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논문은 2002년도 한국학술진흥재단 신진 연구인력 연구장려금 지원으로 연구되었음.
慶北大學校 文學博士 學位論文 朝鮮後期 少論系 文人의 文學論 硏究 大學院 漢文學科 漢文學專攻 金 英 2005 年 珠 12月 慶北大學校 大學院
朝鮮後期 少論系 文人의 文學論 硏究 이 論文을 文學博士 學位論文으로 提出함 大學院 漢文學科 漢文學專攻 金 英 指導敎授 珠 黃 渭 周 金英珠의 文學博士 學位論文을 認准함 2 0 0 5年 12月 委員長 慶北大學校 大學院委員會
목 차 Ⅰ. 序論 1 Ⅱ. 少論系의 形成과 詩文學論의 基底 13 1. 少論系의 形成과 政治的 浮沒 13 1) 少論系 形成의 動因과 그 特性 13 2) 政治的 沒落과 實務官僚로의 轉換 21 2. 少論系 學術 性向의 內包와 外延 27 1) 陽明學 受容에 나타난 開放的 學問 傳統 27 2) 實證的, 反尊華的 歷史 敍述 42 3) 西學 收容에 나타난 科學的 認識 態度 57 4) 古董蒐集에 나타난 玩物喪志 槪念의 瓦解 73 Ⅲ. 道文 關係論의 再樹立과 擴張 99 1. 務實的 道文論 99 1) 辭理兼備 文質彬彬論의 提唱 99 2) 道文分離로의 轉變 111 2. 文章公物論과 效用性 120 1) 批評機材로서의 公物的 文章論 120 2) 實用性이 강조된 公物的 文章論 127 3. 文有三長과 文史一致 觀念으로의 擴張 134 1) 道氣 및 文史觀念으로의 擴張 134 - i -
2) 文史一致論의 主唱 141 Ⅳ. 自得重視 文學理論의 提唱과 演變 147 1. 自得重視 創作 論理의 前提 147 2. 自得重視 創作論理의 諸樣相 195 1) 南九萬의 守法妙悟論과 趙龜命의 脫法自言論 195 2) 李廷變의 本色論과 徐明膺의 自作一體論 199 3) 李匡師의 自成一家論과 李建昌의 惟吾心愜論 203 4) 洪良浩 洪敬謨의 神境論 206 5) 徐瀅修와 徐有榘의 光怪 淸氣論 209 Ⅴ. 自國語 重視의 創作論理와 그 實踐 216 1. 正音의 認識 樣相 216 1) 正音의 起源 및 制字原理에 나타난 國文 擁護 216 2) 諺解 및 朝鮮漢字音의 價値 肯定 227 2. 國文詩歌論의 展開와 그 實踐 234 Ⅵ. 結論 258 參考文獻 267 영문초록 293 - ii -
Ⅰ. 序 論 본 논문은 17세기 말에서 19세기까지 조선 문단에서 독특한 문학적 성과를 이루어 낸 소론계 문학론의 제양상을 조망하고 그 의의를 구명함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少論 이라는 정치집단에 문학집단 의 의미 부여가 타당한 가에 대한 검토가 이루어져야 한다. 만약 문학적 측면에서 少論系文學 이라는 용 어의 사용이 가능하다면, 조선후기 한문학 연구에서 특별히 그들의 문학을 주목 하는 이유와 연구 범위, 기존 연구의 검토, 본 논문의 전개 방법 등에 대한 설명 이 이루어져야 한다. 아래에서 위의 순서대로 논의를 전개해 보기로 한다. 첫째, 정치집단 소론 에 대한 문학 유파적 의미 부여의 타당성 검토이다. 조선후기는 임진 병자의 양란을 겪으면서 사회의 전 방면이 크게 변모하였 다. 임란 당시 주전론을 제창하며 정국을 주도하던 北人들은 1623년의 인조반 정을 계기로 西人과 南人의 연립 세력에게 주도권을 빼앗긴다. 공신세력에 의해 주도되는 조선의 정계에 공신 비공신 실무관료 등의 집단과 효종조 이후 정국 에 참여하게 되는 산림세력, 그리고 연혼 지연 등의 관계에 의한 파벌 등의 내 부적 요소들이 복잡하게 작용하며 이후의 정국에서 서로 다른 정파의 출현이 예 고되었다. 병자호란 후에는 尊周攘夷 의 성리학적 명분에 의거한 북벌계획이 수립되면서 군비의 확충에 주력하였다. 이 사업은 경제적 군사적 기반의 공고화를 통해 자 파의 기반을 강화하려는 서인 산림계가 주도하였다. 이들과 달리, 서인이면서도 관료적 성향이 비교적 강한 南九萬, 崔錫鼎, 朴世采 등은 비현실적인 북벌 논의 보다 安民益國 의 현실 논리에 바탕 한 수취제도의 개선 등을 통해 사회 경제 - 1 -
의 안정에 주력하였다. 특히 金益勳 사건 을 계기로 구체화되는 정국 운영 방식 의 대립은 곧 정파의 대립과 연계되었다. 전자가 훈척에 동조하는 대신들 위주 였다면 후자는 三司의 年少士流와 그에 동조하는 대신이 중심이 되었다. 이것은 노론과 소론의 분립 계기로 작용한다. 삼사의 연소 사류들에 의해 주도되던 소론계는 숙종조 이후의 정국의 변화에 따라 구성원의 속성이 변하였다. 소론계의 연소 사류가 대거 숙청되는 김익훈 사 건과 閔妃 폐위 사건은 소론계가 남구만, 박세채, 정태화, 최석정 등의 중신 주 도의 정치집단으로 변모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張禧嬪의 처벌과 丁酉獨對 사 건에 연루된 소론계의 대신들이 실세한 영 정조대에는 李光佐, 趙文命, 宋寅明 등의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沈錥 家, 李眞儒 家 등이 국정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庚申大處分과 乙亥獄事로 소론계의 대부분이 처형되는 과정에서 심육 일가와 이 진유 일가 등의 소론계 명문이 숙청되어 몰락한 반면, 탕평론자로서 노론 정권에 의 참여를 통해 세도정치기에 이르기까지 실무관료로서 존속하는 부류가 있었다. 최창대의 문인 李宗城과 그의 후손인 李裕元, 李裕承을 비롯하여 정태화의 후손 으로 정조의 신임을 받은 鄭東浚, 鄭元容, 李時秀 李晩秀 형제, 李相璜, 徐命善 과 金尙喆, 洪良浩, 徐命膺, 徐瀅修, 徐有榘 등이 그들이다. 둘째, 소론계가 정치적 변신을 거듭하며 현실에 적응할 수 있었던 근거의 하 나인 학문 사상적 특성이다. 주로 成渾 尹煌 尹宣擧 尹拯 南九萬 朴世堂 으로 연결되는 이들의 학 문 계보는 성혼의 학통을 계승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성혼의 학문 사상의 특징 은 대체로 탈주자학적 성향, 개방적 성향, 양명학 수용, 실학정신 등으로 파악 된다.1) 특히 성혼의 평생의 지기였던 李珥가 자신의 학문적 특성을 견해에 밝 1) 소론계를 우계학통의 계승자로 정의하는 기존 연구에는 다음과 같다.; 황의동, 우 계학의 전승과 그 학풍, 범한철학 28집, 범한철학회, 2003; 정옥자, 조선후기 중화사상 연구, 일지사, 1998; 이동희, 우계 성리설의 특성과 사상사적 의의, 한국학논집 24, 계명대 한국학연구소, 1997; 성교진, 율곡과 우계의 성리학 논 - 2 -
다 고 하고 우계는 몸가짐이 독실하다 고 평한 것이 그것을 입증한다. 실천 을 위한 학문 방법으로 우계가 강조한 것은 自得 이었다. 大東野乘 등에 전하는 우계의 일화를 통하여 자득 을 중시하는 그의 학문 방법이 이미 당대에 널리 알 려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우계의 학문 경향을 전수받은 張維 崔鳴吉 李時白 등의 문인과 그 자손들을 중심으로 陽明學의 가학 전통이 나타났다. 그 들은 양명학의 도입기부터 주관적인 內省 보다는 실용적 측면 에서 양명학의 활 용 방안을 강구하였다. 그 예로, 조익은 理 를 보편적 진리 라는 이념이 아니라 公物 이라는 공리적이고 구체적인 개념으로 이해하였다. 이와 같은 탈주자학적 사고방식과 개방적 학문 태도는 서학의 수용과 역사 서술, 장서와 고동 수집을 가능케 했다. 특히 주체적 역사 인식과 완물적인 고동 수집의 취미는 이들이 문 학에서 性情의 올바름 보다는 성정의 진솔함 을 추구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또 우리의 문화적 유산들에 관심을 갖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위의 사실들을 통해, 정치적 학문적 특성을 공유한 소론계의 문학 집단으로서 의 가능성은 이미 충 분하다고 할 수 있다. 문학 집단으로서의 소론계 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유가 문학 구성의 기본 개념인 道文 에 대한 이해 태도이다. 17세기 중엽의 남구만에서부터 그들은 道와 文의 가치를 종속적이기 보다는 상보적인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하였고 이러한 논의는 최창대에 이르러 구체화된 다. 그리고 한걸음 더 나아가 道 文, 각각의 특성과 역할을 인식하는 道文의 分離를 제창함과 아울러 문학의 기본 범주인 道와 文을 넘어 시대 현실을 문학 방면에 적극 수용한다는 차원에서 文 과 史 를 문학 구성의 새로운 범주로 상정 하였다. 그 결과, 창작 주체의 개성을 중시하는 自得 重視 의 문학론이 제기됨 변, 율곡사상연구 1집, 율곡학회, 1994; 원용문, 우계 성혼론, 한문학논집 근역한문학회, 1994; 한국학문헌연구소, (牛溪門徒) 坡山及門諸賢集, 아세아문화 사, 1982 등. - 3 -
과 아울러 기왕의 문학 창작에서 소외되어 있던 口碑傳承의 민족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우리의 神話 傳說 民譚 樂舞 時調 등을 구체적인 기록으로 남기려 는 문학적 움직임을 보였다. 그것이 바로 소론계의 國文詩歌 擁護論의 제창과 漢譯 작업이다. 이상의 소론계의 정치적 학문적 문학적 특성을 고려할 때, 조선후기 한문학 에서의 소론계 문인의 문학론에 대한 연구 는 충분한 타당성을 가진다. 그렇다 면 연구의 범위는 어떻게 할 것인가? 17세기 후반의 소론계의 성립 과정에서 연구가 시작될 것은 자명하지만 그 범주와 하한선이 문제다. 먼저 소론계 문학의 범주는 위에 열거한 소론계의 정치적, 학문적 특성과 함 께 소론계 문학의 특징으로 거론한 전진적 도문 관념 을 주창하거나 자득 을 중 시하는 문학 논리를 전개한 경우 그리고 국문시가에 대한 옹호적 태도를 보인 인물의 세 가지 범주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로 한정한다. 그 결과로 제시되는 인물들이 남구만, 박세당, 최석정, 최창대, 조귀명, 이정섭, 이광사, 이영익, 서 유구, 서명응, 이상황, 홍량호, 홍경모, 신위, 이유원, 남도진 등이다. 소론계 문학 연구의 범주가 정해짐으로 인해 하한선 역시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위 세 가지의 양상이 구체적으로 확인되고 소론 이라는 명칭이 유의미한 경우는 1896 년 大韓帝國 이라는 새로운 국가명이 확정되기 이전의 朝鮮 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에 소론계 문학의 하한선은 1896년 즉, 거의 19세기 후반 까지가 된다. 소론계와 관련한 기존 연구 성과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것은 歷史學界2)와 2) 역사학계에서 소론계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黃元九의 實學派의 史學理論 ( 연세논총 7집, 1970)과 李佑成 姜萬吉의 韓國의 歷史認識 (創作과批評社, 1976)과 李佑成의 韓國의 歷史象 (創作과批評社, 1982) 등에서이다. 그러나 이 연구에서는 소론계 학인들의 역사 인식 및 그들의 역사 서술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 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단지, 실학파 역사 서술 연구의 일부로서 고찰 될 뿐이었 다. 소론계에 대한 단독 연구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소론계 학자들의 역사 서술 - 4 -
哲學界3)에서 먼저 확인된다. 역사와 철학 분야에서는 일찍부터 소론계의 양명학 적 또는 실학적 특성에 주목하여 그들의 역사의식과 양명학적 성향 그리고 탈주 자학적 성향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에 비하여 한문학계에서 소론계 문학에 주목을 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최 근의 일이며 그 출발은 주로 작가 연구였다. 소론계의 문인 가운데는 申緯4), 李夏坤5), 洪良浩6), 徐有榘7), 趙龜命8), 徐 연구에서이다. 이후로 조선후기의 黨爭과 관련하여 소론계에 주목한 경우가 있다. 이은순과 차장섭, 이성무, 이이화 등은 당쟁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 과정에서 정치집 단으로서의 소론계의 기능과 역할에 주목하였다. 유봉학은 조선후기의 학계와 지식 인 (신구문화사, 1998)에서 조선후기 학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으로 소론계를 서술하 였다. 그러나 책의 전체 구성에서 소론계의 비중은 극히 미약하였다. 결론적으로 말 한다면, 소론계에 대한 역사학계의 연구 성과는 질적인 측면이나 양적인 측면에서, 전체 소론계의 역사인식 태도를 고찰하는 범주에까지는 미치지 못하고 주로 조선후 기 당쟁사 혹은 사서 편찬, 역사 인식을 서술하는 가운데 언급하고 있는 정도이다. 3) 철학계에서는 1927년에 李能和의 朝鮮儒界之陽明學派 ( 靑史學叢 25집, 1937) 을 필두로 李丙燾의 陽明學問題 ( 韓國儒學史, 1937), 白樂濬의 國學論叢 (1956), 尹南漢의 朝鮮時代의 陽明學 硏究 (집문당, 1982), 劉明鍾의 韓國의 陽 明學 (동화출판공사, 1983), 崔在穆의 동아시아의 양명학 (예문서원, 1996)에 이 르기까지 지속적인 연구가 수행되었다. 그리하여 1997년에는 한국 양명학을 전문적 으로 연구하는 韓國陽明學會 가 성립되고 학회지 陽明學 이 발간되어 폭넓은 연구 가 이루어지고 있다. 아울러 개별 소론계의 작가들에 대한 연구도 축적되어 趙翼 朴世堂 尹拯 朴世采 鄭齊斗 徐命膺 林永 등에 대한 개별적인 연구가 많이 이루 어졌다.(소논문 제명은 참고문헌 조항 참조.) 4) ① 손팔주, 紫霞詩의 淵源 硏究, 논문집 9, 부산여대, 1978. ② 정원표, 紫霞 申緯의 漢詩 硏究, 서울대 박사학위 논문, 1987. ③ 강정서, 申緯 詩의 構造와 詩意識 연구, 경북대 박사학위 논문, 2003. ④ 유성준, 申紫霞詩의 源流와 風格, 中國唐詩硏究, 下, 국학자료원, 1994.,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1994; ---, (澹 5) ① 李相周, 澹軒 李夏坤 文學의 硏究 軒)李夏坤文學의 硏究, 梨花文化出版社, 2003. ② 朴用萬, 澹軒 李夏坤의 草坪二 十五詠 小考, 인문학지 21, 忠北大 人文科 學硏究所, 2001. ③ 羅鍾冕, 澹軒 李夏坤의 文藝論에 관한 硏究, 온지논총 6, 溫知學會, 2000. 6) ① 成範重, 詩調의 漢譯과 그 形象化의 問題, 울산어문논집 6, 울산대 국문학 과, 1990. ② 陳在敎, 洪良造 詩文學에 있어서 民族情緖의 受容과 形象化, 성균관 대 박사학위 논문, 1992; ---, 北塞雜徭에 나타난 북관의 진경과 변경민의 삶, 한국학논집 37,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2003. - 5 -
命膺9), 李匡師10), 李裕元11), 南九萬12), 李廷爕13) 그리고 朴世堂14) 李鍾 7) ① 鄭雨峰, 19세기 詩論 硏究,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1992. ② 姜玟求, 楓石 徐有榘의 詩經學 硏究 序說, 泮橋語文硏究 9, 반교어문연구회, 1998. ③ 姜明官, 楓石 徐有榘의 散文論, 한국학논집 34, 한양대 한국학연구소, 2000. ④ 조창 록, 楓石 徐有榘에 대한 한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문, 2003. ⑤ 한민섭, 楓, 고려대 석사학위 논문, 2000. 石 徐有榘 文學 硏究 18세기 사대부층의 새로운 문예인식 - 동계 조귀명의 문예 인식과 문 8) ① 이종호,, 민족사의 전개와 그 문화 - 碧史 李佑成 敎授 停年退職 紀念論叢, 창작과 장론 비평사, 1990. ② 姜玟求, 東谿 趙龜命의 文學論과 散文世界, 성대 석사학위 논 英祖代 文學論과 批評에 對한 硏究 - 趙龜命 林象鼎 李天輔 李 문, 1991; ---,, 성대 박사학위 논문, 1998. ③ 李弘湜, 東谿 趙龜命의 主意論的 廷爕을 중심으로 글쓰기와 奇의 미학, 한양대 석사학위 논문, 2001. ④ 나종면, 東谿의 文藝認識 과 書畵論, 동방학 5, 한서대 동양고전연구소, 1999. 9) ① 任侑炅, 徐命膺의 文學觀 및 詩經論, 한국한문학연구 9 10합집, 한국한문 학회, 1987. ② 申福浩, 18世紀 館閣文學 硏究, 고대 박사학위 논문, 2003. ③ 김문식, 徐命膺 저술의 종류와 특징, 한국의 경학과 주자학, 죽부 이지형교 수 정년퇴직 기념논문집 간행위원회, 1996. ④ 이봉호, 서명응의 道德指歸 에 나타 난 역리와 內丹思想의 일치, 한국사상과 문화, 한국사상문화학회, 2003. 10) ① 강석중, 李匡師 文論 硏究, 서울대 석사학위 논문, 1991. ② 윤경화, 圓嶠 李匡師의 文學論과 漢詩 硏究, 경북대 석사학위 논문, 2001. ③ 김남기, 圓嶠 李匡師의 號說에 대하여, 문헌과 해석 봄호, 문헌과 해석사, 2001; 김영숙, 李匡師의 破鏡合 구성과 삼국사기 薛氏女傳 수용 전승 양상 한민족어문학 45집, 한민족어문학회, 2004. ④ 송하경, 圓嶠 李匡師의 美學思想, 양명학 13 집, 양명학연구회, 2005. ⑤ 이완우, 圓嶠 李匡師의 書藝論 硏究, 미술사학연 李匡師 文藝論의 樣相, 규장 구 190/191호, 한국미술사 학회, 1991; 나종면, 각 27집, 서울대 도서관, 2004. 11) ① 朴福仙, 李裕元의 嘉梧小樂府, 수련어문논집 6, 수련어문학회, 1978. ② 金榮淑, 李裕元의 <海東樂府> 硏究, 어문학 56, 語文學會, 1995. ③ 李敏弘, 橘山 李裕元論, 韓國漢文學硏究 24, 韓國漢文學硏究會, 1999. 남구만의 문학론 연구, 퇴계학과 한국문화 33집, 2003.8. ② 노규 12) ① 김영주, 호, 약천 남구만의 문학과 사상, 남구만 선양 사업을 위한 문헌적 연구, 약천 연구회. 2003.9; 양언석, 남구만의 문학세계 연구, 한국문예비평학회, 한국문 예비평연구, 2004. ③ 성당제, 약천 남구만 문학의 연구, 성균관대 박사학위 논 문, 2004. 13) ① 김윤조, 樗村 李廷爕의 生涯와 文學, 한국한문학연구 21, 한국한문학회, 1991. ② 강민구, 英祖代 文學論과 批評에 대한 硏究, 성대 박사학위 논문, 1997; ---, 李廷爕의 詩에 대한 考察 - 現實批判的 詩를 中心으로, 한국한문학 연구 14, 한국한문학회, 1998. - 6 -
徽15) 李匡呂16) 崔昌大17) 吳道一18) 등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이 같은 작가 연구는 대체로 작가의 생애와 학문 사상적 배경을 바탕으로 문학론 연구, 작품 분석 연구가 진행되어 상당한 성과를 축적하였다. 그렇지만 대체적으로 개 별 작가에 대한 연구에만 집중하고 이와 같은 작가들을 전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방법 탐색과 실천이 부족하였다. 그리하여 조선후기 한문학에서의 이들의 문학적 위치와 의미가 제대로 파악되지 못하는 한계가 나타났다. 그로 인하여 조선후기의 한문학 역시 전체적 구도의 완정성을 확보하지 못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나타난 民謠 趣向 漢詩의 創作 혹은 樂府 硏究에서 남구만, 이광 사, 이영익, 이유원 등의 소론계 문인들이 언급되었다. 이동환은 조선후기 민요 취향 한시의 대두를 실학사상에 바탕 한 지배계층의 기층사회 이해 노력의 일 환, 한국적 문화 전통의 확립, 생활 현실에 대한 문학적 표현 등의 의의를 부여 하였다. 그의 평가는 이후의 심경호 이혜순 황위주 등에 영향을 끼쳤다. 심경 호 등은 소재적인 측면에서 신화 전설 실전가요 악무의 수용 등 주로 내용적 측면에서 조선후기의 악부를 민족적, 주체적인 것으로 이해하였다. 황위주는 내 용과 함께 조선후기 악부의 형식적 측면의 분석을 통하여 시조 또는 민요의 음 률과 연관지었다.19) 14) 金英珠, 西溪 朴世堂의 文學論 硏究, 동방한문학 25집, 동방한문학회, 2003. 修山 李鍾徽의 文學論 硏究, 경북대 석사논문, 2002. 15) 최우윤, 16) 박윤정, 李匡呂의 學問傾向과 詩世界, 성균관대 석사학위 논문, 1992. 17) 金英珠, 昆侖 崔昌大의 修辭論 硏究, 동방한문학회 24집, 동방한문학회, 2003. 西坡 吳道一의 文學論 硏究, 동방한문학 34, 동방한문학회, 2004. 18) 金英珠, 19) ① 이동환, 朝鮮後期 漢詩에 있어서의 民謠 趣向의 擡頭, 한국한문학연구 3 4, 한국한문학연구회, 1978 79. ② 심경호, 海東樂府體 硏究, 서울대 석사학 위 논문, 1981; 李慧淳, 韓國樂府 硏究(Ⅰ), 논총 39, 이화여대 한국문화연구 원, 1981; 이혜순, 韓國樂府硏究(Ⅱ), 동양학 12, 단국대 동양학연구소, 1982; 황위주, 朝鮮後期 小樂府 硏究, 한국학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3; 김 영숙, 朝鮮時代 詠史樂府 硏究, 영남대 박사학위 논문, 1988. ③ 신은경, 申緯 와 小樂府에 대한 文體論的 硏究, 한국시가연구 4, 한국시가학회, 1998; 박진 희, 申緯의 小樂府 所載 時調作品 硏究, 인천대 석사학위 논문, 1999; 朴福仙, - 7 -
그러나 이와 같은 연구 방법은 한시의 성격과 소재 그리고 악부 양식이라는 특징적 측면에 주목한 것이었기에 그들의 논의에서 소론계 문학에 대한 구체적 인 탐색과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단지 조선후기 한문학의 특징의 일면을 제시하는 차원에 그친 것이다. 조선후기 한문학에서 언급되는 天機論 硏究에서도 소론계 문인에 대한 언급이 나타난다. 장원철의 연구를 필두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한 천기론 연구 에서, 최신호 진재교 박태성 등은 홍량호의 천기론이 유가문학의 理氣 관념 에 대립되는 道氣 즉 天機 를 홍량호 문학론의 핵심으로 파악하여 홍량호가 유 가의 전통적인 道 관념을 계승하면서 현실 대응 노력의 일환으로 氣 를 강조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하여 홍량호의 시문학의 특성을 靈發 天機 天籟가 발 현된 진솔하고 소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20) 이와 같은 천기론은 조선후기에 주목할 만한 문학이론의 하나이기는 하지만 홍량호의 천기론의 개성에 주목하였 을 뿐 천기 에 대한 소론계 문인의 전반적인 이해를 고찰하여 통합적인 논리를 고찰하지 못하였다. 李裕元의 嘉梧小樂府, 수련어문논집 6, 수련어문학회, 1978; 金榮淑, 李裕元 의 <嘉梧樂府> 硏究, 대동한문학 6, 大東漢文學會, 1994; 金榮淑, 李裕元의 <海東樂府> 硏究, 어문학 56, 語文學會, 1995; 정석용, 夢囈 南克寬의 續東都 樂府 연구, 한문학논집 9, 단국대 한문학회, 1991. 20) ① 張源哲, 朝鮮後期 文學思想의 展開와 天機論,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3. ② 趙柄悟, 朝鮮朝 天機論的 詩意識의 전개양상, 釜山漢文學會, 1989; 金惠淑, 韓 國 漢詩論에 있어서 天機에 대한 고찰(1), 한국한시연구 2, 한국한시학회, 1994; ---, 韓國 漢詩論에 있어서 天機에 대한 고찰 (2), 한국한시연 구 3, 한국한시학회, 1995; 李東歡, 朝鮮後期 天機論 의 槪念 및 美學理論과 그 文藝 思想史的 關聯, 韓國漢文學硏究, 韓國漢文學硏究會, 2001. ③ 최신호, 耳溪 洪良浩 文學論에 있어서 道氣의 問題, 한국한문학연구 12, 1989; 陳在敎, 耳溪 洪良浩의 文學論 - 天氣論을 중심으로, 고전문학연구 15, 한국고전문학 회, 1999; 박태성, 조선시대 천기론의 전개, 연세대 국어국문과, 1994; ---, 耳溪 洪良浩의 天機論과 詩的 特性 硏究, 延世大, 1997; ---, 이계 홍량호의 인식론, 진단학보, 진단학회, 1997; ---, 耳溪 洪良浩의 天機論과 詩的 特性 硏究, 연세대 박사학위 논문, 1997; ---, 載道論과 天氣論의 분별성과 동일성, 단산학지 4, 전단학회, 1998. - 8 -
조선후기 근기 지역 문인의 문학론을 구명하는 가운데 금동현, 박은정, 송혁 기 등은 李夏坤 崔昌大 南克寬 趙龜命 등을 金昌協 중심의 韓歐正脉 에 포함 하여 古文의 창작 관점과 학습경로, 古氣의 재현, 道文에 대한 전변적 인식과 그에 따른 奇警 尖新 등의 미학적 지향을 고찰하였다.21) 이들의 논의는 전시 기 산문이론과 구별되는 17 18세기 무렵의 산문이론의 특징적인 면모를 부각 하고 구체적인 양상을 조망하였다는 의의가 있다. 그렇지만 산문이론의 일반적 특성을 조망하는 과정에서 개별 작가들의 문학이론의 형성 배경과 그것을 공유 하는 계열에 대한 연계와 심도 있는 분석까지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조선후기의 시화사와 시론에 대한 포괄적인 논의 과정에서 일부 소론계 작가 의 시론이나 시화서에 대한 특징이 논의되었다. 안대회는 이하곤과 이정섭을 白 岳詩壇의 동인으로 분류하여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시인의 성정을 가식 없이 표현하는 등 18세기 시단의 변화에 동참한 인물로 이해하였다. 정우봉은 19세 기의 시론을 性靈 神韻 神境 形神 등의 범주로 논의하는 가운데 서형수 서 유구 신위 이만수 등의 시론이 성정을 중시하는 공통점 위에 나름의 개성을 발휘한 창작 논리를 전개했음을 고찰하였다.22) 이들의 논의는 시화사 및 시론의 특징적인 면모를 부각하며 심도 있는 논의를 전개하여 조선후기 시문학론의 깊이와 편폭을 확장하였다는 의의를 달성하였다. 그러나 논의의 중심이 조선후기 시화사와 시론에 국한되었기 때문에 소론계 문 인의 문학론을 총체적으로 조망하는 데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다. 21) 금동현, 조선후기 문학이론 연구, 보고사, 2002; 송혁기, 18세기초 산문이론의 전개양상 일고-이의현 신유한 조귀명을 중심으로, 한국한문학연구 31집, 한 국한문학회, 2003; ---, 17세기말 18세기초 산문 이론의 전개 양상,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2005; 박은정, 17C 말 18C 전기 농암 계열 문장가들의 고문론 연구, 한양대 박사학위 논문, 2005. 22) 안대회, 조선후기 시화사 연구, 태학사, 1995; 정우봉, 조선후기 시론 연 구, 고려대 박사학위 논문, 1992; 김남형, 조선후기 근기실학파의 예술론 연구, 고 려대 박사논문, 1988; 나종면, 18세기 시서화론의 미학적 지향, 성대 박사학위 논문, 1998; 강명관, 조선후기 문학예술의 생성 공간, 소명출판, 1999. - 9 -
소론 이 문학적으로 유의미한 양상을 나타내게 된 것은 심경호와 정량완 등이 주도한 江華學派 의 한문학 연구에서이다. 심경호와 정량완은 申大羽, 李肯翊, 李令翊, 李匡呂 등의 소론계 문인의 문학을 소개하는 한편 소론계가 중심을 이 루는 강화학파의 문학적 특성을 구명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들은 소론계 문학의 일부로 강화학파의 문학을 연구하여 주자학적 도문관의 일탈과 개성 중시, 모방 반대 등의 문학적 특징을 적출하였다. 특히, 심경호는 강화학파에 대한 기왕의 연구를 토대로 양명 사상의 부분적 수용, 주자학의 비판적 계승, 불교 도교에 대한 개방적 수용, 美學 國語學 분야에서의 업적 달성 등의 대체적인 소론계의 특성을 유추하였다.23) 이와 같은 심경호의 연구 결과는 기왕의 연구에서 산발 적으로 언급되어 오던 소론계 문학의 공통적 특성을 처음으로 규명하였다는 의 의가 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 역시 강화학파에 한정하여 문학적 특징을 고찰하 였다는 제약과 함께 강화학파의 의식지향의 사회 역사적 의미에 대한 고찰과 문학론과의 연계에까지 이르지는 못하는 한계를 노출하였다. 이제는 이러한 기존 연구의 성과를 수용하고 한계를 극복하며 조선후기 문학 에서의 소론계 문인의 문학적 위치와 그 특성을 고찰하는 통시적 작업이 수행될 시기라고 생각된다. 위에서 검토한 소론계 문학 연구의 타당성과 필요성에 의거 하여, 본 논문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23) ① 沈慶昊, 江華學派의 文學 思想, 조선후기 당쟁의 종합적 검토, 한국정신문 화 연구원, 1992; 심경호 정량완,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1), 한국정신문화연 구원, 1993; --- ---,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 ---,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3; 정 량완, 강화학파의 문학과 사상(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沈慶昊, 江華學 派의 虛假 批評論, 대동한문학 14집, 대동한문학회, 2001. ② 박준호, 강화학 파의 문학세계에 대한 일고찰, 대동한문학 14집, 대동한문 학회, 2001; ---, 강화학파의 비지문자론, 동방한문학 25집, 동방한문학회, 2003. ③ 孫秉國, 朝鮮朝 文人들의 陽明學 認識態度와 그 文學的 展開, 성곡논총 27집 1권, 省 谷學術文化財團, 1996; 申承勳, 朝鮮中期 文章家들의 陽明學 受容의 樣相과 意 味, 동양한문학연구 20집, 동양한문학회, 2004. - 10 -
Ⅱ장은 소론계 문학의 성립 배경을 연구한다. 먼저 소론계의 정치적 특성과 학술의 내포와 외연의 특성들을 중심으로 노 소론 분립의 동인과 이후의 그들 의 정치적 부몰, 그에 따른 정치적 변신 과정을 고찰한다. 둘째는 소론계 학문 성향의 특성을 극명히 나타내게 한 양명학적 가학 전통과 그것이 소론계 문학에 반영되는 양상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셋째, 소론계의 양명학적 학문 전통에서 알 수 있듯이 교조화 되어가는 주자학적 이념의 허구성을 비판하며 서구의 자연 과학 지식에 대한 그들의 대응 태도를 고찰하고 그것이 그들의 문학에 끼친 영 향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넷째, 장서 및 고동 서화 수집의 배경과 그 양상을 고찰하여 문화 예술적 취향이 그들의 문학에 끼친 영향 관계를 검토해 보기로 한다. 다섯째, 조선전기의 관찬사서에 주로 나타나던 존화의식과 사대주의 의식 에서 벗어나 역사지리에 대한 실증적 고검을 바탕으로 탈존화적, 실증적 특성을 나타내는 소론계의 역사서술 태도를 고찰해 보기로 한다. 본 연구의 중심에 해당하는 Ⅲ장, Ⅳ장, Ⅴ장에서는 소론계 문학의 이론적 특 성과 함께 문학 논리의 구체적 실천 양상을 검토한다. Ⅲ장은 Ⅱ장의 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한문학의 기본 범주인 道 와 文 에 대한 소론계의 인식 변화를 고찰한다. 먼저 관념론에 지배되던 주자학적 도문일치론 에서 실질을 중시하는 그들의 의식이 辭 理 혹은 文 質 의 겸비를 강조하게 하였으며 그것이 마침내 道 文 의 역할에 대한 분리 인식을 추동하였음을 고 찰한다. 둘째, 그들이 인식한 文 의 기능이 審美的 차원이 아닌 주로 世敎를 보 좌하는 실용적 차원의 것임을 고찰한다. 셋째, 이와 같이 실용과 실질을 강조하 는 소론계의 문학론이 심미적 차원에서는 작가의 개성 표현을 강조하는 道氣論 으로 그리고 실용적 차원에서는 과거를 계승하여 현실의 삶에 보다 충실하려는 취지에서 文史論 을 제기하였음을 고찰한다. Ⅳ장은 Ⅲ장의 결과를 수용하여 그들의 창작에서 강조되었던 自得 重視 논리 의 다양한 양상들을 검토한다. 이를 위해 자득적 창작 논리의 연원을 고찰하고 - 11 -
조선 문단의 자득중시 창작 논리의 수용 과정을 살펴본다. 이어서 작가별로 특 징적으로 전개된 자득 논리를 선별하여 비교 검토하되, 자득론의 전개에서 문 제가 된 法 의 적용 문제, 個性 표출에 대한 이해 태도, 창작에서의 神 과 境 의 의미와 기능에 따른 자득 논리의 양상들을 고찰한다. Ⅴ장은 Ⅲ장과 Ⅳ장에서 도출한 논리들을 입증하는 단계이다. 여기에서는 먼 저 正音의 기원과 制字 원리, 諺解 및 朝鮮漢字音에 대한 소론계의 인식을 검토 한다. 이어서 소론계의 國文詩歌論을 제시하여 양자 간의 관련성을 고찰한다. 이와 같은 과제로 인해, 본 연구에서 사용하는 자료는 소론계의 주요 문인의 문학론 자료에만 한정하지 않았다. 소론계 문인의 문학론에 대한 일정한 이해를 내포한 언급이 있거나 관련성이 있는 것이면 그 분야에 상관없이 가능한 포괄적 으로 수용하고자 하였다. 가능한 광범위하게 자료를 수집하여 논증에 충실하고 자 하였으나 아직 열람조차 하지 못한 자료가 있다. 이 때문에 새로운 자료의 출현에 따라서 본 논문 내용의 일부가 수정 보완되어야 할 여지가 많이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분석 결과로, 양명학 수용의 관점에서 본 소론계의 실용적 개성적 창작 논리에 대한 대체적인 윤곽은 나타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본 연구가 조선후기 문학론에서 소론계의 문학론의 특성과 그 의미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평가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 12 -
Ⅱ. 少論系의 形成과 詩文學論의 基底 1. 少論系의 形成과 政治的 浮沒 1) 少論系 形成의 動因과 그 特性 소론 의 형성 동인에 대한 검토는 그들의 학문 사상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한 선행 작업일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문학 특성과도 연관되는 중요한 문제이다. 정 치적 측면에서, 소론계의 형성 동인의 근저에 자리한 申欽(1566 1628)은 成 渾의 대표 제자이며 저명한 관료였다. 그의 학문 경향은 아들 申翊聖(1588 1644)과 제자인 張維(1587 1638) 崔鳴吉(1586 1647) 등에게 이어졌다. 이들은 성리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陽明學 道敎 佛敎 등을 수용하는 사상 적 유연성과 함께 병자호란 이후의 대명 대청 관계 중심의 국제 정치에서 화친 을 주장하며 동북아 국제 사회의 새로운 변동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현실주의적 입장을 나타냈다. 도시화가 진행되기 시작하는 17세기 이후, 이들에게 安民益國과 농 상업이 조화된 총체적 국가 경영의 개편을 추구하는 특징이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개 방적인 학문 성향 외에 그들 대부분이 서울과 수도권 일대를 생활근거로 하는 관료 집단이었으며 師承 親交 婚脈 등을 통해 굳건한 결속을 유지하였던 때문 으로 생각된다.24) 24) 李建昌의 黨議通略 과 朴世采의 기록에서 申欽과 漢黨系의 인물들이 그러한 특성 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 ① 李建昌, 黨議通略, 仁祖朝 山黨主金集, 而宋俊吉 宋時烈等輔之, 皆連山懷德山林中人, 故謂之山黨, 漢黨主金堉及申勉, 皆 居漢上, 故謂之漢黨., ② 朴世采, 記少時記聞, 南溪集 卷57( 叢刊 V.140), - 13 -
尹拯(1629 1714), 南九萬(1629 1711), 朴世堂(1629 1703), 朴世采 (1629 1703) 등이 같은 당에 소속되어 활동할 수 있었던 원인 역시 사승과 혼맥을 공유한 때문이었다. 조선 최초의 양명학 수용자의 한 사람인 南彦經 (1528 1594)의 손자인 南好學은 張維와 동서간이었다. 또한 남호학의 후손인 숙종조 소론계의 영수 남구만은 박세당과 처남 매부간이었다. 윤증의 조부 尹 煌은 성혼의 사위이며 대표 제자였다.25) 윤증의 후손으로는 英 正祖 때 소론 을 대표하던 李福源과 李時秀 李晩秀 등이 있으며, 문인으로는 朴世堂의 아들 인 朴泰輔(1654 1689)와 鄭齊斗(1649 1736) 등이 유명하다. 정제두의 학통은 아들인 鄭厚一을 비롯하여, 孫壻인 李匡明 申大羽, 李忠翊, 李建昌 등에게로 이어졌다. 정제두의 제자인 沈錥의 학문 경향은 조카인 洪良浩 와 그 손자인 洪敬謨 등에게 전수되었다. 정제두의 또 다른 제자인 李匡師는 아 들인 李令翊 李肯翊을 비롯하여 鄭東愈 李相璜 柳僖 등에게 학문을 전수하였 다.26) 인조 때, 서인을 대표하던 金堉(1580 1658) 역시 소론계의 중심 가문들과 긴밀히 연결되었다. 그의 외손서인 吳斗寅의 사위가 崔昌大이고 최명길의 형인 崔來吉의 외손자가 鄭齊斗였다. 김육의 사위 徐元履와 외손자인 徐文尙 徐文 重 徐文裕 형제와 그 이하의 徐宗泰 徐命膺 徐命均 徐有榘 등도 숙종 정조 대 소론의 핵심 인물들이다. 특히 서문중은 영조조의 탕평정국을 주도한 豐壤 趙氏家와 절친하였다. 趙大壽의 아들로 서명응의 외손자인 趙集命은 남구만의 177면. 西人在於己丑之初, 以李完南厚源力主湖西, 金潛谷堉心護漢西, 勢不相敵, 累世而後成, 故其禍之極, 在下而易局. 25) 金長生을 스승삼은 尹宣擧와 宋時烈을 스승삼은 尹拯의 학맥이 율곡학파와 중첩되 기는 하지만 이후의 학문적, 정치적 행보가 율곡학을 계승한 노론계와 뚜렷한 차이 가 나타나고 윤증의 문인인 朴泰輔, 鄭齊斗 등이 소론계의 대표적 인물임을 볼 때, 그들을 우계학을 계승한 소론계로 파악하는데 무리가 없다고 생각된다. 26) 유봉학, 조선후기 학계와 지식인, 신구문화사, 1998, 124면 도표 참조. ; 이외 鄭東愈는 정조 조의 소론계를 대표하던 李晩秀의 외삼촌이다.(李晩秀, 掌樂院正鄭 公墓碣銘, 屐園遺稿 卷11, 叢刊 V.268, 508면.) - 14 -
팔촌인 南五星의 사위이다. 또한 조대수의 형인 趙仁壽는 趙文命과 趙顯命의 부 친이었고 조문명 등은 서명균 등과 절친하였다. 서문중의 형인 徐文尙은 최창대 의 사위였으며 동생인 徐文裕는 남구만과 사돈이었다. 이로 볼 때, 소론계는 주로 개방적이고 박학적인 학문 경향을 특징으로 하는 성혼 학통을 계승한 학인 집단으로 파악된다. 또한 그들이 학연과 연혼을 통하 여 지속적으로 유대를 결속하며 나름의 전통을 수립해 간 것으로 이해된다. 그 렇다면 이와 같은 학문적 계통성을 공유한 이들이 少論 과 老論으로 분립하게 된 배경은 무엇인가? 먼저, 사건적 측면에서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 있다. 첫째는 金萬均 사건 (1663)27)에서 비롯된 公義 私義의 논쟁이다. 재야의 잠재적 정치세력이 던 金集 宋時烈 등은 유력한 정치집단으로 자리잡은 이후, 소론의 모태가 된 관료계의 인물들과 대립하였다. 人主一心, 萬化之原 의 논리에 따라 세속적인 군주권보다는 도학에 최고의 가치와 권위를 부여하는 정치관을 내세운 산림계는 임금의 덕을 바로 하기 위해 경연의 강화를 정치활동의 근간으로 삼았다.28) 또 한 세도의 주재를 자임하여 군주의 專制權을 견제하고 자신들의 도학적 기준에 맞추어 군주를 상징적 존재로 설정하였다.29) 徐必遠이 군주의 전제권을 보장하 27) 金萬均 事件 : 현종 5년(1664), 淸나라 사신의 접대에서 발단된 것이다. 金益熙 의 아들인 金萬均이 修撰으로 있으면서 淸使를 만나는 임금을 당연히 배종해야 하 는데도 그의 할머니(김익희 어머니인 連山 徐氏)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 하였다고 하여 사사로운 정의로 볼 때 조상의 원수를 접대하는 일에 따라 갈 수 없다고 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사건으로 私義와 公義에 대한 논란이 크게 일어났 다.(이하 公義 私義 논쟁에 대한 것은 이희환의 조선후기 당쟁 연구, 국학자료 원, 1995 참조). 28) 宋時烈, 愼獨齋金先生神道碑銘, 宋子大全 卷155( 叢刊 V.113), 334면. 至 其經筵講說, 則以人主一心爲萬化之原, 每勸其精察於理欲毫釐之間, 而謂堯舜禹湯之 道, 皆不外是. 29) 宋時烈, 紫雲書院廟庭碑, 栗谷先生全書 卷37( 叢刊 V.45), 401면. 戊辰, 以 書狀官朝京, 冬, 拜弘文館校理, 以昔時染禪辭職, 宣廟諭曰, 自古豪傑之士, 未免爲釋 氏所陷溺, 自是恩遇日隆, 先生亦自任以世道, 常以格致誠正, 爲出治之要. - 15 -
던 한대의 정치론에 경도된 남인과 연계하여 김만균의 사직이 불가하다는 공의 를 주장하자,30) 송시열 등은 예교 차원의 인륜 유지를 위한 사의 의 보장을 내 세워 김만균의 사직을 옹호하였다.31) 둘째는 懷尼是非 이다. 송시열이 黃山書院 에서 尹鑴가 간행한 주자집주 를 사문난적으로 규탄할 때, 尹宣擧는 윤휴를 성 인에 가까운 인물로 칭찬하여 송시열로부터 윤휴의 당여 로 지목받았다. 윤증이 송시열에게 부친인 윤선거의 묘문을 부탁했을 때, 송시열이 병자호란 당시 윤선 거의 강화도 탈출 일화를 기록하고 그것에 대한 윤증의 개작 요청을 거부하여, 윤증이 스승인 송시열과 반목하게 되었다. 셋째는 윤증이 송시열 주도의 정국에 입사하는 조건으로 제시한 남인과의 화해 三戚 세력의 제지 송시열의 세도 견 제 등의 개혁방안이 실현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32) 둘째, 국가 정책의 차이다. 양란으로 큰 타격을 입은 국가 수취의 기본 단위 인 財政과 軍政의 회복은 전후의 최대 과제였다. 송시열 등은 養民優先 의 명목 하에 奴婢從母法 各司의 貢物 혁파 戶布法과 養兵制의 폐지를 통한 番上制로 의 환원 등을 통한 국가 재정의 감축이라는 消極的 變通論을 제시하였다. 이와 달리 소론계는 積極的 變通論을 주장하였다. 그들은 국가 번영을 위해 생산자인 농민의 안정을 우선하는 安民益國 의 운영방침에 따라 大同法의 시행, 화폐의 통용, 역법의 개정, 수레와 수차의 활용, 활자의 개량 등을 통하여 수취제도 자 30) 徐必遠, 辭咸鏡監司疏 甲辰正月三十日, 六谷先生遺稿 卷3( 叢刊 V.121), 557 558면. 伏以臣因人得聞左贊成臣宋時烈辭職疏中, 歷擧前修撰金萬均事, 至以 其下理被罪, 皆由於私義陳疏云, 未知何人傳說失眞, 上以揚朝廷所無之失, 下以惑儒 賢至公之聽耶? 臣於此不勝慨然之至, 人臣之不赴召命, 雖云萬不獲已, 而至於再招三 招, 終始不進, 則揆以國體, 亦豈可置而勿問哉? 萬均之下理罷職, 蓋以此也., 宋子大全, 附錄 卷14( 叢刊 V.115), 484면. 先生 31) 李喜朝, 語錄 李喜朝錄 曰, 向歲金萬均之事, 諸公斥之甚力, 未可知矣. 余問此事當限以何讎乎? 先生曰, 朱 子則以爲自五世至從兄弟朋友之讎, 皆不當出見, 然我國家只許有父母之讎者, 此甚難 矣. 余問三寸與兄弟之讎同乎, 曰, 同是朞服則別無異同矣. 又問國家不許則奈何? 先 生曰, 如欲不見, 則不如初不出身也. 32) 李銀順, 朝鮮後期 黨爭史 硏究 (一潮閣, 1988, 4 9면) 및 홍순민, 肅宗 初期 政治 構造와 換局 ( 한국사론 15, 서울대 국사학과, 1986, 140 142면) 참조. - 16 -
체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또 萬民均役 有身者有役 의 원칙에 따라 士族收布制 를 실시하고 서원 등에 의한 민폐를 줄이고자 대대적인 서원 향사의 훼철을 주 장하였다. 셋째, 對淸外交觀의 차이다. 관료계가 국왕 중심의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재 능있는 관료들의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대청외교를 주장한 반면, 송시열 등의 산 림계는 의리와 명분에 집착하여 청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복수의 대상으로 간 주하였다. 그 대표적 사건이 三田渡碑文 의 시비문제였다. 송시열 등은 崇明義 理와 對淸復讎를 주장하며 소론의 원류로 거론되는 李景奭의 찬술을 준엄하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서인 중에서도 국제적 현실을 고려한 박세당과 남구만 등은 이경석의 비문에서 송시열의 행위를 정면 공격하며 삼전도비문 찬술의 당위성을 지적하였다.33) 사건과 국가 정책에 대한 견해차에 더하여 노 소론 분립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은 紅袖의 變(1674)34)과 庚申換局(1680) 그리고 壬戌告變(1682)35)을 일 으킨 金益勳의 처벌 문제 등이었다. 持平 朴泰維 兪得一 등이 金益勳에게 법을 시행하고 멀리 귀양 보내도록 발의하여 아뢰기를, 中略 宋時烈도 처음에는 대간의 의논을 옳다고 하 였고, 淸流들도 흡족히 그를 따랐다. 그 때 마침 송시열이 병이 있어 외부 손님을 대하지 않았는데, 金萬基 형 제만이 밤낮으로 곁에서 간호하며 金益勳을 위해 애걸하였다. 대저 송시열 33) ① 朴世堂, 領議政白軒李公神道碑銘, 西溪集 卷12( 叢刊 Ⅴ.134), 245 253 면. ② 南九萬, 論白軒晦谷西溪, 藥泉集 第29( 叢刊 Ⅴ.132), 497 500면. 34) 김우명이 유약한 숙종을 보호하고, 남인 및 그들과 친밀한 복창군 형제를 제거하기 위해 복창군과 복성군 형제가 궁중에 드나들면서 紅袖[궁녀]들을 간통하고 임신까 지 시켰다 고 고한 사건을 말한다. ; 肅宗實錄 元年 三月 壬申條 卷3( 朝鮮王朝 實錄 V.38), 282면. 35) 어영대장인 김익훈이 金煥과 金重夏와 함께 南人을 몰살시키고자 그들이 역적모의 를 한 것처럼 꾸며서 밀고하였으나 거짓으로 판명된 일을 말한다. ; 肅宗實錄, 八 年, 十月 甲午條 卷13( 朝鮮王朝實錄 V.38), 604 605면. - 17 -
을 받드는 자들이 지극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어서, 때로는 貂皮 이불 과 海松으로 끓인 죽을 주었다는 말이 있었다. 송시열도 이미 기운이 쇠약 해서 사정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마침내 처음의 견해를 변경하여 젊 은 무리들이 김익훈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퍼뜨리며 兪得一을 매우 준엄하 게 배척하였고, 閔鼎重 역시 이것으로 인하여 소원해졌다. 송시열이 사람을 대할 때마다, 左相이 어찌 분명한 외척이 아니겠는가? 라고 말하므로, 민정중이 그 말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빨리 꺾여 들게 되었 으며, 젊은 무리들도 많이 앞서의 견해를 변경하여 송시열에게 아부하며 두 마음을 품으므로 臺閣의 의논이 마침내 老論과 少論의 당목이 생겼다. 少論으로 이름한 자는 趙持謙 崔錫鼎 吳道一 韓泰東 朴泰輔 朴泰維 林泳 徐宗泰 沈壽亮 申琓 兪得一 등 여러 사람이고, 老論이라고 부르는 자는 李選 李秀彦 李頤命 李畬 등 여러 사람이다. 선배인 宋時烈 金錫 冑 이하 노론을 돕는 자가 많았고, 소론을 돕는 자는 朴世采 李尙眞 南九 萬 등 여러 사람인데, 노론은 훈척을 끼고 세력으로 억누르며, 淸議를 가진 자를 많이 말살시켰으므로 송시열을 다시 士流로 여기지 않았다.36) 숙종은 金錫冑 金萬基 등의 도움으로 경신환국을 주도하여 서인 집권의 정국 을 연출하며 尹鑴 許積 李元禎 등 다수의 남인에 대한 살육과 축출을 감행하 였다. 이 때, 남인의 처벌 수위 문제와 김석주 등의 전횡을 두고, 淸流와 그들 을 옹호하는 대신 계열, 김석주를 옹호하는 산림 및 대신 계열이 분기하였 다.37) 특히, 송시열이 처음에는 김익훈의 처벌을 찬성하다가 私情에 끌려 훈척 36) 肅宗實錄補闕正誤 九年 二月 甲戌條 卷14( 朝鮮王朝實錄 V.38), 641면. 持平 朴泰維 兪得一等, 發金益勳加律遠竄之啓, 中略 宋時烈初亦是臺論, 淸流洽然嚮 之. 會時烈有病不見客, 獨金萬基兄弟, 日夜在傍看護, 爲益勳哀乞. 凡所以承奉時烈 者, 無不用極, 時有貂皮衾海松粥之說. 時烈旣氣衰, 不能不牽繫情私, 遂變初見, 揚言 少輩將殺益勳, 斥得一甚峻, 閔鼎重亦以此見䟽. 對人輒言左相豈非亦外戚? 鼎重大畏 之. 遂駸駸折入, 少輩又多變前見, 附時烈而貳, 臺議遂有老少論黨目. 名以少論者, 趙 持謙 崔錫鼎 吳道一 韓泰東 朴泰輔 泰維 林泳 徐宗泰 沈壽亮 申琓 兪得 一諸人, 爲其倡老論者, 李選 李秀彦 李頤命 李畬諸人, 而前輩宋時烈 金錫冑以 下, 右老論者多, 右少論者, 朴世采 李尙眞 南九萬諸人, 而老論挾勳戚, 以勢力勝 之, 持淸議者多致抹摋, 於是乎時烈, 不復爲士類矣. 37) 肅宗實錄補闕正誤 八年 十月 戊戌條 卷13( 朝鮮王朝實錄 V.38), 618면. - 18 -
인 김석주 김만기 등과 결탁하여 청류를 배척하자, 윤증 남구만 박세채 등을 종주로 하는 소론계가 송시열을 추종하는 노론계와 마침내 분립하게 되었다.38) 훈척 대신 주도의 공작 정치가 淸流로 자처하던 삼사의 연소한 관리들에게 반 발을 사게 되었음39)은 물론, 훈척에 비판적이던 중신들조차 대간을 도와 훈척 대신의 축출에 동참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남구만은 김석주의 소론 비난과 병 권 장악을 위한 금위영 창설 주장에 반대하여, 연소 사류들로부터 종주로 받들 어졌다.40) 특히 김익훈 사건으로 삼사의 연소한 관리들이 대거 처벌받으면서, 소론계는 남구만 박세채 이상진 등의 중신에 의해 주도되는 내부적 변화를 겪 는다. 또한 향후 소론의 정국 참여 역시 이들 중신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되 는 계기가 되었다. 소론과 노론의 대립 정국은 송시열의 元子定號 반대 상소로 인한 己巳換局 (1689)으로 처절한 보복정치의 양상을 띠는 換局政治로 전환하게 된다. 또한 이 사건으로 조정에 재등장한 남인은 민비 폐출 장희빈 소생 왕자의 세자 책봉 이이와 성혼의 문묘 출향 경신환국 관련자와 송시열 등의 처벌을 감행하였 다. 그러나 淑媛 崔氏에 대한 남인의 독살을 밀고한 金寅 및 朴貴根 朴義吉 등 의 고변(甲戌換局, 1694)이 일어나면서 남인과의 전격적인 정권 교체로 정국을 38) 숙종 때부터 정치의 중심에서 활약하던 김석주는 노 소론의 분립 원인으로 凶黨 保合 과 勳戚排斥 과 宋時烈 배척 을 제시하며, 吳道一 韓泰東 趙持謙 등을 소론 의 우두머리로 간주하여 이들의 처벌을 주장하였다. ; 肅宗實錄 九年 癸亥 閏六月 丙寅條 卷14( 朝鮮王朝實錄 V.38), 654면. 吳道一則外似䟽脫不解事, 而內實凝 密, 甚多計較, 中略 宋時烈每以引用私人爲非, 故道一聞而銜之, 以時烈門人, 陰 主排擯之論, 沮戱門生伸辨之䟽, 中略 韓泰東, 性甚固執, 可謂䟽戇, 而頃日領相 不允批答中, 揷入間構眩惑, 心苟無瑕等語, 中略 且與持謙入侍, 同辭救解泰維, 此亦可駭. 此等人, 不可不用罰, 以爲鎭定之道. 39) 李建昌, 肅宗朝, 黨議通略. 時善類彙征, 臺閣尤盛, 廉直則 趙持謙 朴泰輔, 文 學則吳道一 林泳, 言議則韓泰東, 力量則朴泰遜, 廉雅則權斗紀, 皆年少名官也, 力 主淸議, 遇事敢言, 稍稍排勳戚以自立, 少論之名始此. 40) 肅宗實錄補闕正誤 三十七年 三月 卷50( 朝鮮王朝實錄 改紀之後, 九萬右淸議, 詘勳戚, 益爲士流所宗. - 19 - V.40), 406면. 及庚申
장악한다. 그러나 노 소론의 연립 정권41)은 남인과 장희빈 남매 및 세자에 대 한 입장의 차이로 강경한 대립 양상을 나타냈다. 환국 직후부터 장희빈을 겨냥한 혐의가 일자 남구만은 왕세자의 지친이라는 이유로 八議之法에 의해 형벌을 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고42) 최석정은 나 이 어린 세자와 종묘사직을 위해 장희빈의 처벌을 너그럽게 하기를 상소하였 다.43) 이들의 반대에도 장희빈은 처벌되었다. 이 일로 인해 소론계는 남구만과 최석정 등의 중심인물이 낙향하거나 귀양 가면서 위기를 겪는다. 특히, 家禮源 流 의 찬자 시비에 판결자로 나선 숙종은 辛酉擬書를 근거로 송시열을 공척한 인물들을 축출하고 권상하 등의 노론을 기용하는 丙申大處分(1716)을 단행하였 다. 아울러 그는 윤선거와 윤증에 대한 先正 의 호칭 사용을 금지하여 소론계의 명분과 정통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고, 이후의 정국이 노론 주도로 이루어지게 하였다. 숙종과 李頤命과의 독대(1717) 이후에 소론은 王世子를, 노론은 延礽君을 보 호하는 형세를 보이며 사문의 시비 위주로 전개되던 노 소론간의 대립이 왕위 계승 문제를 중심으로 한 忠逆의 시비 분쟁으로 변질되었다. 그 결과, 내면적으 로 흐르던 노 소론간의 의심과 상반된 이해관계는 경종의 즉위와 함께 정쟁으 로 표출되어 양파간의 정치적 부몰에 따라 처절한 숙청을 반복하는 朋爭 의 양 41) 일시에 실권을 장악한 서인계는 영의정에 남구만, 병조판서에 서문중, 도승지에 윤 지선, 우찬성에 박세채, 좌찬성에 윤지완 등이 임명되어 소론계가 조정의 요직을 점거하는 형국이었다. 이들은 죽은 서인계 인사에 대한 復爵과 賜祭를 청함과 아울 러 남인의 핵심 인물들을 극형 또는 귀양 등에 처하고 이미 죽은 尹鑴 許積 등의 관직을 추탈하는 철저한 탄압으로 남인 세력을 조정에서 완전히 제거하였다(이희 환, 전게서 147 156면 참조). 42) 肅宗實錄 二十年 四月 癸巳條 卷26( 朝鮮王朝實錄 V.39), 304면. 九萬曰, 中略 希載是王世子至親, 論以八議之法, 遽加刑訊, 殊甚未安. 43) 肅宗實錄 二十七年 十月 甲寅條 卷35( 朝鮮王朝實錄 V.39), 616면. 錫鼎上箚 曰, 中略 竊以爲與其伸法屈恩, 致臣子討復之法, 無寧屈法伸恩, 盡春宮保安之道, 中略 臣之所謂毋致窮竟云者, 非謂不竟諸囚, 不欲窮禧嬪情節耳. 盖雖覈得其情 節, 亦不可致法故也. - 20 -
상으로 변모되었다. 景宗이 즉위했음에도 정국은 여전히 노론이 장악하였다. 소론측 인물로는 趙 泰億 李光佐 李台佐 등 몇 명만이 조정의 요직에 있었고 그마저도 빈번히 노 론에게 탄핵 당하는 실정이었다. 그러나 남인 申潭 등과 결합한 소론의 金一鏡 등이 연잉군의 대리청정을 추진한 노론을 탄핵함으로써 촉발된 辛丑換局(1721) 으로 소론이 정국을 장악하였다. 인사권과 삼사를 장악한 소론이 睦虎龍의 고변 에 의한 壬寅獄事(1722)를 단행하여 노론 四大臣을 위시한 문초자 대부분을 장 폐시키거나 사사하면서, 노 소간의 반목과 갈등은 남인에 대해서보다 더욱 깊 어지게 되었다.44) 2) 政治的 沒落과 實務官僚로의 轉換 소론 집권 하에서 등극한 英祖는 왕권과 정국의 안정을 위해 蕩平論 을 주장 하였다. 그는 환국을 통한 처절한 정치적 보복을 감행하는 이들보다는 붕당의 혁파를 주장하던 이들을 중용하였다. 하루는 임금께서 돌아보고 말씀하시기를, 내가 잠저에 있을 때, 卿이 經幄에서 올린 上疏[趙文命의 破朋黨疏; 역자 주.]를 읽고 내 마음으로 기이하게 여겼다.45) 44) 소론 내부에서 世弟의 代理 문제에 관여한 노론계 인사의 처벌 수위를 두고 급하 고 준엄하게 처벌하려는 金一鏡 李眞儒 朴弼夢 李師尙 등의 峻少系와 주모자만 처벌하려는 尹淳 徐命均 金東弼 등의 緩少系로 대립하였다. 趙泰億 李光佐 崔 錫恒 등의 중신은 처음에는 峻少와 뜻을 모았지만 김일경 등의 발호를 불쾌하게 여겨 緩少를 지원하였다. 이들 가운데 경종조의 집권세력은 김일경이 대표하는 준 소계로서 이광좌만이 그들을 견제할 수 있는 정도였다. ; 景宗實錄 四年 二月 己 酉條 卷14( 朝鮮王朝實錄 V.40), 311면. 45), 歸鹿集 卷14( 叢刊 趙顯命, 叔兄左議政文忠公趙文命墓表 一日, 上顧語曰, 余在潛邸, 讀卿經幄時疏, 已心異之. - 21 - V.212), 519면.
영조가 탕평 을 생각하게 된 계기는 동궁의 요속이던 趙文命, 宋寅明 등이 경 종 원년에 破朋黨論 을 주장하며 세제이던 영조의 보호를 표방한 일46)과 당파 간의 私怨 해결에 왕권이 이용될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영조는 탕평정국의 실현을 위해 소론의 영수 이광좌와 친교가 있는 노론내의 소수 세력인 洪治中 金興慶 등을 발탁하였다. 그러나 탕평의 노력이 노론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히 자, 영조는 丁未處分(1727)을 단행하여 일시에 노론을 축출하고 소론 정권을 수립하였다. 이후, 노 소론간의 忠逆是非를 계기로 발생한 戊申亂(1728)으로 소론이 조정에서 후퇴하며 노론에게 명분상의 우위를 안겨주기는 했지만, 조정 은 여전히 탕평론자들이 주도하였다. 소론 주도하의 탕평 기간 동안, 雙擧互對의 인사방식에 의한 노론 세력의 계 속적인 정계 진출과 신임옥사의 피죄인에 대한 지속적인 신원 요구로 탕평정권 이 와해되는 위기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十九下敎 半夜下敎 混沌開闢 등과 같 은 영조와 탕평세력의 노력으로 정국의 안정이 유지되었다. 탕평의 명분을 고수 하려는 소론계와 달리, 영조의 의도는 왕권 확립을 위한 정국의 안정과 왕위 계 승의 정통성 획득이었다. 이 때문에 강성의 노론을 정계로 진출시켜 임인옥사를 반역으로 판정한 기유처분의 논리를 반박하게 하고 소론과 탕평세력 스스로 기 유처분의 내용을 점차 수정하게 하였다. 또한 임인옥사를 誣獄으로 뒤집는 反案 의 명분을 확보하며 庚申大處分(1740)을 단행하였다. 그 결과 기유처분의 내용 이 공소화되면서 노론 세력이 정계에 대거 진출하여 소론 주도의 탕평 정국은 종말을 고하였다. 특히 소론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며 정계의 주도권을 상실하게 한 사건은 乙亥獄事(1755)였다. 尹志가 김일경의 역모 사건에 연루된 아버지 윤취상이 처 벌받자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나주객사에 붙였다. 이 일로, 홍량호의 외가 46) 英祖, 11年, 12月 25日 庚寅條 ( 承政院日記 第 815冊)의 王과 宋寅明의 문답 중에 上曰, 中略 壬寅以來, 不干犯者, 謂之淸流, 卿等一隊, 是也. 라고 하였다. - 22 -
이며 소론의 명문이던 沈錥 家를 비롯하여 柳壽垣(1694 1755) 家, 申致運 (1700 1755) 家, 六眞八匡 으로 지칭되는 당대 소론의 명문이던 李匡師 일 가47) 등이 타격을 입고 500여 명의 학자들이 처형되었다. 또한 이 사건은 외 가의 후원에 의지하던 홍량호의 관직생활에 위기를 초래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 긍익 이영익 이건창 등이 가난으로 인하여 세거지인 西江을 전전하다가 江華 로 들어와 곤궁한 생활을 영위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들과 달리 노론 및 탕평 정권에 적극 참여하여, 소론 으로서의 명목만을 유 지한 채, 세도정권기에 이르기까지 번영을 구가한 인물들이 있었다. 이태좌의 아들이며 최창대의 문인이던 李宗城(1692 1759)은 평생의 사표로 삼던 존장 이자 소론의 영수였던 이광좌를 역적 운운하며 배척하는 발언으로 노론계의 신 임을 얻어 이후의 노론 주도의 정국에서 영의정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그의 일 문은 세도정권에 협조하며 고손자인 李裕承과 족손인 李裕元(1814 1888)에 이르기까지 정계의 핵심으로 활동하였다. 특히 이유원은 徐有榘의 제자이며 鄭 元容의 사위로 세도정권의 실무관료로서 현달한 소론계 가문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그 자신도 세도정권 하에서 좌의정에 이르는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正祖는 영조의 탕평정치를 계승하되 그 폐단을 시정하고자 하였다. 그는 執淸 議, 持峻論48), 右賢左戚 의 새로운 정국 운영 원리를 내세우는 義理蕩平論 을 정립하여 척족을 축출하고 淸論士流를 적극 등용하였다. 한편, 右文之治 를 표 방하여 규장각의 건립과 抄啓文臣 제도로 친위 관료를 양성하고 노 소 남의 47) 六眞八匡 이란 李眞望(李景奭의 曾孫), 李眞淳 李眞洙 李眞儒 李眞儉 李眞伋 (이상 李景稷의 曾孫) 등의 육인과 李匡世 李匡呂 李匡師 李匡贊(이상 李景稷 玄孫)과 李匡德 李匡誼 李匡度(李景奭 玄孫) 등을 가리키는 말로 이들의 후손은 李忠翊 李令翊 李肯翊을 비롯하여 육세손인 李建昌 李建芳 등이 있다. 당대 소 론의 명문이던 이들 집안이 나주괘서사건으로 인한 을해옥사에 잔당으로 지목되면 서 이광명과 이광현은 물론 종형제인 李匡師 등이 극지로 귀양가서 불귀의 몸이 되었다. 48) 正祖實錄 二十四年 五月 辛亥條 議, 持峻論者, 萬萬不及於古之人 卷54( 朝鮮王朝實錄 - 23 - V.47), 275면. 所謂執淸
삼상 체제를 수립하여 그들간의 견제 위에 왕권을 강화하는 矯俗之治 49)를 시 행하였다.50) 을해옥사로 대부분의 세력이 제거된 소론은 노론 및 탕평에 협조하는 세력들 을 중심으로 왕권 강화의 기반, 노론의 견제, 청론을 통한 척족의 견제를 희구 하던 정조의 목적에 부합함으로써 다시 정계에 진출하였다. 특히, 정조의 즉위 는 물론 洪國榮의 축출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徐命善51)은 정계에서 義理主人 의 명분을 차지하고 영의정에 임명되어 큰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그러나 서명선 과 대립하던 소론 金尙喆이 역모 혐의로 제거되고 蔡濟恭을 기용하여 남인의 정 계 진출이 확대되면서 소론의 정치적 진출에는 다시 문제가 야기되었다. 嶺南萬人疏事件(1792)으로 남인의 입지 강화에 반발하는 노론에 의해 채제공 이 실각하고 노론 時派 정국이 수립되었다. 시파의 입지가 강화되면서 노 소 남의 삼당체제가 흔들리고 탕평정국이 불안해졌다. 그러자 정조는 남인의 西學 信仰과 노 소론의 부화한 文體를 동시에 문제 삼는 文體反正을 통하여 정국의 안정과 함께 정국의 주도권을 모두 차지하고자 하였다. 이후 정조는 貴近으로서 소론계이던 鄭東浚을 각별히 신임하여, 장용영의 설치와 화성 신도시 건설에 대 한 비판을 잠재우는 등 막강한 역할을 담당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 일로 정조의 정국 운영 방식을 비판하던 노론의 時派와 僻派 세력이 결집하면서 그들의 탄핵 으로 정동준 등의 소론계는 정계에서 축출되었다. 이후의 소론은 실무관료로 국 왕의 정국 운영에 적극 동참하여 그 명맥을 유지하였을 뿐 노론 벽파가 완전히 정국을 장악하는 형국이었다. 벽파 주도의 정치 상황에 좌절하여 국왕 주도의 정국을 실현하고자 한 정조는 49) 正祖實錄 二十四年 五月 辛亥條 卷54( 朝鮮王朝實錄 中略 矯時正俗之道, 卽目下第一義理也. V.47), 273면. 上曰, 50) 박광용, 蕩平論과 政局의 變化, 韓國史論 10집, 서울대 국사학과, 1984 참조. 51) 徐命善은 正祖의 문화정책에 적극 동참하던 徐命膺의 아우이며 徐有榘의 從祖父이 다. - 24 -
친위 관료의 일부를 대신으로 발탁하는 한편, 외척에게 전례 없는 정치 역할을 요구하며 世道政治라는 극단적인 정치형태를 탄생시켰다. 지방의 민의나 여론이 중앙 정계에 반영되던 통로가 마비된 채 국왕과 척족에 의해서만 운영되던 세도 정치의 사회적 기반은 매우 취약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 집권적 세도정치의 책 임을 맡은 사람들이 권력 기반의 보강 및 공고화를 위해 선택한 방법은 黨色 보 다는 그들이 주도하는 정국에의 同參 여부였다. 이 때문에 정조 치세 후기부터 겨우 명맥을 유지해 오던 소론은 세도정국의 실무 관료집단으로 변신하며 중앙 정계에서의 입지를 새롭게 다졌다. 이와 같은 생존 방식 역시 완전한 것은 아니 어서, 그들은 주체적 정치활동에 의한 것 보다 세도 주체의 변화라는 외부적 동 인에 의해 그 정치적 부침을 반복하였다.52) 金祖淳 가문은 純祖가 친정한 이후 세도의 중심으로 부각되었다. 순조의 외가 인 朴準源 가문과 趙萬永 가문의 협력을 얻은 김조순 중심의 시파는, 벽파인 우 의정 金達淳이 사도세자의 추숭을 주장한 李土禹 등 영남만인소 주창자의 처벌 을 주장하는 벽파의리 를 천명하자, 조득영을 앞세워 벽파에 대한 공격을 감행 하였다. 세도의 주체로 자리매김한 김조순은 규장각 제학과 검교 제학을 연임하 며 관원의 인사를 주도하였다. 이 때, 소론으로 김조순 계열에 협력한 李相璜은 南公轍 沈象奎 등과 함께 정국을 이끌었으며 李晩秀 역시 검교 제학으로 재직 하였다. 그렇지만 그들의 영향력은 김조순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53)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기 이후, 삼상의 일원으로 정국에 참여하던 李時秀는 김 조순 주도하의 정국에서도 유연한 처세를 통해 좌의정의 지위를 점유하였다. 홍 52) 한 예로, 벽파 계열인 貞純王后의 수렴청정기 동안 소론인 李時秀 徐龍輔 등이 삼 상의 일원으로 활약했다. 그러나 홍봉한 중심의 時派와 金龜柱 중심의 벽파의 대립 이 전면에 부각되던 수렴청정 말기에 김귀주를 공격한 전력이 있던 徐有寧과 그 아들인 좌의정 徐龍輔가 공격을 당하였다가 벽파 정국자의 호감을 얻어 겨우 화를 피할 수 있었다. ; 純祖實錄 五年 六月 壬申條 卷14( 朝鮮王朝實錄 V.47), 558면 참조. 53) 純祖實錄 十八年 十月 己巳條 卷21( 朝鮮王朝實錄 V.48), 140면 참조. - 25 -
봉한 등의 시파 정권에 실무관료로 동참한 徐有大의 아들 徐英輔는 국가의 곡부 군제 전제 등에 관한 내용을 파악하라는 순조의 명령에 의해 沈象奎 등과 함 께 萬機要覽 의 편찬을 담당54)하는 등 관료로서의 실무에 충실하였다. 현실 정치의 장벽을 느낀 순조가 효명세자의 대리청정(1827 1830년)을 명 하자, 李相璜과 鄭元容은 김조순과 협의하여 청정에 찬성하는 등 김조순의 동조 세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55) 또한 정조조의 奎章閣臣을 우대한다는 명분하에 벽파 세력에 동조한 죄목으로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소론계의 徐有榘가 正卿으로 발탁되었다.56) 그러나 갑작스런 효명세자의 사망(1830)을 계기로 권 력을 회복한 시파는, 대리청정 기간 동안에 새롭게 정치세력의 중심인물이 된 洪起燮 金鏴 등에 대하여, 세자의 권위를 업고 대신을 위협했으며 朋比로 서로 어울렸다는 죄목으로 그들을 제거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소론계의 朴宗薰과 申 緯, 柳相亮 등에 대해서도 공격을 감행하여 그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였다.57) 나이 어린 憲宗의 즉위로 인한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기간(1835 1841)에, 이상황은 점차로 권력의 점유를 시도하던 김조순의 명에 의해 조인영 계열의 이 지연 이기연 형제를 축출하였다. 아울러 김조순 가문의 위협 세력이던 김노경 에 대해 공격을 감행하여 그를 조정에서 축출하였다.58) 헌종의 친정 시기(1841 1848)에는 김조순 가의 김흥근과 조만영 가의 조 병구 조병현을 중심으로 경쟁 관계가 격화되었다. 조병현이 시관을 담당했던 과거의 부정행위가 발생하자 대신들은 그의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로 맹렬히 탄핵하였다. 그렇지만 김흥근이 조정을 주무르고 임금의 권한을 억눌렀 다는 대사간 徐相敎의 상소에 대해서는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헌종은 논의를 54) 김규성, 萬機要覽 解題, 國譯 萬機要覽, 민족문화추진회, 1967 참조. 翼宗代理時相臣之奏, 袖香編, 동문사, 1971 참조. 55) 鄭元容, 56) 純祖實錄 二十八年 八月 丁亥條 卷29( 朝鮮王朝實錄 V.48), 314면 참조. 57) 純祖實錄 三十年 八月 癸丑條 卷31( 朝鮮王朝實錄 V.48), 357면 참조. 58) 憲宗實錄 六年 七月 庚子條 卷7( 朝鮮王朝實錄 V.48), 477면 참조. - 26 -
회피했다는 혐의로 소론계의 대사간 徐箕淳과 영의정 鄭元容을 파직59)하면서까 지 김흥근을 두둔하던 柳宜貞을 처벌하여60) 김흥근 세력을 견제하였다. 그러나 鄭元容은 헌종의 후사로 이원범을 내세워 김조순 가의 세도 유지에 결정적인 공 헌을 하면서 哲宗 만년까지 김좌근과 영의정의 자리를 함께 하였고 이들 외에는 한 사람도 영의정에 오를 수 없었다. 이러한 정원용마저도 송시열을 비난하는 문구가 포함된 曺夏望의 문집을 그 손자인 曹錫雨가 간행하여 논란이 일자, 그 의 공격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不敍의 처분을 받을 만큼61) 세도가들의 강력한 자기장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2. 少論系 學術 性向의 內包와 外延 1) 陽明學 受容에 나타난 開放的 學問 傳統 16세기 이후에는 理氣心性의 철학 연구가 사회적으로 반영된 禮學 이나 전란 후 의 제모순을 사상의 차원에서 해결하려는 易學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한 天理 못지 않게 인간을 주재하는 心 에 대한 관심으로 心學化 의 경향이 대두되었 다. 여기에는 심성수양론의 차원에서 조선 심학을 구축한 李滉 계열과 개방적인 학문자세를 바탕으로 심학을 本體論의 차원으로 확대하여 양명학을 수용한 申欽 계열 등이 있다.62) 특히 신흠 등은 栗谷學派와 함께 기호학파의 중심인 牛溪學派 59) 憲宗實錄 十四年 七月 戊子條 卷15( 朝鮮王朝實錄 V.48), 531면 참조. 60) 憲宗實錄 十四年 十月 乙丑條 卷15( 朝鮮王朝實錄 V.48), 533면 참조. 61) 哲宗實錄 五年 十一月 丙子條 卷6( 朝鮮王朝實錄 V.48), 589면 참조. 62) 具萬玉, 朝鮮後期 科學思想史 硏究 1, 혜안출판사, 2004, 102 121면 참조. ; 구만옥은 16세기 말 17세기 초의 조선 학계와 사상계를 禮學 易學 心學化로 삼분하고 다시 심학화의 계열로 양명학에 비판적인 李滉 系列, 양명학에 개방적인 趙翼 崔鳴吉 張維 系列 그리고 체제 위기의 상황에 직면하여 주자학의 학문을 - 27 -
의 계승자였다. 성리학의 이론에 밝았던 李珥는 견해의 경지를 논한다면 내가 조 금 낫다고 할 수 있지만, 몸가짐의 독실함은 내가 미칠 수 없다 63)고 하며 성혼의 학문이 修養 과 實踐 위주의 것임을 주목하였다. 특히 성혼은 良知 의 계발을 통 해 본원을 배양할 도구나 일용의 상규로서의 小學의 가르침을 중시하여64) 소학의 실천 기초로 實心 의 공부를 강조하였다.65) 고원한 담론보다 自得 의 구체적인 학 문 방법을 강조한 성혼은, 博文 約禮 時習 積累 潛心 黙契 등의 일상에서의 꾸준한 실천과 암송으로 성인의 가르침을 이해하고자 하였다.66) 학문 방법상의 자득 은 이후 소론계 학인들의 문장 창작의 주요한 논리로 변용되었다. 실천적이고 절충적인 성향의 우계학파를 계승한 장유와 조익 등은 개방적인 학풍 을 더욱 발전시켰다. 正學 禪學 丹學 등의 다기한 중국 학풍에 비해 程朱學만을 숭상하는 우리나라 학술 풍토의 경직성을 비판한 장유67)나 理 를 고금의 보편적 진리, 즉 公物 로 인식한 조익68)의 견해는 최석정 이정섭 등에게로 계승 발전된 비판하며 한편으로 實踐 實用 實功을 강조하면서 학문의 현실성과 실천성을 중 시한 李睟光 申欽 系列 등으로 삼분하였다. 그러나 장유와 최명길이 陸象山 陳白 沙 王陽明 등을 호평하거나 장점을 인정한 신흠의 문인이라는 점을 볼 때 이들을 동일한 계열에 포괄할 수 있다고 본다. 63) 成渾, 牛溪先生年譜, 牛溪集 卷1( 叢刊 V.43), 247면. 栗谷嘗稱曰, 若論見 解所到, 吾差有長, 至於操履敦確, 則吾所不及云. 64) 成渾, 小學輯註跋, 牛溪集 卷6( 叢刊 V.43), 157면. 聖賢之書, 何莫非服膺 踐實之要, 而小學之敎, 加之幼稚之初, 發良知而示趨向, 正蒙養而培本原. 先諸事爲, 無非家庭日用之常. 65) 成渾, 答安士彦邦俊書, 牛溪集 卷5( 叢刊 V.43), 134면. 竊見士之爲學, 必 有眞實心地. 刻苦工夫, 師友夾輔, 內外交養, 然後庶幾有得. 66) 成渾, 辛巳封事 辛巳 四月 以內贍寺僉正拜疏, 牛溪集 卷2( 叢刊 V.43), 26 면. 聖人之敎, 不先於高遠, 而必始於卑近, 不過使人反而求之一言一動之際, 持守誦 習之間, 博之以文, 開其向往之端, 約之以禮, 篤其踐履之實, 漸次經由, 時習積累, 而 潛心黙契, 深造自得, 則一朝而貫通焉耳. 67) 張維, 我國學風硬直, 谿谷集 谿谷先生漫筆 卷1( 叢刊 V.92), 573면. 中國 學術多岐, 有正學焉, 有禪學焉, 有丹學焉, 有學程朱者, 學陸氏者, 門徑不一, 而我國 則無論有識無識, 挾筴讀書者, 皆稱誦程朱, 未聞有他學焉, 豈我國士習果賢於中國耶? 68) 趙翼, 大學困得後說中, 浦渚集 卷2( 叢刊 - 28 - V.85), 385면. 夫此理, 中略
다. 특히 최석정은 서적을 공물로 인식하여,69) 국가 문물의 발전 자료로 삼았으며, 이정섭은 비평적 기능을 발휘하는 문장을 공물로 인식하는 양상을 보였다.70) 이상에서 살펴본 우계학파의 실천적, 절충적, 개방적 성향들은 경직된 이학적 차원의 개념들이 시대 환경 속에서 점차 구체적이고 실용화되어 가는 양상을 나 타냄71)과 동시에 소론계와 우계학파의 학문 사상적 연관을 분명히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우계학파의 계승자로서 소론계가 理學의 경직성을 탈피하였음을 극 명히 보여주는 사례가 바로 양명학의 수용이라는 학문 전통이다. 양명학의 조선 전래 시기부터 주자학이 교조화되는 17 18세기를 거치면서 도 소론계는 그것을 가학의 일부로 계승 공유하였다. 그 가운데 소론계의 양명 학 수용 전통72)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 心 에 대한 이해와 格物致知說 73) 乃天下古今之公物也. 聖賢經傳, 所以明此理也, 則經傳之旨, 亦天下古今之公物也. 聖賢之所以爲聖賢, 以得乎此理也, 天下古今所以尊仰聖賢, 以先得乎此理也. 先聖所 以立言垂後, 後賢所以解釋經義, 皆所以明此理也, 而後學所以講論經義, 所以求此理 也. 中略 如或有疑, 則當反覆尋思, 究極其所歸, 必得其一是而後已. 69) 兪晩柱, 1780年 8月 2日 條, 欽英 卷5. 崔錫鼎 中略 書籍公物也. 70) 李廷爕, 與李仁老德壽, 樗村集 卷4. 文是公物. 牛溪學의 傳承과 그 學風, 범한철학 28집, 2003, 42면. 71) 황의동, 72) 본고에서 의도하는 것은 그들이 陽明學을 일방적으로 맹신하거나 陽朱陰王하는 이 원적 학문체계를 지녔다든지, 주자학적 학문경향에 대해 배타적이었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본고의 기본적인 시각은 그들의 양명학 계승의 전통이 그 성립과정에 서부터 朝鮮과 明간의 학술적 문화적 교류와 程朱學의 心學化 과정과 連繫되어 전개되는 역사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한 구체적인 예는 조선적 양명학의 개 창자로 알려진 鄭齊斗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는 朱子學이나 退溪學을 비판하면서 도 ①과 같이 朱子學을 애호하였고 또 ②에서는 陽明學을 酷好하면서도 ③에서는 答明齋書. 壬午, 霞谷集 卷1( 叢刊 Ⅴ.160), 9면. 今 폐해를 지적하였다. ; ① 觀陽明集, 其道有簡要而甚精者, 心深欣會而好之. ② 存言, 上, 霞谷集 卷8( 叢 刊 Ⅴ.160). 其學何嘗不善乎, 中略 其實同時爲聖人之學, 何嘗不善乎? ③ 存言, 下, 霞谷集 卷8( 叢刊 Ⅴ.160). 王氏致良之學甚精, 抑其弊, 或有任情縱欲之患. 73) 格物致知說은 宋代 性理學 이후 학문의 입문처로 중시되었다. 朱子는 居敬 窮理를 학문의 二大要素로 삼아서 窮理에 해당되는 格物致知에 대해서는 大學章句 에서 格物補傳 을 추가할 정도로 주의를 기울였다. 이후 格物致知는 성리학의 학문체계 를 대변하는 개념으로 인식되었다. 王陽明 또한 주자의 격물치지를 학문의 입수처 로 삼아 궁구하였다. 그러나 그것의 학문적 한계를 깨닫고 주자의 格物致知說을 致 - 29 -
이다. 조선 최초의 양명학 수용자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는74) 南彦經(1528 1594) 은 李瑤와 함께 양명학을 수용하였다. 그는 徐敬德의 문인이면서 李滉의 문하에 출입하였고, 成渾 李珥와 종유하며 東 西 당론의 형성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였다.75) 天理와 人事가 본래 두 가지가 아니다 라는 말76)은 心卽理說에 근 거한 것으로 남언경이 천리를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 人事, 곧 人心에 내재한 것으로 이해하였음을 보여준다. 이외에 그는 勤獨이 일용에 가장 친절한 공부이 며 힘쓸 것은 無意 無慾이라고 주장하였다. 勤獨이나 愼獨 혹은 誠意에 대한 강조는 왕양명이 정주학의 主敬에 대한 반론으로 제기한 것이며 無意와 無慾에 대한 것은 왕양명의 전습록 에서 강조되는 내용이었다. 이 때문에 이황 역시 그가 전습록 에 중독된 것으로 간파하였다.77) 柳成龍 역시 그를 양명학자로 판정하고78) 宣祖가 李瑤와 청대한 일에 대해 응대하는 가운데 양명학에 대한 그의 견해를 나타냈다. 良知說로 대처하였다.(송석준, 朱子學 批判論者들의 經典 解釋, 儒學硏究 8집, 128면 참조.) 이 때문에 格物致知의 해석 여부는 性理學과 陽明學의 분기가 되는 만큼 朝鮮後期 少論系 문인들의 文學理論 形成의 배경적 요소의 하나로 기능할 것 으로 기대된다. 74) 윤남한은 李能和 李丙燾를 비롯한 先學들의 論考와 日本人 高橋亨 阿部吉雄의 論考에서도 다 같이 南彦經을 조선 최초의 양명학자로 소개하고 있음을 제시하였 다. 이어서 그는 宣祖實錄, 27년 甲午 7월 癸巳條 의 남언경의 문인 李瑤의 請對 記事 가운데 朝鮮最初治陽明學者乃南彦經 李瑤也. 라고 한 점을 예시하였다.(尹 南漢, 朝鮮時代의 陽明學 硏究, 집문당, 1982, 137 138면 참조.) 75) 尹南漢, 前揭書, 139면 참조. 76) 李滉, 靜齋記, 退溪集 旨, 天理人事, 本非二致. 卷42( 叢刊 Ⅴ.30), 443 444면. 涵養體察, 吾家宗 77) 李滉, 答南時甫, 退溪集 卷14( 叢刊 Ⅴ.29), 365면. 所謂用力者, 無意而已, 無慾而已. 夫無意無慾, 乃聖者事, 一超恐難到此地位, 詳此段語, 意微有禪味, 得無看 白沙傳習未免有少中毒耶? 78) 宣祖實錄 二十七年 甲午 七月 癸巳條 人學於彦經者, 亦多尙陽明矣. 卷53( 朝鮮王朝實錄 - 30 - Ⅴ.22), 315면. 今
領相은 慶安令 李瑤를 아는가? 중략 그의 학문은 南彦經을 尊信합니다. 중략 또한 그[남언경을 말함 ; 역자 주]가 배운 바를 극진히 하여 陽 明書와 佛經을 모르는 것이 없다고 하더라. 또 義兵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중략 그 사람이 독서를 많이 하여 보통의 사람은 아닌 것 같다. 그는 중국의 心學하는 사람들을 방문하여 만나고자 생각하고 있으며 또 왕양명의 格致說 을 설명하면서 만일 왕양명으로 하여금 오늘의 사태를 經略하게 한다면 倭 賊을 소탕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陽明學은 象山學과 다릅니다. 대개 양명학은 실천성[運用處]이 풍부합 니다. 陽明은 재질이 높아서 우리나라의 재질이 낮은 인물로는 배울 수가 없을 것이다. 그의 이른바 항상 心을 돌아보라. 는 학설은 옳다. 그가 말하는 마음은 準則이 없습니다. 그의 뜻은 본령인 心을 먼저 바로잡아야 모든 일이 타당하리라는 것이다. 고인들은 儒生은 主理하며 禪家는 主心하고, 道家는 主氣한다. 고 하였는 데, 이 말이 지극히 옳은 듯 합니다. 대개 主理하는 까닭에 事物에 當然之理 가 있다고 생각하고, 主心하는 까닭에 光明이라고 생각하여 마침내 미친 듯 멋대로 하는 폐단이 있게 되었습니다. 79) 위의 宣祖와 柳成龍의 응대는 1594년 晋州城이 왜적에게 함락된 뒤의 급박한 상황을 의논하는 가운데 이루어졌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선조와 유성룡의 양 명학에 대한 관점이다. 양자는 양명학을 國家經營 즉 實用에 적절한 학문으로 파악하였다. 79) 宣祖實錄 二十七年 甲午 七月 癸巳條 卷53( 朝鮮王朝實錄 Ⅴ.22), 315면. 上 曰, 領相嘗知慶安令乎? 中略 成龍曰, 其學, 尊信南彦經矣. 上曰, 中略 且 渠極陳所學, 而如王陽明書 釋氏書. 無不知之云矣. 且言從事義兵人, 中略 上曰 其人多讀書, 似非庸衆人也. 渠以爲中朝心學之人, 欲訪問而見之, 陽明格致之說, 亦 言之矣. 若使陽明, 爲今日經略, 則此賊可以蕩掃矣. 成龍曰, 陽明之學, 異於象山, 盖 陽明多有運用處矣. 上曰陽明才高, 我國才質卑下之人, 不可學也. 其所謂常常顧心之 說, 是也. 成龍曰, 其心則無準則之心. 上曰, 其意以爲本領先正, 事事當正云. 成龍 曰, 古人云儒生主理, 禪主心, 道主氣, 此說極好. 盖主理, 故以爲事物有當然之理, 主 心, 故以爲光明而終有猖狂自恣之弊. - 31 -
靜工夫를 강조한 申欽은 사욕을 없애며 無物我 한 虛受 의 마음 상태를 중요 시했다.80) 허수 와 무물아 를 사상적 견지에서 본다면, 이 두 명제는 다른 생 각, 다른 관점, 다른 견해를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게 하는 유력한 근거가 될 수 있다. 신흠이 求正錄 의 서두에서 求心 을 강조한 것이나 心卽窮理 라는 명제 를 제기하는 것81)에서 양명학의 영향을 알 수 있다. 또 신흠은 왕양명이 眞儒 이며 장구나 따지고 성명설을 끌어대고 정사를 도외시하는 자들이 바로 주자학 도 라고 규정하며 왕양명의 학문이 현실과 연계하여 대단한 事功을 성취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82) 조선의 대표적 양명학 수용자로 거론되는 張維(1587 1638)는 남언경의 손 자인 南好學과 동서간이기에 이들 사이의 학문적 연계를 추측할 수 있다. 장유 는 명분보다 실질 을 중시하고 양지 에 비추어 판단하는 비판정신과 실용정신에 기반한 양명학을 수용하여83) 심즉리설 과 치양지설 그리고 지행합일설 등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혔다. 장유는 심 이 곧 천리 이며 양지 이고, 치량지 방 법이 바로 精一 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심 과 물 이 양지 로 통일됨을 강조하 여 왕양명의 양지 의 가르침도 실제 공부는 오직 성찰과 확충에 두어 매양 고요 함을 즐기고 움직임을 싫어함으로 학자의 경계를 삼았다고 하였다.84) 양지 의 80) 申欽, 求正錄, 中, 象村稿 卷57( 叢刊 V.72), 396면. 纔私, 卽有物我, 不能虛受. 81) 申欽, 求正錄, 上, 象村稿 以自了了, 心卽是窮理. 卷57( 叢刊 V.72), 383면. 物理未易遍窮, 吾心可 82) 申欽, 彙言 4, 象村稿 卷44( 叢刊 V.72), 318면. 王文成守仁, 眞儒者也. 以 儒素能將兵, 馳身於跕鳶之域, 與伏波齊名, 壯矣哉! 世雖誚以學術之誤, 學貴乎適用, 錢穀 甲兵, 何莫非儒者事, 而世之尋章摘句者, 動引性命, 而寘之政事, 則茫然無措手 地, 況司命三軍, 建立大績乎? 中略 余每想其豪姿英彩, 而夢寐之也. 83) 張維와 함께 세칭 四友 로 거론되는 崔鳴吉(1586 1647) 趙翼(1579 1655) 李時白(592 1660) 등은 李恒福의 문하에 함께 출입하였는데, 이항복의 학문 역 시 순수 주자학의 그것이 아니라 양명학적인 요소가 많았다.(조성을, 17세기 前 半 西人 官僚의 思想, 역사와 현실 8집, 1992, 63면 참조.), 谿谷集 卷4( 叢刊 Ⅴ.92), 80면. 人之神明, 謂之心, 心之 84) 張維, 人心道心說 體, 性也. 其用有爲義理而發者, 如惻隱羞惡知愛知敬之類, 是也, 有爲形氣而發者, 如 - 32 -
개념을 두고 논자들이 왕양명을 陳獻章과 더불어 선학으로 몰아세우자, 장유는 치양지 의 방법이 어디까지나 實行에 뜻을 둠을 근거로 그에 대한 반론을 제기 하였다.85) 남구만은 천인 성명론보다는 실천과 궁행을 중시하는 학문 경향을 추구하 며86) 주자학의 격물치지설 이 그다지 긴요하거나 절실하지 못하다고 비판하였 다.87) 우주의 존재원리인 천리 를 인간의 당위법칙으로 인식한 주자학자들은 그것을 인간과 사회에 실현하는 先知後行 의 학문체계를 수립하였다. 이에 따라 그들은 인간의 당위규범을 확립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보편적인 천리에 대한 파악이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과제이며 격물치지는 바로 우주의 존재 원리인 천리를 파악하는 공부로 간주하였다. 이러한 經驗知의 확충을 통한 보편 적 천리를 인식하는 과정에서, 지 의 공부와 행 의 문제는 분리되어 이해되었으 며 결국 이것이 주자의 격물설이 보편적 천리를 인식하는 지 의 공부에 치중하 게 하여 행 을 소홀히 하는 말폐적 현상을 초래하였다.88) 이에 대해 남구만은 지나치게 광범한 경험지의 체득을 주장하는 주자의 견해에 반대하며 주자의 격 知寒覺暖聲臭味之欲, 是也, 二者均謂之情. 形氣之發, 亦理所固有, 本無不善, 流而不 節, 斯爲惡矣. 形氣之流, 謂之人欲, 義理之正, 謂之天理. 學問之道, 無他. 節其流而 歸於正, 則用無疵而體自全矣. 夫是之謂, 精一之學. 85) 張維, 陽明與白沙, 谿谷集 谿谷漫筆 卷1( 叢刊 Ⅴ.92), 579면. 陽明白沙論 者, 竝稱以禪學. 白沙之學, 誠有偏於靜, 而流於寂者, 若陽明良知之訓, 其用功實地, 專在於省察擴充, 每以喜靜厭動, 爲學者之戒, 與白沙之學, 絶不同. 但所論窮理格物, 與程朱頓異, 此其所以別立門徑也. 86) 남구만이 선조인 남언경 이래로 양명학의 가학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은 그의 아들 남학명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 南鶴鳴, 先考遺事, 晦隱先生文集 卷4( 韓 國歷代文集叢書 Ⅴ.2389, 경인문화사), 385 386면. 公居常不談天人性命, 終日 看書沈潛, 一以躬行心得爲務, 夷考其立志勅身, 勤勞盡瘁, 簡潔自守, 雖於小德, 出入 者鮮, 不但天資近道而已. 87) 南九萬, 答崔汝和 壬申, 藥泉集 第32( 叢刊 天下之物, 莫不有理, 此意亦似太闊大而不緊切. 88) 宋錫準, 朱子學 批判論者들의 經傳解釋, 참조. - 33 - Ⅴ.132), 543면. 補亡章, 以爲 儒學硏究 8집, 1999, 134 135면
물 해석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였다. 懸吐에 있어서, 格物 의 토는 마땅히 物을 格 고 로 하여야 하고 物格 의 토는 마땅히 物이 格이니 로 해야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이 誠意 意誠, 正心 心正, 修身 身修, 齊家 家齊 등의 말과 文勢가 일치하게 될 것이다. 현토가 어찌 차이가 있겠는가? 이른바 物이 格하고 는 物 이 스스로 格 하 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니, 예시에서 문자로 經明 行修 義精 仁熟한 것과 語勢가 차이가 없으니 經을 밝히고 行을 닦는 것이 어찌 가히 나로 말 미암아 저절로 밝고 저절로 닦여지며, 義가 정밀해지고 仁이 익숙해지지 않 겠는가? 어찌 다른 사람으로 인하여 저절로 정밀해지고 저절로 익숙해지겠 는가? 대개 語勢가 자연히 그러하지 않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다. 이 때문 에 높이 밝혀 보이기를 物을 格게 호매 의 토는 대개 格 자를 至 자로 간주 하여 반드시 문의가 至 자의 의미에 합하게 하고자 한 까닭으로 그 현토가 부득불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생각에는 또한 그것이 합당한지 알 수 없다. 이 때문에 그것을 미루어 物理之極處 와 欲其極處 라는 두 구절의 현토를 또한 모두 이 로 해야 할 것이다.89) 남구만은 주자가 格 을 至 혹은 窮 으로 파악하는 것에 반대하며 來 로 해석 한 漢儒의 견해에도 반대하였다. 그가 의미하는 격 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제시 되지는 않았지만90) 격물 이 바로 堯 舜이 서로 전수한 16자의 율령 이라고 한 것이나 明善而復初 라고 한 것에서, 그가 의미하는 격 이 양명이 주장하는 格= 89) 南九萬, 答崔汝和 壬申, 藥泉集 第32( 叢刊 Ⅴ.132), 544면. 至於懸吐, 格物 之吐, 當作物을格 고, 物格之吐, 當作物이格이니, 此與誠意意誠正心心正修身身修 齊家家齊等語, 同一文勢, 懸吐豈有異也? 所謂物이格者, 非謂物自格, 與例用文字經 明行修與義精仁熟者, 語勢無異, 經之明行之修, 豈可謂不由我而自明自修, 義之精仁之 熟, 豈可謂不由人而自精自熟哉? 蓋其語勢, 自不得不然耳. 以此言之, 高明所示物을 格게호매吐, 蓋以格字爲至字看, 而必欲使文義合於至字之義, 故其懸吐不得不如此, 而 於愚見亦未知其恰當也. 以此推之, 物理之極處與欲其極處兩句懸吐, 亦皆當作이矣. 90) ① 南九萬, 答崔汝和 壬申, 藥泉集 第32( 叢刊 Ⅴ.132), 543면. 格物之格 字, 漢儒之訓曰來也. 程朱之訓則曰至也. 來字本不合, 至字亦有不足, 故大學章句添 之以窮字, 此於語意雖通, 而格字本義, 終不知有窮字之義. ② 南九萬, 答崔汝和 壬 申, 藥泉集 第32( 叢刊 Ⅴ.132), 543면. 物字似是有物有則之物字, 非但外物 爲物, 吾身吾心, 無非物, 不加喫緊用力之工則無以明善而復初, 所謂格物, 乃是堯舜 相傳十六字律令也. - 34 -
正 에서 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또한 物 을 시경 烝民 의 有物有則 이라 할 때의 萬物 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吾身과 吾心이 당연히 포함된다. 격물 이 자 신의 마음을 바로 잡는 실천적인 것으로 이해한 남구만은 정국 운영을 비롯한 제방면에 그것을 실천하였다. 시사를 처리할 때, 誠一 에 근본하여 오직 정밀해 야 천하의 일을 이룰 수 있다. 91)라고 하며 사안을 꼼꼼히 살피고 많은 사람에 게 자문을 구하여 좋은 의견이 있으면 선택하였고, 시행할 때는 반드시 實用 을 강조한 것92)이 이를 입증한다. 남구만 일가의 양명학적 전통은 처남인 朴世堂의 思辨錄 에 그 흔적이 나타 난다. 사변록 은 경전해석에 대해 주자와 다른 시각을 제시하여 예송과 명분론 이 지배적이던 17세기 사상계에 새로운 사상의 가능성을 시사하였다. 특히 사 변록, 대학 의 격물치지 에 대한 해석에는 양명학의 영향으로 보이는 견해가 나 타난다. 박세당의 격물치지설 의 특징은 實踐 을 중시한다는 점이다. 즉 주자류 의 격물치지설이 知 에 대한 認識理論임에 비해, 박세당은 知와 行을 一元論的 인 것으로 파악하여 실천적인 측면을 강조하였다.93) 주자는 格物을 사물의 理 致를 窮究해 이르는 것 94)으로 해석하였고, 박세당은 사물의 法則을 추구하여 바름의 터득을 기약하는 것 95)으로 해석하였다. 아울러 그는 致知 를 나의 지식 을 미루어 극진히 하는 지식의 확충 으로 이해한 주자96)와 달리, 치지 란 나의 91) 崔昌大, 領議政藥泉南公墓誌銘, 也, 可以成天下之務. 昆侖集 卷17( 叢刊 領議政藥泉南公墓誌銘, 昆侖集 卷17( 叢刊 92) 崔昌大, 廉儉, 性好學, 至耋老, 貫通經史而務致於實用. Ⅴ.183), 320면. 惟精 Ⅴ.183), 322면. 公家居 93) 朴世堂, 大學 傳六章, 思辨錄, 태학사, 1979, 9면. 今欲使學者, 上窮于此, 下窮于草木之微, 懸跂乎不及之塗, 馳騁乎無窮之境, 卒莫省夫所自反, 其不眩亂迷惑 而失其本心之所受, 此不可知. 94) 大學, 經一章 註, 格, 至也, 物, 猶事也. 窮至事物之理, 欲其極處無不到也. 95) 朴世堂, 大學 經一章., 思辨錄 ( 西溪全書, 下 ), 태학사, 1979, 4면. 求以至 曰致. 格, 則也, 正也. 有物有則, 物之有格, 所以求其則而期得乎正也. 96) 大學 經一章. 致, 推極也, 知, 猶識也. 推極吾之知識, 欲其所知無不盡也. - 35 -
앎을 통하여 일의 마땅한 바를 이룬다 고 한 점에서 왕양명의 치양지설과 유사 성을 보였다.97) 그가 사문난적의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주자학의 한계를 비판했 던 것은 현실 문제를 도외시한 채 공허한 사유에만 몰두하는 당시 주자학자들의 학문 태도에 대한 회의 때문이었으며, 주자의 격물설에 대한 그의 비판 역시 같 은 이유에서 비롯되었다고 이해된다. 鄭齊斗 역시 격물치지 에 대해, 격물 이 사람의 뜻이 들어있는 物을 바로잡는 다, 치지 를 자신의 良知를 완성한다 는 의미로 이해한 양명학의 해석태도를 수용하 였다.98) 이러한 논리를 수용한 정제두는 격물 의 물 은 事 이며, 거기에는 사람의 뜻인 意 가 포함된다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그는 격물치지 를 사람의 뜻이 담겨 있는 사물에 나아가 그 뜻을 바로잡는 실천적인 성격의 것으로 이해하였다.99) 양명학적 가학 전통100)을 계승한 崔昌大(1669 1720)는 마음에 대하여 직 접적인 체험에 의한 活物로서 인식하였다.101) 97) 王守仁, 傳習錄, 中 答顧東橋書, 王陽明全書 卷2, 44 45면, 上海古籍出版 社, 1991. 朱子所謂格物云者, 在卽物而窮其理也. 卽物窮理, 是就事事物物上, 求其 所謂定理者也. 是以吾心而求理於事事物物之中, 析心與理而爲二矣. 中略 若鄙人 所謂致知格物者, 致吾心之良知於事事物物也, 皆得其理矣. 致吾心之良知者, 致知也. 事事物物, 吾心之良知, 卽所謂天理也. 致吾心良知之天理於事事物物, 則事事物物, 皆得其理者, 格物也. 是合心與理而爲一者也. 98) 吳光 編, 陽明學硏究, 上海古籍出版社, 2000 ; 시마다 겐지 저/이근우 역, 子學과 陽明學, 까치, 1986. 朱 99) 鄭齊斗, 大學, 霞谷集 卷13( 叢刊 V.160), 350면. 致知也, 知者心之本體, 卽至善之發也. 格正也, 物者事也, 卽意所在之事也. 致其本體之知者, 其實在於其所 事之正焉, 而其至也不過盡其物之實爾, 故必卽其意之所在之物而正之., 遲川集 卷17( 叢刊 V.89), 529면. 或有難者曰, 知 100) ① 崔鳴吉, 復箴後說 行有先後, 易置何也? 余應曰, 因自家切已病痛而鍼砭之, 所以救其偏也., ② 崔鳴 吉의 스승 李恒福이 그에게서 傳習錄 을 빌려 보았다고 한 점 ; 李恒福, 書牘 與崔子謙, 白沙集 卷22( 叢刊 V.62) ③ 崔昌大, 遲川公遺事 昆侖集 卷 20( 叢刊 V.183), 368면. 公與谿谷少時講學也, 見陸王之書, 悅其直指本體, 刊 落枝葉, 兩公皆深取之, 公則中年, 覺其學術之有疵, 屢形於言論, 完陵公稍長涉學, 公嘗赴瀋道, 遺完陵公書, 備論陽明學術之病, 谿谷至老, 不改初見云. 101) 崔昌大, 寄後亮書, 遲川集 卷17( 叢刊 V.89), 531면. 陽明書云, 心本爲活 物, 久久守着, 亦恐於心地上發病, 此必見得親切自家體驗分明, 故其言如此, 以陽明 - 36 -
마음은 活物이다. 처음에 숨기고 참으면 끝에 가서 나타날 때는 반드시 난폭해진다. 마음이 강제로 情에 제약을 당하면 그 일에 나타나는 것이 너 무 지나쳐진다.102) 박세당 남구만 등에게 수학한 그는 活物로서의 마음을 인식하고 그러한 마음 의 작용을 따르는 것이 순리임을 강조하는 양명학적 이해를 나타냈다. 최창대가 活物로서의 마음을 인식한 것은 折屐辨 에 잘 나타나 있다. 여기에서 그는 晉 의 謝安의 折屐故事103)를 변론하며 活物인 마음의 작용을 억제하다가 실태를 빚기보다는 마음의 움직임 자체를 따르는 것이 順理 라고 하였다. 이것은 양명 사상의 종지라 할 수 있는 心卽理 의 형상화이다. 양명학의 실천주의적 특징을 수용한 최창대는 주자학의 이념성과 명분론에 침잠된 조선후기의 현실 상황을 체인하여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였다. 達成 徐氏家 역시 소론계의 대표적 가문의 하나로 남구만, 최석정, 윤증 집안 과 연혼 및 사승 관계로 긴밀하게 얽혀 있기에 이들 역시 양명적 학문 경향과 연관지을 개연성이 존재한다.104) 之高明, 猶有是憂, 況汝方居逆境, 心事何能和泰如平人耶? 102) 崔昌大, 折屐辨, 昆侖集 卷14( 叢刊 V.183), 263면. 心者, 活物也. 隱忍 於始, 則其發於終也必暴, 强制於情, 則其形於事者太過. 103) 晉의 謝安이 국가의 존망이 걸린 전쟁 중에 손님과 바둑을 두고 책을 보다가 전 쟁에 승리했다는 보고를 듣고도 아무런 기쁨을 표시하지 않고 손님을 보내고 집 의 문지방을 넘다가 너무 기쁜 나머지 나막신의 굽이 부러졌는지도 몰랐다는 일 화( 晉書 謝安傳 ). 104) ① 남구만의 손자인 南克寬의 장인이 서유구의 고조부인 徐文裕(1651 1707)이 며, 그의 처남인 徐宗玉과 徐宗泰는 南鶴鳴 등과 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李 宗城 李德懋 등과 교분이 두터웠다. 서유구의 從祖父인 徐命善의 장인은 윤증의 사위이자 제자인 李福源의 아들 李晩秀이다. 또한 서문유의 형인 徐文尙(1630?)은 최창대의 아들인 崔守身의 장인이며, 그의 5세손인 徐榮輔(1759 1816) 는 정제두의 제자이다. ② 주자학이 교조화 되던 17세기 후반, 徐宗泰(1652 1719)는 양명집 을 읽은 뒤의 소감문에서 양명학의 폐해뿐만 아니라 朱門의 말 학적 폐해 와 장횡거 및 여조겸의 학설 역시 의리의 바름을 잃은 부분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 徐宗泰, 書陽明集後 己未, 晩靜堂集 卷11( 叢刊 Ⅴ.163), - 37 -
徐瀅修는 격물 의 해석에 대한 정조의 물음에 鄭玄과 司馬光의 해석이 잘못이 라고 비판한 다음, 왕양명의 격물설이 思辨 에 기인한 것이라고 적확히 지적하 면서도 양명학의 취지에 대해서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臣 瀅修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鄭玄이 格 을 來 로 해석한 것은 조상들의 혼령이 가까이오며 에서의 격 의 의미에 근본한 것이며 司馬光이 격 을 扞 으로 해석한 것은 싸움을 막다 에서의 格 의 의미에 근본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두 개의 격 자 해석은 모 두 바른 뜻을 잃었습니다. 예컨대 왕양명이 격 을 正 으로 해석한 것은 비록 먼저 왕의 마음을 바로 잡는다 에서의 격 자의 의미에 근본하였으나 그것의 의미는 그것을 위하여 한결같이 간이함을 좇아서 일없이 부지런히 구하며, 앉아서 本心의 妙를 체 득하고자 하였습니다. 대저 외물의 유혹을 막는 것은 바로 誠正 의 공부이니 반드시 성정 의 앞 에 반드시 格致 하게 하는 것은, 격치 가 없으면 막아야 할 것 중에 반드시 막지 않아도 될 것을 막는 근심이 있을까 해서입니다. 또 양명이 窮理 라 하 지 않고 격물 이라고 한 것은 허공에 매달린 것을 더듬는 것이 되니 혹 佛 氏의 神通 明覺의 설로 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형상이 있는데 나 아가서 공부하는 것으로 격물 의 의미를 해석할 것입니다. 육상산 왕양명의 무리들은 이러한 뜻을 모르니 理 를 비난할 마땅히 문리를 이루지 못한다고 程朱의 窮 것입니다.105) 236면. 王伯安曰, 言益詳, 道益晦, 析理益精, 學益支離. 又曰, 記誦辭章之習, 獘 之所從來, 無亦言之太詳, 析之太精者之過歟! 是言也, 盖指朱門末學之獘. 中略 盖周 程諸先生歿, 且未及百年, 微言寢晦, 而異說交作. 中略 雖如南軒 東萊 二先生, 經解諸說, 間亦有不得義理之中正, 而其流不能無獘者, 若此不已. 105) 徐瀅修, 講義 大學傳五章, 明臯全集 卷17( 叢刊 Ⅴ.261), 265 266면. 臣瀅修對曰, 康成之以來訓格, 本於祖考來格之格, 溫公之以扞訓格, 本於格鬪之格, 兩格字, 均失正義, 而至若陽明之以格爲正, 雖本於惟先格王之格, 其意則爲此一從簡 易之說, 欲其無事勤求, 坐得本心之妙矣. 夫扞禦外物之誘, 正是誠正之工, 而必使格 致於誠正之前者, 亦以無格致則其所扞禦者, 必有不當扞禦而扞禦之患矣. 且不曰窮 理而曰格物者, 爲其懸空摸索, 或歸佛神身通明覺之說, 而就其有形象, 下工夫者, 爲 訓耳. 陸王之徒, 不知此義, 則宜其以不成文理, 譏程朱之窮理也. - 38 -
서형수는 양명학의 本心의 체득 방법을 비판하였다. 즉 앉아서 본심의 묘를 체득하는 양명학의 靜坐 가 불가의 參禪과 유사하다는 것이다. 이외에 그는 비 현실적이고 사변적인 주자학의 폐해에 대해 정주에게서 나온 말은 감히 털끝만 큼도 같다 다르다 논의할 수 없는 것이 남송 이후 유가의 말폐이다. 106), 진실 로 주자도 오류가 없을 수 없다.107) 고 비판하였다. 동시대 학인들의 주자 맹신 의 분위기 속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양명학의 취지에 공감하는 그의 태도는 상당 히 주목할 만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豊山 洪氏 일문도 소론계의 양명학적인 학문전통과 잇닿는다. 어린 나이에 부 모를 여윈 홍량호의 학문 형성에 많은 영향을 준 伯舅 沈錥(1685 1753)108) 은 양명학과 관련이 깊은 인물이다. 그의 조부 沈濡(1640 1684)는 정제두와 姨從間이었고, 자신은 정제두의 수제자였다. 이 때문에 그의 문집에는 양명학적 경향이 적지 않게 나타난다. 본래 意는 仁心과 義路에 있다, 무릇 이른바 放心을 구한다. 는 것은 다만 心을 회수하려는 것일 따름이다. 中略 그러나 먼저 存心하지 않는다면 또한 養性할 수 없다. 이러한 意를 알지 않을 수 없다. 性在心中不自裁 性은 心中에 있어 직접 재단할 수 없고 功夫先欲放心回 功夫는 먼저 放心을 돌이키고자 해야 한다. 存心養性爲眞諦 存心 養性이야말로 眞理이니 達道元從大本來 達道는 원래 大本에서 나온다.109) 106) 徐瀅修, 題毛西河集卷, 明皐全集 卷10( 叢刊 不敢纖毫異同, 固南宋以後儒家之末獘, 107) 徐瀅修, 題毛西河集卷, 明皐全集 無誤矣. 卷10( 叢刊 Ⅴ.261), 196면. 言出程朱, Ⅴ.261), 196면. 朱子誠不能 108) 洪良浩, 祭伯舅樗村沈先生錥文, 耳溪全書 卷24( 叢刊 Ⅴ.241), 433면. 小 子之事先生, 盖三十年所矣. 中略 先生之於小子, 親則舅甥, 義兼父師. 凡所以 開導而責勉之者, 至誠懇切, 而惟小子, 顓蒙庸懦, 迄未有尺寸之得. 109) 沈錥, 求放心, 樗村遺稿 卷21( 叢刊 Ⅴ.207), 332면. 本意在仁心義路上, 而凡所謂求之者, 但欲此心之收回而已. 中略 然不先存心, 則亦無以養其性, 此 - 39 -
性情의 관계를 體 用의 생성관계에서 본 주자와 달리, 심육은 性 이 심 의 일부에 포섭되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주자설에 대한 심육의 이견은 심성론에만 그치지는 않는다. 良知가 바로 本心 이라고 인식하였다.110) 또 이러한 양지의 유행과 발용은 動하지만 動하는 현상이 없고 靜하지만 靜하는 형상이 없으므로 動하여도 安定되고 靜하여도 安定된다고 이해하였다.111) 이러한 그의 견해는 왕양명이 陸澄에게 답한 서신의 내용과 일치한다.112) 홍량호는 격물 의 분석에 대한 주자설과 양명설의 문제점을 비판하고113), 격 물 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을 시도하였다. 孔門에 있어서는 格致의 공이 曾子만한 사람이 없다. 曾子問 한 편을 보면 그는 얻지 않으면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치 땅을 파 서 샘에 이르고 연못을 더듬어 구슬을 얻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마침내 孔 意有不可不知也. 中略 性在心中不自裁, 功夫先欲放心回. 存心養性爲眞諦, 達 道元從大本來. 110) 沈錥, 本心, 樗村遺稿 卷21( 叢刊 Ⅴ.207), 331면. 爍爍光中指此心, 肆行胡 走認眞心. 不敎天理爲存主, 縱說良知亦本心. 111) ① 沈錥, 動亦定, 樗村遺稿 卷21( 叢刊 Ⅴ.207), 320면. 心似權衡善自持, 靜亦定, 樗村遺 不隨低仰有推移. 從他外物紛酬酢, 發處還如未發時. ② 沈錥, 稿 卷21( 叢刊 Ⅴ.207), 320면. 淸鑑高懸本自空, 確然那得一塵蒙. 姸媸白黑 形難遁, 隨去隨來照不窮. 112) 王守仁, 傳習錄 答陸原靜書, 王陽明全集 卷2, 上海古籍出版社, 1991, 63 면. 來書云, 周子曰主靜, 程子曰動亦定, 靜亦定. 先生曰定者心之本體, 是靜, 定 也. 決非不覩不聞, 無思無爲之謂, 必常知常存, 常主於理之謂也. 夫常知常存, 常主 於理, 明是動也. 已發也, 何以謂之靜? 何以謂之本體? 豈是靜定也, 又有以貫乎心 之動靜者邪? [答] 理無動者也. 常知常存, 常主於理, 卽不覩不聞, 無思無爲之謂也. 不覩不聞, 無思無爲, 非枯木死灰之謂也. 覩聞思爲一於理, 而未嘗有所覩聞思爲, 卽 是動而未嘗動也. 所謂動亦定, 靜亦定, 體用一原者也. 113) 洪良浩, 格物解, 耳溪集 卷17( 叢刊 Ⅴ.241), 312면. 朱子之訓爲至, 蓋取格 于藝祖之義, 而加一窮字, 然後乃備, 所以見議於王氏也. 王氏之訓爲正, 蓋取格王正 事之義, 而無窮理之工, 何以致知至之效耶? 今訓格以薄, 則證之經文, 無處不通, 格 于皇天者, 謂盛德上薄於皇穹也. 祖考來格者, 謂精神下薄於子孫也. 苗民來格者, 謂 威德遠薄而頑民自感也. 格其非心者, 謂誠意上薄, 而君心自感也. 有耻且格者, 謂德 禮徧薄, 而民俗自化也. 如曰扞格, 曰格式者, 皆有兩木之義, 餘可推也. - 40 -
子의 一貫된 취지를 얻어듣고서 吾道의 종지를 터득한 것이다. 그런 까닭에 格物 두 글자가 증자가 남긴 저서인 大學 에 처음 나타나서 성학의 樞要 가 되었다. 諸子에 있어서는 程本氏의 말에 나의 정신이 안정되어 情이 흔 들리지 않으니 物에 가까이 가면 밝아지고 事를 처리하는 것이 확실해진다 라고 하였으니 대개 나의 정신이 안에서 안정되면 그것으로 物을 가까이하 여 事를 대처함이 자연히 밝고 확실해진다는 말이다. 이것은 바로 군자의 格物의 공부가 서로 가까이하고 서로 감응한다 는 뜻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학설은 이미 漢儒 이전에 발현되었지만 주자도 살펴보지 못했으니 지금 어 디에서 우러러 질정하겠는가?114) 훈고를 통하여 格 을 薄 으로 풀이하는 독자적인 견해를 제시한 홍량호는 다 양한 예문을 통해 그 타당성을 검증하고 致知 란 心靈이 物에 접촉하여 物理의 미묘하고 심오한 것을 노정하는 것이며 이것이 격물치지 의 본의라고 파악하였 다.115) 또한 그는 자신의 견해를 기준으로, 格 을 正 으로 풀이한 왕양명의 해 석은 窮理의 공교함이 없어서 知至 의 효과를 이룰 수 없고 至 로 풀이한 주자 의 견해도 窮 이라는 한 글자가 더해야만 완비될 것이라고 하는 비판적인 입장 114) 洪良浩, 格物解, 耳溪集 卷17( 叢刊 Ⅴ.241), 312 313면. 在孔門則格致 之功, 莫如曾子, 觀乎曾子問一篇, 可見其不得則不措, 如掘地而及泉, 探淵而得珠, 所以終聞一貫之旨, 得吾道之宗也. 故格物二字, 始見於曾氏之遺書, 而爲聖學之樞要 也. 在諸子則程本氏之言曰, 神宇泰定而情不搖, 其格物也明, 遇事也剛, 蓋言吾之精 神定於內, 則以之格物, 而處事自然明且剛矣. 正得君子格物之功, 有相薄相感之意, 此說已發於漢儒之前, 而朱子不之省, 今於何仰質乎? 115) 洪良浩, 格物解, 耳溪集 卷17( 叢刊 Ⅴ.241), 312면. 格之爲文, 兩木相薄 之謂, 周語曰, 穀洛鬪, 韋昭解云, 二水格言相薄也. 蓋君子之格物, 如攻堅木, 如 擊猛獸, 誠力旣到, 精神自透, 薄於外而感於內, 物無不窮, 而理無不通也. 今訓格以 薄, 則證之經文, 無處不通, 格于皇天者, 謂盛德上薄於皇穹也. 祖考來格者, 謂精神 下薄於子孫也. 苗民來格者, 謂威德遠薄而頑民自感也. 格其非心者, 謂誠意上薄, 而 君心自感也. 有耻且格者, 謂德禮徧薄, 而民俗自化也. 如曰扞格, 曰格式者, 皆有兩 木之義, 餘可推也. 大抵凡物, 未有不相薄而能相感者, 故致知之道, 我之心靈薄於 物, 而物理之微奧自然呈露, 是謂物格而知至, 金石之頑, 蟲魚之蠢, 猶可孚感, 況於 人事之至著, 物理之有緖者乎? 所以君子積累之功, 至于豁然貫通, 衆理之精粗, 迎刃 而解也. 此乃大學之第一極功, 而意誠以下, 自此而推之矣. 中略 所以成位乎中, 而爲萬物之主也. - 41 -
을 보였다.116) 이러한 그의 태도는 교조화된 주자학설에 대해 묵수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당대의 일반 학인의 범주나 주자학설에 대해 부분적으로 이의를 제기 한 일부의 진보적 학인들의 수준을 넘어서는 혁신적인 성격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實證的, 反尊華的 歷史 敍述 우리의 역사를 고찰할 때, 유례없을 만큼 많은 官撰史書의 간행이 성행한 조 선전기와 대조적으로, 조선후기에는 私撰史書의 편찬이 성행하였다. 관찬사서는 군주와 관료가 역사 서술의 주체가 되었음을 의미하며 그들에 의해 편찬된 사서 에 통치이념을 수립하려는 그들의 목적의식이 강하게 투영되리라는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鄭道傳 등에 의해 편찬된 高麗國史 에는 箕子朝鮮 에 연계한 朝 鮮 의 국호 선정117), 遼東征伐을 통한 국토 수복, 檀君에 대한 제사 등 개국공 신 세력들의 이중적인 정책 추진 의식이 나타났다.118) 太宗 때 反開國功臣派에 의해 편수된 東國史略 은 上古史가 단선적인 外紀로 취급되어 비중이 훨씬 경 감되었으며 三國史의 인식에서 金富軾의 三國史記 를 토대로 재구성하되 결점 을 보완하기 위해 紀傳體가 아닌 編年體 서술 방식을 채택하여 사건의 집중적인 기술과 春秋大義의 추구 등을 시도하였다.119) 河崙 등에 의하여 추진된 高麗 116) 앞의 주 121) 참조. 117) 鄭道傳, 朝鮮徑國典(上), 國號, 三峰集 卷13( 叢刊 V.5), 414면. 惟箕子受 周武之命, 封朝鮮侯, 今天子命曰惟朝鮮之稱美, 且其來遠矣, 可以本其名而祖之, 體 天牧民, 永昌後嗣. 蓋以武王之命箕子者, 命殿下, 名旣正矣, 言旣順矣, 箕子陳武王 以洪範, 推衍其義, 作八條之敎, 施之國中, 政化盛行, 風俗至美, 朝鮮之名, 聞於天 下後世者如此, 今旣襲朝鮮之美號, 則箕子之善政, 亦在所當講焉. 嗚呼! 天子之德無 愧於周武, 殿下之德亦豈有愧於箕子哉! 118) 이상백, 李朝建國의 硏究, 을유문화사, 1947, 74 79면 참조. 三國史略序, 陽村集 卷19( 叢刊 V.7), 196면. 恭惟我主上殿下, 天縱 119) 權近, 聰明, 留神經史, 乃命左政丞臣河崙 藝文館大提學臣李詹及臣等, 將三國史就加檃 - 42 -
國史 의 개찬은 개국공신과 반개국공신 간의 권력투쟁의 도구로 이용되면서 조 선왕조의 개국의 업적을 상대적으로 찬양하며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의미지워진 다. 정치적 주도권을 장악한 世宗의 주도로 간행된 高麗史 의 直書主義 尊王 室主義 記錄保存主義 서술원칙은 事實主義的인 역사서술 태도가 적용되었다기 보다는 중국에 대하여 국가의 위신을 높이려는 의도가 숨어있다고 이해된다. 세 종이 기록 보존을 강조하며 고려사의 체제에서 관람에 편리하고 가치평가가 준 엄한 강목체 보다 관람에는 불편하지만 서사가 상세한 편년체를 지지한 것120)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조선초기의 관찬사서 간행의 대전제는 유교적 가치관에 입각 한 계층사회의 건설이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불평등한 사대적 국제관계의 재정립 이었다. 그러나 실제로는 편수 주체의 정치적 위치와 대중국 관계에 따라, 우 리 역사의 원류를 달리 파악하는 정략적, 사대적 또는 민족사적인 양상을 나타 냈다.121) 17세기 말 18세기 초에, 조선은 反淸復明을 명분삼는 三藩의 亂과 같은 淸 의 내란으로 인해 自强 의 방책을 다각도로 모색하였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효 括, 倣編年法, 合爲一書, 於是以新羅先起後滅, 故用其年紀以表其首, 乃註中國紀元 以明其統, 又以二國元年各註其下, 次書時月以係其事, 先新羅而不以國, 擧以爲之主 也. 次麗, 次濟, 以所起之先後也, 本之本紀, 參之列傳, 有綱以擧其要, 有目以盡其 詳, 革其鄙俚, 芟其繁蕪, 誅絶儧亂, 褒崇節義, 又以管見, 論其得失以附其後, 勒成 一書, 各曰東國史略, 雖其筆力鄙拙, 無足可觀, 然政治之得失, 國祚之脩短, 可法可 戒, 善惡俱存, 萬機之暇, 如賜覽觀, 其於爲治之方, 庶有小補云. 120) 世宗實錄 十四年 八月 丙申條 卷57( 朝鮮王朝實錄 V.3), 409면. 上嘗覽高麗 史, 傳旨春秋館曰, 以綱目法修撰, 則於小事重疊, 難以悉記, 然便於觀覽, 以便年法 修撰, 則觀覽雖難, 敍事則詳, 何以處之? 孟思誠 權軫 申檣 鄭麟趾 金孝貞 偰循等議啓曰, 大抵史記, 有編年而後有綱目. 上曰, 予意亦然. 以編年撰之, 寧失於 煩, 毋令疏略沒實. 121) 한영우, 朝鮮初期의 歷史敍述과 歷史認識, 韓國學報 7집, 일지사, 1977 참 조. 이하의 조선초기의 역사서술 및 그 인식에 대한 고찰은 한영우의 견해를 수 용하였다. - 4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