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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 高 丞 嬉 1) 1. 머리말 1) 황주 병영 방어시설 보강 2. 황해 兵營의 독립과 내륙방어책 2) 蕀城 방어책 3. 황해 북부 영애방어책 3) 太白山城 축조 1) 진보의 신설 2) 관할권 분쟁과 진보 축소 4) 靑石洞 방어론 5. 맺음말 4. 간선도로의 관방 시설 1. 머리말 조선시대에 황해도는 평안도와 경기도의 중간지대에 위치하여 북방의 적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 후방으로 군사적 비중이 높지 않은 곳이었다. 따라서 조 선 전기에는 병영을 감영과 합설하는 등 독자적 방어체계가 뚜렷하게 수립되 지 않았다. 황해도는 서울 의주를 잇는 西北大路를 기준으로 동쪽의 산악지대와 서쪽 의 평야지대로 나뉜다. 낭림산맥의 끝자락에서 갈라진 언진산맥과 멸악산맥에 의해 형성된 내륙 산지는 해발고도 1천 미터를 웃도는 동북쪽의 고산지대를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 낮은 산지를 이루고 있다. 특히 멸악산의 서쪽부터는 산지가 급격하게 낮아져 재령평야를 형성하며 해안가는 넓은 저습지가 발달 하였다. 이같은 지형적 특징으로 인하여 直路1)로1)이용되는 洞仙嶺 외에 낮은 * 이 논문은 2003년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KRF-2003-072AS1001)." 1) 직로의 의미에 대해서는 유선호, 1999 조선초기 역로와 직로, 역사교육 70 참 조. 유선호는 사료에 나타나는 '직로' 용어의 사용례에 따라 그 의미를 ① 한양에

392 韓 國 文 化 38 산지를 관통하는 많은 고갯길이 열려 있어 육로 방어에 난점이 많았으나 평 안도의 후방이라는 입지로 인해 건국 초에는 별다른 관방시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반면 서해안은 평양지대로 배후에 험지가 없기 때문에 해상으로부터 왜구가 침공할 경우 해안읍들의 피해가 컸다. 이에 따라 조선 초부터 황해도 지역의 군사적 관심은 海防체제 구축에 집중되어 해안 진보가 곳곳에 설치되 었다. 내륙지역의 관방책은 문종대에 평안도와 함경도의 후방 보안책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처음 수립되었다. 이는 많은 嶺路들을 차단하기 위해 행성이나 목책 을 쌓아 산악지대에 동서의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방의 긴 방어선을 유지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어 곧 폐기되었고 서북대로의 경로상에 있는 평안도 접계의 黃州와 경기도 접계의 平山이 요충으로 주목을 받았을 뿐이다. 황해도 내지 관방에 대한 관심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다시 높아져 병영이 독립되는 등 독자적인 관방체계가 수립되기 시작하였다. 이후 이괄의 난, 정묘 호란, 병자호란 등 여러 차례의 적변을 경험하면서 영로 방어를 위한 진보를 설치하고 직로 방어를 위한 산성을 수축하는 등 본격적인 관방 시설이 정비 되었다. 본고는 양란 이후 19세기 중반까지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의 정비 과정을 고찰하고자 한다. 병자호란 이후 청은 조선의 군사시설 복구를 허락하지 않았 다. 황해도를 포함한 서북지역의 군사적 복구와 새로운 방어대책의 수립은 양 국 관계가 안정되기 시작한 17세기 후반인 숙종 초부터 가능하였고 영조대 중 반인 18세기 중엽에 대부분 완비되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19세기까지 관방 설 비를 보충하는 작업은 계속되었다. 황해도의 경우, 특히 임진왜란 이후 일련의 적침과 내란의 경험을 바탕으로 간선도로와 산악지대의 영로 방어대책을 마 련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본고에서는 황해도 내륙지역의 적로 방 어시설이 정비되는 과정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서 의주, 경원, 순천, 부산에 이르는 역로 혹은 간선도로, ② 적의 진출로, ③ 지 름길로 분류하였다. 본고에서는 간선도로인 서북대로(의주대로)를 의미하는 용어 로 한정하여 사용하였다.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393 황해도 지역에 대한 기존의 軍事史的 관심은 조선후기 수도방어체계의 일 환이었던 강화도 방어체계와 연계하여 일부 거론하거나2)2)중앙 군영체제의 정 비와 관련하여 5군영 소속 군병의 분포를 언급하는3) 정도였을 뿐 이 지역 자 체의 독자적인 군사체계는 주목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황해도는 평안도와 경 기도의 중간지대로서 서북방어선의 후방이자 수도방어의 전방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곳이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기능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방어전략이 필요하였다. 본고는 이 같은 황해도 지역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고 려하여 수립된 내지 관방체계의 수립 과정과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하고자 한다.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군사전략이나 관방대책은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 과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따라서 조선후기 황해도 지역의 관방체계에 대한 연구도 이 지역의 사회경제적 여건의 특성을 고려할 때 더욱 현실에 가까운 모습을 밝힐 수 있을 것이지만, 본고에서는 그 같은 측면은 다루지 못하였다. 추후의 과제로 삼고자 한다. 2. 황해 兵營의 독립과 내륙방어책 황해도는 북방의 세력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 후방지역으로 서북 3도 가운 데 군사적 의미가 가장 낮은 곳이었다. 따라서 국초에는 북방의 적침에 대비 한 내지 관방대책이 수립되지 않았다. 반면 조선 건국 당시에 자주 출몰하던 왜구 등 해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한 해안 방어에 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 해안가에 위치한 해주 감영에 병영과 수영을 합설하였다.4)4) 황해도 내륙지대 관방책의 근간이 마련된 것은 15세기 중엽이었다. 문종 즉 위 초 중국 정세의 불안정으로 인해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의 방어대책을 수 립하는 과정에서 강변을 통과한 적의 남하 경로상에 있는 황해도의 관방책도 2) 박광성, 1973 병자란후의 강화도 방비구축, 기전문화연구 3; 이민웅, 1995 18 세기 강화도 수비체제의 강화, 한국사론 34; 강성문, 2000 조선후기의 강화도 관방론 연구, 육사논문집 56-2; 송양섭, 2002 17세기 강화도 방어체제의 확립 과 鎭撫營의 창설, 한국사학보 13 ; 조낙영, 2004 17세기 강화도 비축곡의 마 련과 운영,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석사학위논문. 3) 육군사관학교 한국군사연구실 편, 1977, 한국군제사 근세조선후기편, 육군본부. 4) 經國大典 권4, 兵典 外官職

394 韓 國 文 化 38 논의되었다. 이 때 평안도 이남의 방어거점으로 주목된 곳이 黃州였다. 그러나 황주 한 지점을 지키는데 그치지 않고 황주 서쪽 해안지대의 요충인 蕀城부 터 慈悲嶺, 遂安, 谷山을 연결하는 산지의 주요 통로에 木柵이나 石城 등 關防 5) 시설을 설치하고 방어선의 양 끝 지점에 蕀城鎭과 防垣鎭을 두었다. 5)이는 황 주를 중심으로 동서로 이어지는 산악지형을 이용하여 적의 남하를 차단할 수 있는 방어선을 구축하는데 중점을 둔 것이었다. 황해도의 지형적 특성상 황주 이남부터는 산지가 낮아져 통행 가능한 고갯길이 많아 서북대로의 방어만으 로는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요해처의 방어대책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방어지역을 늘어놓는 것은 많은 비용과 인력이 필요하였으므로 군사적 위기 상황이 지속되지 않는 한 유지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극성진과 방원진은 설치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폐기되었으며 영로 관방시설들도 버려졌다.6)6) 황해도의 내지 관방대책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다시 논의되었다. 임진왜란 발발 직후인 선조 26년(1593)에 감사가 겸임하던 병사의 임무를 분리하였다. 처음에는 해주에 별도의 鎭을 두었다가 다음 해에 진을 황주로 옮기고 선조 30년(1597)에는 황주 목사가 병사를 겸하게 하였다. 이후 진을 다시 해주로 옮기고 병사를 별도로 두는 조치가 있었으나 선조 34년(1601)에 또다시 황주 로 이설하여 황주 목사가 겸하게 하였다.7)7) 留鎭체제에서 벗어나 황주에 정식으로 兵營을 개설한 것은 광해군 4년 8) (1612)의 일이었다. 8)이후 병영소재지로서 황주의 군사적 위상이 더욱 높아졌 으며 읍성 등 관방시설이 완비되었다.9)9)이와 더불어 임진왜란 중 산성의 전략 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도 높아져 서북대로 부근에 산성을 수축하는 일도 논 5) 文宗實錄 권3, 문종 즉위년 8월 4일(을해) 6) 이 같은 사실은 세조 12년(1466)에 완성된 經國大典 兵典에 황해도 내지 진보 가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은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종대 증보편찬된 新增東國輿地勝覽 에는 극성진 및 영애 관방시설이었던 산성과 행성이 모두 황 주목 고적조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방원진만은 수안군 관방조에 기재되어 있으 나 大東地志 에 중종 5년에 방원진을 강음현 탈미곡으로 옮겼다가 혁파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오래지 않아 폐치되었음을 알 수 있다. 7) 輿地圖書 兵馬節度營 官職 8) 위와 같음. 9) 光海君日記 권22, 광해군 1년 11월 9일(병술). 황주 성역은 약 10여 년의 기간 이 소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395 10)10) 의되었다. 황해도 지역을 또 다시 군사적 긴장 상태로 몰아간 것은 인조 2년(1624)에 발생한 이괄의 난이었다. 이괄의 난은 외적의 침입은 아니었으나 평안도에서 일어난 반란군이 도성으로 진격하는 과정에서 황해도가 전란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괄의 군대는 직로를 벗어나 샛길을 따라 평산을 우회하여 개성으로 진군하였는데11) 이는 황해도 내륙 방어의 중점을 재검토할 필요성을 제기하 11) 였다. 황주 이남부터는 직로인 서북대로 외에 샛길이 많아 적의 침공로를 예 상하기 어렵다는 방어상의 난점이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괄의 난을 수 습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인조 5년(1627)에 정묘호란이 발생하였다. 조선에 서는 산성을 중심으로 농성전을 펴고자 하였으나 강변을 넘어온 후금군은 산 성 중심의 장기 수어전략을 피하여 서북대로를 따라 남하하였다.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으로 황해도 내륙 방어의 어려움이 여실히 드러났다.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적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산성에서의 농성전보다는 적로 자체를 차단할 필요가 있었으나 직로인 서북대로 외에 이용 가능성이 큰 샛 길이 많아 이 또한 용이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정묘호란 이후 황해도 의 전란 대비책은 산성 정비에 집중되었다. 산성 중심의 관방체계 정비는 서북지역 전체에서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 이었다. 산성 보수는 비교적 빠른 시일 내에 완료할 수 있었으며 전란이 발생 할 경우 주민들을 피난시킨 상태에서 복병전이나 요격전을 벌이는 등 장기전 을 이끌어 갈 수 있는 유일한 전략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12) 황해도 지 12) 10) 宣祖實錄 권83, 선조 29년 12월 19일(신사) 11) 仁祖實錄 권4, 인조 2년 2월 8일(임진); 이괄군의 진격 루트에 대해서 기존의 연구는 수안 방면으로 東進한 것으로 보고있다(한국역사연구회, 2001 모반의 역사, 세종서적, 263쪽). 그러나 실제 이괄군은 황주 검수역 봉산 고읍 전탄 둔 기린역 평산읍의 서쪽으로 우회하였다. 정부에서는 이들이 당초 수안 쪽으 로 올 것으로 예상하여 색장을 방어하였으나 이괄군은 황주로 바로 남하하여 검 수역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샛길을 이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오해 가 생긴 것은 전탄을 지났다는 기록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전탄은 평산의 동 쪽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봉산 고읍에서 기린역 샛길을 지나기 위해서는 서 진해야 하며 그 도중에 전탄둔이 있다. 따라서 전탄은 전탄둔으로 보는 것이 지 리상 타당하다. 12) 이근호, 1998 숙종대 중앙군영의 변화와 수도방위체제의 성립, 조선후기의 수

396 韓 國 文 化 38 역 주민들 역시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산성의 축조나 보수를 강력하게 요청 하였다.13) 이에 따라 정부에서는 도내 산성의 형편을 조사하고 은율, 장련, 안 13) 악, 문화를 포괄하는 九月山城과 재령 부근의 長壽山城을 수축하도록 하였 14)14) 다. 이후 강화도를 중심으로 도성 외곽방어체계가 논의되면서 해주 首陽山 城을 비롯하여 황해도 내의 산성들은 강화도의 배후 지원시설로 주목을 받았다.15) 15) 산성 보수와 더불어 병영소재지인 黃州 邑城도 보수하도록 하였다.16) 황주 16) 는 평안도 안주와 함께 서북의 관문이자 병사의 주재처이기 때문에 황주 성 역을 우선적으로 서둘렀다. 그러나 황주성 개축이 진전을 보지 못하는 가운데 평지성인 황주 읍성이 대북방 방어에 효율적이지 않다는 의견이 제기되었 17)17) 다. 변란시 산성 수비가 가장 효과적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따 라 황주 부근 정방산에 산성을 쌓고 병영을 이설하는 계획이 수립되어18) 인 18) 조 13년(1635)에 正方山城이 축조되었다.19) 그러나 정방산성 역시 병영 주재 19) 처로 부적합다는 지적이 있자 인조 19년(1641)에 병영 이전처에 대한 재조사 가 이루어졌다. 우선 대상지로 거론되었던 곳은 재령, 서흥, 봉산 등지였다. 載 寧의 경우 인근에 장수산성이 있기는 하나 길이 몹시 외진 단점이 있었으며, 瑞興 역시 산성은 있으나 재정이 부족하여 병영을 운영하기 어려웠다. 鳳山은 재정도 풍부하고 정방산성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정방산 성이 황주보다는 봉산에 가깝기 때문이었다. 이에 따라 봉산군수를 부사로 승 20)20) 격하여 병사가 겸임토록 한 뒤 판관을 따로 차출하도록 결정되었으나 장마 철 수해로 인해 병영 이전은 중지되었다. 이후 병영 이설 문제는 원점으로 돌 아가 인조 20년(1641)에는 병영을 다시 황주로 옮겼다.21) 21) 도방위체제, 서울학연구소 仁祖實錄 권16, 인조 5년 5월 13일(무인) 仁祖實錄 권19, 인조 6년 9월 15일(임신) 仁祖實錄 권24, 인조 9년 3월 22일(병신) 仁祖實錄 권17, 인조 5년 8월 10일(계묘) 仁祖實錄 권26, 인조 10년 4월 28일(을미) 海西邑誌(1871) 5책, 正方山城城誌 ( 邑誌 12, 아세아문화사, 281쪽); 備邊 司謄錄 4책, 인조 12년 윤8월 3일 19) 輿地圖書, 병마절도영 관직 20) 備邊司謄錄 6책, 인조 19년 4월 5일 21) 輿地圖書, 병마절도영 관직 13) 14) 15) 16) 17) 18)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397 3. 황해 북부 영애 방어책 1) 진보의 신설 병자호란 당시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는 평지성인 安州를 제외하고 모두 산 22)22) 성으로 옮겨 防守하는 전술을 구사하였다. 그러나 청군은 산성에서의 접전 을 피한 채 평양을 지나 대로를 이용하여 평산까지 진격하였다. 이로써 산성 중심의 수비대책 외에 직로 방어책이 필요하다는 인식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전란 직후 서북지역의 군사적 움직임은 용납되지 않았다. 황해도 관방책에 대한 논의는 대청 관계가 안정기에 들어간 1670년대 중반 에야 가능해졌다. 숙종 즉위 초부터 황해도와 함경도의 접계지역이자 서북 요 23)23) 충지인 곡산수안 일대의 군사력 강화책이 제기되었으며 24)24) 수영패의 훈련을 지시하는 황해병영 소속 등 일련의 군사적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병영 에서 병기를 제작하는 일이 청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다하여 정지시키는 25)25) 등 여전히 적극성을 보이지는 못하였다. 양난 이후 국가 위기 대책은 도성 중심의 수도방어체제를 마련하는데 집중 되었다. 효종 즉위후 수도 외곽의 강화도 방어체제가 정비되었으며 숙종 초에 26)26) 는 개성 일대 방어를 위해 대흥산성 축조가 논의되었다. 이는 임진왜란 이 후 서울이 적에게 함락되는 일이 반복됨에 따라 수도 외곽에 중층의 방어선 을 형성해야 한다는 위기의식에서 나온 것이었다. 또한 정치적으로 수도의 군 27)27) 사력 장악이 정권 유지를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이 되면서 수도 외곽 방어 에 대한 관심은 더욱 높았다. 수도방어의 최북단 거점인 개성의 대흥산성을 축조한 뒤28) 황해도 남부의 금천,29) 평산, 배천, 연안 등지를 대흥산성 방어체 28) 22) 23) 24) 25) 26) 27) 28) 29) 유승주, 2002 병자호란의 전황과 金化전투 일고, 사총 55, 391쪽 肅宗實錄 권2, 숙종 1년 1월 23일(임오) 備邊司謄錄 31책, 숙종 1년 1월 21일 肅宗實錄 권4, 숙종 1년 11월 21일(을사) 肅宗實錄 권4, 숙종 1년 9월 18일(계묘) 이태진, 1985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참조. 대흥산성은 숙종 2년(1676)에 건설되었다( 大東地志 권2, 開城 城池).

398 韓 國 文 化 38 30)30) 제에 편입시켰다. 황해도 자체의 방어대책은 숙종 4년(1679)에 감사 權脩의 관방 장계로 인 해 본격적으로 수립되었다. 그는 황해도내 산성 상태를 조사한 뒤 방어거점으 로 이용할 수 있는 것은 정방산성이 유일하다고 보았다. 이는 정방산성의 오 른쪽에 동선령, 왼쪽에 극성이 있어 협력 수어가 가능하기 때문이었다. 나머지 해주 수양산성, 문화의 구월산성, 재령 장수산성, 서흥 대흥산성은 피난처의 기능 밖에는 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따라서 그는 산성 정비보다는 평 안도와 황해도를 연결하는 고갯길의 방어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평안도와 황해도 접경지대에서 적로로 이용될 가능성이 있는 곳은 서북대 로가 통과하는 洞仙嶺 외에 蕀城, 慈悲嶺, 板籍院, 塞墻, 塞南 등이 있었다. 그 는 이곳들을 지킬 방안을 세우지 않는 한 정방산성만으로 적을 차단할 수 없 다며 각 영로의 지형 조건과 방수 방안을 올렸다.31) 31) 동선령은 골짜기가 길고 좁으며 경사가 급하여 군대가 대열을 이루기 어려 우므로 소수의 정예 병력으로 대군을 방어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당장 인력을 동원하기 어려운 상황이므로 우선 나무를 기르거나 목책을 세워 차단 하고 복병을 설치한 뒤 황주, 봉산 두 읍에서 벌채와 화전 개간을 금하도록 하자고 제안하였다. 황주 동북쪽에는 서흥으로 통하는 자비령길과 황주 수안 을 연결하는 판적원길이 있는데 이 가운데 자비령은 수풀이 우거지고 험난하 32)32) 여 통행하기 어려우나 판적원은 길이 넓고 차단할 만한 고개가 없으므로 보루를 쌓거나 목책을 세운 뒤 병력을 배치해야 한다고 보았다. 평안도 삼 등상원 경계인 색장과 양덕 경계인 색남은 지형이 매우 험하여 별도로 관 29) 備邊司謄錄 3책, 숙종 3년 12월 27일 ; 금천은 효종 2년(1651)에 평산 동쪽의 우봉현과 평산 서쪽의 강령현을 합하여 만든 것이다. 이후 금천이 황해도와 경 기도의 접계읍이 되었다. 30) 備邊司謄錄 33책, 숙종 3년 12월 27일 31) 肅宗實錄 권7, 숙종 4년 12월 3일(기사) 32) 자비령은 岊嶺이라고도 한다. 고려때부터 조선초까지 황주에서 서흥으로 이어지 는 직로가 통과하는 곳이었다. 그러나 자갈땅에 물길이 험하여 명의 사신들이 통행하기를 꺼리자 세조대에 폐쇄하고 새로 동선령길을 열었다( 대동지지 권18, 서흥 嶺路). 이에 따라 황주 서흥 평산으로 이어지는 황해도 남북직로가 황주 봉산 서흥 평산으로 우회하게 되었다. 이곳은 고려 공민왕대 홍건적의 침입 을 막기 위해 목책을 설치했던 곳이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1, 瑞興 ).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399 방을 설치하지 않아도 될 것이라 하였다.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은 동선령 서남 쪽의 극성 일대로 이곳은 해안으로 이어지는 평지로 막힌 곳이 없기 때문에 따로 성을 쌓고 호를 파는 등 인공의 차단시설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권수의 보고에 따라 숙종 6년(1680)에 영애 방수 방안을 골자로 하는 <黃 海道關防事目>이 만들어졌다.33) 그 내용은 평안도와 황해도 접경지대의 산악 33) 지형을 이용하여 황주 봉산 서흥 수안 곡산을 연결하는 동서의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으로 조선 전기의 관방 설치처를 복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行城 이나 목책을 치던 방식에서 영애 부근에 鎭堡를 설치하고 군병을 배치하는 것으로 강화되었다. 이는 17세기 후반에 내지 및 연안 일대 요해처에 진보를 34)34) 증설하고 강화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황해도 방어책의 일환이기도 하였다. <그림>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시설 33) 肅宗實錄 권9, 숙종 6년 1월 6일(병신) 34) 연안 방어진보의 증설 및 이전 문제에 대해서는 강석화, 2006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어체계, 한국문화 38 참조.

400 韓 國 文 化 38 영애 진보의 건설은 요해처 부근의 기존 屯田을 진으로 전환하거나 새로 둔전을 만들어 군사를 모집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황주 봉산간 직로인 동선령은 부근의 마월둔과 대동둔의35) 병졸을 모집, 작대하고 둔장을 만호나 35) 첨사로 승격하도록 하였다. 부근에 둔전이 없는 건은치, 안심현, 구동선 세 고 개는 사변이 있을 경우에 감병사가 군사를 파견하도록 하였으며, 동선령과 극 성의 사잇길은 정방산성에서 파수를 보도록 하였다. 바닷가로 이어지는 평지 인 극성 일대는 나무를 심어 차단하도록 하였다. 황주 봉산 경계의 역계령, 무초령은 길이 좁고 근방에 두용둔과 사찰이 있 으므로 둔감이 둔졸과 승도를 동원하여 지키게 하였다. 성고개와 상산령은 불 지둔과 동삼리 관향둔의 별장이 각각 책임지도록 하였다. 황주 서흥 경계인 산리령의 방어를 위해 소이둔과 범한둔을 소이 만호진 으로 합설하였다. 자비령은 적이 이용할 가능성이 적고 사변시 고개 아래 사 찰의 승도들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별다른 조치를 마련하지 않았 다. 그 동쪽의 자은, 독현, 노파 세 고개는 신당둔과 병풍둔을 합설한 신당 만 호진에서 담당하였다. 중화, 황주, 상원에서 오는 여러 길이 만나는 판적원은 반드시 지켜야 할 요해지였으므로 부근의 감영 소속 선적둔을 옮기고 둔장을 소모별장을 고쳐 수안군수가 겸임하도록 하였다. 황주 수안 경계의 양파령은 부근의 위라둔을 만호진으로 전환하여 파수를 보도록 하였다. 또한 평안도 및 함경도 산악지대와의 접계지인 수안의 민오리, 건은치, 동대현 세 고개는 총명둔에서 책임지도록 하였으며 방원령 일대를 막 기 위해 인근의 문산, 이소둔을 고개 입구로 옮겨 둔감을 만호로 승격하였다. 이로써 황해도와 평안도 접경지대 영애에 蒜山, 東里, 所已, 新塘, 善積, 位 羅, 文山, 蔥嶺, 文城 등 9개의 진보가 완비되었다.36) 영애 진보 일대의 화전개 36) 간 금지와 나무를 심어 가꾸는 일은 담당 만호나 별장이 책임지며 둔군은 유 랑민을 대상으로 모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진보가 위치한 읍의 원적민은 입속을 불허하였다. 35) 海西邑誌(1871) 3책, 鳳山郡邑誌 鎭堡屯( 읍지 12, 아세아문화사, 162쪽) 36) 산산진은 숙종 8년에 극성으로 이전하였다[ 肅宗實錄 권13, 숙종 8년 1월 3일 (신해)].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401 <표 1> 황해도 嶺隘 鎭堡의 방어 체계 部司 左部 中部 右部 진보 관할처(영애) 병력 규모 재정 규모 左司 동리진 성고개, 상산령 건은치령, 무초내 3哨 2,617石 中司 산산진 극성에서 서쪽으로 대야도까 지 10리 5초 3,981석 右司 소이진 역계령, 자비령 산리령 2초 5,386석 좌사 신당진 독현, 자은령, 노파령 2초 14,039석 중사 서대고개, 마유령, 건은치, 동 선적진 고개령 3초 652석 우사 위라진 양파령, 도을령, 비득시령 2초 3,549석 좌사 총령진 동대고개, 건은치 2초 1,015석 중사 문성진 민오리령 2초 934석 우사 명올갑, 니령, 문산진 방원령, 여차령 3초 1,111석 신설 초기 이들 진보는 훈련대장의 관할 하에 놓였다.37) 신설진들이 모두 37) 관향둔이나 순영 둔창을 전환한 것으로 변장의 품계가 낮아 수령과의 관계에 서 독자적인 지휘권을 발휘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38) 이후 숙종 9년(1683)에 38) 별장들을 병조 소속으로 옮기고39) 각 진에 군총을 배정하였으며 담당 방수처 39) 40)40) 와 部司를 정하였다. 해안가 방어요충인 산산진과 곡산 양덕 경계의 문성 진, 상원 황주 경계의 선적진을 3部 천총으로 삼고 문성진과 선적진을 만호 에서 첨사로 승격시켰다. 또한 동리진 소속 군병 중 2초를 선적진으로 옮겼으 며 동리진 소모별장도 만호로 올렸다. <표 1>은 황해도 영애 진보의 部司, 관 할처, 군병 규모를 정리한 것이다. 37) 38) 39) 40) 備邊司謄錄 36책, 숙종 8년 6월 7일 ; 7월 4일 備邊司謄錄 37책, 숙종 9년 6월 12일 위와 같음. 備邊司謄錄 37책, 숙종 9년 7월 4일

402 韓 國 文 化 38 2) 관할권 분쟁과 진보 축소 영애 진보를 설치하고 방수처를 분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진보 혁파 요 청이 잇달았다. 영애 진보가 기존의 둔전을 기초로 설립된 것이었기 때문에 수령과 진장 사이에 둔전 관할권을 둘러싼 갈등이 야기된 것이다. 황해도는 많은 둔전이 설치되어 있어 주민들의 피역 폐단이 컸던 지역이었다. 따라서 현종대에는 둔전의 소속과 설치 연대, 결수, 모민수 등을 조사하여41) 둔전의 41) 혁치를 결정하고42) 혁파된 둔전의 둔민을 작대하는43) 조치가 잇따랐다. 이후 42) 43) 혁파되지 않은 관향둔을 중심으로 영애 진보를 설치하자 수령들이 반발이 컸 던 것이다. 진보 혁파 요구가 가장 먼저 있었던 곳은 遂安의 蔥嶺鎭과 位羅鎭이었다. 숙종 10년(1684)에 수안군수 金道鳴이 총령진 소속의 화전을 수안군에 환속시 키고자 총령진과 위라진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총령진은 총명둔 자리에 설치 된 것으로 재정 규모는 현종 13년에 실시된 둔전 조사 당시의 田案을 따르고 있었다. 이후 숙종 7년(1681)에 둔전을 사핵하면서 추가로 화전 100일 경을 적발하였는데 진보 소속이라 하여 그대로 두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수안군 에서는 진보 무용론을 주장하며 호조에 청탁하여 화전을 환속시키고자 하였 으나 이미 군제를 갖춘 요해 진보를 혁파할 수 없다 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며 총령진 소속 화전 전안을 숙종 7년의 수량대로 시행하도록 하였다. 위라진 경 우에도 같은 결정이 내려졌다.44) 둔전을 둘러싼 갈등은 곡산부와 문성진 사이 44) 에서도 발생하였다. 숙종 9년(1683)에 산군의 전결을 조사하여 현종 4년의 양 전과 비교하여 전안을 정리하도록 하자 이를 빙자하여 곡산부에서 진보 소속 의 화전을 침책하여 수세하였던 것이다.45) 45) 이같이 진보 혁파 논의는 전결이 부족한 산간읍과 진 사이에 화전을 둘러 41) 備邊司謄錄 29책, 현종 11년 7년 29일 42) 備邊司謄錄 38책, 숙종 10년 3월 15일 43) 備邊司謄錄 31책, 숙종 1년 5월 27일. 이 때 재령 철현점 소속 둔민을 함께 작 대하여 점민들이 유산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44) 備邊司謄錄 38책, 숙종 10년 3월 15일 45) 備邊司謄錄 38책, 숙종 10년 4월 19일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403 싼 분쟁의 형태로 나타났다. 그러나 수안, 곡산의 진보는 평안도함경도와 연 결되는 지점에 설치된 것으로 특별히 중요시되었기 때문에 이들 읍의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비변사에서는 진보 신설 당시 칙행용 쇄마를 진에서 징발하도록 하고 진민 모집 대상을 유민에 한정하는 등의 읍과 진 사이의 경제적 갈등을 최소화하 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말이 부족한 산지에서 쇄마를 징발하는 일은 어 려웠으며 진속으로 모입하는 읍민이 많아 양자 간의 갈등은 끊이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진 소속 화전의 이익이 갈등의 가장 큰 원인이었다. 이에 따라 신 설 진의 화전 규모를 정하고 초과분의 耗穀을 雇馬廳으로 옮기는 방안이 제 46)46) 시되었으나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 못하였다. 숙종 15년(1688)에 곡산부민들이 진보에 투속하는 일이 많아 변통 방안이 논의되었다.47) 이 때에도 진장이 모집에 급급하여 읍민 투속을 금하는 규정을 47) 지키지 않은 것이 문제로 지적되었을 뿐 진보 혁파는 불가능하다는 입장이 지배적이었다.48) 그러나 이를 계기로 진보의 타당성을 조사하라는 명이 내려 48) 져 관찰사 權瑍이 내지 진보를 순력하고 이설, 합설 혹은 혁파 대상을 정리하 49)49) 여 보고하였다. 그는 특히 선적진과 광산진의 혁파를 주장하였는데 영애방 어와 직접 관련이 없던 光山鎭의 혁파조차 허락되지 않았다.50) 50) 숙종 17년(1691)에 또 다시 둔전으로 인한 읍진 간의 갈등이 보고되자 권 환은 각 진의 둔전과 둔민수를 조사하여 진의 대소에 따라 규모를 정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러나 병조판서 閔黯은 신설 초기의 일시적 갈등에 불과하다며 반대하였다. 그는 특히 진보의 전결과 민호가 훈련원과 관향사 소속일 때는 아무 말도 못하더니 진의 소속으로 바뀌자 쟁탈하려 한다며 수령들의 처사를 비난하였다.51) 51) 18세기에 들어 북방 정세의 안정으로 서북지역의 군사적 긴장 상태는 완화 46) 47) 48) 49) 50) 위와 같음. 備邊司謄錄 43책, 숙종 15년 3월 14일 備邊司謄錄 43책, 숙종 15년 6월 17일 肅宗實錄 권21, 숙종 15년 12월 17일(기묘) 광산진은 신계에서 수안으로 가는 길목인 오소령 북쪽에 있던 진보이다[ 新溪縣 邑誌 鎭役 ( 조선시대사찬읍지 31, 인문과학원, 450쪽)]. 51) 備邊司謄錄 45책, 숙종 17년 3월 6일 ; 3월 8일

404 韓 國 文 化 38 되었다. 또한 북벌론 등 조선 내의 군사적 대립의식도 사실상 허구화됨에 따 라 황해도 내지 진보의 실질적 효용성은 줄어들었으며 형세도 잔약해졌다. 이 에 따라 영애 진보의 통폐합 논의가 더욱 활발해졌다. 숙종 32년(1706)에 수 안 유학 金處均 등 9인이 상소를 올려 수안군 소속의 문산, 총령, 위라, 선적 4진이 관방에는 도움이 되지 않으면서 읍에 피해만 끼친다며 변통할 것을 호 소하였다.52) 그 뒤 황해도 감사와 순무사의 의견에 따라 숙종 37년(1712)에 52) 53)53) 蔥嶺鎭, 新塘鎭, 光山鎭의 혁파 조치가 내려졌다. 그러나 토졸들은 혁파를 원하지 않아 격고하며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며 총령진과 신당진의 복설을 요 청하는 상소가 올라오는54) 등 지역내 갈등은 또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54) 영조 5년(1725)에는 잔약해진 선적진의 병력을 보강하기 위해 위라진과 문 산진의 군병을 이속하였다.55) 이 때 긴요하지 않다고 하여 군병을 나누어 준 55) 위라진과 문산진은 모두 수안 소속이었다. 수안은 영애 진보를 신설할 때 문 산, 위라, 총령, 선적 등 4개의 진보가 만들어져 재정적으로 가장 심각한 타격 을 입은 곳이었다.56) 따라서 진보 신설 이후 지속적으로 진의 혁파나 축소를 56) 꾀하였던 것이다. 18세기 말에는 군졸의 이산과 재정 흠축이 심각하였다. 정조 16년(1791)에 소이진과 위라진의 군향 흠축이 심각하다는 보고를 계기로 내지 진보와 산성 상황을 조사하여57) 군정 첨정과 환곡 운영 개선 방안을 마련하였다.58) 이 같 57) 58) 은 조치에도 불구하고 진졸의 이산은 계속되었고 진보의 형세는 점차 피폐해 져 군사적 기능을 거의 상실하였다. 1811년에 홍경래의 난이 발생하였을 때 수안 관내의 군병을 모두 소집하였으나 문산진과 위라진의 군병은 모두 흩어 져 전혀 힘이 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후 순조 29년(1829)에 전황해감사 沈 52) 肅宗實錄 권43, 숙종 32년 3월 25일(계미) 53) 肅宗實錄 권50, 숙종 37년 5월 2일(경인) ; 大東地志 에는 숙종 9년에 신당 진을 선적진에 합설하였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이다. 54) 備邊司謄錄 65책, 숙종 39년 4월 8일 55) 備邊司謄錄 85책, 영조 5년 3월 10일 ; 4월 8일 56) 선적진은 서흥 수안 경계에 설치된 것으로 서흥 소속이나 수안군수가 첨사를 겸하였다. 57) 備邊司謄錄 180책, 정조 16년 3월 19일 58) 備邊司謄錄 180책, 정조 16년 윤4월 7일 ; 正祖實錄 권35, 정조 16년 8월 26 일(임진)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405 能岳은 명목만 있고 실효는 없는 문산진과 위라진을 혁파하고 수안군에서 방 수하는 것이 실질적이라고 주장하였다.59) 현지 조사 결과 벌판에 위치한 위라 59) 진은 혁파해도 무방하나 문산진은 관할 영애가 모두 긴요한 곳이라 철파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다. 이에 따라 위라진을 혁파하고 위라진 소속의 군 총과 창곡은 문산진으로 옮기도록 하였다.60) 이로써 서북 3도 교계지점인 수 60) 안, 곡산 일대에는 文山鎭과 文城鎭 두 곳만 남게 되었다. 압록강과 두만강 상 류지대의 적변 위험성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에 수안, 곡산 일대 궁벽한 진 보의 혁파 주장이 받아들여 질 수 있었던 것이다. 호란 이후 청은 군사시설의 복구나 기타 방어대책 수립을 용인하지 않았으 며 서북지역 관방체제 정비는 군사적 긴장이 완화되고 외교관계가 안정된 이 후에나 가능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대청 군사대책의 실질적 필요성을 감소시키는 요인이기도 하였다. 관방체계의 정비가 완료되는 시점에 그 효용 성에 대한 의혹이 함께 제기되었던 것은 이 때문이었다. 황해도의 경우 대북 방 방어에 있어 후방임에도 불구하고 내륙 산지를 따라 방어선을 길게 구축 하여 주민들의 경비 부담이 컸기 때문에 진보 혁파 주장이 잇따라 제기되었 다. 18세기 말 수안, 곡산 일대의 진보 축소는 18세기 전반부터 시작된 내지 진보 통폐합 조치의 귀결이었던 것이다. 4. 간선도로의 관방 시설 1) 황주 병영 방어시설 보강 영애 방어 대책과 더불어 서북대로의 방어대책도 논의되었다. 특히 평안도 에서 황해도로 들어오는 초입이자 병영소재지인 황주의 관방시설을 강화하기 위해 황주 읍성의 개보수가 이루어졌다. 임진왜란 와중에 황해도 병영이 독립되기는 하였으나 병영의 기능은 여전 히 육로로 침입하는 적보다는 해적 방어에 중점이 두어져 있었다. 병영을 황 59) 備邊司謄錄 217책, 순조 29년 1월 27일 60) 備邊司謄錄 217책, 순조 29년 7월 2일

406 韓 國 文 化 38 61) 주로 이설한 뒤 해안 방어가 곤란하다며 병영 이전이 논의되었던 것이다. 61) 당시 적당한 병영 이전지를 찾지 못할 경우 바람이 잔잔한 때에는 병사가 所 江에 주둔하여 해로를 통제하도록 하였는데62) 이는 병영이 수영의 기능을 겸 62) 63)63) 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숙종 1년(1675)에 소강을 방어영으로 승격하여 실 질적으로 수사의 역할을 담당하게64) 되자 병영은 내륙 방어의 일을 전담하게 64) 되었다. 이후 숙종 29년(1703)에 황주 목사가 병사를 겸하던 제도를 파하고 65)65) 單병사를 파견하도록 규정을 고쳤다. 이에 따라 병영 주재처 문제가 또 다 시 논의되었다. 황해 병영의 가장 큰 문제는 대로변의 평지인 황주에 입지하고 있다는 점 이었다. 인조 13년(1635)에 정방산성을 축조하고 병영을 일시적으로 이전한 일이 있었으나 몇 년 지나지 않아 다시 황주로 돌아왔다. 이후 병영이 황주목 에서 독립되자 숙종 32년(1706)에 병영 이전안이 다시 제기되었다. 이 때에는 정방산성과 함께 극성이 병영 후보지로 거론되었다. 그러나 정방산성은 성안 이 험하고 물이 부족하여 병영 주재처로는 부적합하며 평지인 극성은 험지가 없다는 것이 단점으로 지적되어 결국 병영을 그대로 황주에 두되 읍성을 보 66)66) 수하고 관방시설을 강화하도록 하였다. 황주 읍성은 병영 이설 직후인 광해군대에 축조한 것이나 이후 보수가 제 때 이루어지지 않아 치첩이 무너진 상태였으므로 복구가 필요하였다.67) 숙종 67) 44년(1718)에 우참찬 李健命은 청과의 관계가 안정됨에 따라 평안도의 성곽은 61) 宣祖實錄 권209, 선조 30년 3월 23일(경인) 62) 소강진의 설치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經國大典 에 소강진에 수군첨사 1원이 배치되어 있던 것으로 보아 조선 전기에 이미 존재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63) 광해군대에 들어서도 수군절도사의 설치 문제는 논의되지 않은 채 백령진과 소 강진의 수군첨사가 해방을 담당하도록 하는데 그쳤을 뿐이다(강석화, 2006 조 선후기 황해도 연안방어체계, 한국문화 38 참조). 64) 수영의 설치 문제에 대해서는 이선희, 2006 조선후기 황해도 수영의 운영, 한 국문화 38 참조. 65) 肅宗實錄 권38, 숙종 29년 10월 10일(임오); 備邊司謄錄 53책, 숙종 29년 10월 15일. 그런데 輿地圖書 에는 강희 을해년, 즉 숙종 21년(1695)에 單兵使 제도를 시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輿地圖書, 병마절도영 관직). 66) 備邊司謄錄 57책, 숙종 32년 4월 14일 67) 備邊司謄錄 53책, 숙종 29년 11월 27일; 肅宗實錄 권60, 숙종 43년 11월 22일 (임신)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407 모두 개축하였으나 황주 병영은 아직 복구하지 못했다며 황주성 개축을 주장 하였다. 그러나 兵使 元徽는 황주성 보다는 극성에 축성하는 것이 더 시급하 다며 다른 의견을 내었다. 정부에서는 황주와 극성 중 어느 것을 먼저 쌓을 68)68) 지 감사와 병사가 의논하여 급한 곳부터 역사를 시작하도록 하였다. 그 결 69)69) 과 황주 성역이 먼저 결정되어 경종 1년(1721)에 완료되었다. 황주는 서북대로의 요충에 위치하기는 하였으나 지형이 평지였기 때문에 방어에는 난점이 많았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성을 둘러싼 垓字를 건설하였으 나 세월이 지나며 매몰되어 성 밖에 민가가 밀집해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치 첩 보수를 마친 뒤 참호를 건설하는 문제가 재론되었다. 그러나 109호나 되는 민가를 철거하는 과정에서 소요가 발생할 것을 우려한 병사의 의견에 따라 공사를 개시하지 못하였다.70) 70) 이 문제는 영조 5년(1729)에 다시 논의되었다. 동지사로 청에 파견되었다가 귀환하는 길에 황주성의 실태를 파악한 尹淳이 성 밖의 민가를 철거하여 성 안으로 옮기고 참호를 복구할 것을 건의하였던 것이다. 그의 제안이 받아들여 져 북문에서 남쪽으로 남문을 지나 옹성이 설치되어 있는 곳까지 길이 6천 71)71) 척, 너비 50척, 깊이 10척의 해자가 만들어져 평지성 방어의 불리함을 해결 72)72) 할 수 있었다. 2) 蕀城 방어책 평안도에서 황해도로 들어오는 서북대로의 첫 요해지인 동선령의 방어를 위해 산산진과 정방산성이 설치되어 있었으나 동선령 서쪽으로 해안까지 이 68) 69) 70) 71) 72) 備邊司謄錄 71책, 숙종 44년 1월 23일 景宗實錄 권4, 경종 1년 6월 21일(신해) 景宗實錄 권13, 경종 3년 10월 19일(을축) 輿地圖書, 병마절도영 城池 이후에도 병영 이전 문제는 종종 거론되었다. 영조 22년에 평안도 어사 구윤명 은 병영을 봉산의 입선문으로 이설할 것을 건의하였다. 봉산 입석문은 동선령의 서쪽이자 극성 남쪽으로 수륙의 적로가 만나는 대로에 해당하며 사방에 산이 우 뚝 솟아있는 천연의 성지이기 때문에 성을 쌓는 일도 크게 힘들지 않을 것이라 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備邊司謄錄 115책, 영조 22년 6월 3일).

408 韓 國 文 化 38 어지는 저습지대의 방어를 위해 별도의 시설이 필요하였다. 이 일대는 고려말 에 홍건적을 막기 위해 정방산 정상에서 해안의 朴排浦까지 성을 쌓고 그 주 변에 가시나무를 심었기 때문에 蕀城성이라 불렀다. 조선 초에 石城으로 개축 73)73) 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무너져 기지만 남아있었다. 영애 진보를 설치할 당시 전감사 李世華는 극성 일대 방어를 위해 해안가 포구에 제방을 쌓자고 제안하였으나 제방 설치 장소를 선정하는 데 이견이 74)74) 많았으며 공역이 지나치게 크다는 이유로 시행하지 못하고 해안까지 나무 를 심어 차단하도록 하는데 그쳤다. 그러나 이 일대를 그대로 버려둘 수는 없 었기 때문에 숙종 8년(1682)에 동선령 부근의 산산진을 극성으로 옮겨 첨사진 75)75) 으로 승격하고 산산진에서 서쪽으로 대야도까지 둑을 쌓아 大也筒을 개간 하고 그 일부를 진 소속으로 획급하여 진의 재정을 충당하도록 하였다.76) 또 76) 한 신천, 재령, 안악의 군사 3,700명을 산산진에 배속하여 병력을 강화하였 77)77) 다. 이와 함께 축성 계획도 세웠으나 여의치 않아 나무를 심는 데 그쳤다. 이후 금양 조치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아 18세기 초에 극성 일대는 이미 관방 의 형세가 사라진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78) 78) 이에 따라 동선령과 극성 방어 문제가 재론되었다. 숙종 33년(1707)에 지경 연사 李寅燁은 정방산 아래 고려 때 쌓은 성의 옛터가 있으니 이를 다시 수 축하자고 제안하였다. 그는 이곳을 다시 쌓는다면 병영 기지로도 적합할 것이 79)79) 라고 하였다. 그의 건의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으나 극성에 성을 쌓아야 한 다는 주장은 힘을 얻어 다음 해 말에 城役을 개시하도록 하였다.80) 그러나 평 80) 야지대에 긴 장성을 쌓는 것은 대규모의 공사인데다 실효성도 입증되지 않았 73) 海西邑誌(1871) 3책, 鳳山郡邑誌 關阨( 읍지 12, 아세아문화사, 155쪽) 74) 肅宗實錄 권9, 숙종 6년 7월 2일(기축) 75) 肅宗實錄 권13, 숙종 8년 1월 3일(신해) ; 이 때에 흑교진을 산산진으로 합설 하였다. 흑교진은 숙종 4년(1678)에 황주 읍치 북쪽으로 20리 지점에 설치하였 던 것으로 평안도에서 황해도로 들어오는 가장 초입에 있던 진이었다. 76) 肅宗實錄 권15, 숙종 10년 6년 9일(계묘) ; 備邊司謄錄 38책, 숙종 10년 6월 10일 77) 肅宗實錄 권15, 숙종 10년 7월 21일 78) 備邊司謄錄 56책, 숙종 31년 5월 29일 79) 備邊司謄錄 58책, 숙종 33년 5월 14일 80) 肅宗實錄 권46, 숙종 34년 12월 27일(기사)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409 다는 반대 의견도 많았다. 숙종 36년(1710)에 형조판서 兪得一은 동선령 상하 에 샛길이 많아 성을 쌓아도 소용이 없다며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영 의정 李畬 역시 동선령 일대는 지형이 낮고 평탄하여 통로가 되는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므로 이곳을 차단하는 계획은 실현 불가능하다고 반대하여 공사 가 중지되었다.81) 81) 영조대에도 극성 축성 주장은 계속되었다. 영조 5년(1729)에 황해병사 閔濟 章이 극성 축성안을 올리자 공조판서 윤순은 극성은 길이가 5리도 되지 않으 며 예전의 기지가 남아있으므로 그 자리에 축조하면 될 것이라고 찬성하였 다.82) 이에 축성이 결정되었으나 광활한 평지를 성을 쌓아 차단한다는 것은 82) 불가하다는 반대 의견에 따라 결국 지세 형편과 비용 과다를 조사하는데 그 쳤다.83) 83) 영조 9년(1733)에는 황해도 직로 방어문제를 둘러싸고 황해감사 朴師洙와 전감사 徐宗玉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박사수는 극성에 성을 쌓는 일은 사 실상 불가능하다며 극성에서 1리 거리에 있는 정방산성 對峰에 外城을 쌓고 산산진을 정방산성 안으로 이전하여 직로 방어를 전담시키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대해 서종옥은 황주에서 상경하는 길은 동선령과 극성이 있는데 험준한 동선령보다는 극성이 적로로 이용될 확률이 높다고 보았다. 그런데 극성을 이 용할 경우 감영의 主鎭인 장수산성의 동북쪽을 지나 바로 평산에 다다를 수 있다며 장수산성의 개축을 주장하였다. 박사수는 장수산성이 직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전란시 피난처의 구실밖에 할 수 없을 것이라며 차라리 태백산 성이 직로 방어에 더 요긴하다고 반박하였다.84) 정부에서는 양자의 의견을 모 84) 두 받아들여 장수산성과 태백산성를 함께 보수하도록 하였으나 정작 적의 통 로로 이용될 가능성이 높은 극성의 방수대책은 논의되지 않았다. 영조 10년(1734)에 황해병사 朴纘新이 또 다른 극성 축성과 방수안을 올렸 다. 이는 극성의 옛 토성 기지 중 무너진 절반 정도만 돌로 쌓은 뒤 성의 岸 81) 82) 83) 84) 備邊司謄錄 備邊司謄錄 備邊司謄錄 備邊司謄錄 (정미) 60책, 숙종 36년 6월 20일 85책, 영조 5년 4월 27일 86책, 영조 5년 12월 9일 93책, 영조 9년 5월 29일 ; 英祖實錄 권34, 영조 9년 5월 27일

410 韓 國 文 化 38 頭에 포루 1곳을 설치하고 성 우측의 옛 浦口를 준설하여 성 밑까지 조수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며 성 좌측의 대야통 둘레에 濠를 만든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축성 후에 병영 우후가 산산진 첨사를 겸임하여 극성에 주재하도록 하 되 겨울 3달 동안은 병사가 산산(극성)에 머물고 우후가 병영을 지키도록 하 는 분방안을 제시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5) 85) 영조 22년(1746)에는 극성이 아닌 洞仙嶺에 關門을 설치하자는 안이 나왔 86)86) 다. 동선령 주변 산지를 이용하여 관문을 설치하면 공사가 간단하면서도 大 路를 차단하는 효과가 클 것이라는 審理使 南泰良의 의견에 따라 다음 해에 洞仙關이 완성되었다.87) 그는 도한 間路인 극성도 방치할 수 없다며 옛 기지 87) 를 수축하여 진영을 이설하자고 하였으나 결론을 보지는 못하였다. 영조 25년 (1749)에도 극성에 성을 쌓고 병영을 이전하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극성 축성 건은 논란이 많아 취소한 상태라고 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88) 영조 51년 88) (1775)에는 전 감사 洪述海가 산산진 첨사를 혁파하고 극성에 별도의 군영을 개설하자고 제안하였으나 이 역시 수용되지 않았다.89) 89) 18세기 내내 극성 축성 논의가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결론을 보지 못하 였다. 해안가로 이어지는 넓은 저습 평원지대인 극성에 성곽을 쌓아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은 큰 비용이 드는 방식인데다 남하하는 적들이 이용할 수 있는 곳이 극성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그 효과를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더구 나 실질적인 적침 위험이 사실상 소멸되고 있다고 판단되었던 시기에 대규모 의 재정과 주민을 동원하여 역사를 시행한다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지는 것이 었다. 따라서 극성의 전략적 중요성은 인식하면서도 극성 축성 주장은 받아들 여지지 않았다. 또한 극성은 황주 인근 해안가에 상륙한 적이 평원지대를 통 과하여 내지로 들어오는 길목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었던 곳이기도 하였 다. 그러나 海防 강화를 위해 해안 진보를 증설하고 水營 체제를 완비한 상황 85) 英祖實錄 권38, 영조 10년 6월 29일(계유) 86) 備邊司謄錄 115책, 영조 22년 3월 23일 ; 英祖實錄 권63, 영조 22년 3월 25 일(신묘) 87) 備邊司謄錄 118책, 영조 23년 10월 26일 88) 英祖實錄 권70, 영조 25년 9월 23일(무진) 89) 備邊司謄錄 157책, 영조 51년 12월 27일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411 이었으므로 灣入되어 있는 해안지대의 방어를 위해 무리하게 영애방어선을 연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었던 것이다. 3) 太白山城 축조 영애 방어시설 외에 산성 정비 문제도 꾸준히 거론되었다. 북방 기마적에 대한 방어대책의 기본은 산성을 중심으로 한 수어책이라는 점에 변함이 없었 기 때문이다. 17세기에 황해도 내지에는 황주의 正方山城, 은율 九月山城, 재령 長壽山城, 서흥 大峴山城, 해주의 首陽山城 등 다섯 곳의 산성이 있었다. 정방산성을 제 외한 나머지 4곳은 모두 조선 전기부터 존재하던 것으로90) 특히 해주의 수양 90) 산성과 서흥의 대현산성은 17세기 초까지도 성지가 비교적 완전한 상태로 남 아있었다.91) 정묘호란을 겪은 뒤 서북지역 방어대책의 근간으로 산성 수어책 91) 이 채택되면서 황해도 내지 산성에 대한 보수가 이루어졌다. 인조 6년(1628) 92)92) 에 구월산성과 장수산성을 개축하였으며 93)93) 현산성도 수축하도록 하였다. 인조 9년(1631)에는 수양산성과 대 또한 앞서 보았듯이 인조 13년(1635)에는 병 영 이전처로 황주 인근에 새로 정방산성을 축조하였다.94) 94) 90) 新增東國輿地勝覽 에서 서흥의 대현산성, 재령의 장수산성과 은율의 구월산성, 해주의 지성산성을 확인할 수 있다. 지성산성은 뒤에 수양산성이라 불렀다고 한 것으로 보아( 增補文獻備考 권28, 여지고 ) 수양산성 역시 조선 전기부터 존재 하였음을 알 수 있다. 91) 仁祖實錄 권16, 인조 5년 7월 22일(병술) 92) 仁祖實錄 권16, 인조 5년 5월 13일(무인); 같은 책, 인조 5년 7월 22일(병술); 仁祖實錄 권19. 인조 6년 9월 15일(임신) 93) 仁祖實錄 권24, 인조 9년 15일(임신); 수양산성이 실제 수축된 것은 숙종 2년 이었다( 輿地圖書, 海州牧 城池) 94) 海西邑誌 (1871) 5책, 正方山城城誌 에는 정묘난 뒤 계유년, 곧 인조 11년에 수축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비변사등록 4책, 인조 12년 윤8월 3일조에는 여전 히 정방산성을 수축하는 중에 있으며 병영을 정방산성으로 이전한 것은 인조 13 년의 일이었으므로 이 해에 완축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增補文獻備考 권28, 여지고 황해도 성곽조에는 인조 15년에 석축했다고 한다. 각 기록마다 축성 시기가 조금 차이는 있으나 정묘호란 직후에 축조하기 시작하여 병자호란 이전 에 완성된 것은 확실하다.

412 韓 國 文 化 38 이들 산성은 모두 적로를 차단하는 기능을 지닌 것이었다. 정방산성은 평안 도와 황해도를 잇는 인후의 요해처를 방어하는 것이었으며, 서흥의 대현산성 은 북관에서 오는 길이 합류하는 요충으로 북방의 적을 제압하기에 가장 좋 은 위치로 평가되었다. 또한 해주의 수양산성은 바다로 삼남과 이어지는 곳에 있으며, 은율의 구월산성은 바닷길로 평안도와 통하는 길목이라는 것이다. 특 히 감영의 主鎭이며 도내 중심에 위치한 장수산성의 입지가 가장 험하여 보 95)95) 장처로 인정되었다. 그러나 실제 산성의 위치는 도로에서 멀리 떨어진 산중 에 자리 잡고 있어 전란시 피난처를 제공하는데 불과하였다. 가장 중요한 보 장처로 인식되었던 장수산성은 봉산에서 재령을 우회하여 평산에 이르는 길 목에 위치한 것으로 재령 읍치에서 동남쪽으로 70리나 떨어진 험준한 산지를 의지하여 축조한 것이었다. 구월산성 역시 서해안 저지대에 홀로 우뚝 솟은 구월산에 자리 잡은 것으로 인근의 은율, 문화, 장련 주민들에게 전란시 피난 96)96) 처를 제공하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었다. 해주 수양산성은 강화도 중심의 수도방어체계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외곽 지원처의 역할을 하던 것이었으며97) 97) 서흥의 대현산성도 서북대로가 지나는 서흥 읍치로부터 동쪽으로 39리나 떨어 98)98) 져 있었다. 따라서 직로를 직접 차단할 수 있는 것은 동선령 서쪽의 정방산 성 한 곳에 불과하였다. 이같이 도내 산성이 실질적으로 적로를 차단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서북대 로가 지나는 각 읍에 읍성마저 건설되어 있지 않아 직로 방어의 실질적인 수 단이 전혀 없었다. 이에 따라 숙종 44년(1718)에 우참찬 李健命은 직로 방어 를 위한 관방시설을 보충해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특히 의주대로의 남쪽 99)99) 에 자리 잡은 평산 일대에 산성을 수축할 것을 주장하였다. 평산읍에서 동 쪽으로 5리(2km) 떨어진 곳에 옛 성황산성의 기지가 있는데 이를 보수한다면 읍성과 마찬가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산은 병영의 後營임에도 불구 95) 肅宗實錄 권30, 숙종 22년 12월 25일(정미) 96) 仁祖實錄 권16, 인조 5년 5월 13일(무인); 같은 책, 인조 5년 7월 22일(병술); 인조실록 권19, 인조 6년 9월 15일(임신) 97) 仁祖實錄 권24, 인조 9년 3월 22일(병신) 98) 輿地圖書, 瑞興府 城池 99) 備邊司謄錄 71책, 숙종 44년 1월 23일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413 100) 하고 속읍인 연안, 배천의 군병을 강화도로 이속하여 소속 군병이 적은데다 군량은 개성 대흥산성으로 보내고, 군기는 재령의 장수산성에 두어 힘이 나뉘 100) 어져 있으니 산성을 개축하여 군기와 군량을 모아둔다면 진영의 면모를 갖추 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의 제안은 길가의 산성이 변란시 적의 예 봉을 차단하는데 힘이 될 것이라는 찬성 의견에 힘입어 수용되었다. 축성 비 용은 평산에서 마련하도록 하였으나 재정 부족으로 공사가 미루어지자 해서 101)101) 출신 제방미 100여 석과 備局銀 1천냥을 획급하는 등 지원책을 마련하였 102)102) 다. 또한 영건 초기의 재정 보충을 위해 특별히 대흥산성 북창의 군향을 이전하여 사용하도록 하는 우대 조치가 내려졌다.103) 이후 영조 9년(1733)에 103) 는 직로 방어에 요긴하다는 황해감사 朴師洙의 주장에 따라 성의 기지를 확 대, 개축하였다.104) 104) 태백산성의 축조로 황해도 내의 산성은 모두 6곳으로 늘었다. 또한 의주대 로 부근에 정방산성, 대현산성, 태백산성이 차례로 배열되어 직로 방어시설이 강화될 수 있었다. 4) 靑石洞 방어론 황해도 직로 방어는 수도방어와 직결되는 문제였으므로 황해도와 경기도 접계지대의 관방책도 주요한 안건이었다. 따라서 숙종 2년(1676)에는 북방에 서 수도로 들어오는 마지막 관문인 개성에 대흥산성을 축조하였다.105) 이와 105) 함께 18세기에는 직로 요해처인 靑石洞과 부근 샛길에 대한 관방책도 강구되 었다. 이는 국제적 긴장의 완화로 대흥산성이 방치되어 있는 상황에서 더욱 100) 備邊司謄錄 39책, 숙종 11년 5월 11일 101) 肅宗實錄 권62, 숙종 44년 11월 12일(병술); 備邊司謄錄 72책, 숙종 45년 1 월 25일. 102) 태백산성의 축성 연대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어려우나 축성 비용 지원책이 마 련된 숙종 45년에 성역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다음 해 태백산성 축성 건의가 또 올라왔을 때 이미 축조 중이라는 備邊司謄錄 73책, 숙종 46년 3월 15일자 기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103) 備邊司謄錄 83책, 영조 4년 4월 26일 104) 大東地志 권18, 平山 城池 105) 大東地志 권2, 開城 城池

414 韓 國 文 化 38 필요한 조치였다. 청석동 방어안은 숙종 36년(1710)에 호조판서 金宇杭이 처음 제기하여106) 106) 다음 해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우의정 金昌集은 대흥산성이 입지는 좋으 나 청석동 주변에 샛길이 많아 요충지로는 부족하다며 청석동과 배치진[白峙 鎭]의 방어태세를 강화하여 대흥산성과 기각의 형세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개성유수를 管理使로 삼아 대흥산성과 청석동 일대의 107)107) 방어를 책임지도록 하였다. 이같이 청석동은 대흥산성 방어의 보조적 역할 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청석동에 별도의 관방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숙종 42년(1716)에 황해병사 李天根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는 청석동에 진을 하나 설치하고 금천군을 옛 금교역 자리로 이전하여 대흥산성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자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08) 영조 1년(1721)에는 금천을 獨鎭으로 만들어 관리영 108) 109)109) 소속으로 삼자는 제안이 있었으나 이 역시 논의가 진전되지는 않았다. 황해도와 개성 접계지역의 방어대책 논의가 활기를 띠게 된 것은 무신난 발생으로 이 일대가 수도 방어의 요지로 주목을 받게 된 이후였다.110) 영조 6 110) 년(1730)에 개성유수 李箕鎭은 청석동 우측의 샛길인 礪峴에 진을 설치하자는 안을 내었다. 그는 청석동이 직로이기는 하나 지형이 험하여 적들이 오히려 부근 샛길인 용현과 여현을 이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전부터 금천 읍 치를 용현과 청석동 사이로 옮기거나, 용현 여현 사이에 邊鎭을 하나 설치하 자는 주장이 있었다고 소개하였다.111) 용현과 여현은 모두 청석동 서쪽의 고 111) 갯길인데 이괄의 난 당시 반란군이 여현을 통해 개성을 진입한 사례가 있었 다. 이기진의 발의로 청석동 일대 설진건에 대한 토론이 전개되었다. 그 결과 여현과 용현 사이에 진보를 설치하자는 병조판서 金在魯의 의견이 받아들여 져 礪峴鎭이 설치되었다.112) 이로써 황해도와 경기도 접경지대의 방어 시설이 112) 肅宗實錄 권49, 숙종 36년 11월 29일(기미) 備邊司謄錄 61책, 숙종 37년 1월 8일 備邊司謄錄 73책, 숙종 46년 3월 15일 備邊司謄錄 77책, 영조 1년 3월 13일 備邊司謄錄 83책, 영조 4년 5월 11월 ; 6월 3일. 정부에서는 무신난의 확산을 방지하기 위해 황해도 병력을 소집하여 금천군에 陣을 설치하였다. 111) 備邊司謄錄 88책, 영조 6년 8월 6일 106) 107) 108) 109) 110)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415 증설되었다. 영조 25년(1749)에 황해병사 申德夏는 금천을 청석동과 여현 중간 지점으 로 옮기고 후영 영장으로 만들어 개성 진입로를 방어할 것을 주장하였다.113) 113) 금천 이전 문제가 제기된 것은 1차적으로는 읍기의 입지가 좋지 않기 때문이 었다. 따라서 옛 강음 땅으로 이전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금천은 황해 도와 경기도를 연결하는 길목으로 군사적으로도 중요하였기 때문에 직로에서 벗어난 곳으로의 이전은 허용되지 않았다. 결국 금천읍을 청석동 직로 관방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옛 金郊驛 자리로 옮기도록 결정하였다.114) 이후 여현진은 114) 개성부에서, 여현 및 청석동 이북지역은 금천에서 나누어 담당하게 되었다. 황해도와 경기도 접계지대 방어의 기본 책임은 개성부에 있었다. 따라서 개 성부에서는 금천 소속의 배치진과 여현 부근으로 깊숙이 내려와 있는 금천군 토지 일부를 할속할 것을 요구하였다.115) 배치진은 금천 읍치의 동쪽에서 임 115) 116)116) 진강으로 이어지는 요해처로 개성부 동북쪽의 인후였다. 이를 개성으로 이 속하여 대흥산성과 함께 수도방어의 최전선을 담당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배치진 이전 문제는 정조대에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정조 2년(1778)에 개성 유수 유언호는 배치진 뿐 아니라 금천 소속의 대남면소남면과 황해도 내에 있는 개성 관할의 점석둔을 교환하는 방안을 내놓았다.117) 이후 금천군과 개 117) 성부 사이의 행정관할권 재조정을 둘러싸고 길고 지루한 논쟁이 지속되다가118) 정조 20년(1796)에 배치진과 금천 대소남면을 개성부에 이속하는 것으로 결 118) 론이 내려졌다.119) 이로써 황해도 경기도 접계지역 방어는 개성부에서 전담 119) 하게 되었다. 112) 備邊司謄錄 88책, 영조 6년 9월 12일 ; 여현진은 첨사진으로 개성부 소속이 다( 大東地志 권2, 開城 鎭堡). 113) 英祖實錄 권70, 영조 25년 9월 23일(무진) 114) 英祖實錄 권79, 영조 29년 2월 21일(정미) 115) 備邊司謄錄 130책, 영조 32년 1월 27일 116) 大東地志 권2, 開城 鎭堡 117) 正祖實錄 권5, 정조 2년 3월 21일(신사) 118) 금천과 개성 사이의 대소남면 할속을 둘러싼 분쟁 과정은 김태웅, 1999 조선 후기 개성부 재정의 위기와 행정구역 개편, 한국사론 4142, 서울대 국사학 과 참조. 119) 正祖實錄 권44, 정조 20년 5월 29일(계유)

416 韓 國 文 化 38 여현진을 설치하고 배치진마저 개성부로 이속하였으나 정작 직로 요충인 청석동에는 아무런 군사시설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이후에도 청석동 방어안은 계속 제기되어 결국 순조 3년(1803)에 청석동 기슭을 따라 3리의 성 120)120) 을 쌓고 주민을 모집하여 靑石鎭을 만들고 첨사를 파견하도록 하였다. 오 랫동안 논란거리였던 청석동 방어대책이 드디어 마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오 래지 않아 청석진 폐지 주장이 나왔다. 순조 21년(1821)년의 청석진 실태 보 고에 따르면 청석동에 성을 쌓은 뒤 초루와 참호를 조성하기 위해 석벽을 깎 아 낸 결과 좁고 험하던 곳이 평지로 변하였다. 또한 군병 확보를 위해 모입 한 50여의 민호가 주변의 땅을 개간하여 좁은 고갯길이 車馬가 통행할 수 있 는 평탄대로가 되어 버려 기병이 출몰할 경우 방어가 불가능하였다. 오히려 진 운영에 따른 개성부의 재정 부담만 커졌다는 불만이 컸다. 이에 따라 청석 진을 혁파하고 나무를 심어 洞口를 다시 보수하는 한편 鎭民을 원적지로 돌 121)121) 려보내도록 하였다. 청석진 방어대책은 18세기 내내 거론되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하던 문제 였다. 그런데 서북방어체제나 수도방어체제가 모두 제 기능을 상실하고 의미 를 잃어가던 19세기 초에 뒤늦게 設鎭하여 실효성도 없이 폐단을 야기하고 재 력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았다. 19세기 관방대책의 비효율성과 비현실성을 보 여주는 실례였다. 5. 맺음말 황해도는 평안도, 함경도와 함께 서북 3도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북방세력과 직접 접촉하지 않는 후방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군사적 긴장도는 상대적 으로 낮은 지역이었다. 따라서 조선 전기에는 독자적인 지역 방어책이 마련되 어 있지 않았다.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감영에 합설되어 있던 병영을 독 립시켜 황주에 설치하는 등 관방체계의 수립이 본격화되었다. 120) 備邊司謄錄 194책, 순조 3년 12월 8일 ; 純祖實錄 권6, 순조 4년 8월 10일 (병인) 121) 純祖實錄 권24, 순조 21년 11월 29일(병자)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417 황해도의 내륙지역은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이어져 오는 산악지대의 끝자락 으로 비교적 낮은 산지로 이루어져 있어 직로가 통과하는 동선령을 제외하고 는 요해지가 부족한 반면 적들이 이용할 수 있는 샛길이 다수 존재하였다. 또 한 평야지대인 서해안 일대는 의지할 만한 험지가 거의 없어 조선후기 서북 지역의 기본 방어전략인 산성 중심의 수어대책이 실효를 보기 어려웠다. 따라 서 내륙 방어대책은 우선 적들이 이용할 가능성이 있는 낮은 고갯길들 부근 에 진보를 설치하여 동서 방향의 영애방어선을 구축하는 방법이 채택되었다. 이에 따라 청과의 군사적 긴장관계가 완화되기 시작한 숙종 초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접계가 되는 산지를 따라 9개의 진보가 배열되었다. 그러나 최전선 이 아닌 지역에 방어기지를 늘어놓는 방식은 비용은 많이 들면서 효용성은 떨어지는 것이었다. 또한 진보를 설치한 뒤 재정 부담이 늘어난 군현들과 마 찰이 끊이지 않아 곧 진보 폐기론이 제기되었다. 그 결과 긴요하지 않은 3개 의 진보가 폐지되어 19세기에 영애 진보는 6곳만 남게 되었다. 병영 주재처였던 황주의 방어시설도 보강되었다. 황주는 평지에 구축한 읍 성 외에는 부근에 별다른 방어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병영을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종종 제기되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조건을 비교한 결과 병영을 그 대로 황주 읍성 내에 두고 성곽의 방어시설을 보강하도록 하였다. 직로상의 고갯길인 동선령을 넘어 봉산 서흥 평산 개성으로 이어지는 서북대로의 방어대책도 꾸준히 논의되었다. 이는 영애 방어선이 붕괴될 경우 서울로 곧바로 진격할 수 있는 직로로서 실제 호란이나 이괄의 난 때에 적군 이 대로를 따라 서울로 진격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직로 방어에 있어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동선령 서쪽의 극성 방어대책 이었다. 이곳은 영애 방어선의 서쪽 끝자락으로 해안까지 넓은 평원지대가 펼 쳐져 있어 적들이 우회로로 이용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으로 지목되었다. 따라서 정방산성을 축조하고 산산진을 이전하였으나 극성에 성을 쌓아야 한 다는 의견도 많았다. 그러나 역사가 지나치게 큰데다 전쟁의 위험성이 사라지 고 있어 실질적인 필요성이 줄었기 때문에 실행되지는 않았다. 직로 부근의 산성을 수축하는 방안도 추진되었다. 황해도에는 내지에 5곳의 산성이 있었으나 황주의 정방산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란시 주민 피난처로

418 韓 國 文 化 38 이용하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아 황주 이남의 서북대로는 무방비 상태였다. 이 같은 허점을 보강하기 위해 숙종 말에 평산 읍치 부근에 태백산성을 수축 하였다. 18세기 후반에는 황해도와 경기도 접계인 청석동과 부근 고갯길의 방어문 제가 새로이 제기되었다. 청석동 일대의 방어는 기본적으로 개성부의 소관이 었으나 수도방어의 최전방으로 기능하고 있던 황해도 남쪽지역의 방어대책도 함께 강구되어 금천을 옛 금교역 자리로 이전하여 청석동 이북의 방어를 책 임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말에 개성부와 금천부의 경계를 재조정함에 따라 이 일대 방어책임은 개성부로 완전히 이관되었다. 19세기 들어서도 청석 동 설진 논의는 지속되었다. 그러나 국내외의 안정 상태가 지속됨에 따라 황 해도의 군사적 기능은 또 다시 약화되었으며 방어시설들도 축소되는 상황에 서 이는 이미 실효성을 지닐 수 없는 것이었다. (필자 :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구원) 주제어 : 황해병영, 내지 진보, 영애방어, 영로(嶺路), 태백산성, 청석동 투고일(2006.11.3), 심사시작일(2006.11.7), 심사종료일(2006.11.22)

조선후기 황해도 內地 방어체계 419 <Abstract> The Inland Defense System in Hwanghae Province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Ko, Seung-Hee * 122) Hwanghae Province was the region with the low military tension during the early Joseon period. But this province had the duplicate importance in the military aspect; the communications zone of Pyeongan Province and the front line of the capital, Hanyang. The self-contained defense system in Hwaghae Province was framed after the invasions of Ching China in the early 17th century. The government strengthened the military installations of the supreme headquarters in Hwangju that set up after the invasion of Japan, and newly constructed nine fortresses at the strategic points of the inland passes, from Hwangju (west) to Suan(east) in the late 17th century. The Castle of Taebaek was built in the Pyungsan besides five existing castles near the main line to the capital for the defence of the main military route. Key Words : the supreme headquarters(byungyung; 兵營), fortress, inland passes, the Castle of Taebaek(太白山城), main military route * Research Fellow, G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Seoul National Universi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