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을 대신해 가장으로 산다는 것 자 료 명 : 20140411차형돈(보령) 조 사 일 : 2014년 4월 11일 조사시간 : 37분(10:05-10:42) 구 연 자 : 차형돈(남 1936년생) 조 사 자 : 박경열, 유효철, 이원영. 조사장소 :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죽림3리 의식경로당 [구연자 정보] 고향은 황해도 옹진이다. 1936년으로 전쟁 당시 15세였다. 가족은 4남 1녀 중에 둘째이다. 10살 때 여동생이 죽는다. 피난처였던 연평도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인천으로 이사한다. 형이 배를 탔 는테 풍랑으로 실종된다. 형이 죽자 형을 대신해 부모님을 모시고 이사한다. 광천에 수용소가 있다 하여 광천으로 옮긴다. 자식은 5남매를 두었으나 한 자식을 일찍 잃어 4남매만 남았다. [이야기 개요] 고향이 옹진인데 새벽에 총소리를 듣고 전쟁이 난 것을 알았다고 한다. 군인들이 LST 군함을 타 고 후퇴하였는데 피난 가는 사람들은 작은 배를 타고 이동한다. 형이 먼저 배를 탔는데 배에 너무 많은 피난민들이 타고 있어서 배가 움직일 수 없자 선장이 배에 매달린 화자를 발로 밀어 배에서 떨어뜨린다. 형이 그 모습을 보고 화자를 물에서 건져 올려 배에 탑승하도록 도와준다. 중간에 큰 배에 옮겨 타고 연평도로 향한다. 형제만 피난을 나왔기에 다른 가족들이 걱정된다. 형이 겨울 동 란에 황해도 연백에 남아있는 동생과 부모를 만나 함께 피난 나온다. 형이 가족을 부양하였는데 큰 어선을 탔다가 실종된다. 화자가 형 대신 가장 노릇을 한다. 광천에 피난민이 산다는 수용소가 있 다고 해서 광천으로 이동하였고 석면창고로 사용했던 수용소에서 여러 가구가 칸을 나누고 생활한 다. 지금은 그 수용소 자리의 밭을 사서 일구고 있다. * 키워드 : [충남 보령 / 피난담] LST 군함, 황해도 옹진, 피난민, 형, 연평도, 배, 광천, 수용소, 석면 창고 [1] 옹진에서 LST를 타고 연평도로 가다. [조사자 : 그러면 어르신 제가 몇 가지만 여쭤 볼게요. 어르신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차형돈. [조사자 : 그러면 원래 나이가 정확히 어떻게 되시나요?] 36년생이야. [조사자 : 원래 그러면 원 고 향은?] 황해도 옹진. [조사자 : 그러면 원래 형제간은 몇이셨어요?] 3남 1녀였는데 내가 열 살 때 여동생은 하나 죽고 지금 삼형제가 살고 있어요. [조사자 : 그럼 삼형제 중에 어르신은 몇째셨어 요? 첫째?] 아아, 4남 1녀였는데 내 위로 형이 돌아가셨어요. [조사자 : 지금 자제분은 몇 두셨어 요?] 4남매. [조사자 : 옹진에 계셨을 때 전쟁이 나자마자 피난을 나오신 거예요?] 아니요, 그때 옹진군은 38 이남 땅이었어요. 이남 땅이었는데 새벽에 그 새끼들이 총을 쏘고 포탄을 쏘면서 쳐 들어온 거예
요. 우리는 살 수가 없으니게 이게 큰 무슨 전쟁이다 그래가지고서 봉 동면이라고 거기가 말하자면 항구 였거든요. 그때 군인들이 후퇴를 한 거예요. 군인들이 후퇴하면서 활동 못 할 사람들은 다 그냥 죽어버리고 그 나머지 어느 정도 부상당했어도 활 동할 수 있는 사람들은 전부 LST 라고 있어요. 군인들은 퇴각을 한 거예요. 나머지 우리 국민은, 어떻 게 할 수가 없어서 쬐끄만 배들. 쪼끄만 배들을 타고서 우리는 이동 을 해야 되는 거예요. 그때 하도 사람들이 밀리고 밀리니까 배 쪼그 만 거라도 탈수가 없었어요. 제가 그때 나이 열여섯 살 먹었는데 형 은 배를 올라탔고, 내가 탈라고 하 는데 내손을 잡아 쳤네. 타는 게 뭐야. 올라오질 못하게 해. 배가 가 라앉게 생겼으니까. 그래서 물에 쑥 들어갔다 솟구치는 게 형님이 나오 는 거 보고 건저가지고 배를 타고 왔어. 배릍 타고 올 때 그 격랑이라는 건 말할 수가 없었죠. 우선 경찰 경찰들이 경찰 가족들 태우고 큰 배는 전부 그냥 이동하는 거야. 그런데 우리는 쬐끄만 배에서 용케 살라고 큰 배를 만나서 큰 배로다 옮겨 탔어. 쪼끄만 거 버리 고. 근데 그게 일개 경찰도 탔었거든. 탔는데 통통통통하는 발동배가 지나가. 지나가는데 그 총으 로 이놈이 경찰들이 쏴 재끼는거야. 오라고. 그니까 배가 어떻게 해? 이렇게 오지. 왔는데 경찰들 하고 경찰 자식들 이렇게 탔어. 그러면은 큰 배를 타가지고 이동하는 거야. 그렇게 했다가 도착지가 어딘 고하니 연평도라는 섬 알지? 연평도에 도착해가지고 몇 년 동안 거주를 했어. 내가 그때 초등학교 옛날 국민학교 거기 나왔어. 부모님이 나이 먹었어도 공부를 해 야 한다고 해가지고. 제가 5학년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습니다. 5학년에 들어가서 공부를 해가지고 거기서 졸업을 하고 그리구서는 어떻게 거기서는 먹고살 길이 없잖어. 농사가 있어 뭐가 있어. 아 무것도 없으니까. 내 위의 형님이 인천으로 이쪽으로 나가자. 그래가지고 발을 딛은 거야 인천으로. 생활하는 게 부모님도 나이가 많으니까 생활권의 큰 기대 도 없고 내 위의 형님이 참 열심히 일해가지고서 먹고 살았으니. 살다보니까 우리 형님이 결혼하 고서 돌아가셨어. [조사자 : 일찍? 어려서?] 아니 이상시럽게 큰 인천항구에서 큰 어선을 타고서 고기 잡는데 같 이 가셨는데 풍랑을 맞아서 실종 되서 찾질 못했어. 그 뒤로 부모님이 싫다는 거야.
큰자식을 잃었으니 싫다. 부모님 말씀이, 충청남도 광천. 광천에 난민들이 많이 살고 있다고 하니 거기 한번 가보고 오너라. 그때 나이가 내가 스무 살이 되었거든요. 그래서 여기에 와봤어요. 와보니까 이 수용소라는 창고 가 두 군데가 있는데 얘기를 들으니까 석면광산 창고였다고 그래요. 근데 거기서 거주하는 거여. 난민들이. 쬐끄만 방 한 칸에서 불 때고 자고. 아주 어두웠죠. 말도 못하게. 그렇게 생활하면서 지 내더라고. 그래서 나도 가만 생각을 해보니께 어떻게 할 수 없어서 인제 이런데서 도저히 살 맘이 안 나는 데 부모님이 자꾸 오자고 하니 정말 좋다고 자꾸 그러니까 할 수 없어서 여길 와서 쪽방을 하나 장만했어요. 창고 옆에. 창고에서 생활을 몇 년 했죠. 하다보니까 세월이 흘러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때 제가 인천에서 모은 재산을 팔아가지고 여기 와서 그걸 장만해가지고 살면서 뭘 해야 좋으 냐. 그때 와가지고서는 장사를 시작했어요. 농토도 없고 아무것도 없으니까 농사지어보지도 못했고 그러니께 장사. 장사한 뒤에 여기 와서 만난 양반이 돌아가신 우리 형님하고 같이 한 분이더라고 그 양반이 뭐 할 도리가 없으니까 장사나 해라 해가지고 장사를 시작한 거예요. 그렇게 해서 생활하면서 살다가 도저히 장사만 봐도 수틀리고 그러니까 잘 안되더라고요. 그러니까 아예 스물 한 살, 스물 두 살 먹던 해 여기에 이 조기 싣고 들어온 배도 많고 여기 안면도 어산도 섬 지대에서 이 광천장을 많 이 보러왔어요. 생활필수품을 전부 사가지고 가는 거야. [조사자 : 광천장이 정말 컸나 봐요?] 컸어요. 대천보다 컸어요. 대천에서도 여기에서 사다갔어. 예전에는 여기가 정말 좋았다고 충남 광천이. 그러다가 내가 어떻게 하다 보니 노동일을 했어요. 어떻게 하다 보니 장사를 해가지고서는 먹고 살 것이 못되니까. 그때는 이렇게 보리 벼 콩 잡곡들 많고 이 가근방에서 어산도 이 근방에서 소금, 소금을 많이 싣고 와서 전국 수납장이 여기 있었거 든요. 수납을 하는데 1등 2등을 가리잖아요. 이렇게 펴놓으면 배에서 인제 하차해가지고 쌓아놔서 쭉 해가지고 1등2등 등수를 찍는, 매기는 사람이 있어요. 그렇게 해가지고서 해놓으면 지금 현재 도 있어 그 창고에 지금 딴사람이 긴 이름들 지을라고 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전부 소금을 입금 시 키는 거야. 예산장부청을 했어 예산장부청. 그렇게 해가지고서 세월이 흘러가면 겨울에 할 게 없으니까 또 장사를 하는 거야.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렇지 않겠어요? 여름철 본 철은 노동을 했고 이 가을 돼 버리면 할 게 없으니까 장사를 하는 거야. 그렇게 해서 하다보니까 생활권이 조금 나아지니께 안 되겄다 내 근력으로 노동일은 못하겠고 그래서 장사를 쭉하다가 내가 결혼하고서 오남매를 뒀다가 하나를 잃어서 사남매를 키웠 는데 걔들을 가르칠라고 보니께 참 애로가 많았어요. 농토 근거지가 없으니까. 장사를 했는데 여력 이 없어요. 장사만 해가지고 가르치고 먹고살기 참 힘들었어요. 그래도 애들을 그래도 고등학교까 지 가르쳤어요. 가르쳐서 전부다 지들도 알아서 활발하게 잘 살아요. 둘이만 여기서 거주하고 삽 니다. [조사자 : 할머니하고.] 예. 자식들은 전부다 나가서 다들 살아요. 둘이만 여기서 왜 여기를 못 떠났냐면은. 아버지 어머니가 우리 아버님이 마흔일곱에 일손을 놨었어요. 그런데 부모님을 모시고 딴 델 어디로 떠날 수가 없어. 딴 데로. 한 해 한 해 그러다보니까 아버님어머님이 늙으시지 어디 모시고 댕길 수가 없지. 여기는 삼형제가 살고 있는데 하나는 서울 살고 하나는 경기도 김포 살고 나 혼자만 여기서 부모님을 모시고 지키고 산거예요.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께 지금은 자식들 은 다 나가 살고 둘만 여기에 살고 있는 거예요. 현재. [조사자 : 그러면 피난 나올 때가 열네 살이라고 하셨잖아요? 그때 계절상으로는 언제셨어요?]
봄이었죠. 육이오 때니까. [조사자 : 전쟁 이 나자마자 나오신 거네요.] 새벽에 인제 포탄 터지는 소리 들리고 군인들이 퇴거 하니까 우리가 피난을 안 갈래야 안 갈수 가 없었어요. 피난을 나와서 용케 살라고 피난을 나왔어요. 피난을 나왔을 때 형제 간만 피난을 나왔거든요. 형하고 나하고. [조사자 : 부모님은 안 나오시고?] 그땐 동생들도 어리고 하니까 못나오셨지. 같 이. 못나왔다가 수복 되었잖아요. 수복되 어가지고 형님하고 같이 남하하다가 형님 은 나이가 열여섯 일곱은 먹었으니까 쪼 끔 청년 위치에 있잖아요. 그 동네 어른들 하고 같이 떨어지고 나만 올라왔어요. 개 성으로 해가지고 황해도 해주로 해서 내 려왔어요. 동생들하고 부모님은 거기에 계 시는 거야. 인민군이 건들지는 않았어요. 일사후퇴에 다시 전체적으로 다시 가족이 나왔어요. [조사자 : 처음에 나오실 때는 배를 타 고 나오신 게 아니라 개성 해주로 해서,] 아니요, 배를 타고 나왔어요. [조사자 : 그러면 다시 부모님을 만나서, 동생이랑 만나서 일사후퇴 때 피난 나올 때는 그때도 배로 나오셨어요?] 아니요, 그때도 지금 저 짝으로 돌 아 나와야 되는데 그러는 것보다 배타고 나오는 게 빨라. [조사자 : 큰 배타고 나오셨어요?] 예. 그땐 안전하게 나왔죠. 큰 배니께. 그때 일사후퇴 때는 평안남북도 황해도 연백 참 그쪽 사람들이 밀려서 내려오는데 일사후퇴 뒤로 또 그놈들이 그랬잖아요. 일사후퇴 뒤로야 걔들이 삼팔선을 막 아가지고 휴전을 했잖아요. 그때 그 사람들이 피난민들이 억수로 많았어요. 그때 할 수 없어서 거기서 떠난 사람들이 LST 를 타고 목포 쪽으로 들어왔고, 우리는 잘 몰라. 얘기를 들어보니까 목포 쪽으로 들어와서 거기서 부터 생활을 해서 올라온 거예요. 올라와서 주로 난민들이 전부 머리가 좋고 고생을 많이 한사람 들은 성공을 했어요. 올라오면서 고생을 해서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이 전부 먹고 살길이 없기 때 문에 고생을 해서 장사를 해가지고 성공을 한 거야. 만약에 논밭이 있다면은 그렇게 성공할 수가 없었어요. [조사자 : 그러면 그때 형님하고 잠깐 떨어져 있으면서 부모님을 만나서 다시 동생들이랑 나왔 잖아요.] 형님이 그 뒤로 왔어요. 동생들이랑 같이 왔더라고 왔는데. 그때 인민군들이 쳐들어왔을 때 빨리 빨리 안 가고 고생한 사람들은, 인민군한테 끌려가서 학 살시키고 끌고 가고 그랬다. 그러더라고. 얘기를 들어보니까 동네사람들도 그렇게 해서 아주 처참한 생활을 눈으로 보고서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께 일사후퇴 때 다. 그놈들이 잘 했으면은 일사후퇴 때 그렇게 나오겠어요? 그놈들이 그만큼 처사를 잘못하고 전부 총살시키고 끌고 댕기니까 아이고 안 되겠다 하고 나왔겠
죠. [조사자 : 그러면 옹진에 계셨을 때는 부모님이 농사를 지으셨나요?] 농사짓고, 거기에 어장 하는 사람들이 있어가지고, 연평도 조기 잡는 거 그런 거 하고 그랬 어요. [조사자 : 그러면 가족 중에는 크 게 다치거나 그런 분들은 없으셨던 거네 요. 전쟁 중에는.] 없어요. 용케 있는게 나하고 형님하고는 나이가 돼서 이렇게 있었으면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그 우 리 형제는 나하고 밑에 동생들은 나이가 어리니까 잘 넘어간 거야. 그래서 용케 산거예요. 그래서 일사후퇴 때 식구들 전 체가 다 나왔어요. [2] 광천수용소에서의 곤란한 생활 [조사자 : 그러면 전쟁이 끝났을 때는 어디 계셨던 거예요? 인천에 있으셨어 요?] 휴전됐을 때 그때는 연평도 있다가 덕적도 있다가 인천으로 나와서 있다가 그런 거야. 고생은 말도 못해요. 왜냐면 은 뭐 해먹고 살 길이 없으니까. 연평도 에서 덕적도까지 멀잖아요. 덕적도에서 인천까지도 멀어. 또 그 인천으로 나온 거야. [조사자 : 덕적도에서는 어떻게 사셨어요?] 부모님이 고기 잡는 어선을 탔어요. 도저히 식구를 먹여 살리질 못 하겠다. 그래서, 인천으로 나왔죠. 인생살이가 살다보면 다 이런 겁니다. 지금 젊었을 때는 참 모르겠지 만은 우리가 살면서 겪은 고난이라는 건 참 말도 못해요. 그때만 해도 이렇게 개발됐습니까? 안됐 잖아요? 그래서 힘들었던 세월을 겪었어요. [조사자 : 6.25는 6월 25일날 났잖아요? 아까 봄에 나오셨다고 했는데 봄에부터 전쟁이 있었어 요?] 그 전에 삼팔이남 이북이 갈려있었기 때문에 군인들이 항상 서로 맞대결을 했어요. 김일성이 스탈린한테 허락 맡고 총칼 쓰고 댐빈거유. 그래 알고 있어요. [조사자 : 그러면 형님은 군대는 끌려가지 않으셨네요?] 못 갔어요. 못가고서 결혼한 지 1년 만에 이상스럽게 풍랑으로 인해서 돌 아가셨는데 돌아가시고 나니까 제가 공부를 못했어요. 부모님은 일손 놓고 있는 형편이니께 누가 도와줄 사람도 없고. 그래서 중학교도 못나왔어요. [조사자 : 형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첫째가 되셔서 부모님 모시고 떠나지도 못하고 그러셨네 요. 그러면 황해도 옹진에 사실 때는 살만 하셨어요?] 그렇죠. 먹고 살고 이렇게 하는 데는 걱정이 없었으니까. 참 이게 말이 그렇지 젊은 나이에 6.25 겪고 나와서 생활하는 것은 눈물이 나서 말을 못해요. [조사자 : 그니까 인제 스무 살에 광천에 수용소가 있다고 해서 오셨잖아요. 아까 봤던 수용소 가 두 군데였던 거죠?] (청중 : 수용소가 있었어요. 지금 현재도 수용소 자리 이렇게 얘기해요.) 애 당초 여기에 석면광산 딱 있었는데 피난민들이 갈 데가 없어서 정착하니까 수용소야. [조사자 :
수용소가 있었던 게 아니라, 갈 데가 없어서 정착하다보니 수용소가 된 거예요?] 네, 그래서 수용 소가 된 겨. [조사자 : 그분들이 어떻게 해서 여기에 모여 살게 되신 거예요?] 그거는 모르지, 나 이도 스물한 살에 왔으니 어떻게 알겠어? (청중 1 : 죽을 순 없으니까 헤쳐서 산거겠 지. 근데 밥은 누가해줬는지 모르겠어. 생각 이 안나.) (청중 2 : 내가 와서 딱 생활하면 서 이순식이가 객주 볼 때가 제일 컸어. 그 양반이 미국 사람들이랑 알았거든.) (청중 3 : 기석이 작은아버지가 객주 봤잖아.) [조사자 : 객주가 뭐예요?] 장에 위탁해 주는 물건을 팔아주고서 수수료 먹는 것이 객주여. (청중 1 : 고기 잡아오면 팔아주겠 다고 하는 거.) (청중 3 : 조선시대 행수 같 은 거여. 영화 나오면 행수 어쩌고 찾아쌌 잖아.) [조사자 : 상인 중에 우두머리를 말 하는 거예요?] 어. 그 객주라는 사람이 물건 들어 오면은 딱 봐서 생선장사꾼들을 모으 는 거야. 너는 얼마씩 너는 얼마씩 해라. 그렇게 파는 거야. 예를 들어서 100만원 어치 팔았다 하면 10만원씩 나눠주고 몇 만 원씩 띠어먹는 거지. [조사자 : 객주였던 분도 이북에서 오신 거예요?] 여기 사람도 있었고, 이북 사람도 와서 있었고. [조사자 : 속초를 갔더니 아바이마을에 가면 피난민들이 되게 많잖아요.] 강원도 속초 그쪽으로 가면은 함경북도 그쪽 사람이 많아요. 이쪽으로는 황해도 평안남도, 그래 해가지고 그 황해도라 하 면 산재령 벌판을 해가지고 엄청나게 넓은 땅이요. 그런데 그쪽 사람들이 이쪽으로 제일 많이 왔 어. 황해도 해주가 원래 항구도시 아닙니까? 큰 군함이 들어오고 큰 항구도시에요. [조사자 : 그러면 이미 광천에 오셨을 때는 전쟁이 끝난 다음이잖아요?] 그렇죠. [조사자 : 피 난 온 사람들 수용소에서 처음에 사셨잖아요. 그럴 때 정착할 때 힘들지는 않으셨어요?] 그때는 세 월이 흘러갔기 때문에. 왜 내가 여기 와서 수용소에 있었는고 하니 집들을 살수가 없어. 돈이 있어 도 살수가 없더라고. 지금같이 건축사업이 잘 돼서 집이라도 지어주고 하면은 집이라도 짓고 살았 을 텐데 그게 없었거든. 집 날 때 기다렸다가 집이 여기하나 나서 그걸 내가 사가지고 거기 살다 가 거기 뒤로 옮겨 산거야. [조사자 : 수용소라는 게 크게 건물이 하나 있고 그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는 거죠?] 인제 이 건물이 크니까 그 안에 방 한 칸, 부엌 칸 방 한 칸, 부엌 칸. 쭉 그 창고 안에 이렇게 몇 세대가 사는지 몰라. (청중 1 : 현재 그게 있네 있어.) 거기서 사는 세대가 보통 열 몇 가구는 됐을 거야. [조사자 : 그럼 여기 아까 터가 있다고 했잖아요. 창고 터. 크게 수용소 창고가 두 개 있었던 거예 요?] 네. [조사자 : 그럼 한 이십여 가구 되었겠네요.] 그렇게 살았을 건데 자꾸자꾸 떠나더라구요. 생활
들이 나아지니까. 수용소 말이 그렇 지 방 한 칸 쬐그 만 거 가지고 애들 데리고 어떻게 살 겠어요. [조사자 : 여기 처음 오셨을 때는 수용소에 몇 세대정도 살았어 요?] 그때 우리가 저짝 창고가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 섯 여덟 가구가 살 았을 거예요, 창고 하나에. 찬하네도 부자됐지만 거기 살았었어. 그 아버지 어머니가 여기 살았었어. 그래 돈버니께 다 나간 거요. 그렇게 살았다는 거만 알면 돼. [조사자 : 그러면 그때는 어르신처럼 살기가 막막한 사람이 많았을 거 아니에요? 그러면 수용 소에 들어갈 때 세를 냈나요?] 아니요, 세 없었어요. [조사자 : 그냥 아무나 가서 터를 잡으면.] 들어가서 살 데만 있으면 되는데, 살 데가 없더라니까. 그때 보니깐 먼저 들어와서 산 사람은 어떻 게 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가 보니께 수용소 생활하는 사람들 그 외에는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 (청중 2 : 그 후로 예를 들어서 이 건물을 그 사람이 나갔잖어? 나가면 피난민 아닌 사람도 일 부러 들어와서 살다가 나가기도.) 어려운 사람이 와서 살기도 했어. 피난민 아니고 주변 사람들도 어려운 사람은 들어와 살았어. (청중 2 : 내가 어렵다 그래서 거기서 살고서 그렇게 나간 사람이 있어.) [조사자 : 그러면 거기가 원래 전쟁이 나기 전부터 있었던 건물인거죠? 그 창고가?] (청중 2 : 근데 그것이 석면광산에 어떤 사람이.) (청중 3 : 거기다 뭐 석면 같은 거, 금 옛날 거기 광산이 있으니께 뭣이냐 그 광석 같은 거 일본에다 실어가고 그랬어.) [조사자 : 그때 만들었던 창고를 나중에 수용소로.] 그 사용이 불가항력으로 안 써지니까 피난민 들이 들어와 산거예요. 만약에 뭔 임자가 물건을 저장한다 했으면 그렇게 안 놔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