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일 (2008 년 7 월 17 일 ) 반포에서 9,000원이요금인공항버스를타고인천국제공항에 11시에도착하여 3층 C19 카운터에모였다. 짐을부치고일찌감치출국수속을마친뒤, 저마다면세품쇼핑에몰두하였지만여행에서가져올것은추억과사진뿐이라는평소의지론대로빈손으로오후2시대한항공 KE 935편에몸을실었다. 11시간에좀넘는지루한비행은언제나처럼나를괴롭혔지만덕택에시간때우기삼아가져간설득의심리학 II와이준명선생에게빌린베르나르베르베르의빠비용두권을독파할수있었다. 준비하고떠난여행에는배움이있고, 준비없이떠난여행에는감동이있다는데너무도바빴던 1학기를마감하자마자바로다음날떠난여행이라준비가있을턱이없었다. 여행사에서나누어준자료집만쓰윽훑어봤던지라이번여행에는가슴깊이감동만을꽉채우고오리라생각했었다. 결국두번의기내식과독서, 그리고그보다내몸을배배꼬도록만들었던갑갑함과지루함의이코노미클래스를버텨내고현지시각오후 18시30분에프라하국제공항에도착하였다. 출국수속을간단히마치고로컬가이드와만나앞으로 9일간우리를여행지에실어줄관광차에올라호텔로향한다. 운전기사는체코인인데이름은로만으로건장한체구에배가불룩하게나왔지만힘이좋게생겼고손가락마다반지를 10개나끼고있는모습이신기한, 좋은인상을갖고있었다.
호텔로가는길에가이드가체코란나라에대하여간략히설명한것을요약해본다. 체코는 1993년슬로바키아와분리된공화국으로동유럽국가들중형편이좋은나라이다. 여러번의전쟁에도곧바로항복을했기때문에파괴된건물이단한채에불과해서프라하의 886헥타르가 UNESCO WORLD HERITAGE SITE에등록되어있단다. 2007년한해만도약 7000만명의관광객이다녀간나라이다. 국토는남한의 2/3쯤되고, 인구는약천삼십만정도이며수도인프라하의인구는 120만명정도이다. 18세기부터중공업이발달하여 1인당 GDP가 2만불에달하고 2007년부터현대자동차공장이건설중이다. 체코는인구의약 40% 가카톨릭을믿고 10% 는신교, 나머지 40% 는무교로구성되어있다. 2차세계대전이후소련이체코를탐낸이유는플루토늄같은지하광물자원이풍부하기때문이었다. 2007년미국의부시대통령은체코에레이더기지를설치하려했었다. 그이유는체코가미국의정확히지구반대편에위치하고있기때문으로이것으로지구 360도를모두감시할수있기때문이란다. 그러나레이더설치시폭파해버리겠다는러시아푸틴의반대와체코시민의반대로이루어지지못하고있는실정이다. 체코의교육제도는박사학위까지전부무료이며, 특히 1358년설립된까를대학의의과대학이유명하여유학생들이많이오고있다. 체코는핀란드, 이탈리아와함께세계3대유리공예생산국가로알려져애니메이션특히인형애니메이션이유명하다. 또한드보르작과스메타나를배출한나라답게음악을배우러오는학생들과악기제작법을배우러오는학생들이많이있다. 학제는초등 9년과고등 4년으로이루어져있다. 초등 9년이후에는전원고등입시를치루게되어있고이를통해직업을미리선택할수있도록직업학교가세분화되어있다. 고등학교국가고시에떨어지면학비를전액반환하도록되어있기때문에체코학생들은스트레스가대단하며이를폐지하자는시위도있었다고한다. 이처럼엄격한학제의실례로 F학점을세개맞으면유급을당하게된다. 체코는자본주의화되면서루마니아집시들이많이넘어와소매치기등의사회문제를일으키고있다. 하지만여러번의주의를들었지만실제로본적도없고, 나쁜일을당한적도없다. 하긴우리일행이단체로몰려다니는데누가그런간큰짓을하겠는가?
간단한체코말을배워서매일써먹곤하였다. 영어의 Good Morning에해당하는말은 도브레라노 또는간단히 도브레 라고하고 Thank you에해당하는말은 됫구위 이다. 우리나라충청도사투리와비슷해서우리는늘 됫구유 ~ 하고즐겁게말하고다녔다. 첫날묵을숙소는프라하변두리에있는, 늘그렇듯이단체여행의숙소는항상교외나변두리에있다. 뭐비용때문에그러리라생각하고있다. 짐을풀고저녁을먹은후슬슬바깥으로나와한잔할까하는데윽! 이황량함이란. 하지만호텔직원의친절한안내로길건너 100 미터쯤떨어져맥주집몇개가있는것이보였다. 그중제일북적북적하고쌈직한곳으로들어갔는데, 뭐오줌지린냄새도나고시큼한냄새에외국특유의느끼한냄새까지진동한다. 넓직한탁자에 8명이앉아 100Kg은족히되어보일듯한체코아줌씨한테영어를적당히섞어손짓발짓으로생맥주를시켜먹었다. 독일어로 필스너우르켈, 체코어로 플젠스키플라즈드로이 라는맥주다. 머맛이야지역특산이다보니그럭저럭먹을만했는데유럽인들이늘그러하듯이안주가없는거다. 결국최영조선생이감자칩한봉다리사와서나누어먹고맥주한잔씩더추가해서건배한후에숙소로돌아왔다. 사실더먹고싶었는데가게마감시간이 11시라서쫓기듯마시고돌아왔고, 기념으로술먹던현지인과사진한방멋지게찍고돌아왔다. 조금재미있는것은계산서에맥주를몇잔먹었는지적는방법이었다. 우리는보통 4잔 5잔 으로적던가 正 으로적는데이아줌씨는 //////// 처럼먹은숫자마다빗금을쳐서기록하는것이아닌가? 미국과우리의돈세는방법이틀리듯이여기도기재하는방법이틀리다는것을나중에까를다리에있는카페점원이적는것을보고알수있었다.
제2일 (2008년 7월 18일 ) 호텔조식으로계란, 소시지등을잔뜩입에구겨넣고하루를시작한다. 오전관광을시작하기전관광차에서체코에대한설명을계속이어나갔다. 세계대전당시독일침공때문화재의파괴를막기위해바로항복했기에지금도완벽히보존된문화유산을볼수있다고했다. 그런데나중에오스트리아쪽가이드로부터들은바에의하면질것을미리알고저항하지않았다는, 조금은부정적인생각도든다. 이곳의건물들은유럽의근대를주름잡았던합스부르크왕가의특징인주상복합형건물들이대부분이다. 즉 1층은상가 2층이상은숙소로사용되고있는데, 예전에는 1층이마굿간으로쓰였단다. 건물의지붕들은노란색이많은데이것은합스부르크공국 (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 의여제였던마리아테레지아 (Maria Theresia, 1717.5.13~1780.11.29) 가노란색을좋아했기때문이란다. 이여왕의딸이그유명한루이16세의부인인마리앙투와네트이다. 구시가지에있는거의모든건물들은비좁은골목없이건물과건물사이가붙어있다. 그이유는불결한환경과쥐로인한페스트의발생을막기위함이란다. 우리나라는동유럽진출에대한교두보로체코와슬로바키아에수많은광고를하고있다. 그이유로는높은기술력에비해아직도상대적으로임금이낮기때문이다. 거리마다삼성의광고판이정말쫘악깔려있어글로벌기업의면모를보이고있으며, 삼성은슬로바키아에유럽최대의물류기지를건설한바있다. 이런모습을보면국내에서상속이며세금탈루며이러저러한부정적인이미지가확산되고는있지만한국의대표기업으로서국부창출을위해얼마나많이노력하고있는지존경스러울정도이다. St. Vitus Cathedral
첫일정으로 St. Vitus Cathedral을방문하였다. 프라하의상징인프라하성안에자리잡고있으며, 이곳에서는로마네스크양식에서고딕, 르네상스, 바로크그리고네오고딕에이르는천년이상의건축사를엿볼수있었다. 높이솟아오른첨탑과성당외벽을장식하고있는수많은조각품들을통해유럽미술의진수란이런것이구나하는감탄을자아내게하고있다. [John of Nepomuk 성인의무덤 ] 성당안에는화려한스테인드글라스와여러보헤미안왕들의무덤들이자리잡고있었다. 또한까를다리에서있는 John of Nepomuk 성인에대한그림과설명을들을수있었다. 14세기도미니크회의얀네포무크라는신부는왕비의고백성사를받은후왕으로부터그내용을알려달라는명령을받았으나끝까지이를거절하자왕은신부의혀를자른다음블타바강에수장시켰다. 두번째일정으로구시가지의주요거리인 Mala Strana를통과하여유럽옛거리의정취를살펴볼수있었다. 거리양쪽에는각종기념품을파는상점이즐비하였다. 이곳의특징으로는유리제품들이많이있었고, 러시아의특산이라는마트로시카인형이많이있었는데구소련의영향이아닌가하는생각이들었다.
[Mala Strana Street] 세번째일정으로프라하의아기예수상 (Infant Jesus of Prague) 이모셔져있는승리의마리아교회 (Church of our lady Victorious in Mala Strana) 를방문하였다. 스페인의요셉수사가만들었다는이아기예수상은수많은기적들로인해많이공경받고있으며전세계에서보내온화려한예복들이입혀져있다. 같이온수녀님들과선생님들은이곳에서무릎꿇고저마다의간절한기도를올리셨다. 네번째일정으로카를교를방문하였다. 서울에한강이있듯이프라하에는블타바강이있다. 블타바강에많은다리가있지만그중가장오래된다리가카를교이다. 강서쪽의성과동쪽의상인거주지를잇는최초의다리로보헤미아왕카를 4세때 (1346 1378) 에건설되었기때문에카를교라는이름이생겼다. 1357년카를 4세의명에의해성비투스대성당을지은페테르파를레르 (Peter Parler) 에의해새로운다리의건설이시작되었다. 완성은바츨라프 4세때인 1402년이다. 강속에서 12개의교각이떠받치고있고 16개의아치가다리아래에늘어선이석교는너비 10m, 길이 516m로유럽중세건축의정점에있는걸작이다. 원래 Stone Bridge ( 석교 ) 또는 Prague Bridge ( 프라하교 ) 로불리던것이 1870년부터 Charles Bridge (Karluv most, 카를교 ) 로불리고있다. 원래마차, 트램, 버스등이통과할수있게하던것을안전상금지시키고 1978년부터사람통행만가능하다. 너무오래되어계속해서수리, 보수를하고있다고한다. 다리위에있는 30기의성인상은다리가건설될당시에는없었고, 17세기부터시작되어 1683년부터 1714년사이에대부분만들어졌고, 20세기초까지걸쳐서제작된것이다. 제1호는프라하의성인얀네포무크의조각상이다. 1965년부터시작하여모든동상을복제품으로바꾸고진품은국립박물관 (National Museum) 으로옮기고있다. 후에양쪽난간부에상인들의석상을세웠고, 다리양쪽에는탑이있는데그사이의다리길이는약 500m이다.
Charles Bridge (Karluv most) 이곳에있는얀네포무크의상을만지면소원이이루어진다고해서상의아랫부분이반질반질하다.
다섯번째일정으로구시가광장 (Old Town Square) 를방문하였다. 이곳에는 Tyn Cathedral과 Jan Hus Statue 그리고 Old town city Hall이있다. 특히구시청벽에는천문시계 (Astronomical clock) 이붙어있다. 11시에시계가울리는데머특별한것은없고해골모양의상이손잡이를잡아늘이는모습이인상적이기는했다. 그리고탑꼭대기에서트럼펫을울리는데이는과거몽고군이쳐들어왔을때이를알리기위해트럼펫을불다가화살에목을맞은사실을기억하기위함이란다.
한나라의정서를알아보려면광장을살펴보라는말과같이구시가광장은좁은골목길에서지친여행객들의답답한가슴을뻥뚤리게하는묘한매력이있었다. 곳곳에꽃파는노점과노천카페들이잔뜩있었고, 체코의고전춤을공연하는공연장과관광용마차들이이국의정취를흠뻑느끼게해주었다. 이것으로체코구시가지관광을마치고돌아가는길에창밖으로나마프라하벨벳혁명의장소였던바츨라프광장 (Wenceslas square / Vacharske namesti) 을볼수있었다. 광장중앙에는바츨라프동상이서있고넓은광장안으로벨벳혁명당시의사람들의외침이눈에보이는듯하다. 벨벳혁명은 1989년 11월하벨 (Václav Havel) 이반체제연합인 ' 시민포럼 ' 을조직해공산독재체제를무너뜨릴때피한방울흘리지않고체코슬로바키아의민주화시민혁명을이룩한데서유래하였다. 시민혁명이성공한뒤, 하벨은한연설에서 " 우리는평화적으로혁명을이루어냈다. 이는벨벳혁명이다 " 라고말하였는데, 벨벳혁명은여기서비롯된것이다. 벨벳은형용사로는 ' 조용한 ', ' 평화로운 ' 을뜻한다. 체코슬로바키아는이후사회주의체제를끝내고의회민주주의체제로바뀜으로써 40여년의공산독재에종지부를찍었다. 이때부터벨벳혁명은피를흘리지않고평화적으로이룩한모든혁명을비유하는보통명사로쓰이게되었다. [Wenceslas square]
오전관광을마치고점심은한국식당이다. 벌써부터한국음식이그리운지불고기에된장국이얼마나반가운지모른다. 못된버릇이도진탓인지반주로소주한병을시켜서먹었는데무려 15유로란다. 머이곳에서는소주가양주정도로비싸겠지하고스스로위안해본다. 내일의일정을위해오후 2시경우리일행은폴란드의 Krakow로출발하였다. 한 5시간걸린다는데결국밤 10시가되어서야도착할수있었다. 이동하는중간에는아예푹자라고잔잔한음악까지틀어준다. 시차때문인지모두골아떨어져서잠이들곤하였다. 나도시간반쯤자다가일어났다. 창밖에는고풍스런옛유럽의시골풍경들이끝도없이펼쳐진다. 아기자기한초원들과농촌들사이로전형적인삼각형지붕의집들이자리잡고있다. 피곤하지만일어난것은대학시절영어를가르쳐주셨던이희숙선생님의말씀이기억났기때문이다. 여행가서는쓸데없이잠만청하지말고창밖으로펼쳐지는풍광하나하나를음미하고가슴속에새기라는말씀이셨다. 다행히관광차는새것이라서넓은창문이창밖을보기에부족함이없다. 끝도없이펼쳐진평원에는옥수수와밀들이심어져있어옥수수의푸르름과수확기를앞둔황금의밀들이바람에출렁이고있다. 가이드말에의하면 5월에는유채가장관을이룬단다. 우리와위도차이가그리크지않아서인지소나무들도낯설지않게나타난다. 이곳의하늘은서울과달리맑고색감이뚜렷하다. 무채색, 회색조의서울과달리흐린날의하늘에도푸르름이묻어나있고시야는탁트여몇킬로미터밖도깨끗하고선명하게보인다. 흐린날이라구름이낮지만워낙공기가맑아서인지낮은구름위의층까지손에닿을듯이선명하다. 이곳은법으로고속도로운전자가 2시간만운전하면반드시쉬게되어있다. 차에전자칩이내장되어있어서자동으로기록된단다. 한번결리면벌금만 600유로이고두번째걸리면면허가취소된단다. 밤늦게 10시가넘어서야폴란드 Krakow 에도착하여 Holiday inn 에묶을수있었다. 이제야숙소에서저녁을먹는다. 묽은스프에빵조각이둥둥떠있다. 훌훌마시는둥마는둥하고푹찐듯한밥과닭고기, 야채로늦은저녁을때운다. 여기에곁들인시원한생맥주한잔으로하루의피로를씻고잠자리에들었다.
제 3 일 (7 월 19 일 ) 오전에현지가이드와만나하루를시작한다. 현지가이드는일제때순사들이쓰는빵모자에내대학동창을닮은얼굴이라하마터면반갑다고인사할뻔한인상이다. 이양반은유학왔다가현지인과결혼하여눌러앉은사람인데폴란드에대한역사와자신의주관이뚜렷해서이번여행중가장배운것이많은사람이기도하다. 역시나하루일정을시작하는버스안에서폴란드에대한간략한설명을들었다. 폴란드는 1989년사회주의에서자본주의로체제전환을하였다. 북위 49도에서 54도사이에위치하고있으며옛수도인크라코프는북위 50도에위치한다. 여름철은새벽 3시 30분이면동이트고밤 9시나되어야해가진다. 습하지않고건조한날씨고매우쾌적한편이고밤에는좀추운편으로에어컨이거의없다. 겨울은 8시 30분에해가뜨고오후 3시 30분이면해가지는긴계절이다. Poland 는현지어로 Polska 라고과거외부의민족들이대평원에사는민족이라는뜻으로부르기시작했단다. 지금도폴란드를이해하기위한키워드로서 대평원 이라는의미가중요하며 pole' 라는말이대평원을뜻하는말이다. 독일쪽에서는 Polen' 이라부른다. 우리가오늘여행하는크라코프는남쪽이라산이많은편이지만폴란드국토의대부분인 90% 는대평원이고나머지 10% 만이산악지대이다. 위치상유럽정중앙에자리잡고있어서이제는동유럽이라불리기보다는중부유럽으로불리기를원하고있다. 1996년대우자동차가폴란드국영자동차를인수하여운영한이래로한국에대한좋은이미지를가지고있었지만대우그룹의해체이후로인식이많이나빠졌다고한다. 하지만 2002년월드컵때, 폴란드와미국의경기때폴란드를붉은악마가집중적으로응원한이후관계개선이조금은이루어졌다고한다. 동유럽국가들은지난날사회주의국가의부정적인이미지를해체시키고자유시장경제체제로의전환이급속도로이루어지고있다. 체코나슬로바키아, 헝가리가이에해당한다. 이에따라러시아나우크라이나, 루마니아등을이제는동유럽으로부르고있다. 폴란드의북쪽은발트해를끼고있어해상수송이가능하며이연안에서호박 (Amber) 이많이나고있다. 서쪽은독일과접하고있는폴란드는유럽연합에가입되어있으며면적이넓고인구는 3860만명에달해 43개의유럽국가중 7,8위에해당한다. 체코나슬로바키아, 헝가리와는달리해상수송이가능하다는점에서발전가능성이높은나라에해당한다. 여러번의전쟁으로독일이나러시아와는민족감정이좋지않은데이는추후기술하기로한다. 폴란드는하나님이주신두가지축복을받고있다고하는데이는천혜의자연환경에서기인한다. 첫째, 지진이없고둘째, 태풍이나해일등의재해가없다. 또한화산재가퇴적된유럽에서가장비옥한흑토로되어있어우크라이나와함께유럽의곡창지대로불리운다. 미국이나호주, 뉴질랜드와달리이곳의목축업은영세한편이어서개인별로소나돼지를소규모로키우고, 사료를먹이느니풀을먹이는것이경제적으로나은편이란다. 따라서광우병걱정없는깨끗한축산물을먹을수있다. 겨울 5개월중 4개월간눈이펑펑내리고여름에는우박이많이내려서한국과같이비닐하우스는찾아볼수없다. 하지만최근에는지구온난화때문에눈이잘내리지않는다고한다.
민족적으로는러시아, 체코, 불가리아와같이슬라브민족에속하는데이민족의잦은침입에도슬라브민족은단한번도몰락한적이없다는민족적자부심을갖고있다. 그역사적증거로나폴레옹도러시아를침략했다가무너졌고, 독일도 2차대전당시소련을침공했다가패망한것을들고있다. 2차대전당시폴란드로서는가슴아픈비하인드스토리가있다. 전쟁발발전히틀러는동부전선을막기위해비밀리에소련을방문하여스탈린을만났었다. 이에독소불가침조약을맺으며그당근으로폴란드동부전선을주기로약속했었다. 독일의침공이이어지자폴란드인들은동쪽에서들어온소련군을해방군인줄알고저항없이받아들였었다. 하지만소련은독일을막지않았고결국손쉽게폴란드는독일에점령당하게된다. 폴란드는 27일간저항했지만독일에패배하게되고그패잔병들은우군이라믿었던소련으로피하게되는데, 소련군은폴란드군 2만명을끌고들어가비밀리에죽이게된다. 추후이사실이알려지게된이후로소련에대한폴란드의증오는지속되고있다. 레지스탕스는보통프랑스의저항군을일컫고있으나원래는 3국분할시기의폴란드저항정신을일컫는말이다. 역사란원래승리자의편에서기록되는것이니만큼점령국이었던폴란드역시왜곡된역사기술로많이잘못알려진것이많다는것을알게되었다. 점령군인독일은폴란드의저항을막기위하여민족적성향이강한쇼팽의음악도금지하고, 천년간폴란드의호국신앙인카톨릭신앙도막게된다. 게다가쳉스트호바야스나고라의검은마돈나로의성지순례를엄격히금지하였지만폴란드국민들은쳉스트호바까지걸어서하는순례를마다하지않았다. 이제아우슈비츠 (AUSCHWITZ) 이야기로넘어가자. 대부분의사람들은아우슈비츠가유태인을학살하기위하여만들어지고, 유태인들만이학살되었다고오해하고있지만사실과다르다. 독일이 1940년아우슈비츠를세울때에는폴란드인정치범들을수용하기위한목적을갖고있었다. 향후수용자들이늘어감에따라제2수용소 (BIRKENAU) 제3수용소 (MONOWITZ) 가세워졌다. 이수용소는원래폴란드의 OŚWIĘCIM( 오슈비엥침 ) 에세워진것이다. 독일이폴란드를점령하고이지역명칭을독일식으로바꾸면서독일이름인 AUSCHWITZ 로바뀌게된것이다. 독일식정식명칭은 KONZENTRATIONSLAGER AUSCHWITZ( 약자로 KL AUSCHWITZ, 영어로 CONCENTRATION CAMPS) 라부른다. 맨처음이지역에세운까닭은첫째, 이지역에석탄광산이많아노동력착취의수단으로쓰기좋았으며둘째, 기차선로가있는철도교통의요충지이고셋째, 폴란드군부대가있던외진곳으로인적이드물어사람들이보기힘든장소였기때문이었다. 20세기전후로인류사에가장큰해악을끼친것을시대별로구분해보면한마디로단정짓기는쉽지않겠지만다음과같이크게나눌수있을것이다. 19세기카톨릭과종교라는이름하에자행된이교도에대한대학살과 20세기이데올로기의미명아래자행된공산주의혁명, 그리고 21세기현재자본주의를바탕으로한물신주의 (MONEY) 의팽배라할수있다. 그렇다면나치는왜인종말살을획책했을까? 첫째, 유대인의경우 21세기초부터전세계의부를거머쥐고있기때문에그에대한반감이작용했을것이다. 둘째, 나치가세계를정복하기위해서는역사적으로아무도정복하지못했던슬라브민족을정복해야했기때문이다. 슬라브를정복해야만유럽을정복할수있고, 그래야만최우수의민족으로인정받을수있기때문이다. 이러한이유로유대인대학살이란그늘에가려 2차대전중최소 2천만명이넘는소련인의피해는상대적으로잘알려져있지않다. 셋째, 폴란드인역시같은슬라브
민족으로인종말살의한대상이되었다. 폴란드의수도가크라코프에서바르샤바로옮겨진이유는 16세기말북쪽스웨덴의침공을막기위함이었지만 17세기말스웨덴의 2차침공을받게되었다. 이처럼폴란드가외부의침략을지속적으로받게된까닭은무엇일까? 폴란드는유럽의곡창이라불리울정도로풍족한자원을가지고있어서현재도미국에대항할 EU의식량창고역할을하고있다. 그런데드넓은평야에농사짓기는좋은반면외부의침입을방어할만한지형적유리함을갖고있지못하기때문에외적의침입이그토록많았다고한다. 폴란드에대한설명은여기서접기로하고 3일째투어를정리해보기로하자. 오전에처음으로방문한곳은앞서설명한아우슈비츠이다. 가이드의설명에조금은긴장한태도로첫관문앞에섰다. 우리가방문한곳은두번째수용소인 BIRKENAU이다. 수용소정문은쉰들러리스트에서도나왔던유명한곳이다. 문상단에는 ARBEIT MACHT FREI' 라고독일어로씌어있다. 노동이너희를자유롭게하리라 라는뜻인데, 극심한노동끝에죽어간희생자들을생각해볼때아이러니할수밖에없었다. 2차대전당시이곳에수용된사람들은유럽전역에서끌려왔으며주로폴란드정치범, 유태인, 소련군포로, 범죄인, 여호와의증인, 동성애자등으로구성되어있다. 수용소에도착한사람들은그자리에서죽을자와살자로구분되었는데장애인, 노약자, 어린이등강제노역이불가능한사람들이먼저처형당했었다. 지금은기념관으로재구성한수용소를돌아보면서가장가슴아팠던곳들이있다. 끌려온사람들의머리카락을모두잘라서옷감을만들고, 남은 2톤여가량을그대로전시하고있었
다. 그리고그옆에어리다는이유로, 노동을할수없다는이유로그대로죽임을당한어린이들의옷가지를볼때울컥하고터져나오는울음을참느라너무나괴롭고가슴이아팠다. 왜죄없는어린이들까지그래야만했을까? 인간이란존재는과연신에게사랑받을자격이있는존재일까? 더구나이들을대상으로생체실험까지자행한모습을보고난뒤에는속이울렁거리고답답한마음에이곳을그냥뛰쳐나오고싶은마음뿐이었다. 가까스로살아남아중노동에시달렸던사람들마져힘이떨어지면끌려간곳이가스실이었다. 이곳에는욕실, 청결, 건강이라고씌여있었다니얼마나가증스러운일인가? 또한여기서죽은시체를처리하기위한소각장에는성인2명, 아이1명의최적비율로불태웠다니더이상말을잇기힘들지경이다. 이곳수용소는현재기념관으로꾸며져많은방문객들을맞고있는데저마다무선마이크와이어폰을장착하여코스별로자세한설명을들을수있도록되어있다. 우리는이곳에서수용소의내부와감시탑, 교수대등을둘러보고이곳을떠났다. 점심으로여기와서늘그렇듯이폴란드식돈가스와감자, 빵이둥둥떠있는스프로간단히먹고다시 2시간쯤걸리는소금광산으로떠났다. 소금광산 (Wieliczka Salt Mine) 에대해간략하게알아보자. 폴란드크라쿠프 (Krakow) 시에서약 15km 떨어진곳에위치한암염광산인비엘리치카소금광산은크라쿠프광역시내의 Krakow Old Town, 아우슈비츠수용소와더불어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지정지 3곳중의하나이다.( 비엘리치카소금광산은 1978년유네스코에의해세계문화유산으로지정되었다.) 이곳은 13세기부터개발되어현재에이르기까지채굴이이루어지고있으며지하 9층 327m깊이까지거대한규모로개발이이루어졌다. 그리고광산의소금속으로내려가다보면은아름다운조각예술품들을만나볼수있다. 비엘리치카소금광산은한때는소금광산으로서역할을톡톡히해냈지만 17세기부터소금채굴량이줄면서소금광산으로서의미는퇴색해졌다. 하지만광산노동자들이채굴뒤남은공간을예배당이나운동장, 성인이나유명인의기념공간으로활용하면서내부에수많은조각작품을남기게되었다. 이러한작품들이관광자원으로서의역할을해내면서연간 80만명에이르는관광객을끌어들이게되었다.
이곳의관광자원으로서가장유명한곳은 축복받은킹가교회 라는소금예배당이다. 킹가교회의전설을살펴보면폴란드왕볼레스와프와결혼하기위해폴란드로향하던킹가공주는트란실바니아의소금물습지에있는샘에서발길을멈추고약혼반지를그속에던져넣었다. 폴란드에도착한공주는비엘리치카주민들에게암염광산을개발하라고했다. 주민들이공주의말대로땅을계속파내려가자암염층이나왔다고한다. 비엘리치카암염광산의역사는이전설과함께시작되었다. 이러하여킹가공주는비엘리치카암염광산과그주변에발전한비엘리치카마을의수호신과같은존재가되었다. 초록색으로빛나는암염을파내려간노동자들은지하 100m 지점에길이 55m, 폭 18m, 높이 12m의공간을만들었다. 그리고여기에킹가공주에게감사하는마음을표현하고작업의안전을기원하는뜻으로거대한소금예배당을건설했다. 이예배당에는지상의예배당과다름없이제단이나촛대는물론이고, 갖가지조각상까지갖추어놓았다. 이모든것들은광산노동자들이암염을캐내기위해광산에서사용하는도구만으로조각한것이다. 그리고비엘리치카소금광산의암염의치유효과가널리알려지면서 1964년에는지하 211m지점에호흡기질환자들을위한요양원이들어섰으며, 갱안에는중세에서현재에이르기까지광산기술의발전역사를쉽게볼수있는박물관이설치되어있다. 최근복원된박물관의중앙에는현장감독이사용하던호화로운장식이곁들여진무기류와광산책임자의휘장등이장식되어있다. 소금광산의입구에는소금과관계된여러가지물건을판매하는곳이몇군데있다. 여기에서다른선생님들은아토피에좋다는소금가루며, 소금장신구등을구매하고, 광부출신의가이드와함께광산입구로들어갔다. 나무로만들어진계단을빙글빙글돌아내려가는데조금은어지럽고현기증마져날정도로깊숙하게나선형으로만들어져있다. 이곳의나무계단이나받침대들은모두이곳에서풍부하게자라고있는소나무들로이루어져있고, 내부로부터뿜어나오는소금기때문에절대썩지않는다고한다. 뭐내려가다가벽에손을묻혀찍어먹어보니짭짤하기는하더만. 광산안에서유명한것으로는킹가대성당, 다빈치의최후의만찬, 폴란드출신코페르니쿠스상, 요한바오로 2세상등이있다. 그리고힘든광산채굴일을누가대신해주었으면하는바램이깃든난장이상등이있다. 참고로말하자면나무계단을내려가다가벽에낙서를한조 선생은혼좀나야한다. 나는이런관광지에이름이나구호등을써서해악을끼치는일을굉장히혐오한다. 자손에게지속가능한문화나자원을물려주는데교사인우리가반드시일조해야한다는지론을
갖고있다. 이글을읽고반성하시길빈다. 어험! 암염광산에서채굴한소금을위로올리는일은말을이용한일종의도르래같은것을썼는데커다란말을어떻게안으로가져갔는가하는가이드의질문에망아지일때데리고들어가키웠다고바로내가맞추어버렸다. 역시나의총명함이란여기서도빛을발하는구나. 소금광산에위해를가하는큰요소가바로물이다. 소금은물에녹아버리기도하고지하로부터계속물이솟아오르기때문에예로부터물을퍼올리기위하여고심했단다. 요즘이야전기모터로뽑아올리겠지만예전에는이것을손수퍼올렸다니그노력이얼마나대단할지상상이가지않는다. 과거이광산에서위험한것들중또한가지는광산속에서뿜어져나오는메탄가스와초산가스이다. 이것을미리태워버리기위해횃불을들고미리광산속에들어가가스를태우는직업이있었단다. 얼마나위험한지이일을 1년간하면평생을보장해주고거의영웅대접을해주었다는데가스폭발에도거적대기하나뒤집어쓰고위험을무릅쓰는것을보면과연그럴만도하구나하는생각이들었다. 하지만이일의생존율이얼마나되는지들었을때에는눈이휘둥그래질수밖에없었다. 생존률은단 2% 란다. 휴우 ~. 광산으로내려가는지루한계단과는달리올라갈때에는엘리베이터를이용하는데 2층으로되어있어서재미있게오를수있었다. 그냥올라갈수없어서막간을이용해광부출신가이드와사진한방멋있게찰칵!. 여행도중어마어마한양의사진을찍어준곽순종선생에게다시한번감사를해야겠네. 소금광산을뒤로하고우리는크라코프시내로출발하였다. [Main Market Square/ Rynek Glowny]
크라코프역시 Unesco World Heritage Site로등록된역사적인곳이다. 폴란드출신의교황인요한바오로 2세가사제로계셨던성당이바벨성안에위치해있고, 크라코프광장으로가는길목에위치한공원에도그를추모하고기념하는사진과자료들이줄지어전시되어있었다. 광장의정식이름은중앙시장광장 (Main Market Square/ Rynek Glowny) 이고탁트인넓은이곳에는노천카페와다양한문화공연들이심심치않게펼쳐지고있었다. 한쪽에는영화관인지커다란간판이걸려있는것이인상적이다. 우선첫번째로눈에띄는것은성모마리아성당 (Saint Mary's Basilica) 이다. 미사가실시되고있어서인지성당안쪽깊숙한곳에는들어가지못했지만, 멀리서나마 Veit Stoss 대제단의화려한위용을엿볼수있었다. 또한쳉스트호바야스나고라의검은마돈나가이곳에도있었는데원본인지는확실치않다. 광장건너편에는커다란회랑처럼지어져있는직물회관 (Sukiennice Cloth Hall) 건물이있는데그안에는수많은잡화점과공예품들을판매하고있었다. 이곳특산물중의하나가호박이라서부인을위하여목걸이를 35유로주고하나구입했다. 직물회관앞에서는끈으로묶어서조작하는인형극을노천에서공연하고있는데마돈나와마이클잭슨의노래를공연하는모습이인상적이었다. 직물회관뒤에도높은건물이있는데이것은 Town Hall Tower 이고광장한편에아주작은성당이하나있는데이것은 St. Adalbert's Church 이다. 이쯤되면수많은성당이름때문에머리가아파오곤하는데, 오랜기간가톨릭문화권에서가톨릭을국교로삼은나라답다는생각이든다. 오후에는어제묶었던 Holiday inn에다시돌아가여독을풀고잠이들었다. Krakow에대한이태훈여행작가의간략한설명 (2008년 7월 20일 ) 을첨부해본다. 얼마전세계의성인요한바오로 2세의서거와관련해교황과관련된몇가지일화가세상에소개된적이있다. 그일화의하나가교황의첫사랑에관한것이었다. 요한바오로 2세는 27세때신부가되기전까지 10여년동안불꽃같은사랑을나눈여인이있었다. 그러나끝내그들의사랑은이루어지지않았고, 30년이지난후에야비로소교황과신도의신분으로재회했다는이야기였다. 사람들은교황의이루지못한사랑에서글픔을느낀동시에성인으로추앙받는교황에게도한때죽도록사랑했던연인이있었다는사실에인간적인매력과따뜻함을느꼈다. " 나는행복합니다. 그대들또한행복하시오." 그가마지막으로남긴이말을가슴깊이되새기며, 그의청년시절의삶과고뇌, 조국, 좌절, 희망, 사랑이스며있는크라쿠프를찾았다. 크라쿠프는 1038년부터 1596년바르샤바로수도가이전되기전까지 558년동안폴란드의문화, 경제, 정치, 예술, 종교의중심지였다. 14~15세기에전성기를누린크라쿠프왕국은체코의보헤미안왕국과오스트리아의합스부르크왕가와함께중세유럽의문화중심지역할을해왔다.
천년고도의크라쿠프에는폴란드의영화로움이골목길과성곽, 건축물과구시가지광장등도시곳곳에스며있다. 교황바오로 2세의고향인크라쿠프는도시곳곳에서그와관련한사진과그림을만나게된다. 유네스코에서이탈리아의로마보다세계문화유산으로먼저선정했을만큼크라쿠프의명성은유럽에서정평이나있는천년의도시다. 폴란드의수도바르샤바보다문화, 역사, 경제, 정치등에서더오래된전통을지닌폴란드인의정신적수도이자민족문화의메카다. 13세기부터몽골과터키에의해동유럽대부분의도시가파괴되고점령되었을때도크라쿠프만은그어떤피해도입지않았다. 1596년지그문트 3세가폴란드왕국의수도를바르샤바로옮긴후에도크라쿠프는여전히왕의대관식과장례식이치러질정도로폴란드역사에서중요한위치를차지했다. 18세기에폴란드가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에의해식민국가로전락했을때오스트리아령에있었던크라쿠프만은자유도시로인정받아폴란드의역사와문화를찬란히꽃피웠다. 아름답고우수한크라쿠프의문화는가로, 세로 220m의구시가지광장에서비롯된다. 유럽의모든도시들이광장을중심으로뻗어나가듯이크라쿠프또한정사각형모양의중앙광장과남서쪽에있는바벨성을중심으로도시가건설되었다. 네모난광장을기점으로길쭉한타원형모양의구시가지가형성되었고, 북쪽에는옛성곽과성문이그대로남아있다. 하루에도수천명이찾는크라쿠프구시가지광장은로맨틱한사랑만큼이나낭만적인분위기가흐른다. 관광객을위한마차가광장을누비고, 노란색의직물회관, 두개의첨탑이인상적인성마리아성당, 구시가지를한눈에조망할수있는구시청사, 수십개의노천카페가밀집한중앙광장은유럽에서가장크고아름답기로유명하다. 무엇보다크라쿠프가폴란드에서아니유럽에서천년의고도로자리한이유는그어느도시보다종교적열정이가득하기때문이다. 물론교황을배출한도시이기에크라쿠프의거리는가톨릭성당과교회가곳곳에가득하다. 중앙광장에서역대폴란드왕들이거주했던바벨성으로가다보면고딕양식, 르네상스양식의크고작은교회들이길을따라나란히들어서있다. 특히그로츠카 (Grodzka) 거리에는성요셉교회, 성앤드류교회, 성마르틴교회, 성페트로파울로교회등외형적으로너무나아름다운교회들이들어서있다. 이곳의교회들은전쟁에도전혀파괴되지않아건축박물관으로여겨질만큼보존상태가매우양호하다. 그로츠카거리를따라남쪽으로 5분정도내려가면석회암언덕에지어진바벨성과대성당이눈에들어온다. 비수와강이한눈에내려다보이는야트막한언덕위에세워진바벨성은 11세기부터건축되기시작해 16세기에완성되었는데폴란드왕국의상징이자크라쿠프의자랑거리다. 무엇보다바벨성내부에있는대성당은요한바오로 2세가주교로 10년간몸담았던곳이다. 바로크양식으로지어진대성당은폴란드왕들의대관식과결혼식그리고장례식이거행된곳으로지하에는왕족, 민족영웅, 예술가들의유해가안치돼있다. 성당의내부는화려하고세련된조각과벽화들이사람들의눈길을사로잡는다. 성당내부의기둥과바닥을이탈리아의베네치아산마르코대성당처럼검은대리석으로장식한것이특징이다.
제 4 일 (7 월 20 일 ) 시차때문인지이틀째는새벽3시, 사흘째는새벽 4시, 오늘은새벽5시에눈이떠진다. 여전히아침은호텔식으로스크램블과소시지빵으로한끼를채우고하루를시작한다. 동남아권호텔에가면꼭쌀죽이있어서두그릇씩든든히먹곤했는데밀을주로심는나라라쌀죽은한번도먹지못했다. 너무먹구싶네. 조기성선생은여전히식성이좋아서그큰소시지를 4개씩이나먹는다. 살찐다고놀려대도예의사람좋은웃음을보일뿐이다. 헤 ~~ 일요일이라폴란드교외에있는자비의예수님성당에서아침미사를보고떠나기로했다. 어쨌든우리여행은성지순례를목적으로하고있으므로주일미사를거르지않는성실함을보였다. 성당은역사적건물이아니라현대적으로새롭게지은건물인데, 이곳에서폴란드인들과함께미사를보면서느낀점이참많았다. 나는전세계의모든미사가교황청에서정한대로공통의예법을따르는것으로알고있었다. 이곳의미사도별반다르지는않았지만성당에들어간사람들이첫모습과중간과정은나에게잔잔한감동을깊게심어주었다. 사람들은성당에들어가자마자노인이든여자든, 바지를입었건, 치마를입었건모두차가운바닥에무릎을꿇고기도를올린다. 한국에서성호만긋거나성모님께고개숙이고자리에앉는모습에익숙했던나에게는너무나감동적인모습이었다. 어느누구하나빠짐없이입구에서두무릎을서슴지않고꿇는모습을보고, 긴역사를통해이들폴란드국민에게는신앙이특별한것이아니라몸과마음에자연스럽게익숙한생활과같다는것을느낄수있었다. 미사중부르는성가중에는늘우리가부르는것들도있어서친숙하게느껴졌지만중간중간여러번무릎을꿇고미사를드리며나도어릴때부터이런분위기에서성장했다면좀더자연스러운신앙을갖지않았을까자문해보았다. 신앙을알기이전에이미자연과학적지식이머릿속에절대진리처럼꽉차있었던나로서는정말부러운일이아닐수없었다. 온가족이일요일마다단정하게옷을입고부모의손을잡고하느님앞에무릎을꿇는가정환경에서자란다면지금의우리나라의걱정거리중하나인인성교육이나비행청소년문제들은훨씬적어지지않을까하고생각되기도하였다. 폴란드의 AD966년체코로부터카톨릭을받아들인이유는종교를빌미로한독일의전쟁명분을없애기위함이었지만현재까지천년동안국교로굳건히자리잡고있다. 우리나라도이처럼온국민이하나될수있는정신적구심체가있었으면하는부러움이생긴다. 예배를끝내고성당앞에자리한매점에서간단한성물들을구입하는데유로화사용에어려움이많다. 유럽통합이거의진행되었다고는하지만각국의통화를일치시키는데에는아직도시간이좀더필요한듯싶다. 오스트리아를제외하고는유로화사용에애로점이많고휴게소화장실도현지코인으로요금을받는곳이많으므로미리준비할필요가있다. 우리가미사를드렸던성당은성녀파우스티나를모시는수녀원과함께붙어있고, 성당안에는자비의예수님그림이한가운데모셔져있었다. 그분에대해좀더알아보자. 성녀마리아파우스티나는수녀이셨고환시자였으며, 1905-1938년활동하셨고, 최근에시성되신분이다. 마리아파우스티나코발스카 (Mary Faustina Kowalska) 는 10월 5일이축일이다. 성녀코발스카는 1905년 8월 25일폴란드우지의서쪽에있는글로고비에츠 (Glogowiec) 라는마을에서농부인에스타니슬라오코발스카 (Estanisla Kowalska) 와마리아나 (Mariana) 사
이에서 10명의자녀중셋째로태어났다. 그녀는스비니체바르키에 (Swinice Warckie) 본당에서엘라나 (Helena) 라는이름으로세례를받았다. 그녀의부모는가난하고배운것은없었지만신심이깊고올곧은사람들로서하느님에대한사랑과순명, 부지런함에서자녀들에게모범을보였다. 9세때첫영성체를한후어려운가정환경등으로 3년정도교육을받은후 12세때고향을떠나부유한집에서가정부일을하며동생들과부모님의생계를도왔다. 그녀는어려서부터수도성소를느꼈고, 더이상학교수업을받지못하게되었을때수녀원입회를원했지만부모의반대로일단성소를접을수밖에없었다. 그러나그리스도의환시를체험한후 1925년 8월 1일자비의성모수녀회에입회하였다. 그리고 1928년마리아파우스티나 (Maria Faustina) 라는수도명으로첫서약을하였다. 그후성녀마리아파우스티나코발스카는수도원의여러공동체에서조리사, 정원사, 문지기등의소임을담당하면서수녀회의모든규칙을성실히지키고동료들과따뜻한우애를나누었다. 그녀의일상적인삶은단조롭고두드러진특징이드러나지않았지만, 하느님과의깊은일치를이룬삶이었다. 성녀파우스티나수녀는많은환시와예언, 그외에영적은총을받았다. 하지만그로인해그녀를이해하지못하는사람들로부터많은조롱과박해를받았다. 그녀가체험한가장강렬한환시는 1931년 2월 22일에일어났다. 이환시에서예수님은한손으로는자신의성심근처를움켜쥐고, 다른손은내밀어강복하는모습을보여주셨다. 예수성심에서는붉은색과흰색의두갈래빛이나왔다. 예수님은그녀에게자신의성심에대한공경을전파하라는임무를주었다. 이신심의이름은 하느님자비 이다. 예수님은그녀에게그환시를그림으로그려서체험을기념하고아울러그그림을보고공경하는영혼들을구원할수있게하라고지시하였다. 그녀의일생을통해여러번예수님께서나타나서영적인지도와기도의은총을주셨다. 예수님께서그녀에게하신말씀은성녀파우스티나가직접기록한일기에담겨있으며, 그일기는오늘날 내영혼속하느님의자비 (Divine Mercy in My Soul) 라는이름으로알려져있다. 이일기에기록된성녀의사명은세가지로요약된다. 첫째, 모든인간을향한하느님의자비로운사랑에대해성서가전하는신앙의진리를세상에일깨워주어야한다. 둘째, 특히예수님이보여주신 하느님의자비 신심실천을통해, 온세상과특히죄인들을위해하느님의자비를간청해야한다. 셋째, 하느님자비의사도직을시작하는것이다. 이신심운동의목표는세상을위한하느님의자비를선포하고간청하며, 그리스도교의완덕을위해노력하는것이다. 폐결핵을비롯한수많은고통들을, 죄인을위한희생으로받아들이던성녀마리아파우스티나코발스카수녀는크라쿠프 (Krakow) 에서 1938년 10월 5일 33세의나이로세상을떠났다. 성녀의시신은크라쿠프라기에프니키의하느님의자비묘지 (Shrine of Divine Mercy) 에안치되었다. 그녀는 1993년 4월 18일교황요한바오로 2세 (Joannes Paulus II) 에의해시복되었고, 2000년 4월 30 일새천년기에처음으로시성되었다.
이제폴란드에서의일정을마치고슬로바키아와국경을마주하고있는타트라로떠나자. 동유럽의알프스로불리는타트라산맥은슬로바키아가 3/4을, 폴란드가 1/4을점유하고있다. 타트라산맥은비소케타트리산맥이라고도한다. 최고봉은게를라흐봉으로해발 2,655m이다. 1949년슬로바키아최초로국립공원으로지정되었다. 휴양지로서요양소, 산막, 호텔등이많으며겨울에는스키관광객이많이몰린다. 스위스에비해경비가적게들어더욱인기라고한다. 폴란드에서타트라로접어들기시작하면서창밖으로펼쳐지는광경에나의눈은적잖은호사를누렸다. 어떤방향으로든사진기를들기만하면어여쁜엽서의그림이나올정도로아름다운풍경이다. 전봇대처럼쭉쭉뻗어올라간나무들하며푸르게펼쳐진너른초원의바다가나의눈을즐겁게한다. 우리나라처럼구불구불한나무가많은환경에서커온나로서는일본에이어이렇게조림이잘된숲이너무나부럽기만하다. 쭉뻗은나무는베이고산중턱의구부정한소나무만이우리산천을지킨다고했건만이곳에서는늘씬한나무라해도자신의고향을못지킬턱이없어보였다. 슬로바키아로막넘어가기직전의휴게소에서우리젊은일행들은초원을달리고하늘높이뛰면서타트라의자연이주는싱그러움을온몸으로느낄수있었다. 차는다시출발하고삼각형이장난감같은집들과숲그리고초원이어우러진모습에익숙해질무렵슬로바키아국경에다다렀다. 뭐검사하는사람도없고평범한톨게이트통과하는것보다못하게그저쓰윽지나칠수있었다. 통합된유럽이몸으로느껴진순간이었다. 한참을달리니이번엔온통쓰러진나무뿐이다. 몇년전불어닥친최악의폭풍때문에나무가뽑혀나가고온통쑥대밭이되었었단다. 당시가이드가있던호텔도온유리창이다깨지고광광객들은한방에모여공포에몸을떨었다고한다. 그때부러지고뽑힌나무를치우는데만도상당한시간이걸렸다고한다. 하여이곳사람들은이때의폭풍을쓰나미로부르기도한다. 어쨌던얼마간을더달려우리의목적지인슬로바키아의타트라에도착했다. 숙소는벨레뷰호텔이다. 위치는비소케타트리라불리는곳이다. 호텔에서간단히짐을풀고점심을먹었다. 메뉴는역시나돼지고기익힌것에다감자다. 늘현지식으로이것만먹으니까느끄함에몸부림칠수밖에없지만어쩌랴. 배를채워야하는것을. 게다가후식으로커다란크림케익까지주는데나는한숟가락도먹을수없었다. 밥을먹고오후일정은모처럼만에한가한자연피정이다. 타트라의싱그러움을고요하고평안하게느낄수있는시간이다. 호텔앞언덕위로올라갔다. 평소에우리산하의식생에관심이많던나로서는언덕가득히피어있는꽃들과여기저기주렁주렁열려있는열매들, 발밑을채우고있는이름모를풀들에눈길이갈수밖에없었다. 아! 이건질경이네, 붉은토끼풀에민들레도보이고, 가이드의말대로도라지꽃도천지에널려있다. 아마우리나라관광지라면벌써다캐먹었으리라. 오솔길을천천히걸어가노라니, 빨간뱀딸기도눈에뜨인다. 오호. 그렇다면, 산딸기도있으려나? 그런데우연치않게복분자가있는것이아닌가? 영어로는라즈베리, 즉초본이아니라목본에속하는딸기다. 마침검게잘익은것이몇개있어서따먹어보았다. 햐 ~~ 바로그맛이로구나. 여기한주만더있었어도복분자주한말은담글수있겠는걸!
한적한이마을에는타트라로등산과하이킹을오르고내리는사람들이많이보였다. 겨울에는거대한규모의자연설스키장이개장되어사람들이많이모인단다. 이곳에서타트라의높은곳까지케이블카가설치되어있는데이를올라가지못한것이서운함으로남아있다. 다음에간다면꼭미리예약해서오르고싶다. 저녁에는미리사간맥주캔과동네가게에서사온보드카한잔으로여독을풀고잠에들었다. 공기가좋으니스스르잠이든다.
제 5 일 (7 월 21 일 ) 오늘도역시호텔조식으로달걀스크램블에소시지, 빵등으로속을채운다. 이젠요령이붙어야채며토마토를잔뜩가져다먹는다. 덕택에느끄함이조금은덜하다. 포근함과자연의광대함이공존했던천국과도같은타트라를떠나다시금장거리버스에몸을실었다. 이젠헝가리로출발이다. 헝가리부다페스트에도착하자마자점심을먹기위해한국식당으로향했다. 이번메뉴는소와닭의불고기다. 일본에서도유행하는가스불판을피워놓고한접시잔뜩가져다준고기를굽고제법밥다운밥을먹어본다. 박일동씨가가져온팩소주가여기서도빛을발한다. 테이블마다몇팩씩가져다놓고, 컵에다잔뜩따라서시골아저씨마냥꾸울꺽들이켠다. 식당을나와서버스를타기위해가는동안거리에서있는유대교사원에잠깐들렀다. 유럽최대라는데과연위용이만만치는않다. 현재도많은유대인들이살고있는헝가리는나치점령당시 56일간무려 43만7천명이아우슈비치등수용소로보내져가장짧은시간에가장많은유대인이추방되는등유대인과는역사적으로남다른인연을가지고있다. 하지만현재헝가리에는반유대인성향의극우파들이활동하고있어서사회문제가되고있다고한다. 헝가리의수도부다페스트는평야의북서부, 도나우兩岸에걸쳐있으며, 우안의부다와좌안의페스트로이루어져있다. 관광지로서의부다페스트는도나우강을낀풍경의아름다움으로널리알려져있으며부다와페스트는원래별개의도시로발달하였다. 14세기경부터부다는헝가리의수도가되고, 1872년부다와페스트는합병하여오늘에이른다. 세계유산목록에등록되어있다. 헝가리의첫번째코스는영웅광장 (Hero's Square) 이다. 영웅광장은헝가리건국 1000 년을기념하는의미에서어부의요새와함께조성된광장이다. 896년우랄산맥근처에살던기마민족인헝가리마자르족 7부족이이곳판나노니아평원을정복하고나라를세운것을기념하여 1896년에만들기시작하여 1929년에완성한것이다. 광장한가운데에는 36m 높이의민족수호신인대천사가브리엘의기념탑이서있는데오른손엔헝가리왕관을왼손에는로마교황의십자가를들고있다. 그밑에있는기마상은족장아르파트와부족장 6인의것으로이들은마자르족을이곳으로이동시켜헝가리를건국한사람들이다. 이들기념탑뒤로는좌우로반원형의열주가있는데열주꼭대기에있는 4개의동상들은좌측으로부터일, 부, 전쟁, 평화, 지식과명예를상징한다. 열주들사이에는역사학자들의조언에따라선정된역대헝가리국왕들과헝가리의독립을위해목숨을바친지도자 14명의조각상이서있다. 한편영웅광장입구좌측으로는훌륭한서유럽회화를전시하고있는국립미술관, 우측에는예술궁전이자리잡고있고, 영웅광장앞으로는시민공원이있다.
영웅광장앞쪽으로펼쳐진넓은대로는안드레시거리라고불리운다. 파리의샹젤리제와같은느낌이다. 안드레시거리 (Andrassy Avenue) 는부다페스트에서가장넓고복잡한길이 4km의거리이며땅밑으로는유럽에서가장오래된 (1896) 지하철이다닌다. 거리에는가장오래된교회 (1905) 인성스테판교회 (Saint Stephen 's Basilica) 가있고 Grand Boulevard를가로지르면영웅광장 (Heroe's Square) 이있으며그외 19세기에만들어진멋진건물들이많다. 영웅광장을돌아나오는길목에유럽에서제일커다란대중목욕탕이있다. 겉보기에는유명한사원이나역사적건물처럼보이는이곳이바로세체니온천 (Széchenyi Medicinal Bath) 이다. The largest medicinal bath in Europe (Széchenyi Medicinal Bath)
다음코스는성이슈트반대성당 (Szent Istvan Bazilika) 이다. 부다페스트를대표하는네오르네상스양식의성당으로성당의정면양쪽의탑은 80m, 본당중앙돔은 96m라고하는데이는헝가리건국 896년의숫자와맞춘것이라고한다. 1851년에착공해서 1905년완성되기까지 3명의건축가가건축에참여했으며정면입구에는성이슈트반의부조가, 그위에는그리스도부활의프레스코화가있다. 성당문에는그리스도의 12사도가새겨져있다. 성당안오른쪽벽가장자리에는 성모마리아의제단 이있다. 이그림은외아들임레를잃은이슈트반왕이자신이죽은후나라를지켜주기를기원하며마리아에게헝가리왕관을바치고있는내용이다. 이슈트반은임레를자신의후계자로키우면서이탈리아에서수도사겔레르트를초빙해교육을맞겼는데임레는성인이되고사냥을나갔다가멧돼지의습격을받아죽었다고한다. 성당내중앙의원형돔을떠받친 4개의기둥에는왼쪽앞에설교단, 오른쪽앞에성라슬로의조각상, 오른쪽뒤에어린임레왕자의겔레르트를, 왼쪽뒤에성에르제베트의상이새겨져있다. 에르제베트는가난한사람과병자를위해일생을바쳐성인으로추앙받는헝가리공주이다. 주제단은성이슈트반의상과그의생애를묘사한부조로장식되어있다. 이슈트반은성인이면서정치가이기도했으므로손에있는이중십자가는종교와정치 2가지를상징힌다. 부다왕궁의남쪽에위치하고있는겔레르트언덕 (Gellert Hegy) 은해발고도가 170m인부다왕궁언덕보다 70m가더높은곳에위치하고있어이곳에서바라보는도나우강의전망또한어부의요새못지않다. 겔레르트언덕의정상을오르다보면동상하나가서있는데이는언덕의명칭에서유래가된성겔레르트상 (Szt. Gellert emlekmu) 이다. 수도사인겔레르트는헝가리최초의왕인이슈트반 1세의초빙으로부다페스트에와그리스도교를전파했다. 그러나이를못마땅하게여긴이들에의해 1046년이곳에서산채로도나우강에던져져목숨을잃은것으로알려져있다. 겔레르트언덕정상에는치타델라 (Citadella) 가위치하고있다. 치타델라는전쟁에대비해구축한요새로 1854년합스부르크왕가에의해세워졌다. 그러나치타델라가요새로사용된적은단한번도없고이곳은다만합스부르크왕가에반감을사고있던헝가리시민을감시하기위해세워졌다고보는편이옳다. 요새의맨오른쪽끝으로는거대한여신상하나가세워져있는데이는제2차세계대전에서전사한소련군을위해세운위령비로 1947년에세워진것이다. 겔레르트언덕에오르면부다페스트의멋진전경이한눈에들어온다. 이곳에서저마다사진찍기에여념이없었다. 정상의멋진동상과비슷한포즈를취한곽순종선생과조기성선생의모습에서동상이나사람이나다름이없음을느꼈고최영조선생이성벽에올라가는시늉에한껏웃어보기도했다. 이언덕에서아래를내려다보면도나우강을따라줄지어있는유럽풍의옛건물과다리들이진정한유럽의아름다움을느끼게해준다. 프라하나크라코프에서미리보았기에망정이지맨처음코스가여기였다면눈을떼지못했을정도로경관이아름답다.
The bridge is named after István Széchenyi, a major supporter of its construction. At the time of its construction, it counted as a wonder of the world. It had an enormous significance in the country's economics and life. Its decorations made of cast iron, and its construction, radiating calm dignity and balance, raised it among the most beautiful industrial monuments in Europe. It became a symbol of advancement, national awakening, and the linkage between East and West. 도나우강의세체니다리 (Széchenyi Chain-bridge) 를넘어부다왕궁이보인다. 헝가리부다왕궁은벨라4세가몽고침입이후에방어적인기능을잘갖출수있는높은지역인부다언덕에처음만들었으며 14세기에여러왕들이새로운왕궁을만들었고중부유럽의문화, 예술, 정치의중심으로부상했다. 오스만제국시절왕궁이피해를입으며, 도서들과궁전내부의물건들이많이없어졌다. 그뒤, 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가헝가리를다스렸다. 18세기중엽, 마리아테레지아여왕이 203개의방을가진큰왕궁을건설했다. 그러나 2차대전말, 1944-45년에공습으로완전히불에탔으며 1950년대에복구되었다
겔레르트언덕에서유럽의전통적인멋진풍광을본뒤우리는이에뒤지지않는또하나의 View Point인어부의요새로이동하였다. 어부의요새 (Halaszbastya, the Fisherman's Bastion) 는도나우강이한눈에내려다보이는구시가지강언덕위, 왕궁언덕의동쪽에우뚝서서마차시교회동쪽에자리잡고있다. 1896년헝가리건국 1000년을기념하기위하여 1899~1905년사이에건설되었다. 헝가리풍의뾰죽한지붕이얹혀진 7개의탑과로마네스크와네오고딕양식이합쳐진회랑으로구성된요새로서도나우강이한눈에내려보이기도하는곳이다. 어부의요새라는이름은헝가리애국정신의한상징으로 19세기시민군이왕궁을지키고있을때도나우강의어부들이적들을방어하기위해자발적으로경계를선것에서유래되었다고한다. 중세에는어부들이도나우강에서왕궁지구에있는어시장으로가는지름길로사용되었다. 어부의요새앞에는헝가리최초의국왕인 ' 성이슈트반 ' 기념상이서있다. 또한동양적인색깔이짙은고깔모자모양을한일곱개의탑을볼수있는데, 그것은건국당시의 7부족을상징한다. 전체가긴회랑으로연결되어있으며, 하얀색의화려한성벽과마차시교회까지뻗어있는계단이매우아름답다. 도나우의진주 라불리는부다페스트전체를굽어볼수있는뷰포인트로, 이곳에서보이는부다페스트의경관이 1987년유네스코가제정하는문화유산에등록되었다. 어부의요새에서바라보는경관은과연명불허전으로겔레르트언덕과비결될만하다. 이곳에서재미있었던것은작은컵 3개에물건을놓고알아맞히는야바위꾼이었다. 바람잡이들이둘이나있었는데아직도이런사람들이있다니우스울지경이었다. 요새중앙에있는 성이슈트반 기념상에서사진을몇장찍고바로옆에있는마차시교회로이동했다. 마차시교회 (Matthias Church, Mátyás-templom) 는부다페스트에서가장아름다운교회로꼽힌다고하는데 13세기에세워졌다고한다. 이교회는정면입구의오른쪽에 80m의마차시탑, 왼쪽에 36m의벨러탑이솟아있어얼핏보면균형이잡히지않은이상한건물처럼보인다. 그러나고딕양식의정교한조각과왠지친숙한패턴의모자이크지붕이묘한조화로움을자아내는곳인데, 마차시왕을비롯하여역대국왕들의대관식이거행된곳이라고한다. 교회앞삼위일체광장에는 18세기에세워진바로크양식의삼위일체상이서있다. 우리가방문했을때에는때마침공사중이어서그멋진모습을전체적으로살피기쉽지않았다. 마차시교회바로옆에는한국관광객들을상대로한작은상점이하나있는데이곳에서토카지와인을한병샀다. 당도에따라서별5개, 별6개등의등급으로나뉘는데별5개짜리를한병샀다. 늘여행올때마다가이드의이끌림에따라쇼핑을다니는폐단이많았는데이번여행에서는그런전례가거의없어서참좋았던것같다. 그리고처음으로쇼핑을하게되어애교로봐줄만했다. 뭐우리야여러번의여행경험으로이런쇼핑센터의물건들값이터무니없다는것을잘알고있어서별로산것이없었다. 가이드의말대로이곳의특산은토카지와인이라는귀부와인이다. 귀부와인은당도가매우높은것이특징인데이것에대해간단히소개하고자한다. Tokaji (Tokaj) is used to label wines from the wine region of Tokaj-Hegyalja in Hungary. This region is noted for its sweet wines made from grapes affected by noble rot, a style of wine which has a long history in this region. A small quantity of wines from the Slovak wine region of Tokaj also use the Tokaj label, and are referred to as Tokajský/-á/-é, meaning "of Tokaj" in Slovak.
In 1703, Francis Rákóczi II, Prince of Transylvania, gave King Louis XIV of France numerous bottles from his Tokaj estate as a gift. Tokaji was then served at the Versailles Court, where it became known under the name of Tokay. Delighted with the precious beverage, Louis XV of France offering a glass of Tokaj to Madame de Pompadour entitled it the "Wine of Kings, King of Wines" ("Vinum Regnum, Rex Vinorum"). This famous refrain is used to this day as a marketing device for Tokaji wines. 또한토카지와인에는당도에따른등급 (the number of puttony) 이있어서보통 3에서시작하여 6정도면최고급으로친다. 휴우하루의일정이너무나힘들다. 팍팍한다리를주무르며이젠또저녁을먹으러간다. 이젠식사를하는것이식도락을즐기는것이아니라그저내일의일정을소화하기위한에너지를보충하는것에지나지않아보인다. 하지만이번저녁은헝가리의풍속이녹아있는식사라니기대해볼밖에없겠지? 우리가도착한식당은지하에넓게펼쳐진, 마치한국에서도유명한넓은생맥주집같은분위기이다. 넓게자리를잡고앉으니먼저빵과스프가나온다. 스프는구야쉬라는헝가리의대표적인음식으로마치한국의육개장과비슷한맛이나는데, 좀더시큼한것은그속에넣은토마토때문인것같다. 구야쉬에대해좀더자세히알아보면다음과같다. 구야시 (Gulyás) 는소고기, 양파, 고추, 파프리카등으로만든매운수프로헝가리전통음식의하나이다. 굴라시 ( 영어 :Goulash) 라고부르기도한다. 헝가리와그주변국가들뿐만아니라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각국에서도쉽게볼수있는음식이되었다. 유럽대륙전반에걸쳐서즐겨먹는구야쉬스프의 Gulyas' 는우리나라말로 목동 이라는뜻이다. 흔히한국에서스튜로알려진 Porkolt와비슷하지만그스튜와육개장을섞은듯한좀더칼칼한맛이난다. 그칼칼한맛의비밀이바로헝가리파프리카에있다는데, 유일하게파프리카를산최영조선생에게한번더얻어먹어봐야겠다. 구야쉬코뮤니즘 (gulyas communism) 이라는말이있다. 공산주의붕괴이전인지난 1970년대독일언론인이처음사용한이용어는당시헝가리의비교적자유분방한공산주의체제를가리키는말로쓰였다. 사회주의체제를고수하면서도시장경제요소와다당제등정치민주화를일찌감치도입한헝가리식공산주의를서방사회는헝가리전통음식이름을가져다붙인것이다. 결국구야쉬코뮤니즘은서방사회시각으로는공산주의를무너뜨린원동력쯤으로여길만한상당히긍정적인용어로인식되고있다. 하지만재밋는건정작상당수의헝가리인들은이용어를잘모르고있고안다고해도상당수는이용어를매우자조적이고부정적인의미로받아들이고있다는점이다. 공산주의시절미국으로망명했다가돌아온한지식인은 " 옛날소련의위성국가로간섭과탄압을받았던것은 ' 구야쉬공산주의 ' 가상징하는헝가리의나약함때문 " 이라고말하기도했다. 그가이용어의기원이나역사적배경을잘못이해했을가능성도있지만 ' 구야쉬코뮤니즘 ' 이주는뜨뜻미지근한이미지에많은헝가리지식인이거부감을느끼고있는건일면사실인것같다. 누군가헝가리가중동유럽국가들중에서가장먼저시장경제를받아들이고 EU에가입한것이모두다이 ' 구야쉬공산주의 ' 덕분이라고말한다면, 헝가리가제대로된공산주의는
흉내한번못내보고자본주의를받아들인뒤에도많은사람이공산주의시절을그리워하고그때몸에밴습관을떨치지못하는것도다이 ' 구야쉬공산주의 ' 때문이라고말할수있을것같다. 어찌되었던내입맛에잘맞는구야쉬를두그릇이나먹고메인을먹는데, 역시나돼지고기에감자다. 이쯤되면익숙해질만도하지만으휴, 생각만해도싫다. 곁들여나온와인한잔의풍미에음식의지겨움을떨쳐버린다. 그런데헝가리와인이생각보다꽤괜찮다. 가끔비싼프랑스와인을먹어본적이몇번있는데, 그렇게지출하느니보다이렇게캐쥬얼한와인을곁들여먹는것이훨씬나을듯싶다. 이식당에서는영화속에서보는것처럼식사도중 3명의할아버지급연주자들이나와서바이올린, 아코디언, 기타를치면서연주를했다. 한국관광객들이익숙한듯아리랑을비롯한몇곡을연주했는데, 웃기는것은팁을줄때까지계속연주해대는거다. 시끄러워서밥이코로넘어갈즈음김정남선생님이 10유로를줌으로써연주는마감이되었다. 식사후에는예의엄청달아보이는케이크를한조각씩주었는데, 결론적으로말하면한조각도손에대지못했다. 으 ~ 느끼해보여. 한국가서순대국한그릇말아먹고싶다. 저녁을먹고마지막일정을소화해보자. 부다페스트관광의꽃이라는다뉴브의야간유람선탑승이다. 어둑해지는저녁놀을배경으로시원한바람에머릿결을맡기고바라보는강변의야경은내망막깊숙이새겨져꽤오랜시간가슴속에자리잡게될것이다. 저마다카메라를들고강이편, 저편에펼쳐지는유럽역사의산흔적들을담아내기에바쁘다. 조금재미있었던것은여행사 T/C가어제타트라에서우리가먹인술덕택에속이가뜩이나좋지않았던데다가배까지타니까울렁울렁했던모양이다. 다뉴브의야경이구뭐구간에고개를꾸벅숙이며졸고있다. 배에서는연신음악이흘러나온다. 요한스트라우스의봄의왈츠. 내눈에저멀리고풍스런건물의회랑안에서수많은남녀가손을잡고 3박자의왈츠를추며무대를돌고있는모습이떠오른다. 문득떠오른생각은 참좋구나 라는마음뿐이다. 자칭클래식매니아인양하고있는나로서는정말행복한시간이었다. 붉게물들어가는석양을배경으로세체니다리밑을거슬러올라간다. 야경속의세체니는언덕위에서볼때와는또다른매력을준다. 한참을더올라가니이번에는아까차에서쓰윽보고온국회의사당건물이다. 국회의사당건물은궁전처럼화려한고딕양식을자랑하고있다. 건국 1000년을기념해 1884~1920년에지어졌다. 건물벽을다라헝가리역대통치자 88명의동상이세워져있다. 앞의광장에는헝가리의영웅인코슈트 (Kossuth) 와라코지 (Rakoczi) 의동상이세워져있다. 국회의사당발코내에서는헝가리공화국의성립을선포하기도했다. 안에는 691개의방이있다고한다. 중앙둥근돔의높이가 96미터인데헝가리가건국된 896년에맞춘높이라고한다. 역사가인존루카치의말에따르면마자르의중세양식과프랑스의르네상스양식, 웨스트민스터풍의신고딕양식을신바로크의설계도면위에절충하여결합했다는데이게뭔소린지머리가아프네. 날잡아다시한번미술사를정리해보아야겠다. 원래요즈음이수리기간이라전체적인아름다움을보기힘들다고했는데다행스럽게강쪽으로보이는대부분의수리는끝나고오른쪽부분만수리하고있어서이건물이지닌아름다움을충분히만끽할수있었다.
늦은시간도착한호텔은역시나부다페스트교외에위치해있었다. 그런데호텔옆에커다란테스코가위치해있었다. 뭐관광지에서는쓸데없이물건이비싼것을아는이상알뜰하게쇼핑해볼요량으로가보았는데, 우리나라이마트비슷해보였지만물건이다른관계로한번쓰윽훑어보았다. 아까낮에산토카지와인의가격을보니역시나훨씬싸다. 아내줄요량으로이번엔당도 6짜리로한병샀다. 아까마챠시교회옆의매점의반값밖에안되네. 흐! 역시알고도속는다니까.
제6일 (7월 22일 ) 오전에호텔조식을마치고 6번째하루가다시시작한다. 이젠여행이반이상지나서처음의설레임보다는조금은지쳐가는내자신을발견하지만다시발걸음을내딛는다. 무엇보다오늘은클래식음악의본고장비엔나로가는날이아니더냐. 이제짧았던헝가리의부다페스트를떠나오스트리아비엔나로출발이다. 여느때와마찬가지로 2시간내외로휴게소에서꼭쉰다. 이곳에는바람이많은지곳곳에풍력발전기기가서있다. 원래농업위주의산업에다가이렇듯친환경적인시설이갖추어져있으니더욱깨끗할수밖에없을듯싶다. 휴게소와 Marche( 마르쉐 ) 가붙어있다. 화장실이코인제로되어있어현지돈이없는우리로서는화장실에들어가지도못하고한참을전전긍긍하다가간신히환전해서화장실에갈수밖에없었다. 국가간여행은무척자유롭게되었지만경제적인문제는자국의이익과관련되어있어서아직도진행중임을느끼게된다. 저마다긴이동거리를버텨내는기술들이늘어서 PMP등에잔뜩넣어온영화면다큐멘터리를보면서지루한시간을흘리고들있었다. 빈까지가는긴시간동안여전히긴여행에지루할것만같다. 마침 TC가사준약초술과내가심심할때먹을자두술이두병있다. 이두가지술은이곳의특산품이라는데약초술의이름은 BECHEROVKA이다. 모호하게빈시간을견뎌내지못하는나의고약한습성때문에일찌감치약초술을꺼내어이준명선생과곽순종선생에게한잔씩권한다. 뭐 40도씩이나되는독한술이어서저마다인상을찌푸리지만심심치는않다. 앞자리에앉아서억지잠을청하고있는최영조선생을깨워한잔또강권한다. 어! 이거재미있네. 저마다한주당하는성격들이기에슬슬발동이걸리기시작했다. 종이와펜을꺼내사다리타기를시작했다. 걸리면한두잔씩먹는무지막지한게임이다. 가뜩이나심심하던차에뒷좌석에서큰웃음이터지기시작하자한두명씩게임에끼기시작이다. 조기성선생, 박일동주임, 조중석반장님에김종진교감선생님, 그리고 TC까지참여한거대한게임이되었다. 해본사람은알지만이것처럼재미있는게임도없다. 결국왁자지껄한웃음과재미속에두병이나되는술을다먹고도모자라서박일동주임이가져온소주팩몇개, 그리고박사민선생이희사한귀한깻잎통조림까지홀라당다먹고나니모두가붉그레한얼굴에여행의피곤함이싸악날아가버렸다. 이렇듯시간가는줄모르고즐겁게오다보니벌써 1시가넘었다. 빈에도착이다. 시내에위치한한인식당에서오래간만에불고기도시락으로배를채웠다. 오옷! 역시한식이최고라니까. 오스트리아의비엔나는로마제국의군영지가축조된이래 2천년가까운역사를지닌합스부르크왕가의 750년에걸친영광의도읍지였으며, 과거의화려한역사를보여주는박물관, 오페라극장대학, 등의웅장한건물을간직하고있다. 도나우 ( 헝가리에서는다뉴브강이라불림 ) 강연안에위치해있는비엔나는오스트리아수도로행정, 금융, 상업의중심지이다. 총면적 414Km에인구는 175만명이살고있으며유럽에서가장아름다운도시로꼽히고있는음악도시이기도하다. 구시가지를둘러싸고있는황상도로를따라관광명소들이자리하고있으며관광지가시내중심에모여있어거의도보로명소를둘러볼수있다. 오늘날뉴욕, 제네바에버금하는제3의국제연합도시로탈바꿈하고있다.
첫번째코스는쉔부른 (Schonbrunn Brunnen) 궁전이다. 오스트리아비엔나시내에있는 ' 쉔부른궁전 ' 은합스부르크왕가의여름궁전으로유럽에서가장아름다운궁전의하나로소문나있다. 프랑스의베르사이유궁전과비견될정도로멋진궁전이다. 1569년막시밀리안 2세가사냥터로쓰기위해숲속동물원과정원을만들었는데, 여기에서 1619년마티아스황제가사냥을하다가 ' 맑고시원한샘 ' 을발견한데서이름이유래되었다. ' 쉔부른 ' 이란 ' 아름다운샘 ' 이란뜻이란다. 1683년터키군에의해파괴되었으나이를계기로본격적인개보수가진행되어 1713년에완성되었다. 쉔부른궁전의주인마리아테레지아는대단한권력의소유자였다. 남편이황제였지만왕가의혈통은자기였으니말이다. 그녀는욕망도컸고사치도넘쳤다. 16명의자녀를두었는데자식들을정략결혼시켜합스부르크왕가의세력을확장하고역사상가장넓은식민지를보유하였다. 대표적정략결혼의희생자는루이 16세에게시집가서프랑스혁명으로단두대에서최후를마친마리앙투아네트가될것이다. 권력에대한탐욕은수많은정략을산출하며한세월을화려하게누리지만그과정에언제나비극을잉태하고있다는것을우리는역사에서확인한다. 우선은궁전옆에인공적으로조성된예쁜정원에서잠깐구경을하고궁전으로들어갔다. 가이드가설명하는사이에몰래커피한잔사서급하게먹다가입천장을다데일뻔했다. 애들도그렇지만딴짓하면안된다는소중한교훈을다시금깨달으며궁전을구경한다. 쉔부른궁전은 1441개의방으로이루어졌다고한다. 그중관광객에게공개되는방은 40 여개인데우린그중에서도열몇개쯤구경했을까. 따라다니며설명듣느라바빴다. 궁실의화려함못지않게음험하고비극적인냄새가세월흐른지금에도실내에퀴퀴했다. 실내에서는사진도못찍게한다. 부엌만도 130여개라하며, 당시이궁내식구만도 1,000여명이었다고한다. 궁정건물을지나면약 1.7km에달하는바로크양식의왕궁정원이큰자랑거리이다. 정원끝언덕위의글로리에테 ( 현재카페로이용 ), 금은장식의화려한궁정마차박물관, 아르누보양식의온실및세계에서가장오래된동물원등이한층왕궁의분위기와멋을더해준다. 왕궁정원은너무나넓고커서그광대한스케일에입이떠억벌어질지경이다. 과거합스부르크왕가의파워가얼마나대단했는지한눈에알아볼수있을지경이다. 너른앞뜰에기분이들뜬우리들은그동안연습했던점핑샷과연출샷을찍으며따스한햇살을충분히즐길수있었다. 유명한관광지이다보니관광객들도많고해서최영조선생이여기까지온추억으로삼으려지나가던젊은여학생들과기념샷을막찍으려하던찰나, 어머! 영조아냐? 하는낯익은한국말이들리는것이아닌가? 누군가했더니최영조선생의대학동기였다. 게다가최선생와이프친구란다. 으이구, 세상참좁다니까. 다정하게팔짱끼고기념샷한방날린뒤헤어졌다. 두번째코스는빈중앙묘지이다. 세계적인음악가들이영면을취하고있어 음악가의모지 라고불리우는빈중앙묘지는비엔나시당국이 1894년에시내에흩어져있는다섯곳의묘지를한데모아조상한것이다. 240헥타아르나되는광대한녹지안에약 35만기의묘소, 300만명의영혼이고이잠들
어있다. 악성들이영면하고있는 32A 구역은정문을지나가로수길을 200미터가량들어가서왼쪽에있는데베토벤, 슈베르트, 요한슈트라우스, 브람스등의묘가있고중앙에는모차르트기념비가있다. 묘비에는천사를그린초상들이갖가지악기들을연주하는모습들이새겨져있었다. 언제나사람들의발길이항상끊이지않는베토벤의무덤을보면마치그비석도베토벤의음악과같이강한듯하면서심플하게꾸며져있다. 언제나싱싱한꽃으로장식된그의묘에는그를사랑하는음악애호가들, 그를닮고픈후세의음악가들그리고빈을관광했다음악가의묘지를들려보는사람들로인해항상싱싱한꽃이바쳐져있다베토벤은독일본에서태어나 1792년 23세때하이든을따라빈으로옮겨와 1827년작고할때까지이곳에서살았다. 빈북동쪽하일리겐슈타트부근에는그가창작활동을하면서기거하던집대여섯채와거닐던산책로, 시냇가가그대로남아있다. 슈베르트묘를살펴보자. 비엔나에서태어나비엔나에서살다비엔나에서죽은슈베르트는평소베토벤을무척좋아하며존경했다. 살면서감히거장에게말도붙여보지못한그였다. 베토벤을존경한그는베토벤이죽자베토벤의관을직접무덤까지옮기는걸도왔다. 당시슈베르트는이미병을앓고있었다. 그런뒤 1년후슈베르트는죽었는데그의죽을때소원은베토벤옆에묻히는것이었다. 그의소원대로음악가의묘지에그는베토벤옆에묻혀있다. 오스트리아는왈츠의나라이기도하다. 많은왈츠음악을작곡한요한스트라우스의묘비다. 그의화려하고경쾌한왈츠와같이묘비도화려하고왈츠가느껴지는듯한느낌의묘비다. 요한스트라우스는아버지인 1세와아들인 2세두명이있는데, 우리가잘아는봄의왈츠는 2세의작품이고, 매해초에공연되는라데츠키행진곡은아버지인 1세의작품이다. 모차르트의죽음은안타까움을안고있다. 그의주검은어디있는지확인되지않고있어이곳음악가의묘지에있는모차르트의묘는빈묘다. 많은장르의음악을작곡하고살아생전에빈시민들의사랑을받던모차르트였건만그의주검은알수가없어단지그의빈묘만있을뿐이다. 돈이없어서관도사용하지못하고 3급장례를치른모차르트는일반인들과같이공동묘혈속에묻혔다. 그의장례식날에는심한비바람과폭우가쏟아져사람들은그의관을잠시놓고비가멈추기를기다렸으나비는쉽게그치지않았다한다. 장례식장에는아내인콘스탄쯔도없이 3명이참석한가운데치루어졌는데, 당시관습으론성밖에나가면해가지기전까지반드시성안으로들어와야했다. 모차르트의장례는해가질무렵에이루어졌기때문에시신을실은마차는인부들만태우고무덤으로달려갔고어디에묻었는지표식도없이형편없게사라져갔다. 모짜르트묘위의여인의조각상이마치비어있는모짜르트의묘와때론개혁적이기도했던그의인생에대해한없는존경과받듬이느껴지는모습이다. 우리일행은저마다유명한음악가의무덤곁에서멋진포즈를취하곤했지만그들의음악을준비해오지못한관계로내마음속의감흥은그렇게크지못했다. 어서집에돌아가내사랑하는음반들을틀수있기를기대해본다. 세번째코스는성슈테판대성당 (Stephansdom) 이다. 오스트리아최대의고딕양식건물로서, 1147년로마네스크양식으로건설을시작하였고, 1258년빈을휩쓸었던대화재로전소되었다가 1263년보헤미아왕에의해재건되었다. 1359년에합스부르크왕가가로마네스크양식의성당을헐어버리고고딕양식으로개축하
였고, 1683년에는터키군, 1945년에는독일군에의해많이파괴되었으나, 전쟁이끝난후복구를시작하여대부분옛모습을찾았다. 성당이름은그리스도교역사상최초의순교자로기록된성인 ( 聖人 ) 슈테판에서딴것이다. 옛건물이가득들어찬구시가지의중심부에있다. 비엔나의혼 ( 魂 ) 이라고부를정도로비엔나의상징으로꼽힌다. 공사기간이 65년이나걸렸으며건물의길이가 107m, 천정높이가 39m에이르는거대한사원이다. 높이 137m에달하는첨탑과 25만개의청색과금색벽돌로만든화려한모자이크지붕이눈에띈다. 보헤미아왕이세웠던 ' 거인의문 ' 과 ' 이교도의탑 ' 도남아있다. 건물내부에는 16세기의조각가안톤필그람이만든석조부조의설교대와 15세기말에만들어진프리드리히 3세의대리석석관이있다. 그밖에마리아와예수상이있고, 스테인드글라스장식이매우아름답다. 지하에는 1450년에만든지하유골안치소카타콤이있는데, 페스트로죽은사람의유골약 2,000구와합스부르크왕가황제들의유해가운데심장등의내장을담은항아리및백골이쌓여있다. 모차르트의결혼식 (1782) 과장례식 (1791) 이치러진곳이며, 비엔나시민들은매년 12월 31일슈테판대성당광장에모여새해를맞는다. 중앙탑을중심으로좁다란나선형층계를오르면아름다운비엔나시내전경이한눈에쏘옥들어온다는데우리는불행하게도올라가지못했다. 네번째코스로게른트너거리 (karntnerstrasse) 에들어섰다. 오스트리아의가이드는굉장히멋진남자였는데, 바리톤의굵은목소리를가진터라성악을전공하다가눌러앉지않았을까하는상상이갈정도였다. 하지만여전히가이드의직분 (?) 을잊지않고, 잠깐면세샵에갔었는데, 글쎄이지역의특산품이아닌말그대로명품들을파는샵에데려간거다. 여기를들리지않았으면슈테판성당에서게른트너거리를잊는멋진비엔나의거리를충분히즐길수있었을텐데말이다. 어쨌든우리는거리를빙빙돌다가간신히게른트너거리로들어갈수있었다. 늦게도착한데다가비까지추적추적내려서얇은옷만걸친나에게는정말고역이었다. 몇일을추위에떨다가비까지맞으려니도저히버틸수없어서, 일행들몰래근처옷가게에가서두툼한긴팔티셔츠를사서겹쳐입으니오홋살것같다. 조기성선생은추워서닭살이돋으면서도연신춥지않다고버티는구나. 게른트너거리는비엔나최대의중심가답게거리양쪽으로이름말대면다알만한명품샵들이꽉들어차있다. 수많은예술가들이그토록가고싶어했었던비엔나의예술적감성이시내곳곳에서드러나는듯했다. 시내의한중심이라는슈테판성당까지가는게른트너거리는그러한빈사람들이도시를어떻게보존하고또상업적으로이용하는가를절실히느끼게해준다. 건물의외관을해치지않지만멋스럽게화려한상점들에서역사와전통을수호하며부를이뤄가는그들의삶을읽어낼수있었다. 우리나라명동이나강남쪽에덕지적지붙어있는간판과특색없는건물들을생각하며내가서울시장이라면싸악갈아엎어서깔끔하게정리할텐데하는멋쩍은상상을해본다. 여전히비는추적추적내리는데거리중심가에모두모인우리는약 30분정도개인시간을갖기로했다. 뭐딱히쇼핑할것도없는지라뭘할까생각하는데, 집에서나만기다리고있는우리마눌님생각이나서이준명선생과함께스왈로프스키매장으로들어섰다. 워낙이곳이유리공예로유명한곳이라목걸이나하나사줄까하고들어왔는데, 먼지하나없이
깔끔하고고급스런매장분위기덕택에엄청비싼줄알았는데, 뭐적당한가격이어서번쩍거리는크리스탈목걸이를하나사서포장했다. 후후이선물을받고기뻐할생각에기분이좋아졌다. 다른팀들은비엔나의명물모자르트초컬릿을사느라분주했는데나야뭐단것을별로좋아하지않는터라하나도사지않았다. 바빴던오늘도마감하고우리는비엔나에서아주유명하다는저녁을먹기위해다시금차에올랐다. 차는언덕을가로지르는도로옆에포도밭과음식점이잔뜩줄지어있는곳으로올라갔고, 우리는예쁜정원에그림같은실내로되어있는전통식당으로들어갔다. 이식당의메뉴역시우리가늘먹던것과같이감자에돼지고기였지만, 이곳언덕에서직접재배하여만든백포도주가반주로나왔던것이특색이었다. 상큼하고, 달콤한맛이어우러져서늘프랑스와인에만경도되어있는우리에게오스트리아와인에대한좋은인식을갖게해주었다. 이날은특히나류영진수녀님축일이어서더욱의미가있었다. 포도주가한순배씩돌고축하노래에큰박수까지더해져, 마치지역축제에온듯한분위기가연출되었다. 우리는장난삼아수녀님께원샷을외쳤는데, 이게웬일인가? 정말로한번에그큰잔을다드시는것이아닌가? 우리는우와하며환호성을외쳤는데, 알고보니, 그러면그렇지맹물이었단다. 어쨌건지금껏먹었던식당과는분위기가다르게가족적인느낌을받으며편안한시간을보낼수있었다. 식사후버스는다시언덕맨꼭대기로올라갔고, 우리가머물호텔은꽤오래된듯한분위기의작은호텔이었다. 이호텔이다른호텔과달랐던것은방마다굉장히높은천장을갖고있어서, 어떤방은 2층으로되어있는곳도있었다. 마치중세의뾰족한성안에서잠을자는듯한분위기였다. 더구나각층별로연결된오래된엘리베이터가있어서이준명선생과몰래타보기도했다. 오전에했었던버스에서의재미있는게임덕택에우리젊은일행들은다시금 2층으로된방에모여잔뜩사가지고왔던맥주와지역특산술등으로즐거운게임을잔뜩하며하루의피로를씻으며잠이들었다. 높다란천장에서잠이드니꿈에중세의성주로다시태어날것만같다.
7일째 (7월 23일 ) 호텔에서 ( 다음날일어나니 ) 언덕정상에있는호텔뒤편이모두포도밭이다. 푸른빛으로넓게언덕아래까지열지어펼쳐진포도밭에서이른아침의싱그러움을읽는다. 오늘도이처럼파릇파릇한기분으로출발하자. 오전을내쳐달려짤쯔부르크로이동했다. 이동하는차속에서는사운드오브뮤직영화를상영해주는데, 창밖의그림같은풍경과오버랩되어마음이들떠온다. 푸른들판에서아이들과함께노래부르는마리아의모습에쏙빠져서목적지에도착했다. 짤즈부르크 (Salzburg) 에도착이다. 독일어로 소금의성 ' 이란뜻의짤츠부르크는옛날이지방에서소금이많이생산되었다는데서유래되었다. 오스트리아의자랑이자전세계음악애호가들이사랑하는모차르트의고향이며영화 사운드오브뮤직 ' 의배경으로도유명하다. 미라벨궁전이나짤츠부르크성, 대성당등아름다운건축물들이잘보존되어있어관광도시로서도충분히매력적이다. 1996년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선정된아기자기하고예쁜도시짤츠부르크에서또새로운일정을시작한다. 이곳에서도우선현지가이드와만났다. 이곳의유일한한인가이드라는데작은키의아줌마다. 흰머리를풀어헤치며조금은쇳소리나는어조로급하게설명하는데별로호감가는스타일이아니다. 우선시내에있는작은한식집에서점심을먹었다. 집주인의딸인듯한자매둘이서서빙을하는데건너편식탁에서한식을먹는백안의부부와아이들을보니묘한감흥이든다. 길밖도로의가운데는트램이지내가는길이있다. 필요한전기줄은거리양옆에있는집들에못을박아서 2층쯤되는높이에모두연결해두었다. 우리나라로치면전봇대에얼기설기매달려있는전기줄과유선방송줄비슷하다. 도시대부분의건물이 5층이하로되어있고, 함부로증축이나개축을하지않기때문에이런시설이가능하리라생각해본다.
첫코스는미라벨정원 (Mirabell garten) 이다. 잘츠부르크신시가지의미라벨궁전앞에펼쳐져있는정원으로, 중앙역에서라이너슈트라세를따라조금만내려오면오른쪽에있다. 미라벨궁전은 1606년볼프디트리히대주교가사랑하는여인살로메를위해지었으며, 당시는알트나우라고불렀다. 후임자인마르쿠스시티쿠스대주교가지금의이름으로바꾸었다. 정원은 1690년바로크건축의대가인요한피셔폰에를라흐 (Johann Fischer von Erlach) 가조성하였고, 18세기에건축가요한루카스폰힐데브란트 (Johann Lukas von Hildebrandt) 가개조하였으나 1818년화재로파괴된후지금의모습으로복원하였다. 예전에는궁전에속해있어일반인들이들어갈수없었지만지금은완전개방하고있다. 전체적인조화를중시하여조성하였으며, 분수와연못, 대리석조각물과많은꽃들로잘장식되어있다. 중앙분수주위에는 1690년모스트 (Most) 가그리스신화속영웅을조각한작품이늘어서있고그옆에는유럽의많은바로크예술품들을전시해놓은바로크박물관이있다. 정원서쪽에는 1704~1718년에만든울타리로주위를두른극장이있고, 북쪽문앞에는정교한청동조각으로꾸민패가수스분수가있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 (Sound of Music) 에서여주인공마리아가아이들과 ' 도레미송 ' 을불렀던곳으로더욱널리알려졌으며, 멀리보이는호헨잘츠부르크성 ( 城 ) 의모습이매우아름답다. 미라벨궁전은규모는작아도콘서트가많이열리는곳으로유명한데, 볼프강아마데우스모차르트가궁전내대리석홀에서대주교를위해연주를하였으며, 지금도실내악연주회가자주열린다. 또세계에서가장낭만적이고아름다운결혼식이열리는식장으로도인기있는데, 결혼식이끝나면꽃장식마차를타고시내를한바퀴돈다. 미라벨정원맞은편의미라벨광장에는교외로나가는많은관광버스들이여행자들을기다리고있다.
이곳을지나짤쯔부르크에서출생한카라얀이살았던집에잠시들렀다. 이집바로옆에는카라얀광장이있다. 이곳은묀히스부르크산 ( 山 ) 아래페스티발하우스앞에있는광장이다. 페스티발하우스에서열리는잘츠부르크음악제를창설한헤르베르트폰카라얀에서이름을따왔다. 옛날에말을씻기고물을먹이던못인페어데슈베메 (Pferdesschwemme; horse pond) 가말조각으로꾸며져있다. 옆에는묀히스부르크산을파서만든터널의입구인지그문트문 (Siegmund's Gate) 이있다. 나중에알았지만이곳이클래식공연으로그렇게유명한곳이란다. 여행에지쳐가이드설명을대충들은게좀후회가된다. 이곳에그유명한페스트슈필하우스가있다. 다음코스로게트라이데거리 (Getreidegasse) 로이동했다. 이거리는잘츠부르크시내중심인슈타츠 (Staats) 다리를지나동서로뻗어있다. 도시의상징인호헨잘츠부르크성 ( 城 ) 을향하여아름다운쇼핑가를이루고있으며, 잘츠부르크의문화적특성과매력이함축되어있다. 거리양쪽으로보석가게, 꽃집, 옷가게등과레스토랑, 커피숍들이즐비하게들어서있으며 음악의신동 ( 神童 ) 볼프강아마데우스모차르트생가 ( 生家 ) 와 15세기에건축된구시청, 대성당과레지덴츠성, 미카엘교회, 프란치스카너교회, 화랑, 박물관등이늘어서있다. 건물마다가게의특징을철에표현한예술적인수공간판들이많이달려있어독특하고아름다운분위기를만들어내고있다. 이곳을세계에서가장아름다운쇼핑거리로알려지게만든철제간판들은문맹이많은중세시대에무슨가게인지를알리려고하는데서시작되었는데, 200년이상이나된것도있으며거리분위기에맞추어현대의패스트푸드상점들도철제간판을매달아놓은것이재미있다. 수공간판만전문적으로수리하는사람도있다고한다. 여기에서재미있었던것은바로맥도날드의간판이다. 원래맥도날드간판은전세계적으로모두통일된모습이다. 그런데여기서그간판을허가해주지않으니중세식으로예쁘게재디자인해서만들수밖에없었단다. 맥도날드간판중가장유니크한것이리라. 이거리한쪽에모차르트생가가있다. 이곳은 1756년 1월 27일에 음악의신동 ( 神童 ) 볼프강아마데우스모차르트가태어난집으로, 잘츠부르크에서가장번화한게트라이데거리 (Getreidegasse) 9번지에있다. 모차르트는 12세기무렵지어진이건물 3층에서태어나 17세이던 1773년까지살았다. 1917년국제모차르테움 (Mozarteum) 협회에서인수한후모차르트기념관으로사용중이며, 전시품들을통해당시중산층의전형적인생활모습을엿볼수있다. 잘츠부르크에서가장유명한명소로, 1층에는모차르트가사용했던침대, 피아노, 바이올린, 자필악보, 서신등이있고, 2층에는유명한오페라 마술피리 를초연할당시사용했던것과같은소품들이전시되어있다. 3층과 4층에서는모차르트의가족들과잘츠부르크에서생활하던당시의모습을각각소개하고있다. 건물안에는모차르트 CD와각종기념품을파는기념품판매점과카페가있다. 관람시간은 9~6월에는오전 9시부터오후 5시 30 분까지, 7~8월에는오전 9시부터오후 6시 30분까지이다. 모차르트가족이이곳을떠나이사해살았던노란집이미라벨정원근처에있으며모차르트기념관으로사용되고있다. 모차르트생가뒤에는대학광장과대학성당이있다. 대학광장에서는농부들이직접재배한꽃, 약초, 채소, 과일, 직접구운빵과소시지, 햄, 베이컨등이거래되는그린시장이열린다. 이곳에서바라본옛건물들에는숫자가씌여져있는데바로건물들이세워진날짜란다. 기원후 ( 서기 ) 를라틴어로 Anno Domini 라고표기한것이인상깊었다. 이곳은우리나라시장같은곳으로과일야채등을산더미처럼놓고팔고있고, 커다란크
기의프릿젤같은과자와모차르트초컬릿등을파는가게가많이있었다. 누군가이곳자두와살구를몇개사서나누어먹었는데, 크기도클뿐더러당도가높아서몇개더사서먹을걸하는아쉬움이남았다. 다음코스는호헨잘츠부르크성 [Festung Hohensalzburg] 이다. 호헨이란요새란뜻이란다.
이요새는 1077년게브하르트대주교가창건한웅장한중세고성 ( 古城 ) 이다. 높이는 120m이며, 구시가지남쪽의묀히스베르크언덕에우뚝서있어도시어디에서나잘보인다. 잘츠부르크의상징으로일컬어진다. 11세기후반로마교황과독일황제가서임권을둘러싸고대립이심해지고있을즈음, 교황측의게브하르트대주교가남부독일제후가공격해올것에대비하여건설하였으며, 가톨릭에관련된잘츠부르크의여러성과교회가운데에서도중요한역사적의미를지닌다. 창건이후 17세기까지여러차례에걸쳐확장 개축되었으며, 중부유럽에서파손되지않고보존된성채중최대규모이다. 보존상태가양호하고성의테라스에서내려다보는잘츠부르크시내경관이아름답다. 성내부에는대주교의거실을비롯해옛날무기와고문기구, 공예품등을전시하고있는라이너박물관 (Rainer Musseum) 이있고중세에사용하던대포들이그대로남아있다. 매년 5월에는성안에있는 3개콘서트홀에서실내악콘서트행사가열리는데, 그곳에는 1500년에만든난로가있고프란츠요제프하이든과볼프강아마데우스모차르트가사용하였다는수동식파이프오르간이보존되어있다. 작은케이블카를타고올라가는요새까지의경치가기가막히다. 비좁은실내에서왁자지껄웃으며손쉽게올라가려니즐거움이배가된다. 요새위에서는너른들판에멋진집들과호수가점점이박혀있는데그중에사운드오브뮤직의배경이된집이있다. 직접들어가보지는못하지만멀리서나마바라볼수있어서다행이다. 다음번에온다면이번에못본코스만골라서가보고싶다. 내려올때도역시케이블카를타고내려오는호사를누렸다. 관광차로이동중에도옛시가지의모습을볼수있었는데, 우연히지나친곳이사운드오브뮤직의대령이쥴리앤드류tm 와결혼식을올렸던장소로유명한몬드시교회당이었다. 여기도가이드가설명을했을텐데딴짓하느라못들은것이아쉽다. 다음여행에는비디오로풍광과설명을꼭찍으리라. 자이제는짤쯔컴머굿 (Salzkammergut) 으로이동이다. 오전에 Sound of Music 1부를보면서유럽자연의아름다운풍광을즐기며여기까지왔는데, 정말로이영화의배경이된곳으로가본다니마음이설레인다. 영화 사운드오브뮤직 ' 의배경이되어준짤츠컴머굿은 2,000m 급의알프스산들과 70 여개이상의호수로이루어진아기자기하고아담한도시곳곳에서영화속흔적을찾는재미는상상보다더유쾌하다. 차창밖으로지나기는했지만아름다운볼프강호수인근의초원지대를가기도하는데마리아가수도원을빠져나와노래를부르는오프닝신의배경이기도하다.
짤쯔캄머굿은오스트리아의스위스라고일컬을만큼때묻지않은자연환경을자랑하는곳이다. 이곳의하이라이트는역시할슈타트 (Hallstatt) 이다. 4,500 년의빛나는역사를지닌할슈타트는호수로둘러싸인평화롭고아름다운마을로 1997 년에는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선정되기도했다. 케이블카를타고세계에서가장오래된소금광산 (Salt Mine) 을둘러보는것은할슈타트최고의경험이며간단한보안검사를거쳐입장한후에는옛광부의유니폼으로갈아입은후열차를타고가이드의설명을들으며 10km 길이의광산을둘러본단다. 하지만우리는바쁜일정덕택에소금광산은둘러보지못했다. 으아쉬워 ~ 도착하자마자우리는배를타고할슈타트로이동하기위해서무척서두렀다. 키작고급한현지가이드덕택에카우보이가소몰듯이우르르서둘러호수근처선착장에도착했다. 막간을이용해사진한컷찍으려니벌써우리를태우고갈오렌지색배가들어오기시작한다. 냉큼배에올라타고할슈테터호수를가로질러나아갔다. 할슈테터호수 [Lake Hallstätter] 의면적은 13.5km2, 수심은 125m, 크기는길이 5.9km, 너비 2.3km이다. 아름다운휴양지역인짤츠캄머굿에있는산악호수로다흐슈타인산 (Dachstein) 북쪽기슭, 잘츠부르크남동쪽에자리잡고있다. 트라운강 (Traun River) 에서흘러나온물이모여호수를이루며다시트라운강으로흘러나간다. 경사가가파르고숲이무성한경사면으로둘러싸여피오르드지형과같은느낌을선사한다. 배가선착장을떠나호수를가로질러올라가자, 우리는그야말로탄성을지르며눈을휘둥그레뜬채로한마디말도못한다. 알프스산자락같은경치에호수의운치까지더해져그야말로어디라도사진을찍으면그대로엽서가되는풍경들이끝없이펼쳐져있었다. 게다가선장이틀어준음악은사운드오브뮤직의음악이아니더냐. 쥴리앤드류스가긴치마를나부끼며푸른들녘을뛰노는모습이저건너강변위로펼쳐지는듯하다. 안개비가흩날리는호숫가의장관에저마다사진찍기에여념이없구나. 그런데뭔가허전한데. 아뿔사, 이제야사람들이알아차렸네. 글쎄김용옥선생님이배에없는것이아닌가? 부랴부랴이유를알아본즉슨, 현지가이드가시간이없다고우리를잡아채는통에우리도허겁지겁배에올라탔고, TC 역시인원체크를하지않은것이최대의실수였다. 나중에알아본즉슨김용옥선생님은차를내린곳근처의성당에잠깐들렀었는데, 그러다보니일행보다제일늦게선착장에도착한것이었다. 떠나는배위의우리를발견하고소리쳐불러보았지만이미거리가멀고, 다른데정신이팔린우리들도알아차리지못했던것이다. 만일아이들을인솔하고떠난여행이었다면최악의위기상황이될수도있었을것이다. 하지만배는이미중간이상을와버렸고, 현지가이드와공미삼수녀님께서도착즉시다시돌아가는배를타고김용옥선생님을찾기로하였다. 할슈타트에도착하자마자이두분은다시돌아가고우리는걱정스런마음으로식당에들어섰다. 메뉴야늘그렇듯이돼지고기삶은돈가스비슷한것에스프이다. 뭐아오리사과비슷한것하나씩더준것이조금색달랐달까? 그제야현지가이드에게서연락이왔다. 김용옥선생님을무사히찾았다고말이다. 어휴, 정말큰일날뻔했네. 다행히선생께서당황하지않고한곳에계셔서쉽게찾을수있었기망정이지정말간이서늘한시간이었다. TC는너무나긴장이되었는지밥도먹지못하고얼굴이하얗게질려있다. 으이그, 그러니까여행의기본은첫째도인원체크, 둘째도떨어진사람없나살펴보기라니까. 식사를마치고이번엔미리와서기다린우리버스를타고다시선착장을들러김용옥선생님과만날수있었다. 지치고긴장했을선생님이버스에올라타자우리는모두박수를치면서위로를했다. 많이힘드셨으리라생각된다.
짤쯔부르크에다시도착해서호텔에짐을풀었다. 이제하루만남았다고생각하니조금은위안이된다. 으아! 한국가고싶다. 순대국에밥말아먹었으면원이없겠구만. 현지에서마지막밤인관계로호텔바에우리전인원이다모여서시원한생맥주한잔씩하며그간있었던이야기꽃을피웠다. 꽤빡빡했던일정탓에저마다힘들었는지모두들맥주잔이쉽게도비워간다. 10시가넘어이준명선생과같은방을쓰는나는객실로들어갔지만나머지주당들은어제끝내지못한술자리를계속했단다. 한방에모여술먹기게임등으로여행의노독을푼모양인데, 나중에알았지만 80도짜리술한병을나누어먹다가저마다고생을한모양이다. 술냄새가무슨아크릴자를때나는냄새라나? 술자리라면마다않는나이지만오늘만은너무피곤해서그냥쓰러져잤는데, 천만다행이라니까. 다음날아침에속들을부여잡는젊은일행들을향해쿠쿠쿠즐거운웃음을보내주리라. 룰룰루 ~
8 일째 (7 월 24 일 ) 현지에서의마지막날이다. 원래는간단한시내관광을하고체코로들어가귀국하려했으나교장수녀님의권유로오전일정을좀더추가해서진행하였다. 짤쯔부르크를떠나체코로들어선우리는세계문화유산으로지정된또하나의명승지인체스키크롬로프 (Cesky Krumlov) 에도착했다. 체코공화국의남동쪽에자리한중세의성도시인 Cesky Krumlov는인구약 1만5000명의작은도시다. 체스케부제요비체에서남쪽으로 25km 떨어져있으며불타바강변에자리하고있는데, 이강은남쪽으로보헤미아, 오스트리아, 바바리아를서로분리시키는슈마바 (Sumava) 산아래에서 S자형으로흐르고있다. 13세기의한지주가이곳에성을건설하면서이도시의역사도시작됐는데, 이미 700년의역사가흘렀으며중세그대로의모습으로남겨져있다. 붉은기와지붕의중세적인건물들과중심에우뚝솟아있는고딕양식의성, 바로크와르네상스등중세의미술양식이섞인정원들등이그것이다. 이도시가가장번성했던때는 14~17세기초까지의기간이며, 그후 18세기에슈바르젠베르그 (Schwarzenberg) 의소유를마지막으로공산정권하에도시가속하게된다. 성아래로구시가지가발달해있는데, 지금까지도이도시의중심으로각종상점과박물관등이늘어서있으며지금까지도발전을계속하고있다. 또한이곳은 1992년에프라하, 성요한네포묵순례교회, 쿠트나호라, 호란비체등과함께보헤미아땅에서세계문화유산으로지정돼있다.
체스키크롬로프에서도비가추적추적내리는구나. 우리가동유럽을떠나는것을슬퍼하는건가? 블타바강의한지류에걸쳐있는다리를건너니이곳역시중세의모습을그대로간직하고있는오래된마을이나타난다. 구불구불한길양쪽에는지역의공예품과유럽의정취를간직한카페들이가득하다. 마을한복판에있는광장옆조그만골목안에점심을먹을식당이위치해있다. 실내로들어서니마치바이킹들이모여서건배를외칠것만같은분위기를가지고있다. 중세의무기며, 농기구등이운치있게장식되어있고, 한쪽벽난로위에는커다란돼지고기들이지글지글익고있다. 지금껏먹은돼지고기중에서여기서먹은것이가장맛있었던것같다. 식사를마치고체스키크롬로프안에서한시간가량자유시간이주어져오래간만에편안한마음으로이곳저곳을둘러볼수있었다. 마지막날이니만큼가족들에게무언가선물할것이없나살펴보니목공예점이몇군데눈에뜨인다. 자동차며, 기차등속을원목으로아주부드럽고예쁘게깍아조립한것을팔고있었다. 유난히트럭등속의자동차장난감을좋아하는울아들을위해원목으로만든포크레인장난감을하나구입하였다. 반짝거리는눈망울로신기하게바라볼아들을생각하니가슴한가득뿌듯해진다. 그래도시간이남아블타바강바로옆에있는작은카페에앉아맥주한잔을기울인다. 카페가모이기로한장소바로옆에있었기때문에하나둘씩우리주변에모여이야기꽃을피우는구나. 5시까지는늦지않게공항에도착해야하는데, 버스가신나게달려다행히생각보다일찍공항에들어갈수있었다. 그동안우리를안전하게태워준미스터로만에게작별하고출국수속을했는데, 생각보다훨씬간단히빠르게들어갈수있었다. 시간도남아서면세점일식식당에서일식라면을시켜먹었는데, 역시나정말맛이없더군. 입맛만버린듯싶다. 출국직전쇼핑의유혹을떨쳐버리지못하고, 아버지드릴체코약초술한병을더샀다. 오래간만에대한항공에올라타그간못본한국신문도보고, 한국사람들얼굴도실컷볼수있어서한결마음이안정된다. 다만올때 11시간반정도걸리는비행기의지루함때문에고생했는데갈때는 9시간좀더걸린다니안심이다. 하지만실제로는거의 11시간이상걸린것같다. 푹자면서인천까지가리라생각한것과는달리, 잠이오지않는구나. 꿈같았던여정을뒤로한채다시현실세계로돌아온다는부담감때문일까? 아니면편안한내나라로돌아간다는기대감때문일까. 시계의바늘이움직이는것만응시한채좁은자리에서몸을뒤척이다보니결국도착이다. 출발할때가졌던결심대로배움과감동중어느것하나라도가슴깊이채울수있었는지는모르지만여느여행이그렇듯이나도모르는새에조금씩내영혼을살찌우는소중한시간이되었으리라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