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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2 월 1 1일에 모 스 크 바 에 서 서명된 북 태 평양 소하 성어족자 원보존협약 (이하 협약 이라 한다) 제8조 1항에는 북태평양소하성어류위원회 (이하 위원회 라 한다)를 설립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제8조 16항에는 위원회가 을 채택해야 한다고 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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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조선후기 金海 梁山 蘆田지대의 노전소유와 경영 박준성* Ⅰ. 머리말 Ⅱ. 궁방의 노전 소유구조와 관리 1. 김해 양산 노전지대의 특성 2. 궁방의 노전 소유와 지대 3. 궁방 절수지의 소유구조 4. 궁방 노전의 관리와 거납 Ⅲ. 노전주들의 존재와 갈대 이용 1. 노전 소유 방식 2. 노전 소유 규모와 노전주 신분 3. 갈대 이용과 노전 경영 Ⅳ. 맺 음 말 부록 자료 : 김해 양산 전매매문기 Ⅰ. 머 리 말 상업적 농업과 토지 집적을 통한 독점은 조선후기 사회 변동의 토대를 이루는 핵 심되는 문제이다. 궁방, 아문, 양반관료, 토호, 요호부민들이 토지를 독점함에 따라 많 은 농민들은 지주의 토지를 얻어 부치거나, 품을 팔아 생활을 하였고, 살던 곳을 떠나 떠돌이 신세가 되었다. 그런 한편 생산력 발전과 함께 상업적 농업, 수공업, 상업활동 이 활발해지면서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고 있었다. 상업적 농업이나 토지 집적과 관련하여 蘆田(갈대밭)은 16세기 이래 주요한 관심의 대상지였다. 노전을 경영하는데 특별히 많은 노동력을 들이지 않고도 갈대를 베어 여 러모로 이용하고, 개간하여 논밭을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업적 농업과 관련하여 일찍부터 갈대 이용의 중요성이 지적되었고, 노전의 개간 과 소유문제가 일부 검토되었다.1) 그러나 노전의 소유 방식과 주체, 갈대의 이용, 노 전이 소수에 독점되는 과정에 대한 구체적 분석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으며, 대상 지 역도 황해도에 한정되었다. * 成均館大學校 講師 1) 다음 논문들이 갈대를 이용한 상업적 농업과 노전의 개간 소유문제에 대하여 관심을 둔 것이다. 金容燮, 朝鮮後期의 經營型 富農과 商業的農業 ( 朝鮮後期農業史硏究 1, 1969 수록). 李景植, 17 世紀 農地開墾과 地主制의 展開 ( 韓國史研究 9, 1972). 宋讚燮, 17 18세기 신전개간의 확대와 경영형태 ( 韓國史論 12, 1984). 都珍淳, 19세기 宮庄土에서의 中畓主와 抗租ー載寧 餘勿坪庄土를 중심으로 ( 韓國史論 13, 1985).

- 249 노전은 해서에만 있는데, 黄州 安岳 鳳山 등 읍은 노전이 극히 비옥하기 때문에 발 과 자리의 종류가 전국에 이용된다 2)고 할 정도로 황해도 지방에 발달하였다. 황해도 載寧도 노전으로 유명하였다. 16 17세기에 궁방 아문 권세가들은 황해도 지역의 노전 을 차지하여 갈대를 이용자들에게 팔거나, 권력을 이용하고 재력을 들여 개간하기 시 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갈대로 발과 자리를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민인들의 거센 반발과 저항이 있었으며, 개간 이후에도 소유권과 지대를 둘러싼 대립이 끊이지 않았 다. 황해도 못지 않게 노전이 발달한 지역이 낙동강 하구 김해 양산지역이었다. 낙동강 이 남해 바다로 흘러들기 직전 형성된 삼각주 지대에는 넓은 노전이 형성되어 있었 다. 이곳 노전은 면적과 갈대 생산이 전국에서 으뜸이었고, 갈대도 크고 질이 우수했 다.3) 낙동강 하구의 모래벌을 인근 주민들은 관에서 立案을 받아 소유지로 만들어 갈대 를 이용하거나 개간하였다. 궁방 아문에서도 17세기부터 노전을 折受하여 장토를 확 대하였다. 19세기 들어서는 이곳에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徐龍輔와 갑신정변 주역의 한 사람인 徐光範 대 사이의 대구 서씨가에서 노전을 사들이기 시작하여 1880년대 300결이 넘는 노전을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에 관한 양안, 매매문기, 所志 같은 자료들이 비교적 풍부하게 남아있는 편이다. 일반 자료와 함께 이들 자료를 분석하면,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김해 양산 노전지대에서 궁방과 노전주들의 노전 소 유와 경영, 노전 이용 실태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를 통하여 조선후기 노전의 집적 독점과정과 상업적 농업의 한 양상을 검토해 보려고 한다.4) 2) 萬機要覽 財用篇 2, 收稅條 火田蘆田收稅. 3) 財務彙報 제8호(1908), pp. 18 25. 4) 주로 검토할 자료는 다음과 같다. A. 慶尙道庄土文績-慶尙道金海梁山郡所在龍洞宮明禮宮提出圖書文績類 (奎 19302-11). 慶尙道庄土文績-慶尙道金海郡所在龍洞宮提出圖書文績類 (奎 19302-12). B. 內需司文績類 (奎19312-4). C. 明安公主房慶尙道梁山郡南面屯田折受免稅御覽成册 (奎18880, 1677). D. 慶尙道金海府龍洞宮折受蘆畓打量成册 (奎18342-4, 1685). E. 慶尙道梁山郡龍洞宮折受蘆田打量成册 (奎18329, 1685). F. 慶尙道金海府龍洞宮宮屯蘆草畓改打量成册 (奎18315, 1690). G. 慶尙道梁山郡龍洞宮蘆田改打量成册 (奎 18328, 1690). H. 慶尙道梁山郡伏在龍洞宮蘆田追打量成册 (奎18330, 1707). I. 慶尙道金海府所在龍洞宮折受屯田畓庚子改量成册 (奎18313, 1721). J. 慶尙道梁山郡龍洞宮折受田畓打量成册 (奎 18327, 1721). K. 金海府所在龍洞宮蘆田畓區別成册 (奎 18314, 1769). L. 慶尙道金海府所在義烈宮所屬蘆田本卜成册 (奎 18776, 1774). M. 金海府所在龍洞宮蘆田泥生打量成册 (奎 18310 18311, 1803). N. 慶尙道梁山郡所在龍洞宮折受田畓泥生蘆田打量安 (奎 18326, 1803). 0. 金海府駕洛帳南伐員田字號卜數成册 (奎 18569, 1833). P. 慶尙道金海府所在龍洞宮屬駕洛七山右部德島帳蘆田字號卜數量案 (奎 18316, 1846). Q. 慶尙道梁山郡所在京城社洞徐判書宅次知蘆田打量成册 (奎 18576, 1856). R. 金海府所在徐判書宅蘆田新打量案册 (奎 18651, 1866). S. 金海府所在徐判書宅蘆田量案册 (奎 18649, 1881).

- 250 國史館論叢 第63輯 한편, 김해 양산은 토지조사사업 과정에서 분쟁이 매우 심하였으며, 토지조사사업의 전과정에 대한 자료가 거의 유일하게 남아있는 지역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김해 양산 노전지대의 노전 소유관계를 살피는 것은 이 지역 토지조사사업 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前史로서의 의미도 있다.5) Ⅱ. 궁방의 노전 소유구조와 관리 1. 김해 양산 노전지대의 특성 김해 양산의 노전지대는 낙동강 하구 섬들과 강 양쪽 습지대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림 1 은 노전이 대부분 개간된 뒤, 갈대가 자라는 순수한 노생지가 낙동강 유역 에만 산재해 있던 1908년의 상황이다. 낙동강 하구의 여러 섬들 가운데 가장 큰 양산 대저도의 조금 높은 지대( 그림 1 의 대상면 부분)에는 조선전기에도 주민들이 토 지를 경작하며 살고 있었다. 성종 때 경상도 양산 대저도가 이름은 비록 섬이나 육 지에서 불과 300여 보 떨어져 있고, 주민이 남녀 410명에 田이 200여 결이며 토지가 비옥하다 고 한 것은 그 이전에 이미 개간이 이루어졌음을 알려준다.6) 그러나 그 밖 의 섬들과 강 양안은 조선후기까지도 대부분 노전이었다. 지금은 예전의 노전지대가 그림 2 와 같이 김해평야 일부와 부산에 대부분 속하였으며, 을숙도 철새도래지 빼고는 예전의 노전 혼적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노전 지역은 낙동강이 양산협곡을 지난 다음 구포 상류 5km 지점에서 동서의 2 대 분류로 갈라지면서 형성된 삼각주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하구에서 약 50km 떨어 진 삼랑진까지 大潮의 영향이 미쳤다. 낙동강 하구에 있었기 때문에 홍수의 피해 또 T. 金海府所在徐輔國宅蘆田量案册 (奎 18650, 1881). U. 金海府所在徐判書宅蘆田量案册追買秩 (奎 18648, 1881). V. 金海府所在徐判書宅庚辰新加蘆田量案 (奎 18647, 1881). W. 金海府所在徐判書宅蘆田稅納册 (奎 18567, 1886). X. 金海府所在徐輔國宅蘆田稅納册 (奎 18568, 1886). Y. 金海府所在社洞徐判書宅蘆田量案 (奎 18646, 1886). Z. 金海府所在社洞徐輔國宅蘆田量案 (奎 18644 18645, 1886). 이 자료들을 인용할 때는 특별히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규장각 도서번호와 제목을 생략하여 A,B,C로 표시하고, 慶尙道庄土文績 (A)과 內需司文績類 (B)에 실린 노전매매문기는 부록 자료로 실은 노전매매문기 일련번호를( ) 안에 쓰기로 한다. 5) 다음 두 논문은 김해지역 토지조사사업 사례를 연구한 것이다. 裵英淳, 朝鮮土地調査事業에 있어서 金海郡의 土地申吿와 所有權査定에 대한 실증적 검 토 ( 人文研究 8-2, 영남대, 1987). 趙錫坤, 朝鮮土地調査事業에 있어서 所有權調査過程에 關한 한 硏究-김해군의 사례를 중심 으로 ( 經濟史學 10, 1986). 6) 成宗實錄 成宗 2월 갑술조.

- 251 - 한 컸다.7) 그림 1 김해 양산 노전지대(1908년) * 출전 : 財務彙報 제 8 호 방조제가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조선시대에는 홍수의 피해를 더 많이 당했다. 예 를 들어 1792년 대홍수를 당했을 때, 동서 10리 남북 20리로 낙동강 하구에서 가장 큰 섬인 대저도에서는 물에 휩쓸려 간 것이 362戶였으며, 대저도 위쪽에 동서로 쌓은 30리 堰 가운데 무너진 길이가 3千丈이었고, 이를 다시 쌓으려면 役丁 1만 2천명이 필요한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8) 1885년 홍수에는 낙동강 하구 양산군 전답 가운데 침 수된 것이 349결 8부 5속, 물에 떠내려 간 것이 145결 81부 9속, 원호 1,664호에서 물 에 잠기고, 병들어 죽고, 배고파 떠돌아 다니는 집이 735호였다(B).9) 7) 낙동강은 1916 1969년 사이에 홍수가 연평균 3.5회 발생하여 우리나라 대하천 중에서 발생 빈도가 가장 높았다(權赫在, 洛東江 三角洲의 地形硏究 地理學 8, 1973, pp. 8 10). 8) 正祖實錄 正祖16년 9월 신해조. 9) 1886 1890년 慶尙道梁山郡居民等狀.

- 252 - 國史館論叢 第63輯 그림 2 김해 양산 노전지대의 현재 * 출전 : 全國道路地圖 (成地文化社, 1994)

- 253 그림 3 낙동강 하구 김해 여러 섬의 노전 員 作(1846년) 이처럼 큰 홍수가 나면 제언이 무너지고 토지가 물에 잠겨 떠내려가거나 모래에 뒤덮였다. 위쪽에서 모래가 떠내려와 새로 모래벌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한편 큰 홍수 가 휩쓸고 지나가면 예전의 노전도 형체가 바뀌곤 하였다. 그에 따라 노전은 경계선 이 뚜렷하지 않았으며, 면적도 통상 1庫 또는 1作으로 표시하였다. 지역도 어떤 面 또 는 어떤 島의 어떤 員이라고 불렀다. 員은 일반 전답의 무슨 들(坪), 作은 두락 또는 夜味에 비견할 수 있다. 그림 3 은 1846년 김해 가락 칠산 우부 덕도면 여러 섬의 노전 員과 作을 그림으로 나타낸 것이다(P). 홍수가 나서 노전이 강물에 떨어져 나가고 모래벌이 다시 생기는 큰 강 하구의 자 연조건과 경계선이 불명확한 노전 지대의 특성은 이 곳에서 소유권 시비가 자주 발생 하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노전은 갈대가 자라는 습지 뿐 아니라 이미 개간한 곳도

- 254 國史館論叢 第63輯 그대로 노전으로 불렀다.세금도 서로 구분하지 않고 蘆結이라 하여 일반 전답보다 저 렴한 가격을 부과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노전이라 하더라도 개간한 노전인지 갈대가 자라는 노전인지 구분이 쉽지 않았다. 2. 궁방의 노전 소유와 지대 17세기 들어 여러 궁방과 훈신들은 사패면세와 입안절수 등을 통하여 민전을 횡점 하거나 蘆田 魚箭 鹽盆 海澤의 이익을 취해 문제가 자주 발생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 황에서 김해 양산에서도 궁방 아문의 절수가 시작되었다. 無主民田 折受屯耕 으로 성 립된 김해 忠薰府 둔전의 성립시기는 1625년으로 추정된다.10) 1645년(인조 23)에 효명공주방은 김해에 있는 땅을 횡점하여 문제가 되었다.11) 無 主陳田을 許民耕植하여 起耕者爲主의 주인이 있고 여러 차례 세금을 받던 땅을 量案 上無主라는 명목으로 차지하였던 것이다. 1662년(현종 3)에는 堰畓을 절수한 숙명공주 방 농장에서 差人인 宮奴 張斗吉이 재해를 입어 수세를 할 수 없는데도 둔민의 우마 와 가마솔을 침탈하여 빼앗은 일이 있었다.12) 이처럼 17세기 초중반에 궁방 아문은 김해 지역에서 토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명안공주방에서는 1677년(숙종 3) 양산군 남면 둔전을 절수하여 양안을 만들었다 (C). 양산의 所要島員, 柳島員, 德頭島員, 牛島員의 노전을 절수한 것인데, 원전답 202-74-4 가운데 起田이 21-97-2, 起畓이 33-05-4으로 起田畓이 55-02-6이고 나머지 147-71-8은 陳田畓과 覆沙田이었다. 1685년(숙종 11)에는 용동궁에서도 김해에서 14-65-8, 양산에서 28-56-5의 노전을 무주지로 절수하여 토지를 집적하기 시작하였다(D,E).13) 김해 양산에서 노전을 절수한 용동궁은 주위의 땅을 늘려가 1690년에 김해에 37-86-9(기답 0-88-9, 노답 36-98-0), 양산에 46-31-2(기전 0-88-1, 기답 7-26-2, 노전 38-16-9)의 노전을 확대하였다(F,G). 경자양전이 끝난 뒤인 1721년(경종 1)에는 용동궁의 김해 전답이 모두 55-66-5(陳田 0-82-1, 진답 8-08-2, 실답 46-76-2), 양산 전답 100-10-5(진전 1-40-0, 기전 56-49-7, 기답 42-20-8)으로 늘어났고 개간도 상당히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I,J). 의열궁에서도 1774년 김해에 58결의 노전을 차지하고 있었으며(L), 이후로도 계속 10) 李榮薰, 19세기 農業變動의 ー樣相 -慶南 金海郡 內需司庄土의 事例를 중심으로 ( 朝鮮 後期社會經濟史, 한길사, 1988). 11) 仁祖實錄 仁祖23년 10월 정미조. 12) 顯宗實錄 顯宗 3년 7월 갑진조. 肅宗實錄 肅宗 11년 8월 기유조. 13) 김해 노전양안의 大德島帳 南直員 末端 二錦字(자호)에 속한 한 필지를 예로 보면, 西犯三 十九五等蘆畓 直長一百八十尺 廣三十尺 貳拾壹負捌束 無主 二方江東北辛時右畓 으로 기재 되어 있다. 민인들이 소유하고 있는 땅 사이의 개간하지 않은 蘆畓을 무주지로 절수한 것임 을 알 수 있다. 양산 노전도 기재형식은 같으나 무주 를 표시하지 않았다.

- 255 노전을 늘려 갔다. 이렇게 하여 1787년(정조 11)에 내수사와 각 궁방은 김해 양산에 다음 표 1 과 같은 장토를 소유하고 있었다. 표 1 1787년 김해 양산의 내수사 궁방전 <표> 내수사 유토면세지 김해 1-58-4 明禮宮 龍洞宮 義烈宮 김해 77-88-3 김해 55-59-7(노답) 양산 100-l0-5 노전답) 양산 12-59-5(노전) </표> 출세전답(미면세질) 김해 102-43-0(寧嬪房 이래전답) 8-55-3(명빈방 이래전답) 양산 62-29-3(명빈방 이래전답) 김해 159-56-0(노전) 출전 : 乾隆五十二年十一月 日 內需司及各宮房田畓摠結與奴婢摠口都案 (奎 9823) 이처럼 각 궁방은 17 18세기에 김해 양산에서 대부분 절수의 방법으로 노전을 차지 하기 시작하여 장토를 늘려갔다. 궁방의 절수는 무주지 명목으로 이루어졌으나, 절수 대상지에는 이미 민인들이 입안을 받아 소유권을 차지하고 있는 경우와 양안상에는 무주이지만 개간하여 無主陳田 起耕者爲主 의 땅도 포함되어 있었다. 궁방에서 무주 지를 절수한 뒤 민인들이 재간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이런 경우 궁방에서 절수를 하 여 법적 소유권을 확보하였다고 하여도 起田畓을 매득한 것과 같은 정도로 소유권을 행사할 수는 없었다. 따라서 절수자인 궁방과 起耕者爲主를 근거로 한 실질 소유자 사이에 소유권의 확보를 놓고 항상 갈등과 대립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양상은 소유 권의 실현형태인 지대량을 놓고 전개되었다. 김해 양산의 노전 절수지는 그러한 모습 을 잘 보여주는 지역이었다. 그러면 궁방에서 蘆結稅라는 이름으로 수취하는 노전 地代, 곧 절수지에서 민인들 의 부담액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아보자. 먼저 개간이 이루어진 전답의 사정을 살펴 보기로 한다. 1700년대 초 김해에는 숙안공주방 절수 언답 수백여 석락 落種之田과 訓局에서 이 속한 왕자궁의 땅 300여 결이 있었다. 공주방에서는 他例收稅하고, 왕자궁에서는 훈국 의 옛 규정에 따라 1결당 玄木 5필씩을 정식으로 받아오다가 민인들이 원하여 백금 2 냥으로 대신 받아들였다. 그런데 1692년에 공주방 도장이 간세배들과 짜고, 併作之規 를 만들어 가을에 소출의 태반을 타작하여 거두어 가고 종자도 作者에게 과반을 분담 시켜 문제가 되었다. 이 문제는 민인들이 京中에까지 올라가 저항함으로써 前例대로 돌이키게 되었다.14) 他例收稅가 어느 정도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왕자궁의 예를 같이

- 256 國史館論叢 第63輯 든 것을 보면 대략 매결에 현목 5필, 백금 2냥 정도 수준이었을 것이다. 민인들의 요 구에 따라 전례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면 이는 벙작보다는 가벼웠던 것이 분명하다. 숙안공주방의 언답은 일반전답을 매득한 것이 아닌 절수지였다. 여기에서 민인들은 지대 부담을 더 지게되는 병작제 분반타작을 수용하려고 하지 않았던 것이다. 김해 명지도에 있는 명례궁 永作宮屯 有土免稅處 에서는 법전에 따라 1負마다 土稅 條로 租 1두와 免稅條로 조 1두씩을 정하여, 조 1두에 代錢 8分으로 정한 후 각양 잡 비를 빼고 실결 60결에 대하여 911냥을 매년 정식으로 거두어 왔다. 島民들이 감영에 정소하자 1786년(정조 10) 경상도에서는 一土兩稅라고 파악하고 28결을 줄여 남은 39 결에 대하여 대전 618냥을 내도록 결정하였다. 그러나 명례궁 장토에서 민인들의 지 대감하를 위한 노력과 일시적인 성과가 그대로 지속되지는 못했다. 명지도는 전답은 물론 鹽釜도 毎負에 조 2두, 대전 1전 6분씩 민원에 따라 정식으로 상납했다는 궁방 의 주장에 따라 1785년에 미납한 28결에 대한 세전 288냥을 예전대로 올려보내도록 하는 것으로 끝났다.15) 영작궁둔에서 조 200두를 받아들이는 규정은 1695년(숙종 21) 乙亥定式으로 급가매 득제 민결면세제를 실시하면서 창원에 있는 용동궁 둔전답의 예에 따라 정한 것이었 다. 1결당 조 200두 가운데 100두는 국가로부터 양도받은 免稅條이고 100두는 지대에 해당하는 土稅條였다. 1결당 조 200두는 궁방 절수지에서 궁방과 개간자 민인 사이의 대립과 타협의 결과 성립된 궁방전 지대의 한 형태였으며, 일반민전의 賭地보다는 낮 은 수준이었다. 이러한 곳에서도 민인들의 지대경감을 위한 노력은 끊이지 않고 진행 되었다.16) 김해 명례궁 장토도 그런 경우의 하나였다. 김해 명례궁 장토는 개간된 지 오래 된 영작 궁둔 으로서 1결당 조 200두 규정이 궁방의 의도대로 관철되었다. 그러 나 개간된 지 오래지 않거나 개간 중인 노전답의 사정은 이와 같을 수가 없었다. 김해 의열궁 노전과 용동궁 노전의 예를 보자. 1778년에 호조판서 구윤옥은, 지금 의열궁의 김해 노전에서 1결에 10냥을 받아들이 는 것은 지나치므로, 김해에 있는 용동궁 절수노전의 예에 따라 매결에 3냥 5전을 징 세하여 그 가운데 1냥 3전은 出稅조로 호조에 납부하고, 나머지를 해궁에서 차지하도 록 하는 계를 올려 받아들여졌다.17) 그런데 의열궁 노전에서는 그후 10년이 되지 않 14) 承政院日記 肅宗 29년 2월 19일, 6월 7일. 肅宗實錄 肅宗 29년 2월 갑자조, 諫院啓曰 金海境內有淑安公主房及王子宮田地 自古依 他例收稅 壬申年導掌者毎當秋成 太半打取其所出 王子宮導掌尤甚焉 上年加徵今年又加 厥數 殆倍海曲窮民無處伸訴 來到京中 悲號道路 請令本道 各別明査 使之依前例收稅 俾超遠殘氓保 無廢業離散之弊 答曰依啓. 15) 備邊司謄錄 正祖11년 5월 11일. 16) 朴準成, 17 18세기 宮房田의 확대와 所有形態의 변화 ( 韓國史論 11, 1984). 17) 日省錄 正祖2년 10월 초 10일, 義烈宮金海蘆田稅 命依龍洞宮例收捧 戶曹判書具允玉啓 言義烈宮金海蘆田定稅事 有判付矣 蘆田一結之地 十兩收稅 殊涉太過 而本邑亦有龍洞宮折受 蘆田 毎結稅納三兩五錢云 同是宮土 而俱在ー邑 則其所納稅 宜無異同 一依兩宮例 毎結定稅

- 257 아 다시 문제가 제기되었다. 1785년 4월 11일 경상감영에 도착한 비변사 관첩에 다음 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18) 비변사에서 相考한 일은 마침 비변사 啓에 대한 下敎에, 啓辭가 김해 노전에 사는 金德仁 이 上言하여, 김해부의 노전은 경인년(1770) 義烈宮에서 執卜할 때 매결 10냥씩 늑봉하여 해 변가에 사는 잔민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없었습니다. 정유(1777)년 민인들의 상언으로 海西 노전에 따라 매결 2냥 3전씩 영원히 정식으로 삼고 다른 侵徵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경자년 (1780)에 의열궁 세전이라 칭하고 또 三手粮 結錢이라 칭하여 남징하는 바가 다시 이전과 같 았습니다. 그래서 의열궁에 묻고 호조와 균역청에 정소하였으나 모두, 원래 이와 같은 일이 없다고 하니 경자년 이후에 납부한 1,000여냥은 어디로 들어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정유년 판 하한 정식에 따라 중민의 고폐를 제거해주십시오 하였습니다. 이에 경이 이미 道伯으로 자세 한 조사를 했으니 의견을 갖추어 草記하라 는 명이 있었습니다. 호조와 의열궁에 물어 보니 蘆田稅는 매결 3냥 5전을 받아들여 2냥 3전은 墾田之稅의 예에 따라 호조에 내고, 1냥 2전은 土稅로 의열궁에 상납한다고 합니다. 海西의 收稅案을 살펴보니 仍蘆陳田이라고 실려있습니 다. 蘆利가 많다해도 陳田이라 부르므로 결코 時起와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作夫에게서 거두 어 들이는 三手糧 結錢이 兩南 징세 규정에 어찌 다름이 있겠습니까. 지금 상언 중에 다만 호 조에 납부하는 2냥 3전만을 거론하고 궁납조에 이르러서는 거론하지 않아 혹 궁납조를 삼수 량과 결전이라고 오인하여 이와 같은 호소가 있는 것 같습니다. 만약 궁납과 호조에 납부하는 외에 삼수량과 결전을 칭탁하여 더 거두어 들인다면 민인이 칭원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 니다. 道臣에게 자세히 조사하도록 분부하여 매결 3냥 5전 외에 조금이라도 더 거두어 들이는 폐가 있으면 該邑吏輩를 奸弄 橫斂한 죄로 嚴刑照律하여 定式이 제대로 시행되도록 하고 다 시 加濫하지 못 하도록 할 것이며, 冒濫되게 呼籲한 김덕인을 죄주지 않을 수 없으니 해당 관 청에 명하여 법대로 조처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한 것인데 그대로 따르라 고 전교하였으니 계사의 뜻을 깊이 살펴 시행하도록 할 것. 형조에서는 冒濫上言人 김덕인을 杖一百 徒三年하고자 홍충도 영동현을 배소로 정 하여 압송하려고 하였으나, 編配가 많아 근심이니 收贖放送 하라는 전교를 내렸다.19) 이 과정을 보면 의열궁 노전에서는 1결에 10여 냥까지 징수하였으나 노전민들의 저항에 따라 용동궁 예대로 3냥 5전 징수가 정식으로 정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1778년에는 3냥 5전을 거두어 1냥 3전은 호조에 출세하고 2냥 2전을 의열궁에서 차지 하라고 했으나, 1785년에는 2냥 3전은 墾田之稅의 예에 따라 호조에 내고, 1냥 2전 은 土稅로 의열궁에 상납한다고 하여 귀속처에 따른 액수가 서로 다르다. 그 사이에 변 화가 있었는지, 1778년에 호조 납부액을 잘못 알고 있었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총액에 三兩五錢 而其中一兩三錢 則以出稅條納于戶曹 其餘則自該宮次知收捧 似爲公私兩便之道 請 以此分付 從之. 18) 慶尙監營開牒 乙巳(1785) 4월 11일 到付. 19) 日省錄 正祖9년 4월 18일.

- 258 國史館論叢 第63輯 는 다름이 없다. 호조에 납부하는 노세는 통상 1결당 2냥 3전 정도였던 것으로 보인 다. 19세기 초 海西에서 民蘆田 1결의 蘆稅는 木 1疋로 규정되어 있었고, 목 1필의 作 錢價가 黃州에서는 2냥 3전, 安岳에서는 2냥이었다.20) 이러한 노전은 개간이 되어도 일반전답의 時起와 구별되어, 蘆田收稅는 懇田之稅에 따라 목 1필의 작전가 2냥 3전 으로 정해졌다. 김해 의열궁 노전민들은 일반 民結 蘆田과 같이 2냥 3전만을 내고자 했던 것이나, 그렇게 되면 의열궁으로서는 노전 소유를 실현할 수 없게 된다. 의열궁 노전은 유토 면세지가 아니라 유토출세지였기 때문에 출세조로 2냥 3전의 노세를 호조에 내야할 땅이었다. 의열궁으로서는 노전 소유를 실현하는 지대인 土稅條 1냥 2전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관에 노세만 내려는 노전민들과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용동궁 절수 노전의 매결 3냥 5전은, 이 땅이 유토면세였기 때문에 免稅條 2냥 3전 과 土稅條 1냥 2전을 합한 액이었다. 이는 永作宮屯 결당 租 200두가 100두는 면세조, 100두는 토세조인 것과 같은 형식이다. 한편 의열궁이 선희궁으로 바뀐 뒤 선희궁 김 해 노전은 유토출세에서 유토면세로 바뀌는데, 그렇게 되면 선희궁에서 차지하는 결 당 노전세는 1냥 2전이 아니라 3냥 5전으로 용동궁과 같게 된다.21) 그러면 19세기 김해 양산의 궁방 절수 노전에서 민인들이 부담하는 충액은 면세조 와 토세조를 합한 3냥 5전만이었을까? 3냥 5전은 民結 蘆田의 노세 규정 2냥 3전에 비하면 비싼 편이었다. 그러나 김해 양산의 민노전에서도 노세 총액은 2냥 3전만이 아니었다. 1834년에 蘆田主 안경술, 김상옥, 김준규가 누구에겐가 파는 노전매매문기 에는 本結卜에 대한 元稅錢이 표시되어 있다(부록 자료 25,54,119).22) 이를 보면 각각 20) 주 2)와 같음. 21) 度支田賦考 (奎 古圖書 5740/6/6, 1825), 宣禧宮 김해 면세전답 144-89-6. 선희궁은 영조 대왕의 후궁, 장조대왕의 사친인 暎嬪 이씨의 신판을 봉안한 궁으로, 영빈은 1764년(영조 40)에 죽었다. 묘호를 義烈宮이라 했다가 1788년(정조 12)에 宣禧宮으로 바꾸어 불렀다. 22) 매매문기에서 필요한 부분만 떼어 본다. ① 매매일 1834년 12월 일, 蘆田價 200냥, 蘆田主 金尙玉 駕洛面 南伐員 乾字 第2 第3 本卜 56-1 作者 金尙鎭 本結卜 56-1 元稅錢 3兩 5錢 本府納 價錢 200兩 每兩頭 2分 5里式 除 雜費駄價 以稅錢 50兩 毎年 2月內 收納次 ② 매매일 1834년 12월 일, 매매가 310냥, 노전주 金俊圭 장유면 매지원 남자 제 45 본복 34-8 제 46 본복 18-2 작자 김상진 본결복 53부 원세전 2냥 8전 9분 가전 310냥 매냥두 2분 5리식 제잡비태가 이세전 77냥 5전 매년 2월내 수납차 ③ 매매일자 1834년 12월 일, 매매가 90냥, 노전주 安景述 칠산면 곤지원 절자

- 259 본결복 39부 7속에 원세전 2냥 1전 7분, 56부 1속에 3냥 5전, 53부에 2냥 8전 9분이었 다. 환산하면 결당 원세전이 대략 5냥 4전 5분이다. 이것이 현실에서 노전 1결당 관에 바치는 세금의 총액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민노전의 노세 규정 2냥 3전에 비하여 배가 넘는 액이며, 궁방전 절수 노전의 3냥 5전에 비하여도 높은 수준이었다. 민결 노전의 노세 총액이 5냥 4전 5분 수준이었다면 궁방 절수 노전에서 민인들이 납부하는 실질적인 총액은 얼마나 될까? 궁방 수취액은 19세기 내내 결당 3냥 5전 수 준이었다.23) 민결 노전 수준보다 오히려 낮은 액이다. 그런데 김해 양산 궁방 노전의 세액 부담자들인 蘆田主나 作者 또는 守直의 실제 부담액이 3냥 5전에 머물렀던 것은 아니다. 궁방 절수 노전에서도 민인들이 부담하는 총액은 민결 노전에서 관에 바치는 결복가 원세전 5냥 4전 5분과 같은 수준이었다. 1833년 1월에 유학 장석원은 김해 가락장 남벌원에 있는 宣禧宮과 龍洞宮 執卜 노 전 18-89-8을 누군가에게 3,000냥에 팔았다(139).24) 매매문기와 함께 첨부한 金海府 駕洛帳南伐員蘆田字號卜數成册 끝에는 양궁의 집복가와 담당자, 蘆田禾草(지대)액을 밝혀놓았다(A).25) 선희궁 용동궁에 바치는 執卜價(蘆田稅)는 흉년이나 풍년을 가리지 않고 1결에 잡비를 포함하여 5냥 4전 5분씩이며, 노전 守直者가 담당하고, 김해부 색 리가 거두어 다음해 4월 양궁에 올려보낸다는 것이다. 궁방에서 받아들이는 액은 3냥 5전인데 여기서는 잡비를 포함하여 5냥 4전 5분이라고 했고, 김해부에서 거두어 양궁 에 올려보낸다고 한 것을 보면, 잡비가 2냥에 가깝다는 셈이다. 이는 일정한 형식으로 제4서범 제6남범 6등 직노전내 1고 본복 39-7 作者 金尙鎭 본결복 39-7 원세전 2냥 1전 7분 본부납 가전 90냥 매냥두 2분 5리식 제잡비태가 이세전 22냥 5전 매년 2월내 수납차 23) 김해 양산의 용동궁 노전에서 궁방이 받아들이는 액이 3냥 5전이라는 것은 龍洞宮謄錄, 龍洞宮公事册, 龍洞宮捧上册, 龍洞宮鄕味册 등에 동일하게 나타난다. 24) 道光 拾參年 正月 拾五日 移賣 金海府駕洛帳南伐員所在 次知流來植蘆培養蘆田及自己買得蘆田 合庫三十五作 宣禧 宮龍洞宮兩宮執卜合十八結八十九負八束 周回數十里 犯標則東竹島防堰西細浦北泥生伐 價折 錢文三千兩而依數捧上是遣 右宅前永永放賣爲去乎 本文記段田畓文書幷付 故不得許給 右蘆田 字號數卜數成册 蘆田主 幼學 張錫源 證 幼學 安哲遠 筆 執幼學 朴擎華 25) 金海府駕洛帳南伐員蘆田字號卜數成册 蘆田結卜成册中 宣禧宮龍洞宮兩宮執卜 以卜價則勿論凶豊 毎壹結雜費幷五兩四錢五分式 自本 府定色吏收捧 翌年四月日兩宮上納次 蘆田兩宮卜價上納段 蘆田守直者擔當自納是遣 蘆田禾草 段 價錢三千兩頭 毎年四月以陸百兩 以爲定式爲乎乙事 舊蘆田主 幼學 張錫源 證 幼學 安哲遠 筆 執 幼學 朴擎華 金海官

- 260 國史館論叢 第63輯 김해부에 귀속되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 2냥 가까운 액수에는 三手糧이 포함 되었다고 볼 수 있다.26) 결국 김해 양산 궁방전 절수 노전에서 민인들이 1결당 부담 하는 총액은 민결 노전과 같은 5냥 4전 5분 수준이었음을 알 수 있다. 3. 궁방 절수지의 소유구조 궁방 절수지의 노전민들은 노세전의 귀속처가 다를 뿐, 절수지를 민결 노전과 다름없 이 자기 노전으로 인식하고 전상매매, 상속, 전당 등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궁방에 서도 그 권리를 인정하였으며, 양안에도 실질적인 노전 소유주들을 起主 로 표시하였다. 1690년과 1721년에 만들어진 용동궁 양산 노전 양안(G,J)에서 한 예를 들어 본다. 1690년 양안에 김일생 으로만 표시되었던 것이 1721년 양안에는 기주 란을 두고 김 일생을 구 김일생 으로 표시하여 구 기주임을 밝히고, 아울러 今某 가 현재의 기주임을 분명히 하였다. 1690년 蘆田 0-24-4에서 起 가 0-12-2 이고 陳 이 0-12-2 이었던 한 필지가 1721년에는 5필지로 나뉘고 0-35-8가 늘어났으며, 모두 육등 畓으로 바뀌었다. 특히 세필지가 번답(反畓)이다. 그동안 노전을 개간하여 畓으로 바뀐 것이다. 30 여년 한 세대가 지나는 동안 김일생의 노전은 상속, 매매 또는 타인의 개간으로 몇필지로 분 할되었을 것이며, 궁방은 새로운 소유자를 양안에 起主 로 밝히고 있는 것이다. 26) 1868년 용동궁에서는 용동궁 절수전답이 김해 양산 양읍 경내에 있는데, 삼수미 매결 1두 2 승은 법전에 기록되어 있고 각읍에서 지키는 규칙인데 유독 양산읍에서 매결 1두 6승씩을 濫捧하니 법전대로 시행하도록 경상감영에 공문을 보내고 있다( 龍洞宮謄錄, 戊辰 5월 25일 慶尙監營營吏處). 전체 5냥 4전 5분에 이 삼수미 1두 2승價도 포함된 것인 듯하다.

- 261 궁방전에서 기주 로서 위치를 확보하고 전상매매 등의 방법으로 소유권을 행사할 수 있던 근거와 실상을 노전매매문기와 所志가 집중되어 있는 18세기 말 19세기 전반 의 사정을 통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용동궁에서는 19세기 들어 18세기 말까지 집적한 김해 양산의 노전 155-70-2 외에 1803년에 김해에 243-56-2(진 143-34-0, 실결 100-22-2)과 양산에 154-50-5(진 74-22-5, 기 80-28-0)의 노전을 절수하여 양안을 만들었다(I,J). 이 양안의 작성 형식은 다른 양안과 동일하며 실제 소유자들을 기주 라 표시하고 있다. 그 가운데 김해 台也 面 厥字에 속한 金大元, 鄭禹範 노전의 예를 들어본다. 두 사람의 노전은 양안에 이렇 게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陳主 鄭禹範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궐자 제 95필지 노전 6-24-5은 1792년에 裵東晦, 鄭禹範, 崔國平이 立案을 받아 여러해 갈대를 심어온 것으로, 1803년 용동궁 절수지로 들어가 용동궁 양안에 기재된 것이다. 세 사람은 1804년에 이러한 사실을 명 시하고 蘆契立議를 만들어 공동소유임을 분명히 하였다(A).27) 입안을 받아 법적 소유권을 확보하고, 자기 노동력을 들여 갈대를 심은 주인있는 노 전이 용동궁 절수지에 들어 간 것이다. 이 노전인근에 사는 細山洞民들이 자신들의 노 전이라고 갈대를 심으면서 소유권 분쟁이 일어났다. 다음은 이때 용동궁 양안에 이름 이 올라 있는 鄭禹範들 쪽에서 올린 소지이다(A). 台也居 崔順牙 鄭厚男 等 소지를 삼가 올리는 것은, 우리들이 지난 임자년(1792)에 본면 細山員 강변 無主閒曠處에 植蘆할만한 곳이 있으므로 呈出立旨 후 여러 사람이 힘을 쏟아 培植蘆根하였고, 또 용동궁 타 27) 甲子 九月 日 蘆契立議 台也面 細山 강변 한광처에 植蘆 蒙利處가 있으므로 수삼 동지가 지난 임자(1792)년에 정소 하여 立案을 받고 여러 해 갈대를 심어오다가, 계해(1803)년 용동궁에서 타량할 때 入錄案 册되었으며, 결수는 6-24-5이다. 거의 成田이며, 노초가 점점 무성해지고 있다. 우리 수삼인 중에 혹 사익을 취하는 자가 있으면 물리쳐 버릴 것이며 모든 성원이 각각 힘을 쏟으면 다 행이겠다. 立案 同參員 裵東晦 懿如 乙酉 代 裵閏謙 鄭禹範 而則 丙戌 代 鄭秉喆 崔國平 平甫 壬辰 代 崔鳳翔 細山員 厥字 龍洞宮案付 第九十五 東西長伍百貳拾柒尺 南北廣肆百伍拾柒尺 陸結貳拾肆負伍束 東大江西太圭蘆田南大元蘆田北命長蘆田

- 262 - 國史館論叢 第63輯 량시에 우리들의 이름을 量主로 현록하였는데(龍洞宮打量時 以矣徒等名懸錄量主是加尼), 세산 동민들이 그들 洞 信地라하여 植蘆하고 여러 모로 作戱하다가 우리들의 立旨가 분명하므로 그들이 이치에 따라 굴복하였습니다. 식노하는데 들어간 비용을 달라고 하여 5냥을 준 뒤 그 들의 手記를 粘連하여 앙소하오니 앞으로 잡담이 있을까하여 後考次 立旨를 成給해 줄 것을 명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使道主 處分 을축 윤 6월 (題音) 衣手記 後考次立旨成給事 한편 세산동민들은 윤 6월 24일 鄭禹範 立案處가 분명하므로 소유권을 인정하고 자 기들이 갈대를 심는데 든 비용 5냥을 받았다는 수표를 써주었다(A).28) 위 소지만을 보 면 용동궁 타량시에 우리들의 이름을 양주로 현록하였다 고 했기 때문에 崔順牙 鄭厚南 들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본 용동궁 양안과 수표에는 모두 대표자로서 鄭禹範 이름만 쓰여 있고, 蘆契立議는 裵東晦, 鄭禹範, 崔國平 공동명 의로 되어 있다. 소지는 최순아 정후남 이름으로 올렸으나, 그들이 실제 노전 소유자라 기 보다는 공동소유자인 裵東晦, 鄭禹範, 崔國平의 대리인인 집사거나 노비였을 것이다. 세산동민들과 소유분쟁은 정우범 쪽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것으로 정리가 되었는데, 이번에는 세산동에 사는 金能世 가 그의 노전 근처라면서 갈대를 심지 못하게 방해하 여 또 소유지 분쟁이 생겼다. 최순아와 정후남은, 김능세 노전은 제 93 동범 6등노전 남북장 160척 동서광 50척 0-20-4 이방강남서말답북변 金能世 龍宮洞 細山員 厥字, 제 92동범 6등노전 동서장 51척 남북광 48척 0-06-1 동니말답이방서말답북변 金能世 宣禧 宮 細山員 厥字 라고 長廣을 적어 올리니 경계를 분명히 해 달라 고 소지를 올렸다( A)29). 제92번 선희궁소속 6부 1속은 양안이 없어 대조 확인할 수 없으나 제93번 용동궁속 노전은 앞에서 예로 든 용동궁 양안의 93번과 같다. 용동궁 양안에는 起主 金大元 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같은 시기에 같은 노전을 놓고 金能世와 문제가 된 것이다. 위 소지에 대하여 관에서는 그의 땅 근처라고 이와 같이 횡탈하면 근처 사면이 모두 그의 것인가. 법외 非理之習을 일삼는 자는 잡아들여야 한다. 하필 尺量인가. 우선 嚴問차 잡아들이도 록 하라 고 題音하였다.30) 鄭厚男 崔順牙 등이 또 소지를 올렸다. 이번 소지에는 金能世가 아니라 양안에 기주 로 기록되어 있는 金大元을 직접 지칭하고 있다. 김대원이 그의 노전근처라면서 作戱 하므로 우리가 소지를 올렸더니 그를 잡아들이라는 題音을 받았는데, 이를 김대원에게 보여주었으나 오지 않으므로 관에서 잡아들여 횡탈의 폐해가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 다.31) 김능세는 김대원과 무관한 인물이 아니라 그의 대리인으로 보인다. 이 분쟁은 28) 乙丑 閏六月 二十四日 鄭禹範處手標. 29) 乙丑 七月 台也居 崔順牙 鄭厚男等 所志. 30) 위와 같음.

- 263 面에서 摘奸定界後에 김대원이 갈대를 심어 침범했던 노전을 돌려주도록 하고, 전후 사정에 대한 대야면 풍헌의 書目과 牒報에 대해 다시 다투거나 분란을 일으키지 말라 고 題音을 내림으로써 일단락 되었다(A).32) 이 땅은 그 뒤에 공동소유자들이 상속하거 나 자기 몫을 나누어 팔기도 하다가(100),33) 뒤에 모두 裵潤疇가 차지하였고, 그는 이 땅을 1838년에 서판서댁에 팔았다(98).34) 이처럼 김해 양산 궁방 절수 노전의 起主 는 관에서 입안을 발급받고, 갈대를 심어 노전으로서 가치를 갖게 만들고, 개간하여 기전답을 만들기도 했으며, 분쟁이 생겼을 때는 관으로부터 소유권을 확인받고 있으며, 민결 노전 수준의 부담을 지고 있던 실제 蘆田主였다. 이러한 실질적인 소유권을 바탕으로 절수 노전의 노전주들은 상속, 매매, 전당 등 소유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경상도장토문적 에는 소속 궁방을 밝히면서 노 전을 매매하는 문기가 다수 포함되어 있다(부록 자료 참조). 궁방에서는 일정한 노전세를 수취하는 데 지장이 없는 한 이러한 소유권 행사를 규제하 는 특별한 조처를 취한 적은 없다. 그러나 궁방 또한 유토 절수지로서 궁방의 소유지임을 계속 확인해 나가고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양전을 통한 소유지의 획정이다.35) 31) 乙丑 八月日 台也居 鄭厚男 崔順牙等 所志. 32) 台也面風憲書目 (乙丑 팔월 초 10일), 台也面風憲牒報 (乙丑 팔월 초 10일). 33) 嘉慶二十一年 十一月 日 前明文 台也面細山里 前有無主閒曠處 故年前與鄭禹範崔國平三人 呈訴立案 作契植蘆 今至良田 以 方有公錢收刷事 同蘆田中 自己次知條 一今及今年禾草 幷以折價拾貳兩 右人前永爲放賣 而此 田蘆草 三人從次第輪廻刈取知悉爲旀 自筆蘆田主 裵學晉 證 三寸叔 東曄 이 노전을 판 노전주 배학진은, 증인이 삼촌 裵東曄인 것을 보면 鄭禹範 崔國平과 함께 입안 을 받아 식노하고 蘆契立議를 만든 裵東晦의 아들일 것이다. 상속받았던 땅을 지금 누구에 게 팔고 있다. 34) 道光十八年三月十二日 前明文 傳來蘆田 伏在於台也帳細山員厥者九十五 田卜數則陸結貳拾四負五束 陳內起卜九負柒束 禾草四隻刈取地只 價折錢文壹仟拾伍兩 文記柒丈立案一丈 契座目二件 所志十四丈粘連 蘆田主 幼學 裵潤疇 證 幼學 金尙鎭 筆 執 閑良 金志榮 이 매매문기에는 누구에게 파는 것인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서판서 댁 양안에 裵潤疇에게 서 1,015냥을 주고 산 것임이 기록되어 있다. 35) ① 庚申(1860) 2월일, 梁山三公兄處 양산에 있는 노전이 수해를 많이 당하는 곳에 있어 근년이래 사태로 덮인 곳이 적지 않아 공납이 장차 생경함에 이를 것이다. 무릇 전토가 한 쪽에서 떨어져 나가면 다른 쪽에 니생 하는 것이 이치이다. 이 땅을 개량한 것이 여러해 되어 전형이 변하고 부족함이 많으므로 부득불 한번 이정하여 균세의 방칙으로 하여야 할 것이다. 이에 圖署 申飭하니 도착하면 바 로 색리를 정하여 니생처를 적간하고 均平定稅하고 어람 양안을 수정 상송할 뜻을 본관에 알리니 착실히 거행하고 보고하도록 하다( 龍洞宮謄錄, 庚申 二月 日). ② 壬午(1882) 2월 초 2일, 金海三公兄處 梁山三公兄處 궁속 본부소재 전답과 노장 척량이 오래되어 경계가 점점 축소되고 있다. 계품 후 도서공사

- 264 國史館論叢 第63輯 이러한 궁방 절수 노전에서 노전지대, 노전세의 실제 부담자는 누구였을까? 궁방에 서는 봉세하는 규칙은 蘆草坂局의 크기에 따라 둔민이 分執하고 노를 팔아 납세 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다.36) 노전을 분집하고 있는 둔민은 실질적인 소유자인 노전주들 이었다. 노전세는 노전주들이 담당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노전을 매매할 때 문기에 궁 방세액과 부담자를 밝히는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37) 그러나 현실에서는 노전매매가 빈번하고, 노전이 소수에 집적됨에 따라 노전주와 노 세를 부담하는 사람이 분리되고 있었다. 1826년에 노전주 金再重은 용동궁속 하만리원 2고 2척 노전을 李福長 黃大淸 丁五天 黃鶴天 들의 契中에 28냥에 팔면서 노세 5냥을 舊主인 자기에게 내도록 명시하였다(49). 실제 노세 5냥의 부담자는 새 노전주인 契中 이었지만 궁방에서 파악하는 노세 담당자는 김재중이었다. 앞에서 선희궁 용동궁 執卜地 18결 89부 8속을 누구에겐가 판 유학 張錫源이 노전을 팔기 전 1830년 윤 4월에 올린 소지도 실제 부담자가 따로 있음을 보여준다. 용동궁에 세를 바치는 그의 노전이 가락장 남벌원에 있는데, 守直 장동준이 1829년 蘆禾價 250 냥을 내지 않으므로 관에서 엄하게 다스려 督捧하여 궁납을 원활히 할 수 있게 해달라 는 소지였다.38) 용동궁 절수지의 노전 소유자인 장석원은 稍富之人 饒富之人 인 장동 준에게 守直을 맡기고 蘆禾價를 받아들여 궁 세전을 부담한 뒤 소유자로서 이익을 실 를 하송하니 일에 밝은 吏校를 특별히 정하여 향감과 눈을 맞추어 개량한 뒤 수정 양안을 상송하도록 하라( 龍洞宮公事册, 壬午 二月 初三日). 36) 慶尙監營關牒, 乙巳(1785) 10월 6일 到付. 37) ① 1832년에 유학 李春成은 金宗珠에게 자기 노전 10隻地 가운데 8척지를 팔면서, 10척지의 세전이 26냥 7전 4분인데, 팔지 않은 2척지의 세전 5냥 3전 6분은 자기가 담당하고 팔아넘 기는 8척지의 세금 21냥 4전 4분은 새로 산 사람이 부담하도록 매매문기에 기록하고 있다 (135). ② 1837년에 金潤國은 김해 덕도장 상단원에 있는 民結과 宣禧宮稅納蘆田 3庫 禾草 7隻地를 250냥에 서판서댁에 팔면서 선희궁세전이 13냥 4전 9분이라는 것을 기록하였다(40). ③ 1854년에 金澤首는 자기가 샀던 龍屯宮員 노전 4庫 2隻 3同落地를 서판서댁에 팔면서 노 세가 5냥 2전 4분임을 밝히고 있다(62). 38) 梁山寓民 張錫源 삼가 말합니다. 내가 차지하고 있는 용동궁세납 노전이 김해 가락면 남벌원에 있습니다. 이 노전의 守直 張東俊이 심술이 무상하여 작년 蘆禾價 250냥을 떼어먹고 내지 않았습니다. 그 러므로 작년 8월에 사유를 열거한 정소에 따라 잡아들여 20대를 친 뒤 題音에 문적이 분명 한데 관정에서 말을 바꾸는 행위가 통탄스러우므로 이와 같이 杖罰하거니와 그가 9월 보름 까지 備報할 뜻을 이미 納侤했으니 잠시 기다림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稍富之人으 로서 지금까지 노세를 發程하였으되 每每退托하므로 전에 정소했던 것과 함께 사유를 열거 하여 來訴하온즉 제음에 매우 痛駭하므로 嚴治督捧次 잡아들여 對卞하라고 말했습니다. 잡아 들여 대변하온즉 그가 수일내에 비보할 뜻을 명확히 하였고, 관분부에 만약 문기에 따라 출 급하지 않거든 更訴하라고 하였습니다. 그가 饒富之人으로서 一向稱托不給하므로 前呈을 함 께 점련하여 앙소하오니 헤아려 살피신 후, 이는 私債와 다르고 宮家土地의 소출이온즉 동 장동준을 법정에 잡아들여 각별히 엄치하여 감옥에 가둔 뒤 바로 추급, 비납상납하도록 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金海城主處分 庚寅 윤 4월 일

- 265 - 현하였던 것이다. 1833년에 장석원은 또 대리인 張奴順丹 이름으로, 자신이 김해 양산 동래 3읍의 용동 궁 노전 首作者 를 거행하고 있는데, 노전 화초를 베어가고도 값을 내지 않아 궁상납에 어려움이 많다고 소지를 올리고 있다.39) 노전을 팔기 전에 장석원은 실제 노전 소유자 였으며, 궁과 관계에서는 장석원이 作 者로서 명목상 궁상납의 담당자였다. 장석원은 이 노전을 팔면서 蘆田兩宮卜價上納段 蘆田守直擔當自納 이라고 명시하여 궁 卜價는 수직이 담당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40) 그러므로 장석원 노전에서는 선희궁 용동궁+관(복가수취=면세조 토세조+잡비) 노전주 장석원(노전화초=노전지대 수 취) 守直(노전관리자, 노전이용자, 복가+노전화초 실제부담)의 관계가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면 장석원이 이 노전을 팔고 난 뒤 사정은 어떠했을까? 1846년 용동궁 김해 가 락 칠산 우부 덕도 노전 양안다정의 두 필지를 예로 보자. 39) 慶尙左道梁山郡居龍洞宮上納蘆田首作者張奴順丹 소지를 올리는 것은, 본궁차지 세납노전이 김해 양산 동래 3읍 信地에 있는데 상납액이 수 천여 냥에 이릅니다. 노 이 몸이 3읍 중의 首作者를 거행하고 있습니다. 무릇 노전은 원래 곡식을 생산하는 땅이 아닙니다. 다만 노전에 자라는 禾草를 매년 베어 煮鹽 鹽釜에 發賣하 여 상납세전을 備納하고 혹 남는 것이 있으면 이로써 생활합니다. 근년 들어 바다 모퉁이 인심이 無據하여 궁가에서 차지한 상납 노전의 소중함을 멸시하고 동궁 노전 화초를 값으로 쳐서 베어간 뒤에 여러해 동안 지불하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막중한 상납세전 때문에 家庄 을 헐값으로 팔아 空然懲納하니 분통함을 어떻게 당하겠습니까? 이러한 사정을 본궁에 호소 하려도 천리 밖이라 왕복하기 극히 어렵고, 상납기한을 어기는 폐단이 있습니다. 이러한 일 이 그치지 않으면 궁가의 소중함이 과연 유지될 수 있겠습니까? 무릇 私田을 말하더라도 감 히 이러질 못하는데 하물며 궁가에 소속된 것인데 이렇습니다. 분을 이기지 못하여 邑呈訴 와 여러 사람의 手記와 蘆價를 뒤에 기록, 점련하여 來訴하오니 자세히 살펴보신 뒤, 노전은 김해에 있으므로 김해관에서 뒤 각인을 하나하나 잡아들여 먼저 엄히 다스린 뒤 동궁에 상 납할 노초가를 수기에 의하여 이익을 계산, 추급하여 상납 세전을 비납하게 하고 앞으로 이 러한 습성이 없도록 처리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大監主 處分 癸巳(1833년) 後 金相龍 경인(1830) 본문 146냥 3전 崔守宅 정해(1827) 본문 90냥 劉以億 신사(1821) 본문 253냥 7전 張東俊 무자(1828) 본문 150냥 40) 주 25) 참조.

- 266 - 國史館論叢 第63輯 이 양안에서 作張順丹 이름에 포함된 노전은 선희궁 11-96-2, 용동궁 13-09-6, 화령궁 0-40-3, 泥生 11-73-1으로서 모두 37-19-2 이다. 니생지를 뺀 25-46-1 가운데 20-74-2은 1833년 장석원이 자기 노전을 팔면서 만든 金海部駕洛帳南伐員蘆田字號卜數成册 과 字號, 地番, 結負가 일치한다. 그 가운데 용동궁노전은 1803년의 金海部所在龍洞宮蘆田 泥生打量成册 의 해당 필지와 또 일치한다. 이를 표 2 로 나타내 본다. 표 2 1803, 1833, 1846년 김해 용동궁 장석원 양안의 起主 作 참고 : 장석원 매매시 양안의 * 3-68-9에서 1-84-4은 타인 노전이 포함된 것이며, 이를 뺀 18-89-8이 장석원이 누구에게 판 노전이다. 1833년 장석원이 판 노전은 1803년 용동궁 절수 노전의 起主 였던 김수태, 문금대,

- 267 문금발, 문성득, 손취만, 장우량, 조몽돌, 조옥련, 최처욱, 최춘백과 이름을 확인할 수 없는 선희궁, 화령궁의 起主들이 전상매매한 것을 장석원이 사서 차지했던 18-89-9 이었다. 1846년 김해 용동궁 양안에는 이 노전 18-89-9 와 용동궁 선희궁 속 노전 7-32-2, 그리고 泥生蘆田 10-92-1을 합한 곳의 作 을 張順丹으로 기재하고 있다. 이 가운데 18-89-9에 해당하는 필지는 장석원이 1833년에 누구에게 판 것이므로 실제 노전 소유주는 다른 사람이었다. 그 밖의 노전에도 장석원 또는 다른 노전주가 있었 을 것이다. 그런데도 장석원의 대리인인 奴 順丹의 이름을 작 장순단 으로 기재한 이 유는 무엇일까? 장석원이 노전을 팔았지만 궁방에서는 노전세의 부담자를 장석원으로 그대로 파악하고 있으며, 양안에는 그의 대리인인 張順丹을 작 으로 표시하고 있다. 장석원은 노전을 팔고 난 뒤 1846년에도 首作人으로서 노전을 관리 이용하고 있던 것 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때 노전의 소유 구조를 도식화해보면 궁방+관(南宮卜價=노전세=면세조 토세조+잡비 수취)-노전주 某(蘆田禾草=지대, 노전가의 1/5 수취) 作張順丹(장석원 대리인=노전세+노전화초 부담, 수직과 같은 성격) 노전이용자(갈대매입)이었을 것이 다. 그러므로 궁방의 절수 노전에서 궁방과 노전 소유 이용자의 관계는 ①궁방(궁방복 가수취)-노전주(소유 관리 이용, 궁방복가부담), ②궁방(궁방복가수취)-노전주(소유 관 리, 궁방복가부담, 노전화초수취)-이용자(노전화초부담), ③궁방(궁방복가수취)-노전주 (소유, 노전화초수취)-수직(관리 이용, 궁방복가 노전화초부담), ④궁방(궁방복가수취)노전주(소유, 노전화초수취)-수직(관리, 노전복가부담)-이용자(노전화초부담)의 어느 한 형태를 띠고 있었다. 4. 궁방 노전의 관리와 거납 궁방에서는 이러한 절수 노전에 지방의 유력자를 監官이나 사음으로 두어 노전을 관리하고 궁방수취액을 수세상납하는 일을 맡도록 하였다. 이들에게는 身役과 姻戶雜 役을 면제해 주었다.41) 41) ① 龍洞宮謄錄 戊辰(1868) 八月日 申龍珠處 無他 宮屬金海府所在蘆田監官 以汝矣身差定爲去乎 自今爲始 收稅上納等節 着實擧行 俾無不 謹罪責之弊爲旀 汝矣身役及煙戶雜役段置 以此圖署吿本官 依事目憑考頉下宜當向事 朴德權處 無他 宮屬金海府所在蘆田舍音 以汝矣身差定爲去乎 自今爲始 收稅上納等節 着實擧行 俾無不 謹 罪責之弊爲旀 汝矣身役及煙戶雜役段置 以此圖署吿本官 依事目憑考頉下宜當向事 ② 龍洞宮公事册 庚辰(1880) 十二月 二十日 金海三公兄處 且德島居李達五 自今年爲始 監官擧行矣 烟戶雜役 依事目 一竝蠲免之意 竝只吿本官傾念擧 行宜當向事

- 268 國史館論叢 第63輯 감관은 노전의 관리와 수세상납을 수행할만한 부와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자들로 차정되었다. 특히 노전은 경계가 뚜렷하지 않기 때문에 그 사정에 정통한 사람이 필 요하였다. 남벌원 소재 용동궁 노전 감관 丁南斗는 김해 관아의 우청행수를 지냈으며(181),42) 육지답, 보리밭, 염전, 廣船을 소유하고 있었다.43) 1891년에 용동궁 鄕監을 하고 있는 鄭止澤은 1881 3년에 금위영 導掌을 맡고 있었으며,44) 1868년 용동궁 舍音에 차정된 朴德權은 1870년, 1875년에 宣惠廳과 武衛所의 김해 노전 감관을 맡기도 하였다.45) 궁방에 자기의 땅을 투탁하고 감관이 되는 경우도 있다. 배경민은 父가 成出立案한 김해 명지면 신도를 용동궁에 속하기를 원하여 궁에서 면세절수한 뒤 1858년에 감관 으로 차정되었다.46) 감관이 지방의 유력자라도 노전민들의 거납이 심함에 따라 제대로 수세상납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였다. 감관 정남두는 노전민들의 거납으로 여러 해 궁납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였으며, 재산을 궁에 전당잡히는 데까지 이르기도 하였다.47) 19세기, 특히 그 후반에 들어 김해 양산 궁방 절수 노전에서는 거납이 빈번하였다. 거납 뿐 아니라 절수지를 완전한 소유지로 만들려는 은닉의 양상도 보이고 있다. 궁 방 절수지만 아니라 아문둔전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사례를 들어본다. ① 1830년을 전후하여 장석원이 소유하고 있던 용동궁 선희궁 절수 노전에서 수직 장동 준이 1829년 蘆禾價 250냥을 도식하고 내지 않았다. 그리고 노전 화초를 값으로 쳐서 베어간 뒤 金相龍이 1830년도분 146냥 3전, 崔守宅이 1827년도분 90냥, 劉以憶이 1821년 도분 253냥 7전, 張東俊이 1828년도분 150냥을 지불하지 않자 장석원이 처리를 바라는 소지를 올렸다. 이 가운데 장동준은 稍富之人, 饒富之人으로 일컬어지고 있었다.48) 42) 道光二十四年癸卯五月二十三日 前明文 移賣次 傳來蘆田一庫 在於駕洛帳南浦員名字 折價錢文壹佰伍兩 右宅前永永放賣 金海蘆田主 將廳任 金斗榮 千 摠 白敏汐 左廳行首 李秀佑 右廳行首 丁南斗 43) 龍洞宮謄錄, 己未(1897) 7월 金海三公兄處. 44) 龍洞宮公事册, 辛卯(1891) 11월 19일 慶尙監營營吏處 圖署. 宗親府謄錄, 辛巳(1881) 7월 초 1일 嶺營了, 癸未(1883) 8월 22일 嶺營了. 45) 주 41) 참조. 慶尙道金海府所在宣惠廳蘆田打量成册 (藏書閣圖書 2-3108, 1870). 慶尙道金海府所在武衛所蘆田打量成册 (藏書閣圖書 2-3107, 1875). 46) 龍洞宮謄錄, 戊午(1858) 8월 일 金海三公兄處, 戊午 9월 일 帖文 新島居民 裵絅旻, 戊午 9월 27일 完文. 慶尙道金海府新島救弊完文 (奎 18944). 47) 龍洞宮謄錄, 癸丑(1853) 8월 일 金海三公兄處. 48) 주 38 39) 참조

- 269 ② 김해 덕도에 사는 曹莫分과 曺孫玉이 50부에 이르는 궁결을 은닉하여 자기 것으 로 만들고 50 여년이나 몰래 경식하다가 발각되어 자수하였다.49) ③ 김해 양산 용동궁 노전에서 德島居 千百彥이 23냥 1분, 鳴湖居 金性汝가 19냥 3 전 8분, 姜子業이 17냥 6전 4분의 1880년도분 소전을 내지 않았다.50) ④ 양산 사는 洪夢瑞 등 7명이 용동궁 稅租를 여러해 동안 납부하지 않았다.51) ⑤ 김해 신도 소재 노전과 염분 감관으로 대구에 사는 李敏樹를 차정하여 수세토록 했는데 작년과 금년세전 600냥을 미루고 납부하지 않으므로 除太하고 裵讚殷을 차 정하였다.52) ⑥ 양산의 용동궁 노전에서 김해 사는 黃允賛이 노초가를 미루고 갚지 않으므로, 감 영에서 잡아들여 기한을 정하여 미납 노가를 납부토록 하였다.53) ⑦ 종친부 소관 노전과 염전이 김해부 송정 칠산 등면에 있는데 작인 金文兼이 흉년 이라 소금을 굽지 못하였다며 마땅히 내야할 세를 頑拒不納하였다.54) ⑧ 김해부 녹산 송정에 있는 염전과 노전에서 작인 金羽聲이 병자년(1876)세전 360 냥과 정축년(1877) 세전 330냥, 蘆草價 310냥 합 1000냥을 아직 납부하지 않았다. 웅 천 덕산 소재 염전 작인 朱仁瑞도 정축세를 아직 납부하지 않았다.55) ⑨ 김해부 소재 종친부 노전에서 김해 사는 徐尙昊 嚴碩汝 金元吉이 여러해 거납하 여 800여냥에 이르렀다.56) ⑩ 김해 웅천 양산 등읍에 있는 종친부 둔토와 염전, 노전에서 導掌 鄭止澤이 임오 년(1882) 세전을 아직 납부하지 않아 잡아들여 엄중히 조사하였다. 정지택은 租價와 염세, 노초가를 작인들에게 받아들이지 못해 愆滯하게 되었다고 하였다.57) ⑪ 양산군에 있는 금영 둔토의 사음배들이 농간을 부려 세납이 해마다 감축하여 장 차 둔토가 폐기될 지경에 이르렀다. 양산에 사는 李禎益을 새로 차출하였더니 전사 음배들이 백반으로 저희하고 공갈하였다.58) 김해 양산 노전지대의 궁방 아문 장토에서는 도장, 감관, 사음, 노전주, 수직, 갈대 이용자들에 의해 상납이 지체되거나 거납이 빈번하였다. 거납의 주체는 노전주, 수직, 갈대 이용자들이었다. 감관이나 사음이 거납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가운데서도 갈대 49) 龍洞宮謄錄, 戊辰(1868) 5월 25일. 50) 龍洞宮公事册, 庚辰(1880) 12월 20일. 51) 위의 책, 壬午(1882) 3월 일. 52) 위의 책, 庚寅(1890) 6월 25일. 53) 위의 책, 辛卯(1891) 11월 일. 54) 宗親府謄錄, 丁丑(1877) 5월 12일. 55) 위의 책, 戊寅(1878) 8월 28일. 56) 위의 책, 辛巳(1881) 7월 초1일. 57) 위의 책, 癸未(1883) 8월 22일. 58) 禁營謄錄, 丙午 4월 일.

- 270 國史館論叢 第63輯 이용자들이 갈대를 사고나서 값을 제 때 내지 않아 상납이 지체되는 경우가 많았다. 도장이나 감관이 연체하는 경우도 대부분 실제 납부자들의 거납이 커다란 이유였다. 감관, 사음이 연체 거납하거나 수세상납을 수행하지 못하면 궁에서는 경감 궁감을 내려보내 직접 수세 상납하거나, 감관, 사음을 제태한 뒤 다른 사람을 새로 차정하였 다. 아울러 궁방 아문은 절수 노전의 관리와 수세상납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면 으레 왕실과 아문의 권위를 바탕으로 김해 양산관 또는 경상감영에 공문을 보내 거납 작경 하는 무리를 징치 독봉하도록 요청하여 장토를 운영해 나갔다. Ⅲ. 노전주들의 존재와 갈대 이용 1. 노전 소유 방식 노전주들이 노전을 소유하는 방식은 크게 입안이나 입지, 상속, 매득으로 나뉘어진 다. 그 가운데 노전을 획득하는 최초의 형태는 강하구의 강가나 중간에 모래벌이 생 기면 입안을 받아 소유권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A). 嘉慶八年癸亥正月 日金海府決立案 右立案爲成給事 左部居裵南極台也居李正文等名 呈所志內 台也帳細山員大江邊末端良中 東大海西丁允大金能世金守喆等蘆田 南浦 北邊一隅金守喆蘆田一隅大海 而中央處 東西長 五百尺南北廣四百五十尺一庫 古今無主 何幸近年次次泥生 故矣徒等 自壬戌年至于今年 連 以植蘆培養是白加尼 不當外人 此後如有横侵之弊是良置 後考次立案成給事爲置果 是古今 無主泥生處是隱喩 更無主則先執者爲主事在常典之仍 如是立案成給爲去乎 永久憑處宜當者 際 自筆 蘆田主 裵南極 李正文 證人 南是優 使 1803년에 김해 좌부면과 태야면에 사는 배남극과 이정문이 태야면 세산원 대강변 에 생긴 무주니생처에 植蘆培養하면서 입안을 발급받기를 요청하자, 김해부에서 주인 없는 니생처는 先執者가 주인이 된다는 규정에 따라 입안을 발급해준 것이다. 노전주가 차지하고 있던 땅 주위에 모래가 쌓여 니생지가 생길 때도 입안을 발급 받아 소유지를 넓혀갔다. 하동면에 사는 김승익은 가락 말단 남포원에 노전이 있는데,

- 271 모래가 점점 쌓여 갈대를 심을 계획으로 입안을 요청하였다. 김해부에서는 무주처라 는 것을 확인하고 입안을 발급해 주었다(A).59) 니생처의 법적 소유권을 확보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입안과 비슷한 입지가 있다. 입안은 별지의 단독 문서이지만 입지는 소지의 끝에 題音을 친 것이므로 소지와 입지 가 함께 있는 복합 문서 형식 이다.60) 입안이 강력한 공증력과 지속적인 효력을 갖는 데 반하여 입지는 상대적 일시적이며 조건부 효력을 갖지만, 니생지의 소유권을 공중 받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었다. 새로 니생지가 생겼을 때나 자기 노전 주변의 니생지가 넓어졌을 때 노전주들은 입안과 마찬가지로 입지를 발급받았다. 김해 좌면 창평리에 사는 김성필은 홍수가 난 뒤 강 중앙에 니생처가 생기자 입지 성급을 요청하였다.61) 녹산면에 사는 孫 아무개 도 奴 홧돌 명의로 소지를 올려 녹산장 성산원 論 逍 양자에 있는 자신의 노전 좌우 니생처에 대해 입지를 발급받았다(B).62) 無主 泥生地가 확실할 때는 관에서 입안 입지를 발급해 주어 소유권을 인정하였지 만, 이쪽에서 포락되어 저쪽에 니생지가 생겼을 때(此便浦落 彼便泥生) 그 소유권은 여전히 포락지의 소유자에게 귀속되었다. 김해 칠산에 사는 朴思仁은 이런 문제로 1821년 소지를 올렸다. 지난 겨울, 柳下에 사는 金麗卿의 노전과 인접해 있는 칠산장 곤지원 노전 한 곳을 좌부면에 사는 김정순에게 샀는데, 김여경이 자기의 땅이라며 노전을 침탈한다는 것이었다(A).63) 이 건은 박사인의 노전이 포락된 것이 확실하므로 앞으로 분쟁이 없도록 하라고 처리되었다(A).64) 한편, 차지하고 있던 땅이 모두 포락된 뒤 그 땅에 모래가 쌓여 다시 땅이 생겨났 59) 嘉慶七年五月 日 金海府決立案 右立案成給事 卽接下東面居金昇益呈狀內 矣身次知蘆田 在於駕洛末端南浦員 而長四百尺廣 二百尺是如乎 東西犯表 則東南大江 西北同人蘆田是乎矣 江中流沙漸叢泥生 如有來頭植蘆之計 是乎乃 此時人心必有難測之謨是如乎 立案成給事 呈狀爲有置果 是泥生無主處 則後勿某人中起 鬧之意 玆以立案成給者 都護府 60) 崔承熙, 韓國古文書硏究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1) p. 217. 61) 左面昌坪里居化民金聲弼 所志 62) 菉山面居孫奴蒊乭 所志 63) 七山居 朴思仁 右謹陳所志矣段 矣身去冬良中 本村帳昆池員蘆田一庫 買得於左部居金鼎淳處是乎所 此田與 柳下居金麗卿蘆田同隣也 而同金麗卿稍奪右田地境 以爲己有之致 本主金鼎淳不勝寃痛 打量定 界之意 至於呈訴 受題是如乎 同麗卿前習未改 指越梁蘆田 以謂吾信地事甚非理 故敢此仰訴爲 去乎 嚴題禁斷 俾無更侵之地行下爲只爲 行下向敎事 使道 處分 辛巳四月 日 (題音) 摘奸後定界以給爲乎矣 如有一向横奪之弊是去等 懲礪次成報狀捉上事 四月二十五日 64) 七山面風憲書目(본문략) (題音) 自立標定給後 如有更鬧之端 各別嚴繩之 麗卿處分付宜當事 辛巳六月 二十三日

- 272 國史館論叢 第63輯 을 때는 환생지의 소유권을 인정해 주었다. 1831년 6월에 左面 柳島에 사는 金奎賛의 소지에서 그러한 사정을 살필 수 있다. 김규찬 집에 전래해오는 노전 17부 5속이 을 유년 홍수로 대강에 포락된 지 100여 년 됐는데 계미년 홍수의 여파로 조금씩 모래벌 이 생겨난 곳에 수삼년 동안 갈대를 심어 숲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大下洞 德頭里 동임이 동민들을 이끌고 몰래 배를 타고와서 此片頹落 越向泥生 이라면서 갈 대를 뽑아갔다. 김규찬은 이 땅은 民之由來帳內田畓之處 還生照然明白 이라고 주장하 면서 소지를 올린 것이다. 이 건은 김규찬의 소유권을인정하는 것으로 처리되었고, 그 는 1844년에 이 노전을 姜士玉에게 팔았다(B).65) 김해 양산 노전지대의 거민들은 입안이나 입지를 발급받아 최초의 소유권을 확보하 였으며, 관에서 공증한 소유권은 오랜 기간이 지나도 지속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1778년에 천화리금은 조부 천자우가 1708년에 입안을 받았던 땅을 30여 년 동안 잃었 다가 다시 입안을 받아 소유권을 되찾고 있다(A).66) 입안 입지를 발급받아 소유권을 확보하였어도 니생지는 모래벌일 뿐이었다. 입안 입지를 통하여 니생지의 법적 형식적 소유권을 차지하고 나서도, 蘆田 으로서 소유가 치를 지니려면 갈대를 심는 植蘆 가 필요하다. 노전이 이루어지려면 입안 입지를 발 급받기 전이나 후에 갈대를 심는 과정이 따라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입안을 받고자 할 때 泥生植蘆, 植蘆禁養, 수삼년 種蘆成林, 植蘆培養, 成植蘆養藪之餘望 을 근거 로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갈대는 이용하려고 심는 것이 보통이지만, 개간하거나 개간지를 보호하려고 갈대를 심기도 했다. 갈대는 소금기에 잘 견디는 식물이므로 강하구 해안에 갈대를 심으면 모 래의 침전을 촉진시키고 제방을 보호해 주는 구실을 할 수 있어 개간에 유리하였다. 65) 左面柳島居罪人金奎賛所志. 66) 건륭 43년(1778) 8월 22일 김해부입안 우 입안을 결급하는 일. 본부 下面에 사는 千禾里金 吿狀에, "우리 조부 千自右가 살아있 을 때인 강희 47년(1708) 윤 3월에 德島帳 開里金島 水奉島 兩間 泥生覆沙處에 植蘆禁養하 려고 成出立案하여 여러해 차지하다가 조부가 1733년에 사망하고, 부 以海가 1748년에 사망 하였습니다. 1748년에 내 나이는 5세 미만이었습니다. 이웃에 사는 朴命才 등이 偸出立案하 여 그의 것으로 만들었고, 저는 執瓢丐乞하는 지경에 이르러 공연히 見失한 것이 30 여년이 되었습니다. 헤아려 살핀 뒤에 저의 조부이름으로 된 입안과 30여 년간 偸食蘆草價를 하나 하나 추급하여 주기를 바랍니다. 정장에 의거하여 該面에 관문을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도 록 하였다. 면임의 보고에 동 노전이 千自右 입안성출처가 확실하고, 박명재 등이 偸取立案 文券하여 자기물건으로 만든 것이 의심할 바 없이 명백하므로 동 입안을 천화리금에게 추급 하였습니다 는 보고에 따라 두 사람을 잡아와 조사해 보았더니 박명재 등이 투출입안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천화리금을 조사하니 以海는 自右의 아들로 1708년 立案成出 4년 뒤 에 태어났다. 이를 보면 작자로 허위기록한 것을 알 수 있으며, 작자 중에 朴世中이 경인 12 월 초 6일 買得 成文하였다고 하나 세중은 그해 4월 4일에 죽었으며, 유학 曺益徵 역시 작 자에 동참하였다고 하지만, 익징의 말에 처음부터 간섭하지 않았다고 하니 이로 저로 보아 命才 등의 소고가 모두 虛妄하다. 천화리금이 그의 조부 노전을 잃은 것이 확실하므로 동 노전을 천화리금에게 결급하고 후고차 입안을 성급한다. 도호부사

- 273 갈대를 심을 때도 노동력과 비용이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입안 한 땅을 다른 사람이 갈대를 심어 소유지 분쟁이 일어났을 때 소유권은 찾아도 식노 비용은 지불하였던 것이다. 1805년에 김해 태야면 세산동민들은 정우범 등이 입안한 땅에 갈대를 심었다가 소유지 분쟁이 일어나자 소유권은 인정하고 植蘆費 5냥을 받고 수표를 써 주었다(A).67) 또, 을묘년(1795) 누군가 김해세산원 노전에 식노하면서 들어 간 비용을 보면, 考稅 7냥 3분, 白紙價 4분, 白酒價 1냥 5전, 南草價 2전, 生鷄價 1전 2분, 丙巡聚會時下 7전 5분, 面下記 5전이었다(A).68) 노전은 대부분 개개인이 소유하고 있었으나 공동으로 노전을 소유하는 예도 적지 않았다(175 189). 계를 짜거나 宗中, 마을에서 입안 식노, 또는 매득하여 노전을 소유 하는 것이다. 공동으로 소유할 때는 蘆契立議 를 만들거나69) 洞中植蘆改修案 을 만들 어 공동 소유지임을 확실하게 밝히고, 공동 소유자들이 사익을 도모하는 일이 없도록 규칙을 정하였다.70) 입안 입지를 받고 갈대를 심어 노전을 소유한 노전주들은 상속, 매매, 전당을 통하 여 소유권을 행사하였다.71) 18세기 후반 19세기 김해 양산의 노전매매 문기를 통하 여 매매 이유를 살펴보면 표 3 과 같다. <표> 67) 乙丑閏六月二十四日 鄭禹範處手標. 68) 己卯四月初七日 細山蘆田植蘆稅邑下抄記. 69) 주 27)과 같음. 70) 洞中植蘆改修案 嘉慶十年乙丑四月 日 節目序文 完義事段 洞名則台也細山里也 本以十室殘里 元無民瘼之物也 本里東隅伐陳泥生處 犯表則東裵 命長陳江 西丁允大金能守金守喆蘆田長橋江 南大浦越開伊金登 北細山峰中央廤 東西長千九百 尺南北廣千六百尺 又基地自乙卯爲始 年年植蘆成林培養爲去乎 日後洞員與外人中 起鬧之是良 置以前後公文及植蘆案役記憑考卞正事 乙卯植蘆案乙丑改修案 植蘆洞案 裵命長 裵忠俊 裵梯俊 具莫立 李仁福 趙乭禮 金能守 鄭能亂 裵良俊 裵千得 崔珠鶴 崔宗大 白云海 金先孫 尹奉吉 孫赫宗 裵儀俊 崔時大 崔興大 金光云 金守喆 周成昌 崔珣 裵信俊 崔 鳳翔 趙甘龍 朴思卜 原 時座上 金日夫 員 崔宗大 洞中 71) 장토문적에 실려있는 매매문기 189장 가운데 노전을 소유한 유래를 기록한 것이 118장이며 그 가운데 立案 自起가 17장, 傳來가 39장, 매득이 62장이다.

- 274 - 國史館論叢 第63輯 매매 이유를 밝힌 문기는 生活無路, 춘궁, 흉세 등 생활고와 관련된 것이 18건, 사 채, 공채, 공사채, 경채 등 빚 관련이 11건, 환자, 전세, 삼세, 군역 등 삼정과 관련된 것 이 7건, 혼사, 상채 등 관혼상제와 관련된 것이 5건, 기타 이사, 分洞, 옥바라지와 관련 된 것이 3건이다. 이유를 밝히지 않고 放賣次 라고만 기록한 것이 58건이며, 절유용, 긴유용, 유용이라 고만 표시한 것이 57건, 移賣하는 것이 30건으로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특별한 이유를 밝히지 않는 문기 중에도 이유를 밝힌 것과 같은 사정으로 매매한 것이 상당했을 것이 지만, 전반적인 토지 상품화의 추세 속에서 김해 양산 노전지대에서도 매매가 활발했음 을 알 수 있다. 매매문기에는 이유가 밝혀 있지 않지만, 소유권 분쟁의 우려도 노전 매매의 한 이유 였을 것이다. 분쟁이 있던 땅을 관의 개입으로 정리한 뒤 바로 노전을 파는 경우에서 그런 사정을 짐작할 수 있다. 모리 호세배들이 침탈하는 폐해에서 벗어나려고 노전을 팔기도 하였다. 양산군 소재 맥도 노전은 연해 니생처로 100 여년 동안 거민들이 스스로 갈대를 심어 서로 매매해 오면서 자생하였는데, 경향의 모리 호세지류가 돈을 주고 샀다고 칭하며 모점도탈하는 폐가 심했다. 그러자 1866년에 맥도에 사는 金奉夏가 도민들의 피곤을 풀려고 각 작인 들에게 값을 쳐주고 이를 산 뒤, 후폐를 염려하여 종친부에 속하기를 원한다는 예에서 알 수 있다.72)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과 함께 공동 소유, 공동 이용의 분위기가 파괴되는 상황도 공 동소유지 매매의 배경이 되었다. 공동소유지를 팔 때는 공동합의를 거쳐 전체를 팔거나 차지한 몫을 나누어 팔았다.73) 2. 노전 소유 규모와 노전주 신분 19세기 김해 양산 노전지대에서 노전주들이 차지하고 있던 노전의 규모는 얼마나 될 까. 노전 소유자들의 소유규모 전체를 알 수 있는 자료는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1803 년 용동궁의 김해, 양산 노전 잉안(M,N)을 통하여 소유규모의 분화 양상을 일부 살필 수 있다. 양안에 起主로 기재된 사람과 매매문기의 노전주 또는 매득자의 이름이 겹치 는 사람으로 김해에 金成千(金聖千), 金振五, 朴七根, 安聖道(安聖度), 張又良, 千禾以金 (千禾里金), 朴允白(朴允伯), 朴正甲, 安聖祚가 나타나며, 양산에 金尙玉, 金哲文, 申致聃, 72) 宗親府謄錄, 丙寅(1866) 5월 22일 慶尙監營了. 73) 응달리에서는 흉년이 계속되는데다 포역과 각양 관납의 부담이 심하여 감당하기 어렵고, 주 민들이 사망하고 남아있는 사람들도 이산할 지경에 처하자 공동으로 차지하고 있던 流來浦 瘼 蘆田을 洞中合席公議 하여 160냥에 홍생원댁에 팔았다(178).

- 275 申朔先(申朔善)이 확인된다. 이를 보면 1803년 용동궁 양안의 기주들은 실 소유자라고 할 수 있으며, 이 용동궁 노전의 기주는 민결노전의 노전주와 소유권의 성격에서 별 차 이가 없었다. 1803년 용동궁 양안의 김해 노전은 칠산면, 태야면, 녹산면, 가락면, 우부면, 하동면, 명지도에, 양산 노전은 하동면 여러 員에 걸쳐 있었다. 이들 노전 사이에는 이 양안에 실리지 않은 용동궁의 다른 노전과 선희궁 등 다른 궁의 노전, 그리고 민결노전이 섞여 있었다. 실제 1803년 김해 용동궁 양안에서 가락면 남벌원에 2-63-6을 차지하고 있던 張又良 은 1801년에 김해 덕도 남직원 땅 皮牟田 5석락지와 노전 9척 예취처 합 용동궁복 4-53-0처를 金福連에게 200냥에 팔았다(140). 이 노전은 1793년에 천덕순이 안성도에게 팔았고(158), 1799년 장우량이 다시 샀던 것이다(121). 용동궁복 4-53-0처는 용동궁의 1803년 절수처가 아니라 그 전에 절수 받은 용동궁의 다른 노전이었다. 1801년 시점에 서도 장우량이 1803년 용동궁 양안에 기재된 2-63-6을 소유하고 있었다면, 그는 이 뿐 아니라 다른 용동궁 노전 4-53-0를 더 소유하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로보면 1803년 용동궁 양안의 기주들은 다른 노전들도 더 소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 1803년에 김해와 양산의 용동궁 양안에 동시에 기주로 적혀있는 사람은 김수득, 정우범 두 사람 뿐이라는 점에서는 용동궁 절수지의 기주들이 소유하고 있는 노전이 그 밖에 크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양안을 통 하여 소유규모의 실상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1803년의 김해부, 양산군 소재 용동궁 노전 기주들의 노전 소유 분화 상황은 다음 표 4), 표 5 와 같다. 표 4 1803년, 김해부 용동궁 노전 기주들의 노전 소유 분화 <표> 구분 1결이상 75-100 50-74 25-49 10-24 1-9 1부 이하 합 기주수 25 9 18 37 75 113 11 288 백분비(%) 9 3 6 13 26 39 4 100 노전합 52-27-7 7-67-0 10-58-1 12-97-5 11-96-1 4-70-1 0-05-7 100-22-2 </표> 백분비(%) 52 8 10 13 12 5 0 100 표 5 1803년, 양산군 용동궁 노전 기주들의 노전 소유 분화 <표> 구분 1결 이상 노전평균 2-09-1 0-85-2 0-58-8 0-35-1 0-15-9 0-04-1 0-00-5 기주수 15 백분비(%) 21 노전합 63-34-5 백분비(%) 79 </표> 노전평균 4-22-4

- 276 75-100 50-74 25-49 10-24 1-9 1부 이하 합 國史館論叢 第63輯 5 11 9 16 15 1 72 7 15 13 22 21 1 100 4-35-8 6-23-5 3-09-8 2-50-1 0-74-0 0-00-3 80-28-0 5 8 4 3 1 0 100 0-87-2 0-56-7 0-34-4 0-15-6 0-04-9 0-00-3 1-11-5 김해 용동궁 노전에서 1결 이상을 차지한 노전주들은 전체 기주수 288명의 9%에 해당하는 25명이며, 이들이 전체 起蘆田의 52%인 52-27-7을 차지하고 있다. 양산도 양상이 비슷하게 나타난다. 1결 이상을 차지한 21%의 기주 15명이 전체노전의 79% 에 해당하는 63-34-5을 차지하고 있다. 김해 양산 모두 1803년 용동궁 노전의 起 主만을 대상으로 살핀 것이다. 갈대를 심 으면 진전도 기노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는 진전을 둘러싸고도 소유권 분 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한 사정을 고려하면 진전까지 포함시켜 볼 필요가 있 다. 김해에서는 기노전을 소유하지 않거나 1결 이하를 소유한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진전이 39-94-0인데 비해 1결 이상을 소유한 노전 기주 25명 가운데 8명이 27-50-2 의 진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양산에서는 기노전 13-57-7을 가지고 있던 신치담이 진 전 24-12-5을, 기노전 5-77-5을 가지고 있던 김인흥이 진전 3-00-0을 차지하였고, 구 이화와 이동춘은 기노전은 없고 진전만 각각 45-00-0, 1-50-0씩 차지하고 있었다. 진 주까지 포함하면 분화상황은 더 심해짐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 김해 양산 노전지대 에서 노전은 소수의 노전주들에게 많은 노전이 집중되고 있었다. 김해 양산 노전지대에서 노전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주로 어떤 신분층이었을 까? 양안의 기주와 매매문기의 노전주와 이름이 일치하는 사람의 신분을 보자. 김해 에서 39-6의 기주인 김성천(31), 4-88-9의 기노전과 17-65-0의 진전을 차지하고 있던 김진오(57), 2-74-4 의 기주인 안성도(121), 2-63-6의 기주인 장우량(140)은 유학이었 으며, 1-50-0의 기주인 천화이금은 절충이었다(162). 양산에서 기노전 13-57-7과 진전 24-12-5을 차지하고 있던 신치담은 유학이었다(117). 김해에서 1-51-9의 진주인 박칠 근과(93), 양산에서 27-0의 기주인 김상옥(25), 30-8의 기주인 김철문(60)은 매매문기 에 신분표시가 없는 평민이었다. 그 밖에 1821년에 박일영에게 김해 덕도 둔치도 노전과 가락장 태야방언 노전을 8,950냥에 판 장광직이나(136), 1833년에 선희궁 용동궁 執卜 노전 18-89-8을 판 장석 원도 유학이었다(139). 이러한 양상은 매매문기 전체에서도 확인된다. 1765년부터 1881년 사이에 매매된 노전의 매매문기 총 189장에서 공동소유 15건과 노전주가 같은 18건을 뺀 156명의 노 전주들의 신분은 유학 77, 절충 1, 통정 1, 한량 2, 수문장 1, 장청임 1명이고, 73명은

- 277 신분을 기재하지 않은 평민이었다. 노전 소유자들 가운데 유학이 가장 많은 수를 차 지하고 있다. 이 가운데 매매가격 500냥 이상되는 35건의 문기에 보이는 노전주들의 신분은 유학이 23명, 공동소유 1건, 신분표시 없는 노전주 11명이었다. 19세기 김해 양산 노전지대에서 많은 노전을 소유하고 있던 층은 유학이었으며, 평민층 가운데도 노전 소유자가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 19세기 김해 양산 노전지대에서 노전은 유학을 중심으로 하는 소수의 노전주들에게 집중되고 있었으며, 이런 추세는 시간이 지날수록 매매를 통하여 더욱 진전되고 있었 다. 그리고 이렇게 진상매매되던 노전의 상당한 부분을 1830년대 이후 한양의 서판서 가에서 매득하여 집적하였다. 서판서가에서는 1834년부터 시작하여 1866년까지 200결 이 넘는 노전을 매득하였다. 이후로도 매득과 加結로 노전을 늘려나가 1886년에는 300결이 넘는 노전을 소유하고 있었다(Q Z).74) 3. 갈대 이용과 노전 경영 18 19세기 김해 양산 노전지대에서 갈대는 어떻게 이용되었으며 노전의 관리는 어 떠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노전은 종종 홍수와 해수의 피해를 당하기도 하였지만, 갈 대로 지붕을 잇고(盖屋), 자리를 짜고(織席), 염전의 땔감으로 쓰고(煮鹽), 음식을 끓이 는데(炊飯)이용할 수 있으며, 민인이 씨를 뿌리고 김을 매는 수고가 없어도 그 이익이 畓利를 넘으나 세는 오히려 전세보다 헐하였기 때문에 민인들이 즐거이 노전경영에 종사하였다.75) 갈대로는 이 밖에 삿갓(蘆笠)을 만들고 발(蘆簾)을 짜기도 한다. 전답 경작을 주로 하고 노전을 일부 소유한 경우에는 갈대가 단단해지기 전에 베어 거름으로 쓰기도 했 고, 자라기 전에 농우의 먹이로도 이용하였다. 또한 바다에 가까운 泥生地는 起墾을 하면 牟田이 가능하고, 防堰하면 鹽田이 가하고, 禁養하면 蘆田이 가하고, 防簾하면 漁基가 可 한 곳이었다.76) 이를 바꾸어 보면 노전은 이익에 따라 牟田이나 鹽田, 漁基 로 전환하여 이용할 수도 있음을 알려준다. 물이 잠긴 노전에서 나는 갈대는 크고 질이 가장 좋으며 正蘆라 불렀다. 구릉으로 올라갈수록 질이 떨어지는데 이를 秋木이라 부르며 煮鹽의 원료로 많이 쓰였다. 반면 구릉의 잡초지는 수해를 당할 염려가 적어 개간이 용이하였다. 수공업 제품으로 쓰이 74) 서판서가의 노전 집적과 경영에 대해서는 다른 원고에서 자세히 다루려고 한다. 75) 慶尙監營關牒 乙巳(정조 9) 10월 6일 到付, 備邊司爲相考事 卽接內需司所報 則以爲節呈 龍洞宮手本內 宮屬慶尙道金海梁山兩邑所在蘆田畓百五十餘結之地 乃是久遠受賜免稅處 而其 所捧稅之規 從其蘆草坂局之大小 屯民分執 賣蘆納稅者也 盖屋織席煮鹽炊飯 專靠於此 民無耕 種之勞 而其利有過於畓利 其稅反歇於田稅乙仍于 民皆樂從行之百年 76) 주 46)과 같음.

- 278 國史館論叢 第63輯 는 正蘆는 주로 음력 9 10월에 베며, 그대로 두었다가 1월부터 3월 사이에 베어 제 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연료로 쓰는 추목은 주로 8,9월에 벤다. 갈대를 헤아리는 기본 단위는 隻이었다. 갈대를 베어 운반할 때 배를 이용하였기 때문이다. 갈대는 둘레가 5척되는 한 묶음을 1丹 또는 1束이라 하고, 50단이 1同이며, 10동이 1隻(船)이다.77) 인부 한 사람이 하루에 갈대 100단을 벨 수 있었으며,78) 갈대 값은 19세기 후반 1척에 25냥 30냥 정도였다.79) 조선후기 김해 양산에서 나는 갈대는 鹽釜의 煮鹽용으로 많이 쓰였다. 노전 매매문 기에 鹽木 몇 隻之地라는 표현이 그런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었다(38, 142,154). 鳴旨面 鎭東里에 사는 朴晋奎는 鹽業으로 資生하며 살았는데 1834년 4월에 정덕후에게 가락 장 적두원에 있는 노전을 350냥에 사서 秋木을 鹽釜에 이용하였다(A).80) 이처럼 자염용으로 갈대를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염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노전도 같이 소유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전과 염전을 같이 소유하는 예는 김해 뿐 아 니라 다른 지역에서도 보인다. 진주에 사는 朴陽鎭은 1866년에 광양현 골약 옥룡 옥 곡 진상면에 있는 답 18석 9두 3승락과 전 5석 3두락, 노전 3처, 염전 3처, 養山 3처 를 소유하고 있었다.81) 질이 좀 떨어지는 갈대는 염전의 땔감으로 많이 썼지만, 물이 잠긴 곳에서 나는 크 고 질이 좋은 正蘆은 온돌에 까는 갈대자리를 짜거나 삿갓을 만드는데 이용하였다. 조선후기에 갈대를 이용한 수공업 제품의 생산과정과 생산자들의 처지를 직접 보 여주는 자료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한말 일제시대의 갈대 제품 생산과 유통 을 보아 앞 시대의 사정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겠다. 갈대자리를 짜는 기술은 1주간 내외 정도면 습득할 수 있으며,82) 한명이 하루에 4 77) 주 3)과 같음. 78) 德永勳美, 韓國總覽 (博文館, 동경 : 1907) 제10장 농업 제5절 미경지 제3항 曲江과 入海 地의 종류. 79) ① 金海府所在徐判書宅庚辰新加蘆田量案 (V), 下等 禾草 78船 2同 18丹 毎船 25냥씩 합 가전 1954냥 9전, 雪滿古林島 화초 1선 1동 11단 中等 가전 33냥 6전 6분. ② 忠勳府謄錄, 丙午(1836) 11월 일 慶尙監營了, 경상도 양산 출두에 있는 충훈부 사여 둔토의 포락니생처에 재작년부터 원장 자호에 따라 수세를 했다. 김해사는 金鍾遠이라는 자 가 문적을 칭하여 늑탈하려고 한다. 金海吏 裵載文이 김종원에게 뇌물을 받고 본관에 정 소, 처음에는 私庄이라고 하였다가 다시 民庫라 하고 이번 가을에는 수어청을 사주하여 둔 감과 부동하여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세력을 믿고 시초를 베어 7척배에 실어 매선마다 30 냥을 받았다(倚勢 裵吏刈取柴草 裝載七船每船捧價三十兩). 80) 梁山居 朴玟奎 右謹陳所志矣段 矣身之弟晋奎 居治下鳴旨面鎭東里 而以鹽業資生是如 去甲午年四月良中 治 下居鄭德后 來言於矣身之弟曰 渠矣蘆田在於駕洛帳赤頭員是如 折價三百五十兩斥賣云云 以勸 買者活川居宋世緩與鳴旨面居裵度傑也 同蘆田無疑買之 而去年秋木段置盡入於矣身之弟鹽釜 矣. 81) 宗親府謄錄, 丙寅(1866) 5월 24일. 82) 京城商工會議所, 朝鮮に於はる 家庭工業調查 (1937).

- 279 매에서 6매까지 짤 수 있었다.83) 갈대자리를 짜는 방법으로 방석을 만들기도 하였다. 삿갓을 만들 경우는 숙련에 1개월 정도가 걸리며, 한 사람이 하나를 만드는데 8시간 남짓 걸린다고 한다.84) 김해 지역에서 갈대를 이용한 수공업 생산의 중요성을 1929년의 예로 보자. 당시 김해의 주요 공산품 판매액 총액이 88만 4천 900圓인데 판매액이 1만원 이상되는 주 요 공산품을 순서대로 보면 蘆席 350,000원 濁酒 320,680원 蘆笠 150,000원 繩 60,420 원, 麻布 52,779원, 綿布 33,070원, 木炭 22,000원, 菓者 22,500원, 農笠 17,421원, 肥料 12,341원, 洋服 11,375원 순이다. 갈대로 만드는 蘆席(갈대자리)과 蘆笠의 판매액 합이 50만圓으로 전체 판매액의 56.5%를 차지하고 있다.85) 1937년 무렵에는 김해에서 갈대 자리를 만드는데 종사하는 종업자가 800여 명이었고, 산액은 191,690원에 달하였다.86) 이 예들은 1920 30년대 이루어지고 있던 사정이나, 앞에서 보았듯이 조선후기에도 갈대자리나 삿갓 등 수공업 제품의 중요성을 여러 곳에서 지적하고 있다. 특히 종이 장판이 보급되기 전 왕골 자리조차 깔기 힘들었던 농촌 서민들에게 갈대자리는 생필 품의 하나였다.87) 짚자리도 이용하였지만 갈대자리는 그보다 질기고 오래갔다. 갈대 제품을 만드는 데는 특별한 도구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18 19 세기에도 갈대로 만든 수공업 제품의 생산과 판매가 활발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 작할 수 있다. 1826년에 유학 許允宅은 김해 長遊帳 梅枝川員에 있는 노전 한 곳과 답 20夜 8斗 地, 피모전 5곳 15두지, 농우 1척을 170냥에 유학 崔成鶴에게 팔았다. 판 이유는 최성 학에게 180냥을 빚내 갈대자리를 배에 싣고 장사하려고 강을 올라 갔다가 見敗하여 빚을 갚을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169).88) 그가 판 노전 1곳은 바로 전 해 1825년에 83) 주 3)과 같음. 84) 京城商工會議所, 앞의 책. 85) 金海邑誌 (1929). 86) 京城商工會議所, 앞의 책. 87) 한말에 조선경영 을 목적으로 조선사회 사정을 조사한 한 일본인은 보고서에서 노전은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며 개간하더라도 그 반은 그대로 남겨둘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였 다. 그 이유를 갈대는 한국에서 필요한 물품으로 9월 하순에 이를 베어 실내의 자리를 만 들고, 지붕을 잇고, 연료로 사용하기 때문이다 고 들었다. 조선인들의 반발을 가능하면 피해 야 할 것이라는 의도였지만, 조선사회에서 갈대가 매우 중요하게 이용되었음을 알려준다(德 永勳美, 앞의 책). 88) 道光六年十月初六日 幼學 崔成鶴前明文 右明文放賣爲臥乎段 家勢貧寒之致 右前錢文百八十兩出債 貿蘆席載船上江再巡是如何見敗之 中 又況三四人處錢文六十餘兩出給是矣 勢不得推尋 不耐債主之督促 僅僅錢文五十二兩報償是 遣 餘錢段報價無路 勢不已 自己買得田莊 長遊帳梅枝川員藝字蘆田一庫十八衿禾幷百兩 同員 畓二十夜八斗地價文四十兩 同員皮牟田五庫十五斗地價文十五兩 農牛一隻十五兩 合價文佰柒 什兩 依數捧上是遣 田莊如是出給之後 若有起鬧雜談是去等 以此文記吿官卞正事 自筆蘆田畓主 幼學 許允宅 證 從兄 禮宅

- 280 國史館論叢 第63輯 李姓 과녀에게 75냥에 샀던 것이다(128). 그러므로 허윤택은 자기 노전을 경영하면서 갈대자리를 만들어 팔았다기보다, 수공업자들에게 갈대자리를 사서 배에 싣고 낙동강 을 오르내리면서 장사를 하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좀 뒤의 예이지만, 1901년에 김해사는 李景有는 내장원 소관 김해 양산 노전의 1년 치 노전세로 엽전 6천냥을 선납하고 노전 감관이 되었다. 그는 원래 蘆竹으로 爲業行 商하는 사람이었는데 영업의 편리를 위해(便營業之地) 노전 감관이 되려고 하였다.89) 이경유는 노전세를 선납하고 노동력을 구입하여 내장원 노전의 갈대를 베어 팔거나, 수공업자들에게 제품 생산을 위임하여 만든 상품으로 상업활동을 하려고 했을 것이 다. 갈대 제품으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갈대가 상품으로 매매되고, 이를 사서 부업 또는 전업으로 제품을 생산하는 갈대 수공업자들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 을 뜻한다. 이처럼 노전은 개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으며, 갈대는 한번 심어놓으면 해마다 싹 이 나와 다시 자란다. 게다가 벨 때와 적당한 관리 외에 특별한 노동력 투입이 필요 없으며, 자염과 수공업 제품의 원료로 이용되어 상품성이 높았기 때문에 18 19세기 김해 양산지역의 노전과 갈대 값은 계속 오르고 있었다. 노전을 싸게 팔고 나서 노전과 갈대 값이 뛰므로 환퇴를 요구하고 값을 더 받으려 하여 분쟁이 발생하는 예에서 그러한 사정을 살필 수 있다. 유학 김상룡은 가락장 남 포원 건주방언에 있는 노전 3척 반락지를 유학 김진곤에게 70냥을 받고 방매했었는 데, 갈대와 노전 값이 매우 높아지자 환퇴하려고 수년간 다투다가(到今蘆木價與土價 太高之致 以還退次數年詰難) 公議에 따라 70냥을 더 받고 합 140냥에 팔았다(24). 김 해 명지면에 사는 김재형은 1833년 1월에 덕도에 사는 문광조에게 750냥을 주고 노전 한 곳을 샀다. 이 노전은 1816년에 덕도에 사는 박문철이 170냥을 주고 문광조에게 팔았던 것이다. 그런데 19년이 지난 뒤 1834년에 박문철이 환퇴를 도모함으로써 문제 가 되었다. 그가 판 값하고 김재형이 산 값 차이가 많고, 19년 전에 비해 모래가 점점 쌓여 협소하던 田庫가 넓어지고, 蘆根도 예전에는 성글다가 지금은 빽빽하게 들어차 갈대 생산이 늘어났으며, 근래 산천의 초목이 없어지면서 땔나무가 아주 귀하게 되어 갈대값이 뛰면서 노전의 값이 높아지므로(山川童濯柴草朔貴 蘆價隨以高騰, 薪木極貴 左右蘆庄 隨以價高) 되찾든지, 값을 더 받을 욕심을 내게 된 것이다(A).90) 노전가가 오르는 것은 매매문기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91) 노전 값이 내리거 89) 慶尙南北道訴状, 請願書 慶尙南道 金海郡居 李景有. 照會訓令存案, 제19호 훈령 제8 호 90) 1834년 7월, 9월 鳴旨面居金載瀅 소지 3건, 같은 해 9월 金海鳴旨島居公鹽民金載瀅議送 1건 참조. 91) 노전을 매매할 때는 큰 노전을 나누어 팔기도 하고, 사들였던 노전을 묶어서 같이 팔기도 한다. 그런 경우를 빼고 같은 노전이 전상매매되고 있는 것이 확실한 몇가지 예를 들어본다.

- 281 나, 10여 년이 넘어도 같은 값으로 매매되는 경우도 있지만, 전반적으로는 오르는 추 세였다. 노전과 갈대 값의 상승은 노전의 매매를 촉진시켰고, 노전 집적의 배경이 되 었다. 다음은 노전의 관리 이용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자. 집 가까이에 소규모 노전을 가지고 있는 노전주는 스스로 노전을 관리하고, 직접 또는 인부를 사서 갈대를 베어 팔거나 이용하였다. 또 노전과 염전을 함께 소유하면 서 갈대를 자염용으로 이용하는 노전주도 노전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노전의 지대수입이나 매매를 통한 차익에 관심을 두고 있던 노전주는 직접 경영에는 소극적이 었다. 또한 노전이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규모가 클 때는 직접 관리하기가 수 월치 않았다. 그럴 때는 관리인인 守直을 두어 노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노전은 대부분 물 가운데 섬처럼 형성되었기 때문에, 큰 규모의 노전에서는 노전주 가 수직을 고용하여 수직초가와 수직선을 제공하고 노전을 관리하도록 하였다. 노전을 팔 때 守直船과 守直草家를 같이 끼워 파는 예는 대체로 매매가가 높은 노 전에서 보인다. 1843년에 안명로는 천자도에 있는 노전을 1,000냥에 팔면서 수직초가 3 칸과 수직선 1척을 50냥에 같이 팔았으며(120), 황민숙은 가락장 남포원에 있는 11곳 의 노전을 1,600냥에, 초가 4칸과 수직선 1척을 50냥에 같이 팔았고(172), 박일영은 김 해 두응치도와 가락면 남벌원에 있는 화령궁, 용동궁, 선희궁 노전을 8,950냥에 팔면서 上下 守直家도 같이 포함시켰다(88). 세 건 모두 매매가가 1,000냥을 넘는 규모가 큰 노전이었다. 김해 양산 노전지역에서는 노전이 없으면 수직 노릇을 하는 것이 주요한 생활 방도 였다. 육지에서 토지가 없는 사람들이 남의 땅을 빌어 작인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居浦

- 282 國史館論叢 第63輯 之民 亦無蘆田 則勸證他土自爲禁養守直 하는 것이 강가 사는 사람들의 行例였다(A).92) 수직이 하는 일은 궁방 노전 감관의 주요한 일인 수세 상납을 빼면 관리면에서는 그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용동궁에서는 배경민이 투탁한 김해부 신도를 면세절수 한 뒤 감관이 할 일을 정하고 있다. 노전 관리와 관계되는 부분만을 추려 보면, ① 신 도에서 나는 노초는 宮鹽煮納之物이므로 본읍은 물론 다른 지역의 무지 완민배가 흑 시 偸伐할 때는 감관이 바로 관에 고하여 엄하게 다스리고 투벌한 것은 하나 하나 거 두어 들여 세납에 첨부할 것,93) ② 본도기지내 어망선이 무난왕래하며 고기를 잡을 때 노근을 손상시킬 수 있으니 각별히 막아 금지할 것,94) ③ 노전에 소를 풀어 놓아 진황되는 일을 금지하고, 만약 금지를 어기는 소주인은 징치하고 소는 속공할 것들이 다.95) 이러한 것들은 수직도 담당할 일이었다. 수직이 노전을 관리하면서 해야 할 제일 큰 일은 몰래 갈대를 베어 가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었다. 노전주가 사는 곳과 노전 사이에 거리가 멀면 자주 가보지 못하 므로 갈대를 몰래 베어가는 일이 발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A).96) 또 갈대의 어린 싹 은 논의 거름으로 사용하므로 갈대를 베는 계절이 아니어도 항상 수직을 두어 노전을 감시할 필요가 있었다.97) 수직은 노전을 관리하는 댓가로 갈대의 일부를 떼어 받았다. 그때 댓가는 특별한 급료가 아니라 浦狭價 라 하여 주위에 나는 짧은 갈대를 베어 가도록 허락하는 것이 관습이었다고 한다.98) 수직은 관리만 아니라 이용권 전체를 차지하여 갈대를 베어 판매하거나 스스로 이 용하기도 하였다. 노전주에게 노전을 임차하는 형식을 띠는 것이다. 그럴 때는 수직이 관에 노전세를 물고, 일반전답의 작인이 양두세를 무는 것처럼 노전주에게 노전가의 1/5에 해당하는 화초가=노전지대를 물었다. 관할하는 노전 규모가 작을 때는 스스로 92) 德島面居 姜尙仁 右謹陳所志矣段 居陸之民 元無田庄 則勸證他土自爲幷食作者 乃是農業之行規也 居浦之民 亦 無蘆田 則勸證他土自爲禁養守直 乃是水邊之行例也 是故矣身去年五月日良中 本面渚島帳蘆田 一庫折價錢參佰伍拾捌兩 勸賣於熊川主浦居權尙信處 而ー願爲守直是遣 一願爲禾草發賣之人是 加尼 93) 주 46)과 같음. 94) 龍洞宮謄錄, 戊午(1858) 2월 27일 完文. 95) 위의 책, 壬辰(1892) 8월 21일 金海府新島釐弊完文. 96) 左部居 金鼎淳 右謹陳所志矣段 矣身蘆田一庫 在於七山帳昆池員節字及弗字是乎所 七山與左部所居稍遠 故不 得常視 但當刈草之際往視 則移生處一庫蘆草段 土亭居金麗卿爲名人 毎毎先矣身刈去是乎所 矣 身欲爲一番聚訟是乎矣 遠居之致無暇聚訟矣 今已量田事不遠是乎 則不可不觀其形地 而定界乙 仍于不得已仰訴爲去乎 使道 處分 庚辰 七月 日 97) 주 3)과 같음. 98) 위와 같음.

- 283 갈대를 베어 팔았고, 규모가 클 때는 수직이 노전을 관리하고, 갈대를 벨 철에 하루에 100단 정도를 벨 수 있는 인부를 고용하여 1척에 25 30냥 값으로 팔아 노전세와 지 대를 바치고 나머지 몫을 자신이 차지하였을 것이다. 수직 가운데는 稍富之人, 饒富之人 이 존재하고 있었다. 앞에서 본 張錫源 노전의 수직 張東俊이 그런 사람이었다.99) 초부지인 요부지인 으로서 수직이 되기도 했겠지 만, 김해 양산의 노전지대에서는 魚利와 蘆利를 따라서도 모두 족히 자생할 수 있다 거나, 그 수확이 전답보다도 나을 정도였다 고 하는 지적이 흔한 것에서 알 수 있듯 이 큰 노전주의 수직이 되어 노전을 관리 이용하면서 초부지인 요부지인 이 되는 사 람도 있었을 것이다. Ⅳ. 맺 음 말 낙동강 하구에 형성된 김해 양산의 노전지대는 조선후기 전국에서 으뜸가는 갈대 생산지였다. 노전에서 나는 갈대는 자염과 취사의 땔감, 자리와 방석, 발, 삿갓, 지붕 의 재료로 널리 이용할 수 있었다. 노전은 개간하여 전답과 염전을 만들 수도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노전은 토지 집적과 상업적 농업의 주요한 대상지였다. 궁방 아문에서는 17세기 이후 주로 절수의 방법으로 김해 양산지역의 노전을 집적 하기 시작하였다. 궁방은 김해 양산의 노전을 무주지 명목으로 절수하였으나, 절수 대 상에는 이미 민인들이 관에서 입안 입지를 발급받고 갈대를 심거나 개간하여 소유권 을 행사하고 있는 노전이 다수 포함되었다. 절수한 뒤에 민인들이 갈대를 심거나 개 간하기도 하였다. 어느 경부든 궁방에서는 민인들의 입안 입지, 植蘆, 起耕者爲主에 근거한 소유권을 박탈할 수는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절수 노전에서 궁방은 급 가매득지에서와 같은 지대를 거두어 들일 수도 없었다. 18세기 후반 이후 19세기 후반까지 김해 양산 절수 노전에서 궁방의 수취액은 유토 면세지의 경우 매결에 3냥 5전이었다. 3냥 5전에서 2냥 3전은 민결노전의 노전세에 해당하며, 국가로부터 양도받은 免稅條였고, 1냥 3전이 지대에 해당하는 토세조였다. 궁방 절수 노전에서 궁방 수취액은 3냥 5전이었지만, 민인들이 부담하는 총액은 다양 한 잡비를 포함하여 대략 5냥 4전 5분 수준이었다. 민결노전에서 관에 내는 노전세 총액도 이와 같았다. 궁방 절수 노전의 노전주들은 절수지라도 노세전의 귀속처가 다를 뿐, 민결 노전과 다름없이 자기소유지로 인식하고 전상매매, 상속, 전당 등 소유권을 행사하였으며, 관 으로부터도 그 소유권을 확인받고 있었다. 궁방에서도 그 권리 행사에 별다른 제약을 99) 주 38) 참조.

- 284 國史館論叢 第63輯 가하지 않았으며, 양안에 기주 로 표시하여 실제 소유자의 소유권을 현실적으로 인정 하고 있었다. 그러나 궁방도 수세상납이 문제가 되거나, 경계가 문란하다고 판단하면 양전을 통하여 궁방 절수지임을 확인하고 있다. 궁방 절수 노전에서 노전세는 노전주들이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노전이 소 수에 집적되면서 일반 전답의 작인과 같은 존재인 노전 수직이 담당하는 것이 현실이 었다. 따라서 김해 양산 노전지대에서 궁방 절수 노전의 소유구조는 궁방-노전주 또는 궁방-노전주-수직 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를 궁방 노전세 부담과 노전주의 노전지대 수취를 포함하여 소유구조를 좀더 세분하면 ① 궁방(궁방복가수취)-노전 주(소유 관리 이용, 궁방복가부담), ② 궁방(궁방복가수취)-노전주(소유 관리, 궁방 복가부담, 노전화초수취)-이용자(노전화초부담), ③ 궁방(궁방복가수취)-노전주(소 유, 노전화초수취)-수직(관리 이용, 궁방복가 노전화초부담), ④ 궁방(궁방복가수 취)-노전주(소유, 노전화초수취)-수직(관리, 노전복가부담)-이용자(노전화초부담) 등 다양한 형태를 취하게 된다. 궁방에서는 노전 사정에 밝고 영향력 있는 지방의 유력자를 노전 감관과 사음으로 임명하여 노전을 관리하고 수세상납하는 임무를 맡겼다. 그 댓가로 이들에게는 신역 과 연호 잡역을 면제해 주었다. 그러나 19세기, 특히 후반에 들어서는 감관 사음의 힘 만으로 노전을 원활하게 관리하기가 어려웠다. 노전주, 수직, 갈대 이용자들의 거납이 빈번하게 발생하였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궁방은 왕실의 권위를 바탕으로 김해 양산 관 또는 경상감영의 힘에 의존하여 노전 수세를 관철해 나갔다. 김해 양산 노전지대에서 일반인들이 노전 소유권을 획득하는 최초의 형태는 관에 입안 또는 입지를 요청하여 발급받는 것이었다. 관에서 공증한 입안 입지는 소유권 행사에서 지속적인 효력을 지니고 있었다. 입안 입지와 함께 노전으로서 가치를 지니 려면 노동력과 물자를 투입한 植蘆 또는 개간이 따라야 했다. 이러한 노전은 상속, 매 매, 전당의 방법으로 소유권의 이동이 이루어졌다. 19세기 김해 양산의 노전은 소수의 노전주들에 다수의 노전이 집적되고 있었다. 많은 노전을 소유하고 있는 층은 주로 幼學 양반이었다. 그들은 아직까지도 상대적으로 더 많은 부를 소유하고 있던 층이었 으며, 그들의 신분상의 처지가 입안 입지를 발급받거나, 소유권 분쟁을 처리할 때 유 리하게 작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전 소유자들 가운데는 염전도 함께 소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들은 자기 노전의 관리와 경영에 적극적이었으며, 갈대를 자염용으로 직접 이용하였다. 그러나 많은 노전을 소유하고 있는 대부분의 양반 유생 노전주들은 노전을 직접 관리 경영하 여 갈대를 상품화하기 보다는 노전가의 1/5에 해당하는 노전지대 수입, 또는 노전 매 매차익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이 점은 양반 출신의 소수 노전주들에 노전이 집적되 는 요인이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예가 서판서가에 의한 노전 집중이었다. 한양의 서판 서가는 1830년대부터 시작하여 1880년대에 이르기까지 김해 양산에서 300결이 넘는

- 285 - 노전을 매득하였던 것이다. 조선후기 김해 양산 노전에서 나는 갈대 가운데 질이 좀 떨어지는 秋木은 염부의 자염용으로 많이 이용하였으며, 물이 잠긴 곳에서 나는 크고 질이 좋은 正蘆는 온돌 에 까는 갈대자리. 삿갓을 짜는데 이용하였다. 갈대 제품은 만드는데 특별한 도구와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으면서도 농촌 사회의 중요한 생필품이었으므로 생산과 판 매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노전은 개간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고, 갈대는 자염과 수공업 제품의 원료로 이용 되어 상품성이 높았기 때문에 조선후기 김해 양산 지역의 노전과 갈대 값은 계속 오 르고 있었다. 노전과 갈대 값의 상승은 노전 매매를 촉진시켰고, 노전 집적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집 가까이에 소규모 노전을 가지고 있는 노전주는 관리 경영을 직접 담당하였으나, 노전이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규모가 클 때는 관리인인 수직을 두어 관리하 도록 하였다. 김해 양산 노전 지대에서는 자신의 노전이 없으면 수직 노릇을 하는 것 이 중요한 생활 방도였다. 수직은 관리만이 아니라, 노전주에게 노전을 임차하여 경영 하고 갈대를 베어 판매하거나 이용하면서 노전세를 물고, 노전주에게 노전가의 1/5을 화초가=노전지대로 바치고 나머지 몫을 차지하여 이익을 도모하였다. 그를 통하여 부 를 축적하는 수직도 있었다. 조선후기 김해 양산의 노전지대에서 궁방은 노전을 절수하여 3냥 5전의 노전세를 받아들였다. 양반 유생 중심의 노전주들은 노전가의 1/5에 해당하는 화초가=노전지대 를 수취하고 노전을 매매하여 차익을 도모하였다. 일부 노전주는 염전을 같이 소유하 고 노전 경영에 적극 참여하였다. 수직은 노전을 임차하여 관리 경영하면서 노전세와 노전지대를 바치고 남는 몫으로 자신의 부를 축적하고자 하였다. 김해 양산의 노전지 대에서는 권력을 바탕으로 노전세를 수취하는 궁방과, 토지 상품화를 바탕으로 노전 을 집적하고 노전 지대를 수취하는 노전주, 갈대 상품화를 바탕으로 노전을 경영하고 이용하던 일부 노전주와 수직이 하나의 노전을 둘러싸고 이해관계를 달리하면서 서로 대립 갈등하고 있었다. 이들 가운데 어느세력이 주도가 되어 다른세력과 연합하고, 어 떤 방향으로 역사가 움직여 가고 있었는가 하는 문제는 19세기 후반 변혁운동의 흐 름, 이행의 경로와 직간접으로 연결되는 것이기도 하다.

- 290 - 國史館論叢 第63輯 *참고 : 매매문기 가운데 특징적인 내용, 번호는 위 일련번호와 같음, 궁 아문은 해 당궁 아문의 절수지 (1) 금위영둔 (16) 11깃내 10깃, 1깃은 동래사하 김기서깃, 1870년 40냥에 매득 합 490냥 (20) 용동궁 선희궁 세납처 (24) 卜5냥 9전 9분, 蘆木 土價 太高 환퇴차 수년 힐난, 70냥을 더 받고 140냥에 매매

- 291 (25) 작자 김상진, 본결복 56-1 원세전 3냥 5분 본부납, 세전 50냥 매년 2월내 수납 (28) 1869년에 수봉전평 니생처 230냥에 매득 幷付 (31) 용동궁, 3-20-0에서 田卜 80-0 제 2-40-0 (32) 명안공주방 (34) 용동궁 (39) 용동궁속 (40) 선희궁세납 민결노전, 선희궁세전 13냥 4전 9분 (42) 1-08-1 내 민결 0-07-8, 시장 0-32-1, 양진 0-67-2 (47) 용동궁세납 (48) 용동궁 (49) 용동궁, 결부는 5냥씩 구주 김재중전납, 계 이복장, 황대청, 정오천, 황학천, 송지숙 (54) 작자 김상진, 본결복 53-0 원세전 2냥 8전 9분 본부납, 세전 77냥 5전 매년 2월내 수납 (55) 卜 대전 5냥 9전 9분 (59) 용동궁 (60) 용동궁 (62) 용동궁, 노세 5냥 2전 4분 (64) 용동궁, 11깃내 1깃 동래사하 김기서깃, 결복 1-58-3, 전 7냥 9전 2분 (74) 선희궁 1-07-8, 용동궁 0-32-0 (78) 용동궁, 3깃 중 2깃 김여균차지, 1깃매매 (85) 명안공주방 (88) 화령궁복 18-56-3, 용동궁복 3-80-5, 선희궁복 86-6, 上下守直家併 (96) 1821년에 방매했다가 헐가라서 환퇴의도, 80냥을 더받고 방매 (97) 17깃에서 15깃은 각각 산매, 자기 차지 2깃 매매 (99) 전주 배종찬, 필 守直 김종현 (100) 정우범 최국평 3인 입안처 중 1깃, 노초는 삼인이 돌아가면서 刈取 (103) 용동궁 (110) 1797년조 노세와 삼수량은 賣人이 납부 (113) 용동궁, 세전 2냥은 매득주가 해마다 납부 (114) 용동궁, 세전 10냥 2전 7분 (116) 선희궁 (119) 작자 김상진, 본결복 39-7 원세전 2냥 1전 7분 본부납, 세전 22냥 5전 매년 2월 수납 (120) 노전가 1,000냥, 守直草家 3칸 守直船 1척가 50냥, 합 1,050냥 (131) 筆 時尊位 유학 김종현 (132) 結卜 稅文 2냥 (133) 용동궁

- 292 國史館論叢 第63輯 (134) 용동궁 (135) 용동궁, 10척지지 세전 26냥 7전 4분, 8척지지 세전 21냥 4전 4분 곳을 매매 (137) 草家2間併 (139) 선희궁 용동궁 양궁집복 18-89-8 (140) 용동궁복 4-53-0 처, 皮牟田 5석지지, 노전 9척지지, 禾穀段半分之意相納 (149) 3인 작계노전 1깃 (151) 收稅錢 75냥 舊主當納 (153) 용동궁 선희궁세납 (158) 용동궁 (166) 이 노전이 불모지이므로 同員 熊頭노전 加價相換 (169) 노전 1고 禾幷 100냥, 답 20夜 8두지 40냥, 피모전 5고 15두지 15냥, 농우 1 척 15냥 합 170냥 (172) 노전 1,600냥, 守直船 1척 草家 4칸가 50냥, 합전 1,650냥 (175) 계원 이좌원, 김영복, 강순기, 강진욱 (176) 노전주 김성철, 김성희, 김여중 (177) 同里가 分里되면서 應達里 몫 1/5. 노전주 洞員 14명 성명 (178) 노전주 응달리 동원 10명 성명, 각양 관납 無路, 사망 이산, 洞中公議로 매매 (179) 노전주 長派宗孫 유학 조기원, 次派宗孫 조제 (180) 노전주 계원 장동율, 배영권, 김윤항 (181) 노전주 將廳任 김두영, 千摠 백민석, 左廳行首 이수우, 右廳行首 정남두 (182) 명안공주방, 노전주 계장 김성언, 소임 설쾌익 (183) 계원 11깃내 10깃, 노전주 계장 유성록과 계원 9명 성명 (184) 노전주 최봉규, 許奴 용득 (185) 충훈부둔, 新造船 1척, 노전주 유학 이양진, 김진동, 勳府세전 20냥 매년 時作者 담당 (186) 용동궁, 결세 5냥, 노전주 계장 신정택 계원 박지화, 證筆 收稅幹事人 김종현 (187) 卜 1냥 5분, 노전주 김윤철, 김두한, 收稅梁山泥池人 김종현 (188) 용동궁세납, 노전주 정암석, 조득필, 황국손, 황창선, 이석진 모두 유학 (189) 노전주 계장 김득곤, 계원 김상열, 황선호, 황영오, 송원조, 최광주, 이일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