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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 國史館論叢第 41 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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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國史館論叢 第41輯 인 1895년에는 새로 商務社가 설치되는데164) 商務社는 각지 세 임방을 설치하고 보 부상을 통제하다가165) 1904년에 폐지되었다.166) 한편 개항장 객주에 대한 통제는 官指定 特許客主制를 통해 이루어졌다.167) 예컨대 인천 의 경우 25 특허객주제를, 부산에서는 8商賈를 이용하여 개항장 객주 전반을 통제하고 그 들로부터 營業税를 징수하였던 것이다.168) 그러나 이러한 특허 객주제는 객주의 자유영 업 권을 침해하고 외국상인으로 하여금 한국에서의 상행위에 제한을 받게 함으로써 일본으로부터의 거센 항의에 직면해야 하였다. 그에 따라 곧 특허객 주제는 철폐되었고, 정부에서는 다시 영업세를 징수하는 책임자로 상회 객주 대장을 만들어 두목을 하송함으로써 통제를 지속하였다.169) 이와 같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으로 보부상을 제외한 다른 상인들에 대한 통 제는 일관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이들에 대한 통제 보호 기관이 출현하기 시작한 것은 갑오개혁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1893년 10월에는 인천항에 설립된 商 會들에 새로 商規를 규정한 章程을 만들어 보냈으며, 이에 따라 개항장에서는 각기 客主商會社의 구관 통제하에 객주 영업이 행해지게 되었다.170) 즉, 관부나 궁부의 재 정보충을 위하여 각기 필요에 따라 일부 객주를 관부나 궁부에 부속시켜 구문의 일 부를 징수하였으며, 개항장에서는 일정지역의 물화매매를 전관하는 지정 객주제를 163) 高宗純宗實錄 高宗 22년 乙酉 8월 10일. 惠商公局이 혁파되면서 鍮油商會社도 함께 혁 파되었는데, 그 후 褓負商은 商理局에서 관할하였지만, 鍮油商은 별도의 통제기관을 갖지 못한 상태였다. 그로 인해 지방 관리의 수탈로부터 무방비상태에 놓이게 됨으로써, 이들의 청원이 잇따랐다. 이에 정부에서는 1891년 별도로 鍮油社룰 만들어 通商衙門에 부속시켰 다. 그리고 그 節目에서 이들에게 商票를 발급하는 한편, 分錢名色切嚴禁 各處下款或有侵 漁之弊 自各該營 嚴査禁辦事 라 하여 자의적인 수탈을 금지함으로써, 이들을 보호 통 제하였다. 判鍮油社節目 (1891) 古 4256-34 164) 大韓商工會議所, 앞의 책 (1976) pp.26 27. 165) 독립신문 光武 3년 7월 11일 잡보. 166) 商務社를 비롯한 당시의 상인단체, 상인통제단체는 근본적으로 자본주의적 자유영업의 원 칙에 위배되는 것이었고, 정부가 특정 상인의 전기적 독점을 권력에 의해 보장하는 기관이 었다. 이러한 단체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에 상당한 장애를 초래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 때문에 일본의 침략이 강화되면서 차례로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商務社 폐지에 대해서는 高宗純宗實錄 光武 8년 3월 28일자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議政府議政 李根命 奏 商務社之說置 始由於保護商民之意 而挽近百弊滋興 胎害中外 以致民怨之狼藉 此不可仍 置 該社爲先革罷 使各 安業 又或有如前橫恣之弊 各別禁湒 何如 允之. 167) 韓㳓劤, 앞의 책 p.189. 168) 부산에는 일찍부터 일본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객주, 여각이 다수 운집해 있었는데, 이 중 8 인이 일본과의 거래 지정 객주로 선정되어 있었다. 이들을 八商賈라 하였으며, 그 산하에 다수의 객주가 모여 활동하고 있었다. 개항 이후 부산항 객주에 대한 정부의 통제는 기존 의 틀을 이용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즉, 1889년 동래부에서는 부산 객주 44인에게 영업 세를 부과하였는데, 그때 八商賈가 영업세 징수 책임자로 지목되었던 것이다. 大韓商工會 議所, 商工會議所九十年史 (1976) p.46. 169) 위의 책 p.191. 170) 韓㳓劤, 앞의 책 pp.193 195.

- 43 - 실시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개항장 객주는 일부 관지정 객주와 기타 그에 부속하 는 객주로 재편되었으며, 객주상법회사 등은 반관반민의 조직으로서 이들로부터 영 업세를 징수하는 기관인 동시에 상업회의소적 기능을 갖는 기관으로 자리 잡았다.171) 그런데 이들 商法會社, 商會所들은 한편으로는 정부의 영업세 징수업무를 위임받 은 객주 통제기관으로 존재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外商과의 교역에서 상권을 옹 호하는 구실도 하였다. 이들 조직의 주요 직위에는 대개 고급 관료가 임용되었는데, 이는 客主商法會社 商會所들이 갖는 이중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172) 즉, 한편으로 는 객주의 이익을 옹호하기 위한 자발적 단체로서의 성격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 로는 정부의 통제를 받는 관제 통 제조직의 성격도 갖는 것이 바로 이들 客主會였던 것이다.173) 이러한 통제 방식을 제도화 한 것이 1895년에 공포된 商務會議所規 例 174)였다. 이 규례에 따라 각지 객주들이 자발적으로 설립한 상업회의소, 상회사, 상법회사 등 상인단체는 농상공부의 강력한 일원적인 통제 아래에서 영업세 납부 주 체로 자리 잡았다. 1896년에 창설된 仁川紳商協會는 그 章程 제2관 제1조에서 本港 監理署에서 宮內 府 訓令을 奉准하여 客主 營業人의 税則을 母年 2,000元式 分兩等하여 陽曆 6月과 11月로 定期하여 內藏院에 上納케 磨鍊할 事 라 하여 조세청부기관적 성격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으며, 아울러 당 협회에 가입하지 않고 영업하는 행위를 불법으로 규정 하여 도고적 성격을 전혀 극복하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175) 이러한 성격은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상당히 오랜 기간 지속된 것으로 보 인다. 1903년 群山에 설립된 永興社는 그 장정에서 內藏院에서 本社를 勾管할 事, 營業税金은 銅貨 二千元으로 定하고 陰曆 5月 11月에 各一千元式 分兩等輸納할 事 등의 규정을 정하 여 內藏院 관할의 조세청부기관적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176) 171) 韓㳓劤 위의 책 p.196. 172) 李炳天, 앞의 책 p.93. 173) 이에 대해서는 大韓商工會議所 韓國의 商工業百年 (1984) p.63 참조. 174) 大韓商工會議所 위의 책 p.27. 참고로 규례의 내용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제1조 商務會議所를 開設코저 時 該地 商業者中 26名 以上의 合意로 地方長官을 經 由 야 農商工部 大臣에게 認可를 請 미 可 제3조 會議所의 事務權跟은 下와 如 1. 商業이 旺盛 方法이나 衰退 믈 救하 方案을 議決 事 1. 商業의 利害得失에 關 意見을 官廳에 具申 事 1. 商業에 關 官廳諮問에 答申 事 1. 關係者의 請求를 依 야 其他 商業에 關 紛議 裁決 事 제13조 經費 納期에 下納 者가 有 거든 其徵收를 地方 收稅官吏에게 委囑 물 得 함 제17조 農商工部 大臣은 會議所가 其 權限을 犯 거나 商業에 妨害한 行爲가 有 므로 認 는 時 會議 停止 거나 其 情形을 依 야 役員 或 會員의 幾人이나 全數의 改選을 命 믈 得 大韓商工會議所, 앞의 책(1976) pp.68 69. 175) 大韓商工會議所, 앞의 책 pp.108 110.

- 44 - 國史館論叢 第41輯 또 如或有文券을 侵害 於客主者어든 自本社로 一切嚴禁하되 라 하여 文券을 지 닌 客主에 한해 영업권을 가질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또 다음해 역시 群山에 설 립된 昌盛社도 內藏院에 營業税則을 每年 4,000兩式 分兩等하여 陰曆 6月과 同年 12 月로 定期하여 上納할 事(제1조 제3관) 라 하여 역시 內藏院에 營業税를 납부하는 조 세청부기관의 성격을 보이고 있으며, 本社任員은 社長 1員과 副社長 1員과 總務 2員 은 京中縉紳으로 定하고 議員 10員과 公事 2員은 客主中知事人으로 擇定할 事(제1조 제2관), 新入하는 社員은 許入例金 200元을 例納本社하고 憑帖과 章程을 受한 後에 開業할 事(제4조 제1관) 라 하여 昌盛社 加入者에 한해 영업권을 인정함을 밝히고 있 다.177) 1904년에 설립된 務安港士商會社도 그 章程에서 以口文 中從略排出自五年介 上納 宮內府이흡더니 毎年六百元式 春秋分兩等于本院 自本院成章程 以給 이라 하 여 매년 600량씩 內藏院에 납부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178) 즉, 당시의 객주회는 궁내부 내장원에 영업세를 납부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社 長을 內藏院卿이 例兼하고 副社長은 該港 監理 또는 警務使가 例兼하며, 客主 中 유 력자가 會長이 되어 총괄하는 체제로 이루어져 있었던 것이다. 그런 한에서 객주회 는 어디까지나 지방관의 자의적 수탈을 배제한 채, 수탈을 궁내부 내장원으로 일원 화하기 위한 정책적 기재였다고 보아 무방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책적 기재는 봉건적 수탈의 유제가 강고히 존재하던 상황에서 객주들로서도 필요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갑오 이후 객주회가 갖는 이러한 성격으로 말미맘아 이는 순수한 자본가 단체라기 보다는 어용특권단체라 불러야 마땅한 것이었고,179) 그와 관련하여 각종 비리가 발생 하기도 하였 다. 다음 기록은 당시 자본가 단체 결성이 갖는 사회적 의미를 잘 나타 내 주고 있다. 농상공부에서 지난달에 충청남도 관찰사 이건하씨에게 훈령하기를 예산군 덕산군 포구여각 상민 이덕수 등의 소지를 본즉 내포 각군에 쌀 장사 등이 각 포구 여각에 와서 시가대로 곡식을 사고 팔고 하는데 서울 사는 이운학이가 내려 와서 궁내부에 부속하였다 칭하고 도여각(객주회-필자)을 창설하여 곡식 값을 조종하며 각 포구 여 각 상민들의 취리하는 중에서 돈 두냥 닷돈씩을 수렴하고 짐싣는 배 사람에게와 곡 식 매매하려 온 사람에게도 전에 없던 백일세라 칭하고 수렴을 하니 각항 수세와 도 고와 도여각을 임의 혁파하였는데 유독 이운학이가 이 같이 작패하는 고로 각 포구 상민 등의 영업할 길이 없으니 금단하여지이라 한 바 이가는 엇더한 잡유로 궁내부 176) 永興社釐定章程 (光武 7년) 內蔵院 (奎) 18957. 177) 昌盛社章程 (光武 7년) 內蔵院, 群山 (奎) 18974. 178) 務安港士商會社章程 (1904) (奎) 18958. 179) 趙璣濬은 개항기의 전통적 상인 단체는 모두 정부로부터 특권을 부여 받았으며, 특권에 입각하여 견고한 결속력을 유지하였다 고 하였다. 趙璣濬, 앞의 책 p.226.

- 45 - 에 부속하였다 칭하고 각 상민에게 침손하는지 두 고을에 신칙하야 이가를 잡아 가 두고 엄히 중치케 하며 각 포구 도여각은 일병 혁파하야 상민 등의 생업을 편안케 하고 이가의 늑탈한 세전은 사실하야 곳 도로 물려 해군에 봉유하고 써 조판함을 기 다리라 하였더라. 180) 즉, 객주회 상업회의소가 갖는 징세청부권을 이용하여 정부의 특허를 빙자한 불법 적 수탈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며, 이는 상업의 자유에 정면으로 위배된다고 하여 독립협회의 신랄한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는 정부의 특허를 사칭한 경우 를 든 것일 뿐, 정식 인허를 받은 경우라 하더라도 그것이 일반 상인에게 미치는 영 향은 대동소이하였다. 예컨대 1901년에 설립된 平安南北道粬子會社는 매년 一萬元을 국가에, 8백元을 西廟에, 4천元을 淳嬪宮에 각각 上納할 의무를 지는 대신에 해당 지 역의 粬子 판매업자들의 영업을 통제할 권리를 부여받았다.181) 이 회사는 명칭은 회 사 기업처럼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粬子 관매업자들을 통제하고 그들로부터 영업세 를 징수하는 都賈에 불과하였고, 그런 점에서 개항장의 객 주회사들과 하등 다를 바 없었던 것이다 객주회가 갖는 이러한 都賈的 성격은 1905년 이후에 가서야 불식된다. 대략 1900년 이후 부터 각지 객주회 상법회사들이 점차 상업회의소로 개칭하면서 근대적 자본가단 체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영업세 수납기관의 요소가 탈각되고 있 었던 것으로 보인다.182) 예컨대 1907년에 창설된 金泉商業會議所의 規則에서는 이전 180) 독립신문 建陽 2년 2월 11일 잡보. 181) 平安南北道粬子會社章程 (光武 4년) 內藏院 (奎) 21909. 182) 참고로 1911년 현재 활동하고 있던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명칭 의원수 특별의원수 설립년도 京城商業會議所 50 10 1905 仁川朝鮮人商業會議所 7 2 1910 開城商業會議所 40 6 1907 水原商業會議所 10 5 1908 江華郡商業會議所 115 11 1910 大邱商務所 18 2 1908 金泉商業會議所 14 43 1906 東萊商業會議所 30 8 1908 龍南郡商業會議所 43 9 1908 平壤商業會議所 235 22 1908 平壤實業協會 24 5 1911 三和商業會議所 30 7 1908 安州商業會議所 30 1909 元山商業會議所 40 1900 咸興商業會議所 30 1907 北靑商業會議所 40 8 1905

- 46 - 國史館論叢 第41輯 까지 항상적으로 나타나던 營業税 수납 청부기관적 성격이 사라져있다. 다만 상업회 의소 운영을 위한 유지비로 객주 구문의 1/10 징수를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183) 이 단계에서는 이미 정부와의 직접적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 아직도 이전의 의 무 가입조항은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임원의 정부관리 겸직제도는 폐지된 듯하다. 갑오 이후 각지 객주회의 이러한 성격은 그들의 활동 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원산에 서는 개항 직후부터 客主商法會社가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개항 이후 끊 임없이 일본인 상인 단체와 대립하고 있었다. 元山客主商法會社는 방곡령 문제, 일본 인 거류지내 한국인 퇴거문제, 일본인 거류지의 영대차 문제 등을 둘러싸고 元山日 本人商業會議所와 대립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이들에 대한 교섭력을 확보 하기도 하였다.184) 그러나 이는 어 디까지나 그 배후에 영업세 납부를 전제로 한 정 부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한편 1896년 농상공부 대신 趙秉稷, 협판 李彩淵, 상공국장 송헌변, 탁지대신 沈相 薫, 고 문관 브라운이 모여 漢城商業會議所를 창설하였는데,185) 회장, 부회장 등 간부 진은 시전상 인들로 구성되었다. 漢城商業會議所는 1897년 폐쇄될 때까지 정부에 도 량형의 통일을 건의 하고, 전국 상인에게 공정거래를 촉구하는 한편, 외국에서 교사 를 초빙하여 상무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세우는 등186) 당시 정부의 식산흥업정책을 보조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책동이 본격화하는 1905년 이후부터 각지 상인 단체는 정책보 조기관 적 성격을 벗어나 독자적인 활동을 벌이기 시작한다. 이는 물론 러일전쟁 이 후 대한제국 정부가 사실상 주권을 상실함에 따라 초래된 결과이기는 하였지만, 그 이전부터 끊임없이 정치적 발언권을 키워 온 상인집단의 노력도 적지 않게 작용하였 다. 그러한 노력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이 皇國中央總商會이다. 皇國中央總商會는 1898년 9월 시전상인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하였는데, 그 설립 취지문에서 요사이 외 국 장사는 흥왕하고 본국 장사의 생업은 조잔하여 심지어 전 자리를 외국사람에게 방매할 경우에 당하였으니 이렇고 말지 아니하면 일편 중앙의 기지도 보호키 어려우 니 이것이 다만 전민의 실업일 뿐 아니라 국계와 민생의 전판 생업이 끈어질지라 이 라 하여 자국 상업의 보호를 정면에 내걸었으며, 한편으로는 본회 설립 후에 회표로 西面商業會議所 1906 遮湖面商業會議所 1908 계 756 138 * 朝鮮總督府 朝鮮總督府統計年報 (1911). 183) 商業會議所創設記(金泉) 想栢 古 381 Sa58 1907.6.19. 184) 大韓商工會議所, 앞의 책 1976, pp.84 85. 185) 漢城商業會議所는 처음 1884년 종로 백목전 도가에서 육의전 상인들이 모여 설립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곧 유명무실한 상태로 쇠잔하였다. 大韓商工會議所 위의 책 p.89. 186) 大韓商工會議所 위의 책 p.90.

- 47 - 표준을 삼되 회표 아니 찬 이는 장사를 못하게 하고 라 하여 독점적 특권을 자임하 고 있다.187) 이로 미루어 皇國中央總商會는 전국 각지의 객주, 여각을 포함한 모든 상인을 의무적으로 가입시키려 한 것으로 보이나 이전의 惠商公局이나 당시의 商務 社와 같은 관제 조직은 아니었다. 이들은 나아가 동으로 철물교 서로 송교 남으로 작은 광교 북으로 안현까지는 외 국사람 들의 장사하는 것은 허락치 말고 그 지계 밖의 본국 각전은 본회에서 관할할 일이라 든가, 농상공부에서 허가한 인지는 본회에서 구관하니 각도 각군 장시 항구 포구 객주회사 만물 교역하는데 무명 잡세는 일방 금단하고 인지로 신행하며 각항 물가가 무단히 오르고 내리 는 것은 본회에서 자세히 살피고 밝혀 좋을 대로 관할하 며, 등의 구체적 요구 사항을 적기 하고 있는데, 이는 皇國中央總商會가 비로소 정 치적 압력단체로서의 구실을 자임하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188) 그렇다고 해서 皇國中央總商會가 바로 근대적 자본가 단체의 성 격을 띠고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 다. 오히려 그들 스스로가 ① 영업세 징수, ② 무명잡세 금단, ③ 물가 조절, ④ 영업 권 인허 등을 자신의 사명으로 내세웠던 것으로 보아189) 중세 적 도고의 체질을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한 것이었음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어쨌든 皇國中央總商會는 설립 직후인 1898년 11월에는 천여 명이 무리를 지어 5 6일간 商務規則을 인가해달라고 요구한 바 있으며,190) 皇國中央總商會 설립 이전인 1898년 4월에 도 나중 總商會 설립을 주동하는 洪鍾宇 등이 ① 방곡령 공포, ② 외 국 군대의 철수, ③ 외국인의 내지 통상 금지 ④ 외국 상인의 한성개시 철회, ⑤ 외 국 화폐의 사용 금지 등을 청원한 바 있었다.191) 또 같은 해 10월 18일에는 독립협회 와 합동으로 ① 외국 상인의 토지 구입 및 내지 정주상업 금지, ② 한성의 일상 단속 등을 요청하기도 하였다.192) 이와 같은 總商會의 활동은 정부와의 사이에 일정한 갈등을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 總商會長 조병식 이 정배되기도 하였다.193) 187) 독립신문 光武 2년 9월 30일 잡보. 188) 독립신문 光武 2년 10월 1일 논설에는 총상회 규칙 변론 이라는 제하에 본월 26일 밤 에 총상회 회원들이 농상공부 대신 이도재씨를 위협하여 인가를 맡은 일은 대단히 경계없 고 무례한 줄로 우리가 이왕 말하였거니와 라 하여 皇國中央總商會가 설립당초부터 정치적 압력을 근거로 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189) 독립신문 光武 2년 10월 1일 논설. 190) 農商工部大臣金明圭疏略 伏以臣之受勅 適在商民請願之際 千百成群團結於部門已五六晝夜矣 勢無奈何 所謂商務規則 卽行認可 急於退送矣 末乃愚彼褓負商 擅自激譊 駆逐民會 籍曰 忠 憤攸在 而終致亂民之煽動 實職此由也 臣之疲軟 不能早見豫待 防患未然之罪 焉可道乎 高 宗純宗實錄 光武 2년 11월 24일. 191) 독립신문 光武 2년 4월 9일 잡보. 192) 독립신문 光武 2년 10월 18일 잡보 및 19일 잡보. 193) 독립신문 光武 2年 10월 1일 잡보. 그저께 의정부에서 주본을 올렸는데 농상공부대신 이도재씨는 중앙총상회를 당초에 금하였다가 다시 인가하여 주었고 탁지부대신 겸임 경무

- 48 - 國史館論叢 第41輯 그런데 한 가지 특기할 점은 總商會가 事事件件 독립협회와 갈등관계에 있었다는 사실이 다. 독립협회가 자유무역주의에 입각하여 외국 자본의 진출에 호의적인 자세 를 견지한 데 반하여 總商會는 시종일관 국가의 강력한 보호를 요구하였고, 그를 위 한 呈疏運動, 示威運 動을 전개하였던 것이 이들 양자의 기본적 차이였다. 이러한 차 이는 독립협회 회원들이 朝 鮮苧麻會社 등 비교적 대자본이 필요한 사업에 진출하고 있었던 점과 總商會가 시전상인들 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던 데에서 연유한 것으 로 생각된다. 즉, 당시 대자본가층이 외국 자본과의 합작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한 다면, 소자본가들은 외국자본으로부터의 상권 보호라는 데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 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또한 이들 자본의 성장배경의 차이와도 무관하지 않다. 대 자본가들은 토지자본 등을 통하여 곧바로 외국 기술을 도입, 대자본으로 등장한 반 면, 소자본가들은 전래의 상업구조 속에서 미미하나마 점차 자신을 성장시켜 오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目賀田改革 이후인 1905년 7월 19일 금융공황에 대한 대책 마련에 부심하던 서울 상인들이 다시 京城商業會議所를 재발족시켰는데,194) 여기에서는 1904년 目賀田 改革으로 인한 금융공황의 구제책 마련을 정부에 호소하는 한편 화폐정리사업에 따 른 백동화 교환기간의 연기를 청원하였고, 또 그 과정에서 자구책의 일환으로 한일 은행을 설립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195) 이러한 활동은 이전 단계의 정책 보조기관 적 성격을 탈피하여 적극적인 정치적 압력을 행사하는 단계로 발전해 나가고 있었음 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이들은 정부의 보조 없이 독자적인 사업을 펼쳐 나가기 시작하였다. 190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회의소 건물을 건축하였으며 1907년에는 상품진열관을 건립하였다.196) 또 1909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상업잡지인 商工月報 를 발간하였다.197) 잡지 발간은 상업회의소를 통한 자본가 일반의 연대 사 민영기씨는 일전 밤 총상회 회원들이 농상공부 대신 이도재씨의 집에 가서 해회 인가 맡으려고 위협하되 경찰하여 금제치 못하였고 의관 조병식씨는 총상회 일로 저번에 견책 까지 당하였는데 종시 개과치 하니하고 기어이 총상회 회장이 되어 해 회원들을 농상공부 대신 이도재씨 집에 보내어 위협하여 인가맡은 일로 민영기씨의 탁지부대신과 겸임 경무 사며 이도재씨의 농상공부 대신과 조병식씨의 의관은 일병 면 본관하고 한성판윤 이채연 씨는 지방관되어 금칙못한 죄로 견책하고 조씨는 경기 연해변으로 정배마련되었으며 194) 大韓商工會議所 앞의 책 p.48. 참고로 1909년 현재 漢城商業會議所의 임원 명단을 제시하 면 다음과 같다. 회두 趙秉澤 부회두 成文永, 상의원 白完爀 白周兹, 趙鎭泰, 金然鶴 朴 承稷, 白寅基, 鄭斗焕 朴泓鎰, 劉秉璉, 李元植, 尹晶錫, 金鎭玉 즉, 漢城商業會議所는 고위 관료(이들을 대지주로 보아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와 대상인이 함께 조직한 단체라 해 도 좋을 성격의 것이었으며 1909년 단계에서 고위 관료의 참여는 그 대외적 교섭력을 높 이기 위한 것인 동시에 그들 중 다수가 자본가적 성격을 갖추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 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195) 大韓商工會議所, 앞의 책 pp.90 95. 196) 위의 책 p.92. 197) 이보다 앞서 1908년 10월 15일 일본 동경에서 大韓興學會가 商學界 를, 1909년 1 월에는 공업 월보사에서 工學界 를 각각 발간한 바 있으나 자본가 단체가 주체가 되어 잡지를

- 49 - 의식 제고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편, 仁川紳商協會도 러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鷄林獎業團이 활동을 개시하자 이 를 규탄 하는 한편, 1908년에는 李昇薰 등이 주동이 되어 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설립 된 평양도자기 주식회사에 산하 회원들을 참여시키려고 노력하였다.198) 또 대구상의 소는 1907년 국채보상 운동을 발의하여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기도 하였다.199) 일본 자본주의의 침투에 대한 대응 외에도 목포상 객주회가 1908년 호남철도주식회 사 설립에 집단적으로 참여하였던 것,200) 경성상업회의소가 상품진열관을 건립하고 商工月報 를 발행하였던 것 등도 이 시 기 자본가들의 자구책의 일환이었던 것이 다. 나아가 이러한 자구책은 대개 반일적 성격을 동시에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 다. 일본자본과의 결합 유착을 통해 변화된 여건에 신속 히 적응한 일부 대자본 -특 히 은행자본-을 제외한 상당수의 상인, 수공업자들은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이 는 이들로 하여금 개량적인 방법으로나마 반일투쟁의 대열에 서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1905년 이후 부르주아 민족주의자 일부 진영에서 반일 적 태도가 출현할 수 있었던 경제적 배경이었다.201) 商人團體 商業會議所의 이같은 변모는 무엇보다도 더 이상 정부의 보호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즉, 1904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 본이 이어 대한제국 정부에 대한 정치군사적 간섭을 강화함에 따라 국왕의 정치권력 은 허구화되고 일본 지주 일본 자본의 이익만을 전면에 내세운 식민지적 통치가 진 행됨으로써 한인 자본가들이 의지할 터전을 잃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이들로 하여 금 정부의 정책적 보호가 완전히 배제된 가운데에서 자구책을 찾지 않을 수 없도록 하였고, 이는 정부와 상업회의소의 관계 단절이라는 형태로 나타났다 결국, 1905년 이후가 되어서야 비로소 상인 단체는 정부에의 의존, 예속상태를 벗어 날 수 있었던 것이지만, 이는 일본의 정치 군사적 침입을 배경으로 한 일본 자본의 전면적 승리라는 상황에서 주어진 것이었다. 정부와의 관계 단절은 곧 정책적 보호의 배제로 귀결되었고, 상인 단체는 자립의 근거를 확보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어쩔 수 없이 자립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자립마저 오래 지속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 니, 1914년에 조선인 상업회의소가 일괄적으로 일본인 상업회의소와 통합됨으로써 조 선인 자본가들의 독자적인 이해를 대변하는 기관은 완전히 소멸해 버렸던 것이다. 발간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위의 책 p.93. 198) 大韓商工會議所 위의 책 (1976) p.114. 199) 위의 책 p.125. 200) 위의 책 pp. 120 121. 201) 朱鎭五는 상업자본을 바탕으로 산업자본으로의 전화를 시도하던 사상인층이 이미 산업자본 주의 단계에 도달한 일본 자본주의와 대립관계에 서게 됨에 따라 반일운동에 참가하게 되었 다고 보았다. 朱鎭五, 앞의 논문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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