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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麗後期 座主 門生 關係의 變化와 그 性格 元 干涉期를 중심으로 柳 浩 錫* Ⅰ. 머 리 말 Ⅱ. 座主 門生의 關係와 그 性格 Ⅲ. 試驗官의 政治的 社會的 背景 Ⅳ. 科擧의 運營과 國王 Ⅴ. 座主 門生 關係의 發展과 그 實態 Ⅵ. 맺 는 말 Ⅰ. 머 리 말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려시대의 좌주와 문생이란 문신을 선발하기 위한 과거시험, 특 히 禮部試의 시험관과 그 시험관에 의해 급제자로 선발된 사람을 각각 가리킨다.) 이들 양자의 관계는 매우 엄격하면서도 친밀한 것으로 평생을 통하여 계속되었으며, 당시의 과거제는 물론 官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그것이 크게 번성하고 그에 따른 폐 단이 정부에서 거론되는 것은 고려후기의 일이다. 대체로 좌주 문생의 관계는 무인정권에서 부터 점차 발전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원 간 섭기에 크게 번창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좌주 문생 관계의 발전과 변화는 과 거제의 운영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당시의 정치와 사회 전반의 변화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이라는 점에서 주목할만한 가치가 있다. 이제 본고에서는 원 간섭 기를 중심으로 하여 좌주 문생의 관계가 어떻게 변화하였으며 그 실태는 어떠하였는가를 검토함으로써 당시의 사회를 이해하는데 보탬이 되고자 한다. Ⅱ. 座主 門生의 關係와 그 性格 * 全北大學校 講師. ) 물론 국자감시의 시험관과 그에 의하여 선발된 합격자 사이에도 좌주와 문생의 관계가 없었던 것 은 아니지만, 본고에서의 분석은 예부시의 그것에 국한하였다.

- 6 - 좌주와 문생의 관계에 대하여 高麗史 선거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나라의 풍속에 시험을 관장하는 자를 學士라 이르고 門生은 그를 恩門이라 부른다. 門 生과 座主(학사)의 禮는 매우 정중하였다. 학사에게 부모가 있더라도 만일 그 학사에게 (그를 선발한) 좌주(즉 좌주의 좌주를 가리킨다)가 (생존하여) 있으면 (부모를 찾아가기 에 앞서서) 학사는 放榜을 한 뒤에 반드시 公服을 갖추어 입고 가서 (자신의) 좌주를 찾아 뵙는데 문생들은 줄을 지어 그 뒤를 따라간다. 학사는 앞에서 (좌주에게) 拜하고 문생은 뒤에서 拜한다. 여러 賓客들은 그들이 비록 웃어른이라 하더라도 모두 마루에서 내려 와 뜰에 서 있다가 禮가 끝나기를 기다려 揖讓하고 올라가 차례로 拜하며 축하한 다. 그 뒤 학사는 좌주를 자기 집에 맞이하여 술잔을 드리고 만수무강을 축원한다( 高 麗史 권74, 選擧志2 科目2 試官). 위의 기록은 좌주와 문생간의 禮가 대단하였음을 가리키는 사료로 흔히 인용되고 있 는 것이기는 하지만, 좌주와 문생의 관계를 이해하는 데 한 가지 중요한 시사를 준다. 그것은 좌주와 문생의 관계가 단순히 좌주와 문생 양자의 관계에 머무르지 않고 좌주의 좌주, 또는 바꾸어 말하면 문생의 문생으로까지 이어지며 또한 그 혈연으로까지 확대 발 전하는 관계였다는 점이다. 원래 회의 과거에서 선발되는 인원이 30명 안팎의 소수에 불과하였던 만큼,2) 비록 좌주 문생의 관계가 평생 계속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극히 제한된 소수집단 내부 의 폐쇄적인 관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관계가, 위의 사료에서 보는 것 처럼, 좌주의 좌주 또는 문생의 문생으로부터 그 혈연으로까지 확대되기에 이르러서는 그 관계의 파급효과는 매우 광범위한 것이었다. 더욱이 과거 합격자의 상당수가 관계에 들어가 고위 관직자인 좌주를 중심으로 하여 결속될 때 그것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매 우 큰 것이었다. 그런데 좌주 문생의 관계에 관한 사료는 고려전기에는 별로 찾아 볼 수 없으며 대체 로 무인정권 이후의 고려후기에서 나타난다. 아마도 이것은 고려전기보다는 후기에 들어 와 좌주 문생의 관계가 번성한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좌주 문생 의 관계는 과거제가 처음 실시된 광종대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고 려초기의 경우 급제자의 수가 비교적 적었을뿐더러3) 매회 시험관의 수도 문종 말년에 이르도록 명에 불과하였기 때문에4) 시험관과 급제자의 관계가 크게 번성할만한 여건은 2) 고려시대의 과거의 실시횟수와 급제자 수에 대하여는 졸고, 武人執權期 科擧制의 運營과 薦擧 制 ( 全北史學 4, 99) p.38의 표 참조. 3) 위의 주 2)와 같음.

- 62 國史館論叢 第55輯 못되었다고 할 수 있다. 좌주의 생전에 문생이 시험관을 맡는 사례가 무인정권기에 와서야 비로소 나타나는 것도5) 바로 그러한 초기의 실정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급제자와 시험관의 수가 적었다면 당연히 좌주의 생전에 문생으로서 시험관을 지내는 경우란 매우 드물게 마련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좌주와 문생의 관계가 단지 좌주가 좌주를 낳는 데에서만 번창한다고는 말할 수 없다. 예컨대한 사람이 시험관을 여러번 지낼 때에도 비슷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었 다. 같은 좌주의 밑에서 각기 다른 해에 급제한 문생들이 그 좌주를 중심으로 하여 서로 간에 동류의식을 느낄 수 있을 터이기 때문이다. 사실 2회 이상 禮部試의 시험관에 중임 된 사례는 과거가 시작된 광종 이래 자주 발생하여 이미 무인난 이전에 40명의 중임자 가 나왔다.6) 그렇지만 시험관의 중임 현상이 빈번하게 일어났다고 하여 그것이 곧 바로 좌주 문생 관계의 번창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좌주가 좌주를 낳는 경우에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것은 좌주의 정치적 영향력이었다. 좌주의 정치적 입지가 확고할 때 그와 문생의 관계도 훨씬 더 공고한 형태로 발전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아가 서는 좌주와 문생, 문생과 문생들의 관계가 단순한 인간적 유대 관계에서 벗어나 정치적 집단의 성격으로까지 확대될 수도 있게 되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무인난 이전의 고려전기에 시험관의 중임 현상이 빈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좌주 문생의 관계가 그다지 발전하지 못한 것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급제 자나 시험관의 수가 적었던 데다가 좌주의 정치적 영향력이 그리 크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었던가 생각된다. 물론 무인난 이전의 고려전기라고 하더라도 그 기간이 2백여년에 이르는 기간인 만큼 좌주의 영향력의 정도는 각 왕대마다 상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당 시의 시험관의 대부분이 禮部나 國子監, 또는 翰林院의 관리였다는 사실은, 무인정권 이 후 中書門下省이나 承旨 출신의 관리가 시험관에 자주 임명되었던 사실과 견주어 볼 때,7) 상대적으로 그들 시험관의 정치적 비중이 작은 것이 아니었던가 하는 추측을 불러 일으킨다. 禮部試 합격자를 대상으로 하여 국왕이 자주 覆試를 실시하였던 점도 이런 측면에서 그 의미를 생각할 수 있다. 成宗 2년(983)에 처음 실시된 복시는 睿宗 5년(20)을 마지 4) 禮部試의 시험관이 매회 2명으로 된 것은 文宗 37년의 일이었다. 그 이전에는 光宗 23년에 이례적 으로 2명을 두었던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매회 명씩이었다. 高麗史 권73, 選擧志 科目 選 場 및 권74, 選擧志2 科目2 試官 참조. 5) 무인정권기인 明宗 2년에 崔惟淸의 문생이었던 韓彥國이 同知貢擧를 맡은 것이 그 최초의 사례이 다. 本朝光王時 始以詩賦取士 然未嘗有宗伯得見生掌選者 至明王初 學士韓彥國 率門生謁崔相國惟 淸 ( 破閑集 上). 6) 고려시대의 과거 시험관 중 중임자의 수에 대하여는 졸고, 앞의 논문 p.42의 표 2 참조 7) 이에 대하여는 다음의 Ⅲ. 試驗官의 政治的 社會的 背景 참고.

- 63 막으로 중단되었으며, 그로부터 250년이 지난 恭愍王 8년(369)의 科擧制 改革에서 殿 試라는 이름으로 비로소 항구적인 제도로 부활되었다.8) 따라서 복시는 대체로 고려전기 에 집중적으로 실시된 셈이다. 이 시험은 예부시 합격자에 대한 재시험이라는 점에서 시 험관에 대한 국왕의 견제를 뜻하는 것이었다. 곧 과거에 대한 국왕의 개입을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과거가 실시될 때마다 복시가 실시된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복시가 항상 예부시의 시험관을 견제하기 위해서만 실시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좌주 문생의 관계와 관련하여 복시의 시행이 갖는 의의는 오히려 다른 데 있 었다. 즉 복시를 실시함으로써 과거 급제자들은 예부시 시험관에 의해 선발되었기보다는 복시의 주재자인 국왕에 의해 선발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다는 점이다. 요컨대 예부 시의 시험관이 그 합격자들에 대하여 좌주로서의 입장을 견지하기가 그만큼 어려워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무인난 이후 무인정권에서 좌주 문생 관계가 차츰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데에는 복시가 실시될 수 없었던 시대적 요인도 크게 작용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무인정권으로서는 과거에 대한 왕권의 개입을 초래할 수 있는 복시의 실시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무인정권의 집권자들에게는 새로운 관리를 선발하는 일 이야말로 기존의 관리층에 대한 숙청작업 못지않게 기왕의 문신 지배권력구조를 개편하 기 위한 중요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직접 과거의 운영에 관여할 명분이 없었던 무인 집권세력은 측근의 인물을 되풀이하여 시험관에 기용함으로써 과거에 간접적으로 개입하는 방법을 택하였다.9) 이리하여 과거의 운영에서 시험관의 권한은 좀 더 확대될 수 밖에 없었으며, 이같은 시대적 배경에서 좌주 문생의 관계는 활기를 띠게 되었다. 그러나 무인정권에서의 좌주 문생 관계의 발전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었다. 그들 좌주 의 위에 그들을 실질적으로 발탁하였던 무인집권자가 좌주의 좌주, 곧 대좌주로서 도사 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당시의 시험관들이 사실상 무인 집권세력에 의해 임명 된 그의 측근 인물이라는 데서 오는 당연한 결과였다.0) 따라서 좌주 문생의 관계도 어 디까지나 무인집권자의 영향력의 범위 안에서 발전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런 한계 에서나마 차츰 물꼬를 트기 시작한 좌주 문생 관계의 발전은 무인정권이 몰락하고 고려 가 원나라의 강력한 영향에 들어가는 새로운 사태의 전개에 따라 전대와는 다른 면모를 지니게 되었다. 8) 覆試와 殿試에 대하여는 졸고, 高麗時代의 覆試 ( 全北史學 8, 984) 참조. 9) 졸고, 武人執權期 科擧制의 運營과 薦舉制 ( 全北史學 4, 99) pp.4 47 참조. 0) 朴菖熙, 崔忠獻小考 ( 史學志 3, 969) pp. 3.

- 64 國史館論叢 第55輯 표 元干涉 禮部試 시험관의 명단

- 65 이제 국왕의 정치적 입지는 무인집권기와는 매우 다르게 설정될 수밖에 없었으며, 또 한 시험관의 위상도 전대와는 다른 방향에서 재정립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좌주 문생의 관계는 물론 과거의 운영 전반에 걸쳐 큰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 의 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시기의 시험관이 어떠한 인물이었는가를 살 펴보는 일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Ⅲ. 試驗官의 政治的 社會的 背景 忠烈王代 이후 忠定王代까지의 원 간섭기에 禮部試의 시험관에 임명된 사람은 모두 62명인데, 이들 중 2회 이상 시험관을 역임한 사람은 7명이므로 중복된 인원을 빼면 실 제 인원은 55명이 된다. 이들의 명단은 다음에 첨부한 표 과 같다.) 이들 62명을 대상으로 우선 그들이 시험관 임명 당시 어느 정도의 위치에 있었는가를 당시의 官品을 통하여 살펴 보기로 하자. 장원 급제자의 이름과 급제 인원을 수록한 高麗史 選擧志의 選場에는2) 매회의 시험관의 이름 외에 임명 당시의 관직명도 대 부분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이를 통하여 그 지위의 정도를 엿볼 수 있다. 이제 이들 시 험관을 그 관품별로 나누어 다른 시기의 그것과 비교하여 살펴 보면 다음에 첨부한 표 2 와 같다. 이 표에서 보듯이 원 간섭기에 그 관직이 확인 가능한 시험관의 압도적인 다수가 3품 이상의 고위 관직자였으며, 知貢擧의 경우 2품 이상의 재상이 거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封君者로 시험관에 임명된 경우도 이 시기에 들어와 비로소 나타나고 있 다. 이러한 수치는 무인정권이나 그 전대에 비하여 좀 더 고위의 관직자들이 자주 시험 ) 관련자료 난의 경우 편의상 略稱을 사용하였는데, 史 는 高麗史 를, 文 은 東文選 을, 總 은 朝鮮金石總覽 상권을, 追 는 韓國金石文追補 를, 河 는 西河集 을, 古 는 허홍식편의 한국의 古文書 (民音社, 988)를, 陽 은 陽村集 을, 霽 는 霽 亭集 을, 拙 은 拙藁千百 을, 稼 는 稼亭集 을, 上 은 李基白 편의 韓國上代古 文害資料集成 (一志社, 987)을, 歷 은 歷史學報 를, 李 는 斗溪李丙燾九旬紀念韓國史 學論叢 (知識產業社, 987)을 각각 가리킨다. 다만, 高麗史 選擧志 選場이나 榜目의 자료는 이를 일일이 밝히는 번거로움을 피하였다. 그리고 册名 다음에 쓰여진 숫자는 高麗史 와 기타 文集의 경우는 해당 卷數를, 나머지는 모두 해당 면수를 각각 가리킨다. 당해 인물의 전기나 묘지 명일 경우 그 이름을 기재하는 것을 생략하였으나, 동일인물이라 하더라도 다른 이름으로 기재되 어 있거나, 또는 다른 인물의 열전에 그 전기가 附載되었거나 그에 관련된 기사가 나오는 경우, 또는 다른 인물의 묘지명에 관련기사가 나오는 경우에는 특별히 그 다른 인물의 이름을 밝혔다. 한편 시험관의 등급 난에서 정 은 知貢擧를, 부 는 同知貢擧를 각각 가리킨다. 2) 앞으로는 편의상 이를 選場 으로 줄여 쓰도록 하겠다.

- 66 國史館論叢 第55輯 표 2 高麗時代 禮部試 試驗管의 官品別 分類 종품 정2품 종2품 정3품 종3품 정4품 종4품 정5품 종5품 封 君 不 明 총 계 정 3 5 5 4 3 23 55 정 3 0 4 光宗 靖宗 부 소계 3(5.4) (.8) 5(8.9) 5(8.9) (9.6) 4(7.) 3(5.4) 24(42.9) 56(00) 忠烈王 忠定王 부 소계 (.6) 3(4.8) 0(6.) 7 2(33.9) (.6) (.6) 종품 정2품 종2품 정3품 종3품 정4품 종4품 정5품 종5품 封 君 3 不 明 0 총 계 3 3 * 괄호 안은 백분율임. 4(6.5) 2(33.9) 62(60) 정 4 4 2 3 5 8 77 정 7 2 8 20 文宗 毅宗 부 소계 4(3) 5(.) 2(5.6) 4 27(20) 9 0(7.4) 5 20(4.8) (0.7) (0.7) (0.7) 7 35(26.) 58 35(00) 恭愍王 恭譲王 부 소계 (2.5) (2.5) 9 6(40) 9 (27.5) (2.5) 20 8(20) 2(5) 40(00) 정 2 30 8 5 66 정 30 68 42 6 6 4 3 57 249 明宗 元宗 부 소계 3(2.3) (8.3) 2 32(24.2) 26 44(33.3) 7 7(2.9) 2 2(9.) 8 3(9.8) 66 32(00) 총 계 부 합계 2(2.8) 3(7.3) 79(8.6) 66 08(25.4) 28 34(8) 28 44(0.4) 5(.2) 4(0.9) (0.2) 2(2.8) 38 95(22.4) 76 425(00) 관에 임명되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고위관리의 시험관 기용 현상은 무 인정권 이후 차츰 두드러지게 나타나기 시작하여 고려말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3) 한편 시험관들이 임명 당시 지니고 있던 관직을 그 소속별로 나누어 역시 다른 시기의 그것과 비교하여 살펴 보면 다음의 표 3 과 같다. 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원 간섭 3) 崔惠淑, 高麗時代 知貢擧에 대한 硏究 ( 崔永禮華甲紀念 韓國史學論叢, 987) pp.72 84에 서도 고려시대를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시험관의 관품을 고찰하여 본고와 같은 분석결과를 이끌 어 내고 있다.

- 67 기 시험관의 경우 中樞院과 中書門下省의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尙書 6部와 표 3 임명 당시의 所屬官署別로 분류한 고려시대 禮部試 시험관의 시대별 각 인원수 光宗 靖宗 0(7.9) 3(23.2) 8(4.3) (.8) 文宗 毅宗 中書門下省 28(20.7) 尙書 6 部 30(22.2) 禮部 6(6.3) 中 樞 院 27(20) 承旨 2(8.9) 三 司 國 子 監 2(3.6) 3(2.2) 翰 林 院 5(8.9) 7(5.2) 기 타 3(5.4) 5(3.7) 不 明 22(39.3) 35(25.9) 총 계 56(00) 35(00) 明宗 元宗 忠烈王 忠定王 恭愍王 恭讓王 4(3.) 7(.3) 5(37.5) 8(6.) 2(3.2) 4(3) 39(29.5) 9(30.6) 9(22.5) (8.3) 9(4.5) (2.5) (.6) 3(7.5) (8.3) 2(3.2) 3(2.3) 7(2.9) 0(6.) (27.5) 3(9.8) 2(33.9) 2(5) 32(00) 62(00) 40(00) 합 계 0(23.8) 53(2.5) 28(6.6) 95(22.4) 33(7.8) 4(0.9) 8(4.2) 5(3.5) 46(0.8) 93(2.9) 425(00) * 괄호 안은 백분율임. 國子監과 三司 출신이 그 뒤를 잇고 있다. 특히 중추원 출신 9명 중에서 承旨가 반수를 점하고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러한 경향은 주로 翰林學士나 禮部 출신이 시험관에 기용되던 고려전기 이래의 추세와는 크게 다른 것으로 무인정권 이후 두드러 지게 나타난 변화였다.4) 이로 미루어 볼 때 원 간섭기의 시험관의 정치적 위상이 그 이 전에 비해 상대적으로 증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들 62명 가운데 중임으 로 인하여 중복 계산된 7명을 뺀 실제인원 55명 가운데 70%를 훨씬 넘는 40명이 高 麗史 열전에 수록된 사실에서도 이러한 추측이 그리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또한 관련 자료를 통하여 이들이 생전에 올랐던 최고 관품을 살펴보더라도 관직이 불분 명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3품 이상의 고위직이었으며, 특히 2품 이상의 재상에까지 오른 자는 85%가 넘는 47명에 이르고 있다. 물론 고위 관직을 지냈다고 하여 반드시 당대에 그 정치적인 비중이 높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이들 시험관 개개인의 구체적인 이력에 대한 분석 결과는 그들이 생각보다 는 훨씬 더 깊이 당시의 정치에 관여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선 무엇보다도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승지 출신으로 시험관에 기용된 인물이 많다 는 점을 들 수 있다. 표 을 토대로 하여 승지 출신으로 시험관에 발탁된 사람을 정 리하면 다음의 표 4 와 같다. 4) 崔惠淑, 위의 논문 pp.72 84.

- 68 國史館論叢 第55輯 이들 승지 출신의 시험관은 모두 동지공거에 임명되었으며, 그 수도 충렬왕대 7명, 충 표 4 元 干涉期의 禮部試 시험관 중 承旨 출신의 명단 시험관 임명시기 忠烈王代 忠惠王代 承旨 출신의 시험관 朴恒, 薛公儉, 郭預, 崔守璜, 安珦, 趙簡, 宋璘 李君侅, 辛裔 혜왕대 2명 등 9명으로 전체 시험관 수(62명)의 4.5%에 지나지 않지만 그 의미는 가볍게 넘길 수 없는 것이었다. 무인정권 이후 승지가 銓注를 장악하여 상당한 실권을 가지게 되 었으며, 權臣으로 승지에 임명되는 사례가 또한 빈번하였기 때문이다.5) 위의 승지 출신의 시험관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들의 대다수 역시 승지로 있으면서 전주를 맡았다.6) 그런데 이들 가운데 朴恒, 薛公儉, 郭預, 宋辑 등은 必闇赤이기도 하였다는 점이 주목된 다. 必闍赤는 몽고의 職名에서 나온 말로 원래 文士를 뜻하였으며, 이미 崔怡의 무신정권 때 書房의 文士들 가운데 銓法에 능한 사람을 政房의 必闍赤로 임명한 바 있었다.7) 충렬 왕 4년(278)에 설치된 必闍赤 역시 정방의 문사를 가리키는 것이었지만, 흔히 別廳宰樞라 고도 불리운 데서 보듯이 그들의 권한은 이제 인사행정면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8) 여기에서 주목할만한 점은 이들 必闍赤의 대부분이 기왕의 世族과는 그 배경을 달리하는 과거 출신의 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9) 이 必闍赤를 지낸 시험관으로는 승지 출신의 위의 4명 외에도 李尊庇, 金周鼎, 鄭可臣, 鄭瑎 등이 있다. 이들 중 특히 김주정은 바로 必闍赤의 설치를 충렬왕에게 건의한 장본인이었다. 그런가 하면 시험관 임명 당시 승지나 必闍赤를 지내지는 않았지만, 權溥, 金台鉉, 金祐, 李湛 등도 전주에 관여한 인물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볼 때 상당수의 시험관들이 전주에 참여한 경력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위에서 거론한 시험관들의 다수가 또한 2회에 걸쳐 과거를 주재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 우선 앞의 표 을 토대로 2회 이상 시험관을 지낸 사람들의 명단을 정리 하면 다음의 표 5 와 같다. 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시기의 시험관 가운데 중임자들은 충렬왕대 6명, 충혜왕 5) 박용운, 高麗의 中樞院 硏究 ( 韓國史硏究 2, 976) pp.32 33과 邊太燮, 高麗의 中樞 院 ( 震檀學報 4, 976) pp.64 68. 6) 이들에 대하여는 표 에 제시된 해당인물의 관련자료 난에 소개된 자료들을 참조할 것. 특별 한 언급이 없는 한 시험관들에 대한 아래의 설명도 이에 의거한 것이다. 7) 金庠基, 高麗 武人政治 機構考 ( 東方交流文化史論攷, 948) pp.22 223, 237 참조. 8) 충렬왕대의 必闍赤에 대하여는 李起男, 忠宣王의 改革과 詞林院의 設置 ( 歷史學報 52, 97 pp.74 84와 박용운, 高麗의 中樞院 硏究 ( 韓國史硏究 2, 976) pp.27 29 참조. 9) 이기남, 위의 논문 pp.8 84.

- 69 대 명 등 모두 7명으로 무인정권기나 그 이전에 비하여 적은 숫자이기는 하지만, 위에 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이들의 대부분이 승지와 必闍赤 등으로 銓選에도 참여한 국왕의 측근 인물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이제 이들에 대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하자. 표 5 元 干涉期의 禮部試 시험관 중 2회 이상 중임자 명단 번 호 성 명 중임 횟수 시험관 임명시기 朴 恒 2 충렬왕 년, 동왕 5년 2 韓 康 2 충렬왕 년, 동왕 2년 3 薛公儉 2 충렬왕 2년, 동왕 년 4 許 珙 2 충렬왕 2년, 동왕 4년 5 安 珦 2 충렬왕 4년, 동왕 20년 6 鄭可臣 2 충렬왕 6년, 동왕 2년 7 李君侅 2 충혜왕 년, 동왕 복위 2년 먼저 朴恒은 충렬왕 6년에 국왕이 고려전기의 예에 따라 禮部試 합격자를 대상으로 覆試를 실시하려고 하였을 때 이에 반대하는 다른 대신들과는 달리 국왕 쪽에 서서 그 실시를 주장하였으며, 결국 문신에 대한 親試로 그 성격이 바뀌어진 이 시험의 성적 사 정을 국왕으로부터 부탁받았을 만큼 寵臣 중의 한 사람이었다. 또한 충렬왕 4년에는 必 闍赤로서도 정사에 깊이 관여하였다. 그런데 그는 晋州吏 출신으로 당대의 세족 가문과 는 그 기반을 달리 하였다는 점이 주목된다.20) 그 출신이 별로 보잘 것이 없다는 점에서는 韓康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가문은 그의 당대부터 비로소 번성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元宗代에 大司成으로 國子監試를 주관한 적이 있던 그는, 충렬왕 초에 宰樞所에 설치된 司存의 책임자로 임명되어 이 무렵의 국 정의 운영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였다.2) 다음으로 許珙은 高宗代에 崔寧, 元傅 등과 함께 政房三傑로 불리울 만큼 인사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원종대에 林衍의 정권에서는 銓注를 맡았으며 또한 예부시의 시험관을 지 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위의 박항이나 한강과는 달리 그의 부친이 樞密院副使를 지 냈으며, 일찍이 원종 때에 임연이 자기의 아들 林惟茂를 그의 딸에게 장가 보내려고 하 자 이를 거절한 데서 보듯이 그의 당대에 이미 世族으로서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또한 충렬왕의 廟庭에 배향된 인물이기도 하였다.22) 20) 高麗史 권06, 列傳 朴恒傳. 2) 위의 책 권07, 列傳 韓康傳. 22) 위의 책 권05, 列傳 許珙傳.

- 70 國史館論叢 第55輯 薛公儉은 허공과 마찬가지로 충렬왕의 묘정에 배향된 인물로, 일찍이 원종 때 세자였 던 충렬왕을 수행하여 元에 간 것이 인연이 되어 충렬왕으로부터 총애를 받아 密直副使 로 必闍赤에 발탁되었다. 그의 집안 역시 이미 그의 부친대에 樞密院副使로 고위 관직에 오르고 있으며, 그의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는 영예를 누리고 있기는 하지만, 위와 허공의 집안 만큼은 번성하지 못했다.23) 한편 安珦은 충렬왕 말에 贍學錢을 설치하여 國學의 부흥사업을 일으켰으며 충렬왕대 에 文廟에 配享된 것에서 보듯이 그가 시험관으로 기용된 데에는 그의 정치적 위치보다 는 학문의 출중함이 크게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그의 가문의 성장은 그의 바로 선대에서부터 시작되었으며, 그의 부친은 光州吏로서 醫業으로 출신하여 密直副使 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24) 다음으로 鄭可臣은 몰락한 鄕貢 집안의 자제로 각고의 노력 끝에 과거를 통하여 관계 에 들어 온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 역시 충렬왕 초에 必闍赤로 승지에 임명되어 銓 注에 참여하였으며, 뒤에 충선왕의 묘정에 배향되었다.25) 그리고 충혜왕대의 시험관으로서는 유일하게 두 차례에 걸친 시험관을 역임한 李君侅 는 政房의 후신인 知印房에서 銓選에 관여한 충혜왕의 嬖幸이었으며, 충숙왕이 복위한 뒤, 한 때 옥에 갇히기도 하였으나, 이후 충목왕대에도 여전히 정방의 提調로 전선을 맡 았다. 그는 일찍이 충렬왕 초에 必闍赤를 지낸 뒤에 判密直司事까지 오른 李尊庇의 손자 였다. 이존비의 경우 어려서 부모를 잃고 外叔에게 수학하여 급제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 역시 그의 당대에 와서야 출세한 인물로 추측된다.26)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원 간섭기에 되풀이하여 시험관에 발탁된 사람들의 대부분은 그 가문의 배경이 별로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바로 선대에 와서야 世族으로서 뿌리 를 내리기 시작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또 必闍赤나 승지를 역임한 데서 보듯이 국 왕에게 신임을 얻은 측근 인물로, 당대에 상당한 정치적 입지를 갖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측근 인물의 시험관 임용은 국왕이 그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과거를 이용하였을 가능성을 시사하여 준다. 물론 이를 입증할만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지만, 국왕의 측근 인물로 되풀이하여 시험관에 임명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다 름아닌 충렬왕대의 인물이라는 점은 특히 우리의 흥미를 끈다. 다음 절에서 구체적으로 언급되겠지만, 충렬왕은 원 간섭기의 국왕으로서는 유일하게 親試를 실시한 군주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이로 미루어 보건대 충렬왕이 과거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 23) 高麗史 권05, 列傳 薛公儉傳. 24) 위의 책 권05, 列傳 安珦傳. 25) 위의 책 권05, 列傳 鄭可臣傳. 26) 위의 책 권, 列傳 李嵒傳.

- 7 - 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이 시기에서의 시험관의 위상은 분명 이같은 국왕의 과거에 대한 깊은 관심과 아울러 시험관 자신의 정치적 비중으로 말미암아 더욱 높아져 간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물론 국왕의 측근 인사로서의 시험관의 정치적 입지는 국왕의 정치적 운명에 따라서 바뀌어 질 수도 있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시험관 가운데 몇몇 인물들은 상당한 정도의 독자적인 권력을 행사하였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충혜왕 대의 辛裔와 같은 인물을 들 수가 있다. 신예는 高麗史 列傳의 姦臣傳에 그 전기가 수록된, 충혜왕의 嬖幸이었다. 그러나 그는 뒷날 원에서 충혜왕을 잡아갈 때 그의 妹壻 이자 당시의 유력한 환관인 高龍普와 함께 군사를 매복하여 이에 협력함으로써 비난을 받았으며, 또한 충목왕 때에는 政房을 관장하여 辛王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큼 대단한 권 세를 부렸다.27) 그 밖에 같은 충혜왕대의 인물로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李君侅나 충렬 왕대의 吳祁와 宋璘, 그리고 충선왕대의 權漢功, 충숙왕대의 安珪 등도 그 권력의 정도 는 서로 다르지만 그들 대부분이 高麗史 列傳의 姦臣傳이나 嬖幸傳에 그 전기가 수 록되어 있는 데서 보듯이 위의 신예와 비슷한 유형의 인물들이었다.28) 그리고 그 대부분 은 고려에 대한 원의 영향이 갈수록 깊어지면서 여러가지 파행적인 정치가 표출된 충렬 왕 말년 이후에 시험관을 지낸 사람들이라는 점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이 시기의 시험관들은 이전의 시험관들과는 다른 성격을 지니고 있었음 이 분명하여진다. 무인정권기의 시험관들이 무인집권자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 정치적 영 향력을 점차 확대하여 나간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는 무인정권의 문신으로서 지니는 한계가 없을 수 없었다. 한편 원 간섭기의 시험관들 역시 대부분 국왕과의 긴밀한 관계 를 발판으로 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하여 나갔다는 점에서 전자와 비슷한 처지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들 중에는 국왕이 퇴위 또는 실각한 뒤 곧 바로 정 치적 몰락을 경험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원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특수한 시대상황에서 국왕의 입지가 어느 때건 흔들 릴 수 있는 불안한 것이었다는 바로 그 사실로 인하여 오히려 이들 시험관의 정치적 기 반은 좀 더 독자적인 위치에서 다져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바로 이러한 국왕의 처지로 인하여 좌주 문생의 관계는 이전에 비해 훨씬 더 번성할 소지가 마련된 셈이었다. 그렇 다면 이 시기의 국왕들은 과거의 운영에서 과연 어느 정도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던 것일까. 이제 이 문제를 검토해 보기로 하자. 27) 高麗史 권25, 列傳 辛裔傳. 28) 위의 책 권25, 列傳 吳祁傳, 宋玢專, 權漢功傳, 그리고 권24, 列傳 安珪傳.

- 72 - 國史館論叢 第55輯 Ⅳ. 科擧의 運營과 國王 충렬왕 이후, 원 간섭기의 과거운영 상황을 살펴 보면 외견상으로는 전대와 거의 다름 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우선 급제자의 수만을 놓고 살펴보더라도 그렇다. 製述業의 경우 충렬왕 충정왕 년간에 급제한 매회 평균인원은 29.5명으로 무인정권기의 30.5명이 나 공민왕 말 이후 고려 말에 이르는 기간의 3.4명에 약간 미치지는 못하지만 거의 비 슷한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29) 사실 충렬왕 중엽 이후에는, 다소 예외가 있기는 하였지 만, 급제 인원은 매회 33명으로 고정되었다.30) 그리고 이 숫자는 조선조에 그대로 계승 되어 式年文科의 정원이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바와 같다. 그런데 제술업 외에 明經業이나 恩賜까지를 포함한 총급제자수를 다른 시기의 그것과 비교하면 제술업의 경우와는 차이가 난다. 즉 원 간섭기의 매회 총 평균 급제 인원이 30.2명인데 비하여 무인집권기의 그것은 34.7명이고, 공민왕 이후 고려말까지의 경우는 32명으로 제술업만의 경우와는 조금 더 격차가 벌어진다. 그러나 이것은 매회 선발되는 급제 인원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의 실시 횟수가 다른 어느 시기보다도 줄어 들었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 충렬왕 충정왕 연간의 과거실시횟수는 총 32회로 평균 2.4년 즉 약 2년 5개월마다 한 차례씩 과거가 실시되었다. 이러한 실시 횟수는 무인정권기의.6년, 공민왕 이후 고려말 기까지의 2년과 비교할 때 그 어느 시기보다도 비교적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같은 원 간섭기라 하더라도 왕대마다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우선 選場을 토대로 하여 각 왕대별 과거실시횟수를 알기 쉽게 표로 작성하면 다음의 표 6 과 같다.3) 표6 元 干渉期 각 왕대별 禮部試 실시횟수와 실시간격 王 代 忠烈王 忠宣王 忠肅王 忠惠王 忠穆王 忠定王 재위 기간 34(년) 5 25 6 4 3 禮部試 실시횟수 8(회) 5 6 0 禮部試 실시간격.9(년) 5 5 4 29) 앞의 주 2)와 같음. 30) 高麗史 권74, 選擧志2 科目2 選場. 3) 충렬왕 6년과 28년의 과거는 모두 문신에 대한 친시였으므로 통계에서 제외하였다. 이에 대하여 는 뒤의 서술을 참조할 것.

- 73 합 계 77 3 2.5 이 표에서 보듯이 충렬왕은 그의 재위 34년 동안 8회의 과거를 실시하여 평균.9년 즉 약 년 개월마다 한 차례씩 과거를 실시하여 그 전대와 거의 다름없는 비율을 보 였다. 또한 충혜왕대의 경우는 6년의 재위기간 동안 매년 한 차례씩 과거를 실시하였다. 반면에 충선왕과 충숙왕, 그리고 충목왕대의 과거실시횟수는 매우 적으며, 충정왕대의 경우는 3년의 재위기간 동안 한 차례도 과거가 실시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게 된 이유의 하나로 우선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충선왕과 충숙왕은 고려 국내보다는 원나라에서 머물러 있는 일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특히 충선 왕은 충렬왕 24년에 7개월 남짓 잠시 재위할 때를 제외하고는 그의 재위기간의 대부분 을 원에서 지냈다. 이러한 상황은 분명 과거의 실시를 저해하는 요인의 하나로 작용하였 을지도 모른다. 한편 충목왕과 충정왕의 경우는 그들이 각각 8세와 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외적으로 복잡한 정국이 빚어졌던 것도 과거의 실시를 어 렵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지 모른다. 이 시기 과거의 설행에서 각 왕대마다 나타나는 이같은 현격한 차이는 곧 당시의 독 특한 시대적 상황에서 연유하는 것으로, 과거제의 운영이 결코 순조로운 것만은 아니었 으리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사실 권력의 중심이 고려의 국왕이나 왕실에 있지 않고 원 의 황실이나 조정에 있게 된 특수한 상황에서 고려의 정치는 여러가지 굴절을 겪지 않 을 수 없었다. 특히 국왕의 경우 원 황실의 부마라는 위치는 일면 그 자신의 정치적 입 지를 안정시키는 기반이 되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원 황실의 정치적 동 향에 따라 그 자신의 정치적 장래가 좌우될 수 있는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음을 의 미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바로 이러한 국왕의 취약점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 기 위한 세력들에게는 좋은 공격의 목표가 되기 마련이었다. 이 시기에 국왕들의 禪位와 復位가 자주 되풀이된 것도 이러한 데서 그 원인의 일단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었다. 과 거제는 바로 이러한 국왕의 입장과 맞물리면서 여러가지 굴곡을 겪으며 운영되었다. 먼저 충렬왕의 경우를 보면, 그는 과거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가졌던 군주였다. 그것 은 그의 치세 기간 중 두 차례나 親試가 실시되었던 점에서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는 그의 즉위 6년에 이어 28년에 각각 한 차례씩 2회나 친시를 실시하였다. 국왕에 의한 친 시가 실시되었던 것은 毅宗 6년 이후 明宗代에 한 차례 실시된 것을32) 제외하고는 사실 상 30여 년만의 일이었으며, 이후 다시 친시가 실시되었던 것은 그로부터 다시 70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난 공민왕대에 이르러서였다.33) 32) 高麗史 권20, 世家 明宗 25년 3월 정해조 참조. 이때의 친시는 문신을 대상으로 하여 그 詩賦 의 능력을 평가한 것으로 과거시험과는 그 성격을 달리 하는 것이었다.

- 74 國史館論叢 第55輯 충렬왕이 그의 즉위 6년에 처음으로 친시를 실시하려고 하였던 사정에 대해서는 다음 과 같은 기록이 高麗史 에 전하고 있다. 충렬왕이 舊制에 의하여 新及第(者)를 다시 親試하려고 했으나 僧 祖英이 왕에게 총 애를 얻어 그 조카 吳子宜와 친구들을 위하여 登第한 시기를 가리지 않고 모두 시험에 응시하게 하려고 하였다. 왕이 柳璥에게 물으니 유경이 대답하기를, 新舊及第 및 衣官 子弟로 藍衫을 입은 자는 모두 마땅히 응시하게 하여야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때 세상 사람들은, 유경이 그 손자 仁明과 손녀사위 權永을 위하여 그렇게 대답하였다고 말하였 다. 內宦將軍 李之氐가 왕에게 말하기를, 殿試의 法은 毅宗 이래 끊어진 지 수백년이 지났으며, 지금 나라가 多事하여 마땅히 여가가 없고 또 우리나라 사람이 上國(중국)에 참소하는 자가 많기 때문에, 혹시 殿試를 가리켜 天場이라고 무고하여 이로 말미암아 참월하다고 책망받을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였다. 待制 郭預도 일찍이 전시의 실시를 저 지하자, 왕은 명령을 내려 殿試를 뒷날로 기약하였다. 그러나 조영이 왕에게 강요하여 마침내 시험을 실시하니 執政 近臣들도 이를 알지 못하였다. 朴恒은 舊制에 의하여 시 험을 치를 것을 청하였지만 왕은 이를 윤허하지 않았다. 조영이 오자의 등의 試藁(시험 답안지)를 가지고 왕에게 아뢰어 풀로 봉한 것을 뜯기를 청하고 科目을 정하여 5명을 선발하였는데, 오자의를 수석으로 삼았으며 나머지도 모두 그의 친구들이었다. 왕은 박 항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자세히 살펴 볼 수 없으니 卿이 조영과 함께 성적의 高下를 매기도록 하라 고 하였다. 조영은 일이 성사되지 않을까 두려워 하여 박항에게 말하기 를, 일전에 왕이 오자의의 시부를 보고 이미 乙科를 정하였으니 어찌 고칠 필요가 있 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박항은 조영의 뜻을 알고 中使를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旋題員 郭預, 摠郞 崔守璜, 右正言 李子芬 등과 함께 考定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榜이 나옴에 趙簡이 수석이 되었는데 모두가 조영이 정한 바가 아니었다. 박항은 일찍이 殿試를 관장하였는데 선발에 합격한 자 9명 가운데 5명이 다 박항의 門生이어서 사람들이 흰 玉에 난 흠이라고 여겼다( 高鹿史 권06, 列傳 朴恒傳). 위의 사료에서 보이는 친시는, 당해년도의 예부시 합격자를 대상으로 국왕이 재시험을 실시하는 기왕의 고려전기의 覆試와는 성격이 다른 것으로, 이미 과거에 급제한 문신을 대상으로 하는 친시였다. 그리고 문신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는 점에서는 동왕 28년에 실 시된 친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충렬왕 6년에 실시된 최초의 친시의 경우, 국왕이 원래 실시하려고 하였던 것은 위의 사료에서 보듯이 舊制, 즉 고려전기와 같은 성격의 복시였음이 분명하다.34) 복시의 실시가 왕권의 강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생각할 때, 이미 오랫동안 폐지되었던 복시를 충렬왕이 새삼스럽게 다시 실시하려고 한 것도 역시 33) 졸고, 高麗時代의 覆試 pp.22 26 참조 34) 졸고, 위의 논문 pp.22 23.

- 75 - 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사실 충렬왕은 그의 당대에 친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殿試門生이라 부르면서 남달리 총애하였다.35) 그 6년 5월에 실시된 친시의 경우, 바로 전달에 실시된 예부시의 급제자 에게는 가뭄을 이유로 꽃을 하사하지 않은 것과는 달리,36) 그 9명의 합격자에게는 黃牌 를 하사하고 內侍에 소속시키는 한편 이들과 문신을 한 데 모아 연회를 베풀면서 자신 이 직접 시를 지어 보이며 이에 화답하게 하는 등 특별한 은총을 베풀었던 것이다.37) 그 리고 그 28년의 친시에 급제한 사람들에게는 각각 白銀 3근과 말 필을 하사하며 역시 남다른 관심을 표명하였다.38) 뿐만 아니라 이들 친시에서 급제한 문생들의 일부는 뒷날 충렬왕에 의해 과거의 시험 관으로 발탁되기도 하였다. 趙簡, 金台鉉, 李瑱 등이 바로 그들로, 이들은 모두 충렬왕 6 년의 친시에서 합격한 사람들이었다.39) 특히 김태현의 경우 동왕 29년에 知貢擧로 임명 되어 과거를 관장하였는데, 과거가 끝난 뒤에 그가 신급제자를 거느리고 배알하자 국왕은 연회를 베풀어 그를 위로하였다. 이때의 연회는 마침 여기에 참석하였던 元나라의 사신이 감탄을 금하지 못할 만큼 성대한 것이었다.40) 그리고 또 한가지 주목할만한 사실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두 차례의 殿試에서 합격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왕에게 연회를 베풀기 도 하였다는 점이다.4) 이렇게 보면 친서를 통하여 국왕과 일부 관료들 사이에 돈독한 유대 관계가 형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관계는 곧 과거의 시험관과 응시자 간에 이루어진 座主와 門生의 관계와 비슷한 것이라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고려전기와 같은 성격의 복시를 실시하고자 하였던 국왕의 의도가 좌절된 데 서 보듯이, 과거를 통한 국왕의 영향력 강화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는 국왕에 대한 일부 권신들의 견제 외에 李之氐의 언급이 시사하듯이, 전시의 실시가 참월 한 것이라는 비난을 원으로부터 받을지 모르는 당대의 시대적인 상황도 한 요인으로 작 용하였을 것이다. 고려전기와 같은 성격의 복시를 실시하고자 하였던 충렬왕의 의도가 좌절된 것은 어 쩌면 이 시기의 국왕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말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문신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는 하지만 30여년 만에 다시 친시를 실시하였다는 사실은, 또한 元 간섭기의 국왕으로서는 유일하게 그것도 두 차례나 친시를 실시하였다는 사실 35) 高魔史 권73, 選擧志 科目 忠烈王 6년 5월. 36) 위의 책 권29, 世家 忠烈王 6년 4월 을미. 37) 위의 책 권29, 世家 忠烈王 6년 5월 계묘. 38) 위의 책 권74, 選擧志2 科目2 崇獎之典, 충렬왕 28년 5월조 39) 위의 책 권06, 列傳 趙簡傳과 권0, 列傳 金台鉉傳, 그리고 권09, 列傳 李瑱傳. 40) 위의 책 권0, 列傳 金台鉉傳. 4) 위의 책 권32, 世家 忠烈王 29년 6월 기해.

- 76 國史館論叢 第55輯 은 주목되어 마땅하다고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충렬왕의 치세 기간에 임명된 시험관 중에 승지였거나 정방의 必 闍赤를 지낸 측근 인물이 많았다는 점은 눈여겨 보아야 할 대목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 미 앞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국왕 측근의 인물이 자주 시험관에 기용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충렬왕이 과거에 대하여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對元關係의 전개에 따라 정치적 환경이 급격히 변화하고 있었던 당시의 사정을 고려할 때, 국왕의 과거에 대한 이같은 관심은 그 나름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충렬왕의 이 같은 노력이 바라는 만큼의 성과를 가져왔던 것은 아니었다. 우선 국가재정의 부족으로 그 초년부터 納銀授職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사정으로 인하여 인사행정에서 여러가지 폐단이 일어나게 되었다.42) 또한 새로운 정치 외교질서 속에서 元의 세력을 배경으로 하여 나타나기 시작한 여러 정치세력들도 충렬왕으로서는 제어하 기 힘든 존재였을 것이다. 이 시기에 이르러 시험관이 과거에 앞서서 국왕에게 연회를 베풀어 감사의 뜻을 표하 는 이른바 品呈의 관습이 생겨난 것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에 앞서서 국왕에게 宴品을 증정한다는 의미의 品呈은 원래 과거 급제자의 발표가 끝난 뒤에 시험관이 하객에게 3일간 연회를 베풀던 관례가 변한 것으로, 충렬왕 3년에 林貞杞가 國子監試의 시험관을 맡으면서부터 시작된 것이었다.43) 이러한 관례는 시험 전에 국왕과 시험관의 회합을 공식화함으로써 과거에 대한 국왕의 개입을 강화시 키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시험관의 임명 사실이 사전 에 말려짐으로써 과거에 정실을 개입시켜 그 공정성을 저해하는 요인으로 작용될 소지 가 더 컸으리라고 여겨진다. 이 시기에 더욱 강화된 시험관의 영향력으로 미루어 볼 때 더욱 그렇게 생각된다. 결국 충렬왕이 측근의 인물을 시험관에 기용하고 그들을 전시문생이라 부르며 친밀한 관계를 맺었던 것은, 일면으로는 그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또 한편 으로는 시험관의 권한을 강화하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던 것이 아니었던가 추측된다. 충렬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충선왕은 5년의 재위기간 동안 단 회밖에 과거를 실시하 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 대한 그의 관심이 다른 국왕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엷지 않았는 가 하는 생각을 얼핏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과거에 대한 그의 관심은 어느 누구보다도 높은 것이었다. 사실 元의 과거제 실시도 다름아닌 충선왕이 完의 仁宗에게 건의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44) 뒷날 粉紅榜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로 권문세가의 나이어 42) 高麗史 권74, 選擧志3 銓注 鬻爵之制. 43) 위의 책 권23, 列傳 林貞杞傳.

- 77 린 자제를 부정합격시켜 비난이 일었던 國子監試를 한 때 혁파하였던 것도 바로 충선왕 대의 일이었다.45) 요컨대 과거제도의 운영은 충선왕의 주요한 관심사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충선왕은 그의 재위기간의 대부분을 元에서 지냈으며 이 기간 동안의 과거 운 영 실태를 보여 주는 관계 사료로 오늘날 전하는 것은 거의 없다. 다만 그의 재위기간 동 안에 이루어진 유일한 과거시험의 시험관이 權漢功과 崔誠之 등 그의 측근 인물이었으며 그들 역시 銓注에 관여하였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충선왕대의 시험관 기용 역시 충렬 왕대와 매우 비슷한 형태를 띠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충선왕이 上王으로서 그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던 충숙왕 초에 임명된 시험관들 중에 그의 초기 개혁정 치의 주도세력이었던 李瑱, 朴全之 등과 같은 인물이 엿보인다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 다. 그러나 이들 측근 인물의 기용이 곧 과거 개혁의 움직임으로 이어졌다는 어떤 자료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권한공과 최성지의 경우는 원에서 충선왕을 모시면서 銓注를 장 악하며 뇌물을 받아 고려의 중신들에게서도 큰 원성을 들었던 인물들이었다. 이 시기에 과거에 대한 충선왕의 관심을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것은 충숙왕 2년에 瀋 王이었던 그가 禮部試를 應擧試로 고쳤다는 점이다.46) 이것은 원의 최초의 과거 실시와 관련이 있는 조치였다. 충선왕은 그의 건의로 이루어진 원의 과거에 고려인을 응시하게 하였는데, 바로 이 예부시의 합격자 중 성적이 우수한 3인이 고려인에 의해 흔히 制科로 불리워졌던 중국의 과거에 응시할 사람들로 선발되었던 것이다. 아마도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과거응시를 위한 예비시험을 달리 실시하지 못하고 예부시를 그대로 응 거시로 고쳐 제과 응시자를 선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47) 명칭의 변화는 비단 예부시의 경우에만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예부시가 응거시로 바 뀐 바로 그 해에 知貢擧를 考試官으로, 同知貢擧를 同考試官으로 그 이름을 바꾸는 조치 가 아울러 취해졌다.48) 이것은 분명 元을 의식한 조치였다. 충선왕은 일찍이 개혁정책의 일환으로 관제를 고치고 관직의 명칭을 바꾸었다가 그것이 참월한 것이라는 일부 관리 의 원에 대한 참소로 인하여 이를 복구시킨 경험을 갖고 있었다.49) 그리고 그것이 충렬 왕 24년에 그의 실각의 원인의 하나가 되었던 점을 감안하면, 제과 응시와 이에 따른 명 칭의 변화는 원에 대한 충선왕의 유화적인 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실 禪位 이후의 충선왕의 在元生活은 萬卷堂에서 문인과 교유한 사실이 보여주듯이 정치나 권력에의 집착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50) 더구나 본국과는 멀리 떨어져 있었기 44) 高麗史 권34, 忠宣王世家의 충숙왕 원년의 기사 참조. 45) 위의 책 권74, 選舉志2 科目2 國子監試. 46) 위의 책 권73, 選擧志 科目, 忠肅王 2년 정월. 47) 졸고, 高麗時代의 制科應試와 그 性格 ( 宋俊浩敎授停年紀念論叢, 987) p.58의 주 8) 참조. 48) 高麗史 권74, 選擧志2 科目2 試官, 충숙왕 2년. 49) 忠宣王의 개혁정책에 대하여는 이기남, 앞의 논문 참조.

- 78 國史館論叢 第55輯 때문에 上王으로서의 그의 정치적 영향력은 그의 재위 때와는 비교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었다. 그의 재위 때에 폐지되었던 국자감시가 충숙왕 4년에 九齋朔試로 복구되 는 것도5) 바로 이러한 시대적 변화에서 말미암은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충숙왕 7년에 이르러 충선왕의 정치적인 후원자였던 원의 仁宗이 죽자 상왕으 로서의 충선왕의 입지도 크게 약화되었다. 그는 마침내 吐蕃에 유배되었다.52) 바로 이 해에 충선왕에 의해 시험관으로 임명되었던 尹莘傑이 충숙왕에 의해 해임되고 朴孝修로 대체되는 것도 이러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윤신걸의 해임은 그가 選部에서 政 柄을 맡고 있는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전국 각지에서 재물을 모아 學士宴을 성대히 베풀려고 했던 것이 직접적인 사유로 기록되어 있는데,53) 아마도 충선왕과 충숙왕의 반 목과 갈등도 그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 여기에서 특히 우리의 관심을 끄는 것 은 국왕에 의해 견제를 받았을 만큼 대단하였던 시험관 윤신걸의 세력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이 시기의 시험관의 위상을 어느 정도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충숙왕 7년의 과거를 기점으로 고려의 과거 운영에 몇 가지 변화가 일어나 고 있음이 주목된다. 우선 이 해에 이제현과 박효수가 과거를 관장하면서 詩賦를 혁파하 고 策問을 사용하여 시험을 실시하였는데, 이것은 충렬왕 이후 고조되어 온 經學 中心의 學風을 반영하는 것이었다.54) 그리고 제과 응시자를 선발하기 위하여 폐지되었던 考藝試 를 실시하여55) 국학생에 대한 과거 응시상의 특전을 부활하고 국학생의 면학을 장려하 여 교육면에도 상당한 관심이 표명되었다. 또한 과거 응시자들의 자질을 강화하기 위하 여 律詩 4韻 00首, 小學 5聲字韻을 암송한 뒤에야 응시를 허락하였으며,56) 시험관의 명 칭도 고시관과 동고시관에서 지공거와 동지공거로 옛 명칭을 회복하였다.57) 그러나 충숙왕과 충선왕의 불화와 이를 둘러 싼 당파간의 치열한 권력 다툼은 왕위를 노리는 瀋王 暠의 책략과 얽히면서 정국을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더욱이 충렬왕과 충선 왕 이래 어지러워진 인사행정은 이 시기에 들어와 극도의 타락상을 보여 黑册政事 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58) 이같은 상황에서는 과거의 운영에서 공정함을 기대하기란 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문자를 해득하지 못하는 사람이 국자감시의 시관을 맡았는가 하면, 자 50) 충선왕의 在元活動에 대하여는 金庠基, 李益齋의 在元 生涯에 對하여 ( 大東文化硏究, 964 ; 東方史論叢, 984 재수록) 참조. 5) 高麗史 권74, 選擧志2 科目2 國子監試. 52) 이에 대하여는 김상기, 앞의 논문 참조. 53) 高麗史 권09, 列傳 尹莘傑傳. 54) 許興植, 高麗科擧制度史硏究 (一潮閣, 98) p.99. 55) 高麗史 권73, 選擧志 科目, 忠肅王 7년 7월. 56) 위의 책 권73, 選擧志 科目, 忠肅王 7년 2월. 57) 위의 책 권74, 選擧志2 科目2試官, 忠肅王 7년. 58) 高鹿史 권75, 選擧志3 銓注 選法, 忠肅王 6년 9월.

- 79 물쇠를 채운 과거의 시험장에 들어 가 밀봉한 답안지를 찢는 사건도 일어났다.59) 그런가 하면 충숙왕 복위 이후에는 국왕 측근으로부터 청탁을 받은 응시자를 시험관이 부정으 로 선발하자 국왕이 그 시험관에게 치하를 하는 등 국왕조차 과거 운영의 혼탁에 일역 을 담당하고 있었다.60) 그 뒤 호협 방탕한 군주로 이름난 충혜왕대에 이르면 과거의 운영은 극도로 문란해져, 0여 세의 불학무식한 勢家의 子弟가 국자감시에 이어 예부시에 연거푸 합격하자 臺諫 이 나서서 선발을 취소하고 복시를 할 것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그러한 대간의 요 청은 국왕에 의해 거부되었다.6) 이렇게 보면, 충혜왕 6년의 재위기간 동안 5회나 과거 가 실시되어 다른 어느 왕대보다도 빈번히 과거가 실시되었지만 오히려 이처럼 잦은 과 거의 설행을 통하여 세가의 자제들이 좀 더 쉽게 관계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를 갖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조차 갖게 된다. 충혜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충목왕은 즉위 당시 8세의 어린 나이에 불과하였으며 4년의 재위기간 동안 단 회밖에 과거가 실시되지 않았지만, 그러나 오히려 그의 치세 중에 전 대에 볼 수 없었던 과거 운영의 개선을 위한 움직임이 있었던 것은 주목할만한 일이었다. 그가 즉위하던 바로 그 해에 과거법을 개정하여 初場에서 6經 4書疑, 中場에서 古賦, 終章 에서 策問을 시험하도록 하여 충렬왕대 이래의 經學중심의 학풍을 다지고,62) 장군을 시켜 忽只를 거느리고 시험장을 순찰하게 하여63) 과거의 부정을 발본하려는 결연한 의지를 보 였다. 그리하여 그 3년의 과거에서 시험관에 의해 세가의 不學子弟가 부정으로 다수 선발 되는 관례가 되풀이되자, 憲司의 탄핵을 받아들여 신급제자를 내지 않기에 이르렀다.64) 충목왕대의 이런 조치들은 물론 어린 국왕에 의해 주도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이 시대에 시도된 整治都監의 설치를 비롯한 제반 개혁운동에서 보는 것처럼 부분적으로는 고려의 국내 안정을 희구하는 원 황실의 지원을 배경으로 하는 일부 중신들의 주도에 의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元帝의 명에 따라 시작된 개혁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결국 충정왕대에 오면 정치도감의 혁파에서 보는 것처럼 개혁은 완전히 좌절되 었다.65) 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충정왕은 母后의 국정 관여와 외척의 대두로 59) 위의 책 권05, 列傳 許珙傳附 許富傳. 60) 위의 책 권08, 列傳 蔡洪哲傳. 6) 위의 책 권0, 列傳 韓宗愈傳과 권24, 列傳 崔安道傳. 62) 禮部試의 3場에서의 시험과목의 변천과 그 의의에 대하여는 박용운, 앞의 책 pp.253 26 참조. 63) 高麗史 권73, 選擧志 科目, 忠穆王 즉위년 9월. 64) 위의 책 권09, 列傳 李穀傳 그러나 이때 시관을 맡은 이곡의 전기에 실려있는 기사와는 달리 권 74, 選擧志2 科目2 崇獎之典에의하면 이때 신급제자들에게 4일 成行을 6일 成行으로 고쳐 시가행 진을 허락하였으며, 選場에도 이때 33명이 급제한 것으로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신급제자 를 내기로 한 당초의 결정은 이내 취소된 것으로 생각된다. 65) 忠穆王代의 개혁과 그 성격에 대하여는 閔賢九, 整治都監의 設置經緯 ( 國民大學論文集, 977)과 整治都監의 性格 ( 東方學志 23 24 합집, 930) 참조.

- 80 國史館論叢 第55輯 그 정치가 크게 문란하여 3년 만에 왕위에서 물러나고 공민왕이 즉위하게 되었다. 따라 서 이 시기의 과거 운영도 전대와 거의 다를 바 없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살펴 본 것처럼 충렬왕 이후의 원 간섭기에 원 황실의 부마로서의 국왕의 위치는 일면 안정된 것처럼 보였지만 원의 정치적 풍향에 따라 어느 때건 그 정치적 입 지가 뒤바뀔 수 있는 매우 불안한 것이었으며, 또한 시간이 흐를수록 원의 황실과 고위 관료를 배경으로 정치적 실권을 잡으려는 세력들이 고려사회에 그 뿌리를 내리기 시작 하면서 국왕의 입지는 현저히 약화되었다. 이렇게 볼 때 측근 인물의 시험관 임용을 통한 국왕의 과거 운영 방식은 분명 과거에 대한 당시 국왕들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의 불안전한 권력 기반을 다지려고 하였던 측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권력의 중심이 원의 황실이나 조 정에 놓여 있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에서 국왕의 이같은 노력이 결실을 얻기란 또한 매 우 힘든 일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서의 국왕 측근 인물의 시험관 기용은 한편으로는 왕권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지만, 시험관 가운데 일부는 高麗史 열전의 폐행전이나 간신전에 실린 인물이라는 데서 보듯이 오히려 그러한 국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하여 독 자적인 권력을 추구하기도 하였다는 점에서 원 간섭기의 파행적인 정치의 일면을 그대 로 보여 준 것이었다. 무인정권이후 번창해 온 좌주 문생의 관계는 바로 이러한 시대적 인 상황에서 더욱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이 시기의 좌주 문생의 실태에 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Ⅴ. 座主 門生 關係의 發展과 그 實態 이미 앞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무인정권을 계기로 차츰 발전하기 시작한 좌주 문생의 관계는 이 시기에 들어와 더욱 번성하였다. 그러면 이 시기에 좌주 문생와 관계는 과연 어느 정도까지 이르고 있었던 것일까. 이를 알아 보기 위하여 우선 이때에 좌주가 좌주 를 낳은 사례가 얼마나 되는가를 살펴 보았다. 만일 한 좌주에게서 다시 많은 좌주가 배 출되는 사례가 빈번하게 있었다면 그것은 그만큼 좌주 문생 관계의 번창을 뜻한다고 보 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시험관의 상당수가 그 급제년도를 알 수 없는 데다가 그 생몰년대 또한 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기 때 문이다. 選場에 그 이름이 전하는 예부시 시험관은 고려시대를 통틀어 모두 425명이다. 이 숫자는 2회 이상 시험관을 역임한 중임자를 중복 계산한 것이다. 이들 425명 가운데

- 8 급제년도가 확인되지 않은 사람은 244명으로 전체의 57.4%나 된다. 따라서 그 급제년도 가 확실하여 그 좌주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는 경우는 전체의 42%가 조금 넘는 8명 에 불과하지만, 불완전한대로나마 어느 정도의 추세는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禮部試의 시험관을 지낸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들의 좌주(즉 좌주 의 좌주)를 추적하여 같은 좌주에게서 과연 얼마나 많은 시험관들이 배출되었는가를 살 펴 보았다. 그리고 이를 다른 시기의 그것과 서로 비교하였다. 다음의 표 7 이 바로 그것이다. 표 7 위의 표에서 각 시기에 2명 이상의 시험관을 배출한 좌주의 수가 많다는 것은 곧 그 만큼 그 시기에 같은 좌주에게서 배출된 문생들이 다수 시험관으로 활약하고 있었음을 가리킨다. 그리고 그 수치는 분명 문종대 이후의 시기에 크게 늘어나고 있는 것으로 되 어 있다. 이것은 문종 말 이후 시험관의 수가 명에서 2명으로 增置된 것이라든지 과거 의 실시 횟수가 각 시대마다 차이가 있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에, 확인 가능한 경우에 국한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좌주들의 수가 반드시 급격히 늘어났다고 말할 수는 없 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문생으로 시험관이 된 사람들의 수는 시험관의 증치에 따른 중복 계산을 감안하더라도 분명 문종대 이후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무인정권이 후 그 숫자는 크게 불어나서 과거실시 횟수를 감안하면 고려 말까지 그 수준이 계속 유 지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요컨대 무인정권이후 한 좌주의 아래에서 다수의 문생이 시 험관으로 배출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2명 이상의 시험관을 배출하였다고는 하여도 좌주마다 그 배출한 시험관의 수에 는 크게 격차가 있으므로 이를 다시 세분하여 역시 각 시기별로 정리하면 표 8 과 같다. 이 표에서 보듯이 한 좌주 밑에서 5명 이상의 시험관이 다수 배출되기 시작한 것은 무인정권 이후로서 특히 무인정권기에는 한 좌주 밑에서 무려 5명 이상의 시험관이 배 출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한 사람이 여러번 시험관을 역임한 경우를 중복 계산하

- 82 國史館論叢 第55輯 였기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연인원이 아닌 실제 배출된 시험관의 수만을 따진다면 그 수는 이보다는 훨씬 적을 것이다. 즉 위의 표에서 보이는 수치들은 부분적으로는 무인정 권 이후 빈번하였던 시험관직의 중임현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표 8 光宗 靖宗 文宗 毅宗 明宗 元宗 忠烈王 忠定王 恭愍王 恭讓王 당해시기에 2명 3(명) 0 6 4 7 의 시험관을 배 출한 座主의 수 3명 7 3 5 7 4명 2 5명 2 3 4 6명 2 7명 2명 5명 합 계 5 20 8 4 7 위의 분석결과는 또 한편으로는 무인정권이후 같은 좌주를 둔 문생들이 자주 시험관 에 임명됨으로써 좌주 문생의 관계가 되욱 심화되어 가고 있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 들 문생 중에는 좌주가 같을 뿐 해를 달리 하여 급제한 사람도 있었을 터이지만 이들이 같은 좌주의 문생이라는 동류의식을 느꼈을 것은 틀림없다. 결국 좌주 문생의 관계는 단 지 좌주와 문생이라는 수직적인 관계 뿐만 아니라 문생과 문생 간의 수평적인 관계로도 확대 발전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이 시기에 同年의 門生으로서 한 해에 나란히 시험관을 지낸 경우가 많 았던 것도 흥미있는 대목이다. 다음의 표 9 는 고려 전 시기를 대상으로 하여 같은 해 에 급제한 사람들로서 그 뒤에 한 해에 같이 시험관을 역임한 경우만을 추려 본 것이다. 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년의 문생으로서 나란히 한 해의 시험관을 지낸 것으로 확인되는 경우는 문종대가 건이며, 무인정권기인 명종 고종대가 2건, 그리고 원 간섭 표 9 번호 2 3 4 禮部試 시행년대 文宗 37년(083)66) 明宗 22년(92) 高宗 7년(230) 忠烈王 2년(276) 시험관의 성명 崔 奭, 朴寅亮 趙永仁, 柳公權 俞升旦, 劉冲奇 許 珙, 薛公儉 시험관의 급제년대 文宗 5년(05)67) 毅宗 4년(60)68) 明宗 20년(90)69) 高宗 45년(258)70)

- 83 5 6 7 忠烈王 27년(30) 忠宣王 5년(33) 忠惠王 復位 2년(34) 표 0 家 門 孔巖許氏 固城李氏 安東權氏 慶州李氏 安東金氏 光山金氏 竹山朴氏 權 溥, 趙 簡 權漢功, 崔誠之 李君侅, 金光載 忠烈王 5년(279)7) 忠烈王 0년(284)72) 忠宣王 5년(33)73) 시험관의 성명 許珙, 許伯(허공의 孫)74) 李尊庇, 李君侅(이존비의 孫)75) 權呾, 權溥(권단의 子), 權準(권단의 孫)76) 李瑱, 李齊賢(이진의 子), 李世基(이진의 동생) 李蒨(이세기의 子)77) 金恂, 金永旽(김순의 子)78) 金台鉉, 金光載(김태현의 子), 金周鼎(김태현의 숙부)79) 朴全之, 朴瑗(박전지의 子)80) 기인 충렬왕 충혜왕대가 4건으로, 무인 정권기 이후 특히 본고의 분석대상 시기인 원 간섭기에 집중되어 있다. 위의 표에서 또 한 가지 특기할만한 것은 이군해와 김광재의 경우는 충선왕 5년에 역시 동년 의 문생으로서 함께 시험관에 임명 된 권한공과 최성지 의 밑에서 급제한 뒤에 동년의 문생으로서 다시 함께 시험관을 지냈다는 점이다. 이 밖 에도 비록 같은 해에 시험관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金恂, 李瑱, 吳祁 등은 위의 권부, 조 간과 함께 충렬왕 5년의 동년 급제자들이었다는 점에서 원 간섭기에 다수의 동년 문생 66) 과거의 시행년대와 당시 시험관의 이름에 대하여는 選場 참조. 67) 崔奭(또는 崔錫)은 이때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選場, 文宗 5년 4월. 그리고 朴寅亮의 급제 사실에 대하여는 朴景山墓誌銘 ( 韓國金石文追補, p.43) 참조. 68) (高麗列朝) 登科錄 (奎章閣 古 4650-0)과 柳公權墓誌 ( 朝鮮金石總覽 상, p.420) 참조. 69) 東國李相國集 25, 同年宰相書名記와 補閑集 상, 참조 70) (高麗列朝) 登科錄 과 許珙墓誌 ( 朝鮮金石總覽 상, p.465) 참조. 7) 趙簡은 이때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選場, 忠烈王 5년 6월. 그리고 權溥의 급제 사실에 대하여는 權溥墓誌 ( 朝鮮金石總覽 상, p.642) 참조. 72) 文憲公彜齋先生(白頣正) 行狀 ( 淡庵逸集 2)과 崔誠之墓誌 ( 朝鮮金石總覽 상, p.607) 참조. 73) 李嵒墓誌 ( 朝鮮金石總览 상, p.666)와 金光載墓誌 (같은 책, p.663) 참조. 74) 高麗史 권05, 列傳 許珙傳과 許珙傳附 許冠傳 참조. 75) 위의 책 권, 列傳 李嵒傳. 76) 위의 책 권07, 列傳 權㫜傳과 權㫜傳附 權溥傳, 權準傳 참조. 77) 위의 책 권09, 列傳 李瑱傳과 권0, 列傳 李齊賢傳. 권2, 列傳 李達衷傳, 그리고 東文選 권42, 鷄林赴任後再辭表 참조. 78) 高鹿史 권04, 列傳 金方慶傳附 金恂傳, 金永旽傳 참조. 79) 위의 책 권0, 列傳 金台鉉傳과 金台鉉傳附 金光載傳 참조. 80) 위의 책 권09, 列傳 朴全之傳.

- 84 國史館論叢 第55輯 들이 시험관으로 활약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좌주 문생의 관계가 번창하였음은 2대 또는 3대에 걸쳐 시험관을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에서도 엿볼 수 있다. 표 0 은 이 시기의 시험관 중에서 혈연관 계가 있는 사람들을 각 성씨별로 분류한 것이다. 이 표는 직계 자손만을 파악한 것이기 때문에 그 傍系까지 조사한다면 관련인물의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예컨대 權漢功의 경우는 위의 安東權氏의 방계혈족이며, 順興安氏인 安 珦, 安文凯, 安軸 등도 모두 서로 가까운 혈족들이다. 이 밖에도 시험관들은 혼인 관계를 통 해서도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다음은 그 중 확인 가능한 인물들을 뽑아본 것이다. ① 白文節 李尊庇의 外叔8) ② 權溥 李齊賢의 장인82) ③ 許珙 金賆, 金恂의 장인83) ④ 全昇 金賆의 아들의 장인84) ⑤ 金稹 安珦의 外孫이자 權準의 사위85) ⑥ 安珦 그의 손자 安牧이 金台鉉의 딸과 혼인86) 물론 이처럼 혈연이나 혼인관계를 통하여 좌주와 좌주 혹은 좌주와 문생 혹은 문생과 문생 양자가 긴밀한 유대관계를 맺는 일은 비단 이 시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현상이 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 관계의 성격상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 더욱 확대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예컨대 다음의 자료는 비록 고려말의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기는 하지 만, 얽히고 설킨 인간관계를 통하여 좌주 문생의 관계가 사회의 저변에 얼마나 널리 확 대되어 있었던가를 잘 설명하여 준다. 疎齋 崔彪가 (내게)와서 말하기를, 제가 廉東亭(廉興邦 : 筆者註, 아래의 경우도 마찬 가지임)과 함께 星山 宋令公(宋玢) 門下의 출신이었는데,87) 지금 그 손자 宋子郊가 다시 동정에게 뽑히게 되어 장차 성산에 돌아가서 그 조부를 뵈오려 하므로 우리들이 이를 전 송하게 되었습니다. 동정도 또한 감히 자중하지 못하고 나와서 그 모임 속에 참여하였습 니다. 그리하여 당연히 글을 써서 주며 송별해야겠는데, 詩나 文에 우리가 능하지 못한 8) 高麗史 권, 列傳 李嵒傳. 82) 위의 책 권07, 列傳 權㫜傳附 權溥傳. 83) 金賆墓誌銘 ( 韓國金石文追補, p.2)과 金恂配 許氏墓誌 ( 朝鮮金石總覽 상, p.608) 참조. 84) 金賆墓誌銘 ( 韓國金石文追補, p.2). 85) 李基白 편, 光山金氏 金稹戶口單子 ( 韓國上代古文書資料集成, p.53) 참조. 86) 金文正公(台鉉) 墓誌 ( 拙藁千百 ). 87) 염흥방은 공민왕 6년 4월에 李仁復과 金希祖의 문하에서 급제하였으므로 위에서 聖山 宋令公, 즉 宋玢의 문하라고 한 것은 아마도 國子監試 합격 사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송분이 국자감시를 맡은 사실은 기록에 나오지 않는다. 기록상의 착오로 보이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 85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스스로 헤아려 보아도 우리 恩門을 감동시키지는 못할 것 같습니 다. 선생께서는 비록 후진이기는 하지만, (염동정과) 함께 (장원 급제자의 모임인) 龍頭會 에 있으니 송자교를 보는 것이 반드시 남다를 것입니다. 부디 한 마디 말로 빛나게 하여 주십시요 라고 하였다. 나는 늙고 또 병들어 건망증이 이미 심하다. 그러나 우리 座主 益 齋 侍中 (李齊賢)의 손자 李政堂(李寶林)이 자기 조부의 門生 安政堂(安輔) 문하의 출신 이고, 謹齋 安文貞公(安軸)의 손자 正郞 景恭이 자기 조부의 문생 洪贊成(供仲宣) 문하의 출신이며, 내 아들 種學이 선친 稼亭公(李穀)의 문생인 韓清城(韓脩)의 문생이 되었는데, 지금 자교가 동정의 문하에서 나왔으니, 또한 우연한 일이 아니다. 恩門과 門生이 唐에서 한창 성하였고, 宋의 말세에는 재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문장의 血脈이 천지와 더불어 함 께 흐르니 어찌 世敎의 높고 낮음과 시대의 가볍게 여기고 중하게 여김이 그 사이를 틈 나게 할 것인가. (중략) 소재의 청은 진실로 감히 어길 수 없거니와 동정의 아름다움도 또한 마땅히 기록해야 할 것이며, 송씨 자손도 또한 마땅히 기록해야 하므로 나의 鄙拙 함도 잊고 글을 써서 떠나는 길을 전송한다( 東文選 권87, 贈宋子郊序, 李穡作). 위의 기록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려말에 이르러 자신의 조부의 문생의 문하에서 급제 하는 일은 생각보다 빈번히 일어났던 것 같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일은 비단 고려 말에 만 있었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이들 좌주와 문생의 관계는 그 조부로 인하여 남다른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관계는 그들만의 관계에 그치지 않고 좌주의 동년이 나 또는 龍頭會의 모임을 통하여 장원 출신의 다른 좌주와도 연결되어 확대 발전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조부의 문생을 다시 자신의 좌주로 삼게 되는 일은 곧 좌주 문생 관계의 확대 재생산을 의미하였다. 과거를 주관한 시험관들이 과거가 끝난 뒤에 자신의 집에 조정의 관리들과 빈객들을 모아 화려한 연회를 베풀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같은 사회적 토양 위에서 가능한 일이 었다. 흔히 學士宴이라고도 불리웠던 이 연회는 매우 사치스럽고 호화로운 것이어서 무 인정권때에는 御史臺의 주청을 받아들여 정부에서 이를 폐지한 일도 있었다.88) 그러나 이러한 관습은 그 후에도 여전히 성행되어 충렬왕대에 이르면 어사대의 관리들이 백성 의 곤궁함을 그 이유로 들면서 학사연의 停罷를 청하였을 정도였다.89) 그 뒤 충숙왕대에 이르러서는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시험관에 임명된 尹莘傑 이 州郡에 간청하여 錢財를 모아 크게 성대한 학사연을 준비하려다 그 본의를 의심한 국왕에 의해 시험관직에서 해임된 사건이 일어났다. 이처럼 학사연에 필요한 자금을 지 방에서 조달하는 일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윤신걸이 銓注를 장악한 정치적 실 력자였기 때문이었다. 비단 윤신걸의 경우가 아니더라도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 시기 88) 高麗史 권85, 刑法志2 禁令, 明宗 24년 4월. 89) 위의 책 권06, 列傳 沈諹傳.

- 86 國史館論叢 第55輯 의 시험관들 중에는 혹은 必闍赤로서 혹은 승지로서 전주에 참여하였던 인물이 많았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의 시험관 55명 중에서 85%가 넘는 47명이 2품 이상의 재상에까지 오른 사람들이었다. 이같은 시험관들의 위치는 곧 문생에 대한 좌주의 영향력을 강화하 면서 그들 상호간의 유대관계를 더욱 공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관계에서의 문생의 출세 에 있어서 좌주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뒷날 恭愍王代에 이르러서 辛吨이 다음과 같이 좌주 문생 관계의 폐단을 지 적하면서 李齊賢을 비난하였던 것도 결코 지나친 말은 아니었던 것이다. 辛旽이 국왕의 총애를 받자 이제현이 왕에게 이르기를, 신돈은 骨法이 옛 凶人과 같 으니 청컨대 가까이 하지 마옵소서 라고 하였다. 신돈은 이를 마음에 깊이 새겨 넣었지 만 이제현이 나이가 많아 害를 가할 수 없었다. 뒤에 신돈이 왕에게 이르기를, 儒者들 이 座主 門生이라 칭하면서 서로 청탁을 합니다. 심지어 이제현의 門生의 경우에는 門 下가 다시 문생을 보아 드디어는 나라에 가득찬 도둑이 되었으니 科舉의 害가 이와 같 습니다 라고 하였다( 高麗史 권32, 列傳 辛旽傳). 물론 이러한 신돈의 비난은 이제현에 대한 그의 반감에서 비롯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지만, 또한 당시의 좌주 문생 관계의 실태의 일면을 바로 지적한 것이라고 생각된 다.90) 그리고 이처럼 고려 말에 이르러 좌주 문생의 관계를 둘러싸고 자주 그 폐단이 거 론되었던 것은 원 간섭기 이래 크게 제고된 시험관의 위상에서 그 주요한 원인의 일단 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좌주 문생의 관계를 부정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본다면 이는 온당하지 못한 태도이다. 좌주 문생 간의 깊은 인간애는 자칫 경직화되기 쉬운 관료사회를 보다 활력있게 이 끌어 나가는 윤활유의 역할을 하였다. 더욱이 무인집권기 이래 오랫동안 문 인 사회가 침체된 상황에서 그것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큰 것이었다. 그러나 원 간섭기라 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일어난 좌주의 영향력 강화는 왕권의 실추 현 상과 맞물리면서 과거에 자주 정실을 개입시키는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 관계의 성격상 좌주와 문생을 중심으로 하여 派黨이 형성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것이었다. 90) 恭愍王代에 이르러 단행된 과거제의 개혁은 바로 이러한 좌주 문생의 관계를 뿌리 뽑는데 그 주 요한 목적을 둔 것이었으나 그것은 별다른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좌주 문생 관계의 완전한 혁파는 조선조 태종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가능하였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차후 에 別稿를 통하여 다룰 작정이다.

Ⅵ. 맺 는 말 - 87 - 무인정권 이후 차츰 발전하기 시작한 좌주와 문생의 관계는 원 간섭기에 이르러 더욱 번창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 시기의 시험관의 정치적 입지가 전에 없이 크게 강화된 것 과 관련이 있었다. 시험관 개개인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의 결과 이들의 상당수는 承旨나 必闍赤를 지냈거나 銓注를 관장한 국왕 측근의 인물이었다. 특히 2회 이상 과거를 주재 한 시험관의 경우 이러한 성향은 보다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 시기 의 시험관들 중에는 당대에 상당한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던 인물이 많았던 것으로 생각 된다. 그것은 이때 시험관을 지낸 총 55명 가운데 뒷날 재상으로까지 승진하였던 사람들 이 그 85%나 되는 47명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같은 시험관의 기용 방식은 과거에 대한 당시 국왕의 높은 관심을 반영하는 것으로 과거의 운영에 국왕이 깊숙히 관여하지 않았던가 하는 추측을 하게 한다. 사실 충렬왕의 경우는 비록 문신을 대상으로 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두 차례나 親試를 실시하였다. 그리 고 그 중 한 차례의 친시는 원래 고려전기와 같은 의미의 복시, 즉 예부시 합격자를 대 상으로 한 재시험으로 실시하려던 것이었다. 아마도 국왕은 측근의 인물을 기용하여 과 거를 관장하게 하거나 아니면 자신이 직접 과거에 개입함으로써 그의 왕권을 다지려고 하였던 것은 아닐까. 그러나 모든 권력의 중심이 元의 황실에 놓여 있는 특수한 시대적 상황 아래에서 국 왕의 이같은 노력이 결실을 얻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다. 이렇게 볼 때 국왕 측근 인물의 시험관 기용은 한편으로는 왕권을 다지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 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시험관의 상당수가 高麗史 열전의 嬖幸傳이나 姦臣傳 에 실린 인물이었던 점에서 보듯이 그들은 오히려 그러한 국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권력기반을 구축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시기의 시험관들은 전대의 무인집권기의 시험관들이 무인 실력자들의 총애를 받으면서 그 정치적 영향력을 점차 확대해 나간 것과는 달리, 보다 더 독자적인 위치에서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져 갈 수 있는 기회가 부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좌주와 문생의 관계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보다 더 발전할 수 있었다. 좌주의 정 치적 입지가 크게 강화됨으로써 양자의 관계는 더욱 공고하게 다져지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시험관직의 重任現象과 혈연 및 혼인을 통한 좌주 문생 관계의 확대 재생산으로 인 하여 그 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연 번창할 수밖에 없었다. 좌주가 좌주를 낳고 문 생이 문생을 낳으면서 발전해 나간 좌주 문생의 관계는 단지 좌주와 문생이라는 수직적 인 관계 뿐만 아니라 문생과 문생간의 수평적인 관계로도 확대 발전하는 관계였다. 그리

- 88 國史館論叢 第55輯 고 그 관계는 이 시기의 시험관의 정치 권력의 증대에 따라 관료체제 내에 派黨의 우려 마저 자아내면서 당시의 정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공민왕대에서의 과거제 개혁 은 바로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나온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