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b Journal for Preacher ISSN 2383-8485 www.stu.ac.kr 설교자를 위한 전문 저널 설교와 소통 2015 January Vol.02
목차 설교자를 위한 전문 잡지 설교와 소통 2015 January Vol.02 03 주일설교 1 정인교 교수 (서울신대 설교학) 성탄절 후 두 번째 주일설교 13 주일설교 2 주현절 후 첫 번째 주일설교 22 주일설교 3 주현절 후 두 번째 주일설교 31 주일설교 4 주현절 후 세 번째 주일설교 40 교육설교 1 유재덕 교수 (서울신대 기독교교육)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 아담 45 교육설교 2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 노아 50 교육설교 3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 요셉 57 교육설교 4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 모세 설교와 소통 제 1권 제 2호 2015년 1월 2일 발행 발행처 서울신학대학교 대외협력실 발행인 유석성 63 71 인문저서소개 이희용 교수 (서울신대 교양학부) 성공한 사람들의 10가지 공통법칙 자료마당 설교를 위한 예화 (편집부) 믿음으로 이룬 착한 성공, 허름한 자의 모습에서 나온 예수님의 사랑 등록 1988년 5월 9일 제388-2003-00049호 주소 경기도 부천시 소사구 호현로 489번길 52(소사본동) 서울신학대학교 전화 (032)340-9106 팩스 (032)349-9634 홈페이지 http://www.stu.ac.kr Seoul Theological University Press Printed in Korea * 본지에 실린 기고자의 글은 본지의 의견과 다를 수 있으며, 본지에 실린 모든 콘텐츠에 대한 본지의 사전 허락 없는 무단 전재 및 복사를 금합니다. 2
1월을 위한 주일설교 1 성탄절 후 두번째 주일설교 정인교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예배의 부름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 라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다시 사망이 없고 애 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것들이 다 지나갔음이 러라.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계21:1-5) 예배기도 새해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립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으로 올 한해도 우리와 함께 하소서. 상한 심령을 이 시간 치유하여 주시고, 개인이나, 공동체나, 온 사회가 어제와 다른 새로운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길 기뻐하며, 더 좋은 계획과 선한 생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데 앞장서는 한해가 되게 하옵소서, 신령과 진령으로 드리는 이 예배를 거룩하게 흠양하심을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면류관 벗어서(25장/ 통일 25장),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288장/ 통일 204장), 내가 늘 의지하는 예수(86장/ 통일 86장), 너 하나님께 이끌리어(312장/ 통일 341장) 3
성시교독 93번, 새해(1) 봉헌기도 오늘도 거룩한 주일을 지킴으로 성도의 본분을 다하게 하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온 교회 가 선교에 앞장서며, 서로 돌아보아 선행을 격려하고, 평화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 리스도를 알리는 일에 전념케 하옵소서. 서로 좋은 열매 맺기를 격려하여 아름다운 소문으 로 가득한 교회가 되게 하시고, 복음에 풍성한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오늘도 정성을 다 해 구별된 예물을 주 앞에 드립니다. 하늘에 천국이 이루어지듯이, 지상천국의 씨앗이 되 게 하시고, 구원의 강물이 영원히 넘쳐흐르게 해 주옵소서. 성도 개개인의 삶과 가정, 그 리고 직장에 크신 긍휼을 허락하시어 구원의 기쁨과 소망이 가득하기를 원하며 예수 그리 스도의 이름으로 봉헌하며 기도합니다. 아멘. 생명의 말씀 네 인생에 하나님을 담아라! 시 80:19 (본문접맥적 주제설교) 2015년 새해를 맞아 하나님의 크신 은총이 여러분과 가정 하시는 사역 위에 함께 하시 기를 축원합니다! 새해를 여는 첫 번 주일 예배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할 수 있는 것은 매우 큰 은혜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돌이켜 주시고 주의 얼굴의 광채를 우리에게 비추소서 우리가 구원을 얻으리이다! 유명한 구약학자인 헤르만 궁켈은 시편의 시를 찬양시 감사시 탄식시 군왕시 지혜시 이렇게 다섯 가지로 분류했는데 오늘 본문은 탄식시에 해당됩니다. 시편이 모두 150편인데 그중 탄식시는 67편으로 가장 많습니다. 탄 식시는 대개 곤경에 처한 개인 혹은 공동체가 자신들의 어려움을 토로하며 하나님께 도움 을 구하는 내용입니다. 오늘 본문도 탄식시이다 보니 기쁨의 소망이 곁들여 있긴 합니다마 는 기본적으로는 조용한 탄식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이런 설명을 들으면 그 4
런 생각을 하시는 분들이 계실 겁니다. 오늘이 새해 첫 주일 예배인데 하필이면 탄식시입 니까? 오늘 예배의 분위기에 맞는 성경구절이 더 합당하지 않습니까? 가령 바로 밑에 있는 시편 81편처럼 말이지요: 우리의 능력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쁘게 노래하며 야곱의 하나님을 향하여 즐거이 소리칠지어다. 시를 읆으며 소고를 치고 아름다운 수금에 비파를 아우를지어다 초하루와 보름과 우리의 명절에 나팔을 불지어다! 확실히 일리가 있는 지적입니다. 그리고 느낌상으로 시편 81편이 더 잘 어울린다는 생 각도 듭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오늘 본문 말씀에 집중하려 합니다. 왜냐하면 하 나님께서 우리 교회에 본문의 말씀을 한 해를 여는 말씀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 리 공동체가 새해를 열면서 오늘 주시는 말씀에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믿는 사 람들끼리는 어떤 성경말씀이 새해 첫 예배에 더 좋느냐를 놓고 이야기합니다마는 교회문 밖만 나가봐도 상황은 전혀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새해 맞으면서 하 나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대신 새해벽두에는 소원들을 주로 이야기하지요. 현대 모비스 라는 회사에서 새해를 맞아 직원 632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그 결과, 새해 소망으로 `가정의 행복 을 꼽은 응답자가 40. 1%로 가장 많았습니다. 그 뒤를 이어 `건강 24. 0%, `금전적 안정 18. 6%, `자기계발 15. 2% 등의 순이었어요. 최근 세종사이버대 학교가 재학생과 졸업생 등 20~30대 직장인 1,014명을 대상으로 새해 소망을 조사했습니 다. 그 결과 직장인 10명 중 7명은 새해 소망으로 이직 을 꼽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많 이 놀라셨죠? 이것은 현재 다니는 직장에 만족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잖아요? 이어 직장인 이 꼽은 새해 소망 2위가 연봉 인상(117명, 12%)이었고, 자격증 및 학위 취득(77명, 7%), 승진(59명, 6%), 연애 및 결혼(37명, 4%)이 그 뒤를 이었습니다. 사람마다 자기가 처한 상황과 처지에 따라 바라는 게 달라지는 것은 당연합니다마는 이 들 소원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철저히 자기와 자기 가족에 게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나라의 안정, 사회정의, 남북통일, 세계 평화 뭐 이런 거시적인 주제들마저 거의 나타나지 않습니다. 상황이 이런데 여기 하나님 이 못 끼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지요. 하나님은 우리 소망에서 철저히 빠져 있습니다. 한국 의 대표적인 지성 가운데 한분이신 이어령 선생이 새해 축시를 지었습니다. 그중 한 구절 을 소개하지요: 날게 하소서. 뒤처진 자에게는 제비의 날개를, 설빔을 입지 못한 사람에게는 공작의 날 개를, 홀로 사는 노인에게는 학과 같은 날개를 주소서. 5
그리고 남남처럼 되어 가는 가족에는 원앙새의 깃털을 내려 주소서...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어느 소설의 마지막 대목처럼 지금 우리가 외치 는 이 소원을 들어 주소서. 은빛 날개를 펴고 새해의 눈부신 하늘로 일제히 날아오르는 경 쾌한 비상의 시작! 벼랑 끝에서 날게 하소서. 이 새해 축시는 기원문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어령 선생이 몇 년 전 세례를 받고 기 독교로 귀의하셨기 때문에 아마도 기도의 대상을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라 해도 틀리지 않 을 겁니다. 그리고 시의 내용도 한 개인의 평안이 아니라 이 사회의 아픈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을 보듬는 이타적 차원을 포함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 역시 하나님 그분 자체를 구하고 있진 않아요. 사랑하는 여러분, 조금이라도 지각있는 사람들이라면 새해에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 에게 소원을 빌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현명한 일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이여, 내 새해 소원을 들어주 세요! 여기서 한걸음 더나가서 하나님이여 당신이 내 소원입니다! 이리 기도하길 원하십 니다. 여러분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소원은 너무 낯선 소원인가요? 우리는 새해를 맞으면 대개 정동진을 비롯해서 해맞이하러 가는 것이 유행입니다. 우리나라의 경우 구정과 신정 이 나뉘면서 좀 어정쩡하게 된 느낌이 강한데 세계 각국마다 신년을 맞는 고유한 풍속이 있어요. 중국에서는 악한 기운을 물리친다는 의미에서 폭죽을 터트리며 새해를 맞습니다. 멕시코에서는 포도 열두알을 먹으며 소원을 빕니다. 미국은 새해 보다는 12월 31일을 뉴 이어스 이브 라 하여 요란하게 보냅니다. 많은 집에서 파티를 열고 밤 12시가 되면 카운 트 다운을 하며 서로를 축하해 줍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밤 신년이 되면 성 슈테판 성당 의 종소리가 울려퍼지면서 TV와 라디오에서 일제히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 의 선율을 방송합니다. 이처럼 나라마다 민족마다 새해를 맞는 풍속이 천차만별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새해맞이는 아주 특별합니다. 유대인들은 새해 시작하는 날을 나팔 을 불어 기념하는 날 로 삼아 회개와 참회하는 날로 삼습니다. 그리고 그날을 로쉬 하샤 나 라고 부릅니다. 로쉬 하샤나 당일 울리는 나팔소리는 영적으로 무기력한 상태에 빠진 사람들을 일깨워 다가올 심판을 준비하게 하는 경고의 나팔소리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렇 게 로쉬하샤나 당일 울려 퍼지는 나팔소리에 울부짖다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자신이 생명책에 기록되기를 간구합니다. 그리고 새해 오후가 되면 유대인들은 샘이 솟는 6
곳이나 물이 흐르는 시냇가에 가서 타슐리흐 의식을 행합니다. 타슐리흐 의식은 흐르는 물 에 자신의 죄를 던져버리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죄를 상징하는 빵이나 음식을 던지면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라는 미가서 7:18절의 말씀을 외우면서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새해의 첫날이 지났다고 해서 새해 의식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유대인들 특히 종교 인들은 열흘 후의 대 속죄일 까지 열흘을 참회하면서 보냅니다. 그래서 이 기간을 아싸랏 여메이 테슈바 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아싸랏 여메이 테슈바 마지막 날 곧 대 속죄일 바로 전날에 유대인들은 크파롯 의식을 행합니다. 크바롯 의식이란 성전이 있을 때 소와 염소를 잡아 백성들의 죄를 사했던 속죄의식을 살아 있는 닭으로 대치한 속죄의식입니다. 전통적 으로 날개가 달린 닭을 희생 제물로 삼는데 남자는 수탉, 여자는 암닭을 사용합니다. 그리 고 속죄하는 사람의 머리위로 닭을 세 번 돌리는 동안 사람들은 다음과 같은 문장을 암송 합니다. 이것이 나를 대신하며, 이것은 나의 대치물이며, 이것은 나의 속죄물입니다. 이 닭은 죽음에 이르지만 나는 영원한 생명과 평화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처럼 닭을 죽임으 로써 속죄를 행하였다고 유대인들은 믿는 것입니다. 확실히 유대인들의 새해맞이는 우리와 다르지요? 그들은 새해 첫날부터 대 속죄일까지 회당에 참여하며 속죄와 회개하는 마음으로 보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나요? 그들이 라고 우리 같은 소소한 소원이 없을까요? 그 어느 민족보다 강한 성취욕을 갖고 있는 게 유 대인들입니다. 당연히 새로운 한해를 치열하게 살 각오와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어느 민족보다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왜 새해를 시작하면서 회개로부터 시작할까요? 우리 생각에는 회개란 묵은해를 보내는 송구( 送 舊 )의 시간에 하 는 것이고 신년에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게 옳을 것 같은데요. 여러분이 아시는 거처럼 이 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샘플입니다. 전 세계 열방 민족을 향하여 하나님이 보여주시고 자 택하신 본보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분노하시는지, 하나님이 어떻게 징벌하시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하시는지, 하나님은 이스라엘 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보세요.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한 구속 계획을 세우시고 착착 진행하셨습니다. 인간으 로 살지 못하고 노예로 살던 이스라엘을 애굽의 폭정으로부터 구해내셨습니다. 그리고 죽 음의 땅 광야에서 40년간 기적 같은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단련시키셨습니다. 오합지졸같 던 이스라엘을 강력한 용사로 탈바꿈시키셨습니다. 가나안 일곱 족속을 몰아내고 이스라 엘을 가나안에 심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세력을 지중해로부터 유프라테스 강에 이르기까 7
지 확장시키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것을 포도나무에 비유해서 묘사하고 있지요. 8절 이 하를 보세요: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 셨나이다. 주께서 그 앞서 가꾸셨으므로 그 뿌리가 깊이 박혀서 땅에 가득하며 그 그늘이 산들을 가리우고 그 가지는 하나님의 백향목 같으며 그 가지가 바다까지 뻗고 넝쿨이 강 까지 미쳤나이다! 그런데 그리도 잘 나가던 이스라엘이 한 순간에 거꾸러지고 맙니다. 13절은 그 상황을 이렇게 한 줄로 묘사 합니다: 숲속의 맷돼지들이 상해하며 들짐승들이 먹나이다! 멧돼지가 포도나무를 마구 짓밟는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일종의 비유이지요. 포도나무는 이스라 엘을 가르키는 것이고 멧돼지는 앗시리아를 가리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북왕국 이 스라엘의 수도 사마리아가 앗수르 제국의 군대에 의해 점령당했던 상황을 반영하는 것입 니다. 본문 1절 요셉을 양 떼 같이 인도하시는 이스라엘의 목자여 라는 표현과 2절 에 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 앞에서 주의 능력을 나타내사 우리를 구원하러 오소서 라는 표 현이 이것을 잘 증명해 줍니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요셉의 두 아들이자 그들을 족장으로 하는 두 지파의 이름이지요. 그 중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강성하고 대표적인 지파로서 이스라엘 이 남북 두 왕국으로 갈렸을 때 북왕국을 주도하는 중심 지파였습니다. 베냐민은 요셉의 유일한 동생으로서 요셉과 함께 아버지 야곱이 같은 어머니 라헬에게서 얻은 아들입니다. 베냐민 지파는 예루살렘과 연접해있었기 때문에 그 일부가 예루살렘 지역을 통치하는 남 왕국에 머물러 있었지만 본래는 북왕국에 속한 지파였습니다. 또 가끔씩 에브라임, 므낫세 두 지파들과 연합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에브라임과 베냐민과 므낫세는 북왕국 이스라엘 을 대표하는 부족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하나님을 떠나 다른 신을 섬겼습 니다. 그래서 결국 이방제국인 앗수르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보세요. 오늘 본문 시편 80편 위에 아삽의 노래라고 써 있지요? 아삽은 다윗이 예루살렘 성전의 찬양대장으로 임명한 사람입니다. 물론 아삽의 시 라고 해서 모두 아삽 이 직접 지은 시는 아닙니다. 아삽의 시라는 것은 아삽이 직접 지었거나 그가 수집한거 혹 은 전통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에서 사용되어온 찬양시들을 통칭하는 것입니다. 시편 80편 도 그중의 하나이지요. 그러니까 시편 80편은 북왕국이 멸망한 후에 지어진 게 분명합니 다. 누가 지었는지는 불명확합니다. 핵심은 이것이지요. 시편 80편은 남왕국 유다 백성이 북왕국 이스라엘의 함락 소식으로부터 받은 충격과 그로 인한 애통과 비탄을 예배 중에 노 래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세요. 1절부터 마지막 절까지 우리 라는 단어가 무려 14번씩이 8
나 쓰이고 있어요. 무슨 이야기인가요? 비록 남북으로 갈리었고 서로 대치하여 싸우기도 했던 두 나라지만 남 유다인들은 북이스라엘을 남으로 보지 않고 우리의 일로 본다는 겁니 다. 내가 당한 일이 아니지만 내 동포가 당한 점령과 파괴와 약탈과 치욕과 수모를 내 일로 여기며 함께 아파하고 탄식하며 하나님께 구원을 간청한다는 것이지요. 더 중요한 것은 이겁니다. 유대인들은 민족이 흥하는 것도 민족이 망하는 것도 다 하나 님이 하신다고 보았다는 겁니다! 아주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민족을 유브라데강까지 활짝 펼치신 하나님, 그런데 그 하나님이 12절이지요? 주께서 어찌하여 그 담을 허시사 길을 지나가는 모든 이들이 그것을 따게 하셨나이까? 흥하게 하신 하나님이 또한 망하게 하셨 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망하게 하셨다! 오늘 본문은 이것을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표현에 빗대어 묘사합니다. 3절에 주의 얼굴빛 이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또 7절과 19절에 주의 얼굴의 광채 라는 표현이 나오지요? 그러니까 주의 얼굴빛을 비추거나 주의 얼굴 광채를 비추는 것은 우리를 보호하고 융성케 하신다는 표현입니다. 반대로 주의 얼굴을 돌리거나 얼굴의 광채를 거두신다는 것은 우리를 버리신다는 표현이지요. 이런 표현은 구약에 나오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표현과도 동일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흔히 우리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하면 무척 비옥하고 윤택한 땅이라 생각합니다 마는 구약에서 이 표현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상식적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 은 나일강 삼각주의 퇴적지인 애굽입니다. 거기는 물이 풍부하고 토지가 비옥해서 농사가 잘됩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차지한 팔레스틴은 천수답입니다. 항상 하늘만 바라보고 비 오기를 기다려야 하는 땅입니다. 비가 오면 곧바로 땅이 흡수해 버리는 불모지입니다. 물 론 헤브론 골짜기를 비롯해 일부 지역이 농사가 잘되고 물이 풍부한건 사실입니다마는 전 체적으로 보면 사막이고 광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불모지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라고 선언합니다. 태양이 작열하고 비 오기만 기다려야 하는 땅, 비가 오면 곧바로 대지가 물기를 흡수해 버리는 땅이 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냐? 비록 자연 환경의 측면에서는 풍부한 급수원을 가지고 있는 애굽이 하늘만을 의존하고 있는 가나안 땅보다 훨씬 더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애굽은 인간 의 노력에 의존하여 사는 인간 중심의 지역인 반면, 가나안은 하나님의 특별한 관심이 집 중되어 있는 거룩한 땅이라는 것이지요. 신명기에서는 그러한 사실을 이렇게 정리하고 있 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권고하시는 땅이라. 세초부터 세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 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신 11:12) 그러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란게 뭡니까? 하나님의 돌보심이 집중되어 있는 땅이며, 하나님의 시선이 머무는 땅이란 뜻이지요. 따라 9
서, 그 땅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야 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요. 바로 그 땅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 반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당신의 얼굴을 돌려버렸습니다. 하나님이 얼굴을 돌리면, 망 합니다! 남유다 백성들은 북이스라엘 형제 나라의 흥망성쇠를 통해 이점을 분명히 깨달은 겁니다. 하나님이 흥하게 하신다! 하나님이 망하게 하신다! 우리는 흔히 잘되는 것은 하나님하고 상관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잘 안 되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잘되고 잘 안 되고, 이익이 나고 손해 가 나고 이 모든 것 중에 어느 것 하나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흥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은 망하게 하십니다! 그러니까 뭡니까? 역사의 흥망성쇠가 전부 하나님 손에 달렸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가 다시 살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오늘 최첨단 시대를 사는 유대인들이 왜 새해를 시작하는 첫날 하나 님을 찾는지 확실해 졌습니까? 왜 그들이 하나님께 머리를 조아리는지 아시겠어요? 왜 희 망을 말하고 소원을 말해야 하는 신년 초하루부터 가슴을 치며 내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 하는지 이해가 되시나요? 유대인들은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이 모든 것의 모든 것 되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손에 넣어도 하나님을 잃으면 그것이 전혀 무의미하 다는 것을 절감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해를 시작하시면서 각자 마음 속에 희망과 소원이 있지요. 그것은 너무나 자연스런 일이고 당연한 일입니다. 만사에 때가 있는데 지금은 희망을 품을 때이고 새롭게 결심할 때입니다. 압니다. 우리 결심이 얼마나 허무하게 깨져나갔었는지를... 그래 도 다시 이를 악물고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압니다. 내가 그리도 바라고 소원하고 목숨처 럼 의미를 부여했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나니 별 의미 없었다는 것을... 그래도 1%의 의 미라도 잡을 수 있다면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압니다. 소원하고 바라고 염원해도 진 보와 변화가 생각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이해인 수녀가 쓴 새해의 소망 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노여움을 오래 품지 않는 온유함과, 용서에 더디지 않은 겸손과, 감사의 인사를 미루지 않는 승기를 청하며 촛불을 켜는 새해 아침, 나의 첫 마음 또한 촛불만큼 뜨겁습니 다. 세상에 살아있는 동안 어디서나 평화의 종을 치는 평화의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모든 이와 골고루 평화를 이루려면 좀 더 낮아지는 연습을 해야겠다고 겸허히 두 손 모으는 나 의 기도 또한 뜨겁습니다. 누구나 이 시처럼 살고 싶지요. 그런데 어느 날 나를 보면 정반대로 살고 있는 게 인생입 니다. 압니다. 충분히 경험했습니다. 그래도 다시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선을 향 10
한 시도는 어디서 중단하더라도 거기까지가 성공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선을 향한 시 도는 시도하지 않는 것이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각자가 복된 인생이 되기 위해 소 원을 갖고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인생은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저절로 철이 들고 어른이 되고 성인이 되는게 아닙니다. 오직 치열하게 인생을 사는 자만이 어른 이 됩니다. 오직 자기 자신에게 처절하고 준엄한 자만이 진보를 맛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이 중요합니다마는 가장 중요한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유대인들이 한 해를 시작하면서 매달렸던 하나님 그 하나님 말입니다. 모 든 것의 모든 것 되시는 그 하나님 말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 을 비추사 우리가 구원을 얻게 하소서! 바로 이 소원이 여러분의 최고 소원이 되시기를 바 랍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의 전 존재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소소 하게 바라는 모든 것, 의미가 있어요. 그런데 정말 그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두 가지가 반드 시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외적 환경입니다. 내 소원과 희망이 아무리 강력해도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이 어지러우면 다 소용없어요. 보세요, 내가 아무리 희망하는게 있어도, 북한이 요동치고 국제정세가 우리나라를 뒤흔 들고 사회가 소란하면 나라는 개인은 다 소용없어지잖아요? 그래서 내 소원과 희망이 이뤄 지려면 사회 국가라는 상황이 안정되어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메타바시스(metabasis) 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메타바시스의 하나님이십니다. 역사는, 모든 것은, 모든 것의 모든 것은 다 다 다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내 소원과 희망이 의미가 있으려면 메타바시스, 나 를 둘러싼 상황이 안정될 뿐 아니라 두 번째로 내 영혼이 평안해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에 서 말하는 것처럼 내 영혼이 잘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내 영혼이 잘되려면 내가 하나님께 돌이켜야 합니다. 이것을 가리켜 메타노이아(metanoia)라고 하지요. 내 영혼이 하나님께 돌이킨다는게 뭡니까? 거룩하신 하나님, 죄를 미워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 앞에 내 모든 죄를 자백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이지요. 그래야 하나님이 당신의 얼 굴을 우리에게 돌리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을 돌리셔야 우리가 삽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을 돌리셔 야 메타바시스, 우리를 둘러싼 환경이 평안해 집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얼굴을 돌리셔야 메타노이아, 우리의 영혼이 깨끗한 죄사함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동안 우리는 충분할 만큼 후회를 많이 했습니다. 새해의 결심만큼 후회도 많았던 게 우린에 인생입니다. 올해라고 그 후회가 없을 것 같지는 않습니다. 도대 11
체 달력 한 장 넘어간 것 빼놓고 무엇이 새로워졌다고 평생 안 되던 것이 하룻밤 지났다고 술술 자동으로 된다고 자신할 수 없잖아요? 나이 들면 해결된다는 나이브한 생각은 진작 에 버린지 오래잖아요? 이제는 내가 나에게 뭔가를 바라는 것 그만합시다. 이제는 나를 포 기하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젊어서 힘이 있습니까? 그 힘이 나를 강하게 하고 하나님을 약하게 하지 말기를 바랍니 다. 나이 먹어서 힘이 약해지셨나요? 내 힘이 약해졌는데 그렇다고 하나님이 강해지지 않 는다면 이중의(이중적) 비극입니다. 새해에는 우리 모두가 먼저 하나님에게 집중합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집중하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집중하 면 우리가 삽니다! 우리 영혼이 삽니다. 우리 사업이 삽니다. 우리 가정이 삽니다. 우리 교 회가 삽니다. 우리나라가 삽니다. 이 하나님께 모든 것을 걸고 힘차게 출발하는 한해가 되 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12
1월을 위한 주일설교 2 주현절 후 첫번째 주일설교 정인교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예배의 부름 너희는 약한 손을 강하게 하며 떨리는 무릎을 굳게 하여 겁내는 자들에게 이르기를 굳세 어라, 두려워하지 말라, 보라 너희 하나님이 오사 보복하시며 갚아 주실 것이라 하나님이 오사 너희를 구하시리라 하라 (사 35: 3-4) 예배기도 사랑과 은혜의 주님 오늘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하감하시 며 우리 가운데 오사 우리에게 참다운 평화와 기쁨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부족함을 책망하지 마시며 당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우리를 당신의 길로 인도하여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하나님의 크신 사랑(15장/ 통일 55장), 너 예수께 조용히 나가(539장/ 통일 483장), 내 영혼의 그윽히 깊은데서(412장/ 통일 469장), 어지러운 세상중에(340장/ 통일 366장) 성시교독 121번 주현절(1) 13
봉헌기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깨닫고 이 시간 주님 앞에 저희의 모든 것을 드립니다. 이제까 지 저의 것으로 붙잡고 있던 모든 것도 이 시간 주님의 사랑의 손길 앞에 쓰임받기 원하며 모든 것을 주님께 드립니다. 저희의 무지한 모든 것을 끝까지 참으시고 사랑의 손길로 인 도하여 주신 주님께 감사드리오며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저희 자신을 온전히 맡기고 따 를 수 있도록 은혜를 더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저의 삶과 모든 것이 주님의 향기가 될 수 있게 허락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생명의 말씀 생명을 향한 탈피 렘 4: 3-4 (이야기전환방식) 2014년이 지나가고 2015년 새해를 맞은 지 두 번째 주일입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세 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독일의 대 문호 괴테는 자신이 쓴 파 우스트라는 명저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탈피( 脫 皮 )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 뱀이란 일정한 크기가 되면 몸의 허물 벗고 새로 태어납니다. 뱀의 몸은 각질로 되어 있는 비늘로 덮여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각질은 자라지를 않습니다. 반면에 뱀의 몸은 자라거든요? 당연 히 자라는 몸을 껍질이 감당할 수가 없지요. 뱀의 껍질은 대단히 단단합니다. 그 단단한 껍 질을 정기적으로 벗고 새로운 껍질로 바꾸면서 뱀은 생존하고 자라게 되는 것이지요. 뱀 이 상처를 입어 껍질이 손상되거나 독이 든 쥐를 먹어서 병들게 되면 껍질을 벗지 못합니 다. 만약 허물을 벗지 못한다면 뱀은 그 몸이 딱딱하게 변하여 죽게 됩니다. 다시 말해 뱀 은 자기 껍질에 갇혀 죽게 되지요. 그래서 뱀에게 탈피, 즉 껍질 벗기 는 자신의 생존에 직 결되는 중요한 문제이지요. 두 번째는 바다가재 이야기입니다. 여러분들이 가끔 외식하실 때 랍스터 즉 바다가재를 즐겨 드시곤 하지요? 그런데 항상 곤욕스러운게 바다가재 껍질이 보통 단단하지 않습니 14
다. 바다가재는 그 껍질이 마치 갑옷처럼 매우 두껍고, 단단합니다. 그래서 그 껍질을 처리 하기 위해 조그만 망치를 사용할 정도이지요. 그런데 바다가재는 그 단단한 껍질을 탈피, 벗습니다. 그것도 1년에 다섯 번, 5년 동안 무려 25번이나 벗습니다. 그렇게 껍질을 탈피 하면서 가재가 성장하는 것이지요. 만약, 탈피하지 않으면, 가재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 딱딱한 껍질을 벗어던져야 하는 이유는 뱀과 동일합니다. 몸은 자라는데 껍질은 자라지 않 거든요. 그 작은 갑옷에 갇혀 있으면 절대 성장할 수 없습니다. 성장 못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죽습니다. 그래서 탈피 즉 껍질 벗기는 랍스터에게 생명과 직결된 문제이지요. 세 번째는 우리 인간을 이야기해 봅시다. 우리 인간의 몸은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진 약 60 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크기는 평균적으로 대개 1/300mm이고, 형태는 천 차만별입니다. 생명체인 세포는 외부세계에서 영양을 섭취해 소화하고, 그것을 에너지로 바꾸거나 분열해서 그 수를 늘리면서 우리의 몸을 유지합니다. 그래서 한 개의 세포에는 인간이 만든 어떤 최첨단 기술보다 뛰어나고 정교한 시스템이 있는 셈입니다. 세포는 세포 핵, 세포질, 세포막이라는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그 역할이나 형태에 따라 상피세포, 근육 세포, 신경세포, 섬유아세포, 골세포의 5가지로 분류합니다. 같은 종류의 세포가 모이면, 하나의 통합된 역할을 담당하는데, 이런 세포의 덩어리가 조직입니다. 뼈나 근육, 신경, 피 부, 기관이나 장기 등은 모든 조직에 의해 형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인간 의 세포가 대부분 한 평생 가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대개의 세포는 그 수명이 3개월입니 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십억 개의 세포가 소멸되고 다시 만들어집니다. 늙는다는 것은 생 성되는 세포보다 소멸되는 세포의 수가 많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 이걸 보면 인간의 세 포도 어떤 의미에서 탈피한다고 할 수 있지요. 제가 뱀과 바다가재와 사람의 세포를 이야기했습니다마는 이것뿐만이 아니지요. 사실 은 모든 생명이 껍질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생명의 시작부터가 그렇잖아요? 씨앗은 껍질 을 벗어나야 하고, 동물은 알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벗어나지 못하면 죽음입니다. 곤충들 은 유충에서 번데기가 되는데, 번데기에서 다시 날개달린 성충이 되려면 껍질에서 벗어나 야 합니다. 이 과정을 잘 거치지 못하면 불완전한 날개를 달고 나오거나 심지어 죽기까지 합니다. 나무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절이 바뀔 무렵이면 나무들도 껍질을 벗어 자신을 키워 갑니다. 이렇듯 껍질을 바꾸는 것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하고 성장하고자하는 생명체의 핵 심활동입니다. 사람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도 낡은 세포가 죽어 사라지고 새로운 세포가 생성되어 우리 생명이 유지되는 것이지요. 만일 이런 세포의 생성과 소멸에 문제가 생긴다면 어떨까요? 실제 그런 희귀병을 앓고 15
있는 소녀가 있습니다. 지난 2일 미국 NBC 방송은 일명 뱀껍질 소녀에 관한 기사를 보도 했는데요. 올해 다섯 살 된 애나벨 화이트하우스라는 소녀가 어린선(ichthyosis, 魚 鱗 癬 ) 이라 불리는 선천성 질환에 걸렸답니다. 그래서 그 부모들이 매일 같이 뱀의 비늘 같은 피 부를 손질해 줘야만 살 수 있다는 거에요. 매일같이 딸의 피부에 돋아있는 비늘을 떼어주 고 진한 크림을 손과 얼굴에 30분마다 듬뿍 발라줘야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모가 24 시간 아이 곁을 떠날 수 없는 겁니다. 이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몸에 땀구멍이 없어 열을 배출하지 못하기 때문에 피부가 갈라지고 벗겨져 머리부터 발끝까지 비늘에 덮여있어요. 현재 미국에는 30만명 당 한 명꼴로 이런 환자가 발생하는데 현대 의학기술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세포의 생성과 소멸이라는 순환이 이뤄지지 않으면 이런 무서운 병 에 걸리게 됩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소멸과 생성이 단지 세포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보이지 않 는 우리 생각과 마음도 소멸과 생성의 순환에서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 육체가 성장하는 것이 세포의 소멸과 생성이라면 우리 정신과 마음의 성숙도 똑같습니다. 철없던 생각과 마 음을 버리고 장성한 어른의 생각과 마음을 가질 때 우리는 성숙한 성인이 되는 것이지요. 생각의 순환이 멈추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이 굳어집니다. 굳어진 생각과 마음은 선입견과 아집과 고집이라는 두꺼운 껍질을 형성합니다. 그 안에 머물러 있으면 우리의 정신과 인 격은 성장을 멈춥니다. 성장이 멈춘 인간! 그것은 한창 자라야 하는 아이가 자라지 않는 것 이상으로 심각한 것이지요. 어차피 인간의 신체는 25살이 지나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습 니다. 그 다음부터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정신과 인격 그리고 신앙의 성숙이지요. 25살 까지는 가만있어도 신체가 성장합니다마는 우리 마음과 인격과 신앙은 시간이 간다고 저 절로 성숙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가만히 두면 그냥 어린상태로 멈추고 맙니다. 그래서 상 담학에서 어른아이 (adult-child)라는 표현을 쓰잖아요. 나이는 성인이 맞는데 정신적으 로 인격적으로는 여전히 어린이의 상태인 경우 말이지요. 어린아이가 발육이 늦으면 걱정 하는 부모라도 있지만 다 큰 어른이 어린아이처럼 미성숙하면 방법이 없습니다. 누가 이 런 비극을 바라겠어요? 아마도 이러한 탈피에 실패해서 세계적인 조롱거리가 된 민족을 꼽으라면 단연 유대인 들일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예레미야서는 이스라엘의 멸망을 다루고 있는데요. 예레미 야 선지자는 그가 부름 받았던 주전 627부터 주전 580년 경 그가 죽을 때 까지 대략 50여 년 간 활동했습니다. 이 시기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습니다. 당시 신 흥왕국이었던 바벨로니아는 메대와 연합하여 앗수르 왕국의 니느웨와 하란을 점령하였고 그 결과 앗수르가 멸망당하게 됩니다. 바벨로니아는 주전 588년 유다를 침략하였고 주전 16
586년에는 예루살렘을 함락하여 유다를 멸망시키지요. 이런 참혹한 시기에 하나님의 신탁 을 전하는 예언자가 바로 예레미야였던 겁니다. 예레미야는 유대의 멸망을 이렇게 보았습 니다: 탈피해야 할 때 탈피하지 못하고 변해야 할 때 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바벨로니아 가 득세하기 직전까지 최대 강국은 앗수르였습니다. 그런데 앗수르를 다스리던 아슈르바 니팔 왕이 죽고 나자 큰 내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때가 주전 627년부터 624년 어간의 일입 니다. 이 내란이 결국 제국의 약화와 파멸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틈을 타서 바벨로니아가 독립하고 쇠약해진 앗수르를 쳐서 멸망시키면서 고대세계의 절대강자로 등극하게 되지요. 그런데 이스라엘은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정확히 읽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 쓰러져가 는 앗수르에게 계속 의지하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자력할 힘이 없으면 국제 정세라도 정 확히 읽고 대처해야 하는데 낡은 세력인 앗수르에게 빌붙어 신흥강국인 바벨로니아를 적 으로 만들었던 겁니다. 구시대적 국제질서에서 탈피하지 못했던 겁니다. 탈피의 실패! 변 화의 실패!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런 외적인 요인도 요인이지만 보다 결정적인원인을 다른 데서 찾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고 다른 이방신을 섬겼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배 반해서 망했다는 겁니다. 이것을 예레미야는 사막에 발을 벌리고 앉아 지나가는 모든 길 손들을 손님으로 맞는 창녀 짓거리로 묘사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땅을 더럽혔다! 내가 네 남편이다 내가 네 주인이다. 돌아와라! 돌아 와라! 내가 네 애비다 돌아와라 배반한 자 식들아! 이방신으로부터 나와서, 탈피해서,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라! 그리도 호소했건만 이스라엘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자진해서 이스라엘을 바벨로니아에게 넘겨주십니다. 34장 2절에 나오 지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다. 가서 유다왕 시드기야에게 말하라, 여호와 의 말씀이다. 나를 믿으라! 나는 이 성을 점령하고 불사를 바벨론 왕에게 이 성을 넘겨주 겠다. 스스로의 힘으로는 그의 손아귀에서 도망할 수 없다. 너는 반드시 사로잡혀서 그에 게 넘겨지리라! 이게 도대체 누구의 말입니까? 이스라엘을 지키셔야 하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앞장서 서 이스라엘을 멸망으로 몰아넣으시다니요? 그릇된 신앙의 껍질을 벗지 못한 이스라엘, 결 국 주전 586년 나라를 빼앗긴 이래 1945년 다시 제대로 된 주권 국가를 되찾기 까지 얼마 나 오랜 세월 나라 없는 설움을 겪어야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우리나라와 여러모로 닮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갈수록 실감이 납니 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미국 일본 중국 소련은 가히 세계 최강국들입니다. 이 틈바구니 17
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스라엘의 패망은 결코 한번으로 끝나는 역사가 아닙니다. 어디 나라 만 그렇겠습니까? 개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역사를 움직인 위대한 인물들은 하나같이 껍질을 벗은 존재들이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꼽히는 사 람이 모세입니다. 그가 바로의 사촌형제로 그냥 바로 곁에 있었다면 애굽의 중요한 정치인 이 되었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 화려한 신분을 탈피했습니다. 그리고 자기 민족을 살리 는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것은 화려한 궁중의 복장을 벗어던지는 일입니다. 궁중의 산해진 미 대신 아무 맛없는 만나와 메추라기로 40년을 버텨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대 애굽 제국 의 고관대작이라는 출세 대신 애굽 군대의 암살 표적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분명 상식적으 로 볼 때 그의 탈피는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무모함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 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무모함에 도전했습니다. 그리고 달걀이라는 생명이 바위라는 무 생명을 이겼습니다. 분명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일을 위해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는 거 룩한 탈피가 역사를 만듭니다. 여러분에게는 좀 생소할지 모르지만 사도 바울, 어거스틴, 마르틴 루터와 더불어 세계 신학계를 대표하는 인물이 칼 바르트(1886-1968) 라는 분입니다. 이분은 원래 자유주의 자였습니다. 그런데 자기 스승이 나치정권에 협력하는 것을 보고 자신의 신학에 대해 회의 를 갖기 시작했습니다. 이분이 스위스 분인데 스위스의 자펜빌이라는 조그만 시골에서 목 회를 했어요. 그런데 그 엄청나고 심오한 신학적 사유와 달리 성도들의 신앙은 너무 소박 한 겁니다. 여기서 이분이 충격을 받았어요. 그래서 자유주의를 버리고 성경으로 돌아옵니 다. 그분이 1919년 쓴 로마서 주석이라는 책은 그의 전향을 알리는 첫 신호탄이었습니다. 그 후 바르트는 자유주의자에서 자유주의로 기독교를 지켜내는 파수꾼의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한 신학자의 탈피가 기독교 신학과 신앙을 지켜낸 것이지요. 참고로 이 분은 현실 목회를 접고 대학 교수로 강의하시면서 교도소 선교를 시작하셨습 니다. 그래서 칼 바르트의 설교가 듣고 싶으면, 감옥에 들어가라 는 농담이 생길 정도로 그는 교도소 채플에서, 놀라운 권능을 가지고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수 많은 수감자들이 자신의 껍질을 깨고 감옥에서 새롭게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칼 바르트 목 사님은, 수감자들에게 이렇게 설교했어요: 여러분은, 죄를 지은 죄인이기에, 이 감옥 안에 갇혀 있지만, 사실 여러분보다 제가 더 큰 죄인입니다. 저는 제 고집을 내려놓지 못해, 아 직 껍질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껍질을 깨야만 합니다. 믿음 없음 이라는 껍 질을 말입니다. 여러분이 수감된 교도소의 벽은 매우 두꺼운데요, 너무나 두꺼워서 아무도 그 벽을 깨뜨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믿음 없음과 불순종, 교만이라는 벽은 교 도소 벽처럼 너무 두꺼워서 참으로 깨뜨리기가 힘듭니다. 칼 바르트 목사님이 자신을 낮 18
추고, 스스로의 죄성을 인정하시고 설교하니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거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지금 2015년 새해 두 번째 주일을 맞았습니다. 생각하며 사는 분들이라면 새해에 대한 기대가 있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 기대들은 다 선하고 좋은 것들 이겠지요. 그런데 그런 기대들은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기대들을 이루는 가장 확실한 길은 다른 사람이 아닙니다. 외부 환경이 아닙니다.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가 새해 의 내 비전을 이루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관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뱀의 껍질 벗기처럼 바다가재의 껍질벗기처럼 나를 탈피하는 일입니다. 탈피해야 내 비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탈피해야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산다는 것은 생물학적 개념을 넘어 실존적 개념입니다. 단순히 밥먹고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 존재이기에 내 생각이 살아야 합니다. 영적 존재이기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살아야 합니다. 사회적 존재이기에 인간관계가 살아 야 합니다. 살려면 탈피해야 합니다, 나를 탈피해야 합니다. 나를 탈피한다! 도대체 무엇 을 벗으란 말인가요? 무엇을 탈피하란 말인가요? 오늘 본문 3절에는 중요한 단어 두 가지가 나옵니다. 먼저 뒤에 나오는 단어인 가시덤불 을 봅시다. 히브리어로 가시덤불은 코치 라고 하는데, 우리를 지도하는 지도자라는 영어 단어의 코치가 아닙니다. 히브리어 코치는 가시덤불, 가시 그런 뜻입니다. 가시덤불은 절 대 씨를 뿌리는 곳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씨 뿌리는 비유에서 이 코치를 이리 설명하셨지 요. 막3장3~20절에 나오지요: 더러는 가시 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기운을 막으므로 결 실치 못하였다. 그러면 가시덤불이란 무슨 뜻이냐?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과 기타 욕 심으로 가득 채워진 마음! 이게 가시덤불입니다. 예수님은 절대 여기에 씨앗을 뿌리지 말 라고 하십니다. 우리 인생의 비전과 계획이라는 씨를 세상을 사랑하고 돈 버는데 혈안이고 자기 배만 채우려는 욕심 위에 절대 세우지 말라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는 씨를 어디 뿌려야 하느냐? 우리의 새해 비전과 계획을 어디에 세워야 하 느냐? 바로 3절에 먼저 나오는 단어가 묵은 땅입니다. 히브리어로 묵은 땅은 니르 라고 합 니다. 니르는 묵은 땅 혹은 경작하기에 알맞은 땅 그런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비 전의 씨를 뿌릴 땅은 경작하기 좋은 땅인 니르에 뿌려야 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랜 동안 방치해 두어서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어요. 이 위에 씨를 뿌리면 굳어진 대지를 뚫고 생명 이 살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갈아엎어야 합니다. 이것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 4 절에 나오는 너희 마음 가죽을 베라 입니다. 이 두 표현은 같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 리 마음과 몸과 영혼과 생활에 깃들어 있는 그릇된 습관, 생각, 행동을 벗어버리라! 탈피해 라! 마치 밭을 갈아엎듯이 부정적인 생각, 비관적인 생각,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생각, 싹! 19
갈아엎어라! 몸에 붙은 게으름, 자기에게 철저하지 못하고 한없이 너그러운 관용,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탄 듯 우유부단한 행동, 싹! 벗어던져라! 마치 뱀이 껍질을 벗듯, 바다가재가 껍질을 벗듯 벗어 던져라! 그래야 너의 비전을 이룰 수 있다, 그래야 진정 네가 살 수 있다! 그런데 여러분, 오해하지 마세요. 그냥 생활습관 고치는 거 말하는 게 아닙니다. 잘못된 생각이 단순히 올바른 궤도로 돌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말하는 우리 생각과 행동 과 라이프스타일에서 허물을 벗는다, 껍질을 벗는다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다는 이야기입 니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우리 행동이나 생각 그리고 살아가는 태도들을 파고 들어가면 그 밑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우리 이기심 왜곡된 본능이 자리 잡고 있어요. 아무리 잡초를 낫 질해 보세요. 얼마 후 다시 또 다시 자라잖아요? 잡초를 없애려면 뿌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새해 표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들의 새로운 생각, 새로운 결심 새 로운 라이프스타일, 새로운 행동, 이 모든 것의 뿌리가 하나님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하나 님께 속하라! 세상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라! 재물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 라! 세상을 벗고 하나님을 입어라! 하나님께 속하라! 뿌리가 하나님이면 모든 게 선일 수밖 에 없습니다. 뿌리가 하나님이면, 그 열매가 풍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설교를 준비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흥미 있는 사실을 발견했어요. 바다가재가 껍 데기를 벗는 내용인데요, 가재는 종이나 개체에 따라서 큰 차이는 있지만 대개 탈피 4~5 일전 경, 빠른 개체이면 1주일 전부터 서서히 식욕이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탈피 전후 1~2일은 거의 먹이를 섭취하지 않습니다. 이리하는 것은 탈피에 전력을 기울이기 위 해서입니다. 그래서 먹고 싶은 것도 먹지 않고 금식을 하는 거지요. 그런 상태에서 바다가 재가 껍데기를 벗게 되는데 껍데기를 벗을 때에는 자기 몸의 모든 근육을 다 사용해서, 필 사의 노력을 합니다. 그래야 단단한 껍질을 깨고 탈피가 가능한 것이지요. 사람이나 가재 나 안 먹으면 힘없어요. 금식한 상태에서 전신의 힘을 동원해서 껍질을 벗는 게 얼마나 괴 로운 일이겠어요? 그런데 그 괴로움을 견뎌야 부드럽고 연약한, 새 껍질이 생겨납니다. 새 껍질이 생겨야 바다가재는 삽니다. 똑같습니다. 탈피는 힘든 겁니다. 변화는 힘든 겁니다.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특별히 세 상의 눈부신 쾌락에 눈 돌아가기 쉬운 젊은 세대에게 하나님중심으로 탈피하라는 주문은 엄청난 고문일겁니다. 나이 들어 자기 생각과 고집이 발뒤꿈치 굳은살 보다 더 딱딱하게 변 해버린 장년들도 자기를 버리고 하나님을 입으라는 이야기는 결코 쉬운 이야기가 아닙니 다. 그러다보니 12월 31일에 가서 보면 얼마나 많은 시체들이 우리 주변에 뒹구는지 몰라 요. 신년 초의 새로운 결심 새로운 계획들...그 새 생명들이 자라지도 못하고 중간에 다 죽 20
어 뒹굴고 있잖아요? 이유는 간단합니다. 탈피와 변화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탈피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계획과 결심의 밑뿌리가 하나님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에이, 올해도 실패했네! 우리는 그냥 가볍게 넘어갈는지 모르는데 우리에게 생명을 주 신 하나님은 그리 생각 안합니다. 하나님이 보는 악이란 것은 하나님 없이 사는 겁니다. 하 나님 없이 살면, 하나님이 모든 행동과 생각의 뿌리에 있지 않으면 하나님은 분노하십니 다. 그냥 우리 실패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분노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심각한 것 이지요. 올 한해를 새롭게 시작하면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연말 결산은 하나님의 따뜻 한 미소와 칭찬 속에 이루어 질 수 있기를 소망합시다. 잘하였다, 내 아들아 잘 하였다 내 딸아! 하나님에게 속해서 올 한해 삽시다. 하나님위에서 내 생각과 행동과 계획을 세웁시 다. 그래서 지금까지 못가 본 내 인생의 길을 2015년에는 가봅시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서시어 우리의 2015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21
1월을 위한 주일설교 3 주현절 후 두번째 주일설교 정인교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예배의 부름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 기세덱의 서열을 따라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 3-4) 예배기도 오늘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아버지, 감사를 드립니다. 매일 같이 새날을 저 희에게 주사 우리의 소망이 수치를 당하지 않게 하시고 우리가 더욱 더 주를 앙망하게 하 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이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루신 새로운 역사에 감사하며 주 앞에 우리의 지나간 잘못을 고백하고 주 만이 우리의 참다운 구원자가 되심을 가슴 깊이 깨닫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주 우리 하나님(14장/ 통일 30장), 아 내 맘속에(411장/ 통일 473장), 나의 갈 길 다가 도록(384장/ 통일 434장), 주의 사랑비칠 때(293장/ 통일 414장) 성시교독 122번 주현절(2) 22
봉헌기도 우리를 받아 주시고 당신의 새로운 사명의 반열에 세워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매 일 새롭게 고백하게 하시고 우리의 사랑과 감사가 언제나 넘쳐나게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 다.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내어주신 사랑을 잊지 않 게 하시고 주님의 사랑을 닮아가는 저희가 되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 도드립니다. 아멘 생명의 말씀 그대는 천하보다 귀하다! 막 8: 34-38 (본문접맥적 주제설교) 오늘 본문 말씀은 원래 비장하고 긴장되는 컨텍스트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긴장하고 읽어야 합니다. 31절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공생애 3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이 죽임을 당하고 3일 만에 부활할 것을 밝히십니다. 하지만 제자들 귀에는 3일 만에 부활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안 들어오고 죽을 것 이라는 이야기 들어옵니다. 그 래서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합니다. 주님, 이러지 마십시오. 이 러면 안 됩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고 꾸짖으시지요. 자기가 사랑하는 수제자를 사탄이라고 하니 듣는 베드로 입장에서 얼마나 충격이겠어요? 더욱이 예수님이 꾸짖으신 내용은 처음 공생애 시작하실 때 광야에서 유혹하는 마귀를 꾸짖던 바 로 그 꾸짖음과 동일하거든요 본문은 유쾌하거나 기분 좋은 분위기하고는 거리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반적인 분 위기 속에서도 우리를 기쁘게 하는 구절이 있어요. 바로 36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 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자기 목숨과 바꾸 겠느냐? 이 말씀은 예수님이 당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던 와중에 나온 말씀이라서 전체적 23
인 내용과 별로 잘 안 맞는 듯 합니다마는 우리 기호에는 확실히 잘 맞습니다. 불교에서도 석가가 남겼다는 말 가운데 천상천하 유아독존( 天 上 天 下 唯 我 獨 尊 ) 이라는 말이 있는데 이런 뜻이거든요?: 이 세상에 자신이 가장 존중 받아야 할 중요한 개체로서 다 른 누구도 자신을 대체할 수 없다! 그 만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은 스스로 소중하다는 말입 니다. 이리 보면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 소중하다는 점에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석가 의 말이 비슷한 점이 있어요. 그래요, 온 천하를 얻고도 죽으면 소용없어요. 현대 그룹을 일 으킨 정주영 회장이 어느 비가 오는 날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회장님 뭘 그리 보고 계세요? 궁금해서 비서가 물었어요. 임자. 저기 저 아래 정원을 봐. 저기 내 모 습을 동상으로 만들어 논거 보이지? 비가와도 눈이 와도 저 동상은 아무 것도 모른 채 그냥 맞고 있잖아? 저렇게 동상으로 백년 천년 있는 것 보다는 골골대더라도 살아있는 게 소중 한 거야! 맞는 말이지요. 금으로 동상을 만들어 주면 뭐합니까? 골골 대더라도 살아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온 천하를 얻어도 죽으면 온 천하가 무슨 소용입니까? 설사 천하를 얻기는커녕 다리 밑에 살며 동냥으로 하루하루 연명하더라도 살아있는 게 중요한 겁니다. 우리는 2015년 한 해를 시작하면서 많은 계획을 세웠습니다. 올 한해 아니 내 인생 전체 가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성공하려면 이런저런 것이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어 떤 유머러스한 글을 보니까 성공하는 여자를 이렇게 묘사 했더군요: 색기 있는 여자보다 색깔있는 여자, 여우같은 여자보다 여유 있는 여자, 발랑 까진 여자보다 발랄한 여자, 들러 리보다 힐러리가 되려는 여자, 끔찍한 여자보다 깜찍한 여자, 애교만 떠는 여자보다 애정 이 넘치는 여자, 성형수술하는 여자보다 성품이 좋은 여자! 이번에는 성공하는 남자를 이 리 묘사했어요: 여자를 사냥하기보다 사랑하는 남자, 포옹력보다 포용력 있는 남자, 정력 적이기 보다 정렬적인 남자, 나체를 탐하기보다 니체를 탐하는 남자, 공짜보다 공자를 좋 아하는 남자, 안주하는 사람보다 완주하려는 남자! 웃자고 하는 이야기지만 귀담아들을 만한 유머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보다 정말 성 공하는 요소가 있습니다. 바로 자기를 존중하고 자기를 사랑하는 겁니다. 세계적인 실존주 의 철학자로 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가 있습니다. 이분이 철학자가 되기 전에는 정신과 의사였습니다. 그가 의사로 있을 때에 자신이 치료했던 환자들을 관찰한 결 과 공통점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어요. 그게 뭔고 하니 환자들은 공통적으로 나(Ich)가 없 다 는 것이었습니다. 환자들이 말에 조리가 없고 횡설수설하는 것을 분석하면서 야스퍼스 는 그 원인을 이리 결론 내렸습니다: 환자들의 마음에 자기의 생각과 행동을 통괄하는 중 심이 없더라! 즉 자아 가 없더라! 여러분, 팽이가 돌아갈 때 넘어지지 않는 이유는 돌고 있 24
는 팽이에는 스틸 포인트(Still Point)라는 구심점이 생기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사람 들의 인격의 중심에는 나 가 자리 잡고 있어요. 이를 자아정체성( 自 我 正 體 性 )이라 합니다. 영어로는 Self-Identity라 하는데, 이것이 약하면 자기가 자기를 모릅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요.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데 누가 사랑하겠어요?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칫 오해하기 쉬운 것이 기독교는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가 아니냐 하는 건데 맞아요. 그런데 예수님 가르침을 잘 보세요.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 라! 기독교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했다고 하여 자기 자신은 소홀히 하거 나 무시하라는 것으로 생각하데, 그것은 오해입니다. 성경에 거듭거듭 강조하는 것은 하나 님 사랑도 이웃사랑도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지요. 놀라운 것은 말 이지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이라는 겁니다. 자기 자신에게 불만입니 다. 자기 자신을 비하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아요. 나는 왜 이리 못생긴거야! 나는 왜 이리 머리가 돌이야! 난 왜 이리 병약한거야! 이런저런 이유로 자기가 자기를 싫 어해요. 또 어떤 사람은 얄팍한 이유로 자신을 비하하는 사람이 있어요. 내가 나를 비하하 면 행여 다른 사람이 관심을 가져주지 않을까 해서 그와 같이 행동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 러지 마세요. 그렇게 안 됩니다. 처음에는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시간 이 지나면 사람들이 그를 멀리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계속 관심을 써줘야 하니까 힘들거든 요, 함께 있으면 자기까지 부정적인 느낌이 전달되어 불쾌해지거든요, 그래서 점차 멀리하 게 됩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다른 사람의 위로와 격려 같은 보상을 받기 위해 시작된 자기 비하가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하고 그로인해 보상이 오히려 감소되어 더욱 의기소침해 지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심리학에서는 보상감소 이론(Reward Reduction Theory) 이라고 합니다. 인생을 이리 살면 나도 피곤하고 남도 피곤합니다. 우리가 의미 있는 삶을 살려면, 인생 에서 성공하려면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자기가 자기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소 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자기가 자기를 존중해야 합니다. 나는 천하보다 귀하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존중하는 것을 셀프 이스팀(Self-Esteem)이라하지요. 그대는 오직 그대일 뿐, 고로 편하여라. 오직 있는 그대로 그대이어라! 한 왕이 뜰로 나갔다가 꽃과 나무들이 죄다 시들어 죽어 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습니 다. 그래서 각각의 나무들에게 물어 보았어요: 떡갈나무는 자신이 소나무처럼 키가 클 수 없기 때문에 죽어간다고 대답합니다, 소나무는 자신이 포도나무처럼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에 시들어 간다고 말합니다, 저는 장미나무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 없기에 죽고 25
싶습니다! 포도나무가 대답했습니다. 그때 왕은 맘껏 싱싱한 꽃을 피우고 있는 풀꽃을 발 견하였습니다. 너는 어찌 그리 싱싱한고? 왕이 묻자 풀꽃이 이리 대답합니다: 왕께서 절 심으실 때 맘껏 편히 잘 자라라 하시면서 심으셨기 때문이죠. 그러니까 전 저 자신일 수 있죠. 제 맘껏 살 뿐이에요. 그래요,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은 오직 있는 그대로의 여러분일 따름입니다! 무엇 때 문에 빌 게이츠가 되려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김태희가 되려하고 장동건이 되지 못해 안 달입니까? 인생을 아름답게 살려면 내가 나를 사랑해야 합니다. 인생에서 성공적인 삶을 살려면 내 가 나를 존중해야 합니다. 미국의 심리학자 나사니엘 브랜든은 자기존중을 이렇게 표현 했 어요: 자기 스스로가 가치있는 존재임을 믿고 필요한 것과 원하는 것을 주장할 자격이 있 으며 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결과를 즐길 권리가 있으며 또 스스로 행복해 질 수 있다고 믿 는 것이다! 자신을 존중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과도한 신경을 씁니다. 또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면서 침울해 하거나 화를 냅니다. 자기의 존재가치를 낮게 보 는 것이 심해지면 우울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지 마세요. 여러분 자신을 보세요. 하나 님이 빚으신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천하를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작품이 바로 여러분 자신 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을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예수님 말씀대로 온 천하하 고도 바꿀 수 없는 천하보다 귀한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헬라어로 교환수단을 안 탈라구마 라고 하는데 여러분의 생명과 맞바꿀 수 있는 안탈라구마 교환수단은 없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참 아이러니 한 것은 34절부터 35절 말씀입니다. 34절: 누구든지 나 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35절: 누구든 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 으면 구원하리라! 35절에는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가 서로 순차적인 연결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기 부인을 영어로는 self-denial이라고 하지요. 이것은 자기를 존중하는 self-esteem과 정반대되는 개념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 내 생각과 판단은 가치가 없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버리는 것이 자기부인입니다. 자기가 최고요 자기가 모든 것 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며 살던 것에서 나오는 것이 자기 부인입니다. 이렇게 자기로부터 나와서 무엇을 하느냐? 바로 자기의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지요. 원 26
래 로마제국이 사용하던 십자가는 정치범이나 중죄인을 처형하는 형벌의 도구입니다마는 여기서 말하는 십자가란 예수의 십자가 같은 의미입니다. 예수께서 타자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나 중심에서 나와서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사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자 기 십자가란 예수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또는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내가 감내해야 하는 고난과 수고와 희생과 아픔과 눈물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극단의 경우 내 목 숨까지 잃는 겁니다. 이것은 천하보다 귀하다고 하는 나와 완전 대비되지요. 35절은 더욱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하려는 게 인간인데, 살 려고 발버둥 치면 죽는다는 겁니다. 반대로 죽고자 하면 산다는 겁니다. 이 두 말씀을 보면 한편으로는 천하보다 귀한 것이 나라는 신념과 충돌해서 혼란스럽습 니다. 그러면서 몇 가지 사항이 정리가 됩니다. 첫째 살기 위해서는 뭐든지 한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는 것이지요. 천하보다 귀한 것이 내 목숨이라면 그것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없 지요. 그러면 그 목숨을 지키기 위해 뭐든 할 수 있고 또 해야 합니다. 그래서 중한 병을 앓 고 있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피땀흘려 마련한 집도 아낌없이 팝니다. 그런 것은 잘하는 것 이고 당연히 그래야 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영화 보면 많이 나오지요? 적에게 포로가 되어 죽게 되었을 때 동료가 은신한 곳 을 알려주면 살려주겠다는 말에 결국 동료를 밀고합니다. 그래서 동료들을 팔아서 자기 목 숨을 건집니다. 자, 이런 방식으로 천하보다 귀한 자기 목숨을 구하면 그래서 다른 사람을 죽음으로 내어준 대가로 자신이 살면, 살아남은 이 사람은 잘 살까요? 대개 이렇게 동료를 밀고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삶이 비참해요. 평생 양심의 가책에 시달려요. 밤마다 악 몽에 시달립니다. 그래서 살아도 사는 게 아닙니다. 생물학적으로는 살아있지만 죽음보다 더 큰 죽음을 사는 거지요. 이걸 보면 분명해 지는 게 있어요. 내가 귀한 존재인 것은 맞지 만 진정으로 내가 귀한 존재가 되려면 내가 사람됨의 조건과 약속 안에 있어야 합니다. 내 가 나를 존중해서 내리는 결정과 생각과 행동이 함께 사는 인간들 속에서 사람다움으로 인 정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 34절과 35절은 하나의 전제를 달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어요. 34절 나를 따라 오려거든 35절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이 두 가지 공통점의 내용은 바로 예수 그리 스도이시지요. 내가 나를 부인한다든지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내 목숨과는 상반되는 요구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걸 하라고 하십니다. 왜 하느냐? 바로 예수 그리스 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예수와 복음을 위해서! 예수를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잃으 면, 그러면 산다! 반대로 자기가 온 천하보다 자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자기에 27
게 집중시키고 자신을 살리고자 한다면 그러면 그 천하보다 귀한 목숨을 잃는다! 그러니까 진정 귀한 내 생명을 살리는 전제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천하보다 귀한 가치가 나인데 그 나를 진정 살리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내 판단과 생각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나를 벗어던지고 예수를 핵심으로 놓는데 있습니다. 원래 이 이야기는 당시 예수의 제자들을 대상으로 놓고 보면 예수를 따르는 진정한 제 자도가 무엇인지를 말씀하는 것이고 당시 로마제국의 십자가는 당시 현존했던 현실이었기 에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목을 내 놓고 따르는 위험천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우리 모두에게 당시 제자들처럼 집팔고 부모 형제 다 버리고 예수 따르라는 요구를 주님이 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소명은 세대마다 극히 일부의 사람들에만 주어 졌습니다. 우리에게는 다른 방법으로 주님이 말씀하시고 깨우쳐 주시지요.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헤아려야 합니다: 너는 천하보다 귀 한 존재다. 그런데 너를 살리는 것은 너에게 있지 않다! 네가 존귀한 자가 되려면 너를 벗 어나야 한다. 너의 판단과 너의 관심과 너의 이익을 벗어나야 한다. 너로부터 벗어나 나를 바라보아야 한다! 토마스 아켐프스가 이런 말을 했어요: 세상에서 당신을 가장 크게 해 치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종교개혁자 존 칼빈도 비슷한 말을 했습니다: 인간 파멸의 가장 확실한 출처는 자기가 자기 뜻에 복종하는 것이다! 이게 맞는 말이거 든요 우리가 경험하는 대로 우리 인간은 불완전합니다. 유행가 가사처럼 미완성의 존재입 니다. 그래서 우리 결정과 생각은 불완전할 수 밖에 없어요. 거기다가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거기에 갇히다보니 내가 나를 위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되려 나 를 넘어지게 합니다. 한번은 <런던타임즈>가 저명한 작가들에게 에세이를 부탁했습니다. 에세이의 주제는 이 세상에 무엇이 문제인가? 였습니다. 원고청탁을 받은 작가 중 체스터턴(G.K, Chsterton)이라는 분이 원고를 보내왔는데 편집진들은 경악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단 한 문장을 보내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편집진들이 고민을 합니다. 신문에 내기에는 너무 양이 짧은 데 그런데 그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체스터틴이 보낸 문장은 이겁니다: 나입니다! (I am) 맞는 말 아닌가요? 정말 이 세상에 가장 큰 문제는 나 입니다! 그러기에 그런 내가 모든 것을 판단하고 결정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진정 내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벗어던지고 그 자리에 예수를 모셔놔야 합니다. 내 생각의 중심에 예수 28
를 모셔 놓아야 합니다. 내 계획의 중심에 예수를 모셔 놓아야 합니다. 내 인생 설계의 중 심에 예수를 모셔 놓아야 합니다. 예수를 모셔놓는다는 것은 중심이 예수께 있다는 이야 기입니다. 무엇을 하든 예수가 동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엇을 하든 나 이 상의 어떤 가치, 십자가와 같은 다른 사람을 살리는 가치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끼치는 가 치를 지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예수님이 베드로와 제자들에게 내렸던 명령, 자기를 부인 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 이 명령을 안 내리신 것이 참 다행이라 생각했습니 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정말 감당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묵상하 는 중에 차라리 제자들이 더 행복했을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본문이 제자들뿐 아니 라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향한 말씀이라고 생각하니 더더욱 그러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따라야 하고 내 직업과 가족을 다 가진 채 진리의 길을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세요. 성 라우렌시오라는 분은 3세기에 스페인에서 살았던 사제입니다. 당시 황제가 발레리아누스(253-260)였는데 교회를 무척 핍박했습니다. 황제는 교회가 엄 청난 재물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해서 라우렌시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너 희 사제들이 성혈을 은잔에 담으며, 저녁 예식에 금촛대를 사용할 정도로 금을 펑펑 쓰고 있다고 들었다. 또 너희의 스승인 예수가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려야 한다 고 했고, 너희의 신( 神 )은 돈을 만들어내지 않았으며 말씀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 세상에 가지 고 오지 않았다고 들었다. 그러니 너희가 소유한 모든 재산을 나의 제국에 바쳐라. 황제의 말을 듣고 라우렌시오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의 교회는 참으로 부유합니다. 당신에게 정 말 가치 있는 것을 다 갖다 보여주겠습니다. 그러니 3일간의 말미를 주시오. 이에 3일간의 말미를 받은 라우렌시오는 곧바로 달려가 교황의 명대로 로마교회의 모든 재산을 고통 받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고 3일후 수많은 장님, 절름 발이, 불구자, 나병환자, 고아와 과부를 모아서 황제 앞에 한 줄로 세워놓고 말했습니다: 이들이 교회의 보물입니다. 화가 치민 황제는 당장 라우렌시오를 쇠몽둥이로 때리고 석 쇠 위에 쇠줄로 묶어놓고 불을 지피게 하였습니다.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정신을 잃지 않 은 라우렌시오는 순교의 마지막 순간이 다가온 것을 알고 황제와 형리들에게 이렇게 이야 기합니다: 모든 것이 잘 구워졌으니, 뒤집어서 잡수시오! 그리고는 하늘을 향하여 로마제 국의 회개를 빌며 숨을 거두었습니다. 29
참 끔찍한 순교입니다. 당연히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일이지요. 하지만, 아무도 강요하 지 않고 모든 것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것은 그럼 쉬운 일일까요? 보이는 주님을 따랐던 제자들과 보이지 않는 주님을 믿는 우리들 중 누가 더 힘이 들까요? 물리적인 아픔 못지 않은 것이 정신적인 고통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신앙을 갖는다는 것, 그리고 신앙 안 에서 신앙의 원리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2천 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에 비해 결코 쉽지 않 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주님께 의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올 한해 우리의 행복과 승리는 천하보다 더 귀한 존재인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나 를 지배하는 것이 불완전한 내가 되면 이기적인 내가 되면 그래서 무슨 일을 해서라도 살 기위해 혈안이 되면, 그러면 우리는 죽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내 인생의 중심 자리에 주님 이 들어서야 내가 삽니다. 생각과 판단과 행동의 최종 결정권을 주님께 드리면 우리가 승 리할 수 있습니다. 움베르트 에코의 유명한 소설 장미의 이름 에는 회자되는 유명한 문구가 있어요. 진 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라. 그래요! 진정 나를 사랑하는 길은 내가 살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위해 복음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나 의 이익을 꿈꾸면 그 이익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익을 위해 땀 흘리십 시오. 진정 살기를 바라면 죽음을 향해 용감하십시오. 내가 나를 넘어설 수 있을 때 그래서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것처럼 그리 살 수 있을 때 진정 나는 존귀한 자가 될 것입니다. 진정 나는 온 천하보다 귀한 자가 될 것입니다. 이 은혜가 올 한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기를 주님 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30
1월을 위한 주일설교 4 주현절 후 세번째 주일설교 정인교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설교학 예배의 부름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 내 입술이 주를 찬양할 것이라. 이러므로 나의 평생 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 (시편 63편 3-4절) 예배기도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지신 주님을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각기 자신의 원대로 행하였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시고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서 예배 를 드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 예배가 감사와 기쁨의 예배가 되 게 하시고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자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이 주일의 찬송 목소리높여서(6장/ 통일 8장) 양 아흔 아홉 마리는(297장/ 통일 191장) 그 크신 하나 님의 사랑(304장/ 통일 404장) 내 맘이 낙심되며(300장/ 통일 406장) 성시교독 123번 주현절(3) 31
봉헌기도 주님 앞에 동전 두 닢을 바쳤던 여인처럼 우리를 드립니다. 세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 에게 응답하신 주님 앞에 우리 자신을 드립니다. 우리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주님 앞에 다 시금 정결케 되기를 바라며 주님 앞에 우리를 드립니다. 주여 우리가 드리는 모든 것들이 다 주님의 사역을 위한 거룩하고 복된 것이 될 수 있도록 이 시간 축복하여 주옵소서. 예수 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생명의 말씀 직선의 복음 막 1: 16-20 (이야기전환방식) 오늘 우리는 1월의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느덧 한 달이 다 가고 새해라 는 말이 빛이 바랠 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마는 그래도 1월은 새로운 계획과 결심의 달 이지요. 아직 열 한 달이나 남았습니다.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질 문하고 싶은 게 하나 있습니다. 여러분의 신년 계획에 예수가 있는지요? 여러분의 2015년 생각하는 인생 운영에 하나님이 계신지요? 예수가 여러분 계획안에 들어가 있는지요? 여러 분의 생각과 시간 운영과 재정운영에 하나님이 들어가 있는지요? 아이들이 즐겨 하는 퍼즐 놀이의 백미는 마지막 퍼즐 조각을 끼워 넣음으로 작품이 완성되는 것이지요. 다른 걸 다 해 도 마지막 조각을 완성 못하면 그것은 불완전한 미완성 일 수밖에 없지요. 우리 인생도 마 찬가지입니다. 예수 없는 인생 계획, 하나님이 빠진 시간표는 전혀 작품성이 없는 겁니다.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본문을 봅시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사마리아 마을을 떠나 예루 살렘으로 향하는 길에서 세 사람을 만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예수께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는 선생님이 가시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이 사람은 자진해서 자기가 예수 를 따르겠다고 이야기합니다. 다른 사람들은 주님이 부르셨지만 유독 이 사람은 자원해서 32
예수를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예수님 반응이 시큰둥합니다. 그리고 이리 말씀 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구나! 이 대답은 자원해서 예수 따르겠다는 사람에게는 참 당황스런 반응일 수밖 에 없지요.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제자되겠다는 사람이 무슨 마음으로 그리하는 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나 따라오면 호의호식하고 편안할거라고 기대하는데, 안 그래, 고생 직사하게 해, 밥도 굶고 머물 집도 없어. 너는 번지수가 틀렸어! 두 번째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먼저 요청 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그런데 이 말씀을 듣 고 이 사람이 이런 청을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기 전에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도록 허락하 여주십시오! 하필 아버지의 장례가 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 이 사람은 주님을 따르겠다 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겠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 셨으니 먼저 장례를 치르고 그리고 나서 주님을 따르면 안 될까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리 말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장례가 나면 모든 살아있는 사람들의 순서는 이 죽은 자에 게 양보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인간의 오랜 약속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 의 나라를 전파하라! 얼핏 보면 예수님 말씀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 같은 몰상식의 극치 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말씀을 예수가 인륜도 모르는 패륜아라고 단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려는 핵심은 망설임입니다. 누구라도 그리할 수밖에 없는 명분을 가진 망설임! 현재 닥친 문제에 대한 망설임을 지적하시는 겁니다. 이번에는 세 번째 사람이 자원해서 말합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 나 먼저 집안 식구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게 해주십시오! 앞 사람이 죽은 사람 문제를 들 고 나왔는데 이 사람은 산 사람 문제를 들고 나옵니다. 주님의 뒤를 따르겠다는 확고한 결 심은 섰습니다. 그런데 가족이 눈에 밟힙니다. 이대로 갑자기 사라지면 얼마나 걱정하겠 어요? 또 부탁하고 정리할 것도 있겠지요.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배려하는 마음이 얼마 나 아름다워요? 그런데 우리 주님은 이리 말씀 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눅9: 62) 여러분 이 말씀을 가족을 버리라는 말씀으로 듣지 마 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그 가족도 하나님께 다 맡기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가족을 위해 뭔가를 해야지 하는 부담감과 책임감도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맡기라는 이야기입니다. 33
화제를 바꾸어 마가복음 10장을 보면 부자청년 이야기가 나오지요. 그가 영생의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오잖아요?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내가 계명도 다 지켰나이다! 그때 주님이 이렇게 말씀 하시지요: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 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그 말씀을 들은 이 청년에 대해 성경은 이렇 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 고 근심하며 가니라! 여기 열거한 네 사람은 각기 다른 인물들입니다. 그런데 공통의 주제로 묶을 수 있지요. 예수를 따름! 바로 이 주제가 이들을 묶는 공통분모입니다. 자원한 사람도 있고 예수님이 초청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경우가 어찌되었든 공통점이 있어요. 예수님의 요구도 공 통점이 있고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들의 반응에도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요구를 보 면 아주 간단합니다. 나를 따르라! 군더더기가 없습니다. 샛길도 없습니다.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돌려 말하지도 않습니다. 나를 따르라! 저는 이런 예수님 말씀을 들으면서 직선이 생각났습니다. 수학에서는 직선을 이렇게 정 의하지요: 두 점 사이를 가장 짧은 거리로 연결한 것! 반면에 예수님께 이런 저런 이야기 를 하는 사람들의 대답은 곡선에 가깝습니다. 곡선은 모나지 않고 굽은 선을 말합니다. 수 학에서는 곡선을 이렇게 정의 합니다: 평면 위나 공간 안을 잇는 선으로 그중에서 직선이 아닌 것을 포괄하여 말함! 그러니까 같은 지점을 곡선으로 그리면 당연히 직선보다 길 수 밖에 없습니다. 나를 따르라! 얼마나 짧아요? 직선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이들 네 사람 의 말을 보면 하나같이 깁니다. 직선이 아니라 곡선입니다. 복잡합니다. 샛길이 이리저리 나 있는 모습입니다. 그들이 곡선을 좋아하는 것은 이유가 있어요. 그들의 대답을 보면 전부 타당한 이유가 있거든요. 그 타당한 이유는 결국 우리 삶과 불가분리의 관계를 맺고 있고요. 예수 뒤를 따 르겠다고 자원한 사람! 예수 좇아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기대하는 거잖아요? 너무 당연 한 기대입니다. 아버지 장례 치르고 가겠다? 당연히 그리해야 하는 거지요. 그건 상식입니 다. 그리고 이게 인생입니다. 예수를 따르겠다는 계획을 세웠는데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전 혀 예기치 않은 변수가 생기잖아요? 이런 곁길과 곡선이 널려 있는 게 우리네 인생입니다. 가족에게 작별하고 예수를 좇겠다! 당연합니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지면 가족들은 당장 경 찰에 가출 신고내고 온 집안이 불안과 걱정에 떨 겁니다. 가진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을 주고 나를 좇으라! 이거, 정말 고민 중에 가장 고민되는 요구 아닌가요? 어떻게 모은 재산 34
인데 그걸 전부 풀어버리라니요? 근심하며 돌아가는 거, 너무 당연합니다. 그래서 이들 네 사람의 반응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곡선입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럴 수밖 에 없는 인생이 거기 있어요. 예수의 요청은 굶고 짧은 직선이지만 네 사람의 반응과 대답 은 복잡한 삶을 그대로 반영한 곡선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직선이 자연스럽나요? 곡선이 자연스럽나요? 놀랍게도 자연은 직선을 만들지 않습니다. 자연에는 직선이 없습니다. 강과 산을 보세요. 전부 곡선입니다. 뙤리를 튼 뱀, 조개껍질, 달팽이집, DNA의 나선구조 모두 가 곡선입니다. 인간의 심장혈관 시스템은 9.6km의 배관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전부 곡선 입니다. 우리 몸을 구성하는 오장 육부가운데 직선으로 된 장기는 없습니다. 직선을 만드 는 것은 오로지 인간입니다. 직선으로 도로를 만듭니다. 아파트도 직사각형으로 만듭니다. 들쑥날쑥한 해안선을 없애고 일직선으로 방파제를 쌓습니다. 직선은 고속성장의 아이콘입 니다. 직선은 효율성의 상징입니다. 우리나라가 발전한 것은 직선을 선택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마는 부작용도 만만치 않지요. 아시는 것처럼 직선에 는 여유가 없습니다. 부드러움이 없습니다. 당연히 인간적일 수가 없습니다. 이게 우리 삶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어요. 보세요. 앞만 보고 달리다 보니 모든 판단이 업 적과 결과 위주입니다. 과정의 정당성이 사라지다 보니 부정과 편법이 만연합니다. 환경 보호 같은 건 아예 생각도 못했어요. 또 못사는 사람을 돌보지 못하다 보니 부의 불균형 이 심각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이런 직선적인 행태에 대한 반성이 일어났어요. 먹는 시간 도 아까워 서서 빵 한조가리로 때우던 패스트푸드 문화를 버리고 천천히 먹는 슬로푸드를 주창합니다. 빨리 빨리를 외치며 지름길 통행을 강조하던 습성을 버리고 둘러가는 둘레 길 을 만듭니다. 심지어 슬로우 시티를 만들어 사람들을 모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 시대의 아이콘은 곡선입니다. 여유와 인간미가 넘쳐나는 곡선입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은 여전히 직선에 가깝습니다. 목표를 세우는 것을 보면 직선적입니다. 당장 그 직선을 따라가면 금방 꿈이 이루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계획을 실천하는 삶의 현장은 곡선의 모습이지요. 예상치 못한 변수가 돌출합니다. 또 우리 몸이 기계가 아니다 보 니 매일 똑같은 열정과 똑같은 에너지로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삶도 곡 선입니다. 우리는 꿈과 계획은 직선으로 꾸지만 정작 사는 것은 곡선의 삶을 삽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로 직선보다는 곡선을 선호합니다. 가급적 직선을 곡선으로 바꾸고자 합니다. 놀라운 것은 이런 현상이 우리 기독교안에도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나를 따르라! 이 직선의 명령을 사람들은 곡선으로 변경시켰습니다. 사람들이 종교를 갖는 첫 번 째 이유는 하늘의 신령한 복과 이 땅의 기름진 복을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랜 기간 35
예수 믿는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100% 틀린 기대는 아닙니다. 하지만 여기에 나를 따르 라! 는 예수님의 요구는 빠져 있습니다. 예수의 요구가 빠져 있다면 그것은 불완전하고 미 완성이지요. 이것보다 좀 더 신사적이고 교양적인 경우가 도덕주의입니다. 이것은 특히 유럽의 부르 조아 기독교인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대개 이들의 신앙 기조는 칼빈의 예정론입니다. 예정론에 따르면 하나님이 예정하신 자들이 선택을 받아서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게 누군 지는 모릅니다. 그래서 내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았다는 증거를 자기 삶에서 계속 확인하 고자 노력하게 됩니다. 그것이 검소한 생활과 받은 소명을 잘 감당하는 삶입니다. 검소하 고 근면하게 살면 재산을 모을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경제적 부를 이루는 것이 곧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이 오늘의 자본주의를 만들 어 내게 되지요. 막스 베버가 쓴 기독교신앙과 자본주의는 이 둘의 상관관계를 잘 설파하 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의 부를 축적하는 데는 혈안인데 다른 사람을 돌보는 데는 전혀 무관심했다는 것이지요. 자신은 검소하고 근면하게 살면서 노동자들을 수탈합니다. 라인홀드 니버가 지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에서 그런 단면이 잘 드러나 있잖 아요? 자동차 도시인 디트로이트 시에서 자동차 공장을 운영하는 사장들 대부분이 기독교 인입니다. 이들은 엄청난 액수의 십일조를 합니다. 이들은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복이라 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들 공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임금은 비기독교인 사 장이 운영하는 공장보다 턱없이 낮습니다. 이유는 간단하지요. 노동자에게 갈 임금을 대폭 후려쳐서 폭리를 취한 후 거기서 일부를 헌금으로 내는 겁니다. 일종의 신앙양심의 면죄부 를 그런 방식으로 받는 거지요. 결국 공산주의가 왜 일어났느냐? 유럽 기독교의 잘못된 신 앙이 불러온 결과입니다. 이것이 도덕적 기독교가 빠진 함정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것 은 직선의 복음을 곡선으로 변화시킨 가장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왜 이런 변경 을 시도했겠어요? 왜냐하면 나를 따르라! 이 직선의 복음이 부담스럽기 때문입니다. 부담 스러워서 부담 안 되는 쪽으로 바꾸다보니 이 땅에 엄청난 부작용이 발생하잖아요? 공산 주의라는 괴물이 나오잖아요? 다른 사람을 적으로 간주하고 내 재산만 증식시키려는 이기 적인 자본주의가 빈부간의 갈등과 대립을 만들잖아요? 이것은 아니지요. 나를 따르라! 이 직선의 복음은 직선으로 남아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 에 목숨을 바쳐가며 예민했던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의 이름은 독일의 신학자인 본 회퍼 입니다. 독일의 양심 으로 불리는 천재 신학자 본 회퍼는, 나치 정권의 교회 간섭이 심해 지자 이에 대항하는 교회저항운동에 가담하였고 히틀러 정권을 전복시키려는 단체에 합류 36
합니다. 그러다가 1943년 체포되어 1945년 4월 9일 나치정권 붕괴 직전에 교수형을 당 했습니다. 본회퍼는 복음을 그대로 따르기 어려우니까 서구 기독교가 그것을 현실적으로 해석하고 희석시켰다고 보면서 이를 값싼 은혜라고 비판했습니다. 본회퍼의 말을 들어 보 세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내가 죄 값을 치뤘으니 너희들은 이제 편히 살라는 식으로 역시 값싼 동정을 하지 않으신다. 그 분은 모든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셨다. 나를 따르라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받은 자이기 이전에 그분으로부터 나를 따르라 는 명령 을 받은 자이다. 이 명령을 받는 것이 우리의 본질적인 은혜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따르라 는 말을 현대적으로 또는 현실적으로 변형시켜 우리에게 적용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를 따 른다는 것은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따르는 것이다. 그분의 십자가를 지고 그를 따르는 것 이 예수를 따르는 것이다! 본 회퍼는 이런 신념을 가지고 미친 살인자인 아돌프 히틀러를 죽이는 계획에 동참하다 죽임을 당하지요. 미친 운전자가 군중을 향해 차를 돌진한다면 그 운전자를 끌어내리는 것이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다! 이런 생각으로 그는 말 돌리지 않고 미친 운전자인 히틀러 를 끌어내리는 것이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보았던 겁니다. 물 론 암살이라는 폭력적 방법이 정당한가에 대해서는 설왕설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회퍼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명령을 가감없이 즉각 직선적으로 받아들였 다는 것이지요. 그래요, 주님의 명령은 직선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고기잡던 베드로와 그의 형제 안드레를 향해 주님이 이리 명령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낳는 어부 가 되게 하리라! 이 명령에 대한 베드로와 안드레의 반응을 주목해 보십시오. 18절이지 요? 곧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니라! (2번) 곧! 곧! 곧! 즉시! 명령받자마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의 경우를 보세요, 20절이지요? (예수께서) 곧 부 르시니 이 두형제의 반응을 보십시오: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예수를 따라 가니라! 한 장 건너서 막 2장 13절 이하에 세리였던 레위를 부르시던 장면을 보십시오. 레위는 세관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그를 향해 예수가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라! 레위가 반응 합니다: 일어나 따르니라! 여러분, 예수의 명령과 이들 제자들 응답 사이에 뭐가 있습니까?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 이 하나도 없습니다. 꾸물거림이 없습니다. 망설임이 없습니다. 쓰던 그물과 배를 처분하 는 게 상식인데 그 절차마저 없습니다. 세리라는 안정된 직업을 정리해야 하는데 그마저 37
도 없습니다. 가족에게 통보하는 절차도 없습니다. 심지어 연로한 아버지마저 배에 버려두 고 예수를 따라 나섭니다. 아버지나 가족을 고려하지 않는 것을 보면 가족에 대한 최소한 의 배려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무책임하게 까지 느껴집니다. 물품처리안하는 걸 보면 경제관념도 희박해 보입니다. 분명한 것은 명령과 응답 사이가 직선이라는 것입니다. 거기 무슨 핑계나 절차나 고민이 나 조건이나 이런 게 전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말도 안돼! 그런데 여러 분 어떻합니까?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이 이렇게 따랐습니다. 전혀 복잡하지 않고 깨끗하 잖아요? 나를 따르라! 그러자 즉시 따랐다! 너무 간단해서 무서울 정도입니다. 아 그리 서둘거 없어. 일단 집에 가서 가족들 충격받지 않게 잘 이야기하고 생활대책 잘 세워주고 그러고들 오게나. 한 열흘 정도 말미주면 가능하겠지? 우리 생각에는 이리 되어 야 정상이잖아요?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이런 곡선은 나타나질 않습니다. 예수님이 너 무 야속하다고요? 우리의 곡선적 사고로 보면 충분히 그럴 수 있어요. 그런데 입장을 바꾸 어 우리가 죽게 되었을 때라면 어떨까요? 그때도 여전히 여유만만한 곡선일까요? 촌각을 다투는 앰블런스의 움직임이 만고강산 유람하는 곡선이던가요? 하나님이 죽어가는 우리 를 구하기 위해 자기 아들을 보내실 때 곡선이던가요? 직선의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신 겁 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부르는 그 하나님의 부름이 직선적이라 해서 이상할 게 없지요. 문 제는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직선적인 복음을 어떻게 내 삶에서 현실화하느냐 하는 겁니다. 사실 이게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제자들처럼 나를 따르라 이런 명령을 직접 받았다면 고 민은 되겠지만 응답이 분명할텐데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아마도 이런 경우가 근접한 해 답이 될 것입니다. 2011년 3월2일, 파키스탄의 샤바즈 바티 장관이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암살을 당했습 니다. 바티는 소수민족부 장관으로 신성모독법 폐지 등 소수민족과 종교인에 대한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앞장을 서왔던 인물이었습니다. 바티 장관은 내각 내의 유일한 기독교 신자 로서 이슬람 과격 세력으로부터 여러 차례 살해 위협을 받아왔었습니다. 바티 장관이 피 격당하기 얼마 전 미국 LA 한인교회를 방문해서 간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 했습니다.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에서 최초의 그리스도인 장관이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된 것은 하 나님의 계획하심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핍박 받는 파키스탄의 기독교인들 그리고 형제들 의 기도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장관으로 세우신 것은 예수의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38
하는 목적이라고 믿습니다. 그는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리스도인을 예수를 따르는 사 람 (Follower of Jesus)이라고 정의하였습니다. 자기 역시 예수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예 수를 위해 살고 예수를 위해 죽고 싶다고 고백했습니다. 또한 그가 죽기 전에 작성한 비디 오 메시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기독교인과 소수 종교인들의 권리를 방어 하기 위해 활동하다가 죽게 될 것입니다. 결국 그는 죽음으로서 예수를 따르는 제자가 되 었습니다. 너무 부담되는 이야기인가요? 바티 장관처럼 때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이 생명 을 요구하는 극단적인 경우도 있습니다마는 핵심은 이것입니다. 명령과 응답 사이에 어떤 타협점도 없다는 것이지요. 명령과 응답 사이에 자기 이익이나 망설임, 타협이 없어야 한 다는 것이지요. 여러분 각자가 다르고 하는 일이 다르고 관심이 다르기에 주님의 부르심도 매우 다양할 것입니다. 때로 주님의 부르심이 돈 문제와 관련되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포기해라! 양 보해라! 버려라! 때로 나를 따르라는 명령이 사람관계에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끊어 버 려라! 만나지 말아라!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응답의 원리는 동일합니다. 즉시! 망설임 없 이! 머뭇거림 없이! 어렵다고요? 그럴 수 있어요. 본능을 어기는 일인데 어려운 게 맞지요. 하지만 불가능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단 한 번도 불가능한 일을 시키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follow me, 나를 따르라고 하실 때 쓰신 동사가 헬라어로 아콜루데오입니다. 이 아콜루데오라는 동사의 가 장 기본적인 의미는 같이 가다, 동행하다 입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 씀하신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나와 함께 가자는 이야기입니다! 너 혼자가 아니다. 내가 함 께 간다 내가 동행한다. 내가 함께 가면서 너를 도와준다! 그래서 가능합니다. 그래서 넉 넉히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의 일 년을 완성하는 프로그램에 바로 이 예수의 원리가 마지막 퍼즐조각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시간 계획에 예수가 끼어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돈을 지출 하는 계획에 예수가 끼어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목적에 예수가 끼어 있기 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땀 흘리는 이유 가운데 예수가 끼어 있기를 바랍니다. 힘들지만, 나 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한번 만이라도 망설임 핑계 합리적 이유 같은 중간지대 말 고 즉각적으로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예수가 나와 어떻게 동행하시는지 예수가 나 를 어떻게 도우시는지 구체적으로 경험하시는 복된 한해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 니다. 할렐루야! 39
1월을 위한 교육설교 1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아담 (성경본문 창 3:1-17 찬송 254) 유재덕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 도입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실 때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진 것은 인간의 창조가 유일합니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은 말씀만으로 창조되었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존재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말씀으로 창조하시고 마지막으 로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서 인간을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인간이 가장 뛰어 나고 중요한 존재라는 의미가 됩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만드실 때 자신의 형 상을 따라서 창조하셨습니다(창 1:27). 물론 천사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 분명하지 만 그들은 영적 세계에 속한 영적 존재이다 보니 우리 인간과는 비교가 불가능합니다. 하 나님이 만드신 최초의 인간이 바로 아담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하나님이 아다마 로부터 아담을 지으셨다고 합니다. 아다마 는 땅 이고 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첫 번째 사람의 이름은 우리말로 하면 그냥 사 람입니다. 전개 이 첫 번째 사람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원형(prototype)이었습니다. 여러 분, 원형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원형은 마치 공장에서 제품을 찍어내는 기본적인 틀과 같 은 구실을 합니다. 틀에서 찍혀 나온 제품이 그 틀과 다른 모양을 가질 수 없듯이 원형으로 서의 아담에게서 나온 인류는 천부적으로 아담과 동일한 본성, 본질을 가지고 태어나게 됩 40
니다. 그만큼 첫 번째 사람 아담의 역할이 크고 막중했습니다. 물론 아담은 그것을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만, 오늘 우리의 입장에서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에서 인간이 가장 중요한 최상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이 아담에게 창조세계의 관리를 맡기셨다는 것에서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은 아담에게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창 1:28). 그리고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셨습니다(창 2:15). 이렇게 본다면 아담은 하나님의 대리인으로 임명을 받은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는 한 가지 조건 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과실을 먹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호 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이르시되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6-17).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가고 싶은 대로 가고,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지만, 선 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불가능했습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듯이 아담은 결국 그 나무의 열매를 받아서 입에 대고 말았습니다. 하 나님이 금지하신 일을 범했고, 그렇게 해서 하나님과의 계약은 깨졌습니다. 그렇게 해서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나님과 관계는 복원이 불가능할 정도로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 다. 우리 모두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한 데 따른 결과는 결코 간 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행동을 하게 되면, 그러니까 범죄를 하게 되면 하나님 과의 기존의 관계까지 모두 완벽하게 파괴되고 맙니다. 야고보가 이렇게 말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 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 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약 2:10-11). 그러면 아담은 어째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리고 실패자가 되었을까요? 탐욕 때문이 었습니다. 하나님의 대리인이었던 아담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과 동등한 수준이 되고 싶어 하던 탐욕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을 보면 뱀이 하와를 이렇게 유혹합니다. 너희가 그것 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 무인지라 여자가 그 실과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5절, 6절). 하나님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죽으리라 고 경고하셨습 니다(창 2:17). 그런데도 뱀이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 고 하니 마음이 흔들린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탐욕의 전형입니다.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41
서 더 가지려고 하는 것, 그것이 바로 탐욕입니다. 아담에게는 부족한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삶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구비된 에 덴동산과 인생의 동반자인 하와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엉뚱한 선택을 하고 죄의 길로 들어서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탐욕은 결코 부족하다고 해서 생겨나지 않 습니다. 감사하지 않고, 만족을 알지 못해서 생겨나는 게 바로 탐욕입니다. 언제나 하나님 의 은혜와 사랑을 넘치도록 받고 있으면서도 감사하지 않으면 탐욕에 휩쓸리게 됩니다. 사 도 바울은 탐욕을 깊이 성찰하고 나서 우리에게 조언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1).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게 언제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로 지금까지 우리가 살아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배하고 찬양하는 것도 모 두 하나님의 은혜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아담과 달리 탐욕을 피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제나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합 니다. 그러면 어떤 시험이든 역경이든 간에 넉넉히 물리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 5:16-18) 이런 신앙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언제든지 감사하 고 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탐욕을 막아주는 백신이고, 예방주사입니다. 주어진 삶에 감사하면서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살게 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하시고 이 땅에서 진정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게 해주십니다. 주님의 교훈 역시 이와 다르지 않습 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 눅 12:15) 아담이 실패했던 또 다른 이유는 불순종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을 지시하십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명령은 기쁜 소식이고 축복의 또 다른 형태라고 할 수 있 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지금 당장에는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따르면 손해를 보는 것 같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명령하시고, 속 박하십니다. 그 지시를 따라야 우리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질그릇이 어찌 토기장이의 속 뜻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질그릇이 자기를 빚은 자에게, 진흙이 토기장이에게 어떻게 항의하거나 불평할 수 있습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고 뱀의 말을 따랐 기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 러 먹지 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 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창 3:17) 42
아담이 뱀에게 속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의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뱀 은 아주 교활하게 접근했습니다.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키기 위해서 뱀은 나름의 단계적 전 략을 구사합니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 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 3:1) 처음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거론하면 아담 부부가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까봐 전체적인 것을 거론하면서 말을 걸어온 것입니다. 핵심 을 건드리지 않으면서 미끼를 던진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동산 각종 나무의 열매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 으리라 (창 2:16, 17)고 말씀하셨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뱀은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라고 묻습니다. 본말을 전도해서 두 사람을 유혹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교훈을 좇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지시를 왜곡하 는 세상의 지혜를 따르는 것은 불순종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합 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 다 저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시절을 좇아 과실을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 으니 그 행사가 다 형통하리로다 (시 1:1-3) 우리는 노아처럼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노아의 믿음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믿음으로 노아 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 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히 11:7) 노아 는 하나님의 지시를 따르기 위해 120년 동안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 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지시에 순종해서 결국 자신과 가족 모두, 그리고 방주에 탄 모 든 생명체를 구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실패한 이유는 스스로의 잘못을 뉘우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담 부부 는 잘못을 저지르고도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 가 잘못을 범했을 때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여러 차례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숨어 있는 아 담을 찾으면서 물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물음은 두 사람이 범죄하고 나서 숨은 장소를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닙니다. 그들에게 잘못을 청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 다. 아담이 벌거벗어서 두려워서 숨었다고 하자 하나님이 다시 물으셨습니다.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먹었느냐 (3:11) 이것 역시 하나님이 몰라서 물으신 게 아니었습니다. 이미 하나님은 알고 계셨지만, 아담 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다시 한 번 더 주기 위해서 물으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아담은 오히려 자신의 잘못을 하와에게 전가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43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3:12) 사실이 그랬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주었기 때문에 아담이 먹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담의 죄가 용서되지는 않습니다. 아담은 그의 표현대로 여자 가 선악과를 건네는 순간 하나님의 지시를 대변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침묵했습니다. 하나님의 금지 지시를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리지 않은 것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보면 하와보 다 더 큰 잘못을 범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아담의 잘못은 그대로 계승되어서 오 늘날에도 남성들 사이에서 흔한 일이 되었습니다. 래리 크랩(Larry Crabb)은 <아담의 침 묵>에서 그런 현상을 이렇게 거론합니다. 사태가 혼란스럽거나 두려워지면 남자는 내면 이 긴장되면서 뒤로 물러난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삶에 좌절할 때 남자는 속에서 분노 가 치솟는 것을 느낀다. 그렇게 두려움과 분노에 휩싸여 그는 하나님의 진리를 잊어버리고 자기 자신만을 바라본다. 그때부터 모든 것이 틀어져 버린다. 그는 자기 자신만을 믿고 스 스로 인생을 풀어 가려고 발버둥 친다. 그 결과는, 통제할 수 없는 성욕, 멀기만 한 남편과 아버지, 조종하기를 좋아하는 성난 남자 등 우리가 매일 보는 그대로이다. 그 모두가 아담 의 발언 거부로 시작되었다. 결말 하나님은 아담을 심판하려고 찾지 않으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그것을 염두에 두셨다 면 오히려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것입니다. 외면이나 무시보다 무서운 심판은 있을 수 없습 니다. 하나님은 아담을 회복시키고 용서하기 위해서 찾으셨습니다. 그렇지만 아담은 그런 하나님의 깊은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잠언서 기자는 말합니다. 자기의 죄를 숨기 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잠 28:13) 그 뿐입니까? 사도 요한 역시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 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요일 1:9) 인간은 본래 완벽하지 않으니 잘못을 범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도 볼 수 있 습니다. 문제는 잘못을 범하고 난 뒤부터입니다. 일단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행동을 했 다는 것을 깨달으면 하나님에게 잘못을 뉘우쳐야 합니다. 하나님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 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아담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게 됩니다. 비 록 아담의 피를 이어받아 죄의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지만, 우리는 탐욕을 피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언제든지 하나님이 구속하시는 은총을 힘입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44
1월을 위한 교육설교 2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노아 (성경본문 창 6:5-11 찬송 430) 유재덕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 도입 창세기 6장 이하의 내용은 세상에 다시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제2의 창조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존의 세계를 홍수로 일소하시고, 과거와는 다른 세계를 만드 셨기 때문입니다. 신적 재창조 사역에 동참한 주역이 바로 오늘의 주인공 노아였습니다. 대홍수가 시작될 무렵에 노아의 나이는 600세였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 을 정도로 연로했었지만, 노아의 삶을 돌아보는 우리 모두는 믿음생활에 필요한 아주 중요 한 교훈들을 얻을 수 있습니다. 노아는 얼마나 의로운 삶을 살았기에 그 한 사람 덕분에 인 류가 멸종의 위기를 벗어나게 된 것일까요? 하나님은 노아가 살던 시대를 이렇게 평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 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창 6:5-6) 온갖 죄악이 난무하던 당시 세계는 하나님으로 하여금 한숨짓게 만드는 대상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었습니다. 마침내 하나님 은 중대 결심을 하십니다.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 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 함이니라 하시니라 (창 6:7)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으니 직접 삼라만상을 창조한 하나님 이 스스로 나서서 그것들을 없애고 나서 다시 시작하겠다고 결심하신 것입니다. 물론 노아 와 가족들만 제외하고 말입니다. 45
우리는 노아를 통해서 한 사람 때문에 가족과 자신의 운명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새 삼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것 자체가 하나님 을 기쁘게 만드는 일이 되기도 하지만, 덕분에 주변에 있는 사람들까지 긍정적인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면서 이것을 느끼지 못할 때가 많 지만, 나중에 결과를 살피다보면 분명히 알게 됩니다. 노아의 가족이 엄청난 하나님의 심 판을 피할 수 있던 것도 바로 노아의 의로움 때문이었습니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 고 있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엄청난 비극들은 가정을 책임져야 할 성인들이 가족 전체 에 미치는 영향을 간과한 데 따른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개 여러분, 콩을 심은 데서 콩이 나고, 팥을 심은 데서 팥이 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뿌린 대로 반드시 걷게 됩니다. 사도 바울 역시 말하지 않았습니까?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 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갈 6:7) 하나 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의 가정에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믿음의 인물들이 배출되 기 마련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꾸짖기에 앞서 먼저, 스스로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녀의 문제가 자신에게서 비롯되지 않았는지를 말입니다. 부모의 문제를 먼저 고치고 난 뒤에야 자녀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세대 간 단절이나, 세대 충돌이니 하는 말 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기성세대가 그 감화력과 영향력을 상실한 데 따른 결과이지, 전에 없던 현상이 새롭게 출현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영국 중부의 레스터(Leicester) 지방에서 목회에 전념하는 침례교회 목사님이 있었습니 다. 목사님은 유별날 게 하나도 없었습니다. 대학은 문턱에도 들어가 보지 못한 터라 학위 는 없었고, 남들보다 특별히 설교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겸손했 습니다. 목사님은 교인 가운데 구두수선 일을 하는 젊은이에게 관심을 갖고서 말씀을 가르 쳤습니다. 그 젊은이는 나중에 세계적인 인도의 선교사가 된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였습니다. 그리고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란 아들 역시 침례교회에 소 속된 설교자가 되었습니다. 그 아들이 바로 여러 영국 정치 지도자들에게까지 상당한 영적 감화력을 발휘했던 로버트 홀(Robert Hall, 1764-1831) 목사입니다. 이처럼 무엇이든 심 은 그대로 거두기 마련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심을 때 제대로 심어야 합니다. 46
계속해서 노아 한 사람을 통해서 우리의 후손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의 미래가 달 라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 가운데 누구도 노아처럼 중요한 임무를 맡을 수 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노아가 후손과 세상에 대해서 끼친 것과 동일한 영향력을 발휘 하는 것은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여든이 넘은 노인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과일 묘목을 심 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손자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어차피 그 나무를 심 어도 과일을 따먹지 못하실 텐데 어째서 그렇게 힘들여서 일을 하시는 겁니까? 그러자 할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물론 그렇지. 하지만 이 묘목에 자라면 언젠가 누구든지 따먹을 수 있지 않겠니? 지금 우리의 행동은 뒤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노아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그 덕분에 우리는 한 가지 두려움은 완전히 털 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노아 한 사람이 하나님과 언약을 맺음으로써 우리 인류는 물로 멸망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을 덜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노아라는 의인 한 사람을 통해 서 인류 전체가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노아를 통해서 멸종의 위 기에 직면한 동물들이 생명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을 소비를 위한 자원으로만 간주하는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이 됩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자연을 돌보는 책임 을 위임하신 적이 있는데, 그들의 후손인 노아를 통해서 자연 질서를 보존하게 하신 것입 니다. 우리 역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습니다. 아울러서 우리는 노아를 통해 하나님이 생각이 달라지실 수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가끔 우리 자신들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잊어버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에게는 소중 하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들의 풀 한 포기, 공중을 나는 새 한 마리도 중요한데, 하나님이 직접 만드시고 생기를 불어넣으신 우리들이야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자신의 외아들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희생시키기까지 사랑하십니다. 그래 서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더라도 혼자 하지 않으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고, 그 럴 사람들을 두루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들의 요구를 외면하는 법이 없습니다. 노 아가 바로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에 악이 관영함으로 보시고 무척이나 실망 하셨지만, 노아만큼은 하나님을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노아 때문에 하나님은 인 류를 심판하시고, 멸망시키려는 계획을 바꾸셨습니다. 노아와 하나님의 계약이 인류 전체 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정해져 있는 미래라고 할지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바꾸실 수 있음을 노아의 삶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생물학적인 연령이 어떤 경우에도 중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노아는 자신의 삶으 로 입증했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사역을 놓고서 나이 때문에 주저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 47
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역에는 나이가 많건 적건 결코 문제될 게 없습니다. 나이는 오병이 어를 가능하게 한 것은 나이가 어린 소년이었고, 방주에 들어갈 당시 노아의 나이는 600세 였습니다. 문제는 나이의 많고 적음이 아니라 얼마나 변화에 대한 열정이 있는가 하는 것 입니다. 젊은 나이에도 꿈과 비전이 없다면 늙은이와 다를 바 없고, 비록 나이 들어서 얼굴 에 주름이 가득해도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면 어느 젊은이보다 더 젊 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 총리를 두 번 지냈다. 1차 임기(1940-1945년)를 시작할 때 그의 나 이는 66세였습니다. 2차 임기(1951-1955년)는 77세에 맡아서 81세에 마쳤습니다. 이처 럼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끈 처칠에게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습니다. 로널 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역시 마찬가집니다. 그는 1차 임기를 70세, 2차 임기를 74세에 시작했습니다. 레이건은 1984년 재선 TV토론회에서 민주당의 월터 먼데일 후보와 붙었 습니다. 당시 56세인 먼데일은 레이건의 고령을 문제 삼겠다고 단단히 별렀습니다. 하지 만 레이건은 그것을 역이용했습니다. 그는 나는 경쟁자의 젊음과 미숙함을 결코 정치적 인 목적으로 활용하지 않겠다 고 말해서 간단하게 기선을 제압했습니다. 선거 결과는 뻔 했습니다. 최고령 레이건은 지금도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 명단에 단골로 오르 내리고 있습니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지하묘지에 자리 잡고 있는 어느 성공회 주교의 무덤 앞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습니다. 내가 젊고 자유로워서 상상력에 한계가 없을 때 나는 세 상을 변화시키겠다는 꿈을 꾸었다.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지혜를 얻게 되자 나는 세상이 변 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시야를 좁혀서 내가 살고 있는 나라를 변화시키기 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불가능했다. 황혼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는 내가 할 수 있 는 마지막 시도로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들을 변화시키기로 마음을 정했다. 그러나 아무도 달라지지 않았다. 이제 죽음을 맞기 위해서 자리에 누운 나는 문득 깨달았다. 만일 내가 내 자신을 먼저 변화시켰더라면 그것을 보고 내 가족이 변화되었을 것이다. 또 그것에 용기를 얻어서 내 나라를 더 좋은 곳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아는가, 이미 세 상이 바뀌었을지도! 세상을 모두 바꾸어 놓기에는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 너무도 짧 습니다. 하지만 그토록 짧게만 느껴지는 시간일지라도 나 스스로를 바꾸기에는 충분합니 다. 우리 모두 노아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8
결말 끝으로, 레잇 앤더슨의 <당신 스타일에 맞는 리더십을 계발하라>는 저서 가운데 일부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기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날에는 매 시 간 일어나고 있다! 다양성은 훨씬 더하다. 더 많은 언어, 더 많은 인종, 더 많은 종교, 더 많 은 나라, 더 많은 문화, 더 많은 대륙에서 회심이 일어나고 있다. 나는 어느 날 천국의 거리 를 걸을 때 낯선 사람이 내게 다가와 이렇게 말하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21세기가 시작 될 무렵 하나님께서 역사상 가장 크신 일을 행하고 계실 때 당신이 땅에서 설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때 어떠했습니까? 당신의 역할은 무엇이었나요? 오늘 소개한 노아처럼 우 리 모두가 뜨거운 열정을 갖고서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매순간 하나님의 가장 큰 일, 기적 을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49
1월을 위한 교육설교 3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요셉 (성경본문 창 37:5-11 찬송 359) 유재덕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 도입 성경의 인물들 가운데는 여러 번 거듭 읽더라도 싫증이 안 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요셉 이 바로 그런 사람입니다. 우리는 어려서부터 수없이 요셉에 대해서 들어왔습니다. 하지 만 싫증이 나지 않습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요셉의 이야기는 아주 드라마틱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요셉의 생애를 설명하면서 예수님의 모형으로 해석합니다. 실제로 그의 삶 가운데 특별한 잘못도 없고, 고통을 겪으면서도 결국에는 승 리하는 모습이 예수님을 닮은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요셉의 일화를 조금 더 자세히 살펴 보면 요셉을 그렇게 단순하게 설명하기에는 무리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요셉은 우리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사람입니다. 계속해서 살펴보겠지만, 그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습 니다. 그러나 환경을 통해,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더욱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셉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몇 가지 비결을 배우게 됩니다. 전개 요셉은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의 열한 번째 아들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출생 순서에 지 나지 않는다. 요셉의 출생 배경을 보면 그는 실질적인 장남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처음 에 요셉의 아버지 야곱이 결혼하고 싶었던 사람은 바로 라헬이었습니다. 야곱은 라헬과 결 혼하려면 7년을 무보수로 봉사하라는 장인 라반의 요구를 따랐는데, 그를 얼마나 사랑했 50
는지 7년을 수일처럼 여길 정도였습니다(창 29:20). 거기다가 장인의 못된 꾀 때문에 억 울하게 7년을 더 일하고 결혼한 라헬로부터 얻은 아들이 바로 요셉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는 야곱의 11번째 아들이지만 심정적으로는 첫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공식으로는 다 른 아들들 때문에 장남 대접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야곱의 마음이 표현된 게 바로 요 셉만 따로 입던 채색 옷입니다(창37:3). 물론 이것은 색동옷이 아닙니다. 팔 부분이 긴 옷 을 가리켜서 성경에서는 채색 옷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아버지 야곱은 나머지 형제들 에게는 모두 팔 부분이 짧은 옷을 입히고, 오직 요셉에게만 긴 옷을 입혔다는 것은 요셉만 험한 노동에서 빼주겠다는 야곱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정이 어떻든 간에 부모의 그릇된 이런 편애가 나중에 비극을 부르게 됩니다. 요셉의 행동이 모두 이상적이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더라도 나이는 속일 수 없습니다. 어린이는 어린이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청소년을 대할 때 너무 쉽게 신 뢰하고, 너무 쉽게 실망합니다. 그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아이는 아이일 뿐입니다. 아직 성장과정에 있기 때문에 잘할 때도 있고, 잘못할 때도 있습니다. 나이에 따라 그 사람을 평 가해야 합니다. 요셉도 어렸기 때문에 행동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먼저, 그는 입이 가벼웠 습니다. 창세기 37장 2절에 보니까 형제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들의 잘못을 모두 아비에게 고합니다. 좋게 보면 좋은 겁니다. 하지만 입이 가벼운 것도 사실이고, 말이 많은 것도 사 실입니다. 요셉은 자신의 생각을 거리낌 없이 떠들었습니다. 이것은 채색 옷과도 연결되 는 이야기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모두 목축을 하는 목동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에게 는 창세기 37장 2절이나 14절의 내용처럼 야곱이 요셉을 시켜서 형들과 양떼들이 잘 있는 지 보고하라고 시키는 것으로 봐서는 그냥 목동이 아니라 중간 관리인 정도로 요셉을 대하 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감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야기 했고, 그것 때문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움을 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창세기 37장 5절 이하에 꿈 이야기도 같은 사례입니다. 곡식 단과 해와 달과 별이 절을 한 꿈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그것이 나중을 예시하는 것이었지만 가려서 할 말이었 지만, 요셉은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다 말에 실수가 많으니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몸도 굴레 씌우리라 (약 3:2) 그리고 요셉은 꿈을 잘 꾸는 사람이었습니다. 매사에 의미를 부여하고, 물론 그렇게 교 육을 받았겠지만 꿈 이야기에 담겨 있는 의미를 확인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요셉이었습니 다. 그래서 나머지 형제들이 오늘의 설교 제목처럼 요셉이 자신들을 찾아 먼 길을 따라오 자 37장 19절에서 꿈꾸는 자가 오도다 라고 말합니다. 꿈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상당히 고무되는 이야기지만, 사실과는 다릅니다. 가끔 꿈이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을 의미 있 51
는 꿈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닙니다. 꿈보다 확실한 계시의 방법이 있 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왜 눈을 감고 잠을 청해야 합니까? 성경에 계시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꿈을 좋아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마치 꿈을 점괘 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살다 보면 어떤 게 하나님의 뜻인지 확신을 하지 못할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럴 때 꿈을 의지합니다. 이것은 위험한 방법입니다. 구약성경 시대, 특히 요셉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을 확인할 수 있는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꿈을 의 지하고, 우림과 둠밈으로, 혹은 제비뽑기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요셉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요셉이 달라지게 만든 첫째 요인은 형제들의 배신입 니다. 요셉은 본래 자기 위주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감정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 의 생각을 더 앞세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든든한 사랑이 아마 버팀목 이 되었을 겁니다. 그런데 요셉이 다른 사람들까지 헤아리는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 계기가 된 것은 역설적으로 형제들의 배신입니다. 아마 믿고 있던 형제들의 배신은 요셉이 상상하지도 못한 충격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배신도 그냥 배신이 아니라, 창세기 37장 18 절을 보니까 요셉이 가까이 오기 전에 그들이 요셉을 멀리서 보고 죽이기를 꾀하여 라고 합니다. 형제들 사이에서도 증오는 존재합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그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요셉은 그것을 알았을까요?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구 덩이에 그를 밀어 넣고 난 다음에도 형들은 그를 죽일 것인지 살릴 것인지에 대해서 잔인 한 토론을 계속 벌입니다. 이때부터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을 겁니다. 남에게 요셉을 팔아넘긴 것도 충격이 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신 매매에 남이 아닌 형제를 판다는 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로서도 엄청난 일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요셉은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둘째는 보디발의 집에서 겪은 봉변이 요셉의 삶이 변화하도록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이 하게 이 일화에서부터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창 39: 2, 21)라는 말이 나옵니 다. 이것은 무슨 뜻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도우셨겠지만, 요셉은 이때부터 하나님을 철저 히 의뢰하게 되었다는 뜻일 겁니다. 본문을 누가 기록했습니까? 모세입니다. 내용은요? 요 셉의 회고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과거를 돌아보면서 그 당시에 여호와께서 함께 하셨고, 덕분에 위기를 잘 넘겼다는 것을 확인했을 겁니다. 마치 야곱이 창세기 28장 19절에서 돌 베개를 자고 나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것처럼 말입니다. 이전까지 야곱은 그런 말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집에서 겪은 봉변 때문에 달라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려움이 반드시 나쁜 게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 지만 굳이 그런 봉변을 자초할 필요는 없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젊은 요셉을 유혹하려고 52
했습니다. 만일 요셉이 하나님이 꿈을 통해서 보여주신 미래에 대한 소망, 자신은 결코 말 도 물도 설은 이국땅에서 노예로 살다가, 노예로 죽을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믿지 않았다면 아마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했을 때 넘어갔을지 모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고, 하나님의 자녀라고 이야기하면서 어째서 죄를 범합 니까? 그것은 요셉처럼 하나님이 주신 꿈을 소중하게 간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히 청 소년들은 술과 담배가, 그리고 온갖 음란물이 난무해도 의지를 굳게 하고, 성실하고 거룩 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누군가 헬렌 켈러에게 앞을 못 보는 사람보다 불행한 사람이 누구 인가라고 묻자, 그는 시력은 있으되 비전이 없는 사람 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요셉 은 비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의 부탁을 잊어버린 것 역시 또 요셉의 삶에 또 다른 전기 가 됩니다. 요셉이 감옥에서 갇혀 있으면서 만난 술 맡은 관원장은 죽음을 당하고 말았던 떡 맡은 관원장과는 달리 꾼 꿈대로 감옥에서 나가서 본래의 직업을 회복했습니다. 그는 감옥에 가기 이전처럼 바로를 계속 섬기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가 거짓말을 하는 바람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다가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주면서 이렇게 부탁 합니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 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창 40:17). 하지만 이 사람은 감옥에서 나간 뒤에 요셉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 역시 남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요셉의 신앙은 더욱 견고해졌다는 것을 우리는 41장 16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바로가 너는 어떤 꿈이라도 풀 수 있다고 들었다고 하자 요셉은 말합니다. 이 는 내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에게 평안한 대답을 하시리이다 이제는 모든 것 을 하나님 덕으로 돌립니다. 고난이 그로 하여금 성숙한 신앙을 갖도록 훈련시킨 것입니다. 끝으로 형제들과의 만남 역시 요셉의 삶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요셉은 자신 을 팔아버린 형제들이 가나안 땅의 극심한 기근을 피해서 식량을 구하러 애굽을 찾아온 것 을 보고 어째서 자신이 애굽에 오게 되었는지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가족들을 보호 하기 위해하기 위한 하나님의 선견지명 때문이었다는 게 요셉의 결론이었습니다. 창세기 45장 5절에서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 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그 는 이미 하나님의 속마음을 이해할 정도로 안목을 갖출 수 있었습니다. 사실이 그랬습니 다. 덕분에 이스라엘이 목숨을 부지하고 국가를 이룰 수 있는 전기를 마련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는 또 다른 하나님의 의도가 있었습니다. 창세기 38장을 보면 요셉의 형제 인 유다가 이방 여인과 혼인한 일화가 나옵니다. 어째서 요셉의 일화에 그 이야기가 끼어 53
들었을까요? 이것은 유대 민족과 이방인과의 통혼 문제가 심각했다는 뜻입니다. 결국 하 나님은 요셉을 애굽에 보내심으로써 이스라엘의 순수한 혈통을 유지하려고 하셨다는 것 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꿈을 포 기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비록 그것이 터무니없을 지라도 끝까지 고수해야 합니다. 요 셉을 꿈장이라고 부릅니다. 요셉의 생애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꿈입니다. 그가 꿈꾸는 대 로 인생은 흘러갔습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이 이처럼 어렵고, 점점 꼬여만 가는 가장 큰 이유는 요셉처럼 꿈을 꾸면서 노력하는 지도자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교계는 물론 우리 사회 전체가 직면한 딜레마이기도 합니다.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 배후에 자리하고 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읽고, 그것이 현실화될 날을 꿈꾸는 지도자가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절실합니다. 역사를 돌아보면 그런 인물이 스스로는 물론이고 세계 전체를 변화시켰습니 다. 대표적인 경우가 미국의 인권운동가였던 마틴 루서 킹(Martin Luther King, Jr.)이 었습니다. 애틀랜타에서 로사 파크(Rosa Park)가 버스를 타지 않겠다고 결단을 내린 뒤에 킹 목사 는 등을 떠밀리다시피 민권 운동 지도자로 나서야 했습니다. 흑인 사회가 26세의 중산층 출신 새내기 목사를 자신들의 지도자로 선출하자 KKK단이 협박을 가했습니다. 제한속도 40킬로미터의 도로를 48킬로미터로 달렸다고 교도소에 수감되는 일도 있었습니다. 난생 처음 감옥을 경험하고 생명의 위협을 느낀 킹은 서재에 앉아서 한동안 고민했습니다. 나중 에 그는 이렇게 당시를 회고했습니다. 식탁에 앉아서 어린 딸아이를 생각했습니다. 언제라도 그 아이가 내 곁에서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다음은 옆방에서 자고 있는 헌신적이고 사랑 깊은 아내, 소중한 내 아내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곧장 더 이상 지도자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나는 너무 약했습니다. 다음 순간, 신앙이 나에게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분이신가를 알았어야 했던 것입 니다. 나는 커피 잔 위로 머리를 숙였습니다. 그 순간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하 기 시작했습니다. 큰 소리로 외치며 기도했습니다. 주여, 의로운 일을 해보고자 주님 앞에 엎드렸습니다. 저는 제가 옳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내세우는 주장의 동기가 옳다고 생 각합니다. 그러나 주님, 지금 제가 너무도 약한 존재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제자리 에 서서 주저하고 있습니다. 용기가 꺾이고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마음속에서 내게 말 씀하시는 음성이 들려오는 것 같았습니다. 마틴 루서야, 의를 위해 일어나라. 공의를 위 54
해 일어나라. 진리를 위해 일어나라. 보라, 내가 너와 세상 끝 날까지 함께할 것이다. 나가 서 싸우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결코 떠나시지 않겠다. 절대로 혼 자 버려두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절대로 혼자 버려두지 않겠다. 절대로 혼자 버려 두지 않겠다. 킹 목사는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그렇게 해서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의 인권 문 제를 부각시키고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요셉의 사례를 통해서 어려움을 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평범 한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만일 요셉 이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하지 않았다면, 그의 생애는 어땠을까요? 그리고 아버지에게 형제들의 잘못을 고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요셉은 구덩이 속에서, 그리고 보디 발의 집에서, 감옥에서 후회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요셉이 후회했다는 말이 없 습니다. 어째서 그랬습니까? 이것은 요셉이 온갖 어려움을 당했지만 어쩔 수 없는 과거의 실수에 연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실수할 수도 있지만 그것에 집착하다 보면 그것으로 부터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요셉에게만 적용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 본 문 어디에도 요셉이 후회했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는 어려움을 통 해 자신이 더욱 강철처럼 단련될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요셉의 경우를 통해서 믿음은 계속해서 성장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그러니까 대학을 졸업하거나 아니면 가정을 이루게 되면 성장이 멈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이제 믿음이 성숙해서 더 이상 노력하지 않아 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오해에 불과합니다. 믿음은 계속 성장합니다. 현재 에머리 대학의 교수로 있는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가 그 신앙성장 과정을 밝혀냈 습니다. 그것을 그는 신앙의 단계들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을 살펴보면, 먼저, 직관적-투사 적(intuitive-projective) 신앙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갓난아기들이 속해 있는 단계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단계에서는 남을 모방합니다. 계속해서 신화적-문자적(mythic-literal) 신앙이 있습니다. 이 단계에서는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입니다. 세상은 주는 만큼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수준의 사고를 하는 게 이 단계의 특징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종 합적-인습적(synthetic-conventional) 신앙의 단계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서 발버둥을 치지만 쉽게 성취하지 못합니다.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주장이나 행동을 자신 의 삶의 철학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개별적-성찰적(individuative-reflective) 신앙에 도달하게 되면 신앙에 대해서 나름대로 책임감과 확신을 갖게 됩니다. 이 시기가 55
되면 예수님 안에서 거하는 게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지만, 있는 그대로 실행하지 못합니 다. 이것은 제임스 파울러가 말하는 5단계인 통합(conjunctive) 단계에 들어서야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이 단계에 들어서면 삶에서 겪는 갈등, 혹은 경제적인 문제까지 있는 그 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통해 보다 높은 수준의 믿음을 소유하려고 노력합니다. 하지만 이 단계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지 못하기 때 문입니다. 마지막 6단계인 보편적(universal) 신앙의 단계에 들어서야 주님 안에 거하며 하나가 될 수 있습니다. 이때부터는 사실 인생의 그 무엇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단계 에서의 믿음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게 합니다. 결말 우리는 요셉의 사례를 통해서 우리의 삶과 관련된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 역사와 무관하지 않다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이 임마누엘의 신앙이 바로 요셉의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우리도 그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결코 어떤 순간에도 우리를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고 붙들어 주시고, 힘을 불어넣어주신다는 것 을 말입니다. 56
1월을 위한 교육설교 4 성서인물 탐구 교육설교 모세 (성경본문 출 3:13-14 찬송 413) 유재덕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기독교교육 도입 오늘 본문과 그 배경이 되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대표적인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인 모세 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은 물론 하나님의 본성, 이름, 그리고 하나님의 개입이 어떻게 이루 어지는지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특히 중요합니다. 모세에 대한 일화는 이미 누구나 잘 아는 내용이라서 구구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간단하게 모세의 성장배경 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2장에 의하면 레위 지파 출신이었습니다. 그의 가족들은 갓 태어난 아이를 바로의 지시, 그러니까 히브리인들 가운데 남자아이가 태어나 면 살해하라는 바로의 지시를 피해서 한동안 키우다가 어쩔 수없이 나일강에 띄워 보냅니 다.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서 바로의 딸에게 되어 양자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아이에게 모 세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모세는 히브리어로 건져냈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이 집트어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집트어로 태어나다 라는 뜻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모세 라는 이름은 이집트 왕국에서 일반 명사처럼 다른 이름과 연결해서 사용될 때가 많았습니 다. 라메시스, 혹은 툿모시스 같은 이름이 그랬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본다면 모세가 궁중 에서 성장했다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분명한 사실이 됩니다. 57
전개 우리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가 끔 생각한다. 하나님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실까? 이것은 지적인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어린아이들의 질문이 아닙니다.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입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하고 계실까요? 과거에 하나님은 세계를 창조하고 난 뒤에 전혀 관여하지 않으신다는 주장이 제 기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이신론(theism)이라고 부릅니다. 18세기 유럽에서 생겨난 철학입니다. 이신론자들은 하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전혀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믿었습니다. 우주의 질서를 만드셨으니, 간섭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질서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신하려고 했던 일종의 이단이었습니다. 미국의 국부( 國 父 )라고 부르는 토마스 제퍼슨, 벤자민 프랭클린 등이 추종하던 믿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주장이 힘을 발휘하고 있으니, 정말이지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 나님보다 과학의 힘, 이성의 능력이 괴력을 발휘합니다. 어떤 과학자가 죽어서 천국에 갔 다고 합니다. 그곳에 하나님이 앉아 계셨습니다. 과학자가 대단한 발견을 한 표정을 지으 면서 말합니다. 이제는 더 이상 하나님이 필요 없습니다. 하나님이 궁금해 하면서 그 까 닭을 물으십니다. 과학자가 득의만만해서 대답합니다. 무에서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방 법을 과학이 밝혀냈기 때문입니다. 흙으로 당신의 형상을 빚어서 생명을 불어넣으면 인간 이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해보라고 말씀하십니다. 과학자가 흙을 가지고 일을 시작하 려고 하자 하나님이 말씀하십니다. 잠깐, 이 흙은 내 것일세. 자네의 흙을 재료로 써야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하나님의 능력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일화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무엇을 하실까요? 요한복음 5장 17절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 십니다. 아버지가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손을 뗀 적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들어 놓고 스스로 돌아가도록 만든 적이 없었 습니다. 그것을 부정하는 주장은 모두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창조 이후로 줄곧 쉰 적이 없 습니다. 이런 사실을 믿는 게 올바른 성경적 믿음입니다. 모세는 예기치 못한 사건 때문에 궁전을 떠나 광야에서 양을 치는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간섭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출애굽기 2장 25절은 하나 님이 돌보시고, 기억하셨다고 전합니다. 58
또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하나님의 때가 언제인지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어느 때 우리의 일에 개입하는지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보통 시간은 크로노스(chronos)와 카이로 스(kairos)로 구분합니다. 크로노스라는 것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는 시간을 가리 키고, 시간에 의미가 부여되면 그것을 카이로스라고 부릅니다.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우리 인간 세계에 개입하는 순간을 말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간의 의지와 전혀 상관이 없습니 다. 모세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이 유대 민족을 구원할 수 있을 것 같았습 니다. 물론, 그런 자신감에는 근거가 없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잘 알듯이 어머니 유니게와 미리암의 재치로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을 무사히 넘기고 바로의 왕궁에 들어가서 외손 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왕궁에서의 교육은 상당했습니다. 과학, 역사는 물론 신비학까지, 바로가 될 수 있는 모든 지식을 전수 받았습니다. 또 그는 이집트인을 때려서 죽일 정도로 완력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모든 게 순조로울 것처럼 보이던 모세에게 생각하지 못한 위기가 닥쳤습니다. 그러나 위 기가 모두 그렇듯이 처음에는 그것이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출애굽기 2장 11 절을 보니 이렇습니다.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 고역함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어떤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모두가 두 려워하는 왕의 후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모세 앞에서 어느 이집트인이 히브리인을 때 리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연했습니다. 히브리인들은 당시 노예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노예는 죽여도 살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요게벳과 미리암 덕분에 자신이 히브리인 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던 모세는 참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히브리인을 구해보 려고 나섰습니다. 모세는 주변을 살피고 사람이 없는 것을 안심하고 이집트인을 살해했습 니다. 하지만 모세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가고 말았습니다. 먼저 동족 조차 그의 존재를 인정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그가 가로되 누가 너로 우리의 주재와 법관을 삼았느냐 네가 애굽 사람을 죽임 같이 나도 죽이려느냐 (출 2:14) 소식을 들은 바로 역시 그를 더 이상 외손자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 를 죽이고자 하여 찾은지라 (출 2:15) 졸지에 살인자의 신세로 전락한 모세는 바로의 눈을 피해서 미디안 광야로 도망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왕자 모세는 하루아침에 자신의 근거를 모두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어째서 모세는 실패했을까요? 무엇보다 하나님의 때 를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일을 만드시고, 끌어가시는 때를 기다리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를 경험하게 된 겁니다. 무슨 일이든지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때를 기 다리지 못하면 큰일을 도모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이 하나님이시지만, 때가 될 때까지 30년을 기다리셨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59
모세가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목자의 생활을 광야에서 하면서 40년을 보냈을 때, 그러니 까 가장 약한 순간에 하나님의 때가 임했습니다. 별 볼일 없는 목자, 바로의 후계자에서 장 인에게 얹혀사는 신세에 불과한 불운한 처지로 전락하자 하나님이 모세를 찾아오신 것입 니다. 당시 모세의 심정은 그의 아들에게 준 이름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자 신의 신세가 어찌나 한심했는지 아들에게 게르솜, 그러니까 타국에서 객이 되었다 (2:22) 라는 뜻을 가진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궁중에서 누렸던 화려한 생활은 기억 속에 존재하지 않았고, 최고의 교육을 통해서 갖추었던 세상에 대한 지식이나 탁월한 언변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동족의 고통을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완력을 휘두르고, 미 디안 우물가에서 무법자들을 쫓아버리던 기개는 사라진 지 오래였습니다. 그는 지극히 평 범한 촌부, 모세라는 이름이 어색한 목자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세에게 이제 마치 벼락처럼 카이로스의 때가 닥쳤습니다. 모세의 혈기가 지혜로 바뀌자 하나님이 그를 찾아오신 것입니다. 구경꾼의 신세로 전락한 모세가 호렙산 떨기나무에 나타난 이상한 불꽃을 보려고 다가오자 하나님이 그를 부르셨습니다. 모세야, 모세야 (출 3:4). 그러자 모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합니다. 하지만 두려움이 없지 않았습 니다. 3장 6절을 보면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 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때 두려움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것은 막연한 두려움 혹은 공포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것은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을 만난 다는 것은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인데, 이것은 마치 두려운 일이면서도 매료당하는 것입니 다. 왠지 모를 끌림이 있는 것이 바로 거룩함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정체를 직접 알리십니다. 첫째, 하나님은 생소한 분이 아니었 습니다.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니 라 그러니까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늘 조상들과 동행하는 하나님이었습니다. 둘째, 하나 님은 막연한 신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3장 7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 고 내가 내려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하나님은 이런 분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을 보고, 듣고, 알고, 건져내려고 하시는 따뜻한 분이었습니다. 물질을 바 치고, 고행을 해야만 기도에 응답하는 신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는, 모세를 찾아오신 하나 님은 치성의 수준에 따라 응답이 결정되는 차가운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고통 을 이해하고, 듣고, 그리고 알아주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분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를 대상이 아니라 파트너로 인정하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60
하나님은 아무 것도 두려울 게 없었던 젊은 모세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난 뒤에 그 에게 비로소 사명을 주십니다.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 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3:10). 하지만 모세는 이미 자신만만하던 패기를 잃 은 뒤였습니다.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 이까 (3:11) 이 발언에는 모세의 고민이 두 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권위에 대 한 고민인데, 하나는 바로에게, 또 다른 한편으로는 이스라엘 동족들에게 대한 것이었습니 다. 무슨 권위로 내가 바로를 만나고, 이스라엘 민족을 만나 협상을 하고, 지도자가 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고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모세에게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3:12)고 약속하셨습니다. 이것 을 달리 말하면 임마누엘입니다.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세상이 끝나는 날까지 우 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가 예배하고 따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바로 우리의 권위의 근거가 되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흥망성쇠를 반 복하다가 모두 사라질 것들입니다. 우리에게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주신 임마누엘의 약속뿐입니다. 우리 모두는 임마누엘의 약속, 임마누엘 의 신앙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자 모세가 다시 하나님에게 질문합니다.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출 3:13). 모세의 질문에 담긴 의미는 이중 적입니다. 당시 근동세계는 온갖 신들을 섬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었는데, 모세는 그것 을 염두에 두고서 자신에게 말씀하는 하나님은 어떤 신인지 묻고 있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름 자체가 아니라 이름 뒤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 그러니까 하나님은 어떤 분인 지 알고 싶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질문을 달리 표현해보면 한 마디로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이 대답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출 3:14). 히브리어로 에이 예 아쉘 에이예 입니다. 직역을 하면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이다 입니다. 이 문장에 대한 해석들이 다양합니다. 어떤 이들은 여호와가 여러 이방인들의 신 가운데서 유일한 참 하나 님이라고 해석합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이 되신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습 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간섭하실 것을 보장하는 문장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것 을 미래형으로 해석해보면 뜻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그러니까 나는 장차 나타내 보일 그 대로의 나이다 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하나님이 앞으로 자신의 행동을 보면 분명한 정체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성 61
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그 말씀처럼 모세와의 약속을 지켰고, 그렇게 해 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결말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창조 이후로 지금까지 손을 멈추신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서 언제나 일하십니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 으로부터 특별한 카이로스의 순간에 소명을 받고 신적 사역에 동참하게 됩니다. 모세의 삶 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모세는 말할 수 없이 약한 순간에 스스로 있는 분으로부터 소명을 받고 평범한 목자에서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우 리의 고통과 어려움을 보고, 듣고, 알고, 건져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사명을 주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신적 사명이 주어지는 순간 하나님의 뜻을 좇아서 모세처럼 위대한 신앙의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62
인문 저서 소개 성공한 사람들의 10가지 공통법칙 이희용 교수 서울신학대학교 교양학부 저자 _ 켄 셸턴 켄 셸턴은 누구나 잘 아는 스티븐 스필버그부터 마이클 조던, 하워드 슐츠, 리처드 브랜슨, 대니얼 카플란, 터드 터너 등 자기의 분야에서 최고의 성공을 이룬 사람들이 이룬 삶의 업적과 그 과정 에서 겪었던 삶의 모습에서 공통점을 발견하여 10가지 공통법칙 으로 정리했다. 그는 Executive Excellence 지의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시련을 극복하거나 성공을 이루는 데 필요한 노하우를 비롯해 성공과 관련된 기사와 논문을 10년간 5백 회 이상 발표하고, 수많은 도서를 기획 하는 등 일련의 작업들의 최종 결정판으로 이 책을 썼다. 성공을 부르는 사고방식을 이해하라.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는 나는 할 수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 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나는 할 수 있다. 라는 말 속에는 강함, 견고함, 자신감, 활력과 같은 적극적인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긍정적 사고 방식 이라는 무형의 에너지는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반드시 승리를 거두겠다는 의지, 실 천력, 인내심 있는 추진력 을 불러일으켜 성공의 원천 역할을 한다. 세상에는 실제로는 본인이 대단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부정적 63
인 사고방식 때문에 평생을 평범하게 지내거나 작은 성취에 그럭저럭 만족하고 사는 사람 들이 많다. 그들은 언제나 만일 실패하면 어떻게 하지 라고 생각하며 산다. 어떤 일을 시 작해보기도 전에 그 일의 결과에 대해서 자신이 없어 하거나, 실패하는 경우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일에 대한 추진력 자체가 아예 생겨나지 않는다. 만일 나는 내 의지에 따라 움직일 수 있는 인물로서, 하려고만 하면 무엇이든지 성공할 수 있다. 라는 생각을 항상 마음속에 간직하고 긍정적인 사고방식 이 가져오는 위대한 힘 을 믿는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바뀔 수 있다. 나는 태어날 때 부터 성공할 권리와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고 자기 자신에게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 면, 여러분 스스로가 성공을 부르는 자석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저자 켄 셸턴은 성공을 이룬 사람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의 법칙 10가지를 제시하였다. 그 중에서도 몇 가지를 제시한다. 1. 스스로 자부심을 갖는다. 메리케이코스메틱스 창업자인 메이 케이 애시는 성공의 비결이 무엇이었습니까 라 는 질문에 내 자신을 끊임없이 성장시켜나가면서 전 세계에서 일하고 있는 25만 명의 뷰 티 컨설턴트들 한 명 한 명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일에 임했기 때문이지요. 하고 말했다. 1963년 메리 케이는 형제와 친척들의 도움을 얻어서 5백 달러를 가지고 댈러스에 점포 를 오픈했다. 오픈 당시 영업사원은 아홉 명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사업을 시작하기 전에 스탠리폼프로덕스에서 25년간 영업사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다. 당시 그녀에게는 돌보 지 않으면 안 될 세 명의 아이가 있었다. 입사하고 난 뒤 1년 동안, 그녀는 일에 익숙하지 않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세 명의 아이를 겨우겨우 부양해나갈 정도였다. 그러던 중에 그녀는 영업사원 연수회에 참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 연수회 참가가 그녀의 삶을 뒤 집어놓는 계기가 되었다. 메리 케이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다. 키도, 크고 자신만만한 표정을 한 세련된 여성 성 공자들이 그 해의 영업 여왕의 관을 머리에 쓰고 있는 것을 보면서 내년에는 내가 반드시 저 여왕 자리에 앉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저는 사장님께 다음 해 여왕은 저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사장님은 한낱 신입 여사원의 말이라고 가볍게 흘려듣는 것이 아니라 제 눈을 천천히 쳐다보면서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64
나도 왠지 그렇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메리 케이씨가 반드시 저 왕관을 쓸 겁니다. 사장님께서 하신 그 몇 마디가 저에게 어떤 신비한 힘으로 작용하면서 저는 그 다음 해에 영업 여왕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의 회사를 창립하면서 오픈 더 도어(open the door) 를 첫 번째 슬로건으 로 내걸었다. 사원들 스스로 자기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일을 할 수 있도록 한다는 정책이었다. 그는 언제나 사원들이 그런 자세가 될 수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는 것을 자신의 신조로 삼았다. 긍정적인 사람이 되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의 저자인 스티븐 코비도 자 기 긍정론자이다. 그는 올바른 자기 긍정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특징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첫째, 긍정적인 자세를 확립해야 한다. 둘째, 어떤 것이 올바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를 적극적인 자세로 알아보아야 한다. 셋째,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지금 이 상태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가를 결정할 수 있 어야 한다. 넷째, 항상 머릿속에 명확한 비전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섯째, 강력한 의지가 있어야 한다. 코비 박사는 자기 긍정적인 자세를 만들기 위해서는 자신을 편하게 만드는 것, 반복하 는 것,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것 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의 말 중 일부분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 자신을 편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합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상 생활에서 긍정적인 자세가 효과적인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몸과 머리를 차분하게 만 들어야 합니다. 방법은 어렵지 않습니다. 자신을 편안하게 만들면 됩니다. 정신적으로 그 리고 육체적으로 편안해지면 뇌파가 안정되어 자기 암시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때 시각적이고 감정적인 확신을 통하여 자기가 의도하는 생각이나 이미지가 자 기 내부에 깊숙이 스며들도록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방법에는 여 러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의식적으로 근육을 긴장시켰다가 다시 몸에서 힘을 빼는 방법입니다. 우 65
리가 가진 의지가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머릿속을 편안한 상태로 바꿈으 로써 몸 전체에 힘을 빼고 축 늘어뜨리는 방법입니다. 몸 구석구석의 근육이 모두 풀려 늘 어져 있는 모습을 상상하면 됩니다.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몸통, 팔, 목, 등, 얼굴이 겹쳐지 는 상태를 연상하는 것입니다. 시간대로 본다면 아침에 일어날 때와 잠이 들기 전에 뇌의 움직임이 가장 둔화됩니다. 이때에는 거의 무의식에 가까운 상태이기 때문에 하루 중에서 가장 수용력이 좋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자기의 머릿속에 의식적인 프로그래밍을 하기에 가장 좋은 시간대입니다. 두 번째는 반복하기입니다. 자기를 긍정적인 자세로 바꾸기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본인 의 자세에 대한 훈련을 이어서 실행해야 합니다. 입으로는 말하고 글로 옮기고 난 뒤, 보고 느끼면서 그것을 자기 자신의 일부로 삼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프로그래밍해나가는 것입니다. 부모, 친구, 사회, 환경, 또는 유전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의 이미지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만든 이미지에 맞추어 생활해나가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생각 을 반복함으로써 자신이 성장하고, 바뀌어 나가게 됩니다. 세 번째는 이미지 트레이닝을 하는 것입니다. 사무실에 커튼 색상이나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캘린더 등을 머릿속에 선명하게 떠올려보는 것과 같은 훈련입니다. 그것을 거듭하다 보면 인식하는 것이 단순한 환상의 상태를 넘어서게 됩니다. 오감이라는 것은 사용하면 사 용할수록 머릿속에 이미지가 선명하게 남게 되어 자신이 원하는 변화된 상태를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더욱 크게 만들어줍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자기 긍정적 이미지에 의한 놀라운 효과에 대해서 회의적인 태 도를 취하고 있습니다. 기억이라는 자연스런 환경적 요인에만 지나치게 의존하면서 상상 력이라는 뛰어난 자질을 거의 사용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현재, 또는 과거의 자기 모습과 주변 환경에만 집착하여 자신의 미래 가능성에 대해서는 제대로 깨닫지 못합니다. 그런 자 세는 뒤따라오는 차를 비추는 백미러를 보면서 앞을 향해 운전을 하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인류 최초로 달나라 여행했던 아폴로 계획의 준비 단계에서 우주 비행사들이 하는 훈련 중 상당 부분이 시뮬레이션을 통한 교육으로 이루어졌다고 합니다. 인류가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이었으므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을 이미지화해가면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프로그래밍한 것입니다. 비행사들은 우주 공간에서 처음 맞는 위기 상황에서도 시뮬레이션을 통한 훈련 덕분에 무난하게 어려움을 극복해나갈 수가 있었습니 다. 결국 상상력과 창조성이 앞으로 발생할 일을 사람의 머릿속에 미리 이미지화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66
성공을 반드시 이루겠다고 결단하는 것,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대가로 노력과 시간을 투입하는 것, 당장 눈앞의 안락함을 포기하고 불편함을 감수해가면서 문제를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는 것 이 바로 성공을 이루는 데 있어서 빠져서는 안 될 요소들이다. 스타벅스 의 하워드 슐츠, CNN 의 테드 터너 같은 인물들은 자기가 속한 분야에서 성 공을 이루기까지 어떤 자세를 유지해왔을까. 그들은 항상 용기를 가지고 적극적인 자세로 임한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많은 사람들이 선택하는 길보다는 자기 나름대로의 독작적인 방식을 추구해왔다. 자기 해당 분야에서 정상에 이르기까지 이상을 가지고 온갖 좌절과 역경을 극복해가면서 나는 절대 할 수 없다, 차라리 여기서 포기하자 와 같은, 긍정적인 삶을 사는 데 불필요한 일체의 소극적인 사고를 아예 차단한 인물들이었다. 2. 상품이나 사람이나 최고의 품격을 추구한다. 스타벅스는 1971년, 20대 젊은이 세 명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세 젊은이는 시애틀의 파 이크플레이스마켓에 커피 원두를 판매하는 회사를 설립했다. 그들은 회사 이름을 스타벅 스 로 지었다. 얼마 후 이 스타벅스는 모제딕과 협조 체제를 구축함으로써 일반인을 대상 으로 커피를 판매하는 소매 점포 세 곳을 열게 된다. 1982년 젊은 사장은 시장조사부에서 일하고 있던 젊고 활동적인 하워들 슐츠에게 기존 의 시장조사 업무 외에 추가로 커피 소매 부문을 담당하라고 지시했다. 이때 슐츠의 나이 는 29세로 신혼이었다. 슐츠는 사장의 인사 명령을 받아들여 뉴욕에서 서쪽으로 3천 마일 이나 떨어진 시애틀로 거주지를 옮겼다. 시애틀로 옮긴 지 1년 정도 지났을 때 슐츠는 커피 재료를 수입하기 위해 이탈리아에 가 게 되었다. 출장 중에 잠깐 짬이 난 슐츠는 밀라노 광장을 찾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예전에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던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밀라노 광장 부근의 이탈리아 사람들은 아침을 카페에서 시작하고, 또 저녁 늦게까지 그곳에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이 미국에서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미국에서는 아무도 시도해보지 않은 일이지만 우리 스타벅스의 커피 맛은 어떤 회사보다 우수하기 때문에 충분히 이곳 밀라노처럼 사람 들을 불러 모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67
슐츠는 이탈리아 출장에서 돌아온 뒤 이탈리아의 카페 스타일을 참고로 한 스타벅스 카 페 사업을 회사에 건의했다. 그러나 슐츠의 상사들은 이 의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 다. 그들이 슐츠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스타벅스는 레스토랑이 아니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슐츠는 사람들이 자동차하면 캐딜락, 계산기기 하면 IBM을 떠올리는 것처럼 커피에서 도 누구나 커피의 명가 스타벅스 를 떠올릴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미국 전역 어느 곳에 가거나 느긋하게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는 편안 한 공간인 스타벅스 카페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있었다. 수많은 직장인들이 출근 전에 잠 깐 들르고, 또 하루 일이 끝나면 다시 친구들과 들러 늦은 시간까지 담소를 즐기는, 안락 하고 편안한 분위기의 카페였다. 시장에 물건을 사러 온 사람들도 잠깐 들러 쉬어 갈 수 있고, 젊은이들도 술이 아닌 맛있는 커피를 즐기면서 데이트를 할 수 있는 공간을 꿈꿨다. 슐츠에게 경영권이 넘어간 스타벅스는 마케팅에서 새로운 전략을 구사했다. 한꺼번에 여러 도시로 진출해나가는 방식이었다. 하나의 시장을 완전히 장악한 다음 그 옆 도시로 점포를 확장해나가는 방식이었다. 그런 신중한 전략을 취한 결과 오늘날의 스타벅스는 세 계 여러 곳에서 경이적인 매출을 기록하고 있다. 하워드 슐츠는 자기의 경험을 통해 사람들에게 여러가지를 들려주려고 한다. 일단 실천 에 옮기고자 하는 의지와 굳은 결의가 있다면, 어떤 것도 그것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꼭 이루고야 말겠다는 구체적인 꿈을 이루는 데 요구되는 대가를 지불하겠다는 의지가 있 다면 성공은 반드시 찾아온다. 그러나 변화하는 환경에서 새로운 개념에 익숙해지고 거기 에 가까워지기까지는 참을성을 사지고 기다려야한다. 스타벅스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 다. 스타벅스가 커피숍 체인사업을 전개하고 난 뒤 이익이 발생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인내심을 가진 만큼 받는 보상 또한 컸다. 그것은 새로운 시장의 창출자가 갖는 시장 독점권, 또는 시장 결정권이라는 무형의 메리트였다. 슐츠는 커피 카페라는 새 로운 시장을 만들어내면서 상품의 품질에 가장 역점을 두었다. 상품이라는 개념에는 커피 재료뿐만 아니라 이를 관리하는 인적인 측면도 포함되었다. 그는 항상 말한다. 어떤 일이든지 이루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 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루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일이 이루어지는 경우 또한 절대 없습니다. 68
3. 성공할 확률이 1퍼센트라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그레이엄 벨이나 토머스 에디슨, 나폴레옹, 알렉산더 같은 역사적 인물들보다 그 큰 성 취를 이루고야 말겠다. 테드 터너는 그런 큰 꿈을 가슴속에 품고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 고는 마침내 미국 최고의 부자가 되었고, 대통령을 꿈꿀 수 있는 인물로 인정받게 되었다. 물론 테드 터너가 이런 역사적 인물들을 능가할 수 있는 업적을 이루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이견이 있을 수가 있고, 또 미국의 대통령 자리에 오른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오 늘날 이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보다도 큰 성공을 거둔 인물임에는 틀림 없었다. 그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던 케이블 TV 네트워크를 매각하고 타임워너사의 1대 주 주가 되었으며, 자타가 인정하는 세계 최고의 갑부이다. 그가 처음으로 방송업에 손을 대게 된 때는 1970년이었다. 망하기 일보 직전인 애틀란 타의 UHF 방송국을 사들여 TV 방송국의 경영자로 나서게 된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터너는 미국 TV 방송 역사상 가장 큰 획을 긋는 결정을 하게 된다. 그 것은 방송의 전차신호를 위성으로 쏘아 그것을 케이블 시스템으로 수신하는 WTCG(후 에 WTBS로 바뀌게 됨)방식을 이용하여 방송 전파를 미국 전역에 닿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런 새로운 방송 시스템을 터너가 처음으로 생각해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시스템 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고, 앞으로 시청자가 보다 다양한 채널의 방송을 원 하는 시대가 올 것임을 미리 간파한 사람은 바로 그였다. 미래의 케이블 TV 시대를 내다보 면서 터너는 미리 포석을 깔아둔 것이었다. 당시 테드 터너의 주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한다. 테드 터너처럼 머리 가 잘 돌아가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뛰어난 아이디어맨이었습니다. 하지 만 그에게는 다소 무리하는 저돌적인 면도 있었습니다. 테드 터너는 위성을 사용하는 케이블 TV 회사인 슈퍼 스테이션 을 설립했을 때, 회사를 설립한 지 1주일도 지나지 않아 자금을 차입하고 계약금을 겨우 마련해 조지아주 더들러 스 빌에 높이 9미터 중계 수신 안테나를 건설했다. 이 일을 계기로 많은 방송국들이 자사 소유의 안테나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 지상 위성방송국을 설립함으로써 위성을 경유하는 전파를 이용하여 가장 적은 비용으로 미국 전역에 방송 전파를 구석구석까지 보낼 수 있는 69
시스템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바로 이런 일이 진행되고 있던 비슷한 시기에 리스 숀펠드라는 사람이 새로운 아이디어 를 터너에게 가져왔다. 숀펠드는 터너에게 어제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고 있 는 사건을 현장에서 생중계하는 게 어떻겠습니까? 실시간으로 상황을 방송하는 겁니다. 라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테드 터너는 흥분한 어조로 숀펠드에게 말했다. 당신이 바로 내가 찾던 사 람이오, 당신이 사장을 맡으시오. 나는 이 미국을 움직이는 더 큰 역할을 하겠소. 방송을 뉴스 중심으로 구성하겠다는 터너의 결정은 그의 주위 사람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왜냐 하면 터너는 항상 습관처럼 주위 사람들에게 뉴스를 보고 나면 언제나 기분이 별로란 말 이야. 라고 말해왔던 것이다. 당시 뉴스 이외 분야는 늘 새로운 아이템으로 채워지는 뉴스 밖에 없었다. 시기상 다른 경쟁자가 나서기 전에 서둘러서 시장을 선점하지 않으면 안 되 는 중요한 시점이었다. 테드 터너는 자신이 성공을 이룬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무엇보다도 나는 반드시 성공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공을 이루기 위한 과정에서 내가 할 수 있 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찾아오더군요. 경쟁 상대나 성취해야 할 대상이 아 무리 커 보이거나 멀리 보이더라도 지레 주저앉아서는 안 됩니다. 야구 시합에서 우승을 다투거나 사업을 할 때, 단 1퍼센트의 승산만 있더라도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라 는 말을 끊임없이 반복해가면서 자기 자신을 추슬러나가야 합니다. 또한 반대로 아무리 큰 성공을 거두더라도 절대로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분양에서든지 반드시 1등이 되겠 다는 각오와 의지로 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인생에서 큰 성공을 거두기 위해서는 자신의 인생을 진실로 사랑하지 않는 많은 사람들의 가벼운 말 한마디를 들어도 휘둘리지 않는 자기 소신, 끊임없이 다듬어온 좋은 성품, 자립의지, 결단력과 같은 요소들이 필요하다. 내 자신이 안고 있는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은 나 이외에 아무도 없다. 두 발로 우뚝 설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주저앉아 자기 연 민에 빠져 세상 탓만 할 것인가는 본인이 결정할 문제이다. 행복, 건강, 성공, 그리고 운명 은 자기가 만든 프로그램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 프로그램의 제작자는 타인이나 환경, 신 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다. 70
자료 마당 설교를 위한 예화 1 믿음으로 이룬 착한 성공 착한 성공 에서 저자 이경수 집사는 자신이 이룬 착한성공의 핵심이 바로 믿음에 있다 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다. 저자 이경수는 1987년 전주 우석대학교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대학을 다니며 다양한 사회 경험을 하게 되었다. 결혼 후 대전 침례신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아버지가 담임목사 로 시무하고 있던 금호동의 작은 교회에서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건축한 교회에 문 제가 생겨 당분간 목회를 접고 장인어른이 경영하던 문산 튀김집에서 기술을 전수받은 후 골목 떡볶이집을 시작했다. 타고난 장사의 끼와 성실함이 그를 큰 기업을 꿈꾸는 사람 으 로 만들었다. 2000년 겨울, 대학원까지 나온 사람이 떡볶이 장사를 왜 하냐는 주변의 따 가운 시선을 극복하고 꿈을 따라 떡볶이에 대해 고밀도 증폭 관찰 을 시작한다. 그렇게 시 작한 분식 장사는, 12년이 지난 현재, 1000호 점 오픈을 앞둔 떡볶이 브랜드의 절대 강자,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아딸(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 이 되었다. 이경수 집사의 성공을 통해 착한성공이 무엇인지를 잘 알 수 있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이경수 집사가 많은 어려움 속에 주님이 도우시는 손길을 체험할 수 있는 그러한 간증이 나온다. 1972년에 장인어른이 경기도 문산에 문산 튀김집을 열었다. 튀김집을 오랫동안 해서 많은 손님이 있는데 이제 그 딸하고 결혼했으니까 그 딸하고 같이 부부가 아버지, 장 인어른이 하는 그러한 비슷한 음식점을 내기 원해서 2002년에 이대 앞에 아딸 이라고 하 는 아버지 튀김, 딸 떡볶이 해서 아딸인데. 이대 앞에 1호점을 냈다. 떡볶이 해서 얼마나 벌 까? 하고 하찮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데 그는 떡볶이 집에서 하루에 180만원씩 벌었다 고 한다. 손님이 줄을 이어서 왔다. 너무 장사가 잘 되가지고 야! 난 뭐든지 잘되겠다. 전 국에 이 아딸 체인점을 다 만들어야겠다. 해가지고 둔촌동에다가 또 크게 분점을 차려가 지고 둔촌동 대단지 아파트 상가 2층에 80평을 얻어서 있는 돈 다 투자해서 1억 5천만 원 71
다 투자하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손님이 안왔다. 누가 떡볶이 먹으러 상가 2층까지 올까? 떡볶이 집은 지나가다 눈에 보이면 있는데 그 생각을 못했다. 있는 돈을 다 투자했는데 아 무리 노력하고 아무리 음식을 개발해도 사람이 오지 않았다. 1년여 동안 들어갔던 비용 다 날리고 한 푼도 건지지 못하고 쫄딱 망해가지고 나왔다. 그러나 이 집사는 기도하는 분이 었다. 2005년 문을 닫고 나오면서 하나님 앞에 엎드려 기도했다. 자신이 자기 힘으로 다 할 수 있다는 교만을 내려놓았다. 내가 할 수 있다. 나는 모든 것 다 손대는 것마다 성공한 다. 하는 교만을 내려놓고 회개하고 나서 주님 앞에 다시금 매달려서 기도하고 사업을 시 작하는데 사업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고, 이경수 집사는 고백을 한다. 삶속에 고난은 반드시 있다. 시련도 반드시 있다. 기업을 만들고 사업을 하는 데에도 고 난과 시행착오가 있기 마련이다. 시련과 고난은 당연히 따르는 법인데 이것을 만나면 바로 포기하는 사람이 있다. 난 왜 이럴까, 나는 왜 되는 일이 없지. 나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 누구에게나 과정이 있다. 그 속에는 수많은 실패가 있고 고난이고 시행착오다. 과정을 모두 실패했을지라도 마지막에 실패하지 않으면 된다. 실패를 시행착 오로 여기고 극복해 나가면 마지막에는 성공으로 끝맺을 수 있다. 그래서 그때부터 기도 하고 다시 도전을 했는데 하나님이 은혜를 주셔서 2007년도에 백 개가 넘는 체인점이 생 겨나고 2012년 작년 말에 구백오십 개 체인점이 넘게 채워지고 이제 천 개가 넘어서게 되 는데 이 모든 체인점의 사장님들을 불러서 함께 훈련하고 예배드리기 시작했다. 모든 직원 이 함께 예배드리고 나서 믿음으로 하루를 또 시작하니까 사업이 잘 되었고, 모든 체인점 이 다 잘 되고 성공하는 그런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72
자료 마당 설교를 위한 예화 2 허름한 자의 모습에서 나온 예수님의 사랑 김영철 선교사님의 예수님의 발냄새 라는 책을 보면, 하나의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온 다. 어느 날 김영철 선교사님이 일본 선교를 위해 후쿠오카의 역 근처에 있는 조그마한 공 원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거기서 버너에다 물을 끓이고 있는데, 웬 할아버님 한 분이 다가 오셔 가지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았다. 한국에서 온 크리스천이라고 하니까, 그 할아 버지는 가서 오렌지 한 봉지를 사왔다. 나 중에 알았지만, 그 오렌지 가격은 한 5천 엔, 약 한화 5만원 어치 정도였다. 고마워가지고 헌금을 전달하니까 또 가서 밤을 또 사오셔서 먹 으라고 주셨다. 알아보니까 이 할아버지는 공원 저 귀퉁이에서 라면박스로 만들어 놓고 잠 을 자고 있는 노숙자였다. 미국, 일본의 동경의 신주쿠 공원 이런데 가보면요, 이 라면박스 같은 데에 집을 만들어놓고 사는 분들이 많다. 또 역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 다. 김 선교사는 너무 참 감사해서 다시 인사드리러 갔다. 아, 얼마나 그 사는 모습이 안타 까운지. 박스 위에다가 비닐을 쳐서 사는데 겨울에는 어떻게 겨울을 날 수가 있나 하는 걱 정이 들 정도였다. 거기서 김 선교사는 아주 감동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이 할아버지는 어 디 가서 음식 얻으면 옆에 있는 노숙자한테 다 나누어주었다. 전부 다 나누었다. 그래서 김 선교사는 할아버지께 물었다. 아니, 할아버님, 할아버님 받으신 것으로 이렇게 다 나누어 줍니까? 그랬더니, 그 할아버님이 이것 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니까 내가 하나님 의 은혜를 나누기 원한다. 고 대답하셨다. 아, 노숙생활 하면서도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면 서, 옆에 있는 사람을 돕고 계셨다. 참으로 감동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선교사는 자기 동료들이 있는 데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성령님이 마음에 감동을 주셔 서, 손톱깎이를 사서 할아버지 있는 곳에 다시 갔다. 할아버님, 제가 손톱 깎아드릴게 요. 김 선교사는 제대로 손톱을 한 번 제대로 깎지 않아서 때가 덕지덕지 끼고 긴 손톱을 하나하나 다 깎아드렸다. 할아버지는 아유, 이런 일이 어디 있을 수 있냐. 고 하면서 자 꾸 말리셨다. 그래도 선교사는 발톱도 깎아드리려고 했다. 아이고, 발이 더러워서 안 된 73
다. 고 하셨다. 그래도 깍아 드리려고 양말을 벗겼다. 시커멓게 때가 묻고 더럽고 냄새나 고 또 발가락 사이에 때를 뺀다고 이쑤시개로 쑤셔가지고 상처가 나서 곪은 그 분의 발가 락 하나 하나를 깎아드렸다. 깎은 것들이 쌓여 있는 것들을 보는데, 갑자기 마음속에 주님 음성이 들려왔다. 사랑하는 아들아, 고맙다! 지금까지 아무도 내 손톱 발톱을 깎아주지 않았는데, 네가 해 주는구나. 정말 고맙다! 선명한 주님의 음성이었다. 깜짝 놀라 할아버지를 보니 눈물을 흘 리고 계셨다. 할아버지의 눈망울을 가득 채운 눈물 속에 주님의 얼굴이 보였다. 초라한 노 숙자 할아버지와 주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주님은 냉대 받고 버림받은 영혼과도 함께 계셨 다. 저의 두 손 가득 주님의 발 냄새가 묻어났다. 자신도 노숙자인 처지에 더 가난하고 헐 벗은 이들을 위해 살고 있는 무명의 작은 자의 모습에서 김 선교사는 예수님의 사랑을 절 실하게 깨달았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사랑은 요란한 소리 없이 영혼에서 영혼으로 전달되 는 사랑의 나눔이라는 사실을 마음 깊이 새길 수 있을 것이다. 74
개교 100년, 새 사람 새 역사 서울신학대학교를 위해 대학사회에 몰아치는 거친 빗줄기와 희망의 우산을 펼쳐주십시오 삭막한 경쟁 속의 따가운 햇살로부터 서울신학대학교의 내일을 지켜주십시오! [ 서울신학대학교를 지키기 위한 선교헌금보내기운동 동참교회 ] 서울중앙 나눔교회(양동춘) 늘푸른교회(최원영) 동부교회(전현석) 동일교회(안막) 명광교회(박희수) 묵동교회(문교수) 비전교회(정방원) 새로운교회(이경규) 성락성결교회(지형은) 성진교회(정태균) 약수동교회(공수길) 이문동교회 (김용주) 임마누엘교회(이광수) 장충단교회(박순영) 중앙교회(한기채) 청계열린교회(이두상) 청량리교회(박명철) 청학성결교회(황은연) 한누리교회 (최하용) 행복한교회(이상의) 서울동 동안교회(박상진) 명덕교회(김명채) 천호동교회(여성삼) 서울서 가좌동교회(김영민) 꿈이있는교회(양형태) 넘치는교회(민경임) 대광교회(오봉석) 대화제일교회(이진숙) 로고스교회(안성우) 문정교회(임찬희) 문화촌교회(한웅) 북아현교회(신건일) 새샘교회(조종건) 새원당교회(김수환) 세현교회(정진호) 신명교회 (이도윤) 아현교회(조원근) 역촌교회(이준성) 예본교회(이인수) 예수향교회(윤갑준) 은평교회(한태수) 은혜로운교회(이돈칠) 일산교회(곽장준) 증가교회(백운주) 청암교회(이영택) 홍은교회 (서도형) 서울남 강변교회(장병일) 광성교회(김재운) 만리현교회(이형로) 목자교회(마형락) 산돌교회(황영철) 상도교회(박권배) 서울교회(임종기) 서울남부교회(정경환) 서울수정교회(신익수) 성만교회(구선우) 성천교회(이규승) 수정교회(조일래) 신촌교회(이정익) 연희교회(최기성) 하나교회(최종명) 한사랑교회(최영택) 헤브론교회(김일수) 흑석중앙교회(조영한) 서울북 길음교회 (임명빈) 도봉교회(조병재) 백합교회(진인호) 본교회(조영진) 성북교회(최종진) 성북제일교회(이한복) 영안교회(방복순) 전곡교회(이도행) 서울강서 공원교회(장희윤) 광명중앙교회(조남국) 광복교회 (김덕규) 대신교회(박현모) 서울강림교회(문관식) 신서교회(김성영) 신성교회(김성현) 오류동교회(조종환) 임마누엘교회(신현정) 큰나무교회(박명룡) 평안교회(안희성) 하늘교회(염완용) 화곡성결교회 (조범식) 서울강남 명동교회(장종구) 반포교회(위정식) 삼성제일교회(윤성원) 새소망교회(유제성) 영동중앙교회(양정규) 충무교회(성창용) 한우리교회(윤창용) 서울강동 낮은자리교회(김은득) 인천동 당미교회(한승배) 부평시민교회(이석윤) 부평신촌교회(정찬선) 부평제일교회(김종웅) 부평중앙교회(권오균) 비전교회(이춘오) 새빛교회(신상범) 생명샘교회(정태근) 인천서 대곡교회(김현배) 도원교회(최재봉) 만석교회(이기수) 석남중앙교회(이영록) 인천남 감동교회(황사라) 새힘교회(강경천) 생명샘교회(남준우) 서인천교회(송창학) 성산교회(김도석) 신성교회(이동원) 인천제일교회(장길선) 주안교회(진영학) 활천교회(강영주) 인천중앙 비전교회(신남옥) 십정동교회(정명근) 아름다운교회(유동희) 용현교회 (박인철) 지구촌교회(고광배) 부천 나눔과섬김의교회(김형락) 부천삼광교회(심원용) 소사제일교회(이진수) 시흥제일교회(허명섭) 실로암교회(이명재) 지산교회(정재학) 크신사랑교회(박정순) 큰샘교회 (김용철) 한사랑제일교회(김경태) 행복해지는교회(정은일) 경인 대부천교회(김원천) 부천교회(김세일) 성진교회(노흥호) 경기동 송정교회(정경원) 시온성교회(임홍수) 이천동부교회(고제민) 후포교회 (이명주) 경기중앙 오산평화교회(최석원) 큰믿음교회(박철우) 경기남 동부교회(조규동) 두창교회 (김동혁) 백암교회(이호균) 보배교회(이명섭) 사랑의교회(남성호) 삼죽교회(김영선) 안성교회 (김기현) 용인바울교회(박종석) 원평좋은나무교회(노용현) 은광교회(김영선) 일죽제일교회(남승우) 죽산대교회(양정환) 평택교회(정재우) 경기 성북교회(이용일) 일심교회(박신기) 풍산교회(박경순) 경기서 광명비전교회(김한석) 세한교회(주남석) 안양중앙교회(손제운) 양천교회(정철환) 예향교회(오국영) 경서 동수원교회(송태헌) 강원동 거문교회(권영택) 남평교회(전병동) 도계교회(김영현) 샬롬교회(양형철) 속사교회(장기동) 속초교회(권영기) 아름다운교회(신동철) 안디옥교회(김지용) 은샘교회(김덕래) 주문진교회(송재형) 진부교회(전용선) 참좋은교회(심봉섭) 강원서 무장교회(정현교) 잠실효성교회(김홍양) 엘림교회(오주영) 하성제일교회(민경익) 백승대(원주남문) 사랑의교회(이재호) 새춘천교회(신재원) 서원주교회(강두명) 선한이웃교회(김중천) 세상을비추는교회(남기철) 소양교회(이원호) 소양제일교회(이주호) 안흥교회(변낙연) 양문교회 (강철구) 원주남문교회(양기동) 철원평화교회(양희선) 춘천나눔교회(피종호) 춘천새소망교회(김지백) 춘천제일교회(김승범) 춘천중앙교회(유동선) 태장교회(김동오) 하늘평안교회(오생락) 횡성교회 (김응세) 충북 덕산교회(조경신) 제천동신교회(문순기) 청주 뉴월드교회(양기성) 서문교회(박대훈) 운동교회(기형선) 은파교회(박도훈) 청주미평교회(박성호) 청주서원교회(송성웅) 청주신흥교회 (김학섭) 초양교회(강환식) 충청 아산천호교회(김주섭) 온양교회(이재두) 천안교회(윤학희) 충서 금당교회(차신철) 대천성결교회(송천웅) 동산교회(이기훈) 반석샘물교회(김영규) 서산교회(이기용) 서산중앙교회(이종남) 서천중앙교회(김광세) 석남교회(김광호) 성민교회(김일승) 안면교회(류찬식) 운산교회(송윤섭) 인정교회(최진선) 홍성교회(김형배) 충서중앙 간평교회(정찬) 당진교회(우경식) 대전동 대전삼성교회(신청) 대전소망교회(김호성) 대전서 대현교회(홍순성) 백운교회(류정호) 태평교회(노영근) 대전중앙 덕산반석교회(전재작) 삽교교회(이세영) 세류교회(이영주) 예산서부교회(서윤동) 예산성결교회(최상문) 옥금교회(류광열) 참좋은교회(이민재) 동명교회(백장현) 성암열린교회(박애록) 신일교회(홍승표) 인동교회(김윤기) 정동성결교회(이용윤) 주명환(증약교회) 남대전교회(박재규) 대전교회(허성도) 대전선화교회(차승환) 대전열방교회(이종문) 대전중앙교회(박홍규) 비전성결교회(백광현) 산성교회(오두환) 서대전교회(박용규) 선교교회(민현기) 정림교회 (정형교) 충일교회(김낙문) 충남 가중교회(채교진) 노성교회(임종한) 논산새순교회(박태수) 논산성결교회(김영호) 병촌성결교회(임용한) 부두교회(서정혁) 부여중앙교회(신윤진) 석동교회(손상욱) 소양교회(이재천) 은산교회(설광동) 장평중앙교회(박종현) 채산교회(채종석) 홍산교회(이병기) 충청중앙 공주중앙교회(진상선) 금사교회(박영수) 소정제일교회(민성기) 송덕교회(이준호) 신풍교회 (김상익) 전의교회(이규헌) 조치원교회(최명덕) 호계교회 사곡선교회(이인성) 전북 금마교회(홍종효) 꿈이있는교회(김영찬) 사랑의동산교회(김중현) 새롬교회 익산중앙교회(김태철) 주사랑교회(강복숙) 한빛누리교회(김일곤) 전주 동산바울교회(문민석) 드림교회(김효선) 성민교회(주용민) 정읍성결교회(전병일) 하리교회(민경휘) 전북중앙 명광교회(박원종) 삼례교회(전병윤) 새전주교회(김복철) 전북서 군산삼학교회(류은택) 군산중앙교회(홍건표) 그리심교회(윤두현) 남군산교회(이종기) 밀알교회(강근호) 서군산교회(김흥남) 평안교회(조병문) 전남동 병풍교회(김대운) 지구촌교회(김용암) 전남서 북교동교회(김주헌) 한소망교회(오영환) 광주 광주주월교회(한호) 하나교회(권재봉) 전남 강진제일교회(조규철) 순천연향교회(윤세광) 여수교회(박세훈) 장흥고마교회(박홍식) 장흥제일교회 (심천식) 한소망교회(홍삼열) 전남중앙 바울교회(김성남) 양장교회(서봉국) 광주동 남도교회(이성균) 생명시냇가교회(김형구) 성산교회(서대인) 경북 경주중부교회(이종래) 군위교회(허병국) 비안교회(임희규) 성은교회(김명환) 안동교회(이규철) 의성교회(박종섭) 포항교회(유승대) 한마음교회(최정훈) 대구 대민교회(정성규) 동광교회(김기환) 삼일교회(박현규) 수성교회(김종두) 정성규 (대민교회) 충신교회(윤영철) 현풍성광교회(박우경) 경북서 구미중앙교회(김진호) 예원교회(백영길) 원호교회(김시영) 인평교회(채수호) 태촌교회(심현동) 풍성한교회(이주형) 부산동 온천중앙교회 (정민조) 한누리교회(조예연) 부산서 대사교회(권세광) 대연교회(임석웅) 동광교회(이창훈) 부용교회(김동운) 북일교회(황용득) 수정동교회(조관호) 은혜교회(최현호) 하늘빛교회(신종은) 경남 김해대성교회(고승찬) 김해제일교회(안용식) 김해활천교회(박성숙) 밀양교회(고성래) 시온중앙교회(최도훈) 진영교회(안경수) 창원제일교회(최준연) 청운교회(조일대) 평강교회(한상열) 한빛은혜교회 (이충구) 경남서 거창교회(김성철) 세향교회(홍상걸) 안디옥교회(박영진) 우리들교회(이경섭) 장평교회(오홍환) 지석교회(정성진) 충무중앙교회(김철호) 충일교회(박문곤) 태평교회(신완식) 울산 양산교회(이성환) 평산등대교회(최두영) 제주직할 청수교회(최창환) 미주 나성성결교회(정호윤) 둘로스선교교회(황의정) 기타 경주기독문화원(신대위) 권중원 데이빗추 예은화장품(주) (김용태 장로) 주은혜림교회(오승자) 미확인 3월분선교비 3월신학대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우리교회 김순열 명광교회 송영권 은혜교회 이충근 정해철 후원헌금 (총 376개) * 오늘도 선교헌금보내기운동에 동참을 약정한 교회수는 계속 늘어나고 있습니다. 위 동참교회는 2014년 10월 31일 통장입금분까지 기재한 것이오니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 총 회 장 서울신학대학교 이 사 장 총동문회장 총 장 이 박 박 유 신 용 대 석 웅 규 훈 성 모금위원회 위 원 장 백장흠 목사 부위원장 김충룡 장로 총 무 이기수 목사 후원계좌 국 민 은 행 238501-04-198437 예금주_ 학)서울신학대학교 농협중앙회 301-0059-1909-81 예금주_ 학)서울신학대학교 후 원 문 의 032) 340-9107(대외협력실) 75 류정호 목사 윤성원 목사 이준성 목사 최기성 목사 박대훈 목사 이대일 목사 손재연 장로 장광래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