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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1) 이 자 경* Ⅰ. 머 리 말 Ⅱ. 인종 구성과 개괄적 연사 1. 중국 이민 2. 일본 이민 3. 독일계 메노파 Ⅲ. 초기 한인 커뮤니티와 노동주선 Ⅳ. 맺음말-다뉴바 리들리 시대의 개막 Ⅰ. 머 리 말 1849년 샌프란시스코 인근 콜리마에서 금이 발견된 사건은 고요한 샌 화킨 밸리(San Joaquin Valley)에도 골드 러시의 영향을 끼쳤다. 툴라레 호수를 끼고 평화롭게 모여 살던 요쿠츠 인디언 부족(Yokuts)들을 몰아 내고 서부개척사를 쓰기 시작한 이 밸리는 킹스 리버 상류(지금의 리들 리 12마일 북쪽)에 1855년 골드 러시를 위한 나루터(Smith's ferry)를 만 들면서 운송과 교통의 요충지로서의 입지를 다져가기 시작했다. 보트로 강을 따라 새크라멘토에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르는 수상 하이웨이 역할 을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 극작가, 이민사 연구가.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따라서 질퍽거리는 강가의 개펄엔 각종 화물이 정기적으로 하륙되 어 이를 나르기 위한 대형 역마차들이 늘어서고, 자연히 목장과 목초 재배 산업의 성장을 가져왔다. 더욱이 1872년 새크라멘토와 L.A.를 연 결하는 센트럴 패시픽 철도가 부설돼 고센(Goshen)에서 킹스 리버를 관통하는 철마가 달리게 되고, 더 나아가 관개수로 시설이 확충되면 서 바야흐로 밸리는 미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비옥한 과일 생산지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특히 리들리는 1884년 골드 러시에 투입된 광부들을 위한 밀생산을 위해 찾아온 남북전쟁의 영웅인 토마스 리드(Thomas Law Reed)가 개발 의 주역이 되었다. 그는 이 지역의 땅을 사들인 관개회사(76 Land & Water)의 주주로서 서던 패시픽 철도회사의 자회사인 패시픽 개발회사 에게 타운을 구획, 개발할 땅을 제공해 자기의 이름을 리들리'에 남겼 고, 철도로 밀려난 옛 나루터의 주인이며 리들리의 첫 번째 정착자인 제임스 스미스는 인근 스미스 산 에 그 이름을 남겼다. 1) L.A.에서 동북쪽으로 220마일 정도 떨어진 프레즈노(Fresno)는 중가주 교통의 요충지임은 물론 우리로서는 미본토로 유입된 초기 한인 이민자 들의 삶과 죽음을 가장 많이 느낄 수 있는 이민 역사의 성지( 聖 地 )로 성역화 작업이 시급한 곳이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미주이민사는 하와이 편향의 초기 자료에 의존한 점이 농후하고, 또 발로 뛰는 이민사보다는 준비된 자료들을 인용 편집하는 수준의 손쉬운 방편만을 택해왔기 때 문에 미국 본토 이민사는 황무지와 다름없는 현실이다. 더구나 프레즈 노를 중심으로 펼쳐진 중가주 지역의 연구는 오랜동안 무관심속에 방치 되어온 느낌마저 들 정도다. 다시 말해 이 지역의 한인 지도자들, 소위 1) Reedley Historical Society, Reedley:A Study Of Ethnic Heritage(Fresno Pacific College Professional Development Division, fouth printing 2001), pp.8~9. 4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리들리파 라고 일컬어지는 진보적 성향의 인물들로 인해서 지난 반 세 기 동안 연구의 대상에서조차 제외시킨 듯한 정치적 외압 내지 자발적 배제 의도가 숨어 있었다면 이는 역사의 진실을 오도하고 묵과했다는 점에서 깊이 반성할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이제 미주이민 100주년을 계기로 미국 본토 이민사를 정리하는 작업 은 그만큼 새로운 시각의 모험이 요구된다. 이는 지금까지의 연구 노력 이 하와이 치중의 이민사인 동시에 정치적 엘리트 간의 파벌경쟁과 쟁 투를 골자로 하는 학위(석 박사) 취득과 세미나 위주의 논문사였다 해 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적 위주의 편향에서 벗어나 지역 과 시대를 관통하는 통사적 안목으로 잃어버린 과거를 복원하는 역사정 신의 보편성을 회복하는 길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하겠다. Ⅱ. 인종 구성과 개괄적 역사 1. 중국 이민 중국계는 샌 화킨 밸리에 처음 들어온 인종 중의 하나로 1850년대 광 산 노동자와 상인이었다. 그 가운데 아 킷(Ah Kitt)은 밀러톤에 대장간 을 열었다. 그러나 청국 스타일의 변발과 복장은 물론 광둥( 廣 東 ) 사투 리와 그들의 독특한 음식 습관(특히 젓가락질)은 인종 편견에 젖은 백 인들로부터 추방의 요인이 되고 말았다. 그 후 1874년 프레즈노가 카운티 행정 소재지(County Seat)로 승격하 던 해 총 인구 600명 가운데 중국계가 200명 정도나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데 프레즈노 구간의 철도를 까는 노역에 불러들인 결과 5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였다. 철도 일이 끝난 다음 그들은 제방과 관개수로 현장에 투입되었고 새크라멘토의 제방과 운하에도 동원되었던 걸로 보인다. 특히 프레즈노의 초기 건물들과 법원 건물의 벽돌들이 거의 중국인 벽돌공들이 만든 것이라는 것은 중국인들의 실질적인 노동가치를 뛰어 넘어 카운티 역사의 기초를 닦은 전설적 존재로 느껴지는 대목이다. 하 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1885년 인구조사에서 중국인 906명을 제외시킨 3,464명(남자 2,386명, 여자 1,078명)만 기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2) 이 는 1882년 캘리포니아 주에서 상정한 중국인 배척법안이 미국 의회를 통과한 결과로서 1885 1886년 사이 새크라멘토와 샌 화킨 밸리의 중국 계 농장 노동자를 가혹하게 추방한 것과 무방하지 않다. 시애틀과 타코 마를 위시한 와싱톤 주의 모든 시에서도 백인들이 중국계를 거룻배에 강제 승선시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는 경고와 함께 상항으로 몰아냈 다. 이제 중국계는 미국은 물론 캐나다에서도 발붙일 곳을 잃게 되었다. 이른바 북미대륙을 뜨겁게 달군 중국인 증오현상, 즉 황화론(Yellow Peril)의 성난 불길 때문이었다. 3) 골드 러시 때 중국인들의 근면성과 인내는 충분히 증명되었다. 사실 1880년대에 들어서서 중국계는 캘리포니아 노동시장의 원천을 이룰 만큼 값싸고 근면한 노동자를 얻기 위한 고용주들에겐 더없이 필요한 존재였다.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 서구열강의 중국분할 각축전 2) Charles W. Clough & twenty-two co-authors, Fresno County in the 20th Century from 1900 to the 1980s(Fresno:Panorama West Books, 1986), pp. 1~5. 3) 1882년 중국인 배척법안의 통과 이후 미국에서 많은 중국인들이 멕시코 로 몰려들어 각 지역에 그들의 상가와 주거지역을 형성, 특히 북부의 여 러 주(소노라 시날로아 코아윌라)의 상권을 장악했다. 특히 디아스 뽀 르휘리오 대통령(1877~1911) 말기에는 부르조아지 계급으로 부상되어 지역경제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으나 멕시코 내의 황화 열기로 인 해서 수 만 명이 추방당했고 수 천 명이 학살당했다. 6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과 내란으로 말미암아 농촌 경제가 붕괴하자 중국은 이른바 미숙련 노동계급인 쿨리(Coolie, 苦 力 )를 대량생산하기에 이르렀고 이들 중 일 부가 상항에 인해전술로 부려졌던 것이다. 따라서 임금경쟁에 밀린 캘 리포니아 백인 노동자들이 미국 전역에 황화론 분위기를 파급, 급기야 미국 의회 최초로 특수 인종에 대한 배척법안을 낳았다는 이 1882년 법안은 결국 유럽계 백인 노동자들의 증오의 표출인 셈이었다. 당시 중국인 수는 대략 25만 명, 그 가운데 많은 인구가 귀국 길에 올라 1900년에는 9만 명, 1920년엔 6만 명 정도만 남아 대폭적인 감소현상 을 빚었다. 4) 처음에 그들은 사금과 여러 미네랄 채취를 위해 킹스 리버 유역을 따 라 정착했지만 프레즈노의 차이나 타운은 결국 철도 부근에 자리 잡았 다. 다시 말해 서던 패시픽 철도 5) 를 따라 타운들이 만들어질 때 셀마 (Selma)에 형성된 동양인 구역으로 점점 게토를 이루었다. 차이나 타운 은 중국인 통합자선협회(Chinese Consolidated Benevolent Asso., 일명 六 大 會 社 )와 중국계 제1 침례교회, 그리고 가톨릭 성당을 중심으로 그들의 공자학교(Chinese School of Confucius)와 농구클럽(The Fay Wah Club, 4) 1852년 캘리포니아가 중국인과 멕시칸을 겨냥해 통과시킨 외국인 광부세 법(Foreign Miner's License Tax Law)으로 말미암아 중국인에게서 거둬들인 세금은 1855~1870년 사이 무려 500만 달러에 달했다. Lan Cao, Everything You Need To Know About American History(Himilce Novas, 1996), pp.12~ 13. 5) 센트럴 패시픽(동)과 유니언 패시픽(서)은 각각 샌프란시스코와 네바다에 서 시작해 1869년 5월 10일 중간지점인 유타에서 서로 만나 드디어 완공 시켰다. 한편 센트럴은 1868년 서던 패시픽(샌프란시스코에서 뉴올리언 스까지)을 취득했으나 1885년 서던에 합병됨으로써 혼용해 쓰는 경우가 종종 있다. 유니언은 남북전쟁의 제대군인과 아이리쉬들이 동원되었고, 험난한 코스가 많은 센트럴은 거의 중국계 쿨리들이 동원돼 숱한 사상 자를 낳았다. 그 때 사망한 1,200명 쿨리들의 뼈를 싣고 중국으로 환국 한 그 무게는 2만 파운드에 달했다. 7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1931년 조직)과 함께 심장을 이루었다. 한 때는 이곳이 미국에서 3번째 로 규모가 큰 차이나 타운인 시절도 있었다. 프레즈노의 중국계는 쿡과 가정부는 물론 이 지역의 목재산업이 활발 해지면서 그쪽에도 관여하는 등 다양한 직종에 종사했다. 리들리의 경 우, 최초의 중국인은 리들리를 개척한 리드가 1888년 타운이 들어앉을 토지를 분할할 당시 그의 쿡으로 고용된 리(Lee)였으나 그는 영주하지 않고 떠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최초의 영주자가 된 정(Jim Ah Chung) 은 금을 찾아 밸리까지 들어온 인물로 센트럴 패시픽 철도회사에 고용 된 쿡이었다. 철도작업이 끝나자 그는 그곳에 영주할 것을 결심하고 그 지역의 호텔(Traver Hotel) 쿡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쨌든 백인들의 차별은 그들로서는 기나긴 암흑 속의 침잠이었다. 무엇보다도 같은 동양계이나 일본과 한국과도 달리 사진신부 제도의 혜 택에서도 철저하게 제외된 차이나 타운이었지만 금주법이 한창일 때도 매춘과 도박, 그리고 술과 아편소굴로 악명을 떨쳤다. 특히 1939년 시 구역 제한법(Restrictive City Ordinance)에 의해 프레즈노에선 집도 세 얻 을 수 없었을 뿐더러 1950년대에 접어들어서까지 그들의 자녀들은 프레 즈노 대학 내의 각종 조직과 클럽에 조차 가입되지 못하는 등 차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중국계는 일본을 공적( 公 敵 )으로 가진 한인사회와는 긴밀한 유대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항일운동 자금조달에도 지원을 아끼 지 않았다. 참고로 1861 1905년 사이 미국에 유입된 총 이민자 수에 중국인과 유럽인의 비율은 다음 표와 같다. 6) 6) Genth's Photographs of San Francisco's old Chinatown, Selection & Text by John Kuo Wei Tchen(Dover Publications, Inc. New York, 1984), p.18. Also see U.S. Census Reports(Chinese in the United States 1850~1910);이자경, 한국인 멕시코 이민사 (지식산업사, 1998), p.148. 8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연 도 총 이민자(명) 중 국 인(%) 유 럽 인(%) 1861~1870 2,337,279 2.7 98.8 1871~1880 2,812,192 4.4 94 1881~1890 5,246,613 1.2 97.5 1891~1900 3,687,564 0.4 96.6 1901~1905 3,833,076 0.3 95.2 한편 1907년 중국정부가 실시한 본국인 해외인구조사에 따르면 총 679만 2,531명인데 그 가운데 한국에 1만 1,200명, 미국에 27만 1,829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7) 그리고 1985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프레즈노의 중국계는 6,000여 명, 상항 L.A. 새크라멘토 다음의 4번 째로 많은 숫자다. 2. 일본 이민 노동력의 원천인 중국인에 대한 추방작전이 본격화되면서 노동력의 진공상태는 하와이는 물론 미국 본토에 있어서도 큰 고민거리였다. 따 라서 대체 노동력으로 진출한 일본인들은 가는 곳마다 환영일색이었다. 샌 화킨 밸리의 경우도 일본인들의 첫 출현은 역시 1885년 일본의 명치 유신 정부(1868 1911)가 이민 문호를 개방한 직후였다. 그들은 하와이 를 거치지 않고 직접 본토로 들어온 경우로 일본에서 이민회사나 이민 모집 브로커를 통해 철도 노동자와 농부를 목적으로 본토에 투입된 인 력이었다. 일본인 특유의 근면과 절약으로 노동시장의 우위를 점유하자 어느덧 그들은 숫적 파워를 행사하는 그룹으로 변모되어갔다. 더구나 7) 共 立 申 報, 1907년 9월 20일자. 9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철새 노동자 그룹에서 재빠르게 농장 소유주 계급으로 전환하는 비율이 비교적 높았던 점 또한 백인들의 눈엔 가시였다. 프레즈노 카운티의 대략적인 일본인 수는 다음과 같다. 1890년대 말 의 3,000명이란 숫자는 모두 포도밭 노동자였다. 8) 연 도(대) 인 구(명) 1890 12 1890년대 말 3,000 1920 5,731 1980 10,000 1889년 컨(Kern)과 E 스트릿에 세워진 불교 사찰을 중심으로 영위되 던 최소단위 일본 커뮤니티는 1890년대에 접어들면서 상항을 통해 하와 이에서 계속 새로운 동족 이민자들이 밀려들자 그들의 숙식을 해결하기 위한 공간이 필요해졌다. 첫 하숙집이 1892년 마리포사 스트릿에 세워 졌다. 하와이와 마찬가지로 본토에 상륙한 일본인들도 그 어느 인종보 다도 가장 빠른 시일 안에 노조를 움직이는 선동 방법을 터득해 스트라 이크와 보이코트로 집단파워를 급조, 과시함으로써 고용주와 다른 인종 들로부터 증오와 위기의식을 느끼게 했다. 1909년 하와이의 일인들이 임금인상을 놓고 동맹파업에 들어갔을 때 상항의 일인들이 응원단을 조 직하고 대표를 하와이로 급파하는 등의 조직력은 가히 전국적이었다. 이 통에 한인과 필리핀 노동자들은 파업파괴자(strike breaker)가 되어 파 격적인 대우를 받곤 했는데 임금은 하루 70전에서 1원 50전이었다. 20세기에 접어들면서 백인 노동자들의 반일감정은 노골적으로 표면화되 기 시작했다. 상항을 중심으로 20년 전 반중국인 기치를 드높였던 그들은 8) Charles W. Clough, 앞의 책, p.7. 10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이번에는 일본인을 타켓으로 삼아 각종 위협을 가한 결과 1907년 말 미 일 정부간에 신사협정이 체결돼 가족과 배우자만을 제외한 일본 노동자의 입국은 금지되었다. 사진신부 제도는 바로 신사협정의 결과로 일본 신부 5 천여 명, 9) 한인 여성 1천여 명(하와이 951명, 본토 115명)을 신대륙에 불러 들였으며 이 제도도 1924년 동양인 절대 배척법안 통과로 막을 내렸다. 프레즈노의 일본인 사회도 예외는 아니었다. 1910년 한 해에 27개에 달하는 반일본인 차별정책의 법조항 삽입, 게다가 1913년 외국인 토지소 유 금지법 통과의 후유증이 컸지만 1920년부터 일본 노동자는 이 지역 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하기 시작, 급기야는 멕시칸 노동자로 대체되었다. 동양계보다는 노동의 질이 훨씬 낮은 단점에도 불구하고 멕시칸계 노동 주선인들은 대개 지배자 편에 서 있었으므로 부리기가 쉬웠던 까닭이다. 뭐니뭐니 해도 일본계에겐 진주만 사건의 타격이 가장 컸다. 1942년 3월 첫번째 소개명령이 떨어지자, 워싱턴 오레곤 캘리포니아 지역의 서부 반쪽은 군사지역으로 선포되어 그 지역 일인들은 내륙으로 이동해 야 했다. 하이웨이 99번을 경계선으로 킹스버그(Kingsburg) 셀마(Selma) 활러(Fowler) 등 숱한 타운들이 분할되고 프레즈노 곳곳에 일본인 소개 준비 센터가 세워졌다. 셀마는 중국계와 일본계의 거주지로 술집과 도 박 소굴이 많았다. 10) 9) 1919~1920년 사이 사진신부로 상항에 도착한 일본 여자는 5,749명, 그들 의 대부분은 캘리포니아 농장에서 노동하면서 자녀들을 낳았다. 또 191 0~1919년까지 신사조약을 무시하고 수입된 일본 노동자는 19,217명으로 나타난다. 신한민보, 1920년 6월 25일자 2면. 10) Charles W. Clough, 앞의 책, pp.92~94 & Selma Enterprise, April 14. 1904. 셀마는 샌 화킨 밸리에서 가장 먼저 술집(saloon) 등록증을 금지(1904)시킨 타운이 되었고, 그로부터 14년 뒤 콜링가(Coalinga)는 가장 마지막 금주 타 운이 되었지만, 프레즈노와 파이어보그만은 미국 전역에서 금주법이 해제 될 때까지 술을 판 곳으로 유명하다. 이렇게 금주령에 갇혀있는 동안 아 이러니컬하게도 셀마는 감시망을 들락거리면서도 술을 암거래했다. 11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그리고 그들은 6월경 프레즈노와 툴라레 카운티에 각각 하나씩 마련 된 집결소에 모여 집단수용소로 떠나갔다. 3. 독일계 메노파 메노파(Mennonites)란 유아세례와 병역제도를 반대하는 재침례파 (Anabaptist)로 프레즈노 지역에 들어온 그룹은 러시아 볼가강 유역에서 살 길을 찾아 미국행을 결심한 이른바 볼가 독일계(Volga Germans)였다. 16세기 네델란드 신부 메노 시몬스 등에 의해 전개된 순수한 초대교회 로 돌아가는 신앙공동체, 다시 말해 스파르타식 가톨릭 집단을 말함이 다. 급기야 이단으로 정죄되어 로마 가톨릭과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파 의 종교재판을 통해 화형에 처해지는 등 극심한 탄압을 받기에 이르자 일부는 17세기에 펜실바니아로, 또 일부는 스위스와 남독일에 남아 있 다가 1789년 러시아 캐더린 여제의 초청을 받고 망명을 떠난다. 종교의 자유와 복무로부터의 자유를 보장해주는 대신 볼가강 유역의 미간지 개 척을 조건으로 새 땅에 정착하게 된다. 그러나 1887년 러시아의 새 황 제 알렉산더 2세가 군무이행을 명령하는 등 그들의 종교의 자유가 크게 위협당하자 동년 5월 8일 250명이 선두로 1백년 이상 가꿔온 마을 (Straub, Stahl)들을 떠났다. 그들은 철도 트랙의 삼각지대인 벤추라와 캘리포니아 스트릿에 거 주구역을 정하고 일명 루시안 타운 (Rooshian town)이라고 불리는 타 운을 발전시켜 나갔다. 그들이 가져온 해바라기 씨는 루시안 피넛츠 로 명명되었다. 1887년 5월 8일(월요일) 8명의 남자와 7명의 여자가 처음 프레즈노에 도착한 보도가 당시 신문에 실려 있다. 11) 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역 11) Fresno Republican, June 24. 또다른 정보에 의하면 31명이 도착했다 한다. 12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시 교회를 세우는 일이었다. 한때는 독일어로 예배를 보는 교회가 12곳 에 달한 적도 있었다. 또 다른 메노파는 리들리에 첫 입주한 다니엘 아이만으로 1903년 캘 리포니아 업랜드에서 이주해온 인물이었다. 그는 남부 독일에서 미국으 로 직접 온 메노의 후예로 업랜드 이전에 아이오와와 캔사스의 메노 커 뮤니티에 살았다. 산타 페 철도회사가 리들리 지역의 토지 에이전트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이 지역에 흥미를 느낀 그는 철도 회사의 지원으로 동부와 중서부 지역의 메노 타운들을 방문, 리들리를 대대적으로 홍보하며 다녔다. 12) 그 결과 동년 미네소타에서 에드와 거스 벅홀드 가족이 리들리로 이 주했고, 1904년엔 그들의 부모들과 제이콥 벅홀드 가족과 아이만 친척 들이 속속 이주해 타운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906년 메노들은 12가 와 L 스트릿에 그들의 교회를 설립했다. 다니엘의 아들(J.J.Eymann)이 1913년 리들리의 초대 시장으로 선출되었다. 리들리에 정착한 또 하나의 메노파(일명 Mennonite Brethen)는 러시아 에서 미국 서부에 도착한 그룹이다. 지난 20년 동안 일부는 경작지를 찾 아 캘리포니아로 떠나갔으나 그들은 1904년 뒤늦게 철도를 이용해 리들 리에 도착한 것이다. 이듬해 그들은 가정예배로 교회(Reedley Mennonite Brethen Church)를 세우고, 1908년 14가와 L 스트릿에 교회를 건축했다. 그 후 이 그룹은 13가와 L 스트릿에 웅장한 건물을 건축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여러 경로를 통해 들어온 메노들은 1920년경 프레즈노 인근에 만 2만 4,000명에 달했으며 1980년엔 10만 명이 샌 화킨 밸리에 거주하 는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어쨌든 첫날 도착한 사람들의 성씨는 Berg, Kerne, Karle, Metzler, Mehling, Nillmaier, Steitz 등이고 다음 해 온 사람들은 Huberts, Bopps, Hartwigs, Scheerers, Lieders, Diels, Gleims, Schwabenlands, Bitters, Heinzes 등이었다. 12) Reedley Historical Sociery, 앞의 책, pp.101~108. 13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그 밖에 일찍부터 이 밸리의 목화와 낙농산업에 크게 기여한 포르투 갈계는 핸포드 뉴먼 거스틴에 아조레스 후예들의 커뮤니티를 형성한 반면 유고슬라브족은 그들만의 집성촌(Zaninovich라는 성씨, 200여 명)을 델레이노에, 네델란드계는 리폰(Ripon)에 바스크는 베이커스필드에 뿌리 내리고 살고 있다. 한편 미국의 점령국이었던 필리핀의 경우는 1903 1910년 사이에 미국 의 전적인 지원정책으로 이루어진 유학생 선발 프로그램부터 시작되었다. 필리핀 노동이민은 그 후의 일로 미국의 경제적 호황에 맞춰 1920년대는 그들의 이민물결이 절정을 이루었다. 어쨌거나 그들은 미국의 재외동포로 서 입국시 다른 동양계와는 달리 차별대우를 받지 않았지만 그들 역시 투표권과 토지소유권 및 시민권 획득 등의 기본권은 누릴 수 없었다. 필 리핀계는 지금 델타 지역의 아스파라카스 농사를 주도하고 있다. 13) 무엇보다도 대공황이 전국을 휩쓴 1930년대 무서운 황진 바람까지 휘 몰아쳐 초토화된 남서부의 대평원인 오크라호마와 텍사스 등 이른바 Dust Bowl'에서 가뭄과 가난으로부터 떠나온 Okies' 난민들은 이 밸리 의 앵글로-색슨계 개신교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들은 남북전쟁 직후 서부로 몰려든 남부의 제대군인들과 잡상배들로 형성된 백인 선도 그룹 에 반세기나 지난 다음에 합류했던 것이다. 한편 월남전 난민으로 1980년대 프레즈노에 도착한 동남아 그룹 가운 데 멍족(Hmong)은 라오스 고산지대에 살던 종족으로 가장 많은 인구를 갖고 있다. 1981년엔 500명, 1986년엔 1만 5,000명 가까이 정착, 이는 저 지대의 라오스계 2,500명, 월남계 2,000명, 캠보디아계 2 3백 명에 비해 상당히 많은 숫자로 미국내 멍족 정착지로선 가장 규모가 큰 것으로 알 려져 있다. 또 멍족 여인들의 뜨개질 작품 반 다오(ban dao)는 새로운 13) 미국이 선발한 유학생은 펜시오나도(pensionado)로 불리었는데 1910년부 터는 자비로 모든 경비를 충당하도록 정책이 바뀌었다. 14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차원의 예술적 가치로 샌 화킨에서 유명세를 더해 가고 있다. 이렇게 캘리포니아의 마지막 프론티어라고 불릴 정도로 아직도 개발 의 끈을 놓치지 않고 있는 샌 화킨 밸리(Fresno Kern Tulare)는 집 값 이 대도시에 비해 1/3정도인데다 생활비 또한 적게 드는 매력 때문에 발전의 가능성을 많이 안고 있다. 1985년 프레즈노 문화예술 분과에 소속된 인종 그룹의 분류는 다음과 같다. 샌 화킨 밸리가 수확하는 다양한 과일 종류처럼 다양한 인종의 분포를 보이고 있다(무순 14) ). 인 종(민족) 계열수 인 종(민족) 계열수 인 종(민족) 계열수 아메리칸원주민 5 레바논 앗시리아 아시아계원주민 3 라오스 네덜란드-인도네시아 바스크 한국 에집트 아르메니아 유대(이스라엘) 영국 덴마크 켈틱/아이리쉬 폴리네시안/뉴질랜드 하와이 사모아 피지 에스토니아 에디오피아 3 6 스캇츠 웰쉬) 프랑스 타이티 통가 독 일 쿠바 중 국 베트남 캐나다 필리핀 멕시코 예멘-아랍 흑 인 몰로카이 태국 체코슬로바키아 놀웨이 스페인 크로아티아 파키스탄 리투아니아 일 본 폴랜드 프에르토리코 필리핀 포르투갈 러시아 핀랜드 세르비아 남미? 이 란 스웨덴 시리아 러시아계독일 2 우크라이나 집시 희 랍 이태리 스위스 멍 이태리계알바니아 라트비아 헝가리 캠보디아 총 인종(민족) 수 58 인종내 계열 수 19 14) Charles W. Clough, 앞의 책, pp.7~8. 15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Ⅲ. 초기 한인 커뮤니티와 노동주선 한인은 동양계로선 중국 일본에 이어 가장 늦게 샌 화킨 밸리에 들 어갔다. 이민사적 시각으로 중가주의 범위는 프레즈노 다뉴바(Dinuba) 리들리 생거(Sanger) 팔리어(Parlier) 핸포드(Hanford) 바이샐리아(Visalia) 등 6개 시로 규정지을 수 있다. 사실 이 지역들은 자동차로 10~30분 거리에 위치해 있어서 옛날에도 일일권에 속했다. 그러나 광복 이전 한 인들의 노동정황과 커뮤니티의 활동 성격은 물론 샌 화킨 밸리의 지 정학적 특성을 고려할 때 델라노(Delano)를 중심으로 한 롬폭(Lompoc) 베이커스필드(Bakersfield) 맥파랜드(McFarland) 태푸트(Taft) 샤푸터(S hapter) 아이드리아(Idria) 옥스나드(Oxnard) 등지까지 포함시켜 그 범위 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하겠다. 옥스나드는 남가주권으로 분류하는 것 이 마땅한 노릇이나 초기 이민사 연구에 있어서는 중가주에 편입시키는 것이 적합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에 반해 새크라멘토-샌 화킨 밸리의 기름진 델타 지역은 지형적으로나 한인 철새 노동자들의 이동 범위로나 하나의 괄호로 묶는 게 옳겠지만 이 글에는 제외시킬 작정이다. 만일 새크라멘토를 포함시킬 경우, 새크라멘토와 샌 화킨 밸리의 실질적인 수도 역할을 해온 스탁턴에서부터 어바클 맨티카 윌리암스 윌로스 맥스웰 콜루사 등 북가주의 대형 농장지대까지 연대적으로 모두 엮어 야 하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미국 본토 초기의 한인사회는 노동 주선인에 의한 캠푸 (일명 都 給 및 노동 주선소) 또는 려관 을 중심으로 모인 노동집약 형태의 사회였 다. 일의 성격과 작업 조건에 따라 모였다가 또 언제 흩어질지 모르는 철새 노동자들의 기약 없는 독신위주의 사회였다. 하와이에서 미국 본 16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토(상항)로 한인들이 들어온 건 1904년부터였지만 본격적인 이주는 1905 년부터였다. 1904년까지 상항의 한인 인구는 1890년대 중반부터 상해를 거쳐 들어온 인삼장수들과 원동에서 건너온 유학생들을 주축으로 구성 된 50명 내외에 불과했다. 어쨌든 이러한 재이민 성격인 본토로의 이주물결은 마침 하와이에서 발행되는 포와신문 에 실린 시애틀에서 센 폴(세인트 폴리스?)까지 철 도를 부설하는 일에 2만 명을 모집중이며 또 임금도 하와이보다 훨씬 높다는 신문광고가 크게 작용했다. 15) 그들 가운데는 빙표(여권)도 없이 상항에 상륙한 사람도 꽤 많았다. 하와이 이민국에서 사무직을 본 송헌 주( 宋 憲 澍, 당시 하와이 한인상조회 회장)에 따르면 하와이 주재 일본 영사와 선박회사가 다수의 빙표를 압류하고 있던 것을 자신과 비숍(하 와이 사탕수수 농장협회 회장)이 담판 끝에 돌려 받았다는 얘기다. 주인 을 찾아주고 남은 빙표가 15매인데 그걸 찾아가라는 광고를 공립신보 에 냈던 것이다. 16) 이 문제는 하와이 이민자 가운데 많은 사람이 선비 를 미납한 사실과 관련된 것으로 짐작된다. 어쨌든 1905 1906년 사이 하와이에서 상항으로 건너온 한인들은 도 착하기 무섭게 대개는 솔트 레익의 철도 역장과 리버 사이드, 그리고 새크라멘토로 떠났다. 1906년 1월 25일에 도착한 38명 가운데 그렇게 모두 떠나고 2명만 상항에 남았던 것은 좋은 예다. 동년 9월 31일 프레 즈노에 있던 22명이 노동조합을 만들어 이를 허락해 달라는 청원서를 공립협회에 올린 글을 살펴보자. 17) 15) 盧 載 淵, 在 美 韓 人 史 略 上 卷 (미주 나성: 亞 美 利 加 印 刷 所, 1963), 15~ 16쪽. 16) 共 立 申 報, 1906년 9월 7 14일자. 빙표 명단: 韓 昌 圭 白 公 西 李 成 宇 金 明 燮 李 先 昌 張 起 男 吳 辰 國 金 昌 鉉 嚴 用 燮 韓 興 周 金 時 京 李 賢 瑞 李 來 秀 洪 錫 奎 金 宗 玉 등이다. 17) 共 立 申 報, 1906년 10월. 17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청원단은 본인 등이 미주에 건너온지 삼사년에 한 노동자의 자격으로 노 동 정형의 유무를 따라 사면으로 표백하여 다닐 때에 외로운 종적이 철로 역장에 들어가며 적막한 산곡에도 들어가며 황무한 광야에도 들어갔은즉 풍찬노숙의 고생도 하였으며 강수원류의 유한도 없지 아니하였으니 지낸 바에 쓰고 쓴 것은 다 말할 것 없거니와 때로 낭탁이 경갈함을 면치 못하 니 어찌 개탄하고 처창치 아니하리오. 시험하여 우리 같은 각국 노동자의 정형을 보건대 노동으로 말장이 확장 하여 떳떳한 이익을 얻거늘 우리는 홀로 그러하지 못하여 목전에 당한 것 은 곤박뿐이라. 같은 노동자로 특별히 다른 형세가 있는 것은 무슨 까닭이 뇨. 우리가 보고 듣는 바에 미국에 래류하는 각국 노동자뿐 아니라 미국 노 동자라도 각각 동맹조합이 있어서 자기의 노동 권리를 확장하야 다른 사람 의 노동을 용납치 못하게 하니 여간 수단과 신용으로는 노동에 착수하기가 난한 중 현금 우리 동포는 노동에 대하여 두 사람의 동맹이 없는고로 아침 에는 동에 있고 저녁에는 서에 있어 한 곳에 지접이 없으니 무슨 힘으로 노동권을 확장하며 뉘로부터 노동권을 보전하리오. 이런고로 남이 즐길 때 에 우리는 슬퍼하고 남이 흥할 때에 우리는 패하는 것이 동맹조합을 하고 아니하는 데 있는 것은 삼척동자라도 알 바이니 그 뿐만 아니라 새로 건너 오는 동포들이 산수가 생소하고 인종이 다른 곳에 와서 형편을 알지 못하 여 오일경조 18) 로 밝은 날에 또 어디로 갈 바를 몰라 방황주저할 때에 혹 부정한 자가 주색잡기장으로 인도하여 그 신세를 그릇되게 하는 폐단과 혹 보스라 자칭하고 땀흘린 돈을 건몰하는 폐단도 있으니 개인상에 전정이 가 긍할 뿐만 아니오 한인 전 사회가 부패하는 지경에 이를지라. 목전의 걱정 은 고사하고 래두의 근심을 어찌하리오. 유지한 첨군자는 깊이 생각할 바이 아니리오. 대저 노동은 하등사회라 상중하 삼등사회라. 준비된 나라에는 이에 대하 여 별로 관념치 않는 것이 혹 무괴려니와 미국에 있는 우리 한인사회로 말 하면 처음으로 건너온 자 수모는 막론하고 다 노동에 착수한 후에 될 터인 즉 만일 노동사회라 하고 주의하지 않으면 전 사회의 전정을 그릇치 기 쉬울 터이니 그런고로 본인 등이 이것을 생각하며 일변 낙담되며 일변 놀라서 한 어리석은 의견을 제출하온 바 본회 종지의 공립상 관계를 일절 힘써 다 하고저 하와 서로 권하며 서로 사랑하며 서로 인도하여 노동의 신 18) 오일경조( 五 日 京 兆 )란 오래 계속하지 못하는 일을 비유한 것이고, 첨군자 ( 僉 君 子 )란 여러 제위( 諸 位 )를 뜻한다. 18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용을 얻으며 편리함을 도모하며 서로 붙들고 서로 도와 실업을 창개하며 내지 상리 까지 개도하여 일반 공리를 아울러 흥왕케 할 차로 노동동맹조 합을 발기하옵고 이에 청원하오니 인허 함을 바라노라 하였더라. 光 武 十 年 九 月 三 十 一 日 李 正 乃 李 交 倓 李 元 亨 李 致 完 韓 致 弘 氏 等 二 十 二 人 이 글은 초기 한인들의 풍찬노숙의 삶과 노조의 필요성을 절절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자리를 찾아 동가식 서가숙하면서 그야말로 소수 중 의 소수가 겪어야 하는 천대와 참담한 박탈감은 풍전등화의 위기 속에 있는 조국의 모습과 닮은꼴이었다. 1906년(광무 10년) 9월 31일자로 미 국 본토 한인사회에선 최초로 노동조합 설립을 청원한 이들 22명은 모 두 공립협회 회원들이었다. 내용을 미루어볼 때 철도 역장과 광산 등 여러 어려운 노동현장을 경험한 사람들로 짐작된다. 한인 노동자들이 프레즈노에 첫 발을 내디딘 건 1905년으로 보고 싶 다. 그러나 그들보다 먼저 수년 전부터 상항을 거점으로 한 인삼상인들 의 발길이 이 지역에도 스쳐갔을 것임에 분명하다. 현재 리들리 묘역에 묻혀있는 박영순 19) 은 인삼을 팔러 1905년 11월 멕시코의 유카탄까지 갔 을 정도로 인삼상인들은 한국 홍삼을 최고로 아는 중국인이 있는 곳이 라면 세계 어디라도 찾아갔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프레즈노의 차이나 타운은 인구나 규모에 있어서 상당히 매력적인 곳이라 그들로선 그냥 지나쳤을 리 만무하다. 이미 1906년 당시 프레즈노에는 공립협회의 지부격인 공립관이 신설 되어 그런대로 유일한 만남의 장소가 되어 주었으나 숙식을 한국식으로 19) 박영순( 朴 泳 淳 )은 1903년 9월 22일 상항에서 조직된 상항 친목회 8명 발 기인의 한 사람으로 1905년 11월 17일자로 상항의 공립협회에 유카탄에 서 노예로 끌려간 멕시코 동포들의 참상을 알린 바 있다. 共 立 新 聞, 1905년 12월 6일자; 大 韓 每 日 申 報, 1905년 12월 20일자;이자경, 앞의 책, 125~126쪽. 19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해결할 수 있는 여관은 1907년 10월경에야 이원영이 처음 개설했고, 같 은 해 11월에 위영민이 여관과 노동주선을 함께 시작했는데 한인 수는 30 40명에 이르렀다. 이에 앞서 본토에서 가장 먼저 여관이 생긴 곳은 새크라멘토로 1906년 8월 우경식이 그 동안 한인 여관이 없어 일본 집 을 전전하다가 직접 세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같은 해 박 영순이 L.A.에 신설한 데 이어 한인 노동자들이 가는 곳마다 한인 여관 이 들어서게 되었다. 오레곤 에클랜드의 김성천의 경우처럼 노동 주선 도 백인 밑에서 일하기 싫어 직접 역부( 役 夫 )를 모집하는 사람들이 늘 어나 곳곳에 한인 캠프가 세워졌다. 노동주선인이란 계약 청부업자를 말하는데 한인들 사이에선 뽀시 나 보스'로 불리었다. 대부분 숙식과 노동 주선을 같이 하는데 물론 여관 전담과 노동 주선 전담의 분업식 동업체제도 종종 있었다. 노동 주선인 은 철도회사나 농장주와 임금과 작업의 할당량을 계약한 다음 노동자를 관리하게 되는데 노동자들의 임금을 떼어먹고 줄행랑을 치는 사례도 종 종 있었다. 반면 밀린 여관비나 빌려 쓴 돈을 갚지 않는 손님들도 생겨 도덕적 문제를 야기시켰다. 이에 바이샐리아에 돈을 받아주는 경제사 사무소 라는 사설기관이 개설되었으나 오래 가진 못한 듯하다. 프레즈노에 들어온 한인들은 처음엔 포도따는 일과 함께 지방의 간선 철로를 놓는 일에도 동원되었다. 1908년 1월 위영민과 한치홍이 인근 핸포드 구간의 일을 주선, 자연 그곳 7가와 209번지에 임성택의 여관이 들어섰다. 이미 바이샐리아 사탕수수 농장엔 한인들이 2년 전부터 여러 동포들(이영실 박을성 오충각 이사국 신유성 김윤여 이성철 주 원 등)이 있고, 얼마 전 오진국이 그곳에 새로 노동주선을 시작했다. 한편 1907년 대동보국회 프레즈노 지부 부호연회( 富 湖 聯 會 )가 조직 되어 회관을 마련, 본국 유학생들이 묵는 장소로도 쓰였는데 첫해 유 학생으론 김성수( 金 成 洙 ) 이충엽( 李 忠 燁 ) 구찬오( 具 燦 五 ) 김용서( 金 用 20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瑞 ) 이요한 이조지 등 6명이었다. 20) 그렇다면 일단 1906 1910년 사이에 미국 본토 전역으로 분포된 동포 들의 이동과 노동주선의 상황을 간략하게나마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 공립신보 와 신한민보 회록에서 발췌). 1906년 -작년 11월에 조사한 공립협회 회원 수는 상항 103명, 리버사이드 70명(큐카몽가는 별도) -동년 1월/와이오밍의 락스프링스(Rocksprings, 石 泉 ) 석탄광 주선인 은 황사용, 그곳 하루 임금은 3원 30전, 도급을 맡으면 2~3원 더 받는 다. 한인 광부 수는 30~40명 -3월/네바다 옥덴 지방의 사탕수수밭 하루 임금 2~3원 -남가주 지역 7곳에 있는 공립협회 회원 수는 300명, 가장 많은 곳 이 L.A.와 반인랜드(Vinland?) 철도역장에 각각 100명씩 소속된 것을 보 면 비회원 수는 이보다 훨씬 많을 것으로 추산됨 -동포 16명 상항 도착:한재상 김운용 김바위 정인영 박수만 김종림 김달릉 정지영 이원석 홍순오 김경보 김우준 우도영 한 시호 정씨 부인. 그 가운데 15명이 쏠트 레익 철도 역장으로 직행 -아이다호 보이스 지방의 이재수 등 5명이 지방 경찰소 설립 청원 20) 大 同 保 國 會 는 1905년 12월 L.A. 인근 파사데나에서 장경과 방사겸 등이 세운 大 同 敎 育 會 가 1907년 3월 金 愚 濟 를 새 회장으로 선출하고 이름을 바꾼 단체로 여러 곳에 지부를 조직하였다. 지부 조직을 위해 방사겸이 곳곳을 순방해 프레즈노 외에 샌프란시스코에 桑 港 聯 會, 새크라멘토에 櫻 府 聯 會, 네바다 칼린에 葛 崙 聯 會 를 만들었으며, 장경은 상해에 가서 上 海 聯 會 를 조직했다. 富 湖 聯 會 의 1907년 1908년 임원은 회장 김원택, 부회장 김군화, 재무 한성용, 서기 박도선, 학무 김군화, 사법 이관식, 경 찰 박방화 박순원, 구제 박준화, 이사 박봉용, 상의원 김경선 김경심 박도선 임선봉 김봉오 등이다. 大 同 公 報, 1908년 4월 2일자. 21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솔트 레익(Salt Lake, 塩 湖 ) 역장의 사무원 박선겸은 영어에 능통해 한인 및 외국 노동자 1,000명을 관장 -7월/박영순 L.A.에 여관을 개설, 로샌질쓰(L.A.) 공립협회 회원 41명 이 회관 신설. 유타의 레위스톤에서 일인 십장 구보다( 久 保 田 ) 밑에 있 던 유삼만 김보혜 구경선 오창훈 등 4명이 전체의 월급 360원을 슬 쩍해 잠적 -프레즈노( 富 市 ) 공립관 설립. 이 공립관에 모이는 회원들 사이에 이 듬해 조직된 대동보국회 지부로 말미암아 약간 분리현상이 일어남 -레드랜드(Redland, 紫 地 ) 지방회장 안석중은 수로회사(Water Co.)와 노동주선 계약을 체결(임금은 하루 10시간에 2원), 그리고 포도밭 주선 은 15명을 주선하는데 1인당 하루 임금은 1.75~2원이며 귤 따는 일은 얼마든지 있다 -12월/박제순이 유타의 솔트 레익에 塩 湖 旅 館 설립 1907년 -L.A. 인근 샌퍼난도 철로 역장에서 허승운이 노동 주선 -바이샐리아에 한인 수가 늘어 상항 한인교당 감독 리 덕과 양주삼 이 내려가서 예배드림(12명 참가), 김필권을 속장으로 선정 -락스프링스 탄광회사와 한인 노동자 사이의 협의 사항: 1 한인은 얼마든지 고용한다 2 8시간 노동에 1.80전 받던 것을 3.10~3.40전까지 받을 수 있다 3 석탄 씻는 일은 1톤에 21전씩 받던 것을 26전으로 인상한다 4 석탄 캐는 일은 1톤에 50전에서 63전으로 인상한다 등이다 -3월/김길연 백낙범이 동포 52명을 모집해 알라스카 연어 통조림 회사로 가기 위해 상항을 떠남. 9월 14일에 돌아올 예정 -6월/공립협회 회원수 상항 291명(환국 16, 사망 2), 리버사이드 22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Riverside, 河 邊 ) 150명, 레드랜드 52명, 락스프링스 34명 -6월/프레즈노의 최덕용, 작년 8월에 포도 따러 와서 현재 백인 농장 일을 주선 -6월/레드랜드 한인 권업소(주소는 510 Orange Street)의 주인 오윤, 한인 노동자를 모집. 임금은 하루 평균 2원 50전이며 월 평균은 50~60 원 정도 -샌퍼난도 수은광에서 주 원 등 4~5인이 노동 -네브라스카에서 유학중인 안정수가 프레스노 노동정황 시찰 -10월/프레즈노에 거류하는 동포:(박경근과 조정철은 신병으로 사 망) 위영민 리원영 최덕용 박호빈 김형관 강원서 김종림 김사옥 박귀호 이국서 장덕우 양치현 한국승 최순오 신기선 진사문 이 재수 김진행 임기정 유원오 김창만 김창학 계옥룡 김창률 등 이다(동년 8월, 미국인 농장주에게 고용된 최덕용이 한인 50 60명을 고 용한다는 수는 여기에 포함되지 않음) -11월/오레곤 유니언 지방 회원들이 시국 토론회 개최. 그 지역 동 포들의 신한민보 연조 명단:유희경 박병원 최대선 양택용 최준 선 이봉룡 이익순 김병학 전인수 정사순 김수만 김선중 성재 관 라김선 김홍락 김수인 박제목 백영재 이태욱 박경춘 김성 운 등이다 1908년 -1월/프레즈노의 위영민 한치홍이 지방 철도 일을 주선, 이에 임성 택이 현지의 한인 역부의 편리를 위해 핸포드 7가 209호에 여관 개설 -4월/핸포드 지방에 공립협회 경찰서(209 E. 5th 스트릿) 조직, 경찰 은 조원두(조원두는 회관에서 숙식 제공하며 노동 주선을 함) -5월/솔트 레익에서 동포 37명이 아이다호의 휘트니 지방에 있는 이 23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경철의 사탕수수 농장으로 이동. 같은 달 이순기가 L.A. 인근에서 전기 및 철도 역장 주선 여관 신설 -6월/프레즈노에 김원택이 여관 신설(곧 1259 Tulare 스트릿으로 이 주)/프레즈노에 거류하는 각 지방 회원들이 연합 공립관을 발기(고희 원 이재수 임치호 오진국 등)하고 토요 토론회(회장 이치환, 서기 손 경춘, 대의원 임기정, 사찰 임성칠)를 조직. 경비는 본 지방 회원들이 갹 출-이치환 계옥룡 손경춘 김여범 이창근 임기정 임성칠 이운 선 김승제 이재수 오진국 이상 2원씩/프레즈노 연합공립관 사무원은 박호빈과 김종림 -6월/함경도 원산출신 추승엽은 사모아의 미국 병선에서 일함 (U.S.S. Amropolis, Tutulia, Samoa) -7월/프레즈노에 국민회 지방 경찰소 조직, 회원 김영수가 7~8마일 떨어진 곳에서 매일 점검. 동월 회원 이능백은 원래 한의학에 밝아 현 재 프레스노에서 동포들을 구완 -핸포드 회원 23명이 지방회 설립을 청원:장덕우 권용태 홍순 택 조승렬 계옥룡 박인선 마춘봉 김국현 이영수 박충섭 오창 곤 한기갑 김영선 이능백 등 -8월/프레즈노 공립관에서 이재수 임치호가 노동주선, 포도밭 700에 이커 약조하고 8월 27일부터 시작되는 먹는 포도 따기에 일꾼 모집(임 치호는 1920년 윌로스 비행사 양성소 간사 역임). 동월 네바다 모예파 지방에서 한 일 노동자간에 싸움이 벌어짐. 동월 솔트 레익의 박영 순 이재수 방건초(1909년 1월 환국) 등 3인이 웨스턴 패시픽 철도회 사 역장에 다시 갱을 설립(한인 40명) -10월/박영하가 시애틀에 한인 여관을 설립(노동주선인은 김병현) -11월/샌 베니토(San Benito) 카운티의 산중에 위치한 아이드리아 수 은광에서 일하던 김채화가 아편중독자들과 함께 경찰에 체포됨. 김채화 24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는 2달 전 신창길 한치창 정국서 김경하와 함께 중국집에서 아편 을 빨다가 체포되어 벌금 10원을 내고 방면된 전력이 있다. 한편 솔트 레익의 박영순 등은 이번에 유니언 패시픽 일까지 맡아 역부 200명 모집함 -12월/옥스나드(Oxnard)에서 자살한 박봉조와 와병중인 박윤서에 대 한 채무자 및 의연금 명단:김금석 황의호 이종찬 박순경 한운서 임사원 한평국 김성일 조재덕 김성오 박학림 문병옥 조갑석 이 진섭 문명록 송재문 장봉석 김태련 김여수 김성삼 임기정 강국 보 이우현 박능선 고원익 박윤서 김지선 이화준 김종옥 김수 용 김창운 박창호 이회천 이종찬 김수용 정서종 신우성 현경 택 박능선 박순경 안성옥 이대종 안성규 박순기 박치순 김병 칠 장종일 정규만 등 1909년 -3월/박제순 유타의 스웨이빌(Seweyville)에서 자농을 일군 다음 5월 엔 듀이 빌(Dewey Ville)의 150에이커에 사탕수수밭을 자농함. 동월 L.A. 인근 패사디나의 그린 호텔 에 고용된 한인은 11명, 그 가운데 김춘만 은 백인 제임스 아담스에게 구타당해 소송을 제기한 결과 승소 판결을 얻음. 그리고 네바다 모에파 지방의 자농하는 동포들 가운데 김두호 장두학은 동업으로 23에이커를 얻어 참외 농사를 함 -5월/허승원 김응규가 상항 인근의 오션 쇼(Ocean Shore) 철도회사 에서 노동 주선을 하는데 한인 60명을 관할하고 있고, 30명 더 모집하 는데 임금은 하루 1원 50전 동월 와이오밍의 수피리오 탄광과 래울린쓰 동포(이재수의 갱)들의 함남 문천군 흉년 구제 명단:박장순 한흥주 김성옥 김창렬 김필 성 한창주 윤순화 조수담 강락구 김사진 이원식 이순백 이선 25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범 최찬영 전성윤 계옥룡 전기술 우사연 이자선 임치호 박춘 삼 정유만 문병옥 고여당 황세영 양종학 김일만 김상억 이사 정 이창식 오창훈 정극수 임정옥 김현석 등 기타 -7월/김성오가 롬폭에 여관 및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주선을 시작함. 한편 새크라멘토 부근에 최영만이 합스(맥주 원료) 농장의 도급을 받아 인부 1백 명을 모집함 -8월/임성택이 다뉴바에 포도밭 600에이커를 주선함 -10월/아이드리아 수은광의 한인 광부 명단:김진규 한치홍 김사 유 우경식 한신애 김성 엄성칠 이병호 이병준 황동성 박재현 김만준 한봉여 이덕성 이성로 신점록 이면식 등. 이 시기 멕시코 치와와의 금 은 철 동 광산에도 많은 한인들이 몰려감 1910년 -1월/콜로라도 주 프리메로 탄광 갱내에서의 폭발사고로 동포 9명 압사 -2월/옥스나드 사탕수수 농장의 노동주선 박창선 260에이커 계약/상 항 선창가 정거장 근처에 강호영 선우탄 김종림이 20여 칸짜리 여관 (City Restaurant 560 3rd St.)을 신설 -5월/롬폭에 김성오가 여관을 신설. 롬폭 지방의 국민회 경찰원은 이 능백, 서기는 손동선, 사찰은 이봉용이 피선되었으며 신입회원은 김진 하 백군삼 이운옥 김성원 등이고, 평의원은 장라득 김형필, 재무 전 성도, 총회 대의원은 윤병구가 선정됨. 동월 김응규는 웨스턴 패시픽 철 도회사의 노동주선을 시작, 철도를 치도하는 일은 하루에 1원 75전 -프레즈노 지방회 임원은 총회장 허영호, 총무 신달원, 재무 박봉룡, 학무 한삼봉, 경찰 김기수, 대의원 김원택 김군화. 동월 옥스나드에 안 경오 정문팔이 여관을 신설했고, 10여 동포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하루 26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1원 75전 받고 일하고 있음 -8월/프레즈노 지방회의 임시 사무원 한영호와 박봉룡이 노동주선을 함. 유타의 투레몬트 사탕수수 농장엔 이인식과 안상록 등이 노동하고 있음 그 밖에도 몬태나의 비웃(Butt)과 화잇콜(Whitecold) 아이다호의 보이 스 아리조나 워싱턴주 포틀랜드 마이애미 뉴멕시코 가드너 네바다 로간과 칼린(Carlin, 葛 崙 ) 등지의 탄광과 철도, 그리고 각종 농장에서 한인 개척자들은 미국 본토 상륙 이후의 초기 5년간을 성실하게 개척해 나갔다. 반면 독신위주의 사회였던 만큼 아편과 주색잡기에 대한 유혹 도 많아 당시 한인사회의 이슈가 되기도 했다. 1907년 새크라멘토 동포 들은 중국인 구역에 가지 않기로 하는 규칙을 정했는가 하면, 1908년 프레즈노에서 여관을 하던 김원택은 그런 악폐를 퇴치하기 위해 발벗고 나섰으나 1909년 오클랜드에서 발생한 대대적인 한인 집단 아편중독 사 건은 또 하나의 경종이었다. 너무 힘들어 함부로 나서기를 꺼리는 동토 알라스카행(연어 통조림 회사 소속) 선금을 아편에 몽땅 탕진한 것인데 그 가운데는 옥스나드 사탕농장의 송재문과 위명인도 섞여 있었다. 무 엇보다도 자살자가 속출했고, 석탄광이나 철로 역장에서 사고사가 꽤 높은 비율로 발생했다는 점은 초기 이민의 고충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한인 초기 이민의 고난의 오딧세이는 20세기의 첫 10년(the first decade)을 조국광복을 향한 긴 장정의 주춧돌로 삼기에 충분했다. 물론 본국에서 발대한 일이지만 일제의 차관 제공에 따른 경 제예속에 대한 항일 민족 경제운동으로 1907년 조국의 외채 1,300만 원 을 갚자고 일어난 대열에 동참했던 국채보상운동 21) 과 1908년 내지(한 21) 國 債 報 償 義 捐 發 起 書 :속담에 말하였으되 빚진 종이라 하니 그 말이 과 연이로다. 오늘날 국채가 一 千 三 百 萬 원에 달하였는데 이 국채를 만일 부 27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국)에서 외국인에게 땅을 팔아먹는 악폐를 금하고 조국의 국토 전체를 매입한다는 정신으로 L.A.에서 방화중 등 7명이 설립한 권업주식회 사 (1908년 현재 주식 본주 36명, 고본금 2,200원, 본국 매입 토지 369석 7두, 1911년엔 고본금이 1만 6,000원) 22) 와 같은 애국혼은 샌 화킨 밸리 에서도 끝없이 펼쳐져 나갔다. Ⅳ. 맺음말-다뉴바 리들리 시대의 개막 1904년부터 1907년 사이에 하와이에서 상항의 엔젤 섬 이민국을 통과 한 한인 수는 1,000명을 넘고 있다. 그러나 1910년 인구조사에는 462명 만 나타나고 있다. 이 기간에 한국으로 돌아간 귀국자는 300명 정도, 그리고 하와이를 거치지 않고 한국과 상해에서 직접 들어온 경우가 200명 정도, 이렇게 보면 900명 정도의 한인 철새 노동자들이 그야말 로 소수 중의 소수, 눈에 띄지도 않는 소수(invisible men)로 광대한 미 대륙을 종횡무진했던 것이다. 23) 한편 대한인국민회 통계로는 하와이 패한 정부에만 맡겨 두고 우리 국민이 보상할 방책을 강구치 아니하면 마침내 빚의 종을 면치 못할지라. 이러므로 내지에서 유지인사들이 국채 보상하기를 발기하매 전국 인민이 일층 격앙하여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같이 다투어 의연금을 모집하니 어찌 향복이 아니리오. 우리 해외에 있는 동포도 만분지 일이라도 도움이 당연한고로 본원 등이 이에 발기 하오니 미주에 있는 동포는 각각 힘을 다하여 보조하심을 바라옵고 또 수전하는 곳은 공립신보사로 정하였사오니 이차 하량하심천만복망 광무 十 一 년 三 月 二 十 五 일 상항공립협회 회원 김성무 림치정 리교담 근계 22) 新 韓 民 報, 1909년 3월 17일자 1911년 7월 19일자. 23) Edited by Sucheng Chan, Quiet Odyssey-A Pioneer Korean Woman In America MARY PAIK LEE(Univ.of Washington Press, 1990), p.149. 28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4,182명, 본토 2,021명(남자 1,999명, 여자 12명), 전체 귀국자는 974명(남 자 964명, 여자 10명)으로 말하고 있지만 성비 차이가 너무 커서 신빙성 이 없어 보인다. 또 1917년 국민회가 정리한 본토 한인 인구는 1,127명, 이는 캘리포니아와 그 인근에서만 뽑은 것이라 전국적으론 2,000명이 넘 을 것이었다. 국민회 지방회는 15명이 거주하는 지역이면 설립이 가능 24) 했으므로 여기저기 지방회가 만들어져 커뮤니티의 구심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해외 망명정부로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끼쳤다. 프레즈노는 임치 호 임성택 이재수 등이 600 700에이커 규모의 대형 포도밭을 계약 하기에 이르렀고, 1910년대 중반에 들어서부터는 막품팔이 노동에서 십분병작과 자농하는 한인들이 늘어났다. 한편 1914년 5월 20일 다뉴 바에 국민회의 북미지방총회(총회장 이대위) 지방회가 설립되면서 바 야흐로 다뉴바를 중심으로 한 중가주 역사의 막이 올랐다. 국민회 헌 장 제3장 제26조 4항에 의지해 인준된 지방회 임원 및 회원 명단은 다음과 같다. 25) 회장 장춘경, 부회장 이운옥, 총무 손건, 서기 고병관, 재무 김진규, 학무 원 조원두, 법무원 정국현 구제원 이치완 대의원 조원두 회원 리성로 김여수 신흥호 이국빈 장후경 장봉석 이무경 오충 국 손명준 김창헌 송태은 임성택 오창곤 이충기 천영운 김영선 길 운영 동 지방회는 동년 7월 자치제를 제정하고 경찰원과 상주원을 두기로 결의했다. 이는 동년 8월 다뉴바의 현지 관리가 이대위 북미 총회장에 24) 新 韓 民 報, 1909년 3월 24일자. 국민회 章 程 제4장 지방회 제30조. 지방 회는 15인 이상이 주재한 회원의 청원으로 지방총회의 인준을 얻어서 설립함으로 명기되었다. 25) Ibid. 1914년 6월 11일자. 29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게 많은 한인들이 피땀으로 버는 돈을 인근 차이나 타운의 잡기장(아편 과 도박)에서 낭비한다고 통지함에 따라 북미총회가 미주 한인사회의 자치권을 미국정부로부터 얻은 데 따른 결과였다. 다뉴바는 한인들이 포도 따기로 처음부터 들어온 곳으로 한인 주선인 이 없었으므로 백인과 일본인 농장주 밑에서 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 다가 1908년부터 1,000에이커 규모로 포도밭을 계약, 수확기만 되면 150 200(많을 때는 200 300명)명의 동포들이 모여들어 다뉴바는 본토에 서 한인들의 인구밀도가 가장 높은 곳의 하나로 부상하였다. 이렇게 한 인 수가 증가하자 1912년 8월엔 민찬호 목사 부부가 남장로교 순행목사 로 찾아와 설교했고, 이어 한인들과 가까운 스튜워트 부인도 미국목사 를 대동하고 2주간 머물렀다. 다뉴바가 한인 철새 노동자들의 붐 타운으로 부상한 반면 1911년 프레즈노 지방회는 인구 부족으로 솔트 레익과 멕시코의 치와와 지방 회와 함께 폐쇄되고 말았다. 또 여름방학을 이용해 각 지역에서 유학 생들이 찾아오는 건 수년 전부터 다뉴바의 연례행사가 되었지만 1916 년 8월에 이르러 단유바 학생 친목회 (회원 40명)를 결성했고, 1918년 엔 회장 김창만의 주도로 홍 언 원작의 미인심 이란 연극까지 공연해 115도를 오르내리는 불볕 아래서 노동하는 동포들에게 즐거움을 선사 해 주었다. 수확이 끝나고 수 백명의 철새 인구가 떠나고 나면 남는 인구는 40 50명 정도, 역시 독신남들의 커뮤니티가 형성되므로 자연 각종 문제가 발생했다. 1914년에 시작된 자치제는 그 동안 제대로 운영이 안 된 것 인지 1917년 11월부터 현지 경찰국의 인허를 얻어 다시 지방회 구내에 한인 경찰을 두고 한인사회의 치안문제에 보다 신중을 꾀한 듯했다. 자 치권 행사에 속하는 아편과 도박, 동포간의 절도와 완력행위 외에도 임 금 착복과 위조 수표 발행 등의 각종 경제사범과 형사사건이 심심찮게 30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일어난 것도 현실이었다. 가장 큰 경제사범의 사례는 멕시코에서 국경 을 넘어 다뉴바로 들어온 이국빈의 경우로 그는 위조 수표 사건(액수 미상)으로 1년 복역(샌 퀸틴) 후 멕시코로 추방되었다. 무엇보다도 연이어 일어난 살인사건은 초기 한인사회를 얼어붙게 만 들었다. 1914년 4월 17일 샌 퀸틴 감옥에서 교수형을 받은 이남진은 1913년 북가주 스탁튼에서 김희원을 살해한 경우였지만, 1916년 바로 다뉴바에서 석화섭이 박병원( 朴 炳 元, 41)과 윤성범(39, 인천)을 살해한 사건은 다뉴바의 한인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기에 충분했 다. 북미총회 법무원 이대위 목사도 함께 출두한 바이샐리아 고등법정 에서 석화섭은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26) 그리고 이번엔 스탁튼에서 다시 살인사건이 발생했다. 클레멘트라는 합스 농장의 주인이며 주무원인 박 명오를 다른 합스 농장에서 일하는 김영오가 술김에 단총을 뽑아든 것 이었다. 범인 김영오는 감옥에서 자살로 최후를 맞았다. 27) 한편 일인에 대한 배척은 캘리포니아에서 날로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 었다. 1909년 2월 토지 소유권 불허, 일반학교에서 일본 아동 축출 등과 같은 안건이 주의회 하의원을 통과했고, 1911년 3월엔 일본 노동자를 제한하고자 흙과 나무를 다루는 외국 노동자는 일체 쓰지 못하게 하는 법안이 통과되었다. 동년 6월 샌호세에선 백인들이 황인 노동자 대신 학생들을 과일농장에 투입하려는 움직임이 보이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 에 처한 동양계에게 드디어 1913년 8월 10일 캘리포니아에 외국인 토지 매매 금지법안이 시행되었다. 28) 같은 달 프레즈노에서 매음하는 일인 26) Ibid. 1916년 8월 3일자. 박병원(원산 출신)은 현재 다뉴바의 스미스 마운 틴 공동묘지에 묻혀 있다. 그밖에 기록에 남은 중가주 지역의 살인사건 으론 1930년 11월 17일 생거의 한 농장 캠프에서 음식을 만들어주던 김 영제를 사냥총으로 즉사시킨 신태철의 경우가 있다. 김영제는 80여 동포 들의 슬픔 가운데 1930년 11월 21일 리들리 묘지에 안장되었다. 27) Ibid. 1917년 8월 23일자. 31

한국사론 39:미주지역 한인이민사 수 십명이 창녀 34명과 체포돼 본국으로 추방되었고, 다뉴바의 송태은 이 일인을 구타해 법정에 서는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인즉, 어떤 일인 하나가 한인을 가리켜 신( 新 ) 일인이라고 말한 것이 계기가 돼 비화된 사건인 바 재판결과는 일인이 패소, 10원 벌금 에 대표 3명이 찾아와 송태은에게 사과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29) 바야흐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무겁게 감돌기 시작하던 때였다. 다뉴바에서도 한영호(솔트 레익 육군 보병 진수대 복무), 임공선 이도 선 김진성 등의 청년들이 미 육군에 자원 입대하였다. 그밖에 종군한 한인 청년 가운데 한치호 이치겸은 독일 전선에, 이병운은 미육군 보 병 제11연대에서 복무했는데 보병 제308연대 소속이던 박장순은 1918년 9월 독일 전선에서 전사하였다. 박장순은 헤이팅스 소년병학교 출신으 로 사서( 四 書 )를 한글로 번역한 출중한 청년이었다. 하와이와 본토를 통 틀어 1차 대전에 참전한 한인은 150~160명이었다. 30)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로 접어들자 다뉴바는 철새 노동자와 유학 생 중심에서 가족위주의 붙박이형의 인구가 늘면서 점차 안정된 사회형 태를 갖추기 시작했다. 상항에 도착한 사진신부들의 몇몇 다뉴바 유입 도 붙박이형 사회 구성원의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거기 다 김호(본명 김정진) 이살음 최능익 등 지적 정치적 엘리트 및 사 업수완이 뛰어난 김형순 등의 유입으로 말미암아 정치적 의식과 경제적 28) 일인들은 그 법이 시행되기 전 72만 원 상당의 토지를 매입하였다. 캐나 다도 배를 타고 들어와 밀입국을 시도하는 일인 1인당 600원의 포상금 을 걸었고, 일 정부는 캘리포니아 토지법안의 결과, 멕시코와 한층 긴밀 한 관계를 지향했다. 29) 新 韓 民 報, 1913년 8월 22일자. 30) Ibid. 1919년 2월 20일, 3월 6일, 8월 19일자. 한편 멕시코 동포 가운데 광무군인 출신 20여 명이 멕시코 혁명에 관군과 혁명군에 참여해 5~6 명의 전사자를 냈고, 더 나아가 1916년 과테말라 지하 혁명군에 용병으 로 팔려가 30여 명이 사망한 바 있다. 32

중가주 초기 한인 이민사 개요 이자경 규모를 확대시키는 새로운 국면을 전개했던 것이다. 이러한 역동적인 요인에 불을 지핀 것은 다름 아닌 상해에서 날아든 본국의 3 1운동 거 사 소식이었으며, 그로 인한 항일과 애국의 불길은 그해 8월 5일 다뉴 바에서의 대한여자애국단(초대 단장 김혜원) 창설에 크게 기여한 것으 로 보인다. 31) 31) 대한여자애국단 창설은 1919년 8월 2일 새크라멘토 부인회(회장 양제선), 다뉴바의 신한부인회(회장 강원신) 등 여러 지역의 부인회 대표자들이 다뉴바에 회집한 합동 발기대회에서 의결한 결과였다. 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