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 - 國史館論叢 第98輯 몰락농민의 도성집중이라는 상대증가의 두 측면에서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던 셈이다. 한편 개경의 상주인구가 왕실 관인 권세가 등 특권 지배세력을 주축으로 하여 구성 되었음을 고려하면, 이들의 消費行態와 관련하여 도성의 상업적 기반은 더욱 확고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이들 도성인구의 생활과 관련하여 또 국가수요 물자의 조달과 관 련하여 시전과 개경상업은 번성할 수 있었다. 13세기 초반 李仁老의 표현처럼 개경은 萬 寶所聚 求之易得 한 곳이었고, 이러한 사정을 두고 그는 文房四寶 중 그 제조가 가장 어 려운 墨조차 당시인들이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개경에 만물이 모여들어 쉽게 구입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40) 상주인구의 규모와, 그들의 경제적 신분적 지위에 상응하는 소비의 행태가 고려후기 개경상업 발달의 원초적인 기반이었음을 잘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그런데 고려후기 개경상업의 발달은 개경의 인구증가라는 외형적인 배경만이 아니라, 고려 국가의 경제구조 전반의 변동 속에서 진행되는 것이었다. 먼저 국가 및 지배층의 수 요물 조달체계로서 기능하던 官營 手工業과 所 제도의 변질과 해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 다. 고려후기 특히 무신집권기 이후 관영 수공업은 그 관리체계의 이완과 工匠들의 苦役 에 따른 반발 등으로 인해 국초 이래의 운영체계가 크게 동요하고 있었다.41) 충렬왕 22 년(1296) 中贊 洪子藩은 上書를 통해, 외방에 이주해 있는 鍮銅匠들을 기한을 정하여 개 경으로 돌아오도록 조처할 것을 건의하고 있다.42) 개경의 관영 수공업장에서 복무하여야 할 工匠들이 외방에 흩어져 민간 수공업에 종사하던 실태에서 나오는 건의였고, 이러한 현상은 이후 더욱 심화되는 추세였다.43) 이와 같은 관영 수공업체제의 동요는 결국 여기 에서 조달하던 王室과 官府의 수요물을 京市에서 구입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었다. 홍 자번이 같은 상서에서 당시 관부의 제반 수요물을 모두 경시에서 구득하는 실태를 지적 하며 强奪 에 따른 문제점의 개선을 요구하였던 것도,44) 이러한 관영 수공업체계의 동요 에 따라 나타나던 현상이었다. 한편 所 제도의 변동과 해체 또한 고려후기 상업, 특히 경시 성장의 주요한 배경이 되 고 있었다. 고려시기 所 제도는 現地性이 요구되는 지방의 특산물이나 수공업품을 행정구 역 신분제도 등과 연계시켜 특정 지역으로 하여금 공급하게 하는 제도였으나, 고려후기 에 들어 전반적으로 이들 소가 해체되고 특히 手工業 所는 붕괴 국면으로 치닫고 있었 다.45) 睿宗 3년(1108)에 이미 국왕은, 銅 鐵 瓷器 紙 墨 등 雜所에서 바치는 別貢 40) 破閑集 卷上, 文房四寶, p.83( 高麗名賢集 2). 41) 徐聖鎬, 高麗 武臣執權期 商工業의 展開, 國史館論叢 37, 1992. 42) 高麗史 卷84, 志38, 刑法1, 職制, 忠烈王 22年 5月, 中冊, p.843. 43) 徐聖鎬, 앞의 高麗 武臣集權期 商工業의 展開. 44) 주 42와 같음.
高麗後期의 開京商業 - 225 - 物色의 徵求가 지나치게 극심하여, 소속 장인들이 고통을 견디다 못해 도망하는 상황을 지적하면서 해당 관청으로 하여금 각 소로부터 거두어들이는 別貢貢物의 多少를 다시 酌 定하여 상주할 것을 지시하고 있다.46) 12세기 초반에 벌써 과중한 부담에 따른 수공업 소들의 반발이 격증하면서, 소가 점차 해체되는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銀所, 鐵所 등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이들 所民의 役은 주변 군현에 전가되거나 貢 物로 대체되고 있었다.47) 이 과정에서 수공업 소에 소속되어 있던 장인들은 민간 수공업 에 종사하여 갔고, 이들에 의한 민간 수공업의 발달이 역으로 수공업 소의 해체를 촉진시 키고도 있었다.48) 집권국가였던 고려에서 국가의 관부나 왕실, 개경 거주 지배층의 需要物品을 제조하여 공급하던 관영 手工業場과 수공업 所들이 이처럼 고려후기에 들어 동요하고 해체되어 감 에 따라, 이들 諸지배세력의 물품수요는 공물의 형태로 지방민에 부과되거나 京市에서 求 得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 시기 賦稅體系의 변동은 각종 공물의 先納과 代納, 그 리고 나아가서는 防納 현상이 출현하여 확산되면서 큰 문제가 되고 있었다.49) 공물의 대 납은 원간섭기에 접어들면서 일반화하여 갔다. 충렬왕 22년(1296) 中贊 洪子藩에 따르 면, 근래 외방에서 여러 이유로 인해 納貢의 시기를 놓치자 諸司의 관리들과 謀利之人들 이 물품을 선납하고 그 文憑을 토대로 지방에서 代價를 후하게 받아내고 있어 문제되고 있었다.50) 또 忠肅王 後8년(1339)에도 監察司에서 이와 같은 貢物先納의 폐단을 들어 그 금지를 榜示하고 있었다.51) 이와 같은 貢物代納의 추세는 이후 중앙 관서의 관리들이 해당 고을의 공물납부를 지 연시키거나 방해하는 防納으로 이어지면서 더욱 크게 문제되고 있었다.52) 그러나 정부의 거듭된 금지 방침에도 불구하고 고려말기에 들어 공물의 대납과 방납은 더욱 일상으로 확산되어 갔고, 禑王 원년(1375)에는 고려 정부가 그러한 대납의 추세를 인정하고 그에 따른 폐단을 줄이기 위해 상경하는 외방의 貢吏들에게 대납자금을 빌려주는 常平濟用庫 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53) 이 시기 京主人의 주된 업무가 이들 稅貢 특히 공물의 납부 45) 金炫榮, 고려시기의 所에 대한 재검토, 韓國史論 15, 서울大, 1986. 46) 高麗史 卷78, 志32, 食貨1, 田制, 貢賦, 睿宗 3年 2月, 中冊, p.729. 47) 徐明禧, 高麗時代 鐵所 에 대한 硏究, 韓國史硏究 69, 1990; 田炳武, 高麗時代 銀流通 과 銀所, 韓國史硏究 78, 1992. 48) 홍희유, 조선중세수공업사연구,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79(지양사, 1989). 49) 박종진, 앞의 고려시기 재정운영과 조세제도 ; 任明姬, 高麗後期의 貢物代納, 서울大 碩士 學位論文, 1995. 50) 高麗史 卷84, 志38, 刑法1, 職制, 忠烈王 22年 5月, 中冊, p.843. 51) 高麗史 卷78, 志32, 食貨1, 田制, 貢賦, 忠肅王 後8年 5月, 中冊, p.730. 52) 高麗史 卷84, 志38, 刑法1, 職制, 忠肅王 後8年 5月, 中冊, p.846. 53) 朴鍾進, 高麗末의 濟用財와 그 性格, 蔚山史學 2, 1988.
- 226 - 國史館論叢 第98輯 였던 사정 또한 이러한 공물대납의 추세와 연관되는 것이었다.54) 결국 고려후기에 일상화된 공물의 先納과 代納 현상은 개경과 지방을 포괄하는 교환경 제의 성숙을 기반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이들 공물대납의 일상화가 이 시기 상품의 생산과 유통구조를 촉진시키는 바탕으로도 작용하기 마련이었다.55) 그리고 이 같은 공물 의 대납 방납화 추세 속에서 개경의 경시는 가장 큰 공물의 購買 貿納의 場으로 기능 하였다. 공물을 수납하는 관부의 소재지이자, 전국 각지의 물산이 집주하는 공간이 개경 이었던 탓이다. 한편 불법적인 대납과 방납이 아니더라도, 경시에서의 貿納이 불가피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충렬왕대에 宰相들은 당시 諸道에서 공물로 거두어들이는 20升의 黃麻布가 그 紡績의 어려움 때문에, 모두 경시에서 비싼 가격을 주고 구매하여 납부하는 사정을 지적하며 이에 따른 백성들의 고통을 거론하고 있었다.56) 이는 농사에 바쁜 村婦 들의 紡績의 어려움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20승에 이르는 細麻布를 짤 수 있는 방적 기술상의 문제가 주된 이유였을 것이다. 도성과 지방의 직조기술의 차이에서 말미암는 불 가피한 대납 무납의 사례였고, 이는 다른 수공업품에서도 동일하였을 것이다. 도성에서 비록 직조나 제조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시기 高價의 最高級 商品들은 전국 각지에서 그 주된 수요층이 집결하여 있는 경시에 모여들 수밖에 없었고,57) 중앙 관부로 부터 이들 물품의 貢納을 分定 받은 군현의 경우에 따라서 京市에서의 貿納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이처럼 다양한 계기를 통해 京市에서 각종 공물이 무납되어 가던 사정은, 고려후기 시 전과 경시발달의 주된 기반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후기 사회경제의 전반적인 변동과 맞물린 이 같은 부세체계의 변화 곧 국가의 재정운용에서 京市依存이 증대해 가던 현상 은, 결국 그와 같은 변동의 기저에 이 시기 유통경제의 성장과 발달이 배경으로 있는 것 이었고, 또한 역으로 그 변동이 교환경제 그 중에서도 특히 경시발달의 기반으로 작동하 는 상호 연계적인 것이기도 하였다. 한편 고려후기 경시의 발달은 당시 진전되고 있던 지방상업과의 관련 속에서 전개되는 것이었다. 이 시기 특히 14세기에 들어서면, 지방을 무대로 한 교역이 또한 확대되고 있 었다. 品官層의 지방 거주 현상이 늘고 이들을 중심으로 각지에 富戶層이 성장하게 되면 서,58) 일정한 지역적 유통권이 활성화하고 그것과 도성상업과의 연계가 강화되고 있었던 54) 周藤吉之, 高麗朝の京邸 京主人とその諸關係, 朝鮮學報 111, 1984. 55) 金東哲, 앞의 고려말의 流通構造와 상인 ; 任明姬, 앞의 高麗後期의 貢物代納. 56) 高麗史 卷123, 列傳36, 嬖幸1, 朱印遠, 下冊, p.681. 宰相曰 今又令諸道 貢二十升黃麻 布 紡績於女工最難 村婦安能細織 必求諸京 價貴難買 民將不堪 57) 앞의 주 40 참조. 58) 朴恩卿, 高麗後期 地方品官勢力에 대한 硏究, 韓國史硏究 44, 1984; 徐聖鎬, 앞의 高麗
高麗後期의 開京商業 - 227 - 것이다. 고려후기에 陸商의 활동과 격지간을 왕래하는 船商의 활동이 증대해 가던 사정 은, 모두 상업계의 저와 같은 변동과 발전의 한 모습이었다.59) 당시 경시발달의 배경으 로 작용하고 있던 사회경제의 제반 변동이 아울러 지방과 지방상업에도 미치면서 나타나 는 변화였다. 고려후기 지방상업의 발전은 이처럼 도성상업과의 연계 속에서 진전되면서, 도성을 중 심으로 전국 각지의 物産이 집산되고 처분되는 交易網의 단초적인 형성을 가져오고 있었 다. 이제 개경은 정치 행정 군사상의 수도로서 지방의 人民들이 왕래하는 곳이자, 동시 에 이들을 따라 수많은 물품들이 유통되는 공간으로 기능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경과 지 방상업을 연결하는 이러한 교역망의 형성과 관련하여서는 高宗 말년에서 元宗代의 다음 일화가 주목된다. 당시 강원도 溟州의 향리였던 金遷은 고종 말년 몽고 침입 때에 어머니 와 동생이 포로로 잡혀가는 橫厄을 당하였다.60) 그런데 그 후 14년만에 (추정컨대 원종 13년인 1272년이겠다), 元에서 귀국한 百戶 習成이란 자가 元의 東京에서 부탁을 받고 가져 온 김천의 어머니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京市에서 3일 동안 溟州人을 수소문한 끝에 김천의 친구인 旌善人 金純을 만나 그 편지를 전달하고 있었다.61) 일견 상업과는 무관한 듯한 이 일화는, 그러나 당대 경시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사례 라고 판단된다. 즉 江華遷都 40여 년 만에 개경으로 還都한 직후였음에도 불구하고, 개 경의 경시에는 항상적으로 전국 각 지방의 사람과 物資들이 유통되고 있었으며, 이러한 사정을 배경으로 習成은 부탁받은 편지를 경시를 통해 명주에 거주하던 金遷에게 무사 히 전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환도 직후의 개경 경시의 실정이 이와 같았다면, 이후 고 려후기 개경상업과 지방상업과의 연계와 교역망의 형성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겠다. 그 리고 이러한 지방상업과의 연계가 이 시기 국가의 재정운용이나 부세체계의 변동과 맞 물리면서, 시전과 경시가 발달하는 국내의 상업적 기반으로 되고 있음 또한 당연하다 할 것이다. 한편, 고려후기 경시발달의 또 다른 기반은 특히 원간섭기 이후 번성하고 있던 對外貿 易에서 조성되고 있었다. 고려가 元과 동일한 정치 경제권에 속하게 되면서 본격화한 麗 元貿易은 조공무역과 공 사무역, 밀무역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었고, 고려말기에 이 武臣執權期 商工業의 전개 ; 洪榮義, 高麗後期 富豪層의 存在形態, 擇窩許善道先生停年紀 念韓國史學論叢, 一潮閣, 1992. 59) 홍희유, 조선상업사 (고대 중세),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1989; 金東哲, 앞의 고려말의 流通構造와 상인 ; 金三顯, 고려후기 場市에 관한 연구, 明知史論 4, 1992. 60) 蒙古軍이 강원도에 진출하여 溟州를 공략하였던 것이 고종 45년(1258)이므로(尹龍赫,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한국사 20, 국사편찬위원회, 1994, p.210), 金遷의 가족도 이 때 피랍 된 것으로 여겨진다. 61) 高麗史 卷121, 列傳34, 孝友, 金遷, 下冊, p.649.
- 228 - 國史館論叢 第98輯 를수록 그 중 특히 사무역과 밀무역 분야에서 熾盛하고 있었다.62) 그런데 이 시기 원으 로부터 들여오던 수입품의 大宗을 이루었던 상품은 주로 絹織物과 奢侈品 書籍 등이었 다. 紗羅綾緞으로 통칭되던 중국 각지의 특산 고급 견직물류가 고려 귀족층의 소비를 전 제로 대량 반입되고 있었던 것이다.63) 물론 이렇게 수입된 중국산 견직물의 일부가 中繼 貿易을 통해 일본으로 재수출되기도 하였으나,64) 이 시기 수입 사치품의 대부분은 고려 귀족층의 소비에 충당되고 있었다. 고려 최말기까지 계속되고 있던 중국산 견직물과 사치품의 대량 유입은 결국 고려 사 회에 奢侈風潮의 만연을 불러오면서, 크게 사회문제화하고 있었다. 恭讓王 3년(1391) 中 郞將 房士良은, 토산물인 紬 苧 麻布를 이용하던 종래의 衣生活 習俗이 사라지고, 대신 貴賤에 관계 없이 上 下 모두가 異土之物을 다투어 구입하는 풍조가 이루어져 그 奢侈 와 僭濫함에 節制가 없다며 그러한 실태를 탄식하고 있다.65) 나아가 그는 紗羅綾緞과 金 銀珠玉 등 외국산 사치품의 常用 풍토가 貴賤의 신분질서를 무너뜨리고 있고, 이를 갖추 지 않고서는 婚姻이 불가능하여 이 때문에 失禮는 물론이고 人倫마저 무너진다며 그와 같은 奢風의 근절을 강조하고 있었다.66) 이처럼 고려후기에 사회문제화하고 있던 사치풍조는 이 시기에 사무역 밀무역을 통해 수입되고 있던 중국산 사치품에 근거하는 것이었다.67) 그리고 그 수요층이 주로 개경 거 주의 왕실과 특권 귀족층이었음 또한 물론이었다. 더욱이 고려 최말기에 이르면 그와 같 은 사치풍조가 앞의 방사량의 지적에서 보듯이, 資産을 축적한 상인층을 비롯한 하층 신 분에게까지 확산됨으로써 문제가 심각해지던 형국이었다. 결국 고려후기 對中國貿易의 이 와 같은 사정은 그 수입 사치품의 주요 소비층이 집중하여 있는 개경상업의 발달기반으 로 작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시전을 비롯한 개경상업의 발달이, 역으로 이들 무역 을 통하여 반입되는 중국산 사치품의 유통경로를 확대함으로써 이러한 사치풍조의 만연 과 사무역 밀무역 번성의 토대로 작용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고려후기 개경상업의 발달은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개경의 인구증가라 62) 홍희유, 앞의 조선상업사 ; 張東翼, 高麗後期外交史硏究, 一潮閣, 1994; 全海宗, 麗 元 貿易의 性格, 東洋史學硏究 12 13, 1978. 63) 위은숙, 원간섭기 對元貿易 - 老乞大 를 중심으로, 지역과 역사 4, 부산경남역사연구소, 1997. 漢語 교습서인 老乞大 를 분석하여 원간섭기 對元貿易의 실체를 규명하고 있는 이 논 고의 pp.71 73에는, 당시 원으로부터 들여오던 다양한 수입품의 物種이 잘 정리되어 있다. 64) 위와 같음. 65) 高麗史節要 卷35, 恭讓王 3年 3月, 中郞將房士良上時務十一事, p.884. 66) 高麗史節要 卷35, 恭讓王 3年 3月, 中郞將房士良上時務十一事, p.884; 高麗史 卷85, 志 39, 刑法2, 禁令, 恭讓王 3年 3月, 中冊, pp.867 868. 67) 朴平植, 앞의 高麗末期의 商業問題와 捄弊論議.
高麗後期의 開京商業 - 229 - 는 외적인 조건 외에, 官營 手工業體系 所 제도의 동요와 해체, 부세제 변동에 따른 京 中代納과 貿納의 성행 등 社會經濟構造 전반의 변동을 기반으로 하여 전개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건 속에서 왕실을 비롯한 특권세력의 경시에 대한 投資와 獨占이 진 행되면서, 개경상업은 前代에 비해 그 성장을 더 한층 가속하고 있었다. Ⅳ. 開京商業의 主導層 고려시기 교환경제는 財貨收取者의 교환경제와 財貨生産者의 그것으로 양분되어 발전 하고 있었다. 전자가 왕실 관인 권세가 사원 등으로 구성된 지배층의 교환경제였다면, 후자는 농민이나 수공업자가 중심이 되는 피지배층의 교환경제였다.68) 고려후기의 상업 발달은 이 중 왕실과 특권세력이 주도하는 지배층 교환경제의 영역에서 두드러졌고, 이러 한 지배층 교환경제의 발전은 농민이나 수공업자층으로부터의 광범한 수탈에 기초하여 펼쳐짐으로써, 오히려 피지배층의 교환경제를 위축시키고 그 성장을 제약하고 있었다.69) 왕실과 특권세력이 주도하는 교환경제의 발달 양상은 京市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여서, 고려후기에는 이들 특권세력의 시전과 경시에 대한 投資와 利益獨占이 크게 증대하고 있 었다. 고려후기 국가의 公的인 經濟制度와 財政體系는 무신집권기의 혼란과 대몽항쟁 그 리고 원간섭기를 거치면서 전반적으로 동요하고 와해되어 제 기능을 상실하고 있었다. 田 柴科 제도의 운영이 실질적으로 붕괴하여 국초 이래의 收租地 분급제가 마비되고 파탄 상태에 있었으며,70) 반면 대몽항전과 원간섭 체제하에서 국가재정은 극도로 악화되고 있 었던 것이다.71) 이 시기 諸지배층이 합법과 비합법의 수단을 동원하여 대규모의 農莊 조 성에 열을 올리고,72) 한편으로 山林 漁場 鹽盆 등 山林川澤에 대한 奪占에 본격 나서 고 있던 사정은,73) 모두 국가에서 제공하는 공적인 경제기반의 와해와 붕괴에 직면하여 68) 李景植, 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 韓國史硏究 57, 1987; 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Ⅱ, 지식산업사, 1998에 재수록; 蔡雄錫, 앞의 高麗前期 貨幣流通의 基盤. 69) 李景植, 앞의 16世紀 場市의 成立과 그 基盤 ; 蔡雄錫, 高麗後期 流通經濟의 조건과 양 상, 韓國 古代 中世의 支配體制와 農民 (金容燮敎授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2), 지식산업사, 1997. 70) 李景植, 高麗末期의 私田問題, 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86; 朴京安, 高麗後期 土地制度硏究, 혜안, 1996. 71) 박종진, 앞의 고려후기 재정운영과 조세제도. 72) 주 70의 李景植, 朴京安의 논고 참고. 73) 高麗史 卷79, 志33, 殖貨2, 鹽法, 恭愍王 19年 2月, 中冊, p.742; 高麗史 卷85, 志39, 刑法2, 禁令, 忠肅王 12年 2月, 中冊, p.865; 朝鮮經國典 上, 賦典, 山場水梁, 217쪽(國史 編纂委員會刊 活字本 三峯集 에 수록).
- 230 - 國史館論叢 第98輯 그들의 私的인 경제기반을 확보하려는 노력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렇게 생산 영역에 대한 私占과 奪占을 통해 그들의 수중에 집적된 諸産物은, 이제 유통영역에 대한 특권세력의 투자와 연계되면서 商品으로 전화하여 처분되기 마련이었다. 시전과 경시는 이런 형편에서 이들 특권 지배층이 우선적으로 활용하는 최대의 시장이고 교환기구였다. 고려후기 경시에 대한 투자와 독점을 통해 개경상업을 주도하고 있던 세력에는 국왕과 왕실이 그 선두에 있었다. 국가재정의 파탄에도 불구하고 고려후기 특히 원간섭기에 접어 들면서 왕실의 財政需要는 급증하고 있었다. 이 시기 고려 왕실의 親朝費用은 통상적인 국가재정으로는 감당해 낼 수 없을 만큼 그 규모가 컸다. 예컨대 충렬왕 10년(1284) 공 주와 세자가 동행한 親朝 행차의 경우, 扈從臣僚의 숫자가 1,200여 명에 가지고 간 財貨 는 銀 630여 근, 紵布 2,440여 필, 楮幣 1,800여 錠에 이르고 있었다.74) 충숙왕 5년 (1318) 事大以來 國用煩劇 75)하다는 국왕의 실토는 이 같은 처지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결국 고려 왕실과 정부는 친조와 원 사신 접대에 소요되는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內房 庫 迎送都監 國贐色 盤纏都監과 같은 새로운 재정기구들을 설치하고 常徭 雜貢 등의 명목으로 각종 부가세를 징수함으로써 이와 같은 財政難에 대처하고자 하였다.76) 그러나 이렇게 신설된 각종 재정기구와 부가세 科斂 등이 백성들의 저항에 직면하게 되면서, 국왕과 왕실세력은 시전과 경시에 대한 직접적인 투자를 통해서도 심각한 재정난 의 타개를 모색하고 있었다. 특히 원간섭기에 世界市場의 중심으로 번성하고 있던 元都에 체류하면서, 국제무역과 상업에 대한 인식을 提高할 수 있었던 국왕들은 저와 같은 재정 형편 속에서 교환경제의 활용에 주목하여 갔고, 忠惠王은 그 대표적인 국왕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충혜왕 後3년(1342) 2월의 다음 기록은 그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王發義成德泉寶興布四萬八千匹 開鋪於市77) 국왕이 義成庫 德泉庫 寶興庫의 布 4만 8천 필을 재원으로 하여 직접 市廛에 店鋪를 차리고 있는 것이다. 충혜왕의 이 같은 시전내 점포 개설은 그 자체가 국왕으로서 벌인 유례를 찾기 어려운 파격적인 殖貨行態였고, 이 시기 개경상업의 발달을 이끌던 주도층의 한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예라 하겠다. 충혜왕의 京市投資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개경의 三峴에 新宮을 건설하였는 姜順吉, 忠宣王의 鹽法改革과 鹽戶, 韓國史硏究 48, 1985; 權寧國, 14세기 榷鹽制의 成 立과 運用, 韓國史論 13, 서울大, 1985. 74) 高麗史 卷29, 世家29, 忠烈王 10年 4月 庚寅, 上冊, p.611. 75) 高麗史 卷84, 志38, 刑法1, 公式, 職制, 忠肅王 5年 5月, 中冊, p.845. 76) 박종진, 앞의 고려시기 재정운영과 조세제도. 77) 高麗史 卷36, 世家36, 忠惠王 後3年 2月 戊午, 上冊, p.734.
高麗後期의 開京商業 - 231 - 데, 그 제도가 왕의 거처로서 王宮과는 사뭇 같지 않았다. 즉 신궁에는 곡식과 비단으로 가득 찬 倉庫가 100칸이나 되며, 행랑에는 綵緞을 짜는 女工을 선발하여 두고 있었으며, 또한 방아와 멧돌[碓磑]까지 다수 구비하고 있었던 것이다.78) 高麗史 에 전하는 이 삼 현의 신궁은 결국 그 전후의 정황으로 볼 때 국왕의 거처라기 보다는, 비단을 생산하고 곡물을 가공하여 경시에서 처분하기 위해 마련한 商業施設物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그 가 설립한 시전의 점포와 연결시켜 도성상업에서 流通利益을 倍加하기 위한 시설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 신궁의 건설을 그에게 주청한 銀川翁主 林氏가 상인 林信의 딸이었던 사정에서 확인되듯이, 충혜왕의 이 같은 경시투자는 당시 성장하고 있던 대상인 세력과의 연계 아래 이루어지는 것이었고,79) 그가 이들 상인출신 嬖幸들을 대리시켜 벌인 활발한 대외무역 활동80) 또한 그가 투자한 경시를 통해 그 수입품을 처분하여 갔을 것이다. 충 혜왕에 대한 史臣의 殖貨로써 일을 삼고, 商財의 利를 계산하여 經營을 일삼았다 라는 評 은,81) 이와 같은 그의 경시투자와 상업활동을 두고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고려후기 경시에 대한 투자와 이익독점의 추세는 국왕과 왕실만이 아니라, 執權官人을 비롯한 특권세력의 일반적인 경향이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우선 崔氏 武人政權 의 경시대책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최씨 정권을 연 崔忠獻은 집권과 더불어 시전의 행랑 1,008칸을 改築하여 대대적인 시전 재정비를 단행한 바 있었다.82) 한편 최충헌은 이렇 게 시전을 개축하고 정비한 시기를 전후하여 또한 그의 私第를 도성내의 闊洞에 건축하 고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이 闊洞私第를 민가 100여 채를 허문 數里의 부지 위에 굉장하고 화려하게 지었는데, 그 규모가 궁궐과 비슷하였으며 북쪽으로 시전을 향한 十字 閣이라는 別堂을 두고 있었다.83) 그런데 그의 이 私第가 있는 闊洞은 바로 개경의 시전 이 위치한 인근이었고, 별당의 당호인 十字閣 역시 京市署가 소재한 시전거리 남쪽의 十 字街에서 그 명칭이 유래한 것이었다. 요컨대 최충헌의 闊洞私第는 시전이 자리하고 있는 京市의 中心部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84) 최충헌이 집권 이후 이처럼 시전을 대대적으로 개축하여 재정비하고 그 중심부에 자신 78) 高麗史 卷89, 列傳2, 后妃2, 銀川翁主林氏, 下冊, p.32. 王起三峴新宮 其制度不類王居 庫 屋百間實穀帛 廊廡置綵女 又多置碓磑 79) 전병무, 고려 충혜왕의 상업활동과 재정정책, 역사와 현실 10, 1993. 80) 高麗史 卷36, 世家36, 忠惠王 後3年 3月 丙申, 上冊, p.734; 高麗史節要 卷25, 忠惠王 後4年 9月, p.649. 81) 高麗史節要 卷25, 忠惠王 後3年 3月, p.645쪽; 高麗史節要 卷25, 忠惠王 後4年 3月, p.647. 82) 앞의 주 7, 8 참조. 83) 高麗史 卷129, 列傳42, 叛逆3, 崔忠獻, 下冊, p.798. 忠獻嘗營第于闊洞 毁人家百餘 務爲 宏麗 延袤數里 擬於禁掖 北臨市廛 構別堂 號十字閣 84) 北村秀人, 앞의 崔氏政權の成立と京市.
- 232 - 國史館論叢 第98輯 의 私第를 건축하였던 이유가, 京市의 교역활동을 활성화하는 한편으로 이에 대한 관장과 통제를 강화함으로써 최씨 정권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한 財政基盤으로 활용하는 데 있었 음은 自明하다 하겠다.85) 數萬名에 이르던 私兵을 주력으로 정권을 유지하고 있던 그에 게 있어,86) 京市는 정권유지를 위해 소요되는 막대한 財政의 안정적인 運用基盤으로서 매우 중요하게 여겨졌고, 또한 이를 적극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왕실과 집권관인 세력 을 필두로 하는 특권층의 경시투자와 이익독점의 추세에는 이 시기 寺院 또한 예외가 아 니었다. 14세기 전반 개경의 시전구역에 30칸의 店鋪를 내어 운영하고 있던 金剛山 長安 寺의 경우는 그 대표적인 사례였다.87) 수조지 분급제로서의 田柴科 제도가 마비 파탄에 이르고 국가의 公的인 財政構造가 와해되는 사회경제의 격변 속에서, 고려후기 왕실 관인 사원 등 諸특권세력들이 私的인 경제기반의 확보에 주력하면서 그 일환으로 상업 특히 경시에 대한 투자를 증대하고 있 었던 것이다. 당시 온갖 수단을 동원하여 소유지와 수조지의 양 계통에서 조성하고 있던 이들의 農莊은 標以山川 88)하고 山川爲標 89)하다는 지경이었고, 여기에서 축적된 수만 수십만 석의 農莊所出은 高利貸나 유통영역에서 처분되지 않으면 안되었다.90) 여기에 특 권세력이 수조권에 근거한 田主的 强制에 기반하여 벌이던 抑賣買인 反同을 통하여 수취 한 物品들,91) 어장 염분 등 山林川澤의 사점과 탈점을 통해 축적한 産物,92) 이 시기에 이들 주도로 번성하고 있던 대외무역의 과정에서 국내에 반입된 각종 외국산 奢侈品93) 등, 고려후기에 이들 특권층의 수중에 집적된 제반 물품들이 상품으로 전화하여 유통되고 처분되는 공간 또한 주로 시전과 경시일 수밖에 없었다. 고려후기에 부세제 변동에 수반 하여 각종 貢物이 경시에서 무납되어 공급될 수 있었던 것도, 결국은 이처럼 특권세력의 주도하에 국내외 각지의 산물이 경시에 集注하여 유통되던 형편에서 가능한 일이었으며, 왕실 관부 수요의 공물이 高價의 稀貴品目이거나 精細한 高級品일수록 그러한 사정은 더욱 일반적인 것이었다. 한편 고려후기 개경상업을 주도하고 있던 또 다른 세력은 이들 특권층의 상업투자와 85) 위와 같음. 86) 旗田巍, 高麗の武人崔氏の家兵, 白初洪淳昶博士還曆紀念史學論叢, 螢雪出版社, 1977. 87) 주 18 참조. 88) 高麗史 卷78, 志32, 食貨1, 經理, 忠烈王 24年 正月, 中冊, p.707. 89) 高麗史 卷78, 志32, 食貨1, 祿科田, 忠穆王 元年 8月, 中冊, p.714. 90) 高宗 27년(1240) 집권무인 崔瑀의 孼子이자 승려였던 萬宗과 萬全이 경상도에서 운용하던 미곡은, 그 量이 무려 50여 만 석에 이를 정도였다( 高麗史節要 卷16, 高宗 27年 12月, pp.425 426). 91) 주 69의 논고 참조. 92) 주 73 참조. 93) 주 62, 63 참조.
高麗後期의 開京商業 - 233 - 연계하여 성장하고 있던 大商人 세력이었다. 이 시기 개경상업의 발달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왕실과 권세가 등 특권세력에 의해 주도되고 있었지만, 한편에서 이들의 委託 을 받아 상업활동을 대행하는 과정에서 상인들의 수중에 商業的 資産이 축적되고 있었고, 여기에 기반한 상인층의 성장 또한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고려 최말기에 商業捄弊策을 논란하던 중랑장 房士良에 따르면, 당시 상인들의 財富는 그 정도가 公室과 다투고 그에 따른 僭濫함이 王侯에 버금간다는 지경이었다.94) 특히 대외무역 분야에서 이들의 상업활 동은, 그에 대한 지속적인 根絶 방침에도 불구하고 사무역과 밀무역을 중심으로 더욱 熾 盛하고 있던 형편이었다.95) 고려후기 지배층의 상업활동은 유교의 身分 職業觀과 관련하여, 주로 代理商人을 앞 세우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었다. 예컨대 충혜왕대의 南宮信 林檜 尹莊 林信이나, 충숙 왕대의 孫琦 李仁吉 李奴介 등은 嬖幸으로서 국왕의 국내외 교역활동을 주관하였던 자 들로, 모두 한결같이 상인 출신이었다.96) 이들이 국왕의 嬖幸이자 委託商이 될 수 있었 던 조건도, 당시 그들이 축적하고 있던 막대한 상업적인 자산에 그 기반이 있었음은 물론 이다. 이처럼 고려후기 大商人層은 국내외 교역활동을 통해 축적한 資産을 보호하고 이를 확대하기 위해 왕실 및 특권세력과 결탁하여 그들의 위탁상을 자처하고 있었다. 14세기 李齊賢의 언급에 의하면, 당시 고려의 士大夫 사이에는 이들 富商의 女息을 小室로 두는 것이 하나의 풍조라고 일컬어질 만큼 광범위한 현상이었고,97) 그러한 행태에는 王室 또 한 예외가 아니었다. 충혜왕에게 三峴에 新宮을 조성하게 하여 京市를 대상으로 한 상업 시설로 활용하게 하였던 銀川翁主 林氏는 대상인이던 아버지 林信의 딸로서 그 자신도 본래 沙器商이었다.98) 나아가 고려후기에 상인들은 스스로 官職에 진출하여 사회적 身分 을 상승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국내외에 걸친 商活動을 倍加시키고도 있었다.99) 이들의 관직 진출은 대외무역과 연관하여 변경의 千戶 萬戶職에 집중되었으나,100) 그 외에도 각종 添設職,101) 나아가서는 中央官職에까지 미치고 있었다. 충숙왕대에 정 3품의 密直 副使에 오른 李奴介와 李仁吉은 바로 그러한 인물이었다.102) 94) 高麗史 卷79, 志33, 食貨2, 市估, 恭讓王 3年 3月, 中冊, p.740. 95) 위은숙, 앞의 원간섭기 對元貿易 ; 須川英德, 앞의 高麗後期における商業政策の展開. 96) 위은숙, 앞의 원간섭기 對元貿易, p.86. 97) 益齋亂藁 卷4, 小樂府, p.269( 高麗名賢集 2). 98) 高麗史 卷89, 列傳2, 后妃2, 銀川翁主林氏, 下冊, p.32. 99) 이 시기 상인들의 관직 진출과 신분 상승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金東哲, 앞의 고려말의 流 通構造와 상인 에 잘 정리되어 있다. 100) 高麗史節要 卷33, 辛禑 14年(辛昌 卽位年) 8月, p.838; 高麗史節要 卷35, 恭讓王 3年 3月, 中郞將房士良上時務十一事. pp.884 885. 101) 高麗史節要 卷32, 禑王 9年 2月. pp.792 793. 102) 高麗史 卷35, 世家35, 忠肅王 15年 8月 甲寅, 上冊, p.717; 高麗史 卷124, 列傳37, 嬖
- 234 - 國史館論叢 第98輯 이와 같이 특권세력과의 연계나 관직진출을 통해 상활동의 편의를 도모하고 商業資産 의 확대를 기도하던 대상인층에 있어, 京市投資는 따라서 지극히 당연한 경향이었다. 국 내외 교역을 통해 그들의 수중에 집적된 각종 物貨의 최대 소비처가 바로 경시일 수밖에 없던 사정에서, 이는 必至의 귀결이었다. 공양왕 2년(1390) 고려 정부가 京市의 工商을 빠짐없이 파악하여 市籍에 등재시킴으로써 국가의 경시에 대한 관장과 통제정책의 失效 를 提高하려고 하였을 때,103) 그 대상이 되고 있던 工商의 主客은 주로 이들 대상인층과 그들의 휘하에 있는 공상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고려후기 사회경제의 제반 변동과 그에 기초한 경시의 발달사정 또한 이들 대상 인층의 京市投資와 資産擴大에 적극 활용되고 있었다. 이 시기 貢物의 代納과 京中貿納에 서 그 주체로 흔히 지목되던 謀利之人 과 貨殖之徒 들은,104) 바로 관인과 결탁하여 경시 를 활용한 공물대납을 주도하던 상인세력을 지칭하는 것임에 틀림 없었다. 국가의 부세체 계의 변동에 따른 공물의 대납과 京中貿納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또 그 추세를 조장함 으로써 商利益을 확대시키던 대상인층의 행태였던 것이다. 이와 같이 고려 사회의 諸특권세력이 주도하고 여기에 상인들이 가세하여 더욱 진전되 고 있던 개경상업의 발달은, 그것이 국내외 교역에서 차지하는 比重과 位置 탓에 고려후 기 국내외 상업의 발전을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하였고, 결국 그 최말기에 이를수록 심각 한 商業問題 社會問題를 露呈시켜 가고 있었다. 국내상업에서는 왕실 국가기구나 특권 지배층의 京市侵奪과 전주적 강제에 의거한 抑賣買, 백성들의 逐末風潮와 농업의 축소 등 이 문제되었고, 대외무역에서도 사무역 밀무역의 성행과 이에 따른 國際收支의 악화나 奢侈風潮의 만연 등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말기 商業界의 이러한 문제는 이제 그 原因에 대한 분석과 捄弊策을 둘러싸고 관인 사대부 사이에서 激論을 야기시키고 있었고, 이들 상업문제에 대한 인식과 대처방안의 分岐는 고려 왕조의 存續과 신왕조의 開創을 둘러싼 정치세력간의 異見으로 이어지고 있었다.105) 幸2, 崔安道 附 李仁吉, 下冊, p.703. 103) 주 19와 같음. 104) 高麗史 卷84, 志38, 刑法1, 職制, 忠烈王 22年 5月, 中冊, p.843; 高麗史 卷78, 志32, 食貨1, 田制, 貢賦, 忠肅王 後8年 5月, 中冊, p.730. 105) 고려말기 상업문제의 소재와 그 개혁방안을 둘러싼 갈등에 대해서는 앞의 拙稿 高麗末期의 商業問題와 捄弊論議 에서 詳述하였다.
- 236 - 國史館論叢 第98輯 더욱 강화시키고 있었다. 즉 官營 手工業體系나 所 제도의 이완과 해체는 이를 통해 공급하던 국가 왕실 지배층 수요의 물품을 貢物로 대체시키고 있었고, 이 貢納制 또 한 고려후기에 변동하면서 京中에서의 代納과 貿納이 일상화하였던 것이다. 결국 이 시기 재정운영구조와 부세체계의 변동은 그 기저에 시전의 확대와 경시의 발달이라는 유통경제의 성장을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었고, 또 역으로 그러한 추세가 경시발달의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고려후기에는 경시의 발달과 병행하여 지방상업 또한 品官 層의 지방 이주와 富戶層의 성장에 힘입어 진전되고 있었다. 이 시기 지방상업의 발달 은 전국상업의 거점이었던 개경상업과의 연계를 통하여 전국적인 교역망의 단초적인 형성을 가져오고 있었고, 이는 개경상업 발달의 또 다른 기반으로 역할하였다. 아울러 고려후기에 사무역 밀무역 분야를 중심으로 熾盛하던 對外貿易 또한 수입품의 대종이 중국산 絹織物과 奢侈品이었음을 고려하면, 이의 주된 소비층이 집중하여 있는 개경에 서의 처분을 전제로 전개되던 것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경시의 상업기반은 더욱 확대 될 수 있었다. 財貨收取者의 교환경제와 財貨生産者의 교환경제라는 二元的인 구성을 지니고 있던 고 려시기 상업에서, 고려후기의 상업을 주도하던 세력은 왕실 권세가 사원 등의 諸특권세 력이었고, 이는 개경상업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국초 이래 정비된 집권국가의 토지 및 경제제도가 이완되고 변동하면서 公的인 經濟基盤이 와해되어 가자 私的인 경제 기반의 확대에 주력하였고, 그 와중에서 유통영역에 대한 투자와 이익독점을 도모하고 있 었다. 시전과 경시는 이들 특권세력에게 있어 중요한 투자대상의 하나였다. 경시에 대한 투자와 이익독점을 위해 국왕과 왕실 권세가들은 시전에 점포를 차리기도 하고, 국내외 교역을 통해 집적한 물품을 경시를 이용하여 처분하고 있었다. 시전에 점포를 내고 경시 를 대상으로 한 상업시설인 新宮을 조성하였던 忠惠王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 하겠다. 그 러나 이는 충혜왕만의 경우는 아니어서, 최충헌 역시 시전을 전면 개편하고 행랑을 재건 축하는 동시에 시전의 중심지구에 私第를 지음으로써, 이들 경시를 이용하여 정권운영을 위한 경제기반을 확보하고 있었다. 특권세력들이 조성한 대규모의 農莊과 山林川澤에 대 한 私占 奪占, 그리고 국내외 교역을 통해 집적한 物産들의 처분과 그 資産의 확대 재생 산을 위해서도 경시에 대한 투자는 불가결하였다. 여기에 특권세력과 연계한 大商人층 또 한 가세하여, 이들의 국내외 商活動을 대행하면서 商業資産을 확대해 가고 있었다. 국내 외 교역의 거점이었던 경시의 발달을 주도하며 성장하고 있던 대상인층은, 한편으로 그들 이 축적한 資産을 바탕으로 하여 官職 진출과 身分 상승을 이루어냄으로써 그 資産의 보 전과 확대를 도모하기도 하였다. 요컨대 고려후기 시전의 확대와 경시의 발달은, 그것이 국내외 교환경제에서 차지하
高麗後期의 開京商業 - 237 - 던 位置와 比重과 관련하여 고려후기의 상업발달을 선도하고 있었고, 또한 이 시기에 대두하던 상업문제의 핵심이 그 안에 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개경상업의 발달과 그 속에서 파생되고 있던 제반 문제는, 고려말기에 이르면 그 파악방식과 대책을 둘러싼 인식의 격차 곧 상업론 상업인식의 分岐로 이어졌고, 이 과정에서 抑末論 抑末策에 기초하는 집권국가의 새로운 상업정책이 新王朝 개창을 도모하는 세력들 사이에서 본격 대두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