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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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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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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문화연구 2006 가을호 제29권 제3호(통권 104호) pp. 133~167. 硏 究 論 文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조 성 훈 * 1) Ⅰ. 머리말 Ⅱ. 인천상륙작전 직전 낙동강전선 전황 Ⅲ.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의 역할 Ⅳ.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맥아더의 확전론 Ⅴ. 맺음말 <참고문헌> <국문요약> I. 머리말 맥아더는 뛰어난 군사전략가였지만 한국전쟁에서 한계도 많이 드러냈다. 그는 다른 미 군부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전쟁 전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하지 않았 을 뿐만 아니라, 1)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지 못했다. 중공군과 접전 후 휴전을 모색 하려는 트루먼 대통령과는 달리, 맥아더는 작전지역을 중국까지 확대하려 하다가 결국 해임되고 말았다. 그 배경에는 1952년 미국 대통령 선거 출마 욕심에 대한 대통령의 견제 등 정치적 이유가 개재되어 있었지만,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성 공이후 북진할 때 중국군 개입 가능성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병력을 제8군과 제10군으로 나누어 북진시킴으로써 중국군에 약점을 노출한 대실수에 대한 책임 * 한남대학교 강사, 한국현대사 전공(qurinocho@hanmail.net). 1) The New York Times, March 2, 1949; Acheson, Dean, The Korean War(Norton & Co Inc, 1971), p. 42; History of the Office of Secretary of Defense, The Test of War 1950~1953, Vol. 1(Washington D.C., U.S. Government Printing Office, 1988), p. 60.

134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쟁에서 인천상륙작전은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 작전 에 미온적이었던 미 합동참모본부 의장 브래들리(Omar Bradley) 장군은 그 작 전의 성공을 약간 과장하여 군사적 기적이고, 맥아더를 군사적 천재라고 평가했다. 중국에서도 이 작전이 세계군사사를 놀라게 하는 것으로 맥아더가 기적을 창출했 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3) 맥아더가 사망했을 때, 고 박정희 대통령은 그가 우 리 한국민의 가슴 속에 아로새겨진 영원한 벗으로 누구보다도 한국을 이해해 주었 고, 그 누구보다도 한국의 기구한 운명에 동정을 아끼지 않았으며 공산주의자들로 부터 우리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수호함으로써 극동의 평화와 인류의 자유를 위한 불후한 무훈을 남겼다 고 추도했다. 4) 맥아더에 대한 이러한 평가는 한국에서 그 동안 주류를 이루어왔다. 따라서 그 동안 연구는 주로 인천상륙작전의 군사적 성 과에 대해 많이 다루어졌으며, 최근에는 인천상륙전의 기습과 북한군의 대응여부 에 대해 주목한 논문이 이어지고 있다. 5) 중국에서도 한국전쟁을 연구하려면 부득 불 인천상륙작전을 연구해야 하고 이를 연구하려면 맥아더를 연구해야 한다고 그 의 역할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 작전의 성과를 분석하고 장래 상륙전에 대한 대비 책을 강구하는 연구까지 진행되고 있다. 6) 2) 김수남, 한국전쟁기간중 미국의 문민통제: 트루만과 맥아더의 관계, ꡔ국제정치논총ꡕ, 제30집 2호 (1991), 243~244쪽; 딘 러스크(저)/홍영주 정순주(역), ꡔ냉전의 비망록ꡕ(시공사, 1991), 113쪽; 베빈 알 렉산더(저)/김형배(역), ꡔ위대한 장군들은 어떻게 승리하였는가?ꡕ(홍익출판사, 2000), 402쪽. 3) 劉 紫 塇 ( 等 ), ꡔ 鐵 血 戰 士 譚 友 林 ꡕ( 北 京 : 해방군출판사, 2004), 248쪽; Bradley, Omar and Clay Blair, A General's Life(Buccaneer Books, 1993), pp. 556~557. 4) 대통령 박정희, 추도사, 1964. 4. 11, 국가기록원. 5) 박명림, 한국전쟁: 전세의 역전과 북한의 대응 1950년 8월 28일부터 10월 1일까지, ꡔ전략연구ꡕ, 10(1997); 김영인, 인천상륙작전의 작전술 차원 분석, ꡔ군사평론ꡕ, 334(1998); 김광수, 인천상륙 작전은 기습이 아니었는가, ꡔ전사ꡕ, 2(1999); 김현기,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이 한국전쟁에 미 친 영향, ꡔ국방대 교수논총ꡕ 13(1998); 유재춘, 작전술 차원의 기습전례 분석, ꡔ논문집ꡕ, 53(육 군제3사관학교, 2001); 이선호, 맥아더 장군과 9 15 인천상륙작전, ꡔ 軍 事 세계ꡕ, 123호(2005); 김지욱,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 장군 그리고 동상( 銅 像 ), 自 由, 385호(2005. 9); 이상호, 인 천상륙작전과 북한의 대응, ꡔ군사ꡕ, 59(2006);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ꡔ인천상륙작전ꡕ(국방부전 사편찬위원회, 1983). 최근 한국전쟁학회에서는 맥아더의 역할에 재평가를 시도했다( 한국전쟁의 성격과 맥아더논쟁의 재조명, 2006. 3. 31). 6) 張 金 基, 對 美 軍 仁 川 登 陸 作 戰 的 評 析, 陳 忠 龍 ( 編 ), ꡔ항미원조전쟁론ꡕ( 北 京 : 軍 事 誼 文 出 版 社, 2001); 宋 連 生, ꡔ항미원조 再 回 首 ꡕ( 云 南 인민출판사, 2002), 130쪽.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35 이미 상륙작전 성공 이후 유엔군 작전에 미친 영향에 대해 비판이 있었지만, 7) 한국에서는 일부 단체가 맥아더를 주한미군의 상징으로 여겨 2005년 5월부터 맥 아더 동상이 서있는 인천 자유공원에서 철거집회를 하면서 그에 관한 비판적인 입 장이 크게 대두되었다. 맥아더가 과연 동상까지 세워가며 숭앙할 만큼 교훈적이거 나 영웅적인 인물일까? 최고지휘관에 걸맞은 판단력을 갖춘 적이 없는 군사적 모 험주의자이고 인간적으로 볼 때도 맥아더는 독선적이며 자아도취적 소아병 환자였 다고 비판했다. 나아가서 생전에 건립된 맥아더의 동상을 청산해야 할 주권국가의 흉물 이라면서, 민중연대 통일연대 한총련 등은 그의 동상철거를 위해 지지세력 을 동원하여 실력행사를 하기에 이르렀다. 8) 비판론자들이 맥아더의 역할에 대해 태평양전쟁과 한반도 분단, 전후 일본에서 정책, 6 25전쟁에서 양민학살, 대규모 원자폭탄 사용요청 등을 지적하고 있지만, 9) 맥아더 동상이 인천에 세워진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닌 바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공산화될 한국의 위기를 구출한 공을 기리기 위한 것이므로 본고에서는 인천상륙작 전과 관련된 부문을 중심으로 고찰했다. II. 인천상륙작전 직전 낙동강전선 전황 남침 이후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온 북한군이 낙동강선에 도착한 것은 1950년 7 월 말이었다. 미군 개입 초기에 유엔군사령관 맥아더가 북한군의 공세를 효과적으 로 저지하지 못한 데에 대한 비판이 있지만, 낙동강선에서 북한군은 한달 반 동안 저지되고 있었다. 7월 29일 워커 장군은 유엔군 장병에게 이 전선에서 더 이상 후 퇴나 철수는 있을 수 없다고 사수[Stand or die]할 것을 강조하였다. 7) 김광수, 앞의 논문, 218쪽. 8) 한홍구,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한겨레 21, 407호(2002. 5. 9); 맥아더, 한국에서만 '신'이 된 사나이, 오마이뉴스, 2005년 9월 11일자; 장창준, 맥아더 장군 은 과연 대한민국의 영웅인 가?, 정세동향, 2005년 9월호; 김선주, 맥아더 동상철거논쟁의 현황과 향후 과제, 정세동 향, 2005년 10월호. 9) 맥아더 평가, 학계가 나서라, 한겨레신문, 2005년 9월 12일자 사설; 박태균, 인천상륙 은 성공한 작전인가, 한겨레 21, 578호(2005. 10. 4).

136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북한군은 1950년 8월 5일부터 낙동강 도하공격을 개시하여, 8월 15일 해방 5주 년을 기념하여 전한반도를 통일시키려고 공세를 강화했다. 낙동강 전선에서 결정 적인 공격을 위해 후방 예비병력인 제7, 8, 9, 10, 13사단 등 5개 예비사단을 전선 에 투입했다. 10) 그들은 8월중 한반도의 8% 지역 내로 한국군과 유엔군을 압박했 고, 8월을 전 한반도 해방승리의 달 이라고 선포했다. 9월 9일 북한 창설 2주년 을 맞이한 김일성은 승리는 조선인민의 것 이라고 목전에 임박한 승리를 자축했 다. 그러나 북한군은 8월과 9월의 연이은 공세에도 낙동강을 건너지 못했다. 이러 한 장기적인 전선교착 속에 유엔군의 후방상륙 위협이 현실화되었다. 11) <표 1>에서처럼 인천상륙작전 직전까지 국군과 유엔군은 사투를 벌이고 있었 다. 매일 적게는 수명에서 많게는 300명이 넘는 국군이 전사하고 있었다. 8월 6일 하루 동안 국군 225명이 전사하고, 127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85명이 실종되었다. 9월 15일 전투에서는 국군 355명이 전사하고 491명이 부상을 당했으며 663명이 실종되었다. 미군도 매일 수십명의 사상자를 내고 있었다. 북한측은 1950년 8월 31일부터 9월 6일까지 함안, 영산, 창녕, 현풍, 영천, 포항 등을 점령함으로써 미 제8군의 위기는 절정에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12) 이러한 공 세 속에서 9월 6일 대구에 있는 한국 육군본부를 부산으로 이전했고, 이 무렵 미 군은 한국을 포기하고 2개 사단과 민간인 10만 명을 해외에 이주시킬 계획을 준 비했다. 13) 당시 국군은 낙동강을 버리는 순간부터 대한민국은 신생 독립 불과 2 년 만에 사라져 버릴 것 이라는 각오로 사력을 다하면서, 인천상륙작전 계획이 추 진되고 있음을 알고 이를 기대하고 있었다. 14) 국군과 유엔군은 점차 북한군의 공세를 다부동과 영천 등에서 막아냈고 병력면 에서도 북한군 보다 많았고, 제공권 제해권 지상부대의 화력과 기동력 등에서 10)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ꡔ소련 군사고문단장 라주바예프의 6 25전쟁보고서ꡕ(1)(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2001), 227쪽. 최태환은 북한군 제15사단이 포함된 것으로 기억했다(최태환, ꡔ젊은 혁명 가의 초상ꡕ(공동체, 1989), 162쪽). 11) 박명림, ꡔ한국 1950: 전쟁과 평화ꡕ(나남출판사, 2002), 99~105쪽; 오소경, ꡔ중공군의 한국전쟁 교 훈ꡕ(육군본부, 2005), 14쪽. 12) 허종호, ꡔ미제의 극동침략정책과 조선전쟁ꡕ(2)(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93), 107쪽. 13) 정일권, ꡔ정일권 회고록ꡕ(고려서적, 1996), 235~238쪽. 14) 위의 책, 234~237쪽; 공국진, ꡔ한 노병의 애환ꡕ(원민, 2001), 120~121쪽.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37 우세함으로써 낙동강전선에서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는 평가도 있지 만, 15) 인천상륙작전 직전인 1950년 9월 13일 미 제1기병사단에서 총공세를 폈으 나 북한군의 강력한 저항으로 균형을 쉽게 깨뜨릴 수 없었다. 제1기병사단 사령부 에서는 그들과 맞서고 있는 북한군 제1사단과 제13사단이 대구를 점령하려는 의 지를 꺽지 않고 있다고 평가했다. 16) <표 1> 국군과 미군 희생자(1950. 8. 2 ~ 9. 15) 17) 전사 부상 실종 국군 미군 국군 미군 국군 미군 8. 2 84 26 512 130 216 133 3 1 11 0 126 9 144 4 128 7 414 51 591 18 5 29 29 203 111 259 76 6 225 24 127 101 85 29 7 141 11 544 61 643 3 8 59 10 * 444 50 218 7 9 45 21 128 143 117 14 10 22 10 ** 44 121 717 12 11 38 12 139 163 100 50 12 90 17 267 144 106 10 13 55 39 308 172 572 12 14 83 25 400 327 297 152 15 57 38 *** 210 277 98 278 16 132 24 236 260 377 53 17 168 12 539 151 1051 55 18 87 26 373 288 1405 97 19 69 50 168 359 177 13 20 132 9 673 37 264 17 21 63 23 354 106 97 9 22 216 8 739 38 1,274 5 23 66 3 525 79 341 3 24 190 23 876 127 499 19 15) 국방군사연구소, ꡔ한국전쟁ꡕ(상)(국방군사연구소, 1995), 392쪽. 16) HQS 1 U.S. Corps, Periodic Intelligence Report (Sep. 13, 1950), SN 129. 17) High Lights (Aug. 1950), HD 17, 군사편찬연구소; Operation Reports, MacArthur Memorial, SN 95.

138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25 78 6 387 78 87 5 26 204 16 713 63 353 5 27 111 20 1028 85 54 5 28 23 7 325 43 44 2 29 99 12 712 16 53 3 30 108 9 917 30 103 2 31 110 44 513 60 23 11 9. 1 50 53 238 175 26-2 160 44 **** 527 230 266 42 3 305 37 821 182 62 41 4 120 119 ***** 600 606 148 43 5 178 137 1138 521 83 593 6 87 137 534 641 38 39 7 1 42 13 375 237 299 8 1 68 31 258 19 113 9 48 62 266 333 1780 80 10 93 61 441 328 471 64 11 211 29 1288 122 1463 2 12 143 32 791 379 796 21 13 143 91 791 263 796 83 14 77 47 392 341 373 21 15 355 48 491 324 663 21 * 미 제24사단 보고 없음 ** 미 5공정연대 별도 *** 미 제24단 보고는 3일간 임 **** 미 제2사단 보고 없음 ***** 미 제2사단 3일간 통계 III. 인천상륙작전과 맥아더의 역할 1. 상륙작전 준비 과정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의 계속된 공세에도 불구하고 1950년 8월말에 이르면 북 한군이 부산을 장악하지 못하리라는 점은 분명해졌다. 그러나 유엔군이 낙동강 전 선의 교착상태를 어떻게 타파할 것인가는 분명하지 못했다. 즉 낙동강전선에서 병 력증강으로 북한군을 정면에서 돌파하는 방안과 적 후방으로 상륙하여 포위 혹은 교란작전을 수행하는 안이 논의되었다. 18) 상륙작전의 경우 그 대상지역으로 인천,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39 진남포, 군산 등에 대한 논쟁 속에 맥아더가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촉구했으나, 합 동참모본부는 인천의 조수간만의 차가 세계에서 가장 높은 항구 중의 하나이고 상 륙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이 작전이 낙동강까지 떨어져 있는 적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북한군에 직접적인 타격이 될 수 없다는 등을 이유로 그의 계획에 대해 무 척 회의적이었다. 19) 상륙지역을 어느 곳으로 선정하느냐는 상륙작전의 성패를 가르는 중요한 관건 이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의 구상과 계획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이미 북한의 남침직후인 6월 29일 한강전선을 시찰할 때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 다. 20) 이에 대해 인천상륙작전 아이디어는 이미 전쟁 전, 미 육군의 작전계획에 입안되어 있다는 점을 제기함으로써 21) 일부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의 아이디어가 맥 아더의 독자적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문이 제기되고 있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작전의 실행과 그 성공이다. 이점에 대해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J. Lawton Collins)도 맥아더의 역할을 높이 평가했다. 22) 제2차세계대전시 맥아더의 전략적 실수에 대한 비난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인천상륙작전을 입안하고 수행하는 데 수륙양면 전투가 많았던 태평양전쟁에서 경 험이 큰 도움이 되었다. 23) 인천상륙작전이 완전히 새로운 작전이 아니었으나, 맥 아더의 전략적 우수성은 국방부와 합참, 낙동강 전선의 미 제8군, 심지어 상륙작 전을 실행할 해군과 해병대의 반대를 극복했다는 점이다. 24) 18) 1950년 9월 8일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 사령관에게 상륙작전을 촉구하는 편지를 쓰면서, 인천 이나 대구 북방 어느 곳에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상륙작전을 실시하여 제2전선을 구축하는 매우 시급하다고 지적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사령관에게 (1950. 9. 8), 국사편찬위원회). 19) 이강석, 中 共 의 軍 事 戰 略 과 맥아더 解 雇 決 定 의 再 評 價, ꡔ국방연구ꡕ, 27집 1호(1984), 102쪽; 딘 러스크, 앞의 책, 112쪽; 朱 啓 凱 외, 인천등륙 對 未 來 등륙작전적기점계시, 陳 忠 龍 ( 編 ), ꡔ항미원조 전쟁론ꡕ( 北 京 : 軍 事 誼 文 出 版 社, 2001), 496쪽. 20) 유재춘, 앞의 논문, 3쪽; 전쟁기념사업회, ꡔ한국전쟁사ꡕ(4)(행림출판, 1992), 13쪽; 宋 連 生, 앞의 책, 130쪽. 21) 박명림, ꡔ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ꡕ(2)(나남출판, 1996), 588~599쪽. 22) Collins, J. Lawton, War in Peacetime(the Easton Press, 1969), p. 115. 23) 에드거 F. 퍼이어(저)/이민수 최정민(역), ꡔ영혼을 지휘하는 리더십ꡕ(책세상, 2005), 211~217쪽. 최근 중국에서도 맥아더가 직접 당시 전선을 확인하고, 당시에 이미 상륙지점으로 인천지역을 결 정했던 점을 높이 평가했다. 双 石, ꡔ 開 國 第 一 戰 ꡕ( 北 京 : 중앙당사출판사, 2004), 87~88쪽. 24) 가미야후지(저)/이기택(역), ꡔ한국전쟁ꡕ(프로젝트 한반도, 2004), 59~60쪽; Collins, J. Lawton, op.

140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맥아더는 1950년 6월 하순 미 제24사단과 국군이 북한군을 저지하는 동안 제1 기병사단을 인천에 상륙시킬 것을 구상했고, 합참에서도 이 작전을 승인했다. 25) 하지만, 미 지상군의 잇단 패배로 상륙작전이 취소되었다. 그는 상륙작전 계획을 완전 폐기한 것이 아니라, 계속되는 패전상황을 돌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확신했다. 7월 23일, 맥아더는 상륙작전 구상을 합참에 제안했고, 8월 12일 극동 군총사령부에서 상륙작전안(작전 100-B호)을 마련했다. 같은 달 21일, 사실 인천 상륙작전안을 단념시키기 위해 육군 참모총장 콜린스 장군과 해군 참모총장 셔먼 (F. P. Sherman) 장군이 도쿄를 방문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설득당했다. 콜린 스가 군산을 대안으로 제시했지만, 맥아더는 인천의 많은 약점을 극복하고 거꾸로 역습에 성공할 수 있다는 점을 설득했다. 참석자들은 모두 맥아더의 웅변과 열정 (eloquent and passionate soliloquy)으로 최소한 상륙작전의 성공에 대한 그의 자신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는 그의 명망과 능력이 아니었다면 쉽지 않는 상황 이었다. 결국 8월 28일 합참에서 상륙지점을 군산으로 종용하면서도 맥아더 장군 의 계획에 동의한다는 동의서가 전달되었다. 이를 두고 맥아더가 미국의 군 통수 권자인 트루먼 대통령이나 합동참모본부의 명령계통을 무시했다는 비판도 있지 만, 26) 합참은 맥아더의 상륙작전에 대한 거듭된 확신(complete confidence)에 감 명을 받아 9월 9일 최종 승인했다. 트루먼 대통령에게도 맥아더의 낙관적인 답변이 보고되었을 때, 트루먼은 작전안에 대해 대담한 전략적 안(a daring strategic conception)이라고 보고 성공에 대한 최대한의 신뢰를 나타냈다. 27) 작전 협의과정에서 군산 이외에도 미 해군은 평택의 포승면을 제시했지만, 28) 맥아더는 인천을 고집했다. 인천은 서울의 관문으로, 한국의 수도 라는 상징성 외 에도 경제와 교통 및 보급로의 중심지였다. 맥아더는 인천과 함께 군산, 주문진, cit, p. 114. 트루먼 대통령도 맥아더를 좋아하지 않았다. Bradley, Omar and Clay Blair, op. cit, p. 541. 25) Collins, J. Lawton, ibid., p. 114. 26) 박태균, 앞의 글. 27) Collins, J. Lawton, op. cit, pp. 126~129. 이러한 자신감과 달리 한편으로 맥아더는 상륙작전이 개시 전날까지도 미국에게 군사적 재앙이 될 것을 우려했다. Bradley, Omar and Clay Blair, op. cit, p. 556. 28) Collins, J. Lawton, ibid., pp. 126~127.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41 해주, 진남포를 검토하여 인천상륙계획, 군산상륙계획(100-C), 주문진상륙계획(100 -D) 등 3개안을 작성했다. 그런데 군산에 상륙할 경우, 지형적 요소로 인해 상륙 작전에 쉽게 성공할 수 있었을 지라도 낙동강 전선과 연계 가능성이 높고 서울까 지 거리가 있어 서울 재수복에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을 것이다. 원산이나 포항 도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너무 후방이었다. 당시 한국 해병들은 군산 이냐 원산이냐를 놓고 의견이 분분했다고 한다. 29) 마오쩌둥은 북한측에 인천~서울지역과 진남포~평양지역을 특별히 경계할 것을 조언했다. 30) 중국에서도 군산이나 진남포를 선택했다면 인천과 같은 결정적인 전 과를 얻지 못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왜냐하면 상륙 후 포위태세를 형성하기 어 려워 보급선 차단이 불가능해서 상륙작전의 전략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평가했다. 31) 또한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준비기간이 매우 짧았는데도 이를 성공시켰다는 점 도 기억할 만하다. 역사적으로 상륙전의 성공요인을 분석하면 작전 전에 병력동원, 첩보수집, 군수지원 등 충분한 준비가 매우 중요했다. 노르망디 상륙전을 준비하 는데 꼬박 1년 소요되었으나, 인천상륙작전은 단 23일이 걸렸다. 32) 물론 미군이 제공권, 제해권, 지상부대의 화력과 기동력에서 우세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일 을 시작하면 재빨리 끝내는 맥아더의 뛰어난 자질도 33) 중요한 몫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2. 작전결과 1) 낙동강 전선 1950년 9월초에 이르면 낙동강 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 병력보다 거 29) 강복구, ꡔ철모와 들국화ꡕ(행림출판, 1993), 41~42쪽. 30)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저)/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역), ꡔ중국군의 한국전쟁사ꡕ(1)(국방 부 군사편찬연구소, 2003), 176~177쪽. 31) 張 金 基, 앞의 논문, 491쪽. 32) 장련송(외), 역사상중요등륙작전역후근보장적경험교훈, 중국군사과학원, ꡔ군사역사ꡕ, 2001-1, 22 쪽; Commander Malcom W. Cagle, US Navy-the Analysis of a Gamble, US Navy Institute Proceeding(Jan., 1954), p. 50. 33) 윌리엄 맨체스터(저)/육사인문사회과학처(역), ꡔ맥아더원수ꡕ(병학사, 1984), 786쪽.

142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의 2배나 많았다. 산술적으로 낙동강전선에서 공방은 인천상륙작전 여부에 관계없 이 그 귀결이 정해져 있는지 모른다고 지적되기도 했지만, 34) 낙동강전선에서 유엔 군이 9월 16일 반격전을 실시했으나 북한군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인천에 상륙한 제10군단의 부대들이 한강변에 진출하기 까지, 미 제8군은 낙동강 전선에 서 사실상 전진을 할 수 없었다. 전환점은 인천상륙작전이었다. 중국에서도 미군 이 인천에 상륙하여 낙동강 일선의 북한군 후방을 포위함으로써 한국전쟁의 상황 은 급변했다고 평가했다. 35) 낙동강 전선에서 당시 북한군은 병력증원이나 보급이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사생결단 으로 전투에 임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1950년 9월 4일, 여하한 일이 있 어도 낙동강 전선에 교두보를 확보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각 군부대에 가장 혹 독한 명령을 내렸다. 즉 조선인민군은 전투 임무수행에서 상관이나 상부의 명령을 조국의 명령으로 인정하고 일보도 퇴각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만약 상부명령을 실행하지 못하였거나 자기 마음대로 퇴각하였을 때에는 상관이 즉석에서 총살하도 록 지시했다. 이에 따라 인민군 내 정치일꾼들은 정치사업을 진행했다. 인민군 각 부대에서는 하부 말단 분대에 이르기까지 당 민청회를 열고 결의문을 채택한 후 내가 이 엄숙한 결의문을 위반하였을 시 나는 조국의 엄벌을 받겠다 라고 쓰고 자필 서명까지 하였다고 한다. 36) 전 후에 북한측은 인천상륙작전이 기본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실패한 작전이었 다고 주장했다. 37)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으로 하여 금 2개의 전선을 갖게 하였고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심리적으로 그들을 유린 했으 며 보급과 통신수단을 단절시켰다. 김천 부근에 있는 북한군 전선사령부에서는 미 군의 인천상륙 사실을 일찍부터 파악하고 있었으나 최고사령부로부터 적절한 지시 나 명령이 없어 초조와 긴장에 쌓여 사기는 더욱 떨어졌다. 낙동강 전선에서 9월 25일경 북한군은 무기와 탄약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통신체계가 마비되어 상부에 34) 박명림, 앞의 책(2002), 134쪽. 35) 오소경, 앞의 책, 16쪽. 36) 한 영웅(전기철)의 전투일기, 청년생활, 1965년 2월호, 10~12쪽; 최태환, 앞의 책, 162쪽; 장학봉(외), ꡔ북조선을 만든 고려인 이야기ꡕ(경인문화사, 2006), 579쪽; HQ. 1st Cavalry Division G2,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 (1950. 7. 18~12. 1), 군사편찬연구소, HD 1810. 37) 허종호, 앞의 책, 120쪽.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43 서 하부로 명령이 전달되지 않는 형편에 빠졌다. 9월 26일 밤에 북한 주재 소련관 리의 제안으로 전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북한군 장교를 서울과 전선으로 파견할 지경이었다. 38) 인천상륙작전 후, 북한군 지도부는 낙동강전선의 주력부대를 방어체제로 전환시 키고 전선에서 4개 사단을 차출하여 서울지역을 지원하도록 했다. 39) 즉 유엔군이 인천에서 상륙하자, 이를 방어하기 위해 천안까지 내려간 북한군 제18사단에 남진 을 중지시키고, 현풍지방에서 곧 공격행동을 취할 예정인 제9사단과 낙동강 서안 에서 작전 중인 제105전차사단을 빼내 서울지구로 병력을 돌렸다. 40) 팽팽한 전선 에서 병력을 빼낸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다. 국군을 비롯한 유엔군은 9월 16일 총공격을 개시했다. 북한에서는 9월 25일까 지 방어한 후 26일부터 조직적으로 후퇴했다고 주장했다. 41) 그들의 주장보다는 빠른 18일에 이르러 북한군이 밀리기 시작하여 20일에는 북한군 방어선에서 균열 을 보이기 시작하여 국군 제3사단이 포항을 되찾았다. 미군과 국군은 22일부터 낙 동강을 건너 북한군 진지를 돌파했다. 상륙작전 후 10일도 못돼 북한군은 전 전선 에서 후퇴명령을 내리고, 무질서한 후퇴를 계속했다. 반면에 아군은 사기가 크게 올라서 희생자를 최소한으로 줄이면서 하루에 평균 100리씩 진군했다. 42) 9월 26일 미군 제1기병사단의 선두부대는 인천지역에 상륙한 미군 제7사단의 선두부대와 오산에서 합류했다. 만약 상륙작전이 실시되지 않고 아군이 낙동강 전 선에서 반격작전을 실시했다면 38선까지 30일간이 소요되고 아군의 인명피해도 10만 명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43) 38) 스탈린 동지에게 (1950. 9. 27), 외무부(역), 한국전쟁관련 소련 극비문서 (III)(외무부, 1994); 주영복, ꡔ내가 겪은 조선전쟁ꡕ(고려원, 1991), 21쪽. 39)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앞의 책, 180쪽. 40) 주영복, 앞의 책, 22쪽. 41)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ꡔ조선전사ꡕ(26)(평양: 과학백과출판사, 1981), 51~52쪽; 사회과학원력사연 구연구소(편), ꡔ조선통사ꡕ(하)(평양, 과학원출판사, 1968), 427~428쪽. 42)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편), ꡔ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ꡕ(선인, 2001), 203쪽; 류형석 (편), ꡔ우리들의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ꡕ(6 25참전소년병전우회, 2005), 123쪽; HQ, Korean Army, Periodic Operations Report, No. 145~237 (Sep. 1950), 군사편찬연구소. 이미 9월 20일 북한군 제3사단은 후퇴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Tem PW No. CD 352, Kim Pong Jin etc., HQ. 1st Cavalry Division G2, Prisoner of War Interrogation Report(1950. 7. 18~12. 1), 군사편찬연 구소, HD 1810).

144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표 2> 인천상륙작전이후 아군 피해 및 전과 전사 부상 실종 북한군 국군 미군 * 국군 미군 국군 미군 포로 9. 16 84 35 776 332 1,023 50 44 17 48 41 319 286 220 124 239 18 67 66 202 690 76 25 748 19 40 45 207 434 57 16 2,306 20 102 65 ** 441 500 74 141 121 21 151 96 ** 765 457 156 15 452 22 77 39 *** 682 295 72 78 685 23 141 60 *** 824 314 399 15 358 24 163 20 ** 965 181 247 24 221 25 181 55 *** 913 262 473 4 370 26 99 56 435 334 152 25 1,512 27 41 78 181 197 71 2 551 28 49 53 199 424 33 12 29 15 63 44 275 12 15 4,190 30 61 31 223 178 192 11 692 10. 1 38 48 80 102 104 16 6,765 2 31 37 354 94 22 8 642 3 24 87 23 235 15 7 4,166 4 75 16 163 89 208 5 1,652 5 37 2 91 19 112 27 10,327 6 19 5 66 131 14 5 2,180 7 16 17 37 61 37 2 1,765 8 19 4 29 11 24 7 8,108 9 0 1 13 13 3 1 4,531 10 26 8 101 23 92 3 1,141 * 영국군 등은 별도 ** 미 제10군단 별도 *** 미 제7사단 별도 43) 김영인, 앞의 논문, 24쪽; 육군대학, ꡔ한국전투사ꡕ(교참 2-1)(1996), 253쪽.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45 북한측에서는 맥아더의 포위작전이 빈 그물을 낚아 올렸다고 비아냥거렸다. 하 지만 <표 2>에 나타는 것처럼 인천상륙작전 이후 아군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점차 줄고 북한군의 투항자를 포함한 포로의 수가 크게 늘어남을 알 수 있다. 유엔군은 6개 사단과 2개 여단으로 편성된 북한군 제1군단을 비롯해 7개 사단으로 이루어 진 제2군단도 차단하는데 성공했다. 1950년 8월말까지 아군이 획득한 북한군 포 로의 수는 모두 1,745명에 불과했으나, 44) 9월 19일에는 2,000명이 넘었고, 10월 1 일 하루 동안 6,000명이 넘는 포로를 획득하여 10월 22일까지 약 8만 명에 이르 는 포로를 획득하여, 45) 북한군은 거의 와해될 형편이었다. 다급해진 북한군은 포 위된 상태에서 단체적이든, 개별적이든 우선 지휘관부터 철수할 것을 강구했다. 46) 이러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인민군대의 주력이 유엔군의 포위망을 연기처럼 빠져나와 반공격집단을 이루어, 불과 6주 사이에 15만 명의 병력으로 18개 사단을 재편했다고 주장했다. 47) 이에 대해 미군측은 후퇴하던 북한군 중 산 중에 숨고 25,000~3만 명 정도가 38선 이북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했다. 48) 양 측의 주장이 크게 차이가 나지만, 북한군의 재편된 병력 규모는 과장되었던 것이 분명하다. 이 가운데에는 낙동강전선에서 퇴각한 주력부대가 아니라 후퇴하면서 동원되었던 남한 청장년들과 북한지역에서 총동원령으로 징집된 병력이 포함되었 을 것이다. 49) 남한에서 동원된 병력은 북한군이 후퇴하기 시작하는 것을 알게 될 때부터는 밤이면 자기 병영을 탈출하여 도망칠 각오를 하고 있어서 북한을 수호할 기본 병력이 될 수 없었고, 오히려 그들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하여 수비해야 되는 형편이었으므로 마치 포로병 집단을 보호하는 것과 유사하였다고 한다. 50)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이 오랫동안 교착되자 병력보충과 이를 타개하고자 남한 에서 병력을 동원하여 9개 사단을 편성하고, 북한에서 추가로 6개 사단을 창설하 44) HQ UNC, A Tabulation of the Number of Korean and Chinese Communist POWs (1950. 7. 15~1953. 7. 28), 19/338, National Archives. 45) High Lights (Sep. 28; Oct. 23, 1950), 군사편찬연구소, HD 17. 46) 그로미코 동지에게 (1950. 9. 29), 외무부(역), 앞의 책. 47) 허종호, 앞의 책, 129쪽. 48) Collins, J. Lawton, op. cit, p.139. 49)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편), ꡔ격동기 지식인의 세 가지 삶의 모습ꡕ(한국정신문화연구 원 현대사연구소, 1999), 307쪽. 50) 장학봉(외), 앞의 책, 419쪽.

146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여 자신의 힘으로 통일할 것을 구상했으나, 51) 인천상륙작전으로 좌절되었다. 심지 어 김일성은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진군해 오면 새로운 부대를 창설할 수 없어 서 반격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했다. 52) 1951년 7월 전선의 교착 이후에도 중국군 은 인천상륙작전을 재현을 우려하여 미군의 추가 상륙작전을 경계하기 위한 서해 안과 원산 인근에 병력을 배치했다. 한편,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군사적 측면 외에 남북한 사회에 영향을 미쳤다. 추수기 전에 남한의 곡창지대를 회복함으로써 북한군의 보급에 커다란 타격을 주 었을 뿐만 아니라, 닥쳐 올 겨울에 국민들의 식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 는 비록 승리한다고 하더라도, 가을을 넘긴다면 피난민을 포함한 국민의 구호가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53) 그리고 국군과 유엔군의 북진은 북한에 서 우익세력의 활동과 월남을 촉진했다. 소련자료에 따르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 하고 10여 일이 지난 후인 9월 말에 이르면 벌써 북한지역에서 반동세력 이 고개 를 들고 있었다. 54)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할 때, 그들은 신문지와 문창호지에 크레 용으로 그린 태극기를 흔들며 국방군 만세, 연합군 만세 를 외치면서 환영했 고, 55) 중국군 개입 이후 남한으로 피난길에 올라 자유를 찾았다. 2) 경인지역 역사적으로 뛰어난 전략가들은 기습이나 기동력으로 적의 저항을 줄이거나 제 거했다. 영국의 전략가인 리델 하트(Liddell Hart)가 지적하듯이 사람이나 군대도 전방보다 후방으로부터의 위협에 더 민감하기 때문에 배후 공격은 상대방에게 두 려움과 혼란을 일으켜 그들의 조직과 배치를 혼란시키며, 퇴로를 차단함으로써 쉽 게 승리할 수 있는 상황을 조성한다. 56) 51) 스탈린 동지에게 (1950. 9. 27), 외무부(역), 앞의 책; 그로미코 동지에게 (1950. 9. 29), 위의 책. 52) 그로미코 동지에게 (1950. 9. 29), 위의 책. 53) 제8회 12차 국회 본회의, 연합국의 총공세를 촉구하는 메시지 가결, 민주신보, 1950. 9. 3; 제8회 16차 국회 본회의, 연합군 총공격 촉구 결의안 가결, 부산일보, 1950. 9. 8; 국토통 일촉진국민대회, 부산역전 광장에서 개최, 부산일보, 1950. 9. 16. 54) 그로미코 동지에게 (1950. 9. 29), 외무부(역), 앞의 책. 55) 정형섭, ꡔ세월을 넘어 사선을 넘어ꡕ(민족문화사, 1989), 42쪽. 56) 홍성태, 추천의 말, 베빈 알렉산더(저)/김형배(역), 앞의 책.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47 1950년 9월 중순 당시 북한군은 병력이 거의 전부가 낙동강에 집결해 있었고 후방에는 병력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인천상륙작전으로 허리가 잘리니 속수무책으 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그동안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은 기습작전으로 이 해되었지만, 57) 공산측의 자료가 공개되면서 완전한 기습이 아니라 북한군이 이에 대비한 자취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혹자는 인천에 상륙한 연합군 병력이 7만 명 에 이르는 데 비해 인천과 서울에 주둔하고 있는 북한군 규모가 1만 명 수준이었 으므로 58) 이 작전이 성공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를 검토하기 위해 경인지역에서 북한군 대비여부와 북한군 병력 규모, 서울탈환작전이 13일이 소요된 이유를 살펴보았다. 북한측은 이미 1950년 7월 경기도 방어지역 군사위원회를 조직하는 한편 북한 의 주요 항구를 통한 미군 상륙부대와 공수부대의 후방침투 위험성을 강조하면서 소련으로부터 무기공급을 추가로 요청했다. 59) 중국도 인천상륙작전 전에 세 번이 나 미군의 상륙전에 대해 경고를 했다. 이미 1950년 7월 초 북한군의 남진이 계속 될 때, 마오쩌둥은 미군이 반격을 위해 인천지역에 상륙할 가능성을 지적하고 이 뜻을 소련 정부를 통해 북한 최고지도자에게 전달했다. 8월 말과 9월 초에 마오쩌 둥과 저우언라이는 북한 대표를 만나 전쟁의 장기화에 대비하여 인천~서울지역과 진남포~평양지역을 특별히 경계할 것을 권고하였다. 60) 전후 북한에서는 김일성도 이미 1950년 9월 초 유엔군의 인천지역 상륙작전을 알아차리고 인천과 서울지역방어 대책을 지시했다고 강조되고 있다. 61) 전쟁 시기 미군이 노획한 북한군 문서에 따르면, 북한군은 미군의 상륙전에 대해 미리 대비 했다. 1950년 8월 하순부터 인천지역의 북한군 부대는 미군이 기회만 있으면 인 천 또는 서울을 회복하기 위해 인천항의 기습상륙을 기도하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 57)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민족문화연구소(편), 앞의 책, 412~413쪽. 소련측 자료에서도 인천상륙작 전이 기습적이었음을 인정했다(가브릴 코로트코프(저)/어건주(역), ꡔ스탈린과 김일성(II)ꡕ(동아일 보사, 1993), 65~66쪽; 김광수, 앞의 논문, 242쪽에서 재인용). 58) 張 金 基, 앞의 논문, 492쪽. 59)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앞의 책(1981), 21~22쪽; 예프게니 바자노프 나딸리아 바자노바(저)/김광 린(역), ꡔ소련의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ꡕ(열림, 1998), 79쪽. 60)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앞의 책, 176~177쪽. 61) 량동수 백운송, ꡔ미제를 타승한 강철의 령장ꡕ(조선로동당출판사, 1993), 20~23쪽.

148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고 이에 감시를 강화하였다. 62) 당시 해군 제702함장 이희정은 인천에 탱크 6대가 배치되어 있었던 점에 비추어, 북한군이 아군이 인천으로 상륙할 것이라는 것을 예측했던 것으로 이해했다. 63) 하지만, 이는 대규모 상륙작전에 대비한 규모가 아 니라, 언제라도 상륙할 수 있는 미국의 역량에 대한 일상적인 대비인 것으로 보인 다. 즉 북한군의 주력은 모두 낙동강전선에 집중하고 있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말이 이미 8월 말부터 무성했었으나 보충병이나 보충 전투기재는 전혀 도착하지 않아서 그 대비책은 크게 미흡했다. 당시 인천에 는 해안방어 제226여단(여단장 리청송)이 있었지만, 전투력이란 포병 2개 대대와 1개 경비중대 뿐이었다고 한다. 이렇게 병력이 적었던 이유는 당시 제226여단의 방어구역이 황해도 해주에서 경기도 안산까지 그 범위가 넓었던 요인도 있었다. 유엔군의 인천상륙 후 북한군 제18사단이 수원계선에서 보충병력으로 온다는 말 은 있었으나 제226여단 병력이 인천을 빠져 나올 때까지 오지 않았다. 64) 인천지 역의 북한군 병력으로는 1개 대대가 월미도에, 또 다른 1개 대대는 인천항에 배치 되었고 그 외에 1개 경비중대는 해안선에 배치되었다. 이 가운데 통신중대에 약 30명은 신출내기 통신수들이었다. 여단 참모부에는 김창희 참모장을 위시하여 20 명의 군관, 정치부에 정치부장 이하 10명의 군관이 있었다. 유엔군 상륙을 1주일 을 앞두고 인천 제226여단장은 군산 방향으로 해안방어 배치를 위하여 떠난다고 하면서 2개 대대 병력을 인솔하여 군산, 목포 방향으로 떠나간 상태에서 연락이 되지 않았다. 65) 당시 여단장 대리였던 장학봉은 휘하에 탱크도 없고 보조 전투장 비라고 하면 화물차 2대와 지프승용차 한 대가 있었을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인천 여단은 이렇게 적은 병력과 장비로 인천을 방어하려고 하였다. 9월 10일부터 상륙작전을 앞세운 연합군의 예비적 공격은 시작되어 연 5일간 밤낮으로 공중에서 항공포격, 바다에서는 함포 사격이 계속된 결과 북한군 포대대 62) 제884군부대 참모부, 감시지령 (1950. 8. 31), 군사편찬연구소; 박명림, 앞의 책(2002), 423쪽. 63) 인천상륙작전 증언 (이희정, 예비역 소령, 1964. 12. 4), 전사편찬위원회. 장학봉은 탱크가 한 대 도 없었다고 회고했다. 64) 장학봉 편지 (2006. 7. 23), 그는 당시 해안방어여단장 대리로 여단 편제의 특징은 연대가 없고 대대가 직속했다고 진술했다. 65) 장학봉은 정확한 소식은 모르나 유엔군 정보를 청취한 일부 간부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리청송 소장이 군산까지 도착하지 못하고 도중에서 유엔군에게 포위되어 전사하였다고 말했다.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49 의 많은 전투원들은 대항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월미도 해안포 중대(중대장 리 대훈)에서 포진지 구축이 1950년 9월 8일에 끝났지만, 당시 중대에는 포 4문밖에 없었다. 9월 13일 미군의 예비폭격에서 2문이 파괴되어 14일에는 2문의 포로 대 항하였으나 이날 1문이 더 파괴되었다. 중대에서는 상부에 포와 포탄을 보내달라 고 요청했으나 끝내 도착하지 않아 15일에는 1문으로 대항했다. 66) 이러한 사태를 초래한 배경으로 전후에 북한 측은 이승엽 등 남로당계열의 방해책동으로 돌렸지 만, 인천방어를 위해 후방에 예비전력이나 보급지원이 거의 없었다. 인천이 함락 되면서, 이곳의 북한군은 거의 궤멸되었다. 67) 이미 유엔군의 예비공격에서 많은 병력을 잃은 인천여단장 대리 장학봉은 유엔 군이 상륙할 때 월미도 뒷산에 위치한 전투지휘소에서, 유엔군의 대형 함선들이 바닷가에 접하여 뒷문을 열면 거기에서 탱크들이 쏟아져 나오는 모습과 전투원들 을 실은 적은 배들이 수없이 바닷가에 접근하는 광경들을 멍하니 내려다만 보면 서, 부대원을 잠복시켜 총격을 하였으나 달걀로 바위를 때리는 격이었다고 술회했 다. 그는 유엔군의 진격을 피해 종일 산기슭과 신작로, 오솔길을 타고 걸어서 저녁 무렵에 김포 비행장으로 후퇴했다. 이곳에서 인천여단에서 살아남은 총 병력을 점 호하니, 월미도에서 1개 대대 병력 전체가 전사하고 부소대장 1명이 살았으며, 인 천여단 가운데 모두 46명이 살아남았다고 기억했다. 68) 1950년 8월 말 미 제10군단에서 파악한 인천, 서울지역의 북한군 규모는 인천 1,000명 김포 공항 500명 서울 5,000명 등이고 의정부에 대규모의 의용군 훈련 대가 있다고 파악했다. 그 외에 낙동강 전선의 후방지역의 1~2개 사단 규모의 예 비병력과 북한지역에 있는 경비병력 등이 잠재적으로 동원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북한군이 방위사령부(사령관 중장 최용건)를 설치하는 등 점차 서울 인천 지역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했다. 69) 66) 김호, 조국의 한치 땅도 내여 줄 수 없다, 청년생활, 1964년 11월호, 17쪽; 리지영, 월미 도의 영웅들, ꡔ공화국영웅들ꡕ(2)(민청출판사, 1958). 67) 정수길, 인천-서울방어작전, ꡔ조국보위를 위하여ꡕ(1957. 10), 28쪽;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앞의 책(1981), 23~24쪽;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앞의 책(2001), 228, 235, 382쪽. 68) 월미도의 영웅들은 최후의 피한방울까지 바쳐 싸웠다, 로동신문, 1950. 10. 7; 장학봉(외), 앞의 책, 101, 580~581쪽. 생존자의 수가 26명, 46명, 50명 등으로 다르게 진술되어 있다. 69) HQ, 10th Corps, Operation Order No. 1 (Aug. 29, 1950), 군사편찬연구소, SN 4.

150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당시 서울에는 서울 경비연대, 78보병연대, 제18사단, 김포 공항에 공항경비대 대, 서울 방어사령관 예하에는 이제 막 무장된 제25교육여단 3개 대대가 있었다. 유엔군이 서울로 진격하자, 서울 시내에서 치안대원과 의용군이 많이 동원되어 그 규모가 늘었다. 예를 들면 장학봉이 이끌던 인천 여단 병력 가운데 살아남은 40여 명은 전선사령부의 명령으로 서울시 청년들로 구성된 보충병 700명을 받아 역시 임진강 계선 연천군에서 훈련하고 있었으나 아직 아무런 무장도 탄약도 받지 못하 던 형편이었다. 그들은 일부 인천에서 가지고 나온 자동소총 수십 자루와 소련제 보총 몇 자루, 76미리 포 1문이 있었을 뿐이었다. 70) 이 외에 9월 20일 새벽, 서울 방어사령관의 명령으로 춘천으로부터 제45보병사단 예하 제76연대와 제513포병연 대가 투입되었고, 9월 22일 제25교육여단 예하 2개 대대와 제45보병사단 탱크연 대 전차 9대가 투입되었다. 제31서울여단이 서둘러 사단으로 개편되었다. 9월 24 일 춘천으로부터 새벽에 도착한 제17기계화사단, 제33기계화연대를 서울 방어사 령부의 예비로 두었다. 71) 이와 함께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의 주력부대를 방어체제로 전환시키고 전선에 서 4개 사단을 차출하여 서울지역 방어전을 지원하도록 했다. 김일성은 경기도에 주둔한 북한군 부대와 내무성경비대를 경기도 방어지역군사위원회에 소속시켜 인 천~서울지역의 해안방어를 강화하도록 지시했고, 그 후 낙동강전선에서 3~4개 연 합부대를 이 지역으로 신속히 기동시켜 이미 서울에 있던 예비부대들과 배합하여 방어역량을 강화하도록 대책을 세웠다고 한다. 72) 그러나 스탈린이 낙동강전선에서 4개 사단이 신속하게 이동하여 서울에서 전황을 역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질책 을 했던 것으로 보아, 모두 이동하지는 못했지만 일부 대대와 연대병력이 이동하 여 서울전선에 합류했다. 73) 당시 미 제5해병연대 병사는 당시 서울에 있는 북한 병력 규모는 치안대, 의용군 등을 모두 포함해 18,000여 명으로 추산했다. 74) 북한 70) 장학봉(외), 앞의 책, 419, 582쪽. 7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앞의 책(2001), 231~235쪽. 72) 량동수 백운송, 앞의 책, 22쪽. 73) 그로미코 동지에게 (1950. 9. 29), 외무부(역), 앞의 책;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 앞의 책, 180쪽; 예프게니 바자노프 나딸리아 바자노바, 앞의 책, 85쪽. 74) Diary (Sep. 24, 1950), Clarence E. Prince. Jr(미 제5해병연대 통신정비 하사, 전 숭전대 총장), 인천상륙작전 증언 (1982. 11. 12), 전사편찬위원회.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51 군 병력 가운데 낙동강 전선에 추가로 투입하기 위해 남한에서 징집하여 훈련 중 이던 병사들과 서울시민들도 많이 동원되어 그들의 전체 병력 규모는 약 3만 명이 었을 것으로 보인다. 75) 북한군 병력의 서울지역으로 이동은 낙동강 전선에서 아군에게 유리하게 작용 했다. 미 제24사단이 낙동강을 도하하고 왜관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던 것은 김천 동북지역에 있던 북한군 제3, 13, 혹은 10사단이 약해졌거나 철수했기 때문으로 추정했다. 미군 정보 당국은 낙동강 전선의 북한군 제9사단중 일부가 서울 수원지 역에서 눈에 띄고 있었고, 제3 7 10사단의 일부도 영주 충주를 거쳐 이동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76) 한편, 남침시에 북한군이 서울을 3일 만에 점령한 것에 비추어 보면, 인천상륙 작전 후 무려 13일이 77) 걸려 서울을 수복하게 된 데에 대해 맥아더의 능력에 의 문을 나타내기도 한다. 북한측은 14일이나 소요되어 낙동강선의 북한군 주력을 포 위섬멸하려는 계획이 분쇄되었다고 주장했다. 78) 사실 9월 16일 인천을 점령한 후 22일에 김포공항과 한강 남안, 수원비행장 등을 확보하게 되었으므로 진격 속도가 느렸던 점은 사실이었다. 미 해병대는 조그만 저항에도 낮에 진격 속도를 늦추었 고 야간에는 작전을 중지하였다. 79) 맥아더는 5일 안에 서울을 점령할 수 있기를 기대했지만, 아몬드(Edward M. Almond) 미 제10군단장은 2주일 내에 탈환하겠다고 답변함으로써 80) 초기부터 속전속결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미 해병대가 9월 23일부터 한강을 도하했는 데, 이러한 진격속도에 대해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는 예정대로 진척된 것으로 평가 했다. 81) 한강 도하가 서둘러 실시되지 못했던 까닭은 미 해병사단은 한강 도하지 75)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 앞의 책(1981), 37쪽;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344쪽; 예프게니 바자노프 나딸리아 바자노바, 앞의 책, 91쪽. 76) Estimate of the Situation Concerning Possible Withdrawal of NK Forces (Sep. 21, 1950), 군사 편찬연구소; Indications of Enemy Intentions (Sep. 25, 1950), Army Intelligence Project Decimal File, 군사편찬연구소, SN 1596. 77) 북한측에서는 14일이 걸렸다고 기술되었다. 사회과학원력사연구소(편), 앞의 책(1968), 427쪽. 78) 허종호, 앞의 책, 121쪽. 79) Stolfi, Russel H. S., A Critique of Pure Success: Inchon Revisited, Revised, and Contrasted, The Journal of Military History, Vol. 68-2, April, 2004, pp. 517, 522~523. 80) 온창일, ꡔ한민족전쟁사ꡕ(집문당, 2001), 752쪽.

152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점에 대한 사전 정보를 미리 파악하지 못했던 요인도 있었다. 사단사령부에서는 1950년 8월 19일에 작전계획을 수립하기 시작했다. 한강 남안에 도착할 때까지 한강도하를 위한 구체적인 계획은 수립되지 않았다. 82) 보다 큰 요인으로는 병력운용은 제한되었으나, 북한군의 반격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상륙 초기에 미 제10군단의 규모는 46,000여 명에 이르렀으나, 인천 에 5,000여 명을 병력을 배치한 후 가용 병력을 서울과 수원으로 나누어 진격했 다. 수원으로 진출은 남쪽으로 올라오는 미 제8군과 연결을 위한 작전이었다. 그 러므로 서울 쪽으로 진격하는 병력은 한국 해병대 2,786명과 미 제1해병사단 19,494명 등 25,000명 수준에 그쳤다. 83) 즉 9월 18일까지 국군 해병대 1개 연대 와 미 해병사단 예하 2개 연대가 미 제10군단의 전선을 담당하는 전투부대의 전 부였다. 미 제7보병사단은 19일에 전선에 투입되었다. 상륙작전에 참가한 병력이 모두 일시에 상륙한 것이 아니라, 미 제7사단 제32연대는 9월 18일에, 제31연대는 19일 인천에 각각 상륙했고, 미 제7해병연대는 9월 21일에 상륙했으며, 국군 제17 연대는 9월 24일 인천에 도착했다. 또한 미 제7사단에는 한국인 카투사 병력 8,637명을 충원했고, 국군 해병연대는 제주도에서 신병을 모집하여 훈련하던 중 이동한 것이고, 국군 제17연대는 낙동강전선에서 많은 피해를 입고 보충병을 받았 기 때문에 전력이 많이 약화된 상태였다. 84) 맥아더는 9월 25일까지는 미 제1해병사단만으로 서울을 점령하려고 했지만, 24 일 미 제1해병사단이 도하했으나 철원으로부터 온 북한군 제25여단의 저항을 받 았다. 미 해병사단의 느린 진격속도에 제7사단 32연대와 한국군 17연대를 투입했 다. 북한군은 격렬한 시가전으로 대항했다. 85) 서울은 수도라는 정치적 상징성 외 에 주요 도로와 철도가 남북한으로 연결되는 보급기지였으므로, 북한군과 서울시 당에서는 그들에 동조하는 일부 시민들을 동원하여 특별자위대를 편성하여 마지 막 피한방울까지 싸워 사수하자 며 결사적인 방어를 했다. 그들은 참호를 파서 저 81) Collins, J. Lawton, op. cit, p. 138. 82) First Marine Division, FMF Special Action Report Inchon-Seoul (15 Sept 50~7 Oct. 50), 군사 편찬연구소, HC 42, pp. 14~15, 19. 83) 위의 자료, pp. 14~15. 8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앞의 책, 212쪽, 부록; 국방군사연구소, 앞의 책, 395~396쪽. 85) Collins, J. Lawton, op. cit, pp. 139~140.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53 격수를 배치하고 지뢰를 매설하여 강력히 저항했다. 86) 이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으므로, 미 해병 제5연대 한 대원은 왜 우리 부대만 이렇게 고생하며 희생 을 당해야 하는 불만이 있어서 의욕적으로 진출을 서두르지 않았다 고 회상했 다. 87) 북한군은 이 전투에서 국군과 유엔군 12,000여 명을 살상하고 함선 13척과 전차 48대를 격파했다고 주장했다. 88) 하지만 1951년 북한군이나 중국군은 유엔군의 재진격시 해안상륙 가능성에 대 해 공포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전선 교착기 이후에도 미군의 상륙전에 대해 많은 전력을 쏟아 대비하도록 했다. 김일성은 1951년 1월 초부터 동서해안방어부대에 게 해안경비를 강화할 것을 수차 지시했고, 중국군도 원산 등지에 대한 아군의 상 륙에 대비하여 병력을 배치하고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89) IV.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맥아더의 확전론 인천상륙작전 이후 유엔군의 일방적인 승리는 북진으로 이어졌고, 중공군 개입 을 초래했다. 비판론자들은 맥아더의 만주폭격, 원폭투하 등 확전론에 대해 그의 호전성 등을 비판하면서, 이를 애써 외면하는 것은 그에 대한 우상숭배 라고 비판 한다. 90) 중국군 개입 이후 원폭투하 주장을 포함한 맥아더의 전략적 오류나 실수를 외 면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군 개입 이후 맥아더의 확전론의 배경이 되었던 38선 북 진정책에 대해 현지 사령관 주도에 의한 작전의 승리가 후속 작전에서 합동참모부 와 국방부, 행정부의 영향력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지만, 맥아더의 욕심으로 치부될 86) 로동신문, 1950. 10. 1, 2, 4, 5, 6, 8; 박일우, ꡔ조선인민군과 중국인민지원군과의 공동작전ꡕ (평양: 조선로동당출판사, 1951), 11쪽; 허영철, ꡔ역사는 한 번도 나를 비껴가지 않았다ꡕ(보리, 2006), 149쪽. 87) Prince, Clarence E., Jr(미 제5해병연대 통신정비 하사, 전 숭전대 총장), 인천상륙작전 증언 (1982. 11. 12), 전사편찬위원회. 88) 정수길, 앞의 글, 29쪽. 89) 량동수 백운송, 앞의 책, 65~70쪽; 중국 군사과학원 군사역사연구부(저)/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역), ꡔ중국군의 한국전쟁사ꡕ(3)(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5), 532~540쪽. 90) 한홍구, 한홍구의 역사이야기, 한겨레 21, 407호(2002. 5. 9).

154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수 없을 것이다. 전쟁시기 핵무기 사용에 대한 고려는 맥아더뿐만 아니라 트루먼 대통령을 비롯한 미 정부에서 고려되었다. 미국 정부는 특히 중공군 개입 이후 유 엔군이 곤경에 처했을 때 핵무기사용 여부에 대해 고민을 했다. 미 국무부 정책기 획실장 니츠(Paul Nitze)는 한국전쟁에서 원자탄을 사용하는 것이 권장할 만한 것이 아니며 또 핵무기 사용이 소련의 참전을 자극할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핵무기 사용은 아시아인들의 반미운동을 격화시킬 것이며 만약 핵무 기를 선양 하얼빈 따렌 등과 같은 만주의 전략 도시들에 대한 공격 목적에 사용 할 경우에는 엄청난 민간인의 희생을 초래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1950년 11월 30일, 트루먼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필요한 단계에는 중공군에 대해 원자 탄을 사용하기 위하여 모든 적극적인 고려를 하도록 명했다 고 말했다. 91) 또한 당시 이승만 대통령, 군부를 비롯 한국민들은 원자탄의 투하를 포함하더라 도 북한군의 근거지를 없애고 통일하기를 원했다. 현실적으로 38선에서 반격할 북 한군이 거의 없이 열려 있는 상황에서 추격을 중단하기는 매우 어려웠다. 김일성 도 북한군이 남진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는 1950년 7월 13일 영국정부가 북한군 을 38선 이북으로의 철수요구와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모색하자는 제안에 대 해 파렴치 하고 접수될 수 없다 고 반박했다. 92) 후에 중국군이 개입하여 38선에 이르러 계속 남진을 할 것인가에 대해 논란이 있을 때, 김일성과 박헌영 등은 연 이은 중국군의 승리로 자신감을 회복하여 38선 남진에 대한 소극적인 태도를 보 인 중국군 지도부에 중국군의 휴식과 정돈기간을 줄여 속전속결에 의한 승리를 요 구했다. 93) 국내에서는 이미 1950년 8월 15일, 국난극복총궐기대회 에서 80만 부산 시민을 대표하여 맥아더 사령관에게 시급히 북한군을 격퇴시킬 뿐만 아니라 괴뢰집단의 소굴 까지 분쇄할 수 있는 다량의 무기와 병력을 신속히 증파할 것을 요구하면서, 91) 니츠, 핵무기 사용의 영향에 관해 비망록 작성 (1950. 11. 4), United States, Department of State, Foreign Relations of United States, 1950, VII: Korea(Washington, D.C.: USGPO, 1976), pp. 1041~1042; 동아일보, 1950. 12. 2; 채용기, 한국전쟁의 종전과정, 하영선(편), ꡔ한국전 쟁의 새로운 접근: 전통주의와 수정주의를 넘어서ꡕ(나남, 1990), 425쪽. 92) 김일성이 슈티코프에게 (1950. 7. 14), 외무부(역), 앞의 책. 93) 양진삼, 전쟁기 중국지도부와 북한지도부 사이의 모순과 갈등,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ꡔ한국전 쟁사 새로운 연구ꡕ(2)(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02), 596~603쪽.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55 우리 국민은 최후의 일각까지 최후의 일인까지 통일국가 건설의 성전에 돌진할 것 이라고 맹세했다. 또한 연합군 장병들에게도 북한군을 철저히 격퇴하는 동시에 괴뢰집단의 근원지 를 조속히 분쇄하여 한국통일을 완수할 것을 기대했다. 94) 1950년 9월 초에 국회에서 유엔한국위원회 의장, 트루먼 대통령, 맥아더 장군, 주 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중장에게 유엔군의 총공격 촉구 제안을 가결했다. 95) 1950년 9월 15일 실지를 조속히 회복하자는 국토통일촉진국민대회 에서도 이 시영 부통령, 유엔 한국위원회 인도대표 씽 의장 등을 비롯한 국내외인사, 국민회, 청년의용대, 공무원 등이 수 만명 운집한 가운데 申 翼 熙 대표위원을 대리한 曺 奉 岩 이 53개국에 보내는 메시지를, 金 性 洙 대표위원이 美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각각 낭독했다. 이때 대한민국의 통일은 全 한국민의 요청이요, UN에 서도 이미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진지한 노력을 경주하였으나 아직 그것을 실현 못하였던 바 이번 공산군의 침입으로 평화적 해결은 도저히 불가능하게 되었으니 UN군은 차기에 한국 국경까지 전격 돌진하여 완전통일을 실현할 것 을 삼천만의 이름으로 요청했다. 96) 서울 수복 후 신성모 국방장관은 실지인 이북을 다 치고야 감상이 있다면 感 想 談 을 말하겠다면서, 국민들에게 軍 警 을 도와서 우리 반도 뿐 아니라 중국 소련의 공산당까지도 토벌하자고 강조했다. 북한의 남침 이후 그 근 본원인인 북한정권을 무너뜨리지 않고 한국의 재건과 통일이 불가능하다는 인식이 지도자를 비롯해 국민들에게 널리 확산되었다. 97) 이러한 통일여망을 모두 일부 지 도자의 의지로 국한시키고 관제데모 수준으로 이해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일부 비판론자는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 북진을 맥아더가 1952년 대선 출마를 위한 지렛대로 이용했다 98) 고 주장하고 있지만, 중국이나 소련의 개입 다른 지역 94) 국난극복총궐기대회에서 채택한 연합군 총사령관 및 전 장병에 보내는 감사 멧세지 (1950. 8. 15), 국방부 정훈부, ꡔ한국전란 1년지ꡕ(국방부 정훈부, 1952), C8~9쪽. 95) 제8회 12차 국회 본회의, 연합국의 총공세를 촉구하는 메시지 가결, 민주신보, 1950. 9. 3; 제8회 16차 국회 본회의, 연합군 총공격 촉구 결의안 가결, 부산일보, 1950. 9. 8. 96) 국토통일촉진국민대회, 부산일보, 1950. 9. 16. 97) 신성모, 서울 탈환에 대해 담화를 발표 (1950. 9. 27), 국방부 정훈부, 앞의 책, C13쪽; 백남훈, ꡔ나의 일생ꡕ( 新 現 實 社, 1973), 284~285쪽. 98) 마이클 샬러, 전쟁은 대선의 지렛대였다, 한겨레 21, 578호(2005. 10. 4).

156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으로 전쟁확대 등에 대해 미국정부는 인천상륙작전 이전부터 검토하기 시작했다. 미 군부를 비롯한 행정부에서는 북한의 남침 이후부터 소련과 중국의 동향에 촉각 을 세우고 있었지만, 그들은 북한이 남침할 때 공산주의자들의 공격이 남한만을 대 상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아시아지역 내로 확산될지 알지 못했다. 미군을 한국에 파 병하는 동시에 한국전쟁이 아시아지역으로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트루먼 대통령 은 제7함대를 대만해협으로 급파했으며 인도차이나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다. 99)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 진격에 대해 미 군부는 물론 국무부에서도 논란이 있 었다. 워싱턴의 정책 입안자들이 이렇게 전쟁의 흐름이 유엔군 측으로 변하자 38 선 북쪽으로의 진격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1950년 8월 말까지, 만약 소련이나 중 국을 전쟁에 끌어들이지 않으려면 그런 이동이 일어나서는 안된다는 데 일반적으 로 동의했다. 그렇지만 국회의원 선거가 임박하자, 그해 늦여름 공화당은 동아시 아에 대해 어설프고 소극적이라는 민주당 행정부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으로 선거 전을 시작했다. 유명한 공화당 의원들은 애치슨 장관에 대한 많은 불만을 퍼부으 며 그의 사임을 요구했다. 그런 상황에서 트루먼과 그의 최고대외정책 고문들은 전장 상황이 변한 후 한국에서 억제력을 발휘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았다. 100) 국무부 고문 케난(George F. Kennan)과 국무부 정책기획실장 니츠 등은 38 선을 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당시 국무부 차관보인 러스크는 38선을 넘어야 한다고 애치슨 국무장관을 설득했다. 그는 후퇴하는 북한군이 38선 이북에서 군을 재편하여 새로운 공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유엔군은 38선 이남에서 제자리 걸음 이나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38선을 영구경계선으로 생각하지 않았고, 남북이 분단된 채로는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정이 존재할 수 없 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101) 이러한 논쟁을 거쳐 미국정부는 소련과 중국의 개입을 우려하면서 인천상륙작전 이전에 이미 38선 이북에서 작전을 승인했다. 1950년 9 월 11일, 트루먼 대통령은 NSC 81/1을 승인했다. 102) 이는 소련이나 중국이 개입 99) 딘 러스크, 앞의 책, 112쪽. 100) 윌리엄 스툭(저)/김남균(외역), ꡔ한국전쟁의 국제사ꡕ(푸른역사, 2001), 183~184쪽; Higgins, Trumbull, Korea and the Fall of MacArthur(Oxford Univ. Press, 1960), p. 52; History of the Office of Secretary of Defense, op. cit, pp. 64~65. 101) 이상호, 한국전쟁기 38선 북진과 냉전의 고착화,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8권 제4호(2005); 딘 러 스크, 앞의 책, 113쪽; Acheson, Dean, op. cit, p. 53.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57 하지 않는 조건으로 유엔군의 38선 이북에서 작전에 대한 지침이 되었다. 9월 25 일 마셜(George C. Marshall) 국방장관이 맥아더에게 보낼 명령서에는 군사행동의 목표를 북한군대의 궤멸 로 규정했다. 물론 맥아더는 미군이 전쟁에 개입했으면 교착상태에 빠지거나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승리를 쟁취하는 것이 미국의 군사적 전통이라고 여겼다. 103) 하지만 이미 그가 1950년 7월 중순 육군참모총장 콜린스와 공군참모총장 반덴버그(Hoyt Vandenberg)를 만났을 때, 6월 및 7월의 유엔결의가 한반도의 재통일을 포함한다 고 말했다. 그는 나의 의도는 북한군을 몰아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분 쇄하려는 것이므로 북한을 점령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는 8월 하순에 한번 더 38 선을 넘어 군사작전을 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했다. 그러므로 미국 정부가 38선 이 북에 대한 북진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면, 충분히 제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중국군 개입에 대해서도 어느 누구도 중국의 개입을 예견하지 못했다. 미 극동 군사령부에서는 이미 8월 하순에 두개의 중공 야전군이 중국 남부지역에서 이탈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만주지역에 있는 중국군이 북한군이 패퇴하면 개입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분석했지만, 104) 미 군부나 정부는 대규모의 중국군이 만주에 집결하고 있는 점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미 국무부는 소련이나 중국이 직접 간접으로 한국전에 참가할 것인지에 대하여 관심을 쏟고 있었다. 국무부에서는 보급과 물자지원, 고문단 파견, 북한군 교육, 소 련과 중국거주 북한교포의 북한이주 등 폭 넓은 관점에서 그들의 개입여부가 정책 수립에 중요하므로 이를 확인해 줄 것을 요망했다. 105) 1950년 9월 25일 미 육군 부 정보참모부(G-2)는 중국군이 한 만국경 지대에 집중되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 지만, 그들이 북한으로 건넌다는 징후는 없다고 평가했다. 106) 극동군사령부 정보 102) 커밍스는 1950년 8월 북한으로 진격을 결정한 인사가 트루먼 대통령과 애치슨 장관이었다고 주 장했다( 동아일보, 2006. 8. 31). 103) 윌리엄 맨체스터, 앞의 책, 762쪽. 104) 위의 책, 776쪽; HQ, 10th Corps, Operation Order No.1 (Aug. 29, 1950), SN 4. 105) Military Liaison Branch, Department of State to Chief, Intelligence Division, G-2, DA: Direct and Indirect Participation by Soviets and Chinese in Korea (Sep. 8, 1950), 170/319, NA. 106) Office of the Assistant Chiefs of Staff, G-2, DA, Indication of Enemy Intentions (Sep. 25, 1950), 171/319, NA.

158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참모부장 윌로우비(Charles Willoughby) 소장은 10월 14일 소련과 중국의 개입 가능성에 대한 자세한 정보보고서를 올렸다. 이 보고서에서 그는 소련이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결론짓고 중국군에 대해서 만주 주둔 9개 야전군의 38개 사단 가 운데 24개 사단이 압록강을 따라 배치돼 있다는 사실을 단순한 외교적 위협 으로 간과해 버렸다. 107) 심지어 전선에서 국군 제6사단 제19연대가 희천을 점령했을 때, 중국군이 출현했다는 보고를 미 극동군 사령부에 알렸으나, 이를 믿지 않았다 고 한다. 108) CIA에서도 중국군 개입 직전인 1950년 10월 12일자 보고서에서 중국군이 개 입할 수 있지만, 반드시 개입할 것 같지 않다(not necessarily decisively)고 평 가했다. 즉 주은래 성명, 중국군의 만주이동, 비난선전 등은 중국 공산당이 전면개 입을 의도하는 확실한 증거가 못된다고 평가했다. 중국의 개입이 갖는 장단점을 비교 분석하면서, 결론적으로 중국은 전면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있지만, 수집된 정보를 판단컨대 소련이 세계전쟁을 원하지 않고 특히 1950년에 그럴 가능성이 없으므로 아마도 북한군에 대한 은밀한 지원을 계속할 정도라고 결론지었다. 즉 CIA는 중국공산당이 한국전쟁에 전면적으로 개입할 징후는 어디에도 없다고 강조 함으로써 워싱턴 정책 결정권자들의 판단을 흐려놓았다. 109) 1950년 10월 중순 웨이크섬에서 트루먼과 맥아더 장군의 회담에서 둘 다 중국 인들은 전쟁에 개입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맥아더는 우리가 오판했다 해도 미 군은 중국군이 압록강을 가로지를 때 간단히 격파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군과 조우한 이후에도 미국정부에서는 중국정부가 아직 개입 범위를 결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제한적인 군사작전에 그칠 것이라고 분석했다. 110)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반 대했다가 인천상륙작전의 눈부신 성공 으로 그들의 입지가 약화된 합참에서는 맥 아더의 다음 작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는데 주저했다. 8군과 10군단을 나누어 전 107) 위험한 임무 (2), 서울신문, 1991. 8. 7. 중국군이 개입한 후, 윌로우비 소장은 한만국경선 근방에 비행금지선을 설정했기 때문에 정찰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변명을 했다고 한다. 김종 오 장군 증언 (1965. 3. 6), 전사편찬위원회, 48쪽. 108) 양중호 장군 증언 (1966. 12. 27), 전사편찬위원회, 16쪽. 109) Estimate of Chinese Communist Intentions and the Implication for US Propaganda (Nov. 8, 1950), NA. 110) Ibid.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59 진시키는 군대배치에 대해 우려의 뜻만 제출했을 뿐이다. 111) 하지만, 중국군의 개 입 이후 유엔군의 연패에 대해 러스크는 맥아더와 우리 모두 잘못 생각했다 고 했지, 112) 맥아더 탓으로만 돌리지 않았다. 113) 맥아더의 전략적 혹은 전술적 오류에 대해 합참이나 대통령의 견제가 가능하다. 1950년 7월 말 맥아더의 대만방문 이후 장개석과 연대를 통한 전쟁확대를 우려해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를 해임하고 브래들리 합참의장으로 대체할 것을 검토한 적이 있다.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이 맥아더를 해임할 때 합참은 전적으로 동 의했다. 114) 그의 확전론에 대해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한 정치가 트루먼은 제한전 을 고수하고 있었다. 전쟁이 확대되지 않은 주요 이유는 미국과 소련의 최고 지도 자들이 싸움을 견제하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와 달리, 트루먼은 소련과 다 투는 미국에게 동아시아가 유럽보다 부차적이라고 믿었다. 115) 소련과 중국도 6 25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대시키지 않고, 국지전화하려고 했다. 또한 미국은 여론의 나라이다. 미국 여론은 미군의 개입에 대하여 일관된 것이 아니라, 전쟁 진행과정에 따라 유동적이었음을 인식해야 한다. 한국전쟁에 대한 미국여론의 변화는 전쟁의 성격을 제한전쟁으로 이끌게 하는 전개 과정이기도 하 다. 즉 1950년 9월 미국민 여론조사에서는 미군파병에 대해 잘된 것이라는 의견 이 81%였으나, 1951년 1월에 이르면 55%로 떨어졌다. 한국에서 가능한 빨리 철 수해야한다는 의견이 66%에 이른다. 116) 그 외에도 미국의 대외정책은 영국 등 동 맹국의 여론에 영향을 받고 있다. 111) 딘 러스크, 앞의 책, 136쪽; Collins, J. Lawton, op. cit, pp. 141~142. 112) 딘 러스크, 위의 책, 113~116쪽. 113) 1951년 4월 맥아더가 해임되자, 소련의 프라우다 지는 트루먼 대통령이 한반도에서 미군의 패배와 대외정책의 실패를 맥아더 개인에게 전가시킨다고 비판했다( 트루맨 대통령의 졸렬한 술책, 조선인민군 1951. 4. 24). 114) 윌리엄 맨체스터, 앞의 책, 781쪽; Weintraub, Stanley, MacArthur's War(A Touchstone Book, 2001), p.1. 115) 윌리엄 스툭, 앞의 책, 686~689쪽. 116) 갤럽 조사 (1951. 1. 21); 맥아더 해임과 극동정책에 대한 여론조사 (1951. 5. 8), General Records of the DS Office of Public Opinion Studies 1943~1965, 39/59, NA.

160 ꡔ정신문화연구ꡕ 제29권 제3호(2006) V. 맺음말 인천상륙작전은 맥아더에게 영광과 좌절을 주었지만, 한국전쟁사에 매우 큰 의 미가 있다. 이 작전의 성공으로 북한군이 남침 이후 거의 3개월 동안 지속된 그들 의 주도권을 잃게 된 반면에 아군은 공세권을 확보함으로써 전황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계기가 되었다. 김일성은 1950년 9월 부산을 점령하기 위해 추가로 남한지 역으로부터 청장년을 동원하여 9개 사단을 편성하고 북한에서 새로 6개 사단을 창설하여 전한반도를 장악하려 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승리는 이러한 김일성의 무 력통일론을 파탄시켰다. 양측이 팽팽한 대치를 벌이고 있던 낙동강전선에서의 전환점은 인천상륙작전이 었다. 낙동강전선에서 북한군의 거듭된 공격이 실패로 끝났지만, 유엔군은 심지어 인천상륙작전 이후에도 몇 일간은 북한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다. 이때 인 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후방으로부터 추가로 병력을 보충 받지 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낙동강 전선의 일부 병력을 서울전선에 지원하는 동안, 유엔군은 9월 19일 인민군 포로를 2,000명 이상 획득하는 등 북한군을 거의 와해시켰다. 이러한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추수기 전에 남한의 곡창지대를 회복함으로써 북한군의 보급에 큰 타격을 입혔을 뿐만 아니라, 다가올 겨울철에 국민들의 식량 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정부는 승리를 한다고 하더라도 가을을 지나면, 곧 닥 칠 겨울에 피난민구호가 국가적 재앙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했다. 그리고 이 작전 의 성공으로 북한지역의 반동세력 들은 자유를 찾았다. 맥아더를 필요 이상으로 영웅시 할 이유가 없지만,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전쟁 당시 우리의 주권을 지키기 어려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국민을 구원하여 유엔의 위신을 높인 것이 사실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맥아더 동상 철거 주장 등에 대 해 인간 맥아더와 맥아더의 생애 업적을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공산화 막아준 것을 평가하자는 건데 그게 왜 나쁜가 라고 반문한 것 117) 처 럼, 북한의 남침 이후 거듭된 패퇴로 좌절과 절망 속에 있는 한국민에게 서울을 수복하고 통일을 기대할 수 있게 힘을 준 그는 폄하의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한국 117) 김대중 전 대통령 인터뷰 (2006. 2. 4), http://blog.naver.com/redbac, 2006. 7. 31 열람.

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61 의 위대한 벗 이 될 자격이 있다. 인천상륙작전은 평범한 작전이 아니라, 미 극동군사령부의 상급기관인 합동참모 부나 상륙작전을 수행할 해병대와 해군에서 반대했던 전략계획이었다. 인천에서 상륙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던 점은 태평양전쟁에서 쌓았던 맥아더의 경험과 승리 의 자신감에 대한 미 군부와 대통령의 신뢰에서 비롯되었다. 더욱이 1950년 8월 28일 합참에서 상륙작전에 대한 동의를 했던 점에 비추어 보면, 그는 매우 짧은 기간 내에 신속한 계획으로 성공했던 것이다. 맥아더의 동상이 왜 인천에 있는지를 재음미해야 한다. 전쟁 당시 유엔군의 후 방지역 상륙지점으로 거론되었던 곳은 인천, 군산, 주문진, 해주, 진남포, 원산 등 이다. 인천에 상륙하여 서울을 장악하는데 무려 13일이 소요된 점을 비추어 보면, 군산이나 주문진 등에서 상륙했다면 서울수복 북한군의 보급로 차단 등의 작전 목표를 어렵게 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인천에서 상륙작전이 이루어졌다는 점은 그 의미가 각별하다. 맥아더를 신성시한다고 비판하는 입장에 있는 단체 혹은 인사들은 남북한 분단 을 비롯해 확전이나 원폭투하 주장 등에 대해 맥아더 개인에게 모든 책임을 다 지 우는 모순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중국군의 개입계기가 된 유엔군의 38선 북진에 대한 한국지도자와 국민 대다수가 희망했을 뿐만 아니라, 인천상륙작전이 실행되 기 전에 이미 미국 군부를 비롯한 트루먼 대통령도 동의했다. 또한 맥아더의 확전 론은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행정부와 시민들의 여론, 영국 등 다른 동맹국의 견제 가 가능했다. 끝으로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당시 한국민 대다수는 무력으로라도 통일을 원했던 것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김일성의 무력남침이 미국 영국 등 우방국가의 원조로 실패하였듯이 아군의 무력에 의한 통일 기회도 중국과 소련의 저지로 좌절되었음을 교훈삼아 통일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더 많은 노력이 경주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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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을 전후한 맥아더 역할의 재평가 167 투고일:2006. 7. 10. 심사완료일:2006. 8. 29. 주제어(keyword):맥아더(Douglas MacArthur), 한국전쟁(Korean war), 인천상륙작전(Incheon landing operation), 재평가(revalu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