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벽치기 기사모음 목록> 001. 87년 7월 11일. 일간스포츠. 수벽치기 계보찾았다 002. 88년 1월 22일. 일간스포츠. 연재기사(4회). 003. 89년 2월 19일. 일간스포츠. 몸보다 마음을 중시하는 무예의 정신 004. 88년 5월 26일. 한국일보. 지평선 005. 88년 9월 24일 중앙경제 함께 지키는 건강 수벽치기, 택견 006. 89년 7월 24일. 경향신문. 전통무예 수박희 무대예술화 007. 89년 경향신문 맥을 잇는다 008. 89년 12월 17일. 일간스포츠. 울타리굿 관련 기사 009. 90년 6월 2일. 한겨레신문. 고유무술 수벽치기 다리놓기 20년 010. 90년 10월 1일. 중앙경제. 월요 건강체조 011. 90년 12월 2일. 일간스포츠. 수벽치기엔 민족정기가... <<우리무예이야기>> 발간 012. 90년 12월 9일. 중앙일보. <<우리무예이야기>> 발간 기사. 013. 91년 1월 24일. 시사저널. 중국무술 베낀 무예도 보통지 014. 91년 5월 7일. 한겨레신문. 무예도보통지 중국무술 베낀 것 015. 92년 1월 19일. 중앙일보. 전통 氣 무예 되살린다 016. 92년 1월 23일. 일간스포츠. 만능예능인 기른다 백제전문대. 017. 92년 1월 31일. 중앙일보. 민속체조는 수벽치기 표절 018. 92년 2월 8일. 일간스포츠. 활인심방 민속체조연구발표 표절시비 019. 92년 7월 28일. 일간스포츠. 대학생 육사생도 맥잇기 한마음
020. 94년 8월 20일. 일간스포츠.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나니>> 발간 021. 94년. 주부생활. 022. 94년 12월 15일. 시사저널. 023. 96년 11월 30일. 중앙일보. 024. 98년 7월 16일. 프랑스 르몽드 1면. "빗속에서 춤을 추다" 아비뇽 축제. 025. 98년 6월 9일. 경향신문. 센강에서 론강까지 코레의 열풍 아비뇽 기사. 026. 98년 6월 15일. (미상) 아비뇽 기사. 027. 98년 7월 17일. 동아일보. 아비뇽, 한국열풍 028. 99년 8월 14일. 한국일보. 한국무예 연재. 029. 2000년 4월 3일. 중앙일보. 이헌익의 인물 오디세이 030. 2004년 6월 4일. 헤럴드 경제. 배우 유오성 친구 잊고 초심으로
001. 87년 7월 11일 일간스포츠
002. 88년 1월 22일 일간스포츠 연재
003. 89년 2월 19일 일간스포츠
004. 88년 5월 26일 한국일보 005. 88년 9월 24일 중앙경제
006. 89년 7월 24일 경향신문
007. 89년 경향신문
008. 89년 12월 17일 일간스포츠 (울타리 굿, 사진 맨 왼쪽 육태안 선생님)
009. 90년 6월 2일 한겨레신문
010. 90년 10월 1일 중앙경제
011. 90년 12월 2일 일간스포츠
012. 90년 12월 9일 중앙일보
013. 91년 1월 24일 시사저널
014. 91년 5월 7일 한겨레신문
015. 92년 1월 19일 중앙일보 016. 92년 1월 23일 일간스포츠
017. 92년 1월 31일 중앙일보 018. 92년 2월 8일 일간스포츠
019. 92년 7월 28일 일간스포츠 020. 94년 8월 20일 일간스포츠
021. 94년 주부생활
022. 94년 12월 15일 시사저널
023. 96년 11월 30일 중앙일보
024. 98년 7월 16일 프랑스 르몽드 1면 기사
025. 98년 6월 9일 경향신문
026. 98년 6월 15일 (미상) 아비뇽 기사
027. 98년 7월 17일 동아일보
028. 99년 8월 14일 한국일보
029. 2000년 4월 3일 중앙일보
030. 2004년 6월 4일 헤럴드 경제 '친구' 잊고 초심으로 SBS '장길산' 주연 유오성 연기자 길은 절실한 생존문제 '챔피언' 실패 내겐 오히려 보약 전통무술 수벽치기 수련 한창 탈춤ㆍ소리도 완벽구현 구슬땀 유오성이 배우로서, 그리고 인간으로서 하나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노정에 자신을 올려놓았 다. SBS 대하사극 '장길산'의 타이틀 롤을 맡아 다시금 심기일전하는 모습을 보이겠다는 게 유오성의 결의다. 누구에게나 삶의 굴곡은 있다. 올해 서른아홉의 배우에게도 예외는 아니다. 연극배우로 시 작해 미남 연기자들 사이에서 조연으로 묻혀버릴 수도 있었던 그는 영화계와 방송계에서 선 굵은 인물을 담아내려 할 때마다 캐스팅 1순위에 오르는 배우가 됐다. 숱한 시선이 유오성 이란 자연인을 '공인' 반열에 올려놓았고, 급작스러운 변화에 그는 휘청거렸다. 질타과 책망을 뒤로 하고 그가 다시 선다.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있다. 유오성은 열정 어린 눈빛으로, 그리고 정좌한 몸가짐으로 초심을 드러냈다. 자신을 가다듬고 '인간의 도리' 를 다하겠다는 뜻을 조심스럽게 표출했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수벽치기 연구원'에서 '하심 ( 下 心 ㆍ자신의 교만과 아집, 거만함을 버리고 자신을 낮추는 마음자세)으로 '구전심수( 口 傳 心 授 ㆍ말로 전하고 마음으로 가르침)'를 하고 있다는 유오성을 만났다. -장길산이 되기 위한 준비는 어땠나. 광대패 출신 장길산은 어려서부터 무예에 능했다. 촬영에 들어가기 전부터 오전 6시에 일 어나 아침에는 김종엽 선생에게 서도소리와 봉산탈춤을 전수받고, 남사당놀이와 말타기를 익혔다. 오후에는 매일 수벽치기를 수련해왔다. 이는 드라마 '장길산'만을 위한 행동이 아니 다. 나 스스로를 닦기 위한, 잡것을 꺾기 위한 상징적인 수련이다. '장길산'을 찍는 동안에 도 계속 수련할 것이다.
-장길산이 지닌 역사적ㆍ사회적 의미 때문에 어깨가 무거운 것으로 안다. 김성수 감독으로부터 언젠가 "넌 장길산 하면 딱인데"라는 말을 들었는데 '장길산'에 캐스 팅돼 망치로 맞은 듯한 느낌이었다. 장길산 역에 응한 것은 장길산의 사회적 의제, 즉 공동 선을 실현하기 위한 혁파사상에 동의하기 때문이다. 잘못된 세상에서 남자라면, 인간이라면 발언을 하고 싶은 욕구가 있으나 사회성 때문에 참는 경우가 많을 것이다. 조선시대 3대 의 적 중 홍길동과 임꺽정은 자신을 중심으로 민중이 규합됐다면, 장길산의 경우는 주위의 많 은 사람에 의해 만들어지는 인물이다. 민주주의에 가장 어울리는 영웅이다. 배우도 여러 사 람을 통해 정형을 갖춰가는 직업이라는 점에서 같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서 '큰 인물'을 그리려 할 때 꼭 떠오르는 배우라고 여겨지는데. 직선적이면서도 단순과격한 이미지로 많이 비춰졌으나 TV 드라마에서는 멍청하고 순박한 역할도 많이 맡았다. 주로 배우들에게는 코믹배우다, 혹은 액션배우다, 멜로배우다 하는 수 식어가 붙게 마련인데 나는 그러한 전형성을 부여받은 것이 없다. 뚜렷한 캐릭터가 전달되 지 않는다는 단점도 있겠지만 이것이야말로 내가 지향했던 점이다. 배우를 20대에만 할 게 아니기 때문에 끊임없이 연기력을 연마해야 한다. 특정 색깔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여러 역 할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안겨준다고 본다. -영화 '챔피언'에서 김득구 역을 비롯해 영화 '도마 안중근'과 드라마 '장길산'의 타이틀롤을 맡아 연이어 역사적 인물을 맡았다. 지난 1월부터 두 달간 중국 올로케이션으로 안중근 의사의 의거 전후를 집중적으로 그린 '도마 안중근'이라는 영화를 찍었다. 개인적으로는 이미 소설화된 '장길산'이라는 인물이나 한 세기 전 의사( 義 死 )한 안중근 의사보다는 작고한 지 얼마 안된 김득구라는 인물을 연기 하는 것이 가장 부담스러웠다. 소설 '장길산'의 영웅주의는 심하지 않으나 영상매체 특성상 절대적인 존재로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물을 연기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던 것 은 아니고, 그렇게 이미지메이킹을 한 적도 없는데 역할이 주어졌다. 모든 것이 '운명'이라 고 생각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배우로서의 정체감이 궁금하다. 어떤 배우가 돼야겠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배우가 된 것은 절실한 생존 문제 였다. 나는 배우이기 이전에 한 여자의 남편이고, 한 아이의 아빠라는 의식이 크다. 직업은 한 인격체로 존재하기 위한 수단이다. 살아가며 각자 생각하는 인간상에 가까워지기 위해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한 인간으로서 원칙과 상식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다는 바람이 더 크 다. 연기란 사회인 유오성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사회와 인간에 대해 계속 배워나가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배우로서 자신의 위치는 어떠한가. 나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열심히 생각해보지 않았다. 다만 형들과의 변별력을 가지고 싶었 다. 4남1녀 중 둘째형은 서울대 교수고, 셋째형은 검사다. 그러다 보니 시험지 답안이 아닌, 절대평가가 아닌 몸으로 하는 것에 치중했다. 형들에 대한 콤플렉스로 출발하기는 했지만 나만의 것을 추구해왔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 과도기라고 생각한다. 영화 '친구'로 떴다는 표현을 많이 썼지만, 뜨고 말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나는 배우로서 가고 있는 거다. ' 챔피언' 출연 후 '별'을 망해 먹고 한참 쉬던 3, 4년이 배우로서는 카오스 시기였다. 배우는 언제나 평정심을 유지해야 하는데 '별'을 찍으면서 고아였던 주인공마냥 나의 심리 상태도 지쳐 있었다는 것이 아쉽다. -'폭행설' 등 안 좋은 소문도 많았다. 사소한 일들이 침소봉대되는 일이 많았다. 그것이 배우로서 딜레마였다. 배우가 맡은 인 물을 그려나가는 데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 그런데 인간에 대한 신 뢰와 믿음, 우정이 무너지면서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최선을 다해 연기하는 시간만으로도 부족한데 상대적인 잣대로 평가내려지는 데 대한 거부감도 컸다.
-쉬는 동안 무엇을 했나. 그 동안 대한민국 사회에서 배우로서의 가치가 뭔지 고민을 많이 했다. 조선시대 500년 역사에서 광대는 천민이다. 500년이나 지난 1960년대 초반에 와서야 인간문화재로 지정되 며 겨우 인정받기 시작했다. 현대의 광대인 연예인이라 통칭되는 직업군이 자본주의 사회에 서 높은 출연료로 일정한 사회적 지위를 확보한 듯 보인다. 그러나 냉정하게 바라보면 이것 이 연예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존중은 아니다. 예술가로서 평가받는 것은 내가 죽고 난 다음 에나 이뤄지지 않을까 한다. 어쨌든 성북동에 직접 설계하고 직접 흙과 돌을 날라 우리 가 족이 살 집을 지었다. 직접 육체노동을 하다 보니 잡념이 사라지더라. -마지막으로 배우로 서, 또 '장길산'에 임하는 각오가 있다면. '장길산'을 준비하며, 우리 전통에 대해 하나도 모르고 살았다는 게 충격이었다. 서도소리, 봉산탈춤, 검술 세 가지는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다. 배우로서는 초심으로 돌아가겠다. 부단 히 나 스스로를 괴롭힐 작정이다. 드라마가 잘 돼야 한다는 부담을 차치하고라도 내 자신에 게 있어 절대적인 싸움의 시간이라고 여긴다. 김태은 기자(tekim@heraldm.com)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m.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