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격을 띤 개항기 홍범14조(洪範14條) 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등에 이르기까지 일 成均館大學校 法學硏究所 成均館法學 2008年 4月 SungKyunKwan Law Review The Institute of Legal Studies Vol. 20 No. 1 APRIL. 2008 본 제국주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한 번도 단절 없이 기본적인 헌정질서가 유지되어 내려온 특징을 갖는다. 곧 경국대전의 편찬은 이러한 의미에서 조선왕조 통치의 법적 기초, 곧 통치규범체계가 확립되었다는 데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1) 경국대전의 완성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김일환** 1)2) 을 정점으로 조선왕조 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법전편찬에 진력함으로써 법전편찬 왕조라고까지 특색지울 수 있는 것이다.2) 그리하여 경국대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 로 종합적 성격을 띤 국가의 통일법전으로 등장하게 되었다.3) 이렇게 성리학이념에 터 잡은 유교법치국가 를 만들어낸 장본인이 바로 삼봉 정도전이다. 정도전의 조선경 국전은 조선조 문물제도의 제정과 법전편찬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뿐만 아니라 성 리학을 정치적으로 재해석하고 백성을 정치의 목적으로 재발견했으며, 조선정치제도 의 모범을 제시했다.4) 결국 정도전은 조선 건국 지식인의 중심인물이자 조선 5백년 정치이념과 제도, 법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다. 정도전의 복권은 死後 5백년 뒤에 이루 Ⅰ. 문제제기 어졌지만, 그의 사상은 조선 왕조사에서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를 비명에 가게 Ⅱ. 법전국가로서 조선 및 정도전에 관한 헌법상 재평가의 필요성 한 태종조차도 개혁의 기본방향은 정도전의 개혁방향과 일치하였다. 곧 정도전의 사 Ⅲ. 새로운 국가로서 조선의 특징 상은 작게 보면 한 개인의 사상이지만, 넓게 보면 한 집단의 의지를 반영한다. 다시 Ⅳ. 조선건국의 주인공으로서 정도전의 삶과 사상 말하자면 정도전의 사상과 행동은 고려 말 정치상황과 그 개인의 정치사회화의 산물 Ⅴ. 입법가로서 정도전의 업적과 활동 이라고 할 수 있다. 고려 말의 정치상황은 한마디로 위기상황이었고, 역사적 전환기 Ⅵ. 결 론 에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연속성보다 변화의 욕구가 월등히 강렬했던 상황, 그런 의 미에서 혁명상황이었다.5) Ⅰ. 문제제기 1) 박병호, 韓國法制史攷, 法文社, 1983, 419면 2) 박병호, 전게서, 421면. 이것은 경국대전의 조문이 중국법전과는 관계없이 우리의 제도와 법을 성문화한 것을 의미한다. 경국대전은 고유법을 성문화하여 중국법의 침투를 막고 거기에 조상들 이 만들어놓은 법을 경솔히 고치지 못한다는 이른바 조종성헌의 미신이 작용하여 고유법이 유지 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에 경국대전의 다른 하나의 의의가 있다. 그밖에도 경국대전은 중세법으 로서는 내용이 풍부하고 방대하며 형식이 짜이고 완비된 법전으로서 법문화적 의의도 있다. 이런 건국이후 조선은 14세기 정도전(鄭道傳)이 엮은 조선왕조의 이상과 조직대강을 집 약한 조선경국전(朝鮮徑國典), 조준(趙浚)이 집대성한 경제육전(經濟六典), 조선왕조 면에서 볼 때 경국대전은 중세의 다른 법전들보다 오히려 완비된 형식을 갖추었다고 보아야 할 시대의 행정조직과 법률사상을 집대성한 최고의 국가기본법전인 경국대전( 經國大 典 ), 임진왜란 이후 18세기까지 약 200년간 변화를 새로이 반영한 속대전(續大典) 것이다. 이처럼 경국대전은 조선왕조의 성격과 특징을 해명하는 데서나 조선왕조의 법의 발전사 를 연구하는 데서 더없이 귀중한 기초자료로 된다. (윤국일, 經濟六典과 經國大典, 신서원, 1998, 과 대전회통(大典會通) 그리고 국정의 민주적 개혁을 약속한 근대국가의 헌법적 성 207-208면) 3) 경국대전의 법적 성격에 관하여 이를 종합법전으로 보는 입장, 헌법규범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는 * 성균관대학교 법과대학 부교수, 법학박사 ** 이 논문은 2005년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입장 그리고 국조오례의를 헌법으로 보는 입장으로 나뉘는 바, 경국대전이 아닌 국조오례의를 조 선의 헌법으로 보려는 입장은 비판되어야 한다. 이에 관하여는 별도의 논문에서 다루고자 한다. 4) 김영수, 건국의 정치, 이학사, 2006, 802면. 5) 최상용 박홍규, 정치가 정도전, 까치, 2007, 254면. 연구임(KRF-2005-079-BS0128)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3 4 그런데 한국법제사에 관한 법학분야의 기존 연구는 법전국가로서 조선에 대하여 과학과 인문과학계의 평가는 최근 긍정적인 시각이 주류적 입장이라고 판단된다.9) 부정적 평가가 거의 대부분이며 긍정적 평가는 예외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예를 들어 법사학계의 평가와는 달리 조선의 건국 및 조선의 정치체제는 고려 정치 사학 등 다른 인문, 사회과학분야에서는 조선시대 또는 건국상황과 법전편찬 등에 관 체제의 자연적 연속이나 중국 정치체제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치적 재성찰에 의 한 긍정적 평가를 찾기가 어렵지 않다. 특히 성리학이란 이념으로 무장하여 한 국가 한 인위적 산물이며, 조선은 고려 정치체제와 비교하여 볼 때, 세계와 인간의 본성에 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제도를 재편하면서 이를 법전화, 법제도화한 점을 높이 평 대한 새로운 견해에 기초하여 건국되었음을 언급하면서, 이들은 인간의 정신적 완성 가하는 문헌들도 많이 보인다. 다만 그동안 연구를 보면 조선이란 정치공동체를 어떻 을 위한 성리학이란 이념에 터 잡아 이를 위한 제도를 체계적으로 설치하고, 그것을 게 만들어가려고 했으며, 그 시대의 정국운영 및 정치적 당면과제에 대한 인식은 어 현실 정치제도와 연결하고 이러한 목적에 반하는 정치권력의 위험성을 통제하기 위 떤 것이었는지에 관한 연구와 인식이 부족하며, 조선전기 법전의 형성과정과 그 결과 한 세심한 정치제도와 이념, 관행을 만들어내었고, 이를 마침내 30여년이 넘는 제정 로서의 경제육전, 경국대전의 법조문에 대한 분석, 연구와 관련해서는 상당한 성과를 과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담아내었음을 강조하는 견해도 있다.10) 보이고 있으나, 거기에 반영되어 있는 법이념, 정치사상에 대한 분석, 또는 그 법전이 그렇다면 우선 조선시대 법제사 연구는 그 당시 정책입안가나 사상가의 말과 행동 안고 있는 정치적 지향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는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6) 이 어떤 상황과 조건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행위자의 관점에서 바라보 이러한 인식에 근거하여 본 논문에서는 하나의 국가로서 조선이 성립하고 유지될 수 아야 한다.11) 곧 현재의 맥락에서 당시를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맥락을 토대 있도록 만든 정도전의 사상과 활동에 대하여 憲法史的 觀點에서 평가7)해보고자 한 로 신중한 평가를 내릴 수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현대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 다. 지를 생각할 기회를 제공한다고 본다. 따라서 조선건국에 따른 법전편찬작업과 법적 용을 성리학의 철학적 문제로만 환원하는 것은 문제이며 철학, 사상, 정치, 경제, 법 Ⅱ. 법전국가로서 조선 및 정도전에 관한 헌법상 재평가의 필요성 그동안 조선에 대한 법사학계의 평가는 전반적으로 부정적인 반면8) 사학 등 사회 등을 유기적,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작업은 헌법규범과 헌법현실이 서로 맞물리는 그러한 역사적 흐름에 대한 인식과 이해를 통하여 과거 사실에 대한 분석과 더불어 현재를 넘어선 미래 헌정의 못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한국의 전통사회가 전 기간을 통하여 계급사회를 이루어 왔다는데서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상용, 韓國法史 중심 法史와 法政策, 한국법제연구원, 2006, 24 면 이하) 이러한 입장과 다른 견해로는 조선왕조는 이전의 어느 왕조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법 전을 끊임없이 정비하고 반포한 왕조이다. 고려왕조가 변변한 법전 하나 없이 찬란한 문화를 구 6) 오영교 편, 조선 건국과 경국대전체제의 형성, 혜안, 2004, 48면. 7) 조선왕조의 기틀을 마련하였으나 이방원의 정변으로 역적으로 매장된 정도전이 복권된 것은 5세 가한 것에 비해 왜 유독 조선왕조에 와서 법전의 발간이 줄기차게 이루어져야 했는지는 또 다른 학문적 연구과제이지만 분명한 것은 조선왕조의 고도로 정비된 법제도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기가 지난 조선 말 고종 때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970년대에 이르러 그의 사상 것이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조선왕조는 세계사적으로도 당대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볼 때 유례 가 없을 만큼 장기간 지속된 왕조다. 고도로 정비된 법제도가 기능하고 있었으며, 사회통합을 이 과 행동이 학문적으로 재평가되기 시작하였다.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198면) 이에 관하여는 정 재훈, 정도전 연구의 회고와 새로운 사상사적 모색, 韓國思想史學, 제28집, 2007, 193면 이하 참 조. 8) 조선은 동양적, 전제적 유교주의적 양반관인사회였으며, 그 위에 성립한 군주국가였다고 본다. 국왕이 전제권력을 문자 그대로 무제한적으로 행사한 것은 아니다. 국왕은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왕도정치의 실현을 사명으로 하고 수학수덕에 의한 자기완성을 목표로 하는 생활을 강제당하고 있었다. 군주정치가 양반관인의 참여하에 이루어진 것이므로 이씨조선 왕조정치를 전제적 양반관 인정치라고 칭하는 것이다. (田鳳德, 韓國近代法思想史, 博英社, 1981, 33면) 주자학은 조선왕조 의 지배사상으로서 덕치주의를 이상으로 하여서 국가조직과 국가통치의 이념이 되었지만, 그 사 상의 구체적인 내용에 있어서는 상하의 계급질서를 옹호하고 한국의 전통법의 현대화를 이루지 룰 수 있는 사회적 합리성의 가치가 보호받았고 신분사회였음에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 로 평등하고 자유로웠다는 사실을 통해서 볼 때 조선왕조의 장기지속성은 이유가 있었다는 점을 이해하게 된다. (이재룡, 조선시대의 규범이론과 규범체계 1권, 한국학술정보, 2006, 머리말) 9) 필자가 생각하기에 한국 역사에서 가장 큰 문명전환이 일어났던 시기는 14세기 말과 19세기 말 이다. 14세기 말의 변혁은 오늘날 한국인의 전통적 정체성의 기원이며, 19세기 말의 변혁은 근대 적 정체성의 뿌리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14세기 말의 한국에 대한 연구는 오늘날의 한국 인을 만든 전통의 기원을 탐색하는 것이다. (김영수, 전게서, 5면) 10) 김영수, 전게서, 770면. 11) 이한수, 세종시대 家 와 國家, 한국학술정보, 2006, 머리말.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5 6 발전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 오늘날 우리는 민주법치국가의 구축과 실현이라 던 정도전을 비롯한 조선의 건국자들을 이제는 새롭게 고찰해 볼 시점에 와있는 것 는 보편적인 명제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이러한 민주법치국가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에 이다. 결국 조선이란 새로운 왕조의 정통성이란 성리학에 의한 담론적 정당화만으 서 특정 지역에서 발전되어 현재 우리가 받아들이고 있는 구체적인 제도들마저 보편 로 확립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정치체제의 확립이라는 실질적 제도화 과정을 타당한 또는 유일무이한 제도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12) 결국 조선 건국 통해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조선 건국 이후 정통 왕조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제도 자들의 새로운 제도건설 및 성문화작업은 적어도 그 당시로서는 근대적이고 개혁적 화과정을 주도한 이가 바로 정도전이었다. 그는 즉위교서를 작성하여 조선 건국의 정 작업일 수밖에 없었다.13) 이러한 의미에서 불교에 근거한 귀족연합정권의 성격을 지 당성을 선언하였고, 이를 실질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이념과 정책을 제시 닌 고려14)라는 국가를 성리학에 터 잡은 중앙집권국가(법전국가)로 전환시키고자 했 하였다. 그가 그것을 구상하기 위해서 참조한 것은 주자학 서적 및 주례(周禮) 를 비 롯한 중국 역대의 제도에 관한 서적들 - 중화(中華)의 매뉴얼이라고도 할 수 있다 - 12)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대한민국은 입헌민주주의의 새로운 정치실험의 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입헌민주주의의 제도적 양태에만 고집하여 그 근대성의 가치를 독점적으로 운운할 수는 없다. 입헌민주주의의 제도적 장치 이전에 그 제도를 움직이고 있는 인간과 그 인간을 지배하는 에토 스를 생각할 때, 우리는 정도전이 구상한 혁명의 이념적 설계도와 오늘 우리 현실사이에는 놀라 운 연속성이 확보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김용옥, 삼봉 정도전의 건국철학, 통나무, 2004, 10면) 13) 입헌주의란 역사적으로 왕권의 제약과 관련된 것이다. 입헌주의란 모든 정치적 과정과 정부의 권력을 제약하고 통제하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원심적 방향의 정치질서라 한다면 입헌주의는 구 심적 방향의 정치질서인 것이다. 민주가 풀음이라면 헌법은 수렴이다. 삼봉은 민주주의의 원칙 이었다. 그 매뉴얼에는 군주제라는 정치체제와 그것을 운영하는 데 필요한 것(원리) 들이 적혀 있었고, 정도전은 그것들을 읽고 소화해가며 1394년의 조선경국전, 1395년 의 고려사와 경제문감, 1397년의 경제문감별집 등 소중화(小中華) 의 매뉴얼을 차례 로 저술하였다. 그중에서도 조선경국전은 각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와 조선 의 국가 운영에서의 차이를 가장 선명하게 드러내는 것은 법전체제의 유무이다. 고려 의 경우는 각 행정 부서들의 독자적인 관례나 규정에 의해서 통치가 이루어졌을 뿐, 으로서 맹자의 貴民주의이념을 표방하고 易姓혁명의 가능성을 무한히 개방함으로써 민의 절대 적 가치를 신봉했지마는 민의 主됨을 보장하는 자치의 제도적 장치를 확보하는 데까지는 이르 일관되고 체계적인 법전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조선의 건국 주체는 집권적 국가 지 못했다. 그러나 입헌주의의 측면에서는 삼봉은 매우 구체적으로 왕권을 제약하는 여러 가지 운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법체계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 최초의 법전이 정도전 제도적 장치를 확보했다. 단지 재상을 선출하는 과정을 보다 개방적으로 제도화했더라면 아마도 그것은 당대의 세계사에서 가장 선진된 형태의 입헌군주제가 되었을 것이다. 삼봉이 생각한 세 에 의한 조선경국전이다. 이를 통해서 건국 주체는 자신들이 세운 정치세계에 공공성 계는 분명 규범적인 윤리의 세계였다. 그러나 그가 생각한 윤리는 일차적으로 지배계층을 규제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지배계층의 규범적 윤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그러 한 에토스를 산출하는 문화적 저변이 동질적으로 확보되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왕권을 효율적 으로 제약하기 위하여서는 사대부는 자신들의 도덕적 규범을 스스로 규제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일반백성들도 사대부의 윤리를 규제하기 위해서는 하늘의 소리라 말할 수 있는 절대적 을 부여하려고 하였으며, 이후 경제육전과 경국대전으로 이어졌다.15) Ⅲ. 새로운 국가로서 조선16)의 특징 민의를 형성할 수 있는 그러한 문화적 저변 속에서 생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전체적 동 질규범이 곧 보이지 않는 불문적 헌법을 형성하게 된다. 이러한 헌법이 유교적 어휘 속에서는 치집단중 하나로 정치권력을 행사했다. 이는 고려왕실 전유의 왕실재산이 따로 국가예산에 의해 지급되면서 왕실에 의해 유지관리되었던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국왕은 내시기구라는 인이나 예니 四端이니 하는 개념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김용옥, 전게서, 12-14면) 14) 고려 후기의 정치체제는 대외적으로는 반식민지국(부마국체제)이었고, 대내적으로는 귀족연합정 최고의 정치엘리트집단을 측근 정치세력으로 활용함으로써 신하들의 정치세력과의 정책대결에 권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왕 역시 원과의 혼인관계와 원에 의한 임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인 정받았으며, 권문세족 역시 왕보다는 약하지만 원과의 정치적 관계를 통해 정치권력을 유지했던 서 유리한 위치에서 자신의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결국 고려시대에는 국왕을 단일국가의 이 념적 통일체로 즉 천명을 품수받은 지극히 존엄한 존재로 상징화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의미로 것이다. 왕은 조금 더 강력한 귀족이었을 뿐이다. 권문세족들이 농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 고려시대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 곳곳에까지 직접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 았다. 즉 중앙 국가권력이 지방의 토호세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백성을 지배하던 중층적 정치조 왕 역시 식읍과 개인 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고려 말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사적인 권력연 합체였다. 이 때문에 국가의 공적인 기능은 거의 붕괴되었다. 경기도의 토지겸병 때문에 관리들 은 적절한 보수를 지급받지 못했다. 또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과 인원을 확보할 수 없었 다. 토지와 관직, 군대 모두가 사유화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 말의 개혁이 지향했던 바가 외 직 구조를 지니고 있었던 왕조가 고려왕조였다. (이재룡, 전게서, 52면 이하) 15)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130면 이하 ; 김영수, 전게서, 770면 ; 이재룡, 전게서, 52면 이하. 16) 조선시대는 한국의 르네상스시대였던 것이다.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인들은 정신적인 면에서 형적으로는 왕권강화와 사전혁파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공적인 기능의 회복이었 크게 세 단계의 변혁을 겪었다. 3세기 무렵 불교가 유입되어 1000년 동안 한국인의 정서와 사 다. (김영수, 전게서, 41면 이하) 고려의 국왕은 자신의 고유한 정치지분을 지니고 있는 여러 정 상을 지배했다. 14세기 중반 성리학혁명이 진행되어 19세기 말까지 지배적 사상으로 군림했다.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7 1. 고려 정치체제의 붕괴과정 성리학에 터 잡은 중앙집권국가로서 조선의 건국과정과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고려라는 국가의 정치체제와 붕괴과정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 북방민족에 시달리던 고려는 몽고의 강력한 힘에 의해 유례없이 100년의 평화를 누렸다. 그러나 정치적 쇄신이 불가능했던 이유는 누구도 元의 의사에 배치되는 정책 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17) 당대의 고려정치를 지배했던 것은 외적으로는 원 이며, 내적으로는 친원적 권문세족들이었다.18) 결국 무신란 이후 공민왕 대에 이르는 고려정치의 특징을 요약한다면, 그것은 국가적 공공성의 붕괴라고 말할 수 있다. 관 직과 토지, 군대는 모두 사유화되어, 국가는 외형만 유지하고 있었다. 고려 후기의 정 치체제는 대외적으로는 반식민지국(부마국체제)이었고, 대내적으로는 귀족연합정권의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왕 역시 원과의 혼인관계와 원에 의한 임명을 통해 정치권력 을 인정받았으며, 권문세족 역시 왕보다는 약하지만 원과의 정치적 관계를 통해 정치 권력을 유지했던 것이다. 왕은 조금 더 강력한 귀족이었을 뿐이다. 권문세족들이 농 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왕 역시 식읍과 개인 창고를 가지고 있었다. 결국 고려 말의 정치체제는 일종의 사적인 권력연합체였다. 이 때문에 국가의 공적인 기능은 거 의 붕괴되었다. 경기도의 토지겸병 때문에 관리들은 적절한 보수를 지급받지 못했다. 또한 군대를 유지할 수 있는 재정과 인원을 확보할 수 없었다.19) 공민왕의 개혁의지는 열렬했으나, 개혁에 대한 구상은 그만큼 깊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그의 개혁정책들은 유기적인 연관성을 갖지 못했고, 근본적인 목 8 표를 결여하고 있었다.20) 더욱 절망적인 것은 수차에 걸친 공민왕 대의 개혁이 거의 실패했다는 점이다. 공민왕이 죽자, 그동안 힘겹게 억제되고 있었던 부정적 요소들이 한꺼번에 분출되었다. 왕과 권신들은 사적인 욕망의 충족을 위해 정치권력을 철저하 게 私事化시켰다. 국가는 공적인 권력기관이라기보다 일종의 합법화된 폭력집단으로 변모했다. 이 때문에 단순한 개혁 이상의 새로운 전망이 필요한 시대였다.21) 위기는 첫째, 국가기능의 마비, 둘째, 백성들의 참상, 셋째, 지식인들의 위기의식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사전의 겸병으로 인하여 국가기능은 모두 마비상태에 빠졌다.22) 그리하여 고려 중기 이래 개혁의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관료들에게 녹봉으로 지급할 녹과전 의 회복이었다. 다음으로 국방체계가 붕괴되어 병사들에게 지급할 토 지가 없었다.23) 즉 국방문제는 일차적으로는 토지문제였다. 국가는 급전을 통해 병사 들의 군역을 정당하게 요구할 수 있었고, 병사들은 생계를 유지하며 군무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기 이래의 고려는 군인전을 지급할 수 없었으므로 정규군을 보유할 수 없었다. 군대는 사병으로 존재했고, 위기 시에는 훈련되지 않은 농민들을 징발했다. 또한 군량을 확보할 수 없었다. 고려 말 40년에 걸친 왜구의 침 입에 속수무책이었던 것도 이와 같은 국방체계의 붕괴에 그 원인이 있었다. 그리고 행정기능이 마비되었다. 토지분쟁이 폭주했으나 이를 신속하게 처결하기가 대단히 어 려웠기 때문이다.24) 또 하나의 정신적 도피처는 불교였다. 정치적 적실성을 상실하고 형이상학적 완전성이 결여된 유교에서는 정신적 정체성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 었다. 오직 초월만이 그들의 정신을 구원할 수 있었다. 이 시대의 지성은 역사적 요 구에 전혀 부응하지 못했다. 다른 한편 고려의 정신계를 지배하고 있던 불교 역시 종 교적 깊이를 상실했다. 불교는 세속적인 욕망의 수단으로 변모했다. 고려 중기 이래 19세기 말 이래는 과학의 시대이다. 이 과정은 요컨대 보다 구체적이고 감각적인 현실로 우리의 삶을 하향시키는 과정인 것으로 보인다. 베버의 말을 빌리면 합리화 와 세속화 의 과정이다. (김 영수, 전게서, 678면) 17) 김영수, 전게서, 18면. 18) 김영수, 전게서, 24면. 19) 김영수, 전게서, 41면 이하. 공민왕의 정치운영에 있어서 두 번째의 특징은 기강을 세우기 위해 감찰과 사법기관을 중시했다는 점이다. 기강이란 일차적으로 법적인 조치가 권위를 지니는 것이 다. 공민왕이 의식한 기강문제는 권세가들과 관리들의 불법행위였다. 그러나 가장 중시된 것은 감찰사였다. 즉 공민왕이 취한 개혁의 핵심적인 성격은 일차적으로 司正이었다. 공민왕은 개혁 과 관련된 모든 조치에는 반드시 감찰사가 관여하도록 했다. 관료체제가 붕괴된 까닭에, 예컨대 법을 담당하는 전법사만 홀로 재판을 공정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재판관들 의 부정을 방지하려는 노력은 무의미한 것이다. 공민왕 대와, 창왕, 공양왕 대의 개혁을 비교해 보면 공민왕 대의 개혁은 일종의 나열식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즉 개혁을 위한 전체적인 인 식과 청사진이 없었던 것이다. (김영수, 92면 이하) 로 불교는 방대한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고, 고리대금업까지 하는 등 또 하나의 지배 세력이 되었다.25) 20) 김영수, 전게서, 102면. 그런 의미에서 왕조로서가 아니라 문명으로서의 고려는 더 이상의 대안 21) 22) 23) 24) 25) 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즉 이 시대는 본질적으로 고려가 종말을 고한 시기였다. (김영수, 전게 서, 314면) 김영수, 전게서, 379면. 이는 다시 관료체계의 붕괴, 국방의 붕괴, 행정기능의 마비, 규범의 와해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 다.(김영수, 전게서, 595면) 김영수, 전게서, 596면. 김영수, 전게서, 597면. 김영수, 전게서, 52면. 불교의 이상적인 통치자인 전륜성왕은 불법에 따라 통치하는 자이다. 석 가모니는 정치가들의 규범과 건전한 정치를 위해 훌륭한 조언을 남겼다. 사회의 불행을 종식시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9 10 원래 고려는 신라 말엽의 신흥 호족 세력이 중심이 되어 건설되었고, 그 호족 세 으로부터 유입된 宋의 성리학이 새로운 역사적 대안으로 등장했다. 코스모폴리탄적인 력 간의 힘의 균형 위에서 중앙집권체제가 안정될 수 있었다. 그러나 13세기 후반의 세계문화를 가졌던 원과의 전면적인 교류는 고려문화에 광범위하고 심원한 영향을 무신의 난을 계기로 하여 중앙문벌세력과 지방호족세력 간에 치열한 권력투쟁이 전 미쳤다. 이를 통해 고려 말기의 혁신적 정치 및 정신운동이 발아되었다. 고려 말 성 개되었고, 그 결과 전자가 붕괴하고 후자가 득세함으로써 힘의 균형이 파괴되었다. 리학자들은 새로운 정치개혁을 구상하고 정치개혁에 참여했다. 이와 관련하여 중요한 그 후 힘의 균형이 회복되지 않은 채 여말에 이르러서는 몰락한 良人과 部曲民 같은 것이 공민왕 시대 신돈이 행한 성균관의 중수와 과거제도의 개혁이다. 공민왕 16년 하층민조차도 물리적인 힘을 배경으로 권력투쟁에 관여함으로써 정치체제의 몰락으 고려정부는 무너진 성균관을 중수하고, 100명의 학생을 사서재와 오경재에 나누어 두 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처럼 고려 말의 상황은 문자 그대로 전형적인 위기 상황이었 도록 하였다. 이 개혁은 신돈 집권기에 이루어진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이다. 이 다.26) 를 통해 고려 말의 새로운 정신운동인 성리학이 관학의 위치를 인정받았으며, 성리학 2. 고려 말 정치상황의 반성과 새로운 패러다임의 탄생27) 모든 정치공동체는 그 존속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본질적인 이념이 존재한다. 고 려는 그것을 불교에서 구했고, 조선은 성리학에서 구했다.28) 곧 고려 말의 정신적 공 황과 정치적 위기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정신적 지평이 필요했다. 이때 元 의 소양을 갖춘 인물들이 대거 집결하여 새로운 문명 및 정치운동을 구체화시켰기 때문이다. 이 운동의 중심에는 이색이 자리잡고 있었다.29) 이러한 정신적 각성이 결 집되어 시대의 경향을 이루고 공식적인 의미를 획득한 것은 성균관을 통해서였다. 이 운동은 고려 후기의 정신 및 정신운동에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고려의 전통적인 정 신세계 및 정치세계를 전면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이곳으로부터 분출되어 개 화했다.30) 정치적인 측면에서 당시의 고려는 거의 절망적인 상태였다. 따라서 일견 한가해 보이는 이러한 사업에 착수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키기 위해 통치자가 가져야 할 덕목을 요약하면 법치, 분배, 관용, 공평이라고 할 수 있다.(김영 수, 전게서, 689면) 고려 정치체제에서 승려들은 일차적으로 수행자집단이라기보다 관료집단이 었다. 그들은 일반관료집단과 함께 관료제의 다른 축을 담당했던 지배계급이었다. 승려들은 승 성균관의 중영은 안향 이래 본격화된 하나의 역사적이고 문명적인 비전의 개화였 다.31) 성균관의 중영은 삼국시대에 전래된 유교가 형이상학과 윤리, 정치에서 독자적 과를 통해 관직에 임명되고 별사전을 받았다. 국가가 후원하는 사찰에는 사급전이 하사되었다. 인 의미를 획득했다는 것을 뜻했다. 곧 불교에 압도당했던 형이상학과 윤리의 영역을 사원전은 면세지였다. 모든 특권은 종교를 타락시킨다. 종교사원의 중요한 사회적 기능 중 하나 는 자선과 빈민구호이지만, 고려의 승려들은 고리대금업에 종사했다.(김영수, 714면 이하) 오히 탈환했던 것이다.32) 려 승려들은 특권계급의 일원으로 착취에 가담하여, 열악한 백성들의 상황을 더욱 악화시켰던 것이다. 국가재정과 백성의 부담, 모리(謀利)행위와 수탈, 도덕적 타락으로 인해 고려 말의 불교 어떠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개혁을 원했던 세력은 역성혁명으로 나아갔다. 왕정 이외의 정치적 대안을 알지 못했던 이 시대의 정치가들에게 이것은 가장 어려운 결 는 근본적인 개혁대상이 되었다. 호국불교는 불교가 정치공동체와 만나는 직접적인 접점이자 동 시에 타락의 뿌리였다. 불교승단은 국가와 개인의 정신적 불안을 이용하여 그들의 복리를 꾀했 다.(김영수, 전게서, 717면 이하) 26)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256면. 27) 조선 건국은 주자학이라는 이념과, 현실의 적나라한 권력욕이 얽히면서 연출된 역사상 유일한 - 주자학의 발생지인 중국은 물론 그를 수용한 주변국 어디에서도 없었던 - 한 편의 드라마였 29) 김영수, 전게서, 267면 이하. 30) 김영수, 전게서, 355면. 31) 김영수, 전게서, 357면. 공민왕 16년 이색은 성균관 중영의 책임을 맡았다. 뒷날의 역사는 이것 다.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11면) 28) 고려의 정신세계는 불교의 넓은 바다 속에 잠겨 있었고, 불교는 고려 정치체제의 일부로 존재 었다. 다음 시대를 이끌어갈 신진 유신들이 이 정신운동과 깊숙이 관련되어 있었다. 이 운동은 이색이 한반도인들에게 선사한 최고의 선물이며, 그의 삶에 가장 높은 공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 했다. 조선은 정치와 진리를 통합하고자 했다. 진리는 산중이 아니라 정치와 가족 안에 있었고, 원리상 왕과 사대부는 정치가이자 수행자가 되어야 했다. 성리학에서 왕은 정치적 수장이자 스 다. (김영수, 전게서, 442면) 32) 근대의 충격이 도래할 때까지 성리학은 한국인들의 내면과 정치공동체 전반에 걸쳐 확산되고 승이며 진리의 구현자이다. 이 때문에 조선은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인간의 노력을 넘어선 것에 서 구하려고 하지 않았다. 즉 초현세적인 힘에 의존하여 국가와 정치를 운영하고자 하는 기복론 체계화되었다. 그런데 이 시대의 정신운동이 직면한 과제는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세속성 또는 정치성 의 회복이었다. 즉 일상생활과 분리되어 산속으로 간 세속성을 환속시키는 한편, 비속화 적 사고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불교와 성리학의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김영수, 전게서, 된 현실의 세속성을 정화시키는 것이었다. 현세적 삶을 옹호하면서 동시에 그 속에서 초월적 삶 714면) 을 성취할 수 있을까? 이것이 성리학의 본질적 질문이었다. (김영수, 전게서, 359면)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11 이 중대한 문명적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음을 입증했다. 그는 정치로부터 다른 곳으로 희망을 돌 렸다. 깊은 지성과 다양한 경험을 갖고 있던 그는 이 일에 최고의 적임자였다. 실험은 대성공이 12 단이었다. 왜냐하면 역성혁명은 그 세계를 지탱하고 있던 근본적인 가치 중 하나를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결국 고려시대에는 국왕을 단일국가의 이념적 통일체로 곧 훼손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개혁을 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치의 손상을 원하 천명을 품수받은 지극히 존엄한 존재로 상징화하고 있지는 않았다는 의미로 이해될 지 않았던 정몽주 같은 사람들은 반혁명세력으로 변모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이 수 있다.36) 고려시대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 곳곳에까지 직접 미치지 못하는 곳 시대는 다양한 정치이념들과 명분론들의 각축장이 되었다. 이 시대를 특징짓는 요소 이 많았다. 따라서 중앙 국가권력이 지방의 토호세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백성을 지배 중 하나는 엄밀하고도 포괄적인 이념논쟁의 폭발이다. 무엇이 역사에서 옳은 행동이 하던 중층적 정치조직 구조를 지니고 있었던 왕조가 고려왕조였다. 게다가 고려 후기 며, 무엇이 항구적인 국가의 원리인지에 대한 논쟁이 권력투쟁에서 불가결한 부분을 에 이르기까지 사회경제적인 발전의 정도가 지역에 따라 현격하게 차이가 났는데 이 차지하고 있었다. 이런 논쟁은 물론 권력투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치장이기도 했다. 러한 경제적 요인도 통일적이고 일관된 행정이나 정책을 전개시킬 수 없었던 이유가 그러나 권력이 이념에 의해 합리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새로운 현상이었다. 이런 점에 되고 있다. 이러한 여러 사회경제적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고려시대에는 통일된 성문 서 이 시대는 단순한 왕조 교체 이상으로 중대한 전환을 함축하고 있었다.33) 공민왕 법전의 완비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각 지방에 고유한 관습법적 사회규범이 일반적인 의 개혁이 고려성 에 대한 반성을 기초로 하고 있었다면, 이 시대의 개혁은 정치와 사회질서 유지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37) 여기에 고려왕조 시대 내내 부단히 계속된 문명에 대한 보다 보편적인 성찰로 나아가고 있었다. 조선은 급진적 개혁을 원했던 외침과 내홍은 이러한 법적 환경에 더 한층 통일된 법제도 정립의 환경을 저해하는 사람들에 의해 건국되었다.34)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확실히 고려 말의 정치에서 왕권강화는 권문세족 및 부원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그러나 조선은 이와는 매우 다른 정치적 환경에서 건국된 왕조이다. 곧 조선은 고 필요조건이었다. 토지제도의 문란과 국역체계의 붕괴는 궁극적으로 당대 유력자들의 려시대 폐단을 통렬히 인식하고 새로운 이념에 입각하여 건설된 국가였다. 조선의 건 불법적이고 강권적인 토지사유화로 인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더 진전되면 당 국 및 조선의 정치체제는 고려 정치체제의 자연적 연속이나 중국 정치체제의 단순한 대의 고려사회는 지방분권적 봉건사회로 나아갈 수도 있었다. 중세와 근세의 일본이 모방이 아니라 정치적 재성찰에 의한 인위적 산물이었으며 조선은 고려 정치체제와 그러했다. 이것도 하나의 역사적 대안이었다. 고려 후기에 거듭 시도된 전제 개혁은 비교하여 볼 때, 세계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견해에 기초하여 건국되었다.38) 이에 저항하여 중앙집권적 왕정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정치적 시도였다. 왕권강화는 고려 말 조선 초 정도전을 포함한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적 완성을 위한 성리학 이를 위해 필요한 권력의 창출인 것이다. 그것 또한 하나의 대안이었다. 조선의 건국 이란 이념에 터 잡아 이를 위한 제도를 체계적으로 설치하고, 그것을 현실 정치제도 자들은 후자의 대안을 선택하여 전면적인 토지몰수를 통해 전제개혁을 실시하고, 중 와 연결하고 이러한 목적에 반하는 정치권력의 위험성을 통제하기 위한 세심한 정치 앙집권적 왕조국가를 재건했다.35) 제도와 이념, 관행을 만들어냈다.39) 3. 새로운 정치체제로서 조선 1) 조선건국과 정치체제의 특징 고려의 국왕은 자신의 고유한 정치지분을 지니고 있는 여러 정치집단중 하나로 정 치권력을 행사했다. 또한 국왕은 내시기구라는 최고의 정치엘리트집단을 측근 정치세 2) 조선건국과정의 특징 : 건국이념의 법전화, 법제도화 조선 정치체제의 특징은 윤리적이고 철학적인 문제와 정치를 통합적으로 이해하고 이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곧 조선의 국가건설사상은 ① 정신적 삶의 현세화, ② 정치 적 삶의 윤리화, ③ 폭정을 방지하기 위한 권력균형이었으며, 이러한 조선건국은 ① 고려 말의 정치에 대한 역사적 경험, ② 이에 대한 성리학적 반성이었다.40) 곧 고려 력으로 활용함으로써 신하들의 정치세력과의 정책대결에서 유리한 위치에서 자신의 33) 김영수, 전게서, 542면. 34) 김영수, 전게서, 543면. 35) 김영수, 전게서, 252면. 36) 37) 38) 39) 40) 이재룡, 이재룡, 김영수, 김영수, 김영수, 전게서, 전게서, 전게서, 전게서, 전게서, 52면 이하. 52면 이하. 770면. 770면. 772면 이하.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13 말 조선 초의 성리학은 조선건국자들에게 우주와 인간본성에 대한 심오한 이론체계 만을 제공한 게 아니라, 이러한 이론체계를 바탕으로 하여 역사적 경험을 새롭게 이 해하는 패러다임으로 작용하였다. 정도전을 포함한 조선의 건국자들은 새로운 국가이 념으로 유학(성리학)을 채택하고, 새로운 문명국가를 건설하고자 하였으며 이는 구체 14 Ⅳ. 조선건국의 주인공으로서 정도전의 삶과 사상47) 1. 정도전의 삶48) 적으로 민생개선, 국가재정과 국방의 개선, 정치와 문명의 개선작업으로 이어진다.41) 정도전의 父系는 경상도 봉화 지역 鄕吏의 후손이다.49) 봉화 정씨로 중앙정부에서 더욱이 조선의 건국자들은 유학(성리학)이라는 새로운 세계관을 수용하고 그에 의 관직을 지낸 사람은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이 처음이었다. 이렇게 볼 때 정도전은 하여 500년 동안 지속되는 상당히 안정적이고 정당성있는 정치체제를 구축하면서 이 청렴과 품격을 지닌 중소지주 가문 출신이었다. 부계만 보면 정도전은 당시의 중소지 를 법제(전)화하였다. 이 당시 (유)학자들은 정치철학자이면서 새로운 이념가이고 혁 주 출신 향리 집안의 평균적인 수준이었다고 볼 수 있으나, 모계는 신분상의 문제가 명가임과 동시에 입법가이기도 하였다.42) 마침내 이들은 마침내 30여년이 넘는 제정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50) 만약 그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도전은 떨쳐버리기 어려운 신 과정을 거쳐 경국대전에 이러한 이념과 제도를 담아내었다.(건국이념과 원리의 법전 46) 다만 국가에 대한 가의 강조가 갖는 문제점에 대해서는 다음 비판을 참조 : 이 시기 벌어진 예 화, 입법화 = 국가 이념의 구체적인 성문화)43) 송 논쟁은 가의 질서를 국가의 질서까지 확장하는 논리가 강화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국왕의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왕가와 사대부가의 동일성을 주장하는 이 같은 논리는 단순히 전제왕 권의 견제라는 차원을 넘어 결국 조선후기 일부 벌열가문으로 하여금 권력을 농단하고 궁극적 결국 조선의 건국자들은 조선이란 국가공동체를 이념의 정치제도와, 법전화를 통 한 외적 제도화와 수양과 교육을 통한 내적 제도화를 통하여 규율하려고 하였다. 이 러한 법전화, 제도화작업은 궁극적으로 내적인 수양(=修己에 의한 정신의 제도화)과 으로 국가의 약화를 초래하게 하는 사상적 기반이 되었다. 조선후기에는 최고통치권자인 국왕의 적극적 역할을 부인하면서 국왕의 존재를 왕가의 수장 정도로 격하시키고 국가의 영역을 인정 교육 및 외적인 개선(정치와 형벌)(=공적인 정신에 의한 욕망의 제도화 추구)을 목표 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한수, 전게서, 30면) 가에 의해 국가가 정복될 경우 가의 질서 로 하였다. 따라서 조선 건국자들은 인간성의 완성을 국가의 이상적 목표로 생각하였 를 초월하여 국가의 질서에 필수적인 여러 가지 영역은 사라지게 된다. 국가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법으로서 일탈자에 대한 통제가 필요하며, 대외정책의 기반이 되고 유사시 외적의 침 다.44) 유학의 정치적 구상에서 독특한 점은 바로 이 혈연에 기초한 자연적 결사로부 입에 대항하기 위한 武, 즉 군사의 유지와 훈련은 필수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후기에 는 가에 의한 국가의 정복으로 법과 무에 대한 관심이 약화되고 禮와 文을 더욱 강조하게 되었 터 가장 기본적인 윤리적 규범을 세우고, 그것에 기초하여 국가를 구성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곧 家는 단순히 필요의 영역이 아니라, 정치공동체의 기본단위이자 정치적 다. (이한수, 전게서, 31면) 47) 삼봉집을 비롯한 정도전에 관한 1차 자료는 매우 제한적이다. 따라서 앞으로의 연구에서는 지 행위가 처음으로 발생하는 곳이다. 유학은 父子關係와 같은 자연적 윤리를 곧바로 정 금까지의 자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새롭고 다양한 시각에서 해석하는 작업이 필요할 것 같다. 여 기서 우리는 정치사상가로서의, 또 정치가로서의 정도전을, 그의 사상과 행동, 그리고 이념과 권 치사회윤리로 연결시킨다.45) 성리학을 이념으로 건국된 조선은 인륜과 풍속의 확립을 국가건설의 기초로 강조했다. 따라서 국가의 바탕은 家이며, 家의 질서는 인륜성을 력의 상호작용에 대한 종합적 접근을 통해서 해석할 필요성을 절감한다.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확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고 인식되었다.46) 7면) 48) 정도전의 일대기와 사상 등에 관하여는 한영우, 왕조의 설계자, 정도전, 지식산업사, 2006 ; 최상 용 박홍규, 정치가 정도전, 까치, 2007 ; 삼봉정도전선생기념사업회, 정치가 정도전의 재조명, 경 41) 이 당시 성리학이념에 바탕을 둔 개혁자들은 정체체제와 정치운영원리를 의식적으로 자각하였 다. 그리고 조선 건국자들의 개혁안은 정치제도와 정치적 인간에 대한 일관된 이해를 견지하였 세원, 2004 참조 49) 정도전의 출생에서 출사까지에 대해서는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45면 이하 참조. 50) 정도전의 가계와 생애에 대해서는 김난옥, 여말 선초 정치변동과 배타적 家門意識 - 정도전을 다. 42) 원래 이성계를 도와 건국에 참여한 정치가들은 문인, 특히 법률적 지식이 풍부한 유학자들로서, 중심으로 -, 韓國史學報 27호, 2007, 243면 이하 ; 한영우, 전게서, 15면 이하 참조. : 평생 해 결하지 못하고, 죽어서도 풀리지 않은 것은 혈통문제였다. 이 점은 그의 사회개혁의 방향이나 인격의 형성, 나아가서는 그의 동료 사대부와 결별하여 학자에서 혁명가로 전환하는 이유 등을 이들의 보좌로 건국이 이루어진 만큼, 이들에 의하여 초기부터 법제의 개혁과 정비에 많은 노력 이 경주되었다.(전봉덕, 전게서, 11면) 43) 김영수, 전게서, 770면. 44) 곧 이들은 인간의 완성=정치의 완성=세계의 완성과 수미일관되게 연결하였다. 45) 朱子家禮의 목적상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는 부자관계이고, 가장 중요한 윤리는 효이며, 이는 가 이해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고려되어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출신성분은 개인적인 문제이 다. 그는 출신성분이 고려 사회에서 실존적인 문제라는 점을 깊이 자각했다. 그의 가계에는 천 민의 피가 섞여 있었다. 정도전의 외조모는 승려 김진이 종의 아내를 간통하여 낳은 딸이었다. 묘제도로 연결된다. 이 때문에 정도전은 과거합격 뒤 한동안 임명장을 받지 못했다. (김영수, 전게서, 524면) 위화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15 분상의 상대적 박탈감을 가졌을 것이다. 그에게 시련이 닥치기 시작한 것은 공민왕의 시해사건 때부터였다. 당시 이인임이 우왕을 옹립하고 친원정책을 취하자 정도전은 이를 격렬히 반대하였으며, 이인임의 노여움을 사서 1375년 유배를 당하였다. 그 후 16 2. 정도전에 대한 역사적 평가 1) 조선건국의 주도자로서 정도전에 대한 역사적 평가 1384년 정계에 복귀하기까지 고난의 길을 걷게 된다. 그의 유배와 유랑생활은 문자 정도전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보면 1) 조선의 정치체제뿐만 아니라 정신적 기초 그대로 궁핍과 고독과의 싸움이었다.51) 정도전은 신분적 굴욕, 경제적 궁핍, 그리고 를 놓은 것으로 평가되는 정도전은 조선을 기점으로 전후의 한국역사에 명백한 경계 정신적 고독과 싸우면서52) 정계 복귀에의 희망과 정치사회의 변혁에 대한 열망을 품 선을 그었다. 55) 조선의 건국자는 세 사람이다. 이성계는 군사적 건국자, 정도전은 고 1388년(당시 42세) 9월에 함주막의 이성계를 찾아갔다. 정도전과 이성계의 만남은 정치적 건국자, 정몽주는 정신적 건국자이다. 56) 정몽주에 의해 정신적으로 탄생되 문자 그대로 글과 칼의 결합으로 새로운 역사의 출발점이 되었다.53) 그 뒤 위화도 회 었던 조선은 정도전에 의해 정치적으로 탄생되었다. 57) 2) 무릇 위대한 정치이념은 군 이후 혁명의 기치 아래 조준 등과 더불어 개혁을 주도하면서, 이색과 정몽주 등의 당시의 최선의 정치공동체에 대한 해답이며, 그 해답을 실천하기 위한 수단적 가치로 고려 유지파와 권력투쟁을 전개하여 조선 개창의 주역을 담당하였다. 조선 건국 후에 서의 권력에 대한 확고한 의지와 능력이 있어야 정치공동체의 건설이 가능한 것이다. 는 정권 및 병권을 장악하고, 다분야에 걸친 저작을 통해서 새로운 왕조건설의 청사 그러한 점에서 정도전은 정치체제의 전환기에 구체제를 혁파하고 새로운 체제를 형 진을 제시하면서 국가 건설을 주도해나갔다. 그 과정에서 대립되던 이방원의 기습을 성할 수 있는 권력과 이념을 겸비한 큰 정치가라고 말할 수 있다. 58) 정도전은 대표 받아 그의 의도는 좌절되었다.54) 적인 주자학자인 동시에 발군의 경세가이다. 정도전은 탁월한 정치사상가인 동시에 위대한 정치가이기 때문이다. 59) 3) 정도전은 하나의 사상가로서 보다는 개혁적 정 도 회군 뒤의 격렬한 경쟁에서 출신성분은 정도전을 공격하는 핵심적 명분 중 하나였다. (김영 치가로서 주로 역사학분야에서 취급되어 왔다. 그는 사회개혁자로서 정치적 감각을 수, 전게서, 525면) 더욱이 이 문제는 정도전이라는 한 인물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도전과 더불어 혁명의 불길을 지폈던 개국공신의 상당수가 비슷한 환경에 있었고 또 비슷한 박해를 받 고 있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한영우, 전게서, 23면) 개국공신 가운데 혈통상 측실과 연관된 인사가 많은 것은 우연한 일이라기 보다는, 혈통의 문제로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거나 55) 김영수, 전게서, 765면. 그의 학문과 개혁사상은 실제로 거친 들판에서 백성들과 눈물 젖은 밥 을 나누어 먹으면서 완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온당하다. 그는 어지러운 난세에 대중 속에서 성장 정치적으로 제약을 받고 있던 인사들이 의식적으로 혁명세력으로 결집하게 되었다고 해석할 수 한 영웅이었던 것이다.(한영우, 전게서, 39면) 56) 김영수, 전게서. 802면. 이에 관하여는 金錫根, 개혁과 혁명 그리고 주자학, 亞細亞硏究 재97호, 도 있다. 또 이를 뒤집어 말하면 혈통으로 인한 소외계층이 고려 말에 이르러 사회변동을 주도 할 만큼 성장하고 있었다는 의미도 된다. (한영우, 전게서, 25-26면) 51)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258-259면. 52) 유배기의 체험은 정도전이 이색의 문하를 떠나 고려왕조의 정치적 정통성을 부정하게 되는 중 요한 출발점이었다. 반성의 대상은 바로 관습적인 정신의 지평에 머물러 있었던 과거의 자신이 101면 이하 참조. 57) 김영수, 전게서, 379면. 조선 개국기에 군웅이 할거했지만 정치가의 유형으로 특징을 보인 인물 은 정몽주, 정도전, 이방원이다. 이들은 고려 말기의 위기의식을 공감하면서도 역성혁명의 추진 과정에서, 견해의 차이, 보다 정확하게는 치열한 권력투쟁으로 인하여 우적관계의 극적인 드라 었다. 백성들과 생활하면서 그는 관습적인 정신세계로부터 벗어나 시대의 고통을 자신의 역사적 사명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고려 말의 성리학운동은 혁명운동과 결합되었다.(김영수, 전게서, 마를 연출했었다. 세 사람이 다 같이 주자학적 교양을 공유하고 여말위기를 해결하려고 노력한 정치가였으나 끝내 정몽주와 정도전은 권력투쟁 현장의 희생양이 되고, 드라마의 최후의 승리자 533면) 53) 우왕 원년에 유배된 정도전은 10여 년 동안 세상의 신고를 다 맛보았다. 그는 높은 자부심을 지 는 이방원이었다. 이 세 사람의 정치가들은 나름의 정치이념과 권력의지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 니고 있었지만 세상은 그를 버렸다. 그리하여 세계가 상실되는 위기를 겪었던 정도전은 마침내 이성계를 만나러 함흥에 갔다. 이 만남은 고려 말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각각 성장하고 있었던 고려 말의 새로운 문명세력과 무장세력이 공동의 정치적 목적을 가지고 조우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신진성리학자들과 신흥무장세력이 결합되었 다. 칼은 정신의 원리에 무용한 것이지만 권력없는 정치이념은 현실에서 무기력한 것이다.(김영 수, 전게서, 509면) 54)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13면. 이당시 정도전과 관련된 주요 문제는 표전문제로 인한 명과 대립 및 요동 공벌이었다. 들의 정치적 인격의 특징은 너무나 개성적이었다. 정몽주는 정치적 敎義에 대한 집착이 강하였 다. 不事二君이라는 신념으로 인하여 역성혁명에 대해서는 유보적 태도를 보이다가 끝내 명백한 반대입장을 취하였다. 한편 이방원은 역성혁명의 타당성을 지지했지만 구체적인 정치이념보다는 권력의지에 철저하였다. 이에 비해 정도전은 주자학이념에 바탕을 둔 조선왕조 건설의 프로그램 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실현을 위한 권력에의 의지 또한 강렬하였다. 강조점에 따라서 세 사람 을 분류해 보면 정몽주가 이념형, 이방원이 권력형, 그리고 정도전은 이념과 권력의 통합형이라 고 볼 수 있다.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273면) 58)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250면. 59)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7면.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17 18 먼저 키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서 이루어진 학문적 언어 속에서 새로 정치적 인간으로서 남다른 정치적 자질을 가진 정치가요, 정치이념의 실천에 헌신했 운 사유를 먼저 성숙시켰다. 다시 말해서 정치개혁을 위한 이데올로기적 수단으로 그 던 직업정치가임은 물론이고, 실권을 가진 지도적 정치가로서의 역량을 발휘한 정치 의 사상체계를 급조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사상적 패러다임이 성숙해 가면서 정치개혁 가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64) 다) 정도전은 14세기 후반을 살다간 사람이다. 이 에 대한 확신도 변증법적으로 깊어져 갔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60) 4) 정도전은 무 시대 서양에서는 중세의 암흑에서 깨어나는 인간의 모습을 예견한 사상들이 움트기 서운 정열을 지닌 혁명가인 동시에 뛰어난 문장가이자 사상가로서 수많은 저술을 남 시작하였다. 정도전과 가장 비슷한 시기에 활약했던 서양의 사상가이자 정치가로는 겼다. 61)는 등의 평가를 받고 있다. 단테가 있다. 단테가 1321년에 죽고 정도전이 1342년에 태어났으니 엄밀한 의미에서 결국 이를 요약하면 개인적인 불행한 삶과 부당하고 왜곡된 역사적 평가62)에도 정 동시대인은 아니지만, 역사의 큰 전환기에 이탈리아와 조선에서 비슷한 시기에 자기 도전은 성리학을 정치적으로 재해석하고 백성을 정치의 목적으로 재발견했으며, 조선 류의 정치이념을 실현하려고 했던 정치가라는 사실에서 유사한 점이 있다. 단테는 서 정치제도의 모범을 제시했다. 결국 정도전은 조선 건국 지식인의 중심인물이자 조선 양 중세의 황혼에 서서 근세의 여명을 내다본 사상가이며, 18년의 유랑을 강요당하면 5백년 정치이념과 제도, 법제도의 근간을 만들었다. 서도 황제당의 입장에서 교황당과 줄기차게 싸운 정치가이기도 하였다. 단테의 조국 이 이탈리아였지만 르네상스의 출발이 이탈리아임을 생각하면 이탈리아라는 정치고 2) 세계사적 관점에서 정도전에 대한 평가 장에서의 그의 고민이 서양 중세의 고민을 대변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은 흡사 조 더 나아가 그 당시 세계사적 관점에서 정도전을 비교한 견해를 보면 가) 14세기 국 이탈리아의 위기상황을 극복하려고 고투했던 마키아벨리의 사상이 서양 중세의 말에 삼봉만한 정치경륜을 가진 정치가나 정치사상가가 세계적으로 또 있었는지 의 틀을 깨고 근세 정치사상의 보편적 메시지를 발신했던 경우와도 닮았다. 정도전은 대 문이기 때문이다. 63) 나) 서양에서는 16세기 마키아벨리시대에 외교술에 조예가 깊 륙에서 원이 명으로 바뀌고, 왜구의 침투가 극심하던 동아시아의 정치상황하에서 도 고 인문주의적 교양을 습득한 정치가가 유교적 교양이 깊은 중국 정치가와 비슷한 덕과 경제의 파탄, 정치의 혼란에 허덕이던 고려 말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고 새로운 지도적 정치가의 유형에 속한다. 이처럼 동양과 서양에서 오늘날 내각제하의 총리의 정치공동체 조선왕조를 건설하기 위해서 사상과 행동 양면에서 투철했던 위대한 정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지도적 정치가의 유형이 있었다. 지도적 정치가는 최고위급 치가이다. 그가 위기에 대한 극복방안으로 내놓은 각종 정책에서 일관되게 민생과 실 직업정치가라고 말할 수 있다. 정도전은 14세기에 생존했던 지도적 정치가였다. 그는 용을 강조한 것은 훗날 조선의 근대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실학사상의 싹을 미리 보 단순히 군주의 정치고문이나 고위직 문인정치가가 아니었다. 그는 그 영역을 넘어서 는 듯하다. 이러한 점에서 이탈리아의 시인정치가 단테나 조선의 학자정치가 정도전 근대 이후 내각제하에서 내정과 외교를 총괄하는 총리 이상의 권력을 행사했던 지도 이 각기 조국의 위기 상황에 대응하면서 내놓은 처방전들은 서양의 근세, 동양의 근 적 정치가였다. 이상에서 볼 때 정도전은 정치적인 것 에 대한 문제의식이 투철했던 세로 이어지는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다. 65)는 평가도 있다. 3) 정도전의 爲(愛)民思想과 왕권제한사상 60) 김용옥, 전게서, 22-23면. 이 전 과정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구현해낸 삶이 곧 정도전의 삶이었 다. 따라서 정도전에게 있어서는 삶의 철학이 정권의 갈취보다 앞서는 것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살아야만 올바르게 사는 것이냐 하는 인간론적 물음이 정도전을 집요하게 지배했다. 따라서 그 의 철학 자체가 성리학의 도입이나 완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현실을 개혁하는 프 라그마로서의 독창적인 체계를 정립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었던 것이다. (김용옥, 전게서, 64)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254면. 65)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277면 이하. 13, 14세기는 서양에서 근대의 샛별들이 등장하는 시대였 다. 그중에서도 중세의 황혼에서 근대의 여명을 내다본 단테는 당대의 탁월한 사상가인 동시에 정치가였다. 그가 죽은 지 21년 후인 1342년 한국에서 정도전이 태어났다. 그는 세계사적 수준 26-28면) 61) 한영우, 전게서, 107면. 62) 어쨌든 정도전의 후손은 일부가 살아남아서 대를 이어가게 되었으나, 정도전의 명예는 좀처럼 에서 보아 동시대의 어떤 정치가와 비교해도, 그리고 한국사에 등장한 많은 정치지도자들과 비 교해도 지력(知力)이나 정치력 양면에서 그 탁월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도전은 냉혹한 회복되지 않았다. 정도전이 역적의 누명에서 벗어나 왕조의 伸寃을 얻게 된 것은 사후 5백년이 지난 고종 때이다.(한영우, 전게서, 96면) 63) 한영우, 전게서, 머리말.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19 권력투쟁의 과정에서도 확고한 정치철학을 가지고 새로운 정치공동체 조선왕조를 건설한 큰 정 치가였다.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8면) 20 정도전 사상체계의 밑바탕에 흐르고 있는 기본정신은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전제되어야 한다. 첫째는 귀족이나 호족의 지배로부터 백성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것 민본사상이다66) : 군주는 국가에 의존하고, 국가는 백성에 의존한다. 백성은 국가의 이며, 둘째는 통치자=관리 자체의 권력남용을 방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성을 보호 근본인 동시에 군주의 하늘이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다.67) 하기 위해서도, 국가의 존립을 위해서도 통치자=관리 이외의 세력자에 의한 백성의 정도전의 정치사상은 정치를 윤리의 실현과정으로 보는 까닭에 그의 국가관념이나 지배는 배격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음에 통치자=관리가 타락하여 권력을 남용하고 백 통치관념은 자연히 권력이나 주권이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과 문화가 중심이 성을 침해할 때에도 백성이 받는 피해는 역시 막심한 것이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점 된다. 따라서 통치자는 권력자가 아니라 도덕의 실천자요, 교화의 선포자이다. 이 점 을 시정하려면 권력구조상 두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하나는 백성에 대한 통치권 내 은 국가나 정치를 권리, 권력 또는 주권의 입장에서 파악하는 법가사상이나 또는 서 지는 지배권을 일체 중앙정부에 집중하여 관권으로 하여금 귀족 또는 호족의 사적 양의 정치사상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68) 그리고 형벌과 법률은 없어서는 안 될 지배를 억제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관권의 남용을 관권으로 하여금 감독과 견제를 중요한 통치수단이다. 그러나 통치수단의 근본은 덕치, 仁政이 되어야 하며, 형벌은 하게 하는 일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자는 중앙정부로 하여금 전국을 일원적으로 지 그 보조수단이 되어야 한다. 민본, 애민사상에서 출발한 정도전의 정치사상은 인정, 배하는 것이요, 후자는 권력을 상하로 계층화하여 전문화시키고, 권력상호간에 견제 덕치라는 통치수단으로 구체화되고, 인정은 다시금 백성의 물질생활의 안정이라는 保 와 감독기능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체제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중앙집권 民으로 귀결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곧 정치, 경제, 윤리는 삼위일체를 이루고 있 체제의 강화라고 말할 수 있다.70) 다.69) 그리고 군주는 관념상으로만 절대권을 갖는다.71) 곧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를 건설 다음으로 통치권이란 어디까지나 백성을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도전 하기 위해서는 권력을 중앙정부에 모으기 위한 하나의 상징적인 구심점이 필요하다. 의 기본입장이다. 그런데 권력이 백성을 위한 수단이 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조건이 그것이 군주 또는 왕이다. 이는 군주가 국가의 상징이며 국민통합의 구심체라는 것이 66) 愛民이란 말은 書經 夏書에 五子之歌에 百姓은 가까이 親愛하여야 할 것이다. 下待하여서는 아 니 된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여야 나라가 편안하다. 라고 한 데에 근거하여 다. 그래서 군주를 국가의 원수라고 한다. 따라서 군주는 관념상으로는 가장 존귀하 고, 천하의 인민과 천하의 토지를 보유하는 막강한 권력자인 동시에 최대의 부의 소 생긴 말이다. 愛民사상은 당연히 백성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함께 행복을 누릴 것을 강조하였 유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왕권은 天命의 대행자로서 정당화되기도 한다. 그러나 다. 이 愛民, 衆民, 爲民의 정신은 논어의 여러 곳에 仁 으로 표현된다. 맹자로 내려오면 書經이 나 공자의 愛民사상은 더욱 철저하여진다. 왕이 民心을 잃으면 天心을 잃는 것이고 天心을 잃으 왕권이란 어디까지나 상징적이요 관념적인 것이지 실제로 절대권을 가진 독재자가 면 天命을 잃는 것이니 이는 곧 民心을 잃으면 天下를 잃어버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맥 락에서 볼 때 天命思想에 의한 天治主義와 爲民思想에 의한 民本主義는 이념상 결합을 갖는다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왕이 행사하는 실제적인 권한은 두 가 고 할 수 있다. 이 天治主義와 民本主義의 결합은 유교의 天命思想의 중요한 특색이다.(연명모, 는 재상과 정사를 협의, 결정하는 권한이다.72) 국가설계의 정치사상, 대경, 2005140면 이하) 67)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265면. 68) 이재룡. 전게서, 57면. 69) 한영우, 전게서, 153-155면. 정도전은 제도만 갖추면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지 않았으 며, 제도를 운영하는 인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자주의를 신봉하였다 : 소송을 처결하는 사 람은 먼저 자신의 덕을 밝혀서 백성들로 하여금 畏服(외복)하게 하고, 악한 일을 막고 분내는 것을 징계하여 끝내는 처결할 소송 사건이 없어지게 한 다음에야 백성의 덕성이 후하게 될 것 이다. (조선경국전, 憲典) 법 자체만으로는 좋아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을 제대로 얻는 데 달려있다. 반드시 조심스럽게 구휼하는 인자스러움과 밝고 신중한 덕을 갖춘 다 지밖에 없다고 정도전은 주장한다. 하나는 재상을 선택, 임명하는 권한이다. 또 하나 따라서 정도전의 정치사상은 윤리, 도덕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정치란 인간 을 바르게 하는 것으로서, 백성을 교화시켜 윤리, 도덕을 인간사회에 실현시키는 것 70) 한영우, 전게서, 170-171면. 71) 이에 관하여는 김인호, 정도전의 역사인식과 군주론의 기반 - <경제문감>의 분석을 중심으로 -, 한국사연구(131), 2005, 257면 이하 ; 진희권, 조선초기의 관료제의 성립과 정도전을 통해서 본 음에라야 그 좋은 법을 시행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경국전, 憲典, 捕亡斷獄) 대개 선왕이 법 을 만든 것은 천리에 따른 것이지만, 후세 사람이 부세에 폐단을 일으키는 것은 인욕 때문이다. 사상적 기반, 安岩法學 제18호, 49면 이하 ; 최연식, 여말 선초의 권력구상, 韓國政治學會報 제 32집 제3호, 31면 이하 참조. 72) 따라서 정도전이 지향하고자 하는 통치체제는 관념상으로는 군주독재정치나 가산국가와 유사한 才臣과 計吏로 부세를 다스리는 자는 마땅히 인욕을 억제하고 천리를 간직할 것을 생각해야 옳 점이 있으나, 실제는 이와 매우 다름을 알 수 있다. 실제는 군주독재정치도 家産國家도 아닌 관 을 일이다. (조선경국전 상, 賦典, 賦稅) 료지배체제인 것이다. (한영우, 전게서, 172-174면)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21 이 다름 아닌 정치의 본뜻이다. 이렇듯 윤리, 도덕은 정치의 목표인 동시에 수단으로 서, 윤리, 도덕과 밀접한 정치를 仁政 또는 왕도정치라고 한다. 민심을 얻는 정치를 다른 말로 덕치라고 한다. 따라서 백성의 경제생활안정은 윤리도덕실현(=정치)의 전 제조건이기 때문에 위정자는 무엇보다도 경제문제를 중요시하여 백성의 경제생활안 22 Ⅴ. 입법가로서 정도전의 업적과 활동 1. 정도전이 편찬한 법전의 내용과 의의 1) 조선경국전77) 정에 주력해야 한다. 백성의 경제생활 안정을 중요시하는 사상은 민본사상과 깊은 관 (1) 편찬과정78) 련이 있다.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라는 민본사상은 정도전 사상의 기저에 흐르는 기본 정신이다. 그런데 백성이 나라의 근본이기 때문에 백성이 잘 살아야 나라의 근본이 튼튼해지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통치자는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을 위하고 백성을 존중하고,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73) 76) 연명모, 전게서, 42면 77) 분의좌명개국공신 보국숭록대부(奮義佐明開國功臣輔國崇祿大夫) 판삼사사동판도평의사사사 겸 판상서사사 수문전태학사 지경연예문춘추관사 판의흥삼군부사 세자이사 봉화백(判三司事同判都 評議使司事兼判尙瑞司事修文殿太學士知經筵藝文春秋館事判義興三軍府事世子貳師奉化伯) 신 정 상앙이나 한비자와 같은 法家와는 달리 유학자들은 왕의 존재를 천명에 근거한 것 도전은 말씀드립니다. 삼가 도승지 신, 상경(尙敬)이 신을 위해서 구계(具啓)한 것을 받았사온데, 그는 신에게 조선경국전 을 지어 올리라는 것이어서, 교서를 받들고 지어 올리는 것이옵니 으로 보았다. 이에 관한 이론적 근거는 天位論이다.74) 이는 공적 권력의 최종적 근원 에 관한 설명으로서, 일종의 권력위임론이자 책임론이다. 결국 이는 정치가는 물론 다. 이에 부명(符命)을 잡고 도참(圖讖)을 받아 비로소 홍휴(鴻休 개국)의 운수를 열었으니, 강기 왕조조차 단순한 대리인에 불과하며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경우 언제든지 교체될 (綱紀)를 세우고 베풀어서 자손에 대한 계책을 해야 하므로, 주(周) 육관(六官)의 이름을 모방하 여 조선 일대의 법전을 세우는 것입니다. 생각하옵건대 주상전하께서는, 하늘의 덕을 체받으시 수 있음을 시사하고 동양적 혁명론의 전형과 연결된다. 곧 왕조의 적절성여부는 민생 에 대한 보호로 가늠하며, 天位論은 정치적 책임론이자 정치변동론이고 정치에서 백 어 왕위를 인(仁)으로써 얻으셨습니다. 국호(國號)를 정하여 민심(民心)을 안정시키고, 세자[儲 副]를 세워 나라의 근본을 견고히 하셨습니다. 세계(世系)로써 쌓이고 쌓인 경사(慶事)를 나타내 성의 발견을 함축하고 있는 시대의 정치이론(爲民論)이다. 다시 말하자면 天位論의 셨고, 교서(敎書)로써 관대한 은혜를 내리셨습니다. 다스리는 방법은 상신(相臣)에게 책임지우시 핵심은 권력의 공공성, 정치적 정통성이 왕의 세습권이 아닌 천명으로부터 기원함에 고, 세금[貞賦]은 실지로 공용(公用)에 쓰여졌습니다. 예(禮)와 악(樂)을 제정하시어 귀신과 사람 을 화하게 하셨으며, 무사(武事)를 강론하고 병기를 수선하여 나라를 바르게 하셨습니다. 형벌로 있다.75) 이에 터 잡아 조선 건국자들은 조선 정치체제의 현실적 특징을 균형 에 두 어서 전제화된 왕정은 정통성과 권력이 한 개인에게 집중되므로 실질적인 권력은 분 써 간사한 이를 꾸짖고 난폭한 짓을 막으며, 공(工)으로써는 한도와 분량을 알맞게 하셨으니, 이 에서 창업(創業)하여 자손에게 이어 줌이 어려움을 보여, 충분한 준비로써 수성(守成 창업의 뒤 배되어야 하며, 왕의 권력은 견제되고 감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하여 를 이어받아 지킴)함을 오래도록 하신 것입니다. 마땅히 서책[汗簡]에 실어 명산(名山)에 간직해 다양한 이념적, 이론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현실적으로 왕의 권한을 통제, 억제하기 야 할 것입니다. 신이 용졸한 자질로서 외람되게 전하의 지우(知遇)를 얻어, 저작(著作)의 자그 마한 재주를 가지고 생성(生成)의 지극하신 은혜에 보답하려 합니다마는 그 성덕(盛德)과 풍공 위하여 필요한 여러 제도들을 법전화, 법제도화하기에 이른다. 결국 조선 건국자들은 이러한 제도들을 정치공동체의 항구적 요소라 생각하고 이를 법제도화, 법전화하려고 (豊功)은 진실로 다 기술하기 어려워서 대강(大綱)ㆍ소기(小紀)만을 모두 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조선경국전 을 삼가 써서 전(箋)과 함께 올리오니, 바라옵건대 성자(聖慈)께옵서는 한가한 시 노력하였다. 또한 이는 법전화, 법제도화를 통하여 왕의 자질이 열악하다 해도 왕조 간이 있으시면 관람해 주옵소서. 비록 성상의 밝은[緝熙] 학문에는 도움이 못되더라도 시정(施 를 안정적으로 존속하기 위한 노력이기도 하였다.76) 政)에 있어서는 조금은 취할 바가 있을 것입니다. 신은 지극히 격절하고 송구한 마음을 이길 수 없어 머리를 조아리며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 정도전, < 조선경국전 을 지어 올리는 箋文> (갑 73) 선양방식에 의한 새 왕조의 건국은 우리나라 왕조교체사에서 최초의 일이었으며, 그것을 실현 시킨 사상적 기초는 다름 아닌 민본사상과 혁명사상이었다. 정도전은 맹자의 혁명사상을 빌려 술) [撰進朝鮮經國典箋](甲戌) ( 三峰集 권3)) 78) 태조는 즉위년에 고려의 정령(政令) 법제(法制)의 장단점과 연혁을 아뢰게 하고, 관혼상제의 예식 을 경전을 통해 제정함으로써 인륜을 후하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고자 하였다. 또한 고려 말에 형률에 일정한 제도가 없어서 혼란하였다고 여겨 서울과 지방에서 형을 주관하는 관원은 대명 왔지만 독자적인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곧 정도전의 이론은 집단적 혁명이론으로, 인준의 새로 률 을 기준으로 법을 집행하게 하였다. 또한 환직 해임 등의 일은 일체 율문(律文)에 의거하여 죄를 판정하고, 그전의 폐단을 따르지 말 것을 주문하였다. 그런데 이 교서는 정도전이 지은 것 운 형식이었다. 서구의 민주주의가 국민에 의한, 주권재민의 계약정치를 말한다면 정도전의 민 본정치는 국민을 위한 신탁정치를 뜻한다. (한영우, 전게서, 147면) 74) 김영수, 전게서, 788면 이하. 75) 김영수, 전게서, 789면.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23 으로 朝鮮徑國典 의 편찬 동기와 상관이 있을 것이다.( 태조실록 1년 7월 18일조. 백관(百 官)에게 명하여 고려 왕조의 정령(政令) 법제(法制)의 장점 단점과 변천되어 온 내력의 사목(事目) 24 조선경국전에서 정도전은 조선이란 새로운 정치체제의 제도와 운영원리를 제시하 구성되어 있다. 책의 내용은 주례를 모델로 하여 정치영역을 6전으로 나누어 설명한 였는바, 이 저술은 한국 최초의 포괄적인 정치체제 연구서이다.79) 이 책에서 정도전 것이다. 주례에 나타난 국가형태는 만민을 평등하게 만들고, 권력구조에서는 冢宰, 즉 은 ① 정치체제의 구조와 원리를 처음으로 전면적인 성찰대상으로 삼았고, ② 그러한 재상의 역할을 매우 강조하고 있으며, 경제구조는 국가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한 것으 시도를 총체적이고 전면적으로 수행하였으며, ③ 정치체제에 대한 중국의 통찰력을 로 이해되고 있다. 정도전이 만든 조선경국전은 주례의 6전 체제를 중점적으로 참고 고려의 정치적 경험을 통하여 재성찰하였다.80) 물론 공양왕 4년(1392) 정몽주가 대명 하되 이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변용하고, 또 중국의 한, 당, 송, 명의 제도도 부분적 률과 원의 至正條格을 참작하여 신정율을 만들어 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끝내 법전으 으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에서 통치의 큰 규모를 6전으로 나누어 로서의 효력을 갖지 못하고 멸망했으며, 따라서 정몽주의 新律은 하나의 사찬법서로 설명하면서, 6전 앞에 정치의 총론으로서 正寶位, 國號, 定國本, 世系 그리고 敎書의 그치고 말았다.81) 태조 3년 5월에는 판삼사사(判三司事) 정도전(鄭道傳)이 주례(周禮) 5개 항목을 두었다. 먼저 정보위는 왕위를 바르게 유지하는 원칙을 설명한 것이다. 를 참조하여 치전(治典) 교전(敎典) 예전(禮典) 정전(政典) 형전(刑典) 사전(事典) 등으로 왕은 바로 이러한 자연의 이치에 따라 인으로써 왕위를 지켜야 한다고 강조한다.84) 나눈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만들어서 임금에게 올렸다. 태조는 이를 가납(嘉納)하 다음에 정국본은 왕위세습에 관한 원칙을 제시하였다. 여기서 정도전은 왕위세습권이 여 판지(判旨)와 조례(條例)를 모두 모아 그에게 편찬하도록 하였으나 이는 어디까지 장자나 혹은 賢者에게 있어야 한다는 것과 세자에 대한 교육을 철저히 할 것을 강조 나 그의 사론(私論)이었다.82) 조선경국전은 조선왕조가 제정한 공식적인 법전이 아닌 하고 있다. 정도전은 재상중심의 권력구조를 선호하였기 때문에 왕위계승에 대해서는 私撰으로써 통치방향을 제시한 법서에 불과하였으나 조선왕조의 문무조직과 통치방 장자도 좋고 현자도 좋다는 다소 애매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총론의 마지막 부분인 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조선 개국 후 조선왕조 치국의 지침이나 방향을 설정 교서는 왕의 명령서인 교서의 중요성을 강조한 글이다. 왕의 명령은 곧 정치수준을 한 법규나 지침서가 없었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치국의 지침이나 방향을 제시한 법서 가늠하는 기준이 되므로 학문이 높은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85) 가 바로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상하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상부 이 육전체제는 중국의 전통적인 통치와 법전의 근간으로, 周禮 가 그 모델이다.86) 에서는 이성계의 조선왕조 개국의 정당성을 논하고, 국호를 조선으로 할 것과 군왕의 우리나라 법제도에서 육전체제를 의식적으로 채택한 것은 조선경국전 이 처음이었다. 명령은 敎書로서 그것은 곧 법적 성질을 가짐을 기술하였다. 하부에서는 중국의 周禮 고려도 육전체제를 준거로 삼았으나 통합적인 법전은 없었다. 고려 말에 모든 제도가 를 따라서 관제를 6전으로 나누고, 그 각 전이 관장할 관할사무를 기술하였다. 私事化, 무력화되자, 신진 성리학자들은 육전체제에 의해 정부를 일원화, 집중화시킴 (2) 조선경국전의 내용과 의의 으로써 정치적 공공성과 효율성을 재건하고자 했다, 그 뒤 조선경국전 은 1397년(태 조6) 최초의 공식 법전인 경제육전 으로 계승된다. 그런데 주례 는 제도만 있고 법 정도전의 조선경국전 의 체제는 크게 왕(正寶位, 國號, 定國本, 世系, 敎書)과 정부 률이 없다. 조선경국전 도 제도와 그 취지를 설명하는 서문만 있고, 구체적인 법률 체계(治典, 賦典, 禮典, 政典, 憲典, 工典)로 나뉘어져 있다.83) 이 책은 상하 2권으로 이 없다. 이는 조선경국전 이 경제육전 의 편찬원칙을 마련하기 위한 기초 작업이 을 상세히 기록하여 아뢰게 하였다. 敎百官, 前朝政令法制得失 沿革事目, 具錄以聞 ) 79) 김영수, 전게서, 769면. 80) 김영수, 전게서, 770면 이하. 81) 이것은 역사상 명백한 최초의 사찬법서이다.(박병호, 전게서, 397면) 홍무 25년(공양왕4, 1392, 83) 84) 85) 86) 임신) 2월 포은선생이 찬술한 新律 을 왕명에 의하여 지신사 이첨이 진강하기를 무릇 6일 동 안 하니 (고려의 왕이) 여러 번 그 아름다움을 찬탄하였다. 우리 성조가 장차 천명을 받게 되니 선생은 절개를 지켜 돌아가셨다. 이때가 4월 초4일이었고, 이해 7월에 고려가 망했다. (二十五年 壬申 二月 先生進所撰新律 王命知申事李詹進講 凡六日 屢嘆其美 及我聖朝將受命 先生伏節而終 實四月初四日也 是年七月 高麗亡)( 圃隱先生年譜攷異 ) 82) 太祖實錄 卷5-21, 太祖 3年 5月 戊辰; 朝鮮總督府中樞院, 李朝法典考, 1936, 3頁. 조선경국전 은 1397년(태조6) 최초의 공식 법전인 經濟六典 으로 계승된다. 한영우, 전게서, 114-115면. 한영우, 전게서, 116-117면. 六典 이란 명칭은 주례 에서 비롯되었는데 그 후 수천 년 동안 바뀌지 않았다. 대개 天地 春夏 秋冬을 본받아 관직과 법령의 순서를 매긴 것이다. 六典 의 六 은 자연의 數字이고, 典 은 당연 한 법칙이다. (臣拜手稽首謹言曰, 六典之名, 昉於 周禮, 而更後數千年, 莫之或改. 盖取象于天地四 時, 叙次于職官憲章, 六爲自然之數, 而典爲當然之則也. 洪惟我朝聖作明述, 井井焉彬彬焉, 一洗羅 麗之陋, 權輿乎 經濟六典, 大成乎 經國大典, 錯綜乎前後三錄, 會通乎 典錄通考, 至我聖祖續典 之作, 而一王制作之盛, 列聖損益之義, 燦然具矣. 然而原典爲大全, 續典爲補編, 而編帙旣異, 不相聯 屬, 秪見其補, 則無以得其全也.)( 雙溪遺稿 권9, <大典通編序>)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25 26 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나) 정도전은 조선건국의 정치이념을 대변하여 형률에 국한하던 재래의 법전형식 조선경국전 의 체제구상은 두 가지 점에서 주목된다. 첫째, 법전의 처음에 주례 을 부정하고 국가제도의 전반을 포괄하는 법전형식을 취하여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였 에는 없는 왕에 관한 부분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왕정 하의 법은 원칙적으로 왕의 다.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은 조선조 문물제도의 제정과 법전편찬에 커다란 영향을 미 의사이지, 왕의 제재수단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 조항은 왕권 역시 특정한 원리에 귀 쳤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의 저서로서 국가의 통일법전으로 적용되지는 못하였 속적인 것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治典에서 정도전은 인군은 天工(하늘의 직무)을 대 다. 그리하여 경국대전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종합적 성격을 띤 국가의 통일법전 신하여 天民을 다스린다. 고 쓰고 있다. 곧, 왕은 천명의 대리자일 뿐이며, 그 정치적 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경국대전의 완성을 계기로 조선왕조에서는 왕조의 말기까지 의무는 백성을 보살피는 데 있을 뿐이다. 결국 왕권의 궁극적 정당성은 백성의 의사 줄기차게 법전편찬을 밀고 나갔다.90) 이다.87) 둘째, 재상론[冢宰論]이다. 총재는 모든 실무를 장악하고, 심지어 궁중사까지 관장 다) 다음으로 조선경국전은 유교적 법치론에 기초한 저술이었다. 조선경국전이 통 한다. 그러므로 인주의 직책은 한 사람의 재상을 논정하는 데 있다 고까지 말한다. 일법전의 형식으로 출현한 것, 그 자체도 대단한 의미를 가지지만, 유교 혹은 성리학 총재의 가장 중요한 직무 중 하나는 임금을 바로잡는 것[格君]이다. 임금의 자질이 의 仁政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통일법전이 필요하다는 논리 그 자체가 중요했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곧 총재론은 혈연적 권력승계를 따르는 왕정의 단점을 보완 다. 조선이 유교를 경국, 경제의 이념으로 채택하고 이를 전 사회영역에서 구체화하 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왕은 정치를 독단해서는 안 되며, 천명이 무엇인지를 항상 신 고자 함에, 그 핵심에 놓이는 것이 통일법전이었던 것이다.91) 이러한 논리를 제공한 하들과 의논해야 하고, 자신의 정치적 행위가 천명에 합당한지를 알기 위해 비판에 출발점이 바로 조선경국전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통일법전의 형성은 유교적 문화이념 개방적이어야 한다.88) 의 전면화를 지향하는 정치적 태도의 필연적 산물이었다. 통일법전을 마련하고 이를 통하여 국가통치의 제 규범을 일률적으로 마련하고 시행하는 것은 곧 국가의 공권을 (3) 법전국가로서 조선에서 조선경국전의 의의 강화하는 일이며, 국가가 가진 강제력을 법전의 구체적인 형태로 보증하는 일이었다. 가) 먼저 조선경국전은 정도전의 대표적인 정치이론서인 동시에 조선왕조 최초의 말하자면 법전의 편찬은 조선의 문치주의 유교주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였던 것이다. 조선은 한편에서는 교화의 논리를 정책적으로 펼쳐나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헌법에 해당한다는 분석이 있다.89) 법제를 통하여 국가적인 규모의 통일적 강제력을 세워나가고 있었다.92) 87) 정도전이 지은 태조 즉위교서에는 하늘이 많은 백성을 낳아서 君長을 세워, 이를 길러 서로 살 게 하고, 이를 다스려 서로 편안하게 한다. 그러므로 君道가 得失이 있게 되어, 인심이 복종과 라) 정도전은 전이란 통치규범이라는 이해로부터 출발하여 조선경국전을 편찬하 배반함이 있게 되고, 천명의 떠나가고 머물러 있음이 매였으니, 이것은 이치의 떳떳함이다 라고 쓰여 있다. 88) 이에 관하여는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266면 이하. 89) 조선경국전의 총론에 해당하는 정보위는 우리나라 최초의 성문화된 헌법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다. 그중에서도 정도전이 생각한 것이 국가의 최기본철학을 드러낸 항목이 정보위이니, 이것은 면서 당률이나 명률 그리고 정몽주의 신정률을 다 부정하고 6전 체계를 따라 부문별 오늘날 헌법에 해당하는 상위규범이라 할 것이다. 6전의 체제가 이 정보위의 철학을 기준으로 90) 윤국일, 전게서, 205면. 91) 이 법전구상은 강력한 집권국가를 지향하는 조선의 정책의지를 담고 있었다. 여러 규범을 하나 삼아 이루어진 것이다. (김용옥, 전게서, 29-30면) 3월 무진에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왕에게 바쳤다. 왕은 이 책을 보고 훌륭하다고 찬탄하고, 말과 비단, 白銀 등을 하사하였다. 조 선왕조의 통치규범을 6전으로 나누어 설명한 이 책은 말하자면 새 왕조의 헌법초안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왕조의 설계자이자 뛰어난 정치이론가로서의 정도전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 면서, 동시에 뒷날 경국대전의 편찬에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한영우, 전게서, 61 면)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27 대 경제육전이나 경국대전의 6전 체계는 조선왕조의 행정통치기구인 6조의 직능과 조직형식을 따른 것이고 내용서술방법은 부분별로 제도를 체계화해 오던 우리의 전 통을 살린 것으로서 주례의 6분법을 맹목적으로 모방한 것은 결코 아니다.93) 2)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 (1) 경제문감94) 정도전은 조선경국전을 저술한 후 다시 1395년(태조 4년)에 조선경국전의 정신에 기초하여 법전의 일정인 私撰의 經濟文鑑을 편찬하였다. 경제문감은 조선이란 새로운 정치체제를 운영하는 왕과 재상 등 공인의 실제적인 역할과 행위규범을 제시하였다. 태조 4년 6월에 찬진된 이 책은 조선경국전의 보유편에 해당한다. 조선경국전이 국정 로 제도를 체계화해 온 우리의 전통적 방법에 기초하여 법전을 만들었다. 그 뒤 경제 육전이나 경국대전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이 형식과 방법을 그대로 계승하였다. 요컨 의 원칙으로 통일적으로 제시하고자 한 것이 이 구상이 가진 큰 의도였는바, 그것은 구체적으로 는 집권체제를 건설하고자 하는 전망에 대응하는 일이었다. 조선경국전과 같은 통일법제의 존재 는 권력을 하나의 체제 속에서 규율하는 근거를 마련한다는 점에서 집권국가 건설의 핵심이 될 수밖에 없었다. (오영교, 전게서, 59-60면.) 92) 오영교, 전게서, 61면. 28 심적 요소인 재상중심의 권력구조에 대한 의견이 피력되어 있는 명저다.98) 經濟文鑑이란 경세제민을 추구하는 자에게 문장으로 귀감을 제시한다 혹은 경 세제민에 필요한 경제의 문장 이라는 의미이다. 조선경국전을 통해서 제시된 정통 왕 조의 법제를 운영하는 자(경제문감은 재상 이하의 대관, 간관, 위병, 감사, 주목, 군태 수, 현령 등의 신하들을 다루고, 경제문감별집은 군주만을 다룬다.)를 위한 警戒書라 는 의미이다.99) 순환하는 왕조에서 왕조의 명맥을 장구하게 유지하기 위한 방책은 창 역할을 축소시켜 논함으로써 앞서 편찬한 경제문감에서 재상중심체제를 강조한 것과 표리일체 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로써 그의 정치사상은 비로소 완결되었다."(한영우, 전게서, 82면) 98) 한영우, 전게서, 70면. 99) 삼봉 선생이 처음 경제문감 을 편찬할 때 상업(相業)부터 시작하고, 군도(君道)에 대해 언급하 지 않은 것은, 아마 정중히 여겨 감히 말하지 못한 것이리라. 그 글이 이루어지자 선생은 말하 전반의 방향을 제시한 종합적인 大典의 성격을 지녔다면 경제문감은 그 가운데서 治 기를, 임금의 마음은 정사를 해가는 근원인데, 경제(經濟)를 논하면서 임금의 마음을 근본삼지 典에 해당하는 권력구조의 문제를 보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95) 않는다면 이야말로 물이 맑기를 바라면서 그 근원을 맑게 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니 될 일인 가? 하고, 이에 본받을 만한 것과 경계삼을 만한 것을 논하여 열거하되, 당ㆍ우(唐虞)로부터 송 경제문감의 상권에서는 먼저 중국과 우리나라 역대 왕조의 재상제도의 변천과정과 그 득실을 설명하고, 이어서 재상의 직책과 진퇴의 자세를 기술하고 있다. 경제문감 ㆍ원(宋元)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그 중에 참칭(僣稱)한 나라와 분열(分裂)된 나라를 생략한 것은 정통(正統)을 존중한 것이요, 전조(前朝) 왕씨(王氏) 30대 동안의 득실을 또한 모두 논하여 편저 하권에서는 臺諫96)과 위병, 감사, 수령의 직책을 차례로 논하고 있다. 특히 정도전은 (編著)한 것은 듣고 보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 경전(經典)에 있는 성현(聖賢)들의 격언을 모아 대관은 군주와 재상의 실정까지도 탄핵할 수 있도록 하면서, 정치개혁의 한 부분으로 그 뒤에 붙였는데,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고 임금의 덕을 바르게 하는 바와, 역대의 치란(治亂) 및 정사하는 본말이 거론되지 않은 것이 없어, 간략하면서도 자세하고 간결하면서도 절실하게 서 정치를 감독하는 제도장치의 강화를 매우 강조하고 있다.97) 정도전 정치사상의 핵 93) 윤국일, 전게서, 163-165면 : 말하자면 6전은 6개의 부문법전이고 경국대전은 이 6개의 부문법 전을 합친 종합법전인 셈이다. 94) 이에 관하여는 김인호, 정도전의 역사인식과 군주론의 기반 - <경제문감>의 분석을 중심으로 -, 한국사연구(131), 2005, 257면 이하 참조. 95) 6월 6일에 정도전은 판삼사사로서 경제문감을 지어 왕에게 바쳤다. 이 책은 전년도에 편찬한 조선경국전의 내용을 일부 보완한 것으로, 특히 재상의 직책과 臺諫, 衛兵, 감사, 수령의 직책을 차례로 설명하였다. 정도전 정치사상의 핵심적 요소인 재상중심의 권력구조에 대한 의견이 피력 되어 있는 명저다. (한영우, 전게서, 70면) 96) 정도전은 정치의 두 큰 기둥을 재상의 조정과 간관의 비판으로 보았다. 곧 조선의 건국자들은 왕권을 제한하고 정치적 균형을 달성하기 위한 첫 번째 제도는 언관제로 보았던 것이다. 이들은 권력남용은 결국 비판되지 않은 권력 때문에 발생하므로 모든 정치적 행위는 논평의 대상이 되 어야 하였고, 부패의 핵심은 비밀성에 있으므로 모든 정치과정은 공개되고 견제되어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사간원과 간관은 아무런 실무를 담당하지 않고 오로지 국가전체와 왕의 정치에 대한 비판만을 담당하였고, 대간들에게는 공직 취임자의 적절성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인사비평권을 부여하게 된다. 97) "이해 정도전은 經濟文鑑別集을 편찬하여 왕조설계자로서의 꿈과 정열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 었다. 이 책은 경제문감을 보완한 것으로 군주의 역할을 논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군주의 되었으니, 실로 인주의 귀감(龜鑑)이라 하겠다. 생각하건대, 우리 전하께서 신성한 덕과 공으로 천명을 받아 나라를 세우고 유신(維新)의 정사를 일으켜 만세의 터전을 이룩하였는데, 선생은 성 리(性理)의 학문과 경제(經濟)의 역량으로 광보(匡輔 바로잡고 도움)하고 찬양(贊襄 도와 성취시 킴)하여, 강령(綱領)을 세우고 기율(紀律)을 마련했으니 정사와 교화(敎化)와 융성함이 지극하다 하겠다. 그러나 또한 이 책에 정성을 다한 것은 어찌 한때를 다스리는 데만 스스로 만족하게 여 기려 한 것이겠는가? 대개 장차 교훈을 세우고[立言] 규범을 남기어 만세 자손에게 한없는 복이 되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경국전(經國典) 을 저술하고 또 이 책을 편찬하였으니 그의 충성은 크고 그의 생각은 원대하다 하겠다. 근(近)이 변변치 못한 사람으로, 공의 명을 받아 거 듭 교정하여, 불후(不朽)의 사업에 이름을 붙이게 되었으니, 다행함이 이보다 클 수 없다. 그러므 로 대강 선생의 저술한 뜻을 서술하여 책머리에 쓴다. 홍무(洪武) 30년(1397, 조선 태조6) 7월 상한(上澣)에 자헌대부(資憲大夫) 화산군(花山君) 권근(權近)은 서(序)한다. ( 三峯集 권11, 經 濟文鑑別集上序 1397년(태조6)에 권근(權近)이 지은 經濟文鑑 서문. 三峯先生初編經濟文鑑 自 相業而始 未及乎君道 蓋鄭重而不敢言也 其書旣成 則曰 君心出治之源 論經濟而不本於君心 是猶 望流之淸而不澄其源也 而可乎 於是論列其可法可戒者 自唐虞而迄宋元 其僭僞分裂者略之 尊正統 也 前朝王氏三十代之得失 亦悉論而著之者 耳目之所逮也 又採經典聖賢之格言 以附其後 其所以格 君心正君德 與夫歷代之治亂 爲政之本末 靡所不擧 略而詳 簡而切 實可謂人主之龜鑑也 恭惟我殿 下聖德神功 受命開國 以興維新之治 以建萬世之基 而先生以性理之學 經濟之材 匡輔贊襄 立經陳 紀 治化之隆 可謂至矣 然且拳拳於是書者 豈以一時之治 爲自足哉 蓋將立言垂範 以爲子孫萬世無 疆之休也 故旣著經國之典 又編是書 其忠可謂大 而其慮可謂遠矣 近以非材 獲承公命以重校之 託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29 30 업기에 만들어진 전장제도와 우수한 신하의 등용이다. 조선경국전이 전자의 측면을 그의 이념성은 추상적 구호에 그치지 않았다. 정도전은 주자와 마찬가지로 역사의 어 반영하는 것이라면, 경제문감은 후자의 측면을 반영하는 것이다. 정도전은 역사서에 느 시점에서도 道統의 세계는 실현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103) 정도전은 이상세 대한 탐구를 통해서 창업기가 지나간 세습왕조에서 출중한 군주를 기대하기 어렵다 계가 성인 군주를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치자의 문제를 다룸에 있어 는 것을 알았고, 그러한 상황에서 국가를 유지하는 요체를 일대지제 와, 庸君이나 재상 이하의 대관, 간관, 위병, 감사, 주목, 군태수, 현령 등의 신하에 관해서 논한 경 中主를 보좌하여 국가를 운영해나갈 우수한 신하에서 찾았던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제문감에 멈추지 않고, 君道를 다룬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한 의미는 거기에 있는 것이 정도전은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에서 조선왕조의 제도와 그 제도의 운영자에 대한 다.104) 정도전은 경제문감별집에서 君道를 통해서 도통세계로의 지향성을 분명히 밝 자신의 구상을 제시하였으며, 그를 통해서 찬탈에 의해서 세워진 조선을 정통왕조로 히고 있는 것이다.105) 서 확립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운용자의 문제는 정토왕조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념세계의 실현과 직결되는 주자주의의 본질적인 부분이다.100) (2) 경제문감별집 Ⅵ. 결론 다음으로 경제문감별집은 태조 6년에 지은 것으로, 상하 2권으로 되어 있고 앞서 1) 고려시대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지방 곳곳에까지 직접 미치지 못하는 곳이 많 저술한 경제문감의 보유편에 해당한다. 경제문감에서는 신하의 직책에 대해서만 논한 았다. 따라서 중앙 국가권력이 지방의 토호세력을 통해 간접적으로 백성을 지배하던 반면, 군주의 직책을 별도로 논한 것이 바로 이 책이다. 곧 정도전은 경제문감별집에 중층적 정치조직 구조를 지니고 있었던 왕조가 고려왕조였다. 게다가 고려 후기에 이 서 모범적인 군주상을 제시하였다. 결국 정도전은 본래 군주가 전제권을 갖는 것을 르기까지 사회경제적인 발전의 정도가 지역에 따라 현격하게 차이가 났는데 이러한 배격하였으므로, 군주의 직책은 결국 신하의 의견을 존중하고 유능한 신하를 등용하 경제적 요인도 통일적이고 일관된 행정이나 정책을 전개시킬 수 없었던 이유가 되고 는 것으로 족하다고 보았다.101) 정도전은 이 책의 편찬을 통하여 왕조설계자로서의 있다. 이러한 여러 사회경제적 정치적 요인으로 인해 고려시대에는 통일된 성문법전 꿈과 정열을 잃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이 책은 경제문감을 보완한 것으로 군주의 의 완비를 필요로 하지 않았고 각 지방에 고유한 관습법적 사회규범이 일반적인 사 역할을 논한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군주의 역할을 축소시켜 논함으로써 앞서 편찬 회질서 유지의 근간이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고려왕조 시대 내내 부단히 계속된 외 한 경제문감에서 재상중심체제를 강조한 것과 표리일체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로써 침과 내홍은 이러한 법적 환경에 더 한층 통일된 법제도 정립의 환경을 저해하는 요 그의 정치사상은 비로소 완결되었다.102) 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은 이와는 매우 다른 정치적 환경에서 건국된 왕조이다. 곧 조선은 고 2. 법전편찬자로서 정도전의 역할 려시대 폐단을 통렬히 인식하고 새로운 이념에 입각하여 건설된 국가였다. 조선의 건 정도전은 조선경국전(1394)을 통해서 정통왕조의 일대지제 를 구상하여 제시하였 고, 이어서 그 제도를 운용할 치자를 위한 警戒書인 경제문감(1395)과 경제문감별집 (1397)을 저술하였다. 경제문감과 경제문감별집은 한편으로는 정통왕조의 운용을 위 한 매뉴얼인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삼대의 이상세계를 지향하는 이념서적이었다. 국 및 조선의 정치체제는 고려 정치체제의 자연적 연속이나 중국 정치체제의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정치적 재성찰에 의한 인위적 산물이었으며 조선은 고려 정치체제와 103)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174면. 104)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175-176면. 105)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177면. 한편 도통의 세계를 실현하는 데에는 또 하나의 문제가 가로막 혀 있었다. 불교의 문제이다. 원래 성학의 주창과 이단의 배척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정권과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정도전은 태조 6년(1397)에 경제문감별집을 저술하고, 다음 해에 불씨잡 名不朽 幸莫甚焉 故略敍先生著述之意 以引編端云 洪武三十年七月上澣 資憲大夫花山君權近序) 100)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161-162면. 101) 최상용 박홍규, 전게서, 174면 이하. 102) 한영우, 전게서, 82면.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31 변을 저술하여 敎權마저 장악하고자 하였다. 즉 그는 이단을 배척하고 正學을 세워 조선에서 道統의 계승자임을 자임하고자 했던 것이다. (최상용 박홍규, 183면) 32 비교하여 볼 때, 세계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새로운 견해에 기초하여 건국되었다. 고 4) 조선경국전은 조선왕조가 제정한 공식적인 법전이 아닌 私撰으로써 통치방향을 려 말 조선 초 정도전을 포함한 성리학자들은 인간의 정신적 완성을 위한 성리학이 제시한 법서에 불과하였으나 조선왕조의 문무조직과 통치방향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 란 이념에 터 잡아 이를 위한 제도를 체계적으로 설치하고, 그것을 현실 정치제도와 었다. 조선 개국 후 조선왕조 치국의 지침이나 방향을 설정한 법규나 지침서가 없었 연결하고 이러한 목적에 반하는 정치권력의 위험성을 통제하기 위한 세심한 정치제 다. 이러한 조선왕조의 치국의 지침이나 방향을 제시한 법서가 바로 정도전의 조선경 도와 이념, 관행을 만들어냈다. 국전이었다. 조선경국전은 새로운 정치체제의 제도와 운영원리를 제시하고 있으며, 경제문감은 이를 운영하는 왕과 재상 등 공인의 실제적인 역할과 행위규범을 제시하 2) 조선 건국자들은 조선 정치체제의 현실적 특징을 균형 에 두어서 전제화된 왕 정은 정통성과 권력이 한 개인에게 집중되므로 실질적인 권력은 분배되어야 하며, 왕 고 있다. 정도전은 군주제의 원리에 입각하여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경제문감별집에 서 한 국가를 운용할 구체적인 제도와 정책을 구상하여 제시하였다. 의 권력은 견제되고 감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이를 위하여 다양한 이념적, 이 론적 근거를 제시하면서 현실적으로 왕의 권한을 통제, 억제하기 위하여 필요한 여러 제도들을 법전화, 법제도화하기에 이른다. 결국 조선 건국자들은 이러한 제도들을 정 치공동체의 항구적 요소라 생각하고 이를 법제도화, 법전화하려고 노력하였다. 특히 고려 말 조선 초 정도전을 포함한 성리학자들은 형이상학적 유학자들이 아니라 구체 적인 이론가, 혁명가, 정치가로서, 특정한 이념에 바탕을 둔 구체적이고 특정한 정치 체제의 설계와 건설에 몰두하였다. 그리고 이를 마침내 30여년이 넘는 제정과정을 거 쳐 경국대전에 담아내었다. 3) 조선 건국 이후 정통 왕조의 실현을 위한 구체적인 제도화과정을 주도한 이가 바로 정도전이었다. 그는 즉위교서를 작성하여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선언하였고, 이 를 실질적으로 확보하기 위해서 구체적인 이념과 정책을 제시하였다. 고려의 경우는 각 행정 부서들의 독자적인 관례나 규정에 의해서 통치가 이루어졌을 뿐, 일관되고 체계적인 법전을 갖추고 있지 못하였다. 조선의 건국 주체는 집권적 국가 운영체제를 확립하기 위해서 법체계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그 최초의 법전이 정도전에 의한 조선 경국전이다. 이를 통해서 건국 주체는 자신들이 세운 정치세계에 공공성을 부여하려 고 하였으며, 이후 경제육전과 경국대전으로 이어졌다. 통일법전을 마련하고 이를 통 하여 국가통치의 제 규범을 일률적으로 마련하고 시행하는 것은 곧 국가의 공권을 강화하는 일이며, 국가가 가진 강제력을 법전의 구체적인 형태로 보증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법전의 편찬은 조선의 문치주의 유교주의 실현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였던 것이다. 조선은 한편에서는 교화의 논리를 정책적으로 펼쳐나가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법제를 통하여 국가적인 규모의 통일적 강제력을 세워나가고 있었다. 김일환 입헌주의(Constitutionalism), 정도전(Jung Do-jun), 헌법사(History of Constitution), 조선경국전(ChosunKyonggukjon), 경국대전(KyonggukTaejon)
입법가로서 정도전에 관한 憲法史的 考察 33 Abstract 34 was the way of strengthening the nation's public rights and the compelling power would be guarantied by the specific code. Chosen Dynasty put forth A Study of Constitutional History about Jung Do-jun as a legislator in Chosen Dynasty its ideology, Confucianism due to the compilation of codes and ruled by scholars. Kim, Il Hwan Chosen's Founders thought that an autocrat should be restrained his absolute power because they tried to establish the Chosen under the "BALANCEABLE AUTHORITY" between the retainers and the lord. Thus the king should be observed and the substantial power need to be dispersed. On the basis of this belief, the Founders made various regimes and codified the laws as a means to an end for checking the king's absolute power. The Founders set out each system in Chosen for the permanence of political community. especially, the era of the end of the Korea Dynasty to the beginning of the Chosen Dynasty, Jung Do-jun and his companies who studied Sung Confucianism were absorbed to create specific political system in the concrete. Such conception was embodied by enacting The Code of Kyeng Kuk Tae Jeon which was taken 30years. Jung Do-jun led such systematization process to actualize the idealism of new dynasty after Chosen was established. He declared the legitimacy of Chosen Dynasty via framing a Message of Enthronement. In Korea Dynasty, each office ruled by its own precedents and rules, a coherent code was unsettled. Unlike Korea Dynasty, Chosen's Founders tried settling a centralized national operating system through establishing the law regime. Jung Do-jun completed the Code of Chosen Kyeng Kuk Jeon which is the first code of constitutional law in Chosen Dynasty. The Chosen Kyeng Kuk Jeon influenced not only for the Kyung Je Yuk Jeon(the Code about Economy)but also the Code of Kyeng Kuk Tae Jeon. Compiling the code 36 이번 행정조직개편안에 대해서는 작고 효율적인 정부를 구축하기에 적절한 안이라 成均館大學校 法學硏究所 成均館法學 2008年 4月 SungKyunKwan Law Review The Institute of Legal Studies Vol. 20 No. 1 APRIL. 2008 는 평가와 과학기술과 IT산업발전 및 여성의 지위향상에 역행하는 조직개편이라는 평가가 엇갈리고 있다. 이번 행정조직개편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정보통신혁명의 선구자 로서의 역할을 방송 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지성우* 해 온 정보통신부를 폐지하고 그 기능을 행정안전부, 지식경제부, 방송통신위원회, 문 화체육관광부 등으로 이관한다는 내용이다. 이러한 계획의 일환으로 한나라당에서는 방송과 통신의 진흥 및 규제 업무를 총괄하는 대통령 직속의 방송통신위원회를 설립 하는 방송통신위원회 설립 및 운영에 관한 법률 (이하 방송통신위원회법 )을 국회 에 제출하여 지난 2월 26일 여 야 합의로 국회에서 의결하였고, 2월 29일부터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3) 이 법률에 의하여 방송과 통신 업무에 대하여 미국의 연방커뮤니케 이션위원회 (Federal Communications Commission, FCC)를 모델로 한 대통령 직속의 방송통신위원회 가 설치되었다. 정보통신부는 지난 94년 문민정부 출범과 함께 체신부를 확대 개편해서 발족하였 Ⅰ. 새로운 시대를 위한 비전의 현실화 Ⅱ. 방송통신 정책기관 통합의 당위성에 관하여 Ⅲ. 통합기구의 법적 지위와 성격 문제 Ⅳ. 결론 다. 체신부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무려 120년, 부처 창설 이후에도 14년간 초고 속 인터넷 보급, 세계 최초로 코드분할다중접속(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CDMA) 이동전화 기술 상용화, 와이브로(Wireless Broadband, Wibro)기술의 3세대(3G) 이동전 화 표준 채택, 디지털멀티미디어기술(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 DMB) 상용화 등 의 성과를 올리면서 우리나라를 통신강국으로 만드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일 부에서는 이러한 정보통신부를 폐지하여 IT진흥기능을 여러 부처로 분산시키는데 따 른 부작용을 우려하고 있으며, 실제로 향후 IT강국을 자처하던 한국의 선도적 지위가 I. 새로운 시대를 위한 비전의 현실화 지난 2008년 1월 16일 한나라당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중앙정부의 조직을 현재 18부 4처 4처, 18청, 4실, 10위원회에서 2원 13부 2처 17청 5위원회 4실로 대폭 축소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 계획안에 의하면 기존의 18부 중 통일부, 정보통신부, 해양 수산부, 과학기술부, 여성가족부 등 5개 부처와 국정홍보처, 기획예산처 2개 처는 폐 지 흡수되는 것으로 알려졌었다.1) 그 후 여 야의 합의과정에서 통일부와 여성부를 존 치하기로 최종 결정함으로써 향후 15개의 부처로 정부가 운영되게 되었다.2) * 단국대학교 조교수, 법학박사 1) 중앙일보, 2008. 1. 17. 위태롭게 될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간 학계와 실무계에서는 방송의 주무부서인 방송위원회와 통 신의 주무부서인 정보통신부간의 기구통합과 방송 통신관련 법제의 정비가 시급하다 2) 애당초 인수위원회의 정부조직개편안에 따르면 정부조직 중 존치되는 13부는 기획재정부(재정경 제부 기획예산처)와 인재과학부(교육부 과학기술부 일부), 외교통일부(외교통상부 통일부), 법 무부, 국방부, 행정안전부(행정자치부 개칭), 문화부, 농수산식품부(농림부 해양수산부의 수산부 문), 지식경제부(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일부 과학기술부 일부), 보건복지여성부(보건복지부 여 성가족부), 환경부, 노동부, 국토해양부(건설교통부 해양수산부의 해운기능) 등이었다. 이 중 최종적으로 폐지하기로 계획했던 통일부와 여성부를 존치시켜 기획재정부, 교육과학기술 부, 외교통상부, 통일부, 법무부, 국방부, 행정안전부, 문화체육관광부, 농림수산식품부, 지식경제 부, 보건복지가족부, 환경부, 노동부, 여성부, 국토해양부 등 15개 부처로 확정되었다. 3) 동아일보, 2008. 1. 22. A8면.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37 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이는 현재 방송에 적용되는 방송관계법과 통신에 적용되는 38 거나 이의 본질을 훼손할 우려가 있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의무를 지고 있다. 통신관계법이 엄격히 구분되어 있음은 물론, 그간 양 미디어를 관할하는 정책기관의 방송의 자유를 구체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방송제도 형성의 문제 역시 제도적 보장 대립으로 인하여 방송적 성격을 가진 통신서비스, 통신적 성격을 가지는 방송서비스 의 문제에 속한다.5) 따라서 방송의 자유 자체를 폐기하지 않거나 그 본질적 내용을 등 새로이 등장하는 경계영역적 서비스에 대한 규율이 불가능하거나 지연되어 왔기 훼손할 우려가 없는 한도 내에서는 입법자의 재량의 자유가 상대적으로 넓게 인정된 때문이다. 다. 입법자는 구체적인 제도 형성에 관해 폭 넓은 재량권을 행사할 수 있으므로 당대 지금까지 국내에서 논의되고 있는 방송 통신정책기관통합의 논의의 핵심은 ① 정책 기관 통합의 필요성 여부, ② 통합기구의 법적 지위와 성격, ③ 통합기구의 권한 등 의 시대가치를 최대한 반영하여 방송의 자유가 효율적으로 보장될 수 있도록 방송 제도를 형성하면 되는 것이다.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정부조직법의 개정과 새로 제정된 방송통신위원회법 에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시대와 국가를 떠나 보편타당한 방송제도 또는 규제기관의 대한 입법평가 및 향후의 발전방향에 대해서는 후속 논문에서 보다 상세히 논의하기 유형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며, 국가의 문화적 헌법적 현실과 가치를 반영할 수 있는 로 하고, 이 논문에서는 우선 정보통신부와 방송위원회의 기능을 통합하여 새로이 신 기관의 설립이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신규 서비스에 대한 공공성 유지와 산업성 제 설된 방송통신위원회 의 설립방안에 대한 그동안의 논의들을 정리하고, 방송과 통신 고를 동시에 강구할 수 있는 효율적인 정책방안이 제시된다면 굳이 기관을 통합하지 의 융합에 따른 관련 정책기관들의 통합의 당위성에 대하여 고찰한다. 또한 입법론적 않을 수도 있으며, 나아가 향후 통합 전보다 더욱 큰 혼란과 문제가 발생한다면 다시 관점에서 신설되는 방송통신위원회의 법적 지위 및 성격과 아울러 구체적인 조직형 양 기관을 분리할 수도 있다는 발상의 전환과 열린 사고가 필요하다. 성에 있어 몇 가지 고려되어야만 할 핵심적인 사안에 대하여 개략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방송정책기관과 통신정책기관이 반드시 통합되어야 한다고 보고 있는데, 이것은 어떠한 근거에 기한 것인지에 관하여 먼저 살펴볼 필요 가 있다. II. 방송통신 정책기관 통합의 당위성에 관하여 2. 논리적 필연의 구체화 로서의 방송통신 정책기관 통합 1) 아날로그 시대의 방송 통신법제 및 정책기관의 분리 1. 제도적 보장으로서의 규제기관 형성의 자유 (1) 방송의 자유와 통신의 자유의 기본권적 차이점 방송과 통신을 관할하는 기구의 통합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지적하고 싶은 점 은 기구 통합이 방송 통신 융합의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점이다. 관련기구의 하드웨어적 통합이 방송통신융합 논의의 논제 중 가장 중요한 가시적 현행 헌법 제2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언론 출판의 자유는 현대 민주주의 국가의 존 립과 발전에 필수불가결한 기본권으로서, 대다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에서는 이 를 중요한 기본권의 하나로 보장하고 있다.6) 이러한 언론의 자유는 단순히 국민 개 인 결과물이며, 통합의 결과 정부부처의 대대적인 개편이 불가피하므로 이해당사자들 의 관심이 여기에 쏠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정책기관 통합의 문제는 방송통신 융합의 최종목표가 아니며 효율적인 규제를 위한 수단적 의미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5) 제도적 보장 이라 함은 정당제도, 선거제도, 공무원제도, 지방자치제도, 교육제도 대학자치제, 군 사제도, 사유제산제, 가족제도 등 국가존립의 기반이 되는 일정한 제도를 헌법의 수준에서 보장 함으로써 당해 제도의 본질을 유지하려는 것 을 말한다. 상기한 자유권들을 제도적으로 보장한다 헌법적 차원에서 고찰해 보면 방송의 자유는 자유권적 속성과 제도적 보장으로서 는 것은 이를 통하여 헌법적 차원에서 일정한 제도의 창설을 보장하고 입법부가 임의적으로 그 제도를 폐지하거나 본질을 훼손할 수 없도록 구속을 받게 한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상세한 사 의 양자의 성격을 모두 가진 이중적 성격의 자유권으로 보는 것이 통설적 견해이 다.4) 이러한 견해에 의하면 입법자는 입법행위를 통하여 방송의 자유 자체를 폐기하 항은 권영성, 전게서, 2007, 187~190면; 헌재 1997. 4. 24(95 헌바 48 결정)참조. 6) J. Choper/R. Fallon Jr,/Y. Kamisar/S. Shiffrin, Constitutional Law 10th Ed., Thomson/West, 4) 권영성, 헌법학원론, 박영사, 2007, 187~190면; 헌재 1997. 4. 24(95헌바48 결정)참조.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39 2007, pp. 587~628; R. Rossum/G. A. Tarr, American Constitutional Law 7th ed., Thompson 40 개인의 주관적 공권으로서의 측면뿐만 아니라 정보의 전달과정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의 정보유통을 보호하기 위하여 특정사용자 이외의 제3자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가 하고 있는 제도적 보장으로서의 성격을 가진다. 상대적으로 적은 유선망을 중심으로 발달해 왔다. 언론 출판의 자유는 그 매체적 속성을 기준으로 출판 신문 방송 등으로 분화되어, 이와 같은 기술적 차이 때문에 방송망과 통신망은 네트워크상으로 엄격히 분리되 동일한 언론 출판의 자유라 할지라도 각기 상이한 규제원리가 적용되어 왔다. 이 중 어 있는 것으로 인식되었고, 1990년대 초반까지는 관련 법규 역시 방송망과 통신망 방송의 자유는 주파수의 희소성과 사회적 영향력을 이유로 하여 공공성이나 사회적 에 각각 상이한 법리가 적용되었다. 공익성이 강조되어 출판이나 신문의 자유권보다도 더욱 엄격한 내용규제와 구조규제 를 받아왔다. 반면, 통신은 양방향성을 가지고 소수의 선택된 참여자들 간에 음성 및 데이터 정 보를 송 수신하는 것으로서, 시장원리와 효율성을 바탕으로 하는 경제적 산업적 측면 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통신의 특성에 근거하여 통신의 자유는 개인의 비밀보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통신관련 법제는 통신의 비밀보호 등의 이용자 보호, 기술 및 독과점 규제, 공정경쟁 환경조성 등을 위한 정책과 아울러 통신인프라 구축을 통한 원활한 통신서비스 이용을 목표로 규범화되어 있다. 둘째, 서비스 차원에서는 방송서비스의 경우 전통적으로 전파를 통해서 오디오 정 보를 제공하는 라디오 방송서비스와 비디오 정보를 제공하는 TV서비스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송신자의 방영행위에 대하여 수신자인 시청자는 채널변경, 음성조절, 전원 끄기 등 아주 수동적인 행위만이 가능했다. 반면 통신은 전화나 무선통신과 같이 음성정보의 소통을 목적으로 설치된 네트워 크로서, 사용자들 간에 다양한 상호작용이 가능한 쌍방향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셋째, 수용자 측면에서는 전통적 의미의 방송의 경우 공중을 대상으로 일방적으로 송신되어 불특정 다수인이 제한을 받지 않고 평등하게 수신할 수 있다. 따라서 방송 이와 같이 그동안 종래 언론 출판의 자유와 통신의 자유는 전혀 이질적인 매체를 에 있어서는 일반적 접근가능성 (allgemeine Zugänglichkeit)이 인정되어야 하며 불특 통해 전달되는 것으로서, 전자는 매스미디어적 속성을, 후자는 개인적 정보전달의 매 정 다수인에게 임의적 공개성 을 가지고 일반적으로 전송될 때에만 방송으로 인정된 개체로서의 속성을 지니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고 양자에 적용되는 법리 역시 현격한 다. 차이가 있다. (2) 방송과 통신의 기술적 매체적 차이점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방송의 자유와 통신의 자유는 기본권적 성격, 존재의의, 구체적인 보호의 태양 등이 전혀 다른 이질적인 기본권이다. 이러한 기본권적 성격과 아울러 일반적으로 방송과 통신은 기술 서비스 수용자 측면에서 다음과 같은 차이가 있다고 한다. 첫째, 기술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방송은 전파를 이용한 라디오 방송에서 출발하여 이와는 반대로 통신은 주로 특정참여자 간의 정보활동으로 인식되었다. 이와 같은 수용자 측면의 차이에 기인하여 방송에서는 방영내용에 대한 규제 가, 통신에서는 통신비밀의 보호 가 중요한 입법목적이 되어 왔다. (3) 아날로그 방송시대의 미디어법제 및 정책기관의 분리 방송과 통신간의 이와 같은 기술 서비스 수용자 측면에서의 차이점 때문에 전세계 적으로 아날로그 시대에는 양자에 적용되는 법제가 확연히 구분되었으며, 우리나라에 있어서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유선, 위성 등의 형태로 발전하여 왔는데, 최근까지는7) 주로 무선망 중심으로 발달하 먼저 라디오 방송이 개시된 1927년부터 1994년까지 우리나라에는 지상파 라디오 여 한정된 주파수를 사용하는 일방향적인 전송형태였다. 이에 반해 통신은 특정인 간 방송과 지상파TV방송만이 존재하였다. 이 당시까지만 해도 방송과 통신은 각기 다른 법영역에 속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였으며, 방송법제와 통신법제는 전혀 별개의 Wardsworth, 2007, pp. 181~273; G. Herrmann, Rundfunkrecht, C. H. Beck, 2. Aufl. 2004, S. 194~222; H. Jarras/B. Pieroth, Grundgesetz, C. H. Beck, 9. Aufl. 2007. Rn. 35~48; K. Stern, Das Staatsrecht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 Band IV/1, C. H. Beck, 2006, S. 1387~1418; 1460~1766; 성낙인, 언론정보법, 나남, 1998, 60~61면 등을 참조. 7) 가령 우리나라에 유선방송이 도입된 것은 1995년이다. 영역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이 시기 방송 통신 분야에 관한 법학적 연구를 법제사적 차원에서 살펴보면 ① 방 송과 통신에 대한 법제적 연구의 부족, ② 방송과 통신법제 분야의 철저한 분리, ③ 지상파 독과점으로 인한 병리현상의 해결방안, ④ 명예훼손 법리의 발전, ⑤ 새로운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41 42 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른 통신인프라 구축 방안에 관한 법제의 발전 등의 특징을 발 견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방송정책을 담당하는 방송위원회(2000년 이전에는 문화관광부)와 정 보통신부(1994년 이전에는 체신부)는 각각 방송법 등의 방송관계법과 전파법 전기통 이러한 공영지상파의 독점은 민영방송인 서울방송이 개국되고(1990년), 유선방송 (소위 케이블TV)이 우리나라에 도입되면서(1995년) 서서히 경쟁체제로 돌입하게 되었 다. 그리하여 1995년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방송 통신 융합 현상이 본격화되기 전의 방송과 통신산업은 각자의 영역에서 수직적으로 발전하였다. 즉 지상파TV, 케이블 TV, 위성방송, 라디오방송 등 정보의 특성과 매체의 유형에 따라 콘텐츠의 제작, 분 신기본법 전기통신사업법 등을 관장하는 기관으로서, 상호간의 직무영역과 거의 무관 계하게 독립적으로 직무를 수행해왔다. 2. 방송 통신 융합으로 인한 정책기관 통합의 필요성 1) 방송 통신의 융합 현상의 대두 배, 서비스 제공 등이 수직적으로 통합된 형태를 띠고 있었다. 이 시기의 매체 발전의 특징으로는 방송이 그간 지상파 방송의 보편적 서비스의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내에서는 2000년대 초반까지 방송과 통신의 매체적 개념에서 탈피하여 유선방송과 위성방송 등을 통하여 전파되면서부터 유료서비스로 상이성을 이유로 방송 통신 관련법과 정책기관이 수직적으로 엄격하게 분리되어 있었 전환되었다는 데 있다. 이에 따라 그간 보편성, 공공성, 공정성을 중심으로 논의되던 으며, 통합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학문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수용자 복지 라는 방송철학이 점차 상업주의적 성격으로 변화되게 되었다. 이러한 매 2000년대 초반 이후 소위 방송과 통신의 융합 (Convergence between Broadcasting 체간의 상업주의적 성격으로 인하여 방송광고의 수주량과 직결되는 시청률경쟁이 가 and Telecommunication)현상으로 인하여 기존의 방송 통신 규제체계는 새로운 정보사 열되었으며, 자연히 방송내용의 폭력성 선정성이 질적 양적으로 크게 증가함으로써 사 업(소위 융합서비스)을 규제하는 데 한계가 노정되고 있다. 통상 이러한 융합현상은 회의 가치공감대를 훼손하는 결과가 빚어지게 되었다. 또한 공정경쟁 측면에서도 과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영역에서 진행된다고 한다. 도한 시청률경쟁으로 인하여 신문시장과 마찬가지로 경쟁회사의 고객선점, 저가의 끼 (1) 네트워크의 융합(Convergence of Network) 워팔기, 프로그램 공급업자들에 대한 불공정행위 등이 문제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방송분야에서는 ① 민영방송의 상업화에 대한 반발로 공영방송의 역할에 관한 연구, ② 미디어의 선정성 폭력성에 대한 심의문제, ③ 매체간의 공정경 방송과 통신의 융합은 가장 먼저 미디어공학의 발달과 이로 인한 방송망과 통신망 의 융합으로 나타나고 있다. 쟁문제, ④ 상업방송의 과도한 선정적 보도로 인한 명예훼손 문제 등이 중요한 법적 최근까지 방송과 통신서비스는 각각 별도의 망을 통해서 송신되었다. 즉 음성은 이슈로 부각되었다. 한편 통신분야에서는 ① 전송기술의 발전으로 등장한 휴대폰, 유 음성통신망,9) 방송은 방송망, 데이터 통신은 데이터통신망10) 또는 인터넷 망을 통해 무선인터넷 등 신규서비스의 활성화 정책, ② 2002년 KT(Korea Telecom)의 완전 민 전달되었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보면 과거에는 음성통신망, 화상통신망, 데이터통신망 영화와 더불어 경쟁체제로의 돌입에 따른 통신사간의 공정경쟁 문제, ③ 통신사간의 등과 방송망은 차이가 있어 방영행위를 하기에 충분한 정도가 되지 못했으나, 최근 불공정행위나 담합행위 해소방안, ④ 통신회사간의 활발한 상호 인수 합병에 따른 법 전송기술의 발달과 통합망의 등장으로 인하여 통신망을 통한 방송행위11)나 방송망을 규 위반 문제, ⑤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는 음란물 폭력물로부터의 국민보호 문제, ⑥ 통한 통신행위12)가 가능한 정도로 네트워크의 성능이 향상되면서 이제 더 이상 통신 P2P(Peer to Peer)8)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디지털 콘텐츠의 보호와 저작권 문제 등이 망, 방송망, 인터넷망의 구별 없이 단일네트워크에서 방송, 통신, 인터넷이 융합된 멀 주로 논의되었고,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방송 통신의 융합으로 인한 법적 문제점과 티미디어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규제체계 변경의 필요성이 학문적인 차원에서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8) P2P 란 인터넷에서 이루어지는 개인 대 개인의 파일 공유 기술 및 행위 를 말한다. 이는 기존의 서버와 클라이언 개념이나 소비자개념에서 벗어나 개인 컴퓨터끼리 직접 연결하고 검색함으로써 모든 참여자가 공급자인 동시에 수요자가 되는 형태이다.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43 (2) 서비스의 융합(Convergence of Service Provision) 9) PSTN(Public Switched Telephone Network) 10) PSDN(Public Switched Data Network) 11) 가령 기존의 지상파 방송사들이 자신의 콘텐츠를 인터넷을 통하여 VOD형태 또는 실시간으로 제 공하는 경우를 말한다. 12) 가령 유선방송사에서 제공하는 방송 통신 인터넷 등의 TPS(Triple Play Service) 등을 말한다. 44 신의 자유는 기본권적 속성이 전혀 다른 별개의 기본권으로서, 향후 어떠한 네트워크 이러한 네트워크의 융합을 통하여 서비스 제공에 있어서도 ① 방송망을 통한 통신 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의 기본권으로 융합될 수 없다.16) 이러한 헌법 서비스,13) ② 통신망을 통한 방송서비스14) 및 ③ 소위 방송과 통신의 경계영역적 서 상의 기본권적 성격의 차이 때문에 소위 융합영역의 기본권적 성격이나 실체가 불분 비스15)가 출현하고 있다. 가령 대역폭의 확대로 인하여 통신 분야에서 영상서비스의 명한 경우에는 당해 융합영역에 속하는 서비스에 대한 규제가 매우 난해하다.17) 제공이 활성화되고 있는 경우라든가, 반대로 방송분야에서 다채널화가 진행되면서 방 실제로 현행 방송법제는 주파수의 희소성 및 사회적 영향력에 초점을 맞추어 하드 송의 기본적인 특징이 되는 일반성이 희석되어 불특정 다수가 아닌 특정인에 대한 웨어 소프트웨어를 통합적으로 운영함과 동시에 방송내용규제, 방송사업자의 소유 및 수신을 목적으로 하는 서비스와 양방향 서비스가 발전하고 있는 경우가 전형적인 예 참여제한 등을 중심으로 하는 규제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반면, 통신법제의 경우에는 이다. 전송내용의 비밀보호 및 보편적 서비스의 제공에 초점을 맞추어 하드웨어와 소프트 (3) 산업의 융합(Convergence of Industry) 사업자의 융합 이라 함은 산업적 측면에서 방송사업자와 통신사업자간의 전략적 제휴(Strategic Alliance), 인수(Acquisition), 합병(Merger) 등을 통하여 방송사업자가 통 신사업에 진출하거나, 통신사업자가 방송사업에 진출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SKT나 KT과 같은 통신회사들은 현재 방송법의 소유지분 제한 규정에 의하여 MBC, SBS와 같은 지상파방송의 지분 소유가 절대적으로 금지되어 있으나, 향후 이러 한 통신회사들이 지상파방송사의 지분을 소유할 수 있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와는 반대로 가령 미국의 AOL사와 Time Warner사 간의 합병과 같이 방송사와 통신사 간 의 인수합병에 의해 새로운 미디어 기업을 탄생시키는 경우도 상정할 수 있다. 웨어를 분리하여 운영하면서 요금, 접속조건, 시장경쟁, 전송매체의 표준화 등을 중심 으로 하는 규제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또한 허가구조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현행 방송법에 의하면 방송사업에 있어서 는 전송수단(지상파방송, 종합유선방송, 위성방송, 이동멀티미디어방송), 기능(음악유 선방송, 방송채널사용사업, 종합편성사업) 등 다양한 기준으로 구성되어 있는 반면, 통신사업에서는 기간 별정 부가통신사업자 등과 같이 기능별로만 차등을 두어 허가를 부여하거나 등록하게 하여 사업을 시행하도록 하고 있다. 이렇게 현행 방송 통신관련 법제가 양자 간의 엄격한 분리를 전제로 하고 있으므 로, 이러한 기준이 혼용되어 나타나는 새로운 방송정보사업자를 규제하는 데 적합하 지 않다는 문제점이 발생하게 되었다. 즉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통신네트 워크를 통한 방송행위 와 방송네트워크를 통한 통신행위 가 가능해지면서 방송과 통 2) 경계영역적 서비스의 등장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법적 문제점 상술한 바와 같이 네트워크의 통합을 통하여, 그간 엄격하게 구별되었던 방송서비 스와 통신서비스의 경계가 불확실해지면서, 방송과 유사한 통신서비스 또는 통신과 유사한 방송서비스 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방송 실무계에서는 흔 히 방송과 통신의 융합 (Convergence)이라고 표현하면서 마치 이러한 서비스의 융합 신의 중간 영역에 해당하는 분야에 대해 방송정책기관인 방송위원회와 통신정책기관 인 정보통신부 간의 관할권 다툼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영역에 적용하여야 할 법제가 정비되지 않은 상황이 지속되면서 새 로운 시대로의 도약을 위해 방송 통신 및 멀티미디어 분야를 관할할 기관 및 법제의 통합이 필요했던 것이다. 다만 이러한 융합현상을 규율하기 위하여 법제 및 관련기관 간의 통합이 필수적인가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의견의 대립이 있다. 현상을 통하여 방송과 통신이 기본권적으로도 융합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듯하 다. 하지만 헌법적 차원에서 기본권 속성상의 차이점을 고찰해보면 방송의 자유와 통 13) 가령 유선방송(CATV)을 통하여 통신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를 말한다. 14) 전화망을 통하여 VOD(Video on Demand)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 등을 말한다. 15) 예를 들어 인터넷을 통해 신문, 방송, 이메일, 전화 등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우를 말한다. 최 근 인터넷신문이 포털사이트화 하면서 광고유치, 콘텐츠의 질, 전파속도 등의 면에서 기존 인쇄 매체를 능가하는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3) 정책기관 구성변화의 불가피성 16) 멀티미디어의 발달에 따른 방송개념의 변화 및 방송과 통신의 자유의 기본권적 속성의 차이와 융합의 불가능성에 대해서는 지성우, 멀티미디어 시대에 있어 방송개념의 가변성에 관한 연구, 성균관법학 제18권 제3호, 2006, 115~140면 참조. 17) 경계영역적 서비스의 규율문제에 대해서는 고민수, 방송 통신융합과 입법적 과제, 공법연 구 제34집 제4호 제1권, 2006, 93~118면 참조.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45 (1) 조정 협의의 불가능성 46 처와 일부 그 권한이 중복된다고 하여도 부처의 본질적인 고유 업무영역은 유지될 방송통신위원회 설립 전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간에는 IPTV(Internet Protocol 수 있다. Television)18) 등 신규 미디어의 관할권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불협화음이 발생하고 반면,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와의 갈등과 대립은 네트워크와 전송기술의 발전으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관할권 다툼은 단지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간에만 존재하 로 인하여 새로 등장하게 될 거의 모든 매체들의 규제 범위와 수준을 결정할 때 번 는 것이 아니라 가령 대법원의 명령 규칙에 대한 심사권을 둘러싼 헌법재판소와 대법 번이 발생할 문제이며, 이러한 신규 미디어에 대한 관할권 포기는 곧 기관 존립의 정 원의 갈등, 수사권 독립을 둘러싼 검찰과 경찰의 대립, 통신사업자들의 공정거래 문 당성의 문제로 비화될 것이기 때문에 구조적으로 어느 한 당사자의 관할권 포기를 제를 둘러싼 정보통신부와 공정거래위원회의 갈등, 외주전문채널 문제를 둘러싼 방송 기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최근 몇 년간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는 아래의 표 위원회와 문화관광부간의 갈등 등 시기와 기구를 불문하고 지속적으로 제기되는 문 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신규 서비스의 관할권을 둘러싸고 지속적으로 의견이 대립되어 제이다. 왔으며, 그 결과 신규 서비스가 등장할 때마다 관할권의 다툼으로 인하여 서비스 개 이렇게 정부기관간의 규제권에 대한 다툼이 유사 영역에 관할권을 행사하고자 하 시가 지연되어 왔다. 는 기관 간에 상시적으로 존재하는 문제이므로 당해 사안이 발생할 때마다 조정위원 <표 1> 신규 서비스 관할권에 대한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간의 의견 대립 회 등을 설치하고 중간적 영역에 제3의 법률을 두어 사안별로 해결하면 될 것 아니 냐는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구 분 이러한 견해는 ① 이론적으로는 규제기관 상호간의 합리적 규제조정의 가능성을 통 신 법 회선설비보유 회선설비임차 기간통신사업자 부가통신사업자 방 송 법 전제로, ② 구체적으로는 독일식 분리모델을 따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IP-TV 하지만 이론적 실무적으로는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간 상호간의 합리적 규제조 정의 가능성은 거의 없는 것으로 판단되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양 기관의 통합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었다. 직접 근거조항 없음 방송사업자의 웹캐스팅을 웹캐스팅 기간통신사업자 부가통신사업자 VOD 기간통신사업자 부가통신사업자 (주문형방송채널사용사업 데이터방송 기간통신사업자 부가통신사업자 데이터 방송 기간통신사업자 부가통신사업자 방송위원회가 심의 상기한 바대로 대법원의 명령 규칙권에 대한 심사권을 둘러싼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근거조항 없음 의 갈등, 통신사업자들의 공정거래 문제를 둘러싼 정보통신부와 공정거래위원회의 갈 자로 간주) 등, 외주전문채널 문제를 둘러싼 방송위원회와 문화관광부간의 갈등 등 정부부처 간 에는 상시적으로 관할권을 둘러싼 갈등이 존재하여 왔고, 향후에도 이러한 갈등양상 은 재현될 것이지만, 위에서 언급한 정부부처들을 통합해야 한다는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이러한 갈등으로 인하여 한 부처의 존립의 정당성이 의심받을 정 도의 심각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휴대폰 TV (June Fimm 등) 직접 근거조항 없음 (별정방송으로 간주) 즉 위에서 언급한 정부부처들은 모두 고유한 업무영역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부 (2) 협의 조정의 불가능으로 인한 문제점 18) IP-TV (Interner Protocol TV)라 함은 인터넷 체계를 기반으로 TV 모니터를 통해 인터넷 방송과 같이 스트리밍 방식의 방송을 전달하고, 이와 더불어 인터넷 및 기타 부가서비스를 제공하는 것 이렇게 신규서비스에 대한 정책권을 둘러싼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의 이원적 을 의미한다고 본다. IP-TV는 일반적으로 IP 기반의 네트워크를 이용하여 HD(High Definition)급 고화질 생방송, 주문형 비디오(VOD), TV콘텐츠 등을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IP-TV 도입의 전 체계를 유지할 경우 구체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의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망과 문제점에 관하여는 윤석민, IPTV의 국내외 도입 현황과 정책상의 쟁점들, 한국정보법학 예견되어 왔다.19) 회(편), IP 미디어 신상품의 성공적 시장진입을 위한 전략 연구, 2004, 96면 이하 참조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47 첫째, 방송 통신융합서비스에 대해 규제의 법적 근거가 없는 규제공백 상태를 상정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한편으로는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상 유해 콘텐츠에 대한 제재 방 법이 없다는 문제점이 있고,20) 다른 한편으로는 법적 규제의 흠결로 인하여 사업자가 사업을 영위할 수 없게 되는 문제점도 발생하고 있다. 특히 후자의 경우처럼 사업자 가 제공 가능한 융합형서비스 제공의 법적 근거가 없을 경우에는 1995년 통신위성 발사이후 2000년 통합방송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위성을 사용하지도 못하고 순수사업 비만도 약 3400억 이상을 낭비한 위성방송의 전철을 밟게 될 것이다. 나아가 향후 제공될 방송 통신융합형서비스에 있어서는 그 손해액이 기하급수적으로 증대될 것으 로 예상된다. 둘째, 방송 통신융합서비스에 대해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양자에 의해 이중규제 가 가해지는 상황을 예정할 수도 있다. 즉 현행 방송 통신관계법제에 의하면 최근 출 현하고 있는 이동휴대수신방송, IPTV 등의 융합형서비스에 대한 정책 및 규제근거가 48 이러한 규제기관간의 관할권에 관한 다툼은 과거의 DTV전송방식, 이동휴대수신방 송, IPTV 등의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증폭됨으로써 규제기관의 전면적인 통합문 제를 논의하는 수준에 이르렀다.22) 4. 정책기구 통합 이외의 대안의 불합리성 규제기관의 분리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주로 다음과 같이 두 가지 방안으로 방송과 통신에 관한 규제기관을 분리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첫째, 방송위원회와 정 보통신부의 중간에 조정협의체를 두어 여기에서 매체의 속성을 결정하는 방식을 채 택하는 방식과 둘째, 네트워크와 콘텐츠의 관할기관을 분리하는 방식이다. 먼저 독일 식의 정책기관 분리모델의 내용과 문제점에 대해 살펴본다. 1) 독일식의 정책기관 분리모델에 대한 검토 미비한 실정이다. 따라서 이러한 신규서비스가 제공될 때마다 이전의 DTV(Digital 먼저 소위 독일식의 정책기관 분리모델을 주장하는 견해에 의하면 방송위원회와 TV) 전송방식의 예에서와 같이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간에 서로 방송인가 통신인 정보통신부 간에 조정협의체를 두고 여기에서 방송인지 통신인지 또는 제3의 융합형 가의 개념과 관할권을 놓고 의견이 불일치하는 경우 방송 통신융합형 서비스는 양 기 서비스인지를 결정하게 하자고 주장한 바 있다. 관으로부터 이중규제를 받을 위험성이 크다. 이에 따라 신속성 시의적절성을 생명으 이 방안에 의하면 현행 방송법, 전파법, 전기통신기본법, 전기통신사업법을 부분 로 하는 신규서비스의 제공이 지연되면 천문학적인 재원의 낭비와 국가경쟁력 실추 개정하고 소위 통신방송융합서비스사업법(가칭) 을 제정하여 현재 방송위원회에서 는 명약관화(明若觀火)하다.21) 주장하는 별정방송이나, 독일의 미디어서비스 국가협약 (Mediendienstestaatsvertrag) 또는 텔레서비스법 (Teledienstgesetz) 등의 법률을 제정하여 융합영역을 규율하되, 19) 방송통신의 융합과 관련하여 규제기관간의 할거주의로 인한 폐해에 대한 연구로는 이승선, 매 그 규제는 거의 별정통신사업자 정도의 아주 약한 수준으로 하면 될 것이라고 한 체융합서비스에 대한 할거주의적 관할권 경쟁 연구, 방송학보 13, 1999, 267면 이하 참조 20) 가령 현재 휴대폰을 통해 방송서비스가 제공되고 있는데 DMB서비스의 경우에는 방송사업으로 분류되어 방송법의 적용을 받고 있으나, June, Fimm서비스 등의 경우에는 부처 간의 이견으로 다.23) 인하여 규제의 공백상태에 있다. 또한 여관 등 숙박업소를 대상으로 성인비디오프로그램을 위성 게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인터넷 멀티미디어 방송사업자법 을 통과시킴으로 인하여 수년 으로 송출 제공하는 사업의 경우에도 방송위원회에서 불법위성방송행위로 간주하여 고발조치하 였으나, 법원은 당해 송출행위는 위성방송으로 볼 수 없으며, 위성방송으로 보지 않을 경우에는 만에 일단락되었다. 22) 최근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 및 문화관광부 간의 갈등사례에 관하여 연구한 자료에 의하면 처벌을 위한 근거법률이 없다는 이유로 1심에서 무혐의 판결을 받은 바 있다. 21) 통신망에서 제공되는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통신서비스로 분류하고 있는 현재의 통신법제에 의 정부기구간의 갈등과 지대추구 현상을 1기(탐색기), 2기(통합법 주도권 갈등기), 3기(정책 주도권 갈등기), 4기(융합서비스 확보를 위한 갈등기), 제5기(IP-TV 갈등기) 등으로 구분할 수 있으며, 하면 IP-TV는 통신망을 통해 방영되기 때문에 통신의 영역에 속하게 된다. IP-TV의 경우 시청 자의 입장에서는 네트워크 구성이 IP 방식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는 디지털 케이블 방송과 전혀 지속적으로 갈등이 확대 증폭되어 왔다고 한다. 방송정책을 둘러싼 정부기관간의 갈등사례에 대 차이를 느끼지 못한다. 따라서 IP-TV서비스를 두고 방송위원회는 종합유선방송으로서 방송의 일유형으로 보고 있는 반면, 정보통신부는 통신망을 통해 제공되는 서비스이므로 통신서비스라 고 주장하여 현재까지 양 기관의 관할권 충돌문제가 해결되고 있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지난 2007년 12월 28일 국회에서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가 공동으로 IPTV를 관할하 한 역사적 고찰과 분석에 관하여는 홍선기 황근, 방송 통신융합에 대비한 정부정책 평가, 방 송 통신 융합의 정책 이념과 실제 (뉴미디어방송협회 주관세미나 발제문), 2005. 2. 16, 41면 이 하 참조 23) 구체적인 추진방안에 관하여는 정보통신정책연구원(편), 통신서비스 산업과 방송산업의 균형발 전 방안 연구, 2004, 156~160면 참조.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49 50 이 방안에 의할 경우에는 방송을 국가적 영역에 두지 않으면서도 규제가 가능하 (Teledienstegesetz)을 제정하여 규율하고 있었다.27) 그러나 최근에는 미디어서비스와 며, 기존의 방송과 통신에 관한 관할권에 대한 변경 없이 융합형 서비스에 대한 규율 텔레서비스 양자를 텔레미디어 (Telemedien)로 통칭하여 모두 연방에서 관할하는 것 이 가능하여 조기에 조직을 안정시키고 관련 산업의 발전에 전념할 수 있다는 장점 을 내용으로 하는 텔레미디어법 (Telemediengesetz)을 제정하였다.28) 따라서 현재 이 있다. 독일은 방송정책은 방송국가협약에 의하여 연방의 각주가, 통신정책은 통신법에 의하 이 방안의 모델이 되는 독일의 경우 우리의 헌법에 해당하는 기본법(Grundgesetz) 제정 당시 언론 매체가 정치의 시녀로 정치적 선전수단으로 전락하였던 나치 시대에 여 연방이 관할하되, 멀티미디어에 대해서는 방송에 비해 규제수준을 대폭 완화하여 연방에서 관할하도록 하고 있다. 대한 반성으로 문화고권 (Kulturhohheit)을 연방이 아닌 연방 각 주에서 행사해야 한 이렇게 방송 영역에 대한 관할권의 분리로 인하여 각 주간의 이해관계가 대립할 다고 규정하고 있다.24) 이러한 헌법 규정에 따라 통신에 대한 관할권과 방송에 대한 경우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데, 이때에는 서비스의 성질에 관한 최종적인 결정권은 기술적인 인프라 구축에 관한 권한은 연방이, 방송정책과 내용규제 등의 문화적 사안 주미디어청장회의 에서 행사하게 된다. 여기에서 당해 매체의 속성이 방송이라고 만 에 대하여는 연방 각 주25)에서 행사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게 방송에 대한 관할권이 장일치로 판정할 때에는 방송으로 인정하여 연방 각 주가 관할하고, 그렇지 않으면 각 주에 있는 관계로 경쟁체제에 돌입한 방송시장의 통일적인 규율이 필요하게 되자 통신 등으로 구별하여 연방의 관할 하에 두게 된다. 연방 각주에는 통일적인 규정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연방 각주의 방송법 방송국가 협약 (Rundfunkstaatsvertrag)26)을 체결하였다. 이와 같이 복잡다기한 방송규제제도를 형성하고 있는 독일에서도 역시 통일적인 법규 및 규제기관의 필요성이 강력히 제기되고는 있다. 그러나 역사적 문화적인 이유 그 후 오랜 기간 동안의 논의 끝에 융합형서비스 중 방송적 속성을 가지는 미디어 로 문화고권 전체를 연방 각 주에 부여하고 있는 기본법 규정을 방송만을 위하여 개 는 미디어서비스(Mediendienste)로 구분하여 각 주의 관할로 하고 미디어서비스 국 정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며, 헌법 개정은 국민들의 동의가 있어야 하는데 방송 가협약 (Mediendienstestaatsvertrag)을 체결하였고, 통신적 속성을 강하게 갖고 있는 통신의 융합과 이에 대한 신속한 결정보다는 방송의 국가로부터의 독립과 선전도구 매체들은(가령 원격의료, 원격게임 등) 연방의 관할로 보아 텔레서비스법 화의 지양이라는 이념이 더 우선시되는 독일에서 이러한 헌법 개정이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규제기관 통합은 단기간에는 난망하며 이로 인한 연방과 각 주간의 24) 독일 기본법 제30조, 제73조 제7호 및 제83조 이하 참조. 여기에서는 연방의 권한을 나열하고 있으며, 이러한 연방의 권한에 속하지 않는 권한은 당연히 각 주의 관할권에 속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25) 현재 독일에는 3개의 자유시(Berlin, Bremen, Hamburg)와 13개의 주가 있다. 이 주들에는 민영방 송을 관장하는 15개(Berlin과 Brandenburg는 지리적 근접성으로 인하여 1개의 미디어청을 구성) 미디어청(Landesmedienanstalten)들이 각 주 내지 자유시의 민영방송을 관장한다(연방 각주에는 관할권 다툼 역시 지속적으로 재연될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이러한 모델에 의할 경우 향후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새로운 유형의 융 합형 서비스 출현시 당해 서비스가 방송유사서비스인지 통신유사서비스인지에 관한 구별기준과 경계가 모호하여 관할권에 관한 의견대립의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일견하기에 독일식의 협의체모델 설립방안이 매우 설득력이 있는 것처 미디어법 또는 방송법 이라는 다양한 명칭의 방송관계법이 존재), 이러한 미디어청들의 럼 보이지만 이러한 모델은 방송과 통신의 융합과 이에 대한 규제기관 간의 갈등을 연합체가 바로 지방미디어청협의회 (Arbeitsgemeinschaft der Landesmedienanstalten, ALM)이며, 여기에서 방송국가협약 (Rundfunkstaatsvertrag, RfStV)을 체결, 연방 각 주의 중요한 정책을 27) 보다 상세한 사항에 대하여는 지성우, 방송과 유사방송서비스의 규제에 관한 연구, 헌법학연 조율하게 된다. 참고로 공영방송은 협업 형태의 독일공영방송사협의회 (Arbeitsgemeinschaft der öffentlich-rechtlichen Rundfunkanstalten der Bundesrepublik Deutschland, ARD)와 단일 방송사인 구, 제10권 제3호(2004), 381면 이하 참조. 28) 다만 여기에서 유의할 점은 독일 역시 지난 2007년 1월 18일 전자상거래통합법 (Elektroni- 제2공영방송 (Zweite Deutsche Fernsehen, ZDF)을 구성하여 내부적 규제를 가하고 있다. 26) 통상 협약 이나 조약 이란 법률 용어는 국가간의 약정에 사용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 scher Geschäftsverkehr Vereinheitlichungsgesetz, EIGVG)를 통과시키면서 그 일부 법률로 미디 어서비스 국가협약 (Mediendienstestaatsvertrag) 또는 텔레서비스법 (Teledienstgesetz)을 통합 Staatsvertrag (국가협약)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게 되는 이유는 아마도 우리나라와는 달리 외교권 이나 국방권 등 협소한 권한만을 연방에서 행사하고, 나머지 권한들(특히 교육, 지방행정, 경찰 한 텔레미디어법 (Telemediengesetz)를 입법화하였다는 점이다, 이로써 독일에서는 방송과 통 신 및 중간적 영역의 서비스에 대한 관할권 중 방송에 대한 관할권은 각주에, 통신에 대한 관할 권 등)은 모두 각 주에서 행사하고 있는 독일의 현실에서 이를 통일적으로 규율한다는 의미에 권은 연방에 주되 양자의 중간적 영역의 서비스에 대해서는 연방이 관할권을 갖게 되어 최소한 서 국가협약 이라는 법률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입법적인 타협의 실마리를 찾은 것으로 평가된다.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51 해소하는 데 적합하지 못하다. 2) 네트워크와 콘텐츠의 분리 모델에 대한 검토 규제기구 분리를 주장하는 또 한 가지 견해는 네트워크와 콘텐츠를 분리하여 각기 다른 기관에서 관장케 하자는 것이었다. 52 직적 모델 대신 네트워크와 콘텐츠 규제에 대한 규제프레임워크를 차별적으로 설계 할 것을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권고안들의 내용은 별론으로 하고라도 현실적으로 네트워크와 콘텐츠를 엄 격히 분리하여 이를 각각 다른 기관에서 담당하게 하는 것은 정책의 실효성 측면에 서도 매우 부적절하다. 네트워크 정책과 콘텐츠 정책은 동전의 앞뒷면과 같이 연관된 이 견해는 방송통신의 정책 및 규제기능을 견제와 균형의 원칙, 규제의 정치적 중 것으로서 한 기관에서 네트워크 정책을 시행하고자 하는 때에는 적정한 정도의 콘텐 립과 독립성 확보 측면에서 합리적 효율적으로 정비함을 목적으로 하여, 정책수립, 산 츠 공급가능 여부에 관하여 면밀히 검토해야 하며, 콘텐츠에 대한 정책 역시 네트워 업육성 및 법령 제 개정은 정부부처에서 관장하되, 공정경쟁 및 내용 등에 관한 기술 크에 대한 기술적 경제적 정책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이를 각기 다른 기관에서 분리 경제적, 사회 문화적 규제는 독립기관인 위원회에서 담당하게 하자고 주장하여 왔다. 규제하게 되면 기관간의 견해가 대립할 경우 다시 이를 해결할 방안을 모색해야 하 이 견해에 따르면 신규서비스 도입 및 통신망 발전정책과 방송정책 등 방송통신에 관한 전반적인 정책권 및 지원기능은 정부부처(정부부처 신설 불가시 위원회 형태)에 서 담당하고,29) 이와는 별도로 방송통신위원회를 설치하여 공정경쟁 및 소비자보호관 련 기술적 경제적 규제는 방송통신위원회에서 담당하고, 방송 및 통신 프로그램의 내 용에 관한 사회 문화적 규제는 방송통신위원회 산하의 민간기구인 방송통신윤리위원 회를 설립하여 여기에서 담당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다.30) 는 불합리한 점이 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네트워크와 콘텐츠를 분리 규제하자는 견해는 이론적 실무적으로 채택하기 어렵다고 사료된다. 3) 소결 이상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과거와 같이 정책기관간의 분리체계를 유지하면서 방 이 견해의 특징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정부의 독임체 부처에서 방송과 통신의 전반 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의 기관 간 갈등을 해결하기는 지난하였다. 특히 최근까지 정 적인 정책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전제에서 네트워크 규제기관에서는 방 보통신부에서 역점사업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IT839전략32)을 분석해 보면 대부분의 송 통신정책과 사업자 허가, 시장규제기능을 모두 총괄하고, 콘텐츠 규제기관은 방송, 서비스가 방송서비스 또는 방송과 관련된 서비스 제공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콘텐츠 심의를 수행하는 것으로 역할을 구분하자고 주장하면서 그 논리적 근거로 EU 이러한 사업을 추진하고자 할 때 정보통신부 입장에서는 신규서비스들을 통신으로 권고안(EU Directive)과 OECD 권고안을 인용하고 있다.31) 구분하여 자신들의 관할권에 속한다고 주장할 것이고, 방송위원회 역시 명백히 방송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명백하게 사실관계를 호도한 것이다. EU와 OECD 권고안의 근본취지는 방송통신융합 환경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규제기관 수를 감소시켜야 할 32) 과거 정보통신부에서는 차세대 신성장 동력사업의 일환으로 IT839 전략을 추진하고 있다. IT839 필요성이 있으며, 다만 산업활성화 측면을 고려하여 네트워크와 콘텐츠에 관한 규제 전략이라 함은 Wibro 서비스, DMB(Digital Multimedia Broadcasting) 서비스, 홈 네트워크 서비스, 원칙을 다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EU와 OECD의 권고안의 핵심은 방송과 통신 텔레메틱스 서비스,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 서비스, W-CDMA(Wideband Code Division Multiple Access) 서비스, 지상파 DTV(Digital TV), 인터넷전화(VoIP, Voice over Protocol) 을 규율할 수 있는 단일 통합기구를 구성하되, 이 기관 내에서 방송과 통신이라는 수 등의 8대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한 광대역통합망(BcN, Broadband Convergence Network), U-센서 네트워크(USN, U-Sensor Network), IPv6(Internet Protocol v6) 등의 3대 인프라를 구축함으로써, 29) 이 견해에 의하면 법령 제 개정시에는 방송통신위원회와 방송통신윤리위원회에서 관련 법내용에 대한 제 개정 건의권만 행사하고, 법령 제 개정 제안권은 정부부처에서 행사해야 한다고 주장하 차세대이동통신, 디지털 TV, 홈네트워크, IT SOC(Social Overhead Capital), 차세대 PC, 임베디드 여 왔다. 정보통신정책연구원, 통신서비스산업과 방송산업의 균형발전 방안 연구, 2004, 160 면 이하. 30) 정보통신정책연구원, 통신서비스산업과 방송산업의 균형발전 방안 연구, 2004, 160면. 31) EU의 6개 Directive들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정보통신정책연구원, KISDI 이슈리포트 05-02, 2005 참조. S/W, 디지털 콘텐츠, 텔레메틱스, 지능형 로봇 등 9대 신성장동력을 육성하겠다는 계획이다. 다 시 말하면 이는 언제 어디서나, 모든 사물이 인터넷에 연결되고 고품질 정보수신 및 고속으로 처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이로부터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창출하겠다는 것이다. 정보통 신부의 계획에 의하면 이러한 서비스들을 활성화함으로써 2010년 정도에는 국민소득 2만 달러 를 달성할 수 있다고 한다. 정보통신부, 국민소득 2만불로 가는 길 - IT 839전략, 2004, 18 면 참조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53 서비스 내지 유사방송서비스에 속하는 서비스들을 통신영역에 포함시키게 될 경우에 는 부처의 존립근거가 사라지게 될 것이므로 당해 신규 서비스들을 방송영역에 포함 54 1. 위원회 또는 독임제의 선택 문제 통합기구의 법적 위상에 관하여 위원회 형태를 주장하는 견해와 독임제 형태를 주 시키려고 할 것이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는 방송위원회나 정보통신부 어느 한 쪽도 융합형서비스에 대 장하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었다. 과거 방송위원회는 방송법에 근거한 무소속 국가기관이며, 정보통신부는 정부조직 한 관할권을 포기할 수 없는 실정이며, 이렇게 관할권 다툼이 지속될 경우, 미디어의 혁명적 발달 속도를 고려할 때 새로이 등장하는 융합형서비스는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낡은 기술이 되어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할 것을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실제로 과거 방송위원회와 정보통신부의 갈등으로 인해 신규 서비스 도입이 지연된 바 있고, 최근에는 IP-TV 등을 둘러싼 정책기관간의 관할권 다툼으로 인하여 국가경 법에 근거한 독임제 중앙행정기관이었다. 이러한 이질적인 조직을 통합한 규제기관의 법적 지위에 대하여도 다양한 견해가 개진되어 왔으나, 요약하면 독임제와 위원회 형 태의 선택의 문제 및 중앙행정기관형과 국가기관형의 선택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 두 가지 문제는 서로 논리적으로 관련된 문제이므로 여기에서는 함께 다루기로 한다. 먼저 위원회제 또는 독임제의 선택의 문제에 관하여 살펴보면, 양자는 서로 장단 쟁력이 실추될 우려가 있다는 점이 지속적으로 지적되어 왔다. 또한 우리나라와 같은 문제점을 안고 있던 영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서 최근 이 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했었음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는 규제기관을 통합한 사례를 분석해 보면, 대부분의 국가들이 규제기관을 통합하지 아 니한 채 효율적인 규제방안을 제시하기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는 결론에 다 다른 것이 아닌가 한다.33) 이와 같이 논의과정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정책대상인 방 송과 통신의 경계영역적 서비스 증가로 인한 정책혼선의 예방을 위해서 정책기관의 통합은 시기와 방법의 문제일 뿐 언제든지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점을 가지고 있어 어느 쪽이 우월한 제도라고 일의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또한 현 행 정부조직법 제2조 제2항에서는 중앙행정기관은 이 법과 다른 법률에 특별한 규 정에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부 처 청으로 한다 고 규정하고 있으며, 동법 제5조에서 는 행정기관에는 그 소관사무의 일부를 독립하여 수행할 필요가 있는 때에는 법률 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행정위원회 등 합의제 행정기관을 둘 수 있다 고 규정하고 있으므로 통합규제기구의 조직구성시 정부조직법상의 부 또는 특별법상의 위원회 형태 중 어느 쪽도 선택가능했던 안이다. 먼저 합의제 행정기구의 경우에는 독임제 형태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정치적 독립 결론적으로 방송 통신을 둘러싼 외부적 정치적 상황의 불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당위 적 이론적인 측면에서 보면 규제기구의 통합은 시기와 방법의 문제일 뿐 멀티미디어 기술의 발전, 방송 통신 산업계의 통합과 이에 따른 관련 법규의 통합이라는 흐름에 성 확보가 용이하고, 콘텐츠 내용에 다수의 구성원이 관여할 수 있어 독임제에 비하 여 미디어의 공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반면, ① 여 야의 정치적 안배만을 고려하여 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방송의 정치적 따라 자연스럽게 귀결될 논리적 필연의 구체화 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단계로는 과연 기구 통합시 방송의 독립성과 통신의 효율성을 조화 롭게 유지함으로써 융합에 따른 산업적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은 무엇인지에 관하여 논해야 할 것이다. 먼저 그간 논의되어 왔던 통합기구의 법적 지 독립성보다는 정치적 균형성만을 추구하게 되면 결과적으로 여 야간의 의견이 대립하 는 의제는 가급적 피하는 비의제화현상 이 일어날 우려가 있으며, ② 정식 행정기구 가 아닌 불완전한 독립규제위원회의 형태를 취함으로써 정책의 결정 집행에 있어 권 위와 강제력이 결여될 수 있고, ③ 막강한 권한에 비하여 전문성이 결여되어 정책수 위와 성격에 대해 살펴본다. 립 집행에 있어 피규제기구와의 갈등이 야기되어 방송정책이 혼선이 있을 수 있다는 III. 통합기구의 법적 지위와 성격 문제 문제점이 지적된다.34) 이와는 반대로 독임제 중앙행정기관의 경우에는 타 부처와의 긴밀한 협조 하에 업 무수행의 효율화를 기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반면, 강한 규제집행력에 대하여 사 업자들의 저항이 예상되고 정보내용물의 정파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해내기가 33) 해외의 방송 통신정책기관의 통합과정과 문제점에 대해서는 한국방송광고공사(편), 방송통신 융합과 방송정책 추진체계 개편 연구, 2004를 참조.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55 34) 김정기, 전환기의 방송정책, 한울아카데미, 2003, 93면 이하. 56 쉽지 않으며, 방송의 독립성 및 민주성 확보가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어 여론의 지지 가지 견해로 요약할 수 있다. 현재의 위원회제 형태 역시 위의 3가지 안에 표현된 기 를 얻지 못했다. 구 형태와 같다. 상기한 바와 같이 위원회제나 독임제 중앙행정기관 유형은 상호 장 단점이 있어 어 떤 유형이 타 유형에 비하여 우월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방송의 사회적 영향력, 자유롭고 다양한 여론형성이 민주정치의 사활이 걸 린 중대한 문제라는 점을 고려하면,35) 방송정책권을 독임제 행정기구에서 독단적으로 결정 처리하게 하는 것은 정치적 독립성을 해칠 우려가 있다. 또한 만일 독임제를 채 <표 2> 2008년 정부조직법 개정 전 정부의 주요 위원회의 법적 성격 구 분 기 관 설치근거 헌법기관 선거관리위원회 헌법 택할 경우에는 위헌 논란에도 불구하고 2000년 통합방송법에서 방송위원회를 정부부 처에 소속되지 않는 위원회 형태로 구성한 취지와 시대정신에 배치되는 것이다. 이러 한 이유에 기인하여 다수의 학자들은 독립된 위원회 형태의 국가기관형을 선호하고 있는 듯하며,36) 필자 역시 방송에 관한 정책권을 행사하는 기구는 독임제 보다는 다 양한 여론 수렴과 사회 제세력간의 견제와 균형이 가능한 위원회제 형태가 바람직하 다고 본다.37) 하지만 회의제적 구조는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조직상의 단 방송위원회 방송법 국가인권위원회 국가인권위원회법 법률상 독립기관 대통령 소속기관 직무상 감사원 헌법 독립 부패방지위원회 부패방지법 직무상 종속 중앙인사위원회, 국가공무원법, 정부조직법, 국가정보원법 등 국가정보원 등 점이 있으므로 향후 고도성장성과 산업기반적 성격으로 인하여 국가전략산업으로 인 정받고 있는 방송통신분야의 정책결정에 있어 합의제적 기구에서 신속한 의사결정과 강력한 집행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제의 정비방안이 지속적으로 연구되어야 한다. 2. 통합기구의 법적 지위 문제 다음으로 방송통신위원회의 소속에 관하여도 다양한 견해가 개진되어 왔다. 이러 한 견해들은 ① 2008년 이전처럼 무소속 독립위원회 형태를 유지하는 방안, ② 대통 령 소속으로 하는 방안, ③ 국무총리 소속으로 하는 방안 등 3가지 정도의 방안 등 3 먼저 기구통합을 주장하는 견해 중 국무총리 소속으로 하는 방안만을 주장하는 학 자들의 견해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국무총리 소속으로 할 경우에는 방송의 독립성 확보에 미흡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일 것이며, 사견에 의하더라도 위의 세 가지 방안 중 최소한 국무총리 소속으로 하는 방안은 비록 행정의 효율성은 일부 확보할 수 있 으되 정치적 중립성의 확보는 불가능하므로 이후 통합기구 설립시 기구개편방안의 안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논의의 초점은 과거와 같이 무소속 독립위원회 형 태를 유지해야 하는가 아니면 대통령 소속으로 할 것인가로 모아진다. 과거 2008년 방송통신위원회법 시행 전 방송위원회는 무소속 독립 합의제 행 정기구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는 舊공보처를 폐지하면서 방송에 대한 정책기능을 독 35) 김철수, 헌법학신론, 2007, 박영사, 598~600면; 허 영, 한국헌법론, 박영사, 2007, 734~735면. 36) 同旨 한국방송진흥원, 방송 통신 융합시대 정책일원화를 위한 규제 정책기구 개편방안, 2001, 128~146면; 이상식, 방송환경 변화에 따른 방송 통신법제 연구, 방송위원회(편), 방송 통신융 합에 대비한 규제기구 체계 수립 방안, 2001, 103~123면. 37) 2006년 8월부터 약 1년간 방송통신융합에 대한 현안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조직되었던 방송통 신융합추진위원회 에서 제시한 안도 방송정책기관과 통신정책기관을 합의제 형태로 일원화하는 것이었다. 립기관인 방송위원회로 이관하여 방송의 독립성 및 방송민주화를 실현하고자 했던 당시의 시대사상의 반영이었다.38) 방송위원회가 법률에 의해 중앙행정기관으로부터 독립된 행정기관으로서의 위상을 가지게 되는 경우, 정치적 독립성을 확보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38) 현행 방송법에 의한 방송위원회의 법적 지위와 성격 및 권한에 대해서는 고민수, 독립행정위원 회의 헌법적 정당성 - 방송위원회의 법적 지위의 체계정당성을 중심으로, 한국행정학회 2005 년 추계학술대회 발표논문집 별쇄본, 2005, 27~38면 참조.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57 반면, 2000년 설립 이후 7년여 동안 이 제도를 운영해 본 결과, 방송위원회가 준입 58 처와의 긴밀한 협조 및 원활한 직무수행이 가능하다는 장점이 있다. 법, 준사법, 행정권을 가지는 국가기관이라는 법원의 판결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39) 현실적으로 과거 무소속 독립기관인 방송위원회의 업무추진에 있어 만일 타정부기 출범 이후 끊임없이 위헌시비에 휘말려 왔다. 또한 비정부소속 행정기관을 예견하지 관들이 방송위원회의 법적 지위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면서 방송위원회의 업무에 않고 있는 각종 법규제정, 행정조직, 관리, 예산, 민원서비스 관련 법령들의 적용을 협조하지 않을 경우에는 정부기관간의 공식적인 채널을 통하여 이를 해결할 유효한 받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점이 노정되어 왔다. 방법이 없었다. 새로이 구성될 통합기구는 방송 뿐 만 아니라 정보산업과 정보기술의 이와 같은 무소속 독립기관의 문제점에 비추어 최근 학자들 간에는 대통령 소속기 범사회적 기반으로서의 성격을 가진 통신영역도 관할하는 것으로 예정되어 있는데, 관 중 직무상 독립할 수 있는 방안을 선택하는 편이 현실적이라는 견해가 개진되고 방송의 독립성을 이유로 타 행정기관과의 업무협조를 할 통로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있다. 과거의 구조를 유지한 채로 효율적이고 신속한 결정이 요구되는 통신행정을 처리하 이 유형은 독립기관과 행정부처의 절충형태로서 현행 헌법체계 내에서 소속을 명 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확히 하면서 기관의 직무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다.40) 향후 방송통신위원회의 법적 지위에 관한 지속적인 논의과정에서는 방송의 독립성 여러 가지 문제점과 우려에도 불구하고 대통령 소속의 직무상 독립기관의 경우, 이라는 명분에만 집착하여 과거와 같은 법률상의 무소속 독립행정위원회 형태를 유 방송에 대한 정책기관의 직무 독립성과 방송의 독립성을 유지할 수 있는 구체적인 지할 경우, 새로운 통합기구가 자칫 국가기관들 사이에 외로이 떠있는 섬과 같은 존 대안이 마련된다면 대통령에 소속되어 조직의 법적 위상을 명확히 정립하고 행정부 재 로 전락하여 정치적 독립성이나 효율성 양자 모두를 상실할 우려가 있다는 점이 고려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방송정책을 담당하는 기구는 국가의 간섭이나 일방적 명령에 종속되지 39) 다만 이 점에 관하여 대법원은 이미 2000년에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방송위원회가 국가기관임을 인정하고 있다. 첫째, 방송위원회는 방송의 공적 책임 및 공정성과 공공성을 유지하고 방송내용 않고, 사회 어느 일방의 지배적 영향력 행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도록 법적 제도적 전반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기 위하여 설립된 기관이다. 둘째, 방송위원회는 그 구성에 관하여, 국가가 관여하며, 위원의 신분이 보장된다. 셋째, 방송위원회는 방송의 운용 편성의 기본정책과 인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자기 책임성을 가지고 업무를 추진할 수 있도록 형성 광고방송에 관한 사항 등을 심의 결정하는 등 다양한 행정 권한을 행사함을 직무로 한다. 넷째, 방송위원회는 방송사업자에 대한 심의 및 제재에 관한 행정권한을 행사한다. 다섯째, 위원회의 태, 구성 및 기능에 있어 무소속 독립기관에 필적할 수 있도록 방송의 독립성을 보장 되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다만 그 조직형 규칙을 제정한다. 대법원 2000. 8. 22. 98두9295판결(원심 서울고등법원 1998. 4. 24. 97구51256 받을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완비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당해 기관이 국가조직 판결) 참조. 생각건대 근거법령이나 명칭, 소속기관 등에 관계없이 국가의 사무를 수행하는 기관 일체를 가 의 일부로서의 국가행정영역에 속하더라도 방송의 국가로부터의 자유 (Staatsfreiheit) 리킨다고 해석함이 타당하고, 반드시 그 기관이 국가 통치기구 중 행정부의 일반적인 조직과 사 무를 규정하고 있는 정부조직법에 근거를 두고 있어야 하는 것도 아니라고 할 것이며, 만일 후 원칙에 배치되는 것은 아니다.41) 자와 같이 국가기관의 의미를 좁게 해석한다면 입법부나 사법부 소속의 기관, 그리고 각종 특별 을 배제하는 데에 있다면, 그에 대한 수단적 성격을 가지는 구체적인 기관 형성은 선 법 내지는 별도의 단행법에 의하여 설립되어 3부(府)의 지휘를 받거나 혹은 독립적으로 국가사 무를 수행하는 기관을 제외하게 되어 부당한 결과가 될 것이다. 따라서 방송위원회의 독립기관 화로 인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견해는 별론으로 하고, 방송위원회의 국가기관성은 이미 판례를 통해 확인되었다고 본다. 40) 새로 설립되는 방송통신위원회는 대통령의 직속기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무처 직원의 신분 및 예산 등에 있어 정부부처의 운영형태를 준용하게 된다. 방송통신위원회의 구조가 대통령 직 속기관화 되고, 직원들의 신분이 공무원화 된다면 대통령 소속기구에 의한 내용심의 는 권력에 의한 검열 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으므로 심의기능의 민간이양이 불가피할 것으로 본다. 현행 방송통신위원회법 제18조에서는 방송위원회의 심의기능과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심의기능 방송정책기관을 국가로부터 분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국가로부터의 부당한 간섭 택의 문제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정부기관들과 유리되어 효율적인 행정권의 행사가 난해한 과거와 같은 조직을 유지하기 보다는 차라리 국가조직으로 하면서 확실한 외 부적 견제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독립성과 효율성을 제고할 수 있다.42) 41) 同旨 전정환, 방송규제기구에 관한 헌법적 고찰, 헌법학연구 제5집 제1호, 1999, 250면; 김 창규, 방송 통신 융합에 따른 통합규제기구의 위상과 역할, 방송연구 2004 여름호, 2004, 78~79면. 42) 同旨 김동욱, 방송통신 융합을 위한 제도개편 방안, 방송통신 융합을 위한 국가전략 모색 을 일원화하여 확대 개편하여 정보통신심의위원회 를 구성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59 한편, 무소속 독립위원회 또는 대통령 소속위원회 양자 중 어떤 조직을 선택하더 (한국뉴미디어방송협회 주최 세미나), 2005. 3. 30, 47면 참조. 60 개선방안에 대해서는 지면상 후속논문에서 계속 다루기로 한다. 라도 위원회제를 선택하는 경우에는 강화된 권력에 상응한 외부적 견제장치가 마련 되어야 한다.43) 구체적으로는 ① 대통령으로부터의 직무상 독립성의 명시, ② 추천자격요건의 법 정화를 통한 전문성 강화, ③ 위원 전원에 대한 인사청문회 등을 통한 위원 선임의 투명화, ④ 업무의 연속성 보장을 위한 스태거링 시스템(staggering system)44)의 도입, ⑤ 방송통신위원회의 헌법기관화 문제45) 등 이번에 제정된 방송통신위원회법 의 제반 문제점들에 대해 보다 심도 있는 논의가 있어야 한다. 구체적인 문제점과 법제 VI. 결론 이상에서는 현재 논의 중에 있는 방송과 통신의 통합 정책기관의 설립에 있어 핵 심적인 쟁점이 되는 통합의 이유, 통합기관의 법적 지위, 위원의 선임 방식 등에 대 하여 논의하였다. 43) 통합규제기구의 법적 위상의 장 단점과 보완책에 대하여는 방송위원회(편), 방송 통신체계정비 현재 방송의 정치적 독립성 과 정보통신산업의 국가경쟁력 제고 에 적합한 형태의 및 위원회 대응방안, 2003, III-28~III-40면; 한상혁, 방송 통신위원회의 법적 위상과 성격, 언 론개혁시민연대(편), 방송 통신구조개편에 대한 태스크포스: 방송 통신 융합정책의 주요 쟁점 방송통신 통합기구의 구성에 관해서는 순수위원회제 또는 독임제를 가미한 위원회제 검토 (세미나 자료집), 2004. 6. 22, 27~33면; 김창규, 방송통신 융합에 따른 통합규제기구의 위상과 역할, 방송연구 2004년 여름호, 2004, 77~80면 참조. 44) 현재 방송위원회를 비롯한 위원회 제도의 가장 큰 단점 중의 하나는 위원들이 일시에 교체되기 때문에 업무의 연속성이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향후 위원회 형태의 통합기구를 구성할 때에는 업무의 연속성을 보장하기 위해 위원들을 한꺼번에 교체하지 않는 방안으로 미국의 FCC처럼 staggering system이 도입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가령 현재의 FCC 위원장인 Kevin J. Martin의 등 여러 가지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재삼 강조하거니와 통합기구의 법적 지위와 권한에 관한 문제는 당대의 시대가치 와 헌법철학을 반영할 수 있는 가장 최적의 방안을 선택하는 선택의 문제이지, 당위 의 문제는 아니다. 따라서 통합기구는 방송의 공공성과 통신의 산업성이 최적의 접점 을 이룰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향후 방송통신위원회의 구 경우 Bush 대통령에 의해 3월 18일 지명되었다. 또 다른 위원인 Kathleen Q. Abernathy는 2001 성과 운영에 있어서는 현재까지 제시된 여러 가지 견해와 미디어 환경 및 국가의 장 년 3월 31일, Michael J. Copps도 역시 2001년 3월 31일, Jonathan S. Adelstein는 2002년 12월 3 일부터 업무를 개시하였다. http://www.fcc.gov/commissioners/(최종검색일: 2005년 4월 27일)참조. 기발전 목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정파적 이해관계에서 한 발자국 물러나 거시 참고로 미국의 FCC는 5년 임기의 위원 5인을 상원의 권고와 인준에 따라 임명하며, 위원장은 위원 중 1인을 지명하게 된다. 다만 위원 중 3인까지만 동일 당적을 보유할 수 있기 때문에 대 부분 여당 3인, 야당 2인의 균형을 이루고 있다. FCC, About FCC, 2004, pp. 3. 45) 지난 2005년 하반기부터 현재 헌법학계와 정치계를 중심으로 헌법개정 논의가 진행된 바 있다. 당시에는 여러 가지 정치적 이유로 헌법개정문제가 제대로 논의되지 못했다. 그러나 현재의 권 력구조와 기본권 체계에 문제점이 있다는 것이 다수의 의견이므로 언젠가 헌법 전반에 걸친 개 정작업이 진행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방송통신위원회를 헌법에 규정하기 위한 목적만을 위한 헌법 개정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헌법의 전면 개정시에 방송과 통신의 양자를 아우르는 방송통신위원회라면 그 정치적 중립성을 보장하기 위하여 헌법기관화를 논의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현재 국회, 행정부 및 법원 이외에 헌법에 그 존립근거를 두고 있는 헌법기관은 감사원(헌법 제97조), 헌법재판소(헌법 제111조), 선거관리위원회(헌법 제114조제1항) 등인데, 방송통신위원회에는 방송과 통신에 관한 포괄적인 권한이 부여되어 있으므로 동위원회의 정치적 사회적 중요성이 감사원 이나 선거관리위원회 보 다 덜하다고 확언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헌법은 국민의 기본권과 통치구조에 관한 사항을 규정한 국가의 최고규범 인데 방송통신 위원회가 이러한 통치구조 최상층부의 법적 지위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론(異論) 이 있을 수 있으며, 헌법이론에 비추어 보더라도 헌법기관화에 대한 논의는 가능하나 실현가능 성은 희박 하다고 본다. 적인 국가 운영차원에서 방송과 정보통신산업의 발전을 이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 해야 할 것이다. 다만 통합기관의 법적 지위와 권한을 획정할 때에 유의해야 하는 것은 이 문제를 둘러싼 견해의 대립과 갈등이 표면적으로는 기관간의 권한 획정의 문제로 비쳐질 수 있지만, 이 논의의 배후에는 문화적 다양성 확보 와 경제적 발전 제고 또는 문화적 시각 과 산업적 시각 이라는 두 가치가 충돌하고 있다는 점이다. 법의 역할이 현재 의 한국 의 규범현실 을 규율하는 것이라고 보면 국민의 문화적 생활의 다양성 보장과 공동체적 질서를 형성하는 기능을 가진 방송 과 국가의 성장 동력으로서 경제적 가치를 가진 정보통신산업 이 정치적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우면 서도 경제적 부를 창출할 수 있도록 하는 최적의 방안을 찾는 것이 기구개편의 핵심 이다. 이를 위해서는 향후 통합기구가 상호 대립하는 두 가지의 가치 중 어느 쪽에 중점을 두어야 하고, 또 이러한 가치를 실현하는데 최적의 형태가 무엇인가 하는 고 민이 선행되어야 한다.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61 62 第 20 卷 第 1 號 Abstract Ein zurückblickender und zukünftiger Überblick auf dem Verbesserungprozeß der administrativen Struktur entsprechend der Konvergenz des Rundfunks und Telekommunikation. Ji, Seong Woo 지성우 방송(Broadcasting, Rundfunk), 방송법(Broadcasting Law, Rundfunkrecht), 통신법(Telecommunication Law, Telekommunikationsrecht), 방송 통신 융 합(Convergence between Broadcasting and Communication, Konvergenz des Rundfunks und Telekommunikation), 방송통신위원회(Broadcasting and Telecommunications Commission, Kommission für Rundfunk und Telecommunikation) Auf Februar 25. 2008, waren die regierende Partei und die Opposition Partei damit einverstanden, die Zahl Leitung Agenturen von 18 bis 15 zu verringern. Entsprechend dieser Verbesserung wurden das Ministerium für Information und Telekommunikation abgeschaffen. Und die Kommission für Rundfunk und Telekommunikation wurde verursacht. Diese These beschäftigt die Notwendigkeit und das konkrete Maß für die Kreation der neuen Kommission für Rundfunk und Telekommunikation in akademischer und praktischer Perspektive ausgedrückt. Bis vor kurzem waren unterschiedliche zugelassene Grundregeln am Übertragen und an der Telekommunikation beziehungsweise angewendet worden. Dank die neue Konvergenz beider Sektoren, dort waren kein theorectical Einwand zur Kreation der neuen Kommission. Als für die konkrete Methode der Kombination jedoch gab es eine Meinungsverschiedenheit zwischen der Kommission-orientierten Methode und der Leitung-orientierten Methode. Die Unabhängigkeit und die Öffentlichkeit Natur der Kommission werden innerhalb der Grenzen der direkten Steuerung des Präsidenten garantiert. Und damit werden die Energien der neuen Kommission verstärkt. Folglich sollte es externe Regelungen für die Tätigkeiten der neuen Kommission gegeben werden. Konkret sprechend, es sollte mehr Debatte in diesen Punkten geben: 1 Unabhängigkeit von der Arbeit des Präsidenten, 2 Verstärken von 방송ㆍ통신 융합에 따른 행정기구개편과정의 회고와 전망 63 64 第 20 卷 第 1 號 Professionalismus durch die Prüfung von Empfehlungen, 3 Transparenz der Delegation durch eine Wahlhörfähigkeit für alle Delegierten der Kommission 4 Einleitung des staggering system für die Reihenfolge der Arbeit, 5 Bildung der neuen Kommission in eine konstitutionelle Agentur.
66 호규정을 두고 있다.1) 成均館大學校 法學硏究所 成均館法學 2008年 4月 SungKyunKwan Law Review The Institute of Legal Studies Vol. 20 No. 1 APRIL. 2008 평등조항은 헌법이념으로서 국가의 목표규정인 동시에, 이를 구체화하여 국가기관 의 구체적 활동방향을 제시하고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하는 헌법 원리 내지 원칙이 기도 하다. 더 나아가 평등은 모든 국민이 불합리한 차별을 당하지 않을 평등권 으로 현행 헌법상 평등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 헌법재판소 판례를 중심으로 - 서 헌법상 기본권으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평등권은 Hans Kelsen이 이야기하는 근본규범 (Grund Norm)이나 Carl Schmitt가 말하는 Verfassung(Verfassungsrecht와 구별)에 해당되므로, 함부로 개정할 수 없는 헌법개정한계사유에 해당된다. 또한 다른 기본권들과 마찬가지로 주관적 공 한상운* 46) 이창훈**47) 권으로서의 성격을 지니며, 연혁적인 의미에서 초실정법적인 자연권이면서 국가의 간 섭을 배제하는 소극적인 면과 국가에 대하여 생존권의 평등을 요구하는 적극적인 면 을 가진 양면적 권리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평등 위반여부에 대한 사법적 판단은 다른 기본권과 구별되는 평등권의 독 자성으로 인하여 적지 않은 혼란을 초래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우리 헌법재판소는 자의금지원칙 과 비례성원칙 이라는 이중의 심사기준을 적용하고 있는데, 본질적으 Ⅰ. 서 론 Ⅱ. 평등심사구조와 사법적 심사의 당위성 로 같은 것을 자의적으로 다르게 취급하거나, 본질적으로 다른 것을 자의적으로 같게 취급하는 것 은 절대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것으로 보면서(자의금지원칙), 헌법이 명시 Ⅲ. 미국과 독일의 평등심사기준 한 개별적 평등조항에 대한 심사에 있어서는 목적과 방법 간에 비례성이 충족될 것 Ⅳ. 현행 헌법상 평등심사기준 을 요구하고 있다(비례성의 원칙). Ⅴ. 결 론 이하에서는 평등심사구조의 독자성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법적 심사의 측면에 서 평등조항을 재조명해 보고, 평등심사기준에 대한 학설과 판례의 경향을 분석함으 로써 우리 헌법재판소의 평등심사에 대한 태도를 살펴보고자 한다. Ⅰ. 서 론 현행 헌법의 평등에 관한 규정은 다른 기본권과 달리 헌법 전반에 걸쳐 다양하게 규정되어 있다. 전문을 비롯하여, 제11조 제1항 제1문에서는 일반적 평등원칙 내지 일반적 평등권을 규정하고 있으며, 제11조 제2항에서는 특수계급의 창설금지를, 제3 항에서는 영전일대의 원칙 등을 규정하고 있고, 기본권 영역에서는 개별적인 평등보 Ⅱ. 평등심사구조와 사법적 심사의 당위성 1. 평등심사구조의 독자성 1) 헌법 제11조의 규정형태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헌법 제11조 제1항은 일반적 평등원칙을 규정하 고, 모든 영역에서의 차별금지와 차별금지사유를 정하되, 차별금지사유로는 신체적 조건, 언어, 인 종을 추가하여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과 함께 차별금지사유의 범위를 한정하여야 한다는 견해가 * 한상운(법학박사, 한국환경정책 평가연구원, 책임연구원, LL.D. Research Fellow, Korea Environment Institute) ** 이창훈(한국환경정책 평가연구원, 연구원, Researcher, Korea Environment Institute) 현행 헌법상 평등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67 있다. 조홍석, 현행 헌법의 평등권 양성평등조항 개정방향, 헌법학연구 제12권 제4호, 2006, 135~162쪽. 68 헌법 제11조 제1항의 일반적 평등권은 다른 기본권과 달리 실체적 내용이 없으며 져야 하며, 이것이 평등원칙 규정인 헌법 제11조 제1항 제1문이 갖는 제1차적인 규 구체적 내용의 형성이 입법자에게 맡겨져 있다. 그에 따라 평등위배여부에 관한 심사 범적 의미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같은 것임에도 다르게 취급하거나 본 구조도 자유권 등 다른 주된 기본권의 침해여부에 관한 심사구조와 다른 모습으로 질적으로 다른 것임에도 같게 취급하는 경우에는 평등위배의 소지가 있는데, 입법자 나타난다. 등 규율주체가 규율대상과 비교대상에 대하여 상호 모순된 평가를 하였다는 의심이 즉 평등권은 실체적 보호영역 이 없으므로 공권력에 의하여 제한 될 수 없는 것이 발생하게 된다.5) 어서 평등권 제한 이라는 표현은 타당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헌법 제37조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곧바로 평등위배라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다. 즉 같은 것 제2항에 따른 기본권 제한 의 일반적 심사기준인 비례성 원칙 이나 본질적 내용 침 을 다르게 취급하거나 다른 것을 같게 취급한다고 하더라도 차별 이 존재하여 평등 해금지의 원칙 이 적용될 여지가 없다.2) 다만 평등위배여부에 대한 심사구조는 일반 위배의 위험이 있지만, 그 차별 에 정당한 사유가 존재하고 그 사유와 차별의 비례성 적으로 규제내용에 따라 비교 대상과 관점이 정해지고, 그에 따라 비교되는 대상에 이 충족된다면 평등위배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6) 대한 취급이 합리적인지 여부가 결정된다.3) 2. 비교 대상 및 관점의 설정 3. 평등위배에 대한 사법적 심사의 당위성 입법자에 대한 강한 신뢰는 헌법 제11조 제1항 제1문이 비교대상 간의 차별여부가 본질적으로 동일한 것을 다르게 취급하고 있는지 여부는 비교되는 집단 간에 본질 입법자의 형성영역이라는 1차적인 규범적 의미로 나타나게 된다. 따라서 헌법의 추상 적인 동일성이 존재하는지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4) 그런데 본질적 동일성 여부 는 적 규정은 입법작용에 의하여 구체화되고, 이 과정에서 평등은 정의구현을 위한 필요 일정한 비교의 관점이 전제되어야 판단될 수 있다. 여기서 비교 관점은 기본권의 보 조건으로서 최소한의 형식적 작용을 담당하는데, 이는 평등원칙의 입법자비구속이론 호영역의 설정 문제와 마찬가지로 개별적 차별입법의 의미와 목적에 의하여 정해진 과 연계될 수 있다. 다. 결국 비교 관점에 따라 비교 대상이 정해지고 양자가 본질적으로 동일한지 여부 가 결정된 다음, 헌법상 정당한지 여부를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를 강조하게 되면, 웨스턴(Westen)의 평등개념무용론 으로 확대 될 위험이 있다.7) 평등개념무용론은 평등이 추구하는 가치가 개별 기본권적 가치에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비교되는 대상이 규제대상과 다르게 취급되어 함몰되어 평등개념의 독자성을 부인하게 되는데, 평등원칙이 입법자를 구속할 수 없 불이익 또는 이익을 받고 있는지, 아니면 비교 대상과 같게 취급되어 불이익 또는 이 다면 헌법상의 독자적 기본권으로서의 평등권은 그 존재가치를 상실하게 될 수도 있 익을 받고 있는지에 대한 판단이 가능하게 된다. 이 때 법률에서 규제되는 대상과 관 는 것이다. 점의 관계, 비교되는 대상과 관점의 관계 양자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인지 다른 것인 지에 따라 평등원칙위배 여부가 정해진다. 여기서 양자가 본질적으로 동일한지 여부에 대한 1차적인 판단은 입법자에게 맡겨 2) 이욱한, 자유권과 평등권의 사법심사구조, 사법행정, 2003, 7~10쪽. 3) 평등권과 개별기본권의 상호관계를 고려하여 구체적인 심사척도선정방안을 마련하고자 하는 견해 가 있다. 이에 대해서는 장영철, 기본권체계내에서 평등권의 기능에 관한 연구 - 헌법재판소결정 에 나타난 평등권과 개별기본권의 상호관계를 중심으로 -, 공법연구 제34집 제4호, 2006, 209쪽 이하. 4) 본질적 동일성 여부에 대한 판단은 비교되는 집단의 개별적인 대상전체가 아니라, 특징적인 표식 그러나 오늘날에는 입법자구속이론 이 일반화 되어 있는 상황이고,8)9) 평등개념의 독자성을 대다수의 학자가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평등은 비교할 권리(comparative right)'로서 자유권과 다르기 때문에10) 비교대상 간의 차별여부가 전적으로 입법자에 5) 6) 7) 8) 정태호, 일반적 평등권 침해여부의 심사, 고시계, 2002, 22~23쪽. 이욱한, 전게논문, 12쪽. Western, The Empty Idea of Equality, 95 Harvard Law Review 537, 1982, pp.542. 제헌헌법 당시부터 학설과 판례에 의하면 법률에 대한 평등심사를 인정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법 적용평등설이나 법내용평등설에 관한 논의의 실익은 제헌헌법 당시부터 없음을 알 수 있다. 9) 독일의 Maunz나 Dürig는 입법자도 평등원칙에 구속되며, 법률은 그 내용도 평등원칙에 위반되지 을 중심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므로 비교관점의 설정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다. G. Robbers, 않아야 한다고 보았다. K. Hesse, Grundzüge des Verfassungsrechts der B. R. D., 14. Aufl., Der Gleihheitssatz. DӦV 1988. Heidelberg, 1984, 166 ff.
현행 헌법상 평등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69 게 맡겨질 수 없고 헌법에 의한 통제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결국 헌법재판소가 특정한 규제입법이 평등원칙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판단함에 있 어서 그 심사기준은 어떠해야 하는지가 핵심적인 문제로 대두된다.11) 따라서 이하에 서는 우리나라에 주된 영향을 준 미국과 독일의 평등심사기준을 먼저 살펴보고,12) 우 70 심사기준으로 이중기준이 채택된 배경이 되었다. 2. 미국의 심사기준 1) 평등보호조항(equal protection clause) 및 3중심사기준(three standards of review) 리 헌법재판소의 평등심사기준을 분석해 보기로 한다. Ⅲ. 미국과 독일의 평등심사기준 미국의 경우, 남북전쟁 이후 도입된 수정헌법 제14조에 의하면 어떠한 주도, 그 지배권 내에 있는 어떠한 사람에 대하여도 법률에 의한 평등한 보호를 거부하지 못한다. 고 하여 일반적 평등권을 규정하고 있다. 미국 연방대법원은 1886년 Yick Wo 1. 의의 판결14)을 통하여 제14조 제1항을 일반적 평등권으로 인정하고 평등한 법에 의한 보 호 (protection of equal laws)도 포함된다고 하였다. 차별이 존재하더라도 그 차별이 정당화 될 수 있다면 평등원칙에 위배되는 것은 그러나 미국 학계에서는 일반적으로 수정헌법의 평등보호는 직접적이며 의도적 차 아니다. 문제는 차별의 정당성 여부에 대한 심사기준이 어떠해야 하는가이다. 전통적 별에 대한 헌법적 금지명령으로 한정하여 해석하고 있으며,15)16) 위 판결 이후에도 으로 평등의 구체적 내용형성은 입법자에게 유보되어 있음을 이유로 헌법상 평등심 수정헌법 상의 평등보호조항 은 적법절차조항의 보조적 지위에 머물다가 실체적 적 사에 대해서는 대단히 완화된 기준이 적용되었다.13) 미국의 합리성 원칙 과 독일의 법절차이론의 종언을 고하게 된 1937년 이후부터 실질적 심판기준으로 작용하였 자의금지원칙 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다.17)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지구촌 사회의 국제화 개방화와 개인 간 정보 이와 같은 평등보호 위반 여부에 대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심사기준은 다양하다.18) 교류의 증대로 인하여 발생한 지식의 대중화 현상은 기존의 법 제도에 잠재되었던 전통적인 판례이론으로서 이중심사기준인 합리성 심사, 엄격 심사가 인정되었으며,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소수계층이나 사회적 약자의 불만을 야기하였으며, 이것은 사 버거(Burger) 대법원장이 취임하면서 중간 심사 기준이 수용되어 현재는 3중심사기 회통합의 결정적 장애요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각국의 헌법재판 기관 준 을 취하고 있다.19)20) 은 보다 적극적인 평등구현을 위하여 종래의 완화된 평등심사기준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심사기준으로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게 되었다. 이러한 흐름은 각국의 평등 10) Keneth W. Simons, Article: Equality as a Comparative Right, 65 Boston University Law Review 387, 1985, pp.471~72.; 박경신, 평등의 원초적 해석과 실질적 평등의 논리적 건재 - 제대군인가 산점 위헌결정 평석, 제13회 헌법실무연구회, 2000. 11) K. Hesse, Der allgemeine Gleichheitssafz in der neueren Rechtsprechung des Bundes -verfassungsgerichts zur Rechtsetzungsgleichheit, in: Wege und Verfahren des Verfassungslebens, 1993, 121 ff. 12) 이 외에 프랑스의 평등원칙과 위헌심사척도에 관한 논문으로 전학선, 프랑스의 평등원칙 실현에 관한 연구, 세계헌법연구 제12권 제2호, 2006,을 참고할 것. 13) 특히 급부권과 관련된 평등권은 전통적인 자의금지 혹은 과소보호금지를 기준으로 급부권침해 여부를 심사하고 있다. R. Rassow, Zur Konkretisierung des Untermaßverbotes, ZG 2005, S. 262 14) 118 U.S. 356 (1886). 15) Christopher D. Totten, Constitutional precommitments to gender affirmative action in the european union, germany, canada and the united States, Berkeley Journal of International Law, 2003, pp.57. 16) 미국에서는 수정헌법 제14조의 해석과 관련하여, 형식적 법치주의를 규정한 것으로 보아 적극적 평등실현조치에 대해 소극적이라는 견해와 적극적 평등실현조치를 통하여 실질적 평등을 이루 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가 대립하고 있다. Robin West, Progressive and Conservative Constitutionalism, 88 U. Mich. L. Rev. 1990, pp.641,693. 17) 그러나 미국 연방대법원은 기본적 권리와 이익의 영역에서 워렌 대법원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을 거의 활용하지 않았으며. 사회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평등화하기 위한 원천으로서 평등보호조항 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석인선, 미국헌법상 기본적 권리(fundamental rights)론의 전개와 평가, 세계헌법연구 제13권 제1호, 2007, 273~300쪽 참조. 18) 다단계 심사기준의 구체적인 근거에 대해서는 H. J. Abraham., Freedom and the Court, 1977, ff. pp.24~32. 현행 헌법상 평등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71 2) 합리성 심사(rationality review, The Rational Relationship Test) 72 3) 엄격 심사(Strict Scrutiny) 합리성 심사 란 차별이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지 여부만을 심사하는 것이다.21) 이 엄격 심사 는 차별이 긴급한 정부 목적을 추진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경우에 한하 기준은 1897년 미국 연방대법원이 Ellis 사건22)에서 처음으로 제시한 이후, 1920년 여 허용된다고 본다.29) Warren 대법원장 시절(1953 1969)의 미국 연방대법원은 사법 Royster Guano Co. v. Virginia 사건23)에서 판례로 확립되었다.24) 미국 연방대법원은 적극주의 입장에서 인종과 국적에 따른 차별에 한정하여 적용하던 엄격 심사의 적용 전통적으로 인종과 국적에 따른 차별에 한하여 엄격 심사를 하였고, 이를 제외한 기 영역을 확대하여, 입법의 내용이 의심스러운 차별(suspect classification) 이거나, 국민 타의 영역, 특히 경제 사회 영역에서의 차별입법에 대해서는 주로 합리성 심사를 하 의 기본적 권익(fundamental rights or interests) 의 제약을 담고 있는 경우30)에도 엄 는데 그쳤다.25) 이것은 사법소극주의에 따른 대단히 완화된 심사기준으로 정부의 입 격심사를 하였다. 여기서 의심스러운 차별 은 입법이 편견에 근거하여 사회적 약자인 장에서는 목적과 차별 간의 합리성만을 입증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였다. 이 기준은 소수자를 차별하는 경우(대표적으로 인종이나 국적)를 말하고, 기본적 권익 이란 연 1950년대 워렌(Warren) 법원 이전까지 미국 연방대법원의 원칙적 심사기준이 되었 방헌법이 특별히 보장하는 권리와 이익을 의미한다. 다.26) 특히 흑인에 대한 차별과 관련하여 1896년 Plessy v. Ferguson 사건에서 기차 내에 하지만 합리성 심사는 의회의 판단을 존중하고 법원이 수행하는 특유의 역할이 없 서 흑인과 백인을 분리하여 앉도록 한 주법을 분리하되 평등(seperate but equal) 의 음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연방대법원이 합리성 심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논리로 인정하였다.31) 이것은 기존에 행해져 오던 학교를 포함한 흑백인 분리시설에 법률을 무효 선언하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에, 이 심사기준은 의회나 정부의 판단에 대해 헌법적 정당성을 제공한 사례였다.32) 대해 절대적 존중을 보임으로써 사실상 심사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비판이 있 그러나 1954년 Brown v. Board of Education Topeka 사건에서 흑백인 학교의 분리 다.27) 그러나 합리성 심사에 관한 미연방대법원 판례입장은 1980년대에 들어 와서 를 전제로 하는 분리하되 평등 원칙은 오로지 인종을 근거로 하여 공립학교에서 아 서서히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이것은 합리성 심사기준을 적용하여 법률을 무효 동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비록 물적 시설과 다른 외적인 조건들이 평등하다 할지라 화하는 사례가 점차 나타나기 때문이다.28) 도 소수집단의 아이들에게 균등한 교육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라고 하여 엄격심사 에서 요구되는 입법의 목적이나 수단에 대한 판단을 할 필요도 없이 분리된 교육 그 19) 이에 관해서는 E. Chemerinsky, Constitutional Law-Principles and Politicies-, 2002, pp.518 520. 20) United States v. Virginia, 518 U.S. 515(1996); Grutter v. Bolinger, 539 U.S. 306(2003); Gratz v. Bollinger, 539 U.S. 244(2003) 21) JOHN E. NOWAK/ RONALD D. ROTUNDA, PRINCIPLES OF Constitutional Law, THOMSON/WEST, 2004, p. 377~378. 22) 165 U.S. 150 (1897). 23) 253 U.S. 412 (1920). 24) 서주실, 평등보호를 위한 사법심사기준, 미국헌법연구 제8호, 미국헌법학회, 1997, 3쪽. 25) 미연방대법원은 기본적으로 경제 사회 입법에 대해 사법적 존중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에 대 해서는 Ruth Bader Ginsburg, Sexual Equality Under the Fourteenth and Equal Rights Amendments, Wash. U. L. Q,. 161, 1979, pp.162~163. 26) 미국 판례를 통하여 확립된 평등원칙에 대한 적용기준인 합리적 심사기준은 미국 헌법 수정 제 14조의 평등을 상대적 평등으로 파악하고 그 차별의 위헌성을 판단하는데, 이 기준에 있어서 합 리성 판단은 입법이나 행정이 의도하는 목적과 차별에 있어 어느 정도 합리성을 가지고 있는지 여부에 의하여 결정된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나달숙, 미국헌법상 평등보호를 위한 사법 심사, 법학연구 제20집, 2005, 182~183쪽. 27) 김문현, 평등에 관한 헌법재판소판례의 다단계 위헌심사기준에 대한 평가 - 미연방대법원판례 및 관련이론을 바탕으로 -, 미국헌법연구 제17권 제2호, 미국헌법학회, 2006, 109쪽. 자체를 위헌으로 선언하였다.33) 그런데 공적인 분야가 아닌 사적인 분야에서의 차별이나 사실상 차별의 경우는 방 치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대응책으로서 국가행위(State Action) 이론은 평등보호조 항을 공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사적인 영역까지 확장하기 위한 미국 연방대법원의 확 28) City of Cleburne v. Cleburne Living Center(1985); Allegheny Pittsburgh Coal Co. v. County Commission(1989). JOHN E. NOWAK/ RONALD D. ROTUNDA, PRINCIPLES OF Constitutional Law, THOMSON/WEST, 2004, p. 380~381. 29) Shapiro v. Thompson. 394 U.S. 618. 634 (1969); JOHN E. NOWAK/ RONALD D. ROTUNDA, PRINCIPLES OF Constitutional Law, THOMSON/WEST, 2004, p. 378. 30) Jerome A. Baron and C. Thomas Dienes, Constitutional Law, West Publishing Co., 2005, pp.211. 31) 163 U.S. 537 (1897). 32) 인종에 의거하여 소수계에게 이익을 주는 적극적 평등실현조치에 대한 심사기준은 Croson Case 이후 엄격심사로 확립되었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박승호, 미연방대법원과 적극적 평등 실현조치, 헌법학 연구 제12권 제3호, 2006, 290쪽 이하. 33) 347 U.S. 483 (1954).
현행 헌법상 평등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73 74 립된 판례이론으로 발전되어 헌법상의 평등보호조항이 사인 간의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음을 논증하고 있다. 역평등이론은 미국에서 전통적으로 차별을 받아 온 소수집단을 일정한 영역에서 보다 많은 특혜를 누리도록 해 주려는 이론으로서 우선적 처우(Preferential 하지만 엄격심사가 적용되면 일반적인 경우 법률이 위헌이라 판단되므로, 이론상 Treatment) 이론, 선의적 처우(Benign Treatment) 이론 등 일련의 판례를 통하여 발 으로는 엄격하고34) 실제적으로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문제점이 지적되고 전된 것이다. 이것은 과거에 행해진 소수집단에 대한 차별을 보상하고 배분적 정의를 있다.35) 이루어 결과의 평등을 추구하려는 것이 목적이므로 보상적 배분적 개념으로서 적극 적 평등실현정책(Affirmative Action) 이라고도 한다.40) 4) 중간 심사(intermediate scrutiny) 이와 달리 역차별(reverse discrimination) 이란 적극적 평등실현정책이 백인 등 다 중간 심사 란 차별입법의 중요한 입법목적과 차별이 실질적 관련성(substantially 수입장에서 볼 때 불리하게 취급당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역평등과는 구별되어야 한 related)이 있을 때 허용된다.36) 이 기준은 Warren 법원 이후 Burger 대법원장(1969 다. 다만 역평등조치에 따른 차별이 인종 등을 사유로 하는 경우에도 엄격 심사를 하 1987) 시절에 종래의 이중심사기준의 양극단성으로 인하여 엄격심사가 적용되는 경 여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미국 헌법학자들의 주장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지만, 적극 우에는 거의 위헌으로, 합리성 심사인 경우에는 거의 합헌으로 양분되는 문제인식에 적 평등실현을 위한 선의의 차별이므로 완화된 심사기준을 적용하여야 한다는 견해 기초하고 있다.37) 와 인종 등에 관한 차별이므로 엄격한 심사기준이 적용되어야 한다는 견해가 대립한 종래 합리성 심사가 적용되어 합헌으로 판시되었던 성별에 따른 차별 입법이나 사 생아(嫡庶)에 대한 차별, 상업적 언론에 대한 규제, 공개포럼에서의 언론규제 등에 주 다.41) 다만 후자의 입장은 엄격 심사를 하더라도 이 경우에는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 는 공익이 존재하는 경우로 본다.42) 로 적용되었는데, 1970년 후반과 1980년 초반에는 선거권이나 피선거권을 제한하는 이와 관련하여 1989년 미국 연방대법원은 인종에 근거한 적극적 평등실현조치에 입법에 대하여 사실상 중간 심사를 한 판례가 있고, 기본적인 헌법적 권리라 할 수 관한 크로슨 사건에서 엄격심사기준을 적용하여야 한다고 보았는데43), 이러한 경우에 있는 주간(州間) 여행권에 대한 제한입법에 대하여 엄격 심사를 하지 않고 합헌을 인 도 성별에 의거한 분류가 중요한 정부목적에 기여하고 사용된 차별수단이 그 목적 정한 경우가 있다. 중간 심사는 Burger 법원에서 수용되어 Rehnquist 법원(1987 달성에 실질적으로 관련되는 경우에 정당화 되는 것으로 판단한 경우가 있다.44) 2005)에서도 적용되었다.38) 중간 심사가 적용되는 경우, 의회나 정부가 입증책임을 지게 되는데, 중간심사기준 3. 독일의 심사기준 1) 기본법상 평등조항 의 엄격성과 관련하여 중간 심사에 대해서도 덜 제한적인 대안 분석(less restrictive alternative analysis)이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39) 기본법 제3조 제1항은 모든 사람은 법률 앞에 평등하다. 고 하여 일반적 평등원칙 5) 역평등이론 을 규정하고 개별적 평등조항으로서 제3조 제2항에서 남녀는 동등하다. 국가는 남녀 평등의 실질적 실현을 위하여 현존하는 불이익 제거에 노력하여야 한다. 그리고 제3 34) 엄격심사에 대하여 법원이 사용한 기준에 대한 논의는 Gerald Gunther, In Search of Evolving Doctrine on a Changing Court: A Model for a Newer Equal Protection, Harvard Law Review 86, 1972. 김문현, 전게논문, 111쪽. 429 U.S. 190 (1976); 486 U.S. 456 (1988) 등 황도수, 법규범으로서의 평등의 사적 전개, 헌법논총 제7집, 1996, 198 199쪽. 2005년 9월 Rehnquist 대법원장이 사망하고, 이후 Roberts 대법원장이 취임하여 현재 미국 연방 대법원을 이끌고 있다. 미연방대법원 홈페이지 http://www.supremecourtus.gov/ 참조. 39) 김문현, 전게논문, 110쪽. 35) 36) 37) 38) 현행 헌법상 평등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75 40) 적극적 평등실현조치의 개념정의와 관련해서는 John Valery White, What Is Affirmative Action? 78 Tul. L. Rev., 2004, pp.2117. 41) Thomas Sowell, Affirmative Action Around the World : An Empirical Study, Yale University Press, 2004. 42) 이와 관련된 학설의 내용에 대하여 자세한 것은 박경신, 전게논문 참조. 43) 488 U.S. 469 (1989). 44) 553. U.S. 53(2001). 76 조 제3항에서 아무도 그의 성별, 가문, 인종, 언어, 출생지와 혈통, 신앙, 종교적 내 그러나 이와 같은 자의금지원칙에 대하여 학계는 평등위배여부에 대한 심사기준이 지 정치적인 견해 때문에 차별되거나 혹은 특권을 받을 수 없다. 누구든지 장애를 사 자의금지라는 명백성 통제에 그친다면, 기본법 제3조 제1항의 규범적 의미가 거의 형 유로 불이익을 받지 아니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45) 그리고 개별 기본권 조항인 제6 해화될 수밖에 없다고 비판하고 있다.52) 조 제5항에서 사생아의 육체적ㆍ정신적 성장과 사회적 지위에 관하여는 법률로서 적자와 동일한 조건을 마련하여야 한다. 고 규정하고 있다. 3) 비례성의 원칙 1919년 바이마르 헌법 당시에도 일반적 평등원칙을 규정하고 있었지만, 그 당시의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1980년부터 자의금지원칙에 대한 학계의 비판을 수용하여 통설은 평등원칙의 입법자 구속성을 부인하였다.46) 그리고 1994년 기본법 개정이전 평등심사기준을 다양화하기 시작하였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1980년 차별입법을 의 기본법 제3조 제2항은 남성과 여성은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 고만 규정되었으며, 인적 차별과 사항적 차별로 구분하여 서로 다른 심사기준을 제시하였는데,53) 인적 이에 대한 해석과 관련하여 학설은 남여의 법적ㆍ형식적ㆍ절대적 평등으로 이해하여 차별의 경우에는 두 인적 집단 사이의 차별대우를 정당화할 만한 정도로 성질과 비 여성에 대한 적극적 평등실현의 근거가 아니라고 보았다. 독일연방헌법재판소도 학설 중에 있어서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달리 취급한다면 평등권에 위반된다. 고 하여 과 동일하게 판시하였으나,47) 1980년대 들어와서 판례를 변경하여 여성에 대한 적극 소위 새로운 공식(die neue Formel)'54)을 제시하면서, 다만 사항적 차별의 경우에는 적 보호의 의미도 포함된다고 보았다.48) 이와 같은 판례입장을 반영하여 1994년 기 종래의 자의금지원칙이 적용된다고 보았다.55) 본법을 개정하여 현재와 같은 제3조 제2항 2문을 추가함으로써 적극적 평등실현 조 치의 기본법적 근거를 마련하였다.49) 2) 자의금지원칙 새로운 공식으로서 인적 차별에 대한 엄격심사기준은 법적 차별을 정당화할 수 있 는 어떠한 합리적인 이유 의 존재가 아니라, 두 인적 집단사이 차이의 성질과 비중 이 차별대우와 적정한 관계에 있어야 한다. 는 것을 요구하는 비례원칙 의 관점을 도 입한 것이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1951년 남서국판결(Südweststaaatsurteil) 에서 기본법 제3조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1990년대 이후, 이를 보완 발전시켜 인적 집단의 차별을 가 의 평등원칙의 위배여부에 대한 심사기준으로서 자의금지원칙 을 수용하면서 법률 져오는 경우뿐만 아니라 사항적 차별이 간접적으로 인적 차별을 초래하는 경우와 다 규정과 입법자가 규율하려는 영역 사이에 아무런 내적 관련성이 존재하지 않을 때, 른 기본권의 행사에 불리한 영향을 미치는 정도가 큰 경우, 기본법 제3조 제3항에서 또는 그와 같은 내적 관련성이 존재하긴 하지만 완전히 불충분한 관계에 있음이 명 금지하고 있는 차별사유에 해당하는 경우에도 엄격한 심사를 할 수 있다고 판시하고 백할 때 자의적 입법 이라고 보았다.50) 있다.56) 이것을 새로운 공식 에 대한 수정판결로서 최신 공식(die neueste Formel)'이 이것은 입법자에 의하여 의도적으로 불합리하게 행해진 차별이라는 의미의 주관적 라고 부르기도 한다.57) 자의가 아니라, 차별을 통하여 규율하려는 사실 상황과의 관계에 있어서 차별의 명백 한 불합리성, 즉 객관적 자의를 말한다.51) 45) 동 규정에 대하여 독일의 학설은 열거규정으로 보고 있다. M. Sachs, Besondere Gleichheits 46) 47) 48) 49) 50) 51) -garantien, in: Isensee/Kirchhof(Hrsg.), Handbuch des Staatsrechts, Bd, V 1992, 126, Rdnr.40 참 조. 황도수, 전게논문, 202쪽. BVerfGE 37, 217(244). BVerfGE 74, 163(180). 조홍석, 현행 헌법의 평등권ㆍ양성평등조항 개정방향, 헌법학 연구 제12권 제4호, 2006, 142쪽. BVerfGE 1,14. BVerfGE 2, 266, 281. 52) 황도수, 전게논문, 204~205쪽. 53) 인적 사항적 평등구분론은 평등심사를 비교대상의 특성에 상관없이 무차별적으로 자의금지원칙 에 따라 판단한 것보다 규범수신인을 기준으로 평등심사를 차별화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장영철, 전게논문, 204~205쪽. 54) 이에 대하여 자세한 내용은 Mauntz/Dürig, GG kommentar, Art. 3 Anhang, Rdn. 6 ff. 55) BVerfGE 55, 782ff.; 이발래, 인권법상 소수자 보호체계와 차별심사에 관한 연구, 헌법학 연구 제 9권 제1호, 2003, 367쪽. 56) BVerfGE 88, 5ff. (1992); 1993년 제2차 성전환(Transsexuellen) 사건, BVerfGE 88, 87 (1993). 57) 김주환, 입법자의 평등에의 구속과 그에 대한 통제, 헌법논총 제11집, 헌법재판소, 2000, 431~ 480쪽.
현행 헌법상 평등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77 78 Ⅳ. 현행 헌법상 평등심사기준 2) 비례성원칙 헌법재판소는 엄격한 심사를 한다는 것은 자의금지원칙에 따른 심사, 즉 합리적 1. 이중심사기준 이유의 유무를 심사하는 것에 그치지 아니하고 비례성원칙에 따른 심사, 즉 차별취급 의 목적과 수단 간에 엄격한 비례관계가 성립하는지를 기준으로 한 심사를 행함을 헌법재판소는 종래까지 평등심사기준으로서 자의금지원칙을 주된 심사기준으로 삼 의미한다. 고 하여, 평등위배에 대한 엄격 심사로서 비례성원칙을 인정하였다.60)61) 고, 부분적으로 합리성 심사나 비례성 심사를 하였다. 그러나 공무원 공채시 제대군 그리고 같은 판례에서 엄격한 심사척도인 과잉금지원칙에 의할 것인지, 완화된 심사 인에게 가산점을 부여하는 제대군인지원법에 대한 위헌심판에서 명시적으로 평등심 척도인 자의금지원칙에 의할 것인지는 입법자에게 인정되는 입법형성권의 정도에 따 사기준을 엄격 심사인 비례성원칙과 완화 심사인 자의금지원칙으로 이원화하였다.58) 라 달라진다. 고 하면서, 구체적으로 엄격 심사가 적용되는 경우를 다음의 두 가지 또한 엄격심사기준이 비례성 원칙이 적용되는 경우에도 그 부분원칙을 엄격하게 적 경우로 한정하였다.62) 용하는 경우와 완화하여 적용하는 경우로 구분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현행 헌법재판 첫째, 헌법에서 특별히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경우로서 헌법이 스스로 차별의 근 소의 심사기준은 ⅰ. 완화된 심사기준으로서의 자의금지원칙, ⅱ. 엄격심사기준으로서 거로 삼아서는 안 되는 기준을 제시하거나 차별을 특히 금지하고 있는 영역을 제시 의 비례성원칙의 부분원칙을 완화하여 적용하는 경우, ⅲ. 비례성 원칙의 부분원칙을 하고 있다면, 그러한 기준을 근거로 한 차별이나 그러한 영역에서의 차별인 경우이다 엄격하게 적용하는 경우의 3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제1기준). 둘째, 차별적 취급으로 인하여 관련 기본권에 대한 중대한 제한을 초래하 게 되는 경우이다(제2기준). 이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하나에만 해당되면 비례성원칙 1) 자의금지원칙 이 적용된다. 자의금지원칙은 원칙적인 평등심사기준으로서 헌법재판소 판례에 의하면, 비례성 원칙이 요구되지 않는 기타의 차별에 대하여 적용된다. 자의금지원칙에 따른 평등심 사는 차별입법에 대한 명백성의 통제(Evidenzkontrolle), 즉 차별의 불합리성이 명백한 2. 비례성원칙에 따른 심사의 적용기준에 대한 검토 헌법재판소는 비례심사를 합리적 이유의 존부문제를 넘어 차별을 정당화하는 이유 경우에만 평등위반이라고 평가된다. 그리고 차별입법의 자의 여부나 합리성 여부를 판단하는 구체적인 기준이 무엇 인가에 대하여 인간존엄성설과 입법목적설이 대립하고 있다. 인간존엄성설에 의하면, 인격의 가치는 모든 인간에게 평등하게 인정되어야 한다는 이념에 위반하는가를 기 와 차별간의 상관관계에 대한 심사, 즉 비교대상간의 사실상의 차이의 성질과 비중 또는 입법목적의 비중과 차별의 정도에 적정한 균형관계가 이루어져 있는지를 심사 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63) 나아가 헌법재판소는 비례심사를 완화된 비례성심사 와 엄격한 비례성심사 로 구 준으로 합리성 여부를 판단하여야 한다고 보았다. 이에 반하여 입법목적설에 의하면, 일정한 입법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차별이 불가피하고 또 그것이 사회통념상 적정 한 것인가를 기준으로 합리적 차별인가의 여부를 판단하여야 한다고 본다. 분하고 있는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평등심사를 위한 척도를 적용하기 위하여 구 체적인 두 가지 기준을 제시하고 있는 바, 헌법재판소의 평등심사과정에 대한 논증과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인간존엄성설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 헌법재판소는 합리적 차별여부의 판단은 인간의 존엄성 존중이라는 헌법의 최고원리와 정당한 입법목적의 달성 및 수단의 적정성이라는 세 가지 복합적 요소를 기준으로 판단하여야 한다고 보고 있다.59) 60) 헌재 1999. 12. 23. 98헌마363 등. 61) 엄격심사를 통하여 합헌결정을 받기 위하여 어떤 조건을 충족시켜야 하는지에 관한 헌법재판소 의 입장이 불분명한 것으로 보인다. 조홍석, 평등권에 관한 헌법재판소 판례의 분석과 전망, 공 법연구 제33집 제4호, 2005, 124쪽. 62) 이것은 법적 사실상 불이익을 입은 자에 대한 보상으로 인한 차별, 즉 일종의 역평등조치에 대해 서도 적용된다고 보았다. 63) 헌재 2001. 2. 22. 2000헌마25 참조. 58) 헌재 1992. 12. 23. 98헌마363 등. 59) 헌재 1996. 11. 28. 96헌가13. 현행 헌법상 평등심사기준에 관한 연구 79 정이 타당한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 기준들에 대한 검토가 선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1) 제1기준: 헌법에서 특별히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경우 헌법상 특별히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가는 일반적 평등조항인 헌법 제11조 제1항 80 이와 달리 열거설로 보는 입장도 제2문이 헌법 제11조 제1항 제1문을 구체화 한 것이므로 질적 양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아 원칙적 심사기준인 자의금지원칙이 적용 된다고 보는 견해와 평등사상의 근원과 연혁을 고려할 때 제2문은 성별 종교 사회적 신분에 따른 차별은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한 금지됨을 선언하는 것이므로 엄격심사 기준으로서 비례성원칙이 적용되어야 하는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68) 제1문을 중심으로 판단하게 된다. 이에 따라 동 조문의 일반적 영역에 포섭되지 않고 그러나 현재 헌법재판소의 판례에 따라 헌법상 특별히 평등을 요구하는 경우 를 특별한 영역을 구축하고 있는 헌법상의 개별적 평등조항들이 특별히 평등을 요구하 근거로 특정사례의 개별적 평등조항을 중심으로 판단하여 심사기준을 달리하는 것은 고 있는 경우 에 해당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개별적 평등조항에는 헌법 제 명시적인 헌법규정과 헌법현실과의 차이를 간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69) 출신지 31조 제1항(교육의 기회균등), 제32조 제4항 제5항(여성과 연소자 근로에 대한 특별 역, 학력 등과 같이 현실적으로 심각한 차별을 발생시키는 사유들이 있음에도 불구하 보호), 제32조 제6항(국가유공자에 대한 우선적 근로기회 보장), 제41조와 제67조(평 고 헌법규정을 중심으로 심사기준을 달리한다면, 심사결과의 타당성에 대하여 의문을 등선거원칙), 제119조 제2항(사회적 시장경제질서와 국가의 균형있는 국민경제의 성 제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장) 등을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64) 그리고 평등문제가 제기된 사실관계가 복잡한 구조를 취하고 있는 경우, 헌법재판 이 기준에 대한 검토는 특히 헌법 제11조 제1항 제2문이 명시하고 있는 성별, 종 소가 어떠한 평등조항에 해당하는지를 판단하여 구체적인 심사기준을 선택할 것인지 교, 사회적 신분 이외의 사유에 대해서도 비례성원칙에 따른 심사를 할 수 있는가에 예측하기 힘들게 되기 때문에, 결국 심사기준이 불명확하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수 대한 논의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65) 밖에 없다. 이와 관련하여 헌법 제11조 제1항의 법적 성격에 대하여 열거설로 보는 입장 과 따라서 헌법에서 특별히 평등을 요구하고 있는 경우 라는 기준은 불필요한 것으로 예시설로 보는 입장 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열거설로 보는 입장도 헌법 제11조 제1항 생각된다. 헌법규정과 헌법현실과의 차이를 감안하여 구체적인 평등문제에 대해 접근 제1문과 제2문이 일반규정과 특별규정의 관계에 있으므로, 제1문에 대해서는 자의금 할 필요가 있으며, 일반적 평등조항은 개별적 기본권과 연계되어 구체화될 때 실질적 지원칙이 적용되지만 제2문에 대해서는 비례성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보는 견해 가치를 가지고 개별적 평등조항은 일반적 평등조항을 구체적으로 예시한 주의적 확인 와66) 제1항 제1문과 제2문을 일반법과 특별법관계로 보면서도 제1문의 일반적 평등 적 규정이므로, 개별적 평등조항과 관련된 차별에 대해서만 엄격심사기준을 적용할 원칙은 그 적용영역이 광범위하므로 그 효력내용과 보호강도에 따라 일반적 평등원 수는 없는 것이다. 즉 평등위배여부에 대한 모든 평등심사에 엄격심사기준이 적용되 칙위배여부에 대한 심사기준과 방법을 달리하게 되며, 이에 대하여 제2문의 개별적 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평등원칙은 그 적용영역의 제한성이라는 영역적 특수성을 고려하여 그 효력영역 내 부에서 독립적으로 개발ㆍ적용되어야 한다는 견해로 구분된다.67) 2) 제2기준: 차별적 취급으로 인하여 관련 기본권에 중대한 제한을 초래하는 경우 64) 이와 관련하여 헌법재판에서 개별적 평등조항과 관련하여 비례성원칙이 적용된 경우는 여성근 로에 대한 특별보호규정인 헌법 제32조 제4항이 문제된 제대군인가산점 사건 과 헌법 제36조 제1항과 가족제도에서의 양성의 평등보호 조항이 문제되었던 구 국적법상 부계혈통주의 사건 등이 있다. 65) 헌법 제11조 제1항 제2문을 원칙적 절대적 차별금지사유 를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이욱한, 차별금지원칙과 실질적 평등권, 공법학연구 제6권 제3호, 2005, 118~119쪽. 66) 헌법은 130 여개의 한정된 조문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헌법규정을 예시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비판의 여지가 있다는 견해가 있다. 조홍석, 전게논문, 117~118쪽 참조. 67) 김주환, 평등권 심사 기준과 방법의 구조화 - 일반적 평등원칙을 중심으로 -, 헌법실무연구회 제83회 발표문, 2008. 4. 4. 2쪽; 그러나 이 입장에서는 개별적 평등조항의 위배여부에 대한 심 사기준과 관련하여 규범프로그램의 특수성을 고려하여 비례성 심사가 일률적으로 적용된다고 하는 점은 의문이다. 68) 황도수, 헌법재판의 심사기준으로서의 평등, 박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1996, 142 154쪽. 69) 이준일, 헌법재판의 법적 성격 - 헌법재판소의 논증도구인 비례성원칙과 평등원칙을 예로 -, 헌 법학연구 제12권 제2호, 2006, 342쪽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