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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Baduk Culture of Korea in 1920-1930 s Presented in <Maeil Shinbo> and <Dong-A Ilbo> 1)남 치 형(Nam, Chi Hyung)* 목차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과 기존 연구 현황 2. 연구의 범위 Ⅱ. 본론 1. 바둑에 대한 인식 2 향유계층 3. 전문기사의 출현 4. 바둑시장의 형성 5. 규칙과 용어의 변화. Ⅲ. 결론 영문제요 The most embarrassing part in the study of Korean Baduk history is the lack of absolute quantity of data based on facts. We know almost nothing but the legends, strange anecdotes, namely narratives about the game of Baduk which has been played more than 1300 years in Korean Peninsula. In addition, there is even fewer references about Baduk in colonized Korea. Therefore this paper tries to represent the Baduk culture in Korea particularly during 1920-1930 s through the newspaper articles, columns, and novels dealing with Baduk. It chose two newspapers <Maeil-Shinbo> * 명지대학교 바둑학과 부교수 (chihyung@mju.ac.kr)

270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published through the whole colonized years and <Dong-A Ilbo> most popular. From these two newspapers, we can see how Baduk was recognized, who were the people playing and loving Baduk, the environment made Baduk professionalized, the process of formation of Baduk market, and the changes happened in the traditional Korean Baduk called Sunjang. key words: Baduk, Baduk Culture, <Maeil Shinbo>, <Dong-A Ilbo>, Colonized Joseon, Newspaper, Sunjang Baduk. Ⅰ. 서론 1. 연구의 필요성과 기존 연구 현황 일본의 식민지배가 조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에 대하여는 많 은 연구들이 이루어졌고 현재도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다. 식민지기는 정치적으로 개화기 이후 외국과의 접촉을 통해 강화되어 가던 민족에 대한 자각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이자 조선의 주권을 빼앗긴 시기이며, 경제적으로 도시화, 산업화, 근대화가 본격화된 시기이다. 당시의 이러 한 변화가 조선사회에 내재되어 있던 역량의 자생적 발전인지 아니면 일제의 교묘한 수탈방법에 의한 것이었는지, 또는 그 둘의 복합적인 작 용인지 등에 대해서도 많은 논의가 진행 중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문화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식민지를 경험함으로써 우리의 전통문화는 쇠퇴하거나 명맥이 끊어졌는가, 아니면 최소한 유지되었거나 혹은 이전 보다 융성하여졌는가? 만일 전통문화가 식민지기를 거치면서 그 이전의 모습과 어떤 식으로든 달라졌다면 그 원인은 무엇인가? 현재 우리가 가 지고 있는 전통문화는 과거로부터 단절된 무엇이거나 식민지기의 잔재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71 인가 아니면 원래 우리가 가지고 있던 것의 올바른 복원인가? 그런데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하려는 시도에 앞서 부딪히게 되 는 문제가 있다. 바로 우리는 식민지기나 그 이전의 시기에 대해 얼마 나 알고 있는가 의 문제이다. 문제를 전통문화 중에서도 한반도에서 최 소한 1300년 이상의 긴 세월 동안 향유되어 왔던 바둑에 국한시켜보면 이러한 의문이 훨씬 더 구체화 된다. 사실 그 오랜 시간 동안 한반도에 서 바둑이 어떤 방식으로, 누구에 의해 향유되었는지를 알 수 있는 사실 에 근거한 구체적 자료는 거의 없다. 삼국유사나 삼국사기 등의 역사책 에 나오는 바둑에 관한 이야기들은 사실이라고 하기엔 전설이나 기담 ( 奇 談 ), 설화와 같은 내용이 대부분이고, 그 밖의 문헌에서도 그런 이야 기를 바탕으로 개인의 생각을 전개하거나 비슷한 내용을 각색한 것이 대종을 이루었다. 이러한 바둑에 대한 서술은 20세기가 되어서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 다. 과거의 바둑이 어떠하였는지에 관한 학술적 연구가 거의 전무한 가 운데 단행본이나 신문과 잡지의 기사들에 실린 단편적 글들은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던 이야기들의 재탕이 많았다. 때문에 특정 시기의 바둑 문 화가 실제 어떠하였는지 알기 어렵고, 따라서 연속된 두 시기를 비교하 는 서술, 예를 들어 식민지기의 바둑문화가 그 이전에 비해 어떻게 달라 졌는지, 발전했는지 퇴보했는지 등을 논하는 것은 결코 용이하지 않다. 본고가 식민지기의 바둑문화를 신문이라는 조금은 불완전한 자료를 통 해서라도 살펴보려는 이유는 이처럼 이론적 논의의 바탕이 되는 원자료 의 부족을 메우는 것만으로도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바둑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시대와 분야를 막론하고 모든 부분에서 절대량이 부족하지만 특히 식민지기 바둑문화에 관한 학문적 연구는 사 실상 전무했다. 이제까지 발표된 식민지기 조선의 바둑에 관한 연구 논

272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문은 필자의 논문 두 편(남치형, 2013a, 2013b)이 전부다. 게다가 이 두 편도 식민지기 바둑문화의 재현보다는 어떻게 일본의 바둑문화가 식민 지기를 거치면서 한국에 정착하게 되었는지, 왜 고유의 순장바둑 1) 은 이 러한 과정에서 쇠퇴하고 말았는지 등의 질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고, 때문에 당시의 바둑문화 그 자체보다는 그것에 대한 일본의 영향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다. 연구의 순서로 보면 식민지기에 조선 바둑계의 상황이 어떠하였는지를 아는 것이 먼저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연구의 부 족으로 인해 외부의 영향에 대한 평가가 먼저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식 민지기 혹은 해방 이후의 바둑문화가 이전 시기로부터 어떻게 변화되어 왔는지, 바둑이 식민지기에 근대화되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생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아니면 외부의 영향인지 등의 질문 자체가 처음 있는 일 이기도 했지만, 사실관계조차도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논의가 이루어진 탓에 거친 가설 수준을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따라서 본고는 1920-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바둑문화를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의 기사를 통해 재현해 보고자 한다. 2. 연구의 범위 본고에서 주로 검토할 자료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다. 두 신문은 모두 바둑대회를 주최하고 관전기를 게재하는 등 바둑을 콘텐츠로 적극 활용했다. 바둑이 처음으로 신문이라는 근대 적 매체와 결합하게 된 것은 일본에서였다. 일본에서 바둑은 이미 16세 1) 현재 우리나라에서 공식적으로 바둑이라고 인정되고 있는 것은 식민지기 일본으로 부터 유입된 일본식 바둑이다. 한반도에서 식민지기 이전에 최소 1300여 년 동안 두어졌던 바둑은 바둑판 위에 먼저 17개의 흑백의 돌을 배치한 후 시작하는 일명 화점식 의 순장바둑이었다.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73 기 말부터 제도화가 진행되어 바둑을 직업으로 삼는 전문가와 일반 애 호가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었고, 신문이 보급되기 이전에도 바둑 관련 출판물들이 소비되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일본 최초로 신문에 바 둑란을 두고 유명 기사들을 초빙하여 대국을 하게 한 후 그 기보를 게 재한 것은 우편호치( 郵 便 報 知 )신문 으로 1878년에 첫 기보를 게재하 였고, 이후 일본의 바둑은 사실 신문과 함께 발전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규칙의 발전, 시장의 확대, 후원자 집단의 다양화 등 많은 변 화들이 신문을 매개로 이루어졌다(남치형, 2010) 2). 조선에서 가장 먼저 기보를 게재한 것은 매일신보 로 1914년 10월 부터 묘수풀이를 게재하였고, 1919년 1월16일부터는 기전( 碁 戰 ) 이라 는 제목 하에 일본기사 山 平 壽 (당시 3단)와 조선의 국수( 國 手 )인 백남 규와의 일본식 2점 접바둑 대국보를 연재한다. 3) 매일신보 가 이처럼 일찍부터 바둑을 주요 콘텐츠로 다룬 것은 일본어 신문인 경성일보( 京 城 日 報 ) 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보인다. 일제는 강제 병합 이전에 조선 에서 발행되던 일본어 신문 5개 중 경성일보 만 남기고 모두 폐간시켰 고(윤상길, 2011), 조선인 독자들에게 가장 큰 신뢰를 받으며 발행부수 도 가장 많았던 대한매일신보 를 매수하여 매일신보 로 이름을 바꾸 고 총독부 기관지화 하였다(김영희, 2009). 이후 매일신보 는 경성일 보 에 비해 상대적으로 주변적인 위상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윤상길, 2) 이러한 바둑과 미디어로서의 신문의 관계 또한 매우 흥미로운 주제임에도 불구하 고 우리나라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아직까지 제대로 연구되지 못하고 있는 실정 이다. 본고는 신문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는 당시 바둑계의 상황을 객관적으로 재현 하는 것이 목적이므로 미디어이벤트로서의 바둑과 식민지 조선의 신문과의 관계에 관한 더 깊은 논의는 추후의 연구로 미룬다. 3) 가장 먼저 순장바둑의 기보를 게재한 것은 중외일보 로 1926년 12월 5일부터 명 가기전( 名 家 碁 戰 ) 이라는 제목 하에 순장바둑 기보를 게재한다: 안영이, 다시 쓰 는 한국바둑사 (서울: 한국기원, 2005), P.190.

274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2011), 주로 이념적이고 정치적인 내용보다는 가정 중심적이고 신변잡 기적인 내용을 전달하는 신문으로 바뀐다(권보드래, 2008). 그러므로 매일신보 가 바둑을 다루는 기사의 분량이나 내용은 이러한 제약을 염 두에 둔 상태에서 읽혀져야 한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총독부의 정책 이 이전보다 유연해지고 새로운 신문들이 창간되기까지 약 10년 간 유 일한 조선어 신문으로서 매일신보 는 그 나름대로 대중의 집단적 경험 을 매개하여 이후 사회 정치적 대중으로 전유할 가능성을 배태하였고(권 보드래, 전게논문), 바둑에 있어서도 1910년대부터 꾸준히 다양한 각도 에서 바둑을 보여주어 자료로서 손색이 없다 할 것이다. 동아일보 는 1920년에 창간되어 1940년까지 발행되었던 조선인 발 행의 신문들( 동아일보, 조선일보, 중외일보, 중앙일보, 조선중 앙일보 ) 중 가장 발행부수가 많았던 신문으로서 1936년 일장기 말소 사건 으로 무기정간을 당한 후 조선일보 에게 추월당하기 전까지 국민 의 호응을 가장 많이 받았던 신문이었다(김영희, 2009). 또한, 주로 직접 적으로 바둑을 다룬 기사와 관전기 등을 제외하면 별로 바둑에 관한 언 급이 없는 매일신보 와 달리, 소설이나 기행문, 기획 기사 등에서도 바 둑이 많이 다루어지고 있어 당시의 바둑문화를 재구성하는데 있어 매우 유용한 자료라 할 수 있다. 다만, 동아일보 는 일장기 말소사건 으로 인한 무기정간이 해제된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바둑을 다루고 있어 바둑 이 신문의 주요 콘텐츠가 되는 것이 단순히 바둑 자체의 사회적 위상변 화로만 해석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순장바둑이 폐지되던 당시 신문에 서 순장바둑에 대해 내리는 평가 4) 를 믿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다. 순장폐지를 둘러싼 정치적 역학관계에 대해 정황증거 이외에 아무 런 정보가 없기 때문에 신문이 하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 4) 매일신보 1937.12.30. 유진하 기계 1년의 회고 (1).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75 는 것이다. 한편, 1920년부터 동아일보 등의 조선인 발행의 신문이 세를 떨치 던 기간 동안 매일신보 는 경성일보 와 다를 바 없는 논조로 인기를 잃었는데, 이러한 측면이 본 연구에서는 오히려 동아일보 와의 차별성 을 갖는 요소가 되리라 생각된다. 반대로 동아일보 는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하면서 언론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조금씩 그 논조가 일 제의 정책에 협조적인 것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에는 적극적인 친일 논조로 변화하여(정진석, 1990) 매일신보 의 논조 와 큰 차이가 없어지는데, 이러한 측면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자료들이 놓인 맥락을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할 것 이다. 예컨대 신문사에서 직접 기획한 행사에 대한 신문사 자체의 평가 는 실제보다 과장될 수도 있다.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는 모두 크고 작은 바둑대회를 스스로 주최하고 그에 관한 기사를 내보냈는데, 단 한 번의 예외 없이 대회는 성황리 에 종료되는 것이다(대회와 관계없는 신문사에서는 보도조차 하지 않는데 말이다). 본고에서는 이처럼 성격이 다른 두 신문을 통해 1920년대와 1930년 대 조선 사회에서 바둑이 차지하는 위치, 바둑계의 상황 변화 등을 살펴 볼 것이다. 두 신문 모두 데이터베이스가 잘 갖추어져 있어 연구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다만 실제 신문 자료를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고 바둑, 위기( 圍 碁 ), 기전( 碁 戰 ) 기원( 碁 院 ), 박보( 博 譜 ) 등의 검색어로 조사하였기 때문에 누락된 기사가 있을 수 있다. 또한 본 논문에서는 검 색된 자료들 중 대국보나 묘수풀이 등의 내용은 분석하지 않았으며, 바 둑대회에 관한 단신들도 특이점이 없으면 분석에서 제외하였다. 당시의 바둑 수준이 어떠하였는지, 독자들이 현상묘수풀이에 얼마나 참여하였 는지, 얼마나 많은 크고 작은 바둑대회가 열렸는지 등의 분석은 이후의 연구의 몫으로 남겨둔다.

276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Ⅱ. 본론 1. 바둑에 대한 인식 중국 당나라 때부터 여러 문헌에 나타나는 금기서화( 琴 棋 書 畵 ) 라는 말은 한국과 중국, 일본 세 나라에서 바둑이 지식인들의 필수교양의 하 나로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다른 반상유희들과 비교하였을 때 상대적으 로 점잖은 취미였던 바둑은 오랜 동안 주로 엘리트와 지식인들 사이에 서 여가 선용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남치형, 2013b). 하지만 조선 후기 이르러서는 바둑은 더 이상 상류층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된다. 안대회 (2007)는 18세기 말에 바둑으로 명성을 떨친 정운창과 함께 최북( 崔 北, 1712~?), 지석관( 池 錫 觀 ), 이필( 李 馝 ), 김종귀, 고동, 이학술, 그리고 근 대에 들어서 지우연( 池 遇 淵 ), 김만수( 金 萬 秀 ) 등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중인계층의 인물들로, 이는 과거 상류층과 지식인들의 유희였던 바둑이 중인계층 사이에서도 크게 유행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 다. 바둑이 윷놀이, 투전, 골패, 쌍육, 화투, 장기 등과 유사하게 일반적 으로 유행하는 오락거리인 동시에 노름의 대상이 된 것도 대체로 이즈 음으로 보인다. 1910년대의 신문에서 종종 내기바둑, 바둑노름 등과 관 련된 기사를 볼 수 있는데 5), 이것 역시 바둑이 대중화된 일면을 드러내 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젊은이들이 바둑을 두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유익한 일이 아니었다. 1920년대 중반 동아일보 는 각 지방 청년들의 활동상을 소 개함과 동시에 그들을 계도하려는 의도로 -청년에게 라는 제목이 붙은 기사들을 연속 게재하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민족의 미래에 대한 막중 5) 매일신보 1915.04.18. / 1915.08.15.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77 한 책임을 지고 신심의 수양만으로도 바쁜 청년들이 바둑이나 장기로 허송세월 하는 것 을 질타한다. 청년의 몸이 밧분 것이야 다시 말할 것이 잇스랴. 그네들은 생장을 위 하야 또는 그네들의 수양을 위하야도 여가가 업도록 밧분 것이오, 그뿐만 아니라 빈한한 우리 조선 청년은 당장 밥벌이부터 하여야 될 것이다. 그런 대 우리 해주 청년은 무슨 여가가 잇어서 장기나 바둑이 아니면 주사청루 를 자기집 사랑으로 알고 일각천금의 귀중한 시간을 허송하는가. ( 동아 일보 1924.01.30. 해주( 海 州 )청년에게 6) ) 1922년에 동아일보 에 연재되었던 나도향(1902~1926)의 소설 환희 ( 幻 戱 ) 에서도 바둑 두는 청년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상고머리를 깍고 나희가 스믈 다섯이 될낙말낙한 청년과 금니를 해 박 고 옥으로 만든 물부리를 들은 청년은 저의들끼리 무슨 이야기인지 저쪽 굿퉁이에서 분주하게 한다. 또 한 굿퉁이에서는 바둑판을 갓다 놋코 물느 느니 안 물느느니 하고 저의들끼리 떠들어 댄다. 영철도 우영이하고 이야 기만 하는 것이 심심한 듯이 어듸 나도 한목 끼어보세 하고 바둑판 엽흐 로 달녀들냐할 제 엽헤 보료 우에 목침을 베이고 들어누엇든 조선 옷 입 은 청년이 이 꼭을 보더니 이사람들아, 졂은 사람들이 곰상스러웁게 바둑 들이 무엇인가 하며 벌떡 이러나더니 바둑판 우으로 넘적한 손을 벌니여 쑥 한 번 홀트닛가 바둑은 모다 허무러젓다. ( 동아일보 1922.12.21.) 젊은이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할 일이 있는 사람들이 바둑이나 두는 6) 그 외에 동아일보 1923.11.03. 유광렬( 柳 光 烈, 1898-1981, 언론인)의 개성행 19, 1924.09.27. 전주학생제군에게, 1925. 04.10. 용천청년에게, 1925.04.26. 해 주청년에게, 1925.06.02. 삭영( 朔 寧 )청년제군에게, 1925.10.27. 여( 汝 )해진( 海 津 ) 청년에게 등에도 비슷한 내용이 담겨있다.

278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것 은 매우 비난 받을 일이었다. 바둑은 시간을 많이 뺏는 오락이고 일단 바둑에 빠지면 다른 일을 등한히 하게 된다는 인식이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무슨 까닭임니까? 이것은 다만 지난 날에 우리 한아버지들이 술과 놀이로, 장기와 바둑으로 세월을 보내며 자긔의 책임을 니저버린 까 닭이요, 딸하서 겨을으게 잠이나 자고 쓸데업는 싸홈을 한 까닭입니다. ( 동아일보 1931.01.02. 새해새날에 어린이들에게 책임 깨닷고 팔 거두 자 2.) 지난 6월 28일 이래의 폭우로 도처에 피해가 막대함은 누차 기보한 바인데, (중략) 금번 울산수리조합 구내에서는 (중략) 조합에서 현장에 나 가달라고 전화까지 하엿는데 한가히 바둑만 두고 잇다가 다른 지주들에게 들키어 일대 풍파가 잇엇다 한다. ( 동아일보 1933.07.08.) 결혼이란 인간대사라 하야 자고로 우리 동양에서는 굉장게 일러 왓지 만 실상 결혼처럼 인생의 할 일 가운데에서 시연치 안흔 것은 없다. 그것 은 바둑, 장기나 편물 뜨기처럼 아모 할릴이 없을 때 심심파적으로나 할 것이지 사람으로서 할 바의 크고 훌륭한 일을 할 줄 아는 사람으로는 결 혼은 될 수 잇는대로 아니하는 것이 조타는 것이다. ( 동아일보 1938. 01.22. 천당에 결혼이 없는 이유 ) 반면 노인들의 여가활동이나 특별히 해야 할 일이 없는 시간을 바둑 으로 보내는 것은 오히려 권장할 만한 일이었다. 여름 날 노인들이 바둑 을 두고 있는 풍경은 팔자 좋은 풍경이었고, 장수하는 노인들에게 인기 있는 오락거리였다. 대동강 물 우에는 수은을 끼언진 듯 서편강안 인가주렴에 달님 물들은 하늘 우에 별과 가치 무수히 벌녀 잇서 풀업시 번득이는데 어른들은 물노 래, 아희들은 달노래, 노인들의장기, 바둑, 한담모임, 청년들의 완력경쟁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79 용맹비교, 성악기악 연애모임, 소년들의 숨바꼭질, 순라잡기, 유희모임, 부 인들의 다리미질 모임, 자기자손 자랑모임, 칭찬모임, 험담모임 등 여기저 기 석맛기여 벌어지니 ( 동아일보 1926.08.29 평양 인상 13) 동구마다 정자가 잇고 부호의 별장이 잇고 정하마다 연석을 벌이지 안 흐면 바둑, 골패판을 벌이고 시원한 매암이 소리를 드르며 유한한 하일( 夏 日 )을 팔자 조케 소일하고 잇섯다. 실노 개성인토( 開 城 人 土 )는 팔자가 조 하보엿다. ( 동아일보 1928.07.17. 이기영( 李 箕 永, 1895~1984)의 하등 ( 夏 燈 )만필 ) 로인의 오락은 안경을 쓰지 안흔채로 석유 등잔불 미테서 신문보는 것 과 서적 읽기, 바둑두기 외에 여름이면 과수원을 손수 일워가지고 가을이 면 이 열매를 거두어 부근 동리의 빈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년 중행사로 한다. ( 동아일보 1931.01.07. 장생실화 고령자 생활기 지 금도 갈비를 뜨더낸다. 아산( 牙 山 ) 윤영렬( 尹 英 烈, 윤치호의 삼촌, 윤보 선의 조부)씨 부처.) 김상윤씨는 금년에 83세의 고령인데 81세 된 신씨와 함께 아들, 딸, 손자 합해서 40여 명의 자손을 거느리고 잇다. (중략) 취미로는 약화제 구 입하야 법제하기와 장기, 바둑은 물론 글읽기도 조와한다. ( 동아일보 1940.01.18. 숨은 백수( 百 壽 )비결 ) 바둑을 두는 사람이 지위가 높은 사람이거나 일본인인 경우에도 그 평가는 호의적이었다. 일본에서는 바둑이 제도화된 역사가 길고 막부시 대는 물론 메이지 유신 이후에도 정 재계의 유력 인사들이 바둑을 즐기 고 후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藤 井 正 義, 1978). 근일에는 뎐하께서 무엇으로 취미를 두시고 지나시는지? 를 무르매, 씨는 말하되, 뎐하께서는 본래 옥돌( 玉 突 )를 됴와하시는 터이지만은 아

280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직도 상즁에 계심으로 그와 갓흔 오락 긔관은 일절 폐지하시고 다만 잇다 금 바독과 혹은 장긔갓흔 것으로 심심하시면 하실 때가 죵죵 계심니다. ( 매일신보 1920.05.12. 이강공( 李 堈 公 )의 어근상( 御 近 狀 ), 금곡릉 고 별 참배라던지 경도 이주의 말은 거짓말. 바둑으로 일 삼으신다 ) 조선은행 경성주재 이사 星 野 喜 代 治 씨는 금회 착임햇는데, 선은( 鮮 銀 )관계 제 문제 及 신장상( 新 藏 相 )에 대하야 다음과 같이 말하엿다. (중 략) 靑 木 新 藏 相 은 정평잇는 두뇌명민의 사( 士 )로 노력가이다. (중략) 바 둑은실력 2단인데 津 島 씨고 강하나 靑 木 씨가 더 강하다. 꼴프도 우수하 다. ( 동아일보 1939.08.31.) 이상에서 보듯이 바둑에 대한 가치 평가는 바둑을 즐기는 사람, 시간, 장소 등에 따라 달랐다. 동아일보 에 실린 바둑대회에 대한 기사에서 바둑이란 소일물이지 애덜은 두지 안는게다 (1939.08.11. 고재환( 高 在 環 )의 하일만초( 夏 日 漫 草 ) )라고 한 마디로 정리한 것처럼 일반인들에 게 바둑은 잉여적 시간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놀이였다. 뒤에 살펴볼 것 처럼 바둑은 장기와 더불어 가장 많이 보급되었고 가장 오랜 기간 사랑 받은 놀이의 하나였지만 여가활동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는 활동은 아 니었다. 2. 향유계층 1925년에 발행된 조선기우명감( 朝 鮮 碁 友 名 鑑 ) 에는 당시 조선에서 바둑을 둔 사람들 2451명의 명단이 소개되어 있는데, 이 중 일본인이 2402명이고 조선인이 49명이다(이승우, 2000). 조선인 중에는 유명한 기 사들의 이름도 빠져 있는 점, 그리고 명단에서 가장 급수가 높은 사람이 4급이며 거의 대부분이 관청이나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81 어 볼 때 이 자료만으로 조선인 바둑 인구의 실상을 제대로 알 수는 없 다. 한편, 1940년에 발간 된 조선기계총람( 朝 鮮 棋 界 總 覽 에는 일본인 2601명, 조선인이 495명, 총 3096명의 명단이 소개되어 있다. 앞의 자료 와 비교할 때 일본인의 숫자보다 조선인의 숫자가 훨씬 많이 늘어났지 만, 여전히 조선의 바둑 인구에 대한 정확한 조사라고 하기에는 숫자가 너무 작다. 두 자료 모두 일본인이 조사하고 일본어로 출판한 것이어서 조선의 바둑계에 대한 자료로서보다는 재조선 일본인에 관한 자료로 더 의의가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얼마나 많은 조선인들이 바둑을 즐겼을까? 불행히도 위의 자료를 제외하면 조선의 바둑 인구에 대한 실증적 자료는 없다. 조선총 독부에서 1941년에 간행한 조선의 향토오락 ( 朝 鮮 の 鄕 土 娛 樂 ) 이라 는 자료에 따르면 전국을 약 220개의 지역으로 나눈 가운데 절반 이상 의 지역에서 바둑을 두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거의 대부분의 지역에서 발견되는 장기와 비교하였을 때에는 적은 숫자이지만, 바둑이 전국적으로 고르게 민간에까지 널리 퍼져 있었음을 말해 준다. 이는 신 문의 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매일신보 는 이미 1910년대 초반부터 전국 곳곳에서 열린 크고 작은 바둑대회의 소식을 전하는데 7), 그 빈도 가 상당할 뿐만 아니라 지역도 매우 다양하다. 대부분의 대회에 참가자 수는 수 십 명에서 120여 명에 달해 8) 그 규 7) 가장 이른 기사는 매일신보 1913년 10월 19일의 평북( 平 北 ) 위기경기회 개최 의 기사로 보인다. 당시 매일신보 는 기사를 내용에 따라 분류하지 않고 특정 지 역의 소식을 한데 모아서 전했는데, 바둑대회는 단골 기사거리였다. 8) 1918년에 경성일보 주최의 전국위기대회 참가 인원이 약 100명( 매일신보 1918.06.11)이었고, 인원은 매년 조금씩 늘어나 1939년에는 경성부의 예선 대회에 만 127명이 참가한다( 매일신보 1939.02.07.) 지방 대회의 경우에도 대체로 30-50 명 정도가 참가하고 있고, 일본인 거주자가 많았던 부산의 경우에는 부산위기구락 부 주최의 대회임에도 타 지방에서까지 신청이 들어와 참가자가 100여 명이었다고 한다( 매일신보 1925.03.21).

282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모도 결코 작지 않았다. 다만 입상자의 명단으로 미루어 볼 때 참가자 중 상당수는 일본인이었으며, 조선인이라고 해도 관청에 근무하거나 자 영업으로 돈을 벌어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어서 민간에서 어느 정도 바 둑을 두었는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거의 모든 바둑대회는 일본식 여관 이나 유명한 요리집, 혹은 관청 건물에서 이루어졌고 참가자들은 1-3원 의 참가비 9)10) 를 내야 했는데, 이것이 사회적 지위나 금전적 여유가 없 는 사람들로 하여금 바둑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하는 진입장벽으로 작 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11) 따라서 바둑대회에 참여한 사람들의 수나 구성만으로 당시 조선인 사회에서의 바둑 보급의 정도를 정확히 파악하 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바둑과 장기가 매우 보편화된 오락이었던 것은 틀림없어 보인 다. 1930년 4월 6일자 동아일보 는 과거 10년 간 유행한 오락들을 소 개하면서도 바둑, 장기가 지금이라고 호기가( 好 碁 家 )들의 오락이 아니 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아직도 조선에서는 오락 중에 그 수위를 점령 9)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소개된 바둑대회의 중 비싼 것으로는 1937년의 망년위 기회( 동아일보 1937.12.23)의 참가비가 3원, 1918년에 열린 경성일보 주최의 전조선위기대회로 2월 50전이었고( 매일신보 1918.06.07), 평균적으로 1원 50전이 었으며, 싼 것은 1원으로 주로 당일에 끝나는 지방대회들이었다. 10) 1920-1930년대 1-2원이 현재가치로 어느 정도 되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당 시와 현재의 필수품, 사치품에 대한 기준, 생활방식과 수준 등에 있어 많은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다만 간접적인 자료로 추측해 볼 수 있을 뿐인데, 예를 들어 1929 년 당시 공립보통학교 교원의 봉급액을 보면 조선인 교원의 봉급액은 평균적으로 월 40원이 채 못 되는데(박혜진, 1910, 1920년대 공립보통학교 교원의 업무와 지 위, (석사학위논문,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2001)) 이것을 기준으로 할 때 당시 1-2원은 지금의 10만원 전후가 아닐까 싶다. 11) 대개의 경우 참가비에는 숙박료, 차비, 식사비, 그리고 입상하는 경우 받을 상품까 지 포함되어있기는 했다. 예를 들어 매일신보 원산지국에서 개최한 북선( 北 鮮 ) 위기대회 는 2원의 참가비를 받았는데 여기에는 석왕사( 釋 王 寺 )에서의 1박과 원 산-석왕사 간의 차편, 그리고 식비까지 포함되어 있다. ( 매일신보 1927.09.06. 기 사)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83 하고 있는 것이다 라고 전제하고 있다. 또한 총독부의 기관지였던 매일 신보 가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실은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총독부 역시 식 민지 경영의 초기부터 다른 반상 유희들은 금지하면서도 바둑에 대해서 는 유한 태도를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년에 경향을 물론하고 바독이 가장 성행하는 경향이 잇스니 이것은 구시대에 각쳐에 성행하든 도박을 엄금한 이후로 소일할 것이 업습에 말 미음인 듯하니 바독의 셩행함을 보건대 또한 도박의 악습이 업셔지고 셰 샹사람이 바독의 취미를 다쇼 깨달은 증거이라. 가히 죠흔 경향이라 할 일 이 안인가. ( 매일신보 1916.01.18. 위기의 취미 ) 1937년에는 총독부 사회교육과에서 농촌의 오락물을 조사하였는데 당시 기사는 조선의 각 지방 농촌에는 개인과 개인 간 또는 단체와 단 체 간에 유행되는 오락, 즉 음악유희, 운동, 잡기 등의 성질을 띠고 오랜 옛날부터 나려오는 것이 적지 안타. 그 중에서 가장 보편적인 것을 보드 라도 개인 간에는 바둑, 장기를 비롯하여 씨름 등 일일이 열거할 수도 없고( 동아일보 1937.11.10) 라고 하여 바둑이 도시에서뿐만 아니라 농 촌에서도 향유되는 오락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주로 어떤 사람들이 바둑을 두었을까? 조선시대 바둑은 양 반이나 부유층의 사랑방 놀이였고 이는 식민지기에도 계속 유지되었다. 남편되는 반너머 늙음 분은 날마다 아무 생각없는 듯이 각집 사랑으로 댕기면서 바둑, 장기, 골패로나 일을 삼고(이하 생략) ( 동아일보 1938.02.12. 복면자( 覆 面 子 ), 역사소설 만향( 晩 香 ) 그러나 문간채에서 다시 왼편으로 중문을 들어가 사랑 마당으로 들어 서면 역시부자집티가난다. 산같이 싸인 장작덤이는 두 겨울 세 겨울을 때

284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고도 남을 만하다. 드높지않으나좌주사랑이분명하고자근사랑에는일상문객 들이잇어바둑을두곤한다. ( 동아일보 1939.12.26. 유진오( 兪 鎭 午, 1906~1987, 소설가, 법조인, 정치인) 소설 화상보( 華 想 譜 ) ) 외국으로 가는 선상에서의 오락에도 바둑과 장기는 빠지지 않았는데, 당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계급이라면 상당히 상류층 사람이었을 것 이므로 바둑이 여전히 상류층의 놀이의 하나였음을 추측해 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선내에서 운동회를 개최하엿슴니다. 선내에서는계급제 도가엄중히려행( 勵 行 )되는 고로 선내 운동회라 하지만은 기실은 일등선객 만의 운동회올시다. (중략) 경기 종류는 골푸, 줄끌기, 바독, 장긔, 양인삼 각, 도보경주, 장애물경기, 감자경주, 계란경주 등이올시다. 그 중에는 연 령에 따라 어룬 경기와 아해 경기의 구별이 잇고, 남녀에 따라서 남자경기 와 부인경기의 구별이 잇섯슴니다. 이형, 나는감자경구에 2등상을 타고, 바둑은 승부미결이고 골푸는 젓슴니다. ( 동아일보 1922.01.30. 김준연 ( 金 俊 淵, 1885~1971, 정치가, 언론인) 독일 가는 길에 1) 셋째날인 23일에는 바다도 다소 평온하려니와 훨신 배에 익숙된 듯싶 어 목욕도 할 수 잇고 식당에도 나가고 오후에는 처음으로 갑판 휴게실에 올라갓습니다. 피아노, 축음기, 라디오, 바둑, 기타 께임 도구 등이 잇고 떽골푸는 1등 갑판에만 한하엿습니다. ( 동아일보 1935.03.02. 이중철( 李 重 澈, 의사) 호주기행 2) 갑판 유희로는 떽골푸, 핑퐁, 테니쓰 등이 가장 인기가 잇는 겜이요, 실내로는 축음기, 라디오, 피아노, 장기, 바둑, 독서 등이다. (1937.10.24. 정보나( 鄭 保 羅, 치과의사), 태평양횡단기 3) 한편, 바둑은 이미 위의 인용문들에서도 드러났듯이 대체로 남자들의 놀이였다.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85 남편으로 하여금 어떤 취미에 흥미를 갖도록 해서 속히 집으로 오고 싶도록 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입니다. 정원 손질을 한다든가 새를 기른다 든가 바둑을 사노코 바둑을 두게 한다든가 해서 그런 방면으로 시간을 만 히 쓰게 하면 술먹는 기회도 적게 됩니다. ( 동아일보 1937.10.29. 일상 을 함께 살어야할 남편의 나뿐 버릇 2) 이 큰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조흔 길은 서로 쓸데 없는 간섭을 하지 아니 할 것이다. 가령남편이바둑을질겨하고안해는음악을조하한다고하자. 이 두사람의 취미는 일치하지 안타. 그러나 안해는 그 남편에게 그 질겨하 는 바둑을 질겁게 하고 남편은 그 안해에게 그 조하하는 음악을 집겁게 하기는 용이한 일이다. ( 동아일보 1939.08.28. 이만규( 李 萬 珪 ), 가정독 본. 27. 가정화락의 법촉 ) 그리고 이와 같은 남성들을 상대해야 했던 기생들의 놀이이기도 했다. 한편에서는 어느덧 바둑을 드러다가 홍진이와 석태가 대국을 하고 안 젓다. 느졋는데 바둑은 하며 중환이가 엽헤가서 드려다보고 섯스랴니까 련홍이도 내말이 그말이야 하며 뎀벼드러서 두손으로 휘저어노앗다. ( 동아일보 1923.10.10. 염상섭( 廉 想 涉, 1897~1963) 소설 너희들은 무엇 을 어덧느냐 41) 서론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문에서 보여주는 삶은 당시 실제의 삶의 일부분에 불과하다. 심지어 도박 사건의 주체들도 유한계급일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12) 신문 기사와 소설에 등장하는 바둑인은 대부 분 경제적으로나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바둑이 12) 바둑 도박에 관한 기사는 그 수가 상당하다. 하지만 다른 도박 사건들, 예를 들어 마작이나 골패 등을 이용한 도박 사건들에 대한 조사가 없어 실제 사건의 중요성 이 어느 정도인지 비교 불가능한 점, 그리고 본고는 일반적인 바둑 향유의 행태를 다루는 데 반해 도박은 예외적인 일이므로 본고에서는 분석하지 않기로 한다.

286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유한계급의 놀이였다고 결론내릴 수는 없다. 일상적인 것일수록 기사화 되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이것만으로 실제 민간에서 어느 정도 바둑 이 두어졌는지, 그리고 민간에서 바둑을 즐기는 방법은 유한계급의 그 것과 어떻게 달랐는지를 추정하기는 쉽지 않다. 신문보다 내용 선택의 자율성이나 지면의 여유가 좀 더 있는 당대의 소설, 개인의 일기나 자서 전과 같은 자료들을 활용한 추후의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3. 전문기사의 출현 일본에서는 일찍부터 일종의 전문기사제도가 발달하였다. 일본에서의 바둑의 전문화는 한국과 중국의 경우와 비교했을 때는 물론 일본 내에 서 다른 분야와 비교해 보아도 상당히 빠른 편이었다. 도쿠가와 막부는 제1대 이에야스( 家 康 )가 혼인보( 本 因 坊 ), 야스이( 安 井 ), 이노우에( 井 上 ) 등의 이에모토( 家 元 ) 13) 를 성립시켰고, 제3대 이에미쓰( 家 光 ) 때부터는 오시로고( 御 城 碁 ) 14) 라는 연례 바둑행사가 제도화되었다. 또한 비슷한 시기 고도코로( 碁 所 ) 라는 직책을 설치하여 기사들의 단위, 승단, 대국 등 바둑계 전반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각 이에모토는 귀족 이나 관료 혹은 부유한 상인들을 후원자로 두었고, 전문적인 기사( 棋 士 ) 가 되려는 제자들도 많았다. 일단 이에모토에 소속되어 단위를 받게 되 면 출장 지도대국 등을 통해 수입을 얻을 수 있었고, 실력을 인정 받아 이에모토의 수장이 되면 막부로부터 살 집과 도장( 道 場 ) 주어졌으며 일 13) 다도, 꽃꽂이 등 일본 전통문화와 기예 등의 전승시스템. 이에모토라고 불리는 스 승을 정점으로 제자군을 형성하고 특정한 유파를 발전, 전승하는 제도이다. 일본의 전문기사제도와 이에모토의 관계에 대해서는 남치형(2013c) 참조. 14) 도쿠가와 막부 시절, 매년 11월이면 혼인보 등 4개의 이에모토가 가문의 명예를 걸 고 대국을 할 기사를 선발하여 쇼군의 성에서 시합을 벌였는데 이를 오시로고라 한다.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87 정한 급여도 받았다. 한 마디로 일본에서 바둑은 이미 17세기 초부터 상 당히 전문화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조선의 바둑계는 특별히 -계( 界 ) 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었다. 바둑은 개인적인 소일거리였고, 다수가 모이는 경우에도 어디까지나 개 인적 친분관계의 테두리 안에 머물렀다. 제1장에서 언급한 것처럼 조선 후기에는 몇몇 이름난 기사들이 부유한 바둑 애호가의 개인적 후원을 받아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 역시 드물고 예외적인 케이스였다. 바둑의 성행하는 풍조가 일어남은 좋은 일이지만은 조선에는 아직 일 본과 갓치 초단, 2단의 칭호주는 기관도 업고 그런 칭호를 엇은 사람도 업 는 것은 유감이라 할 지니, 이것은 아직 바둑에 대한 취미를 아는 사람이 적고 바둑의 성행이 아직 유치한 지경을 벗어나지 못함에 말미암음이니 우리 조선에도 하루바삐 그런 기관이 생겨 혹은 구락부라든지 협회라든지 바둑에 대한 기관이 생겨 바둑 좋아하는 동지의 좋아하는 마음을 만족케 하게 함을 희망하는 마음이 있음은 바둑 좋아하는 우리의 마음. ( 매일신 보 1916.01.18. 城 南 碁 狂, 위기의 취미 ) 위의 인용문으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조선에는 단( 段 ) 이라는 체계 가 없었다. 조선의 기사들은 일본과 달리 급( 級 )으로 실력 차를 표시하 였고, 특별히 이름난 기사들의 경우 국수( 國 手 ), 도기( 道 棋 ), 면기( 面 棋 ) 등으로 표시하였다. 1926년 12월 5일자 중외일보 는 당대 기사들의 기 력을 정하여 발표했는데 일수( 一 手 ), 일수에 다음 가는 수, 다음에 다음 가는 수 등의 말을 사용하였다 15). 우리나라에서 지금과 같이 단 ( 段 ) 이 사용된 것은 1950년에 단위결정대회 가 열린 이후다(조남철, 15) 일수 에 백남규, 노사초, 윤경문, 일수에 다음 가는 수 에 서석제, 민중식, 윤주병, 박정현, 손득준, 채형제, 다음에 다음 가는 수 에 정규춘, 도은각, 김형권, 유진하, 임우식, 안종호 등이 이름을 올렸다.

288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1997: 132). 하지만 1920년대에 들어서서 조선인 경영의 신문들이 속속 창간되자 조선의 국수들도 정기적으로 대국할 기회를 얻었고, 그 중 일부는 신문 에 관전기를 게재함으로써 안정적인 직업 활동을 하는 것도 가능해졌다. 예를 들어 1926년 중외일보 가 처음으로 순장바둑 대국을 게재한 때부 터 순장바둑이 공식적으로 폐지된 1937년까지 조선의 국수들이 대국한 순장바둑 기보는 총 42국이다 16) (안영이, 2005: 190). 1937년 이후에는 좀 더 많은 대국의 기회가 생긴다. 동아일보 가 1937년부터 위기란( 圍 棋 欄 )을 개설함과 동시에 1940년까지 매년 전조선위기선수권대회 와 국수쟁패전 등을 개최하였고, 매일신보 도 같은 해부터 전조선국수 선정위기대회 를 개최하기 시작하여 1939년까지 계속하였기 때문이다. 국수들 중 유진하와 권병욱( 權 秉 郁 )은 대국자로서만이 아니라 관전필자 로도 유명했다. 유진하는 현호실거사( 賢 乎 室 居 士 ) 17) 라는 필명으로 동아일보 위기란을 담당하였고, 권병욱은 매일신보 에서 운심각주인 ( 雲 深 閣 主 人 ) 이라는 필명으로 관전기를 써서 전문성을 높였다. 국수들이 신문의 초청대국을 하였을 때 얼마의 대국료를 받았는지, 관전필자의 원고료는 얼마였는지에 관한 자료는 아직 찾지 못하였다. 하지만 그들이 참가하는 바둑대회의 상금은 상당하였다. 1937년 매일 신보 가 주최한 제1회 국수선정위기대회 에는 초청을 받은 8명과 신문 16) 1937년 이전에 일본식으로 두어진 조선 기사의 대국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가장 많은 일본식 대국보를 실었을 경성일보 의 자료를 포함시키지 않아 본고에서는 정확한 수치를 제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 유진하는 1937년부터 1940년까지 그리고 해방 후 동아일보 가 다시 바둑기보 를 게재한 이후 64년에 향년 72세로 사망할 때까지 - 동아일보 의 위기란( 圍 碁 欄 ) 에 현호실거사 라는 필명으로 관전기를 썼으며, 식민지기 여러 바둑대회에서 입상한 실력자일 뿐만 아니라 1950년대 한국기원이 설립된 후에는 전문기사가 되 어 한국기원 2단까지 승단하였다.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89 사 심판부에서 실시한 자격심사를 통과한 권재형( 權 載 衡 )의 총 9명이 시합을 벌였는데, 상금은 1등이 100원, 2등 30원, 3등 20원 18) 이었다( 매 일신보 1937.06.30. 사고). 같은 해 동아일보 가 개최한 제1회 전조선 위기선수권대회 에는 총 10명이 참가하였고 상금은 1등 100원, 2등 50 원, 3등 25원으로 매일신보 주최의 대회보다 조금 더 컸다( 동아일보 1937.07.03. 사고). 대회규모는 3년 뒤인 1940년 제4회 대회부터 1등 150원, 2등 100원, 3등 50원, 그리고 등외 20원으로 훨씬 커진다( 동아 일보 1940.07.16.). 국수급의 기사들은 이러한 대회 이외에도 여러 초청 대국의 형태로 대국을 하였고 액수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대국료를 지불 받았을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바둑만으로도 생계유지가 가능하 였을 것이다. 한편, 일본과 같은 제도를 갖추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 여 구락부를 결성하기도 했다. 지난 8일 윤병구, 이윤성, 홍우기 등 위기계의 명인들이 조선위기의 진흥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부내 견지동( 堅 志 洞 ) 40번지에 위기구락부를 설치하고 그 제일차 사업으로 오는 16일 오전 10시에 다음과 갓튼 규정 아래 위기대회를 개최하리라는데 회비는 2원이라 하며 상은 1등 20원, 2 등 10원, 3등 5원이라 한다. 그런데 전긔 경문( 敬 文 ) 윤병구씨는 현재 구 락부장이며 또 국수인데 동씨는 조선위기에 대하야 위기의 기원은 요순 시대부터 시작하얏고, 조선서는 단군때부터 잇섯다합니다. 그후 신라시대 는 문화가 발달된 만치 위기도 발달되앗든 모양입니다. 그 여파로 지금도 경상도에 명수가 만흔듯합니다. 역대의 국수로는 (중략) 김해 김만수, 경 성 신군만( 申 君 萬 ) 등의 국수가 잇엇고, 최근에는 지난 섯달에 별세한 백 남규( 白 南 圭 )씨가 잇섯습니다. 그리고 또 내지 위기와 조선 위기는 그 정 18) 각주 13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29년 공립보통학교 조선인 교사의 평균 월급이 40원 정도였으니 100원은 약 2개월치 월급과 맞먹는 액수라 할 것이다.

290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신에 거리가 만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매일신보 1930.02.14. 조선 위기의 진흥을 위하야 구락부를 조직 ) 인터뷰를 한 윤경문( 尹 敬 文 )은 스스로 국수로 소개한 백남규의 대를 이어 1920년대까지 한 시대를 풍미한 기사이다. 이전 세대의 기사들이 불 규칙적인 대국기회로 인해 개인적인 후원자에 의지하여 생계를 꾸려나간 데 반해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이처럼 상설 구락부를 만들어 활동의 지속 성과 폭넓은 후원을 보장받기 위한 노력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 기사들의 협회로서의 기원들도 속속 생겨났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원은 경성기원( 京 城 棋 院 )이다. 1930년에 민영휘( 閔 泳 徽, 1852~1935, 조선의 정치가)의 별장에 개설된 경성기원은 노사초, 채극문, 유진하, 정 규춘 등이 추진하였고 후원자들로부터 300원을 모금하여 운영하였다 19). 1934년에는 보다 체제를 갖춘 조직으로서의 조선기원( 朝 鮮 棋 院 ) 을 설 립하게 된다. 조선일보 1934년 1월 17일자에 실린 조선기원의 창립 소 식과 설립취지서에 따르면 창립 발기인은 채극문, 정규춘, 유진하 등 3인 이며, 순 한문으로 되어있는 설립취지서에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미력을 살피지 아니하고 하나의 기원을 설립하여 장차 오로지 연구에 정 진코자 한다. 다행히도 관심 있는 분들의 찬동과 특별한 후원에 힘입어 이렇게 꾸몄고 앞으로의 유지에 대하여는 착착 진행 중 20) 이라는 내용이 실려 있다. 1937년이 되면 경성기원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기원이 생긴다. 동년 19) 경향신문 1984년 3월 21일 기사, 최초의 기원 ; 1996년 11월 13일 김은신의 이것이 한국최초 58 등 참조. 다만 이 1930년에 설립된 경성기원에 관한 기록은 해방 이후 수 십 년이 지난 것들뿐이어서 사실관계가 확실한지 알 수 없다. 20) 원문은 순한문으로 되어 있으며 현대어로의 번역은 안영이. 원문은 다음과 같다. 故, 善 于 同 人, 不 揆 棉 力, 設 一 棋 院, 將 欲 專 意 精 硏, 幸 賴 論 關 之 共 鳴 特 援, 現 下 備 設, 來 頭 維 持, 着 著 有 進 안영이, 전게논문, p. 72-73 참조..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91 8월 하순 창립총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300원의 희사금을 모집하였으 며, 최덕영( 崔 德 永 ), 윤경현( 尹 炅 鉉 ), 민석현( 閔 奭 鉉 ), 임주철( 林 周 喆 ), 김용덕( 金 容 德 ), 최형렬( 崔 亨 烈 ) 등이 이사진을 꾸렸고, 고문에 최린( 崔 麟, 1878~1958), 김명준( 金 明 濬 ), 그리고 기원의 교수( 敎 授 )로 유진하, 윤주병이 초빙되었다(유진하, 1937). 이 중 고문에 이름을 올린 최린은 3.1운동의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으로 천도교 대표이자 매일신보 사 장이었다. 물론 아직 본격적으로 전문기사를 선발하는 제도가 정착되거나 기사 들이 안정적으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활동의 종류나 양이 많지는 않았 지만, 일본의 영향을 받은 신문들이 바둑란을 개설하고, 정기적인 대회 를 개최함으로써 조금씩 바둑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이 들을 일종의 협회의 성격을 갖는 구락부나 기원을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여전히 수입의 정도나 정규성 등은 개별 기사들의 수완에 따라 차이가 있었지만, 오로지 개인 후원자의 호의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과거와 비교하여 관리와 예상이 가능한 수입원이 생겨난 것은 진정한 바둑 전 문인이 탄생하는 데 있어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된다. 4. 바둑시장의 형성 전업기사가 출현하는 것과 바둑 시장이 형성되는 것은 어느 것이 먼저 인지를 따지기 어렵다. 매일신보 는 1914년부터 거의 매일 지면을 할애 하여 묘수풀이 문제를 게재하였고( 매일신보 1914.10.13.~1914.12.29.), 동아일보 응접실 코너에는 박보( 博 譜 ) ( 동아일보 1929.11.08)와 바둑문답 (1930.01.23.)을 게재하여 줄 수 없는지를 묻는 독자의 질문이 소개되는 등, 신문 독자들 사이에서 바둑과 장기에 대한 수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응접실 코너에서 바둑을 배우고저 하는대 바둑에 대

292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하여 용이히 해독할 수 잇는 서적, 정가, 판매소를 하교하여 주시요 ( 동 아일보 1936.07.04. 무산( 茂 山 ) 일 독자 )라는 문의에 대해 초심독습 위기( 初 心 獨 習 圍 碁 ), 정상보신( 井 上 保 申 ) 저, 大 阪 區 號 發 行, 정가 1 원, 위기독습수( 圍 碁 獨 習 手 )-ほどきから 初 段 まで 東 京 圍 碁 硏 究 會 編, 정가 1원 50전, 東 京 神 田 區 神 保 町 1의5, 泰 文 館 發 行 등으로 연구 해 보시지요 라며 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일본에서 출판된 바둑책이 조 선에 수입되었고 그것을 구입해 보는 독자가 있었음도 추측해 볼 수 있다. 한편, 주로 일본인이 세운 것으로 보이지만, 바둑 교수소 나 바둑구 락부 라는 것이 이미 1920년대에 성행했음을 보여주는 신문기사도 있다. 당시 일본 바둑계는 일본바둑의 해외보급을 목적으로 식민지 조선과 대 만, 만주 등은 물론이고 미국과 독일 등지에도 기사를 파견하였다. 식민 지 조선에서는 서울과 대전의 바둑 교수소( 敎 授 所 )에서 활동하던 일본 인 기사가 최소한 5명 정도 있었다( 松 本 薰 외, 1940). 이들은 지도대국 과 복기( 復 碁 )에 대한 교수료를 받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는데, 정식 기 사가 없는 조선에서 일본인 관료나 재계 인사들로부터 후원을 받아 상 당히 풍족한 생활을 했다 21). 경성부 내에는 오락이니 취미이니 하고 바둑 교수소니 구락부니 하는 간판이 이십여 곳이나 붙어 있으나 사실 교수하는 곳은 두어 곳에 불과하고 내용은 모두 도박장이라는 비난을 듣는 중인데 그 중에서도 대화정( 大 和 町 ) 2정목( 町 目 ) 부근에 있는 바둑 교수소에는 총독부 식산국에 근무하는 판임관축들이 퇴근하는 길로 그곳에 가서 그 이튿날 출근할 때까지 밤을 새 워가며 돈내기 바둑을 둔다는 바 (이하 생략) ( 동아일보 1925.01.21. 대 화정 위기교수소에서 총독부 관리가 도박 ) 21) 조남철(1973. 8)에 따르면 1930년대 후반 바둑 한 판의 지도료가 50전이었는데, 그 를 지도했던 마쓰모토 카오루의 경우 하루에 열 판 이상 지도를 하였다고 한다.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93 바둑판의 수요도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총독부는 중일 전쟁 이후 과 세 나 증세 가 있을 때마다 바둑판을 품목에 포함시켰는데, 이는 바둑 판이 일종의 사치품으로 여겨졌으며 또한 과세가 의미 있을 만큼 잘 팔 리는 물건이었음을 보여준다. 이 밖에 보석종류, 시계, 만년필, 화장품, 모자, 단장, 가죽가방, 구두, 서화, 방안 꾸미는 물건, 바둑, 장기 22), 세간, 모피, 가죽으로 만든 물건(이 하 략) ( 동아일보 1938.02.24. 이번의 임시 증세는 일상생활에 큰 영 향. 무엇이 어떠케 올랏나. ) 제1종 을( 乙 ): 시게, 문방구, 화장용구, 모자, 스뎃키, 양산, 트렁크, 구 두, 신발, 서화, 골동, 실내장식품, 완구, 운동구, 조명기구, 전기기구, 깨스 기구, 바둑, 장기, 가구칠기, 도자기, 초자제기구, 직물, 메리야스, 레스, 펠 드, 과물( 果 物 ) ( 동아일보 1939.02.18. 신과세물품결정 ) 바둑판의 가격을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바둑판은 나무의 종류와 재질 등에 따라 가격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할 수 없기 도 하다. 하지만 최소한 저렴한 물건이 아니었음은 짐작해 볼 수 있다. 1941년 5월 16일자 매일신보 에는 바둑, 장기도 공정가격을 실시 한 다는 기사가 실리는데, 이를 통해 바둑판의 가격을 도고시( 道 告 示 )로 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에서는 15일부 도고시로써 내지산 바둑판, 장기 등의 공정가격을 새로이 지정 실시하엿다. 값은 9/18 가격보다 일할 가량 오르게 된 것인데 내지의 공정가격에 운임을 보태어 계산하엿다. ( 매일신보 1941.05.16.) 22) 이 인용문 및 이하의 두 인용문에 나오는 바둑판, 장기판은 모두 일본식 판을 가리 키는 듯하다. 일본어 발음으로 쇼기 라고 불리는 일본식 장기는 바둑판과 두께나 크기가 거의 비슷한 고가의 목재판에서 두어진다.

294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한편, 바둑판이 비교적 고가였음에도 불구하고 대개의 여관( 旅 館 ) 23) 들은 객실에 바둑판을 비치해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6년 전에 원산 엇던 여관에 드럿는데 (중략) 우연히 우리 방에 바둑판 과 바둑돌이 잇섯슴으로(이하 략) ( 동아일보 1925.09.30. 허영숙, 민족 발전에 필요한 어린 아희 기르는 법. 32.) 예술이란 뼈다귀를 물고 꼬리를 치는 개보다는 물론 고상한 유희거니 와 저기서 두는 바둑보다도 고등이라는 말일세. ( 동아일보 1927.10.24. 염상섭, 소설 사랑과 죄 71.) 5. 규칙과 용어의 변화 매일신보 1918년 6월 7일자에 실린 사고( 社 告 ) 는 경성일보 주 최의 바둑대회를 홍보한다. 경성일보사 주최로 來 9일 정오부터 경성( 京 城 ) 梅 家 에서 위기대회를 개최할 터인데, 조선인사로 내지( 內 地 )식 기( 碁 )에 난숙( 爛 熟 )한 이는 참 가하기를 희망한다 하며, 회비는 2원 50전(단, 만찬비)이오, 희망자는 8일 까지 경성일보사 영업국내 위기계로 신청함이 가하다더라. 여기서 내지식 기(바둑) 라 하는 것은 일본식 바둑이자 현재 우리나 라에서 두어지는 일반적인 바둑을 말한다. 원래 조선에서 두어지던 바 둑은 현대 한국에서 두어지고 있는 일본식 바둑과 달리 미리 화점에 17 개의 돌을 놓고 시작하는 순장바둑 이었다. 그러나 일제의 강제 병합 이전에도 일본에 유학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본식 바둑이 알려지기 시 23) 여기에서의 여관도 일본식 료칸 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95 작했고, 위의 사고가 나간 1918년경에는 조선인 중에도 일본식 바둑에 익숙한 사람들이 소수지만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의 보한 바와 갓치 경성일보사 쥬최의 바둑두는 대회는 구일 졍오브 터 본뎡 이뎡목 매의가 에서 열렷더라 첫여름의 새 록음으로 흘러드러오 는 바람이 시원한 이층의 광간에 됴선 각디 지명의 내디인 기객 근백명이 참회하야 뎡한시 시각브터 심판원 알선의 지휘아 래에 경기를 개시하얏는 대 경기는 한사람이 다셧판을 두어셔 유승자는 츄첨으로 등급을 뎡하는 규뎡이라. 이날은 맛침 동경의 바둑 잘두는 사단의 명인 제등현덕( 薺 藤 賢 德 )씨가 만쥬로부터 동경에 도라가는 길에 출셕하얏고 또 됴선 일수라 이 르는 백남규씨도 쳥대에 응하야 저등 사단과 한판 승부를 결단함은 백씨 가 일본바둑에 서투른 까닭이던지 불행히 승리를 엇지 못하얏스나 당일의 회쟝에는 금상쳠화인듯 하더라. ( 매일신보 1918.06.11.) 하지만 1910년대 말까지도 조선인들 사이에서 일본식 바둑은 그다지 잘 두어지지는 않았던 듯하다. 경성일보 라는 일본어 신문 주최의 대 회였기 때문에 조선인들의 반발심이 작용했을 수도 있지만, 어찌되었든 결국 대회에 참가한 근 백 명의 사람들은 모두 조선에 있던 내지인 이 었고, 초청되어 참석하였던 조선의 국수 백남규도 일본식 바둑에 서툰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약 10년 뒤인 1926년에 중외일보 는 순장바둑 대국보를 게재하기에 앞서 다음과 같은 기사를 내보낸다. (전략) 그러나 종래에는 비록 바둑 수를 연구코자 하는 희망이 있을지 라도 그것을 배울 편의가 전혀 없으며 근일에 와서는 일본 기보가 많이 유 행하여 그것을 연구하는 이도 있는 모양이나 일본 바둑과 조선 바둑은 화 점을 놓고 아니 놓는 차이가 있어 참고는 될지언정 조선 바둑을 연구하는 재료는 아니 되고 또 종래의 기보라는 것은 있으나 그는 다만 어떤 특별한

296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경우에 치중 놓는 법을 연구하는데 지나지 못한다. 그러나 바둑을 연구하 려면 적어도 벌임새의 전례수와 상전하는 법과 집내기하는 법의 세 가지를 다 보아야 될 것인 즉 이것도 아주 불완전하다. 본사에서는 이러한 것 여 러 가지 관계를 생각하여 현대 기가들 중의 고수를 청하여 실지로 대국한 결과 좋아하시는 독자를 위하여(이하생략, 중외일보 1926.12.05.) 당시 조선에서는 바둑을 연구를 하고 싶어도 마땅한 교재가 없는 상 황이었고, 일본 책이 있기는 하지만 순장바둑과는 두는 방식이 달라 불 충분하다는 것이다. 1920년대 중반까지도 조선인은 순장바둑을 둔다는 생각이 좀 더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1934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바둑전문 잡지이자 유일한 순장바둑 교 재인 신정기보( 新 訂 碁 譜 ) 가 출간 24) 되기도 한다. 책의 서문에는 동년 11월 초에 조선기원을 설립하고 동시에 기도연구소 를 열었다는 것, 잡 지를 펴내어 애기가들이 자습할 교재로 쓰고자 하는 의도, 매월 단계를 높여 간행하겠다는 목표 등이 피력되어 있으며, 총 96페이지에 걸쳐 순 장바둑의 호선바둑부터 8점 접바둑까지 두는 방법의 예시, 순장바둑의 정석 등이 소개되어 있다. 특히 책의 뒷부분에는 일본식 바둑 두는 법을 소개하면서 일본식과 조선식이 처음 배석하는 것과 종국하는 법이 매 우 달라 서로 같은 것이라 할 수 없다. 조선식은 (중략) 범위 장소가 협 소하여 이해를 따지기가 쉽고, 일본식은 반대로 순장점이 없어 포석, 정 석의 방법을 배우지 않으면 둘 곳을 찾기 어렵다 25) 고 주장하고 있다. 이처럼 일본식 바둑과 뚜렷하게 구분되어 향유되던 순장바둑이 언제 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현재와 같이 일본식 바둑만을 두게 되었는지에 24) 채형락( 蔡 衡 洛, 채극문의 본명), 정규춘 두 사람이 저술하고 평한 이 책은 원래 정 기간행물(잡지)로 의도되어 표지에는 제1호 라고 적혀있으나 이후 간행이 중단되 었다. 25) 원문은 국한문 혼용체로 되어 있으며 현대어로 번역은 필자.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97 관한 확실한 증거는 없다. 다만 앞서 언급한 대로 동아일보 1937년 12월 30일자에 실린 유진하의 기계( 碁 界 ) 1년의 회고 에 따르면 당시 의 유명기사들이 정식으로 순장바둑 두기를 그만두고 일본식 바둑으로 전향한 것은 1937년 1월부터다. 1월 1일에 원남동 조선기원에서 채극문, 정규춘, 윤주병 제씨가 도소 주를 난우고 원단의 첫 감상으로 재래 화점식( 花 點 式 )을 전혀 폐지하기로 결의하엿다. 화점은 원래 없든 것이다. 서애 유상공이 자기 치숙( 痴 叔 )과 대국한 포석( 布 石 )이 곧 화점이란 전설도 잇거니와 하여간 명가의 처음 포석을 양편으로 균배( 均 配 )하여 논 것이 화점으로 된 것과 발단한 연대 가 300년 좌우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화점은 대체의 진용이 정형 ( 定 型 )되었음으로 기반국량( 基 盤 局 量 )이 협애( 狹 隘 )하여진다. 따라서 천 재( 天 才 )의 발양( 發 揚 )에 기반( 羈 絆 )이 만은즉 당연히 폐지할 것으로 오 히려 늦은 게 유감이다. ( 동아일보 1937.12. 30. 유진하, 기계 1년의 회고 1.) 그러나 인용문에서 말하는 순장바둑의 유래( 由 來 )나 천재의 발양에 기반이 많다 는 등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더욱이 폐지를 선언한 시점 이 내선일체 와 민족말살정책 등이 본격화 된 1937년이라는 것도 폐 지 선언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하는 부분이다. 순장바둑이 폐지된 것이 일본의 직간접적인 억압과 강요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1920년대와 1930년대를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융화/동화된 것인지 에 대해서는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26). 그 이유야 어찌 되었든 1937년의 순장폐지 선언 이후 모든 신문에 서는 순장바둑을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같은 해에 시작된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주최의 대회들은 모두 일본식 바둑으로 두어졌고, 순장바둑 26) 순장바둑 폐지 선언의 의미에 대해서는 남치형(2013a)와 남치형(2013b)를 참조.

298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과 일본식 바둑의 차이점에 대한 언급도 더는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두 신문의 관전기를 살펴 면 고미(こみ) 27), 중압승( 中 押 勝 ) 28) 등의 일본 어 바둑용어가 사용되고 있으며, 덤도 4.5집이 주어져 일본과 조선의 바 둑이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차이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Ⅲ. 결론 이상으로 1920년대와 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의 바둑관련 기사와 바둑이 소재로 쓰인 소설 등을 토대로 당시 조선 바둑계의 상황 을 조명해 보았다. 조선 후기까지도 주로는 부유층의 사랑방 놀이였던 바둑은 근대적 문물인 신문을 통해 전문화되고 제도화될 계기를 맞는다. 신문은 한편으론 바둑을 허송세월 이라 비난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권장할 만한 소일거리 로 소개했고, 특히 권력자나 상류층 인사들의 바 둑 취미와 모임 등을 소개함으로써 근대적 여가활동으로서의 바둑의 이 미지를 만들어 나갔다. 신문은 또한 그 자체로 훌륭한 경기장이기도 했다. 두 신문은 조선 최고의 기전을 직접 개최하였을 뿐만 아니라 대회에서 생산된 기보를 지면을 통해 보도함으로써 현장에 참석하지 못한 대중들에게 경기 그 자체를 재현해 보였다. 조선의 기사들은 이를 통해 자신들의 실력을 대 중에게 알릴 기회와 더불어 대국료와 상금 수입까지 얻을 수 있었다. 바 둑을 두는 것이 하나의 직업으로 정착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기보 게재는 관전기를 쓰는 사람에게도 새로운 직업의 길을 열어 주었 다. 관전필자는 신문이라는 미디어를 통해 기사와 일반 대중을 연결시 27) 덤 을 뜻하는 일본 바둑 용어. 28) 불계승 을 뜻하는 일본 바둑 용어.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299 켜주는 역할을 담당함으로써 바둑을 통한 직업 활동이 바둑을 두는 것 에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바둑을 즐기는 방식이 이전과 달라졌음도 확인할 수 있었다. 바둑을 향유하는 개인들은 이제 사랑방 같은 개인적이고 비전문적인 공간이 아 닌, 바둑만을 위해 특화된 장소에서 바둑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서울 과 지방 각지에서 다양한 규모의 바둑대회와 모임들이 있었고, 바둑 실 력을 기르기 위해서 책이나 잡지를 구입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조선 의 순장바둑이 사라지게 된 것도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물론 민간에서 도 실제로 순장바둑이 사라졌는지, 그 시기는 언제인지 등에 대하여는 논의의 여지가 많지만, 적어도 공식적인 신문 지상에서는 1937년을 기 점으로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식민지기 조선의 바둑을 조명하는 데 있어 신문 자료만을 활 용한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다. 물론 최근에 이러한 방법을 통해 과거를 재현하려는 시도가 많아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엄승희(2004)는 매일 신보 를 통해 근대 도자( 陶 瓷 )문화를 연구하였고, 박계리(2008)은 근대 적 이미지를, 정혜영 배영희(2004)는 보통학교 교육정책을, 권보드래 (2008)는 새로운 주체의 출현을, 손준식(2010)은 동아일보 의 기사를 통해 조선의 대만에 대한 인식을, 이태화(2012)는 식민지기의 판소리 문 화를 연구하는 등 학문 분야를 초월하여 과거의 재현을 목표로 하는 많 은 연구들이 당대의 신문을 자료로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적 매체 인 신문이나 잡지 등의 발달로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은 양의 기록들이 생산되었고, 그 덕분에 당대를 연구하는 사람들은 훨씬 입체적인 관점을 가질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된 것은 기록되지 않은 것을 뒤에 감추는 법이다. 예컨대, 1910년대의 신문에 각종 문화행사에 관한 기록이 넘쳐나는 것은 총독부 가 문화로의 출구만을 열어 놓은 채 정치영역에서는 압살이라는 정책을

300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취했기 때문(권보드래, 2008)일 수 있다. 이를 바둑의 예를 통해 본다면, 신문지상에서 바둑의 외연이 넓어진 것은 한편으로는 시장의 확대, 대 중의 성장 등으로 해석될 수 있지만, 동시에 그러한 시장을 움직이는 힘 을 가진 사람들에 의한 문화의 왜곡이 나타날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신문은 기사화되기 어려운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언 급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당시를 재구성함에 있어 빈 구석이 많을 수밖 에 없다. 전국대회는 물론 지방의 소규모 대회까지도 뉴스로 다루는 반 면, 심지어 유명한 기사들이라도 평시의 활동 등에 관해서는 전혀 언급 이 없는 것이 신문이다. 일반인들이 바둑을 향유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도박 이라든가 장수비결 로서는 뉴스거리가 되지만 평범한 놀이로서 는 거의 소개되고 있지 않다. 이러한 신문이라는 매체가 지니는 한계에 더하여 바둑이라는 분야의 한계도 존재한다. 애초에 바둑은 정치나 경 제, 혹은 전쟁과 같은 중요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바둑을 중심으로 다 루는 매체가 아닌 신문의 경우 그 관심의 범위는 일정 수준 이상을 넘 어설 수 없다. 하지만 일본과 같이 기보나 바둑책 등이 남아 있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신문은 당시의 바둑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유일한 기록물이기도 하다. 신문의 바둑란은 바둑을 음악이나 미술, 문학 등과 같은 일종의 저작물로 서 보존하고 있다. 비록 본고는 신문 기보를 통해 바둑 그 자체에 대한 분석까지는 포함시키지 못하였지만 신문이 바둑의 역사의 중요한 한 부 분을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본고를 계기로 신문 자료를 활용한 보다 심도 있는 연구가 계속되기를 기대해 본다. 주제어 : 바둑, 바둑문화, 매일신보, 동아일보, 식민지기 조선, 신문, 순장바 둑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301 참고문헌 1. 신문기사 동아일보 1922.01.30. 김준연, 독일 가는 길에 1. 1922.12.21. 나도향, 소설 환희( 幻 戱 ). 1923.10.10. 염상섭, 소설 너희들은 무엇을 어덧느냐 41. 1923.11.03. 유광렬, 개성행 19. 1924.01.30. 해주( 海 州 )청년에게. 1924.09.27. 전주학생제군에게. 1925.01.21. 대화정 위기교수소에서 총독부 관리가 도박. 1925. 04.10. 용천청년에게. 1925.04.26. 해주청년에게. 1925.06.02. 삭영( 朔 寧 )청년제군에게. 1925.09.30. 허영숙, 민족발전에 필요한 어린 아희 기르는 법. 32. 1925.10.27. 여( 汝 )해진( 海 津 )청년에게. 1926.08.29 평양 인상 13. 1927.10.24. 염상섭, 소설 사랑과 죄 71 1928.07.17. 이기영, 하등( 夏 燈 )만필. 1929.11.08. 응접실. 1930.01.23. 응접실. 1931.01.02. 새해새날에 어린이들에게 책임 깨닷고 팔 거두자 2. 1931.01.07. 장생실화 고령자 생활기 지금도 갈비를 뜨더낸다. 아산( 牙 山 ) 윤영렬씨 부처. 1933.07.08. 기사. 1935.03.02. 이중철, 호주기행 2. 1936.07.04. 응접실. 1937.10.24. 정보나, 태평양횡단기 3. 1937.10.29. 일상을 함께 살어야할 남편의 나뿐 버릇 2. 1937.11.10. 기사.

302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1937.12.23. 망년위기회. 1938. 01.22. 천당에 결혼이 없는 이유. 1938.02.12. 복면자, 소설 <만향( 晩 香 )>. 1938.02.24. 기사. 1939.02.18. 신과세물품결정 1939.08.11. 고재환( 高 在 環 )의 하일만초( 夏 日 漫 草 ). 1939.08.28. 이만규, 가정독본. 27. 가정화락의 법촉. 1939.08.31. 기사. 1939.12.26. 유진오, 소설 화상보( 華 想 譜 ) 1940.01.18. 숨은 백수( 百 壽 )비결. 매일신보 1913.10.19. 평북( 平 北 ) 위기경기회 개최 1914.10.13. ~ 1914.12.29. 묘수풀이. 1915.04.18. 기사. 1915.08.15. 기사. 1916.01.18. 위기의 취미 1918.06.07. 사고. 1918.06.11. 기사. 1925.03.21. 기사. 1927.09.06. 기사. 1930.02.14. 조선위기의 진흥을 위하야 구락부를 조직. 1933.03.12. 기사. 1937.12.30. 유진하 기계 1년의 회고 (1), (2). 1939.02.07. 기사. 1941.05.16. 기사. 조선일보 1934.01.17. 기사.

1920-1930년대 매일신보 와 동아일보 에 나타난 조선의 바둑문화 303 중외일보 1926.12.05. 기사. 경향신문 1984.03.21. 기사, 최초의 기원 1996.11.13. 김은신의 이것이 한국최초 58 2. 단행본 및 논문 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서울: 휴머니스트, 2007 안영이, 다시 쓰는 한국바둑사, 서울: 한국기원, 2005 정진석, 한국언론사, 파주: 나남, 1990 조남철, 바둑에 살다, 서울: 한국기원, 1997, 연재 기도( 棋 道 ) 40년, 월간 바둑, (1973.8 1975.2). 채극문, 정규춘, 신정기보( 新 訂 碁 譜 ), 경성위기연구소., 1934 조선총독부, 朝 鮮 の 鄕 土 娛 樂, 調 査 資 料 第 四 十 七 輯, 1941 松 本 薰, 赤 岩 嘉 平, 朝 鮮 碁 界 總 鑑, 西 村 印 刷 所, 1940 藤 井 正 義, 日 本 棋 院 關 西 棋 院, 敎 育 社, 1978 권보드래, 1910년대의 새로운 주체와 문화: 매일신보 가 만든, 매일신보 에 나타난 대중, 민족문학사연구 제36호(2008.4), pp.147-169. 김영희, 한국사회의 미디어 출현과 수용: 1880~1980, 서울: 커뮤니케이션북 스., 2009 남치형, 식민지의 외래문화 이식 및 수용과 해방 후의 재수용의 문제: 순장바 둑의 폐지와 일본식 바둑의 수용을 중심으로, 바둑학연구, 제10권 1 호(2013a), pp.21-33., 순장바둑의 쇠퇴와 한국기원의 설립: 일본적 규칙과 제도의 보편화에 관한 일 고찰, 사회와역사, 제100호(2013b), pp.203~234., 이에모토와 근대 일본의 바둑제도, 바둑학연구, 제10권 1호(2013c), pp.35-47., 일본 근대바둑의 시작과 우편호치신문, 바둑학연구, 제7권 2호 (2010), pp.57-79.

304 인문과학연구논총 제35권 1호 박계리, 매일신보 와 1920년대 전반 근대 이미지, 미술사논단, 제26호 (2008), pp.101-139. 박혜진, 1910, 1920년대 공립보통학교 교원의 업무와 지위, 석사학위논문, 숙 명여자대학교 대학원, 2001. 손준식(2010), 동아일보(1920-1940) 기사를 통해 본 식민지 조선의 대만 인식, 국제중국학연구 제61집(2010.6), pp.319-342. 엄승희, 每 日 申 報 에 나타난 한국 근대 陶 瓷 의 일고찰, 미술사학 제21호 (2004.2), pp.23-57. 윤상길(2011), 식민지 공공영역으로서의 1910년대 매일신보, 한국언론학보 제55권 2호(2011.4), pp.56-76. 이승우, 한국 현대바둑 원년에 관한 고찰, 바둑과문화, 한국바둑문화연구회 제1집, 2000 이태화, 일제강점기의 판소리 문화 연구, 박사학위논문,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2. 정혜정, 배영희, 일제 강점기 보통학교 교육정책연구: 1920년대 每 日 申 報 를 중심으로, 교육사학연구 제14집(2004), pp.165-192. 두산백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논 문 접 수 일 심 사 완 료 일 게 재 확 정 일 2014년 1월 14일 2014년 1월 26일 2014년 2월 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