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14)이 * 개 석 머리말 Ⅰ. 大元-高麗 關係에 대한 초기 연구와 屬國論을 둘러싼 論爭 Ⅱ. 高麗王府說과 瀋王位下의 문제 Ⅲ. 새로운 분석틀 탐구 맺음말 요약 이 연구는 13-14세기 元-麗關係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를 검토하여 大元-고려관계의 성격을 살피고, 이를 바탕으로 유용한 분석틀에 대한 나 름의 견해를 보탠 것이다. 초기 일본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연구한 麗元關係 연구는 몽골의 한반 도 침략과 東征期間 주둔군의 고려에 대한 정치적 간섭 등 역사 사실에 대한 실증적 검토가 중심이었고, 해방 후 국내 연구자들에 의해 수행된 많지 않은 연구 역시 몽골 침략에 대한 항쟁과 貢女 宦官의 징발 등 침 략세력에 의한 인적 물적 수탈에 대한 실증적 연구에 치중하였기 때문 * 경북대학교 교수 투고일 2007.11.27. 심사일 2007.11.27. 심사완료일 2007.12.17. 39
史學硏究 第88號 에 麗元關係에 대한 인식은 정복과 피정복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원관계사 연구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은 1960년대 초 고병 익 선생의 연구였다. 그것은 고려에 대한 몽골의 중심적 지배기관인 정동 행성을 연구함으로써 여원관계의 실상과 내속관계를 집약적으로 살필 수 있는 지표를 제공하였고, 또 六事라는 지표를 통해 대몽골국과 주변의 피 정복지역의 관계를 비교 검토함으로써, 고려에 대한 원조 지배의 특수 한 성격에 대한 비교사적 이해를 비로소 가능하게 했다. 1970년대 이후 연구 환경의 변화로 국내 학계의 여원관계 연구는 양 적으로 비약적인 발전을 보였으나,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분석틀은 1990년대 초까지 제시되지 못했다. 물론 같은 기간 동안 대만학자인 蕭啓慶이 몽골 황실과 고려왕실 사이의 혼인관계 연구를 통 해 여원관계 이해를 위한 또 하나의 새로운 분석틀을 제공하였던 바, 그 는 몽골 공주가 諸王에 비견되는 지위를 가지고 고려국왕과 고려를 共治 하였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상의 연구는 유목적 전통이 스며있는 대몽골 국의 권력구조와 정복지역 지배의 성격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였고, 몽골 의 침략과 지배가 지속되는 동안 발생할 수 있는 여원관계의 질적 변화 등을 살필 수 있는 분석틀(지표)을 고안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이익주의 世祖舊制論과 森平雅彦의 高麗 王府論, 그리고 장동익이 정동행성연구에 시기구분을 도입함으로써 大몽 골국과 고려 사이의 관계를 보다 다각적이고, 보다 장기적인 변화 속에서 분석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 森平雅彦의 연구는 종래 지배-피지배의 틀 에 스며있는 몽골적 특성을 고려하지 않았던 여원관계 연구의 한계를 극 복하는데 결정적 기여를 하였고, 대몽고국-고려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지 평을 열었다. 또 최근 김호동 교수 역시 치밀한 분석을 통해 몽골 세계사 내의 여원관계의 위상과 의미를 새롭게 음미하였으며, 그 결과 고려사 연 구자의 취약점으로 지적된 여원관계사 이해의 몽골 세계사적 기초를 튼 40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튼히 다졌다는 점에서 이 분야 연구의 질적 비약을 예고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기존의 국내외 연구에 보이는 속국론과 간섭론의 문제점, 중국적 개념의 부용관계 등 인식상의 문제점과 森平雅彦의 고려 왕부론과 投下論이 가지는 무단적 관점을 비판하고, 김호동 교수의 최근 연구의 문제점을 음미하여, 麗元關係 분석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서, 1) 정동행성, 2) 부마고려국왕의 왕부, 3) 世祖舊制라는 세 가지 축과 시기에 따른 大元-高麗 관계의 변화를 복합적으로 고려하고, 왕위 계승자 와 관료의 在元宿衛 등 사회문화적 통로와 詔令 등 법제적 수단에 의한 지배의 측면을 고려할 것을 제의하였다. 주제어 : 대몽고국(大蒙古國)-고려관계, 정동행성(征東行省), 육사(六 事), 왕부론(王府論), 투하(投下), 세조구제(世祖舊制), 불개 토풍(不改土風), 고병익, 소계경, 장동익, 이익주, 모리히라 마사히코, 김호동 41
史學硏究 第88號 머리말 1231년 본격적으로 시작된 몽골 군대의 한반도 침략은 元宗이 1260년 6월 2일(戊午, 사월 스무 하루) 몽골 군대의 도움을 받아 고려의 국왕으로 즉위함으로써 일단 종식된다. 그러나 이후 恭愍王 5년(1356) 奇轍과 盧頙 의 逆謀를 계기로, 백련교도의 봉기와 원조 지배집단 내부의 권력투쟁으 로 인해 지방과 외번에 대한 원조 중앙의 통제력이 약화된 틈을 타서, 7월 25일(乙亥, 유월 스무 엿새) 至正 年號의 사용을 정지할 때까지1) 고려는 大蒙古國/大元2)의 지배와 간섭 아래 놓여 있었다. 유사 이래 한민족은 외 1) 高麗史 권39, 恭愍王 世家2: (五月丁酉)罷征東行中書省理問所. (六月)乙亥, 停 至正年號.. 復我祖宗之法. (/4상-/6상) 1260년 이래 지속된 大元의 속박에서 고 려가 벗어나는 것은 백련교도의 봉기로 元朝의 帝國 내부에 대한 통제력이 이미 무너진 상태였던 공민왕 5년(1356) 6월 16일 大司徒 奇轍과 慶陽府院君 盧頙의 모 반 진압이 계기가 된 征東行省理問所 폐지와 元의 年號 정지, 고려의 祖宗之法을 회복시킨 것을 기준으로 삼을 수 있다.(北村秀人, 高麗末に於ける立省問題につい て, 北海島大學文學部紀要 14-1, 160쪽), 하지만 1360년 12월 이후 홍건적의 침입 으로 어려움에 빠진 고려가 1361년 가을(九月癸酉) 征東行省官을 다시 설치하고, 蒙塵 중이던 1362년 봄(三月甲子)에는 관제도 바꾸어 大元에 대한 外藩의 명분을 회복하려 했기 때문에 고려에 대한 원의 형식상 지배와 간섭관계는 그 이후까지 지속된다고 볼 수도 있다. 물론 北元과의 유대관계를 고려하면 여원관계는 여기에 서 끝나는 것은 아니며(特木勒, 北元与高麗的外交: 1368年~1369年, 中國邊疆史 地硏究 2000-2), 공민왕 18년(1269) 至正年號를 다시 정지한 시기까지 계속된 것으 로 볼 수도 있다( 高麗史 권41/24하 恭愍王世家四, 十八年五月: 辛丑, 停至正年 號. ). 2) 高麗史 는 초기 麗元交涉關係를 기록하면서 주로 大朝 와 蒙古, 그리고 드물게 大蒙古, 大蒙古國 (권51, 曆2 授時曆經 上)이란 용어를 쓰는데, 후자는 大元이 라 불리는 예케 몽골 울루스(大蒙古國) 의 의미이다. 김호동, 몽골제국과 大元 ( 歷史學報 192집, 221-253) 참조. 또 高麗史 의 元宗 8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我國臣事蒙古大國, 稟正朔有年矣. 라고 하였는데(권26/10하), 이것은 大蒙古國의 잘못이다. 한문사료인 永樂大典 권19416, 站赤1/9-10쪽에도 太宗皇帝, 元年... 是 42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부로부터 여러 차례 군사적 침략을 당했고, 때로 명분상의 군신관계를 수 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늘 독자적 권력을 유지해 왔던 한민족 사회가 高 麗軍民의 30년에 걸친 항쟁에도 불구하고 결국 몽고족의 군사적 침략에 굴복하여 실질적인 外藩의 지위를 받아들인 것이다. 수많은 인민이 희생되고 귀중한 문화재가 파괴된 데에 그치지 않고, 권력의 독립성마저 상실함으로써 끝내 한민족 사회는 문화적 자존감과 정체성마저 심각하게 유린되고 훼손되었던 고려는 100년 가까이 지속된 몽골 정권의 한반도 지배로 정치와 사회, 경제와 문화면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고, 또 이러한 경험은 몽골 지배가 종식된 이후 韓民族 사회의 발 전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大元과 고려 사이에 내면화된 宗藩 關係의 경험은 이후 明 淸에 대한 事大의 명분을 쉽게 수용할 수 있게 하였고, 오늘날 한국인들 사이에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이른 바 地政學的宿命 의 논리도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뿐만 아니라 몽골 정권의 한반도 지배, 특히 제주도와 고려 북방지역 의 분할과 통치는 이후 한민족 국가의 영토의식 형성과 한민족 문화의 발전에도 중요한 계기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수동적이었지만 고 려가 汎몽골 세계의 네트워크에 포섭됨으로써, 몽골 세계의 중심이었던 중국에서 융합된 中國과 아랍세계의 선진 文化가 활발한 인적 물적 교 류를 통해 한반도에 도입되었고, 조선 초기 찬란한 한민족 문화 의 건설 에 참여하는 귀화인들의 도래 역시 여기에서 비롯된다. 한민족 사회의 발전과정에 이처럼 몽고 지배 시기의 역사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 학계의 고려 후기 몽고 지배 하 역사에 대한 연구는 아직도 만족스러운 수준에 이르렀다고 보기 힘들다. 하지만 몽골 세력의 침략과 月制曰, 上天眷命賜皇帝之徽名. 大蒙古國, 衆寡小大, 罔不朝會. 라 하여 大蒙古 國 이 쓰이고 있다. 43
史學硏究 第88號 지배, 그리고 간섭이 13-14세기 고려사회의 구석구석에 미친 영향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축적하지 않은 채, 고려 후기 사회의 역사적 事象에 보 다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은 없으며, 麗末鮮初 특히 한민족문화의 비 약적인 발전기인 15세기 역사에 대한 객관적 이해와 평가도 불가능하다. 물론 본고의 주제인 大元과 고려 사이의 관계 및 그 성격에 대한 검토 는 20세기 초 근대적인 역사연구가 시작된 이래 국내외 학계에서 꾸준히 이루어졌다. 특히 池內宏 등 초기 일본 연구자들은 실증적 연구를 통해 몽고군의 고려 침략과 정복, 14세기 중엽 反元獨立의 쟁취과정은 물론 몽 고지배 아래 편입된 이후 고려 내부의 변화에 이르기 까지 여원관계사 전반에 걸쳐 현재의 연구에도 유용한 많은 기초적인 역사적 사실을 밝혀 내었다.3) 하지만 몽고국과 고려의 관계를 한 마디로 압축할 만한 성격 논 의까지 나아가지 못했으며, 1945년 이후 국내외 연구자들에 의해 새로이 麗元關係의 여러 측면 곧 貢女問題, 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지만,4) 1970 년대 국내학계의 여원관계사 연구 환경이 새롭게 조성되기 전까지는 산 발적이고 단편적인 연구에 그쳐 고병익(高柄翊) 선생의 일련의 연구5)와 北村秀人의 연구6)를 제외하면 대체로 식민지 시기 실증적인 연구가 달성 3) 張東翼, 高麗後期外交史硏究 (一潮閣, 1994) 2-3쪽. 일본 학자의 연구성과 외에도 白南雲의 朝鮮社會經濟史 第二卷 인 朝鮮封建社會經濟史 (上) (東京: 改造社, 1937)에 포함된 여원관계 관련연구 역시 참고할 만하다. 4) 이 시기 국내학계의 여원관계사 연구 업적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金庠基 선생의 高麗時代史 (東國文化社, 1961)로서 개설서이지만 국내 고려사 연구자들의 논문 에 빈번히 인용되고 있다. 5) 高柄翊, 麗代 征東行省의 硏究, 歷史學報 14(1961), 19(1962);, 高麗 忠 宣王의 元 武宗 擁立, 歷史學報 17 18合輯(1962); 蒙古 高麗의 兄弟盟約의 性格, 白山學報 6(1969); Koh, Byong-ik, Mongol Patterns of Conquest and Control presented at the 3rd East Asian Altaistic Conference, held at Taipei, 1969 in Essays on East Asian History and Cultural Traditions. Seoul: Sowha Publishing Co, 2004. 290-299 쪽. 6) 北村秀人, 高麗に於ける征東行省について, 朝鮮學報 32(1964); 高麗末に於け る立省問題について, 北海道大學文學部紀要 14-1(1965). 44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한 수준에도 미치지 못했다. 이와 비교할 때 1970년대 이후 국내 연구자의 여원관계사 연구는 고 려의 抗蒙鬪爭, 貢女와 宦官, 王室 婚姻, 麗元關係 관련 인물, 公主와 瀋 王, 성리학 도입 등 정치 군사적 방면은 물론 사회 경제 문화적 방면 에 이르기까지 麗元關係 전반에 걸쳐 활발하게 진행되고 많은 연구 성과 를 축적하고 있으며, 1980년대 이후 蕭啓慶7), 陳高華8), 森平雅彦, 喜蕾9) 등 대만과 중국, 일본 연구자에 의한 여원관계사 연구 역시 양적 질적으 로 크게 진전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국내 연구자의 여원관계사 연 구는 극소수를 제외하면 주로 고려사 연구의 연장으로 이루어졌고 사실 고증에 치중하였기 때문에10) 복잡한 양상을 보이는 대몽고국과 고려 사 이의 지배와 내속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개념화와 새로운 분석틀 (이해체계)을 고안해 제시하는 노력은 미흡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1961년과 1962년 두 해에 걸쳐서 고병익 선생 이 발표한 征東行省에 관한 장편의 연구11)는 여원관계를 보다 구조적으 로 이해하는 데 유용한 분석틀을 제시하였으며, 또 고병익 선생은 1969년 타이페이에서 열린 아시아 알타이 학회에서 몽골 정권이 각 정복지역에 요구한 六事의 내용과 시행여부를 비교하여 大元의 고려에 대한 통제방 식과 지배의 성격을 밝힌 연구를 통해 비교사적 분석틀을 제시하였는 데,12) 前者는 이후 北村秀人(1964, 1965) 丁菎健13) 등 국외 연구자에 의 7) 蕭啓慶, 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与强權政治 ( 元代史新探 臺北, 1983), 245-248쪽. 8) 陳高華, 元朝与高麗的海上交通, 震檀學報 71 72합(1991);, 從 老乞 大 朴通事 看元与高麗的經濟文化交流, 歷史硏究 1995-3;, 舊本 老乞大 書後, 中國史硏究 2002-1. 9) 喜蕾, 元代高麗貢女制度硏究 北京: 民族出版社, 2003. 10) 張東翼, 위 책, 3쪽. 11) 高柄翊, 麗代 征東行省의 硏究(上), 歷史學報 제14집(1961), 45-76쪽;, 麗 代 征東行省의 硏究(下), 歷史學報 제19집(1962), 121-197쪽). 12) Koh, Byong-ik, Mongol Patterns of Conquest and Control. 13) 丁菎健, 元代征東行省之硏究, 史學彙刊 10(1980). 45
史學硏究 第88號 해 검토되고, 다시 1980년대 후반 이후 장동익(張東翼)14)에 의해 재검토 되는 등 다른 주제에 비하여 최근까지 국내외에서 비교적 많은 연구가 발표되고 있다.15) 또 後者는 종래 大元-高麗 두 정치세력 사이의 관계로 보고 있던 麗元關係의 이해를 大蒙古國과 그 外藩들 사이에 맺어지는 關 係라는 비교사적 지평에서 처음으로 검토하였다는 점에서 수준을 한 단 계 높여준 연구 성과였는데, 이익주(李益柱)는 다시 이러한 비교사적 분 석틀 안에 世祖舊制 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백년 남짓 지속된 麗元 사이의 內屬關係의 성격에 대한 보다 의미있는 분석의 틀을 제공하고 있 다.16) 곧 쿠빌라이 사후 카간의 권력 내부에 중국적 황제권의 속성이 더 욱 강화됨으로써 카간의 울루스 내부의 內屬關係를 구조화하려는 元朝와 이를 저지하려는 高麗의 대응논리인 世祖舊制 를 통해 麗元關係를 동태 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증적 구체적 연구라는 면에서는 원조와 고려의 관계는 아직도 충분한 검토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이 점에서 최근 에 출간된 森平雅彦의 일련의 연구17)와 김호동 교수의 몽골제국과 고려: 14) 張東翼, 前期征東行省의 置廢에 대한 檢討, 大丘史學 32(1987);, 征東行 省의 硏究, 東方學志 67(1990) 및 張東翼, 위 책. 15) 최근 동북공정의 영향으로 이루어진 중국 학계의 한중관계사 연구 중에 宋炯, 元代的征東行省 ( 廣西社會科學, 2002年 第5期)과 程尼娜, 元代朝鮮半島征東 行省硏究 社會科學戰線 (2006)가 있는데, 이 글을 작성하면서 宋炯의 연구는 아직 참고하지 못했다. 16) 李益柱, 高麗 元關係의 構造와 高麗後期 政治體制 1996년 2월 서울대학교 대 학원 박사학위 논문. 학위 논문 중 핵심적인 논의가 高麗 元關係의 構造에 대한 硏究 소위 世祖舊制 의 분석을 중심으로 ( 韓國史論 36, 1996: 1-51쪽)에 포 함되어 있다. 17) 森平雅彦, 高麗王位下の基礎的考察---大元ウルスの一分權勢力としての高麗王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6(1998) 55-87쪽;, 駙馬高麗國の成立---元朝におけ る高麗王の地位についての豫備的考察-- 東洋學報 79-4(平城 10년) 343-373쪽;, ケシク制度と高麗王家---高麗 元關係における禿魯花の意義に關聯して-- 史學雜誌 110-2(2001) 硏究ノト 60-89쪽;, 賓王錄 にみる至元十年の 遣元高麗使 東洋史硏究 63-2(2004) 58-93쪽. 46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쿠빌라이 정권의 탄생과 고려의 정치적 위상 18)의 제5장 고려의 위상 은 여원관계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보여주고 있다. 森平雅彦은 몽골 왕가 의 구성원으로서 부마국왕의 성격을 중심으로 여원관계를 검토하였고, 김호동 교수는 고려와 大元의 속국관계에 보이는 이중적 성격, 곧 세계제 국 대몽고국의 속국으로서의 성격과 분열된 카간의 울루스 大元의 내속 국 성격이 나타나고, 또 후자의 성격이 짙게 나타난 것은 쿠빌라이 카간 의 집권을 계기로 세계제국 대몽고국이 분화하게 됨으로써, 이 무렵 구조 화되는 여원관계가 카간의 울루스 내부의 원조와 고려 사이의 지배와 내 속의 틀에 의해 규정되고 그것이 정동행성을 통해 강화되고 있음을 매우 실증적이고 치밀한 논증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요컨대, 최근 대몽고국-고려 관계사 연구는 양적으로도 크게 발전했 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전기를 맞고 있다고 할 수 있는 바, 이 분야 연구에 갓 입문한 필자로서는 우선 지금까지 이루어진 대몽 고국-고려 관계에 대한 국내외 학계의 연구 성과를 두루 검토하고, 학계 에 이미 제기되고 있는 몇 가지 논점을 중심으로 이를 평가한 뒤에, 필자 나름으로 각각의 논쟁에 대해 비판적으로 검토한 결과를 보충하고, 이를 통해 장차 필자의 연구에 활용할 만한 유효한 분석틀을 마련하는 데 목적 이 있다. 하지만 이 한 편의 작은 비평적 논문으로 필자의 바람이 이루어 질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는다. 18) 金浩東, 몽골제국과 고려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7. 이 책은 본인이 이 글을 발표 한 2007년 4월 18일 이전에 탈고된 것으로 보이나 2007년 6월에 출판되었다. 연구 사적으로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이 글을 새로 수정하면서 반영하였다. 47
史學硏究 第88號 Ⅰ. 大元-高麗 關係에 대한 초기 연구와 屬國論을 둘러싼 論爭 大元과 고려의 관계에 대한 견해는 학자들마다 다르며, 일본제국주의 식민지배 시기에 일본학자들이 제기한 屬國論에서 봉건적 의례관계였지 만 내용에서는 기본적으로 대등하였다 는 김재홍의 獨立國(?)論의 주장 에 이르기 까지 매우 다양한 시각을 나타내고 있다. 김재홍은 대원국과 고려국의 관계를 시기와 문제에 따라 간섭을 허용하는 면이 없지 않 았으나 이러한 형식의 국교관계는 고려가 당, 송, 료, 금과 맺은 국교관계 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없었으며, 14세기 중엽 몽고와 국교를 단절할 때까지 본질적 변화가 없었다. 곧 형식에서는 봉건적 의례관계였지만 내 용에서는 기본적으로 대등하였다 19)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연구가 이께우찌(池內宏) 등의 연구에서 전제하 는 屬國論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라고 적고 있는데,20) 정작 池內宏의 글의 내용은 김재홍의 주장과 다르다. 그는 內屬 초기 1278년 철수할 때까지 고려 피정복집단에 대한 몽골의 직접적인 정치권력 구사의 수단으로 쓰 였던 王京 다루가치나 관리들, 곧 충렬왕대 이전의 다루가치나 정동행성 에 파견된 관리들은 耳目官의 역할을 했을 뿐 내정을 간섭하는 총독이나 통감과 같이 권세가 있는 駐箚官은 아니었다고 한다. 元 內地의 지방관아 에 파견된 다루가치와 마찬가지로 監臨官의 역할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 고 있다.21) 19) 김재홍, 13-14세기 고려-몽고 관계에 대하여(상) ( 력사과학 1964년 제4호) 12쪽. 20) 윗 논문, 6쪽. 21) 池內宏, 高麗における元の行省 ( 滿鮮史硏究 中世第三冊) 173쪽. 48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물론 池內宏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당시 고려인들은 王京 다루가치가 단순히 원 내지의 지방관아에 파견된 다루가치와 같은 耳目官의 역할을 했다고 보지 않았으며, 고려의 국정을 좌지우지하는 監 國의 역할을 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곧 1300년 시월 고려국왕이 征東行 省平章政事 闊里吉思가 추진하고 있었던 노비제 개혁을 재고해 줄 것을 요청한 表文22)에 따르면 至元 7년(1270) 황제가 다루가치를 파견했을 때 같은 문제가 있었지만 당시 몽고조정이 國俗 대로 따르도록 했음을 지적 하고 있는데, 高麗史 金止淑傳에도 世祖皇帝가 帖帖兀을 보내 監國하 게 했을 때, 趙石奇라는 자가 免賤해 달라고 提訴(訴良) 하여 帖帖兀이 上國法을 따르고자 하였으나 世祖가 本國의 舊俗을 따르라는 詔를 내린 예가 있으니 변경할 수 없다23)고 하여 闊里吉思를 설득했다는 고사를 소 개하고 있다. 요컨대 金止淑傳에 나오는 監國 帖帖兀은 쿠빌라이 카간이 1270년 五月 丙午에 王京 다루가치로 임명했던 脫朶兒였으며, 이듬해 시 월(己亥)에 그가 病死하자 원조는 1272년 四月 癸卯 다시 李益을 王京 다 루가치에 새로 임명하였고, 1274년 섣달 甲寅에는 黑的이 다루가치로 부 임하고 있다.24) 1370년 고려에 임명된 王京 다루가치 脫朶兒는 京軍을 閱 兵한다든지25) 군사재판에 간여하고,26) 심지어 고려 관리의 봉록 지급을 중단시키고 있다.27) 각종 사안에 간여하고 있어, 정복지역의 군사와 치안, 22) 高麗史節要 권22/19 하: 故於至元七年, 小邦去水就陸之時, 先帝遣達魯花赤以治 地, 于時因人告狀, 欲變此法, 確論聞奏, 廷議明斷, 俾從國俗. 23) 高麗史 권108/ 6상. 24) 高麗史 권28/6하, 28/7하: (元年)二月己酉, 副達魯花赤周世昌卒. 권28/12상: 是月 (=十二月)元遣中書員外郞石抹天衢爲副達魯花赤. 25) 高麗史 권27/14상 元宗 12년: (五月癸亥)是日脫朶兒與宰樞閱兵于郊, 凡五百餘 人,. 脫朶兒問曰, 宰樞子弟有從軍者乎? 答云無. 脫朶兒乃令宰樞各出馬給軍官, 26) 高麗史 권27/18상, 1271 六月 戊申; 권27/37하: (元宗 14년/1273)三月辛酉, 李益以 西海道戰艦多敗沒, 囚按察使禹天錫. 27) 高麗史 권27/37상하. 元宗 14년2월: 辛亥, 李益禁左倉頒祿. 王曰, 左倉陪臣俸祿所 在, 非官人所知, 吾將奏于帝, 益乃止. 49
史學硏究 第88號 그리고 행정을 책임졌던 초기의 다루가치와 같은 성격을 보인다. 특히 고 려인의 병장기 소지를 금지한 상황에서 王京의 치안을 맡고 있었던 巡馬 所를 다루가치가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28) 이를 통해 몽골 카간 권력은 상시로 실현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巡馬所의 역할에 대하여 최초로 주 목한 白南雲은 몽고 기마병이 야간에 순찰하며 開京의 주민활동을 통제 했다고 하였으며,29) 巡軍을 처음 專論으로 다루었던 한우근(韓㳓劤)은 巡 馬所의 提控官이 다루가치였음을 지적하였다.30) 하지만 두 사람 모두 巡 馬所의 기능과 관련지어 상부 기관인 王京 다루가치의 성격을 새롭게 해 명하는 데는 이르지 못했다. 1273년 八月 카간의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를 묘사한 高麗史節要 의 기술을 보면 당시 다루가치의 위세를 엿볼 수 있 는 바, 다루가치가 그 속료를 이끌고 왕의 오른쪽에 섰는데, 상장군 康允 紹가 胡服 차림으로 참례하여 客使로 행세하며 元宗을 보고도 예를 행하 지 않았다31)고 한다. 따라서 당시 고려인들이 다루가치를 監國으로 본 것 은 괴이한 일은 아니었다. 巡馬所는 1278년 다루가치가 철수한 다음에도 유지되었으며, 관할권 은 고려국왕에게 이관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장관인 巡馬千戶는 여전히 元에서 임명하고 있다. 1282년 8월 9일(乙未) 大將軍 印侯가 원에서 돌아 왔는데, 황제는 충렬왕의 청을 받아들여 왕의 內僚32) 高宗秀를 巡馬千戶 28) 高麗史 권28 忠烈王1 4년 7월 11일(壬辰): 時達魯花赤依蒙古制置巡馬所, 每夜巡 行禁人夜作. 29) 朝鮮封建社會經濟史(上) (東京, 1937) 第八十二章 蒙古勢力に依る兵權の去勢さ れた段階: 677쪽. 30) 韓㳓劤, 麗末鮮初 巡軍硏究--麗初 巡檢制에서 起論하여 鮮初 義禁府成立에까지 미침-- 震檀學報 22(1961) 24쪽. 31) 高麗史節要 권19/19하: 元宗 14년 八月條. 32) 高麗史 의 용례에서 內僚는 內豎를 포함하고 있지만 대체로 忠烈王과 忠宣王 시기에 집중되어 쓰이고 있으며, 宿衛한 인물을 지칭하는 바 뒤의 王府의 관리로 볼 수 있다. 高麗史 本紀에 나오는 金子廷(1277), 高宗秀(1282), 金呂(1293), 宋均 (1304), 金儒 高汝舟(1304), 曺頔(1305), 申彦卿(1309), 趙元瑞(1310), 石天輔 石天 50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로 임명하고 金牌를 내렸다.33) 또 충렬왕 1293년에 元은 다시 高宗秀를 王京等處管軍萬戶府 萬戶로 임명하고 三珠虎符를 내렸으며, 다음달 6월 에는 內僚 중 別將 金呂가 巡馬指諭에 임명되고 있다. 이후에도 巡馬官은 왕의 內僚 중에서 임명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는데,34) 이로써 충렬왕의 王 府35)가 元의 중앙권력 체계 속에 보다 깊숙이 편제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 볼 수 있고, 또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大元의 支配體制 안에서 고려국 왕의 지위도 제고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달에 元은 趙仁規를 嘉義大夫 王府斷事官에, 李之氐를 奉直大夫 合浦等處鎭邊萬戶府副萬戶에, 行中書 省 副鎭撫 金延壽를 西京等處管水手軍萬戶府副萬戶에 임명하고, 각각 虎 符를 수여하고 있는데,36) 이들 역시 충렬왕의 內僚로서 元의 職牒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중국과 대만학자들의 관점은 대체로 屬國論의 입장이다. 물론 학자에 따라 약간씩 다른 견해를 보이고 있는데, 臺灣 中央硏究院 院士인 蕭啓慶은 고려의 지위가 근대 식민제도 중 간접통치 아래 놓인 보호국에 상당한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元 麗 왕실간의 聯姻關係의 성 립을 계기로 蒙古 公主는 共治(joint rule) 수준으로 고려정사에 참여했으 卿( 高麗史 권71 樂二/ 俗樂/ 蛇龍) 등이 內僚로 언급되고 있다. 33) 高麗史 권29 충렬왕2, 8년 8월: 乙未, 大將軍印侯還自元, 帝以內僚高宗秀爲巡馬 千戶, 仍賜金牌, 王嬖宗秀表請故也, 또 高麗史 권123 李之氐附傳: 宗秀忠烈朝, 以善吹笛, 得幸用事, 官至三司左史. 王表請于帝, 授武略將軍巡馬千戶, 賜金牌. 34) 高麗史節要 권21(/34상하) 충렬왕3/19년 五月: 元以武略將軍巡馬千戶高宗秀爲 王京等處管軍萬戶府萬戶, 賜三珠虎符. 六月以 內僚別將金呂爲巡馬指諭, 內僚兼 巡馬始此. 高麗史 권30(/37상) 충렬왕3/19년 6월 丙戌條는 巡馬指揮 로 나온다. 35) 李玠奭, 高麗史 元宗 忠烈王 忠宣王世家 중 元朝關聯記事의 註釋硏究 ( 東 洋史學硏究 88, 2004: 77-129쪽) 1. 高麗王府의 蒙古的 官制: 必闍赤(비체치 bicigeci) 制와 王府必闍赤 (80-95쪽) 참조. 36) 高麗史節要 권21(/34하) 충렬왕 19년 六月. 이와 같은 내용은 高麗史 충렬왕 19년 6월 甲寅條에도 기록되어 있지만 趙仁規의 경우 高麗史 에는 충렬왕 16년 11월 丁卯에 이미 황제가 그를 왕부단사관에 임명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衍文 으로 의심된다. 51
史學硏究 第88號 며, 忽篤㥘里迷思(忽都魯揭里迷失 Qutlugh Kelmish)가 元 조정의 이익을 보다 잘 대표하여 고려의 정사를 감독할 수 있었기 때문에 1278년 다루가 치를 철수시킨 것이라고 보고 있다.37) 한편 부마고려국왕의 지위획득은 黃金氏族의 구성원 자격으로 쿠릴 타이에 참여하여 국정을 함께 상의할 수 있게 되었고, 부마가 되기 이전 六事의 의무를 수행해야하는 元朝의 外藩 중 하나에 불과했으나38) 駙馬 가 된 이후 宗藩 사이의 외교행위가 친족 간의 친목행위로 변하며, 몽고 제국 내의 지위도 크게 높아졌다(예속의 내면화)고 한다. 1296년 侍宴에 서 충렬왕의 座位는 諸王駙馬 중 일곱 번째로 올랐고,39) 1300년에는 네 번째였다고 한다.40) 이는 카간을 에워싼 몽골 통치권력의 권위체계 안에 서 혼인을 통해 고려국왕의 지위가 높아진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부마국왕의 지위를 통한 고려의 위상 제고가 고려의 국익을 지키는데 도 움을 주었지만, 결과적으로 카간 울루스 권력 체계 내에 고려 왕권을 편 제시킨 것이고, 이로 인해 고려왕실의 몽고화가 진전됨으로써 고려의 大 元國에 대한 예속화를 심화시킨 측면도 공존하고 있다는 것이 蕭啓慶의 견해이다.41)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駙馬國王의 신분을 획득함으로써 元 一代를 통해 고려가 局部的이나마 주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보고 있다. 반면 중국 대륙학계의 통설을 대표하는 韓儒林의 元朝史 는 기본적 으로 고려를 외국으로 취급하고 있는데, 고려 왕족이 원조황실과 甥舅 37) 蕭啓慶, 元麗關係中的王室婚姻与强權政治. 元代史新探 (臺北, 1983) 245-248쪽. 38) 益齋亂藁 (권9상/9하-10상) 忠憲王世家 : 中統五年夏五月, 天子遣必闍赤忽兀 禿來, 詔曰, 今歲王公群牧, 咸會上都. 王其乘驛而朝, 秋八月王親朝...., 天子所以待 遇之諸侯王莫敢望. 39) 高麗史 권31/14하. 당시 성종 티무르가 長朝殿에 마련한 侍宴에서 공주는 제왕 이 만좌한 가운데 맨 상좌에 앉았다. 40) 高麗史 권31/29하-30상. 41) 蕭啓慶, 윗 논문. 52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之好 를 맺고 원조의 역량을 이용하여 자신의 통치지위를 공고히 하는 외 에, 또한 이로써 恪守臣職 을 표하여 원조의 의심과 미움을 벗어나 상 대적 독립 을 유지하는데 이용하고자 했다. 원대 전 시기를 통해 고려는 명의상 元朝에 臣屬하였으나 기본상 독립적 지위를 유지하였다. 고 보고 있으며,42) 1310년에 지어진 姚燧의 高麗瀋王詩序 (牧庵集 권3/18상) 有 宗廟, 蒸嘗以奉其先也, 有百官, 布列以率其職也. 其刑賞號令專行其國. 征 賦則盡是三韓之壤, 唯所用之, 不入天府. 를 그 방증자료로 제시하고 있 다.43) 韓儒林의 제자이며, 元朝史 의 필진 중 한 사람인 陳得芝가 주편이 되어 편찬한 中國通史 第八卷 中古時代 元 時期(上) (上海人民出版社, 1997)의 서술도 元과 고려의 관계를 제13장 중외관계의 제1절에서 다룸으 로써, 고려가 원조권력체계 바깥에 있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원조 는 정치적인 혼인관계를 통해 또 公主의 정치 간여를 매개로 고려를 조종 (控制)하고, 고려왕 역시 駙馬의 신분에 의거하여 元 조정과 본국에 있어 서 지위를 높이고, 원 일대를 통해 본국에 대한 局部的 주권을 유지했 다44)는 蕭啓慶의 견해를 수용하고 있고, (상대적 독립성은 유지했지만) 원조에 대하여 納貢 質子 置驛 등 藩屬國의 의무를 수행해야 했고, 원 조 통치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그 국정에 간여하고 직접 또는 간접으로 고려인민을 압박하고 착취했다고 서술함으로써,45) 고려가 大元國에 예속 되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근래 한국학계의 고려사 연구자들은, 이러한 외국학계의 연구시 42) 韓儒林 주편, 元朝史 下 (人民出版社, 1986) 408, 409쪽. 43) 이러한 인식은 高麗史節要 권25 충숙왕 후4년 윤12월 조 기사 중 李穀이 疏에서 故其俗至今不變, 方今天下有君臣有民社, 惟三韓而已 라고 한 세조의 조서내용 과도 유사하다. 44) 陳得芝 주편, 中國通史 vol. 13/ 648쪽. 45) 윗 책, 649쪽. 53
史學硏究 第88號 각과 달리, 원 간섭기 라는 개념을 즐겨 쓰고 있으며,46) 高麗와 大元國 사이의 關係를 대체로 간섭관계라고 보고 있는 듯하다.47) 이른바 간섭기 론 은 국왕의 親朝와 重祚, 원 공주와 혼인, 고려관제의 개편, 정동행성 의 설치와 그것을 통한 내정간섭 기도 등 을 내용으로 하는 관계이며, 정 치군사적 예속의 강도는 역대 어느 이민족에 의한 것보다 강했으나, 토지 소유 노비개혁 등 하부구조면에서 보면 그 강도가 낮은 편이어서 원의 고려지배가 고려의 전 사회구조에 전면적으로 관철된 것은 아니었다고 보는데,48) 이것은 大元國에 대한 고려의 관계가 附庸的인 관계였지만 六 事를 기본으로 하는 몽고적 방식이 아니라 중국적인 개념 속에서 유지되 었기 때문에, 고려는 왕실과 행정체계가 유지되고 사회와 풍습도 고쳐지 지 않았다49)는 고병익 선생의 주장을 계승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50) 그러나 고병익 선생이 1960년대에 새로운 분석틀을 제시한 이후 국내 외 학자들의 大元과 高麗 관계를 탐구한 업적은 제법 많이 축적되었지만, 양국관계의 성격을 연구하고 규정짓는데 이용할 만한 분석 틀을 강구하 는 노력은 오랫동안 비교적 소홀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에서 이익주가 고려와 大元 관계를 구조적으로 설명하고자 제기한 소위 世祖舊制論 과 46) 이는 당시 젊은 고려시대사 연구자들의 집체연구의 성과였던 14세기 고려의 정치와 사회 (14세기 고려사회성격연구반, 민음사, 1994)에 수록된 박종기 등 여 러 필자가 쓴 논문의 제목들에서 확인된다. 47) 논문제목에서 원 간섭 하 라는 개념이 빈번히 눈에 띄는 것은 물론이고, 책 제목 으로도 역시 나타난다. 元干涉下의 高麗政治史 (一潮閣, 1998)의 저자인 김당택 은 서두의 책을 내면서 에서 간섭을 강조해서도 안 되지만, 元의 간섭을 받은 86년간의 역사를 무시해서도 안 되며, 원의 정치적 간섭 아래서 고려의 정치적 상황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책 제목에 원 간섭하 란 말을 포함시킨 것이라고 해명하고 있다. 48) 박종기, 총론: 14세기의 고려사회--원 간섭기의 이해문제 윗 책, 19쪽. 49) 고병익, 고려와 원과의 관계 ( 東洋學 7, 부록: 제6회 동양학 학술회의록) 282284쪽. 50) 金九鎭이 최근 집필한 2. 여 원관계의 전개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0, 서 울 : 탐구당, 2003)도 대체로 같은 의견이다. 54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森平雅彦의 高麗國王府說 은 매우 의미 있는 새로운 분석틀이라고 볼 수 있으며, 김호동 교수가 최근 제시한 분석틀 역시 종래의 여원관계 분 석틀을 한 단계 세련시킨 귀중한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世祖舊制論 은 이익주의 자신의 發明品이라고는 볼 수 없어 도51) 꽤 유용한 분석틀로 보인다. 1260년 8월 元宗에게 보낸 3道의 詔 書52) 중 1道 조서 안에서, 쿠빌라이 카간은 고려 元宗의 의관은 본국의 풍속에 따른다, 사신은 몽고조정에서만 보낸다, 개경환도를 재촉하지 않는다, 둔수하는 군대를 금년 내로 압록강 이북으로 철수한다, 다루 가치 일행은 귀환시킨다, 앞으로 몽고에 투속하려는 자를 허락하지 않 는다. 는 여섯 가지 요구사항53)을 수용하였는데, 世祖舊制란 바로 이것을 말하며, 그 중 마지막 까지 지켜진 不改土風 을 世祖舊制의 핵심이라고 이익주는 보고 있다. 물론 世祖舊制는 당시 大元이 고려에 요구한 六事(納質, 助軍, 輸糧, 設驛, 供戶數籍, 置達魯花赤)의 수용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었으며, 이익주 는 고려가 1269년 民戶를 計點하여 貢賦를 다시 정한 기사에 근거하여, 당시의 供戶數籍이 元의 戶計制度에 따라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54) 그 때까지 차일피일 미루어 오던 六事의 마지막 요구인 供戶數籍을 고려가 받아들였다는 박종진의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55) 곧 不改土風 의 원칙 51) 北村秀人(1965)이 이미 世祖舊制에 주목한 바 있으나 이 문제를 李益柱처럼 철저 히 검토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 52) 8월 壬子에 몽고에서 돌아온 永安公 僖 편으로 고려가 받은 3道의 조서 가운데 第三道에는 今賜卿 虎符國王之印 裕民而利國, 當適便而隨宜. 라는 대목이 나온 다. 53) 高麗史 권25/18하 元宗世家1: (八月壬子) 一曰, 衣冠從本國之俗, 皆不改易, 行人 惟朝廷所遣, 古京之遷, 遲速量力, 屯戍之撤, 秋以爲期, 元設達魯花赤 俱勅西還,,, 其自願托迹於此者, 今後復有似此告留者, 斷不准從. 54) 이익주, 앞 논문, 28쪽. 55) 이익주는 박종진의 연구(1993 박사학위논문, 149쪽 동, 고려시기 재정운영과 조세제도 서울대학교 출판부 2000: 205-207쪽)를 근거로 供戶數籍이 이루어졌다 55
史學硏究 第88號 에 따라 독자적인 왕조체제를 유지하면서 大元에 대한 事大關係를 지속 하는 것이 世祖舊制의 핵심이 된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56) 하지만 이익주의 소위 世祖舊制의 내용은 쿠빌라이 재위 말기 곧 1287년 元朝의 제4차 정동행성이 설치됨으로써 고려에 대한 世祖舊制가 비로소 완성된다고 본다.57) 곧 형식상 고려에 설치된 정동행성은 大元의 지방행정관이었고, 이후 兩國 간의 행정절차 등은 行省의 예에 따르게 되 었다고 한다. 大元의 지방통치기구인 정동행성은 국가로서의 고려와 병 존하는 특별한 성격을 가졌지만, 고려 국왕이 정동행성의 丞相을 겸했고, 아울러 屬官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중체제의 유지로 인한 모순과 충돌을 방지할 수 있었다고 李益柱는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점은 이에 앞서 소위 世祖舊制의 전제 조건인 六事의 의무가 다른 것들로 대체되고 있는 점이다. 1278년(충렬왕 4년) 여름 行在에 親朝한 충렬왕이 다루가치의 지속적인 파견을 요청하 고 大元의 법에 따른 點戶를 자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쿠빌라이 카간은 供 戶數籍에 대해서만 알아서 하라 可自爲之 58)고 허락하였을 뿐 고려의 內政을 고려 국왕에게 위임하고, 다루가치 파견도 수용하지 않았다. 곧 충렬왕 4년 여름 親朝를 통해 六事 중 供戶數籍과 다루가치 설치라는 두 가지 핵심적 의무를 면제받게 되었다는 점이다.59) 고 본다. 이익주, [고려원관계의 구조에 대한 연구], 19-20쪽. 그러나 1269년에 실시 한 호구조사( 在元王己巳年, 計點民戶更定貢賦 厥後, 賦斂不均, 民受其病 )는 원조의 요구에 따른 호구조사가 아니었음은 1278년 충렬왕이 쿠빌라이에게 올린 上奏에서 확인된다. 56) 이익주, 앞 논문. 31쪽. 57) 이익주, 윗 논문, 36-37쪽. 58) 高麗史 권28/41상하 忠烈王 2: 忠烈王四年七月戊戌: 小邦亦請依上國法點戶... 若點戶則可自爲之. 또 고려가 計點의 결과를 元에 보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같은 해 11월 18일(丁酉) 충렬왕이 計點使를 각 도에 파견하고 있다. 권28/46상하 忠烈王 2: (十一月丁酉) 遣諸道計點使, 三司使朱悅于慶尙, 國子祭酒權㫜于全羅, 判少府事崔濡于忠淸, 殿中尹崔有侯于東界, 交州判事禹濬冲于西海. 56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그렇다면 무엇이 六事를 대신하여 世祖舊制의 보장을 위한 전제가 된 것인가? 물론 大元과 고려의 관계를 검토할 때, 征東行省과 六事 외에도, 또 여기서 한 가지 더 고려할 것이 있다. 이것은 森平雅彦이 처음으로 착 안하여 검토한 바 있는 부마고려국왕의 王府問題이다.60) Ⅱ. 高麗王府說과 瀋王位下의 문제 고려를 소위 杉山正明의 大元 울루스 61)에 속한 한 王府의 投下領으 로 보는 森平雅彦의 投下領論 은, 타당성 여부와 관계없이, 여원관계사 이해를 위한 새로운 분석틀로서 꽤 신선하며 충격적인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기왕의 몽골 황실과 고려왕실의 혼인관계를 축으로 한 麗元關係의 연구가 고려왕권 안정의 측면과 황금가족 중심의 몽골 권력체계 내에서 고려왕실의 지위제고를 검토하는데 그쳤으나, 그는 王府를 통해 몽골통 치권이 고려에서 실현되는 측면에 대하여 처음으로 주의를 환기시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문제제기였다. 그렇다면 고려를 駙馬高麗國王의 王府로 간주하는 森平雅彦의 견해 는 타당한 근거가 있는가? 森平雅彦에 의하면 애당초 服屬國이 아니었던 59) 이익주, 윗 논문, 28쪽. 60) 森平雅彦, 高麗王位下の基礎的考察---大元ウルスの一分權勢力としての高麗王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6(1998) 55-87쪽. 61) 杉山正明가 처음 쓰기 시작한 개념인 大元울루스 의 문제점에 대하여는 앞에 인용한 몽골제국과 大元 에서 김호동 교수가 이미 비판적으로 검토한 바 있으 며, 문맥상 대신 김호동 교수가 최근 쓰기 시작한 카간의 울루스=쿠빌라이 울루 스 로 쓰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김호동, 몽골제국과 고려 80-81쪽 참조 57
史學硏究 第88號 高麗는 通婚을 통해 高麗王이 駙馬高麗國王에 책봉됨으로써 복속국이 되 었고, 고려왕은 大 카간 家의 부마로서 分地分民을 받아 元朝라는 국가를 내적으로 구성하는 하나의 分權的인 정치세력으로 존재하였으며, 그에게 인정한 位下인 고려본국은 諸投下의 연합체인 大몽골국을 구성하는 단위 로서 일종의 投下였다. 따라서 원조 통치체계 내에 들어 있는 다른 투하 의 주인들과 마찬가지로 定例歲賜와 臨時賜與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62) 고 본 것이다. 森平雅彦이 처음 고려 내부의 몽고 권력 중 하나로 주목한 王府의 존 재는 확실하며, 분석틀로서 유용성에 대하여도 필자 역시 동의한 바 있 다.63) 그러나 고려본국을 고려왕에게 주어진 投下領으로 보는 森平雅彦 의 견해는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고려를 정동행성의 통치영역으로 보 는 것만큼이나 형식논리를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전개한 측면이 있다.64) 고려의 땅과 백성은 원래부터 고려왕권의 통치를 받았고, 臣屬의 과정에 서 대몽고국의 카간은 고려왕에게 이 울루스의 독자적인 통치를 추인하 였으므로, 취약하기는 하였지만 초기元宗 치하의 고려는 쿠빌라이 정권 탄생 시기에 스스로 정복한 지역에 대한 기득권을 바탕으로 예커 몽골 울루스(大元) 에서 분립한 서방의 汗國들과 오히려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62) 森平雅彦, 高麗王位下の基礎的考察---大元ウルスの一分權勢力としての高麗王家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6(1998) 55-87쪽. 그는 같은 해 발표한 駙馬高麗國の成 立---元朝における高麗王の地位についての豫備的考察-- ( 東洋學報 79-4, 1998) 의 결론 부분에서 이 논문의 관점을 먼저 정리하고 있으며(23-25쪽), 또 2001년 연구 노트인 ケシク制度と高麗王家---高麗 元關係における禿魯花の意義に關聯 して-- ( 史學雜誌 110-2: 60-89쪽)를 통해 논지를 보완하고 있다. 63) 李玠奭, 高麗史 元宗 忠烈王 忠宣王世家 중 元朝關係記事의 註釋硏究 ( 東 洋史學硏究 제88집, 2004), 92-93쪽. 64) 投下領論에 대하여는 최근 김호동 교수가 비판적 검토를 통해 중앙정부의 부세징 수 등 논거 보완의 필요성을 지적했다. 김호동(2007), 112-113쪽. 58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쿠빌라이 카간이 서방 諸汗에게 분립을 허락한 방식 외에도 칭기스 한이 대몽고국을 건국한 이래 그를 이은 몽골 카간들은 제왕 공주 부 마 공신에게 토지와 백성을 나누어 주고, 그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지배 하는 것을 허용했다. 칭기스 한 재위 시기에 漠南北 초원과 여타 지역에 분봉된 宗王이나 諸王의 크고 작은 울루스는 大元 중기까지 宗王과 諸王 이 실질적으로 分地와 游牧部民을 배타적으로 지배하고 있으며, 칭기스 한이 功臣 千戶에게 기득권으로 혹은 공로에 대한 대가로 분급한 투하 도 嶺北等處行中書省이 설치된 이후에야 비로소 중앙의 징세권이 행사되 고 있지만 극히 제한되고 있다.65) 제왕 부마 공신에게 분급된 戶口로 이루어진 漢地의 投下는 중앙정부가 파견한 管民官인 諸路의 總管이 投 下主가 파견한 다루가치와 함께 分民을 통치했다. 投下主는 분급된 호구 로 부터 五戶絲를 징수할 권리가 주어졌으며, 管民官이 징수하여 지급하 도록 규정하고 있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쿠빌라이 카간이 南 宋을 정복한 뒤에도 제왕 부마 공신에게 戶口를 분급했으며, 황제가 임명한 管民官으로 하여금 兩稅法에 따라 賦稅를 거두어서 분급된 호구 숫자만큼의 五戶絲에 해당하는 戶鈔를 投下主에게 지급하게 했다.이것이 아하 타마르 (형제들의 몫)66)라고 불린 江南戶鈔였다. 그렇지만 諸王은 漢地에서와 마찬가지로 江南의 投下戶에 대하여 다루가치를 파견하여, 카간 권력이 의도한 명목상 지배에만 그치지는 않았음은 물론이다.67) 그 렇다고 해도 고려를 굳이 부마고려국왕의 投下로 비정할 경우, 漠南北 초 원에 칭기스칸이 분급한 공신 천호의 投下와 비교해 볼 수 있다. 하지 만, 고려와 大元의 관계는 功臣千戶의 투하가 가진 속성만으로 설명하기 65) 李玠奭, 14世紀 初 元朝支配體制의 再編과 그 背景 (서울대학교 대학원 1998년 박사학위 논문), 136-138쪽 참조. 66) 김호동, 몽골제국과 고려: 쿠빌라이 정권의 탄생과 고려의 정치적 위상 68쪽. 67) 李玠奭, 元朝의 南宋倂合과 江南支配의 意義, 慶北史學 21(1998), 428-429쪽. 59
史學硏究 第88號 는 어렵고, 高麗-大元 관계의 여러 가지 속성 중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물론 원 지배 하에서 고려왕의 王府를 설치하는 시기와 王府 속관의 구성 등 고려국왕의 왕부권력기구에 대하여 초보적인 사항들도 아직 충 분히 검토되었다고 할 수 없다. 예컨대 원대에는 몽골 諸王과 駙馬, 勳臣 의 경우 王府를 설치할 수 있었으며, 王爵이 있어야 했다. 또 고려국왕이 몽고적 특성을 갖는 王府를 설치하려면 몽고적 통치권력 체계 안에 고려 의 국왕권력이 편제되는 것이 전제된다. 고려의 국왕권력이 大蒙古國의 통치체계 안에 편입되는 과정은 쿠빌라이 카간이 1260년 8월 보낸 세 번 째 조서를 통해 元宗을 高麗國王에 봉하고, 虎符와 國王의 印章을 수여하 면서 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으나 裕民而利國, 當適便而隨宜 라 하여, 고려의 내정을 고려국왕에게 위임함으로써, 고려의 국왕권력은 황금가족 에 의하여 공유되고 있는 大蒙古國 권력의 외연에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 었을 뿐이었기 때문에 몽고적 왕부가 따로 설치되지 않았다.68) 더욱이 元 宗 정권은 大蒙古國에 대한 臣屬을 수용하여 30년에 걸친 전쟁상태를 종 결지었지만, 내부 기득권 세력의 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軍閥의 저항과 三 別抄의 봉기로 內戰狀態가 초래되었고, 몽골의 군대가 진압에 참여함으 로써 고려의 왕권은 다시 몽골 군대의 보호 아래 놓이게 되었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고려가 비록 東藩을 자임하였다고 해도, 당시 새 로 구축되고 있던 쿠빌라이 카간의 대몽고국 권력 체계 안에서 고려국왕 의 권력은 자신의 영역조차 스스로 부지할 수 없는 허약한 지방권력에 불과했다. 충렬왕 5年(1279) 고려국의 최고행정기관인 僉議府에 正四品衙 門의 구리 도장을 보낸 몽고국 관리들의 인식69)에서도 드러난다. 68) 高麗史節要 권18/ 37상, (元宗10年 七月)淐尊王爲太上王, 立府, 曰崇寧. ; 권 18/42하, (十一月)甲子, 王復位, 淐還私第, 百官詣王府, 扈駕入闕, 觀者感泣. 이라 하여 元宗의 王府가 있었으나 태상왕의 處所를 의미했다. 69) 高麗史 권29/ 4하-5상: 忠烈王 5년 五月條. 그러나 두 달 후에 從三品衙門의 印으 로 교체되고( 高麗史 권26 輿服志/ 諸衙門印: 七年九月元陞僉議府爲從三品, 鑄 60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결국 고려 왕실은 몽골 황실과 통혼관계를 맺음으로써 국내적인 왕권 의 위기를 돌파하게 되었으며, 또 몽고의 일본 정벌에 크게 기여함으로써 異姓으로 大蒙古國의 王爵을 받을 수 있는 駙馬나 勳臣 두 가지 요건을 모두 만족시켰다. 곧 元宗의 太子 王諶이 1274년 6월 26일(오월 스무하루 丙申) 쿠빌라이의 딸 쿠툴룩 켈미시(忽都魯揭里迷失/忽篤㥘里迷思) 공주 를 妃로 맞아 카간의 駙馬가 됨으로써, 쿠빌라이 카간의 駙馬로서 大蒙古 國의 王爵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고, 고려왕실은 姻族으로 몽 골 황금가족의 外延에 편제되어 蒙元 권력체계 내에서 고려 왕실의 위상 이 높아졌다.70) 하지만, 그 결과로 고려의 대몽고국에 대한 內屬은 구조 화되고, 고려의 국왕권력이 大蒙古國 카간의 권력체계 내의 지방권력으 로 전락하는 계기도 되었다. 고려의 독립적인 통치기구인 三省六部가 元 朝의 지방정부기관인 僉議府로 개편되어 1356년 공민왕의 개혁에 의해 비로소 해소될 때까지 지속되었다. 이 점에서 쿠빌라이 카간의 駙馬가 된 고려 태자 王愖에 대한 王爵 수여와 관련하여 김구진의 충렬왕 瀋王初封說71)을 여기서 새롭게 검토하 는 것도 의미가 없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또 충렬왕 王愖이 혼인을 통 해 비로소 王爵의 자격을 갖추게 되므로 간단히 통혼경과를 살펴보는 것 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고려 태자 愖과 대몽고국 공주의 혼인문제는 1269년 8월 太子 愖이 몽고에서 돌아오는 길에 林衍의 쿠데따 소식을 듣 고 다시 몽고로 돌아갔을 때 고려측에서 황제에게 請兵하는 중에 처음 印賜之), 이후 忠烈王 19年에 都僉議使司로 바뀌면서 從二品 衙門으로 승격되었 다. 高麗史 권30/37상 : (三月 丙寅)又改僉議使司爲都僉議使司, 陞爲從二品, 賜 兩臺銀印一顆. 70) 蕭啓慶은 고려왕실이 혼인관계를 통해 황금씨족의 (外延인) 姻婭集團에 편입되고, 蒙元世界秩序 속에서 지위를 높일 수 있었다고 한다.(蕭啓慶, 245쪽) 그러나 이에 대해 김호동 교수는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71) 金九鎭, 元代 遼陽地方의 高麗軍民 ( 李元淳敎授華甲記念史學論叢, 서울:知識 産業社, 1986) 480쪽. 61
史學硏究 第88號 제기되었다고 하며,72) 당시 쿠빌라이 카간이 이 요구를 원칙적으로 수용 하였음은 1269년 12월 16일 元宗이 사신으로 온 몽고 兵部侍郞 黑的을 上座에 앉히려 했을 때 黑的이 許婚한 사실을 근거로 사양하는 것73)으로 확인되는데, 김호동 교수는 몽고측에서 통혼의 상황을 유도하였다고 보 고 있다.74) 1271년 8월 30일 태자 諶으로 하여금 상서우승 宋玢, 군기감 薛公儉, 호부랑중 金㥠 등 수종 관료 20인과 귀족가문의 자제(衣官允冑) 20인, 衙內職員 100인을 거느리고 원나라에 가서 宿衛했는데, 그해 11월 태자를 호위하고 몽고에 갔던 추밀원부사 李昌慶이 돌아와 쿠툴룩켈미시 공주와 태자의 혼인을 카간이 허락한 사실을 전했다. 물론 高麗 太子 愖 은 1274년 카간의 駙馬가 되기까지 쿠빌라이 카간의 측근에 머물렀고, 3 년 동안의 宿衛를 통해 大蒙古國 카간의 신하로 거듭난 것으로 보인다. 비로소 王爵을 받을 수 있는 필요조건도 갖출 수 있었다. 고려 태자 王愖이 공주를 아내로 맞은 지 한 달이 채 못되는 7월23일 (6월 18일/癸亥) 父王 元宗이 薨去했다. 또 고려왕 元宗의 訃音과 後嗣에 관한 表文을 받은 元 朝廷은 8월 22일(七月 十九日/癸巳) 同知上都留守事 張煥을 보내 太子 王諶을 (高麗國)王으로 冊封하였다고 하며,75) 비로소 귀국길에 오른 태자 王諶은 다음 달인 9월 26일(8월 25일/戊辰) 開京에 도 착하여, 이튿날 쿠빌라이 카간의 조서를 받고 왕위에 올라 群臣의 朝賀를 받고 있다. 그런데 太子 王愖이 개경에 도착한 날의 행사를 기록한 高麗 72) 73) 74) 75) 森平雅彦, 駙馬高麗王國の成立, 10쪽. 高麗史 권26/ 27상: 黑的等讓曰, 今王太子已許尙帝女. 몽골제국과 고려, 105쪽. 元史(宋濂撰, 中華書局標點本, 北京, 1976) 권8, 世祖3 至元 11年秋七月癸巳條: 勅 同知上都留守司事張煥冊愖爲高麗國王. 하지만 高麗史節要 (서울: 亞細亞文化 社, 1983) 권19/24에는 秋七月元冊世子愖爲王 이라 했고, 高麗史 (서울: 亞細亞 文化社, 1983) 권28/1상에도 역시 秋七月元遣同知上都留守事張煥冊爲王 이라 하 여 충렬왕이 즉위 전에 원에 머물고 있을 때 왕으로 책봉된 사실만 전할 뿐 高麗國 王에 봉왕된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62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史 가 八月 戊辰日에 元에서 돌아온 瀋王이 堤上宮에 가서 殯殿에 배알 했다76) 고 적고 있는 바, 문자 그대로 이해하면 고려 태자 王愖이 귀국하 기 전에 심왕에 책봉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 기사에 대하여는 고병익 선생의 高麗史 오류설이 현재 학계의 중론이고77) 설득력도 있다. 하지 만, 쿠빌라이 카간 재위시기의 封王制度에 대한 학계의 최근 연구 성과가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 점도 있고 충렬왕의 王府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어 좀 더 분명히 해둘 필요가 있다. 먼저 김구진의 말대로 태자 王愖이 귀국 이전에 瀋王에 봉해진다는 것은 가능한 설정일가? 元 世祖 재위기에 중국적인 제도인 王爵을 최초로 받은 사람은 正后 차비의 생존한 소생 중 장남인 眞金이었다. 그리고 中 統 2년 眞金이 燕王에 책봉된 이후 1274년 무렵까지 왕으로 책봉된 사람 은 대개 皇子나 宗王으로 황금씨족의 일원이지만 카간의 駙馬 중에도 王 爵을 받은 1例가 있는 바, 쿠빌라이 카간의 딸 兀魯眞 공주를 아내로 맞았 던 이기리스(亦乞列思) 氏의 不花 駙馬가 至元 4년 國邑이 없는 왕으로 책봉되었으며, 6등급의 龜紐銀印을 받았다.78) 따라서 형식논리상 쿠빌라 이 카간의 부마인 고려 태자 王愖 역시 1274년 부마가 된 이후 王爵을 받는 것은 가능하며, 8월 22일 同知上都留守司事 張煥을 보내 책봉한 것 은 高麗國王이라기 보다 카간의 부마에게 주는 王爵을 잘못 기록한 것일 수 있다. 카간의 사위 중 솔랑카 지방 군주의 아들은 쿵크라트(宏吉剌) 종 족 출신으로 낭가진(囊加眞)79)과 혼인하여 濟寧王에 책봉된 만지타이(蠻 76) 高麗史 권64, 禮志/國恤의 元宗 15년 八月戊辰, 瀋王至自元詣堤上宮謁殯殿. 77) 高柄翊, 東亞交涉史의 硏究 서울대학교 출판부, 1970: 234쪽/ 주84 및 김혜원, 박사학위논문, 31-37쪽. 78) 野口周一, 元代世祖 成宗期における王號授與について ( 中國史における亂の構 圖について 雄山閣, 1986): 295-298쪽 表1 王號授與事例一覽 및 元史 권6, 世祖本 紀 : (至元 4年 十月) 壬戌, 賜駙馬不花銀印, 과 元史 권108, 表第三諸王表 참조. 79) 김호동 교수 번역본의 만지타이의 딸 엥진은 카간의 공주 낭가진으로 보인다. 칸의 후예들, 428쪽. 63
史學硏究 第88號 子台)80)와 함께 당시 몽골 통치집단 내부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던 만큼81) 고려 태자 諶이 부마로서 王爵을 받았을 가능성은 매우 높다. 하지만 正后가 아닌 阿速眞 카툰82)의 소생인 쿠툴룩 켈미시 공주와 혼인한 駙馬인 王愖에게 正后(차비 카툰) 소생과 그 자손에게만 수여한 一字王의 王爵을 주었다고 보기 어렵다. 또 당시 王爵의 수여는 印章의 수여를 수반하는 것인데, 어디에도 印章에 대한 언급이 없다. 요컨대, 다 른 부마에게 王爵을 수여한 예로 미루어, 一字王인 瀋王으로 책봉했을 가 능성은 없으나, 고려 태자 王愖이 최소한 王爵을 받았을 여지는 여전히 남아 있다. 또 이 때 瀋州 지역에 있던 고려 유민 중 일부 특히 王諄의 瀋州를 충렬왕의 位下로 수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1296년 十月 충렬왕 夫 妻가 입조할 때 행차가 23일(戊午)에 瀋州에 도착할 때까지 출영하지 않 은 瀋州 總管 朴仁才와 知事 朴純亮에게 충렬왕이 칼을 채우고, 또 1298 년 八月 成宗이 충렬왕을 復位시키자 같은 해 十月 22일(乙亥)에 瀋州 다 루가치 闍里大가 사람을 보내 말 한 필과 양 30두를 바치며 복위를 축하 한 것으로 미루어 가능한 추론이다.83) 단순히 僑寓 고려인의 州縣이라고 해도, 또 몽고 황실의 높은 어른인 공주의 행차라 해도, 속국의 군주가 고려의 관할 밖에서 카간의 관리를 멋대로 처벌하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같은 이유로 武宗 하이산이 根脚 가문 洪福源一家와 王綧一家의 근거인 瀋陽路를 무리하게 충선왕의 位下로 수여하는 것도 납득이 될 수 있을 것이다.84) 80) 元史 권18, 成宗本紀1, 元貞 元年: (春正月) 乙亥, 追封皇國舅按只那演爲濟寧王, 封皇姑囊加眞公主爲魯國大長公主, 駙馬蠻子台爲濟寧王, 仍賜金印. 元史 권108, 表三. 諸王表, 2744쪽 하 및 元史 권118, 特薛禪傳: 2920쪽 참조. 81) 김호동 역, 라시드 앗딘의 집사③ 칸의 후예들 사계절, 2005: 428쪽. 82) 高麗史 권89/1상, 后妃 2. 83) 高麗史 권31/ 14상 및 권31/ 24하. 김혜원은 충렬왕이 고려인이 다수 거주하는 瀋州지역에 영향력이 있고, 원 황실에서의 정치적 지위 때문이라고 한다(김혜원, 학위논문, 34쪽). 64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물론 瀋王의 位下로 여겨지는 瀋陽路의 瀋州가 당초부터 瀋王의 分地 였는지 여부에 대하여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김혜원은 瀋陽王이 심양로 지역의 왕이라는 뜻이며, 충선왕이 瀋陽王(瀋王)에 피봉되면서 瀋 陽路를 分地로 받았을 것이라는 견해를 보이는데,85) 이는 받아들이기 어 렵다. 그것은 江南을 병합한 이후 元朝는 더 이상 大蒙古國 시기 漢地에 서 분급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分地를 지급하지 않았으며, 분급된 戶口數 에 따라 해당된 路總管府에서 대신 五戶絲의 변형인 戶鈔를 거두어 位下 主에게 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또 遼陽路의 영역 안에 들어 있는 瀋陽路 역시 지리적 개념으로 이해 하기는 어렵다. 瀋陽路는 元에 투속한 망명고려인호를 분리하여 편성한 遼陽路 내의 僑寓路라고 볼 수 있으며, 그 治所인 遼陽古城 역시 그러한 성격의 僑治였다. 1296년 元朝는 二元的인 관할 체제 아래 있던 遼東地域 의 고려 유민에 대한 지배계통을 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로 통합재 편하고, 遼陽古城을 그대로 治所로 삼게 했다.86) 물론 遼東地域에는 1269 년 원에 투항했던 최탄 등이 이끌고 투항한 망명 고려인 집단도 역시 존 재하였다. 1278년 고려 측의 요구로 元朝가 강점한 일부 지역을 돌려주고, 또 至元 27년(1290) 3월 東寧府가 설치된 서북면 제 지역을 모두 돌려주게 84) 한편 元史는 1307년 7월 25일 慶壽寺에 유폐되었다가 6월에 고려로 돌아간 충렬왕 王昛를 瀋陽王에 進封 했다고 하고(元史 권22, 武宗 大德 11年 六月: 戊午, 進封 高麗王王昛爲瀋陽王, 加太子太傅駙馬都尉. 및 元史 권128, 諸王表), 또 高麗史 는 이듬해(1308) 6월 9일 황제가 定策의 功으로 前王을 瀋陽王으로 (역시) 進封했 다( 高麗史 권33/17상하 (忠宣王 1): (忠烈王) 三十四年五月, 戊寅元以定策功封 瀋陽王, 制曰.. 太子太傅上柱國, 駙馬都尉, 進封瀋陽王. )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은 1307년에 進封되는 忠烈王의 기사는 1308년 定策의 功으로 進封되는 충선왕 관련기사를 잘못 기록한 것이라는 견해를 제출하고 있 다. 85) 김혜원, 박사학위논문, 37쪽. 86) 元史 권58, 地理 2, 1399쪽. 이후 예하에는 摠管 5인, 千戶 24인, 百戶 25인을 두었다 고 한다. 65
史學硏究 第88號 되자, 고려에 반기를 들었던 최탄 등 대부분의 토호들은 고려에 귀속하지 않고, 거느리고 있던 민호를 이끌고 遼陽行省의 遼瀋地域으로 옮겨가 버 렸는데,87) 이 시기에 遼陽行省에 투항한 대다수 北界와 西海道의 軍民 역 시 瀋陽路에 편입되지 않고 東寧路를 따로 개설하여 독립된 세력으로 존 속하였다고 한다.88) 그러나 서북면의 땅이 고려에 환부되었기 때문에, 東 寧路 예하의 城治는 모두 虛設이었다. 따라서 (遼東地域에) 錄事司만 남 은 東寧路總管府가 명목만 남은 예하 府 州 鎭의 이름을 딴 亡命高麗 人 民戶 집단 별로 통할하는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89) 여기서 우리는 遼 陽等處行中書省 내부의 망명고려인 관할기구 및 조직체계는 元代 많은 총관부가 집단을 관할하는 단위로 설치되었던 것처럼, 민족 집단인 망명 고려인을 대상으로 한 편성이고 지역적인 구분에 따른 편제가 아님을 짐 작할 수 있다. 요컨대, 당시 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는 독립적인 영 역(地域)을 가진 路가 아니고, 遼陽路에 寄留한 독립행정단위인 僑寓路의 성격을 가졌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도 아직 오늘날 까지 남아 있다. 곧 聖朝混一方輿勝覽 90) 卷上의 鎭東行中書省 (大德三年五月立) 安撫高麗總管府(1296년 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 의 項에 나오는 기사가 그것인데, 新城州, 遼城州,... 安市州, 以上十四州 並無城池, 是高麗降散諸軍鎭, 以其酋長主之. 라는 기사는 安撫高麗總管 府의 경우 투항한 토호와 그 예속민으로 이루어진 조직을 元이 그대로 路와 州로 편제하여 지배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이로써 일반적인 87) 高麗史 권230, 崔坦傳. 88) 金九鎭, 麗元의 領土紛爭과 그 歸屬問題--元代에 있어서 高麗本土와 東寧府 雙 城摠管府 耽羅總管府의 분리정책을 중심으로--, 國史館論叢 제7집, 72쪽. 89) 元史 권58, 地理 1398쪽. 90) 北京圖書館古籍珍本叢刊 영인본. 영인본은 인쇄상태가 선명하지 않기 때문에 (元) 劉應李 원편/ 첨우량 개편/ 郭聲波 정리, 大元混一方輿勝覽 (상/하, 四川大學出版 社, 2003)을 함께 참조하였다. 66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路에 한 명의 총관이 임명되는 것과 달리, 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 에 5인의 총관과 24인의 千戶가 임명되어 있는 사연도 해명된다. 하지만 僑寓州 瀋州에 대하여만 특수한 관계를 가졌던 고려 왕실의 瀋陽王이 洪氏와 王氏의 관할로 종래 분할되어 있다가91) 1296년 합쳐 만 든 僑寓路인 瀋陽路에 대한 位下主가 됨으로써 관할권을 둘러싼 대립은 피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통상적인 路의 일부 戶口만을 투 하로 받은 예사의 位下와 僑寓 高麗人戶만으로 구성된 작은 규모의 瀋陽 路에 대한 관할권을 둘러싼 다툼은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또 원래 洪福源의 部民을 다스리던 安撫高麗軍民總管府와 王綧의 部民을 다스리 던 官衙인 瀋州를 통합해 성립한 瀋陽路(瀋陽等路安撫高麗軍民總管府)의 총관직은 여전히 遼陽行省의 平章政事, 右丞, 商議遼陽等處行中書省事 등 고위 관직을 두루 맡고 있었던 洪福源 일가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92) 91) 安撫高麗總管府와 瀋州高麗總管府가 각각 별도의 계통으로 존재했음은 永樂大 典 권19422, 站赤7에 각각 2곳의 역참을 관할하는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安撫高麗總管府 관할 2站에는 말 70필, 車 7輛, 소 70마리를 보유하였는데, 在城站 에 말 40필, 車 4량, 소40마리, 彰義站에 말30필 차3량, 소30필이였다하고, 瀋州高 麗總管府에는 관할하는 두 곳의 역참에 말이 70필이었는데, 本州站에 40戶 말40필 崖頭站에 30호 말30필이었다.(下冊, 19쪽) 站의 위치는 崖頭站에서 正東 1백20리 에 彰義站이 있고, 彰義站에서 정동으로 가면 瀋州가 있고, 瀋州에서 正南 1백20리 에 東京(遼陽)이 있었다( 永樂大典 권19426, 驛站2 站赤 하책/177쪽). 또 1288년 이후 부족한 祗應을 지원하기 위해 鈔를 지급했는데, 遼陽等處行中書省 예하의 5路 중에 安撫高麗總管府에 30錠, 瀋州高麗總管府에 15錠이 따로 지원되고 있다. (站赤3/64쪽) 1292년 6월에도 중서성은 瀋州高麗總管府의 蒙古敎授 明安答兒에게 管押箚紙入站遞運赴遼陽等處行省交納 라 하고, 다시 兵部로 하여금 行移應付 沿途粥飯以行 케 하고 있다. 92) 至元 24년(1287)에 遼陽等處行中書省을 처음 설치했을 때, 처음 洪茶丘가 右丞에 임명되었으며,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워 龍虎衛上將軍(正二品)이 된 그 의 아들 洪重喜가 그를 이어 1292년 遼陽行省右丞에 임명되었는데, 당시 그는 總 管高麗女直漢軍萬戶와 高麗軍民總管을 겸하였다. 또 1306년 숙부 洪君祥이 일시 遼陽行省右丞을 대신하였지만 1307년 복귀하였다. 한편 1280년 이미 昭勇大將軍 (正三品)에 오른 洪君祥은 中書右丞에 임명된 지 1년이 채 못되어 1306년 조카 洪重喜를 대신하여 잠시 遼陽行省右丞을 맡은 뒤에 무종 즉위 후 同知樞密院事를 67
史學硏究 第88號 따라서 元都에 체류하고 있던 武宗의 정책공신 忠宣王이 어떤 식으로 건 瀋陽王으로서 位下의 문제에 간여하게 되었을 때 양측의 갈등은 필연적 인 것으로 보인다. 瀋陽王의 王號가 一字王인 瀋王으로 바뀌는 시점인 1310년 5월에 武宗이 瀋陽路 관리에게 瀋陽王 을 거치지 않고 주청을 하 는 것을 금한다고 명하는 것93)에서 두 세력 사이의 갈등과 사태의 변화가 분명하게 감지된다. 결과적으로 洪茶丘의 아들로 洪氏一門의 대표인 洪 重喜는 그 자신 戰功이 많고, 그의 가문 역시 대표적인 根脚 가문이었음 에도 불구하고, 1309년 10월 충선왕을 모해한 죄로 매를 맞고 潮州로 유 배를 갔다.94) 요컨대, 충렬왕은 즉위하기 전에 카간의 駙馬로서 元의 王 爵을 받고 귀국하여 고려국왕에 즉위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고 瀋州를 그의 位下로 수여하였을 가능성을 부인하기 어렵다. 물론 王爵의 수여가 王府의 설치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 충렬왕 즉 위 초부터 王府가 존재했는지 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를 구체적으로 보 여주는 사료는 없다. 다만 그는 즉위 직후 고려 관료기구와 별도로 그가 宿衛한 3년 동안 그를 투르카그(禿魯花)로 수종했던 衣冠子弟를 교대로 숙위하는 忽赤로 개편하고 있다.95) 또 충렬왕 元年 정월 公主가 元成公主 로 책봉됨에 따라96) 膺善이라는 公主府가 설치되고, 牽龍行首 閔宗儒 등 93) 94) 95) 96) 거쳐, 中書平章政事에 올랐다가 遼陽行省平章政事, 商議行省事로 옮기고 있다. 따라서遼陽行省 내부의 洪氏一門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高麗史 권33, 忠宣王 2年 五月: 辛卯, 帝命瀋陽路官吏毋得隔越瀋陽奏請, 違者理 罪. 및 高麗史節要 권23/23상: 帝命瀋陽路官吏毋得隔越瀋王奏請, 違者理罪. 高麗史節要 권23(/ 21하-22상) 元史 권154, 洪福源 附洪萬傳에는 漳州로 유배되 어 가는 길에 항주에서 사면을 받아 돌아 왔다고 한다. 高麗史節要 권19/24상: (元宗15年八月) 以衣冠子弟, 嘗從王爲禿魯花者, 分番宿 衛, 號曰忽赤. 이 사료만으로는 冊封의 주체가 불확실하지만, 公主 책봉의 주체는 쿠빌라이 카간 으로 추정되며, 湯沐邑인 安東府와 京山府를 수여한 주체 역시 동일한 권력으로 볼 수 있다. 至元 31년에 成宗이 고려의 요구에 따라 元成公主를 安平公主로 다시 책봉하는 것도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元史 권18, 成宗本紀 1: (至元 31年 五月) 戊寅, 皇姑高麗王王昛妃忽都魯揭里迷失爲安平公主. 및 高麗史節要 권 68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이 僚屬으로 임명되었으며, 安東府와 京山府를 湯沐邑으로 주었는데,97) 李尊庇도 이 무렵 膺善府 右詹事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98) 요컨대 1274 년 忠烈王 王諶이 王으로 被封되고, 고려국왕으로 즉위한 직후에 忽赤가 설치되고, 공주의 膺善府가 창설되며, 특히 公主府에 官屬과 湯沐邑이 수 여되고, 그 貢賦 중 일부가 元의 投下와 마찬가지로 元成殿에 보내지는 것으로 보아 公主府인 應善府는 몽골 諸王이나 駙馬의 王府와 유사한 성 격을 가졌음을 알 수 있지만 충렬왕의 王府 설치 여부는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1278년 공주 세자와 함께 입조한 충렬왕이 8월 10일 새로이 駙馬金印을 받게 된99) 이후에 비로소 부마고려국왕 位下에 정식으로 王 府官이 설치된다고 볼 수 있다. 쿠빌라이 카간은 4월 1일 개경을 떠나 6월 9일에야 開平府 東門에 도착한 駙馬 忠烈王을 극진히 대하였을 뿐만 아 니라, 六事의 의무를 면제해주고 고려 내부의 정사를 충렬왕에게 일임하 였다. 이로써 몽골 정권의 권력체계 안에서 부마고려국왕의 위신은 이전 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높아졌고, 그와 더불어 왕부관의 임명도 허락된 것으로 보인다. 이 해 7월 26일(丁未) 金天固가 舌人(켈렘치)으로서 처음 21/37상, 忠烈王 20年 六月. 97) 高麗史 권89/1하, 后妃 2: 明年丁月, 冊爲元成公主, 百官皆賀, 宮曰敬成, 殿曰元 成, 府曰應善, 置官屬, 以安東京山府爲湯沐邑. 高麗史節要 권19/28에도 같은 사 실을 기록하고 있지만 官屬 대신 僚屬 이라고 적고 있다. 崔瀣, 有元高麗國故 重大匡僉議贊成事上護軍判摠部事致仕諡忠順閔公墓誌 拙藁千百 10하-11상. 墓誌銘의 주인은 閔宗儒( 高麗史 권108)이다. 忠烈王尙帝女齊國公主, 特立膺善 府, 乙亥, 徙爲膺善府牽龍行首. 98) 李尊庇墓誌銘, (金龍善, 高麗墓誌銘集成, 한림대학교출판부, 1997) 397쪽. 應善 府 관직은 蔡洪哲이 1284년 膺善府錄事를 하였고( 高麗史 권108, 蔡洪哲傳; 蔡洪 哲墓誌銘, 高麗墓誌銘集成 508쪽), 崔瑞도 1292년 膺善府左詹事가 된다.(崔瑞墓 誌銘, 高麗墓誌銘集成 422쪽). 이 외에 시기는 알 수 없지만 朴全之의 부친 朴煇 도 膺善府 右詹事를 지냈으며(朴全之墓誌銘, 高麗墓誌銘集成 454쪽). 朴遠도 應 善府左詹事를 역임했다(朴遠墓誌銘, 高麗墓誌銘集成 518쪽). 99) 元史 권10, 世祖本紀 7: (至元 15年 七月) 壬寅, 改鑄高麗王王愖駙馬印. 高麗史 권28, 忠烈王 1: (四年 七月) 壬寅, 帝賜王海東靑一連, 駙馬金印, 鞍馬. 69
史學硏究 第88號 內侍로 충원되었고, 10월 21일(辛未)에 당시 別廳宰樞라 불리게 된 必闍 赤(비체치)와 申聞色을 처음 설치하였는데, 이는 이 보다 앞서 1274년 설 치된 侍衛인 忽赤와 함께 모두 몽골적 권력의 핵심인 怯薛의 구성요소들 로서, 駙馬高麗王의 사적인 권력이 한 단계 더 강화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충렬왕의 王府가 정식으로 설치되는 것은 1290년 趙仁規를 왕 부의 속관인 王府斷事官에 임명한 것으로 표지를 삼아야 할 듯하다. 1280 년 충렬왕은 朴義를 보내 征東과 관련된 일곱 가지 건의100)를 올린 바 있 었는데, 親朝하여 설명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9월 21일(八月乙未) 차간노 르(闍干那兀)의 行在에서 쿠빌라이 카간을 알현했는데 征東元帥府의 구 성을 바꿔달라는 충렬왕의 奏請을 받아들이지는 않았지만,101) 충렬왕의 거듭된 요구를 물리치지 못하고 마침내 제2차 東征의 진용을 실질적으로 바꾸었으며, 元에서 돌아온 충렬왕이 12월 4일(十一月己酉) 다시 우승지 趙仁規와 대장군 印侯를 中書省에 보내, 고려왕에게 前例 대로 上國의 宰 輔職을 수여할 것, 行省이 大小軍情公事를 고려왕과 반드시 상의하여 시 행하고, 사신을 조정에 보내는 것도 고려관리와 동행케 할 것, 행성이 고 려왕에게 문서를 보낼 때, 적어도 駙馬에게 보내는 법도를 준수할 것, 고 려에 흉년이 계속되어 군량과 馬料를 요구한 대로 제공할 수 없으므로, 새로 징발하는 4600명의 군사를 무장하기 위한 갑옷 5천, 활 5천, 활줄 1만을 지급할 것, 珍島와 耽羅, 일본정벌에 공을 세운 고려의 장군들에게 총관 천호 총파 등 원의 군관직과 牌面을 내려 줄 것을 요청하고, 특히 東征元帥府에 김방경을 함께 참여케 하고, 몽고어와 한어가 모두 능하여 100) 闍里帖木兒가 이끄는 몽고군을 파견해 줄 것과 征東省事을 자신과 闍里帖木兒에 게 관할케 해줄 것, 충렬왕에게 합포에서 군마를 閱送케 할 것 등을 요청하였다. 101) 高麗史 권29, 충렬왕2/ 25상: 帝曰, 已領所奏.... 予昔在朝廷, 嘗以勾當行省事, 聞于宸所, 未蒙明降.) 또 九月 귀국길에 征東元帥府 鎭撫인 也速達이 가져온 2牒 의 關子 중 하나에 聖旨로 忻都와 洪茶丘, 범우승, 이좌승에게 征收日本行中書省 事를 맡기고 있다. 70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충렬왕 본인과 공주를 가까이서 보필하는 우승지 趙仁規를 王京脫脫和孫 兼 推考官頭目에 임명해 주도록 中書省에서 주청해 줄 것을 부탁하였는 데, 12월 23일(辛卯) 趙仁規와 印侯가 가지고 돌아온 詔書를 보면, 쿠빌라 이 카간은 충렬왕의 요청을 대부분 받아들이고 있다. 곧 충렬왕을 開府儀 同三司, 中書左丞相, 行中書省事에 제수하고 印信을 지급했으며, 김방경 에게 從二品 中奉大夫와 고려군을 관령하는 도원수를 제수하였다. 또 박 구와 김주정은 正三品 昭勇大將軍 左右副都統, 趙仁規에게도 從四品 宣 武將軍102) 王京斷事官兼脫脫和孫에 제수하고 金牌와 印信을 내리고 있 다. 그리고 이어 1281년 3월 20일 장군 盧英이 황제가 내린 駙馬國王의 宣命과 征東行中書省印을 가지고 원에서 돌아옴으로써 征東元帥府의 元 首로서 고려국왕의 지위가 비로소 확립되고, 원에서 파견된 정동원수부 의 관리들의 항례를 면할 수 있었으며,103) 그해 4월 충렬왕이 合浦에 가 서 출정하는 원정군을 사열할 수 있었지만, 趙仁規에게 주어진 직위는 여 전히 王府斷事官이 아니라 王京斷事官이었다. 요컨대 제2차 東征을 계기로 駙馬高麗國王의 大元 왕조의 권력체계 안에서 지위가 크게 높아진 것을 알 수 있지만 駙馬王府의 기구는 아직도 정비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1290년 조인규를 부마고려국왕부의 단 사관에 임명되는 것을 고려왕의 王府가 공식적인 기구로 비로소 확립되 는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元의 왕부제도를 보면, 王府에 는 王傅, 府尉, 司馬, 斷事官과 하급 속료가 설치되고 있는데104), 고려에서 는 斷事官을 제외하면 王傅, 府尉, 司馬 등 상급의 속관은 보이지 않는다. 오로지 斷事官이 설치되어 있을 뿐인데, 1290년 조인규가 처음 왕부단사 관에 임명되었고, 이후 계속 임명되고 있으므로 왕부제 정비의 시점을 여 102) 元史 권91, 백관7 武散官三十四階 (중화서국본 2321쪽). 103) 高麗史 권29, 충렬왕 세가2 /33상. 104) 李治安, 元代分封制度硏究 (天津: 古籍出版社, 1992). 71
史學硏究 第88號 기에 설정하는 것이다. 이후 부마고려국왕의 왕부단사관으로는 1300년에 吳潛이 임명되 며,105) 자세한 내용은 알수 없지만 1308년에는 조인규의 二男인 趙璉이 충선왕의 왕부단사관을 겸하고 있다.106) 또 權溥와 이제현도 왕부단사관 을 역임했는데,107) 특히 이제현의 경우 1320(庚申)년 당시 王府斷事官이 었는데,108) 그의 문생인 李穀이 1340년 이제현의 아들을 위해 쓴 墓表를 보면 당시 王府斷事官이 僉議評理 보다 자랑스러운 직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109) 이 밖에도 宣撫將軍合浦鎭邊萬戶府 萬戶를 世職으로 받고 있었 던 權廉의 차남 權鉉110)과 王府斷事官 趙璉의 차남 趙德裕가 王府斷事官 을 역임하고 있고,111) 袁澄은 高麗王府斷事官의 知事를 지낸 것으로 사료 에 나와 高麗王府斷事官 예하에 屬官112)이 설치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요컨대, 카간의 內廷과 성격이 유사한 기능을 수행하는 국왕의 사적인 권 력기구로서 王府가 고려조정과 별도로 존재하였고, 이 기구도 고려에 대 105) 吳潛墓誌銘 (김용선 편저, 高麗墓誌銘集成(增補), 490쪽). 이 墓誌銘의 찬자는 그가 大德 2년부터 5년까지 4년 동안 執政했다고 하여, 당시 王府官의 위상과 王府의 권력을 짐작케 한다. 106) 趙仁規墓誌銘( 高麗墓誌銘集成(增補) ) 631쪽. 107) 李玠奭, 高麗史 元宗 忠烈王 忠宣王世家 중 元朝關係記事의 註釋硏究 ( 東 洋史學硏究 제88집, 2004), 94쪽. 108) 東文選 권126(제7책/88쪽) 鷄林府院君諡文忠李公墓誌銘 109) 李穀, 稼亭集 권11, 高麗國奉常大夫典理摠郞寶文閣直提學知制敎李君墓表. 110) 牧隱文藁 권16, 重大匡玄福君權公(廉)墓誌銘: (/13상)又, 如京進奉帝所. 泰定甲 子加中正大夫司僕正, 明年奏授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 蓋世職也. (/15 상)長男曰鏞, 宣授宣武將軍合浦鎭邊萬戶府萬戶重大匡玄城君. 次曰鉉, 宣授王 府斷事官奉翊大夫版圖判書上護軍,... 111) 稼亭集 권3, 趙貞肅公(仁規)祠堂記: (/10하)次璉官至中議大夫王府斷事官, 僉議 贊成事, 諡忠肅,..., 次適江浙平章烏馬兒,..., 元帥長男... 女適安吉王也兒吉尼.... (11상)斷事官長男..., 次德裕今爲奉訓大夫王府斷事官判典儀司事. 112) 劉將孫, 養吾齋集 권32, 袁謹齋墓誌銘: (/3하) 子四女二, 尙幼卜, 延祐甲寅臘, 葬某 處. 任老君婿也, 今以澄初名, 受勅命爲高麗王府斷事官知事.1) 先葬以館人彭應 琦狀求銘. 予哀之, 懷之, 知之, 深也. 豈必狀而銘哉.... (4상)澄初又能以其名蚤聞於 仕版. 72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한 몽골지배를 관철하는 중요한 통로 중 하나였다. Ⅲ. 새로운 분석틀 탐구 이께우찌 히로시의 선구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를 이은 1백년 가까운 연구사에서 大元(國)과 高麗의 관계는 비교적 다양한 각도에서 논의되고 연구되었으며, 꽤 많은 성과도 축적되었다. 하지만, 최근 김호동 교수가 역작을 발표하기 전까지 여원관계가 당시 몽골 세계제국 大蒙古國과 고 려 관계에 의해 규정받는 카간의 울루스와 고려의 관계였다는 인식을 바 탕으로 한 연구는 미흡했던 것 같다. 또 1260년 쿠빌라이의 지원을 받아 元宗이 즉위한 이후 1369년 中原을 포기하고 초원으로 돌아간 大元國과 관계를 정리할 때까지 150년 가까이 지속된 麗元關係는 형식상 지배와 내속의 宗藩關係를 유지했지만, 대내외적 조건의 변화에 따라 원의 고려 에 대한 지배의 성격과 예속의 정도는 각 시기마다 뚜렷한 차이가 있었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기에 따라 변하는 麗元關係와 관계의 구조에 대하여 충분히 유의한 연구자는 그리 많지 않았던 듯하다. 또 변화에 유 의했어도 시기에 따라 유효성이 변할 수 있는 분석틀을 사용했거나,113) 종적으로 비교 불가능한 다양한 지표를 임기응변으로 사용해서 여원관계 113) 장동익 교수는 元宗대 및 충렬왕 초기 20여 년간 元은 군대의 주둔을 기반으로, 다루가치를 통해 부분적인 내정간섭을 행하였으나 고려왕조의 독자성이 인정되 었고, 1287년 이후 정동행성이라는 지배기구를 설치하여 정치적 압력을 강화시 켜 갔는데, 이러한 상황은 80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고 보고 있다. 고려후기외교 사연구 (서울: 일조각, 1994) 제3장 麗 元 교섭의 諸局面 1. 麗 元의 정치적 관계, 110쪽. 73
史學硏究 第88號 의 변화를 분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114) 이하 두 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분석틀을 검토해 보고자 한다. 먼저 김호동 교수는 독자성을 지닌 다수의 울루스로 분할이 확정되기 이전에 단일체로서 대몽골국에 대한 屬國의 속성과, 동아시아와 몽골 초 원으로 이루어진 카간 울루스의 성격이 짙어진 쿠빌라이 왕조의 내속국 의 속성을 공유한 것이 고려가 麗蒙關係에서 여타 내속국과 다른 특별한 독자적인 지방/왕국 의 지위를 누리게 된 요인이라고 한다.115) 또 종래 쿠빌라이 정권의 성립을 제국의 분열 로 이해하던 통설을 비판하고,116) 쿠빌라이 카간이 권력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아릭 부케 지지세력을 분열 시키기 위해, 현실적으로 정주지대의 지배권을 갈망하던 諸王들에게 大 몽골 울루스 를 분할해서 위임통치하는 전략을 택함으로써 울루스 정권 이 분립 하게 된다117)는 새로운 학설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1260년 성립한 여몽관계는 기본적으로 단일체로서 몽골 제국의 속국이었다. 카간 울루스의 군주가 아닌 제국전체의 군주로서 고 려국왕의 來附를 받아들였고, 고려가 자발적으로 복속하였기 때문에 칭 기스칸 이래의 관례에 따라 帝國의 외연적 속국으로 국가적 독자성을 유 지하였고, 本國의 풍속을 유지하는 것도 허락받았다. 그러나 이후 제국의 분할 통치가 체제화 함으로써 여몽관계는 카간 울루스의 속국관계가 되 었고, 또 몽고는 불안정한 국내외 정세를 유리하게 이끌고 麗宋聯合의 가 능성을 봉쇄하기 위해 고육지책인 王室通婚을 유도해 실현하였고, 이로 인해 고려왕은 제국의 외연적 존재인 속국 국왕의 지위와 내포적 존재 114) 고병익, 元과의 關係의 變遷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7, 1977), 390-393쪽 및 김구진, 2. 여원관계의 전개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0, 2003), 263326쪽. 115) 몽골제국과 고려 81쪽. 116) 몽골제국과 고려 80-81쪽. 117) 몽골제국과 고려 Ⅳ-2. 쿠빌라이의 전략', 66-69쪽, 74-75쪽, 80-81쪽 참조. 74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인 부마의 지위를 동시에 가지게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쿠빌라이 카간은 몽골제국의 이상을 버리지 않았고, 고려 역시 외연적 존재인 屬國의 지위 가 유지되었다. 하지만 쿠빌라이 사후 大元도 예커 몽골 울루스(大蒙古 國) 의 이상을 상실하게 됨에 따라 고려도 國王 지배 하의 屬國 보다는 駙馬 예하의 屬領 이라는 측면이 강조되고, 일본원정을 위한 군사기구로 세조대에 설치된 정동행성은 성종대에 들어 1299년 내정간섭기구로 변질 하였으며,118) 이후 단속적으로 제기된 立省論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 고 있다. 아울러 不改土風 이 핵심인 고려의 世祖舊制 주장이 원말까지 호소력을 가졌던 것도 칭기스칸 이래 자진귀부한 나라에 정치적 독립을 보장한 몽골적 속국관계에 대하여 몽골제국의 통치자들이 단일제국의 이 상을 완전히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김호동 교수는 이 연구에서 종래 많은 논란이 된 서방 울루스 분립의 배경, 이중적인 여원관계 성립 배경, 정동행성 성격변화의 계기, 世祖舊制 의 메카니즘 등에 대하여 매우 설득력 있는 설명과 분석틀을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의 연구에도 전제 등에 사소한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김교수는 속국 으로서 고려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입론의 근거 인 쿠빌라이 카간의 대몽고국에 대한 고려의 자발적인 투속을 강조하고 있다. 또 여원의 신속관계는 1260년 元宗이 쿠빌라이의 카간 즉위를 축하 하는 사절을 보내는 것을 계기로 성립한다고 보며, 1259년 元宗이 태자로 서 皇弟 쿠빌라이에게 투속하였다는 종래의 통설에 반대하고 있다.119) 그 해 八月 쿠빌라이 카간이 永安公을 통해 보낸 3道의 詔의 내용에 의해 여원관계가 규정된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屬國說의 근거로 드는 梁楚之郊에서 王愖이 쿠빌라이를 우연 118) 몽골제국과 고려 118쪽. 119) 高麗史 권25/ 13하: (元宗元年四月) 丙寅, 遣永安公僖如蒙古, 賀卽位, 表曰, 云 云. 75
史學硏究 第88號 히 만났다는 설정에는 약간의 문제가 있다. 우선 梁楚之郊는 汴粱 부근이 아니라 梁과 楚의 경계지역을 말하며 襄陽 부근이라고 볼 수 있다. 蒙古 카간의 조정에 入朝하기 위해 1259년 四月 고려를 떠난 태자 王愖은 釣魚 山에 있는 憲宗의 行在로 찾아가기 위해 燕京에서 潼關을 거쳐 京兆府에 이르렀고, 남송 공략을 위한 지원기지였던 六盤山에 이르렀을 때, 憲宗의 부음을 듣고 사태의 진전을 살피다가 江南에 머물고 있던 皇弟 쿠빌라이 를 만나기 위해 南下하게 되었으며, 그가 梁楚之郊에서 이르렀을 때 마침 襄陽을 거쳐 철군 중이었던 쿠빌라이 카간을 만나 幣帛을 바쳤다.120) 따 라서 고려 태자의 남하 경로는 漢中을 거쳐 襄陽으로 뚫린 秦嶺 남쪽 大 巴山 북쪽에 난 險路를 거쳐 간 것으로 볼 수 있고, 梁楚之郊는 襄陽 근처 의 어디쯤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121) 고려 태자 王愖은 1260년 1월 4일 쿠빌라이와 함께 燕京에 도착하여 봄이 올 때 까지 그곳에 머물렀는데, 4월 6일 비로소 고종의 부음을 듣고 3일 동안 服喪한 뒤 홀필렬의 허락을 받아 바로 귀국길에 오른 것으로 보이며, 4월 28일 개경에 도착하고 있다. 태자 王愖이 귀국하기 전 쿠빌라 이의 측근들은 귀국하는 고려 태자를 藩王의 禮로 대접하여 회유할 것을 권고하였고, 束里大와 康和尙(守衡)을 다루가치로 삼아 귀국하는 王愖의 귀국길을 동행케 하고 있지만, 5월 20일 荊節이 사절로 왔을 때 가져 온 서신에 아직 臣服하지 않은 나라로 송과 고려를 지적한 것으로 보아 고려 태자가 귀국하기 전에 쿠빌라이 대왕에게 臣屬의 예를 취하지 않았으며, 즉위 축하 사절을 통해 신속을 공식적으로 표시했을 것이라는 김호동 교 120) 李齊賢, 益齊亂藁 권9상/9상하, 忠憲王世家 : 至六槃山, 憲宗晏駕而阿里孛哥 阻兵朔野, 諸侯虞疑, 罔知所從. 時世祖皇帝觀兵江南, 世子遂南轅間關, 至梁楚之 郊, 世祖適自襄陽班師北上, 奉幣帛謁于道. 121) 김 교수는 益齊亂藁 의 다른 곳에서 汴粱之地라 하고, 그 細注에 역시 汴粱이란 한 것에 의해 현재의 開封 근처로 보고 있으나, 忠憲王世家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권6/2상 在大都上中書都堂書. 76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수의 주장은 타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1260년 5월 5일 쿠릴타이에서 즉위 하기 전까지 쿠빌라이는 고려가 신속의 예를 표시할 몽고의 군주가 아니 었기 때문이다. 요컨대 고려가 공식적으로 몽고에 신속하게 되는 것은 쿠빌라이 즉위 후라고 볼 수 있지만 梁楚之郊의 麗蒙遭遇는 고려의 선택과 의지가 반영 된 것으로 볼 수 있고, 그 결과 여원관계는 麗蒙遭遇 초기단계부터 카간 울루스의 속국으로 전락할 소지가 컸던 것으로 보인다. 또 김호동 교수의 소위 내포적 존재인 부마의 지위와 駙馬 예하의 屬領 이란 개념도 음미 할 여지가 있는 것 같다. 먼저 駙馬의 지위는 속성상 몽골 권력에 내포 적 인 존재이지만 통혼관계가 성립되기 이전 駙馬의 지위에도 미치지 못 한 지방권력으로 치부되던 고려의 왕권이 몽골 황금가족 권력의 외연에 편입됨으로써 고려의 지위가 대 몽골 울루스 차원의 존재가 되고, 그 결 과로 카간의 울루스와 고려의 내속관계를 소위 대몽고국과 고려의 외연 적 속국관계로 변질시킨 측면도 있다. 한편 김 교수는 1299년 정동행성의 구조변화의 계기를 大 몽골 울루 스 의 이상을 가지고 있던 쿠빌라이의 사망에서 찾고 있다. 쿠빌라이 사 후 大元이 大 몽골 울루스 의 이상을 상실함에 따라 大元의 고려에 대한 두 가지 정치적 지향 속에서 부여된 국왕 지배하의 속국 과 駙馬 예하의 屬領 이라는 두 가지 정치적 지위 중 후자의 측면이 강화되고, 정동행성 이 갑자기 增置 되었다고 본다. 하지만 쿠빌라이 집권 후기 행중서성의 설치와 제도의 정비는 1276년 남송지역 정복 후 강화된 카간 권력의 성격 변화와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이 보다 합리적일 것이다. 至元 28년 새롭게 호적이 정비되고, 강남에 양세법이 시행됨으로써 카간의 중앙재정이 급 격히 팽창되는데,122) 이를 바탕으로 카간의 집권적 전제권력(황제권력)이 122) 李玠奭, 元朝의 南宋倂合과 江南支配의 意義, 慶北史學 21(1998), 428-431쪽 참조. 77
史學硏究 第88號 강화되며, 지방에 대한 카간 권력의 통제력도 강화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쿠빌라이 카간의 사망을 大元 권력이 大 몽골 울루스 의 이상이 상실된 시기로 비정하는 것도 다소 이른 감이 있다. 1303년 우게데이 한 국의 계승자였던 하이두의 庶長子 차파르가 차가타이 후왕 두아의 권유 를 받아들여 성종의 조정에 臣從을 표시함으로써 1304년 성종은 동서화 해를 공포하는 사절을 유라시아 각 지역의 몽골 울루스에 보내어 전 몽골 세계가 카간의 울루스로서 元朝의 정통성을 승인함으로써, 오히려 쿠빌 라이 즉위로 상실된 大 몽골 울루스 의 이상이 부활하였고, 전장에서 하 이두군을 무찔러 동서화해를 이끌어 냈던 무종 하이산도 역시 쿠빌라이 가 꿈꿀 수 없었던 전 몽골의 통합 곧 예케(대) 몽골 울루스 를 복원하기 위한 포석을 하였다는 스기야마 마사아끼(杉山正明)의 지적도 있기 때문 이다.123) 물론 필자는 원조 내부의 동력을 과소평가하는 스기야마 씨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124) 쿠빌라이 사망 이후 대 몽골 울루스 의 이상 상실을 駙馬 예하의 屬領 화와 정동행성의 성격변화의 계기로 보는 김 교수의 견해 역시 재검토될 여지가 있다. 이는 자칫 森平雅彦의 고려본국 投下領論과 같은 의미로 이해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麗元關係는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측면의 관계도 중요하 며, 이를 통해서도 지배와 내속관계의 변화를 살필 수 있다. 또 공녀와 환관, 그리고 여원 양국 왕실과 귀족 사이의 혼인관계로 매개된 원조 권 력 내부의 고려인의 영향력 증대와 그것이 거꾸로 고려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점에서 특히 공녀문제를 다각적인 측면 에서 검토한 젊은 중국학자 喜蕾의 연구는 주목할 만하며,125) 附元勢力을 123) 杉山正明, 大元ウルスの三大王國 カイシャンの奪權とその前後 京都大學 文學部硏究紀要 34(1995), 107쪽. 124) 필자는 무종의 정치적 지향을 유목적 전통을 원조체제 내에 통합하는 과정으로 보고 있다. 李玠奭, 漠北의 統合과 武宗의 創治改法 (서울大學校 東洋史學硏 究室 편, 近世 東아시아의 國家와 社會 지식산업사, 1998: 133-194쪽) 참조. 78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통해 여원관계의 일면을 분석한 백인호의 연구126) 역시 새로운 연구방향 의 탐색으로 시사적이다. 그러나 大元과 고려 사이의 관계를 기본적으로 규정하는 힘은 몽골 권력이 고려에 행사한 정치 군사적 강제이며, 결국 大元의 지배가 어떤 경로를 통해 그리고 어떤 방식으로 고려에 행사되고, 실현되었는가를 살핌으로써 그 구조와 성격이 해명될 수 있다. 몽골 정권은 고려를 굴복시킨 이후에도 大蒙古國(大元) 통치권력 아 래 고려를 종속시키기 위해 다양한 수단을 구사하였으며, 시기에 따라 또 高麗側의 대응과 카간 울루스 내외의 정세 변화에 따라 구사한 수단들도 달라진다. 따라서 그러한 수단의 결합 형태에 의하여 강압의 강도와 예속 의 정도도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를 통해 麗元關係의 시기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고, 각 시기 지배의 성격이 갖는 특징도 얘기할 수 있다. 당시 몽골 정권이 고려에 적용한 다양한 수단 중 첫 번째 수단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소위 六事로서 "納質 助軍 輸糧 設驛 供戶數籍 置達魯 花赤"가 그 내용이며, 몽골 통치권력이 투항한 복속지역의 內屬與否를 확 인하기 위해 설정한 기본적인 요구조항이었다.127) 몽골군대의 침략이 시 작된 이후 강화의 조건으로 六事를 요구하였으나, 여러 가지 핑계로 이를 거부하였지만, 무신정권이 붕괴된 이후 비로소 고려는 모두 수용하였 다.128) 두 번째 수단은 복속한 부족이나 국가의 우두머리를 婚姻을 통해 포섭한 칭기스칸 이래 구사한 정책으로, 혼인을 통해 宗藩關係인 內屬國 의 군주 권력을 大元 황금가족 권력의 외연에 편입하는 방식이었다. 특히 쿠빌라이 왕조가 성립한 이후에는 王이나 郡王과 같은 중국적인 王爵과 125) 元代高麗貢女制度硏究 北京: 民族出版社, 2003. 126) 고려후기 부원세력 연구 부산: 세종출판사, 2003. 127) 高柄翊, 蒙古 高麗의 兄弟盟約의 性格 白山學報 6--> 동서교섭사의 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1970, 179-182쪽. 128) 李益柱, 高麗 元關係의 構造에 대한 硏究--소위 世祖舊制의 분석을 중심으로-- 韓國史論 36(1996), 19쪽. 79
史學硏究 第88號 印章을 수여함으로써, 보다 강화된 몽골 카간의 권력 체계 내의 宗王과 諸王, 公主 권력의 반열에 이들의 권력을 편입시켰으며, 고려의 경우도 쿠빌라이 카간의 황녀와 충렬왕 사이의 혼인을 통해 몽골 황금가족권력 의 일부로 편입되었고, 동시에 宗藩關係도 강화되었다. 세 번째 수단은 정복지역인 고려에 설치한 몽골 중앙권력의 파견기구 등 강제력인데, 고 려의 경우 1278년 다루가치가 철수한 이후 1287년 다시 征東行省이 설치 되었고, 巡軍府와 鎭邊萬戶府 등 강제력을 고려에 유지시켰다. 특히 몽골 정권은 征東行省과 그 부속관부인 理問所를 통하여, 또 수시로 직접 카간 의 관리를 파견하여 고려의 통치에 간여하였다. 각 시기에 사용한 몽골의 통치 수단과 그 결합을 지표로 시기구분을 해보면, 그 첫 시기는 1260년 元宗의 즉위부터 1269년 元宗의 폐위와 복 위를 거쳐 삼별초 봉기가 진압될 무렵까지 六事를 요구하던 시기인데, 元 은 무력으로 임연에 의해 폐위된 元宗을 도로 자리에 앉힘으로써 무인정 권을 무력화시키고 있지만 六事에 근거하여 국왕의 출륙과 親朝를 요구 하는 외에는 적극적으로 내정에 간섭한 형적은 없다. 다음 단계는 1275년 충렬왕이 즉위하여 1278년 새로이 부여받은 부마고려국왕의 권위를 바탕 으로 고려내의 몽고세력을 본국으로 돌려보낸 뒤 외부의 간섭 없이 독자 적으로 국사를 처결하게 되는 시점으로부터 1287년 정동행성이 설치되기 이전의 시기로서 몽골 정권이 고려왕국에 대한 공주의 영향력과 부마고 려국왕의 명분을 이용한 단계였다. 六事의 의무 중 供戶數籍 등 많은 부 분을 면제받는 독립왕국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종국은 원 지배체 제 내에 편성된 부마국왕의 권력으로 輸糧과 助軍의 의무는 여전히 부담 하고 있었다. 세 번째 단계는 정동행성이 설치되어 공민왕대 폐지될 때까지로 가장 길었던 단계인데, 정동행성의 설치는 고려와 大元國 사이의 타협의 산물 이라고 할 수 있다. 곧 내속국인 고려를 大元國 체제 내의 독립적 왕국으 80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로 유지하도록 하는 대신, 카간의 직할통치 기구인 行省을 설치하여 고려 의 국왕권력을 제도적으로 감시 견제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정동행 성은 몽골 중앙권력의 파견기관(萬戶府 등)도 관할하였고, 그 우두머리인 승상의 자리를 부마고려국왕이 겸하였기 때문에 형식상 고려 내부의 모 든 권력은 고려왕의 통할 아래 있었다. 요컨대 征東行省이 최소한의 직할 지역도 가지지 못하고, 체제도 매우 불완전한 行省이었다는 점으로 미루 어 짐작할 수 있듯이, 征東行省은 오히려 고려가 형식상 내속국이었지만 상대적 자주성이 보장된 지역이었음을 상징하는 기관으로 볼 수도 있다. 또 시기에 따라 달랐지만 정동행성의 관리 중 일부만 중서성에서 파견되 었고, 고려왕이 행성의 속관을 천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정동행 성 관리는 고려국왕의 內僚가 겸직하였고, 元의 임명을 받아 고려의 재판 에 간섭한 理問官이나 巡馬所와 같은 기관도 결국 고려국왕의 통제 아래 있었다는 점은 관리계통이 엄격히 분리된 막북의 제왕관할지역이나 嶺北 等處行中書省129)과도 달랐기 때문이다. 물론 이를 근거로 丁崑健은 실제 모양이 封藩과 같은 行省이라고 하지만,130) 후기에 들어 원조 황실의 유 력자와 끈을 댄 고려의 귀족이 국왕에 대항하여 정동행성의 권력을 휘두 를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유력 封藩의 宗王 휘하에 설치된 王相府 와는 전연 성격이 달랐다. 물론 시기에 관계없이 고려에 관철되는 복수의 몽골 권력의 통로가 상호 결합되어 작용하기도 했으며, 巡軍獄이 한 예이다. 또 이러한 경우 는 고려국왕과 고려관료의 몽골화를 통해서도 나타났는데, 이것 역시 후 기 여원관계의 성격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볼 수 있다. 곧 고 려 국왕위 계승자와 시종 및 관료가 숙위 등 이유로 장기간 원에 체류하 고, 혹은 여러 통로를 거쳐 몽골 황실이나 귀족과 連姻으로 묶이게 됨으 129) 李玠奭, 元代의 카라코룸, 그 興起와 盛衰 몽골학 제4호(1996): 55-61쪽. 130) 元代征東行省之硏究 史學彙刊 10, 177쪽. 81
史學硏究 第88號 로써, 몽골 권력을 스스로 내재화하고, 또 그러한 경향이 후기로 갈수록 강화되고 있는 바, 사회적 측면에서 內屬關係의 내면화라고 볼 수 있 다.131) 또 이는 후기 고려권력의 정동행성 의존과 정동행성 기능변화에까 지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기 때문에 특히 가벼이 볼 수 없으나, 아직 이들 복수의 인자를 복합적으로 고려한 연구 성과는 나오지 않고 있다. 요컨대 필자는 대원국과 고려 사이의 관계를 김재홍의 대등한 관계나 혹은 고병익 선생의 중국적 개념의 부용관계였다는 의견에 동의할 수 없 다. 기본적으로 대원국과 고려 사이의 관계를 검토하기 위해서는 독립적 왕조이던 고려와 大元國 사이에 고려의 풍속을 바꾸지 않는다 는 전제 로 맺어진 六事 틀의 부용관계, 大元의 황녀와 혼인한 부마국왕의 권력을 이용한 왕국의 大元支配體制 내 편입, 끝으로 정동행성과 그 부속 기구를 통한 통제를 살펴야 하며, 이 외에도 끊임없는 사절의 파견을 통한 카간 의 직접 지령과 고려에 대한 원조의 통일된 법제 적용 등 다양한 지표를 통하여 두 나라의 관계를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통일된 법제를 제정하여 지배 하 전 지역 주민에 적용하려는 원 조의 시도가 고려의 법제상에 미친 영향은 몹시 컸고, 녹촌(鹿邨) 선생도 元代의 法制--蒙古慣習法과 中國法과의 相關性-- 132)에서 이미 주목한 바 있으나, 이를 원-고려관계를 구명하는 지표로 주목한 바 없다. 이 점에 서 程尼娜가 征東行省의 羈縻統治機能를 언급하면서 理問所와 元의 법률 적용문제를 제기한 것133)은 새로운 분석시각의 제안이라고 볼 수 있다. 131) 杉山正明은 케식 복무를 인종 종족 언어 생활습관 등 來源이 전혀 다른 피정 복민(의 유력집단)을 몽골이란 동일한 집단으로 녹여버린 도가니 역할을 했다 고 보고 있는데, (李玠奭, 書評: 杉山正明 著, 大モンゴルの世界: 陸と海の巨大 帝國, 中央아시아硏究會會報 2,1994, 27쪽) 원조 성립 후 이루어진 고려국왕 위 계승자와 시종들의 宿衛에서도 역시 그러한 성격을 찾을 수 있다. 132) 歷史學報 第3輯(1953): 315-355쪽. 133) 征東行省의 특수한 지위 때문에 理問所에서 형을 집행할 때, 大元通制와 至正條 格 등 元朝의 法을 적용하였기 때문에 고려관리들은 관여할 수 없었다고 한다. 82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쿠빌라이 카간 재위기에 원의 내속국의 지위로 전락한 이후 고려는 世祖舊制라는 보호장치에 의지하여 不改土風 을 주장하였다고 해도, 수 시로 전달되는 카간의 칙령과 원조가 제정한 至元新格, 大元通制, 至正條格 도 준수해야 했다. 또 辛禑 3년(1377)에는 판결에 至正條格 하나만을 따르라 134)는 왕명이 나오는 바, 비록 禑王이 내린 명령이 그대 로 집행되었는지 알 수는 없어도 이미 실질적인 지배와 내속관계가 해소 된 시기에 자발적으로 至正條格을 기본법전으로 적용한다는 결정이 나온 것은 麗末 고려사회에 미친 원의 법제의 영향이 몹시 컸던 것임을 보여준 다. 大元의 위세가 아직 당당했던 1330년대나 至正條格 반포 직후에도 元 朝法律의 적용에 대한 고려사회의 거부감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1337 (後至元 丁丑)년 征東行省 左右司員外郞으로 부임한 李穀이 함께 부임한 同僚인 理問 揭以忠이 고려에 元朝法律이 통용되지 않는 점에 대하여 불 만을 토로하자 고려에 이미 독자적인 문화와 법체계가 있으며, 세조가 不 改土風을 약속하여 고려조정의 執法官吏가 舊法을 적용함으로써 行刑基 準의 혼란이 발생한 것이라고 배경을 해명했던 故事를 굳이 送別의 序에 서 다시 강조하는 것도135) 고려 지배층의 원조법제에 대한 태도의 일단을 보여준다. 李穀의 경우 심지어 원조 법제가 行省의 理問所를 통해 적용되 程尼娜, 전게 논문, 160쪽. 134) 高麗史 권84/30상 刑法1 職制 : (辛禑)三年二月, 令中外決獄一遵至正條格. 그러나 14년의 기사는 원조의 법률이 고려에 적용되는 데 근본적인 어려움이 있었음을 잘 지적하고 있다. (十四年九月)前元有天下, 制以條格通制布律中外, 尙懼其煩而未*, 復以中國俚語爲律而名之. 曰, 議刑易覽, 欲令天下之爲吏者, 皆得 以易曉也. 然本朝俚語与中國不通, 則尤難曉之. 又無講習者. 135) 李穀, 稼亭集 권9, 揭理問序, 揭君謂余曰, 政出多門民不堪命, 方今四海一家, 何中朝之法不行于東國乎? 余應之曰, 高麗古三韓地, 風氣言語不同華夏, 而衣冠 典禮自爲一法, 秦漢以來未能臣之也.. 比來, 國法漸弛, 民風益薄, 自相變亂, 而 爭告訐省吏之執通制者, 則曰, 普天之下莫非王土. 國臣之持舊法者, 則曰, 世皇有 訓不改土風. 於是出彼入此, 趣輕舍重, 皆有所說, 莫可適從法之不行非由此歟. 君 曰, 然吾旣有所受, 惟知奉法而已. 83
史學硏究 第88號 는 점에 대하여 불만을 가졌던 것 같고, 그것은 그가 가진 법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향시의 策問으로 출제하는 것을 통해 분명하게 드러난다.136) 이러한 피압박에 저항하는 정서는 결국 1356년 奇轍과 盧頙의 모반사건 을 진압한 다음 공민왕이 첫 조치로 정동행성이문소를 혁파하는 것으로 표출되었고, 11월 4일 元에 보낸 表文에서도 역시 행성의 관리들이 고려 의 監察司와 典法司의 掌刑聽訟과 非理糾正의 기능을 왜곡한 점을 강조 하고 있다. 맺음말 13-14세기 大蒙古國과 고려의 관계에 대한 연구는 위에서 살핀 바와 같이 아직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녹촌 고병익 선생이 征東行省 연구와 六事를 지표로 한 비교사적 方法을 도입함으로써 20세 기 후반 麗元關係史 연구에 큰 획을 그었고, 또 왕실혼인을 통해 여원관 계의 성격을 살핀 타이완의 蕭啓慶 교수와 변화의 관점에서 정동행성을 새롭게 검토한 장동익 교수 등 많은 국내외 후학이 녹촌 선생의 문제의식 을 계승함으로써 여원관계사 연구를 크게 발전시킨 것도 사실이다. 또 근 자에 들어와 李益柱가 世祖舊制 와 不改土風 을, 森平雅彦이 王府와 投 下 를 잣대로 여원관계를 분석함으로써 여원관계사 연구의 지형이 새롭 136) 稼亭集 권1, 策問 先有大元通制, 後有至正條格,, 然, 今法吏多用例, 律其 不如例乎. 例或無其條則求之律, 律如其無文, 將於何求之歟.... 本國立法已久, 重於變更, 比來政出多門, 人不奉法, 或於用刑之際, 繩之以元朝之法, 有司拱手而 不敢言. 或曰世皇有訓, 毋變國俗, 或曰普天之下莫非王土, 今欲上不違條格, 下不 失舊章, 使刑法歸一, 而人不苟免, 其要安在? 84
大蒙古國-高麗 關係 연구의 재검토 게 바뀌고 있고, 몽골 제국사와 중앙아시아사 두 분야에서 모두 혁혁한 업적을 내고 있는 金浩東 교수가 大 몽골 울루스(大元)의 이해체계 안에 서 대원과 고려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함으로써 역시 여원관계사 연구의 새로운 국면을 열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고안한 새로운 접근방법에도 불구하고 많은 문제점이 여전히 속 시원하게 해명되지 않고 있다. 정치사적 관점 외에도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사와 문화사의 잣대로 연구할 필요가 있으며, 또 정치사의 측면에서도 위에 든 권력의 통로가 아닌 조칙이나 법제를 통한 직접지배 의 방식을 통해 지배와 내속관계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검토해 볼 수도 있다. 大元과 高麗의 지배와 내속관계를 속속들이 해명하기 위해서는 大 元國의 통치 권력이 고려 내부에 설치한 정치적 군사적 장치의 작동, 칙 령 등 詔書와 법령 선포 등 카간의 일상적인 통치행위의 영향, 또 왕위계 승자과 관료 그리고 관료예비군의 숙위와 혼인 등 인적 교류의 증가에 의해 고려에 增殖되고 내면화된 大元의 지배와 親元 혹은 附元集團의 자 발적 동의와 여타 집단의 비자발적 동의와 저항의 양태 곧 당대 각 계층 의 의식과 문화에 대하여도 살핌으로써 여원관계사 연구의 부족한 부분 이 채워질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현재의 단계에서 여원관계사 연구는 아직도 많은 부분에 빈 구석이 있고, 기초적인 연구도 충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울 뿐만 아 니라 연구방법도 개선할 여지가 많다. 물론 정복과 파괴, 억압적 지배와 수탈 등 피지배로 인한 고통의 기억을 계승한 국내의 많은 연구자가 애국 주의적 관점에서 여원관계사 연구에 접근하고 있는 것도 중요한 이유이 다. 이로 인해 1218년 이후-1380년에 이르는 몽고-고려관계사 연구의 문 제의식을 정치사 밖의 주제로 넓히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여원관계사 연구를 다시 새롭게 활성화시키고 수준을 한 단계 높이기 위해서는 무엇 보다 여원관계를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할 수 있는 의향과 능력을 갖춘 85
史學硏究 第88號 많은 연구자를 육성하는 것이 대몽고국-고려 관계사 연구를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선결과제라고 할 수 있다. 여원관계사 연구에 한 번이라도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라면, 우선 고 려사와 대몽고국 역사 두 분야 모두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무엇보다 필요 하다는 점을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특히 대몽고국 시대의 역사는 중국의 여타 왕조사와 다른 특성이 있기 때문에 여타 왕조사를 연구하는 중국사 연구자도 쉽게 접근할 수 없으며 특별한 훈련 기간이 필요하다. 한문 해 독능력 외에 다양한 사료언어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글 집필의 계기를 제공한 녹촌 고병익 선생 역시 여러 가지 언어를 해독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였음은 주지하는 바이지만, 유능한 여원관 계사 연구자 후속세대를 양성하기 위해 이러한 능력을 갖출 수 있는 훈련 과정을 하루바삐 대학에서 갖추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여원관계사를 보는 관점의 대 전환이다. 여원관계사 연구의 핵심은 원 지배 하 고려에 대한 연구이지만, 고려와 원의 관계를 연구하는 것은 그 시대 고려사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위한 중요한 수단이다. 뿐만 아니라 원대 고려사 연구는 元史 연구의 중 요한 일부로서 두 분야 연구자의 협동연구를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또한 원 지배 하 고려사 연구자도 원 지배 하 고려사 연구역량을 향상시키기 위해서는 여원관계사 연구자의 후속세대가 갖추어야 하는 능력을 역시 갖출 필요가 있다. 끝으로 민족주의적 역사의식은 소중한 역사학의 자산 이다. 하지만 연구자는 그것의 보호와 그것이 가지는 한계로부터 스스로 걸어 나와 과학적인 학문방법론을 가지고 여원관계사를 새롭게 연구해야 할 것이다. 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