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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순천지역 여순사건 결정사안 강재수( 姜 裁 秀, 직다-324) 외 438명이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 까지 순천시내, 승주읍, 서면, 월등면, 황전면, 상사면, 해룡면, 주암면, 외서면, 낙안면, 별량면 등 순천시 일대에서 국군 제2연대(1ㆍ2대대)ㆍ제3연대(1ㆍ2대대)ㆍ제4(20)연대 (1ㆍ2대대)ㆍ제12연대(1ㆍ2ㆍ3대대)ㆍ제15연대(1ㆍ2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순천경 찰서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사살당한 사건에 대하여 진실을 규명한 사례. 결정요지 1. 강재수( 姜 裁 秀, 직다-324) 외 438명은 여순사건 직후인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까지 순천시내, 승주읍, 서면, 월등면, 황전면, 상사면, 해룡면, 주암면, 외서면, 낙안 면, 별량면 등 순천시 일대에서 국군 제2연대(1ㆍ2대대)ㆍ제3연대(1ㆍ2대대)ㆍ제4(20) 연대(1ㆍ2대대)ㆍ제12연대(1ㆍ2ㆍ3대대)ㆍ제15연대(1ㆍ2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순 천경찰서 경찰에 의해 불법적으로 집단사살되었다. 2. 국군 제2연대(1ㆍ2대대) 부대원들은 순천 진압작전부터 1949년 초까지 순천시내 민간인을 연행, 북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에서 고문 및 취조한 후, 북국민학교, 순천농 림중학교 건물 뒤편에서 집단사살했다. 3. 국군 제3연대(1ㆍ2대대) 부대원들은 순천진압작전 이후 1949년 초까지 순천농림중 학교와 순천 철도국에 주둔하면서 순천거주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사살하거나,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후, 북국민학교, 순천역, 낙안면 등지에서 위법적으로 사살했다. 4. 국군 제4(20)연대(1ㆍ2대대)는 순천진압작전과 1949년 토벌작전 과정에서 순천시 남국민학교와 풍덕동 옛 펄프공장, 황전ㆍ월등면 등지에 주둔하면서 별량면ㆍ순천시내ㆍ 황전면ㆍ월등면 등지에서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4연대는 민간인들을 주둔지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사살했다. 5. 국군 제12연대(1ㆍ2ㆍ3대대)는 1948년 10월 하순, 1949년 1월 순천농림중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구례읍 등에 주둔하면서, 순천시내ㆍ황전면ㆍ월등면 등지에서 마을 을 수색하고 소개했다. 이 과정에서 제12연대는 주둔지와 북국민학교ㆍ황전지서 등지로 순천지역 여순사건 473

2 제3권 민간인을 연행하여 취조한 후, 인근 순천농림중학교ㆍ양지맷골 등지에서 사살하였다. 또 한 이들은 마을을 수색하고 소개한 후, 마을 인근에서 민간인을 사살했다. 특히 12연대 지휘관들은 소심한 부하에게 즉결처분을 지시하거나, 난폭한 부하에게 목을 베라고 한 뒤 총에 걸고 다니게 하는 등의 가해행위를 했다. 6. 국군 제15연대(1ㆍ2대대)는 순천 탈환 이후부터 1949년에 걸쳐 순천남국민학교, 순천농림중학교, 풍덕동 옛 펄프공장, 주암면ㆍ황전면 등지에 주둔하면서, 순천 전 지역 을 대상으로 마을을 수색하고 주민을 소개했다. 그 과정에서 가옥을 소각한 뒤, 민간인들 을 연행하여 불법적으로 집단사살했다. 특히 15연대는 친인척들에게 반군협조혐의가 있 는 민간인들을 척살하도록 교사하거나, 민간인을 살상하여 전과를 허위보고하는 등의 가 해행위를 했다. 7. 한편, 순천경찰서 경찰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말까지 사찰계를 중심으로 관 내 반군토벌 및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을 벌이는 과정에서, 민간인들을 본서나 읍면별 지 서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해당 관내에서 불법적으로 사살했다. 8. 조사결과 강재수( 姜 裁 秀, 직다-324ㆍ1378) 등 모두 439명의 희생자 신원이 확인되 었다. 1948년 10월 말에서 1950년 2월까지 순천지역 여순사건에서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자 수는 약 2,000여 명 정도로 추산되지만, 정확한 피해규모는 파악할 수 없다. 위원 회에 신청된 자와 기록에서 확인된 희생자는 439명이며 희생추정자는 5명이다. 9. 본 사건 희생자의 연령별 분포를 보면, 전체 439명 가운데 20대와 30대가 319명으로 73%를 차지하였다. 성별 분포를 보면, 남자가 91.4%로 희생자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는 가장 활동적인 시기의 청년 남성이 민간인 희생의 주요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 면별 분포에서는 순천시내권과 10개 읍면 가운데 서면과 상사면, 순천시내권에서 44.6%에 해 당하는 204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특히 서면지역의 피해가 많았다. 이는 서면이 백운 산과 인접해 있고, 광양과 구례로 가는 길목인 까닭에 반군의 이동통로로 이용되었던 지 리적인 요인과 더불어 국군 15연대에 의해 발생한 판교리 노은마을 사건ㆍ용계산 사건 의 희생자가 많았던 점에 기인한다. 서면에서는 반군이 근거지로 삼았던 지역이 많았고, 이에 서면 사람들이 군경과 반군의 중간에 놓이게 되면서 다른 면에 비해 희생자가 많았 다고 판단된다. 10. 군경 참고인 가운데 일부는 희생자들이 반란에 가담하거나 협력한 남로당원, 지방 폭도, 빨갱이 였다고 주장하며, 가해의 정당성과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본 사건 당시 반군 활동지역에 거주했던 주민들은 반군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을 수 없었던 상황에 놓여 있었다.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피해이유는 대체로 이를 반영하 듯 반군과의 관련성 여부에 집중되어 있다. 첫째는 가장 일반적인 반군협조혐의로서 숙 식이나 식량제공ㆍ노무동원ㆍ반군과의 연락이나 반군 은닉 등이 대표적이었다. 여기에는 반군이 활동한 작전지역에 거주한다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도 포함된다. 둘째는 반군에 가담한 혐의로 희생당한 경우이다. 이러한 경우 가담혐의로 지목되었다는 추정만 있을 뿐, 구체적인 가담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거치지 않았기 때문에, 군경의 가해는 자의적 인 성격이 강했다. 셋째는 본 사건 자체와 무관한 대살( 代 殺 )로, 바로 좌익 및 입산자가족 또는 동료라는 이유로 희생된 경우이다. 이밖에도 연행이유와 피해이유를 모르거나 무고 와 모략, 고문으로 희생된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당시 군경이 민간인을 자의적이며 무리 하게 연행 및 취조하고 살해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11. 본 사건의 가해주체는 제2연대(1ㆍ2대대)ㆍ제3연대(1ㆍ2대대)ㆍ제4(20)연대(1ㆍ 2대대)ㆍ제12연대(1ㆍ2ㆍ3대대)ㆍ제15연대(1ㆍ2대대) 소속 부대원 그리고 순천경찰서 경찰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2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2여단 장(원용덕 대령) 제2연대장 이 제1대대장 박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3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 제5여단장(김백일 중령) 제3연대장 함 제1대대장 박ㆍ제2대대장 조ㆍ제3대대장 한로 확인되 었다. 국군 제4(20)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사령관 송호성 준장)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지구전투사령관(김백일 중령) 제4연대장 이 ㆍ위ㆍ박 제1대대장 유ㆍ제2대대장 이ㆍ제3대대장 오으로 확인되었다. 국군 제12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투사령부(육군 준장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지구전투사령관(제5여단장 김백일) 제12 연대장 백ㆍ백ㆍ송 제1대대장 허ㆍ제2대대장 김ㆍ제3대대장 이 ㆍ연로 확인되었다. 1949년 3월 1일 이후에는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정일 권)가 구례지역에서 작전을 지휘하였다. 국군 제15연대의 지휘ㆍ명령계통은 반군토벌전 투사령부(육군준장 송호성) 호남방면전투사령관(제2여단장 원용덕) 남ㆍ북지구전투사 령관(제5여단장 김백일ㆍ제2여단장 원용덕) 광주5사단(사단장 원용덕) 제15연대장 신 ㆍ김ㆍ윤ㆍ송 제1대대장 이ㆍ양ㆍ김ㆍ제2대대장 최 ㆍ제3대대장 최으로 확인되었다. 본 사건은 현지 토벌작전 지휘관의 명령 아래 발생했지만, 최종적인 감독 책임은 국방 순천지역 여순사건 475

4 제3권 부,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과 국가에 귀속된다고 할 수 있다. 순천지역 경찰의 경우는 이중의 지휘ㆍ명령계통 하에서 활동했다. 하나는 순천지역 계 엄사령관 순천경찰서장, 다른 하나는 제8관구경찰청(전남경찰국) 순천경찰서장으로 하 달되는 계통이었다. 본 사건 당시 순천경찰서장은 변ㆍ양ㆍ손ㆍ이이었 다. 그리고 당시 제8관구경찰청장(전남경찰국장)은 김ㆍ김이었다. 경찰 최상급 기관인 내무부 치안국이 본 사건과 관련하여 직접 명령을 내렸거나 보고받았는지는 확인 할 수 없지만, 지휘 및 관리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12. 본 사건 과정에서 군경당국은 본 사건 관련자를 체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민간 인에 대한 무차별적 연행, 불법적인 취조와 고문, 자의적인 심사와 분류에 따른 살해 등 여러 가지 형태의 불법행위를 자행하였다. 본 사건에서 군경이 작전 과정에서 민간인을 살해한 근거는 계엄령에서 비롯된다. 그 러나 본 사건 당시 계엄령은 계엄법이 부재한 상황에서 공포되었고, 비록 계엄사령관에 게 행정권과 사법권은 주어졌으나, 이를 실행할 수 있는 관련 법령이나 규정은 없었다. 본 사건 당시 현지 사령관은 계엄령에 대한 자의적인 판단 아래, 민간인을 반군협력자라 는 혐의만으로 불법적으로 연행하여 살해하였는데, 이는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 는 계엄령의 일반적 한계를 벗어난 위법적인 행위였다. 계엄령 아래에서 이루어진 군의 즉결처분권 은 민간인 살해나 처형을 정당화하는 주요 한 근거였으나, 법의 일반적 요건이나 정당성을 결여하고 있었다. 계엄포고문에서 즉결처분은 군율 에 따르도록 규정하였으나, 민간인을 즉결처분, 곧 임의처형하는 과정에서 관련 법 조항을 따르지 않았다. 본 사건에서 군경당국은 법적 통 제를 받지 않고 작전의 편의성이나 효율성만을 고려하여 즉결처분 을 남용하였다. 이에 많은 민간인들은 반군에 협조한 혐의만으로 재판절차를 거치지 않고 사살당했으며, 이는 즉결처분 이 사실상 학살이었음을 말해준다. 13. 진실화해위원회는 국가가 순천지역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과거 국가권력이 저지른 잘못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사건 관련 희생자와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과 희생자에 대 한 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지원 조처를 마련할 것을 권고한다. 또한 유사 사건의 재발 방 지를 위해 본 사건의 진실규명내용을 관련 역사기록에 반영하고, 평화인권교육을 강화할 것을 권고한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전 문 사 건 직다-324 외 202건, 순천지역 여순사건 신청인 강병화 외 202명 결정일 주 문 이 사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진실이 규명되었으므로 진실규명 으로 결정한다. 이 유 Ⅰ. 조사개요 1. 사건개요 가. 신청접수와 처리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실화해위원회) 는 진실규명 신청기간 ( ) 동안 군경이 국군 제14연대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살해했다고 주장하는 사건(총 832건)을 접수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상기 접수된 사건을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제14차 회의( 구례봉성산여순사건 9건), 제17차 회의( , 구례봉성산여순사건 3건), 제20차 회 의( 건), 제26차 회의( 건), 제28차 회의( 건), 제30차 회의( 건)에서 병합하여 조사하기로 의결하였다. 또한 본 사건의 명칭 을 여순사건 으로 결정(조사1팀-1373, )하였다. 제39차 전원위원회( )는 여순사건을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 으로 규정하여, 직권조사하기로 의결(48건 병합ㆍ조사개시 포함)하였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은 여순사건 중 전라남도 순천(승주읍)군 일대의 민간인이 군경에 의해 집단으로 희생된 사건을 말하며, 대상 시기는 1948년 10월 말부터 1950년 2월까지이 다. 1) 사건의 원인 및 발생배경의 측면에서 본다면, 여순사건에는 전남 동부지역 국민보 1) 제39차 전원위원회( )는 여순사건에 대한 직권조사 사건 전환을 의결하면서, 1948년 10월 19 일부터 1950년 9ㆍ28 수복 이후 10월까지 전라남도 동부지역 및 전북ㆍ경남 일부 지역에서 반란군과 진 순천지역 여순사건 477

6 제3권 도연맹 사건ㆍ전국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ㆍ부역혐의 민간인 희생사건과 여순사건 당시 반군과 좌익에 의해 희생된 사건 등이 포함된다. 다만, 진실화해위원회에서는 사건조사 의 효율성을 위해 사건을 유형별로 분류하여 조사하고 있으므로 국민보도연맹사건, 전국 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 부역혐의 민간인 희생사건 등은 본 사건에 포함되지 않았다. 순천지역 여순사건의 신청건수는 총 258건이다. 본 보고서는 이 가운데 14연대 입대 후 사망 4건, 지방좌익과 반군에 의해 희생된 22건, 순천지역 여순사건이 아닌 29건 2) 을 제외 한 총 203건을 조사대상으로 삼았다. 203건의 신청인이 주장하는 희생자 수는 총 258명이 다. <표 1> 순천지역 여순사건 신청서 접수와 처리상황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강병화 ( 姜 炳 和 ) 장경자 ( 張 敬 子 ) 오광호 ( 吳 光 虎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강재수 ( 姜 裁 秀 ) 김대례 ( 金 大 禮 ) 강옥순 ( 姜 玉 順 ) 장환봉 ( 張 環 峰 ) 오인권 ( 吳 仁 權 ) 신청인과 관계 남 57 부 여 59 모 여 12 누나 남 29 부 남 27 부 비고 압군에 의해 발생한 집단희생사건을 조사대상과 범위로 설정했다.(제39차 전원위원회, 여순사건의 직권 조사 전환 안건에 대한 심의 의결안, 집단희생규명위원회.) 본 보고서는 국민보도연맹 사건, 전국형무소 재소자 사건 관련 희생자를 제외한 1948년 10월 19일부터 1950년 6월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순천시 전 역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사건을 조사대상과 범위로 제한했다. 조사대상에는 순천지역 거주 민간인들과 순천 인근 지역 출신으로 순천에서 희생당한 민간인들을 포함했다. 2) 기존에 조사개시 결정되었던 순천지역 여순사건 258건 중, 신청인 조사결과 여수지역 여순사건으로 판단 된 1건(직다-2760), 국민보도연맹사건으로 판단된 7건(직다-2248ㆍ6067ㆍ6068ㆍ6220ㆍ7643ㆍ7956 ㆍ9648), 전국형무소재소자희생사건으로 판단된 7건(직다-1386ㆍ6655ㆍ8789ㆍ9103ㆍ9106ㆍ3376ㆍ 7031), 군경에 의한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판단된 4건(직다-368ㆍ1359ㆍ8783ㆍ9905)을 해당 부서로 이 관하였다. 또 진실규명대상자가 복수인 신청사건 재검토 결과, 국민보도연맹사건과 전남 광주지역 부역혐 의 민간인 희생사건으로 판단된 2건(직다-1381ㆍ2329)을 각기 직다-1381(1)ㆍ2329(1)로 분리ㆍ이관 조치하였다. 또한 구례지역 여순사건으로 2008년 7월 17일 진실규명 결정된 7건(직다-6446ㆍ6447ㆍ 6448ㆍ7268ㆍ7269ㆍ7271ㆍ7272)을 제외하였다. 이 가운데 사건번호 직다-6655는 전국형무소재소자 희생사건(직다-6655(1))과 전남광주부역혐의희생사건(직다-6655(1))으로 각각 분리되어 이관되었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허택 ( 許 澤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허길성 ( 許 吉 星 ) 신청인과 관계 남 31 부 비고 이진휘 ( 李 鎭 輝 ) 이기증 ( 李 奇 增 ) 남 50 부 이강원 이기담 ( 李 起 淡 ) 남 23 부 안귀엽 ( 安 貴 葉 ) 안두영 ( 安 斗 榮 ) 남 23 부 이춘형 ( 李 春 炯 ) 이상근 ( 李 相 根 ) 남 40 부 박병찬 ( 朴 炳 贊 ) 박상래 ( 朴 相 來 ) 남 39 부 여두성 ( 呂 斗 星 ) 여두원 ( 呂 斗 元 ) 남 18 형 허동환 ( 許 銅 奐 ) 허정년 ( 許 正 年 ) 남 24 숙부 양병옥 ( 楊 炳 玉 ) 양경식 ( 楊 炅 植 ) 남 26 숙부 박영규 ( 朴 英 圭 ) 박병구 ( 朴 炳 球 ) 남 28 부 송칠귀 ( 宋 七 貴 ) 남 56 조부 송기충 ( 宋 基 忠 ) 이효심 ( 李 孝 心 ) 김임순 ( 金 壬 順 ) 여 42 조모 여 26 모 송기화 ( 宋 基 和 ) 남 3 동생 허문범 ( 許 文 凡 ) 허규범 ( 許 圭 凡 ) 남 21 형 정남두 ( 丁 南 斗 ) 정인택 ( 丁 仁 澤 ) 남 36 형 허선행 ( 許 善 行 ) 허필동 ( 許 弼 同 ) 남 19 숙부 순천지역 여순사건 479

8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허채구 ( 許 彩 九 ) 배금엽 ( 裵 金 葉 ) 정재종 정태영 김선문 ( 金 善 文 ) 김천일 정현종 ( 鄭 賢 鍾 ) 최동숙 ( 崔 東 淑 ) 홍동호 ( 洪 東 鎬 ) 손삼순 ( 孫 三 淳 ) 남인심 ( 南 仁 心 ) 김영곤 ( 金 永 坤 ) 박종열 ( 朴 鍾 烈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허갑진 ( 許 押 震 ) 허만두 ( 許 萬 斗 ) 배학선 ( 裵 學 善 ) 정기영 ( 鄭 基 榮 ) 정추택 ( 鄭 樞 澤 ) 김철중 ( 金 喆 中 ) 김원기 ( 金 源 基 ) 정기석 ( 鄭 基 碩 ) 나성환 ( 羅 成 煥 ) 홍목침 ( 洪 木 沈 ) 정선례 ( 鄭 善 禮 ) 홍일순 ( 洪 一 順 ) 홍재호 ( 洪 在 鎬 ) 위형량 ( 魏 瑩 良 ) 조정순 ( 趙 正 順 ) 이삭심 ( 李 朔 心 ) 김용기 ( 金 容 基 ) 이공월 ( 李 空 月 ) 신청인과 관계 남 30 부 남 25 숙부 남 27 오빠 남 41 부 남 28 부 남 24 부 남 27 부 남 37 부 남 32 시부 남 45 부 여 32 모 여 17 누나 남 3 동생 남 68 시부 여 38 시모 여 4 시누이 남 25 숙부 여 43 모 비고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강병화 ( 姜 炳 和 ) 강질용 ( 姜 秩 龍 ) 장홍석 ( 張 弘 錫 ) 공준모 ( 孔 俊 模 ) 김용석 ( 金 容 錫 ) 박균호 ( 朴 均 鎬 ) 박정수 ( 朴 貞 洙 ) 이상호 ( 李 相 浩 ) 박희원 ( 朴 喜 源 ) 염금순 ( 廉 今 順 ) 김종철 ( 金 鍾 哲 ) 장옥자 ( 張 玉 子 ) 황정수 ( 黃 正 水 ) 김효수 ( 金 孝 洙 ) 유순오 ( 兪 順 吾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강재수 ( 姜 裁 秀 ) 김대례 ( 金 大 禮 ) 강옥순 ( 姜 玉 順 ) 강양수 ( 姜 陽 秀 ) 조성림 ( 趙 成 林 ) 공재권 ( 孔 在 權 ) 오연심 ( 吳 連 心 ) 김영모 ( 金 永 模 ) 박기옥 ( 朴 基 玉 ) 박유만 ( 朴 有 萬 ) 이상연 ( 李 相 連 ) 박기영 ( 朴 基 英 ) 김용연 ( 金 容 淵 ) 김태구 ( 金 泰 求 ) 장석남 ( 張 錫 楠 ) 황만수 ( 黃 萬 壽 ) 김복종 ( 金 福 鍾 ) 유복암 ( 兪 福 岩 ) 신청인과 관계 남 57 부 여 59 모 여 12 누나 남 42 부 여 46 모 남 44 부 여 37 모 남 47 부 남 48 부 남 40 부 남 24 형 남 36 부 남 27 시숙 남 24 부 남 32 부 남 33 부 남 29 양부 남 41 부 비고 324와 중복신청 순천지역 여순사건 481

10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이광섭 ( 李 光 燮 ) 제갈종 ( 諸 葛 鍾 ) 제갈덕모 ( 諸 葛 德 模 ) 이항근 ( 李 伉 根 ) 고화석 ( 高 化 錫 ) 김재홍 ( 金 在 洪 ) 박종대 ( 朴 鍾 大 ) 박종대 ( 朴 鍾 大 ) 윤계배 이양기 ( 李 良 基 ) 김주곤 ( 金 株 坤 ) 권종국 ( 權 鍾 國 ) 이순애 ( 李 順 愛 ) 이영섭 ( 李 永 燮 ) 김영기 ( 金 永 基 ) 장광수 ( 張 光 洙 ) 방경규 ( 房 㯳 圭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이복석 ( 李 福 石 ) 제갈숙 ( 諸 葛 淑 ) 제갈아지 ( 諸 葛 可 只 ) 이봉주 ( 李 鳳 柱 ) 고재옥 ( 高 在 玉 ) 김성균 ( 金 晟 均 ) 박재정 ( 朴 載 汀 ) 박인규 ( 朴 仁 奎 ) 윤우암 ( 尹 又 巖 ) 이희철 ( 李 熙 哲 ) 김용배 ( 金 容 培 ) 권성옥 ( 權 性 玉 ) 이기찬 ( 李 基 贊 ) 이삼근 ( 李 三 根 ) 김인석 ( 金 仁 錫 ) 장용암 ( 張 龍 岩 ) 장종환 ( 張 鍾 桓 ) 방용규 ( 房 鏞 圭 ) 신청인과 관계 남 36 부 남 19 동생 남 22 숙부 남 19 형 남 26 부 남 27 형 남 23 숙부 남 28 부 남 36 숙부 남 31 부 남 37 부 남 29 부 남 40 부 남 35 부 남 27 부 남 63 조부 남 34 부 남 18 형 비고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방경규 ( 房 㯳 圭 ) 박종영 ( 朴 鍾 永 ) 정종원 ( 鄭 鍾 元 ) 전일수 ( 全 一 秀 ) 박춘근 ( 朴 春 根 ) 최낙선 ( 崔 洛 璇 ) 박복구 ( 朴 福 久 ) 최두용 ( 崔 斗 鎔 ) 박중환 ( 朴 仲 煥 ) 신희중 ( 申 熙 重 ) 황종은 ( 黃 鍾 磤 ) 박종혁 ( 朴 鍾 赫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방영규 ( 房 泳 圭 ) 박재규 ( 朴 在 圭 ) 정귀남 ( 鄭 貴 男 ) 전덕상 ( 全 德 相 ) 박명구 ( 朴 明 九 ) 최석호 ( 崔 石 鎬 ) 박성일 ( 朴 聖 一 ) 김점례 ( 金 点 禮 ) 최채용 ( 崔 彩 鎔 ) 최덕용 ( 崔 德 鎔 ) 최덕심 ( 崔 德 心 ) 최창용 ( 崔 昌 鎔 ) 최정호 ( 崔 廷 鎬 ) 최경심 ( 崔 敬 心 ) 신태수 ( 申 泰 秀 ) 황종부 ( 黃 鍾 涪 ) 박노은 ( 朴 魯 銀 ) 이장순 ( 李 長 順 ) 신청인과 관계 남 15 형 남 24 부 남 33 부 남 34 부 남 35 부 남 37 부 남 31 부 여 47 모 남 27 형 남 25 형 여 20 누나 남 19 형 남 12 형 여 31 모 남 31 부 남 24 형 남 53 조부 여 41 조모 비고 순천지역 여순사건 483

12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박종혁 ( 朴 鍾 赫 ) 박일규 ( 朴 一 奎 ) 한재임 ( 韓 在 壬 ) 박준옥 ( 朴 準 玉 ) 공형모 ( 孔 亨 模 ) 최익우 ( 崔 翼 宇 ) 황방자 ( 黃 芳 子 ) 이홍재 ( 李 弘 宰 ) 박정석 ( 朴 正 錫 ) 김종길 ( 金 鍾 吉 ) 정동현 ( 丁 東 鉉 ) 서길석 정기순 ( 鄭 基 淳 ) 정기순 ( 鄭 基 淳 ) 허순자 ( 許 順 子 ) 김용출 ( 金 容 出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박옥란 ( 朴 玉 蘭 ) 박노은 ( 朴 魯 銀 ) 이장순 ( 李 長 順 ) 박옥란 ( 朴 玉 蘭 ) 신청인과 관계 여 14 고모 남 53 부 여 41 모 여 14 누나 한관섭 남 19 오빠 박동련 ( 朴 東 連 ) 양두남 ( 梁 豆 男 ) 최춘우 ( 崔 春 宇 ) 황천식 ( 黃 天 植 ) 이영오 ( 李 永 五 ) 남 66 조부 여 48 모 남 20 형 남 30 부 남 30 형 박상교 남 48 부 김희곤 남 18 숙부 정맹현 ( 丁 孟 鉉 ) 서병중 ( 徐 丙 中 ) 이상호 ( 李 祥 昊 ) 남 21 형 남 12 작은 아버지 남 24 사촌형부 정기홍 남 26 사촌오빠 허종순 ( 許 鍾 順 ) 이영수 ( 李 永 洙 ) 남 25 부 남 25 시동생 비고 1948과 중복신청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허수길 ( 許 秀 吉 ) 김영기 ( 金 英 基 ) 박영자 ( 朴 英 子 ) 박정순 ( 朴 貞 順 ) 박정순 ( 朴 貞 順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허만우 ( 許 萬 佑 ) 김용수 ( 金 容 洙 ) 박현석 ( 朴 現 錫 ) 박영옥 ( 朴 永 玉 ) 남동산 ( 南 東 山 ) 임병순 ( 林 炳 順 ) 신청인과 관계 남 26 부 남 34 부 남 33 부 남 21 부 여 59 조모 여 20 모 비고 정인순 ( 鄭 仁 順 ) 이후권 ( 李 後 權 ) 송영종 ( 宋 永 鍾 ) 정운산 ( 鄭 雲 山 ) 송순심 ( 宋 順 心 ) 최석근 ( 崔 錫 根 ) 한일상 ( 韓 日 相 ) 최봉규 ( 崔 琫 圭 ) 최종우 ( 崔 鍾 宇 ) 방종섭 ( 方 鍾 燮 ) 송갑수 ( 宋 甲 水 ) 정일천 남 27 부 송삼덕 ( 宋 三 德 ) 이선권 ( 李 先 權 ) 송기찬 ( 宋 基 贊 ) 정순원 ( 鄭 順 源 ) 송기봉 ( 宋 基 琫 ) 최석호 ( 崔 錫 澔 ) 이소유 ( 李 小 臾 ) 최병주 ( 崔 炳 周 ) 최동두 ( 崔 東 斗 ) 방기현 ( 方 琪 現 ) 송태은 ( 宋 泰 銀 ) 여 25 모 남 16 쌍둥이형 남 21 부 남 23 숙부 남 32 부 남 19 형 여 28 조모 남 25 부 남 28 부 남 48 부 남 35 부 순천지역 여순사건 485

14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박양근 ( 朴 良 根 ) 박병준 ( 朴 炳 俊 ) 지득례 ( 池 得 禮 ) 방종섭 ( 方 鍾 燮 ) 박점덕 ( 朴 点 德 ) 공봉덕 ( 孔 奉 德 ) 공봉덕 ( 孔 奉 德 ) 오수만 ( 吳 壽 萬 ) 민병일 ( 閔 丙 一 ) 서원배 ( 徐 源 培 ) 우채규 ( 禹 採 圭 ) 정하용 ( 鄭 夏 溶 ) 김성기 ( 金 成 基 ) 위계룡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박계호 ( 朴 桂 浩 ) 박정호 ( 朴 政 浩 ) 지득권 ( 池 得 權 ) 방윤섭 ( 方 允 燮 ) 박선호 ( 朴 繕 浩 ) 박임석 ( 朴 壬 錫 ) 정현순 ( 鄭 玄 順 ) 박영구 ( 朴 永 求 ) 오연근 ( 吳 連 根 ) 민계식 ( 閔 季 植 ) 김점수 ( 金 点 秀 ) 우영철 ( 禹 榮 哲 ) 정태구 ( 鄭 泰 龜 ) 김홍연 ( 金 烘 淵 ) 황인주 서평촌 신청인과 관계 남 28 부 남 21 조부 남 23 오빠 남 20 형 남 22 부 남 56 시조부 여 50 시조모 남 21 시숙부 남 41 부 남 18 숙부 남 38 외조부 비고 남 19 숙부 6419와 중복신청 남 19 삼촌 남 24 숙부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김옥순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황하연 신청인과 관계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비고 황종은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방광수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우영철 ( 禹 榮 哲 ) 남 19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6382와 중복신청 성명미상 남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중앙병원 간호사의 부 위계룡 성명미상 성명미상 여 여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중앙병원 간호사의 모 중앙병원 간호사의 언 니 김모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김 치과 동생 (8267, 9939와 중복신청) 나모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나씨 딸 성명미상 남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나씨 사위 안태현 남 47 김삼수 여 42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7165와 중복신청 7165와 중복신청 순천지역 여순사건 487

16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위계룡 최용식 ( 崔 龍 植 ) 김병태 ( 金 炳 泰 ) 주주원 ( 朱 珠 元 ) 이희자 ( 李 熙 子 ) 정종채 ( 鄭 鐘 采 ) 문덕심 ( 文 德 心 ) 김용순 ( 金 龍 順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안종만 남 17 안선자 여 15 성명미상 8명 최경식 ( 崔 敬 植 ) 김길동 ( 金 吉 童 ) 주두신 ( 朱 斗 新 ) 주성창 ( 朱 成 錩 ) 최인규 ( 崔 仁 奎 ) 최진규 ( 崔 珍 圭 ) 최승수 ( 崔 昇 壽 ) 최승모 ( 崔 昇 模 ) 박태윤 ( 朴 泰 允 ) 박태숙 ( 朴 泰 淑 ) 이군보 ( 李 羣 甫 ) 박우남 ( 朴 禹 南 ) 미상 미상 신청인과 관계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기타 (시민단체 대표신청) 남 28 형 남 35 부 남 19 종조부 남 22 숙부 남 23 사촌시숙 남 18 시숙 남 19 처남 남 17 처남 남 24 사촌시동생 남 21 사촌시동생 남 42 시부 여 43 시모 이점례 여 2 시누이 비고 7165와 중복신청 7165와 중복신청 손은기 ( 孫 銀 基 ) 손인갑 ( 孫 仁 甲 ) 남 33 조부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신청인과 관계 비고 허치성 허전 남 24 부 박종현 ( 朴 鍾 炫 ) 박선규 ( 朴 先 圭 ) 박윤규 ( 朴 允 圭 ) 남 37 부 남 24 숙부 박종현 ( 朴 鍾 炫 ) 박득규 ( 朴 得 圭 ) 남 22 숙부 양재순 ( 梁 在 順 ) 양회정 ( 梁 會 正 ) 남 27 부 안태현 남 47 부 안금자 ( 安 錦 子 ) 김삼수 여 42 모 안종만 남 17 오빠 안선자 여 15 동생 송철현 ( 宋 哲 鉉 ) 송임석 ( 宋 任 錫 ) 남 22 사촌형 손승상 ( 孫 承 相 ) 손형수 ( 孫 亨 洙 ) 남 31 숙조부 윤세인 ( 尹 世 寅 ) 윤달헌 ( 尹 達 憲 ) 남 21 숙부 이철섭 ( 李 澈 燮 ) 이정철 ( 李 正 哲 ) 남 36 부 조영 ( 趙 英 ) 조한송 ( 趙 漢 松 ) 남 47 백부 이용권 ( 李 墉 權 ) 이봉권 ( 李 奉 權 ) 남 29 형 최병선 ( 崔 炳 善 ) 최순식 ( 崔 順 植 ) 남 28 부 최병선 ( 崔 炳 善 ) 최운식 ( 崔 雲 植 ) 남 23 숙부 정영주 ( 鄭 永 住 ) 정순현 ( 鄭 順 鉉 ) 남 37 부 순천지역 여순사건 489

18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정영주 ( 鄭 永 住 ) 최택철 ( 崔 澤 澈 ) 김영수 ( 金 永 秀 ) 허남석 ( 許 南 淅 ) 정대연 ( 鄭 大 連 ) 지정애 ( 池 政 愛 ) 김정애 ( 金 禎 愛 ) 김양희 ( 金 良 喜 ) 정수환 ( 鄭 守 桓 ) 이종옥 ( 李 宗 鈺 ) 최진동 ( 崔 鎭 東 ) 강남수 ( 姜 南 秀 ) 허기 ( 許 棋 ) 최미자 ( 崔 美 子 ) 이건찬 ( 李 建 讚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정계현 ( 鄭 桂 鉉 ) 최진영 ( 崔 鎭 永 ) 김병수 ( 金 炳 洙 ) 김학수 ( 金 學 洙 ) 신청인과 관계 남 27 숙부 남 27 삼촌 남 28 부 남 20 숙부 허영구 남 19 삼촌 정종신 ( 鄭 宗 臣 ) 지채종 ( 池 采 鍾 ) 김용환 ( 金 容 煥 ) 한석기 ( 韓 碩 基 ) 정기영 ( 鄭 基 永 ) 이재선 ( 李 在 先 ) 최진숙 ( 崔 鎭 淑 ) 강길수 ( 姜 吉 洙 ) 강종훈 ( 姜 鍾 勳 ) 방봉애 ( 房 鳳 愛 ) 허순조 ( 許 淳 祖 ) 박홍기 ( 朴 洪 紀 ) 이덕행 ( 李 德 行 ) 남 21 부 남 28 부 비고 남 23 숙부 6419, 9939과 중복신청 남 40 시부 남 26 부 남 63 부 남 20 형 남 22 장형 남 19 형 여 18 장형수 남 33 당숙 남 26 시부 남 22 부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정창조 ( 鄭 昌 朝 ) 양희승 ( 梁 熙 承 ) 추환열 ( 秋 桓 烈 ) 추환열 ( 秋 桓 烈 ) 추환열 ( 秋 桓 烈 ) 추환열 ( 秋 桓 烈 ) 김채문 ( 金 采 文 ) 위귀순 ( 魏 貴 順 ) 정용택 ( 鄭 容 澤 ) 박철근 ( 朴 哲 根 ) 정동우 ( 鄭 東 宇 ) 김영주 ( 金 永 柱 ) 하정래 ( 河 晶 來 ) 지봉연 ( 池 奉 連 ) 배형철 ( 裵 炯 喆 ) 박병도 ( 朴 炳 道 ) 조찬익 ( 趙 贊 翼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정기선 ( 鄭 淇 銑 ) 양회주 ( 梁 會 炷 ) 신청인과 관계 남 29 백부 남 26 백부 추인수 남 25 숙부 추석순 남 17 숙부 추기선 ( 秋 基 善 ) 추기운 ( 秋 基 雲 ) 추형량 ( 秋 炯 亮 ) 김흥열 ( 金 興 烈 ) 김두표 ( 金 斗 杓 ) 정영철 ( 鄭 泳 喆 ) 박호지 ( 朴 浩 志 ) 정동선 ( 鄭 東 善 ) 김정기 ( 金 正 基 ) 하재규 ( 河 在 奎 ) 지태석 ( 池 泰 錫 ) 배형회 ( 裵 炯 檜 ) 박기래 ( 朴 錤 來 ) 남 28 당숙 남 26 당숙 남 27 부 남 36 부 남 22 남편 남 18 숙부 남 21 백부 남 19 형 남 33 조부 남 25 조부 남 20 백부 남 20 형 남 22 숙부 이덕심 여 34 모 비고 순천지역 여순사건 491

20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한상순 ( 韓 相 順 ) 황동하 ( 黃 東 夏 ) 박대수 ( 朴 大 秀 ) 박대수 ( 朴 大 秀 ) 홍용석 ( 洪 龍 石 ) 박외규 ( 朴 外 圭 ) 박외규 ( 朴 外 圭 ) 신대우 ( 申 大 雨 ) 김세태 ( 金 世 泰 ) 최덕용 ( 崔 德 鏞 ) 조동진 ( 趙 東 進 ) 김영인 ( 金 永 仁 ) 김동호 ( 金 東 浩 ) 이광하 ( 李 光 夏 ) 오정권 ( 吳 正 權 ) 김순덕 ( 金 順 德 ) 신홍근 ( 申 洪 根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한광수 ( 韓 光 洙 ) 한익수 ( 韓 益 洙 ) 황인만 ( 黃 仁 滿 ) 박병근 ( 朴 炳 根 ) 박병두 ( 朴 炳 斗 ) 홍성표 ( 洪 聖 杓 ) 박병렬 ( 朴 炳 烈 ) 박병기 ( 朴 炳 箕 ) 신복동 ( 申 福 同 ) 김종필 ( 金 鍾 弼 ) 최창열 ( 崔 昌 烈 ) 조한상 ( 趙 漢 相 ) 김화현 ( 金 和 鉉 ) 이수개 ( 李 守 介 ) 이준평 ( 李 晙 坪 ) 오종호 ( 吳 宗 鎬 ) 이계수 ( 李 啓 洙 ) 신원문 ( 申 元 文 ) 신청인과 관계 남 37 부 남 24 숙부 남 21 부 남 23 백부 남 18 삼촌 남 23 삼촌 남 34 백부 남 27 부 남 39 부 남 29 부 남 20 삼촌 남 26 부 남 34 조부 남 19 외삼촌 남 35 부 남 31 부 남 26 시동생 남 17 삼촌 비고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한영섭 ( 韓 英 燮 ) 윤석진 ( 尹 錫 珍 ) 백영묵 ( 白 永 黙 ) 김인중 ( 金 仁 中 ) 김동석 ( 金 東 錫 ) 신만식 ( 申 萬 植 ) 신만식 ( 申 萬 植 ) 이기화 ( 李 起 和 ) 김태옥 ( 金 太 玉 ) 박이관 ( 朴 以 寬 ) 조기원 ( 趙 基 元 ) 장우수 ( 張 友 洙 ) 김양곤 ( 金 良 坤 ) 정대환 ( 鄭 大 煥 ) 정영기 ( 鄭 瑛 基 )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한상범 ( 韓 相 範 ) 윤석봉 ( 尹 錫 奉 ) 백학선 ( 白 學 先 ) 김용환 ( 金 容 煥 ) 김복개 ( 金 福 介 ) 신창우 ( 申 昌 雨 ) 신현우 ( 申 炫 雨 ) 이기신 ( 李 起 新 ) 김만옥 ( 金 萬 玉 ) 박이만 ( 朴 以 萬 ) 장순심 ( 張 巡 心 ) 최명순 ( 崔 明 順 ) 김용태 ( 金 容 台 ) 정대룡 ( 鄭 大 龍 ) 정옥기 ( 鄭 鈺 基 ) 신청인과 관계 남 38 부 남 26 형 남 24 부 남 22 삼촌 남 37 형 남 26 부 남 20 삼촌 남 22 동생 남 26 형 남 21 형 여 41 조모 여 28 모 남 31 부 남 19 동생 남 25 형 비고 신청건수 (신청인 수) 203건 대표신청(총 28건, 총 68명) - 2명 신청: 직다-1357 등 17건 - 3명 신청: 직다-324 등 6건 - 4명 신청: 직다-1352 등 3건 - 6명 신청: 직다 건 - 26명 신청: 직다 건 순천지역 여순사건 493

22 제3권 연번 사건번호 접수일자 신청인 진실규명대상자 성명 성별 당시 나이 신청인과 관계 비고 진실규명대상자 258명 중복신청(총 6건, 총 13명) - 직다-324: 직다-1378(3명) - 직다-1948: 직다-1970(3명) - 직다-6419: 직다-7165(4명) - 직다-6419: 직다-9939(1명), 직다-8267 (1명) - 직다-6382: 직다-6419(1명) 신청사건 희생자수 = 신청건수 203건 + 대표신청(2명:17건, 3명:6건, 4명:3건, 6명:1건, 26명:1건, 총 28건) 68명 - 중복신청 13명(총 6건) = 258명 나. 신청인의 주장 본 사건의 신청인들은 여순사건 당시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동한 진압군경(국군 제2연대 ㆍ제3연대ㆍ제4연대ㆍ제12연대ㆍ제15연대ㆍ제2여단ㆍ제5여단, 수도경찰대ㆍ특경대ㆍ경 찰토벌대ㆍ순천경찰서 경찰)이 1948년 10월 하순부터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순천시 전역에서 민간인을 불법적으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순천시내권과 각 읍면별로 신청인의 주장을 정리했다. 순천시내 순천시내(가곡동, 덕암동, 덕월동, 동외동, 매곡동, 안풍동, 오천동, 와룡동, 용당동, 저전 동, 조곡동, 풍덕동) 신청인 장경자(직다-1026) 외 19명(총 20건)은 1948년 10월 22일 부터 1950년 1월 2일(음 )까지 3연대ㆍ12연대 외 진압군과 순천경찰이 민간인들 을 반군에 협력했다는 혐의로 연행하여 죽도봉, 매곡동 매산여고 담벼락 길, 이수중학교 부근 공동묘지, 구랑실재 등지에서 구타하여 학살하거나, 집단으로 학살 후 시신을 소각 했다고 주장했다. 승주읍 3) 승주읍(구강리, 남강리, 도정리, 도평리, 두월리, 석흥리, 신전리, 유흥리, 죽학리) 신청 인 최종우(직다-4926) 외 14명(총 15건)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8월 11일경(음 3) 1985년 쌍암면이 승주읍으로 승격되었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까지 쌍암지서 경찰 및 군경이 연행ㆍ자수한 민간인들을 서정마을 원모퉁이, 쌍암 지서 앞마당, 두월리마을 앞 논, 죽학리마을 등지에서 학살하거나, 월등ㆍ쌍암지서 등지 에서 고문하여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서면 서면(운평리, 선평리, 죽평리, 판교리, 흥대리, 구상리, 압곡리, 청소리, 지본리) 신청인 양병옥(직다-1350) 외 48명(총 49건)은 1948년 10월에서 1950년 1월 8일(음 ) 사이 3사단, 백골부대 등의 군인과 경찰토벌대, 순천경찰이 민간인들을 반군에게 협력을 했다 는 혐의로 연행하거나, 구경하던 민간인을 죽도봉 골짜기, 판교리 노은마을 앞 노은고지, 서면 용계산 골짜기, 생목동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 교) 옆 산 아래 공터 등지에서 학살하거나, 서면지서에서 고문하여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월등면 월등면(계월리, 농선리, 신월리, 월용리) 신청인 유순오(직다-1397) 외 19명(총 20건)은 1948년 11월 18일(음 )부터 1950년 1월 4일(음 ) 사이 군경이 민간인들을 반군 협력혐의로 월등면 농곡마을 앞산 양지맷골, 월등면사무소 앞 중봉산 아래 논두렁, 화지마 을 지사골재 등지에서 학살했고, 연행된 민간인들은 행불되어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황전면 황전면(괴목리, 금평리, 모전리, 선변리, 월산리, 죽청리, 황학리) 신청인 장옥자(직다 -1394) 외 15명(총 16건)은 1948년 10월 30일부터 1949년 12월 15일(음 ) 사이 주둔 군인들과 순천경찰이 민간인들을 연행하여 월전중학교 옆 양지맷골, 조곡동 둑실마을 죽 도봉 계곡, 월등면 망룡마을 옆 골짜기 등지에서 학살하거나, 고문으로 살해했다고 주장 했다. 상사면 상사면(도월리, 마륜리, 오곡리, 용계리, 응령리, 흘산리) 신청인 전일수(직다-1427) 외 21명(총 22건)은 1948년 10월 22일(음 )부터 1949년 12월 7일(음 ) 사이 15연 대 외 군인과 순천경찰, 토벌대가 민간인을 연행하여 상사지서 뒤편 상사면 흘산마을 땅 고재 중턱 공동묘지, 조계산, 승주에서 주암 가는 접치재 골짜기 등지에서 학살하거나 고 문하여 살해했다고 주장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495

24 제3권 낙안면 낙안면(금산리, 목촌리, 상송리, 옥산리) 신청인(총 24건) 가운데 강병화(직다-324) 외 16명(총 17건)은 1949년 10월 8일(음 ) 군경이 반군토벌을 위해 신전마을에 들어와, 반군협조자를 치료해주었다는 혐의로 주민 22명을 학살한 뒤 소각했다고 주장했다. 신청 인 박종혁(직다-1948) 외 6명(총 7건)은 1948년 11월(음 10월)부터 1949년 4월 6일(음 3. 8.)까지 군경이 민간인을 반군으로 오인하거나, 반군협조혐의, 모략 등의 이유로 낙안면 신전마을 앞, 낙안면 검안리 소재 공동묘지, 이수중학교 부근 죽두봉, 낙안지서 앞 등지에 서 학살하거나 구타하여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해룡면 해룡면(도롱리, 용전리, 상내리, 월전리, 중흥리) 신청인 김남수(직다-8366) 외 13명(총 14건)은 1948년 11월부터 1949년 늦가을까지 군경이 민간인들을 좌익책임자, 반군협조자, 은신 등의 혐의로 도롱리마을 뒷산, 순천 조례동 법원 뒷산, 월전리 자택 등지에서 학살 하거나, 순천경찰서로 연행하여 덕암동 이수중학교 주변, 순천-광양 경계 산골, 생목동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 등지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별량면 별량면(대룡리, 금치리, 덕정리, 봉림리, 송학리) 신청인 이상호(직다-1385) 외 9명(총 10건)은 1948년 11월 6일(음 )부터 1950년 2월 15일(음 )까지 별량지서 경찰 및 군인이 민간인을 연행하여 고문한 뒤 별량역, 대룡리 야산, 석현리 저수지 야산 등지 에서 학살하거나, 지서경찰과 한청단원이 민간인을 대룡리 용안마을 과수원 오두막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주암면 주암면(복다리, 요곡리, 주암리) 신청인 정종원(직다-1424) 외 4명(총 5건)은 1948년 10 월 22일부터 1949년 12월(음 11월)경 사이에 주암지서 경찰이 민간인을 주암지서로 연행 한 뒤 접치재, 구랑실재, 순천시내 초등학교 등지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외서면 외서면(금성리, 반용리, 월암리, 장선리) 신청인 이강원(직다-1335) 외 9명(총 10건)은 1948년 12월 21일(음 )부터 1949년 12월(음 11월)경 사이에 군경이 민간인을 연행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하여 금성리 월평마을 도로변, 외서면 도신리 마을 뒷산, 외서면 반용리 수직마을 앞 논 등지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송광면 송광면(장안리) 신청인 박준옥(직다-2278)(총 1건)은 1948년 12월 22일(음 ) 경 찰이 민간인을 장안리 대밭 위 움막에서 학살했다고 주장했다. 기타 지역 출신 희생사건 기타 지역(고흥군 도양읍 봉암리ㆍ두원면 성두리ㆍ대서면 남정리, 곡성군 옥곡면 오지 리,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광양군 옥곡면 묵백리,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 여수시 여천군 삼일면 화치리, 화순군 남면 사평리) 신청인 박이관(직다-9959) 외 9명(총 10건)은 1948년 10월 22일부터 1949년 봄까지 지역 거주 민간인들이 군경에 게 연행되어 학살되었다고 주장했다. 2. 조사의 근거와 목적 가. 조사의 근거와 목적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ㆍ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기본법 (법률 제7542호, , 이하 기본법) 제22조제3항에 의거, 여순사건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서 진 실규명에 해당한다고 인정할 만한 상당한 근거가 있고 진실규명이 중대하다 고 판단하 여, 아래와 같은 이유로 동 사건을 직권조사 사건으로 전환하였다. 4) 진실화해위원회는 여순사건에 대해, 1) 계엄령 실시와 국가보안법 제정( ) 등 한국사회의 분단체제 공고화에 큰 영향을 끼친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2) 여수 제14연대의 반란으로 비롯되었지만, 진압군경과 반란군 양측에 의해 군경과 민 간인이 다수 희생된 복합적 성격을 지니고 있으므로, 신청사건만을 조사할 경우 진실규 명이 불가능한 사건이며, 3) 한국전쟁 발발 이후 국군과 경찰 등 국가권력에 의해 지속적으로 이루어진 제2전선 지역에서의 민간인 집단희생의 발단이 되어, 국민보도연맹 사건ㆍ전국형무소재소자 희생 4) 진실화해위원회 제39차 전원위원회 의결( ). 순천지역 여순사건 497

26 제3권 사건ㆍ부역혐의 희생사건과도 밀접하게 관련된 사건이며, 4) 당시 전라남ㆍ북도와 경상남도지역의 일부 주민들은 반란동조세력 으로 규정되어, 피해의식도 깊고, 상호불신감을 심어준 사건이므로, 국가적 차원에서 진실을 밝혀내어 지역사회의 화해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타 지역 여순사건과의 관계, 지역사회 및 관련 유족의 진실규명 노 력, 유해발굴사업과의 관련성, 사건규모, 조사인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진실규명결 정( )이 된 구례지역 여순사건 다음으로 순천지역 여순사건 을 우선 조사하기 로 결정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조사를 통해 사건의 실재 여부, 사건경위와 희생과정, 희생규모, 희 생자의 신원과 특징, 피해이유, 가해주체와 그 지휘ㆍ명령체계, 가해의 위법성 유무, 유족 의 피해 등을 규명하고, 궁극적으로 피해자 및 유족의 명예회복과 함께 국민화해와 통합 을 위한 적절한 법적ㆍ제도적 조치를 국가에 권고하고자 하였다. 나. 조사의 필요성 1) 과거 국가기구의 사건 처리경과 여순사건 발생 직후인 1948년 11월 1일 전라남도 보건후생국에서는 순천지역의 피해 현황을 사망자 1,134명ㆍ중상자 103명ㆍ행방불명 818명ㆍ가옥피해 전파 13호(피해예 상액 1,350만원)ㆍ식량피해 200석(피해예상액 2,000만원)이라고 발표하였다. 5) 비록 순천지역 피해실태를 별도로 산정하지는 않았으나, 1949년 1월 중앙청에서 파견 된 조사관들이 여수ㆍ순천을 비롯하여 구례, 곡성, 광양, 고흥, 보성, 화순 등을 현지답사 하고 전체 피해상황을 보고했다. 이에 따르면 1949년 1월 10일까지 밝혀진 인명피해는 총 5,530명(사망 3,392명ㆍ중상 2,056명ㆍ행방불명 82명)이고, 가옥피해는 8,554호(전 소 5242호ㆍ반소 1,128호ㆍ소개 2,184호)였다. 가옥을 비롯한 총 재산피해 추정액은 99억 1,763만 395원에 달했다. 6) 또한 여순사건이 일어난 지 1년 뒤인 1949년 11월 11일 전남도 당국이 집계한 여순사 건 피해규모를 보면, 인명피해 11,131명, 가옥피해(파괴 및 소실) 11,871호, 재산피해 200 억 원에 달했다. 7) 5) 호남신문, ) 동아일보, )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박사논문, 2004, 187~188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순천시는 1997년 순천시지 를 편찬하였으나, 각 면별은 물론 전체적인 피해규모를 밝 혀내지는 못했다. 8) 2) 유족회의 진상규명 활동 순천지역 여순사건 유족들은 2000년 이후 여순사건화해와평화를위한순천시민연대 (순 천시민연대)를 중심으로 피해자 실태조사, 관련 학술행사, 역사순례 등을 전개하였다. 2000년 6월 발족한 여순사건 순천유족회 (회장 장준표)는 여수ㆍ구례ㆍ고흥ㆍ보성 등 유족회와 함께 매년 10월 19일 합동위령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 단희생사건 진상규명을 위한 입법청원운동에 함께했다. 2006년에는 순천시청의 지원을 받아 순천시민연대와 함께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2006년 12월 진실화해위원회가 출범하자, 관련 유족들은 순천지역 여순사건의 진실규 명을 신청했다. 3. 조사방법 가. 신청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기본법 제23조(진실규명 조사방법), 동법 시행령 제7조(조사의 절차 및 방법), 진실규명 신청 및 조사에 관한 규칙 (위원회 규칙 제13호)에 의거, 개별 신청 인 203명을 조사하였다. 신청인 조사는 신청인을 면담하여 를 작성하는 형태로 진행하였으며, 부득이 한 경우 전화로 조사했다. 는 문답형식으로 작성하였으며, 주로 육하원칙에 따라 사건개요와 피해과정, 피해이유, 군경의 가해혐의 확인, 유족의 피해상황 등을 확인하였 8) 한 문헌은 여순사건의 피해를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강조는 인용자. 여수지구: 인명피해 1,200여 명, 소실ㆍ파괴된 가옥 1,548동, 이재민 9,800명 순천지구: 사망자 1,134명, 행방불명 818명, 전파가옥 13 동 진압군의 작전결과: 유기시체(즉결처분) 392명, 포로 1,512명, M1 소총 952정, 3ㆍ8식 소총 679정, 9ㆍ9식 소총 863정, 박격포 14문 진압군 측 피해: 전사장교(순천파견대의 5명 포함) 9명, 사병 42명, 부 상 118명 처벌: 11월 1일 사건 관련자 89명 사형집행, 11월 7일 광주군법재판은 28명에 사형언도, 11 월 13일 14일 순천군법재판은 102명에 사형언도, 11월 6일 고등군법재판은 35명에 사형언도. 이기봉, 빨치산의 진실, 다나, 1992, 142쪽. 여순사건 당시 육군본부 정보과장이었던 김점곤은 순천지역 피해상 황을 논하며 적의 손실 부분에서 즉결처분이라는 용어 없이 유기시체 392라고만 적고 있다(김점곤, 한 국전쟁과 노동전략, 박영사, 1972, 202쪽). 한편, 순천지역 시민단체가 추산한 여순사건 관련 인명피해 는 1,661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대한민국 군경에 의한 여순사건 희생자는 1,026명, 반군과 지방좌익에 의한 희생자는 635명이라고 밝혔다. 여순사건 화해와 평화를 위한 순천시민연대, 여순사건 순천지역 피 해실태 조사보고서 2006, 271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499

28 제3권 다. 9) 신청인 조사는 2007년 4월부터 2008년 11월까지 203명을 대상으로 수십 차례의 현 지 출장과 전화통화로 이루어졌다. ([별첨 1] 신청인 조사상황 참조.) 나. 참고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기본법 제23조(진실규명 조사방법)ㆍ제24조(동행명령 등)ㆍ제31조 (조사대상자의 보호), 동법 시행령 제7조(조사의 절차 및 방법)ㆍ제8조(의 녹음 등), 그리고 진실규명 신청 및 조사에 관한 규칙 (위원회 규칙 제13호)에 의거하여, 참고인 을 조사했다. 1) 경찰 관련 참고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참전경찰유공자회 전국명단을 입수하여 이 가운데 전남ㆍ순천지부 163명을 대상으로 전화탐문을 벌였다. 그 결과 사건관련자 18명의 명단을 확보하였으며, 이 중 면담을 거부한 3명을 제외한 15명에 대한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다. 또한 참고ㆍ신청인의 에서 가해 경찰로 언급된 당시 순천경찰 안의 인사기록 을 퇴직 당시 소속인 강원지방경찰청에 요청 10) 하여 사건 관련 여부 및 소재지를 파악하 는 한편, 그 결과를 바탕으로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안과 더불어 유력한 가해 경찰 로 언급된 구에 대해서도 참고인 조사를 진행했다. 한편, 국방부에 참전사실확인서를 제출한 민원인 중 전남지역 관련자를 탐문하여, 참고 인을 탐문했다. 이와 함께, 순천경우회 소속 전직 경찰관 명단을 입수, 참전경찰유공자회 전남ㆍ순천지부 명단과 중복되지 않는 관련자(사건 당시 경찰 재직자ㆍ대한청년단 단원 ㆍ순천경찰서 의경ㆍ향토방위대 등) 5명을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별첨 2] 경찰 관련 참고인 조사상황 참조.) 9) 참고(신청)인 조사는 ㆍ서ㆍ녹취록ㆍ면담보고서ㆍ통화보고서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 다. 각 형식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 : 조사관이 작성한 후 인의 서명 및 간인을 받은 자료 - 서 : 인이 직접 작성한 후 서명 및 간인을 한 자료 - 녹취록 : 인의 동의 후 내용을 녹취한 자료 - 면담보고서 : 인의 동의 후 면담내용을 정리한 자료 - 통화보고서 : 인의 동의 후 통화내용을 정리한 자료. 10) 강원지방경찰청, <요청자료 송부>, 경무과-6642(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2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2) 군 관련 참고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군 관련 참고인 대상자를 선정하여 명단을 작성한 다음, 전화로 사 전조사를 거친 후에 참고인을 조사했다. 그러나 상당수의 군 관련 참고인들이 작성 및 확인 서명에 거부감을 표명하여, 의 형태를 수정하거나 면담보고서를 작성하는 방식을 취하기도 했다. 녹음이나 녹화에 동의한 참고인의 경우, 동의서 작성 후 조사내용을 녹음하거나 녹화했다. 일반 사병 참고인 명단은 국가보훈처의 협조를 받아, (참전)유공자 등재자 중 년 군에서 복무했던 12군번자, 14군번자, 15군번자, 27군번자, 52군번자, 53군번자 총 8,766명의 연락처와 주소를 확보하였다. 11) 이 가운데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자로 추정되는 325명을 대상으 로 전화탐문을 벌여, 관련자 43명을 확보하였다. 답변을 거부한 10명을 제외한 사건 관 련자 33명에 대해 참고인 조사를 벌였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을 결정한 구 례지역 여순사건 관련 제3연대ㆍ12연대 소속 군인들 가운데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자 44명을 대상으로 본 사건에 관하여 재조사하였다. 국군 제2연대, 제3연대, 제4(20)연대, 제12연대, 제15연대 출신 참고인의 주요 내용 은 [별첨 3], [별첨 4], [별첨 5], [별첨 6], [별첨 7]과 같다. [별첨 8]은 상기 연대 출 신이 아닌 기타 군 관련 참고인의 주요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별첨 3] [별첨 8] 군 관련 참고인 조사상황 참조.) 3) 일반 참고인 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인 및 유족회 관계자의 과 기존 증언자료를 종합하여, 생존 자나 목격자를 중심으로 본 사건 관련자를 파악하고, 이들을 일반 참고인으로 선정하여 조사하였다. 또한 진실화해위원회는 진실규명 신청기간( )에 신청하 지 못했지만, 본 사건에 대해 많이 알고 있는 유족(미신청 희생자 유족)들도 참고인으로 11) 여순사건 조사 관련 자료 협조 요청 (조사1팀-844, ); 참전명예수당 수령자 명단 통보 보상급여-2007 ( ). 이 밖의 참고인 명단은 사건 당시의 신문ㆍ잡지,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1 7권(국방군사연구소, ), 한국전쟁 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국군의 뿌리 창군 ㆍ참전용사들 (50동우회 편, 삼우사, 1998), 육사제5기생 (육군사관학교제5기회, 1990), 육군사관학 교 제3기생 회원주소록 (육군사관학교 제3기회, 2007), 장교자력표 (육군본부 기록정보관리단 소장), 인사명령부 (통위부 및 국방부 인사명령철), 기타 참고인들의 등을 참고하여 확보하였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01

30 제3권 선정하여 조사하였다. ([별첨 9] 일반 참고인 조사상황 참조.) 다. 자료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기본법 제23조(진실규명 조사방법) 및 동법 시행령 제7조(조사의 절 차 및 방법), 진실규명 신청 및 조사에 관한 규칙 (위원회 규칙 제13호)에 의거하여, 본 사건과 관련된 자료를 조사했다. 1) 주요 참고자료 가) 경찰 관련 참고 자료 순천경찰서, 뺷보안기록조회회보서뺸1 2권, 1979 전 면 뺷보안기록 뺸기재사례 확대 사진 뺷보안기록조회회보서뺸(회보서)는 경찰이 작성한 보안 또는 대공관련 개인별 신원자료 이다. 본 자료는 2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권 156명ㆍ2권 150명 총 306명의 인적사항 (성명, 원적, 본적, 주소, 생년월일)과 대공신원상 특이사항(부역 및 처형내용과 주체)이 기재되어있다. 불분명한 내용을 제외하고, 1 2권을 통틀어 여순사건 관련 사살자 12)로 기재된 자는 82명이었다. 이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진실규명대상자는 1명으로 확인되었다. 특이사항에는 남로당(38명), 노동당(2명), 보도연맹(5명), 민청(31명) 등으로 12) 사살자 는 사전에 없는 말이다. 정확하게는 사살당한 자 또는 피살자로 써야한다. 그러나 본 보고서에서는 군경의 자료에서 등장하는 사살자 라는 용어가 사살한 자를 나타내기보다 사살당한 자를 의미하고 있고, 의미의 혼동이 크지 않다는 점에서 사살자 로 표기하기로 한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부역ㆍ활약ㆍ활동하다가 아군(256명)과 경찰(3명)에게 사살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다. 보 안기록조회회보서 는 경찰이 1970년대 말부터 전산화하기 시작한 보안기록 을 근거로 제작된 자료로서, 경찰은 이 자료를 근거로 관내의 이른바 인적위해자 (부역자, 처형자 연 고자, 좌익ㆍ간첩출소자, 공안사범)들을 관리해오고 있다. 따라서 회보서 는 경찰이 경호 ㆍ보안ㆍ신원조회 등의 현용업무에 사용하는 기본 데이터로서 자료의 신뢰성이 높다고 볼 수 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2007년 본 자료를 경찰청과거사위원회로부터 제공받았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1 33권, 1980 전 면 사실조사서 기재사례 확대 사진 사실조사서 는 1980년 연좌제를 폐지한다는 취지에서 신원기록일제정비계획 에 의거 하여 전국 각 경찰관서에서 생산된 한국전쟁 전후 좌익관련 개인별 동향 기록이다. 사실조 사서 는 기존의 대장 등을 근거로 관리대상자들을 재분류, 전산처리의 기본자료로 활용하 기 위해 만들어졌다. 13)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는 총 33권으로, 1948년 초부터 1954년경 까지 한국전쟁 전후 관내에서 활동한 좌익활동 혐의자들이 사살자 와 생존자 등으로 분류 되어 있다. 여기에는 순천 관내의 남로당, 여순사건, 민청, 보도연맹원, 여맹, 유격대원, 공비, 노동당 등의 부역사실 과 개인 인적사항(이름ㆍ본적ㆍ주소ㆍ직업ㆍ성별) 및 신원기록(전 과관계ㆍ시찰사항ㆍ국가공헌도 및 현재 사상 동향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다. 사실조사서 에 등재된 사살자 는 총 643명이고 자수자는 1,461명이다. 이 가운데 국민보도연맹 사건과 13) 경찰청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경찰청, 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503

32 제3권 전국형무소재소자 사건, 기재 오류 등을 제외하면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 사살자 는 205명 으로 확인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진실규명대상자를 사실조사서 에 조회해본 결과, 37명이 확인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는 이 가운데 10명을 무작위로 선정하여 표본조사 를 벌인 결과, 10명 모두 순천지역 여순사건 관련 사살자 로 확인되어 자료의 신뢰도는 높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른바 인적위해자 로 불리는 관내의 관리대상자들로는 인민위원회(1,168명), 의 용군(886명), 농맹(727명), 보도연맹원(21명) 출신자들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진실화해 위원회는 경찰청과거사위원회로부터 2007년 본 자료를 제공받았다. 전남지방경찰청 소장, 인사사령부, 내무부 치안국, 한국경찰 10년사, 1958 전남경찰국, 사살자 가족 동향 감시 철저 지시 (정보 , ) 진도경찰서, 사살자 가족 동향 감시 철저 (정보 , ) 진도경찰서 각 지서, 사살자 가족 동향 감시 철저 ( ) 내무부 치안국, 한국경찰사 ( ) Ⅱ, 1973 전남지방경찰청, 전남경찰사, 1992 윤장호, 호국경찰전사, 도서출판 제일, 1995 전남지방경찰청 소장, 인사기록카드 다수 참전유공자회, 전남지역 참전유공자 회원 명부 치안본부, 대공신원기록편람 1 4, 1984 순천경찰서, 경무기본대장 순천경찰서, 순직경찰관(전몰애국단체원)대장, 순천경찰서, 상이경찰관(전상애국단체원)대장, 순천경찰서, 참전ㆍ보훈, 2005 智 異 山 地 區 警 察 隊 總 指 揮 本 部, 戰 鬪 祥 報 ( 檀 紀 ), 內 務 部 治 安 局, 경찰청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조사결과보고서, 경찰청, 나) 군 관련 자료조사 국방부 역사일지 육군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 1.2.년사(초안) 40 50년도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국방부 기획관리실 총무과, 국방본부 역사일지, 군사편찬연구소ㆍ육군기록정보관리단 소장, 장교자력표 41건. 장교임관순대장(육군) ( ). 육군기록정보관리단 소장, 병적기록부 42건. 육군본부, 공비토벌사, 195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보병제5사단, 부대약사, 1969ㆍ1980 육군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 2, 1971 장창국, 육사졸업생, 중앙일보사, 198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대비정규전사 ( ), 1988 육사제5기생회, 육사제5기생, 1990 보병제1사단, 전진역사, 1994 국방군사연구소, 호국전몰용사공훈록 제1 7권, ( 50동우회 편, 국군의 뿌리 창군ㆍ참전용사들, 삼우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전쟁의 배경과 원인, 한국전쟁사 1, 공군본부, 6ㆍ25전쟁 증언록, 2002, 79쪽 군사편찬연구소, 6ㆍ25전쟁 전후 계엄업무 수행체계 연구, 민군 관련 연구 논문 집, 2006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한국전쟁 증언록 ([별첨 10]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한국전쟁 증언록 조사상황 참조.) 2) 일반 자료 조사 가) 국내자료 조사 조선일보, 동아일보, 경향신문, 세계일보, 서울신문, 한성일보, 자유신문, 국제신문, 독립신보, 호남신문, 동광신문, 강원일보, 국민신문, 대동신문, 평화일보, 부산신문, 수산경 제신문, 민주일보 외 신문 및 잡지 다수 국사편찬위원회, 자료대한민국사 제8 18권, ( 선휘성 채록, 이계유 외 구술, 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 녹취록1 2, 국사편찬위 순천지역 여순사건 505

34 제3권 원회, 2006 대한민국국회, 제헌국회속기록, (선인문화사, 1999) 대한민국정부 공보처, 관보, 국가기록원 소장, (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빨치산 자료집 제1ㆍ7권, 1996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편, 여순사건 피해실태조사보고서, 제1집-여수편, 1998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편, 여순사건 피해실태조사보고서, 제3집-순천외곽지역편, 2000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편, 여순사건 자료집 (여순사건 연구총서 제2집), 1999 전남동부지역사회연구소, 여순사건자료집Ⅰ 국회속기록ㆍ잡지편, 선인출판사, 2001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지창환, 순천 KBS 여순사건 60년 특별기획 잃어버린 기억 녹취록, ( 방영) 전남도지편찬위원회, 전남도지 Ⅱ(정치ㆍ행정ㆍ사법 편), 1994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 上 ㆍ 下, 1997 구례문화원 소장, 구례군 마을조사자료, 2005 이윤, 진중일기, 여문각, 2001 백선엽, 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권경안, 큰산 아래 사람들 : 구례의 역사와 문화, 향지사, 2000 최기덕, 내 생애 최고의 비밀, 사상계 130호, 1964년 1월호 존 R. 메릴 저ㆍ신성환 옮김, 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 과학과사상사, 1988 윤기출, 극기, 정문사, 2006 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 광주전남현대사 1 2, 실천문학사, 1991 이기봉, 빨치산의 진실, 다나, 1992 짐 하우스만ㆍ정일화 공저, 한국의 대통령을 움직인 미군대위 - 하우스만 증언, 한국문원, 1995 유건호, 전환기의 내막, 조선일보사, 1982 김동춘, 전쟁과 사회, 돌베개, 2000 황남준, 전남지방 정치와 여순사건, 해방 전후사의 인식 3, 한길사, 정석균, 지리산 공비토벌작전 : 여순반란군 토벌을 중심으로, 군사 제19호, 김순태, 제주 4ㆍ3민중항쟁 당시의 계엄에 관한 고찰 - 계엄의 법적 근거 유무에 대한 판단을 중심으로 -, 민주법학 제14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김창록, 1948년 헌법 100조 - 4ㆍ3계엄령을 통해 본 일제법령의 효력, 법학연 구, 부산대학교, 1998 Allan R. Millett/ 김광수 역, 하우스만 대위와 한국군 창설( ) 군사 40호, 2000 홍영기, 문헌자료와 증언을 통해 본 여순사건의 피해현황, 4ㆍ3과 역사 제1호, 2001 정청주, 여순사건 연구의 현황과 과제, 여수대학교 논문집 제13집 1권, 1998 최정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의 진상 규명을 위하여 : 광주ㆍ전남 지역의 실태조사에 대한 중간보고, 전쟁과 인권 : 2001 민간인 학살 심포지엄, 한국전쟁전후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범국민위원회,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전남사학 22집, 노영기, 여순사건과 구례 여순사건 직후 군대의 주둔과 진압을 중심으로, 사 회와 역사 제68호,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반공체제의 구축, 성대 사학과박사논문, 2004 김득중, 여순사건 의 실상과 민중의 피해, 내일을 여는 역사 2호, 2000 김득중, 이승만정부의 여순사건 왜곡과 국회논의의 한계, 역사학연구 7호, 역사 학연구소, 2000 최정기, 국가형성과정에서의 국가폭력, 지리산권 주민의 한국전쟁경험과 지역공 동체의 재구성, 한국사회사학회 여름워크숍 발표자료집, 2005 김수자, 대한민국수립직후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의 형성과정, 한국사상사학 25권, 2005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 나남출판, 1996 서중석, 이승만과 제1공화국, 역사비평사, 2007 브루스 커밍스,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 창비, 2001 김점곤, 한국전쟁과 노동전략, 박영사, 1981 이효춘, 여순군란연구-그 배경과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 역사교육과 석사 논문, 1996 선휘성, 여순사건 발생 배경과 피해 실태에 대한 인식, 순천대학교 교육대학원 석 사학위 논문, 2004 진실화해위원회ㆍ한국현대사회연구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유해 매장 추정지 조사용역 최종보고서, 2007 진실화해위원회ㆍ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피 해자현황조사 용역사업 결과보고서, 2007 순천지역 여순사건 507

36 제3권 진실화해위원회ㆍ충북대학교 박물관,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2007 년 유해발굴 보고서 제1 3권, 2008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피학살자 전국유족회, 한국전쟁전후 학살(추정)지 현황 제출 ( )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유해발굴센터ㆍ한국도로공사, 여순사건 집단희생지 (전남 순천시 서면 구랑실재) 유해발굴 약보고서, 2008 순천문화원, 여순사건, 순천이야기, 2004 나) 해외자료 조사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주한미군 정보일 지) 제6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주한미군정보일 지) 제7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미군사고문단정 보일지) 제1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미군사고문단정 보일지) 제2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HQ, USAFIK, G-2 Weekly Summary ( )(주한미군주간 정보요약) 제5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0 HQ, USAFIK, Counter Intelligence Corps, Monthly Information Report, 미군정기 정보자료집 : CIC(방첩대) 보고서 ( ) 제3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95 KMAG, W.L. Roberts 문서철 Far East Command, Daily Intelligence Summary, RG319 - ID File ㆍJohn J. Muccio, Review of and Observation on the Yosu Rebellion, ID No ㆍAmerican Mission in Korea, Political Summary for October 1948, November 16, 1948, ID No Entry OCMH Box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ㆍJohn P. Reed, The Truth about the Yosu Incident, History of the Korean Army, 1 July 1948 to 15 October 1948 RG338 Records of United States Army in Korea, Lt. General John R, Hodge Official Files Entry 11070, Box 68 ㆍG-3 Section, ⅡⅣ Corps, History of the Rebellion of the 14th Regiment and the 6th Regiment of the Korean Constabulary, 10 November 1948(24사단 작전참 모부, 국방경비대 제14연대와 제6연대 반란사 ) - Entry 11071, Box2, Yosu Rebellion ㆍSpecial Agent 9016의 보고, 유창남 인터뷰, 28 October, 1948 ㆍCaptain Howard W. Darrow, The Yosu Rebellion, Amphibious Phase RG407 Entry 427 File No. 306 ㆍ6th Division, Chronological Journal of Events (18 October 1948 to 21 November 1948) USAFIK G-3, OPERATIONS JOURNAL, 1948, RG554, BOX9 USAFIK G-3, OPERATIONS JOURNAL, 1948, RG554, BOX10 USAFIK G-3, SUBJECT FILES, , RG554, BOX12 Interview with Prudoncio D. Uliberri ( ), RG 319. Box 6, R.K. Sawyer, Military Advisors in Korea : KMAG in Peace and War, Office of the Chief of Military History, Department of the Army(Washington D.C.), 1962 Carl Mydans & Shelly Mydans, The Violent Peace-A Report on Wars in the Post War World, The Free Press(New York, Atheneum), 1968 Carl Mydans, More than Meets the Eye, Harper&brothers(New York), 1959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The Roaring of the Cataract ) Volume Ⅱ,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90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사자료집ㆍ한국관계 영국외무성문서10 17권, 1994 라. 현장조사 진실화해위원회는 본 사건의 조사과정에서 신청인과 참고인의 안내를 받아 사건현장 순천지역 여순사건 509

38 제3권 을 확인하였다. 주요 현장은 순천시 월등면 일대(양지맷골), 북국민학교(현 북초등학교), 순천농림중학교(현 순천대학교), 구랑실재, 학구 대구실재, 조곡동 둑실마을 안골(죽도봉 골짜기), 상사 우산보 인근 보장골, 월등면 망룡부락 보름터골(망룡계곡), 월등면 큰박골, 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 매곡동 매산길(매산중학교 옆길), 판교리 월치재 인근(노은ㆍ지본고지), 용계산 계곡 골짜기(구상리 안골, 앵기산 골짜기, 용골), 주암면 접치재, 낙안면 금산리 신전마을, 외서면 도신마을 뒤 대나무골, 별량면 돌고개재 공동묘지 등이었다. 이 가운데 구랑실재는 한국도로공사ㆍ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유 해발굴센터가 2008년 6월 25일부터 7월 13일까지 유해발굴사업을 벌인 장소이다. 14) 한 편, 매곡동은 진실화해위원회ㆍ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유해발굴센터가 7월 29일부 터 8월 10일까지 집단희생 추정지에 대한 유해발굴사업을 추진했다. 15) Ⅱ. 조사결과 1. 사건배경 가. 해방 후 순천의 정치상황 해방이 되자 1945년 8월 17일 순천건국준비위원회(이하 순천건준)가 결성되었다. 순천 건준은 좌익세력들을 배제한 채 위원장에 김양수, 부위원장 김정기 등 우익인사들로 채 워졌다. 16) 건준에서 배제된 좌익은 노동조합(위원장 정충조)을 조직하여 우익 일색인 건 준과 반목했다. 17) 국가건설을 둘러싼 좌우익 대립의 시작이었다. 미군이 진주하자 우익 세력은 9월 25일 서울을 제외하고 전국지부로는 최초로 한민당 순천지부를 결성하여 건 준에서 이탈했다. 18) 이에 따라 좌익계 인사들은 김기수를 중심으로 건준을 인계하여 인 14) 구랑실재의 경우 고속도로 건설사업 추진에 따라 훼손될 유해에 대한 구제 차원에서 발굴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 1구의 시신이 수습되었다. 유해발굴단은 더 이상 유해가 발굴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하여, 유해 발굴을 잠정 종료한 상태다.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유해발굴센터ㆍ한국도로공사, 여순사건 집단희 생지(전남 순천시 서면 구랑실재) 유해발굴 약보고서, 2008, 10쪽 15) 충북대학교 중원문화연구소 유해발굴센터의 유해발굴 결과, 매곡동 발굴지에선 시신이 발굴되지 않았다. 16) 김양수는 미국에서 대학을 나온 대지주 출신의 인텔리였다.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속ㆍ수감되어 집행유 예로 석방되었다. 8ㆍ15 직전 예비검속,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채 해방을 맞았다. 김정기는 곡성 출신으로 전문학교를 졸업한 기독교 장로로 목포, 함흥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온건한 명망가였다. 훗날 한민당에 관계하면서 순천군수와 승주에서 2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안종철, 광주전남지방 현대사연구, 한울, 1988, 93~94쪽 17) 좌익을 중심으로 한 노동조합이 건준을 습격하기도 했다.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733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3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민위원회(인민위)로 명칭을 바꾸었다. 19) 미군 진주 후 한민당과 인민위가 조직적으로 대립하는 가운데, 김양수가 군수에, 일제 시기 경찰 출신 이종수가 서장에 임명되자, 인민위와 산하 단체들에 대한 탄압이 시작되 었다. 농민조합 대표가 체포되었고, 1946년 1월 20일에는 좌익계 청년연맹 정보부장 김백 일이 광복군 순천지부장 이정열에게 살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20) 1946년 3월에는 순천 경찰이 좌익 총검거에 나서 인민위와 공산당 간판을 박탈하고, 공산당 순천대표 정충조, 민전 사무국장 박남현, 인민당 부위원장 한태선, 백광해 등을 검거했다. 21) 전남 동부지역은 해방 초기부터 사회경제적인 조건 등의 이유로 우익세력의 힘이 강한 지역이었다. 22) 순천의 경우 우익세력은 결집력이 매우 강했고 미군의 직접 주둔에 힘입 어 전반적인 정치상황을 지배하고 있었다. 반면 좌익세력도 상대적으로 결집이 강해 주 로 면 단위 이하에서 농민조합 등과 같은 조직을 통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순천의 경우 좌우익 갈등의 정도가 전남 동부지역 가운데 상대적으로 높았다. 23) 18) 순천은 전남에서 우익세력이 우세한 대표적인 지역이었다. 전남일보 광주전남현대사 기획위원회, 광주전남 현대사 1, 실천문학사, 1991, 96쪽. 19) 인민위에는 위원장 김기수, 부위원장 정충조과 오만봉, 손남삼, 박만고, 이석모, 김성봉, 장남현, 오경심, 정영한, 이영민 등이 참여했다. 이효춘, 여순군란연구 그 배경과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 역사교육과 석사논문, 1996, 19쪽. 20)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순천은 다른 지역과 달리 한민당과 광복군이 연결되 어 있었다. 안종철, 광주전남지방 현대사연구, 한울, 1988, 156쪽. 21)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21쪽. 여순사건 당시 학생연맹 감찰부장을 지낸 황은 1946년도 좌익검거 시 한태선은 도피했다고 했다. 참고인 황 면담( ). 22)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여순사건 논문집,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164쪽. 순천 대한청년단 단장 황는 우익 확산의 본산지가 순천이라고 말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황우수 증언, 141쪽. 23) 3ㆍ1운동 이후 순천은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이 활발했다. 1920년대에는 소작쟁의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순천지역은 지주제가 발달하여 소작농(지) 비율이 높았고, 아울러 재지지주가 많아 소작쟁의의 사회ㆍ경제적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다. 1923년과 1924년에 일어난 소작쟁의 가운데 순천은 가장 많은 쟁의를 기록했다. 1922년 12월 서면에서 소작농 1,600여 명이 4작 소작료 관철, 지세의 지주 부담 등을 주장하며 투쟁을 벌였다. 서면민요( 西 面 民 擾 ) 로 불린 이 쟁의는 모든 면과 광양 여수까지 번졌다. 소작쟁의의 경험은 자연스레 농민운동으로 이어졌다. 1924년에는 사회주의 성향의 조선노농총동맹을 출범시키는 등 순천지역은 일제하 농민운동에서 상당히 비중 있는 역할을 하였다. 일제하 순천지역의 사회운동에 큰 역할을 한 활동가로는 이영민, 이창수, 김기수, 박병두, 박중임, 이건, 박만고 등을 꼽을 수 있다. 김기수는 전남 노동동맹위원이었고 소작쟁의의 지도자였다. 그는 박병두, 이창수, 이영민 등과 함께 제2차 조선공산당에 가입했고, 1926년 이들과 함께 순천 야체이카를 조직했다. 해방 후 순천군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여순사건에 가담한 뒤 월북했다. 박병두는 남선농민연맹원, 이창수는 순천농민연합회 집행위원이었다. 이영민은 순천농민연합회 집행위원과 순천 민전 회장으로 여순사건 당시 은거했다. 정충조는 여수 출신으로 여순사건 전 월북했다. 박만고는 여순사건 당시 3일 군수 로 불리다 진압군에게 체포, 부인 오경심과 함께 실형을 선고받고 수감되었다. 호남의 대표적인 소프라노 성악가였던 아내 오경심은 한국전쟁 당시 풀려나 인민군 장교로 순천에 나타났다.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583~599, 650~653, 순천지역 여순사건 511

40 제3권 나. 여수 제14연대의 반란과 순천 점령 육군본부가 1948년 10월 19일 오전 7시 여수 제14연대 24) 에 제주4ㆍ3사건 진압을 위한 출항명령을 하달하자, 이에 반대하는 14연대 소속 군인 약 2,000명이 반란을 일으켰다. 25) 제14연대 반군은 지창수 상사의 지휘 아래 차량을 동원하여, 경찰의 저지선을 무너뜨 리고 여수를 장악했다. 26) 10월 20일 반군의 주력부대가 시내에 침입하여 교전이 개시되 었으나, 소수의 경찰병력은 반군을 저지할 수 없었다. 반군이 시내로 들어오자, 여수 시민 600여 명이 반군에 합세하였다. 10월 20일 오전 9시에 이르러 여수시는 완전히 반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27) 반군은 주요기관과 건물을 접수하고 체포된 경찰관과 기관장ㆍ우익 단체원ㆍ유지 등을 여수경찰서 뒤뜰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이어 인민위원회가 조직되 고, 인민공화국 깃발이 주요 건물에 걸렸다. 28) 여수를 장악한 반군의 주력 2개 대대는 20일 오전 9시 30분경 김지회 중위의 지휘 아래 여수역에서 통근열차를 이용, 순천으로 북상했다. 29) 순천역 앞에서 대기하던 홍순석 중위 휘하 순천 파견 2개 중대가 즉시 반군에 합류했다. 30) 순천교와 순천역에 배치된 광주 급파 제4연대 1개 중대도 반란에 반대하는 일부 사병을 사살한 뒤 반군에 합세했다. 31) 20일 오후 733쪽;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20쪽. 24) 14연대는 광주 4연대 1대대를 기간병력으로 1948년 5월 4일 전남 여수에서 창설되었다. 당시 전국 각 지역에서 벌어졌던 군과 경찰의 갈등에서 상대적으로 열세에 놓여 있던 군에는, 경찰에 반발하고 있던 사병들과 지창수를 비롯한 김지회ㆍ홍순석 등 좌익계의 하사관과 장교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 게다가 경찰의 수배를 받고 있었던 좌익 동조자들과 일반 범죄자들까지도 경찰의 추적을 피해 쉽게 입대가 가능했기 때문에 경찰에 대한 적대감정이 높았다.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여순사건 논문집, 여수지역사회 연구소, 2006, 172~173쪽. 당시 의무병으로 14연대에서 근무한 곽상국은 14연대 모병이 부락마다 할당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구술했다. 고된 훈련에 비해 보급이랑 처우 등이 형편없어 군입대자가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 다. 곽상국 구술, 선휘성 채록, 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 녹취록1, 국사편찬위원회, 2006, 4쪽. 25) 육군본부 전사감실, 공비토벌사, 육군본부, 1954, 13~14쪽; 육본 발간 공간사에는 10월 19일 21시 20분 이라고 적고 있다.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1.2.년사(초안), 1969, 197쪽. 26) 공군본부, 6ㆍ25전쟁 증언록, 2002, 79쪽. 27) 육본 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 1971, 204쪽. 28)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55쪽. 29) 김점곤, 한국전쟁과 노동전략, 박영사, 1981, 198쪽. 여수에서 출발한 반군들의 당초 진로가 순천이 아니라 구례였다는 주장이 있다. 동순천역 부근에서 벌어진 순천경찰과의 전투로 예정에 없던 순천을 점령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구례로 진로를 정한 것은, 여순사건 전 구례구역에서 일어난 군경충돌사건에 대한 보복을 한 뒤, 지리산 입산을 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남로당 순천군당 조직책 윤기남은 당초 반군이 구례로 들어가 독자적인 유격활동을 할 계획이었다고 말했다. 민간인들과 함께 봉기할 계획은 없었다는 것이다.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1.2.년사(초안), 1969, 206쪽;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정효(당시 순천열차 사무소 차장) 증언, 122쪽;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내가 겪은 여순사건 윤기남,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801쪽. 30)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67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4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3시경 반군은 순천시내를 완전 점령하였다.32) 이어 반군은 병력을 3개부대로 재편성하여 주력 1천여 명은 구례, 곡성, 남원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학구 쪽으로 진격해나갔고, 일부는 광주 방면으로 진출하기 위해 벌교, 보성, 화순 방면으로, 나머지 일부는 경상도지방 진출을 위해 광양, 하동 방향으로 진격해나갔다.33) 남원ㆍ구례ㆍ보성 등지에서는 반군이 도착하기 도 전에 지방좌익세력들이 점령을 하여, 14연대가 무혈 입성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 다.34) 그동안 비합법 상태에서 지하활동을 하던 이 지역의 민애청원이나 노조원 그리고 남로당원 학생 등이 사건에 적극 가담35)하면서부터 14연대 반란은 여순사건 이 되었다.36) [지도 1, 2] 미 군사고문단 1948년 10월 20ㆍ21일 24시 상황 지도37) 20일 24시 순천을 점령한 반군이 세력을 학구, 광양, 21일 24시 4연대 450명과 3연대 2ㆍ3대대가 반군과 보성 방면으로 확장하고 있다. 학구에서 대치하고 있다. 14연대 군인들이 순천시내를 점령한 10월 20일 밤, 여맹과 민청이 지하에서 나와 간판 을 걸었고 인민위원회도 재건되었다.38) 순천의 좌익세력들은 반군에게 무기를 지급받고, 31)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대비정규전사( )뺸, 1988, 34쪽. 32)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761쪽. 다른 공간사(公刊史)는 순천 점령 시점을 10 월 20일 17:00시경으로 적고 있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대비정규전사( )뺸, 1988, 34쪽. 33) 안종철, 여순사건의 배경과 전개과정, 뺷여순사건 논문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74쪽. 34) 이효춘, 여순군란연구 그 배경과 전개 과정을 중심으로, 고려대 역사교육과 석사논문, 1996, 32쪽. 35)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처, 뺷육군1.2.년사(초안)뺸, 1969, 198쪽. 36) 서중석, 뺷이승만과 제1공화국뺸, 역사비평사, 여순사건의 특기할 점은 민간인, 특히 학생들의 적극적 인 참여였다. 좌익계 학생들은 민애청, 민주학생동맹을 중심으로 여순사건에 깊숙이 개입했고, 이는 학생 전체를 대상으로 한 피의 보복을 낳았다. 순천지역의 경우 순천사범, 순천여중, 순천중학, 순천농림, 매산 중학 등의 일부 학생들이 가담했다. 진압 직후 군경은 순천사범의 40%, 순천농중 30%가 반란에 동조했다 고 발표했다. 손태희, 여순사건 참가계층의 제유형, 순천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30 31쪽. 37) NARA, USAFIK, 뺷Adjutant General Section뺸, RG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eneral Correspondence(Decimal Files) , A1 1378, Reports (2). 순천지역 여순사건 513

42 제3권 함께 경찰ㆍ우익요인ㆍ청년단원들을 습격하거나 우익인사들을 적발하는 데 앞장섰다.39) 이들은 친일파의 은행예금을 동결하거나 재산을 몰수하는 한편, 식량창고를 개방하여 쌀 과 물자를 시민들에게 배급하였다. 일부 지역에서는 경찰이나 우익인사에 대한 인민재 판40)을 실시하기도 했다.41) 10월 27일자 영국 외무성문서에는 미 외교관 보고를 인용하 여 300명의 경찰과 비공산주의자 시민들이 반군에게 학살되었다고 적혀 있다.42) 진압군 측은 400여 명의 경찰관이 사살당한 것으로 추산했다.43) 반군은 10월 21일 이후 정부군의 진압작전이 본격화되자 다시 순천으로 집결하였다가, 광양의 백운산과 구례를 거쳐 지리산으로 들어갔다. 이때부터 지리산 부근에서는 제14연 대원들이 주축이 된 구빨치 의 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다. 정부의 진압작전 여순사건이 발생하자 정부는 이를 즉각 반란으로 규정하고 진압에 나섰다.44) 1948년 10월 20일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사무실에서 국무총리 겸 국방부장관 이범석, 국방경비대 총사령관 송호성 준장, 임시군사고문단 단장 로버츠 준장, 국방부 고문 제임스 하우스만 (James Hausman) 대위를 비롯한 미군과 한국군 참모들이 모여 비상회의를 가졌다. 이 회의에서 광주에 토벌군사령부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45) 38)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77 78쪽. 해방 직후 남 한 지역의 지방인민위원회는 미군정의 탄압으로 잠시 동안의 활동에 그쳤고, 여수나 순천지역의 인민위원 회는 강한 행정력을 행사한 것은 아니지만, 자연발생적인 민중의 의지를 대변했던 조직으로서, 그 영향력 은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있었다. 이는 1946년 10월의 전국적인 추수봉기 시 이에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지방과는 달리 이 시점까지도 해방 직후의 건준지부와 인민위원회를 주도했던 세력이 여전히 붕괴 되지 않았던 데 기인했다. 박명림, 뺷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II-기원과 원인뺸, 나남출판, 1996, 410쪽. 39) 육군본부 전사감실, 뺷공비토벌사뺸, 육군본부, 1954, 14쪽;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처, 뺷육군1.2.년사(초안)뺸, 1969, 200쪽. 40) 여순사건 당시 재판부는 민간인으로 구성되었고, 그들에 의해 재판이 실시되었다. 미군정 정보보고서(G-2 Report)에 의하면 벌교지역의 경우 5명의 재판관 가운데 3명이 지방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피고는 경찰, 정부관리, 지방 우익인사, 그리고 방첩대(CIC)에서 일한 우익인사였다. 김동춘, 뺷전쟁과 사회뺸, 돌베개, 2000, 159쪽. 41)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처, 뺷육군1.2.년사(초안)뺸, 1969, 200쪽. 42) The American Vice-Consul at Kwangju has reported that the rebels have butchered over 300 police and non-communist civilians. 국사편찬위원회, 뺷대한민국사 자료집ㆍ한국관계 영국외무성문서 10뺸17권, 1994, 272p. 43) 육본 정보참모부, 뺷공비연혁뺸1, 1971, 205쪽. 44) 사건 발발 당시 군 수뇌부 중 일부는 통상적인 군경 갈등이라 판단, 사태를 관망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사 사키 하루다카, 뺷한국전비사上-건군과 시련뺸, 병학사, 1977, 쪽. 한편 이승만 정권은 발발 당시 사 건을 우익에 의한 군부쿠데타로 의심하기도 했다. Allan R. Millet, 하우스만 대위와 한국군의 창설, 뺷군 사뺸40, 2000, 259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4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육군 총사령부에서는 1948년 10월 21일 반군토벌전투사령관에 육군총사령관인 송호성 ( 宋 虎 聲 ) 준장을 임명하여 제2여단과 제5여단을 지휘하게 하였다. 46) 또한 제2여단장에 원 용덕 대령을, 제5여단장에 특별부대사령관 김백일( 金 白 一 ) 중령을 임명하여 진압작전을 지휘하게 하였다. 47) 송호성은 특별기 편으로 10월 21일 오후 1시 광주 송정리 비행장에 도착했다. 또한 미 임시군사고문단 장교들과 국군참모들도 송호성과 함께 광주에 도착했 다. 48) 10월 21일 진압부대는 육군 5개 연대와 비행대 그리고 수색대로 편성되었다. 반군의 대응이 예상 밖으로 강력해지자, 10월 22일에 부산의 제5연대가 추가로 배치되었다. 49) 이와 함께 1948년 10월 22일 정부에서는 여수ㆍ순천지구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를 위반할 시에는 군법에 의해 사형 및 기타에 처한다고 밝혔다. 50) 국무총리 겸 국방부 장 관 이범석은 10월 22일 반란군에 고한다 라는 포고문에서 제14연대 반란은 국법상 도 저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며, 총살당하지 않으려면 즉시 투항하라고 명했다. 51) 10월 23 일 이승만은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일반 국민에게 경고문을 발표했다. 52) 정부는 처음부터 45)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전남사학 제22집, 2005, 263쪽. 46)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1.2.년사(초안), 1969, 203쪽. 반군토벌사령부의 구성과 주요 지휘관은 다음과 같다. 전투사령관 육군준장 송호성( 宋 虎 聲 ) 제2여단장 육군대령 원용덕( 元 容 德 ) 제5여단장 육군중령 김백일( 金 白 一 ) 비행대장 육군대위 김정렬( 金 貞 烈 )(L형 연락기 10대) 수색대장 육군대위 강 필원( 姜 珌 遠 )(장갑차). 작전부대로는 제4연대 3개 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이성가( 李 成 佳 ) 제3연대 2개 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함준호( 咸 俊 鎬 ) 제6연대 1개 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김종갑( 金 鍾 甲 ) 제15연대 1 개 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최남근( 崔 楠 根 ) 제12연대 3개 대대 연대장 육군중령 백인기( 白 仁 基 )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59~460쪽. 47) 5여단 참모장에는 위대선( 魏 大 善 ) 소령을 임명, 현지로 급파했다. 육본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1.2.년사 (초안), 1969, 203쪽. 48) 주한임시군사고문단 장교는 하우스만(Houseman : 국방부 작전고문), 리드 대위(Reed : 국방부 정보고문), 트리드웰 대위(Treadwell : 전 제5여단 고문), 프례 대위(Frye : 제5여단 고문)였고, 국군참모는 채병덕 대 령(국방부 총참모장), 정일권 대령(육군 참모장), 백선엽 중령(육군 정보국장), 고정훈 중위(육군 정보국 장교) 등이었다. G-3 Section, X X IV Corps, HISTORY OF THE REBELLION OF THE 14TH REGIMENT OF THE KOREAN CONSTABULARY. 49) 14연대 반란은 중앙정부로서는 매우 당황스러운 일이어서 38선 경비 병력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가용 병 력을 진압작전에 투입하였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편, 전쟁의 배경과 원인, 2004, 459쪽. 50) 계엄령은 순천을 진압작전을 벌이던 1948년 10월 22일, 현지 사령관인 제5여단장 김백일에 의해 처음 내 려졌다. 그리고 진압군이 순천을 완전히 점령하고 여수를 공격하기 시작한 10월 25일, 뒤늦게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대통령령 제13호로 공포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10월 22일 발표에서 현지사령관에 의한 계 엄령을 인정하는 형식을 취했다. 사사키 하루다카, 한국전비사 上 -건군과 시련, 병학사, 1977, 354쪽; 대 한민국정부공보처, 관보 제10호, ; 경향신문, ) 서울신문, ) 다음의 이승만 경고문은 이미 민간인 집단희생을 예고하고 있었다. (전략) 정부에서는 각부 당국에게 신 칙해서 우선 각 학교의 각 정부기관에 모든 지도자 이하로 남녀아동까지라도 일일이 조사해서 불순분자 는 다 제거하고,(강조-인용자) 조직을 엄밀히 해서 반역적 사상이 만연되지 못하게 하되, 앞으로 어떠한 법령이 혹 발포되더라도 전 민중이 절대 복종해서 이런 비행이 다시는 없도록 방위해야 될 것이다.(후략) 순천지역 여순사건 515

44 제3권 강경진압의 방침을 정한 채 진압작전을 전개했다.53) [지도 3, 4] 미 군사고문단 1948년 10월 22ㆍ23일 24시 상황 지도54) 22일 24시 3연대 2대대, 12연대 1ㆍ3대대가 순천외곽에 주둔하고 있다. 23일 24시 순천은 완전 점령되었다. 5여단 본부 예하 4ㆍ3ㆍ12연대가 순천을 장악했다. 한편 여순사건 당시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은 미국의 수중에 있었으며, 따라서 진압작전 은 완전히 미군의 통제 하에 있었다.55) 광주 반군토벌전투사령부에는 작전ㆍ정보ㆍ군수 업무를 지원하는 미군 군사고문이 배치됐다. 한국군 부대에 이미 배속되어 있던 군사고 문들은 담당 부대들의 작전에 자동적으로 참여했다.56) 당시 12연대 부연대장이었던 백 수산경제신문, ) 노영기, 여순사건과 군 육군을 중심으로, 뺷여순사건 논문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190쪽. 반란 에 대한 책임으로 토벌사령관에 임명된 송호성은 광복군 출신으로 평소 군내에서 비주류였다. 반군에 대 한 만주군 출신 지휘관들의 강경 진압방침과 달리 송호성은 온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당시 강경한 진압작 전을 주장하고 실행한 인물들은 이승만-채병덕-김백일, 백선엽, 백인엽, 송석하로 이어지는 세력이었다. 사건 초기, 진압작전의 주도권은 이미 송호성에서 김백일, 백선엽으로 넘어갔다. 훗날 송호성이 부정적으 로 평가된 것은 이 같은 태도와 훗날 납북되어 북한에서 활동한 사실 때문이었다.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 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쪽. 54) NARA, USAFIK, 뺷Adjutant General Section뺸, RG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eneral Correspondence(Decimal Files) , A1 1378, Reports (2). 55) 점령기간이 끝났으므로 미국은 표면상 한국의 내정을 간섭할 권한이 없었지만 반란의 진압은 미국인들이 조직하고 지시했다.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W. Norton & Company, 1997(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뺷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뺸, 창비, 2001, 312쪽). 56) 반군토벌사령부 송호성 총사령관을 보좌하는 군사고문으로 하우스만이 파견됐다. 하우스만은 미 임시고문 단을 대표하는 작전 책임자이자 송호성 총사령관의 고문 자격으로 반군토벌사령부에 배속됐다. 하우스만과 정보부(G-2) 리드 대위는 처음부터 토벌사령부에 참여해 작전을 주도한 고문단원들이었다. 이들 외에 윌슨 (Marvin G. Wilson) 중위는 군수참모(G-4) 고문관으로서 작전에 필요한 군수품을 조달하는 역할을 맡았 다. 그리피스(Arthur G. Griffith) 중위는 연락비행기를 타고 반군과 정부군의 움직임을 정찰하는 일을 담당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4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은 작전권이 임시군사고문단에게 있었고, 병력이동과 장비이동을 임시군사고문단이 관리했다고 했다. 57) 백의 에 따르면, 본 사건 발생지역인 순천지역 진압작 전을 주도했던 12연대에도 미군 고문관이 동행하면서 작전에 관여했다. 58) 당시 임시군사고문단의 주요한 임무는 장비를 비롯한 병참물자 지원이었다. 59) 고문단 은 M-1소총, 81mmㆍ60mm 박격포, C-47수송기, M208 무전기 등 한국군에 필요한 물 자와 장비를 관리하고 현지에 제공했다. 60) 특히 고문단은 여순사건 발발 직후부터 부대 간 연락과 공중정찰을 위해 L-4(10대), L-5(10대) 경비행기를 진압군에 제공했다. 61) 여순사건 발발 직후 미군은 정일권ㆍ채병덕ㆍ김백일 등 젊은 한국군 대령들의 도움을 받아, 실제로 반군진압작전을 지휘했다. 진압작전에 관여한 미군 주요 고문은 할리 풀러 (Harley E. Fuller) 대령, G-3의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 Hausman) 대위, G-2의 존 리드(John P. Reed) 대위 등이었다. 62) 했다.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36~138쪽. 57) 백은 고문관의 지시 없는 병력이동이 불가능하진 않았지만, 작전권은 그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으니 까 물어봐야지 라고 했다. 참고인 백 ( ). 58) 백은 제12연대에 배속된 미 군사고문관이 순천 진압작전에서 박격포 사격을 도왔고, 10월 말 지리산 으로 도주한 반군을 추격하기 위해 12연대와 지리산 노고단까지 동행했다고 했다. 순천에 들어갔는 데 (중략) 우리 부대는 행인지 불행인지 모르겠지만 미군 고문관이 박격포 출신이었어요. 그 사람이 박격 포를 잘 아는데 (중략) 박격포를 정비해서 들이때렸죠. (중략) 그 사람하고 같이 하다가 도중에 내가 지리 산 노고단, 반야봉, 천왕봉, 심온 (중략) 화개장으로 해서 작전을 끝내는 길이 있어요. 그 길을 고문관하고 동행을 하다 노고단에서 헤어졌어요. 미고문관이 연대에 둘인가 셋이 있었어요. 다 있었습니다. 참고인 백 ( ). 59) UNITED STATES MILITARY ADVISORY GROUP TO THE REPUBLIC OF KOREA, Advisor's Handbook ( ), W.L. Roberts 문서철, p )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40~141쪽. 백도 장 비 지원과 편성, 그에 따른 인원 편성도 임시군사고문단이 관리했다고 했다. 곧 전차양륙정(LST) 지 원이나 유류 사용, 인력편성, 무기지급 등에 대해 고문단과 상의하고 그들의 승인이나 관리를 받았다고 말 하였다. 참고인 백 ( );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중 백 증언. 61) 먼저 지원된 L-4 연락기는 긴급연락, 정찰, 지휘관 수송 등의 임무를 수행하였는데, 항속거리가 짧아 L-5 연락기 10대를 추가로 지원받았다. 여순진압작전은 공군 최초의 비행기에 의한 항공작전이었다. 한편 공 군 소장으로 예편한 오점석은 L-4 연락기를 10대를 이미 보유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공군본부, 6ㆍ25전 쟁 증언록, 2002, 80~84쪽. 62) Bruce Cumings,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Ⅱ(The Roaring of the Cataract ), Princeton Univ. Press, 1990, p 순천지역 여순사건 517

46 제3권 [사진 1, 2] 송호성 준장과 풀러 대령 반군토벌사령관 송호성 준장이 군경 지휘관을 불러 반군토벌사령관 송호성 준장과 미임시군사고문단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할리 풀러(Harley E. Fuller) 대령 칼 마이던스( )/<LIFE> 칼 마이던스( )/<LIFE> 또한 미군은 직접 공중정찰과 CIC를 통해 반란 지역의 현지 정보를 수집했다.63) 당시 CIC 요원이었던 울리베리(Prudongcio D. Uliberri)에 따르면, 미군은 반군진압에 적극적 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진압작전의 세부적인 정보를 원하고 있었다. 울리베리는 이동 식 무선전신으로 사건을 주한미군에 보고했다.64) 광주 CIC는 1948년 10월 19일 23시 제 14연대 군인들이 봉기를 일으키고 순천을 향해 기차로 출발했다는 현지 상황을 10월 20 일 오전 주한미군에 보고했다.65) 전주 CIC도 10월 20일 19시 35분 반군 1천 명이 남원으 로 진격 중이고 12연대가 경계태세에 들어갔고 3연대가 지원병력을 보냈으나 상황은 악 화됐다고 주한미군에 보고했다.66) 63) 6th Division, Chronological Journal of Events (18 October 1948 to 21 November 1948), p. 14. 미국 정보기관들은 한국군 및 한국 국립경찰 내의 정보기관과 긴밀하게 협력했다.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W. Norton & Company, 1997(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뺷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뺸, 창비, 2001, 312쪽). 64) Interview with Prudoncio D. Uliberri ( ), RG 319. Box 6, ) 6th Division, Chronological Journal of Events (18 October 1948 to 21 November 1948), p ) 6th Division, Chronological Journal of Events (18 October 1948 to 21 November 1948), p. 6. 반군은 CIC 요원들을 처형하기도 했다. 제14연대 반군이 여수를 점령한 후 10월 20일부터 23일 까지 처형한 사람들의 명단에는 여수 CIC 요원 이광선ㆍ최인태ㆍ김수곤 3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82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4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2. 사건경위 본 사건은 1948년 10월 말부터 1949년 7월까지 순천에 주둔한 진압군경의 반군토벌 과 정에서 발생하였다. 본 보고서는 사건경위를 순천지역 진압군의 토벌작전, 순천경찰의 반 군협조자 및 좌익혐의자 색출, 순천지역 민간인 희생과정으로 구분하여 순천시내, 각 면 별로 사건의 경위를 재구성하였다. 가. 순천지역 진압군의 토벌작전 미 임시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송호성에게 보낸 훈령에서 정치적ㆍ전략적으로 여수와 순천이 중요하기 때문에 가능한 빠른 시일 안에 탈환해야 한다 는 입장을 밝혔다. 67) 토벌사 령부는 최초 탈환목표를 순천으로 정하고 이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68) 진압작전은 순천에서 광주로 향하는 북상로와 백운산ㆍ지리산으로 향하는 도주로를 차단하고 해상과 육상에서 협공으로 여수반도 일대를 압박해 들어간다는 개념이었다. 주 공격은 제5여단(대령 김백일 지휘) 예하의 제3연대(함준호 중령 지휘)와 제4연대(이성가 중령 지휘)를 중심으로 하여 학구에서 순천으로 진격하고, 4연대 제1대대(제5여단 참모 장 오덕준 중령 지휘)는 보성을 경유하여 벌교 쪽에서 순천을 공격하며, 제15연대(최남 근 중령 지휘)는 하동에서 광양을 경유하여 동쪽에서 순천을 공격한다는 것이었다. 69) 국 방부 총참모장 채병덕 대령은 10월 22일 기자회견에서 병력을 집중시켜 압박섬멸전의 공격을 시작했다고 발표했다. 70) 각 진압부대가 순천 학구에 집결하기 시작한 것은 반군 이 순천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였다. 학구는 화순 경유 광주, 남원, 하동에 이르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반군의 북상이 예상되는 지점이었다. 71) 진압군은 먼저 순천 외곽의 반군 보초를 생포하여, 진압군 요원을 순천시내에 투입, 당 핵심간부를 순천농림중학교 부근에서 살해하는 첩보공작을 펼쳤다. 72) 한편, 10월 22일 군산에서 출동한 제12연대 2개 대대(부연대장 백 소령 지휘)가 학구에서 반군과 교 67) W.L. Roberts To General Song Ho Seung, Letter of Instruction ( ), W.L. Roberts 문서철, p )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767쪽. 69) 육군본부 작전참모부 군사처, 육군1.2.년사(초안), 1969, 204쪽. 경찰의 대응도 기민했다. 제8관구경찰청 (전남경찰국)은 반군이 순천을 점령한 1948년 10월 20일 주암지서에 전투지휘소를 설치했다. 최기덕, 내 생애 최고의 비밀, 사상계 130호, 1964년 1월호, 219쪽. 70)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전남사학 제22집, 2005, 263~264쪽. 71) 백선엽, 실록 지리산, 고려원, 1992, 172쪽. 72)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내가 겪은 여순사건 심명섭,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814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519

48 제3권 전하면서 대치하고 있던 3연대ㆍ4연대를 지원하여 합동작전을 개시하였다. 진압군의 대 규모 반격이 시작되자 반란군은 일부가 투항하고 주력부대는 순천으로 퇴각하였다. 73) 학 구를 장악하자 제4연대(연대장 이성가 중령 지휘)를 남겨두고 제12연대의 주력부대와 제 3연대(부연대장 송석하 소령 지휘) 병력은 순천으로 추격하여 오후 4시경 외곽지에서 반 군과 교전하였다. 74) 4연대 병력을 학구에 잔류시킨 것은, 4연대가 반군의 모집단으로서 병력 일부가 이미 반란군에 합류하는 등 사상적으로 불순하다고 판단, 순천 탈환작전에 서 배제한 것이었다. 75) [사진 3, 4] 진압작전 2연대 소속 사병이 주먹밥을 먹고 있다. 철모에 쓴 숫자 2는 2연대를 의미한다. 칼 마이던스( )/<LIFE> 진압작전 당시의 모습. 미 임시군사고문단 소속 장교는 현지에서 작전을 지휘했다. 칼 마이던스( )/<LIFE> 순천과 광양으로 분리되는 삼거리(강청리)에서 제12연대는 순천 시가를 반으로 나누 는 동천( 東 川 )을 경계로 하여 제2대대(대대장 김희준 대위 지휘)는 봉화산 하단부를, 제 3대대(대대장 이유성 대위 지휘)는 가곡동고지, 난봉산고지로 진출하고 제3연대의 제2대 대(조재미 대위 지휘)는 외곽고지를 차단하면서 진격했다. 76) 이날 진압군은 순천시내에 73) 반군 주력부대의 퇴각방향을 한국전쟁사 에서는 광양 방면으로, 순천시사 는 순천 방면으로 기술하고 있다. 퇴로가 차단된 반군 중 일부는 순천시내로 퇴각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주력부대는 백운산을 거쳐 지 리산으로 입산하는 광양 쪽 루트를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 과 건군( ) (제1권), 1967, 462쪽; 순천시사편찬위원회, 순천시사-정치사회편, 1997, 767쪽. 74) 육본 정보참모부, 공비연혁 1, 1971, 209쪽. 75)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여순사건 논문집,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81-82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4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진출하여 시가지를 점령했으나, 완전히 점령한 것은 아니었다.77) 날이 어두워지자 순천 북방입구를 점령한 진압군은 전투를 중지하고 외곽지대에 주둔하여 방어선을 굳히고 다 음날의 공격을 준비했다.78) 이튿날 23일 새벽 제2연대 1개 대대, 제4연대 1개 대대, 장 갑차부대, 경찰부대로 증강된 진압군은 순천 주변의 산과 이른바 인민군사령부로 되어 있던 동순천역을 일시에 포위하고 박격포사격과 정찰기의 지원을 받으며 장갑차부대를 선두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김지회 등의 반군지휘관과 순천의 주요 좌익간부들로 구 성된 주력부대는 이미 광양 방면의 백운산과 지리산 줄기의 인근 산악지대로 도피한 상 태였다.79) 사실 23일 무렵 순천읍에는 총과 죽창으로 무장한 현지 출신의 치안대, 민애청원 등의 좌익단체원이나 좌익학생들만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중무장한 진압군에게 큰 위협이 될 수는 없었다.80) 화력과 병력에서 압도적으로 우세한 진압군은 10월 23일 오전 11시경 순 천을 탈환81)하고 오후에는 시가지 소탕전을 완료했다.82) 순천을 완전 점령한 진압군은 1 개 대대병력이 장갑차를 앞세우고 여수를 향해 떠났다. 10월 24일에는 보성과 벌교를 진 압했다. 동시에 하동과 순천에서 광양을 향해 진격했다.83) 순천에 남은 진압군은 반란에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62쪽. 사사키 하루다카, 뺷한국전비사 건군과 시련뺸(상권), 병학사, 1977, 349쪽.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768쪽.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뺷여순사건 논문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82쪽. 백선엽, 뺷실록 지리산뺸, 고려원, 1992, 180쪽. 백선엽의 동생인 12연대 부연대장 백인엽도 순천 탈환이 쉬 웠으며 박격포 쏘고 파죽지세로 들어갔다고 말했다. 또 순천농림중학교 교사로 순천시내 상황을 목격한 김관수도 진압작전 시 진압군에 비해 반군의 화력이나 병력이 현저히 약했다고 말했다.(MBC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관수ㆍ백 증언, 147, 234 쪽.) 또한 2여단 하사관 교육대 중대장으로 순천에 가장 먼저 진입했다는 서도 반군은 모두 도피하여 저항이 없었다고 했다. 3연대 1대대 3중대 소속으로 진압작전에 참전했던 김도 순천 진압작전이 중대별ㆍ소대별로 시가전을 벌이며, 큰 저항 없이 행군하며 수색하는 수준이었다고 했다. 참고인 서 (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서 면담보고서 ( );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81)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768쪽. 순천을 진압하는 데는 이철승이 대표로 있던 전국학생총연맹(학련) 등의 우익청년단체도 일익을 담당했다. 진압군이 순천에 진입할 때 길잡이 역할을 했다. 순천학련은 여수, 구례, 광양학련을 관장할 만큼 활동이 활발했다. 사건이 발발했을 당시 피신하지 못한 학련단원들은 사살당하거나 고초를 겪었다.(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21쪽.) 당시 순천학련 감찰부장이었던 황은 여순사건 전에도 학련에게 총이 지급되어, 좌익학생들에 대한 테러와 폭행을 일삼았다고 했다. 또한 진압 후에는 군경과 함께 부역자 색출이나, 잔비소탕에 가담했다고 말했다. 참고인 황 면담( ). 82) 당시 신문들은 진압군의 발표를 근거로 전투가 치열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미군은 세 발의 박격포탄을 발사한 후 시내에 진입하자 별다른 전투를 치르지 않고서도 방어선이 무너졌다 고 보고했다. 존 R. 메릴, 뺷침략인가 해방전쟁인가뺸, 과학과사상사, 1988, 210쪽. 83)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뺷전남사학뺸제22집, 2005, 265쪽. 76) 77) 78) 79) 80) 순천지역 여순사건 521

50 제3권 가담했던 자들을 찾아내기 위해 시내 가옥들을 하나하나 수색하기 시작했다.84) [지도 5, 6] 미 군사고문단 1948년 10월 24일 12시ㆍ24시경 상황 지도85) 24일 12시 5여단 2여단 본부가 순천에 설치되었고, 12연대가 여수 탈환작전에 나섰다. 24일 24시 5연대가 여수로 진격했고, 사령부는 주암에 설치되었다. 반군토벌전투사령부에서는 10월 24일 여수 탈환작전을 개시하였다.86) 이때 작전은 여 수를 중심으로 육지와 해안에서 포위망을 구축하여 진압하는 것이었다. 즉, 제4연대는 여 수의 서쪽, 제3연대와 제2연대는 여수의 북쪽, 제12연대는 여수의 북서쪽, 제5연대는 바 다, 제6연대는 여수의 북쪽 산맥, 제15연대는 여수의 동쪽으로부터 진격하는 것이었다.87) 1948년 10월 24일 반군토벌전투사령관 송호성이 수색대대와 장갑차 그리고 제3연대(부 연대장 송석하 소령)를 앞세우고 직접 여수 진압작전을 시도한 결과, 10월 26일 여수에 진입할 수 있었으며, 10월 27일 여수를 완전히 탈환했다.88) 1948년 10월 27일 하우스만과 리드는 광주의 사령부에서 순천에서 북쪽 방향으로 이동한 반군을 토벌하기 위해 백운산 과 지리산지역을 동시에 소탕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있었다.89) 11월 5일 로버츠는 채병 84)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뺷여순사건 논문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82쪽. 85) NARA, USAFIK, 뺷Adjutant General Section뺸, RG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eneral Correspondence(Decimal Files) , A1 1378, Reports (2). 86)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66쪽. 육군본부 전 사감실에서 펴낸 뺷공비토벌사뺸에는 여수작전을 22일에 개시, 23일 여수를 완전 탈환한 것으로 되어 있으 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육군본부 전사감실, 뺷공비토벌사뺸, 육군본부, 1954, 16쪽. 87) 노영기, 여순사건과 육군의 변화, 뺷전남사학뺸제22집, 2005, 265쪽. 88) 1948년 10월 27일까지의 진압작전에는 총 140명의 장교와 4,732명의 군인들이 참가했다.(노영기, 위의 논 문, 266쪽.) 진압군은 본부를 여수군청, 헌병대와 수도경찰대를 중앙국민학교에 설치하여, 반군을 적발 및 처단하였는데, 제5연대 대대장 김종원 대위는 일본도를 가지고 직접 참수하기도 하였다. 국방부 전사편찬 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71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덕 참모총장에게 반군의 봉기 가능성, 무기고 관리, 통신체계 등 한국군이 취해야 할 조 치를 제시했다. 90) 진압군은 여순지역의 탈환작전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치안유지와 반 군협력자 색출을 위한 최소 병력을 탈환지역에 남겨두고, 지리산과 백운산 등지로 들어 간 반군을 추격해 소탕하는 작전에 돌입했다. 91) [지도 7, 8] 미 군사고문단 10월 25일 24시, 26일 27일 상황 지도 92) 25일 24시 사령부가 순천시내에 설치되었고, 백운산과 지리산부근에서 3ㆍ4ㆍ12ㆍ15가 추격전을 벌이고 있다. 26일ㆍ27일 여수는 완전 탈환되었고, 보성지역은 4연대 1대대가 장악했고, 고흥지역은 3연대 3대대ㆍ6연대 1대대가 토벌작전 중이다. 이에 진압군의 조직도 재편되었다. 1948년 10월 30일 반군토벌전투사령부는 호남방면 전투사령부(사령관 원용덕 대령)로 개편되었다. 호남방면전투사령부는 관할지역을 지리 산을 기준으로 북지구와 남지구로 구분하였으며, 북지구는 원용덕 대령이 겸임하였다. 93) 북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제2여단장 원용덕 대령)는 사령부를 남원에 설치하고, 휘하에 제2여단 소속 제2연대ㆍ제6연대의 1개 대대ㆍ제15연대의 1개 대대와 제3연대를 배속하 였다. 94) 남지구전투사령부(사령관: 제5여단장 김백일 중령)는 사령부를 순천에 설치하 89) From Task Force Roger To Commanding General, PMAG ( ), Operations Journals 1948 RG 554, Box 9. 90) W.L. Roberts To Col. Chai ( ), W.L. Roberts 문서철, p ) 노영기, 여순사건과 구례 여순사건 직후 군대의 주둔과 진압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제68호, 2005, 45쪽. 92) NARA, USAFIK, Adjutant General Section, RG554 Records of 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 Supreme Commander, Allied Powers and United Nations Command, General Correspondence(Decimal Files) , A1 1378, Reports (2). 93)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 (제1권), 1967, 479쪽. 94) 제3연대는 김백일이 지휘하는 당시 제5여단 소속이었으나, 제3연대 주둔지가 남원이었던 까닭에 전투ㆍ 순천지역 여순사건 523

52 제3권 고, 제4연대ㆍ제15연대의 1개 대대와 제12연대의 2개 대대를 배속시켜 토벌작전을 진행 했다. 남ㆍ북 지구의 전투지경선은 섬진강 구례 압록 삼지 옥과(옥천) 담양 고창 (고부)을 연결하는 선95)이었다. 이어 1949년 3월 1일 호남방면전투사령부가 호남지구전 투사령부(약칭 호전사, 사령관 원용덕 대령)와 지리산지구전투사령부(약칭 지전사, 사령 관 정일권 준장)로 개편되었다. 나. 진압군경의 반군 협력자 와 좌익혐의자 색출 지방좌익이 반군에 가담하면서, 여순사건은 14연대 반군과 진압군 간의 전쟁을 넘어섰 다. 이승만 정부는 여순사건의 배후로 공산주의자들을 지목하며 모든 문제를 공산주의, 좌익세력에게 돌렸다.96) 따라서 진압군은 14연대 반란군과 민간인을 구별하지 않았고, 민간인들이 조금이라도 의심되면 사살했다.97) 미국 소식통들은 정부군은 공산주의 봉기에 협력했다는 의심이 조금이라도 드는 사람은 사살하고 다녔다 고 보고했다.98) 여순지역이 재탈환되자 군경은 계엄 상태에서 가장 먼저 반란군과 이에 가담한 협력자 를 철저하게 색출하는 작업에 나섰다. 반란군 및 협력자 색출작업은 2단계로 진행되었다. 제1단계로 진압군은 전 시민을 국민학교 같은 넓은 공공장소에 집결시켜 주로 외모(머리 가 짧은 자, 군용팬티를 입은 자, 손바닥에 총을 든 흔적이 있는 자 등)와 경찰관ㆍ청년단 원ㆍ학련생ㆍ우익요인 등의 적발을 통해 반군과 협조자를 색출해냈다.99) 반군의 즉결처분에 가담하거나, 짧은 점령기간 동안 발생했던 인민재판 때 처형에 앞장 섰다고 적발된 자는 즉석에서 곤봉ㆍ개머리판ㆍ체인 등으로 무참하게 타살100)되거나 총살 을 면치 못했으며, 나머지는 따로 수용되어 재심사를 받거나 계엄군이나 경찰에 넘겨져서 심문과 재판을 받았다.101) 제2단계 작업은 제1단계에서 애매하다고 판단된 자와 그 후 작전활동에 있어서는 제2여단 원용덕의 지휘를 받았다. 또 제12연대는 제2여단 소속이나 제5여단 김백일 의 지휘를 받았다. 국방부 군사편찬위원회, 뺷국방사뺸1, 1984, 쪽. 95)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대비정규전사( )뺸, 1988, 77쪽. 96) 김수자, 대한민국수립직후 민족주의와 반공주의의 형성 과정, 뺷한국사상사학뺸25권, 2005, 380쪽. 97)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47쪽. 98)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W. Norton & Company, 1997(브루스 커밍스, 김동노 외 옮김, 뺷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뺸, 창비, 2001, 313쪽). 99)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782쪽. 여수의 경우, 서국민학교에 끌려온 여수 시민 들은 3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선휘성 채록, 이계유 구술, 뺷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뺸녹취록1, 국사편찬 위원회, 2006, 3쪽. 100) 특히 여수에서 5연대 장교 김종원은 일본도를 이용한 즉결참수로 악명이 높았다. 서중석, 뺷이승만과 제1 공화국뺸, 역사비평사, 2007, 48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고발된 혐의자를 대상으로 행해졌으며, 이들은 재심사 혹은 심사를 받아 즉석에서 총살되 거나 군경에 이첩되었고 그렇지 않으면 석방되었다. 이 과정은 수개월간 계속되었다.102) [사진 5, 6] 점령과 소집 주민들이 거리로 나와 손들고 서 있는 가운데 진압군이 거리를 수색하고 있다. 칼 마이던스( )/<LIFE> 진압군은 반군협력자 색출을 위해 주민들을 학교에 집결시켰다. 칼 마이던스( )/<LIFE> 10월 23일 순천을 장악한 군경은 시민들을 북국민학교에 모이게 했다.103) 이곳에서 본 격적인 반군가담자 심사 가 시작되었다.104) 혐의를 벗기 위해서라도 시민들은 운동장에 나와야만 했다. 당시 순천농림중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던 김정만도 반군의 지시로 보 101) 당시 조선민족청년단 단원으로 반군협조자 색출작업에 참가한 참고인 최은 손가락 총에 지목을 당 한 사람들 중 몇은 즉결처분을 하고 나머지는 군법회의에 회부됐다고 했다. 참고인 최 면담보고 서( ). 102) 안종철, 전남지방의 정치상황과 여순사건, 뺷여순사건 논문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2006, 95쪽. 취재기 자였던 김기오는 당시 순천에 합동조사국이 설치되었고, 헌병대장으로 있던 김인경 대위(육사 2기생)가 조사국장을 맡았다고 말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기오 증언, 216쪽. 103) 당시 순중 2학년으로 북국민학교 협력자 색출작업을 목격한 권준표는 손가락으로 지목만 당하면 그 자 리에서 바로 군경이 사살했다고 증언했다.(순천문화원, 학생이 겪은 여순사건-권준표, 뺷순천이야기뺸, 2004, 9쪽.) 순천 진압작전을 목격한 김관수는 북국민학교에서 반군협조자 색출을 하다 운동장이 좁아 순 천 농림학교로 옮겼다고 말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관수 증언, 147쪽. 104) 참고인 황 면담( );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신 녹취록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25

54 제3권 초를 서다 진압군에게 붙잡혀 북국민학교로 끌려갔다. 그는 진압군이 군산에서 온 12연 대105)라고 말했다. 팬티만 남기고 옷을 모두 벗은 채, 북국민학교 후원에 2 3일간 억류 되어 있던 그는, 교실에서 취조를 당하던 이들 중 여럿이 총살당하는 듯 총소리가 난무했 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진압군은 혐의가 뚜렷한 이들을 교실에서 끌고 나와 학교 운동 장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 동조자를 지목 하게 했다.106) 이른바 손가락 총 이었다. 한편 순천사범학교 사범과 4학년(20세)으로 북국민학교에서 당시 상황을 목격한 참고인 정영 호는 다음과 같이 했다. 거기는 아주 지옥이었어. 갔더니 사람이 많이 모여 있었어요. 칼빈으로 막 쏴 죽이더라 고. 끌려온 사람한테 앉아 있는 사람 중 반란군협조자를 골라내라고 그러더니 지목당한 사 람을 옆으로 끌고 가서 쏴 죽였어요. 손가락질 지목을 당한 사람은 가차 없이 사람들 있는 앞에서 칼빈 총으로 쏴버렸어요. 내 눈으로 그걸 봤어요. 군인도 있고 경찰도 있었어요. 한 열댓 명 죽은 거 봤어요. 칡백나무 부근에서 쏴 죽여서 그 나무 아래로 밀어 넣더라고. ( ) 옆으로 지나가면서 이 사람이라고 하면 항의고 뭐고 없이 죽여버리니까. 내가 얼굴이 안 알 려져서 살아남은 거겠지요.107) 위의 처럼 진압군과 경찰은 초등학교 운동장에 시민들을 수용하여 반군협력자를 적발하기 시작했다.108) 누가 가담자 인지를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은 없었고, 경찰, 우익요원, 청년단원 등 반군 치하에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었던 집단들이 색출 및 적발심 사를 담당했다.109) 이때 심사는 주로 외모, 고발, 개인적 감정에 의한 모략, 강요된 자백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에 무고한 사람이 처벌받는 수가 많았다.110) 군경은 노인과 부녀자들을 운동장 모퉁 이로 가게 한 뒤, 20 30대 남자들에게는 옷을 벗고 팬티만 입게 했다. 순천을 점령한 군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에는 제2ㆍ3ㆍ4ㆍ12ㆍ15연대 등 대다수의 진압군이 참여했다. 김정만 구술, 선휘성 채록, 뺷지역민이 체험한 여순사건뺸녹취록1, 국사편찬위원회, 2006, 8쪽. 참고인 정영호 ( ). 당시 제2연대 1대대 2중대장으로 진압작전에 참가한 중위 설재련(薛在連)도 발가벗긴 사람들로 당시 북 국민학교가 꽉 찼다고 말했다. 설재련 증언록, 뺷한국전쟁 증언록뺸,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109) 참고인 황은 다음과 같이 했다. 목사, 전도사 등 이런 사람들이 민족진영 사람들을 가려내고, 가려진 그 사람들 보고 반군에 가담한 자를 색출해내라 했어요. 그들이 손짓을 하면 그 해당되는 사람들 을 동천 건너 봉화산 골짜기에 데려다가 무참히 죽였어요. 참고인 황 면담( ). 110) 이기봉, 뺷빨치산의 진실뺸, 다나, 1992, 148쪽. 실례로 당시 현장 취재기자였던 김기오는 반군에게 밥을 해 줬다는 이유로 총살당할 위기에 놓은 한 여인을 합동조사국 국장에게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살려주었을 정도로 협조자 색출과 처벌은 자의적으로 집행되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 대 반란 녹취록 ( 방영), 김기오 증언, 217쪽. 105) 106) 107) 108)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경은 이때 이미 14연대에 가담한 혐의자 22명을 사형한 후였다.111) 이 시신 옆에서는 5천 여 명의 심문이 진행 중이었다. 한 신문은 일본군 철모를 쓴 경관 한 명이 혐의자를 취조하 고 있으며, 학교 교정 담 뒤에서는 부녀자들이 매 맞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고 보도했다. [사진 7, 8] 반군 협력자 색출 순천농림중학교에서 진압군이 반군협력 혐의자의 옷을 벗긴 채 취조하고 있다. 칼 마이던스( )/<LIFE> 경찰이 순천 북국민학교에서 반군협력 혐의자를 취조하고 있다. 칼 마이던스( )/<LIFE> 다음은 순천농림중학교 4학년으로 북국민학교 반군협력자 색출작업을 목격한 참고인 장의 이다. ( ) 길에서 학생들을 잡아와서 경찰들에게 인계를 하고 군인들은 갔어요. 고개를 들라 고 해서 개머리판으로 때리면서 3일 동안 같이 활동한 놈을 지목하라고 했어요. 우물우물 하면 개머리판으로 막 때렸어. 그 많은 사람 중에 누가 누군지 모르니까 아무나 손가락질 을 하는 거야. 그 자리에서 지명을 당하면 옷을 팬티만 남기고 다 벗기고 끌고 가 죽였어. 2 3일 전 수많은 경찰관이 죽은 것에 대한 보복이었지. 경찰들 몇 십 명이 죽어버리니까 이성을 잃은 거야. 그때 잡혀간 학생들은 하나도 못 살았어. 지목당한 사람보고 또 다른 사 람을 지목하라고 그랬어요. 이것만 떼어놓고 보면 경찰이 죄를 진 거지만, 그 당시에는 그 111) 반란지구 답사기, 동광신문( ). 사살은 북국민학교에서 50m 떨어진 매곡동 현 고속버스터 미널 부지에서 이루어졌다.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27

56 제3권 랬어요. 전남청 부청장112)이라는 사람이 검은 안경을 쓰고 와가지고는 우리 앞에서 이를 갈면서 너희들 싹 다 죽여버리고 싶다고 말했어요. 통신망도 없고, 정확한 증거도 없고, 감 정만으로 경찰들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어.113) 장의 처럼 동조자 지목을 주저하는 사람은 가차 없이 폭행을 당했다. 강압적 인 분위기 하에서 협력 혐의가 없는 시민이라도 운수가 나쁘면 다른 사람의 착각이나 개 인감정에 의해서 손가락질을 받을 수도 있었다.114) 그러나 운동장에 모인 그 많은 혐의자 중 누가 과연 실제로 반군에 협조했는가를 적확하게 골라낼 수 있는 사람은 사실상 없었 다. 살아남은 경찰은 사건 당시에는 숨어 있었거나, 탈출했거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 지한 경우였기 때문에 민간인 반군협조자를 일일이 구별해낼 수 있는 증거를 가지고 있 지 못했다.115) 증거도 없이 심증만으로 이루어진 색출 때문에 시민들은 공포에 사로잡혔 다. 결국 당시 호박잎 하나라도 반군에 준 사람 은 모두 혐의자로 몰렸다.116) 당시 조선 일보 취재기자로 순천에 급파된 유건호는 순천의 살풍경을 이렇게 전했다. ( ) 그곳은 순천 북국민학교 교정이었다. ( ) 주로 청년들만 모아놓은 곳이 있는가 하 면 남녀학생들만 모인 곳, 또 팬츠만 입고 벌벌 떨고 있는 벌거숭이 집단도 있다. 경찰대가 구분해 놓은 곳이다. ( ) 심사 중인 그룹 앞에는 경찰관에게 끌려나온 사람이 충혈된 눈으로 이 얼굴 저 얼굴 을 번갈아 훑어보면서 누군가를 찾고 있고 웅크리고 앉아서 떨고 있는 사람들은 고개를 숙 인 채 그 시선을 피하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다. 얼굴을 들었다가 그와 시선이 마주쳐서 저 놈이다 손가락이 가리키기만 하면 끝장이 나는 것이다. ( ) 읍민들이 수용되어 있는 북국민학교 교정 남쪽에서 탕, 탕, 탕 카빈 총소리가 울렸다. 언제 파놓았던 것인지 구덩이가 패어져 있는 앞에 손을 뒤로 결박당한 청년 5명이 서 있고 약 10m 떨어진 거리에서 5명의 경찰관이 총격을 가했다. 제2탄, 제3탄이 계속 발사되었다. 그 총살은 계엄사령관의 명에 의한 것이라 했고, 계속될 것이라고 했다. 벌거숭이들은 모 112) 당시 제8관구 경찰청 부청장은 최천(崔天)이었다. 그는 제주도 경찰국장( )을 지 낸 뒤 제8관구 경찰청 부청장으로 이임해 온 터였다. 이후 경북 경무과장( ), 경남 경찰국장( )을 지냈다. 김득중, 이승만 정부의 여순사건 대응과 민중의 피해, 뺷여 순사건 자료집뺸, 여수지역사회연구소, 1999, 61쪽. 113) 참고인 장 면담보고서( ). 114) 당시 순천학생연맹 감찰부장으로 반군협력자 색출과정에 관여한 황은 맘에 들지 않는 사람을 빨갱이 라면서 몰아 부치면 잘못했다고 비는 사람도 많았을 정도였다 고 증언했다. 순천문화원, 여순사건, 뺷순 천이야기뺸, 2004, 22쪽. 115)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53쪽 116) 순천시사편찬위원회, 내가 겪은 여순사건-김(여), 뺷순천시사-정치사회편뺸, 1997, 818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두 일단 폭도로 인정된 자들이다.( )117) 진압 이후 순천의 살벌한 광경은 다른 신문보도나 자료에서도 확인된다. ( ) 순천 이외에 있는 농업학교 뜰에는 웃옷을 벗은 천여 명의 군중이 수심이 가득한 얼 굴로 앉아 있고 이들 생명을 우려하여 찾아온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이곳저곳에서 터지고 있다. 들은 바에 의하면 국군이 순천 소란 시에 시내에서 반란군에 가담한 혐의자로 체포한 것을 경찰에 인도하여 취조하는 것이라 한다. 이들 중에 반란군에 가담하여 경찰과 우익간 부를 살상한 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외 20명의 좌익간부는 24일 상오 이미 경찰에서 총살형 을 집행했다고 한다.( )118) 반란치하와 진압시의 잔혹한 협조자 색출로 순천에서만 사망자 1,134명, 행방불명자 818 명, 전파가옥 13동 등의 피해를 낼 정도로 그 참혹함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읍내는 가는 곳마다 시체더미요, 시체를 물어뜯은 수많은 개들이 미쳐 뻘건 눈빛으로 돌아다니는 바람에 진압부대는 이 개들부터 처치해야 할 정도였다.119) 우익청년단체원들도 반군협조자 색출과정에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청년단원들은 이미 경찰과 함께 순천으로 진입하는 반군과 교전을 벌인 바 있고, 또한 여수와 순천에서 많은 희생자를 냈기 때문에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120) 진압군이 순천에 진입할 때, 길 안내를 하며 들어온 청년단원들은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들을 색출하고 취조하는 등 경찰 과 군인 옆에서 거의 동일한 역할을 수행했다.121) 진압작전을 조직한 핵심인물인 임시군사고문단의 제임즈 하우스만(James Hausman) 조차 본국에 올린 보고에서 순천경찰이 본격적으로 복수하러 나섰고, 수감포로와 민간 인들을 처형하고 있다. 여러 명의 친 정부 민간인들이 이미 살해되었으며 시민들은 우 리가 적만큼이나 나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며 여론의 악화를 우려할 정도였다.122) 또 117) 유건호, 뺷전환기의 내막뺸, 조선일보사, 1982, 149쪽. 118) 사건 발생 4일 후의 순천 현지보고, 대동신문( ); 계엄령 선포된 반란지의 거리표정, 세계 일보( ). 119) 이기봉, 뺷빨치산의 진실뺸, 다나, 1992, 148쪽. 120) 황은 동지를 죽인 좌익들을 내 눈이 뒤집혀 집집마다 잡으러 다녔는데 복수를 못 했다 고 했 다.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121) 황은 순천시내에서 경찰들이 오히려 학련본부에 와서 정보를 많이 얻어갔다 며, 학생들의 활약이 경찰보다 더 많았고, 세력도 대단했다 고 증언했다. 순천문화원, 여순사건, 뺷순천이야기뺸, 2004, 22쪽;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김득중, 뺷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뺸,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54쪽. 122) Special Agent no. 9016" 보고서인 Yǒsu Operation, Amphibious Stage," G-2 Intelligence 순천지역 여순사건 529

58 제3권 한 하우스만과 함께 한국군 작전참모로 진압을 주도한 백선엽 총사령부 정보국장도 훗날 펴낸 회고록에서 당시의 순천 상황을 곳곳에서 즉결처분이 잇따르고 한동안 살벌한 분 위기가 순천을 지배했다 고 말했다.123) 다. 순천지역 민간인 희생과정 1) 순천시내권 희생사건 순천 진압 후 시내에는 진압군으로 꽉 찼다. 선제 공격부대인 제12연대 2ㆍ3대대, 제3 연대 1대대, 제2연대 1대대, 제4연대 2대대, 기갑부대, 전투사령부 등이 있었고, 경찰부 대들이 진주하여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124) 반군협조자 색출을 시작했다. 참고인 최 에 따르면, 색출된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들은 군경의 취조를 받은 후 혐의만으로 순천 시 외 야산에서 구덩이를 파고 총살당한 후 매장됐다.125) 10월 23일에는 순천지청 검사 박 찬길과 순천인민위원회 부위원장, 순경 한 명, 남녀학생 등 모두 22명이 총살되었다.126) 당시 광주지방검찰청 차석검사였던 박찬길의 죄목은 반군에 협조하여 인민재판소 재판 장을 지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혐의는 후일 근거 없이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 다.127) 그가 총살된 진짜 이유는 경찰이 검거한 좌익인사를 법규정대로 처리하면서 빚어 진 경찰과의 갈등 때문이었다. 조만식의 제자이고 기독교도였던 박찬길은 엄격한 법의 Summary no. 166, 1948년 11월 5일 12일; USFIK file, box 76/96, Roberts가 PMAG에 보 내는 1950년 10월 25일자 문서; message from Hausman," 1950년 10월 25일. Bruce Cumings, Korea's Place in the Sun: a modern history, W.W. Norton & Company, 1997(브루스 커밍스, 김동 노 외 옮김, 뺷브루스 커밍스의 한국현대사뺸, 창비, 2001, 313쪽에서 재인용). 123) 백선엽, 뺷실록 지리산뺸, 고려원, 1992, 쪽. 이 대목은 정부 공식기록에서도 확인된다. 국방부 전 사편찬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64쪽. 124) 국방부 전사편찬위원회, 뺷한국전쟁사 : 해방과 건군( )뺸(제1권), 1967, 464쪽; 사사키 하루다 카, 뺷한국전비사 건군과 시련뺸(상권), 병학사, 1977, 쪽. 125)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최 통화보고서( ). 순천시내 부역자 색출 의 주체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당시 조선민족청년단 단원으로 북국민학교 부역자 색출작업에 참여했 던 참고인 최은 군인들이 시민들을 경찰에게 인계했고, 반군협조자 색출작업은 경찰이 담당했다고 했다. 그러나 순천철도국에서 근무한 참고인 신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15연대 군인들이 북국 민학교에 민간인들을 잡아와 말 몇 마디하고 그냥 쏴 죽였다고 했다.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 참고인 신 녹취록( ). 126) 반란지구 답사기, 동광신문( ). 당시 순천농림중학교 교장이 남긴 일기를 보면 24일에는 최 천의 지휘 하에 일제조사가 있었고 오후에 5명이 총살당했다고 한다. 25일에는 총살형이 없었고, 오후 5 시 혐의자 전부를 경찰서로 이송한 뒤에는 군인이 주둔했다. 한편 권승렬 법무부장관의 국회보고에서는 같은 보고임에도 불구하고 총살일자가 23일 오전과 24일 오전 두 가지로 나와 있다. 권승렬 법무부장관, 뺷국회속기록뺸제5회 제13차, 쪽. 127) 권승렬 법무부장관ㆍ윤치영 발언, 뺷국회속기록뺸제5회 제14호, 282쪽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5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기준에 따라 좌익사건을 처리하곤 했는데, 좌익척결에 앞장섰던 경찰은 박찬길이 가벼운 형벌로 좌익을 처리하자 그를 좌익검사 로 여겼던 것이다. 128) 경찰은 여순사건을 기화로 삼아 박찬길에게 보복을 감행했다. 129) 당시 광주지방검찰청 순천지청장 출신 참고인 윤 은 (사건 당시) 숨어 지내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박찬길 검사는 억울하게 죽었다 고 했다. 130) 한편 1949년 이후 순천시내권은 토벌작전부대의 주요 주둔지로서 토벌군 각 연대가 주 둔하거나 작전을 펼쳤다. 국군 제15연대와 4(20)연대는 순천지구의 주력부대로 남국민 학교, 주암면, 황전ㆍ월등면 등지에 주둔하며 빨치산 동조 민간인들을 연행 및 구금하고 사살하였다. 순천경찰서 경찰들도 반군협력자를 색출ㆍ연행하여 조사한 뒤, 즉결처형하거나 군법회 의에 회부했다. 순천 대한청년단 단장으로 반군협조자 색출과정에 깊이 관여한 황우수는 25일(24일로 추정됨) 북국민학교에서 12명을 가려내 인근 농고에서 총살했다고 증언했 다. 131) 참고인 황도 (경찰이) 북국민학교에서 색출된 여 명의 좌익협조자 혐의자들을 동천 건너 봉화산 죽두봉 골짜기에서 무참히 사살했다고 했다. 132) 당시 순천경찰서 사찰과 형사였던 김봉운은 국군 12연대가 반란군 혐의자 30명을 용수동 수 원지에서 총살했다고 말했다. 133) 순천시내권 사건은 목격(전문) 참고인이 부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각 읍면과 는 달리 도시화가 진척되어 지역공동체 자체가 유지ㆍ계승되기 어려운 조건에 기인한다. 순천시내권의 피해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순천 진압 이후 벌어졌던 반군협력 자 색출과정에서 희생된 경우와, 1948년 10월 말부터 이듬해까지 벌어진 토벌작전과정 에 희생된 경우가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 행방불명되어 살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건이 편재한다. 매곡동 집단희생사건은 순천 진압과정에서 벌어진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이다. 128) 김득중, 여순사건과 이승만 반공체제의 구축, 성균관대 사학과 박사논문, 2004, 176~177쪽. 129) 당시 순천경찰들과 함께 반군가담 혐의자 색출에 적극 관여한 한청단장 황우수는 여순사건 전부터 경찰 이 박찬길을 죽이려고 이를 갈고 있었다 면서, 그의 경우는 경찰에게 밉보여 죽음을 당한 것 이라고 말 했다.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황우수 증언, 141쪽. 130) 참고인 윤 면담보고서( ). 131)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제작팀, 여수 14연대 반란 녹취록 ( 방영) 황우수 증언, 141쪽. 132)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133) 김석학ㆍ임종명, 광복 30년 제2권, 전남일보사, 1975, 200~201쪽. 순천지역 여순사건 531

60 제3권 매곡동 집단희생 사건 조사결과, 매곡동 사건은 1948년 10월 22일 순천 탈환작전 과정에서 국군 12연대 3대대 (이유성 대위 지휘)와 3연대 2대대(조재미 대위 지휘)가 민간인들을 반군협조 혐의 등을 이유로 매곡동 매산여고 부근에서 집단사살한 사건이다. 134) 참고인 박기일 135) ㆍ황종권 136) ㆍ이명식ㆍ김정애, 신청인 우채규 137) 의 을 종합하 면, 1948년 10월 22일 오후 7시경 철모에 흰 띠 두른 12연대 군인들이 집에 들이닥쳐 아무도 없냐고 소리를 질렀다. 순천중학교 학생이었던 우영철(직다-6382, 19세)이 내다 보자 너 나와! 해서 끌려갔다. 다음날 아침 동네주민들 다수가 그 군인들에게 죽었다. 진압군은 우영철, 황인주(직다-6419, 연령미상), 서평촌(직다-6419, 연령미상), 김옥순 (직다-6419, 연령미상), 황하연(직다-6419, 연령미상), 황종은(직다-6419, 연령미상), 방광수(직다-6419, 연령미상), 김용환(직다-6419ㆍ8267ㆍ9939, 22세), 안태현(직다 -6419ㆍ7165, 47세), 김삼수(직다-7165, 42세), 안종만(직다-7165, 17세), 안선자(직 다-7165, 15세), 나(직다-6419, 이름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 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 -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 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6419, 성명ㆍ연령미상), (직다 -6419, 성명ㆍ연령미상) 등 26명의 주민들을 매산중학교 담길(현재 매곡동 성서신학원 134) 당시 매곡동 부근에서 탈환작전을 벌였던 3연대 2대대 소속 이등병 소총수 최동옥은 순천 진입 시 소위 자위대원을 생포하여 약 30명을 총살했다고 증언했다. 3연대와 같이 22일 순천시내에 진입한 12연대 3대 대 9중대장 송호림은 9중대가 순천 중앙에 들어가서 농업학교 근방까지 갔다고 증언했다. 여기서 농업학 교는 순천농림중학교를 말한다. 농림학교와 매곡동의 거리는 불과 300m 정도다. 최동옥 증언록, 한국 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송호림 증언록, 한국전쟁증언록, 군사편찬연구소 소장. 한편, 신 청인 김정애는 1948년 10월 22일경 매곡동에 국군 백두산호랑이부대가 들어와 총살했다고 했다. 이 는 5연대 김종원 부대를 말하는 것으로 보이나, 5연대는 10월 22일 순천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청인 김정 애 ( ). 135) 25구의 시신을 수습했던 박기일은 시신마다 페니실린 병에다 이름을 적어넣어, 신원 확인을 하려고 했다 고 회고했다. 매장장소는 현 삼풍그린파크 2차 아파트 뒤편 매곡동 경노당 뒤편이라고 했다. 진실화해위 는 충북대 박물관과 함께 2008년 7월 28일부터 8월 8일까지 매곡동 참고인 박기일이 주장하는 장소에 대 한 유해발굴을 실시했다. 그 결과 유해는 발굴되지 않았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집단희생 관련 08년 유해발굴 중간보고회 자료집, 민간인 집단희생 유해발굴 조사단, 2009, 85쪽. 136) 황종권은 사살현장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참고인 황종권 통화보고서( ). 137) 우채규는 희생자 우영철의 연행과정을 직접 목격했다고 했다. 신청인 우채규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정문 아래쪽 20여 미터 지점)에서 사살했다. 138) 이 가운데 당시 군청 축산계장이던 안태 현과 그 아내 김삼수, 중학교 6학년이었던 안종만, 그 여동생 안선자 등 신청인 안금자의 일가족이 모두 몰살됐다. 신청인 안금자의 이다. 전 간호사를 했어요. ( ) 저 혼자 갑자기 충격을 받아 정신이 없었고, 어떻게 지금까지 살아왔는지 모르겠습니다. 한 몇 년 동안 정신이상이 된 듯 아파서 아무 일도 못했습니다. 139) 매곡동 사건 희생자 가운데 김용환(직다-8267ㆍ9939ㆍ6419)의 경우, 희생자의 연행 을 목격한 신청인 김정애의 에 따르면, 1948년 10월 22일 회사원 김용환이 오전 숙 직을 하고 귀가하는 길에 진압군에게 연행되어 매곡동에서 사살되었다. 140) 26명의 시신 수습현장을 목격한 참고인 김용기의 이다. 그때가 초가을 10월 어두울 때였어요. 사살현장을 보진 못했지만 총소리가 막 들렸는데. 그 이튿날 죽은 사람들 시신을 수습하는 걸 봤습니다. 다른 시신들은 가마니에 싸서 묻었는 데 김용환의 시신은 마침 집에 할머니가 돌아가실 경우에 대비해 준비해둔 관에 넣어 다른 시신들과 같이 묻었어요. 묻은 곳이 당시 선교사 땅하고 일반 사람들 땅하고 경계가 되는 지점인데, 철조망에서 불과 4 5미터 지점이었어요. 지금 가보니 현장이 완전히 바뀌어서 찾을 수 없었어요. 141) 참고인 박는 사건 다음날 아침 매곡동 매산중학교 담벼락 느티나무 부근에 시신 이 늘어져 있던 것을 목격했다 고 했다. 142) 조사결과, 매곡동 집단희생사건의 희생자 는 26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희생자는 12명이었다. 143) 조곡동 이봉권(직다-7782, 29세)의 경우, 희생자의 시신을 목격한 신청인 이용권, 참 고인 김연식ㆍ김용래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0월 24일(음 ) 12연대 군인 2 3명이 조곡동 마을에 와 젊은이들을 마을회관에 소집했다. 신청인 이용권도 회관으로 나가려는 차, 밖에서 총소리가 났다. 부랴부랴 달려갔더니 집 근처 골목에서 모친과 동생 이 형 이봉권의 시신을 부여잡고 울고 있었다. 옆에는 무엇을 잘못했는지 사병이 장교에 138) 참고인 김용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우채규 ( ). 139) 신청인 안금자 ( ). 140) 신청인 김인중 ( ); 신청인 김정애 ( ). 141) 참고인 김용기 통화보고서( ). 142)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143) 이 사건은 진실규명대상자 26명을 대표 신청한 사건이었다. 희생 확인된 12명을 제외한 나머지 이름을 알 수 없는 14명은 제적등본 및 관련 참고인을 확보할 수 없어, 진실규명이 불가능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33

62 제3권 게 혼이 나고 있었다. 그때는 이미 마을회관 앞에 모인 청년들 가운데 반군협조 혐의자가 없어, 12연대 장교가 모두를 귀가시킨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사병이 우발적으로 주민 1 명을 사살하여 혼이 나고 있던 것이다. 그 1명이 이봉권이었다. 144) 특히 조곡동은 순천 탈환작전 시 민가를 향한 진압군의 발포로 인해 사망한 경우도 있 었다. 희생자의 사망을 목격한 참고인 김정수ㆍ김학용ㆍ정영철ㆍ정영호의 에 따르면 1948년 10월 23일 아침 정영자(미신청인, 10세)가 순천시내로 진입한 진압군의 총에 맞 아 즉사했다. 145) 참고인 정영철의 이다. ( )총소리가 멀리 시내 쪽(장대다리 쪽)에서 계속 들려왔으며 점점 가까이 크게 들려오 면서 순식간에 저의 집 앞까지 들려왔고 갑자기 저의 집에 총탄이 날아왔으며 유리창이 깨 지는 소리가 나더니, 벽을 뚫은 총구멍에서 흙먼지들이 튀였고 우리 가족 모두는 죽는 줄 알고 부엌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었는데 갑자기 나의 한쪽 팔꿈치가 따뜻하여 옆을 보니 나의 동생 영자가 귀 뒤쪽 머리에 총을 맞아 피가 쏟아져 나와 나의 몸을 적시면서 죽어 있 었습니다.( ) 146) 석현동 황천식(직다-2626, 30세)의 경우, 참고인 정순심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15일(음 ) 순천시내에 구경을 간다고 나가, 순천경찰서로 연행된 뒤 사살되었다. 147) 오림동의 경우, 희생자의 연행과정을 목격한 신청인 신희종의 에 따르면, 1948년 10월 하순경 헬멧에 흰 띠를 두른 진압군이 들이닥쳐 사람들을 모두 도사초등학교로 소 집했다. 신태수(직다-1781, 31세)는 자택에서 경찰 3명에게 연행되어 도사초등학교로 끌 려갔다. 마을주민들 중 신태수만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한 달 뒤 1948년 11월 말(음 10월 말) 경찰들이 신태수를 비롯하여 같이 끌려온 사람들을 트럭 2 3대에 나눠 실어 현 이수중학교 부근 죽도봉 공동묘지에서 집단으로 사살한 뒤 시신을 소각했다. 148) 참고인 김보례의 에 따르면, 순천 진압작전 시 경찰에게 쫓기던 용당동 거주 허종 순(직다-3435, 25세)이 1949년 3월 7일경(음 2. 8.) 체포되어, 서면 구랑실재 골짜기에서 144) 참고인 김연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용래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용권 ( ). 145) 참고인 김정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학용 진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영철 진 술( ); 참고인 정영호 ( ). 146) 참고인 정영철 ( ). 147) 참고인 정순심 통화보고서( ). 신청인 황방자는 2005년 7월 1일 순천경찰서에 부친 황천식의 소재 파악을 의뢰했다. 그 결과, 황천식이 여순사건 관련자로 전남 광주에서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회신을 받았다. 순천경찰서, 사건처리상황통지, ) 신청인 신희종은 총소리를 들었다고 했다. 신청인 신희종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집단으로 사살되었다.149) 당시 미군 G-2 기간보고서는 1949년 3월 7 일 서면에서 군경토벌대가 반군 한 부대를 공격해 반군 1명 사살에, 1명 생포, 칼빈총 1정 을 노획했다고 적고 있다.150) 순천 진압 후 반군협력자 색출과정에서 일제하 민족해방운동가의 가족도 피해를 입었다. 순천 탈환 후 1948년 10월 31일경 진압군이 저전동에 들이닥쳐, 집집마다 사람들을 끌어내 트럭에 실었다. 최명순(직다-10095, 28세)도 군인에게 연행되어 트럭에 실렸다. 이후 끌려간 사람들과 함께 죽도봉에서 진압군에게 사살되었다. 신청인 장우수는 부친 장남현의 성향이 모친의 죽음과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 며 죽은 아버지 때문에 산 어머니가 죽었다 고 했다.151) 여순사건 당시 학생들의 참여가 컸던 만큼, 진압 후 교육계의 피해가 적잖았다. 교사들 은 학생에 대한 관리감독을 소홀했다거나, 좌익선동을 했다는 혐의로 사살되었다. 순천 행정동 71번지에 살던 중학교 수학교사 이상호(직다-3381, 24세)는 여순사건 당시 군경에게 연행되어 살해되었다.152) 매산중학교 교사 최창수(미신청, 23세)ㆍ김옥태(미신청, 31세)의 경우, 참고인 박 의 에 따르면, 1948년 여순사건 당시 12연대 진압군이 들어온 직후 순천경찰서로 연행된 뒤 서면 압곡리 구랑실재에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살되었다. 사건 직후 어머니 고옥랑이 최창수의 시신을 수습했다.153) 저전동의 경우, 일본고등음학학교(현 일본국립 음악원) 출신 순천여중 음악교사 김생옥(미신청, 30세)이 광주에서 개인음악회를 준비하 다 순천경찰서의 출석요구를 받고 출두했다. 김생옥은 좌익선동을 했다는 혐의로 ) 참고인 허보례 통화보고서( ). 경찰자료에는 허종순이 사살된 자 로 기재되어 있다. 순천경찰서, 뺷사실조사서뺸, 1980.; 순천경찰서, 뺷보안기록회보조회서뺸, ) HQ, USAFIK, 뺷G-2 Periodic Report뺸( )(주한미군 정보일지) 제7권, no. 1085,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360p. 151) 저전동에 살던 장남현은 일제시기 광주학생운동에 호응, 부산지역 학생운동을 조직하여 실형을 산 인텔 리 출신 민족해방운동가였다. 신청인 장우수가 국가보훈처로부터 제공받아 제출한 포상자 공적 에 는, 장남현이 월 말경 부산 제2공립상업학교 재학 중 광주학생의거에 호응하여 동맹휴교를 강행 하기 위한 일환으로 격문 수천 통을 만들어 학교 교실과 부산시내에 살포하였으며, 에는 조선 방직주식회사 동맹파업 활동에 참여하여 격문 150매를 작성, 동월 21일 부산시내에 살포하는 등의 활동 을 하다 被逮되어 징역 10월을 받은 공적이 인정되므로 건국포장에 해당하는 분으로 판단됨 이라고 기재 되어 있다. 국가보훈처, 포상자 공적, ; 신청인 장우수 ( ).; 참고인 장여자의 에 따르면, 장남현은 해방 후 정치활동과는 거리를 둔 채, 오로지 생업에만 몰두하다, 1947 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참고인 장여자 통화보고서( ) 152) 참고인 정기태 통화보고서( ). 153) 매산중학교 교장 김형모는 사건 직후 학생들을 모아놓고 최창수, 김옥태 두 교사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울먹이며 말했다고 한다. 한편 최창수의 시신은 구랑실재에 가매장된 후 1960년 전남 함평의 선산으로 이장됐다. 참고인 박 ( ); 참고인 최 면담보고서( );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35

64 제3권 년 10월 31일 죽도봉 골짜기에서 사살되었다. 154) 순천 행동 71번지에 살던 정기홍(직다-3382, 26세)은 여순사건 당시 4연대에게 연행되 어 살해되었다. 155) 가곡동의 경우, 여순사건 당시 회사원 한석기(직다-8279, 40세)가 출근 후 행방불명되 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156) 덕월동 참고인 최홍수의 에 따르면, 여순사건 당시 덕월동에 살던 홍성표(직다 -9895, 23세)는 동네친구인 14연대 군인 오기석 상사와 주막에서 술을 마시다, 장난삼아 오기석의 총을 쏴보았다. 총소리 듣고 인근 도사지서에서 반군이 출현했다며 출동, 총을 쏜 홍성표를 잡으려 했다. 겁을 먹은 홍성표는 도주했다. 도피생활을 하던 홍성표는 모친 의 설득 끝에 자수했다. 경찰은 모친에게 자수하면 살려준다는 회유를 한 상태였다. 살려 준다던 경찰은 1948년 가을 홍성표를 송치재(소련재)에서 사살했다. 157) 1948년 10월 20일 아침, 반군이 여수에서 통근열차를 이용하여 순천까지 진입했던 까 닭에, 기차를 징발당한 철도국 공무원들도 반군협조자로 몰려 피해가 컸다. 동외동 참고 인 조윤남의 에 따르면, 1948년 10월 23일 순천이 진압된 후 순천철도국 공무원 신원 문(직다-9929, 17세)이 출근한 후 순천역에서 순천경찰에게 사살되었다. 며칠 뒤 얼굴을 간신히 알아보고 순천역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158) 덕암동의 경우, 1948년 11월 20일경 순천경찰은 순천철도국 기관사 장환봉(직다-1026, 29세)을 체포하여, 철도국 창고에 한 달간 감금했다. 1948년 11월 30일경 군경이 장환 봉 외 감금되어 있던 30 40명을 조곡동 죽도봉에서 사살 후 시신을 소각했다. 159) 한편,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무혐의처분을 받아 귀가하던 중에 잠복 중인 군인들에 게 사살당한 사건도 있었다. 동외동에 살던 이계수(직다-9925, 26세)는 1948년 11월경 순 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고 귀가 중 현 순복음교회 앞 도랑가에서 잠복 중인 군인들에게 불시검문 받다 사살되었다. 160) 154) 참고인 유혜량 ( ). 155) 참고인 정기태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정기순은 희생자 정기홍이 1947년 민주청년동맹결성식 에 참가하는 등의 사회의식이 있었고, 이런 과거 행적이 문제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신청인 정기순 ( ). 156) 신청인 김양희는 희생자 한석기의 아들인 남편도 아버지의 일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는다고 했다. 신청인 김양희 ( ). 157) 참고인 최홍수 통화보고서( ). 158) 참고인 조윤남 통화보고서( ). 159) 참고인 진점순 ( ). 160) 희생자 이계수가 연행되는 것을 목격한 신청인 김순덕은 수습해온 이계수의 시신을 목격했다고 했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경찰의 가혹한 고문에 못 이겨 말한 허위자백 때문에 친인척이 사망하는 사건도 있었 다. 안풍동 참고인 차점덕의 에 의하면, 여순사건 당시 순천시 안풍동 월평마을에 살 던 정병현이 좌익활동에 가담했다. 진압 후 경찰이 정병현의 집을 수색했다. 경찰은 정병 현의 소재를 물으며, 아내 이복남을 고문했다. 이복남은 고문에 못 이겨, 남편이 옆 수동 마을 종친 정순현(직다-8057, 37세)ㆍ정계현(직다-8057, 27세)의 집으로 피신했다고 말했다. 1949년 7월(음 6월)경 순천 안풍동 159번지 정순현의 집에 순천경찰서 경찰이 들이닥쳐 집안을 수색했다. 경찰은 놀란 정순현, 정계현을 몽둥이로 마구 구타하면서, 정 병현의 소재를 추궁했다. 별 소득이 없자, 경찰은 철수했다. 두 사람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지만, 한 달 뒤 정순현이 먼저 사망했다. 사인은 장파열과 과다출혈이었다. 두 달 뒤 정계현도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61) 1950년 1월 2일(음 ) 순천경찰서 경찰들이 순천시 와룡동에 살던 백학선(직다 -9937, 24세)을 연행했다. 경찰들은 백학선을 이틀 동안 감금한 뒤, 와룡동 늘너리 골짜기 에서 마을주민들과 함께 사살했다. 162) 1949년 11월 19일(음 ) 15연대가 풍덕동에 살던 장종환(직다-1421, 34세)을 연행 했다. 장종환은 장대다리에서 포승줄에 손과 몸을 묶인 채 트럭에 실렸다. 희생자가 끌려 가는 광경을 목격했던 누이 장혜자에게 장종환은 눈물을 지었다. 트럭에는 50여 명 정도 가 갇혀 있었다. 트럭은 죽두봉 상봉에서 멈췄다. 장종환 등 50여 명이 집단으로 사살되 었다. 그날 저녁, 아들의 연행 소식을 듣고 시신이라도 수습한다고 집을 나간 장용암(직 다-1421, 63세)도 군경에게 살해되었다. 163) 장천동에서는 1948년 10월경 순천경찰서 경찰이 김유섭(미신청, 31세)을 순천시 장천 동 구 성카톨릭병원 앞 자택에서 연행한 뒤 살해했다. 164) 조사결과, 순천시내권 희생자는 1,200여 명으로 추산 165) (<표 3> 참조)되나 미신청을 포함한 진실규명대상자 수 총 47명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희생사실을 확인한 사람은 다. 신청인 김순덕 ( ). 161) 참고인 차점덕 통화보고서( ). 162) 신청인 백영묵 ( ). 경찰자료에는 백학선이 사살된 자 로 기재되어 있어, 신청인 이 주장하는 사건일자와 일치한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1980; 순천경찰서, 보안기록조회회보서, ) 참고인 장혜자 통화보고서( ); 신청인 장광수 ( ). 164) 참고인 김관 통화보고서( ). 165) 진실화해위원회는 신청인과 참고인의 속에서 언급되는 피해인원을 근거로 별도의 시내/읍 면별 피해 추산치를 산출했다. 신청(참고)인의 기억에만 의존하여 된 피해인원을 직접적으 로 신뢰하긴 어려워, 잠정적인 피해규모를 가늠하는 근거로만 활용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37

66 제3권 32명이다. 1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순천시내권 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사 건의 희생장소 및 추산치는 아래 <표 2>, <표 3>과 같다. <표 2> 순천시내권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경찰 자료 참고인 시신수습 여부 확인 근거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기타 확인 / 추정 여부 장환봉 ( 張 環 峰 ) 장용암 ( 張 龍 岩 ) 장종환 ( 張 鍾 桓 ) 신태수 ( 申 泰 秀 ) 황천식 ( 黃 千 植 ) 이상호 ( 李 祥 昊 ) 남 29 남 63 남 34 남 31 남 30 남 24 7 정기홍 남 허종순 ( 許 鍾 順 ) 우영철 ( 禹 榮 哲 ) 남 25 남 19 시신이 순천시 덕암리 1026 불에 타 재를 수습 순천시 풍덕동 순천시 풍덕동 공무원 인사기록 카드 확인 1421 확인 1421 확인 시신이 순천시 오천동 1781 불에 타 재를 수습 순천시 석현동 2626 순천시 순천면 순천시 순천면 확인 순천 경찰서 민원처리 통지서 (사망추정) 확인 3381 확인 3382 확인 순천시 사망 용당동 3435 신고 안 됨 순천시 매곡동 황인주 (황인주) 남 66 순천시 매곡동 서평촌 (서평촌) 확인 6382 확인 6419 확인 여 확인 12 김옥순 (김옥순) 여 확인 13 황하연 여 확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경찰 자료 참고인 시신수습 여부 확인 근거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기타 확인 / 추정 여부 14 황종은 남 확인 15 방광수 남 확인 중앙병원 간호사 부 중앙병원 간호사 모 중앙병원 간호사 언니 남 6419 불능 여 6419 불능 여 6419 불능 19 나씨 딸 여 6419 불능 20 나씨 사위 남 6419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불능 30 안태현 남 김삼수 여 안종만 남 17 순천시 매곡동 와 중복신청 순천시 매곡동 와 중복신청 순천시 매곡동 와 중복신청 확인 확인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539

68 제3권 연 번 희생자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경찰 자료 참고인 시신수습 여부 확인 근거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기타 확인 / 추정 여부 33 안선자 여 이봉권 ( 李 奉 權 ) 정순현 ( 鄭 順 鉉 ) 남 29 남 37 순천시 매곡동 와 중복신청 순천시 조곡동 7782 순천시 안풍동 (사망 일자 일치) 확인 확인 7865 확인 36 정계현 ( 鄭 桂 鉉 ) 남 27 순천시 사망 안풍동 7865 신고 안 함 확인 37 김용환 ( 金 容 煥 ) 남 23 순천시 6419,9939 매곡동 8267 와 중복신청 확인 38 한석기 ( 韓 碩 基 ) 남 40 순천시 가곡동 8279 추정 39 홍성표 ( 洪 聖 杓 ) 남 23 순천시 덕월동 9895 확인 40 이계수 ( 李 啓 洙 ) 남 26 순천시 동외동 9925 확인 41 신원문 ( 申 元 文 ) 남 17 순천시 동외동 9929 확인 42 백학선 ( 白 學 先 ) 남 24 순천시 와룡동 9937 확인 43 최명순 ( 崔 明 順 ) 여 28 순천시 저전동 확인 44 최창수 ( 崔 暢 洙 ) 남 23 순천시 매곡동 미신청 신고 안 됨 매산고 경력 증명서 확인 45 정영자 ( 鄭 榮 子 ) 여 10 순천시 조곡동 미신청 (사망 일자 일치) 확인 46 김생옥 ( 金 生 鈺 ) 남 30 순천시 순천여학 교 관사 미신청 확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6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경찰 자료 참고인 시신수습 여부 확인 근거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기타 확인 / 추정 여부 47 김유섭 ( 金 有 燮 ) 남 31 순천시 장천동 미신청 확인 총계 총 47명 (확인 32명/추정 1명/불능 14명) 연 번 1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순천 시내권 2 순천 시내권 3 순천 시내권 4 순천 시내권 5 순천 시내권 죽도봉 골짜기 (조곡동 둑실마을 안골) 생목동 수박등 공동묘지 둑실 5길 주변 일대 (정원 넥스빌, 금강메트로빌 아파트 지역) 현 이수중학교 (생목동 24번지) 및 인근 생목현대아파트, 금호타운아파트, 벽산아파트 일대 북국민학교 현 순천북초등학교 (매곡동 425-1) 순천농림 중학교(강당 뒤편 논) 매곡동 (매산길) 현 국립순천대학교 (중앙로 413, 매곡동 315) 현 매산중학교 담장 6 순천 시내권 기타 지역 순천경찰서 등 개별 사건 장소 총계 <표 3> 순천시내권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1948년 10월 1949년 1948년 10월 1949년 1948년 10월 1948년 11월 1948년 10월 1948년 11월 1948년 10월 1948년 10월 1949년 12월 국군, 순천 경찰서 경찰 국군, 순천 경찰서 경찰 2연대ㆍ12연 대ㆍ15연대 ㆍ순천경찰 국군 2연대ㆍ 3연대ㆍ 4연대ㆍ12연 대ㆍ15연대 국군 12연대ㆍ 3연대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비고 약 400명 166) 6명 167) 일제강점기부 터 경찰사격장 약130명 168) 5명 169) 순천철도 관계자 집단사살 후 시신 소각 약 100명 170) 1명 171) 반군협조 혐의자 심사 약 500명 172) 5명 173) 26명 174) 12명 175) ) 외 다수 20명177) 약 1200명 49명178) 순천지역 여순사건 541

70 제3권 2) 승주읍 희생사건 1985년 쌍암면에서 승격된 승주읍은 조계산과 인접해 있고, 분지였던 까닭에 피해가 잇따랐다. 승주읍 희생사건은 크게 두 가지로 유형화된다. 빨치산들의 보급투쟁 으로 인 한 피해와 도피에 따른 피해가 그것이다. 두 피해는 서로 연동되어 있다. 군경이 빨치산 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민간인을 사살하자, 이를 보고 신변에 위협을 느낀 마을주 민들이 산으로 피신, 결국 사살되었던 것이다. 누구나 반군협조 혐의를 받아 사살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목격한 마을주민들은 산으로 피신했고, 군경에게 발각되어 사살되었다. 승주읍은 여순사건 이후 1949년 초까지 황전ㆍ월등에 주둔했던 12연대와 1949년 4월 이후 외서ㆍ벌교에서 토벌작전을 벌인 15연대의 관할지에 속했다. 12연대와 15연대 군 인들은 거주 민간인들을 현지에서 사살하거나, 연행 및 고문한 뒤 불법적으로 사살했다. 쌍암지서 경찰들도 반군협조 혐의가 있는 민간인들을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후 불법 적으로 사살했다. 황전지서 주임으로 근무하다 쌍암지서 주임으로 부임해 온 임상기는 주민들을 가혹하게 대해 원성이 자자했다. 179) 먼저 구강리의 경우, 해방 이후 해남 출신 윤씨가 1년에 2 3번 마을에 와 며칠씩 묶 으면서 청년들에게 강연을 하곤 했다. 마을청년들은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 청년들은 166) 참고인 황 면담보고서( ). 167) 순천시내 거주 4명(직다-1026, 직다-1421, 직다-10095, 미신청 (김생옥)), 순천시내 이외 거주 2명(직다 -1353, 직다-1394). 168) 참고인 신 녹취록( ); 신청인 양병옥 ( ); 신청인 신희종 ( ); 신청인 이기화 ( ); 신청인 한재임 ( ). 169) 순천시내 거주 1명(직다-1781), 순천시내 이외 거주 4명(직다-1350, 직다-1422, 직다-9946, 직다-2246). 170) 반란지구 답사기, 동광신문( ); 참고인 신 녹취록( ); 신청인 이기화 ( ). 171) 순천시내 이외 거주 1희생자 명(직다-2400(주암면 거주)). 172) 참고인 유근춘, 한국전쟁 증언록, ( ); 참고인 정 ( ). 173) 순천시내 이외 거주 희생자 5명(직다-1341, 직다-3002, 직다-4050, 직다-7267, 직다-7505). 174) 신청인 위계룡 ( ); 참고인 김용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유채규 ( ). 175) 순천시내 거주 26명 (직다-6382, 직다-6419 확인 6명, 직다-7165 확인 4명, 직다-8267(직다-9939와 중복 신청). 직다-6419 불능 14명.). 176) 신청사건 중 순천시내 기타 지역에서 희생된 것으로 확인/추정된 수. 177) 순천시내 거주 희생자 16명(직다-1424, 직다-3381, 직다-3382, 직다-8279(추정), 직다-2626, 직다-7782, 직다-7865(확인 2), 직다-9925, 직다-9929, 직다-9937, 직다-3435, 직다-9895, 미신청 3(최창수, 정영자, 김유섭)), 순천시내 이외 거주 희생자 5명(직다-8366(확인 3), 직다-9104, 직다-8861). 178) 총 확인 수 = 순천시내 거주 확인 32명 + 순천시내 이외 거주 확인 17명. (순천시내 거주 총 47명(확인 32, 추정 1, 불능 14), 순천시내 이외 거주 총 17명(확인 17)). 179) 임상기는 한국전쟁 당시 휴가 나온 해병대에게 살해되었다고 전해졌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지방좌익활동에 가담했다. 180) 여순사건 당시 마을에 온 반군이 주민들에게 밥을 해달라고 하자, 마을구장과 반장들 은 해코지가 두려워 밥을 해주었다. 그러나 1949년 3월 6일(음 2. 7.) 이웃마을인 사제마 을을 포위한 12연대가 마을주민들에게 사제마을 구장 유흥두 집이 어디냐며 들이닥쳤다. 유흥두는 위협을 느끼고 도망가다 사살되었다. 12연대는 사제마을 반장 박태석을 체포한 뒤, 태촌마을 파수병들의 안내를 받아 태촌마을 반장 최동두(직다-4926, 28세)의 집에 쳐 들어왔다. 그리하여 사랑방에 자고 있던 최동두와 박태석을 묶어 쌍암지서로 연행했다. 다음날 1949년 3월 7일(음 2. 8.) 새벽 승주읍 서평리 뒷산인 서정재에서 총소리가 났다. 아침 9시경 면 장터 다녀오던 김천연이 집에 와 12연대가 최동두를 서정재에서 죽였다고 말해주었다. 181) 서정재 고개 도로변에서 최동두, 박태석의 시신이 수습됐다. 182) 두월리에서도 반군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민간인들이 지서경찰에게 사살되었다. 희생자의 연행과정을 목격한 신청인 김태옥의 에 따르면, 여순사건 당시 두월리 무 도마을에 산사람들이 내려와 밥을 해달라 하여 해코지할까 두려워 마을사람들이 밥을 해 줬다. 1949년 2월 12일(음 ) 쌍암지서 경찰들은 반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김만옥(직다-9957, 26세)ㆍ김옥기 등 마을주민 4명을 쌍암지서로 연행했다. 모진 고문 과 구타가 이어졌다. 다음날 1949년 2월 13일(음 ) 쌍암지서 경찰들은 김만옥과 김옥기 등 끌려간 4명을 지서에서 살해했다. 인부들이 말이 끄는 수레에 김만옥, 김옥기 시신을 실어 수습해왔다. 183) 한편, 승주읍 유흥리에선 딸을 겁탈하려던 경찰을 가로막던 어머니가 사살당하는 사건 이 있었다. 참고인 조현규의 에 따르면, 1949년 8월 11일(음 ) 마을의 남자들이 나무를 베러 산에 간 사이 쌍암지서 순경들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을 소집했다. 경찰이 집 집마다 돌며 남아 있는 사람이 있는지 확인했다. 유흥리 463번지 참고인 조의 집에 순경이 들어와 어머니 장순심(직다-10091, 41세)을 집 밖으로 나가라고 위협했다. 딸의 위험을 직감한 장순심이 순경을 가로막았다. 순경이 모녀에게 총을 쏘았다. 장순심은 현 180) 참고인 조 ( ). 181) 신청인 최종우 ( ). 경찰자료에는 최동두가 6ㆍ25 당시 남로당원으로 부역타가 사살된 자 로 기재되어 있으나, 특이사항에 대상자의 부역사실이 불확실하다고 적고 있어, 이를 신뢰하기는 어렵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 신청인 최종우는 여러 곳에 총상을 입은 희생자 최동두의 시신을 목격했다고 했다. 신청인 최종우 ( ). 183) 신청인 김태옥은 김만옥, 김옥기의 연행과정과 시신을 목격했다. 김태옥이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김만옥이 1949년 2월 14일 쌍암면 두월리 524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김태옥 진 술( ). 순천지역 여순사건 543

72 제3권 장에서 즉사했고, 딸 조는 다리에 장애를 입었다. 피해 참고인 조의 이다. 그때가 49년 음력으로 7월 여름 더울 때였어요. 제가 열여섯 살이었는데. ( ) 마을엔 노 인들하고 여자들만 있었는데, 산판일에 안 나간 남자들이 있는지 찾으러 왔다고 나중에 들 었어요. 우리 집에는 어머니와 저만 있었는데 순경 한 명이 집에 들어왔어요. 마당에서 순 경이 어머니만 나오라고 어머니를 밀어냈어요. 어머니가 저만 남겨두고는 못 나가겠다고 마당에서 버텼어요. 그러니까 그 순경이 어머니를 총으로 쐈어요. 그리고 제가 서 있었는데 저를 한 방 쐈어요. 저는 총을 맞고 쓰러졌어요. 오른쪽 허벅다리에 맞았는데 총알이 살을 뚫고 나갔어요. ( )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나서 한참 질뚝질뚝 걸었어요. 음력 7월에 어 머니가 죽었는데 음력으로 4월생인 막내동생이 있었어요. 100일도 안 된 아기였는데 어머 니가 죽고 나서 젖을 못 먹어 그해 음력 11월에 죽었어요. 저를 쏜 그 사람 얼굴을 기억 못 해요. 검은색 경찰 옷을 입었는데. 제가 서 있다가 총에 맞고 쓰러졌는데. 어떻게 됐는지 정 신도 없고 기억도 안 나요. 184) 남강리의 경우 참고인 지진종ㆍ지영일의 을 종합하면, 누군가 마을에 반군이 숨겨 놓은 총이 있다고 쌍암지서에 신고를 했다. 1949년 1월 26일(1948. 음 ) 쌍암지 서 경찰이 저동마을 구장 지채종(직다-8121, 28세)을 총을 숨겨두었다는 이유로 연행했 다. 이후 쌍암지서 경찰들이 지채종을 승주읍 서평리 서정마을 원모퉁에서 사살했다. 185) 남강리 남정마을에 살던 김종필(직다-9905, 29세)이 1949년 9월 말경(음 8월 초) 마을 회관에서 산사람들에게 잡혀갔다. 그 후 10월 초(음 8월 중순경) 작은할아버지 댁을 거쳐 쌍암지서에 자수했다. 그날 저녁 쌍암지서 경찰들이 낙안면 목촌리 조산마을 뒤 야산에 서 김종필을 사살했다. 희생자 김종필의 지인이 현장을 목격하여 평사리 화목 거주 숙부 에게 연락해 1949년 10월 13일(음 ) 시신을 수습했다. 186) 도평리의 경우, 참고인 신형우ㆍ신복순의 에 따르면, 여순사건 당시 백현마을 임방 기와 임판규가 좌익활동에 가담했다. 순천경찰은 그 둘이 있으니 백현마을은 폭도 마 을 이라며, 주민들을 무차별 연행했다. 신창우(직다-9942, 26세)도 순천경찰들에게 연행 되어, 5일 동안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갇혀 있었다. 이후 무혐의로 쌍암지서로 이송했는 데, 쌍암지서 주임의 명령으로 1948년 12월 3일(음 ) 사살되었다. 경찰서에서 집 184)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신청인 조기원 통화보고서( ). 185) 참고인 지진종 통화보고서( ); 참고인 지영일 통화보고서( ). 신청인 지정애가 제 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지채종이 1948년 12월 28일 오후 9시 서면 남강리 1091번지에서 사망한 것으 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지정애 통화보고서( ). 186) 참고인 김주태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으로 연락이 와, 누이동생 신복순, 신형우가 시신을 수습했다. 187) 신창우가 사망한 후 마을의 젊은이들이 쌍암지서로 끌려가 봉변을 당하는 상황에서 신 창우의 동생 신현우(직다-9943, 20세)는 신변의 위협을 느껴 친구 4 5명과 야산에 은 거했다. 1949년 1월 말(음 12월 말경) 12연대는 승주읍 도정리 축내마을 노고치산에서 신현우를 발각하여 사살했다. 희생자의 누이동생 신복순, 신형우가 수소문하여 노고치산 에서 시신을 수습했다. 188) 승주읍 도정리에 살던 이덕심(직다-9263, 34세)은 여순사건 당시 산 중에 거주하고 있다 는 이유로 1949년경 1월경 마을주민과 함께 월등지서에 잡혀가 당일 고문으로 사망했다. 189) 두월리는 반군에게 밥을 해줬다는 이유로 12연대와 쌍암지서 경찰들이 마을주민들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거나, 고문하여 살해했다. 참고인 김종태의 에 따르면, 1949년 2 월 5일(음 1. 8.) 저녁 마을에 반군이 들어와 자고 다음날 오전에 간 일이 있었다. 다음날 2월 6일(음 1. 9.) 아침 12연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두월리 두얼2구 마을 논 앞으 로 소집했다. 전날 반군에 밥을 해준 김점수(직다-6289, 38세) 등 4명을 주민들이 보는 앞 에서 사살했다. 사살현장은 신청인의 집 바로 아래 논이었다. 시신은 바로 수습되었다. 190) 석흥리 이영오(직다-2795, 30세)의 경우, 참고인 이행수ㆍ한상출의 에 따르면, 1948년 12월 19일(음11.19.) 낙안 금산리 오리밭골 골짜기에 잠복 중이던 군경이 집으 로 오던 이영오를 반군으로 착각하여 사살했다. 191) 신청인 이홍재는 수습된 희생자 이영 오의 시신을 직접 목격했다. 192) 신전리 김복개(직다-9940, 37세)의 경우, 1948년 10월 말경 쌍암지서 경찰들이 승주읍 신전리에 살던 김복개 등 주민들을 반군에 동조했다는 혐의로 죽학리 대수골 마을회관 앞으로 끌고 가 사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 죽학리의 경우, 사살현장을 목격한 죽학리 참고인 이인례ㆍ최정운의 에 따르면, 187) 참고인 신복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신형우 통화보고서( ). 경찰자료에는 신창우 가 에 사살된 자 로 기재되어 있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 참고인 신복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신형우 통화보고서( ). 경찰자료에는 신현우가 6ㆍ25 당시 면 연락책으로 활약하다 에 사살된 자 로 기재되어 있으나, 특이사항에 는 부역사실 유무가 불확실하다 고 나와 있다. 부역사실 유무가 불확실 했음에도 사살이 이루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 신청인 조찬익 통화보고서( ). 190) 참고인 김종태 통화보고서( ). 191) 참고인 이행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한상출 통화보고서( ). 192) 신청인 이홍재 ( ). 193) 신청인 김동석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45

74 제3권 1949년 8월 9일(음 ) 저녁 빨치산 몇 명이 죽학리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장복 철 집에 소집했다. 주민 30 40명이 모이자, 빨치산이 연설을 시작했다. 밖에선 반군의 출동 정보를 미리 알고 있던 쌍암지서 경찰들이 장복철의 집을 포위하고 있었다. 잠시 후 경찰이 장복철의 집을 급습했다. 주민들 일부는 겁을 먹고 뒤란으로 피했다. 경찰들은 도 주하는 이들을 무차별 사살했다. 최경심(직다-1524, 31세)ㆍ이소유(직다-4075, 28세) ㆍ강인호의 부인 ㆍ남평수의 어머니 ㆍ남득수의 어머니 등 5명 중 배를 맞은 이소유 등 세 명은 즉사했다. 최경심 등 2명은 살았다가 병원으로 옮겼으나, 다음날 8월 10일(음 ) 사망했다. 빨치산은 2명 사살되었다. 194) 조사결과, 승주읍 희생사건 진실규명대상자 13명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 인한 사람은 총 12명이며, 1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승주읍 희생자 신원 확인 결과 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4>, <표 5>와 같다. <표 4> 승주읍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 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최경심 ( 崔 敬 心 ) 이영오 ( 李 永 五 ) 이소유 ( 李 小 臾 ) 최동두 ( 崔 東 斗 ) 김점수 ( 金 点 秀 ) 지채종 ( 池 采 鍾 ) 김종필 ( 金 鍾 弼 ) 여 31 남 30 여 28 남 29 남 38 남 28 남 28 승주읍 죽학리 승주읍 석흥리 승주읍 죽학리 승주읍 구강리 1524 확인 2795 확인 4075 확인 4926 확인 승주읍 두월리 6289 (사망일 자 일치) 승주읍 남강리 승주읍 남강리 8121 (사망일 자 일치) 확인 확인 9905 확인 194) 참고인 이인례 통화보고서( ); 참고인 최정운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희생자 연 번 확인 근거 참고인 시신 수습 여부 제적 등본 확인 확인 추정 확인 확인 9957 (사망일 자 일치) 확인 확인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8 이덕심 (이덕심) 여 34 승주읍 도정리 김복개 (金福介) 남 37 승주읍 신전리 신창우 (申昌雨) 남 26 승주읍 도평리 신현우 (申炫雨) 남 20 승주읍 도평리 김만옥 (金萬玉) 남 26 승주읍 두월리 13 장순심 (張巡心) 여 41 승주읍 유흥리 총계 경찰 자료 유족회 희생자 명단 확인 / 추정 여부 기타 총 13명 (확인 12명/ 추정 1명) <표 5> 승주읍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번 1 희생 장소 지역 장소 승주읍 기타 지역 세부 희생시기 가해주체 국군 12연대 승주읍 서평리 뒷산 1949년 서정재 고재, 승주지서 등 1월 1949년 12월 쌍암지서 경찰 총계 희생자 수 추산치 확인 13명195) 외 다수 12명 13명 외 다수 12명 비고 3) 서면 희생사건 서면은 광양, 구례, 순천을 잇는 길목에 위치, 반군과 진압군의 주요 이동경로였던 까닭 에 지역 주민의 피해가 컸다.196) 특히 구랑실재는 순천에서 광양으로 넘어가는 주요 교통 195) 승주읍 희생자 수(승주읍 거주 14, 확인 13, 추정 1). 196) 서면은 순천지역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사건이 접수된 곳이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47

76 제3권 요지였다. 또한 서면지역은 백운산과 인접해 있어 빨치산토벌을 위해 오랫동안 군인들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전쟁기까지 민간인 희생이 이어졌다. 한편, 일제하부터 농 민조합운동이 활발했던 역사적 배경은, 군경이 서면을 좌익의 근거지로 판단하게 하는 요인이 되어 더 큰 피해를 낳았다.197) 여수순천 탈환작전이 벌어진 10월 20일부터 24일까지 서면에는 제3연대 2ㆍ3대대, 4 연대 2개 중대, 12연대 1ㆍ3대대, 15연대 1대대가 진압작전을 펼쳤고, 진압이 마무리된 1949년부터는 제15연대 2대대가 서면 판교리 부근에 주둔하면서 반군협조나 반란가담 등의 혐의로 민간인들을 연행 및 구금하고 사살하였다. 서면지서 경찰들도 반군협력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서면 거주 민간인들을 구타한 뒤 지서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하거나 구금 뒤 사살하였다. 서면지서 주임 안198) 과 학구출장소 소장 구199)은 그 과정에서 직접적인 사살 지시를 내린 인물로 평가되 고 있다. 실제 서면지역 신청인들의 대다수가 가해자로 서면지서 경찰, 특히 안을 지 목하고 있다.200) 이러한 은 경찰 참고인 조사에서도 확인된다. 서면지서 한청단원과 의경으로 활동했던 황ㆍ배ㆍ서는, 지서주임 안이 많은 사람들을 잡아 엄하게 다뤘고, 서면 사람들을 많이 죽였다고 했다.201) 자기 비위에 맞지 않고 눈에 거슬리면 공산당으로 몰아 죽였고, 선평리 구장 허만관도 반군에 협조했다고 죽였다고 말했다.202) 이에 대해, 참고인 안은 그런 사실이 없다 며, 본인은 지역주민을 보호 하려 노력했다 며 본인과 관련된 에 대해 전면 부인했다.203) 학구지서 주임 구도 반군협력 혐의자를 가혹하게 처리했다. 서면 학구파출소 의경 197) 참고인 안 녹취록( ); 참고인 장 면담보고서( ). 198) 참고인 안의 과 그의 인사기록을 종합하면, 그는 평안도 용천 출신으로 1946년 봄에 월남하여 서면 광산부근 사택에서 생활하면서 서북청년단으로 활동했다. 이후 1948년 6월 9일 순경으로 임명되어 해남서, 순천서에서 근무하다 여순사건이 터지자, 순천시내 향림사 부근으로 피신했다. 순천이 진압된 10 월 28일경 순천서로 돌아와 사찰형사주임을 맡다, 1948년 11월 29일 경사로 승진되면서 서면지서 주임 으로 발령받았다. 진실화해위원회는 강원지방경찰청에 안의 경력증명을 의뢰했다. 안은 5ㆍ16 군사쿠데타 이듬해인 62년 의원면직했다. 군부의 강요에 의한 면직이었다고 안은 했다. 강원지 방경찰청, <요청자료 송부>, 경무과-6642( ). 199) 구은 참고인 조사과정에서 당시 서면 면장이었던 장인 유영채가 반군에 의해 희생되어, 적개심에 불 탔다고 했다. 학구출장소 부임 전 구은 별량면 지서주임을 지내면서 별량지역 민간인 희생과정 에 깊숙이 개입했다. 참고인 구 통화보고서( ); 참고인 구 녹취록( ). 200) 신청인 정재종 통화보고서( ); 신청인 송순심 ( ); 신청인 박영규 ( ); 신청인 이상호 ( ). 201) 참고인 서 ( ). 202) 참고인 황 녹취록( ); 참고인 배 녹취록( ). 203) 참고인 안 녹취록(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으로 구과 함께 근무한 참고인 서는 구례로 가는 길목인 송치재에서 전기통신 망 파괴가 잦자, 학구지서 주임 구이 젊은 사람들을 많이 잡아서 죽였다 면서, 한번 은 장척마을 주민 윤두한을 반군에 밥을 해줬다는 혐의로 학구마을에서 장척마을로 가 는 중간지점에서 즉결처분했다 고 했다. 당일 서는 학구마을에 있었는데 이튿날 들어서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204) 윤두한과 관련하여, 참고인 구은 자신의 지시로 부하 경찰들이 윤두한을 사살했다며, 즉결처분을 시인했다. 본인은 민간인 피해를 최소화 하려고 했으나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고 덧붙였다. 205) 안과 구이 거론된 사건 들은 여순사건 당시 혐의의 사실 여부보다는, 지역 치안책임자의 개인적인 판단이나 감 정 또는 모함이 더 중요한 사살이유가 될 수도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사결과, 서면지역의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희생자 수와 유형에서 몇 가지 특징을 보인다. 대규모 집단희생사건 변복 등의 기만술 동원 대살 등이 그것이다. 서면 판 교리와 용계산에서 1949년에 걸쳐 주둔 부대와 지서경찰에 의해 도합 100여 명 이상의 피해자를 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 벌어졌다. 서면에 주둔한 15연대 2대대와 광양에서 출동한 15연대 1대대는 반군 및 빨치산으로 변복한 후 이를 착각한 주민들을 무차별 사 살했다. 또한 반군협조자 혐의로 이미 사살되거나,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일 가족을 찾아 몰살하기도 했다.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희생사건 판교리 노은마을 희생사건 은 1949년 3월 19일(음 ) 서면지서 경찰에게 인계받은 반군혐의 민간인들을 서면 판교리 주둔 15연대 2대대가 주둔지 부근에서 집단으로 사살 한 사건이다. 206) 조사결과, 약 100여 명의 주민들이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나, 진실위원회 에서 확인된 희생자는 정태구(직다-6384, 19세), 김홍연(직다-6385, 24세) 2명이다. 참고인 정막례의 에 따르면, 운평리 용당마을에 거주했던 지방좌익 정민택의 부탁 으로 정민택 동생 정을 비롯하여 마을주민 정태구, 김홍연, 김봉기, 김영두가 반군에 게 쌀을 갖다준 일이 있었다. 운평리 용당마을 뒷산은 노은마을 산과 연결되는 반군들의 근거지였다. 1949년 3월 18일경(음 경) 서면지서 주임 안과 경찰들은 양씨마을 204) 참고인 서 ( ). 205) 참고인 구 녹취록( ). 206) 미군 G-2 기간보고에는 1949년 3월 25일 1개 국군 소대가 생포된 반란군들의 안내를 받아 순천에 있는 반란군 거점을 공격했다. 반란군 6명이 사살됐다 고 기술되어 있다.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 )(주한미군 정보일지) 제7권, 한림대 아시아문화연구소, 1989, 419p. 순천지역 여순사건 549

78 제3권 초상집 문상 중인 정태구, 정, 김봉기, 김영두, 김홍연 등을 구타한 뒤 연행했다. 인근 월곡마을에서 체포되어 끌려온 정운용과 함께였다. 그들은 지서에서 하루 감금되어 있다 가, 3월 19일경(음 경) 서면 판교리 노은마을 뒷산에 주둔했던 15연대 2대대에 인계 되었다. 15연대는 노은마을 뒷산에서 같이 끌려온 판교리 주민 100여 명과 함께 정, 정태구, 김홍연, 김봉기, 김영두를 사살했다. 정용운은 총알이 빗맞아 죽은 척해 기적적으 로 살아남아, 당시 현장을 증언한 뒤 몇 년 전 사망했다.207) 민간인들을 15연대에 2대대 에 인계한 경찰 책임자로 지목된 참고인 안은 이 사건에 대해 있을 수 없는 일 이라 며, 해당 사건 자체가 사실무근 이라고 전면 부인했다.208) 그러나 서면지서 한청단원으 로 안과 함께 근무한 참고인 배은, 서면 사람들 100여 명이 서면 판교리 노은마 을 야산에서 주둔부대에게 사살됐다고 했다.209) 용계산 계곡 집단희생사건210) 서면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인 용계산 계곡 사건은 1949년 9월 24일에 서 26일(음 )에 걸쳐 주둔 부대인 국군 15연대 1대대와 서면지서 경찰들이 서 면 구상ㆍ흥대ㆍ연동마을 주민들을 반군에 협조했다는 혐의로 집단으로 사살한 사건이 다. 일부 신청인들은 당시 가해부대를 3사단 백골부대라고 지목하고 있으나, 조사결과 이 사건의 가해군경은 15연대 1대대ㆍ2대대, 서면지서 경찰인 것으로 드러났다. 한편, 15연대는 1949년 9월 26일(음 8. 5.) 서면지역 외에도 인접한 월등면 양지맷골에서 주 민들을 집단으로 사살했다.211) 용계산 계곡 집단희생사건에는 특히 일가족이 몰살된 경우가 많았다. 특히, 국군 15연 대는 반란가담ㆍ반군협력 혐의를 받아 사살되거나,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가 족을 색출하여 몰살했다. 15연대는 반군에게 죽은 군인들에 대한 보복으로, 서면 구상리 ㆍ흥대리ㆍ판교리 거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212) 이는 반군협력자 가족 살해로서 대살 207) 참고인 정막례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정하용 ( ). 신청인 정하용이 제출한 제적등본 상에는 1949년 2월 20일 서면 판교리 390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한편, 신청인 김성기가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김홍연이 1949년 3월 23일 서면 판교리 산 미상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김성기는 희생자 김홍연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김성기 ( ). 208) 참고인 안 녹취록( ). 209) 참고인 배 녹취록( ). 배이 안을 기억한다고 말하자, 안은 배이 누군 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참고인 안 녹취록( ). 210) 조사결과, 용계산 계곡은 서면 구랑실재 뒤 구상리 안골 골짜기, 혹은 앵기산 깊은 골짜기로도 불린다. 본 보고서에서는 지명의 구체성을 위해 용계산 계곡으로 표기했다. 211) 월등 양지맷골 사건 참조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7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 代 殺 )로 볼 수 있다. 여순사건은 진압부터 토벌까지 일종의 보복전이었다. 용계산 계곡 사건은 1949년 9월 24일에서 26일(음 )에 3일에 걸쳐 일어났고 사살은 24일과 26일 자행됐다. 먼저, 참고인 문덕심의 에 따르면, 1949년 9월 24일(음 8. 3.) 15연대 군인들은 구상 마을에 거주했던 일가족 박임석(직다-5302, 56세), 정현순(직다-5302, 50세), 박영구(직다 -5303, 21세), 사촌 박태윤(다-6653, 24세)을 용계산 계곡에서 사살했다. 213) 반군가족이라 는 것이 이유였다. 박임석 일가족 살해 후, 3일 동안 구상리, 대흥리, 판교리에서 민간인 을 대상으로 한 사살이 시작되었다. 다음날 15연대는 인근마을인 세동마을로 향했다. 세동마을에서 15연대는 변복이라는 기만술로 마을주민들을 농락했다. 신청인 박정석의 에 따르면, 조계산 방향으로 도주 하던 14연대 반군이 구상리 세동마을 거주 박상교(직다-3001, 48세)에게 밥을 해달라 해, 어쩔 수 없이 동네사람 몇 명과 쌀을 거둬 밥을 해준 일이 있었다. 1949년 9월 25일(음 8. 4.) 반군 복장의 군인들이 밥해준 은혜를 갚고자 한다며 마을에 당도했다. 서면에 주둔했 던 15연대가 협력자를 색출하기 위해 빨치산으로 변복하여, 마을로 들어온 것이다. 그들 은 마을구장을 속여 결국 밥을 해준 박상교의 집을 알아냈다. 박상교의 연행과정을 목격 한 신청인 박정석(당시 16세)의 이다. ( )비가 많이 오는 저녁 10명 내외의 산사람 행색을 한 사람들이 마을에 와 강 반장 212) 신청인 김용순 ( ). 신청인 김용순은 15연대가 주민들을 사살하면서, 20여 명의 동료 를 죽인 반군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한 것을 나중에 들었다고 했다. 이와 관련하여 15연대 1대대 1중 대 소속 참고인 정는 1949년 9월 18일 15연대 1대대본부가 주둔했던 광양 서국민학교가 반군들의 습 격을 받아, 20여 명의 피해를 입은 일이 있었다고 했다. 참고인과 신청인의 을 종합하면, 빨치산 의 습격을 받은 15연대 1대대는 반격에 나서, 사건발생 6일 만인 1949년 9월 24일 서면지역에 당도했다. 광양 서국민학교와 서면은 불과 4k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위치해 있다. 참고인 정 통화보고서( ). 213) 참고인 문덕심 통화보고서( ); 신청인 공복덕(직다-5302) ( ); 신청인 공복 덕(직다-5303) ( ); 신청인 문덕심 ( ). 신청인 공복덕이 제출 한 제적등본에는 박임석과 정의 사망일시ㆍ장소가 1949년 9월 5일 서면 구상리 산 109번지로 기재 되어 있고, 박영구는 1949년 9월 30일 서면 학구리 산 미상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참 고인과 신청인들이 주장하는 사건일시는 1948년 음력 8월 3 5일로, 이는 양력으로 9월 24 26일이다. 1949년 9월 30일로 기재된 박영구를 제외하고, 나머지 9월 5일로 기재된 희생자들의 희생일자와 9월 24 26일은 차이가 있는데, 신청인들은 제적등본상의 사망일자가 사건일자와 일치한다고 주장하고 있 다. 사건 전 해였던 1948년에 음력과 양력이 정확히 한 달 차이였던 점, 1949년은 윤달이 있던 해로 7 월이 두 번 있던 점 등을 혼동하여 음력 8월 5일을 양력 9월 5일이라고 착각한 듯하다. 한편, 서면 면사 무소에 확인했으나, 사망장소로 등재된 구상리 산 109번지가 용계산 계곡 골짜기를 의미하는지는 확인 할 수 없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51

80 제3권 이라는 사람의 집에 들렀어요. 예전에 밥을 해줘 고마워 은혜를 갚겠다고 하며 당시 밥을 해준 사람들을 알려달라고 한 거지. 완벽히 속은 강반장은 박상교와 두 사람의 집을 알려주 었고, 그 사람들은 부친 박상교와 이성삼씨를 집에서 끌어내 동네 마당에 꿇어앉혀 놓았어 요. 그 사람들은 날이 새자 우리 집에만 불을 지른 뒤, 군복으로 갈아입고 이성삼씨를 집에 보내주는 거라. 그러고는 부친 박상교와 이웃 구상마을에서 연행된 여자들을 포함한 23명 을 백운산 가는 앵기산 깊은 골짜기214)로 끌고 갔어. 그 다음날부터 작은아버지 두 분이 앵 기산에 부친을 찾으러 가 3일 만에 머리에 총을 맞은 부친 박상교의 시신을 찾았어요. 칡넝 쿨에 묶어 지게에 짊어지고 왔어요. 당시 죽은 사람은 23명인데 우리 마을은 부친 1명이었 고, 거의 100호가 넘는 큰 마을인 구상마을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죽은 사람들은 30 40미터 간격으로 사람이 찾기 힘든 곳에서 총에 맞아 죽어 있었고, 몇 명인지는 모르겠지 만 여자들은 모두 옷이 벗겨진 채, 음부를 총에 맞아 죽어 있다고 숙부에게 들었어요. 개중 에 처녀도 있었다고 했어요.215) 같은 날인 1949년 9월 25일(음 8. 4.) 흥대리에서도 변복을 하고 나타난 15연대는 두 부 류로 나눠 작전 을 진행했다. 먼저 일부는 회의를 소집한다고 마을주민들을 동원했다. 나 머지 일부는 협박과 회유를 통해 밥을 해달라면서 마을주민들을 모았다. 15연대를 진짜 반군이라 착각하여 시키는 대로 회의에 나온 사람들과, 협박에 못 이겨 밥을 해준 사람들 모두 다음날 사살되었다. 당시 초등학생으로 사건을 목격한 참고인 박신호는 만약 밥을 해주었다면 부친도 꼼짝없이 돌아가셨을 것 이라며 다음과 같이 했다. 그때가 첫 벼를 베서 햅쌀로 밥을 지어먹은 때예요. ( ) 제가 초등학교 때인데, 그날 저 녁에 반군 행세를 한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왔어요. 마을에 각 집집마다 찰 정도로 많았어 요. 회의를 소집한 군인은 몇 안 되었어요. 우리 집 밑에 집에서 회의를 한다고 했어요. 마 을구장 박계호씨를 시켜서 회의에 참가할 사람들을 모으라고 했어요. 그때 군인들이 우리 집에도 와서 우리 아버지한테 밥을 해달라고 했어요. 저도 기억해요. 그런데 아버지가 보니 까 이 군인들이 반란군 같지 않았어요. 반란군치고는 숫자가 너무 많았어요. 아버지가 우리 집에 내 새끼들만 5명인데 밥을 못 해주고 있다고 사정을 했어요. 그러자 군인이 영감 쏴 죽인다 고 했어요. 지금도 그 말이 생생해요. 그래도 아버지가 거절을 했어요. 그랬더니 군 인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서 가더군요. 그러니까 (국군이 인용자) 반란군처럼 행세를 한 거예요. 만약 아버지가 밥을 해줬거나, 회의에 나갔다면 아버지도 화를 당했을 거예요. 그래서 그날 회의에 참석한 서면 사람들을 군인들이 너희들은 공산당이라며 구상리 용계산 214) 조사결과, 앵기산 깊은 골짜기는 용계산 계곡 골짜기와 같은 지명으로 확인됐다. 215) 신청인 박정석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8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문바위(문처럼 생긴 바위) 216) 뒤로 끌고 가 사살했어요. 74명이 죽었어요. 서면 흥대리 연 동부락에서만 박계호, 박정호(박계호 동생), 박선호, 박현석 4명이 죽었어요. 서면 구상리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들었어요. 여순사건이 나고 이듬해 일입니다. ( ) 군인들은 그날 하루를 머무르고 철수했습니다. 217) 서면 흥대리에 거주했던 박계호(직다-5010, 28세), 박현석, 박정호(직다-5011, 23세), 박 선호(직다-5920, 22세)가 이날 회의에 참가했고, 이 때문에 이들은 다음날 1949년 9월 26 일(음 8. 5.) 15연대에게 집을 소각당한 뒤, 용계산 계곡 골짜기에서 사살되었다. 218) 여기 에는 반군협조 혐의자 박영옥(직다-3733, 21세)의 모친 남동산(직다-3734, 59세)과 아내 임병순(직다-3734, 20세)도 집을 소각당한 뒤 끌려와 사살됐다. 219) 참고인 박정근의 에 따르면, 박영옥은 순천농림중학교 축산과 학생회장으로 여순사건 당시 학교연설 중 경찰에게 연행되어 이미 사살되었다. 220) 구상리에 살던 정일천(다-3735, 27세) 일가족도 용계산 골짜기에서 몰살당했다. 참고인 정병길의 이다. 여순사건이 나고 나서 다음해 가을 때쯤 되어 반란군이 서면 구상리에 내려와서는 사랑 방에 잠자던 사람들 5명을 용계산으로 끌고 가버렸는데, 그 이튿날 경찰들이 와서 어젯밤 끌려간 놈들은 모두 반란군들이라고 하면서, 5명의 집에 불을 질러버리고 그 가족들은 마 을 안 안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는 모두 총살하였던 것입니다. 그때 정일천 일가족 8명이 죽 었어요. 221) 참고인 정병길에 따르면, 15연대가 구상리 거주하는 신청인 정인순의 부친 정일천, 모 친 송삼덕(다-3735, 25세), 조부 정임조(연령 미상), 조모( 祖 母, 성명ㆍ연령 미상), 그리고 작은아버지 정병학(연령 미상), 작은어머니(성명ㆍ연령 미상), 임산부 고모(미신청, 성명 ㆍ연령 미상) 등 일가족 8명을 순천시 서면 구상리 마을 안골 골짜기에서 사살했다. 15연 216) 용계산 문바위는 용계산 계곡과 같은 장소이다. 217) 참고인 박신호 통화보고서( ); ( ). 218) 신청인 박양근 ( ); 신청인 박병준 ( ). 신청인 박양근은 아버 지 박계호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박양근ㆍ박병준이 제출한 제적등본상에는 박계호, 박 정호가 1949년 9월 5일 구상리 산 109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1949년은 윤달이 있는 해여서, 7월이 두 번 있었다. 신청인과 참고인 박신호가 주장하는 희생일자는 정확 히 일치한다. 219) 신청인 박정순 ( ); 참고인 박정근 통화보고서( ). 220) 참고인 박정근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정순 ( ). 221) 참고인 정병길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53

82 제3권 대는 사랑방에서 자다 반군에 끌려간 5명 중 머슴살이하던 삼촌 정씨(이름ㆍ연령 미상)가 있으니 너희들은 모두 반란군가족 이라며 임산부를 비롯한 일가족 모두를 사살했다.222) 판교리 참고인 이양의ㆍ이찬의ㆍ이항의의 을 종합하면, 1949년 9월 26일(음 8. 5.) 15연대가 판교리 평남정마을로 들어와 구장 김팔호에게 좌익분자의 집이 어디냐고 위협했다. 김팔호가 이기호, 송기충, 박홍기의 집을 지목했다. 15연대는 그 집에서 자던 이들을 끌어내고 집에 불을 지르고, 판교리 446번지 뒤편에서 끌고 온 사람들에게 구덩 이를 파게 한 뒤 그 구덩이에 밀어 넣었다. 15연대 군인들은 동료 20여 명을 죽인 반군 에 대한 보복이라며 이군보(직다-6868, 42세)와 박우남(직다-6868, 43세)은 사살했고, 이점례(직다-6868, 2세)는 돌로 찍어 죽였다.223) 참고인 이기창의 에 따르면, 송칠귀(직다-1352, 56세)의 일가족도 이날 사살되었 다. 1949년 9월 26일(음 8. 5.)밤 10시경 15연대는 송칠귀, 이효심(직다-1352, 42세), 김임 순(직다-1352, 26세)을 기동마을 보 인근 언덕에 미리 파놓은 구덩이에 넣고 생매장했다. 세 살짜리 막내 송기화(직다-1352, 3세)도 구타를 당한 뒤, 살해되었다. 15연대는 송칠귀 의 아들 송정섭이 반군에 가담했다는 이유를 들어, 그 가족을 살해했다. 사건 전 송정섭 은 군경에 의해 사살되었다.224) 같이 희생된 공재권(직다-1381, 44세)의 가족도 비슷한 경우였다. 참고인 정현종의 진 술에 따르면, 15연대는 반란군협조 이유로 흥대리 거주 공재권, 만삭 임산부 오연심(직다 -1381, 37세), 당숙모 등 마을주민 19명을 서면 용계산 계곡 골짜기에서 사살했다. 신청인 공준모의 에 따르면 동네어른들이 시신을 수습하러 갔을 때 태아가 오연심의 배 밖 으로 튀어나온 채 죽어 있었다.225) 사건 전 공재권의 형 공종모가 반군 식량을 산으로 운 반해줘 도피 중에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226) 222) 참고인 정병길 ( ). 당시 7살이었던 신청인 정인순은 사건을 전혀 기억 못 할 뿐만 아니라, 가족의 이름조차 모르고 살았다고 했다. 가족이 몰살당해 고아로 자란 신청인은, 호적에 홀 로 등재되어 있다. 부친의 본적을 알길 없어 신청인이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신청인의 부친이 정명 미상 (鄭名未詳)으로 기재되어 있다. 참고인 과정에서 언급된 정임조 및 조모(祖母)는 제적등본상 신원을 알 수 없어, 미신청 희생자로 확인할 수 없었다. 신청인 정인순 ( ). 223) 참고인 이양의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항의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찬의 통화 보고서( ). 신청인 김용순이 제출한 제적등본상에는 희생자 이군보가 1949년 8월 4일 오전 서 면 판교리 246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김용순은 희생자 이군보, 박우남, 이점례의 시신을 친인척 이건우(사망)가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김용순 ( ). 224) 참고인 이기창 통화보고서( ). 225) 신청인 공준모 면담보고서( ). 226) 이후 서면지서에 자수한 공종모는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서면 경찰들에 의해 서면 학구 3거리 현 순천 운전면허장 자리에서 수용된 사람들과 집단으로 사살됐다. 참고인 정현종 통화보고서( ); 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8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신청인과 참고인의 을 종합한 결과, 구상리, 판교리, 흥대리의 주민들이 포함된 이 사건의 희생자 수는 100여 명으로 추정되나,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희생자는 22명이다. 흥대리 정기석(직다-1368, 37세)의 경우, 참고인 정기성의 에 따르면, 순천 진압 후 인 1948년 10월 말경에 마을사람들과 같이 진압군에게 끌려간 뒤, 서면지서에서 취조를 받았다. 1948년 11월 14일경 군경이 정기석을 순천시 서면과 광양시 봉강면 경계 다리 근 처에서 사살했다. 친척들이 시신을 수습했다. 227) 양두남(직다-2329, 48세)의 경우, 1949년 10월 5일(음 ) 아침 15연대가 양두남 등 30여 명을 소집시켜 안골 계배나무골 발치로 끌고 가 사살했다. 228) 판교리 배형회(직다-9120, 20세)의 경우, 참고인 이기창의 에 따르면, 순천경찰이 1949년 2월 20일경 서면 판교리 거주 배형회 외 8명을 순천경찰서로 연행하여, 1949년 7 월 4일(음 6. 9.) 서면 학구리 송치재(대구실재)에서 사살했다. 229) 판교리 거주 박기래(직다-9121, 22세)는 여순사건 당시 밤에 반군이 와서 끌고 가려 해 산으로 도망갔다 내려왔는데 부재를 의심한 경찰에게 쫓겨 다시 산으로 도주했다.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왔던 박기래는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1949년 1월 10일 지본리 산 에서 사살되었다. 230) 한편, 서면지역 희생자 중에는 공무원들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먼저, 참고인 박영 규의 에 의하면 선평리에 살던 서면 면장 정기영(직다-1360, 41세)은, 여순사건 당시 시내 평화여관에 피신해 있었다. 진압 후 부임한 안 지서주임은 창고물품이 없어졌 다며 면장, 구장 등의 책임을 물어, 정기영에게 사표를 강권했다. 순천시 보도연맹 결성대 회로 여순사건 관련자 전원을 집합시킨 1949년 11월 20일, 서면 판교리 주둔 15연대 군인 들이 서면지서에 연행된 면장 정기영 등 12명을 주둔지 앞 골짜기에서 사살했다. 231) 정기 영 사퇴종용에 대해, 참고인 안 지서주임은 사실무근이라며 부인했다. 232) 선평리 정인택(직다-1354, 36세)의 경우, 1949년 11월 10일경 철도국 직원 정인택이 서 고인 공형모 통화보고서( ). 227) 참고인 정기성 통화보고서( ). 228) 참고인 이병철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현종 통화보고서( ). 229) 참고인 이기창 통화보고서( ). 230) 참고인 이기창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병도가 제출한 제적등본 상에는 박기래가 1949년 1월 10일 서면 지본리 야산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어, 신청인ㆍ참고인이 주장하는 희생일자와 일치한다. 231) 참고인 박영규 ( ). 신청인은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정재종 통화보고서 ( ). 232) 참고인 안 녹취록( ). 순천지역 여순사건 555

84 제3권 면지서로 출석하라는 통보를 받고 동네사람 4명과 출두했다. 서면지서에서 취조를 받은 이들은 주임 안에 의해 서면에 주둔한 3사단 군인들에게 신병이 인계되었다. 연행 한 달 뒤 12월 10일경 3사단 군인들은 주둔지 부근인 판교리 노은마을 앞 노은고지 골짜기 에서 정인택 등 11명을 사살했다. 233) 각 마을별 구장들의 피해도 컸다. 구상리마을 구장이었던 김용수(직다-3615, 34세)는 1948년 12월 16일(음 ) 서면 구상리에서 진압군에게 끌려간 뒤 살해됐다. 234) 선평 리의 경우, 참고인 김동수는 1949년 7월(음 6월) 초 서면지서 주임 안이 출두명령을 내려 선평리 구장 허갑진(직다-1357, 30세)이 같은 동네 사람 5명과 출석했고 5일 후 1949년 7월 2일(음 6. 7.) 경찰들이 지서에 잡혀 있던 30여 명과 함께 허갑진을 트럭에 태 워 순천 서면 압곡상리 야산(구상리 야산)에서 사살한 뒤 매장했다 며 사살현장에서 살 아남은 허진구에게 전해 들었다 고 했다. 또한 허진구의 증언으로 30여 구의 시신이 수습됐다 고 덧붙였다. 235) 1950년 1월 8일(1949. 음 ) 서면지서 경찰은 구장회의를 빌어 각 마을 구장들을 소집한 뒤, 지서주임 안이 이들을 판교리 노은마을에 주둔했던 15연대에 인계했다. 15연대는 이들을 주둔지에서 1km 떨어진 판교리 노은마을 월치재 인근 노은고지(지본고 지)에서 박병구(직다-1351, 28세), 주평마을 이장 박정규 등 12명을 사살했다. 236) 당시 광 양경찰로 서면에 거주했던 참고인 배은 판교리 출신 박병구가 억울하게 죽었다면서, 그때 10여 명이 같이 죽었다고 당시 사건에 대해 증언했다. 237) 선평리는 서면의 넓은 들판 가운데 있는 마을로, 구례에서 순천으로 진입하는 길목에 위치하여 진압군의 작전이동로에 해당되었다. 선평리 거주 김원기(직다-1367, 27세)의 경 우, 1950년 1월 9일(1949. 음 ) 서면 판교리에 주둔한 15연대 군인들이 김원기 등 12명을 논치고개에서 살해 후 매장했다. 238) 한편, 선평리는 허씨 집성촌 239) 으로 희생자의 상당수가 허씨이다. 당시 동산국민학교 5 학년으로 상황을 또렷하게 기억하는 참고인 허삼례의 에 따르면, 1948년 10월 22일 233) 참고인 정숙정 ( ). 신청인 정남두가 사망하여, 신청인의 아들 정숙정을 참고인으로 조사했다. 234) 신청인 김영기 ( ). 신청인 김영기(직다-3615)의 경우, 제출한 제적등본상의 사망일자 와 신청인이 주장하는 희생일자가 일치했다. 235)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236) 참고인 황계순 통화보고서( ). 237) 참고인 배 면담보고서( ). 238) 참고인 박영규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천일 ( ). 239) 참고인 허삼례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8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순천농림고등학교 학교간부 허영구(직다-7953, 19세)가 시내에 구경 간다고 나갔다가 군 경에게 살해되었다.240) 1948년 10월 24일 허규범(직다-1353, 21세)은 친구 허만욱과 총소리를 듣고 시내에 갔 다가 경찰에게 잡혀 순천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았다. 허규범은 주소를 거짓으로 말했다고 4일간 취조 및 고문을 당한 뒤, 10월 28일 순천 둑실골짜기(현 죽도봉 골짜기, 경찰서에서 1km 지점)에서 72명과 함께 순천경찰서 경찰들에게 사살되었다.241) 허만우(직다-3614, 26세)의 경우, 1948년 12월 26일(음 ) 경찰이 허만우 등 20여 명을 연행하여 황전면 비촌리 야산에서 사살하였다.242) 순천농림중학교 3학년 허필동(직다-1355, 19세)의 경우, 1949년 6월경 마을사람들 5명 과 같이 묶인 채 트럭에 실려, 서면 구상리 야산에서 약 50명과 함께 경찰에게 집단사살 되었다. 사건현장에서 총을 빗맞아 생존한 허진구는 마을로 생환했다.243) 허필동의 둘째 형인 순천철도국 직원 허필윤(미신청, 31세))은 1949년 12월 8일경(음 경) 밤 자 택에서 서면지서 경찰들에게 서면지서로 연행된 뒤 3 4일 뒤 지서 뒤 논두렁에서 경찰 에 사살되었다.244) 모함으로 숨어 다니던 허만두(직다-1357, 25세)는 1949년 3월 초순경 서면지서로 연행 되어 고문 받은 후, 경찰에게 사살되었다.245) 희생자 허정년(직다-1348, 24세)의 경우, 시신을 수습한 참고인 허우정의 에 따르 면, 1949년 6월 30일(음 6. 5.) 저녁 무렵 서면지서 경찰들이 허정년을 지서로 연행하여 3 4일 동안 구타 및 취조한 뒤 7월 4일(음 6. 9.) 허정년 등 70여 명을 차에 태운 뒤 서 면 학구 삼거리 부근 야산 현 순천자동차학원 자리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참고인 허우 정이 시신을 수습했다.246) 구상리는 광양과 경계를 이룬 순천 서면의 가장 동쪽에 있는 구랑실 분지의 서쪽 마을 참고인 허삼례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남석 ( ). 신청인 허문범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수길 ( ). 참고인 허신행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선행은 현 장에서 살아온 허진구가 자신은 다른 사람들이 총에 맞아 쓰러질 때 자신도 같이 쓰러지면서 죽은 척하 고 있다가 살아났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현장에서 신청인의 할머니와 아버지 허필성이 허필동의 시신 을 수습했다. 허진구는 2003년에 사망했다. 에서 신청인은 희생자 허필동의 이름을 허필윤으로 잘못 말했다. 신청인 허선행 ( ). 244) 허필윤의 형인 허필성과 허필윤의 부인이 그 시신을 수습했다. 참고인 허신행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선행 ( ). 245)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채구 ( ). 246)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240) 241) 242) 243) 순천지역 여순사건 557

86 제3권 로 구상, 마륜, 세동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구상리에서는 전술한 용계산 계곡 집단희생사 건의 희생자가 많았다. 당시 17세로 서면 구상리에 거주한 참고인 박홍규의 에 따르면, 1949년 11월경(음 10.경) 반군이 같은 마을 박태숙(다-6653, 21세)을 강제로 짐을 지게 해 데려간 뒤, 군경 에게 살해되었다. 247) 운평리의 경우, 참고인 위경엽은 남편 정추택(직다-1361, 28세)의 사살 광경을 직접 목 격했다. 248) 위경엽의 이다. 반란사건 나고 이듬해 봄입니다. 1949년 음력으로 3월 12일 아침에 갑자기 서면지서 경 찰들이 우리 집으로 와서 남편을 서면지서로 데려갔습니다. 지서에서 하룻밤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인 1949년 음력으로 3월 13일 아침에 저희가 아침밥을 해서 지서에 갔는데 경찰들이 남편을 산으로 데려갔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집에 왔는데 월곡마을 뒷산, 우리 집에서 보이는 덴데 멀지 않아요. 우리 집에서 그 골짜기가 다 보여요. 거기에서 경찰들이 남편하고 죽평마을 사람 대제씨란 분을 총으로 쏴 죽였어요. 멀지 않아서 제가 다 봤습니 다. 그래서 경찰들이 가고 바로 저와 시아버지, 저희 작은아버지 셋이 가서 남편 시신을 수 습해 월곡마을 공동묘지에 묻었습니다. 249) 1949년 4월 15일 오후 6시경 서면지서 주임 안과 경찰들이 운평리 월곡마을에 살 았던 정순원(직다-3885, 23세), 송기봉(직다-3886, 32세), 송기찬(직다-3882, 21세)을 반군 에 협력했다는 혐의를 들어, 서면지서로 연행한 후 15연대에 인계하여 동산리 산정마을 과 월산마을 사이 계곡에서 사살했다. 250) 희생자 송기찬의 아내로 시신을 목격한 참고인 김소근의 이다. ( ) 시아버님이 그날 현장에 있던 경찰인지 군인인지한테 들었다는데, 사람들을 바위 위에 올려놓고 총을 쐈대요. 총을 쏜 건 광양에서 온 백골부대 군인들이었다고 시아버지가 그랬어요. 그런데 (군인들이 총을 쏘기 전) 우리 집 양반이 잠깐 중지하라고 했대요. 그리고 는 사방으로 절을 하더래요. 부모님한테 절을 드린다고. 자기들이 죽여놓고 참 아까운 사람 247) 참고인 박홍규 통화보고서( ); 신청인 문덕심 ( ). 248) 경찰자료에는 정추택이 1949년 4월 6일 서면 동산리 월산부락 뒷산에서 아군에 사살된 자라고 기재되어 있어, 신청인이 주장하는 장소와 일시가 거의 일치한다. 순천경찰서, 보안기록조회회보서, ) 참고인 위경엽 통화보고서( ). 250) 참고인 송점섭 통화보고서( ); 참고인 송규연 통화보고서( ). 그날 밤 마을에서 울음 소리가 났고, 수습되어 집 마당에 놓인 피투성이 아버지 송기봉의 시신을 신청인 송순심이 목격했다. 신 청인 송순심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8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이 죽었다고 말을 하더래요. ( ) 시신을 봤더니 바로 명치를 한 군데 맞고 총알이 등을 뚫 었어. 남편 손을 잡아보니 손이 따뜻했어.251) 판교리의 경우, 참고인 강서봉의 에 따르면 서면 판교리 거주 순천 매산중학교 학생 최승수(직다-6650, 19세), 최승모(직다-6650, 17세)가 1949년 10월 18일경 글을 잘 쓴다는 이유로 반군에게 끌려가 산속에서 삐라 작성을 했다. 이후 서면지서 경찰들에게 체포된 최승수, 최승모는 구타와 고문 끝에, 서면 용담골 뒤 대장굴 부근에서 사살되었다.252) 1949년 5월 9일(음 ) 서면지서 경찰들이 판교리 옆 톳골 마을에 이르는 고갯길에 서 최순식(직다-7784, 28세)을 반군으로 여겨 사살했다.253) 2일 뒤 톳골마을 주민들이 알 려줘 시신을 수습했다.254) 그로부터 한 달 뒤인 1949년 6월경(음 5월경) 서면지서 경찰이 집에 들이닥쳐 최순식의 동생 최운식(직다-7785, 23세)을 연행했다. 반군동조 혐의를 받 고 있던 형 최순식 때문이었다. 참고인 허정업은 시동생의 연행을 목격했다. 이후 서면지 서 경찰들은 최운식을 사살한 것으로 추정된다.255) 참고인 허정업은 한 달 사이에 남편과 시동생을 잃었다. 운평리의 경우, 참고인 최진홍의 에 의하면, 빨치산들이 운평리 죽동마을에 살았던 최진숙(직다-8365, 20세)에게 동조하라 협박을 했고, 서면지서 경찰은 이를 알고 최진숙 을 잡으러 다녔다. 최진숙은 며칠 산에 은신하다가 경찰에게 발각돼, 1949년 8월 20일경 운평리 죽청 뒷산 중턱에서 사살되었다.256) 운평리에선 소개되어 지서 앞에서 잠을 자고 마을로 돌아가던 구장을 반군으로 착각하 여 사살한 경우도 있었다. 희생자의 시신을 목격한 참고인 장삼남의 에 따르면, 1949 년 여름 서면 운평리는 빨치산의 잦은 출몰로 마을사람들이 지서 앞으로 소개되어 노숙 을 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서면지서 경찰들이 마을 앞으로 뛰어가던 죽동마을 구 장 최진옥(미신청, 당시 31세)을 반군으로 착각하여 사살했다. 장삼남은 당시 13살로 학 251) 참고인 김소근 면담보고서( ); 신청인 송영종이 제출한 제적등본상의 사망일자와 신청인ㆍ 참고인이 주장하는 희생일자는 정확히 일치한다. 신청인은 친지들과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 인 송영종 통화보고서( ). 252) 참고인 강서봉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정종채는 희생자 최승수, 최승모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정종채 ( ). 253) 참고인 정운식 ( ). 254) 참고인 정운식 ( ); 참고인 허정업 통화보고서( ); 신청인 최병선(직다 -7784), ( ). 255) 참고인 허정업 통화보고서( ); 신청인 최병선(직다-7785) ( ). 256) 참고인 최진홍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재근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59

88 제3권 교 파하는 길에 희생자 최진옥의 시신을 목격하였다. ( )총 맞아서 얼굴이 이만큼 부었더라고요. 달려가는 걸 쐈으니까 뒤에 어딘가를 총에 맞은 거 같더만. 외숙모가 울면서 외삼촌(최진옥 인용자)을 부축하니까 입에서 피가 철철 흘렀어요. 257) 운평리 최진영(직다-7866, 27세)의 경우, 참고인 최진홍의 에 따르면, 1949년 11월 경 서면지서 경찰들이 운평리 죽동마을에 살았던 최진영을 연행하여 고문한 뒤, 1949년 11월 19일경 지본리 뒷산에서 끌려온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사살했다. 258) 1949년 12월 9일(음 ) 서면지서 경찰들이 서면 운평리 거주 김정기(직다-9114, 당시 33세)를 집에서 연행하여 3일 동안 취조와 고문을 한 뒤, 1949년 12월 12일(음 ) 서면 죽청마을 곰바굴 계곡에서 10여 명과 함께 사살했다. 259) 압곡리의 경우, 참고인 박영규의 에 따르면, 배학선(직다-1358, 27세) 등 마을사람 12명은 서면지서로 출두하라는 경찰의 통보를 받고, 1950년 1월 9일(49년 음 ) 지 서에 갔다. 지서 경찰은 배학선 등 12명을 서면 판교리 노은고개에 주둔하던 15연대에 인 계했고, 3사단 군인들은 주둔지 인근 고개에서 배학선 등 12명을 사살 후 매장했다. 260) 시신을 현장에서 직접 수습한 신청인 배금엽은 다음과 같이 했다. 그때가 음력 11월경이에요. ( ) (집나간 지 인용자) 한 달이 넘어도 오빠 소식이 없었 어요. 마을사람들이 하는 말이 오빠가 행방불명되고 한 달 지났을 때 판교리 노은마을 논치 재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총소리가 났다는 걸 누가 들었댔어요. 거기에 사람들 시신이 있 다고 했습니다. 부모님과 남편이랑 저, 오빠 각시가 시신을 찾으러 갔는데, 달포를 헤매다 찾았어요. 시체들이 엉켜 있었어요. 시신들을 떼어놓으려니 막 옷도 헤지고. 오빠 각시가 오빠 시신을 알아보고 찾았어요. 12명이 죽었어요. 서면지서장 안이 지시를 해서 지서 257) 참고인 장삼남 ( ). 258) 참고인 최진홍 통화보고서( ). 신청인 최택철은 희생자 최진영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 다. 신청인 최택철 ( ). 259) 참고인 정운식 ( ); 신청인 김영주 ( ). 신청인은 시신을 수습했다 고 했다. 신청인이 제출한 제적등본상에는 희생자 김정기가 1949년 10월 20일 오전 5시 서면 운평리 37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은 사망일자가 제적등본과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한편, 사건일자 음력 10월 20일이 제적등본에 양력 10월 20일로 기재되어 있는 것은, 음양력을 구분하지 않고 10월 20일로 사망신고를 했을 가능성과, 음력 10월 20일로 신고했으나, 기입과정에서 양력으로 환산되지 못하고 바로 10월 20일로 기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신청인 김영주의 제적등본은 희생자의 사 망일자와 비교적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260) 참고인 박영규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8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에 잡은 오빠랑 다른 사람들을 차에 실어서 논치재로 데려가 구덩이를 파놓고 경찰들이 죽 였다고 들었어요. 261) 여순사건 당시 압곡마을에는 반군을 피해 경찰 2명이 마을대숲으로 숨어들었다가 뒷산 으로 도망간 일이 있었다. 지방좌익들은 압곡마을 거주 박호지(직다-9111, 21세)를 대동 하여 경찰을 쫓았고, 산에서 체포하였다. 당시 세무서원으로 형편이 좋아 좌익들 집회에 자주 불려나갔던 박호지, 정동선(직다-9114, 당시 19세), 장은 마을대표 3인으로 경찰 에 대한 사형집행 참관인 란에 서명했다. 여순사건 진압 뒤, 군경이 압곡마을 주민들을 소집해 반군협조자들을 색출했다. 박호지와 정동선은 위협을 느껴 뒷산에 숨었다. 1948년 11월 20일경 군경토벌작전 과정에서 체포된 박호지, 정동선은 당일 저녁 나머지 1명의 참 관인 장씨(이름 미상)와 함께 서면지서로 연행되었다. 박호지는 강요에 의한 것이라 항변 했으나, 지서 경찰은 그가 서명한 문서를 제시했다.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고, 결국 사망했 다. 경찰들은 박호지를 지서 밖으로 끌어내 확인사살했다. 11월 22일 지서에서 연락이 와, 시신을 수습했다. 시신에는 고문과 구타, 총상의 흔적이 있었다. 262) 두 달 뒤 정동선이 군 산에서 사살되었다고 서면지서에서 연락이 왔다. 263) 지본리는 경주 김씨들의 집성촌으로 일제하 순천지역 사회운동가이자, 해방 이후 순천 군 인민위원장을 지냈던 김기수의 고향이었다. 264) 희생자의 동네친구였던 참고인 황계윤 의 에 따르면, 지본마을에 거주했던 김희곤(직다-3002, 18세)은 해룡면 신대리 어머 니 댁에 나무를 해주고, 1949년 4월 14일(음 ) 돌아오던 길에 반란군을 만나고 온 것 이라며 토벌대에 의해 순천농림중학교로 연행되었다. 그곳에는 지본리 주민들과 다른 면 사람들도 많았는데, 일부는 풀려나고, 김희곤을 포함한 일부는 순천농림중학교 옆 산 밑 공터에서 사살되었다. 265) 청소리의 경우, 1948년 11월 30일(음 ) 오후 반군들이 집으로 와 황전면 평 촌리 가는 길을 안내해달라며 청소리에 살던 김철중(직다-1366, 24세)을 데리고 갔 다. 김철중은 다음날 귀가했다. 1948년 12월 1일(음 ) 아침 서면지서 경찰들이 261) 신청인 배금엽 통화보고서( ). 262) 참고인 박정애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철근이 제출한 제적등본 상의 사망일자는 1948년 11월 20일로 신청인과 참고인이 주장하는 사건일자와 정확히 일치한다. 263) 참고인 박정애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철근 ( ); 신청인 정동우 ( ). 264) 참고인 조창환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철근 ( ). 265) 참고인 황계윤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종길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61

90 제3권 김철중을 비롯한 마을주민 최봉채, 최상문 등을 연행했다. 빨치산을 도와줬다는 혐 의였다. 1948년 12월 4일(음 ) 서면지서 경찰들은 이들을 순천경찰서로 이송했 고, 그 후 경찰은 순천지역 산골짜기에서 김철중, 최봉채, 최상문 등을 집단으로 사 살했다.266) 진압군경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단지 기분만으로 민간인을 사살한 경우 도 있었다. 참고인 윤정한의 에 따르면, 서면사무소 공무원 양경식(직다-1350, 26세)은 1948년 11월 20일 출근길에 경찰 약 10명이 마을 앞에서 주민 9명을 몽둥이로 구타하 는 것을 목격했다. 경찰 한 명이 너도 반군동조자지? 하며 구경하던 양경식을 덩달아 폭행했다. 경찰은 양경식 등 10여 명을 철삿줄로 묶어 서면지서로 연행하여 칼빈총 개 머리판으로 구타했다. 이후 10여 명은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어 취조실에서 5일 동안 고 문당했다. 1948년 11월 25일경 순천경찰은 양경식과 수감되어 있던 또 다른 이들이 포함된 30여 명을 생목동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에서 사살했다. 시신은 소각ㆍ 처리되었다.267) 1949년 9월 28일(음 8. 7.경) 군인들이 청소리에 들어와 마을사람들을 연행하고 집에 불 을 질렀다. 소각하던 군인들이 구경하던 마을소년 서병중(직다-3369, 12세)을 간 큰 놈이 라며 사살했다.268) 조사결과, 서면 희생자는 400여 명으로 추산(<표 7> 참조)되나, 진실화해위원회가 신 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63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는 아래 <표 6>, <표 7>과 같다. <표 6> 서면지역 희생자 신원 확인 희생자 연 번 1 확인근거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허정년 (許正年) 남 24 서면 선평리 1348 경찰 참고인 자료 시신수습 여부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확인 / 추정 기타 여부 확인 266) 참고인 김순모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선문 ( ). 267) 참고인 윤정한 통화보고서( ); 신청인 양병옥 ( ). 순천경찰서에서 작성한 뺷사실조사서뺸에는 양경식이 사살된 자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특이사항에는 부역사실 유무가 불 확실하다고 적고 있다. 순천경찰서, 뺷사실조사서뺸(1980). 268) 참고인 김순모 통화보고서( ); 참고인 서중석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2 3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양경식 ( 楊 炅 植 ) 박병구 ( 朴 炳 球 ) 남 26 남 28 시신이 불에 서면 죽평리 1350 타 재를 가져옴 서면 판교리 (사망일자 일치) 확인 1351 확인 4 송칠귀 ( 宋 七 貴 ) 남 56 서면 판교리 1352 확인 5 이효심 ( 李 孝 心 ) 여 42 서면 판교리 1352 확인 6 김임순 ( 金 壬 順 ) 여 26 서면 판교리 1352 확인 7 송기화 ( 宋 基 和 ) 남 3 서면 판교리 1352 확인 8 허규범 ( 許 圭 凡 ) 남 21 시신이 서면 선평리 1353 불에 타 재를 수습 (사망일자 일치) 확인 9 정인택 ( 丁 仁 澤 ) 남 36 서면 선평리 1354 사망신고 안 됨 확인 10 허필동 ( 許 弼 同 ) 남 19 서면 선평리 1355 확인 11 허갑진 ( 許 押 震 ) 남 32 서면 선평리 1357 확인 12 허만두 ( 許 萬 斗 ) 남 26 서면 선평리 1357 사망신고 안 됨 확인 13 배학선 ( 裵 學 善 ) 남 29 서면 압곡리 1358 확인 14 정기영 ( 鄭 基 榮 ) 남 41 서면 흥대리 1360 사망신고 안 됨 확인 15 정추택 ( 鄭 樞 澤 ) 남 28 서면 운평리 1361 확인 16 김철중 ( 金 喆 中 ) 남 24 서면 청소리 1366 확인 17 김원기 ( 金 源 基 ) 남 27 서면 선평리 1367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563

92 제3권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정기석 ( 鄭 基 碩 ) 공재권 ( 孔 在 權 ) 오연심 ( 吳 連 心 ) 양두남 ( 梁 豆 男 ) 박상교 (박상교) 김희곤 ( 金 熙 坤 ) 서병중 ( 徐 丙 中 ) 허만우 ( 許 萬 佑 ) 김용수 ( 金 容 洙 ) 박현석 ( 朴 現 錫 ) 박영옥 ( 朴 永 玉 ) 남동산 ( 南 東 山 ) 임병순 ( 林 炳 順 ) 정일천 (정일천) 남 37 남 45 여 38 여 48 남 48 남 18 남 46 남 26 남 34 남 33 남 18 여 59 여 20 남 27 서면 흥대리 1368 확인 서면 흥대리 1381 (사망일자 일치) 서면 흥대리 1381 (사망일자 일치) 서면 흥대리 서면 구상리 확인 확인 2329 확인 3001 확인 서면 지본리 3002 사망신고 안 됨 서면 청소리 3369 (사망일자 일치) 서면 선평리 3614 (사망일자 일치) 서면 구상리 3615 (사망일자 일치) 서면 흥대리 3616 (사망일자 일치) 서면 구상리 서면 구상리 서면 구상리 서면 구상리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3733 확인 3734 확인 3734 확인 3735 확인 32 송삼덕 ( 宋 三 德 ) 여 25 서면 구상리 3735 확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송기찬 ( 宋 基 贊 ) 정순원 ( 鄭 順 源 ) 송기봉 ( 宋 基 琫 ) 박계호 ( 朴 桂 浩 ) 박정호 ( 朴 政 浩 ) 박선호 ( 朴 繕 浩 ) 박임석 ( 朴 壬 錫 ) 정현순 ( 鄭 玄 順 ) 남 21 남 24 남 32 남 28 남 21 남 22 남 56 여 50 서면 운평리 3882 (사망일자 일치) 서면 운평리 3885 (사망일자 일치) 서면 운평리 3886 (사망일자 일치) 서면 흥대리 5010 (사망일자 일치) 서면 흥대리 5011 서면 흥대리 (사망일자 일치)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5290 확인 서면 구상리 5302 (사망일자 일치) 서면 구상리 확인 5302 확인 41 박영구 ( 朴 永 求 ) 남 21 서면 구상리 5303 (사망일자 일치) 확인 42 정태구 ( 鄭 泰 龜 ) 남 21 서면 운평리 6384 (사망일자 일치) 확인 43 김홍연 ( 金 烘 淵 ) 남 24 서면 운평리 6385 (사망일자 일치) 확인 44 최승수 ( 崔 昇 壽 ) 남 19 서면 판교리 6650 확인 45 최승모 ( 崔 昇 模 ) 남 17 서면 판교리 6650 (사망일자 일치)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565

94 제3권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박태윤 ( 朴 泰 允 ) 박태숙 ( 朴 泰 淑 ) 이군보 ( 李 羣 甫 ) 박우남 ( 朴 禹 南 ) 이점례 (이점례) 최순식 ( 崔 順 植 ) 최운식 ( 崔 雲 植 ) 최진영 ( 崔 鎭 永 ) 남 24 남 21 남 42 여 43 여 2 남 28 남 23 남 27 서면 구상리 서면 구상리 6653 확인 6653 확인 서면 판교리 6868 (사망일자 일치) 서면 판교리 서면 판교리 서면 운평리 서면 운평리 서면 운평리 확인 6868 확인 6868 확인 7784 확인 7785 확인 7866 확인 54 허영구 (허영구) 남 19 서면 선평리 7953 확인 55 최진숙 ( 崔 鎭 淑 ) 남 20 서면 운평리 8365 확인 56 박호지 ( 朴 浩 志 ) 남 21 서면 압곡리 9111 (사망일자 일치) 확인 57 정동선 ( 鄭 東 善 ) 남 19 서면 압곡리 9113 확인 58 김정기 ( 金 正 基 ) 남 33 서면 운평리 9114 확인 59 배형회 ( 裵 炯 檜 ) 남 20 서면 판교리 9120 확인 60 박기래 ( 朴 錤 來 ) 남 22 서면 판교리 9121 (사망일자 일치) 확인 61 최진옥 ( 崔 鎭 玉 ) 남 31 서면 운평리 미신청 확인 62 허필윤 ( 許 弼 允 ) 남 31 서면 선평리 미신청 확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63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김옥태 (김옥태) 남 31 서면 선평리 미신청 확인 총 63명(확인 63명) 연 번 <표 7> 서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희생 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비고 1 서면 판교리 노 은마을 월 치재 인근 노은 고지 (지본고지) 삼양식품 순천지점 뒷 산(판교리와 지본리 경 계, 월치재 우측) 약 7 부 지점 골짜기 1949년 3월 국군 15연대 서면지서 경찰 사건 당시 약 120명 269) 9명 270) 정상에 군부 대 주둔 2 서면 송치재 순천-구례간 17번 국 도 송치터널 1948년 10월 1949년 국군 12연대 월등지서 경찰 5명 271) 외 다수 2명272) 3 서면 서면 용계 산 안골 4 서면 대구실재 5 서면 구랑실재 6 서면 기타지역 계룡재 남쪽 비봉산 상 봉 좌측 안골 골짜기의 좌측 둔턱 학구3거리 남서쪽 약 150미터 지점, 현 순천 자동차 전문학원 뒤 언 덕 포장도로 우측 서정 수 씨 농장 출입문 주변 언덕 서면 압곡리 산 일대 야산 및 골짜기 (서면 압곡리 뫼골 우 측 골짜기) 서면지서 등 개별 사건 장소 1949년 9월 1948년11월 1949년 12월 1948년 11월 1949년 12월 1948년 10월 1950년 국군 15연대 서면지서 경찰 서면지서 경찰 주암지서 경찰 순천경찰서 경 찰 서면지서 경찰 주암지서 경찰 순천경찰서 경 찰 서면지서 경찰 국군 약 150명 273) 20명 274) 우측에 비봉 산 상봉, 좌측에 씨래 바구 약 80명 275) 3명 276) 철길은 현 재 비닐하 구 학구역 우스 자리 30여 명 외 다수 277) 5 278) 현재 남원- 광양 간 도로 건설 공사 중 31명 외 다수 279) 총계 약 400명 70명 280) 31명 순천지역 여순사건 567

96 제3권 4) 월등면 희생사건 순천과 구례가 연결되는 솔재는 여순사건과 한국전쟁기 소련재로 불렸다. 빨치산들의 출몰이 잦았던 까닭이었다. 솔재 너머 좌측 산악지대에 위치한 월등면은 비교적 여순사 건의 피해가 많지 않은 곳으로 알려졌으나, 진실화해위원회에 접수된 신청건수는 21건으 로 서면지역 다음으로 많은 건수를 보였다. 큰박골 사건은 월등면의 대표적인 사건으로, 이웃 황전면에서 연행된 주민들도 이곳으로 끌려와 사살되었다. 큰박골 사건 월등면 큰박골 사건은 1948년 11월 26일 국군 제12연대ㆍ월등지서 경찰들이 월등면 신월리ㆍ계월리 거주 민간인들을 반란동조 및 반군협력 등의 혐의로 월등면 농선리 큰박 골에서 집단으로 사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은 2개리와 최소 6개 이상의 마을에서 거의 269) 참고인 배 녹취록( ); 참고인 이기창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배금엽 통화보 고서( ); 신청인 정하용 ( ); 신청인 김성기 ( ); 신청인 최택철 ( ). 270) 서면 거주 희생자 9명(직다-1351, 직다-1354, 직다1358, 직다-1360, 직다-6384, 직다-6385, 직다-7866, 직 다-9121). 271) 참고인 최홍수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영수 통화보고서 ( ); 참고인 이행수 ( ). 272) 서면 이외 거주 희생자 2명(직다-9895, 직다-7951). 273) 참고인 허신행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신호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신호 조 서( );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채구 ( ); 신청인 공준모 ( ); 신청인 공형모 조소( ); 참고인 정현종 통화보고서( ); 신청인 문덕심 ( ); 신청인 공봉덕 ( ); 참고인 정운식 조 서( ); 신청인 김영주 ( ). 274) 서면 거주 희생자 20명 (직다-1355, 직다1357, 직다-1381(확인 2), 직다-2329, 직다-3001, 직다-3616, 직 다-3733, 직다-3734(확인 2), 직다-3735(확인 2), 직다-5010, 직다-5011, 직다-5290, 직다-5302(확인 2), 직다-5303, 직다-6653, 직다-9114). 275) 신청인 허동환 ( ) 참고인 김동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기창 통화보고서 ( ); 신청인 배형철 ( ); 신청인 정종원 ( ). 276) 서면 거주 희생자 2명(직다-1348, 직다-9120), 서면 이외 거주 희생자 1명(직다-1424). 277) 참고인 박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선문 ( ); 신청인 최덕용 ( );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참고인 홍말례 통화보고서( ). 278) 서면 거주 희생자 2명(직다-1366, 미신청 김옥태), 서면 이외 거주 희생자 3명(직다-3435, 직다-9906, 미 신청 최창수). 279) 서면 거주 희생자 30명(직다-1352(확인 4), 1357, 직다-7785, 직다-9111, 직다-9113, 미신청 허필윤, 직다 -1361, 직다-1368, 직다-3369, 직다-3382, 직다-3385, 직다-3386, 직다-6288(확인 3), 직다-6650(확인 2), 직다-6653, 직다-7953, 직다-3615, 직다-7784, 직다-8365, 미신청 최진옥, 직다-1350, 직다-1353, 직다 -3002, 직다-3614), 서면 이외 거주 1명(직다-1422). 280) 서면 거주 희생자 확인 63명 + 서면 이외 거주 희생자 확인 7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동시다발적으로 벌어진 것으로 보인다. 12연대와 지서 경찰은 마을을 급습하여 주민들을 소집한 뒤, 혐의자들을 구타하여 연행하는 방법을 사용했다. 이른바 군경합동작전 이었 다. 효과적인 색출을 위해 병력은 여러 개 마을에 분산배치되었다. 체포되거나 연행된 사 람들을 빠르면 몇 시간 안에, 늦어도 3일 안에 사살하였다. 순천 황전ㆍ월등지역에서 12 연대가 자행한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큰박골 사건만이 아니었다. 여순사건 당시 의용단 동원부장이었던 참고인 박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경 12연대가 월등지서에 와, 반군협조 혐의로 지서에 감금되어 있던 마을사람들을 지서 앞에서 사살하여, 본인을 비롯한 의용단원들이 시체를 치웠다고 했다. 281) 먼저 계월리의 경우, 참고인 권구댁과 신청인들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1월 25일 (음 ) 반군이 들어와 월등면사무소에 불을 질렀다. 반군들은 월등면 계월리에 살 던 제갈숙(직다-1400, 19세)ㆍ이희철(직다-1408, 31세)ㆍ권성옥(직다-1411, 37세) 등 마을 젊은이들에게 월등면사무소 주변 경계를 서게 했다. 다음날 11월 26일(음 ) 새벽 (반군은 퇴각하고), 보초 서던 마을청년 5명은 귀가했다. 마을 누군가가 이를 목격 하고 월등지서주임 조금동에게 신고했다. 11월 26일 오전 조금동 등 월등지서 경찰들과 12연대 군인들이 마을에 들어와 반군에 협조한 이들을 수색했다. 유복암(직다-1397, 41 세), 윤우암(직다-1407, 36세), 김용배(직다-1409, 37세), 제갈숙, 이희철, 권성옥 등 9 명의 젊은이들은 동네 앞 들판에서 군경에게 장작과 긴 소총 등으로 구타를 당했다. 12 연대와 지서경찰은 이들을 월등지서로 연행했다. 연행 뒤 몇 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오 후, 월등지서 경찰과 12연대가 제갈숙, 이희철, 권성옥 등 6명과 황전면 주민들 44여 명 을 월등면 농선마을 큰박골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사건 당일 월등지서는 제갈숙의 가 족에게 시신을 찾아가라 통보했다. 282) 한편, 같은 날 계월리 중천마을에서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13살로 희생자의 연행을 목격한 신청인 제갈덕모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26일(음 ) 아침, 월등지서 경찰 4 5명이 마을에 와 주민들을 모두 소집했다. 경찰들은 제갈아지(직다 -1401, 22세)와 그의 당숙 제갈길세를 비롯한 청년들을 구타한 뒤, 총으로 위협하여 월 등지서로 연행했다. 인근 마을 젊은이들도 이미 연행된 뒤였다. 당일 저녁 제갈아지의 모 281) 참고인 박 ( ) 282) 참고인 권구댁 통화보고서( ); 신청인 권종국 ( ). 신청인 제갈종과 이양기 는 희생자 제갈숙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제갈종, ( ); 신청인 이양기 ( ). 신청인 유순호는 연행된 지 일주일 정도 지난 1948년 11월 초 마을사람들의 연락 을 받아, 희생자 유복암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유순호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69

98 제3권 친이 지서로 밥을 가져갔는데, 경찰은 이미 오후 4시경 양지맷골에서 사살했다고 심드렁 하게 말했다. 다음날 월전중학교에서 월등면 방향으로 3 400m 방향에 있는 큰박골에 가보니 사람들이 나뉘어 사살되어 있었다. 283) 신월리의 경우, 참고인 김효수ㆍ허일순ㆍ정기상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1월 23 일 밤 5 6명의 반군이 신월리 율지마을에 들어와 저녁밥을 지으라고 협박했다. 해코지 가 두려워 마을구장 허순조(직다-8782, 당시 33세)와 그의 아내가 밥을 해주었다. 다음 날 11월 24일 월등지서 경찰들이 와서 반군에 협력했다고 허순조를 월등지서 유치장으 로 연행해 2일 동안 고문했다. 당시 지서에는 40여 명의 주민들이 잡혀 있었다. 그 무리 속에는 신월리 신월마을 구장 정기선(직다-8857, 29세)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난 23일 경찰이 마을에 급습해 월등면 각 마을의 구장들과 사상이 의심되는 몇 명의 주민들을 연 행하는 과정에 구장인 그도 끌려왔다. 1948년 11월 24일 오후 황전면에 주둔했던 12연 대 군인들이 지서에 찾아와 12연대 군인들은 월등면에서 끌려온 주민 수십 명을 월등지 서 앞마당에 2줄로 세운 뒤 뒤돌게 했다. 각 마을 구장들을 끌어내 반군협조자를 지목하 라는 것이었다. 정기선도 끌려 나왔다. 12연대 군인들은 칼빈 개머리판으로 내리치며, 빨 갱이나 협조자를 골라내라고 다그쳤다. 한 명도 없다고 하자 군인들은 정기선을 마구 구 타하며, 다시 지서 안으로 끌고 갔다. 이틀 뒤인 11월 26일 월등지서에 다시 국군 12연대가 들어와 경찰에게 뭔가를 물어본 뒤, 유치장에 갇혀 있던 사람들을 끌어내 월등지서 앞마당에 2줄로 세웠다. 한 줄은 석방 되어 귀가했고, 한 줄은 등에 사형자 라고 씌어졌다. 그 줄에는 월등지서로 출두하라는 말을 듣고 온 황만수(직다-1395, 33세)ㆍ김복종(직다-1396, 29세)도 있었다. 방앗간에 서 일하다 새벽에 귀가한 그들은 반군으로 간주되었다. 12연대 군인들은 이들을 트럭에 태운 뒤, 월등면 큰박골로 가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허 순조의 사촌형 허쌍조는 11월 26일 사형자라는 글씨가 등에 적힌 채, 트럭에 타고 끌려가 는 사촌동생 허순조의 겁먹은 표정을 목격했다. 당일 월등면 희생자는 35명이고, 그중 신 월리 출신은 허순조ㆍ정기선ㆍ황만수ㆍ김복종을 비롯해 남상효(미신청, 20세) 284) ㆍ김욱 종ㆍ정일조ㆍ정학영ㆍ강정원ㆍ남용길 도합 10명이다. 285) 이상을 종합하면 1948년 ) 신청인 제갈덕모는 희생자 제갈아지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제갈덕모 ( ). 284) 참고인 남홍우 통화보고서( ). 285) 참고인 김효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기상 통화보고서( ) 참고인 허일순( ). 신청인 허기는 희생자 허순조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허기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9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월 26일 12연대 군인들과 서면지서 경찰들에 의해 사살된 월등면 계월ㆍ신월리 희생자 는 총 40명으로 추정되나, 조사결과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총 12명이다. 계월리는 백운산 줄기 송치재 부근으로 빨치산이 자주 출현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사 건의 한 배경이 되고 있다. 1949년 11월 중순경 경찰이 박재정(직다-1405, 23세)을 계월 리 야산에서 사살한 것으로 추정된다. 286) 계월리 거주 김성균(직다-1404, 27세)은 여순사건이 나고 반군의 강압에 못 이겨 심부 름을 한 일이 있었다. 1950년 1월 4일(1949. 음 ) 김성균은 집에서 밥을 먹던 중 인 기척에 도망가다 얼마 못 가 쫓아온 한청단원들에게 붙잡혔다. 김성균에게 반군협조 혐 의를 두었던 한청단원들은 그를 구타하고 돌로 내리쳤다. 누나 김성순이 집에서 비명소 리를 듣고 가보니 동생 김성균은 머리에 피를 흘리고 죽어 있었다. 287) 농선리의 경우, 참고인 이연순의 에 따르면 1949년 1월 9일(1948. 음 ) 밤 월등지서 경찰이 월등면 농선리 장선마을에 살던 이기찬(직다-1412, 40세)ㆍ이삼근(직 다-1413, 35세)ㆍ이정철(직다-7640, 36세)을 밤에 불러내 월등면 산성마을 지나 나오 는 작은 지사골 논에서 사살했다. 다음날 이철섭의 모친이 밥을 해 월등지서로 찾아가던 길에 시신들을 현장에서 발견하여, 이웃 이기찬의 아내에게도 알려주었다. 288) 월용리의 경우, 참고인 이순남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18일 밤 자택에서 자던 중 경찰 정보원 박성심이 데려온 의용경찰 2명과 같이 이복석(직다-1398, 36세)을 농협창 고(현 황전 하나로마트 자리)로 연행했다. 이틀 정도 가둔 뒤 경찰은 10월 18일 다른 사 람들 4 5명과 같이 쇄정으로 끌고 가 사살했다. 현장에 가보니 이복석 등 4 5구의 시 신이 발견됐다. 이복석은 복부에 2발 총상을 입고 누워 있었다. 289) 여순사건으로 숙부 이봉증 등 월룡리 주민들이 살해되자, 이기증(직다-1334, 50세)은 신변에 위협을 느껴 집을 나갔다. 1949년 1월 9일 경찰은 월등면 태안사에서 이기증을 체 포하여 월등지서로 연행했다. 같은 날 월등면 갈전리 야산에서 마을에서 같이 끌려간 이 들과 사살되었다. 290) 286) 신청인 박종대 ( ). 287) 참고인 이운재 면담보고서( ); 신청인 김재홍 ( ); 참고인 김성순 통화보고 서( ). 신청인 김재홍은 희생자 김성균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288) 참고인 이연순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순애 ( ); 신청인 이영섭 ( ); 신청인 이철섭 ( ). 신청인 이순애ㆍ이영섭ㆍ이철섭은 희생자 이 기찬ㆍ이삼근ㆍ이정철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289) 참고인 이순남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광섭 ( ). 290) 신청인 이진휘는 희생자 이기증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이진휘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71

100 제3권 1948년 12월 20일(음 ) 밤 월등지서 경찰들이 월용리에 살던 이봉주(직다-1402, 19세)를 연행했다. 다음날 아침 운곡마을 한청단원 장영철이 이봉주가 밤에 죽었다고 알 려줬다. 월등면사무소 앞 죽봉산 아래 논 도랑가에서 다른 2명과 함께 사살된 채 발견되 었다. 291) 군경의 빨치산토벌 과정에서 월등면 공무원들도 피해를 입었다. 1948년 10월 22일 월 등면사무소 공무원 박인규(직다-1406, 28세)가 근무 중 군인들에게 연행되어, 순천 방향 으로 가는 열차에 실려 간 뒤,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내 한정례가 양수정이라는 곳 에서 열차에 타는 남편 박인규을 목격했다. 292) 조사결과, 월등면 희생자는 총 약 70명 외 다수(<표 9> 참조)로 추산되나, 월등면 진실 규명대상자 21명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9명이고, 2명은 희 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8>, <표 9>와 같다. <표 8> 월등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이기증 ( 李 奇 增 ) 황만수 ( 黃 萬 壽 ) 김복종 ( 金 福 鍾 ) 유복암 ( 兪 福 岩 ) 이복석 ( 李 福 石 ) 제갈숙 ( 諸 葛 淑 ) 남 50 남 33 남 30 남 41 남 36 남 19 월등면 월용리 1334 확인 월등면 신월리 1395 (사망일자 일치) 월등면 신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월용리 월등면 계월리 확인 1396 확인 1397 확인 1398 확인 1400 확인 291) 신청인 이항근은 희생자 이봉주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이항근 ( ). 292) 신청인 박종대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0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총 계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제갈아지 ( 諸 葛 可 只 ) 이봉주 ( 李 鳳 柱 ) 김성균 ( 金 晟 均 ) 박재정 ( 朴 載 汀 ) 박인규 ( 朴 仁 奎 ) 윤우암 ( 尹 又 巖 ) 이희철 ( 李 熙 哲 ) 김용배 ( 金 容 培 ) 권성옥 ( 權 性 玉 ) 이기찬 ( 李 基 贊 ) 이삼근 ( 李 三 根 ) 이정철 ( 李 正 哲 ) 허순조 ( 許 淳 祖 ) 정기선 ( 鄭 淇 銑 ) 남상효 ( 南 相 孝 ) 남 22 남 19 남 27 남 23 남 28 남 36 남 31 남 37 남 29 남 40 남 35 남 36 남 33 남 29 남 20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월용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계월리 월등면 농선리 월등면 월용리 1401 확인 1402 확인 1404 확인 1405 추정 1406 추정 1407 확인 1408 확인 1409 확인 1411 확인 1412 확인 1413 확인 월등면 월용리 7640 (사망일자 일치) 월등면 신월리 8782 (사망일자 일치) 월등면 신월리 확인 확인 8857 확인 월등면 신월리 미신청 (사망일자 일치) 총 21명 (확인 19명/ 추정 2명)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573

102 제3권 연 번 <표 9> 월등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희생 장소 희생자 수 희생 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비고 1 월등 면 농선리 큰박골 월전중학교(농선리 108-3) 서남쪽 1km 지점 농곡마을 앞산 하단부 매실밭 1948년 11월 26일 월등지서 경찰, 국군 12연대 약 40명 293) 12명 294) 삼양 산업 현장 우측에 건물 위치 2 월등 면 기타 지역 월등지서 등 개별 사건 장소 1948년 10월 1949년 12월 월등지서 경찰, 국군 약 30명 295) 외 다수 12명296) 총계 약 70명 외 다수 24명 297) 5) 황전면 희생사건 황전면은 구례와 인접해 있고, 지리산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지리적인 이 유로, 지역주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공비토벌작전의 대상이 되어 피해가 많았다. 여순사건 진압 후 황전에는 국군 12연대와 15연대ㆍ20(4)연대가 진주ㆍ주둔하면서, 공비토벌작전을 벌였다. 12연대는 1948년 11월 경 구례읍에 주둔하면서 황전지역을 비 롯한 구례까지 일상적인 토벌작전을 벌였다. 15연대는 1949년 상반기에 황전ㆍ월등지역 에 주둔했다. 15연대가 원대복귀한 후 20(4)연대가 1949년 하반기 황전ㆍ월등지역에 주 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빨치산유격대는 1949년 10월 초부터 1950년 2월 말까지 순천 곡성 경계인 봉두산과 구례 경계인 용서폭포 뒷산 까바구산(별봉산 동주리봉) 부근, 조계산 부근, 백운산 부근에 걸쳐 주둔했다. 298) 293) 신청인 권종국 ( ); 참고인 김효수 통화보고서( ). 294) 월등면 거주 희생자 12명 (직다-1395, 직다-1396, 직다-1397, 직다-1400, 직다-1401, 직다-1407, 직다 -1408, 직다-1409, 직다-1411, 직다-8782, 직다-8857, 미신청 남상효). 295) 신청인 이진휘 ( ); 신청인 이항근 ( ); 참고인 황제연 통화보고서 ( ). 296) 월등면 거주 희생자 9명(직다-1400, 직다-1334, 직다-1402, 직다-1404, 직다-1405(추정), 직다-1412, 직다 -1413, 직다-7640, 직다-1406(추정)), 월등면 이외 거주 희생자 3명(직다-9263, 직다-1792, 직다-9116). 297) 월등면 거주 희생자 21명(확인 19, 추정 2), 월등면 이외 거주 3명(확인 3). 298) 지리산지구경찰대총지휘본부가 1950년 발간한 전투상보 에 일자별로 실린 敵 情 要 圖 - 人 民 遊 擊 軍 第 2 兵 團 에는 단기 4282(1949)년 10월 1일부터 4283(1950)년 2월 28일까지의 인민유격대 제2병단의 주둔지 가 10일 간격으로 표시되어 있다. 1949년 10월 10일의 경우, 인민유격대 제2병단은 순천 곡성 부근과 순 천 구례 부근에 무장 70명, 비무장 20명이 산개해 있는 것으로 나와 있다. 지도상의 이 지역은 순천-곡성 경계인 봉두산과 순천-구례경계인 용서폭포 뒷산 까바구산(별봉산 동주리봉) 부근으로 추정된다. 智 異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0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한편, 국군 12연대ㆍ15연대ㆍ20(4)연대는 황전면에서 반군협조나 반란동조 혐의자를 연행 및 구타ㆍ고문한 뒤 사살했다.299) 또한 취조와 조사가 끝나지 않아 지서에 구금중 인 주민들을 지서 앞으로 끌어내 사살하기도 했다. 황전지서 경찰들도 반군협력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황전면 거주 민간인들을 구타 한 뒤 지서로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하거나 구금 뒤 사살하였다. 한편, 황전면지역의 피 해가 컸던 이유에는 황전지서주임 임상기의 영향이 컸다.300) 황전면지역 신청인들의 상 당수가 가해자로 황전지서 경찰, 특히 임상기를 지목했다.301) 월등면 망룡계곡 사건 황전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은 1948년 11월경 황전지서 경찰들이 황학 리 주민들을 빨치산동조 혐의로 월등면 망룡계곡에서 집단으로 사살한 사건이다. 참고인 김창순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1일경 황전지서 경찰들이 황학리 발산마 을 주민들을 집결시킨 뒤 일부는 그 자리에서 사살하고, 일부는 황전지서로 연행했다. 그 후 월등면 망룡마을 옆 골짜기에서 오인권(직다-1331, 27세) 등 70여 명을 집단으로 사살 했다.302) 신청인과 참고인의 을 종합해볼 때, 전체 희생자 수는 70여 명으로 추정되나, 진실 화해위에서 확인한 희생자는 1명이다. 양지맷골 사건 황전면과 월등면의 경계에 자리한 골짜기 양지맷골에서 황전ㆍ월등면 민간인들이 가 장 많이 죽어나갔다. 이른바 양지맷골 사건이다. 이 사건은 여순사건 진압 이후 1948년 10월말부터 1949년 9월까지 12연대와 황전ㆍ월등지서 경찰들이 반군협력 또는 반란가 담 등의 혐의로 거주 민간인들을 집단적으로 처형한 사건이다. 참고인ㆍ신청인의 과 조사결과 등을 종합해볼 때, 이 사건의 희생자는 황전면과 월등면에 걸쳐 총 90명으로 山地區警察隊總指揮本部, 敵情要圖, 뺷戰鬪祥報뺸(檀紀 ), 內務部 治安局, ) 12연대는 구례 문척면ㆍ구례읍 등지에 주둔하면서 황전면에 출동하여 토벌작전을 벌였다. 진실화해위 원회, 구례지역 여순사건 조사결과보고서, ; 참고인 서 ( ). 300) 임상기는 황전지서 주임으로 역임한 후 쌍암지서 주임으로 전근을 가, 그곳에서도 민간인 집단희생사건 에 깊숙이 관여했다. 301) 신청인 김태옥 ( ). 302) 참고인 김창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오영순 통화보고서( ). 경찰자료에는 오 인권이 사살된 자라고 기재되어 있다. 순천경찰서, 뺷보안기록조회뺸(1979)ㆍ 뺷사실조사서뺸 (1980). 순천지역 여순사건 575

104 제3권 추정되나,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황전면 희생자는 5명이다. 월산리의 경우, 참고인 허기주의 에 따르면, 황전지서 경찰들이 평소 수상히 여기 던 조씨(이름 미상)를 찾았다. 지서 경찰은 조씨의 딸을 구타하여 아버지 조씨가 월산리 자은마을로 갔다는 자백을 받아냈다. 지서경찰은 월산리 자은마을에 와서 주민들을 소집 했다. 주민들 손바닥을 일일이 검사한 지서경찰은 허전(직다-6974, 25세)의 손이 곱다며 반란군 종자라고 몰아세웠다. 경찰은 누명을 벗고 싶으면 한청에 가입하라고 강요했다. 허전은 거부했다. 다음날 지서로 불려가 모질게 매질을 당한 뒤 귀가했다. 며칠 후 1948 년 11월 25일(음 ) 지서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지서에 가보니 경찰들이 구금돼 있 던 민간인들을 지서 앞 트럭에 강제로 태우고 있었고, 허전도 그 트럭에 실렸다. 트럭은 양지맷골로 향했다. 경찰들은 끌려온 사람들을 다시 폭행하기 시작했다. 허전과 함께 25 명이 사살되었다. 303) 여순사건 당시 황전면 죽청리 좌익활동가 김영운이 동네주민 고재옥(직다-1403, 26세) 을 명부에 죽청리 청년단장으로 기재했다. 빨치산이 도주한 자리에서 관련 명부를 발견 한 15연대는 이를 황전지서 경찰에게 넘겼다. 황전지서 경찰들은 명부에 기재된 사람들 을 모두 체포했다. 고재욱도 1949년 9월 25일(음 8. 4.) 황전지서로 연행됐다. 다음날, 9월 26일(음 8. 5.) 황전지서 경찰들은 월등면 농곡마을 앞산 현 월전중학교 옆 양지맷골에서 고재욱과 연행된 황전면 민간인 50여 명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 뒤 사살했다. 옆 골짜기에 는 월등면 민간인들도 동일하게 사살되었다. 304) 참고인 이용수는 황전지서 경찰이 주민 들을 양지맷골로 끌고 가는 것을 목격했고, 이후 총소리를 들었다고 말했다. 305) 사건발생 며칠 전, 황전지서 경찰이 죽평리에 와 1949년 9월 26일(음 8. 5.) 오전까지 수 평리, 괴목리로 소개하라고 명령했다. 소개를 안 한 집은 모두 반군으로 간주, 소각해버리 겠다고 위협했다. 죽평리 주민 최경식(직다-6535, 28세)은 짐을 꾸렸다. 알고 지내던 수평 리 고광출에게 우마차를 빌려 수평리 면소재지로 부지런히 짐을 옮겼다. 황전지서 경찰 은 우마차의 짐을 의심하여 최경식과 고광출을 지서로 연행했다. 1949년 9월 27일(음 8. 6.) 오후 3시경 황전지서 경찰 10여 명이 최경식과 고광출을 비롯한 황전면 다른 주민들 40여 명을 양지맷골로 끌고 갔다. 경찰들은 이들을 매질하면서 빨치산의 어떤 심부름을 303) 참고인 허기주 통화보고서( ); 신청인 허치성은 사살당한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현장에 가보 니 죽은 25명 중 희생자 허전이 위에 엎드려 죽어 있었다고 했다. 작은어머니와 어머니 둘이서 교대 로 시신을 지고 와 울면서 매장했다고 말했다. 신청인 허치성 통화보고서( ). 304) 참고인 이용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고두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고재문 통화 보고서( ) 305) 참고인 이용수,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0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했는지 불라했다. 끌려온 주민들이 혐의를 부인하자, 경찰 무리 가운데 한 명이 전원 총 살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40여 명을 사살했다. 마을사람들이 총소리를 들었다. 306) 1949년 12월 12일(음 ) 오전 황전지서 경찰 4 5명이 황학마을 김길동(직다 -6536, 35세)의 집에 들이닥쳤다. 반군동조자 김길동 나오라고 하면서 지서로 연행했다. 끌려간 지서에서 구타와 고문이 이어졌다. 가족들이 밥을 넣어주었다. 3일째 되는 12월 15일(음 ), 지서 경찰이 더 이상 밥을 넣을 수 없다고 말해, 발길을 돌렸다. 이날 오후 황전지서 경찰은 김길동과 황전면에서 연행된 다른 20여 명을 함께 양지맷골로 끌 고 갔다. 무리 안에는 남녀가 뒤섞여 있었다. 경찰들은 빨치산에 동조한 사실을 인정하라 며 매질을 가했다. 다들 동조한 사실이 없다고 하자, 경찰 한 명이 전원 총살 명령을 내렸 다. 20명이 사살되었다. 307) 황학리의 경우,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한 참고인 남맹희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17일 낮에 순천경찰서 경찰 2명이 황학리 자택에서 하재규(직다-9116, 25세)를 연행했다. 며칠 지나 하재규는 황전지서로 이송되었다. 며칠이 지난, 1948년 12월 1일 밤 월등면 장 선마을 야산에서 총소리가 울렸다. 황전지서 경찰들이 사살한 것이었다. 다음날 12월 2일 장선마을 야산에서 하재규 등 시신들 3구가 발견되어 시신을 수습했다. 하재규는 연행될 때 입은 옷 그대로 보름 만에 시신이 되어 누워 있었다. 308) 황학리 거주 김병수(직다 -7951, 28세)는 1948년 11월 초 순천경찰서에 연행된 후 석방되었다. 그와 평소 관계가 좋지 않던 한청단원들이 김병수의 자택으로 찾아와 1948년 11월 10일 김병수 등 5명을 송치재에서 사살했다. 김병수의 동생 김학수(직다-7951, 20세)는 1949년 11월 빨치산에 끌려간 뒤 이후 군경에게 살해되었다. 309) 황전면의 공무원들과 마을구장들도 군경의 토벌작전에서 피해를 입었다. 참고인 장정 자ㆍ장영자ㆍ장경재ㆍ이용호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0월 30일 황전면사무소에서 306) 참고인 이용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고두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고재문 통화 보고서( ). 신청인 최용식이 직접 양지맷골에서 희생자 최경식의 시신을 수습했으며, 총알이 박힌 피투성이 시신에는 멍자국이 선명했다고 했다. 307) 참고인 김옥암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병화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병태는 어 머니가 직접 희생자 김길동의 시신을 수습했고, 훗날 경찰이 사살했다고 순천경찰서에 다니는 지인에게 들었다고 했다. 한편, 신청인 김병태가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김길동이 1948년 10월 25일 오 후 7시 황전면 황학리 552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김병태 ( ). 308) 참고인 남맹희 통화보고서( ). 309) 참고인 이행수 ( ); 참고인 김병래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옥암 통화보 고서( ). 김병수의 부인 정명순은 사건현장에서 김병수 등 시신 5구를 확인하고 시신을 수습 했다. 신청인 김영수 통화보고서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77

106 제3권 구례방향 세 번째 집 앞 건너편에서 군인토벌대가 속옷차림 사람들을 군용트럭 몇 대에 싣고 갔다. 행렬의 마지막 차량이 면사무소 앞에서 섰다. 괴목리에 살던 면사무소 공무원 장석남(직다-1394, 32세)이 책을 들고 나오다 군인토벌대에 체포되어, 트럭에 실려가 조 곡동 둑실마을 죽도봉 계곡에서 연행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살되었다.310) 1948년 11월 초(음 10월 초) 월산리마을 구장 허길성(직다-1333, 31세)은 반군동조 혐 의로 순천농고 학생들에게 연행되어, 지서에 구금되었다. 지서에 인계된 그는 11월 10일 (음 ) 경찰에게 고문을 당한 후 사살되었다. 지서 경찰이 부친 허길성을 고문하다 끝내 사살하는 광경을 목격한 참고인 허충례의 이다. 여순사건 나던 해 1948년 음력 10월 초였습니다. 낮에 학생들이 떼로 집에 와서 아버지 를 황전지서로 데려갔습니다. ( ) 저는 며칠 동안 저녁마다 황전지서로 아버지 밥을 드리 러 면회를 갔습니다. ( ) 지서 안에서 경찰복 입은 이들이 아버지 코에 고춧가루 물을 붓 고 고문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좌익활동을 했냐고 바른대로 말하라고 경찰들이 고문했습니 다. 아버지가 연행되고 며칠 후인 1948년 음력 10월 10일 저녁에 제가 면회를 갔는데( ) 지서 앞에 냇가가 있었습니다. ( ) 경찰이 ( ) 총으로 쏴 죽였습니다. 저는 지서 앞 냇가 건너편에서 아버지가 그렇게 총에 맞아 죽는 걸 보았습니다.311) 1949년 7월 29일 군 토벌대가 마을에 반군이 들어온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는 이유로 금평리 교동마을 반장 손형수(직다-7270, 31세)를 구례 간전면 또는 문척면 부대 주둔지 로 연행하여, 대창으로 척살했다.312) 서면 구상리ㆍ흥대리ㆍ판교리의 경우처럼, 황전면에서도 토벌대와 지서 경찰들은 빨치 산 입산 혐의자가 거주했던 마을(집)에 대한 소각과 그 가족에 대한 대살(代殺) 및 구타 를 자행했다. 반군 습격에 대한 보복의 일환이었다. 황전면 모전리에 거주했던 이영수(직다-3490, 25세, 이명 이봉수)는 면사무소 직원 이 주호의 집에서 머슴살이를 했다. 어느 날 여자들과 머슴 이영수만 있던 이주호의 집에 빨 치산들이 들이닥쳐 식량과 의복을 가져갔다. 3일 뒤 빨치산들은 다시 이주호의 집엘 들러 잡은 소를 이영수에게 괴목리까지 운반하라고 시켰다. 이영수는 구타와 협박에 못 이겨 소를 끌어주었다. 다음날 점심 한청단원들이 마을로 들어와 주민들을 마을 동산으로 소 310) 참고인 장정자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영자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경재 통화 보고서( ); 참고인 이용호 통화보고서( ). 311) 참고인 허충례 통화보고서( ). 312) 참고인 손덕례 통화보고서( ); 참고인 손덕순 통화보고서( ). 신청인 손승상은 희 생자 손인수, 손인갑의 시신을 증조부가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손승상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0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집하여 남자들을 구타했다. 특히 신청인 김용출의 남편 이윤수는 빨치산의 짐을 날라준 이영수의 형이라는 이유로 무차별로 구타를 당했다. 동생 이영수는 한청단원들에게 연행 되어 황전지서에 3일 간 감금되었다. 1948년 12월 9일경(음 경) 한청단원들이 모전 리 이윤수의 집에 불을 지르면서, 12월 8일(음 경) 이영수가 본황 뒷산 골짜기에서 사살되었으니 확인하라고 말했다. 313) 황전 모전리 내모전 마을에 살았던 황종무가 좌익활동 후 반군에 가담하여 입산한 일 이 있었다. 1948년 12월경(음 11월경) 황전지서 경찰들이 마을에 와 반군 마을이라며 불 을 지르고, 황종무의 사촌 황종부(직다-1792, 24세) 등 젊은이들 15명을 연행하여 황전지 서 지하유치장에 구금했다. 다음날 황종부를 제외하고 연행된 주민들 모두가 석방되었다. 감금 후 며칠이 지났을 때, 토벌대가 반군의 습격을 받은 일이 있었다. 토벌대는 그 보복 으로 1948년 12월 13일(음 ) 해질녘에 황종부 등 5 6명을 죽내리 공동묘지 인 근 야산에서 사살했다. 314) 1948년 11 12월경 진압군인들이 황전면 선변리 거주 최인규(직다-6646, 23세), 최 진규(직다-6646, 18세) 등 마을청년들을 연행하여 살해하였다. 315) 군 토벌대는 가족의 죽음에 항의하는 민간인도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1949년 7월 29일 동생 손인수가 토벌대에게 대창으로 척살 당하자 큰형 손인갑(직다-7270, 33세)이 토벌 대 주둔지인 구례 간전면으로 달구지를 가지고 시신을 수습하러 갔다. 동생의 참혹한 시 신을 목도하고 감정이 복받친 손인갑은 토벌대 군인들에게 왜 내 동생을 죽였느냐고 항 의했다. 12연대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손인갑을 사살했다. 316) 조사결과, 황전면 희생자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6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10>, <표 11>과 같다. 313) 신청인 김용출 ( ). 신청인 김용출은 황전지서 경찰 또는 괴목 한청단원들이 가해자이 고, 시신은 바로 수습했다고 했다. 한편, 신청인은 자신의 집이 타버려 경제적으로 어려운 곤궁한 삶 을 살았다고 했다. 314) 참고인 황제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황종은은 사건 당일 연락이 와 희생자 황종부의 시신을 수습했고, 내모전 마을에서는 황종부만 사살되었다고 했다. 315) 참고인 이점순 통화보고서( ). 316) 참고인 손덕례 통화보고서( ); 참고인 손덕순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79

108 제3권 <표 10> 황전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오인권 ( 吳 仁 權 ) 허길성 ( 許 吉 星 ) 장석남 ( 張 錫 楠 ) 고재옥 ( 高 在 玉 ) 황종부 ( 黃 鍾 涪 ) 이영수 ( 李 永 洙 ) 최경식 ( 崔 敬 植 ) 김길동 ( 金 吉 童 ) 최인규 ( 崔 仁 奎 ) 최진규 ( 崔 珍 圭 ) 손인갑 ( 孫 仁 甲 ) 남 27 남 31 남 32 남 26 남 24 남 25 남 28 남 35 남 23 남 18 남 허전 남 손형수 ( 孫 亨 洙 ) 김병수 ( 金 炳 洙 ) 김학수 ( 金 學 洙 ) 하재규 ( 河 在 奎 ) 남 31 남 28 남 20 남 25 황전면 황학리 황전면 월산리 황전면 괴목리 황전면 죽청리 황전면 모전리 황전면 모전리 황전면 죽청리 황전면 황학리 황전면 선변리 황전면 선변리 1331 확인 1333 확인 1394 타 재를 시신이 불에 가져옴 확인 1403 확인 1792 확인 3490 확인 6535 확인 6536 확인 6646 확인 6646 확인 황전면 금평리 6891 (사망일자 일치) 황전면 월산리 황전면 금평리 황전면 황학리 황전면 황학리 황전면 황학리 확인 6974 확인 7270 확인 7951 확인 7951 확인 9116 확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0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총 계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총 16명 (확인 16명) <표 11> 황전면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 연 번 희생장소 희생 희생자 수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시기 추산치 확인 1 월등면 농선리 양지맷골 2 월등면 망용리 보름터골 3 황전면 기타 지역 총계 순천월전중학교(농선 리108-3) 서남쪽 약 500m 지점 농곡마을 앞산 골짜기 상단부 망용마을 버스승강장 에서 망용보건소 지 나 마봉산 방향으로 약 500m 지점 우측 보름터골로 진입, 약 50m 지점 현 매화밭 황전지서, 구례 간전 면 등 개별 사건 장소 1948년 10월 1949년 12월 1948년 11월 1일 1948년 12월 1949년 12월 12연대 순천경찰서 경찰, 황전지서 경찰 황전지서 경찰 순천경찰 국군 3연대 비고 현장 위편 언덕 우 약 110명 317) 3명 318) 측에 김해 김씨 김 종순의 묘지 위치 다수 319) 1명 320) 에 정진양씨 묘지 위치. 현장은 과거 골짜기 초입 좌측 에 논이었음 약 30명 321) 14명 322) 약 140명 외 다수 18명323) 317) 신청인 고화석 ( ); 신청인 최용식 ( ); 참고인 이용수 통화보고서 ( ); 참고인 김옥암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병화 통화보고서( ); 신청 인 김병태 ( ). 318) 황전면 거주 희생자 3명(직다-1403, 직다-6535, 직다-6536). 319) 신청인 오광호 ( ); 참고인 김창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오영순 통화보고 서( ). 320) 환정면 거주 희생자 1명(직다-1331). 321) 참고인 정점례 면담보고서( ); 신청인 허수길 ( ).; 참고인 황제연 통화보고 서( ); 신청인 김영수 통화보고서 ( ). 322) 황전면 거주 희생자 12명(직다-1333, 직다-3490, 직다-6646(확인 2), 직다-7951(확인 2), 직다-6974, 직다 -1394, 직다-1792, 직다-6891, 직다-7270, 직다-9116), 황전면 이외 거주 희생자 2명(직다-3614, 직다 -9105). 323) 황전면 거주 희생자 16명(확인 16명) + 황전면 이외 거주 희생자 2명. 순천지역 여순사건 581

110 제3권 6) 해룡면 희생사건 해룡면은 여순사건 진압 이후 특경대ㆍ15연대ㆍ해룡지서 경찰들이 반란동조 및 반군 협력 혐의자들을 연행하여 취조 및 고문한 뒤 사살하였다. 해룡면에서 피해가 가장 큰 곳 은 도롱으로 이곳은 인민위원회 면책인 강인수가 살던 곳 324) 이었다. 다음으로 피해가 큰 곳은 용전으로 좌익이 일제시대 때 면서기였던 임정택의 사촌동생들을 임정택 대신 사살 했다. 이에 임정택은 순천에 있던 진압군 12연대에 이 사실을 통보하고 12연대는 용전의 좌익들을 사살했다. 도롱리의 경우, 1948년 11월경 도롱리에 살던 방용규(직다-1422, 18세)ㆍ방영규(직 다-1422, 15세) 형제는 여순사건 당시 괜한 화를 입을까 우려하여 당시 여천군 율촌면 외가로 피신해 있었다. 해룡경찰은 방용규 형제가 피신해 있다는 점에 혐의를 두고 모친 인 이호두를 잡아다 고문하여 형제의 귀가를 종용했다. 1948년 11월 중순경 집에 돌아 온 방용규, 방영규는 곧바로 해룡지서로 연행되었다가,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15일 정도 감금된 후, 1948년 11월 말경 큰형 방용규가 먼저 덕암동 현 이수중학교 부근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집단으로 사살됐다. 그 후 순천경찰은 동생 방영규를 순천-광양 경계 산골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집단으로 사살했다. 325) 특히 해룡면 도롱리에선 순천경찰이 좌익활동 혐의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친인척들 을 대살하기도 했다. 참고인 김학연의 에 따르면, 1949년 늦가을 토벌대가 사촌이 좌익활동 혐의자라는 이유로 해룡면 도롱리에 살던 강길수(직다-8366, 22세)ㆍ강종훈 (직다-8366, 19세)ㆍ방봉애(직다-8366, 18세)를 해룡지서로 연행하여 구타와 고문을 가한 뒤, 유치장에서 사살했다. 326) 도룡리 참고인 한정택ㆍ강남수의 을 종합하면, 해룡면 도롱마을 이장 추형량(직다 -9098, 27세, 이명 추규봉)이 여순사건 당시 좌익에 연루되었다. 순천 진압 이후 반군협 력 혐의자들의 가족들도 피해를 보던 시절이라, 추형량의 친척인 추석순(직다-9096, 25 세)ㆍ추기선(직다-9097, 28세)ㆍ추기운(직다-9097, 26세) 3명은 산에서 숨어 지냈다. 1948년 12월 5일(음 ) 추기선, 추석순, 추기운은 도롱마을 뒷산 너머 용전리 쪽 나 무 아래에서 숨어 있는 것을 밭에 일하러 온 도롱리 설씨가 목격했다. 설씨는 순천경찰서 324) 신청인 방경규 ( ). 325) 동생 방영규는 구금 기간 동안 모친에게 편지를 해, 형 방용규가 어디론가 먼저 끌려갔다고 말했다. 참고 인 한정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강남수 통화보고서( ). 326) 참고인 김학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강남수는 희생자들이 경찰특공대에 연행되는 걸 목격했 다. 신청인 강남수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경찰이었던 친척 정학기에게 이들을 신고했다. 순천경찰서 경찰이 현장에 출동, 그 자리 에서 추기선, 추석순, 추기운을 사살했다. 327) 추형량의 동생 추인수(직다-9095)는 해룡 면 상삼리 논에서 마을사람 7명과 함께 경찰에게 사살되었다. 한편, 추형량은 당시 친척 집을 전전하며 숨어 지내다가 1949년 1월 25일(1948. 음 ) 토벌대에게 연행되 어, 상삼리 논에서 사살되었다. 328) 상내리 참고인 손병휘의 에 따르면, 여순사건 당시 상내리에 살면서 철도청 순천 사무소에 근무했던 양회주(직다-8861, 26세)는 순천 진압 후 반군동조자로 분류되어 동 료 3 4명과 함께 경찰에 쫓기고 있었다. 순천 조례동 법원 뒤편 산에 토굴을 파고 은둔 하던 1949년 2월 7일(음 ) 동료 한 명이 순천 자기 집에 갔다가 가족들 설득으로 자수했다. 은신처는 누설되었다. 1949년 2월 7일(음 ) 순천경찰은 양회주와 동료 들을 현장에서 사살했다. 329) 1948년 11월경 반군이 용전마을을 급습하여 면서기 이영재를 살해했다. 그 후 정복 경 찰들이 마을에 들이닥쳐 주민들을 소집했다. 김두표(직다-9104, 22세)를 비롯한 주민들은 구타당한 뒤 도사지서로 연행됐다. 김두표는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가 경찰에게 살해 당했다. 330) 여순사건 때 도롱리 윤씨가 반군에 합류하여, 용전마을 사람들을 선동했다. 반군들은 일제시기부터 용전마을 사람들을 괴롭혀 온 면사무소 임정택을 죽이려다가, 잘못 알고 임정택의 동생을 죽였다. 1948년 가을 진압군이 용전마을에 들어와 마을 앞 논에 주민을 소집했을 때 임정택은 평소 자신을 미워했던 사람들을 모두 좌익으로 몰았다. 진압군은 최창열(직다-9906, 20세) 등 27 28명 젊은이들과 옆 마을 신월부락 사람 1 2명 포함 30여 명을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갔다. 이후 이들은 광양 가는 길목 구랑실재에서 사살되 었다. 331) 임정택은 훗날 마을에 내려온 백운산 빨치산들에게 사살되었다. 332) 여순사건이 진압된 1948년 10월 말경 해룡지서 순경이 용전리 719번지에 살던 이기신 (직다-9946, 22세)과 마을청년들을 연행하여 고문 및 취조한 뒤, 순천경찰서로 이송했다. 327) 신청인 추환열은 희생자 추기선ㆍ추석순ㆍ추기운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추환열 조 서( ); 신청인 추환열 ( ). 328) 참고인 한정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강남수 통화보고서( ). 329) 참고인 손병휘 통화보고서( ). 신청인 양희승은 희생자 양회주의 시신을 순천시 조례동 법원 둿산에서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양희승 ( ). 330) 참고인 김도엽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331)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참고인 홍말례 통화보고서( ). 332)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83

112 제3권 신청인 이기화가 순천경찰서로 동생 이기신을 몇 번이나 만나러 갔으나, 면회는 허락되 지 않았다. 이기화는 면회를 갔을 때, 감금된 사람들을 순천시 생목동 부근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에서 사살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경찰은 순천경찰서에 감금된 이 들 중 일부는 형무소로 보내고, 이기신을 포함한 윤부리ㆍ신판식ㆍ김봉열ㆍ최동열ㆍ이덕 열ㆍ서보연ㆍ윤용한ㆍ조기홍ㆍ조기홍ㆍ이충규ㆍ김공수ㆍ최창열ㆍ이기수ㆍ김두열ㆍ김두 표ㆍ추영환 등 25명을 순천 생목동 부근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에서 사살했다. 신청인 이기화는 1948년 11월경 생목동 부근 공동묘지(현 이수중학교 부근)에서 이루 어진 사살현장을 목격했다. ( )순천경찰서로 동생(이기신) 면회를 갔더니 잡혀온 사람들을 순천시 생목마을 부근 야산 공동묘지에서 총살을 한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생목동 공동묘지에 몰래 따라가보니까, 50명 이상 사람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검은 천으로 눈을 가리고 손은 뒤로 나무에 묶고 줄을 세워서 경찰인지 군인들인지 모르지만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총으로 쏘아 죽이는 것을 보았습니다. 생목동 공동묘지에서 제 동생이 그 자리에 총살되었는지는 보지를 못했습니다. ( ) 333) 월전리의 경우, 해룡지서 경찰 허부성이 14연대 반군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대살을 자 행했다. 1948년 11월 26일(음 ) 참고인 양회택은 형 양회정(직다-7076, 27세)의 시 신을 직접 목격했다. ( ) 둘째형 양회문은 14연대 반란군으로 당시 대전형무소에 수감 중이었습니다. ( ) 그 날 형님은 마당에서 추곡수매를 위해 나락가마니를 묶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마을사람들을 마을 앞 논에 모이라고 경찰들이 총을 쏘아댔다고 합니다. 그래서 형님 양회 정도 나갔는데 곧 해룡지서 경찰 허부성이가 형님을 집으로 끌고 오더니 온몸을 총으로 여 러 발을 쏘아 돌아가시게 했다고 합니다. 둘째형님 가족이라는 이유로 총을 쏘았다고 합니 다. 허부성은 술로 찌들어 난폭하게 해 사람들이 피했는데 그날도 술에 취해 미친개 같았다 고 합니다.( ) 334) 중흥리의 경우, 참고인 안양수ㆍ박종성의 에 따르면, 1948년 11월 20일(음 ) 오전 순천경찰서 경찰 허부신 등이 승주군 어업조합에 근무하던 김학모(미신청, 37 세)를 승주군 해룡면 중흥리 증흥마을 옆 당산나무 앞에서 인민위원장 역임 혐의로 사살 333) 참고인 김봉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기화 ( ). 신청인 이기화는 생목동 집단사살장소를 또렷하게 기억한다고 했다. 334) 참고인 양회택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했다. 1948년 12월 초(음 11월 초) 순천경찰은 백채선, 강형수 등 우익인사들의 신고를 받고 김학모의 부친 김현조(미신청, 62세, 호적상 김사현)를 마을의 좌익책임자 혐의로 연행했다. 1948년 12월 24일(음 ) 순천경찰 허부신은 김현조를 중흥리마을 선착 장으로 끌고 와 사살했다. 335) 1948년 10월 말경 밤에 소총과 죽창을 든 사람들이 증흥리에 쳐들어와 지태석(직다 -9118, 20세) 등 5명을 해룡지서 방면으로 끌고 간 뒤, 살해하였다. 336) 용전리 거주 정영철(직다-9105, 18세)은 1948년 늦가을 조사를 받으러 옆집 사람과 함 께 용전지서로 연행된 뒤 사살되었다. 337) 조사결과, 해룡면 희생자는 30명으로 추산되나 이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 인한 사람은 총 19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12>, <표 13>과 같다. <표 12> 해룡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1 방용규 ( 房 鏞 圭 ) 남 18 해룡면 도롱리 1422 확인 2 방영규 ( 房 泳 圭 ) 남 15 해룡면 도롱리 1422 확인 3 양회정 ( 梁 會 正 ) 남 27 해룡면 월전리 7076 확인 4 강길수 ( 姜 吉 洙 ) 남 23 해룡면 도롱리 8366 확인 5 강종훈 ( 姜 鍾 勳 ) 남 20 해룡면 도롱리 8366 확인 6 방봉애 ( 房 鳳 愛 ) 여 19 해룡면 도롱리 8366 확인 335) 참고인 안양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종성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양휘가 제 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김학모가 1948년 10월 20일 오전 7시, 희생자 김현조는 1948년 11월 25일 오 전 10시 중흥리 187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참고인 김양휘, ( ) 336) 참고인 정삼신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길홍 통화보고서( ). 337) 참고인 김부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기화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85

114 제3권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7 양회주 ( 梁 會 炷 ) 남 26 해룡면 상내리 8861 확인 8 추인수 (추인수) 남 25 해룡면 도롱리 9095 확인 9 추석순 (추석순) 남 17 해룡면 도롱리 9096 확인 10 추기선 ( 秋 基 善 ) 남 28 해룡면 도롱리 9097 확인 11 추기운 ( 秋 基 雲 ) 남 26 해룡면 도롱리 9097 확인 12 추형량 ( 秋 炯 亮 ) 남 27 해룡면 도롱리 9098 확인 13 김두표 ( 金 斗 杓 ) 남 22 해룡면 용전리 9104 확인 14 정영철 ( 鄭 泳 喆 ) 남 18 해룡면 용전리 9105 확인 15 지태석 ( 池 泰 錫 ) 남 20 해룡면 중흥리 9118 사망신고 안 함 확인 16 최창열 ( 崔 昌 烈 ) 남 20 해룡면 용전리 9906 확인 17 이기신 ( 李 起 新 ) 남 22 해룡면 용전리 9946 확인 18 김현조 ( 金 鉉 祚 ) 남 62 해룡면 중흥리 미신청 (사망일 자 일치) 확인 19 김학모 ( 金 學 模 ) 남 37 해룡면 중흥리 미신청 (사망일 자 일치) 확인 총계 총 19명 (확인 19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표 13> 해룡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희생장소 연 번 지역 1 해룡면 장소 세부 희생시기 희생자 수 가해주체 1948년 10월 순천경찰서 경찰 기타 해룡면 월전 마을 앞 해룡지서 경찰 말 지역 논 등 개별 사건 장소 1949년 1월 용전지서 경찰 추산치 확인 비고 약 40명 19명339) 외 다수338) 총계 약 40명 외 다수 19명340) 7) 상사면 희생사건 상사면은 여순사건 당시 좌익세가 강해, 주민들이 좌익에 협조하는 분위기도 일부 있 었다고 전해졌다.341) 14연대 반군에 의해 순천이 점령당하자 순천과 가까운 상사지역의 지서 경찰들은 몸을 숨겼고 남로당의 활동가들은 면사무소가 있는 흘산리에 모여서 인민 위원회를 구성했다.342) 순천 진압 후 15연대와 상사지서 경찰들이 반군협조 혐의자들을 연행하여 취조 및 고 문하거나 집단적으로 사살했다. 특히 마을주민들을 마을회관에 소집해놓은 뒤, 청장년을 따로 붙잡아두고 구타와 고문을 한 뒤 사살하는 방식을 보였다. 한편, 산간지역인 상사면에서는 군경이 입산한 사람들을 찾아내기 위해 가족들을 볼모 로 잡거나 사살하는 경우도 많았다. 희생자의 시신을 목격한 신청인 지득례의 에 의 하면, 여순사건 당시 반군이 용계리마을에 와 밥을 해달라 강요했다. 해코지가 두려웠던 주민들은 두세 번 밥을 해준 일이 있었다. 며칠이 지나고 진압군은 동네 가운데 논으로 주민들을 소집하여 반군에게 밥을 해주고 도망간 놈들을 찾아내라며 고문했다. 마을구장 이었던 지득권(직다-5053, 23세)은 이미 피신한 상태였다. 진압군은 지득권의 어머니와 동생인 신청인 지득례를 상사면 도월리 큰마을에 있는 주둔지로 연행하여 구타ㆍ고문했 338) 신청인 최덕용 ( ); 참고인 한정택 통화보고서( ); 참고인 강남수 통화보고 서( ); 참고인 정삼신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길홍 통화보고서( ). 339) 해룡면 거주 희생자 확인 19명(직다-7076, 직다-9095, 직다-9096, 직다-9097(확인 2), 직다-9098, 직다 -9118, 미신청 김현조, 미신청 김학모, 직다-1422(확인 2), 직다-9946, 직다-8366(확인 3), 직다-9104, 직 다-8861, 직다-9105, 직다-9906). 340) 해룡면 거주 희생자 19명, 확인 19명. 341) 신청인 박외규 ( ). 342) 참고인 정삼신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길홍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587

116 제3권 다. 진압군은 지득례의 귀 가까이 공포를 쏘며 위협했다. 그럼에도 모친이 끝내 입을 열 지 않자, 진압군은 상사지서에 자수하면 책임지고 용서해준다고 회유했다. 이 말을 믿은 모친은, 아들 지득권을 비롯하여 같이 은신했던 지한모, 지만형 등 청년들을 설득하여 1948년 11월 13일(음 ) 상사지서로 데려갔다. 아들은 청년들과 함께 모친의 눈 앞에서 유치장에 갇혔다. 내일 오라는 말만 믿고 모친이 지서를 나선 그날 밤 9 10시 무렵, 지서 부근에서 총소리가 났다. 모친과 신청인 지득례가 새벽녘 부랴부랴 지서에 가 보니 지서 앞 논바닥에 아들 지득권과 지한모, 지만형 등이 죽어 있었다. 343) 오곡리에 살던 박선규(직다-7009, 37세)ㆍ박윤규(직다-7009, 24세)ㆍ박득규(직다 -7010, 22세)는 형제지간으로 큰형 박선규는 소작을 100마지기 줄 정도로 부유했다. 집 안 내 당숙, 증조부가 좌익 혐의를 받아 형무소에 끌려가자, 화를 입을까 두려웠던 박선 규는 산으로 숨어들었다. 1949년 2월 12일(음 ) 군경이 운동산(은산)에서 큰형 박 선규를 발각하여,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둘째 박윤규는 순천 진압 후 군경에게 살해되었 다. 셋째 박득규는 순천 진압 후 진압군에게 사살됐다. 넷째 박윤규는 친구 만나러 나갔 다가 반군으로 착각한 진압군이 쏜 총에 맞아 사망했다. 344) 오곡리는 개인적인 인연과 좌익세가 강했던 당시 분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빨치산의 심부름을 해줬다가 화를 입은 경우가 많았다. 여순사건 당시 오곡리 거주 정종수가 입산을 하여, 동생 정종신(직다-8057, 21세), 형제지간인 박병렬(직다-9896, 34세)ㆍ박병기(직다 -9897, 27세), 또 다른 형제지간 박병근(직다-9893, 당시 23세)ㆍ박병두(직다-9894, 18세)가 빨치산의 심부름을 해준 일이 있었다. 순천이 진압되고, 이들 4명은 신변의 위협을 느껴 피신했다. 박병두는 1948년 11월 5일경 상사면 비촌리 운동산에서 체포되어 현장에서 상사지 서 경찰들에게 사살되었다. 박병근은 오곡리 375번지에서 은신하다 11월 10일(음 ) 발각되어 상사지서 경찰들에게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박병렬은 오곡리 183번지 대밭에 작은 토굴을 하고 은거하다, 1948년 11월 18일에서 19일경(음 ) 상사지서 경찰들에게 발각되어 현장에서 사살되었다. 345) 한편, 1949년 4월 19일(음 ) 몰래 집에 들른 정종신과 박병기를 상사지서 정보원 조일환이 발견하여 신고했다. 상사지서로 연행된 정종신, 박병기 는 당일 지서에서 맞아죽었다. 346) 343) 신청인 지득례 ( ). 경찰자료에는 지득권이 사살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날짜 는 음력의 오기인 듯하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 참고인 박삼규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남규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종현은 상사 지서 둿 산에서 총 맞아 죽었다고 마을주민들이 알려줘 희생자 박선규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박종현 ( ). 345) 참고인 김가월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병춘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도월리에서는 경찰토벌대의 구타와 고문을 못 이겨 말한 허위자백 때문에 마을주민들 이 죽었다. 도월리 참고인 방종섭ㆍ박춘근ㆍ전일수의 을 종합하면, 1949년 6월 2일 (음 5. 6.) 새벽 경찰토벌대는 산에 꼴 베러 갔던 최정호(직다-1433, 12세), 박춘길(9세) 을 잡아 반군이 어디서 잤느냐고 물으며 구타했다. 매질을 못 이겨 전덕상(직다-1427, 34세)의 집에서 잤다고 말했다. 경찰토벌대 20여 명이 마을에 와서 마을회관 앞에 주민 들을 소집했다. 경찰토벌대는 참고인(신청)인 전일수의 집 뒤에서 전덕상을 구타한 뒤 코 에 물을 붓고 고문했다. 누가 반군의 밥을 해주었는지를 말하라는 것이었다. 경찰토벌대 의 매질에, 견디다 못한 전덕상은 주민 이름 몇 명을 말했다. 박명구(직다-1428, 35세) ㆍ구장 방기현(직다-4927, 48세)ㆍ김점례(직다-1433, 47세)ㆍ최정호ㆍ전덕상 등 5명이 전덕상의 집에서 무릎 꿇려진 채로 포박되어 구타당했다. 방기현은 의자에 묶인 채로 맞 았다. 박춘근ㆍ방종섭이 그 광경을 목격했다. 최정호와 김점례는 모자지간이었다. 참고인 황대연의 에 따르면, 큰아들 최채용(직다-1433, 27세)이 반군에게 산으로 끌려간 후 로, 머슴살이하던 넷째아들 최정호(직다-1433, 12세)도 큰형을 도운 전력이 있었다.347) 아들 둘이나 좌익에 동조했다고 토벌대는 최정호와 김점례를 죽창으로 내리쳤다. 김점례 의 막내아들 신청인 최두용은 울면서 이 현장을 목격했다. 신병은 다음날 6월 3일(음 5. 7.) 순천경찰서로 이송됐다. 6월 4일(음 5. 8.) 순천경찰은 전덕상, 박명구, 방기현, 최정 호, 김점례 등 5명을 순천 땅 고개재 공동묘지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348) 최정호와 김 점례가 죽고, 둘째 최덕용(직다-1433, 25세)은 이모네로 밥을 얻어먹으러 가다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딸 최덕심(직다-1433, 20세)ㆍ셋째형 최창용(직다-1433, 19세)도 경찰에 의해 살해되었다.349) 9남매 중 5남매가 죽었다. 도월리 거주 일본유학파 방윤섭(직다-5288, 20세)은 여순사건 당시 순천시 옥천동 외가 에 머무르고 있었다. 1948년 10월 23일 우연히 시내에 나갔다가 마산 15연대에 연행되 346) 참고인 김가월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병춘 통화보고서( ); 참고인 양수남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정대연과 박외규는 희생자 정종신ㆍ박병기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진 술했다. 신청인 정대연 ( ); 신청인 박외규 ( ). 347) 참고인 황대연 통화보고서( ). 348) 참고인 방종섭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전일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춘근 통화보고서( ) 신청인 전일수ㆍ박춘근ㆍ방종섭은 희생자 전덕상ㆍ박명구ㆍ방기현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전일수 ( ); 신청인 박춘근 ( ); 신청인 방종섭 ( ). 349) 참고인 황대연의 에 따르면, 먼저 최두용의 부친 최재동은 1949년 초 상사지서 경찰들에게 구타 뒤 연행되어 목포형무소에서 수감 중 전쟁이 발발하자 살해됐다. 큰형 최채용도 결국 1949년 조계산 토벌작 전에서 사살되었다고 전해졌다. 신청인 최두용은 희생자 김점례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말했다. 참고인 황 대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최두용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89

118 제3권 어 옥천동 수돗가 앞에서 5 6명과 함께 사살됐다.350) 도월리 마을일을 맡았던 김화현(직다-9917, 34세)이 1949년 2월 초(음 1월 초) 순천경 찰서에서 나오라 해, 출두했다. 1949년 2월 6일(음 1. 9.) 경찰서에서 트럭에 실려 나갔 다. 1주일 뒤 승주에서 주암 가는 접치재 골짜기에서 김화현 등 4 5명 시신이 수습되었 다. 당일 접치재에서 사살된 사람은 20여 명이다.351) 1949년 2월 1일(음 1. 4.)경 도월리 거주 박홍기(직다-8786)는 경찰에게 연행되어 순천 과 광양 경계 위치인 성 가롤로병원 근처에서 사살되었다.352) 마륜리 참고인 장석기ㆍ최재식의 을 종합하면, 1949년 3월 19일 빨치산들이 이선 권(직다-3837, 16세)을 강제로 끌고 산으로 갔다. 그 후 빨치산 한 사람이 자수하면서, 위치를 군경에게 알려주었다. 1949년 10월 20일 이선권은 도월리 미곡부락 뒷산에서 군 경에게 사살되었다.353) 여순사건 당시 용계리마을에는 14연대 반군이 들어왔다. 14연대 반군이 소집한 회의에 지방좌익들은 마을구장 최석호(직다-1429, 37세)에게 참석과 협력을 강요했다. 최석호 는 회의에 참석했다. 1948년 10월 말경 상사지서 경찰들이 모임에 참석한 최석호ㆍ최한 호ㆍ오재열ㆍ최구삼 등을 상사지서로 연행했다. 이들 4명의 신병은 순천경찰서로 인계되 었다. 최석호는 순천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하다 사망했고, 나머지 세 명은 목포형무소로 이송된 후 행방불명되었다. 최석호의 부친 최귀명과 동생 최영호가 순천경찰서에 면회를 갔더니, 정문 게시판에 최석호가 사망했다는 공고문이 붙어 있었다.354) 1949년 1월 3일(1948. 음 ) 상사지서 경찰 4 5명이 응령리 248번지 금곡마을 에 살던 이준평(직다-9920, 35세)을 자택에서 상사지서로 연행했다. 지서 경찰은 반란에 350) 신청인 방종섭 ( ). 351) 참고인 김정욱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영인은 두개골에서 총알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신청인 김영인 ( ). 352) 참고인 최기호 통화보고서( ) 박홍기의 당숙이 현장으로 나무를 하러 갔다가 시신을 발견해 박홍기의 모친이 그 시신을 수습했다. 신청인 최미자 ( ). 353) 참고인 장석기 통화보고서( ); 참고인 최재식 통화보고서( ). 지리산지구경찰대총 지휘본부가 1950년 발간한 뺷전투상보뺸1949년 10월 10일자 敵情要圖-人民遊擊軍 第2兵團 을 보면 빨치 산 8연대가 조계산 부근에 주둔하고 있었다. 열흘 뒤 1949년 10월 20일자 特別監視哨要圖 를 보면 조계 산 부근이 특별감시구역으로 설정되어 있다.(智異山地區警察隊總指揮本部, 敵情要圖, 뺷戰鬪祥報뺸(檀紀 ), 內務部 治安局, 1950) 따라서 경찰토벌대 또는 군 토벌대가 이 지역에 특 별감시작전을 펼쳤을 가능성이 있다. 사건장소인 상사면 도월리는 조계산 기슭으로 상사호에 인접해 있 어, 지리적으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다. 신청인은 당시 토벌대가 토벌작전을 벌였다고 했다. 신청 인 이후권 통화보고서( ). 354) 참고인 최영호 통화보고서( ); 신청인 최낙선 ( ). 경찰자료에는 최석호가 사살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순천경찰서, 뺷사실조사서뺸,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1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동조한 사실을 불으라며 구타와 고문을 자행했다. 일단 귀가조치를 한 지서 경찰은 다음 날 이준평을 다시 지서로 불러내, 반군에게 식량을 제공했다며 몽둥이로 구타했다. 지서 경찰들은 당일 이준평을 상사면 동백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사살했다. 355) 수도경찰대도 반군협조 혐의 민간인을 연행하여 취조 및 고문한 뒤, 사살했다. 흘산리의 경우, 1948년 11월 5일(음 ) 11시경 집 앞 개울 건너에 수도경찰대가 트럭을 타고 공포를 쏘며 나타나, 보리밭을 갈고 있던 송태은(직다-4974, 35세)에게 오라고 손짓했다. 송태은이 가려고 하자, 모친이 옷이나 챙겨 입고 가라고 했다. 송태은은 금방 오겠지요 하고 개울 건너 트럭 앞으로 갔다. 수도경찰대는 송태은을 트럭에 태우고 가버렸다. 사흘이 넘도록 송태은이 돌아오지 않자, 모친이 순천경찰서로 찾아 나섰다. 마을 최씨가 송태은과 같이 감금되어 있었다며, 경찰서 팽나무 아래서 고문을 당했다고 말해주었다. 송태은은 연신 나는 억울하다 고 하소연했 다고 했다. 경찰서엔 송태은이 없었다. 모친이 애타게 주위를 찾자, 한 경찰이 1948년 11월 7일경(음 ) 조곡동 죽도봉에서 수도경찰대가 사살했다고 말했다. 356) 오곡리 참고인 김성문ㆍ심영구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1월 18일(음 ) 오 전 10시경 상사지서 경찰, 의용경찰 10여 명이 서촌마을로 들어와 서촌마을-오곡마을 사이 논으로 주민들을 집결시켰다. 청장년만 따로 모아 구타하며 반군의 심부름을 했는 지를 추궁했다. 다른 이들을 돌려보내고 김태구(직다-1392, 24세)만 연행하여, 오곡마을 에서 상사지서로 가는 중간지점인 서당골에서 사살했다. 357) 1948년 11월 20일(음 ) 상사지서 경찰과 한청단원들 30여 명이 상사면 오곡마을 사람들을 회관 앞으로 소집하여, 마을 청장년들을 구타했다. 오곡마을 구장 박재규(직다 -1423, 24세)와 반군협조자로 의심되는 오경옥ㆍ오승용ㆍ오도환ㆍ오자열ㆍ최금동 등을 끌고 가 구타와 고문했다. 오곡마을 공산당 두목이 누구냐고 취조했다. 1948년 11월 21 일(음 ) 박재규 등 6명을 여수군법회의로 이송하기 위해 순천역을 거쳐 여수역으 로 내려가던 중 역 앞에서 박재규가 사망했다고 상사지서 경찰 김두홍이 전해주었다. 358) 한편, 진압군은 정체를 숨기고 질문하여, 반군이라고 착각하게끔 유인하여 잘못 대답하 면 바로 사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1948년 10월 23일(음 ) 오곡리 거주 오연근(직다 -5729, 41세)이 오곡마을 산에서 솔씨를 따다 눈을 다쳐 시내 병원엘 갔다 돌아오는데 시 355) 참고인 조숭례 통화보고서( ). 경찰자료에는 이준평이 불상연월에 사살되었다 고 기재되어 있다. 순천경찰서, 사실조사서, ) 신청인 송갑수 ( ). 357) 참고인 김성문 통화보고서( ); 참고인 심영구 통화보고서( ). 358) 참고인 박 녹취록( ). 순천지역 여순사건 591

120 제3권 내 경계가 삼엄해 땅고개 방향으로 오다가 옥천동에서 일행 오기연과 함께 흰 띠 두른 진 압군에게 잡혔다. 진압군은 김일성이 좋은가, 이승만이 좋은가라고 물었다. 오연근은 반 군인줄 알고 김일성이 좋다고 했다. 오연근과 오기연은 옥천동 정수장에서 시내 방향으 로 m 거리의 작은 공터에서 사살되었다.359) 조사결과, 상사면 희생자는 약 90여 명으로 추산(<표 15> 참조)되는데, 이 가운데 진실 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28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 생자 수는 아래 <표 14>, <표 15>와 같다. <표 14> 상사면 희생자 신원 확인 희생자 연 번 확인근거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경찰 자료 참고인 1 김태구 (金泰求) 남 24 상사면 오곡리 1392 확인 2 박재규 (朴在圭) 남 24 상사면 오곡리 1423 (사망일자 일치) 확인 3 전덕상 (全德相) 남 34 상사면 도월리 박명구 (朴明九) 남 35 상사면 도월리 최석호 (崔石鎬) 남 37 상사면 용계리 김점례 (金点禮) 여 47 상사면 도월리 최채용 (崔彩鎔) 남 27 상사면 도월리 최덕용 (崔德鎔) 남 25 상사면 도월리 1433 유족회 제적등본 희생자 확인 명단 확인 / 추정 여부 시신 수습 여부 기타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359) 신청인 오수만이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오연근이 1948년 10월 23일 상사면 오곡리 664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오수만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2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제적등본 수습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확인 여부 명단 여부 9 최덕심 ( 崔 德 心 ) 여 20 상사면 도월리 1433 확인 10 최창용 ( 崔 昌 鎔 ) 남 19 상사면 도월리 1433 확인 11 최정호 ( 崔 廷 鎬 ) 남 12 상사면 도월리 1433 확인 12 이선권 ( 李 先 權 ) 남 16 상사면 마륜리 3837 확인 13 방기현 ( 方 琪 現 ) 남 48 상사면 도월리 4927 확인 14 송태은 ( 宋 泰 銀 ) 남 35 상사면 흘산리 4974 확인 15 지득권 ( 池 得 權 ) 남 23 상사면 용계리 5053 확인 16 방윤섭 ( 方 允 燮 ) 남 20 상사면 도월리 5288 (사망일자 일치) 확인 17 오연근 ( 吳 連 根 ) 남 41 상사면 오곡리 5729 (사망일자 일치) 확인 18 박선규 ( 朴 先 圭 ) 남 37 상사면 오곡리 7009 확인 19 박윤규 ( 朴 允 圭 ) 남 24 상사면 오곡리 7009 확인 20 박득규 ( 朴 得 圭 ) 남 22 상사면 오곡리 7010 확인 21 정종신 ( 鄭 宗 臣 ) 남 21 상사면 오곡리 8057 확인 22 박홍기 ( 朴 洪 紀 ) 남 27 상사면 도월리 8786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593

122 제3권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제적등본 수습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확인 여부 명단 여부 23 박병근 ( 朴 炳 根 ) 남 23 상사면 오곡리 9893 확인 24 박병두 ( 朴 炳 斗 ) 남 18 상사면 오곡리 9894 확인 25 박병렬 ( 朴 炳 烈 ) 남 34 상사면 오곡리 9896 확인 26 박병기 ( 朴 炳 箕 ) 남 27 상사면 오곡리 9897 확인 27 김화현 ( 金 和 鉉 ) 남 34 상사면 도월리 9917 확인 28 이준평 ( 李 晙 坪 ) 남 35 상사면 응령리 9920 확인 총계 총 28명 (확인 28명) <표 15> 상사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 번 지 역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비고 1 상 사 면 우산보 인근 보장골 우산보에서 상사호 길 건 너 동쪽으로 약 300미터 지점, 상사호길(상사면사 무소 방향) 우측 현 공작 가든(예식장) 뒤편(동쪽 방향)약 100미터 떨어진 야산 골짜기 우산보에서 동쪽으로 약 250미터 지점, 공작 가든 좌측 현 상사참숯가마 찜질방 (흘산리 1-3) 건 물 뒤(약 5미터 이격) 골 짜기 1948년 1949년 1948년 1949년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약 30명 360) 약 30명 361) 보장골1. 현재 행정구역 상 순천시 덕월 동으로 편제 보장골2. 현재 골짜기로 좌우로 콘크리 트 작업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2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지 역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비고 상사호길(상사면사무소 방향) 우측 현 솔가든 및 자라농장 뒤편으로 약 50미터 떨어진 야산 골짜 기 하단부 1948년 1949년 국군, 순천경찰서 경찰 다수 362) (추정 불가) 보장골3. 현 솔가든 뒤 민 가에서 우측 후 방 작은 골짜기 2 상 사 면 기타 지역 상사지서 등 개별 사건 장소 1948년11월 1949년 11월 상사지서 경찰 국군 약 30명 363) 28명 364) 총계 약 90명 외 다수 28명365) 8) 별량면 희생사건 별량면은 남서쪽으로는 순천시내와 연결되고 서쪽으로는 벌교와 고흥으로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다. 북으로는 상사면과 낙안면이 산악으로 이어졌으며 남으로는 갈대가 유명 한 순천만이 둘러싸고 있다. 중앙의 면소재지를 중심으로 순천과 벌교를 잇는 4차선 2번 국도가 면의 중앙을 가로지르는데, 도로의 북쪽은 조계산 자락으로 연결되고 남쪽은 논 과 바다로 이어져 비교적 평탄한 지역이다. 여순사건의 피해상황은 2번 국도의 남과 북을 중심으로 뚜렷하게 구분되는데 산으로 연결된 북쪽 지역에서 피해가 많았다. 1948년 11월 7일경(음 경) 별량지서 경찰 4 5명이 금치리 대치마을 앞들로 마을주민들 을 소집했다. 경찰들은 청장년들을 몽둥이로 패면서 반군협조사실을 말하라고 했다. 몇몇이 매질에 못 이겨 밥을 해줬다고 하자, 한상범(직다-9934, 38세)ㆍ윤종석ㆍ안정수ㆍ이명우 등 5명을 별량지서로 연행하여, 당일 운천마을 뒷산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다. 사살장소에 가보니 시신 5구가 줄지어 쓰러져 있었고, 한상범은 가슴에 두 군데 총상을 입고 죽어 있었다. 366) 360) 참고인 허 면담보고서( );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361) 참고인 허 면담보고서( );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362) 참고인 허 면담보고서( );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363) 참고인 허 면담보고서( ); 참고인 조 면담보고서( ); 참고인 박 녹 취록( ); 신청인 박종영 통화보고서( ); 신청인 지득례 ( ). 364) 상사면 거주 희생자 28명, 확인 28명(직다-1392, 직다-1423, 직다-1433(확인 6), 직다-5053, 직다-8057, 직다-9897, 직다-1427, 직다-1428, 직다-4927, 직다-3837, 직다-7009(확인 2), 직다-9893, 직다-9894, 직 다-9896, 직다-7010, 직다-9920, 직다-1429, 직다-4974, 직다-5288, 직다-5729, 직다-8786, 직다-9917). 365) 상사면 거주 희생자 28명, 확인 28명. 366) 신청인 한영섭은 사살현장에서 희생자 한상범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한영섭 순천지역 여순사건 595

124 제3권 1949년 2월 4일(음 1. 7.) 별량지서 주임 구 등 경찰들이 반군협조자 황인성을 끌고 대룡리 대동마을로 들어왔다. 마을주민들을 소집한 뒤, 마을에 숨은 반군 윤씨를 체포해 협조자가 누군지 고문했다. 윤씨가 저항하자 경찰들이 그를 사살했다. 경찰이 황인성에 게 협조자를 지목하라고 하자, 황인성이 이상연(직다-1385, 24세)ㆍ박기영(직다-1389, 36세)ㆍ박기선ㆍ박두석 등 마을사람 4명을 지목했다. 별량지서 경찰들은 이들을 연행하 여 다음날 1949년 2월 5일(음 1. 8.) 별량지서 인근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다. 367) 금치리 대치마을 젊은이들이 연이어 끌려가서 화를 입자, 윤석봉(직다-9935, 26세)은 별량면 대룡리 대동마을 처가에 은신했다. 1949년 3월 6일(음 2. 7.) 군경 20여 명이 마을 에 나타났다. 윤석봉은 대동마을 야산으로 도망갔으나, 이내 사살되었다. 368) 1950년 2월 14일(음 경) 경찰 20여 명이 금치리 금동마을에 와 옆집 아저씨 와 얘기 중이던 박성일(직다-1431, 31세)을 무슨 얘기했느냐며 끌고 갔다. 다음날 2월 15일(음 경) 별량지서 경찰들이 박성일과 한혹수ㆍ한기태를 별량지서로 연행해 고문한 뒤, 별량역 뒤에서 사살했다. 369) 대룡리에선 구장 선출을 놓고 마을이 두 패로 나뉘어, 한쪽이 한쪽을 반군동조자로 모 함하는 일도 있었다. 참고인 이종옥의 에 따르면, 1949년 초 별량면 용안마을 구장 자리를 두고 이봉주와 이경노가 대립했다. 정기영(직다-8362, 41세)은 이경노를 지지했 다. 이봉주가 이경노와 정기영 등을 남로당이라고 별량지서(주임 강원홍)에 허위신고하 여, 순천경찰서에 수차례 끌려가 고문을 당하고 풀려난 일이 있었다. 순천 진압 후 별량 지서 의용경찰 김종주가 친구 사이인 정기영ㆍ이완옥ㆍ이범주를 연행하여 별량지서로 호송했다. 이완옥의 처 정순엽이 간청해 순천 효천고등학교 건너편 외고개 주막집(현 대 룡리 778번지)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김종주가 담배 피는 사이 이완옥ㆍ이범주 둘은 산 으로 도주했고, 효천고 앞 논으로 도망치던 정기영만 총에 맞아 붙잡혔다. 온야마을 뒤 광대골재에서 인부를 불러 끌고 가 별량지서 김종주가 사살했다. 370) 1950년 2월 5일( ) 별량면 대룡리에 살던 이재선(직다-8363, 63세)이 대룡리 산 139번지 과수원 오두막에서 자다가, 별량면 한청단(단장 박종태)과 별량지서 경찰들이 벌인 토벌작전 과정에서 사살되었다. 371) ( ). 367) 참고인 황병연 통화보고서( ). 368) 신청인 윤석진 ( ). 신청인 윤석진은 희생자 윤석봉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369) 참고인 한성재 통화보고서( ); 참고인 한이석 통화보고서( ). 370) 참고인 이종옥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2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덕정리의 경우, 1948년 11월 6일(음 ) 별량지서 경찰들이 반군에게 밥을 해주었다는 혐의로 상삼마을 거주 최병주(직다-4383, 25세)를 연행하여 별량면 석현리 저수지 야산에서 사살했다. 372) 봉림리의 경우, 순천 진압이 되기 전까지 봉림리마을은 행정공백상태였다. 1948년 11월 초순 별량지서 경찰(주임 김동진)과 서북청년단이 마을에 들어와 주민들을 정동식의 집으로 소집했다. 정동식은 입산한 반군 두목으로 별량면장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정동식의 집에서 주민들 한 사람씩 경찰과 서북청년단이 취조했다. 매질을 하면서 남로당 가입 여부를 물어, 뚜렷한 혐의점이 없으면 귀가시켰다. 3 4일 후 경찰이 새벽에 집으로 찾아와 김홍열 (직다-9101, 36세, 이명 김철수)을 별량지서로 연행했다. 1948년 11월 7일(음 ) 지서 옆에 거주하던 행정대서였던 최문식씨 부인이 당일 오전 집으로 와, 김홍열의 모친에게 새벽녘에 지서에 있던 11명이 묶인 채 운천리 공동묘지 쪽으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당일 오후 작은아버지가 운천리 공동묘지 돌고개재에 가보니 김홍열 등 시신 10구가 누워 있었다. 같이 끌려갔던 박영호는 기적적으로 살아 도주했다. 박영호의 증언에 따르면, 지서에 감금되 어 있는 중에 보성에서 폭동이 일어났다는 전화를 받고, 감금된 사람들을 그대로 두면 안 된다고 해서 바로 사살했다. 그날 죽은 10명 중에 한 명은 여성이었다. 373) 송학리 참고인 황인석의 에 따르면, 1949년 2월 4일(음 1. 7.) 별량지서 경찰들이 설을 쇠러 송학리 장학마을에 온 순천역 철도공무원 황인만(직다-9532, 21세)을 연행하 여 송학리 장학마을 부근 공동묘지 골짜기 야산에서 사살했다. 며칠 뒤 큰 당숙이 별량지 서에 가서 물어보니, 지서 경찰은 장학마을 부근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다고 말했다. 374) 조사결과, 별량면 희생자들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0명이 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16>, <표 17>과 같다. 371) 신청인 이종옥은 사건 다음날 음력 12월 20일에 직접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이종옥 ( ); 참고인 한충석 통화보고서( ). 372) 참고인 정제현 통화보고서( ); 참고인 최병조 통화보고서( ). 373) 참고인 박영모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참고인 김길수 통화 보고서( ). 신청인 김채문은 희생자 김홍열의 시신을 김와 김길수가 수습했다고 했 다. 신청인 김채문 ( ). 374) 참고인 황인석 통화보고서( ). 신청인 황동하는 희생자 황인만의 시신을 가족들이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황동하 ( ). 순천지역 여순사건 597

126 제3권 <표 16> 별량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이상연 ( 李 相 連 ) 박기영 ( 朴 基 英 ) 박성일 ( 朴 聖 一 ) 최병주 ( 崔 炳 周 ) 정기영 ( 鄭 基 永 ) 이재선 ( 李 在 先 ) 김흥열 ( 金 興 烈 ) 황인만 ( 黃 仁 滿 ) 한상범 ( 韓 相 範 ) 윤석봉 ( 尹 錫 奉 ) 남 24 남 36 남 31 남 25 남 26 남 63 남 36 남 21 남 38 남 26 별량면 대룡리 별량면 대룡리 별량면 금치리 별량면 덕정리 별량면 대룡리 별량면 대룡리 별량면 봉림리 별량면 송학리 1385 확인 1389 확인 1431 확인 4383 확인 8362 확인 8363 확인 9101 확인 9532 확인 별량면 사망 금치리 9934 신고 안 함 별량면 금치리 확인 9935 확인 총계 총 10명 (확인 10명) 연 번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1 별량면 서자골 공동묘지 <표 17> 별량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봉림리 돌고개재 인근 운 천 저수지에서 남쪽으로 약 200미터 지점. 봉림리 봉덕 뒷산 서자골 좌측 공 동묘지 초입 둔턱 1948년 11월 1949년 2월 별량지서 경찰 비고 약 15명 외 다수 375) 4명 376) 사건 당시에 도 공동묘지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2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2 희생장소 지역 장소 별량면 기타 지역 세부 희생시기 가해주체 희생자 수 추정 확인 별량지서 등 개별 사건 1948년 11월 별량지서 약 15명 외 장소 경찰 다수377) 1950년 1월 6명378) 약 30명 외 다수 10명379) 총계 비고 9) 낙안면 희생사건 낙안면은 벌교와 인접해 있어 여순사건 당시 좌익과 반군의 활동이 활발했다.380) 낙안 지서와 면사무소가 수시로 습격을 당했고, 교전 과정에서 낙안읍성 낙민루가 소각되기도 했다. 신전마을 사건은 낙안면의 대표적인 집단희생사건이다. 빨치산을 보살펴주었다는 이유로 신전마을 주민 22명이 집단으로 사살됐다. 신전마을 사건 금산리 신전마을에서 15연대는 빨치산 소년 문홍주(14세)를 치료해줬다는 이유로 1949 년 10월 8월(음 ) 마을주민 22명을 집단으로 사살하고 시신 및 가옥을 소각했다. 이 른바 신전마을 사건이다. 참고인 손삼순ㆍ홍동호ㆍ장홍석ㆍ김복심ㆍ김이곤ㆍ이형희ㆍ정달막ㆍ조선효의 을 종합하면, 1949년 상반기 쌍암(현 승주읍) 남정리 출신 소년 문홍주가 허벅지에 총상을 입은 채, 빨치산들과 함께 신전마을로 내려왔다. 빨치산들은 문홍주를 마을주민들에게 맡기면서 제대로 치료해주지 않을 경우 가만두지 않겠다며 협박했다.381) 후환이 두렵기 도 했고, 문홍주가 어려 안쓰러웠던 마을주민들은 십시일반 보살펴주었다. 사건관련 생 375) 참고인 황병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희원 ( ); 신청인 이상호 ( );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신청인 김채문 ( ). 376) 별량면 거주 희생자 4명 (직다-1385, 직다-1389, 직다- 9101, 직다-9934). 377) 신청인 박복구 ( ); 참고인 한성재 통화보고서( ); 참고인 한이석 통화보고 서( ); 참고인 정제현 통화보고서( ); 참고인 최병조 통화보고서( ). 378) 별량면 거주 희생자 6명(직다-1431, 직다-4383, 직다-8362, 직다-8363, 직다-9532, 직다-9935). 379) 별량면 거주 희생자 10명. 380) 참고인 김이곤 통화보고서( ). 381) 참고인 김이곤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형희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홍석 통화보고서( ); 신청인 홍동호 ( ). 신청인 손삼순ㆍ홍동호, 참고인 김 이곤ㆍ이형희는 사건현장을 직접 목격했다. 순천지역 여순사건 599

128 제3권 존자 신청인 홍동호는 당시 마을에서 제일 형편이 나아 문홍주를 집에서 치료해주었다고 했다.382) ( )저희 집에서 어머니 아버지께서 치료를 해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절룩거리는 문홍주와 함께 (제가 인용자) 소를 몰고 같이 마을로 들어왔던 기억도 납니다.( )383) 이후 총상이 다 나은 문홍주는 마을을 떠나 승주에서 약국을 운영하던 조부를 만나러 관등마을을 지나다 동네아이들과 시비가 붙었다. 문홍주가 홧김에 반군을 데려와 다 죽 여버리겠다 고 엄포를 놓았다. 그 앞을 지나던 서정수가 그 얘길 듣고 문홍주를 끌고 와 경찰서에 넘겼다.384) 15연대는 문홍주를 취조 및 고문하여, 총상을 입고 내려온 신전마을 에서 치료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15연대는 문홍주를 신전마을로 끌고 가, 마을 주민들을 마을 공터로 소집했다. 군인들은 한 명이라도 도망가면 다 죽여버리겠다고 위 협했다. 주민들이 모이자, 군인들은 이 마을이 빨갱이활동을 했고, 공산당을 도왔다 며, 구장을 비롯한 몇 명을 묶어놓고 마구 때렸다. 구장이었던 시아버지 위형량이 구타당하 는 모습을 지켜 본 손삼순의 이다. 시아버님을 신작로 옆 또랑에 넘어뜨린 뒤에 총으로 질근 질근 밟았어요. 총으로 마구 때렸지. 사정없이. 죽일 데가 어디에 있을 것이여. 끌어내면 살아. 기가 막혀.(한숨) 그리고 끌어낸 다음에 빨갱이 짓을 불으라고 했는데 뭐 한 일이 있어야지 불지. 그러니까 다시 또 랑에 밀어 넣고 총으로 또 밟았어요. 그러고는 또다시 끌어내고 시아버님이 추우니까 피워 논 모닥불 앞에서 벌벌 떨더라고.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어요.( )385) 15연대는 문홍주에게 너를 치료해주고 보살펴준 이들을 지목하라며 개머리판으로 때 렸다. 망설이던 문홍주는 자신을 치료해주고, 옷을 빨아주고, 약, 올벼쌀, 누룽지, 홍시감 등을 준 사람들을 지목했다. 문홍주의 손가락 총 에서 학살이 시작되었다. 어머니의 등에 업히기를 꺼려해 자신도 모르게 기적적으로 생존한, 신청인 홍동호의 이다. 1949년 음력 8월 17일 첫새벽에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마을주민들을 집결시켜 앉혀놓고 신작로 옆 도랑에 2 3명을 넣어 밟으며 고문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문홍주를 382) 신청인 홍동호 ( ). 383) 신청인 홍동호 ( ). 384) 지창환, 순천 KBS 여순사건 60년 특별기획 잃어버린 기억 녹취록, ( 방영), 장홍석 증언, 16쪽. 385) 신청인 손삼순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2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데리고 등을 들고 집결한 마을주민의 얼굴을 비추면서 마을주민들을 가려내는 모습을 보았 습니다. 가려낸 사람들을 부락에 들어가는 길 한쪽에 모아놓자, 먼동이 트기 시작했습니다. 군인 지휘관이 가려낸 분들을 마을로 데리고 들어가라고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고, 이에 군 인들이 앞에서 인솔하고 뒤에서 밀어 이분들을 마을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 이때 어머니 께서는 당신 집이 불타지 않은 것을 보시고, 우리는 살게 되니까 등에 업고 집으로 가자 하 시면서 업어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왜 그랬는지 모르게 어머니께 업히지 않겠다 고 따라가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시 동이 틀 무렵 모닥불을 피워놓고 사람들이 모여 있는 마을입구 신작로에 계속 있었는데, 마을에 들어간 후 얼마 되지 않아, 10분도 안 돼서 콩 볶는 듯한 총소리가 요란하게 났고, 저희 집이 활활 불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동이 트고 환해지자, 제가 집으로 갔습니다. 집에는 새까맣게 타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시신들이 저희 집 마당에 널려 있었습니다. 3살 먹은 저의 동생은 타버린 상태에서 창자가 배 밖으 로 터져 나온 상태였습니다. 부모님 시신의 얼굴은 알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생각에서 시신에 기름을 뿌리고 태운 것 같았습니다. 당시 집에 큰 개가 있었는데, 시신을 뜯어먹고 있어서, 그 개를 다른 마을로 줘버렸습니다.386) 또랑 옆 구멍에 숨어 간신히 살아난 신청인 손삼순은 당시 마을에 교전이나 좌우익 갈 등은 없었다며 단지 그 문홍주라는 애를 치료해준 게 죄라면 죄 라고 말했다. 손삼순의 이다. 근데 자식 같은 애를 부모심정에 어떻게 나 몰라라 할 것이요. ( ) 동네 학교 뒤편 신작 로로 마을사람들을 모았어요. 몇 명인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모아놓고 문홍주가 마을사 람들을 가리키면서 누구는 감을 주고, 누구는 밥을 주고, 누구는 뭐해주고 그러면서 발로 차서 사람들을 골라냈어요.387) 강재수(직다-324ㆍ1378ㆍ1379, 다-324ㆍ1378, 57세)ㆍ강옥순(직다-324ㆍ1378, 12세)ㆍ김대례(직 59세)ㆍ홍목침ㆍ정선례ㆍ홍일순ㆍ홍재호ㆍ위형량388)(직다-1374, 68 세)ㆍ조정순(직다-1375, 38세)ㆍ이삭심(직다-1375, 4세)ㆍ김용기(직다-1376, 25세)ㆍ 이공월(직다-1377, 43세)ㆍ강양수(직다-1379, 42세)ㆍ조성림(직다-1380, 46세)ㆍ정달 막ㆍ조선효ㆍ박옥란(직다-1948ㆍ1970,14세)ㆍ이장순(직다-1948ㆍ1970, 41세) 등 지 386) 신청인 홍동호 ( ). 387) 신청인 손삼순 ( ). 388) 경찰 자료에는 위형량이 여순사건 당시 세포위원으로 사살된 자 라고 기재되어 있으나, 특이사 항에 부역사실 유무가 불확실하다 고 기재되어 있다. 다시 말해, 이는 부역사실 유무가 불확실한데도 사 살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순천경찰서, 뺷사실조사서뺸, 순천지역 여순사건 601

130 제3권 목된 22명은 빨치산으로 몰려 마을에서 제일 큰 홍동호의 집에서 집단으로 사살됐다. 홍목침(직다-1373, 45세)ㆍ정선례(직다-1373, 32세) 부부는 세 살짜리 아들 홍재호 (직다-1373, 3세)와 딸 홍일순(직다-1373, 17세)과 함께 불타 죽었다.389) 특히 강재수, 강옥순, 김대례와 조성림, 정달막, 조선효, 손삼순도 한 식구였다. 아버지 는 약을, 어머니는 올벼쌀을, 딸은 누룽지를, 아들은 홍시를 주었다고 죽였다. 고모는 빨 래를, 삼촌은 잠잘 방을 줬다고 죽였다. 조정순은 4살배기 딸 이삭심을 등에 업은 채 총을 맞았다. 엄마 품에서 젖을 빨던 갓난 아들도 함께 즉사했다.390) 이장순과 박옥란은 모녀 사이였다. 1948년 11월 30일(음 ) 머슴 찾으러 집 밖에 나선 이장순의 시아버지 박노은(직다-1948ㆍ1970, 53세)을 토벌대가 반군으로 여겨 사살한 일이 있었다. 시아버 지가 죽은 지 1년 만의 일이었다. 손삼순의 이어지는 이다. 자기들은 안 죽을라고 싸우고 안 다녀요. 우리도 살라고 걔를 치료해준 것인데 안 도와 주면 죽인다고 해서 말이시. 살라면 할 수 없어서 그런 것인데.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조사 도 안 하고 죽인 것이 말이 되냐 말이여. 무슨 죄가 있으면 피해불지, 나왔것소. 죄가 없는 나를 어쩌겠냐는 생각에 나온 것이제. 그때는 경찰들도 산에 들어가기 겁을 냈어요. 산사람 들 때문에 무서워서. 경찰도 그런데 마을사람들이 어떻게 지냈겠소. 말 한마디라도 거역하 면 죽음을 당하는데 어찌 살겠소.391) 신전마을 주민들을 사살한 토벌대는 시신 위에 기름을 뿌리고 집에 불을 붙였다. 참고 인이자 신청인 손삼순은 살아남은 주민들은 넋을 잃었다 며, 시신 타는 냄새가 하늘을 덮었다 고 말했다. 32가구가 살던 신전마을은 어느새 잿더미로 변했다. 참고인 장홍석은 한동안 옆 마을 사람들이 시신 타는 냄새에 먼 길을 돌아다녔다 고 말했다.392)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결과, 신전마을 사건으로 총 22명의 주민들이 희생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낙안면 상송리에선 주민이 모함 한마디에 사살되는 사건도 있었다.393) 1948년 10월 25일 (음 ) 마을에 진주한 3연대 장교가 조영철394)과 같은 일본육사 동기라며 상송리에 389) 지창환, 순천 KBS 여순사건 60년 특별기획 잃어버린 기억 녹취록, ( 방영), 장홍석 증언, 16쪽. 390) 지창환, 순천 KBS 여순사건 60년 특별기획 잃어버린 기억 녹취록, ( 방영), 장홍석 증언, 16쪽. 391) 신청인 손삼순 ( ). 392) 지창환, 순천 KBS 여순사건 60년 특별기획 잃어버린 기억 녹취록, ( 방영), 장홍석 증언, 16쪽. 393) 참고인 김 통화보고서( ). 394) 신청인 조영의 에 따르면, 조한송의 아들 조영철은 일본 육사를 나와 여수수산학교 영어교사를 하다,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살던 조한송(직다-7642, 47세)이 돼지를 잡고, 음식을 장만하여 집을 나섰다. 조한송이 집을 나간 지 반나절 만에 그가 죽었다는 전갈이 왔다. 아내와 딸들(신청인 조영자)이 낙안지서로 가보니 지서 앞 고목나무 밑에 조한송 등 시신 7구가 가마니에 쌓여 있었다. 조한송과 사이가 안 좋던 김창표의 부인이 조한송을 인민위원장이라고 모략했기 때문이었다. 3연대 장교가 마을을 떠나자, 낙안지서 경찰들은 별도의 조사 없이 조한송 등 6명을 사살했다. 395) 이틀 뒤 3연대는 마을에 다시 나타나 청장년을 낙안국민학교에 소집하여 일일이 호명 했다. 조동식이 호명에 일어나자, 벌교읍 소화다리 밑으로 끌고 가 사살했다. 군인들이 찾 던 조동식과 동명이인이었다. 396) 옥산리의 경우, 1948년 10월 말경 진압군이 조한상(직다-9911, 26세)을 반군에 동조했 다는 혐의로 사살했다. 397) 목촌리 한관섭(직다-2246, 19세)의 경우, 여순사건 당시 한관섭은 행동도립병원 앞 이 발소에서 일했다. 한관섭은 순천 진압 후 3일 만인 10월 25일 26일 사이 경찰에 의해 순천경찰서로 연행됐다. 조사 후 열흘 만에 석방되었다. 그 뒤 금곡동 의용단원의 모략으 로 다시 경찰서로 연행되었다. 순천경찰은 1948년 11월경 현 이수중학교 부근 죽두봉 골짜기에서 한관섭을 비롯한 60여 명을 일렬로 세워 사살했다. 사살 뒤 경찰은 미리 구 해둔 장작을 이용해 시신을 소각했다. 398) 희생자의 시신을 수습한 참고인 나기동의 에 따르면, 누군가의 밀고로 1948년 12 월 2일 새벽 낙안지서 경찰 3 4명이 수정마을 집으로 들이닥쳐 구장 나성환(직다 -1371, 32세)을 지서로 연행했다. 지서 경찰은 3일 동안 나성환을 구타 및 고문한 뒤, 12월 7일 낙안면 검암리 소재 공동묘지에서 사살했다. 머리에 총을 맞고 다른 마을 사람 들과 같이 죽어 있는 나성환의 시신을 마을사람들이 발견하여 수습했다. 399) 또한 수정마을에선 집 안으로 숨어 들어온 빨치산 때문에 피해를 입은 경우도 있었다. 여순사건 당시 진압군에게 끌려갔다. 여수수산학교 학생들이 반군에 동조한 까닭이었다. 등에 사형수라 는 낙인까지 찍힌 채, 죽음의 문턱에 있던 그는, 육사친구인 진압군 지휘관의 도움으로 살았다. 순천고에 서 근무하다 53세에 사망했다. 신청인 조영 ( ). 395) 참고인 조영자 통화보고서( ). 신청인 조영은 희생자 조한송의 시신을 낙안지서 앞에서 수습했 다고 했다. 신청인이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조한송이 1948년 10월 25일 오후 3시 승주군 낙안 면 상송리 76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신청인 조영 ( ). 396) 참고인 조영자 통화보고서( ); 참고인 김훈 통화보고서( ). 397) 신청인 조동진 통화보고서( ). 398) 한관섭이 연행되는 걸 목격한 신청인은 한관섭 시신이 불태워져 시신을 수습할 수 없었다고 했다. 신청인 한재임 ( ). 399) 참고인 나기동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03

132 제3권 희생자 김인석(직다-1415, 27세)의 사살광경을 직접 목격한 참고인 유옥례의 이다. 1948년 음력 11월 28일 낙안면 목촌리 수정마을 주변에 빨치산이 출현하여 경찰토벌대 와 추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가운데 빨치산 2명이 마을로 들어와 김인석의 집 뒤 짚 단에 숨었다. 경찰토벌대가 이를 발견하여 현장에서 사살했다. 경찰토벌대는 방에 있던 남 편 김인석과 내게 빨치산에게 밥을 해주지 않았느냐고 추궁했다. 그런 일 없다고 김인석이 말하자, 경찰토벌대가 바로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나는 아들인 신청인 김영기를 안고 있다 는 이유로 사살 안 했다.400) 창녕리의 경우, 사건현장을 목격한 신청인 신대우와 참고인 손막동ㆍ이상문의 을 종합하면, 1949년 2월 11일(음 ) 낮 반군이 별량지서를 습격하고 상사면 기동마을 뒤 재를 넘어 낙안면 창녕마을을 통해 도주했다. 진압군이 마을로 추격을 했다. 저녁을 먹고 있을 무렵, 진압군이 마을주민들을 회관으로 소집했다. 군인 3명이 신복동(직다-9902, 39세) 에게 반군을 봤느냐 물었다. 못 봤다고 말하자 군인 셋이 개머리판으로 집단 구타했다. 상처가 심해, 다음날 2월 12일 정월 보름날 신복동은 순천시내 고산병원에 입원하여 두 달 동안 치료를 받았으나, 1949년 4월 6일 결국 사망했다.401) 조사결과, 낙안면 희생자는 40여 명으로 추산(<표 19> 참조)되나 이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23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18>, <표 19>와 같다. <표 18> 낙안면 희생자 신원 확인 희생자 연 번 당시 거주지 나이 이름 성별 1 강재수 (姜裁秀) 남 58 2 김대례 (金大禮) 여 60 3 강옥순 (姜玉順) 여 12 확인근거 사건 번호 324 낙안면 (1378 금산리 중복신청) 324 낙안면 (1378 금산리 중복신청) 324 낙안면 (1378 금산리 중복신청) 경찰 자료 확인 / 추정 여부 참고인 시신수습 여부 제적 등본 확인 유족회 희생자 명단 확인 확인 확인 기타 400) 신청인 김영기는 희생자 김인석의 시신을 현장에서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김영기 조 서( ). 401) 참고인 손막동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상문 통화보고서( ). 신청인 신대 우는 희생자 신복동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신대우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나성환 ( 羅 成 煥 ) 홍목침 ( 洪 木 沈 ) 정선례 ( 鄭 善 禮 ) 홍일순 ( 洪 一 順 ) 홍재호 ( 洪 在 鎬 ) 위형량 ( 魏 瑩 良 ) 조정순 ( 趙 正 順 ) 이삭심 ( 李 朔 心 ) 김용기 ( 金 容 基 ) 이공월 ( 李 空 月 ) 강양수 ( 姜 陽 秀 ) 조성림 ( 趙 成 林 ) 김인석 ( 金 仁 錫 ) 박노은 ( 朴 魯 銀 ) 이장순 ( 李 長 順 ) 남 32 낙안면 목촌리 1371 확인 남 45 낙안면 금산리 1373 (사망일 자 일치) 여 32 낙안면 금산리 1373 (사망일 자 일치) 여 17 남 3 남 67 여 38 낙안면 금산리 여 4 낙안면 금산리 1373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금산리 1373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금산리 1374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금산리 확인 확인 확인 확인 확인 1375 확인 1375 확인 남 25 낙안면 금산리 1376 (사망일 자 일치) 여 43 낙안면 금산리 남 56 낙안면 금산리 여 47 남 27 확인 1377 확인 1379 확인 낙안면 금산리 1380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목촌리 남 53 낙안면 금산리 여 41 낙안면 금산리 확인 1415 확인 1948/ / 1970 확인 (사망일 자 일치) 확인 순천지역 여순사건 605

134 제3권 연 번 총 계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박옥란 ( 朴 玉 蘭 ) 한관섭 (한관섭) 조한송 ( 趙 漢 松 ) 신복동 ( 申 福 同 ) 조한상 ( 趙 漢 相 ) 여 14 낙안면 금산리 1948/ 1970 남 19 낙안면 시신이 불에 목촌리 2246 타 재를 수습함 남 47 남 39 낙안면 창녕리 남 27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상송리 7642 (사망일 자 일치) 낙안면 옥산리 확인 확인 확인 9902 확인 9911 확인 총 23명 (확인 23명) 연 번 희생 장소 희생자 수 희생 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1 낙안면 금산리 신전마을 2 낙안면 기타 지역 <표 19> 낙안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낙안북초등학교 뒤 편 금산리 신전마을 159번지(주택) 낙안면 검암리 공동 묘지, 낙안지서 등 1949년 10월 1948년 10월 1949년 9월 국군 15연대 낙안지서 경찰 비고 22명 402) 16명 403) 신청인 사건 당시 홍동호 자택 약 20명 외 다수 404) 9명 405) 총계 약 40명 외 다수 25명 406) 402) 신청인 손삼순 ( ); 신청인 홍동호 ( ); 참고인 김이곤 통화보고서 ( ); 참고인 이형희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장홍석 통화보고서( ). 403) 낙안면 거주 희생자 16명(직다-324(확인 3, 직다-1378과 중복신청), 직다-1373(확인4), 직다-1374, 직다 -1375(확인 2), 직다-1376, 직다-1377, 직다-1379, 직다-1380, 직다-1948(확인 2, 직다-1970과 중복신청)). 404) 신청인 최동숙 ( ); 신청인 김영기(직다-1415) ( ); 신청인 박일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조영자 통화보고서( ); 신청인 신대우 ( ); 신청인 조동진 통화보고서( ); 신청인 한재임 ( ); 신청인 이홍재 ( ); 참고인 김주태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10) 외서면 희생사건 외서면은 일제 때 공출로 민중들의 수탈과 탄압이 심했던 지역이며 해방 이후 박재상 외서면 인민위원장(송광면 장안리 출신)을 중심으로 인민위원회가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인민위원장 박재상은 외서면 수직마을 출신인 김용고를 조직책으로 하여 외서면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외서면 희생자들은 박재상과의 인간적인 인연 때문에 화를 입었다. 이후 체포된 박재상은 외서초등학교 교정에서 우익 가족들에 의해 공개사살되었다고 전해진 다. 407) 수직마을은 14연대가 백운산과 지리산에 입산하기 전에 2개월간 주둔했다. 한편, 15연대 1대대 소속 참고인 강의 에 따르면, 15연대 1대대 1중대가 산골 가용재부락에서 반군 두목을 잡아, 다른 부락주민들과 함께 외서국민학교에서 사살한 일 도 있었다. 외서면 반군협조 혐의자는 15연대에 의해 면소재지로 끌려가 처리되었다. 408) 15연대는 송광면 오룡리, 구표리, 대흥리 일대의 빨치산 보급투쟁로를 차단하기 위해 위 3개 마을을 전부 소개했고, 주민들은 외서면 쌍율로 이주해 생활했다. 409) 외서면 금성리 참고인 안귀엽ㆍ이상근ㆍ박상래ㆍ권대연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2월 21일(음 ) 토벌대가 외서면 금성마을로 들어와 마을회관으로 주민들을 소집 했다. 젊은이들을 외서지서로 연행해 반군협조자를 불으라며 취조 및 고문했다. 매를 못 이긴 누군가가 이기담(직다-1335, 23세)ㆍ안두영(직다-1336, 23세)ㆍ이상근(직다 -1337, 40세)ㆍ박상래(직다-1338, 39세) 4명을 지목했다. 토벌대가 4명을 외서면 금성 리 월평마을 도가집 옆 도로변에 세워놓고 토벌대 소대장의 지시로 수십 명 토벌대가 칼 빈 총을 발포했다. 안두영은 빗맞아 뒷논 방향으로 도주하여, 마을 민가에 숨었다. 그러 나 쫓아온 토벌대에 다시 체포되어 사살되었다. 410) 반용리 참고인 김기태의 에 따르면, 1949년 4월 3일(음 3. 5.) 군인토벌대가 마을에 들이닥쳐 마을주민들을 소집했다. 김용태(직다-10593, 31세) 등 마을청년 9명을 인근 외 서면 도신리 마을 뒷산으로 끌고 가 집단으로 사살했다. 411) 405) 낙안면 거주 희생자 7명(직다-1371, 직다-1415, 직다-1948, 직다-7642, 직다-9902, 직다-9911, 직다 -2246), 낙안면 이외 거주 희생자 2명(직다-2795, 직다-9905). 406) 낙안면 거주 희생자 총 23명(확인 23명) + 낙안면 이외 거주 희생자 2명(확인 2명). 407)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408) 참고인 강 통화보고서( ). 409) 참고인 박기재 통화보고서( ). 410) 참고인 안귀엽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상근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상래 통화 보고서( ); 참고인 권대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강원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춘형 ( ); 신청인 박병찬 ( ). 411) 참고인 김기태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양곤이 제출한 제적등본상 사망일자는 1949년 3 순천지역 여순사건 607

136 제3권 김영모(직다-1382, 47세) 등의 경우, 참고인 김의 에 의하면, 1949년 3월 5 일 김영모ㆍ김용연(직다-1390, 27세) 등 마을사람 8명이 밭일을 하고 있었다. 대마삼을 심기 위해 퇴비를 지게로 나르는 중 벌교 토벌대가 나타나 반군 짐을 나른다고 김영모, 김용섭, 김용연 등 8명과 그 아내들을 구타했다. 누군가 항의하자 김영모, 김용섭, 김용연 등 8명을 반용리 수직마을 앞 논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412) 월암리 구장 박유만(직다-1384, 40세)은 1948년 12월 17일(음 ) 반군에게 끌려갔다. 이후 아내는 감시 대상이 되었고, 외서지서 경찰과 토벌대에게 연행되어 남편의 소재를 불으라며 고문당했다. 박유만은 송광면과 주암면 경계 모후산에서 군경에게 사살되었다. 413) 월암리 거주 박기옥(직다-1383, 48세)은 여순사건 당시 인민위원장 박재상과의 친분으 로 입산했다. 이후 아내가 외서지서에 끌려가 고문당했다. 하산한 박기옥은 1949년경 외 서지서에 자수했다. 이후 풀려나 농사짓고 살다가 1949년 11월(음 10월)경 외서지서로 연 행되어 곧바로 순천경찰서로 이송되었다. 순천경찰서 경찰이 박기옥을 묶어 아내와 신청 인이 거주하던 순천 유지 염동탁 집으로 데려와 돈을 요구했는데, 염동탁이 거절했다. 이 후 행방불명되어 사살되었다. 414) 장선리 참고인 김규수ㆍ임영호의 을 종합하면, 1948년 12월 16일(음 ) 대 전마을에 살던 이수개(직다-9918, 19세)가 새벽 꿩약을 놓으려고 바가지에 왕겨를 담아 마을 산밑 밭으로 갔다. 산에서 잠복근무하던 토벌대가 총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착각해 쫓아왔다. 이수개는 겁이 나 집 방향으로 달아났다. 이수개는 집에서 100여 미터 떨어진 장산리 358번지에서 결국 사살되었다. 415) 조사결과, 외서면 희생자 가운데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0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20>, <표 21>과 같다. 월 5일로 참고인ㆍ신청인이 주장하는 사건일자와 일치했다. 신청인 김양곤 ( ). 412)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신청인 김용석ㆍ염금순은 희생자 김영모, 김용섭, 김용현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김용석 ( ); 신청인 염금순 ( ) 413) 참고인 박기재 통화보고서( ). 414) 참고인 박무평 통화보고서( ). 415) 참고인 김규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임영호 통화보고서( ). 신청인 김동호는 희 생자 이수개의 시신을 사건현장에서 바로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김동호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7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표 20> 외서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 제적 유족회 수습 등본 희생자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기타 여부 이기담 ( 李 起 淡 ) 안두영 ( 安 斗 榮 ) 이상근 ( 李 相 根 ) 박상래 ( 朴 相 來 ) 김영모 ( 金 永 模 ) 박기옥 ( 朴 基 玉 ) 박유만 ( 朴 有 萬 ) 김용연 ( 金 容 淵 ) 이수개 ( 李 守 介 ) 김용태 ( 金 容 台 ) 남 23 남 23 남 40 남 39 남 47 남 29 남 40 남 27 남 19 남 31 외서면 금성리 외서면 금성리 외서면 금성리 외서면 금성리 외서면 반용리 외서면 월암리 외서면 월암리 외서면 반용리 외서면 장선리 1335 확인 1336 확인 1337 확인 1338 확인 1382 확인 1383 확인 1384 확인 1390 확인 9918 확인 외서면 반용리 (사망일 자일치) 확인 총계 총 10명 (확인 10명) <표 21> 외서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번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1 외서면 반룡리 수직마을 앞 논 1949년 3월 벌교 토벌대 8명 416) 2명 417) 2 외서면 도신리 송곡재 (배나무골)뒷산 송곡재, 반월로(수직마을 진입 전 약 2킬로 미터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보이는 정상 철탑 밑 능선 1949년 4월 토벌군인 10명 418) 1명 419) 비고 순천지역 여순사건 609

138 제3권 연 번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3 외서면 기타 지역 월평마을 도로변 등 개별 사건 장소 1948년 11월 1949년 12월 외서지서 경 찰, 순천경찰 서 경찰, 국군 7명 420) 외 다수 7명 421) 비고 총계 약 25명 외 다수 10명422) 11) 주암면 희생사건 내운마을 출신 김용길이 처가인 오산으로 이주해 오면서부터 주암면에서 좌익활동이 전개됐다 고 알려져 있다. 423) 김용길은 주암면 인민위원장과 전라남도 유격대 부사령관을 역임해 좌익 거물로 지목됐고, 이로 인해 주암면 주민들은 좌익 가담 여부와 무관하게 피해를 당했다. 424) 행정리 접치재 사건은 주암지역의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희생사건이다. 한편, 반군의 순천 점령 이전인 1948년 10월 20일 아침 주암리 출신 순천농림중학교 2학년 최춘우(직다-2400, 20세)가 시내 하숙집에서 등교하다 순천경찰에게 연행되었다. 경찰은 최춘우 를 시내 북국민학교로 끌고 가, 이미 끌려온 사람들과 함께 아침 9시경 살해한 것으로 추정된다. 425) 416)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신청인 김용석 ( ); 신청인 염금순 ( ). 417) 외서면 거주 희생자 2명(직다-1382, 직다-1390). 418) 참고인 김 면담보고서( ). 419) 외서면 거주 희생자 1명(직다-10593). 420) 참고인 안귀엽 통화보고서( ); 참고인 이상근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상래 통화 보고서( ); 참고인 권대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이춘형 ( ); 신 청인 박병찬 ( ); 참고인 박무평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기재 통화보고서 ( ); 신청인 김동호 ( ). 421) 외서면 거주 희생자 7명(직다-1335, 직다-1336, 직다-1337, 직다-1338, 직다-9918, 직다-1383, 직다-1384). 422) 외서면 거주 희생자 총 10명, 확인 10명. 423)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범국민대책위원회,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실태보고서, 한울아카데미, 2006, 434쪽. 424) 참고인 정봉균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동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 ( ); 신청인 정종원 ( ). 425) 하숙집 주인이 희생자 최춘우의 연행과정을 목격했다고 신청인 최익우는 했다. 신청인 최익우가 제 출한 순천농림중학교 제적부에는 희생자 최춘우가 4281년(1948년) 10월 20일 사망에 의해 제적 처분되었 다고 기재되어 있다. 제적등본상에는 1948년 10월 20일 오전 9시 순천군 주암면 주암리 700번지에서 사 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희생일시는 일치했다. 신청인 최익우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39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행정리 접치재 사건 접치재 사건은 1948년 12월 17일 승주에서 주암 가는 길목인 행정리 접치재에서 주암 지서 경찰들이 반군동조 혐의 민간인들을 집단으로 사살한 사건이다. 접치재는 조계산과 모후산의 연결지점이어서, 빨치산협조 혐의로 피해가 컸다. 대광리 거주자 이덕행(직다 -8856, 22세)은 여순사건 당시 좌익활동을 하여 산에 은거하던 사촌매제에게 밥을 날라 주다, 경찰에게 발각되어 도주했다. 1948년 12월 17일(음 ) 주암지서에 자수했다. 이후 주암지서 경찰들이 이덕행을 포함하여 지서에 감금된 이들을 주암면 접치재로 끌고 가 사살했다. 426) 조사결과와 참고인과 신청인의 을 종합하면, 희생자는 35명으로 추 정되나, 진실화해위원회가 확인한 희생자는 5명(3명은 주암, 2명은 승주읍 거주자)이다. 복다리의 경우, 참고인 오치웅의 에 따르면, 오종호(직다-9922, 31세)는 1948년경 주 암 저수지 공사에 동원되어 일했다. 1948년 겨울 빨치산들이 인부 숙소로 와 짐을 나르라고 위협했다. 해코지할까 두려워 짐을 날라주었다. 이후 주암지서 주임 황영환과 경찰들에게 연행되어, 7일 간 취조 및 고문을 당했다. 지서에는 주암면 요곡리에 살던 형제 한광수(직다 -9433, 37세), 한익수(직다-9433, 24세)도 감금되었다. 한광수, 한익수 형제도 1948년 12월 중순경(음 11월 중순경) 주암면 행정리 저수지 공사 일에 동원되었다가, 주암지서로 연행되 어 며칠 동안 감금되었다. 1948년 12월 17일(음 ) 새벽녘에 주암지서 경찰들이 오종호ㆍ한광수ㆍ한익수를 비롯한 감금된 사람들을 주암면 승주에서 주암 가는 길목인 행 정리 접치재에서 집단으로 사살했다. 427) 당일 저녁 친척들이 아직 살아 있던 오종호를 발 견하여, 접치재에서 걸어서 한 시간 거리인 복다리까지 데려왔으나, 바로 숨졌다. 428) 복다리 이문휴(미신청, 35세)의 경우, 피신하다 1949년 11월 1일(음 9. 21일) 조계산 송 광사 뒷산 계곡에서 토벌대에게 사살되었다. 429) 요곡리의 경우 참고인 정봉균ㆍ정동한ㆍ정의 을 종합하면, 1949년 12월경(음 11월 초) 오산리 당산나무 아래 잔치가 있다고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요곡리에 살던 정 귀남(직다-1424, 33세), 정병남도 함께였다. 주암지서 주임 황영환과 지서 경찰들이 정 귀남과 정병남을 연행했다. 약 일주일간 고문 및 취조가 잇따랐다. 이후 순천경찰서로 이 426) 참고인 이건총 통화보고서( ). 427) 참고인 한광수 통화보고서 ( ) 신청인 한상순이 제출한 제적등본에는 희생자 한광수, 한익수 가 1948년 11월 17일 주암면 행정리 불상번지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어, 사건일자와 일치한다. 신청인 한상순은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한상순 ( ). 428) 참고인 오치웅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형기 통화보고서( ) 신청인 오정권은 집에 서 숨을 거둔 희생자 오종호의 시신을 수습했다고 했다. 신청인 오정권 ( ). 429) 참고인 이병도 ( ). 순천지역 여순사건 611

140 제3권 송되어 1950년 1월 3일(음 ) 경찰들이 대구실재에서 사살했다. 430) 조사결과, 주암면 희생자는 30명 외 다수로 추산(<표 33> 참조)되나 이 가운데 진실화 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6명이며, 1명은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22>, <표 23>과 같다. <표 22> 주암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제적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수습 등본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여부 1 정귀남 ( 鄭 貴 男 ) 남 33 주암면 요곡리 1424 확인 2 최춘우 ( 崔 春 宇 ) 남 20 주암면 주암리 2400 (사망일자 일치) 학교제적 증명서 (사망일자 일치) 추정 3 이덕행 ( 李 德 行 ) 남 22 주암면 대광리 8856 확인 4 한광수 ( 韓 光 洙 ) 남 37 주암면 요곡리 9433 (사망일자 일치) 확인 5 한익수 ( 韓 益 洙 ) 남 24 주암면 요곡리 9433 확인 6 오종호 ( 吳 宗 鎬 ) 남 31 주암면 복다리 9922 확인 7 이문휴 ( 李 文 休 ) 남 35 주암면 창촌리 미신청 확인 총계 총 7명 (확인 6명 / 추정 1명) 430) 참고인 정봉균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동한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 ( ); 신청인 정종원 (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41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표 23> 주암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 번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비고 1 주암면 행정리 접치재 주암면과 승주읍 경계 지역인 접치재 정상 인근 구 호남 고속 도로(광주 방향) 좌측 현 조계 산 등산로 입구(장군봉 방향) 산행로 표지판 앞 둔턱 1948년 12월 주암지서 경찰 약 30명 431) 4명 432) 2 순천 일대 기타 지역 서면 구랑실재, 순천북초 등학교, 조계산 송광사 뒷 산 등 1948년 10월 1949년 12월 순천경찰서 경찰, 국군 약 3명 외 다수 433) 3명 434) 총계 약 30명 외 다수 7명 435) 12) 송광면 희생사건 송광면도 조계산과 인접해 있어 여순사건 당시 피해가 많았다고 전해졌으나, 진실화해위원 회에 접수된 사건건수는 1건이다. 참고인 지성엽의 에 따르면, 장안리 마을회관 뒤 대밭으로 반군이 들어왔다며 송광지서 경찰들이 주민들에게 대나무를 치게 했다. 장안리에 살았던 박동련(직다-2278, 66세)도 대를 치러 나왔는데, 냇가 건너 외서면 지원 토벌대가 산 밑 대밭 쪽으로 내려가라고 손짓하여 내려왔다. 내려가던 박동련을 토벌대가 사살했다. 436) 조사결과, 송광면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24>, <표 25>와 같다. 431) 참고인 이, 면담보고서( ); 참고인 이건총, 통화보고서( ) 432) 주암면 거주 희생자 4명(직다-8856, 직다-9433(확인 2), 직다-9922) 433) 신청인 정종원, ( ); 신청인 최익우, ( ); 참고인 이병도, ( ) 434) 주암면 거주 희생자 3명(직다-1424, 직다-2400(추정), 미신청 이문휴) 435) 주암면 거주 희생자 7명, 확인 6명, 추정 1명. 436) 참고인 지성엽,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13

142 제3권 <표 24> 송광면 희생자 신원 확인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시신 제적 유족회 수습 등본 희생자 번호 자료 여부 확인 명단 기타 여부 1 박동련 ( 朴 東 連 ) 남 66 송광면 장안리 2278 (사망일자 일치) 확인 총계 총 1명 (확인 1명) <표 25> 송광면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 번 희생 장소 희생자 수 희생 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정 확인 비고 1 송광면 기타 지역 개별 사건 장소 1948년 12월 토벌대 1명 외 다수 437) 1명 438) 총계 1명 외 다수 1명 13) 기타 지역 순천지역 여순사건과 관련하여 인근 지역의 주민들도 순천지역에서 연행되어 사살되었다. 특히 순천이 교육중심지였던 까닭에 순천지역으로 유학 온 인근 지역 출신 학생들의 피해가 많았다. 희생자와 함께 반군협력자 색출과정을 겪었던 신청인 송철현의 에 따르면, 순천 탈환 뒤 1948년 10월 23일 저녁 12연대 군인들이 청장년들을 북국민학교에 소집했다. 고흥군 두원면 성두리 출신으로 순천농고 6학년생이었던 송임석(직다-7267, 22세)도 그 자리에 있었다. 12연대 군인들은 소집된 젊은이들에게 눈을 감으라고 한 뒤, 반군협력자 보고 동조자를 지목하라고 시켰다. 12연대 군인들은 지목된 이들을 건물 뒤로 끌고 가 사살했다. 1948년 10월 24일 아침 신청인 송철현은 석방이 되어, 송임석과 헤어졌다. 당 437) 참고인 지성엽 통화보고서( ). 438) 송광면 거주 희생자 1명(직다-2278)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43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일 오전 12연대 군인들이 송철현 등 청장년 수십 명을 석현동 향림사 뒷골 골짜기에서 사살했다.439) 1948년 10월 22일경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 출신 순천농고 재학생 최석호(직다-4050, 19세)가 등교했다가 12연대 진압군에게 연행되어 순천시 석현동 소재 향림사 수로 제방에서 사살됐다.440) 곡성군 옥곡면 오지리 출신으로 곡성에서 순천까지 기차로 통학했던 순천중학교 5학년 정대룡(직다-10652, 19세)은 여순사건 당시 등교 후 연행되어 군경에게 살해됐다.441)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출신으로 매산중학교 3학년 박이만(직다-9959, 21세)은 휴학생 으로 1949년 2월경 순천시내 자취방으로 돌아갔는데, 며칠 후 부친이 집주인에게 물어보 니 순천경찰서 경찰들이 박이만을 연행했다고 말해주었다. 이후 박이만은 살해되었다.442) 여순사건 당시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 출신으로 순천농고 재학생 윤달헌(직다-7505, 21 세)은 등교한 후 군경에게 사살되었다.443) 여순사건 당시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출신으로 순천농림중학교 2학년생 여두원(직다-1341, 18세)은 1948년 10월 25 26일경 제복 입은 사람들이 끌고 온 트럭에 태워져, 이후 살해되었다.444) 화순군 남면 사평리 출신으로 순천농림중학교 5학년생 민계식(직다-6267, 18세)은 여 순사건 당시 학교에 나가 며칠간 집에 안 들어왔다. 며칠 뒤 하숙집 아줌마가 군인들이 민계식을 포함한 학생들을 포승줄에 묶어 끌고 가는 장면을 목격했다. 이후 군인들은 민 계식을 구랑실재로 끌고 가 사살한 후 소각하였다.445) 여순사건 당시 여수시 여천군 삼일면 회치리 덕암부락에 살던 주두신(직다-6572, 19세), 주성창 (직다-6572, 22세)은 피신하여 순천 해룡면 하사리 친척집에 숨었다. 1948년 11월 17일 군인들과 경찰들이 해룡면 친척집을 급습하여, 주두신과 주성창을 인근 산으로 끌고 가 사살했다.446) 여순사건 당시 순천도립병원 원장이 반군들에게 협조했던 일이 있었다. 순천 탈환 후 신청인 송철현 ( ). 참고인 전영섭 ( ). 참고인 정대춘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이철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대수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대식 통화 보고서( ); 신청인 박이관 ( ). 443) 참고인 윤금순 통화보고서( ). 신청인이 제출한 순천농고 학적부에는 희생자 윤달헌이 1949년 2월 22일 장기결석으로 제적처분 받은 것으로 기재되어 있다. 444) 참고인 박문길 통화보고서( ); 참고인 여복만 통화보고서( ); 신청인 여두성 ( ). 445) 참고인 민문식 통화보고서( ). 446) 신청인 주주원은 채무관계로 갈등을 빚던 채무자가 주두신의 집안을 좌익집안이라고 허위신고하여 사살되었 다고 주장했다. 신청인 주주원, ( ). 주복신은 지리산으로 도망갔다가 토벌작전 때 사살되 었다고 전해졌다. 참고인 정두화, 통화보고서( ); 참고인 최병선, 통화보고서( ) 439) 440) 441) 442) 순천지역 여순사건 615

144 제3권 1948년 10월 25일 순천도립병원에 온 진압군들이 의사 정옥기(직다-10834, 25세) 등 의사 들과 식모, 병원사람들을 연행하여 이후 살해했다.447)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에 살던 정맹현(직다-3362, 21세)은 1949년 초 설을 쇠고 머슴살 이하던 집에서 조계산 빨치산들에게 끌려갔다. 송개순과 혼인한 지 3일만의 일이었다. 정 맹현은 1949년 봄 조계산에서 진압군에게 살해됐다.448) 조사결과, 기타 지역 희생자 중 진실화해위원회가 신원을 확인한 사람은 총 11명이다. 신원 확인 결과와 주요 희생장소 및 희생자 수는 아래 <표 26>, <표 27>과 같다. 조사결과, 순천지역 여순사건 민간인 희생사건과 관련한 (미)신청된 진실규명대상자는 총 269명 이고, 이 가운데 신원이 확인된 희생자는 250명이었다. 시내권과 읍(면)별로 희생사실이 확인된 인원은 순천시내권 32명, 승주읍 12명, 서면 63명, 월등면 19명, 황전면 16명, 해룡면 19명, 상사면 28명, 외서면 10명, 낙안면 23명, 주암면 6명, 송광면 1명, 별량면 10명, 기타 11명이다. <표 26> 기타 지역 희생자 신원 확인 희생자 연 번 확인근거 경찰 참고인 자료 시신 수습 여부 유족회 제적등본 희생자 확인 명단 확인 / 추정 여부 이름 성별 당시 나이 거주지 사건 번호 1 여두원 (呂斗元) 남 18 보성군 벌교읍 벌교리 정맹현 (丁孟鉉) 남 21 고흥군 대서면 남정리 3362 (사망일자 일치) 확인 3 최석호 (崔錫澔) 남 19 구례군 산동면 계천리 4050 확인 4 민계식 (閔季植) 남 18 화순군 남면 사평리 6267 (사망일자 일치) 확인 5 주두신 (朱斗新) 남 19 여수시 여천군 삼일면 화치리 6572 확인 기타 확인 447) 참고인 백준기, 통화보고서( ) 448) 참고인 박동근ㆍ정하천의 에 따르면 동강면 송강마을 출신으로 좌익활동을 하다 자수한 박학주가 정맹현의 사망사실을 전해주었다. 참고인 박동근, 통화보고서( ); 참고인 정하천, 통화보고서( )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145 제 2 부 집단희생규명위원회 사건(2) 연 번 희생자 확인근거 확인 / 이름 성별 당시 시신 유족회 추정 나이 거주지 사건 경찰 참고인 제적등본 수습 희생자 기타 번호 자료 확인 여부 명단 여부 주성창 ( 朱 成 錩 ) 송임석 ( 宋 任 錫 ) 윤달헌 ( 尹 達 憲 ) 박이만 ( 朴 以 萬 ) 정대룡 ( 鄭 大 龍 ) 정옥기 ( 鄭 鈺 基 ) 남 22 남 22 남 21 남 21 남 19 남 25 여수시 여천군 삼일면 화치리 고흥군 두원면 성두리 나주군 다도면 방산리 고흥군 도양읍 봉암리 곡성군 옥곡면 오지리 광양군 옥곡면 묵백리 6572 확인 7267 확인 7505 사망신고 안 함 순천대 학적부 제적 처분 확인 9959 확인 확인 확인 총계 총 11명 (확인 11명) <표 27> 기타 지역 주요 희생장소와 희생자 수 연 번 희생장소 희생자 수 희생시기 가해주체 지역 장소 세부 추산치 확인 비고 1 순천 일대 기타 지역 개별 사건 장소 1948년 10월 1949년 12월 국군 12연대 순천경찰 11명 외 다수 449) 11명 450) 총계 11명 외 다수 11명 449) 신청인 송철현, ( ); 참고인 전영섭, ( ); 참고인 정대춘, 통화보고서 ( ); 참고인 박이철, 통화보고서( ); 참고인 박대수, 통화보고서( ); 참고 인 박대식, 통화보고서( ); 신청인 박이관, ( ); 참고인 윤금순, 통화보고서 ( ); 신청인 여두성, ( ); 참고인 민문식, 통화보고서( ) 순천지역 여순사건 617

146 제3권 이상의 사건을 관련 장소별로 정리하면 [그림 1], [그림 2], <표 28>과 같다. [그림 1], [그림 2]에 표기된 아라비아 숫자는 <표 28>의 연번과 동일하다. [그림 1] 순천지역 여순사건 주요 집단희생장소와 가해주체(외곽)451) 450) 순천시 이외 지역(구례군, 고흥군, 보성군 등) 거주 희생자 11명(직다-1341, 직다-3362, 직다-4050, 직다 -6267, 직다-10834, 직다-6572(확인 2), 직다-7267, 직다-7505, 직다-9959, 직다-10652) 451) 지도 제공: 순천시청( 년 하반기 조사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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