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연혁 1. 숭례문의 연혁 2. 1961년 수리공사 3. 전차선로와 숭례문 4. 조선왕조실록속의 숭례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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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禮門 精密實測調査報告書 ④ 평방 이음의 보강 주먹장으로 되어 있던 평방 이음을 보강하기 위하여 평방 상면 이음부에 띠쇠를 건너지르고 평 창방을 관 통하는 앙카를 박아 창방 밑에서 볼트로 고정하였다. ⑤ 고주 머리의 보강 고주 상부에 별도의 부재로 되어 있던 부분을 고주를 연장하고 연장부분을 동자주 형태로 가공하였다. 라. 結論 서울南大門修理報告書 에는 수리전과 후의 상태 및 수리공사 진행상황 등이 충실히 기록되어 있지만 각 부재 에 대한 교체 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다. 수리공사의 기본 방향은 구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하여 수리이전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지만, 변형된 부분에 대해서는 그 원형을 찾아 변경하고 그대로 했을 때 구조적인 문제점이 발생될 수 있는 부분은 충분한 논의를 거 쳐 현황을 보완하는 방법을 찾아 조치하였다. 3. 電車線路와 崇禮門 장 순 용((주)삼성건축사사무소 대표이사) 가. 電車線路 建立에 따른 崇禮門의 變化 도성 내에 전차선로가 만들어지기는 고종 광무 2년(1898) 10월 17일에 서대문 청량리간 단선궤도 부설에 착수하여 동년 12월 25일 에 선로공사가 준공되었다. 그러나 전차를 운전하기 위한 발전소 건 설은 동년 12월에 동대문 부근에 터를 잡아 착공하였고 이듬해 음력 4월 8일에 전차개통식이 거행되어 전차가 다니기 시작하였다. 한 편 1898년에는 종로와 남대문 간의 단선궤도 부설을 착수하였으나 준 공기일에 대한 기록은 미상한 편이다. 그러나 1899년 1월에는 남대문에서 구용산간 단선궤도가 기공되고 이듬해 1월에 준공되며 1월 9일에 시운전에 들어가서 4월에 종로 용산 간 전차운행이 개시되었다.48) 사진 2-1. 1904년 숭례문 북측면 이 당시는 남대문 좌우의 성벽이 아직 철거되지 않은 시기이므로 전차는 남대문 홍예를 통과하여 통행하게 되었다. 이와는 달리 경성전기주식회사 60년 연혁사 에서는 종로 남대문 간의 단선궤도가 1899년에 준공된 것으로 기록 하고, 남대문 구용산간의 단선궤도는 1901년 1월에 준공된 것으로 정리하여49) 경성전기 주식회사 20년 연혁사 의 내용보다 1년이 늦게 되는 차이가 있어 의문이 생긴다. 20년사에서는 일본의 연호로 연대표시가 되어 있고 60년 사에서는 단기로 표시된 것과 연혁사의 작성 시기를 고려하면 20년사의 내용이 정확한 것으로 볼 수 있으나 이 문제 는 더욱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1907년 3월에는 동대문과 남대문이 황성의 중요가로인 바 차마가 폭주하고 전차까지 그 속을 관통하여 교통이 매우 불편하므로 대문 좌우의 성곽을 각각 8칸을 철거하여 그 곳으로 전차가 다니게 하고 백성은 대문으로 통행케 하자는 건의를 승낙하고 있다.50) 또한 동년 6월에는 동대문과 남대문 좌우의 성벽 철거에 관하여 이미 승인을 받았 으나 남아 있는 성벽이 교통 폭주의 길목이고 우천 시 배수처리에도 문제가 있으니 내부(內部) 및 탁지부로 하여금 철거토록 하자는 건의도 승인되었다.51) 처음에 철거키로 승인된 성곽의 폭 8칸은 영조척으로 64尺에 해당하여 대략 48) 경성전기 주식회사 20년 연혁사, 1929, p58 49) 경성전기 주식회사 60년 연혁사, 1958, p256. 50) 高宗實錄, 高宗 44年(光武 11) 3月 30日條 51) 高宗實錄, 高宗 44年(光武 11) 6月 22日條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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崇禮門 精密實測調査報告書 이와 같은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쳐 1908년 2월 14일에는 성벽처리위원장에 일본인 木內重四郞이 임명되 고,54) 3월 11일에 동대문 좌우의 성벽을 철거하는 작업으로 서울성곽 철거 작업이 시작되었으며55), 9월 5일에 는 성벽처리위원회 규정의 폐지를 반포하였다.56) 1910년 5월 28일에는 서울의 전차궤도를 도로의 중앙으로 옮 기기 위한 측량이 착수되었고,57) 동년 8월 22일에 한일합병조약이 조인되고 동월 29일에 공포됨으로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58) 1911년 6월 1일에는 동대문 북측 성벽을 철거하고 도로가 개통되었다.59) 1911년 4월 11일에 동대문 청량리 간의 전차 복선공사가 준공되고, 12월 17일에 서대문 동대문간의 전차 복선공사가 준공되었고,60) 1912년 2월 12일에 남대문 서울역 간의 전차 복선공사가 준공되었다.61) 이상의 내용으로 보면 동대문 내부로 전차가 통행하는 시기는 단 선궤도가 준공되는 1898년 12월부터 복선공사가 준공되는 1911 년 4월까지의 13년 동안인 것을 알 수 있고, 동대문 좌우의 성벽 철거는 1908년 3월과 1911년 6월의 두 차례 철거가 있었다. 그러나 남대문 좌우의 성곽 철거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종로에서 남대문간의 단선궤도가 부설되는 1898년부터 남대문의 정차장이 남대문 밖 광장에 설치되었을 것으로 본다면 이 때부터 전차가 남 대문 내부로 통과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남대문 서울역간의 복선공 사가 준공되는 1911년 12월까지의 13년간은 단선궤도의 전차가 남대문 내부로 통행한 시기가 된다. 사진 2-2. 숭례문 성벽 철거 후 남측면 남대문 밖 연지가 1907년에 매립되고, 고종 순종실록에서 성벽 철거관련 기사에서 남대문과 동대문을 동시 에 거론한 내용을 보거나 전차선로로 개통된 시기적인 면 등의 관점에서 보면 남대문 좌우의 성벽철거는 동대 문과 마찬가지로 1908년과 1911년의 두 차례에 걸쳐 철거되었을 것으로 추측되며, 남대문 둘레에 쌓은 석축 은 1911년경에 축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나. 崇禮門 虹 하부에 성토된 시기의 문제 1961년과 1963년에 걸친 남대문 해체 수리공사가 있었고, 이 때의 수리공사 보고서가 발간되었다. 동 보고 서의 내용을 검토하면 남대문 육축의 손괴부분도 해체하여 보수하였고, 이 때에 신재로 교체된 석재가 지금도 구 석재와는 색상이 달라 육안으로도 판별되고 있으며, 이 같은 대대적인 공사를 하면서도 남대문 바닥이 높여 진 것을 파악하지 못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2005년에 숭례문을 시민에게 개방한다는 목적에 의해 숭례문 통로바닥에 박석을 까는 공사가 추진되고 있었 으며, 마침 숭례문 실측조사의 자문회의 시에 이 문제를 논의하면서 석축의 하부구조를 확인하고 설치한다는 방안이 채택되었다. 이 같은 방침에 따라 홍예 대석 하부와 좌우의 계단 시점과 무사석 주변으로 몇 개소의 시 굴을 하여 본 결과 놀라운 모습이 드러났다. 현황의 강회다짐 바닥에서 1.6m 정도의 깊이에 홍예와 석축의 지대석이 노출되고, 대문의 확석과 박석이 노 출된 것이다. 확석에는 360 360 깊이 180 의 홈이 파여져 있으나 모서리가 둥글게 치석되었고, 그 속에 들어있던 주철제의 확쇠는 제거되어 있다. 이와 같이 홍예 하부의 바닥이 성토된 이유는 단선의 전차가 통행하게 됨에 따라 성문의 구조에 손상을 최소화 시키려는 목적에서 박석 위로 진흙다짐을 하고 전차선로를 구성하기 위한 것으로 판단되며, 성벽이 철거되고 전차 선이 숭례문 외측으로 변경된 이후에도 전차선로를 걷어내고 보토된 것은 그대로 유지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54) 純宗實錄, 隆熙 2年 2月 14日條 55) 연표로 보는 현대사, 新丘文化社, 1973, p.223. 56) 純宗實錄, 隆熙 2年 9月 5日條 57) 연표로 보는 현대사, 新丘文化社, 1973, p.253. 58) 연표로 보는 현대사, 新丘文化社, 1973, p.252. 59) 연표로 보는 현대사, 新丘文化社, 1973, p.261. 60) 연표로 보는 현대사, 新丘文化社, 1973, p.263. 61) 경성전기 주식회사 60년 연혁사, 1958, p.256. 84
Ⅱ. 연혁 사진 2-3. 남측면 서쪽 홍예 하부 시굴 부분 사진 2-4. 북측면 서쪽 홍예 하부 시굴 부분 바닥을 성토하여 높이게 되면 대문도 따라서 높이를 축소시켜야 하는데, 전차가 통행되기 전에는 성문을 개폐 하여 야간에 통행이 금지되지만 전차가 다니기 시작한 후로는 문은 항상 열어놓은 상태로 변화된다. 문의 높이가 축소되면서 과거에 장군목이 끼워졌던 장군목 홈이 성토된 바닥 위에 올라앉은 모습이 되므로 그 상부로 또 다른 장군목 홈을 추가로 만들게 되면서 한 쪽 벽의 상하에 장군목 홈이 파여진 특이한 상태가 되고 만 것이다. 1961년과 1963년간에 걸친 해체 수리공사 시에 파손된 무사석축도 부분적으로 해체하여 석재를 교체하는 공사를 하면서 하부의 장군목 홈을 하인방이 끼워지는 것으로 판단하여 현황과 같이 장대석의 하인방이 설치되 었다. 이 당시에 지표 하에 지대석과 박석을 확인하지 않고 보수가 진행되었다는 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의 문이 아닐 수 없다. 다. 年輪年代와 大門의 변화 숭례문의 대문을 구성하고 있는 목재의 연륜연대 조사결과는 판널과 띠장의 최외곽 연륜의 연대가 1844년에서 1862년으로 확인되었다. 따라서 숭례문의 대문은 1862년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바, 1862 년은 철종 13년에 해당하고 철종은 이듬해 12월 8일에 승하하고 1864년 4월 7일에 예릉(睿陵)에 장례하였으며 철 종 연간의 실록에는 숭례문에 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고종이 즉위한 1863년 12월 이후에 숭례문 의 대문을 수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高宗實錄 에서 남대문 수리와 관련이 있는 기록으로는 고종 5년(1868) 9월 7일조의 내용이 주목된다. 즉 추부(樞府 : 중추부)와 헌부(憲府 : 사헌부) 및 육조의 아문이 모두 오래되었고 동대문은 전체가 노후되어 개 수가 요망되므로 차제에 영건도감으로 하여금 아문과 성문을 개수토록 하자는 건의를 승낙하고 있다. 또한 고종 5년(1868) 10월 6일조에는 장차를 대비하여 도성과 성문 및 공해(公 )를 차제에 모두 개건을 시행하 도록 하라는 대원군의 분부가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은 발의에 따라 동대문은 해체 수리하여 이듬해 3월에 준공되었음을 보고하고 있다.62) 숭례문의 성문을 직접적으로 수리한다는 분명한 기록은 없으나 고종 5년 9월과 10월의 실록내용으로 보아 숭례 문의 대문이 고종 5년에 수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대문의 연륜연대 측정에서 나타난 1862년은 고종 5년(1868)의 공사로 문짝 전체가 신재로 교체되었으며, 6년간의 목재의 수피부근 나이테가 치목 시 깎여나갔 기 때문에 최후의 연륜연대가 1862년으로 나타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911년경에 숭례문 주위로 석축을 둘러쌓게 됨에 따라 문루 좌우의 성벽도 현재의 모습과 같 이 정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숭례문이 도로 중앙에 섬과 같은 형태로 남게 되면, 문루양단의 석축 단면이 노출되는 문제와 측벽이 토압으로 밀려나가는 문제를 해소하는 방안으로 숭례문 좌우에 일제식 석축으로 보축한 것으로 추측되 며, 이전에 전차가 숭례문 홍예로 통행하던 시기에 바닥에 보토하여 높아진 지면은 그대로 유지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보토를 하게 되면 성문의 높이도 이에 따라 조정하여야 하므로 대문을 보토된 높이에 맞춰 절단하게 되었으 62) 高宗實錄 高宗 6年 3月 16日條 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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