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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교육원 모집안내-2013학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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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朴 容 玉 * Ⅰ. 머 리 말 Ⅱ. 1898 年 최초의 女 權 運 動 과 그 特 性 1. 女 權 通 文 과 女 性 社 會 進 出 論 2. 贊 襄 會 運 動 의 歷 史 的 制 限 性 Ⅲ. 1905~1910 女 性 運 動 展 開 의 特 性 1. 女 性 敎 育 運 動 의 擴 大 와 그 限 界 2. 救 國 的 男 女 平 等 意 識 의 擴 大 Ⅳ. 女 性 職 業 의 創 出 과 그 進 出 1. 敎 育 從 事 者 로의 進 出 2. 宗 敎 指 導 者 로의 進 出 3. 醫 療 人 으로의 進 出 4. 商 工 業 從 事 者 로의 進 出 Ⅴ. 맺 음 말 Ⅰ. 머 리 말 한말 근대사회로의 전환에서 나타나는 중요한 사회적 지표의 하나가 여성운동과 여성 의 사회진출이다. 일반적으로 농업사회에서는 남녀간의 역할이 확연하게 구분된다. 유교 권 사회,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가정내의 일상사는 주로 여성 전담이고 가정 밖의 일 크게는 정치로부터 일상적인 각종 생업 종사 은 전적으로 남자의 職 域 이었다. 그러나 근대 사회로 전환되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제분야에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되며, 아울 러 여성의 삶의 영역을 점차 사회로 확대시키기 위한 여권운동과 여성의 사회진출을 동 반하게 된다. 여성운동이나 여성의 초기 사회진출은 그 사회가 처한 역사적 사회적 여건 에 따라 나라와 사회마다 다소 다른 양태로 나타난다. 그러나 남자와 동등하게 인간적 권 리를 획득하기 위한 여성운동을 통하여 여성도 사회진출을 하여야 한다는 생각은 거의 같았다. 서구 사회에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산업혁명으로 공장에 기계를 대량으로 설치하 는 등 산업이 발달하던 18세기 중엽부터 산업현장과 정치권과 교육 영역 등에서 다양하 게 일어나고 마침내 여권을 획득하기 위한 거대한 정치적 사회적 운동으로 발전해 갔 다. 1) 한국사회의 근대화 과정은 18세기로부터 태동 발전하였으나, 보다 적극적 근대화는 제 * 성신여자대학교 사학과 교수.

- 104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국주의적 침략에 대응해야 했던 19세기 중반 이후부터였으며, 여성의 개화운동은 그보다 훨씬 뒤인 19세기 80년대 말부터였다. 한국여성운동과 초기 여성의 사회진출을 가능하게 한 역사적 사회적 배경으로는 첫째 동학사상이나 개화사상과 같은 근대적 사상이 생성 발전되었고, 둘째는 서양의 개신교 여선교사들의 활발한 사회활동과 독립협회에서 여성의 평등한 사회 활동을 강력히 주장하여 근대적 여권론을 사회에서 새롭게 인식하게 된 것 이고, 셋째는 서울 북촌과 같은 전통적 지도층 사회 여성들이 여권을 획득해야 한다는 자 각심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1898년 9월에 발표된 우리 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권 선언서 인 여권통문 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진출이 우리 민족사회를 발전시키는 데 참으로 필요하다는 폭넓은 사회적 인식을 갖게 된 것은 일제의 한국 침략이 적극화되었던 1905년 이후였다. 여성을 民 力 육성 차원으로 인식하 게 되면서 여성교육운동이 확대되고 여성들이 비교적 다양한 분야로 사회진출을 해가게 되었다. 본고는 한말 초기여성운동 전개의 특성과 아울러 역사적 사회적 제한성을 살피고, 또 한 이 시기 여성들이 주로 어느 분야로 사회진출을 해갔는가를 검토하는 데 주안을 두었 다. 본고의 내용 및 연구방향을 크게 3부분으로 나누었는데, 첫째는 1898년 우리나라 최 초의 여군운동인 찬양회가 발표한 여권통문 의 내용을 분석하고 이 운동이 성공할 수 없었던 역사적 사회적 제한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둘째는 1905~10년에 여성교육운동이 비교적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순수여성운동으로서의 한계성을 지녀야 했다. 그러나 1907년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자발적인 여성 참여를 통해 한국여성운동이 어떻게 발전하 였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급격한 사회 변환과 지속적 여성운동을 통해 여성이 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새로운 직업들이 창출되었고 아울러 그 직업들로의 진출상황들을 검토하고자 한다. Ⅱ. 1898 年 최초의 女 權 運 動 과 그 特 性 1. 女 權 通 文 과 女 性 社 會 進 出 論 내외 정세의 변화 속에서 우리 사회가 급변하는 19세기 후반, 閨 門 밖의 세상 일은 오 직 남자의 영역이라고만 교육받고 생각했던 한국여성들의 의식에 변화가 일어났다. 1898 년 서울 北 村 양반부인들이 우리 나라 최초로 여권획득을 선언하고 근대적 여권운동을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05 - 전개하게 되었다. 그 운동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으로는 내적 외래적 요인이 동시적으로 작용했다고 생각된다. 1882년 미국과 수교를 한 이후 서방국가들과의 외교관계가 늘어났 다. 우리 나라에 오는 서방국가의 외교관과 상인들 중 대부분이 부인을 동반하여 함께 활 동하였고, 또한 비숍부인(Mrs. Isabella Bird Bishop) 1) 과 같은 여성여행자나 서양 여 선교사 등을 서울과 지방에서 자주 만날 수 있었다. 특히 우리나라의 초기 여성교육 및 여성의료사업을 위하여 입국 활동한 외국인들이 거의 모두 개신교 여자선교사들이었다. 이미 실학운동시대 이래 우리사회를 주도하였던 지식인층 가문에서 남자와 차별된 여성 의 삶에 대한 비판의식이 일어났었으며, 19세기 중엽 이후 창도된 동학에서도 평등한 인 간권리를 주장하였으므로 서구여성들의 각종 사회활동은 비상한 관심의 대상으로 관찰되 었던 것이다. 개화선각자들이 중심이 된 독립신문 간행과 독립협회운동은 여성의식을 깨우치는데 보 다 큰 기여를 하였다. 1896년 4월 7일에 창간된 독립신문은 창간 논설 이후 여러 차례 에 걸쳐 여성의 평등한 인간 권리론을 주장하였다. 2) 독립신문은 민력과 국력 양성 차원 에서 여성교육과 여성의 사회진출을 주장하였던 것이다. 독립신문이 제시하는 남녀동권 성립시의 국가적 유익논은 첫째 지혜 있는 부인들도 국사를 의논하는 데 참여할 수 있어 정치를 진보케 할 수 있고, 둘째 부부간에 가사를 서로 의논하여 家 道 를 흥왕하게 할 수 있고, 셋째 열살 이하의 자녀교육은 어머니 담당이므로 학문으로 자녀를 가르치는 자녀의 좋은 스승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3) 이와 같이 국익과 직결된 평등적 여성교육론은 사회 변환과 국가 발전을 주장하는 양반사회 지도층의 여성계를 크게 각성시켰다. 그 결과 1898년 9월 1일, 서울 북촌 양반부인 3~400명이 뜻을 일으켜 우리 나라 최초의 여권선 언문인 여권통문 4) 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女 權 通 文 의 내용은 첫째 여성은 병신이 아닌 온전한 인간이어야 함에 대한 주장이 다. 온전한 인간이란 곧 남자와 평등한 권리를 갖는 인간임을 주장하는 것이다. 문명 개 화정치를 지향하는 새 시대를 당하여 온갖 구법과 구습이 개혁되고 있는데 오직 여성들 1) 비숍부인은 1831년 11월 15일 영국의 중류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1909년 10월 10일 사망 하였다. 그는 영국 the Royal Asiatic Society의 회원으로서 1894~97년 사이에 만주 중국 시베리아 등을 포함하여 4차에 걸친 한국 방문 여행을 하였다. 이를 기초로 하여 1898년 1월 에 Korea and Her Neighbours를 저술 출간하였는데, 그 다음날로 2천부가 매진되고 重 版 도 10일 내에 매진되었다고 한다. 4판까지는 영국에서 출간되고 5판은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이 책은 서방 국가들이 한국을 새롭게 이해하는 데 많은 기여를 하였다. 한국 방문시의 비숍 부인의 나이는 60대의 중반이었다. 2) 독립신문 1896년 5월 12일 및 동 9월 5일자 논설. 3) 독립신문 1896년 5월 26일 논설 여학교론. 4) 독립신문 1898년 9월 9일 여학교 ; 皇 城 新 聞 1898년9월 8일, 논설; 五 百 年 有.

- 106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만은 옛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으니 한국여성은 마치 귀먹고 눈 어두운 병신과 같다고 표 현했다. 그리고 여성은 먼저 意 識 의 병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둘 째는 남자와 똑같은 온전한 신체를 가진 평등한 인간인 여성이 어째서 평생 동안 깊은 규중에 갇혀 남자의 절제를 받아야만 했는가 라고 하여 여성차별 극복에 대한 강한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 통문 에서는 그것에 대한 역사적 해답을 지극히 원색적인 언어로 표 현했다. 즉 여성들은 사나이들이 벌어다 주는 것에만 의지하여 사는 경제 무능력적인 병 신이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원색적 표현의 언어는 여자도 남자들과 마찬가지로 경 제적 능력을 가져야만 평등한 인간 권리를 누릴 수 있음을 주장한 것이며, 동시에 여성의 사회진출의 절대적 필요성을 제시한 것이다. 셋째는 여성의식을 깨우치고 사회 진출 능력 을 갖게 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성들이 남자와 동등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는 것이다. 즉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居 內 而 不 言 外 하며 惟 酒 食 是 議 라 는 전통적 여성의 역할관로부터 당당하게 벗어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 활동하기 위하여 여학교 설립을 스스로 해내겠다고 선언하였다. 5) 여성의 직업을 가질 권리와 교육받을 권리를 양반 사회 여성들이 역사상 처음으로 이 처럼 당당하게 선언하자, 당시 온 사회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제국신문 (1898. 9. 13)은 우리나라 부인네들이 이런 말을 하며 이런 사업 창설할 생각이 날 줄 을 어찌 뜻하였으리요. 진실로 희한한 배로다 라고 찬탄을 머금은 찬평을 하였다. 황성 신문 (1898, 9, 8)도 하도 놀랍고 신기하여 우리 논설을 제각하고 이를 기재한다 라고 하고 여권통문 전문을 게재하였으며, 독립신문 (1898, 9, 13)은 여성교육을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니 정부 기구에 불필요하게 쓰이는 20여만 원과 급하지 않은 군사 증액비 100여 만원을 모두 여성교육비에 쓰라고 주장하였다. 2. 贊 襄 會 運 動 의 歷 史 的 制 限 性 한국 초기 여성운동에서 여성의 교육받을 권리의 획득은 여성운동의 중심 과제이며 기 반이었다. 여성교육의 기본 도구는 여학교이다. 이에 여권통문 선포에 참여하였던 부인 들은 우리 나라 최초의 여성단체인 찬양회를 조직하고 회원으로부터 수합한 회비를 가지 고 우리 나라 최초의 민립여학교인 順 成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순성여학교는 관립여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존속하는 과도기적 성격의 여학교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찬양회는 순 성여학교 후원 단체이면서 동시에 학교 교육을 받을 기회를 갖지 못하는 대다수 부인에 5) 朴 容 玉, 韓 國 近 代 女 性 運 動 史 硏 究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1984), pp.57~64.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07 - 대한 교육사업도 겸하였다. 찬양회의 임원진은 회장( 李 養 成 堂 ), 부회장( 金 養 賢 堂 ), 총무원( 李 昌 吉 堂 태양진당), 사무원( 高 貞 吉 堂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여권통문 준비 핵심 인물들일 것임이 분 명하다. 당시의 신문을 검토하여볼 때 여권통문 작성과 발표에 남자들이 참여 지도한 흔적이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런 점으로 볼 때 여권통문 은 순전히 여성들의 머리와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 초유의 여권운동을 발의하고 준비한 주동 인물은 누구일까. 그것은 아마도 찬양회의 임원진일 것임이 틀림없다. 찬양회의 중점사업 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여성교육이며 그것도 官 立 女 學 校 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과도적 단계로서 순전히 북촌양반 부인들의 손으로 순성여학교를 먼저 설립한 것이었다. 찬양회의 부회장인 김양현당이 순성여학교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사무원인 고정 길당과 몇 명의 외국부인들이 교원으로 임명되었다. 김양현당과 고정길당이 우리 나라 여 성이 설립한 최초의 여학교교육을 담당하였던 점으로 보아 이들이 여권통문 발의 작성 의 주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회장과 총무원은 북촌 부인계의 영향력 있는 부인으로 추 대하고, 이들이 북촌 부인계를 규합하고 여론을 조성하는 등의 일은 김양현당과 고정길당 의 담당이었다고 생각된다. 순성여학교가 선교사들이 설립한 여학교들보다 10여년 뒤늦 게 출발하였으나, 사회적으로는 이 학교야말로 최초의 한국여성교육기관이라는 반영을 보 였다. 그런데 김양현당과 고정길당은 모두 북촌 부인이 아닌 北 來 者 였다. 김양현당은 원래 서경(평양)에서 생장하였고 고정길당은 함경도 태생으로 그의 아버지를 따라 러시아 연 해주에 이주 귀화하였다가 서울에 온 여성이다. 양현당은 자녀 없이 과부가 된 후 서울로 와서 북촌 양반부인들과 교유하였고 자신의 자산도 꽤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북촌부인이 아닌 그가 찬양회의 부회장과 여학교 교장직을 맡은 것으로 볼 때 그는 근대 학문의 소양을 갖춘 개화의식이 높은 여성이었음이 틀림없다. 순성여학교가 개교한 1899 년은 독립협회 중심의 개화세력이 보수적 정치세력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던 때였으므 로 찬양회 활동도 위축되어 학교운영을 위한 재정적 지원이 어렵게 되었다. 또한 고종황 제가 약속하였던 관립여학교 설립도 의정부 회의에서 각하되어 설립 가망이 무산되었다. 이처럼 이중삼중의 어려움 가운데에서 김양현당은 私 財 를 털어 학교 운영자 겸 교사의 역활을 담당하였다. 그는 1903년 3월 자신이 죽은 후 저 어린 여학생의 교육을 누가 담 당할 것인가를 염려하는 선각적 교육자로서의 유언을 남기면서 숨을 거두었다. 6) 김양현 6) 찬양회와 순성여학교 및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에 관한 내용은, 朴 容 玉, 앞의 책, pp.57~73 참조.

- 108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당은 우리나라 여성교육을 위하여 몸과 마음과 재산을 올곧게 바친 한국 초기 여성교육 의 선구자였다. 귀화 한국계 러시아인인 고정길당이 來 韓 한 것은 親 露 세력이 컸던 1895년쯤일 것으로 생각된다. 그는 러시아어와 청어에 능통하고 세계정세와 근대지식에 밝아 그를 가리켜 무비개화학문한 여중호걸 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런데 그는 학교가 경영난에 허덕이던 때 인 1899년 후반에는 이미 학교를 떠나서 서울 무교동에 양요리점을 차려 돈을 벌고 있었 고, 1900년에는 다시 충청도 일대에서 희랍정교회 전도사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면서 사회 적 물의를 일으키기도 하였었다. 7) 그는 김양현당과는 달리 자신의 영리와 영달을 위해 기회주의적 삶을 살았던 이가 아니었던가 한다. 한국 최초의 순수 여권운동은 보수세력의 발호와 몰이해 속에서 순탄하게 성장할 수 없다가, 1905년 이후 일제 침략으로 인한 國 亡 의 위기에 처하여서야 여성교육의 중요성 이 새로히 인식되어 여성교육단체와 여학교들이 수다히 설립되었다. 그러나 이 이후의 여 성운동은 1898년 찬양회의 여성운동에서 볼 수 있었던 것과 같은 여권 획득이라는 순수 여권운동으로서 추진될 수 없었다. 이 시기의 모든 사회운동은 항일구국적 차원에서 행하 여지거나 또는 아류적 친일단체나 친일단체로서 활동해야 했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러 한 민족사적 상황과 처지는 한국근대여성운동 전개에 있어 상당한 제한성이 가해지지 않 을 수 없었다. Ⅲ. 1905~1910 女 性 運 動 展 開 의 特 性 1. 女 性 敎 育 運 動 의 擴 大 와 그 限 界 1905년 이후 일제의 한국침략이 가속화되자 국운을 회복하여 완전한 자주독립국가를 세우려는 저항적 민족운동이 다양하게 추진되었다. 그 운동의 주류는 의병항쟁과 애국계 몽운동이다. 후자는 민력배양의 국권확립 민족운동으로 敎 育 運 動 과 殖 産 運 動 을 주된 과제 로 내세웠다. 교육운동의 한 특색은 민력의 절반이 되는 여성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여성교육을 확대하기 위한 수다한 여성교육단체들이 설립 활동하였고 도시들과 촌촌마다 여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1886~1910년에 설립된 사립여학교 설립자 실태를 보면 174교 중 21개교만 여성 설 7) 朴 容 玉, 앞의 책, p.70.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09 - 립자이며, 8) 1905~10년 여성교육단체들 중 규모가 큰 것은 주로 남자에 의하여 조직활 동되었다. 즉 남성에 의하여 여성교육운동이 추진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여성의 사 회진출에 대한 사회적 요구를 반증한다는 긍정적 면도 지녔으나, 반면 순수 여권 획득 운 동이 제한되고 변화하는 남성중심사회에 알맞는 여성운동만을 추진하게 하는 여성운동의 제한성을 보였던 것도 사실이다. 신문 잡지 등 인쇄물을 통해 밝힐 수 있는 이 시기의 여성단체수는 서울 지방을 합쳐 30개 전후가 된다. 그 중 서울에서 조직 활동된 단체들은 규모나 내용면에서 비교적 충 실하였다. 서울의 경우 여자교육회 진명부인회 양정여자교육회 대한여자흥학회와 한일부 인회 자선부인회 동양애국부인회 자혜부인회등이 있었는데 한일부인회 이하는 친일여성 단체들이다. 이 시기 여성 단체의 조직과 활동에 참여한 부녀들은 평민 부녀라 할 평범한 여성들보다는 왕실과 고위 관인 또는 친일적 인사등의 상층 사회 부인들이었던 것도 이 시기 여성운동의 중요한 특성이었다. 규모와 활동이 컸던 여성단체로 여자교육회 9) 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체는 독립협회 등 사회개혁운동에 참여한 바 있었던 이른바 선각적 남자들이 중심이 되어 부녀들의 계몽 개화의 뜻으로 조직 활동되었다. 설립자는 秦 學 冑 秦 學 新 鄭 喬 李 舜 夏 高 羲 駿 李 瑛 奎 등 으로, 1906년 5월초에 학문과 女 工 과 부덕 淳 哲 을 교육하여 현모양처의 자질을 양성 완 비한다 는 목적으로 발기하였다. 그리고 동 회가 후원할 여학교로 養 閨 義 塾 을 설립하여 동 6월 10일 개교하였다. 회원은 출발 당시 귀부인 3~40명이 입회하였고, 점차 증가하 여 동 10월 초에는 300여명으로 증가하였다. 당시 사회는 학문없는 여자를 학식있는 교 사나 점잖은 남자가 지도해야 아름다운 결과를 얻는다 고 통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양 규의숙의 塾 長 塾 監 은 저명한 남자로 임명하고 교사 두명만 여자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10 수명의 사회적 지명도가 있는 남자들로써 남자 贊 務 所 를 구성하여 여자교육회를 지도 할 상층기구로 삼고, 상류사회 여성들의 단체 참여를 촉구하고, 임원을 다음과 같이 임명 하였다. 會 長 ; 留 案, 代 辦 회장; 金 雲 谷, 총무; 金 松 齊, 부총무; 李 一 貞 堂, 評 議 員 ; 李 夏 榮 부인 閔 謙 鎬 부인 權 重 顯 부인 李 完 用 부인 沈 相 熏 부인 閔 丙 弼 부인 權 重 弼 부인 閔 泳 綺 부인 李 載 克 부인 朴 羲 秉 부인 兪 星 濬 부인 吳 臺 煥 부인 秦 學 新 부인 秦 學 冑 부인 崔 永 年 부인 金 益 泳 부인 兪 相 範 부인 高 羲 駿 부인 尹 孝 定 부인 兪 吉 濬 부인 崔 炳 憲 부인 玄 暎 運 부인 李 鐘 華 부인 金 祥 雲 부인 秦 卓 隱 李 鶴 仙 金 錦 漢 司 法 員 ; 金 湖 山 金 松 岩 金 美 山 趙 南 波 韓 一 心, 회계원; 朴 淸 雲 金 逸 隱, 서기원; 金 海 秋 申 公 8) 朴 容 玉, 앞의 책, pp.210~218. 9) 여자교육회에 관하여 朴 容 玉, 앞의 책, pp.80~106 참조.

- 110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子, 事 務 員 ; 仍 任, 女 工 課 長 ; 李 允 用 부인, 衛 生 課 長 ; 李 根 湘 부인, 織 造 所 理 事 ; 梁 成 雲 朴 淸 雲, 養 蠶 所 理 事 ; 白 元 혁부인 金 鼎 禹 부인, 衛 生 所 理 事 ; 池 錫 永 부인 金 益 南 부인, 染 色 所 理 事 ; 崔 錫 祥 부인 玄 국부인, 曝 白 所 理 事 ; 趙 鎭 泰 부인 崔 奎 翊 부인, 裁 縫 所 理 事 ; 李 根 培 부인 申 公 子, 東 署 事 務 長 ; 金 克 巖, 西 署 事 務 長 ; 洪 肯 燮 부인, 南 署 事 務 長 ; 申 峯 子, 北 署 事 務 長 ; 留 案, 中 署 事 務 長 ; 張 妙 蓮. 10) 이상 임원진이 실제 활동을 얼마나 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이들은 대부분이 고 관 및 유지들의 부인들이었다. 이 중 실제 활동자는 김운곡 김송제 김호산 김송암 등 취 지서 발표 당시의 발기인들과 이준의 부인이자 개화선각자인 이일정당 등이다. 여자교육 회는 운영권을 놓고 여러가지 갈등도 많았으나, 일반부녀대중과 고루한 사회를 계몽시키 기 위한 연설회와 토론회를 지속적으로 행하여 여성의 사회참여 의식을 높인 점은 주목 할 만하다. 1906년 7월부터 1907년 7월까지 행해진 총 25회의 연설 및 토론회의 의제 는 여성 및 유아교육, 衣 冠 制 개량, 내외법 폐지, 부인산업, 공업개발 등이었는데 주제 강연자는 주로 남자들이었으나 토론은 좌우파로 나누어 여자들이 담당하였다. 토론 담당 여자들은 김송제 김운곡 이일정당 조남파 한일심 진홍자 신공자 박번자 김석자 신리자 신소당 신영자 김일은 김필원 장석령부인 유두자 등이었다. 그리고 전시효과적 의미까지 를 포함한 평의원들은 실제 활약은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들이 토론회나 강연회 및 통 상회에는 늘 참석했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그 참여 자체가 여성사회진출 의지를 북돋고 또 여성 활약의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적지 아니 기여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다음은 1907년 4월에 申 簫 堂 崔 花 士 등에 의하여 설립 활동된 進 明 婦 人 會 11)의 여성 활동 상황을 살펴보고자 한다. 1906년 12월 초부터 여자교육회가 경비 부족으로 양규의 숙을 후원 유지할 수 없게 되자 신소당이 양규의숙을 유지 진흥시킬 단체로서 진명부인 회를 발기 조직하고, 1907년 4월 23일 제 1회 총회를 열고 임원을 발표하였다. 총재는 留 案 으로 두고 부총재 崔 花 士, 회장 申 簫 堂, 부회장 李 石 卿, 총무 朴 英 子, 회계원 李 鍾 石, 재무원 李 起 泓 부인, 서기 金 石 子 金 一 堂, 평의장 朴 泳 仁, 및 평의원 權 直 相 부인 등 16명과 찬성장 李 美 卿, 부찬성장 閔 賢 子 로 임명하였는데 평의원은 여자교육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회적 저명인사와 고관들의 부인이었다. 진명부인회를 실질적으로 조직 운영한 회장 신소당은 민족 교육운동과 여성운동을 적 극적으로 추진하였던 대표적인 사회단체운동가이자 민족교육 운영자이다. 그는 판서를 지 낸 故 金 奎 弘 의 부인으로 이미 대안동 자기집에 소학교인 私 立 光 東 學 校 를 설립하고(1906 10) 萬 歲 報, 1906년 11월 2일, 여교흥왕. 11) 進 明 婦 人 會 에 관하여 朴 容 玉, 앞의 책, pp.106~109 참조.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11 - 년경) 12) 자신은 교장으로, 교감에는 이일정을, 또 학감에는 박영자를 임명하였다 13). 이 일정과 박영자는 당시 부인운동계에 진출하여 다양한 활동을 하였던 선각적 여성들이다. 이 학교는 빈한한 아이들(40여명)만 모집하여 학비를 전적으로 신소당이 자담하였다. 그 가 觀 鎭 坊 會 에 또하나의 새 학교를 설립하면서 재정적 어려움이 닥쳐 광동학교를 설립 3 년만인 1908년 말에 安 東 金 氏 宗 約 所 에 운영 인계를 하였다. 14)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확대되고 있을 때 그는 서울 대안동에 대안동국채보상부인회를 조직하여 여성 계의 국채보상운동 총본부로서의 기능을 스스로 맡아 행했었다. 여성의 교육 및 여성사회진출이 필요하다고 주장되는 사회적 분위기는 嚴 皇 后 로 하여 금 여성교육을 위한 적극적 의지를 가지고 여성교육운동을 펴가게 하였다. 황실에서의 여 성교육운동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해도 무방하다. 엄황후는 황실여성들과 顯 官 부인들을 규 합하여 大 韓 女 子 興 學 會 와 慈 惠 婦 人 會 를 설립했다. 전자는 1908년에 설립된 한성관립고등 여학교를 후원 흥왕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후자는 경성고아원을 찬성하기 위한 자선 단체였다. 관립여학교 설립에 즈음하여 엄황후는 여성교육 徽 旨 15)를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여 성교육을 집안의 행복을 증진하여 국가의 비보가 되어야 한다는 현모양처론적 교육에 중 점을 두고 있었다. 이것은 여성이 독립된 인간으로서 사회로 진출하여 적극적인 삶을 영 위하기보다는 교양을 갖추고 개화하는 사회에 맞추어 가정을 경영할 훌륭한 내조자가 되 도록 교육하는데 있었다. 대한여자흥학회 16) 발기는 학부 주선으로 宗 親 府 에서 개최되었 고, 황실 및 고관 귀족 부인들 50여명과 現 舊 정부대신들이 참여하였고, 임원은 총재 完 興 君 李 載 冕 부인, 부총재 李 完 用 부인, 회장 海 豊 府 院 君 尹 澤 榮 부인, 부회장 李 載 克 부인, 총 무 趙 輔 國 寧 夏 부인과 侍 從 卿 閔 丙 奭 부인, 사무원은 학무국장 尹 致 旿 부인과 편집국장 魚 允 迪 부인, 고문 舊 現 정부대신, 남자사무원 윤치오와 어윤적으로 임명되었다. 이들은 모두 황실과 현구대신의 부인들이다. 이 단체의 실제 활동자는 윤치오 부부와 어윤적 부부 17) 였다. 자혜부인회도 총재 이완 용부인, 평의장 李 貞 淑 (조동윤대부인), 총무장 李 鈺 卿 (이지용부인)이며, 실질적 활동은 이옥경이었다. 이옥경은 매국 5적의 부인으로 친일활동에 앞장서고 또 다른 고관부인들 과는 달리 일찍 개명하여 남편을 따라 일본에 갈 때도 활발한 독자적 활동을 하였으며 12) 제국신문, 1907년 3월 16일, 光 東 學 校. 13) 大 韓 每 日 申 報, 1907년 5월 5일, 光 校 生 광 ; 萬 歲 報, 1907년 5월 8일, 婦 人 設 校. 14) 大 韓 每 日 申 報, 1908년 11월 24일, 光 東 引 繼 의 希 望. 15) 舊 韓 國 官 報, 1908년 5월 26일. 16) 대한여자흥학회에 관하여 朴 容 玉, 앞의 책, pp.110-113 참조. 17) 尹 致 旿 의 부인은 尹 高 羅 이며, 魚 允 迪 은 漢 城 官 立 女 子 高 等 學 校 의 초대 교장으로 임명되었다.

- 112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국내에서도 양장에 구두를 신고 활보하는 신식여성이었고, 재정이 어려운 여자교육회의 총재를 비롯하여 여성단체활동을 많이 하였다. 그러나 그의 친일적 행동으로 말미암아 일 반 사회에서는 호평을 받지 못했었다. 여성단체 운동에 황족과 정부대신 및 그들의 부인들을 다수 참여시키는 중요 이유는 첫째 단체의 사회적 인지도를 높이려는 것이고, 둘째는 황족등 상층 사회의 부인들로 사 회적 모범을 보여 여성의 脫 閨 門 을 유도하여 여성의 사회진출의식을 보편화시키려는 것 이다. 셋째는 여성사회진출의 보편화를 통해 여성인력 활용을 용이하게 하려는 데 있었 다. 일제의 한국식민지여성정책의 중심은 여성인력 확보였다. 그들은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이미 1906년에 이옥경으로 하여금 대한부인회 18) 를 조직하여 여자실업 교육 장려라는 이름으로 정부 예산을 책정, 양잠강습소를 설립하고 양잠교육을 강화 확대 해갔다. 당시 국제시장에서 絹 絲 값이 높아 잠업은 가장 이익이 높은 산업이었다. 그러나 일본은 기후가 습하고 기온이 높아 양잠사업에 아주 부적합하였다. 그에 비해 한국의 경 우는 양잠산업에 적합한 기후를 가졌고 저임금으로 활용할 우수한 인력도 갖추어져 있었 다. 이옥경으로 하여금 여성실업교육 장려라는 명목으로 양잠교육을 확대시킨 것은 식민 지여성정책의 수행에 앞장서게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옥경은 여성의 사회활동이 용이하 지 못한 사회여건하에서 친일적 목적 수행이라는 반민족적 여성운동을 수행했다는 부정 적 평가는 면할 수 없으나, 그의 활동을 통하여 여성사회진출의 한 모형을 보여준 점에 있어서는 긍정적 의미를 지닌다. 2. 救 國 的 男 女 平 等 意 識 의 擴 大 일본이 1876년 무력을 앞세워 국제 정세에 어두운 우리로 하여금 강제적 문호개방을 하게 한 이후 국가 존립에 대한 위기론이 유자층을 중심으로 강력히 제시되었다. 반면 개 화의식을 가진 청년 유자중에서는 나라가 강성해지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개화정책이 추 진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1882년 갑신정변과 같은 비상적 수단에 의한 정치적 변혁까지 도 꾀하였었다. 그러나 개화추진파의 생각과는 달리 일본의 조선에 대한 정치적 경제적 침략은 연년이 확대되었고, 1895년에는 국모를 시해하기까지 하였으며, 1905년에는 우 리의 자주적 통치력을 극도로 제한하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케 하여 국권상실의 급박 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에 일제 침략세력을 저지하고 꺾으려는 항일민족운동이 막을 수 없는 큰 힘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국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민력을 키워야 한다는 주장 18) 朴 容 玉, 韓 日 婦 人 會 의 組 織 背 景 과 活 動, 韓 國 學 論 叢 ( 霞 城 李 瑄 根 博 士 古 稀 記 念 論 文 集 刊 行 委 員 會, 1974), pp.63-73 참조.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13 - 이 높아지면서 여성교육과 여성의 사회진출이 속히 이루어져야 한다는 새로운 사회사상 이 전 사회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1907년 2월에 대구에서 徐 相 敦 에 의하여 일본으로부터 빚진 국채 1300만원을 국민의 힘으로 상환하여 완전 자주 독립국을 이루자는 국채보상운동론이 제기되어 삽시간에 전국적 호응을 받게 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脫 身 分 的 이며 脫 地 方 的 이며 脫 性 別 的 인 특성을 지니는 거대한 자주적 민족주의 운동이었다. 특히 여성의 적극적 참여는 이 운동을 전국으로 확대시킨 원동력이 되었고, 閨 門 안에서만 생활하도록 삶의 영역과 인간적 권리를 극도로 제한받았던 여성들 로 하여금 평등한 인간으로서 살 권리를 인식하게 한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국채보상운 동에 대한 여성계의 첫 반응은 대구 남일동에서 일어났다. 정운갑 모 서씨 서병규 처 정 씨 정운화 처 김씨 서학균 처 정씨 서석균 처 최씨 서덕균 처 이씨 및 김수원 처 배씨 등 7명이 국채보상취지서에 남자의 참여방법만 제시하고 여자의 참여방법을 제시하지 않 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여자는 국민의 일분자가 아니냐고 항의하고 부녀들은 각자가 소지 한 패물을 가지고 열심히 참여하자고 주장하는 檄 文 ( 경고 아부인동포라 )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각자의 패물 총 13냥 8돈중을 의연하였던 것이다. 19) 전통사회 여성이 자신의 의지로 참여할 수 있는 삶의 영역은 주로 규문 안의 안살림에 한정되어 있었다. 국채보상과 같은 일은 실은 정치적 영역의 것이므로 종래의 사회적 규 범으로 볼 때 부녀의 참여 방법을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대 구 남일동 부인들의 생각과 주장은 아주 달랐다. 우리 부녀들도 남자들과 동등한 권리를 갖는 국민이므로 떳떳이 독립적으로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의 주장에는 구국을 위한 활동에는 남녀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참여하여야 한다는 신념이 있었다. 당시 이러한 정신은 여성사회 전반에 널리 확대되어 있었다. 평양의 가난한 선비 林 基 馨 이 자신의 가족 7명당 1원씩을 도합하여 7원을 의연하고, 집에 돌아와서 이 사실 을 부인에게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부인은 정색을 하고 남편을 책망하면서 국가적 관 념과 천부의 자유는 사람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 의무는 나도 마땅히 이행하여야 한다 고 말하고 시집 올 때 가져온 銀 粧 刀 한 개를 즉각 捐 出 하였다. 20) 국채보상을 위한 여성들의 참여 열의는 어떠한 역사적 국난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만 큼 뜨겁고 활발하였다. 여성들의 참여 유형은 위의 임기형의 부인처럼 개개인이 독자적으 로 참여하는 경우와 국채보상부인단체를 정식으로 조직하여 하나의 여성운동으로서 참여 하는 경우와 일가 門 族 또는 마을 단위나 동일 직업인들(예; 妓 生, 酒 姬, 선생, 학생등) 이 집단적으로 義 捐 에 참여하는 경우 등이 있었다. 이 중 단체를 조직하여 선언문을 반포 19) 大 韓 每 日 申 報 1907년 3월 8일, 경고 아부인동포. 20) 大 韓 每 日 申 報 1907년 3월 8일, 銀 刀 出 捐.

- 114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하고 구체적인 참여방법을 제시하고 章 程 까지 마련하고 여성의 참여를 독려하는 구국적 여성단체운동은 국채보상운동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자의 참여방법 으로 제시된 유형은 크게 네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첫째 패물폐지형, 둘째 減 膳 減 饌 減 飯 型, 셋째 현금의연형, 넷째 위의 네가지의 혼합형이다. 국채보상여성단체로는 大 邱 南 一 洞 의 佩 物 廢 止 婦 人 會 를 비롯하여 大 安 洞 國 債 報 償 부인회 夫 人 减 餐 會 國 債 報 償 女 子 義 成 會 (이상 서울 지역), 掬 米 積 誠 會 (인천), 국채보상의무소(김 포군 검단면), 국채보상부인회(안성 장터, 진천군, 창원항의 세곳), 부인의성회(남양군), 減 膳 義 捐 부인회(부산 좌천리), 斷 煙 同 盟 부인회(부산), 三 和 港 佩 物 廢 止 부인회(현 진남포), 夫 人 汲 水 報 償 會 (청북강계), 國 債 報 償 減 飯 會 (영흥군)등이 있었다. 21) 여성들이 단체를 조 직하여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여성의 정치참여의식을 갖게 되었다는 의미를 지니며 또한 남자와 평등하게 사회참여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주체적 활동을 하겠다 는 의지를 나타낸 것이라 하겠다. 여성 참여 및 활동에 나타난 특성 22) 으로는 첫째 지역별 특성을 검토할 수 있다. 정치 경제 문화 상공업의 중심 도시와 항구도시에서 주로 국채보상 여성단체가 조직되었던 것 이다. 둘째는 주도층 신분에 나타난 특성을 들 수가 있겠다. 이 운동은 신분 지방별과 같 은 것을 초월하여 거족적으로 참여되었다는 데서 큰 의의를 찾는다. 그러나, 이 운동을 활성화시킬 주도층 내지 지도층에 대한 검토가 있어야 한다. 단체의 조직 발기자의 주도 층이라는 면에서 볼 때, 양반 및 유지부인들이 절대수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혼전 여성보다는 가정경영권을 가지고 있는 주부가 대부분이고 상층사회부인들의 참여가 높았다. 또 경제력을 가진 기생신분들의 애국적 참여도 두드러진다. 가장 활발한 국채보 상 여성단체인 인천의 국미적성회의 경우처럼 기독교부인들의 사회적 지도력이 점차 높 아지고 있다는 점도 주목된다. 셋째 특성으로는 참여 열의에 비하여 평균 의연금액이 그 리 높은 액수가 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의 4대 신문에 게재된 의연 여성 2821명을 대상으로 의연금액을 분석한 결과 50전 이하가 절대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00원 이상을 낸 사람은 단지 5명뿐이었다. 그 이유는 다음의 인용문을 통하여 간접적 해답을 구할 수가 있다. 조그마한 금액이 계속 들어왔는데 그러나 정부의 큰 벼슬아치나 서울의 사대부층이나 돈있는 큰 장사치들은 한사람도 호응하여 기부하는 이가 없어 미치광이처럼 절규하고 눈물 로 호소하였으나 급급하여 미치지 못했던 것같다. 천한 신분으로 고용살이하며 빌어먹는 계 21) 朴 容 玉, 國 債 報 償 運 動 의 發 端 背 景 과 女 性 參 與, 한국민족운동사연구 8(1993, 2), pp.147 ~182 참조. 22) 朴 容 玉, 위의 논문, pp.182~188 참조.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15 - 층들이 도리어 많았다. 이 때에 많은 금액을 낸 사람은 해주 사는 李 戴 林 이 2만원, 金 善 駿 이 1만원이었다. 23) 고관들이나 돈많은 남정네가 거액의 의연을 하면 아울러 그들 부인들도 참여하여 전반 적으로 부인 의연액수도 높아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였다는 것은 국채보 상운동이 갖는 하나의 한계성이라고 볼 수 있다. 넷째의 특성으로 들 수 있는 것은 남녀동등의식의 성장과 발전이다. 이 특성은 한국근 대여성운동사상에서 볼 때 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여성의 근대화론을 제일 먼저 주장한 것은 개화 주장자들이었다. 즉 남자들이 국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민력 양성이 먼저 되어야 하며, 민력 양성을 위해서는 民 의 절반이 되는 여성을 개발시켜야 한다는 논 리에 따라 여성개화운동을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운동 단체 로서 1898년에 조직 활동된 찬양회의 경우조차도 여성단체를 지도 자문해줄 男 子 贊 成 員 制 를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국채보상여성단체들은 여성 독자의 힘으로 단체를 조직하여 남자들을 능가하는 활동을 하였던 것이다. 여성들이 독자적 힘을 가지고 국채보상운동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그 힘과 의지는 어디 에서 온 것인가. 그것은 첫째 국망의 위기에 처한 현실을 더 이상 구시대의 낡은 윤리로 는 구제할 수 없다는 데서이다. 새로운 생각 새로운 가치관으로 변환하지 않고는 나라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둘째 그 새로운 가치관이란 곧 남녀평등권의 실행인 것이다. 1907년 4월 장의근 장모 공씨와 김덕유 조모 엄씨가 발기 조직한 국채보상탈환회의 취 지문의 말미에, 이렇듯이 國 債 를 갚고 보면 國 權 만 恢 復 할 뿐 아니라 우리 여자의 힘을 세상에 전파하여 男 女 同 權 을 찾을 것이니 24) 라고 밝히고 있다. 발기인인 공씨와 엄씨는 장년을 지난 노년의 부인들이다. 일반적으로 노년의 부인들은 자신이 지내온 삶의 방식이나 가치관을 고집스럽게 지키려 한다. 그런데 그러한 노년의 부인들이 남녀동권 획득을 국채보상운동의 최후의 목적으로 제시하고 있 음은 크게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국권회복이라는 민족사적 명제 앞에서 는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같은 남녀평등관은 일제침략하에서의 항일 여성운동으로 이어져 여성들이 의열활동에까지 참여하였으며, 남녀평등의식도 사회 저변 으로 다양하게 확대되어갔던 것이다. 23) 독립운동사편찬위, 독립운동사자료집 14, (독립운동사편찬위, 1978), pp.284~5. 24) 大 韓 每 日 申 報 1907년 4월 23일, 탈환회취지서.

- 116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Ⅳ. 女 性 職 業 의 創 出 과 그 進 出 1. 敎 育 從 事 者 로의 進 出 여성이 평등한 인간권리를 가지고 사회와 국가를 위하여 활동할 수 있는 자질을 갖기 위하여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여성교육이 확대되어야 했다. 1905년 이후 여성교육이 확대 되면서 먼저 교육을 받은 여성들이 더 많은 여성들에게 배움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스스 로 교육종사자가 되어야 한다는 선구적 소명감을 갖게 되었다. 1905년 이후 여학생들 중 많은 학생들은 자신의 배움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그리고 여성 개명을 위하여 반드시 값있게 쓰여져야 한다는 선각자적 신념과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1906년 9월 29일 황 성신문 에 의하면 인천 영화학교 여자생도 몇사람이 평생 出 嫁 하지 않고 문명 학업에 종 사하겠다고 誓 言 을 하고 훌륭한 여교사가 되기 위하여 일본 神 田 으로 유학을 간다는 기 사가 있다. 사회 여건상 결혼한 여성은 자유롭게 사회 활동하기가 어려운 시대였으므로 학업을 마친 후도 독신으로서 사회적 활동을 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나타낸 것이다. 여성 교육론의 확대와 여학교의 증가는 교사 자격을 갖춘 여교사가 필요하였다. 그러므로 외국 유학 여성 또는 국내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개신교 학교 출신 여성들은 자연히 학 교 교사로서 환영을 받고 많은 활동을 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첫여학교가 1886년 서울에서 개신교 여자선교사에 의하여 문을 열었고(이 화학당), 이 뒤로 계속하여 정신(1887), 일신(1895, 부산진), 영화(1896, 인천), 정진 (1896, 평양), 배화(1897, 서울), 여자맹아학교(1898,평양), 정의(1899, 평양), 공옥 (1900, 서울), 기전(1902, 전주), 멜불덴(1902,군산), 숭의(1903, 평양), 정명(1903, 목포), 광신(1903, 강계), 루씨(1903, 원산), 삼일(1903, 수원), 호수돈(1904, 개성), 진성(1904, 원산)등의 개신교계의 여학교가 설립되어 여성교육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여 기서 교육받은 다수의 여학생들이 우매한 여성을 가르치기 위한 교사직 또는 전도부인 등으로 진출하였다. 우리 나라에서 첫 여교사로 활동한 이는 이화학당의 李 慶 淑 과 蓮 洞 학 당(정신여학교의 전신)의 辛 마리아였다. 1888년 이화학당 학생이 18명으로 늘어나자 서 양선교사만으로는 학생을 가르치고 생활 지도를 할 수 없게 되어 1889년 4월부터 이경 숙을 한글과 한문 및 학생생활 지도교사로 채용하였다. 그는 1851년에 충청남도 홍주의 가난한 선비집 딸로 태어나 15세에 결혼했으나 얼마 안되어 소년과부가 되어 女 僧 이 되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17 - 었다가 還 俗 하였다. 그녀는 39세 때, 선교사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남편 친구의 소개를 받아 이화학당장 스크랜튼 여선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 후 학당 교사 겸 학당장 비서 일을 하게 되면서 그의 인생은 큰 변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한국여성개화 선각자로 서의 중요한 한 인물이 되었다. 그는 교사가 된 지 반년만에 세례를 받았으며 교사 재직 6년 후에는 이화학당 교사직을 떠나 스크랜튼여사와 함께 전도사업에 전력하였다. 25) 또한 연동학당의 첫 여교사인 신 마리아는 우리 나라 최초의 여의사인 박에스터의 둘 째 언니로 申 正 祐 와 일찌기 결혼하여 두 남매를 키우던 주부였다. 그녀의 본성은 光 山 金 氏 인데 서양인의 풍습에 따라 남편 성을 쓴 것이다. 그녀는 동생 에스터가 이화학당에서 새학문을 배우는 것에 자극받아 1893년 장로교 경영의 정동학당(연동학당 전신)에 들어 가 3년간 공부한 뒤인 1896년부터 연동으로 새로 이사한 연동학당에서 교사로 봉직하였 다. 그는 학감과 사감직을 역임하였고, 학생들에게 침공 수학 성경을 가르치는 교사직도 겸하였다. 26) 그녀는 가정과 직업을 겸전한 채 활발한 교육활동을 한 최초의 여성이란 점 에서 더욱 의의를 갖는다. 그녀의 딸 辛 義 卿 도 정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교사로 봉직하는 중 3. 1운동일 일어나 자신의 교사 김마리아가 회장으로 활약하였던 대한민국애국부인회 의 임원으로 활약하다가 체포되어 1년간의 투옥생활을 하였었다. 특히 정신여학교는 3. 1운동 이후 항일민족운동의 본거지의 기능을 하였던 점 등으로 볼 때, 정신여학교의 초 기 여성교육의 정신과 방향이 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헌신적인 여성을 길러내는 데 있었 던 것이다. 우리 나라 초기 여성교육에 초석을 쌓은 이화학당과 연동학당에서 가르친 과목은 한글 한문 수학 수예와 성경 정도였으나, 학생들은 선교사를 통하여 서구의 새 문화를 접할 수 있어 학당 출신 학생들의 의식은 매우 개명하였다. 그리고 여자 선교사들과 초기 교사 신 마리아등 교사의 활동은 학생들의 모델이 되어 학생들로 하여금 선각자적 의지를 가지고 사회로 진출해가게 했던 것이다. 이화학당의 경우 학제가 정제된 1904년 이전 이 학당 을 거쳐나간 학생은 약 100명에 달하였는데 이름이 남아있는 졸업생은 20명에 불과했다 고 하였으며 1908년 제1회 정식졸업생을 배출한 이후부터 교육계로의 진출이 더 활발해 졌다. 1회졸업생 5명, 2회 10명, 3회 9명이 배출되었는데 이들은 각 지방에 이화학교의 支 校 를 설립하여 여학생들을 교육하는 이도 있었고, 새로 설립된 각여학교 교사로 봉직하 기도 하였다. 27) 여자교육회가 설립한 양규의숙의 두명의 여교사 중 한명도 이화학당 출 신 셀레였고, 해주 정내여학교 교사 홍은애 28), 부산 초량사립여학교 교사 황혜수 29) 는 모 25) 梨 花 九 十 年 史 ( 梨 花 女 子 高 等 學 校, 1975), pp.55~56. 26) 貞 信 七 十 五 年 史 ( 貞 信 女 子 高 等 學 校, 1962), pp.91-94. 27) 梨 花 九 十 年 史, p.73.

- 118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두 연동학당 출신이었다. 개신교 여학교 출신 중 박에스터 30) 河 蘭 史 黃 (여)메례 崔 活 蘭 등은 이 시기에 한국여 성과 사회를 개화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한 대표적 여성들이다. 하란사는 1875년 평 양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남편은 인천 감리로 재산이 있는 河 相 驥 31)였다. 이화학당은 기 혼자 입학이 안되는 교육 방침을 세웠었는 데도 그녀가 교육을 받겠다는 너무도 강한 의 지를 보였기 때문에 기혼자인데도 불구하고 1896년에 입학을 허가하였다. 그녀는 이화학 교에서 4년간 수학후 1900년 3월부터 1년간 일본 유학을 하고 돌아왔다. 그리고 그 이 듬해(1902)에는 자비로 다시 미국 유학을 떠나 오하이오 웨슬리안(Weslyan) 대학에 입 학, 영문학을 전공하고 1906년 졸업, 우리 나라 최초의 외국유학 문학사가 되었다. 귀국 후 그는 이화학교의 교사로 봉직하는 한편 스크랜튼과 함께 達 城 離 宮 에 기거하면서 상동 교회 건설에 협력하였고 여기서 여자영어반을 개설하여 뒷날 여성교육에 기여한 손메레 신알버트 양우러러 등을 길러내었다. 이화학당에서는 영어와 성경을 가르치고 기숙사 사 감 및 총교사로서 일하였다. 또한 교내 써클인 以 文 會 를 지도하고, 미국여선교사 앨벝슨 양(Millie M. Albertson)과 함께 이화학당 곁에 부인성서학원을 창설하여 전도사업을 하였다. 특히 영어에 능숙하여 황실 통역도 하였다. 또한 그녀는 민족독립의식이 강하여 국내외 독립운동가들과도 긴밀한 연락을 가지고 활약하였으며, 1차 대전 종료후에는 의 친왕을 대신하여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1919년 1월에 북경에 당도하였다가 불의의 식중독으로 사망하였다. 32) 황(여)메례(Mrs. Mary Whang)는 1872년 2월21일, 마산에서 김씨 집안의 외딸로 태어났고, 黃 氏 家 에 출가하였으나 곧 남편을 사별하였다. 그 뒤 (1886) 달성이궁에 기거 하는 스크랜튼의 양녀가 되어 이화학당에서 영어 수학 성경등을 공부하였다. 그녀는 영어 에 능통하고 신학문의 식견도 높아 교회와 학교에서의 활동이 다양하였다. 1901년 정동 제일교회 내의 회원 63명의 보호회를 발족 지도함을 비롯하여 1903년에는 이화학당 내 의 리빙 소사이아티를 지도했고, 1905년부터는 스크랜튼을 도와 상동교회에서 성경공부 반을 지도했으며, 1910년에는 엡윗여자청년회를 조직하여 기독교 여자 청년운동을 하였 다. 또한 그는 保 救 女 館 에서 선교사를 도와 의료활동과 전도를 하였다. 33) 1903년 3월 28) 皇 城 新 聞, 1908년 12월 23일, 正 內 將 進. 29) 大 韓 每 日 申 報, 1909년 5월 13일, 女 師 被 選. 30) 박에스터는 여의사로 활약하였으므로 의료계로의 진출에서 다룰 것임. 31) 하란사는 仁 川 監 理 를 지낸 河 相 驥 의 소실이었다고 하며, 그의 본성은 白 氏 인 것같다. 大 韓 每 日 申 報 1906년 9월 29일, 婦 人 擔 敎 에 의하면 興 化 학교 교사 白 象 圭 가 義 親 王 을 수행하 여 일본에 가므로 그가 回 還 할 때까지는 하상기 부인 백씨가 교수 책임을 졌다고 했다. 32) 梨 花 九 十 年 史, pp75~76. 33) 梨 花 九 十 年 史, pp.76~77.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19 - 교육 시찰차 일본에 갔다온 후 여성교육에 관심이 높아져 施 病 院 에 방 하나를 얻어 여학 생 20명을 모아 직접 가르쳤다. 그 학생 중 엄황후의 사촌 오빠 嚴 俊 源 의 딸이 있었다. 그는 엄준원을 통하여 여성교육에 뜻이 높았던 엄황후를 만나게 되었고, 엄황후로부터 창 성궁을 학교 건물로 하사받아, 1906년 5월에 엄준원을 교장으로, 황여메레를 총교사로 하여 진명여학교 문을 열었다. 34) 또한 평양에서 前 관찰사등 유지들이 1906년 3월에 평 양애국여학교를 설립하여 35) 30여명의 학생을 가르쳤는데, 기부금에 의한 학교 운영이 어 려워지자 여성교육열이 높은 엄황후가 황여메레를 보내어 평양 진명여학교로서 재출발하 게 하면서, 36) 400원을 하사하였다. 37) 평양의 진명여학교는 평양의 대성학교와 더불어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던 서북지방의 대표적 여학교가 되었다. 엄황후의 지원과 황여메레의 적극적 활동으로 평양의 여성교육이 점차 확산되었다. 평양 명륜당 안에 설한 여자교육연 구회에서 여성교육연설회를 개최했을 때, 황여메레는 김현련부인 및 안창호 김희경과 청 중을 감동시키는 연설을 하였다. 38) 1909년 1월에는 수원 삼일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쳐 고명한 교사로 칭송을 받았다. 39) 1888년 9월 23일에 인천에서 태어난 최활란은 8세에 이화학당에 입학한 후 20년을 이화에서 배우고 가르쳤다. 또한 새로 부임하는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일도 했 다. 그는 이화 중등과 학생일 때 일본 나가사끼( 長 崎 )의 갓스이( 活 水 )여학교에 유학하고 1907년에 귀국한 후 교사 겸 총교사로 모교 봉직을 하였으며, 1915년에는 이화의 대학 과를 졸업하였다. 26세에 최병헌 목사의 아들 崔 在 鶴 과 결혼한 후에도 계속하여 Y.W. C.A. 태화여자관, 경성여자기독교절제회등의 기독교 사회단체에서 활동을 하였다. 40) 나라 운명이 위기에 처한 1905년 이후 국력 배양을 위하여 여성 교육을 시행 확충하 여야 한다는 사회여론이 높아지면서 경외 각지에서 사립여학교의 설립이 급격히 증가되 었다. 이미 학문이 있거나 뜻이 있는 여성들 중에는 여성교육의 시급성을 깨닫고 사재를 털어 여학교를 설립 운영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는 운영난으로 설립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문을 닫는 경우가 많았다. 그 중 개성에 貞 和 女 學 校 를 설립 운영한 金 貞 蕙 ( 本 姓 은 梁 氏, 1868~1932)는 대표적인 여성교육사업가였다. 그는 여성교육이 필요하다는 적극적 의지와 자신의 재력과 성심성의의 정성을 가지고 학교를 경영한 우리 나라의 초 34) 제국신문, 1907년 5월 13일, 女 校 盛 況, 韓 國 女 性 史 2( 梨 花 女 子 大 學 校 韓 國 女 性 史 編 纂 委 員 會, 1972), p.82. 35) 제국신문, 1906년 11월 29일, 平 壤 女 校. 36) 제국신문, 1907년 6월 12일, 女 校 擴 張. 37) 大 韓 每 日 申 報 1907년 7월 10일, 內 賜 校 費. 38) 제국신문 1907년 7월 17일, 女 校 擴 張. 39) 大 韓 每 日 申 報, 1909년 1월 10일, 女 師 高 明. 40) 梨 花 九 十 年 史, pp.77~78.

- 120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기 여성교육의 선각자이다. 그의 조부는 개성 북부에 살았고 縣 監 을 지낸 梁 成 鎭 이며 부 친은 해주에서 무역으로 거금을 번 梁 在 川 으로, 1868년 10월 12일에 개성에서 그의 둘 째딸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성질이 활발하며 인내심이 강하고 남에게 한걸음도 지 지않는 진보적 마음이 강했다. 그의 시가도 경기도에서 손꼽는 거부로서 시조부는 府 使 를 지낸 金 鼎 實 이었다. 그녀는 11세에 14세의 金 永 鍾 과 결혼하였으나 3년만인 14세에 청상 과부가 되고, 이듬해에는 시아버지가 사망하여 시조모와 시모를 모시고 수절생활을 하고 있던 중 22세에 이들마저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家 財 는 풍부하였으나 자신의 기구한 인 생과 세상의 허망함을 느끼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처음에는 자기와 비슷한 소년과부들 과 어울려 사계절 들놀이와 잔칫구경 굿구경 등으로 세월을 보냈다. 그러던 중 한번은 개 성의 북부교회 구경을 갔다가 그의 인생의 크나큰 변환을 가져오게 되었다. 그는 그 곳에 서 선교사의 설교를 듣고 감복하여 귀가 후 터주 금줄 재앙신 등 섬기던 온갓 미신적 인 것을 마당에 모아 모두 불태워버리고, 지금까지의 자신의 생활을 청산하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41) 그리고 2년 뒤 세례까지 받는 독실한 신앙인이 되었고 서양식으로 자신의 성 대신 남편의 성을 쓰게 되었다. 당시 우리 사회를 발전시킬 민족적 대과제로서 신교육 신 문화운동이 풍미하고 있음을 관찰한 그녀는 특히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다. 그녀는 여성교육사업에 큰 뜻을 두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선교사가 운영하던 松 桂 학원을 인수 운영하면서, 교사 양성을 위한 사범과를 두고 4~5명의 교사를 양성 배출하였 다. 42) 그녀는 뜻한 바 있어 이 학원을 6개월만에 선교사에게 도로 양도하고, 1910년 여름부 터 해나뭇골 자기 집 안방에 여학교를 새로 설립하였다. 이것이 오늘날까지 존속 발전한 정화여자상업학교의 전신이다. 처음에는 청상과부등 6~7명을 모집하여 교육을 시작한 것이 5개월만에 100여명으로 늘어나고 7개월째에는 130여명의 학생으로 증가하였다. 증 가일로의 학생을 수용하기 위하여 아랫채와 헛간까지 교실로 만들어 썼다. 그의 가산이 비교적 풍성하여 처음에는 교육비 일체를 자담하였으나 학생의 수가 급증하면서 점차 학 교 운영이 어려워졌다. 그러나 한편 그의 뜻이 사회에 알려지자 사회 유지인들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개성군수 朴 宇 鉉 은 校 舍 마련을 위하여 활터( 君 子 亭 )를 빌려주고 학 교 이름을 貞 和 라고 지어 주었으며 경제적 지원도 하였다. 이 학교에 대한 사회적 지원 양상은 1910년 7월 8일에 정화여학교에서 서울 진명여학교 교사 황여메례( 黃 余 메 禮 )를 초청하여 여자교육의 급무 라는 내용의 연설회를 개최했을 때 여실히 나타난다. 당시 방 청 관광자가 인산인해의 대성황을 이루었고 다수의 귀부인들도 출석하여 김정혜의 열심 41) 新 女 性 1932년 11월호, pp.32~37. 42) 皇 城 新 聞 1910년 7월 16일.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21 - 에 감복하여 귀부인들이 즉석에서 출연한 금액이 200여원이 되었다 43) 고 하였다. 1910년 이전에 설립된 사립학교들이 사립학교령의 규제 때문에 거의 폐교하고 재정 지원이 가능한 기독교계 학교와 왕실 재정 후원을 받는 학교 정도만 존속할 수 있었던 민족사적 비운 속에서도 개성의 정화여학교는 의연히 존재하고 성장해나아갔다. 1915년 일제가 식민통치의 공적을 과시하고 민심을 회유하기 위하여 개최한 공진회 당시도 김정 혜의 교육열을 높이 치하하는 포상을 하기까지 하였다. 44) 1920년 이후 여성교육열이 새 로히 높아지면서 정화여학교도 급격한 발전을 하였는데 그 이유는 첫째 年 收 入 200석의 자신의 토지 6만 4천평을 학교를 위해 기부하고 개성의 유명한 재산가 金 元 培 가 年 700 원씩을 기부하겠다는 약속과 평양과부 김진흥의 4만원 기부와 같은 평양 과부 이현준 및 개성과부 한인원의 기부를 받아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학교도 새로 지을 수 있었던 때문 이었다. 45) 김정혜는 실로 국운이 쓰러지던 우울한 시대에 민족의 미래를 보고 전재산 전 생애를 바친 초기 한국여성교육의 대선구자였다. 이 시기 사립학교에서는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육이 행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육의 확대는 일제의 한국식민지화정책에 대한 큰 걸림돌이었다. 그러므로 바른 교육의 표본이라는 미명 아래 사립학교령을 반포하여 민족주의 교육을 탄압 방해하고 한편으로 는 식민지교육정책을 수립 강화하였다. 여성교육도 마찬가지였다. 일제는 1908년 식민지 여성교육의 표본을 보이기 위하여 우리 정부로 하여금 관립한성고등여학교 46) 를 설립하게 하고, 최고의 학벌을 가진 교사진을 구성하기 위하여 일본 등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최고의 지식여성을 교사로 임명하였다. 개화선각자 尹 孝 定 의 딸 尹 貞 媛 이 당시 관립여학 교의 교사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13살에 일본 유학을 가서 최고등과를 졸업하고 구라파를 수년간 遊 歷 하고 귀국한 후 고등여학교 교수로 피임되었고 47) 윤황후의 논어 講 官 으로 내 정 받은 신진여성이다. 48) 또 일진회장 洪 肯 燮 의 子 婦 인 洪 貞 子 도 고등여학교 교사로 임 명되었는데 49) 그는 일진회장 윤시병의 딸로 일본에 10년간 유학하여 간호학과 음악 등 을 배우고 1906년에 돌아온 재원이다. 50) 윤치오의 부인 尹 高 羅 도 고등여학교 영어교사 43) 皇 城 新 聞, 1910년 7월 8일, 眞 正 女 史, 동 7월 12일, 貞 和 演 說, 동 7월 16일, 婦 人 界 의 模 範 的 事 業 ( 論 ) ; 大 韓 每 日 申 報, 1910년 7월 16일, 貞 校 將 進. 44) 每 日 申 報 1915년 10월 24일. 45) 新 家 庭, 1933년 1월호, pp.100~102. 46) 朴 容 玉, 舊 韓 末 의 女 性 敎 育 ~ 官 立 漢 城 高 等 女 學 校 設 立 을 중심으로, 史 學 硏 究 21, 1969, pp.361~78 참조. 47) 大 韓 每 日 申 報, 1909년 3월 23일, 高 等 女 師. 48) 皇 城 新 聞, 1909년 5월 15일, 尹 貞 媛 講 官 內 定. 49) 皇 城 新 聞, 1908년 9월 1일, 女 師 任 命. 50) 皇 城 新 聞 1908년 9월 1일, 女 師 任 命.

- 122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로 임명되었는데, 51) 그녀는 주미공사관의 참사관을 지냈고 1903년에 미국 콜로우드대학 을 졸업한 金 潤 晶 의 딸로서 1907년에 일본여자학원에 입학하여 수업 중 학교에 불이 나 중도에 귀국하여 52) 養 源 여학교 영어교사, 53) 동교 유지회 회장, 54) 유지 부인들과의 養 心 여학교 설립 55) 등 여성교육활동을 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동양애국부인회등 친일성 부인 단체에서도 활약하고 56) 또 일인 및 서양인들과의 사교계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이같은 당시 사회의 여성교육열은 외국 유학 여성의 수를 점차 증가시켜갔다. 특히 일제는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 수행으로서 한국의 여성인력을 자국 경제 발전을 위하여 활용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그리하여 한국여성의 노동력 활용을 위한 실업교육을 중시하였다. 즉 양질의 대량 絹 絲 생산을 위한 蠶 業 및 製 絲 와 염색 등의 기술을 향상시 키는 여성교육을 확대해 나아갔다. 이를 위하여 친일계 여성들로 하여금 대한부인회를 조 직케 하고 거액(당시 3천원)의 정부 예산으로 전국적 양잠교육을 행하게 하였다. 57) 그 대표적 인물이 친일매국노인 李 址 鎔 의 처 李 鈺 卿 이었다. 그러나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역사적 사회적 상황들은 여성교육자의 길을 새로이 창출하고 여성의 교육계 진출의 길을 점차 넓혀주는 기회가 되었고 사회진출 여성의 수도 증가하게 되었다. 2. 宗 敎 指 導 者 로의 進 出 종교 분야는 개신교계로의 여성진출이 두드러지며, 다음은 정부로부터 탄압 받던 동학 이 1905년 이후 천도교로 재정립하여 교단 확립을 하면서 천도교 포교를 위하여 새로운 여성 전문직으로서의 수 많은 부인 전교사를 두어 이 방향의 여성 활약도 돋보였다. 먼저 개신교계의 여성활동을 살펴보자. 교육 및 의료 분야에서 보인 개신교계 외국선교사들의 봉사적 활동과 전도는 여성 사회에서 긍정적인 호응을 받았다. 그리하여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에 대한 여성들의 호기심은 곧 신앙으로 바뀌었고, 선교 확대를 목적으로 하는 선 교사들은 부인성경학교 등을 세워 전도부인을 양성하여 이들로 하여금 한국 가정에 기독 교를 전파하게 하였다. 선교사들의 교육 및 의료 활동은 바로 개신교를 한국 사회에 선교 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므로 이들은 양성된 전도부인을 통하여 한국의 가정들을 방문하여 51) 皇 城 新 聞, 1908년 4월 24일, 夫 人 敎 師. 52) 大 韓 每 日 申 報, 1908년 9월 2일, 계속유학. 53) 皇 城 新 聞, 1908년 10월 8일, 語 師 善 敎. 54) 大 韓 每 日 申 報, 1908년 10월 1일, 維 持 盛 會. 55) 皇 城 新 聞, 1908년 11월 3일, 養 心 女 校 發 起. 56) 皇 城 新 聞, 1908년 11월 3일, 愛 國 婦 人 會 總 會. 57) 朴 容 玉, 韓 國 近 代 女 性 史 (정음사, 1975), pp.172~189 참조.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23 - 제일 먼저 안주인을 기독교인화하게 하였다. 전도부인들은 전도 구역내에 교회와 여학교 를 개설하고 여아와 부인들을 가르쳤다. 일제하에서 이들 전도부인들은 항일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민족 독립의 전령과 같은 존재의 전도사의 역활을 하였다. 1910년 이전 개신교계에서 활동한 대표적인 여성으로서는 서북지방의 전삼덕 김살로 메 김도라 홍유례등과 인천의 최헬렌등을 들 수 있다. 全 三 德 (1844~1932)은 서북지방 에서 제일 먼저 교인이 되어 세례를 받고 가장 많은 활동을 한 감리교계의 선교 역군이 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교육자이며 사회사업가이며 여성해방운동가이기도 하다. 전삼덕 은 1843년, 강서군 벽위섬에서 양반집 딸로 태어나, 17세에 공조참의 우부승지 등 벼슬 을 한 강서의 金 善 柱 와 결혼했다. 그러나 첩을 두고 서울을 왕래하는 남편과의 가정생활 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그는 뒷날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하여 그때 나의 심경은 정말 여자로 태어난 것이 저주스럽고 무척 고독하고 외로왔다 고 술회한 것으로 볼 때 전통적 여성의 삶을 순응하며 받아들일 수 없는 상당히 진취적인 성품과 의식을 가진 이였다고 하겠다. 1893년 그녀는 평양에 있는 南 山 峴 敎 會 는 남녀의 차별없이 교인으로 받아들인다는 새 소식을 듣고 가보고 싶은 강한 충동을 느꼈다. 그는 이 충동을 참을 수 없어 자신의 몸종 을 데리고 몸소 80리 거리의 이 교회를 찾아가 새로운 복음을 접하게 되었다. 이 후로 그는 이 먼 길을 매주 예배를 보러 다녔고 1895년에는 세례를 받아 정식 교인이 되었다. 1898년에는 두 며느리와 동리 부인 한명을 전도하여 세례를 받게 했으며 이 해 12월에 는 노블(Dr. Noble) 목사와 김재찬 목사의 주선으로 강서읍에 처음으로 감리교회를 세 웠다. 처음에 교인은 전삼덕의 가족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그는 어둠에 묻혀 사는 여성들 을 깨우치기 위하여 여성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고 여겨 큰 며느리 김닐린 58) 과 함께 평 양의 여자성경학교를 다녀 졸업증을 받았다. 그녀는 졸업 후 선교사(Miss Ethel M. Esdey)의 종용으로 학교를 설립하여 며느리와 함께 여성교육을 하였다. 초기 여성교육 은 이처럼 종교지도자가 소명감을 가지고 더불어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전삼덕은 며느리 닐린과 함께 고향 학동에 崇 德 보통학교를 설립하여 여성에게 새로운 지식을 가르쳤다. 그 는 5일간은 학교에서 일하고 토요일은 오로지 교회일과 지역 전도만을 하였다. 그는 1932년 89세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오로지 여성교육과 주의 사업에 생애를 바쳤다. 59) 58) 김닐닌은 김폴린( 保 麟 )의 어머니이다. 김폴린은 3.1운동 당시 이화학교 대학 예과 2학년으로 만세 시위에 참여하였고, 1920년 여름방학에는 김활란이 이끈 7인전도대에 참가하였다. 이후 YWCA 창립에도 참가하였고, 감리교 교회교육 개혁에도 앞장을 섰었던 교회 지도자였다. 한 국기독교백주년기념사업협의회 여성분과위원회편, 여성 - 韓 國 基 督 敎 女 性 百 年 史 (대한기독교 출판사, 1985), pp.270~72. 59) 張 炳 旭, 韓 國 監 理 敎 女 性 史 (성광문화사, 1979), pp.185~194.

- 124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인천지방에 본격적인 기독교 선교사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송도의 과부 전도부인 백 헬렌에 의해서였다. 그는 남편이 죽자 두 아이를 데리고 살길을 찾아 무조건 서울로 왔 다. 그는 일자리를 구하기 위하여 거리를 쏘다니다가 지금의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튼 부인 이 여성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성경반의 광경을 보고 여기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뜨거운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성경반에 다니는 중 스크랜 튼 부인에게 전도부인으로 발탁되었고, 이후 3년간 스크랜튼과 피얼스 밑에서 전도교육 을 받았다. 교육이 끝난 1893년부터 그는 세계여성선교회의 이름으로 여자선교사업이 아 직 행해지지 못하고 있는 제물포로 파송되었다. 그는 두 아이를 거느린 어머니로서의 삶 과 전도 사업이라는 양면의 임무, 즉 직장과 가정을 함께 이끌어가야 하는 이중적 짐을 지고 있었다. 그는 이 두가지 삶의 임무를 行 商 을 통해서 아주 훌륭하게 해내었다. 深 閨 에 처하여 생활하는 안방부인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행상만큼 좋은 방법이 없었다. 당시 부인들은 남편으로부터 소박을 받고 시어머니로부터 시달림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느 그들에게 물건을 팔면서 동시에 그들의 힘들고 상처받은 삶을 들어주고 사랑의 마음으로 어루만져주면서, 마음의 안위와 영혼의 구제를 위해 기독교인이 되어야 함을 힘써 전도하 였다. 행상과 전도를 겸전하기 3~4년에 제물포에서는 백전도부인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1897년 인천지방에 새선교사 존스(Dr. Jones)내외가 부임하여왔다. 그 는 백전도부인이 힘써 닦아놓은 전도의 터전 위에 교회(지금의 내리교회)를 시작하고 존 스부인은 여선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여성선교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영화여학교를 설 립하였다. 제물포의 개신교세는 날로 늘어나, 1901년에는 부천을 거쳐 강화에까지 확대 시켰다. 60) 중앙여고를 설립하고 한평생을 여성교육과 여성운동을 위하여 몸바친 황신덕의 친정어 머니 洪 裕 禮 도 전도부인으로 활동하였다. 1898년 11월 6일 황신덕을 출산할 때 태반이 산모의 턱밑까지 치밀어 죽을 수밖에 없는 지경에 빠졌다. 그때 평양에서 부인병원을 경 영하고 있던 선교 의사인 홀(Dr. Hall)부인을 불렀다. 홀부인은 능슥한 솜씨로 탯줄을 끄집어내어 사경에 처한 난산으로부터 살려주었다. 홀부인에게 감사의 표시를 하고자 하 자 그녀는 극구 사양하고 예수를 믿을 것만을 부탁하고 돌아갔다. 홍부인은 그 뒤 평양 남산현교회를 다니게 되었고 신앙이 크게 자라 마침내 홀부인의 병원에서 환자를 돌보며 성경을 가르쳐주는 전도부인이 되었다. 61) 즉 홍유례는 신기한 서양 의술로 인하여 예수 60) 張 炳 旭, 위의 책, pp.194~198, Missionaries of the Women s Foreign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 Fifty Years of Ligh, Y.M.C.A, Press Seoul Korea, 1938, pp.34~39. 61) 張 炳 旭, 위의 책, pp.527~8.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25 - 를 믿게 되었고 또한 기독교 여성지도자로서의 전도부인이 되었던 것이다. 이 시기 전도부인은 여성교육자와는 달리 가정부인으로서 종사한 경우가 많았다. 그것 은 아마도 전도부인으로서의 교육기간이 짧고 시간 활용이 교사직에 비하여 융통성이 있 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천도교의 지도급 여신도들의 교회 부흥 발전을 위한 활약도 적지 않았다. 천도교의 근 본 정신은 만인 평등의 개벽 사회를 이 땅위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초기 동학 포교 시절부터 남녀의 평등을 주장하여 한국근대사에서는 최초로 남녀평등과 여성해방을 주장하였고 한국근대화로의 기치를 올린 바 있었다. 그러나 초기 포교 시절에는 여성의 사회 참여의 이상적인 모델이 없었기 때문에 여성의 사회 진출과 같은 것은 논위될 수가 없었다. 특히 1894년 동학의 농민혁명운동으로 인하여 정부로부터 극심한 탄압을 받아 동학의 교세가 크게 꺾이었다. 여자선교사를 비롯한 외국여성들의 여러 형태의 사회 활약 이 많았고, 또한 여학교 출신여성들의 적극적인 사회활동도 다양화해지고 있던 1905년 이후 동학은 근대적 종교로서의 교단 정립을 하여갔다. 천도교로서 새로 출발한 동학은 부인 포교를 위한 婦 人 傳 敎 師 (또는 婦 人 奉 敎 師 )제를 두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전도부인 제도를 통한 교세의 확대를 보고 부인전교사제를 도입한 것으로 생각된다. 모든 종교가 그러하듯 종교의 발전은 부인들이 얼마나 열심히 그 종교에 참여하는가에 달려 있다. 그 러므로 부인신도를 널리 확보하고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지도하기 위해서는 여성종 교지도자가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천도교의 교세를 확대하는 데 적지 않은 기여를 하였 던 천도교의 부인전교사제는 아마도 1906년부터 주로 활동된 것으로 생각된다. 1906년 9월 천도교 부인전교사 李 九 가 100여명의 부인들에게 천도교리를 전파하여 새 교인으로 입교시켰다. 그리고 매 侍 日 마다 입교한 부인들을 데리고 중앙총부 성화회에 참 석했다 62) 는 기록이 있다. 전도(전교)와 신앙 및 신앙인으로서의 올바른 삶을 살도록 지 도하는 것은 천도교 부인전교사의 중요한 임무였다. 이것은 또한 새 입교자들에 대한 신 앙생활의 지도와 신앙의 성장을 통해 천도교를 보다 발전시키기 위해서의 활약인 것이다. 또 이 해 12월에는 전북 금구군 송내리에 사는 교인 朴 淵 童 의 처 이씨와 朴 守 桓 의 어머 니 김씨가 동리 부인 100여명을 천도교에 입교시켰다 63) 부인들이 가정경영권과 자년양 육권을 전적으로 갖고 있는 한국의 가족제도에 있어 한 가정의 주부를 교인으로 만든다 는 것은 곧 그 가족 전부를 교인화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적극적 포교를 위해서는 각 가정을 방문하여 포교를 할 婦 人 奉 敎 師 가 필요했을 것이다. 천도교에서는 1910년 4월 婦 人 奉 敎 師 40명을 선정하여 각지방에 파송, 부인 포교에 힘쓰도록 결정하 62) 萬 歲 報, 1906년 9월 16일, 婦 人 誠 心 布 敎. 63) 萬 歲 報, 1906년 12월 28일, 婦 人 說 敎.

- 126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였던 것이다 64). 이들 부인봉교사의 종교활동은 일제하에서 천도교를 중심으로 하는 여성 운동을 활발하게 추진시킨 바탕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3. 醫 療 人 으로의 進 出 우리나라에는 이미 조선조 태종대부터 女 醫 制 度 가 있었다. 여의는 주로 궁중을 중심으 로 의료활동을 하였고, 여의가 되기 위해서는 일정기간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여성의 사회활동을 극도로 제한하고 있던 시대였으므로 여의로서 활동하는 여성신분층은 대개 官 妓 나 宮 女 등이었으며 이들에 대한 사회 통념은 천업 이상의 것이 아니었다. 일반 민간인들은 과학적인 의료 혜택을 거의 받지 못하고 있었다. 병이 나면 굿이나 독경과 같 은 미신적인 것에 의지하거나 전통적인 민간 치료법에 따르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허 무맹랑하고 비위생적이어서 건강에 위해를 주고 생명을 위협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양선 교사이며 의사인 알렌이 1884년 갑신정변에서 심하게 상해받은 이들을 훌륭한 솜씨로 치 료해서 단시일에 쾌차케 한 것을 본 왕실과 조정에서는 서구의학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갖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개화기 한국여성에게 있어 교육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역시 근대 의료를 수용하여 부 녀들에게 시혜하는 것이었다. 한국선교의 원활한 길을 찾고 있던 미국 장로교 선교부에서 는 1886년에 최초의 의료여선교사인 엘러스(Ellers)를 한국에 파송하였고, 그 이듬해는 미국감리교여선교회에서도 하워드(Howard)를 파송하여 우리 나라 최초의 부인병원인 保 救 女 館 (Caring for and Saving Woman s Hospital)을 창설하였다. 근대의학에 대 한 한국인의 긍정적 인식으로 인하여 치료를 받으려는 부인 환자들이 늘어나자 손이 모 자란 선교사들은 한국 여성에게 직접 의료교육을 시켜 진료에 임하도록 해야겠다고 느꼈 다. 1891년 10월에 보구여관에 파송되어온 의료 여선교사 셔우드(Rosetta Sherwood)양은 부임후 의료강습반을 열어 한국인 4명과 일본인 1명에게 의학강습을 하였다. 여기서 공 부한 박에스터가 1896년에 미국으로 유학하여 1900년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을 졸업, 우리나라 최초의 여의사가 되었다. 박에스터는 1877년 3월 16일 서울 정동에서 김홍택( 金 弘 澤 )의 세째딸 金 点 童 으로 태 어났고, 선교사 아펜젤라의 집에서 일하고 있던 그의 아버지가 스크랜튼 여사가 여아를 맡아 교육한다는 소문을 듣고 8세인 딸 점동을 이화학당의 초기 학생으로 입학시켰다. 그는 총명하고 영어를 잘하여 보구여관에서 셔우드의사의 통역과 의료 보조로 일하다가 64) 大 韓 每 日 申 報, 1910년 4월 14일, 婦 女 布 敎.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27 - 의료 교육까지 받게 되었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근대 여성 의료 교육의 처음이었다. 그녀 는 15세에 세례를 받고 에스터라는 세례명을 받아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되었다. 그녀는 그 이듬해(1893) 5월 24일에 신실한 24세의 청년 박유산과 결혼하였으며, 65) 결혼 후에 도 계속해서 병원에서 일을 했다. 그의 남편은 의사 셔우드의 약혼자로 평양에서 의료선 교를 하는 홀박사(William Jamems Hall, 1860~1894)를 도와 일하던 청년으로 홀박 사가 중매를 해 결혼이 성립된 것이었다. 홀박사는 결혼후 부인과 에스터 부부를 데리고 진료와 선교를 위해 평양에 다녀왔는데 그 때 장질부사에 걸려 1894년 11월 27일에 죽 고 말았다. 남편 홀박사가 죽자 비탄에 잠긴 셔우드는 한살된 아들을 데리고 뉴욕주 리버 티의 친정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때 박에스터는 그에게 자기도 미국으로 함 께 데려가 주기를 간청하여 마침내 미국유학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1894년 12월에 홀 부인을 따라 남편과 미국으로 간 에스터는 1895년 2월에 리버티의 공립보통학교에 입학, 열심히 공부하고 동 9월에 생활비를 벌기 위하여 뉴욕시의 유아병원에서 1년 이상 일하 고, 1896년 10월 1일에 현재의 존즈 홉킨즈대학의 전신이었던 볼티모어 여자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00년에 졸업하였다. 66) 에스터가 공부하는 동안 남편은 돈을 벌어 아내의 뒷 바라지를 하였다. 그의 남편은 그 시대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신실하고 또 아내에 대한 이해심과 관용이 많은 남편이었다. 그런데 아내의 뒷바라지를 하던 박유산은 불행하 게도 그녀가 졸업하기 21일을 앞두고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미국 유학 여의학석사(M.D.)인 에스터는 졸업후 미국에서 좋은 일자 리에 안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곧 귀국하여 여성들에게 예수를 전하며 의료사업을 펴 기로 결심하였다. 에스터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 주었던 선교사 홀부인(Mrs. Hall)이 이 미 그의 귀국에 앞서 남편 사업을 잇기 위하여 다시 한국으로 와서 평양에서 의료 선교 사업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초의 맹아학교를 설립 운영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에스터는 귀 국후 홀부인의 사업을 돕기 위하여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의료활동을 하였으며 또 황 해도 지역의 순회전도사로서의 활약도 하였다. 에스터와 홀부인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깊은 인연의 여성들이었다. 결혼도 거의 비슷한 시기에 하였고, 또한 다 같은 청춘 과부 로서 의료 전도사업을 하는 동지적 관계였다. 홀부인의 아들 셔우드 홀의 회상기에, 나 는 에스터를 무척 좋아했다. 그녀는 마치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우리와 함께 살았다. 그 녀는 감미롭고도 선율적인 목청을 갖고 있었다. 저녁에는 내내 소설이나 시를 낭송해주곤 했다 67) 고, 쓰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녀의 홀부인 가족과의 관계등을 잘 알 수가 있다. 65) 셔우드 홀 著 ; 金 東 悅 譯, 닥터 홀의 조선회상 ( 東 亞 日 報 社, 1984), p.100. 66) 셔우드 홀 著 ; 金 東 悅 譯, 닥터 홀의 조선회상, pp.96~99, 100~118, 135, 144~46, 158 ; 梨 花 九 十 年 史, pp.73~75. Fifty Years of Light, p.46.

- 128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그녀는 의사이면서도 매일의 분주한 생활로 자신의 건강을 돌볼 겨를을 갖지 못하여 마 침내 1910년 4월 14일 남편처럼 폐결핵으로 사망하였다. 참으로 아까운 의료계의 여선 구자를 상실한 것이다. 의료 선교를 통한 한국내에서의 여성 의료인 배출은 간호사가 의사보다 더 많이 필요 하였고 그 교육도 보다 용이하였다. 1902년에 에드먼즈(Margaret Edmunds)양이 우 리나라 최초의 간호 선교사로 내한하였는데 그는 동년 12월에 간호원양성소를 설립, 간 호교육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첫학생은 오른손의 엄지손가락과 또 한 손가락이 없고 질투 심 많은 남편한테 코를 물어뜯겨 코 한쪽이 없는 여성이었고 두번째 학생은 병원의 환자 였었던 심한 절름발이었다. 또 조혼의 관습때문에 괜찮은 젊은 여성을 간호원으로 확보하 는 일은 매우 어려웠던 위에 간호직을 천시하여 간호원 확보는 더욱 어려웠다. 68) 이같은 정황에서 간호원 戴 冠 式 이 처음 행해진 것은 1906년 1월 25일이었고, 1908년에 두명의 졸업생(김마태와 이그레이스)을 정식으로 배출하였다. 1906년에 세브란스병원에 간호원 양성소가 설립되고, 박에스터의 여동생 김벳세가 69) 동 양성소의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김벳세는 언니 에스터와 함께 홀부인을 도와 병원에서 일을 했다. 70) 박에스터가 당당한 의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강한 사회진출 의식과 더불어 서 양의료선교사 활동이라는 여의사 모델이 있었고 또한 선교회라는 문을 통하여 외국유학 이 가능하였던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우리 나라는 여성들이 비록 의사가 되어 사회에 진출하기를 원한다 해도 그 뜻을 받아 가르칠 교육적 여건이 거의 갖추어지지 못하고 있 었다. 제국신문 의 1899년 5월 19일자 녀인셩심 조에 의하면 북촌 교동 사는 총명 혜 철한 한 여성이 학문 배우지 못함을 한탄하다가 의학교 설립 소식을 듣고 의학을 공부하 면 사회에 나아가 봉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의학교장 池 錫 永 을 찾아가 입학하기를 청 하였으나, 남녀 동학의 章 程 이 없어 입학시킬 수가 없다고 거절을 하였다. 여의사가 되기 를 원하는 여성이 있는 한 여자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의료교육제도는 어떤 형태로든 존 재해야 했던 것이 당시의 현실이었다. 1905년 이후 여성교육론이 비등하고 여성교육이 확대되는 과정에서 여성 의료교육의 기회가 등장하게 되었다. 1906년 5월에 李 春 世 李 匡 夏 등이 同 濟 의학교를 설립하고 5명 의 선생(그 중 1인은 姜 弼 周 부인 김씨)으로 남녀 兩 학과를 두고, 교과는 의학 국한문 산술 물리학 외국어학을 가르치는 의학교육을 시작하였다. 71) 여학생이 몇명이나 입학하 67) 셔우드 홀 著, 앞의 책, pp.144. 68) Fifty Years of Light, pp.6~7. 69)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사편찬위원회, 韓 國 女 性 史 2 (이화여대출판부, 1972), p.55. 70) 셔우드 홀 著, 앞의 책, pp.145. 71) 皇 城 新 聞, 1906년 5월 31일, 同 校 趣 旨.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29 - 여 사회 배출을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최초의 여의사 교육 기관이 한국인의 손으로 존재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또 의료 활동에서 간호원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廣 濟 院 에서는 1906년 8월, 간호학교를 설치하여 간호에 종사하면 문명에 진보 하고 자기 衣 食 之 道 에 유익하다 72) 면서 학생을 모집하였다. 이것은 여성의 사회적 기여 와 더불어 여성 자신의 경제적 능력을 가질 수 있음을 의미한 것이다. 근대 의료 보급에 따라 여성에게만 과해지는 특수의료분야의 여성 의료진 양성이 필요 하였다. 첫째 전국에 종두를 실시하게 되면서 아직도 내외법이 심한 시대라 부녀자들이 남자에게는 종두를 하려 하지 않으므로 여자 종두사들이 절대 필요하였다. 둘째는 출산을 도와줄 産 婆 도 절대적으로 필요하였다. 이에 1907년 大 韓 醫 院 官 制 가 정비될 때 산파 및 간호부양성소가 설립되어 정식으로 간호부를 교육 배출하였다. 73) 새로운 의술에 대한 여 성들의 관심도 높아 1909년 6월 대한의원에서 여성종두사를 모집할 때는 서울 관내에서 만 4~50명이 지원하였다. 74) 여성의료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 전환으로 사립 助 産 婆 양성 소들도 설립되어 산파를 배출하였다. 1909년 7월 위생국 조사에 의하면 산파 33명, 간호 부 33명이라고 했다. 75) 숫적으로는 많은 것이 아니나 의료계로의 여성 진출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1910년대의 외국유학 여학생 중 의학 교 입학자가 늘어가는 계기를 주었다. 4. 商 工 業 從 事 者 로의 進 出 개항 이후 일본인과 서구인들에 의하여 새로운 자본제에 의한 기계류 상품들이 대량으 로 유입되었으며, 또한 국가적 개화문물정책과 외국 특히 일본의 기계제 산업체가 국내에 설립 운영됨으로 인하여 여성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공장들과 외국 물품 취급 상점들이 세워졌다. 산업계의 급격한 변화는 전통적 산업 질서를 붕괴시킨 반면 여성들에게는 새로 운 사업과 산업에 종사하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이것은 여성의 새로운 직업활동의 한 양 상을 보인 것이며, 여성의 사회적 지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통시대에도 집안이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부녀들은 생계를 위하여 나물장사 떡장사 술장사와 같은 것을 전혀 안한 것은 아니었다. 또 가정에서 부업으로 할 수 있는 옷감 물 들이기 바느질 베짜기 가축 기르기 등을 통해서 가족 생계를 도맡아 행하고, 때로는 장사 72) 皇 城 新 聞, 1906년 8월 2일, 廣 濟 院 振 興. 73) 皇 城 新 聞, 1908년 6월 28일, 看 護 婦 見 習 ; 大 韓 每 日 申 報 1908년 7월 30일, 看 護 婦 募 集. 74) 皇 城 新 聞, 1909년 6월 1일, 看 護 資 格, 동 6월 6일, 婦 人 醫 學 志 願. 75) 皇 城 新 聞, 1909년 7월 23일, 衛 生 狀 態 調 査.

- 130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의 재주가 뛰어나 큰 돈을 모은 여인도 있었다. 예를 들면 정조때 제주도의 큰 흉년에 자 신의 재산을 풀어 굶어 죽어가는 섬사람들을 구제한 義 人 金 萬 德 은 특수작물의 재배와 육지무역과 사슴농장 등으로 巨 富 가 된 여성이었다. 또한 尙 州 의 손꼽히는 부자가 된 金 生 의 아내의 이야기 등을 통해서도 부녀의 致 富 활동이 특히 사회변동이 심하였던 조선 조 후기에는 꽤 있었던 것이다. 일본과 서구 상인들이 빈번히 출입하는 19세기 말엽에는 직업의식의 변화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새로운 형태로의 여성의 상업 진출이 나타났다. 그 첫째가 남성전 용의 전통 상업에도 여성이 진출하였다는 점이다. 즉 종래 남자 전업이었던 보부상계에 여자가 처음으로 동참하게 되었던 것으로 이것은 전의 사회에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 었다. 1899년 8월 29일자 독립신문 에 負 商 을 남편으로 둔 서울 기생들이 서방 직분을 좇아 부상에 입참하여 남녀가 함께 등짐장사를 하니 대한 상업이 더욱 흥왕할 것이라 고 보도했다. 남녀가 평등으로 상업에 종사하게 된 것을 격려하는 신문 기사인 것이다. 둘째는 여성들이 외국 교역 물품을 취급하는 특수한 부녀 전용 상점을 경영한 것으로, 이것은 당시 사회에서는 세계인으로서의 안목을 가진 여성의 활동으로 인식하였던 것이 다. 1899년 1월 9일, 大 韓 每 日 申 報 에 의하면 서울 다방골에 사는 조문천의 첩이 외국 의 각항 물건을 무역하여 장사한다고 보도하였으며, 양장 여인 경옥당이 안동에서 서울 정동의 한창호의 집으로 이사하여 역시 외국의 각색 물건과 동서양의 각종 좋은 술을 판 다고 보도하였다. 76) 이 당시 여성들이 舶 來 品 상점을 운영한다는 것은 여성을 서구문물 에 간접으로 접촉하게 하여 고루한 생각을 벗어버리게 하는 수단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상업적 이익만이 아닌 여성 개화라는 측면에서 선각적 여성이 부인상회(점) 를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서울 안현에서 부인상점을 경영하였던 李 一 貞 이 그 좋은 예 이다. 77) 그는 당시 平 理 院 검사이며 뒷날 헤이그밀사로 파견되었다가 순절한 李 儁 의 아 내로 이미 진명부인회등의 애국계몽적 여성단체에서 활약하였고, 일진회에서 일본에 파견 한 유학생 21명이 학비난에 허덕일 때도 의연금(지화 21환)을 내고 이들에 대한 지원운 동을 벌였으며 78), 제국신문이 경영난에 허덕일 때도 신문애독 권고운동을 폈던 분이 다. 79) 이일정은 남자의 기개를 가진 진취적 성품의 여성이었다. 1931년 신여성 의 기 자가 서울 봉익동 이일정의 집을 방문하여 면담한 방문기에서 이일정은 부인상회에 관하 여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76) 大 韓 每 日 申 報, 1899년 2월 15일, 韓 女 爲 業. 77) 제국신문, 1907년 1월 16일, 婦 人 義 捐. 78) 大 韓 每 日 申 報 1907년 2월 19일, 夫 人 寄 函. 79) 제국신문, 1907년 9월 11일, 新 聞 廣 覽 ( 寄 ).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31 - 그 때 내가 회계로 있었는데 그 때 부인들의 사상은 아주 고귀하고 뜻 있었지. 한닢만 모 아도 이것을 모아 나라의 빚을 갚자 두닢만 보아도 그랬고 다리 하나 추려도 이것을 나라빚 갚기로 하고는 입을 것 먹을 것 못입고는 전부 우리 집에 갖다 쌓았는데 지금으로 말하면 아마 크나 큰 창고에 한짐은 될 것이야요. 그래 모인 것을 팔아서 바치고 바치고 했지요. 천만에 그 회가 생긴 후 오륙년 후에 숙명 진명이 생겼으니까 그러고 그때 부인들은 회를 모아도 처내장옷 쓰고 모았지만 단결은 아주 굳었지요. 비록 단상에 올라서서 말을 못하나 회에 대한 관념은 굳었지요. 그리고 물건을 사도 꼭 단결하고 조선상점에서 샀지요 80) 이 일정이 30여년 전의 일들을 회고하여 말한 것이어서 時 事 내용 등에 약간의 오차 등 이 있으나 그가 운영하던 부인상회는 단순한 상점이 아니라 부녀들의 경제적 활동을 통 하여 나라를 구하려던 일종의 구국적 여성경제운동의 일환이었음을 충분히 알게 한다. 당 시 사회에서는 부녀들이 외국의 각종 물건을 구비한 개화 물품 상점을 경영하는 것은 대 단히 진취적인 것으로 보았다. 즉 부녀들이 외국문물에 대한 견식이 있어야만 박래 물품 상점 운영이 가능한 것이므로 당시로서는 아주 새로운 직종의 사업으로 여겨 이들을 개 명 여성으로 평판하고 있었던 것이다. 외국 상인들의 빈번한 왕래와 외국과의 교역업자 등의 증가는 자연히 호화로운 음식점 이나 유흥업소를 차리게 했다. 러시아 귀화 한국여성으로 1898년에 찬양회 조직에 참여 하고 순성여학교 교사를 한때 지냈던 고정길당은 서울에 양요리점을 채려 장사를 하였 다. 81) 당시 외국인이나 신흥 부자들을 비롯한 일부의 새로운 유형의 소비자인 有 錢 客 을 상대로 하는 양요리 靑 樓 를 거금을 가지고 경영하는 자가 꽤 있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한 새로운 사업으로 차를 파는 다방도 생겨났다. 녹음이 우거진 南 山 和 壇 臺 근처에는 일인 이 경영하는 찻집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 한 찻집에서 한국 여인이 차를 팔았다고 했 다 82). 이것은 오늘날의 다방 레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되는데 여성들이 이처럼 새 로운 직종으로 나아가 생업을 하였던 것이다. 서구 자본제 기계상품들이 교역을 통해 국내에 반입되는 경우와, 회사나 공장을 국내 에 설립하여 생산 판매하는 경우가 있었다. 직물회사와 공장, 까스회사 연초회사 제사공 장 인쇄소 조폐공사 등을 들 수 있다. 이들 공장과 회사에는 여공이 필요했으며, 家 貧 한 여성들은 생계 보조를 위하여 여공으로 취업하였던 것이다. 특히 여성노동력을 값싸게 활 용할 수 있는 이점을 노려 일본직물회사들이 일찍부터 한국으로 진출하였다. 일본측은 여 공의 효율적 활용을 위하여 직조학교를 설시하고 일본인 교사로 하여금 학생교육을 행하 였던 것이다 83). 직물 수요가 광범위한데 비하여 큰 자본을 갖지 아니하더라도 운영할 수 80) 新 女 性 1931년 10월호, 海 牙 密 使 李 儁 氏 夫 人 李 一 貞 女 史 訪 問 記, P. 37. 81) 皇 城 新 聞, 1899년 9월 18일, 女 設 料 理. 82) 萬 歲 報, 1906년 7월 24일, 日 娶 韓 女 賣 茶.

- 132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있는 것이 직물회사이므로, 지배층 및 재야지식인들까지 직물업을 부국강병의 길로 여겨 舊 韓 末 에 몇몇의 직물회사가 설립되었다. 아울러 여공 진출로의 길도 그만큼 확대되었다. 예를 들면 1900년 3월, 閔 丙 奭 (사장) 李 根 澔 (부사장) 李 鳳 鎬 (총무원)가 설립한 서울 남 서 예동의 織 造 緞 布 주식회사는 각양 주단과 포목 직조하는 기계를 구입하여 남녀 학생을 모집하여 일정 기간의 교육을 거친 후 졸업과 동시에 월급을 지급하는 정관을 만들어 공 원을 모집했다. 84) 서울 南 竹 洞 직조소의 경우는 錦 綾 木 布 의 직조와 더불어 각종 표백과 염색을 專 務 資 業 하였는데 이에 종사할 학생 요원(14~20세)을 선발하여 3년간 교육시키 고, 견습생에게는 점심을 제공하며 재학생이 직물했을 때는 척수에 따라 공비를 지급했고 중도 퇴학자는 食 料 金 을 변상하게 했다. 전문 직조인을 양성하여 우수제품을 생산하고 그 전문 인력을 확보하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85). 당시 직조업은 비교적 수지타산이 높은 직종이어서 각직조회사마다 유리한 조건을 내 세워 공원을 모집하고 있었다. 서울 東 嶺 洞 漢 城 製 裁 회사의 남녀 직공모집 광고에 의하면 숙련공은 기계 2좌를 운전하여 하루에 150~60척씩을 직조할 수 있고 초습자도 7~8일 을 배우면 1좌에 5~60척을 직조할 수 있으므로 매일 7~8량의 공전을 받을 수 있다 하 였고, 여공 숙소는 따로 마련하였다고 하였다. 남녀 임금의 차이는 두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86) 일인 경영의 동아연초회사, 용산인쇄국, 일한가스회사도 여공원 여 技 員 및 여사무원을 모집하였는데 가스회사는 14~18세의 고등학교 졸업 정도인으로 자격을 제한하고 있었 다. 이것은 사무원으로서의 전문직종인 때문인 것이다. 이에 비해 인쇄국과 연초회사의 경우는 연령 15~25세를 모집하였으며 동아연초회사의 경우 한국인 여공이 무려 260여 명(일인직공 64, 한국남직공 130명)이었다. 이만한 수라면 능히 공인 자신의 이익을 옹 호할 세력 규합을 할 수 있으며, 실제로 1909년 한국여공이 日 女 에게 구타당한 사건이 발생하여 일제히 퇴사하는 일이 있었으며, 87) 1910년 3월에는 부인의 월급이 겨우 3환밖 에 되지 아니하여 임금에 불만을 품고 많은 부인들이 퇴사를 했다. 88) 1910년대에 오면 생계보조적 수단과 여성들의 경제적 독립의 희망 등으로 인하여 여 성취업 의지가 크게 확대되었다. 1910년 4월에 서울 新 門 外 作 蠶 회사에서 고용 여인 30 명 모집에 무려 200여명의 지원자가 몰렸던 것 89) 은 당시 사회의 경제적 여건과 여성의 83) 제국신문, 1900년 3월 10일, 織 造 敎 育, 동 3월 27일, 織 造 學 校. 84) 皇 城 新 聞, 1900년 3월 19일, 織 造 會 社. 85) 皇 城 新 聞, 1900년 7월 14일, 織 造 所 의 擴 張. 86) 皇 城 新 聞, 1901년 5월 13일, 男 女 織 工 募 集. 87) 大 韓 每 日 申 報, 1909년 12월 12일, 烟 社 風 波. 88) 皇 城 新 聞, 1910년 3월 20일, 婦 人 退 雇.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33 - 사회진출 의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Ⅴ. 맺 음 말 이상에서 대한제국기라 할 1910년 이전의 한국여성운동의 특성과 그 운동 전개에 있 어서의 역사적 한계성에 관하여 살폈다. 그리고, 그러한 여성운동을 통하여 사회 전반적 으로 여성 인식에 변화가 나타나고 여성자신들도 평등적인 인간의 삶을 위하여 다양한 사회진출 활동을 하게 되었음을 밝히었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나라 초기 여권운동과 여 성사회 진출에 대한 다음 몇가지의 새로운 인식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첫째는 전통적인 삶의 방식을 벗어나 여성들이 당당하게 사회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무 엇보다도 먼저 사회의 변화가 일어나야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18세기 이래 이미 사회 변동의 내재적 역량이 크게 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래적 문화를 수용함에 있어 적극 적인 면을 보였다. 외국 여선교사들의 여성교육활동이 학교 설립초에는 환영받지 못한 채 부진하였으나, 한국여성들은 외국여성들의 적극적인 삶의 태도를 곧 자신을 변화시킬 필 요한 모형으로서 받아들였다. 둘째는 1898년 9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운동이 서울 북촌 양반부인들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이들은 여권통문 을 반포함으로써 종래 의 차별된 여성의 삶을 청산하겠다는 변혁적 의지를 보이고 찬양회의 조직과 사립 순성 여학교의 설립 운영과 관립여학교 설립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통문 에 의하면 종래의 한국여성의 삶은 규문에 갇혀 남자의 절제만을 받는 병신이었으므로 온전한 인간 이 되기 위해서는 남자와 똑같이 교육을 받고 그 굴레를 스스로 벗어나 활달한 사회진출 을 통해 여성해방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참으로 진보된 우리나라 초유의 여성 운동이었다. 그러나 개혁정치를 주장하던 독립협회 세력이 꺾이고 보수적 정치세력이 강 세하게 되자 평등지향적 여성의 사회진출을 목표로 하던 여성운동은 다시 유보되지 않을 수 없었다. 셋째는 국망의 위기에 처한 1905년 이후 민력과 국력 양성의 측면에서 여성교육이 절 실한 국가적 과제로 대두되면서 다시 여성운동과 여성의 사회진출을 통해 국력을 배양해 야 한다는 논의가 사회 일반에 확대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국권 회복의 중요한 수단 으로서 여성교육운동이 필요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의 여성운동은 주로 여 성교육운동으로서 전개되었고, 사회적 국가적 요구에 의한 여성운동이었던 만큼 선각적 89) 大 韓 每 日 申 報, 1910년 4월 26일, 雇 女 募 集.

- 134 - 國 史 館 論 叢 第 83 輯 남성들이 여성교육단체와 여학교를 설립운영하는 경향이 높았다. 그 대표적인 것이 여자 교육회이며, 이 이후 여성들에 의하여 설립 활동된 여성단체들도 여자교육회적 모델을 크 게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아울러 여성운동의 측면에서 볼 때 찬양회운동보다 후퇴한 감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일제 침략이 가속화되면서 여성운동을 일제식민지여성 정책을 수행할 방향으로 활용하는 경향을 뚜렷이 보였다. 넷째는 일제 침략이라는 국망의 위기로부터 국권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온 國 民 의 힘 을 모아야만 했다. 이같은 절박한 역사적 상황에 처하여 부녀들의 국가의식 민족의식이 크게 높아져 구국적남녀평등의식이 성장하게 되었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부녀들이 이 운동에 가족구성원으로서가 아닌 국가구성원으로서 참여하게 되었다. 家 長 의 생각이나 명령에 의하여 참여하는 것이 아니라 부녀들이 자발적이며 독자적으로, 그리고 여성 자신의 소유물을 가지고 당당하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여성의 손 으로 국채를 갚고 보면 서양과 같은 남녀평등권을 획득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참여 하였던 것이다. 국채보상여성운동은 한국근대여성운동이 역사의 중심부에서 성장 발전할 수 있는 중요한 계기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다섯째 급격한 사회변동과 여성운동의 발전은 여성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직업을 창출 하고 여성들의 사회진출을 가능하게 하였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가장 많은 분야는 교육분 야였다. 다음으로 서양 의술에 대한 관심과 수용은 이 분야로의 여성진출을 가져왔다. 의 사란 특수한 교육과 훈련이 요해지는 분야이므로 여성 진출이 용이하지 않아 전문직 여 의사로는 박에스터가 모범적이고 선구적인 여의사의 삶을 살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국내 의학교가 설립되자 의학을 공부하기 갈망하였던 여의사 지망자가 있었으나 제도적 여건 이 마련되지 않아 뜻을 펴지 못하였다. 이것은 여성의 활동을 제한하는 사회적인 불합리 한 여건이 선구적 여성의 사회진출의 길을 가로 막은 것이라 하겠다. 이에 반해 의사의 보조역활자인 간호원직과 해산을 돌보는 조산파직으로의 진출은 증가해갔다. 개신교의 전도부인, 천도교의 봉교사와 같은 새로운 여성종교지도자로의 진출도 중요 한 여성사회진출 분야가 되었다. 이 분야로의 여성진출은 그네들의 종교적 신념과 더불어 애국애족적 의지도 강하여 우매한 여성들에게 종교적 귀의를 안내 지도하면서 동시에 애 국애족의식을 키워주었다. 뒷날 3.1운동에서 이들 전도사들의 활약이 절대적으로 컸던 것은 이들의 종교적 신념이 곧 신으로부터 완전 자주독립을 부여받을 수 있게 된다는 신 념과 일치한 때문이라 하겠다. 근대사회로의 변환은 근대적 상공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부녀들의 상업분야로의 진출 은 여성의 경제권 확립 의지와 더불어 개화의식의 발전에 있었다. 또한 직물공장, 연초제 조공장 등 기계제 산업체의 설립이 늘어나면서 여성노동력의 공장진출이 증가되었다.

한말 여성운동의 특성과 여성의 사회진출 - 135-1910년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는 공장여공의 수가 한개 공장에 기백명을 헤아릴 만큼 많 이 진출하였던 것이다. 이 밖에 그 수는 많지 않지만 사회변동에 따른 새로운 직종업의 증가로 인한 여성의 사회진출이 다양화해져갔다. 한말의 여성운동과 여성의 사회진출은 수량으로 볼 때 많은 것은 아니었으나, 이를 토 대로 민족수난의 일제통치하에서도 오히려 다양한 여성운동을 발전시킬 수 있었고 또한 여성의 적극적 사회진출의식을 확대시켜준 역량적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는 데에 역사적 의의가 있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