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延 世 醫 史 學 제12권 제1호: 33-42, 2009년 6월 Yonsei J Med Hist 12(1): 33-42, 2009 특집논문 3 3ㆍ1운동과 세브란스 장 규 식 중앙대 역사학과 1. 머리말 세브란스는 지역ㆍ신분ㆍ계층ㆍ종교와 남녀노소의 구별을 뛰어넘어 근대 민족으로서 한민족을 탄생시킨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이었던 3ㆍ1운동 과정에서 기독교계와 학생단 독립 운동의 주요 거점으로 한국민족운동사에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이와 관련하여 연세대학 교 백년사 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가 3ㆍ1운동에 참여한 것을 다음의 세 갈래로 나누어 정리하고 있다. 그 첫째는 이갑성ㆍ함태영 및 스코필드와 같은 교직원이 3ㆍ1운동의 주동인물의 하나로서 활동한 것이요, 둘째는 당시 학생이었던 이용설ㆍ김문진을 중심으로 한 학생활동이요, 셋째는 3ㆍ1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지하운동의 일부로서의 독립신문 의 발행이었다. 1) 대체로 납득이 가는 설명이지만, 3ㆍ1운동 추진과정에서 함태영과 이갑성의 활동이 세 브란스 그리고 이용설 등의 학생활동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었는지, 또 지하 독립신문 의 발행은 어떠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는지에 대한 입체적인 조명이 부족해 다소 아쉬움을 준 다. 앞서 거론한 세 갈래의 흐름은 각각 별개의 활동이 아니라 서로 긴밀하게 엮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 그 매개고리 역할을 한 것이 세브란스의전 학생청년회(YMCA)였는데, 그 에 대한 검토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2) 이에 본고에서는 먼저 세브란스가 기독교계 3ㆍ1운동의 추진 거점으로 자리잡게 되는 과정을 함태영과 이갑성의 활동을 중심으로 살펴보려 한다. 그리고 세브란스 재학생들이 1) 연세대학교백년사편찬위원회, 연세대학교 백년사1 (연세대학교 출판부, 1985), 137쪽. 2) 3ㆍ1운동 과정의 세브란스의전 학생과 교직원의 활동을 다룬 연구로는 金 良 善, 三 一 運 動 과 基 督 敎 界, 三 一 運 動 50 周 年 紀 念 論 集 ( 東 亞 日 報 社, 1969); 장규식, YMCA학생운동과 3ㆍ1운동의 초 기 조직화, 한국근현대사연구 20(2002) 등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34 / 延 世 醫 史 學 제12권 제1호 학생YMCA를 매개로 이갑성과 함태영의 지도를 받으며 조직적으로 학생단 독립운동에 합 류하는 과정과 3ㆍ1운동 거사 이후 독립신문 발행에 참여하는 전후 사정을 검토해 보려 한다. 2. 기독교계 3ㆍ1운동의 추진거점 세브란스 세브란스가 3ㆍ1운동 준비과정에서 기독교계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떠오른 것은 1919년 2월 11일 급거 상경하여 송진우로부터 함께 독립운동을 추진하자는 천도교측의 제의를 전 달받은 이승훈이 귀향길에 세브란스병원 구내 남대문밖교회에 들러 조사 함태영과 병원 제 약주임 이갑성을 만나면서부터였다. 이 자리에서 이승훈은 송진우와의 교섭 전말을 들려준 뒤 두 사람의 참여의사를 확인하고,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장로회 평북노회와 도사경회 가 열리고 있던 선천으로 직행하였다. 3) 이후 세브란스는 당시 서울의 관문이자 철도교통의 요지였던 남대문역(현재의 서울역) 앞에 위치한 공간적 입지조건과도 관련하여 3ㆍ1운동의 주요 추진거점이 되었는데, 이 때 특히 주목할 것이 병원 구내 이갑성과 함태영의 사택이었다. 이 가운데 이갑성의 사택은 3ㆍ1운동 기획단계에서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대표자회 의와 제1차 기독교계 지도자 연석회의가 열린 장소였다. 2월 11일 이승훈을 통해 천도교측 과 기독교측 사이에 독립운동을 위한 암중모색이 진행되고 있음을 전해들은 이갑성은 2월 12일 밤 세브란스병원 음악회가 끝난 뒤 세브란스의전의 김문진, 이용설, 배동석과 1월 27 일 대관원모임에 참석한 바 있는 연희전문의 김원벽, 경성의전의 한위건, 김형기, 경성전수 학교의 윤자영을 병원 구내 자신의 사택으로 초청하였다. 이 자리에서 이갑성은 해외에서 는 이승만이 미국의 한인단체를 대표하여 미국 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청원하고, 일본에서는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하고, 남북간도의 한인들도 한국의 독립을 위해 크게 활동하는 이 때에 안팎에서 호응하여 독립운동을 해야겠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냐며 학생들의 의견을 구하였다. 그리고 지금 발표할 수는 없지만 차차 그 기회가 있을 것이라 하여 국내에서도 독립운동 계획이 진행중에 있음을 암시하였다. 4) 3) 예심종결결정, 독립운동사자료집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12쪽; 李 甲 成 신문조서,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이하 자료집) 12(국사편찬위원회, 1990), 59쪽; 咸 台 永 신문조서, 자료 집 12, 99쪽; 李 寅 煥 ( 昇 薰 ) 신문조서, 자료집 12, 160-162쪽. 4) 경성 독립운동 관련 학생의 예심 종결 결정서, 독립운동사자료집 13(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7), 97쪽; 金 元 璧 신문조서, 자료집 11, 109-110쪽; 공판시말서- 金 炯 璣, 자료집 18, 185-186쪽; 공판시말서- 尹 滋 英, 자료집 18, 192쪽.

3ㆍ1운동과 세브란스 / 35 이 자리에 참석한 이용설은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의 전 회장이었고, 김문진은 현 회 장이었으며, 배동석은 교남(영남)학생친목회 회장을 맡고 있었다. 김원벽 또한 연희전문 학 생YMCA 회장을 지낸 바 있었고, 한위건과 김형기도 YMCA 학생사업에 관여하고 있었으 므로, 5) 이날 모임은 YMCA 학생운동 지도부와 이갑성이 대면하여 독립운동에 관해 말문을 연 자리라 할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는 조직적으로 학생단 독립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갑성 또한 이용설 김문진 등 세브란스의전 인맥을 통해 지속적으로 학생독립운동에 개입하였다. 한편 2월 21일 밤에는 장로회측에서 이승훈, 함태영, 이갑성, 안세환, 김세환, 김필수, 오 상근, 감리회측에서 박희도, 오화영, 신홍식, 오기선, 현순 등이 참석한 가운데, 제1차 장로 회ㆍ감리회 양 교단 지도자 연석회의가 역시 이갑성의 사택에서 열렸다. 앞서 함태영, 이갑 성과 만나고 귀향하여 평안도 일대를 돌며 동지를 규합한 뒤 2월 17일 재차 상경한 이승훈 은 천도교측과의 교섭이 지지부진하자, 2월 20일 밤 수창동 협성보통학교 박희도의 주소지 에서 감리교회 지도자들과 모임을 갖고 기독교계 단독으로 거사를 추진하기로 의견을 모았 다. 그리고 이튿날 오전 함태영을 찾아와 전날 회의내용을 전하고 장로교계의 동지규합 방 안을 논의하였는데, 당일 오후 이승훈과 최린의 회담이 성사되면서 상황이 급반전되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 이갑성의 사택에서 제1차 장ㆍ감 양 교단 지도자 연석회의가 열렸는 데, 이 자리에서 참석자들은 천도교측과의 합작을 결정하고, 운동 방식을 독립선언으로 할 지, 독립청원으로 할지의 여부는 천도교측과 협의후 결정하기로 합의하였다. 더불어 천도교 측과의 교섭위원으로 이승훈과 함태영을 선정하고, 상하이 주재원으로 현순의 파견을 결정 하였다. 또한 독립청원서에 날인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지방순회위원을 선정하였는데, 대 구ㆍ부산ㆍ마산은 이갑성이, 수원ㆍ이천ㆍ공주는 김세환이, 평남은 신홍식이, 평북은 이승 훈이, 전주ㆍ군산은 김병수(세의전 학생)가 각각 담당하기로 하였다. 6) 다음으로 함태영의 사택 또한 이승훈의 방문 이후 2월 23일 제2차 장ㆍ감 양 교단 지 도자 연석회의(이승훈, 함태영, 안세환, 박희도, 오화영, 오기선 참석)가 열린 것을 계기로 독립운동 추진의 주요 거점으로 자리를 잡았다. 당일 이승훈과 함태영이 천도교측의 최린 과 독립선언 문제를 협의한 뒤 개최한 이 날 모임에서, 장ㆍ감 양 교단 지도자들은 천도교 측에서 주장하는 독립선언서 발표 방침을 수용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독립운동 일원화 방침 을 최종 확정하였다. 다만 오기선은 독립선언 방식에 반대하고 탈퇴를 하였다. 이후 함태영 은 기독교측의 실무대표로 천도교측의 최린과 함께 거사 날짜를 정하고, 독립선언서와 청 5) 김원벽이 대관원모임 참석자 가운데 강기덕은 예수교 신자가 아니므로 음악회 통지를 받지 못했 고 윤자영의 경우는 배동석과 동향으로 친한 사이여서 초대를 받았다고 진술한 데서 살필 수 있 듯이, 이날 모임은 기독학생이 중심이 된 자리였다. 金 元 璧 신문조서, 자료집 11, 109-110쪽. 6) 예심종결결정, 독립운동사자료집 5, 12ㆍ17-19쪽.

36 / 延 世 醫 史 學 제12권 제1호 원서의 초안 작성 및 출판 배포 등과 관련한 제반 실무를 관장하였다. 7) 이와 같이 세브란스병원 구내 이갑성과 함태영의 사택은 2월 12일의 기독학생모임과 제 1ㆍ2차 장ㆍ감 양 교단 지도자 연석회의의 개최 장소로서 3ㆍ1운동 추진과정에서 기독교 계와 학생단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역할을 하였다. 당시 이갑성은 세브란스의전을 중퇴하 고 세브란스병원의 제약주임을 맡고 있었다. 그리고 함태영이 조사로 시무하던 남대문밖교 회는 처음에 병원교회로 출발하여 1909년 11월 독립한 이후에도, 이듬해 병원 구내에 새 예배당을 신축하고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의 신앙생활과 종교활동의 터전 역할을 하였다. 때 문에 이갑성과 함태영은 세브란스의전 재학생 특히 학생YMCA 회원들과 평소 긴밀한 관계 를 유지하였고, 그것은 세브란스 학생YMCA가 학생독립운동의 중요한 축으로 자리잡는 발 판이 되었다. 3.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와 학생단 독립운동 보통 3 1운동을 천도교계 기독교계 불교계가 힘을 합해 일구어낸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라고 하지만, 3 1운동의 추진과정에서 그와 더불어 주목해야 할 세력은 학생단이었다. 3 1 독립선언서 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박희도와 이갑성은 엄밀히 말해 기독교계 대 표라기보다는 학생단의 대표였다. 실제로 이갑성은 세브란스의전을 중퇴한 뒤에도 병원 제 약주임으로 있으면서 학생들과 교분을 쌓고 있었고, 박희도는 연희전문 기숙사 사감을 거 쳐 중앙YMCA 회우부 간사로 있으면서 YMCA학생사업에 관계하고 있었다. 연령상으로도 40~50대가 대부분인 민족대표들 가운데 박희도와 이갑성만이 김창준과 함께 30대 전반이 었다. 8) 뿐만 아니라 박희도는 연희전문 학생YMCA 초대 회장 김원벽 현임회장 이병주와 노준탁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통해, 이갑성은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 전임회장 이용설 현임회장 김문진과 배동석 등으로 이어지는 라인을 통해 조직적으로 학생독립운동에 관여 하였다. 9) 학생단의 독립운동은 1919년 1월 27일 중국음식점 대관원에서 서울 시내 전문학교 학생 지도자들이 회동함으로써 태동하였다. 대관원 모임은 박희도가 YMCA 학생회원 모집을 명 목으로 김원벽ㆍ한위건ㆍ김형기 등을 통해 주선한 자리였다. 10) 이 자리에서는 세계 정세와 7) 예심종결결정, 독립운동사자료집 5, 17-19쪽. 8) 조선독립선언서 및 청원서에 관계된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사건 관련인 명단, 자료집11, 3-17쪽. 9) 장규식, YMCA학생운동과 3ㆍ1운동의 초기 조직화, 한국근현대사연구 20(2002), 135쪽. 10) 대관원 모임에 참석한 전문학교 학생들은 박희도와 연희전문의 김원벽, 경성의전의 한위건 김형 기를 비롯해 보성법률상업의 강기덕, 경성전수학교의 윤자영 이공후, 경성공전의 주종의, 그리고

3ㆍ1운동과 세브란스 / 37 파리강화회의 상황, 그리고 학교끼리 연락을 취해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문제 등에 대한 이 야기가 오갔으나, 찬성론과 시기상조론이 엇갈려 결론을 맺지 못한 채 헤어졌다. 11) 하지만 이를 통해 향후 학생단 독립운동의 대략적인 윤곽이 잡혔는데, 10명의 참석자 가운데 8명 이 서북지방 출신이고, 대부분이 YMCA와 서북학생친목회 교남학생친목회의 회원들이었다 는 사실은 12) 학생단 초기 조직화의 단서를 보여준다. 그런데 김원벽과 이용설이 평소 학생 YMCA 활동을 통해 친분이 깊은 사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날 모임에 세브란스의전 출신 은 무슨 사정에서였는지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이 학생단 독립운동에 합류한 것은 앞서 살펴본 대로 2월 12일 세 브란스병원 구내 이갑성 사택에서 김원벽, 한위건, 김형기, 윤자영 등 대관원모임 참석자들 과 이용설, 김문진, 배동석 등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 그룹이 이갑성의 주선으로 만남을 가지면서였다. 이를 계기로 학생단의 조직작업은 연희전문ㆍ세브란스의전 학생YMCA와 서 북학생친목회를 양대 축으로 하여 진행되었다. 세브란스에 학생YMCA가 조직된 것은 1911년 6월 개성에서 열린 제2회 학생 학령회를 전후해서였다. YMCA 선교사 브로크만의 연차보고서에 따르면, 1911년 9월 현재 YMCA학 관 외에 배재학당과 상동청년학원에 학생YMCA가 재건되고, 경신학교와 세브란스의학교, 개성의 한영서원에 새롭게 학생YMCA가 조직되었다고 한다. 당시 이들 학교의 학생수는 모두 663명이었는데, 학생YMCA의 회원수는 준회원까지 포함해 모두 536명에 이르러 이들 학교의 학생 대부분을 포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 이후 세브란스 학생YMCA는 1914년 4월 한국YMCA의 전국조직으로 조선기독교청년회 연합회가 출범할 때 회원조직의 하나로 참여하였다. 당시 조선YMCA연합회에는 1개 시청 년회와 9개의 학생청년회가 참여하였는데, 14) 학생청년회 가운데 전문학교에 조직된 학생 YMCA는 세브란스의학교가 유일하였다. 때문에 중등학교에 조직된 학생YMCA를 지도하는 위치에 서 있었다. 그같은 사실은 1915년 무렵부터 서울의 세브란스의학교와 배재학당ㆍ경 신학교ㆍ청년회학관 등 네 학교 학생YMCA가 방학기간에 연합전도회를 조직해 활동한 데 보성법률상업 출신으로 대종교회에 근무하고 있던 주익과 연희전문을 중퇴하고 배화여학교 교사 로 있던 윤화정 등 10명이었다. 金 元 璧 신문조서, 자료집11, 32쪽; 金 炯 璣 신문조서, 자료 집 15, 167쪽. 11) 경성 독립운동 관련 학생의 예심 종결 결정서, 97쪽; 공판시말서- 尹 滋 瑛, 자료집 18, 1994, 191쪽. 12) 장규식, YMCA학생운동과 3ㆍ1운동의 초기 조직화, 124-126쪽. 13) Annual Report of Frank M. Brockman of Seoul Korea for the year ending September 30th, 1911, p.7. 14) 조선기독교청년회연합회 창립대회는 1914년 4월 2-5일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1913년 황성기독교 청년회에서 강제 개명)와 9개 학생YMCA(중앙기독교청년회학관 배재학당 경신학교 세브란스의학 교 개성 한영서원 전주 신흥학교 군산 영명학교 광주 숭일학교 재일본 동경조선기독교청년회) 대 표 45명이 모인 가운데, 개성 한영서원에서 개최되었다.

38 / 延 世 醫 史 學 제12권 제1호 서도 확인된다. 15) 이렇게 세브란스 학생YMCA가 전도대 파송을 비롯해 아침기도회 개최, 성경반 운영 등 의 다양한 활동을 펼쳐 나가는 과정에는 교직원들의 도움 또한 적지 않았는데, 그 대표적 인 인물이 세브란스의학교 최초의 한국인 교수 오긍선이었다. 오긍선은 1915년 4월 전남 광주에서 열린 제5회 학생 하령회(춘령회)의 대회장을 맡아 대회를 주관하였을 뿐 아니라, 그에 앞서 하나님의 의지와 인간의 삶 (Wright 지음)을 교재로 겨울 3개월 동안 학생들의 성경공부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16) 오긍선 외에 3ㆍ1운동 당시 남대문밖교회의 조사로 시무 했던 함태영 또한 학생YMCA의 활동을 지도하고 자문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세브란스 학생YMCA는 종교활동 뿐만 아니라, 학생회가 없는 상황에서 사실상 의 학생회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1925년의 통계보고에 따르면 세브란스의전 재학생 68명 전원이 학생YMCA의 정회원이었는데, 17) 이를 통해 3ㆍ1운동 과정에서 보여준 세브란스 학 생들의 폭넓은 조직적 활동이 어떠한 기반 위에서 가능하였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다. 아무튼 2월 12일 이갑성 사택에서의 기독학생 모임을 계기로 속도가 붙은 학생단의 조 직작업은 2월 20일 연희전문 대표 김원벽이 다니던 승동교회에서 제1회 간부회를 개최하 고, 김원벽과 강기덕을 필두로 1차 거사에 나설 시내 각 전문학교 대표자들을 선정함으로 써 일단의 결실을 맺었다. 18) 세브란스의전에서는 학생YMCA 회장 김문진을 대표자로 선정 하고, 전회장 이용설은 후위에 남아 한위건, 윤자영과 함께 2차 거사를 주도하는 것으로 가 닥을 잡았다. 이후 천도교측과 기독교측 사이에 독립운동의 일원화가 성사되자, 학생단은 자체적으로 독립시위를 벌이려던 당초의 계획을 미루고 그에 합류하기로 방침을 바꾸었다. 그 결과 2월 25일 정동교회 이필주 목사 사택에서 열린 제2회 학생단 간부회에서는 3월 1 일의 거사는 중등학생들로 하여금 지원케 하고, 그 뒤 전문학교 학생대표 주도하에 제2차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결정하였다. 19) 이후 과정에서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는 이갑성과 함태영의 지도 아래 20) 독립운동에 동참할 삼남지방의 기독교계 대표를 교섭하는 일과 독립선언서를 배포하는 일을 주로 담당 하였다. 먼저 기독교계 대표 교섭작업은 2월 21일 밤 이갑성의 사택에서 열린 제1차 장ㆍ 15) 차리셕, 복음젼도음악단, 基 督 申 報 (1916. 9. 6). 16) Annual Report of Frank M. Brockman for the year ending September 30, 1915, p.3; Annual Report of Lloyd H. Snyder for the year ending September 30, 1915, p.4. 17) A Statistical Table of YMCA in Korea, (1925). 18) 이 자리에서 선정된 시내 각 전문학교 대표자들은 전성득(전수학교), 김형기(경성의전), 김문진(세 브란스의전), 김대우(경성공전), 강기덕(보성법률상업), 김원벽(연희전문) 등이었다. 경성 독립운동 관련 학생의 예심 종결 결정서, 98-99쪽. 19) 경성 독립운동 관련 학생의 예심 종결 결정서, 99-100쪽. 20) 外 科 醫 인 獨 立 鬪 士 與 天 李 容 卨, 내가 겪은 二 十 世 紀 ( 京 鄕 新 聞 社, 1974), 99쪽.

3ㆍ1운동과 세브란스 / 39 감 양 교단 지도자 연석회의에서 독립운동에 동참할 동지를 규합하기 위해 지방순회위원을 선정하기로 하고, 이갑성에게 삼남지방을 맡김으로써 시작되었다. 이갑성은 본인이 먼저 대 구 등지를 직접 다녀온 뒤, 2월 25-26일 세브란스의전 학생YMCA의 김문진을 대구에, 배동 석을 마산에, 김병수를 군산ㆍ전주에 각각 파견하였다. 다음으로 독립선언서의 배포 또한 기독교측의 독립선언서 배포 책임을 맡은 이갑성의 지도 아래 이루어졌다. 구체적으로 2월 28일 밤 김성국과 김문진이 독립선언서 1천 5백매 와 1천매를 각각 이갑성에게서 건네받아 이를 승동교회와 정동교회에 모인 학생대표에게 전달하였고, 김병수가 군산의 박연세에게 1백매를, 이용상이 대구의 이만집과 마산의 임학 찬에게 4백매를 각각 전달하였다. 그리고 3월 1일의 거사를 앞두고는 서영환이 역시 이갑 성의 지시로 조선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전달하였다. 21) 한편 학생단은 독립선언서의 배포와 학생동원의 책임을 맡아 3월 1일의 거사를 준비하 는 한편, 3월 5일 학생단 주최의 제2차 독립운동 계획을 실행에 옮겨 나갔다. 그런데 3월 1 일 오후 2시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주관하기로 한 민족대표들이 전날 갑자기 태화 관으로 장소를 옮김에 따라, 파고다공원에서의 거사 또한 사실상 학생들 주도하에 치러지 게 되었다. 당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식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보성법 률상업의 강기덕과 세브란스의전의 김문진 등 학생대표들은 태화관으로 달려가, 대표자중 몇 사람, 그것도 안되면 이갑성만이라도 파고다공원으로 와서 독립선언서를 낭독케 해 달 라고 요청하였다. 하지만 이갑성은 조선총독부에 독립청원서를 보내는 일로 아직 태화관에 나타나지 않았고, 결국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과 뒤이은 가두시위는 학생들의 주도 하에 진행되었다. 22) 만일 독립선언식이 요리점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만의 행사로 끝났다 면, 거족적인 독립만세운동으로서 3ㆍ1운동은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면에서 파고다 공원에서 학생 주도하에 치러진 독립선언식과 만세시위는 거족적인 독립운동으로서 3ㆍ1운 동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 이어 학생단은 3월 4일 시내 전문학교와 중등학교 대표들을 배재고보 기숙사로 불러 이 튿날의 거사준비를 최종 점검하고, 그날 밤 세브란스의전에 다시 모여 후속작업으로 독립 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한 방안을 논의하였다. 그리고 3월 5일 오전 9시 남대문역 앞에서 김 원벽과 강기덕의 주도로 당초 예정했던 학생단 주최의 독립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23) 이용설의 회고에 따르면, 당초의 계획은 3월 5일 제일착으로 첫 시위를 한 뒤 4-5일 내 21) 공판시말서- 金 炳 洙, 자료집 18, 52쪽; 공판시말서- 康 基 德, 자료집 18, 304쪽; 金 良 善, 앞 글, 254-255쪽. 22) 康 基 德 신문조서, 자료집 11, 195쪽; 金 良 善, 앞 글, 259-260쪽. 23) 李 秉 周 신문조서, 자료집 16, 104쪽; 경성 독립운동 관련 학생의 예심종결 결정서, 105-107쪽.

40 / 延 世 醫 史 學 제12권 제1호 지 1주일에 한 번씩 다섯 차례로 나누어 만세시위를 지속시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3월 5일의 만세시위 이후 일제 관헌의 대대적인 검색으로 이후 서울 중심가에서 대규모 시 위를 벌일 수 없었다. 그래서 만세시위 대신에 독립신문 을 발행하기로 작정하고, 세브란 스가 중심이 되어 각처에서 일어나는 시위 소식, 파리평화회의 소식, 격문 등을 담은 한 장 정도의 신문을 만들어 배포했다고 한다. 24) 이용설은 그 같은 신문을 세브란스병원 전 외래진료소 맨 꼭대기 4층에 있는 해부학교 실 옆 사진암실에서 비밀리에 1개월 이상 등사하였다고 회고하였다. 그런데 당시 보성고보 재학생이었던 장채극은 법정에서 3월 하순부터 4월 상순까지 제17호에서 제23호에 이르 는 독립신문 원고를 이용설에게서 받아 황금정1정목(현 을지로1가) 김춘남에게 부탁하여 인쇄하게 했다고 이용설의 회고와는 엇갈린 진술을 하였다. 25) 장채극이 일제 당국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비밀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을 했는지, 아니면 이용설의 착오였는지 확인할 수는 없지만, 이용설을 비롯한 세브란스 학생들이 3ㆍ1운동 이후 독립신문 발행에 관여 한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4. 맺음말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남대문밖교회, 함태영 사택, 이갑성 사택을 아우르는 세브란스병 원 구내는 3ㆍ1운동 준비과정에서 기독교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남대문밖교회는 이승훈과 함태영, 이갑성이 만나 기독교계 독립운동의 첫 단추를 꿴 곳이고, 이갑성 사택은 서울시내 전문학교 기독학생모임과 제1차 장ㆍ감 지도자 연석회의가 열려 천도교측과 독립 운동 일원화의 발판을 놓은 장소였다. 또한 함태영 사택은 제2차 장ㆍ감 지도자 연석회의 가 열려 독립선언 방식의 독립운동 방침을 확정한 장소였다. 이렇게 세브란스 병원을 거점으로 기독교계의 독립운동이 착착 진행되는 가운데, 세브 란스의전 학생YMCA 또한 학생단 조직작업에 합류하여 연희전문 학생YMCA, 서북학생친 목회와 함께 학생독립운동을 이끌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할 것은 세브란스의전을 중퇴하고 병원에 근무하던 이갑성의 역할이었다. 이갑성은 이용설, 김문진 등 세브란스 학생YMCA 지도부를 학생단 추진주체들과 연결시키는 한편, 자신이 책임을 맡은 독립운동에 동참할 삼남지방의 기독교계 대표 교섭과 독립선언서의 배포에 세브란스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투 입하였다. 24) 이용설, 나의 三 ㆍ 一 學 生 運 動 體 驗, 새벽 3-1(1956. 1), 30쪽. 25) 공판시말서- 張 彩 極, 자료집 18, 294-295쪽.

3ㆍ1운동과 세브란스 / 41 한편 3월 1일 파고다공원에서 거행된 독립선언식과 3월 5일의 학생단 주최 만세시위에 서 이용설을 비롯한 세브란스의전의 학생 지도부는 전면에 나서지 않고 후위에 있었는데, 그것은 그 뒤를 이어 만세시위를 지속적으로 조직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3월 5일의 학생 단 시위 이후 일제 관헌의 대대적인 검속으로 후속 시위의 조직이 여의치 않자, 이용설 등 은 대신에 지하신문으로 독립신문 을 발행해 독립운동의 열기를 지속시켜 나갔다. 이렇게 세브란스의전 학생들이 3ㆍ1운동 과정에서 조직적으로 폭넓은 활동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학생YMCA를 통한 운동 경험이 중요한 자산이 되었는데, 이와 관련해서는 앞으로 꾸준한 관심과 검토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핵심어: 3 1운동, 기독교계 독립운동, 세브란스 의전, 독립선언, 이갑성, 함태영, 이용 설, 학생YMCA

42 / 延 世 醫 史 學 제12권 제1호 Abstract The March 1st Movement and the SUMC CHANG Kyu-sik Chung-Ang University Severance Hospital and Union Medical College was the key base for the Korean Christians who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Namdaemun Church and the residences of Yi Gab-seong and Ham Tae-young, which were located within the campus, served as the base and later became the landmark site for independence movement of the Korean Christian leaders. The Youth YMCA leaders at the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SUMC) also participated and Korean Christian leaders prepared for the March 1st Movement at the Severance Hospital Area. At this time Yi Gab-seong, one of the signees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led the Severance students. Under his direction, the Severance students went to the southern provinces to recruit the local Christian leaders to lead movements in their areas. They also delivered printed copies of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to the Youth Independent Group and local Christian leaders as well. In the immediate aftermath of the March 1st Movement, Yi Yong-seol who was the former president of the Youth YMCA at the 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 published underground newspaper to further advocate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Youth YMCA acted as a mediator between Christian national leaders and students in this process. Key words: March 1st Movement, Independence Movement of Christian Group, SUMC, Declaration of Independence, Yi Gab-seong, Ham Tae-young, Yi Yong-seol, Student YM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