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절신석기시대 1. 신석기시대의사회와문화지금으로부터 1만년전쯤해서기후가오늘날과같이따뜻해지자북반구의상당부분을덮고있던빙하가녹아내리기시작하였다. 빙하가물러난지역은초원지대로, 과거의초원지대는삼림 ( 森林 ) 지대로바뀌었으며, 강하류의퇴적지대에서는야생곡물이자생하고있었다. 이때에인류는신석기시대로들어가게되었다. 우리나라에서신석기문화는구석기시대의종말이후오랫동안무인공백지대로있던한반도에토기와마제석기를사용하는사람이새로이등장함으로써이루어졌다. 우리나라신석기문화는강원도오산리 ( 鰲山里 ) 유적에서미루어볼때서기전 7000년경으로올라간다. 1) 이신석기인들은처음에는원시무문토기 ( 原始無文土器 ) 와융기문 ( 隆起文 ) 토기를사용하였고, 그뒤를이어즐문토기 櫛文土器 : 빗살무늬토기 문화가들어와해안과하천을따라전국적으로퍼져나갔다. 그시기는대략서기전 4천년경부터시작된것으로보인다. 이원시무문토기나즐문토기를사용한사람들은당시시베리아와만주일대에퍼져살고있던고 ( 古 ) 아세아족 (Palaeo-asiatics) 또는고 ( 古 ) 시베리아족 (Palaeo-siberians) 계통으로서그일부가여러시기에걸쳐한반도로들어온것으로보는것이일반적이다. 2) 우리나라신석기인들은대체로바닷가나강가에살던수변 ( 水邊 ) 생활자였다. 이들은바닷가에서굴이나조개를채취하는한편그물이나낚시혹은작살로고기잡이를하였다. 그러나신석기시대중기이후에는각지에서농경이시작되어식량채집단계를벗어나원시농경이나마식량생산경제체제로발전하게되었다. 신석기인들은돌을갈아마제석부 ( 磨製石斧 ) 등여러가지도구를만들었다. 석기외에뼈로만든송곳 작살 낚시바늘 장신구 점복구 ( 占卜具 ) 등도있었다. 신석기인들의주거형태는대개움집 [ 竪穴住居 ] 이였다. 움집의형태는땅을직경 6-7m, 깊이 60cm 정도로파고움벽을따라가장자리에기둥을세워벽과지붕을이엉으로덮고출입구를남쪽으로내었는데겉모양은원추형내지원통추형이었다. 움바닥한가운데는화덕을설치하여취사와난방에사용하였다. 신석기시대인들은우주만물과자연현상에생명과정령 [ 영혼 ] 이깃들어있었다고생각하였다. 그리고이정령이초월적인능력으로사람의생활을지배하고있다는정령신앙 [ 精靈信仰 : Animism] 과인간세상의길흉화복이모두죽은자의영혼이나악귀의짓으로일어난다고믿었다. 이리하여이들을달래거나물리쳐환난을막고복을비는무격신앙 [ 巫覡信仰 : Samanism] 이생겨나고이를위해의식을베풀수있는전문적인주술사 [ 呪術師 :Saman] 가나오게되었다. 신석기시대사회의기본단위는여러움집이모여서이룬취락이었다. 이들주민들은모두혈연으로결합된혈족집단으로서씨족 ( 氏族 ) 이라한다. 이씨족들은다른씨족과의구별을강조하는토템 (Totem) 을가지고있었다. 이씨족사회는공동체사회로서수렵 어로 채집등의경제활동을공동으로행하고성과물을분배받았으며, 또종교의식을비롯한마을의중요한일을공동으로처리해나갔다. 따라서구성원사이에지배 피지배의사회적관계가아직발생하지않은수평적사회관계였다.
1) 임효재, 1982, < 강원도오산리유적발굴진전보고 > 한국고고학연보 9 집참조. 2) 김정배, 1973, 한국민족문화의기원, 고려대학교출판부.
2. 울진지역의신석기문화 1) 후포리신석기유적개관울진지역의신석기시대는지역적으로볼때강원도의영동지역과깊은관련을갖는다. 영동지방의유적으로는양양군오산리유적 송전리유적 조산리유적 하광정리유적 강릉시영진리유적 가둔지유적 명주금진리유적 토성지유적 지변도유적 송림리유적 안인리유적 하시동리유적등이있다. 1) 울진지역에서의신석기유적으로는 1983년 3월후포면후포리등대산에서발견 조사된후포리 ( 厚浦里 ) 유적을들수있다. 이지역은등대산이바다쪽으로돌출되어나온관계로자연방파제의역할을하고있어항구로서는혜택을받은입지를갖추고있다. 후포리유적발굴보고서에 2) 의하면후포리유적은산꼭대기의자연적인구덩이를이용한집단묘지이다. 그장법은세골장 ( 洗骨葬 ) 이주류를이루며최소한 40인이상으로추정되는인골들이매장되었는데인골은중앙부에놓으려는의식과장축을남북으로놓으려는의식이엿보인다. 또함께부장된돌도끼 [ 石斧 ] 는인골을덮는역할을한것으로보인다. 이처럼한구덩이안에세골장의장법으로집단매장한것은원시시대분묘유적중에서도후포리유적이처음이서그출현배경은앞으로의연구과제라할것이다. 후포리유적에는토기가한점도출토되지않았지만여기에서출토된석부의형태에서미루어볼때분명토기가존재한시기라고할수있다. 그러나토기가출토되지않아유적의연대를결정하기는어려우나신석기시대후기일것으로보인다. 그렇지만청동기시대까지내려올가능성도배제할수는없다. 본유적에서나오는장대형돌도끼들과비슷한것은춘천교동 ( 校洞 ) 유적 회령 ( 會寧 ) 연대봉유적 종성 ( 鍾城 ) 상삼봉유적등이있다. 따라서이러한장대형석부들은주로동해안또는동쪽지방에분포하는경향을보인다. 그러나본유적의돌도끼들은다른유적에서는거의볼수없는비실용적이라고생각될만큼길이가긴것이많은데이는부장용으로서인골을덮는구실을한것같다. 매장부는하층부, 중층부, 상층부의 3층으로이루어졌는데세층의시간적인경과는단절적인것이아니라점이적 ( 漸移的 ) 이라고한다. 이같은사실은후포리지역에거주하던주민들이상당한기간을이지역에서살면서이무덤을공동으로사용한것으로볼수있다. 세골한뼈는다발로모은듯하며, 가끔신전장으로보이는것도있으나소수이며육탈한이후매장한듯하다. 인골에는일부주 ( 朱 ) 를칠한흔적이보인다. 주칠한흔적은상층부 중층부에서검출된인골에서보인다. 장법이세골장이므로주칠은육탈한후매장하기전에칠한것이라할수있다. 인골에주를칠한것은벽사 (? 邪 ) 의목적에서한것으로생각된다. 그리고주칠을하거나관옥 ( 管玉 ) 을부장한인골은특수한사람이었을가능성이크다. 후포리유적인골들에서다른조직들은모두부패하고치아들만남았다. 치아의크기형태, 치아의우식증, 치아교모도, 성별및연령추정등을해본결과 1) 형태는현대인과차이를거의보이지않았으며, 치관의크기는현대인류와거의유사하였으나상악전치의치관근원심경과하악제1대구치의근원심경이다소크게나타났다. 성별및연령추정에서남녀비율은비슷하였으며, 주로 20대젊은층의치아로판명되었다. 그러나이들의종족적계통이어디에속하는지는알수없다.
1) 강원도지방의신석기시대유적에대해서는강원도, 강원도사 역사편, 306-322 쪽참조. 2) 후포리유적에대한설명은국립경주박물관, 1991, 후포리신석기유적, 11-17 쪽및 31-32 쪽에의거하였다
2) 후포리신석기유적출토유물후포리유적에서인골과다량의석제품및소량의관옥이출토되었다. 발굴보고서에의해이유적에서출토된유물들을간략히정리하면다음과같다. (1) 인골인골은서로뒤엉긴상태로검출되었는데그나마잔존상태가매우불량하여개체 ( 個體 ) 식별이불가능하였다. 인골이나온곳은상층부 중층부 하층부로나누어진다. 가. 상층부제1군은인골의상부에남북장축의장대형석부 3점이있었다. 인골은대퇴골 ( 大腿骨 ) 혹은상완골 ( 上腕骨 ) 로보이는대형골과다공질 ( 多孔質 ) 의두개골로추정되었고, 주 ( 朱 ) 를칠한흔적도있었다. 치아는이일대에서불규칙적으로검출되었다. 제2군의인골은대형골만으로정연하게유구벽에기대어세운듯한것과분말 ( 粉末 ) 인골과뒤엉긴상태의대형골도있다. 제3군의경우대형골과두개골및치아가검출되었다. 제4군은장대형석부아래에서인골이검출되었는데대형골이주류를이루며강한만곡도 ( 彎曲度 ) 를가진것은갈비뼈로추정되었다. 제5군은장대형석부밑에서인골이검출되었는데 2개체이상의두개골인골로보인다. 제6군은장대형석부아래에서인골이검출되었는데두개골의존재로보아 2개체이상의사람이매장된것같다. 제7군의인골은장대형석부아래에서검출되었는데모두대형골이며, 두개골도 1점과치아가검출되었다. 제8군은장대형석부의아래에서인골이검출되었지만석부로인골을덮은것같지는않다. 인골군의남단에두개골 2개체가검출되었고, 그반대쪽인북단에서관옥 ( 管玉 ) 2점이출토되었다. 제9군은장대형석부와소형석부아래에인골이검출되었는데두개골이 4개체분이어서다수의사람이매장된것으로추정되며, 부분적으로주를바른대형골도있었다. 인골의출토상태로보아신전장 ( 伸展葬 ) 을한것도있었다. 제10군은남북장축의장대형석부의아래에서인골이검출되었는데대형골도있고, 소형골도있다. 나. 중층부제11군의경우마제석부가노출된하부에서인골이노출되었다. 북측의인골은원형을유지하고있었고, 주가검출되었다. 제12군은제9군의하부에서인골이검출되었는데 2개체분이상의인골이서로엉켜있었는데굴신 ( 屈伸 ) 하고있었다. 제13군의인골은대부분분말상태이고간혹대형골도있다. 제14군과제15군의인골은잔존상태가매우나쁘며, 두침 ( 頭枕 ) 은북침 ( 北枕 ) 인것으로보인다. < 사진 2-1> 후포리유구중층부노출상태
제16군의인골에는대형골이검출되었는데 1인이상이매장된것으로보인다. 제17군의인골에는두개골로보이는인골이검출되었으나상태가좋지않다. 제18군은제9군의하부에서 1점의석부아래에서인골이검출되었는데대형골도있었다. 제19군은석부의아래에서인골이검출되었는데 2인이상의인골이서로엉켜붙은상태이어서여러사람이매장된것으로추정된다. 제20군은석부의하부에서출토된것같으며, 대형골도있었다. 제21 군의인골은석부의하부에서검출되었으며, 2인이상이매장된것으로추정된다. 다. 하층부제22군에서는석부아래에서분말화된인골과대형골일부가검출되었다. 머리의방향은남쪽이다. 제23군은석부아래에서분말인골과함께대형골이검출되었다. 인골의장축은남북이다. 제24군은석부아래에서대형골이검출되었으며, 장축은남북이다. 제25군은제 24군밑의남쪽에위치하며인골은없고, 석부 2점만이검출되었다. 라. 기타제26군에서는석부 4점이검출되었다. 제27군은제6군의아래에서검출되었는데인골은분말화되어있었고, 석부 2점이함께출토되었다. 제28군은제26군의아래에서검출되었는데, 대부분의인골은분말화되어있었고이주위를둘러싸듯이대형골이있었다. (2) 돌도끼 ( 石斧 ) 석부는매장신고품을비롯하여 180점이다. 석부는형태적특징에따라평면상의형태가날쪽으로가면서폭이넓어지는 A형과석부의가운데폭이넓고두부쪽으로갈수록폭이좁아지는 B형으로구분된다. 출토된석부는실제사용이용이한 10-20cm 정도의것은별로없고대부분이 20cm 이상 의장대형석부이며, 5cm 미만의소형석부도상당수보인다. 형태적으로 A 형의경우는석 질이호온펠레스가많고 B 형은편마암이많다. 후포리유적의장대형석부는처음부터의도적으로만든것인데장대형이라는형태는후 포리석부의큰특징이라할수있다. 소형의석부는날의형태가끌날과닮아끌로도생각 될수있다. (3) 석제수식 ( 石製垂飾 ) 2 점이출토되었는데평면형태는유선형이다. 한끝에구멍이하나뚫어져있어목같은 곳에달아매던장신구로생각된다. (4) 관옥 ( 管玉 ) 2 점이다. 석질은옥과비슷한것으로보이나정확한암석의종류는확인되지않았다. 일반적인관옥과는달리구멍이비교적넓어어망추로생각될수도있으나석질로볼때관옥으로여겨진다. 1) 후포리유적의인골과치아에대해서는김종열 윤창록, 1991, < 울진후포리유적에서발굴된치아에관한연구 > 울진후포리유적, 국립경주박물관, 134-138 쪽을중심으로정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