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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 강제근로의 금지 폭행의 금지 공민권 행사의 보장 중간착취의 금지 41 - 대판 , 2006도7660 [근로기준법위반] (쌍용자동차 취업알선 사례) 11 균등대우의 원칙 43 - 대판 , 2002도3883 [남녀고용평등법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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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동북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인 쇄 2004년 12월 발 행 2004년 12월 발 행 처 발 행 인 편 집 인 통일연구원 통일연구원장 협동연구팀 등 록 제2-2361호 (97.4.23) 주 소 (142-887)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6동 535-353 전 화 (대표) 900-4300 (직통) 901-2551, 2645 (팩시밀리) 901-2546 홈페이지 http://www.kinu.or.kr 가 격 6,500원 c 통일연구원, 2004 통일연구원에서 발간한 간행물은 전국 대형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구입문의) 정부간행물판매센타: 매장: 734-6818 사무실: 394-0337 국립중앙도서관 출판사도서목록(CIP) 동북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 최진욱...[등저]. 서울 : 통일 연구원, 2004 p. ; cm. -- (인문사회연구회 협동연구총서 ; 04-16) 참고문헌수록 ISBN 89-8479-273-X 93340 911.0099-KDC4 951.9-DDC21 CIP2004002325

동북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본 서는 인문사회연구회 2004년도 협동연구사업 의 일환으로 인문 사회연구회 소관 9개 국책연구기관과 5개 외부단체가 협동으로 수행한 연구과제 중 하나입니다. 본 서에 수록된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인 견해이며 당 연구원의 공식적인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요 약

한국은 전 세계 150여 개국에 660만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의 대 부분은 미국 210만 명, 중국 210만 명, 일본 90만 명, 러시아(독립국가연 합) 60만 명 등 주변 4대국에 거주한다. 한인 재외동포 수는 이탈리아 (6,000만 명), 중국(2,500만 명), 이스라엘(1,800만 명), 멕시코(1,800만 명), 우크라이나(1,200만 명)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 이는 우리보다 인구 가 훨씬 많은 인도(480만 명)나 일본(260만 명)보다도 많은 수이며, 전체 한인 인구 대비 해외동포들의 비례로 보면 7.5%로, 이탈리아, 이스라엘 다음 가는 높은 비율이다. 해외 한민족 사회의 형성 연원이 오래 되었고 이주 배경도 다양하지 만, 여전히 높은 수준의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 관습, 생활양식 등을 유지 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한민족 동포사회가 점차 일본, 중국, 러시 아라는 국가체제에 동화되어가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동포사회는 여전히 한민족 으로서의 정향을 버리지 않고 있다. 한민족 공동체는 통일된 단일국가 형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각 국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 성원들을 하나의 민족이라는 동질성과 동포의 식에 바탕을 두고 정서적 연대를 형성하는 문화공동체의 성격이다. 즉 각 국에 존재하는 한민족 사회의 연결망 또는 유대체제를 말한다. 한민족 문 화공동체의 형성을 통해 무한경쟁의 세계화시대에 공동대처하는 협조체 제를 구축하고 나아가 남북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국의 한 민족 사회를 연결하는 조직망을 구축하고, 지도자를 양성하며, 공동의 이 익을 확장하는 사업 등이 요구된다. 본 연구는 한민족 문화공동체 형성방안을 제시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 로서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의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 과정과 실태 를 분석한다. iii

1. 일본내 한민족 사회의 특징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의 산물로 형성되기 시작한 재일 한인사회는 대체로 하층 노동계층으로 빈곤한 생활을 영위하며, 대도시 주변의 집단부락을 형성하면서 생활하였는데, 1945년 종전시 약 200-240만 명 정도로 추산되었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한반도로 귀환하고, 약 60만 명 정도의 한인이 남아 전후의 재일교포사회를 형성하였다. 재일한인들은 회복된 민족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1945년 10월 좌우 세력을 망라한 한민족단체인 재일조선인연맹 을 결성하였으나, 한반도 분단에 따른 남 북한의 정치적 영향으로 재일 한인사회는 분열되고 대 립하였다. 한국을 지지하는 재일한인들은 조선건국촉진청년연맹 (건청) 신조선건설동맹 (건동)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민단)을 중심 으로 결집하였고, 북한을 지지하는 한인들은 재일조선인연맹 (조련)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민전)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조총련)를 중 심으로 결집하였다. 즉, 재일 한인사회는 비극적인 한국근대사의 쓰라림 과 민족의 분단의 아픔 속에서 형성되었다. 따라서 재일 1 2세 한인들은 민족의식이 매우 강하였고, 일본사회에 정착한다 는 생각보다는 언젠가는 고국으로 돌아간다 는 생각을 가슴에 품고 생활하였으며, 정치적 경제적 차별에도 불구하고 일본으로의 동 화 귀화에 강하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한국에서 태어난 1세들이 거의 사망하고, 2세에 이어 3 4세가 재일 한인사회의 중심을 이루면서 일본 정주생활에 따른 동화 성향이 점 차 강해지고 있다. 3 4세가 중심을 이루고 있는 재일 한인사회의 문화 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재일한인 3 4세들은 일본사회에 정주하여 대체로 안정된 생활 을 하고 있기 때문에, 민족, 이념 등 보다는 일상적 이해관계에 더 관심 을 가지면서 일본사회에 적응해 살아가고 있다. 즉, 재일한인 3 4세들은 문화적으로 상당히 동화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는 향후 일본으로 의 귀화자가 더욱 증가할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다. 둘째, 탈냉전시대의 도래에 따른 일본 국내외의 이데올로기 대립의 약 iv

화,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의 전개에 따른 남북관계의 개선 및 긴장완화 등의 영향으로 민단과 조총련간의 대립구도가 약화되고 있고, 조총련에서 민단으로 전환하는 한인들이 증가하고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의 영향으 로 조총련에서 민단으로 즉 국적 전환을 한 한인들은 예전과는 달리 조 총련계 한인들과의 인간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이는 향후 조총련 에서 민단으로 전환하는 한인들이 더욱 증가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 며 민단계 한인들과 조총련계 한인들의 화해 협력이 한층 활성화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셋째, 재일한인 2 3 4세들의 민족의식 약화로 인하여 민단과 조총련 이 조직의 쇠퇴와 몰락의 위기상황을 맞이하고 있는 것은 한인공동체의 장래를 매우 어둡게 하고 있지만, 최근 일본사회에서 불고 있는 한류의 영향으로 재일한인 3 4세들의 한국 및 민족문화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 고 있고, 민단 조총련의 교류 증대는 한민족문화공동체의 유지에 긍정 적으로 기능할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의 한인사회에는 1965년 한 일 국교정상화 이후 도일하 여 정착한 소위 뉴커머(new comer) 그룹이 있다. 이들은 한국에서 대 체로 일정 수준 이상의 교육을 받고 일본에 왔고, 따라서 문화적으로 한 국과의 연계아래 일본속의 현대한국문화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일정 부 분의 역할을 행하고 있다. 따라서 민단과 조총련계 한인사회의 화해 협력의 증대와 더불어 민 단 조총련 뉴커머 등이 민족문화의 계승 발전을 위한 협력운동을 적 극적으로 전개할 경우, 이는 일본 내의 한민족문화공동체를 유지 발전 시키면서 한 일 문화교류에 적지 않은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일본 내의 한민족문화공동체의 유지 발전과 더불어 한일 문화교류의 활성화 및 문화적 상호이해의 증대는 동북아문화공동체의 형성 구축에 도 매우 중요하다. v

2. 중국내 한민족 사회의 특징 조선족이 오늘의 중국 영토에 이주하여 집단적인 군락을 이루고 살게 된 것은 19세기 후반부에서 1940년대까지에 걸친 시기이다. 중국 조선족 들의 이주 시기는 대체적으로 두 시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조선조 중엽부터 대한제국의 초엽을 거쳐 1910년 한일합방 에 이르는 시기이며, 제2기는 한일합방 이후에서 1945년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까지이다. 중 국내 조선족은 다음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중국내 조선족들은 경계인 으로 살고 있다. 일부의 중국 내 한민 족들이 조선인 또는 한국인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들의 거의 대부분은 한국인도 아니고 조선인도 아닌 중국의 조선족이라고 자 신들을 규정한다. 중국 내 한민족은 중국 55개 소수민족의 일원으로서 중 국을 조국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들에게 한국은 조상의 나라일 따름이지 모국은 아닌 것이다. 중국 내 한민족들이 자신을 중국 국민이라고 이야기 하고 있지만, 중국 사회의 핵심 구성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중국경제 정치의 주류에 속해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경계인 (border person)으로 살고 있다. 장기 이주의 인생역정을 통해 2가지 이상의 민족적, 문화적 범주 속 에서 어느 한 곳에서도 분명하게 자신의 소속감을 가지지 못하고 서로 다 른 사회문화 정체감의 사이에 위치한 모호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중국 내 한민족들은 한국과 중국에서 모두 주변인 으로 인식되고 있다. 둘째, 중국내 조선족 사회는 세계 한인사회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 는 자치주를 설치 운영하고 있다. 중국 내 한민족사회는 여타 지역의 한 민족사회에 비해 강력한 공동체사회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가장 큰 이유 는 집단적인 삶을 영위하는 공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연변자치주와 장 백자치현 등은 중국 한족사회와 격리된 폐쇄적 농촌공동체를 유지하여 왔기 때문에 한민족으로서의 동질성과 문화적 전통을 유지 보존할 수 있었다. 특히 한민족은 중국 동북지역에 벼농사를 전파하였는데, 물줄기 를 따라 집단적으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논농사를 함으로써 공동체 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다. vi

그러나 중국내 조선족 자치지역에서 한민족의 인구비율이 감소하고 있 다. 가장 큰 이유는 중국정부가 소수민족 자치지역에 한족을 이주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내 한민족사회 와해의 또 다른 원인은 타 민족에 비 해 인구증가율이 낮다는 점이다. 조선족의 도시 이동과 집거지 붕괴는 조 선족 전통문화, 언어, 민족학교를 유지시키는데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 다. 중국 내 한민족의 응집력을 강화시킬 수 있는 고유의 종교와 민족 지 도자가 없다는 점도 한민족 자치지역의 위상에 영향을 주는 요인이 되고 있다. 셋째, 중국내 여러 소수 민족 중 조선족은 고국을 갖고 있는 민족이다. 1980년대 이래 경제건설과 반패권과 함께 국가통합을 3대 국가정책 목표 로 설정해 온 중국으로서는 소수민족의 분리 독립 가능성에 대해 극도로 경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쟝과 시장지역의 분리 독립 운동으로 인하여 중국사회 불안이 조성되고 미국과 유엔 등 국제사회로부터 비판의 대상 이 되어 왔다. 따라서 중국은 당 통일전선부와 국무원 장관급 부서인 국 가민족사무위원회 등을 통해 중국 내 여러 민족과 계층을 통합시키는 데 주력해 왔다. 넷째, 중국 조선족은 높은 교육 문화적 소양을 지니고 있다. 중국 내 한민족은 진취적이고 개척적인 민족으로서 버려진 땅을 일구어 개혁 개 방기 이전까지 중국에서 가장 소득이 높은 지역으로 변화시켰다. 재중 한 인들은 중국내 다른 소수민족뿐만 아니라 한족에 비해서도 교육수준이 월등하게 높은 문화민족이다. 한민족은 문맹률이 낮고, 대학생 비율도 중 국 내에서 가장 높다. vii

3. 연해주내 한민족 사회의 특징 한인들의 연해주 정착은 1860년대 초 가난을 못 이겨 국경을 넘으면서 시작되어, 1937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될 때까지 18만 명에 달할 정 도로 성장하였다. 1956년 중앙아시아 억류가 해제되면서 조금씩 연해주 로 돌아오기 시작하던 고려인들이 본격적으로 연해주로 재이주하게 된 것은 소련이 해체된 1991년 이후였다. 연해주 한인들은 다음의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한 중 일 3국은 연해주와의 협력관계 속에서 서로 경영권을 확보하기 위해 경쟁하는 관계에 있고, 연해주 한인사회는 한국의 연해주 진출에 큰 자산으로 간주된다. 중국과 일본은 러시아의 협력 상대인 동시 에 경계대상이기도 하다. 중국은 연해주와 접경국으로서 만주 지역에 엄 청난 인구로 인해 러시아에 위협이 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1860년 북경 조약 이전 이 지역이 중국 영토였다는 점에서 더욱 러시아를 긴장시키고 있다. 일본 역시 러 일전쟁의 경험과 여전히 끝나지 않은 북방 4개도서 영토분쟁 등으로 인해 러시아의 경계 대상이다. 과거 중국과 수교후 중국진출시 중국내 조선족 사회가 한국의 중국진 출에 큰 도움을 주었던 것과 같이, 한국의 러시아 진출에는 고려인 사회 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물론 중국 조선족과 러시아 고려인들은 정체성 이나 언어 등에 있어서 차이가 있으나, 일본과 비교했을 때는 한국의 자 산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연해주의 다민족 문화 속에 한민족 공동체의 시험장이 될 수 있 다. 연해주 지역은 다양한 한인이 거주하며, 한인뿐만 아니라 다민족의 문화가 공존하는 지역으로 국가 간 그리고 민족 간 경계를 넘어서 상호 협력을 시도하기 위해 접촉하기 시작한 접경지대이다. 한인들이 동질성을 유지하고 자치역량을 함양시키고 있다. 특히, 한민족이 민족내부 관계를 잘 처리하여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해 가는 장소가 될 가능성이 있음과 동시에, 동아시아 지역협력에도 시사하 는 바가 크다. 연해주는 중앙아시아, 사할린, 남북한 등에서 다른 문화를 가진 한민족이 모여서 협력하며 생활하는 곳이다. 중국시장의 예에서 보 viii

듯이 중국 조선족과 고려인이 함께 일하면서 한국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 러한 면에서 연해주는 한민족 협력의 시험장이 되고 있다. 또한 남북한과 중국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연해주뿐만 아니라 동북아 지역 전체에 지역 통합과 민족통합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셋째, 러시아의 고려인에 대한 우호적 태도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고려 인은 연해주에서 독특한 지위를 차지하며 긴장요소가 잠재해 있다. 우선 연해주는 역사적으로 발해의 영토였다는 점에서 한국에게 각별한 정서적 유대감이 있다. 또한 한인 최초의 이민지이고, 중앙아시아 거주 한인들의 원고향으로 이들의 유입이 계속되고 있다. 최근에 한국 내에서 간도협약 이 무효이며, 1860년 중국이 조선령인 연해주를 러시아에 할양한 것도 무효라는 인식이 확산되는 등 장차 영토분쟁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넷째, 연해주 고려인들은 자치주 문제를 안고 있다. 1993년 재러시아 한인 명예회복에 관한 법안 이 통과되어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한인들의 명예회복과 거주지 원상회복의 권리가 부여된 것을 계기로 한인들의 민 족 자치구 문제가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러시아는 한인들에게 자치구를 허용하는 것에 대하여는 부정적인 태도 를 갖고 있으나, 한인들의 연해주 정착에 대하여는 환영하는 입장이다. 1998년 연해주지사는 연해주에 소재한 해체된 군사도시를 연해주 고려 인재생기금에 이양하여 무상으로 활용하게 하는 것에 대한 명령 이라는 공문을 고려인 재생기금 앞으로 보냈다. 이는 경제적 도움 못지않게 고려 인들의 연해주 재이주에 대한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고려인들의 연해주 정착을 환영한다는 정치적 의미가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이 공문에 따라 브즈드니젠카, 라즈돌노예, 포포프카, 플라토노보, 오레호보 등 5개 소가 고려인에게 주어졌다. ix

4. 동북아 한민족 사회의 공통점과 차이점 한민족 사회는 국가별로 하나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주 국가 내에서도 한인들의 다양한 정체성이 존재한다. 예컨대, 이주 1세대와 이후 세대간에는 정체성 보존과 현지동화의 정도 면에 있어서 차이가 있 다. 거주국 정부의 동화정책과 다문화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는 존재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주시기에 따라서도 정체성 보존의 차이가 나타난 다. 즉 이주할 시기의 모국 문화를 정체성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해외 한인들은 두 가지 이중 정체성을 갖게 된다. 하나는 거주국에 대 한 정체성과 한인으로서의 이중 정체성이며, 또 하나의 이중 정체성은 남 한과 북한 어느 쪽과 보다 동질감을 느끼는가이다. 해외 한인들이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오랜 기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대를 거듭할수록 정체성이 약화됨을 알 수 있다. 언어나 문 화에 있어서 현지화가 강화되고, 결혼 등에 있어서도 현지인과의 결혼이 증가되는 것은 어느 나라든 공통적인 현상이다. 러시아 정부의 소수민족 에 대한 동화정책으로 러시아 한인들의 한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은 비교적 약한 편이나, 일본과 중국의 한민족 역시 최근 정체성의 약화현상이 나타 나고 있다. 민족의식이 약화되어 간다는 세대별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국가별로 민족 정체성 및 한인사회의 동질성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 러시아 한인은 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약한 반면, 중국은 가장 강하게 유지되고 있 다. 한편, 일본은 탈냉전 이후 민족 정체성이 급격히 약화되고 있다. 러시 아 한인은 1937년 강제이주 이후 러시아 정부의 동화정책에 의해 모국어 를 상실하고 철저하게 러시아화를 거쳤다. 그러나 연해주의 한인사회에는 중앙아시아에서 온 고려인뿐만 아니라 사할린 출신, 중국 출신, 북한 출 신, 남한 출신 등 다양한 한민족이 살고 있으며, 비교적 동질성을 유지하 며 자치역량을 함양시키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3국 중 민족정체성은 가 장 약하나 러시아의 한인들은 연해주 지역으로 계속해서 몰려들면서 한 인 공동체를 키워나가고 있다. 중국 정부의 소수민족정책 덕분에, 조선족 사회는 모국어 교육을 공식 x

적으로 받을 수가 있었으며 모국어를 보존할 수 있었다. 결혼도 대부분 조선족간에 이루어지고 있으며, 조선의 문화와 풍습을 보존하고 있다. 연 변자치주는 중국 내 한민족 생활의 중심지이며 한민족 문화 보존지역으 로 남아 있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개방과 한 중 수교 이후 조선족들은 동북3성을 떠나 여러 곳으로 흩어지고 있다. 거주국의 경제적 차이에 의해서 한민족 사회의 사회 경제적 차이가 현저히 나타난다. 동북아 3국 중에서는 일본의 한민족 사회가 중국이나 러시아에 비해 직업이나 업종 그리고 전체 국민 대비 평균 소득 수준에 서 높게 나타난다. 동북아 3국의 한민족 사회가 한민족 공동체에 갖는 관심은 유사할지라 도, 그들의 실질적 참여는 상당한 차이를 보일 수 있다. 이는 각국의 정 치제도, 정치이념, 정치발전 정도와 한민족 사회의 정치 경제적 지위와 관련이 있다. 재중동포와 재러동포는 재일동포에 비해 정치참여에 대한 인식이 낮고 훈련도 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한민족 공동체의 참여 요청을 받을 경우에도 중국과 러시아의 경우 일본에 비해 거주국의 눈치를 보다 많이 살피게 될 것이다. 향후 한민족 문화공동체 형성시 이와 같은 동북아 한민족 사회의 공통 점과 차이점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xi

목 차 Ⅰ. 서론 1 1. 연구목적 3 2. 연구방법 및 구성 7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9 1. 재일 한인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11 2. 재일 한인사회의 실태 28 3. 재일 한인사회의 특징 및 정책적 고려사항 51 Ⅲ. 중국내 한민족 사회 55 1. 중국내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58 2. 중국내 한민족 사회의 실태 71 3. 중국내 한민족 사회의 특징 및 정책적 고려사항 83 Ⅳ. 극동 러시아내 한민족 사회: 연해주를 중심으로 93 1. 연해주 한인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97 2. 연해주 한인사회의 실태 110 3. 연해주 한인사회의 특징 및 정책적 고려사항 122 Ⅴ. 동북아 한민족 사회의 비교분석: 정책적 함의 129 1. 공통점 131 2. 차이점 135 참고문헌 139 최근 발간자료 안내 105 xiii

표 목 차 <표 Ⅲ-1> 1982~1990년 일부 도시의 조선족 인구 변화 74 <표 Ⅲ-2> 연변자치주 내 조선족 비율 변화 86 <표 Ⅳ-1> 1989년 소련 내의 한인 분포 107 <표 Ⅳ-2> 연해주 한인의 출신지별 구성 110 <표 Ⅳ-3> 연해주 고려인의 지역별 집계 112 xiv

I 서 론 1

1. 연구목적 한국은 전 세계 150여 개국에 660만 명의 재외동포가 있으며, 이들의 대부분은 미국 210만 명, 중국 210만 명, 일본 90만 명, 러시아(독립국가 연합) 60만 명 등 주변 4대국에 거주한다. 한인 재외동포 수는 이탈리아 (6,000만 명), 중국(2,500만 명), 이스라엘(1,800만 명), 멕시코(1,800만 명), 우크라이나(1,200만 명) 다음으로 많은 수이다. 이는 우리보다 인구 가 훨씬 많은 인도(480만 명)나 일본(260만 명)보다도 많은 수이며, 전체 한인 인구 대비 해외동포들의 비례로 보면 7.5%로, 이탈리아, 이스라엘 다음 가는 높은 비율이다. 한인 디아스포라는 1860년대 초 가난을 못 이겨 국경을 넘어 간도지방 으로 이주하면서 시작되었다. 이후 1903년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 동이민이 시작되었고, 한일합방 이후 정치적 이유로 일제에 항거하기 위 해 고국을 떠나면서 확대되었다. 일제 강점 하에서는 징용과 징병으로 인 해 타의에 의한 집단 거주가 발생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많은 한인들이 귀국하기도 하였으나, 냉전으로 인해 고국으로 돌아오는 길이 막혀 오지 못하는 경우도 많이 있었다. 이후에도 해외유학이나 새로운 기회를 찾아 서, 혹은 남북대치상황에서 안보불안 등으로 인한 해외이주는 계속되었 다. 최근에는 해외원정출산과 조기유학, 국내에서의 조기 실직 등으로 인 한 자의반 타의반식 이주라는 새로운 풍속도도 등장하였다. 이처럼 해외 한민족 사회의 형성 연원이 오래 되었고 이주 배경도 다양 하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의 한민족의 전통과 문화 관습, 생활양식 등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한민족 동포사회가 점차 일본, 중국, 러시아라는 국가체제에 동화되어가고 있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 도 불구하고 이들 동포사회는 여전히 한민족 으로서의 정향을 버리지 않 고 있다. 한국정부의 평화번영 정책은 한반도 차원을 넘어 동북아의 평화와 번 영을 동시에 추구하며, 그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달성하려는 전 Ⅰ. 서 론 3

략적 구상이다. 그런데 한국의 전략적 구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동북아 지역 국가 간의 경쟁과 통합의 동학(dynamics) 속에서 한국의 중추적 역 할을 모색해야 한다. 동북아지역 국가 중 중국은 급속한 경제성장을 바탕 으로 정치적, 문화적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으며, 일본 또한 오랜 기간의 경제침체에서 벗어나 새로운 경제적 활력을 회복하고 있다. 그리고 러시 아는 국가발전전략으로서 극동지역에 대한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의 회복을 추진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은 경제 침체 및 무역자 유화에 대한 국내적 도전 속에서 동북아시대 라는 어려운 국가적 과제를 추진하고 있다. 분단 극복문제는 지속적인 도전이다. 그런데 한국의 국가과제 수행은 단순히 경제적, 정치적 도전으로만 성 취되는 것은 아니다. 21세기의 경제는 디지털 기술에 토대를 둔 디지털 경제로 변하고 있다. 디지털 경제란 정보기술을 바탕으로 하여 인터넷을 통해 전세계적으로 연결되어 이루어지는 경제구조를 말하며, 정보가 중심 이 되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가는 경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한 중 일 3국으로 구성된 동북아지역 은 한자문화권, 유교문화권이라는 전통적인 공유점 이외에 세계경제에서 가장 역동적인 발전의 가능성이 있는 지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여기에 러 시아 극동지역을 포함하면 그 경제적인 규모는 더욱 확장된다. 이 지역의 인구 합계는 15억 명이 넘는 규모로 세계 인구의 1/4 정도를 차지하며, 경제규모, 무역규모, 기술적 측면, 문화적 여건 등을 감안할 때, EU나 NAFTA에 비해 큰 손색이 없어 향후 지역경제공동체의 형성과 발전의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가능성은 동북아지역 국가 간의 인문적, 문화적 인식의 공유점 을 넓힐 때, 더욱 추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즉 인식공동체 내지는 문화공동체적 관점의 경제적, 국제정치적 관점과의 결합은 동북아지역 국 가 간의 고리역할을 할 수 있는 한국의 전략적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중국이나 일본에서 일고 있는 한국의 대중문화에 대한 호기심 및 열기의 증대와 이에 대한 지적 탐구의 시작은 21세기 국가 상호의존과 정 4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보화 시대의 문화적 공동체를 이룰 수 있는 조그만 단초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현상이 동북아지역 국가 간의 국경을 넘나드는 상호주관적 인 지식으로 발전하는 과정에 있다고 할 수는 없다. 여전히 동북아지역 국가의 각 구성원과 그 전체의 구조를 관통하는 규범, 제도, 문화 등은 형 성되어 있지 않은 실정이다. 이러한 실정을 감안할 때, 동북아 문화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은 21세기 적 상황에 맞는 공동체 의 개념과 그 구조가 담을 내용에 대한 탐구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동북아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민 족사회에 대한 정확한 이해는 동북아 문화공동체라는 구조를 구성하는 하위 영역으로서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본 연구의 목적은 한국이 동북아 문화공동체의 형성 에 적극적인 역할을 추진하기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차원에서 그 공동체 의 하위 구성소인 동북아 차원의 한민족 문화공동체 형성을 위한 실태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정책적으로는 한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평화번영정책의 지향점인 동북아지역에서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는 것 과 연계된다. 다시 말해, 평화번영정책의 실천과정으로서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 이행의 인식적, 문화적 배경으로서 동북아 한민족을 하나의 문 화권으로 연계하려는 방안을 강구하려는 것이다. 나아가 21세기 세계화시대에 한민족이 적응하고 생존하기 위한 민족적 발전전략으로서 한민족공동체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한국이 일본, 중국, 러시아에 동류의식을 가지는 상당한 규모의 동포사회를 가지고 있 다는 것은 한민족 전체의 미래를 위한 귀중한 자산으로 평가된다. 20세기 전반기의 한국민족주의의 화두가 자주독립이었고, 20세기 후반기에는 통 일이었다면, 21세기 한국민족주의의 화두는 한민족공동체가 될 것이다. 1 해외의 한민족 사회가 거주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한 상태에서 고국에 대한 민족의식을 동시에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한민족 공동체의 형성을 1 정영훈, 한민족공동체형성과제와 민족정체성 문제, 재외한인연구, 제12권 2호 (2002), p. 11. Ⅰ. 서 론 5

통해 내외 인적 자원의 네트워크를 구축함으로써 세계화시대의 경제 문 화전쟁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을 것이다. 요컨대, 한민족 공동체는 통일된 단일국가 형성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 니라 각국에 흩어져 있는 한민족 성원들을 하나의 민족이라는 동질성과 동포의식에 바탕을 두고 정서적 연대를 형성하는 문화공동체의 성격이 다. 2 즉 각국에 존재하는 한민족 사회의 연결망 또는 유대체제를 말한다. 한민족 문화공동체의 형성을 통해 무한경쟁의 세계화시대에 공동대처하 는 협조체제를 구축하고 나아가 남북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각국의 한민족 사회를 연결하는 조직망을 구축하고, 지도자를 양성하며, 공동의 이익을 확장하는 사업 등이 요구된다. 본 연구는 한민족 문화공동체 형성방안을 제시하기 위한 기초 작업으 로서 일본, 중국, 러시아 극동의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 과정과 실태 를 분석한다. 첫째, 19세기 말엽과 일제 강점기 시대에 본격적으로 형성 되기 시작한 일본, 중국 및 러시아 극동지역의 한민족사회의 연원과 형 성, 변화 과정을 역사적 차원에서 재조명한다. 둘째, 일본, 중국 및 러시 아 극동지역의 한민족 사회의 현지 적응 실태 및 문제점, 한국과의 관계 등을 분석한다. 구체적으로는 1한민족사회의 조직과 활동, 2정치경 제 사회 분야에서 현지 사회로의 동화 실태, 3한민족 동질성의 유지 정도, 4한민족 사회 내부의 문제점, 5한국정부 및 한국사회와의 관계 와 한국에 대한 인식 등을 살펴볼 것이다. 이와 관련, 그 동안의 이들 사 회에 대한 국내의 연구와 국내 기관의 조직, 활동 등도 살필 수 있을 것 이다. 셋째, 일본, 중국 및 러시아 극동 각 지역의 한민족 사회의 실태를 비교적 관점에서 분석한다. 이러한 비교를 통하여 한민족간의 (문화)공 동체 형성과 본국 한국과의 교류 협력 등 관계 발전을 포함한 동북아 지역 차원의 한민족공동체를 형성하는 과정에서의 긍정적, 부정적 요인 들을 추출해보고자 한다. 2 위의 논문, p. 9. 6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2. 연구방법 및 구성 가. 연구방법 첫째, 기존 연구 및 각종 기관의 해외동포사회에 대한 활동에 관한 문 헌분석연구를 실시하였다. 특히, 해외동포사회의 형성과정에 대한 기존연 구에 기초하여 역사적 접근방법을 활용하였다. 이 과정에서 시기별로 구 분하여 특징을 도출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둘째, 일본, 중국, 러시아 한민족 사회 실태에 대한 현지 조사를 실시하 였다. 현지 조사에서는 한민족 문제 전문가뿐만 아니라 일반인과도 인터 뷰를 하였으며, 연해주의 경우는 생활상을 조사하기 위해 한인들의 시장, 농장, 가정집 등도 직접 방문하였다. 또한 거주지 소수민족 정책 담당자들 과도 인터뷰를 통해 한민족에 대한 거주국의 태도를 조사하였다. 셋째, 각국의 한민족 사회의 실태와 제반 문제점에 대한 비교 분석 접 근방법을 활용하여 공통점과 차이점을 도출하였으며, 이를 통해 향후 정 책적 시사점을 도출하고자 하였다. 넷째, 지역전문가 등을 활용한 전문가 자문, 워크숍 및 토론회를 적극 적으로 활용하였다. 특히 러시아의 경우는 동북아평화연대의 도움이 많았 다. 동북아평화연대는 현지 조사 일정과 통역, 안내 등을 주선해주고, 각 종 자료를 제공하는 등 많은 도움을 주었다. 나. 연구의 구성 본 연구는 5장으로 구성된다. 제 1장은 서론이다. 제 2, 3, 4장은 각각 일본, 중국, 러시아에서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과 실태를 분석한 후 한민족 사회의 특징 및 정책적 고려사항을 기술하고 있다. 끝으로 제 5장에서는 동북아 한민족 사회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석하고 있다. Ⅰ. 서 론 7

II 일본내 한민족 사회

1. 재일 한인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가. 해방전 1910년 한일합방 전에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불과 수백 명의 한인들 이 일본에 일시적으로 거주하였고, 3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몰락한 농 민들의 일본사회로의 유입과 더불어 재일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하였 다. 즉, 재일 한인사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에 대한 지배의 산물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4 재일한인은 일본 제국주의의 한반도 식민지배 시기에 한반도 농촌의 몰락에 의해 배출된 이농민이 일본의 노동시장에 자율적으로 유입됨으로 써 형성되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1937년 11월 중 일전쟁의 개시에 따른 전선의 확대로 인하여 전시노동력의 증대가 요구되고 1938년 4월 국가총 동원령의 공포와 더불어 1939년 7월 노동력 동원계획이 발표됨에 따라 한인들이 강제연행에 의해 일본열도에 유입되게 되었다. (1) 한일합방과 재일 한인사회의 형성 1876년 부산개항 이후, 일본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한반도를 내왕할 수 있었지만, 대한제국의 한인들은 일본정부가 1899년 2월에 발표한 칙령 제352호 외국인노동자입국제한법 에 의해 자유롭게 일본을 내왕할 수 없 었다. 즉, 일본정부는 한인과 중국인 노동자의 입국을 허가하지 않는 정책 을 취한 것이다.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한인의 일본 입국에 대한 제한이 없어지게 되었고, 게다가 일본이 1914년 제1차 대전의 연합군에 가담하여 군수공업 중심으로 경기가 활성화되면서, 한인들은 저임금의 노동자로 일본에 들어 3 1902년 재일한인의 수는 236명이고, 1909년 재일한인수는 790명으로 나타나 있 다. 森 林 芳 夫, 在 日 朝 鮮 人 處 遇 の 推 移 と 現 狀 ( 東 京 : 法 務 硏 修 所, 1955) 및 이 문웅, 세계의 한민족 일본 (서울: 통일원, 1996). 4 이문웅, 세계의 한민족 일본.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11

가게 되었다. 한일합방이후, 한인들은 대체로 (1) 일본의 선진 근대문화와 경제발전, (2) 일본인의 금융과 토지수탈, (3) 노동인구의 절대 증가 등의 이유 때문 에 도일하게 되는데, 특히, 도시금융침식, 토지수탈 등의 식민지정책이 추 진되면서 임금노동자로 전락한 한인들의 도일이 급증하였다. 5 일본의 근대화 및 선진 문물을 배우기 위해 유학생들이 도일하였고, 일 반 노동자들도 경제적으로 보다 발전한 일본에서 구직이나 돈벌이를 위 해 도항 또는 밀항을 하였는데, 한인 노동자들의 일본으로의 도일은 1910 년 3월부터 1918년 11월까지의 기간 동안 토지조사사업이 전개되어 토지 수탈이 추진되면서 급격하게 증대하기 시작하였다. 동양척식주식회사, 일 본인 지주 등이 중심이 된 한반도의 토지수탈 과정에서 농민들은 영세화 에 의해 임금노동자로 전락하고, 생활고 때문에 일본의 각종 회사들의 노 동자 모집에 응해 도일하였다. 그러나 1923년 9월 1일 동경을 중심으로 한 관동지방 일대에 대지진이 발생하여 수천 명의 한인들이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하게 되면서, 많은 노 동자가 한반도로 귀환하였다. 6 이후 일본정부는 국내 만성적 불경기 및 실업문제 방지, 경찰의 감독과 통제라는 치안문제 등을 이유로 1925년 8월부터 부산항에서 일정한 기준 을 갖추지 않은 사람에 대한 도항저지제도를 실시하였다. 1925년부터 1938년까지 도항저지자의 수는 890,854명에 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촌에서 배출되는 과잉인구의 생활고 등으로 인하 여 도항자수는 계속해서 증가하였다. 즉, 재일한인은 1931년 31만 명, 1934년 50만 명, 1938년 80만 명 등으로 증가하였다. 이처럼, 재일한인들은 열악한 노동환경의 저임금 노동자로서 일본에 이 주하여 일본자본주의 노동시장의 저변층을 형성하면서 한인사회를 이루 어 갔다. 5 전준, 조총련 연구 (서울: 고려대학교 아세아연구소, 1972). 6 1922년에 46,326명의 노동자가 귀환한 데 비해, 관동대지진 직후인 1923년에는 거의 2배가 넘는 89,745명의 노동자가 귀환하였다. 이문웅, 세계의 한민족 일본. 12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2) 강제연행과 재일 한인사회의 형성 일본은 대륙침략을 위해 만주사변에 이어 1937년 11월 중 일전쟁을 야기하였고, 1941년 12월에는 미국과의 태평양전쟁을 개시하였다. 따라서 일본은 전선의 확대에 따른 병력과 일본 본토의 전시 군수산업의 노동력 이 더욱 더 필요하게 되었다. 일본정부는 노동력의 확보를 위하여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령의 공포 와 더불어 1939년 7월 노동력 동원계획을 발표하였고, 동시에 조선총독부 에 조선노무자 일본 본토 이주에 관한 건 을 전달하였다. 따라서 1939년 7월부터 1945년 8월 해방 전까지 조선총독부에 의해 한 인들은 강제 연행되어 일본으로 입국하게 되었다. 즉, 한인노동자는 주로 힘든 육체적 노동이 요구되는 석탄광산, 금속광산, 토목공사 등에 강제연 행 되었는데, 위험이 큰 갱 속에서 작업하는 인부의 60-70%가 한인노동 자였다. 이처럼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강제 연행된 한인노동자의 인원은 724,787명인데, 여기에 군인 군속 365,263명을 합하면 한인 강제 연행자 의 수는 100만 명을 넘는 것으로 추산되며, 7 전체 재일한인의 수는 200-240만정도로 추산 된다. 8 그리고 이들 재일한인들은 대체로 대도시 주변에 집단부락을 형성하면 서 생활하였고, 경제 상태는 하층 노동계층에 속했으므로 빈곤한 상태에 있었다. 즉, 하층 노동계층의 수준에 있었던 재일한인들은 일본사회에서 격리되고 폐쇄된 병리사회를 형성해 살았던 것이다. 9 나. 해방후 1945년 종전시 재일한인의 수는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고 대체로 200-7 위의 책. 8 森 林 芳 夫, 在 日 朝 鮮 人 處 遇 の 推 移 と 現 狀. 9 전준, 조총련연구.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13

240만정도로 추산되는데, 이 가운데 상당수는 한반도로 귀환하고, 약 60 만 명 정도의 한인이 남아 전후의 재일교포사회를 형성하였다. 10 재일한인들은 회복된 민족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1945년 10월 좌우 세력을 망라한 한민족단체인 재일조선인연맹 을 결성하였다. 그러나 재일조선인연맹 이 좌파세력들의 세력 확산 공작으로 인하여 좌경화로 기울게 되자, 이에 반발하여 우파 민족주의 재일한인들은 조선 건국촉진청년연맹 을 설립하였는데, 재일조선인연맹 과 조선건국촉진 청년연맹 은 연합군 점령사령부의 지원 아래 적극적인 조직 활동을 전개 하면서, 체제이념, 신탁통치안에 대한 입장 등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즉 한반도 분단에 따른 남 북한의 정치적 영향으로 재일 한인사회는 분열 되고 대립하였다. 북한을 지지하는 단체는 재일조선인연맹 (조련) 재일조선통일민 주전선 (민전)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 (조총련)으로 발전하였고, 한국 을 지지하는 단체는 조선건국촉진청년연맹 (건청) 신조선건설동맹 (건동)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민단)으로 발전하였다. (1) 해방직후의 재일 한인사회의 사상적 성향과 좌경화 (가) 재일한인의 사상적 지향과 국적 선택 해방직후의 재일 한인사회는, 전쟁에 패한 일본이 정치적으로나 사회적 으로 변동기에 있었으므로, 일본사회의 정치적, 사상적 조류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게 되었다. 11 패전 직후 일본사회는 정치적으로는 간접적이지만 미국의 점령통치를 받고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기아, 빈곤, 기성 권위의 추락, 가치관의 파괴, 무질서 등에 의한 혼란 상태에 있었다. 즉 일본사회 10 1946년 2월 17일 미국 점령군 총사령부(GHQ)가 신고 받은 재일 잔류한국인의 총수는 647,006명이었다. 11 배정호, 조총련의 일본내 문화적응에 관한 연구, 통일과 북한 사회문화 (서 울: 민족통일연구원, 1996). 14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는 사회주의 혁명사상이 급속히 전파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특히 소 련을 중심으로 한 국제공산주의운동이 활발히 전개됨에 따라, 사회주의 사상은 패전국가 일본 에서 권위 있는 사상으로 받아들여져 주도적인 사 상의 한 조류를 이루게 되었다. 이와 같이 혁신사상이 일본의 지식인들이나 노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 을 미치는 사상적 분위기는 재일 한인사회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 었다. 그 당시 대부분 노동자로 하층생활을 하였던 재일 교포 1세, 2세들 은 민족적 입장과 더불어 계급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사상적 기반으로 서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하였고, 12 정치적으로는 일본 공산당을 비롯한 혁신계세력을 지지하는 편이었다. 13 재일교포 1세, 2세들의 이와 같은 사회주의 지향의 정치적, 사상적 성 향은 한반도의 38선 분단에 따른 국적선택에 있어서 그대로 나타났다. 재일교포 1세, 2세들의 본적지를 보면, 경상남도가 압도적으로 많고 그 다음으로 경상북도와 전라남도가 2, 3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38선 이남지 역 출신이 거의 대다수이다. 그런데 국적선택 상황을 보면, 1950년도의 북한국적 취득자는 약 46만7,470명, 한국국적 취득자는 약 7만7,433명이 다. 즉 재일교포들 가운데 86%가 북한국적을 취득하였는데, 절대다수의 재일교포들은 자신들이 자본주의사회에 살고 있고 자신들의 고향 또한 미국의 통치하에서 자본주의적 발전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사회주의 국가 인 북한을 선택한 것이다. 이와 같은 국적취득 성향은 해방직후 재일 한인사회의 정치적, 사상적 성향이 사회주의 등 혁신지향임을 나타내는 것이며, 아울러 재일한인 혁 12 심한 차별과 비참한 하층 노동층을 구성하고 있었던 재일동포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은 지극히 매혹적이며 쉽게 받아들여지는 사상이었다. 이승목, 조총련이 일 본사회에 미치는 영향, 조총련의 동향과 대책에 관한 연구 (국토통일원 정책 기획실, 1972). 13 일본제국주의 시절, 피압박민족으로서 엄청난 압박과 서러움을 겪었던 대다수의 재일교포 1세, 2세들은 사실 사상적인 입장에 앞서 민족적 차원에서 戰 前 에 천 황제와 침략전쟁, 식민지통치를 정면으로 반대했던 일본의 혁신계세력에 대해서 정치적으로 공감을 가졌고 그들을 지지하였다.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15

신계 세력이 그들의 세력기반을 조성하는데 좋은 여건이 마련되어 있음 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 재일 한인자치단체의 좌경화 일본의 패전과 더불어 재일한인들은 해방된 민족으로 처우 받고 회복 된 민족 권리를 옹호하기 위하여 일본내 각지에서 약 300여개의 한인자 치단체를 결성했다. 즉 재일한인들은 귀환의 후원, 생활상담 등 생존권 확 보차원에서 300여개의 각종 소규모 자생단체들을 조직하여 운영하였다. 그러나 점차로 재일한인들은 대동단결의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하였고 아울러 지역별 단체들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14 또 재일한인대표들은 일 본 전국에 산재되어 있는 자치단체들을 전국적인 규모의 통합단체로 결 성하기 위하여 1945년 9월 10일 도쿄( 東 京 )에 모여 재일본 조선인연맹 중앙준비위원회 를 조직하고, 동년 10월 15일에는 도쿄의 히바야( 日 比 谷 ) 공원에서 전국대표 약 5,000명이 참가하는 대회를 통하여 재일조선 인연맹 (이하 조련 이라고 칭함)을 결성하였다. 이와 같이 조련 은 처음에는 좌우세력을 망라한 한민족단체로서 출발 하였다. 그러나 재일한인 좌파세력들이 세력확대를 위하여 공작활동을 전 개함에 따라 이념갈등에 따른 조직적 분열을 거치면서 좌경화되었다. 말 하자면, 좌우파를 망라한 재일한인단체 조련 은 전전( 戰 前 )의 일본공산 당 간부였던 김천해가 조련 에 개입하게 된 이후부터 좌경화하기 시작 하였던 것이다. 1945년 10월 10일 도쿠다( 德 田 球 一 )를 비롯한 일본공산당 간부들과 함께 출옥한 김천해는 동년 10월 15일 조련 결성대회에서의 연설을 통 하여 대중적 지지를 획득함으로써 조련 의 최고고문에 취임하게 되었는 데, 조련 에 최고고문으로서 개입하게 된 김천해는 조련 의 주도권 장 악 및 좌경화를 위하여 조련 에서 보수적인 민족주의 우파세력들을 축 14 예컨대 關 東 地 方 朝 鮮 人 會, 在 留 朝 鮮 人 對 策 懇 談 會, 高 麗 人 中 央 協 議 會, 大 阪 朝 鮮 人 協 議 會 등이 결성되었다. 16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출하는 공작을 전개했다. 그 결과 조련 은 김천해, 김두용, 박은철 등 일 본 공산당 간부를 중심으로 한 좌파세력들에게 장악되고, 조련 은 일본 공산당의 재건을 위한 활동거점이 되었다. 15 그리고 일본공산당이 정치적 성장과 더불어 조련 에 대한 지도력을 강화하게 되면서, 조련 은 일본공산당과 동일한 이념아래 동일한 과제를 대상으로 투쟁을 전개하는 하부조직으로 전락되어 갔다. 16 (2) 민단의 결성 (가) 민단 좌우세력을 망라한 한민족 단체로 출발한 조련 이 좌파세력들의 세력 확산 공작과 더불어 이념적 분열을 거치면서 좌경화로 기울게 되자, 이에 반발한 홍현기 김상호 등 우파 민족주의 청년들은 조선건국촉진청년동 맹 (이하 건청 이라 약칭함)을 결성하게 되었다. 1945년 11월 16일 결성 된 건청 은 조련 과 마찬가지로 연합군 점령사령부(GHQ)의 지원을 받 으면서 적극적인 조직활동을 펼쳤는데, 조련 과는 신탁통치안에 대한 입 장, 체제이념 등을 둘러싸고 대립하였다. 17 또 이강훈 원심창 등 아나키스트계, 민족주의 중도파, 구( 舊 )친일계 재일한인들은 1945년 10월 27일 정치범으로 23년간 복역한 박렬이 아키 다( 秋 田 ) 형무소에서 출옥하자 그를 중심으로 1946년 1월 20일 신조선 건설동맹 (이하 건동 이라 약칭함)을 결성하였다. 건청 이 청년층을 중 심으로 조직되었기 때문에 건동 은 장년층을 중심으로 조직되었다. 15 일본 共 産 黨 은 朝 聯 을 활동거점으로 黨 재건운동을 전개하여 마침내 1945년 12월 제4차 黨 大 會 에서 黨 을 부활시키고 합법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였다. 16 일본 共 産 黨 이 합법적인 정당활동을 전개함에 따라 德 田 球 一 서기장의 최측근인 김천해는 黨 의 중앙위원, 정치위원, 조선인 부장직을 겸직하게 되었고, 朝 聯 내 韓 人 좌파 세력들도 國 際 共 産 主 義 運 動 의 一 國 一 黨 의 原 則 에 따라 일본 共 産 黨 에 가입하게 되었다.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一 國 一 黨 원칙에 따라 공산주의자 들은 外 國 人 의 경우 공산당에 入 黨 하려면 在 留 國 공산당의 당원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17 이문웅, 세계의 한민족 일본, pp. 79-80.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17

건동 은 신탁통치지배를 지지하는 조련 을 반( 反 )민족단체로 비판하 고, 18 건청 과 힘을 합쳐 조련 에 대항하였다. 즉 건동 과 건청 은 신탁통치 반대 대회 를 열어 반탁운동을 전개하고 3 1독립기념식을 개 최하는 등 재일 한인사회의 좌경화를 막기 위하여 우파 민족진영의 방파 제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재일한인들의 거주 생활안정 및 권익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 하면서 건동 및 건청 은 능력의 한계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특히 건동 은 조선과 일본의 융화, 조선의 완전독립 을 표방하고 처음부터 정 치단체로 발족하여 활동범위를 스스로 제한하였으므로 사회단체인 조련 에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고, 전반적으로 대중적인 기반이 취약하였다. 그러므로 재일 한인사회에서는 보다 강력한 한인조직이 필요하다는 인 식이 확산되기 시작하였고, 1946년 8월 31일 개최된 건동 제2회 전체 대회에서는 우익진영의 결집체로서 거류민단결성이 제안되었다. 나아가 동년 9월 28일 개최된 건동 건청 의 전국대의원 합동대회에서는 민 단 창설에 관한 제원칙이 합의되었으며, 동년 10월 3일에는 재일조선거 류민단 의 결성대회가 도쿄에서 개최되었다. 재일조선거류민단 도쿄 결성대회에는 건청 건동 뿐만 아니라 건국촉진회, 조선구락부, 조선거류민회, 대한협회, 조선무역협 회, 조선문화협회 등 유명무실한 단체를 포함하여 20여개 단체의 대표 등 약 2,000여명이 참가하였고, 민단 제 1차 선언 19 이 발표되었다. 이와 같은 도쿄 결성대회이후, 재일조선거류민단 은 전국조직을 지향 하여 각 현( 縣 )에 지방본부를 설치하기 시작하였고, 1948년 8월 15일 대 한민국정부가 수립되자 동년 10월 4-5일 전국대회를 소집하여 민단 제2 차 선언 20 과 더불어 조직명을 재일대한민국거류민단 (이하 민단으로 18 建 同 은 신조선 창간호와 제2호, 제3호를 통하여 격한 논조로 신탁통치반대 를 주장했다. 19 민단 제1차 선언 의 3대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재일동포의 민생안정을 기함. 2. 우리는 재일동포의 교양향상을 기함. 3. 우리는 국제친선을 기함. 18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약칭함)으로 개칭하였다. (나) 역경속의 민단의 성장 민단은 재일한인들의 정치적, 사상적 성향이 혁신계 단체를 지지하는 성향 때문에 조직적 열세에 있었지만, 재일한인들의 인권 및 생활권을 위하여 사법육성회, 협동조합 을 설립하고 외국인 등록 투쟁 을 전개 하였으며, 나아가 조련 및 그 산하의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 의 극좌 폭력노선에 따른 테러의 감행 속에서도 조직을 강화하고 성장을 도모하 였다. 1 사법육성회 의 창설과 협동조합 의 결성 연합군 사령부는 1946년 11월 20일 기본지령을 통하여 본국 귀환을 거절하고 일본에 재류( 在 留 )하는 조선인은 일본법률에 따르라 고 하였다. 그런데 재일한인들은 일본법률에 무지하였으므로 인권 및 생활권에서 침 해를 당하기 일쑤였고, 또 자신들을 보호 구원하는 능력이 없었으므로 인권 및 생활권에서 침해를 당해도 법적으로 대항할 능력이 없었다. 따라 서 민단은 재일한인들의 인권 및 재산권을 보호하고 구원하기 위해 사법 적 보호대책을 강구하게 되었고, 마침내 1947년 3월 31일 재일조선거류 민단사법육성회 를 설립하게 되었다. 21 재일조선거류민단사법육성회 의 설립과 더불어 민단은 일본법률에 무지한 재일한인들이 인권 및 재산권 20 민단 제2차 선언 의 강령은 다음과 같다. 1. 우리는 대한민국의 국시를 준수함. 2. 우리는 재류동포의 민권옹호를 도모함. 3. 우리는 재류동포의 민생안정을 도모함. 4. 우리는 재류동포의 문화향상을 도모함. 5. 우리는 국제친선을 도모함. 21 회 장 : 박열 부회장 : 이강훈, 심원창 이사장 : 김종재 이 사 : 권일, 김보경, 김정주, 서상한, 현희, 정철, 김재화, 정주화, 최유존, 왕시복, 김희명, 서충희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19

의 억울한 침해를 당하지 않도록 보호하는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또, 민단은 전후 일본사회의 하층민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던 재 일한인들의 생활안정을 위하여 한 방안으로서 협동조합의 설립을 검토 연구하였다. 마침내 민단은 1947년 4월 15일 재일한인들의 생활합리화를 지도하고 동시에 상호간의 친목을 도모할 수 있는 재일본조선거류민단 협동조합 을 설립하였다. 22 민단은 재일본조선거류민단협동조합 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재일한인 들의 민생안정을 위한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함과 동시에 재일본조선거 류민단협동조합 을 민단사업의 조직적 기반으로 활용하였다. 2 외국인 등록과 민단의 투쟁 연합군 사령부가 1946년 2월 17일 외국인등록 에 관한 취지를 발표함 에 따라, 일본정부는 1947년 5월 2일 일본에 재류하고 있는 모든 외국인 에 적용되는 외국인등록령 을 발포하였다. 즉 일본정부는 칙령 제270호 및 내무성령 제28호로서 외국인등록령 및 동 시행규정을 공포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재일외국인의 등록 조치는 재일한인들에게 적지 않 은 불안감을 느끼게 하였다. 재일한인들은 포츠담 선언에 입각하여 독립 국민 으로 규정되었으나, 이는 개념상의 규정에 불과하였고 실제로는 애 매모호한 상태에 있었기 때문이다. 즉 재일한인들은 해방된 민족이었지 만, 조국이 아직 독립된 정부를 수립하지 못하고 미국의 군정치하에 있었 으므로 실제로는 국적 없는 상태 에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재일한인들은 일본국 및 일본인들로부터 비( 非 )일본인 또는 제3국인 이라 하여 일본인도 아니고 외국인도 아닌 기형적인 존재로 취 급을 받아야만 했다. 22 조 합 장 : 원심창 부조합장 : 김희명, 서충신 상무이사 : 김희명, 현희 이 사 : 김정주, 정주화, 정동조 감 사 : 전두수, 변영우 20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이와 같은 현실 때문에 재일한인들은 일본정부의 외국인 등록조치에 대해서 상당한 의혹을 갖게 되었고, 아울러 외국인 등록을 하더라도, 조국 이 독립정부를 수립할 때까지 당분간 외국인으로 정당한 대우를 못 받게 될 것을 우려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민단은 외국인등록령 공포 직후 즉시 부당한 외국인등록령 에 반대하는 의사를 공식표명하고, 이어 동년 6월 16일 올바른 국제법에 근거한 외국인 대우를 주장하는 민단의 견해 23 와 박열단장의 주장 을 발표하였다. 나아가 민단은 동년 7월 25일 연합군사령부에 대하여 청원서 와 민단의 결의를 전달하고, 8월 20일에는 외국인 등록에 대한 불협력 을 발표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민단 투쟁활동은 일본당국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 치게 되었고, 일본당국은 민단의 요구사항을 받아들여 외국인 등록을 민 단을 통하여 실시하게 되었다. 특히 1947년 12월의 제 4회 민단 중앙협의 회의 결의 즉 모든 등록자에 대하여 평등하게 외국인 대우를 할 것을 요 구한 결의는 재일한인들의 법적 문제를 본격적인 문제로 격상시킨 발전 적인 결의이기도 하다. 3 민단의 시련과 성장 1949년에 접어들면서 일본공산당은 소련의 스탈린과 코민포롬의 지령 에 따라 평화적인 의회전략에서 폭력적인 극좌투쟁노선으로 전환하였다. 따라서 일본공산당과 활동방침을 같이 하였던 조련 24 은 국제공산주의 23 민단의 일본정부에 대한 주요 요구사항 1. 국제 통념에 입각한 올바른 외국인 등록령을 요구한다. 2. 조선인의 등록은 조선인 단체에 일임하고 연합국 최고사령부에 직접 보고 할 것을 요구한다. 3. 일본정부는 조선인에 대해 외국인으로서의 모든 대우를 할 것을 요구한다. 4. 일본정부는 조선인의 생명 재산을 보장하고 인권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 5. 세계평화를 위해 조선인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일본 국민들이 갖도록 할 것을 요구한다. 24 1948년 9월 9일 북한의 김일성 정권이 수립되자 朝 聯 은 즉시 북한의 정부수 립 강령을 지지하였다.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21

노선 및 극좌투쟁 노선을 추종하면서 조선의 통일과 독립, 일본의 민 주혁명 달성 등을 표방한 많은 불법 폭력을 자행하기 시작하였다. 조 련 의 불법 폭력행위는 민단간부들에 대한 테러로 나타나기도 했다. 예컨 대, 1949년 7월 14일에 민단의 宮 城 縣 지방본부 단장이 조련계 조직원에 의해 사살되었고, 동년 8월 20일에는 야마구치현( 山 口 縣 ) 지방본부가 조 련 과 재일조선청년동맹 의 조직원들에 의해 1주일간이나 습격당하였 다. 이와 같은 조련계의 테러 폭력행위는 좌익계 단체는 물론 재일 한인 사회 전체가 불이익을 당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25 1949년 9월 연합군 총사령부와 일본 법무성은 조련 을 폭력단체로 규 정하여 단체 등에 관한 규정령 제4조에 의거 해산명령을 내림에 따라 조련 및 그 산하의 전위적 행동부대인 재일조선민주청년동맹 은 물론 조련계 학교가 폐쇄되고, 그 여파로 민단계 학교까지 폐쇄를 당하게 되었 다. 더욱이 일본 당국이 폭력행위를 규제한다는 명분아래 재일 한인사회 전체를 죄악시하고 때때로 문제 삼음에 따라 재일한인들은 억울하게 차 별이나 불이익을 감수하여야 했다. 민단은 이와 같은 시련 속에서도 조직의 확대 강화를 도모하여 1949 년 10월경에는 지방본부 조직 43개소, 지부조직 207개소, 분단( 分 團 )세력 133개소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1950년 6 25 전쟁이 발발하자 민단은 즉 각 재일 의용 학도군 을 조직하여 참전하였고, 현금 932,712원( 圓 ), 위문 포대 2,825자루를 본국에 보냈다. 요컨대, 좌익세력의 테러, 재일 한인사회의 압도적인 북한지지, 일본정 부의 민족차별정책 등 여러 가지 어려움 속에서도 민단은 조직을 정비하 고 성장을 추구한 것이다. 25 필자가 만난 일본인들 가운데 이 당시에 청년기를 보낸 일본인들은 朝 聯 계의 폭 동을 생생히 기억하였다. 朝 聯 계의 폭동은 일본인들의 재일한인들에 대한 이미 지를 아주 나쁘게 한 사건이었다. 22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3) 조총련 앞에서 언급하였듯이, 일본공산당의 지도아래에서 좌익단체로 변모한 조련 이 폭력적인 극좌노선을 추구하다가 1949년 9월 8일 강제해산을 당함에 따라, 재일한인 좌파세력들은 활동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따라서 재일한인 좌파세력들은 조련 의 산하단체였던 조선해방구원 회 와 재일조선민주녀성동맹 을 통하여 조련 의 구( 舊 )조직을 재건코 자 하였다. 그러나 조선해방구원회 와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 의 노력만으로는 전국적 규모의 광범한 조직이었던 조련 의 구( 舊 )조직을 완전하게 보존 하고 통제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즉, 조련 의 구( 舊 )간부들을 비롯한 좌 파세력은 조련 을 대체할 수 있고, 이강훈을 중심으로 한 우파 민족주의 자들의 통일전선형성 제창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조직체의 결성하여 야 했다. 따라서 조련 의 지하 간부들은 1950년 4월 24일 조선인단체협의회 를 결성하여 그 산하에 조선해방구원회, 재일조선민주녀성동맹, 재 일조선인학생동맹,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 등을 망라시켰다. 이와 같은 조련 구( 舊 ) 간부들의 조직재건 움직임은 1950년 6월 25 일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하게 되자 더욱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특히 한 국전쟁의 발발은 기간조직을 지하화하였던 일본공산당에게도 당의 태세 를 긴급하게 갖추도록 하였다. 즉, 일본공산당은 당의 조선인부 를 검토 하여 민족대표부 로 재출발시키고, 나아가 민족대표부 로 하여금 1950 년 7월 조국방위위원회 의 결성과 더불어 재일 조선청년의 결집을 위한 조국방위대 라는 서클을 조직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으로부터 조국통일 활동에 동참 을 요청받았던 조련 의 구( 舊 ) 간부들은 조선인단체협의회 로서는 남 북한 대치상황에 적절하게 대응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재일교포사회에서 의 조직재건 및 확대를 위하여 1950년 6월 16일 재일조선민주민족전선 결성 준비회 를 발족시켰다.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23

재일조선민주민족전선 결성 준비회 는 한국전쟁의 발발과 더불어 즉 시 재일조선통일 민주전선 준비회 로 개칭되었다가 다음해인 1951년 1 월 9일에 이르러 전국적 조직인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 (이하 민전 이 라 약칭함)으로 정식 발족되었다. 26 한국전쟁의 영향 속에서 결성된 민 전 은 재일한인 좌파세력들의 결집체로서 기반을 공고히 해갔다. 1953년 11월 11일 민족대표부 의 주도아래 개최된 제4차 민전 전 국대회 이후부터 중앙간부의 다수가 일본공산당의 당원이 됨에 따라 27 민전 과 일본공산당과의 관계는 조련 때보다 더욱 긴밀해졌고, 아울러 민전 은 일본공산당의 혁명전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조련 이 해산된 후, 재일한인 좌파세력들은 일본공산당의 영 향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을 지향하면서도, 28 일본공산당의 지도아래에서 조국방위위원회 및 민전 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즉, 일본공산당이 민 전 이 결성 된지 1개월 후인 1951년 2월에 개최된 제4차 전국협의회에서 무력투쟁을 행동방침으로 결정하자 민전 은 합법적인 대중투쟁을 전개 하였고, 조국방위위원회 는 비합법적인 군사혁명노선에 따라 투쟁을 전 개 하였던 것이다. 26 民 戰 의 결성이 지연된 것은 한국전쟁의 戰 況 과 관계가 있다. 즉 朝 聯 계 인 사들은 1950년 9월 14일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을 轉 機 로 戰 況 이 북한에게 극히 불리하게 전개됨에 따라 새로운 조직을 발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가, 동년 11월 25 일 中 共 軍 의 개입으로 戰 勢 가 다시 북한쪽으로 유리하게 전개되자 勢 확대를 위 하여 전국적 규모의 조직을 발족시킨 것이다. 27 民 戰 시기까지만 해도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一 國 一 黨 의 원칙 이 엄존하였으 므로, 재일 韓 人 공산주의자들이 共 産 黨 의 당원이 되기 위해서는 일본 共 産 黨 에 당원으로 가입하여야 했다. 28 일본 패전 후, 朝 聯 은 일본공산당과는 黨 재건 때부터 一 心 同 體 로 활동을 해 왔는데 일본당국은 朝 聯 과 일본 共 産 黨 의 해산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朝 聯 에 대해서 더욱 강압적인 조치를 취했다. 즉 일본당국은 朝 聯 에 대해서 해산 및 재산몰수 등의 강력한 조치를 취한 데 비하여 일본 共 産 黨 에 대해서는 중앙간부 들의 공직에서의 추방, 당 기관지 赤 旗 의 무기한 발행정지, 점령군 총사령부의 레드 퍼지(red purge) 지령에 따른 신문 방송 통신 분야 등에서의 공산당계 인사 약 14,200명 추방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에 朝 聯 의 간부들은 일본 당국 에 대해서 민족차별에 따른 반감을 가지게 되었고, 일본 共 産 黨 에 대해서도 석연 치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즉 朝 聯 의 舊 幹 部 들은 일본 共 産 黨 으로 부터 이탈된 새로운 조직체의 결성을 도모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다. 24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민전 및 조국방위위원회 의 활동은 격렬하였는데, 그와 같은 과격 한 투쟁은 (1) 대외적으로 이전의 조련 계의 폭력행위와 마찬가지로 일 본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주면서 고립화를 초래하였고, (2) 대내적으로 일 본 공산당원보다도 더 많은 희생을 치름에 따라 조직의 약체화를 초래하 였다. 따라서 민전 의 내부에서는 일본공산당의 극좌 폭력노선에 대해서 회 의를 갖게 되었고 아울러 북한의 대일본 접근과 더불어 일본공산당의 지 배로부터 벗어나려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되었다. 여기서 민전 의 민족주의적 성향이라는 것은 일본공산당 대신에 북한 으로의 경사를 의미하는데, 29 북한의 대일본 접근과 더불어 민전 의 민 족주의적 성향은 확대되어져 갔다. 북한은 국제환경에서의 평화공존을 위 한 긴장완화 30 와 일본에서의 대 공산권 유화적 정권의 등장으로 31 대일본 접근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 32 됨에 따라 일본에 적극적으로 접근하였고, 아울러 재일교포사회에 대한 영향력증대를 위하여 민전 으로 하여금 일 본 공산당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 지도노선을 전환하도록 유도하였다. 따라서 한덕수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파가 민전 의 주류인 민족대 표부 파에 대하여 정면 비판을 가하기 시작하였고, 마침내 제19차 민전 중앙위원회를 계기로 민족주의파가 대세를 장악함과 더불어 민전 의 활 동은 사실상 북한의 주도아래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55년 5월 24일 북한의 지원 아래 치루어진 제6차 민전 전체대회를 통하여 민전 과 조방위 는 발전적으로 해체되고, 동년 5월 25일 재일조선인총련합 회 ( 조총련 이라고 약칭함)는 결성되었다. 29 이승목, 조총련이 일본사회에 미치는 영향, 조총련의 동향과 대책에 관한 연 구, pp. 47-48. 30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평화공 존 노선을 주창하였는데 그에 따라 국제환경은 동서냉전적 상황으로부터 평화공 존을 위한 긴장완화의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다. 31 1954년 1월 일본국내에서는 친미적인 요시다 정권이 물러나고 하토야마 정권이 등장하면서 대외정책은 대미의존정책으로 부터 자주노선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32 배정호, 日 本 北 韓 의 關 係 正 常 化 와 남북관계, 94 北 韓 및 統 一 硏 究 論 文 集, 第 5 卷 ( 統 一 院, 1994), pp. 133-213.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25

조총련 의 출범과 더불어 일본공산당출신의 민전 간부들은 당적을 이탈하였고, 대부분의 민전 간부들은 조총련 의 주요직책을 맡았다. 조총련 의 결성배경 및 그 의의는 다음과 같이 지적될 수 있다. 33 첫째, 국제환경 및 일본 국내환경의 변화와 관련하여 살펴보면, (1)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이 사망하고 흐루시초프가 권력을 장악하여 평 화공존노선을 주창함에 따라 국제환경은 동서냉전적 상황으로부터 평화 공존을 위한 긴장완화의 분위기로 바뀌게 되었고, 또 (2) 1954년 1월 일 본국내에서는 친미적인 요시다 정권이 물러나고 하토야마 정권이 등장하 면서 대외정책은 대미 의존정책으로부터 자주노선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환경의 변화는 북한으로 하여금 적대적인 대 일본정책을 유 화 접근정책으로 전환토록 하였다. 34 둘째, 민전 의 내부에서는 일본공산당의 극좌노선에 대해서 회의를 갖 고 일본 공산당의 지배로부터 이탈하려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대 두되었는데, 북한의 대일본 유화적 접근은 그와 같은 민족주의 파가 민 33 위의 논문. 34 북한의 南 日 외무상은 1954년 8월 30일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 인민들에게 대한 일본정부의 비법적 박해를 반대 항의하여 라는 성명을 발표하여 재일조선인의 정당한 권리를 정부정책차원에서 보호할 것임을 천명한 것에 이어 1955년 2월 25일 대일 관계에 관한 성명을 통하여 일본과의 관계개선 의사를 최초로 공식적 으로 제안하였다. 즉 북한정부는 남일외무상의 성명을 통하여 일본의 군국주의 재생에 대한 경계를 표시하면서도 일본정부와 무역, 문화관계 및 관계정상화를 향한 북한 일본 관계의 발전 등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토의할 용의가 있음을 의 사 표시한 것이다. 조선중앙년감 (조선중앙통신사, 1956), p. 16. 조선 인민은 과거에 조선을 강점하고 그를 발판으로 하여 아세아를 제패하려 던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적 행동을 반대하여 투쟁하였으며 현재에도 일본 을 재무장하여 일본에 군국주의를 재생시킴으로써 일본을 아세아 침략의 책원 지로 전변시키며 일본 인민을 새로운 군사적 모험에 리용하려는 미국 정부의 전쟁 정책을 반대하고 있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부는 각이한 사회제도를 가진 모든 국가들이 평화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원칙으로부터 출발하여 우리나라와 우호적 관계를 가지려고 하는 일체 국가들과 정상적 관 계를 수립할 용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우선 호상 리익에 부합되는 무역관계와 문화적 련계를 설정할 것을 희망하여 왔다. 조선 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정 부는 일본 정부 수상 하또야마씨의 우리 공화국과 경제적 관계를 개선하며 회 담할 용의를 표명한 최근 발언을 긍정적으로 대하며 따라서 일본 정부와 무역, 문화 관계 및 기타 조일관계 수립 발전에 관한 문제들을 구체적으로 토의할 용의를 가지고 있다. 26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전 및 재일 한인사회에서 세력의 확장을 도모하는데 지원세력으로 작용 하였다. 셋째, 민전 의 지도노선이 일본공산당에서 북한노동당으로 전환되는 시기에 조총련 이 결성되었는데, 북한과 민족주의 파의 주도아래 조 총련 이 출범하였다는 것은 해방후 재일 한인사회에서의 공산주의 운동 을 기본적으로 규제해 왔던 국제공산주의 운동의 대원칙인 일국일당의 원칙 이 사실상 무너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재일 한인좌파 세력들은 해방후 일본공산당과 10년간에 걸쳐 형성된 인적 조직적 유대 관계를 바탕으로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였다. 끝으로 한국정부의 대일본정책 및 재일교포정책이 부재하였던 시기에 북한이 대일본 유화적 접근 및 재일교포 포용정책을 전개하였는데, 그와 같은 북한의 정책은 재일교포사회의 좌경화를 가속화하였고, 아울러 일본 사회 및 재일교포사회에 대한 북한의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실제로 일본 사회 및 재일교포사회에 대한 북한의 영향력은 조총련 의 조직적 발전 과 더불어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즉 북한으로서는 최대의 해외전위조직 을 확보한 것이다. 조총련은 북한노동당의 지도노선에 따라 전국적 규모의 활동을 전개하 기 위하여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지향하였다. 35 따라서 조총련은 도쿄에 있는 중앙본부가 지방조직을 통괄하는 형태로 조직체계를 정비하였다. 즉 중앙조직은 중앙대회(전체대회), 중앙위원회, 중앙상임위원회, 감사위원회 로 구성되었고, 지방조직은 일본의 행정구역에 준해서 도( 都 ) 도( 道 ) 부( 府 ) 현( 縣 ) 본부 49개소, 지부 320개소, 분회 2,000개소와 7개 지방협 의회로 구성되었다. 35 조총련의 모든 업무 및 운영은 中 央 常 任 委 員 會 의 議 長 에 의하여 주관되었다. 말하자면, 조총련은 중앙상임위원회의 의장인 한덕수의 지휘아래 한덕수계 세력 을 중심으로 하는 8,500명의 간부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되는 것이었다. 이들은 조총련조직을 이끌어가는 중심세력인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1957년 3월 결성된 學 習 組 는 비밀조직으로서 김일성주의 를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신봉하고 조국 혁명=조국통일 을 위해 몸을 바치는 핵심적인 혁명투사 조직이다. 學 習 組 는 북 한노동당의 하부조직으로서 실질적 기능을 하였다.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27

그리고 조총련은 계층별, 세대별, 직능별, 성별 활동과 여론주도를 위한 선전 홍보활동을 위하여 산하에 여러 단체들을 두었는데, 구체적으로 살 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요 산하단체> 재일조선청년동맹,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 재일조선인교육회, 재일조선 인교직원동맹, 재일조선인과학자협회, 재일조선문학예술가동맹, 재일조선 문학예술가동맹, 재일조선언론출판인협회, 재일조선유학생동맹, 재일조선 인상공연합회, 재일조선인신용조합협회, 재일조선인체육연합회, 재일조선 인불교도연맹, 재일조선인통일동지회 <주요 사업단체> 조선신보사, 조선통신사, 구월서방, 학우서방, 조선문제연구소, 조선화 보사, 시대사, 조선중앙예술단, 조선연극단, 재일조선인통신교육협회, 재 일수출입상사, 동해상사주식회사, 조선청년사, 조총련중앙학원 2. 재일 한인사회의 실태 1955년 북한의 지원 아래 재일 한인사회의 좌파세력을 재결집하여 등 장한 조총련은 조직을 정비하고, 민단과의 대결구도 속에서 민족교육사 업, 금융사업, 재일교포 북송사업 등을 전개하여 재정과 조직 면에서 민단 보다도 훨씬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나아가 조총련은 일본 정계와의 관계 도 공산당의 범주를 넘어 그 폭을 넓혀나갔다. 그러나 조총련은 1970년대 에 들어오면서 내부권력의 후유증, 재정적 기반의 침하 등으로 인하여 조 직이 약화되기 시작하였고, 게다가 김일성 우상화에 대한 조총련계 지식 인의 반발, 북한 지상낙원론의 붕괴 등과 더불어 민단이 조총련계 동포의 모국방문사업, 신용조합의 설립, 차별철폐 권익신장운동, 교육사업 등을 28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적극적으로 추진함에 따라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반면, 민단은 대체로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조총련의 약세 쇠퇴 등 의 영향 속에서 상대적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의 일본사회의 생활보수화 성향, 1990년대 이후 의 탈냉전시대의 도래에 따른 일본 국내정치공간의 이데올로기적 대립구 도의 붕괴, 재일 한인사회의 세대교체에 따른 민족의식의 약화 등으로 인 하여 현재 조총련은 물론 민단까지도 쇠퇴와 몰락의 위기상황을 맞이하 고 있다. 즉, 재일한인 2 3 4세들의 민족의식 약화는 한인공동체의 장 래를 매우 어둡게 하고 있다. 가. 민단계 재일 한인사회의 실태 (1) 민단의 주요활동과 발전 민단은 대체로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조총련의 약세 쇠퇴 등의 영향 속에서 조총련계 동포의 모국방문사업, 신용조합의 설립, 차별철폐 권익 신장운동, 교육사업 등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면서 상대적으로 성장 발전 하였다. (가) 조총련계 동포의 모국방문사업 1971년 8월 12일 대한적십자사와 북한적십자사에서 제의한 1천만 이 산가족 찾기 운동 에 근거하여 한국정부와 민단은 1975년 4월부터 조총 련계 교포의 성묘 방한사업을 추진하였다. 한국정부와 민단은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재일조총련계 한인 포용정책 을 시행한 것이다. 그리하여 1975 년 추석, 북한을 지지하고 한국정부를 적대시하였던 조총련계 한인 1,000 여명은 30년 만에 한국의 고향을 방문하여 자유롭게 성묘를 하고 친지들 을 만난 뒤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 후 1년 동안에 약 1만 명 이상의 조총 련계 교포가 고향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이들이 고향을 방문하고 부모형 제와 재회하는 감격스러운 장면은 일본의 TV, 신문 등을 통하여 보도되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29

었다. 그와 같은 일본 언론의 보도 덕택으로 민단의 성묘단 사업은 상당 한 호응을 얻게 되었고, 따라서 성묘단사업은 연말연시, 한식, 단오절 방 문단으로 계속 확대 발전되어 갔다. 한편 성묘단에 참가하여 한국을 방문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조총련계 한인들은 북한과 조총련의 선전과는 전혀 다른 한국의 발전상을 보고 정 치적, 사상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더욱이 이들의 한국에 대한 이야기가 조총련계 한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나가면서 상대적으로 북한에 대한 환 멸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성묘단으로 한국을 다녀온 한인들 가운 데 상당수가 조총련으로부터 이탈하게 되었고, 또 조총련의 조직과 인 적 경제적 관계 때문에 부득이 이탈할 수 없었던 한인들은 조직의 활동 에 극히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방관하는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36 즉 한국 정부와 민단의 성묘단사업이 성공적으로 전개됨에 따라 조총련의 구심력 은 두드러지게 약화되고 조직은 전체적으로 흔들리게 된 것이다. 요컨대 재일조총련계 한인들의 모국성묘단 사업 은 재일 한인사회에서 민단의 입장을 상당히 강화시키는 반면, 조총련계 한인사회에는 상당한 충격을 주었고 동시에 조총련 조직을 근저에서 약화시키기 시작했다. (나) 한국정부와 민단의 교육사업 민단은 재일한인들의 민족교육을 위하여 1949년 오사카( 大 阪 )에 백두 학원과 금강학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다. 북한과 달리 한국의 이승만 정 부가 재일교포의 민족교육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으므 로, 민단의 교육사업은 조총련에 비하여 상당히 취약하다고 하겠다. 따라 서 민단계 재일한인들은 민족교육을 위하여 백두학원이나 금강학원에 자 녀를 입학시키거나, 일본정부가 재일한인들에 대한 교육정책으로 공립 소 중학교내에 설치한 민족학급 을 이용하여야 했다. 민족학급 은 일본 36 성묘단으로 고국을 방문하고 돌아온 조총련계의 한 교포는 조총련 조직에 대한 반감과 민단가입을 주저해야 하는 심정 을 익명으로 1977년 12월 21일자 통일일 보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30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정부가 조선인학교 폐쇄령 에 대한 수습책으로서 1949년 12월부터 도쿄 도( 東 京 都 ), 오사카부( 大 阪 府 ), 효고현( 兵 庫 縣 ), 아이치현( 愛 知 縣 ) 등의 공립 소 중학교에 한국 조선인 재학생들을 위해 설치한 한국어 과외수 업 교실 이다. 민족학급 의 재정은 지방자치단체가 부담하였고, 각급교육 위원회가 감독하였다. 이와 같은 민족학급 의 교육은 점차로 쇠퇴하다가, 1970년대 이후 일본학교들이 재일한국인 민족교육에 높은 관심을 가지고 자주적으로 운영하게 되면서 재일한인들의 민족교육에 적지 않게 기여하 게 되었다. 재일한인들의 민족교육에 관한 한국정부의 관심은 1961년부터 나타나 기 시작했다. 한국정부는 1961년 2월 문교부 교포교육조사단 을 일본에 파견하여 재일한인자녀 교육에 대한 지원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하였고, 나 아가 동년 12월에는 주일한국대표부 내에 장학관실을 설치함과 더불어 도쿄( 東 京 ) 교토( 京 都 ) 오사카( 大 阪 ) 등지의 전일제( 全 日 制 ) 한국학교 와 홋카이도( 北 海 道 ) 등지의 야간 한국학원에 교사들을 배치하였다. 즉, 1945년 8 15해방이후 처음으로 한국정부에서 파견한 교사들이 재일동포 자녀들의 민족교육을 지도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민단은 한국정부의 지원 아래 1962년부터 본국유학 희망자들을 위하여 모국 수학제도 를 마련하였고, 나아가 1963년 4월에 일본 주요도 시 10개 처에 교육문화센타를 설치했으며, 1966년부터는 하계학교(고교 생 대학생 대상), 1977년부터는 춘계학교(대학생 대상)와 하계학교(중 고교생 대상)를 개설하였다. 요컨대 민단의 교육사업은 비록 규모면에서 조총련계 학교보다 상당히 열세에 있었지만, 한국정부의 행정적 재정적 지원 아래 모국이해교육 및 현지적응교육 에 역점을 두고 추진되었고 점진적으로 발전하였다. (다) 권익신장운동 1970년대까지만 일본사회는 모든 사회복지제도에 국적조항이 설정되어 있었으므로, 재일한인들은 사회복지의 혜택을 일체 받을 수 없게 되었다.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31

따라서 민단은 제27회 정기 중앙위원회에서 재일한인들의 인권선언 을 채택함과 동시에 재일한국인 권익옹호위원회 의 설치를 결의하고, 1970 년대 후반부터 사회보장제도의 차별을 철폐하기 위하여 전국적 규모의 행정차별 철폐 운동 을 전개하였다. 차별철폐 100일간 운동 기간(1997. 8.1-11.8)동안에 각 지방조직은 지방자치제에 차별철폐에 관한 요망서 를 제출하여 그 내용을 충분히 설명하고, 나아가 자치제의 결의 채택을 촉구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재일한국인 권익옹호위원회 는 행정차별 철폐의 당면중점목표로 서 (1) 주택입주 차별 (2) 아동 수당 국민연금의 적용 (3) 주택 공고( 公 庫 ) 등의 융자 (4) 공무원 채용의 네 가지 항목을 설정하여 이에 관한 전 국적으로 통일된 요망서를 작성하였고, 아울러 차별의 실태를 이론적으로 고발하는 차별백서 7권을 발간하여 일본사회의 여론에 호소하는 한편, 일본정부 및 정당, 사회단체에 대한 요망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민단의 노력으로 마침내 1980년에 주택입주 차별 및 금융 공고( 公 庫 ) 차별 은 일단 해소되었다. 그 외 사법연수생, 아동수당, 교원채 용, 지방공무원, 소학교 취학안내 등에서 차별이 철폐되었다. 또 1981년에 최대의 난관이었던 국민연금 문제에서 국적조항이 철폐됨에 따라 복지 제도에서의 국적차별문제가 기본적으로 해결되게 되었다. 그리고 민단은 민단연금 제도를 만들어 자체적으로 재일한인들의 복 지를 위한 보험사업을 추진하였고, 아울러 각종 신용조합을 결성하여 재 일한인들의 경제적 활동에 기여하였다. 나아가, 1983년 가을에 들어오면 서 민단은 재일한인들의 기본적 인권침해인 지문압날제도( 指 紋 押 捺 制 度 ) 를 철폐하기 위한 운동을 전국적 차원에서 추진하였다. 특히, 37만 명이 라는 외국인이 외국인등록증을 갱신해야 하는 1985년에 접어들면서 민단 은 이 해의 3 1절 기념행사를 지문압날 상시연대제도( 指 紋 押 捺 常 時 携 帶 制 度 ) 철폐 요구대회 로서 개최하였고, 또 일본 법무성이 동년 5 월 14일 지문에 대한 政 令 37 을 발표하자 즉시 민단은 전국 지방단체장 37 (1) 지문압날을 종래의 회전지문에서 평면지문으로 전환, (2) 지문거부자에게 3 32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회의 를 개최하고 지문유보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지문유보 운동에는 1 만 명 이상의 재일한인들이 참가하였다. 민단은 이와 같은 활동을 통하여 재일 한인사회에서의 구심력을 강화시키고 동시에 조직을 확장시키면서 발전을 도모하였다. (2) 민단의 약화와 민단계 재일 한인사회의 실태 재일한인 1세들은 언젠가는 고국에 돌아간다 는 생각을 가슴에 늘 품 고 있었으므로 비교적 강한 민족의식을 지녔지만, 2 3 4세 한인들은 일 본에서 태어나 성장하였고 또 일본사회에 정주하여 대체로 안정된 생활 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념보다는 일상적 이해관계에 더 관심을 가지면서 일본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다. 특히 민단계 3 4세 한인들은 조총 련계 3 4세 한인들보다 민족의식이 상대적으로 취약하므로, 일본사회에 대체로 문화적으로 상당히 동화된 상태에서 생활하고 있다. 38 한국에서 태어난 1세들은 이제 겨우 7%정도에 불과하고, 2세에 이어 3 4세가 재일 한인사회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 민단계 청 장년 세대의 거의 대부분은 일상적 생활에서 본명이 아닌 통명인 일본이 름을 사용하고 있으며, 적지 않은 숫자가 민족적 열등감을 가지고 있다. 이와 같은 민단계 3 4세 젊은 한인들의 취약한 민족의식은 일본 국내 외의 탈 이념화 성향 및 국제화 추세의 영향으로 한층 약해지고 있고, 이 는 민단에 대한 무관심의 증대로 나타나고 있다. 즉, 민단계 젊은 세대들 이 민단의 필요성에 대해 절실하게 느끼지 못하며 소극적 참여 또는 외면 하는 경향을 보임에 따라, 민단은 조직의 공동화 현상과 더불어 조직기반 의 침체에 따른 조직유지 조차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또, 민단계 상공인들 가운데는 상당한 재력가들이 있지만, 민단계 민족 개월의 설득기간을 마련, (3) 기간 경과후 자치제는 지문거부자를 고발. 38 조총련계 교포들이 민단계 교포들에 비해 문화적 차원에서의 민족의식이 훨씬 강하기 때문에 민단계 교포들이 일본사회에 동화되면서 생활하고 있는데 비하 여, 조총련계 교포들은 일본사회에 동화되는 것에 저항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사회에 적응하여 살아가고 있다.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33

학교는 재정난으로 운영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어 오고 있다. 39 이는 민족 교육의 침체에 따른 민족의식의 약화의 악순환 을 초래하는 주요 요인이 될 수도 있다. 재일한인 3 4세들의 민족의식 약화는 1990년대 중반의 조사에서도 나 타났다. 재일본 대한민국 청년회 는 1993년 재일 한국인 청년들의 의식 및 가치의 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를 1994년 제3차 재일한국인 청년의 식조사 중간보고서 40 를 발표하였는데, 최종보고서는 1997년 재일한국 인 청년의 생활과 의식 41 이라는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 재일한국인 청년의 생활과 의식 은 부정적 자기이미지 vs. 민족적 긍 지, 귀화 희망 vs. 국적 보유, 통명 vs. 본명 에 관한 조사를 통하여 재 일청년들의 민족의식 상태를 분석하였는데, 구체적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 부정적 자기이미지 vs. 민족적 긍지 1980년대 후반의 조사에 따르면, 상당수의 재일 한국인 청년들은 재일 한국인 조선인인 자기자신 에 대하여 어두운 이미지를 갖고 있고 아울러 자신의 부모가 일본인이 아닌 것을 원망하기도 한다 고 하는데, 그와 같 은 부정적 자기 이미지 는 제3차 재일한국인 청년의식조사 중간보고서 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즉 약 63.7%가 성장과정에서 부정적 자기 이미 지 를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고, 그 주된 이유는 일본인에 의한 차별과 그에 따른 민족적 열등감 때문이었다. 따라서 재일 한국인 청년들은 그다 지 민족적 긍지를 가지고 있지 못하고 있으며, 민족이라는 것에 구애되지 않으려 하고 있다. 39 오사카 민족학교를 위해 헌신적인 노력을 하고 있는 김중권 이사장은 예외적인 독지가이다. 40 在 日 本 大 韓 民 國 靑 年 會, 第 3 次 在 日 韓 國 人 靑 年 意 識 調 査 中 間 報 告 書 ( 東 京 : 在 日 韓 國 人 靑 年 會 中 央 本 部, 1994 年 2 月 ). 41 福 岡 安 則 金 明 秀, 在 日 韓 國 人 靑 年 の 生 活 と 意 識 ( 東 京 : 東 京 大 學 出 版 會, 1997). 34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나) 귀화 희망 vs. 국적 보유 1990년대 중반까지 일본국적으로 귀화한 재일한인들의 누계는 18만 7 천여 명을 넘어서고 있다. 제3차 재일한국인 청년의식조사 중간보고서 에 의하면, 꼭 귀화하고 싶다 (12.0%)와 가능한 한 귀화하고자 한다 (15.0%)를 합쳐서 귀화 희망 자는 27.0%이고, 한국적 보유에 민족적 의미를 느끼는 자가 그다지 귀화 하고 싶지 않다 (15.9%)와 절대로 귀화하고 싶지 않다 (27.7%)를 합쳐서 43.6%이다. 그리고 국적 그 자체에 아무런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어느 쪽이든 좋다 는 자( 者 )가 29.4%이다. 따라서 계기가 주어지면, 귀화를 할 수 있는 자가 56.4%인 것이다. 현 재는 2 3세가 중심을 이루고 있지만, 4세 이후에는 상당수가 귀화할 가 능성이 높다. (다) 통명 vs. 본명 재일한인들은 일상적으로 본명(한국명)이 아닌 통명(일본명)을 사용하 고 있다. 어릴 때는 일본인들 앞에서 본명을 사용하더라도, 중학 고교단 계에 들어가면 일본인들 앞에서 거의 본명을 사용하지 않는다. 제3차 재일한국인 청년의식조사 중간보고서 에 따르면, 재일한국인 청년들의 경우 통명을 사용하는 자가 약 80%정도이고, 본명을 사용하는 자는 불과 12%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젊은 세대의 조국과의 정신적 거리의 확 대, 민족적 열등감, 민족일원으로서의 자기부정 등으로 인하여 민단은 조직유지에서 조차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는데, 그와 같은 민단의 어 려움은 북한붕괴론의 대두와 함께 한층 가중되었다. 왜냐하면, 북한이 붕 괴되면 이어서 조총련도 와해되고, 따라서 조총련의 상대인 민단도 필요 가 없게 된다는 인식이 김영삼 정부의 재일교포정책에 반영되어 나타났 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의 출범과 더불어 남북화해협력과 평화공존을 추구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35

하는 햇볕정책이 전개되면서 민단무용론은 약화되었고, 최근 일본사회에 서 불고 있는 한류의 영향으로 재일한인 3 4세들의 민족문화에 대한 관 심도 높아지고 있다. 나. 조총련계 재일 한인사회의 실태 (1) 조총련의 주요활동과 발전 조총련은 1957년에 조직정비를 완료하고 재일 한인사회의 세( 勢 ) 확대 를 위하여 (1) 조국의 평화통일 (2) 민족권리의 옹호 (3) 민족교육의 추진 (4) 북조선과 일본의 국교정상화를 정치목표를 내걸고 적극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조총련은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일본사회 및 교포사회에서 영향력을 확대시키면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가) 조총련의 평화통일운동과 문화선전활동 한반도에 휴전협정이 체결된 이후 한국의 이승만정부는 무력북진통일 을 주창하였고, 이에 비하여 한국전쟁을 도발하였던 북한은 남한의 북침 을 강조하면서 자기합리화를 위한 평화공세를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즉 북한은 국제사회에 남한은 가해자 이고 북한은 피해자 라는 선전을 펼치 면서 평화통일론을 주장하였다. 따라서 일본에서는 조총련을 비롯한 좌익세력들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 하여 남한의 북침론을 대대적으로 정치선전을 하면서, 이승만정부의 무 력북진통일 에 맞서 평화통일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일본에서는 사회주의 정치세력이 제도적 정치권내에서 상당한 영 향력을 가지고 평화주의 세력으로서 활동을 하고 있었으므로, 42 그와 같 은 일본의 정치사회적 여건에 편승한 북한의 평화통일론은 일본사회에서 42 당시 일본사회의 정치사상적 분위기를 보면, 사회당을 비롯한 혁신정치세력들은 헌법개정반대, 평화헌법수호, 미일안보조약반대, 비동맹 중립주의, 재군비 반 대 등을 주장하였는데, 이는 일본사회에서 평화주의노선으로 간주되는 것이었다. 36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여기에는 이승만정부의 철저한 반일정책노선이 기여한 점도 있다. 이승 만정부는 반일정책의 추진과 더불어 평화선을 침범한 일본어선들을 나포 하고 억류하였는데, 일본국민들은 그와 같은 이승만정부를 호전적으로 보 게 되었고 따라서 이승만정부의 북진무력통일론보다 북한의 평화통일론 에 우호적인 입장을 나타낸 것이다. 이와 같은 일본사회의 반응은 재일교포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고, 재일교포의 상당수가 북한이 주장하는 평화통일론에 동조하게 되었다. 대 체로 재일교포사회는 한국전쟁의 비극을 겪었으므로 무력통일에 대해서 는 反 통일정책으로 간주하고 극히 부정적인 입장을 나타내었다. 43 요컨대 북한과 조총련은 평화통일운동의 전개를 통하여 재일교포의 민 족주의적인 감정에 호소함으로써 지지기반의 확대와 더불어 평화애호적 이며 민족주의적 이라는 이미지를 구축하였고, 아울러 조직을 확대 강화 시켜 나갔던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이 북한의 평화통일론을 발판으로 조총련이 일본사회 및 재일교포사회에서 이미지를 개선하고 세( 勢 )를 확대시킬 수 있었던 것 은 선전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것에 적지 않게 기인한다. 조총련은 조선 신보사를 언론 출판 선전활동의 거점으로 삼고 그밖에 조선통신사, 구월 서방, 시대사, 학우서방, 조선화보사 등을 통하여 북한과 조총련의 노선 및 입장을 홍보하는 각종 출판물을 발간하였다. 44 또 조총련은 예술활동을 통하여 선전활동을 전개하였는데 북한과 조총 43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재일교포사회는 북한의 평화통일론과 이승만정부의 북진 무력통일론에 대해서 이데올로기의 차원이 아닌 평화냐 전쟁이냐, 통일이냐 반 통일이냐 하는 차원에서 생각하였고 민족평화통일론을 지지하게 된 것이다. 44 조총련계 단체에서 발간하는 주요 기관지는 朝 鮮 新 報 ( 日 刊, 韓 國 語 ), 朝 鮮 新 報 ( 週 刊, 日 本 語 ), 總 聯 週 刊 ( 韓 國 語 ), 祖 國 ( 日 刊, 韓 國 語 ), 朝 鮮 通 信 ( 日 刊, 日 本 語 ), 朝 鮮 英 文 通 信 ( 日 刊 ), 朝 鮮 書 報 ( 月 刊, 日 本 語 ), 朝 鮮 靑 年 ( 週 刊, 韓 國 語 ), 朝 鮮 靑 年 ( 月 刊, 日 本 語 ), 朝 鮮 女 性 ( 月 刊, 韓 國 語 ), 朝 鮮 商 工 時 報 ( 週 刊, 日 本 語 ), 文 藝 學 術 ( 月 刊, 韓 國 語 ), 朝 鮮 大 學 新 聞 ( 日 刊, 韓 國 語 ), 朝 鮮 大 學 新 聞 ( 月 刊, 日 本 語 ), 친한동무 ( 旬 刊 ), セセデ ( 月 刊, 日 本 語 ), 朝 鮮 資 料 ( 月 刊, 日 本 語 ), People's Korea( 週 刊 ) 등이 있다. 이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朝 鮮 新 報 ( 日 刊, 韓 國 語 )이다.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37

련을 홍보하는 영화상영은 물론, 중앙예술단, 조선연극단, 금강산가극단 등을 전국 순회공연 시켰다. 즉 재일교포들의 민족적 정서와 타국살이의 애환을 달래주면서 북한과 조총련의 정책노선을 홍보하고 아울러 그 지 지를 확대시켜 나갔던 것이다. 재일교포들의 민족적 정서에 호소하는 문 화예술활동은 이데올로기를 넘어 교포사회에 널리 침투( 浸 透 )하였다. 이상과 같은 조총련의 선전활동은 일본사회 및 교포사회에 대하여 조 총련의 영향력을 증대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총련의 선전조직 은 대체로 1960년대 전반( 前 半 )에 걸쳐 대대적으로 확대 발전된다. 즉 뒤에서 곧 언급할 재일교포 북송사업 을 통하여 조총련의 조직 및 재정적 기반이 비약적으로 증대될 때 확대된 것이다. (나) 조총련의 교육사업 1945년 일본의 패전과 함께 해방된 재일교포들은 자녀들의 민족교육 을 위하여 국어강습소 를 세우고 여기에 일본인 학교에 재학하고 있 던 자녀들을 입학시켜 한글을 비롯한 민족교육을 받도록 하였다. 그리고 조련 의 등장과 더불어 설립된 국어강습소 는 1946년 봄부터 재정비 되어 초등교육전반에 걸친 수업을 실시하였다. 이와 같은 재일교포들의 교육열은 재일교포들을 위한 교육사업이 교포 사회에서 조직의 확대 및 영향력의 증대를 도모하는데 있어서 상당히 중 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특히 교육을 통한 의 식교육은 이데올로기의 대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은 조총련의 결성과 더불어 재일교포 교육사업에 지대한 관심을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지원하였다. 한국의 이승만 정부가 재일교포 의 민족교육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을 때, 북한은 조총련을 통하여 재일교포의 교육을 위하여 상당한 자금을 지원하였다. 즉 한국전쟁의 후유증을 벗어나지 못했던 1957년 4월에 북한은 1억2,100 만엔(61만5천5백80달러)의 교육자금을 조총련에게 지원하였다. 45 45 1957년 한국정부는 재일교포를 위한 교육지원 자금으로 22,000달러를 지원하였 38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그 이후 북한은 지금까지 매년 신년 축하, 김일성 생일, 북한정권 수 립일 (9월 9일), 노동당 창건일 (10월 10일) 등에 학교운영비 및 장학금의 명목으로 조총련의 교육자금을 지원하고 있다. 또 북한은 교육지원자금과 병행해서 교육활동가에게 훈장, 메달, 공훈 교원, 인민교원 등의 명예칭호를 부여하고 아울러 박사, 교수, 준박사, 부 교수의 학위 학직까지 수여하면서 조총련의 교육사업을 지원하였다. 46 조총련은 북한의 지원에 힘입어 일본전역에 유치원부터 고급까지 설립 하고 대학까지 세웠다. 47 나아가, 조총련은 북한의 교육노선에 입각하여 한편에서는 재일교포들에 대한 민족문화교육을 실시하면서, 다른 한편에 서는 공산주의사상 교육을 시켰다. 조총련의 공산주의사상 교육은 1958년 8월경부터 재일교포의 북송운동이 추진되면서 한층 강화되었다. 48 이와 같이 일본의 여러 지역에 유치원부터 고급학교까지 설립하고 대 학까지 세웠다는 것은 조총련의 커다란 업적이기도 하다. 그리고 북한지 지의 입장에서 사상교육을 실시하였다고 하더라도 일본태생의 한인 2세, 3세들을 위하여 한글교육과 역사, 민족문화교육을 실시하였다는 것은 조 총련의 존재가치를 인정하게 하는 업적이다. 49 조총련계 한인들뿐만 아니 라 민단계 한인들의 자녀들도 적지 않게 조총련계 민족학교를 다녔다. 50 는데, 이는 북한의 1/28에 지나지 않는다. 46 イム チョンスク, 在 日 僑 胞 たちの 法 的 地 位 (ピョンヤン, 1990), p. 163; 安 夢 弼, 日 本 の 在 日 朝 鮮 人 政 策 と 日 本, 美 蘇 硏 究, 第 7 輯 (1994)에서 재인용. 47 현재 조총련은 일본의 47개 都 道 府 縣 가운데 27개 지역에 67개의 유치원, 83개 의 초급학교, 56개의 중급학교, 12개의 고급학교, 1개의 대학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재외교포조직이 세운 유일한 대학인 朝 鮮 大 學 은 1956년 4월에 2년제 대학 으로 설립되었는데, 북한의 재정적 지원 아래 1958년 3월부터 4년제 대학으로 성장하였고 1968년 4월에는 사회당출신의 美 濃 部 東 京 都 지사로부터 各 種 學 校 로 인가를 받았다. 조선대학의 인가를 전후하여 일본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총련 의 각급학교들도 속속 인가를 받았다. 48 李 瑜 煥, 재일한국인60만 ( 東 京 : 洋 洋 社, 1971), pp. 225-228. 49 재일한인 좌익계 세력과 조총련계의 교육사업은 북한에 이용당하는 면도 있었지 만 민단계가 할 수 없었던 업적을 남겼다. 허동찬, 조총련 교육, 북한의 교육 (서울: 을유문화사, 1990). 50 재일교포사회에서는 며느리는 우리글과 우리풍습을 아는 조총련계 출신을 맞이 하는 것이 낫다 는 여담도 있다.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39

그러므로 조총련은 재일한인들의 결집의 장으로 기능하는 측면이 있는 민족학교를 조직의 확대발전을 위하여 최대한으로 이용하고자 하였다. 즉, 민족학교 졸업생들로 하여금 광범한 인적 네트워크를 구축케 하여 세 력 확대를 도모하였던 것이다. 51 사실 조총련계 학교의 사상교육은 조직 구성원의 지속적인 배출을 통하여 조직의 확대발전에 상당히 중요한 기 여를 하였다. 조총련계 민족학교 출신 졸업생들의 사상적 성향은 대체로 일본자본주의체제의 틀 내에서 민족주의적 사회주의 또는 사회주의적 민 족주의 를 지향하며 정치적으로는 한국정부를 비판하고 북한을 지지하는 쪽이었다. 요컨대 북한의 막대한 교육자금지원은 조총련의 교육사업의 밑거름이 되었고 아울러 조총련의 조직 확대 및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이는 북한의 조총련에 대한 영향력 확대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다) 조총련의 금융사업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지만, 재일한인들은 아 주 열악한 환경에서 경제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였다. 특히 마땅한 일자 리가 없었던 재일한인들은 토목공사장의 인부, 구두 고무타어어 냄비 등의 수리공으로 일하거나 영세한 곱창구이집, 국수 수제비집, 판매업 등을 운영하며 근근이 생활을 영위하였다. 일본 법무성 입국관리국이 편 찬한 출입국관리와 그 실태 ( 出 入 國 管 理 とその 實 態, 1959)를 보면, 약 60여만 명의 재일교포 가운데 무직자가 45만9천여명정도이다. 또 맨주먹 으로 상공업을 시작한 재일교포들은 일본정부의 규제, 차별 에 의한 어려움은 물론, 일본금융기관으로부터 대출을 받지 못해 무척 고 생을 하여야 했다. 일본은행들은 일본기업들도 자금난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인데 더욱이 재일교포들은 귀국해버리면 대출금을 회수할 수가 51 지금까지 조선대학 졸업생이 1만 명이다. 재일교포가 70만 명이므로 교포 70명 중 1명이 조선대학 졸업생인 것이다. 따라서 이들 졸업생들에 의한 인적 네트워 크는 재일교포사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조선대학 졸업생은 조 총련 사회에서 지도적 역할을 해왔다. 40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없게 된다 는 이유로 대출을 거절했다. 따라서 재일교포들은 민족적 차별을 극복하고 상공활동에 필요한 자금 을 조달하기 위하여 민족금융기관의 설립운동을 전개했다. 마침내 일본당 국은 민단계와 조련 계 공동운영을 조건으로 동화신용조합( 同 和 信 用 組 合 )의 설립을 인가하였다. 1952년 6월 20일 동화신용조합이 운영되면서 코오베( 神 戶 ), 가와사키( 川 崎 ), 나고야( 名 古 屋 ), 교토( 京 都 ), 오사카( 大 阪 ) 등 8군데에 민족금융조합이 설립되었고, 1955년에는 10군데, 1962년 에는 19군데가 세워졌다. 그런데 동화신용조합은 민단계와 조총련계간의 갈등으로 내분을 겪다 가 1961년 5월 제 9차 총회에서 조총련의 가맹을 결정함에 따라 조총련 계 기관으로서 발전을 하게 되었고, 명칭도 조은 도쿄 신용조합( 朝 銀 東 京 信 用 組 合 )으로 바뀌게 되었다. 조총련의 금융사업은 조은신용조합( 朝 銀 信 用 組 合 )을 일본 각지에 지 점으로 설치하면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조총련은 북한으로부터 매년 송 금되어 오는 교육사업 지원금 및 장학금을 조은신용조합에 예치토록 함 으로써 조총련계 금융조합의 성장을 지원하였다. 조선신용조합은 조총련 의 결성당시에는 8군데의 신용조합, 14개의 점포, 8억8천만엔의 예금액에 불과하였지만, 1990년 6월경에 이르러서는 38군데의 신용조합, 176개의 점포, 2조375억엔의 예금액 규모로 성장하였다. 조총련계 한인뿐만 아니라 민단계 한인들도 조총련계 금융조합을 이용 하였으므로, 조총련계 금융조합은 일본금융기관으로부터 민족차별과 불리 한 대부조건에 고생하던 재일한인 상공인들의 경제활동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52 52 현재 조총련계 상공인은 약 2만2천여 명 정도인데 이들은 빠칭꼬, 부동산업, 불 고기집 등을 운영하면서 연간 3백억-4백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것으로 추산되 고 있다. 朝 銀 信 用 組 合 을 비롯한 조총련계의 금융조합은 이들의 사업이 성장하 는데 적지 않은 기여를 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41

(라) 조총련의 재일한인 북송사업 1950년대에 들어오면서 북한은 일본정부에 재일한인들의 북송 을 요 구하기 시작했고, 조총련도 1958년 8월 12일 도쿄에서 열린 8 15해방 13주년 기념대회에서 일본정부에 대한 선전요청문을 통하여 재일본 조 선인의 북조선귀국을 보장하여 조속히 그것을 위한 대책을 강구하도록 강력히 요망 한다 고 공식적 차원에서 주장하였다. 그리고 동년 9월 8일 김일성은 북한정권 창건 10주년 기념대회에서 무권리와 민족적 차별과 생활고에 허덕이고 있는 재일동포들은 최근 조 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돌아오고 싶다고 희망하고 있다. --------- 공화국정부는 재일동포가 조국에 돌아와서 새로운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을 보증해 줄 것이다. 우리들은 이것을 민족적 의무로 생각한 다. 고 연설하면서 조총련의 재일한인 북송운동 을 격려했다. 또 동년 9 월 16일 북한의 남일 외교부장은 최근, 재일조선공민은 자기들의 조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귀국하여 안정된 생활을 누리고 싶다는 염원 을 표시하여 필요한 조치를 청구해 줄 것을 공화국에 요청해 놓고 있다. 일본에 거주하는 대부분의 조선공민들은 실업과 무권리에 의하여 극도로 비참한 생활 속에서 어려운 나날을 보내고 있으며 수많은 청소년들은 민 주주의적 민족교육을 향유치 못하고 있으며, 진학과 졸업 후의 생활안정 을 보장 못 받고 있다. ------ 우리들은 재일조선공민의 귀국을 조속히 실현하기 위하여 공화국에 귀국하고 싶다고 희망하는 조선공민을 우리 측에 인도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요구할 것을 일본정부에게 요구 한다 며 한층 박차를 가했다. 53 이와 같은 북한 측의 요구에 응하여 일본정부는 1959년 2월 13일 각료회 의에서 희망하는 재일한인들에 한하여 북한으로 송환할 것을 결정하였다. 따라서 북한과 일본 간에는 1959년 4월 13일부터 제네바에서 17차에 걸친 교섭회의를 하게 되고, 마침내 1959년 8월 13일 인도의 캘커타에서 일본 적십자대표와 북한 적십자대표 간에 재일한인들의 북송협정을 체결 53 이승목, 조총련이 일본사회에 미치는 영향, pp. 59-60. 42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

하게 되었다. 재일한인들의 북송협정이 체결됨에 따라 조총련의 재일한인 들의 북송사업은 일본정부의 보조아래 추진되었다. 1959년 12월 14일 제 1차 재일교포의 북송이 실시된 이래, 1967년 11월 12일 북송협정이 폐기 될 때까지 155차례에 걸쳐 총 88,611명의 한인들이 니카타( 新 潟 )항구를 통하여 북한으로 보내졌다. 이러한 재일한인들의 북송사업 은 북한의 전략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 는 것이지만, 54 조총련계 한인사회에서 재일한인들의 북송사업 은 일본에 서 민족적 차별 속에 서럽게 살고 있는 재일한인들을 구출해 주는 민족주 의적인 사업으로 받아들여졌다. 즉 재일한인들이 155차례에 걸쳐 88,611 명이나 북한으로 간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조총련계 한인들은 조총련의 북송사업을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조총련의 북송사업이 그렇게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호응을 받으며 전개 된 요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첫째, 재일한인 1세 2세들은 일본에 정착하기보다는 조국에 돌아간다 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일본사회에서는 재일한인들을 한 반도로 돌려보내라는 여론이 있었다. 둘째, 일본경제가 고도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아직 경제적으로 그렇게 여유가 있는 사회가 못 되었고 더욱이 당시의 재일한인들은 일본 정부의 차별정책으로 취직도 못하고 어려운 생활로 인하여 장래에 대한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셋째, 재일한인들은 소박한 민족감정에서 남의 나라 일본에서 고생하는 것보다 조국의 건설사업에 종사하는 것이 보람된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54 재일교포의 북송사업에 관련된 북한의 전략적 의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지 적할 수 있다. 첫째, 당시 북한은 극심한 노동력의 부족을 겪고 있었으므로 노 동 공급전략의 일환으로 북송사업을 추진하였다. 둘째, 북한은 동포애 차원에서 북송사업을 추진한다는 명분아래 재일교포사회에 영향력을 확대시키고 궁극적 으로 재일교포사회 전체를 적화시킨다. 셋째, 한국이 재일교포의 북송반대를 반 대할 경우, 이를 한국과 일본을 이간시키는 데 이용한다. 넷째, 재일교포 북송사 업을 통하여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북한 일본의 관계정상화를 위한 기반 을 조성한다. Ⅱ. 일본내 한민족 사회 43

넷째, 당시의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항은 귀국을 희망하는 재일한인들 을 받아들일 수 있는 형편이 못 되었다. 55 다섯째, 재일한인들은 북한의 사정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었으므로 조총련과 일본의 혁신계 지식인들의 대대적인 지상낙원론 선전에 현혹 되어 북한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되었다. 북한의 막대한 교육 원조비 및 장 학금은 재일한인들이 그와 같은 환상을 갖는데 상당히 기여하였다. 이상과 같은 요인들이 재일한인들로 하여금 민족주의적 차원에서 조총 련의 북송사업에 적극 호응토록 한 것이다. 조총련에 의한 북송사업은 1966년 8월 북송협정의 폐기와 더불어 일시 중지 되었지만, 1971년 2월 북송재개를 위한 합의가 이루어짐에 따라 계 속 추진되었다. 56 이와 같이 재일한인들의 호응 속에 전개된 조총련의 북송사업은 조총 련의 재정기반을 비약적으로 확대시켰다. 조총련은 북송한인들에게 (1) 지상낙원 북한에 가면 모든 생활을 나라에서 보장해 준다고 선전하였고, 나아가 (2) 조총련에 돈이나 집 등 재산을 기부하였다는 증명서를 가지고 가면 북한에서 반대급부로 우대를 받는다는 선전을 하였다. 즉 북한은 북 송한인들의 재산기부를 유도하는 선전공세를 펼친 것이다. 그 결과, 북송한인들의 상당한 재산이 조총련에 기증되었다. 이로써 조 총련의 재정적 기반은 북송한인들의 재산기증, 조총련계 한인들의 경제적 기반강화 등으로 인하여 비약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총련은 민족교육사업, 재일교포 북송사업 등을 계기로 재정적 기반을 강화하고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와 같이 조직 을 확장하고 세력을 확대한 조총련은 일본의 좌파세력과의 관계에서도 그 폭을 넓혀 나갔다. 57 55 조총련에 의한 북송사업이 시작된 4개월 후 한국에서는 4 19혁명이 일어나 이 승만정권이 붕괴하고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으나 정국은 매우 불안정하였다. 게 다가 보리 고개 등 경제적으로는 절대빈곤상태에 있었다. 56 1996년 현재 북송교포는 93,339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57 조총련은 1950년대까지는 주로 일본공산당과 직접적인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수 준이었는데, 1960년대 후반부터 변화를 나타내었다. 특히 북한과 조총련은 일본 44 동아시아 한민족 사회의 역사적 형성과정 및 실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