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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담과 담 담과 벽 벽과 벽 벽과 방 수문통에서 백마장까지 글 사진 유동현 인천골목이 품은 이야기 劉東鉉 방과 방 방과 창 창과 창 現, <굿모닝인천> 편집장 인천시 대변인실 미디어팀장 그 사이에 골목이 있습니다. 前, 월간<리크루트> 기자, 편집장 옹기종기 다닥다닥 구불구불 울퉁불퉁 오밀조밀 인천골목이 도란도란 품은 얼기설기 이야기 오순도순 올망졸망 몽(夢)땅, 우리의 골목입니다. 골목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 지고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대변인실 발행 최근 간행물 인천 똑똑, 대한민국 심장 인천을 만나다 일년이 즐거운 인천 놀토 여행 인천의 핫 트렌드, 키스 더 인천 시간, 먼지 되어 날다 (근간) 유네스코 지정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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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역사(History) 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Story) 의 모음입니다. 우리 인천 은 비류의 미추홀( 彌 鄒 忽 )부터 오늘날까지 숙명적으로 우리나라 역사의 중심 무대에 서 있습니다. 그만큼 인천이 품은 이야기는 무궁무진하고 드라마틱합니다. 이제 골목은 추억을 지나 역사 로 가고 있습니다. 거창한 건축물이나 유서 깊은 관 광지에만 역사와 이야깃거리가 있는 건 아닙니다. 오래된 골목은 압착된 시간이 켜 켜이 저장된 기억의 창고이자 우리가 살아 온 역사이며 문화 그리고 문화재입니다. 여기서 만들어진 이야기들은 우리 지역 역사책의 첫 줄이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오 래된 동네들이 단지 낡았다는 이유만으로 거침없이 해체돼 왔습니다. 늙은 어미를 고려장 하듯 주름진 묵은 공간들을 서슴없이 갖다버렸습니다. 우리는 이제 골목 있는 원도심이 인천을 따듯하게 만드는 도시의 아랫목 이 되길 기대합니다. 우리시는 해체된 지역의 주거 환경을 개선하고 공동체 문화를 회복 시 키고자 인천형 마을 만들기의 일환인 원도심 저층주거지 관리사업 등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아무쪼록 이 책이 시민의 지역 사랑 필독서로써 뿐만 아니라 도시 계획과 문화 정 책을 입안하고 집행하는 담당자들에게 좋은 참고서가 되길 기대합니다. 그리하여 골 목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명을 얻고 살아나는 창조적 공간이 되길 희망합 니다. 2013년 12월 23일 인천광역시장

4 C O N T E N T S 6 송현동 난민 亂 民 과 빈민 貧 民, 품어 준 수도국산 226 송월동 하얀 원통 건물, 스케치북에서 사라지다 24 송림동 시간이 멈춰선 흑백 黑 白 사진 그 속에 내가 있다 242 율목동 오늘 찍은 사진, 현상해 보니 과거 가 나왔다 40 화평동 냉면, 함세덕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동네 258 신흥동 피고 지고 또 피고 그렇게 꽃처럼 흘러간다 54 화수동 시간의 닻 깊게 내린 무네미 280 사 동 신사 神 社 뒷마당에서 흘러나온 요염한 웃음소리 70 만석동 근대화, 산업화 겪으며 깊게 패인 굵은 주름 292 도원동 복숭아 꽃향기에 실려 온 삶과 죽음 88 창영동 창영학교 소풍 가는 날은 비 오는 날 308 숭의동 과거의 추억도 현재의 풍경도 로터리에서 돌고 돈다 104 북성동 선창가 바람, 붉은 풍등 風 登 흔들다 324 용현동 용현벌 미나리밭에 심어진 하와이 사탕수수 124 경 동 세상의 온갖 물상 物 像 빠르게 넘던 싸리재 338 도화동 불도저로 세운 사학 왕국, 이젠 그 흔적도 그립다 138 내 동 시간이 공간을, 공간이 시간을 이어주며 곱게 늙은 동네 354 옥련동 그 길에는 불편한 진실 이 깔려 있다 162 인현동 싱그러운 웃음 풋풋한 젊음, 가슴에 지우지 못하네 368 십정동 희망의 두레박질은 계속된다 180 용 동 색 色 좋았던 그 동네, 이젠 모든 게 바랬다 382 산곡동 질곡의 외세풍 風 돌고 돈 백마장 194 전 동 쩐 찍어내던 프레스 소리 울려 퍼지다 398 작가의말 夢 (몽)땅, 인천골목 210 송학동 담쟁이 뒤엉킨 축대... 그 곳 영욕 아는 듯

5 송현동 난민 亂 民 과 빈민 貧 民 품어 준 수도국산 동구 송현동은 가깝게는 산을 품고 있고 멀리는 바다를 끼고 있다. 송현동 사람들은 바다를 공장에 내주 고 산으로 들어와 살았다. 수탈과 전쟁에 밀려서 정착한 산등성이의 삶은 늘 고달팠다. 비탈길 만큼이나 그들의 삶도 비탈졌다. 송현동 사람들은 난민( 亂 民 ) 아니면 빈민( 貧 民 ) 사이의 구차한 삶을 이어갔다. 그 삶을 처절하게 지탱시켜 준 것은 그 산, 수도국산이었다. 수도국산은 그들에게 어머니 품이었다. 산이기에 앞서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숨 쉬는 삶의 터전이었다. 송현동 사람들은 하루의 고단한 등짐을 내려놓고 밤새 그곳 에 기대어 있다가 다음날 새벽에 다시 고갯길을 내려가 전쟁터 같은 삶의 현장으로 향했다. 그 산은 따로 존재하는 공간이 아니라 그들 신체의 일부와 같은 존재였다. 수도국산의 원래 이름은 송림산( 松 林 山 ) 혹은 만수산( 萬 壽 山 )이었다. 일제는 1910 년 이 산의 꼭대기에 노량진에서 끌어온 물을 저장하는 배수지를 만들었다. 인천에 거주하는 자기 나라 거류민의 식수와 군수공장의 공업용수 그리고 인천항에 정박하 는 기선( 汽 船 )에 물을 대기 위한 것이었다. 이 배수지를 관할하는 수도국이 생기면서 이 산은 수도국산 으로 불리었다. 만수산이 그 몸통에 물을 채움으로써 이름처럼 만 수( 滿 水 ) 가 된 형국이었다. 수도국산은 근 100년 가까이 민통선(민간인 통제선) 구역이었다. 배수지 바깥으로 철조망이 높게 둘러처져 있었고 정복을 입은 경비원들이 24시간 외부인의 접근을 막 았다. 당시 동네 어른들은 이렇게 경계가 철저한 것은 배수지가 국가 주요 시설로서 만약에 간첩이 물탱크에 독약을 타면 인천 시민의 절반이 죽기 때문이라고 얘기하곤 했다. 그래서 어른들은 함부로 그곳에 들어갔다가 잡히면 간첩 죄로 감옥에 갈지 모 른다고 엄포를 놓기도 했다. 송현동 7

6 그러나 높고 촘촘한 철조망일지라도 아이들의 몸을 막진 못했다. 숲이 우거진 배 수지는 훌륭한 놀이터였다. 철조망을 뚫은 아이들은 나무총이나 칼을 들고 편을 나 눠 총싸움을 했다. 밀림 속에서의 서바이벌 게임이었다. 배고프면 아카시아를 따서 씹어 먹었다. 간혹 여자애들도 곤충 식물채집을 하기 위해 개구멍을 드나들었다. 아예 수도국산에 맞닿은 집은 구멍을 뚫어 놓고 제집 드나들 듯했다. 몰래 그곳에서 봄나물을 채취하거나 겨울 땔감 잡목을 긁어모았다. 지금의 서흥초교 쪽으로는 1960년대 말까지 온통 비탈진 배추밭이었다. 배추 수확 을 하고 난 자리에 웅덩이를 파서 인분을 퍼날랐다. 그런데 겨울이 되면 이게 얼어붙 어서 땅과 구분이 가질 않았다. 이웃 동네에서 온 아이들은 비탈길을 가로지르다 웅 덩이에 빠지는 난감한 사고 를 당했다. 거대한 판잣집 동네는 산을 중심으로 해서 둥그렇게 형성되었다. 멀리서 보면 마 치 시루떡 포개 놓은 듯 산 밑에서 꼭대기까지 한뼘의 여유 공간도 없이 앞집 어깨를 타고 올라섰다. 틈만 보이면 무단으로 밤새 집을 지었다. 이 때문에 남의 집 마루를 통과해야만 내 집 마당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형적인 가옥도 생겼다. 70년대 수도국산과 수문통 시장. 18만 1,818m2(5만5,000평)에 1,800채의 꼬방집들이 다닥다닥 들어섰다. 안방, 건넛 방, 마루할 것 없이 창문을 열면 달과 별을 볼 수 있었던 동네. 서울의 난곡과 쌍벽을 이루던 우리나라 대표적인 달동네 수도국산은 1998년부터 재개발 사업으로 철거에 들어갔고 송현동 사람들은 다시 자신의 터전을 내주고 밀려나갔다. 그 자리에 3,000 가구의 거대한 아파트 단지 솔빛마을이 들어섰다. 다행히 배수지 공간은 그대로 살 려두고 공원으로 조성했다. 사람은 떠났지만 그들의 애환이 담긴 살림살이들은 2005년에 개관한 수도국산 달 동네박물관에 남겨져 있다. 동네가 철거될 때 전국의 고물상이 다 모여 진기한 물건 들을 수집해 갔다. 궁중이나 양반댁에서 사용한 고고한 유물이 아닌 우리 부모들이 사용했던 세간들이 세월 의 때를 덕지덕지 묻힌 채 박물관으로 들어가 추억을 전시 하고 있다. 수도국산과 이어진 작은 산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산을 그냥 돌산 이라고 불렀다. 한때 채석장으로 사용할 만큼 단단한 암석으로 된 산이었다. 이 산 위아래에도 동네 가 있었다. 아래쪽에는 피란민 수용촌이 있었다. 6 25전쟁 때 황해도 등 이북에서 피 난 온 사람들이 합판, 천막 등을 주워서 집을 짓고 살면서 자연스럽게 난민촌을 형성 했다. 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현동 9

7 내래 평안도 순천에서 혼자 내려왔지. 열아홉 살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교사 발 령을 기다리다 전쟁이 터져서 잠시 피한다는 게 벌써 60년이 되었어. 수용소촌에 처 음 발을 딛고 여태까지 이곳에 살고 있지. 아파트 벤치에서 쉬고 있던 최영속(82) 할아버지는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로 지난 이야기를 하다 곧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수용소촌 옆에는 1960년대 중반 경에 연탄 공장이 있었다. 황해도 피란민 출신 유진성( 劉 鎭 成 ) 사장은 공장의 이름을 자신의 고 향을 따서 황해연탄 으로 지었다. 이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수용소촌에 거주하는 황해도 사람들이었다. 빈손으로 내려와 3 8 따라지 라는 천대 속에서 가난 하게 시작했지만 많은 피란민들은 특유의 근면성과 강한 의지로 낯설고 물설은 남한 땅에서 성공적인 삶을 개척해 나갔다. 돌산 위에도 사람들은 위태롭게 집을 짓고 살았다. 밤새 하꼬방집이 들어서 자고 나면 골목이 하나씩 생겨나기도 했다. 여름 장마가 끝나면 이 돌산 동네에는 천연 풀 장이 만들어지곤 했다. 물이 고인 웅덩이에서 아이들은 다이빙을 하면서 수영을 했 다. 80년대 초 이 돌산 동네는 인천에서 처음으로 대대적으로 재개발되었다. 이 대목 에 전두환 전 대통령과 얽힌 이야기가 하나 등장한다. 취임 후 전 대통령은 시찰 할 산업시설로 인천제철을 택했다. 시찰단 일행은 먼저 인 근의 수용소촌과 송현3동사무소를 들렀다. 이어 돌산 밑의 길로 해서 인천제철 쪽을 가 다가 산동네를 보고 깜작 놀랐다. 아니 인천에 아직 저런 동네가 있다니. 이 길은 우 리나라를 찾는 외국 귀빈들의 산업시찰 루트이기도 했다. 대통령의 철거지시가 바로 1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현동 11

8 떨어졌고 전두환 대통령 재개발 지시 에 따라 1982년 불량주택 531채를 철 거하고 그 자리에 10평에서 20평짜리 의 5층 공영아파트 송현라이프 주택 단지가 들어섰다. 옛 송현라이프 아파트. 이 아파트 앞쪽 수도국산 산자락에는 1967년에 설립한 숭덕중학교가 있었다. 제 6 교회와 공민학교가 모태가 된 이 학교는 1982년 남동구 만수동으로 이전해 여중과 여고로 분리되어 현재 약 2만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고 있다. 학교가 떠난 이 자리에 한 동짜리 누리아파트가 세워졌다. 얼마 전 아파트 바로 앞에 수도국산을 관통하는 터널과 고가도로가 설치되었으나 개통하지 못하고 흉물처럼 남아 있다. 6,70년대 국민학교 교과서에 인천은 임해공업도시 라고 설명돼 있다. 바다나 항만 을 끼고 조성한 공업단지를 말한다. 송현동에는 바다를 끼고 있는 중후장대한 공장 들이 많이 자리 잡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현대제철이다. 1941년에 설립해 요철을 생 산한 조선이연금속은 광복 후 조업이 중단되었다가 대한중공업으로 재가동되었고 인천제철로 이어졌다. 이후 인천제철은 1978년 4월 현대그룹으로 흡수되면서 현대 제철 로 그 이름이 바뀐다. 이 대목에서 경영인 이명박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해 6월 공터에서 배구를 하는 인천중앙장로교회 교인들. 1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13

9 현대제철 사장으로 이명박이 취임한다. 그는 1981년까지 약 3년 동안 현대제철 사장 직을 맡는다. 1991년경 정주영 회장이 통일민주당을 창당할 즈음 이명박 사장은 정 회장에게 현대제철을 자신에게 넘겨달라고 요구했다는 설이 있다. 일언지하 거절당 했고 이후 두 사람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고 한다. 예전에 송현동 일대는 제철공장 굴뚝에서 뿜어져 나오는 검은 연기로 대낮에도 해 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누구 하나 그것을 탓하거나 시비를 걸기보다는 산업화시대 의 자랑거리로 삼던 시절이었다. 송현동 아이들은 어렸을 적부터 철가루를 들이마셔 일찍 철든다 는 자조적인 말만 오갔을 뿐이다. 당시 전국의 고물은 제철과 제강 공장이 있는 송현동으로 실려 왔다. 쇳덩이는 곧 돈이었다. 고물을 잔뜩 실은 트럭은 동네 청년들의 표적이 되었다. 그들은 화수동 쪽 에서 오는 트럭이 수문통 다리를 지나기 위해 속도를 줄이면 재빨리 트럭에 올라타 돈이 될 만한 쇳덩이를 갯골로 던져 버렸다. 물이 빠지면 전리품 을 주워서 고물상에 팔았다. 그 시절 유난히 송현동에는 고물상이 많았다. 송현동은 원래 산을 제외하고 바닷물이 드나드는 갯골과 갈대 무성한 습지가 많 던 동네였다. 일본인 요시다는 1939년부터 43년까지 5년에 걸쳐 이 지역을 매립했 고깃배가 드나들던 복개하기 전의 수문통. 1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현동 15

10 다. 화평동과 배다리까지는 갯골로 그냥 남겨 두었고 나머지는 땅으로 만들었다. 그 는 매립으로 떼돈을 벌었고 그 일부로 송현초등학교를 설립했다. 지금은 공립학교이 지만 당시에는 사립학교였다. 매립해 만든 학교라 백중사리 때는 바닷물이 역류해서 교실까지 밀려들어왔다. 가끔 복도에 물고기가 펄떡거리기도 했다. 현재의 화평치안센터와 송현치안센터 사이, 약 200m 거리에는 수문통 이라 불린 갯골 수로가 있었다. 지대가 낮아 인근 동네의 온갖 생활하수가 이곳으로 다 흘러들 었다. 이곳에 종종 탯줄이나 사산아( 死 産 兒 )를 싼 시멘트 봉지가 둥둥 떠다니기도 했 다. 여름이면 악취가 코를 찌르는 똥바다 였다. 하루에 두 번 들어오는 밀물은 수문 통을 정화시켰다. 썰물로 나갈 때 온갖 쓰레기는 수로를 따라 바다로 떠내려갔다. 물 때 따라 작은 돛단배가 수문통으로 들어오기도 했다. 멋모르고 고깃배를 쫓아온 갈 매기가 이곳에서 길을 잃기도 했다. 배짱 좋은 아이들은 수문통 갯골에서 멱을 감기 도 했다. 동네사람들은 이 수문통을 세느강 이라고 불렀다. 결코 낭만적인 삶을 살진 못했지만 송현동 사람들은 빈곤 속에서도 그렇게 늘 낭만을 꿈꿨다. 여름철 장마 때는 전동, 인현동 등 윗동네 하수구로 빠진 공들이 다 떠 내려와 이 곳 아이들은 돈 주고 공을 산 적이 없었어요. 수문통 동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지 역 방송인 한영우(56) 씨의 추억담이다. 화평동 쪽 수문통 끝자락에는 한동안 수상 가옥 이 있었다. 갯골을 일부 복개한 곳 위에 많은 판잣집들이 들어섰다. 안방 밑으로 바닷물이 찰랑거렸다. 우리나라 유일 의 수상 가옥이었던 셈이다. 이 곳에 1962년 9월 1일 수문통시장이 개장했다. 슬레이 트 지붕에 판자벽을 한 이 시장의 건물은 일층은 가게이고 이층은 살림집인 일종의 주상복합이었다. 시장으로 시작했지만 화평동 쪽 입구에 순대집과 그 반대편 입구에 과일가게 몇 집만 장사를 하는 등 활성화되지는 못했다. 결국 대부분 주거지로 사용 되었는데 대낮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아 통로는 늘 어둠침침했다. 하루에 두 번씩 바 닷물이 드나들었기 때문에 방바닥에 누우면 물결치는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1996년 수문통의 나머지 부분이 복개되었고 수상 가옥은 철거되었다. 수문통 골목에는 아직도 공장 사택으로 사용했던 일본식 주택들이 남아있다. 1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현동 17

11 송현동 개천가에 허름한 노점들이 하나둘씩 들어섰다. 밤늦도록 노점들이 불을 밝 히면서 일대는 자연스레 야( 夜 )시장이 되었다. 1936년에 노천시장에 양철지붕을 얹 어 일용품시장 으로 변모하였다. 이후 소성시장으로 불리다가 1950년 4월에 지금의 중앙시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중앙시장은 동인천역을 끼고 있는 덕분에 늘 사람들 로 번잡한 인천의 대표 시장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시장은 크게 혼수 상가, 그릇 상가 그리고 양키시장 으로 형성되며 몸집이 커졌다. 그중 가장 중앙시장의 색깔을 진하게 보여준 게 양키시장이었다. 양키시장의 정식 이름은 송현자유시장 이다. 송현동 100번지 양키시장. 물들인 군복, 청바지, 보세옷 인천 사람이라면 누구나 젊은 날 이곳과 얽힌 추억을 한두 개쯤 갖고 있는 무대 다. 1965년 12월 정식으로 시 장 등록이 되었지만 그 시작은 6 25전쟁 직후부터였다. 인천에는 미군부대가 곳곳에 있었다. 부대 뒷문으로 흘러나온 양키물건들이 이곳에서 은밀하게 거래되었다. 양주 와 양담배, 향수, 로션, 초콜릿, 스낵, 통조림 등. 양키 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 보다 는 동경심으로 인해 보기만 해도 가슴이 뛰던 물건들이 좁은 선반에 빽빽하게 진열 돼 있었다. 다른 편 가게에서는 간이침대, 야전삽, 수통, 군용식량 등 각종 미군용품 도 거래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돈 달러와 이른바 빨간책 이라고 불리던 플레이 보이, 펜트하우스 등 같은 야한 잡지도 구할 수 있었다. 인천에 양키들은 이제 없다. 양키는 갔지만 아직 양키시장은 남아있다. 세월의 무 게를 이겨내지 못한 듯 어스름 조명 아래 늙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양키시장은 일반 시장과는 모습부터가 다르다. 3층 높이의 건물들이 시장을 사방으로 막고 있 다. 시장이라기보다는 골목이다. 100백여 개가 넘는 작은 가게들이 하루 종일 한 조 각의 빛도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골목에 줄지어있다. 30촉 짜리 백열등 아래서 은밀히 거래하기 딱 좋은 분위기다. 쩨 를 쫓아 드나들던 사람들 발걸음으로 항상 활기를 띠 던 시장도 이제는 바람만이 골목을 쓸쓸히 배회한다. 1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현동 19

12 다 죽었어. 가게 지키던 사람은 늙어죽고 가게는 장사 안 돼 죽었지. 마트에 가면 이 제 미제 물건 다 살 수 있잖아. 오랜 단골이나 그냥 옛 생각나서 가끔 들르는 사람들 밖 에 없어. 아들의 어린시절 별명을 상호로 쓰는 똘똘사 허순영 사장(74)의 설명이다. 양키시 장 가게 주인 중에는 93세 된 현역 김고분 할머니도 있다. 김 할머니는 한 평이 채 안 되는 가게에 매일 나와 미제 물건에 쌓이는 먼지를 털어낸다. 양키시장의 물건은 이 제 더 이상 미군 양키들에게 나오지 않는다. 남대문시장 중간도매상들이 정식으로 수입된 물건들을 이곳에 공급한다. 가게 진열대에 놓여있는 허쉬 초콜릿과 코티 분에 쌓이는 것은 먼지뿐이 아니다. 여러 가지 과거 가 그 위에 쌓인다. 그들이 사고파는 것은 이제 양키 물건이 아니라 추억 이다. 시간에 떼밀려 가는 것은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뒷모습은 슬프고 서럽다. 수선, 마크, 명찰, 오바로크 빛바랜 간판들이 어지럽게 걸려있는 양키시장 골목 이 끝나는 곳에 극장이 하나 있다. 애관 2관 이라는 희미한 글자가 붙어있는 오성극 장이다. 마치 시장 위를 올라탄 모습을 하고 있는 오성극장은 씨네팝, 애관 2관으로 이름을 바꾸며 운영되다가 2003년 4월 11일에 스크린을 내렸다. 문은 쇠줄로 굳게 감 겨져 있다. 옛 영화의 잔상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 바로 앞에서 50여 년 동안 구제 품 옷을 팔아 온 흥신사 주인에게 극장에 들어가 볼 수 있냐고 물었다. 거긴 뭐 할려 고 올라가요. 아마 귀신 나올텐데.... 극장 바로 앞에는 재난위험시설(D)급 지정 안 내표지판이 붙어있다. 이제 극장은 우리의 기억뿐만 아니라 눈에서도 영원히 사라질 날이 머지않은 듯하다. 2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현동 21

13 그때, 이곳 송현동 Map & Photos 옛 돌산 지역 현대제철 솔빛마을아파트 ➐ (옛 수도국산) 수도국산 ➌,➑ 박물관 ➎ 누리아파트 ➒ 수문통거리(복개천) 동부아파트 송현초 중앙교회 ➍ ➏ 미림극장 ➊ 동인천역 북광장 ➋ 중 앙 시 장 ➊ 순대골목 동인천북광장 옆에 순대 골목이 있다. 얼마 전까지 20여 곳의 순대 국밥집이 그야말로 순대처럼 마주 보고 길게 늘어서 있었으나 지금은 동인천북광장 조성으로 한쪽이 철거 된 상태다. 이 순대 골목의 뿌리는 30여 년 전의 수문통 시장이다. 당시 화수부두, 만석 부두와 가까운 수문통 주변에는 항만이나 공장 노무자들이 즐겨 먹던 순대 국밥집이 시장통 안에 많이 있었다. 수문통 시장이 헐 리면서 국밥집들이 이곳으로 이주해오고 기 존에 있던 몇몇 국밥집들과 합쳐지면서 순 대 골목이 된 것이다. 숭의동에서 이화순대 와 함께 명성을 떨치고 있는 시정순대도 여기서 시작했다. 이 순대 골목은 지난 1997년에 특색음식거리 로 지정됐다. ➋ 중앙시장 1935년 무렵 박영섭이 동인천역 부근에 벌집 모양의 시장을 개설 한 데 이어 인천상공협회 창립자 였던 유창호가 현 중앙시장 인근 개천가에 야시장을 운영하면서 오늘의 시장 개설의 터를 닦아놓 았다. 이어 1949년 송현동을 비 롯 전동, 숭의동, 도원동 등 각처 의 노점 자유상인들의 소성자유 시장자치회가 합동하여 지금의 '중앙시장'이 발족되었다. 개천을 복개한 후 건물을 지어 시장을 만들고 갑, 을, 병 지구로 나누었다. ➌ 제수변실 송현배수지에는 상단이 원통형으로 생긴 제 수변실( 制 水 弁 室 )이 있다. 제수변실은 배수관 의 단수 및 유압 조절 기능을 하는 제수 밸브 를 보호하는 시설로 물을 통제할 수 있는 기 계적인 장치다. 일체식 무근 콘크리트의 원통 형 구조로 상부를 페디먼트로 장식한 출입구 와 창문이 있다. 출입구 위에는 백 번 흐르면 만 번 빛난다 는 뜻의 만윤백량( 萬 潤 百 凉 ) 이 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인천광역시 문화재 자료 제23호 지정돼 있다. ➍ 송현시장 송현시장은 중앙시장과 길 하나를 놓고 마주하고 있다. 1960년 대 초에 개설한 송현시장은 2008년 6월 문화관광부와 지식경제 부, 중소기업청 등으로부터 문화관광형 시장이란 타이틀을 받 았다. 시장 안에는 옛 향수를 더듬어 볼 수 있는 빨래터와 펌프 장 등을 복원해 놓았고 길거리갤러리도 만들었다. 송현시장이 믄화관광형 시장으로 지정된 것은 인근에 골목들이 그대로 살아 있고 무엇보다 우리나라 최대 달동네였던 곳을 추억할 수 있는 수도국산박물관이 있기 때문이다. ➎ 해방 우물 수도국산 주변에는 우물들이 많았다. 그 중 송현시장에서 수도국산 오르는 골목에 있는 해방 우물 이 유명했다. 흔히 층층대 우물이라고도 불렀다. 몇 년 전까지도 이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 은 메워버렸다. 우물을 개통할 때 세운 작은 기념석이 한편에 세워져 있다. ➏ 미림극장 1957년 11월 고희 석 대표가 송현동 중앙시장 진입로에 천막극장을 세워 평화극장 이란 이 름으로 천막을 세 워 무성영화를 상 영하면서 시작되 었다. 영화 뿐만 아니라, 남진과 나훈아 등의 리사이틀 무대이기 도 했다. 참고로 1958년 발행한 인천연감에 의하면 미림극장이 개관한 이듬해인 1958년 한 해 동안 인천에서 영화를 관람한 연 관객 수는 75만 5,848명이었다. 당시 인천 인구가 30만 명 정도 였으니 시민 모두가 1년 동안 두 차례 이상은 영화를 본 셈이다. 지난 2004년 7월 29일 영화 투가이즈 를 끝으로 문을 닫은 미 림은 지난 10월 2일 250석 규모의 실버전용극장으로 리모델링 해 다시 개관했다. ➐ 수도국산 달동네박물관 1960~70년대 달동네 서민의 생활상을 테마로 한 수도국산 달 동네 박물관은 지난 2005년 10월 개관했다. 동네어귀, 구멍가게 등 달동네의 풍경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고 연탄을 배달한 유완 선 씨, 대지이발관을 운영하던 박정양 씨 등 이곳을 삶의 터전으 로 평생 살아 온 사람들의 모습을 마네킹으로 만들어 생생함을 더한다. ➑ 수도국산(송현) 배수지 수도국산 정상 부근(2만 5천 평)에 일본인 나카지 마( 中 島 )가 설계해 1906 년 착공하여 1908년 10 월 송현 배수지를 준공한 데 이어 기타 잔여 공사 를 하고 1910년 4월 인 천의 상수도를 운영, 관리 하기 위한 인천수도사무 소를 설치했다. 그해 9월, 마침내 약 4년 여의 공사 끝에 인천에서 노량진에 이르는 인천 상수도 건설 공사를 모두 마무리하였다. 당시 수돗물 공급량은 시민 7만 명이 하루 사용할 수 있는 분량으로 현재의 1백분의1 수준이었다. 수 돗물은 주로 일본인들 위주로 공급되었다. ➒ 적십자병원 1956년 7월 25일 수문통 옆에 경기적십자병원이 개원했다. 주 변에 거주 인구와 큰 공장들이 많았기 때문에 병원의 수요가 많 았다. 1977년 3월 30일 송현동에서 남구 숭의동 숭의로타리 근 처로 이전하면서 이름을 인천적십자병원으로 바꾸었다. 송현동 자리는 천주교회가 들어섰고 현재는 천주교 성당 재건축을 위해 비어있는 상황이다. 적십자병원은 1996년 6월 5일에 연수동 결 핵요양소 자리로 재차 이전하였다. 2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현동 23

14 송림동 시간이 멈춰선 흑백 黑 白 사진 그 속에 내가 있다 송림의 산들은 100년 넘게 사람을 안고 살았다. 이발관, 한약방, 목욕탕, 솜틀집, 국수집 그 산을 터전 삼아 살던 사람들의 오랜 삶의 공간들이다. 한자리에서 4,50년은 기본. 아직도 그곳에 남아 엄연한 현재 의 사진첩을 구성하는 소재들이다. 그 안에는 사람들이 내쉰 숨이 만들어낸 기억과 시간이 훑고 간 흔적 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 아비규환 생지옥이 따로 없었다. 성냥개비로 지은 양 집들이 산산조각 파편처럼 흩 어졌고 이곳저곳에서 부엌 가스통이 폭발해 불길이 계속 퍼졌다. 외마디 비명도 지르 지 못하고 거대한 흙더미 속에 마을 전체가 묻혀 버렸다. 외할머니댁에 놀러온 어린 남 매, 새벽에 가게 일을 하고 잠시 집에 들른 주부, 폭우가 쏟아져 날품 팔 일 없어 집에 있던 가장 등 26명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었다. 1990년 9월 11일 낮 12시 40분, 동구 송림5동 박문여고와 선인중학교 사이 흔히 부처 산 이라고 부르는 야산 축대가 무너지면서 수백 톤의 흙더미가 21가구가 살고 있는 가 옥 12채를 덮쳤다. 이 산은 돌부처 88개가 똬리를 틀고 있던 일본 절이 있었다는 이유 로 혹은 산등성가 부처 형상이라 하여 부처산 혹은 부채산 이라고 불리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 부처님의 자비는 없었다. 전달부터 야산 중턱에 있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빗물에 쓸려서 많이 기울어져 주민 들은 밑둥을 베어줄 것을 요청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결국 그 나무에 걸려 있던 흙더 미가 며칠동안 내린 집중호우로 높이 15m 가량의 야산 중턱에 내려앉으면서 축대가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당시 민자당 김영삼 대표는 합동분향소와 매몰지를 방문해 유 가족을 위로했다. 송림동 25

15 송림동의 산들은 이렇게 늘 위태로웠다. 거기에 기대어 사는 사람들의 삶도 늘 위태 로웠다. 1900년대 초 일본군이 중구 전동 부근에 주둔하면서 일제에 쫓겨 온 사람들이 송림동 이쪽저쪽 산등성이에 움막을 지었다. 이어 6 25 전쟁이 터지자 황해도 등 이북 사람들이 산비탈에 솥단지를 걸었다. 그들은 곧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 생각하고 임 시 거처를 마련했지만 반백년( 半 百 年 )이 넘는 세월을 보내고 말았다. 6,70년대 접어들 면서 공장 일자리를 찾아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이 식솔을 이끌고 산으로 들어왔다. 이들은 우리나라 산업화의 불꽃을 피어낸 장본인들이다. 송림동의 산들은 그렇게 100 년 넘게 사람을 안고 살았다. 송림동을 품고 있는 대표적인 산은 송림산( 松 林 山 )이다. 송림산은 해발 58m의 아트 막한 산이다. 나중에 수도국 배수지가 산 정상에 들어서면서 수도국산 으로 불렸다. 송림산을 동서로 나눈다면 한쪽은 송림동, 다른 한쪽은 송현동이다. 서쪽 송현동 기슭 은 대부분 재개발이 돼 솔빛마을 이란 동네가 되었다. 송림동 쪽은 아직까지는 불도저 의 삽날을 피해가고 있다. 떠나고 들어오기를 몇 번. 주인은 바뀌었지만 집은 그대로 그곳을 지키고 있다. 애초에 빈 땅에 말뚝 박고 집을 지었기 때문에 동네는 산 모양대로 자연스럽게 형성 되었다. 남의 집 마루와 안방을 지나야 내 집으로 들어 갈 수 있는 기형적인 가옥들과 사람이 죽어도 관조차 돌릴 수 없는 좁은 골목이 있었다. 등 굽은 골목들은 마치 쟁기 질한 것처럼 길게 산 밑으로 구불구불 내려간다. 산 아래에는 송림로터리, 현대극장, 현대예식장, 동부시장, 노동회관 등 도시 기능의 요소를 두루 갖춘 안 송림동 이 있다. 이곳이 송림동의 안쪽이요 그 밖은 송림동의 바깥이다. 6,70년대 송림동은 실제로 인 천 도심의 끝이었으며 개건너 등 교외에서 들어오는 첫 지역이었다. 그 시절 안 송림 은 일종의 다운타운이었다. 안 송림은 지대가 낮다. 동네 옆으로 바다와 통하는 갯골이 굽이 흘렀다. 주변은 온 통 미나리깡 아니면 배추밭이었다. 낮은 곳을 북돋워 평지를 만들었지만 비만 오면 물 이 고였고 사리 때는 바닷물이 범람하기 일쑤였다. 1965년도에 개교한 서흥초교 학생 들은 한동안 등교할 때마다 다 탄 하얀 연탄을 들고 와 운동장에 던지는 게 일이었다. 이 벌판에 곡마단 천막이 쳐지고 원숭이를 앞세운 약장수들이 모이면서 이 땅은 활기 를 얻었다. 1960년대 초 큰 건물이 하나 들어섰다. 500평 규모의 2층짜리 현대극장이다. 시내 도 아닌 변두리에 극장이 들어섰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대단한 일이었다. 시내 영화관 에서 몇 달 전에 내린 영화 두 편을 동시 상영했다. 한국인이 만든 중국 영화와 스토 리 엉성한 에로 영화가 주로 올려졌다. 그나마 비가 줄줄 새는 필름은 끊어 먹기 일쑤 지금은 사라진 부처산 아랫동네. 이곳에 동산휴먼시아 아파트가 들어섰다. 2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림동 27

16 옛 현대극장. 였다. 그래도 인근 노동자와 서민들의 안식처요 시네마 키드들의 더할 나위 없는 꿈의 공간이었다. 영화 대신 땅딸이 이기동, 비실이 배삼룡이 쇼를 하는 날이면 극장 앞길은 인산인해였다. 현대극장은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이 일대는 송림동이란 명칭보다 현 대극장 동네로 통했다. 주변의 상가나 가게들은 현대 라는 상호를 붙이는 것을 자랑스 럽게 생각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인근의 대한중공업도 현대그룹에 넘어가면서 현대 제 철이 되었다. 현대극장은 1998년 2월에 문을 닫았다. 한동안 비어 있다가 지금은 할인 마트가 들 어섰다. 극장의 외관은 앞면만 조금 바뀌었을 뿐 지붕과 시멘트 벽 등은 개관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특히 뒷면 벽에 현대극장 이라고 쓴 빛바랜 페인트 글씨 는 시간의 흐름을 대변해 준다. 현대극장 바로 옆에는 현대예식장이 있었다. 중구 용동에 있는 신신예식장과 쌍벽 을 이루던 예식장이었다. 김포, 강화는 물론 서구 지역에 마땅한 결혼식장이 없었기 때 문에 시외버스가 닿는 이곳에서 결혼식이 많이 열렸다. 주말이면 하객을 실어 나르는 관광버스로 교통 혼잡을 빚곤 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제과점과 정형외과가 들어섰다. 그 뒤편으로 아주 독특한 2층짜리 건물이 자리 잡고 있다. 중앙통로에 회랑이 길게 놓여있고 그것을 중심으로 좁은 골목이 격자형으로 뻗어있다. 2층은 각 집을 통해서만 오를 수 있으며 각 동은 구름다리로 연결돼 있다. 여름 뙤약볕이 내리쬐는 날임에도 불 구하고 골목 안으로 들어가면 곳곳에 백열등이 켜져 있다. 그만큼 어둠침침하다. 일명 똥고개 라 불리던 송림 송현동 고개. 2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림동 29

17 이 건물의 이름은 현대상가. 아래층은 가게, 윗층은 살림집인 일종의 주상 복합 건물 이다. 상가가 건립되기 전까지 이 터는 인근에서 키운 배추 등 채소 경매가 이뤄지고 노 점상들이 장사를 하던 곳이다. 70년에 현대상가 건립을 추진하면서 노점상들을 길 건 너 시장 깡마당 빈터로 강제 이주시켰다. 1971년 4월 현대식으로 지은 상가를 완공하고 연면적 13평씩 점포당 300 ~ 350만 원에 분양했다. 당시 집 한 채 값에 맘먹는 액수다. 그즈음 쫓겨난 노점상들은 결속을 다지며 상권을 형성해 그해 12월 24일에 동부시 장을 설립한다. 이후 원예협동조합공판장, 동구상가, 궁현상가, 송육상가, 중앙상가 등 을 현대시장 의 이름으로 한데 아우르며 한때 인천 최대의 시장으로 발전한다. 반대로 현대상가는 몇몇 포목점들이 장사를 했을 뿐 제대로 분양이 되지 않았다. 결국 상권을 형성하지 못하고 1층 가게도 값싼 주택으로 세를 주면서 점차 슬럼화되기 시작했다. 두 시장의 신세가 완전히 역전된 것이다. 현대상가는 지금 경쟁에서 밀려난 채 초췌하 고 늙수그레한 모습으로 그렇게 40년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 현대극장 못지않게 유명한 건물이 노동회관이었다. 한국노총의 사무실이 있었기 때 문에 그런 이름을 얻었지만 실제는 지역 복지회관의 성격이 강했다. 원래는 50년대 말 혹은 60년대 초에 현대극장 자리에 세우려고 했으나 땅을 파고 보니 개펄이 나와 포기 했다. 제삼교회 바로 앞에 터를 잡은 3층 건물에는 목욕탕, 이발소, 미용실, 예식장, 식 당 등이 들어섰다. 지역민에게 인기 있었던 시설은 바로 목욕탕과 이발소였다. 다른 이 발소가 200원 할 때 회관 구내이발소는 30원이었다. 영등포, 수원 등에서 날 잡아서 온 가족이 머리를 자르러 왔어요. 이발한 후 목욕하 고 짜장면 한 그릇 먹고도 돈이 남거든. 한창때는 이발사만 15명을 두고 일했어요. 3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림동 31

18 2000년 동구청소년수련관이 건립되기 전, 끝까지 노동회관에 남았던 구내이발관 이 송철(73) 사장의 설명이다. 한국노총이 떠나면서 회관이 폐쇄되자 그는 바로 옆에 회 관이발관 을 열고 지금까지 가위를 놓지 않고 있다. 얼마 전부터 37세의 아들이 같은 자리에서 가위손의 대를 잇고 있다. 현대극장 옆으로 알록달록한 간판을 단 주점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닭알탕 을 주메뉴로 파는 집들이다. 닭알은 죽은 암탉의 뱃속에서 꺼낸, 달걀이 안된 알이다. 50년 전 맞은편 현대시장 닭전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닭알을 포장마차에서 얼큰하 게 찌게로 끓여 내놨다. 현대제철과 인근 철공소에 다니던 노무자들의 입맛을 사로잡 았다. 이후 공락주점을 시작으로 형제, 창석, 왔다, 풍차, 현대주점 등 6곳에서 앞다퉈 닭알탕을 칼칼하게 끓여내면서 닭알탕 거리 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송림동에는 개건너~ 제물포역 ~ 동구청 ~ 동인천역 ~ 현대제철을 이어주는 로터리가 있다. 인천에서 숭의로터리와 쌍벽을 이루던 로터리였다. 이 로터리 밑에 사연과 곡절 이 많은 지하도가 있다. 1988년 2월, 로터리 밑 땅속을 파기 시작했다. 딱 2년 후면 3평 남짓한 점포 102개와 지하도로를 갖춘 1만1,100m2 규모의 지하상가가 들어선다는 장밋 빛 기대감 속에 진행됐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처음 시공을 맡은 회사가 넘어갔 고 또 다른 시공사도 부도났다. 인천시가 1993년 4월에 떠맡았지만 사업은 제대로 진척 되지 않았다. 상가만 들어서지 않았지 지하통로는 거의 완성된 상태에서 출입문이 봉 쇄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차 잊혀져 갔고 지하도는 점차 도시의 흉물이 되었다. 3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림동 33

19 송림아뜨렛길의 휴식 공간. 특히 여름에 인기다. 2012년 8월 이곳에 빛이 들어왔다. 거의 15년 만의 일이다. 귀신 나올 것 같았던 어 두침침한 공간이 산뜻하게 문화공간으로 변신했다. 송림아뜨렛길 이란 멋진 이름도 얻었다. 이곳에는 LED 조명을 이용해 상추와 배추, 무 등을 키우는 식물공장 동이네다 랑채 를 비롯해 차를 마시며 책을 볼 수 있는 널찍한 북카페와 사진, 그림 등을 감상할 수 있는 갤러리가 조성됐다. 개장하자마자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으며 특히 일본 NHK 는 후쿠시마 원전사태 이후, 농산물의 안전성과 관련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으로 송 림아뜨렛길 를 취재해 방송했다. 애물단지가 보물단지가 된 것이다. 송림동과 송현동의 접경 지역인 서흥초교 옆으로 가파른 고갯길이 나있다. 사람들 이 똥고개 라 부르던 마루턱이다. 송림동 사람들이 수도국산 옆으로 해서 화수동, 만 석동으로 다니던 길이다. 이 고개를 따라 배추, 호박, 복숭아 등을 키우는 밭이 널려 있 었다. 그 밭에 똥거름을 주었기 때문에 똥고개 라는 이름을 얻었다. 겨울이 되면 얼어 붙은 구덩이에 아이들이 빠지는 난감한 일이 종종 생기기도 했다. 지금의 송림동 이마 트 자리는 매립하기 전에 바다였다. 인분을 실은 똥차들이 이곳에다 똥을 버렸다. 바로 옆 염전에서 멱을 감던 아이들은 변소에 빠트린 동전을 줍기 위해 똥차를 따라 다녔다. 실제로 똥차는 가끔 동전을 흘리고 다녔다. 3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림동 35

20 송림동이 인분과 맺은 인연은 오래 갔다. 1977년 똥고개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송 림6동 옛 대주중공업 뒤편, 현 백병원 부근에 송림위생처리장이 설립되었다. 이전에 숭의동과 연희동 등에서 처리되었던 인천 전역의 분뇨가 이 똥공장 에서 처리되었다. 여름날 바람을 타고 날아오는 역한 냄새에 주민들은 두통을 호소하기도 했다. 이 동네에서는 밥 먹는 시간을 배꼽시계에 맞추질 않았어요. 처리장이 가동을 멈춰 야만 그때 숟가락을 들었을 정도였어요. 어휴, 냄새 대단했지. 송림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주윤배(55) 씨는 불현듯 기억 속의 냄새를 맡았는지 미간이 살짝 접혔다. 이 처리장은 1996년 9월에 폐쇄되었다. 이 부지는 2014 인천아시 아경기대회 배구장으로 재탄생했다. 똥공장 자리에 세워진 배구장의 이야기는 송림동 의 극적인 발자취의 하이라이트다. 3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37

21 그때, 이곳 송림동 Map & Photos ➊ 도축장 ➍ 동명초교 ➐ 계명원 ➋ 배다리 ➏ ➎ ➍ 현대극장 ➌ 송림 로터리 ➊ 동구청 서흥초교 동부시장 가좌동 ➓ 재능대 ➑ ➒ 동산 중 고 제물포역 ➐ 현 동구청 자리는 인천보건조합이 운영했 던 도축장이었다. 1933년판 인천부사에 의하면 인천도축장은 1916년 9월 6일에 허가를 시작으로 부지 평수 689평, 건물 평수 99평, 직원으로서는 부서기 1명, 도 살부 3명을 두었고 소와 돼지를 중심으로 연 평균 6천여 마리를 도살했다고 기록하 고 있다. 사람들은 흔히 이곳을 때려 잡는 다 는 일어( 日 語 ) たたく다다꾸 에서 와전된 다데기깐 으로 불렀다. 1968년 1월1 일 동부, 북부 출장소를 합병하여 도축장이었던 이곳을 동구청사로 사용하였다. 초 창기에는 도축장 건물을 그대로 사용했다고 한다. 구청 마당에는 도축장에서 희생 된 동물들의 넋을 위로하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한편 도축장은 1974년까지 인천 시 관영으로 학익동 제 1도축장, 갈산동 제 2도축장으로 운영했고 이후 민간으로 이관되면서 구월동으로 이전했다. 현재는 십정동에 있다. ➋ 송림동 성당 1956년 우리나라 1세대 건축가 로 유명한 이희태에 의해 세워 진 성당이다. 이희태는 명수대성 당(1954), 혜화동성당(1960) 등을 통해 입방체형의 근대 성당 건축 을 시도해 그의 건축물들은 당시 로서는 매우 혁신적인 것으로 평 가 받았다. 송림동 성당은 종탑과 본당이 구분된 독특한 구성으로, 건립 당시 성당 주변의 한옥을 의식한 듯 모던한 벽면에 리듬감 있는 창호 계획과 재료를 달리 적용하여 분절의 효과를 극대화했다 전쟁 후 가톨릭 구제회에서 밀가루와 헌옷 등 구호물자를 보내 주었는데 이 걸 받으려 성당에 나오던 밀가루 신자 가 많았다고 한다. ➌ 송림리 수켓장 인천은 축구, 야구 등 서양의 스포츠들이 들어온 개항장이었다. 겨울철 대표적 스 포츠인 스케이트도 비교적 많이 보급되 었다. 1925년 제1회 전( 全 )인천빙상경기 가 한적한 교외였던 송림리 옛 현대극장 이 있는 송림오거리 부근에서 개최되기도 했다. 정식 빙상경기장이라기보다 공터에 물을 채워 얼린 경기장이었다. 당시 신문에는 스케이트를 수켓 이라고 표기했고 경기장을 수켓장 이라고 불렀다. 30년대 이후부터는 각종 스케이트 경기를 숭의운 동장에 물을 얼려 빙상장으로 만들어 치렀다. 설립자 박창례 선생은 1929 년 도원동 보 각선원에서 관 서학원으로 시 작해 1931년 유동에 일본 인의 땅을 빌려 현 동명초교의 근간이 된 동명학원 을 설립한다. 그러나 1939년 일제는 고구려의 시조인 동명성왕( 東 明 聖 王 )의 이름을 딴 간판은 내걸 수 없다 는 트집을 잡아 학교 이름을 일 본식 이름인 소화강습회 ( 昭 和 講 習 會 )로 개명했다. 1946년 8월 일본 동경대 전염병연구소의 실험용 우사를 인수해 지금의 동명 초교 터를 만들었다. ➎ 인천 두묘제조소 일제강점기 때 송림동에는 동양에서 유일한 두묘 제조소가 있었 다. 두묘( 痘 苗 )란 우두약으로 당시 일본인들은 한우인 송아지에서 뽑는 두묘를 일본. 중국, 미국 등 전 세계로 공급했다. 두묘는 봄 가을 2회에 걸쳐 제조되었는데 1회 생산품이 350만 명 분이었다 고 한다. 당시 송아지 값이 1,000원이었는데 우두로 사용하면 1 년에 한 마리에서 약 3만 원의 수입을 올릴 만큼 질이 좋았다. ➏ 노다 장유공장 1905년 11월 10일 모기와 다카나시 가문이 조선으로 건너와 인천부 송림리 19통 에 일본장유주식회사 인천공 장을 설립하였다. 일본장유주 식회사는 8대를 걸친 노다장 유 의 역사성을 강조하기 위 해 1917년 노다장유주식회 사( 野 田 醬 油 株 式 會 社 )로 명 칭을 바꾸고 된장, 간장, 조미 료, 향료, 청주, 소주 등을 생 산하는 종합식료품 제조회사로 변신하였다. 일본 간장과 일본 된장을 대량으로 생산해 조선에 진출한 일본인과 만주에 거주하 는 일본인에게 장류를 판매했다. 당시 인천은 간장과 된장의 주 원료인 대두를 경기도와 황해도에서 쉽게 공급받을 수 있는 입 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1950년 인천동부경찰서가 노다 장유 공장으로 이전했다. 현재는 인천경찰기동대가 사용하고 있다. 현 진로아파트 자리에 1951년 11월에 세워진 고아원이다. 60 년대 계명원의 원생들은 3, 4년씩 늦은 나이에 인근 서림초교 에 진학했는데 이들이 들어간 축구부 등 서림초교의 운동부 는 인천 시내 학교 대항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했다. 1996년 10월 21일 강화군 양도면으로 이전했다. ➑ 인천상업강습회 1938년 7월 율목동에서 인천 10대 부호 중 한 사람이었던 이흥선의 주도로 인천상업강습회를 설립했다. 이는 조선인의 순수 재원으로 운영된 유일한 민족학교였다. 1939년 인천상 업전수학교로 개편했고 1941년 11월 영원농원 배 밭이 있던 송림동 현 위치에 교사를 신축하고 1946년 동산중학교로 교 명을 변경했다. ➒ 박문여자중고등학교 1940년 5월 18일 송림심상소학교(현 송림초등학교)의 교실 두 칸을 빌려 2개 학급에 120명(조선인, 일본인 여학생 각 60 명)을 모아 첫 입학식을 치렀다. 당시 인천부에는 여학교로 는 인천공립고등여학교가 유일했기 때문에 이 여학교의 개교 는 인천부민의 염원을 이룬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1945년 9 월 30일 인천박문여자중고등학교로 학교명을 변경했고 1956 년 8월 30일 부평교사에서 현 송림동 교사로 신축 이전하였 다. 이 학교는 곧 송림동 시대를 마감한다. 박문여중은 2014 년 2월에, 박문여고는 2015년 2월에 연수구 송도동으로 배움 의 터를 옮긴다. ➓ 동산공원( 東 山 公 園 ) 70년대 인천시사 에 의하면 1944년 1월 8일 조선총독부 고 시 제13호로 지정된 곳으로 원래 도시계획상 아동공원으로 지정되었다. 광복 후 무선고등학교(현 대헌공고) 부지로 일부 편입되었고 특히 선인재단이 무허가 로 체육관을 건설하면서 공원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3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림동 39

22 화평동 냉면, 함세덕 그것만으로도 고마운 동네 도시를 가로지르는 철도로 인해 중심지에서 조금 비켜서 있던 화평동. 어느 날 갑자기 지금까지 요리책 어느 페이지에도 없던, 듣도 보도 못했던 새로운 냉면의 발생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냉면 삶는 냄새를 뒤로 하고 뒷골목으로 들어서면 우리는 인천이 낳은 거인들의 발자취를 쫓을 수 있다. 비가 오면 인천 곳곳을 거쳐 온 빗물이 이곳에 모였다. 이 물은 갯골을 따라 바다로 나갔다. 화평동에서 태어난 이 들은 빗물처럼 거친 바다로 나가 세상에 그 이름을 남겼다. 화평철교를 사이에 두고 중구와 동구가 갈린다. 동인천 지역이 한창 융성할 때는 화평철교가 도심의 화려함과 거주지의 소박함을 구분하는 경계선이기도 했다. 동구 에 속한 화평동의 뿌리는 평동( 平 洞 )이다. 동네가 평평해서 얻은 이름인데 일부 지역 은 평평하기 보다는 지대가 낮다. 낮다보니 비가 내리면 물이 모이곤 했다. 이 물은 갯골을 만들었다. 화평치안센터 앞에는 화강암으로 된 다리 표지석 두 개가 남아 있었다. 송현교 라 고 새겨진 이 표지석은 마치 뽑다만 덧니처럼 박혀 있었다. 예전에 위쪽으로 다리가 있었던 흔적인데 남은 표지석을 기준 삼아 발걸음으로 어림잡아 측량해 보면 다리는 폭 3m, 길이 15m 정도의 크기였다. 이 다리 밑으로 화평동 일대로 모인 물과 바다에 서 밀려 들어 온 짠물이 만나 흘렀다. 수문통이라 불린 이곳부터 옛 인천극장이 있는 언덕배기까지가 화평동이다. 화평동이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게 된 것은 아무래도 냉면 때문일 것이다. 전통 적인 함흥냉면이나 평양냉면 측에서 보면 이단아 라고 할 수 있는 화평동 냉면은 일 단 지름 30cm 가까운 세숫대야처럼 생긴 그릇을 대하는 순간, 모두들 써프라이즈. 이 특이한 그릇에 담겨 나오는 것에 입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제는 맛에도 뒤지지 않 화평동 41

23 는다. 고추장 양념과 오이, 무, 열무, 깨 등의 채소 고명의 조화는 특유의 얼큰하고 시 원한 맛을 자아내고 있다. 같은 종류의 음식점이 한데 모이면 슬슬 원조 다툼이 시작된다. 화평동 냉면도 예외는 아니다. 원조에 대한 규명은 결국 그 골목에 대한 역사를 더듬어 보게 된다. 6 25전쟁 이후 화평철교를 기점으로 경인철로 변을 따라 무허가 집과 가게들이 들어 섰다. 1980년대 초 인근 화수시장에서 서너 평 정도의 소규모 냉면집을 운영했던 상 인들이 동인천역으로 가는 길목인 이곳에 하나 둘 개업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냉면 골목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는 설 이 가장 설득력을 갖는다. 현재 냉면 골목 중간쯤에 자리 잡은 아저씨 냉면집 의 간판을 원조 밝히기의 단초 로 삼을 만하다. 길 건너편 허름한 집에서 제일 먼저 시작한 집으로 거짓이면 다른 집에서 이의를 제기할 것 이라고 당당하게 간판의 반 이상을 할애해 적어 놨다. 이 간 판이 아무 문제없이 계속 걸려 있는 것을 보면 다른 냉면집들도 이 집을 원조로 순순 히 인정하는 모양이다. 원조 로 추정되는 아저씨집에서 냉면을 시켜놓고 취재에 응하기를 요청했다. 한사 코 인터뷰를 거부하는 아저씨. 시간이 좀 지나자 식탁을 맴돌면서 하나둘씩 이야기 보따리를 푼다. 아저씨가 냉면을 말기 시작한 것은 현재 서른다섯 살 된 아들이 태어나기 한두 해 전, 그러니까 1976년경이다. 지금은 경인선 복복선 공사로 다 헐리고 없어졌지만 건 너편에는 양화점과 양복점 등 가게들이 즐비했다. 아저씨는 솜틀집 옆 작은 가게에 서 탁자 한 개를 놓고 냉면집을 시작했다. 당시 인천 냉면집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경 인면옥의 냉면 값이 4,500원 할 때 이 집은 500원짜리 냉면을 팔았다. 지금은 4,000 원. 아직도 당시 경인면옥의 냉면 값을 넘지 못하고 있다. 가격에 비해 양은 풍성했다. 엄청난 양을 담기 위해서 두터운 스테인레스 재질의 양푼을 개당 9,900원에 금형 떠서 특별 주문했다. 만들고 보니 세숫대야 모양의 그릇 이 되었다. 지금의 이 그릇이 그때 만든 것이냐 고 했더니 30년 넘게 닦았더니 두께 가 거의 절반으로 닳았지만 그 그릇을 아직도 내 놓는다 는 다소 믿기 힘든 답변이 돌 아왔다. 80년대 초만 해도 인근 대성목재, 동일방직, 인천제철 그리고 인천항 부두 근로자 들이 작업복 입은 채로 허름한 냉면집을 찾았다. 한창 때는 새벽 6시 동틀 무렵에 가 게 앞에서 문 열기를 기다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원한 냉면으로 해장도 하고 배도 채우기 위해서다. 전성기 때는 골목 양쪽으로 23개나 있었던 냉면집이 이제는 10여 곳만 남았다. 이 마저도 곧 불어 닥칠 재개발로 인해 자리를 지키며 명맥을 이어 갈 수 있을지 궁금하 다. 대신에 이곳을 고향으로 둔 화평냉면이 인천 시내는 물론 서울 등 전국으로 면발 처럼 길게 퍼져 나가고 있는 것에 그나마 위안 삼아야 할 것 같다. 철길이 넓어지기 전 현재의 냉면집 맞은편에는 양화점과 양복점들이 늘어서 있었 다. 양화점은 주로 맞춤과 기성품을 병행하는 집이었다. 특히 인근에 공장들이 많이 4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평동 43

24 있었던 까닭에 군화를 물들인 안전화를 많이 팔았다. 기성화를 갖다가 파는 구둣방 도 몇 집 있었다. 길 한쪽 줄이 통째로 철거되었다. 두어 집은 동인천 쪽으로 이전해 지금도 장사를 하고 있다. 이곳 양복점은 경동거리 양복점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 다. B급이랄까. 간판도 내부 장식도 화려하지 않은 동네 양복점이었다. 럭셔리 고급 양복이라기보다는 서민들이 마음먹고 한 벌 장만하는 수수한 양복들을 만들었다. 이들 틈에 솜틀집들이 있었다. 그중 인천에서 가장 오랜 솜틀집은 은율면업사. 황 해도에서 피난 온 박재화 씨는 고향 은율에서 하던 목화업을 이어가 이곳에서 은율 면업사를 열었다. 아들 박현석 씨 그리고 손자 박길주 씨에 이르기까지 2000년까지 삼대째 솜틀집을 운영하였다. 10여 평의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기계는 기름때 묻은 솜틀기계 하나. 60년대 방직공장에서 쓰던 중고를 사다 개조한 것이다. 그들은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서민들이 사용하던 이불속 목화솜을 가지런히 펴는 작업에 정성을 다했다. 솜뭉치 속에는 가난한 서민들의 애환과 추억이 가득 담겨 있기 때문이다. 한 겨울 엄동설한에 연탄불도 없는 구들장에서 온 가족이 한이불에 덮고 자던 기억, 가 난한 살림을 줄여 큰맘 먹고 첫 신접살림으로 장만했던 일 등. 솜이불에는 우리의 추 억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확장 공사 직후의 화평철교. 4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평동 45

25 이제 솜 트는 기계 소리를 더 이상 화평철교 인근에서 들을 수 없다. 그들은 모두 고인이 되었다. 은율면업사에서 실제로 사용했던 솜틀기계는 고인의 유언대로 송현 동 수도국산달동네박물관에 기증돼 전시되고 있다. 오늘도 박 씨 삼대는 박물관의 좁은 골목길에 자리 잡고 대지이발관 박정양 씨, 연탄가게 유완서 씨를 이웃으로 두 고 여전히 솜을 틀고 있다. 화평동을 냉면으로만 이야기하기에는 아쉬운 동네다. 화평동 골목에는 우리나라 연극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의 태가 묻혀 있다. 골목 어귀에서 오래된 기와 집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는 이 동네를 거닐다보면 먼저 함세덕 이란 이름 석자와 만나게 된다. 극작가 함세덕( )은 1915년 화평동 455번지에서 태어났다. 1936년 조선문학에 희곡 산허구리 를 발표하면서 연극계에 명함을 내민 뒤 39년 1막 짜리 단막극 동승 으로 일약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무의도 기행, 도념( 道 念 ) 해연 등 20여 편의 역작을 남겼다. 일제강점기와 광복 후 혼돈기에 나온 그의 작품은 가난과 자유가 주 테마였고 토속 적이고 때론 치열한 서정적 리얼리즘을 바탕으로 시대를 초월한다. 그러나 월북 작가 라는 이유로 40여 년 간 우리는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못한 함구 대상 작가였다. 그의 생가가 궁금했다. 번지 주소와 사진 한 장만 갖고 탐문한 끝에 마침내 생가를 찾아냈다. 반가움도 잠시, 폐업한 소주방으로 변해 버린 집을 보고 아연 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옥상에 올라가서 뒷집을 내 려다 볼 수 있을까요? 뒷집에 뭐 볼게 있다고. 뒷집의 정체 를 몰라 마뜩잖은 눈치를 보이는 아줌 마의 시선을 뒤로 하고 이웃집 옥상에 올라가서 생가 함세덕 일가 (어린아이가 함세덕). 소주방으로 바뀐 함세덕 생가. 4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평동 47

26 를 내려다보았다. 낡았지만 조부 함선지, 부친 함근욱 2대가 누린 68평의 한옥 기와 집의 골격은 그대로 남아있다. 옥상에서 보니 기다란 경인선 철도길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는 이른 새벽 화평철 교를 털컹거리며 지나는 철마 소리에 잠을 깨고 수문통에서 묻어나온 바다 특유의 내음을 폐부 깊숙이 들이마시며 하루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렇게 화평동의 바람과 냄새는 그의 작품의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1935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고개 라는 시는 19세까지 인천에 머물렀던 시절에 쓴 것이다. 이 고개 가 혹시 집 앞 화도고개 를 맘에 두고 만든 작품이라고 생각하면 너무 앞서 나간 것일까. 다른 골목, 화평동 37번지에서는 우리나라 미술계를 대표하는 거목 과 마주한다. 1919년 이곳에서 태어난 석남 이경성 선생(2009년 작고)은 인천시립박물관 초대관장 이자 국립현대미술관장을 역임했다. 무엇보다 인천시립박물관 시절 6 25 전쟁의 난 리통 속에서도 귀중한 문화재를 몸으로 지켜냈다. 박물관 아래 시장 관사 방공호에 문 화재급 유물 19점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빌려온 55점 등 유물 200여 점을 포장해 옮 겨 놓았다. 그의 이런 행동이 없었다면 중요한 유물들은 잿더미가 되었을 것이다. 그 는 우리나라 미술비평 1세대로 미술행정가와 평론가, 화가로 일생을 살았으며, 한국 미술사 (1962), 한국근대미술연구 (1975), 한국근대회화 (1980) 등의 저술을 남겼다. 냉면 골목 중간쯤, 주위 분위기와 동떨어진 4층짜리 건물이 있다. 입구에는 평안 수채화의 집 이란 나무 간판이 걸려 있다. 수채화가 박정희(90) 할머니가 거주하며 이웃에게 그림을 가르치는 집이다. 박 할머니는 한글 점자 훈맹정음 을 만든 송암 박 두성 선생의 따님이다. 송암 선생과 함께 율목동에 살다가 결혼해서 1949년부터 이 곳에 살기 시작했다. 목조 건물이었던 것을 의사 남편 유영호 박사(작고)가 콘크리트 건물로 짓고 평안의원 이란 간판을 걸었다. 지금은 건물 외벽 전체에 당시 평안의원 의 모습과 의사 가운을 입은 남편 유영호 박사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당시에는 이 건물이 제일 높았겠네요 4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평동 49

27 지금도 제일 큰데 내가 이 동네 터줏대감이여. 경성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인천 제2공립학교에서 3년간 교사로 근무했고 이 후 30년 동안 유치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서른 살 때부터 그림을 이웃에게 가르 치다가 예순이 넘은 나이에 화가로 정식 데뷔했다. 그가 키워 낸 제자는 200여 명이 된다. 붕어빵 파는 아주머니, 공장 노동자, 주부, 학생 등 지위 고하나 재산의 많고 적 음에 관계없이 이 안에선 모두 평안한 예술가였다. 박 할머니는 아직도 현역이다.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일년에 50점 정도를 그린다. 전시회를 통해 마련한 그림값은 시각장애인들의 복지를 위해 기꺼이 내놓는다. 수채 화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그가 정작 주위와 나누고 싶었던 건 그림이 아니라 사랑인 듯했다. 화수동, 만석동, 전동의 꼭지점 역할을 하면서 변두리의 중심지 였던 극장 주변은 바로 앞에 화수자유시장이 자리 잡고 있어서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사람들이 모 이면서 자연스럽게 건달들도 등장했다. 가끔 인천극장 앞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 건 들이 지역 신문을 장식하곤 했다. 지금은 마트, 헬스센터 등 복합상가로 바뀌었지 만 아직도 그 극장의 형태는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극장에서 냉면골목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황인의원이 나온다. 병원 간판에는 좀처 럼 쓰지 않는 Since 1958 이란 표식이 있다. 병원 개원이 58년 개띠 로 인천에서는 연 조 있는 병원임을 은근히 내세운 것이다. 주변에 크고 작은 공장들이 많고 비교적 중 심가에 자리 잡은 덕에 환자들이 끊이질 않았다. 지금은 동네병원 격이지만 인천에 종합병원이 들어서기 전에는 지역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고의 환자들과 전염병 치료에 한몫을 담당했다. 굳건히 한 지역을 고수하며 대를 이어서 산재를 당한 주변 노동자와 주민들에게 의술을 펼치고 있다. 지금은 동인천역이 북쪽으로도 출입구가 나있고 북광장도 있지만 예전에는 인현 동 쪽으로만 나있고 송현동 쪽은 철로로 막혀 있었다. 화평동은 중심가와 거리상으 로는 가깝지만 사람들의 동선( 動 線 )과 심리적으로 인해 변두리로 치부되었다. 이런 화평동에도 한때 인천극장이란 영화관이 있었다. 인천 이란 지명의 이름을 딴 극장 임에도 불구하고 이 극장은 삼류극장인 동시상영관이었다. 동인천 주변의 개봉 영화 관과는 달리 서울에서 이미 개봉이 끝나 스크린에서 내려버린 영화 두 편씩을 동시 상영하는 극장이었다. 5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51

28 그때, 이곳 화평동 Map & Photos ➊ 화평철교 ➍ 평안 수채화의 집 ➏ 삼화목욕탕 ➏ ➎ (구)인천극장 화도진 ➋ 화수자유시장 송현동 ➌ ➐ 냉면 거리 ➍ 황인의원 만석동 ➊ 동인천 경 인 선 철 도 전동구름다리 전동 옛 인천여고 앞길에서 송현동으로 가는 내리막에 있는 경인선 철교를 말한다. 당 초 철로는 1899년 동인천역 앞 대한서림 쪽으로 휘어져 있었는데 1900년도 일본 철도운송조합에서 직선화하며 이 철교가 생겼다는 설이 있다. 경인선 개통 당시 약 7.5m로 자동차 두 대가 교차하기에는 쉽지 않은 철교를 1964년 11월 20m(차도 14m, 보도 3m) 폭으로 확장했다. 이후 약간의 확장 공사를 통해 오늘의 모습을 유 지하고 있다. ➋ 화수자유시장 화수 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옛 인천극장 바 로 앞에 있는 화평동 생활권 시장이다. 원래 이 자리는 대한성냥공장이 있었고 공장이 이 전한 후 40여 년 전부터 시장이 형성되었다. 당시 대부분의 시장들은 지붕이 없었는데 이 시장은 70년대 초 튼튼한 철근으로 엮은 슬 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그 아래 상가와 노점 이 빼곡히 자리 잡았다. 화도진터에 있던 달 동네가 공원으로 개발되고 피란민 동네가 아 파트로 변하면서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게다가 인천극장이 나가고 그 자리에 대형마 트가 들어서면서 시장의 기능을 거의 잃었다. ➌ 함세덕 동승 문화재청은 함세덕의 희곡집 '동승' 초판본을 근대문학유물 로 목록화했다. 이 작업은 개화기부터 1950년대까지 발간된 문학 관련 저작물 중 문화재로서 연구 보존 가치가 높은 작품을 선별하는 것이다. 그의 희곡집에는 동승, 무의도기 행 등 5편의 희곡이 실려 있다. 각 작품 첫머리마다 홀수 별 면에 삽화를 넣어 극의 배경을 짐작케 했다. 국내 최고령 수채화 화가 박정희( 朴 貞 嬉 90) 화백의 집이자 작 업실이다. 그는 예순이 넘은 1985년에야 어릴 적 꿈인 화가에 도전했다. 30여 년 가까이 수채화가로 활동한 박 화백은 전시회 수익금을 시각장애인 장학금, 개안 수술비, 점자도서관 건립 비 용 등으로 지원한다. 1952년부터 1963년까지 다섯 남매를 키워 온 과정을 담은 일기 박정희 할머니의 행복한 육아일기 (2001) 는 당시 생활사와 교육 문화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 받는다. 손으로 직접 쓰고 삽화를 그려 넣은 원본은 국가기록원 에 기증될 계획이다. 평안 이란 이름은 의사 남편 유영호 박사가 이 자리에서 평안의원 을 개업한 데서 비롯되었다. ➎ 인천극장 동인천 부근에 있었지만 동시상영관으로 삼류 취급을 받았다. 한때 불량배가 많기로 소문난 극장이었다. 1955년 3월 이민 씨 와 김태훈 씨가 연극 전문극장으로 개관하였다. 이듬해 1956년 4월 24일 화재가 일어나 전소되었다. 1960년대 시민극장에서 인천극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영업을 해 오다 2001년 9월에 문 을 닫았다. 화평동 만화로 사 거리에서 송현초교 로 가는 좁은 골목 길에 50년대 후반에 서 60년대 초 개장 한 목욕탕이다. 그동 안 주인은 몇 번 바 뀌었지만 한 장소에 서 계속해서 영업을 한 목욕탕으로 현재 인천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 된다. ➐ 석남( 石 南 ) 이경성 이경성( 李 慶 成, )은 1919년 2월 17일 화평동 37번지 에서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 31일 초 대 인천시립박물관장(당시 인천 부립박물관)에 취임하였다. 27세 의 젊은 나이였다. 이후 이화여자 대학교박물관, 홍익대학교박물관, 홍익대 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 관, 워커힐미술관 등에 근무하면서 박물관, 미술관과의 인연 을 계속 이어갔다. 해외에서는 일본 소게츠 미술관 명예관장 을 맡기도 했다. 이경성은 1954년 사임할 때까지 10년간 인 천시립박물관장으로 재직했다. 이 기간 동안 박물관의 소장 품을 수집하는 한편 인천지역의 문화유적에 대한 조사 발굴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경성은 박물관 미술관의 행정가로서 뿐 아니라 우리나라 미술비평의 개척자, 교육자로서도 인정 을 받고 있다. 고유섭 이후 본격적으로 비평 활동에 매진했 던 거의 유일한 존재 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1981년 미술인 최초로 국립현대미술관장에 임명된 후부터 35세 미만 작가에게만 시상하는 석남미술상을 제정하여 신 진 작가들을 발굴하는 데 힘을 쏟아 왔다. 5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평동 53

29 화수동 시간의 닻 깊게 내린 무네미 사람만 표정이 있는 게 아니다. 도시도 표정이 있다. 느린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조롱하는 세상에서 화수동 은 여전히 아날로그식 표정을 짓고 있다. 바닷물이 넘어 들어 왔다고 해서 무네미 라고 불렸던 이곳은 한 때 바다에서 건져 올린 온갖 생물로 인천에게 젖을 물렸다. 인천의 개발 청사진에서도 비껴나 있는 덕분에 어느 때 가도 냄새와 소리로 인천인의 몸속에 체화된 강렬한 추억을 이끌어내는 몇 남지 않은 곳이다. 우리는 이제 동구 화수동 183번지 를 기억해야 한다. 그곳은 인천도시산업선교회가 태동한 곳이다. 인천도시산업선교회는 산업화 시절의 노동운동과 군사정권 시절 민주 화의 불씨를 키워온 곳이다. 1961년 9월 미국 감리교의 조지 오글 목사는 화수동 183번 지의 낡은 초가를 구입해 인천산선(인천도시산업선교회) 을 설립했다. 그는 추방되기 전 까지 이곳에서 한국인 목회자들과 함께 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인천산선은 김근태 등 유력한 민주화 운동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화수동 주변에는 동일방직, 대우중공업(현 두산인프라코어), 이천전기, 한국유리 등 큰 공장들이 많이 있었다. 선교회는 산업사회의 민주화와 평화를 위한 화해자로서의 사명으로 직접 작업 현장에 들어가 이른바 노동자 의식화 사업을 펼쳤다. 한때 도시산 업선교회는 도산 이라 불렸다. 도시산업선교회가 기업에 침투하면 그 기업은 도산한 다며 산선을 빨갱이, 공산당 이라고 몰아세우며 끊임없는 감시와 무차별 탄압을 펼쳤 다. 경찰서 정보과 형사들은 화수동으로 출근해 하루 종일 산선이 있던 골목에 어슬렁 거렸다. 산선의 노동자교회 자리는 이제 일꾼교회 와 사회복지선교회 로 바뀌었다. 교회 현 관 입구에는 70년대 까지 49m2(15평)짜리 초가지붕 건물이었던 인천산선 회관의 흑백 화수동 55

30 도시산업선교회 간판이 걸린 초가집과 집회 모습. 사진과 선교회를 돕던 조지 오글 목사가 미국으로 추방되는 모습의 사진들이 걸려 있 다. 현재 이 교회는 집회 사진과 보고 문서 등 도시산업선교회 활동 자료를 30여 박스 가량 소장하고 있다. 또한 동일방직 여공들이 피신해 있던 지하방 등 민주화 운동의 흔 적과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당시에는 교회 밖 노동의 현장, 가난의 현장에서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것이 선교라 고 생각했다. 고 말하는 일꾼교회 담임 김도진 목사는 이제 동구푸드마켓 운영과 장애 인 및 저소득층 자녀교육 등 사회복지선교회로서의 소명을 이어가고 있다. 화수동의 국수집 하나가 전국적인 관심을 끌고 있다. 언덕배기에 자리 잡은 민들레 국수집 은 국수 맛 때문에 뜬 집이 아니다. 그곳은 주리고 배고픈 자들을 위해 매일 하 늘창고에서 식재료를 꺼내 천상( 天 上 )의 식탁을 차려낸다. 2003년 만우절(4월 1일)에 문을 연 민들레 국수집 은 그야말로 거짓말 같은 공간이 다. 거짓말 같이 문을 열어, 공갈 처럼 많은 사랑이 모여들어, 구라 같은 이야기를 만 들어내며, 믿기지 않게 10년을 버텨오고 있다. 이곳 주인장은 서영남 씨다. 그는 25년 동안 가톨릭 수사( 修 士 )로 지냈다.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 속으로 더 깊게 들어가기 위 해 수도복을 벗어 던졌다. 이곳에서는 줄을 서지 않습니다. 무조건 가장 오래 굶은 사람이 먼저 먹습니다. 노숙인이나 배고픈 사람들은 모두 세상의 줄서기 경쟁에서 밀려난 꼴찌들이다. 이곳 에서나마 줄서기와 눈칫밥에서 자유로워지길 바라는 서 씨의 깊은 배려가 깔려 있다. 5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수동 57

31 민들레 국수집과 서영남 씨(오른쪽). 낡은 식탁 하나로 시작한 가게는 24명의 손님을 받을 수 있을 만큼 넓어졌다. 최근 바로 옆에 공간 하나를 더 마련했다. 매일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찾아오는 손님 은 400명에서 500명 정도. 하루 짓는 쌀만 20kg짜리 예닐곱 포대를 풀어야 한다. 오늘 화수동 사람들이 동인천역 방향으로 갈 때 반드시 넘어야 했던 화도고개. 이집의 식단은 계란말이, 마늘장아치, 열무김치, 어묵조림, 미역국 등이고 후식은 수박 화채다. 뷔페식으로 차려졌다. 민들레 국수집 에는 정작 국수 가 없다. 초기 식단은 국수였지만, 밀가루로는 손님 들의 허기를 달랠 수 없어 메뉴를 변경했다. 언젠가 모든 이들이 배고프지 않은 그날, 국수는 그저 간식으로 내놓을 수 있길 바라며 가게 이름도 국수집을 고수하고 있다. 이 곳은 정부나 기업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 집배원, 회사원, 주부 등 뜻을 함께하는 순수 개인들이 십시일반으로 후원을 한다. 식당 안 식자재 창고에는 전국 각지의 발송지가 적힌 쌀, 고추장, 채소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중년의 남자 한 명이 검은 봉투 하나를 식탁에 슬쩍 놓고 간다.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겨져 있다. 저 분, 기장님이세요, 기장님이요?, 예, 대한항공 조종사예요. 서울 등촌동에 사는 윤종원 씨는 비행이 없는 날이면 어김없이 이곳에 와서 봉사를 한다. 이곳에서 5년 동안 계란말이를 도맡아 만들어 이제는 계란말이의 달인이라는 칭 호까지 받고 있다. 국수집에서 150m쯤 떨어진 곳에 또 하나의 민들레 홀씨가 떨어졌다. 아이들을 위한 민들레 꿈 어린이 밥집 이 문을 열었다. 형편이 어려운 동네 아이들은 물론 맞벌이 등 으로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아이들이 어울려 쉬며 밥과 간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이다. 36m2의 1층에는 식당이, 비슷한 넓이의 3층에는 공부방이 자리 잡고 있다. 화수동 언덕은 요새였다. 외국함대와 상선 등 이양선( 異 樣 船 )이 인천 앞바다에 자주 출몰하자 조선 정부는 고종 16년(1879)에 강화도에서 캐온 돌을 이용해 화도진( 花 島 鎭 ) 을 구축했다. 화도진은 묘도(괭이부리)북변포대, 호구(논현동)포대 등 인천 해안선을 빙 둘러싼 포대들을 예하부대로 둔 야전사령부 같은 역할을 했다. 1894년 10월 말경에 폐쇄됐고 광복 전에 인근 지역이 매립되면서 터는 완전히 그 자취를 감췄다. 화도진은 지난 1988년 국립중앙도서관이 소장한 화도진도( 花 島 鎭 圖 ) 를 토대로 복원됐다. 복원 공사를 할 당시 이 터에는 피란민과 도시 빈민의 허름한 집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5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수동 59

32 옛 화도고개. 100여 년 전 화도진은 소나무 숲으로 뒤덮였고 바닷물이 진지 바로 밑까지 밀려들어 왔으며 제물포(현 도심지)로 통하는 한 줄기 오솔길이 화도고개를 넘어갔을 뿐이라고 전해진다. 정문 옆에 약 20여 채의 민가가 있었으며, 간혹 말을 탄 병사가 총이나 창을 비켜들고 왕래했고 어쩌다 가마를 탄 양반들이 드나들곤 했다. 화도진 옆 작은 마당에는 사람 키 높이만큼의 한미수교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이곳에 서 미국과 조약을 체결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조약 체결 장 소는 이곳이 아니라 자유공원 석정루 아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 주장이 설득력 을 얻고 있다. 이로 인해 동헌 안에 있는 조약식 재현 밀랍인형들이 머쓱하게 되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화도진 언덕에 올라서면 영종도와 작약도가 한눈에 들어 왔다. 지금도 고층 아파트와 공장들 사이로 어렴풋이 바다가 보인다. 오늘도 화도진은 100년 질곡의 역사를 품은 채 앞바다에 떠있는 이양선 들을 그렇게 묵묵히 바라보고 있다. 화도진 뒤쪽 동네로 내려오면 쌍우물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인천 향토지에서조차 이 우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고 다만 화도진도에 우물 정( 井 )자가 표기된 정도다. 무 네미의 쌍우물은 맑고 시원해서 화도진 병사들도 길어다 마셨다는 얘기가 전해져 온 다. 안타깝게도 두 개의 우물 중 건너편에 있던 우물은 민가가 생기면서 없어져 지금은 명칭만 쌍우물일 뿐이다. 물맛은 좀 짰어. 그래도 물이 잘 나와서 만석동, 송현동에서도 물지게 지고 와서 하 루종일 줄 서서 퍼갔지. 6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수동 61

33 쌍우물 옆에 있는 오줌싸개 동상. 19세 때 이 동네로 시집와서 50년 넘게 근처에 살고 있는 한 할머니가 우물의 과거를 전한다. 지금은 우물 뚜껑이 굳게 닫혀져 있고 특이하게도 우물 몸통에 수도꼭지가 달 려 있다. 가끔 그 꼭지를 통해 물을 빼버릴 정도로 우물은 여전히 원기왕성하다. 매년 10월 살아있는 이 우물 앞에서 마을의 안녕과 번영을 비는 쌍우물축제가 열린다. 화수동은 아직도 주변에 공장이 많다. 그래서 사람들이 많이 들고 나는 동네다. 이 런 동네에 복덕방은 여전히 중요한 필수업소다. 한쪽은 쌀가게, 다른 한쪽은 복덕방을 하는 강화부동산도 그 중 하나다. 사장 김송자(75) 할머니는 1978년에 가게 문을 열었 다. 이 자리에서 장사하던 강화 사람이 40년 전에 취득한 양곡매매신고서와 간판을 고 스란히 양도 받았다. 언제부턴가 사람들이 쌀을 사러왔다가 동네 셋방 사정을 물어보곤 했다. 평소에 귀 동냥을 해서 들은 정보로 이 방 저 방을 소개해 주곤 했다. 그 댓가는 계란 한 판, 박카 스 한 박스 등이었다. 김 할머니는 아예 싸전 옆에 강화복덕방 간판을 내걸었다. 물론 자격증은 없었지만 하루에도 두세 건은 거뜬히 계약을 성사시켰다. 복비는 정해진 게 없었다. 쌀을 자주 사가는 사람에게는 반값. 찢어지게 가난한 사람에게도 공짜. 숟가 락 하나 달랑 들고 이사 온 농촌 총각에게는 월급 받은 후 주는 대로. 6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수동 63

34 그에게는 낡은 다이어리 수첩이 10여 권이 있다. 그 수첩에는 30여 년 동안 거래한 매물 정보가 빼곡히 적혀 있다. 수첩 하나를 들쳐봤다. 백구두 할아버지, 이빨 빠진 키 큰 아저씨, 천식 있는 아줌마, 귀걸이 많은 아줌마, 원룸 노처녀, 예쁜 제주도 색시 등 신체적인 특징을 적어 놓았거나 혹은 경숙이 이모, 미륭아파트 사는 젊은 엄마, 봉 섭이 누나. 다 기억하지. 그게 내 암호여. 이름은 까먹어도 그 사람 특징은 한번 쓱 보고 수첩에 적어놓으면 생생하게 기억나요. 이 동네는 전국 각지에서 직장을 찾아 올라온 젊은이 들이 많아요. 방 얻으러 왔다가 중신 좀 서달라고 부탁하는 이들이 간혹 있지요. 집주 인들도 며느리감이나 사위감 될만한 사람을 골라서 세놓고 싶어 해요. 화수동이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는 날까지 두 평짜리 복덕방 책상에 놓인 할머니 다 이어리 수첩에는 해독 불가능한 암호들이 계속 채워질 것이다. 6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수동 65

35 화수동을 화수동답게 했던 것은 화수부두다. 화수부두는 6,70년대 연평도 조기잡이 배를 비롯해 옹진, 강화, 충청도 앞바다에서 잡은 생선을 가득 실은 배들이 드나들던 우리나라 3대 어항이었다. 선박의 주소지는 덕적도, 연평도 등 섬이었지만 생선을 판 매하는 곳은 화수부두였고 선주들은 인근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1960년대 에 이미 자가용을 부릴 정도로 자산가였다. 화수부두에는 수협공판장, 얼음공장, 어구 상점, 식당 등이 즐비했고 새우젓 배들이 입항하는 날이면 큰길까지 비릿한 난장이 서 곤 했다. 여름날 인근에 사는 아이들은 얼음공장에서 선박으로 나르는 공중 파이프에 서 떨어지는 얼음조각을 주워 먹으며 즐거워했다. 그러나 이제 화수부두는 도시의 오지( 奧 地 )가 되었다. 문명도, 문화도, 세인의 관심 도 모두 비껴 간 안쓰러운 부두가 되었다. 옛날의 화려한 모습은 오간 데 없고 고달픈 삶의 흔적만 곳곳에 남아 있다. 이제 공장과 북항 개발로 포구로서의 여백이 얼마 남아 있지 않다. 출항도 가물에 콩 나듯 하는지 경찰 마크 뜯긴 선박출입통제소는 자물쇠로 잠겨져 있다. 한동안 비린내 맡기도 힘들었던 이 부두가 최근 조금씩 활기를 띠고 있다. 지난 5월 화수부두 수산물직매장이 문을 열었다. 부둣가 옆에 자리 잡은 이곳은 화수부두에 정 박하는 어선의 선주 32명이 직접 잡아 올린 싱싱한 해산물을 판다. 철저하게 100% 자 연산만 판매하고 있어 입맛 까다로운 식도락가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뚝딱뚝딱~. 부두 후미진 곳에서 망치소리가 들린다. 조그만 창문을 낸 흰 장막이 사 방을 두르고 있다. 틈새로 들어오는 가느다란 빛줄기가 전부인 그곳에 나무 배 한 척이 통째로 들어차 있다. 19세부터 어부로 살아 온 유동진(68) 씨가 혼자서 목선을 만들고 있다. 벌써 3년째다. 9톤짜리 내 배를 만들고 있어요. 재미있어요. 절약도 하고 튼튼하게. 무엇보다 내가 내 마음대로 디자인한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는 배가 될 거예요. 일종의 DIY(Do-it-yourself) 방식으로 배를 만드는 것이다. 그가 연필을 들었다. 종이 는 따로 없다. 구겨진 지난 신문을 두 손으로 쫘악~ 펴고 그 위에 그림을 그린다. 볼펜 을 쥔 손은 굳은살로 두텁다. 이제 머지않아 방수처리를 한 후 엔진, 스크루 그리고 각종 기계를 목선의 빈 공간 을 채우게 된다. 이 목선이 완성되면 선광호 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일생 동안 그가 탄 배들은 모두 선광호 였다. 다섯 번째 이 선광호를 완성하면 화수부두에서 진수식을 할 것이다. 선광호 키를 잡고 부두를 벗어나 큰 바다로 나가는 유 선장의 행복한 모습이 그려진다. 그림자 길어진 시간, 부두를 빠져 나오는데 어디선가 추억이 스며있는 비린내와 뱃 고동이 바람에 실려 왔다. 6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수동 67

36 그때, 이곳 화수동 Map & Photos ➊ 이천전기 변신했다. 수산물직매장이 문을 열면서 시민들의 발길은 화 ➐ 보라매보육원 일제강점기 1938년에 설립 된 군수공장으로 광복 후 변 압기 등을 생산하는 이천전 기로 재도약했다. 1993년 삼 수부두를 바쁘게 오고 가기 시작했다. 화수부두에 정박하는 선주 32명이 운영하는 이곳은 어부들이 직접 잡은 100% 자 연산만을 판매한다. 제2의 전성기를 맞은 화수부두는 바다의 맛으로 깊어지고 있다. 1951년 3월 영종 도에 김보경 원장 이 설립했다 년 10월 현재의 위 성에 인수되었다가 1998년 12월 일진그룹의 자회사로 ➍ 이즉 묘 치(화수동 140번 지)에 이전했다. 현 편입되면서 일진중공업이 되 화수동에는 고성 이씨, 소성 이씨가 여러 대에 걸쳐 자리를 잡 재 건물은 2008년 었고 2002년 일진전기로 다 고 살아왔다. 지금의 화수2동 일대에는 조선 인조 때 반란을 에 신축했다. 시 사명이 바뀌었다. 일으켰던 이괄의 선조인 이즉의 묘가 있었다고 한다. 이괄의 난을 진압한 후 인조는 이곳에 있던 이즉의 묘를 모두 파내라 ➑ 인천공작창 ➋ 인천부립공중욕장(부영탕) 우리나라에 대중욕탕이 처 음 설립된 것은 1924년 평 고 지시를 했다. 그런데 관원들이 묘를 찾으러 왔을 때 짙은 안 개가 껴 찾지 못하고 그냥 되돌아갔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 다. 그만큼 이곳이 명당이라는 이야기다. 1937년 7월 일본 차량주식회사 인천 공장으로 설립되었 양에서다. 부( 府 )에서 직접 운영하였으며 관리인을 따 ➎ 황해도평산소놀음굿 고 광복 후 1945 년 12월 상공부 직 로 임명하였다. 인천에서는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은 무당이 소 모습으로 꾸미고 농사의 풍 할 조선차량주식 1932년 신화수리(화수동)에 년과 장사의 번창, 자손의 번영을 기원하며 노는 굿놀이다. 정 회사로 발족했다 m2의 규모로 부립 공 확한 기원은 알 수 없으나 조선시대에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뿔뿔이 흩어졌던 중욕장이 설립되었다. 욕탕 인천 동구에는 황해도 피난민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을 400여 명의 종업원들을 불러들여 공장 안에 방치된 미완성의 이 폐쇄되고 그 자리에 화도교회 선교원이 들어섰다. 통해 이 놀음굿이 전승되고 있고 화수동에 보존회가 있다. 화 기관차, 객차, 화차 등을 손질해 화차 7량을 완성시켜 인천~영 도진에서 매년 황해도평산소놀음굿을 공연한다. 인천시 중요 등포간 시운전을 성공적으로 끝냈다. 1950년 10월 교통부로 다 ➌ 화수부두 무형문화재 제90호다. 시 이관하여 인천공작창으로 바뀌었다. 1980년 대전공작창으 로 통폐합해 대전으로 이전했고 부지 2만3천 평에는 동부아파 ➏ 대건중학교 트 등이 들어섰다. ➒ 서울식당 가장 인천적인 곳, 화수부두에 서울 간판을 단 식당이 ➒ 두산인프라코어 ➌ 화수부두 ➊ 일진전기 있다. 40여 년 된 서울식당은 복 잘 하는 집으로 유명 월미도 만석동 인천역 두산인프라코어 만석초 화 도 진 ➏ ➐ 화도진중 현대제철 ➑ 동부아파트 쌍우물 ➍ ➎ 민들레국수집 ➋ 화도교회 화평동 화수부두는 1970년대 까지 새우젓 전용 고깃배들이 입항으로 수도권에서 알 아주는 새우젓 전문시장이었다. 연평도와 백령도 등 먼 바다에서 잡은 생선들 도 속속 화수부두로 들어왔다. 부두 얼음공장에서는 쉴 틈 없이 얼음을 쏟아내 고 닻 공장은 닻을 산더미처럼 만들었다. 1970년대 초 연안부두가 생기면서 화수부두는 차츰 쇠락하기 시작했다. 화수부두를 가득 채우던 어선들이 연안 부두로 안식처를 옮겼고 주변은 점차 공장들이 터를 넓혔다. 그러나 어부들의 배는 여전히 화수부두를 안식처로 삼고 있다. 화수부두는 2013년 5월 새롭게 화도진 부지 일부에 1945년 9월 영화중학교, 1953년 11월 영 화고등학교가 설립되었다. 1963년 대건중학교로 변경되었고 88년 중학교는 폐교되고 고등학교만 남았다. 이마저도 1988년 연수구로 이전했고 그 자리에 영풍아파트가 들어섰다. 하다. 주인장 안문 숙 할머니(85)가 직접 담아 온 장으로 복탕을 만든다. 복은 강원도 주문진에서 살아있는 것을 직송해 온다. 인천에 새로 부임하는 고위공직자 나 탤런트들이 많이 찾는 맛 집으로 알려져 있고 20~30년 넘 게 이곳을 드나드는 단골손님들이 많다. 6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화수동 69

37 만석동 근대화, 산업화 겪으며 깊게 패인 굵은 주름 만석동은 한 세기 전 인천의 신도시 였다. 일제는 갯벌을 메우고 산업단지와 위락시설을 유치하면서 신 천지의 꿈을 키웠다. 이로 인해 호랑이가 살았다는 전설을 품은 괭이부리섬(묘도)은 깡그리 파헤쳐져 지 도에서 사라졌다. 그들은 그곳에 아카사키 라는 일제의 쇠말뚝을 박은 후 유곽을 끌어들이고 나중에 병 참 공장까지 세운다. 광복 후 바다로는 피란민을 받아들이고 육지로는 농촌의 노동자들을 받아들인 만석 동은 이제 할머니의 쪼그라든 젖가슴처럼 말라 비틀어진 포구 하나를 가슴에 부여안고 그렇게 늙어가고 있다. 경성을 떠난 지 두어 시간 힘차게 달려 온 철마는 철길 옆으로 해변이 길게 뻗은 종 착지 인천역에 다다른다. 마중 나온 갈매기 한 마리가 열차 위를 선회하며 길을 안내한 다. 열차는 질주의 고단함을 잠시나마 시원한 해풍으로 씻어낸다. 오른쪽 차창으로 흰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그 너머 바다 위에 크고 작은 섬들이 한가롭게 떠있다. 눈앞에 솟 아 있는 영종도와 강화도로 마치 병풍을 두른 듯 하고 바다는 호수처럼 잔잔하다. 한 폭의 그림 같은 이 모습은 100년 전 만석동의 풍경이다. 만석동의 본래 태생은 바다. 현재의 만석동 대부분은 갯벌을 메워 만든 매립지다. 바다와 접한 만석동은 1900년 초만 해도 조선인 20 ~ 30가구 만 사는 아주 한적한 마을 이었다. 이곳을 일본인 사업가 이나다( 稻 田 )가 1906년 9월 만석동 앞의 갯벌을 메웠다. 이 매립으로 약 50만m2(15만 평)의 새로운 땅이 생겼다. 그는 조선인 집들을 몰아내고 이곳에 정미소와 간장공장을 유치했다. 그런데 거기 까지였다. 더 이상 공장이 들어오지 않았다. 매립으로 한몫 단단히 챙기려 했던 이나다 는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보게 되었다. 고심 끝에 그가 내놓은 방안은 유흥업소 유치였 다. 당시 선화동에 있던 창녀촌 부도유곽을 본떠 묘도유곽 을 만들었다. 만석동 71

38 묘도( 猫 島 )는 만석동 앞바다에 떠있는 조그만 섬이었다. 매립지에서 묘도 가는 언덕 에 6, 7채의 객실과 고급 음식점 그리고 해수탕을 갖춘 2층짜리 팔경원 을 건립하고 주 위를 홍등가로 만들었다. 팔경원이 있던 곳으로 추정되는 구릉지에 서 보았다. 주위에 비해 살짝 높았지만 시 야가 트여 전망이 좋은 편이다. 그들은 그때 그곳에서 어떤 팔경( 八 景 )을 감상했을까. 조선총독 이토히로부미는 인천에 오면 이곳 팔경원에 가끔 들렀다고 한다. 술과 여자 만 있으면 자연스럽게 돈이 풀리고 사람들이 꼬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이곳은 너무 외져서 이토의 발길도 지역 활성화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 결국 그 땅의 일부는 중국인의 채소밭으로 전락하거나 대부분 오랫동안 잡초 무성한 황무지로 방치되었다. 만석동 매립지에 본격적으로 공장이 들어선 것은 동양방적(현 동일방직)이 문을 열 면서부터다. 일본인들이 동양 최대 라고 자랑한 이 공장은 1934년 10월 1일 종업원 3,000명에 직조기 1천292대로 조업을 시작했다. 하루 품삯이 쌀 2되 정도로 비교적 높 은 편이어서 조선인들은 동양방적에 들어가길 원했다. 유니폼 입은 종업원들은 스스 로 동대( 東 大 ) 에 다닌다고 할 정도로 큰 자부심을 지녔다. 일설에 의하면 인천 출신 영 화배우 도금봉(본명 정옥순)도 이 공장에서 잠시 일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유락시설 팔경원의 모습. 대단했제. 우리 큰딸이 동일방직에 다녔는데 그 애 덕분에 동생들 다 공부했어. 월 급날에는 이 일대가 하루 종일 들썩거릴 정도였으니까. 48년 전 전남 남원에서 올라와 만석동에 정착해 육 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홀로 살 고 있는 김성순(80) 할머니의 설명이다. 이 공장은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한 획을 긋는 현장이 된다. 유신 말기인 1978년 여성 노조원들은 이른바 똥물 테러 를 당한다. 이 똥 물은 부메랑이 되어 유신정권이 뒤집어쓰게 된다. 동양 최대라는 수식어가 붙었던 이 공장은 이후 섬유업 퇴조에 따른 생산 시설 이전 등으로 만석동 시대를 서서히 접고 있 다. 기다란 공장 담장 안에서는 여공들의 재갈거림 대신 늦여름 매미 소리만이 한가롭 게 넘어왔다. 7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만석동 73

39 현 두산인프라코어인 조선기계제작소 전경. 조선기계제작소(현 두산인프라코어)를 빼놓고는 만석동을 얘기할 수 없다. 이 회사 는 1937년 6월 광산용 기계 생산업체로 설립되었다. 공장 터를 조성하면서 괭이부리섬 묘도를 깡그리 뭉갠 것으로 보인다. 묘도의 위치는 현재의 삼미사 혹은 옛 한국유리공 장 앞 도로 부근으로 추측된다. 당시에는 육지의 끝 지점이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인천을 대륙 병참 기지로 삼는다. 1943년 4월 말 조선 기계제작소는 일본육군조병창으로부터 잠수함을 건조하라는 명령 을 받는다. 잠수함 을 진수시키기 위해 도크를 신축하고 1천300여 명의 인력을 확충하고 그들을 위한 숙 사( 宿 舍 ) 112동을 새로 건축한다. 이때에 세워진 집들이 현재의 아카사키 촌 의 근간이 된다. 좁은 공간에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 위해 화장실도 없는 쪽방으로 집을 지었다. 골목은 딱 어른 어깨 넓이다. 60년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도 근로자들이 묵었던 왜색풍 의 집들이 힘겨운 채 곳곳에 남아 있다. 그곳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여전히 공동변소 를 사용한다. 잠수함 1호기는 명령받은 지 1년 만에 제작돼 진수되었다. 광복이 될 때까지 총 4척 의 잠수함이 만석 독(Dock)을 통해 태평양으로 나갔다. 광복을 맞아 진수되지 못한 두 어 척의 잠수함들은 60년대 초반까지 독에서 녹슨 고철이 돼 나뒹굴었다. 그래서 한동 안 사람들은 만석동을 잠수함 만들던 동네 라고도 불렀다 전쟁 후 주로 배를 타 고 황해도에서 건너 온 피란민들이 이 동네에 정착했다. 이어 6,70년대 산업화 시기에 는 호남과 충청지역에서 올라온 노동자들의 터전이 되었다. 7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만석동 75

40 조선기계제작소 독에서 나뒹굴던 부숴진 잠수정들. 우리 부부가 이곳에서 가장 오래 살았을거요. 옛날 판유리공장 뒤편에 나가면 바지 락이 지천이었는데 그거 잡으며 살았지. 그거 팔아도 충분히 먹고 살았으니까. 나중에 인천시 도움을 받아 5톤짜리 조그만 뗏마(배) 40척을 만들어서 주민들과 같이 낚시배 부리면서 살았어요. 이용준(86), 양순옥(83) 노부부는 아카사키 촌의 터줏대감이다. 난리통에 황해도 옹 진군에서 피난 나와 매일 고향으로 돌아갈 꿈을 꾸며 이곳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만 석동은 70년대 까지 반어반노( 半 魚 半 勞 ), 어부와 노동자가 반반이었던 동네였다. 주인 집은 배를 부리고 세 들어 사는 사람은 공장에 다녔다. 지금은 믿기 힘들지만 만석동에 비치 가 있었다. 지금처럼 빡빡하게 공장이 들어서기 전에는 갯벌과 모래가 뒤섞인 바 닷가를 끼고 있었다. 그걸 추억이라도 하듯 2002년에 재개발된 고층 아파트의 이름을 만석비치타운 이라고 지었다. 만석비치타운의 자리는 원래 대성목재(조선목재공업)가 있었다. 1936년 설립된 조 선목재공업은 라왕 합판 등 항공자재를 제조했던 군수공장이었다. 광복 후 대성목재 로 이름을 바꿔 합판 등 건축 목재를 생산했다. 6,70년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인천에 올 라온 사람들 사이에서는 대성목재밖에 갈 곳이 없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만큼 당시 에는 규모가 아주 큰 회사였다. 옛 대성목재. 7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만석동 77

41 숨을 잃는다. 해마다 인근 동네에서는 1, 2명의 아이들이 이런 사고를 당해 생명을 잃 었다. 여름방학이 시작되는 날 선생님들은 반 학생들에게 저목장에서 놀지 말 것을 신 신당부하곤 했다. 이 회사는 앞바다에 저목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그곳에 지름 1.5~2m, 길이 15~20m 가량의 거대한 수입 원목들을 수천 개씩 띄워 놓았다. 이 저목장의 원목은 벌이가 없던 주민들의 생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주민들은 끝을 납작하게 만든 빠 루 를 이용해 원목의 껍질을 떼어내 햇빛에 말린 뒤 일반 가정집에 팔거나 자기 집 땔 감으로 사용했다. 좁은 마당에는 물론 골목마다 원목 껍질을 쌓아 놓아 비좁은 골목이 더 비좁았다. 간혹 도난 사고가 발생해 이웃간에 언성이 높아지기도 했다. 이 나무껍 질을 태우면 군불이 오래 가기 때문에 연료로는 최고였다. 경쟁이 치열해지자 어떤 이 는 멀리 배를 타고 나가 원목을 실은 배에 올라가 나무껍질을 떼어내기도 했다. 회사는 이를 제지하지 않았다. 공정상 원목 껍질은 베껴내야 하기 때문에 굳이 이를 못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 대성목재의 저목장은 이처럼 주민들이 입에 풀칠하는 데 큰 보탬을 주는 장소였지 만 목숨을 앗아가는 무서운 공간이기도 했다. 여름철 아이들은 저목장에서 수영을 하 거나 띄워 놓은 통나무 위에서 묘기를 부리며 뛰어 놀았다. 순간, 미끄러져 통나무 사 이로 빠지면 굉장히 위험한 상황이 발생한다. 원목 아래로 떨어지면 수압 때문에 물 속 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고 빠져나오려 발버둥쳐도 통나무에 막혀 쉽게 나오질 못해 목 비록 퇴락했지만 만석동이 바다를 완전히 잃은 게 아니다. 여전히 부두와 섬을 품고 있다. 질펀한 부두의 옛 정취는 다 사라졌지만 이곳을 통해 사람들은 바다로 나간다. 낚시배를 타든 조개잡이배를 타든 바다로 나가려면 포구 끝에 있는 해경 만석파출소 에서 승선 신고를 해야 한다. 만석부두에는 두 개의 포구가 있다. 파출소가 자리 잡고 있는 포구와 쌍용기초소재 공장 정문과 만석낚시점 사이로 들어가면 짠 하고 나타나 는 또 다른 포구가 있다. 이 포구는 낯설다. 남의 공장에 들어가는 길인 줄 지레 짐작하고 그곳으로 발걸음을 하지 않기 때문에 그 존재를 잘 알지 못한다. 파출소 쪽 포구는 콘크리트로 깔끔하게 성형을 했다면 공장 쪽 포구는 화장기 하나 없는 쌩얼 그 자체다. 그곳에는 오랜 시간 만석비치타운 옆의 새로운 굴막들. 7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만석동 79

42 만석동 바다를 젖줄 삼아 온 굴막이 있다. 굴막은 만석동 아낙들이 섬에 나가 굴을 캐 와서 껍 질을 벗기는 하꼬방 같은 작은 공간이다. 바다 바람, 세월 바람에 스러진 굴막들은 공 장 담벼락에 기댄 채 마치 어두운 굴( 窟 ) 속에 있는 것처럼 웅크리고 있다. 물때가 그들의 집합시간이었다. 아낙들을 태운 굴배는 희뿌연 새벽 바다를 가른다. 판유리공장, 북성부두, 대성목재, 월미도를 비켜 세 시간 넘게 물살 헤쳐 간 배는 이작 도 옆 작은 무인도에 머리를 들이댄다. 할아버지섬, 진달래섬, 참섬, 뽕아리섬, 개발섬, 돌때리는 섬. 이 섬들은 굴까는 아낙네들에게서 이름을 받았다. 상륙 후 흩어져 본격 적인 작업이 시작된다. 쪼새로 쉴 새 없이 바위를 쪼아댄다. 쉴 틈이 없다. 목마르고 허 기지면 그냥 굴을 삼킨다. 섬 가득 바위 쪼는 소리만 들릴 뿐이다. 손 빠른 사람은 하루에 80kg짜리 두 세 포대씩은 거뜬하 다. 해가 늬엇늬엇 질 쯤 굴 포대를 배에 잔뜩 싣고 다시 만석포구로 향한다. 공장 담장에 늘어선 굴막까지의 운반 이 만만치 않다. 배에서 굴 포대를 짊어지 고 얼기설기 엮은 나무다리를 건너는 일은 위험하고 힘에 부친다. 잘못하면 포대와 함 께 바닷물로 떨어질 수도 있다. 마지막 남은 힘을 다해서 굴막 안으로 끌어 놓았지만 일이 끝난 게 아니다. 굴 까는 작업이 기다리고 있다. 굴막은 비바람을 피할 수 있게 만 들어졌다. 30여 년 전에 한 두 사람이 무거운 굴 포대를 집으로 이동하느니 포구 움막 에서 작업하는 게 나을 것 같아 짓기 시작했다. 처음엔 그냥 거적대기로 만들었고 후에 판자와 비닐을 사용해 바람을 막았다. 한창 많을 때는 만석부두 주변에 굴 캐는 사람이 300명이었던 적이 있었다. 굴 파시였다. 당시 이 포구에는 40여 개의 굴막이 늘어섰다. 굴막 하나에 두어 명씩 들어가 밤샘 작업을 했다. 바닷가에서는 닭 대신 갈매기가 새벽을 깨운다. 갈매기 우는 소리에 눈을 비비고 굴 막 문을 열고 다시 배 타러 나간다. 굴막을 잠시 비우더라도 문단속을 단단히 해야 했 다. 그곳에는 이불, 곤로, 옷, 호롱불, 라디오 등 귀한 세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부턴가 굴막에는 1호, 2호라고 글씨를 적어 놓거나 아예 문 앞에 문패를 달기도 했다. 명절이나 김장철에는 주문이 많아 집에도 못 가. 백중사리 때는 굴막 앞까지 물이 찰랑 거려 오도 가도 못해. 그냥 굴막에서 촛불을 켜고 굴을 까며 밤을 지새곤 했지. 45년 전 굴막 일을 한 넙죽이 영배 엄마(74)의 이야기다. 8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만석동 81

43 노을 지는 만석부두. 이제 만석포구의 굴막은 거의 다 무너져 내렸다. 집주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경우가 많다. 아직 쪼새를 놓지 못했을지라도 이곳에서 더 이상 굴 까는 작업을 하지 않는다. 대부분 만석동 고가 밑 알루미늄 새시로 만든 굴막으로 이주했다. 그렇다고 이 포구 굴막이 완전히 폐쇄된 것은 아니다. 서너 채는 여전히 영업 중 이다. 날이 차지면 굴막 몇 개에서 희미한 불빛이 새나온다. 그런데 이마저도 오래 갈 것 같지 않다. 현재 화수부두 ~만석부두~북성포구를 잇는 포구 둘레길이 입안되고 있다. 둘레길은 이 굴 막 앞을 지나가게 된다. 누추하고 불편하다는 이유로 이 굴막은 철거 대상으로 입에 오 르내리고 있다. 2013년 말, 이 자리에 보금자리 주택이 들어섰다. 만석부두에 서면 봉분처럼 솟은 섬 하나가 보인다. 멀리뛰기라도 하면 닿을 수 있을 것 같은 가까운 거리다. 작약도다. 이 섬의 행정구역은 만석동이다. 얼마 전에 만석동 작약로 라는 새 주소를 얻었다. 일제가 묘도를 뭉갤 때 매립하지 않고 섬으로 그대로 놔둔 게 고마울 따름이다. 8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만석동 83

44 만석동 작약로 라는 새 이름이 붙은 작약도. 7만 2,727m2(2만2,000여 평)의 크기에 섬 둘레가 1.5km 밖에 되지 않는 앙증맞은 섬이 다. 섬 정상에는 무인등대가 있다. 표지석에는 무치섬 등대 라고 쓰여 있다. 개항을 요 구하던 외국 선박들이 한강 하류를 거슬러 오르기 위해 거쳐 갔던 작약도의 원래 이름 은 물치도 였다. 병인양요(1866) 때 프랑스 함대가 이곳에 잠시 머물며 섬 이름을 보아 제 라고 불렀고 신미양요(1871) 때 미국인들은 섬에 나무가 많다하여 우디아일랜드 라 고 명명했다. 섬 소유주였던 일본인 스즈끼가 패전 후 본국으로 급히 돌아갈 때 십 억 환어치의 금괴를 가져갈 수 없자 어쩔 수없이 몰래 작약도 어느 한구석에 해골과 함께 파묻고 갔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후에 많은 사람들이 동원돼 철야 작업을 하며 이곳저 곳 산을 파헤쳤지만 섬만 골병들게 했던 일화도 있다. 광복 후 건너편 화수동에 살던 이종문이란 사람이 이곳에 고아원을 설치해 운영했으나 6 25 전쟁으로 폐쇄되었다. 작약도는 배편이 시원치 않아 멀리 갈 수 없었던 시절인 6,70년대 만해도 수도권에 서 알아주던 해상 유원지였다. 이름값 하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손을 탄다고 했던가. 동림산업, 한보개발, (주)원광, 진성토건 등으로 넘어갔다가 결국 경매시장에 나오는 등 우여곡절을 겪었다. 강화해협의 거센 조류를 치받는 섬, 물치섬은 그렇게 시류에 치 받히면서도 굳굳이 오늘도 만석 앞바다를 지키고 있다. 8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만석동 85

45 그때, 이곳 만석동 Map & Photos ➊ 인천판유리 공장 ➌ 만석우체국 ➎ 조선소 북성포구 월미도 만석포구 굴막 두산인프라코어 ➊ ➎ 송현동 ➏ 부두입구 두산인프라코어 옛 팔경원 아카사키촌 만석비치아파트 (옛 대성목재) ➍ 동일방직 ➋ ➌ 인천역 1954년 운크라(유엔한국재건기구)의 계획으로 1956년 만석동 부지 12만 2,314m2 (3만 7,000평)에 공장을 건설하기 시작해 59년 9월부터 가동을 시작했다. 판유리 공장이 자리한 만석동은 안면도 승언리 해변 등의 밀가루 같은 보드라운 모래를 배편으로 실어오기에 지리적으로 유리했다. 하지만 생산량과 수입 등 공급과잉 현 상이 심화되자 1981년 인천 공장의 명성은 저물어 갔고 현재는 빈터로 남아 있다. ➋ 동일방직 의무실 동일방직 안에는 공장 건물과 어울리지 않은 목조 단층 기와집이 한 채 있다 년에 신축된 이 건물은 한때 강당, 사내 직업훈련원, 부속 의무실 등으로 사용되다 가 현재는 비어있다. 경인선 철로에 양쪽으로 이웃한 만석동과 송월동은 같은 생활 권으로 주민들은 철도 건널목을 건너다니며 자유롭게 교통했 다. 1962년 9월에 문을 연 만석우체국은 두 동네가 만나는 길 목에 있어 늘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오랫동안 바다에 나가 있던 어부가 뭍에 나와 맨 먼저 달려온 곳도 이곳이고 한 달 봉급을 받은 공장 근로자도 먼저 발길을 돌린 곳도 이곳이다. 그러던 중 안전을 위해 철로변에 차단벽이 세워지고 그 위로 만석고가 도로가 생겼다. 단절은 곧 퇴락으로 다가왔다. 발길이 끊긴 우체 국은 이제 만석동과 같이 그렇게 쓸쓸히 늙어가고 있다. ➍ 괭이부리말 아이들 이 작품의 배경 인 괭이부리말 은 6 25 전쟁 후 가난 한 피란민들이 모여 살면서 형성된 오래 된 만석동 달동네의 별칭이다. 작가 김중 미 씨는 1987년부 터 괭이부리말에서 살며 지역 운동을 해 왔다. 작가의 생생한 경험이 담겨 있는 이 작품은 초등학교 5 학년인 숙희와 숙자 쌍둥이 자매를 중심으로 가난한 달동네의 구석구석을 착실하게 그려 나갔다. 2001년 11월부터 방송된 MBC의 새 오락프로그 램 느낌표 의 책 책 책! 책을 읽읍시다! 코너에서 국민 필독서 로 선정되면서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다. 만석부두를 감 싸고 있는 공장 뒤쪽으로 돌아 들어가면 갯벌 위에 레일이 깔 려 있는 등 다소 낯선 바다가 나 온다. 후미진 그 바닷가에는 우 리가 도시에서 쉽게 보지 못하 는 광경이 펼쳐 진다. 선박을 만 드는 중소 규모 의 조선소들이 있고 그 옆으로는 고장난 배들을 수리하는 일종의 선박 병원 이 있다. 모퉁이를 돌면 선박을 해체하는 독이 있다. 수만리 바다를 항해한 여객선, 화물선 등이 그 생명을 다하고 장기가 적출되는 현장이다. 이렇듯 만석동 뒷바다에는 요람부터 무덤까지 선박의 일생이 있다. ➏ 굉이부리 나루 만석동에 굉이부리 라는 나루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옛 판유리 공장 자리인 이 굉이부리에는 호랑이와 얽힌 재미있는 이야기 가 전해지고 있다. 옛날 이곳은 해변가로 산림이 울창한 외진 곳이었다고 한다. 어느 화창한 봄날 부녀자 5 6명이 나물을 캐 고 있었는데, 그 곳에 굴이 있어서 자세히 보니 그 안에 호랑이 새끼 세 마리가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은 호랑이 새 끼들이 하도 귀여워 지켜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어미 호랑이가 나타나 어흥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나물바 구니를 내버린 채, 집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다음날 아침에 보니 그들의 나물바구니가 마을 앞에 놓여 있었다. 호랑이가 제 새끼 를 해치지 않아 고마운 표시로 나물바구니를 물고 갖다 놓았다 는 전설 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이곳은 괭이부리 라는 지명을 사용한다. 8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만석동 87

46 창영동 창영학교 소풍 가는 날은 비 오는 날 창영동은 개화를 알리는 기적( 汽 笛 ) 소리에 잠을 깨며 한동안 신식 동네로 살아왔다. 인천에서 서울로, 서울에서 인천으로 오가는 길목인 이 동네는 인천의 근대교육, 기독교, 노동운동이 발아한 곳이다. 한동 안 묵은 것만 움켜쥐고 바튼 기침하며 점점 박제가 돼 가던 이 동네는 하마터면 큰 수술을 받을 뻔했다. 이 동네에 불어 닥친 개발 바람은 호불호의 논쟁을 일으키며 오히려 관심과 활기를 불어넣었다. 오랫동 안 수면 무호흡증에 빠져있던 동네가 다시 기지개를 펴고 있다. 인천의 자존심을 지키며 나잇값 하는 꼰 대 로 돌아오고 있다. 장면 1 풍랑을 헤치고 온 기선( 汽 船 )이 아침 일찍 제물포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조그만 목 선들이 기다렸다는 듯 큰 배를 에워싸고 사람과 짐을 옮겨 싣는다. 제물포 포구에 내 린 벽안( 碧 眼 )의 이방인은 조랑말 한 마리에 올라탄다. 고삐를 잡은 조선인 말잡이는 서둘러 포구를 벗어나 가파른 언덕으로 길을 잡는다. 갯벌 냄새가 좀 가시나 했더니 이번엔 인분 냄새다. 언덕 밑에서 청국인 옷차림을 한 농부들이 밭에 거름을 뿌리고 있다. 길가 곳곳에 싸리나무가 무성하다. 길은 좁은 내리막길로 이어진다. 바닷물이 들어 왔었는지 질퍽하다. 갈매기 두어 마리가 갯골 위를 배회한다. 납작하게 엎드린 초가집들 옆으로 큰 공사가 벌어지고 있다. 흰 무명끈을 머리에 질끈 맨 노무자들 네 명이 한 조가 돼 기다란 쇳덩이를 옮기고 있다. 철길을 놓는 것이다. 마치 소뿔처럼 생 긴 언덕길을 힘들게 오른 말잡이는 잠시 숨을 고른다. 뒤돌아보니 멀리 앞바다에 정박 한 기선 굴뚝에서는 아직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이방인은 말잡이에게 가던 길을 빨 리 가자고 눈짓을 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한양 성문이 닫힐 수 있기 때문이다. 이내 말 머리는 동쪽 길로 향한다. 몇 발자국 더 떼자 이제는 민가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창영동 89

47 장면 3 주변에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거래가 활발했던 50년대 배다리 시장 모습. 하루 종일 포클레인의 굉음소리가 마을을 뒤흔들었다. 이미 보상을 받고 떠난 이웃 의 빈집들이 거대한 삽날에 힘없이 내려앉았다. 소문에 의하면 산업도로가 마을 한가 운데로 난다고 했다. 수인역을 지나 철교 밑으로 해서 수도국산을 뚫고 나간다고 한 다. 그 시커먼 터널 속으로 배다리 영혼이 빠져 나갈지 모르는데. 헌책방을 운영하 는 곽 사장과 의상실 박 씨 아줌마를 중심으로 배다리 사람들이 모였다. 얼마 후 구월 동에 있던 문화공간 스페이스빔이 비어있던 양조장 건물로 들어왔다. 이를 계기로 산 업도로 개통 반대 운동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끝내 도로 개통은 무산되었고 집을 철거 한 곳은 바리깡이 지나간 것처럼 흉물스럽게 남았다. 스페이스빔을 중심으로 다행공 방, 아침햇살, 한점갤러리, 사진공간 배다리, 달이네 등 크고 작은 문화 공간들이 자리 잡으면서 배다리 일대가 삐까 번쩍해졌다. 장면 2 곳곳이 폐허가 되었다. 다행히 학교와 교회 그리고 여선교사 집은 포탄 세례를 용케 피했다. 송림학교 아래 넓은 공터에는 매일 큰 장이 섰다. 이북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 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돈 될 만한 것들을 갖고 나와 좌판을 차렸다. 옆집의 순이는 어 제부터 엿판을 목에 걸고 시장으로 나갔다. 어디선가 지금껏 맡아보지 못한 색다른 냄 새가 흘러들었다. 아침부터 철도길 옆 공터에서는 큰 무쇠 솥에 죽을 끓였다. 깡통과 바가지를 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섰다. 걸쭉한 죽을 받아 든 사람들은 철길에 걸터앉 아 허겁지겁 들기 시작했다. 돼지고기 맛 같기도 한 오묘한 맛이 꿀맛이다. 허겁지겁 마시다시피 하는데 갑자기 뭐가 씹혔다. 담배꽁초다. 까뗌 주워들은 욕을 내뱉었다. 다행히 오늘은 한 개만 씹혔다. 깡통을 다 비웠을 쯤 철길이 흔들렸다. 요란한 기적을 울리며 시커먼 검댕이 연기를 내뿜고 탱크를 실은 화물기차가 서울 쪽으로 지나갔다. 철교 밑에 헌책방이 생겼다. 책을 읽은 지 얼마 만인가. 콘사이스를 한 권 살 겸 그곳 으로 향했다. 벌써 소문이 퍼졌는지 책방 안에는 발 디딜 틈이 없다. 쉴 새 없이 고물 장수 아저씨들이 책방 앞 손수레에서 책을 내려놓았다. 9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창영동 91

48 산업도로가 관통할 뻔한 창영동은 인천의 근대 역사가 관통하는 곳이다. 1899년 경 인선 철도가 놓이기 전 제물포항에서 서울을 가려면 이 길을 거쳐야 했다. 개항 후 포 구에서 싸리재를 거쳐 배다리 옆을 지나 쇠뿔고개로 가는, 이름하여 경인가도( 京 仁 街 道 )다. 이방인들이 오고가다 보니 낯선 풍경의 집들도 들어섰고 별난 이야기도 만들 어졌다. 창영초등학교는 인천 최초로 조선 어린이들을 가르치고자 1907년 인천공립보통학 교 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1910년 3월 첫 졸업생 18명을 배출했다. 현재도 건재한 빨간 벽돌의 교사( 校 舍 )는 당시 교육을 열망하는 조선인 유지들이 정성껏 모금한 2만 원을 밑거름으로 1922년에 완공했다. 인천의 3 1운동 만세 불씨는 이 학교에서 지펴졌다. 1919년 3월 6일 인천공립보통 학교 상급반 학생들이 만세의 첫 깃발을 올렸다. 그들은 어느 단체의 지령이나 누구의 지시도 없이 자발적으로 항일 동맹휴학을 결의하고 거리로 뛰쳐나갔다. 정오에 학교 를 출발해 인천공립상업학교(현 인천고등학교) 학생들과 배다리에서 합류해 동인천 역 부근 채미전 거리 등 시내 중심지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고 대한독립 을 외치면 서 시민들이 궐기에 동참할 것을 촉구했다. 만세 운동을 주도한 이 학교 학생 25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당시 3학년이었 던 김명진(18)은 징역형 2년, 4학년이었던 이만용(18)과 박철준(19)은 각각 태형 90대 를 선고 받았다. 김명진은 지방법원의 판결에 불복하고 지금의 고등법원에 해당하는 복심원에 항소했다. 그는 일본인 판사 앞에서 나의 행위는 조선 민족으로서 정의 인 도에 바탕한 의사 발동이지 결코 범죄가 아니다. 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그는 결국 1 년 6개월 징역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국가보훈처는 1996년 9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창영동 93

49 기가 벅찰 만큼 아이들이 없다. 창영은 소풍날의 징크스가 있었던 그 시절이 못내 그 립다. 3 1운동 기념비와 류현진의 창영야구부 1960년대 선배들. 8월 15일 광복절에 김명진의 유족에게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했다. 창영초교총동창 회는 당시 인천일보 조우성 문화부장이 제공한 옛 일본 총독부 재판 기록 등 고증자 료를 확인하고 후배들과 시민들에게 지사들의 고귀한 애국충정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95년 3월 6일 모교 교정에 횃불 모양의 웅대한 자연석으로 3 1독립만세운동 인천 지역 발상지 기념비 를 세웠다. 70년대 말까지 창영동이 인천의 중심지였기 때문인지 창영학교 아이들은 송현동, 만석동 등 변두리 아이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얼굴색이 좋았다. 한마디로 기름지고 뽀 얗다. 그 학교에는 부잣집 아이들만이 할 수 있는 고적대와 야구부 등이 있어 부러움 의 대상이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창영학교 소풍날은 어김없이 비가 내렸다. 징크스 가 계속되다 보면 설화 가 만들어지는 법. 학교 우물을 팔 때 거기에 살던 용을 죽였다 는, 혹은 소사 아저씨가 막대기로 용의 꼬리를 쳤기 때문에 그 용이 원한에 사무쳐 저 주를 내린 것이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변두리 학교 아이들에게는 창영학교 아이들의 이런 불운을 보면서 자신들은 참 좋은 학교에 다닌다고 애써 자위하곤 했다. 맑은 햇살이 빨간 벽돌 건물을 선명하게 비춘 늦가을 날, 창영학교를 찾았다. 야구 부원들이 함성을 주고받으며 운동장에서 땀 흘리고 있다. 학교 담벼락에는 메이저리 거 류현진의 모교 창영초 야구부원 모집 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세월은 흘렀어도 창영은 여전히 부러움의 대상이다. 문제는 학생 수다. 많을 때는 한해 1천 명 이상이 입학했다. 전교생이 6천 명을 웃돌았다. 이제 그것은 빛바랜 학적 부에나 있는 숫자일 뿐이다. 요즘 한해 입학생 수는 40여 명. 이제는 야구팀 하나 채우 창영학교 담 옆으로 영화학교가 있다. 독실한 크리스천 미국인 처녀 마거릿 벤젤은 1891년 22세 때 평양을 건너 조선으로 건너 왔다. 그녀를 마중 나온 존슨 목사는 당시 내리교회 담임목사였다. 인천으로 온 벤젤은 당시 내리교회 한국인 전도사의 딸을 가 르쳤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초등교육기관 영화초등학교의 출발이다. 시작부터 어려움이 많았다. 서양인이 어린이의 간을 약에 쓴다는 흉흉한 소문에 초기 학생 수는 남자 3명, 여자 2명뿐이었다. 1909년에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정식학교로 인가를 받았다. 싸리재에 있던 학교는 1910년 현 위치에 2층 212평 규모의 벽돌집 교사를 마련해 이 전했다. 이제 머릿돌을 박은 지 100년이 넘는 이 교사는 교실마다 스팀난방이 설치된 당시로서는 초현대식 건물이었다. 최초의 여성 박사이자 이화여대 총장을 지낸 김활 란을 비롯해 한국 최초의 여대생 김애리시, 이화학당 이사장 서은숙, 이화여대 사범 대학장 김애마, 이화여대 음대학장 김영의, 영화배우 황정순, 노동운동의 대모 조화순 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창영교회 옆에는 야트막한 언덕이 있다. 존스 목사는 이 곳을 에즈버리 동산 이라고 불 렀다. 1893년 선교 기지를 세 우기 위해 이 일대의 땅을 매 입해서 지금의 인천세무서 자 리에 남자 선교사 사택을 지 었다. 그 옆에는 안데르센 동 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고풍스 러우면서도 앙증맞은 여선교 1910년에 세워진 영화학교 교사. 9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창영동 95

50 사 사택을 지었다. 지상 2층, 지하 1층에 건평 469m2(142평) 짜리로 마루가 깔린 복도 를 따라 아래 윗층에 각각 5개의 방이 있다. 서울과 평양에 주재하고 있는 여선교사들 이 여름휴가를 즐길 수 있는 휴양 공간을 겸할 수 있게 만들었다. 지하에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 볼 수 없었던 문화재급 보일러 시설이 그대로 남아 있다. 이 보일러의 연료 는 조개탄으로 탱크에서 가열된 수증기를 각 실로 연결된 관을 통하여 보내는 방식이 었다. 동생 뒷바라지 때문에 결혼도 안하고 돈을 벌 요량이었다. 처녀가 결혼 안 한다는 말 은 거짓말 중의 거짓말. 그는 결혼했다. 그래서 슬그머니 간판에서 미스 를 지워버렸 다. 함께 오랜 세월을 보낸 사람들은 골목만 늙어갈 뿐 자신들은 늙지 않은 것으로 서로 착각하는 것인가. 이웃 삼성서림 사장님은 아직도 그녀를 미스 박 이라고 부른다. 한때 이곳은 일류는 아니지만 골든의상, 정의상, 르네의상 등 대여섯 군데의 의상 실이 있었어요. 저도 지금은 단골 10여 명의 옷만 만들 정도예요. 한창때는 미싱사 등 너댓 명을 두고 하루 세 벌을 만드느라 밤새기 일쑤였다. 박 사 장은 중구 사동에 살았는데 열 살 때 집이 철거돼 송림 3동으로 이주해 살았다. 이런 아픔 때문인지 길을 뚫기 위해 집들이 철거될 때 맨 앞에 서서 반대했다. 그는 배다리 에서 그의 실패가 다 돌아갈 때까지 일하고 싶은 소망을 갖고 있다. 미싱이 돌아갈 때 실이 실패에서 풀려나가듯 인생도 자연에 순응하며 그렇게 흘러 가는 것. 어떤 모양으로 풀려나갈지 박음질이 되어질지, 그 숙제는 우리가 푸는 것 창영동 길 중간쯤에 있는 박의상실 쇼윈도에 써 있는 글귀다. 의상실 주인이 궁금해 불쑥 문을 열고 들어갔다. 바느질 인생에 대한 제 이야기이자 소회( 所 懷 )죠. 박태순(62) 씨는 6번지, 3번지, 9번지 등 창영동 골목에서만 40년 넘게 실패를 돌렸다. 1976년 당시 인기 많은 직장 이 었던 동일방직에 취업하려고 했는데 키가 작아 떨어졌다. 회사에서 요구하는 키는 155cm. 거기에서 딱 1cm가 모자랐다. 친구와 함께 양재 기술을 배웠다. 그리고 배다리 에 미스박 의상실 이란 간판을 걸었다. 십정농장 흔적 9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97

51 우리 집이 동인천 대한서림 다음으로 오래된 책방이야. 헌책방 거리에서 60년간 집현전 이란 헌책방을 운영하고 있는 오태운(87) 사장. 헌 책방 거리는 6 25 전쟁 직후 폐허가 된 거리에 이동식 리어카 책방이 하나둘 모여들면 서 시작됐다. 1960년대 서울 청계천에 이어 전국에서 두 번째로 큰 헌책방 거리가 형 성됐다. 오 사장은 영어 관련 서적을 구하기 힘들었던 시절 학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미군 부대 등을 돌아다니며 헌책을 구하기도 했다. 그러면 책을 사려는 학생들이 책방 앞에 줄을 섰다. 6,70년대 줄을 서 책을 구하려는 학생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국의 미래가 밝구나 생 각했지요. 하지만 요즘 학생들은 참고서 외에는 책을 찾지 않아 그게 안타까워. 헌책방 가게의 주인들은 이제 헌책만큼이나 긴 인생을 보냈다. 얼마 전에 삼성서림 과 국제서림이 가게를 내놓았다. 이제 머지않아 헌책방 거리는 그들과 함께 역사의 뒤 편으로 사라질지도 모른다. 이 헌책방 거리에는 우리나라 문학의 거두 박경리 선생의 숨결이 가련히 맴돌고 있 다. 박경리는 경남 진주여고를 졸업한 이듬해인 1946년 1월 30일 김행도 씨와 결혼했 다. 당시 22살 젊은 새댁으로 신혼의 단꿈을 꾸던 그는 1948년 이삿짐을 싸야만 했다. 남편이 멀리 인천의 주안염전에 취직했기 때문이다. 이삿짐을 푼 곳은 금곡동 59번지. 주안염전 사택인 ㅁ자 형 한옥에서 다시 신접살림을 시작했다. 남편이 근무하는 염전 이 내려다보이고 낯선 이국적 건물들이 간간이 눈에 띄고 증기기관차가 큰 소리를 내 며 자주 지나가는 마을이었다. 모든 게 낯설었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시장이 있어 종종 물건이나 사람 구경삼아 나들이를 했다. 광복 직후 먹고 살 거리를 찾기 위해 전국 각지의 사람들이 이 시장으 로 모여들었다. 온갖 고물과 중고 물품들도 좌판에 깔렸다. 그 틈에서 낡은 책들을 발 견했다. 책을 유난히 좋아했던 그는 마음에 드는 책을 손에 쥐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쭈그리고 앉아 읽었다. 아예 그는 책을 모아 작은 헌책방을 열었다. 박 작가는 인천에 서의 이 2년을 그의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시절로 꼽았다. 9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창영동 99

52 이 행복한 책 읽기는 장강( 長 江 )과 같이 굽이굽이 흘러가는 대하소설이요, 근대에 서 현대로 이어지는 파란과 격동의 역사를 살아 온 한국인의 삶을 담아 낸 명작, 토지 를 집필하는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헌책방 아벨 을 운영하고 있는 곽현숙 대표가 박 작가의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를 읽다가 약력에 인천시 동구 금곡동에서 2년 간 살았다 는 내용을 우연히 발견하면서 알려졌다. 그러나 금곡동 59번지라는 지번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다. 그동안 수차례 번지가 변동되어 현 재는 61번지 등 여러 번지로 분산됐기 때문이다. 다만 인천세무서 뒤쪽 인천산업정보 학교 정문 앞을 거쳐 동구청으로 가는 길에 있는 동네 일대가 금곡동 59번지였다는 것 만 확인되었다. 박경리 선생의 큰딸 김영주 박경리문학관장도 금곡동에 살았던 시절 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다. 그나마 금곡동 집에서 찍은 아들 김철수의 돌 기념 가족 사진이 남아 있어 ㅁ자형 한옥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을 뿐이다. 반세기가 넘은 명신여인숙과 옛 대인상회 건물. 헌책방 거리 뒤쪽에는 배다리 큰 도로와 이어지는 좁은 골목이 하나 있다. 방값이 싸 요즘 외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길조여인숙이 나온다. 6,70년대 전형적인 여인 숙의 모습인 이 집 벽에는 한 달 이상 숙박하는 손님을 위한 달방 이 가능하다는 종이 가 붙어 있다. 그 옆에 대인상회 라는 간판이 붙은 오래돼 보이는 2층 건물이 있다. 일 제강점기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데 한때 쌀을 크게 취급했다고 한다. 지금은 1층 에 토시살 숯불구이집이 자리 잡고 있다. 황인순 할머니(80)는 황해도 은율 출신으로 1 4후퇴 때 피난 내려왔다. 처음에는 빈대떡, 되비지 등을 팔았지만 이 집이 한때 유 명세를 치른 것은 토끼고기를 팔았기 때문이다. 토끼뿐만 아니라 오리, 참새, 꿩 등 날 개 달린 거의 모든 조류가 그곳에서 요리되었다. 지금은 손자 고원기(38) 씨가 할머니 와 함께 토시살 등을 팔고 있다. 우리는 개발을 원해요. 비만 오면 물이 줄줄 새요. 반대하는 사람들 중에 이 동네에 서 먹고 자는 사람 별로 없어요. 우리에겐 생존인데 그들에겐 그게 문화래요. 사라진 흔적의 덧없음과 사라지지 않은 흔적의 견고함이 겹쳐진 창영동에서는 모 든 게 인천 역사의 밑줄 쫙 이다. 10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창영동 101

53 그때, 이곳 창영동 Map & Photos ➊ 창영떡집 ➍ 남선교사 합숙소 ➐ 인천양조장 화평동 ➒ 국민은행 송림초교 배다리철교 동인천역 송림로터리 ➌ 옛문화 극장 지성소아과 헌책방거리 ➏ ➎ 동구청 여선교사사택 ➍ ➊ 창영초 영화여중 고 ➋ 도원역 박의상실 ➑ ➐ 스페이스빔 도원역 인천세무서 옆에 있는 창영떡집은 떡을 빚 은 지 61년이다, 6 25 전쟁 후부터 떡을 만들어 팔았다. 콩고물을 입힌 찹쌀떡과 영 양떡이 유명세를 타고 있다. 이곳은 할머 니, 아버지에 이어 현재 손자가 전통의 명 맥을 잇고 있다. 손자 박원석 씨(37)는 13 년간 미국에서 생활하다 5년 전부터 떡집 을 맡아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 강화 교동 에서 생산된 쌀과 찹쌀로 떡을 만든다. ➋ 강재구 소령 강재구는 1937년 금곡동에서 태어났다. 창영초, 인천중, 서울고를 거쳐 육군사관 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소위로 임관했 다. 1965년 대위 시절 베트남에 파병되는 전투 부대원의 훈련 중 한 병사가 수류탄 을 잘못 던져 폭발할 위기에 놓이자 그는 자신의 몸을 던져 많은 부하를 구하고 29 세의 젊은 나이로 산화했다. 순직 후 소령 으로 승진되어 고( 故 ) 강재구 소령 이라 불리고 그의 희생정신이 교과서에 실렸 다. 모교인 창영초 교정에 그의 흉상이 세 워져 있다. ➌ 조선인촌(성냥)주식회사 1917년 인천부 금곡리(옛 문화극장 일대) 6,000여 m2(2,000여 평)의 대지 위에 조선 인촌(성냥)주식회사가 들어섰다. 남녀 직공 500여 명이 우록표, 쌍원표 등 연간 7만 상자의 성냥을 만들어 당시 국내 성냥소비 량의 20%를 점유한 국내 최대의 성냥 공 장이었다. 지방 학생들의 수학여행 코스이 기도 했다. 성냥공장 주변 금곡동과 송림동 지역의 500여 가구가 성냥갑을 만들어 공 장에 납품하는 일에 종사하면서 성냥갑 만 드는 일이 인천지역 최고의 가내수공업으 로 자리매김했다. 1895년 존스 목사가 한국 서부지방 선교 기지를 꿈꾸며 창영동 일대의 부지를 매입하였다. 남선교사 합숙소는 1897년 현재의 인천세무서 자리에 세웠다. 1942년 정미업자 주정기가 이 건물 을 매수하여 거주하기도 했으며 조선알루미늄공업 합숙소로 사 용되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후 경기도경찰전문학교 교사, 교 장 사택을 거쳐 1955년에 동인천세무서 청사로 개축했다. ➎ 아펜젤러 사택 존스 목사는 1890년대 말에 서 1900년대 초기 현재의 금곡동 58번지에 아펜젤러 사택을 세웠다. 이 집은 아펜 젤러와 존스 박사의 사택으 로 오랫동안 사용했다. 후에 박용균이 병원을 개업하기 도 했으며 1925년 경성전기 가 매입하여 변전소로 개축 했다. 현재는 인천성서침례 교회당이 들어서있는데 이 교회 옥상에 올라서면 왜 이곳을 선교사의 사택으로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사방팔방 인천이 한눈에 시원스럽게 들어온다. ➏ 아벨서점 배다리 헌책방 거리의 터줏대감 이자 산 증인인 아벨서점 곽현 숙(64) 사장이 책 방을 연 것은 지 난 1973년. 올해 책방 개점 40주 년을 맞았다. 금곡동 48에서 태어난 곽 사장의 인생은 그 자체 가 한편의 대하소설이다. 소방서 급사, 월부 책 판매, 버스 안내 양, 호떡 장수, 공장 여공, 식모살이 등이 헌책방 주인이 되기까 지 했던 일들이다. 이제는 헌책방 경영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인으로 지역의 공동체 운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아벨서점 바로 옆에는 전시장이자 시낭송 공간인 아벨 전시관 이 있다. 1920년대 초반, 인 천에는 한국인 소 유의 양조장 14개, 일본인 소유 7개 등 21개의 양조장 이 있었다. 1926년 에 설립한 인천양 조장은 황해도 평 산 출신 최병두가 설립한 인천 최초의 양조장으로 70여 년간 소 성주를 빚었다. 1996년 술맛을 좌우하는 이 일대의 지하수의 수 질 저하로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청천동으로 이전했다. 2003년 1월부터 3년간 아벨서점 전시관으로 활용했고, 이어 민운기 씨 가 이끄는 지역 문화단체 스페이스 빔 이 2007년부터 자리 잡고 있다. 건물 입구에는 은색 깡통 로봇이 약간은 고뇌에 사로잡힌 듯 서 있다. ➑ 임영균 인천 최초의 치과의사이면서 인천 양조장 경영인으로 지역 언론과 문 화에 기여했다. 1915년 영화학교를 졸업하고 1917년 서울 YWCA중학 에 입학했다가 3 1운동 때 투옥되 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치전 에 입학했고 서울로 통학하면서 경 인기차통학생친목회 문예부에서 활 동했으며 연극단체 칠면구락부 멤 버로도 참여했다. 1954년 주간 인천 을 창간, 발행했고 경기매 일신문 창간에도 간여했다. ➒ 송미정 배다리 중앙시장 동쪽 입구 국민은행 뒤편에 있는 송미정은 1959년에 문을 열었다. 올해로 54년째다. 현재의 김현서(68) 사 장의 어머니 곽두삼(작년에 작고) 씨로부터 시작했다. 평양에서 피란을 나온 곽 씨는 당시 인천중공업에 고문으로 와 있던 독일 인 기사의 식사를 맡으며 양식 요리를 접하게 되었다. 1959년 중공업을 나와 현 장소로 이사한 뒤 처음에는 양식집 송미옥 으 로 문을 열었다가 1962년 복요리 전문 음식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10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창영동 103

54 북성동 선창가 바람, 붉은 풍등 風 登 흔들다 130여 년 전, 낯선 말투와 차림을 한 사람들이 하나둘 산으로 올라와 터를 잡았다. 그곳에서 여지껏 맡 아보지 못한 낯선 음식 춘장 볶는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네들의 영사관, 학교, 사찰이 들어서면서 그 곳은 중국촌이 되었다. 그 아래, 응봉산 줄기가 내처 달리다 바다와 맞닿은 곳은 고기잡이배 포구와 선창 가가 되었다. 독(dock)이 생기기 전에는 바다의 물 끝이 경인선 철도가 끝나는 지점 바로 밑까지 밀려들 어왔다. 현재의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탑이 서 있는 곳까지가 우리가 말하는 제물포( 濟 物 浦 ) 였다. 독 공사로 1973년 부두시설이 새 바닷가 연안부두로 이전했다. 부두는 옮겨갔지만 아직도 그곳에는 비릿한 선창가의 흔적이 남아있다. 10월 10일 오전 10시. 중구 북성동 차이나타운의 한 학교에서 북과 괭과리 소리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리듬과 박자가 우리 귀에는 익숙하지 않다. 그 소리에 이끌려 간 곳은 인천화교중산중고등학교. 학생들이 운동장에서 화려한 사자춤을 선보이고 있다. 오늘은 대만 건국기념일인 쌍십절( 雙 十 節 ). 운동장 한편에 세워진 국기 게양대 에는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 靑 天 白 日 旗 )가 휘날리고 있다. 북성동 차이나타운을 차이나타운 답게 하는 것은 청요리집이나 중국 관련 상점이 아니다. 1세기 넘는 긴 시간이 흘렀어도 중국 동네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던 것은 그곳에 화교학교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중구 북성동 8번지에 자리 잡고 있는 화교학교의 정식 명칭은 인천화교중산중 소학교( 仁 川 華 僑 中 山 中 小 學 校 )다. 중산학교가 설립된 것은 1901년이다. 처음 학교 문을 열었을 때는 초등학교 과정인 소학교로 시작했는데 이것이 한국 화교 학교교육의 효시다. 화교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 놓은 때는 1882년(고종 19)으로 추정된다. 임오군 란 때 한국에 파견된 군대를 따라 40여 명의 상인이 입국하였는데 이들이 한국 화교 북성동 105

55 의 시초가 되었다. 이어 1884년 인천 북성동에 청국조계지( 淸 國 租 界 地 )가 설치되면 서 1천여 명의 화교가 거주하게 된다. 자연스럽게 아이들 교육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중국 영사부의 주도로 마침내 학교가 설립되었다. 화교 학교는 화교 사회의 번성과 침체에 따라 그 학생수가 증감했다. 인천의 화교 들은 북성동 주변에 모여 살다가 점차 주안, 용현동, 부평 등으로 퍼져 나갔다. 그곳 에도 작은 화교 사회가 형성되면서 학교가 세워졌다. 1946년에 주안분교, 1951년에 용현분교와 부평분교가 설립되었다. 그곳 분교에서 3학년까지 마치고 4학년 과정부 터는 북성동 본교로 와서 공부했다. 그밖에 수원, 평택 등에서 유학을 오는 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그들을 위해 오림포스 호텔(현 파라다이스호텔) 밑에 있던 영미연초회 사(Chemulpo Tabacco Co.) 벽돌 건물을 학교 기숙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17, 8년 전에는 초 중 고 전교생 1,500여 명에 이르러 농구 코트 두 개 크기의 운 동장에 함께 모이면 말 그대로 바글바글 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소학교 교장, 중고 등학교 교장이 따로 있을 만큼 학교 규모가 컸다. 지금은 전교생이래야 400여 명에 불과하다. 현재 한국에 사는 화교 수는 2만6,000명이며 이중 인천에는 중국 산둥성 출신 등 본토인이 800여 명, 대만인이 1,100여 명 등 약 2,000명이 살고 있다. 차이나 타운 등 북성동 인근에는 120가구 500여 명이 살고 있다. 학생수가 줄다보니 인천중산학교의 자랑인 중국무용단과 밴드부를 꾸려나가기도 힘들게 되었다. 1997년 9월에 창단된 중국 전통무용단은 쌍십절이나 개교기념일에 화려한 용춤과 사자춤을 선보이며 이국적인 볼거리를 제공했다. 예전에는 쌍십절을 손꼽아 기다려 일부러 학교로 구경 가는 시민들도 적지 않았다. 그날이 되면 학부모 와 구경꾼 그리고 잡상인들로 차이나타운 골목은 온종일 북새통을 이뤘다. 무용단과 밴드부는 인천시민의 날 거리행진에 단골손님으로 초청되기도 했다 인천중산학교는 대만 정부의 것이다. 중국 소유가 아니다. 1992년 8월 우리나라와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이 수교하고 중화민국(대만)과 단교했지만 화교 학교는 여전 10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북성동 107

56 히 대만 정부의 소유이고 대만으로부터 학비 보조금을 받는다. 이런 이유로 8월에 1 학기, 2월에 2학기가 시작하는 여름학기제 등 교육과정도 대만의 것을 따르고 있다. 그렇지만 화교 학교에서는 우리나라 학교와 거의 비슷한 과목을 가르친다. 국문( 國 文 ) 시간에는 표준어인 북경어를 배우고 일주일에 세 시간 있는 한문( 韓 文 ) 시간에는 한글과 한국어를 배우는 게 다를 뿐이다. 인천중산학교 재학생이 모두 화교는 아니다. 초등학교에는 30%, 중고등학교에는 15%의 한국인이 있다. 화교 학생 중에도 아버지가 화교, 어머니가 한국인인 경우가 절반 정도로 순수 화교 학생의 비중이 높은 편은 아니다. 얼마 전부터는 중국 본토 출신 학생도 20여 명 재학하고 있다. 대부분 취업을 위해 한국에 온 중국동포의 자녀 들인데 점점 느는 추세에 있다. 매년 졸업생 중 10명 정도는 대만대학에 진학한다. 한국 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 은 주로 한의대, 공대, 무역학과 등으로 진로를 잡고 있는데 외국인 학교로 지정돼 있 기 때문에 화교 학교 학생들은 한국 대학에 가려면 검정고시 과정을 거쳐야 한다. 80 년대 까지는 대만교육부에서 매년 6월 한국으로 건너와 화교들을 대상으로 대만대 학 입시를 주관하기도 했다. 현재 이 학교에는 30명 정도의 교사들이 근무한다. 한글 선생님 한 명을 빼고 모두 화교 출신들이다. 이들 대부분 한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 니고 대만 대학에 진학해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와 교편을 잡은 교사들이다. 1950년대 중반 인천중산학교 졸업생 중에 이수영이 있었다. 그는 인천의 당면 공 장 화교 노동자의 딸이었다. 1944년 인천에서 태어나 이 학교를 다니다 13세 때 대만 으로 건너가 대북국립예술전문학교 음악과에 재학 중이었다. 18세의 그녀는 1961년 미스 차이나에 뽑혔고 그해 런던에서 열린 미스 월드에서 2위로 입상했다. 동양인으 로는 처음으로 준( 準 )월드미스에 뽑혀 세계적인 뉴스가 되었다. 1962년 1월 25일 이 수영은 김포공항으로 금의환향했다. 자유중국 대사 부부, 화교 200여 명, 미스 코리 아 진선미 등 많은 사람들이 환영나왔고 며칠 후 고향 인천시민회관에서는 시민들이 장내를 꽉 찬 가운데 미스 차이나의 밤 이 성대하게 열렸다. 10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북성동 109

57 바닷물 닿는 곳 어디든 화교( 華 僑 )가 있다. 1882년 임오군란 직후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청나라가 군인 3,000명과 상인 40명을 보낸 것이 한국 화교의 효시다. 올해로 딱 130년의 시간이 흘렀다. 1884년 4월 청국 조계지가 설정된 이후 1910년 한일병탄 직전까지 중국인들은 서해를 건너 물밀 듯 들어왔다. 1만1천800여 명까지 증가했는 데 인천에만 2,800여 명이 거주했다. 중국을 오가는 정기여객선 이통환( 利 通 丸 )이 제 물포에 닿으면 두꺼운 호떡을 마치 탄대처럼 들쳐 멘 중국 남자들이 새까맣게 내렸 다. 초기 그들은 대부분 석공으로 일을 했다. 그들 손에 의해 홍예문은 물론 서울의 중앙청, 명동성당 등이 축조되었다. 어딜 가든 중국인들의 짐 보따리에는 세 종류 칼 이 들어 있다고 한다. 조선으로 건너 온 그들은 나중에 대부분 요리사, 이발사, 포목 상으로 돈을 벌었다. 간혹 본국과의 교역으로 동순태 같은 큰 돈을 번 거상이 출현하 기도 했다. 북성동은 초기에 조선과 중국의 친선을 도모한다는 의미에서 선린동( 善 隣 洞 )이라 고 불리다가 일제강점기에 지나정( 支 那 町 ) 이라고 불렀다. 1930년 중국 영사관은 이 명칭이 중국의 국체를 무시한 것이라 하여 정정을 요구했고 인천부윤(지금의 시장) 은 이를 받아들여 서정 으로 개칭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 명칭은 사용되지 않았고 미생정( 彌 生 町 ) 으로 명명되었다. 한때 이곳은 청나라 관청이 있는 동네 라는 뜻으로 청관( 凊 館 ) 이라고 불렀다. 흔히 차이나타운 하면 짜장면 동네로 생각한다. 짜장면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 짜장면 없는 중국집 이 있다. 중산학교 바로 정문 앞의 복래춘( 福 來 春 )은 4대째 꽁신삥(공갈빵)과 웰빙(월병)을 굽고 있는 중국 전통 과자점이다. 지 금은 곡회옥( 曲 懷 玉 65) 씨와 그 아들 곡사충( 曲 士 忠 33) 씨가 화로 앞에서 함께 땀을 흘리고 있다. 곡 씨의 할아버지는 1920년대 한국으로 건너와 월병을 팔기 시작했다. 곡 사장에 게 복래춘의 웰빙 역사를 들려달라고 하자 말없이 벽을 가리킨다. 상점 벽에는 월병 가계도 가 걸려 있다. 곡 씨의 가계( 家 系 )를 그린 그 종이에는 월병의 기술을 전수한 가족들의 이름을 빨간색 테두리로 표시해 놨다. 가게 곳곳에는 월병 무늬를 찍어낼 때 사용한 나무틀 등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도구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복래 춘은 처음에 공화춘(현 짜장면박물관) 근처에 있다가 50여 년 전에 현재의 자리로 이 전했다. 중국인들에게 원래 공갈빵과 웰빙은 간식거리가 아닌 제삿상에 올리는 귀한 음식 입니다. 우리집에서 만드는 과자들은 중국 산둥성 북방족의 맥을 고스란히 잇는 것 들로 대만에서 만드는 남방식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복래춘에는 부영고, 소과, 깨과자, 팔보월병 등 공갈빵 외에도 수십 가지의 중국 전 통과자를 만든다. 19세부터 빵을 굽기 시작한 곡회옥 씨는 인천은 물론 세계에서 가 장 맛있는 중국 전통과자를 만든다는 긍지를 갖고 있다. 이러한 자부심을 담아 복래 춘의 포장지에는 百 年 傳 統 老 店 이라고 적혀있다. 일제강점기 때의 차이나타운 골목. 11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북성동 111

58 춘장 냄새와 차( 茶 )향이 뒤섞이고 있지만 차이나타운은 엄연한 한국 땅. 이 거리에 서 고집스럽게 중국색( 色 ) 없이 버티는 곳이 있다. 금색으로 혹은 적색으로 화려하게 쓰여진 한자 간판들 사이, 한글로 반듯하게 현대크리닝 이라고 새겨진 이름이 낯설 다. 짜장면집에 포위된 세탁소의 모습이다. 외관은 요즘 구미에 맞춰 리모델링하였 는데 내부는 천장이 높은 옛 중국 건물의 형태 그대로다. 한 120여 년 쯤 된 건물이에요. 시아버지 때부터 이 자리에서 세탁업을 한 지 50년 이 되었고요. 지금은 며늘아기와 함께 가게를 돌보고 있어요. 최근에도 집세를 이기 지 못해 주변 세탁소 몇 곳이 문을 닫았어요. 세탁소 주인 박민자(58) 씨는 이야기 하는 도중에도 다리미를 손에서 놓지 못한다. 손은 바쁘지만 요즘 장사 재미는 별로인 눈치다. 장사가 잘 될 때는 자동세탁기를 쉴 새 없이 돌려야 했다. 하지만 지금은 일이 3분의 1로 줄어 기계를 쓸 필요가 없어 세 탁물을 일일이 손으로 모두 다린다. 20여 년 전만 해도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때만해도 이 동네에 여인숙과 술집 이 밀집해 있었고, 뱃사람들이 양말이며 속옷까지 한짐 들고 와 정신없이 쏟아내곤 했다. 하지만 중국 요리집이 하나둘 생기고 동네 사람들마저 기업형 세탁소로 발걸 음을 돌리면서, 당시 대여섯 군데 있던 세탁소 가운데 이곳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유혹 도 많았을 텐데 50년 동안 업종 변경하지 않고 세탁업을 이어 온 것이 참 대 견하다. 짜장면 집들 속에서 이제는 이 집이 이방인처럼 되었지만 긴 세월 동안 한눈 11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113

59 새우젓 창고를 개조한 집들이 모여 있는 새우젓 골목. 팔지 않고 삼대가 기술을 쌓아 온 손길이 이 세탁소를 지탱하게 하는 힘일 것이다. 이 가게는 차이나타운의 소소한 흥망성쇠를 그 속에서 몸소 지켜 본 산증인이다. 차이나타운 아래, 인천역 뒤편은 바닷사람과 바다물건이 모여드는 왁자지껄한 선 창가였다. 인천의 섬을 오가는 객선부두와 물 위에 뜨는 잔교( 棧 橋 )가 있었고 앞바다 에서 걷어 올린 생선을 경매하는 깡시장 공판장이 있었다. 현재 이곳은 도크가 만들 어졌고 여객터미널과 어시장 등은 연안부두로 이전했다. 인천항 8부두 정문 건너에 작은 동네가 있다. 큰길에서 살짝 들어가 있기 때문에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사람들은 이곳을 새우젓 골목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잡은 새우를 소금에 절여 보관하던 창고와 가게들이 있었다. 사시사철 골목 이곳저곳에 새우젓 독이 일렬로 사열하듯 세워져 있거나 빈 통으로 나뒹굴었 다. 김장철이 되면 사람들은 양동이 하나씩 들고 열차를 타고 오거나 자유공원 응봉 산 고개를 지게 지고 넘어왔다. 파는 이와 사는 이의 흥정소리와 악다구니가 골목 밖 으로 넘쳐나갔다. 골목에는 새우젓뿐만 아니라 건어물 가게들도 함께 있었다. 부두 가 사라지면서 새우젓도 함께 떠나버렸다. 빈 창고와 가게에 인근 노동자와 도시 빈 민들이 들어와 구들을 놓았다. 쪽방촌이 되었다. 새우젓 골목 옆에는 하얀 소금이 산처럼 쌓였다. 인근 섬과 주안염전에서 들여온 소금이었다. 소금은 가마니나 포대에 포장돼 전국 각지로 실려 나갔다. 소금을 배에 서 부리던 그 앞의 부두를 사람들은 한염부두라고 불렀다. 소금공장이 떠나고 그 자 리에 5층짜리 동일아파트 두 개 동이 들어섰다. 옥상에 올라가 보았다. 새우젓골목 이 한눈에 들어왔다. 반듯한 통로와 지붕 높은 집들이 일반 골목과는 분명 달랐다. 얼마 전 낡은 외벽에 총천연색 그림이 그려졌다. 마치 팔순 노파의 얼굴에 색조화장 을 짙게 한 어색한 모습이다. 난장이었지. 길바닥은 늘 물기로 진창이었고 지나다니다 물건끼리 사람끼리 부딪 히고, 바다 끼고 사는 사람들이 한데 모이다보니 자주 싸움박질하고 그게 사람 사 는 모습이었지. 그때가 많이 그리워. 아파트 마당 그늘 평상에서 쉬고 있는 박치국(77) 할아버지가 잠시 옛 모습을 회상 한다. 그는 평안도에서 피난 나와 북성동에 거주하면서 조그만 배의 기관장으로 일 하며 늘 바다를 끼고 살았다. 옆에 앉은 할아버지가 옛 모습의 조각 하나를 툭 던진 11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115

60 다. 저쪽에 한번 가 봐요. 그 골목이 뱀 골목이요. 뱀 장수들이 야한 얘기를 곁들이 면서 뱀과 약을 팔았어. 아파트 담장을 끼고 도니 뱀처럼 살짝 휘어진 인적이 끊긴 골목이 나왔다, 주저앉은 집, 사람 살지 않는 집, 바람에 나뒹구는 쓰레기들. 이제 그 곳은 뱀이 나올 만큼 스산하고 퇴락했다. 서둘러 돌아 나오려는데 뒤에서 뱀장수의 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애들은 가라. 선창가에는 노점상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 중에는 매일 경인선 열차를 타고 서울 로 가서 장사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큰 함지박에 얼음과 함께 물 좋은 생선을 담아 인천역에서 탑승했다. 출근 시간대의 열차 안은 생선 냄새가 진동했다. 게다가 창문 을 열수 없는 겨울철이면 승객들은 대놓고 말은 못해도 참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들 이 노량진역에서 내리고 나서도 한참 동안 열차 안은 비린내가 배어 있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풍경으로 한 시대를 살아간 이 땅의 억척스러운 왈순아지매들의 모습이었다. 선창가 그림에서 빠질 수 없는 풍경이 주점과 색시집들이다. 갈매기의 호위를 받 고 만선 고기잡이배들이 들어오면 부두는 아연 화색이 돈다. 술집 창문 넘어 젓가락 두드리는 소리와 교태 소리가 밤새 흘러넘쳤다. 섬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몰려든 사 람 때문에 부두 주변에는 여인숙 등 숙박업소가 늘 성업이었다. 당시 가장 유명했던 집은 차이나타운에 있던 황해여관이다. 사람이 밀려들어 예약을 하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의 호시절도 있었다. 지금은 여관이 헐리고 그 자리에 중국 음식점 청관 이 들어섰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택시기사에게 청관 가자고 하면 잘 몰라도 황해여관 있던 곳 가자 하면 그 앞에 세워줄 정도였다. 선창가 흔적이 가장 뚜렷하게 남은 곳은 파라다이스호텔(옛 오림포스) 밑 만석고 가도로 옆이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석축 위에 1958년경에 설립된 해무청사(인천해운 항만청)가 있었다. 건축미가 뛰어난 격자무늬의 이 건물은 서울올림픽공원 정문 설 계자 김중업 씨의 작품이다. 이후 안타깝게도 이 건물은 헐리고 다시 짓고 1993년 국 립식물검역소로 활용되었다. 지금은 바다와 전혀 관계없는 업체가 들어와 있다. 그 바로 옆에는 이국풍의 러시아 인천영사관이 있었다. 함포사격에도 살아남았던 이 건 물은 1974년에 철거되고 만다. 11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북성동 117

61 그 라인에는 아직도 그물을 비롯해 배에서 쓰는 어구들을 파는 선구점( 船 具 店 )들 이 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더께가 내려앉은 빨간 벽돌집 앞에 섰다. 이쪽저쪽 사 진을 찍고 있는데 안주인이 나왔다. 왜 찍어요? 아, 좀 오래된 것 같아서요 다 낡은 거 뭐 좋다고 다소 못마땅했지만 안주인은 바로 집의 이력을 술술 풀어준다. 이 집은 6 25 전쟁이 끝나자마자 시아버지가 지금의 아트플랫폼 근처 폭격 맞은 창고 벽돌을 얻어다가 지은 집이다. 현재 4대에 걸쳐 사는 이 집은 창문틀 양식이 일제강점기 때의 그것과 흡사하다. 시아버지가 일러 준 것에 의하면 송월동에 있는 옛 비누공장 애경사의 벽돌과 재질이 같 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림잡아 벽돌의 나이는 7,80년은 족히 됐다는 얘기다. 기독교100주년 기념탑 방향으로 몇 집 건너면 최근에 리모델링한 오래된 3층짜리 건 물이 있다. 이 건물의 사연은 더 드라마틱하다. 얼마 전까지 이 집의 주인은 유광준(74) 씨였다. 그는 이 집이 일제 대정시대에 지은 건물이라고 했다. 일제의 대정시대는 1911 년부터 1924년까지다. 그렇다면 길면 100년 짧아도 87년 된 건물이다. 5대에 걸쳐 살아 온 이 집은 겉으로 보기에는 콘크리트 건물 같은데 실은 목조 건물이란다. 인천에 목조 3층집은 옛날 항도백화점 옆집하고 이 집밖에 없었어요. 3층까지 세워진 나무기둥들이 이 집을 지탱하고 있다. 짠바람에 쩔어서 그런가, 벌 레가 없어서 지금도 썩은 데가 한군데도 없다. 벽은 대나무로 엮고 짚을 섞은 진흙을 엉겨 만들었다. 1992년에 작은 화재가 난 후 슬레이트벽으로 덮으면서 콘크리트 건 물처럼 보였다. 이 집은 원래 객주( 客 主 )집 이었다. 부두 화물이나 생선의 매매를 주 선하거나 위탁 판매를 하던 집이다. 나중에는 잠시 다다미가 깔린 공동주택으로 사 용되기도 했다. 현재 이 건물에는 기념탑교회가 자리 잡고 있다. 오후 4시경 어디서 나타났는지 양동이를 들거나 캐리어를 끄는 중년여성들의 모 습이 부쩍 많이 띈다. 그들의 발걸음은 급하다. 어디들 가세요?, 포구에 가는 거요. 꽃게 사러.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대한제분공장 옆길로 바다에 다다르자 이미 보따리 하나씩 챙겨든 몇몇 무리들이 포구를 등지고 나온다. 초입부터 사람들과 자동차들이 뒤엉켜 번잡하고 소란하다. 바로 옆에서 낚싯줄을 드리운 채 한가롭게 바다에 시선을 둔 강 태공들이 모습이 인상적이다. 포구에는 20여 척의 고기잡이배들이 닻을 내려놓고 서로의 어깨를 꼭 낀 채 정박 해 있다. 갑판 위는 작은 어시장으로 변했다. 꽃게, 새우를 비롯해 갖가지 생물들이 물 밖에서 발버둥 친다. 사람들은 배로 내려가 어부들과 직거래를 한다. 고기 한 점 얻어먹기 위해 어디서부터 쫓아왔는지 갈매기는 공중에서 절규한다. 그 소리가 소음 에 가깝다. 덩달아 흥정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커진다. 난전이다. 그러길 한 시간. 거래가 끝나면서 사람들은 포구를 떠나고 갈매기마저 제 갈 길로 가버리자 바다는 이내 조용해졌다. 다시 강태공들의 세상이 되었다. 11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북성동 119

62 북성동 1가 1번지, 송월동에서 만석동으로 넘어가는 육교로 철길을 건너 만석동 우체국 옆길 동네를 지나가면 옛 외국인 묘지 자리가 나온다. 응봉산 줄기라고 할 수 있는 땅이 바다 끝에 멈추면서 구릉처럼 조금 불쑥 솟았다. 개항 이후, 주로 인천에 거주하다 사망한 서양 상인, 선교사, 외교관 가족들의 유해를 안치하려고 조성한 묘 역이다. 1887년 7월에 첫 시신이 매장되었다. 뒤를 이어 상인 타운센드, 헤르만 헹켈, 의사 랜디스 박사, 청국 외교관이었던 오례당 같은 인물들이 이곳에 잠들었다. 묘는 1965년 연수구 청학동으로 이전했다. 이후 묘역은 철도 부지로 편입되었고 지금은 높은 담장 안으로 둘러쳐져 고작 한 움큼쯤 되는 붉은 언덕만 남았다. 그 안에 어지 럽게 줄기를 뻗은 아카시아 몇 그루만이 한에 사무치는 듯 고요 속에 기울어져 있다. 처음에 묘지를 바닷가에 자리 잡았던 것은 언젠가는 제물포에서 배를 타고 자신의 고향으로 돌아가 다시 묻히리라는 간절한 바람이었리라. 옛 묘역에 서니 그 영혼들 이 바닷바람 따라 자신들의 고국으로 잘 돌아갔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12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북성동 121

63 그때, 이곳 북성동 Map & Photos ➒ 차이나타운 ➓ ➍ 동인천역 패루 인천역 ➎ 파라다이스호텔 ➏ ➐ ➊ ➋ (구)객선부두 월미도 답동사거리 중부경찰서 ➑ ➌ 선교100주년 기념탑 수인역 ➊ 러시아영사관 파라다이스 호텔 밑, 인천역 길 건너 에 있던 2층짜리 러시아 인천영사관은 1903년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된다. 러시 아는 경성 한국 주재 영사관 내에 부영 사관을 병설하고 인천, 평양, 진남포 등 을 관할케 하고 있었는데 1902년 10월 31일자로 부 영사관을 갑자기 인천에 이 전 설치하였다. 제물포항을 일본만이 독점하는 것을 방지하는 동시에 자국의 병참 기지화를 위한 것으로 보인다. 제물포 해전 후 영사관이 폐쇄 당했으며 일본 육군 운수부에서 사용했고 광복 후 우리나라 해군과 인천해사출장소로 사용하다가 1974 년에 철거되었다. ➋ 해무청사 김중업( 金 重 業 )은 평양 출신으로 일본과 프랑스에 서 유학한 후 서울대 등에서 후 진을 양성하다가 프랑스 문화 부의 고문 건축가를 지낸 건축 계의 대가( 大 家 )였다. 파라다이 스호텔 밑에 1957년에 세워진 인천지방 해무청사는 그의 대 표 작품 중 하나다. 그 건물은 1903년경에 설립된 러시아영사관 건물과 나란히 바다를 보고 있었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현대적인 건물이 부둣가의 번잡한 풍경과 함께 어우러진 모습은 그림 그 자체였다. 해무청사는 1992년경에 사라졌고 그 자리에는 특색 없는 철근 콘크리트 건물이 들어섰다. ➌ 국제마라톤대회 1959년 9월 28일 제1회 9 28수복기념 국 제마라톤대회 가 열렸다 전쟁 참전 국 가 중 미국, 호주 등 7명의 외국인 선수가 참 가한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대회라고 할 수 있다. 해안동 로터리를 출발해 서울 중앙청 앞 결승점을 통과하는 경주였다. 1966년 3 회 대회 때는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우승 한 맨발의 마라토너 아베베가 참가했다. 그 는 2시간 17분 4초의 기록으로 월계관을 썼 다. 해안동 로터리는 경인간 마라톤의 출발지로서 우리나라 마라톤의 성지( 聖 地 )와 도 같은 곳이다. 인천시는 1966년 6월 이곳을 새롭게 단장하고 제1회 9 28수복 기념 국제마라톤대회 기념비를 세웠다. ➍ 청국영사관( 淸 國 領 事 館 ) 청국영사관은 청국지 계가 설정된 1884년 4 월에 1,120평 규모로 개설되었다. 초기에는 청국이사부 또는 청국 이사서( 淸 國 理 事 署 )라 고 부르다가 1907년 무렵 정식 영사 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1894~1895년에 있었던 청일전쟁 당시 잠시 폐쇄했다가 1898년 1월에 청국영사관으로 다시 문을 열었다. 일제 말기에 재차 폐쇄되었는데 그 정확한 일 자는 알 수 없다. ❺ 제물포연초회사 터 미국인 해밀 톤은 파라다 이스호텔 입 구 언덕 아래 에 인천연초 회사(제물포 지궐련연초 회사)를 설립해 담배를 생산했다. 홍도패, 산호, 열쇠표 등의 이름 이 붙은 담배를 하루 30만 갑씩 생산했다. 1910년대 담배 생산 액은 정미업 다음을 차지했고 직공수도 제조업 가운데 가장 많 을 정도로 인천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컸다. 하지만 1921년 조선총독부가 연초전매법을 시행하면서 인천산 담배는 자취를 감췄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중산학교 기숙사로 사용하기도 했다. 옆에는 중국인 사당이 있었다. ➏ 해망대산 현재 파라다이스(옛 오림포스)호텔이 자리한 곳으로 산이라기보 다는 일종의 언덕이다. 언덕 수준이지만 바다에 접했기 때문에 이름 그대로 바다를 바라보기 좋은 곳이었다. 봉화대가 있었고 바다를 향한 대완구(대포)가 있었다. 개화기에는 한때 영국영사 관이 설치되었고 이후 인천상륙작전 때 함포로 폐허가 돼 빈터 로 남았다. ➐ 오림포스관광호텔 오림포스관광호텔은 1965년 12월 객실 43개로 개업했다. 인천에 서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이었다. 개관 당시 이 호텔 에는 중국식 광동요리의 나이트클럽, 24시간 무휴의 지하 바(Bar) 한국 명기( 名 技 )가 특대 하는 한국요리집과 기 생관 등이 있었다 년 8월 1일 우리나라 최초의 외국인 전용 카 지노가 이 호텔에 들어 섰다. 2000년 3월 카 지노계의 대부 전낙원( 田 樂 園 )이 이 호텔을 인수하고 자신의 이 름을 따서 파라다이스 호텔로 바꿨다. ➑ 첫 선교수녀 도착지 기념비 중부경찰서 정문 옆 화단 안에는 샬트 르 성 바오르 수녀회 한국 설립 120주 년을 맞아 첫 선교 수녀들이 도착한 장 소에 2007년 7월 22일 기념비를 세웠 다. 이 비에 의하면 네 명의 샬트르 성 바오르 수녀들은 1888년 7월 22일 제 물포항에 도착해 순교의 땅 조선에서 처음으로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➒ 중화기독교회 북성동 3가 5-1번지에 있었던 중 국인을 위한 기독교회로 인천부 사 에 의하면 1917년 6월에 창립 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2002년 이 예배당은 상가를 짓기 위해 철 거되었고 교회는 상가 건물에 들어갔다. 1922년 중화기독교회 라는 주춧돌이 있는 것으로 보아 1922년에 건물이 개축 또는 증 축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한동안 신축 상가 뒤편에 이 주춧돌 이 방치돼 있었다. ➓ 의선당 인천부사 에 의하면 이 중국절은 1933년 이전 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 다. 총 3채의 건물로 구 성돼 있다. 중국식 기 와를 올린 맞배지붕 건 물인 본당이 있고 좌측 에는 거주 공간이 있다. 길가에 위치한 건물은 한때 중국무술도 장으로도 사용했고, 현재는 중국물품을 판매하는 상점이다. 12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북성동 123

64 경동 세상의 온갖 물상 物 像 빠르게 넘던 싸리재 사람들은 경동이란 행정명보다 흔히 싸리재 라고 불렀다. 토속적인 이름과 달리 이곳은 한때 최신 유행 을 이끌어가던 인천 최대의 중심가이자 번화가였다. 1961년 인천에서 신호등이 처음 켜진 곳도 경동사 거리였다. 빨강 노랑 녹색불이 주기적으로 들어오는 신호등은 마냥 신기한 구경거리였다. 이처럼 신 문물이 흘러가고 사람과 문화가 모였던 곳이 경동이었다. 시계바늘을 100여 년 전으로 돌려보자. 제물포항에 짐을 내린 벽안( 碧 眼 )의 외국 인은 서둘러 쇠뿔고개로 향한다. 말잡이는 싸리재로 길을 잡는다. 우마차 한 대 겨우 드나들 수 있는 길 초입에 들어서니 거름 냄새가 코를 찌른다. 주변은 온통 중국인들 이 경작하는 양배추밭이다. 오른쪽 언덕에는 주변 풍광과는 어울리지 않는 서양식 건물이 하나 서 있다. 파리 외방선교회가 지은 제물포본당(답동성당)이다. 고개길을 조금 더 오르니 멀리 시커먼 연기를 내뿜으며 달리는 기차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얼마 전에 개통한 경인철도다. 시계바늘을 50여 년 전으로 당겨본다. 이제 6 25 전쟁은 끝났고 사람들은 폐허가 된 땅에 다시 삶의 씨앗을 파종하기 시작했다. 싸리재에도 활력이 돌기 시작했다. 일 제강점기 때부터 모던보이 모던걸의 무대였던 경동에 양복점과 양화점이 다시 문을 열기 시작하더니 길 양 옆으로 상점들이 빼곡히 줄을 이었다. 긴담모퉁이 길 입구 언 덕에 미국 감리교의 도움으로 지은 기독병원이 개원하고 주변에 개인병원도 한 집 걸러 하나씩 생겼다. 더불어 약방과 약국도 속속 문을 열면서 이곳은 늘 사람들로 붐 볐다. 2013년 10월 초순, 그곳에서 다시 시간여행을 한다. 경동파출소 앞에 섰다. 6,70년 대 야통(야간통행금지)이 있던 시절에 번화가의 특급지답게 사건사고로 늘 시끌벅적 경동 125

65 했던 파출소였지만 지금은 경동치안센터 라는 이름으로 간판을 바꿔달았다. 안을 슬 쩍 들여다보니 컴퓨터 모니터를 보는 의경 혼자 한가롭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통행하 는 사람이 없어 거리도 무료하고 파출소 안도 무료하다. 경동에 오면 아직도 옛 추억을 고스란히 곱씹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 극장 이름은 애관( 愛 館 ) 이지만, 보는 것을 사랑한다 ( 愛 觀 )는 의미를 품은 극장이다. 이 극장은 공인받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공연장 협률사( 協 律 社 ) 의 역사를 이어받고 있 다. 애관극장 덕분에 일제강점기 때 경동거리는 복지강화 (합동영화사), 날개 없는 천 사 (국보영화사) 등이 제작 보급될 만큼 한동안 시네마 천국의 역할을 했다. 특히 대동 신문 지사장이자 건설영화사 사장인 최철은 인천에서 무영의 악마, 광복 후 1년의 인 천 뉴스 등을 제작했는데 그는 최불암의 부친이다. 애관극장은 영화만 상영한 것이 아니었다. 미스터유니버스 선발대회, 취업 알선 설 명회, 국정 홍보 등을 개최했으며 세계적인 음악가 번스타인의 피아노 연주회가 열리 기도 했다. 중심지답게 정치 행사도 자주 열렸다. 대표적인 것이 1945년 8월 18일 조 봉암 주도로 인천건준이 결성된 행사다. 한때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스크린을 가진 애 관극장에서 당대 스타였던 신성일과 엄앵란이 무대 인사를 하던 날, 경동 일대가 교통 마비가 되었다는 것은 이제 희미한 전설로 남아있다. 현재 극장 사장은 탁경란 씨다. 1960년 애관극장을 재건한 이봉열 씨에게서 1972년 극장을 인수한 탁상덕 씨의 막내딸이다. 오빠가 맡았던 극장이 점점 내리막길을 걸으 면서 외환위기 때 부도를 맞자 그는 미국에서 들어와 경매로 이 극장을 재인수했다. 애관은 지난 2004년 5개의 스크린을 가진 멀티플렉스로 변모했다. 박스오피스 1, 2위를 다투고 있는 영화 관상 과 스파이 등의 포스터가 붙어 있는 극 장에 들어섰다. 평일 한낮이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극장 안의 풍경은 늘어진 필름처럼 한가롭게 돌아가고 있다. 이곳에서 두 시간 내내 까치발을 들고 바람과 함께 사라지 다 를 보았던 헐리웃 키드들에게는 애관이 존재하는 그 자체만으로도 그저 고맙다. 12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경동 127

66 극장 뒤 언덕에 오르면 신신예식장이 있다. 이 예식장은 60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80년대까지 만해도 인천에서 좀 폼나게 결혼식을 올린다고 하면 거의 신신예식 장에서 치렀다. 이 예식장에는 작은 정원이 딸려 있어 예식이 끝나면 이 야외마당에서 단체사진을 찍었다. 예식장이 비어 있는 날짜에 맞춰 결혼 날짜를 잡아야 할 정도로 인기 있던 곳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청첩장에서 신신예식장 이라는 글자를 볼 수 없다. 한동안 이름을 신신컨벤션웨딩홀 로 고치면서 신세대의 마음을 끌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올 초 모 대학교에서 이 건물을 노인요양원으로 개조해 운영하고 있다. 어쩌면 침상 에 누워있는 이들 중에는 이 신신예식장에서 백년가약을 맺고 살다가 이제는 혼자 가 되어 들어온 노인들도 있을 것이다. 사람만 늙은 게 아니다. 우아했던 건물은 여 러 차례의 증축을 통해 옛 모습이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정원의 흔적은 그대로 남 아 있다. 신랑신부가 새 출발을 위해 첫발을 디뎠던 경동 쪽으로 난 옛 계단 출입문 도 그대로다. 이제 이곳에서 결혼행진곡을 들을 수 없지만 신신예식장은 이 거리에 웨딩문화의 씨앗을 뿌렸다. 길 양편으로 드레스숍이나 한복집 그리고 사진관 등 결혼 관련 가게들 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더니 몇 년 전에는 아예 웨딩거리 로 명명되기에 이르렀다. 번성했던 경동거리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던 상점은 양복점이었다. 한미라사, 김테일러, 화신양복점, 서울라사, 잉글랜드양복점, 자유라사, 신라라사, 백양테일러, 대흥양복점, 월드양복점, 현대라사 등 한창 때는 30여 개의 양복점이 성업을 이뤘다. 멋쟁이 신사들이 한 벌 쫙 빼입고 활보하던 거리에 이제 양복점 간판을 보기가 힘들어 졌다. 맞춤 양복은 기성복에 밀리고 백화점에 밀렸다. 모퉁이 길에서 눈에 띄는 이수일양복점에 무작정 들어갔다. 한가롭게 TV를 보던 이 수일(71) 사장에게 옛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하자 다 잊혀진 이야기인데 뭘 하면서 말꼬리를 흐린다. 이것저것 양복에 대한 이야기를 슬쩍 던지자 그제야 얘기 보따리를 풀기 시작한다. 12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경동 129

67 한창때는 재단사, 봉제사 등 20명을 두고 장사를 했지. 추석과 설 명절 때는 며칠 밤을 새워서 일하곤 했는데 한때 극장 영화 예고편 앞에 양복점 광고가 몇 개씩 붙 은 적도 있었지. 그때 손님 한 명이 문을 밀고 들어왔다. 오늘이 가봉하는 날이란다. 가봉 얼마나 오랜만에 듣는 단어인가. 이내 줄자를 목에 건 이 사장의 눈빛은 금세 장인의 눈빛으 로 변한다. 돌리고 재고 올리고. 40년 동안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몸통 치수를 쟀을까. 요즘 맞춤양복 한 벌 값은 대략 100만 원 선. 단골인 듯한 손님은 스스로 특이 체형이 라면서 양복을 꼭 맞춰 입는다고 한다. 아마 여기에 제 아버님 치수 장부도 있을 겁니다. 오래된 장부를 들춰보면 체형이 비슷한 부자( 父 子 )들이 대를 이어 양복을 맞춰 입 었음을 알 수 있으리라. 차 한 잔 권하는 이수일 사장에게 커피 대신 이 동네에서 좀 오래된 다방을 알려 달 라고 하자 바로 양복점 옆 골목에 있는 학다방 을 소개한다. 인천에서 연조가 있는 다 방 중의 하나라는 설명이다. 비걱대는 나무문을 밀고 들어가니 색깔 조명 밑의 탁자 와 의자 등의 소품이 70년대 다방 분위기를 그대로 풍긴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 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릴 들어보렴 최백호 13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경동 131

68 의 노래가 절로 생각났다. 도라지 위스키 대신 쌍화차를 한 잔을 시켰다. 잠시 후에 노 른자위가 둥둥 뜬 쌍화차가 탁자에 놓였다. 아, 계란 띄운 쌍화차가 이곳에서는 아직 도 살아있구나. 약을 사기 위해 문밖으로 줄을 길게 선다면 이해가 갈까. 그런 풍경이 심심치 않게 연출되었던 곳이 동서대약국과 싸리재약국이었다. 기독병원을 중심으로 김내과, 이 이비인후과 등 십수 개의 개인의원들이 함께 의료타운을 이뤘다. 인근 김포, 강화, 옹 진 섬 사람들이 시내에 온 김에 약을 박스나 봉지채로 사가곤 했다. 동서대약국의 간판에는 Since 1946 이란 글자와 함께 옛모습이 담긴 사진이 걸려 있다. 옛 주인은 미국으로 이민가고 지금은 이 집의 역사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약사 가 세들어 운영하고 있다. 바로 옆 코너에 있던 싸리재약국은 성병 즉효약 조제로 유 명했다. 얼마 전 커피숍에 자리를 내주고 어디론가 떠났다. 그렇게 싸리재는 잊혀지고 있다. 싸리재 하면 돌체 를 얘기하지 않을 수 없다. 돌체는 최영준, 김성찬, 정주희 등 100 여명의 연극인들을 배출한 인천 연극의 산실이었다. 지난 1978년 12월 얼음공장을 개 조해 약 90석 정도 되는 객석과 무대공간을 만들어 문을 열었다. 초기에는 연극뿐만 아니라 통기타 가수들의 노래를 관객들이 따라 부르는, 당시 유행이었던 싱어롱의 무 대도 겸했다. 극단마임 대표인 최규호 씨가 마임 전용극장으로 활용하면서 지역 문화 에 불씨를 키우기도 했다. 13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경동 133

69 2007년 마임이 남구 문학동으로 이전하며 돌체극장은 한동안 조명이 꺼졌다. 싸리 재 부근에는 돌체를 필두로 배다리예술극장, 미추홀소극장, 경동예술극장, 신포아트 홀 등 소극장들이 생겨났다가 사라져 갔다. 2010년 돌체가 떠난 자리에 문화활동가이 자 작가인 장한섬(39) 씨가 문화공간 플레이캠퍼스 라는 간판을 내걸면서 돌체 골목 에 다시 조명이 들어왔다. 가구점 사이에는 경기의료기 가 있다. 중구에서 태어나고 자란 박차영(63) 씨가 34 년 넘게 의료기점을 운영하고 있다. 주변에 병원이 많았기 때문에 한창때는 가게 앞을 지나는 사람의 절반은 환자 아니면 환자 가족이었을 것이다. 가게를 찾는 사람들의 발 길이 줄어들자 얼마 전 업종 겸업을 시작했다. 2층을 수리해 카페를 들였다. 천장 서 까래에는 당시 상량식 때 써 놓은 소화 5년 4월 5일 오후 3시 글씨가 그대로 남아 있 다. 소화 5년은 1930년이다. 파인 벽에는 당시 흙과 지푸라기를 사용한 흔적들이 드러 난다. 카페 창으로 내려다보이는 90여 년 전에 지어진 그의 ㅁ자 전통 한옥이 햇빛을 환하 게 받고 있다.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안채에 살다가 몇 해 전 이사를 했다. 빈 한옥은 게스트하우스가 되었다. 그는 새 간판을 달았다. 경동의료기 글자 옆에 카페 싸리재 를 붙였다. 경동 과 싸리재 가 오누이처럼 잘 어울렸다. 현재 문화공간 플레이캠퍼스 로 사용하고 있는 옛 돌체. 13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경동 135

70 그때, 이곳 경동 Map & Photos ➊ 조흥은행 터 ➎ 싸리재 고개 ➑ 상업은행 인천부사에 의하면 인천우체사는 처음에 외리 226번지, 경동 조흥은행 자리에 설 립했다가 그 후 1898년에 내리(현 내동) 103번지에 새로 청사를 짓고 이전했다. 이 후 김휘관 양조장이 있어 소성소주를 생산했다. 중구 중앙동 58은행 자리에 둥지 를 튼 조흥은행 인천지점은 1958년에 경동으로 건물을 새로 짓고 이사왔다. 후에 건물은 헐리고 주차장이 되었다. ➋ 화신양복점 화신양복점은 경인간 최초의 전화 개통지다. 1898년 1월 28일 인천~한성간 최초 로 전화선을 가설하여 1900년 경인간 시외전화가 개통되었다. 또 1902년 3월 30 일 인천전화소를 설치해 시내전화 업무를 총괄하고 6월 1일에는 인천 한성간 자 석식 전화 12회선을 설치해 교환 업무를 시작했다. 경동파출소부터 배다리 앞 대진침대 (옛 서울은행) 까지의 길을 싸리재( 丑 峴 ) 길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완만한 고갯길이지만 옛 날에는 경사가 가팔라서 우마차가 다니기 힘들었 다. 항구 지역의 수질이 좋 지 않아 동쪽 한인 지역에 서 이 고개를 통해 급수를 했는데 겨울철 미끄러운 고갯길로 지장이 많았다. 그래서 1913년과 1917년 두 차례 언 덕을 깎았다. ➏ 애관극장 부산 출신 정치국은 인천에 와서 돈을 많이 벌었다. 개인의 호 사적 취미였는지 부의 사회환원 차원이었는지 1895년 창고를 개조해 극장을 꾸몄다. 그 극장이 협률사( 協 律 社 )다. 이 극장은 1907년에 개관한 종로의 단성사보다 무려 12년이나 앞섰다. 이 극장이 후에 축항사( 築 港 舍 )라는 명칭으로 불리다가 1915년 무 렵 다시 애관( 愛 館 )으로 개명되었다. 애관극장은 6 25전쟁 중에 소실되었다가 1960년 9월에 재건축됐다. ➐ 광신제면 은행들은 사람을 쫓아 돈을 쫓아 이전했다. 일제강점기 주로 해 안동, 항동 등에 있던 은행들은 새로운 중심지인 경동으로 옮 겨 왔다. 항동에 있던 상업은행은 1956년 12월 20일 기독병원 입구(경동 187번지)에 건물을 새로 짓고 이전했다. 후에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예지요양병원이 들어섰다. 한편 배다리 쪽에 있던 서울은행은 처음엔 태양당안경원이 있었고 현재는 대진침 대가 영업을 하고 있다. ➒ 삼성태 양화점은 1885년 단발령이 내린 이후 양복과 양장 차림을 하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면서 생긴 개화 풍조였다. 인천 최초의 양 화점은 1905년 애관극장 맞은편에 문을 연 삼성태 였다. 주인 이성원은 짚신 대신 바닥은 가죽, 발등은 우단이나 천막천을 댄 남자 고무신 형태의 값싸고 질 좋은 경제화 를 만들었다. 이후 밑창을 개량한 만력저( 萬 力 底 ) 신발은 동경 박람회에서 발명상 을 수상했다. ➓ 삼강옥 신신예식장 동인천길병원 ➓ ➐ 경기의료기 (싸리재 카페) 동서대약국 (구)돌체 소극장 경동사거리 ➏ ➎ ➑ ➊ ➋ ➒ 기독병원 이수일 ➍ 양복점 긴담모퉁이 길 ➌ 배다리 ➌ 항도( 港 都 )백화점 1954년 인천고무공업사 장범 진 사장이 인천 최초의 백화점 을 세웠다. 당시로서는 드문 3층 짜리 건물에서 진기한 양품류를 선보이지만 잘 팔리지 않아 개 점 1년여 만에 문을 닫았다. 현재 Lady's Style 이란 가구점으로 사 용하고 있다. ➍ 비전원 1918년 1월에 설립한 행려병자 치료소 비전원은 경동 161번지에 있었다. 당시 우 리나라에서는 드문 설비를 갖춘 이 시설은 일제강점기 인천에 진출해 있던 일본 불교 종파가 연합하여 설립했다. 1931년 247.9m2(75평) 규모의 건물을 신축했다. 환자의 치료는 인천병원에서 담당했는데, 대부분 조선인들이었다. 우리나라 면발의 역사 를 새롭게 쓴 쫄면이 탄 생한 곳이다. 창업주 장 보성(83) 할머니는1960 년대 말 남편과 함께 냉 면공장을 시작했다. 당 시 인천에 냉면공장은 현대시장과 제물포, 이 곳을 포함해 세 곳이 전 부였다. 주문에 밀려 면 발 뽑는 금형틀을 잘못 끼우는 바람에 냉면 면 발이 굵게 나왔다. 이게 뭐야. 할머니는 잘못 뽑힌 면을 버리기는 아까워 공장 옆의 분식 집에 줬다. 분식집 주인은 다양한 야채와 함께 고추장으로 새콤 달콤하게 버무렸는데 이게 대박. 이것이 현재의 쫄면이다. 경동 95번지, 동인천에서 옛 청과시장 물산회사 건물 뒤편에 있 는 설렁탕집 삼강옥은 6 25 전쟁 직후부터 해장국밥을 팔기 시 작했다. 현재 주인인 김주숙 여사의 시아버지인 고 박재황 씨 가 1950년 개성에서 피난 내려와 이곳에 정착해 밥집을 냈다. 평양옥과 더불어 국밥류를 파는 음식점으로는 인천에 남아 있 는 제일 오래된 집이다. 현재는 그의 아들이 삼대에 걸쳐 운영 하고 있다. 한창때 해장국만으로 하루에 80kg 쌀 한 가마를 팔 기도 했다. 13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경동 137

71 내동 시간이 공간을, 공간이 시간을 이어주며 곱게 늙은 동네 한때 안골말 이라고 불리던 내동 언덕을 오르내리다 보면 골목어귀에서 파란 눈의 선교사와 구한말 조 선의 관리들을 마주칠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이 언덕 마루턱에는 백범 김구의 정신이 흐른다. 그는 이곳 에서 두 번의 옥고를 치르며 옥중에서 신서적을 통해 새로운 문명에 눈뜬다. 인천 축항에서의 강제노역 과 인천민들의 구명 운동 등을 통해 의열 청년 김창수는 독립운동가 김구로 다시 태어난다. 김구는 백 범일지에서 인천을 의미심장한 역사적 장소 라고 말했다. 나는 38 이남만이라도 돌아보리라하고 제일 먼저 인천에 갔다. 인천은 내 일생에 뜻 깊은 곳이다. 스무 두 살에 인천 감옥에서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스무 세 살에 탈옥 도주하였고 마흔 한 살에 17년 징역수로 다시 이 감옥에 이수되었다. 저 축항에는 내 피땀이 배어 있는 것이다. 옥중에 있는 이 불효자를 위해 어머 님이 걸으셨을 길에는 그 눈물 흔적이 남아 있는 듯하여 마흔 아홉해 전 기억이 어제인 듯 새롭다. 인천 감옥에서 수형 생활을 하는 동안, 인천 개항장을 통해 유입된 신문물을 익히며 항일운동가로서의 사상을 정립했다 - 백범 일지 중에서 - 백범 김구는 광복 후 고국에 돌아와 지방 순회를 할 때 인천을 제일 먼저 찾았다. 인 천과는 어떠한 인연이 있길래 그는 서둘러 인천으로 발걸음을 했을까. 1896년 명성황 후 시해 소식을 듣고 크게 분노한 그는 일본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했다. 이른바 치하 포사건이다. 이 일로 5월 13일 사형 선고를 받고 해주 감옥에 수감됐다가 당시 가장 힘 든 감옥이라고 알려진 내리(내동)의 인천감영(인천감리서)으로 7월 26일 압송되었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바로 직전 고종 황제의 사형 집행 정지령이 내려지고 무기수 로 감형되었다.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의 옥바라지를 위해 내리로 왔다. 인천항 내의 유명한 물상 객주집에 기숙하면서 밥 짓는 일과 옷 만드는 일을 거들며 아들에게 하루 세끼 감옥에 밥 한 그릇씩을 갖다 주는 조건으로 고용되었다. 내동 139

72 인천인들은 재판 과정에서 보여준 김구의 의연함과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항거가 마음 에 와 닿아 그를 적극적으로 돕는다. 가장 적 극적이며 헌신적으로 나선 이는 강화 출신 김주경이었다. 그는 강화에서 큰 세력을 형 성하였는데, 당시 사람들은 강화의 인물로, 양반에는 이건창( 李 健 昌 )이요, 상놈에는 김주경 이라는 평했을 정도였다. 인천 유생 비밀결사의 지도자 유완무와 순검 김정근 은 아예 그의 탈옥을 모의한다. 유완무는 용감한 청년 13명을 뽑아서 일종의 특공대 를 조직해 한밤중에 석유통을 지고 들어가 7, 8곳에 불을 지르고 감옥을 깨서 그를 구 출하려는 계획까지 짰다. 거사를 실행에 옮기기 전 백범은 1898년 3월 19일 인천 감옥 을 스스로 탈출했다. 이후 1911년부터 안명근사건과 신민회사건으로 서대문 감옥에서 수감 생활을 하다 가, 1914년 인천 감옥으로 다시 이감되었다. 죄수번호는 55호였다. 인천 축항공사(인 천항 제1부두)에 동원돼 노역에 시달리다가 1915년 인천 감옥에서 가출옥되었다. 이 렇듯 인천은 1919년 상해 망명 이전 김구 인생의 많은 부분을 감당했던 곳이다. 그가 인천은 의미심장한 역사적 장소 라며 광복 후 맨 처음 인천을 순시한 이유는 당연하고 충분한 것이다. 백범이 두 번이나 옥고를 치른 인천 감리서는 조선 정부가 1883년 내동 83 번지 마루턱에 설치하였다. 개항장 제 물포의 조계지 관리를 비롯해 외국인 입출항의 외교 업무와 무역 관세의 통상 업무를 처리하기 위해 감리( 監 理 ) 를 파견했다. 감리아문 청사는 한옥 단 백범이 노역한 인천 축항공사. 인천감리서 전경. 층 건물이었으며 우리나라에 서 처음으로 한옥에 유리창이 달린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문은 커다란 삼문( 三 門 )으로 열려 있었다. 1888년 제물포를 찾은 프랑스의 세계적 여행가 샤를르 바라는 그 때의 인상을 이렇 게 표현했다. 다음날 아침, 시끄러운 기계 소리에 잠을 깬 나는 부랴부랴 갑판으로 올라갔고, 제 물포만의 경탄할 만한 광경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것은 내가 평생 처음 보는 아 름다운 장관이었다. 조선의 이 커다란 마을은 길 하나와 몇 개의 좁은 골목들로 얼기 설기 짜여져 있으며 특히 그 곳을 관할하는 널찍한 관아는 끝이 약간 올라간 큰 지붕 을 이고 있었는데, 중국과는 눈에 띄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가 말한 관아는 바로 인천감리서다. 후에 감리서는 인천부(현 인천시청)의 역할에 개항장재판소와 학교 기능까지 함께 한다. 행정, 사법 기능에 교육기관이 들어선, 요즘으로 말하면 일종의 복합행정타운 이 었다. 눈에 띠는 것은 감리서에 감옥이 있었다는 점이다. 포승줄에 묶인 사람들의 모습 을 종종 볼 수 있었고 죄인이 볼기 맞는 비명소리가 담장을 넘어 인근 민가에 들렸다고 한다. 1895년 관립외국어학교가 인천감리서 안에서 개교했다. 개교 당시 학생수는 30 명으로 수업 연한은 4년이었다. 첫 졸업식에는 9명, 2회 때는 단 한 명만 졸업했다. 이후 공립상업학 교로 개편되고 1922년 현재의 송 림초교 터로 이전하게 되는데 후 에 이 학교가 바로 인천고가 된다. 14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내동 141

73 아무리 생각해도 그 언덕에 아파트를 세운 것 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이다. 1972년 2월에 법원 이 석바위로 이전하면서 이듬해 대한준설공사 가 들어섰다. 이 회사는 후에 한진그룹에 속하 고 1990년 한진종합건설이 된다. 한진은 1996년 경 이 건물을 헐고 인천신포스카이타워 라는 지 하 2층 지상 12층의 아파트를 짓는다. 거대한 성채와 같은 이 아파트는 응봉산에서 불어오는 산바람과 월미도를 휘돌아 올라오는 바닷바람을 막으며 갈라놓았다. 현재 옛 감리서 터에는 표지석이 세워져 있 다. 그 옆에는 풍만한 몸매의 세 명의 나체 연인상이 커다랗게 세워져 있다. 아파트 상 가에 입주한 불가마 사우나에서 세운 듯하다. 유구한 역사를 지닌 터에 볼썽사나운 모 습이다. 끌어내 볼기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다. 아파트 바로 옆에 자유공원과 신포동을 이어주는 언덕길이 나있다. 적당히 경사진 산자락에는 이국풍의 예배당과 세월을 품은 주택들이 바다를 굽어보고 있다. 감히 이 곳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예쁜 도심의 언덕길이라고 얘기한다면 인천애( 愛 ) 가 너무 지나친 것이라고 핀잔 들을까. 그림엽서에 담아도 모자람이 없다. 이 길을 경계로 왼 쪽은 외국인 조차지, 오른쪽은 조선인 부락이었다. 이 길은 성공회 내동교회로 이어진다. 1891년 한국 최초로 인성여고 부근에 세워진 성공회 내동교회는 1956년 현재의 위치인 성누가병원 부지에 교회를 다시 지었다. 내 동교회는 6 25 전쟁에 참전해 전사한 영국 전몰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그 유가족들 이 모금해 건축한, 일종의 전쟁 기념 성당이다. 50년대 말까지 교회 안뜰에는 대공 기 관포가 있었다고 한다. 내동교회를 얘기하면서 의사 랜디스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조선식 온돌이 있는 성누가병원을 열고 뛰어난 한문 실력으로 낙선시( 樂 善 施 선행을 함으로써 기쁨을 내동교회 오르는 길. 14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내동 143

74 내동교회 마당에 있는 고요한 주교(좌)와 랜디스 박사(우)의 흉상. 준다) 라는 병원 이름을 직접 작명하기도 했다.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던 랜디스는 장티푸스에 걸려 32세 나이에 요절했다. 그는 한복 두루마기에 쌓여 북성동 외국인묘 지에 안장되었다. 교회 뜰을 거닐다 보면 갖가지 표지석과 기념비 그리고 흉상들을 만 날 수 있다. 이들 안내문을 하나하나 읽다보면 구한말 역사의 한 페이지가 파노라마처 럼 펼쳐진다. 내동교회 언덕길을 내려오면 붉은 서양식 주택이 하나 나온다. 동네 사람들이 흔히 내동 벽돌집 으로 부르는 유항렬 저택이다. 유항렬은 한국 최초의 도선사( 導 船 士 )다. 그는 동경고등상선학교를 졸업하고 1937년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도선사 자격증을 땄 다. 조선우선주식의 선박 선장으로 인천 ~ 칭따오~상하이간을 운항한 바다 사나이 다. 광복 후 일본인 도선사들이 모두 떠났을 때 구호물자를 실은 선박들을 홀로 인천 항으로 안내했다. 그가 살던 이 주택은 223m2의 대지 위에 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1933년에 지어졌다. 건축한 지 80년 가까이 되었지만 아직도 튼실하게 보인다. 벽돌 아치와 굴뚝 등이 이 국적인 모습을 풍긴다. 이 저택은 복도를 통해 각 실로 연결되도록 배치되어 있으며 다다미를 깐 방과 목조 계단 등 일본식으로 지어졌다. 특히 눈에 띠는 것은 테라스. 이 테라스는 남쪽으로 나지 않고 서쪽으로 향해 있다. 그 서쪽에는 팔미도가 있다. 그는 이곳에 서서 망원경으로 팔미도 앞으로 들어오는 배들을 바라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리 각도를 잡아도 팔미도가 보이질 않는다. 그만큼 바다가 멀어졌다. 14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내동 145

75 얼마 전 내리교회 본당 바로 옆 비탈진 언덕에 붉은 벽돌로 지은 예배당 제물포웨슬 리관이 복원되었다. 오랫동안 내리언덕의 풍광에 한몫했던 옛 내리교회 예배당이다. 각종 역사 관련 책자에서 내리교회를 얘기할 때마다 등장했던 사진 덕분에 눈에 익숙 하다. 이전의 교회를 허물고 선교사의 도움 없이 1950년대 초 순수하게 내리교인의 헌 금으로 봉헌한 성전이었다. 그동안 설계도면이 없어 복원에 애를 먹었는데 미국 뉴저 지연합감리교에 소장돼 있는 도면을 발견해 다시 짓게 되었다. 안이 궁금해 초인종을 눌렀다. 답이 없다. 바로 옆의 구멍가게 주인에게 물었다. 저 집에 사람이 사나요?, 오늘은 없을 거예요. 주말에 가끔 서울 사람들이 와요. 누가 오는 건가요., 그 후손들이 오는 것 같아요. 건축은 한번 세워지면 사람의 수명보다 긴 세월을 버티며 동네를 지킨다. 이제 그 누구도 테라스에 서서 망원경으로 팔미도를 바라보지 않지만 그 집은 언덕에 기댄 채 바다를 여전히 바라보고 있다. 인천항 갑문 친수 공간 한켠에는 한국도선사협회가 그 를 기리며 세운 기념비가 있다. 현재 한국 최초 교회는 1887년 9월 27일 언더우드 목사가 세운 정동 장로교회(현 새 문안교회)로 알려져 있다. 1922년 발간한 인천내리교회역사 에는 내리교회가 정동장 로교회보다 2년 여 앞 선 1885년 처음 예배를 드렸다고 기록돼 있다.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첫발을 내디딘 것은 1885년 4월 5일 부활절 오후였다. 조선의 불안한 정국으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가 6월 20일 재입국했다. 안골(지금의 내동)에 숙소를 정하고, 상 경 시기를 관망하면서 목회를 시작했다.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교회의 시작이 라고 볼 수 있다. 7월 7일 마침 일본 나가사키에서 배로 부친 풍금이 도착하자, 아펜젤 러는 1시간여 동안 연주를 했다. 이것은 우리나라의 하늘에 울려 퍼진 최초의 감리교 찬송이었다. 내리교회는 우리나라 이민사의 첫 장을 연 교회다. 그 현장이 교회 아래쪽에 있다. 돈 비어천가 음식점 옆 골목으로 들어오면 주차장이 나오는데 그 부근에 동서개발회사 라 는 간판을 단 하와이 이민사업 대행사가 있었다. 회사 대표는 미국인 데쉴러였다. 그는 전국의 큰 도시와 항구에 이민 모집 방( 榜 )을 붙였다. 옛 내리교회 예배당. 14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내동 147

76 기후는 온화하여 심한 더위가 없음으로 각인( 各 人 )의 기질에 합당하며 월급은 미 국 돈으로 15원, 일하는 시간은 매일 10시간 동안이요, 일요일은 휴식함. 농부의 유숙 하는 집과 나무와 식수와 병을 치료하는 경비는 고용주가 지급하고, 농부에게는 받지 아니함. 그러나 희망자는 거의 없었다. 다급해진 사업 대행자 데쉴러는 내리교회의 존스( 趙 元 時 ) 목사에게 도움을 청하기에 이르렀다. 존스 목사는 곧바로 내리교회 신도와 인 천항 부두 노동자를 설득했다. 그렇게 해서 모인 수는 121명이었다. 이중 50여 명은 기독교 신자였고 나머지는 부두노동자, 농민, 그리고 군에서 퇴직한 하사관들이었다. 출신지별로 보면, 제물포(인천) 67명, 부평 10명, 강화 9명, 서울 7명, 경기도 3명 등이 었다. 오늘날의 인천 관내 지역에 사는 사람이 86명이었다. 이민선이 떠나는 날 제물포 부두에는 세찬 바닷바람이 불어 전송 나온 사람들의 가 슴을 얼어붙게 했다. 이민 사무를 맡아보던 조선 정부 기관 수민원( 綬 民 院 ) 총재 민영 환도 경인철도를 타고 인천으로 내려와 그들을 전송했다. 희망을 안고 떠나는 이민이 었지만 첫 이민선이 떠난 제물포항은 슬픔 그 자체였다. 그때 항구에는 3개의 바다가 생겼다고 한다. 땅에서 환송하는 사람들의 눈물바다, 또 하나는 배 위 사람들의 울음 바다, 그리고 제물포항의 통곡바다였다. 그들은 이틀간의 항해 끝에 일본 나가사키항에 도착했다. 거기서 1차 신체검사를 받은 후 104명(통역관 2명 포함)만이 갤릭호를 타고 요코하마를 거쳐 3주 만인 1903년 1월 13일 새벽, 하와이 호놀룰루항 외곽 샌드아일랜드에 닿았다. 상륙하기 전 또 한 차 례 신체검사가 있었다. 호놀룰루 보건위생관이 나와서 정밀검사를 한 끝에 4명의 안 질 환자를 골라냈다. 그들은 결국 상륙 허가를 받지 못한 채 왔던 길을 거슬러 귀국했 다. 동서개발회사에서 처음 접수할 때부터 눈에 붉은 기운만 돌아도 불합격시킬 만큼 신체검사는 엄격했다. 끝내 24명이 중도에서 탈락하고 97명만이 호놀룰루에 발을 내 디뎠다. 이처럼 신체검사가 까다로웠던 것은 바로 그해 조선에서는 콜레라와 장티푸 스가 창궐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이민사의 첫 장이다. 동서개발회사는 1903년부터 약 7,500여 명의 조선인을 하와이로 이주시켰다. 이 회사는 폐업하고 광복 후 여러 세대가 들어와 사는 집으로 사용되다가 다시 그 자리에 인천예식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동서개발회사 윗 길은 동인천과 신포동을 잇는 지름길이었다. 이 길을 통하면 용동마루턱에 있던 미락 제과 앞으로 나오면서 큰길로 연결되었다. 이 길을 알고 있는 인천 토박이들은 동인천 첫 이민선 갤릭호. 14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내동 149

77 에서 신포동으로 갈 때 이 길을 이용했다. 이 골목에는 80년대 중반까지 토담벽을 한 초가집이 있을 만큼 변화가 더딘 동네였다. 내동에서 중앙동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크라운볼링장이 나온다. 1968년 원래 미군 댄스홀이었던 곳으로 우리나라에서 서너 번째로 문을 연 원조급 볼링장이다. 한때 이 곳에서 볼 좀 굴려야 인천의 멋쟁이 소리를 들었다. 학생시절 그곳이 궁금해 쪽문으 로 훔쳐보았던 적이 있다. 자동화되기 전에 핀을 일일이 손으로 세웠던 핀보이들의 험 상궂은 시선에 뒷걸음쳤던 기억이 있다. 몇 년 전에 쪽문은 정문으로 정문은 쪽문으로 바꾸며 레인의 방향도 바뀌었다고 한다. 하지만 볼 던지는 방향이 정반대로 바뀌었을 뿐 40년 넘게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오래된 동네 풍경의 한 소재( 素 材 ) 역할 을 하는 크라운볼링장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지어진 붉은 벽돌조의 건물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시간이 공간을, 공간이 시간을 연결하며 창작 스튜디오, 공방, 자료관, 교육관, 전시 장, 공연장 등 총 13개 동의 규모로 조성되었다. 오래된 것과 새것의 시간차를 오히려 즐기며 일본식 적산가옥과 서양식 건물의 부조화를 일부러 티내며 예술공간으로 재 탄생했다. 특히 아트플랫폼 자료관으로 쓰임새가 바뀌게 된 인천우선회사(시 등록문화재 248 호)는 건물이 지닌 시간성의 발견을 제대로 보여 주고 있다. 리모델링 작업 중 이 건물 이 국내에 현존하는 근대건축물 가운데 사무소 건축물로 가장 오래된 것으로 판명되 었다. 이전까지 등기부 등본상으로는 건축 시기를 확인할 수 없었는데 아트플랫폼 보 내동과 인접한 중앙동은 개항기에 신문물이 유입된 동네다. 이런 역사적 배경은 이 동네에 이국적인 풍경의 조각들을 곳곳에 남겼다. 빨간색 벽돌창고와 적산가옥이 줄 지어 있는 등 현재의 주거와 상업 등 일상의 풍경이 혼재되어 있다. 지난 2009년, 100년 세월을 담은 창고와 사무실 등이 예술 창작 공간으로 트랜스폼 되었다. 대한통운 창고 등 인천항 하역 물품을 보관하던 옛 창고를 비롯해 1930~40년 대에 건설된 삼우인쇄소, 피카소 작업실, 영광수퍼, 대진상사, 양문교회 건물 등을 리 모델링해 하나의 회랑으로 연결했다. 허물지 않고 재활용한 네 채의 벽돌 건물과 새로 15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151

78 수공사 도중 건물 내 트러스의 왕대공에 설치되어 있던 상량판이 발견되었다. 상량판 에 기록된 내용에 의하면 건축 연대가 1888년 9월에서 12월 사이로 추정된다. 아트플랫폼은 인천 예술 문화의 자양분이 이미 충분히 스며있는 곳이다. 윗길에는 한국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대불호텔(후에 중화루 자리), 그 건너편에 있던 이태호텔, 청요리쯤 먹어봤던 사람들이 꼭 거론하는 송죽루 그 뒤로는 청관 거리(차이나타운)와 조선제일은행 건물을 비롯한 근대건축물 거리가 펼쳐진다. 아트플랫폼 인근, 80년의 시간을 보존한 건물 하나가 최근 살짝 성형 을 했다. 관동 1가의 카페 팟알(pot_R) 은 1933년에 지어진 근대 일본의 점포 겸용 주택 마치야( 町 家 ) 양식의 건물이다. 좁은 통로를 따라 건물 뒤쪽으로 돌아가면 중정( 中 庭 )이 있고 정원 옆에는 작은 살림집이 들어서 있다. 일제강점기 이곳은 일본인이 운영하는 하역 15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내동 153

79 팟알 로 변하기 전의 일본식 주택. 회사였다. 1층에는 사무실이 있고, 2 3층의 다다미방에선 100여 명의 조선인 노동자 들이 숙식을 하며 제물포항으로 들어오는 배를 기다렸다. 팟알 이 들어서기 전까지 살던 전 주인은 이 적산가옥에서 태어나 평생을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하역회사에서 작업반장으로 일했고 광복 후 일본으로 귀국하는 사장 에게 이 집을 물려 받았다. 77년간 주민등록상 주소지가 바뀐 적 없는 고집스런 주인 은 이 집을 거의 건드리지 않고 2대에 걸쳐 살아왔다. 3층의 기울어진 벽에는 1920년 대 요미우리신문, 1900년대 일본 벽지, 포스터 등이 붙어있고 일본어 낙서가 가득했 다. 이중 삼중으로 덧바른 벽지가 보물 창고였다. 이 건물은 한 때 창대건강원으로 운 영되다가 이후 주택으로 사용되었다. 현재 1층은 카페로 운영되고 2, 3층은 전형적인 일본 다다미방으로 꾸며져 소모임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발걸음을 신포동 쪽으로 향한다. 한때 인천의 명동 으로 불렸던 이 동네에 화선장 이란 고급 음식점이 있었다. 이 음식점은 연합군 포로의 탈출과 얽힌 드라마틱한 이 야기 하나를 품고 있다. 2차 대전에 참전했던 체스터 존슨 소령은 1942년 여름 필리핀 전투에 참전했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었다. 근 3년 동안 남양군도의 여러 섬으로 끌 려 다니다가 현재의 인천신광초교 터에 있던 외국인포로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제 2부두 축조 공사장과 지하도 공사장으로 끌려 다니며 많은 혹사를 당했다. 일본된 장과 무우말랭이를 밥에 넣어 쑨 죽을 먹으며 힘겹게 지냈다. 여름 어느날 강제노동에 끌려 나가던 그는 동료 세 사람과 함께 탈출했다. 골목골목으로 숨이 차도록 2km나 달려 도망쳤다. 그런데 지리를 전혀 몰랐던 그들이 한나절 빙빙 돌다가 간 곳은 시내 한복판, 지금의 신포동이었다. 하필이면 일본 사람이 경영하는 음식점 성금( 成 金 ) 앞이었다. 피곤함과 굶주림에 앞길을 헤아리지 못하고 무 조건 이 음식점으로 뛰어 들어가 손짓 발짓으로 헝그리(배고프다) 를 연발했다. 마침 그를 본 사람은 조선인 종업원 김진원이었다. 그는 후에 적산 상점 성금을 인수해 화선 장의 주인이 되는 사람이다. 김 씨는 재빨리 그들을 구석방에 숨기고 먹을 것을 주었다. 그들은 밥을 얻어먹은 후 목욕탕으로 들어가 샤워를 하다가 다시 붙잡혔다. 이후 광복이 되고 미7사단의 상륙으로 존슨 소령은 인천포로수용소에서 구출되었 다. 20여 년이 흐른 후 그는 주한 미군 사단장(소장)으로 부임했다. 존슨 7사단장은 김 진원 씨를 찾았고 둘은 감격적으 로 상봉했다. 화선장은 이후 승 승장구하는 고급 음식점으로 발 전했다. 옛 화선장에서 조금 더 내려가 면 신포공영주차장이 나온다. 이 곳에 오면 오페라의 음률이 귓가 옛 화선장 건물. 15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내동 155

80 벽화 속 사람과 벽화 밖 사람의 조우. 에 맴돈다. 나비 부인(Madam Butterfly) 은 푸치니가 작곡한 2막 3장의 오페라이다. 일 본의 기녀 나비 부인이 미국의 해군 장교 핑커턴에게 버림받아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 지의 비극적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오페라 나비 부인 의 실제 주인공의 딸이 인천 에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능대학 손장원 교수는 나비 부인 의 모델이 된 야마무라 쓰루의 딸 글로버 하나가 인천으로 시집와 살다가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고 밝혔다. 그녀의 아버지 토마스 글로 버는 1861년 24세 나이에 일본으로 건너가 글로버상회를 설립해 선박과 무기를 판매 한 무역상이었다. 그가 일본에 팔았던 선박 중에는 일본이 조선을 침략할 때 타고 온 운요오호 도 있었다. 토마스 글로버는 일본에서 사업하며 이혼녀 야마무라 쓰루와 결혼한다. 그녀는 나 비가 수놓아져 있는 기모노를 입고 있었다고 해 나비 부인 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야 마무라는 오페라 속에 등장하는 비극적인 삶을 산 나비 부인과 달리 실제로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 둘 사이에 1남 1녀가 태어났는데, 그 딸이 글로버 하나다. 글로버 하나는 나가사키에서 영국인 월터 베넷와 결혼식을 올린다. 남편 베넷은 인천으로 건너와 베 넷상사(광창양행)를 설립해 사업을 벌였다. 그 자리가 바로 현재 신포공영주차장 터 다. 이곳 사택에서 글로버 하나와 신접살림을 차린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른 기록에 는 1915년부터 1935년까지 인천 앞바다가 한눈에 보이는 영국 인천영사관(현 파라다 이스 호텔 터)에서도 생활했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1938년까지 살다가 70세의 나이 로 사망해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묻혀있다. 15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내동 157

81 그때, 이곳 내동 Map & Photos ➊ 대불호텔 개신교 선교사 아펜젤러 목사의 선교 보고서에 의 하면 대불호텔 은 1885년 4월 이전에 영업 중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잡 지 하퍼즈 위클리 등도 이 를 입증하고 있다. 원 대불 호텔 로 알려진 3층 벽돌로 건물은 1888년에 신축한 것으로 경인선이 개통되자 영업이 부진해 중국인에게 매 도돼 훗날 중국 음식점 중화루 가 되었다. 1978년 철거돼 현재 빈터로 남아 있다. ➋ 한진그룹 창업터 한진그룹 창업자 조중훈은 1945년 중구 해안동에 있는 창고를 개조해 트럭 한 대를 갖고 한진상사를 설립했다. 상호였 던 한진( 韓 進 ) 은 한민족의 전진 을 줄인 말로 한국의 진보를 꿈꾼다는 의지를 표 현한 것이다. 한진상사는 1950년에 종 업원 40여 명에 트럭 30대를 보유하는 ➍ 군회조점 아트플랫폼의 건물로 사용된 군회조점 은 코오리킨 자부로라는 일본인이 세운 1900년대 초 사무 건축이다. 본격적인 리모델링 이 시작되기 전까지 언제 지어진 건물인지 알 수 없었으나 건물 지붕 속에서 明 治 三 十 五 年 十 一 月 十 一 日 郡 金 三 郞 이라는 상량 문이 발견돼 1902년에 세워졌다는 것이 밝혀졌다. 현재 리모델 링 된 모습은 원래 모습이기보다 1960년대 주출입구 부분을 증 축해 완전히 변형된 모습을 그대로 살린 것이다. ➎ 타운센드정미소 1892년 설립한 타운센드정미소는 우리나라 최초로 스팀 동력 을 이용한 근대식 시설을 갖춘 정미소다. 정미소는 전 인천경찰 서 아래 터에, 사무실은 현 크라운볼링장 자리에 있었다. 이 정미 소에서 생산한 쌀은 그 품질이 좋아 일본과 연해주의 특등 수출 품이 되기도 했다. 당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정미소를 담손이 방앗간 이라고 불렀다. 한국인 지배인이 전 부통령 장면 박사의 아버지 장기빈 씨였다. 한편, 우리나라 사람이 운영한 정미소는 1924년 유군성이 신흥동에 세운 유군성정미소가 최초로 엥겔식 정미기 3대, 중앙식 2대를 갖추었다. 남녀 70명의 직공이 하루 현미 250석, 정미 100석을 처리했다. 흥택이 근해 어 업자들의 어획물 을 사들여 상설 어 시장을 개설했다. 어시장에는 인천 앞바다에서 잡히 는 숭어, 민어, 농 어 등을 파는 생선 전이 들어서 있었 다. 어시장보다 뒤 늦게 등장한 것이 푸성귀 농산물 시 장이었다. 바로 지 금의 신포시장이 다. 이는 한국인이 나 일본인이 아닌 청국인이 개설했다. 생선류를 파는 어시장인 제1시장은 1929년 12월에, 청과류를 다루는 농산물 제2시장은 1933년 7월에 각각 신포동에 건물을 신축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경영에 들어갔는데 제1시장은 벽돌 단층 1동에 28구획, 제2시장 은 목조 단층 1동 31구획 규모였다. 회사로 성장했다. 그러나 6 25 전쟁이 일어나 그동안 이룩한 것을 모두 버리고 ➏ 일선해운 ➑ 신포우리만두 피란길에 올랐다. 1953년 다시 인천에 1925년 창립한 돌아와 회사 재건에 힘을 쏟았고 이후 일선해운( 日 鮮 海 육해공 분야에 독보적인 회사가 되었다. 運 )은 군산, 목포, 한진이 처음 창업한 곳은 인천일보 윤전실 옆 건물과 길 건너 옛 인일철공소 자리 진남포에 출장소 로 추정된다. 를 두고 해륙 운 송 중개 대리 ➊ 중구청 ➓ ➒ ➏ 아트플랫폼 ➍ 월미도 홍예문 ➋ ➎ 성공회 내동길 인천감리서 터 동인천 내리 교회 경동사거리 신포시장 ➐ ➑ ➌ 외환은행 답동사거리 답동 성당 신흥동 ➌ 금파 현재의 신포동과 신생동의 경계이자 5거리에 위치한 모밀 전문점 청실홍실 터 에 있었던 카페 건물이다. 1930년대 모더니즘의 유행 과 함께 서양에서 들어 온 카페에서는 간단한 서양요 리와 커피, 맥주와 양주 등 을 판매했고 요정에 비해 상 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으로 여종업원과 술을 마실 수 있었던 탓에 성황을 이뤘다. 업 외 금광 채굴 업 등을 경영했다. 사옥은 장식주의 적 요소와 모더니즘적 요소가 결합된 건축물로 초기에는 일본식 3층이었으나 1932년 4층으로 신축되었다. 1층은 거친돌로 마감 되어 신축 당시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주 출입구의 아치 장식이 인상적이다. 인천에 유일하게 현존하는 4층 규모의 근대 건축물 로 현재 (주)선광의 소유이다. ➐ 신포시장 신포시장은 인천 상설시장의 역사 한 페이지를 꿰차고 있다. 옛 1902년 옛 신포마켓 자리에 인천 수산업계의 대부로 알려진 정 신포우리만두는 1971년 송현시장 3평짜리 분식집에서 출발했 다. 테이블 2개를 놓고 호떡,순대와 함께 연탄 화덕에 솥을 걸고 만두를 쪄 팔았다. 1977년 신포시장으로 이전해 작은 만두전문 점을 열었다. 무우말랭이와 돼지고기가 섞인 만두소가 큰 인기 를 끌었다. 주 메뉴는 만두와 함께 쫄면이었다. 쫄면 이라는 이름 은 1970년대 초 인현동 맛나당 분식점 주방장이 면이 쫄깃쫄깃 하다 해서 불렀다는 게 정설이다. 신포우리만두는 초기에 가족 중심으로 체인점으로 운영하다가 후에 프랜차이즈로 발전해 미 국에 진출하기도 했다. 15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내동 159

82 ➒ 세창양행 사옥 1884년 독일 본사에서 인천으로 파견된 칼 볼터는 현재 중앙프라자(마사회) 상가 자리에 세창양행 사옥을 세웠다. 세창양행은 해운사업, 근대 기기 도입, 광산 채굴, 무기 판매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 범위를 넓혔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근대적 광고를 신문에 실었다. 사업 영역을 넓히기 위해 조선 정부에 돈을 빌려 주기도 하 고 이를 빌미로 외교적 압력을 가하기도 했다. 세창양행은 1914년 일본의 대독 선 전포고 이후, 최소 인력만을 남긴 채 조선에서 철수했다. 사옥은 6 25 전쟁 때 소 실됐다. 세창양행이 사용했던 창고들은 아직 남아있다. ➓ 아침바다 이 건물은 1942년에 신축되 었다. 일부 1932년경 신축되 었다는 설도 있다. 아와야 철 물점을 운영하던 가와바타가 세운 창고로 외벽이 붉은 벽 돌로 돼 있다. 1954년 민간에 매각돼 한동안 설계사무소로 사용되다가 최근까지 '아침바 다'라는 레스토랑이 운영되었 다가 현재는 장기간 휴업 중 에 있다. 마름모꼴 창문 좌우에 철제 덧문을 부착한 것이 이채롭다. 표관 1909년 건물을 신축하여 개업한 상설영화관이다. 주로 일본 영화를 중심으로 상 영하던 객석 수 797개의 극장으로 현재의 외환은행 터다. 광복 후 미군이 Sea House Theater'로 사용했으며, 미군 철수 후 시립문화관으로 개칭하여 인천시가 직 영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 소실되었다. 이 자리에 키네마극장이 세워졌다가 현재는 외환은행이 들어섰다. 일본 제1은행 인천에 개설된 일본 제1은행은 부산지점 인천출장소였으나 1898년 인천지점으로 승격된다. 서울에 인천지점 서울출장소가 개설된다. 이 은행에서는 각국 상인들에 대한 대출과 환전 등이 이뤄졌으며 인천항 을 통해 수입되는 물품의 관세를 납부하는 곳이기도 했다. 여기서 발행한 은행권은 상인들 사이에서 화폐처럼 통용됐다. 한편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된 3개월 뒤 인 1882년 8월 조선은 일본과 제물포조약을 맺는다. 그 자리는 일본 제1은행 자 리로 일본은 이곳에 천막을 치고 군영을 설치했다. 현재는 개항박물관으로 사용 하고 있다. 일본 제18은행 일본 제18은행은 일본 나가 사키에서 활동하던 상인들 이 중심이 되어 1877년 9 월에 제18국립은행으로 세 운 은행이다. 인천지점은 1890년 10월에 설치된 것 으로 일본 제18은행이 해외 에 세운 최초의 지점이었다. 이후 약 47년간 영업하다가 1936년 에 인천, 서울, 부산지점 등 9개의 지점을 조선식산은행으로 양 도하였다. 1954년 10월 1일 상공은행과 신탁은행의 합병으로 발족한 한국흥업은행 지점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카페, 중고 가 구 도매상으로 사용되다가 2006년 인천개항장 근대건축전시관 으로 개관했다. 박물관 야외전시장은 원래 이 은행의 사택이 있 었던 곳이다. 일본 제58은행 58은행의 인천지점은 인천 전환국에서 주조한 신화폐 와 구화폐의 교환을 목적으 로 1892년 개설됐다. 일본 오사카에 본점을 둔 이 은 행은 양국에서 송금한 상품 대금 결제와 무역금융에도 주력했다. 광복 후에는 조흥은행 인천지점, 대한적십자 경기도지 사 사옥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인천시 요식업조합이 사용하고 있다. 지붕이 이중으로 경사를 이룬 프랑스 르네상스 양식의 건 물로 2층의 발코니가 인상적이다. 중화루 1907년 세워진 이 건물은 1919년부터 산업은행의 전 신인 식산은행이 사용했다. 1911년 당시 이 일대에는 요리집이 36개소, 기생과 기예를 둔 집이 10여 개가 있을 만큼 유흥가이자 금 융 중심가였다. 식산은행은 1925년 해안동에 건물을 신축하고 이전했고 그 이후 합자회사 아끼다상회, 일화루, 군영각 등의 음 식점, 카페 등으로 사용되었다 전쟁 후 해군 헌병대가 사 용했다. 해군 헌병대가 철수하고 나서 한동안 빈 건물로 있다가 1985년경 선린동의 공화춘 주인 아들이 이곳에 중화루 라는 중 식당을 운영하기 시작했다. 인천정미소 인천상공회의소 90년사 에 따르면 인천정미소는 1889년 3월에 설립되었 다. 당시의 풍경은 기선 이 제물포로 들어오면 가 장 먼저 눈길이 닿는 것 이 나무 한 그루 없는 인 천항의 산언덕 아니면 맹렬하게 검은 연기를 공중에 뿜어내는 인천정미소의 굴뚝이었다고 한다. 인천정미소는 여러 대의 증기 기관을 갖추고 밤낮 없이 작업을 하였으며, 개업 이후 정미한 쌀 이 수만 석을 넘었다. 현재 현존하는 것은 굴뚝과 부속 건물이다. 현재 부속 건물은 개인집으로 사용되고 있다. 상우재( 尙 友 齋 ) 대지 140평의 이 집은 1930년대 일본인 도립병원장이 지어서 살았고 6 25전쟁 직후 미군 고위 장교가 한동안 살았다. 문고 리, 현관문, 창문 모양, 복도 등 집 구조는 기본적으로 일본식이 지만 미국인, 한국인 등 거주하는 사람이 달라지면서 거실에 벽 난로를 설치했고, 방문은 일본식 미닫이에서 서양식으로 바뀌었 으며 방바닥은 한국식 온돌을 깔았다. 한미일 퓨전식 주택이다. 리모델링 중 천장에서 미군 장교가 넣어둔 듯한 임진강 유역의 군사지도 여러 장을 발견하기도 했다. 우리 아픈 역사와 궤를 같 이하는 이 집은 2012년에 게스트하우스로 탈바꿈했다. 16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내동 161

83 인현동 싱그러운 웃음 풋풋한 젊음 가슴에 지우지 못하네 동인천역 건너편의 중구 인현동은 한때 인천 최고의 번화가였다. 제물포고 등 많은 학교가 밀집해 있었 고 경인철도 동인천역과 인천의 거의 모든 시내버스가 경유하던 교통의 중심지였다. 여기에 우리나라에 서 가장 긴 지하상가의 출입구였던 덕분에 항상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이제는 시간이 멈춰 서 있는 원도 심으로 변했지만 곳곳에 교복 세대들의 아련한 추억이 서려 있는 동네다. 안타깝게도 인현동이 전국적 지명이 된 것은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건 때문이었다. 1999년 10월 30일, 시내 몇 고등학교에서 축제가 끝났다. 그 기분을 이어가기 위해 학생들은 동인천역 부근 호프집으로 몰려들었다. 오후 6시 55분경 발 디딜 틈 없이 꽉 찬 2층 안으로 매캐한 냄새가 스며들었다. 모두들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다. 잠시 후 입구 쪽으로 시뻘건 불길과 시커먼 연기가 세차게 들어왔다. 그제야 학생들은 당황 해서 급히 피신했다. 모두 입구 반대편 비상구 쪽으로 몰려갔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비상구가 비상( 非 常 )이었다. 이어 바로 비상( 悲 傷 )의 상황이 벌어졌다. 잠시 후 학생 들은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54명이 화마( 火 魔 )에 희생됐다. 인천 시내 거의 모든 고등학교 학생이 한두 명씩 포 함되었다. 1971년 서울 대연각호텔 165명, 1974년 청량리 대왕센터 88명 이후 건국 이 래 세번째로 많은 희생자를 낸 대형 화재였다. 공사 중이던 지하노래방에서 석유가 잘 타냐, 신나가 잘 타나 장난삼아 한 불장난의 결과였다. 아이들의 유골은 월미도와 팔미도 앞바다에 뿌려졌다. 그래서인가, 10월 인천 앞바다의 파도는 유난히 세차고 구슬프다. 인현동 163

84 아들아, 딸들아 너희는 어디 갔느냐 / 이제나 저제나 불현듯 문 앞에 들어설 듯 한 / 그 싱그러운 웃음 그 풋풋한 젊음 / 가슴에 지우지 못하고 삼백예순 날/너희 안부 물어볼 밖에 없는 못난 아비 못난 어미를 오오 용서해 다오. (후략) 화재 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인천학생교육회관 뒤뜰에는 그들을 추모하는 위령비가 있다. 아래 하단에는 당시 광성고 교사였던 시인 조우성 선생(현 인천일보 주필)이 지은 우리 모두 함께 듣는다 라는 제목의 추모시가 적혀있다. 인천학생교육회관은 2001년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한 축현초교가 있던 자리다. 학생들이 마음껏 즐길 장소가 없었기 때문에 이런 불행을 맞았다는 어른들의 자책과 자성으로 마련한 공간이다. 시월 마지막 날, 학생회관 뒤편을 찾았다. 2m 높이의 위 령비와 희생된 학생들의 이름이 또박또박 적힌 추모비가 나란히 놓여 있다. 위령비 주변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남녀 학생들 쪽으로 다가갔다. 낯선 어른의 출현에 모 두들 마뜩잖은 눈치다. 여기 회관 안에 동아리가 있어요. 일주일 한두 번 와서 놀다 가요. 이 회관 안에 놀 거 많아요 자유공원에서 동인천역으로 내려오는 길. 예전에 학원, 분식집, 탁구장 그리고 점( 占 )집이 많았다. 회관에는 만화방, 보드게임방, 보컬연습장 심지어 디스코장과 노래방도 있다. 화재 사건 후유증으로 이 지역은 한동안 인적이 끊기며 적막감마저 돌았다. 화재 발생 14 년, 화상( 火 傷 )은 어느 정도 치유되었고 기억 속에 멀어지면서 다시 청소년들의 재기 발랄한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인천에 백화점이 하나도 없던 시절, 인천의 대표적인 스쿨존 인현동에는 학생백화 점 이 있었다. 1층에는 문구점과 화방, 체육사와 레코드점 그리고 2층에는 DJ가 있는 분식집이 있던 대동학생백화점이다. 지금으로 이야기하면 숍 인 숍 의 형태였다. 여 전히 대동학생백화점 이란 간판을 내걸고 있지만 지금은 1층에 문구점과 화방만 운영 하고 있다. 여전히 70년대 여주인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5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이곳 은 일년 내내 학생들로 늘 붐볐지만 특히 3월 신학기를 앞둔 며칠 전부터 학용품과 체 육복을 새로 구입하기 위해 몰려든 학생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한창때는 줄을 서 서 기다려야만 입장할 수가 있었는데 그 줄은 백화점을 감쌀 정도로 꼬리가 길었다. 인현동 호프집 화재 희생자 추모비. 16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인현동 165

85 신학기가 되면 외국 배우의 사진이 새겨진 공책과 코팅한 책받침을 확보하기 위해 아침 일찍 주인보다 먼저 백화점에 와있는 학생들로 장사진을 쳤다. 전쟁을 치르듯 어렵게 물건을 차지한 학생들은 DJ박스가 있는 2층으로 올라갔다. 학용품을 사고 남 은 우수리 돈으로 분식을 사 먹으면서 서로 그날의 전리품을 내놓고 자랑했다. 인현동에는 1남3녀(남고 1개, 여고 3개)의 고교를 비롯해 초 중학교 10여 학교가 있었다. 반경 300m 이내에 이렇게 많은 학교가 있는 곳은 우리나라에서 전무후무했 다. 7,80년대 등하교 시간에 이곳은 마치 거대한 펭귄 떼가 이동하는 모습을 연상시킬 만큼 온통 교복 입은 학생들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학생들과 관련된 사업이 번창했다. 문구점, 체육사, 화방, 학원, 탁구장, 사진관, 분식집 등이 성업을 이뤘다. 용동마루턱 을 기준으로 신포동과 경동은 어른들의 공간이요, 인현동은 얄개들의 천국이었다. 삼천리국수강산 대한면국( 大 韓 麵 國 ) 의 막내 면발, 쫄면의 이름을 처음 얻은 고향 답게 명물당, 만복당, 맛나당 등 당 자 돌림의 분식집들이 한 집 걸러 하나씩 있었다. 이제는 학교도 많이 떠났고 학생수도 줄었지만 대동백화점 아래쪽으로는 아직도 몇 몇의 문구점, 체육사, 화방, 분식집이 남아있다. 이곳에 오면 누구나 학창시절 깔깔대 며 이 거리를 거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서울에 종로서적이 있었다면 인천엔 대한서림이 있다. 7,80년대 젊은이들의 모임은 책방 앞에서 먼저 만난 후 장소를 옮기는 아날로그식 만남이었다. 동인천역에 내리면 한 눈에 보이던 5층 건물 대한서림은 인천의 대표적인 만남의 장소이자 랜드마크였 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대한서림에서 일단 만나자고 약속했지만, 무슨 사정으로 끝내 나타나지 않는 상대를 기다리며 읽은 책이 짧게는 시집이요, 길게는 소설이었다. 대한서림이 문을 연 지 어언 60년. 우리나라 책방 역사에 쉽지 않은 세월이다. 이 책방은 1953년 처음 문을 열었다. 1978년 김순배(70) 회장은 장인이 운영했던 서점을 이어받았다. 현재의 5층 건물 전에는 그 옆 작은 2층 건물에 대한문구사와 대한일보 와 함께 있었다. 그는 서점의 전문화, 대형화를 예견하고 공학도 출신답게 업계 최초 16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인현동 167

86 대한서림 빌딩 옆, 낡은 지붕을 머리에 이고 있는 키 낮은 집들이 옛 인천여고까지 이어져있다. 서울 세운상가가 잠수함을 만들 수 있다고 뻥친다면 소형 헬리콥터 정도 는 조립한다고 맞받아 칠 수 있었던 인현동 전자상가다. 일제강점기 때 마쓰다 양조 장 건물이었던 빨간 벽돌건물을 중심으로 축현학교 담을 기댄 크고 작은 전파상과 조 명가게 그리고 전업사가 오밀조밀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 건물은 한때 디스코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는데 훤히 보이는 천장의 뼈대는 여전히 튼실해 보인다. 로 전산화 작업을 했으며 직원들에게 유니폼을 착용하게 했다. 결국 대한서림은 국내 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드는 대형서점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세월은 이겨 내지 못했다. 지난해 8월부터 1, 2층을 빵가게에 내주고 3, 4층 만 운영하고 있다. 책방이 책빵 이 된 것이다.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 책이나 빵이나 다 양식이라고 자위를 했지만 시민들은 안타까움과 미안한 맘을 가졌다. 반 백년 이상 이 서점은 맞은편 동인서관과 함께 세월을 보냈기 때문에 결코 외롭지 않 았다. 그런데 대한서림이 책빵 으로 변신하자 잠시 후 동인서관도 그 자리를 스포츠 점에 내주고 위쪽 학생회관 앞으로 옮겨갔다. 공간의 이동은 있지만 인천에 이런 서 점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저 고마울 뿐이다. 현재 대한서림이 있는 건물은 원래 별제과 건물이었다. 1, 2층 별제과점 3, 4층 별 다방 5층은 음악감상실이었다. 별제과는 결혼을 앞둔 양가 부모의 격식있는 상견례 자리였을 만큼 70년대 당시 인천 최고의 럭셔리 양과점이었다. 말 그대로 이곳을 드 나드는 사람들은 별 처럼 보이던 시절이었다. 별음악감상실은 음악을 통해 새로운 조 류를 받아들이던 젊은이들의 발길로 문턱이 닳았다. 가수 송창식도 무명 시절에 가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한때 문인들이 시낭송회를 개최하는 등 별제과 건물은 동인천 문화예술의 한 공간을 담당했다. 16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169

87 이곳은 이제 진공관 시대를 거쳐 IC, 그리고 IT 시대로 오면서 외관부터 많이 변했 다. 전축 틀던 시절 스피커, 턴테이블 바늘 등 각종 부품들과 도란스 등 전기제품을 사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다. 한때 한 평이 채 안 된 가게부터 2층짜리 번 듯한 건물 등 100여 개 가깝던 상점도 지금은 30여 개 남짓으로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아있는 가게들도 손님들의 발길을 끊겨 그저 셔터만 올려놓은 상태다. 우주전자, 대륙전자 같은 간판처럼 80년대 중반 대륙을 꿈꾸고 우주를 꿈꾸며 벤처정신으로 무 장하고 이곳을 제집 드나들듯했던 그 공학도와 기술자들은, 지금 자신의 꿈을 이뤘는 지 문득 궁금해진다. 반공궐기대회가 열리고 있는 70년대 동인천역 광장 모습. 땅 밑에도 인현동이 있다. 1972년 인천 최초의 지하상가가 뚫렸다. 동인천역에서 답동사거리까지 길게 늘어선 지하상가는 1972년 새동인천을 시작으로 1974년 동인 천, 1977년 중앙로, 1980년 인현, 1983년 신포까지 모두 5개의 지하상가가 조성됐다. 차량의 원활한 소통과 안전한 보행을 위해 개통되었지만 실제로는 민방공 대피용으 로 활용하려는 목적이 더 강했다. 대피 시설로 만들었기 때문에 초기에는 냉난방 시 설이 없었고 환기가 제대로 안되었으며 조명도 열악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Ssazio 의 주인 김갑숙(59) 씨는 이곳에서 36년 동안 신발을 팔아왔다. 스물셋 꽃다 운 나이에 양화점 점원으로 일을 시작한 그는 1년 후 바로 사장으로 신분 상승했다. 20여 년 전 한창때는 당시 공무원 한 달 봉급 40만 원을 하루에 다 벌만큼 장사가 잘됐어요. 그도 시대의 흐름을 피할 수 없어 휴대폰 판매로 업종을 바꾸었다가, 단골들을 외 면할 수 없어 최근 매장 한편에 신발가게를 자그맣게 다시 열었다. 그땐 굉장했어요. 지상과 지하가 인천 최대의 상권으로 서로 부딪치며 다닐 정도 로 사람이 많았지요. 인천에서 새 신발, 새 옷 하나 장만하려면 꼭 이곳에 들릴 정도 였으니까요. 지하상가에서 아들과 함께 금은방 도레미양행 을 운영하는 동인천의 터줏대감 옥 현철(51) 씨는 그때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사람의 물결이 넘실거리는 인천 최고 17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인현동 171

88 도심 속 오지, 이른바 똥골. 의 번화가, 바로 인천사람들의 기억 속에 머무르는 동인천의 모습이다. 도레미양행 의 모태는 그 옛날 극장광고에도 종종 등장했던 도레미소리사. 부친이 운영하던 소리 사는 전파사가 되었고 금은방으로 자리 잡을 때까지 도레미 라는 이름을 버리지 않았 다. 그 세월이 50여 년이다. 가게는 원래 중앙시장에 있다가 북광장역이 조성되면서 지하상가 안으로 옮겨왔다. 30여 곳에 이르던 금은방 가운데 지금은 10군데 정도가 살아남았다. 인현동에는 기찻길 옆 오두막이 있다. 보이질 않아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완전히 지워진 곳. 동인천청과물시장 건너편 빌딩 뒤의 쪽방촌이다. 다닥다닥 붙은 슬레이트 지붕을 얹은 140여 개의 집들이 철로를 따라 동인천역에서 배다리 가까이 길게 늘어 서 있다. 동네 한가운데 커다란 우물의 흔적이 있고 그 옆에 공동변소와 공동목욕탕 이 있다. 집에는 그만한 공간을 낼 틈이 없기 때문에 골목에 공동시설을 만든 것이다. 기차가 지나가자 집들이 심하게 떨린다. 대낮인데도 앞을 막은 건물과 방음벽으로 인 해 골목으로 빛이 제대로 들지 않는다. 기차가 일으킨 바람소리 외엔 소리도 없다. 역 방향 쪽 골목은 똥골 이라 불린 사창가였다. 7,80년대에는 낮이고 밤이고 역 광 장에 포주들이 나와 있었다. 포주에 이끌린 남자들이 붉은 등이 켜진 골목으로 쉴 새 없이 들어갔다. 이 사창가는 윗동네 그 옛날 용동 기생집에서 일하던 여자들이 흘러 들어 오면서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지금은 집창촌 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기에 는 세가 많이 약해졌지만 아직도 몇 집은 밤이 되면 홍등을 걸어 놓는다. 동인천역 옆의 쪽방촌. 17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인현동 173

89 17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인현동 175

90 인현동에서 전국구의 명성을 얻고 있는 곳은 삼치거리다. 학생교육문화회관 뒷길 은 매일 저녁 고소한 삼치구이 냄새가 진동한다. 이 골목길이 삼치거리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66년 인하의 집 이 현재의 자리에 약간 떨어진 곳에서 삼치와 막걸리 를 팔면서부터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에 후까미 양조장, 광복 후에 소성주 라는 인 천막걸리의 토대가 된 대화주조라는 양조장이 있었다. 이곳은 응봉산(자유공원)과 연결되는 수맥에 지하수를 뚫어 약수로 술을 빚어 술 맛이 좋았다고 한다. 때문에 술은 자연스럽게 막걸리가 나왔고 안주로는 인근 부두에서 싼값에 팔리는 삼치를 튀겨 내놓았다. 이후 한두 집씩 삼치를 곁들인 막걸리집이 들어서더니 지금은 15개 업소가 성업 중이다. 업소마다 기름에 튀기거나 그릴에 굽는 등 제각각 다른 독 특한 맛으로 손님들을 끌고 있는데 어느 집이든 어른 손바닥보다 큰 삼치를 두어 토 막씩 한 접시에 푸짐하게 담고 있다. 이곳은 주머니 사정이 가벼운 대학생들과 직장인들이 삼치와 막걸리로 저녁을 대 신하면서 개똥철학을 설파하고 시국을 논했던 곳이다. 세월이 지나 이제 중년이 된 그들은 이 골목을 다시 찾아 그 시절의 향수에 젖곤 한다. 막걸리 열풍 덕분에 다시 조명받기 시작했지만 서너 명이 마음껏 먹어도 2, 3만 원이면 충분할 정도로 세월이 흘러도 서민적 분위기는 여전하다. 장소의 연조를 말해 주듯 인하의 집 주차장에는 100년 된 라일락 나무가 아직도 왕성하게 자라고 있다. 인심과 맛은 바뀌지 않았어도 거리와 건물의 외관은 많이 바뀌었다. 2001년 이 거리는 동인 천 삼치거리 로 지정되었고 얼마 전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간판과 외벽을 치장했다. 화가 등의 손길을 거치면서 모든 가게의 간판 이 작품 으로 거듭났다. 삼치 맛 못지않게 간판 구경하는 맛도 괜찮다. 17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인현동 177

91 그때, 이곳 인현동 Map & Photos ➊ 뉴(코아)아파트 ➎ 동인천역 ➐ 동인천지하도 얼마 전부터 뉴코아 라는 이름에서 코아 자가 빠진 이름의 주상복합건물이다. 옛 인천여고 바로 앞에 있는 이 건물에는 입주 초창기에 실제로 당시 잘나가던 뉴코 아쇼핑센터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양조장이었고 광복 후에는 대형 얼음공장이 있었다. ➋ 삼화고속 정류소 삼화고속은 1970년 2월 23일 인천~ 서울역간 경인고속도로를 운행한다. 고 속버스를 운행하면서 동인천(우리은행 길 건너편)에 작은 정류소 겸 차고지를 마련했다. 비슷한 시기에 한진고속도 동인천역 앞 인현통닭 부근에서 영업 을 시작했다. 삼화고속 정류소는 시외 직행버스(동인천~서울역)의 운행 경로 변경에 따라 2005년 12월 폐쇄되었다. 일 제강점기 1935년부터 그 자리에 택시회사가 있었다. 1967년 동인천역이 번잡해지자 교통과 보행을 원활하게 하 기 위해 지하도를 팠다. 1972년 이 지하도와 새동인천지하상가 가 연결된 이후 1974년 동인천, 1977년 중앙로, 1980년 인현, 1983년 신포지하상가까지 모두 5개의 지하상가가 이어졌다. 비 한 방울 맞지 않고도 동인천역에서 답동사거리까지 갈 수 있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지하상가로 조성되었다. ➌ 축현초등학교 ➑ 삼성헬스장 1899년 경인철도가 개통할 때는 청과물 시장에 축현역( 杻 峴 驛 ) 이 생겼다. 1926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상인천역( 上 仁 川 驛 ) 으로 역명이 바뀌었다. 다시 1955년 동인천역( 東 仁 川 驛 )으로 개 명했고 1957년에 동인천역사를 새로 준공한 후 89년 오랫동안 화평동 동인천 역 ➎ (구)지하도 ➑ 현재의 신흥초교였던 인천공립고등소학교의 취학아동이 증가함에 따라 별도의 학 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인현동에 교사를 신축하고 인천공립심상소학교 라는 이름으로 1919년 4월 1일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1935년 이름을 인천용강심 상소학교로 바꾸었는데 일본인 자녀를 위한 학교였다. 광복 후 축현공립국민학교 로 다시 이름을 바꾸었고 6 25 전쟁 중 신흥초교에서 재개교했다. 2001년 3월에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했다. 정들었던 역사를 허물고 광장을 상당히 차지한 민자 역사를 지 으면서 인천백화점이 자리했다. 운영난에 문을 닫고 엔조이쇼 핑 으로 다시 재기를 노렸으나 다시 문을 닫고 이후 빈 건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➏ 아랍식당 아라베스크 자유 공원 인현동 전자상가 ➊ ➍ ➌ 자유공원 대한 서림 ➋ ➐ ➏ 답동 배다리 ➍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옛 축현초 자리에 들어선 청소년을 위한 공간. 2001년 12월 착공해 2004년 10월 개관했다. 전체 4층 건물로 소공연장(이든홀), 대공연장(싸리재홀), 전시실 등 문화 공간을 비롯해 탁구장, 당구장 등 체육시설과 만화방, 영화감상실, 노래방 등이 있 다. 건물 뒤편에는 1999년 인현동호프집 화재 때 희생된 학생들을 추모하는 위령 비가 있다. 거리에 빈번히 보이는 무슬림들은 동인천의 새 풍속도가 되었 다. 그들은 옛 송도유원지와 북항에서 중고차 수출사업을 하기 때문에 교통이 편리한 동인천역 부근에 많이 온다. 대한서림 건 너편 하나은행 2층에 요르단에서 온 피라스 씨가 아랍인을 위한 식당을 열었다. 주요 메뉴는 케밥, 바비큐 양갈비, 커리, 난(빵), 탄 두리다. 이 건물에는 예전에 인영극장과 동인천극장이 있었다. 1958년 인천에서 가장 먼저 생긴 현대식 헬스장으로 추정된다. 인천의 미스터 코리아 선수들을 많이 배출한 곳이다. 예전에는 동인천역 개찰구 바로 앞에 있어서 승객들이 운동하는 사람들 을 자주 구경하곤 했다. 그래서 선수들은 쉬고 있다가 기차가 도 착하면 그때부터 역기 등을 들곤 했다. 얼마 전에 65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문을 닫았다. 17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인현동 179

92 용동 색 色 좋았던 그 동네, 이젠 모든 게 바랬다 황당한 연계일 수도 있다. 술 -권번-요정- 여인숙 - 산부인과. 용동은 유난히 이와 관련된 집들이 많았 다. 100여 년 전 용동권번이 이곳에 자리 잡으면서 골목마다 꽃 분내가 짙게 흘러나왔다. 니나노 장단 가락이 흘러나오던 용동 골목은 이제 인기척조차 없다. 목로주점들은 거의 다 문을 닫아 노가리 굽는 냄 새도 맡을 수 없다. 젊은 연인들이 통행금지를 핑계 삼아 하룻밤 사랑을 나누던 여인숙은 장기 투숙하는 날품 노동자들의 차지가 되었다. 노래와 웃음을 팔아 치마 속에 넣어뒀던 쌈지 돈을 독립자금으로 선뜻 내어놓았던 용동 기생의 흔적은 돌계단에 새겨진 글 한 줄이 전부다. 권번( 券 番 ) 은 사어( 死 語 )다. 이제는 쓰지 않는 단어다. 용동에는 권번 이란 공간 이 있었다. 사시사철 분 냄새가 진동했다. 지금의 신신예식장 부근이다. 권번은 기생 을 손님의 요청에 따라 전용 인력거에 태워 요릿집에 보내고 화대를 책임지고 수금 하는 등 매니저 역할을 담당했다. 인물, 태도, 노래와 춤 등의 심사를 통해 여자 아이 들을 모집해 기생으로 양성하는 일도 했다. 용동권번은 1901년 5월에 생긴 것으로 알 려져 있다. 초기에는 인천의 옛 이름인 소성( 邵 城 )을 따서 소성권번이라고도 불렀다. 인천 기생은 수준이 서울보다 낮고, 개성보다는 높았다. 개성은 갑, 을 2종이었으 나, 인천에는 을종이 없었다. 그 옛날의 관기보다는 신세대에 속했고, 카페나 빠 종사 자보다는 틀이 잡힌 예술가였다. 고일 선생의 인천석금 에 이렇게 적혀있다. 인천에 쌀 거래를 하는 미두장이 번성하면서 돈 많은 미곡상, 물산 객주들이 몰려 들자 요정집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기 시작했다. 당시 용동권번 주변에는 일월관, 용 금루, 화월관, 조선각 등이 성업을 이뤘다. 1931년 통계를 보면 인천에는 일본 요리 집 8개소, 한국 요리집 3개소, 일본 예기 33명, 한국 기생 77명이었다. 용동 181

93 인천 출신 기생 중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린 기생들이 있다. 대중가요 가수로 스타 가 된 이화자가 용동권번 출신이며 같은 레코드사 소속의 김일타홍, 일본인보다도 일본 노래를 잘 불러 일본 요정으로 단골출장을 다닌 이화중선, 아리랑 의 나운규와 사랑에 빠진 영화배우 오향선 등이 이곳 출신이다. 용동 기생 박미향도 빼놓을 수 없 다. 그녀는 인천항에 입항한 중국 군함 함장의 마음을 빼앗아 출항 일정을 수일 넘기 게 할 만큼 뛰어난 미모를 지녔다고 전한다. 훗날 영화계의 스타 계보에 올랐던 복혜 숙도 한때 용동권번의 기적에 올랐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 유학까지 한 인텔리 여배 우로 토월회 활동 때 인천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 토월회가 인천 공연에 나섰다가 흥 행에 실패하자, 남자 단원들이 밀린 여관비와 식비를 마련하겠다고 서울로 떠나면서 그를 남겨놓으면서 운명이 바뀌었다. 이후 복혜숙은 용동권번에서 3년간 생활하며 기생의 권익과 권번 개혁에 앞장서기도 했다. 지워버리고 싶어도 지워지지 않는다. 돌에 새긴 글자는 몇백 년은 거뜬히 갈 것이 다. 신신예식장에서 용동 칼국수집 동네로 내려가는 골목길의 돌계단에는 龍 洞 券 番, 昭 和 四 年 六 月 修 築 이란 글자가 비교적 선명하게 음각돼 있다. 2011년 동사무 소는 계단 보수 공사를 하면서 이 돌계단을 시멘트로 깔끔하게 발라 버렸다. 과거의 기생 마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수치스럽다고 생각한 동네 사람들의 요청이었는지 아니면 생각 없는 관공서의 행위였는지 알 수는 없다. 지역 문화 단체로부터 한소리 듣자, 며칠 후 글자를 가린 시멘트를 벗겨내 龍 洞 券 番 은 다시 빛 을 보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유흥 의식은 우리와 분명 차이가 있다. 그들은 도시를 만들면서 반드 시 신사를 짓고 학교를 세우며 이어 바로 옆에 유곽이나 권번 따위를 설치했다. 그들 에게 유흥업소는 도시 건설의 필수 인프라였던 것이다. 그러니 이런 업소를 개축하 고는 다리 하나 놓은 것처럼 떠들썩하게 기념해서 동네 길목 돌층계에 버젓이 용동 권번 이라는 이름을 조각했을 것이다. 18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동 183

94 용동권번 기생들의 모습(좌)과 월미도 요정에서 춤을 추는 기생들. 한술 더 떠 성대한 낙성연을 베풀기까지 했다. 위 계단에 새겨진 소화 4년 은 1929 년이다. 이와 다른 건축 행사였는지 확실치 않으나 1925년 11월 용동권번의 성공적 인 개축을 맞아 크게 잔치를 벌인 기사가 시대일보에 1925년 11월 18일자 게재되었 다. 내용은 대략 이렇다. 인천부 용리에 있는 용동권번은 개축 기금을 마련키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했다. 지난 여름에 연예회(공연)를 열어 부내의 유지들의 기부 를 받기도 했다. 마침내 2층 양옥 및 확대한 건물을 신축하였는 바 이를 기념하기 위 해 15일부터 17일 까지 3일간 낙성연을 벌였다. 첫날은 신문기자들을 초대했고 나머 지 이틀은 부내 유지들을 초빙했다. 부윤(현 시장)도 개축에 대한 축사를 전했다. 권번 홍보도 드러내놓고 했다. 일본어 선전 문구와 함께 기생 명단을 적어 내걸기 까지 했다. 당시 소성권번의 홍보 문구를 보자. 예도( 藝 道 ) 발달의 중임을 맡고 수련 을 거듭하기를 그 몇 성상( 星 霜 )이던가. 이제 예도의 자신이 가슴에 가득 찬, 꽃 같은 기생( 妓 生 )이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다. 그 무렵 기생들은 신여성의 부류로 속하면서 신문물의 도입과 소비를 이끌어가기 도 했다. 신여성들의 호칭인 모던걸(Modern girl)은 모단( 毛 斷 머리카락을 자른)걸 로도 불렸다. 실제로 여성 단발은 1920년대 들어 기생들에 의해 주도됐다. 머리는 앞 서 나가는 여인들이었지만 몸은 늘 권번에 구속돼 있었다. 1926년엔 인천의 기생이 극장에서 영화 해설을 하는 젊은 변사( 辯 士 )와 눈이 맞아 달아났다가 포주에게 다시 붙잡히자 1926년 5월 9일자 조선일보는 사회면 기사에서 불상한 어린 양( 羊 )과 가 티, 참아 떠러지지 안는 발을 띠워 다시 부자유한 농조( 籠 鳥 새장 속의 새)의 생활을 면치 못하게 되엿다. 며 안타까워했다. 기생들은 요정에서 소리를 하고 춤을 추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요즘 말로 하면 이 벤트 행사 도우미로도 활동했다. 경인철도 개통 초기에 손님이 거의 없자 철도 회사 는 승객을 유치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평양 명기 앵금, 인천 기생 초선 하는 식으 로 주요 역 정거장 마당에 기생 이름을 적은 푯말을 꽂아놓고 일종의 라이브 공연을 벌였다. 더 나아가 기차 칸칸마다 타고 출발역에서 종착역까지 왔다갔다하면서 승객 유인에 한몫했다. 오늘날 물 관리하는 나이트클럽의 여성 무료 입장 의 원조격이다. 그들은 신여성답게 현실에 대한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1897년 1월, 인천 상봉루의 기생 9명은 90전의 돈을 모아 독립협회에 보냈다. 노래와 웃음을 팔아 치마 속에 넣 어뒀던 쌈지 돈을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 선뜻 내놓은 것이다. 또한 1925년 7월 엄청 난 비가 부천군 일대(현재의 인천시 남구 일대)에 쏟아져 많은 피해가 발생했다. 용 동권번의 모든 기생들은 많은 식료품을 가지고 부천군 일대를 순회하며 이재민들에 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1946년 4월 15일 인천권번 대표 김본건은 광복 후 중국에 서 귀환한 전재민 동포들이 있는 수용소를 방문해 기생들이 모은 구호금 1만 원을 전 달했고 동명학원에도 1만 원을 기부했다. 이밖에 영화보통학교 운동장 확장 비용도 18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동 185

95 마련하는 등 사회참여도가 높았다. 40년대에 이르러 태평양전쟁이 가열되고 쌀 배급 에 이어 술도 제한적으로 공급되면서 요정들이 하나둘 간판을 내렸고 이에 따라 권 번도 문을 닫았다. 기생집이나 요정은 돈이나 권력이 있는 자들이 드나들던 곳이다. 서민들은 값싼 선술집이나 목로집을 이용했다. 목로집은 온돌 부뚜막과 나무로 만든 긴 탁자가 있 는 술집으로 따뜻하게 데운 약주와 함께 인천 앞바다에서 잡아 온 생선과 찌개를 안 주로 팔았다. 이 목로집은 인천에서 처음 생긴 뒤 서울로 퍼져나가 목로주점 으로 발 전했다. 당시 이곳 용동에서 영업을 한 안흥관 과 청대문집 등 목로집들은 광복 후 에도 한동안 술꾼들로 문턱이 닳도록 장사가 잘됐다. 1970년대 들어 이 동네에는 용동큰우물 옆 막다른 좁은 골목 안에 있던 주촌집을 비롯해 노가리집, 영주집 등 저렴한 술집들이 많았다. 용동 골목에서는 한때 동그랑 땡 이라는, 지금으로 말하면 모듬전이 인기 안주였다. 70년대 중반 로젠켈라(후에 장 미회관)라는 세련된 맥주집이 등장했다. 번쩍거리는 옷을 입은 키가 아주 작은 아저 씨가 항상 입구에서 손님을 맞이했고 안에는 현란한 조명 아래 미니스커트를 유니폼 으로 입고 가슴에 명찰을 단 웨이트레스들이 서빙했던 술집이다. 술값이 만만치 않 아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출입했던 곳이다. 이후 목로집들이 하나둘 사라지고 마음 과 마음 등 같은 7080세대의 생맥주집들이 그 자리에 들어섰다. 18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동 187

96 용동칼국수 골목과 능인사 뒷골목. 80년대 들어 용동 골목에는 후에 칼국수거리 라는 팻말이 세워질 만큼 칼국수 집 들이 전성기를 누린 적이 있다. 아마 주객들이 값싸고 시원한 바지락 국물로 해장을 한 탓일 것이다. 새집칼국수, 큰우물칼국수, 황고집칼국수집, 원조칼국시 등 골목 안 은 늘 국수 냄새로 진동했다. 이 거리에 칼국수집의 터줏대감인 초가집이 있다. 초가 집칼국수 집주인 신경현(81) 할머니가 칼국수를 삶은 지 58년. 할머니는 시어머니에 게 물려받은 솜씨 그대로 날콩가루를 넣고 밀가루를 반죽해 국수를 만들어낸다. 여 기에 바지락으로 국물을 내고 애호박, 파, 마늘을 넣고 끓이는 칼국수 국물의 맛은 잡 맛 없이 그야말로 시원하고 깔끔하다. 신 할머니가 시어머니가 하던 초가집을 이어받은 것은 46세 때였다. 갑작스런 시 어머니의 와병으로 부산에서 극장 매점을 운영하던 일을 접고 인천으로 올라왔다. 시어머니는 병상에 누워 며느리에게 칼국수 반죽하고, 만두 빚고, 김치 만드는 일을 전수했다. 처음에 이 집터 일대는 다 흙이었어요. 흙바닥에서 국수를 밀고, 연탄에 풀무질을 해 가며 끓였어요. 구들장에 앉아 먹었지만 손님들이 미어터져 골목 밖으로 줄을 섰 죠. 초가집이 기와집으로, 기와집이 지금의 4층을 올릴 만큼 돈도 좀 벌었죠. 하지만 몇 년 전부터 가스비도 힘들 만큼 많이 달라졌어요. 칼국수로 따듯하게 배를 채우고 커다란 우물가에 다가섰다. 100년 이상, 아니 아 득한 그 이전부터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동큰우물이다. 이 우물은 주변 지형을 볼 때 마치 사람의 사타구니 같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 물이 풍성할 수밖에 없 다. 그래서 큰우물 이다.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르지 않고 물맛이 좋아 주민들의 사 랑을 한 몸에 받아왔다. 1960년대까지만 해도 율목동, 신흥동, 내동, 창영동 주민들이 이 우물을 길어다 먹었다. 물이 달고 끝맛이 시원해 옛날 우물 주변에 있던 대화양조 장, 영화양조장 등 5개의 양조장들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우마차를 동원해 물을 날라 다 술을 빚었다. 인천시가 60년대 중반 큰우물 바로 옆에 담배 가게를 내주는 조건으 로 가게 주인에게 우물을 관리 하도록 했다는 일화도 있다. 1967년 수질을 보호하기 위해 기와지붕의 6각 정자로 우물을 에워쌌다. 이때 인천 출신으로 당시 최고의 서예 가였던 동정( 東 庭 ) 박세림이 쓴 작품 龍 洞 큰우물 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18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동 189

97 용동큰우물 기와지붕 건설 준공식(1967년)과 주변을 소공원으로 조성한 최근 모습. 최근 용동큰우물 주변은 주촌 등 골목에 있던 목로집들이 다 헐리고 작은 공원으 로 정비되었다. 그곳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미학자이자 미술사가인 우현( 又 玄 ) 고유 섭을 만난다. 그곳은 그의 탯줄이 묻힌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고유섭은 일찍이 아 버지와 어머니가 이별해 어린 시절 조부모와 새어머니 밑에서 자라면서 말이 없는 의기소침한 소년으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3 1운동 때에는 태극기를 만들어 동네아 이들에게 돌리고 용동 일대에서 만세를 부르며 돌다가 붙잡혀 3일간 구류를 당한 적 이 있을 만큼 강한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외로움과 우울함을 시, 시조, 수필 등으로 표출하고 때로는 어디론가 홀로 떠나 스케치를 하면서 문학청년으로 변해 갔다. 그는 경성제국대학 예과과정에 입학한 후 우리나라 최초로 철학과에서 미술사와 미학을 전공했다. 이 학교에서 미학을 전공한 사람은 광복 때까지 그가 유일하였다. 1930년 졸업과 동시에 연구실의 조교로 남았다. 1929년 12월 5일자 그의 일기를 보 면, 조수 1년 안에 서양미술사를 하나 쓰고 2년 안에 경주 불국사 연구와 불교 미술 사를 연구하자 라고 다짐한 내용이 보인다. 1934년 고유섭은 개성부립박물관장으로 임명되었다. 허리춤에 도시락을 달고 흰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개성을 비롯한 전국의 유적지를 답사했다. 맨 걸음으로 다니 거나 먼지 나는 길을 달구지를 타고 조선의 아름다움을 탐구했다. 마음 한편에 지식 인으로서 울분과 고통이 내재돼 있던 그는 간간이 술로 이를 달랬다. 고유섭은 1940 청과물 시장 주변에는 종묘와 농약 등 농업 관련 상점들이 많았다. 년 과로로 쓰러졌고 이후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갔다. 결국 간경화증으로 1944년 6 월 26일 4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개성 수철동 묘지에 묻혔다. 동인천에서 배다리로 가는 오른편에는 청과물시장이 있다. 세칭 깡 이라고 불렸던 이곳은 1930년 공설청과물시장 이란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송림동, 숭의동, 용현동 등지의 과수원 농장에서 수확한 과일을 이곳에 내다 팔기 시작하면서 길 주변에 많 은 청과물 가게가 들어섰다. 특히 여름이 되면 멀리 서울 오류동에서 달기로 소문난 오릿골 채미(참외)나 재래종인 청채미 등 많은 참외가 마차로 실려와 길거리 빈터에 무더기로 쌓인 채 팔렸다. 이로 인해 이 시장은 참외전거리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사 람들은 흔히 채미전거리 로 부르곤 했다. 지난 1982년 6월 동인천역과 숭의동간 2km 가량의 도로 확장으로 철로변의 가게들 이 철거되면서 시장은 점차 위축되었다. 이어 1998년 9월 인천시가 주차장을 마련하 기 위해 청과물시장 부지를 매입하면서 대다수 상인들은 송림동 동부시장과 숭의철 교 인근 청과물시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19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동 191

98 그때, 이곳 용동 Map & Photos ➊ 대한천일은행 지점 대한천일은행( 大 韓 天 一 銀 行 )은 구한 말 대한제국 관료층과 상업자본가들 이 주체가 되어 설립한 민족은행이 다. 현재 우리은행(상업은행 한빛은 행 우리은행)의 전신으로 1899년 (광무 3) 1월에 설립했다. 용동에 있 는 우리은행 인천 지점은 1899년 5 월 10일 개점한 우리나라 최초의 은행지점이다. 이를 알리는 동판이 은행 출입구 옆에 박혀 있다. 경인선 개통 당시의 축현역. 이 참외전거리에 작은 역 하나가 있었다. 1899년 경인선 개통 당시 지금의 원예농 협 앞에 축현역이 있었다. 축현( 杻 峴 )은 싸리재의 한자 이름이다. 1908년 증가하는 승객과 화물을 감당할 수 없어 현재의 동인천역 자리로 옮겨갔다. 1926년 축현역이 라는 이름이 부르기 어렵다는 여론이 있자 시민을 대상으로 역명을 공모했다. 상인 천역과 동인천역이 1, 2위였다. 축현역을 상인천역으로 바꾸었다. 광복 후 일본인들 이 지은 역 이름이 싫다고 해서 1948년 다시 축현역으로 환원했다. 서울에서 오는 사 람들이 역 이름이 어렵다고 하자 1955년 동인천역으로 또 바꿨다. 그 순간 부터 인천 의 동서남북은 헷갈리기 시작했다. 옛 축현역 앞은 원래 습지였다. 이를 살려 역 앞에 1,600여m2(500여 평)의 큰 연못 을 만들었다. 1924년 12월 인천기독교청년회는 꽁꽁 언 이 연못을 스케이트장으로 만들어 회원제로 운영했다. 그 전까지는 웃터골이라고 불린 산근정공설운동장(현 제 물포고)을 얼려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했다. 화평동 대한 서림 답동 동인천역 제물포역 농협➌ 동인천청과물 시장 ➍ 동인천 길병원 용동큰우물 ➋ 칼국수골목 신신예식장 우리은행 ➊ ➋ 인천흥업주식회사 용동 152-6번지에 위치한 2층 건물 로 건축 연도는 1910년대라는 설과 건축양식이 조선식산은행 인천지점 신청사, 인천미두취인소 등과 비슷한 것을 보아 1930년대 이후에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는 의견도 있다. 정면 출입구 위에 인천흥업주식회사 라는 간판이 있으나, 현재는 주택으로 사용 하고 있다. 인천흥업은 일종의 대부업체다. ➌ 비강조합 현재의 채미전 거리 초입에 있는 성환상회 자리에 죽산 조봉암이 운영하였던 비 강조합이 있었다. 비강조합은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모아 연료로 공급하는 곳이다. 그 옆에 인천 좌익의 핵심 박남칠이 운영하던 인천미곡상조합(현재 농협) 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천미곡상조합은 사무장 이승엽의 탁월한 조직 활동으로 인해 크게 성장하였고 그것을 근간으로 광복 후 인천미곡상이 중심이 되어 건준 인천지부가 신속하게 설립되었다. ➍ 이길여산부인과 이길여 박사는 친구와 함께 1958년 5월 용동 에 이길여산부인과 를 개원했다. 병원은 적산 가옥 2층33m2(10평) 남짓한 목조 건물이었다. 가천재단사( 史 )에 따르면 산부인과 개원은 선 진 의학을 공부하기 위해 유학비를 마련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어렵고 힘든 환자들을 도와주 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고 적고 있다. 19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동 193

99 전동 쩐 찍에내던 프레스 소리 울려 퍼지다 전동은 응봉산(자유공원) 동쪽의 완만한 경사면에 자리 잡은 동네다. 1번지 는 한 지역이 형성될 때 가장 먼저 찜 되는 곳으로 동네의 상징적인 공간이다. 전동 1번지 만큼 우여곡절이 많은 땅도 드물다. 수차례 많은 기관에 찜 당했다. 먼저 군대가 들어왔고 이어서 신식 화폐를 만드는 전환국, 철도 관련 기관, 여학 교 그리고 현재는 동사무소 등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군이 이곳에 주둔했다. 주변으로 일본인들이 따라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동네가 서서히 형성되기 시작했다. 군대가 철수한 후 그 자리에 구한 말의 돈을 찍어 내던, 요즘으로 말하면 조폐공사인 전환국이 1892년(고종 29년)에 자 리 잡았다. 주화의 원료 동( 銅 )을 일본에서 수입해야 했기 때문에 서울 조폐창은 여러 모로 불편했다. 기계와 기술, 원료 등의 수입이 편리한 인천에서 바로 돈을 찍어 내는 것이 유리했다. 서울에 있던 기계를 옮기기로 했다. 아직 경인철도가 개통되기 전이라 물길을 타고 이전하기로 했다. 기계를 한강까지 끌고 와 배에 싣고 강화수로를 거쳐 송현동 해안(수문통)에 배를 대고 하역했다. 너무 무거워서 갯벌에 빠지는 등 큰 어려 움을 겪은 끝에 가까스로 돈 찍는 기계를 전동으로 옮겼다. 인천전환국에서는 압인기(프레스) 9대로 대조선( 大 朝 鮮 ) 이라 새긴 5냥짜리 은화 등을 발행했다. 조선에 와있던 청나라 위안스카이는 청나라가 대국이오, 조선은 소국 이니 대조선이라는 것은 국격상 체모에 불합하다. 라며 시비를 걸어 한동안 大 자를 빼고 그냥 조선 만 새겨 넣는 굴욕을 맛보기도 했다. 용산에 새로운 전환국이 세워지 고 1899년 경인선 철도가 개통하면서 원료 수송이 쉬워지자 1900년 7월, 8년 전 배에 실려 인천에 왔던 기계들은 이번엔 기차에 실려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전동 195

100 전환국의 모습. 전환국이 떠난 그 자리는 1904년 러일전쟁 때 다시 일본군이 잠시 주둔했고 철도감 부(철도청 전신)로도 사용되었다. 이때 몸 파는 여자들이 주변에 모여들면서 지역 이 름이 한때 화동( 花 洞 ) 으로 불리기도 했다. 전환국도 군대도 떠난 자리를 학교가 차지했다. 인천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인 인천 여자실과학교가 이곳에 설립된다. 이 학교는 1885년 10월부터 신흥동 본원사 절방에 서 10여 명의 아동을 교육시킨 것이 시작이다. 후에 본원사 옆쪽에 있는 현재의 신흥 초교 자리에 학교 건물을 세웠고 1907년에 전동에 다시 분교를 설립했다. 이곳에 인 천여자실과학교 를 설립했고 후에 인천고등여학교(인천고녀)가 되었다. 이 학교에서는 여자에게 필요한 고등보통교육과 기예를 주로 가르쳤다. 무엇보다 재봉틀을 다루는 기술을 위주로 한 가사실업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이 때문인지 개교 당시 22명 학생 대부분은 기혼자였다. 이 학교에서는 매년 바늘 공양 이란 의식을 치 렀다. 바늘의 수고에 대해 감사하고 그 영을 위로하기 위해 부러진 바늘들을 두부에 꽂아놓고 제사를 지냈다. 전시 체제에는 학생들의 체력 단련을 위해 무술과 목검 체조 를 가르쳤고 가끔 모래주머니를 지고 학교에서 부평까지 12km를 걷게 했다. 또한 매년 10월경 전교생이 학교에서 용산역까지 40km 도보 행군을 실시했다. 돌아올 때는 기차 를 타고 오는데 순서를 거꾸로 하기도 했다. 이런 내용은 모두 학적부 체력란에 게재 했다. 수학여행은 압록강 건너 만주 지역을 다녀오기도 했다. 19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197

101 이 학교는 전형적인 일본인 학교였다. 1942년 졸업 앨범 을 보면 학생 외에 신발을 깁는 할아버지가 유일한 한국인임 을 알 수 있다. 1917년 한국인 학생 1명이 처음으로 입학하며 1945년 광복 때까지 98명만 졸업했다. 한국 학생들은 한 학급에 두어 명밖에 없었다. 보통 입학 경쟁률이 20대 1에 달해 기록해 합격자 명단이 신문에 게재되곤 했다. 이들 중에 이옥경(8회)이란 학생이 있었다. 그는 인천고녀를 졸업하고 도쿄 일본여 자음악학교에서 공부한 후 경성방송국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가 된다. 우리나라 최초 의 여성 패션디자이너로 이름을 날린 노라노가 그의 딸이다. 노라노의 솜씨는 학교에 서 재봉질을 배운 어머니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지 추측해 본다. 이옥경의 아버지 이학인은 영친왕의 영어 교사로서 사립 재령학교 영어 선생이었으며 인천에서 해관 업무를 담당했다. 옛 인천여고 교정. 현재 동인천동 주민센터와 중구문화원이 입주해 있다. 옛 흔적을 찾아 길을 나서 본다. 교정이었던 곳에 여전히 우람한 은행나무와 회화 나무들이 커다란 그늘막을 만들고 있다. 특히 늦가을이 되면 이 아름드리 은행나무들 은 동네를 온통 노랗게 물들인다. 동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마을 초입에서 수호신 역 할을 한 나무에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곤 한다. 흔적은 돌이 돼 한곳에 모여 있다. 구적 한국시대 조폐소 지적( 舊 蹟 韓 國 時 代 造 幣 所 址 跡 ) 이라 새긴 비석과 전환국에서 만든 화폐의 모형이 나무 밑에 세워져 있다. 그 옆에는 인천여고의 상징인 은행잎을 형상화 한 학교 표지석이 있다. 중구문화원 뒤쪽에는 계단 위 중구보건소 밑까지 연결된 것으로 보이는 방공호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미군 공습을 피해 피신 연습을 하는 여학생들의 모습이 그려졌 다. 요즘 한여름이 되면 그 앞으로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모여든다. 입을 크게 벌 린 굴속에서 시원한 바람이 쉴 새 없이 나온다. 부근에 궁중에서나 사용됐을 법한 6각 형 돌기둥 문과 문설주 조각이 잡풀에 묻혀 나뒹굴고 있다. 19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전동 199

102 교정 뒤편으로 걸음을 옮기면 시간을 잊게 하는 동네를 온전히 만날 수 있다. 해관 과 은행 그리고 전환국 사택으로 사용되었던 일본식 주택과 한옥들이 골목을 나눠 쓰 고 있다. 특히 일본식 주택이 늘어선 골목을 사진에 담으면 마치 일본 영화 철도원 과 러브레터 등에서 본 듯한 작은 동네가 그대로 담긴다. 골목 모퉁이에 나무전봇대 하 나가 꼿꼿이 서있다. 아직도 전기줄을 몸에 감은 엄연한 현역이다. 근 100여 년 동안 마을을 환히 비추고 개구장이들 말뚝박기 놀이의 든든한 기둥이 돼 주었을 것이다. 인일여고 정문 옆의 시멘트 길을 오른다. 여기 학교 아닙니다. 관리인이라고 밝힌 한 남자가 길을 막는다. 많은 사람들이 학교인 줄 알고 올라온다고 한다. 여기는 한국 은행 합숙소다. 현대식 2층 건물에 커다란 회화나무가 작은 운동장 한편에 우뚝 서 있 다. 옛 모습은 다 사라졌지만 이 건물은 예전에 인천조선은행 은행장 사택이었다. 뒤 편으로 기상대와 바로 연결된 길도 있었다. 이 부근의 많은 땅이 한때 이 은행의 소유 였다. 인천여고도 학교를 증축할 때 이 은행으로부터 한 평에 8원을 주고 땅을 사기도 했다. 공원 오르는 길 오른편에 인현 전동 경로당이 있고 그 옆에 빌라 한 채가 이웃해 있 다. 이 터는 우울한 역사를 품고 있다. 오랫동안 한옥 소슬대문으로 외부와 단절된 채 거의 방치되었던 이 터에 대해 인천 한세기 (신태범)는 이렇게 적고 있다. 행랑채와 사랑채 그리고 명물이던 목련 고목도 없어졌으나 대문 안에 연못을 둔 아 담한 정원과 화사한 나이든 주목이 옛 모습대로 안채를 지키고 있다. 이 집이 인천에 서 가장 유서가 분명한 대표적인 구옥( 舊 屋 )이다. 이 한옥은 1892년에 일본의 기자재 와 기술로 인천여고 자리에 전환국을 건립할 때 전환국 방판( 幇 辦 )으로 일본을 왕래 하며 실무를 담당하던 안경수가 자신이 거처하기 위해 지은 것이다. 이 집은 안경수( )가 지었다. 당시 세도가 민영준의 통역관으로 발탁되면 서 정계에 발을 디딘 안경수는 인천전환국을 설립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부평부사를 역임했고 독립협회 초대 회장까지 지낸 인물이지만 열강들의 부침 속 격랑을 피할 수 20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전동 201

103 없었던 그는 친일에서 친러, 다시 친일로 돌아섰다. 그는 철도, 해운, 조폐 등에 관련된 일을 했기 때문에 인천에 별도의 거처가 필요했다. 전환국과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커다란 별택을 짓고 첩을 두었다. 을미사변 직후 친러파 이범진과 한패가 된 쿠데타가 실패하자 이 별택으로 피신해 왔다. 이후 황제 양위 음모가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했 다가 후에 스스로 돌아와 자수했으나 교수형에 처해졌다. 소식을 전해 들은 첩은 이 저택에서 자살했다. 한동안 이 집에 밤마다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 후 이 저택은 미두취인소 사택으로 잠시 사용되다가 고타니 마스지로( 小 谷 益 次 郞 )의 집이 되었다. 그는 1939년 인천부 의원에 당선된 사람으로 개항 50주년을 맞아 이 집에서 인천부사 라는 역사책을 집필한다. 또한 인천중학교 설립을 주도했으며 광 복 직후 인천세화회( 世 話 會 )를 조직해 일본인들의 본국 귀환을 위한 책임을 맡는다. 이를 위해 전쟁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재향군인들을 무장시켜 순사 복장을 하고 각 파 출소를 경비하게 하는 등 한국인들의 응징에 대비하기도 했다 전쟁 후에는 박순정 여의사가 이 자리에 전동의원을 개업했다. 그는 경성여자 의학 강습소를 나와 기독병원의 전신인 부인병원에서 진료를 하다가 이 자리에 전동 의원을 개업했다. 인천에서 개업한 한국인 의사 중 최초의 여의사로 알려져 있다. 그 런데 이 집에서 그의 아들이 자살을 한다. 그 충격으로 박씨는 성공회 내동교회에 집 을 넘기고 미국으로 떠난다. 2009년 오랫동안 폐허로 남은 저택은 허물어지고 얼마전 빌라가 들어섰다. 1961년 3월 13일자 조선일보 만평 한 컷. 세간을 머리에 인 아낙네와 책보따리를 짊어 진 아들이 함께 어느 학교로 향하는 그림이 그려졌다. 그 밑에는 서울서 못된 것만 보지 말고 저 학교로 가자. 라고 적혀 있다. 저 학교 는 바로 제물포고등학교였다. 그해 서울대 입시에서 제물포고 박순철이 전체 수석을 차지한 것을 비롯해 연 고대 등 이른바 일류 대에 많은 학생이 합격하자 유력 일간지 만평의 소재로 등장하기에 이른 것이다. 20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전동 203

104 부르기도 했다 전쟁 중에는 미군 야전병원이 들어섰다. 당시 건축물로는 흔치 않게 옥상이 있는 콘크리트 건물이었고 스팀 난방시설을 갖춘 전국 유일의 학교였다. 개교하면서 건립한 벽돌조 강당 성덕당( 成 德 堂 ) 은 일제강점기에는 군국주의와 식민 지를 정당화하는 훈시의 장소였지만 광복 후에는 유진오, 백낙준, 함석헌 등 당대 석 학들이 강연을 통해 학생들에게 민족혼과 애국심을 일깨운 곳이다. 성덕당은 2008년 10월 등록문화재 제427호로 지정되었다. 현재 제물포고 교정인 옛 웃터골. 위쪽에 기상대가 보인다. 삼태기처럼 생긴 분지 모양의 땅에 들어앉은 제물포고는 1954년 개교하자마자 명 문고의 대열에 섰다. 그 기틀을 마련한 사람은 초대 교장인 길영희 선생이다. 독립운 동가이자 계몽운동가였던 그는 교훈을 학식은 사회의 등불, 양심은 민족의 소금 이라 고 정하고 유한흥국( 流 汗 興 國 땀을 흘려야 나라가 발전한다)의 뜻을 학생들에게 심 어 주었다. 제물포고가 들어앉은 터는 웃터골 이다. 완만하게 경사지고 녹음이 푸르러서 천연 스탠드와 그라운드 구실을 톡톡히 했다. 1920년에 땅 고르기 작업을 해서 1935년까지 15년간 인천공설운동장으로 사용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나라 잃은 울분을 운동을 통 해 표출했던 장소로 무엇보다 야구 경기가 많이 열렸다. 동호회 수준이었지만 기차통 학생 한용단 을 주축으로 해서 일본인들로 구성된 쌀 거래소 미두취인소 미신 과의 한일간 시합이 자주 열렸다. 어찌보면 올림픽 금메달과 WBC야구대회 4강 성적도 여 기서 출발했다고 볼 수 있다. 1935년 이 운동장에 제물포고의 전신인 인천중학교가 세워졌다. 광복 전에는 주로 일본인들이 다닌 학교였다. 당시 노인들은 인천중학과 제물포고를 웃터골 학교 라고 70년대 인천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탁구장의 폐허. 전동은 학교와 궁합이 잘 맞는 동네다. 제물포고, 인일여고, 인천여고, 인천중, 인천 여중, 상인천여중, 축현초 등 많은 학교들이 좁은 길을 사이에 두고 있었다. 여기에 우 리 기억 속에서 흐릿한 학교 하나가 있다. 축현초 정문을 지나 제물포고로 올라가는 경사 길 오른쪽 아래 옛 인천양조장 근처 낮은 지대에 인천대의숙( 仁 川 大 義 熟 )이란 전문대학 과정의 학교가 있었다. 의숙( 義 熟 )은 공중을 위하여 의연금으로 세운 교육 기관을 일컫는다. 20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205

105 이 학교는 법정과와 상경과를 주야로 운영하였고 지원 자격은 일반 고등학교와 교 육대학의 전신인 사범학교 졸업자였다. 모집광고에 장차 4년제 대학으로 승격될 경 우 해당 학년으로 편입함 이라고 광고를 냈지만 60년대 말 문을 닫았다. 1966년 서울 에서 열린 47회 전국체전에 이 학교 학생들은 경기도 대표로 출전했는데 무슨 연유인 지 101명이 부정선수로 판명돼 무더기 실격당한 기사가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인일여고 정문을 지나 화평동 방면의 일방통행 길을 걸으면 학 교 담 옆에 있는 커다란 빌라촌을 만난다. 예전에 전동변전소가 있었던 터다. 이 변전 소는 일제강점기부터 도심지의 전력을 공급했던 중요한 시설이었다. 1990년대 초 변 전소는 없어졌고 옆에 있는 전동교회가 그 터(약 2,500m3)를 구입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은 빌라가 들어섰다. 빌라 앞을 지나면 경인선 철로를 가로지는 작은 다리가 나온다. 사람들은 이 다리를 그냥 구름다리 혹은 인천극장 가는 다리 라고 불렀다. 기차가 달리는 철길 위를 걸어 다니니 마치 구름 위를 거니는 기분이 들어서 이같이 부른 듯하다. 언제부턴가 굳이 한자로 고쳐 운교( 雲 橋 )라고 했다. 이 다리는 경인철도가 개통되던 즈음에 7m 정도의 높이로 설치됐다. 그때는 나무 로 만든 작은 목교였다. 자동차가 거의 없던 시절로 사람들이 주로 다녔고 기껏해야 우마차나 인력거 통행이 전부였기 때문에 목교라도 충분히 버틸 수 있었다. 썩지 말라 고 검은 염료를 발랐는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흔히 흑교 라고 불렀다. 해마다 가을이면 일본인 축제 행렬이 그곳을 지나갔다. 지금의 인천여상에 있던 신사에서 출발한 그들 의 신을 모신 가마를 앞세우고 소리를 지르며 다리를 지나갔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 어른 아이할 것 없이 많은 구경꾼들이 구름다리 위에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20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전동 207

106 그때, 이곳 전동 Map & Photos ➊ 전환국 ➍ 해군병원 ➑ 길영희 동상 제물포고 ➐ ➑ 인일여고 ➏ ➍ ➓ ➎ 홍예문 ➒ 삼치 거리 인천역 (구)인천여고 ➊ ➋ 뉴아파트 ➌ 전동 구름다리 화평동 1892년 5월에 착공하여 그해 12월에 준공했다. 약 6만 원의 비용을 들여 5,123m2 (1,550평) 대지 위에 凹 자 형태의 벽돌조 3동의 건물은 한국 정부 최초의 양식 건 축이라는 데 건축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1908년 인천여고가 설립되어 교사( 校 舍 )로 사용되다가 잇단 화재로 부분적으로 소실됐고 1926년에 벽돌조 2층 규모의 교사가 세워지면서 완전히 철거됐다. 지금은 내동, 경동, 용동, 전동, 인현동을 관할 하는 동인천동사무소와 중구문화원이 들어섰다. ➋ 인천여고 1908년 4월 6일 중구 전동 1번지 전 환국 자리에 3년제 인천여자실과학 교로 문을 열었다. 초창기에는 당시 의 복잡한 안팎 사정 때문에 학교 이 름이 여러 차례 바뀌고, 학제( 學 制 )도 3년제에서 4년제를 거쳐 6년제로 바 뀌었다. 일제강점기에는 흔히 인천 고녀 로 불렸다. 1998년 연수구 연수 동에 교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2008년 국내 공립여자고등학교 중에서 두 번째로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➌ 전동 구름다리 1899년 7월 17일자 독립신문에 전환국 옆의 산을 파헤치는 작업 중 흙더미가 무 너져 인부 4명이 사망하고 1명이 상하는 기사가 났다. 그 위치상으로 볼 때 지금의 송월동, 화평동으로 넘어가는 곳으로 추정한다면 바로 전동 구름다리 가 이즈음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1960년대에는 이곳에서 자살이 빈번했는데 사체가 어느 쪽으로 떨어졌느냐에 따라 인천경찰서와 동인천경찰서의 관할 다툼으로 시신이 오랫동안 방치되는 일이 흔했다고 한다. 교통량이 늘어나면서 1967년 5월에 확장 했다. 1946년 6월 14일 통위부 내에 의무 국을 설치하면서 우리나라 군은 현 대적인 의료 활동 을 시작했다. 정부 수립 후 조선 해안경비대에서 독 립해 창설한 해군은 1952년 11월 1일 해군본부 직속 하에 해군 인천병원을 설립했다. 이 병원은 현재 인일여고 정문 앞 아우구 스또 수도회 자리에 문을 연다. 이 병원은 1964년 10월 포항으 로 이동한다. ➎ 안경수 별택 전동 24번지에 위치한 안경수의 저택은 1892년에 지어진 건물 이다. 고타니 마스지로의 집이었던 1933년 당시 이미 한 채는 사라졌고, 한 채도 반은 없어져 중심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6 25전쟁 후 여의사 박순정이 인수하여 전동의원을 개설했으 며, 후에는 성공회유지재단의 소유였다. ➏ 조선은행 합숙소 인일여고 옆 현대식 2층 건물로 일제강점기에 인천조선은행 은 행장 사택이었다. 현재는 은행 직원 합숙소로 사용하고 있다. 마 당에 이 터의 연륜을 말해 주듯 아름드리 회화나무가 서 있다. 주변에는 해관, 미두취인소 등의 사택도 많이 있었다. ➐ 성덕당 1935년 건립된 제물포고 강당으 로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의 벽돌 조 건물이다. 학교 강당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인천지 역 사회의 대형 집회 공간으로 이용해 온 역사적인 장소다. 15m 나 되는 너비를 중간 기둥 없이 처리했으며 전체적으로 아주 간 결하면서도 기능적이다. 이 건물은 당시 제물포고 학생들이 많 은 애국지사 등의 강의를 들으며 청운의 꿈을 키웠던 곳이다. 현 재 등록문화재 제 427호다. 길영희 교장은 1900년 평북 사천에서 태어나 평양고보를 졸업하고 경성의전에 재학 중 1919년 학생 대표로 3 1 운동에 나섰다가 체포되었 다. 도산 안창호 선생을 만나 민립 농과대학을 설립하기로 결심하고 1939년 인천에 내 려와 만수동에 후생농장을 만들어 문맹퇴치운동, 농촌 계몽운동을 벌여나가다 광복 을 맞이하였다. 그해 11월 인 천중학교 교장으로 부임하고 1954년 제고를 설립해 16년간 인 중, 제고 교장으로 재직하며 수많은 후학을 길러냈다. 퇴임 후에 도 충남 예산군에 내려가 가루실 농민학교를 설립해 1984년 세 상을 떠날 때까지 농민들과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교육에 힘 을 쏟았다. 제고 성덕당 앞에 그의 동상이 있다. ➒ 전동 떡집 60년 가까이 찹쌀떡만을 만 들어 온 전통 떡집이다. 시어 머니에 이어 며느리 한영화 (66) 씨가 일본풍의 팥앙금 찹쌀떡을 만든다. 그는 시어 머니를 도우면서 찹쌀떡 만 드는 것을 배웠다. 70~80년 대만 해도 국회의원 선거 때 나 명절 때면 찹쌀떡을 사방 에 퍼다 날랐을 정도로 장사 가 잘 됐고, 찹쌀떡을 사가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렸을 정도였다. 지금도 서울뿐만 아니라 외 국에서도 주문이 줄을 잇고 있을 정도로 이 집 찹쌀떡 맛은 널리 알려져 있다. ➓ 약수탕 자유공원과 연결되는 수맥이 이 동네의 물맛을 좋게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주변에 양조장들이 많았지만 물 좋은 대중목욕탕도 한몫했다. 약수탕은 오랫동안 한자리에서 영업을 하다가 2년 전 에 폐업하고 그 자리에 공영주차장이 들어섰다. 배다리 20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전동 209

107 송학동 담쟁이 뒤엉킨 축대... 그 곳 영욕 아는 듯 송학동은 부자 동네였다. 사람 키 서너 배 넘는 돌 축대와 담쟁이로 둘러싸인 높은 담장 그리고 넓은 정 원과 육중한 철문. 감히 범접할 수 없을 것 같은 저택들이 바다를 향해 자리 잡고 있었다. 어쩌다 자유공 원에 놀러갔다가 그곳을 한번 기웃거리기라도 하면 대문 앞에서 자가용을 닦으며 사장님을 기다리던 운 전수의 눈초리가 여간 무서웠던 게 아니다. 실제로 4, 5대 국회의장을 지낸 곽상훈 씨 등 고관대작이나 항만 관련 사업을 하던 경제인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서울사람들이 이 동네를 지나가면서 인천에도 성북동 같은 동네가 있네 하고 의아함과 놀라움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동네가 바로 송학동이다. 송학동은 동네 자체가 그리 크지 않다. 게다가 송( 松 ) 자로 시작하는 송현동, 송림 동, 송월동과, 그리고 학( 鶴 ) 자 돌림의 청학동, 선학동, 문학동과 헷갈려 정작 인천사 람들도 그 위치를 제대로 알지 못한다. 중구 송학동은 자유공원(응봉산) 남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동네다. 앞쪽으로 막힐 게 없어 인천 앞바다가 고스란히 보이는 양지 바른 곳이다. 송학동은 자유공원의 일부를 품고 있다. 바다와 항구를 시원하게 바라볼 수 있는 자 유공원은 한때 인기 있는 신혼 여행지였다. 주말이면 웨딩마치를 막 끝낸 신혼부부를 태운 오색 테이프로 치장한 대절 택시들이 공원 언덕길을 쉴 새 없이 오르내렸다. 수 도권에 살던 사람치고 맥아더 동상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 찍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인천에 놀러왔다는 인증샷은 무조건 장군 앞에서 찍은 사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구식 공원 이란 타이틀이 붙은 공원이지만 조선총독부 고시 13 호에 의하면 자유공원은 1944년 1월 8일자에야 비로소 공원 으로 결정된다. 그 이전은 그냥 공원으로서의 기능 혹은 호칭이었을 뿐 행정적으로 결정된 것은 광복되기 바로 직전이었다. 송학동 211

108 조망이 좋은 덕분에 자유공원은 자유 롭지 못했다 전쟁 중 공원 일부는 군에 징발돼 대공포와 참호 등 군 시설과 막사가 차지했고 전쟁 후에도 한동안 곳곳에 군 콘세트 건물들이 있었다. 1969년 모 사업자가 공원 정상에 전망탑을 건축하겠다고 사 업계획서를 제출한 적도 있고 현재의 공중화장실 부근에 아파트를 건립하겠다는 황 당한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 절정은 1972년 다목적용 자유의 타워 건립 계획이었다. 70년대 인천시사 에 의 하면 당시 어린이놀이터(현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 자리에 전망타워를 건립하는 계 획이 경기도로부터 사업승인을 얻어 구체적으로 추진되었다. 이 타워는 연건평 2만 2,148m2(6,700평)에 지하 1층 지상 13층 탑층 38층 등 총 52층 높이의 대규모 건축물이 었다. 입주 시설은 등대 송수신 장치, TV 중계탑, 상품 전시장, 국제회의실, 어린이회 관, 외항선원실, 전망대, 스카이라운지, 예식장, 도서관 등 말 그대로 다목적 타워였 다. 압권은 이 전망대와 월미도 간을 케이블카로 연결한다는 계획이었다. 민자로 추진 되는 이 모든 계획이 80년대 초기에는 분명히 성사될 것으로 그 시사에서는 자신있게 예견 하고 있었다. 봄날의 석정루. 예전에 비둘기장이 있었던 공원 광장. 21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학동 213

109 설들로 공원은 언제 어느 때 찾아도 푸근하다. 응봉산이 바다로 내쳐 달리다 급정거를 하며 깎인 지점에 늘 그림처럼 서 있는 팔각정, 석정루. 목재업과 조선소로 큰돈을 벌 맥아더 동상 앞에서 거행된 시민의 날 제물포제. 오늘날의 자유공원은 산책로에 줄지어선 아름드리 벚꽃나무로 특히 유명하다. 이 나 무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심은 것으로 잘못 알려져 있다. 1975년 인천라이온스는 일본 나가사키, 기타규슈 등 자매 클럽의 도움으로 3년 계획으로 1천 그루를 심었다. 만국공원 시절, 이 공원은 제국주의의 산물로서 휴식과 위락 공간의 역할에만 그치 지 않았다. 1919년 3 1운동의 열기가 잦아들기 전인 4월 2일, 만국공원에 비밀리에 사 람들이 모여들었다. 이규갑, 이종욱, 안상덕 등 전국 13도 대표들은 이날 독립운동의 실효를 거두기 위해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만천하에 선포할 것을 결의한다. 바로 상해 임시정부의 모태가 된 한성임시정부 다. 한성임시정부의 수립과 관련해 일종의 의회 의 역할을 한 중요한 회의였으며 당시 임시정부의 통합에 있어 상당한 주도권을 행사한 회합이었다. 일제의 감시망을 뚫고 독립정부를 세우려는 의지를 가진 다수의 독립운동가들이 모인 최초의 모임이었다. 공원 내 많은 기념비가 있지만 무슨 연유인지 아직도 이러한 내용의 기념비가 세워지 지 않은 게 그저 의아할 뿐이다. 자신이 지휘한 폭격으로 무너진 집터에 자신의 동상이 세워진 아이러니를 맥아더 는 알고 있을까. 자유공원의 수호신으로 살아 온 지 어느덧 57년. 이데올로기 논쟁에 지친 것일까 아니면 세월이 너무 많이 흘러서일까 월미도 쪽을 응시하고 있는 장군의 눈매도 이젠 힘이 없어 보인다. 동상을 놓고 서로 다른 꿈을 꾸는 동상이몽( 銅 像 異 夢 ) 의 소모전은 언제쯤 끝날까. 었던 이후선 사장이 30여 년간 자유공원을 산책하며 건강을 지켜온 데 대한 보은으로 1966년 시민의 휴식처가 될 2층 누각을 지어 인천시에 기증했다. 그는 공원 내에 있는 많은 자연석도 기증했다. 출생지가 월미도였던 연유로 월미도를 바라 볼 수 있는 공원 서쪽 언덕바지를 누각의 위치로 정했다. 누각명은 주변의 강권으로 자신의 아호를 따 석정 ( 石 汀 )루다. 당대에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친 서예가 박세림 선생이 현판 글씨를 썼다. 이보다 앞서 한미수교기념탑 쪽에는 연오정( 然 吾 亭 ) 이란 육각형 단층 정자가 있었 다. 이 정자는 송현동 100번지에 살던 조길 씨가 그의 부친인 독립운동가 조훈 선생이 이제 자유공원은 추억의 공간이다. 세월이 흘러도 굳건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시 21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215

110 비둘기장과 석정루.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 생존 시 당부한 뜻을 받들어 1960년 8월 350만 환의 공사비로 건축했다. 사람들은 이 곳에서 바닷바람을 맞으며 장구 장단에 맞춰 소리를 하며 풍류를 즐겼다. 사라진 것도 있다. 공원 광장에는 여러 층으로 된 비둘기 집이 있었다. 광장과 비둘 기는 공원의 한가한 풍경을 완성하는 소재였다. 1967년 대성목재에서 190쌍의 비둘기 가 서식할 수 있도록 나무로 만든 집을 마련해 주었다. 70년대에 이르러 비둘기가 1천 쌍으로 늘어나자 수원시와 여주군에 분가시키기도 했다. 1996년 주변 환경을 위해 비 둘기 집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는 배 모양의 전망 데크가 설치되었다. 집 잃은 비둘 기들은 어디로 둥지를 옮겼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일제강점기 소월미도에는 인천관측소와 일본군 군용기지를 오고 가는 전서구( 傳 書 鳩 : 통신용 비둘기) 사육장이 있었다. 인천관측소에서 매일 아침 작성되는 기상표도( 氣 象 表 圖 )는 한차례 결항됨이 없이 인천에서 경성 여의도비행장으로 운반되어, 그날그날의 항공 여객과 항해 여객에게 안심하고 유쾌한 여행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전화로 보낼 수 없고 기차로는 한 시 간이 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인천 경성간의 기상도 체송( 遞 送 )을 전서구 날개에 맡길 때에는 겨우 15분에서 30분쯤 걸려 비 오는 날이나 눈 오는 날이나 어렵지 않게 날라 가게 되는 것이다. 전서구의 활약상을 알리는 1932년 7월 동아일보 기사다. 바다와 인접해 있는 자유 공원 비둘기들은 세월이 흘렀지만 전서구의 후예들인 듯 경계를 넘어 간혹 갈매기들 의 영역인 바다를 비행하기도 한다. 처럼 화도진이나 현 파라다이스호텔이 아닌 석정루 아래 탱고스튜디오 (옛 극동방송 국) 자리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현직 관세청 서울세관 공무원이면서 해관 사료 수 집 연구가인 김성수 씨가 최근 발굴한 구한말 인천해관 관련 문서에 첨부된 제물포 지 도(Sketch of Chemulpo Enclosure in Jenchuan No 6 of 10 Jenuary 1889 to Seoul)에 의 한 것이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1882년 5월 22일 조선이 서양 국가 중 처음으로 미국 과 맺은 조약으로, 그동안 어디서 조약을 체결했느냐를 놓고 논란을 빚어 왔다. 조약을 맺은 이 자리는 당시 건물이 없던 빈 땅으로 주변엔 조선인들이 살던 허름한 초가집이 듬성듬성 있었고 무덤들이 산재해 있을 뿐이었다. 조선은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급하게 천막을 쳐서 조인식을 가졌다. 높은 지역이었고 앞의 시야를 가리는 건물 도 없었으므로 제물포 해안 아래에서 올려다보면 매우 잘 보이는 곳이었다. 이후 이 자리는 인천 유일의 방송국이 들어선다. 1956년 극동 지역 선교 방송인 HLK(국제복음주의방송국)가 학익동 갯벌 위에 송신 안테나를 세우고 1962년 이 인천 해관 관사 자리에 스튜디오를 마련하고 특수 방송 시대를 연다. 현 시립합창단 윤학원 지휘자가 프로그램을 맡는 등 어느 정도 지역문화에도 기여했으나 1967년 서울 마포 로 이전했다. 이후 웨딩홀, 레스토랑 등으로 사용되었다. 최근 대한민국의 개항사를 뒤흔든 사건 이 있었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장소가 새롭게 발견 된 것이다. 개항기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맺은 장소가 지금까지 알려진 것 21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217

111 요즘의 공원은 소일거리 없는 노인들이 대부분 차지하고 있다. 공원에 나와 왕년에 내가 말야 하며 서로 말동무를 자처한다. 이 공원의 풍경을 더욱 더 빛바랜 사진처 럼 보이게 하는 소품 중의 하나가 공원 매점이다. 학도의용대 기념탑 옆에 있는 정자 처럼 지은 매점은 오랜만에 이곳을 찾은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사한다. 반가운 마음에 매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이 집이 몇 년이나 됐습니까? 공원에 놀러 오는 할아버지들이 그러시는데 50년은 족히 됐고 60년이 넘었을지도 모른다고 하시데요. 아, 문화재감이네. 온 식구가 공원에 나들이 온 날은 분명 집안에 경사가 있거나 먼 곳에서 친척이라도 온 날일 것이다. 그날 아이들은 이 매점에서 평소에 갖고 싶었던 장난감 총이나 바비 인형을 하나 챙겼으리라. 매점 옆에는 철제 탑이 높이 세워져 있다. 하나는 TV 난시청 중계탑이고 또다른 하 나는 4개의 확성기가 달려 있는 사랑의 탑 이다. 1965년 인천로터리클럽에서 세운 이 탑은 80년대 말까지 매일 밤 10시만 되면 사방팔방으로 계도 방송 을 했다. 청소년 여러분, 이제는 집으로 돌아갈 시간입니다. 부모님이 기다리시는 가정으로 속히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공원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혼비백산해서 도망갈 정도였다. 당시 계도 방송을 들었던 청소년들은 이제 자신의 아들, 딸 혹은 손녀, 손자의 늦은 귀 가를 걱정하는 나이가 될 만큼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반세기 동안 송학동의 모양은 많이 변했지만 이 동네의 풍치를 그런대로 간직하게 하는 것은 100년 세월의 이끼가 덕지덕지 묻어있는 돌문 때문이다. 이 문은 윗머리가 무지개 형상을 했다고 해서 홍예문( 虹 霓 門 ) 이란 예쁜 이름을 얻었다. 이름에 걸맞게 담쟁이 넝쿨이 계절에 따라 고즈넉한 풍광을 연출하고 있지만 이 문은 슬픈 역사를 품 고 있다. 21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학동 219

112 22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학동 221

113 송학동 그때, 이곳 송학동 Map & Photos 구한말 인천에 거주하던 외국인들의 사교 공간 제물포구락부. 1883년 개항 후 중앙동, 신포동 일대에 터를 잡은 일본 거류민들은 전동과 만석동 방면으로 그 영역을 넓히기 위해 응봉산 산허리를 잘라 문을 낸다. 그들이 보기에도 산의 혈( 穴 구멍)을 뚫었다고 생각했는지 일본인들은 이 문을 혈문 이라고 불렀다. 일본조계에서 경인철도의 축현역(현 동인천역 부근)으로 우마차를 이용해 물건을 쉽 게 옮길 수 있는 지름길이 필요했다. 1905년 일본 공병대가 암석 폭파 등 토목공사에 앞장섰고 중국인 석수장이와 한국인 노무자를 동원하는 등 난공사 끝에 3년이 지난 1908년에 완성했다. 지금도 문 앞 벽에는 쪼아내다 내버려둔 거대한 암석의 뿌리가 그 대로 남아 있다. 홍예문의 높이는 13m다. 7, 80년대 까지만 해도 시내에서 이만한 높이의 개방된 건 축물이 별로 없었다. 이게 문제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이곳에서 몸을 던졌다. 자살터. 사고가 이어지자 이후 높다란 철책이 둘러쳐졌다. 당시 동인천 쪽에서 통학하는 인성여고생들은 자살 사건이 나면 한동안 이 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신포동 쪽으로 돌아서 다니곤 했다. 10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높이도, 6.7m의 폭도 그대로다. 당시 우마차는 교행할 수 있었지만 지금의 자동차로는 어림없다. 양쪽 오르막을 냅다 달려온 차들은 고개 정 점인 이 문 앞에서 우선멈춤 을 해야 한다. 이 돌문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잠시나 마 양보의 미덕을 발휘하라고 묵묵히 얘기하고 있다. ➐ 자유공원 ➍ 석정루 연오정 ➓ 맥아더동상 ➋ ➊ ➌ 제일 교회 ➒ 제물포고 인성여고 ➑ 화평철교 ➏ ➎ 인천학생교육 문화회관 홍예문 ➊ 제물포구락부 1901년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찐의 설계로 세워진 양 철지붕의 서양식 건물이다. 1913년까지 독일, 영국, 러 시아, 미국 등 서양인들의 사교장으로 사용되었다. 내 부에는 사교실, 도서실, 당 구대 등이 있었다. 서양인들은 보름마다 식사를 겸한 무도회를 열었다는 기록이 있 다 전쟁 후 시립박물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 건물은 김하늘과 고수가 출 연한 드라마 피아노 의 무대가 되면서 다시 유명세를 탔다. ➋ 담쟁이집 수아네 구락부 아랫길에는 전형적인 일본식 주택이 몇 채 남아있 다. 그중에는 드라마 피아노 에서 수하(김하늘 분)의 집으 로 나왔던 파란대문집도 있 다. 드라마가 한창 상영될 때 담쟁이 넝쿨을 뒤집어 쓴 이 2층 집은 팬들이 적어 놓은 글씨로 빼곡했다. 12년이 되었건 만 봄 햇살을 받은 창 문으로 수아가 해맑은 얼굴을 내밀 것 같은 착각이 든다. ➌ 자유공원 방공호 일본인들, 특히 어느 정도 지위에 있던 이들 많이 살던 송학동에는 공습을 피하기 위한 방공호들이 있다. 맥아더 장군 동상 뒤편 주차장은 예전에 롤러스케이트장이 었고 한동안 나대지로 있을 때는 학 생들의 결투 장소이기도 했다. 그곳 에 동상 밑으로 뚫린 천정이 아치형 으로 된 방공호가 있다. 인민군들이 폭약 저장소로도 사용했다. 옛 시장 관사로 사용한 인천역사자료관의 방 공호는 6 25전쟁 때 인근 시립박물 관의 유물을 잠시 보관했다. 문화재 급 유물 19점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빌려온 55점 등 유물 200여 점을 포 장해 옮겨 놓았었다. 석정루 아래에 있는 방공호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 도로 깊은데 레스토랑의 와인 저장소 로 사용하기도 했다. 22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학동 223

114 ➍ 국제복음주의방송국 천시립시민관이 개관해 당시에는 인천시가 직접 극장으로 운영 하다가 1958년 5월에 위탁 경영으로 전환하였다. 현재 이 자리 에는 인성여고 체육관이 들어서 있다. ➒ 우리탕(오례당) 주택 인천상륙작전 중 소실되었다. 1957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7 주년을 맞아 그 자리에 맥아더 장군의 동상을 세우고 이를 계기 로 같은 해 개천절을 기해 만국공원에서 자유공원 으로 개칭하 였다. 아끼다 쯔요시 주택 1956년 12월 23일에 개국해 1961년 1월 19일에 방송국 명칭을 국제복음방송국으로 변경하고 1962년 7월 1일 자유공원 석정루 아래로 연주소를 신축하고 이전한다. 67년 5월 1일에 극동방송 으로 이름을 바꾸고 그해 12월 23일 연주소를 서울 마포구 상수 동으로 이전한다. ➎ 일본 인천경찰서 일본영사관 구내에 있던 일본 인천경찰서는 1932년 송학동에 벽돌조 2층 건물(560여 m2)을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광복 후 이 건물은 인천경찰서, 중부경찰서 등으로 사용하다가 1978년에 헐었다. 현재 연립주택이 들어서 있다. ➏ 공회당 ➐ 제임스 존스턴 별장 이 건물 터에는 현재 한미수교100주년기념탑이 들어서 있다. 1905년에 완공된 이 건물은 제임스 존스턴의 여름 별장으로 일 제강점기 인천의 랜드마크로 당시 거의 모든 사진과 엽서에 등 장한다. 상하이에서 온 10여 명의 조각가가 내외부를 장식했고 전기 관련 장치물과 전등은 세창양행을 통해 독일에서 수입했 다. 당시 인천에 전기가 없었기 때문에 정원에 발전소를 설치하 였다. 1936년 서공원 회관 이라는 이름을 가졌다가 인천각 으 로 개칭해 이듬해부터 고급 여관 겸 요정으로 사용했다. 광복 이 후 미군 장교 기숙사로 쓰이다가 6 25 전쟁 후 민간인이 불하받 아 건물을 철거했다. 후에 그 자리에 어린이놀이터가 들어섰다. 지붕에 돔을 얹은 우리탕 주택은 당시 가장 특이한 모습을 한 주 택이었다. 이 집은 1909년에 건축했는데 준공되자마자 불이나 같은 모양으로 다시 세웠다. 중국인 우리탕은 인천해관 통역관 이었으며 부인은 포르투갈 사람이었다. 우리탕은 이 집을 지은 뒤 얼마 되지 않아 사망하였다. 1930년대 상공회의소 대표이던 요시다히데지로의 주택으로 사용했으며, 광복 후에는 미군 독신 장교 숙소로 사용했었다. 그 후 육군방첩대가 사용하던 중 화재 로 소실되었다. 두 번이나 화마에 휩싸인 주택이었다. 현재 이 집 터에는 동국빌라가 들어서 있다. ➓ 세창양행 사택 러일전쟁으로 번 돈을 인천에 가져와 여러 사업을 한 아끼다의 호화로운 흔적이 남아있는 저택이다. 건물과 정원이 아름다워 추전어전 이라고도 불릴 정도였고 나중에 은수루 라는 요정으로 사용되었다. 6 25전쟁 당시 소실되었고 현재 대문의 문주와 진 입부 계단 및 석축이 남아 있다. 중구청 주차장으로 사용하다가 현재 중구청 어린이집이 들어섰다. 인천시역사자료관 ➑ 인성여고(인천병원) 현재의 인성여고 운동장은 원래 잔디밭으로 어린이들의 놀이터 였다. 1906년 9월에 인천병원이 들어섰다. 환자가 많아져 건물 이 좁아지면서 1936년 신흥동(현재의 인천보건환경연구원)으 6 25 전쟁 중에 소실된 공회당에서는 음악회뿐만 아니라 강연 회가 활발히 열렸다. 1924년 4월 죽산 조봉암이 뒷날 아내가 된 여성 사회운동가 김조이와 함께 이곳에서 명강연을 열어, 500석 좌석을 가득 채운 인천청년들을 사로잡았다. 1933년 11월에는 현제명의 독창회가 열렸다는 기록이 있다. 1957년 3월 1일에 인 로 다시 이전하였다. 그 후 송학동 인천병원은 일본군 헌병대 청 사로 개축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얼마나 이곳에서 당했는지 광복 후 분풀이로 이를 부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전쟁 후 에는 제일교회가 이를 소유하면서 무궁화유치원을 거쳐 무궁화 공민학교 교사로 사용하다가 인성여자중학교 건물이 들어섰다. 인성초교 일대에는 경인철도 부설권을 처음 획득했던 미국인 모 오스가 1898년경 세운 저택과 하와이 이민을 총괄했던 데쉴러 의 주택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맥아더 동상 자리는 독일의 무역상사 세창양행이 1884(1890)년 에 지은 국내 최초의 양관인 사택이 있었다. 빨간색 서양식 기와, 아치형의 네모기둥으로 장식한 테라스 등으로 빼어난 건축미를 자랑했다. 독일 황제의 동생인 하인리히가 1899년 6월 19일 인 천에 왔을 때 이 집에서 왕자를 위한 파티가 열렸다. 일본인의 손에 들어가 청광각 이라 불리며 이런저런 용도로 사용하다가 1922년 인천부가 매입해 부립도서관을 설립했다. 194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공립박물관인 인천시립박물관이 개관했으나 일제강점기에 중앙동 4가에서 잡화상 등을 운영했던 일본인 사 업가 코노가 별장으로 사용하였고, 광복 후에는 송학장 이라는 댄스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1966년에 인천시장 공관으로 사 용되었고 현재는 인천광역시역사자료관으로 사용 중이다. 22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학동 225

115 송월동 하얀 원통 건물, 스케치북에서 사라지다 자유공원을 품고 있는 응봉산의 뒤편에서 격동의 바다를 바라보던 동네가 있다. 그 바다를 통해 기상관 측, 전기, 비누 등 신문물의 보따리가 들어왔다. 송월동은 어머니 품과 같은 동네다. 긴 항해를 마친 뱃사 람들과 수십 리를 달려 온 철마가 그곳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이제 이 동네는 동화 속 이야기처럼 천진 난만한 꿈을 꾸며 그렇게 조용히 살아가고 있다. 참 묘하다. 인천이나 서울이나 기상관측소가 들어앉은 자리가 둘 다 송월동이다. 송월동( 松 月 洞 )이란 한자도 같다. 서울 기상관측소는 1907년 경복궁 근처 중심지역 날씨를 측정하기 위해 세워졌다. 지금도 이곳 마당에 첫눈이 내려야 서울 첫눈으로 발 표된다. 이보다 먼저 생긴 인천기상대는 우리나라 기상관측소 중 가장 큰 형님뻘이다. 공교롭게도 두 관측소가 송월 이란 이름과 연관이 있어 흥미롭다. 소나무에 걸친 달 의 상태가 기상 관측의 중요한 요소였는지 하는 실없는 상상을 해 본다. 인천기상대의 주소는 정확히 말하면 전동이지만 정문이 송월동 쪽으로 나있어 심리적으로 충분히 이 동네에 속한다. 전동 쪽으로는 인일여고와 긴 담으로 굳게 막혀 있다. 북위 동경 응봉산 꼭대기에 둥지 튼 이 기상대는 자유공원 사생( 寫 生 ) 대회의 단골 스케치 포인트였다. 많은 아이들이 높게 솟은 철탑과 하얀 원통형의 독 특한 외관을 한 기상대를 크레파스로 도화지에 그려 넣었다. 그림으로는 친근했지만 가깝지는 않았다. 도로에서 떨어져 깊숙이 들어가야만 닿을 수 있고 육중한 철문으로 굳게 닫힌 이곳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느낌을 갖게 했다. 오랫동안 일반인의 출입 을 금지했던 기상대는 이제 출입이 자유롭다. 송월동 227

116 이제 사생대회 아이들은 그 건물을 더 이상 그릴 수 없다. 그 유서 깊은 원통 모양의 건물이 지난해 사라졌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살아남았던 건물이었다. 기상 하얀 원통을 머리에 이은 듯한 모습이 특징이었던 옛 인천기상대. 대 측은 1960년대와 80년대에 증 개축했기 때문에 문화재 가치가 별로 없다는 이유 로 소리 소문도 없이 철거했다. 인천의 근대문화유산 하나가 다시 한번 손을 탄 것이 다. 10월 22일 새 청사가 들어섰다. 낯설다. 새로 지은 2층 건물이 놓인 기상대 봉우리 의 실루엣이 영 어색하다. 그나마 다행이다. 옛 본관 옆에 있는 작은 빨간 벽돌집은 그 대로다. 이 건물은 언뜻 봐도 100년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인천기상대가 문을 연 지 100년이 되었다. 일제가 1905년 1월 1일 응봉산 정상에 관 측장비를 갖춘 인천측우소 청사를 세웠다. 초대 소장으로 일본 중앙기상대장을 지낸 기상학의 권위자 와다 박사가 부임했다. 그만큼 인천측우소의 위상은 중요했고 막강 했다. 날씨 파악은 한반도 진출의 중요한 업무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인천관측소는 국 내 13개 도시에 있는 측우소는 물론 만주 지방의 관측소까지 통괄했다. 일본 기상대, 1960년대에 세워진 건물로 알고 있어요. 한동안 방으로 쓴 것 같은데 불탄 흔적도 있어요. 기상대 직원의 설명이다. 사실( 史 實 )과 설명 사이에 적지 않은 간극이 있다. 지난 2010년 2월 인천기상대에서 발행한 인천기상대 역사를 찾아서 라는 자료집을 보면 이 창고는 1923년 4월에 준공된 것으로 적혀 있다. 90년이 된 고건축물이다. 이 건물을 런던의 그리니치천문대와 기상정보를 주고받을 만큼 보유 기술도 뛰어났다. 꽝, 꽈앙~ 100년 전 관측소 마당에서 쏜 대포 굉음이 매일 인천시내에 울려 퍼졌 기상대 정문 앞 동네의 기상대 슈퍼. 다. 사람들의 움직임이 부산해진다. 학생들은 책보따리에서 도시락을 꺼내 들고 노동 자들은 기계를 멈추고 식당으로 향했다. 대포 소리가 난 시간은 정각 12시. 점심시간 을 알리는 소리였다. 광복 전만 해도 시계가 흔치 않았기 때문에 관측소에서는 매일 정오에 공포를 쏘았다. 당시로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정오에 대포를 쏜다고 해서 흔히 응봉산을 오포산( 午 砲 山 )이라고 불렀다. 공포( 空 砲 )에 대한 공포( 恐 怖 ). 대포 소리에 맞춰 밥은 먹었겠지만 속은 편치 않았 을 것이다. 시각을 알리는 명분으로 오포를 쏘았다고 하지만, 가까운 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경기( 驚 氣 )가 날 정도로 심한 소음이었을 것이다. 짜증스러운 스 트레스의 차원을 넘어서 그 대포 소리는 식민지 민초들에게 가하는 무언의 으름장이 었다. 22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229

117 1923년에 건축된 기상대 창고와 근대기상100주년 기념 동판. 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여론을 의식해 기상대 측은 이 창고 건물은 보존하기로 했다. 인 천기상대 역사, 기상 현상, 예보 생산 과정, 날씨 체험관으로 구성된 기상역사관으로 탈바꿈한다. 기상대를 막 나서는데 정문 옆의 세계지진관측망 인천관측소 라는 작은 푯말에 눈 길이 갔다. 이곳이 바로 한국 최초 지진 관측 시발점이다. 1905년 3월 24일 인천관측 소 안의 작은 방공호에 기계식 지진계가 설치되었다. 세월이 흘러 1995년에 노후된 장 비는 모두 최첨단 디지털 장비로 교체되었다. 이 관측소는 지난 천안함 사건과 관련된 뉴스가 보도되면서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그날 이 지진계의 바늘은 백령도 앞바다의 수중 음파가 전달되면서 잠시 몸서리를 쳤다. 기상대 정문 앞으로 내려가면 건너편에 자유유치원이 있다. 산 끝자락 가파른 곳에 서 있어 바다를 조망하기 좋은 곳이다. 이 때문에 자리 바뀜이 유난히 많았던 곳이다. 원래 이 자리는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의 주택이 있었다. 우아한 서양식 2층 석조 건축 물로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경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 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토 마고토의 별장으로 사용되었다. 총독이 눈독을 들일만큼 좋은 위치였던 곳이다. 광복 이후에는 미군과 국군이 번갈아 사용하다가 인천상륙작 전 때 건물의 일부가 파괴되었고 1955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송월초등학교가 그 곳 에 세워졌는데 후에 건너편으로 이전하였고 그 자리에 북성초교가 다시 개교했다. 북 성초교는 얼마 안 가 송월초와 통합돼 폐교된 후 그 자리에 인천교육과학연구원이 들 어섰다가 현재의 유치원에 자리를 내줬다. 23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231

118 어스름해지는 시간, 가방을 든 몇몇 사람들이 자유유치원 아랫길 계단을 서둘러 오 른다. 허름한 2층 집 창문에서 간간히 새 나오는 불빛이 골목을 밝힌다. 이곳은 인향야 학이다. 7, 80년대 풍속도의 하나였던 야학( 夜 學 )이 여전히 이곳에 건재하고 있다는 사 실이 놀랍다. 인향야학은 문을 연 지 51년이 되었다. 인천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야학이다. 그 역사만큼이나 우여곡절이 많았다. 학교 건물을 찾아 지금까지 이사 다닌 것만 열한 차례이다. 인향야학은 1962년 도원동에서 처음 문을 열었다. 당시 동장이 글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시작했지만 출발부터 쉽지 않았다. 1966년 용현 2동 재건회관으로 쫓기다시피 옮 겼다. 베니어판을 쪼개 칠판으로 삼고 절에서 불공하고 남은 양초를 모아다 불을 밝힐 만큼 열악했다. 교실도, 학습 교재도 어느 하나 변변치 못한 여건이었지만 가난 때문에 정규 학교에 가지 못하는 학생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2년 동안 천막 교실 생활을 한 적 도 있고, 한 정비공장의 2층을 빌려 교실로 쓰다 공장이 부도가 나서 내쫓기기도 했다. 영어 교사로 봉사 나왔던 미군 두 사람이 부대에 있는 철근과 시멘트 등의 자재를 지 원하겠다고 해 당시 빈터가 많았던 학익동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짓다 말다 하기를 반복하던 겨울 어느 날 강한 바람에 부실하게 골조만 올라가던 학교 건물이 폭삭 내려 앉았다. 이후 몇 번의 짐을 싼 끝에 몇 년 전 이곳 옛 송월동공부방 자리에 다시 불을 켰 다. 요즘은 거의 사어( 死 語 )가 되다시피 한 주경야독 의 단어가 이곳에서는 여전히 유 효하다. 수업은 오후 6시 30분부터 4시간씩 하는데 2교시가 끝나면 라면이나 김치찌개 등을 끓여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지난 50여 년 동안 2,000여 명의 학생과 900여 명의 선 생님들이 이곳을 거쳐 갔다. 23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월동 233

119 구한말 송월동에는 독일인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적지 않게 거주했다. 산 남쪽의 번잡함을 피해 이곳에서 여유롭게 살았다. 그런 이유로 신문물이 들어와 이곳에서 발 아하기도 했다. 1905년 6월 구미인, 청국인, 일본인 등 외국인 39명이 함께 출자해 인 천전기를 설립하고 이듬해 4월 지금의 송월동 남경포브 아파트 자리에 발전소를 차렸 다. 독일에서 가져 온 100kW 규모의 직류 화력 발전기 두 대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전 기가 들어 온 것은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당시 조선일보의 전등 관련 광고를 보자. 자는 수밧게 업던 암흑세계를 백주( 白 晝 ) 와 가티 밝힌 전등은 경이로운 존재였다. 캄캄한 세상에서 불빛을 모르고 살든 우리 조상을 도라볼 때에 일면 가이업슨 생각 이 들 정도였다(1926년 8월 5일자). 송월동 동화마을 개업 한 달 만에 1,000여 개, 2개월 후에는 1,800여 개의 등이 설치돼 인천의 밤을 환 히 밝히기 시작했다. 인천전기는 한동안 그런대로 호황을 누려 1910년 말에는 690가 구에 3,860 등을 공급했다. 하지만 급증하는 수요를 충당할 수 없는 데다가 새 설비를 도입할 능력이 없어 결국 1912년 7월 일한와사전기에 매각되고 말았다. 그 후 이 회사 는 1915년 9월 경성전기로 변경되었고, 1922년 7월에는 인천의 발전소가 문 닫으면서 서울 용산에서 전기를 받는 처지가 되었다. 신문물 보따리에 싸여 들어온 것 중에 비누가 있었다. 인천서 비누를 처음 만든 것 은 1895년경이지만 본격적인 비누공장이 세워진 것은 1912년 일본인 오다 가 송월동 에 애경사( 愛 敬 社 ) 를 설립하면서부터다. 1954년 제주도 사람 채몽인 씨가 이 공장을 인수해 애경유지공업(주) 를 창립해 종업원 50명과 함께 비누 사업을 시작했다. 애경 은 바로 전국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애경 사사( 社 史 )에 의하면 미향 이란 브 랜드의 비누만 한 달에 100만 개를 팔아 당시 경인국도를 달리는 차량 대부분이 애경 유지 트럭이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이것이 오늘날 애경그룹의 모태다. 앞서 언급한 채 몽인 씨는 애경그룹 장영신 회장의 남편이다. 23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월동 235

120 지금도 송월동에는 일본식 주택이 많이 남아있다. 특히 송월교회 밑으로 모양이 비 슷한 일식 주택이 많이 눈에 띈다. 동일방직과 이천전기 사택으로 사용되었던 집들이 다. 비탈에 집을 짓고 곳곳에 계단을 만들어서 골목이 아기자기하게 이어졌다. 세월에 못 이겨 퇴락하던 이 골목이 최근 대대적으로 화장( 化 粧 )을 넘어 분장을 했 다. 골목에 들어서면 마치 테마파크 입구에 들어선 느낌이다. 가스 밸브함을 이용해 만든 오즈의 마법사 의 양철 나무꾼을 비롯해 헨젤과 그레텔, 빨간 모자 등 이름만으 로도 친숙한 동화 속 장면들이 벽을 컬러풀하게 수놓았다. 골목 이름도 아예 송월동 동화마을 이라고 붙였다. 노인네들만 사는 동네라 수리하고 칠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어 그냥 살아왔는데, 이렇게 해 주니 고맙지. 손자들이 오면 좋아할 것 같아요. 요즘엔 서울 사람들이 와서 사진도 많이 찍고 가더라고. 벤치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던 주민 강태용 씨는 이제 곧 자신의 집도 칠해 줄 거라 면서 큰 기대를 했다. 이 동네 사람들의 삶도 동화 같이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하는 바람을 하면서 발걸음을 옮겼다. 송월교회 내리막길 옆에는 우물이 있다. 앞에는 녹슨 펌프도 있다. 길 가던 주민에게 물으니 오래전에 폐쇄되었다는 말과 함께 골목 아래쪽에도 우물이 하나 더 있다는 정 보를 준다. 아래쪽 우물은 뚜껑이 열쇠로 잠겨 있지만 얼마 전까지 사용한 흔적이 있다. 이 동네에서 60년 가까이 살아 온 오익환(88) 할아버지는 송월동의 변천사를 상세히 꿰 차고 있다. 그는 천안에서 철도 관련 일을 하다 광복 직후에 인천역 근처로 전근 오게 되었다. 인천역 근처에 부두가 있었을 때는 이 동네에 배를 부리는 선주( 船 主 )들이 많이 살 았지. 저 우물들 앞에 오징어를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씻었던 게 엇그제 같은데 암튼 이 동네는 산 밑이라 그런지 물이 좋아. 아무 데를 파도 물이 나왔지. 송월동에는 일본식 가옥들 뿐만 아니라 오래된 한옥이 많이 남아있다. 송월초등학 교 밑으로 가면 인천에서는 이제 보기 드문 기와집 골목이 나온다. 1950년대 중반에 조성된 도시형 한옥촌이다. 조성된 지 반세기가 넘다보니 곳곳이 낡았지만 골목에는 기와집의 우아한 자태와 기품이 여전히 흐른다. 만석동 쪽으로 언덕을 내려오면 경인전철 변에 닿는다. 기찻길 옆에 송월시장이 있 다. 1937년 2월 송월공설시장으로 개설되었는데 가축시장의 기능을 하고 있어 흔히 돼지장터 라고 불렀다. 만석동과 이어진 건널목에 육교가 생겼고 철로변에 높은 담이 쳐지면서 시장은 급격히 퇴락했다. 인천역은 송월동 동선 안에 있다. 경인선이 시작되고 끝나는 이곳을 인천사람들은 하인천역 이라고 부른다. 동인천역이 한때 상인천역이라 불린 것에 대한 댓구다. 지 23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월동 237

121 박정희 전 대통령을 태우고 인천역에 도착한 경인선 복선 축하 열차. 금의 역사( 驛 舍 )는 1960년 9월 17일에 건립된 이후 특별히 성형 하지 않은 그대로다. 덕분에 시대물 드라마나 영화의 배경으로 종종 등장한다. 허벅지 근육통이 생길 만큼 계단을 오르내리거나 조바심 나게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일 없이 광장에서 개찰구를 거쳐 플랫폼까지 평형으로 걸어간다. 무엇보다 사람이 열차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열 차가 다소곳이 사람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원하는 칸에 들어가 원하는 자리에 앉을 수 있는 편안한 곳. 경인선 중에 이만한 순수함과 소박함을 지닌 역사는 없다. 인천역은 초창기에는 사람보다 화물을 주로 처리했다. 월미도가 유원지로 명성을 날리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고 한때 앞문보다 월미도 방향으로 난 뒷 문이 더 발달하기도 했다. 광장 옆 구석에 인천역이 처음 생겼을 때 심었던 것으로 추 정되는 커다란 라일락이 힘겹게 서있다. 인천역은 열차에게 엄마 품이다. 세 시간 가 까이 바다를 향해 달려온 경인선 기차는 인천역에서 잠시 숨을 고른다. 그렇게 인천역 은 한 세기 넘게 사람과 열차를 품 안에 받아 주고 다시 라일락 향으로 기운을 회복시 켜서 먼 길로 보냈다. 23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월동 239

122 그때, 이곳 송월동 Map & Photos ➊ 인천기상대 1899년 인천, 원산, 진남포 등 해관에 기상관측소가 설치된 5년 후인 1904년 우 리나라 최초로 일기예보를 알리는 인천기상관측소 가 설치되었다. 중구청 뒷길에 있던 스이쯔 여관에서 임시 기상사무실을 개설하고 기상관측을 시작했다. 이어 1905년 1월 1일 대한제국 황실 재산이던 응봉산 정상 현 위치에 인천관측소를 신축해 이전하게 된다. 목조 2층에 210m2 규모의 이 근대적 기상관측소에는 당시 로서는 첨단 장비인 풍력계 지동계 일조계 자동강우계 백엽상 증발계 등 이 갖춰졌다. 인천관측소는 1910년 8월 조선총독부관측소로, 1939년 조선총독 부기상대로 이름이 바뀌었다. 1948년 정부 수립 때까지 전국의 관측소를 통할하 고 일본 중앙기상대, 런던 그리니치천문대 등과 기상정보를 교환하는 중앙기상대 역할을 했다. 초기에 일기예보는 낮에는 깃발, 밤에는 전등으로 전달됐다. 큰 삼각 형 깃발을 이용해 동풍은 녹색, 서풍은 청색 등으로, 사각형 깃발로 맑음은 흰색, 비는 청색 등으로 예보됐다. 밤에는 깃발 대신 여러 가지 색깔의 큰 전등을 내걸 어 날씨를 알렸다. 라디오를 통한 기상 방송은 1928년부터 시작됐다. 1931년부 터는 해상 날씨를 알려주는 어업기상방송도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정부 수립과 함께 서울로 올라갔던 중앙기상대는 6 25전쟁과 함께 잠시 인천으로 기능이 옮 겨졌다가 1953년 11월 서울로 다시 돌아갔다. 1963년 3월 기상청은 지진측정기가 설치됐던 그 자리에 세계 지진관측계를 다시 설치한다. 이 지진측정기는 1995년 7월 디 지털 지진측정기로 교체되기 전까지 인천 해상 등 인천지역에 서 발생한 크고 작은 지진 25차례를 측정한 뒤 역사 속으로 사 라졌다. ➍ 인천 전기 발전지 인천에서의 전등 사업 은 1905년 6월 각국 외국인 39명의 출자한 인천전기주식회사로 부터 시작된다. 자본금 12만5,000원으로 세 워진 이 회사는 1906 년 4월 당국의 특허를 얻고 옛 한국전력 인천지점 창고 자리에 다 발전소를 차렸다. 100kW 규모의 직류 화력 발전기 두 대로 시작한 사업이었다. 처음 발전소가 있었던 남경포브 아파트 내 에는 인천 전기 발전지 라는 표지석이 놓여 있다. ➎ 아사히 양조장 청주공장 1919년 10월 도원동에 아사히양조 소주공장을 개업했다. 인천 에는 양조에 필요한 맑은 물이 적어 양조가 어려웠는데 도원동 에서 지하수를 찾아내고 소주 생산을 시작했다. 이 소주공장에 앞서 아사히 양조는 송월동에서 아사히 양조장 청주공장을 운영 하고 있었다. 는 꽤 번창했던 시장이었으나 철도 길이 담으로 막히면서 만석 동과 단절돼 상권이 급속히 위축되었다. ➐ 파울 바우만 주택 독일 상인 파울 바우만의 주택으로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 ~1907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조 선 총독을 두 번이나 지낸 사이또 마고토의 별장으로 사용되었 다. 총독 사이또는 1919년 8월 13일 조선에 부임하러 온 날 당 시 경성역에서 나운규 열사의 저격을 받았던 인물이다. 인천상 륙작전 시 일부가 파괴되기도 했고 1955년 3월 30일 송월초등 학교가 들어서면서 철거되었다. ➑ 애경비누 이야기 1883년 개항 직후, 인천에는 서양의 증기선들이 싣고 온 박래 품( 舶 來 品 )들로 넘쳐났다. 그동안 양잿물을 사용했던 조선에서 신식 비누 가 날개 돋힌 듯 팔리자, 인천 거주 외국인 몇몇이 1895년에 비누 공장을 차렸다고 하는 이야기만 전해지고 있다. 정작, 비누가 인천에서 생산된 것은 1912년 송월동에 애경사 ( 愛 敬 社 ) 가 세워진 후부터였다. 1962년 경쟁이 치열해지자 애 경은 본사를 영등포로 이전해 갔고, 오늘의 애경그룹 으로 성장 했다. ➒ 오포와 싸이렌 기상대 ➒ ➊ ➋ ➌ 동인천역 ➐ 기상대 올라가는 길 ➏ 만석동 ➎ ➍ ➑ 선광아파트 차이나타운 인천역 패루 답동사거리 파라다이스 호텔 월미도 ➋ 기상대 창고 1923년 4월 본관 건물 옆에 준공된 고건축물이다. 이 창고는 일제강점기에 건축 된 인천기상대 건물 중 유일하게 현존하는 서양식 건축물이다. 한때 기상대가 방 을 들여 사용하기도 했다고 한다. 기상대 측은 이 창고 건물을 보존해 인천기상대 역사, 기상 현상, 예보 생산 과정, 날씨 체험관으로 구성된 기상역사관으로 탈바꿈 할 계획이다. ➌ 세계지진관측망 인천관측소 인천기상대 정문 한편 방공호 안에 있는 지진관측 소는 한국 최초 지진관측의 시발점이다. 우리나라 의 지진 관측은 1905년(대한제국 광무9년) 3월 24 일 인천관측소에 기계식 지진계가 설치되면서 시작 됐다. 이 측정계는 설치 이후 1943년까지 인천의 지 진을 측정했으나 1945년의 광복과 1950년 6 25 전쟁으로 중단된 뒤 20여 년 동안 암흑기를 보낸다. ➏ 송월시장 현재의 만석고가교(인도교) 옆에 1937년 2월 설립된 가축시장이 다. 질퍽한 부지에 특별한 건물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말을 키우던 곳이라 하여 흔히 말깐(말간) 또는 돼지장터라 불렀다. 광복 후 만석동 공장에서 일하는 근로자들이 많이 이용해 한때 오포는 1906년 2월 처음 실시했다. 홍예문 위에 있던 인천상비 소방소의 감시탑에서 사이렌으로 시보를 알리던 1925년까지 계 속되었다. 이후 점심때가 되면 공습경보를 알리는 듯한 긴 사이 렌 소리가 정오를 알렸다. 광복 후, 사이렌 소리는 정오가 아닌 자정에 울렸다. 1945년 9월 7일 미 군정청이 밤 12시부터 새벽 4시까지를 통행금지 시간으로 정했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까 지만 해도 통금 싸이렌 소리는 인천의 밤하늘을 매일 엄습했다. 24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송월동 241

123 율목동 오늘 찍은 사진, 현상해 보니 과거 가 나왔다 7,80년대 TV 연속극에서 좀 산다는 동네로 단골처럼 등장한 곳은 서울 가회동 아니면 성북동이었다. 풍채 좋은 한옥집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인천에도 한때 이에 못지않은 동네가 있었다. 밤나무골로 불 리던 중구 율목동( 栗 木 洞 )이다. 이제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밤나무도, 기와집도 거의 사라졌지만 아직도 근근이 남겨진 호젓하고 조붓한 골목길을 걷다보면 인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흔적들을 만날 수 있다. 밤나무 마을 율목동이 부자 동네가 된 것은 쌀 때문이었다. 1906년 농상공부 허가 쌀 중개업체인 근업소가 율목동 55번지에 문을 열면서 부자 동네가 되었다. 근업소( 勤 業 所 )는 간혹 권업사 라고도 불렀는데 이는 솟을대문 위에 걸려 있던 근업소의 근( 勤 ) 자를 권( 勸 )자로 잘못 읽었거나 그냥 쉽고 편하게 발음한 것으로 추측된다. 근업소는 40년대 말경에 폐쇄되었지만 현판은 1970년대까지도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이 동네 를 권업소 말(마을) 이라고 불렀다. 이 인천근업소 주변에 여주, 이천 등 전국에서 생산된 쌀을 일본에 수출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 모이고 돈이 꼬이기 시작했다. 주로 영남 출신 상인들이 미곡 중개를 주 름잡았는데 업무상 일본어 능통자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쌀장사로 돈을 번 그들은 근업소 근처에 단아한 자태의 한옥을 지어 살면서 이 마을은 밤나무골 새동네 로 불렸 다. 자료에 의하면 1910년 당시 율목동은 235가구에 인구 1,049명으로 내동과 함께 부 자촌의 쌍벽을 이룰 만큼 기와집이 제법 많았다. 4, 50대 인천 중년들에게 율목동 하면 생각나는 것 중의 하나는 율목풀장 일 것이다. 율목풀장은 1972년 6월 22일 현재의 어린이공원에 개장했다. 몇 발자국만 떼면 바닷가 였던 인천에서 풀장은 그리 흔한 시설이 아니었다. 염전이나 송도유원지에서 짠물로 율목동 243

124 멱을 감던 아이들은 여름방학 중에 율목풀장 한번 가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렵사리 풀 장에 가면 입장료 생각에 온몸이 퉁퉁 불 정도로 물 속에서 놀았다. 이곳에서는 주로 남자들이 수영을 즐겼는데 당시 만해도 도심 한가운데 노천풀장에서 여성들이 노출이 심한 수영복 입기를 꺼려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1900년대 초반까지 인가가 거의 없던 이 언덕배기는 일본인들이 9천여 m2의 공동묘 지를 조성했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 상당수가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 본군이었다고 한다. 1944년 공원으로 바뀌었지만 사자( 死 者 )의 땅 으로 인식돼 한동안 인적이 드문 야산으로 남아있었다. 뼈가 나뒹굴던 산꼭대기 땅이 풀장 으로, 그야말로 환골탈태하면서 인천의 명소가 되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지하수를 퍼 올려 쓰던 이 풀장에 시체 썩은 물이 흘러든 다는 괴담이 돌곤 했다. 아마 풀장에 가지 못하는 아이들이 퍼뜨린 소문일 테지만 아무 튼 입술이 파래지도록 물이 차가웠던 것은 사실이다. 이 풀장은 1996년 폐쇄되었고 그 이듬해 다시 공원으로 조성되었다. 공사를 하던 중 땅속에서 귀와 목이 잘린 문인석 6점이 거꾸로 매장된 것을 발굴했다. 일제가 민족혼 을 말살하려고 저지른 행위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중 3개의 문인석이 현재 율목공원 맨 위쪽에 세워져 있다. 율목풀장 개장식 날 모습 ( ) 율목동 하면 언덕 위 시립도서관을 빼놓을 수 없다. 1946년 일본인 정미업자의 별장 자리로 옮긴 시립도서관은 6 25 전쟁 통에 5,000권이 분실 혹은 소실되었지만 전국에서 최초로 참고열람실을 개실하고 2층짜리 신관을 신축하는 등 한동안 전국 도서관의 모델 하우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시립도서관은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2008년 말 폐관을 결정하고 구월동에 새 터를 마련하고 이 자리는 율목도서관에 내줬다. 24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율목동 245

125 옛 시립도서관 신관 인천에서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도서관에 대한 추억 하나쯤은 간 직하고 있다. 좌석을 잡기 위해 새벽 공기를 헤치고 싸리재 고개를 거쳐 성산교회 앞 언덕을 숨 가쁘게 올라가던 일. 발걸음을 뗄 때마다 삐걱거리던 구관 목조 계단. 바다 가 내려다보이는 양지바른 신관 앞 벤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읽었던 소설책들. 우리나라 건물 구조와는 사뭇 다른 목조 이층집(구관)이 도서관 마당 끝에 자리 잡 고 있다. 건물 옆에는 일본식 정원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분수 연못과 여러 개의 석등 이 세워져 있다. 이 집의 옛 주인은 역무 정미소 로 이름을 날렸던 정미업자 리끼다께 ( 力 武 平 八 ). 정미소로 떼돈을 번 그는 전망 좋기로 소문난 이곳에 정원이 딸린 대저택 을 짓고 살았다. 그는 정원의 석등에 불을 켜 놓고 일본 정미업자들과 함께 항구와 신 흥동 정미소에서 새어나오는 불빛을 내려다보며 밤새 흥청망청 연회를 벌였으리라. 광복 후 이곳에 있던 석등과 돌들 일부가 관리 소홀을 틈타 인근 저택의 정원으로 스며 들어갔다는 소문도 있다. 1962년 준공한 2층 본관 옥상에 올랐다. 사방팔방으로 시야가 트였다. 월미도, 인천 대교, 수도국산, 수봉산, 청량산, 계양산 아파트가 없던 시절, 전망 하나로만으로도 이 동네에 사는 맛이 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밑으로 일본식 집들의 지붕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율목동은 산을 중심으로 북동 쪽은 한옥 동네, 서남쪽은 일본식 집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한옥이 있던 곳은 거의 빌 라가 들어섰지만 아직도 반대편은 왜식풍의 주택들이 많이 남아 있어 일본 동네의 분 24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율목동 247

126 위기가 물씬 난다. 이곳에는 1920년대에 일본인들이 문화주택이라고 부르며 지었던, 남향으로 넓은 창을 낸 작고 아담한 이층집들이 많이 남아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 근에 다다미방 수리가게가 있었다가 지금은 없어진 것으로 보아 이제는 대부분의 집 들이 외관만 왜색풍이지 내부는 현대식으로 변경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끔 그 골목에서 사진기를 든 허리 구부정한 백발의 노신사를 만난다면 그는 일제 강점기에 진센(인천의 일본어 음) 에서 태어나고 자라다가 패전 후 일본으로 건너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1963년 6월 2일 일요일 대낮, 답동에 있는 무허가 화공약품 공장에서 폭발 사고가 발 생해 18명이 사망하고 50명이 화상을 입었다. 1969년 인천지역에서 137명의 사망자가 발생하는 콜레라가 발생했다. 1970년 8월 8일 하오 송현동 쪽 동인천지하도가 붕괴돼 7명이 압사하고 24명이 다치는 참사가 일어났다. 80년대까지 인천에서 발생하는 크고 작은 사고의 사망자 수습과 부상자 치료를 도맡아 한 병원이 기독병원이었다. 기독병 원은 대규모 병원들이 생기기 전까지 인천 에서 가장 규모 있는 병원이었다. 주위 사람 들이 조금 큰 병에 걸리면 으레 찾아가는 병 원이 바로 여기였다. 인천기독병원이 중구 율목동 237번지에 문을 연 것은 1952년 5월 26일이다. 실제 기 독병원의 태동은 그 전 해인 1951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난지 부산에서 열린 기 독교대한감리회 총회에서 인천, 강화, 천안 등 세 곳에 병원을 세울 것을 결정한 데서부 터다. 실제 뿌리는 더 거슬러 올라가야 한 다. 병원 자리에 1923년 1년간 인천에 주재 했던 감리교 여선교사 코스트럽이 개설한 231m2(70여 평) 부지의 일반 진료소가 생겨 났고, 1924년에는 아동보건소가, 1931년에는 인천부인병원이 개원했다. 일제는 1940 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선교사들이 철수하자 미국 감리교 재산이었던 이곳을 접대부 검진소로 사용했다. 주로 인근 용동의 기생 혹은 신흥동의 창녀나 술집 접대부들을 대 상으로 한 검진소의 기능을 했다. 일본이 패망하면서 미군이 접수하여 정보기관 사무 실로 사용하다가 미국 여선교사들이 다시 내한하면서, 재환원 원칙에 따라 교회에 반 환했던 것을 병원으로 사용한 것이다. 전쟁 후 정문에 걸린 대한감리회인천기독병원 이라는 정식 간판 옆에는 북한피난민연합회진료소 라는 간판도 함께 걸었다. 황해도 벽성군 출신인 강석봉 초대 원장을 비롯해 적지 않은 멤버가 이북 출신이거나 북쪽에 서 의료 생활을 하던 인연이 있어서였는지 모른다. 24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율목동 249

127 초라한 병원이 크게 이름을 낼 수 있었던 것은 미국 감리교 여선교부의 지원으로 새 로 도입한 엑스레이 기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개인병원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설 비이지만 당시 서울을 제외한 경기도 일원에서 이 같은 최신 의료 설비가 있는 곳은 기 독병원이 유일했다. 이 엑스레이 기기가 들어왔다는 소문은 레이저 광선처럼 빠르게 입에서 입으로 퍼져나가 인천, 경기 지역은 물론 충청도에서까지 환자들이 밀려들었 다. 덕분에 기독병원 은 인천의 대표적인 지명이 되었다. 시내에서 길이나 위치를 말 할 때는 경동 싸리재 기독병원 앞 이런 식으로 이 병원 이름을 입에 오르내렸다. 25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율목동 251

128 이 병원 안에는 전문대학이 있었다. 1973년 간호사를 양성하기 위해 인천간호전문 학교가 병원 한 공간을 빌어 개교했다. 1978년에 인천간호전문대학이 되었고 이듬해 시청 보다 먼저 현 시청의 뒤편인 남동구 간석동으로 이전했다. 이후 인산전문대학으 로 변경되었다가 경기도 안산시로 이전하면서 현재의 안산대학교가 된다. 동인천과 가깝고 조금만 올라가도 외졌던 율목동은 6,70년대 청춘남녀의 데이트 코 스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인도집 이라 불린 유명한 도나스(도넛)집이 있었다. 기독병 원 옆 골목에 있던 인천도나스집은 70년 대 초까지 얄개들의 연애 장소로 최고의 인기 를 누렸다. 세간에서는 그곳을 연애당 이라고도 불렀고, 교외지도 담당 선생님들의 단 골 순찰 코스이기도 했다. 방금 튀겨 나온 직석 도넛에 흰 설탕을 뿌려먹던 그 맛도 맛 이지만 라디오를 통해 재즈나 컨트리송 같은 음악도 곁들여 주어 학생들이 좋아하던 장소였다. 도넛도 유명했지만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블루베리잼을 듬뿍 바른 샌드위치와 팥 과 연유, 젤리, 파인애플 등이 수북이 담긴 팥빙수가 일품이었다. 여드름이 숭숭 돋아 난 연인들은 달콤한 도넛과 단팥죽을 먹고 나서, 인적이 드문 인천의 몽마르트 언덕 율목공원으로 장소를 옮겨 그보다 더 달콤한 데이트를 즐겼으리라. 신기하게도 옛 인도집 바로 건너편 길에는 즉석 도넛을 파는 노점이 있다. 예전에 도나스로 유명했던 집이 저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아세요? 며칠 전에 어떤 아저씨가 얘기해 주더라고요. 엄청 맛있었다며 그 맛을 결코 잊지 못한다고. 추억은 머릿속에만 있는 게 아니다. 달달하게 감도는 혀끝의 기억은 참 오래간다. 골목에 잠들어 있는 우리의 오감을 가동시키는 추억거리들이 많아 고맙다. 율목동 골목에서는 무궁무진한 인물들의 사연이 읽혀진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은 맹인들의 세종대왕 송암 박두성이다. 강화 교동에서 태어난 그는 일제 강점기에 한글 점자를 창안하고 시각장애인 교육에 평생을 바치며 암흑 세상에 한 줄기 빛이 되었던 인물이다. 송암이 언제부터 율목동에 살았는지 모르지만 1935년 인천영화학교 교장에 부임하던 시절부터 1963년 8월 25일 76세의 일기로 별세할 때까지 율목동 25-1번지에 25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율목동 253

129 송암 박두성이 살던 집 거주했다. 그는 대문에 커다란 태극 문양을 그려 넣어 동네사람들이 시각장애인들에 게 자신의 집을 쉽게 알려 줄 수 있도록 배려했다. 원래 방이 7칸 있을 만큼 컸던 그 집은 현재 도로와 상가 등으로 잘려나갔고 아무런 표식이 없어 낡고 오래된 기와만이 그 집의 연조를 말해 주고 있다. 한동안 대문 앞에 세워져 있던 표지석은 현재 율목공원에 놓여있다. 집주인이 자신의 집을 기웃거리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못마땅해 다른 곳으로 옮겨달라고 했다는 후문이다. BBS회관 뒷모습 25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율목동 255

130 그때, 이곳 율목동 Map & Photos ➊ 인천정보산업고(옛 인천고 교사) ➍ BBS회관 ➏ 경아대 이 자리는 원래 1933년 인천고(인상)가 자 리를 잡은 곳이다. 인천고는 1971년에 남구 주안동으로 이전하고 그해 그 자리에 중앙 초교가 설립된다. 1995년 중앙초교는 연수 구 연수동으로 이전하고 1995년도에 현 인 천정보산업고가 개교한다. 교정을 둘러보면 아름드리 은행나무들이 많고 벤치는 일제강 점기에 사용한 오래된 돌로 만들었으며 연 못 주변에 이 돌들이 많이 깔려 있다. 본관 뒤편에 가면 옛 건물에 사용했던 돌들이 쌓 여있다. 1963년 2월 율목동 244번지에 건평 148m2(45평)의 아담한 국악 회관이 경아대( 景 雅 臺 ) 란 이름으로 준공되었다. 현판은 박세림 선생이 썼다. 경아대 설립 후 인천국악협회는 기존의 시조부와 기악부 외에 민요부, 농악부, 창악부(국극부), 문예부, 정악부 그 리고 무용부를 산하에 두고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➐ 성산교회 마당 돌 도원역 ➊ 송림동 배다리철교 동인천역 율목도서관 성산교회➐ ➋ 율목공원 신흥동 ➎ ➍ ➏ ➌ 박두성 생가 인천도나스집 기독병원 경동사거리 긴 담 모 퉁 이 동인천 ➋ 오례당 농원 1900년 인천에 거주한 중국인 해관 통역관 오례당(우리탕)이 약 3만 3,057m2(1만 평)의 율목동 농원에 여러 종의 과수를 재배했다. 율목동 옛 시립도서관 자리도 원 래는 오례당의 과수원이었다. 그의 아내는 포르투갈인으로 대지주이자 부동산 임 대업자였는데 외국인들 사이에 평판이 그리 좋지 않았다. 오례당과 그 부인은 현재 청학동 외국인 묘지에 잠들어 있다. ➌ 부영( 府 營 )공동숙박소 당시 인천부가 설립 운영했 던 일종의 사회 시설이다. 인 천부는 1921년 9월 1일 시 내 율목리 58에 인천 최초의 노동자 공동숙박소를 준공했 다. 조선식 온돌 25칸, 바라 크 2동 및 변소 1동으로 하 루 50명까지 수용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여인숙 또는 하숙 등의 숙박도 못하는 빈곤 노동자들에게 숙박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시설이었다. 숙박료는 5전, 식사 한 끼에 15전이었다. 1921년 8월 5일 부설 직업소개소도 함께 개설했다고 인천부사는 기록하고 있으며 야학을 통해 노동자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1964년 BBS경기도(인천)연맹이 조직되었다. 1968년에 현 율목 공원 아래 당시로서는 보긴 드문 현대식 3층 규모의 경기도 청 소년회관을 기공해 현재까지 인천연맹 사무소로 사용하고 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이곳은 인천 청소년들의 동아리, 문화 활동 주 무대이기도 했고 70년대에는 대공 관련 형사들의 출입처이기도 했다. 야간 직업청소년 학교를 운영하는 등 불우한 청소년에게 장학금 등 각종 지원을 하고 있다. ➎ 일본인 공동묘지 율목공원 아래 구석에는 하라다( 原 田 ) 소하 10년 1935년 이란 비석이 하나 있다. 아마 이 비석은 부근 일본인 묘지에서 사용되 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율목공원은 원래 일본인들이 9,000 여m2 의 공동묘지를 조성했다. 일설에 의하면 묘지 상당수가 임오군 란과 갑신정변 때 목숨을 잃은 일본군이었다고 한다. 옛 시립도서관 아래에 있는 성산교회에는 마당 곳곳에 오래된Ⅰ 자형 돌들이 많이 깔려 있다. 일제강점기 신흥초교 위에 있던 일 본절 동본원사 층계 돌 혹은 교회 아래 있었던 인천 최초의 일본 인 화장터에서 이용한 돌들로 추측되고 있다. 같은 돌로 추정되 는 돌들이 교회 바로 아래 공영 주차장에 많이 쌓여 있었고 일부 는 주차장 시설로 활용되고 있다. 25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율목동 257

131 신흥동 피고 지고 또 피고 그렇게 꽃처럼 흘러간다 한때 일본 동네였던 신흥동 골목을 걷다보면 국치( 國 恥 )의 흔적이 곳곳에서 배어난다. 동네는 사람이 지 키는 것이 아니라 집이 지킨다. 그들은 떠난 지 오래되었지만 남아있는 거리와 가옥에서 불현듯 일본인 의 탐심과 욕정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신흥동에 수인선의 종착역을 만들고 수탈의 철길을 깔았다. 그 길을 따라 조선인의 울분과 탄식이 실려 왔다. 신흥동( 新 興 洞 )은 글자 그대로 광복을 맞아 새롭게 발전하고 부흥하자 는 뜻에서 그 이름을 얻었다. 이전의 동네 이미지를 벗어 버리겠다는 의지도 담겨 있다. 지금은 많 이 사라졌지만 광복 당시 곳곳에는 적산( 敵 産 )가옥 등 왜색풍의 건물이 즐비했다. 대표적인 건물이 정미소 쌀 창고였다. 옛 도립병원(현 보건환경연구원)과 수인역 인근에는 가등( 加 藤 )정미소, 역무( 力 武 )정미소 등 크고 작은 정미소가 있었다. 1930년 대 일제는 경기도 이천, 여주 등 곡창지대의 쌀을 이곳에서 정미한 후 일본으로 반출 하기 위해 수인선 협궤열차의 기찻길을 창고 안까지 연결시켰다. 현재의 삼익아파트 부근까지 바닷물이 밀려들어왔는데 정미소에서 나온 누런 왕겨가 영종도 앞바다까지 둥둥 떠다녔다고 한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이 창고들은 한동안 사동 삼거리부터 수인역까지 어깨를 겹치 듯 줄지어 있었다. 고려정미소, 선경창고 등으로 불리다가 70년대 들어서 하나둘씩 디 스코텍과 카바레 등으로 용도 변경 되었다. 인근에 민가도 없을 뿐 아니라 천장 높게 두꺼운 벽돌로 지어져 간단히 손을 보면 훌륭한 댄스홀이 되었다. 이제는 이 마저도 거의 다 없어졌다. 대형 마트, 가전 양판점, 물류 창고로 사용하는 서너 동의 창고만이 옛 흔적을 초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앞쪽의 고층 아파트 옥상에 신흥동 259

132 올라가 내려다보니 아파트에 둘러싸인 창고가 손바닥 만하게 보인다. 한때 쌀가마니가 가득했을 빛바랜 물류 창고 한 군데를 들어가 보았다. 옛 모습 그 대로 삼각 구조를 한 여러 개의 나무가 천장을 지지하고 있다. 너무 낡아 가끔 떨어지기도 해서 몇 개는 새것으로 지지대를 만들었지만 벽은 아주 단단해서 사용하는 데 별문제 없습니다. 창고 주인은 이 창고가 80여 년의 풍상을 이겨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까. 창 고 거리 부근에는 없어진 한 면을 담벼락 삼아 살고 있는 집들도 종종 눈에 띈다. 신 흥동 창고거리는 붉은 벽돌에 말라비틀어져 달라붙은 담쟁이 넝쿨처럼 그렇게 퇴락 하고 있다. 창고 뒤편으로 가면 곳곳에 일본식 집들이 모여 있다. 1920년대 일본인들이 문화주 택이라고 부르며 지었던 집들로 광복이 되면서 적산가옥으로 등재되었다. 적산( 敵 産 ) 가옥은 말 그대로 적의 재산으로 일본인들이 남겨 놓고 간 집들이다. 살던 집까지 짊 어지고 갈 수 없어서 남겨진 주인 없는 집이었다. 광복 후 서로 차지하겠다고 쟁탈전 을 벌이자 국가에서 민간에게 불하했다. 6 25전쟁 때 이 동네는 답동성당 때문에 살아남았지. 맥아더가 십자가 달린 큰 성당 부근 쪽으로는 함포 사격을 하지 말라고 했던 거지. 왜놈들이 자손만대로 살 작정을 했 는지 집을 튼튼하게 지어서 크게 손질하지 않고도 살아왔는데 이젠 슬슬 그 끝이 보여. 몇 가구로 쪼개져 있던 나가야( 長 屋 )식 일본집을 터서 구멍가게를 낸 주인장의 말이 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모르지만 신흥동은 개발의 바람이 비껴나가 일본인들이 남긴 26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신흥동 261

133 26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263

134 잔재들이 비교적 원형대로 보존되고 있다. 이 가게에서 신흥동 로터리 방향으로 가면 역사책에서나 보았을 것 같은 집 한 채가 있다. 한눈에 봐도 세월의 먼지를 만만치 않게 뒤집어 쓴 왜식풍 이층집이다. 외벽을 둘러싼 널판지들은 원래 저렇게 시커멓지 않았으리라. 집에 대한 내력을 알고 싶었지 만 안에는 아무도 없는 듯했다. 대신 뒷집을 방문했다. 우리집도 예전에 산파가 살았던 집으로 40년이 넘었는데 저 집은 처음 이사왔을 때 봤던 모습 거의 그대로예요. 족히 7, 80년은 되지 않았을까. 저녁 늦은 시간까지 기다렸지만 끝내 그 집의 주인은 만나지 못했다. 그 집에 아직 도 다다미가 깔려 있는지 확인하지 못하고 뒤돌아선 것이 못내 아쉽다. 큰길을 건너 돌층계를 오르면 해광사 란 절이 있다. 도심에서 만나기 드문 한적한 사찰이다. 원래 해광사는 1910년에 일본인이 지은 화엄사 절이었다. 그 흔적이 절 입 구 돌기둥에 희미하게 새겨져있다. 1994년에 왜색풍의 절을 헐고 대웅전을 다시 지었 다. 대웅전 뒷쪽과 옆쪽에는 오래된 벽돌집 두 채가 있다. 눈길을 끄는 것은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뒤쪽 건물 시왕전이다. 문을 열어젖히니 순간 서늘한 기운이 바깥 공기를 가른다. 이 건물은 슬픈 이야기를 품고 있다. 이곳에는 6 25전쟁 전몰장병들의 유해 40 ~ 50기가 모셔져 있다. 얼마 전까지 지하 에 있던 것을 1층으로 옮겼다. 아마 6 25 전쟁 중에 전사한 경기도 출신 장병들을 이리 모신 것 같아요. 유해들은 하나같이 이름은 없고 그냥 김 일병, 박 이병 그런 식으로 표시해서 찾아가는 사람 도 없어요. 한동안 인천시 차원에서 위령제도 지냈는데 지금은 그것도 없어요. 다 잊 혀진 거죠. 황진 스님의 설명이다. 6 25전쟁 때 인천을 점령한 인민군은 해광사에 오금이 저리게 한 정치보위부를 설 치하고 민족진영 계열 인사, 군경 등 우익계 인물을 닥치는 대로 체포했다. 인민군이 퇴각한 후에는 잠시 미군이 이곳에 진을 치고 대포를 설치하기도 했다. 해광사는 당시 인천의 육해공을 한눈에 파악하기에 가장 좋은 자리였다. 26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신흥동 265

135 신흥초교에 전시돼 있는 제물포해전 당시 수거된 러시아함대 포탄. 이곳에는 일본인 위패들도 있었다. 패전하면서 서둘러 가느라 미처 챙겨가지 못한 것들이다. 한일수교 후 후손들이 다 찾아갔고 현재는 1기만 남았다. 그 남은 1기의 후 손은 정기적으로 재( 齋 )를 지내러 이곳에 온다고 한다. 한동안 일본 왕의 위패도 있었 는데 누군가 후미진 곳에 처박아 두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아직도 신흥 동 한구석에는 일본인의 망령과 국군의 영령이 혼재돼 떠다니는 듯했다. 해광사에 오르는 계단 옆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이다 공장이 있었다. 인천부사에 의하면 1905년 일본인이 창업한 인천탄산수제조소가 미국식 제조기와 5마력짜리 발동 기를 사용해 사이다를 생산했다 고 전한다. 그 자리에는 현재 동인당 이라는 골동품을 파는 가게가 들어서있다. 당시 주변 마을 사람들은 사이다병 뚜껑 만드는 부업을 많이 했다. 후에 같은 동네에 라무네 제조소 라는 공장이 생겼다. 라무네 는 물에 설탕과 포 도당, 라임향 등을 첨가해 만든 달콤한 탄산음료로 일본인들이 즐겨 마셨다. 광복이 되자 인천탄산수제조소는 (주)경인합동음료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타사이 다 라는 이름의 사이다를 생산했고 이는 훗날 칠성사이다로 이어진다. 1960년대 코미 디언 고( 故 ) 서영춘 씨는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떴어도 고뿌(컵)가 없으면 못 마십 니다. 라는 일명 사이다송 을 불렀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둥둥 떠다녔다는 이야 기는 전설이 아니라 엄연한 사실 인 듯하다. 신흥초등학교는 1884년 4월 아사히( 旭 ) 소학교로 문을 열었다. 광복 때까지 대부분 의 학생이 일본인이었다. 그 잔재를 찾기 위해 교정으로 나섰다. 옛날에 운동장 한편 에 큰 방공호가 있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그 흔적조차 없다. 본관 로비에 전시된 역 대 교장 사진에도 일본인 교장은 없고 광복 후 한국인들의 사진만 걸려 있다. 26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신흥동 267

136 그런데 흔적 하나가 본관 바로 앞 정원 한편에 놓여 있었다. 회색으로 칠해진 포탄3 발이 안내판과 함께 전시돼 있다. 1904년 월미도 앞바다에서 벌어진 제물포해전(러일 전쟁) 당시 수세에 몰리다 자폭한 러시아 함대에서 수거한 포탄이다. 일제는 처음에 이 포탄을 인천부청(현 중구청) 마당에 전시했다가 이 학교로 옮겨 놓았다. 어린 학생 들에게 러일전쟁의 승전을 선전하기 위해서다. 일본인들의 흔적이 또 하나 있다. 정문에서 본관으로 오르는 길 오른편 동산에 일본 인들의 비석이 세워졌던 자리가 있다. 3단 층계로 마련된 곳에 비석은 없고 30여 개의 얕은 기단 흔적만 있다. 누구의 비석이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옆에 있던 일본 절 동본원사에 있던 비석을 모아 놓았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한편 인천가족공원(부평 공동묘지)에는 일본인 비석들이 한데 모인 곳이 있는데 여기에 있던 비석과 연관이 있 는지 궁금하다. 1953년부터 상설시장이 된 신흥시장은 한때 인천에서도 잘 나가던 전통시장으로 손 꼽혔다. 부두 길목에 위치해 있고 시장 앞에 시립병원이 있었던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현재는 시장 골목도 수십 미터에 불과하고 점포들도 60여 개에 불과할 만큼 상권이 예 전만 못하다. 이 시장 일대는 1903년 화개동( 花 開 洞 ) 이란 이름을 얻는다. 꽃이 피는 동네. 여자들 이 몸을 파는 사창가였다. 공창( 公 娼 )제도를 인정한 일제는 이곳을 유곽( 遊 廓 ) 지역으 로 만들고 그들의 욕정을 배출했다. 당시 40군데 업소에 매춘부 130여 명이 일했다는 기록이 있다. 화개동은 꽃 화( 花 ) 자는 그대로 품에 안은 채 1914년 선화동( 仙 花 洞 )으 로 개명된다. 미 군정기에 유곽은 폐쇄된다. 1948년 2월 공창 폐지를 앞두고 경기도 보건후생국 은 인천 유곽 22호에 있는 180명의 창부에 대해 차후의 희망 조사를 실시한다. 그 결과 공장 취업 40명, 화류계 종사 32명, 출가 12명, 자기 집 귀가 12명 그리고 미정 23명으 로 조사된다. 이중 성병에 감염된 화류병자 80명을 도립병원 인천화류병치료소에 1개 월간 강제로 입원시켜 치료를 받게 한다. 이를 위해 입원비 38만9,500원(식대 포함)과 부도유곽 입구. 교화비 22만4,000원의 예산을 책정한다. 인천부는 공창폐지대책위원회를 열고 이들이 가정주부로 갱생할 수 있도록 단기 교화강습을 시키고 유곽은 전부 여관, 음식점, 카 페, 당구장 등으로 전업시킬 방침을 세운다. 유곽은 폐쇄되었지만 한번 핀 꽃은 좀처럼 시들지 않았다. 1960년대 신흥동 일대는 젓가락 장단에 맞춰 술판을 벌이는 니나노집부터 방석집, 기생 요릿집, 창녀집에 이르 는 거대한 환락가였다. 이후 이 홍등가는 대대적으로 정비되었고 꽃 들은 인근 독갑다 리, 학익동, 옐로우하우스 쪽으로 옮겨 다시 피게 된다. 신흥동 한쪽에서는 얼마 전부터 다른 종류의 꽃이 활짝 피고 있다. 무역 이란 꽃이 만개하고 있다. 중국을 오고가는 출입구 제2국제여객터미널을 중심으로 50여 개의 소 규모 무역업체들이 문을 연 것이다. 1994년 중국과 수교하면서 처음엔 보따리 무역으 로 시작되었던 것이 언제부턴가 소규모 무역업체들이 하나둘씩 들어서기 시작했다. 보따리상 출신의 개인 무역업체부터 서울에 본사를 둔 무역회사에 이르기까지 규모도 다양하다. 이들이 취급하는 물건도 농산물부터 기계부품에 이르기까지 각양각색이 다. 길가의 허름한 집들이 무역 간판을 달고 물류 차량이 쉴 새 없이 드나들고 무역업 에 종사하는 중국 동포 등이 이 동네에 거주하면서 신흥동 골목의 모습이 새롭게 바뀌 고 있다. 신흥동의 꽃은 그렇게 피었다 지고 다시 피어나고 있다. 26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신흥동 269

137 시야에서 사라지는 열차의 끝을 보면 슬프다. 내 사람, 내 물건을 싣고 가는 것도 아 닌데 아득한 곳으로 기차를 떠나보내고 나면 공허함이 몰려온다. 신흥동 수인역에 가 면 마치 등 굽은 노인네 같은 노쇠한 철길 때문에 슬프다. 수인역은 도심 후미진 곳에 물러나 있다. 아파트에 가려져 있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서 잊혀져 가고 있어 이제 그 존재감은 없다. 역 이름도 희미해지고 역사( 驛 舍 )는 아예 사라졌지만 아직 철길은 살아있다. 철길 따라 사람들도 살아있다. 닿을 듯 말 듯한 간 격으로 철길과 마을이 사이좋게 공존하며 삶을 이어 가고 있다. 수인역은 수원과 인천역을 오가던 수인선의 한 정거장이었다. 1948년에 세워진 옛 역사( 驛 舍 )는 곡물시장 인근 지금의 화물주차장에 있었다. 요즘은 흔히 수인역하면 신 광초등학교와 CJ 인천공장 사이를 말한다. 기찻길은 마치 골목길처럼 나있다. 집들 사이로 난 철로를 보고 있노라면 기차가 먼 저 길을 냈는지 마을이 먼저 자리 잡았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1937년 협궤열차 수인선 이 건설되었고 철로는 정미소가 있던 수인역에 닿았다. 기차가 서는 곳에 사람과 물자 가 몰려들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들어선 것이다. 검은 연기 내뿜으며 달려온 기차는 역에 가까이 왔다고 왝왝 거리며 소리를 지르곤 했다. 수원, 군자, 소래 등지에서 온 사람들은 자신이 키운 닭이며 각종 곡식을 이고 지 고하며 수인역에 내려놓았다. 금방 큰 장이 서고 거래로 왁자지껄 소란해졌다. 장이 서는 동안 열차 맨 앞 기관차는 거대한 회전기를 이용해 다시 수원 방향으로 놓여진 다. 그렇게 수인역은 번창했다. 1979년 종착역이 송도로 변하면서 급격히 쇠락하였다. 이제 수인역은 젊은 택시기 사들은 그 위치를 잘 모를 정도로 도시의 뒷무대로 한발짝 물러 앉아있다. 얼마 전까 지 농산물 대신 포항에서 실은 철강 코일과 강원도에서 실은 시멘트와 석탄을 채운 화 물차만이 하루에 10여 차례 지나갔다. 수인역 마을에서 철길은 두 갈래로 갈라진다. 우측으로 가면 인천역, 좌측으로 달리면 부두행이다. S자로 휜 철길 위를 달리는 열차 의 모양이 마치 구렁이 같았다. 이것도 이제 옛 이야기가 되었다. 올 초부터 기차는 더 이상 다니지 않는다. 가게의 간판과 지붕 처마를 아슬아슬하게 스치듯 동네 한가운데 로 들어 왔던 시커먼 열차는 이제 없어진 그림이 되었다. 건널목 간수의 요란한 호각 소리도 더 이상 들을 수 없다. 27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271

138 예전에 이 부근에서는 다른 호각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인근 남부역은 입영 열차 정거장이었다. 70년대 말까지 수많은 청춘 들은 이곳에서 출발하는 논산훈련소행 입 영열차에 몸을 실었다. 공설운동장에서 집결한 장정들은 숭의로터리를 지나 이곳으 로 이동했다. 부모와 형제, 친구들과 마지막 포옹을 하고 눈물을 흘리느라 미처 열차 에 몸을 싣지 못하자 호송관들의 날카로운 호각 소리가 울렸다. 덜컹, 기차는 긴 기적 을 한 번 울리더니 움직이기 시작했다. 열차가 주인선으로 접어드는 순간 호송관들의 살벌한 고함소리와 동시에 열차 안은 금방 군기 바짝 든 훈련소로 변했다. 다 사라진 것은 아니다. 열차 때문에 생긴 시장은 그 명맥을 이어 가고 사람들도 남아 있다. 곡물상과 고추집 그리고 기름 짜는 집 등 40여 개의 점포가 신광초교 담벼락에 기 대어 수인곡물시장 이란 이름으로 장사를 하고 있다. 지금의 한별아파트 자리에는 인천 최대의 농산물 깡시장이 있었고 이후 김치공장과 농협 하나로마트가 개장하는 등 농산물과 관련된 시장이 계속 이어져 왔다. 이제는 연 백상회, 개풍상회, 충남상회 등 고향을 가게 간판으로 내건 곡물점이 주를 이루고 있다. 예전만 못해. 대형마트 때문이야. 그냥 심심하니까 가게 문을 열고 있는 거지. 충북 영동에서 올라와 한자리에서 30년 넘게 장사를 하고 있는 흥진상회 이영주 (81) 할아버지는 곡물이란 이름 붙은 곡식은 다 있고 다른 데보다 30% 정도는 싸다 고 설명하며 연신 소리쳐 참새 떼를 쫓는다. 그나마 기름집들의 사정은 좀 나은 듯하다. 그것은 냄새로도 알 수 있다. 수인역 인근에 가면 하루 종일 고소한 냄새가 진동한다. 90년대 말 기름집 전성시대에는 기 름집 옆에 있던 어느 약국도 한편에서 기름을 짤 정도였다. 약 조제 하던 손으로 기 름을 제조 한 것이다. 조제하다 제조하고 다시 제조하다가 조제하고. 소문을 들은 약 사회에서 현장에 나와 그 약사에게 약을 팔 건지, 기름 장사를 할 건지 선택하라고 했 다는 이야기는 이제 전설 로 남았다. 만수기름집, 대영기름집 등 40여 년의 세월을 입은 기름 가게들은 이제 대를 이어 기름을 짜고 있다. 부모의 손길로 모서리가 닳아버린 되박, 깔대기, 함지박 등 기름 짜는 도구들을 아들이 이어받아 사용하고 있어, 세월이 흘러도 고소한 옛 맛은 그대 로다. 공설운동장에 집결한 입대 장정들, 그들은 수인역 인근 남부역에서 입영열차를 탔다. 27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신흥동 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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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 수인역 시장 역사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는 가게가 또 하나 있 다. 50년 넘게 국수를 말아 온 골목 국수집이다. 한 사람이 지나가기도 버거운 좁디좁은 골목에서 시작한 이 가게는 시장 사람들과 부두노동자들의 허기를 달래 주었다. 장사가 잘 될 때는 밤에 만 야식으로 100여 그릇씩 팔았다. 열차를 끌고 온 기관사가 잠시 기차를 세워놓고 이 집에서 요기를 해결할 정도였다. 이제는 골목에서 나와 기차길 바로 옆 2층 건물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 할머니는 국수를 말고 할아버지는 철길 건너 시장통을 누비며 배달을 하셨다. 지금은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고 할머니만 철도길 사람들을 위해 계속 국수를 말고 있다. 1942년 동남아에서 강제 이송된 연합군 포로들이 상인천역(현 동인천역)에 내린 모습. 일제 말 신광초교는 연합군 포로수용소였다. 1942년 말레이반도 전투에서 잡힌 영국 군 포로들을 비롯해 후에 미군 포로들이 이곳까지 끌려왔다. 일제는 서울, 부산, 인천, 흥남 네 군데에 포로수용소를 설치했다. 그중 인천수용소의 규모가 가장 컸다. 연합군 포로수용소는 수인역 인근, 현재의 신광초교 자리에 있었다. 왜 이곳에 자리 잡았을까. 신광초교에서 직선거리로 400여 미터 떨어진 인천여상에는 저들이 목숨을 걸고 지키 려 했던 것이 있다. 바로 신사( 神 社 )다. 그들은 신성한 신사를 보호하기 위해 포로수용 소를 방패막으로 삼은 것이다. 미군이 1944년 12월 항공 촬영한 사진을 보면 연합군 측은 포로수용소의 위치를 정 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연합군은 일제가 노렸던 것처럼 아군 포로들의 피해를 우려해 수용소 일대에 폭격을 할 수 없었다. 일제는 연합군 포로들을 인간 방패로 이용하여 신 사와 전략 시설인 인천항 그리고 그들의 주거지인 신흥동을 동시에 보호했던 것이다. 연합국 측은 포탄 대신 이곳에 포로로 잡힌 아군을 위해 보급품을 공중투하했다. 마 을 사람들은 수용소 밖으로 떨어진 물건들을 서로 차지하기 위해 한바탕 난리가 났다. 생전 처음 보는 물건들은 신기하고 값졌다. 주로 유곽의 아가씨들에게 팔거나 길거리 에 내놓고 반짝 장을 열기도 했다. 소문을 들은 시내 깡패들이 물건을 독차지하기위해 이곳으로 나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2차 세계대전이 인천의 한 작은 마을에 또 다른 전쟁 을 일으킨 것이다. 27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신흥동 277

141 그때, 이곳 신흥동 Map & Photos ➊ 신흥초등학교 ➎ 신흥동 자전거 경기장 ➑ 인천부윤 관사 ➊ ➏ ➐ ➋ 답동사거리 인천여상 이마트 인천역 ➑ 율목도서관 벽돌창고 (구)고려정미소 인천보건환경연구원 (구)시립병원 ➌ 경남아파트 삼익아파트 배다리 숭의로터리 ➓ ➒ 신흥시장 ➎ 신광초 ➍ 수인곡물시장 일본인이 자신들의 어린이를 교 육하기 위해 인천에 세운 최초의 학교로 일제강점기 때 학교명은 인천공립고등소학교였다. 1883년에 동본원사 별원에서 아 동을 교육한 것이 시초다 년에는 일본 인천영사관 구내에 있던 병원의 병실(1933년 당시의 인천부윤 관사 터)을 개조하여 교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학생수가 1,175명(조선인 17명 포함) 정도로 당시로서는 규모가 큰 학교였다 전쟁 중 공산군은 인천 지역 의용군을 이 학교로 강제 징집해 전선으로 보냈다. ➋ 신흥초교 앞길 이 도로는 신흥동 입구에서 답동사거리에 이르는 총 연장 300여 m 길로 원래 막혀 있었다. 여러 차례 확장할 계획을 세웠으나 천주교와 오례당 소유의 토지가 속해 있어서 추진이 어려웠다. 양쪽으로부터 기부 신청을 받아 비로소 1914년 1월에 도 로가 준공되었다. 이후 6m 도로를 1978년 제 59회 전국체전을 맞아 현재와 같이 대폭 확장했다. 이 시기에 인천라이온스의 도움으로 신흥동 로터리도 건립했다. ➌ 경성지방법원 인천지청 내동 감리서에서 1910년 9월 화정 2정목(신흥동 2가)에 신청 사 대지 2,247m2(680평) 건평 343m2(104평) 규모로 건립했다. 1912년 4월 조선총독부가 재판 소령을 개정한 결과 경성지방법 원을 인천지청으로 개칭하고 관 할구역은 인천부, 부천군, 김포 군, 강화군으로 확장했다 년 재정 부담으로 폐청하고 등기소만 남겨 두었다. 1935년 옛 감리서 터에 신청 사를 건축하고 이전했다. 항도실업학교가 있었고 현재는 이 자리에 중구노인복 지관이 자리하고 있다. ➍ 원예협동조합 김치공장 원예협동조합은 1966년 총 공사비 6,000만 원을 투입해 식품 가공공장을 세웠다. 서독 및 일본의 최신형 기계시설을 갖춘 이 공장은 아스파라거스, 양송이, 김치 등 인천지역에서 생산되는 원예작물 일체를 식품 통조림화해 월 평균 48만 통을 생산 했다. 동남아 시장과 파월 장병에게 군납해 연간 120만 달러의 외화를 벌어들였다. 일제강점기 인천의 자전거 붐은 대단했다. 자전거 숫자도 크게 늘어 1924년 12월 인천경찰서는 부내 자전거 소지 실태를 파악 해 관리했다. 1925년 6월과 10월에는 인천조선매일신문사가 화 정( 花 町 지금의 신흥동) 매립지에서 전조선자전거경기대회 를, 1929년 6월에는 인천자전거선수구락부가 대회를 열었다 년 6월에는 같은 장소에서 인천자전거점원구락부 주최로 인천 최초의 전조선남녀자전거경주대회가 열려 성황을 이뤘다. 이렇 듯 신흥동은 우리나라 자전거경주대회의 한 뿌리를 품고 있다. ➏ 동본원사 1885년 9월에 동본 원사 부산별원 인천 지원으로 시작했다. 처음에는 일본인의 주택을 전전하다가 1888년에 관동 1가 1번지에 246m2(80 평) 규모의 임시 본 당을 만들었다. 1892년까지는 일본인 자녀를 위한 교육기관으 로도 활동했다. 1899년 10월 현재의 신흥동 로얄답동맨션에 건 물을 세워 이전했다. 동본원사 외에 현재의 송도중학교 교내에 서본원사도 있었다. ➐ 해광사 1908년 8월 29 일에 준공된 일본 불교 사찰로 원래 의 명칭은 화엄사 이다. 화엄사 본 전은 해광사 대웅 전을 세우기 위 해 철거되었고 현 재의 명부전은 원래부터 있었다. 경내에 일본식 석물이 남아있 고 정문 석주에는 일제강점기에 새겨진 글자가 씌어 있다. 사찰 로 올라가는 계단은 상부는 원래부터 있었던 것이고 하부 계단 는 그 자리에 건물이 있던 것을 철거하고 계단을 새로 설치한 것 이다 전쟁 중 전사한 경기도 출신 60여 영령의 유해를 축 현역(동인천역)으로 들어와 해광사에 봉영했다. 신흥동 1가 19번지 에 인천부윤이 사용 했던 관사가 있다. 이 주택은 전형적 인 일본풍의 건물로 1966년에 새로 인 천시장 관사(현 인 천광역시 역사자료 관)가 세워지기 전까지 인천시장 관사로 사용하다가 현재는 개 인이 소유하고 있다. ➒ 신일반점 현재 우리나라 중국 음식점 중 가장 고 령 현역 주방장은 신흥동 신일반점의 임서약( 林 書 若 ) 옹 이다, 1931년 생으 로 올해, 만으로 82 세다. 중국 산둥( 山 東 )성이 고향인 임 옹은 66년째 신흥동로터리 주변에서 청요리 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신일반점의 뿌리는 현재의 자리 건너 편에 있던 호떡집이었다. 호떡집을 중국집으로 바꾸고 신흥동 에서 제일 맛 좋은 음식점이 되자 는 소망을 담아 신일반점 이란 간판을 내걸었다. 1978년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10여 년 전까지 만해도 돌잔치나 약혼식을 치를 만큼 규모가 큰 연회석 을 갖춘 음식점이었다 ➓ 평양옥 1945년 평양 순안 출신인 김석하 씨 부부가 신흥동 3가 18번 지, 현재 자리에서 개업한 장국밥집이 그 기원이다. 개업 초기 광 복 직후 부활된 경평전( 京 平 戰 ) 축구시합에 출전하는 고향 선수 들에게 냉면을 배달하기도 했다. 평양옥을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의 출입. 박대통령은 새벽 4시 통금이 해제되면 이따금 작업복에 모자를 눌러쓴 채 들어와 자리에 앉 곤 했다. 1980년대에는 전두환 대통령도 월미도 해역사령부를 순시하고 불시에 들어와 갈비와 냉면을 먹고 가기도 했다고 전 해진다. 연안부두 27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신흥동 279

142 사동 신사 神 社 뒷마당에서 흘러나온 요염한 웃음소리 사도석우( 沙 島 夕 雨 ). 사도에 내리는 저녁 비 는 인천 팔경( 八 景 ) 중 하나였다. 여전히 바다에 비가 내리 지만 이제 그 빗물을 받아 줄 사도는 없다. 모래섬 사도는 항구가 만들어지면서 지도에서 지워졌다. 사도 는 영원히 사라졌지만 사동 이란 지명을 남겼다. 이 동네는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의 정신적 숭배 공간인 신사( 神 社 )와 육체적인 욕정을 발산한 요정( 料 亭 )이 공존하던 기묘한 곳이었다. 현재의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 자리에는 인천신사( 仁 川 神 社 )가 있었다. 학교 남쪽 은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넘실거리는 낭떠러지였다. 일본인들은 그곳에 1890년 6월 신 사를 건립했다. 지대가 높으며 시가지에서 떨어진 한적한 곳이어야 한다는 조건이 맞 아 떨어진 것이다. 신사 는 일제의 황국 신민화 정책의 대표적 상징이었다. 우리는 흔히 신사참배 라는 말을 통해 이 땅에 신사가 존재했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알고 있다. 인천부사 에 따르면 당시 인천에 살고 있던 일본인들은 인천에 신사가 없다는 사실 을 안타깝게 여겼다. 그래서 1889년부터 신사 창설의 뜻을 품고 기부금을 모아 신사 건립에 나섰다. 당시 인천에 거주하던 일본인 수는 1,600여 명. 신사는 이미 1910년 병 탄 이전에 인천을 비롯해 국내 곳곳에 세워졌다. 대신궁 건축 공사가 낙성되면서 면모 를 갖춘 인천신사는 이후 지속적인 증축 공사를 하며 규모를 넓혔다. 지금도 교정 주 위에 쉽게 볼 수 있는 축대와 울타리 공사는 1919년부터 이후 3년 여에 걸쳐 축조한 것 이다. 일본인들이 기록한 인천항사 에는 인천신사 부지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시가지의 중앙, 서해에 면하고 지대가 높아 건조한 곳에 있다. 수목이 울창하고 분 수가 있다. 경내 중앙의 제일 높은 곳에 천조황태신궁 및 명치 천황을 천좌해서 받든 다. 경내는 넓고 조망이 무척 아름답다. 사동 281

143 광복이 되자 신사는 조선인들 분노의 첫 타깃이 되었다. 그날 저녁으로 조선인들의 손에 제일 먼저 파괴당한 곳이 각처의 신사였다. 실제로 8월 15일 저녁 평양신사를 비 롯한 전국 신사에 대한 방화와 파괴가 시작됐다. 인천신사도 같은 운명이었다. 일본인 들은 신령이 깃든 신체가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한 대책을 마련하느라 전전긍긍했다. 인천신사에는 탁구공 크기의 검은 색 옥사리( 玉 砂 利 ) 신체가 있었다. 8월 17일 오후 4 시 인천신사의 궁사들과 인천부윤, 부두관리국장이 입회한 가운데 인천항 앞바다 한 가운데에 그 신체를 가라앉혔다. 광복과 동시에 신사가 모두 파괴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부 시설은 격노한 시민들에 의해 망가졌지만 원형은 그대로 유지됐던 것으로 보인다. 광 복 직후 인천시에서는 인천신사를 허물어서 근로자들의 휴식처인 노동회관으로 개축 하려는 계획을 세웠던 것을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여러 해 동안 을씨년스런 건물로 남 아있던 이곳에 인천여자상업고등학교가 들어서면서 신사 부속 건물들을 본격적으로 철거한 것으로 보인다. 신사를 치받고 있는 거대한 암석을 뚫어 만든 방공호 28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사동 283

144 이 동네에는 신사와 사찰만 있던 게 아니다. 일본인들에게 신성( 神 聖 ) 은 신성( 身 性 ) 과도 통하는 모양이다. 인천신사 건립에 맞춰 수명루와 명월루라는 고급 요정이 한 부지 안에 개업하였다. 일반적으로 신의 위패를 모신 곳은 성스러운 지역이라 반경 몇 미터 안에는 유흥시설을 들일 수 없는 것이 우리네 상식인데 인천신사의 경우 그 경내라 할 수 있는 곳에 술과 몸을 파는 요정이 들어섰던 것이다. 특히 수명루는 제일루 라 불릴 정도로 인천 최고의 요정이었다. 맛있는 술과 음식, 아름다운 여자들 그리고 청아한 정자와 눈부신 전망을 자랑했다. 당시 시인이자 조선 마치 일본에 온듯 일본식 주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사동 골목 옛 묘각사 입구의 돌기둥 지금도 인천여상 정문에 들어서면 석축과 석조 난간도 쉽게 발견할 수 있고 교정에 곳곳에서 당시의 석주, 석탑을 만날 수 있다. 학교 아래 동네에는 커다란 방공호가 그 대로 남아 있다. 옛 신사를 떠받쳤던 거대한 암석을 양쪽으로 길게 이어지게 방공호를 뚫었다. 유사시 궁사나 승려들 그리고 참배객들이 급히 피신할 수 있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지금도 가정집 마당 한편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여전히 그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신사 주변에는 일본인들이 종교 활동을 한 흔적이 남아 있다. 현 송도중학교에는 묘각사 ( 妙 覺 寺 )가 있었다. 인천여상과 송도중학교 뒤편 사잇길에는 일본식 주택들 이 많이 눈에 띈다. 한 가정집 바로 앞에서 일본식 돌기둥과 계단을 볼 수 있다. 이 계 단은 지금은 학교 담으로 막혀 있지만 예전에는 이 길이 사찰로 들어가는 입구임을 알 수 있다. 두 개의 돌기둥에는 절의 종파와 이름을 알리는 일연종 묘각사( 日 蓮 宗 妙 覺 寺 ) 와 부산에 이은 두 번째 포교지라는 의미의 서점제이도장( 西 漸 第 二 道 場 ) 이란 글 귀가 써 있다. 묘각사 외에 인근에는 동본원사, 서본원사, 명조사, 편조사 등 일본 불교 사찰이 많이 있었다. 28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285

145 신보사 기자였던 아오야마 고헤이는 제물포의 빼어난 풍경은 일본공원(동공원)에 있 고, 일본공원의 기묘함은 수명루에 모여 있다 고 수명루에 대한 감상을 표현했다. 수 명루는 청일전쟁이 끝난 후 팔판루( 八 阪 樓 )로 이름을 바꾸어 영업을 계속했다. 사람 들은 이를 흔히 팔팔로 라고 불렸다. 일본식 건물을 여러 채 배치하고 대형 연회장을 갖추고 있어 인천에 입항하는 일본 함대의 환영 연회를 독점했다. 초대 조선통감이었 던 이토오 히로부미(이등박문)도 이곳에 애첩이 있었고 인천에 올 때마다 즐겨 찾았 다고 한다. 광복 후 적산이 된 요정은 전재민( 戰 災 民 )을 위한 주거지로 개방하라는 요 구를 받기도 했으나 한동안 미군 방첩대 사무소로 사용했다. 후에 인천여상이 들어서 면서 신사와 함께 완전히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경동 싸리재에서 기독병원을 지나 신흥동으로 넘어가는 길에 긴담모퉁이길이 있 다. 이름 그대로 돌담이 길게 놓여진 길로 애초에는 꼬불꼬불한 실오라기 산길이었다. 1907년 일본인 공동묘지가 있던 곳에 학교와 사찰 등이 들어서자 구릉을 헤치고 축대 를 쌓아 신작로 를 만들었다. 신흥동에서 경동을 거쳐 동인천역으로 가는 길목이자 경 인가도와 연결되는 지름길이었다. 고( 故 ) 최성연 선생의 개항과 양관역정 에 따르면 이 공사를 시작한 것은 1907년 4월이며 같은 해 11월에 공사를 마쳤는데, 지금의 전동 전환국 청사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공병대가 이 공사를 맡았다. 완공 후 화수동, 송현 동 등에 살던 젊은 아낙네들이 하얀 머릿수건을 쓰고 신흥동 정미소 동네로 줄지어 출 퇴근했던 슬픈 사연을 지니기도 한 길이다. 긴담모퉁이 중간 쯤 철문으로 굳게 닫친 굴이 있었는데 이 굴은 언덕 너머의 신흥초 등학교 내 동산으로 이어졌다. 신흥초 아이들 사이에서는 곰을 기르던 굴이라는 소문 도 있었지만 일본군이 총, 폭탄 등 무기를 저장하기 위해 굴을 판 것으로 알려졌다. 70 년대 들어 학교 측에서 굴의 입구를 봉쇄해 지금은 학교 쪽 입구는 볼 수 없고 긴담모 퉁이 쪽은 철문으로 굳게 닫힌 모습을 볼 수 있다. 긴담모퉁이길 윗 편 너머에는 답동성당이 있다. 답동 이란 이름은 1977년 신포동에 편입되어 이제는 법정동으로만 존재한다. 하지만 여전히 이곳을 답동이라 부르는 것 은 그 중앙에 우뚝 서 있는 답동성당 때문일 게다. 1889년 파리외방전교회는 제물포항을 포교지로 정하고 빌렘 신부를 파견했다. 청 일전쟁으로 잠시 중단했던 성전 건립은 1895년 정초식을 갖고 본격적인 공사에 들어 갔다. 이듬해 종탑을 완공하고 마침내 1897년 7월 4일 조선교구장 뮈텔( 년 28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사동 287

146 크고 작은 요정들이 있었던 인천신사 부근 마을 입구. 재임)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역사적인 축성식을 거행했다. 991m2(300평) 규모로 전면 에 세개의 종탑을 갖춘 로마네스크 양식의 성전이었다. 뮈텔 주교는 이날의 일을 일기 에 이렇게 적고 있다. 7시경 신부들이 미사를 드리고 난 후 성당의 강복식이 거행되었고, 다시 미사와 81 명의 교우들의 견진이 있었다. 성당은 매우 아름답고 성공적인데, 스테인드글라스와 같은 효과를 내는 유리면과 교우들의 반은 앉을 수 있는 의자들도 갖추었다 본당의 야산과 밭들은 다 조선 사람들에게 세를 주었는데, 그 모든 것들이 하나의 마을을 이 루어 요술처럼 훌륭했다. 세월이 흘러 신자수가 급격히 늘자 1934년 개축공사를 시작했다. 옛 성당을 그대로 둔 채 외곽을 벽돌로 쌓아올리는 난공사 끝에 마침내 1937년 로마네스크식의 성당이 세워졌다. 이것이 현재의 답동성당이다. 정면과 좌우에 반원 아치를 두고 중앙 탑 꼭 대기와 양측의 작은 철탑 위에 뾰족 돔을 얹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인천 앞 바다가 고즈넉하게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답동성당은 인천의 온갖 풍상을 함께 겪으며 동고동락해 온 인천의 산증인이다. 28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사동 289

147 그때, 이곳 사동 Map & Photos ➊ 동공원 일본인들은 기부금을 모아 나무와 꽃을 심는 등 본격적으로 공원을 가꾸어 가기 시 작했다. 그렇게 조성된 인천공원은 남쪽 해변으로 밀려드는 파도와 봄철이면 만개 한 벚꽃으로 유명했다. 인천 신사를 품고 있던 이 공원은 1914년 각국 조계가 폐지 되면서 이름을 동공원 으로 바꾸었고 이때 만국공원 역시 서공원 으로 변경되었다. ➋ 가부키좌 1905년 사동에 가부키좌( 歌 舞 伎 座 ) 가 개설되었다. 해안을 매립한 991m2(300평) 대지 위에 일본의 가부키좌를 그대로 모방해 순일본식 2층으로 세워진 가부키좌는 130개의 전등에 불을 밝히고 약 1,0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었다. 설비가 완성 된 점에서는 실로 현재 조선 유일이라 칭할 만한 근대 극장의 면모를 갖추었다. 가 부키좌는 연중 245일간의 공연 일수의 3분의 2를 일본 신파극에 할애했다. ➌ 인천은행 답동성당 가톨릭회관 옆에는 개신교 관련 서적을 파는 오래된 서점이 있다. 전국에 서 가장 오래된 기독교 전문서점인 인천복음서점이다. 1957년 배다리에서 33m2(10평) 정도의 규모로 문을 열어 동인천 대한서림 앞과 내동, 용동을 거쳐 1975년부터 현재의 자리에 다시 문을 열었다. 1957년에 이 서점을 연 이는 임형섭(82) 어르신이다. 그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6 25전쟁 당시 주한 영국군 부대 사무원으로 일했다. 영국군 부대가 한국을 떠날 즈 음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으로부터 기독교 전문서점을 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 다. 다시 미군 부대 사무원으로 일할 수 있는 추천도 받았지만 서점을 운영하는 쪽에 더 마음이 끌렸다. 기독교 전문서점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성경책, 찬송가, 성서 관련 책을 팔았으나 장사가 그리 잘 되지 않았다. 가게 세를 못내 부인의 결혼반지를 팔아 보태기도 했다. 한때 헤진 성경책 가죽 케이스를 수리해 주거나 성경책을 다시 제본해 주는 일까지 하면서 지금까지 서점을 꾸려왔다. 그는 영국군 부대 시절부터 갈고닦아 온 영어실력으로 성경의 역사(All about Bible) 라는 영문 서적을 성경통론 이라는 제 목으로 번역해 출간하기도 했다. ➌ 외환은행 ➋ 동인천역 ➍ 신흥초교 답동사거리 인천여상 ➊ 동공원 수인역 답동성당 송도중 예수그리스도 말일성도교회 ➎ 긴담 모퉁이길 신흥로타리 1967년 3월 인천상공회의소는 인천지방은행설립추진위원 회 를 구성하고 자본금 1억 5,000만 원을 확보하기 위해 주 식 공모 운동을 벌였다. 1969년 12월 8일 인천은행은 내 고 장의 경제발전의 원동력이 되는 시민의 금고를 자임 하며 키 네마극장(현 외환은행 자리)에서 개점식을 갖고 이어 사동 본 점 금고의 테이프를 끊어 영업에 들어갔다. 3년 뒤인 1972년 6월 1일 상호를 경기은행 으로 바꾸고 영업구역도 확대했으 나 1998년 6월 우여곡절 끝에 간판을 내리고 말았다. ➍ 가톨릭회관 지금의 가톨릭회관 부지는 옛날에 붉은 흙이 드 러나는 절개지였다. 도로를 내기 위해 땅을 절개 하기 전 언덕이 있었고 탁포현이라 불렀던 것으 로 보인다. 1900년 이 자리에 인천박문보통학교 가 자리 잡고 있었는데 2차대전 말 일본 관청의 소개 명령으로 헐려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부지 를 정리하고 1974년 10월 14일 지하 1층 지상 5층의 가톨릭회관이 들어섰다. 한 때 전시장과 회의실, 그리고 지하에 다방이 있었다. ➎ 부천군청사 부천군은 부평군 전 지역, 인천부를 제외한 인천 전 지역, 강화도에 속해 있던 신도, 시도, 모도, 장봉도 및 남양군의 대부면을 관할하던 군이었다. 부천군의 청사는 1923년 4월 답동 에 청사를 신축하여 이전하였다. 답동의 부천 군청 터는 원래 이하영의 별장이 있던 자리 로 이 건물은 1958년에 헐렸다. 부천군청은 이 건물을 1940년까지 사용하다가 율 목동에 건물을 신축하여 이전해 1962년 부천시 심곡본동으로 이전할 때까지 사용 했다. 옛 부천군청 터에는 현재 말일성도교회가 들어서 있다. 29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사동 291

148 도원동 복숭아 꽃향기에 실려 온 삶과 죽음 산 하나가 도원동을 품고 있다. 사람들은 그 산을 모모산이라고 불렀다. 모모 는 복숭아의 일본말이다. 일제는 이곳을 복숭아밭으로 만들고 1906년 이 동네를 도산정( 桃 山 町 )이라고 명했다. 임진왜란과 정유 재란을 일으켜 조선을 침략했던 풍신수길이 활동했던 때를 일컫는 도산시대 에서 도산을 가져다 붙인 것이다. 이곳은 인천의 끝이었다. 화장터와 전염병 격리 병원이 있어 생( 生 )과 사( 死 )가 혼재했던 곳이었 다. 공설운동장이 들어서면서 비로소 도원벌에는 살아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힘차게 울려 퍼졌다. 1959년 7월 31일 오전 11시, 서울 서대문형무소의 하늘은 지리한 장마가 끝난 탓에 오랜만에 민낯을 보이며 맑았다. 그는 교도관에 이끌려 서대문형무소 교수대에 섰다. 당당한 걸음걸이, 흔들림 없는 눈빛. 가족들이 맞춰 보낸 흰 한복을 단정히 차려입은 그에게 기품과 위엄이 흘렀다. 죽음 앞에 섰지만 초연한 모습이었다. 나는 공산당도 아니고 간첩도 아니오. 이승만은 몇 사람을 잘 살게 하는 정치를 했 고 나는 모든 백성이 잘 살게 하는 정치를 했다고 생각하오. 그는 유언을 남기고 마지막 가는 길에 입회한 목사에게 설교와 기도를 해 달라고 요 구했다. 목사는 누가복음 23장을 읽으며 기도했다. 그는 눈을 감은 채 들었다. 잠시 후 손과 발이 포승줄에 묶인 그의 머리에 흰 주머니가 씌워졌다. 교도관이 목에 굵은 밧 줄을 건 뒤 나무판자를 두드리자 다른 교도관이 마루청과 연결된 포인트 를 잡아당겼 다. 그의 몸이 허공을 갈랐다. 간첩 혐의 등 억울한 누명으로 사법살인의 희생양이 된 죽산( 竹 山 ) 조봉암( 曺 奉 岩, ). 강화에서 삼 형제 중 둘째로 태어난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4년제 강화공 립보통학교와 관립 실업학교인 2년제 보습학교를 나올 만큼 평범한 어린 시절을 보냈 다. 그의 일생에 전환점인 된 것은 3 1 만세운동이었다. 도원동 293

149 죽산은 강화교회 청년회에서 알게 된 독립지사 유봉진 선생과 함께 한 달 동안 이 어진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옥살이를 했다. 이때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이가순 선생을 만나면서 민족혼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출옥 후 1920 년 7월 일본으로 건너가 주말엔 엿장수를 해 가며 주오( 中 央 )대학에서 사회주의 이론 서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와 중국에 머물며 더욱 확고한 신념을 쌓아 가던 중 1932년 중국 상하이에서 프랑스 경찰에 붙잡혔고 결국 일본 경찰에 신병이 인도돼 7년 동안 옥살이를 한다. 그 사이 부인 김이옥 여사는 세상을 떠났고 딸 호정은 인천 친척집에 얹혀살 수밖에 없었다. 죽산은 인천 도산정(현 도원동) 12번지에서 만 9년을 살면서 정치적 입지를 차츰 다 져나갔다. 정미소에서 나오는 왕겨를 수집해 연료를 공급하는 비강조합 조합장 일부 터 시작했다. 죽산은 1945년 1월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예비 검속되기도 했지만 다시 인천에 내려와 인천치안유지회를 만들며 지역의 치안에 각별히 신경 쓰기 시작했다. 1945년 광복 후 인천영화극장에서 건국준비위원회 인천지부를 조직하면서 서서히 인천의 지도자로 부상하기 이르렀고, 그해 10월 인천 미군정 당국에 의해 인천시장 후 보로 이름이 오르기도 했다. 이후 대중을 향한 행보의 일환으로 인천협동조합 결성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의장으로 활동했다. 1948년 5월 10일 선거에서 제헌 국회의원으 로 당선되었고 같은 해 초대 농림부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56년 11월 10일 진보당을 창당한 죽산은 책임 있는 혁신 정치, 민주 우방과 제휴를 통한 평화적 조국통일, 교육 의 국가보장제 등을 담은 다섯 가지 강령을 발표하면서 우리 정치계에 새 지평을 연다. 29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원동 295

150 그러나 당시 한국 정치의 현실 속에서 그의 주장은 결코 용납될 수 없었다. 자유당 정권은 끊임없는 정치적 모략과 견제를 펼치며 진보당을 해체시켰다. 죽산은 간첩죄, 불법무기소지죄, 국가반란단체 수괴 등의 혐의로 육군특무부대에 의해 기소됐다. 1심 재판에서는 간첩 혐의가 무죄로 판결돼 징역 5년을 선고받았으나 2심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었고 1959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2011년 1월 20일 죽산은 다시 살아났다. 그날 대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재심 판결에 서 전원합의체 재판부는 1959년의 대법원의 최종 판결이 잘못된 판결로 사형이 집행 되었다. 재심 판결로 그 잘못을 바로 잡는다. 고 판결했다. 사법( 司 法 )살인 을 당한 죽산과 도원동 집. 도원동에는 죽산 조봉암의 흔적이 있다. 죽산이 1948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입각 하기 전까지 도원동 12번지에 살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옛 소방서 바로 위 언덕 에 있는 일본식 주택 골목이다. 이 골목에는 인천부( 府 )에서 지은 40여 평짜리 부영( 府 營 )주택 48 채가 있었다. 지금으로 얘기하면 시에서 대단위 택지를 조성해 지은 시영 주택단지다. 현재는 오래된 축대 위에 쌓은 서너 집이 남아 있다. 최근 모 지역신문을 통해 죽산이 살았던 집이 이곳에 현존하고 있다고 보도돼 큰 관 심을 끌고 있다. 죽산의 맏딸 조호정(85) 씨와 이웃에 살던 몇몇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 로 한 것이다. 죽산의 도원동 거주에 대해 다른 의견도 있다. 광복 후 이곳으로 이주해 서 살아 온 유재관 (92) 옹으로부터 죽산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집에는 주로 죽산의 조카가 기거했고 죽산은 가끔 와서 그곳에 한동안 머물곤 했어요. 그 집도 지금은 남아 있지 않고 얼마 전 헐리고 빌라가 들어섰지요. 죽산이 거주했다고 하는 집에 현재 살고 있는 집주인도 죽산이 자신의 집에 살았다 는 이야기는 금시초문이라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29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원동 297

151 도원동은 인천의 끝이었다. 산 밑으로 개천이 흘렀다. 개천은 지금의 제2장로교회 앞을 휘돌아 독갑다리 밑으로 해서 바다로 흘렀다. 이 개천이 옛 인천의 지경( 地 境 )이 었다. 그 밖은 부천군 문학면과 다주면이었다. 외진 곳에는 멀리 하고 싶은 험한 시설이 들어서는 법. 옛 야구장 앞 소방서가 있던, 지금은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는 산기슭에 화장장이 있었다. 그 바로 밑 지금의 중앙 여상 부근에는 콜레라나 장티푸스 등 전염병 격리병원인 덕생원이 있었다. 덕생원의 전신은 피할 피( 避 ) 자를 쓰는 피( 避 )병원이었다. 일제는 1898년 당시만 해도 도시 외 곽이었던 답동의 일본인 공동묘지 인근에 환자 18명을 수용할 수 있는 건물과 의료 장 비, 의료진을 갖추고 피병원을 세웠다. 도시가 점차 확장되자 대표적인 기피 시설인 이 피병원은 외곽으로 밀려나 도원동 으로 이전한 것이다. 1921년 모모산 기슭 일본군 병참사령부 수비대 터에 시설을 확 충해 이전하고 이름을 덕생원이라 하였다. 대지 8,988m2(2,719평), 건평 1,335m2(404 평) 규모에 26개 실의 병실을 두고 최대 96명의 환자를 수용했다. 광복 후에도 이 병원 은 인천의 전염병 관리를 담당했으나 6 25 전쟁 때 건물이 파괴돼 그 기능을 상실했 다. 1955년 주안동 산 5번지에 부지를 마련하고 미군의 원조로 새로운 건물을 착공해 1956년 10월 12일 제인원( 濟 仁 院 )이라는 새 이름으로 개원했다. 후에 제인원은 없어 지고 그 자리에 남구보건소가 들어선다. 현재 보건소는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그곳에 빌라가 들어섰다. 도원동 덕생원 자리는 1954년 고 김응순 목사가 어려운 청소년을 대 상으로 한 성경구락부를 세운다. 이것은 보합고등공민학교로 되었다가 후에 인천중 앙여상으로 발전한다. 전염병원, 화장터 등이 있어 한낮에도 음산한 분위기가 감돌아 피해 가고 싶은 지역 이었던 이곳에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 것은, 1934년에 공설운동장이 들어서면서부 터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다시피 한 이 운동장은 1953년 인천에 주둔한 미군 항 만사령부로부터 기름 공드럼과 목재 등의 자재를 원조 받아 새로 단장했다. 공사에 동 복숭화 꽃 타일 벽화. 원된 트럭이 연 900대에 이르렀다.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철판에 시커멓게 타마구(콜타르)를 바른 담장이 운동장을 빙 둘러쌓았다.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은 사람들은 모모산 기슭에 앉아 한가롭게 경기를 공짜로 즐기곤 했다. 그동안 세 차례의 전국체전과 한 차례의 소년체전을 개최했던 공 설운동장은 이제 다 헐리고 그 자리에 축구전용경기장 숭의아레나가 건립되었다. 산 위에서 운동장을 내려다보니 문득 관중들의 함성소리에 섞여 낯익은 안내 방송이 바 람결에 실려 오는 듯 했다. 운동장 최 씨, 운동장 최 씨, 본부석까지 와 주세요. 산 정상 부근에는 1976년에 실내체육관이 건립되었다. 몇 차례 수리를 거쳤지만 건 립될 당시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지니고 있다. 2004년에 개봉한 영화 역도산 의 레슬 링 장면이 이곳에서 촬영되었다. 촬영 전, 로케이션팀이 전국을 다 뒤졌지만 마땅한 29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원동 299

152 드럼통을 펴 담장을 친 공설운동장. 곳을 찾지 못했다. 4,50년대 일본 체육관의 분위기가 나는 곳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 들은 도원체육관을 보고나서 뛸 듯이 기뻤다. 레디 액션. 역도산 역을 한 설경구가 마루 중앙에 설치된 링 위에서 당수 한 방으로 거구를 쓰러뜨렸다. 산을 넘어 선화동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만나는 뉴월드그린 아파트 앞에는 얼마 전까지 오래된 건물 하나가 있었다. 남한 최초의 소주공장 조일양조장이다. 평양에 세워진 조선소주 보다 넉 달 늦은 1919년 10월 12일에 설립됐다. 일본인이 세운 이 회 사의 소주 상표는 금강표 였다. 조일양조는 1925년 기계를 증설해 대량생산에 나섰고 시음행사 같은 적극적인 마케팅까지 도입해 판매량을 늘렸다. 1928년 전국 소주양조 업자연합회 회장사를 맡을 정도로 성장했다. 조일양조의 소주는 만주, 사할린 등지에 진출할 만큼 인기를 끌었다. 사업이 잘되자 축구 팀도 창단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실업축구 팀이라 할 수 있다. 조일양조장 팀의 실력은 각종 대회를 휩쓸 만큼 강팀이었다. 광복 후 1947년 우리나라 최초의 국가 대표팀을 구성할 때 선발 선수 대부분이 조일양조장 팀 소속이었다. 인천유나이티드 축구단의 홈구장 인천축구전용경기장. 30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원동 301

153 하는 사고도 일어나 주민과 갈등이 많았다. 이후 일제가 전쟁으로 인해 곡물 소비를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경영난에 빠졌다. 광복 후 적산 공장으로 계속 운영되다가 세금 체납 때문에 소주 600석이 차압되었고 미군정에 양조 금지령이 내려지는 등으로 인해 한동안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가 6 25전쟁 직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비어있던 공장 터는 1978년 인천에서 열린 전국체전을 위해 건설된 실내수영장 부 지로 내주었다. 그 밑에 1949년 신축된 조일양조장 별관 건물이 최근까지 남아 있었 다. 이마저도 중구청에서 주민들의 주차시설을 위해 지난 2012년 7월 표지석 하나 달 랑 남기고 흔적도 없이 밀어버렸다. 전성기 때의 조일양조(아래)와 철거되기 직전의 조일양조 일부 건물(위). 당시 술 산업을 위해 인천부(현 인천시)도 발 벗고 나선 듯하다. 인천부사( 府 史 )에 는 1927년 인천부청 내에 주류시험실 을 설치해 주질( 酒 質 )을 개량하고 우등주를 제 조함으로써 일본 제품의 유입을 방지함과 동시에 수출에도 이바지했다. 고 기록돼 있 다. 그해 8월 3일 총독부를 출입하는 신문 통신사 기자단이 인천을 방문했다. 그들은 기차로 상인천역(현 동인천역)에 도착해 곧바로 조일양조장을 시찰할 만큼 당시 조일 양조의 술 공장은 인천의 주요 산업시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조일양조는 1931년 기존에 사용하던 수돗물을 지하수로 바꾸려고 대형 우 물을 팠다가 부근의 지하수가 모두 말라버려 주민의 원성을 샀다. 게다가 탱크가 폭발 조일양조의 생산시설은 다 없어졌지만 일부 사택은 부근에 그대로 있다. 30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원동 303

154 50m 정도 높이의 야트막한 산이지만 모모산은 유동 쪽으로 경사가 급한 편이다. 옛 도원동사무소 옆에 설치 된 70계단 은 가파른 산을 직코스로 오르내릴 수 있게 만든 70 개의 계단이다. 이 계단을 오르면 율목동, 화수동 등 구도심의 정경이 바로 눈앞에 펼쳐 진다. 옆에는 40계단도 있다. 이 계단들은 모두 일본인들이 도원신사에서 참배하기 위 해 만들어 놓은 것이다. 산 정상에는 광성중 고가 자리 잡고 있다. 당시 인천경찰서장 으로 부임한 류충렬 씨가 1955년 구두닦이 등 불우청소년들을 모아 인천소년수양원을 개설하면서 시작된 학교다. 1965년 광성고등공민학교를 거쳐 오늘에 이른다. 경인선 철길이 있는 큰길로 나가면 쇠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도심 속의 대장간이 다. 이 거리는 2, 30년 전만해도 철공소 거리였다. 쇠 두드리는 소리를 좇아 도원철공 소로 들어갔다. 나종호(63) 사장이 시뻘겋게 달궈진 쇠를 모루 위에 놓고 두드리고 있 다. 한 아주머니가 쇠고챙이 10여 개를 신문지에 싸 들고 왔다. 굴 따는 찍새예요. 굴 따다 보면 구부리지거나 무뎌져요. 날 세우려고 갖고 왔어요. 대장장이는 시뻘건 화 로에 찍새들을 올려놓는다. 달궈진 찍새는 쇠망치 세례를 받는다. 불꽃이 튄다. 정말 찍 소리 못하고 매를 맞지만 덕분에 찍새는 새로운 날을 세운다. 40년 넘게 쇠를 두들겼죠. 예전에는 한 집 건너 철공소가 있어서 닻, 대형 집게, 곡 괭이, 낫, 호미 등 물론 특수 주문용 철기구도 이 동네에서 다 만들었어요. 이제는 철공소 대신 기성품을 파는 가게들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 거리에는 머지 않아 대장간의 합창 이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을 것이다. 30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원동 305

155 그때, 이곳 도원동 Map & Photos ➌ 도원철공소거리 ➋ 도원 죽산이 실내체육관 ➐ 광성 살던 집 중.고교 ➊ 중앙여상 ➍ ➏ 도원역 ➎ 인천 축구 전용경기장 공구상가 숭의로타리 ➊ 피병원(덕생원) 전염병 환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병 원으로 원래는 인천여상 아래쪽에 있던 것을 1898년 당시 공동묘지 화장장 부근인 답동 9번지로 이전 했다. 이 공동묘지에 주택단지가 들 어서면서 1921년 3월 31일 도원동 12번지로 다시 이전하였다. 이 병원 의 명칭은 설립 당시 피할 피( 避 )자 를 써 피병원으로 명명되었다. 인천병원 분원(1914년 4월1일), 사정병원(1914년 9 월 22일), 전염병원을 거쳐 덕생원으로 변경되었다. 도원동에 있던 덕생원 일대는 제물포해전 후 일본군의 군사용지로 중대 규모의 부대가 주둔했던 곳이다 전쟁 중 소실되었고 그 자리에 현재의 중앙여상이 들어섰다. ➋ 보각선원 1912년 인천의 유지 정치국의 대지 를 기증받아 김적음 스님이 현 광성중 고등학교 뒤쪽에 보각선원을 창건했 다. 보각선원은 일본 불교의 정토진종 본원사파이나 조선인 포교의 목적으 로 건립되었다. 창건 당시에는 본당과 시왕당, 칠성당 등의 건물이 있었다고 하나 현재는 광복 이후 개축한 대웅전 건물만 남아 있다. 이곳은 동명초교의 뿌리가 있던 곳이다. 설립자 박창례 선생은 1930년 4월 보각선원 강당을 빌려 관서학원( 關 西 學 院 ) 이란 야학 간판을 내걸었 다. 성냥공장과 정미소에서 일하는 소년 소녀 직공 100여 명에게 한국어와 역사 를 가르쳤다. ➌ 조일(아사히)양조 조일(아사히)양조주식회사 의 소주공장은 1919년 10 월에 개업했다. 인천에는 양조에 필요한 맑은 물이 적어 양조가 어려웠는데 아사히양조회사가 도원동 에서 지하수를 찾아내고 소주 생산을 시작했다. 이 소주공장에 앞서 송월동 에 아사히양조장 청주공 장을 운영했다. 이것은 원래 길금주소였다. 이 자리는 한때 껌 공장과 그릇도매상 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➍ 독갑다리 도원동 언덕에서 내려가면 숭의동 쪽으로 독갑다리가 있었다. 다리 너머 바다에는 일제강점기에 염전이 많았다. 그 염전을 오 가던 다리가 이 독갑다리다. 이 다리는 1916년까지 사용된 것으 로 전해진다. 독갑 이란 이름을 갖게 된 것에 대해 여러 설이 있 다. 숭의공구상가거리에 세워진 비문에 의하면 마을에서 쉽게 구할수 있던 큰 독에 흙을 채워 그것으로 교각을 삼았다고 해 독 갑다리라고 불렀다는 설과 이 다리를 중심으로 옹기장이 있었는 데 독값을 받으러 이 다리를 건너다녔다 해서 독값다리 라 했는 데 이것이 독갑 으로 변했다는 설이 있다. 초기 숭의교회가 있던 곳이 도깨비산이어서 도깨비다리 라고 하던 것이 독각 이 되고 독갑 이 되었다는 설도 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운영하 던 선화동의 유곽이 폐쇄되면서 많은 창부들이 이쪽으로 이동했 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중요한 손님 접대는 독갑다리 색시집에서 한다 는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했다. 현재 독갑다리 일대는 크고 작은 철공소와 공구상들이 차지하고 있다. ➎ 인천축구전용경기장 2008년 6월 13일 숭의종합경기장(구 인천공설운동장)을 철거하 고 그 자리에 2012년 지하 3층, 지상 5층 규모의 축구장 전용경 기장을 건설했다. 수용 인원은 약 2만 300명이다. 다른 FIFA 규 격의 구장보다는 작지만 짜임새 있고, 관중과 호흡하며 함께 느 끼는 구장으로 설계됐다. 인천축구전용경기장은 시민구단 인천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이다. ➏ 도원교 도원교는 1955년 5월 6일 착공해 같은 해 9월 28일 개통되었다. 길이 18m, 폭 15m로 주로 미군이 원조한 자재로 건설했다. 도 원동쪽과 송림동쪽을 연결하는 이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창영동 건널목으로 내려와 통행했다. 개통 이후 종종 이곳에서 투신자 살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➐ 시립도원실내수영장 제 59회 전국체전을 대비해 1978년 건립된 인천시립도원실내 수영장은 인천 최초의 실내 수영장이다. 대지 9,917m2(3,000평), 지하 1층, 지상 2층 연건평 3,157m2(955평) 50m 21m 국제규 격 풀장에 수용능력 1,500명이다. 그 후 제 64회 전국체전을 맞 아 1983년 트러스 및 지붕판을 교체 하는 등 전면 개보수 하였 다. 이후 1999년 80회 전국체전 등 수많은 체육행사를 치러냈 다. 바로 위에 있는 광성중 고는 체육시간에 이곳에 와서 수영 강습을 하기도 했다. 30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원동 307

156 숭의동 과거의 추억도 현재의 풍경도 로터리에서 돌고 돈다 숭의동 교차로에는 오래된 로터리가 있다. 그 로터리를 돌면 여의실도 갔고 깡시장도 갈 수 있었다. 더 돌면 109번지 전도관 동네와 옐로우하우스에도 다다른다. 한때 그 로터리를 돌아야 도심에서 교외로, 교외에서 도심으로 오갈 수 있었다. 도시의 경계가 불분명해진 오늘날에도 숭의로터리는 하염없이 자동 차를 원심력으로 돌리고 또 돌린다. 로터리는 과거의 추억도 현재의 풍경도 돌리고 있는데 숭의동의 시 계 바늘은 멈춰 서있다. 심하게 낡았음에도 요즘 인천에서, 아니 대한민국 골목 중에서 가장 핫 한 곳, 숭의 동 우각로 문화마을. 안전행정부 차관은 예고도 없이 전격 방문해 주민과 함께 골목 구 석구석을 돌아보았고 어느 여름날 인천시장은 들렀다가 아예 그곳에서 하룻밤 묵고 갔다. 공중파를 비롯해 거의 모든 TV 화면에 심심치 않게 나오는 이 동네는 얼마 전에 는 제1회 대한민국지방자치박람회 우수향토자원 30선에 선정되었다. 전국 145개 향토 자원 중에서 뽑혔다니 그 경쟁력이 대단하다. 우각로 문화마을의 오늘 모습이다. 그러나 그 동네의 어제는 터프하고 와일드한 것으로 핫 했다. 사람은 밟고 있는 땅을 닮는다고 했던가. 쇠뿔고개, 황골고개라는 거친 옛 이름을 가진 이 동네는 지형만큼이 나 거칠기로 유명했다. 창영동, 송림동 등 아랫동네 아이들은 그곳에 오르기를 극도로 꺼렸다. 이유는 단 하나, 이유없이 두들겨 맞을까봐. 600여 가구 중 절반은 빈집이었다. 15년 이상 끌어온 재개발 계획은 계속 공수표만 날렸고 사람들은 하나 둘 떠났다. 체온 없는 빈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었다. 소굴 이었 다. 비행청소년, 술주정뱅이 그리고 쓰레기더미가 집 하나씩을 차지했다. 주민들조차 자신의 동네를 무서워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동네가 점점 희미해질 즈음 예술한다 숭의동 309

157 는 사람들이 동네 언덕으로 올라왔다. 작가 화가 도예가 연극인 등 예술인의 영역 도 다양했다. 그들은 빈집부터 색칠했다. 알록달록 울긋불긋 총천연색. 아니 예술한다는 사람들 이 저렇게 색감도 없이, 촌스럽게. 그동안 너무 칙칙한 무채색에 둘러 싸여 살던 주민 들을 위한 배려였다. 일단 겉모습만으로도 동네는 생기를 찾기 시작했다. 아예 몇몇 예 술인은 짐을 옮겨와 눌러앉고 다른 이들은 빈집을 작업 장소로 쓰기도 했다. 그렇게 삼 삼오오 모이기 시작해 20명의 예술인이 마을 주민이 되었다. 빈집이 공예방으로, 영화 제작소로, 작은 도서관으로, 게스트하우스로 변신했다. 대낮에도 돌아야 했던 경찰 순 찰도 사라졌다. 문화마을로 알려지자 사람들의 발길이 늘었다. 골목마다 셔터소리와 함께 감탄사 그리고 웃음소리가 새나왔다. 순찰 대신 순례의 발길이 이어졌다. 50년대 초 산 위에 남은 옛 알렌별장의 흔적. 우각로 문화마을 위에는 성채와 같은 거대한 건물이 서있다. 흔히 전도관 이라 불리 는 건물이다. 전도관은 한때 인천의 랜드마크였다. 동인천, 주안, 개건너는 물론 앞바 다 섬에서 인천 항구로 들어올 때도 희미하게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게 이 건물이었다. 그곳의 주인은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었다. 맨 먼저 등장하는 인물이 알렌이다. 선 교사이자 의사로서 초대 주한 미국공사를 지낸 그는 1890년 고종황제의 땅 옆에 여름 별장을 지었다. 둥근 타워의 돔을 곁들인 2층 별장이었다. 1907년 알렌은 미국으로 귀 국했고 그 자리를 이완용의 아들 이명구가 차지했다. 1927년에는 이화여전 출신의 이 순희 남매가 그곳에 흔히들 개미학원이라고 불렀던 계명학원을 세웠다. 광복 직후에 는 서울의 한 대학의 분교가 개교하기도 했다. 31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숭의동 311

158 휴전 후, 한 종교 단체의 집회가 남한 땅을 온통 휩쓸었다.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1955년 9월 16일 송림동 동산중학교 앞 넓은 벌판에 엄청나게 큰 천막들이 쳐졌다. 수 없이 많은 솥단지들이 돌맹이 위에 올려졌다. 수많은 사람들이 폭우가 내리는 가운데 천막 안에서 열광적인 집회를 가졌다. 원래 닷새 예정이었으나 이틀을 연장하며 밤낮 으로 열렬한 집회를 가졌다. 그 집회를 인도한 사람은 바로 불의 사자, 동방의 의인 이라 불린 박태선 장로였다. 그 종교 단체 이름은 한국예수교전도관부흥협회였다. 지 금은 천부교라는 새로운 교명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공사집, 선교사 집 으로 불리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1957년 10월 전도관을 세웠다. 수많은 신도들의 벽돌을 이고 지 고 언덕을 올랐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사방팔방 산 밑에서 개미처럼 꼭대기로 올라오는 모습이 아직 도 눈에 선해.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었잖아. 새벽 4시까지 기도하던 그 소리에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었어, 옆집에 살면서 전도관에 다니던 경숙이 엄마는 소사 신앙촌으 로 들어간다며 이 동네를 떴는데 지금 어디서 사는지. 40여 년간 전도관 주변에서 살고 있는 장춘자(74) 할머니의 기억 속 한 줄거리다. 높은 축대와 담장으로 둘러쳐져 있던 옛 전도관 건물. 주황색 지붕을 한 커다란 건물이 전도관. 1978년 전도관은 이곳을 떠났다. 조 씨라는 서울 사람이 이 건물을 매입했다. 6개월 정도 비어 있다가 신발 공장 세 곳이 세 들어 왔다. 직공들이 많아 별도의 기숙사도 있 었다. 2, 3년간 운영하다가 공장은 이전했다. 1984년 이 자리에 예루살렘교회가 들어 섰다. 다시 열광적인 집회가 이어졌다. 매 주일이면 교인을 가득 실은 수십 대의 버스 가 좁은 골목길을 비집고 꼭대기로 향했다. 주민들이 반복되는 그 혼잡 때문에 들고 일 어났다. 결국 버스는 공설운동장에 세워졌다. 30여 년 전의 모습처럼 교인들은 걸어서 109번지로 올랐다. 9년 전 예루살렘교회는 다른 곳으로 옮겼다. 다시 전도관은 비었다. 불 꺼진 성채는 을씨년스럽기조차 하다. 산꼭대기의 1,700여 평 땅은 한없이 넓어 보였다. 주황색의 양 철 지붕에 올랐다. 알렌이 왜 여기에 별장을 세웠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주변이 육 지로 많이 변했지만 월미도는 물론 멀리 인천 앞바다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 왔다. 갯바 람이 코에 스치는 듯했다. 어디선가 울부짖는 기도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숭의동에는 여의실( 如 意 室 ) 이란 동네가 있다. 현재의 남구청사와 청소년회관 일대 를 일컫는다. 흔히 여우실이라고 부르는 이 동네는 조선왕조 개국공신 김균의 후손들 31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숭의동 313

159 이 600년 동안 살아 온 경주 김씨의 집성촌이었다. 6선 의원으로 국회부의장까지 지낸 고( 故 ) 김은하( ) 씨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여의실에는 오랫동안 김씨 문중의 선영이 있었다. 일제 말이었던 1940년, 일본 사람 의 거주지가 도심에서부터 점점 확장해 오면서 현 숭의로터리 일대까지 밀려왔다. 주 변에 도로가 뚫리고 선영과 마을이 두 동강 나자 선영을 시흥시 미산동으로 이장했다. 1996년에 종가와 사당마저 헐리게 되었고 그 자리에 남구청 종합민원실이 들어섰다. 점점 역사 속으로 사라져가던 종가터에 지난 2006년 11월 여의실 문중 종친과 남구 학 산문화원이 주축이 돼 표지석 하나를 세웠다. 현재의 민원실 바로 앞이다. 인천남중학교 후문 가까이에 있는 여의실 경로당에서 김용식(81) 할아버지를 만났 다. 그는 이곳에 태어나 지금까지 살고 있는 여의실 토박이다. 31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315

160 이 일대가 온통 배밭이었어요. 저기 시온교회가 들어선 자리는 배밭 주인이 살던 집 이고. 남구청 밑으로는 온통 미나리깡이었지. 어렸을 적에는 거기서 붕어와 미꾸라지 잡아먹곤 했어요. 한때 구청 자리에 미군이 포를 설치하기도 했고. 옛 인천교대 터도 여의실 문중의 땅이었다. 개성공립사범학교는 6 25 전쟁으로 갈 곳을 정하지 못하고 숭의초교 교실 몇 개를 빌어쓰고 있었다. 개성사범학교를 인천으 로 유치하기 위해 문중이 땅을 내놓았다. 1953년 4월 숭의동 203번지에 학교 부지를 확 보했다. 당시 그 땅은 야산이었고 다른 한편은 온통 미나리밭과 물구덩이었다. 학생들 은 방과 후는 물론 일요일에도 등교하여 땅을 고르는 작업을 했다. 이 학교는 인천사범 학교에서 인천교육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고 다시 오늘날의 경인교육대학교로 발전했 다. 옛 주인선 옆에 있는 신광이발소. 개업한 지 60년 되었다. 1990년 인천교대가 계산동으로 떠난 그 자리에 남구청과 청소년회관이 들어섰다.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은 교대 본관으로 사용되었던 일자형 건물이다. 한눈에 봐 도 주변 건물과는 사뭇 다르다. 건물 모퉁이에 머릿돌이 박혀 있다. 단기 4289년 9월 로 돼 있다. 1956년에 세워진 건물로 현재는 청소년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건물과 건 물을 이어주던 회랑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은 청소년회관과 남구의회 청사를 이 어주고 있다. 옥상에 오르니 옛 교사( 校 舍 )의 모습이 더 뚜렷하다. 이런 이유로 영화제 작 관계자들의 발길이 심심치 않게 이어지고 있다. 거의 다 그대로예요.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 손상된 게 별로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선배들에게 수업 후는 물론 체육시간에도 체력 단련으로 벽돌을 날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1967, 68년에 이곳에서 공부했던 6회 졸업생 김병진 씨(한국우주소년단 사 무국장)의 설명이다. 숭의동 철로변에 가면 나무 냄새가 난다. 나무 켜는 소리와 망치 두드리는 소리가 들 린다. 경인선 철도길 따라 목공예 관련 업체 30여 집이 모여 있다. 대부분 30년 넘는 집 들로 처음에 배다리에 터를 잡았으나 철도길과 도로가 확장되면서 도원동을 거쳐 이 인천교대 본관과 연결된 회랑의 지붕. 31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숭의동 317

161 곳 숭의동으로 옮겨오게 되었다. 다시 모이 면서 자연스럽게 이곳은 특화 거리가 되었 다. 목공예점은 나무 현판부터 계단 손잡이 같은 인테리어 소품을 만들고 목공점은 주로 문짝과 창문틀 등 큰 나무 물건을 만든다. 7, 80년대에는 바둑판도 빠지지 않는 인기품목 이었다. 명절이 되면 주문이 밀려 철야 작업 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중국 기성품이 많이 들어와서 예전만 못했는데 최근에 웰빙 바람이 불면서 조금씩 일감이 늘고 있네요 신정목공예 안희식 대표의 말이다. 작업장 가운데 요즘에 보기 드문 나무 물통 하나 가 놓여있다. 드라마 동이 의 소품으로 방송국에 10개를 납품하고 남은 하나다. 드라 마 대장금 의 소품 몇 점도 그의 손을 거쳤다고 한다. 기계대패 돌아가는 소리가 나는 옆 가게 한일공예사에 들렀다. 이제는 이 일을 배우려고 하는 애들이 없어요. 이곳에서 장사하는 사장들이 그만두 면 이 일도 맥이 끊긴다고 봐야죠. 김종필 사장에게 손으로 하는 작업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하자 몇 가지 시범을 보 이는데 30년 장인답게 손놀림이 민첩하다. 팔만대장경도 이렇게 만든 거잖아요. 우리가 그 후예라고 봐야지요. 그는 몇 년 전 송도 151층 인천타워 모형을 주문받아 나흘 동안 밤샘 작업을 해서 3m짜리 모형으로 납품했던 것을 자랑한다. 그러나 인천타워 사업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으면서 자신이 만든 모형도 폐품 처리됐을 것을 생각하면 영 마음이 좋지 않다. 숭의 깡시장이 있었다. 한동안 인천 시민의 농산물 공급을 책임지던 숭의철교 옆 도매시장이었다. 지금은 숭의청과물시장 이란 이름이 붙은 40년 정도의 역사를 지닌 31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숭의동 319

162 경인선 철도 기공식(1897). 작은 시장이다. 7,80년대까지만 해도 인근의 김포, 강화는 물론 충청도, 전라도에서 신 선한 청과물들이 물밀 듯 들어왔다. 중개인의 경매 외침소리가 매일 새벽을 깨웠다. 길 건너편을 포함해 주변에 100여 개의 가게가 문을 열었고 철교 밑에도 노점이 장사진을 쳤다. 이제는 15여 개의 가게만 문을 열 뿐 빛바랜 사진으로만 남은 시장이 되었다. 새댁 때 이곳에 와서 장사했는데 이젠 할머니가 되었어. 20여 년 전 농산물시장이 구월동으로 이전하면서 시장이 폭삭 죽었어. 옛 경매장 뒤편 한 귀퉁이에 문을 열고 있는 할머니의 안타까운 푸념이다. 시장 뒤 편으로 가면 가게 문들은 다 닫혀 있고 행인조차 뜸해 황량하다. 이제는 택시 기사에게 숭의청과물시장 보다는 시장 옆에 있는 풀 나이트클럽 가자고 해야 올 수 있는 곳이 되었다는 게 상인의 얘기다. 시장에서 철도길 따라 도원역 방향으로 오르다보면 가로수 공원에 사람 키를 훨씬 넘는 돌 하나가 세워져 있다. 한국철도 최초기공지 표지석이다. 1897년 3월 22일 중절 모를 쓴 서양인과 도포를 입은 조선인 등 수십 명이 구릉에 모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2 년 후 1899년에 개통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 경인선 기공식 첫삽을 떴다. 그 삽질이 한국철도 110년의 초석이 된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현재 표지석이 세워진 곳은 기공식 첫 삽을 뜬 곳이 아니다. 현재의 위 치에서 동쪽으로 400여 미터가 정확한 장소라고 표지석에 써 있다. 그러니까 현재 진로 아파트 남쪽 부근 숭의철교에서 박문삼거리로 가는 도로가 올바른 자리로 추정된다. 32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숭의동 321

163 그때, 이곳 숭의동 Map & Photos 동인천역 인천역 광성 중.고교 도원역 ➐ 옛 전도관 ➑ 인천 축구 전용경기장 ➎ ➑ 숭의 로터리 숭의철교 ➋ ➌ ➊ 현대유비스 병원 남구청 ➒ 제물포역 인하대 ➍ ➏ ➊ 우각역 우각역은 주위에 민가가 없었기 때문에 오로지 알렌만을 위한 역이었다. 알렌이 자신의 별장을 오르기 위해 정차한 역으 로 역 건물이 있었다는 증거 사진도 없다. 그가 미국으로 돌아가고 선로가 직선화 되면서 숭의동 쪽으로 지나가자 이 역은 존재 가치가 없어져 1906년에 사라진다. 숭의동 109번지 자동차정비소 뒤쪽 골목길에 선로가 지나갔던 축대 흔적이 남아 있다. ➋ 영제한의원 1945년 이전부터 대를 이어 내려오는 한의 원이다. 1970년 가까이 전수된 우강 침법과 보뇌환 등으로 각종 희귀 질환 등을 치료하 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한의원의 전신인 영 제한약방을 개설한 우강 노학영은 6,70년대 당시 지역 내 기탁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 했다. 1979년 6월 수봉공원 팔각정 건립에 도 1,504만 원을 기탁해 팔각정 이름은 그의 호를 딴 우강정( 佑 江 亭 )이다. ➌ 숭의동 다복아파트 일제강점기 다복아파트 터에는 면화 (솜)를 생산하는 군수공장이 있었다. 여기서 생산된 물품은 남구청 건너 편에 방공호 등 그 흔적이 현재도 남 아있는 마굿간으로 옮겨졌다. 마굿간 은 일종의 물류창고였다. 마차로 수 인선 남부역으로 운송돼 인천항역을 거쳐 선박으로 일본이나 중국으로 건너갔다. 구청 주변에는 이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이 거주했던 나가야 영단주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다복아파트는 군수공장 터에 1975년 10 월 준공되었다. 인천개발공사에서 다복맨션아파트라는 명칭으로 100가구를 분양했다. ➍ 와룡양조장 인천남중학교 정문 건너편 현재의 태양아파트를 중심으로 1970 년대 까지 있었던 양조장이다. 지금의 수봉탕 목욕탕 까지 넓은 부 지를 차지하고 있었다. 붉은 벽돌의 높은 굴뚝에 흰 페인트로 臥 龍 釀 造 라고 한자로 적혀 있었다. 고구마로 주정을 뽑은 검은 색 폐수가 공장 앞 큰 저수지로 흘러나왔다. 겨울이 되면 이곳에서 많 은 아이들이 썰매나 스케이트를 탔다. 현재 폐허로 된 제물포시장 은 저수지 바로 옆 논을 매립하여 지은 것이다. 인근에 가죽공장이 있었고 침례교회에서 운영하는 고아원 성애원이 있었다. ➎ 숭의동 극동아파트 1968년 4월16일 인천 최초의 시 공영아파트 자리다. 현재 그 터 에는 11층 규모의 극동아파트가 세워져 있다. 한편 인천 최초의 단지형 아파트는 1975년 주택공사에서 건설한 현재는 수봉공원 인공폭포가 된 도화동 AID아파트다. ➏ 주인선 경인선의 주안역과 수인선의 남인천역 사이에 가설되었던 주한 미군의 화물 철도(길이 3.8km의 단선 철로)로 주안역의 주 자와 남인천역의 인 자를 따서 이름을 붙였다. 1957년 부평 미군부대 와 남인천역 근처에 있던 미군부대 간 물자 수송을 위해 가설되 었다. 1959년 5월 31일 준공하고 7월 업무를 개시했다. 남인천역 은 1980년대 인천과 논산 사이의 입영 열차가 운행되기도 했다. 1990년 이후 부평 미군기지의 기능이 축소되면서 1992년경부터 주안역과 남인천역 구간의 열차 운행이 중지되었다. 2005년 주인 선 폐선 부지 1.4km 구간, 2만7,990m2에 공원이 조성되었다. 제물 포역 쪽에 잘려진 주인선 철교가 일부 남아 있다. ➐ 옐로우하우스 광복 이후까지 운영되었 던 선화동 유곽이 1960 년대 초 박정희 정권이 사회 정화의 일환으로 정 리하자 현재의 숭의동 지 역으로 옮겼다. 건물을 지으면서 당시 미군부대 에서 노란색 페인트를 얻어다 칠했기 때문에 옐로우하우스 란 별칭을 얻게 됐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모두 단층 혹은 2층 건 물이었다. 연안부두에 들어온 선원들이 한 달 가량 이곳에 머물 기도 해 한창때는 서른두 집에 340명의 아가씨들로 불야성을 이 루었던 대표적인 집창촌이었다. 다시 출항을 하기 위해 선주들 이 이곳에 와서 술 취한 수많은 선원들을 업어서 데려갔다는 이 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집창촌이 포함된 숭의1동 3 4 통 3만3,000m2가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돼 재개발을 앞두 고 있다. ➑ 숭의자유시장과 숭의평화시장 숭의운동장 옆에는 숭의자유시장과 숭의평화시장이 마주 보고 있었다. 1970년에 지어진 숭의자유시장은 체육사와 냉가공업점 등이 있었으나 공설운동장의 재개발로 철거가 되었다. 옆에는 1966년 12월 영사실 천장에서 원인모를 불이나 전소되었던 도 원극장이 있었고 목조 창문과 문을 만드는 목공예점이 많이 있 었다. 1971년 개설한 숭의평화시장은 초기에 주변의 도원동과 숭의동 지역의 주민은 물론 제물포역 인근 주민들이 채소 경매 시장과 이 시장을 이용하면서 활성화되었지만 현재는 그 기능이 거의 상실한 상태다. ➒ 일제강점기 관사 마을 남구청 주변에는 일 제강점기 나가야( 長 屋 ) 주택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나 가야 주택은 한 건 물 안에 여러 가구 가 밀집해 거주하는 일본식 다세대 주택 이다. 주변에 공장과 관사가 많이 밀집해 있었으며 이 일대는 공 장 근로자 마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 영향 탓인지 현재 이 동네에는 일본 종교인 천리교 경인포교소가 자리하고 있다. 32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숭의동 323

164 용현동 용현벌 미나리밭에 심어진 하와이 사탕수수 이승만 전 대통령은 용현벌에 대학이 들어설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일까. 이곳에는 독쟁이 고개가 있다. 이는 독정리에서 파생한 명칭이다. 독정( 讀 亭 ) 은 책을 읽는 정자라는 뜻이다. 미나리밭과 피난민수용소 로 사용했던 너른 터에 상아탑이 우뚝 서게 된 운명은 이미 땅 이름에서 타고 난 듯하다. 인하대학교는 하와이 이민자의 한 많은 눈물과 땀이 토대가 된 배움터다. 1979년 2월 24일 비 오는 오후, 인하대 인경호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그들 사이에 프란체스카 여사, 조중훈 이사장, 이재원 총장 등의 모습도 보였다. 잠시 후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모습이 보였다. 동상으로 그가 다시 돌아왔다 혁명 후 각 지에 있던 그의 동상이 철거된 후 처음으로 이곳에 건립된 것이다. 그가 1965년 세상 을 떠난 후 첫 번째로 세워진 동상이었다. 하와이 한인동지회에서 보낸 성금 5만 달 러를 들여 6m 30cm(좌대3m 포함) 높이로 세워졌다. 화강암 석대의 추념문에는 하와 이 이민의 한 많은 눈물을 받아 본교 창립에 크게 이바지한 초대 대통령 이라고 쓰였 다. 그러나 동상은 학원 민주화 바람을 비켜가지 못했다. 1983년 10월 학생들에 의해 동상은 밧줄에 묶여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동상은 현재 학교 측에서 원형대로 복원해 보관하고 있다. 2010년 9월 인하대 총동창회는 지난 1983년 철거된 대학 설립자 이승만 전 대통령 의 동상 재건을 추진 중이라고 밝혔다. 총동창회 측은 정치를 떠나 순수 대학 설립자 를 존중하는 의미에서 동상 재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며, 앞으로 설문조사나 포럼 등 을 통해 공감대를 형성해 나갈 것. 이라고 말했다. 곧바로 학내는 물론 학교 밖에서도 용현동 325

165 의견이 찬반양론으로 들끓었다. 결국 동상은 다시 제자리로 올라가지 못했고, 현재 동 상 없는 석대만 30년 동안 인경호를 쓸쓸히 바라보고 있다. 인하대와 이승만 전 대통령 인연은 19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인하대 총동창회 50년사 에 따르면, 1903년 하와이에 사탕수수 재배 노동자로 떠난 100여 명은 1913년 자녀교육을 위해 하와이에 한인기숙학교를 설립했다. 이들 이민자의 90%는 인천 출 신이었다. 그때 하와이 교포들은 이승만 전 대통령을 교장으로 초빙했다. 그는 이 학 교에서 교육사업을 펼치며 1918년 한인기독학원으로 이름을 바꿨다. 1919년 이 전 대 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에 선출돼 학교 운영에 전념하기 어려웠고 결국 학 교는 1947년 폐교됐다. 그러자 교포들은 한인기독학원의 판매대금을 조국의 대학 설 립기금으로 보내고 싶다는 뜻을 이 전 대통령에게 전했다.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 (MIT)와 같은 최고 수준의 대학을 설립하겠다는 의지를 갖고 있던 이승만 대통령은 학교 부지로 인천을 점찍었다. 하와이 교포들의 고향 이자, 공업단지가 들어서 있는 등 공대를 설립하는 데 있어 장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인천시는 용현벌 부지 41만3,223m2를 무상 제공했다. 그곳은 온통 미나리밭과 배추 밭이었고 6 25 전쟁 이후에는 잠시 피란민수용소로 사용되었던 곳이었다. 1954년 그 벌판에 인하공과대학 이란 상아탑이 세워졌다. 인하 라는 이름도 인천( 仁 川 )과 하와 인하대 캠퍼스의 상징인 쌍발여객기. 32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현동 327

166 이( 荷 蛙 伊 )의 앞 글자에서 따왔다. 대학 설립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승만 전 대통령 은 1960년 하야할 때까지 매년 입학식과 졸업식에 참석할 정도로 인하대에 남다른 애 정을 가졌다. 용현동은 예전에 비랑이 혹은 비랭이라고 불렸다. 비랑 이란 파도( 浪 )가 난다( 飛 ) 는 뜻으로 쓰였다고 전해지긴 하나 비탈진 곳 이라는 해석이 더 우세하다. 용현동의 대표적인 비탈길은 흔히 얘기하는 독쟁이 고개다. 독쟁이는 발음 편의상 독정리에서 파생한 명칭이다. 독정( 讀 亭 )은 책을 읽는 정자라는 뜻이다. 이곳은 배산임수의 땅 모 양이다. 수봉산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승기천 개천이 흐르며 멀리 인천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양지바른 기슭이었다. 책 읽기 알맞은 정자가 들어서기에 딱 좋은 곳이다. 훗 날 인하대학교가 이곳에 터를 잡게 된 운명은 이미 타고 난 듯 하다. 인하대생들은 주로 뒷문으로 다닌다. 정문 쪽은 공장지대이기 때문에 상권이 발달 하지 못했다. 자연스럽게 뒷문 건너편이 대학가가 되었다. 먹자골목은 남북축과 동서 축이 교차하며 활기를 띠고 있다. 몇 년 전 이 골목은 걷고 싶은 거리 로 조성되었다. 동서축은 100년 전 경인철로를 형상화해 옛 역사의 연혁 등을 주물 동판으로 표현했 고 남북축은 우리나라 해발고도의 기준이 되는 수준원점을 이미지화해 국내외 대표 적인 해발고도를 주물 동판으로 설치했다. 인하문화의거리 간판이 서 있는 이 사거리 를 학생들은 고민사거리 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술을 먹을지 밥을 먹으러 갈지 또는 다른 곳으로 갈지를 고민한 뒤 움직이기 때문이다. 7, 80년대 인하대 후문의 명소는 당구장이었다. 당구 학점 300은 돼야 졸업한다 라 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인하대생의 평균 당구 실력은 만만치 않았다. 그만큼 영진당구 장, 거북당구장 등 당구장이 책방보다 많았다. 그 덕분에 이 동네에서 유명한 여자 당 구 선수가 배출되었다. 2004년과 2006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한 김가영 선수다. 김가영은 아버지 김용기 씨가 이곳에서 당구장을 운영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4학년 때 자연스럽게 큐대를 잡았다. 어린 딸을 위해 아버지는 큐대를 키에 맞춰 잘라 주었고, 수준원점( 水 準 原 點 ) 김가영은 대학생 오빠들 틈에서 당구공과 씨름했다. 15년 후 그녀는 포켓볼 세계 랭킹 1위에 올랐다. 인하공전 7호관 뒤에는 중요한 국가시설이자 문화재가 자리 잡고 있다. 언뜻 보면 첨성대처럼 보이는 3m 46cm 붉은 벽돌의 원통형 건축물은 수준원점( 水 準 原 點 ) 이다. 이 수준원점은 대한민국 지형 높이의 기준점이 된다. 즉 백두산의 높이 해발 2,744m 는 이곳을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바다로부터의 높이를 말하는 해발의 기준점이 바로 이 수준원점이다. 원래는 당시 바닷가였던 중구 항동1가 2에 설치했다. 하지만 바다를 계속 매립하자 이 수준원점을 더 이상 바다 옆에 두기 어려워 육지 안으로 옮기는 방 안이 논의됐다. 이때 이전 대상지로 떠오른 곳이 인하공전 캠퍼스다. 지반이 평탄하 고 단단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수준원점은 1963년 12월 항동 바닷가에서 인하공전으 로 옮겨졌다. 비록 국립지리원의 관리 대상물이지만 학생들은 국내 유일의 수준원점이 학교 내 에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인하공전은 학교에서 송도유원 지까지 왕복하는 원점마라톤대회는 물론 원점체육대회, 원점축제 등 원점 돌림자의 행사를 매년 치른다. 32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현동 329

167 인하대와 같은 울타리에 있는 정석항공고 뒷문 건너편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보육 원인 해성보육원이 있다. 이 보육원은 우리나라 개화기 역사의 한 페이지를 품고 있 다. 프랑스 뮈텔 주교가 1895년 파리외방전교회에 보낸 보고서에는 1년 전에 인천에 도착한 마리클레망스 수녀와 엠마누엘 수녀가 가을에 4살과 12살 여자 아이 등 5명의 아이들을 성바오로 수녀회 인천본원 시료소에서 돌보았다. 라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1894년부터 고아들을 돌보아 온 해성보육원의 첫 출발이자 국내 근대 보육사업의 첫 해로 꼽을 수 있는 명확한 증거다. 프랑스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는 1894년 가을 길거리에 버려진 4살과 12살 된 여자아이와 이듬해 4월 2살 된 남자아이를 보살피기 위해 답동성당 내에 해성보육원 을 설립했다. 광복 이후 고아의 수가 급격히 늘자 보육원은 1948년 현재의 자리에 용 현동 분원을 설치했다. 6 25전쟁 때 신부와 수녀들은 200여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송 도와 덕적도 등으로 피란을 다녀야만 했다. 전쟁이 끝난 뒤 보육원을 재정비하고 1975 년에 아예 보육원 자체를 용현동 분원으로 이전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인하대 옆에는 얼마 전 까지 큰 공터가 있었다. 흔히 SK저유소 라고 불리던 곳이었 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는 군수공장 히다치가 있었고 광복 후에는 POL(Petroleum Oil Lubricants)이라 불린 미군유류보급창이 있었다.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가장 중요한 기름을 인천항을 통해 들여왔고 이곳에서 각 지역으로 송유관 혹은 트럭으로 기름을 수송하는 일종의 물류기지 기능을 했다. 정전협정을 앞둔 1953년 6월 13일 밤 10시 북괴 폭격기 3대가 인천 상공에 나타나 이 유류보급창을 기습 공격하고 이어 인근 신흥동 소재 송도직물공장에 폭탄 수발을 투하했다. 공장에서 잠자던 여공 수명이 죽거나 부상당했고 유류창 부대는 온통 불바 다가 되었다. 부대의 화재는 거의 일주일 이상 지속되었고 결국 불도저로 모래를 덮어 진화했다. 빈 드럼통들은 숭의동 공설운동장으로 운반했다. 그리고 드럼통을 펴서 처 음으로 운동장 담을 쳤다. 33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현동 331

168 현재 SK스카이뷰아파트 단지가 신축 중인 옛 SK저유소. 부대의 규모는 땅 크기만큼이나 엄청났다. 인천 POL에 근무하는 한국인 근로자가 959명에 달했다. 1966년 4월 16일 도서실, 의무실, 각종 오락실을 갖춘 현대식 3층짜리 POL노동회관을 낙성했는데 그 오픈식에 당시 인천시장이 참석했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 기름통은 지역 건달들의 좋은 표적이었다. 인천문화재단 대표 김윤식 시인은 이와 관련한 이야기를 글로 쓴 적이 있다. 미군 유류창을 출발한 휘발유 드럼 운반 트럭들은 옛 장안극장 위쪽 숭의동 308번 지 일대를 관통하는 샛길을 통해 경인 국도로 나서는데 이 사거리에서 일단 정지를 했 다가 부평 쪽으로 우회전했다. 이 길은 약 15도 정도 경사져 있어서 트럭들은 그다지 빠른 속도를 내지 않고 달렸다. 사거리에 도달하기 직전, 트럭이 더욱 속력을 줄일 무 렵 골목에 숨어 있던 청년들이 두 명씩 트럭에 기어오르는 것이다. 운전석의 미군 운 전병은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른 채 그냥 앞만 보고 사라지고, 그러면 골목에서 득달 같이 구루마가 나오고 드럼통은 거기에 실려 어디론지 사라지는 것이었다. 1972년 미군이 철수하면서 그 자리에 석유공사가 들어섰고 이어 유공, 선경 그리고 SK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때 광활한 나대지 한 귀퉁이에는 부천유공축구단과 SK와이 번스야구단의 연습장이 들어서기도 했다. 이곳은 현재 아파트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 다. SK건설이 인천SK 스카이 뷰 라는 브랜드로 22~40층 짜리 총 26개 동 3,971가구의 대단지 아파트를 건설하고 있다. 33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현동 333

169 골목 깊숙이 있는 이윤생 강씨 정려. 용현동 골목에는 또 하나의 역사적인 기념물이 있다.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는 유리 (유류)부대 뒤편에 시도기념물 제4호인 이윤생 강씨정려( 李 允 生 姜 氏 旌 閭 )가 있다. 정려는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기리기 위해 마을에 세운 건축물이다. 1604년 용현동에 서 태어난 이윤생은 1636년(인조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집하여 인근의 낙 섬으로 들어가 강화도에서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길목을 차단하며 청나라 군사를 무 찔렀다. 다시 청나라 대군이 침입하자 사력을 다해 싸웠으나 결국 패하고 의병들과 함 께 34세 나이에 전사하였다. 그의 전사 소식을 들은 부인 강씨도 곧 바다에 몸을 던져 순절하였다. 후에 철종은 정려를 내리고 그를 좌승지에, 강씨를 숙부인으로 봉했다. 2년 전 용현동 일대에서 영화 한편이 촬영되었다. 인생 끝에 찾아온 아름다운 사랑 을 깊은 시선으로 담아 낸 영화 그대를 사랑합니다 에는 용현동의 풍광이 고스란히 담 겼다. 영화 담당자는 용현동 일대를 둘러보고 로케이션 장소로 바로 OK했다. 김만석 (이순재)의 손녀 연아(송지효)의 직장인 용현3동 주민센터를 비롯해 비룡쉼터, 용현시 장 등이 필름 속으로 들어갔다 전쟁 후 독쟁이 골목과 수봉산 기슭에는 이북에서 내려 온 피난민들과 시내에 서 쫓겨온 철거민들이 몰려들었다. 인천에서 제일 먼저 시내버스 노선이 개설된 곳일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주해 정착했다. 그들은 영화 속의 노인들처럼 지나온 시간에 순 응하며 동네와 함께 그렇게 늙어 갔다. 비탈진 골목은 시간이 흐를수록 노인들의 주름 처럼 깊게 패여 갔다. 33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현동 335

170 그때, 이곳 용현동 Map & Photos ➊ 낙섬 경인고속도로가 끝나는 현대아파트와 한양아파트 부근에 낙섬이 있었다. 옛 지 도에는 원도( 猿 島 )라고 표기를 하고 납도 ( 納 島 )라고 병기를 하고 있다. 옆에는 소 원도( 小 猿 島 )가 있었다. 조선시대 때 이 곳에서 서해바다 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인천부읍지 에 의하면 매년 봄, 가을마 다 인천부사가 직접 이곳에 나와 제사를 지낸 것으로 전해진다. 낙섬은 일제 때 일 본인들이 바다를 막아 염전을 만들면서 둑으로 연결되었다. 염전에 바닷물을 대주 는 저수지가 있었는데 별다른 놀이시설이 없던 당시 이곳은 망둥어 낚시터였고 물 놀이 장소였다. 어린아이들이 익사사고를 많이 당하기도 했다. 현재 용현동에서 숭 의동으로 넘어가는 큰길이 낙섬사거리 로 불리고 있다. 교육을 위해 현재의 인천성공회(성공회 병원) 구내에 학교를 세 웠다. 1955년 성당을 신축할 때 용현동으로 학교를 이전했다. 1969년 경인고속도로가 학교 부지를 통과하면서 폐교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한편 전쟁 전 황해도 연백에 황해중학교가 이미 있었다. 이 황해중학교와 인천 황해도 피난민들이 세운 황해중 학교가 같은 학교인지는 알 수 없다. ➍ 토지금고 1975년 4월 업무용 토지, 주택 건설용 대지 등 토지 이용도를 증 진시킬 목적으로 토지금고법 에 의거해 토지금고가 발족되었다. 이는 현 LH의 전신이다. 토지금고는 현 용현 5동 일대에 있던 염 전 및 갯벌을 매립하여 시범주택단지로 조성했다. 이에 이 지역 을 토지개발기관의 명칭을 따서 흔히 토지금고 라고 부른다. 던 용현동이 너무 외졌다고 불평이 많았다. 1997년 11월 20일 관교동종합터미널이 개장하면서 문을 닫았다. 현재는 아파트가 들어서 있는데 태화버스 등 일부 버스가 이곳에서 출발한다. ➐ 시연센 용현4동 성당에는 흔히 시연센 이라고 부른 시민교육연극센터 가 있었다. 2004년 성당과 남구청 그리고 전 시립극단 예술감독 박은희 씨가 힘을 합쳐 지하 74평 공간에 150석 규모의 관람석 을 갖춘 연극 공간으로 문을 열었다. 그동안 문화체육관광부 복 권기금 등을 활용해 근근이 꾸려 왔는데 시연센은 결국 10년을 채우지 못하고 운영비 부족으로 2011년 초에 문을 닫았다. ➑ 영진당구장 남구청 시청 ➒ ➏ 수인역 인하대 ➐ ➑ 경인고속도로 학익동 홈플러스 옥련동 SK저유소 (SK뷰아파트 신축중) ➋ ➌ 용현초 ➍ ➎ ➊ ➋ 맹아산 용현초교 건너편에 있는 작은 산으로 그곳에 1960년대에 현재 부평에 있는 인천 성동학교 전신인 농아학교가 있었다. 고아원도 이곳에 있었다. 1940년대 맹아산의 채석장 부근에는 인천에서도 알아주는 유명한 장좌리 약물터 가 있었다. 용현초교 교가에는 약수터 넓은 뜰에 라는 가사가 있다. 현재 맹아산 일부에 우성아파트 가 들어섰다. ➌ 황해중학교 6 25 전쟁 이후 인천으로 피난 온 황해도민들이 용현초교 근처에 세웠던 학교. 성 공회 사제 전세창 신부를 따라 남한으로 내려온 황해도 피난민들이 1952년 자녀 ➎ 토지금고시장 1990년대 후반 토지금고에 양옥집들이 들어서면서 골목 한 집 두 집이 물건을 내다팔기 시작했다. 점차 집들은 마당을 개조해 상가로 만들었다. 매립된 토지 위에 집들이 들어 선 곳, 토지금고 시장은 앞집, 옆집, 뒷집이 벽을 허물고 서로 마당을 내주면서 만 들어진 독특한 시장이다. 시장 골목을 걷다 보면 집으로 연결된 철 대문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2010년 인정시장 등록을 마친 이 시장의 상가는 현재 140~150여 개. ➏ 용현동 시외버스터미널 1975년 9월 25일 용현동 614번지에 대지 5,000평, 연건평 1,200여 평 지하1층 지상 4층 규모로 개장됐다. 금아산업이 6억 원의 공사비를 들여 완공한, 당시로서는 현대식 시외버스터미널 이었다. 이 시외버스터미널이 생기기 이전에는 삼화고속, 한진고 속버스 주차장은 동인천역 건너편에 있었고 시외버스들은 광장 오른쪽에 있었다. 이들 버스 248대가 이곳을 터미널로 사용하게 되었다. 당시 시민들은 염전을 매립해 터미널 건물만 달랑 있었 영진당구장은 46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작 고한 창업주 이 순칠 옹은 학생 들에게 번 돈은 다시 학생들에 게 써야 한다는 확고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장학사업에 관심이 많아 상당한 금액을 인하대에 매년 기부했다. 본인은 찢어진 신 발을 신고, 새옷 안 사면서 모은 돈이었다. 이런 공로로 당시 인 하대 총장으로부터 감사패를 받기도 했다. ➒ 물텀벙이 거리 인천의 물텀벙이(아귀) 식당은 6 25 전쟁 후 인천역 뒤 인천항 부근에서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인천항은 수산물이 모이 고 노동자들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이었다. 당시 아귀는 싼 생선 으로 이를 이용해 얼큰한 탕을 끓여 안주나 끼니로 사 먹기에 더 없이 좋았다. 용현동에 물텀벙이 거리가 형성된 것을 40년 전이 다. 용현동의 성진물텀벙에서 남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물텀벙 이를 해장국처럼 끓여 판 후 용현사거리 부근에 하나둘씩 물텀 벙이집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자연스레 물텀벙이거리가 형성되 었다. 33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용현동 337

171 도화동 불도저로 세운 사학 왕국 이젠 그 흔적도 그립다 인천 어디에 가더라도 마징가제트 의 머리는 보였다. 심지어 앞바다 섬에서 배를 타고 인천으로 들어올 때 그 모습부터 서서히 다가왔다. 홍수환, 유명우, 장정구 등 한때 세계프로복싱 무대를 누볐던 우리의 챔 피언들도 그 체육관의 특설 링에 올라 온 국민을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렸다. 선인체육관은 하나의 건축물 에 그치지 않았다. 당연히 있어야 할 인천 풍경의 붙박이 소재 였다. 한순간에 무릎이 꺾였다. 그리곤 풀썩. 무너져 내리는 데 5초면 충분했다. 40년 동안 언덕에 서서 인천을 굽어보던 맘모스 선인체육관이 먼지와 함께 그렇게 순식간에 사 라졌다. 선인 과 관련 있는 학교를 다닌 것도 아니어서 애증의 대상이 아닌데 순간 울 컥했다. 동시대를 살아 온 지기를 먼저 보내는 섭섭함과 안타까움이 몰려들었던 모양 이다. 폭파하기 전 이미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안전을 위해 건물 아랫부분을 흰 천으로 둘러싼 모습이 마침 염( 殮 )을 한 모습이었다. 한동안 주변을 맴돌면서 이별 시 간을 기다렸다. 2013년 8월 3일 오후 7시 20분경. 그날따라 날씨는 보기 드물게 쾌청했 고 마지막 저녁 해를 흠뻑 맞은 체육관의 실루엣은 유난히 선명했다. 맞은편 청운대 옥상에서 참관하던 시민들도 무너져 내리는 그 모습을 보며 와 ~ 하 는 함성 대신 아~ 하는 탄성을 짧게 내뱉었다. 그들도 같은 마음이었으리라. 후폭풍 먼지는 한동안 높고 넓게 피어올랐다. 대부분의 참관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고 먼지가 걷히길 기다렸다. 잠시 후 제로 그라운드 가 된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있어야 할 배 경 그림이 빠진 듯한 모습이 무척 생경했다. 그렇게 선인체육관은 갔다. 마치 자연 환 경에 적응하지 못한 맘모스처럼. 도화동 339

172 폭파 후 제로그라운드. 선인체육관은 1973년 9월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1970년 4월 착공해 연인원 27 만 명의 건설 인력과 철근 1만 톤, 시멘트 60만 포대를 쏟아부어 3년 6개월 만에 완공 했다. 장충체육관의 세 배 규모로 3층 스탠드에 3만 명의 관중을 수용할 수 있으며 3층 에 있는 로열박스 바로 앞까지 승용차가 다다를 수 있게 만들었다. 실내 바닥에 400m 육상 트랙까지 갖췄으며 축구와 야구를 빼고 그 어떤 종목의 국제경기도 치를 수 있는, 한마디로 서울운동장 메인스타디움을 지붕으로 씌운 격이었다. 동양 최대 규모로 지 어져 맘모스 체육관 으로도 더 많이 불렸다. 그런데 70년대 인천시사 에 의하면 이 체 육관은 당초 무허가 로 지은 건물이었다. 체육관이 들어선 부지는 원래 1944년 1월 8일 조선총독부 고시 제13호로 아동공원으로 지정되었는데 선인재단이 무단으로 체육관 을 건설하면서 공원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었다. 당시 선인재단 백인엽 이사장은 스포츠 대결은 새로운 전쟁 이라고 전제한 뒤, 장차 한국에서 올림픽이 열리면 이 체육관이 큰 역할을 하길 희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1988 년 서울올림픽 때 이 체육관에서는 단 한 경기도 치르지 못했다. 올림픽은 치르지 못했 지만 크기에 걸맞게 빅 이벤트가 많이 열렸다. 특히 그 시절 가장 인기가 높았던 프로 복싱 세계타이틀전이 자주 열렸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1976년 10월에 열린 홍수 환과 알폰소 사모라(멕시코)의 WBA밴텀급 타이틀매치. 이날 입장하려는 관중 행렬이 제물포역까지 이어질 만큼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그러나 홍수환은 사모라에게 경기 내내 흠신 두들겨 맞았고 결국 12회 TKO를 당했다. TKO 판정에 불만을 품은 관중들 이 경기 후 링에 난입했고 이 와중에 홍 선수의 형이 사모라를 폭행하는 사건 이 발생 했다. 이날 경기는 전 세계에 위성 생중계됐다. 해외토픽감이 되기에 충분했다. 34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화동 341

173 WBC 챔피언 장정구가 1987년 4월 에프엔 핀터(멕시코)를 6회 KO로 물리치고 타이 틀 12차 방어에 성공한 곳도 이 체육관이었다. WBA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 유명우는 1986년 6월 2차 방어전, 1990년 1월 14차 방어전을 이곳에서 성공적으로 치렀다. 그러 나 크기에 비해 시설이 그다지 좋지 못했다. 특히 냉난방 시설이 문제였다. 여름은 그 럭저럭 버틸 수 있었지만 난방이 되지 않는 겨울철에는 대책이 없었다. 1977년 12월 18 일 하오 6시, 밖은 영하의 날씨로 수은주가 곤두박질쳤다. 안의 기온도 별반 다를 게 없 었다. 그 시간 임재근과 에디 가조(니카라과)의 WBA 주니어미들급 타이틀매치가 그 곳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두 선수는 시종 클린칭으로 일관하면서 맥 빠지게 경기를 끝 냈고, 가조가 판정으로 타이틀을 지켰다. 경기가 끝난 후 중남미에서 온 가조는 날이 너무 추워 제대로 싸우지 못했다. 고 소감을 말했다. 운동 경기만 한 것이 아니다. 1978년 9월 1일 구국여성봉사단 박근혜 총재가 참석한 새마음갖기결의실천대회 등 관 주도 행사뿐만 아니라, 1994년 6월 매진 사례 속에 열 린 김건모 콘서트 같은 크고 작은 행사가 일년 내내 열렸다. 운영하고 있었다. 1954년 인천항만사령관 엘디스 대령은 학교 건설에 사용하라고 목 재 등 자재 170 트럭분을 이 재단에 원조했다. 그런데 재단 측은 이것을 횡령해 착복했 고 결국 학교는 폐교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1958년 8월 예비역 쓰리 스타 백인엽이 이 재단을 인수했다. 그는 이 학원을 인수한 뒤 1965년 3월 학교법인 명칭을 선인학원 으로 바꾸었다. 선 ( 善 ) 은 자신의 형 4성 장군 백선엽의 이름에서, 인( 仁 ) 은 자신의 이름에서 따왔다. 그 때부터 교명을 자신의 가족 이름을 따서 짓기 시작했다. 선인중 고교를 비롯해 선화 여중 고, 인화여중 고 등은 두 형제 이름에서 따내 지었고 효열국교는 어머니 이름, 진흥유치원은 아들 이름에서 따왔다. 운산기계공고는 백선엽의 호에서, 운봉공고는 백인엽의 호에서 따 붙였다. 왕국 의 영토는 171만 9,000m2(52만 평)으로 웬만한 대학 캠퍼스보다 넓었다. 당시 학교 인근에 살던 주민들은 학교 부지 확장에 열을 올리던 백인엽을 태운 헬리콥터가 부처산 일대에서 자주 이착륙했던 모습을 목격했다. 초기 부지 공사에는 미군들의 불 도저 등 중장비 지원이 있었으며 특히 부지 확장 과정에서 선인재단은 주민들과 자주 신태범 박사의 인천 한세기 에는 이 동네를 이렇게 적고 있다. 선인체육관 주변은 아담한 농가 마을 쑥골 이고, 수봉공원 진입로 일대가 도마다리 라고 부르던 도마동 ( 道 馬 洞 )이었다. 이 두 동네가 통합되어 지금의 도화동( 道 禾 洞 )이 된 것이다. 쑥골과 도마다리 일대에는 소나무와 잡목이 우거지고 중국인 채소밭이 펼쳐져 있어 참새, 콩 새 등 산새들이 많았다. 이곳에 선인 이라는 왕국이 건설된다. 선인학원의 역사는 1940년대에 설립한 성광 학원 이라는 자그마한 사학재단부터 시작된다. 이 재단은 성광중학교와 성광상업고를 34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343

174 마찰을 빚었다. 끝내 집을 내놓지 않으면 집 앞의 도로를 다 파헤치고 심지어 주택만 남기고 주변을 절벽으로 다 깎아 내기도 했다. 당시 인근에 있던 중국인 공동묘지를 불 도저로 밀어버려 한국과 대만간의 외교 문제로까지 비화되기도 했다. 이 왕국은 유치원에서 대학에 이르기까지 무려 16개교에 3만 1,000여 명의 학생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공납금 내는 날이면 돈 자루를 실어 나르는 차량들이 학교 언덕을 쉴 새 없이 넘나들었다. 이 재단의 몇몇 남학교는 한때 동복( 冬 服 ) 코트를 입었다. 앞쪽에 두 줄로 수십 개의 금빛 단추가 달린 스타일로 마치 사관생도의 복장과 비슷했다. 교사 들도 예비군 군복을 입고 보초를 서거나 순찰을 돌아야 했다. 결코 무너지지 않은 것 같았던 왕국은 민주화 바람을 이겨내지 못했다. 1980년대 초 학생들의 학내 민주화 시위 후 문교부의 감사 등으로 부정 비리가 적발되어 백인엽 이 사장은 재단을 국가에 헌납하고 구속되었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1994년 3월 1일 선인 선인재단 시절에 세운 이율곡 상. 지금은 사라진 도화시장. 34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화동 345

175 재단의 학교들은 시립화, 공립화가 이뤄졌다. 그리고 1936년 철옹성의 왕국은 역사 속 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2009년 인천대가 송도국제도시로 이전하면서 이곳은 새롭게 변신하고 있다. 옛 인 천대 본관 건물에는 청운대 제2캠퍼스가 조성되었고 인천시상수도사업본부, 제물포 스마트타운(JST) 등이 입주할 제2행정타운이 들어선다. 또한 인천보훈지청, 인천지방 노동위원회 등 6개 기관이 입주할 인천정부지방합동청사가 건립된다. 수봉산은 원래 水 峯 山 이었는데 후에 壽 鳳 山 으로 한자 표기가 바뀌었다. 예전 주안 역 뒤편까지 바닷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멀리서 이 산을 보면 마치 물 위에 떠 있는 봉 우리처럼 보였을 터, 그래서 물봉우리 가 아니었을까.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작은 봉우 리. 소박하지만 운치 있어 보이는 이름이다. 쉬익~ 수봉산 중턱에 오르면 시위를 떠난 살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린다. 활 터 무덕정에 동이 트기 시작하면 사대에는 궁대를 찬 궁사들의 모습이 하나둘 보이기 시작한다. 활을 든 사람들은 여럿이지만 사대에는 정적만이 감돈다. 습사무언( 習 射 無 言 ). 활을 쏠 때는 말하지 않는다 는 계율에 따라 활시위를 당기고 과녁을 바라보는 날 카로운 눈길만 오갈 뿐이다. 이내 활이 시위를 떠나고 찬 공기를 가르며 산기슭에 마련된 과녁을 향해 날아간다. 탁~ 화살이 145m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과녁을 맞히자 관중( 貫 中 과녁을 명중)이요 라는 소리와 함께 과녁 앞에서 깃발이 올라간다. 자세를 바르게 하기 위해 아랫배에 힘을 주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면 절로 단전호흡 이 되면서 혈액순환이 잘되고 내장 기능도 튼튼해집니다. 방금 활쏘기를 마친 임배영 옹은 국궁 예찬론을 편다. 임 옹은 1954년 마닐라 아시안 게임 레슬링 동메달리스트인데 이제는 노년기의 건강을 국궁으로 다지고 있다. 임 옹 뿐만 아니라 무덕정의 노인들은 국궁 덕분에 병치레 없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활력있 는 일상생활을 즐기고 있다. 숭의동 영제한의원을 개원한 우강 노학영의 기부금으로 건립한 팔각정. 34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화동 347

176 수봉공원에 있던 어린이놀이터, 이 시설은 자유공원에서 옮겨온 것이다. 수봉산에 자리 잡은 무덕정은 그 역사를 볼 때 민속문화재급이다. 1865년 문학면에 서 처음 설립됐으니 한 세기를 넘어 4반세기가 보태진 장구한 세월을 연연히 이어 온 사정이다. 현존하는 전국의 사정 중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든다. 무덕정은 1978년 도원 동에 있던 사대를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긴 역사만큼이나 무덕정은 한국 국궁 역사의 깨지지 않는 신화를 하나 지니고 있다. 1987년 9월 28일부터 31일까지 대전 대덕정에 서 열린 대한궁도협회장기 대회에서 무덕정 소속 명궁 다섯 명이 다섯 발씩을 모두 명 중시킨 것이다. 그러니까 스물다섯 발이 모두 과녁을 맞힌 것이다. 이 기록은 앞으로도 깨기 어려운 신기( 神 技 ) 라고 한다. 수봉산에는 현충탑, 인천지구전적기념비, 자유와 평화의 탑, 망배단 등 호국 정신을 기리는 현충 시설이 유난히 많다. 그중 다른 지역에서는 보긴 드문 재일학도의용군참 전비 가 있다. 1967년 6월 5일 이스라엘과 아랍연합국(이집트 - 시리아 - 요르단) 사이에 제3차 중동전쟁이 발발했다. 재외 이스라엘 청년들은 앞다퉈 배낭을 메고 공항으로 달 려가 예루살렘 행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각국 언론은 세계 최초의 재외 국민 참전 이라 며 대서특필했다. 그러나 세계 역사상 해외 거주 국민의 참전은 대한민국이 먼저다. 17년이나 앞선 1950년 6 25전쟁 때 642명의 재일교포 청년학도들이 자발적으로 의용군을 조직해 전선 에 뛰어들었다. 조국이 위기에 처하 자 1,000명이 넘는 청년들은 재일본 대한민국거류민단에 참전 지원을 했다. 신체검사 등을 거쳐 18세 고등학생부터 45세 중년 까지 총 642명이 최종 선발됐다. 여성 지원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의 한국행은 끝내 이뤄지지 못했다. 나흘 동안의 기초 훈련을 마친 1진 78명은 9월 12일 요코하마항에서 군용 수송 선 피닉스 호에 승선했다. 이들에게는 군번과 계급이 부여되지 않았다. S.V.(Student Volunteer) FROM JAPAN 이라는 견장 표시가 유일했다. 현해탄을 넘은 재일학도의용군 은 9 15 인천상륙작전 이틀 후인 9월 17일 인천 땅을 밟았다. 꿈에 그리던 조국 땅에 상륙한 것이다. 2진 266명은 9월 24일 비슷한 과정을 거쳐 옛 오림포스호텔 주변 해안 가에 상륙했다. 바닷가에서 하루 야영하고 이튿날 송림초등학교 운동장에 집결해 몇십 명씩 흩어져 미군 각 부대에 배속됐다. 이어 3진 101명이 10월 5일 인천항에 도착하는 등 4, 5진이 잇따라 참전하게 된다. 그들은 미군과 함께 원산상륙작전, 장진호전투 등에 투입돼 혁혁한 공을 세운다. 재일학도의용군은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무려 135명(전사 52명, 실종 83명)이 희 생되었다. 휴전협정 테이블에서 북한군 대표들은 일본군이 참전했다며 거세게 항의했 다. 한국말이 서툴고 일본말을 자유자재로 하는 생포된 의용군을 증거로 내세운 것이 다. 휴전이 되자 생존한 의용군들은 부모 형제가 있는 일본으로 귀환하고자 했다. 그러 나 일본 정부는 1952년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내세워 의용군을 허가받지 않 고 임의 출국한 자들 로 규정하고 입국 자체를 불허했다. 미군의 주선으로 265명이 가 까스로 돌아갔고 242명은 졸지에 국제 미아 로 전락했다가 고국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 했다. 34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화동 349

177 재일학도의용군동지회는 조국에서 산화한 동지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956년 그 들이 처음 조국 땅을 밟은 월미도에 충령비를 세우려고 했으나 그곳에 군부대가 주둔 하는 바람에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들은 1979년 인천 앞바다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수봉공원에 재일학도의용군참전비 를 세웠다. 기념비 앞 대리석에는 강공래 부터 황 평길 까지 642명 대원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1974년 수봉산 북쪽 기슭에 성냥갑처럼 생긴 집들이 섰다. AID 아파트다. AID 아파 트는 미국 AID(Act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차관으로 빌린 돈으로 전국 대도시 에 건축된 아파트다. 대한주택공사 주관으로 도화동에 1974년 6월 착공해 5층짜리 10 개 동을 6개월 만에 후딱 지어 그해 12월에 분양했다. 경관 좋은 수봉공원 지구 라는 타 이틀로 15평 6개동(300 가구)과 42m2(13평형), 4개 동(200 가구)의 분양 광고를 냈다. 49 m2(15평)의 분양가는 329만 1,000원, 13평은 220만 원이었다. 지역난방으로 연중 온수 공급, 단란한 온돌방, 수세식 변소, 알루미늄 창, 장독 및 연탄 등 저장 발코니 등 이 아 파트가 지닌 장점을 담아 분양 광고를 냈다. 요즘 기준으로 보면 가장 기본적인 시설이 AID아파트. 지만 아파트가 거의 없었던 시절이라 분양 즉시 부유층으로부터 크게 인기를 끌었다. 당시 이 아파트 주변에 살았던 김민호(45) 씨의 회상 한 토막. 도화초등학교에 다닐 때 같은 반에 이 아파트에 사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끔 자기 집에 친구들을 데리고 갔는데 간택 받기 위해 잘 보이려고 반 아이들이 무척 애를 썼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 번은 그 무리에 선택돼 그 집에 놀러 갔었는데 수세식 변소를 보고 너무 신기해 충격 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로 정말 그 아이가 달라 보이더라고요. AID 아파트는 2006년 철거되었다. 그 자리에 2009년 8월 21일 배를 형상화한 지상 3 층, 지하 1층 짜리 수봉도서관이 개관했다. 멀리서 보면 마치 배 한 척이 수봉산 자락 에 걸쳐있는 형상이다. 도서관 옆 수봉산 중턱에는 인천의 명물이 하나 들어섰다. AID 아파트를 건설할 때 산을 깎으면서 절개지가 생겼는데 이를 이용해 높이 37m 폭 122m 짜리 우리나라 최대의 인공폭포를 만들었다. 물 떨어지는 모습이 마치 수봉산에서 발 원한 물줄기가 낙하하는 듯 하다. 깊은 계곡에 온 듯한 착각에 빠져들 만큼 웅장한 이 인공폭포는 한여름에는 동네 아이들의 훌륭한 풀장 역할을 한다. 35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화동 351

178 그때, 이곳 도화동 Map & Photos ➊ 제물포역 1899년 9월 18일 경인선 개통과 함께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했다. 1957년 11월 1일 숭의역 으로 이름을 변경했다가 1959년 7월 1일 제물포역으로 개칭했으며 그 해 3월 역사를 준공했다. 제물포역 앞의 지하상가는 1976년 8월에 착공해 1977년 6월 1일에 준공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➋ 제일시장 제일시장은 1970년에 개설된 등록시장으 로 도화동 463-1일대에 위치한다. 80년대 만해도 매달 16일 인천장( 場 ) 이 섰으며 이 른바 도깨비시장이 형성되며 활기를 띠었 지만 지금은 빈 점포가 늘어 활력을 잃고 있다. 문을 연 지 30년이 넘은 제일곱창을 비롯해 시장의 절반을 곱창집들이 차지하 고 있어 그나마 시장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➌ 중국인묘지 중국인 전용 묘지는 청대 때부터 도화동에 있었으나 그 자리가 1958년 인천대학 부지 로 편입되면서 만수동 산 6번지 일대로 이 전했다. 도시 확장으로 인해 1988년 인천 시와 화교협회 협의에 의거, 인천시로부터 현 부평가족공원 부지를 제공받아 다시 묘 지를 조성해 1990년 6월 30일 이장했다. ➌ 옛 선인재단 숭의동 제물포역 ➊ 송림동 서화초교 ➍ 청운대 옛 선인체육관 간석동 도화역 ➋ ➎ 가좌동 옛 AID아파트 도화초 ➍ 국군묘지 1968년까지 서화초교 운동장 언저리와 옛 선인체육관 아래 부분에 국군묘지가 있었 다. 이곳에 6 25 전쟁 때 전사한 국군 379 위(혹은 358위)의 주검이 안장되었다. 매년 6월 6일 현충일이면 이곳에서 추념행사가 진행되었다. 도화동 국군묘지는 1968년 이 곳에 묻힌 시신들이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로 이장되면서 폐쇄되었다. ➎ 인천정보산업진흥원 정보통신부와 인천시가 인천의 IT산업을 육성하기 위해 2002년 설립한 기관이다. 국책사업 추진과 더불어 지역 내 IT산업 발전을 위한 정책을 수립하고 지원한다. 중 소기업과 벤처기업의 사업화, 마케팅, 인증 지원, 기술 개발 등을 돕고 있다. 특히 문화 콘텐츠 육성을 위해 문화관광부로부터 2008년 12월 도화동 일대를 문화산업 지구로 지정받아 IT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 콘텐츠 산업의 기틀을 다지고 있다. 여름이면 풀장으로 변하는 수봉폭포. 35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도화동 353

179 옥련동 그 길에는 불편한 진실 이 깔려 있다 조개 파먹으면서 살던 외딴 동네에 시커먼 연기를 내뿜는 철마가 달리기 시작했다. 이어 해안가에 무의 도에서 파온 하얀 모래를 깐 인공 유원지가 들어서면서 뜨거운 태양 아래 인천은 사람사태 라는 기사가 날 만큼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6 25전쟁 후 송유관이 끊임없이 이어져 들어오고 마을사람들은 기름 물 을 먹고 살아야했다. 아낙들이 조개 흘리던 그 길에 실미도 대원들의 울분의 총성 한 발이 비극적으로 울 려 퍼졌다. 이름에 관한 불편한 진실 하나. 독도( 獨 島 )와 송도( 松 島 ). 섬 도( 島 ) 자가 붙었지만 하나는 섬, 다른 하나는 섬이 아니다. 연관이 별로 없을 것 같은 이 두 지역이 이름으 로 얽히고 얽혀있다. 마쓰시마( 松 島 )는 18세기 일본이 독도를 다케시마( 竹 島 )로 부르 기 이전의 이름이다. 일제는 이 송도 를 군함의 이름으로 사용한다. 이후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당시 활약했던 군함 송도함을 기리기 위해 한반도 내 몇 지역에 송도 라는 쇠말뚝을 박아버린다. 1937년 인천부 옥련리는 부산과 포항 지역에 이어 송도정( 松 島 町 ) 으로 강제 개명된다. 구한말 옥련동 일대는 한진, 옥골, 독배, 대암 등 자연마을이 있었던 원우이면( 遠 又 爾 面, 일명 먼우금) 이었다. 일제의 쇠말뚝은 뽑히기는커녕 더 세게 박히게 된다 년 7월, 우리 스스로 동춘동 앞바다 갯벌을 매립해 만든 국제도시의 법정동명을 송도 동 으로 정한다. 문학산 옆 노적산 산줄기가 끝나는 양지바른 곳에 옥골이란 오래된 동네가 있다. 바 다 쪽에서 보면 안쪽으로 오그라든 마을이라 옥골이라는 이름을 얻었다고 한다. 그곳 에 동네의 연륜을 대변해 주는 기와집 두어 채가 있다. 100년이 훨씬 넘은 고택들이다. 옥련동 355

180 길에서 동네 어르신 이창렬(73) 씨를 만났다. 우리가 덕수 이 씨인데 고조할아버지 께서 이곳에 정착했습니다. 매립되기 전까지는 마을 어귀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어요. 그물 치고 갯벌 캐고 하면서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늘 풍요로웠죠. 반농반어의 평화로 운 부락이었는데 수인선이 지나가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죠. 재개발이 된다고 하는데 이제 옛 모습을 볼 날도 얼마 안 남았어요. 새로운 수인선은 옥골을 반으로 가른다. 기찻길에 길을 내주기 위해 동네 곳곳이 파 헤쳐져 어지럽다. 재개발 계획대로라면 이 마을은 흔적도 없이 전체가 엎어질 것이다. 옥골은 불편한 진실을 품고 있다. 오랫동안 기름으로 뒤범벅돼 땅이 신음을 하고 있 다. 한동안 옥골은 기름골이었다. 1950년대 초 시립사격장 인근 산기슭에 미군 유류창 이 자리 잡았다. 수원비행장 등 수도권 일대 미군에게 기름을 공급하기 위해 지름 30m 의 대형 유류 저장 탱크 수십 개가 산 기슭 전체를 뒤엎었다. 탱크 하나당 용량은 1,500 드럼을 담을 엄청난 크기였다. 인천항으로 유조선이 들어오면 기름은 POL(미군유류보 급창, 옛 SK저유소)에서 파이프라인을 통해 이곳까지 와서 저장 탱크에 시커먼 기름을 콸콸 쏟아부었다. 송유관 파이프는 이음새가 자주 터져 논과 밭을 흥건하게 적시곤 했 다. 추운 겨울에는 바다의 큰 얼음조각이 파도에 밀려와 종종 파이프를 터뜨렸다. 기찻길 옆 사람들은 당시 귀하디 귀한 석유를 땔감으로 펑펑 땠다. 기름이 새는 이음 새에 깡통을 받쳐 기름을 받았다. 미군 병사들이 정기적으로 기차를 타고 순찰을 돌았 지만 그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다. 파이프에서 철철 흘러나온 석유를 모두 깡통으로 받 아낼 수는 없었다. 철철 넘쳐난 기름은 땅으로 스며들었다. 사람들은 땅을 파서 구덩이 를 만들어 놓았다. 비가 오면 기름이 물과 함께 고였다. 물에 떠서 두껍게 말라버린 기 35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옥련동 357

181 름층을 회 뜨듯 양철로 벗겨서 그릇에 담았다. 이것은 훌륭한 땔감이었다. 왕겨에 버무 려 때면 겨 한 줌만 갖고도 하루 종일 불을 거뜬히 땔 수 있었다. 남는 것은 몰래 내다 팔기도 했다. 기름도 등급이 있었다. 짙은 하늘색이 감도는 항공기 기름은 최고가였고 그 다음이 붉은색의 휘발유였다. 이런 기름은 바로 돈이 되었다. 나머지 기름들은 난방 용 아궁이 연료로 사용하기 위해 집집마다 장독이나 드럼통(도라무깡)에 보관했다. 돈 이 되다 보니 여기서 그치지 않고 아예 전문적으로 기름을 훔치는 일당들이 생겼다. 당 시 신문을 장식한 기름 절도 기사를 보자. 경기도 경찰국 수사과에서는 최근 해상과 육지에 부설된 미군 송유관을 뚫고 휘발유 300드럼을 절취 한 두 개의 절도단 10명을 구속하였다. 그 한패는 지난 2월 5일 송도 근처 낙도에 시설된 미군 소유 28호 및 72호 유조 탱크에서 전후 3회에 걸쳐 휘발유 20드럼(싯가 336만환)을 절취했으며 또 한패는 작년 12 월 인천 외항 미군 유류 유조선에서 POL 보급창으로 연결된 송유관에서 휘발유 70드럼 그리고 금년 2월 28일 120드럼 (도합 싯가 600여 만 환)을 절취해 운반선에 싣고 도주하였으나 경찰 수사 결과 그 일당이 체포된 것이다. (경향 ) 기름 탱크는 지난 1971년 미군 유류창이 포항으로 이전한 뒤에도 한동안 방치돼 있 었다. 유류 저장 탱크가 산에 박힌 이후 옥 골에서는 그 누구도 우물을 파지 않았다. 이곳에서 태어나 현재까지 살고 있는 옥골 원주민 이종림(63) 씨는 당시 상황을 생생 하게 기억하고 있다. 저기 산 중간중간 평평한 곳이 당시 기 름 탱크들이 놓였던 곳입니다. 기름 붓는 날이면 온종일 기름 냄새가 가시질 않았어 요. 우물을 파면 기름이 둥둥 떴어요. 그 물 옛 송도역으로 오르는 계단. 송도 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남아 있는 대합실. 을 끓이면 붉은 끼가 보였습니다. 어렸을 적 인천 전역에 콜레라가 돌고 저기 송도역 인근까지 사람이 죽어 나갔는데 우리 마을엔 전염병에 걸린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어 요. 어른들이 그럽디다. 우린 기름 물을 먹어서 콜레라에 안 걸린다고. 1937년 수인선이 개통되면서 옥련 지역에 역이 하나 만들어졌다. 역명은 동네 이름 을 따서 송도역 으로 붙였다. 수인선 협궤열차는 1979년 남인천역~송도역 간, 1992년에 는 송도역~소래역 간 운행이 중지되었다. 철로가 폐쇄하면서 송도역도 문을 닫았다. 송도역은 그 기능을 다했지만 시골 간이역의 모습을 지니고 있는 역사( 驛 舍 )의 흔적 은 가까스로 남아있다. 역사는 너무 낡아서 비가 오면 물이 새 얼마전에 슬레이트 지붕 에 천막을 씌웠다. 누군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한갓 낡은 건물로밖에 볼 수 없는 이 역 사는 자신이 옛날에 철도역이었음을 스스로 설명하고 있다. 역무원 사무실로 사용했 던 방 외벽에 아직도 송도 라는 명찰을 달고 있다. 수없이 칠해진 페인트칠에도 감춰지 지 않는 사실 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35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옥련동 359

182 꼬마열차가 힘겹게 오르던 옛 수인선 철길 자리. 그나마 낡은 물건 하나가 철도 정거장이었음을 명확히 말해 준다. 송도역에서 학익 동 쪽으로 30m 가량 내려가면 녹슨 철탑 위에 커다란 철통이 놓여져 있다. 급수탑이 다. 천리를 달려 온 화차가 목마름에 물 한 모금 마셨던 곳이다. 증기기관차가 수인선 을 달렸을 때 사용한 물통이니 족히 5, 60년은 된 물건이다. 비바람에 심하게 녹슨 급수 탑이지만 주둥이에서 금방이라도 물을 쏟아낼 것 같은 모습이다. 그 옛날 송도역은 물물교환 장소의 역할을 톡톡히 했다. 역전 공터에는 번잡한 장이 섰다. 소래, 군자 쪽에서 건너 온 촌로와 수인역 쪽에서 온 아낙네가 서로의 물건을 내 놓고 흥정을 벌였다. 폐선이 되면서 이 모습은 사라졌다. 대신에 송도역전시장이라는 상설시장이 들어섰다. 시장 안 송도방앗간 이연수 사장이 과거의 이곳 풍경을 그려 줬다. 3, 40년 전 송도 역 건너편에 수인선 양쪽에서 온 사람들로 늘 복잡했지. 각종 농산물을 비롯해 닭, 어 류 등을 내놓은 좌판이 줄지어 있었어요. 수인선이 폐선되면서 장사꾼들의 발이 묶였 고 급격히 위축된 거죠. 그 자리에 상가 건물들이 들어섰고 그 뒷쪽으로 현재 이 시장 이 생긴 겁니다. 36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옥련동 361

183 송도역전 시장조차 이제 그 명맥을 잇기 쉽지 않은 듯하다. 상권이 위축되면서 40여 개의 가게만 장사를 하고 있고 몇 년 전에 번영회도 없어졌다. 시장 안쪽으로 가면 송 도초등학교가 있다. 1948년 학익국민학교의 분실로 개교한 학교다. 당시 군자, 소래 등 수인선 변에 살던 학생들이 수인선 꼬마열치를 타고 이 학교를 다녔다. 철로는 없어졌지만 기찻길의 흔적은 아직 남아있다. 옥골 동네 앞에는 기다란 둔덕 이 엎어져 있다. 이것이 철로가 놓였던 기찻길이다. 협궤열차가 다니던 외길답게 다리 를 양쪽으로 뻗으면 닿을 만한 폭이다. 이 길을 따라 걸어 내려가면 조개고개에 다다른 다. 사람들이 홍어회 골목이라고도 부르는 곳이다. 조개고개 라는 이름 은 그 아래편에 조개조합이 있었기 때문이고 홍어회 골목 은 홍탁, 홍 어회 무침 등 홍어 음식점들이 밀집 해 있었기 때문이다. 동양화학이 바다를 매립하기 전까지 이 동네는 바다를 끼고 있던 동네다. 물끝 따라 나가서 반나절 만에 망태기 하나 가득 조개를 캐오던 곳이다. 갯일을 마치고 고개를 넘 던 아낙들이 하나둘씩 흘리고 간 조개들로 길 위가 까맣게 보여 조개고개라는 이름을 얻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조개가 흔했던 곳이다. 예전만 못하지만 아직 이 골목에 들어서면 홍어 삭힌 냄새를 맡을 수 있다. 도로 양 편으로 충남 홍어, 흑산도 홍어, 할머니 홍어 등 빛바랜 간판을 달고 있는 몇몇의 홍어 집이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이곳에 처음 홍어집이 들어선 것은 대략 40년 전쯤. 인천에 일자리를 얻은 아들을 따라 충남 대천에서 올라온 충남 홍어의 김찬례 할머니가 식당 을 내면서부터다. 당시 노적산 기슭에 예비군 훈련장이 있었다. 훈련을 마친 예비군을 상대로 밥장사를 하던 할머니가 간단하게 홍어무침을 반찬으로 내놓았다. 여기에 매 콤한 맛을 진정시켜 주는 조갯국을 함께 내놓았다. 바로 인기 폭발. 뜻밖에 좋은 반응 을 얻자 아예 홍어집으로 업종을 바꿔버렸다. 이후 입에서 입으로 홍어맛 소문이 번져 나가면서 주변에 하나둘씩 홍어회집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흑산도 홍어집 사장 정이석(63) 씨는 인하대 자리에 있던 피란민 수용소에서 태어났 고 이후 이곳에서 일생을 보낸 이곳의 산증인이다. 한때 줄서서 먹었어 요. 자리가 없으면 그냥 마당에 자리 깔고 먹기도 했죠. 순전히 조갯국을 먹기 위해 홍어회를 먹 는 사람도 많았어요. 그 냥 앞마당 나가듯 나가서 조개를 잡아오면 됐으니 까. 36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옥련동 363

184 조개고개 건너편에 새인천풀장이 있었다. 동양화학에서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까 지 잠시 운영했던 노천 풀장이다. 키 작은 아카시아나무 몇 그루밖에 없던 뙤약볕 아래 의 풀장이었지만 아쉬운 대로 시민에게 인기 있던 여름 놀이터였다. 이곳의 행락객들 도 조개고개에 와서 허기를 달래곤 했다. 수인선 철길 옆에는 송도역에서 조개고개를 잇는 오래된 길이 하나 있다. 세기자동 차, 옥련여고 등이 접해 있는 약 400m의 좁은 구 도로다. 1937년에 개통한 길로 현재도 그때 쌓은 석축의 곳곳에 남아 있다. 이 길에는 비극의 불편한 역사 한 페이지가 숨어 있다. 실미도 대원 탈주 루트였던 것이다. 1971년 8월 23일 이른바 실미도 사건이 발생했다. 대원들은 새벽 6시 30분 지나가던 6톤급 어선을 탈취해 실미도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육지에 닿은 곳은 옥련동 돌산 인 근이었다. 몇몇 대원은 해수욕을 하며 놀기도 했다. 그들은 현재의 송도고 밑으로 돌아 나오다가 옥골고개에서 떡장수 할머니에게 떡 1,700원어치를 사 먹고 2,000원을 주고 갔다. 오후 1시 30분쯤 조개고개까지 나온 대원들은 송도에서 인천 시내로 들어가는 항도 여객 경기 영 호 시내버스를 총으로 위협해 탈취해 승차했다. 버스 안에는 승객 6명과 버스 기사, 여차장이 타고 있었다. 잠시 후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군인들과 조개고 갯길에서 총격전을 벌였다. 이 와중에 옥련이발소 앞에서 놀던 김은희(당시 5세)가 총 탄을 맞고 사망했다. 송도 길을 벗어난 버스는 학익동 ~ 용현동~ 숭의로터리~ 제물포역 ~ 석바위를 내처 달렸다. 바퀴가 펑크 나자 그들은 석바위에서 서울행 버스로 갈아타 고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그 길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조개고개부터 이어지는 옛 송도길. 36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옥련동 365

185 그때, 이곳 옥련동 Map & Photos 송암미술관 ➋ 송도 해안도로 송도고 ➊ ➌ ➍ 용현동 옥련터널 동양화학 조개고개 옥련여고 송도유원지 옥 골 송도역 청학동 ➏ 외국인묘지 송도유원지 ➐ ➑ ➎ ➊ 송도고등학교 학교명 송도 는 이름은 인천의 송도 ( 松 島 )가 아니라, 북한 개성의 송도 ( 松 都 )에서 유래한 것이다. 1906년 10월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설립을 위임받은 윤치호가 개성 송 악산 부근에 한영서원( 韓 英 書 院 )으 로 설립하였다 전쟁으로 임 시 휴교를 했고 1952년 4월 송학동 (현 남부교육청 자리)에 남녀 피난 학생 500명을 모아 재개교했다. 이듬해 11월 답 동 교사로 이전해 오랫동안 이곳에 정착한다. 이후 구월동으로 이전하려던 계획을 접고 1983년 2월 옥련동으로 이전했다. 이전 준비 공사를 하던 중 재정의 어려움 을 겪게 되는데 개성 출신 기업가 이회림 동양화학 회장이 2억원의 기부금을 송도 고에 희사하고 송도학원 이사장에 취임한다. 현 교정 한편에 해군 참수리 357호정 정장으로 2002년 6월 제2연평해전에서 순국한 졸업생 고 윤영하 소령의 흉상이 있다. ➋ 새인천풀장 송암미술관 입구 쪽에 있던 바닷물을 끌어들여 이용한 도크식 풀장이었다. 7, 80년 대 당시 청학풀장, 율목풀장과 함께 각광받던 곳이다. 이 풀장은 동양화학과 관련 있는 동양관광개발에서 운영했는데 1976년 이회림 회장은 동양화학 소유 해면 4 만 9,000여 m2(1만5천평) 매립지에 8억 원을 들여 수중 터널을 비롯하여 해수풀장, 수족관, 조탕( 潮 湯 ), 관광호텔, 쇼핑센터 등 동양 최대 규모의 관광지를 계획했지만 무산되었다. ➌ 능허대 소동파의 적벽부( 赤 壁 賦 ) 에서 따온 이름 으로 만경창파(서해)를 하늘로 날아오르듯 항해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다. 백제는 근 초고왕 1927년(372년)에 중국 동진( 東 晋 ) 과 교류하고 싶었으나 육로는 고구려가 떡 버티고 있어 어쩔 수 없이 바닷길을 택했 다. 그 출발점이 바로 능허대 밑 한나루( 大 津 대진)라는 나루터였다. 삼국시대부터 시 작된 능허대 중국행은 조선조 광해군 때까 지 이어진다. 현재 주변은 완전히 매립돼 주변에 대단지 아파트가 들어서 있고 지난 1988년 인공 연못과 언덕에 정자가 세워 진 작은 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인천시 기 념물 제 8호다. ➍ 송도석산 옥련동 현대아파트 부근에 있는 채석장(13만9천 여m2)으로 1987년 채석 행위가 중단돼 현재는 흉한 돌산으로 남아있다. 높 이 60m의 석산을 인공폭포를 갖춘 공원을 비롯해 유스호스텔, 복합스포츠센터, 미술관 등으로 조성할 다양한 계획을 세웠지만 모두 공수표가 되었다. 심지어 큰바위 얼굴 조성, 클라이밍장 등 으로 활용하자는 의견도 있었다. 독바위 혹은 독배로 불리던 이 곳은 구한말 외국무역상사 타운센트 사가 탄약고를 설치하기도 했다. 1930년 초 현재의 외환은행 뒤에서 총포상을 하던 사람이 엽총 한 자루 값으로 이 석산을 샀다는 믿기지 않은 전설이 전해 온다. 송도해안도로를 공사할 때 이곳에서 돌을 파서 깔았다고 한다. ➎ 아암도 매립 이전 아암도는 송도유 원지 남쪽 해변에서 500여 m 떨어져 있어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1989년 아암도 앞 갯벌까지 매립공사가 마 무리되면서 해안선 끝에 남 게 되었고 1994년 7월 아 암도 옆으로 해안도로가 개 통되었다. 1995년 6월 아암 도 주변 400여m 구간의 철 책선이 철거되면서 2000년 4월 완전히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인천시 출자 법인인 인천도 서관광(주)이 3억6천500만원에 아암도를 개인에게 팔았다가 시 민의 반발이 거세지자 다시 사들이는 해프닝도 있었다. ➏ 인천결핵요양원 현재 적십 자병원 자 리에 있던 인천결핵 요양원은 인천 개 항 100년 사 에 의하 면 1940년 11월 20일 연수장( 延 壽 莊 ) 이란 이름으로 개원했다. 남한에서는 최초로 세워진 결핵 전문 병원이었다 전쟁 중 인천결핵요양원은 송도에 주둔하고 있던 영국군의 휴양소로 잠 시 사용되었지만 1953년 휴전 후 전쟁고아 결핵환자 22명을 수 용하면서 그 기능이 다시 정상화되었다. 인천시는 환자들이 계 속 늘어나자 송도역에서 요양원까지 가는 도로를 뚫었고 요양원 은 병실을 증개축했으며 앞뜰을 9,917m2(3천평)으로 넓히고 잔 디와 옥향나무 등을 심어 대저택의 정원처럼 꾸며 놓았다. 이 때 문에 영화 촬영의 단골 장소가 되었다. 당시 인기 절정이었던 가 수 김정호가 1980년에 입원하기도 했는데 고독한 여인의 미소 는 슬퍼 라는 노래를 이 때 만든 것으로 전해진다. 인천결핵요양 원은 1996년 6월 5일 문을 닫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➐ 외국인묘지 청학동 외국인묘지에는 1883년 인천항 개항 이후 국내에 체류하던 랜디스 박 사, 오례당 등 (외교관, 통역 관, 선교사, 선원, 의사 등) 여 러 분야에서 활동을 하다가 이 땅에서 숨진 외국인 66명 이 안장돼 있다. 묘역은 중구 북성동 1가 1번지에 자리하 고 있었으나 6 25 전쟁으로 묘역 일부가 파손된 것을 다 시 복원해 관리하여 오던 중 시세의 팽창으로 1965년 3월 25일 이곳 청학동 53번지로 이장해 영원히 안식을 하고 있다. 한편 중 국인 묘지는 부평가족공원에 있다. ➑ 인권의 길 1998년 세계인권선언 50주 년을 맞아 유엔 인권고등성 판무관실과 유네스코가 옥련 동 인천상륙작전기념관에서 송도유원지 로터리에 이르는 250m(너비 10m)의 도로를 인권의 길 로 지정했다. 우리 나라에서 인권의 길이 선정 된 것은 이곳이 처음이었다. 거리에는 인권의 길이라고 새긴 너비 65m, 높이 50cm 크기의 표지판이 설치되었지만 이후 이 길은 시와 시민 모두의 무관심 속에 의미가 다가오지 않아 유명무실해졌다. 36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옥련동 367

186 십정동 희망의 두레박질은 계속된다 그곳은 게토(Ghetto)다. 유대인을 강제 격리하기 위해 설정했던 게토처럼 그곳은 도시의 유민들을 가둬 놓고 있다. 인근의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날품을 파는 도시 빈민들이 모여들면서 산동네 달동네가 되었다. 그들은 한시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저버린 적은 없다. 오늘도 열우물에 모여 희망의 두레박 질을 계속한다. 십정동에는 한때 한센병자들이 돼지를 기르고 닭을 치며 고단한 삶을 영위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동네는 은밀하지 않다. 게다가 위대하지도 않다. 그러나 총관객수 625만 명을 기 록하며 흥행 돌풍을 일으킨 영화 은밀하게 위대하게 의 많은 부분을 이 동네에서 촬영 했다. 제작팀이 4개월 동안 전국 60여 곳에 달하는 후보지를 헤매다 이곳에 와서 외친 한마디. 바로 여기다. 공화국에서는 혁명전사, 이곳에서는 간첩. 난 최정예 스파이인데 내 남파 임무는 달동네 바보 백수 역할. 십정동은 헐렁한 추리닝을 입은 더벅머리 바보 백수 동구(김수현 분)가 전혀 드러 나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으로 딱이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 계단이 이어지고, 얼굴을 맞 댄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금세라도 동구가 쌀부대를 들고 뛰쳐나올 것만 같다. 눈길 닿는 대로 발길을 좇으면 영화 속 풍경을 자연스레 만난다. 마치 달동네 동구 가 된 듯하다. 영화에서 십정동은 단순한 배경 그 이상이며 밑바탕을 이루는 정서다. 돌아갈 곳을 잃은 간첩 셋이 정 붙이고 살아갈 만한 동네다. 영화의 중심 무대였던 석이슈퍼는 사라지고 없다. 세트로 지은 건물은 촬영이 끝난 후에 허물었다. 그 자리에는 작은 텃밭이 들어섰다. 영화의 흔적은 열우물로 102번길 언덕배기에 그대로 남았다. 더벅머리에 초록색 추리닝과 남색 슬리퍼의 벽화 그림. 낯 십정동 369

187 익은 뒷모습, 누가 봐도 동구다. 누군가 동네 담벼락에 동구의 모습을 그렸다. 이곳에는 유난히 계단이 많다. 마치 빗질을 한 것처럼 모두 아래를 향해 있다. 시간 이 가면서 시멘트 계단은 쪼개지고 부수어지며 울퉁불퉁한 흉물이 되었다. 몇 년 전부 터 이 동네에 젊은이들이 은밀하게 나타났다. 열우물길 프로젝트 라는 이름 아래 그 들은 붓을 들고 계단과 벽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이것이 인천 벽화 운 동의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붓만 든 것이 아니다. 2002년도에 시작된 이 일에는 교육과 문화도 뒤따랐다. 그들은 맞벌이나 결손 가정으로 자칫 방치되기 쉬운 아이들의 형과 누나가 되어 주고 산동네 마을의 공동체 문화를 다시금 위대하게 되살렸다. 언뜻 보아도 한때 이 동네의 중심 역할을 했을 것 같은 장소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 길은 산동네에서 아랫동네로 통하는 길이다. 길 양쪽으로 허름한 2층 상가가 뻗어있 다. 대부분 문이 닫혀있지만 비디오 가게, 양장점 등이 여전히 빛바랜 간판을 달고 있 다. 고추를 빻기 위해 할머니 두 분이 방앗간 앞 평상에 앉아 있다. 37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십정동 371

188 할머니, 여기가 예전에 시장이었나 봐요. 시장 이름이 뭐예요. 여기가 구( 舊 )시장이여. 옛날엔 저녁때만 되면 사람들로 시끌벅적했던 곳이야. 약 국도 있었고 정육점, 술집도 있었지 인근 수출 5, 6공단 덕분에 동네 경기가 좋았던 시절 상권이 형성되었던 곳이다. 이 제는 조금 떨어진 신시장에 상권을 빼앗기고 퇴락하였다. 요즘 보기 드문 장의사집 간 판이 보였다. 동네마다 장의사집이 있던 시절이 있었다. 이젠 태어나고 죽는 곳이 집 이 아니라 병원이다. 어렸을 적엔 장의사집 앞을 제대로 지나가질 못했다. 무서웠다. 그 집 안에다 주검을 모신 줄 알았기 때문이다. 장의사 집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초상 집 대문에 내거는 등불과 병풍, 천막 등 장례식에 필요한 비품들이 보였다. 늙어 죽을 사람들 웬만한 사람들은 다 죽어서 이제 이 동네는 초상도 나지 않아. 그 나마 요즘은 죽으면 병원 영안실로 다 가잖아. 여긴 그냥 간판만 걸어둔 거요. 이 장의사집의 실제 주인은 현재 시내 모 병원의 영안실을 운영하고 있단다. 옆집에 사는 김금옥(85) 할머니가 대신 집을 지키고 있다. 할머니는 이 장의사집에서 차례로 남편과 아들의 초상을 치렀다. 요즘은 십정동보다 열우물 이란 이름이 더 가깝게 다가온다. 동네 이름 풀이는 여러 가지다. 흔히 10개의 우물이 있어 십정동( 十 井 洞 )이란 이름을 얻었다는 설과 추운 겨 울에도 따뜻해서 얼지 않는 열( 熱 )이 나는 우물 이 있어서 열우물 이란 설 그리고 산줄 기가 십자형으로 교차한 형국( 十 丁 )인데 이게 十 井 으로 변형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37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십정동 373

189 아무튼 열우물은 인천에서 부평에 이르는 첫 마을이었다. 예전 인천 시내에서 부평 을 거쳐 김포나 강화 길로 접어들려면 이곳을 거쳐야 했다. 배밭과 염전이 있던 한적 한 이 마을에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부터 70년대 초 다. 동구 만석동과 주안 지역 그리고 멀리 서울에서 철거민들이 떼밀려 들어왔다. 아랫동네부터 무허가 집짓기가 시작되었다. 앞집의 어깨를 짚고 다른 집이 올라섰 다. 집들을 나누는 담장은 없다. 담을 칠 공간조차 없었다. 집의 벽이 곧 담장이 되었 다. 산 모양을 따라 낮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었다. 오를 수 있는 곳까지 집들이 들어섰 다. 그렇게 산동네가 되었다. 동네를 벗어나는 길도 따로 없었다. 다니다 보니 그게 골목이 되었고 길이 되었다. 갯골이 가깝게 있던 아랫동네는 비만 오면 바다가 되었다. 마누라 없인 살아도 장화 없이 살 수 없는 동네가 되었다. 집값이 싸다 보니 인근의 공단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날품을 파는 도시 빈민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렇게 달동네가 되었다. 몇 년 전 십정동은 수많은 집들을 긁어내고 한쪽에 거대한 아파트를 세웠다. 그 아 파트들은 마치 겁먹고 움츠린 꼬마를 무릎 꿇게 하고 윽박지르는 어깨 의 모습이다. 본격적인 재개발 바람으로 이 동네는 곧 덩치 큰 어깨들만 꽉 차게 들어설 것이다. 37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십정동 375

190 열우물에는 또 다른 눈물이 배어있다. 천형( 天 刑 )이라 불리는 한센병을 앓던 사람 들이 십정동 한편에서 세상의 천대 속에 모진 삶을 이어갔다. 동암역과 백운역 사이 경인철도 변에 있는 신동아아파트 부지는 당시 나환자들이 개간해서 일군 십정농장 터였다. 1998년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농장은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철도 건너편에는 영세 공장으로 변한 그 잔재가 남아있다. 한하운 시집 보리피리 와 옛 십정농장 전경(원내는 한하운). 부평 지역에 한센병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초 성계원 이란 집단 나 환자촌이 형성되면서부터다. 성계원은 지금의 인천가족공원(부평공동묘지) 위쪽 산 속에 자리 잡은 일종의 국립요양원이었다. 이곳에는 원래 1947년에 동인요양소 라는 작은 단체가 있었다. 서울, 수원, 강원도 등에서 한센병자들이 집단 이주하면서 그 규 모가 커졌다. 1961년에 성계원은 양성과 음성을 구분해 양성환자는 그곳에 그대로 남게 하고 음 성(치유)환자는 자립을 위해 십정동과 청천동 등지로 이주시킨다. 천주교 신앙을 가 진 사람은 십정농장으로, 개신교 신자는 청천농장으로 분리되었다. 그들은 사회에 냉 대 속에서도 부지런히 양돈과 양계 사업에 종사하며 사회에 완전히 정착했다. 한때 인 천 대부분의 달걀은 그들 손에서 나온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들 속에 한하운( 韓 何 雲 )이 있었다. 문둥병 시인 으로 알려진 그의 시 파랑새, 보 리피리 가 초등학교 교과서에도 실렸다. 한하운은 나병의 한( 恨 )을 시로 승화시키면서 사회와 소통하려 했던 예술가이자 사회사업가였다. 그는 한센병자의 자식들을 위해 1952년 농장 인근에 신명보육원을 창설했다. 당시 보사부는 성계원에 거주하는 나환 자들이 아기를 갖는 것을 금지했고 아이가 있으면 부모와 서로 만날 수 없도록 격리해 수용했다. 성계원과 신명보육원 사이에는 철조망이 가로막고 있었다. 아이가 보고 싶 은 부모와 부모가 그리운 아이들이, 해가 지면 산을 돌아 넘어와 철조망을 사이에 두 고 몰래 만났다고 한다. 인근에 한 초등학교가 개교한 1965년대 무렵, 이 학교 학부모와 교직원들은 근처 십 정농장 아이들이 입학하는 것을 꺼려 농장 근처에 그들만의 분교를 따로 두자고 강하 게 주장했지만 그 뜻을 관철시키진 못했다. 한센병자의 자식들은 어렵사리 학교에 입 학한 후에도 교사와 같은 반 아이들의 멸시와 천대 속에서 지내야만 했다. 소규모 공장으로 변한 십정농장 양계장. 37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십정동 377

191 부평농장을 위문 차 방문한 여성단체(좌), 인천수출산업단지 기공식. 최근 인천시에서 발행한 인물로 보는 인천사 에 한하운이 포함되었다. 그 책에 의하 면 그는 1949년 12월 30일 밤, 70여 명의 환자를 이끌고 부평공동묘지 골짜기로 들어 왔다. 그들과 닭똥을 치며 동고동락하다가 1975년 2월 28일 십정동 산 39번지 자택에 서 간경화로 사망하였다. 그는 죽어서 푸른 하늘 푸른 을 날아다니며 푸른 노래 푸른 울음을 우는 파랑새가 되었으리라. 십정동은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거대한 소금밭을 품고 있었다. 바닷물이 동네 어 귀까지 드나들었다. 구한말 융희 원년(1907년)에 소금을 공급하기 위해 조정에서 1정 보(약 3천평) 규모로 우리나라 최초의 천일염전 시험지를 조성했다. 현재의 홈플러 스 간석점 부근인 십정1동 일원이다. 시험을 마친 이후 약 99만 1,735m2(30여 만 평)에 달하는 거대한 염전이 본격적으로 조성되었고 주변에 천일염을 정제하는 소금 공장들도 함께 들어섰다. 인천은 한때 전국 소금 소비량의 절반을 충당할 정도로 풍부 한 생산량을 자랑하기도 했다. 산업화의 물결이 밀어닥치면서 염전 일대는 1969년 수출 5 6공단과 인천기계공단 으로 지정되었고, 결국 그 자리를 불도저로 밀어붙이면서 소금끼는 완전히 자취를 감 추었다. 염전벽해( 鹽 田 碧 海 )의 흔적은 표지석 하나로 달랑 남아있다. 지번 하나 갖고 천일염전 최초 시험지 표지석을 찾기 위해 주변을 서너 번 돌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결국 공장 관리인의 안내를 받고서야 겨우 발견 할 수 있었다. 그 표지석은 옛 서울제 강 단지 내에 있는 고물 집하장 정문 옆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옹색하게 있었다. 37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십정동 379

192 그때, 이곳 십정동 Map & Photos ➊ 가좌동 심씨 고택 ➍ 부평전투 승전기념비 ➋ 백운역 ➑ ➍ 부평 신동아 아파트 옛 십정농장 ➎ 십정동 환경개선지구 ➏ 금호어울림 아파트 백양 아파트 철마산 용현동 ➌ 주안 ➐ ➊ 십정동 인천축산물도매시장에서 서구 가좌3동 원적산 네거리 방 향으로 내려가면 300년 된 고택 이 있다. 이 고택은 가좌동 코스모 화학 뒤편 공장 지대 골목에 있어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이 집의 소 유주는 심재갑(전 인하공전 명예 교수) 씨다. 그의 10대 조부에 의 해 1715년에 지어진 이 마을 최 초의 기와집이다. 1940년에 개 축할 때 압록강에서 백두산 소 나무를 가져와 서까래와 기둥으 로 사용했고 병자호란 당시 영흥 도에 머물렀던 임경업 장군 거처 의 기와를 세 척의 배로 가져와 올렸으며 개성 목수들이 나무와 나무를 엮어 개축 하였다고 한다 전쟁 때는 피난민이 몰리면서 이 집에 20가구 이상이 살았다. 1950년대에는 농촌계몽운동의 장소였다. 당시 인천고, 제물포고, 인일여고, 이화여 고 학생들이 방학 때 이곳에 머물며 농촌계몽운동을 벌였다고 한다. ➋ 인천혜광학교 인천혜광학교는 1956년 12월 임경삼 목사가 실명 어린이 6명을 양육하면서 세운 시각장애인학교다. 1958년 기독 맹아원을 설립했고 1961년 경기맹학교 를 개교했다. 1982년 지금의 학교명으 로 변경했고 현재 유치원과 초 중 고 등부 및 전공부를 갖춘 시각장애인들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우리나라 최고의 하모니카 연주가 전제덕 씨도 이곳 출신이다. ➌ 천일시험염전 터 구한말 융희 원년(1907년) 조정에서 현 재의 홈플러스 간석점 부근에 1정보(약 9,900m2) 규모의 천일염 생산 시험지를 조성했다. 이 시험지에서 시작된 천일염 생산은 이후 일본인 니카오쿠 오오쿠라 가 중국으로부터 본격적으로 천일염 제 조기술을 도입하고 주변 지역에 염전 축 조가 이뤄지면서 대량 생산이 본격화됐다. 1911년에는 부평구 십정동, 서구 가좌 동 일대 99정보가 거대한 천일염전으로 변모했다. 이 자리에는 수출 5 6공단(현 부평 주안산업단지)이 들어섰다. 부평아트센터 옆 백운근린공원에 있는 현충 시설로 2008년 6월 13일에 건립했다.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후 경인국도를 따 라 서울로 진격하던 국군 해병 제3대대와 연합군은 원통이 고개 등 부평 지역에 진을 치고 있던 적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아 군의 피해도 있었지만 이 지역에서 많은 적을 섬멸했다. 이 전투 로 서울 수복이 시작된 것이다. ➎ 한하운과 인천 문둥이 시인 한하운( 韓 何 雲,1919~1975)은 이 리농림학교 출신이다. 이 리농림학교는 오래 전 익 산대학교로 바뀌었고 다 시 전북대학교 익산캠퍼 스로 변경되었다. 이 학교 안에 한하운의 시비가 있다. 그는 함경 남도 함주군 동촌면 쌍봉리 출생이다. 3대가 과거에 급제한 선비 집안으로 지방 지주였다. 함흥제일공립보통학교 내내 음악과 미 술에 자질을 보이며 우등생이었던 그의 몸에 이상이 오기 시작 한 것은 보통학교를 졸업하기 전 해인 1931년 5학년 봄부터였 다. 보통학교 졸업 후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당시 전국적으로 명 문학교였던 이리농림학교 수의축산과에 입학한다. 그는 이리농 림 당시 장거리 육상선수로 활약하기도 했다. 1936년 봄 경성제 대 부속병원에서 그는 나병 환자로 판정을 받는다. 1943년 한하 운은 중국 북경대학을 졸업하고 1944년 함경남도 도청 축산과 에 취직한다. 이듬해 병이 크게 악화되자 그는 직장을 사직하고 함흥 중앙동으로 귀가한다. 이때부터 문학공부에 빠지게 된다. 그는 1950년 인천시 부평 소재 나환자정착촌 성계원 으로 이주 하면서 인천과 인연을 맺는다. 성계원의 자치회장이 되었고 이 어 1952년 부평에 신명보육원 을 창설했다. 한하운은 1975년 2 월 2일 57세를 일기로 부평구 십정동 자택에서 지병인 간경화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김포시 풍무동 번지 소재한 장릉 옆 김포공원묘지에 영면하고 있다. (사진 좌측이 한하운) ➏ 해님방 십정동 산동네에는 해님방이 있다.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게 살 아가는 동네를 꿈꾸는 이들이 만든 작은 모임이다. 해님방은 1986년 십정동 산동네에 둥지를 틀었다. 이 마을에 철거민들과 공장에 다니는 노동자 가족들이 몰려들면서 형성된 저소득층 자 녀를 위한 각종 프로그램을 운영했다. 해님방은 미취학 아동을 위한 놀이방과 방과 후 교실인 공부방을 열어 그들의 짐을 나눠 지면서 주민들과 만나기 시작했다. 그 뒤 학부모들은 아이들 문 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모회를 만들었고 주민들은 동네 이름을 따서 열우물주민회를 만들었다. 비록 공간부족으로 90년 초에 놀이방은 문을 닫았지만 도서 대여를 하는 해님쉼터가 새로이 문을 열었고, 94년에는 구청의 지원을 받아 중학생들까지 참여 가 가능한 해님 청소년 공부방을 열었다. 같은 시기 지역주민을 대상으로 한 한글, 영어, 한문 교실을 열어 지금까지 운영했고 지 신밟기나 단오제 등 절기별 행사도 매년 치렀다. ➐ 인천축산물 도매시장 흔히 십정동 도살장 으로 불렀던 곳으로 1983년 개설했다. 지 난 2001년 이곳에서 죽은 소를 불법 도축 해 문제가 되기도 했 다. 이후 도축 공정을 개선하고 안전하고 위생적인 축산물을 공급해 신뢰를 얻었다. 시장 안쪽의 인천도축장(삼성식품)에서 주말을 제외하고 하루에 소 80두, 돼지 600~700두가 도축된다고 한다. 인천축산물백화 점을 비롯해 골목골목 형성된 상회 등 현재 130곳의 고기 판매 점이 도소매업을 하고 있다. ➑ 부평아트센터 부평아트센터는 2007년 10월 착공해 2010년 4월 백운공원 인근 에 개관했다. 연면적 1만7천300m2 규모에 지하 2층, 지상 3층으로 대공연장 소공연장 전시장 커뮤니티홀 등을 갖췄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야외 옥상 공연장인 별누리극장이 있다. 부평아 트센터 터에는 기무사 부대 송학사 가 있었다. 아트하우스가 송학 사(기무사) 건물이었고 아트센터 자리는 기무사 운동장이었다. 38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십정동 381

193 산곡동 질곡의 외세풍 風 돌고 돈 백마장 전쟁은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일제는 중일전쟁을 위해 부평벌에 거대한 병참기지를 만들고 매달 소총 4,000자루를 만드는 등 엄청난 무기를 생산해 냈다. 패전 후 그들이 떠난 자리에 미군이 주둔 하면서 그 일대는 기지촌이 되었다. 철마산 밑에서 한가롭게 농사짓고 살던 백마장에도 왜색풍이 불다가 다시 양키문화가 불어닥쳤다. 이제 한 세대가 지나갔지만 옛 조병창 땅은 아직 우리 품에 안기지 못했고 부평벌 곳곳에는 여전히 식민 통치와 미군 주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금단( 禁 斷 )의 땅에서는 상상의 꽃 이 무럭무럭 자라기 마련이다. 누군가 이야기를 만들고 그 이야기는 다시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부평 도심 한가운데 자리 잡 은 미군 부대 캠프마켓(Camp Market)을 얘기할 때마다 귀를 쫑긋하게 하는 테마 는 그 안에 인천항까지 연결된 지하 터널과 거대한 보물 창고가 있다는 것이다. 과연 있 을까. 최근 그 사실 에 대해 공식적인 증언자들이 나왔다. 2013년 9월 16일 부평 미군 부대 시민참여협의회는 인천시청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부평 미군 부대 안에 지하터 널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미군기지 인근에 살고 있는 주민 이 모(67) 씨의 증언이다. 예전에 부대에 근무했던 부친으로부터 땅굴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 7년 전 부대 내 정문 옆 주차장 부근과 좌측 옛 빵공장 부지 등에서 땅굴 여섯 곳을 발견했다. 당시 동쪽 기지 정문 근처에 있는 철문을 발견하고 이게 뭔가 하는 생각에 들어가 본 적이 있다. 땅굴로 내려가는 길은 폭과 높이가 2미터 정도 됐으며 7m쯤 내려간 곳에 물이 가득 차있어 더 들어가지 못했다. 당시 바닥엔 무기 수송을 위한 철도 레일이 깔려 있 었다. 땅굴과 관련해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래전부터 부대 안에 큰 연못이 있다는 소 문이 나돌았다. 그 연못의 깊이가 시시때때로 달랐다고 한다. 바다와 연결돼 있기 때 산곡동 383

194 60년대말 애스컴 전경. 문에 썰물 때와 밀물 때의 깊이가 다르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연못에서 멱을 감다 실종되었는데 한참 후에 인천 앞바다에 시체로 떠올랐다는 괴소문도 돌았다. 과거 부평 미군 기지에 근무했던 박 모(72) 씨는 기지 지하에 터널과 함께 백금 등 보물과 유물을 숨겨놓은 보물창고가 있을 것이라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해 실 제로 1986년 4월 이 동네에서는 보물찾기 소동이 한바탕 벌어진 적이 있다. 일본군 병기제조공장이 있던 자리에서 청조 중화민국의 동( 銅 ) 화폐와 놋그릇 등 각종 유 물 이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2차 세계대전 말 포탄 등 무기를 만들기 위해 일제가 조선 전국은 물론 중국, 만주, 대만 등에서 강제로 공출해 온 동 철제품이 그곳에 묻혀 있 었던 것이다. 이곳에 있던 공공기관이 다른 곳으로 옮겨가면서 땅속에서 화폐 등이 쏟아져 나오 자 인근 주민과 화폐수집가 고물상 등 하루 500여 명이 몰려들어 보물찾기 에 나섰 다. 출토된 물건은 청조에서 통용되던 황동회( 貨 )와 중화민국 개국 기념 화폐를 비롯 해 칼, 놋그릇, 수저 등이 주류를 이뤘다. 드물게 우리나라의 상평통보와 청동 불상 등 도 나왔다. 많이 캔 사람은 혼자서 1,000점 이상을 발굴 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보물창 고 에 대한 소문은 끊이지 않아 1990년대 말 한국과 미국이 합동으로 발굴 조사 작업 을 벌이기도 했다. 1939년 일제는 부평에 일본육군조병창을 설립했다. 조병창( 造 兵 廠 )은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일본군의 전쟁 물자를 조달했던 조선 내의 대표적인 병기 공장이었다. 부평 조병창의 월간 생산량은 소총 4,000정, 총검 2만 자루, 소총탄환 70만 발, 포탄 3 만 발, 군도 2,000정, 차량 200량 등에 달하며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이곳에서는 선박 250척, 무전기 200조, 심지어 잠수정까지 만들어 냈다. 당시 이곳에는 수천 명을 헤아리는 군인과 군속들이 종사했다. 조병창에 근무하면 징용을 면제해 주는 특혜 때문에 이곳을 피난처로 삼고자 많은 외지인들이 전국에서 몰려들었다.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해 학생들까지 동원했다. 학생들의 사보타 지로 인해 군수품 생산량이 급감하자 보성전문학교 폐교를 검토할 정도였다. 간혹 이 곳에서 무기를 몰래 빼내 일본 요인의 암살기도와 임시정부에 공급하려 하기도 했다. 부평사 에 의하면 일제 말기에는 광복 후 육군참모총장이 되는 채병덕 소좌가 이곳 책 임자로 부임하기도 했다. 38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385

195 무기를 생산하기 위해 공출된 그릇 등 집기들. 롯데마트 길 건너 산곡1동에 들어서면 자로 잰 듯한 10여 개의 골목이 나온다. 골목 길 입구에 서면 끝이 가물가물할 정도로 골목길이 기다랗다. 두부를 자른 것처럼 반듯 한 골목에 똑같이 생긴 집들이 빈틈없이 일렬로 도열해 있다. 일제는 조병창과 조선베 아링 등 군수 기지에서 일할 노동자들을 위해 1941년 조선주택영단을 설립해 다섯 가 지 표준형 주택을 설계했다. 이중 49~66m2(15~20평) 규모의 갑( 甲 )형과 을( 乙 )형은 일 본인들을 위한 단독주택이었고 19~33m2(6~10평)의 병( 丙 )형 이하는 한국인을 위한 집 단 주택이었다. 집단주택은 말이 주택이지 수용소와 다름없었다. 산곡동의 주택은 신 일제가 패망한 후 미군이 이곳을 접수하자 모두 그 안이 궁금했다. 특히 창고에 저 장돼 있는 물자의 양이 궁금했다. 1946년 1월 25일자 대중일보를 보자. 인천 공업인 들이 1돈에 2,500원을 줘도 입수하기 힘든 코크스가 무려 5,000돈이나 쌓여 있고 어떤 공장에서든지 필요한 스패너가 약 20 화차분이나 쌓여 있으며 철재를 비롯한 군수품 이 산적해 있다. 실제로 당시 국내에서 1년에 3,000톤이면 충분한 고무 원료가 조병창에서 1만 톤이 나 발견되었다. 이로 인해 고무제품 가격이 급락했고 특히 고무신 값이 7, 80원 정도 왕창 하락하기도 했다. 일제는 조병창 인근에 군수기지를 구축하기 위해 일본인 토건하청업체 다섯 곳을 참여시켰다. 이 중 간또오구미( 關 東 組 )라는 업체는 백마장 일대의 공사를 맡았고 근 로보국대에 편성된 조선인들이 이 공사에 투입되었다. 근로자들을 위해 판자로 만든 집들이 길게 들어섰다. 지금의 산곡동 롯데마트 인근이다. 사람들은 이 동네를 관동 조 라고 불렀다. 미군이 부평에 주둔하면서 관동조 동네는 양색시촌으로 그 모습이 바 뀌었다. 후에 미군이 떠나자 한국인을 상대하는 집창촌으로 다시 변했고, 현재는 아파 트단지가 들어섰다. 38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산곡동 387

196 사택과 구사택으로 구분된다. 구사택은 벽돌로, 신사택은 블록으로 지어졌다. 특이한 점은 적게는 여섯 개 많게는 열두 개의 집이 한 통으로 연결된 기와지붕을 이고 살았 다는 것이다. 건축비와 공사기간을 줄이기 위한 방편인 듯하다. 이쪽 집에서 얘기하는 말소리가 저 끝집에도 다 들렸어요. 고양이하고 쥐들이 통으 로 연결된 천장에서 운동장처럼 뛰어놀았어요 동네 골목에서 만난 주민의 설명이다. 좁고 긴 골목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불현듯 이 른 새벽 군복 같은 작업복에 각반을 찬 수많은 노동자들이 벤또 를 하나씩 들고 군수 공장으로 향하는 모습이 오버랩된다. 산곡1동사무소 옥상에 올라가서 단지를 내려다 보니 마치 틀로 찍어낸 기와집들이 다닥다닥 어깨를 끼고 있다. 그렇게 그 집들은 70 년의 세월을 보냈다. 최근 인천시는 슬픈 역사의 한 단면을 품고 있는 이 주택단지를 등록문화재로 등재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일제가 쫓겨난 후 미군이 들어왔다. 미군은 조병창을 접수하고 남한 지역에 주둔한 미군들의 주요한 보급기지인 미군수지원사령부(ASCOM)라는 간판을 단다. 애스컴 주 변에는 다양한 미군 시설들이 자리 잡았다. 60년대 초 현재의 현대아파트 3단지 자리 에 국내에서 제일 큰 121미군후송병원이 설립되었다. 이 병원은 시설과 의료진이 좋 아 당시 유력 정치인들은 물론 대통령도 치료 받았다는 소문이 있다. 이 병원이 세계의 이목을 끈 적이 있다. 1968년 1월 23일 북한 원산 앞 공해상에서 미국의 푸에블로 호가 북한의 초계정 네 척과 미그기 두 대의 위협을 받고 납치되었 다. 사건 발생 후 11개월이 지난 1968년 12월 23일 북한은 판문점을 통해 승무원 82명 과 유해 1구를 송환했다. 승무원들은 바로 이 121병원으로 후송돼 하루 동안 묵으며 검진을 받았다. 별 넷 미군 사령관을 비롯해 한국에 주둔하는 모든 미군 별들이 사이 60년대 애스컴 주변거리. 38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산곡동 389

197 드카와 소방차의 호위를 받으며 이곳을 방문했고 외신 기자와 국내 기자의 취재 열기 로 백마장 일대는 크리스마스이브 하루 종일 북새통을 이루었다. 전후방에서 부상당한 미군들은 헬리콥터로 날랐다. 지금의 한화아파트(조선베아 링) 자리에 항공부대가 있었고 금호아파트와 한양아파트 사이 큰길 마장로에 활주로 가 길게 놓였다. 하루 종일 헬리콥터와 프로펠러 경비행기들이 오르내렸다. 신나는 구경거리였죠. 초등학교 때 지금의 명신여고 언덕에 올라가서 여러가지 모 양의 비행기를 지루한 줄 모르고 구경하곤 했습니다. 비행기 뜨는 것을 보며 미지의 세 계를 막연히 동경하기도 했습니다. 아직도 비행기 굉음이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백마장 토박이 정준택(56) 씨는 눈앞에 방금 인화한 사진을 펼쳐보이듯 지난 풍경 을 그려낸다. 390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산곡동 391

198 부평에 미군과 미제물건이 들어오면서 양키문화도 함께 들어왔다. 백마장 골목에 는 미군들이 출입하는 클럽들이 문을 열었고 주말이면 일대가 불야성을 이뤘다. 미군 헌병들이 자주 순찰을 돌았지만 미군끼리, 미군과 한국인이 심심치 않게 싸움판을 벌 이곤 했다. 가끔 기지촌 여성의 살인사건이 신문 귀퉁이를 장식하곤 했다. 급기야 부 대 인근에 미군 형무소가 생기기도 했다. 미군 형무소는 70년대 중반까지 존재했고 이 후 그 자리에 문화주택이 세워졌다. 골목마다 미군을 상대하는 양색시집들이 줄줄이 들어섰다. 연합병원과 모자병원 이 문을 열었는데 양색시들의 보건증 발급이 중요한 업무 가운데 하나였다. 철마산 아래에는 혼혈아 고아들을 위한 고아원이 설립되기도 했다. 동네가 험하고 거칠어졌 지만 미군 덕분에 돈은 잘 돌았다. 구멍가게에서도 달러를 바꿀 수 있을 정도로 백마 장 경기는 좋았다. 특히 가구점과 양복점은 호황을 누렸다. 침대와 소파는 양색시들 의 필수 구입품이었으며 본국으로 돌아가는 미군들은 값싸고 솜씨 좋은 양복을 몇 벌 씩 맞춰갔다. 양색시들의 국제결혼과 미국 이주에 필요한 서류를 대행해주는 민간사 무소들도 솔솔이 재미를 봤다. 시장 안에는 늘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1965년 시장 입 구에 문을 연 백양당 아이스케키점은 여름철 하루에만 1만 개 이상 아이스케키를 팔 정도였다. 백마장 인근에는 버스정류소 이름으로 유명한 화랑농장 이 들어섰다. 이 농장은 상 이용사들을 위해 1955년 3월 건립했다. 거주자들을 위한 115m2(35평) 대지에 57m2(18 백마 라는 흔적이 남은 동네 간판. 392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산곡동 393

199 화랑농장 개소식 장면. 평) 건평의 주택 120동 정도가 세워졌다. 일률적으로 빨간 벽돌에 파란 지붕을 얹은 집들이었다. 이곳은 장끝말 이라는 마을이다. 일제가 중일전쟁을 시작하면서 조병창 을 만들 때 이곳에 거주하던 스무 남짓 가구의 원주민들을 내쫓으며 마을도 함께 사라 졌다. 일반인의 통행을 엄금하면서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어 화랑농장이 들어서기 전 까지는 부평 토박이도 알 수 없었던 외진 곳이었다. 이곳을 1952년 무의탁 상이군인들이 양계를 하며 개척을 했고 한미재단의 건축자 재 원조와 미 8057부대의 지원으로 화랑농장 이란 간판을 달았다. 농장으로 시작했지 만 후에 간장공장도 세워졌기 때문에 근처에 가면 간장 달이는 냄새가 진동했다. 나중 에는 서울 중랑천 철거민들이 이곳으로 옮겨오는 등 또 다른 이주민들이 정착했다. 부평은 한때 애스컴시티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평 미군부대에 고용된 한국 인 노동자가 얼마나 되었는지 정확히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1962년 6월 17일에 재건 된 외기노조 부평지부 조합원의 수가 3,166명(남 2,900명, 여 266명)인 것을 감안하면 4,000명에 가까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코 사그라질 것 같지 않던 미군 경기는 70년대 들면서 한풀 꺾이기 시작했다. 미 군 철수가 현실이 되면서 급기야 1972년 12월 중순 부평 애스컴부대 한인 종업원 416 명은 해고 통지서를 받았다. 이후 백마장에서는 미군과 군속 그리고 양색시들의 그림 자가 점점 사라졌다. 394 골목, 살아 [사라] 지다 395

200 그때, 이곳 산곡동 Map & Photos ➎ 철마산 화랑농장 한양 아파트 현대 아파트 십정동 ➌ 백운역 청천동 롯데마트 원적사거리 현대 아파트 ➐ 고가도로 ➑ 주안교회 ➒ 캠프마켓 (옛 조병창) 부평공원 ➊ 다 다 동아 구 아파트 미 남부고가도로 부평구청 부평역 ➋ ➏ 동수역 ➍ ➊ 다다구미 현재의 롯데백화점(옛 동아백화점) 앞 원통천 복개변 개울가 일대를 흔 히 다다구미 라고 불렀다. 조병창 공 사 하청업체 다다구미( 多 田 組 )의 현 장 사무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광복 후 현장 사무소가 철수하면서 이곳 은 빈터로 남아 있었다가 무허가 판 잣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살기 시작했 다. 1960년대 초 마을 이름을 평화촌 이라고 명명했는데 널리 사용되지 못했다. ➋ 미쓰비시 사택 지금의 부평 2동 일대를 홍중(히 로나까)사택 이라고 불렀다. 일제 강점기 부평공원 자리에 홍중( 弘 中 )이란 군수공장이 있었고 종업 원 사택이 부평2동에 수십 채 있 었기 때문에 이렇게 불렀다. 이후 히로나까 공장이 미쓰비시( 三 菱 ) 로 바뀌면서 사택 이름도 미쓰 비시 사택 혹은 삼능사택 으로 바뀌었다. ➌ 백운주택 1970년을 전후해 경인철로를 따라 십정동으로 넘어가는 고갯길에 마을이 형성되 었으며 그 이름을 백운주택 이라 불렀다. 이 고개에 구름이 하얗게 끼면 비가 오고 그렇지 않으면 비가 내리지 않는다 해서 백운( 白 雲 ) 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이 로 인해 이곳에 전철역이 생길 때 그 이름이 백운역이 되었다. ➍ 부평시장 인천시가 1962년 6월 7일 북구 부평동 225번지 일대에 공설시 장으로 개설한 것으로 시장법 에 의한 최초의 시장이다 년을 전후해 부평수출산업공단 의 근로자들로 인해 최고의 전 성기를 구가했다. 1971년 공설 시장에서 사설시장이 되면서 부평자유시장으로 바뀌었고, 같은 해 부평진흥자유시 장이 생기기도 했다. (주)부평자유시장은 1992년 해산되었으나 번영회가 그 뒤를 잇고 있다. ➎ 철마산 관통 인천과 부평을 잇는 폭 20m, 연장 6km의 철마 산 관통 도로는 1969 년 10월에 착공해 1972년 10월에 개통했 다. 철마산이 개통되기 전에는 인천지역과 부 평지역을 왕래하려면 경인국도 쪽으로 돌아가야 했다. 같은 행 정구역에 속해 있었지만 인천과 부평은 분명 심리적 거리 가 있 었다. 도로의 개통으로 인천과 부평의 왕래가 15분 가량 단축되 었다. ➏ 부평경찰학교 광복 직후 미군정은 1945년 9월 13일 종 로구 세종로 미 대사관 자리에 오늘날의 경찰 종합학교의 효시인 경 찰관 강습소 를 설립한 다. 조선경찰학교, 국립 경찰학교로 개편되었다가 1946년 8월 15일 국립경찰전문학교 로 승격했다. 경찰교육이 현 부평6동 부평성모병원 옆으로 이전 하며 부평시대를 연 것은 경찰 창설 10년 만인 1955년 3월 27 일이었다. 부평에 새 교사를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경찰관 양성 을 했으며 경찰대학은 1984년 경기도 용인으로. 중앙경찰학교 는 1986년 충주로 이전했다. 일제 말기에 박문여중학교(인천소 화고등여학교)가 교사로 사용하다가 징발되기도 했다. ➐ 원통이고개 전투 원통이 고개는 인 천지하철 동수역에 서 부평삼거리역에 이르는 길이다. 이 곳은 인천상륙작전 후 실제적인 첫 대규모 교전이 일어난 곳이다. 부평사 에 의하 면 인천상륙 3일째인 9월 17일 아침 6시경 북한군 보병부대와 인민군 전차 6대는 경인국도를 따라 부평 쪽에서 인천 방향으로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고개 위 산 속에 있는 미 해병대 진지 를 전혀 파악하지 못한 듯 전차 위에서 식사를 하거나 떠들면서 웃으며 행군했다. 북한군의 마지막 전차가 원통이 고개를 직각 으로 굽은 큰 길을 꺾어 돌려고 하는 순간 미군은 2,36인치 로켓 포로 전차부대를 공격했다. 퇴로가 차단된 상태에서 전차는 전 부 파괴되었고 인민군 보병 250명 가운데 200명이 사살되었다. 순식간에 원통이 고개는 북한군의 피로 물들었다. ➑ 부평수출산업공업단지 부평수출산 업공업단지 조성 예정지 로는 효성동, 작전동, 갈산 동 일대 약 69만 4,214 m2(21만평)의 부지가 지정되었고, 1966년 4월 8일 기공식이 거 행됐다. 당초에는 서구 가좌동 해안을 매립하여 공단을 조성하 자는 의견이 대두되기도 했으나 미군부대의 철수로 경제능력이 약화된 부평을 회생시키려는 목적에서 지역 인사들이 수출산업 공단의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후문이다. 1969년에 부평 수출공업단지는 준공되었고 공단 건설과 함께 50개 업체가 입주 하여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후 새나라자동차 와 신진자동차 를 거쳐 대우자동차 와 같은 거대한 공장이 자리를 잡게 되었다. ➒ 애스컴(ASCOM24) 1945년 일본 항복 후, 미 24군단 예하부대 제24군수지원사령 부(Army Service Command24, 약칭 ASCOM24)는 그 해 9월 10 일 부평조병창을 접수한다. 안개가 많이 끼는 부평 평야가 폭격 으로부터 안전하다고 미군은 판단한 것이다. 애스컴은 1950년 6 25 전쟁 발발 이틀 만에 철수했지만 1951년 다시 주둔한다. 병참기지와 121후송병원으로 재구성한 애스컴은 1963년 55보 급창 6의무보급창, 565공병자재창 19병기창, 4통신대, 512정 비대대, 55항공대, 8057보충대, 37공병대 76공병대 등 7개 구 역으로 나뉘게 된다. 당시 주한 미군의 종합보급창 역할을 한 55 보급창은 종업원 1,200명을 고용, 한국 내 단일 부대 중 최고의 인력을 자랑했다. 396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산곡동 397

201 작가의 말 夢 (몽)땅, 인천골목 골목 있다. 골목 잊다. 다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그 존재를 잊고 지냈다. 골목을 다시 찾은 때는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이었다. 2003년 작은 디카를 손에 쥐고 인천 골 목을 쏘다녔다. 그즈음 인천에는 과거를 털어 버린 동네들이 이미 여럿 있었고 털 어버릴 준비를 하고 있는 마을도 적지 않았다. 오늘 찍은 거리 사진도 내일이면 그 모습과 의미가 변할 만큼 인천은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한동안 인천은 도심재생 이니 신 구도심 균형 발전 같은 근육질 의 언어가 난무하면서 어제 보았던 골목이 불도저의 날카로운 삽날에 하루아침에 사라지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다. 허겁지겁 기록 하기 시작했다. 그것을 모아 2006년 3월 사진기록 집 골목길에 바투 서다 를 출간했다. 그때 무슨 용기로 그런 책을 출간했는지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 책에 담긴 사진들은 결코 멋진 작품 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좋은 기록물 이었다는 것에 스스로 위안을 한다. 이미 그 책에 담겼던 마 을과 골목 중 상당수가 사라지고 없어졌기 때문이다. 해체되고 멸실되는 그 공간들을 다시 담기 위해 지난 2010년부터 2년 동안 월간 굿모닝 인천 에 Old but New 시리즈를 연재했다. 그때 스무 곳의 골목을 취재했다. 이 책은 당시 연재한 지역을 중심으로 또다시 2013년 한 해 동안 골목을 샅샅이 탐 방하고 취재해서 엮은 것이다. 여전히 골목 안에는 사람들이 내쉰 공기가 만들어낸 기억과 시간이 훑고 간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대로에는 업무 가 있지만 골목에는 일상 이 있었다. 골목은 마음을 열고 들어오 는 사람들에게 아주 오래된 역사부터 바로 조금 전 벌어진 소소한 이야기까지 모든 걸 들려줬다. 할머니 무릎을 베고 들었던 옛날이야기 같이 달콤했고 때론 인생의 교훈과 지혜를 주는 잠언( 箴 言 )처럼 묵직했다. 이 책에 담은 이야기들은 새로울 게 하나도 없다. 이미 지역의 역사 연구가나 향 토사학자 그리고 지역 전문가들이 말하고 전했던 사실 들이다. 어찌 보면 그분들 모두 골목 탐사의 좋은 길잡이가 돼주었다. 이 책은 단지 현장을 확인하고 이야기 퍼즐 조각을 찾아서 과거의 골목과 현재의 공간을 이어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아직 찾지 못한 조각은 분명 누군가 더 찾아서 계속 맞출 것이다. 원고를 쓰면서 골목이 정말 지겨워져 당분간 그곳을 찾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 런데 또 골목이 그립다. 내일은 어디를 갈까. 십정동? 송림동? 골목은 내 가슴에 그리움으로 다시 살아 나고 있다. 인천 골목은 내게 몽( 夢 )땅 이다. 인천의 골목은 근대화와 산업화의 과정에서 깊게 패인 도시의 잔주름이다. 한 도 시가 어떤 주름살과 어떤 피부, 어떤 눈빛을 갖게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곳에서 살 아가는 사람들에게 달려 있다. 도시의 모습은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얼굴을 닮 기 때문이다. 인천 골목만큼 다양한 표정을 갖고 있는 도시도 드물다. 2013년 12월 23일 인천시청 대변인실 별실에서 유동현 398 골목, 살아 [사라] 지다 작가의 말 399

202 주요 참고 문헌 자료 인천이야기 100장면 (조우성) 다시 쓰는 인천근대건축 (손장원) 인천석금 (고일) 인천 한 세기 (신태범) 격동 한 세기 인천이야기 (경인일보사) 인물로 보는 인천사 (인천발전연구원) 1960년대 인천풍경 사진집 (화도진도서관) 동구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내일 (인천시 동구) 부평사 1, 2권 (인천시 부평구) 인천시사 70년대편 (인천직할시) 인천역사문화총서시리즈 (인천시역사자료관) 2013 인천광역시사 (인천광역시) 블로그 인천의 어제와 오늘 블로그 달동네 수도국산 이야기 외 [비매품] 발행일 2013년 12월 27일 펴낸이 인천광역시장 펴낸곳 인천광역시 대변인실 글 사진 유동현(굿모닝인천 편집장) 감수 조우성(인천광역시 시사편찬위원) 탐사도움 장회숙(인천도시자원디자인연구소 공동대표) 기록도움 김민영(i-vew 객원기자) 인쇄 디자인 성광디자인(주) 김미경 이 책에 실린 글과 사진(옛 사진 제외)의 저작권은 인천광역시와 저자에게 있습니다. 서술된 내용은 저자의 견해이며 인천시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책을 받고자 하시는 분은 인천광역시 대변인실 미디어팀( )으로 연락하시길 바랍니다.

203 담과 담 담과 벽 벽과 벽 벽과 방 수문통에서 백마장까지 글 사진 유동현 인천골목이 품은 이야기 劉東鉉 방과 방 방과 창 창과 창 現, <굿모닝인천> 편집장 인천시 대변인실 미디어팀장 그 사이에 골목이 있습니다. 前, 월간<리크루트> 기자, 편집장 옹기종기 다닥다닥 구불구불 울퉁불퉁 오밀조밀 인천골목이 도란도란 품은 얼기설기 이야기 오순도순 올망졸망 몽(夢)땅, 우리의 골목입니다. 골목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 지고 있습니다. 인천광역시 대변인실 발행 최근 간행물 인천 똑똑, 대한민국 심장 인천을 만나다 일년이 즐거운 인천 놀토 여행 인천의 핫 트렌드, 키스 더 인천 시간, 먼지 되어 날다 (근간) 유네스코 지정 2015 세계 책의 수도, 인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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