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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데 힘을 북돋워 왔다3)는 점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다. 사상의 합리성을 따지는 이론적인 시각은 기존의 교설들을 분석 하여 서로 차별하고, 다시 그 접합을 모색하게 된다. 무아설 관련의 불교 연구가 그 대표적인 예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렇게 모색 된 결론 역시 같은 과정을 겪으면서 미해결의 문제로 남게 된다. 무 아설에 관한 이런 과정이 다음의 언급에는 잘 압축되어 있다. 말 그대로 이해하는 한, 무아와 주체성은 서로 모순한다. 이 모순에 관 한 의문은 일찍이 원시불교에도 보이지만, 부파 시대에 이르러 특히 윤회 의 문제와 결부되어 요란하게 논의되었다. 즉 만약 我가 없다면 6道를 윤 회하는 자, 응보를 받는 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 에 대해 근본 상좌부의 有分(bhavaṅga)識, 有部의 五蘊相續說 내지 中有說 을 비롯하여 독자부의 補特伽羅(非卽非離蘊), 경량부의 一味蘊(根本蘊), 化地 部의 窮生死蘊, 대중부의 根本識 등이 설해져서 혹은 무아론의 입장을 견 지하면서도 뭔가의 주체적 지속이 가능함을 설명코자 하고, 혹은 일종의 정신적 주체를 인정하여 유아론으로 이끄는 등, 여러 가지로 해명에 고심 한다. 무아의 사상은 般若空觀에서 다시 심화되고, 이로부터 대승적인 無 我卽大我 또는 蘊 속의 眞我 사상, 혹은 여래장이라든가 佛性을 설하며, 혹은 마나식과 아뢰야식을 세우는 입장, 더 나아가서는 無位의 眞人을 바 로 증득하는 입장 등이 전개되어 간다.4) 불교 내부에서 그간 논의의 핵심은 윤회설이 무아설과 상충되지 않도록 영혼을 대신할 수 있는 원리 개념을 발견하는 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이 불교 밖의 현대 학자들에게 오해의 가능 성이 있는 견해를 유발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현대 학자들에 의해 불교적 접근과 베단타적 접근의 차이가 적절히 감소될 수 있는 방식 으로 무아설을 해석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져 왔는데,5) 인도의 샤르마 는 무아설의 불교는 순수 의식이자 유일한 실체인 순수 자아, 즉 순 수한 아트만(我)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 6)라고 주장했다. 그에 의 3) Cf.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 p. 160. 4) 增田英男, 無我と主體性, 印度學佛敎學硏究, 14-1(1965), p. 110. 5) Kar, Anatma and Karma in Buddhist Philosophy, p. 28. 6) Chandradhar Sharma, A Critical Survey of Indian Philosophy(Delhi : M

인도철학 제4집 하면 불교도는 아트만을 영혼(jīvātman)으로 취급하며,7) 궁극적 실체 인 진정한 자아는 결코 불교도의 비판의 손길이 닿지 않는다는 것이 다. 그는 아슈바고샤와 아상가와 샨타락쉬타가 각각 我(ātman), 最高 我(parātman), 淸淨我(viśuddhātman)와 같은 용어를 사용함을 인용하기 도 한다.8) 인도의 바르마는 근대의 힌두 사상가들이 초기 불교의 베단타化 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불교의 무아설을 해석하는 경향이 있음을 지 적하여 경계한 바 있는데,9) 샤르마의 경우엔 아예 불교 전체의 베단 타化 로 나아갔다고 지적할 만하다. 불교 내부를 포함하여 불교 외부 의 위와 같은 견해들은 결국 무아설과 윤회설이 양립할 수 없다는 기본 인식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도의 정통파의 입장을 견 지하는 학자들은 윤회설이라는 기반 위에서 무아설의 취의를 해석하 려 한다. 이상과 같은 문제는, 반복되는 과정이긴 하지만, 항상 원점에서 그 해결의 가능성을 찾지 않을 수 없다. 일반 윤회설의 전제10)를 고려 otilal Banarsidass, 1960), p. 325. 7) 이 경우의 아트만은 순수한 아트만 이 아닌 아트만이다. 이에 대한 그의 구체적인 언급은 다음의 註를 참조. 8) Kar, Anatma and Karma in Buddhist Philosophy, p. 28. Kar는 이런 견 해가 반드시 타당하지는 않음을 반증하고서, [불교 내부에서] 후대의 몇 몇 저자들이 我 最高我 등과 같은 표현을 사용하긴 하지만, 이를 통해 논리적으로 무아설과 有我說이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동일한 기반에 있다 는 결론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 고 지적한다. Ibid., p. 31. 그러나 샤르마의 오류는 불교가 베단타 철학의 경우와 같은 순수한 아 트만 을 인정한다고 주장하는 데 있으며, 순수한 아트만 과 대비되는 아트 만에 대한 그의 다음과 같은 설명은 타당하다고 보아도 좋다. 불교는 아 트만 이라는 말을 시초가 없는 무지(avidyā)요 환상(māyā)이요 인상(vāsan ā)인 개인의 자기 고정 관념 (the individual ego-complex) 또는 영혼으로 취급하는데, 이는 통각(buddhi)이라는 내적 기관과 결합된다. 붓다와 대승 불교도는 이런 아트만을 쉽게 거부하였으며, 동시에 그것이 경험적 실체 임을 받아들였다. Sharma, A Critical Survey of Indian Philosophy, p. 32 5. 9)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 pp. 144 ff. 拙稿, 원시불교에서 非我의 의미, 印度哲學, 제3집(인도철학회, 1993), p. 58, 참조. 10) 이 전제의 핵심은 윤회의 주체인 불멸하는 본체(영혼 또는 아트만)인데, 관련된 부수 전제의 문제에 대해서는 拙稿, 業說의 양면성과 불교 業說의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하면 윤회와 무아는 모순함을 부인할 수 없음에도, 석가모니가 이 모 순에 개의치 않고 윤회를 설법한 의도나 인식 내용을 재검토하는 데 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흔히 통용되는 설명들이 있다. 즉 일부 학자 들은 교의상 무아와 業(윤회) 사이의 불일치를 인정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사람들의 의식 성향이나 정신적 염원이나 일반적 행위 성 격 때문에 당시 널리 퍼져 있던 業說(윤회설)을 채용하여 붓다가 자 신의 법을 설했다고 말한다.11) 좀 색다른 견해로는 다음과 같은 주 장도 있다. 불교가 윤회의 개념을 수용하지만, 우파니샤드와 불교의 이론 사이에는 중대한 차이가 있다. 첫째의 이론적 차이는 불교가 인간의 영혼에 대한 일원론적이고 본체론적인 견해를 거부하는 점이다. 언뜻 보면 윤회하는 어떠한 정신적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 윤회의 관념을 내세우는 것이 터무 니없는 듯하다. 영혼에 대한 영적인 본체론적 견해를 거부한 후에도 불교가 윤회 개념을 수용한 것은 문화적 전통에서 수용되어 온 개념들이 거대한 힘으로 존속함을 입증한다. 윤회 개념의 영향력은 불교가 뭔가 변 형된 형태로 수용하지 않을 수 없도록 당시의 북인도 국민을 압도했음이 틀림없다.12) 이러한 설명들은 납득할 만한 타당성을 지닌 것으로 이해된다. 그 러나 특히 위의 견해는 석가모니 또는 이후의 불교가 마지못해 윤회 설을 수용한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불교의 윤회설 수용은 본래적인 것임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석가모니의 가르침은 자신과 동등 한 수준의 깨달음을 얻지 못한 범부(설혹 그의 제자일지라도)를 상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에 관한 좋은 예가 율장의 大品 에서 발견된다. 석가모니는 성도 후 최초의 설법에서 전에 함 께 수행한 적이 있던 5비구에게 무아(非我)를 설한다. 그러나 이후 재 의의, 伽山學報, 제3호(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pp. 180-212, 참조. 11) Genjun H. Sasaki, Linguistic Approach to Buddhist Thought(Delhi: M otilal Banarsidass, 1986), p. 24. 12)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 pp. 164-5.

인도철학 제4집 가자로서 불교에 입문하게 되는 야사, 야사의 부모, 야사의 친구들에 게는 베품(보시)과 도덕적 습관(持戒)과 천상에 태어남(生天)을 차례로 설함(소위 次第說法)으로써 그들을 교화한다.13) 석가모니는 애초부터 윤회를 인정하고서 대중을 교화했던 것이다. 이런 인정이 그럴 만한 의도에서였다면, 그 의도가 분명히 불교의 궁극적 지향에 도움이 되 는 방향이었을 것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로 이 점에서 불교의 윤회설은 인도 일반의 윤회설과 그 성격을 달리하는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하면 석가모니의 의식 속에 윤회와 무아가 양립했다는 사실을 주목하여, 그렇게 양립한 윤 회설의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무아설과의 상충 문제를 해소할 수 있 는 방안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자는 구모이 쇼젠(雲井昭善)이 제시 한 다음과 같은 고찰의 방향을 주목하면서, 불교에서 양립하는 윤회 설과 무아설의 성격을 검토하고자 한다. 무아를 표방하는 불교가 윤회의 문제를 어떻게 해석하는가 라는 設問 은 그대로 불교의 근본적 태도에 부응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해답에 앞서 다음 두 가지를 고찰할 필요가 있다. ①불교가 수용했다 는 윤회설의 성격과 ②그 수용의 태도, 바꾸어 말하면 윤회설이 外敎說이 라는 입장을 전제로 하여 그로부터 결론에 이른 外敎說이기 때문에 불교 독자의 것은 아니다. 라고 하는 사고 방식을 먼저 음미해야 한다. 이와 동 시에 外敎說이기 때문에 불교적으로 의의가 없다. 라고 보는 것이 허용되 는가 안 되는가를 비판해야 한다.14) 위에서 제시한 두 문제 중에서 전자(①)를 이해하면 후자(②)는 어 느 정도 쉽게 해결될 수 있다. 그런데 필자는 후자에 대한 간명한 입 장에서 전자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미 언급했듯이, 윤회설은 불 교 이전부터 인도에 유행했던 관념이라는 점에서 불교로 보면 비본 질적인 사상(外敎說)이지만, 어쨌든 그것이 석가모니의 설법에서 무아 설과 공존하면서 대중을 교화했다는 점에서 보면 그 가치가 당연히 13) Vinaya-piṭaka, Vol. Ⅳ, Mahāvagga, Ⅰ,6-7. I. B. Horner(trans.), The B ook of the Discipline(London: The Pali Text Society, 1951), pp. 23-26. 14) 雲井昭善, 輪廻と無我に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 2-2(1954), p. 280.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불교적인 것으로 인정되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한 입장에서 필자가 파악한 불교 윤회설의 특수한 성격은 영 혼 개념으로서의 아트만(我)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윤회한다는 사실을 설파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석가모니의 교설을 통해 영혼과 같은 불 멸의 본체가 없이도 윤회할 수 있음을 이해한다면, 윤회와 무아의 양 립상의 상충은 해소될 수 있다. 이 문제는 윤회하는 나(我) 와 윤회 하지 않는 나 를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문제로 직결된다. 사실 이런 문제가 제기될 수밖에 없었던 배경에는 소위 석가모니 의 無記 가 있을 것이다. 인간의 지각 능력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문 제들에 대해 석가모니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던 데에서 상반된 추 리가 가능했던 것이다. 無記를 야기한 중요 관심사는 자아의 有無 문제를 둘러싼 내용으 로, 세계 속의 영혼 또는 해탈한 자의 존속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15) 이 문제에 대한 석가모니의 침묵은 무아를 암묵적으로 천명한 것으 로 해석될 수 있다. 즉 그의 黙說的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근본 문제 에서 일체가 무아 임을 명백히 하고 있으며, 부수적으로 실용적인 면에서 질문자의 의도와 심리적인 상태가 참작되고 고려되었음을 보 여 주고 있다. 16)는 것이다. 또는 이것은 자아의 부정으로 이끌며 불 교의 가르침을 자아는 없다 는 점으로 이끈다고도 한다.17) 반면에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그의 침묵은 초월적 자아로서의 본체가 있 음 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되었지만, 그것은 논리적 추리의 영역 안 에 이르지는 않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18)라고 지적하며, 또 붓다의 침묵을 절대적 아트만을 승인하는 것으로 해석할 합리적인 근거는 없다. 19)라고 지적하는 점으로 보아, 無記를 무아의 반대인 有我로 15) 徐盛源, 雜阿含에 나타난 Vatsagotra의 질문, 佛敎思想論叢 (鏡海法印 申正午博士 華甲記念會, 1991), p. 284. 16) 위의 책, p. 286. 17) H. Oldenberg, Buddha, translated by William Hony from the German(1 882 ; New Delhi : Lancer International, 1992), p. 273. 18) David J. Kalupahana, Buddhist Philosophy: A Historical Analysis(Hon olulu: Th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76), p. 40. 19) Kar, Anatma and Karma in Buddhist Philosophy, p. 29.

인도철학 제4집 해석한 예도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필자는 위와 같은 無記의 이면에는 무아와 윤회의 양립이 내재되 어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리라고 생각한다. 無記의 태도는 中道와 緣起에 기인한 것임이 석가모니의 설법에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아함경에서의 무아와 윤회의 문제는 어떠한 점에서 보더라도 중 심적 과제라고 한다. 아울러 이 문제를 해결하는 관건은 인도 사상 사적 기반에 서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은 동시에 윤회설이 지닌 사상적 기반과 무아설이 지닌 사상적 근거를 탐구하는 것이기 도 하다. 라고 한다.20) 그러나 필자는 지침이 될 만한 이 타당한 지 적을 기본 시각으로 견지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미흡한 상태로 당장 의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 이 미흡함은 본론과 관련된 지속적인 연구 로써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2. 我의 실상 불교의 근본 입장에서 보아 아함 경전에서의 윤회에 관한 일반적 형식은 대략 다음과 같은 세 가지로 파악된다고 한다. ①緣起의 심오한 이치를 여실히 알지 못하고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윤회 의 고통이 있다. ②無明에 싸여 渴愛에 속박되어 流轉 윤회하는 중생에게는 고통의 끝이 없다. ③붓다의 성스런 가르침을 들은 성스런 제자는 윤회하지 않지만, 愚癡의 범부는 윤회한다.21) 여기서 첫째 형식은 둘째와 셋째의 형식에 적용된다는 점에서 굳 20) 雲井昭善, 輪廻と無我について, p. 282. 21) 위의 책, p. 281, 참조. ①의 출처는 Saṃyutta-nikāya, Vol. Ⅱ(London: Th e Pali Text Society, 1888), p. 92. ②와 ③은 이하에서 검토한다.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이 나머지와 구분할 필요가 없는 것이지만, 불교에서 윤회가 성립되 는 기본 전제가 된다는 점을 앞으로도 계속 상기해야 한다. 둘째와 셋째의 형식은 윤회하는 자와 윤회하지 않는 자를 구분하여 설명하 는 것이다. 윤회하는 나 와 윤회하지 않는 나 상응부 경전에서 비구들이여, 이 시초가 없는 윤회는 無明에 싸 여 있고 渴愛에 묶여 있으며 옮겨 다니면서 流轉하고 있는 중생들에 게는 과거가 알려지지 않는다. 22)라는 언명으로부터 시작되는 다음 의 설법 내용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 A① 善人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은 자들은 色을 我(자아, 常住 불변하는 본질적 자기)23)로 생각하고, 受와 想과 行들과 識을 我로 생각한다. 혹은 識을 지 닌 것을 我로 생각하며, 識이 我에 있다거나 我가 識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오직 色을 따라다니며 맴돈다. 오직 受와 想과 行들과 識을 따라다 니며 맴돈다. 色을 따라다니며 맴돌고 있는, 受와 想과 行들과 識을 따라 22) Anamataggāyam bhikkhave saṃsaro pubbakoṭi na paññāyati avijjānīva raṇānam sattānaṃ taṇhāsaṃyojanānaṃ sandhāvataṃsaṃsarataṃ. Saṃy utta-nikāya, Vol. Ⅲ(London : The Pali Text Society, 1890), p. 149. 23) 我 는 attan 또는 ātman의 漢譯으로 널리 통용되는 말이다. 그런데 이 말 이 의미하는 바는 자기, 자신, 자아, 혹은 나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원 문의 번역에서는 상식적인 자기 를 가리키는 경우도 많이 있다. 따라서 이 말을 어떠한 경우에나 철학적인 자아 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상식적인 자기 이상으로 깊은 자기를 의미하는 경우도 분명히 발견된다. 그러므로 이 말은 문맥에 따라 그 의미를 상식 적인 자기, 철학적인 자아, 불멸의 본체, 영혼 등으로 파악할 수 있다. 平 川彰, 無我と主體, 中村元(編), 自我と無我 (京都: 平樂寺書店, 1963), p. 3 93, 참조. 이 번역에서 我 는 문맥으로 보아 본질적인 자기, 즉 철학적(형이상학 적) 자아로서 나의 내면에서 상주 불변한다고 상정되는 영혼과 같은 것으 로 간주할 수도 있다. 필자는 我 개념의 모호함을 피하기 위해 종종 자아 나 등을 구사하는데, 대체로 이런 철학적 자아로서의 我를 가리킬 경우에 는 자아 로 표현하고, 상식적인 자기는 나 로 표현한다.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대비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5온(色 受 想 行 識)을 我라고 집착하는 범 부는 고통을 낳는 윤회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그렇게 집착하지 않 는 覺者는 해탈하여 윤회로부터 벗어난다는 것이 요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바른 가르침이란 5온은 我가 아니다 라는 사실이 며, 이는 곧 흔히 말하는 자아에 대한 바른 인식을 교시하는 무아설 임을 아래의 예와 대비함으로써 알 수 있다. 아래의 斷片들에서는 위 의 經文과 거의 같은 내용 및 구조를 확인할 수 있는데, 윤회에 초점 이 있지 않고 무아(非我)에 초점이 있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26) A② 비구들이여, 여기에 [진리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는 범부가 있다. 성 자들을 본 적이 없고, 성자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며, 성자의 가르침에 따 르지 않으며, 善人들을 본 적이 없고, 善人의 가르침을 알지 못하며, 善人 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는다. 그는 色을 我라고 보며, 色을 지닌 것을 我 라고 보며, 我에서 色을 보며, 色에서 我를 본다. 그에게는 色이 변화 한 다른 상태인 근심 슬픔 고통 낙담 고뇌가 생긴다. (Saṃyutta-nikāya, Vol. Ⅲ, p. 42.) 그(凡夫)는 무상인 色을 무상인 色이라고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 苦인 色을 苦인 色이라고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 我가 아닌 色 을 我가 아닌 色이라고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 (Ibid., p. 56.) B② 존자들이여, 실로 성자들의 성스런 제자로서 잘 듣고 보며 善人의 가르침에 잘 따른 자는 色을 我로 보지 않으며, 色을 지닌 것을 我로 보지 않으며, 我에서 色을 보지 않으며, 色에서 我를 보지 않는다. 苦인 色을 苦인 色이라고 여실하게 안다. 我가 아닌 色을 我가 아 닌 色이라고 여실하게 안다. 그는 色에 접근하지 않고 집착하지 않으며, 나의 我 라고 고집하지 않는다. (Ibid., pp. 114-5.) 불멸하는 영혼의 이론은 이기심이나 자기 중심주의를 낳기 쉽다 는 점에서 종교적 삶에 유해한 이론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교가 윤회설을 수용한 데 대해서는 천상과 지옥과 같은 것을 믿는 어떤 대중 신앙은 붓다에게는 사람이 현생에서 체험하는 즐거움과 고통 26) 필자는 무아설과 관련하여 이 예문을 세부적으로 검토한 바 있다. 원시 불교에서 非我의 의미, 印度哲學, 제3집, pp. 72 ff.

인도철학 제4집 의 감정에 불과한 것이었지만, 인간의 도덕적 종교적 행위를 규제한 다는 점에서 유익한 것으로 생각되었다. 27)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상의 설법 내용에 의하면, 붓다의 윤회에 대한 인식이 반드시 그와 같은 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다. 윤회라는 사실이 단순 히 그 효용이라는 방편적 차원에서 수용된 것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자아 의식(나 또는 자아에 대한 생각)28)을 파악함으로써 인정된 것이라 고 이해된다. 위의 설법들에는 윤회하는 자(범부)의 자아 의식과 윤회 하지 않는 자(覺者)의 자아 의식이 명료하게 대비되어 있다. 맨 먼저 제시한 설법(A①)에 의하면, 그(범부)는 오직 色을 따라다 니며 맴돈다. 오직 受와 想과 行들과 識을 따라다니며 맴돈다. 라고 설하듯이, 윤회하는 것은 5온일 뿐이다. 그래서 이 5온을 상주 불변 하는 본질적 자기로서의 자아(我)라고 집착하는 나 는 당연히 5온에 따라 윤회한다. 결국 5온과 동일시되는 자아 가 윤회하는 것이다. A ②의 설법에 의하면, 5온은 사실은 자아가 아니고 무상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5온과 동일시되는 자아 는 범부의 그릇된 인식(無明)에 의 해 상정된 무상 變易의 자아, 즉 假我라고 명명되어야 할 것이다. 이 런 자아는 경험적으로 구상된 개념으로서 범부의 자아 일 뿐이며, 결 코 상주 불변하는 자아가 아니다. 원시불교의 무아설에 고려되어 있 다고 하는 3종의 자아, 즉 무아로써 부정되는 자아, 假我(prajñapti, pa ññatti)라고 불리는 자아, 범부가 집착하는 자아 29)도 모두 자아의 실 상을 범부의 자아 의식으로부터 간파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A②의 설법을 고려하면서 A① 설법의 취의를 다시 정리해 보자. 범부는 본질적 자기로서의 자아(我)가 있다고 믿고 5온을 본질 적 자기로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러한 자아는 없다. 본질적 자기로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자아는 그렇게 생각하는 범부의 자아일 뿐이 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 의식을 통해 범부는 윤회한다. 결국 범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무상한 5온을 자아로 생각하면서 이로 인해 윤회 27) Kalupahana, Buddhist Philosophy, p. 40. 28) 이것을 이전의 논문, 원시불교에서 非我의 의미 ( 印度哲學, 제3집)에서 는 我想 이라고 표현했다. 29) 平川彰, 原始佛敎の倫理, 壬生台舜(編), 佛敎の倫理思想とその展開 (東京 : 大藏出版株式會社, 1975), pp. 15 ff, 참조.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한다는 사실을 A①은 지적하고 있다. 이상과는 반대의 양상을 B①과 B②의 설법은 제시한다. 그 내용 은 바른 가르침, 즉 범부가 생각하는 자아의 실상인 生死 의 진리를 터득한 경지이다. 이는 범부와 대비되는 覺者의 자아 의식이라고 말 할 수 있다. 범부가 집착하는 자아가 假我임을 파악한 각성의 상태이 다. 그리고 이 각성의 상태에서는 윤회하는 일이 없음을 밝힌다. 윤 회를 이끄는 범부의 자아 의식이 없기 때문이다. 假我 개념이 상정된다면 당연히 眞我 개념도 상정된다. 그러나 어 떠한 의미의 자아라도 그것은 자아로서의 집착을 유발하기 때문에, 이 眞我는 윤회하지 않는 나 로서 이해된다. 이러한 나 는 범부의 윤 회를 계기로 무아라는 진상을 깨달아 있으므로 더 이상 윤회하지 않 는 眞我로서 존재한다고 표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30) 윤회하는 자와 윤회하지 않는 자를 설하는 이상의 설법에 의하면, 윤회를 인정하는 것이 곧 영혼과 같은 불멸의 본체를 인정하는 것으 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윤회와 해탈의 갈림길에서 관건이 되는 것 은 자아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자아의 실상에 대한 인식이다. 간명하 게 말해서 자아를 윤회의 주체로 집착하면 당연히 윤회하지만, 그러 한 주체가 부정되면 윤회할 근거가 없게 된다. 범부의 我 佛傳 문학에 속하는 마하바스투 (大事)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2) 30) 중국의 法藏(賢首 대사)이 我에 대해 구분한 바에 의하면 윤회하는 나 는 執我에 상당하고, 윤회하지 않는 나 는 眞我에 상당할 것이다. 執我란 범부 의 我로서 선천적으로 집착된 我와 분별에 의해 집착된 我를 의미한다. 眞 我는 곧 진리(緣起의 이치)가 각성된 실상인 眞如를 의미한다. 法藏은 我를 다음과 같은 6종으로 구분한다(大正藏, 40, p. 606 상). ①執 我, ②慢我(有學의 위치에 있으며, 오직 선천적으로 집착된 我), ③習氣我(無學 의 위치에 있으며 ①과 ②의 餘習), ④隨世流布我(諸佛이 평등하게 세속에 수 순하여 임시로 칭하는 我), ⑤自在我(8자재 등 여래가 깨달은 후에 얻는 後得 智를 본성으로 삼는 것), ⑥眞我. 中村元, インド思想の諸問題 (東京: 春秋 社, 1967), p. 175.

인도철학 제4집 있다. 가족을 위해 어느 하나를 버려야 한다. 마을을 위해 가족을 버려야 한 다. 국가를 위해 마을을, 자아를 위해 세계를 버려야 한다. tyajed ekaṃ kulasyārthaṃ grāmārthaṃ tu kulaṃ tyajet, grāmaṃ janapad asyārthaṃ ātmārthaṃ pṛthivīṃ tyajet.31) 이 문구는 불교 이외의 인도 고전인 마하바라타 판차탄트라 히토파데샤 등에서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들 문헌 으로부터 불교가 차용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여기서 주목되는 것 은 자아를 위해 세계를 버려야 한다. 는 말이지만, 이는 불교측으로 부터는 부정되어야 할 것, 비난되어야 할 것으로서 인용되어 있다고 한다.32) 불교 문헌과 바라문교 문헌에서는 인용의 방식에 현저한 차 이가 인정된다는 것이다. 원래 바라문교에서는 梵我一如를 기치로 삼 아 진실한 자아의 실현을 추구한 데 대해 불교는 이기적 자아, 아집, 我所執(나의 것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소위 무아를 표방한 다. 한편은 我 의 진영이고 다른 한편은 無我의 진영이다.33) 특히 자아를 위해 세계를 버려야 한다. 라는 표현은 결코 진실한 자기(자 아)의 실현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팽개쳐야 한다는 것과 같은 고차원 또는 종교적 수준에서 인용되고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34) 위의 문구는 소위 梵我一如라는 자아 실현을 지향하는 바라문교의 문맥으로 보아, 세계 위에 군림하는 최고 가치로서의 자아를 전제한 다. 그러나 불교측이 이 문구를 부정적인 시각에서 인용했다는 사실 은 그러한 자아가 범부의 자아 의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인식을 반영 한다. 범부가 생각하는 자아는 세계를 버려서 얻을 수 있을 정도로 특수한 본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緣起의 이치에 따라 변화하 는 무상한 5온으로서 존재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불교측의 밑바탕에 31) Mahāvastu, 1, 310, 11-12. 高原信一, 自己のために世界を捨つべし の引 用をめぐつて, 印度學佛敎學硏究, 22-1(1973), p. 471, 재인용. 32) 위의 책, p. 467. 33) 위의 책, p. 462. 34) 위의 책, p. 461.

인도철학 제4집 주체적 존재에 귀속시키든가 신체에 귀속시키려는 경향을 지닌다. 나 와 나의 것 (我所)이라는 사고의 범주는 우리의 인식의 깊은 곳에 깃들어 있 다. 불교도는 이 현실을 인식하여 그것을 일상의 차원에서는 승인한다.36) 붓다는 5온과 연관된 나 (ahaṃ)라는 개념을 낱낱이 부정하고 있는 것 이 아니라, 이러이러한 蘊은 이러이러한 자아에 속한다. 라는 진술의 배 후에 있는 형이상학적 전제를 부정할 뿐이다. 어떤 말이 한 가지 의미만 지니고 다른 의미는 지니지 않는다는 가정은 붓다의 언어 개념에 위배되 었다. 붓다가 바라문교적 체계에서 채택된 나 (我)라는 개념을 거부하고 나서, 자신의 설법 곳곳에서 바로 그 나 라는 말을 계속 사용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37) 범부가 5온에서 생각하는 자아는 형이상학적 자아임이 분명하기 때문에, 붓다는 5온은 我(형이상학적 자아)가 아니라고 부정한다. 그런 형이상학적 자아는 5온의 어느 하나에 의해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 다. 그러나 非형이상학적이거나 경험적인 자아는 5온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 불교 학자들의 일반적인 경향은 5온이 형이상학적 자아를 거부하는 부정적인 기능만을 돕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러나 초기 설법을 주의 깊게 읽어보면 5온은 경험적 자아가 존재함을 명 백히 하는 긍정적 기능도 수행한다는 점도 드러난다고 한다. 결국 인 간 존재를 5온으로 분석한 데에는 형이상학적 자아(아트만, 我)가 없음 은 물론이고 경험적 자아가 현존함을 알리려는 의도가 있다고 이해 된다.38) 이 경험적 자아가 바로 우리 범부의 자아이다. 경험적 자아는 범부가 집착하는 형이상학적 자아가 아니라는 의 미에서도 假我라고 지칭된다. 이 假我는 육체와 정신의 온갖 기능, 즉 5온이 집합함으로써 성립되는 자아로서 육체와 정신의 기능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 감을 특징으로 한다.39) 36) 神子上惠生, 佛敎における自我槪念の硏究, 佛敎文化硏究紀要, 제18집 (龍谷大學, 1979), p. 386. 37) David J. Kalupahana, A History of Buddhist Philosophy(Honolulu: Th e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92), p. 70. 38) Cf. Ibid., pp. 70-72. 39) 平川彰, 原始佛敎の倫理, p. 17.

인도철학 제4집 거의 부정하지 않았던 이 둘은 논리적으로 동등하다.42) 전제 ②를 잘 음미함으로써 알 수 있듯이, 전제 ①의 자아 는 인 격적 실체, 즉 영혼과 같은 형이상학적 자아이다. 그렇다면 전제 ② 의 자아 는 假我로서의 자아이다. 그리고 전제 ②의 신체 (色)는 5온 을 대표하는 말이다. 따라서 전제 ②는 假我는 곧 5온 임을 의미하므 로 假我가 아닌 자아를 부정하는 전제 ①과 논리적으로 동일한 것이 다. 이처럼 윤회와 무아의 문제를 취급할 경우, 범부의 我 에 대한 이해는 문제 해결의 필수 조건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어떤 말 이 한 가지 의미만 지니고 다른 의미는 지니지 않는다는 가정은 붓 다의 언어 개념에 위배되었다. 43)라는 지적의 당위성을 실감할 수 있다. 覺者의 我 범부가 젖어 있는 자아 의식의 실상을 바르게 파악하여 무아에 투 철하는 데서 불교의 깨달음(自覺)은 성립한다. 따라서 범부의 자아 의 식이 역전된 상태인 이 자각의 경지가 소위 眞我 등의 개념으로 표 현되긴 하지만, 이런 개념들이 형이상학적 자아에 비견되는 의미로 이해된다는 데서 다른 해석의 여지를 남긴다. 사실 범부의 허구적 자 아에 대치하여, 覺者의 자아는 소위 진실한 자아 일 것이라는 인식은 역시 범부의 관점에서는 통용될 만하다. 그러나 이러한 편의적인 인 식이 표현되는 말 자체에 천착하게 될 때, 覺者는 범부가 추구하는 것과 같은 철학적 자아를 실현한다고 오해되기 쉽다. 覺者의 我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범부의 자아 의식을 간파하고 연 기 무아에 투철한 자각의 경지에서는 종전의 분별에 의해 파악되어 왔던 소위 나 라는 한정 속박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3) 42) Richard Taylor, The Anattā Doctrine and Personal Identity, Philosop hy of East and West, Vol. 19, No. 4(1969), p. 360. 43) 註 37.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전제하여야 한다. 이 점은 역설적으로 我는 我 자신에 투철함으로 써 我 자신을 탈각하는 것이다. 라고 설명된다. 이어지는 다음의 설 명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아무것에도 의지함이 없이 해탈하는 진실한 주체가 자연 그대 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주체적 전환으로서의 절대 부정 즉 절대 긍정이 여기서 실현된다. 무아가 곧 대아 (無我卽大我)라는 것은 이것이다. 무아 란 여기서 我 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脫我를 의미한다. 즉 我가 한정적 폐쇄적인 자아 라는 껍질을 탈각한 존재 방식을 의미한다. 무아를 이렇게 이해하면 저 윤회의 주체 문제와 모순되지 않으며, 또 대 승적 주체론의 전개도 극히 당연하게 된다.44) 위의 설명을 적용하면 覺者의 我 란 脫我의 나 를 의미한다. 또 脫 我의 나는 범부의 자아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윤회하지 않는 나 를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假我로서 존재하는 자아로부터 벗어나 무아를 자각해 있는 나 가 脫我의 나이고 覺者의 我이다. 이것을 大我라고 한다면, 이 大我는 범부의 자아 의식이 말끔히 불식된 청정 상태를 의미할 것이다. 大乘莊嚴經論 은 그것이 무아에 의한 空性에 다름 아님을 천명한다. 즉 諸佛은 청정한 空性에서 무아에 의해 道를 달 성하기 때문에, 我의 청정을 얻기 때문에, 我의 大我性에 도달한다. 45)라고 설한다. 이제 대승불교의 문헌에서 흔히 有我로 오해되기 쉬운 개념으로 등장하는 용어나 표현들도 이상과 같은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소위 대승적 주체론 의 전개가 결코 무아의 교의에 벗어나 있지는 않다는 의미이다. 대승불교의 주요 용어 중에서 특히 如來藏(tathāgata-garbha, 여래의 母胎)은 有我의 관점이 개입된 것으로 오해되기 쉽다. 앞에서 그 시각 44) 增田英男, 無我と主體性, p. 113. 45) śūnyatāyāṃ viśuddhāyāṃ nairātmyān mārgalabhataḥ, buddhā śuddhāt malabhitvāt gatā ātmamahātmatām. S. Bagchi(ed.), Mahāyānasūtrālaṃk āra of Asaṅga, Buddhist Sanskrit Texts No. 13(Darbhanga: The Mithil a Institute, 1970), p. 41.

인도철학 제4집 을 소개한 바 있는 샤르마(Sharma)는 능가경 에서 언급하는 여래장 을 절대 의식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며, 이런 방식으로 베단타의 절대주의와 불교의 무아설 사이의 차이를 축소하고자 한다. 46)고 지 적된다. 그러나 샤르마의 이해는 다음과 같이 반박된다. 그러나 능가경에서 붓다는 다음과 같이 설함을 볼 수 있다. (필자 의 생략) 여래장을 궁극적 진리인 실재라고 설한 것은 미신에 빠져 아 트만론을 신봉하기 쉬운 이교도를 우리의 교의로 끌어들이기 위함이다. 능가경 의 이 내용은 대승이 아트만을 승인하지 않으며 무아설을 전반적 으로 승인하는 불교의 입장과 일치함을 명백히 입증한다. 심지어 藏 (garb ha, 모태)을 여기서는 본체가 아니라 본체가 없음 이나 무아로 해석하고 있음은 특히 주목된다. 이런 견지에서 여래장은 본체가 없는 것 일 뿐이 며, 이런 의미에서 그것은 空性 과 일치하기도 할 것이다.47) 능가경 의 여래장이 위와 같이 이해된다면, 여래장을 선양하는 데 크게 기여한 대승 능가경 역시 누누이 여래장을 眞我로 간주한 다. 48)는 점에서 覺者의 我 (眞我)는 여래장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 이다. 이러한 이해에 입각하면, 일체 중생이 여래장을 지님을 설하는 대승장엄경론 이나 일체 중생이 佛性을 지님을 설하는 열반경 의 취의는, 모든 범부는 자아 의식으로부터 벗어나 무아를 체득하는 覺 者로 轉化할 수 있다는 사실을 교시하는 데 있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여래장이나 佛性 등이 위와 같은 취의에서 벗어나 일종의 基體와 같은 개념으로 인식된다면, 그것은 覺者의 我와는 무관한 것 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다.49) 바른 이치인 法을 관찰하는 입장에서는 46) Kar, Anatma and Karma in Buddhist Philosophy, p. 30. 47) Ibid. 48) 西義雄, Ātmanとanattanについて 特に佛敎の眞我說, 印度學佛敎 學硏究, 8-2(1960), p. 292. 49) 근래에 일본의 마츠모토 시로는 여래장 사상은 불교가 아니라는 과격한 주장을 폈는데, 이 주장은 여래장이 불교 역사에서 무아설의 취의에서 벗 어나는 방향으로 사상적 전개를 이루어 온 데서 기인한다. 그는 그렇게 주장하는 이유를 스스로 밝히길, 석가모니의 깨달음, 그리고 불교를 무아 나 空의 입장이 아닌 我나 有의 입장에서 해석하려는 견해를 명확히 부정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한다. 그의 주장은 단언하면, 대승에서의 여래장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소위 상식적 자기 인 경험적 자아는 완전히 배제되는 동시에, 이 자 아의 본질이어야 할 法 으로서의 자아도 그 장소를 지닐 수 없기 때 문이다. 그리고 이처럼 경험적 자아의 배제와 더불어 일체의 자아가 근본적으로 배제되는 데에 이 입장(즉 覺者의 입장)의 주목해야 할 특 징이 있는 것이다.50) 그럼에도 범부의 我 로부터 覺者의 我 로의 轉化를 고려할 때는 순수한 자아(純粹我)와 같은 관념이 그 전화의 논리적 원리로서 상정 되어, 그 순수한 자아 가 결국은 형이상학적 원리와 연결되는 것으 로 보이게 된다. 그리하여 불교 철학사에서도 나중에는 드디어 大 我 라는 표현이 나타나게는 되지만, 그러나 초기 이래의 근본적 입 장에서는 단호하게 이 純粹我는 배척된다고 한다.51) 결론적으로 무아의 주장은 經驗我(경험적 자아)의 배제와 함께 바 로 純粹我가 의식 내용일 수 없고 사유의 대상일 수 없다 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52)라고 말할 수 있다. 이제 覺者의 我 를 표현하는 온갖 술어는, 범부가 집착하는 자아 관념을 극복한 무아 체득의 경지를 지칭하는 불가피한 언설인 것으 로 이해해야 한다. 그 언설이 오해를 낳거나 달리 해석될 수 있는 것 은 언설이 인간의 의식 내용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오해의 가능성을 안고 있긴 하지만, 覺者는 무아를 체득해도 상식적 자기인 5온으로서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覺 者의 我 를 무아를 체득한 나 라고 달리 표현할 수는 있겠다. 사상은 평등 사상이 아니라 차별 사상이며, 그 본질적인 구조를 보면 基體 說로서 전개되어 왔으므로 무아설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의 주장은 객 관적인 학문론을 위함이라고 스스로 밝히듯이 종교라는 측면을 무시한 과 격한 면이 있긴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여래장을 무아의 관점에서 재해 석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해 준다. 松本史朗, 緣起と空 如來藏思想批判 (東京: 大藏出版, 1989), pp. 1-8, 참조. 50) 和辻哲郞, 原始佛敎の實踐哲學 (改版; 東京: 岩波書店, 1970), p. 133, 참조. 51) 위의 책, 같은 곳 참조. 52) 위의 책, p. 135.

인도철학 제4집 3. 無記의 이면 인간의 언어는 인간끼리 경험한 내용들을 소리와 문자로 기호화 한 약속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의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언어는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경험 내용을 직접 전달하기가 곤 란하다는 한계에 항상 부닥치고 있다. 그래서 소위 문화라고 칭하는 공통 경험의 양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언어의 양도 많아진다. 그런데 경험의 성격이 범부의 일상 경험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아주 특수 한 것이라면, 일상의 언어로 그 경험을 직접 표현하기란 거의 불가능 하다고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석가모니의 설법에서는 언어의 그러한 한계성이 소위 無記(avyākat a)라는 방식으로 표현된다. 이 경우의 無記는 어떤 질문에 대해 석가 모니가 그 답을 설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경전에서는 밧차곳타(Vacch agotta)라는 遊行者가 석가모니에게 제기한 질문이다.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다. ①세계는 상주(영원)한가, 무상한가? ②세계는 유한한가, 무한한가? ③영혼(jīva)과 신체는 서로 다른가, 동일한가? ④여래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는 동시에 비 존재인가, 존재하지도 않고 비존재도 아닌가? 이상과 같은 4종 10항 목의 질문 또는 주장이 무기이다. 다만 漢譯에 대응하는 불전에서는 이것이 확장되어 14항목 또는 16항목으로 되어 있는 예가 많다.53) 그런데 석가모니가 침묵으로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것이 無記 라고 흔히 알고 있지만, 팔리 경전의 10무기에서는 아예 침묵으로 일 관하는 것이 아니라 각 질문에 대해 답변하고 있다. 즉 上記의 질문 들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계속 부정하는 것이다.54) 마침내 그간의 대화로 무지와 혼돈에 빠져 이제는 신앙의 척도마저 사라져 버렸다 고 토로하는 밧차곳타에게 석가모니는 이렇게 말한다. 53) 無記의 다양한 유형과 명제의 내용 및 출처에 대해서는 徐盛源, 雜阿含 에 나타난 Vatsagotra의 질문, pp. 280-1, 참조. 54) 각 항목에 대해 밧차여, 나는 정말 라고 그와 같이 보지 않는다. (Na kho ahaṃ Vaccha evaṃdiṭṭhi : )라고 답변한다.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밧차여, 실로 그대에게 무지가 있고 혼돈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밧차 여, 실로 심오한 이 法은 보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고, 寂靜하고, 탁월하 고, 추론의 범위를 초월하고, 미묘하고, 賢者에게 경험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을 보고, 다른 것을 신앙하고, 다른 것을 바라고, 다른 곳에서 명상 하고, 다른 방법으로 수행하는 그대에 의해 그것이 알려지기는 어렵다.55) 여기에는 범부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를 일상의 언설로써 단정적 으로 설명해줄 수 없는 이유가 잘 나타나 있다. 현자에게 경험될 수 있는 세계는 경험하지 못한 범부의 언설로써 표현되는 그런 세계가 아니라고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이 경우, 범부는 覺者인 석가모니 가 나는 그와 같이 보지 않는다. 라는 언설로써 아니다 라고 표현한 세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자신의 질문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 다. 그러나 범부가 다른 사고 방식에 젖어 覺者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적합하지 않은 방법으로 노력하고 있을 때, 그에게는 무지와 혼돈 이 뒤따를 뿐이다. 무아설이 애초에 非我(그것은 我가 아니다)라는 언설 로써 표현되는 이유도 바로 여기서 발견할 수 있다. 이상과 같은 무기 설법에서 석가모니의 사실상의 대답은 中道임을 쉽게 감지할 수 있다. 극단적인 사고가 계속 부정되고 있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인 언급은 다른 무기 설법에 나타나 있다. 소위 10무기나 14무기 등은 我(아트만)의 有無에 관한 밧차곳타의 질문에 대해 침묵 으로 일관하는 이 무기 설법이 확장되어 정형화된 것으로 보인다. 그 런데 밧차곳타가 떠난 후, 침묵한 이유를 묻는 아난다에게 석가모니 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런데 아난다야, 我가 있느냐 고 묻고 있는 遊行者 밧차곳타에게 我가 있다 고 내가 대답한다면, 아난다야, 그것은 常住論者인 바라문 사문들의 편에 있게 될 것이다. 또 아난다야, 我가 없느냐 고 묻고 있는 유행자 밧차곳타에게 我가 없 55) Alaṃ hi te Vaccha aññāṇāya alaṃ sammohāya. Gambhīro h ayaṃ Va ccha dhammo duddaso duranubodho santo paṇīto atakkāvacaro nipuṇo p aṇḍitavedaniyo, so tayā dujjāno aññadiṭṭhikena aññakantikena aññarucik ena aññatrayogena aññathācariyakena. Majjhima-nikāya, Vol.Ⅰ(London : The Pali Text Society, 1888), p. 487.

인도철학 제4집 다 고 내가 대답한다면, 아난다야, 그것은 斷滅論者인 바라문 사문들의 편 에 있게 될 것이다. 또 아난다야, 我가 있느냐 고 묻고 있는 유행자 밧차곳타에게 我가 있다 고 내가 대답한다면, 그것은 모든 것들은 我가 아니다 (諸法無我)라는 나의 앎과 일치하겠느냐? 확실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또 아난다야, 我가 없느냐 고 묻고 있는 유행자 밧차곳타에게 我가 없다 고 대답한다면, 아난다야, 그것은 혼미한 밧차곳타에게 전에는 정말 나에게 我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없다 라고 더욱 큰 혼돈으로 있을 것이다.56) 여기서 석가모니의 無記는 中道를 설하는 것임57)이 확실히 드러난 다. 특히 이같은 교설은 무기의 입장이 斷常(단멸과 상주)의 두 극단을 떠난 中道임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처럼 계속되는 교설에 의해 斷常 을 떠난 中道가 緣起의 입장임이 명료하게 된다고 한다.58) 따라서 무기의 이면에는 석가모니가 깨달은 세계의 이치, 즉 중도와 연기가 있었음이 확실하다. 56) Ahañ c 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Atthattā ti puṭṭho sam āno Atthattā ti vyākareyyaṃ, ye te Ānanda samaṇabrāhmaṇā sassatavā dā tesam etaṃ saddhim abhavissa. Ahañ c 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Natthattā ti puṭṭho sa māno Natthattā ti vyākareyyaṃ, ye te Ānanda samaṇabrāhmaṇā ucched avādā tesam etaṃ saddhim abhavissa. Ahañ c 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Atthattā ti puṭṭho sa māno Atthattā ti vyākareyyaṃ, api nu me tam anulomam abhavissa ñā ṇassa upādāya Sabbe dhammā anattāti. No hetam bhante Ahañ c Ānanda Vacchagottassa paribbājakassa Natthattā ti puṭṭho sa māno Natthattā ti vyākareyyaṃ, sammuḷahassa Ānanda Vacchagottassa bhīyyo sasmmohāya abhavissa Ahu vā me nūna pubbe attā, so etara hi natthīti. Saṃyutta-nikāya, Vol. Ⅳ(London: The Pali Text Society, 1894), pp. 400-1. 57) G. P. Malalasekera(ed.), Encyclopaedia of Buddhism, Vol.Ⅰ(The Gover ment of Ceylon, 1961), p. 575 left. 58) 平川彰, 無我と主體, 中村元(編), 自我と無我, p. 413.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따라서 이러한 문제에 붓다가 無記로써 대처했던 의미는 단순히 무기 라는 것만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되고, 무기의 배후에 있는 붓다의 입장, 즉 斷常 중도나 有無 중도의 입장에서 이해해야 한다. 이것은 위의 교설로 도 명백하듯이 緣起의 입장이다.59) 위와 같이 설명하는 히라카와 아키라 박사는 중도를 설하는 16종 의 轉法輪經 을 검토하여 중도의 자료로서의 네 가지 유형 을 경전 의 예문과 함께 제시한 바 있다.60) 네 가지 유형이란 ①苦樂 중도, ②有無 중도, ③斷常 중도, ④중도로서의 수행도이다. 이 중 ②와 ③ 은 연기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파악한다.61) 아트만의 有無에 관해 상주론과 단멸론을 경계했다는 위의 무기 설법으로도 짐작할 수 있듯이, 有無 중도와 斷常 중도는 동일한 유형 인 것으로 재분류된다.62) 이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유무 중도가 공 간적인 입장에서 중도를 설하는 것이라면 단상 중도는 시간적인 입 장에서 중도를 설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즉 이는 업의 과보를 받는 자와 業의 관계에서 그 둘(受報者와 업)이 일치하는가 일치하지 않는가 의 문제이며, 인격의 연속이라는 문제로 연결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두 가지 중도가 아함경에서는 연기설로 제시되어 있다는 것이다.63) 이상과 같은 파악에 의하면, 무기 설법의 이면에는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에 대한 고려도 있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결코 무리는 아니 다. 業說 및 윤회설 일반에서 전제되는 원인(因)과 결과(果) 사이의 인 격적 동일성 은 행위자와 受報者가 동일 인격이어야 한다는 것64)인 데, 무아설을 범부의 시각에서 적용하면, 동일 인격을 擔持할 불변 상 주하는 본체(자아 또는 영혼)는 존재하지 않으므로 윤회는 성립되지 않 는다. 그러나 중도 연기를 깨달은 無記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본체의 59) 위의 책, p. 415. 60) 平川彰, 阿含の中道說, 佛敎硏究, 제1집(國際佛敎徒協會, 1972-3), pp. 1-23. 61) 한편 ①은 8正道를 지향하고, ④는 37道品의 수행도를 지향한다. 62) 이 둘은 有 無와 斷 常의 문제에 대해 표현상으로 中에 의해 (majjhena)라 는 공통의 입장을 취한다. 63) 平川彰, 阿含の中道說, p. 9. 64) 水野弘元, 業說について, 印度學佛敎學硏究, 2-2(1954), pp. 112-3 참조.

인도철학 제4집 有無나 斷常의 문제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범부는 자신의 자아 의식(有我)을 여실히 깨달으면 覺者의 자아 의식(無我)에 이르러 윤회를 벗어나고, 그렇게 깨닫지 못하면 자신의 자아 의식에 빠져 윤 회를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즉 윤회의 인격적 동일성을 전제하 는 有我와 그것을 전제하지 않는 無我 역시 연기의 관계에 있는 것이 다. 이제 아트만의 유무 문제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한 無記의 이유를 위의 관점과 연관하여 다음과 같이 유추해 볼 수 있겠다. 아난다야, [假我를 我로 집착하는 자아 의식(有我)에 빠져] 我가 있느냐 고 묻고 있는 遊行者 밧차곳타에게 [그의 자아 의식을 고려하여] 我가 있 다 고 내가 대답한다면, 아난다야, 그것은 常住論者인 바라문 사문들의 편 에 있게 될 것이다. 또 아난다야, [假我를 我로 집착하는 자아 의식(有我)에 빠져] 我가 없 느냐 고 묻고 있는 유행자 밧차곳타에게 [그의 자아 의식을 고려하지 않고 그가 집착하는 我가 假我임을 파악한 경지(無我)에서] 我가 없다 고 내가 대답한다면, 아난다야, 그것은 斷滅論者인 바라문 사문들의 편에 있게 될 것이다. ([ ]는 필자가 이 설법에 내재되어 있다고 유추하는 내용) 이와 같이 유추할 수 있는 근거는 10무기의 설법에 제시되어 있 다.65) 질문자인 밧차곳타는 我에 관한 진리를 이해하기엔 아직 미숙 했으며,66) 그는 아직 무아의 관념을 이해할 수준에 있지 않았으므로, 이 특수한 경우에는 침묵으로 그런 질문을 방치하는 것이 가장 현명 한 방법이었던 것이다.67) 이상과 같이 고찰할 때, 무기 설법은 연기와 중도의 관점에서 무 아와 윤회가 양립함을 인정하는 覺者의 인식에서 유래된 것으로도 65) 註 55. 66) Malalasekera, Encyclopaedia of Buddhism, Vol.Ⅰ, p. 575 left. 67) Walpola Rahula, What the Buddha Taught(2nd. ed. ; London: Gordon Fraser Gallery Ltd., 1967), p. 64. 나중에 붓다를 찾은 밧차곳타는 이전과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고 한 다. 결국 그는 붓다의 제자가 되어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아라한果에 도 달하여 진리를 깨달았으며, 아트만의 문제나 다른 의문에 더 이상 사로잡 히지 않았다고 한다. Ibid., n. 5.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이해할 수 있다. 사실 일종의 불확정의 원리 라고 칭할 수도 있는 無記라는 개념은 아트만의 존재를 주장하는(有我論) 우파니샤드에서도 아니다, 아니다 (neti neti)라는 유명한 표현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有我論에서 는 아트만(我)과 브라흐만(梵)의 동일성에 관한 장애물과 그 동일성에 관련된 모든 것을 해명하는 데 그것을 이용했지만, 불교에서는 오로 지 경험적으로 구상된 개념(prajñapti, 假我)에 관하여 그 개념의 한계라 든가 결점을 드러내거나 파헤치는 데 사용했다.68) 여기서 말하는 한 계나 결점이란 윤회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사실이나 윤회로 인한 고 통의 발생을 가리킬 것이다. 4. 윤회의 주체 앞에서 고찰한 바와 같이 覺者의 경지에서는 무아와 윤회가 양립 한다고 인정하더라도 윤회를 전전하는 주체에 대한 의문은 주요 관 심사로 남게 된다. 실제로 석가모니의 제자들 중에서도 그런 의문을 제기하거나 나름대로 그 주체를 제시하는 수행자들이 있었음을 경전 은 전한다. 윤회를 인정하는 한, 인도 일반에서 통용되는 윤회에 대 한 고정 관념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에서, 윤회의 주체에 대한 의문이 제기됨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으로 이해 된다. 불교 윤회설의 특수성은 인도 일반의 윤회설이 전제하는 것과 같 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그러나 팔리 문헌에서 는 많은 구절들이 無我를 지지하지만 我를 지지하는 구절들도 없지 는 않음을 인정하거나69) 바르마 박사가 다음과 같이 지적한 점에서, 68) Cf. Inada, Problematics of the Buddhist nature of self, Philosophy of East and West, Vol. 29, No. 2, p. 146. 69) Poussin, The Ātman in the Pali Canon, Indian Culture, Vol. Ⅱ(1935-

인도철학 제4집 불교 윤회설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그것을 인도 일반의 윤회설 의 범주에서 적용하려는 경향이 있었던 듯하다. 붓다는 영혼과 같은 자기 지속의 자아를 믿지 않았다는 전반적인 인상 을 갖고 있지만, 그가 인간의 육체에 머무는, 영원 불멸의 자아인 어떤 종 류의 靈的 실체를 믿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보여주는 간접적인 주장들도 어떤 문헌에는 언급되어 있다.70) 바르마 박사는 붓다가 영적 실체를 믿었을지도 모른다는 오해를 낳게 하는 간접적인 근거들을 여섯 가지로 분류하여 제시하고 나서 이에 대한 바른 이해를 제시하는데, 우선 그 근거들의 요점은 다음과 같다.71) ①五蘊에 유래하는 我. 긍정론적인 해석자들은 경험적 범주에 비 추어 본 자아를 부정함으로써 붓다는 간접적으로 경험을 넘어선(meta -empirical) 자아를 주장하고 있다고 주장한다.72) ②非我에 함축된 의미. ③業報 輪廻와의 관련. ④禪定의 단계. 영적 원리를 상정하지 않고서는 신비적 의식의 상 승 단계를 설명할 수 없다. ⑤至福 상태로서의 열반. 붓다가 해탈의 경지에서 오랜 동안 至福 을 향수했다는 등의 기술은 인간의 유한한 운명이라는 부정론적인 생각과 어울리지 않는다. 도덕 생활에는 목적이 있고, 신비적 실현은 신화가 아니며, 화장터의 장작더미가 인간 개체의 종착역이 아니라 면, 우주와 인생에는 무한한 영적 원리가 있어야만 한다는 점이 강조 될 수밖에 없다. 무아와 단멸론적인 열반에 대한 설법만이 가장 격렬 한 고행과 윤리적 수양의 최종 결과라면, 초기 불교는 대중 종교로든 36), pp.821-24.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 pp. 150, 재인용. 70) Varma, Early Buddhism and its Origins, pp. 150-1. 71) Ibid., pp. 151-4. 72) 이에 대해 바르마는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 문제는 여전히 미해 결인 채로 있으며, 현상적 양태로서의 자기 중심적인 자아를 부정한다는 것이 초월적인 상위의 나 라는 실체를 간접적으로 가리킴을 의미한다고 단정적으로 주장하긴 어렵다. 고 평가한다.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진실한 형이상학으로든 아주 불만족스러운 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초기 불교의 否定主義라는 불만족스러운 성격은 그 반동으로서 대중 적인 儀式主義와 우상 숭배, 그리고 또한 후대에 대승의 종교와 철학 이 발전한 데서 보이는 철학적 절대주의로 이끌었다. ⑥三歸依에서 붓다에 대한 귀의를 고려할 경우, 붓다는 결코 자신 을 영적 지도자로 받들라고 주장한 적은 없지만, 그 귀의는 붓다의 생존 기간에 사람들이 그를 영적 지도자의 지위로 받아들였음을 의 미한다. 하여간 붓다가 반열반 후에 완전히 절멸했다면, 그에게 귀의 케 하는 것은 무의미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귀의는 붓다 가 영적 존재로서, 아마도 지상 세계를 초월하는 어떤 곳에서 존속하 고 있을 때라야만 의미를 지닌다. 종교적 관점과 철학적 관점이 뒤섞여 있는 위와 같은 근거들은 나 름대로 수긍할 만한 점이 있다. 그러나 영적 실체를 부정하는 더 많 은 근거들을 무시하고서 위와 같은 근거나 논리로 붓다가 영적 실체 를 인정했다고 주장한다면, 이는 아무래도 타당하지 않다. 佛典에 상 반된 해석의 가능성을 내포하는 언급이 많은 것은 이제까지 필자가 고찰한 관점을 적용하여 이해하는 것이 타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위 의 근거들에 대한 바르마 박사의 이해도 필자의 견해와 결코 어긋나 지는 않는다. 有我說을 지지하는 이런 간접적 증거는 정말 중요하다. 종교란 총체적 인 것이며, 사람들에게 우주론의 어떤 추상적인 전제를 제공할 뿐만 아니 라 인생 철학을 제공해야 한다. 따라서 통속적 견해 및 편견들과의 많은 절충이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고, 그것들 중의 어떤 것은 종교 체계 자체 에 편입되기도 한다. 이와 같이 나는 철학적 지평에서 붓다는 무아의 관 념을 설했다고 주장하긴 했지만, 그는 자신이 종교 지도자로 살고 있었던 환경 기반의 힘에 의해, 추상적 무아의 견지에서는 조야해 보이는 많은 관 념과 개념들을 부득이 자신의 교설에 포함했다고 생각한다.73) 불교 내부에서 일부 수행자에 의해 윤회의 주체로서 제일 먼저 고 려된 것은 識(또는 心)74)이었다. 識이나 心을 윤회의 주체로 고려하게 73) Ibid., p. 154.

인도철학 제4집 된 것은 그것이 육체 또는 개체를 통일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 문일 것이다. 이런 생각을 낳게 하는 비유가 상응부 경전에 있다.75) 비유의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하나의 성곽이 변방에 있고, 이를 한 사람의 왕인 성주가 통치하고 있 다. 그 성곽에는 6개의 문이 있다. 현명한 문지기가 이것을 지키고 있어 적을 방어하고 친우를 맞는다. 왕은 그 성 중앙의 네거리에 앉아 있다. 이 때 동쪽 또는 서 남 북 지방으로부터 신속한 2인의 사자가 와서 문지기에 게 왕이 있는 곳을 묻고, 왕을 면회하여 여실한 소식을 전하고는 다시 원 래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76) 위의 비유에서 성곽은 地 水 火 風의 4大로 이루어진 신체, 6개의 문은 6根, 이것을 지키는 문지기는 正念, 신속한 2인의 사자는 止와 觀, 중앙의 네거리는 4大, 거기에 앉아 있는 성주는 識, 여실한 소식 은 열반, 원래 왔던 길은 8正道를 각각 의미한다고 해석된다. 이 비 유의 초점이 되는 것은 識이며, 그 요지는 識을 육체 속에 있으면서 육체를 통일하는 것인 양 간주하는 것이다. 성이 성주에 의해 비로소 성답게 존재하듯이,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정되는 것은 識(즉 心)에 의 해 육체가 통일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다.77) 74) 心과 意와 識은 同體의 異名 이라고 설하듯이 識과 心은 같은 의미로 사 용되지만, 실은 識을 대신하는 표현으로서 心이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心 意 識의 셋을 비교해 보면, 대체로 마음의 주체적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 心이고, 마음의 작용의 측면을 표현하는 것이 識과 意라고 생각된다. 그 중에서 識은 분별하여 앎 (了別)을 뜻한다고 하므로 지적 인식의 면을 관 장한다. 意는 思量을 뜻한다 하고 또 원어인 mamas는 末那識으로서 집착 의식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는 감정과 의지 의 면에서 사량하고 망상하여 隨眠하는 활동을 관장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識이라는 말은 때로는 心과 같은 주체의 면을 표현하기도 하고, 意 와 같은 染汚識으로서 情意 측면의 작용을 표현하기도 한다. 이처럼 識은 狹義로 사용되는 경우와 廣義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舟橋一哉, 原始佛 敎思想の硏究 (京都: 法藏館, 1952), p. 58. 75) Saṃyutta-nikāya, Vol. Ⅳ, p. 194. 雜阿含, 제1175經(大正藏, 2, p. 315 하). 76) 舟橋一哉, 原始佛敎思想の硏究, p. 57. 77) 위의 책, 같은 곳. 漢譯 잡아함경 에서는 6개의 문이 아니라 4개의 문인데, 이는 4識住(色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위의 비유처럼 識 또는 心을 개체의 중심적 존재로서의 통일체로 본다고 해서, 이 관점이 곧바로 識을 불변 상주하는 본체(즉 윤회의 주 체로서의 我)로 인정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상응 부 경전에서는 4大로 이루어진 육신은 1년 내지 100년을 머무는 경 우도 있지만, 心(또는 意 또는 識)은 마치 원숭이가 나무의 한 가지를 잡고서는 그것을 놓고 또 다른 가지를 붙잡는 것처럼 주야로 생멸하 는 것이기 때문에, 범부로서는 心을 我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육신을 我라고 생각하는 쪽이 낫다고 설하고 있다.78) 이 경전은 心이 개체의 통일체라고 말하는 점을 오해하여 心을 我라고 말하는 불제자에 대 한 훈계일 것이다. 따라서 心(즉 識)은 결코 我는 아니지만 개체의 통 일체이긴 하다. 이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가 오해하면 識을 我라고 집착하게 되기 쉬운데, 실제로 윤회설과 결부하여 識을 윤회의 주체 로 생각하는 사상으로 전개해 갔던 것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그러 한 사고 방식도 강하게 거부하고 있다.79) 識은 因緣으로 생기는 것이 며 찰나마다 생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중부 경전에서 사티(Sāti, 嗏帝)라는 비구의 견해에 대한 석가모니의 질책으로 천명되어 있다.80) 여기서 사건의 진행은, 사티 비구가 자신이 이해하기로는 다른 것이 아닌 이 識이 流轉하고 윤회한다. (idaṃ viññāṇaṃ sandhāvati saṃsarati anañña n)라고 붓다가 설했음을 다른 비구들에게 알리는 것으로 시작된다. 이에 대해 그것이 그릇된 이해라고 생각한 다른 비구들은 사티에게 受 想 行의 4온)를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이 비유에 대한 잡아함 경 의 설명에 의하면 城은 인간의 육신, 성곽을 잘 관리함은 正見, 도로가 잘 뚫림은 6根, 문지기는 4念處, 성주는 識受陰(5온 중의 識蘊), 사자는 正觀, 여실한 소식은 4성제, 왔던 길로 되돌아감은 8정도를 각각 의미한다. 그런 데 후나하시 이츠사이(舟橋一哉)가 성주는 正見을 의미하는 것으로 漢譯의 비유를 소개하고 있는 것은 漢譯을 잘못 읽은 것일 뿐만 아니라 상응부 경전의 내용과도 그 취의가 일치하지 않는다. 78) Saṃyutta-nikāya, Vol. Ⅱ, pp. 94-7. 雜阿含, 제289-290經(大正藏, 2, pp. 81 하-). 이에 대해 들은 바가 많은 성스런 제자는 緣起로써 잘 사유하고 관 찰한다고 설한다. 79) 舟橋一哉, 原始佛敎思想の硏究, p. 59. 80) Majjhima-nikāya, Vol.Ⅰ, pp. 256 ff. 中阿含의 제201, 嗏帝經(大正藏, 1, p p. 766 ff).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가 한다 고 말한 적이 없으며, 무엇에 의해 또는 무엇을 緣으로 하여 (kim paccayā, 何緣故) 하느냐고 묻는 것이 좋은 질문이라고 대 답한다. 아울러 스스로 제시한 질문을 6處 觸 受 愛 取 有 生 老死 라는 연기 관계로 설명한다. 여기서도 識은 연기적 존재임이 천명되어 있다. 연기적 존재인 識은 고정적인 자기 동일자는 아니 기 때문에, 고정적인 자기 동일자 라는 의미에서의 윤회의 주체일 수는 없는 것이다. 83) 이상과 같이 윤회 주체의 존재는 불교에서는 어떠한 의미에서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사후에 존재하는 영혼을 대신하여 5온 내 지 識 또는 心相續을 세운다든가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부정되어야 할 방향에 있다.84) 그러나 윤회의 주체를 부정한다는 점을 이유로 내세워 아함경에 서는 윤회적 존재를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속단일 것이다. 識은 윤회의 주체일 수는 없더라도 業을 중심으로 한 가변의 윤회의 존재를 상정하는 것은 가능하기 때문이다.85) 이제 윤회의 주체가 없이 어떻게 윤회가 가능한가 라는 의문에 대해 業에 의해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여기서 말하는 業이란 정확히 표현하면 業力이며, 이것은 인간을 구성하는 5온의 활동이 남기는 잠세력이다. 이 잠세력은 5온 이 파괴되더라도 끊이지 않고 이어지면서 연기적인 계기에 의해 假 我인 5온으로 다시 형성된다. 이 끊임없는 연결을 相續(saṃtāna)이라 고 칭하므로, 불교에서의 윤회는 업의 상속 에 의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후대에 구사론 에서 소개하는 5온의 상속 이 론이나 心의 상속 이론도 5온이나 心 자체가 상속한다는 의미가 아 니라, 5온이나 心이 남기는 업력이 상속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86) 예를 들어 구사론 에서의 다음과 같은 언급이 주목된다. 83) 平川彰, 無我と主體, p. 403. 84) 佐佐木現順, 業論の硏究 (京都: 法藏館, 1990), p. 38, n. 10. 85) 平川彰, 無我と主體, p. 404. 86) 이와 관련하여 제목만 보더라도 관심을 끄는 발표문이 있다. 上野順瑛, 原始佛敎に於ける無我輪廻說の論理的意義, 印度學佛敎學硏究, 7-1(1958), pp. 190-3. 그런데 이 논문의 다음과 같은 결론은, 필자가 보기로는 소위

인도철학 제4집 蘊은 찰나마다 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윤회한다는 것은 불 가능하다. 영속하는 어떤 원리나 어떤 아트만이 전혀 없이, 다만 번뇌와 업에 의해 조건지어지고 만들어진 蘊의 상속이 모태에 들어간다.87) 여기서는 5온보다 業이 상속 윤회의 선행 조건임을 명시하고 있다. 주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업 윤회론을 설하면서도 주체(sāra, 靜 的 조건)를 인정하지 않는 무아론을 설하고 있다고 하는 역설적 사태 가 어떠한 의미인가 라는 문제에 대해, 불교는 업론과 무아론 사이 의 상호 배척적 관계보다도 오히려 내면적 연관의 필연성 위에서야 자신의 특질을 지닌다. 88)라는 견해는 불교의 업설 또는 윤회설의 특수성을 지적하는 견해일 것이다. 이같은 견해는 윤회의 주체 라는 문제는 고정 실체가 아닌 業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음을 제시하는 다 음과 같은 설명으로 귀결된다. 인간적 본질은 단순히 매개 없이 무아의 상태로서 서술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업에 의해 업에서 그 본질을 드러낸다. 인간적 본질은 서술된 그 상태 자체에서 비록 무아성이라고 하더라도, 그 무아성인 것은 업을 통해 서가 아니면 진실로 구체적으로 본질을 드러내 보이지는 않는다. 이러 한 해답의 형식 자체 속에서 이미 업과 무아의 내면적 접합성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업이란 말할 것도 없이 하나의 실체는 아니다. 끊임없 이 지속하고 상속해 간다.89) 五蘊相續說에 입각하면서 5온 자체가 상속한다는 시각을 援用한 것이라는 점에서 기존 논의의 한계를 별로 벗어나지는 못한 듯하다. 아래에서 말하 는 相互因待的 과정 이란 前 찰나의 원소가 後 찰나의 원소가 되고, 後 찰 나의 원소가 前 찰나의 원소가 되는 과정이라고 한다. 5온의 相互因待的 과정이 인간이고, 이 과정의 계기로서 [前 찰나와 後 찰나의] 5온이 동일하게 되는 면이 인간의 常住性, 동일성을 담당하며, 다 르게 되는 면이 生老死인 변화를 담당한다. 5온의 이러한 相互因待的 과정 으로서 고려된 인간이 무아적 인간이다. 현실의 생존에서는 前 찰나의 5 온과 後 찰나의 5온과의 관계가 동일하다면, 그리고 현생의 최후 찰나의 5 온과 재생의 최초 찰나의 5온과의 관계가 동일하다면, 무아적 재생은 성 립한다. 무아 윤회의 논리적 의의는 시간적 常住性을 相互因待說에 의해 정립했던 점에 있다. 87) 徐盛源, 第一義空經과 Vasubandhu, 印度哲學, 제3집(1993), p. 24 참조. 88) 佐佐木現順, 業論の硏究, p. 28.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행동의 근저에 我(자아 의식)가 강하게 작용 하고 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석가모니는 我의 이런 화 근을 보고서 이것을 제거하기 위해 무아의 가르침을 폈던 것이라고 도 이해된다.90) 그런 화근은 범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행자들 에게도 있었음을 앞에서 소개한 사티 비구의 예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 자신은 연기의 법을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윤회하는 주체를 識이라고 보았다는 사실은 당시의 수행자들이 빠지기 쉬운 일면을 반영하는 사례일 것이다.91) 위와 같은 사례만으로도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 문제가 누구나 납 득할 정도로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문제는 앞으로도 더욱 많은 검토와 고찰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 리고 이 작업은 그 문제를 보다 본격적으로 취급했던 후대의 논서 들을 주로 참고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 경우에도 사티 비구와 같은 사례를 고려하여,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는 논자들의 시각을 석가모 니 본래의 입장과 대비해야 할 것임은 당연하다. 5. 맺음말 불교에서 학문적으로 쟁점이 되는 것을 논할 때마다 판단의 기준 이 되면서도 항상 궁금한 것은 석가모니의 正覺의 내용이 무엇이냐 는 점이다. 이 궁금증에 대한 해답은 대체로 大同小異하게 제시되어 89) 위의 책, p. 33. 90) 平川彰, 無我と主體, p. 411. 91) 雲井昭善, 輪廻と無我について, p. 282, 참조. 여기서 구모이 쇼젠은 이 사례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본래 무엇에 의해(kim paccayā) 識이 있다는 바른 불교적 입장과 누군 가 의식한다는 입장 사이의 미묘한 차이가 識의 성격을 사티 비구의 견해 로 나아가게 했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도 아함과 부파불교 사이에 어 떤 하나의 접촉점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된다.

인도철학 제4집 있다. 그럼에도 모든 문제의 해결이 여기에 귀결되면서도 여전히 반 론의 여지를 남기게 되는 것은, 석가모니의 깨달음의 내용이 그대로 논자의 경험으로 연결되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不 立文字 直指人心 을 내세운 禪家의 취의도 충분히 납득된다. 그러나 수행이 잘 이루어진 禪師라도 그 깨달음의 핵심을 설명할 때는 대체 로 다음과 같은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을 것이다. 붓다의 깨달음은 다음과 같은 사실의 발견이었다. 인격이나 자아 같은 것은 진실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 마음에는 단지 자아가 있다는 거짓된 상정으로 이끄는 무지와 집착이 발생한다는 점. 출생과 죽음은 오로지 이 자아 에 부속된다는 점. 이러한 상정이 숱한 문제를 일으켜 고통으로 이 끌 뿐이다. 그렇다면 붓다의 가르침을 전파한다는 것은 곧 나 라든가 나의 것 과 같은 것은 없다는 진리를 전파하는 것이다.92) 무아설이든 윤회설이든 그 핵심은 나 의 문제로 집약된다. 그런데 바로 그 나 (我)가 범부의 의식에서는 항상 오해된 채 있음으로 인해 정작 나 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착각 집착하여 고통의 쳇바퀴를 맴돈다. 이 착각과 집착은 붓다가 그 존재를 부정했던 자아는 어느 때라도 동일성을 지니고서 존재하는 것으로 상정되면서 죽은 후에도 신체와 세계를 독립적으로 존속케 할 수 있는, 상주하는 내적 자아였 다. 93)라는 사실에 대해 더욱 불안감을 느낀다. 더 좋은 상태로의 전 92) Bhikkhu Buddhadāsa, Me and Mine, edited by Donald K. Swear(Delhi: Sri Satguru Publication, 1991), p. 81. 이렇게 말하는 붓다다사 비구는 4성 제와 緣起에 대해서도 이 관점을 적용하여 설명한다. Ibid., p. 89. 苦: 고통은 나 와 나의 것 이라는 감정에서 유래한다. 集: 고통의 원인은 나 와 나의 것 이다. 滅: 고통의 소멸, 즉 열반은 나 와 나의 것 의 소멸이다. 道: 8정도는 나 와 나의 것 을 제거하기 위한 방법 또는 수단이다. 緣起: 나 와 나의 것 이라는 감정이 어떻게 일어나고 멈추는지를 상세 히 설하는 것이다. 나 와 나의 것 을 검토하는 데서 우리는 그것이 윤리적인 의미에서 자기 중심주의 (egoism)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될 것이다. 93) Taylor, The Anattā Doctrine and Personal Identity, Philosophy of Ea st and West, 19-4, p. 359.

무아와 윤회의 양립 문제/ 정승석 환 가능성이 없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교에서 윤회의 주체 와 관련된 여러 가지 代案과 異見이 등장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그러한 범부 의식을 고려한 데서 기인할 것이다. 그러나 상주하는 내적 자아, 즉 범부가 생각하는 윤회의 주체가 없이도 윤회가 성립함을 믿는다면 그러한 불안은 가실 수 있다. 하지 만 범부의 의식 자체로는 그 사실을 믿을 수 없다. 자신의 자아 의 식으로 인해 윤회한다 는 사실 자체가 불안이고 고통임을 스스로 인 식할 때서야 무아 교설의 가치를 느끼기 시작할 것이다. 이리하여 윤 회하는 범부의 자아 의식은 윤회가 없는 무아의 覺者를 지향하는 계 기가 된다. 불교의 윤회설이 지향하는 목표도 여기에 있다. 이제까지의 논술을 유지해 온 필자의 시각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불교는 영혼과 같은 윤회의 주체를 인정하지 않으면서 윤회를 인 정한다. 이런 윤회설을 무아설과의 양립 불가라고 논란하기보다는 불교의 윤회설로 그 특수성을 인정해야 한다. 緣起的인 세계의 생성 변화 과정은 어떤 基體로서의 我가 존재하지 않더라도 설명이 가능 하다. 다시 말해서 윤회는 我가 없더라도 가능하다. 그러나 현실의 범부 의식에서는 我를 상정함으로써 심리적 집착에 의해 고통의 세 계를 연출하므로, 我는 부정되고 윤회는 극복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결국 불교에서의 무아설과 윤회설은 그 취의가 동일하며, 이런 의미 에서도 무아설과 윤회설은 양립한다. 이제 윤회와 연관된 무아설의 취의를 아래의 인용으로 대신하여 밝히면서 이 글을 일단 마무리한다. 生死苦로서 有情 의 모습, 환언하여 緣起를 여실히 알지 못하는 입장 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대로 무아의 입장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것 이라 고 換置될 수 있을 것이다. 소위 연기설이 무상 고 무아 라는 세 가지 진 상과 상관적 입장에 있다는 점에서 보면, 緣起의 입장을 여실히 알지 못 한다 고 말하는 것은 무아라는 본래의 존재 방식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것이다. 원시불교의 교리면에서 파악하면, 有我的으로 파악하려는 데에 迷 妄의 세계가 있다는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것은 나다, 나의 것이다. 라고 집착하는 데서 미망이 따라 일어난다는 것이다. 더욱이 그것 은 바로 無明과 渴愛에 싸여 속박되어 있으므로, 거기서 나다, 나의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