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선사 문화의 발전과 여러 나라의 성장 1 선사 문화의 발전 출제 포인트 핵심 정리 구석기 시대의 주요 유적지(연천 전곡리)를 알아두자. 신석기 시대의 주요 유물, 특히 토기를 청동기 시대와 구분하여 알아두자.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 구분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도구 경제 활동 뗀석기, 뼈도구 사냥, 채집, 고기잡이 간석기(돌보습, 돌괭이, 돌삽, 돌낫) 이른 민무늬 토기, 빗살무늬 토기 원시 농경(조, 피) 원시 수공업(가락바퀴, 뼈바늘) 사회 활동 이동 사회, 무리 사회 평등 사회, 부족 사회 신앙 애니미즘, 샤머니즘, 토테미즘, 조상 숭배 주거 생활 동굴, 막집(강가) 움집(원형, 반지하, 중앙 화덕) 주먹도끼 짐승을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며, 땅을 파서 풀이나 나무뿌리를 캐는 등 여 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슴베찌르개 주로 구석기 시대 후기에 널리 사용 되었다. 자루 속에 박히는 부분인 슴 베가 달린 찌르개로서 창과 같은 기 능을 하였다. 구석기 시대의 생활 우리나라와 그 주변 지역에는 약 70만 년 전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다. 이 시대 사람들은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도구, 또는 돌을 깨뜨려 만든 뗀석 기를 사용하였다. 처음에 만든 주먹도끼, 찍개 같은 뗀석기는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나중에는 자르개, 밀개, 찌르개 등 쓰임새가 정해진 뗀석기를 만들었다. 구석기 시대 유적은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 충남 공주 석장리, 경기도 연천 전곡리 등에서 발견되었다. 연천 전곡리에서는 아슐리안형 주먹도끼 가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었고,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과 충남 청원 두루봉 동굴에서는 구석기 시대 사람의 뼈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구석기 시대 사람들은 무리를 이루어 사냥과 어로, 채집을 하여 생활하였 다. 그리고 사냥감을 찾아다니거나 계절에 따라 이동하였기 때문에 동굴, 바 위 그늘에서 생활하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무리 가운데 경험이 많고 지혜로운 사람이 지도자 역할을 하였으나 권력을 행사하는 지배자는 아니었다. 구석기 시대 후기에는 슴베찌르개가 널리 사용되었으며, 사냥감의 번성을 12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를 담아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 등으로 조 각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에는 빙하기가 끝나 고 다시 기후가 따뜻해졌다. 이 시기에는 작고 빠른 짐승을 잡기 위해 활을 사용하고, 이전보다 작은 잔석기를 나무나 뼈에 꽂아 톱, 활, 창, 작살 등 이음도구를 만들어 사용하였다. 신석기 시대의 생활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8000년경부터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돌을 갈아서 여러 가지 형태와 용도를 가진 간석기를 만 들어 사용하였다. 또 흙으로 빚은 그릇을 구워 토기를 만들었으며, 여기 에 음식물을 조리하거나 저장하였다. 신석기 시대를 대표하는 빗살무늬 토기는 서울 암사동, 평양 남경 등 전국에서 출토되었는데 대부분 강가나 바닷가에서 발견되었다. 빗살무 늬 토기보다 앞선 시기에는 이른 민무늬 토기와 덧무늬 토기, 눌러찍기무늬 토기 등도 사용되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대체로 강가나 바닷가에 살면서 고기잡이와 사냥 을 하였지만, 나중에는 농경과 목축을 통해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황해도 봉산 지탑리와 평양 남경의 유적에서는 탄화된 좁쌀이 발견되어 신 석기 시대에 잡곡류를 경작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등이 농기구로 사용되었다. 신석기 시대에는 가락바퀴나 뼈바늘을 사용해 옷이나 그물을 만드는 등 원시적인 수공업 활동도 이루어졌다. 한편 조개껍데기 가면, 짐승의 뼈나 이빨로 만든 치레걸이 등의 예술품을 만들기도 하였다. 농경과 목축이 시작되자 사람들은 정착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신석기 시대 사람들은 땅을 1m 내외로 판 뒤 기둥을 세워 지붕을 얹은 움집에서 생활하 였다. 움집의 바닥은 원형이나 모서리가 둥근 사각형이고, 중앙에는 불씨를 보관하거나 취사와 난방을 위한 화덕이 있었다. 출입문은 햇빛을 많이 받는 남쪽으로 내었으며, 화덕이나 출입문 옆에는 저장 구덩을 만들어 식량과 도 구를 저장하였다. 집터의 규모는 4~5명 정도가 살기에 알맞은 크기였다. 신석기 시대에는 핏줄이 같은 씨족들이 모여 마을을 형성하였고, 나아가 여러 씨족 공동체가 모여 부족 사회를 이루었다. 신석기 시대의 부족 사회 도 구석기 시대의 무리 사회와 마찬가지로 아직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는 발 생하지 않았으며, 연장자나 경험이 풍부한 사람이 부족을 이끌어 나가는 평 등한 공동체 사회였다. 구석기 유적지 제주시 한경면 고산리 유적 제주시 고산리에서 눌러떼기 수법으 로 만든 석기와 섬유질 토기, 덧무늬 토기 조각 등이 다량 출토되었다. 이 로써 우리나라 신석기 시대의 상한이 8,000~10,000년 전까지 올라가게 되었다. 가락바퀴 실을 뽑는데 사용된 도구 01 선사 문화의 발전과 여러 나라의 성장 13
농경이 시작되면서 신석기 인들은 자연의 섭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농사에 큰 영향을 끼치는 자연 현상이나 자연물(태양, 물)에도 정 령이 있다고 믿었으며(애니미즘), 영혼이나 자연 현상을 주관하는 하늘을 인 간과 연결시켜 주는 무당과 그 주술을 믿었다(샤머니즘). 또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죽지 않는다는 생각이 일반화되어 영혼 숭배와 조상 숭배가 나타났 고, 자기 부족의 기원을 특정한 동식물과 연결시켜 그 동식물을 숭배하였다 (토테미즘). 갈판과 갈돌 갈판 위에 곡물이나 열매를 올려놓고 갈돌로 갈아 껍질을 벗기고 가루로 만드는 데 사용하였다. 빗살무늬 토기 다양한 간석기 암사동 움집터 14
2 청동기 철기 시대 출제 포인트 주요 유물을 통해 청동기 시대의 모습을 추론하는 문제가 자주 출제된다. 핵심 정리 청동기 시대와 철기 시대 청동기 시대 비파형 동검, 거친무늬 거울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미송리식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고인돌, 돌널무덤 철기 시대 전기 철제 무기와 철제 농기구 세형동검, 잔무늬 거울 민무늬 토기 검은 간토기, 덧띠 토기 널무덤, 독무덤 농경 발달(벼농사 시작) 벼농사 확대, 중국과 교류(명도전, 붓) 직사각형 움집, 지상 가옥, 벽면 화로, 각종 공동 시설 생산력 증대로 잉여 생산물 발생 빈부 격차와 계급 분화, 남녀 분업 촉진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 출현, 족장(군장) 청동기의 보급 기원전 2000년경에서 기원전 1500년 무렵에는 만주와 한반도에서 청동기 문화가 시작되었다. 청동기 시대에는 생산 경제가 신석기 시대보다 더 발달 하고, 청동기를 만드는 장인이 나타났으며, 사유 재산 제도와 계급이 발생하 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비파형 동검(요령식 동검), 거친무늬 거울 등의 청동기를 만들 어 사용하였다. 당시 청동기는 만들기가 어렵고 재료도 충분하지 않아 지배 계급의 무기나 장식품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농기구는 여전히 반달 돌칼, 바퀴날 도끼, 홈자귀 등 돌로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토기의 생산 기술도 발달하여 미송리식 토기, 민무늬 토기, 붉은 간토기 등이 만들어졌다. 덧띠새김무늬 토기[ 突 帶 文 또는 刻 目 突 帶 文 土 器 ] 신석기 시대 말기부터 나타나는 새로 운 양식의 토기로서 청동기 시대 가 장 이른 시기를 대표한다.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01 선사 문화의 발전과 여러 나라의 성장 15
반달 돌칼 청동기 시대에 곡식의 이삭을 자르는 데 사용한 농기구이다. 홈자귀 도끼와 자루를 끈으로 묶기 위해 홈 을 낸 도구를 말한다. 세형동검 세형동검은 청천강 이남에서 주로 발 견되는데, 옛 마한 지역에서 집중적으 로 출토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를 대표하는 비파형 동검은 만주와 한반도 전역에서 출토되고 있다. 비파형 동검의 분포는 미송리식 토기 등과 함께 이 지역이 청동기 시 대에 같은 문화권이었음을 말해 준다. 철기의 보급 우리나라에서는 기원전 5세기경부터 철기 시대(청동기 시대 후기)로 접어들 었다. 기원전 1세기경부터는 철기가 널리 보급되어 삽, 괭이, 낫 같은 농기 구와 칼, 창, 화살촉 등의 무기, 그리고 톱, 도끼, 자귀 같은 공구들이 모두 철 로 만들어졌다. 철제 농기구를 사용하면서 농업이 크게 발달하였고, 철제 무 기와 철제 연모를 쓰게 되면서 청동기는 점차 의식용 도구로 변하였다. 청동기 문화도 더욱 발달하여 한반도 안에서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비파형 동검이 세형동검(한국식 동검)으로, 거친무늬 거울은 잔무늬 거울로 바뀌었다. 그리고 청동 제품을 제작하던 틀인 거푸집도 전국의 여러 유적에 서 발견되고 있다. 이 시기에는 토기의 입구 단면에 원형, 타원형, 삼각형의 덧띠를 붙인 덧 띠 토기, 표면에 검은 광물질을 바르고 매끈하게 갈아서 만든 검은 간토기 등이 사용되었다. 한편 이 시대의 유물과 함께 출토되는 명도전, 반량전, 오수전 등은 중국 과의 교류가 활발하였음을 알려 주고, 창원 다호리 유적에서 나온 붓은 당 시에 이미 문자를 쓰고 있었음을 알려 준다. 청동 도끼 거푸집 명도전 독무덤(광주 신창동) 청동기 철기 시대의 생활 청동기 시대에는 조, 보리, 콩, 수수 등 밭농사를 주로 지었지만 일부 저습지 에서는 벼농사를 지었다. 여주 흔암리, 부여 송국리 등지에서 탄화미가 발견 되고 있어 이 사실을 뒷받침한다. 돌도끼, 홈자귀, 괭이나 나무로 만든 농기 구를 이용하여 곡식을 심고, 가을에는 반달 돌칼로 추수하면서 농경이 더욱 발전하였다. 집터 모양은 직사각형이나 원형 등 다양하며, 움집은 점차 지상 가옥으로 바뀌어 갔다. 화덕은 움집 중앙에서 한쪽 벽으로 옮겨지고, 저장 구덩은 한 16
쪽 벽면을 밖으로 돌출시키거나 따로 설치하였다. 취락 형태를 이루고 있는 집터는 넓이가 다양한데, 주거용 외에 창고, 공동 작업장, 집회소, 공공 의식 장소 등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생산력 증가로 잉여 생산물이 발생하자 이것을 힘이 강한 자가 개인 적으로 소유하였다. 사유 재산이 늘어나면서 빈부의 차이가 생기고, 정치와 군사를 담당하는 지배 계층과 생산을 담당하는 피지배 계층이 생겨났다. 청동기 시대에는 돌널무덤과 고인돌이, 철기 시대에는 널무덤과 독무덤이 만들어졌다. 고인돌은 계급 사회의 발생을 보여 주는 유물이다. 축조 과정 에 많은 인력이 동원된 고인돌은 당시 지배층이 우세한 정치권력과 경제력 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독무덤은 두 개의 항아리를 옆으로 이어 만 든 것으로, 특히 영산강 유역에서는 대형 독무덤이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정치권력이나 경제력이 우세한 부족들은 주변의 약한 부족을 정복하고 공 납을 요구하였다. 청동이나 철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면서 정복 활동이 활발 해졌고, 이는 지배자와 피지배자의 분화를 촉진하였다. 이로써 신석기 시대 까지 유지되던 평등한 사회는 계급 사회로 바뀌어 갔고, 족장(군장)이라고 부르는 권력과 경제력을 가진 지배자가 나타났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울주 반구대의 바위그림은 사냥과 고기잡이의 성공을 비는 기원이 담겨 있다. 또 고령 양전동 알터의 바위그림에는 동심원 등의 기하학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는 농업 사회에서 볼 수 있는 태양 숭배와 관련이 있다. 농경무늬 청동기 따비로 밭을 일구는 모습(오른쪽 위), 괭이로 땅을 일구는 모습(오른쪽 아 래)이 새겨져 있다. 호랑이 모양과 말 모양의 띠 고리장식 고인돌 청동기 시대 지배층의 무덤으로, 형태에 따라 바둑 판식(남방식)과 탁자식(북방식) 등으로 나뉜다. 우리 나라에는 전국적으로 약 3만여 기 정도가 분포하고 있으며, 고창 화순 강화의 고인돌 유적은 세계 문 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부여 송국리 청동기 유적 부여 송국리 유적은 우리나라 최대의 청동기 시대 마을 유적이다. 반달 돌칼, 홈자귀 등의 석기와 비파 형 동검, 청동 도끼 거푸집, 붉은 간토기, 송국리식 토기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또한 다량의 불탄 쌀 과 볍씨 자국이 남아 있는 토기 조각도 발견되어 당 시 사람들이 벼농사를 지었음을 보여 준다. 울산 울주 반구대 바위그림 01 선사 문화의 발전과 여러 나라의 성장 17
3 고조선의 성립과 발전 출제 포인트 핵심 정리 단군 신화, 고조선의 강역과 관련된 유물, 8조법이 각각 출제되었다. 위만 조선(기원전 194~기원전 108)을 묻는 문제가 출제될 가능성이 높다. 고조선의 발전 과정 성립 발전 위만 조선 청동기 문화에 바탕을 둔 최초의 족장(군장) 국가 강역 : 요령 지방과 한반도 북부 지방 기원전 3세기경 부왕 준왕 때 왕위 세습, 관직 설치(상, 대부, 장군) 요서를 경계로 연과 대립할 만큼 강성 위만의 정변(기원전 194), 준왕 축출 철기 문화의 본격적 수용, 중계 무역으로 발전 한 무제의 침입으로 멸망(기원전 108) 단군과 고조선 고조선의 세력 범위 비파형 동검과 북방식 고인돌은 만주와 북부 지방에 서 주로 출토되어 고조선의 세력 범위를 알려 준다. 삼국유사 등의 기록에 따르면 고조선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 검이 건국하였다. 단군이 이끄는 집단은 주변의 군장 사회를 정복 하거나 연맹을 맺으면서 점차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홍익인간) 라는 이념을 내세우며 새로운 사회 질서를 형성해 갔다. 단군 신화에는 이와 같은 고조선의 성립 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고조선은 요령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여 점차 한반도까지 세력 을 확대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비파형 동검이나 탁자식(북방식) 고인돌의 출토 분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말에는 왕을 칭할 정도의 국가 체제를 갖 추었으며, 기원전 3세기에는 부왕, 준왕과 같은 왕이 등장하여 왕위 를 세습하고, 그 밑에 상 相, 대부( 大 夫 ), 장군( 將 軍 ) 등의 관직을 두 었다. 고조선은 이러한 국가 체제를 바탕으로 중국의 전국 7웅 중 하나인 연( 燕 )과 대적할 만큼 강성했다. 그러나 기원전 3세기 초 연 나라 장수 진개의 침략을 받아 서쪽 땅을 잃게 되었는데, 이 무렵 수도가 요하 유역에서 평양 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단군왕검 당시 지배자의 칭호로 제사장을 뜻하 는 단군과 정치적 군장을 의미하는 왕검의 합성어이다. 위만의 집권 중국의 진 한 교체기에 혼란을 피해 고조선으로 넘어오는 유이민이 늘어났 다. 기원전 2세기 초 위만이 무리 1,000여 명을 이끌고 고조선에 들어오자, 18
준왕은 그들을 서쪽 변경에 거주하게 하고 변경의 수비 임무를 맡겼다. 그 러나 위만은 점차 세력을 확대하였고, 마침내 수도인 왕검성을 공격하여 준 왕을 몰아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기원전 194). 위만 왕조의 고조선은 철기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철기를 사용 하면서 농업과 무기 생산을 중심으로 한 수공업이 발달하였고, 그에 따라 상업과 무역도 발달하였다. 고조선은 이러한 사회와 경제의 발전에 힘입어 중앙 정치 조직을 갖춘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리고 우세한 무력으로 활발한 정복 사업을 전개하여 넓은 영토를 차지하였다. 또 지리적인 이점을 이용하여 동방의 예나 남방의 진이 직접 중국의 한과 교역하는 것을 막고, 중계 무역의 이득을 독점하려 하였다. 위만 조선의 발전에 불안을 느낀 한( 漢 )의 무제는 대규모 군대를 보내 고 조선을 침략하였다. 고조선은 패수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후 약 1년에 걸쳐 한의 군대에 맞서 완강하게 대항하였다. 그러나 지배층의 내분으로 왕 검성이 함락되어 위만 조선은 3대 86년 만에 멸망하였다(기원전 108). 한은 고조선의 옛 땅에 4개의 군과 여러 현을 설치하여 지배하였으나, 토 착민들의 반항에 부딪쳤다. 이에 평양 지역에 설치된 낙랑군을 제외한 나머 지 군현은 곧 폐지되었다. 한군현의 가혹한 지배로 8조에 불과하던 법 조항 은 60여 조로 늘어났고, 풍속도 각박해졌다. 한편 고조선의 유이민들이 남 쪽으로 내려와 삼한의 발전에 큰 자극을 주었다. 위만 조선 위만은 왕이 된 후에도 국명을 계속 조선이라 하였고, 그의 정권에는 토착 민 출신으로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 들이 많았다. 이러한 점에서 위만의 조선은 단군의 조선을 계승하였다고 할 수 있다. 사료 돋보기 고조선의 법 (고조선에서는) 백성들에게 금하는 법 8조를 만들었다. 그것은 1 대 개 사람을 죽인 자는 즉시 죽이고, 2 남에게 상처를 입힌 자는 곡식으로 갚는다. 3 도둑질을 한 자는 노비로 삼는다. 용서받고자 하는 자는 한 사 람마다 50만 전을 내야 한다. 01 선사 문화의 발전과 여러 나라의 성장 19
4 여러 나라의 성장 출제 포인트 초기 국가들의 특징을 구별하는 문제는 꼭 출제되므로 반드시 암기해야 한다. 핵심 정리 초기 국가 부여 정치 경제 5부 연맹체(왕과 사출도), 왕권 미약 농경과 목축, 말 모피 주옥 풍속 순장 풍습, 영고(제천 행사), 법률(1책 12법)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정치 풍속 정치 풍속 정치 경제 풍속 정치 경제 풍속 5부 연맹체, 대가(상가, 고추가) 제가 회의에서 국가 중대사 결정 동맹(제천 행사), 국동대혈에서 제사 서옥제(혼인 풍속) 군장 국가(거수, 삼로) 민며느리제(혼인 풍속), 골장제(장례 풍속) 군장 국가(읍군, 삼로) 방직 기술 발달, 단궁 과하마 반어피 족외혼(혼인 풍속), 책화, 무천(제천 행사) 마한 54국(목지국 주도), 변한과 진한 각각 12국 제정 분리 사회 : 신지 읍차(군장), 천군(제사장) 벼농사 발달, 철 수출(변한) 제천 행사(5월, 10월), 두레(공동 노동) 연맹 왕국 연맹 왕국은 부족이 연합하여 국가 형태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왕권이 강력하지 못하였고 부족장들에 의해 왕이 추대 혹은 폐위되기도 하였다. 부여, 고구려, 마한의 경우 연맹 왕국 을 형성하였으나 옥저, 동예는 족장 (군장) 사회에 머물렀다. 부여 부여는 만주 길림시 송화(쑹화)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였고 말, 주옥, 모피 등이 특산물로 유명하였다. 부여 는 남쪽으로 고구려, 서쪽으로는 선비족과 접하고 있어 일찍부터 중국과 외 교 관계를 맺었다. 3세기 말에 선비족의 침략으로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 고 구려에 편입되었다. 부여에는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 리가 있었다. 이들 가( 加 )가 직접 다스리는 사출도는 왕이 직접 통치하는 중 앙과 합쳐 5부를 이루었다. 가( 加 )들은 왕을 추대하고, 오곡이 잘 익지 않으 면 왕에게 책임을 묻기도 하였다. 한편 왕은 궁궐, 창고, 감옥과 같은 시설을 갖추고 있었으며, 죽으면 많은 사람을 껴묻거리와 함께 순장하기도 하였다. 20
부여의 읍락에는 호민으로 불리는 부유층이 있으며, 그 아래 하호(피 지배층)와 노비가 있었다. 가, 대가 등 족장 세력들은 호민을 통해 읍락 을 지배하였다. 전쟁이 일어나면 가와 호민은 무장하여 싸웠으며, 하 호는 식량을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부여에는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고, 남의 물건을 훔쳤을 때에는 12배 를 배상하게 하였으며,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사형에 처하 는 법이 있었다. 또 사냥이 시작되는 12월에 영고라는 제천 행사를 열 었고,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제천 의식을 행하고 소를 죽여 그 굽으 로 길흉을 점치는 우제점법을 하였다. 부여는 고대 왕국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연맹 왕국의 단계에서 멸망하 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한 계통임을 자처하 였다는 점은 부여가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여러 나라의 성장 고구려 삼국사기 는 부여에서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추모)이 기원전 37년에 고구 려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고구려가 자리 잡은 졸본(환인) 지방은 대부분 큰 산과 깊은 계곡으로 된 산악 지대였기 때문에 농토가 부족하여 양식이 부족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초기부터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면서 평야 지 대로 진출하고자 하였다. 부여와 마찬가지로 고구려도 상가, 고추가 등의 대가들이 왕 아래에 있었 으며, 각각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리를 거느리고 있었다. 중대한 범죄자는 제가 회의를 통하여 사형에 처하고 그 가족은 노비로 삼았다. 고구려 사회에는 남자가 혼인을 한 뒤 일정 기간 처가에서 살다가 남 자 집으로 돌아가서 사는 서옥제라는 혼인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건국 시조인 주몽과 그 어머니 유화 부인을 조상신으로 섬겨 제사를 지냈다. 10월에는 동맹이라는 제천 행사를 성대하게 치르고, 아울러 국동대혈에 왕과 신하들이 모여 함께 제사를 지냈다. 부경 고구려 지배층의 집에 있던 창고. 피 정복민으로부터 획득한 곡식이나 물 건을 저장하였다. 서옥제 서로 혼인을 하기로 정한 뒤에는 신부 집 뒤꼍에 조그만 집을 짓고 살면서 자식을 낳아 장성하면 아내를 데리고 신랑집으로 돌아가는 제도이다. 옥저와 동예 국동대혈 옥저와 동예는 함경도 및 강원도 북부의 동해안에 위치하였다. 두 나라는 연맹 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각 읍락은 거수, 읍군, 삼로 등의 소군장이 자 기 부족을 다스렸다. 변방에 치우쳐 있어 선진 문화의 수용이 늦었고 일찍 부터 고구려의 압력을 받아 크게 성장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옥저는 어물과 소금 등 해산물이 풍부하였는데, 이를 고구려에 공납으로 01 선사 문화의 발전과 여러 나라의 성장 21
민며느리제 바쳤다. 옥저의 혼인 풍습으로는 민며느리제가 있었으며, 사람이 죽으면 가 옥저의 풍속에는 장래에 혼인할 것을 약속하면, 여자가 어렸을 때에 남자 집에 가서 살다가 성장한 후에 남자가 예물을 치르고 혼인을 하는 일종의 매 매혼인 민며느리제가 있었다. 매장하였다가 나중에 그 뼈를 추려서 가족 공동의 무덤인 커다란 목곽에 안 과하마 이라는 활과 과하마, 반어피 등의 특산물이 유명하였다. 말을 탄 채 과일나무 밑을 지날수 있 다는 데서 나온 것으로, 키가 작은 말 을 뜻한다. 치하였다(골장제). 동예는 옥저와 마찬가지로 토지가 비옥하고 해산물이 풍부하여 경제생활 이 윤택하였다. 특히, 명주와 삼베를 짜는 등 방직 기술이 발달하였다. 단궁 동예에서는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매년 10월에 열었다. 그리고 씨족 사 회의 풍습이 남아 있어 족외혼(族外婚)을 엄격하게 지켰으며,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다른 부족의 영역을 함부로 침범하였 을 경우 책화라 하여 노비와 소, 말로 변상하게 하였다. 춘천 율문리 철자형 집터 여자형 집터 평면 형태가 장방형이고, 남쪽에 출입 구 시설을 별도로 마련한 이른바 철 (凸)자형 집터이다. 동쪽과 북쪽벽에 걸쳐 아궁이와 부뚜막, 구들(고래), 배 연시설(굴뚝)이 ㄱ자형 으로 갖추어 져 있다. 최근 강원도에서 철(凸)자 및 여(呂)자 모양 집터들이 발굴되어 동예의 문화가 고고학적으로 규명되고 있다. 철자형 집터 삼한 한반도 남부에는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진(辰)이 성장하였다. 기원전 2세기 경 고조선에서 남하해 오는 유이민에 의해 새로운 문화가 보급되어 사회 발전 이 촉진되었다. 그 결과 마한, 변한, 진한의 연맹체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경기, 충청, 전라도 지방에서 발전한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10여만 호였다. 변한은 김해, 마산 지역을 중심으로, 진한은 대구,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변한과 진한은 각기 12개국으로 이루어졌고, 모두 4~5만 호였다. 마한의 세력이 가장 강력하여 마한 소국 중 하나인 목 지국의 지배자가 마한왕 또는 진왕으로 추대되어 삼한 전체를 주도하였다. 삼한의 지배자는 세력이 큰 것은 신지, 작은 것은 읍차 등으로 불렸다. 한 편 삼한에는 정치적 지배자 외에 제사장인 천군이 있었다. 천군은 소도에서 솟대 천군이 다스리는 신성 지역인 소도를 표시하는 상징이다. 소도에는 큰 나무 를 세우고 방울과 북 등을 달아 신을 섬겼다. 이 전통이 이어져 마을에 나 무나 돌로 만든 새를 장대나 돌기둥 위에 앉힌 솟대가 되었다고 한다. 22 농경과 종교에 대한 의례를 주관하였다. 소도는 군장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 는 신성한 지역으로, 죄인이라도 이곳에 숨으면 잡아가지 못하였다. 소도와 천군의 존재는 고대 신앙의 변화와 제정의 분리를 보여 준다. 삼한의 주민들은 초가지붕의 반움집이나 귀틀집에서 살았으며, 두레 조 직을 통하여 농사를 공동으로 짓는 등 공동체적 전통을 유지하였다. 그리고
해마다 씨를 뿌리고 난 뒤인 5월과 가을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10월에 계절 제를 열어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마한 목지국의 이동 마한의 토실 마한의 무덤 삼한 사회는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농경 사회로, 특히 벼농사가 일찍 부터 발달하였다. 김제 벽골제나 제천 의림지와 같은 저수지는 삼한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한편 변한에서는 철이 많이 생산되어 낙랑, 왜 등에 수출 하였다. 철은 교역에서 화폐처럼 사용되기도 하였다. 철기 문화가 발달하면서 삼한 사회에서도 변동이 일어났다. 백제의 세력이 커지면서 마한 지역을 통합해 갔고, 낙동강 유역의 변한 지역에서는 가락국 (가야)이, 진한 지역에서는 사로국이 성장하여 고대 국가의 기틀을 다져 갔다. 사료 돋보기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 1 고구려에는 큰 산과 깊은 골짜기가 많고 평원과 연못이 없어서 계곡을 따라 살며 골짜기 물을 식수로 마셨다. 좋은 밭이 없어서 힘들여 일구어 도 배를 채우기는 부족하였다. 사람들의 성품은 흉악하고 급해서 노략질 하기를 좋아하였다. 2 부여는 구릉과 넓은 못이 많아서 동이 지역 가운데서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다. 토질은 오곡을 가꾸기에는 알맞지만, 과일은 생산되지 않았다. 사람들 체격이 매우 크고, 성품이 강직 용맹하며, 근엄하고 후덕하여 다 른 나라를 노략질하지 않았다. 3 옥저는 큰 나라 사이에서 시달리고 괴롭힘을 당하다가 마침내 고구려에 게 복속되었다. 고구려는 그 나라 사람 가운데 대인을 뽑아 사자로 삼아 토착 지배층과 함께 통치하게 하였다. 동예는 대장군이 없고, 한대 이후 로 후, 읍군, 삼로 등의 관직이 있어서 하호를 통치하였다. 예의 풍속은 산천을 중요시하여 산과 내마다 구분이 있어 함부로 들어가지 않았다. 4 (삼한) 짚으로 지붕을 덮은 흙집에서 사는데, 그 모양이 마치 무덤과 같 으며 문은 윗부분에 있다. (중략) 귀신을 믿기 때문에 국읍에 각각 한 사람씩 세워 천신의 제사를 주관하게 한다. 이를 천군이라 한다. 여러 나라에는 각각 소도라고 하는 별읍이 있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 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다른 지역에서 거기로 도망쳐 온 사람은 누구든 돌려보내지 아니하였다. 01 선사 문화의 발전과 여러 나라의 성장 23
02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1 삼국의 정치 발전 출제 포인트 삼국의 주요 군주의 업적을 반드시 알아두자. 삼국 시대 주요 금석문인 광개토 대왕릉비, 진흥왕 순수비와 주요 전투를 꼭 정리해 두자. 가야의 중심 세력이 바뀌는 과정을 알아두자. 핵심 정리 고구려의 발전 고국천왕(2세기) 미천왕(4세기 초) 고국원왕(4세기 중) 소수림왕(4세기 후) 광개토왕(5세기 초) 장수왕(5세기) 왕위의 부자 상속제 확립, 5부 개편(부족 행정), 진대법 서안평 점령, 낙랑군 축출 전연의 침략, 백제의 공격(평양성에서 전사) 불교 수용, 태학 설립, 율령 반포, 전진과 교류 만주 정복(후연 격파), 백제 공격, 신라에 침입한 왜 격퇴(400), 영락 연호 남북조와 동시 수교, 남진 정책 추진(평양 천도) 한성 함락(475), 한강 유역 진출(충주 고구려비) 백제의 발전 고이왕(3세기) 근초고왕(4세기 중) 침류왕(4세기 후) 동성왕(5세기 후) 무령왕(6세기 초) 성왕(6세기 중) 한강 유역 복속, 관등제와 관복제 실시 왕위의 부자 상속제 확립, 정복 활동(마한 복속, 고구려 공격) 가야 지역 진출, 해외 진출(산둥, 요서, 규슈 지역) 불교 수용(384) 신라와 결혼 동맹(493) 지방 통제 강화(22담로), 남조(양)와 교류 사비(부여) 천도, 남부여로 국호 개칭, 중앙 관제 정비(22부) 일본에 불교 전파, 한강 유역 회복, 관산성에서 전사(554) 신라의 발전 내물왕(4세기 후) 눌지왕(5세기) 지증왕(6세기 초) 법흥왕(6세기 초) 진흥왕(6세기 중) 김씨 왕위 세습제 확립, 마립간 칭호 사용, 낙동강 지역 진출 나제 동맹 체결(433) 신라 국호, 왕 호칭, 우산국 정복, 지방 제도 정비 율령 반포, 17관등제 정비, 공복 제정, 병부와 상대등 설치 불교 공인, 건원 연호, 골품제 정비, 금관가야 정복 팔관회 개최, 화랑도 개편, 불교 교단 정비 한강 유역 진출(단양 적성비, 4개의 순수비) 24
고대 국가의 성격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성장한 여러 족장(군장) 국가들은 우세한 집단의 족장을 왕으로 세워 연맹 왕국을 형성하였다. 족장들이 여 전히 독자적 세력을 유지한 가운데 왕은 주변 지역을 정복하여 영 연맹 왕국과 중앙 집권 국가의 차이 역을 확대하고, 이 과정에서 성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왕권을 더 욱 강화하였다. 이에 족장들은 점차 왕 아래로 들어가 귀족이 되었고 권한 도 이전보다 약해졌다. 연맹 왕국은 율령을 반포하여 통치 체제를 정비하고, 불교를 받아들여 집 단의 통합을 강화하는 등 점차 중앙 집권적인 고대 국가로 발전하였다. 고 구려, 백제, 신라는 5부 또는 6부를 중심으로 한 연맹 국가에서 출발하여 이 호우명 그릇 와 같은 과정을 거쳐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5세기 신라의 고분인 호우총에서 청 동 그릇이 발굴되었는데, 그릇 바닥에 는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 이라는 광 고구려의 정치 발전 개토 대왕의 왕호가 새겨져 있다. 이 그릇이 경주에서 출토된 것은 광개토 고구려는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유리왕 때 졸본 대왕이 신라를 도와 왜구를 토벌한 성에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기고, 1세기 후반 태조왕 때에는 정복 활동을 사실과 관련이 있다고 여겨진다. 활발히 전개하였다. 태조왕은 한 군현을 공략하여 요동 지방으로 진출하였 고, 옥저를 복속하여 경제 기반을 더욱 확대하였다. 이에 따라 왕권이 크게 강화되어 계루부 고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게 되었다. 2세기 후반 고국천왕 때에는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가 더욱 진전되었다. 부자 상속의 왕위 계승이 확립되고, 부족적인 전통을 지녀 온 5부가 행정적 성격의 5부로 개편되었으며, 족장들은 중앙 귀족으로 편입되었다. 3세기 중반 동천왕 때에는 위나라의 침입을 받아 한때 큰 위기 를 맞기도 하였다. 4세기 미천왕 때에 낙랑군을 완전히 몰아내고 대동강 유역을 확보하는 등 남쪽으로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 하였으나 고국원왕 때에는 전연과 백제의 침략으로 국가적 위기 를 맞기도 하였다. 4세기 후반 소수림왕은 전진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 대외 관계를 안정시키고 체제 정비에 힘썼다. 그는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 하였으며 태학을 설립하는 등 중앙 집권적 국가 체제를 강화하였다. 이러한 내정 개혁을 바탕으로 5세기 초 광개토 대왕 때에 만주 지방에 대한 대규모의 정복 사업을 단행하였고, 남으로는 백제를 압박하고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함으로써 한반도 남부에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광개토 대왕은 대국을 건설한 자신감을 바탕으 로 영락 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웠다. 5세기의 한반도 02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25
광개토 대왕의 신라 출병 광개토 대왕릉비 장수왕 때에 건립된 것으로, 광개토 대왕의 정복 사업이 기록되어 있다. 장수왕 때에는 중국의 남북조와 각각 교류하여 배후를 안정시킨 후 본격 적인 남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도읍을 옮기고(427), 백제의 수도 한성을 함락하였다. 고구려는 이때 한강 전 지역을 포함하여 죽령 일대로부터 남양만을 연결하는 선까지 그 판도를 넓혔다. 고구려의 한 강 유역 진출을 보여 주는 충주 고구려비에서 고구려는 스스로 천하대국임 을 자부하면서 신라를 동이( 東 夷 )라고 멸시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고구려 는 중국과 당당하게 자웅을 겨루는 동북아시아의 대국으로 군림하였다. 사료 돋보기 충주 고구려비 5월 중에 고구려 대왕이 상왕공( 相 王 公 )과 함께 신라의 매금( 寐 錦 : 왕)을 만나 영원토록 우호를 맺기 위해 중원( 中 原 )에 왔으나, 신라 매금이 오지 않아 실행되지 못하였다. 이에 고구려 대왕은 태자공 전부( 前 部 ), 대사자 다우환노( 多 于 桓 奴 )가 이 곳에 머물러 신라 매금을 만나게 하였다. (중 략) 신라 매금이 신하와 함께 고구려의 대사자 다우환노를 만나 이 곳에 주둔하고 있던 고구려 당주( 幢 主 )인 발위사자 금노( 錦 奴 )로 하여금 신라 국내의 중인( 衆 人 )을 내지( 內 地 )로 옮기게 하였다. 칠지도 일본의 이소노카미 신궁에 보관되어 있으며 칼의 앞뒤면에 새겨진 명문( 銘 文 )으로 보아 4세기경 백제와 왜의 친 교 관계를 알 수 있다. 4세기의 한반도 백제의 정치 발전 백제는 기원전 18년 고구려에서 남하해 온 유이민 세력이 한강 유역의 토 착 세력을 규합하여 건국하였다. 이와 같은 백제의 건국 과정은 석촌동 고 분이 상당 부분 뒷받침하고 있다. 백제는 3세기 중엽 고이왕 때 중앙 집권 국가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이 무렵 한강 유역을 완전히 장악하였으며, 중 국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 관등제를 정비하고 관복제를 도 입하는 등 정치 체제를 정비하였다. 4세기 중반 근초고왕은 불안정했던 왕권을 강화하고 왕위 의 부자 상속제를 확립하여 백제를 고대 국가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쳐 마한 의 나머지 세력을 정복하여 전라도 남해안에 이르렀으며, 북으로는 황해도 지역을 놓고 고구려와 대결하다 평양성 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기도 하였다. 또 낙동강 유역의 26
가야에 대해서도 지배권을 행사하였다. 이후 백제는 해외로 눈을 돌려 중국 의 요서 지방으로 진출하였고, 이어서 산둥 지방과 일본의 규슈 지방에까지 진출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백제는 동진, 왜와 교류하 면서 강력한 해상 국가로 떠올랐다. 사료 돋보기 백제의 해외 진출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 리에 있었다. 그 후에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하였다. 백제가 통 치한 곳을 진평군(진평현)이라 한다. - 송서 - 처음 백가( 百 家 )로서 바다를 건넜다 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 晉 代 )에 구 려( 句 麗 :고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 진평의 두 군 을 차지하였다. - 통전 - 양직공도 6세기 양나라와 교류한 국가들의 사 절을 그림으로 그리고 설명을 덧붙인 것이다. 백제 사절에 대한 설명에는 백제의 간략한 역사와 백제의 요서 진출 사실도 기록되어 있다. 침류왕 때에는 불교를 받아들여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백성들의 사상적 성왕의 체제 정비 성왕은 중앙 관청을 22부로 확대 정 통합을 꾀하였다(384). 그러나 백제는 4세기 말부터 고구려의 공격을 받아 비하고, 수도를 5부로, 지방을 5방으 국력이 약화되었다. 고구려의 남진 정책에 밀려 개로왕이 죽임을 당하고 한 로 정비하였다. 강 유역을 상실하자, 백제는 웅진(공주)으로 도읍을 옮겼다(475). 그 뒤 무역 활동이 침체하고 귀족 세력의 권력 다툼이 이어져 큰 시련을 겪었다. 5세기 후반 동성왕 때부터 다시 사회가 안정되고 국력을 회복하였다. 동 성왕은 고구려에 대항하기 위하여 신라와 동맹을 강화하였고, 무령왕은 지 방의 22담로에 왕족을 파견하여 통제를 강화하였다. 이로써 백제 중흥의 발 판이 마련되었다. 성왕은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부여)로 옮기고(538), 남부여로 국호를 고치 면서 중흥을 꾀하였다. 또한 중앙 관청과 지방 제도를 정비하고, 승려를 등 용하여 불교를 진흥하였다. 그리고 중국의 남조와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일본에 불교를 전하였다. 성왕은 신라와 연합하여 일시적으로 한강 하류 지역을 수복하였지만 곧 신라에게 빼앗기고, 신라를 공격하다가 관산성 왕호 거서간 차차웅 사용 시기 박혁거세 남해 의미 군장 무당 전투에서 전사하였다(554). 이후 백제는 신라의 적극적인 영토 확장에 이사금 유리~흘해 계승자, 연장자 대응하여 고구려와의 관계를 친밀하게 하였다. 마립간 내물~소지 지증왕 대군장 한자식 왕호 왕 법흥왕 불교식 왕명 신라의 정치 발전 무열왕 중국식 시호 사로국에서 출발한 신라는 기원전 57년에 경주 지역의 토착민 집단과 유 이민 집단이 결합해 건국하였다. 이후 석탈해 집단이 가세하면서 박 석 김의 3성이 교대로 왕위를 차지하였다. 유력 집단의 지배자는 이사금(왕) 으로 추대되었고, 주요 집단들은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였다. 신라의 발전과 왕호 변천 신라는 초기에 박 석 김의 3부족이 연맹하며 그 연맹장을 교대로 선출할 때 이사금을 칭하 였다. 이후 김씨가 왕위 세습권을 독점하면서 대군장이라는 의미의 마립간으로 바뀌었다. 02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27
골품제 신라 시대 혈통에 따라 신분을 구분 한 제도이다. 왕족은 성골과 진골로 구분하였으며, 일반 귀족은 1~6두품 으로 구분하였다. 골품은 관직 진출은 물론 의복과 가옥 등 사회생활 전반 을 규제하였다. 북한산 진흥왕 순수비 진흥왕이 개척한 국경 지방을 순수 ( 巡 狩 )하면서 그 기념으로 각지에 세 운 비석이다. 신라는 4세기 후반 내물왕 때 고대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김씨가 왕위를 독점적으로 세습하고, 왕의 칭호도 대군장을 뜻하는 마립간 으로 바꾸었다. 한편 내물왕은 활발한 정복 활동을 벌여 낙동강 동쪽의 진 한 지역을 거의 차지하였다. 그러나 왜의 침입을 물리치는 과정에서 고구려 의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후 신라는 고구려의 간섭을 받는 한편, 고구려를 통하여 중국의 전진과 수교하고 중국의 문물을 받아 들이면서 성장하였다. 5세기에 들어서면서 고구려의 남진 정책이 강화되자 눌지왕은 백제와 동맹을 추진하였다(433). 신라가 중앙 집권 국가로 성장한 것은 6세기 이후부터이다. 6세기 초 지 증왕은 나라 이름을 신라 로 바꾸고, 마립간을 중국식 칭호인 왕 으로 바 꾸어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한 이사부를 보내 우산국을 정복하고 지방 행정 구역도 주 군으로 나누어 관리를 파견하였다. 법흥왕은 율령을 반포하고 불교를 공인하여 중앙 집권 국가 체제를 완비 하였다. 공복을 제정하여 관직을 체계화하였으며, 상대등과 병부를 설치하 였다. 또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들을 포섭하기 위해 골품제를 정비하였다. 불교식 왕명을 사용하여 왕의 권위를 높이고, 건원 이라는 연호를 사용하 여 자주 국가로서의 위상을 높였다. 대외적으로는 대가야와 결혼 동맹을 맺 고, 김해 지역의 금관가야를 정복하여 영토를 확장하였다. 진흥왕은 화랑도를 국가적인 조직으로 개편하여 인재를 양성 하였고, 사상적 통합을 도모하기 위해 불교 교단을 정비하였다. 백제와 연합하여 고구려의 지배 아래에 있던 한강 유역을 빼앗 고 북쪽으로는 함경도 지역까지 진출하였으며, 남쪽으로는 고령 의 대가야를 정복하여 낙동강 서쪽을 장악하였다. 특히 한강 유 역의 장악은 이후 삼국 경쟁의 주도권을 신라가 장악하는 계기가 되었다. 진흥왕의 정복 활동에 관한 사실은 단양 적성비와 4개의 순수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가야의 발전 6세기의 한반도 낙동강 하류의 변한 지역에서는 2세기 이후 여러 정치 집단들 이 출현하였다. 3세기경 이들의 통합이 한 단계 더 발전하여 김 해의 금관가야를 중심으로 전기 가야 연맹을 형성하였다. 금관가야는 해상 활동에 유리한 입지 조건과 철의 중계 교역 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김해 지방에는 질 좋은 철이 많이 나서 각종 철제 무기를 만들어 사용하였고, 덩이쇠를 만들어 화폐와 같은 교환 수단으로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4세기 말~5세기 28
전기 가야 연맹 금관가야 중심 농경 문화 중계 무역 발달 400년 고구려의 침입 후기 가야 연맹 대가야 중심 신라와 결혼 동맹 추진 가야의 발전 가야 연맹 맹주의 변화 초에는 신라를 후원하는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고 큰 타격을 입어 연맹 맹주 로서의 지위가 흔들리게 되었다. 금관가야가 쇠퇴하자 낙동강 서쪽의 여러 가야는 고령의 대가야를 중심으 로 다시 연맹체를 이루었다. 대가야를 중심으로 한 후기 가야 연맹은 5세기 후반 크게 성장하여 그 세력 범위를 소백산맥 서쪽까지 확장시켰으며 6세 기 초에는 백제, 신라와 대등하게 세력을 다투게 되었다. 한편 대가야는 신 라와 결혼 동맹(522)을 맺어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가야 연맹은 각 소국이 독자적인 정치 기반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 배력을 집중시키지 못하였다. 결국 김해의 금관가야가 신라에 정복당하고, 562년에는 대가야마저 멸망하면서 가야 연맹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가야의 금동관 고령 지산동 32호분 출토 사료 돋보기 고구려의 왜 격퇴 (영락) 9년(399) 기해에 백제가 서약을 어기고 왜와 화통하므로 왕은 평양 으로 순수해 내려갔다. 신라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말하기를 왜인이 그 국경에 가득 차 성을 부수었으니, 노객은 백성된 자로서 왕에게 귀의하여 분부를 청한다. 고 하였다. 10년(400) 경자에 보병과 기병 5만을 보 내 신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관군이 이르자 왜적이 물러가므로, 뒤를 급히 추격하여 임나가라의 종발성에 이르렀다. 성이 곧 귀순하여 복종하므 로, 순라병을 두어 지키게 하였다. - 광개토 대왕릉비문 - 02 고대 국가의 성립과 발전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