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장 미국으로 돌아와서 원진전자 8.1 KDK Electronics, Inc. Sunnyvale 에 설립 한국반도체 재직중에 나를 만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 한 사람이 David Heck 이였다. 이 사람에 대해서 설명을 좀 해야겠다. 학력은 Purdue 대학 전기과를 졸업하고 Harvard 에서 MBA 를 한 실리콘밸리에서 알아주는 반도체 엘리트였다. 일찌감치 한국 Fairchild 사의 사장으로 있다가 돌아올 때 한국 고아를 입양해서 온 친한 파이기도 했다. 한국에 미국과 같은 수준의 Wafer Foundry 를 만들고 미국에서 제품 디자인을 갖고 가서 만들어오는 방식의 아주 큰 비즈니스가 형성될 수 있다는데 둘이다 생각하는 것이 일치했다. 장래가 좋은 제품 디자인은 알아내는 재주가 있어야 하고 또 이 디자인 샘플을 차질 없이 만들고 양산까지 순조로이 이어지는 공장이 되어야 한다. 많은 외부 사람, 조직을 이용하고 coordinate 해야 하기 때문에 한 회사에서 모든 것을 하고 있는 현재의 큰 회사 경영 방식과는 많이 다른 경영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상호 신뢰와 계약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조금도 의심스러운 경영은 절대 안하고 정말 말 그대로 투명한 경영을 하기로 했다. 내가 한국에서 실패한 것도 한국식 경영환경에 반도체란 첨단기술이 끼여들 수가 없었다. David Heck 역시 한국식 경영이 국제사회 특히 여기 실리콘밸리의 체질을 따라오려면 한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가까운 친구들, Harvard 동창들이 여기 금융계, 법률 계에서 굵직 굵직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물론 멀리 Washington DC 에서도 크게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첫 투자가 문제다. 우리는 둘 다 돈이 없다. 여기 실리콘밸리에서 반도체공장 건설은 생각도 못한다. Intel 이나 AMD 정도의 큰 투자가 이루어지기 전에는 경제성이 없다고 보고 있어 그런 규모의 사업은 우리 둘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Dave Heck 은 나로 하여금 한국의 돈 있는 사람을 연결 지어 한국에 반도체공장을 세우자는 것이다. 내가 이미 실증했다. 한국서 반도체공장 투자가를 찾는 것은 힘들지 않았다. 코론의 이원천회장이 첨단 전자사업을 하기로 했다. 한국의 전자공업관련 기사를 취급하고있는 내외경제신문 성의경 기자의 소개로 그당시 우리나라의 섬유산업계의 재벌로 두형제가 갈라저서 이원천회장이 장래가 유망한 업종을 찾고 있슬때였다. 곧 원진전자를 설립하고 반도체공장을 짓기로 했다. 원진전자가 1976 년 여름에 설립되자 나는 곧 미국에서 KDK Electronics, Inc.를 서니베일에 설립했다. 그리고 미국 시민권도 동시에 취득했다. 원진전자에서 책임자와 실무진이 왔다. 이들은 한국의 공장건설 생산시설제 구입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삼성에서 숙청되어 나온 이기윤, 강경석, 이종호가 원진팀에 합류되어 미국 현지 실리콘벨리의 사람들과 똑같이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기술이전이란 것이 이런것이고 정말로 실감나고 내 자신 나의 업적에 만족하고 있었다. 한국반도체 계획당시의 생산장비는 이미 한세대 지난것이다 그때로부터이미 5 년이지났다. 오늘날 Computer 를 알고 또 쓰고있는 사람은 5 년전의 기계가 어떤것인지 알것이다. 1973 년 한국반도체 계획때에 비해서 값이 많이 올랐다 그때 값은 유류파동 전이였고 그후에 많은 기계들이 더 자동화되였다. 한국반도체때의 시행 착오는 모두 시정되고 특히 반도체용 소모품은 충분히 처음부터 LC 에 포함시켰다. 미국에서는 반도체 장비가 그동안에 이렇게 발전되었는데 한국의 반도체 관련분야는 조금도 달라진 것이 없다. 122
8.2 세계 제일의 반도체 Operation --새 희망 그리고 실패 나는 가능한 한 새로 나온 장비를 선정하여 새로 생기는 원진공장은 세계에서 가장 새롭고 앞선 CMOS 공장으로 만들 것이다. 원진 측에서도 최신 최 첨단을 많이 강조했다. 5 년 전에는 혼자서 ICII 의 미국 회사, 한국반도체의 한국 회사 두 다리 걸치고 그 당시 나를 포함해서 경험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상태에서 정말 힘든 일을 했었는데 이젠 호강하면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David Heck 이 자기가 하던 일을 정리하고 KDK 로 왔다. 재정관리, 법률 관계 하나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첨단기술의 해외 유출도 이젠 걱정 되는 사항이 아니다. 아무것도 꺼릴 것이 없고 이젠 우리가 원하면 막강한 미국 굴지의 변호사들이 친구로서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첫 작품이 성공하면 Venture Capital 이 기다리고 있다. 이런 일을 하는 Dave 의 친구들도 있다고 했다. 회사에서 쫓겨날 걱정도 없다. 실리콘밸리의 디자인센터, 그리고 한국에 Wafer Fab Foundry, 다국적 반도체사업체재 의 새 개렴 이다. 원진의 생산능력이 앞으로의 성장에 Bottle neck 이 될 것이라고 미리 걱정도 해봤다 ---앞이 보이면 미리미리 주저 없이 해야 되는데----- 잘하면 Intel 이나 AMD 보다 더 커질 수가 있다. 외냐 하면 우리는 Overhead 가 이들 보다 훨신 낮고 한국의 생산 단가는 더 좋은 노동 질과 훨신낮은 인건비로 미국의 절반으로 가능하다. 수송비는 문제가 안 된다 삼성에서 쫏겨나서 못 푼 한을 이제는 풀수있게됬다. 이젠 나도 나를 도와준 사람들에게 빛을 갚게 됬다. 조고만 Pilot line 을 Sunnyvale 에 만드러 옛날 공로자들을 모두 여기로 모으는 거다. 우리의 조고마한 왕국을 만들 수 있다. 8.3 LC 의 불법 개정 원진전자 의 잔꾀 원지공장이 필요한 건설재 생산시설의 List 가 정리되어 LC (물건 매매계약서-신용장 Letter of Credit)가 열렸다. Sunnyvale 에 파견 나왔던 김대무이사가 돌아가고 김경욱이사가 후임으로 왔다. 삼성에서 보낸 이충수이사와 그 행동이 흡사했다. 이충수는 주주 삼성의 권한으로 왔으니 그의 행동을 어느 정도 이해는 할 수 있지만 원진전자와 KDK 는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는 완전히 독립된 별개 회사이다. 이젠 Technical coordination 외에는 할 일도 없다. 원진에서 휴가가 아니면 없는것이더 낫다고 생각해서 미국으로 보낸 것 같았다. 여기 KDK 에있는 사람은 전부 어디에 내 놓아도 손색없는 반도체 전문가들이다. 회의에서도 장비선정 Process 방식 검토 무엇 하나 끼어 들 수가 없다. 미국사람이 찾아오거나 미국사람이 끼게 되면 영어를 제일 못 알아들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은 살아있어 의미 없는 질문을 하면서 본인은 자기도 동등하게 한 목 끼어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다른 사람들은 한국반도체에서 수년간 미국인 Engineer 들과 일을 했기 때문에 기술에 관련된 의사 소통에는 문제가 없는 것이다. 기술관계는 내 담당이어서 한국말로 되지만 김경욱이사와 이야기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Business 에 관련된 사항은 Dave Heck 하고 이야기 해야 된다. 자기의 능력, 권위를 과시하려는 것이 너무나 눈에 띄게 나타나고 있었다. 자기 아버지가 한국의 정계에서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는 김주인씨로 원진회장이 정치적인 이유로 뽑았다고 나는 알고 있다. 어린애들이 자기 마음에 안 들면 트집부리고 망나니 짓을 하는데 바로 김경욱이사가 나이만 들었지 이런 애들과 꼭 같았다. 잘했던 못했던 간에 나와 Dave Heck 은 미국과 한국에서 반도체공장을 경영했던 경력의 소유자이다. 김경욱이사는 뭐하나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통하지도 않는 영어로 원진을 내세워 모든 것을 간섭하려고 했다. 그래도 앞으로 같이 일해야 할 사람이라서 시간도 때울 겸 지금 그는 별로 할 일이 없으니 Dave Heck 과 같이 영어도 배우고 또 미국식 경영도 좀 배우게 할려고 했는데 Dave 가 waste of time 이라고 거절했다. 123
나보고 다시 과거의 mistake 를 반복하려는 거냐고 그냥 무시하고 내버려두라는 거다. 나는 김경욱 이사는 일할 것이 없으니 미국서 소환해달라고 원진의 강부사장에게 부탁했다. 김경욱이사가 한국으로 돌아갔다. ㅡ 얼마 후다 내가 한국에 출장 갔다가 돌아가기 전날이었다. Dave Heck 한태서 한국으로 전화가 왔다. LC 가 발행된 뒤에 내가 LC 개정에 합의한 것이 있느냐고 묻는 거다. 아무 것도 없다고 대답했다. 별 관심 없이 미국으로 돌아와서 보니 LC 가 KDK 도 모르는 사이에 개정 되었다는 것이다. 원진이 승인하는 서류를 한가지 더 첨부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이 서류가 없으면 물건을 보내고도 돈을 못 찾게 되었다. 그래서 Dave Heck 이 은행에 갔다가 서류미비로 퇴짜를 맞았다. 이 LC 는 취소 불능으로 특히 국제간에 물건을 사고 파는데 일방적인 계약 사항 변갱을 피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문서이다. 사고 파는 당사자 그리고 이들을 대표하는 양쪽은행을 포함해서 4 자가 합의 안하고는 그 내용을 고칠 수 없게 되어 있다. 지금 바로 이런 원진 의 일방적 행위를 막자는 것이 LC 의 기본 정신인 것이다. 원진은 국제사업을 한다고 한국에서 최고라는 서울 상과대학까지 나온 사람들을 고용 해서 요직에 앉었다. 이런 기초상식도 없이 이들이 행동 했다고는 믿어지지가 않았다. 뭔가 잘못되었다. 내가 원진에 전화를 걸었다. LC 가 개조되었다는 거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항의 했스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급해졌다 큰돈이 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는데 물건값을 제때에 지불 안 하면 신용이 떨어지고 지금 막 시작 하는 회사로 신용대출도 안되고 큰 상처를 입으면 회복이 불가능 할 수도 있다. 우리가 원진에게 앞으로 공장 기자제 선정 뿐만 아니고 기술지도 도 무상으로 해주기로 되 있는데 이건 말도 안 된다. KDK 가 죽으면 원진은 자동적으로 죽게 된다는 것을 모른단 말인가?. Dave Heck 이 샌프란시스코로 알려진 금융관계 변호사 친구인 Ted Collins 를 찾았다. 이야기를 듣고는 아직도 이런 불법 행동을 미국을 상대로 하는 회사도 있느냐고 하면서 바로 길 건너 연방법정을 찾아가서 Temporary Restraining Order (TRO 가처분)를 얻어 주었다. 8.4 국제분쟁 미 연방법정 TRO 이 사실은 바로 Telex 로 원진에 전달되었다. 다음 날 아침 법정문서를 들고 Dave Heck 이 Red eye flight(밤새서 가는 비행기)편으로 뉴욕에 있는 한국상업은행 지점에 가서 돈을 찾았다. 만약 한국상업은행이 지불을 거부를 할 경우 곧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federal marshal(미 연방 경찰) 에 조치도 해 노았었다. 우리의 San Jose 에 있는 은행이 자기네는 이런 분쟁에 끼어들기 싫으니 직접 원진측 은행으로 가라고 권유했기 때문에 뉴욕까지 간 것이다. 우리측 미국은행은 LC 가 일방적으로 개정됐을 리가 없다고 우리의 주장을 믿지를 않고 원진이 요구하는 서류를 KDK 가 제출 못하는 이유가 KDK 에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원진 측은 강박사는 돈이 필요해서 당장 날아와서 살려달라고 무룹 꿀고 빌 거라 기다려 보기로 했는데 엉뚱하게 미연방법정의 TRO 가 전달 된 것이다. 원진은 크게 당황했다. 문제가 한국식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다. 회장에게 숨길 수는 없게됬다. 강기동이가 사기꾼입니다. 우리가 모른다고 사기친 겁니다. 확실한 물적 증거가 여기에 있습니다. 같은 기계인데 강박사가 요구한 개조라고 해서 그값이 두배가됬습니다. 이런 국제사기꾼을 그냥뒤서는 안됩니다. 이렇게 회장에게 보고했다. 반도체 최신장비란 우선 그 생산성 즉 워이퍼 처리능력에 비래 해서 비싸지고 새 방식이 나오게 되면 124
구식장비는 그날부터 고철 신세가 된다. 특히 자동 처리가 되지 않으면 양산에서 처리하는 품질의 균일 성을 보장 할수가없다. 완벽한 새 기계라도 큰 Wafer 를 다를 수 없으면 창고로 보내서 보관 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페기처분한다. 앞으로도 쓸 chance 가 없기 때문이다. 기계선택의 한 예를 든다면 지금은 3 inch wafer 를 쓰고 있지만 1-2 년 후면 5 inch Wafer 로 바뀔 가능성이 있다고 하자. 살때 3 inch 전용 기계를 사느냐 그렇지 않으면 3 inch 와 5 inch 겸용을 사느냐 결정을 해야한다. 겸용은 값이 두배 정도 된다. 그러나 5 inch 로 바꾸게 될 2 년후면 그때 새로 나온 5 inch 기계에비해서 처리속도가 늦으면 미련 없이 버릴 수도 있다. 새 기계가 나와도 워낙 인기가 좋으면 돈 주고도 못살수도있다. 반도체는 이런 면에서 장치 산업이기도 한 것이다 장치를 잘못 선택하면 경쟁을 못한다. 잘못 선택이 확실해지면 더 좋은 것으로 지체 없이 바꾸고 막대한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원진만이 아니라 한국에 이런 반도체 의 경험이 있슬리가 없다. 이젠 김경욱이사가 원진전자를 사기꾼에서 구출한 영웅이 된 것이다. 생전처음 자기의 실력을 인정 받았다. 원진의 이원천 회장을 설득시켜 강기동이를 다시는 못 이러 나게 완전히 매장하기로 했다. 원진은 국제사건을 담당할 변호사를 찾아나 섰다. 미국 연방법정에서 싸울 수 있는 변호사는 고사하고 영어로 된 법적 문서를 재대로 읽고 쓸 수 있는 변호사는 국내에서는 찾기 힘들었다. 나는 딱 한 사람 이런 변호사를 안다 한국법조계에서 알려진 신씨 집안의 아들로 나의 옛 서울 필동 집의 옆 옆 집에 살고 있었다. 또 경기후배이고 미국서 공부했다. 그의 누이 신연자는 나의 친구 최필동이의 Wife 로 역기미국서 우리동네에 살고 있다. 의외로 이 신변호사한테서 전화가 왔다. 나를 만나러 급히 미국에 왔다고 했다. 비밀리에 맞나 자는 거다. 나는 우리 변호사한테까지 비밀로 하고 싶지는 않았다. 우리변호사는 이건 절대 안 된다. 미국서 교육받은 변호사라면 뭐는 되고 뭐는 안 된다는 것쯤은 알 거라 정 그렇다면 자기가 만나겠다고 했다. 신변호사 하고 통화가 나의 변호사하고 이루어졌다. 신변호사는 그냥 돌아깄다. 신변호사는 그후 세종이라는 큰 변호사 회사를 만드렀다 우리 변호사의 예측과는 달리 맞고소가 들어왔다. 원진측의 주장은 처음부터 LC 가 강기동이에 의해서 조작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바로 잡아달라는 내용이다. 사실 모든 업무는 원진에서 파견된 직원이 했고 KDK 에서는 강기동 이외에는 관련자가 없었다. 정식으로 국제분쟁이 시작된 것이다. 증거서류는 강기동이가 원진에서나온 engineer 들이 선정한 장비를 안 사고 마지막 판에 새로 나온 최신 장비로 고쳐서 발주한 것들이 모두 여기에 증거로 들어 있었다. 최신장비는 모두 내 의견이 들어간 주문 제작으로 그 값이 많이 올랐다. 내가 특별히 개조해 달라고한 부분에 나의 sign 이 있섰다. 한편으로 나로서는 미 연방법정의 도움으로 LC 가 개정전의 원상으로 살아 났스니 하루 속히 선적해서 모든 조건을 조금도 차질 없이 이행해야만 했다. 살아있는 LC 를 시일내에 이행 하지 않으면 나도 문제가 된다. 원진측은 국제적으로 알려진 law firm 인 Baker and McKenzie 를 고용 했다. 그들은 첨단 반도체장치가 어떤 것이고 그 가격구조가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반도체 장비수출관련 국제분쟁을 얼마 전에 원진 측 변호사가 해결한 사실을 우리 변호사가 알아냈다. 내용인즉 여기 Silicon Valley 의 한 반도체 장비 Broker 가 유럽으로 반도체 제조 장비를 수출 했다. 수입 자는 반도체 장비를 값이 좋아서 샀는데 알고 보니 한 세대 지난 장비를 샀다는 것이다. 미국 Broker 가 첨단 최신 장비라고 속였다는 내용이다. 일년 전만 됐어도 최신장비로 아무 문제가 없었다. 수입 125
측이 반도체장비의 발전속도를 몰라서 온 문제로 그 값으로는 그것밖에 살수 없고 더욱이 반도체사업에서 기계선정과 LC 개설의 시차가 커지면 기계가 도착하기도 전에 새 기계가 나오는 경우는 여기서는 상식화 되어있다. 새로 개발된 장비는 2 배 이상의 값이 나왔다. Baker and McKenzie 는 자기 유럽고객을 설득 시켜서 고소를 취하했다. 사는 측이 반도체장비를 아는 사람들이였다. 우리와 정반대의 사건이었다. 이런 것이 반도체 사업이다. 8.5 반도체사업의 본질을 몰라서 온 후진국 형 실패 KDK 는 Silicon Valley 에서도 막 개발 되서나오는 기계들을 남보다 먼저 Order 한것이다. 부당 이득을 취득한 증거는 아무데도 없다. 원진측 변호사의 전략은 달라졌다. LC 이행과정에서 KDK 가 돈이 필요해서 부정이 있을 것을 예상하여 그것을 잡아내고 또 시간만 끌면 자금난으로 굴복할 수 밖에 없다고 단정하여 우리 변호사를 별것도안인 일을 만들어서 많은 비용을 내게 하고 시간 지연작전을 폈다. 그래서 거의 2 년을 끌었다. 부러 나는 변호사 비용은 이 사건이 끝날 때까지 보류하기로 했다. 원진 측에서 갖고 나온 증거는 아무런 merit 가 없고, LC 이행과정에서 원진이 기대했던 KDK 에 불리한 증거는 아무 것도 안 나왔다. 고소는 취하되고 잘잘못은 안 따지고 서로의 갈 길을 가기로 합의했다.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해서다. 원진 측은 시간을 끌어서 재정적으로 KDK 압박하는 데는 성공했다. 분쟁이 길어질 것 같아 중학교 때 가까웠던 친구 정인용 이한테 도움을 청했다. 경제기획원에서 높은 자리에 있었고 원진의 이원천 회장도 잘 안다고 해서였다. 결과는 내 정보를 원진 쪽에 넘겨 준는걸로 되어 도리어 문제가 악화됐다. 학교 때 친했다는 것 만으로 내편이 될 거라는 생각은 잘못이 였다. KDK 는 늘어난 변호사 비용을 5 년에 갈라서 내기로 하고 끝이 났다. LC 가 뭔지도 모르면서 KDK 길들이기(?) 로 시작된 LC 불법 변조사건은 세계굴지의 Harvard 출신 변호사들을 상대로 한 국제소송으로 발전됐고 원진 역시 외국 땅에서 비싼 미국 변호사를 고용한 법적 싸움은 막대한 비용과 KDK 와의 이별로 문을 닫을 수밖에 없게됬다. 강기동이를 죽이려다 거꾸로 자기회사가 끝이 났다. 한국 국회에서도 진상규명 논의가 있섰다. 반도체사업의 본질을 모르고 고치면 안 되는 서류 좀 고치는 것은 별것도 아닌 것으로 알고 있던 후진국 형 어리석은 사건이였다. 수입한 원진전자 재산은 삼성이 인수했다. 미국 현지에서도 최신 LSI 생산장비인것을 알아볼 사람도 없거니와 이것으로 싸구려 Tr 이나 만들 거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매어질 것 같았다. 벤츠 이름도 못 들어본 시골서 택시용으로 최신 벤츠차를 쓰는 격이다. 한국에 이렇게도 반도체사업 할 사람이 없단 말인가? 한국에서 반도체시대를 열었다고 부평에 한국형 반도체공장 New Korea 전자 가 설립되고 대통령 이하 전 경제각료가 참석해서 축하한지도 이젠 10 년이나 됐는데-. 박정희 정부는 계속 High Tech 의 북을 쳤고 이젠 충분히 반도체 전문가가 나올 만도 할 때이다. 그 후 한국화약구릅의 친구 오태환 기획실장의 초청으로 서울에 체류하면서 진지하게 반도체사업 검토를 했고, 또 한때 재계의 큰손으로 알려진 장영자회장과 롯데호텔옆 사무실에서 반도체사업과 특정 방위산업을 검토한일이 있었다. 모두 사업자체에는 긍정적이였스나 내가 한국에 와서 이 사업을 추진할 생각이 없다고 해서 무산되고 말았다. 이 무렵에 아남산업의 김주진씨도 Sunnyvale 에서 자주 만나서 반도체 공장 검토도 했섰다. 126
8.6 반도체 Hi Tek 사기꾼 나 같이 되지 말라 앞에서 한말이 반복 되지만 1967 년 내가 모토롤라에 있을 때 한국에 조립공장을 내는데 조사 팀으로 한국에 간 일이 있었다. 한국에 대한 사전교육을 모토롤라 사장실에서 받았는데. 삼성의 사카린 밀수사건과 국회에서 김두한의원이 항의 차 똥물을 뿌린 사건을 거기서 처음 들었었다. 이 사건은 대 재벌이 국법을 어기고 나라를 속인것이다. 개인간의 속임수 하고는 차원이 다르나. 나는 그후에 한때 이 조직의 사장 이라는 자리에 있섰다. 이제는 누구를 나쁘게 말할 자격도 나에게는 없게 된것이다. 나쁜일에 가담 했건 안했건 사장쯤되면 동업자인것이다. 이런 이유도 있고 해서 나는 남을 속이는 일은 안 했지만 남이 사기꾼 이라고 해도 그냥 무시하고 아무런 해명이나 변명도 하지 않았다. 나도 같은 한국인이지만 한국사람 의식 속에는 속인다 속는다 는 것이 깊이 박혀있는 것 같다. 조심해! 너 그러다 속는다. 이런 말은 어디서나 많이 들었다. 관계없는 사람이 날 속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이들이 모두 나를 속이려는 사람들인가? 또 그 반대로 그들은 내가 그들을 속이려고 한다고도 보고 있을 것인가? 사실 나는 1967 년부터 한국에서 강박사가 사기 친다는 소리를 간접으로 많이 들었다. 이런 말이 어디서 온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한국에서 반도체관련 학계나 전자 공업분야의 높은 분들 눈에 벗어나고 있섰다. 물론 적극적으로 동창이나 친지들을 통해서 만나고 친분을 쌓고 잘못 알고 있는 것을 해명하고 해서 이러한 오해를 극복할 수도 있었겠지만 나는 최우선과제 highest priority 가 내 회사일인 시제품 생산이었다. 이런 것은 이차 삼차의 문제이고 그 당시는 이런데 관심을 둘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또 하나는 술을 좋아하고 친구나 사업관련자들과 자주 어울려야 하는데 나는 그 반대로 기회가 있어도 피할 때가 많았다. 내가 Motorola 반도체 공장에서 Silicon Bipolar Transistor 제조 기술을 정리해서 완성 한 것이 1960 년대 초반이였다. 회사내의 제조공정을 내가 새로 만들었다. 한국서 납득이 안 되는 이야기다. 일개 연구소 연구원이 그 큰 공장의 공정을 만들어? 그 후 반도체 생산기술이 미국에서 Motorola 가 제일 앞섰다고 업계에 알려졌던 것이다. 기술회의에서도 일년씩 묵혔다가 발표한 논문도 전세게 특히 일본과 독일 에서 몰려온 기술자들의 질문공세를 받고 우리 Motorola 의 앞선 기술을 인정 받았섰다. 세계적, 최첨단 등 의 형용사는 한국에 와서 배웠지만 한국식 표현으로 한다면 세계 최 첨단 기술 을 내가 개발 했고 또 내가 갖고 있었다. 일본에 가면 일본 반도체 업계에서 VIP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이 없는 한국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 당시 날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한국에서 반도체사업을 같이할 생각으로 최신기술로 혼자서 시작할 수 있다고 열심히 설득했었다. 이 때의 반응이 나는 반도체 전문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사업이라고 알고 있다 강기동이가 사기 친다는 것이다. 내가 미 국방관련 비밀 사업에 관련했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사업은 나 이외의 다른 사람을 포함시키는 것이 매우 위험했고 그럴 필요도 없섰다. 1967 년 당시는 NPN, PNP transistor 시대라서 혼자서 다 할수있섰다. 한국반도체회사 때도 그랬다. 김규한/ 이상규씨에게 혼자서 다 한다고 사기 쳐서 투자하도록 했다. 그래서 회사를 말아 먹었다. 삼성 때는 강박사는 반도체는 다 안다고 사기첬다. C-MOS 전문가 였는지는 모르지만 Tr 이나 TV IC 는 모르는 사람이다. 또 원진전자 하고 는 강박사가 LC 조작으로 값을 부풀려 사기치는 것을 보고만 있슬수 없어서 원진전자 이사로 있던 김경욱이가 용감하게 총대를 멨다고 했다. 강박사는 고단수의 반도체 Hi 127
tec 사기꾼이다. 내가 모르는 사람들까지 나를 나쁘게 말하는 것을 해명 하거나 싸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모른척하고 무시해 버리고 사기꾼이 됐다. 한국에서 모든 미련을 버리고 조용이 떠나기로 했다. 나는 한국에서는 끝난 사업가 인 것이다. 그들이 필요해서 날 찾아야지 내가 사업하려고 돈이 필요해서 먼저 찾아가서 생긴 오해다. 후진국은 첨단 사업은 할 수 없는 구조이다. 적어도 그 당시 나와 한국에서의 반도체는 그런 것 같았다. 삼성에서 쫓겨나고 나서 때때로 과학원을 찾았다. 그래도 날 알아주는 사람들이 거기에는 있었기 때문이다. 김충기 박사 하고 조장희 박사다. 김충기박사는 고교. 대학 후배일 뿐만 아니라 미국서 김박사가 Fairchild 에 다닐 때 우리와 Sunnyvale 한 동내 가까운 곳에 살고 있섰다. 한국에서는 그 당시 Wafer Fabrication 을 Fairchild 사에서 제대로 경험한 유일한 반도체 Engineer/교수 이다. 조장희 박사는 대학 시절의 산( 山 ) 친구 후배로 의료 기기의 왕좌를 차지하는 Body Scanner 전문가가 되 있섰다. 내가 과학원에 들릴 때마다. 김충기박사는 학생들을 교실에 모아서 강의(?) 를 부탁 했다. 한번은 강의가 끝나고 질문하는데 후배들에게 도움될 말 좀 해달라는 부탁이 있섰다. 나는 할말이 없다고 했다. 그래도 뭐 있지 않겠냐는거다. 그래서 너의 들은 나같이 되지 말라 고했다. 그랬더니 그게 무슨 뜻이냐는 거다. 이런 예기는 잘된 사람이 자기같이 잘되는데 필요한 지혜를 후배 들에게 가르쳐 주는 것인데 내 이야기는 실페로가는 가르침이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8.7 새 일거리를 찾아서 인도를 가다 때는 1981 년말경이라 생각된다 Sunnyvale 은 겨울이나 여름이나 온도 차가 크지 않아 계절감각이 둔해진다. 현대에서 신규사업 현지조사 차 왔다는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자는 부탁이었으나 이젠 반도체에서 손을 떼었다고 거절했다. 반도체 신기술 개발 현장에서 멀어진 지도 10 년이 가까워 나는 이제 한 물 간지도 옛날이다. 반도체 그리고 특히 한국을 잊고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있을 때 인도친구 Rama Reddy 가 인도에 한번 와 달라고 부탁을 해서 그 준비를 하고 있었다. Rama 는 인도 갑부의 아들로 Stewart Warner 사에서 전자회로설계 엔지니어로 인도사람답지 않게 말이 적고 머리 좋은 착실한 엔지니어였다. 같은 외국인이라서 회사에서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다. 반도체를 고만두고 내 앞길을 새로 잡는 기회도 될 것 같아 날자를 잡아 인도로 갔다. 아버지는 Hyderabad 의 유지로 한국으로 친다면 대구시장 정도의 위치 같았다. Hyderabad 는 인도 중앙지대에 있어 국책으로 여기를 공업단지로 육성하게 되어 정부 고위간부들이 다 와 있었다. 나의 여행도 여기에 맞추어져서 미국서 온 VIP 로 대우를 받고 국방장관, 상공장관도 만났다. 국방장관은 국방관련 전자단지를 생각하고 나하고 신무기 개발 등을 이야기했으나 나는 이런 것 하고는 사실 아무런 관련도 없는 반도체 제조 엔지니어인 것이다. 그 당시 인도는 미국을 등지고 소련과 가깝게 지내고 있었다. 인도 국방장관의 걱정은 미국 무기를 살수 없는 상황이라서 자주국방을 어떻게 하는가 였고 소련제무기를 사와도 인도에 맞도록 개조해야 되는데 영어를 쓰는 나라가 소련 system 도입도 문제라고 했다. 인도도 이젠 국방 공백상태를 방치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Rama 이야기로는 가난한 나라지만 막대한 돈이 무기개발과 무기구입에 쓰여질 거라고 귀띔해주었다 나는 그 당시 가능성조차 상상 못했지만 이들은 원자탄 개발을 추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기에 electronics 장비가 필요했다. 내가 인도까지 와서 미국의 정보라도 빼낸다고 의심 받기가 딱 좋은 128
환경의 Setting 이기도 했다. 여기는 무엇을 하던 간에 Infrastructure 가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아주 넓은 원시적인 벌판 밖에 없었다. 나의 전문 분야가 아니다. 내 전문은 반도체 제조인것이다. 인도에서 빈손으로 돌아왔다. 인도에 갈 때에는 트랜지스터 공장이라도 짓자고 할 것 같은 기대가 없지도 않았는데 막상 가서 보니 그런 기대는 10 년을 기다려도 가능할 것 같지가 않았다. 내가 한국에 반도체 공장을 지을 때 한국을 황무지로 봤는데 여기는 그때의 한국하고는 비교도 안 되는 황무지의 황무지였다 내가 사기꾼이였다면 Rama 하고 짜고 인도의 국방 Project 로 크게 한 밑천 했슬 것이다. 두 나라에 회사 채리고 비밀무기개발 을 한다. 나에게는 익숙한 일들이다. 비밀무기 개발은 모든것이 비밀로 추진됨으로 실패해도 그것으로 끝난다. 무기제조 자재 자금을 제 3 국에 빼돌린다. 얼마나 좋은 사기건수 인가? (a) 우리도 이런 나라였다 인도 의 첫날밤 여기서 방향을 바꾸어 인도에서의 체혐한것 몇 가지 이야기하고자 한다 내가 인도를 떠나면서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와 일본식민지였던 우리의 과거를 비교해보았다 내가 입국한 New Deli 공항은 매우 한적한 느낌을 주었다. 비행기에서 내린 사람도 몇 안된데다 나는 중형 가방 하나만 check 했기 때문에 통관은 그냥 가방을 한번 열어만 보이고 끝났다. 내짐이 보세구역에서 밖으로 나가는 table 에 노이기가 무섭게 서너 명의 남자가 달려들어 내 가방을 서로 빼슬려고 하더니 그 중 한 놈이 들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겁이 덜컹 났다. 쫓아서 나도 공항 건물 밖으로 나왔다. 그는 멀찌감치 서있는 Taxi 로가서 내 가방을 차에 실 는 것이다. 이것이 여기 Taxi 기사의 고객 확보 방식이었다. 도둑인줄 알고 나는 진땀을 뺐다. 그냥 달아났어도 나는 별수없이 바라만 보았슬것이다. Hyderabad 에서는 옛날 영국 고관이 살던 개인 집을 개조한 곳에 나를 위해서 새로 정돈한 좋은 방을 마련해주었다 여기는 날씨가 무척 더워서 내가 온다고 해서 하루 전에 자작 Air Con 을 새로 설치했다. 침대 위 청정에 큼직한 바랑개비가 돌고 있고 내 침대 바로 창 밖에 Compressor 가 설치되어 있어서 고단한데도 머리가 울리고 시끄러워 잠이 안 온다. 냉방이 너무 잘 듣는 것 같아서 이에 끄고 자기로 하고 Switch 를 찾았스나 보이지가 않는다. 밤이 늦어 물어볼 사람도 없어서 망설이다 창 밖을 보니 거기에 compressor 용으로보이는 큼직한 switch 가 있었다. 창을 열고 끌려고 했스나 손이 자라지가 않는다. 다행이 창이 커서 창을 넘어 밖으로 나가서 compressor 를 껐다 장치는 전기 motor 하고 compressor 를 따로따로 갔다가 조립해서 만들어서 그 결합 부분이 잘 안되어 진동이 심한 것 같았다. 이제는 됐다고 잠을 청했는데 창에서 무슨 소리가 나고 있다. 커튼을 열고 보니 매미만한 큰 날벌레가 밖으로 나가려고 야단이다. 내가 창을 열 때 들어왔다 밖에 전기등이 있어서 밝은데다 보니까 많은 날벌레들이 여기에 모여 있는 것이 아닌가? 창을 열고 쫓아 낼 수도 없다. 잘못하면 더 벌레가 들어오게 된다. 옛날에는 매미 잡으려 간 일도 있었는데 이젠 맨손으로 잡기에는 이 벌래는 너무 크다. 파리채 같은 것이 없나 찾아 봤스나 그런 것은 안 보인다 모두 포기하고 침대 cover 를 깔고 방바닥 구석에서 자기로 했다. 이젠 또 더워서 못 자겠다. 자는 둥 마는 둥 누었다가 아침식사가 들어와서 일어났다. 이것이 미국 서온 한 VIP 의 인도에서의 첫날밤이었다. 다음날 다른 곳으로 숙소를 옮겼다 129
(b) 25 년 전의 인도 --교통순경 과 단독주택 시내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길가에 가득 차 있섰다. 꼭 무슨 큰 행사가 끝난 뒤 같았스나 이들은 그냥 거기서 사는 사람 들이었다. 밤에는 길가에서 자는 Homeless 들이다. 자동차도 제법 있섰스나 반쯤은 뒤를 보고타는 삼륜차로 만든 Taxi 들과 자전거들이다 네거리는 교통순경이 서있어서 교통정리를 하는데 건널목도 확실하지 않지만 손으로 정지신호를 하면 정지하는데 거짓말 안하고 일분은 걸리는 것 같았다. 가던 차는 서지 않고 계속 가고 많은 사람들이 길을 건늘려고 도로로 나오면 가는 차와 건늘려는 사람들과의 전쟁이 시작된다. 이전쟁의 계속 시간이 일분이다. 사람에 치여서 차가 멈추고 사람 떼가 길을 건는다. 요번에는 그반대로 사람을 멈추고 차를 보내는 신호를 한다 사람 떼가 그칠 줄 모른다 차들이 사람 속으로 밀고 들어온다. 또 일분 정도 의 전쟁을 치르고야 차도에서 사람이 끊긴다 그것도 서서히. 신장로가 생겨서 시외로 나왔다 여기저기 소가 있서서 소가 보이면 속도를 줄였다. TV 에서 소에 대한 시 의회 토론이 있섰다. 소가 시내로 들어오는 것을 막자는 편과 막으면 안 된다는 편의 토론이었다. 신장로에는 차가 별로 없어선지 중앙 분리 선은 없고 차가오면 그때 가서 옆으로 피해준다 paint 가 비싸서 못한 것 같다. 한참 시외로 나오니까 하수도 공사용으로 크다란 직경이 2 meter 길이가 4 meter 쯤 되어 보이는 콘크리트 원통 Tube 를 많이 갔다 놓았다. 가까이 가보니 한쪽은 막고 다른 쪽은 문을 만들어 사람이 이 안에서 살고 있섰다. 여기 Hyderabad 평야 횡단 하수도 공사용으로 일년 전에 갔다 놓았는데 사람들이 들어가 살기 시작해서 여기 인구 가늘고 대책 없이 쫓아 낼 수도 없고 하여튼 지방정부의 큰 골치거리라고 했다. 지금은 이런 신규 단독 주택(?) 을 금지해서 그나마도 구하기가 힘들고 이것도 집이라고 값이 많이 올랐다고 했다. 언제 하수도공사가 시작될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 넓은 평야에 계획에 없던 수천 채의 단독주택이 널려져 있섰다. 우리도 하꼬방(판자집) 시대가 있섰다. 서민들의 생활 근거지라서 철거도 할수없섰다. 9.0 한국 Memory 왕국 현대가 64K DRAM 으로 시작 9.1 나의 7 번째 반도체 사업계획 정주영 현대 회장의 결심 인도에서 돌아오니 나는 현대사람을 만나지도 안았는데 강박사가 현대반도체를 한다고 소문이 나 있었다. 몇몇 사람이 나에게 확인도 했다. 나는 그런 것 모른다고 강력히 부인했다. 그 중에는 나에게 옛날부터 관심이 많은 UC Berkley 대학의 이임성교수도 있었다 이교수는 삼성하고 관련이 있어서 그런지 나의 일거일동에 관심이 많았다 정주영 현대그룹회장 한국 Memory 왕국 건국공신 그러던 중에 현대에서 한국으로 한번 나와 주십시오 하는 부탁이 왔다. 인도가 기대 밖이어서 거절은 안하고 미국에서라면 자문에 응하겠다고 했다. 곧 미국 현지에서의 자문에 동의한다는 연락이 왔다. 한국 과학기술처의 허가를 얻어 현대중공업주식회사 이현태사장과 나의 회사인 미국 KDK Electronics, Inc. 간에 기술용역 계약이 정식으로 체결되었다. 얼마 전에 그런 것 모른다고 현대하고의 관계를 부인했는데 이젠 정말 나는 거짓말쟁이가 됐다. 현대그룹의 신규사업부의 이종운부장이 기술계약에 따라 서니베일로 왔다. 회장님이 반도체 사업을 결심 했스니 사업계획을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다. 나는 이것으로 반도체사업 계획만도 무려 7 번을 하게 되었다. 130
첫 번째는 1968 년 LA 노신영 총영사의 주선으로 이광택공사 와 만들었고 두 번째 는 1970 년 친구인 조해형이와 쌍용구릅 반도체 프로젝트, 세 번째는 1972 년 Unitrode (Taiwan 의 宇 環 電 子 )의 Andy Chew 하고, 그리고 같은 해 네 번째로 Kemco 의 김규한사장과 한국반도체(지금의 삼성반도체), 다섯 번째는 1977 년 코오롱그룹의 원진전자, 여섯 번째는 결실은 안됐지만 1979 년에 내친구인 한국화약 기획실의 오태횐실장과 한국화약구릅 반도체사업(참고), 그리고 7 번째가 지금 하는 현대 반도체사업이 된다. 실제로 정부인가 받고 땅 사서 공장 건설한 것은 모두 4 곳으로 한국반도체가 경기도 부천에, 원진전자가 경기도 용인에 그리고 현대번도체 (지금의 Hynix)는 경기도 이천과 미국 Santa Clara, California 의 두 곳이다. 내가 처음 경기도 부천에 한국반도체공장 계획을 할 1972 년 당시는 생산기술 그 자체를 내가 개발 했고 반도체 세계의 한가운데에 내가 있었다. 그래서 그때 문제는 내가 어떤 위치에 있다는 것을 투자가에게 알리는 것과 또 하나는 내가 미국 비밀무기 개발에 직접 관련했는데 이때 비밀 누설 안 한다는 서약을 했섰다. 이것도 내가 감당 해야 할 문제였다. 지금 이 현대반도체 사업은 정말 그 때와 비교도 안 되는 좋은 조건이지만 제대로 되려면 내가 미국 의 주류 반도체 회사에서 개발 책임자쯤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새 기술 개발 현장에서 손을 뗀 지도 10 년이 됐다. 현대는 무턱대고 반도체사업을 하겠다고 날 찾아왔다. 얼마 전에 면회를 거절 했슬때 내가 무례하게 했다고 매우 섭섭하다고 했다. 날 찾아준 것은 고맙지만 내가 반도체를 잘 알아서라기 보다 다른 한국사람이 없어서 찾아 왔다. 이부장 말로도 미국 전국을 다 뒤졌는데 이런 프로젝트를 맡길 사람을 찾지 못했다고 했다. 사실 나 역시 한국화약구룹의 신규 반도체 사업을 시작 하려고 맡길 사람을 찾았섰다. 나는 한국에 와서 살지 않겠다고 해서 반도체사업을 포기 했다. 미국의 반도체 사업은 그 대부분이 Silicon Valley 에 모여있어 여기서 못 찾으면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자 첨단기술 도입을 국책의 우선과제로 하고 있는데 그 많은 유학생들은 모두 어디로 갔단 말인가? 생각해보면 나도 삼성에서 밀려났지만 공부한 사람들이 학교에서 가르치는 것을 선호하고 풍랑이 심한 생산 현장은 기피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또 내 경험으로도 미국서 자라나지 않은 한 언어 장벽도 특히 생산 현장에서는 무시 못할 factor 인 것이다. 1972 년 한국반도체를 시작할 때와는 달라서 10 년이지난 지금은 회로나 설비 모두가 더 고도화 되어 막대한 자본이 들어간다고 이야기해 주었다. 또 제품이 제대로 나와도 새 회사는 Reliability 에 관련된 Customer Acceptance 라는 장벽이 있어서 회사가 흑자운영이 될 때까지 많은 시일이 걸린다고 했다. 나는 걱정이되서 기회 있슬때마다 반도체 사업의 어려움을 이야기 했는데 내가 아무리 이런 이야기를 해도 먹혀 들지가 않았다. 현대 정회장은 한번 한다고 하면 그냥 밀고 나간다고 했다.. 이부장의 입장은 나는 심부름 온 사람이니까 군소리 말고 사업계획이나 만들어 달라는 거다. 빨리 돌아가서 정부에서 사업계획 승인 받고 땅 사서 공장 지어야 한다고 했다. 내가 처음 "한국반도체"를 시작할 때와는 말 그대로 천지 차이다. 큰 돈이 들고 국내 사장이 있는 것도 아닌 모두가 힘들다고 하는 반도체사업을 자체기술도 없이 이렇게도 쉽게 시작할 수가 있는지 믿어 지지도 않았다. 현대는 정말 대단하구나 하고 새삼스러이 느꼈다. 131
9.2 한국으로서는 64K DRAM 이 최선의 선택 반도체 IC 에서 동일제품의 대량 생산이 가능한 것이 Memory 다. 일본이 이미 미국을 앞질러 양산체제를 가추고 있섰다. 처음에는 미국의 반도체 업체들은 앞으로 전개될 Memory 수요의 급격한 증가가 예상되어 Memory 설계 제조 기술을 확보 해 놓고 시장이 형성되기를 기다리고 있섰다. 그렇지만 일본제품이 값싸게 밀려와서 memory 가격이 폭락하면 도리어 큰 손해를 보게 된다는 것이 그 당시 미국 반도체업계의 공통된 견해 라고 나하고 같이 일하던 David Heck 한테서 들은 일이 있섰다. 즉 미국 반도체 회사들에게는 큰 매력이 없는 제품인 것이다. 나는 그때 막연히 이런 것을 한국에서 만들면 승산이 있겠구나 하고 생각한적이 있섰다. David 는 앞에서도 말했지만 Fairchild 출신의 Silicon Valley 에서 알아주는 반도체 Elite 였다. 일본 반도체기술은 이때까지도 별 것 아닌 것으로 나는 보고 있섰다. 우선 나는 Memory 를 검토해보았다. 1. 양산효과가 가장 큰 제품 2. 설계의 비중이 낮은 제품 3. 시장이 큰 제품 4. 설계를 밖에서 구할 수 있는 제품 5. 계속 성장하는 제품 6. 미국 반도체 업게 에 겁을 안주는 제품 7. 한국의 장점을 가장많이 반영하는 제품 8. 삼성이 안 하는 제품 -- 이런 조건으로 제품을 좁혀가다 보니 결론은 DRAM (Dynamic Random Access Memory) 이다. 처음에는 집적 도를 64K 로 시작해서 64K x 4 로 올라간다. 또 내 전문이 C-MOS 기술이다. 삼성이 무시해버린 기술이어서 나에게는 더 이 기술에 미련이 있섰다. 회로가 커지면 지금은 N-MOS 기술이 DRAM 제조에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앞으로 C-MOS 기술을 써야될때가 온다. 내가 Memory 를 택한 이유에 이러한 나의 미련도 작용하고 있섰다. 제품은 반도체 메모리다. 년 말까지 준비를 모두 끝내고 날씨가 풀리면 곧 바로 공장 건설을 시작하기로 했다. 미국 현지 공장도 동시에 착수하는 것으로 계획이 확정되었다. 9.3 내가 두고나 온 삼성반도체 공장 현대는 삼성에게 큰 관심을 보였다. 지금 상태로는 아무런 걱정도 할 것이 없다고 안심시켰다. 삼성은 기회를 잡을 줄을 모른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회장 눈치만보는 경영이다. 10 년 전에는 C-MOS 반도체 생산기술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첨단기술이었는데 시계칩이 크게 성공하자 강박사를 반 삼성의 죄명을 쒸워 제거 하고 나서 Tr 이나 TV 용 IC 공장으로 전락하여 수출제품에서 내수제품으로 바뀌었다. 기술면에서도 CMOS LSI 에서 Bipolar Transistor 로 132
뒷걸음질 쳤고 그 때 고급 기술자들이 나하고 같이 숙청도 되고 나가 버렸다. 더욱이 LSI 용으로 설계한 최신장비는 아깝게도 가격 경쟁력도 없는 Tr 이나 만드는 후진 반도체공장으로 되어버렸다. 기술면에서도 이젠 이 시설마저도 10 년이된 골동품인 것이다. 반도체에서는 2-3 년만 지나도 생산시설이 경쟁력을 상실하게 된다. 처음에는 13 년이지난 TR 을 만들고도 한국서는 최신기술이라고 생전 Silicon Wafer 는 구경도 못한 사람에게 반도체개발 최고 기술자로 대통령상 표창을 했고 그 후 무엇이던 만들기만 하면 한국최초, 최신, 최첨단, 세게 수준, 의 형용사로 한국의 전자업계를 삼성이 독점 하고 있섰다.. 그룹차원의 전략이라고 많은 Tr 과 새 IC 제품들을 개발했지만 모두가 한물간 흑백 Tv 용 수입 대체품으로 일본이나 미국에서는 오래전에 사라진것 들이 였다. 내다 팔곳도 없었지만 patent 에 걸리지 않으면 인건비도 못 건지는 것 이 되어 회사의 적자는 늘어만 났다. 내가 떠날 때 호황을 누려 정부까지 나서서 Swiss 수준까지 육성한다고 떠들던 손목시계사업은 강박사 작품으로 강박사계를 숙청하고 나서 여기에 관심을보이면 불이익이 올 수도 있어 아무도 돌보지 않았다. Hi Tek 제품의 개렴도 없었고 그냥 내버려 젔다. 결국 회사는 재정악화로 대통령상까지 준 책임자를 문책하고 경영불실이된 회사를 삼성전자에 흡수시켰다. 기술부분을 포함한 많은 간부직이 생전 반도체공장은 구경도못한 회사의 충성파로 채워졌던것이다. 내가 떠나고 몇 년 지났슬 때다. 옛 한국반도체 직원을 만났다. 요새 회사는 어떠냐고 물어봤더니 말 마십시오 오늘도 일이 없어서 노는 사람은 모두 밖에 나가서 잔디밭 잡초 뜯으라고 명령이 내려 저서 잡초 뜯고 왔다고 했다. 이런 소리 들으면 가슴이 아프다. 미국에서는 주가가 오르고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분야가 바로 이 반도체인데 ---. 도리켜 보건데 현대 정주영회장이 아니였스면 삼성은 반도체사업에서도 비료공장이나 시멘트공장 Mentality 에서 벗어나지 못 했섰을것이다. 즉 한번 차려놓고 그대로 몇십년을 우려먹을수 있다고 생각 했슬지도 모른다. 반도체가 이런 식이면 그건 망할 수밖에 없다. 반도체를 살리기 위해서는 삼성은 몇 년 전에 싸구려 가전제품 뒷바라지에서 벗어나 시설도 새것으로 갈고 메모리를 시작했어야 했다. 자사 내에 C-MOS LSI 제조능력을 갖고도 그 가치를 모르고 있섰다. 회장에게 약속한 수입반도체의 대체 외에도 강진구사장은 강박사를 제거해서 강박사가 못 만든 TR 과 TV 용 IC 를 만들어서 더 잘됐다는 평가를 받을려고 했던 것이다. 그당시 Digital 부문에 감각이 있는 사람은 삼성에는 없었다. 사실 이들을 탓 할수도 없다. 알아야 면장이지 전자공업 황무지인 우리나라에서 어디서 이런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겠는가? 일본의 NEC 가 그때 10 년 동안 Memory 에서 세계 정상에 오르고 있는것을 바로 옆에서 보면서도 그게 뭔지도 모르고 멍청이 지냈다. 일본이 N-MOS 로 Memory 만들고 있슬때 삼성은 이미 차세대 기술인 silicon gate C-MOS 기술을 갖고있섰다. Terry Martin / Anh Nguyen 의 지도하에 Process Tuneup 으로 Intel 1101 16K SRAM 도 만드렀다. 나를 숙청한 세력이 들어와서 제품의 우선순위가 바뀌고 강박사하고 관련된 project 는 모두 뒷전으로 돌려 버려젔다. 앞으로 현대가 5 inch wafer 의 최신 시설로 나오게 되면 삼성이 메모리에 참가하더라도 오래된 시설로 생산단가의 경쟁력 면에서는 비교도 안 된다. 반도체사업은 기술이나 다른 여건이 같으면 그 승부는 Wafer 크기로 판정이 난다. 133
삼성이 반도체를 포기하지 않는한 현대가 메모리를 만들려는 것을 알면 틀림없이 이들도 메모리를 한다고 나올 것이다.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의 제품이 없기 때문이다. 현대는 이런 큰 프로젝트를 삼성이 모르게 할 수가 없으니 이번에 현대를 보고 삼성이 눈을 뜰 것 같은 예감과 기대도 나에게 없었던 것은 아니다. 날 쫓아낸 곳이지만 그래도 내가 설계하고 감독하고 지은 건물, 내가 일하던 사무실, 비가 새서 야단 떨던 Diffusion Room, 나의 한평생을 거기에 두고 나왔다. 그냥 뺏기고 나왔다는 것이 나에게는 더 정확한 표현이다. 좀 잘됬스면 좋겠다. 나는 이젠 아무 관련도 없지만 껍데기만이라도 오래 오래 남아 있어주었스면- 아직도 나는 삼성에 미련이있고 잘되기를 바라고 있섰다. 반도체공장의 중요성은 날이 갈수록 강조되고 전자교환기 사업에도 삼성은 반도체공장을 내세워 다른 업체를 따돌릴 수가 있섰다. 그러나 집안 충성파 만으로는 반도체특성상 살아나기는 힘든 상태였다. 그렇다고 당장 삼성이 Memory 를 한다고 나올 것 같지는 안았다. 그럴수는없다 현대에 맡설려면 적어도 현대와 같이 새 5 inch 생산 Line 을 설치해야 된다. 그럴 라면 새로 땅 사고 공장을 지어야 한다. 이렇게 큰 투자를 현대가 한다고 알지도 못하는 Memory 에 회장한테 가서 돈 달라고 할 정신 나간 사람은 아무도 없다. 현대를 보고 있다 돌다리를 여러번 두들겨보고 시작 하게 되면 1, 2 년 후가 된다. 그렇다고 이회장이 반도체를 아는 전문가도 아니다. 본인은 모르고 있지만 그 당시 Hi Tec 을 Low Tec 으로 전환시켜 불실로 만든 장본인 인 것이다. 그리고 적자가 늘었다고 책임자를 내보냈다. 이런 상황에서 밑에서 반도체에 엄청난 돈을 드려 국내 시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알지도 못하는 memory 만들자고 회장을 설득 시켜? 말도 안 된다. 밑의 사람들은 그 반대 일거다 회장이 한다고 해도 겁이 나서 말릴 것이다. 9.3 강박사 현대전자 사장내정--계획 데로 추진 나는 자문만 하고 그냥 끝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정주영회장이 미국 서니베일로 나를 찾아 왔다. 나의 자문 보고서를 보았다고 했다. 나를 설득하기 위해서라기보다 이미 사장으로 내정 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 같았다. 현대의 최고 높은 분이 여기 끼지 오셨는데 No 라는 말은 차마 할 수도 없었지만 나에게 반도체 사업의 전권을 준다고 했다. 삼성이 나의 반도체회사를 인수하고 나서 나는 몇 년을 거기서 사장이라고 있섰는데 이병철 회장하고는 의미있는 대화라고는 한적이 한번도 없섰다. 특히 반도체에 남다른관심을 갖고 있서서 사재를 털어 나의 한국반도체회사를 인수(내국인지분 50%) 했다는 이건희 회장은 알지도 못하고 맞난일도 없다. 사실 나는 쫓겨날 때까지 이병철 회장이 내 회사를 산 걸로 알고 있섰다. 정주영 회장의 반도체사업 동기는 그 전해(1981) 전경련회장으로 있슬때다. 정회장은 일본서 초대한 matsushita 회장과 아남의 김향수사장을 동반하여 세미나 후에 전두환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 자리에서 matsushita 화장으로부터 강력한 반도체사업 진출의 권유를 받고 여기에 全 대통령도 합세하자 거기서 마음을 굳쳤다고 그 당시 전자공업 진흥업무를 담당한 송태욱씨의 말이다. 또 이부장 말로는 덩치큰것만 잘하지 덩치가 작은 정밀공업은 못할 것이라는 일반의 인식과 이러한 정밀산업도 삼성을 이길 수 있다는 재벌 총수의 EGO 에 반도체사업이 딱 맞아 떨어졌다는 것이다. 낙하산이란 단어를 여기에도 쓸 수 있다면 이것이 정주영 자신이 만든 낙하산 사업이였다. 뚱딴지같이 난데없는 전자의 핵심분야인 일본도 허덕이는 반도체다 모두가 어렵다고 하기 때문에 결심한 것이다 정회장의 결심은 확고했다. 이러한 사업동기는 내가 충분히 이해할 수 있고 삼성의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보다 솔직해서 마음에 들었다. 정회장과의 대화에서도 느꼈지만 전자공업도 선발업체인 삼성을 넘어설 수 있다고 134
정회장은 확신하고 있섰다. 자기는 삼성처럼 국내시장에서 쉽게 돈 벌 생각은 없고 전세계가 자기시장 이라고 했다. 나하고 같은 생각이다. 정회장 하고는 상당한 시간을 반도체사업의 특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많은 사항에서 의견이 일치했다. 삼성이 이랬다면--. 아쉬움이 앞섰지만 지난 일은 잊고 다시 앞날을 생각해볼 기회인 것 같았다. 특히 나는 미국에서 살고 싶다고 했더니 자기는 그런 것 상관 안 한다는 것이었다. 삼성하고는 보는 차원이 다른 것을 나는 느낄 수가 있섰다. 과연 정주영이구나 하고 나의 마음은 변하고 있섰다. 곧 이어 이현태 현대건설사장으로부터 비행기 1 등석으로 한국으로 초청이 왔다. 서울서 수행원이 나와서 울산으로 내러 갔다. 현대자동차 공장을 구경하고 다른 시설도 보여 주었다.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정회장의 전시장이다. 정말 잘난 사람이다. 5000 만에서 하나뿐인 사람이다. 12 년 만에 쌍용의 반도체사업을 같이 시작했던 손명원씨를 여기서 만났다. 매우 반가웠다. 쌍용반도체사업 준비로 Sunnyvale 에 와서 나하고 반년쯤 같이 지냈다. 쌍용반도체사업은 박정희 정권 때 쌍용회장 김성곤씨가 관련된 정치파동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후에 손명원씨는 쌍용자동차 사장도 했다. 그때 명원이는 현대건설의 부사장으로 있다고 하면서 곧 집안 사람이 된다고 나를 축하해 주었다. 저녁에 고급 요정에서 정주영회장이 저녁과 술자리를 마련해 주어서 동석했다. 내가 손명원부사장을 초대했어야 했는데 미처 생각을 못했다. 현대 반도체사업에 데려와서 한국공장 책임자가 좋겠다고 생각도 해보았다. 내가 주빈인데 술 못한다고 말할 수가 없어서 주는 술은 다 받아 마셨다. 그 후의 절차는 취소하고 숙소로 돌아와서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모든 사람들이 사장이라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서울을 떠날 때 이부장이 나에게 조용히 알려주었다. 정회장한테 여러 곳에서 압력이 들어오고 있다는 것이다. 김경욱이가 강박사가 울산까지 온 것을 알고 이현태 사장을 만나고 자기 아버지인 정치가 김주인, 코롱 이원천회장, 이병철회장을 동원해서 원진전자의 예를 들면서 강박사의 사장직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다고 했다. 강박사한테 이런 큰 사업을 맡기면 걸과는 뻔하다는 것이다. 원진전자에 있던 김경욱이는 그 때 현대에와서 임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삼성이 현대에 심어노은 인물이다. 모두가 밀어 주어도 어려운 사업인데 집안에 적이 있스니 역시 여기는 내가 일할 곳은 아니다. 85%까지 갔던 내 마음이 0 % 로 완전히 식었다. 나는 미국에 돌아오자 마자 마음 변하기 전에 사장직을 안 한다고 통보했다. 서울서는 강박사의 부임이 늦어지더라도 시간낭비 말고 강박사 Plan 대로 반도체사업을 추진하라고 명령이 내려저 있섰다. 내가 한국으로 안 온다는 것이 확인되자 대안이 없던 정주영회장은 자기가 직접 전자 사장으로 취임했다. 여기가 한국반도체사의 일대 전환 점이다. 다음에서 다시 설명 하겠다. 내가 추천한 배명승, 남종우, 천동우, 이용각등 은 모두 현대전자의 요직에 임명되었다. 이용각이를 빼고는 이들은 반도체 주류 회사에서 일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내가 알고 있는 한국 엔지니어로는 반도체사업에 가장 가까이에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나의 고등학교 후배이기도 했다. KDK Electronics, Inc. 의 전화번호는 모두 바뀌어졌고 그 이상 현대하고의 연락은 받지 않았다. 이것으로 나의 반도체 생애는 영원이 그 막을 내렸다. 앞으로는 반도체를 떠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는 거다. Sunnyvale 사무실도 정리하고 집으로 옮겨왔다. 135
9.4 한국 Memory 왕국 건국의 진실 - 나의 사장직 사퇴가 시작점 한편 삼성 이병철회장은 현대의 전자공업 참여 소문은 오래 전부터 듣고 있섰지만 처음부터 어려운 반도체에 진출 한다고는 생각을 못하고 있섰다. 그러다가 현대는 Tv 와 같은 민생용 전자는 건너뛰고 computer 의 핵심 반도체부품 부터 만든다는 전략이 알려졌다. 더욱이 강기동박사의 현대전자 사장취임을 막는데에는 성공 했스나 사장 적임자를 못 찾아서 정주영회장이 직접 사장직을 맡은데에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이렇게되니 현대 정회장에 맞설사람은 자기밖에 없는 것이다. 이병철 회장은 직접 자신이 발벗고 나설수밖에 없섰다. 반도체 전략 긴급 검토 명령이 내려젔다. 반도체는 내 영역이다. 현대에 그냥 내줄 수는 없는 것이다. 삼성은 지금까지 반도체관련 사업검토를 안 한 것은 아니였다. 합작이나 기술도입 형식으로 검토하고 있섰다. 워낙 기술료가 비싸다 보니 잘못하면 남 좋은 일로 끝날 것 같아 돌다리만 계속 두드리고 있던 상태였다. 현대와 같이 혼자서 해본다는 정주영 식 뱃장은 없었다. 이번은 다르다. 현대가 독자적으로 한다고 나왔스니 그냥 보고만 있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삼성에서도 많은 인원이 Silicon Valley 를 찾아왔다. 반도체에 관한 한 여기밖에 찾아갈 곳이 없다. 와서도 만나는 사람은 항상 정해져 있다. 가만 앉아있서도 한국의 정보가 모두 나에게 집중적으로 몰려오고 간접으로 자문을 요청하기도 한다. 나의 현대반도체 자문보고서는 여기 Sunnyvale Elcamino Real 에서 종교서점을 하는 분에게 한글 타자와 제본을 부탁해서 만들어 왔는데 부탁한 것보다 많이 만들어와 돈을 더 달라고 해서 더는 필요 없스니 남어지는 버리라고 했섰다. 삼성 손에 들어갈 가능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 였지만 어차피 모든 내용을 알게 될 것이고 보안을 해 보았자 삼성 손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1973 년에도 한국반도체 사업계획서를 경제기획원에 내자 마자 그 내용이 삼성에 알려졌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였다. 삼성이 보고서도 거의 동시에 위로 전해졌다. 삼성 보고서는 나는 보지 못했지만 Microprocessor 개발을 포함한 반도체전반에 걸친 방대한 것이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내가 볼때 결론은 뻔하다. 삼성이 반도체 세상을 안다면 한국에서 할만한 품목은 Memory 외에 다른 것이 있슬수가없다. 그것도 DRAM 한품목뿐이다. 1982 년 11 월, 현대전자 Memory 계획서가 상공부에 접수됬다. 처음 계획한 날짜보다 좀 늦어젔다. 제품은 64 K DRAM 으로 시작해서 미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공장 건설로 사업을 시작한다는 내용이다. 이병철 회장의 마음이 급해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것이다. 급히 서둘러서 1983 년 2 월에 나도 memory 하고 대형 반도체 신규사업을 동경서 발표했다. 새로 땅을 사서 한국과 미국에서 시작한다는 현대의 사업공식( 公 式 ) 그대로다. 사실 현대에 지지않을려면 이방법밖에 없는 것이다. 재벌 총수의 기득영토 (반도체)를 침범 당할 수 없다는 rival 의식에서오는 오기 에 가까운 결정이 였다. 삼성의 많은 참모 들이 이건 아닌데 하고 어리둥절했다. 몇몇 간부들은 좀더 심중하게 검토해야 된다고 하면서 조심하는 의견을 표명했었다. 모든 사업을 상의하던 홍진기 회장 에게는 발표 바로 전에 알리기만 했다고 한다. 강박사가 선정한 현대의 반도체 Memory 사업이 엉뚱하게 이병철회장의 동경 발표로 이어졌다. 이발표는 동경에서 이루어지긴 했스나 일본보다는 정주영회장 드르라고 일부러 크게 북을친것이였다. 전 예가 없는 삼성의 대형 HI TEK 독자 개발 계획이다. -- 미국 Micron technology 사에서 일부 기술을 사오기는 했지만--. 내가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애들 장난 같다고 느꼈저서 믿기가 어려웠다. 이미 반도체 사업을 시작하고 136
10 년 가까이 내버려두고 나서 지금 와서 갑자기 현대에 겁 먹고 더 크게 현대와 똑같은 공식으로 나온 것이다. 갖인 사람 그것도 대단히 많이 갖인 재벌총수의 독점의욕 그리고 경쟁심리를 나는 제대로 모르고 있섰다. 돈이 문제가 아니다. 반도체를 일부라도 내줄 수는 없다. 이때 묵묵히 사업을 실천에 옮기고 있는 현대가 대견스러웠다. 처음에는 정주영 회장이 나도 정밀공업 하면서 엉뚱한 반도체 삼성 이병철회장 Memory 왕국 건국 memory 사업에 뛰어 들었고 이것을 보고 있던 이병철 회장이 급해져서 네가해? 그럼 나는 더 크게 해- 하면서 장군 멍군 하고 나온 것이다. 꼭 애들 장난 같은 이야기지만 이것이 한국 반도체 memory 왕국 건국의 진실이다. 9.5 64K DRAM 내가 만든 부천 공장에서 나오다 이병철 회장 Memory 왕국건국 경기도 부천에 있는 반도체공장에 비상이 걸렸다. 64K DRAM 을 최단 시일에 만들어 내라는 구릅 총수의 명령이다. 이것 역시 반도체 memory 가 무언지도 모르면서 높은 데서 내려온 낙하산 명령이다. 내가 택한 품목이기도 했지만 다른 더 좋은 품목이 있슬수가없다. 따라서 잘못된 선택은 아닌것이다. 이보다 8 년전 나는 1975 년 초에 시계칩을 생산하기위해서 생산 Line Tune up 으로 C-MOS 4000 series memory 를 만드러서 TEST 했다. 그러니까 한국땅에서 재일처음만든 반도체제품이 TEST 용 이긴 하지만 memory 였다. 이때 생산공정은 Terry Martin 이 Test 는 Anh Nguyen 지도하에 이루어졌다. 또 얼마후 부천공장에서 Terry 가 Silicon Gate CMOS 공정을 설치해서 그 Test 도 할겸 Anh Nguyen 이 Intel 의 1101 을 바탕으로 16K SRAM 을 만드렀다. 이때 옛날에 구입한 Teradyne Tester 로 Test 하느라고 애 먹었다고 하면서 Memory 를 만들려면 전용 tester 를 사야 겠다고 Anh 이 나에게 이야기 한일이 있었다. Terry 는 내가 미국 Stewart Warner 사 에서 부터 데리고있던 반도체 생산 기술자로 한국반도체회사의 C-MOS Line 설치를 지희 감독 했다. Anh 은 한국반도체 설립때 국내서는 찾을수가 없어서 미국서 데려온 Digital/ test Engineer 였다. 둘이다 나의 설득으로 나를 믿고 한국까지와서 고생만했다. 이들은 반도체기술을 한국에 정착시킨 말 그대로의 진정한 최고 공로자 들이다. 나는 우리나라 현대화에 이들보다 보상도 없이 Hi Tek 에 공헌한 외국인은 없다고 본다. 나는 이들에게 채용할때의 약속도 못 지키고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그냥 오해속에서 헤어졌다. 부천공장 으로서는 memory 는 하나도 낯선 제품은 아닌것이다. 미국 현지에서 급히 한국인박사 Engineer 들이 여러 명 채용 됐다. 다른 회사에서 서로 다른 배경으로 자라난 박사님들을 별안간에 모두 부천공장 한집웅 밑에 투입했다. 위에서는 64K DRAM 생산이 박사들이 많아서 쉽게 됄줄알았으나 선장이 너무 많아젔다. 배가 방향을 못잡는다. 모두가 급해젔다. 시간이없다. Design 은 사와야 된다. 그렇게되면 여기에 따른 제조기술, 테스트기술 까지도 모두 Design 에 마추어야된다. 이때 삼성의 재수도 좋았다. 미국의 memory 제조업체인 Micron Technology 사는 재정난으로 허덕이고 있을때였다. 미국 Micron Technology 사의 64K DRAM 설계와 sample 칩 3 천 500 개를 급히 돈주고 구해왔다. 원체는 3000 개로 되어있는데 좀더달라고 졸라서 몇 개를 덤으로 더주었다고 들었다. 137
기술자도 여러명을 보내서 생산공정도 뵈워 왔다. 새로 사온 설계는 N-MOS 로 되어 있어 C-MOS 보다 한단계 쉬운 공정이다. 그동안 내버려진 부천공장의 C-MOS 생산 라인을 외부에서 만든 N-MOS 공정으로 하향 조정 하여 동경발표에서 9 개월만인 1983 년 11 월에 64K DRAM 의 시제품이 나왔다. Design 을 일직이 사왔스면 더 속히 나올 수도 있섰다. 삼성은 자체실력으로 개발했다고 크게 선전하고 개발 책임자에 대통령상을 수여했다. 현대로서는 예상하고 있섰던 일이지만 놀란 것은 일본이다. 일본이 DRAM 생산에서는 미국을 앞서고 있슬때였다. 적어도 2-3 년은 걸릴 거 라고 마음 놓고 있섰기 때문에 이들 눈에는 삼성이 불가능을 해낸 것이다. 일본사람들은 1975 년에 한국에서 LSI-CMOS 시계 칩이 나왔다는 것을 모르고 있섰다. 민생품이 여서 그때 미국 ICII 에서 시계칩을 사다가 조립만 했다고 밖으로 알렸섰다. 강박사는 혹시라도 있슬수있는 Trade secret 의 국제분쟁-미 국방성에서 제기할수도있는 국방기술의 해외유출 등을 우려하여 한국서의 Wafer Fabrication 에 연막 전을 쓴것이 성공 한것이다. ICII 사는 강박사가 한국반도체주식회사 설립을 위해서 미리 미국 sunnyvale 에 세운 현지법인이고 한국반도체회사에서 일한 주요 기술지들은 모두기 미국 ICII 사에서 출장 나온 것으로 되어 있섰다.. 64K DRAM 시제품이 삼성의 부천공장에서 나왔다. 이 사실이 삼성의 Memory 사업에 아주 중요한 역사적 시발점이 된 것이다. 기술적으로는 최신 설계(씨앗)를 밖에서 구해오면 최신제품이 나온다는 것을 반도체를 모르는 높은 곳에서 감을 잡았다. (후에 한국에 없는 설계전문가들을 파격적 대우로 모셔오게 됨) 물론 집안에서 그런 설계를 소화할 수 있는 시설과 제조 능력(밭)이 있어야만 된다는 전제하에서다. 그 당시 삼성은 비옥한밭이 경기도 부천에 있섰던 것이다. 10 년이지난 골동품이 된 시설이지만 아직도 몇 개의 시제품 제조에는 문제가 없었다. 외부로는 이회장이 자존심을 회복하고 자신과 용기를 얻은 계기가됬다. 삼성은 무서운 회사다. 삼성을 비웃고 내려다보던 일본사람들이 그 이상 무시 못하게됬다. 대형 반도체 사업을 우려 했던 staff 들도 더 할말이 없어젔다. 더욱이 이들에게는 일본사람들이 놀랐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다. 이회장은 많은 점수를 땄다. 자기네들도 모르는 64K DRAM 의 선택은 이병철 회장만이 할수있는 용단이라고. -이것은 맞는 말이다-. 현대 정회장 의 덕분이라고 했스면 더 정확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DRAM 의 선택은 앞을 내다보는 구릅 총수의 신통력으로 승화 시켰다. 9.6 Memory 왕국의 원동력- 두 재벌총수의 기 싸움 내가 Memory 를 선택하고 나서 삼성하고 정면으로 부딪치지 않아서 잘됐다고 생각하고 있섰는데 현대 64K DRAM 계획이 살공부에 접수되고 3 개월 후에 이회장이 그것도 현대와 똑같은 공식으로 나도 하고 나올 줄은 정말 몰랐다. 이병철 회장은 모든 것을 꼼꼼히 분석하고 결정하는 스타일로 알려져 있고 나도 그렇게 알고 있섯기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삼성이 전자사업을 시작할깨 기존업체들이 못하게 방해한 것을 이회장은 잘 알고 있다. 정회장의 반도체 진출을 막고 십지만 이젠 세상도 달라 저서 내놓고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업으로 그리고 돈으로 이겨야 한다. 나는 가까이서 양쪽을 다 보면서 이런 것이 드라마구나 하고 얼마 전에 TV 에서 맹수들이 남의 영역을 침략하고 또 자기 영역이라고 목숨을 내걸고 방어하는 것과 비교가 되었다. 좁은 땅에서 한국 최대의 두 재벌총수가 반도체 memory 가 뭔지도 모르면서 동시에 memory 판에 재벌의 명예(자존심?) 를 걸고 뛰어든 것이다. 현대 역시 삼성에 지지않을려고 정주영회장은 나 때문에 공석이 된 사장직을 직접 자기가 맡아서 미국과 한국에서 공장건설이. 138
추진됐다. 적격자가 없어서 그랬다고는 하지만 정회장이 직접 반도체 사장직을 맡은 것은 현대로서는 잘못이였다. 나는 지금까지도 정주영 회장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어지지 않고 있다. Silicon valley, Santa Clara 에 있는 높은 건물의 Intel 회사 옆에 제법 큰 빈터가 있섰다. 나는 여기가 좋다고 이종운 부장한테 이야기한 일이 있섰는데 얼마 후에 현대는 바로 이 터에 현지공장을 짓고 있섰다. Intel 의 부속 건물 같이 나에게는 보였다. 이미 나는 반도체에서 손을 뗀 후 였지만 여기 San Jose 의 Silicon Valley 를 관통하는 101 Free Way 를 지날 때마다 높지는 않지만 꼭 한번은 처다 보고 지나가는 건물이 되었다. 64K DRAM 의 시제품이 나오자 이병철회장은 마음 놓고 돈주머니 끈을 풀게됬다. 현대 정주영회장 역시 같은 Memory 를 목표로 많은 돈을 밑 빠진 독에 물 퍼붓듯이 퍼붓고 있섰다. 정회장의 스타일이다. 정주영 회장의 밀어붙이는 뚝심은 이병철 화장의 현대에 질 수 없다 의 All-In 의 일종의 오기와 같은 투자 전략이 되어 구릅의 운명을 건 이병철 대 정주영의 기 싸움으로 발전했다. 이 싸움판이 다름 아닌 Memory 였다. 이 두 재벌 총수의 기 싸움으로 memory 한 부분에만 집중된 막대한 자본투자 경쟁은 도리어 오늘날 Memory 왕국의 원동력 이 되어 튼튼한 기초가 만들어진 것이다. 삼성은 그 동안 막대한 수업료를 냈고 이제는 반도체 정규 코스에 들어 섰스나 현대는 초보과목에 등록을 마친 상태였다. 얼마 후 정회장은 반도체과목에서 낙제를 하고 물러났다. 오늘날 반도체에서 정회장의 실패는 알아도 그의 공헌을 아는 사람은 없다. 한국반도체 Memory 왕국의 건국 공신은 현대의 정주영회장인 것이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 Memory 에서 현대를 크게 앞지른 삼성은 요번에는 나도 자동차 하고 현대와 자동차 의 싸움판에 뛰어들게 된다. -----24 년후 2007 년 7 월------ Internet News 에 현대전자로 시작한 Hynix 반도체가 삼성반도체를 따라 잡았다는 기사가 크게 나있섰다. 그렇다면 세계 1 위(memory 에서) 라는 삼성반도체를 따라 잡았다니 Hynix 가 세계 No.1 이 되었다는 것이 아닌가? 물론 회사 전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 겠지만- 싶었다. 그러나 Hynix 에는 나를 아는 사람도 없고 또 내가 아는 사람도 없섰다. 하여튼 축하 E-Mail 이라도 보내고 9.7 내 이름으로 받은 유일한 상장 여기 사진은 나의 반도체업적을 내 이름으로 외부에서 받은 딱 하나 있는 상장 수상 장면이다. 아마도 한국반도체가 손목시계 제품을 성공 시키고 상공부에서 시계산업 육성안을 추진할 때인 1975 년 말인것 같다.. 그 당시 상공부장관이 장예준씨였다. 나의 반도체 개발로 많은 크고 작은 공로상 표장장이 주어 졌지만 모두가 일은 내가하고 표창은 다른 사람이 받았다 반도체 국산화로 수출의날에 받은 상공부장관상 139
9.8 내 계획으로 시작한 두 반도체회사 전세계 시장 10% 이상 공급 내가 집에서 이것저것 뒤적거리며 만든 사업계획으로 시작된 한국반도체주식회사와 현대전자는 지금은 삼성 반도체와 Hynix 로 그 이름도 바뀌고 주인도 바뀌었다. 모두 Memory 분야에서 세계정상을 바라보는 대 회사로 자라났다. 다음표에서 보는 바와같이 2006 년 기준으로 삼성반도체는 세계에서 둘째 Hynix 는 아흡째가 되었다. 두회사를 합치면 전세계 반도체시장의 10.2% 를 공급하고 있는것이다. KDK 에서 같이 있던 David Heck 이 무심코 던진 한마디에 Hint 를얻어 선택한 Memory 가 두 재벌의 엄청난 투자와 많은 기술인력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한때는 부녀자의 머리가락을 팔아서 연명하던 세계에서도 최하의 경제권의 나라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반도체 Memory 왕국이 건국된 것이다. 반도체 전체시장은 Memory 가 아닌 분야가 Memory 시장보다 훨신 더 크다. 이 분야도 한국이 개척 한다면 명실공히 세계 반도체 왕국이 될 날이 곧 올것이다. 2008 년 봄 미국 Reno Nevada 에서 강기동 2005 Rank Top 10 Worldwide Semiconductor Vendors by Revenue 2004 Rank Company 2005 Revenue 2005 Market Share (%) (Millions of U.S. Dollars) 2004 Revenue 2004-2005 Growth (%) 1 1 Intel 34,590 14.7 30,730 12.6 2 2 Samsung Electronics 18,347 7.8 16,276 12.7 3 3 Texas Instruments 10,119 4.3 9,170 10.3 4 7 Toshiba 8,984 3.8 8,538 5.2 5 6 STMicrolectronics 8,821 3.8 8,691 1.5 6 4 7 5 Renesas Technology Infineon Technologies 8,291 3.5 9,001-7.9 8,205 3.5 8,945-8.3 8 9 Philips Electronics 5,959 2.5 5,689 4.7 9 12 Hynix Semiconductor 5,723 2.4 4,648 23.1 10 8 NEC Electronics 5,657 2.4 6,438-12.1 Others 119,939 51.1 113,891 5.6 Total Market 234,635 100.0 222,017 5.7 Source: Gartner Dataquest (April 2006) 140
9.9 이건희 회장 앞으로 보낸 편지 - 모두 회답이 없다 편지 - 1 141 이회장앞으로 보낸편지와 배달증명
편지 - 2 이건희 회장님 보십시요. 2011 년 3 월 30 일 Reno NV 저는 1973 년도에 부천에 '한국반도체주식회사' 를 설립하고 삼성에 반도체 기술과 사업을 처음으로 들여 온 강기동 입니다. 현재 미국 Reno Nevada 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날 삼성을 세계 제일의 전자회사로 키우신 회장님의 역량을 옛 삼성의 일원으로서 진심으로 존경해 마지 않습니다. 그 동안 여러 번 서신을 올렸습니다만 바쁘셔서 미처 못 보신 것 같습니다. 오래된 일이라서 제가 편지를 올리게 된 배경을 대충 말씀 드리겠습니다. 이 일은 회장님께서 당사자이시기 때문에 그 누구를 통할 수 없는 내용이라 판단됩니다. 회장님께서는 저의 '한국반도체주식회사'를 1974 년말에 저를 포함하는 조건으로 인수하셨습니다. 회장님이 인수하시고 3 년후에 이름이 삼성반도체 로 바뀌었습니다. 그때는 중동전쟁이 몰고 온 유류파동으로 인한 세계적 불경기의 와중에서 가까스로 도입된 제조설비 설치를 겨우 끝낸 상태로 시제품도 나오기 전이였습니다. 회장님께서는 반도체 양산기술의 정착과 제품의 전량수출이 이루어지면 인수하신 회사의 10%의 지분을 저에게 주시는 것으로 약속 하셨습니다. 첫 제품인 C-MOS LSI 시계 칩은 심한 불경기에도 불구하고 예상을 뒤엎고 없어서 못 파는 공전의 Hit 를 하여 생산 3 개월만에 월별 회계가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제가 떠나던 1976 년에는 수출실적이 $4,184,989 가 되었습니다. 당시 자본금의 4 배가 넘는 액수 입니다. 이 사실은 삼성반도체통신 10 년사 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해당 면을 편지 끝에 첨부 합니다. 제가 만든 전자손목시계는 청와대에도 공급되어 외국 귀빈 선물용으로 쓰여졌고, 상공부에서는 전자시계사업의 스위스 수준으로의 육성 안이 마련되어 조사단이 해외로 파견 되는 등 저의 위상이 하루아침에 올라 갔습니다. 여기에 놀란 그룹 내의 일부 세력은 급기야 저에게서 시계 사업부를 떼어내고 저를 자기네들 앞날의 걸림돌로 단정하고 모략 중상으로 저를 제거하였습니다. 창업자 사장이 회사를 성공시키고 떠나는데 간소한 송별회식도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뿐입니까 곧 이어 강기동계 라고 저를 믿고 따라와서 저하고 같이 고생한 사람들도 제거 되었습니다. 제가 어려운 환경에서 창업한 반도체회사는 지금 세계 으뜸으로 성장했고 당시 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공을 인정 받은 한 임원은 단시일에 국가 최고 반도체 기술자가 되어 대통령상도 받고 승진도 했습니다. 삼성은 큰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던 최첨단 C-MOS LSI 기술을 무상으로 얻은 것입니다. 저는 삼성에서 월급을 포함한 금전적인 보상은 한 푼도 받은 적이 없습니다. 저의 월급은 미국에 제가 먼저 세운 ICII 사로부터 받았습니다. 혹시 미 국방성에서 제기할지도 모를 국방기술 해외유출 에 대한 저의 대비책의 일환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 '한국반도체주식회사'의 역사는 지워지고 제가 한 일들은 모두 삭제 되거나 다른 사람이 한 것으로 기록 되었습니다. 142
특히 미국서 제가 데려온 설계기술자중 한 사람인 Nguyen Anh 이 C-MOS silicon gate 공정 조정용으로 Intel 1011 의 16K S Ram 을 만들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제가 설립한 부천공장에서 1983 년에는 C-MOS 공정보다 만들기가 쉬운 N-MOS 공정으로 64K DRAM 이 6 개월이란 단시일에 나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삼성은 정말 남에게 말 못할 도리에 옳지 않은 일을 저희들에게 했습니다. 이들은 제가 무슨 죄를 지었길래 자기네들까지 쫓겨나는지 영문도 모르고 후환이 두려워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당시 직장을 잃은 이들에게는 반도체 기술은 쓸 데도 없었지만 삼성에서 쫓겨났다는 이유만으로 안정된 직장에 취직도 못했습니다. 이들의 억울한 희생 위에 오늘날 세계 일류를 자랑하는 삼성 반도체가 서게 된 것입니다. 저는 어려운 환경에서 회사를 성공시키고도 저 때문에 고통 받은 국내외의 많은 동료들에게 지금까지 제 능력으로는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지고 살아 오고 있습니다. 회사를 떠나면서 저는 약속 받은 저의 10% 지분'을 요구 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대답은 지금 막대한 자금이 들어가고 있으니 돈을 벌 때까지 좀 기다려 주십시오 였습니다. 안 주겠다는 것이 아니니 저로서는 기다리는 수 밖에 없었 습니다. 저의 지분은 오랜세월동안 삼성반도체사업에 기여한 것입니다. 대 삼성이 강박사 돈을 떼어 먹겠습까? 라며 걱정 말라고 하신 강진구 회장님은 오래 전부터 건강이 좋지 않으셔서 아무런 도움도 줄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약속하신 저의 회사 지분은 오늘날 계산하기도 어렵습니다만 간단히 생각하여 당시 '한국반도체주식회사' 발행주식 100 만주(자본금 $100 만불)중 제 몫은 10%인 100,000 주 입니다. 현시가로 환산하여 약 900 억에 해당합니다. 지금의 삼성전자 규모나 반도체기술 불모시대에 제가 이룬 업적에 비한다면 보잘것없지만 지금이라도 약속을 이행하여 주심이 마땅하다고 생각 됨이다. 이제 회장님께서는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받아 들이시어 지워버린 '한국반도체주식회사' 역사를 되살리시고 60-70 년대 삼성 나아가서 한국반도체산업 개척사에 새로운 전설 한 장을 추가해 주십시오. 회사이름이 바뀌었다고 해서 역사가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부당하게 해고된 창업 공로자들의 노고에 대한 응당한 보상은 당연히 하셔야 된다고 봅니다. 미국은 2 차대전 당시 나라가 격리 수용하여 고통 받은 일본계 시민들에게 뒤 늦게나마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을 하였습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을 넘어서 세계 정상에 오르신 대 재벌기업가 이십니다. 삼성이 신뢰와 양식으로 상징되는 기업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부디 건강하십시오. 멀리서 회신을 기다리겠습니다. 강기동 올림 Ki Dong Kang 15240 Redmond Loop Reno, NV 89511 USA 775-849-0872 kdkang@gmail.com * 삼성이 발간한 삼성반도체통신 10 년사 Page 172 * (앞 P.118 보십시요) 143
9.10 참고 자료 1)정주영 아산 박물관 내의 www.asanmuseum.com 자료관 2) 현대의 Memory 선택 3)강진구회장 회고록 사실과 다르다 4) 나의 이력서 1)정주영 아산 박물관 내의 www.asanmuseum.com 자료관 1982 년 8 월, 이현태 그룹종합기획실장을 미국으로 보내서 재미 교포 회사 KDK Electronics 와 전자 사업의 기술과 제품 전략에 관한 조사 용역 계약을 체결했다. 그리고 그 조사 결과와 그룹종합기획실의 기초 조사를 토대로 기본 전략을 만들었다. 한국의 생산 능력과 미국의 엔지니어링의 설계 능력을 결합하는 전략을 채택, 최단기간 내에 일본을 제압한다. 이를 위해서 미국에 현지 법인을 설립, 미국에서 설계를 담당하고, 국내에서는 미국에서 개발한 제품을 양산하는 이원화 체제를 갖춘다., 목표 기술 수준은 선폭 2 미크론(당시 국내 수준 5 미크론), 웨이퍼 크기 5 인치, 집적도 64K 내지 2 백 56K 급의 VLSI(고집적 메모리 반도체 회로)로 한다. 1982 년 12 월 사업 계획서를 상공부에 제출했고, 1983 년 2 월 23 일 현대전자산업주식회사 의 설립 등기를 마쳤다. 그리고 20 여 일 후인 3 월 16 일에는 캘리포니아 주 산타크라라에 Modern Electrosystems Inc.(MEI)라는 상호로 미국 현지 법인을 설립했다 2) 현대의 Memory 선택 --미국 KDK Elect 자문보고서에서 144
(3) 강진구회장 회고록 사실과 다르다 ㅡ 145
나의 이력서 姜 起 東 1934 年 12 月 9 日 咸 南 咸 興 生 ( 本 籍 : 慶 南 金 海 ) New Media-2007 京 畿 高 等 學 校 1953 年 卒 (49 回 ) 서울 大 工 科 大 學 電 氣 工 學 科 1957 年 卒 (11 回 ) The Ohio State University, Columbus Ohio M.Sc. and Ph.D. 1962 Motorola Inc. Semiconductor Products Division, Phoenix Arizona 1962-1969 Stewart Warner Micro-Electronics Inc., Sunnyvale California 1969-1972 Integrated Circuits International, Inc.(ICII) 設 立 Sunnyvale California 1972-1976 韓 國 半 導 體 株 式 會 社 ( 現 : 三 星 半 導 體 ) 設 立 京 畿 道 富 川 市 1972-1976 KDK Electronics, Inc. 設 立 Sunnyvale California Reno Nevada 1977-2011 나의 計 劃 으로 建 設 된 半 導 體 工 場 1973-1983 (1) 韓 國 半 導 體 ( 株 ) 京 畿 道 富 川 ( 現 三 星 ) (2) 源 進 電 子 京 畿 道 龍 仁 ( 三 星 이 買 入 ) (3) 現 代 電 子 - 京 畿 道 利 川 ( 現 Hynix) (4) MEC ( 現 代 電 子 Santa Clara, California 半 導 體 工 場 ) E-mail : 現 住 所 : kdkang@gmail.com 15240 Redmond Loop Reno, NV 89511 USA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