吳東振 硏究 申載洪* 머리말 Ⅰ. 成長期와 亡命 Ⅱ. 靑年運動의 展開 Ⅲ. 光復軍 司令部의 組織과 活動 Ⅳ. 大韓統義府의 組織과 活動 Ⅴ. 正義府의 成立과 活動 Ⅵ. 被逮經緯와 獄中闘爭 맺음말 머리말 일제에게 국권을 강탈당하였던 30여 년간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자신의 몸을 희생하여 가 며 국내외에서 투쟁하다가 순국하였다. 吳東振도 그 중의 한 사람으로 특히 그는 만주로 망 명하여 무장항일투쟁을 전개한 대표적인 민족운동지도자로서 그가 차지하는 독립운동사 속 에서의 비중이 매우 높다고 하겠다. 그는 대다수의 在滿民族運動者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기피하는 당시의 상황에도 불구하 고 臨政의 옹호와 지지를 주장하고 임정산하의 재만통일단체 구성에 노력하였던 사람이었 다. 또한 그는 무장항일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재만독립운동의 지지기반인 재만한국인의 생계 와 보호에도 극력 노력함으로써 다른 지도자와 구별되는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러 나 무엇보다도 그의 활동은 8년이라는 짧은 기간에도 불구하고 괄목할 만한 성과를 낳았으 며 더욱이 일경에 체포되어서도 끝까지 항쟁하여 끝내는 옥사를 하였던 인물이다. 따라서 吳東振의 연구는 재만민족독립운동의 성격과 위상을 정립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미 가 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자료가 몹시 희귀하여 그의 전모를 밝히기 매우 어려운 실정이 다. 특히 그의 성장과정에 관한 자료는 전무하여 그의 사상적 배경을 규명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미흡하나마 얼마 안되는 자료를 토대로 그의 항일운동에서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Ⅰ. 成長期와 亡命 吳東振은 1889년 8월 14일 平北 義州郡 廣坪面 靑水洞에서 출생하였다.1) 그의 家系에 대 하여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다. 다만 그의 본관이 海州라는 것과 그의 생모는 韓氏라는 것, * 國史編纂委員會 編史部長. 1) 吳東振의 出生地에 관하여 朔州三一錄 에서는 朔州郡 靑水邑 萬家洞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字는 雷卿이오 號는 松庵이라 하였다.
그리고 吳東振이 태어난지 반년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하며 12세부터 계모 白氏에 의 하여 성장하였다는 것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그의 成長期는 일제의 침략이 가중되고 국내의 정세가 급변하는 격동기였다. 따라서 그는 어려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한국사와 시국에 대한 말을 자주 들어 은연 중에 일제에 대한 증오심과 적개심을 품게 되었다. 처음 한문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하다가 사립소학교에 들어가서 신학문을 접하게 된 오동진 은 얼마 후 학교를 중퇴하고 평양에 가서 민족지도자인 安昌浩 선생이 설립한 大成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 속성사범과에서 공부하면서 그는 안창호 선생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 아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이 싹텄으며 이 때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2) 일제가 主權을 강탈한 뒤인 1913년 대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鄕里에 들어가서 인재육성 을 목표로 교육사업에 전념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그 곳에서 日新學校를 설립하였다. 여기서 그는 私財를 털어서 교사신축을 위하여 헌신하였고 청소년들에게 항일민족의식을 심 어 주는데 노력하였다.3) 오동진의 성품은 매우 인자하였다. 그는 가족을 위하기보다 同志들을 극진히 위하였다. 곧 독립운동에 투신하였을 때 그는 자신의 옷과 밥을 동지나 부하에게 주는 일이 비일비재하였 다 한다. 특히 그의 감화력은 지대하여 누구든지 그와 4 5일을 같이 지내고 나면 그의 동 지가 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다. 한 예로 그가 일신학교를 세워 육영사업에 종사할 때 그곳의 교회 집사로 있었는데 2년이 못되어 인근의 모든 사람을 전부 기독교에 입교시킬 만 큼 감화력과 통솔력이 뛰어났다 한다.4) 그러나 그의 교육사업은 오래 지속될 수 없었다. 겨 우 힘들게 교사를 신축하며 완공한지 얼마되지 않은 1918년 일제가 일신학교를 폐쇄하고 말 았던 것이다. 그 이유는 일신학교가 항일민족사상을 고취하는 중심 학교였기 때문이었다. 그 후 오동진은 재력을 모아 재기할 뜻을 품고 일제의 눈을 피하여 각지로 전전하며 상업활동 을 전개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발발하자 오동진은 義州로 가서 주도하였으나5) 3 1운동이 일제의 무력 탄압으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만주로 망명하였다. 당시 오동진은 3 1운동에 참여 하였다 하여 日警이 그를 체포하려 하였고, 또 평화적인 시위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으며 오로지 무력으로 일제를 구축하는 방법밖에 없다는 판단으로 망명의 길을 택하였던 것이다. 그는 1914년에 결혼한 부인 李陽淑과 망명 직전에 태어난 아들 京天을 두고 홀로 망명하 였다. 京天은 아버지 얼굴을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하며 1928년 오동진이 체포당할 때 10 살이었다.6) Ⅱ. 靑年運動의 展開 寬甸縣 安子溝로 건너간 吳東振은 곧 그곳에서 尹河振 張德振 朴泰烈 등 여러 동지들과 2) 吳東振 豫審終結書 (昭和 3년 豫第2호). 이 자료에는 吳東振이日新學校를 졸업한 뒤 大成 學校로 進學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日新學校는 吳東振이 大成學校를 졸업한 이후 고향에 돌아 와서 세운 學校이다. 3) 朴永錫, 獨立運動者功勳錄 제4권(國家報勳處) p.747. 4) 東亞日報 1928.2.12. 5) 앞의 豫審終結書. 6) 東亞日報 1928.2.11.
廣濟靑年團을 조직하여 본격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7) 그러나 분산적인 항전이 抗日 運動을 전개하는데 비효율적이라는 판단 아래 각지에 산재한 청년단체를 하나의 통일조직으 로 결성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19년 11월 安秉瓚 金燦星 金承晚 金時漸 吳學 洙 李春根 등의 동지들과 협의하여 20여개의 靑年團體를 규합, 安東縣에 大韓靑年團聯合會 를 조직하였다. 이렇게 결성된 聯合會는 大韓民國 臨時政府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고 활동 방침을 다음과 같이하였다.8) 1. 大韓民國 臨時政府를 받들고 옹호하며 이에 복종할 것. 2. 각 지방단에 義勇團을 조직케 하여 그 대표자 1인 이상을 본단에 집합시켜 導議시키도 록 할 것. 3. 대규모의 독립전쟁은 정부의 명령에 의할 것이나 우선 적의 倀傀 官公吏 적에 아첨하는 재산가를 토벌하기 위하여 상당한 수단을 취할 것. 4. 국내 선전에 관하여 기관지로서 大韓靑年報를 발행하여 세계의 대세와 民國의 國是, 임 시정부의 방침, 본회의 주의를 선전할 것. 등 수개항의 활동 방향을 정하였다. 그리고 財務部 敎育部 交涉部 通信部 編輯部 勞動部 警 護部 등의 部署를 두어 활동하였다. 吳東振은 敎育部에 소속되어 各地를 왕래하며 재만한인들의 결속과 민족의식 함양에 노력 하였다. 또한 臨時政府의 기관인 安東交通事務局 安東臨時議事會의 간부로서 군자금 모금, 國內와의 연락, 사무 등에 큰 활약을 하였다. 1920년 1월 聯合會는 날로 가중되는 日帝의 탄압으로 활동이 어려워지자 武力으로 일제에 대항하기로 하고 軍事敎育의 강화, 군자금 및 무기의 조달 등을 통하여 獨立戰爭을 준비하 여 나갔다. 그리고 獨立戰爭에 사용할 무기구입을 위하여 敎育部長 李鐸을 上海 臨時政府에 파견하였다. 李鐸이 政府와 협의하여 무기구입대금을 上海로 송금하여 주도록 요청하자 李 鐸을 대신하여 敎育部長職을 대리하고 있던 吳東振은 그간 모금한 자금 680圓을 上海로 즉 시 송금하였다.9) 이것이 계기가 되어 在滿 武裝獨立運動團體의 統合運動이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Ⅲ. 光復軍 司令部의 組織과 活動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하여는 무엇보다도 각지의 무장단체의 통합이 시급한 과 제이며 統合의 주체는 大韓民國 臨時政府가 되어야만 한다고 판단한 吳東振은 즉시 大韓靑 年團聯合會를 주축으로 하여 統合運動을 전개하였다. 먼저 韓族會 大韓獨立團 平北督辦府의 간부 등과 협의하여 다음과 같은 5개항에 대하여 합의를 보게 되었다.10) 7) 東亞日報 1928.2.12, 앞의 豫審終結書, 文一民, 韓國獨立運動史 p.260. 8) 大正 9年 特刑 第2號의 1 判決文; 독립 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자료집 10, p.670. 9) 吳東振 豫審終結書 (昭和 3년 豫第2호) 10)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5권 pp.265 266, 愛國同志援護會, 韓國獨立運動 史.
1. 각 단체의 행동 통일 기관을 설치하고 국내 왜적의 행정기관 파괴사업을 실행하되 각 단체의 개별적인 명의로 하지 말고 반드시 상해 임시정부의 지정하는 명의로 할 것. 2. 연호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할 것. 3. 임시 정부에 대표를 파견하여 이상 사실을 보고하고 통일 法名을 요청할 것. 4. 통일 기관은 국내와 접근한 압록강 연안 적당한 지점에 둘 것. 5. 上記 통일기관 경비는 원칙적으로 각 단체가 평균 부담하되 국내로부터 특별 수입금은 통일 기관 군사비에 보충할 것. 이상의 합의 사항에 의거하여 이듬해 즉 1920년 2월에는 우선 각 단체와의 통일적인 연락 을 취할 수 있는 기구를 寬甸縣에 설치하고, 평북독판부와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활동하게 하였다. 이후 동년 5월 김승학 안병찬 이탁이 대표로 상해로 가서 남 북만주 독립운동 정화 및 통일기관 설치 관계의 보고를 하니 여기서 임시 정부에서는 光復軍의 參理部 司令部, 軍 營 설치 등에 관한 결정을 보게 되었다. 光復軍 參理部는 南北滿의 교민을 통치하는 기관으로 臨時政府 內務部에 직속하는 기관으 로 구성되었으며 그 任員은 다음과 같았다.11) 참리부장 : 趙秉準 재무사장 : 白基俊 협 찬 : 金承滿 법무사장 : 申彥甲 내무사장 : 申禹鉉 교통사장 : 白義範 외무사장 : 金斗滿 경무사장 : 尹昌壽 한편, 光復軍 司令部는 南 北滿의 모든 武裝抗日團體로 구성되는 군사기관으로서 臨時政 府 軍務部 직할로 하였으며 任員은 다음과 같았다.12) 사 령 장 : 趙孟善 부 관 : 呂淳根 참 모 장 : 李鐸 군정 겸 군기국장 : 金承學 군법국장 : 劉應夏 군령국장 : 朴利烈 소모국장 : 洪植 정 보 국 장 : 梁基瑕 훈련국장 : 여순근 이상의 두 기관 이외에도 獨立軍의 훈련과 日帝의 軍警 및 행정기관 파괴를 전담하는 軍 營을 각 지방에 설치하였다. 6개 군영으로 설치된 이 군영은 일제와 직접 항전하는 실질적인 무장부대로 결성되었는데 6개 군영의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第1營長 : 邊昌根 第5營長 : 崔 粲 第2營長 : 吳東振 第6營長 : 金昌坤 第3營長 : 洪 植 第4營長 : 崔時興 이상 6개의 지방군영 중 최강의 부대는 吳東振이 지휘하는 第2營이었다. 第2營의 핵심 구 성원은 吳東振이 渡滿한 후 제일 먼저 결성하였던 廣濟靑年團 團員으로서 이들은 투철한 항 일정신으로 무장된 정예분자였다. 따라서 吳東振 휘하의 부대는 당시 독립군 중 최고의 정 예부대라고 할 수 있었다. 이상과 같이 조직된 광복군사령부는 그후 광복군총영으로 개편되었다. 당시 광복군사령부 11) 위의 책 p.267. 12) 위의 책 pp.267 268.
는 각계의 지도자로 구성된 영도기관이기 때문에 戰闘軍團으로서는 비효율적으로 짜여 있었 다. 그래서 막강한 전투군단으로서의 개편이 불가피한 실정이었다. 따라서 동년 7월 독립전 쟁의 제1선을 담당하는 선봉부대로서 光復軍總營이 결성되었다. 여기에서의 總營長은 최강 의 정예부대를 거느리고 있던 吳東振이 주대되었고 參謀部長에는 李鐸, 그리고 經理部長에 는 趙孟善이 임용되었다.13) 總營長 吳東振은 자신의 가산을 모두 털어 무기를 구입하고 조 직을 강화시켜 나갔다. 당시 제정된 光復軍總營 約章을 보면14) 당시 光復軍總營의 소재지는 寬甸縣인데 約章에서는 서울에 總營을 설치하기로 되어 있으며 道에는 道營, 郡에는 郡營을 두고 주요 군사요충지에는 別營을 설치한다고 규정하였다. 이로써 본다면 總營을 계획할 당 시에는 國內組織에 중점을 두었던 것 같다. 그리고 4조 5조에서는 營員은 18세 이상 50세 이하의 남녀로서 보통 軍制에 준하는 권리 의무를 가질 것을 규정하고 다음 6조 10조에서는 총영 도영 군영 별영의 4부로 본영을 형 성하였다. 이의 내용을 살피면 도영은 5개소 이상의 郡營이 있는 도에, 군영은 10대 이상 1 백대 이하의 조직이 있는 군에, 별영은 10대 이상 1백대 이하의 결사군으로 조직된 각 요새 지에 설치하며, 총영에는 군사부 참의부 재정부를 두어 사무를 통할할 것을 규정하였다. 그 리고 11 14조에서는 총영 도영 군영 별영의 직원을 규정하였는데 각영의 부서 조직을 보면 아래와 같다. 총영 총영장 1인 참의부장 1인 도영 도영장 1인 참의장 1인 군영 군영장 1인 별영 별영장 1인 비서 2인 참의 약간인 비서 2인 참의 5인 부관 2인 부관 2인 군사부장 1인 재정부장 1인 군사장 1인 재정장 1인 참의 3인 참의 3인 부관 약간인 경리 약간인 부관 2인 경리 3인 경리 2인 그리고 隊伍編制에 있어서는 대원 10명에 隊長을, 대장 10명에 특무대장을, 군내 특무대장 위에 郡營, 도내 각 군영 위에 도영을, 13도 도영 위에 총영으로 조직하였다. 또 내외 각 중 요지점에는 총영장이 재결하는 특무기관을 설치하게도 하였다.15) 이 광복군총영 약장에 보이는 국내 設營계획은 대한 독립단의 국내 총지단 지단 설치계획 과도 유사하였으며, 본국내에 도영 군영 등을 조직 설치하였다가 내외 합세로 조국광복전을 승리로 이끌려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1920년 7월 이후 오동진은 국내에도 군영 설치계획을 추진하였으며 경고문을 국내에 배포하여 국내에 있는 적 기관에서 일하는 자 및 일반 동포 들의 경각심 분발을 촉구하기도 하였다.16) 그러나 오동진의 이러한 대 국내활동 설치 계획은 당시 일제 침략자의 삼엄한 경계와 야 만적인 폭압 수단이 계속되는 중에서 실현을 보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광복군총영이 설 치된 후에 총영원 徐奉根 金德湖 등은 평안남도 安州 平原郡 등지에서, 趙昌龍 李熙道 등은 13) 위의 책 p.268 14) 大韓民國 2년 7월 1일에 約章이 공포되었음(국사편찬위원회, 韓國獨立運動史 資料 3). 15) 앞의 책 독립운동사 제5권 p.270. 16) 光復軍總營에서 발표한 對日人警告文은 다음과 같다. 我等은 天下의 大義나 國家危急함을 생각하며 諸君에게 告한다. 너이들에게 告하노니 너이들은 무슨 원수가 있길래 我同胞를 해 치느냐. 速히 물러가지 않으면 벼락이 머리위에 떨어지리라 네 生命과 子孫을 保存하고 싶거 든 速히 물러가라 ( 武裝獨立運動秘史 p.63).
황해도의 新溪郡 등지에서 郡營 道營 설치를 위한 조직을 시도하였다. 또 金聖燁 崔志寬 李 運逢 등 사령부 출장원들은 義州 龜城 등지에서 지방 조직과 군자금 모집을 겸한 맹렬한 활 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서는 일제의 경찰과 밀정이 들끓는 형편이었으므로 그 들의 활동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지사들은 대개 적측에 체포되어 순절 또는 옥고를 치르 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독립군의 국내설영계획은 말하자면 이미 시기가 늦은 일이었 던 것이다. 때문에 도 군영 및 별영의 설치 계획은 이보다 더 앞서 평안북도의 義州 龜城 朔 州의 交界에 있는 天摩山을 근거지로 독립투쟁을 벌여오던 천마산대와 碧潼 波猪江 연안에 서 무장활동을 벌이던 일부의 무장 단체가 광복군의 산하에서 天摩別營과 碧波別營으로 개 편하는 정도에 그치게 되었다. 그리고 광복군총영은 총영장 오동진에 의하여 계속 운영되고 또 많은 국내 진입작전을 통하여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1922년 8월 7일 오동진은 제2회 정기대회를 개최하고 다음과 갈은 개회사를 통하여 분발 할 것을 촉구하였다.17) 금일 우리들이 비상한 시기와 위험한 지대에 처함을 불구하고 제위의 다수 참석하심에 대하여 喜悲交感함을 불금하나이다. 금일에 과거 수 년사를 회고하면 우리가 적의 무도한 저항중에서 조 국을 위하여 鞠躬盡瘁 하여 온 결과 頗히 양호한 성적을 收하였음은 전혀 諸位의 열성에서 나온 줄 압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으로 만족하다 할 것이 없으니 우리 祖國을 아직 광복치 못하였음 이요 또 우리의 과거 경험으로 결점이 없지 않았음을 각오할 바라 바라옵건데 여러분은 이 석상 에서 모든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여 장래 우리 사업의 성공의 기초가 될 모든 큰 방침을 확립함이 本營과 또 우리배달 민족 전체의 운명문제인즉 여러분은 힘을 다하고 정성을 쏟아 본 회의에 철 저한 의견을 제공하심을 희망한다. 이날 회의에서는 約章修正 任員改選 後援團體問題 南滿獨立團體 統一問題 將來의 活動方 針 國民代表會議에 대한 問題 등을 협의 하였다. 한편 개선된 임원을 보면 다음과 같다.18) 營 長 : 吳東振 軍事部長 겸 參謀部長 : 白南俊 經理部長 : 李寬麟 鐵馬別營長 : 崔時興 碧波別營長 : 金永和 광복군총영은 결성된 후 즉시 독립전쟁을 전개하여 놀랄 만한 전과를 올렸다. 창설 당연 도인 1920년에만 하더라도 日帝의 軍警과의 交戰이 78차, 駐在所 습격이 56개소, 행정기관 파괴가 20개소, 사살 95명의 戰果를 올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광복군총영의 활동에서 국내외를 경악시킨 일은 美國議會員團이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에 일으킨 무장활동이었다. 당시 상해에 있던 임시정부는 미국 국회의원단이 내한하는 것을 계기로 우리 국민이 얼마나 독립을 염원하고 있는가를 이들에게 보여주기 위 하여 국내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킬 것을 계획하였다. 그리하여 政府는 이 중대한 사명을 광 복군총영에서 전개하도록 하였다. 임시정부의 명령을 받은 총영장 오동진은 대원중에서 정예대원을 선발하여 이를 시행하도 록 하명하였다. 당시 선발된 사람은 安敬信(女) 張德振 朴泰烈 文逸敏 鄭仁福 金某 林龍日 李 學弼 金榮哲 金最明 金聖澤 등으로 당시 吳東振은 이들을 4개조로 편성하여 각기 임무를 부 여하였다.19) 17) 독립신문 1922.9.20. 18) 위의 자료.
당시의 명령 사항을 보면 안경신 장덕진 박태열 문일민은 평양으로, 정인복 김모는 新義州 로, 임용일 이학필은 宣川으로, 김영철 김최명 김성택은 京城으로 들어가서 대기하다가 美議 員團이 그 지방을 통과할 무렵에 건물을 파괴하고 적 관리를 처단하여 독립운동의 기세를 올리게 하라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군령에 의하여 용사들은 각기 임지에서 진입 행동 을 개시하였다. 그 중 안경신 일행은 도중 安州에서 심문하는 경찰을 사살하였고 장덕진 등 은 8월 3일 평안남도 도청과 경찰부 건물에 폭탄을 던져 일부 건물을 파괴하였다. 또한 정 인복 등은 신의주에서 정거장 부근 건물을 폭파하고, 임용일 이학필은 선천 읍내에서 경찰 서 군청에 폭탄을 던졌으며 단장 김영철을 중심으로 한 일행은 서울로 들어와서 미국의원단 이 도착할 때를 기다리면서 서울역 앞과 총독부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던져 국내외를 진동케 할 것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불행히 미국의원단이 入京하기 3일 전인 8월 20일 밤에 김영철 등 일행이 적 경찰 에게 체포되고 폭탄 권총 및 最急警告文 등 다수 문서까지도 강탈당하니 서울에서의 거사계 획은 성취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들이 적측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고 국내외에 준 충동과 영향은 상당히 컸던 것이다. 또 단장 김영철 이하 안경신 장덕진 등의 기민한 잠 입 경로와 대담한 활동은 세인을 감탄 분발케 한 쾌거였다. 오동진부대의 무장활동 중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를 전개한 것은 국내에 진입하여 일제의 통치기관을 습격 파괴한 이른바 국내 진입작전의 전개였다. 주로 일제의 경찰관서를 대상으 로 전개된 이 작전으로 말미암아 국경지방의 일제 식민통치는 거의 기능마비 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오동진부대의 주요 작전상황을 보면, 碧潼경찰서 三西주재소 朔州郡九曲面 순사주재 소 觀會面사무소 小貴面사무소 鶴會面사무소 厚昌郡 東興주재소 楚山 營林廠사무소 茂山郡 長三주재소 등 관공서의 습격을 주도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아울러 친일관리인 厚昌郡守 慈 城郡守 등을 사살함으로써 국경지대 한국인 관리들을 자진 사직하게 하였다. 또한 文學彬 孔周宣 李能學 등을 평북 벽동군에 파견, 군자금의 모집을 위하여 노력하기도 하였다. 광복군총영의 부대가 국내에서 활동하던 중 일본군 수비대와 조우하여 격전을 벌인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의주 용전 벽동 자성 창성 영원 강계 갑산 등 주로 韓滿國境 부 근에서 격전이 벌어졌다. 이와 같은 격전에서 큰 전과를 거두기도 하였으나 독립군의 희생 역시 적지 않았다. 吳東振이 지휘하는 光復軍總營의 獨立軍 중 國內에 주둔하며 치열한 抗日戰을 전개하였던 부대는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天摩別營과 碧波別營의 두 部隊였다. 이중 天摩別營의 활동 은 武裝獨立運動史上 특이한 존재였다. 모든 獨立軍이 근거를 滿洲에 두고 활동하는데 비하 여 天摩別營은 平北 朔州郡에 있는 天摩山을 본거지로 1919년부터 무장활동을 전개하여 찬 란한 전과를 올렸다. 吳東振은 光復軍總營을 조직하면서 國內支部의 조직에 대한 필요성을 인식하여 天摩山隊 를 지휘하고 있는 崔時興을 總營으로 불러들여 天摩山隊를 總營의 國內 部隊로 할 것을 협 의하였다. 그후 천마산대는 총영의 별영이 되었고 이후 平北 龜城 江界 熙川 楚山 昌城 雲山 寧遠 등 平北의 韓滿國境地帶에서 抗日戰闘를 전개하여 일제국경 수비에 치명타를 가하였 다. Ⅳ. 大韓統義府의 組織과 活動 19) 앞의 吳東振 豫審終結書.
오동진은 일본군의 만주출병과 재만한인 대학살작전으로 치명적인 타격을 받은 독립운동 계가 다시 그 상처를 딛고 재기하는 과정에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것이 1922년의 大韓 統義府의 결성이었다. 당시 吳東振은 항일무장독립 단체의 재편성과 통합에 뜻을 두고 자기를 찾아온 梁起鐸과 만나 통합운동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논의하였다. 양기탁은 만주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軍 政署 統軍府 韓僑民團 大韓獨立團 등을 하나로 통합하여 무장항일운동을 좀더 효과적으로 추진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吳東振은 즉각 찬동하고 그 일을 함께 추진하자고 하였다. 두 사람의 노력에 의하여 동년 8월 30일 桓仁縣 馬圈子에서 西路軍政署 大韓獨立團. 韓僑民團 大韓正義軍 大韓光復團 平北督辦府 光復軍總營 統軍府 등 8개 단체 대표 71명이 참가한 統 一會議가 개최되었다. 이 때 오동진은 金昌義 白南俊 등 5인을 光復軍總營 代表로 지명하여 동회의에 참가시켰 다.20) 이 會議에서 통합단체의 명칭을 大韓統義府로 할 것을 합의하고 모든 단체는 해체키 로 결의하였다. 새로운 통일 독립운동 기관인 統義府는 總長 副總長 아래 민사 교섭 군사 법 무 재무 학무 실업 권업 교통 참모의 10부( 독립 신문 에는 권업부가 없는 9부로 되어 있 다)를 두었으며, 부 밑에는 局을 두고 비서과와 사판소를 설치하여 남만지역 내에서의 독립 정부형태를 이루었다. 말하자면 민 군 정을 통일한 독립운동 기관이었던 것이다. 또한 이것 은 통의부의 전신이라고도 할 수 있는 통군부에서 그해 6월 20일 각 지방 總營회의를 통하 여 결의 실시한 바 있는 호적의 정리, 학교의 증설, 부업의 권장, 광복 운동으로 희생을 당 하거나 피해를 입은 가족에게 구휼금을 모집 전달하는 등의 일반적인 업무도 그대로 계속하 였다. 따라서 별개의 의용군 조직이 있다고는 하지만 실지에 있어서는 독립전쟁을 위한 군 사 방면보다 일반업무에 치중한 감이 없지는 않았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듬해 즉 1923년 12월 현재의 개편된 기구는 좀더 일반 업무를 간소화하 는 대신 군사 방면에 주력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즉 이 때의 개편 상황을 보면 기 구 조직에 있어서는 총장 아래에 민사 군사 재무 학무 교통 실업의 6부를 두었으며 지방 행 정을 담당한 민사 부장 밑에는 總監(管) 區長 檢務監 등등의 직제를 두고 군사 부장 밑에는 의용군사령장과 軍需局長 군무국장 호위국장을 두었으며, 법무부장 밑에 檢務국장 사법국장 을, 교통부장 밑에 교통국장을 두어 기구를 현실에 맞게 개편하였다.21) 이와 같이 統義府가 결성되었을 때 吳東振은 처음에는 交通部長 財務部長 民事部長 등 일 반 행정적인 직책을 맡아 교민사무에 종사하였다. 그러나 1924년 義勇軍 司令長 申八均이 항일전투 중 전사하자 그 뒤를 이어 軍事部長 겸 義勇軍 司令長이 되어 다시 무장항일 운동 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의 주요한 무장투쟁은 주로 평북 의주를 중심으로 한 한 만국경지대 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오동진의 武裝闘爭은 주로 평북 의주지역에서 전개되었는데 그곳이 그의 고향이라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듯하다. 즉 그는 1923년 4월 21일에 통의부 제5중대 소속 李龍淡 등에 게 평북 의주군 광평면 上廣面에서 군자금을 모집하게 하였으며 동년 6월 20일에는 이용담 외 5명에게 의주군 의주경찰서 永山市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 큰 전과를 올렸던 것이다. 20) 독립신문 1922.9.30, 독립운동사 제5권 p.420. 21) 위의 책 p.433.
Ⅴ. 正義府의 成立과 活動 재만독립운동단체의 통일단체로서 출발하였던 대한통의부는 오래지 않아 이념의 차이로 분열되고 말았다. 곧 보수적인 성격을 지닌 인사들이 개화적 성격을 가진 통의부 지도층에 반발하여 통의부를 이탈하고 새로이 義軍府를 결성하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분열로 인하여 서로 적대관계를 유지하며 분쟁을 초래하자 독립운동계는 다시 파국을 초래하게까지 되었 다. 더욱이 일제의 압력이 가중되고 재만중국당국이 일제와 접근하여 가는 시대적 상황 아 래에서 두 단체가 동족상잔의 비극을 연출하자 독립운동계의 재정비는 시급한 과제로 등장 하게 되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 아래 재만독립운동 8개 단체대표 25명이 1924년 7월 吉林에서 全滿統一 議會籌備會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吳東振은 李靑天 金東三 등과 협의하여 南 北滿 각 지역에 산재하여 있는 獨立運動團體를 통합하고자 맹렬히 활동하였다. 그리하여 大韓統 義府를 위시하여 吉林住民會 義成團 勞動親睦會 大韓匡正團 大韓軍政署 固本契 등 8개 단체 를 규합하는데 성공하였다. 이 統一會의 결과 새로이 統合團體로서 正義府를 결성하는데 합의를 보게 되었다.22) 그 내용은 1. 명칭을 정의부라 한 것은 인류 평등의 정의와 민족 생업의 정신으로서 광복대업 을 성취하려는 목적을 세웠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2. 정의부는 지방 치안을 위하여 무장 대를 두고, 3. 통치 구역은 당분간 하르빈(哈爾賓)과 額穆의 북간도의 선을 구분하여 그 이 남 만주 전부로 한다. 4. 세입으로써 매호 연액 6원과 따로 소득세를 부과한다. 각 단체들은 이상과 같은 결의를 하고 조직에 착수하였다. 그렇지만 정의부의 헌장과 조 직이 완성되는 때는 대개 1925년 1월 24일 경이었다. 이 때에 들어서야 비로소 중앙 행정위 원제도가 확정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때까지만 해도 통합한 각 단체가 완전히 해체하지는 않았다. 특히 통의부를 비롯한 각 단체의 완전한 해체시기는 그해 4월부터였다. 그러면 여기에서 1925년 4월 9일자로 발포된 포고령 제5호를 살펴 보기로 한다.23) 포고 제5호 본 중앙행정위원회는 제3회 중앙행정위원회의 결의안을 다음과 같이 포고함. 기원 4258년 4월 9일 중앙행정위원 李沰 玄正卿 池龍起 李靑天 李震山 金用大 金履大 尹秉用(德甫) 吳東振 1. 소득세 징수 규정 통과함. 2. 정의부 직제를 통과함. 3. 각 군대 장교는 현직에 유임함. 4. 전 대한통의부 사무 인계 위원은 池龍起 金用大를 명함. 5. 식비는 매인 매월 평균 9원으로 정하고 재무부에서 식표를 급여 또는 실비금 10원을 지불하 기로 함. 6. 임시수입 3만 원을 추가함. 7. 임시 수입액을 보충하기 위하여 동정금을 청구함. 22) 國史編纂委員會, 韓國獨立運動史 3 pp.130 131. 23) 독립운동사 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제5권 pp.485 486.
8. 公農 수익금은 월 2步 利割로서 민간에 대부함. 단, 불가항력의 재해를 당한 경우 스스로 생 활을 할 능력이 없는 자에 한함 9. 전 대한통의부로부터 인수한 사무중, 반동군 진압사항은 정전(停戰)하고 빨리 귀순하도록 노 력할 것임. 吳東振은 이와 같이 새로이 탄생한 正義府에서 中央執行委員으로 生計委員長職을 맡아 활 동하였다. 그러나 그는 1925년 다시 본래의 직분인 軍事部委員長 겸 總司令官에 임명되어 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정의부는 상비군으로 약 7백명의 병력으로 8개 중대 및 헌병대와 民警隊를 두었으며 모젤과 부로우닝 권총 그리고 소총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한편 농촌에는 군사 보급회를 설립하여 청년장교를 파견, 군사훈련을 시킴으로써 동포사 회의 마을마다 독립운동의 준비태세를 완비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相助契 韓備同鄕令 같은 친일단체를 격파하면서 동포사회 자체내의 질서를 도모하기에 노력함과 아울러 국내진격을 수행하였다. 국내진격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25년 3월 19일 평안북도 楚山과 碧潼郡 의 경찰을 공격한 일이다. 이것은 참의부의 고마령참변24) 직후이어서 더욱 뜻있는 독립전투 이었다. 독립군은 3월 18일 밤에 3대를 편성, 출발하여 19일 새벽에 모두 공격하였다. 제1대는 예 정대로 초산군 성면 鹰岩里 楸洞里 주재소를 공격하여 추동주재소를 소각하고 일경순사부장 이하 3명을 사살하고 4, 5명을 부상시켰다. 제2대는 압록강변에서 일경과 만나 싸워 예정대 로 목적지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다. 제3대대는 벽동군 오북면 如海洞 주재소를 공격하여 일 경의 경부 西川隆吉을 사살하고 주재소를 소각하였으며 장총 1정을 노획하였다.25) 이와 비슷한 독립전쟁은 정의부 창설이래 수 없이 있었다. 그러나 1925년 6월 소위 三 矢協定 이 체결된 후에는 참의부처럼 활동에 제약이 많아 용이하게 추진되지는 않았다. 국 내진격전의 경우 정의부는 참의부만큼 활발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정의부보다 참의부가 국경선 근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또한 참의부가 원래 군사단체로 출발하였으나 이와 달리 정의부는 독립전쟁도 중요했지만 동포사회의 안녕질서와 산업이나 교육의 향상도 돌보 아야 하는 자치단체로 출발하였기 때문이었다. 정의부에서 활동하던 吳東振은 1926년 3월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吉林省 吉林城內에서 高 麗革命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에는 정의부의 玄正卿 高豁信 등을 비롯하여 소련서 돌아온 李圭豊 朱鎭壽 崔素水 그리고 국내 天道敎 革新派인 高麗革命委員會 金鳳國 李東洛, 衡平社 의 李東求 宋憲 등이 참여하였다. 그는 同黨의 委員으로서 위원장 양기탁을 보좌하며 정치이념을 실현하고자 하였다.26) 아 울러 1927년 8월에 吉林縣에서 金錫河 이청천 김동삼 등 정의부의 일부 간부들과 함께 고려 혁명당의 이념에 따라 정의부의 목적을 변경하고자 하였다. 또한 군사부위원장 겸 사령관으 로서 군대를 고려혁명군 이라 칭하고 혁명이념을 실천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오동진의 활동은 공산주의 사상이 만연되어져 가는 가운데 민족진영 독립운동가가 취한 자발적인 변 신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오동진은 이시기에 재만한인의 생활개선에 대하여 관심을 기울이기도 하였다. 당시 재만 24) 古馬嶺慘變은 1925년 3월 16일 臨政의 직할군사단체인 陸軍駐滿參議府가 輯安縣 古馬嶺에서 軍事幹部會議를 개최 중에 日軍警의 기습을 받고 幹部 대부분이 피살되었던 사건을 말한다. 이 慘變을 복수하기 위하여 正義府에서는 國內進入作戰을 전개하였다. 25) 韓國獨立運動史 4, pp.133 135, 武裝獨立運動秘史 p.137. 26) 武裝獨立運動秘史 p.139.
한인 인사들은 대부분 가난한 소작농들이었으나, 이들의 대부분은 사실상 독립군의 인적자 원임과 동시에 독립운동자금을 부담하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오동진은 1927년 安昌浩와 梁起鐸이 추진하던 在滿同胞 生活改善運動에 적극 참여하여 동년 4월 1일 金基豊 金履大 金 東三 李沰 등 민족지도자들과 함께 吉林省 大東門 밖 大東公司 내에서 農民互助社를 조직하 였다. 이 단체는 토지를 買受하여 새로운 농촌을 건설함을 목적으로 하고 각기 토지를 매입할 자금을 5개년간 저축키로 하였으며 근대적 영농기술을 도입하여 僑民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로 하였다. 또한 在滿韓人의 교육발전에 뜻을 두어 각지에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국내로부터 中等 이상의 교육을 필한 사람을 敎員으로 초빙하여 愛國敎育을 실시하는 한편 위생과 보건 에도 뜻을 두어 병원의 설립까지도 시도하였다. 이러한 오동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被逮되었으며 滿洲事變이 발발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하지 못하였다.27) Ⅵ. 被逮經緯와 獄中闘爭 在滿僑民의 生計를 위하여 農民互助社를 만들어 활동하던 오동진은 무엇보다 자금의 결핍 으로 큰 난관에 봉착하였다. 어떻게 하든지 資金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활동하던 오동진은 뜻 밖에 자금을 제공할 의향이 있는 독지가가 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고 그 독지가를 만나려 고 하다가 체포되었다. 오동진의 피체에는 일경의 간악한 계략과 밀정의 치밀한 공작 때문이었다. 곧 그가 재만 독립운동계의 지도적 인물임을 이미 간파한 일경은 그의 체포에 현상금 10만원을 내걸고 갖 은 농간과 술책을 사용하였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밀정으로 하여금 오동진을 유인 토록 하였던 것이다. 밀정은 金宗源이란 자로서 만주에서 正義團 단원으로 독립운동에 종사하다가 체포되어 복 역한 사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출옥 후 일제에 투항하여 밀정으로서 만주에 파견되어 활 약하였다. 그는 吳東振에게 접근하여 신임을 받았으며, 오동진의 경우 김종원이 밀정으로 파 견된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오동진은 그가 과거에 독립운동하다가 일 경에 피체된 경력만을 믿고 그를 전폭적으로 신임하여 자기의 집에 기숙토록 하는 등 편의 를 베풀어 주었다. 그는 오동진이 자금난으로 곤경에 처하여 있음을 탐지하고 자기가 직접 금광업자인 崔昌 學으로부터 자금을 얻어 오겠다고 감언이설로 꾀었다. 吳東振은 신임하던 부하의 말에 넘어 가 여비를 마련하여 출발시켰다. 얼마 후 김종원이 돌아와서 崔昌學과 교섭이 잘되어 그가 길림에 와서 직접 오동진에게 자금을 건네어 주려 한다고 속였다. 이에 자금난으로 허덕이 던 오동진은 앞뒤 생각없이 김종원과 함께 최창학이 있다는 長春帖 부근 新蔭河로 갔다.28) 김종원에 유인된 吳東振은 1927년 12월 26일 미리 그의 연락을 받고 매복하고 있던 일경 에 의하여 체포되고 말았던 것이다. 1919년 만주로 망명하여 1927년 체포되기까지 만주에서 무장항일운동을 주로하여 왔던 吳東振은 이와 같이 뜻을 다 펴지 못하고 피체되었던 것이 다. 27) 위의 책 pp.144 145. 28) 大韓民國獨立運動功勳史, 東亞日報 1928.2.12.
신의주로 압송된 오동진은 조금도 굽힘이 없이 당당하게 일경의 심문에 응하여 자신의 소 신을 두려움 없이 피력하였다. 당시 취조를 담당하였던 예심판사 사이또는 吳東振의 인품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 있다.29) 오동진은 남북만주 독립단의 수령인 만큼 그 개인적 인격에 있어서는 여간한 인물이 아닙니다. 대체 취조하는 우리로도 이러한 인물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는 옥중에서도 일제에 대항하여 단식투쟁을 전개하였다. 45일간 물만 마시고도 조금도 기운이 衰한 빛을 보이지 않았으며, 목욕도 보통사람과 똑같이 하면서 자신의 예심종결서를 탐독하는 모습은 일본 형사들 사이에 큰 화제가 되기도 하였다. 한편 오동진이 체포된 후 정의부에서는 그를 구출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1927년 7 월 초순에 그의 심복부하인 제5중대 상등병 張基仙과 崔成俊 등은 압록강을 건너 국내에 잠 입, 약 5개월동안 평북일대에서 오동진의 구출을 위해 활동하였다. 또한 1928년에도 오동진 의 심복부하인 金汝英이 신의주에 잠입하여 신의주형무소에서 오동진을 구하려다가 일경에 게 체포되었다. 그리고 朴景喆 외 7명도 吳東振救出決死隊를 조직하여 신의주 대안 安東縣 에 진출하여 계획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무산되었다. 1929년 12월 6일 예심종결과 함께 신의주지방법원 합의부에 기소된 그는 制令7號違反 치 안유지법위반 강도 살인 방화 등의 죄명으로 무기징역을 언도받았다. 17년 동안 옥중생활 끝에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그는 1944년 옥사하였다.30) 맺음말 이상에서 오동진의 독립운동 발자취를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오동진이 재만무장독립운동 계에서 차지하는 특별한 위상은 대개 다음과 같이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지 않을까 한 다. 첫째 머리말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당시 재만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상해에 수립된 대한 민국 임시정부를 기피하는 일반적 현상에서도 그는 오직 임시정부의 옹호를 부르짖고 임시 정부의 산하 재만무장단체의 통합을 주장하여 재만광복군사령부를 구성하는데 결정적 역할 을 하였다. 둘째 그는 강력한 무장단체를 편성하여 무장운동을 지휘하면서도 독립운동의 기반 구축에 노력하였다. 셋째 피체된 이후 옥중에서도 끝내 항거하여 단식을 전개하다 순국하였다. 이상의 특기 사항 이외에 한가지 부언할 것은 그는 직접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소 속 독립군을 지휘하여 큰 전과를 남겼다는 점이다. 자료의 부족으로 더 심층적인 연구가 되 지 못하였음을 안타깝게 생각하는 바이며 차후 오동진에 대한 더욱 심오한 연구가 있기를 바란다. 29) 東亞日報 1928.2.13. 30) 治安本部에 소장되어 있다가 國史編募委員會로 이관된 寫眞表(일제경찰이 작성한 犯罪人 寫 眞表)에는 平壤覆審法院에서 無期懲役이 확정되어 京城刑務所에서 服役하다가 20년으로 감형 되었고, 그후 다시 15년으로 감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진표에 기록된 그의 身長은 1m 61cm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