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 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종교와 문화.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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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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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니아와 세르비아의 종교와 문화> 1.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보스니아 일반적으로 동유럽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그리고 정교와 이슬람 등 다양한 종교와 이 에 따른 문화들이 현존하고 있어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동 유럽 지역 중 발칸반도에 자리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Bosna-Hercegovina/ Bosnia and Herzegovina, 이후, 보스니아로 약칭)는 가톨릭과 정교 그리고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 교가 복잡하게 얽혀진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중에서도 가장 복잡하고도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 이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란 측면에서 보스니아의 국제적 중요성은 냉전 이후 세계질서의 특징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 Clash of Civilizations> (1996)을 집필한 헌틴텅(Samuel Phillips Huntington, 1927-2008)의 주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상징되는 냉전 종결 이후 새롭게 변모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일 어나는 일련의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으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 간의 충돌이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이후의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러한 문화 간 종교간 차이에서 비롯된다고 언급하였다. 또한 그는 자신의 저서 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 지역을 들었 다. 본래, 보스니아라는 용어의 기원은 보스니아 북부에서 사라예보(Sarajevo)를 통과하는 보스나(Bosna)강에서 유래하였으며, 6-7세기에 내려온 남슬라브족들이 이 강을 중심으로 형성된 오늘날 보스니아 지역의 주요 거주민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더불어, 헤르체고비나 란 용어는 1482년 오스만 터키의 침공 당시 오늘날 보스니아 남부 지역의 주요 도시인 모 스타르(Mostar)와 도시를 관통하는 네레트바(Neretva) 강 유역을 지배하고 있던 헤르쪼그 (Stefan Hercog) 가문의 이름에서 처음 유래하였으며, 이후 오스만 터키의 지배 하에서 행 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 으로 명명되면서 오늘날까지 이 어지게 되었다. 보스니아인들은 초기에 작은 부족단위로 정착하였으며, 여기에는 같은 남슬라브족 일파 인 세르비아인과 크로아티아인 또한 상호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들 민족들은 중앙 집중적 국가 형태를 띠기보다는 족장인 쥬판(Župan)의 지도 아래 쥬파(Župa)라 불리 는 작은 국가단위체들을 한데 묶은 연합체 성격을 지녔으며, 이를 다스리는 대족장을 통상, 벨리키 쥬판(Veliki Župan) 이라 불렀다. 지정학적으로 로마 교회(가톨릭)와 콘스탄티노플 교회(정교)의 교차지점에 자리한 보스니아는 13세기까지 대부분의 역사를 가톨릭과 정교 간 세력 다툼의 희생양이 되어야 했으며, 더불어 주변의 크로아티아, 불가리아, 세르비아, 헝가 리 등 외세의 지배하에 있어야만 했다. 이후 트브르트코 1세(Stjepan Tvrtko I, 1338-1391, 재위 1377-1391)시기 중세 왕국이 수립된 이후에야 비로소 본격적인 왕국의 면모를 마련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15세기 중엽부터 확대된 오스만 터키의 공격으로, 1451년 왕국의 최대 전략적 요충지였던 브르흐보스나(Vrhbosna, 오늘날 사라예보 )가 점 령되자, 1463년 보스니아 중세 왕국은 항복을 선언해야만 했다. 1481년 보스니아 지역 중 - 1 -

가장 강력하게 저항하였던 훔(Hum, 오늘날 헤르체고비나) 지역마저 오스만 터키에게 정복 됨으로써, 이후 1878년 오스트리아로 지배권이 넘어갈 때까지 보스니아에는 약 400년간의 오스만 터키의 지배가 시작되게 되었다. 중세 시절 유럽에서의 영토 확장은 자신이 지닌 종교 세계관의 확장을 또한 의미하였다. 하지만, 보스니아의 경우에는 독립 왕국 수립 전까지 오랜 동안 외세의 지배와 함께 종교적 강요가 이루어져 왔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지배 민족도 자신의 왕국과 지배 종교에 대한 보스니아인들의 충성심을 유도해 내지는 못하였다. 그러한 배경은 보스니아 지역의 지정학 적 요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보스니아의 지리적 위치를 분석하자면, 고대 로마 시절 보스 니아는 동 서로마의 분기점에 위치해 있었으며, 이후에는 가톨릭의 로마교회와 정교의 콘스 탄티노플 교회 간의 교차 지점에 자리하게 된다. 따라서 주변 국가들에게 있어 보스니아 지 역은 다른 종교적 영역으로 자신의 종교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중요한 전초기지이자 전략적 중요 지역이었다. 따라서 주변 국가들은 이 지역을 둘러싼 지루한 힘겨루기를 지속하였고, 그만큼 주변 국가들의 지배 기간 또한 짧았었다고 할 수 있다. 더불어, 이러한 지배 국가와 지배 종교가 너무 빈번히 바뀜에 따라, 보스니아인들의 지배 왕국에 대한 충성심과 그들의 종교 확대를 유도할 충분한 시간을 지니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실제, 가톨릭으로 발전되는 로마교회 세력은 보스니아의 서부와 남부 지역인 크로아티아 와 달마티아 대부분 지역에 퍼져있었고, 정교로 이어지는 콘스탄티노플 교회 세력은 보스니 아의 동부인 불가리아, 마케도니아, 세르비아 지역에 그 세력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보스니 아는 이러한 양대 동 서 교회의 접합 점에 위치하여 있었다. 따라서 9세기 이후 로마와 콘 스탄티노플로부터 온 선교사들에 의해 보스니아로 전파된 크리스트교는 로마교회와 콘스탄 티노플 교회의 관할권 논쟁에도 불구하고, 11세기 중엽까지는 적어도 이들 양 교회의 특징 과 의식을 인정한 연합교회가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후 정교를 신봉하는 비잔 틴 제국의 세력약화와 더불어 로마 교회의 영향력이 증대됨에 따라, 보스니아인들 사이에선 로마 가톨릭의 영향력이 확대되어갔다. 기록에 따르자면 적어도 보스니아 중세 왕국이 형성 되기 이전 보스니아의 북부와 중부 지역은 헝가리 영향력 하에서 가톨릭 영향력으로 들어갔 으며, 반면에 보스니아 남동부인 헤르체고비나 지역은 세르비아 지배 하에서 정교 영향권으 로 편입되게 되었다. 하지만 외세의 빈번한 침략과 세력권 교체로 인해 당시 중세 보스니아 인들과 귀족들의 신앙심은 그리 깊지 못했으며, 오히려 보스니아 귀족들은 세력 변화에 따 라 종교적 신앙을 수시로 바꿔가며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려는데 노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현실을 인식하고 있던 보스니아의 실권자들은 종교적 믿음을 저버리면 곧 바로 죽음으로 이어졌던 주변 국가들과 다르게, 종교적 관용과 함께 종교 개종에 대해서도 비교 적 관대한 정책을 폈었다. 하지만, 이러한 보스니아의 종교적 관용 정책은 다음과 같은 결 과를 불러오게 하였다. 그 첫째는 양대 교회의 특징이 결합된 보스니아의 교회들이 훗날 주 변 국가들에 의해 이단으로 치부되며, 이들 국가들의 영토적 야심에 악용되는 결과를 초래 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가톨릭 신봉 국가인 헝가리와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 등 주변 국가들 은 보스니아에서 독특한 형태로 자생되고 있던 보스니아 교회(Crkva Bosanska)를 당시 유 럽에서 유행하던 파타네리(Patareni)교 혹은 보고밀(Bogumil/ Bogomil)교 등과 같은 이단 으로 치부하였고, 이러한 압력을 통해 보스니아로의 영토 확장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두 번 째 특징으로는 상대적으로 종교 개종이 쉬었던 보스니아의 종교적 관용 정책과 주변 국가들 의 박해는 보스니아인들의 이슬람으로의 대규모 종교 개종을 보다 쉽게 낳았다고 할 수 있 다. 15세기 이후 보스니아 왕국을 점령한 오스만 터키는 이슬람으로 개종할 경우 왕족과 귀 - 2 -

족들에겐 기존의 특권과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그리고 평민들 또한 토지와 부의 확대 기회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에 보스니아의 상당수 귀족들과 평민들은 이슬람 으로 개종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주변 크리스트교 국가들의 보스니아로의 지배 영역 확대 추진과 보스니아 교회 배척은 보스니아인들의 약한 종교적 신념과 더불어 오스만 터키의 보 스니아 지배를 계기로 이들 신도들이 상당수 무슬림으로 개종하는데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오늘날 유럽 내에 무슬림이 다수인 보스니아가 존재하게 되는 주요한 역사적 배경을 형성케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보스니아 중세 교회에 대한 논쟁> 중세 보스니아 무슬림들의 기원과 관련하여 여러 상반되는 주장들이 있는데 이러한 이유는 당시 시대적 배경과 보스니아의 지정학적 위치, 그리고 보스니아 지역에 퍼져있 던 보스니아 교회의 모호한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하겠다. 보스니아는 가톨릭의 로마 교 회와 정교의 콘스탄티노플 교회 세력의 경계선이 관통하는 지역으로서 양 지역의 문화 나 종교 중 어느 하나가 주도적인 세력으로 성장할 수 없었던 곳이었다.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중세 보스니아 교회와 관련된 논쟁은 크게 두 가지 학설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우선 하나는 보스니아 교회를 이원론적이거나 신 마니교도적, 혹 은 보고밀교와 파타네리교라 주장하고 이를 크리스트교의 이단으로 규정하고 있는 주장 이다. 이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보고밀은 3세기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발생한 마니교 (Manichaeism)로부터 13세기 프랑스 남부인 알비(Albi)지방의 알비주의파(Albigenism) 까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으며, 불가리아에서 처음 발생했으나, 10세기를 전후로 불가 리아와 이웃 세르비아에서 박해를 받다가 이후 보스니아로 전파된 후 정착에 성공하여 보스니아에 만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의견으로는 신마니교나 파타네리교와는 다르게 보스니아 교회가 성신과 삼 위일체, 교회건물, 십자가, 성인예배, 종교예술, 구약성경 등을 중시하였다는 점을 들어, 기본적으론 가톨릭의 일파였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보스니아에 대한 종주권을 확 보하고자 했던 헝가리와 세르비아가 의도적으로 양대 교회의 형식이 혼합된 보스니아 교회를 이단으로 몰아 세웠다는 것이다. 특히, 1235-1241년에 있었던 헝가리의 보스니 아에 대한 십자군 파견은 가톨릭에 대한 보스니아인들의 반감을 확대하였으며, 이후 가 톨릭교와의 공식적인 관계 단절로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한 성직자들이 양성되었고, 이들에 의해 비( 非 )가톨릭적인 여러 의식들이 행해지게 되면서 일련의 악순환이 이어지 게 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세르비아 정교와 중세 왕국의 번영, 두샨 황제 세르비아인들 사이에 있어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인물로 칭송 받는 자로는 14세기에 등장 한 두샨(Stefan Uroš IV Dušan, 1308-1355, 왕 1331-1355, 황제 1346-1355)을 들 수 - 3 -

있다. 이 시기 세르비아는 과거 서로마 지역과 비잔틴 제국, 소아시아간의 중개 무역을 통 해 부를 축적하였고, 안정된 정치력과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발칸유럽 대부분을 장악하 면서 역사상 최대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두샨은 1308년 아버지 데찬스키(Stefan Uroš III Dečanski, 1285-1331, 재위 1321-1331)와 어머니로는 불가리아 공주였던 스밀레츠(Teodora Smilec) 사이에서 장남으 로 태어났다. 1314년부터 약 7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에서 유학한 그는 여기서 그리스어와 함께 비잔틴 제국의 사회 문화상 등을 익히게 된다. 이후 1331년 9월 자신의 아버지를 몰 아내고 왕위를 차지한 두샨은 이후 불가리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 왕국과의 싸움을 통하여 영토를 계속 확장하여갔고, 뒤 이어 1342년에는 비잔틴 제국의 내분과 왕위 계승권 싸움에 따른 혼란을 이용하여 비잔틴을 공격해 서부 발칸 지역의 거의 대부분을 장악하는 데 성공 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1345년 스스로 황제라 칭하였고, 1346년 4월에는 스코프예 (Skopje, 오늘날 마케도니아 수도)에서 세르비아 대교구에 의해 세르비아와 로마 제국의 황제 로 추대되었다. 또한 그는 콘스탄티노플 교회 하에 있던 그리스 교구들과 더불어, 과거 세르비아 중세 왕국의 시조인 네마냐(성 시메온, Stefan Nemanja, St. Simeon, 1113-1199 영주 재위 1166-1196)와 성 사바(St. Sava, 1175-1235)가 세운 그리스 아토 스(Athos) 산의 힐란다르(Hilandar) 정교 사원 관할권을 자신의 영향력 하로 완전히 편입하 게 된다. 이어 두샨 황제가 해군력을 통해 비잔틴 제국의 남은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자 로마 교 황에게 협조를 요청하자, 위기에 직면하게 된 비잔틴 제국은 당시 소아시아에서 성장하고 있던 오스만 터키족을 용병으로 불러와야만 했다. 1344년 이후로 세르비아와 오스만 터키 간의 계속된 전쟁이 이어졌고, 강력한 십자군 구성을 위해 노력하던 두샨이 1355년 12월 독살로 추정되는 요인에 의해 갑자기 사망하게 된다. 이후 그의 제국은 유일한 아들이자 세 르비아 역사상 가장 무능한 왕으로 평가받고 있는 우로쉬 5세(Stefan Uroš V, 1336-1371, 재위 1355-1371) 시기를 거치며 여러 봉건 지역으로 쪼개졌고, 결과적으로 1389년 코소보 전투에서의 패배와 함께 오스만 터키 하로 편입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14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두샨 황제의 업적 은 다음과 같다. 첫째, 그는 발칸의 전 지역을 관할하는 총대교구로써 세르비아 정교회를 발전시키려는 야심에 따라 세르비아 교구의 영향력을 확대하는 한편, 코소보의 쥐짜(Žica) 에 있던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 교구를 코소보의 뻬치(Peć)로 옮겼다. 두 번째로는 1354년 세르비아 민족의 전통과 관습을 가미시킨 독자적인 두샨 법전(Dušanov zakonik/ Dušan's Code) 을 최종 완성시킴으로써 중세 세르비아 왕국의 위상을 드높일 수 있었다. 총 201개 항목으로 이루어진 두샨 법전은 당시 비잔틴 제국의 법전 내용 외에도, 로마법에 기초한 시 민법과 바티칸 공의회에 기초한 교회법 등이 서로 편집되어 1219년 성 사바(Sveti Sava, 1175-1235)에 의해 실행된 최초의 세르비아 법전에 상당 부분 그 기초를 두고 있었다. 세르비아 민족의 역사적 자부심이라 할 수 있는 두샨 법전의 원본은 안타깝게도 현재 남아 있지 않고, 14세기부터 18세기 사이에 제작된 사본 20여종만이 남아있는 상태이다. 무엇보 다도 그의 가장 큰 업적이라 한다면, 세르비아 역사상 가장 드넓은 영토의 확장과 함께 세 르비아니즘 의 토대를 구축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두샨 황제 시절 당시의 세르비아 영광 은 1844년 세르비아니즘의 이론 구축에 기여하였던 가라샤닌(Ilija Garašanin, 1812-1874) 에 의해 다시 제창되었고, 그는 세르비아 근대국가의 모델로서 중세 두샨 황제 시절의 영토 적 당위성을 기초로 한 대( 大 )세르비아 국가 건설을 세르비아니즘의 이론적 기틀로 삼았 - 4 -

다. 두샨 황제 이후로 세르비아인들은 스스로가 발칸 유럽의 맹주 국가였다는 자부심과 함 께 영토적 확대에 기초한 문화적 민족주의인 세르비아니즘의 확산을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고 볼 수 있다. 3. 세르비아 왕조와 독립 정교의 뿌리, 성 시메온과 성 사바 세르비아 중세 왕국의 시작은 스테판 네마냐 시기 때부터로 거슬러 올라간다. 발칸 유럽 에서 크리스트교가 계속 확대되는 가운데, 스테판 네마냐는 세르비아 중세 왕국의 전신인 라쉬카 공국의 안정과 지속적인 발전을 위해서라도 정교를 받아들일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 다. 따라서 1196년 대족장 자리를 그의 둘째아들인 스테판 네마니치(Stefan Nemanjić, 1196-1228, 대족장 1196-1217, 왕 1217-1228)에게 넘겨준 후, 자신은 세르비아의 스투 데니짜(Studenica, 1986년 UNESCO 지정) 사원과 오늘날 그리스 힐란다르 사원을 건립하 는 등 정교의 발전과 확대에 주력하게 된다. 네마냐의 노력 결과, 스테판 네마니치는 1202 년에 들어와 당시 로마 교황인 이노센트 3세(Innocent Ⅲ, 1160-1216, 재위 1198-1216) 로 부터 왕위를 부여받은 후, 1217년에 세르비아 중세왕국을 선포할 수 있었다. 더불어, 네마냐의 막내아들인 사바 네마니치는 아버지를 따라 정교에 입문하여 독립 정 교회 수립에 전념하였고, 1219년 콘스탄티노플 교회의 명령에 따라 마침내 그 꿈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어 최초의 세르비아 독립교구가 세워졌고, 이후로 사바는 세르비아 정교 회와 수도원을 개축, 보수하고 교회서적을 번역하는 등 세르비아 중세 왕조의 정신적 버팀 목으로써 세르비아 정교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한평생을 바치게 된다. 이러한 교회의 역할과 의미들은 이후에도 사바 주교와 그의 후계자들의 노력에 의해 세 르비아 일반 민중들에게 계속해서 유입되게 된다. 이후 네마냐와 사바는 세르비아인들에 의 해 성인으로 봉축되었고, 오늘날까지 세르비아인들의 가슴속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 었다. 4. 종교, 문화적 충돌과 제 1차 세계대전의 진원지, 사라예보 오늘날 보스니아의 수도인 사라예보는 1461년 오스만 터키가 도시를 건설한 이래로 발 칸유럽의 중요 전략적 상업 도시이자 유럽 내 대표적인 이슬람 도시로써 발전하여 왔다. 과 거 역사 속에서 보스니아는 동유럽은 물론 유럽 내에서도 대표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 크 중 모자이크 지역 으로 불려 왔으며, 사라예보는 이슬람을 믿는 보스니아 무슬림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 유대인 등이 서로 복잡 하게 혼재되어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 이란 별칭을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20세기말 유럽 최대의 민족 분쟁이라 일컬어지는 보스니아 내전을 거치면서 보스니아는 1국가 2체제, 즉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공화국 안에 세르비아계가 장악하고 있는 스르프스카 공화국 (RS: Republika Srpska) (영토의 49%) 그리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가 차지하고 있는 사라예보를 비롯한 영토 51%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cija Bosne i Hercegovine) 으로 나뉘어 졌으며, 사라예보는 오늘날 전형적인 이슬람 도시로 변모해 가 - 5 -

고 있는 중이다. 사라예보가 세계 역사 속에 그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무엇보다도 1914년 6월 세르비 아 민족주의 청년인 프린찌프(Gavrilo Princip, 1894-1918)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페르디난 드 황태자 부처를 암살한 사건을 통해서라 할 수 있다. 암살 사건은 이후 제 1차 세계대전 의 단초를 제공하게 되었고, 그 결과 사라예보는 제 1차 세계대전의 진원지 란 이름으로 역 사 속에 기록되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 발발이전, 당시 보스니아와 발칸유럽을 둘러싼 국제 정세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등 강대국들의 영향력 확보 다툼과 함께 영토 확대를 위한 발칸 유럽 내 국가들 간의 잦은 전쟁 등으로 매우 복잡하고 혼미한 상태였다. 당시 이 지역에서 보인 국제적 양 상은 우선, 오스트리아의 발칸유럽으로의 동진( 東 進 ) 정책 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국제 적 흐름은 식민지 확대 경쟁 그리고 이를 통한 원활한 원자재 공급 및 생산품의 수출 시장 확보가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과거 합스부르크 제국의 후신인 오스트리아 제국은 1866년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패한 이후 오랜 동안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었던 독일 지역 등 서부 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북으로는 러시아, 남으로는 이탈리아 등으로 인해 식민지 및 영토 확장을 꾀할 수 있는 지역이 용이치 않은 상황에서, 남은 지역은 오스만 터키가 지배 하고 있었던 동부인 발칸반도 밖에 없었다. 따라서 당시 오스트리아는 국가 운명의 사활을 걸고 발칸유럽으로의 진출과 영향력 확대를 추진해 나가야만 했었다. 두 번째, 러시아의 발칸유럽으로의 남진( 南 進 ) 정책 과 부동항( 不 凍 港 ) 획득 정책 을 들 수 있다. 표토르 1세(Пётр I Алексеевич/ Peter the Great, 1672-1725, 재위 1682-1725)이후로 러시아는 과거 후진적 사회를 벗어나기 위한 서구주의 정책과 계몽주의 그리고 산업혁명 도입을 통해 제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였다. 아시아와 유 럽에 걸친 광활한 지역을 아우르고 있는 러시아는 제국으로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계절적 요 인에 따른 얼지 않은 부동항의 획득과 함께 전략적 함대기지 구축이 절실히 요구되고 있었 다. 따라서 러시아에게 있어서, 크리미아(Crimea) 반도 및 흑해(Black Sea) 연안을 둘러싸 고 있는 발칸유럽의 이해 영역(Interest Sphere) 설정과 영향력 확보는 제국 발전을 위한 필수적인 요소이기도 했다. 마지막 주요 양상 중 하나는 발칸유럽 국가들 간의 치열한 영토 확보 전쟁이라 할 수 있 다. 과거 발칸반도는 14세기 이래로 오랜 동안 오스만 터키의 지배하에 놓여 있었으나, 19 세기 민족주의 시대 이후로 특히 1877년 러시아와 터키간의 전쟁 이후 대부분 독립 국가를 이루게 된다. 이때 독립한 이들 발칸유럽 국가들과 이제는 유럽의 종이호랑이로 쇠락해 버 린 터키는 서로 간의 치열한 영토 확보 노력과 세력 확대 경쟁을 치러야만 했고, 이것은 제 1, 2차 발칸 전쟁(1912, 1913)을 낳게 하였다. 실제로, 19세기 중엽 민족주의에 고무된 발칸 유럽의 여러 민족들은 터키의 폭정에 저항 하는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고, 이에 대해 터키는 무자비한 진압으로 견제하려 하였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같은 슬라브 민족이자 정교도인 발칸유럽의 민족들을 이슬람 제국으로부터 구원해 낸다는 미명 아래, 1877년 터키에 전쟁을 선포하게 된다. 이후 터키의 항복 속에 1878년 러시아는 불가리아의 영토를 크게 확대시켜 주는 등 발칸유럽의 상당 민족들을 독 립시켜 줌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1878년 3월 산스테파노 조약). 하 지만, 발칸유럽으로의 동진정책을 주요 국가 전략으로 추진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는, 발칸 유럽에서 터키의 급격한 약화가 러시아의 세력 확대는 물론 유럽의 안정에도 심각한 치명상 을 입힐 수 있다며 유럽의 강대국들을 설득하였고, 마침내 러시아와 터키를 베를린으로 불 - 6 -

러들여 새로운 조약을 맺는데 성공하게 된다(1878년 6월 베를린 조약). 이를 통해 오스트 리아는 친( 親 )러시아 성향의 불가리아의 상당 영토를 터키에게 다시 돌려주었으며, 이에 대 한 대가로 터키로부터 보스니아의 행정권을 넘겨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 결과 보스니아는 약 400년 동안 자신을 지배하였던 오스만 터키의 지배를 벗어나, 이제는 오스트리아라는 또 다른 지배 제국 하로 편입되는 운명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후 보스니아를 발칸유럽을 향한 동진 정책의 전초 기지로 활용하고자 했던 오스트리아는 이 지역에 대한 확실한 지배권을 구축하고자 했으며, 이에 따라 1908년 보스니아를 합방시키게 된다. 이것은 당시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크게 자극하였으며, 세르비아인들을 중심 으로 새로운 독립 운동의 단초를 제공하는 계기를 형성케 하였다. 이후 보스니아에는 젊은 보 스니아(Mlada Bosna) 를 비롯한 여러 비밀 결사단체 등이 수립되었으며, 이들은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하고 있던 보스니아를 이웃 세르비아 왕국으로 편입시킬 것을 주장하면서, 오스트리아 관료 암살 및 폭탄 테러 등의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1914년 6월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처를 암 살한 프린찌프 또한 젊은 보스니아 의 비밀 단원이었다. 1914년 6월 28일,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처는 근위대 열병식에 참관 차 사라예보를 방문하 게 된다. 이 날은 세르비아의 성령 축일(비도브단, Vidov dan/ St. Vitus' day)이자 과거 1389 년 오스만 터키와의 코소보 전투 패배로 세르비아 중세 왕국의 실질적 몰락을 가져 온, 세르비 아인에게 있어선 잊을 수 없는 역사적 아픔이 담긴 날이기도 했다. 페르디난드 황태자 부처가 암살되자, 오스트리아 제국은 사건의 배후에 당시 러시아와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던 이웃 세 르비아가 존재하고 있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독일의 빌헬름 2세(Wihelm II, 1859-1941, 재 위 1888-1918)에게 군사 협조를 요청해 수락을 받은 오스트리아는 7월 23일 세르비아에게 책 임자 처벌과 반( 反 )오스트리아 단체 해산, 그리고 오스트리아 관료들의 세르비아 직접 방문 조 사 등이 담긴 요구서를 보내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48시간 이내에 답을 줄 것을 요청했지만, 심 각한 주권 침해를 의미하는 이러한 요구서에 세르비아는 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따라 7월 28 일 오스트리아는 세르비아에 선전포고를 단행하게 된다. 세르비아 지원을 약속했던 러시아에 7 월 29일 총동원령이 내려졌고, 8월 1일엔 독일이 러시아에 선전포고를, 뒤 이어 여러 군사 협 약으로 맺어져 있던 프랑스 등 유럽 국가들이 전쟁에 참여하게 되면서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 하게 된다. 이처럼 발칸유럽의 작은 도시 사라예보에서 발생한 총격 사건은 전 세계를 전쟁의 화염과 비극 속으로 몰아넣게 되었다. 5. 문화적 조화와 종교간 화해를 꿈꾼 이보 안드리치 오늘날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문학가로는 1892년 보스니아 트라브니크(Travnik)에서 출 생한 이보 안드리치(Ivo Andrić, 1892-1975)를 들 수 있다. 어린 시절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비쉐그라드(Višegrad)의 친척집에 기거해야 했던 안드리치는 사라예보에서 중등 과 정을 마친 이후, 크로아티아의 자그레브, 그리고 이후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와 폴란드의 크라코프 대학에서 철학과 역사학을 전공하였다. 이후 반( 反 )오스트리아 저항 운동에 가담 하였던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오스트리아의 형무소에 갇혀 있기도 했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인 1924년 바쁜 외교관 생활 중에서도 오스트리아의 그라쯔 (Graz)에서 <터키 지배의 영향 하에서 보스니아 정신생활의 발전, The Development of Spiritual Life in Bosnia under the Influence of Turkish Rule>이란 주제로 역사학 박사 학 - 7 -

위를 수여받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 최초의 남슬라브족 통합 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왕국 이 수립되자, 그는 종교부 장관에 이어 외무부 장관 그리고 독일을 비롯 해 유럽 여러 국가의 대사직은 물론 국제 연맹의 왕국 대사로도 수차례 활동하면서 외교적 능력을 과시하게 된다. 정치적으로 그는 당시 확대되고 있었던 왕국 분열 및 왕권 약화에 반대하였으며, 제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조용히 기거하면서 1961년 노벨 문학상의 영광을 안겨준 <드리나 강의 다리, Na Drini Ćuprija>란 작품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완성하였다. 이후 그는 1975년 베오그라드에서 사망할 때까지 보스니아 및 유고슬라비아의 여러 지역과 역사를 배경으로 한 <트라브니크 연대기, Travinčka hronika>, <아가씨, Gospođica>등 약 100여 편의 수많은 명작들을 발표하였다. 특히, 그의 대표작인 <드리나 강의 다리>는 보스니아의 다양한 종교와 문화의 공간 속에서 기다란 역사 속에 비친 인간의 삶과 사람들과의 관계를 다리 에 빗대어 만들어 낸 역사 소설의 대작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시대배경은 15세기 오스만 터키가 보스니아를 지배해 드리나 강 에 다리를 세운 이후부터 시작되어, 1914년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오스트리아 군대가 다리 를 건너 세르비아로 진격해 들어가는 것으로 끝나는 약 400년이 넘는 역사를 다리를 주인공으 로 해서 소설을 이어가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이보 안드리치는 다리를 경계로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 속에 거주하던 보스니아 민중들의 역사적 삶과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를 드리나 강에 서 있는 다리의 상징성을 통해 잘 묘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안드리치의 유명세만큼 현재 그의 문학 세계를 둘러싸고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의 갈 등 또한 중요한 이슈가 되고 있는 게 사실이다. 크로아티아에서는 안드리치가 비록 보스니 아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부모가 가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이었다는 점에서 안드리치의 작 품들을 크로아티아 작품으로 분류하고 있다. 반면에 세르비아에서는 안드리치의 주요 활동 무대가 베오그라드였으며, 그가 쓴 작품들의 대다수가 세르비아인이 주로 쓰고 있는 에 (ekavski/ ekavian) 방언 이고, 무엇보다도 1958년 결혼 당시 그의 민족성을 세르비아인으 로 인정했다는 측면에서 그의 작품들을 세르비아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는 실정이다. 반면에 보스니아에선 안드리치의 출생지라는 점을 들어 보스니아 문학가로 선전하고 있는 상황이 다. 실제 안드리치 자신은 어느 민족에도 속하지 않은 유고슬라비아인(남슬라브족)임을 항 상 강조하였으며, 실제 그의 작품들은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대표적 언어였던 세르 보크로아트어(Srsko-hrvatksi/ Serbo-Croat)를 중심으로 초기엔 크로아티아인들이 주로 쓰 는 이에(ijekavski/ ijekavian) 방언 으로 써졌지만, 이후엔 세르비아인들이 주로 쓰는 에 방언 을 활용하였다. 어쩌면 그는 현재는 사라져버린 조국 유고슬라비아를 마지막까지도 사 랑했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는지도 모른다. - 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