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도 역대 국회의장단 구술기록 아카이브 구축사업 이만섭 녹취문(서비스용) 2013. 12. 국회기록보존소
<녹 취 전 문> 과제명 2013년도 역대 국회의장단 구술기록 아카이브 구축 사업 구술자명 이만섭 제14대 전반기, 제16대 전반기 국회의장 면담자 손동유 교수 면담장소 헌정회 사무실 면담일시 2013. 10. 10. 회차 1회차 이만섭1-1.mp4 1. 시작멘트 : 일시 및 연구진 소개 (00:00:11 00:00:40) 2. 최근 근황 (00:00:41 00:05:17) 3. 성장과정 (00:05:18 00:21:42) 4. 대학시절과 한국전쟁-1 (00:21:43 00:50:39) 이만섭1-2.mp4 5. 대학시절과 한국전쟁-2 (00:00:10 00:09:35) 6. 기자시절에 겪은 4.19와 5.16 (00:09:35 00:52:11) 이만섭1-3.mp4 7. 박정희 의장 단독 인터뷰 (00:00:10 00:23:48) 8. 1963년 대통령선거와 정계입문 (00:23:49 00:41:06) 이만섭1-1.mp4 1. 시작멘트 : 일시 및 연구진 소개 (00:00:11 00:00:40) 면담자 : 본 면담은 국회도서관 국회기록보존소에서 수행하는 역대 국회의장단 구술기록 아 카이브 구축 사업의 일환으로 진행됩니다. 오늘 구술해주실 분은 이만섭( 李 萬 燮 ) 전 국회의장님이십니다. 일시는 이천십삼(2013)년 시(10)월 십(10)일 목요일이고, 면 담은 명지대학교 손동유 연구교수입니다. 촬영은 송기윤 감독이고 이만섭( 李 萬 燮 ) 의장님의 일(1)회차 면담을 시작하겠습니다. 2. 최근 근황 (00:00:41 00:05:17) - 1 -
면담자 : 의장님 안녕하십니까? 구술자 : 안녕하세요? 면담자 : 바쁜데 시간 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구술자 : 천만에요.. 면담자 : 최근에도 저희가 언론 보도 등을 통해서 의장님을 간접적으로 뵐 기회가 있었는데 요. 현재에도 정치적으로나 우리 사회세태에 대해서 귀중한 얘기, 쓴 소리 많이 해 주고 계신데,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잠깐 근황부터 말씀해주시죠. 구술자 : 지금 말씀한 바와 마찬가지로, 많은 시간을 언론인들과 만나게 돼요. 왜냐하면, 각 티비(TV)마다 어려운 문제가 있을 때마다 나보러 나와서 시사토론을 통해서 좋은 이야기를 해달라 그래서, 내가 몸을 아끼지 않고 전부 나가고 있어요, 지상파든 케 이블티비(cable TV)든 간에. 나는 지금 어느 당에도 속하지 않는, 상임고문 같은 것을 맡지 않고 있거든요. 그야말로 중립이야 나는, 또 객관적 입장에 있고. 이래서 그래도 한평생 정치를 했기 때문에, 현실 문제를 어떻게 타결해나가는 게 좋으냐 하는 것을 내가 있는 그대로 제시를 하고 있어요. 또 여당의 잘못한 점, 야당의 잘 못한 점, 전부 내가 충고를 하고 있어요.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어요. 면담자 : 아, 그러시군요. 구술자 : 내가 내 남아 있는 소원은 내 살아있을 때까지 바른 소리 하다가, 죽을 때는 당당 하게 웃고 죽는 게 내 소원이에요. 면담자 : 오래오래 건강하셔야죠. 구술자 : 모르겠어요. 뭐 한 이삼(2-3)년 더 살까. 면담자 : 별 말씀을요. 건강은 괜찮으시죠? 구술자 : 그래요. 괜찮아요. 예. 면담자 : 제가 뵙기에도 아주 혈색도 좋으시고 건강해보이십니다. 작년 말이죠, 대통령 선거 를 통해서 박근혜( 朴 槿 惠 ) 대통령이 당선이 됐는데요. 전체 임기를 보면 인제 아직 시작 단계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현 정부와 박근혜( 朴 槿 惠 ) 대통령께 바라는 기 대와 주문이 있으시면 말씀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구술자 : 박근혜( 朴 槿 惠 ) 대통령은 잘하고 있어요. 소신대로 잘하고 있다고요. 에. 그런데 지 금 박근혜( 朴 槿 惠 ) 대통령이 취임 후 지금까지 하는 것 보면 영국의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수상 많이 닮았어. 면담자 : 아, 그렇게 보십니까? 구술자 :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밀고 나가는 추진력이 있고, 더구나 이 한반도를 위한 복잡 한 정치정세 하에서, 국제정세 하에서 잘 나가고 있다고 봐요. 다만 앞으로는 대처 (Margaret Hilda Thatcher) 수상 플러스(plus) 독일의 메르켈(Angela Merkel) 총리 - 2 -
처럼 좀 더 대화하고, 문을 열고 그리고 항상 어머니와 같은 마음으로 그런 리더십 (leadership)도 앞으로는 더 필요하겠다는걸 느낄 때가 있어요. 그러고 일부에서는 수첩공주니, 불통이니 그러는데, 지금 이 복잡한 나라를 끌고 가는데, 확고한 소신 이 있어야지. 그저 우왕좌왕( 右 往 左 往 ), 좌고우면( 左 顧 右 眄 )하다가는 나라가 죽도 밥도 안 된다구요. 대체적으로 잘한다고 봐요. 문제는 그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박 근혜( 朴 槿 惠 ) 대통령과 함께 죽을 때까지 박근혜( 朴 槿 惠 ) 대통령을 모시겠다 하는, 철학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소신을 가지고 일해주면 좋겠어요. 지난번에 진영( 陳 永 ) 보사부장관 보니까. 면담자 : 사퇴하셨죠? 구술자 : 혼자 노인복지연금하고 국민연금하고 연계시키는게 잘못이다. 잘못이면 대통령한테 직접 만나서 건의를 해야지.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이러고 그만두면 그럼 대통령 이나 딴 사람 뭐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나는 그런 눈치 보고 왔다 갔다 하는 사 람 필요 없고, 확고한 소신을 가지고 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과 같이 나가면 좋겠 다 그런 생각을 해요. 3. 성장과정 (00:05:18 00:21:42) 면담자 : 네. 잘 알겠습니다. 대체로 긍정적으로 보고 계시면서 대통령 주변 분들에게 주문 삼아 몇 가지 해주신 걸로 알겠습니다. 구술자 : 그래요. 면담자 : 네. 의장님 본격적으로 정치활동과 관련된 질문을 드리기 전에요. 여러분들이 알고 계시는 부분도 있지만 성장하실 때의 스토리(story)는 많은 분들이 잘 모르거든요. 그래서 조금만 어린 시절 이야기를 좀 여쭙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말씀해주신 전체 적인 이야기가 좀 인제 맥락을 잘 갖게 되니까요. 저희가 자료를 보니까 삼십이 (32)년에 대구에서 출생하신 걸로 되어 있구요. 고등학교까지는 대구에서 지내시다 가 연세대학으로 진학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대학 진학하시기 전, 고등학교 때 까지 부모님이나 가정생활은 어땠으며 가정교육이랄까 또 학교에서 학창시절에 뭐 이렇게 즐겨하시던 일이며 이런 얘기를 잠깐 좀 옛날 얘기 삼아 들려주시면 좋겠 습니다. 구술자 : 나는 어릴 때 우리 집이 비교적 부유했어요. 아버지가 정미소를 했으니까 어, 비교 적 잘 살았어요. 그런데 내가 어릴 때 완전히 개구쟁이야. 아버지 애를 많이 먹였 다구요. 예를 들면 아침에 아버지 자전거를 내가 몰래 가지고 나가서 자전거 타는 거 연습한다고 자전거를 완전히 부셔가지고 들어온다든가 또는 아침 일찍 잠자리 - 3 -
채 들고 잠자리 잡으러 나가면 저녁 늦게까지 안 들어와가지고 어머님이 대구 달 성공원 뒤쪽에 서부국민학교 옆에 연못이 있어요. 거기까지 막 내 이름을 부르면서 찾아다니셨다던 거나. 하도 개구장이고 말을 안 들으니까 아버지가 만 여섯 살 때 국민학교에 넣었어요. 면담자 : 일찍 학교에 넣으셨군요. 구술자 : 그런데 그땐 유치원이 없으니까 바로 국민학교에 넣었지. 그래 내가 대구 수창초등 학교, 그 당시는 국민학교지. 수창초등학교에 만 여섯 살에 들어갔어요. 그런데 그 때는 신학기가 사(4)월 일(1)일이니까, 삼(3)월 말까지는 한 살 어려도 학교서 봐준 것 같애. 그러니까 내 동기생들이 대개 나보다 한 살, 두 살이 많았어요. 그래가 내 가 국민학교를 다녔어요. 근데 국민학교 다닐 때 지금도 두 가지 내가 잊지 못할 일이 있는데, 나는 이름이 만섭( 萬 燮 )인데 내 동생이 천섭( 千 燮 )이라고 있었어요. 천( 千 ), 만( 萬 ) 뭐 이래 되지. 근데 천섭( 千 燮 )이가 나보다 훨씬 잘생기고, 몸도 좋 았고, 그랬는데 내가 오(5)학년 때니까 그 애가 이(2)학년 때야. 나보다 삼(3)년 아 래니까. 학교에서 공부시간에 선생님이 들어오기 전에 교실에서 좀 떠들었다 그래 가지고 일본 선생이 젊은 음악선생이야. 일본 선생이 그 아이를 업어치기를 몇 번 했다고요. 면담자 : 어유, 그 어린 아이를. 구술자 : 그래가 뇌를 다쳤어. 뇌를. 그래서 의식불명이 되서 바로 대구 동산병원에 갔는데 가자마자 바로 죽었다 이 말이야. 우리 어머니가 땅을 치고, 미친 듯이 막 통곡하 는 그 장면을 지금도 기억을 해요. 일본이 그랬다구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내가 기 억나는 것은 국민학교 육(6)학년 때 우리 반에 그때 이름이 하야시(はやし)야. 임 ( 林 )가야 임( 林 )가. 일본 이름이 하야시(はやし)인데 이 친구는 친구들하고 같이 뭐 이야기할 때도 언제든지 일본말로 쓴단 말이야. 나는 그래서 일본 학생인가 이래 생각을 하고, 그 친구를 데리고 야. 너희 집 가보자. 해서 집에 가봤어. 가봤더니 대구 원정통에 아주 큰 양복점이야. 양복집이라고. 근데 그때 대구 시내에 양복집 이라는 게 뭐 한두 군데 있을까? 큰 부자야. 근데 분명히 한국아이인데, 자꾸 일본 말하고 이래서 그다음 날 학교에서 내가 끌고 나가가지고 학교 뒷담 있는데 데리 고 나가가지고 내 좀 패놨다고, 때렸다고. 그 친구가 이제 코피를 흘리면서 담임한 테 가서 일렀다 이 말이야. 어. 그래, 담임선생 이름이 나카노(なかの)인가. 그래, 담임선생이 날 데리고 바로 우리 아버지한테 갔어, 퇴학시킨다고. 그러니까 아버지 가 막 손이야 발이야 빌고 이래가지고 퇴학은 면했어요. 그러나 중학교 들어갈 때, 그때 대구에서 대개 좀 집안이 괜찮다는 사람들은 대구 경북중학교로 갔어. 서울로 말하면 경기중학교와 같은 거야. 근데 나는 이제 입학원서를 안 써주니까 이(2)차, - 4 -
그러니까 그걸 후반기라 그러나? 면담자 : 후기라고 그러지요. 예. 구술자 : 후기. 대륜중학교로 갔다구요. 그러나 그 대륜중학교 간 것이 나를 오늘 날 나라를 위해서 그래도 바른 일을 할 수 있게 한 계기가 됐다, 이렇게 생각을 해요. 면담자 : 아, 왜 그러시죠? 구술자 : 왜냐하면 그 대륜중학교라는 곳이 민족사학이야. 민족사학인데 삼일(3.1)운동 때 영 남 대표로, 대구 경북 중심으로 영남 대표로 참여했던 분, 정운기( 鄭 雲 騏 ) 선생을 비롯해서 세 분이 모여가지고 우리가 이 나라 독립을 해서, 나라 다시 찾을라면 젊 은 인재들에게 교육이 필요하다 이래가지고 이상화( 李 相 和 ) 선생 있잖아요. 면담자 : 시 쓰시, 시인 이상화( 李 相 和 ). 구술자 : 어. 저항시인. 면담자 : 네. 저항시인 이상화( 李 相 和 ). 구술자 : 이상화( 李 相 和 ) 선생의 집, 서재 이름이 경교장( 京 橋 莊 )이야 1). 거기 모여가지고 학 교를 세우기로 하고, 이상화( 李 相 和 ) 선생이 자기 사재를, 이상화( 李 相 和 ) 선생 잘 살았다고 집이, 자기 사재를 전부 집어넣고. 이 양반이 대륜학교, 중학교 선생하면 서도 봉급도 물론 안 받고 자기 사재를 털어 넣고 그런 민족주의 학교예요. 내가 거기서, 그리고 예를 들면 독립운동 하다 돌아가신 청포도 이육사( 李 陸 史 ) 시인 이런 분이 내 선배야. 그런, 그런 민족주의 학교에서 내가 독립정신을 배우고, 정의 를 배우고, 나라를 우리가 사랑할 줄 알고 이런 마음을 배웠다 이 말이야. 그러니 까 나에게는 아주 고마운 학교예요. 그래서 일제 때도, 난 중학교 이(2)학년 때 해 방이 됐는데 일제 때 일본 제국주의가 중학생들 공부가 없어. 아침부터 밤까지 공 장에 가서 일하거나 또는 산에 가서 송진을 따요. 송진을 왜 따느냐. 비행기 기름 이 없으니까. 송진을 따오고 이랬거든. 우리가 산에 송진 따러 가면 우리끼리 모여 가지고 김구( 金 九 ) 선생 이야기, 또 이승만( 李 承 晩 ) 박사 이야기, 그때도 김일성( 金 日 成 )이 이야기도 많았어. 뭐냐면 보천보 전투. 면담자 : 있었으니까. 예. 구술자 : 들어와가지고 이, 일본 경찰서 습격하고 하는, 그러니까 김일성( 金 日 成 )이 이야기 이런 게 많이 나왔어. 그리고 일본이 꼭 망한다 하는 이야기를 우리끼리 밤나 모이 면 했다구요. 그런 학교야. 그런데 한 가지, 이걸 공개를 할 수도 있는 문젠데, 그 러니까 우리 학교는 일제 때 일본 선생 반, 한국 선생 반 이런데 학교 공부시간에 도 선생님들이 예를 들면 국회의장 했던 이효상( 李 孝 祥 ) 선생 또는 경북 문리대학 1) 구술자가 담교장( 談 交 莊 ) 을 착각한 것으로 보임. - 5 -
장 하셨던 이규동( 李 揆 東 ) 선생이라고 있어요. 이 양반 영어선생인데 나중에 인제 우리 대륜 교장도 하시고, 경북여중 교장도 하셨는데, 이런 선생이 학교 공부시간 에도 조선말하고 이랬다구요. 그땐 조선말이라고 그랬거든. 조선말하고 이랬어. 복 도에 형사가 있나 없나 하는 걸 이렇게 보고는, 조선말하고 이랬다고. 그리고 이규 동( 李 揆 東 ) 선생은 사육신( 死 六 臣 ) 같은 걸 이야기해주고, 그래, 우리 젊은 소년들 에게 독립정신을 길러준 거야. 그런 학교였는데 체조 선생은. 면담자 : 체조. 구술자 : 체조 선생이 그때 교감이셨는데 김준기( 金 準 基 ) 선생님이야. 이분이 인제 학교 교감 이니까 자기 책임도 있겠지마는 학생들끼리 운동장에서 놀 때 한국말 하는 학생도 잡아가지고, 기합을 넣고, 처벌을 하고, 이랬다 이 말이야. 그래서 우리 학생들한테 굉장히 좋지 않는 인상을 줬다구요. 면담자 : 그랬겠습니다. 구술자 : 본인은 이제 훈육을 겸해서 교감을 맡아 있으니까 할 수 없이 그랬겠지마는 우린 아주 인상이 안 좋았거든. 근데 해방이 되자 천구백사십오(1945)년 해방이 되자 대 구에 대구중학교 그리고 대구여중 여기 학생들은 전부 일본 학생이야. 대구중학교 는 서울에 아마 서울중학교하고 같을 거예요. 전부 일본 학생이고 한 크라스(class) 에 한 사람씩 친일파 아이들만 들어가 있었다고요. 그래, 일본 학생들 다 들어가고 대구여중도 일본 학생들 다 들어가고 학교는 텅텅 비었잖아. 그러니까 모두 막 다 편입을 하고 이랬는데, 그동안 학교 못 갔던 사람들, 가정이 어렵던 사람들, 전부 이제 해방 후에 그 학교에 편입해 들어갔지. 그때 우리, 내가 이야기하는 김준기 ( 金 準 基 ) 선생이 대구여중에 교장으로 가셨어. 면담자 : 아, 여기 교감으로 계시다가 인제 글로. 구술자 : 어. 교장으로 가셨거든. 그러다가 내가 삼(3)학년 때 대륜의 교장으로 오시게 됐어. 그러니까 아, 일제 때 한국말 한다고 처벌하던 선생이 교장으로 온다니까 우리 정 의감에 가만히 있을 수 있어요? 면담자 : 그렇죠. 구술자 : 내가 삼(3)학년인데 어, 교장배척투쟁위원회 위원장을 했어 내가. 면담자 : 중학교 삼(3)학년 나이에. 구술자 : 삼(3)학년 때. 사(4)학년도 있었는데 아, 내가 제일 아마 앞장섰던가 봐. 그래서 내 가 투쟁위원장이 됐거든. 그런데 대구경찰서의 형사가 우리 집에 왔어. 나는 뭐 뒷 문으로 도망을 갔지마는. 근데 마침 그 형사가 우리 아버지를 잘 아는 사람이야. 우리 아버지 보고 어차피 학생이 질텐데 어, 큰일 납니다. 그러니까 빨리, 삼(3)학 년인데 뭐 사퇴하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하는 이야기를 우리 아버지한테 하고 - 6 -
갔어요. 그렇다고 내가 사퇴할 수는 없잖아. 아. 그래 또 그 사람이 하는 소리가 이 뒤에는 좌익이 있습니다. 그때는 이승만( 李 承 晩 ) 박사 때는 으레이 정부에 반 대하거나 당국에 반대하면 으레이 좌익이 조정했다 뭐 이런 식이거든. 그런데 그와 별도로 그 당시 체육, 체육선생 반기화( 潘 基 華 ) 선생이라고 있었어요. 반기화( 潘 基 華 ) 선생이라고. 면담자 : 반( 潘 ), 반( 潘 ) 씨십니까? 구술자 : 반( 潘 ), 반( 潘 ) 씨야. 반기화( 潘 基 華 ) 선생이 아주 훌륭하신 분인데 이 분이 나를 참 사랑하셨어. 그 선생님이 우리 집에 오시더니 여봐 이군, 사(4)학년이 투쟁위원장 을 맡아서 하지, 왜 삼(3)학년이 맡아서 하나? 어? 내가 볼 때는 앞으로 이게 문제 가 될 텐데, 안 하는 게 좋겠다. 하고 인제 날 걱정해주시더라고. 그래놓고는 그 반기화( 潘 基 華 ) 선생이 학교에 가셔가지고 사(4)학년들 전부 모아놓고 야! 이 비겁 한 놈들아. 너희들이 앞장서야지 왜 삼(3)학년한테 슬그머니 미루느냐. 비겁하잖 아! 이거 또 사(4)학년이 생각하니까 그 말이 맞거든. 도중에 개편을 했어, 투쟁위 원회를. 그래, 사(4)학년이 모두 맡아했지. 나는 끝까지 하고 싶었지만, 하여간 그런 분위기에서 나는 투쟁위원회에 빠졌다 이 말이야. 그래, 결국 학생들이 졌지. 그래 한 다섯 명 퇴학당하고, 한 다섯 명 무기정학당하고 그랬어. 그때 반기화( 潘 基 華 ) 선생 아니면 내가 나도 퇴학당했을는지 모르지. 그게 제일 기억에 남아요. 기억에 남는다고. 면담자 : 아. 그런 경험이 있으시군요. 구술자 : 그때만 해도 이승만( 李 承 晩 ) 대통령은 이,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지마 는 일제 때 고등계형사니 뭐니, 일제 때 악질 형사들이고 뭐고, 전부 활용을 했다 고. 그러니까 으레이 좀 당국이나 정부에 싫은 소리 하고 이러면 저 뒤에 뭐 공산 당이 있다 노상 그런 식이었다고. 그 이른바 관제 공산당인데, 그런 일이 있었어. 그래서 내가 삼(3)학년 때 그런 일이 있었다 하는 걸 내 참고로 말씀드려요. 면담자 : 고등학교 진학하실 때는 그래서 문제가 되진 않았습니까? 그 중학교 때 투쟁위원회 하고 이랬던 게? 구술자 : 그때는 중학교 육(6)년제야. 면담자 : 아, 맞습니다. 구술자 : 고등학교가 없었어. 우리는 중학교 육(6)년이야. 중학교 일(1)학년 들어가면 육(6)학, 육(6)학년까지 계속 가잖아. 이 고등학교라는 게 언제 생겼느냐. 육이오(6.25)전쟁 이후에 이제 고등학교가 생겼어요. 내가 있을 땐 고등학교라는 거 없었어. 4. 대학시절과 한국전쟁-1 (00:21:43 00:50:39) - 7 -
면담자 : 네. 그러셨군요. 대학은 연세대학교로 유학을 오시는 개념이죠? 대구에서. 가족 어 르신들과 다 함께 오십니까 아니면 혼자서 오십니까? 대학 진학하실 때요. 구술자 :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사업을 잘 하셨는데 해방 후에 사업을 실패를 하셨어요. 그 래, 굉장히 인제 어렵게 됐어, 우리 가정이. 그래서 돌아가신 아버님은 나를 대구의 과대학에 가라고 자꾸 그러셨단 말이야. 면담자 : 의과대요. 구술자 : 의과대학. 대구에서 공부하라고, 의대를 가라고. 근데 나는 그게, 대구에 의과대학 가는 게 만족지 않아가지고 서울에 갑니다. 이래가지고, 내가 우겨가지고 서울에 시험을 쳤단 말이야. 그게 천구백오십(1950)년도야. 면담자 : 네. 전쟁 바로 전에. 구술자 : 오십(50)년도인데, 내가 생활이 어렵고 이런 줄 알고 내 담임선생하고 아까 이야기 한 반기화( 潘 基 華 ) 선생하고 이분들이 애를 써서 입학금 전액을 장학금으로 받았 고, 그리고 또 선생님들이 얼마씩 거출해가지고 한 달 치 하숙비하고 입학금 전액 하고 그걸 내가 학교의 덕을, 신세를 졌지. 그래가 그걸 딱 가지고 서울에 왔다 이 말이야. 그래가 인제 한 달 하숙비를 내놨으니까, 한 달 지나면 가정교사를 할라고 우리나라 삼십삼(33)인 중에 한분 이갑성( 李 甲 成 ) 씨가 있잖아요? 이갑성( 李 甲 成 ) 선생이 우리 졸업식 때, 그 양반 그때 이(2)대 국회의원을 대구서 출마하셨거든. 그 래, 큰 고등학교 졸업식에 일일이 참석을 하셨어요. 오셔가지고 내가 송사를 읽는 걸 보고 저렇게 훌륭한 학생이 있나, 하면서 나를 부르시더니 서울에 오면 꼭 집에 오라고 이러시더라고. 그래 내가 한 달 다 이제 돼가니까 이갑성( 李 甲 成 ) 선생을 찾아가야 되겠다. 다음에 인제 하숙비가 없으니까, 가정교사 구할라고. 그래 갔더니 이갑성( 李 甲 成 ) 선생이. 면담자 : 기억하세요? 구술자 : 돈암동인가 계셨어. 면담자 : 의장님을 기억하세요? 이갑성( 李 甲 成 ) 의원이? 구술자 : 알고 말고. 그러더니 가정교사를 구해주시겠다고 그리 이야기를 하셨거든. 그런데 우리는 그때 유(6)월 일(1)일날 개학했어, 대학이. 일(1)일 날 개학했는데 유(6)월 이십오(25)일 날 육이오(6.25)가 났잖아. 아, 하숙비가 떨어지자, 육이오(6.25)가 난 거야. 그런데 내가 분명히 이야기할 것은 우리나라 일부 진보학자들 또는 일부 종 북세력들이 육이오(6.25)가 북침이다 하는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거 는 말도 되지도 않는 이야기야. 우리가 대학교 일(1)학년 땐데, 그날도 일요일이야. 일요일 날 새벽에 이북에서 남침을 했다고 기습적으로. 대한민국 군인들은 전부 외 - 8 -
출 나가고, 외박 나가고, 군은 텅텅 비었어. 우리가 북침한다면 그러나? 그래가 나 중에 급하니까 내 기억에 헌병대 차들이 다니면서 마이크를 붙들고 국군 여러분, 지금 북한이 남침을 했으니까 빨리 군대로 돌아오십시오. 빨리 군대로 빨리 돌아 오라고 방송하고 다녔다니까. 그러니까 새벽에 들어왔다고. 그런데 우리나라 라디 오(radio)를 틀면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지금 북진 중입니다. 노상 그 이야기만 해놓고는 군가 하나 틀어놓고는, 라디오(radio) 틀면 그 말밖에 없어. 그리고 정부는 전부 다 피난 가지 않았어. 한강 다리 끊고. 정부는 대전으로 갔다가 나중에 대구로 가지 않았어요. 한강 다리 끊고 이랬으니까 꼼짝없이 우리들 은 모두 다 서울에 갇혀있었지. 면담자 : 의장님 그때 혼자 계실 땐가요? 아니면 가족분들이. 구술자 : 아니, 아니야. 물론 내 혼자지. 면담자 : 그죠? 가족분들 다 대구 계시고. 구술자 : 물론. 하숙비 가지고 왔다 그러잖아. 근데 그래가 이십오(25)일 날 육이오(6.25)가 났는데, 이십칠(27)일 날 밤에 말이야, 나는 서대문 충정로에 하숙했으니까, 골골골 골골골 하는 소리가 밤새도록 나더라고. 그 이상하다고 이십팔(28)일 날 아침 일찍 나가보니까, 소련 탱크(tank)를 앞세우고 북한군이 보무당당( 步 武 堂 堂 )하게 탁 들어 오더라고. 그러니까 홍제동에서 독립문으로 해서 서대문으로 인제 들어오는 거야. 그러니까 양쪽에 서있던 시민들이 어이가 없어서 가만 바라보는 사람도 있고, 마지 못해 박수치는 사람도 있고, 그래 됐다구요. 그런데 이제 나는 칠(7)월 십(10)일경 에, 그러니까 육이오(6.25)가 딱 나니까 벌써 하숙집에서 그때는 쌀이 귀하고 난리 가 났으니까 육이오(6.25) 딱 나니까 밥을 안 주더라니까. 한 달 치 냈으면 유(6)월, 유(6)월 삼십(30)일이가? 삼십(30)일까지 줘야 될 거 아니가. 밥도 안 줘. 그래서 저 양평에, 먼 친척이 살고 있는 농촌마을에 가서 하루 일해주고 감자를 잔뜩 또 사가 지고 와서, 얻어가지고 와서 감자 삶아먹고, 나중에 우리 중학교 동창들 대학, 고려 대학 다니는 친구들 뭐 어, 집집마다 다니면서, 그 친구들은 또 밥은 하숙집에서 주더라고, 눌은밥 얻어먹고 있다가 칠(7)월, 칠(7)월 칠(7)일경인가 난 대구로 내려 갔어. 나하고 같이 하숙했던 사람이 김경덕이라고, 그 양반이 선산 사람이야. 그러 니까 둘이 같이 걸어서 내려갔다고. 나중에 보니까 칠(7)월 십오(15)일경에 연대 학 생들 전부 학교 모이라고 연락 해갖고 이래가지고 학생들이 가니까 그대로 전부 이북 인민군으로, 인민의용군으로 다 데려가버렸어요. 우리는 그 전에 이제 대구로 내려왔다 이 말이야. 그렇게 인민의용군에 전부 강제로 끌려갔다가 나중에 포로가 돼서, 인민군에 편입됐다가 포로가 된 사람도 있고,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 석방 때 나온 사람도 있고, 민족의 비극이야. - 9 -
면담자 : 대구로 내려가실 때 쉽지 않으셨을 텐데 걸어서 그렇게 내려가셨어요? 구술자 : 걸어서 내려갔지. 면담자 : 예. 친구 분하고 딱 둘이서. 구술자 : 지금 워커힐 있는 거기 광나루야. 면담자 : 네. 광나루요. 구술자 : 광나루 인제 그땐 나룻배라 그러나? 배가 다녀서 광나루 건너가지고 갔는데 내 기 억에 경기도 이천 거쳐서 장호원에서 낙동강 쪽으로 내려간 거야. 그러니까 상주 쪽으로 내려갔지. 근데 인민군 최전방 가는데 바로 뒤에 따라갔으니까. 그 인민군 장교들이 정훈장교인가 봐. 학생 학생. 하고 불러요. 어디 가느냐고, 대구 간다 그 러면 소지품 보자고. 뭐 콘사이스(concise) 하나 들고 있으니까. 학생증하고 콘사이 스(concise)만 들고. 그런데 그 사람들 잡아가고 이렇지도 않고, 대구로 간다니까 대구 빨리 가시라고. 가서 우리가 곧 대구 들어갈 테니까 환영준비나 하라고. 어, 자신만만하더라구요, 그 친구들도. 그렇지, 유엔(UN, United Nations, 국제연합) 2) 군 이 안 올라왔으면 우리가 없어졌을 거 아니야. 그래서 낙동강 마지막 나룻배 건너 는데, 낙동강을 마지막에 이제 타고 건넜더니 선산 장천이 나왔어. 그 친구 집은 선산 장천이고, 나는 거서 마지막 대구로 가는 버스를 타고, 대구 들어간 거야. 그 때 고생했어요. 한 일주일? 산에서 자고, 밥이라고는 먹어본 일이 없고 주로 참외 따먹고, 수박 따먹고 뭐, 그렇게 해서 걸어가는 거지. 그래서 대구에 내려갔어. 내 려갔는데, 그때 육이오(6.25) 때 서울대학하고 연세대학은 부산에 피난 갔고, 고려 대학은 대구로 피난 왔어. 근데 육이오(6.25)전쟁 때라도 대학생들은 징집 보류가 됐다고. 군대 가는 게 보류가 됐었다고. 그러니까 연세대학은 부산의 영도에 있었 는데, 가교사. 그 분위기 어떤가 하고 나도 이제 복교를 할까 하고 가봤어. 가봤더 니 전쟁 중인데 대학 다니는 친구들이 패잔병처럼 보이더라고. 아이고 나는 군에 간다. 지금 전쟁 중에 뭐 공부가 뭐야. 군에, 기왕에 군에 갈 바에야 공군으로 간 다. 저 높은 하늘에 내 이상을 두고, 이 나라, 조국의 하늘을 지키겠다. 이래가지고 공군에 간 거야. 공군사관학교 삼(3)기생이야. 면담자 : 예. 그러니까 자원해서 공군사관학교에 들어가신 거죠? 구술자 : 아. 물론. 물론. 면담자 : 그때도 공군사관학교는 지금 같지 않을 텐데 몇 년제 교육과정이었나요? 구술자 : 지금하고 거의 같은데 공군사관학교 일(1)기는 육이오(6.25) 전에 임관해가지고 육 이오(6.25)때 출격들 하고 있었고. 2) 전쟁 방지와 평화 유지를 위해 설립된 국제기구. 활동은 크게 평화유지활동 군비축소활동 국제협력활 동으로 나뉘며, 주요기구와 보조기구 전문기구로 구성되어 있다. - 10 -
면담자 : 장교로서 출격도 하고 그러고 있었고. 구술자 : 그렇지. 이(2)기생은, 이(2)기생하고 바로 우리가 또 삼(3)기로 들어갔거든. 근데 그 때는 내 중학교 후배가 이(2)기로 바로 들어간 사람도 있고, 육이오(6.25) 직후에 간 사람은 이(2)기야. 우린 조금 있다가 갔으니까 삼(3)기고. 그런데, 내가 그때 공 군사관학교 학생회 회장을 했어. 오성회라는 걸 조직을 했어. 내 학생회장을 했거 든. 내가 공군사관학교 입학식 때도 제일 앞에 서서 학생대표로 사열, 분열을 내가 지휘를 하고 이랬다고. 그때 팔(8)군사령관 테일러(Maxwell Davenport Taylor) 장 군이 와서 나하고 악수도 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학생회장을 쭉 하고 있었는데 아, 이(2)년 반 지나고 삼(3)년째, 마지막 사천비행장에 가서 이제 조종훈련을, 조종 연 습을 하기 직전에 대전에 항공병학교에 와서 육군이 하는 거를 전부 이런, 다 학습 을 하고 가요. 면담자 : 대전에 무슨 학교라고 그러셨나요? 구술자 : 어. 육군의 보좌관 : 항공병학교. 면담자 : 항공병학교요. 예. 구술자 : 육군의 아, 소대 공격, 소대 방어 그리고 중대, 대대 공격 대대 방어까지 전부 우리 가 해보고. 왜냐면 잘못하면 우리 비행기가 아군을 때릴 때가 있단 말이야. 그래, 그건 전부 이런 학습을 하고 가요, 그리고 마지막 권총 사격까지 다 하고. 인제 내 일은 사천에 비행기 타러 가는데, 그날 밤에 여기 뭐 빽(back) 3) 있는 사람들, 대학 교 이(2)학년, 삼(3)학년짜리들이 어, 행정장교로, 공군 행정장교로 들어왔다 이 말 이야. 육(6)개월 해가지고 이제 공군 소위야. 행정장교들이야. 근데 그 사람들이, 지 금은 내가 이해가 가지마는, 내일 소위로 임관하는 시기인데 유성에 가서. 면담자 : 유성요. 예. 구술자 : 술을 잔뜩 먹어가지고 막 신라의 달밤 을 부르고 이래 들어온다. 우리 삼(3)기생들 이 지내고 있는 콘세트(Quonset) 바로 그 맞은편에 있었는데. 뭐, 전시에 그래, 내 일 공군 소위 된다는 친구들이 유행가 부르고 떠들고 이래가 되겠어? 그래서 우리 삼(3)기생의 불침번이 정지해! 누구야!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술이 취해가지고 뭐 공군사관학교면 제일이야? 어? 조종사면 제일이야? 이런 식으로 자꾸 시비를 걸었다 이 말이야. 그래서 큰 싸움이 벌어졌어. 그래, 나는 콘세트(Quonset) 제일 저쪽 가에 있었는데, 그 소식을 듣고 전부 내가 자는 콘세트(Quonset)에 전부 모았 어, 우리 삼(3)기 사관들을. 그래 막 흥분해가지고 난리야. 그래 내가 가서 사과를 받을 테니까 좀 진정하라고 그러면서 무기는 갖지 마라. 혁대는 매라. 그리고 왼 3) back ground 의 은어 - 11 -
쪽에 흰 수건을 매라. 밤에 캄캄했으니까, 아군 식별하는 거지. 수건을 매라. 이 래가지고 연병장에 비상! 해가지고 그 행정장교들 있는 콘세트(Quonset)가 큰 게 두 갠가 있었는데, 하나를 포위를 했어. 그래서 내가 들어가서 내 삼(3)기 사관 대 표 이만섭( 李 萬 燮 )이다. 당신들 오늘 행동이 뭐야? 어? 잘못했다고 사과 한마디만 해. 그랬는데 그 사람들은 술이 취해가지고 막 공군사관학교면 제일이야? 어? 이 만섭( 李 萬 燮 )이가 뭐야? 막 이러니까 그 소리가 확 크게 들리니까 포위를 하고 있 던 삼(3)기 사관들이 콘세트(Quonset)에 문이 앞뒤밖에 없었어요. 앞뒤로 확 들어 갔다 이 말이야, 격분해가지고. 들어가니 이 사람들이 앞뒤로 맥했으니까 갈 데가 없잖아. 그래, 콘세트(Quonset) 옆에 유리 있잖아, 프라스틱(plastic) 유리, 그걸 막 깨고 도망가고, 이랬다고. 그런데 불행하게도 들어가는 입구에 카빈(Carbine)총하고 목총이 또 있었다고. 또 과격한 학생들이 그걸 들고 때리고 이래가지고, 한 삼십 (30)명 부상을 하고, 행정장교, 그래가 공군본부에서 난리가 났어. 참모총장을 제외 한 모든 공군본부의 국장들이 전부 대전으로 내려오고, 하여간 문제가 심각해졌다 이 말이야. 그래가 공군사관학교 학생들 한, 열 명 가까이 전부 퇴학처분을 당하고 벌을 받을 뻔했어. 그걸 내가 오성회 회장인데, 학생회 회장인데, 모든 책임은 내가 지고, 그 학생들을 살려달라. 그래서, 그 학생들 살려주고 내가 유치장에 갔지. 그 때 공군본부가 대구에 있었으니까, 전시에. 칠성국민학교에 유치장이 있었어. 그래, 내가 유치장에 내가 갔어. 유치장에 가니까 허리띠도 푸르고, 이러더만. 그래가 군 법회의를 받게 됐단 말이야. 군법회의에서 내가 그러니까 국방경비법 십팔(18)조 사상은, 사상이 아니라 폭동의 책임자로 몰려가지고, 내가 군법회의를 받았다니까. 그래가 형을 받았어. 형을 받아서 바로 그 자리서 헌병들이 또 수갑을 채워가지고, 다시 유치장에 다시 데리고 갔다고. 그런데 당시 최용덕( 崔 用 德 ) 공군 참모총장이 공군사관학교 교장 겸 공군 참모총장이었어. 이분이 날 잘 알거든. 학생회장 하면 서 진해 삼군 사관학교, 육사, 공사, 해사 운동대회가 있으면 내가 가서 응원단장도 하고 이러니까, 날 참 사랑하시던 분이야. 그러니까 우리 공군사관학교 삼(3)기보다 한 오(5)개월 늦게 육사 십일(11)기가 들어왔다고. 그 육사 십일(11)기라는 게 전두 환( 全 斗 煥 ), 노태우( 盧 泰 愚 ) 그, 십일(11)기가 우리보다 한 오(5)개월 늦게 들어왔어. 그래서 내 형무소 있는데 최용덕( 崔 用 德 ) 참모총장이 부른다 그래서, 내가 이 허리 띠 대신에 자크(zipper)를 매고, 그래가 이제 참모총장실에 들어갔어요. 죄인이 들 어간 거야 이제. 그때는 군법회의에서 형을 내리더래도 참모총장이 마지막 결재가 있어야 돼. 기각할 수도 있고 뭐. 그래, 참모총장이 날 붙드시고, 최용덕( 崔 用 德 ) 장 군께서, 총장님이 날 붙들고 내가 한평생 비행기를 탔지마는, 장개석( 蔣 介 石, 장제 스) 총통도 모시고 다니고 이랬지마는 자네 같은 성격은 비행기 타면 꼭 죽는다. - 12 -
그러니까 연대 다니다가 왔다니까, 내가 모든 뒷바라지를 해줄 테니까, 연대 다시 복교를 하라. 고. 이러면서 날 기각하고, 그 대신에 인제 사관학교 연한이 있으니까 삼(3)년 가까이 다녔으니까, 사병으로 전입이 돼가지고, 사병으로 인제 공식으로 군 인사법에 의해서 사병으로 편입이 돼가지고 이등병이야, 공군 이등병야. 그래가 내 가 예편을 했거든. 그래가, 그때는 생활이 어려웠으니까, 공군본부 서울분실이 회현 동에 있었어. 거기 책임자 이름이 박제형 대령인데, 사병들 영어 가르치고 자고, 거 기서 학교 다니고. 아. 면담자 : 학교도 같이 다니신 거예요? 구술자 : 그렇게 해서, 그래가 내가 천구백오십삼(1953)년에 어, 연세대학교 정외과 다시 복 교를 했어요. 복교해가지고 다닌 거예요. 면담자 : 예. 그때 일(1)학년으로 복교하셨나요 그러면? 구술자 : 아니지. 학교, 그때 대학교야 뭐 일(1)학년 이(2)학년이 있나. 몇 학번, 학번인데 그 러니까 사(4)학년 반에도 들어가고, 삼(3)학년 반에도 들어가고, 이(2)학년 반에도 들어가고,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고 그래 인제 필수과목은 또 반드시 해야 되니까 또 일(1)학년 반이라도 꼭 어, 들어가고 이랬지. 그러니까 나보다 삼(3)년 후배하고 내가 같이 졸업하게 되는 거예요. 면담자 : 공군사관학교 다니실 적에요. 그때 전쟁 중에 다니신 거잖아요? 구술자 : 그렇지요. 면담자 : 그때 전쟁에 직접 참전하시진 않고 훈련만 받으셨었던가요? 구술자 : 그렇지. 나는 전투조종사가 될라고 했는데 도중에 그런 일이 있어서 사병으로 이제 예편하고 공군사관학교, 연대 복교를 했다 이 말이야. 면담자 : 복교해서 다니신 거군요. 구술자 : 휴정 협정 맺는 천구백오십삼(1953)년에 연대에 다시 복교를 했어요. 복교를 하니까 내 졸업반들이 모두 나하고 입학 동기들이 모두 졸업논문 쓰고 졸업준비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때 동기생이 내 기억나는 사람이 하와이대학에 교수하던 서대숙( 徐 大 肅 ) 박사. 면담자 : 아, 서대숙( 徐 大 肅 ) 박사님이 동기세요? 구술자 : 그렇지. 또 건국대학 대학원장 하던 조재관( 趙 在 瓘 ), 또 고려대학 교수 오래 했어, 한배호( 韓 培 浩 ). 근데 한배호( 韓 培 浩 )나 이 서대숙( 徐 大 肅 )이는 육이오(6.25)가 나자 바로 연락장교로 갔어, 이 사람들은. 연락장교로, 통역장교로 있다가 바로 미국으로 간 거라고요. 그때 뿔뿔이 흩어졌으니까. 아. 그랬어요. 그래 연대 다녔는데, 연대 정을 붙여야 되겠단 말이야, 후배들하고 같이 공부할라니까. 정을 붙여야 되겠어. 그래가 내가 제일, 학생 중에 제일 끗발 있는 게 뭐야? 그랬더니 내가 뭐 후배들 - 13 -
이 하니까 학생회장 같은 건 할 수 없고 뭐야? 그랬더니 응원단장이래. 좋다. 그 럼 내가 오늘부터 응원단장이다. 이래가 연대 응원단장을 한 거예요. 면담자 : 별명이 털보 응원단장 이시던데요. 젊으셨을 때 이, 수염이 많으셨나 봐요. 구술자 : 그때 연대 털보 응원단장이라고 그래서 요새 말로 날렸다고. 왜 그러냐. 그때는 운 동 프로가 없었다 이 말이야, 프로 없이. 그러니까 연고전을 하게 되면 일본의 소 케이센(そうけいせん, 早 慶 戰 ), 영국의 옥스퍼드 예일 뭐 하듯이. 연고전 하게 되면 완전히 서울시민의 축제야. 근데 내가 응원단장을 했으니까. 그때는 수염을 길렀어 요. 응원단장이니까 뭘 좀 수염도 좀 턱 있어야 되겠다는, 특색이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있었지마는 사실은 이발 값도 없고 이러니까. 그래, 유명한 털보 응원단장 을 한 거야. 면담자 : 예. 다시 그, 연세대 복교하셔서는요 하숙 생활 계속하시고 뭐 가정교사도 하시고 이러셨어요? 구술자 : 우리 형님이 대구 신명학교 수학선생을 하시다가 서울에 보인상고 수학선생을 쭉 하셨는데, 형님이 봉급을 막 애껴가지고 날 하숙비를 대주고 그래 하다가 미안해서 내가 또 가정교사를 나왔어요. 가정교사를 또 하다가 그때 가정교사는 돈 받고 하 는 게 아니야. 세끼 먹고 자고 아니, 아침저녁 먹고, 자고, 숙식 해결하는 거지. 다 만 등록금 낼 때 학교 등록할 때, 좀 보태주면 뭐 고맙고 그런 거지, 요새처럼 돈 으로 계산하는 건 아니고. 면담자 : 이른바 입주가정교사를 하셨군요. 구술자 : 그렇지. 그때는 그랬어. 근데 가정교사하고 이러다가, 결국은 나중에 김사익이라는 내 친구, 정외과 동기동창인데 이 친구 집이 사직동에 잘 살았어요. 자기하고 같이 있자 그래서 그 사람하고 같이 있었어요. 하여간 나는 연대 다닐 때 내가 사(4)년 간 점심을 먹어본 일이 없어. 돈 있는 친구들은 점심 때 되면 식당에 가서 곰탕 사 먹고, 뭐 해먹고, 어떤 친구들은 이제 도시락에 밥만 넣어가지고 가서, 식당에서 곰 탕 국물 얻어다가 국물에 말아먹고, 나는 점심시간이 되면, 뒷산에 올라가서 드러 누워가지고, 흘러가는 구름도 보고, 내일도 생각하고, 이래 있다가 시간 되면 내려 오는 거야. 내려올 때는 수돗물에 입대고, 물 잔뜩 마시고, 뭐 밥이나 잘 먹은 것처 럼 또 강의실에 들어와서 큰소리치고 이랬다고요. 사(4)년 동안 내가 밥 먹어본 일 이 없을 거야, 요새 학생들은 그런 고생한 걸 좀 알아야 돼. 우리가 그랬어. 면담자 : 네. 어렵게 다니셨네요. 구술자 : 아. 면담자 : 예. 그, 응원단장이면 요즘도 그, 전통이 있잖아요? 특히 연세대나 고려대학교 같은 경우는. 후배들도 좀 종종 만나고 그렇게 하시나요? 응원단 후배들? - 14 -
구술자 : 그런데 후배들 만난 일은 없는데, 내가 듣기로는 임성훈인가? 그 친구가 응원단장 했다 그러고. 면담자 : 응원단장 출신이라고 그러죠? 구술자 : 또 지금은 그만 뒀다, 내가 아깝게 생각하는데. 공성진( 孔 星 鎭 )이라는 국회의원 있 었어. 새누리당 앞에 공성진( 孔 星 鎭 )이. 면담자 : 아, 공성진( 孔 星 鎭 ) 의원이요? 예. 한나라당 때. 구술자 : 한나라당 때. 그 친구도 날보고 아이고, 의장님 제가 연대 정외과 직계 후배뿐만 아니라 응원단장 후배입니다. 이랬어. 근데 똑똑했다고. 괜찮다, 괜찮다 했는데, 나 중에 어떻게 잘못돼가지고 비리에 걸려가지고, 내가 지금도 마음 아프게 생각을 하 지. 그러니까 정치인들이 항상 자기 몸을 애껴야 돼. 근데 내가 있을 때는, 내가 하 여간 응원단장을 오래 했어. 이, 저, 동아일보 있을 때도, 동아일보 있을 때도 연고 전 있으면 내가 운동장에서 응원해주고. 면담자 : 아, 선배 입장에서 가서. 구술자 : 그렇지. 또 내가 국회의원 할 때도 연고전 있으면, 서울운동장에 가서 응원하고 이 랬다고요. 그러니까 고대 출신 국회의원들이 모여가지고 날보고 항의를 하더라구 요. 그러니까 우리 선배지, 광주의 정성태( 鄭 成 太 ) 의원, 동대문 송원영( 宋 元 英 ) 의 원, 전휴상( 全 烋 相 ) 의원 뭐, 이런 사람들이 아이 아, 이 의원 자꾸 나가서 응원하 니까 고대학생들 우리는 뭐 하느냐고 욕먹으니까 제발 나가지 마라. 고. 면담자 : 아, 그런 일이 다 있으셨군요. 구술자 : 그래서 이제 안 나갔는데 아주 참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대학을 다녔다 고. 면담자 : 네. 잘 알겠습니다. 의장님, 테입을 한번 갈아야 돼서요 잠깐 쉬었다가 더 진행하겠 습니다. 이만섭1-2.mp4 5. 대학시절과 한국전쟁-2 (00:00:10 00:09:35) 면담자 : 의장님, 계속 여쭙겠습니다. 제가 아까 미처 못 여쭤본 게 있어서 제가 한 가지만 여쭤보면, 동생분 먼저 돌아가신 가슴 아픈 말씀도 해주셨는데 형제분은 어떻게 되 세요? 구술자 : 나는 삼(3)형제야. 아까 이야기한 대로 형님은. 면담자 : 선생님 하셨던 형님. - 15 -
구술자 : 학교 선생님 쭉 하시다가 어, 지금은 돌아가셨고 동생은 그래, 천섭( 千 燮 )이는 그래 가 죽고. 그러니까 일본이 그렇게 식민지 때 우리를 그렇게 학대를 하고, 학살을 했다 이 말이야. 에, 그래 내 기록에 남길라 그랬어요. 면담자 : 네. 저희가 잘 남기겠습니다. 그리고 아까 공군사관학교 나오실 즈음 해갖고 뭐 좀 더 해주실 말씀 있으면 지금 더 말씀을 해주셔도 괜찮습니다. 구술자 : 그런데 내가 인제 연대 복귀하기 전에 인제 공군사관학교 그만두지 않았어요? 면담자 : 네. 네. 구술자 : 그때 나는 인제 이등병으로, 편입이 됐으니까 사관학교에 가서 내 사물, 짐을 챙기 고, 그래, 사관학교에서 내가 나올 거 아니야. 그 전날 날 환송식을 했는데 사관학 교 식당에서, 환송식이라는 게 뭐 저녁 먹을 때 빵 두 개씩 더 놓고 이래가 환송식 인데 날보고 노래를 한마디 부르라 그래서 그때 오 데니보이(Oh, Danny Boy), 아! 목동아 그 노래를 내가 불렀다고요. 그래가 그 삼(3)기 사관들이 전부 눈물을 흘리고 울고 이랬다고요. 그래 내가 나오는 날, 사물 메고 나오는 날 자는 병사에 서 밑에 공군사관학교 교문까지 굉장히 길어요. 거기에 사관학교 전 학생들 도열하 고, 심지어 거기에 일하는 문관들 그리고 군의관 간호사까지 전부 도열해가지고 내 가 나가는데 모두 손을 흔들고, 손수건을 흔들고, 그러니까 영화의 한 장면 같았어 요. 내가 지금 생각해도. 아주 감명 깊었다고. 근데 그때 공사 육사 왔다 갔다 하시 면서 강의하신 분들이 있었다고요. 예를 들면은 국사는 김도태( 金 道 泰 ) 선생이, 유 명한 김도태( 金 道 泰 ) 선생이 가서 공사도 가르치고, 육사도, 육사도 가르치고, 그분 은 이제 물론 문관이시지마는. 또 서울대학 영어선생 하시던, 서울대학 사범대학 영어선생 하시던 황찬호( 黃 燦 鎬 ) 교수라고 있었어요. 이분은 육군대위 계급장을 다 시고 왔다 갔다 하시며 강의를 하셨는데, 육군사관학교 가서 강의를 하시면서 사 관학교 학생들은 공사의 이만섭( 李 萬 燮 ) 생도 같은 사람이 되라. 이러고 내 이야 기도 소개를 하고 그랬단 이야기를 내가 나중에 들었어요. 그렇게 해서 내가 연대 를 다시 복교를 했고, 그래가 연세대 다닐 때 내가 남이 볼 때는 뭐 응원단장이라 그러고 어깨 힘주고 다녔지마는 사(4)년간 점심도 못 먹고 차비도 없었어, 그때는. 차비도 없이 다녔다니까요. 가정교사 하다가 이제 또 친구 집에 있고 이러니까. 근 데 그때 시내버스는 상이군인( 傷 痍 軍 人 )들은 상이군인증만 보이면. 면담자 : 그냥 타시고. 구술자 : 그냥 타고 이랬다고. 나는 상이군인이 아니지만 내 제대증을 탁 내놓고 말이야 그 래 고마 버스, 버스 값도 안 주고 내리고 타고 이랬다고. 했는데 그때 연대 털보 응원단장이라고 하도 소문이 나니까 아, 하도 소문이 나니까 그때 경향신문 여기자 가, 경향신문 여기자가 한윤복( 韓 閏 福 )이라는 여기자가 이 사람 이제 경향신문 문 - 16 -
화부 있다가 조사부에 있었는데, 남자들 시시하게 보고 이러다가 연대 털보 응원단 장 이야기가 하도 들리니까 함 만나봤으면 이래가지고, 그때 케이비에스(KBS)방송 국에, 김인숙( 金 仁 淑 )이라는 아나운서가 자기 친구야. 김인숙( 金 仁 淑 ) 아나운서를 통해서, 연대 나하고 입학 동기인데 그, 케이비에스(KBS) 아르바이트(Arbeit)하는 친구가 있었어요. 정 누구야?, 하, 그 친구를 통해서 연락이 왔어. 경향신문 여기자 가 함 만나봤으면 좋겠다, 이래서 나도 은근히 여자가 만나자니까 응원단장을 좋아 한다고 이러니까, 광화문에 릴리다방이라는 데서 만났다고. 광화문의 릴리다방이라 는 데서 만났는데, 그게 오십육(56)년 전인가 봐. 근데 엉겁결에 가기는 갔지마는 이야기하다가 보니까 버스 값도 없는데 내가 차 값이 없잖아. 커피 값이 없었다고. 야, 이 큰일 났다. 그때만 해도 남자가 차 값을 내기나 점심을 내지 지금처럼 뭐 더치페이(Dutch pay) 하기나 뭐 이런 게 없단 말이야. 야 이 큰일 났다 나갈 때 어 떡하느냐. 그 걱정 때문에 그때 이야기한 건 전혀 기억이 없어. 그래, 고민하고 있 는데 나가면서 그 여자가 탁 내고 나가더라고. 아이고, 저만하면 됐다. 그래갖고 커 피 한잔 얻어먹고 지금까지 살고 있는 거야. 그래, 오십육(56)년 됐어. 그래 내가 지금 내가 커피 한잔 얻어먹고 이거 내 끌려다닌다 그러면. 면담자 : 사모님 뭐라세요? 구술자 : 우리 집사람은 커피 한잔 사주고 이렇게 고생한다고. 왜냐면 내가 팔(8)선 의원인데 어, 선거 때마다 얼마나 고생을 했어. 면담자 : 그렇죠. 구술자 : 더욱이나 내 선거구가 대구인데, 우리 집사람은 순 서울 토백이야. 그래, 대구 사람 들이 굉장히 배타적이라고. 그런데 뭐 대구 아가씨들은 대구 여자분들은 뭐, 이만 섭( 李 萬 燮 ) 씨 말이야 대구도 미인이 많은데, 서울내기하고 결혼했다고 이러고 또 저, 우리 집사람이 선거운동 한다고 다니면, 서울내기 다마네기(たまねぎ, 양파)라 그러고 또 놀리고, 또 어데 가면 또 노래 불러보라 그러고, 고생을 쭉 했으니까, 날 보고 커피 한잔 사주고 고생한다 그래요. 면담자 : 아까 사모님 말씀하실 때 케이비에스(KBS) 아나운서(announcer) 김인숙( 金 仁 淑 ) 아나운서(announcer) 잠깐 언급하셨잖아요? 그분은 어떤 관계셨던 거죠? 구술자 : 아니지. 우리 집사람하고 김인숙( 金 仁 淑 ) 아나운서(announcer)하고 이제 친구다 이 말이야. 면담자 : 친구셔갖고 통해서 연락이 왔다는 말. 구술자 : 아. 그렇지. 그 사람을 통해가지고. 면담자 : 학생 통해가지고. 구술자 : 연대 학생 아, 정인아, 정인아, 정인아라는 내 입학 동기야. 그 친구 돌아갔을 거야. - 17 -
그 친구를 통해서 연락이 왔다 이 말이야. 면담자 : 아, 그렇게. 구술자 : 그런데 그 동안에 사실은 내가 그렇게 털보 응원단장 하면서 굉장히 내가 무서웠거 든. 그래도 가끔 연대 후배들이 형님 우리 누나가 이화여대 다니는데 형님 한번 만났으면 합니다. 그래서 내가 시끄러워 이 사람아. 네 누나보고 공부나 하라 그 래. 야단치고 이랬거든. 내가 커피 값도 없는데 만나면 뭐 하냐 그래서 그, 뿌리쳤 는데 여기는 나도 모르게 가봤어. 광화문 릴리다방. 그게 또 내 친구 내가 같이 공 부한다는, 친구 집에 내 가있었다는 데, 김사익씨 집이 사직동이니까 또 가깝고 이 래서. 그래서 오십육(56)년 전인데 앞으로 사(4)년만 더 살면 회혼식이 된단 말이 야. 면담자 : 회혼이시네요. 예. 구술자 : 예? 근데 회혼식이 그래 또 어렵대. 왜 그러냐면 내외간에 다 건강해야 되니까. 면담자 : 그러시죠. 예. 구술자 :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회혼식까지는 살았으면. 인제 사(4)년 남았거든. 그런 생각인 데, 그때까지 살지 모르겠어요. 면담자 : 지금 건강하시니까, 충분히 그러실 거 같습니다. 어떻게 보면은 기자 부부시네요. 두 분이. 구술자 : 그렇지. 면담자 : 기자시잖아요? 구술자 : 그렇지. 어. 면담자 : 그러면 혼인을 하고 나서도 사모님께서는 기자 생활을 하셨나요? 구술자 : 아니지. 면담자 : 결혼하시면서 인제 그만하시고. 구술자 : 그럼. 면담자 : 예전에는 그랬죠? 구술자 : 옛날에는 그랬어. 결혼한대면, 집에 살림 사는 거지, 또 일하기는 뭘 일 해. 면담자 : 네. 예전에는 그랬습니다. 구술자 : 어. 6. 기자시절에 겪은 4.19와 5.16 (00:09:35 00:52:11) 면담자 : 의장님 근데요. 학창시절 말씀이나 이런 말씀 쭉 들어보면 굉장히 리더십 (leadership)도 있으시고, 관계 면에서도 그러시고 그래서 정치외교학과를 다니시고 - 18 -
정계로 가실 수 있는 기회가 많으셨을 거 같은데 어떻게 언론사로 취업을 하셨어 요? 구술자 : 내가 언론사에 간 거는 역시 집사람 영향을 받았어요. 내가 대학 졸업할 때 나도 정치하겠다는 꿈이 있었으니까 처음에는 외무부를 가느냐 외무고시를 해가지고, 그 때는 행정고시 삼(3)부라 그랬어. 외무고시를 해서 외무부를 가느냐, 그래가 외교관 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바로 정당에 들어가서 정당생활을 하느냐. 비서다 뭐다 이래가지고 정당생활을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언론계 들어가느냐. 그래서 한참 생 각을 했는데 집사람도 권유하고 언론계 들어가는 것이 폭넓게 모든 세상을 볼 수 있을 것 같고 이래서 언론계에 간 거예요. 면담자 : 네. 동아일보에 오래 계셨잖습니까? 동아일보에 가셔서 정치부 생활을 먼저 하셨나 봐요. 구술자 : 쭉 정치부만 했어요 나는. 쭉 정치부만 했다고. 면담자 : 아, 정치부에서만 쭉 계셨군요. 구술자 : 어. 예. 면담자 : 의장님과 관련된 일화들이 많이 나와 있습니다. 근데 제가 꼭 한번 직접 여쭙고 싶 어서 몇 가지 메모를 해서 먼저 말씀드렸는데요. 오십팔(58)년 십이(12)월에 이른바 보안법 파동 때 취재를 하셔야 되는데 의회에서 막 소리치셨다 그래요. 그래갖고 이, 자유당 놈들아 막 이렇게 소리를 치셔갖고, 당시 곽상훈( 郭 尙 勳 ) 부의장한테 제지도 받고 그러셨다는데, 그 기억나세요 지금도? 구술자 : 근데 그게 잘못 알려져 있는데, 그때가 아니고 천구백육십(1960)년 사일구(4.19) 이 후에 오(5)대 국회에서, 오(5)대 국회에서 사일구(4.19) 이후에, 사일구(4.19) 이후에 사(4)대 국회, 사(4)대 국회에서, 사일구(4.19) 이후에 사(4)대 국회니까 그때도 역시 자유당이 다수야. 오(5)대 국회 선거하기 직전이니까. 면담자 : 직전에. 구술자 : 사(4)대 국회에서 자유당 부정선거의 원흉들을 모두 구속하기로 했거든. 구속하기 로. 그래가 일일이 투표를 해요. 투표를 하는데 자유당 국회의원들이 많이 있어도 다 포로 같은 입장이니까 가표를 던질 수밖에 없지. 이제 그런데 가다가 도중에, 정존수( 鄭 存 秀 )라는 자유당 당무위원 체포 동의안 구속 동의안이 나왔을 땐가, 자 유당이 부결시켰어. 전 국민의 뜻인데 그거는 가결시켜줘야지, 선거부정 원흉들인 데, 근데 그걸 부결시켰거든. 그래 내가 이(2)층 기자실에 있다가, 그때 기자실이 이(2)층이야. 그때는 지금처럼, 앞에 유리, 글라쓰(glass)도 없었어요. 다 소리도 들 리지. 내가 이(2)층에서 이 자유당 도둑놈들아. 하고 소리를 질렀거든. 그랬더니 사회 보시던 곽상훈( 郭 尙 勳 ) 부의장님이 그 양반이 민주당 최고위원도 하시고 날 - 19 -
아주 사랑해주셨지. 곽상훈( 郭 尙 勳 ) 부의장이 인제 날 잘 아니까 이래 이(2)층을 보 면서 그 동아일보 이만섭( 李 萬 燮 ) 기자 조용하시오. 그랬다고. 근데 그게 속기록 에 쭉 있었는데 나중에 뭐 속기록 정리하면서 그 구절을 뺐던가 이렇더라고. 아. 근데 그때, 그때야. 내가 자유당 도둑놈들아. 하고 소리 질른 게. 면담자 : 아, 그게 오십팔(58)년이 아니고 사일구(4.19) 전후군요. 구술자 : 그렇지. 그렇지. 신보안법 파동 때에는 내 회고록 책에도 나와 있지마는 자유당이 망한 게 거기부터 망하기 시작한 거예요. 전국의 무술 경위들을, 무술 경찰관들을 이백(200)명 모집을 해가지고 국회에 경위복을 입혀가지고 농성하고 있는 야당 국 회의원들을 전부 짐짝 나르듯이 막 끌고 가서 날라가지고, 내던진다고 문밖으로. 그래가 본회의장하고 식당 고 사이에 복도에 전부 가다놓고(가둬놓고) 그래 신보 안, 보안법을 통과시킨다고요. 그래가 이제 조병옥( 趙 炳 玉 ) 박사를 앞세워가지고 모 두 시가행진을 하는데 내가 이제 취재를 하면서 조 박사 바로 옆에 서있었지. 그 내 회고록 사진도 나와요. 그땐 그렇게 됐고. 그때는 눈물이 나서 볼 수가 없었어. 박순천( 朴 順 天 ) 여사 같은 분은 할머니인데도, 무술 경위들이 한 사람은 위에 팔을 쥐고 한 사람은 다리를 쥐고 하나, 둘, 셋. 하고 문밖으로 던지고 이랬다고. 그 래 내 자유당이 이제 망한다 내 그랬어요. 그게 신보안법 파동이야. 그랬어요. 면담자 : 네. 그러셨군요. 그리고 의장님, 그 사일구(4.19) 바로 전에 김주열( 金 朱 烈 ), 삼일오 (3.15)부정선거 이후에 김주열( 金 朱 烈 ) 열사와 관련된 특종을 하셨다고도 들었는데 요. 그때는 취재를 하러 거기까지 내려가신 건가요? 마산까지? 구술자 : 아니. 마산에서 이제 부정선거 항의시위가 일어났는데, 동아일보 정치부에서 마땅히 가야 될 거 아니야. 그래, 동아일보 정치부에서 내가 특파원으로 간 거예요. 면담자 : 아, 특파원으로 가신 거군요. 구술자 : 특파원으로 갔는데 그런데 지난번에 무슨 국정원 댓글사건을 가지고 일부 야당의원 이 뭐 삼일오(3.15)부정선거에 뭐 비유를 하고 이러더라고. 그거 큰 잘못이야. 그건 전혀 말도 안 돼요. 왜냐하면 삼일오(3.15)부정선거라는 게 저게 원천적 부정선거 야. 예를 들면 반장들이 야당 성향 사람들, 이 사람은 야당 찍을 것이다 하는 사람 들은 미리 투표용지를 안 줬다고요. 미리 투표용지를 안 주고 어, 자유당 대통령 이승만( 李 承 晩 ), 부통령 이기붕( 李 起 鵬 ) 도장 푹푹 찍어가지고 미리 다 투표함에 넣 어버렸어. 이게 사전투표야. 그리고 또 투표하러 가는데 삼(3)인조 오(5)인조, 세 사 람 또는 다섯 사람씩 거기에 꼭 한 사람씩 자유당 계통 사람들이 딱 끼어요. 그래 가 감시하면서 가서 이른바 삼(3)인조, 오(5)인조 투표. 그러니까 마산시민들이 투 표를 하니까네, 투표용지가 없잖아. 내 투표용지 달라고 소리를 소리 지르고 그래 서 들고 일어난 거라고 모두. 그래, 그런 엉터리 부정선거가 어데 있어요? 그래가 - 20 -
내가 마산에 내려갔는데 동아일보 차가 깃발 달고 왔다 갔다 하면, 마산시민들이 막 만세를 불러주고 이랬다고. 그때 유일한 야당지가 동아일보니까 막 만세를 부르 고 이랬어요. 그리고 내가 이런 언론인 출신으로서 말하기 그거 하지만, 이건 뭐 보관한다니, 자료니까 서울신문 차가 지나가면 시민들이 서울신문 차를. 면담자 : 야유. 구술자 : 아니야. 면담자 : 예? 구술자 : 불 지르고 이랬어. 면담자 : 불, 야유 정도가 아니라. 구술자 : 어. 그렇게 했다고요. 그런데 내가 참 매일같이 인제 기사를 보내는데 하루는 제보 가 왔어, 동아일보 지사에. 학생이 최루탄 눈이 백힌 채 바닷가에, 바다야, 밀물 썰 물이가? 이래 올라오나 아? 면담자 : 예? 보좌관 : 밀물이요. 면담자 : 아, 밀려오는 거, 밀물이요. 구술자 : 밀물에 학생 하나가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올라왔다는 거야. 그래가 사진기자 박 용윤( 朴 容 允 ) 기자를 데리고 급히 현장에 갔지. 가니까 눈이 최루탄이 박힌 채 모 래 위에 누워있어. 그래가 사진을 찍고 급히 기사로 서울로 보낸 거야. 그래가지고 나는 빨리 이제 기사 전화로 연락해주고 김주열( 金 朱 烈 ) 시체를, 지금은 김주열( 金 朱 烈 ) 열사라 그러나? 면담자 : 네. 구술자 : 그때는 김주열( 金 朱 烈 ) 학생 시체가 마산도립병원에 있었어. 그걸 또 빼돌린다는 소 문이 있어서 내 그 앞에 지키고 있었다고. 아니나 다를까 비는 부슬부슬 오는 밤중 에, 캄캄한 이제 밤에 김주열( 金 朱 烈 )이 시체를 싣고 경찰차가 남원 쪽으로 가더라 고. 고속도로 올라가는 걸 내가 따라 갔단 말이야, 자동차로. 그랬더니 경찰들이 탁 막아가지고 날 못 가게 했어요. 그래서 밀고 댕기고 한 일이 있는데, 그 학생이 원 래 남원이야. 마산에 이제 공부하러, 마산에 와서 공부를 했거든. 그러니까 남원에 집에 가서, 거기서, 아마 지금도 무덤이 거기 있을 거야.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 동아일보 신문을 보고 전국의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가 동아일보 신문 때문에 이제 전국에, 사(4)월 십팔(18)일 날 고려대 학생이 들고 일어나고, 고 려대 학생이 들고 일어났는데 반공청년단 단원들이 가서 폭력을 행사하고 그리고 각 대학이 전부 들고 일어난 거 아니에요? 그리고 사(4)월 이십오(25)일 날은 연대 철학과 정석해( 鄭 錫 海 ) 교수를 선두로 해서 대학교수들의 시위가 있는거 아니에요? - 21 -
그래 내가 그, 정석해( 鄭 錫 海 ) 교수 바로 옆에 내 같이 걸어오면서 격려도 해드리 고 이랬는데. 그래가 나는 인제 다시 또 서울에 왔지. 와가지고 동아일보에서 경무 대, 지금은 청와대 아니야? 경무대 거길 왔다 갔다 하면서 취재를 하는데, 경찰관 들이 막 총을 쏘아가지고 내 앞에 옆에 학생들이 쓰러져 죽고 이랬다고. 그, 총탄 을 뚫고 나는 취재하러 왔다 갔다 했다고. 그때 사일구(4.19) 때 죽은 학생이 백팔 십(180)명이나 돼. 그래 이 박사가 나중에 결국은 사(4)월 이십육(26)일 날인가? 계 엄사령관 백선엽( 白 善 燁 ) 씨가, 아니야 백선엽( 白 善 燁 ) 아니지, 송요찬( 宋 堯 讚 ), 송 요찬( 宋 堯 讚 ) 계엄사령관이 주선해서, 시민대표 학생대표들이 이 박사 만나는 거예 요. 그래가 이승만( 李 承 晩 ) 대통령이 국민의 뜻이 그렇다면 나는 그만두겠다고 하 야하겠다고 이래가 이승만( 李 承 晩 ) 대통령이 사(4)월 이십육(26)일날 하야 결심을 하고 국회에, 국회에다가 하야선언서를 하야, 대통령 사퇴서를 국회에 보내고 그래 가 이십팔(28)일 날인가 이화장( 梨 花 莊 )으로 가시잖아. 이화장( 梨 花 莊 )으로 갈 때, 그 양반 역시 미국에서 공부를 했으니까 내가 대통령, 이제 대통령도 아닌데 내가 차를 탈 수 없다. 이래가지고 걸어서 간다고 이화장( 梨 花 莊 ). 근데 모두 비서들이 막 와가지고 말리고 이래가지고 차타고 이제 갔다가 나중에 허정( 許 政 ) 내각, 임시 내각수반이 주선을 해가지고 미국 하와이로 망명하지 않았어. 망명해서 거서 돌아 가셨다고 병원에서. 돌아가셨는데도 국민 여론이, 국민 여론이 나빠가지고 돌아가 셨는데도 조국에 몬 왔다고. 근데 박정희( 朴 正 熙 ) 대통령이 그러나 아, 그러나 그, 무덤은 우리, 우리나라에 모시는 게 옳다 이래가지고 지금 국립묘지에 모시고 있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내가 사일구(4.19)의 주역이라고 나는 생각한다고. 예. 그랬 어요. 면담자 : 네. 그때 학생들이 인제 대체로 주역, 아니 주축이 돼서 사일구(4.19)가 진행이 됐는 데 기자시면서도 또 함께 참여하신 거나 다름없잖습니까? 구술자 : 아니. 내가, 내가 주도세력으로 생각한다니까요. 어. 면담자 : 그렇죠. 예. 그, 혹시 취재하시는 과정에서 삼일오(3.15)부정선거 바로 직전에요 이 른바 삼일(3.1)삐라사건이라고도 혹시 기억하세요? 동대문운동장에서 학생들이 삐 라를 뿌린. 구술자 : 몰라. 나 그건 모르겠는데. 면담자 : 거기에 참여했던 어떤 당시 학생이 이만섭( 李 萬 燮 ) 기자는 기억할지 모른다. 이런 얘기를 하더라구요, 그래서. 구술자 : 그렇지. 면담자 : 워낙 활발하게 취재를 하시고 인제 하셨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길래 한번 여쭤본 겁니다. - 22 -
구술자 : 그러고 이, 역사에 남기기 위해서 이야기인데 그해 이(2)월 십육(16)일에 야당의 대 통령 후보인 조병옥( 趙 炳 玉 ) 박사가 미국에서 수술하다 돌아가셨다고요. 그러니까 야당은 조병옥( 趙 炳 玉 ) 박사, 장면( 張 勉 ) 박사 부통령, 자유당은 이승만( 李 承 晩 ) 대 통령, 이기붕( 李 起 鵬 ) 부통령 그랬거든. 그러니까 대통령 선거는 이미 끝난 거와 같 애. 그런데 자유당 강경파들이 우겨가지고 기어이 부통령을 이기붕( 李 起 鵬 ) 씨를 당선시킬라고 하다가 결국 사고가 난 거예요. 어. 그러니까 이 강경파들이 문제라 니까. 그때 임철호( 任 哲 鎬 ), 장경근( 張 暻 根 ) 그리고 경무대 박찬일( 朴 賛 一 ) 뭐 이래 가지고 강경파들이 기어이 이기붕( 李 起 鵬 ) 씨를 부통령으로 시킬라다가 결국 사일 구(4.19)가 나지 않았어요? 그래가 이기붕( 李 起 鵬 ) 씨는 결국 피신한다고 군단이고, 사단이고 갔더니 군단장 사단장들이 마음이 돌아가지고 어, 보호해주지도 않지 다 시 청와대 와서 청와대, 청와대 경무대 뒤에 그 관사, 경무대 직원 관사 거 있다가 큰아들 이강석( 李 康 石 )이가 아버지, 엄마, 동생, 다 총으로 쏘고 자기도 자살하고 그렇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 자유당 강경파가 역대 정권에 강경파가 득세를 하 면 그 정당과 정권은 꼭 망한다고요. 공화당도 마찬가지지. 차지철( 車 智 澈 )이라는 강경파가 득세를 하고 이래가지고 결국은, 십이륙(10.26)사태가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내 지금도 후배들에게 자꾸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새누리당, 야당이 민주당 이가? 아? 면담자 : 예. 구술자 : 새누리당이고 민주당이고 그 당 대표나 원내대표란 사람들이 강경파에 휘둘리지 마 라고, 강경파 그거 눈치 보지 말고. 강경파에 휘둘리고 강경파의 눈치 보니까 강경 파의 눈치보고 이러면 그 정당은 결국 망한다니까요. 그 당의 대표나 당의 지도자 란 사람이 왜 강경파 눈치를 봅니까? 아? 면담자 : 사일구(4.19). 구술자 : 이번에, 이번에 민주당이 한 달 가까이 있다가 천막에서 국회로 돌아갔나? 면담자 : 아직 안 돌아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구술자 : 근데 이제 그런 것도 어, 내가 야당대표 같으면 들어가자! 국회로 그리고 끌고 들 어가야지, 안 들어온 사람은 그만 둬하고 그래가 끌고 가야지 밤낮 강경파에 휘둘 려가지고 그 천막에 앉아가지고 그래가 되겠어? 그러니까 절대로 강경파에 휘둘리 면 안 된다니까요. 그걸 내가 옛날 결부를 해서 내가 한마디 하는 거예요. 면담자 : 사일구(4.19)가 주는 교훈 중에 하나니까. 구술자 : 그래요. 면담자 : 지금 말씀해주신 거죠? 구술자 : 예. - 23 -
면담자 : 예. 잘 알겠습니다. 바로 이어서요. 그 이듬해에 오일육(5.16)이 나지 않습니까? 오 일육(5.16) 때도 기자셨잖아요. 구술자 : 물론이지. 면담자 : 이전, 오일육(5.16), 그러니까 오(5)월 십육(16)일 이전부터 그런 징후를 좀 알고 계 셨나요? 아니면 나구선 그 뒤에 알게 되셨나요? 구술자 : 오일육(5.16)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기록에 남겨야 될 이유가 오일육(5.16)이 무조건 군사쿠데타다 정변이다 이렇게 부정적으로 볼 게 아니라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느 냐 하는 거를, 그 당시 현실을 잘 봐야 돼요. 그리고 또 그 과정이 어떻게 했으며 성과가 어떻게 했는지 종합적으로 이야기를 해야지 오일육(5.16) 무조건 쿠데타 뭐 이런 식으로 치부해선 안 된다 이 말이야. 내가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는데 내 누구 보담도 언론계에서 기여하지 않았어요? 면담자 : 그렇습니다. 구술자 : 그런데 그때 인제 내각책임제로 바뀌었으니까. 장면( 張 勉 ) 총리가 워낙 정치력이 없 었어. 워낙 리더십(leadership)이 없었어요. 그리고 신구파 싸움은 매일같이 일어나. 민주당 내에 신구파 싸움이 매일같이 일어난다고. 결국 나중에 구파가 이제 분당해 서 신민당인가? 만들고 나갔지마는. 그래, 사회는 불안하고, 학생들은 매일 데모하 고 판문점 가서 이북학생들하고, 회담하자 그러고 심지어 유치원, 국민학교 학생까 지 데모했다니까요. 국민학교 학생까지 데모를 했어. 그리고 국회의사당 앞에는, 민주당 국회의원 김선태( 金 善 太 ) 의원이라는 분이 성질이 좀 급해서 경찰관, 결례 하고 버릇없는 경찰관을 아마 야단치면서 한대 때렸는가봐. 어쨌든 경찰관들이 국 회 앞에 모여서 매일 데모를 하지. 그거는 내가 이해가 가. 사일구(4.19)동지회, 사 일구(4.19) 관계 단체에서는, 그거는 나는 그 사람들이 옳다고 봐 하여간. 사일구 (4.19) 해가지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는데 사일구(4.19)의 부정부패 원흉, 사일구 (4.19) 때 학생들 총으로 쏜 사람들, 이 사람들 처벌을 엄격하게 해줘야 되는데 적 당히 넘어간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그 삼일오(3.15)부정선거의 원흉들 모두 엄격히 처벌하라고 엄히 다스려야 된다고 국회 본회의장 점령을 해 있었다고. 국회 본회의 장 점령해, 앞에는 경찰관들이 데모해, 학생들은 매일같이 판문점에 간다 그러지, 국민학교 학생도 데모를 한다 그러지. 장면( 張 勉 ) 총리는 또 인사를 하는데 전부 신구파 안배를 하니까 명색이 국방장관에 처음에는 권중돈( 權 仲 敦 ) 의원이 하시다 나중에 현석호( 玄 錫 虎 ) 의원이 하셨는데 현석호( 玄 錫 虎 ) 의원이 법률가야. 사람은 개인적으로 훌륭한 분이지마는 점잖은 분이지만 권총이 어떻게 생겼는지 권총을 한번 쏘아보지도 않는, 이런 분들이 국방부장관이라고 앉아있으니, 나라가 되겠어 요? 그러니까 그때 공공연하게 사(4)월에 일어난단다, 오(5)월에 일어난단다, 사(4) - 24 -
월 위기설, 오(5)월 위기설 공공연하게 돌았다니까. 면담자 : 군부가 일어난다는. 구술자 : 그렇지. 그리고 또 국민들이 이대로는 안 된다, 뭘 바뀌어야 된다 하고 국민들 대부 분 그래 생각했다고. 요새 젊은 학자들이 자꾸 민주주의 이론가지고 이야기하는데 현실 전혀 몰르고 그래. 그런 거를 내 이야기를 좀 들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국 민들도, 이래서 안 되겠다, 뭐가 일어나야 돼 하고 기다렸다니까. 그리고 오일육 (5.16)이 일어났어. 그러니까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도 올게 왔다고 그러지 않았어. 올게 왔다고 그랬거든. 심지어 사상계사 장준하( 張 俊 河 ). 면담자 : 장준하( 張 俊 河 ) 선생님. 구술자 : 장준하( 張 俊 河 ) 주필도, 주필이가? 장준하( 張 俊 河 ) 주필도, 나도 아는 분이지. 장준 하( 張 俊 河 ) 주필도 오일육(5.16)혁명은 불가피했다고 그때 사상계사에 썼다고 본인 이. 면담자 : 네. 약간 기대 섞인 그런 그, 발언을 하신 걸로도 또 알려져 있습니다. 구술자 : 아니야. 오일육(5.16)은 불가피했다고 썼다니까요. 면담자 : 네. 불가피하기도 했고 또. 구술자 : 어. 앞으로 잘해주기를 바란다 그러고. 면담자 : 네. 맞습니다. 예. 구술자 : 사일구(4.19)혁명의 정신을 이어가주길 바란다, 이러고 오일육(5.16)은 불가피했다고 썼다니까. 다만 이제 박근혜( 朴 槿 惠 ) 대통령이 대통령 출마했을 때, 오일육(5.16)은 불가피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이랬거든. 그거 아마 누가 옆에서 잘못 적어준 거 같애. 오일육(5.16)은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이러면 되는 거야. 최선의 선택이란 최 선의란 말은 넣을 필요가 없었다구요. 최선은 그런 혁명이 안 일어나는 게 최선이 지. 그러니까 말을 잘못했는데, 그러나 오일육(5.16)은 불가피했다구요. 면담자 : 네. 의장님 그렇게 보시는 거죠. 구술자 : 나도 새벽에 전화가 왔어 어데서. 전화 받으니까 선배님 저 해병대 장교입니다. 선 배님 후배입니다. 군에서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하고 전화를 끊더라고. 그래 내 생 각에, 지금 생각에도 그거 옛날에 김재규( 金 載 圭 ) 장군 십이륙(10.26) 때 그 바로 그 밑에 부하 박선호( 朴 善 浩 ). 면담자 : 박선호( 朴 善 浩 ). 구술자 : 박선호( 朴 善 浩 )인 거 같애. 그 친구가 날 또 좋아하고 밤낮 따랐거든. 그래 나와서 이제 취재를 하고 나도 결국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고. 딴 방법이 없는데, 나라 가 없어지는데 무정부 상태인데 민주주의 이론만 가지고 앉아있나 그럼? 우선 나 라 살려야 될 거 아니에요. 근데 이 젊은 학자들은 뭐 입만 열면 쿠데타 있을 수 - 25 -
없는 일이다, 민주주의 역행이다, 뭐가 역행이야? 나라 살려놓고 민주주의가 있지. 그리고 내 지나간 이야기인데 이거는 뭐, 이야기도 안 했지만 이것도 또 역사의 비 화야. 내가 마산에 내려가기, 내려가기 전날. 면담자 : 육십(60)년도 말씀이시죠? 구술자 : 마산 삼일오(3.15)부정선거 때 내려가기 전날, 그때 장면( 張 勉 ) 박사가 부통령이야 그때도. 장면( 張 勉 ) 박사 내 찾아 갔다고. 개인적으로 잘 알지. 그래 내가, 그때 나 는 또 어떻게 생각했냐. 나는 동아일보 있을 때 조병옥( 趙 炳 玉 ) 박사를 좋아했어. 신익희( 申 翼 熙 ), 조병옥( 趙 炳 玉 ) 박사 구파를 내 좋아했거든. 그러나 야당 할 때도 장면( 張 勉 ) 박사가 너무 좀 꼼꼼하고 이랬어. 그러나 조 박사가 돌아갔으니까 이젠 장 박사가 중심이 아니야. 그러니까 장 박사를 밀어야 되겠다 나도 밤낮 그 생각이 지. 그래 내 찾아가가지고 박사님, 부통령 내던지십시오. 지금 여기 순화동에 편안 하게 순화동 공관에 편안하게 계시다가, 정권 잡으면 앞으로 또 학생들에 의해서 정권 넘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니까 학생들 앞장서야 됩니다. 어. 부통령 내던지십 시오. 이랬더니 그때 내가 이야기할 때 조재천( 曺 在 千 ) 대변인하고 송원영( 宋 元 英 ) 공보수석도 있었어. 처음에 가니까 저, 송원영( 宋 元 英 ) 공보수석이 아, 이형 오늘 인터뷰(interview) 안 된다. 고 자꾸 그렇게 이 사람아 내가 인터뷰(interview)하러 온 게 아니야. 어. 같이 들어가자. 내 개인적으로 말씀드릴라 그래. 그래, 조재천 ( 曺 在 千 ) 대변인하고 같이 들어갔다니까 그 방에. 박사님 내던지십시오. 이 나중에 가만 앉아가 학생들, 피에 의해서 정권 잡았다 그러면, 또 나중에 학생들에 의해서 넘어지기 쉽습니다. 앞장서십시오. 그래 장면( 張 勉 ) 박사 말씀이 국민이 사(4)년 간 기간을 두어서 뽑아줬는데 내가 임기 끝나기 전에 내가 어떻게 그만 두느냐. 그래, 지금 그런 말씀을 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면 이승만( 李 承 晩 ) 박사는 임기가 남았는데 왜 학생이 모두 그만두라 그럽니까? 아. 그런 말씀 할 때가 아닙니다. 그 만두시는 게 좋습니다. 그래도 안 그만두실라 그래. 그래서 내 나와가지고 이제 그다음 날 마산 가면서 야 장 박사 할 수 없다, 내가 속으로 그래 생각한 일이 있 어요. 그래 생각한 일 있는데, 내가 뭐 처음 공개하는 건데. 근데 나중에 사태가 워 낙 급박하니까, 이기붕( 李 起 鵬 ) 의장 쪽에서 당선사퇴 성명이 나와요. 한참 사일구 (4.19) 때 말이야 마산이 심각하고 이러니까 당선사퇴 성명이 나온다니까, 이기붕 ( 李 起 鵬 )이가. 그때 당선 발표를 했으니까 부통령. 근데 그것도, 그분은 개인적으로 는 훌륭해. 국문학자 한갑수( 韓 甲 洙 ) 씨가 그 이기붕( 李 起 鵬 ) 국회의장 비서실장을 하셨어. 지금도 그분이 그, 비서실장 한 거를 후회하실 거야. 막 자꾸 해달라 그러 니까 이제 맡으셨겠지. 이 양반이 초안을 잡았어, 부통령을 사퇴한다고. 그런데 또 강경파들이 부통령 사퇴를 하지 말고 부통령 사퇴 고려, 고려 자를 하나 넣자. 부 - 26 -
통령 당선을 사퇴할, 사퇴할 것을 고려할 수 있다. 사퇴를 고려할 수 있다. 인제 고려 를 넣었다고. 그 성명이 나간단 이야기를 듣고 장면( 張 勉 ) 박사도 급히 참모 들 모아놓고 어떡하느냐, 그 장 박사 부통령 사퇴를 그때 했다고 같은 날. 그래가 내 동아일보 있을 땐데 신문사에서는 어느 쪽을 톱(top)을 싣느냐. 결국은, 두개 다 같이 톱(top)으로 이래 올려, 하나는 오른쪽 하나는 왼쪽에 톱(top)으로 올렸지마는 그런 일이 있었다고. 그렇게 소심하시다니까. 그런 일이 있었다고요. 근데 이기붕 ( 李 起 鵬 ) 씨는 또 당선사퇴면 당선사퇴지 당선사퇴 고려 자를 넣어가지고 더 자극 을 시켰다니까, 그때 학생들하고 시민들을. 그래 또 데모가 더 격화되지 않았어. 그 러니까 강경파 때문에 망한다 이 말이야, 내 말은. 면담자 : 강경파들의 역할도 분명히 있었겠지만, 이기붕( 李 起 鵬 ) 씨 스스로도 좀 그런 의사가 있었겠지요? 구술자 : 이기붕( 李 起 鵬 ) 씨는 사실은, 사실은 큰 욕심은 없었는데. 면담자 : 아, 의장님 보시기에요. 구술자 : 그 박마리아 여사가 더 욕심이 많았지. 그랬을 거예요. 면담자 : 네. 그렇게 보시는군요. 그래서 그 오일육(5.16)이 그런 아주 혼란스러운, 사일구 (4.19) 이후에 혼란스러운 정국에서 불가피했다라고 인제 보고 계시다고 말씀을 해 주셨었는데요. 구술자 : 그렇지. 면담자 : 그때도 여튼 그 새벽에 연락을 받고 막 취재를 다니셨잖습니까? 구술자 : 그렇지. 면담자 : 금방 상황은 파악이 되셨나요 그때? 누구들이 어떻게 하는 건지? 구술자 : 시청 앞에 나오니까 박정희( 朴 正 熙 ) 소장이 턱 계시고. 면담자 : 사진으로 남는 그 장면을 직접 보신 거군요. 구술자 : 그렇지. 내가 직접 봤지. 그리고 박종규( 朴 鐘 圭 ) 소령이가? 이낙선( 李 洛 善 ) 소령, 중 령인가, 소령인가, 그 친구들이, 소령인갑다. 그리고 차지철( 車 智 澈 ) 대위, 쫙 서있 고 이랬어. 그런데 장면( 張 勉 ) 박사가 반도호텔에 사무실이 있었거든, 반도호텔에. 임시로 이제 반도호텔에 사무실이 있었는데 오일육(5.16)이 나고 군사혁명이 났다 니까, 막 급해가지고, 피신을 가는데 자기가 쓰고 있던 안경도 못 끼고 안경도 끼 다가 안경도 떨어뜨리고 막 피신했다구요. 면담자 : 그냥 도망가듯 막 피신을 하셨군요. 구술자 : 그래, 도망갔지. 그래가 어디 갔나면 갈멜수녀원에 갔잖아 혜화동. 어. 안경도 제대 로 끼지도 못하고. 그러니까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대통령이 총리는, 장면( 張 勉 ) 총리는 어데 갔냐? 그러니까 뭐 행방불명이야. 그 국무장관 그리고 극 - 27 -
동담당 국무차관보 노상 전화야. 장 박사 어데 갔냐? 처음에는 미국이 반대했다 고 오일육(5.16)혁명을. 그래가 이제 마샬그린(Marshal Green) 대리대사하고 매그 루더(Carter Bowie Magruder) 대장이 팔(8)군사령관 매그루더(Carter Bowie Magruder) 대장이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한테 와서 각하, 지금은 국군통수권자가 대통령이십니다. 빨리 군을 동원해서 혁명군을 선별해야 됩니다. 그러니까 윤보선 ( 尹 潽 善 ) 대통령이 노(No.). 우리 국군끼리 싸움하면 어, 북한이 남침할 구실을 준 다. 기회를 준다. 노(No.). 이래가 거절하셨어. 그래가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이 친 서를 보내요. 이한림( 李 翰 林 ) 일(1)군사령관 그리고 그 예하 군단장들한테 친서를 보냈다고. 그리고 친서를 가지고 간 사람이 김준하( 金 準 河 ) 비서관하고 김남( 金 楠 ) 비서관이야. 내가 다 잘 아는 사람. 근데 이한림( 李 翰 林 ) 장군은 이제 처음에는 군 을 동원해서 서울에 올라 그랬지. 이 혁명군을 뭐 격퇴를 시킬라고, 섬멸할라고 했 는데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 편지를 보고 조금 마음이 흔들리고 이랬는데 또 매그 루더(Carter Bowie Magruder)가 와가지고 또 해야 된다고 해야 돼. 근데 군단장들 이 뭐 말을 들어야지. 군단장들이 전부 혁명을 지지하고 나오는데. 어, 민기식( 閔 耭 植 ) 장군을 비롯한 군단장들이 그때 최석( 崔 錫 )이라는 군단장 하나 빼고는 전부 지 지야. 면담자 : 어, 누구요? 구술자 : 최석( 崔 錫 )이라는 분은 아마. 면담자 : 최석( 崔 錫 ). 구술자 : 이한림( 李 翰 林 ) 씨하고 같은 생각일 거야. 그래가 우물쭈물하는데 혁명군을 지지하 는 그, 팔(8)기생이 아마 인솔하는 헌병대에서 또 와가지고 딱 이한림( 李 翰 林 ) 장군 을 포위를 해가지고 납치돼가지고 서울로 호송을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오일육 (5.16)은 불가피했다니까요. 면담자 : 네. 그렇게 보시는군요. 근데 그 오일육(5.16) 직후에 저기, 의장님은 왜 필화사건으 로 그렇게 되셨던 건가요? 구술자 : 그거는 나도 사실은 오일육(5.16) 속으로는 불가피했다고 인정하는 사람인데, 그 필 화사건은 또 문제가 조금 달라. 뭐냐.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이 오일육(5.16) 나기 전에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한테 유원식( 柳 原 植 ) 장군이, 그분이 나중에 오일육 (5.16) 나고 난 뒤에 최고회의 재정위원장을 했어. 유원식( 柳 原 植 ) 대령이야 장군 아니고. 유원식( 柳 原 植 ) 대령이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한테 와서 세배하러 와가지고 각하 우리가 일어납니다. 인조반정( 仁 祖 反 正 )입니다. 우리가 일어나면 각하를 모십 니다. 그리 이야기하고 갔단 말이야. 그리 이야기하고 갔어. 그러니까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의 생각에는 날 모실 것이다 하고 생각을 했지. 인제 그 후에 보니까 윤 - 28 -
보선( 尹 潽 善 ) 대통령을, 내가 동아일보 있을 때 그걸 질문한 일이 있어요, 인터뷰 (interview)를. 그때 그 어른이 오프더레코드(off the record)라 그러고 이야긴데, 유 원식( 柳 原 植 ) 대령이 와서 이야기한 건 사실인데 그저 지나가는 말로, 그때는 뭐 사(4)월혁명설, 오(5)월혁명설 워낙 많으니까 소문이 났으니까, 그저 지나가는 말로 자기는 들었다, 그래 이야기를 하시더라고. 오프더레코드(off the record)로 안 쓰는 걸 전제로 해서 나한테 이야기를 하셨어. 하여간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 마음 한 구석에는 이제 내가 이 나라를 통치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었을 거 아니야. 면담자 : 그렇지요. 구술자 : 근데 가마 보니까 정권이 자기한테 올 것 같지 않거든. 어. 군사정부가 자기한테 정 권을 가지고 올 거 같지 않으니까, 오일육(5.16), 유(6)월 초에, 유(6)월 중순인가 기 자회견 했어. 내가 날짜는 잘 기억이 안 나. 유(6)월에 청와대에서 기자회견 하는데 헌병들이 탁 둘러싸고 아주 공포분위기야. 군사정부는 유엔(UN), 구(9)월 유엔 (UN)총회에 미치는 영향을 고려하여 민간인에게 조속히 정권을 이양해야 한다. 하고 말씀하셨거든. 뭐 그땐 또 우리나라 언론이라는 건 또 말이야 반성해야 돼. 동아일보 빼놓고는 쓴 데가 없다. 면담자 : 어, 그런 내용을요? 구술자 : 겁이 나가지고. 근데 조선일보는, 조선일보는 기사 제일 뒤에 고 말만 붙였어. 동아 일보는, 제목으로 크게 말이야. 면담자 : 민정이양 해야 된다. 구술자 : 민정이양을 촉구, 유엔(UN)총회 미치는 영향 고려,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 엄명 하 고 톱(top)으로 나갔거든. 톱(top)으로 나갔는데 검열에 걸렸다 말이야, 검열에. 그 때는 포고령, 검열할 때니까. 그래 검열을 하는데 걸려가지고 잔소리하니까 이 톱 (top)을 조금 줄였어요. 줄여가 중간에 이래 중간 톱(top) 비슷하게 내렸어요. 그래 한번 넘어갔다 말이야. 근데 혁명정부에서는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이 말 안 하는 것을, 말 안 한 것을 동아일보가 이거를 허위로 보도를 해서 군사정부와 국민을 이 간을 붙였다, 이래서 포고령위반 이만섭( 李 萬 燮 ) 기자 구속, 내가 구속이 된 거야. 면담자 : 그렇죠. 구술자 : 그때 공보부장관 심흥선( 沈 興 善 ) 소장이 공보부장관이야. 그 사람이 기자회견도 하 고, 동아일보 이만섭( 李 萬 燮 ) 기자 구속하는 게 온 세계 다 기사가 다 나갔지 외신 에. 그래 내가 삼(3)개월 동안 육군형무소에 있었다니까. 그 고생은 말도 못해요. 면담자 : 네. 그러니까 그런 보도를, 그런 기사를 쓰시고 보도를 한 거는 뭐 특별한 이유가 있어선 아니고, 비중 있는 발언이었기 때문에 그냥 보도를 하신 것뿐인 거죠. 구술자 : 대통령 말씀인데 그러면 신문에 당연히 써야지. - 29 -
면담자 : 예. 그러니까는 뭐 군사, 그러니깐 군부의 뭐 이렇게 눈치를 보고 이런 거 없이 그 냥 하셨다는 거죠. 구술자 : 그렇지. 나는 당당하게. 언론에 자유가 있잖아. 언론의 권위도 있고. 근데 이 동아일 보에서는, 그런데 내가 육군형무소 가면서 처음엔 서대문 유치장에 있다가 그 육군 형무소에 가면서, 내 집사람보고 조병옥( 趙 炳 玉 ) 박사 사모님한테 가서 이야기를 좀 해달라. 조병옥( 趙 炳 玉 ) 박사 사모님한테 가서 이야기해달라. 근데 우리 집사람 이 조병옥( 趙 炳 玉 ) 박사 사모님 노정면( 盧 禎 冕 ) 여사한테 가서 이야기를 했어. 이렇 게 억울하다 그랬더니 노정면( 盧 禎 冕 ) 여사가 또, 억울하단 말이야 내가. 잘 아시 지. 조 박사가 날 많이 사랑했기 때문에. 내가 동아일보에 있었지마는 날 사랑했다 고. 그러니까 노정면( 盧 禎 冕 ) 여사가 경무대 들어와가지고 그땐 청와대지. 청와대 들어와가지고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한테 두 번이나 와서 이야기했다고. 대통령이 말한 걸 기자가 썼는데 이만섭( 李 萬 燮 ) 기자를 잡아넣는데 대통령이 어떻게 대통령 이라 그러고 여 앉아 있을 수가 있느냐. 고. 더욱이나 우리 돌아간 조 박사님이나 윤 대통령이나 동아일보 이만섭( 李 萬 燮 ) 기자한테 우리가 얼마나 인간적으로 신세 를 졌느냐. 고. 내가 인제 기사 뒷받침을 많이 해줬으니까, 자유당 때. 두 번을 가 서 이야기했다고. 그러니까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도 하, 고민하다가 한번은 여 서 울 교외선, 전철이 아니라 서울의 교외선 개통을 하는데,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이 그때 박정희( 朴 正 熙 ) 최고회의 의장이 나왔단 말이야. 거기서 박정희( 朴 正 熙 ) 최고 회의 의장보고, 동아일보 이만섭( 李 萬 燮 ) 기자 좀 내달라고 이야기를 했어. 그러니 까 박정희( 朴 正 熙 ) 대통령이, 박정희( 朴 正 熙 ) 의장이 그 자리에서 김종필( 金 鍾 泌 ) 부장, 중앙정보부장 부르시더래. 김 부장. 동아일보 이만섭( 李 萬 燮 ) 기자 아직 있 는가? 네. 있습니다. 그 내줘. 면담자 : 현장에서. 구술자 : 그 말은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의 회고록에 있다고.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 회고록 에 있다고. 그래 내 삼(3)개월 만에 나온 거예요. 그때 육군형무소에서 고생한 거는 말도 못해. 처음에 사병 감방에 있을 때는 바로 누워서 자질 못했다니까. 얼마나 잡범들이, 죄인들이 많은지. 옆으로 이래 누워서 잤어. 어깨 대고, 위에는 양철지붕 이지. 서빙고 육군형무소야 서빙고, 그 유명한. 죽는 줄 알았어. 그러다 나중에 이 제 동아일보에서 노력을 해서 장교 감방으로 옮겼지. 그러고 난 뒤엔 좀 나았단 말 이야. 그런데 동아일보에서 날 뺄라고 신직수( 申 稙 秀 ) 씨를 박정희( 朴 正 熙 ) 최고회 의 의장하고 잘 아니까 변호사로 모셨어. 그러니까 신직수( 申 稙 秀 ) 변호사가 해명 기사만 내주면, 동아일보에서 뭐 잘못했다는 해명 기사 비슷하게 내주면 우리가 이 만섭( 李 萬 燮 ) 씨 빼내주겠다. 그래 동아일보 고재욱( 高 在 旭 ) 주필하고 김성열( 金 聖 - 30 -
悅 ) 정치부장이 형무소에 왔어요. 그래가지고 날보고 이렇게 해명 기사 이야기를 하는데 어떡하면 좋겠냐. 고. 내가 내가 죽어도 좋으니까 형무소에서 죽어도 좋으 니까 해명기사를 쓰지 마라. 고. 잡아넣을라면 대통령을 잡아넣든지 해야지 왜 나 를 잡아넣어. 비겁하지 않냐. 고. 어. 언론의 권위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위해서 절대 해명 기사 쓰지 마라. 고 내 그래 버텼다니까. 그래 삼(3)개월만에 나왔다고, 삼(3)개월 후에 나왔어요. 면담자 : 네. 재판은, 형을 받지는 않으셨구요. 구술자 : 그러니까 재판하기 전에 나왔지. 면담자 : 하기 전에. 구술자 : 어. 그래가 원충연( 元 忠 淵 ), 그때는 원충연( 元 忠 淵 ) 공보실장이 새벽에 지프차를 타 고 와서 날 데리고 우리 집에 데려다줬다고. 집에 데려다주니까 장모님이 입에다 두부를 넣고 이러더만. 형무소 갔다 나오면 두부를 넣는가 입에 두부 넣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면담자 : 네. 그러셨군요. 의장님 테입을 한 번 더 갈아야 돼서요. 잠깐 예, 멈추겠습니다. 이만섭1-3.mp4 7. 박정희 의장 단독 인터뷰 (00:00:10 00:23:48) 면담자 : 네. 의장님 그, 동아일보 필화사건까지 말씀해주셨는데요. 어쨌거나 삼(3)개월간이나 그, 아주 고초를 겪으시다 보면 군부죠, 군부에 좀 서운한 감도 있으셨을 거 같은 데 그렇진 않으셨어요? 구술자 : 왜, 많았지. 면담자 : 많으셨죠. 예. 구술자 : 그런데 동아일보에서 내가 육군형무소 있다 나왔으니까 원래 인제 신문의 모든 책 임은 편집국장이 지는데 편집국장이 그때, 김영상( 金 永 上 ) 편집국장이, 손님이 와서 자기는 신문, 게라(ゲラ, galley)라 그래, 신문대장도 못 보고 신문을 이래 보지를 못했다 이래서 그 양반 빠지고, 또 정치부장도 빠지고, 내가 이제 혼자 고생을 했 으니까, 신문사에서 미안해서 나를 일본특파원으로 보내요. 한일국교정상화 되기 전이야. 일본 특파원으로 가있었어요. 가있었는데 그때 이제 동양통신에선 한종우 ( 韓 鍾 愚 ) 특파원이 있었고, 조선일보에서는 누구야? 김윤환( 金 潤 煥 ) 특파원이 있었 고, 이제 이랬는데, 그래 있었는데 연말이 가까워졌는데 하나 또 에피소드(episode) 가 있는 것이 박정희( 朴 正 熙 ) 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John Fitzgerald Kennedy) 미국 대통령 만나러 가는 길에 일본에 와서 일본의 이케다( 池 田 勇 人 ) 수상을 만나 - 31 -
고 가요. 근데 그때 이케다( 池 田 勇 人 ) 수상이 일부러 비행장까지 나가서 박정희 ( 朴 正 熙 ) 대통령 모시고 오고 이랬어요, 영빈관까지. 그거 특별대우지 대통령도 아 니고 이런데. 그래 이제 영빈관에 오셨는데 오시자마자 바로 기자회견이 있었어. 내외신 기자회견이 있었거든. 그런데 나는 인제 특파원이니까 거 있었지. 외국기자 들이 많았지. 기자회견 시작하자마자 제일 먼첨 내가 질문을 했어요. 내가 질문한 것은, 내가 옛날에 서운한 게 있어도 그래도 우리나라 국가원수인데 저분 용기를 줘야 되겠다. 여기 한국기자도 있습니다 하는 것도 보여주고 또 하나는 저분한테 힘이 돼야 되겠다, 도와드려야 되겠다 하는 생각에서 내가 질문을 하면서 청구권 문제니 뭐, 하여간 그때 중요한 문제를 짚어서 내가 질문해드렸거든. 외신기자가 그걸 묻기 전에. 나는 도와드릴라고 그랬는데, 그 회견 끝나고 나가시면서 그때 한 일회담 대표로 와있었던 정일영( 鄭 一 永 ) 대표보고, 정일영( 鄭 一 永 ) 박사가 나중에 제네바 대사도 하다가 국민대학 총장을 한 분이야. 그래, 정일영( 鄭 一 永 ) 박사보고 그 아까 질문한 친구 누구지? 이러시더래. 그래, 동아일보 이만섭( 李 萬 燮 ) 기자라 그러니까 그 친구 국내에서도 애 멕이더니 바깥에 나와서까지 날 애 멕이냐. 고 이렇게 말씀하시더라는 거야. 나는 그거 전혀 몰랐지. 전혀 몰랐어. 근데 나중에 조 선일보에 연재하는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는 게 있다고. 그게 조갑제( 趙 甲 濟 ) 씨 가 쓴 걸 보니까, 정일영( 鄭 一 永 ) 박사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하고 나와있더라구요. 그래 내 나중에 정일영( 鄭 一 永 ) 박사 만나가 물어봤더니, 세월이 많이 흘러가지고, 최근에 와서 물어봤더니 그때 박정희( 朴 正 熙 ) 의장께서 그런 말씀 하셨다고. 그래 내가 아, 이거 오해라는 게 무섭구나. 나는 도와드릴라고 했는데, 세상에 오해라는 게 무섭다. 막 그래가 넘어갔어. 넘어갔는데. 면담자 : 당시 박정희( 朴 正 熙 ) 의장 입장에서는 질문이 좀 곤란했나 보죠? 구술자 : 그러니까 나는 미리 좀 참고를 하십시오, 하는 걸로 이런 게 나옵니다 하는 뜻에서 내가 이야기를 한 거지. 그런데, 나중에 동아일보에서, 아마 초겨울일거야. 빨리 본 사로 들어오라는 거야. 최고회의 안에 기자실이 생겼다고. 그때까지는 최고회의 안 에 기자실이 없으니까 못 들어가니까 최고회의 바깥에, 현관에, 보도자료 쭉 꼽아 놓는 데가 있다고. 그 보도자료 꼽아 놓으면 신문사 사환이 가서, 급사가 가서 그 거 받아가지고 와서 가지고 와서 이제 기사 쓰고 이랬거든. 근데 이제 기자실이 생 겼다고 아이 빨리 나와서 그거 나가라는 거예요. 그래 내 정치부장보고 아이고 꼴 도 보기 싫은데 내가 왜 거 가느냐. 안 나간다, 나 안 나간다. 고 그랬거든 그랬더 니 나갈 사람이 없대. 기어이 나가야 된다고 정치부에 나갈 사람이 없다고 딴 사람 이, 또 군대 안 갔다 온 사람은 안 되고. 그래 내가 들어와서 최고회의에 나갔잖아. 어. 그래, 한 사람 나오다가 나중에는 내가 옛날에 청와대에 박정희( 朴 正 熙 ) 대통령 - 32 -
때 청와대에 정무수석 하던 유혁인( 柳 赫 仁 ) 후배를 내가 또 데리고 나갔지, 두 사 람씩 할 때. 그래가 데리고 나갔는데 아이 그래 최고회의에 나갔다고. 면담자 : 그러면 일본엔 한 일(1)년쯤 계셨던 건가요? 일본 특파원으로? 구술자 : 일(1)년 채 안 됐을 거야. 면담자 : 일(1)년도 채 안 되는. 구술자 : 안 됐어. 유(6)월 달에 더울 때 가가지고 어, 초겨울에 왔으니까 뭐. 그래가 내가 인 제 돌아와서 최고회의 출입을 한 거예요. 최고회의 출입을 하고 있는데 한 번은 국 방부 출입기자가, 지금 살아있어 윤양중( 尹 亮 重 )이라는, 국방부 출입기자가 우리 정 치부장보고 박정희( 朴 正 熙 ) 최고회의 의장이 오늘 강원도 화진포에 해병대상륙작 전을 시찰하러 가신다. 고 그러니까 정치부에서 누가 한 사람 아, 가볼 만하지 않 느냐. 고 혹시 뭐 단독회견이라도 어, 할지 모르니, 할 수 있을지 모르니 하여간 아, 가볼 만하지 않냐. 이랬단 말이야. 그래 정치부장이 날보고 화진포 가라는 거 예요. 단독회견. 그래 아이 단독회견이 어떻게 되느냐. 고 아이 안 되는 거 괜히 가지 말자. 고 이러니까 아이, 그래도 가. 그래가 단독회견 못해도 좋으니까 하 여간 가보라. 그래서 그러면 단독회견 안 된다는 조건하에 그러면 간다. 고 이래 가 이제 갔지. 여의도에 시포리세븐(C-47) 비행기에 인제 국방부 출입기자들이 쭉 비행기에 올라타는 거예요. 나는 동아일보 국방부 출입기자하고 같이 이제 묻어서 탄 거야. 화진포에 내렸어. 그 해병대상륙작전 인제 시찰하고 계셨어. 그때 최고회 의 공보실장이 이후락( 李 厚 洛 ) 실장이 취임해서 얼마 안 됐어요. 근데 이후락( 李 厚 洛 ) 공보실장은 최고회의 출입 보니까 내가 제일 오래 됐지. 언론계에선 내가 제일 선배지. 또 내가 동아일보 제일 큰 신문사에 있지. 그러니까 이후락( 李 厚 洛 ) 실장도 나하고 좀 가까이 지냈으면 하는 생각이 있을 때에요. 그래 내 이후락( 李 厚 洛 ) 실 장보고 이 실장, 내가 군함에 타고 있겠다. 고, 내가 군함에 타고 있겠다고 그러니 까 이 실장이 어, 나는 몰라. 나는 몰라. 이러시더라구요. 그래 인제 해병대상륙 작전 보시고 군함을 타고 울릉도로 시찰을 가시는 거예요. 우리나라 국가원수로서 는 울릉도 시찰하는 게 처음이야. 그래 나는 군함에 몰래 타있다고 그랬더니 안 된 다고, 자기는 모르겠다고 그러더라고. 그래 내가 군함에 갔지. 가니까 탁 경호실에 서 딱 경비를 하고 있더라구요. 그때 최고회의 경호실에 경호과장이 신동관( 申 東 寬 )이라고 있었어. 그 친구가 나중에 경남 사천에서, 아니야 박희태( 朴 熺 太 )가 나온 데가 어데야? 사천 아닌가? 하동 위에 섬. 경남에 하동 위에 그 섬 있잖아. 보좌관 : 거제도. 구술자 : 어? 보좌관 : 거제도요. - 33 -
구술자 : 거제도 말고. 면담자 : 하동 위에 섬이 어딘지 저도 지금 갑자기 헷갈리는데 아, 남해요 남해. 구술자 : 그래 남해. 면담자 : 예. 예. 박희태( 朴 熺 太 ) 의장 거기서. 구술자 : 남해 국회의원 하셨어 신동관( 申 東 寬 )이라고. 이 사람이 경호과장이에요. 그 양반 나 얼굴은 알지. 그 내가 속였어. 내가 이후락( 李 厚 洛 ) 공보실장이 최고회의 기자 한 사람은 가야 된다, 그러고 날보고 미리 군함에 타있으라 그러더라고. 그래 이 제 군함에 탔지. 이 친구 내가 속였어. 그랬더니 어어어. 그러고는 그대로 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군함 제일 밑에 가니까 수병들 자는 침대가 탁탁탁탁 붙어있더라, 흔들리는 침대. 그래 그 밑에 있다가 조금 있으니까 나발 소리가 나고 국가원수가 이제 군함을 탔으니까. 면담자 : 아직 원수는 안 됐을 때죠? 최고회의, 최고회의 의장. 구술자 : 그렇지. 국가최고회의 의장이니까 당시에. 근데 그때는 대통령 권한대행이야 그 어 른이. 어. 윤보선( 尹 潽 善 ) 대통령이 그만뒀으니까, 최고회의 권한대행이지. 대통령 권한대행이야. 그래가 이제 막 나발 소리가 요란하고 그래서 배가 떠나더라고. 그 래 인제 지하에서 올라왔지. 설마 날 뭐 바다에 내던지진 않겠지 하고 이래 올라왔 단 말이야. 함장실로 이리 들어가는데 저쪽에서 보니까, 최고회의 의장, 그 뒤에 육 군참모총장 민기식( 閔 耭 植 ), 해군참모총장 이맹기( 李 孟 基 ) 그리고 이후락( 李 厚 洛 ) 공보실장 그리고 부산 출신 조시형( 趙 始 衡 ), 나중에 농림부장관 했어, 조시형( 趙 始 衡 ) 최고위원 탁탁 들어와서, 함대사령관 한명수( 韓 明 洙 ) 제독 이렇게 탁. 그러더니 이후락( 李 厚 洛 )이가 일부러 자기 책임비서니까 깜짝 놀래는 척하면서 어? 어, 동 아일보 이만섭( 李 萬 燮 ) 씨 웬일이냐? 고 이러면서 그래 인제 함장실에 들어가면서 각하 동아일보 이만섭( 李 萬 燮 ) 기자입니다. 이러니까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朴 正 熙 ) 의장이 뭐? 동아일보? 동아일보 그게 신문이야? 그래 내 동아일보가 왜 신 문이 아닙니까? 면담자 : 그러셨어요? 구술자 : 선동만 하고. 어? 그래 내 뭘 선동했다 말입니까? 그랬더니 쌀값이 올라가면 어, 쌀, 쌀, 쌀값 폭등 하고 말이야. 어. 뭣에든지 선동만 한다고. 그건 선동하는 게 아닙니다. 쌀값이 이렇게 폭등이 됐으니 정부가 미리 알고 정책을 세우라는 뜻 이지, 그게 어떻게 선동입니까? 어쨌든 동아일보는 선동이야. 안 돼. 그러나 언 론이 사실 보도는 해야지요. 대통령께서 사실 보도야 해야지. 그러면서 앉으셨 어. 그러니까 또 박정희( 朴 正 熙 ) 최고회의 의장한테 잘 보일라고 한마디씩 전부 날 공격하는 거야 또. 나는 일(1) 대 오(5)인가 뭐 붙어가지고 말이야. 그래도 내가 성 - 34 -
격이 내가 질라 그래? 그런데, 나를 그래 몰아붙이고 이러다가 어느새 울릉도에 도 착했어. 면담자 : 그렇게 말씀 나누시는 동안. 구술자 : 어. 그런데 군함은 바다에 있고 경비정이 와서 그래 우리가 타고 올라가는 거예요. 그때 내 기억에도 울릉도 도민들이 횃불을 들고 막 환영을 했다고. 면담자 : 아, 이미 밤이 됐군요. 구술자 : 그렇지. 이미 밤이 됐으니까. 그것도 장관이야. 참 보기 좋더라니까. 횃불 들고 확 이래가지고. 그래가 이제 내리자마자 박정희( 朴 正 熙 ) 의장 일행은 군청 관사에 싹 들어가고. 관사에서 그날 저녁을 잡수시고 이랬는데 그 군수 이름이 그때 박창배 야. 4) 이 사람이 나중에 세월이 흘러가지고 대구시장이 됐어. 그 사람이 나한테 세 월이 흐르고 난 뒤에 이야기가 그날 저녁에, 저녁을 잡수시고 반주를, 술을 한잔 하시면서 화제가 노상 이만섭( 李 萬 燮 ) 의원님이 화제가 됐다고 나를 술안주로 놓고 모두 술을 잡쉈다고. 근데 나는 뭐 혼자니까 허! 참내, 갈 데도 없고 여관 찾으러 다니는 거야. 그랬더니 순경이 한사람 지나가다가 선배님. 하고 경례를 하더라고. 저가 대륜 나왔습니다. 어. 그래. 아유 반갑다. 고 여관 좀 안내해달라 하니까 여기 여관이 없습니다. 이래. 그때만 해도 울릉도에 여관이 없었어. 저희 집에 가 주무시지요. 그래서 순경 집에 가 잤다고. 그런데 그 이름을 내가 기억을 안 해 놨단 말이야. 적어놓든지 해야 되는데. 내가 어떡하든지 찾아야 되겠다 내 그래 생각을 해요. 박정희( 朴 正 熙 ) 대통령이 울릉도에 처음 시찰했을 때 거기에 있는 순 사 중에, 대륜 나온 사람 찾으면 아마 찾을 수 있을 거야. 보좌관 : 그렇죠. 면담자 : 네. 맞습니다. 구술자 : 찾아야 되겠다 내 그 생각이야. 그래가 이제. 면담자 : 하룻밤 신세를 지셨군요, 그 댁에서. 구술자 : 어? 면담자 : 하룻밤 신세를 지셨어요 그 댁에서. 구술자 : 그렇지. 그 얼마나 고마워. 면담자 : 그럼요. 구술자 : 더구나 심리적으로 내가 외롭고 이런데. 그래 그다음 날 또 나오니까 박정희( 朴 正 熙 ) 최고회의 의장이 어촌 시찰하시고, 또 농촌도 돌아보시고, 또 국민학교까지도 가보시더라고. 나는 이제 신문기자니까 취재를 해야지. 따라다녔단 말이야. 쭉 따라 다니는데 나중에 점심을 바닷가에 큰 기둥을 세워가지고 이게 다방이 하나 있었어. 4) 구술자가 박창규( 朴 昌 圭 )를 착각함 - 35 -
바닷가에 다방에. 거서 인제 모두 국수를 잡수신다고. 그래서 같이 들어가 봤더니 박정희( 朴 正 熙 ) 대통령이 날 막 부르시더라고 이만섭( 李 萬 燮 ) 씨. 하고. 그러더니 갔더니 내 손을 꼭 잡고는 자기 옆에 앉히더라고, 여 국수 같이 들자. 고. 그러면 서 날보고 여보 이만섭( 李 萬 燮 ) 씨 어제 내가 심했지? 아유 미안해. 미안해. 미안 하다고 미안하다고 두 번이나 그러시더라니까. 그리고 같이 국수를 잡수시자고, 그 래 같이 국수 들고. 근데 대통령께서 같이 국수 들자 그러고 미안하다는 말을 두 번 세 번 하니까 내 마음이 탁 가라앉았단 말이야. 면담자 : 그렇죠. 예. 구술자 : 아, 그래가지고 다시 이제 군함을 타고 포항으로 가시는데. 면담자 : 하루만 거기서 주무신 건가요? 울릉도에서? 구술자 : 하루. 면담자 : 하루 딱 주무시고. 구술자 : 근데 파도가 얼마나 심한지 이쪽에서는 안 되고 섬 저쪽으로 넘어갔어요. 이 군함 도 저쪽으로 가있고. 그래 걸어가면서 인제 대통령이 내 손을 꼭 잡고 같이 걸어가 면서 이 나라 농촌문제, 나라 경제이야기 앞으로 잘 살아야겠단 이야기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둘이 걸어서 횡단을 했으니까 또 정이 많이 들었을 거 아니야. 면담자 : 그렇지요. 구술자 : 그래가 이제 배에 올라탔다고. 그쪽도 파도가 셌어. 그래 경비정 타고 가서 한 사람 씩 군함에 올라타는데 모선에 올라타는데 로프(rope) 있잖아 로프(rope), 로프(rope) 를 타고 이제 올라가는 거야. 그런데 큰일 날뻔했어. 박정희( 朴 正 熙 ) 의장이 로프 (rope)를 타로 올라가는데, 파도가 확 쳐가지고, 잘못하면 떨어질 뻔했다고, 그래 겨우 올라타가지고. 다음 민기식( 閔 耭 植 ) 장군이 육군참모총장이 몸무게가 많이 나 가서 올라가는데 막 애 먹었어요 시간이 걸리고. 나도 겨우 올라탔단 말이야. 그래 가 이제 그 군함이 포항으로 왔어. 근데 그 안에서, 배 안에서 단독회견 생각이 나 서 이후락( 李 厚 洛 ) 실장보고 단독회견 이제 하자고 그랬더니 지금 모두 토하고 파 도가 심해가지고 막 토하고 난리고 다 죽어가는데 무슨 회견이냐고. 나도 그랬어. 나도 몸을 가눌 수가 없었어. 그래가 포항에 가서 기동차를 타는 거야. 기동차 타 고 이제 서울로 가는 거야. 그런데 박정희( 朴 正 熙 ) 의장이 여기 앉아있는데 그 옆 에 누가 앉을 수가 없잖아. 이 수행원들은 전부 여기저기 앉아있고. 바로 앞엔 사 람이 없으니까 내가 가서 앉았지. 그래, 이런저런 이야기하다가 내가 대구 다 올 때 내가 대구에서 내리겠습니다. 나는 집이 대구가 돼서 대구에서 내리겠다고 이 러니까, 오면서 여러 가지 대화하는 가운데 말씀 하나하나가 전부 특종이지. 선거 는 언제 하시겠습니까?, 정치인들 활동은 언제부터 하게 됩니까? 뭘 일일이 물 - 36 -
었잖아. 하나하나 특종이야. 면담자 : 기자가 아무도 없는 거잖습니까? 구술자 : 그때까지 박정희( 朴 正 熙 ) 의장이 내외신 기자를 통 털어서 만난 일이 없는 분이야. 내외신 기자를 통 털어서 만난 일이 없다니까. 면담자 : 이렇게 단독으로 인터뷰(interview)한 적이 없다는 말씀이시죠? 구술자 : 그렇지. 단독 아니라 우리 국내 기자들 여럿이라도 회견한 일이 없어. 그러니까 막 완전히 특종이야. 그래 나는 대구에서 내리겠다 그러고 아유 서울에 오면 꼭 만나 자고 이래고 대구에서 내려서 동아일보 지국까지 얼마나 뛰었는지 지금도 생각하 면 숨이 가파. 그래가 열두 시 다 됐지, 막 전화로 기사를 부르면서 한장 한장 공 장에 넘기라 그래가지고 동아일보 특종을 했지. 완전 특종이지. 그래가 그때 특종 상, 몰라 내 기억에 뭐 한 백만(1,000,000)원 받았을 거야. 그것 가지고 정치부 기자 들 전부 가서, 저녁 먹고 한잔하는데 뭘 백만(1,000,000)원 가지고 모자라잖아? 그 러니까 그 집에 최두선( 崔 斗 善 ) 사장이 자주 다니던 데야. 단골이야. 그래가 사장한 테 돈 오바(over)되는 거는 초과되는 건 글로 달아놓고, 그때는 기자들 사는 게, 그 렇게 인간적으로 좋았다고. 달아놓고 이래 완전히 특종한 일이 있는데, 그 후에 박 정희( 朴 正 熙 ) 의장께서 틈만 나면 날 찾으셔. 그래가 나도 이제 인간적으로 만나는 그거는 취재, 보도할 수도 없잖아. 그래 여러 가지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이런 이 야기 저런 이야기 쭉 하시면서 대화를 해보니까 내 생각에 아하, 이 분이 우리 대 한민국 팔(8)년만 맡으면 이 나라가 달라지겠다 하는 생각이 자꾸 들더라고요. 그 야말로 사심이 없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나라 걱정이야. 나라 경제 걱정. 아하, 이분이 팔(8)년만, 사(4)년, 사(4)년 팔(8)년만 하면 이 나라가 달라지겠다 하 는 생각이 자꾸 나더라니까요. 그게 자꾸 그 생각이 나니까, 내가 신문기자는 중립 을 지키고 객관적 보도만 하면 되는데 마음이 기울어지니까, 이 신문사에 대해서도 미안한 생각이 들고, 언론에 대해서 이거는 원래 본분이 아니란 말이야. 마음이 기 울어지고 이러니까 이럴 바에야 차라리 내가 박정희( 朴 正 熙 ) 대통령하고 손잡아야 되겠다, 도와드려야 되겠다 이래가지고 천구백육십삼(1963)년 추석날 밤에 우리 집 사람하고 둘이 앉아가지고, 그 밝은 달을 바라보면서 우리 집사람하고 의논했어. 내가 동아일보 그만두고 가서 도와드리는 게 낫겠다. 또 우리 집사람도 좋다 그랬 어. 그래가 그다음 날 바로 최고회의 의장 공관에 가는 거요. 최고회의 의장 공관 이 장충단에 있었어. 가서 내가 의장님, 내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내가 구 정치인들 처럼 돈을 바라는 것도 아니고, 감투를 바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왜 이 나라에 박 정희( 朴 正 熙 ) 의장 같은 분이 대통령 되어야 하느냐 하는 나의 소신을 국민들에게 밝힐 수 있는 기회만 주십시오. 이랬더니 그 자리에서 막 박정희( 朴 正 熙 ) 의장께 - 37 -
서 너무너무 고마워가지고 천군만마를 얻는 거 같은 기분이셨어. 왜냐 그때 주위에 사람이 없었다고. 김종필( 金 鍾 泌 ) 씨는 사(4)대 의혹사건으로 구라파에 망명하고 없 고 주위에 물론 공화당은 있지마는 아주 측근에 주변에 특별한 사람이 없었거든. 그러니까 이 양반이 너무 좋아가지고 그 자리에서 전화통을 붙들더니 이후락( 李 厚 洛 ) 실장한테 전화를 해. 여보 이 실장, 여기 동아일보 이만섭( 李 萬 燮 ) 씨 여 와있 는데 대통령 유세반에 넣어라. 면담자 : 바로 지시를. 8. 1963년 대통령선거와 정계입문 (00:23:49 00:41:06) 구술자 : 그 자리에서. 그래가지고 이제 내가 대구부터 유세를 시작하는 거예요. 근데 그때 박정희( 朴 正 熙 ) 대통령 유세가 대전하고, 대전하고 대구 이래 나와 있는데 나는 대 구부터 하겠다, 내 고향에서, 그게 의미가 있다 이래가지고 대구에서 유세를 했지 요. 했는데 박정희( 朴 正 熙 ) 대통령이 잘 말씀을 안 하시는데 그날은 금호호텔에서 점심을 사주시고 차타고 오는데 나를 옆에 태워가지고 오시는데 여보 이만섭( 李 萬 燮 ) 씨 오늘 잘해야 돼요. 잘해야 돼요. 하고 걱정하시더라니까. 근데 대구 수성 천 변에 나와 보니까 사람이 인산인해( 人 山 人 海 )야. 대구 생기고 그렇게 사람이 많 이 모였어. 그래가지고 그날 일(1)번 타자에 민관식( 閔 寬 植 ) 이(2)번 타자에 백남억 ( 白 南 檍 ), 일(1)번 타자에 내가 있어 이만섭( 李 萬 燮 ) 이(2)번 타자에 민관식( 閔 寬 植 ) 삼(3)번 타자에 백남억( 白 南 檍 ) 그래 마지막에 네 번째에 박정희( 朴 正 熙 ) 후보가 하 시고 이랬거든. 내가 일(1)번 타자야. 내가 연설을 얼마나 잘했는지. 그런데 그 당 시에 말이지 나는 이거 아직도 모르겠어. 어느 방송사고 그 동영상을 갖고 있는데 가 없다구요. 면담자 : 아, 그렇습니까? 구술자 : 으레이 박정희( 朴 正 熙 ) 후보는 지는 걸로 생각을 했겠지. 동영상이 없다니까. 녹음 해놓은 것도 없고. 그래 옛날에 녹음기 이쪽에 꼽아가 여기 빙빙빙 돌리면서 하는 거 있잖아. 보좌관 : 릴(reel). 면담자 : 릴테입(reel tape)으로. 예. 구술자 : 그걸 내가 갖고 있었어. 지금도 갖고 있는지 모르겠어 어디 저 밑에 보관해뒀는데. 보좌관 : 그 다시 이렇게 시디(cd)로 정리하지 않으셨었나요 그때요? 구술자 : 그래서 내가 아주 기가 막히게 잘했거든. 그때 아까 이야기한 대로 이제 나하고 민 관식( 閔 寬 植 ), 백남억( 白 南 檍 ) 이랬는데 사회를 누가 봤느냐, 이효상( 李 孝 祥 ) 의장이 - 3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