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평화연구원 편
발간사 2011년은 새해 벽두부터 변화와 위기의 한 해였습니다. 연초에 이집트 무 바라크 대통령과 리비아 카다피 대통령이 축출되었고, 12월에는 북한의 김정 일이 사망하였습니다. 구체제의 지도자들이 명운을 달리하는 와중에 후쿠시 마 원전사태나 EU의 재정위기 같은 커다란 사건들도 발생하였습니다. 한국 은 중동에 원유를 의존하고, 북한과 일본에 인접하고 있으며, EU와는 FTA를 발효하고 있으므로 이러한 변화와 사건들이 평화와 번영에 주는 영향과 함의 를 면밀하게 관찰하고 분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 평화 정착과 동아시아의 협력을 통한 공동번영을 추구하는 데 기여 하고자 탄생된 저희 제주평화연구원은 설립 이래 역내 평화 정착과 다자협력 의 확대와 제도화에 중점을 두고 이론적 논의와 정책대안의 개발에 노력해 왔습니다. 2011년에도 저희 연구원은 국내 유수의 여러 학자와 정책 전문가 들을 모시고 우리나라와 동아시아, 나아가 전 세계의 평화와 번영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한 현안에 대하여 깊이 있게 논의하고 그 결과를 JPI 정책포럼 으로 출판하였습니다. 2011년에는 한반도 평화와 남북관계, 동아시아 다자협력, 글로벌협력과 한 국이라는 세 가지 주제 아래 전통적 안보문제, 비전통 안보문제, 평화문제 등 에 대한 다양한 논의와 분석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연구와 토론의 결과를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I, II: 전환기의 대응전략 이라는 제 목 아래 단행본으로 출판하는 것은 2011년의 주요 문제에 관한 우리나라 유
수의 전문가들의 집단적 지성을 종합하고 넓게 활용할 수 있게 한다는 중요 한 의의가 있습니다. 이 기회를 통해 2011년 JPI 정책포럼에 참여하여 주신 연구자와 전문가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이 책의 독자들에게 저희 연 구원에 대한 많은 성원과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끝으로 출판을 위해 수고하 여 주신 한국학술정보(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2011년 12월 제주평화연구원장 한태규
C O N T E N T S 발간사 4 1부 한반도 평화와 남 북 관계 남 북 관계의 국제정치 / 황지환 11 북한의 다각적 평화공세와 체제전환 가능성 / 안찬일 27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 정영태 41 독일통일의 쟁점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 염돈재 60 새로운 통일 필요성 논리의 개발: 청소년 대상 통일교육과 관련하여 / 고성준 76 북한 정치경제 체제의 본질과 남 북교류협력사업 방향 / 김동성 104 한반도 통일: 비전과 전략 / 김병로 127 독일 통일 교훈과 한반도 평화통일 비전 / 양창석 143 북한의 변화와 남 북통일전망 / 정지웅 160 북한에 부는 한류 열풍 의 진단과 전망 / 박영정 181 양안( 兩 岸 ) 교류협력의 특징과 남 북한관계에 대한 시사점 / 신종호 200
2부 동아시아 다자협력 동아시아 경제통합과 거대기업의 역할: EU사례의 함의와 적용 / 김두진 221 러 중 군사협력의 동향과 장래 / 이홍섭 240 미 중 관계의 정상화와 대만 / 김중섭 257 대지진 이후의 일본 위상과 동북아질서 / 이면우 274 중국의 대북정책과 북 중 동맹의 동학 / 이기현 284 북 중 경협의 현황과 전망 / 임수호 304 중국의 부상과 러시아의 극동정책 / 홍현익 319 일본의 민주당 정치와 한 일 관계 / 고선규 349 동아시아 전략적 3국 관계와 한국외교의 대응방향 / 김동성 370
1부 한반도 평화와 남 북 관계
남 북 관계의 국제정치 황지환(명지대학교 교수) 남 북 관계는 국제정치와의 관계에서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역할을 동시에 하고 있다. 한반도 분단의 역사에서 볼 때, 남 북 관계의 변화를 통해 국제정치 환경이 달라짐과 동시에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남 북 관계가 변화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 북 관계는 국제정치에 대한 독립 변수보다는 종속변수로서의 모습을 더 강하게 드러내곤 했는데, 이는 한반도가 가진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국제구조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북 핵 문제나 한반도 평화 체제, 최근의 천안함 및 연평도 사건처럼 한반도에서 중요한 여러 이슈들을 살펴볼 때, 남 북 관 계는 그 자체적으로 독립적인 역할을 하기보다는 국제정치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다. 북 핵 문제의 경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 모두 남 북정상회담이나 남 북 간 접촉을 통해 문제 를 해결하기보다는 한반도 주변의 국제정치 상황 변화에 커다란 영향을 받은 측면이 강했다. 한반 도 평화체제 역시 당사자인 남 북한의 대화와 협상이라는 남 북 관계의 틀 속에서 논의가 이루 어지기보다는 6자회담이라는 국제정치 속에서, 그리고 미국의 대한반도정책의 맥락 속에서 논의가 진전되거나 붕괴되었다. 최근의 천안함 및 연평도 사건 역시 사건 자체는 남 북 관계의 틀에서 벌어졌지만, 그 대응과정은 자체적인 역학관계보다는 국제정치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어 종속 변수로서의 남 북 관계가 더 크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남 북 관계가 한반도 주변 국제정 치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상황에서는 주변 강대국들에 대한 한국의 외교력을 강화하는 노 력이 중요하다. 특히 남 북 관계의 기본적인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남 북 관계 혹 은 통일외교의 추진이 필요한데, 남 북 관계에 대한 주변국들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한국의 이니 셔티브를 확대해나가는 외교력을 키워가야 할 것이다. 2010-01-15
12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1. 남 북 관계는 국제정치다 남 북 관계는 국제정치다 라는 언명은 남 북 관계를 국제정치의 독립변 수로서 보는 경우와 종속변수로서 보는 경우의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음. 국제정치에 대한 독립변수로서의 남 북 관계는 남 북 관계가 국제정치 적으로 중요한 변화요인이기 때문에, 남 북 관계의 변화를 통해 국제정 치 환경이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함. 국제정치에 대한 종속변수로서의 남 북 관계는 국제정치 환경의 변화에 따라 남 북 관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함. 가. 독립변수로서의 남 북 관계 남 북 관계가 국제정치변화에 독립변수의 역할을 한 대표적인 사례로 세 계냉전질서의 초기 단계에서 한국전쟁이 미친 영향성을 들 수 있음. - 한국전쟁은 미국과 소련의 초기 냉전적 대치상태를 격화시키고, 그 구조 를 봉인했다고 평가할 수 있음. 이는 레이몽 아롱(Raymond Aron)이 표현한 이룰 수 없는 평화 로서의 냉 전의 구조를 완성하는데 한국전쟁 당시의 남 북 관계가 미친 영향이라고 할 수 있음. 정반대의 측면에서 한국전쟁은 냉전(Cold War)이 열전(Hot War)이 되지 않도록 하는 국제적 합의구조를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음. - 레이몽 아롱의 표현에 따르면 이는 일어날 것 같지 않은 전쟁 으로서의
남 북 관계의 국제정치 13 냉전의 구조가 형성되는 데 한국전쟁이 미친 영향을 의미함. 나. 종속변수로서의 남 북 관계 남 북 관계가 국제정치의 변화에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사례로 남 북한 의 분단과정을 들 수 있음. 한반도의 분단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과정에 서 형성된 미 소 간의 상호불신의 결과로서 이해될 수 있음. 미국과 소련 모두 초기에는 한반도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 만, 1945년 2월의 얄타회담의 결과, 양국은 한반도가 동북아에서 어느 한 세력권에 드는 것을 원하지 않음으로써 한반도의 분단을 가져옴. 미국은 한반도를 일본이라는 전략적 거점의 방어를 위한 완충지대로서, 소련은 한반도가 소련공격을 위한 기지가 되지 않도록 하는데 의미를 부 여했고, 이는 한반도의 분할점령을 가져옴. - 남한에 친미정권, 북한에 친소정권이 들어오면서 해방 후 남 북 관계 의 성격을 규정지음. - 이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질서의 미 소 간 세력균형(balance of power) 형성과정에서 형성된 부산물임. - 이러한 모습은 미 소의 세계냉전과 미 중 소의 세력균형관계가 변하 는 1970년대 데탕트의 여파로 7 4 남 북공동성명이 이루어지는 모습에 서도 잘 나타남. 다. 독립변수와 종속변수의 비교 한반도 분단의 역사에서 볼 때, 남 북 관계는 국제정치에 대한 독립변수
14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로서도 종속변수로서도 동시에 작용해 왔음. - 남 북 관계는 국제정치에 대한 독립변수보다는 종속변수로서의 모습이 더 강하게 드러남. - 월츠가 이야기하듯, 한반도가 가진 지정학적인 위치에서 국제구조의 압도 적인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임. 최근의 천안함 및 연평도 사건 역시 사건 자체는 남 북 관계 내에서 벌어 진 것이지만, 그 대응과정은 자체적인 역학관계보다는 국제정치의 영향을 더 많이 받고 있어 종속변수로서의 남 북 관계가 압도적으로 더 크다는 점을 보여줌. 2. 남 북 관계에 대한 국제정치의 영향력: 이론적 시각 가. 제2이미지 역전 이론 외교정책 연구에서 일반적으로 국내 정치적 요인을 강조하는 대부분의 이 론은 국가 안 의 속성을 통해 국가 밖 의 행동을 설명하는(inside-out) 경 향을 보임. - 이 이론들은 국가의 외교정책 행위와 그 결과로 나타나는 국제정치적 결 과들을 종속변수로, 국가 내부의 국내정치적 요인들은 이 종속변수를 설 명하는 독립변수로 간주하는데, 이는 월츠가 이야기하는 제2이미지 의 견해임. - 제2이미지 역전 이론은 구레비치(Peter Gourevitch)가 논의하듯 국내 정치 요인이 국제정치적 사건의 원인이 아니라 오히려 국내 정치 상황을 국제
남 북 관계의 국제정치 15 정치적 요인에 의해 발생한 결과로 인식함. 제2이미지 역전 이론은 국내구조를 주어진 것으로 보지 않고 대외적 요 인에 의해 영향받은 것으로 이해하는데, 이는 밖 으로부터의 영향이 어떻 게 국가 안 에서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지에(outside-in) 관심을 두고 있음. 나. 제2이미지 역전 이론의 적용 남 북 관계는 물론 제2이미지 역전 이론에서 의미하는 국내 정치가 아 니기 때문에 직접적인 적용은 어렵지만, 한반도라는 지역 내부의 관계라 는 점을 감안하여 제2이미지 역전 이론을 적용할 수 있음. - 이는 남 북 관계를 고정된 것이나 혹은 자체적인 동학에 의해 움직이는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국제적인 요인에 의해 상당한 영향을 받으 면서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인식하면서 남 북 관계가 가지는 역사성을 강조하는 것임. 현재 남 북 관계를 북한 정권의 속성이나 한국 정부의 정권 변화 등으로 설명하는 것과는 달리, 이러한 관계가 미 소 간의 냉전, 미 중 관계의 변 화, 동북아질서의 변화에 따라 어떻게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임. - 이는 남 북 관계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질 뿐 아 니라, 한국 정부의 대북정책과 대외정책을 결정하는데도 중요한 교훈을 줄 수 있을 것임.
16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3. 남 북 관계에 대한 국제정치의 압도적 영향력: 사례분석 가. 남 북 관계와 북 핵 문제 북 핵 문제처럼 남 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에서 남 북 정상 간의 논의가 얼마나 획기적인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었는가를 평가하는 것은 중요한 사례임. 남 북 간 최고의 대화채널이라고 할 수 있는 남 북정상회담이 북 핵 문 제 해결 과정에서 미친 영향성을 통해 남 북 관계에 대한 국제정치의 압 도적 영향력을 평가할 수 있음. 1) 김영삼 정부 시기 김영삼 대통령은 1993년 2월 대통령 취임사에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 한 전향적인 대북전략과 남 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적극적인 정책의지 를 표명했으며, 이를 위해 남 북정상회담을 제안했음. - 김 대통령은 냉전의 종식 이후 평화와 협력의 세계질서 흐름에 발맞추어 한반도에서도 남 북한이 서로 협력하고 평화를 이루어내야 함을 강조하 며, 어느 동맹국도 민족보다 더 나을 수는 없다 고 언급하며 급변하는 국 제질서에서 민족공조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음. - 남 북정상회담을 제의함으로써 남 북 간 긴밀한 협력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지향할 것임을 명확히 했음. - 취임 당시의 전향적 대북 기조는 3월 12일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 선언 이후 방향을 급선회하게 됨.
남 북 관계의 국제정치 17 김영삼 정부는 북한의 핵사찰 거부와 NPT 탈퇴로 초기의 전진적인 대북 관계 구상에 수정이 불가피해졌음을 인식하고, 대화와 압력을 병행한다는 대북기본전략을 마련함. - 김 대통령은 1993년 6월 취임 100일의 기자회견에서 핵무기를 가진 상대와 는 결코 악수할 수 없다 며 북 핵 문제에 대한 단호한 입장을 밝혔음. - 김영삼 정부가 대화와 압박을 병행하는 전략으로 대북정책의 기조를 변경 함에 따라 북한은 강력히 반발하며 남 북채널을 붕괴시켰고, 이에 따라 한국은 북 핵 문제와 남 북 관계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북 미 채널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음. -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제안했던 남 북정상회담은 북 핵 위기의 고 조로 불가능해졌음. - 김영삼 정부의 남 북정상회담은 의외의 계기를 통해 성사되었음. - 1994년 6월 북 핵 위기가 고조되어 군사적 충돌 우려까지 제기된 상황에 서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하여 김일성과 북 핵 문제에 대해 합의를 하게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카터는 김일성 주석에게 남 북정상회담을 제안하 고 김일성 주석과 김영삼 대통령이 이를 수용하면서 회담 개최가 성사되 었음. 김영삼 정부 시절 남 북 관계는 북 핵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협의의 과정 으로 남 북정상회담을 활용하기보다는 북 핵 문제의 국제정치적 상황의 변화에 영향을 받았음. - 김영삼 정부 시절 남 북정상회담이라는 남 북 관계가 북 핵 문제 해결 을 이끌어 간 것이 아니라, 북 핵 문제 해결 과정이 남 북정상회담 성사 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음. - 북 핵 문제는 한반도 주변 국제질서의 영향력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음.
18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2) 김대중 정부 시기 김대중 정부 시기 한반도 주변의 국제관계는 더할 나위 없이 호전되어 있 었음. 1994년 6월의 카터 - 김일성 합의는 10월의 제네바 합의로 이어졌음. - 1998년 8월, 북한이 인공위성 광명성 1호라고 주장한 대포동 1호 미사일을 일본 열도를 넘어 발사한 후에는 미사일 위기가 조성되고 있었으나, 미국 의 대북정책을 재검토하기 위해 페리 전 국방장관이 1999년 5월 북한을 방문하였을 때, 북한은 미국의 제안에 상당히 호의적이었음. - 이후 미사일 회담이 급진전되고, 1999년 10월 페리 보고서가 제출된 후 북 한과 미국은 유례없는 관계개선의 꽃을 피웠음. 북한의 조명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방미하여 클린턴 대통령과 면담했 을 때 재확인되었는데, 당시 공동코뮈니케에서 북한은 제네바 합의의 성 실한 이행과 북 미 관계개선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하였음. - 이 방문에서 조명록은 클린턴의 방북을 초청하는 김정일의 친서를 전달했 는데, 이의 준비를 위해 올브라이트 국무장관이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하기도 했음. -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 간의 2000년 6월 남 북정상회담은 이 와 같이 북 핵 동결과 북 미 관계 개선이라는 우호적인 한반도 환경에서 성사되었음. - 북 핵 문제가 동결된 상황에서 남 북정상회담이 이루어진 것임. 제1차 남 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되었던 김정일 위원장의 서울 답방 혹은 제2차 정상회담 약속은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북 미 관계가 경색되기 시작하자 지켜지지 못했음. - 남 북정상회담의 합의문인 6 15공동선언에 북 핵 문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었다는 점은 남 북 관계가 북 핵 문제를 이끌어가지 못했다는 사 실을 보여주는 것임.
남 북 관계의 국제정치 19 -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에도 불구하고 6 15공동선언에서 합의되었던 제 2차 남 북정상회담은 정권 말까지 실현되지 못했고, 북 핵 문제는 한국 의 노력에도 계속 악화되었음. -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남 북정상회담은 한반도 주변 국제정치 환경이 민 감하게 고조되고 있을 때는 가능하지 못했고, 북 핵 문제가 합의되어 동결 되었을 때 가능했었음. - 남 북정상회담이 남 북 관계의 여러 이슈에 대해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 을지는 몰라도 북 핵 문제 해결을 실질적으로 이끌어가지는 못했으며, 오 히려 북 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환경의 악화가 남 북 관계의 진전을 가로 막았다는 것을 의미함. 3) 노무현 정부 시기 2002년 가을 이후 제2차 핵 위기가 시작된 이후 부시 행정부에 대한 북한 의 위협인식은 악화되어 북한은 점점 더 충돌적인 핵 정책을 추구했는데, 특히 2003년 3월,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이후 더욱 심화되었음. - 북한은 이전에도 미국의 군사적 움직임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해 왔지만, 이라크 전쟁이 시작된 이후 이라크의 상황을 북한의 상황과 대비시키면서 핵무기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시사했음. - 이러한 제2차 북 핵 위기와 북 미 간의 충돌상황에서 노무현 정부는 햇 볕정책을 이어받은 평화번영정책을 펼쳤지만,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 북정상회담을 오랫동안 성사시키지 못했음. - 노무현 정부는 2007년 초 이후 북 핵 문제가 6자회담을 통해 합의되어가 는 과정에서 제2차 남 북정상회담의 기회를 가지게 됨. 2007년 2월의 2 / 13 합의 이후에는 북한의 핵동결과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가 진전되면서 제2차 정상회담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수 있었음. - 노무현 정부는 이처럼 북 핵 문제와 북 미 관계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20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2007년에 들어와서 제2차 남 북정상회담을 가지게 되었고, 그 시기도 6 자회담에서 10.3 합의를 이루어 나가는 시기와 일치함. - 제2차 정상회담의 합의문인 10 4 선언에서도 북 핵 문제는 남 북 간의 합의나 노력에 의해서가 아닌 6자회담의 해결 과정에 의존하고 있음. - 노무현 정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남 북정상회담이 성사되지 못하다가 임기를 6개월도 남기지 않은 상황에서 성사된 것은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 책이 전환되었음에 기인한다고 평가할 수 있음. - 노무현 정부 시절에도 남 북정상회담이라는 남 북 관계가 북 핵 문제 해결을 이끌어 갔다기보다는 북 핵 문제의 갈등이라는 한반도 주변 안보 환경의 변화에 남 북 관계가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고 평가됨. 나. 남 북 관계와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한반도에서 평화질서를 구축하는 것은 남 북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어젠 다 중의 하나임. - 한국전쟁의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한반도 평화의 질서를 구 축하는 것은 남 북 관계 변화에 중요한 사건이 될 것임. -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관한 논의가 어떻게 진전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남 북 관계와 국제정치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의미를 제시해 줄 것임. 1) 6자회담과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2007년 부터 2008년까지 활발하게 논의된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남 북 회담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베이징 6자회담에서 북 핵 문제가 합 의되면서 그 부산물로서 이루어진 것임. - 2007년 2월의 2/13 합의 이후에는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 게 진전됨.
남 북 관계의 국제정치 21 2005년 9월 19일, 제4차 베이징 6자회담의 결과물로 제시된 9 19 공동성 명에서 관련 당사국들은 동북아시아의 항구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 동 노력할 것을 공약 하며,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 을 공언하였음. - 이후 제5차 6자회담의 3단계 회의가 끝나고 2007년 2월 13일 발표된 9 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 에서도 참가국들은 동북아에서의 지 속적인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노력을 할 것을 재확인 하였음. - 이에 따라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갖는다 고 명시했으며, 2007년 10월 3일 합의된 제6차 6자회담 2단계 회의에서 2단계 조치에 합의함으로써 북 핵 문제 해 결과 한반도 평화체제의 국제사회의 기대를 한층 더 진전시켰음. - 2008년 12월 수석대표회의를 끝으로 6자회담이 공전되자, 이후 한반도 평 화체제에 관한 논의는 중지되었고, 남 북 관계는 이에 대한 어떠한 변화 도 꾀하지 못함. 2)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전환과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 당시의 한반도 평화체제 논의는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전환에서도 나타 났음. - 부시 행정부 2기에서 대북강경정책을 변화시키는 데 커다란 영향력을 발 휘한 것으로 알려진 젤리코(Philip Zelikow) 보고서는 북 핵 문제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에 대한 장기적인 방향을 제안했음. - 젤리코 보고서는 북한 핵 문제의 해결이 완료되기 이전에라도 북 미 간 의 평화협정(peace treaty) 체결에 관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다는 새롭고 광 범위한 접근법(a broad new approach)을 담고 있었음. - 북한이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해체하기 이전에는 어떠한 경제적 외교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부시 행정부의 이전 입장을 고려할 때 이는 상당 히 진전된 시각이었음.
22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 여기에는 부시 행정부가 핵 문제 해결뿐만 아니라 북한과의 공식적인 경 제협력관계 및 외교관계의 수립 등을 동시에 고려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었 는데, 종국적으로는 관련 당사국들이 해결되지 않은 한국전쟁의 이슈들 을 다루며 평화프로세스로 나아가서 한국전쟁의 최종적인 종전을 시도 함으로써, 한반도에서의 항구적인 평화체제 구상에 대한 의지를 표명하고 있었음. - 이에 따라 2006년 4월의 미 중 정상회담에서 부시 대통령은 후진타오 중 국주석에게 북 미 평화협정의 가능성을 타진했던 것으로 알려졌음. - 이어 2006년 11월 18일 하노이에서 열린 한미정상회담에서 미국은 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하면 종전선언과 평화조약을 체결할 용의가 있다 고 제안함. - 이러한 과정은 한반도 평화체제에 관한 논의가 당사자인 남 북한의 대화 와 협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미국의 대외정책 변화 속에서 진전 된 것을 보여주는 것임. 다. 천안함 및 연평도 사건과 남 북 관계 1) 천안함 사건 이전의 남 북 관계 천안함 사건 이전 남 북 관계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북한의 강경한 대응으로 경색되고 있었음. - 2009년 초, 북한의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이명박 정부의 대북강경책으로 인해 남 북한 사이에 채택된 모든 합의문이 사문화되고 백지화되었다고 주장하였음. - 이에 따라 북한은 남 북 사이의 정치, 군사적 대결상태 해소와 관련한 모 든 합의사항을 무효화한다고 선언하였는데, 이는 북한이 이명박 정부 1년 의 대북정책을 관찰한 후 남 북 관계에 대한 접근법을 전면적으로 수정 할 것임을 의미하는 것이었음.
남 북 관계의 국제정치 23 - 당시 북한의 대남정책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대응책의 일환으 로 이루어진 남 북 관계 차원의 것이었으며, 남 북한 기본관계에 대한 남 북 간의 인식차이를 반영한 것이었음. - 천안함 사건 이전 남 북 관계는 이전 김대중 및 노무현 정부의 대북정책 에 대한 논쟁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남 북 관계의 맥락에서 대응 되고 있었음. 2) 천안함 및 연평도 사건의 국제정치 천안함 사건 이후 남 북 관계는 한반도 주변 국제정치에 의존하는 경향 이 강함. - 대표적으로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 이후 남 북 관계는 실종되고 미국, 중 국, 일본, 러시아 등을 통한 치열한 외교전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 할 만한 사실임. - 천안함과 연평도 사건을 대하는 중국 정부의 미묘한 입장에서 잘 드러나 듯 최근 남 북 관계는 미 중 관계의 긴장이 북한 문제를 통해 돌출되는 과정에 크게 영향을 받고 있음. - 2009년 미 중 전략경제대화에서 돈독한 관계를 과시했던 미 중 관계는 2010년 들어 검색엔진 구글 에 대한 사이버 분쟁을 시작으로, 대만에 대 한 미국의 무기판매 결정, 위안화 절상 및 무역 불균형 문제, 천안함 및 연 평도 사건 등 전방위로 갈등이 악화되어 왔음. - 이에 따라 최근 미국과 중국의 외교적 갈등이 악화되면서 한국은 남 북 관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한 미동맹과 한 중 관계 사이에서 상당한 전 략적 딜레마를 겪고 있음. 2008년 이후 글로벌 금융위기로 더욱 첨예화된 미 중 간의 갈등구조는 앞 으로 남 북 관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됨. - 동북아의 4강에 둘러싸여 있고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어 한 미 관계와
24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한 중 관계를 모두 중요시해야 할 한국으로서는 남 북 관계를 관리해 나가는 데 있어 이러한 미 중 간의 갈등상황이 매우 어려운 전략적 딜레 마를 안겨 주고 있음. - 이명박 정부 들어 한 미 관계가 강화되는 과정에서 중국은 한미동맹이 냉전의 유산이라며 수차례 비판하고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의 대북정책은 남 북 관계에서 한국의 입지를 어렵게 하고 있음. 4. 정책적 함의: 국제정치를 활용하는 남 북 관계 외교의 중요성 이처럼 남 북 관계가 한반도 주변 국제정치의 압도적인 영향을 받고 있 는 상황에서는 주변 강대국들에 대한 한국의 외교력을 강화하는 노력이 중요함. - 남 북 관계의 기본적인 성격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남 북 관계 혹은 통일외교의 추진이 필요함. - 한반도 주변국들에는 남 북 관계에 대한 불안감이 일정 부분 존재하는 데, 이는 한반도가 안정되어 통일된 이후 동북아 국제관계의 역학관계에 대한 불안정성과 예측 불가성 때문임. - 통일된 한반도가 동북아의 안정과 협력을 위해 얼마나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주변국들에 설득하는 노력이 외교의 가장 중심된 부분이 되어야 하며, 이러한 외교가 국가외교의 주요한 어젠다로 설정되어 장기 적인 비전을 주변국들에 설득시켜야 함. 남 북 관계와 한반도 문제의 당사자로서 문제에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 는 정보를 확보하고 정책을 제안하여 국제협력의 주도권을 최대한 추구하 는 것이 중요함.
남 북 관계의 국제정치 25 - 우선 미국과의 관계에서 한국은 미국의 정책변화를 예측하고, 주요한 이 슈를 선점하여 미국의 한반도 관련 정책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 전략적 비전을 만들어 가야 함. - 중국과의 공조는 북한의 입장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보조를 취하여야 할 것임. - 2008년 4월 전략적 협력동반자관계 로 격상된 한 중 관계에서 북한의 미래에 대해 어떠한 전략적 목적을 공유할 것인지 다양한 논의를 전개할 필요가 있음. - 북한의 급변사태에 대한 중국의 대응 등과 같은 민감한 상황에 대한 갈등 은 최소화하고 한반도의 미래비전에서 중국이 할 수 있는 역할에 대한 논 의를 활발히 해 나가야 할 것임. 중국은 북한문제와 남 북 관계의 연착륙(soft landing)을 바라고 있기 때 문에 중국이 선호하는 접근방식을 대북정책에 반영시킬 필요가 있음. - 중국은 일부에서 기대하는 북한붕괴론이나 흡수통일론을 수용할 가능성은 거의 없으며, 중국의 관점에서 북한의 김정일 정권이 붕괴할(regime collapse) 가능성을 상정할 수는 있겠지만, 북한 자체가 붕괴할(state collapse) 가능성은 배제하려고 할 것임. - 중국이 강조하는 6자회담의 주요 결과물을 기초로 남 북 및 6자회담 합의 사항 중 한국과 미국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을 남 북 관계에서 구현할 필요가 있음. - 일본과의 전략적 공조도 중요한 부분으로, 동북아의 향후 질서와 남 북 관 계의 향후 미래를 고려할 때, 한 일 간의 전략적 협력관계는 특히 중국과 의 관계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가지기 위해서 필수적임. 독일의 사례를 보면, 서독의 경우 독일의 분단 해소와 통일이 유럽의 국제 관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영국, 프랑스, 소련 등의 우려를 적극적인 외
26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교를 통해 완화시켰음. - 유럽의 평화와 안정이 독일의 통일과 병행되어야 한다는 미국의 전략을 활용하여 주변국들의 위협인식을 감소시키고, 서독의 통일비전을 설득시 켰음. - 동북아에서도 남 북 관계의 안정과 한반도의 통일이 역내 평화와 안정의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을 주변 강대국에게 설득시킴으로써, 남 북 관계에 대한 주변국들의 영향을 최소화하고 한국의 이니셔티브를 확대해나가는 외교력을 키워가야 할 것임.
북한의 다각적 평화공세와 체제전환 가능성 안찬일(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 2011년 새해를 맞으며 북한은 갑자기 쓰나미식 대화공세를 취하고 있어 한국정부를 당황하게 만 들고 있다. 북한은 시종일관 그래 왔듯이 대남정책에서 강온 양면 전략을 구사하며 지난해의 천안 함 사건 및 연평도 무력도발이 언제 있었느냐는 식으로 철면피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북한은 분단체제에서 언제나 불리하면 도발하고 유리하면 대화공세를 펴는 방식을 되풀이해왔다. 무력으로 싸우는 군사적 대결보다 말로 싸우는 대화가 자신들의 체제유지와 한반도 평화에 유리 하다는 것을 북한은 잘 알고 있다. 특히 북한은 현재 3대 세습의 안정이라는 내적 논리에 근거하여 외부로부터의 경제적 수혈과 정세안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다. 원래 북한의 전략은 3차 당 대표자회 개최 전 중국과 한국에 경제지원과 평화제스처를 강하게 피력했으나, 그것이 아무런 피 드백을 가져다주지 않자 군사도발이란 긴장의 에너지를 선택하였다. 북한의 강한 평화공세로 시작된 2011년 남 북 관계는 어떤 양상으로 변화될 것이며, 또 북한은 남 북 관계의 변화 속도에 맞추어 자신들의 체제전환에서도 똑같은 속도를 낼 것인지 궁금증이 증폭되고 있다. 북한이 단지 외부적 수혈이라는 차원에서 대화공세를 펴고 있다면 그것은 말 그대 로 공세로 끝나고 말 것이다. 북한은 자신들의 잘못된 체제를 개혁하고 개방하는 데서 생존의 열쇠 를 찾아야 할 것이다. 북한은 북에서 밀려 내려오는 중국의 시장점령군도 두렵고, 또 남한에서 올 라오는 황색바람도 무섭다고 우왕좌왕하지 말고 구체제를 변화시키는 데서 자신들의 생존의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2011-01-31
28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1. 들어가며 가. 신년공동사설 2011년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북한은 올해의 대남정책 구호로서 북과 남, 해외의 온 민족이 힘을 합쳐 자주통일의 새 국면을 열어나가자 를 제시함. - 2010년의 구호 북남공동선언의 기치 밑에 온 민족이 단합하여 조국통일 을 하루빨리 실현하자 와 유사하지만, 2010년 조국통일을 하루빨리 실현 하자 에서 자주통일의 새 국면을 열어나가자 로 바뀜으로써 통일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적극성에서 다소 후퇴. 2010년의 신년공동사설에서는 남 북 관계 발전을 요구하는 언급도 많았 고 남 북 관계의 개선과 경제협력의 증진을 위한 의지를 강하게 표현하 였으나 올해는 남 북 대결상태의 해소만 제시함. - 6 15공동선언과 10 4선언에 대한 존중과 이행을 여전히 강조. - 신년공동사설에서는 드러내지 않았던 평화공세를 1월 중순부터 강하게 밀 어붙이는 데서 북한 신년공동사설의 허구성을 잘 보여주고 있음. 남 북 관계 개선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론으로서는 작년과 동일하게 남 북화해와 협력의 적극적인 실현을 강조함. - 민족 공동의 이익을 첫 자리에 놓고 북남 사이의 대화와 협력 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하여 적극 노력 하여야 하고 각계각층의 자유로운 왕래와 교 류를 보장하며 협력사업을 장려 할 것을 요구함. 남한 사회 내에서 통일전선전술에 입각한 연북 투쟁의 고취를 촉구한 것 은 작년과 동일하나 투쟁 목표는 상이함.
북한의 다각적 평화공세와 체제전환 가능성 29-2010년 신년 공동사설에서는 민족의 공리공영을 위한 사업을 저해하는 온갖 법적 제도적 장치들 의 철폐가 목표였으나 올해는 전쟁을 반대하 고 조선반도의 평화를 수호하기 위한 성스러운 정의의 애국투쟁에 총궐기 할 것 과 내외호전세력의 북침전쟁연습과 무력증강책동 저지를 촉구해 저들의 무장도발에 대한 반대급부에 전전긍긍하는 모습 드러냄. 나. 체제 내적 상황 북한은 현재 정치 경제적 측면 모두에서 내적 고갈의 절정에 직면하고 있음. - 화폐개혁 이후 이반된 민심은 지난 9월 3차 당 대표자회 1) 이후 발표된 3 대 세습으로 더욱 절정에 달하고 있으며 좀처럼 수습하기 어려운 상황으 로 치닫고 있음. - 북한 주민은 당국의 어떤 발표와 지시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으며 오직 생 계에 급급하면서 체제전환만을 기대하고 있음. 김정은의 등장 후 당과 군대 등에서 세대교체란 명분하에 구세대 축출이 단행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불만이 극도에 달하고 있음. - 3차 당 대표자회를 기회로 중앙당으로 도 당 책임비서들이 영전한 황해북 도(최룡해), 평안북도(김평해), 함경남도(태종수)의 경우, 비서들과 부장들 대부분이 세대 교체되면서 심각한 권력투쟁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고 있음. - 이와 같은 도 급의 갈등은 마찬가지로 군과 리 단위까지 파급되면서 간부 자리를 놓고 매관매직이 성행하고 모함과 신소로 심화되고 있음. 1) 2010년 9월 28일 평양에서 개최된 노동당 3차 당 대표자회에는 당(673명), 군(451명), 과학, 보건, 문화, 예술(75명), 핵심당원(116명), 여성(149명) 방청(517명) 등 총 1,653명이 참가하였다.
30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2. 북한의 신년 평화공세 내용 가. 각급 남 북대화 재개 공세 북측은 최초 1월 8일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명의로 남 북 당국 간 회담의 개최를 공식 제안하는 동시에 적십자회담과 금강산관광재개 회담, 개성공 업지구 회담을 1월 말이나 2월 상순 개성에서 열 것을 제의함. - 이에 앞서 북한은 1월 5일 새해 벽두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 당 단체 연합성명 을 통해 남 북 당국 간의 무조건적 회담개최 제의. - 북한 당국 간 회담을 위한 국장급 실무접촉과 적십자회담 개최, 경제협력 협의사무소 동결 해제 및 판문점 적십자 채널 복원 등의 내용을 담은 총 3통의 통지문을 우리 측에 보냄. - 이어 1월 12일 통일부 앞으로 총 3통의 통지문을 보내왔는바 그 내용은 금 강산 관광 재개 회담과 개성공단 실무회담을 촉구하는 천안함 폭침에 따 른 5 24조치 이후 자신들이 스스로 동결했던 개성 남 북경제협력협의 사무소 정상화를 위한 대화를 요구해옴. - 12일 통지문의 경우 당국이 보내는 형식을 취하고 있어 우리가 요구하는 진정성에 어느 정도 성의를 나타낸 것으로 풀이됨. 이어 북한은 지난 1월 20일 북한 인민무력부장 김영춘의 명의로 된 서한 을 한국 국방장관 김관진 앞으로 발송해 남 북고위급 군사회담을 즉각 개최하자 고 제안하였음. - 이는 우리 정부가 통일부 대변인 논평을 통해 북한의 대화공세에 역제안 한 데 따른 조치로 풀이됨. - 통일부 대변인은 북한이 제안한 현안들에 대한 논의가 이뤄지려면 천안 함 연평도 문제와 비핵화와 관련된 남 북 당국 간 대화가 먼저 이뤄져
북한의 다각적 평화공세와 체제전환 가능성 31 야 한다 고 강조. 나. 대화공세의 절박성과 북한 북한은 지난해 여러 군사적 모험주의가 가져다준 결과에 대한 심각한 성 찰이 있었고, 또 내적으로 고갈되어 가는 경제적 여력을 남 북대화를 통 해 만회하려는 의도를 숨기지 않고 있음. - 3대 세습의 정당성을 획득하고 긴장이란 새로운 에너지로 북한 체제를 이 끌어가려는 북한 당국자들의 목적이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고 판단한 기반 위에서 남 북대화를 통해 한반도의 평화체제를 유지하려는 의도 노골화. - 북한 내에서 높아가는 주민의 불만을 잠재우고 경제적 동력을 확보하는 길은 남쪽으로부터의 경제지원이 아니고서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판단 하 에 대화공세 시작. 천안함 사태 이후 남 북 관계 일지 2010년 3.26 천안함 침몰사태 발생 5.24 정부, 개성공단 제외한 남 북교역 교류 중단 등 5 24조치 발표 5.26 북, 판문점 적십자 연락사무소와 해운 당국 간 통신 차단 통보 개성공단 통일부 직원 추방 7.18 북, 경의선 군 통신선으로 임진강 상류 댐 방류 가능성 통보 8.8 북, 동해상에서 대승호 나포 8.9 북, 서해북방한계선(NLL)인근에 해안포 130여 발 발사 8.11 정부, 대한적십자사 명의로 대승호 송환 촉구 대북전통문 발송 8.13 정부, 5 24 조치 이후 대북민간단체 방북 첫 승인 8.25 지미 카터 미국 전 대통령 방북, 미국시민 송환 8.26 김정일 중국 방문, 30일 가지 동북 3성 순방 8.26 한적, 북한 적십자에 수해복구 지원의사 전달 8.31 정부, 한적 명의로 100억 원 상당 수해복구 지원 다시 제의 9.4 북 조선적십자회, 개성공단관리위원회 통해 한적에 수해복구 위한 쌀, 시멘트, 굴착기 지원 요청하는 통지문 전달
32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9.6 북한 적십자, 개성공단관리위원회 통해 한적에 대승호 선원 송환 통보 9 7 대승호 동해 통해 귀환 9.11 북한 중앙통신, 북한적십자회가 이산가족상봉제의 보도 9.13 대한적십자사, 13일 수해 지원을 요청해온 북한에 쌀 5천 톤과 시멘트 1만 톤 등 총 100억 원 규모의 구호물자 전달 발표 9.16 북, 지난 15일 남 북 군사실무회담을 열어 전단살포와 서해 북방한계선 문제 등을 협의하자고 제의한 것으로 확인 9.17 북, 남 북적십자 실무접촉에서 오는 10월 21일에서 27일까지 금강산 지구 내에서 100명 규모의 이산가 족 상봉을 갖자고 제의 10.25 현 정부 출범 이후 정부 재원으로 처음 마련된 쌀 5천 톤과 컵라면 300만 개 출항 10.30 남 북 이산가족 1차 상봉 11.3 남 북 이산가족 2차 상봉 11.11 북, 금강산 관광 재개문제 논의할 당국 간 회담을 19일 개성에서 갖자고 제의 11.23 북, 연평도 남측 군부대, 민간인 거주 지역 무차별 포격 도발 11.28 한미연합훈련 서해상에서 실시 12.20 안보리 한반도 긴급회의 성명 채택 무산, 군 연평도 해상사격 훈련 실기 북, 유엔 핵 사찰단 복귀 허용 과 핵 연료봉을 외국으로 반출하는 데 합의 2011년 1.1 북, 신년공동사설에서 남 북 간 대결상태 해소 강조 대화와 협력을 추진해 남 북 관계를 복원해 나가겠다는 의지 보임 1.5 북,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당 단체 연합성명 발표 남 북 당국 간의 무조건적 회담 개최 제의 1.8 북 조평통, 남 북 당국 간 회담의 개최를 공식 제안하는 동시에 적십자회담과 금강산관광 재개회 담, 개성공업지구 회담을 1월 말이나 2월 상순 개성에서 열 것을 제의 1.10 북, 당국 간 회담을 위한 국장급 실무접촉과 적십자회담 개최, 경제협력협의사무소 동결 해제 및 판문점 적십자 채널 복원 등의 내용을 담은 총 3통의 통지문을 우리 측에 발송, 우리 정부, 북측의 위장평화공 세 라고 일축,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도발에 대한 조치, 비핵화에 대한 진정성 확인 등을 논의하기 위한 당국 간 회담을 역제의 1.20 북한 남 북고위급 군사회담 전격 제의
북한의 다각적 평화공세와 체제전환 가능성 33 3. 다각적 평화공세의 목적 가. 한반도 평화체제 유지 목적 북한 당국자들은 자신들의 허약한 체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는 상황을 제일 두려워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임. - 지난 1994년 1차 핵위기 당시 미 국방부는 한반도에서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개전 90일 이내에 미국 5,200명, 한국군 49만 명, 민간인 사상자 100 만 명 이상이 발생할 것이라고 추정하였음. - 미국이 부담해야 할 전쟁비용은 1,000억 달러, 한국과 주변국은 1조 달러 의 손실을 감당해야 할 것으로 추정, 현재 그런 상황이 재현된다면 그 비 용은 6조 내지 7조 달러로 추산해야 할 것임. - 북한은 군사력 측면에서 양적으로는 자신 있다고 할 수 있을는지 모르나 기술적 측면, 재정적 측면에서는 커다란 열세에 놓여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실정임. 권력의 세습기에 북한은 정치 군사적 안정을 바라왔고 북한은 현재 3대 세습기에 돌입한 상황에서 군사적 긴장은 제일 피하고 싶은 상황인 바, 연 평도 무력도발 등은 내적 긴장의 필요성에 의해 저지른 도발로 판단하여 야 할 것임. - 북한 권력세습은 먼저 당에서 이루어지지만 당의 기반이 군대에 있는 현 재 상황에서 군부의 권력교체가 우선되고 있는 실정임. - 3대 세습의 주인공 김정은은 연소하고 리더십이 부족한 취약점 극복을 위 해 남 북 관계를 평화유지 상태로 고착시킨 후 경제개혁을 단행해 체제 재생산을 의도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임.
34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나. 경제지원 목적 북한의 대남전략이 2000년 이후 10여 년 동안 해방전략 에서 일보 후퇴하 여 획득전략 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임. - 북한은 2000년 남 북정상회담을 통해 어느 정도 자신감을 확보한 기반 위에서 남쪽의 풍요를 퍼다 북쪽의 빈곤을 채우려는 획득전략 을 대남정 책의 기본전략으로 수립. - 2008년 이명박 정부 등장과 함께 북한의 획득전략은 다시 원위치로 환원 되었으나 아직도 남한의 풍부한 경제적 재화는 북에게 군침이 넘어가는 획득의 목표로 되고 있음. 북한 국방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출현 직전 대남의존도가 너무 높아가고 있다는 판단하에 대남분야에 대한 국방위원회 집중검열을 단행하여 최승 철 통전부 부부장 등을 숙청하였으며 대남관계자 상당수를 총살형에 처하 는 조치를 취하였음. - 2007년 북한의 국방위원회는 아무런 예고 없이 대남부서들이 자리 잡고 있는 3호 청사에 들이닥쳐 당시 대남관계를 주무하고 있던 통전부 부부장 최승철 등을 현장에서 체포하였으며 일부를 인민무력부 보위사령부 구치 소에 감금하여 심문하였음. - 최승철의 여자관계 등을 문제 삼아 철직 해임은 물론 북한에 남한의 황색 바람을 끌어들였다는 죄목을 뒤집어씌워 총살 내지는 숙청하였음. - 혹자는 이명박 정부 등장과 현 정권의 대북정책이 잘못되어 북한이 강경 노선으로 전환한 것처럼 설명하고 있으나 이미 이 정권 들어서기 전에 북 한은 대남정책을 전면 수정하는 조치를 취하였음.
북한의 다각적 평화공세와 체제전환 가능성 35 4. 북한 체제의 근본적 문제점 가. 세습의 논리 집착 북한은 체제유지와 재생산에서 세습이 아니면 안된다는 논리에 집착하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음. - 김정일로의 부자세습이 북한 정치를 얼마나 후퇴시키고 경제를 얼마나 황 폐화시켰는지 삼척동자도 다 알고 있지만 누구 하나 전면에 나서 아니 되 옵니다 를 말할 수 없는 정치문화가 북한을 지배하고 있음. - 최고 엘리트들 대부분이 현실에 안주하며 자신들의 기득권과 세습에 미련 을 버리지 못하고 눈치만 보고 있는 한심한 실정임. 2) 세습은 정점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아래 단위로 내려가면서 간부 층 대부분이 세습으로 권력을 이양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임. - 인민군 대장이며 당비서인 최룡해는 전 인민무력부장 최현의 아들이며, 당 검열위원장 김국태는 전 전선사령관 김책의 아들, 또 국방위 오극렬 대장 역시 빨치산 출신 오중성의 아들, 강석주는 김일성의 외척 강석숭의 동생임. - 북한의 간부층을 살펴보면 조선시대 양반계층과 왕권이 결탁하면서 정권 500년을 이어온 것처럼 당 간부와 군 간부가 서로 협력하면서 권력을 유 지하는 모양새를 나타내고 있음. 나. 경제의 심각한 마비 북한 경제는 단지 침체와 저능률이라는 차원을 넘어 마비단계로 들어선 2) 과거 1970년대에는 김동규 부주석이 나서 전면 세습을 비판했고 80~90년대에는 연형묵(전 총리)과 같은 대쪽 같은 고위 간부들이 나서 어느 정도 세습정치를 견제하였으나 이제 북한 권부에는 바른말 할 사람이 한 사람도 남아 있 지 않다.
36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지 오래됨. - 현재 북한 인민경제 가동률은 3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인민들은 대부분의 생필품을 중국으로부터 들어오는 잉여상품, 재래시장을 통한 장 마당경제로 충당하고 있음. - 2009년 노동당은 상인계층을 겨냥하여 선전포고 형식인 화폐개혁을 선언 하였지만 심한 반발에 부딪혀 내각 총리가 직접 사과하는 결과를 초래하 였음. 현재 상태로 북한 경제는 자력으로 일어설 수 있는 한계점을 넘어섰으며 개혁과 개방이란 긴급 조치가 없다면 몇 년 안에 침몰할 수밖에 없음. - 북한의 중국에 대한 경제의존도는 계속 높아져 심각한 상태로 치닫고 있 음. 북한은 지난해 중국을 통해 사상 최대 규모인 8만 3천 945t의 쌀을 수 입했음. - 그 외에도 옥수수와 식용유, 설탕, 목화, 버섯 등 식료품까지 수입하고 있 으며 대신 오징어 등 연체동물류와 냉동어류를 수출하고 있음. 3) 다. 민심의 이반 북한은 2008년 김정일의 건강 악화 등을 이유로 3대 세습을 서둘러 진행 시켰으나 현재 북한 내 주민으로부터 아무런 지지를 얻어내지 못해 전전 긍긍하고 있는 실정임. - 원래 북한은 김정은이 33세가 되는 2015년에 3대 세습을 단행하려 했으나 김정일의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앞당기게 되었음. - 김정일도 나이 33세인 1974년 2월 후계자로 공식 지명되었는바 이는 김일 성이 33세인 1945년 귀국하면서 북한의 최고 지도자로 된 연령적 기준에 3) 지난해 북한과 중국 양국 간 농수산품 교역액은 총 3억 5,390만 3천 달러로 전년 대비 3.5% 감소했는데 북한은 8,099만 8천 달러를 수출하는데 그쳐 1억 9,107만 달러의 적자를 보았다. VOA, 2011. 1. 15일자.
북한의 다각적 평화공세와 체제전환 가능성 37 의거한 것임. 김정일은 사회주의 건설로 마련된 유산으로 그럭저럭 30 ~ 40년 북한을 끌 어왔지만 이제 김정은에게는 아무런 유산도 물려줄 수 없게 되었음. - 김정은은 주민들 속에서의 군량미 강탈을 제지하는 등 초기 민심 잡기에 나섰지만 군부가 반발하자 다시 군량미를 공출토록 해 인민들로부터 철 부지는 철부지 라는 비난을 사고 있음. 5. 북한 체제전환 전망 가. 제도적 체제전환 기대 노동당은 지난 3차 당 대표자회를 통해 제도적 지배의 근간을 복원하였는 바 이는 체제안정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긍정적 측면과 체제전환의 기폭 제가 될 수도 있다는 양면적 측면이 혼재함. 4) - 사회주의 집단지도체제는 결국 정치국을 통한 지배이므로 정치국이 김정 일 사망 후 제도적 장치를 이용해 김정은에 반기를 들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될 것임. - 이미 공산당 지배의 러시아와 몰락한 동구 사회주의 나라들에서도 여러 차례 정치국의 역량으로 체제전환을 가져온 사례가 있음. - 북한의 경우 김정일 체제에 전면적인 반기를 드는 형식이 아니라 노선변 경 정책변경을 이유로 체제전환을 요구할 가능성이 매우 높음. 4) 현재 북한 노동당 정치국을 관찰해 보면 항일빨치산 그룹 2세로 김정일과 김국태, 김경희가 있고 만경대 가문 출신 으로 양형섭과 이용무가 있다. 결국 정치국원 17명 중 이들의 비중은 30%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정치국 후보위 원도 마찬가지다. 15명 중 최용해와 장성택이 빨치산과 만경대가문 출신이고 나머지 13명은 모두 일반인 출신이다.
38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나. 군부의 힘에 의한 체제전환 현재 북한 체제에서 사회주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집단은 군부가 유일 하며 소위 노동계급, 농민계급은 대부분 몰락하거나 상인계층으로 변화되 어 있는 사회계층의 혼란시대가 이어지고 있음. - 김정일은 이와 같은 군부의 역할을 성찰하고 3차 당 대표자회에서 당으로 권력을 다시 집중시키는 조치를 취하였지만 그렇다고 군부의 사회에 대한 지배력까지 환원된 것은 아님. - 한국 사회의 경우 이미 40 ~ 50년 전에 국가의 최고 엘리트군이 법조계, 기 업, 학계 등으로 이동하였으나 북한의 경우 여전히 최고 엘리트들은 군에 머무르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할 것임. 과거 선군정치 15년 동안 군대는 식량공급 등에서 특권을 누려왔지만 이 제 노동당은 군대만을 우대할 형편이 아닌 지경에 도달하였음. - 3차 당 대표자회에서 지도기관을 개편한 노동당은 나름대로 지배력을 발 휘하려 하고 있지만 사회에서 머리를 들고 있는 상인계층, 불만계층을 무 시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음. - 노동당은 다시 군대에 의존하게 될 것이고 군대는 다시 특권을 발휘하게 되면서 당 군 민의 3각 대립관계가 형성되어 군이 모든 것을 평정하는 상황 예측. 다. 민에 의한 체제전환 가장 낮은 전망이 되겠지만 북한 주민도 과거와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있 는바, 그들은 김정일 김정은 부자에 대해 노골적인 비판을 가하고 있음. - 현재 북한 주민은 노동당에 줄 서지 않고 장마당에 줄 서고 있으며 충성심
북한의 다각적 평화공세와 체제전환 가능성 39 을 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돈을 품으려고 애쓰고 있음. - 북한의 장마당과 공공장소에 김정일 부자를 비판하는 삐라가 나붙고 있으 며 심지어 벽에 체제비판 구호가 쓰이고 있는 실정임. 특수부대 군인 출신들로 <별동대>란 마적단이 조직되고 이들이 사회 불량 배 집단과 결탁하여 보안성을 위협할 정도로 사회 기강이 무너지고 있는 것은 노동당 지배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반증임. - 김정은 등장 후 군부에서 대좌급 이상 고급군관들이 대거 사회로 방출되 면서 체제비판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으며 여기에 특수부대 출신 군인들 이 가세하고 있는 실정임. - 사회로 방출된 방대한 군인집단과 일반 주민이 합세할 경우 식량폭동 등 민란이 일어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는 것이 북한의 최근 사회실정 으로, 내적 고갈이 천정을 치고 있음. 6. 끝내며 지난 1월 19일 있은 미 중 정상회담에서 양국 정상은 진정성 있고 건설 적인 남 북대화와 6자 회담의 조속한 재개 를 촉구함과 동시에 공동성명 을 통해 우라늄농축 프로그램(UEP)에 대해 우려를 표명하면서 북한에 대 해서는 추가도발 포기를, 남한에 대해서는 대화 재개를 촉구함. 남 북 관계 발전에 미국과 중국의 영향력이 크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공 공연한 것임. 그러나 북한의 신년 다각적인 평화공세가 반드시 중국의 의 중을 담고 있다고 진단하기는 어려움. 오히려 그것은 중국을 압박하는 하 나의 카드임. 즉, 중국에 내민 손이 빈손일 때 북한은 남한에 화해 제스처
40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를 보내왔다는 점임. 우리 정부도 북한에 대해 군사실무회담을 재개하는 등 남 북 관계 개선 에 주도적으로 나서고 있음. 만약 북한의 다각적 평화공세를 마냥 외면한 다면 한반도 정세의 이니셔티브 장악에서 우리가 불리할 것이기 때문임. 또 이명박 정부는 통일에 대해 어느 정부보다 자신감에 차 있음. - 중요한 것은 북한의 체제변화임. 북한체제가 순조롭게 변할 때 남 북 관 계도 잘 풀릴 것이고, 반대로 북한이 더욱 견고한 독재체제로 간다면 그들 의 평화공세는 위장평화공세로 낙인찍힐 것임. 모두의 바람은 북한의 평 화공세가 진정성을 담고 있기를 갈망함. - 잦은 대화는 왕래의 길을 넓혀줄 것이고, 물이 흐르다 보면 도랑이 생기듯 남 북 관계는 새로운 봄을 맞이하게 될 것임. 북한의 생산력과 사회통합이 심각한 수준에 이른 현재가 남 북통합에 오히려 긍정적일 수 있음. 북한 주민 다수가 훌륭한 체제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임. - 분단시대 극복에서 대량탈북이니 뭐니 하는 우려는 기우일 수 있음. 이제 탈북자도 어느 정도 넘어왔고 북한에 남아 있는 자들은 반드시 거기서 살 아야 할 숙명을 안고 있는 계층들임. 북한의 재건에 막대한 예산을 쏟아 부어야 한다는 기우 역시 기우일 수 있음. 통일비용 못지않게 북한에는 막 대한 자원과 우수한 노동력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임.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정영태(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NLL은 정전협정과 남 북기본합의서에 의거 법적 근거를 찾고 있으나 북한이 정전협정 파기, 남 북기본합의서를 무시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NLL의 타당성 또는 실효성이 점차적으로 약화될 수 있다. 북한이 NLL을 부정하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선례를 지속적으로 축적하게 될 경우 국제법상의 응 고의 원칙 에 근거한 NLL 타당성 견지 입장이 취약하게 될 가능성도 있다. 북한이 서해 해상경계선 문제를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나올 경우, 기존의 NLL을 서해상 불가침경 계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할 필요가 있다. 남 북교류협력이 본격화. 제도화될 경우 상호 안보위협은 최소화하면서도 어느 일방의 양보가 아닌 남 북 쌍방 간에 정치 경제적 이익을 공유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나가도록 한다. 공동 어로구역 / 평화수역 설정 /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단계적으로 이행해 나가도록 한다. NLL 관련 중장기 대책은 남 북 평화체제 전환 단계에 따라 수립 및 시행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된다. 남 북 교류협력의 심화 발전 및 동북아 안보질서 안정을 통해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기반조성, 한반도 평화보장에 대한 주변국들의 실질적 보장 도출,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 NLL 관련 사안을 신 축적으로 적용해 나가야 할 것이다. 2011-02-11
42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1. NLL의 법적 성격과 유효성 가. NLL의 법적 성격 및 설정 근거 1) 서해 해상경계선 설정 배경 정전협상 당시 유엔군의 해 공군력은 한반도 해상통제를 장악한 상태임. - 유엔 측은 지상분계선에 중점을 두고 협상에 임했음. - 북한 측은 주변도서가 거의 유엔군 담당하에 있었으므로 주변도서 문제를 협상의제로 삼을 경우 불리하다고 판단, 지상분계선에 중점을 둔 것으로 보임. 한국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키려는 참전국 및 미국 내의 여론과 휴전 후 전 쟁재발의 방지 등에 치중하여 유엔군 측은 해상경계선에 대해서는 많이 양보한 상태에서 성급하게 정전협정을 체결하였음. 정전협정 체결 시 국련 측과 조중 측은 서해수역에서의 상호 영해 설정(우 리 측: 3해리, 북측: 12해리 주장)에 합의를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쌍방 간 인접해변 이라는 애매한 어휘를 사용하여 정협문안을 작성한 결과 휴 전 이후에도 합의된 명확한 해상 경계선의 부재로 서해상에서의 분쟁사건 이 빈번히 발생하게 되었음. - 남 북기본합의서에도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하되 확정 시까지는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장차 대북 협상 시 영해의 명확한 설정이 요구되고 있는 상황임. 남 북한은 각각의 논리로 해상경계선을 확정 발전시켜 왔으며 이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음.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43 <남한의 해상 경계선 변천 과정> 1950년 7월 4일: 미 극동해군사령관이 동 서해 봉쇄한계선 설정(동해 41 도 N, 서해 39도 - 30도 N) 1952년 9월 27일: 유엔군 사령관(클라크 대장)이 해상방어구역(Clark Line) 의 선포 정전협정 후 폐지(1953년 8월 27일) 1953년 8월 30일: 유엔군 사령관이 유엔군 측 함정 및 항공기 활동제한 목 적으로 해상 경계선(NBL / NLL) 설정 - 동해: 북방경계선(NBL: Northern Boundary Line), 38도 -36분 -06초N 기준 설정. - 서해: 북방한계선(NLL: Northern Limited Line), 한국 및 북한의 주요 도서 로부터 3해리, 우리 측의 서해 5개 도서와 북한 측 도서 사이의 중간 점을 연결하였으며 백령도 서방해역은 37도 -35분 -00초 N 선 기준 설정. 1959년, 1961년: NBL 및 NLL 상향조정 1980년 4월 15일 /1981년 8월 17일: NBL / NLL 상향조정 1996년 7월 1일: 유엔사 / 연합사 규정 525-4호 정전 시 교전규칙 개정에 따라 NBL 개념 삭제하고 동 서해 모두 NLL로 통일 우리 측은 NLL 설정 후 지금까지 이선을 성실히 지켜오고 있으며 사실상 해상경계선으로 운용하고 있는 상황임. <북한의 해상경계선 변천 과정> 북한은 1955년 3월 5일 12해리 영해를 선포하였으나 공식적인 공표는 없었음.
44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1977년 7월 1일 경제수역을 발표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음. - 수역범위: 영해 기산선으로 부터 200해리, 200해리 획정불가 수역은 반분선. - 주장내용: 수중. 해저. 지하 수역 안에서 생물 및 비생물 자원에 대한 자주 권 행사, 규제 및 사전승인 없이 경제수역 안에서 어로. 시설물 설치, 탐사, 개발 등과 바닷물, 대기오염을 비롯한 인민과 자원에 해를 주는 행위 금지. 1977년 8월 1일 해상군사경계선 설정에 관한 북한군 최고사령부 발표 - 수역범위: 동해: 영해 기산선으로 부터 50해리, 남방한계선을 38도 -36분 48초로 설정, 우리 측 NBL보다 3초 남쪽으로 확정(약 400M 중첩됨). - 서해: 경제수역 경계선, 백령서방 남방한계선을 38도 -00분 N로 설정 추정, 우리 측 NLL보다 3분 남쪽으로 확정. - 주장내용: 군사경계선 구역 안(수상, 수중, 공중)에서 외국인, 외국군용 함 선, 외국 군용비행기들의 행동금지, 민용 선박, 민용 비행기들은 사전합의, 혹은 승인하에 군사수역 항행 및 비행 가능, 군사수역 안에서 민용 선박, 민용 비행기들이 군사적 목적의 행동과 경제적 이익 침해활동 불가. - 우리 측은 국제법상 전례가 없는 불법적인 주장으로 인정할 수 없음을 명 백히 밝혔음(정부 대변인 성명 1977.8.1). 1999년 북한은 북측 황해도 강령반도 끝단인 등산곶과 남측굴업도 사이의 등거리 점(북위 37도 18분 30초, 동경 125도 31분 00초), 북측 웅도와 남측 서격렬비도, 소협도 사이의 등거리 점(북위 27도 1분 2초, 동경 124도 55 분), 한반도와 중국 사이의 반분선과 교차점(북위 36도 50분 45초, 동경 124도 32분 30초)을 이은 선을 해상군사분계선으로 하고, 이 선의 북쪽 수 역을 인민군 측 해상 군사통제수역으로 한다고 일방적으로 선언함으로써 NLL을 정식으로 부정하는 행위를 단행함.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45 2) 관련 규정 정전협정 - 제2조 13항 ㄴ 정전효력 발생 후 10일 이내에 상대방의 연해 섬들 및 해면으로부터 모든 군사역량, 보급물자 및 장비를 철거한다. ( ) 연해 섬 이란 정전효력이 발생할 때, 비록 일방이 점령하고 있더라도 50.6.24에 상대방이 통제하고 있던 섬들을 말한다. 단, 황해도와 경기도의 도계선 북쪽과 서쪽에 있는 모든 섬 중에서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및 우도의 도서 군들을 국 제연합군 총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두는 것을 제외한 기타 모든 섬은 조 선인민군 사령관과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둔다. - 제2조 15항 본 정전협정은 적대 중의 일체 해상군사 역량에 적용되며 이러한 해상군 사 역량은 비무장 지대와 상대방의 군사통제하에 있는 한국육지에 인접한 해면을 존중하며 한국에 대하여 어떠한 종류의 봉쇄도 하지 못한다. 인접 해면의 범위에 대한 의견 차이로 구체적인 넓이, 거리에 대한 미합의 인접해면에 대해 북측은 12해리, 유엔사는 3해리 주장 서해 5개 도서만 유엔군 통제 하에 남겨두는 문안으로 합의 - 정협 규정에는 서해 5개 도서 로 표기되어 있으나 이중 연평도의 경우 대연평도와 소연평도로 명백히 구분되기 때문에 서해 6개 도서로 통칭. 양측 군사통제구역의 접촉선이나 해상경계선을 명확히 확정하지 않은 채 서둘러 정전협정을 체결
46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남 북합의서 - 제2장(남 북 불가침) 제11조 남과 북의 불가침 경계선과 구역은 정전협정에 규정된 군사분계선과 지금 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 - 남 북 불가침 부속합의서 제3장(불가침 경계선 및 구역) 제10조 남과 북의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 협의한다. 해상불가침 구역 은 해상불가침 경계선이 확정될 때까지 쌍방이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 으로 한다. 나. NLL의 법적 유효성 1) 북방한계선(NLL): 서해상 유엔사 / 연합사 해군 및 항공초계활동의 북방한계를 한정 짓기 위해 유엔 군 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설정(1953년 8월)한 것으로 법률상의 효력을 갖 지 않으며, 한국 및 북측 주요 도서 사이의 중간 점을 연결한 선임. 2) 북방경계선(NBL): 동해상 유엔사 / 연합사 해군 및 항공 초계활동의 북방한계를 한정 짓기 위해 유엔 군 사령관이 일방적으로 설정한 선으로 법률상의 효력을 갖지 않으며, 군 사분계선을 동쪽으로 연장한 선임. 3) 북방한계선에 대한 관련 측의 입장 정전협정 후 70년대 초까지는 서해 도서와 북한도서의 지근거리가 5.7해 리임을 감안, 중간선인 3해리 영해를 묵인해 옴. - 1973년도에는 북한이 200해리 경제수역 및 12해리 영해를 주장하였고 정 전협정조항을 주관적으로 해석해 왔음(경제수역이론 발생 시기). - 현재는 3마일 영해 및 NLL 범위에서 쌍방 공방전이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임.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47 북방한계선에 대한 관련 측들의 구체적 입장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음. - 한국의 경우: 해상경계선으로 간주하고 북한 선박이 NLL 월선 시 군정위 를 통한 항의 요구 및 대국민 홍보를 하고 있는 실정임. - 북한의 경우: NLL을 인정하고 있지 않으며 새로운 해상 경계선을 설정, 이를 고착화시키고자 노력해 오고 있음. - 유엔사의 경우: 북한선박의 단순한 NLL 월선은 정전협정 위반이 아니므 로 군정위를 통한 항의는 불가하나 대한민국 인접수역(3해리)의 침범 또 는 적대행위 시는 군정위를 통한 항의(유엔군 사령관 서한 국방부 장 관, 1989.06.03). 서북도서 3해리 이내의 수역을 유엔사 통제지역으로 간주함. 4) NLL의 타당성에 대한 국제법적 근거 도서의 영해: 국제인 학설, 판례, 조약 등에 의하면, 도서는 본토의 부분으 로 취급되어 영해를 가진다고 되어 있으며, 그러한 관할권은 국가 경찰권 의 적절한 행사와 전시 타국의 적대행위로부터 방호대책을 강구키 위해서 필요함. 도서 영해의 기선( 基 線 )과 폭( 幅 )에 대한 국제법상의 원칙에 따라 우리 측 관할권의 유효성 주장 가능 - 등거리의 원칙: 해양법 협약 제15조: 대향. 인접 국가 간의 영해의 경계확정. 2개국 간의 해안이 상호 대향 또는 인접하고 있는 경우에는 양국 중 어느 국가도 양국 간의 개별의합의가 없는 한, 양국의 각 영해의 혹은 측정하는 기선상의 최근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모든 점의 연결인 중간선을 넘어 서 영해를 획정하지 못한다. 단 본 조의 규정은 역사적 근원 또는 기타 특 수사정으로 인하여 본 규정과 상이한 방법으로 양국의 영해를 획정할 필 요가 있는 경우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48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북측은 12해리 영해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서해 5도는 북측 관할지역으 로부터 12해리 영해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백령도의 경우 가장 가까운 거 리인 5.7해리에 위치하고 있음. - 중첩된 해역의 한계는 상술한 등거리 중간선 원칙 에 의해 구획되어야 하 며, 북측의 영해와 서해 5도 영해의 중간선은 유엔사령부가 설치한 NLL과 대체로 일치함. - 북측이 영해 12해리를 주장할 경우 연평 - 소청도간 수역은 24해리를 초 과하여 등거리 중간선원칙 적용 시 우리 측 논리가 취약하게 됨. 이러한 취약성은 전쟁수역 또는 방어수역 이론으로 보완할 수도 있음. 전쟁수역 또는 방어수역 을 설정하는 것은 국제법상 교전자의 권리로 인정되어 있는 바, 국제연합군 사령부가 일방적으로 설치한 NLL은 일종 의 전쟁수역 또는 방어수역 으로 1952년 7월 27일에 국제연합군 사령 부가 선포한 클라크라인과 동일한 성격의 것으로 볼 수 있음. 상기 단서 조항인 역사적 근원 또는 특수 사정으로 인한 논리를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할 수도 있음. - 남 북기본합의서 전문에 명시된 바와 같이 국가 간 관계가 아닌 남 북 한 간의 특수한 관계 적용. - 북한 측이 NLL을 묵시적으로 시인한 사례 적용: 군정위 168차 회의(LSMR 311우리 함정의 간첩선 격침위치 상호 주장) 시 간접적 시인(1963. 5.) / 수 해물자 수송 시 상통 점을 NLL 선상으로 합의 비영도 남방 3.2NM, 백령 도 서방 NLL 선상 등. 실효성의 원칙(Principle of Effectiveness) - 국제법상 권원의 유무를 불문하고 현실적인 사실상의 지배를 존중하는 것 으로 사실상의 존재를 확인하는 상태(군사상의 지배). - 국제법상 국가 정부 교전단체의 승인, 전시점령 봉쇄, 정복, 선점 등의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49 경우에 사실상 실효적인 지배권의 행사 유무를 중시하며 국제법 질서가 영속적으로 복종되고 작용되는 데까지 국제법은 이를 승인함. - 국가는 실효성의 원칙에 따라 작용하게 되며, 영해의 획정을 포함한 영역 주권은 비록 위법적인 행동일지라도 법령의 시행, 묵인 등에 의해 유효한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음(I. Brownlie). - 정전협정 이전에 서해 6도를 포함한 옹진, 기린도, 순위도가 남한의 주권 이 미치는 38 선 이남에 있었고 NLL은 정전협정 이후 40여 년 동안 우리 측에 의해 실효적인 지배가 이루어져 왔음. - 서해 6도 주변해역을 포함하여 NLL 이남은 우리 측의 관할권이 행사되는 해역으로 판단됨. 응고의 원칙(Principle of Consolidation) - 국제사회의 발달에 따라 영역 취득의 새로운 권원을 인정. - 관계국의 합의, 승인, 묵인 등의 다양한 복합적 요소에 의해 인정되는 권 원 취득 방식. - NLL 이남의 해역은 40여 년 동안 북한의 묵인에 의해 응고되어 UN 군 관 할하에 있음.
50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2. NLL(해상경계선)의 문제점 현재 견지되고 있는 NLL은 정전협정과 남 북기본합의서에 의거 법적 근 거를 찾고 있지만 북한 당국은 정전협정 파기, 남 북기본합의서를 무시 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NLL의 타당성 또는 실효성이 점차적으로 약화될 수밖에 없음. - 정전협정 내에서도 합의된 명확한 해상 경계선의 부재. - 남 북기본합의서에도 해상불가침 경계선은 앞으로 계속협의 하되 확정 시까지는 지금까지 관할하여온 구역으로 한다 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장차 대북협상 시 영해의 명확한 설정 요구가 당연시되고 있음. NLL은 해상경계선으로 보다 지상의 군사 분계선에 맞추어 해상봉쇄 세력 을 남쪽으로 철수시키기 위한 자기 제한적 경계선 으로 하달된 지시로서 북한 당국에는 공식 통보되지 않은 것으로서 북한이 이를 공식 수용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북한의 태도 여하에 따라 이를 무효화하는 해상분쟁 발 생이 빈번해질 문제점을 지니고 있음. - UNC 측은 북한함정들이 적대행위나 도발적 행위를 자행하지 않는 한 영 해를 제외한 월선행위를 정전협정의 위반사항이 아닌 것으로 간주하고 있 어 이는 북한의 NLL 무시 또는 부정행위를 더욱 심화시켜 나갈 가능성이 상존함. 현 북측이 NLL을 부정하면서 이의를 제기하는 선례를 지속적으로 축적하 게 될 경우 현재 국제법상의 응고의 원칙 에 근거한 NLL 타당성 견지 입 장이 취약하게 될 가능성도 있음.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51 3. NLL 해역의 긴장완화 및 평화정착 방안 가. 서해 공동어로수역 설정 및 군사적 조치 1) 서해 공동어로수역 설정 NLL 인접수역을 남 북한 공동어로수역으로 조성하여 남 북한 공동어 로 협력 활성화를 기할 수 있음. - 공동어로수역의 경우 서해 NLL 부근 남 북에 걸치는 공동구역을 지정하 는 방식. - 북측지역을 공동구역으로 정해 남측이 입어료를 내고 조업하는 방식. - 북측에 남측의 배를 대여해 조업하는 방식 등이 제시될 수 있음. 서해 NLL 부근 남 북에 걸치는 공동구역 설정 방식을 우선적으로 추진 하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판단됨. - 북측은 NLL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그들의 새로운 해상경계선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NLL을 사실상 인정하게 되는 NLL 인접수역 공동어로수역 조성에 대한 합의 도출 어려움 상존함. - 북측이 NLL 인접수역 조성에 합의를 하게 될 경우에도 NLL 자체를 실질 적으로 무실화시키는 방향으로 추진해 나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음. - 서해 특정해역의 상호입어를 통한 공동어로수역방식은 남 북한 간 새로 운 서해 해상경계선 설정에 대한 합의가 도출되기 이전에는 현실성이 크 게 결여되는 방안으로 판단됨. - NLL 관련 재협상 NLL 인접수역 공동어로 수역화 남 북공동어로협 력 과정을 수용하는 방향설정에 대한 과단성이 필요함. - 이러한 과감한 방향설정이 전제되지 않은 상황에서 NLL 인접수역 공동어 로 수역화가 추진될 경우 NLL에 대한 입장차이로 인하여 서해 해상이 분
52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쟁 지역화될 우려 상존함. 공동어로수역 설정 관련, 가장 현실성 있는 것으로는 북측지역을 공동구 역으로 정해 남측이 입어료를 내고 조업하는 방식으로 판단됨. - 이 경우 남 북 양측은 당해수역의 수산자원이나 어업에 대한 공동관리 차원에서 조업어선의 종류, 규모, 척수나 어획량을 규제할 필요가 있음. - 공동어로사업의 대상어종으로는 꽃게, 대하 등이 지적되며 자망어업, 통발 어업, 연승어업, 기선형망어업 등 중소형어선에 의한 어업 등이 주 대상 업종이 될 수 있음. - 이 공동어로사업이 추진될 경우 북한 측의 각종 어로자재나 장비 등의 지 원으로 남 북한 양측의 어획성능 격차를 해소해 나감. 서해상 평화정착 관련 군사적 신뢰구축문제와 수산분야 협력과 직접 연관 시키는 것을 지양하고 수산분야 고유의 협력실무협의회 중심으로 추진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함. - 이를 위해서 남 북한실무협의회에 군사 관련 인물을 배제하고 순수하게 수산 관련 실무자 및 관계 전문가들로 구성. - 향후 수산 관련 협력분야 및 내용이 결정되고 이의 원활한 추진을 위한 군 사실무회담 실시로 연결되도록 함. 남 북한 도로 연결을 위해 군사실무회담이 이루어짐으로써 남 북한의 자연스러운 군사대화가 추진된 전례를 적극 활용. 수산실무협의회에서는 NLL 관련 재협상과 같은 북한의 정치 군사적 요 구를 원천적으로 차단하고 수산실무협의에 치중하도록 유도함. 남 북수산협력 협의 초기 단계에서는 단일 창구의 수산협력실무협의회 를 정례적으로 개최하여 남 북한의 관련 당국자 간 협의하고 각종 정보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53 교환에 치중함. - 관련 당사자 간 남 북수산협력의 필요성, 분야, 방법 등에 대한 개괄적인 합의를 도출해내는 단계로 활용. 이어 남 북수산협력의 분야가 확정되면 상호협력을 위한 조사단계에 돌 입하게 될 것이며 이를 위해서 분과위 또는 분야별 관련 전문 조사 기구 를 각각 구성함. - 이를 통해서 상호 현지 방문조사, 기술적 타당성 및 경제성을 판단하거나 기후 수질 수자원 에너지 공급 등 기초자료 수집활동 실시. 본격적 수산협력 단계에 가서는 수산협력실무협의회 및 분과위 또는 전문 기구를 지원할 수 있는 남 북한수산협력공동연구센터(가칭) 를 설립할 필요성이 있음. - 동 연구센터를 북한지역 또는 남측지역 중 하나, 아니면 남 북 양측 각각 하나씩 설립하여 연구지원 물자 및 연구 인력의 상호 이동 및 협력 체제를 구축해 나가도록 함. 2) 군사적 제 조치 남 북한 간 수산협력 과정에서 우선적으로 제기되는 것이 해상충돌을 예 방하는 문제임. - 일차적으로 NLL을 합법적인 해상경계선임을 북한이 재인식할 수 있는 환 경을 조성하고 이를 무시하는 일체의 도발행위를 단호하게 응징한다는 태 세를 유지함. - NLL을 둘러싼 군사적 갈등을 최소한 억제하려는 차원에서 남 북함정 간 해상충돌방지협정 체결을 필요로 함. 남 북 함정 간 해상충돌방지협정은 접경지대 해상에서 상호 조우 시 군
54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사적 충돌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한 조치의 하나인데 1972년 미 소 간 체 결한 바 있는 공해상충돌방지협정(INCSEA) 과 같은 내용을 적용할 수 있 을 것임. - 이와 함께 남 북한이 모든 해군함정이 공해상에서 충돌방지를 위한 국제 협약(예: International High Sea Clash Prevention Regulations; International Code of Signals 등) 준수를 확인하는 공동선언을 추진. 남 북한 영역에서 해상사고 발생 시 수색 및 구조 활동이 양측 해군함정 이 직접 참가할 수 있도록 하는 수색 및 구조(SAR)활동으로 활성화될 필 요가 있음. - 이를 위해서 첫째, 수색 및 구조를 담당할 책임구역을 획정토록 하며, 둘 째, 구조업무를 위해 타 영역으로 들어가는 입국허가 및 절차에 관해 합의 하도록 해야 하며 셋째, 합동훈련 및 연수를 주기적으로 실시하도록 하며, 넷째, 공동으로 적용할 신호 및 통신규정을 작성하고 통신회선을 주기적 으로 점검하도록 함. 해상범죄 방지를 위해서 남 북 해군함정들의 협력활동을 본격화할 필요 가 있음. - 이를 위해서 사건발생 시 상호 교신방법과 추적 및 나포를 위한 역할분담, 그리고 사건처리를 위한 절차 관련, 남 북 간 상호합의를 구체화하고 이 를 본격적으로 실시하도록 함. 유엔평화유지활동을 위해 남 북한 함정이 공동으로 참여할 기회를 창출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임. -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을 위해 각국의 해군함정은 병력 및 물자의 수송, 의 료지원 등 후방 군수지원은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소해작전 등 직접적인 전투지원 업무까지도 지원하고 있는 상황임.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55 - 향후 남 북 관계가 좀 더 발전하는 상황에 부응하여 해군 합정의 UN PKO 공동참여 활동을 펴나가게 될 경우 남 북한 간 해군차원의 신뢰구 축뿐만 아니라 한반도 차원의 군사협력 태세를 과시할 좋은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될 것임. - 이에 공동으로 참여하게 될 경우 상호협력을 위해 군사용어의 통일은 물 론 공통된 신호규정과 통신방법 등을 확정하고 필요시 관련 교육과 훈련 을 공동으로 벌일 필요도 있음. 나. 기타 서해 NLL 해역에서의 남 북 간 공동이익 창출 방안: 남 북수산협력 사업 1) 추진전략 당사자 간 협의 단계: 남 북한 당사자 간 협의. 각종 정보교환 / 기초 환경 및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개괄적 파악 가능성 검토 및 조사단계: 현지 방문조사, 기술적 가능성과 경제성 분석 / 기 후. 수질, 수자원, 에너지 공급 등 자료 수집 검토 시험양식 및 검증 단계: 시험양식을 통한 검증과 문제점 분석 / 종묘 혹은 치어생산, 투약, 사료, 각종 시설에 대한 실험 및 검증 본격적 수산협력 단계: 시험양식 결과를 토대로 본격적 수산협력 실시 / 근 로자 관리, 품질검사 등 종합적 판단 2) 수산협력 사업의 종류 서해상의 수산자원 공동조사
56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서해 해상 중국어선 침범에 대한 공동대응 NLL 주변지역 서식 어종 인공부하방류사업 수산분야 대북지원 합작어로회사 설립 - 공동어로구역 / 평화수역 설정 /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 한강하구 공동이용. 4. 서해 해상경계선 관련 대북 협상 방안 가. 서해 사태의 원인과 문제점 기본적으로 북한은 서해 해상 경계선을 비롯한 한반도 군사분계선을 모호 하게 하거나 폐기하여 남 북한 경계선을 중심으로 무력 분쟁화를 기도함 으로써 남 북사회의 분열을 통한 남측사회 붕괴를 유도하고자 함. - NLL 침범을 거듭함으로써 서해 해상 경계선에 대한 분쟁지역 이미지 고 착과 새로운 협상대상으로 당연시하는 분위기 창출. - 군사분계선의 경우 북한은 끊임없이 정전협정체제를 부정함으로써 이를 무실화시키고자 노력함. 북측의 서해 해상 침범 및 서해 5도 군사도발의 경우 남 북 장성급군사 회담에서 합의한 바 있는 서해 우발적 충돌방지 관련 사항을 악용하여 서해 해상 분쟁 지역화 의도를 본격화한 사례로 평가됨.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57 - 북한은 스스로가 인위적으로 설정한 서해 해상 분계선을 기점으로 서해 우발적 충돌 방지 사항을 적용, 남측의 NLL 기점 해상방어 활동을 남 북 장성급 회담 합의사항 불이행으로 몰고 감과 동시에 NLL 침범을 거듭함 으로써 NLL 무력화를 시도. 북한이 먼저 서해 해상 경계선을 비롯한 군사적 문제를 다루기 위한 군사 회담을 선 제의한 것 역시 NLL의 분쟁 수역화 분위기 확산노력의 일환 으로 치부됨. - 향후 남 북고위급 군사회담이 실현될 경우 북한은 서해 해상의 군사적 긴장완화와 충돌방지 관련 논의를 앞세워 NLL 재협상 문제로 연결시켜나 가고자 할 것임. 나. 대응방안 1) 기본방향 북한이 서해 해상경계선 문제를 거론하고 나올 경우, 기존의 NLL을 서해 상 불가침 경계선으로 설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함. NLL이 서해 해상불가침 경계선으로 설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우리 측의 주장은 국제법 및 국제관례, 남 북기본합의서 규정 등에 비추어 합리성 과 법리적 타당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해상경계선 설정 시까지 NLL을 고수함. - 기타의 방안은 1953년 이후 지금까지 준수되어온 남 북한 간 묵시적 해 상경계선인 NLL의 국제법적 타당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결과 야기. 납북교류협력이 본격화 제도화될 경우 상호 안보위협은 최소화하면서도 어느 일방의 양보가 아닌 남 북 쌍방 간에 정치 경제적 이익을 공유할
58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 나가도록 함. - 공동어로구역 / 평화수역 설정 / 경제특구 건설과 해주항 활용 / 민간선박의 해주직항로 통과 /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을 단계적으로 이행해 나가도록 함. 2) 중장기 대책 NLL 관련 중장기 대책은 남 북 평화체제 전환 단계에 따라 수립 시행 되는 것이 바람직할 것으로 판단됨. 제1단계: 남 북 교류협력의 심화 발전 및 동북아 안보질서 안정을 통해 냉전구조 해체를 위한 기반을 조성함. - 북한의 NLL 무효화 주장을 일축하고 남 북한 NLL 준수 공동의지 표명 을 유도하면서 단계적으로 NLL의 군사적 의미를 경제적 의미로 전환시키 는 방안을 모색함. - 북한의 공세적 외교차원에서 진행되는 NLL 무효화 주장 원천 봉쇄. - 서해안의 상업용 선박 운항로를 설정하여 다양한 관광코스 개발 및 남 북 한 합작 사업을 위한 수송로 등으로 활용, NLL이 상업용 선박들에 대한 항해에 대한 관할 분기점이라는 경제적 의미를 갖도록 하는 조치 강화. 제2단계: 한반도 평화보장에 대한 주변국들의 실질적 보장을 이끌어 내는 과정이므로 북 미, 북 일 협상 과정에서 NLL 문제와 관련된 미 일의 협력을 유도함. - 한반도 평화보장 관련, 대북협상에서 미국과 일본은 한반도의 안정을 보 장하기 위한 포괄적 안전보장 이행 방안의 하나로 기존에 유지되어 온 해 상경계선 및 육지 경계선 유지 필요성을 강조하도록 유도. - 남 북한은 경제적 협력을 넓혀나가는 상황에서 서해 해상에서의 경제, 과학, 기술 관련 공동협력 방안을 적극 모색하는 가운데 이를 구체화하는 과정에서 제기되는 각종 군사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군사실무회담을
서해 해상 긴장완화와 평화정착 방안 59 적극 유도해 나감. 제3단계: NLL과 관련된 사안을 보다 신축적으로 운용, 평화체제 구축에 NLL 관련 사안이 장애 요소로 등장하지 않도록 하는 데 노력을 경주함. - 남 북합의서에 근거한 남 북군사공동위원회에서 NLL을 대체하는 새로 운 해상경계선 획정 문제를 의제로 채택, 실질적인 협상 추구. - 새로운 경계선 획정이 곤란하게 될 경우 일단 남 북한 간 공동어로 구역 을 설정, 북한과의 수자원 공동 활용방안을 수립. - 3단계 도래에 대비하여 지금부터 정부는 NLL과 관련하여 어느 정도까지 신축성을 허락할 것인지의 문제를 검토, 남 북한관계 변화과정에 입각한 단계별 NLL 대책을 수립할 필요가 있음.
독일통일의 쟁점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염돈재(성균관대학교 국가전략대학원장) 우리 국내에서 독일통일의 과정과 배경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주요 쟁점들에 대한 심층적 논의가 필요하다. 브란트의 동방정책, 화해 협력 정책이 독일통일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생각, 흡수통일과 조급한 통일보다는 대등한 통일, 점진적 통일이 좋다는 생각, 독일이 통일과정에서 많은 실책을 저질렀다 는 생각, 아직도 독일은 심각한 통일 후유증을 겪고 있다는 생각 등은 독일통일의 과정과 배경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대표적 사례들이다. 아울러 흔히 우리는 독일보다 훨씬 심각한 경제적 통일 후유증을 겪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나 북한의 경제재건 여건이 동독보다 훨씬 좋아 독일보다는 훨씬 빠른 기간 내에 통일 후유증을 극복 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2011-01-25
독일통일의 쟁점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61 1. 머리말 독일통일 이후 우리 국내에서 독일통일에 관해 많은 연구가 있었으나 대 부분 연구가 1990년대 중반 이전, 독일통일의 내막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 은 시기에 이루어진 데다 그 후의 많은 연구가 이들의 연구결과를 답습하 고 있어 독일통일의 배경을 잘못 이해하게 된 경우가 허다함. 독일통일과 관련된 주요 쟁점사항들에 대한 심층적 논의가 필요함. 2. 독일의 통일 과정 가. 동독 공산정권의 자체 붕괴 1989년 5월 2일 헝가리 개혁정부가 개혁의지의 표시로 오스트리아와의 국 경 철조망을 철거한 것을 계기로 동독 주민의 대량 탈출이 시작됨. 10월 7일 동독 건국 40주년 행사에 참석한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동 독의 개혁을 공개적으로 촉구하고 동독 정치국원들과의 비밀회합에서 소 련군의 동독시위 불개입 방침을 천명한 데 이어 주 동독 소련대사가 시위 의 유혈진압은 안된다고 경고함. 1989년 9월 라이프치히 니콜라이 성당에서 소규모로 시작된 촛불집회가 서독 TV의 영향으로 급속히 확산, 10월 6일에는 베를린에서 100만 명이 참가하는 등 대규모 시위가 전국 규모로 확산되고 1989년 중 46만 명이 서독으로 탈출함.
62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동독 공산잔당들과 개혁세력들은 동독의 멸망을 막기 위해 원탁회의를 구 성하여 국정을 운영하는 한편, 3월 18일 인민의회 선거를 실시했으나 예상 과는 달리 신속한 통일을 약속한 서독 기민당의 제휴정당인 독일연맹 이 승리함. 나. 동독 주민의 서독편입 결정 4월 12일 로타 드메지어 연립정부가 수립되고 4월 19일 드메지어 총리가 서독 기본법 23조(기본법 적용지역 규정)에 의한 신속한 통일을 약속함. 통일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5월 18일 사회경제화폐통합조약을 체결 되고 8월 30일 통일조약 체결, 9월 20일 동 서독 의회의 통일조약 비준, 10월 2일 동독의회의 독일민주공화국(동독) 소멸 의결 등을 거처 10월 3 일 통일을 달성함. 다.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동의확보 베를린 장벽 붕괴 후 11월 28일 서독정부는 독일과 유럽분단 극복을 위 한 10개항 계획 을 발표, 통일의지를 확고히 천명한 후 통일독일의 NATO 잔류를 약속하고 미국의 지원을 받아 통일외교에 착수했음. 소련에 대해서는 오데르 - 나이세 국경선의 인정, 통일독일 병력의 대폭 축소(66만 5천 37만), 대규모 경제원조(철수비 지원 90억 달러, 매년 34 억 달러의 소련군 주둔비용 부담) 등을 약속하는 한편, 미국과 협조하여 소 련을 압박하면서 2+4 회담을 통해 2차 대전 전승 4대국이 동의를 확보함.
독일통일의 쟁점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63 라. 체제통합 과정 서독체제를 동독지역에 이식하되 동독인들의 적응을 위해 일부 법 규정의 적용은 1~ 3년간 유예하고 동독의 행정체제를 서독 체제로 개편함. 화폐통합, 동독 국유재산의 매각(2,564억 마르크 적자), 서독 사회보장 제 도의 동독으로의 확산, 반 법치국가적 행위자에 대한 처벌, 공산치하에서 의 피 박해자에 대한 보상 등을 통해 경제 사회 통합을 추진했음. 마. 독일통일의 성공 배경 직접적 요인 - 고르바초프의 개혁 개방 정책, 소련의 동구포기, 동독의 개혁 촉구. - 동구권의 개혁 및 민주화 혁명 열풍. - 공산정권에 대한 동독 주민의 염증 확산. - 동독의 경제 파탄. - 동독 지도부의 체제수호 의지 결여. - 서독정부의 과감하고 적절한 조치. - 미국의 적극적 지원. 간접적 요인 - 서독이 동독 주민의 동경대상이 되었다는 점. - 원칙을 고수한 서독정부의 정책(동독에 대한 국가인정 거부, 기본법 적용 지역을 규정한 기본법 23조와 동독 주민도 서독국적자로 간주하는 기본법 116조 국적조항의 고수, 대가 없는 지원 불가 방침). - 동독 주민의 삶의 질 개선에 중점을 두었던 서독의 대동독 정책.
64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 동독 주민의 서독 TV 시청. - 철저한 과거 청산으로 주변국의 신뢰 확보. 3. 독일통일의 배경과 관련된 쟁점들 가. 독일통일은 힘의 우위 정책의 성과인가 화해 협력의 결과인가? 보수정당인 기민당(CDU)의 정책은 서독이 정치 경제 군사 도덕적으로 힘의 우위 를 견지하면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는 자석이론(Magnet Theory) 이 논리적 근거임. - 기민당 정부는 제2차 세계대전 후 소련의 중립화 요구를 거부하고 친미 친 서방 노선을 견지하면서 민주제도의 정착과 경제재건을 최우선 주력. - 1955년에는 통일장애 요인이 된다는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 NATO에 가입 하고, 1979년 소련의 중거리 미사일 유럽배치 시에는 퍼싱Ⅱ 미사일과 크 루즈미사일의 서독 배치에 동의, 미국의 신뢰확보와 소련의 변화 촉진에 기여. - 대동독 관계에서는 1960년대까지는 서독의 유일대표권 을 주장했으나 1982 년 재집권한 콜 정부는 사민당의 교류 협력 정책을 답습하면서도 1989년 말 동독 평화혁명 시에는 힘의 우위 정책으로 선회, 적극적으로 통일을 추진. 진보성향인 사민당(SPD)의 정책은 접근을 통한 변화 에 근거를 둔 정책 으로 소련 동독과 화해 협력하고 동독의 안정을 도우면 언젠가는 동독 이 변해서 통일이 되거나 사실상의 통일 을 이룬다는 정책임. - 외교정책 면에서는 서독의 중립화 또는 동 서 양 진영을 오가는 시계추
독일통일의 쟁점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65 외교 를 모색하면서 서독의 NATO 가입을 반대하고 소련의 전유럽안보협 력회의(CSCE) 구상에 적극 동조. - 대동독 관계에서는 할슈타인 원칙을 포기하고 동독을 사실상의 국가로 인 정하면서 양독관계 정상화를 추진하여 동 서독 간의 교류 협력을 대폭 적으로 확대, 민족의 동질성 유지와 분단의 고통 완화 에 기여. - 1989년 동독 평화혁명 시에는 동독과의 화해분위기 손상을 우려, 동독 탈출 민의 수용 제한, 동독에 대한 대폭적 경제지원 및 점진적 통일을 주장하여 통일을 주저하는 정당 또는 독일통일의 최대 패배자 라는 평가를 받음. 독일통일은 브란트의 동방정책, 화해 협력 정책으로 동독 공산정권이 변 해서 가능해진 것이 아니라 동독 주민의 시위로 공산정권이 무너지고 동 독 주민이 서독과의 통합을 원해서 이루어진 것임. - 동방정책으로 소련과 화해 협력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고르바초프의 등 장이 가능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소련의 변화는 1980년대 초 이후 미국 레 이건 행정부의 힘의 우위에 바탕을 둔 화해정책, 전략방위구상(SDI)의 추 진, 소련 중거리 미사일 유럽배치에 대응한 퍼싱Ⅱ미사일의 유럽배치 등 힘의 우위 정책이 거둔 성과라는 분석이 지배적임. - 동 서독 간의 교류 협력의 확대로 동독 평화혁명이 가능해졌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 논리로는 동독보다 폴란드, 헝가리, 체코, 루마니아에서 개혁운동 과 공산정권 붕괴가 먼저 일어났다는 점을 설명하기가 어려움. - 1989년 동독 혁명 이후 사민당의 주장대로 동독 탈출자의 수용을 제한하 고 동독에 경제지원을 하면서 점진적 통일을 모색했다면 통일이 훨씬 지 연되거나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했을 것임. - 동독 공산정권을 인정하고 안정시켜 동독의 변화를 유도하려고 한 사민당 의 정책은 통일정책이 아닌 분단의 평화적 관리 정책이었고 정통성 없는 동독 공산정권을 안정시켜 평화혁명을 지연시켰다는 비판에 직면함.
66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더욱이 사민당 정부도 친서방 노선의 유지, 1979년 12월 NATO의 이중결 정 수용, 대가 없는 경제지원 불가 방침의 고수 등 힘의 우위 노선을 견 지해 왔다는 점에서 독일통일은 힘의 우위 노선이 이룬 성과라고 보는 것이 타당함. 나. 흡수통일은 바람직하지 않은 통일방법인가? 우리나라에서는 흡수통일 은 한쪽의 의사를 다른 쪽에 강요하거나 약자 의 희생을 요구한다는 점, 그리고 독일이 흡수통일로 일층 심각한 후유증 을 겪게 되었다는 인식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은 통일모델 또는 기피해 야 할 모델 로 인식함. 독일이 이른바 흡수통일 방법을 선택한 것은 동독체제나 제도 가운데 통 일독일이 계승해야 할 요소가 거의 없고 대부분의 동독 주민이 서독체제 에의 가입 을 원했던데 기인함. 흔히 분단된 양측이 대등한 관계일 경우 갈등과 이해관계 조정이 어려워 통일이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많으며, 이는 예멘통일이나 2010년도 국내에 서의 시군구 통합 시에도 잘 나타난 바 있음. 북한과 대등한 입장에서 통일을 하려 할 경우 북한과의 협상에서 무엇을 양보하고 무엇을 고수할 것인가? 다. 신속한 통일 대신 점진적 통일을 했어야 하는가? 독일통일 후유증이 부각되자 우리 국내에서는 조급한 통일 보다는 북한
독일통일의 쟁점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67 경제를 일으켜 세운 후 천천히 통일해야 한다는 주장이 대두함. 독일의 경우 1 동독 탈출민의 폭증을 막기 어렵고, 2 동독경제가 파탄상 태였고, 3 동독 민주정부가 신속한 통일을 요구했고, 4 고르바초프의 실 각 가능성도 예견되었으며, 5 점진적 통일이 통일비용만 증가시킬 뿐 실 익이 없다는 점 등 때문에 신속한 통일을 추진. 우리의 경우 점진적 통일을 추진한다 해서 북한체제하에서 경제발전이 가 능하거나 통일 후유증 예방이 가능할 것인가? 라. 독일통일의 최고 공로자는 누구인가? 독일통일의 최고 공로자로는 흔히 고르바초프 소련 대통령, 브란트 전 서 독 총리, 부시 미국 대통령, 동독 주민 등이 거론되며 특히 우리 국내에서 는 콜 서독 총리의 역할에 대해서는 전혀 주목하지 못하고 있음. 고르바초프 대통령은 1 동유럽의 개혁 개방을 선도했고, 2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포기했으며, 3 동독정부의 개혁을 촉구하고 시위의 무력진압을 막았고, 4 독일통일을 수용했다는 점에서 독일통일에 가장 큰 영향을 미 친 것은 사실임. 고르바초프는 소련과 동구권의 변화를 가져온 역동성의 본질 을 이해하 지 못한 채 역사의 흐름에 떠밀려 의식 없이 동유럽을 해방시켰고, 독일통 일을 수락한 것도 끝까지 버티다가 서방측의 압력으로 불가피하게 동의하 게 된 역사무대의 수동적 배우 라는 점에서 최고 공로자로 평가받기에는 부족함.
68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콜 서독 총리는 1989년 9월 동독 주민의 시위 초기부터 통일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예견하고 확고한 의지와 주도적 노력으로 좁게 열린 통 일의 창 을 활용, 통일을 이루었다는 점에서 독일통일의 최고 공로자로 평 가받기에 손색이 없음. 콜 총리의 역할: 1 헝가리의 대동독 여행협정 파기 교섭(89.8), 2 독일 및 유럽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 발표(89.11.28), 3 1989년 중 동독 탈출자 46만 명의 전원수용, 4 동서독 화폐의 1:1 교환 약속, 5 동독정부 의 경제지원 요구와 조약공동체 통일방안 의 거부. 마. 정상회담은 동 서독 관계개선의 돌파구가 되었는가? 동 서독이 1970년 1~2차 정상회담을 개최한 후 동서독기본조약이 체결 되었다는 점에서 우리도 남 북 정상회담이 남 북 관계 개선의 돌파구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서 정상회담을 적극적 으로 추진함. 동 서독은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까지 총 4회에 걸쳐 공식 정상회담이 개최되었으나 1987년 9월 서독에서 있었던 콜 - 호네커 정상회담을 제외 하고는 실질적인 성과가 없었음. 1970년 3월 및 5월 개최된 1~2차 정상회담은 서독과의 접촉을 체제위협 요인으로 생각한 동독이 소련의 종용에 따라 마지못해 서독 측 제안에 응 한 회담으로 상호견해차이만 확인했을 뿐 전혀 성과가 없었으며, 1972년 동서독기본합의서는 소련이 강경파인 울브리히트 서기장을 호네커로 교 체한 후 체결이 가능했음. 1981년 슈미트 - 호네커 간에 동독에서 개최된 정상회담도 소련의 종용에
독일통일의 쟁점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69 따라 서독 측 제안에 응한 회담으로 일부 합의사항은 있었으나 슈미트가 매우 실망스러웠다고 평가한 회담이었으며, 1987년 회담은 경제난에 처한 동독이 경제지원을 얻기 위해 응한 회담으로 그 후 인적 물적 교류 확대 에 크게 기여함. 정상회담이 관계개선의 돌파구를 마련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하에 무리 하게 추진하기보다는 상대방의 의도와 득실을 면밀히 분석한 후 추진함이 바람직함. 바. 동독정부가 서독 TV 시청과 방송교류를 허용한 것은 화해 협력 정책의 성과인가? 동독 주민이 서독 TV를 시청할 수 있었던 것이 독일통일에 크게 기여했다 는 점이 알려지자 일부 정치인들이 북한과의 방송교류를 제안하기도 했고 각 방송국도 다투어 북한과의 방송교류를 추진함. 동독은 1953년 동베를린 봉기가 서독 리아스(Rias) 방송 때문이라고 판단 하여 서독 방송 청취를 엄격히 금지해 왔으나 1971년 이후 서독 TV 시청 을 허용하고 1986년 문화협정 체결 이후에는 프로그램의 교환 등 방송교 류도 추진함. 동독정부가 서독 TV 시청을 허용한 것은 서베를린에서 송출되는 전파 차 단이 어렵고 서독방송 청취금지가 주민의 큰 불만사항이 되었기 때문이었 으며, 특히 보안기관(Stasi)은 방송개방에 적극 반대함. 북한이 우리와의 방송개방이나 실질적인 방송교류에 응할 가능성은 희박함.
70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사. 2+4 회담과 유럽안보협력회의(CSCE)는 독일통일에 실질적으로 기여했는가? 2+4 회담은 독일통일의 대외적 문제를 종결하는 기제(mechanism)가 되었 고 CSCE 정상회의에서도 독일통일을 만장일치로 승인, 독일통일이 주변 국의 축복 가운데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점에서 우리 정부는 동북아다자 간안보협의체(Mini-CSCE)와 6자회담을 적극적으로 추진함. 2+4 회담은 미국이 소련의 평화회의 개최 주장에 대응하기 위해 제안한 회담으로서 2+4회담 개최시기를 가급적 지연시켜 동서독(Two)이 먼저 통 일에 합의한 후 제2차 세계대전 전승 4대국(Four)이 이를 추인토록 했다는 점, 중요한 결정은 2+4 회담 밖에서 양자협상을 통해 이루어졌다는 점에 서 독일통일의 조장자 가 아닌 형식적 추인자 에 불과했음. 통일을 염두에 두고 현재의 6자회담을 보다 구조화하거나 다자간안보체제 로 발전시키는 문제는 보다 신중히 검토가 필요함. 아. 독일통일은 돈 주고 산 것 인가? 독일 통일 시 독일이 소련군 철수비용 67억 유로, 소련군 주둔비용 75억 유로, 기타 차관 등 대규모 경제지원을 했다는 점 때문에 독일통일은 돈 주고 산 것 이라는 평가도 대두됨. 소련은 끝까지 버티다가 국제정세 변화와 경제파탄으로 국제적 영향력이 현저히 약화된 데다 미국, 영국, 프랑스가 연합하여 소련을 제외한 채 독일 통일을 수락할 것이라고 위협했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독일통일을 수락함.
독일통일의 쟁점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71 소련이 서독의 대규모 경제지원을 받은 것은 불가피하게 독일통일을 수락 해야 할 상황에서 부수적으로 챙긴 이득일 뿐 독일통일을 수락하게 된 핵 심적 요인은 아니었음. 4. 통일 후 통합과정과 관련된 논쟁들 가. 독일은 통일과정에서 많은 정책적 실수 를 저질렀는가? 국내 학자들은 독일은 조급한 통일로 실책이 많았으므로 반면교사 로 삼 아 후유증 없는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정부 관계자들 도 선발자의 영광은 독일에게, 후발자의 이득은 우리에게 라면서 후유증 없는 통일방안 짜기에 열중함. 국내 인사들이 지적한 대부분의 실책 은 독일정부가 그 문제점을 인식하 면서도 불가피하게 선택한 차선책이었을 뿐 실책이 아니었음. - 화폐 교환비율을 시세보다 높게 책정한 것은 1 통일열기의 조장, 2 동독 주민의 저축 보호, 3 동독 주민의 이주물결 억제, 4 동독정부의 강력한 요구 등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선택한 정치적 결정이었음. - 동독기업의 급진적 구조조정은 경제 5현 의 권고에 따른 것이며 옳은 방 법이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임. - 몰수재산의 반환우선 원칙 은 통일조약의 위헌판결 가능성과 동독 출신 자들의 정치적 압력을 고려한 조치임. - 동독경제 상황을 과대평가한 것은 동독의 통계부실과 통일 후 동독경제의 급속한 붕괴에 기인한 것으로 정책적 실수는 아니었음.
72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독일인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정책적 실수 는 다음과 같은 것들임. - 통일 초기 정치인들이 너무 많은 장밋빛 약속을 한 것. - 베를린 장벽붕괴 전까지 통일에 전혀 대비하지 못한 것. - 동독의 경제상황을 과대평가한 것. - 통일 후 세금을 더 많이 올리지 않은 것. - 동독경제 재건에 필요한 기간을 과소평가한 것. - 서독제도를 너무 빨리 이식하려 한 것. - 동독 노동자의 임금을 너무 급속히 인상한 것. - 동독지역 행정개편 시 동독 측 인사들에게 더 많이 자율권을 주지 않은 것. 이렇게 볼 때 독일통일은 실패사례 가 아닌 성공사례 로 보아야 하며, 특 히 독일정부가 어떤 정책과 노력을 통해 20세기의 기적 을 이루었는지에 대한 재성찰이 필요함. 나. 통일비용이 예상보다 훨씬 많이 소요된 것은 잘못된 정책 때문인가? 통일 직전 서독정부는 1994년까지 4년간 1,150억 마르크의 통일비용(약 69 조 원)이 소요될 것으로 추정했고, 통일 직후에는 10년간 2조 마르크(약 1 조 360억 유로)의 통일비용을 예상함. 독일정부는 2005년까지 15년간 1조 4,000억 유로를 투입했으나 아직도 연 방예산의 25% 정도를 동독지역에 투입해야 하며, 통일비용 지출액의 60% 가 연금 및 보험금 지급 등 소비성 지출이어서 문제점으로 대두됨. 예상보다 훨씬 많은 통일비용이 소요된 것은 1 예상보다 훨씬 열악한 동 독의 경제상태, 2 동독경제의 급속한 붕괴, 3 동독 국유재산 가치의 하 락, 4 동독 내 투자 여건 악화 등 주로 정책 외적 요인에서 비롯된 것으로 정책실패 때문은 아니었음.
독일통일의 쟁점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73 다. 독일통일 후유증은 아직도 심각한가? 통일 후유증 - 통일 이후 매년 연방예산의 25 ~ 30%, 1991년부터 2005년까지 15년간 총 1 조 4천억 유로(2,540조 원)를 동독지역에 투입한 데다 그중 60%가 소비성 지출이어서 성장 둔화, 재정적자 확대, 실업증가로 유럽의 병자 로 평가. - 동독 주민은 서독체제에의 적응상의 어려움, 실업의 공포, 2등 국민 의식 으로 어려움을 겪은 반면, 서독 주민은 통일비용 부담을 불만스럽게 생각. 통일 후유증의 극복 - 2003년 이후 내핍정책인 어젠다 2010 추진을 계기로 경제적 후유증을 대부분 극복, 펄펄 나는 독일경제 로 부활. - 1993년 -1.6%였던 성장률이 2006년 3.5%로 호전되고 수출은 1조 1,120억 달러로 세계 1위를 탈환했으며, 1991년 서독지역의 35%에 불과하던 취업 자 1인당 생산량이 2007년에는 77%에 주민소득은 서독지역의 83%에 도달. - 동독 주민이 아직도 적응에 어려움을 겪는 것은 사실이나 동독시절로 되 돌아가고 싶다는 사람은 15% 정도에 불과하고 메어켈 총리, 티어제 전 연 방상원 의장, 플라첵 사민당수 등 동독출신이 통일독일의 지도자로 부상, 2등 국민 의식도 상당히 극복. - 이제 남은 문제는 인간사회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는 일반적인 문제라는 것이 독일인들의 일반적 인식. 독일통일 후유증이 부각된 배경 - 서독은 2차 대전 이후 호황만을 누려와 독일인들은 통일 후 경기침체를 자존심의 손상 으로 받아들이면서 안정된 사회보장 체제의 동요를 우려. - 독일은 분단 당시 1 전쟁의 공포도 없었고, 2 이산의 고통 이 적었고, 3 분단비용도 높지 않았기 때문에 통일의 실익을 느끼기 어려운 상황.
74 2011 동아시아 평화와 협력을 위한 구상 Ⅰ - 독일은 74년에 불과한 통일국가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다 제2차 세계대전 이 후 민족의식을 부추기는 행위가 금기시되어 민족의식이 높지 않았으며, 정치 지도자들도 통일 후유증 극복을 위해 민족의식을 동원하기가 어려운 입장. - 통일작업을 위해서는 고통 감내가 필요한 데다 통일 후 걸프전 비용 지원, 소련 및 동유럽 원조 등 국제적 부담요구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통일 후유 증 문제가 더욱 부각. - 우리 국내에서는 흡수통일 불가론, 점진적 통일론, 대북한 경제지원 필요 성 등을 주장하는 논거로 독일통일 후유증이 자주 거론된 데다 독일통일 에 반대한 사회당 계열 인사들이 우리 언론에 자주 등장한 것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임. 라. 한반도 통일 시에도 독일과 같은 통일 후유증이 재현될 것인가? 우리의 경우 동 서독에 비해 1 남 북 간 갈등수준이 높고, 2 강력한 체제수 호 세력이 있고, 3 경제격차가 크다는 점에서 더욱 불리한 측면도 있음. 독일의 통일 후유증이 증폭된 된 것은 1 동독 국유재산 가치의 대폭적 하락, 2 동독경제의 급속한 붕괴, 3 열악한 동독지역 투자 여건 등에 기인한 것으로 우리의 경우 이러한 문제점이 적음. - 동독 국유재산 가치가 1 동독경제의 국제경제에의 급속한 노출, 2 동독 내 매물 격증, 3 폴란드, 헝가리, 체코 등 인접지역에서의 매물 급증 등으 로 급격히 하락. - 통일 후 동독지역 경제가 1 급진적 구조조정, 2 공산권경제상호원조회의 (CMEA: 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 COMECON: Communist Economic Conference) 경제체제의 붕괴, 3 동독 주민의 동독 물품 배척, 4 동 서독 노조의 담함에 의한 급격한 임금상승, 5 낙후된 생산설비, 6 숙련노동력의 이탈, 7 동독 기업인의 경영능력 부족 등으로 급격히 몰락.
독일통일의 쟁점과 한반도 통일에의 시사점 75 - 동독지역 투자 여건이 1 인플레 우려에 따른 이자율 인상, 2 급격한 임 금인상에 따른 노동비용 증가, 3 인프라의 미비, 4 세제혜택 및 산업부 지 제공 등 인센티브의 부족, 5 엄격한 환경규제와 인허가 절차, 6 여타 동유럽 국가들의 상대적으로 좋은 투자 여건, 7 새로운 수출시장 개척의 어려움 등에 따른 투자 여건의 악화. - 우리의 경우 1 북한의 부동산 사유화 수준이 낮은 반면 토지와 지하자원 등 국유재산 가치가 높고, 2 해외시장 개척으로 북한경제의 급속한 붕괴 예방 이 가능하고, 3 투자유치 여건이 좋아 북한경제의 신속한 재건이 가능. 우리의 경우 1 통일편익이 훨씬 높고, 2 북한 주민이 통일의 편익을 쉽 게 느낄 수 있고, 3 통일 후유증 극복을 위해 민족의식을 동원할 수 있 고, 4 북한경제 재건 여건이 좋아 정치적 통합이 원만히 이루어진다면 통 일 후유증이 훨씬 경감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됨. 5. 결어: 한반도 통일에 주는 교훈과 시사점 북한 주민의 동경 대상이 될 국가 사회의 건설이 가장 중요한 선결과제 이고 북한정권과의 화해정책은 굳건한 안보와 힘의 우위가 뒷받침되어야 성공이 가능함. 북한 주민을 위한 인도적 지원과 북한 정권과의 꾸준한 대화 노력이 지 속적으로 필요하고 대북지원은 면밀한 전략적 고려하에서 추진해야 함. 통일 후유증 은 불가피한 분단 후유증 이라는 인식 필요하고 진정한 통 일을 위해서는 나눔의 자세가 중요하며, 예고 없는 통일기회 도래에 대비 한 대비책을 강구해야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