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학년도 서양어대학 학술제 자료집> 서양어대 골든벨 퀴즈 공격을 막아라 西 든 어택! - 제49대 청년서양어대 학생회 늘,봄 - - 1 -
목차 1.네덜란드...03 2.독일...22 3.러시아...37 4.스칸디나비아...51 5.스페인...72 6.이탈리아...83 7.포르투갈...97 8.프랑스...107-2 -
네덜란드 - 3 -
Part. 1 : 정치 국왕: 빌럼 알렉산더르 총리: 마르크 뤼터 네덜란드는 입헌군주국으로서 정부형태는 내각책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기본적인 정부기구 는 국왕, 내각, 의회, 국왕최고자문위원회, 사법부로 구성되어 있다. 네덜란드의 국왕 - 국가원수로서 세습제에 의해 계승되며 대외적으로는 국가를 대표 - 국내 정치적으로는 총선 후 정부 구성을 위한 연립정부 구성 협상을 주선하는 조정자 - 총리 후보를 지명하는 역할을 수행 - 매년 9월 3번째 화요일에는 의회의 개원식을 주관하고 교서를 발표 - 네덜란드의 국왕은 그 지위가 상징적, 국사에 있어서 형식적이며 의례적인 권한을 행사 - 법령 또는 중요 국정 관계 문서의 서명권이 있으나 관계 각료의 부서가 있어야만 효력이 발생되므로 국왕은 정치적 책임을 지지 않음 네덜란드의 내각 - 국왕에 의해 임명된 정부 각료로 구성됨 - 국정 최고의 의결기관 - 내각의 의장은 총리가 맡음 - 각료직은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 간에 의회 내의 의석 분포에 따른 비율로 배분하는 것이 원칙 - 네덜란드는 내각책임제이지만 각료는 국회의원이 아님 * 국회의원이 각료나 정무장관이 되는 경우에는 3개월 이내에 의원직을 사임하여야 한다. - 내각은 법령, 국제협정과 조약, 고위관리(국왕자문위원, 주지사 및 주요 시장 등) 임명 등 국정 전반에 관한 토의 및 의결의 권한을 보유 - 법령과 문서는 관계 각료의 부서가 있어야만 효력이 발생 - 4 -
- 각료가 의회에 대하여 개별적 또는 집단적으로 책임을 짐 - 내각의 회의는 1주 1회 개최가 원칙 - 그러나 필요할 경우 추가적인 회의 개최가능 - 내각의 의결은 다수결에 따름 * 다만 가부 동수인 경우에는 차기 회의로 연기된다. 긴급한 사안으로 전 각료가 참석한 경 우에는 가부 동수라 하더라도 총리가 결정권을 행사한다. 네덜란드 내각의 무임소장관(Ministers Without Portfolio) - 특정한 부처를 책임지고 있지 않은 각료를 의미 - 무임소장관은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정당 간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임명 - 한 부처가 장관 한명만으로는 관리가 어려우나 두 부처로 분리하기 힘든 경우 임명 정무장관(State Secretary) - 1948년 이후 도입된 제도 - 부처 내의 특정 업무를 관장 - 소관 각료의 지시를 준수 - 정무장관은 내각 회의의 구성원은 아니지만 필요한 경우에는 회의에 참석할 수 있음 - 의회에 대해서도 책임을 짐 * 단, 소관 장관이 사임하는 경우에는 해당 정무장관도 사임해야 한다. 정무장관이 사임했 을 경우, 소관 장관은 사임하지 않아도 된다. 네덜란드 의회 - 네덜란드의 의회는 상원 및 하원 양원으로 구성됨 - 의원은 양원을 동시에 겸임할 수 없음 - 조약체결 동의권도 보유 - 네덜란드는 원칙적으로 모든 조약은 의회의 비준동의를 받아야 함 - 네덜란드 의회에는 별도의 정부 또는 각료에 대한 신임투표제도 없음 상원 - 네덜란드 의회의 상원은 지방의회에 의해 간접 선출된 75명의 의원으로 구성 - 상원 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피 선거권자는 25세 이상 * 상원 의원에게는 하원 의원과는 달리 수당만 지급된다. 하원 - 네덜란드 의회의 하원은 국민의 직접 보통선거에 의해 비례대표제로 선출 - 임기 4년의 직선의원 150명으로 구성 - 선거권자는 18세 이상 - 피 선거권자는 25세 이상 - 5 -
- 하원 의원은 봉급과 수당을 지급 - 65세 이전에 은퇴하는 의원은 수당을 지급받음 - 65세 이후에는 연금을 받음 - 하원만이 단독으로 법률안 발의권과 수정 권을 보유 상원은 하원을 통과한 법률안을 거 부할 수 있으나 수정할 수는 없음 * 각료, 정무장관, 국왕최고자문위원, 대법원 판사, 주지사 등은 의원직을 겸임할 수 없다. 네덜란드의 헌법상 정부의 의회 해산권 정부와 의회 간에 분쟁이 발생할 경우, 정부는 의회를 해산할 수 있다. 그러나 동일한 이 유로 두 번 이상 의회를 해산하지는 못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헌법개정안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을 때에는 의회는 반드시 해산되고 새로운 선거를 실시해 야 한다. 의회를 해산하는 경우에는 총선 일시 및 새로 구성되는 의회의 첫 회기를 명시해 야 한다. 국왕최고자문위원회 - 28명 이내의 상임위원과 14명 이내의 비상임위원으로 구성됨 - 국왕이 의장을 맡으며 부의장 1명이 있음 - 국왕최고자문위원회의 위원은 법무장관과의 협의 및 내무장관의 추천에 의해 국왕이 임 명 - 일반적으로 은퇴한 원로 정치인에게 주어지는 명예직, 종신직 * 실제로는 70세에 은퇴한다. - 국정 전반에 관한 사항뿐만 아니라 입법 사항에 대해 자문을 하고 정부관서 내의 행정 분쟁조정 및 행정소원을 처리하는 기능을 담당 - 6 -
Part. 2 : 문화 1)기본사항 ㅇ국명 : 네덜란드왕국 (Kingdom of Netherlands) ㅇ수도 : 암스테르담(80만명) ㅇ면적 : 약 41,526km2 ㅇ인구 : 1,690만명 (2015년) ㅇ종교 : 가톨릭, 개신교 등 2)음식문화 1) 네덜란드 음식문화의 특징 네덜란드 요리는 비교적 소박한 편이다. 수프와 스튜를 곁들인 스테이크, 치킨, 생선 등이 주 메뉴이다. 특히 고기와 우유, 치즈는 맛도 좋고 신선해서 인기가 높다. 또한 어류의 종류 도 다양하고 푸짐하다. 매년 5월이 되면 청어를 파는 가게가 곳곳에 들어선다. 청어 요리는 네덜란드인들이 즐겨먹는 음식 중의 하나이다. 인기 있는 겨울 음식에는 에르픈 수프와 쌀 을 주원료로 한 인도네시아 요리 레이스타펠이 있다. 음료수로는 네덜란드의 맥주 하이네켄 과 레모네이드가 있다. 아침과 점심은 간단하게 해결한다. 빵과 커피, 샌드위치나 감자튀김 등이 있다. 저녁식사는 감자를 기본으로 고기나 생선, 삶은 야채 등을 먹는다. 저녁식사 후에는 디저트로 푸딩, 아 이스크림, 커피 등을 마신다. 드넓은 평원의 영향으로 고기와 우유, 치즈 등을 많이 섭취한 다. 네덜란드인들은 인도네시아, 중국, 일본 등의 아시아 요리에도 관심이 많다. 이 이유로 슈퍼마켓에서 아시아 차, 식품 및 나물, 두부, 간장 등을 쉽게 살 수 있다. (1) 청어 등 해산물 풍부 (2) 낙농업으로 우유 및 유제품 발달 (3) 현지화한 다양한 인도네시아 요리 (4) 편리 위주의 간단한 식단 (5) 더치페이(Dutch Pay) 네덜란드는 각종 해외 요리의 종류가 풍부하고 레스토랑 종류도 많아서 즐기기 좋다. 그러 나 역시 특유의 국민성은 많은 직장인들이 도시락을 싸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드러난다. 도 시락은 위에 언급했던 점심식사와 별반 다를 바 없이 빵과 치즈 혹은 청어가 들어간 오픈샌 드위치 정도이고 디저트로 사과나 바나나가 곁들여질 뿐이다. 네덜란드인의 초대도 이와 유사하다. 단순히 집에 초대했다면, 손님은 식사를 하고 가는 것 이 예의이다. 네덜란드에서 식사 초대는 흔치 않은 일이며 혹, 초대의 목적이 식사라면 초 대할 때 확실하게 밝힌다. 일반적으로 남의 집에 가서는 차와 과자류 이상을 기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더치페이라는 말은 커피 한 잔을 같이 마셔도 자기 몫은 자 - 7 -
기가 값을 치루는 더치, 즉 네덜란드인의 방식이라는 뜻이다. 더치페이는 경우에 따라 전체 금액을 머리수대로 나누어 내는 경우가 있기도 하지만, 대부분 자기 몫을 정확히 계산하여 치루는 자칫 비인간적으로 보일 수도 있으나 합리적인 사고방식이다. 편리 위주의 식단 네덜란드인은 1일 1회 저녁식사에 한하여 더운 음식을 먹는다. 아침은 주로 간단한 빵과 커피, 홍차로 대신하며, 중식 역시 간단하게 샌드위치나 감자튀 김 등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이웃 벨기에는 전 인구의 약 70% 정도가 중식으로 더운 음식을 먹는 반면, 네덜란드인은 전 인구의 70%가 차가운 음식(빵, 샌드위치 등)으로 간단히 해결한다. 저녁식사의 경우, 준비시간이 평균 30~45분 정도인데, 음식재료로 사용되는 야채 등도 대부분 가공식품을 사용해 준비시간이 단축된다. 저녁메뉴는 주로 감자(삶거나 튀긴 감자)를 기본으로 고기나 가공육 혹은 생선(주로 금요 일) 그리고 삶은 야채 등 크게 3가지로 나뉜다. 후식으로 푸딩이나 아이스크림, 커피를 이용한다. *대표음식 -올리볼렌: 네덜란드의 대표적인 새해맞이 음식으로, 밀가루 반죽에 말린 과일을 넣어 옅은 갈색으로 튀겨낸 작은 공 모양의 달달한 도넛을 말한다. 6세기경 네덜란드 사람들에 의해 처음 만들어졌으며 미국의 도넛과 매우 유사하여 네덜란드 도넛 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겉 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빵 안에 전통적으로 건포도, 다진 사과, 또는 커런트(currant)가 속재료로 들어가는데, 오늘날은 개인의 기호에 따라 바나나, 베리, 커스터드 등의 다양한 재 료를 활용하고 있다. 네덜란드 사람들은 이 앙증맞게 생긴 올리볼렌을 축제와 행사에서 간 식으로 즐겨 먹으며, 특히 새해 전날이면 가족과 친구들이 모여 새로운 한 해의 평안을 기 원하며 나누어 먹는다. 네덜란드에서는 매년 1억 3천만 개의 올리볼렌이 소비되고 있다. -스탬폿: 네덜란드 사람들이 즐겨먹는 삶은 감자에 양파 등의 여러 뿌리 야채들을 혼합하여 만든 소박한 농가형 전통음식이다. 16세기에 네덜란드의 독립전쟁 중 만들어진 헛스팟 (hutspot) 이라는 음식에서 진화되었으며, 네덜란드에서는 기온이 내려가는 가을과 초봄 사 이에 주로 먹는 대표적인 겨울음식이다. - 8 -
3)관광명소 4)기타 -네덜란드의 교통: 네덜란드는 대중교통이 잘 갖추어져 있다. 주요 강과 많은 운하가 내륙 수로로 이용되며, 수로를 오가는 전동선이 많아 배로 여행하기에도 좋다. 세계적으로 유명 한 로테르담 항구는 라인 강을 지나 유럽을 오가는 관문으로, 북해 운하를 통해 북해와도 연결된다. 또한 암스테르담 부근에 있는 스히폴 공항은 80여 개의 항공사들이 100개국 이 상의 220여 도시로 취항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네덜란드 항공의 본사가 있으며, 공항 내에 위치한 기차역과 바로 옆의 고속도로를 통해 곧바로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연결 된다. 또 전국 각 지역에 건설된 400여 개의 기차역을 통해, 네덜란드 어디든 최첨단 기차 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 하지만 국토가 좁고 인구 밀도가 높아서, 교통 문제가 심각한 대도시에서는 자전거를 많이 이용한다. 전 국민이 한 대 이상의 자전거를 갖고 있으며 전국 에 19,200km의 자전거 전용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서 자전거 이용이 편리하다. -자린고비 정신: 네덜란드 사회는 전반적으로 근검절약하는 자린고비 정신이 강하다. 그래 서 옷차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고 집이나 자동차를 살 때도 겉모습보다 실용적인 면을 우 선으로 생각한다. 또 워낙 할인을 좋아해서 할인 제도가 다양하게 발달하여, 기차 이용에도 스무 가지가 넘는 할인 방법이 있다. 흔히 각자 비용을 낼 때 '더치페이'라는 말을 하는데, 여기서 더치(Dutch)는 네덜란드를 뜻하는 영어로, '네덜란드식 계산법'이라는 뜻이다. 이것 은 원래 네덜란드와 식민지를 놓고 경쟁했던 영국인들이 네덜란드인들의 접대 문화를 비꼬 아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전통 나막신, 클롬펀: 땅이 낮아 항상 물과 전쟁을 벌였던 네덜란드인들은 6백여 년 전부 터 습기를 방지하고 발을 따뜻하게 유지시켜 주는 나막신을 신었다. 지금은 기계로도 생산 되지만 1930년대까지 손으로 나무를 깎아 만들었기 때문에, 주로 강하면서도 다듬기 수월 한 미루나무를 사용했다. 네덜란드에서는 매년 3백만 켤레의 나막신이 생산되며, 관광지에 서는 나막신 깎기 시연을 자주 볼 수 있다. -네덜란드의 동성애자 결혼합법화 네덜란드는 개방적이고 진보적인 국가로 알려져 있는데, 그 실례로 네덜란드는 유럽국가 최 초로 1993년 동성결혼을 합법으로 인정하였으며, 2001년 4월 1일 0시부로 동성애 커플의 결혼과 이혼을 허용하는 법이 시행되었다. 단, 입양은 허용이 되지 않으며, 정신박약어린이 와 장애어린이의 양육은 허용된다. - 9 -
-네덜란드의 마약합법화논쟁 네덜란드의 마약정책은 마약사범을 처벌하는 처벌위주정책이 아닌, 중독성이 낮다고 판단되 는 마약을 합법적으로 관리하는 정책이다. 네덜란드 정부는 1976년 상대적으로 중독성이 낮고 인체에 피해가 적은 대마와 환각 버섯 등을 연성마약(Soft Drug)으로 규정, 5g 이하의 대마를 피우거나 소지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고, 커피숍이라는 곳에서 대마를 피는 것을 허 용하되, 500g 이하만 판매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이는 연성마약을 허용함으로써 헤로인과 코카인 등 이른바 중독성 마약을 가까이하는 것을 막기 위한 정책이다. 하지만 이로 인한 폐해도 있다. 바로 대마중독자 문제이다. 2008년 네덜란드에서는 마약중독자가 줄어든 대 신, 대마가 주는 편안함 때문에 복용을 끊지 못하는 대마중독자가 늘어나고 있는데, 이들 대마중독자들은 취업 등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중독성이 낮다는 대마에 중독되어 직장생 활 등의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부적응자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 10 -
Part. 3 : 역사 1 네덜란드 독립 전쟁 배경 개신교의 성장 1517년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는 북유럽에 빠르게 확산되고 있었다. 무역에 의존하고 있던 네덜란드의 지방 정부는 자유와 관용으로 사회를 유지할 필요가 있었고, 그 때문에 개신교에 대해 관대한 편이었다. 카를 5세와 그의 후계자 펠리페 2세는 개신교를 로 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이단으로 보았으며 개신교의 교세가 확산되자 이를 억압하고자 하였 다. (피의 칙령 선포, 1550) 이로 인해 관용에 바탕을 두었던 네덜란드의 평화로운 공존은 위기를 맞게 되었으며 펠리페 2세는 에스파냐의 군대를 주둔시켜 반란을 진압하고 네덜란 드를 로마 가톨릭 교회 국가로 되돌리려 하였다. 이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발화점이 되었 다. 전쟁 초기 (1555년 - 1572년) 고조되는 갈등(1555년 - 1568년) 1556년 카를 5세는 왕좌를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양위한다. 카를 5세는 네덜란드를 가혹하게 통치하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자신의 고향이라는 생각이 있었다. 그러나 펠리페 2 세는 스페인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네덜란드어는 물론이고 프랑스어, 독일어도 할 줄 몰랐 다. 펠리페 2세가 네덜란드에 대해 더욱 무거운 세금과 개신교에 대한 탄압 그리고 권력의 중앙 집중을 위한 정책을 추진하자 네덜란드는 결국 독립을 결심하고 전쟁을 선포하기에 이 른다. 적대적인 귀족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신뢰할 수 있는 확고한 정부를 세우기 위해 네덜란드 17주의 상 급 귀족으로 하여금 네덜란드 의회를 구성하게 하고 수장으로 그란 베일을 임명하였다. 후 일 펠리페 2세는 카를 5세의 서녀였던 파르마의 마르가레테를 총독으로 임명하였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1558년 네덜란드에서는 스페인 군대의 철수와 높은 세금의 감면에 대한 요구 가 쏟아져 나왔으며 상위 귀족들로 구성된 의회가 침묵으로 일관하자 펠리페 2세에게 직접 탄원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청원은 하급 귀족들이 중심이 되었으나 상급 귀족 중에도 이 들의 청원에 가담한 사람들이 있었다. 에그몬트 백작 라모랄, 흄 백작, 오라녜 공 빌렘 1세 등은 의원직을 사퇴하고 펠리페 2세가 그란베일을 스페인으로 소환할 것을 요구하였다. 1564년 말, 귀족들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반란이 일어날 것임을 경고하였으나 펠리페 2세의 대답은 오직 억압뿐이었다. 위의 세 명은 다시 한 번 의원직을 사퇴하고 일견 복종하는 듯하였다. 그 기간 동안 네덜란드에서는 로마 가톨릭의 개신교 박해를 반대하는 여론이 확산되었다. 1566년 하급 귀족 400명이 서명한 청원서가 펠리페 2세에게 전달되었다. 펠리페 2세는 이 - 11 -
들을 "괴젠"이라 표현하였는데 이는 "거지"를 뜻하는 말이다. 그들의 탄원이 일정정도 받아 들여지자 하급 귀족들은 "괴젠"이란 모욕적인 칭호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성상파괴와 압제 (1566년) 1565년 네덜란드는 북방 7년 전쟁의 여파와 흉년이 겹쳐 경제가 침체되고 생활고에 시달 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로 인해 네덜란드에는 칼뱅주의를 신봉하는 개혁교회 (Reformed Church)신자들을 중심으로 반란의 기운이 가득 차게 되었다. 1566년 8월 플랜 더스의 혼트슈테 교회를 습격한 칼뱅주의자들은 교회에 있던 가톨릭 성인의 성상을 파괴하 였다. 이는 당시 네덜란드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성상 파괴 운동 중의 하나였다. 성서주의자 들인 칼뱅주의자들은 성상이 십계명에서 금지한 우상 숭배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 성상 파괴를 정당화 하였다. 성상 파괴에 참여한 인원은 적었으며 그들의 배후는 밝혀지지 않았 으나 지방 정부는 그들의 파괴행위를 방관하였다. 이러한 성상 파괴 운동의 발생은 네덜란드 귀족을 두 편으로 갈라놓았다. 오란녜 공과 브 레데로드 백작 헨리가 각 진영의 정점에 있었다. 귀족들의 청원에 응답하기 전부터 펠리페 2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통제권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펠리페 2세는 군대를 파견하여 반란 을 진압하는 것 이외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1567년 8월 22일, 알바 공, 페만도 알바레즈 톨레도가 1만의 군대를 이끌고 브뤼셀에 주둔하였다. 알바 공은 특별 법정을 세우고 국왕을 비방한 모든 이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상위 귀족도 예외가 있을 수 없었다. 알바 공은 자신이 네덜란드에서 펠리페 2세를 대리한 다고 생각하였으며 파르마의 마르가레테의 지위는 무시되었다. 결국 그녀는 1567년 9월 총 독 직을 사퇴하였다. 에그몬트 백작과 흄 백작은 체포되어 브뤼셀의 대광장에서 참수되었 다. 처형된 두 백작은 죽을 때까지 스페인의 국왕에 대한 충성을 지킨 로마 가톨릭 교회 신 자였다. 알바 공이 이들을 처형한 명분은 이들의 개신교에 대한 관용정책이 반란을 키웠다 는 것이었다. 알바 공의 상급 귀족 처형은 네덜란드 의회의 권한을 침해한 것이었으며, 알 바 공의 법정은 수 개월간 수천의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이러한 무자비한 처형 때문에 특별 법정은 "피의 법정"으로 불리게 되었고 알바공은 "강철 대공"이란 악명을 떨치게 되었다. 네 덜란드의 반란이 수그러들고 난 뒤에도 이러한 처형은 계속 이루어졌다. 오라녜 공 빌렘 1세 오라녜 공 빌렘 1세는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의 영중이자 앤트워프의 후작이었으며 펠리페 2세에 대한 청원에 앞장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한 네덜란드 의회의 의원이었다. 알바공이 에그몬트 백작과 흄 백작을 처형하자 그는 체포를 피하기 위해 그의 영지를 장인 이었던 삭소니의 선제후에게 넘겼다. 펠리페 2세는 빌렘 1세의 네덜란드에서의 모든 지위와 영지를 몰수하였다. 1568년 빌렘 1세는 그가 원하는 것은 스페인 왕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브뤼셀의 알바 공 을 퇴진시키는 것과 자신의 영지를 되찾는 것이라 밝혔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네덜란드의 국가 1절의 가사로 요약된다. 1568년 4월 23일 빌렘은 헤일리게레 전투에서 스페인 군대와 싸워 승리하였으며 이는 이후 80년간 이어질 8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제1,2차 대 스페인 항전)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빌렘은 재산이 바닥나게 되어 군대가 해산되었고 알바공은 빌렘의 동맹군을 패퇴시켰다. 그는 1572년 다시 한 번 군대를 일으켜 델프트와 홀란트를 탈환하였다.(제3차 대 스페인 항전) 그러나, 오라녜 공 빌렘 1세는 1584년 로마 가톨릭교도 - 12 -
인 발타자르 게라트에 의해 암살되었다. 다시 불붙은 전쟁(1572년 1585년) 거세지는 반군 에스파냐는 지중해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네덜란드와 오스만이 라는 전혀 다른 전선에서 전쟁을 수행하여야 하였고 이는 스페인이 네덜란드 독립전쟁 진압 에 전력을 집중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1570년 알바공은 여전히 반란군에 대해 우위에 있었으나 그의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재정은 고갈되고 있었다. 알바공은 네덜란드에 주둔하 고 있는 에스파냐 군대의 비용을 해결하기 위해 네덜란드 의회에 새로운 세법을 공포하도록 요청하였다. 이른바 "1할세"로 불린 이 세금은 모든 판매수익과 토지수익의 1할을 세금으로 납부하도록 한 것이었다. 네덜란드 의회는 새로운 세법의 공포를 거절하였고 일정 정도의 타협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571년에 이르러 알바공은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1할세를 강행하였다. 이러한 알바 공의 압제는 로마 가톨릭 교회 신자이냐, 개신교 신자이냐 하는 교파의 구분 없이 모든 네덜란드 주민들이 불만을 품도록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반란은 더 욱 거세지고 많은 주민들이 강제로 부과된 세금을 피해 알바공의 통치 지역에서 도망치게 되었다. 1572년 3월 1일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에스파냐 국왕의 요청이라는 명분으로 영 국의 항구에서 "바다의 거지들"이라 불리던 괴젠을 추방하여 이들을 네덜란드로 보냈다. 4 월 1일이 되자 괴젠들은 루멘의 영주 라마르크의 빌렘 2세를 지도자로 하여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브리엘을 점령하였다. 브리엘의 점령 후 반군은 점차 북 네덜란드의 여러 지역으 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모든 저지대의 개신교들의 반군 결성을 이끌어 내었다. 1572년 도르드레히트에서 빌렘 1세는 홀란트, 젤란트, 위트레흐트, 프리스란트의 통치자이 자 장군으로서 반군들과 회동하였다. 이 회동에서 오라녜 왕가와 국가의 권력 분립이 합의 되었다. 1578년 여전히 로마 가톨릭 교회 세력이 우세하였던 암스테르담과 미델부르크를 제외한 홀란트와 젤란트 대부분의 도시가 반군에 가담하였다. 이로써 북 네덜란드 내에서 반군의 영향력은 급속히 확대되었고 두 번째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네덜란드는 칼뱅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에스파냐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는 개신교도 의 독립파와 브뤼셀의 정치적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가톨릭 교도로 분열되었다. 로마 가 톨릭 교회 교도들은 반군을 지지하지 않았으나 개신교도들은 반군이 에스파냐의 군대를 무 찌르고 네덜란드의 권리를 쟁취할 것을 희망했다. 빌럼 1세는 애초에 두 기독교 교파사이에 서 중립적이었으나, 에스파냐에 대한 대항에 칼뱅주의자들이 적극 가담하자 점차 칼뱅주의 로 경도되었다. 빌럼 1세는 1573년 개신교로 전향하였다. 간트 협약 1573년, 네덜란드의 반란이 지속되자 에스파냐는 알바 공을 레퀴상스로 교체하였다. 레퀴상 스는 에스파냐와 네덜란드 양 진영에 모두 호의적인 정책을 취하려고 애썼다. 한편 1575년 에스파냐는 파산상태에 빠졌다. 이로 인해 용병의 급여가 지급되지 않자 에스파냐의 군대는 당연히 쇠약해 졌으며 엔프워프에서 약탈을 자행하였다. "에스파냐의 약탈"이라 불리는 이 약탈은 반군 측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데 일조하였다. 1576년 저지대 지방에서 에스파냐를 축출하기 위해 저지대 지방의 북부와 남부가 서로간의 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협력하기로 - 13 -
하는 간트 협약이 체결되었다. 에스파냐의 엔트워프 약탈을 지켜본 로마 가톨릭 교회 교도 들은 외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하느니 반군에 가담하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형식적 으로는 여전히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한편, 에스파냐는 에스파냐 령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막대한 금을 가져올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군대를 편성하였다. 사령관은 페르네제였다. 아라 동맹과 위트레흐트 동맹 1579년 1월 16일 페르네제는 바룬 프랜더스(지금의 프랑스 아라와 벨기에의 왈로니)에서 북 네덜란드와 개신교에 대항하는 가톨릭교도들을 중심으로 아라 동맹을 결성한다. 이로 인 해 3년간 유지되던 간트 협약은 붕괴되었고 종교적 관용을 바탕에 둔 독립을 희망했던 네 덜란드 17주의 초기목표 역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1월 23일 빌렘 1세는 아라 동맹에 대 한 대응으로 북 네덜란드를 중심으로 하는 위트레흐트 동맹을 결성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17주는 에스파냐 국왕의 휘하에 있는 남부와 반군의 통치를 받는 북부로 양분되었다. 영국의 개입과 네덜란드의 독립 선언 16세기말 상급 귀족이 아닌 다른 세력이 네덜란드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으며 네 덜란드 의회는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2세가 지배력을 회복하기를 희망하였다. 성공회 신 자였던 잉글랜드의 엘리자베스 1세는 명백하게 네덜란드 개신교 신자들의 독립전쟁을 후원 하는 것으로 쪽으로 기울었다. 초기에 그녀는 프랑스와 위그노 즉, 프랑스의 개신교 신자 사이에 개입하여 헴프턴 코트 협약을 맺었다가 위그노들로부터 배반당하였던 경험 때문에 네덜란드와 에스파냐의 분쟁에 개입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으나, 1585년 엘리자베스 1세는 처음의 선언을 철회하고 네덜란드와 논서치 협약을 맺어 반군을 지원하였다. 펠리페 2세는 엘리자베스 1세의 결정을 배반으로 받아들였으며 이후 9년 전쟁에서 아일랜드를 지원하여 보복한다. 논서치 협약은 네덜란드 반군이 앤트워프를 공격할 때 영국이 말과 군사를 지원 하는 것이었다. 영국과 에스파냐의 이러한 대립은 결국 전쟁으로 치닫게 되어 1588년 에스 파냐의 무적함대는 영국 해군과 전쟁을 치르기에 이른다. 이 전쟁에서 에스파냐의 무적함대 는 괴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고 패배하였다. 1581년 펠리페 2세는 프랑스와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프랑스의 앙리 2세의 막내아들이었던 앙주 공 프랑소와를 네덜란드의 신임 총독으로 임명한다. 네덜란드 의회는 이러한 펠리페 2 세의 결정에 반대하였으며 결국 1581년 7월 네덜란드 독립 선언을 통해 네덜란드가 더 이 상 에스파냐의 국왕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을 것임과 펠리페 2세의 지배를 거부한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선포하여 사실상 독립을 선언하고 네덜란드 공화국을 수립하였다. 앙주공은 자 신에게 비협조적인 도시들에 대해 군사력을 행사하는 등 권력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결국 점차 영향력이 줄어들게 되자 1583년 네덜란드를 떠나고 만다. 앙주 공이 네덜란드를 떠난 후 네덜란드는 다시 한 번 영국의 공식적인 후원을 요청하였으 나 엘리자베스 1세는 이를 거절하였다. 네덜란드는 더 이상 외국 국왕의 후원을 기대하는 것을 포기하고 공화국으로서 독립하는 것을 모색하게 되었다. - 14 -
엔트워프 함락과 네덜란드의 위기 네덜란드가 결별 선언을 선포하자 에스파냐는 새로운 군대를 네덜란드에 파견하였다. 지방 연합으로부터 지배력을 되찾기 위해 파견된 에스파냐의 군대는 몇 년에 걸쳐 네덜란드 북부 지역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는 플랜더스와 브라반트를 탈환하기에 이른다. 1585년, 당시 저지대 지방의 가장 큰 도시였던 엔트워프가 에스파냐 군대에게 함락되었으며 절반에 가까 운 시민들은 북부 네덜란드로 탈주하였다. 1560년 10만이었던 엔트워프의 인구는 도시 함 락 후인 1590년 4만 2천명으로 줄었다. 한편, 펠리페 2세는 1580년부터 오라녜 공 빌렘 1세를 무법자라 불렀으며, 빌렘 1세는 결 국 1584년 7월 10일 필리페 2세의 사주를 받은 암살자에 의해 암살되었다. 빌렘 1세의 지 위는 그의 아들 오라녜 공 나사우의 마우리츠에게 상속되었으며 마우리츠는 아버지를 이어 독립 전쟁의 지도자가 되었다. 1585년 네덜란드는 칼뱅주의의 개신교가 대다수인 북부와 로마 가톨릭이 대다수인 남부로 분리되어 있었으며, 북부는 결별 선언과 함께 사실상 독립국이 되었고 남부는 여전히 에스 파냐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에스파냐는 남부에 상당수의 군대를 주둔시켜 북부 네덜란드 와 전쟁을 치르는 한편 프랑스를 견제하였다. 북부의 독립(1585년 - 1609년) 마우리츠의 활약 엘리자베스 1세는 네덜란드에 대한 공식적인 후원은 거절하였으나 비공식적으로는 지속적 인 도움을 주고 있었다. 1585년 논서치 협약에 따라 영국은 네덜란드를 지원하기 위해 레 스터 백작이 이끄는 5,000 ~ 6,000 정도의 보병과 1,000의 기병을 파병한다. 그러나 레스 터 백작은 사령관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였을 뿐 아니라, 정치적 감각도 없어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간의 미묘한 관계를 이해하지도 못하였다. 그는 극단적인 칼뱅주의자의 편에 서서 로마 가톨릭 신도와 온건 개신교 신도를 대하였기 때문에 많은 네덜란드의 유력인사와 충돌 을 빚어 대중의 지지를 잃었다. 결국 레스터 백작은 영국으로 돌아갔고, 1587년 네덜란드 의회는 당시 20세였던 오라녜 공작 빌렘 1세의 아들 오라녜 공작 마우리츠를 네덜란드군의 대원수로 임명한다. 오늘날의 네덜란드의 기초는 대부분 마우리츠의 작전에 의해 대략적인 윤곽이 만들어졌다. 마우리츠는 군사적 전략 뿐 아니라 재정적으로도 에스파냐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그는 1588년 해군을 정비하고 영국과 연합하여 에스파냐의 무적함대에 맞서 찰스 하워드가 이끄 는 영국 함대가 아르마다 해전에서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1595년 프랑스의 앙리 4세가 에스파냐에 전쟁을 선포하자 에스파냐는 또다시 파산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에 스파냐는 아메리카에서 막대한 금을 가져와 영국과 프랑스 양국과의 전쟁에 소비해야만 했 다. 오라녜 공 마우리츠는 에스파냐가 영국과 프랑스에 패배하여 약화된 사이 네덜란드의 주요 도시들을 점령하였다. 1588년 베르겐을 시작으로 여러 도시를 속속 점령하여 나갔다. 마우 리츠의 이러한 점령의 결과 네덜란드는 오늘날의 국경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무적함대의 패배 1588년 에스파냐는 22척의 전함과 108척의 무장상선으로 무적함대를 구성하고 네덜란드 - 15 -
공화국을 지원하는 영국을 저지하기 위한 원정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무적함대는 영국 함대 와의 해전에서 패배하여 목적 달성에 실패하였다. 이 해전에서 영국의 승리는 이후 영국의 해상력 강화의 기반이 되었다. 프랑스-스페인 전쟁 프랑스의 앙리 4세는 개신교 신도였으며 이로 인해 프랑스 내 가톨릭 세력으로부터 왕위 를 부정당하였다.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프랑스의 가톨릭 세력을 지원하여 앙리 4세를 압박하였으나 무적함대의 패배 이후 영국 및 네덜란드와의 전쟁에서 에스파냐의 세력이 약 화되자 앙리 4세는 1595년 에스파냐와 전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에스파냐가 다시는 프랑 스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것과 앙리 4세의 왕권을 인정하는 베르빙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 다. 1595년 펠리페 2세가 사망한 뒤 에스파냐의 왕위를 이은 펠리페 3세는 앙리 4세와의 베르빙 조약을 계승하였다. 이로써 프랑스 종교 전쟁이 일단락되었다. 1598년 펠리페 2세는 전쟁으로 인한 재정 압박으로 인해 네덜란드는 자신의 딸 이사벨라 와 그녀의 남편 오스트리아의 알베르트 대공에게 양도하였으며 프랑스와는 베르빙 조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의 승전 네덜란드는 1600년 니우포르트 전투와 1607년 지브롤터 해전에서의 결정적인 승리를 쟁 취하였다. 이로써 네덜란드 공화국은 에스파냐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기에 이른다. 전쟁의 승리를 통해 에스파냐의 지배를 물리친 네덜란드는 이후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열강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1602년 네덜란드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를 설립하고 해외 식민지 쟁 탈전에 뛰어들었다. 네덜란드 제국은 인도네시아, 싱가폴 등을 식민 지배하였다. 다시 시작된 전쟁(1621년 1648년) 1622년 스페인의 브레다 함락 영구 평화 조약 체결을 위한 에스파냐와 네덜란드의 협상은 결국 결렬되었다. 협상 결렬의 첫 번째 원인은 종교적 문제였다. 에스파냐는 북부 네덜란드 내의 로마 가톨릭 신도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요구하였으나 네덜란드가 똑같은 조건으로 남부 네덜란드의 개신교 신도들에 대한 종교적 자유의 인정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였다. 다른 하나는 동아시아에서 아메리카 에 이르는 양국의 식민지에 대한 권리 문제였다. 결국 평화 조약 협상의 결렬은 전쟁으로 이어졌고 이것은 양국이 30년 전쟁에서 충돌하는 계기가 되었다. 전쟁의 경과 30년 전쟁은 표면적으로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신성로마제국이 이끄는 로마 가톨릭과 네덜 란드를 비롯한 스웨덴, 덴마크, 보헤미아 등의 개신교의 종교전쟁이었으나 실제로는 각국의 이익에 따라 결성된 동맹 간의 전쟁이었다. 프랑스는 로마 가톨릭 교회 국가였으나 합스부 르크 왕가를 견제하기 위해 개신교 국가의 편에 섰으며 독일의 많은 선제후들은 개신교였음 에도 불구하고 합스부르크 왕가의 편에 서서 싸웠다. 전쟁의 초기 에스파냐는 베르다를 함락하는 등 선전하였으나 결국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주 축이 된 동맹군에 패배하였다. 네덜란드는 개신교 동맹으로서 승전국의 지위를 획득하게 된 - 16 -
다. 평화조약과 독립의 승인 1648년 베스트팔렌에서 베스트팔렌 조약이 체결됨으로써 전쟁은 종결되었다. 이 결과 유 럽 각국의 개신교도들은 종교적 자유를 인정받았고 네덜란드와 스위스는 독립이 국제적으로 인정되었다. 2 영국-네덜란드 전쟁 제1차 (1652 ~ 1654) 청교도 혁명 전쟁 중에 잃은 영국의 해운( 海 運 )과 무역을 회복하고자 크롬웰은 1651년 항 해조례( 航 海 條 例 )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영국의 무역 어업으로부터 네덜란드인과 그 선박을 배제하려는 것이 직접적인 목적으로, 이로 인하여 양국 해군은 충돌하였다. 이에 네덜란드 해군 제독 마르턴 트롬프는 영국군을 무찌르고 1652년 12월에 던지네스 해 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하지만 1653년부터는 우수한 무기를 지닌 영국 해군들이 전투에 서 승리해 1653년 여름에 테셀 해전에서 마르텐 트롬프 제독이 전사하고 양측 모두 많은 피해를 입으면서 1654년 4월 웨스트민스터 조약으로 종결되었다. 이로써 17세기 전반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던 네덜란드가 곧이어 쇠퇴의 길을 걷는 전조가 되었다. 제2차 (1665 ~ 1667) 네덜란드는 재정을 정비하고 해군을 확장하여 무역을 진흥시켰으나, 영국은 1660년의 왕 정복고( 王 政 復 古 ) 후 찰스 2세가 항해 조례를 갱신하고, 1664년에는 아메리카 대륙의 뉴네 덜란드를 침략하여 뉴암스테르담을 점령하고 이를 뉴욕으로 고쳤다. 다음 해 1665년 3월 영국이 네덜란드에 선전포고하여 2차 전쟁이 개시되었다. 영국은 로 스토프트 해전에서 네덜란드 해군을 무찔렀으나, 이후 프랑스가 네덜란드 편을 들어 참전했 고 영국의 동맹국 뮌스터 공국도 참전했으나 프랑스에게 패배했다. 이번 전쟁에서는 1665년 흑사병과 1666년 런던 대화재로 영국이 밀려 1667년 6월에 메드 웨이 해전에서 네덜란드의 데 뤼터 제독이 템스강에 침입하여 하구( 河 口 )를 봉쇄하는 등 전 과를 올렸다. 1667년 7월에 브레다 조약(Treaty of Breda)으로 종결되었다. 브레다 조약의 주요내용은 1.양국의 영토는 대략 현상태를 유지한다. 2.영국은 뉴암스테르담(오늘의 뉴욕)을 얻고, 네덜란드는 수리남을 확보한다. 3.항해조례( 航 海 條 例 )를 수정하고 1662년 통상조약을 재확인한다.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 간에도 조약이 체결되어, 영국은 아카디아를 프랑스에 양도하고 서 인도 제도의 영토를 얻었다. 제3차 (1672 ~ 1674)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가 행한 침략전쟁 중의 하나로, 네덜란드의 무역 독점 타파를 목적 으로 하였다. 더 직접적인 원인은 네덜란드가 프랑스 망명자를 비호( 庇 護 )한 데 있다. - 17 -
전쟁준비로서 루이 14세는 앞서의 3국 동맹(네덜란드, 영국, 스웨덴)을 타파하고자 1670년 에는 영국과 도버 밀약( 密 約 )을 맺고, 1672년에는 에스파냐와 그리고 독일 제후( 諸 侯 )들과 결탁하였다. 1672년 프랑스군은 라인 강을 건너서 네덜란드에 침입하였다. 네덜란드에서는 데비트가 암살되고 오렌지공( 公 ) 윌리엄이 총독이 되어 수문을 열고 홍수전술( 洪 水 戰 術 )로 항전하였 다. 1673년과 1674년 네덜란드는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빌헬름, 황제 레오폴트 1 세, 그리고 에스파냐와 동맹을 맺고, 또 영국과도 화해를 함으로써 프랑스에 대해 외교전술 로 대항하였다. 전투는 네덜란드와 알사스, 그리고 지중해에서 장기간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1678년 네이메헌 화약( 和 約 )으로서 종막을 내렸다. 네이메헌 화약은 프랑스-네덜란드간(1678년 8월 10일), 프랑스-에스파냐간(1678년 9월 17일), 독일 황제-프랑스-스웨덴간(1679년 2월 6일), 네덜란드-스웨덴간(1679년 10월 12 일), 프랑스-덴마크간(1679년 9월 2일), 덴마크-스웨덴간(1679년 9월 26일)에 체결된 제 조약의 총칭이다. 이 조약에 의해서 네덜란드는 모든 영토를 회복하고 중립( 中 立 )을 약속하였으며, 에스파냐 는 프랑스에 프랑슈콩테와 그 밖의 동북 국경의 몇 개의 도시를 양보하고, 레오폴트 1세는 프랑스에 일부의 영토를 양보하였다. 제4차 전쟁 (1780.12.20~ 1784.5) 제4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은 영국이 1780년 12월 20일에 네덜란드에 전쟁을 선포하고 1781년에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한 뒤 서인도 제도와 동인도 제도를 점령해 영국에게 유리 하게 되었다. 1781년 8월에 네덜란드는 마지막으로 도거뱅크 해전에서 승리했으나 그 후 함대를 조직하지 못해 1784년 5월에 네덜란드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이 4차례 전쟁으로 네덜란드의 위신은 떨어지고 세계 강대국 지위를 상실했다. 또한 영국이 해양강국으로 부상 했다. 3 네덜란드 연합왕국 성립 배경 빈 회의에서 프랑스는 1792년의 국경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이 원칙이었으므로(나폴레옹이 엘바 섬을 탈출하여 벌어진 백일천하 이후에는 1789년의 국경으로), 나폴레옹 전쟁 시기 프 랑스로 귀속되었던 남부 네덜란드, 즉 옛 오스트리아 령 네덜란드를 누가 차지하느냐는 중 요한 안건 중의 하나였다. 협상은 쉽지 않았는데, 그것은 빌럼 1세가 가능한 최대의 결과물을 얻어내려고 했기 때문 이었다. 클렌카티 백작이 이러한 빌럼 1세의 입장을 빈 회의에 대변하였다. 오스트리아 령 네덜란드 문제에 있어서는 세 가지 협상안이 마련되었다. 1.북부 네덜란드, 즉 옛 네덜란드 공화국은 옛 국경을 복구하고, 남부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대한 방벽으로 삼기 위하여, 강대국 예를 들어 오스트리아 제국의 보호에 속하는 국가를 창 설한다. 2.만일 남부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통치 하에 여전히 맡겨둔다면, 네덜란드를 (프랑스의 위 - 18 -
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화하기 위하여 네테 강 혹은 플랑드르 전역 으로 확장한다. 이에 따르면 독일의 일부가 네덜란드로 편입되는 것이며, 그 경계는 메클렌 -마스트리히트-쾰른-뒤셀도르프를 잇는 선을 따라 라인 강까지 연장될 터였다. 3.프랑스는 1789년의 경계로 돌아가고, 북부 네덜란드는 남부 네덜란드를 흡수하며, 그 외 에도 라인 강 서안의 독일 영토들과 모젤 강의 북안, 베르크, 나사우 백작령 등을 보유한다. 위의 안들 중 1안과 2안은 라이프치히 전투 후에 대 프랑스 동맹국들 사이에서 회람된 네덜란드 메모 에서 언급된 것으로서 그 중 2안은 당시까지는 나폴레옹의 완전한 몰락 여부가 불분명했기 때문에 경우를 나누어 작성된 것에 불과하여 빈 회의 당시에는 이미 의 미가 없었다. 3안은 빌럼 1세에 의하여 작성되었다. 빈 회의가 진행됨에 따라 1안은 현실화될 가능성이 점차 낮아졌는데, 그 이유는 강대국들 (빈 회의의 4국위원회, 즉 영국,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이 오스트리아의 대공이 독 립된 남부 네덜란드는 프랑스에 대한 방벽은 고사하고, 그 위협으로부터 독자 생존을 영위 하기에도 벅찰 정도로 약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렇다고 해서 오스트리아가 이 지역의 직할을 되찾을 생각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강대국들은 3안을 선택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빌럼 1세가 바란 대로까지 네덜란드의 영토를 확장하지는 않았다. 빌럼 1세가 최종적으로 받게 된 영토는, 옛 네덜란드 공화국, 1789년의 오스트리아 령 네덜란드, 리에주 주교 령이었다. 1815년 3월 16일, 마침내 빌럼 1세는 신생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또 한 그는 룩셈부르크 대공국의 대공위에도 동시에 올랐는데,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네덜란드 연합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면서도 독일 연방의 일원이 되는 이중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갈등 1579년부터 그의 선조 네덜란드 공화국의 오라녜 공 빌럼 1세가 꿈꿔왔던 통일은 마침내 네덜란드 연합왕국의 초대 국왕 빌럼 1세의 대에 와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 는 문제의 끝이 아닌 시작일 뿐이었음이 곧 드러났다. 통합 당시 북부 네덜란드의 7주가 지고 있던 대외부채는 상당한 수준이었으며, 한편 인구 는 남부 네덜란드의 10주보다 더 적었다. 그럼에도 북부 네덜란드가 가지고 있던 부채가 그 대로 연합왕국에 떠넘겨져 인구가 많은 남부 네덜란드가 북부 네덜란드의 빚을 갚아주는 형 국이 되었다. 한편 인구가 적은 북부 네덜란드는 인구가 많은 남부 네덜란드와 통합의회에 서 동등한 대표권을 행사했다. 남부 네덜란드에서 로마 가톨릭의 교세가 강했음에도 불구하고, 개신교의 전통이 뿌리 깊 은 북부 네덜란드의 종교 정책은 연합왕국 전역에 그대로 적용되었다. 행정에 있어서는 남 부 네덜란드에서 프랑스어의 사용인구가 많음에도, 연합왕국의 공용어는 네덜란드어 단일로 결정되었다. 통상정책에 있어서는 남부 네덜란드가 보호무역 정책을 필요로 했음에도 북부 네덜란드가 필요로 하는 자유무역 정책이 연합왕국의 정책으로 고집되었다. 분리 흡사 식민지를 통치하는 듯한 빌럼 1세의 통치에 반감이 깊어진 남부 네덜란드인들은 1830년 혁명에 자극받아 브뤼셀을 중심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빌럼 1세는 반란이 장기화되 면 반드시 열강이 개입하리라 생각하여, 반도 전쟁에서의 종군 경험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 - 19 -
에 대해 관용적인 입장이어서 남부 네덜란드에서 인기가 있던 왕세자 빌럼 2세를 파견하여 반란군을 설득하려 했다. 빌럼 2세가 반란군에게 많은 양보를 제안했음에도 반란을 가라앉히는 데는 실패했다. 1831년 1월, 유럽의 열강들은 남부 네덜란드가 벨기에로 독립하는 것을 승인했다. 1831년 8월, 빌럼 2세는 군대를 이끌고 벨기에로 침입하여 신생 벨기에 왕국의 초대 국왕 으로 추대된 레오폴 1세의 군대를 무찔렀으나 프랑스의 개입 위협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 다. 그 후로도 벨기에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고 있던 네덜란드의 빌럼 1세는 다시 벨기에를 되찾기 위한 전쟁을 벌이려 했으나 네덜란드 국민들조차 이를 지지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고 1840년 10월 퇴위했다. 벨기에의 독립은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었고, 네덜 란드 연합왕국은 종언을 고했다. 4 빌럼 2세의 헌법 개정 빌럼2세는 빌럼 1세의 아들로 헤이그에서 태어났다. 1795년 가족과 함께 영국으로 망명하 여 영국군에 복무하면서 반도 전쟁에 참전하였고, 워털루 전투에서는 네덜란드군의 사령관 직에 있었다. 네덜란드 연합 왕국의 벨기에 부분에서 인기가 있던 그는 1830년 벨기에 혁 명이 일어난 후, 부왕에 의하여 브뤼셀로 보내졌다. 1840년 10월 그는 부왕의 퇴위와 함께 네덜란드 국왕 자리에 올랐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 회와 개신교에 관대하였으나, 정부의 더 많은 대표들을 원하던 자유주의자들에 의하여 반대 되었다. 1848년 유럽의 혁명 운동이 네덜란드를 휩쓰는 위협을 느껴 자유주의자 요한 토르 베케와 동료들에게 새 헌법을 기안하는 데 위임하여, 1848년 11월에 입증되었다. 헌법은 국왕의 권한을 대폭 제한했고, 의회가 내각 해임 권, 국정 조사권, 질의 권, 법의 개정권을 갖게 하는 등 장관들과 국회의 권력을 확장시키는 한편, 직접 선거의 원칙을 설립하고, 기 초적 시민 자유를 안정시켰다. 5 사회 분화 현상 빌럼 2세가 재위 9년 만인 1849년 3월 17일 북부 튈비르흐를 순방하던 중 갑작스럽게 사 망하면서 빌럼 3세가 왕위에 오르게 되고, 네덜란드 사회 내에서는 사회 분화 현상이 일어 나게 된다. 당시 네덜란드 정치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들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했다. 그들 내 부에서 발생한 갈등과 분열은 네덜란드의 정치계가 이념에 따라 분열, 재조직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사립학교에 대한 국가 재정 보조 허용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학교 갈등(de Schoolstrijd, school conflict)으로부터 시작된 분화 현상은 1870년 이후 시작된 네덜란드의 산업화 과정의 결과로 나타난 사상적 분열을 통해 더욱 가속화되었고, 그 이래 로 1970년대 초, 탈분화 현상(Ontzuiling)이 대두될 때까지 존속되었다. ➅ 제1차, 제2차 세계대전 20세기 초 유럽 각국은 재무장을 시작하였다. 유럽 지역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을 무렵 러 시아의 니콜라스 2세의 요청으로 만국평화회의가 네덜란드의 헤이그(Hague)에서 1899년과 1907년에 각각 개최되었고, 상설 중재재판소 가 설치되었다. - 20 -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엄정 중립을 표방하는 한편, 병력을 동 원하여 국경에 배치하는 등 경계에 임하였다. 네덜란드는 독일군의 국경 침략이 없어 무난 히 중립을 유지한 채 제1차 세계대전의 개입을 면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네덜란드는 다시 중립정책을 표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덜란드는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의 침공을 받았고, 5월 14일에는 네덜란드 군이 독일 군에 항복하였다. 이와 동시에 빌헬미나(Wilhelmina) 여왕을 비롯하여 각료들이 영국에 망 명하여 런던에 망명정부를 수립하였다. 망명정부는 종전 때까지 해외 영토를 관리하고 레지 스탕스 활동을 지원하는 등 대독항전을 지속하였다. 7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가로의 성장 2차 대전이 끝난 후 네덜란드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미국이 서유럽 16개국에 행한 대외원조계획인 마셜플랜(Marshall Plan)에 힘입어 전쟁의 상처를 치유하는 한편, 네덜란드 는 전통적인 중립정책을 포기하고 서유럽연합(WEU, West European Union)과 북대서양조 약기구(NATO, North Atlantic Treaty Organization)에 가입하여 서방 진영에 가담하였다. 전 쟁 중이던 1944년에는 베네룩스(Benelux) 경제동맹을 창설하고, 1957년에는 유럽공동체 (EC, European Community)에 창설회원국으로 가입하는 등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추구하였 다. 2차 대전의 전후 처리로 네덜란드는 1949년 12월 해외 영토 중 인도네시아를 인도네시아 합중국으로 독립시켰다. 이후 1950년 8월 17일에는 인도네시아공화국이 선포되었다. 뉴기 니(New Guinea)는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의 잠정관리를 거쳐 1969년 인도네시아에 통합되었고, 수리남도 1975년 11월 25일에 독립하였다. 현재 네덜란드의 해외 영토로는 자 치령(Constituent Countries)1)에 쿠라사우, 아루바, 신트마르턴 등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네덜란드는 주로 기독교 정당과 노동당 등 양대 정치 세력이 중심이 되어 번갈아 연립정부를 구성하여 왔다. 1967년~1971년간에는 피트 데 종(Piet de Jong) 총리의 기독교 신교 자유당 연정, 1972년~1977년간에는 욥 덴 윌(Joop den Uyl) 총리의 노동당 등 진보정당 내각, 1977년~1982년간에는 판 아흐트(Van Agt) 총리의 기독민주당 자유민주당 중도우파 연립 내각, 1982년~1994년간에는 뤼돌퓌스 프란스 마리 뤼버르스 (Rudolphus Frans Marie Lubbers) 총리의 기독민주당 자유민주당 연립 내각, 1994 년~2002년간에는 빔 콕(Wim Kok) 총리의 노동당 자유민주당 민주66당 연립 내각, 2002 년~2010년간에는 4차에 걸친 얀 페터르 발케넨더(Jan Peter Balkenende) 총리 내각을 거 쳐 오면서 정치적 안정과 경제발전을 이룩하였다. - 21 -
독일 - 22 -
Part. 1 : 정치 독일 현직 대통령 : 요아힘 가우크 독일 현직 총리 : 앙겔라 메르켈 나치 : 원래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1919년 결성 1926년에 히틀러가 당수가 됨 1933년 히틀러 수상 취임 후 군국주의적 성격과 유대인 학살 연방주의 - 독일의 전통적 특성 (통일 이전 11개주 통일 이후 16개 주) - 연방의 각 주는 자체 국가권력 및 헌법을 보유 - 국민의 의사가 수시로 국정운영에 반영되도록 함 - 권력의 수평적, 수직적 분산을 추구함 독일의 기본법 - 국가질서의 근간 (공화주의, 민주주의, 연방국가, 법치국가, 사회국가) - 기본법 개정의 조건 : 연방하원 재적의원 2/3의 찬성, 연방상원 투표 2/3의 찬성으로 개 정 (연방주의 및 인간의 존엄과 자유, 평등권과 기본권은 수정이 불가) 독일의 연방 대통령 - 독일 연방공화국(Bundesrepublik Deutschland)의 국가원수 - 대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하는 지위 - 연방 총리 및 연방 공무원에 대한 임명권 등의 극히 제한적이고 상징적인 권한 연방대통령의 임기 - 임기 종료 30일전에 연방 특별회의를 통해 간접선거 절대 과반 수 이상 득표자 - 5년 1회 연임가능 - 23 -
연방 대통령의 권한 - 외국과의 조약체결 - 외교사절의 파견 및 접수 - 법령의 서명 및 관보를 통한 공포 - 연방하원에 대한 총리후보 추천 및 연방하원에 의해 선출된 자를 총리로 임명 - 연방총리의 제청에 따른 연방각료 임명 - 연방판사, 연방공무원, 군 장교 및 하사관의 임명 - 연방총리의 제청에 따른 연방하원 해산 연방 특별회의 - 연방하원의원(현재 622명)과 각 주에서 선출된 같은 수의 주 대표(622명)로 구성 - 각 주 선거인단 수는 인구수에 비례 - 주 의회를 구성하고 있는 의석 수 비율에 따라 선거인단이 결정 - 각 주 선거인단은 주로 주 의회 의원, 정치인, 저명인사 등으로 주 의회에서 선출 독일 연방의회 - 의장은 1년 임기로 주 교대로 맡음 - 연방하원에서 모든 법률을 제정 (재정 및 행정 분야의 입법 등 각 주의 이익에 직접적으로 관계되거나 기본법에 영향을 미 치는 법안은 연방상원의 동의 필요) - 연방상원은 연방하원이 통과시킨 법안을 거부할 수 있음 - 법안이 위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경우 연방하원은 다수결로 연방상원의 표결 무효 가능 - 대통령의 해외 체류가 연장 혹은 사임하는 경우 상원의장이 대통령의 권한을 대행가능 연방하원 - 독일 정치체제에서 유일하게 국민이 직접 선출하는 헌법기관 - 연방하원 의원의 임기는 4년이며 - 18세 이상의 유권자 1인 2표제로 투표 - 주로 법률의 제정, 연방총리의 선출, 정부활동에 대한 감시 등의 권한을 행사 - 제1투표에서 299개 지역구 의원을 선출, 제2투표에서 비례대표 후보를 선출 - 의석은 제2투표의 5% 이상 또는 지역구 의석 3석 이상을 차지한 정당에만 의석을 분배 연방상원 - 주 총리, 주 장관, 시장 등으로 구성됨 (이들은 주 정부에서 선출) - 투표권은 각 주의 인구비례에 따라 부여됨 * 인구가 적은 주에는 최소 3표의 투표권, 인구가 200만 이상인 주에는 4표, 인구가 600만 이상인 주에는 5표, 인구가 700만 이상인 주에는 6표를 부여한다. *각 주는 투표권을 일괄적으로 행사해야 한다. - 24 -
연방총리 선출 - 연방대통령의 제청으로 연방하원에서 재적 과반수의 득표로 선출 - 대통령이 제청한 총리후보가 연방하원에서 재적 과반수의 득표를 하지 못한 경우, 연방하 원은 14일 이내에 재적 과반수의 찬성으로 다른 사람을 총리로 선출 - 연방하원은 재적 과반수의 찬성으로 후임총리를 선출하는 형식을 통하여 총리에 대한 불 신임 표명 이는 이른바 건설적 불신임 으로 연방총리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하는 제도 - 연방하원이 연방총리에 대한 불신임을 결의하면 연방대통령은 연방총리를 해임하고 연방 하원이 선출한 후임 총리를 임명 - 총리 불신임안이 재적 과반수의 동의를 얻지 못할 경우, 대통령은 총리의 제안에 따라 21일 이내에 연방하원을 해산가능 연방총리 직무 및 권한 - 연방정부의 기본 정책노선을 결정 - 연방대통령에 대한 연방각료 임면을 제청 - 연방대통령에 대한 연방하원 해산을 제청 - 연방 각료 수와 소관 업무를 결정 * 기본법에 규정된 외무부, 내무부, 재무부, 법무부, 국방부 등은 정부조직상 필수 부서이 다. * 독일은 정부조직법이 별도로 없다. - 25 -
Part. 2 : 문화 1)기본사항 o 수도 : 베를린(약 340만명) o 인구 : 8,110만명('14) o 면적 : 357,112km2(한반도의 1.6배) o 인종 : 게르만족 o 종교 : 신교(31%), 구교(32%), 이슬람교(4%) 2)독일의 음식 문화 (1) 소시지 감자 맥주 등 인접국의 영향을 받지 않은 독특한 음식발달 (2) 돼지고기와 감자가 주식인 전원 음식문화 (3) 저장음식으로 소시지를 비롯한 돼지고기 발달 (4) 감자와 빵 등 서민적인 음식문화 (5) 점심식사에 따뜻한 만찬 즐겨 (6) 보수적인 성향으로 전통적인 식문화 고수 *대표적 독일 음식 (1) 아이스바인(eisbein) 독일을 대표하는 음식 중 하나인 아이스바인(eisbein)은 독일식 족발요리이다. 독일의 보존 식품 중 하나로, 소금에 절인 돼지 뒷다리고기를 맥주에 푹 삶아 향신료를 약간 첨가한 후 차게 해 뼈째로 슬라이스해서 낸다. 맥주에 삶으면 돼지고기 특유의 누린내가 없어지고 육 질은 더 부드러워진다. (2) 햄버거 스테이크 오늘날 정크푸드로 대변되어져 건강식을 선호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외면 받고 있는 햄버거 가 식재료 원래의 맛을 중시해서 조미료나 이외의 첨가물을 넣지 않는 자연주의 음식의 나 라 독일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독일은 주로 소시지나 햄버거 스테이크와 같은 다진고기 요리를 많이 먹는데 바로 쇠고기를 갈아만든 햄버거 스테이크도 그 중 하나. 독일 함부르크에서 이민 온 사람들에 의하여 미국 으로 전달된 이 햄버거 스테이크가 미국에서 햄버거 샌드위치로 만들어지면서 대중화된 것 이다. 따라서 엄밀히 따지면 맥도날드나 버거킹 등 전 세계적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는 가장 대중화된 음식이 바로 독일음식이다. (3) 사우어크라우트(sauerkraut) 감자나 소시지 외에 유명한 독일음식인 사우어크라우트는 샐러드 대용으로 양배추를 채를 썰어서 발효시킨 다음, 캐러웨이 같은 향신료를 섞은 것으로 약간 시큼한 맛이 난다. 우리 나라에는 김치가, 일본에는 아사즈케가, 인도에는 마살라가, 태국에는 남플라가 있다면 독일 - 26 -
에는 바로 이 사우어크라우트가 빠질 수 없다. 독일식 김치라고 명명되어지는 사우어크라우 트는 주로 기름이 많은 고기요리와 함께 먹는다. (4) 아인토프 야채, 콩, 감자, 고기 부스러기 등을 냄비에 넣고 끓인 아인토프라는 죽도 대중음식으로 많 이 먹는다. 2차대전 때 히틀러가 장려한 요리로, 근면하고 검소한 독일인을 상징한다고 해 서 나치 정부가 적극 권장해 독일 전통음식으로 자리잡은 역사를 갖고 있다. 이 아인토프는 현재도 그 전날 남은 재료를 모두 섞어 만드는 요리로 자취생이 많은 대학 기숙사나 서민가 정에서 볼 수 있다. (5) 독일의 대표적인 음료와 맥주 프랑스와 이태리에서 와인을 빼놓을 수 없듯이, 독일에서는 맥주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 다. 그들에게 있어 맥주는 술이 아닌 음료수처럼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마시는데 유럽의 여 러 나라들처럼 독일도 물이 안 좋아 맥주를 많이 마신다고 한다. 맥주는 독일 이전에 유럽의 여러 고대국가에서 만들어졌다. 바빌론 사람들은 밀, 보리, 혼합 양곡 등을 이용해 20여 종의 맥주를 빚을 줄 알았으며 이집트인들은 빵 반죽으로 맥주양조 의 전통을 이어나갔다. 이 맥주 제조기술은 게르만들에게도 전해져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국가가 됐다. (6) 1천5백여 종의 다양한 소시지 독일 소시지는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데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이 대략 1천5백 여 가지로 추정되며 지역마다 독특한 특징을 가진 소시지가 있다. 소시지는 독일어로 부르 스트(Wrust)라 하는데 대표적인 것은 돼지의 붉은 고기에 파슬리나 향신료를 넣은 프랑크푸 르터(Frankfurter)가 있다. 또 석쇠에 구운 브라트부르스트(Bratwrust : 구운 흰 소시지)와 삶은 소시지인 보크부르스트(Bockwrust : 붉은 색의 쇠고기 소시지), 그리고 커리가루를 뿌 린 커리부르스트(Curry-wurst) 등이 유명하다. 재료나 모양에 따라 다양하지만 종류에 따라 기름에 굽는 것, 오븐에 굽는 것, 물에 데쳐 먹는 것, 날로 먹는 것 등 조리방법도 제각각이다. 독일인들은 주로 겨자를 잔뜩 찍어서 먹 지만 제조단계에서부터 미리 카레가루나 캐러웨이, 파프리카 등 고유의 향신료로 양념한 것 은 그냥 먹기도 한다. 소시지는 겨울을 나는 요리였기 때문에 유럽요리답지 않게 소금간이 세다. 그래서 약간 짠 음식 정도는 개의치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도 독일 현지의 소시지는 입맛에 맞지 않기 때문 에 소시지와 빵을 밥과 반찬처럼 곁들여 먹는 방법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소시지의 본고장 인 독일에서는 소시지를 먹을 때 미국이나 기타 다른 여러 나라처럼 빵에 끼워서 핫도그로 즐기기보다는 소시지 자체의 맛을 즐긴다. 소시지와 관련된 축제로 폴크스 운트 슈텐페스트 (Volks und Schtenfest)가 있다. 중세 때부터 내려온 이 축제는 각 마을 단위로 열리며 각 지방의 소시지, 감자 요리와 고기 종류의 음식들을 볼 수 있다. - 27 -
3)관광명소 4)기타 -독일의 축제 독일에서는 1년 내내 다양한 행사가 열린다. 전통 민속 축제와 수확을 기념하는 축제, 뛰어 난 음악가를 기념하는 음악제, 종교적인 축제 등 풍부한 행사들이 독일의 365일을 즐겁게 해 준다. (1) 옥토버페스트 매년 9월 세 번째 토요일 정오부터 10월 첫 번째 일요일까지 뮌헨에서 열리는 세계에서 가 장 큰 맥주 축제이다. 독일 국민은 물론 전 세계에서 700만 명이 넘는 관광객이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여든다. 1810년 10월 바이에른 공국의 초대 왕인 빌헬름 1세의 결혼을 축하 하는 축제에서 시작된 옥토버페스트는, 1883년 뮌헨의 맥주 회사들이 축제를 후원하면서 독일을 대표하는 국민 축제로 발전하였다. 축제 첫날에는 시민들이 분장하고 음악가 바그너 가 세운 극장에서부터 시내를 행진한다. 동시에 시내 광장에서는 뮌헨의 6대 맥주 회사가 3 천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는 천막 술집을 열어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이어 뮌헨 시장이 그 해 첫 생산된 맥주를 선보이면서 축제의 개막을 선언한다. 이후 16일 동안 맥주를 마시고 즐기면서 독일이 자랑하는 맥주 축제가 벌어진다. 독일 국민은 물론 전세계에서 700만 명 이 넘는 관광객이 이 축제를 즐기기 위해 모인다. (2) 사육제 독일에는 부활절 40일 전부터 고기를 먹지 않고 근신하는 사순절이라는 기간이 있었는데, 이 기간이 시작되기 전에 실컷 고기도 먹고 술도 마셔 두자는 잔치가 바로 사육제( 謝 肉 祭 ), 카니발이다. 특히 사순절이 시작되기 1주일 전부터 축제는 최고조에 달하는데, '장미의 월 요일'에는 거리에 성대한 가장 행렬이 이어지고 밤새 축제가 벌어지지만 축제의 마지막인 ' 재의 수요일'이 되면 거짓말처럼 온 나라가 조용한 일상으로 돌아온다. -독일의 축구 축구는 독일에서 큰 인기를 얻고 있는 스포츠이다. 독일 축구 협회는 약 2만 5천여 개의 산 하 단체를 두고, 회원 수만도 600만 명이 넘는 독일 최대의 스포츠 단체이다. 1900년에 독 일 축구 협회가 설립되었고 4년 후에는 FIFA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으며, 20세기 초 바이에 른 뮌헨, FC 샬케 04와 같은 축구 명문 클럽들이 잇달아 창단되면서 독일 축구는 전국적으 로 인기를 얻는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면서 축구의 인기는 잠시 주춤해졌으나 전쟁 이후에 다시 높아져, 등록된 축구 선수의 수도 1919년의 15만 명에서 1932년에는 무려 백 만 명을 넘어선다. 또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축구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독일에 자신감을 - 28 -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하였다. 1954년에는 처음으로 월드컵 우승을 차지하였으며, 지금까지 단 세 번을 제외하고는 모두 16강에 진출했다. 독일 축구 대표팀은 '전차 군단'이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는 뛰어난 조직력과 팀워크, 빈틈없는 수비력과 힘 있는 경기를 펼치는 강력한 독일 축구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독일의 프로 축구 리그인 분데스리가는 1963년에 16개의 클럽으로 시작된 이후, 1974년에 독일이 월드컵에서 우승한 뒤 세계 최강의 리그로 자리 잡았다. - 29 -
Part. 3 : 역사 1 고대 게르만족 사회 기원전 4세기에서 3세기경에 게르만족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혈통적이라기보다는 경제 사 회 문화적 발전에 따른 복속과 통합 과정으로 인해 생겼다. 게르만족은 숲 속에서 살았는데 토지는 공유제였다. 경작 시 공동체구성원에게 평등하게 분할되었다. 토지분할이 매해 일어나, 소유권은 영속적이지 않았다. 농업상의 필요에 의해 토지의 사유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지리적 조건 탓에 그들은 사냥과 목축업에 더 주력했 던 것 같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 라인강을 중심으로 로마인이 출현하기 시작했다. 로마의 라인강 진출 은 게르만족에게 앞선 로마 문명을 전달해주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라인 강 주변의 본, 트리어, 마인쯔, 쾰른 등지에는 로마군이 주둔했으며, 군용 도로가 건설되었다. 게르만족은 조금씩 로마군에 입대하는 경우도 있었다. 로마 제국 말기에 이르면, 게르만족 전사들은 점차 대규모로 로마군에 입대하게 된다. 프랑크 왕국 498년 클로비스가 기독교로 개종하면서 프랑크족의 귀족들은 초기의 봉건적인 귀족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6세기에 프랑크족에 의한 봉건적 국가가 구성되었다. 751년, 피핀 3세가 교황의 지원을 배경으로 프랑크 왕으로 등장하였는데, 이때 피핀이 기증 한 중부 이탈리아가 훗날 교황령의 기원이 되었다. 피핀의 아들인 카롤루스 대제(프랑스어 로는 샤를마뉴)는 도나우 강변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이곳에 오스트마르크(Ostmrak)를 설치 하였고, 이것이 오늘날의 오스트리아의 기원이 되었다. 카롤루스 대제는 옛 서로마 제국의 대부분의 영토를 획득했고, 교황 레오 3세로부터 서로 마 제국 황제로 인정받았다.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은 3등분되었으며, 서프랑크는 오늘날의 프랑스, 중프 랑크는 지금의 이탈리아, 동프랑크는 지금의 독일의 기원이 되었다. 2 신성로마제국 919년에 작센의 하인리히 공작이 독일국 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넓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많은 가신을 보유하고 있었다. 헝가리와 상대로 전쟁을 하여 영토를 확장했으며, 928 929년에 슬라브(폴란드)를 공격했다. 그는 마자르(헝가리)에 대한 곡물 납부를 거부하 기도 했다. 그가 하인리히 1세이며, 그의 아들이 오토 1세이다. 오토 1세는 재차 침입해온 마자르군을 완전히 물리치고 독일 국가 권력의 강화를 추구했 다. 이 과정에서 교회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국가 교회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주 교와 수도원에 토지를 기증하고 성직자들에게 세속적인 관직을, 즉 봉건 영주의 작위를 수 - 30 -
여하면서 주교령에 대한 왕의 보호를 약속한다. 왕과 성직자의 이러한 결속은 봉건영주들과 정치적 균형을 가져와 왕권이 강화되었다. 오토는 곧 북이탈리아를 점령했으며, 이후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들은 독일 국내의 문제보다는 이탈리아 문제에 더 신경을 많이 쓰게 됨으 로써 스스로 왕권약화를 초래하였다. 3 카노사의 굴욕 교황은 스스로 신의 대리자라 자칭하고 있었고, 주교 임명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황제는 스스로 세속권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며, 황제는 독일국가내의 주교들에 대한 서임권 을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황은 성직자들의 임명권(서임권)을 왜 세속군주가 갖고 있는지에 대해 그 이유 를 납득하지 못했다. 교황은 당연히 서임권을 자신이 행사하겠다고 나섰고, 세속 군주로서 는 그것을 교황에게 돌려줄 수 없었다. 그래서 발생한 것이 이른바 서임권 분쟁(the Investiture Contest)이다. 고조되어 가던 교속의 갈등은 결국 신성 로마 제국의 하인리히 4세와 교황 그레고리오 7 세 때에 폭발한다. 이것이 1077년에 발생한 저 유명한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다. 반( 反 )황 제적인 독일국내의 귀족들이 교황과 결탁하였고, 교황은 서임권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황제는 도시민들의 지원을 받았으나, 안팎에서 공격을 받게 된 하인리히 4세는 결국 카노 사 성에서 교황에게 굴복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하인리히 4세는 그레고리오 7세를 병사시 켰다. 이 사건은 황제와 귀족의 대립이며, 신정 정치 체제와 세속 군주정간의 권력쟁탈전이 었다. 결국 두 가지가 복잡하게 얽히고설킨 것이 바로 '서임권 분쟁(the Investiture Contest)'이었던 것이다. 4 30년 전쟁 30년 전쟁은 독일 땅으로 외세의 복잡한 갈등을 끌어들인 결과였다. 영방군주들이 외세와 결탁하여 세력다툼을 일삼게 된 것이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를 포함한 대제국을 이룩한 합 스부르크 왕조 및 가톨릭 연합세력, 그리고 초기 부르주아와 다른 귀족들 간의 연합세력이 대립을 펼쳤다.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는 독일 내 주도권 쟁탈전을 벌이게 되었지만, 프로이센은 일개 제후 국에 불과한 처지였고, "왕국"의 호칭도 갖지 못한 상태였다. 전쟁의 시작은 보헤미아인들이 합스부르크에 저항하면서 시작되었다. 30년 전쟁은 보헤미 아와 Platz간의 대립에서 덴마크와 네덜란드의 개입을 거쳐 스웨덴의 개입, 마지막으로 프 랑스군이 개입이라는 순서로 전개되었다. 이 전쟁으로 독일 전체는 피폐화되었고, 독일 인 구의 1/3이 죽었다. 결국 1648년에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졌다. 조약으로 스위스와 네덜란드의 독립이 확정되었으며, 프랑스는 알자스-로렌을 차지하고, 프로이센이 확장되었다. 이때 확장된 영토를 배경으로 프로이센은 18세기 초에 왕국이 될 수 있었다. 5 1848년 3월 혁명 - 31 -
배경 빈 회의의 결과, 회의를 주도한 오스트리아 재상 메테르니히의 반동정책에 의해 독일은 38 개의 주로 분할되고, 각 주에서는 절대주의적 지배 체제를 강화했으며, 또한 이를 반대하여 통일과 자유를 표방하던 부르셴샤프트 등의 운동에 대해서는 1819년 카를스바트 결의처럼 심한 탄압이 가해졌다. 그러나 농민해방과 관세 동맹 성립을 계기로 농 공업의 자본주의화 는 진전되고 그 결과 1840년대에는 라인 주를 중심으로 하는 산업 부르주아지와 정권을 독 점하는 동부 융커 귀족층, 초기 자본주의가 취한 가혹한 노동제도하에서 고생하던 노동자 및 영락 수공업자와 부르주아지 간에 각각 대립이 생겼다. 이에 따라 1848년의 혁명전야에 는 민주적 대의제도 헌법 제정 독일 통일을 요구하는 부르주아지의 청원운동과 슐레지엔 직 조공 폭동 등과 같은 기아폭동이 격심해져 혁명의 토양이 마련되었다. 3월 혁명 프랑스 파리의 2월 혁명은 독일에 중대한 영향을 불러일으켜 1848년 3월 5일에는 남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이 하이델베르크에 모여 전독일 통일회의 준비를 결정했다. 18일에 일 어난 베를린 시가전으로 국왕이 양보함으로써 자유주의적인 캄프하우젠 내각이 성립되었다. 내각은 제헌의회의 준비와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보장했다. 빈 혁명 1848년 3월 13일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급진파 자유주의자 로베르트 블룸이 주도하여 혁 명이 발생, 군중은 란트하우스의 의회로 쇄도하여 궁전까지도 포위했다. 황제는 시민 요구 를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메테르니히는 궁정 반대파의 사직 요구에 굴복, 런던으로 망 명했다. 시민의 무력 봉기에 직면하여 시민적 자유의 원칙이 승인되었다. 또한 헝가리와 뵈 멘에서도 마자르인이나 슬라브인의 자치정부가 결성되었다. 베를린 혁명 베를린에서는 1848년 3월 5일 시민의 폭동이 발생했고, 7일에는 국회 소집, 헌법 발포의 청원이 결의되었다. 14일, 시내에는 바리케이드가 구축되어 긴장이 극도에 달했고, 18일에 는 검열 폐지, 통일헌법에 관한 칙령이 나왔다. 그러나 왕궁 앞으로 모인 군중에 대한 군대 의 발포는 전 시가에 걸친 시가전을 유발, 왕은 군대를 철퇴시키고 왕 자신이 통일의 선두 에 설 것을 약속했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 1848년 5월 18일부터 프랑크푸르트 암 마인(Frankfurt am Main)의 성 바울 교회당에서 열린 최초의 국민의회이다. 의원은 약 600명으로 자유주의자가 다수를 점했다. 국민의회에 는 독일 국민의 기본권을 근간으로 하는 프랑크푸르트 헌법 초안을 제정, 전독일인에게 자 유 평등한 시민권과 민주주의적 제반 권리를 승인했다. 국가 형태는 세습 황제제에 바탕을 둔 독일제국으로 하고 의회는 2원제를 규정했다. 오랜 의론이 거듭된 결과 오스트리아를 제 외한 소독일주의에 의한 독일 통일의 방향이 제시되었으며, 1849년 3월 국민의회는 프로이 센 왕 빌헬름 4세를 독일 황제로 선출했으나 그에게 거부당하였다. 빌헬름 4세의 거부 이후 국민회의는 목표를 잃고 점차적으로 기능을 상실해 가다가 결국 해체되었다. - 32 -
6 독일의 통일 자유주의적 통일을 주장했던 프랑크푸르트 국민회의가 실패한 이후 독일의 정치적 통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1862년 프로이센의 수상으로 임명된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의회와 자유주의 세력의 반대를 억누르고 철혈정책을 추진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1866년 오스트리아 제국을 맞아 쾨니히그레츠 전투에서 크게 이겨 북독일 연방을 성립시켰다. 이어서 나아가서는 1871년 7월 14일에 프랑스와 전쟁이 일어났다. 프랑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전쟁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였다. 프랑스군은 마르스라투르 전투 와 그라블로트 전투에서 참패해 괴멸되었다. 프랑스를 격파하고 이 전쟁에 승리한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통해 알자스지방과 로 렌지방을 되찾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를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 제국의 수립을 선 포함으로써, 독일의 통일과 독일제국 수립을 성립시켰다. 7 독일 제국의 성립과 비스마르크 체제 1871년에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 제후들에게 추 대되는 형태로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가 독일 황제로 즉위하여, 독일 제국이 성립했다. 그 후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보불전쟁)에서 패전한 프랑스의 복수를 염려하여,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서구 열강과 복잡한 동맹 관계를 구축해 프랑스를 고립화 시키는 외교 정책을 취했다. 이것을 비스마르크 체제라고 부른다. 이 비스마르크 체제로 프 랑스를 견제하는데 있어서 성과가 있었다. 해외 식민지로서는 남아프리카와 서아프리카(나미비아), 동아프리카(탄자니아 르완다 부룬 디), 카메룬, 토고, 남양 군도, 뉴기니 북동부 및 부근의 크고 작은 섬들(나사 마크 제도), 사모아, 중국의 산둥 반도 등을 획득했다. 8 제 1차 세계대전 1914년, 오스트리아와 세르비아 사이에서 긴장이 높아가던 중 세르비아의 한 민족주의자 청년이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를 방문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는 사건이 일 어났다. (사라예보 사건) 이를 계기로 오스트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였다. 그러자 세 르비아를 지원하였던 러시아 제국은 오스트리아와 동맹국이었던 독일에 대항해 총동원령 내 렸으며, 독일은 러시아, 프랑스, 영국, 벨기에에 선전포고, 공격함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짧은 시간 내에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예상을 했지만, 마른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전쟁의 양상은 참호전과 장기전으로 되어갔다.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주변 국가들이 이해관 계에 따라 참전하였고, 독일이 제해권을 빼앗기 위해 무제한 잠수함 공격을 가했고, 전쟁의 양상은 점점 더 치열해져 갔다. 여기서 미국 상선이 독일 잠수함에 의해 격침당하자 미국은 1917년에 독일 제국에 선전포 고를 한다. 그리고 미국은 대규모 군대가 파견되어 서부유럽 전선에 참전하게 되며 전쟁양 상은 독일제국이 불리하게 되어간다. 이 무렵 러시아에서는 혁명이 일어나 러시아와 독일과 단독강화를 맺고 전선에 이탈하였으며, 1918년에 같은 동맹국이던 오스만 제국이 탈퇴했다. - 33 -
특히 러시아 혁명으로 통해 동맹국 오스트리아와 독일 국민들 사이에서 크게 영향을 받아 반전 운동이 생겼고, 독일 킬 군항에서 수병들이 반란을 일으켜 11월 혁명으로 퍼져 나가 자, 독일제국 황제 빌헬름 2세는 퇴위하고 추방당하여 네덜란드로 망명한다. 1918년 11월, 독일 임시정부는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사상자가 생겼고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통해 독일제국이 가지던 식민지 영구히 상실, 막대한 배상금 지불, 군비축소, 알자스-로렌 지방 프랑스에 반환 등 패전국 독일에 대한 가혹한 조약으로 인해 뒷날 제2차 세계대전 발 발 원인의 씨앗이 된다. 9 바이마르 공화국 제1차 세계대전 중 킬 군항에서 수병대 폭동을 시작으로 11월 혁명이 일어나 황제 빌헬름 2세는 퇴위되어 추방당하고, 네덜란드로 망명하게 된다. 11월 혁명으로 독일 제국 제정체제 가 붕괴된 이후, 사회주의자 중심세력으로 부상한 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의하여 수립된 공화국이다. 독일 역사상 처음으로 공화정과 민주주의를 실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갖는 다. 1919년에 공화정이 시작되어 1933년 나치스가 제1정당으로 집권하기까지 존속하였다. 이 공화정의 의의 중 하나가 민주제의 연방국가의 정체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특 징이다. 또한 대통령제와 의회의 혼합 형태로 구성되었다. 초대 대통령은 프리드리히 에베 르트였다. 의회는 제국 의회 또는 라이히슈타크(Reichstag)였고 수도는 베를린이었다. 이 공화국에 이름을 준 도시 바이마르는 제헌 국민의회의 개최지였다. 10 나치스의 집권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으로 천문학적인 전쟁 배상금을 승전국에 지불해야한다는 내용과 알자스, 로렌 지방, 슐레지엔 지방, 구 식민지 영토 상실 등 가혹한 베르사유 조약, 1929년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독일은 극심한 실업난에 허덕이고 경제적 궁핍과 사회 불안으로 시달 리던 때였다. 1933년,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에 임명되고 곧이어 치러진 총선거에서 나치스 정당이 제1정당이 됨으로써 집권을 하게 된다. 국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으며 빠르게 경제를 회복시킨 히틀러는 1935년 베르사유 조약 파기 선언과 재무장 선언을 했고, 불과 10만 명으로 제한되었던 병력이 급속히 확장되었다. 1938년 4월에는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합방 찬반 국민투표를 저지한 후 아르투어 자이스잉콰르트를 오스트리아 총리로 앉히도록 강요하고 곧바로 병합을 단행함으로써, 오스 트리아를 병합했다. 이어서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할양요구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독일, 이탈리아, 영국, 프랑스 등 4개국 정상들이 이 해 9월 29일 뮌헨에서 회담을 가졌다. 당시 세계대전이 터질 것을 두려워한 영국과 프랑스는 뮌헨 회담에서 주데텐란트 할양을 묵과하여 결정되었다. 그러나 히틀러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불러 서 체코슬로바키아 전역에 대한 합병할 것을 협박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는 합병되고, 슬로바키아는 요제프 티소를 수반으로 괴뢰국 정권을 세운다. 이어서 1939년 3월에는 메멜 을 불법 점령한다. 독일과 폴란드 간에 단치히문제를 놓고 협상이 계속되었으나 결국 결렬되었고, 히틀러는 폴 - 34 -
란드 침공을 준비한다.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폴란드 침공할시 독일과 전쟁을 치르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8월에는 외무장관 리벤트로프를 소련으로 보내어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와 비밀 회담을 가져 불가침조약을 맺는다. 11 제 2차 세계대전 나치스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으로 빼앗긴 단치히를 비롯한 슐레지엔 지방의 반환 을 폴란드에게 요구, 거부당하자 1939년 9월 1일에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 이 터졌다. 개전 20여 일만에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를 점령했다. 이어서 1939년 8월에 맺 은 나치 독일-소비에트 연방 비밀 협정(불가침 조약)에 따라 폴란드를 분할 점령하였다. 이 에 대해 영국과 프랑스가 강력히 항의하며 선전포고를 하였다. 개전 초기 독일군의 파죽지 세와 전격전에 의해 폴란드, 프랑스, 덴마크, 노르웨이, 벨기에 및 네덜란드는 점령하여 승 승장구하였다. 영국은 본토 상륙의 위협에 노출되었다. 이어서 유고슬라비아, 그리스 및 북 아프리카로 침공한 후, 나치 독일은 1941년에 불가침 조약 맺은 소비에트 연방도 공격하였 다. 그러나 1941년 미국의 연합군 참전. 1943년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및 쿠르스크 전투 패배, 연합군의 북아프리카 전투 승리, 이탈리아 본토 침공 등으로 전쟁은 연합군, 소련 쪽으로 기울어갔다. 1944년에는 소련의 바그라티온 작전, 6월 6일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등 으로 나치 독일 정권의 붕괴가 시작되었다. 서쪽과 남쪽에서의 연합군 및 동쪽에서의 소비 에트 연방군과 폴란드군의 반격에 의해서 점령지는 급속도로 축소되어, 1945년 봄에 연합 군은 독일 본토로 진격하였다. 1945년 4월 30일에 아돌프 히틀러가 자살하였으며, 5월 1일 에 소련군대가 베를린을 점령. 5월 8일에 독일은 연합국, 소련에 무조건 항복을 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은 막을 내린다. 12 분단 후 통일 1945년 5월 8일부터 1990년 10월 3일까지 45년간은 분단국가의 시대였다. 분단 시대는 크게 2가지 측면이 있으며, 제1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4분할의 시대, 제2가 동독과 서독이라는 2개의 국가의 시대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은 4개국 연합군(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진주하였다. 소련은 동독과 동베를린에 진주하였고,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서독과 서 베를린에 진주하 였다. 미국이 서독정부를 수립시키자, 소련은 이에 대항하여 동독지역에 있는 서 베를린 지 역을 봉쇄하고 동독정부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몰래 서 베를린으로 넘어가서 서방세계로 탈출하는 사람들이 계속 늘어나자, 소련 은 1961년 8월 13일에 동서 베를린 사이에 장벽을 설치하였다. 1970년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는 긴장완화를 위해 동독과 협상을 시작하여 1972년 기본 협정을 맺은 뒤, 이듬해 동서 독일이 유엔에 함께 가입하였다. 1975년에는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35개국이 '유럽의 안보와 협력에 관한 회의'를 열고 '유럽의 국경은 침해할 수 없는 것이며, 분쟁이 발생할 때 무력에 의존하지 않고 해결한다.'는 원칙을 선언하였다. - 35 -
1985년, 소련의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개혁과 개방정책을 추진하는 한편, 1988년 '동구권 유럽 공산세력 국가에 대해 간섭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이 같은 상황에서 1989년 가을 부터 동독지역에서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났다. 그리고 1989년 11월 9일 밤, 독일인들은 동서 베를린을 가로막고 있던 장벽을 무너뜨렸 다. 이후 통일을 위한 분위기가 급속히 조성되어 1990년 10월 3일 서독이 동독을 흡수하는 형태로 독일은 통일되었다. - 36 -
러시아 - 37 -
Part. 1 : 정치 러시아 대통령 : 블라디미르 블라디로비치 푸틴 러시아의 대통령 - 국가원수의 지위 - 내각 임면권 - 법률안 서명권 및 공포권 - 국회해산권 - 국민투표 실시 결정권 - 국군 통수권 - 계엄령 및 비상사태 선포권 - 러시아 대통령은 국민직선에 의해 선출 - 임기는 6년으로 3회 연임은 불가능 러시아 의회 러시아의 상원(Federation Council) - 러시아의 상원 임기 2년 - 인원수 166명 - 러시아 연방 구성 주체들 간의 경계선 변경을 승인 - 전시상태 선포에 대한 러시아 연방 대통령령을 승인 - 비상상태 선포에 대한 러시아 연방 대통령령을 승인 - 러시아 연방 영토 밖에서 러시아연방의 군사력을 사용하는 문제를 결정 - 러시아 연방 대통령 선거의 공고, 러시아 연방 대통령의 탄핵 * 166명은 83개 연방주체에서 2명씩(지방의회와 행정부대표 각 1명) 선출된다. - 38 -
* 2002년 1월 새로운 러시아 상원 구성 법안 에 따라 상원을 재구성하였는데, 기존의 지방 정부 수반의 겸직을 폐지하는 대신, 지방정부 행정수반 및 지방의회 의장이 각각 1명을 지 명하여 지방의회 동의를 거쳐 임명하도록 하였다. 러시아의 하원(State Duma) - 임기 4년 - 인원수 450명 - 러시아 연방 총리 임명에 대한 동의 - 러시아 연방 내각 불신임 문제를 결정 - 러시아 연방 중앙은행 총재를 임명, 해임 - 회계감사원 원장과 회계감사원을 구성하는 감사위원 반수를 임명, 해임 - 연방 헌법률에 따라 활동하는 인권담당 전권대표를 임명, 해임 - 사면의 실시, 러시아 연방 대통령에 대한 탄핵 발의, 법안 제출권 등의 주요 권한 보유. * 450명 전원을 정당명부식 비례대표로 선출한다. 소련에서 러시아로 - 러시아제국(제정 러시아)이 1917년 레닌의 소비에트 혁명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세워지면 서 소련(소비에트연합)이 됨 -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CIS(독립국가연합)이 됨 (CIS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그루지아, 카자흐스탄, 우 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탄의 12개 국가들이 구성한 연합체) - 나누어진 여러 국가 중 러시아가 소련의 전통성을 계승 *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분리 독립 CIS에 불참 하였다. - 39 -
Part. 2 : 문화 1)기본사항 o 수도 :모스크바(Moscow, 1,150만명) o 인구 :1억 4,247만명 o 고려인동포현황 : 17만 여명(한국교민 5,400명) o 면적 :1,708만km2(한반도의 78배, 미국의 1.8배) o 주요언어 : 러시아어 o 종교 : 러시아정교, 이슬람교, 유대교, 가톨릭교 등 2)음식문화 1) 육류요리와 열량 높은 음식 위주로 발달 2) 추위를 이기기 위한 고열량 음식이 발달 3) 지역별 계층별로 색다른 음식문화가 발달 4) 보드카의 원산지 *대표음식 -블리니: 메밀가루와 밀가루를 넣고 얇고 둥글게 부친 러시아식 팬케이크 또는 크레프이다. 원 모양으로 얇게 구운 블리니는 간소하게 버터만 발라 먹을 수도 있지만 훈제 연어, 캐비 어 등 다양한 식재료를 곁들여 먹는 경우가 많다. 둥근 반죽 위에 스메타나(smetana, 러시 아식 사워크림), 캐비어 또는 훈제 연어, 골파(chive)를 얹은 조합은 잘 알려진 애피타이저 메뉴이다. 이렇게 짭조름하게 만든 종류도 있고 코티지 치즈, 과일, 꿀 등을 넣고 달콤하게 만들어 디저트로 먹는 종류도 있다. 새 생명이 태어나는 봄을 맞이하는 이교도(paganism) 의 축제에서 블리니가 태양의 상징으로 빠지지 않고 등장했으므로 러시아에서 러시아 정교 가 국교로 제정된 10세기 이전부터 블리니를 만들어 먹었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블리니 는 오늘날에도 러시아 정교 식으로 계승된 봄의 축제 를 의미하는 마슬레니차(maslenitsa) 기간에 만들어 먹는 요리이다. -보르쉬: 비트(beet, 두껍고 둥근 뿌리에 붉은색이 도는 채소) 뿌리로 만든 붉은색이 나는 수프다. 러시아를 비롯해 우크라이나, 폴란드 등 동유럽 여러 국가에서 먹는 이 수프는 중 세 초기에 우크라이나에서 호그위드(hogweed)라는 식물의 뿌리로 만들어 먹던 것이 오늘 - 40 -
날과 같은 형태로 발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15~16세기 우크라이나를 중심으로 호 그위드 뿌리가 비트 뿌리로 대체되며 붉은색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에 보르쉬 의 종류는 요리사의 수만큼 많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따뜻하게 먹는 것과 차갑게 먹는 것, 맑은 것과 걸쭉한 것, 비트를 넣은 것과 예외적으로 비트를 넣지 않은 것 등 다양한 종류가 존재한다. -비프 스트로가노프: 길쭉하게 썬 쇠고기를 볶고 러시아식 사워크림인 스메타나(smetana) 로 만든 소스와 함께 내는 요리이다. 러시아 제국의 유명한 귀족 가문이었던 스트로가노프 (Stroganov) 가와 관련해 19세기 즈음에 이 요리가 탄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비프 스트 로가노프는 오늘날 해외에서 러시아를 대표하는 요리 중 하나로 자리 잡았다. 러시아에서와 는 달리 미국, 영국 등에서는 소스에 토마토 페이스트를 추가하거나 완성된 요리를 파스타 면이나 밥에 얹어먹는 등 변형된 레시피를 흔히 발견할 수 있다. -피로그: 러시아식 파이이다. 속재료가 단 것과 짠 것, 윗면을 반죽으로 덮은 것과 속재료 를 그대로 노출시킨 것, 모양이 둥근 것과 각진 것, 반죽을 이스트로 발효한 것과 발효하지 않은 것 등 다양한 종류가 있다. 4~6인 가족이 먹을 수 있을 정도로 큰 피로그가 있는 반 면, 1인용으로 작게 만든 피로그도 있는데 이는 피로시키(pirozhki)라고 부른다. 최소 14세 기 이전에 등장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원형은 호밀가루로 만드는 파이였으나 오늘날의 피로 그는 밀가루를 사용하여 만든다. 이 파이는 18세기 러시아 왕실의 만찬에 등장할 정도로 연 회 요리로서의 성격이 강했다. 이름도 연회를 뜻하는 피르(pir)에서 유래된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피로그는 연회 요리와 일상적인 요리로서의 성격을 모두 지니고 있다. -우하: 담백한 맛의 러시아식 생선 수프로 우리나라의 맑은 생선탕처럼 국물이 맑은 수프 다. 연어, 철갑상어부터 잉어까지 다양한 생선이 이 수프의 주재료이며 감자, 당근, 양파 등 의 채소도 부수적으로 들어간다. 본래 우하는 소나 돼지로 만든 수프였으나 15세기경부터 생선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17~18세기에 들어서 오늘날과 같은 맑 은 생선 수프의 레시피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우하를 만들 때 생선의 담백한 맛을 살리는 것이 관건이므로 신선한 생선을 사용하고, 강한 맛을 내는 재료는 사용하지 않는다. -샤슬릭: 러시아어로 꼬치구이 라는 뜻으로 쇠고기, 양고기 등 고기뿐만 아니라 야채나 해 산물 등을 먹기 좋게 잘라 양념에 재 놓은 뒤 꼬치에 꽂아 숯불에서 고루 익혀내는 요리를 말한다. 러시아 대부분의 집에서 샤슬릭에 필요한 재료나 도구를 갖추고 있을 정도로 러시 아인들이 가장 즐기는 일반적인 음식 중 하나다. (가을 대동제 당시 러시아어과 월드빌리지 에서 판매했던 음식!) - 41 -
4)관광명소 5)기타 -러시아 발레 발레는 이탈리아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지만, 현재 서양의 발레는 러시아의 고전 발레를 기 본으로 발전하였다. 러시아 황실은 1673년 러시아에서 처음 열린 발레 공연에 큰 감동을 받아 유럽화 정책의 하나로서 발레를 민중의 오락으로 채택하였고, 황실 무용 학교를 세우 고 우수한 안무가를 초빙하여 교육하는 등 발레 발전에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었다. 19세기 에 들어 러시아 발레가 서양 무용사에 큰 위치를 차지하면서 유럽의 뛰어난 무용수들과 안 무가들이 러시아로 건너와 차이콥스키 같은 뛰어난 작곡가들과 함께 <백조의 호수>, <호두 까기 인형>, <잠자는 숲 속의 미녀> 등 현재까지 전해 오는 대부분의 작품들을 만들었다. -러시아의 음악 러시아의 음악은 18세기 초 유럽화 정책을 경계로 근대 이전과 이후로 나뉘며, 1917년의 러시아 혁명 이후를 현대로 본다. 근대 이전에는 그리스 정교의 영향 아래 성가와 음악 이 론이 발전했으며, 근대 이후에는 유럽의 영향을 받아 다양한 음악이 발표되었다. 무소륵스 키, 림스키코르사코프 등의 국민악파를 비롯, 루빈스타인과 <교향곡 6번(비창)>, 고전 발레 곡 <백조의 호수>, <호두까기 인형> 등으로 유명한 차이콥스키가 근대를 대표하는 음악가 이다. 현대 이후에는 라흐마니노프와 스트라빈스키 등의 활동이 활발했다. -러시아 문학 11세기 구전 문학으로부터 이어져 오던 러시아 문학은 약 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 세기 초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경계로 중세와 근대로 나뉘며, 이즈음에 고대의 문학 전통이 단절되고 서유럽 문학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특유의 문학이 만들어진다. 19세기 초에는 천 재 시인 푸시킨의 소설과 시극, 비극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으로 러시아적 현실과 정서를 표현하는 국민문학이 형성되었다. 또한 푸시킨은 수많은 서정시와 서사시로 아름답고 풍요 로운 근대 러시아어를 완성시키고, 사실주의를 발전시켰다. 19세기 중반은 사실주의 소설의 황금시대로, 이때 쓰인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카라마조프의 형제들>과 사실주의 문 학의 최고봉인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안나 카레니나>는 20세기 세계 문학에 큰 영향 을 끼쳤다. - 42 -
Part. 3 : 역사 1 키예프 대공국 키예프 대공국 또는 키예프 루스(고대 동슬라브어: Рѹ сь, Рѹ сьскаѧ землѧ)는 880년경 부터 12세기 중반까지 현 우크라이나의 키예프를 중심으로 존재한 고대 국가로 동슬라브족 들이 구성원들의 주를 이루었다. 우크라이나의 시초이기도 하다. 창시자는 바랑기아인 출신 노브고로드의 올레그 공( 公 )으로 드니프르 강 유역을 정복하여 루스의 수도를 노브고로드에서 새 정복지의 키예프로 옮겼다. 블라디미르 1세 때에 전성기를 맞았다. 그는 동슬라브의 여러 부족을 정벌하고, 동로마 제 국 군대의 반란을 진압할 때 협력하였다. 이어 동로마 제국의 황제 바실리우스 2세의 동생 인 안나와 결혼하고 그리스 정교를 받아들였다.(동방 정교회의 국교화, 988) 이를 계기로 러시아에 비잔틴 문화가 널리 퍼졌으며, 대토지 소유제가 시작되어 봉건제 사회를 맞게 되 었다. 그의 아들인 야로슬라프 1세(재위 1019년 1054년)까지 최전성기였다. 끼예프 루스는 여러 공국으로 분열되고 흑해 유목민의 침입을 받아 쇠퇴하고, 블라디미르 모노마흐(재위 1113년 1125년)가 중흥시켰음에도 불구하고 13세기 중엽에 몽골에게 정복 을 당해 멸망했다. 2 모스크바 러시아 몽골의 통치에서 독립을 이룬 이반 3세의 손자인 이반 4세는 3살의 나이에 대공이 된다. 초반 몇 년간의 섭정 통치가 끝나고 1547년에 이반 4세는 기존의 대공이라는 명칭 대신 ' 차르', 즉 왕으로서 즉위하게 된다. 이로써 분권적인 모스크바 공국 시대가 끝나고, 중앙집 권적인 모스크바 러시아(러시아어: Царство Русское, 짜르스뜨보 루스까예)가 성립된다. 강력한 이반 4세의 통치기간 동안 중앙집권제가 확립되고 해외 영토가 많이 팽창하였지만, 후계 문제 때문에 러시아는 동란 시대로 접어든다. 이반 4세의 아들인 드미트리를 자칭하는 가짜 차르가 3명이 등장한 가운데, 이반 4세의 처가인 로마노프 가문의 미하일 로마노프가 1613년에 자리를 계승한다. 이로써 류리크 왕조는 막을 내리고 로마노프 왕조가 시작된다. 초기 로마노프 왕가의 차르들의 권력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력한 표트르 대제의 등장과 함께 모스크바 러시아는 러시아 제국으로 거듭나게 된다. 3 스테판 라진의 난 (1670~1671) 알렉세이 미하일로비치 황제의 칙령( 勅 令 ) 이라 불리는 농노법(1649)에 의하여 도망 농 민의 단속이 강화되고 농민의 이동은 전혀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 이러한 농노제( 農 奴 制 ) 강화에 따라 도망 농민이 속출하고 코사크(15세기 말 부터 20세기 초까지 우크라이나와 러 시아 남부에 있었던 군사 집단) 내에서 계층분화가 진전되자 무산( 無 産 ) 코사크가 증가하여 그들 사이에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식량 부족으로 돈 코사크의 통수( 統 帥 )인 스테판 티모페예비치 라진(Stepan Timofeevich Razin)의 지휘 아래 도망 농민이 1667년 돈에서 볼가 강 강변으로 이동했다. 라진이 인솔 - 43 -
하는 부대는 대상인의 곡물이나 상품 운반선을 습격했다. 1668년에 농민군은 카스피 해( 海 ) 에 나타나 무역선을 습격하였다. 이 농민군은 차차 커져서 정부 지주 대상인을 위협하는 존 재가 되었으므로, 정부는 대군을 파견하여 진압했다. 1671년 라진은 러시아 제국 관군에 체포되어 러시아 제국의 매국노로 적발되고 사지를 찢 기는 사형에 처해졌다. 4 표트르 1세의 집권과 상트페테르부르크 시( 市 ) 기공 표트르 1세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황제(재위 1682년 ~ 1725년)였다. 표트르 대 제로 불리기도 한다. 표트르 1세는 서구화 정책과 영토 확장으로 루스 차르국을 러시아 제 국으로 성립하였다. 만년에 표트르는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설에 몰두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북 방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발트 해의 바닷가 불모지에 1703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하였다. 바 닷가의 황량한 불모지에 건설되는 도시라 건설이 어려웠으나, 표트르는 옛 수도 모스크바를 벗어나 서구 유럽 어느 나라에도 뒤지지 않는 화려한 수도를 건설하기를 원하여 많은 인명 과 물자의 손실을 감수하면서 수도 건설을 진행하였다. 토목공사에 지친 민중들의 마음이 사나워져서 반란이 일어나자, 표트르는 비밀경찰을 통해 많은 반대자들을 처형하기도 하였 다. 5 데카브리스트의 난 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는 급격한 서구화가 진행되었지만, 정작 근대화가 필요한 농촌 에는 개혁의 바람이 불지 않아 농노제는 폐지되지 않았고, 예카테리나 대제 시기에는 농노 제가 확장되기까지 하였다. 농민들은 톨스토이의 단편소설에 언급될 정도로 비참한 삶을 살 았다. 이렇게 19세기 전반기 농노제와 전제정치가 계속 존속하여 빈곤한 삶에 빠져있던 러 시아 제국에서 자유주의사상에 전파되어 영향을 받게 된다. 이는 나폴레옹 전쟁 때, 나폴레 옹을 추격해 유럽을 원정했던 진보적인 성향의 청년 귀족들 사이에 자유주의 분위기 영향을 받게 된 것부터 시작된다. 이들은 1816년부터 해방 동맹이라는 결사를 조직하였으나 중간에 사상적 차이로 인하여 공화제를 주장하는 북부결사, 입헌군주제를 주장하는 남방 결사 연방제를 주장하는 슬라브 연방 등으로 분열되었으나 활동은 활발하게 계속되었다. 이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우크라 이나를 중심으로 활동을 하였는데, 1825년 알렉산드르 1세가 사망하면서 3주 동안 후계계 승 논쟁으로 혼란한 공백기가 이어지자,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부 청년장교들이 혼란 한 기간을 틈타 이를 기회로 봉기를 계획했다. 이들은 니콜라이 1세에게 충성을 거부하고, 1825년 12월 14일에 봉기를 하게 된다. 이들은 입헌군주제와 농노제 폐지 등 서부 유럽같 이 자유주의사상을 실현하고자 했었다. 그러나, 봉기는 준비와 조직이 충분하지 못하였고 실행직전에 남부 결사의 지도자였던 파 벨 페스텔이 우연한 경위로 체포됨에 따라 사전에 계획이 니콜라이 1세의 귀에 들어갔기 때문에 곧 쉽게 진압되었다. 임시정부의 권력자가 될 예정이던 세르게이 트루베츠코이 공작 은 도망쳤다. 곧이어 봉기를 일으켰던 체르니고프의 연대도 역시 쉽게 진압되어 무너졌다. 이어서 니콜라이 1세가 이 사건에 직접 참여하여 광범위한 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 44 -
121명의 데카브리스트가 재판을 받았고, 그 가운데 파벨 페스텔. 릴리예프. 카홉스키. 세르 게이 무라비요프. 페스트체프 류민 등 5명이 1826년 7월 25일에 처형당했으며, 31명이 감 옥에 갇히고 나머지는 모두 시베리아로 유배당했다. 6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 니콜라이 1세의 뒤를 이은 알렉산드르 2세는 본격적인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하였다. 이 는 크림 전쟁 당시 영국과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오스만 제국에 패한 영향이 컸다. 알렉산 드르 2세 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861년에 행해진 농노제도의 폐지였다. 그는 우선 귀족들에게 개혁에 관해 공개 토론을 시작하도록 강요했으며, 해방된 농노들에게 농토를 분 배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을 선포했다. 결국 알렉산드르 2세는 대다수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 쓰고 몇몇 계몽 관료들과 자유주의적 여론의 지지를 받으며 농노 해방령을 공포하여 농노제 폐지를 선포했다. 농노 해방 개혁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법적인 측면에서 나타났다. 인간의 예속을 철폐하 는 이 부분은 농노들에게 가장 반가운 소식이었다. 농노 해방령으로 인해 4,000만 명의 농 노가 자유로운 몸이 되었으며, 이는 후대에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법적 조처 로 칭송받 는다. 그러나 정작 농노들이 살 토지를 마련해주지 않아, 도시에서는 농민 출신의 빈곤한 노동자들이 등장하는 부작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은 구체제가 세워놓았던 계급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혁신이었다. 즉 농노제도의 폐지는 자유를 가진 자와 못 가진 사 사이의 근본적인 차별을 없앤 것이었 다. 해방된 농노들은 젬스트보에서 그들의 옛 주인과 자리를 같이 하였으며, 원칙적으로는 다른 계급의 대표들과 동등한 대접을 받았다. 새로 개편된 법원은 만인에게 평등한 법 이라 는 이상을 내걸었고 이를 실천하려고 노력하였다. 군대의 개혁도 국민 모두가 병역의 의무 를 가진다는 민주적 원칙에 입각한 것이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르 황제는 1881년에 암살당했고, 알렉산드르 3세에 이르면 부황이 행했던 대학 자치제 등의 자유주의가 제한되었고, 전제정치는 더욱 강해졌다. 7 피의 일요일 (1905) 알렉산드르 3세의 뒤를 이은 니콜라이 2세도 마찬가지로 전제 정치를 행하였다. 불평등한 사회체제로 억눌린 러시아 민중들은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초상화와 기독교 성화상, 그리고 노동자들의 요구를 적은 청원서를 손에 들고 비폭력시위를 벌였는데, 이들에 대해 제정 러 시아 정부가 유혈진압이라는 가혹한 탄압을 가했다. 죽은 사람만 500 600명, 부상자 수천 명이나 된 대형유혈사태였다. 주동자는 사회개혁론자이자 러시아 정교회 사제인 가폰 (Georgy Gapon)신부이다. 이 사건으로 하느님처럼 떠받들던 차르의 실체를 알게 된 제정러시아 민중들이 사회주의 혁명인 10월 혁명을 주도하게 됨에 따라 로마노프 왕조의 몰락은 가속화된다. 한편 시위를 주동했던 가퐁은 해외로 망명 후 러시아에 귀국했다가 살해당했다. - 45 -
8 러시아혁명 (1917) 배경 러시아 제국의 전제군주정치 러시아 제국은 철저한 전제 군주전제 주도하에 근대화 개혁을 점진적으로 나아가, 그 결과 19세기 후반 산업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전제정치가 그대로 유지되었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바꾸는 개혁안은 철저히 배제되 었고, 지식인들과 학생들은 자유주의 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사회민주당을 결성하여 사회 개혁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당시 러시아 제국은 격동하는 시대에 황제 니콜라이 2세는 근본적인 개혁의 소리 에 대해서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제국이 변화 되는 것을 두려워했었기 때문이 다. 러일전쟁 1904년 2월, 마침내 일본제국이 러시아제국이 점유하고 있던 청나라의 뤼순항을 기습 공 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한다. 전쟁은 치열한 공방전 끝에 예상을 깨고 일본의 승리였 다. 하지만 이 전쟁은 애초에 러시아 여론은 물론이고 일본여론,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 방여론마저 러시아의 승리를 점쳤기에 이 전쟁은 러시아에게 큰 타격이었다. 이로써 국민들 은 정부에 대한 불만을 폭발시킨다. 피의 일요일 1905년 러일전쟁을 계기로 러시아 정교회 사제의 주도로 개혁을 요구하는 민중운동이 일 어났다. 당시 민중들은 차르의 실체를 보지 못하고 자신들의 아버지로 믿었다. 1905년 1월 22일 사제 가폰 신부를 필두로 수많은 노동자와 그 가족들이 상트페테르부르 크의 겨울 궁전으로 몰려들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의 설립과 근로조건의 향상들을 아버지 차 르에게 요구하였으나, 차르는 그 요구에 무력진압으로 답했다. 비무장한 시위대를 상대로 차르의 군대가 발포하였고, 달아나는 군중들을 기마대가 추격하여 학살, 이날 하루에만 3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차르에 대한 환상이 깨어지고 러시아 제국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다, 자본가의 착취와 노동자의 인권이 존중되지 않는 열악한 근무환경에 맞선 온갖 파업 투쟁이 끊이지 않았고 1905년 5월 흑해의 포템킨 호의 선원들이 반란을 일으켰다가 루마니아 정부 에 항복하기도 했다. 1906년 한 해 동안 100만 명이 파업을 일으켰고 농민 반란이 2600건이나 일어났다. 이에 러시아 제국정부는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두마'라 불리는 의회를 설치하는 등 개혁을 추진 하였으나 농민들과 노동자들의 생활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러시아 민중들의 생활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할 무렵, 차르에 대한 불만세력이 여전하다고 여긴 니콜라 이 2세는 이러한 국내의 불만을 진정시키기 위해 많은 병력을 파병하도록 선전했다. 처음에 민중들은 애국심에 불타서 제1차 세계대전에 많은 지지를 하였고, 무려 1500만 명이나 전 - 46 -
선에 나가 지원 했었다. 하지만, 지휘관들의 무능함으로 탄넨베르크 전투에서 자멸적인 대패를 초래했을 뿐만 아니 라,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에 지원하여 러시아의 노동력은 급격히 저하되었으며, 민중의 복 지에 써야 할 국가예산이 전쟁에 사용되면서 민중들의 생활은 오늘 먹을 빵과 우유조차 없 을 정도로 아주 어려워졌다. 이는 러시아 제국이 얼마나 무능한가를 말해주는 증거였으며 1917년 러시아 민중들에 의 해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는 원인이 되었다. 그럼에도 니콜라이 2세 황제는 1915년부터 직접 전투지휘에 나서며 국정은 황후에 맡기 고, 황후를 등에 업은 라스푸틴을 중심으로 국정도 파탄지경에 이르렀다. 전개 2월 혁명(3월 혁명) 페트로그라드 시위 제1차 세계대전이 장기화됨에 따라 러시아 제국 민중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졌다. 당연히 러시아 민중들은 민중운동으로 그들의 생존권을 쟁취하고자 하였는데, 1917년 3월 8일 페 트로그라드 시위가 그것이었다. 당시 페트로그라드의 민중들은 밀가루 반입량이 절반으로 줄어듦에 따라 빵을 살 수 없었 고, 어린이들에게 먹일 우유도 절반으로 줄어들었다. 빵과 우유를 배급받고자 시민들은 새 벽부터 밤까지 줄을 서야 했다. 우연하게도 3월 8일은 국제 여성의 날이었는데, 페트로그라드 여성들은 이날 빵과 우유를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으며 그들과 같은 처지의 노동자들이 8만 명이나 시위에 가담하였다. 시위는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로 이어졌다. 혁명으로의 발전 러시아 민중들의 시위는 전쟁에서 돌아오거나 민중시위 진압을 거부한 일부 사병들이 참여 하면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트 로 단결하는 혁명으로 발전하였다. 1917년 2월 22일 푸틸로프 공장에서 노동자들이 파업을 일으켰고 니콜라이는 수도방위사 령관 하발로프에게 군대를 보내 진압하도록 하였으나 2월 27일 군대까지 노동자들의 편에 섰다. 결국 3월 2일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동생 미하일에게 정권을 넘겼으나 이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제정체제가 붕괴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것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판단하고 정권을 장악하지 않았다. 이렇게 됨으로써, 부르주아와 사회주의자들의 연합 정권인 케렌스키임시정부가 탄생하였 다. 이때 2월은 러시아 달력에 근거한 것이며, 그레고리력으로 하면 3월 혁명이 된다. 10월 혁명 볼셰비키의 지지 이 시기에 사회주의자들로 주축이 된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민생이 어려워진 - 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