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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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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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고 전화도 많다. 몸은 1,000년 전보다 진화한 것이 없는데, 처리할 일과 정보는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영어가 필요 없는 분야에서까지도 취 업 시험에서 영어 성적을 요구하니, 우리를 필요 이상으로 바빠지게 하는 요인이다. 문자 생활도 우리를 바빠지게 할 수 있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CD 2117(121130)

Transcription:

그분을 그리며 김형규 선생님과 국어연구소 김동언 강남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월 4일. 이날은 제가 해암(海巖) 김형규 선생님을 처음 뵌 날 입니다. 국어연구소의 소장님과 신임 연구원 신분으로 만났습니다. 이 만 남은 이후 선생님이 1988년 3월 제2대 소장을 끝으로 국어연구소를 떠나 실 때까지 만 3년을 지속하게 됩니다. 퇴임하신 이후에는 뵙지 못하다가 1996년 12월 삼성서울병원에서 선생님의 영결식을 맞게 되었으니, 3년 세월이 선생님과 인연을 맺은 시간의 전부라 하겠습니다. 선생님은 국어연구소의 초대 소장과 제2대 소장으로 선임되시면서 국 어연구소와 인연을 맺으셨습니다. 국어연구소는 오래전부터 국어국문학 계는 물론 언론계에서 설립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오던 중, 1984년 5월 10 일 학술원의 임의 기구 형식으로 설립되었습니다. 당시 언론에서는 20여 곳에서 기사 혹은 사설 등으로 설립을 축하하고, 국어연구소에 대한 기대 감을 드러냈었습니다. 이것은 국민들이 국어연구소의 설립에 얼마나 관 심을 가졌는지를 웅변으로 보여준 예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설립 초기 국어연구소 운영에 대한 지원은 매우 초라하기 그지 없었습니다. 서울시 종로구 안국동 148번지 해영회관 4층에 방을 얻어 문 을 연 국어연구소의 첫해 예산은 문교부 지원금 1억 4천여만 원이었고, 인원은 연구원 4명, 조사원 6명, 사무원 2명이 전부였습니다. 잡다한 서무 1985년 3 그분을 그리며 161

임져야 할 서무 과장도, 연구실 운영을 책임질 연구 실장도 없는 상 태로 출발한 것입니다. 심지어 서무의 일을 특정 연구원이 겸무해야 하는 상황으로 있다가 1985년 10월에 가서야 서무과가 생겼으니 그 사정을 미 루어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임의 기구라는 조직은 업무를 안정적으로 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이 따 랐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국어연구소의 예산 집행은 공무원 규정에 준해 이루어졌지만, 연구원의 신분은 단순히 임의 기관의 직원일 뿐이었습니 다. 훗날 제가 대학으로 자리를 옮길 때, 국어연구소의 경력은 40%만을 인정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렇게 어수선한 상태에서 연구원의 들고 남 이 잦았던 때라 당시 국어연구소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선생님의 고충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선생님은 국어연구소 운영 방향을 두 가지로 잡으셨던 듯합니다. 하나 는 국어의 과학적 연구를 뒷받침할 자료의 수집 정리 연구이고, 다른 하 나는 국가 정책 사업에 대한 자료 조사 및 연구입니다. 전자는 국어연구 소 첫해의 사업이 국민학교 교과서 어휘 조사, 한자 및 한자어 사용 실태 조사 연구, 외래어 사용 실태 조사 연구, 정부 수립 이전의 어문 정책에 대한 연구, 국어 생활 발간 등인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후에 도 이러한 기조의 연구 사업은 계속 이어졌고, 여기에 북한의 국어 연구 등이 추가되는 정도였습니다. 후자는 1985년 2월부터 학술원의 맞춤법, 표준어, 외래어 표기법 개정안 에 대한 연구 검토 사업이 국어연구소에 위탁되면서 당시 국어연구소의 중심 사업이 되었습니다. 국어연구소가 시급한 국가 현안인 어문 규범의 최종안을 책임지게 되 면서 연구소는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이 사업의 모든 분야에 위원으로 참여하시면서 최종안을 마련하기 위해 부단히 애쓰셨습 니다. 마침내 국어연구소는 1986년 외래어 표기법(문교부 고시 85-11), 1988년 한글맞춤법(문교부 고시 88-1)과 표준어 규정(문교부 고시 88-2) 의 뼈대가 된 각각의 국어연구소안을 마련하였습니다. 따라서 1984년 학 를책 162 새국어생활 제21권 제2호(2011년 여름)

술원안을 중심으로 개정된 국어의 로마자 표기법을 제외한 3대 어문 규 정 개정 작업이 모두 선생님의 재임 기간 중에 국어연구소안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선생님은 1970년 문교부 국어심의회 어문조사연구위원회에 서부터 어문 규범 개정안 작업에 참여하셨으니, 이 결말은 선생님께도 매 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맞춤법과 표준어에 대한 최종 규정이 고시됨에 따라 국민의 언어생활 에도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가장 많은 혼란을 일으킨 것은 명사 형 어미 -음 을 -슴 으로 표기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표준어 규정에서 존대법 서술형 어미를 -습니다 하나로 통일한 것이 발단이었습니다. 이 전까지는 -습니다 와 -읍니다 가 별개의 단어로 모두 인정되었기에, 언 중은 -읍니다 가 -습니다 로 바뀐 것으로 이해하고, 이 어미와는 상관없 는 명사형 어미 -음 도 -슴 으로 표기하였기 때문입니다. 길거리 공사판 의 입간판에도 갓길 없슴, 칼국수 봉투에도 방부제 없슴, 관공서 증명 서 수수료 게시판에도 수수료 없슴 으로 표기되는 일이 아주 오래 지속 되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경제학 교수는 -읍니다 는 -습니다 로 바꾸면 서 읍사무소 는 왜 습사무소 로 바꾸지 않느냐고 따지는 일도 있었습니 다. 국어를 정확하게 쓰는 일은 국어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지식이 필요하 나, 대부분의 언중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던 일이었습니다.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해 준 국어연구소는 저에게도 잊을 수 없는 즐 거운 추억을 남겨 주었습니다. 먼저 학계의 원로 선생님들을 직접 뵐 수 있는 기회가 많았던 것입니다. 학부를 대전에서 보냈던 저는 국어학을 공 부하면서 관련 전공 서적이나 논문을 쓰신 원로 선생님들이 늘 궁금했었 습니다. 강의실에서 스승과 제자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선생님들의 책을 통해 배우면서 남는 아쉬움이었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기회는 저에게 작 지 않은 즐거움을 주었습니다. 또한 국어연구소는 국어의 현실적인 문제들에 눈을 돌리는 기회를 주 었습니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늘 이론적인 문제들이 중요한 주제였지, 현 그분을 그리며 163

실 생활에서 국어와 관련된 어문 규정이나 국어사전 등에 대하여 관심을 습 런데 국어연구소는 모두 이런 현실 국어의 문제를 다루는 곳이었으니, 여기에서 잊고 있던 국어 연구의 한쪽 부분을 찾은 셈입니다. 다양한 국어사전을 눈여겨볼 기회가 있었음은 국어연구소가 저에게 준 하나의 행운이었습니다. 표준어 규정에 대한 국어연구소안이 1987년 6월 확정되고, 이어 1987년 9월부터 표준어 사정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작업의 결과는 1990년 9월 표준어 모음 이라는 책으로 발간되었는데, 저도 이 작업에 뒤늦게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작업은 국어대사 전 과 새한글사전 에서 공통된 것, 또는 국어심의회안(1979년)과 국어 연구소안(1987년)의 어휘를 우선 채택하고, 이 네 가지가 일치하지 않거 나 어느 한 곳에만 있는 것을 중심으로 심의한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국어사전에 대한 검토가 필수적이었습니다. 이 경험은 1998년 국어의 비속어만을 모아 편찬한 국어비속어사전 (프 리미엄북스)을 내는 데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국어사전들 이 가지고 있는 큰 문제의 하나는 용례에 근거한 구체적 뜻풀이가 부족 하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한 사전을 한 개인이 편찬한다 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주제를 비속어로 한정하고, 20 세기에 발간된 문학 작품에서 10년 단위로 용례를 예시하는 형태를 취한 용례 중심의 사전을 편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선생님은 불만을 겉으로 표현하시지 않고 안으로 삭이시는 성품이셨습 니다. 제가 1986년 국어연구소 기관지 국어생활 의 편집을 맡을 때였습 니다. 제4호인가로 기억되는 국어생활 이 발행된 다음에 문제가 생겼습 니다. 본문의 띄어쓰기가 많이 틀린 채로 발행된 것입니다. 국어 생활의 모범을 보여야 될 국어생활 이 이렇게 되었으니 실무 책임자인 저로서 는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지금에야 고백하건대, 이러한 일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지 않고 대충 교정을 본 결과였습니다. 선생님께 기울여 본 적이 없었 니다. 그 164 새국어생활 제21권 제2호(2011년 여름)

호출되어 호된 질책을 받는 것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는 상황이었습니 다. 그러나 당시 선생님은 국어의 띄어쓰기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나 중요 한 것은 틀리지 말아야 한다는 당부의 말씀을 하신 게 전부였습니다. 회 초리로 맞는 것보다 더 아팠습니다. 선생님께 죄송하고, 제 자신이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 이후로 저에게는 일이 터지기 전에 미리 최선을 다 하자 라는 생활 지침이 생겼습니다. 대학으로 자리를 옮긴 후 10년이 넘 는 시간을 제가 봉직하는 대학 신문인 강남학보 의 주간으로 지냈습니다. 책임을 맡고 있는 내내 국어생활 의 일이 잊히지 않았습니다. 신문이 발행되는 날에는 대부분 인쇄소로 달려갔습니다. 사소한 띄어쓰기까지 제 눈으로 모두 확인해야만 마음이 놓였습니다. 선생님은 건조한 연구소 생활에 때때로 유쾌한 시간을 만들어 주셨습 니다. 당시 선생님 아드님의 친구인 KBS의 피디(PD)가 가족끼리 우리 말 실력을 겨루는 프로그램 제작의 협찬을 요청해 왔습니다. 유럽 여행 중 에 자국어로 게임하는 프로그램을 보고 신선한 자극을 받았으니, 이 일을 국어연구소에서 도와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우리말 겨루기 의 원조 격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논의 끝에 비교 적 한가했던 제가 대표로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거쳐 1986년 방영된 KBS1 텔레비전 오락 프로그램 가족끼리 정답게 에 국어 문제가 출제되었습니다. 음절 10개를 제시하면 이 음절을 조합하여 같은 시간에 많은 단어를 만드는 가족이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프로그램에 서 제시될 문제는 다른 연구원들과 함께 만들었지만, 채점을 위하여 거의 6개월 가까이 방송국을 오갔었습니다. 채점이 필요한 것은 출연자가 제시 한 말이 단어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 출연료는 매번 전표로 받았는데, 이것을 한꺼번에 모아 찾은 액수 가 적지 않았나 봅니다. 연말에는 선생님의 배려로 연구원들에게 떡값을 줄 수 있었으니 모두가 행복한 연말이었습니다. 세종호텔 한식 뷔페에서 있었던 송년 회식이 끝나고, 몇몇은 연말 분위기에 취해 시내를 활보하다 그분을 그리며 165

던 저의 집으로 향했습니다.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고 다음 날 연구소로 출근했던 30대 초반 젊은 시절의 만용을 생각하면 지금도 저절 로 미소가 납니다. 길지 않았던 시간, 선생님과 함께했던 시간은 저에게 즐겁고 고마운, 잊 을 수 없는 시간입니다. 선생님은 임의 기구로서 불안하게 출발했던 국어 연구소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노력하셨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국어의 실태 파악과 어문 규정 정리 등에서 나름의 결과를 내셨습니다. 올해가 탄신 100주년이 된다니 선생님을 뵙고 싶고, 또한 그 시절이 그리워집니다. 소격동에 있 166 새국어생활 제21권 제2호(2011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