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시대를 준비하는 북한선교 소식지 통권 43호 www.durihana.com 혹독한 고향 땅을 탈출한 탈북자들에게 중국을 가로질러가는 3000km 넘는 위험천만한 여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국경을 무사히 넘고 나면 이들은 전혀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꾸려나가야 한다. 2009 3 4 NATIONAL 특집 두리하나 - GEOGRAPHIC 내셔널 지오그래픽 협력취재 북한 탈출기
북한선교를위한 두리하나 기도모임 두리하나 월요모임에 가면 북한이 보입니다. 북한에 남겨져 있을 믿음의 그루터기, 지하교회 교인들, 중국이나 제 3국에 있는 북한난민들, 이미 남한에 들어 온 북한자유이주민들, 미사일을 쏘아 올리는 북한을 움직이는 사람들, 정치범 수용소, 북한의 소외 계층. 언젠가는 해결되어야 하는, 응답을 받아야 하는 갖가지의 사연들 그 눈시울 뜨거운 기도제목이 있기에 두리하나 월요모임에 가면 북한을 위한 기도가 보입니다. 그리고 두리하나 월요 모임에 가면 북한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길 위에 던져진 몇 안 되는 곡식 낟알 같은 보잘것없는 적은 무리입니다. 수없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에 담기지 않는 그런 적은 무리일지라도 주의 이름으로 두세 사람이 모인 하나님의 사람들이기에 그 자리가 그립고 거기에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오랜 친구처럼 따뜻하게 가슴속에 담깁니다. 언젠가 이 적은 낟알 같은 무리들이 30, 60, 100배로 열매 맺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일 시 매주 월요일 오후 7시 30분 장 소 두리하나교회 문 의 1577-9121 북한선교를 위한 두리하나의 기도 북한 지하교회와 북한의 복음화를 위하여 계속해서 북한 땅에 복음의 씨앗이 뿌려지게 하옵시고, 동방의 예루살렘 평양에 하나님의 나라가 하루빨 리 회복되게 하소서. 숨어서 예배하는 지하교인에게 더욱 큰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안위를 지켜 주소서. 중국과 제3국에서 흩어져 떠돌고 있는 탈북동포의 안전과 그들의 인권 및 구출을 위하여 중국정부를 움직여 탈북자들의 강제 송환을 막아 주시고, 공안의 감시에서 자유함을 주시고, 어려움 가 운데 의인을 만나 악인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시옵소서. 현장사역자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며, 사역의 형통함을 위하여 선교사님들의 처해진 환경과 상황에 지치지 않도록 하시고, 신변의 안전을 지켜 주시며, 성령의 지혜와 분별력으로 맡은 사역 잘 감당하도록 하여 주소서. 선교현장에 갇혀 있는 선교사들의 출옥을 도와주시고 그들의 육체적 건강과 영혼을 평안케 하옵소서. 국내에 입국한 북한 자유이주민을 위하여 정착하는 데 필요한 직업을 허락하여 주시고, 고향에 두고 온 가족과 향수로 인한 외로움을 달래 주시고, 무엇보다도 이 어려운 상황을 예수 그리스도를 의존하여 극복하게 하셔서 북한 복음화에 귀하게 쓰임 받게 하소서. 편견과 열등감으로부터 그들의 영혼의 병을 치유하여 주시고, 지혜롭고도 담대하게 그 상황을 잘 극복할 수 있게 하셔서 건강한 일꾼으로 성장하게 도와주옵소서. 남한 사람들로 하여금 탈북동포를 사랑하고, 형제애로 친밀한 관계를 맺게 하시고, 편견으로 대하지 않 게 하옵소서. 탈북하여 국내에 정착하고 있는 탈북 청년들이 방황치 않게 하시고 잘 정착하여 자신의 꿈을 이루어 나 갈 수 있도록 도와주옵소서.
두 리 하 나 칼 럼 둘이 하나 되리라 (에스겔 37:17) 통일 선교한국의 비전과 사명 김 진 섭 (백석대 대학원신학부총장 겸 신학대학원장, 구약학) 구 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성민(聖民)으로 선택된 민족은 이스라엘뿐이다. 이스라엘은 솔로몬의 국제결혼(왕비 700명, 첩 300명)에 연계된 우상숭배의 죄로 인해(왕상 11:11), 주전 931년 북 이스라엘(여로보암)과 남 유다(르호보암)로 분열되어(왕상 12:2124; 대하 11:1-4), 결국 북 이스라엘(호세아)은 주전 722년 앗수르의 살만에셀 5세에 의 해 망했다. 남 유다(시드기야) 역시 주전 586년 바빌론의 느부갓네살에 의해 망했다는 절 망적인 소식을 선지자 에스겔은 5개월 후 포로 된 바빌론에서 듣게 된다(겔 33:21). 에스겔에게 임한 둘이 하나가 되리라 는 하나님의 메시지는 이미 망한 남 유다와 북 이스라엘이 내 종 다윗 이라 불리는 한 왕 (멜렉크 에하드)이 통치하는 한 민족 (고이 에하드, 겔 37:22)을 이루며, 화평 의 언약 (베리트 샬롬)인 영원한 언약 (베리트 올람, 겔 37:26) 아래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겔 37:23, 27)고 선포한다. 세계사적으로 이 예언은 놀랍게 성취되었는데, 바로 만왕의 왕, 만주의 주 (계 17:14, 16)로서 다윗의 자손 (마 1:1; 계 22:16)으로 성육신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십자가와 보혈로 우리의 화평이 되셔서,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 [One New Man]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엡 2:14-15), 유대인 남자들이 아침마다 감사하는 세가지 이유인 이방인, 종, 여자로 태어나지 않은 것 을 폐지시키며, 너희는 유대인이 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나이니라 (갈 3:28)고 고 백하게 만드셨다. 그리하여 각 나라[260여국]와 족속[24,000종족]과 백성[66.5억]과 방언[6,912언어]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계 7:9), 모든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빌 2:10b-11) 하신 것이다.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의 성령충만과 전도폭발이 일어난 북한은 이제 35,000개의 김일성 김정일 우상 과 함께 6 25 남침에서 300만 명을, 과반세기동안 종교 정치범으로 100만 명을, 그리고 1995년 이후 300만 명 이상을 기아(飢餓)로 죽게 만든 세계 최악의 불량국가로 전락했다면, 그래도 남한은 58,000개의 교회와 168개국에 37,000명의 선교사를 보낸 세계 최고의 기독교국가로 상승했다. 이제 178개국에 750만 명의 세계 최대 디아스포라를 가진 한민족은 유대인들에 의해 제 2의 유대인 이라 불리면서, 돌감람나 무 인 이방인과 참감람나무 인 유대인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둘이 하나 되게 하는 비전과 사명을 안고 있는 것이다(롬 9-11장, 특히 11:25-26a 참조). 이제 통일한국과 선교한국의 비전과 사명의 최상의 실습장으로서 남한에 보내 주신 2만 명의 북한자유민 과 130만 명의 이주민(노동자 65만, 다문화가정 23만, 유학생 8만, 한국국적 취득자 9만, 기타 25만)에서부 터 둘이 하나 되게 하시는 주 예수님의 영광스런 복음의 실천과 선포에 더욱 매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구하면서, 천기원 목사를 대표로 하는 두리하나교회와 선교회도 배전(倍前)의 감동적인 사명의 장을 펼치 길 축원한다. DURIHANA 2009/3 4 3
내개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 2009년 새해를 맞아 두리하나교회는 지난 1월 30일(금)부터 2박 3일간 화성에 위치한 송내수련원에서 성 령님이 해답입니다 라는 주제로 전교인 영성수련회 를 갖고 풍성한 은혜의 시간을 나누었습니다. 첫날 천기원 담임목사님의 개회예배를 시작으로 이튿날 김윤태목사님의 큐티SHARING 과 이병희전도 사님의 인도로 진행된 십자가의 길(천로역정) 은 그동안 성령하나님과 나 자신과의 일대일 신앙생활을 재 점검하는 은혜로운 체험의 시간이었습니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수련회에서 목사님이 저의 발을 씻겨 주실 때 저의 아빠가 생각났 어요. 울고 싶었지만 끝까지 참았어요. 한번 터진 울음 그치지 못할까봐 한번 울면 계속 울어 버릴까봐 너무 아빠를 그리워하고 사랑하기 때문 에 그날 목사님을 통해 아빠를 본 것 같아요 발 씻겨 주실 때 많이 당황했지만, 무릎 꿇 고 발을 씻겨 주시는 목사님 가운데 함께하시 는 주님을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 을 씻겨 주실 때 그 마음 느끼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소망 (여, 2007년 입국) 4 DURIHANA 2009/ 3 4
목사님께서 제 양말을 벗겨주시고 제 발을 정성스럽 게 씻어주시고 또 닦아주시는 동안 저는 하나님, 이렇 게 귀하신 분께서 저같이 부족한 사람의 발을 씻겨주시 게 하십니까? 생각하면서 감히 말 한마디 그리고 눈도 못 뜨고 눈물만 흘리고 있다가 저도 모르게 눈을 떴고 그 순간 제 발을 정성스럽게 씻겨주고 계시는 목사님의 모습과 사랑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 그리고 그 극진하신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저의 부끄러운 죄( 罪 ) 성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아, 어떤 말로 그 순간 가슴속 영혼의 깊은 곳에서 올 라오는 눈물의 거룩한 기쁨과 감동과 부끄러움을 표현 하고 전달할 수 있을까요 성령님께서 제 짧은 간증을 사용하시기만을 바랄 뿐 입니다. 목사님, 사랑하고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과 교회 앞에 겸손하고 낮은 종으로 섬기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이평재집사 DURIHANA 2009/ 3 4 5
취재 기자 일문일답 내가 만난 탈북자들 중국과 태국, 라오스를 넘나들며 탈북자들을 동행 취재한 톰 오닐 기자를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판이 직접 만났다. 중국에 숨어있는 탈북자들과 어떻게 접촉했나? 오래전부터 내셔널 지오그래픽에선 요란한 선전 뒤에 감춰진 북한의 실상에 관해서 취 재하려고 했습니다. 몇 년 전 사진기자 한 명과 평양에 가서 취재 허가를 받으려고 했지 만 거부당했어요. 그 후 워성턴 D C에서 미국에 처음 입국한 탈북자들을 만났죠. 북한 의 참담한 실상에 대해 숨김없이 털어놓더군요. 북한을 제대로 보려면 탈북자들을 만나 는 게 지름길이다 싶었죠. 1년 뒤 탈북자들을 돕는 두리하나 선교회 천기원 목사를 만났 습니다. 천 목사 덕분에 탈북자들을 취재할 수 있었죠. 단 엄격한 조건이 있었어요. 탈북 자의 실명이나 신상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거였죠.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는 선교사나 자 세한 탈북 경로에 대해서도 밝히지 않기로 했어요. 취재를 하는 동안 들키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했나? 중국 공안이 탈북자의 은신처를 눈치 챌 만한 동행은 절대 금물이었어요. 난 한국인 아 내와 함께 신혼여행 온 관광객 행세를 했죠. 통화는 되도록 짧게 끝나고 암호를 만들어 얘기했어요. 사진기자 창 첸지에게 우리 부부가 무사히 탈북자들과 만났다든가 탈북자를 만나러 갈 때면 이런 식으로 전달했죠. 결혼식 하객 전원 도착. 지금막소풍떠남. 이 메일을 쓸 때도 서로 암호명으로 불렀습니다. 난 프레리도그 첸치는 더블 해피니스(중국산 담배) 였죠. 휴대전화번호도 자주 바 꿨어요. 중국에 오기 며칠 전, 한국 기자가 선양에 있는 탈북자의 은신처를 취재한 뒤 공 안이 들이 닥쳤다는 소식을 접했던 터라 조심 또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선양에 있던 탈북자 여덟 명은 모두 체포되어 북한으로 강제 송환 되었다고 하더군요. 아찔한 순간은 없었나? 국경 부근에선 정말 피가 마르는 것 같았어요. 누가 공안에 신고라도 하는 날엔 당장 체포될 테니까요. 탈북자를 만날 때마다 모자 달린 외투를 푹 뒤집어쓰고 다녔고 탈북자 를 돕는 선교사와 식사를 할 때면 항상 별실이 있는 식당을 이용했습니다. 베이징에서 아내와 난 탈북자들과 함께 쿤밍 행 기차에 올랐죠. 장장 40시간의 기차 여행 끝에 쿤밍 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쿤밍 역에 마중 나오기로 한 안내인이 안 보이더군요. 사방엔 공안과 군인이 쫙 깔려 있었고요 들키면 큰일이다 싶어서 기자의 본분이고 뭐고 제쳐두 고 탈북자들을 택시에 태워서 호텔 방으로 데려갔죠. 아내와 나 모두 공범이 된 셈이었 어요. 잡히면 나야 추방되는 걸로 끝이지만 아내는 한국인이라 몇 년을 감옥에서 보낼 6 DURIHANA 2009/ 3 4
수도 있었습니다. 라오스 국경으로 데려다 줄 안내원이 몇 시간 뒤에야 나타나더군요. 몇 주 뒤 한국에서 탈북자들이 무사히 태국에 도착했다는 전화를 받고는 너무 기뻐서 소 리를 질렀죠. 부인이 한국 사람이라는 게 도움이 되었나? 그럼요. 아내가 한국 사람이라서 탈북자들이 우릴 믿어줬죠. 아내는 태국 방콕의 이민 국 수용소까지 가서 탈북자들을 직접 만나기도 했어요. 아내 고향인 서울에서 아내 친구 들을 만난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었습니다. 안타까웠던 순간이나 사연이 있다면? 탈북자들은 대개 가족이 굶어 죽거나 체포되는 걸 목격한 사람들이죠. 두려움과 절망 에 사로잡혀 있어요. 고향이 그립고 외롭다고 했어요. 북한 생활이 그렇게 고통스러웠는 데도 가족이나 고향 마을, 이웃을 그리워했죠. 대부분 다시는 가족을 만나지 못할 걸 아 니까 마음이 아팠어요. 북한 사람을 직접 만났는데, 어땠나? 서울이 고향인 아내는 탈북자들이 아주 옛날 사람 같다고 했어 요. 중국에서 만난 탈북자들은 처음엔 아주 불안해하면서 우릴 의심했습니다. 음식도 사주고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기도 하니까 그제야 조금 마음을 열더군요. 유머 감각도 아주 뛰어났어요. 농 담을 하면 잘 웃고 어디 구경거리나 소동이라도 있으면 웃음을 참지 못했어요. 나보곤 키가 크다고 놀려댔죠. 인간미가 넘치는 사람들이었어요. 중국 북한 땅이 바라보이는 중국 도문에서 톰 오닐과 한국인 아내 이소영씨가 손을 맞잡고 서 있다. 두만강 다리 건너 북한 남양이 보인다. 기사에 나오는 레드와 화이트, 블랙은 지금 어떻게 지내나? 화이트는 갑상선 암 수술을 받고 지금 회복 중입니다. 건설 일 을 그만둔 블랙은 서울에서 다른 직장을 구했어요. 인테리어 디 자인을 배우고 싶어 합니다. 레드 소식은 좀 안됐어요. 탈북자인 남자 친구에게 구타당한 뒤 화이트와 함께 두리하나 선교회로 거 처를 옮겼다더군요. 휴전선 기사에 이어 이번엔 탈북자를 취재했는데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나 동기가 있 나? 한국에 대해 또 취재를 한다면 어떤 분야를 하고 싶은지? 2002년 DMZ 기사를 취재하러 처음 한국에 왔어요. 그때 아내를 만났습니다. 아내는 내셔널 지오그래픽 한국판 초대 편집장을 지냈습니다. 은퇴한 뒤론 서울과 워싱턴 DC 를 오가며 살고 싶어요. 지금은 한국의 심마니에 관한 기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DURIHANA 2009/ 3 4 7
북한 탈출 잔혹한 고향 땅을 탈출한 북한인들, 이들에게 3000km나 되는 중국 국경을 넘는 위험한 여정은 시작에 불과하다. 다음 과제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일이다. 중국 국경도시 옌지에서 한 선교사가 자유를 찾아 머나먼 여정에 올라야 하 는 북한 사람들을 조심스레 찾고 있다. 원제목 : Escape From North Korea 글 : 톰오닐 사진 : 치엔치 창 February 2009 맹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11월 어느 날, 발자국 소리가 국경에서 16km 떨어진 중국 옌지의 한 허름한 아파트 3층에서 멈췄다. 소리를 들은 젊은 두 여자는 급히 뒷방으로 가서 벽에 몸을 바싹 기댄 채 움츠리고 앉 았다. 잠시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탈북자 신분인 두 여자는 최악의 상태를 예상하는 듯 머리를 수그리고 있었다. 중국 공안이 신분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들은 수갑과 체인에 묶여 강제 송환 될 운명에 처한다. 북송되면, 노동수용소에서 수년 동안 중노동에 시달려야 한다. 두 여자를 고용해 비디오 채팅을 강요했던 조선족 주 인도 이들을 찾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레드와 화이트 (중국 공안이 검문할 상황에 대비해 취재수첩에 적은 두 8 DURIHANA 2009/ 3 4
여성의 가명)는 방안에 갇혀 인터넷 상에서 음담패설 을 나누고 남한 온라인 고객들이 원하면 카메라 앞에서 옷까지 벗으며 포로같은 생활을 해야 했다. 그런데 바 로 전날 밤, 선교사들에게 구출돼 이 은신처까지 오게 됐다. 문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안에 누구 있어 요? 문 열어요. 라고 남자가 외쳤을 때, 화이트가 목소 리를 알아들었다. 어제 자신을 구출해 준 선교사의 목소 리였다.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다. 문밖에는 전기밥솥과 쌀 한 자루를 들고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마른 남자 가 서 있었다. 그는 배고프지요? 하며 말을 건넸다. 여 자들은 인사하고 나서 부엌으로 그를 안내했다. 곧 이어 방안은 말소리로 가득 찼다. 그는 메시지를 갖고 왔다. 곧 떠날 채비를 해야겠습니다. 방금 전화가 왔거든요. 중국에는 5만 명 가량, 아니면 그보다 훨씬 많은 북한 인들이 숨어 있는데, 대부분은 1450km에 이르는 중국 국경 주변의 외진 마을과 도시에서 숨어 지낸다. 몇 개 월 간 몰래 중국에 들어와 식량을 얻고 돈을 벌어 다시 북한으로 돌아가는 북한인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수는 지옥 같은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 거나, 돌아가기 싫어서 계속 중국에 머문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밖에 없다. 계속 숨어 지내든지 - 이를 악 용하는 고용주의 포로로 지내는 사례가 다반수다. - 또 는 아시아 지하철도(Asian underground railroad : 역 주-미국역사에서 남북전쟁 전에 노예 탈출을 도운 비밀 조직을 Underground Railroad 라고 지칭했음) 여정 에 나서는 것이다. 후자는 도보, 차량, 기차 등으로 중국 을 횡단해 동남아시아로 가는 위험천만한 모험이다. 검 문소, 밀고자, 험난한 지형 등의 장애물이 진을 치고 있 는 이 여정 중에 무수한 탈북자들이 체포됐다. 그러나 소수의 인권운동가들과 3천 달러 이상을 요구하는 브로 커들의 도움으로 지금까지 약 1만5000명의 탈북자들이 안전한 장소(대부분이 남한행)에 도착했다. 남한에 도착 하면 정신적 충격을 겪은 데다 기술도 별로 없는 이들은 가장 넘기 힘든 장애물에 맞닥뜨린다. 삶을 처음부터 시 국경지역 경비가 삼엄한 러시아-중국- 북한 삼국 접경지대에 철조망이 쳐 있다. 이곳 외의 다른 국경지역은 경비가 허술 한 편이다. DURIHANA 2009/ 3 4 9
작해야 하는 것이다. 대량 탈북사태는 북한 전역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던 1990년대 중반에 시작됐다. 식량난이 더욱 심한 지역에 서는 사람들이 뿌리와 풀, 나무껍질 따위로 연명해야 했 고, 아사자가 2백50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처음 에는 중국인(특히 국경지역의 조선족)들이 절박한 탈북 자들을 공개적으로 도왔다. 그러나 북한측의 항의로 중 국정부는 탈북자 체포에 나섰다. 발각되면 북송된다는 두려움에 떠는 탈북자들을 색출하기 위해 중국 공안은 정기적으로 동네와 마을을 급습해 단속을 벌였다. 북한 은 허가 없이 국경을 넘었다가 체포된 북한인들을 노동 수용소에 3년에서 5년까지 감금시키고, 선교사나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남한행을 시도한 경우는 배반행위로 간주돼 굶기고, 고문하고, 때로는 공개처형까지 시켰다. 인권단체들과 여러 외국 지도자들, 특히 미국과 유럽 연합 지도자들은 북한인이 송환될 경우에 받는 처벌을 이유로 이들을 난민으로 인정할 것을 중국정부에 촉구 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탈북자들이 불법 경제 이주 자 라는 주장을 고수하고 있다. 중국당국은 2008년베 이징 올림픽을 앞두고 몇 달 동안 탈북자 단속을 강화해 1주일에 수십에서 수백 명까지 체포해 강제송환시켰다. 그럼에도 탈북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대개는 강폭이 좁은 두만강을 건넌다. 주로 걸어서 건 널 만큼 수심이 얕은 여름이나 얼음이 어는 겨울에 강을 넘는다. 중국 국경의 약 3분의 1을 차지하는 두만강의 중국 쪽은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 만큼 경비가 느슨해, 군인들도 보기 힘들고 전기 장벽도 없다. 건너편에 보이 는 북한 쪽 강둑에는 몇 백 m마다 벙커가 있는데 초소 라기보다 버려진 사냥용 잠복처처럼 보였다. 중국 쪽 국 경까지 나를 태워다 준 운전사에게 이렇게 수비가 엉성 한 이유를 물어봤더니, 미소를 머금으며 북한은 강을 건너기 전에 탈북 기회를 노리는 자들을 색출할 수 있다 고 생각하고, 중국은 원하면 언제든지 탈북자를 체포할 수 있다고 확신하거든요. 라고 말했다. 초소를 제외하면 강 건너편 전경은 그 너머의 북한 현 실을 알려주지 않는다. 충성심이 부족하다고 감금시키 는 노동수용소가 수십 곳에 이르고, 2천3백만 인구 중 의최고25% 가량이 영양실조와 허기에 시달리며, 국민 을 괴롭히고 감시하는 군인이 최소한 1백만 명에 달하 는 현실 말이다. 강변 평야에는 집단 농장들이 군데 군 데 보였는데 대부분이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이곳의 1차선 다리는 남양으로 이어 진다. 그쪽에는 페인트칠을 하지 않 은 아파트 건물들이 서 있고, 도로는 군용차량과 자전거 몇 대 외에는 텅 비어 있다. 그 마을의 유일한 색깔은 미소 띤 김일성의 거대한 초상화뿐이 다. 북한의 창설자이자 현 북한 지도 자 김정일의 아버지인 김일성은 김정 일과 더불어 신격화되고 있다. 북한 두만강변 벙커에서 응시하고 있는 군인들 은 몰래 북한을 탈출하거나 입국하는 자를 사격 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십자가형 말뚝은 전기선 을 지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경비 병들 가운데 다수가 뇌물만 건네주면 중국으로 넘어가는 것을 눈감아준다. 10 DURIHANA 2009/ 3 4
레드의 집에서는 국경 건너편이 보였다. 중국은 그 녀에게 매혹적인 낙원처럼 여겨졌다. 아파트 건물들과 발전소에서 비치는 수많은 불빛을 볼 수 있었죠. 중국은 너무 부유해 보였어요. 그녀는 함경북도의 집단농장에 서 성장했다. 함경북도는 북한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 로 탈북자 대부분이 이 지방 출신이다. 사람들이 풀을 뜯어먹고 병들어 죽는 걸 보며 자랐어요. 그녀가 말했 다. 최근에는 근처 도시의 아파트 전체에 여자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모두 국경을 건너 중국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2003년까지만 해도 탈북자의 남녀 비율은 거의 동일 했다. 그런데 지금은 여성이 75퍼센트 이상을 차지하 며, 이런 불균형 현상은 세계 난민 추세와는 사뭇 대조 적이다. 대부분의 남자들은 군대, 농장, 공장 등에 소속 돼 있는 반면, 여자들은 집이나 직장에서 몰래 빠져 나 오기가 더 용이하다. 중국에 간 후에도 여자들이 더 쉽 게 일자리를 찾는다. 한편, 레드나 화이트처럼 성 매매 산업에 종사하거나 중국 농부의 신부로 팔려가는 경우 가늘고있다. 북한 강추위가 몰아치는 12월 어느 날, 일꾼들이 중국 국경에 인 접한 함경북도의 허름한 집단농장에 모여 있다. 북한정부는 국경지 역에 열성당원들만 살게 하고 이들에게 수상한 활동을 고발하도록 지시하고 있다. 북한에서 가장 가난한 이 지역은 항상 식량난에 노 출돼 있으며, 탈북자들 대부분이 이 지역 출신이다. 7월의 어느 비오는 날 밤, 드디어 레드는 탈출에 성공 했다. 그녀는 집안에 짐이 되는 걸 우려했고, 마을 확성 기로 친애하는 지도자 김정일 동지 소식을 낭독해야 하는 새 임무가 창피했다. 그녀는 국경수비대원에게 눈 감아주는 대가로 약 15달러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하고 이모와 함께 두만강까지 왔다. 레드는 밧줄로 얼기설기 엮은 튜브를 미친듯이 손으로 저어 강을 건넜지만, 이모 는 튜브가 새는 바람에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에 15살밖에 안 됐던 레드는 공포에 질린 채 혼자서 걷기 시작했다. 그녀는 곧 중국인 농부에게 팔린 북한 여자 톰 오닐은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수석기자이고, 대만 출신인 치엔치 창은 메그넘 포토 에이전시에 소속된 사진작가로 타이베이와 뉴욕에서 거주한다. DURIHANA 2009/ 3 4 11
중국 기사에서 블랙 으로 명명된 이 탈북자는 밤에 언 두만강을 몰래 건넜다. 중국에서는 체포돼서 추방될까봐 교회 은신처에 숨어 지냈다. 집에 머물게 됐고, 그때부터 3년 간 농사일을 돕 거나 설거지 일을 하며 숨어 지냈다. 결국 주인 돈을 훔쳐 옌지까지 간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성 을 파는 비디오 채팅 일을 하게 됐는데, 그녀 옆 에는 화이트가 있었다. 화이트는 10월 어느 날 밤에 강을 건넜다. 그 녀는 병든 엄마와 어린 동생 2명과 함께 북한 북 부 산업도시에서 살고 있었다. 처음에는 젓가락 공장에서 일하다가 다음에는 노변에서 과일을 팔았지만 돈을 못 벌어 허기를 자주 느끼곤 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남자가 그녀에게 다가와 중국 에 컴퓨터 계통 일자리가 있는데 가겠냐고 했고, 26세였던 그녀는 엄마 약값을 벌 때까지 일하면 되겠다는 순진한 생각에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북한인 브로커는 차로 그녀를 두만강의 외진 곳 까지 데려다 주며, 건너가서 그쪽에서 기다리고 있는 차에 타라고 지시했다. 강을 건넌 후 떨고 있던 그녀는 차가 보이자 아무 것도 묻지 않고 차 안으로 급히 탔다. 그 후 1년 간, 그녀는 방에 갇 힌 채 성을 팔아야 했다. 사기를 당한 것이었다. 중국 자기 이름을 미세스 리 라고만 밝힌 중 국 옌지의 이 탈북여성은 북한관리들이 자기를 알아보고 북한에 있는 가족들을 처벌할까봐 얼 굴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28세의 이 여성은 중 국에서 5년째 숨어살면서 탈출할 날을 기다리고 있다. 그녀는 가라오케 바에서 매춘부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 탈북여성들 가운데 다수가 성관련 업종에 종사한다. 몇 차례 몰래 북한으 로 넘어가 가족에게 돈을 주고 왔음에도 돈을 충분히 모은 그녀는 탈출 계획을 세울 수 있게 됐다. 안내인과 교통편 마련에 드는 경비는 평 균 3000달러쯤 된다. 이 사진을 찍고 나서 몇 주 후 그녀는 태국까지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식료품점이 들어서 있는서울의 한 건물 3층 사무실에서 천기원 목사가 전화를 걸었다. 탈북자 들에게 지하철도 여정을 시작하라고 알리는 신호 였다. 과거에도 수없이 했던 전화다. 탈북자를 돕 기 위해 생겨난 남한의 여러 조직들 중의 하나인 두리하나(둘이 하나가 된다는 뜻) 선교회의 설립 자인 천 목사는 중국에 숨어지내는 탈북자 수백 명의 탈출을 지휘해 이 들이 남한을 비롯해 미국과 다른 나라들에 정착할 수 있게 도와줬다. 아 시아 지하철도 로 탈북자를 탈출시키는 사람들은 천 목사와 같은 선교 사들 외에도, 인권운동가, 인도주의자, 브로커 등 다양하다. 어떤 이들은 이를 통해 북한 붕괴가 앞당겨지길 바라고, 또 어떤 이들은 북한인을 기 독교로 개종시키길 원한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의 공통점은 극심한 고 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이다. 북한과 중국에 있는 북한 인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천 목사는 말했다. 그러 니 그들을 도울 수밖에요. 천 목사는 위험에 관한 한 도가 튼 인물이다. 그는 2002년에 밀고자 12 DURIHANA 2009/ 3 4
중국 베이징 기차역 광고판의 전지전능한 눈 밑에서 공안은 종종 기차로 중국을 횡단하려는 북한인들을 찾아나선다. 의 신고로 당시 애용되던 탈출 루트인 몽고 국경 근처 에서 중국 공안에 체포됐다. 그가 인도하던 탈북자 9명 도 함께 체포됐다가 결국 북송됐는데, 그들 소식은 지 금까지도 알 수 없다. 천 목사는 중국 감옥에서 8개월 동안 갇혔다가 남한으로 추방된 뒤 중국 입국이 금지됐 다. 천 목사의 체포와 수감 소식은 한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키며 탈북자의 고통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는 계 기가 됐다. 레드와 화이트의 상황은 화이트의 온라인 고객 중에 그녀를 좋아하게 된 남자 덕분에 천 목사에게까지 알려 지게 됐다. 그 고객은 그녀가 원치 않는 일을 강요당하 고 있는 북한 여성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그녀에게 인 터넷으로 두리하나에 연락하는 방법을 알려줬다. 그녀 가 주인 몰래 보낸 구원 요청 이메일은 천 목사를 감동 시켰고, 그는 이 여성들을 구출하기 위해 중국 네트워크 를 가동시켰다. 그리고 레드와 화이트의 도주에 분개한 주인에게 이들이 혹시라도 잡힐까봐 이들의 이름을 지 하철도 탈북자 목록의 제 일 순위로 올렸다. 레드와 화이트가 초조하게 출발할 때를 기다리는 동 안, 몇 km 떨어진 곳에서는 또 다른 탈북자가 중국을 탈출할 수 있는 자기 차례가 빨리 오기를 기도하고 있었 다. (나는 그를 블랙 으로 명명했다.) 나는 조선족 선교 사의 주선으로 옌지의 한 음식점 독실에서 블랙을 만났 다. 그는 살을 에이는 강풍이 몰아치는 날에 입기에는 너무 얇은 진한색 나일론 재킷을 입고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은 수심에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김이 나는 설렁탕 을 먹으며 두려운 듯한 미소를 지었다. 나는 북한에 있 는 가족 보호 차원에서 그의 이름이나 북한 생활을 밝히 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그에게 확신시켰다. 그제서야 그는 말문을 열었다. 2년 전, 블랙은 언 두만강을 건너 탈출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 출신으로, 탈북자들 중에는 드문 고학력이다. 평양에서 경비 근무를 할 때, 노동자의 낙원 에팽배 해 있는 부패와 뇌물 현장을 목격하며 점점 환멸을 느끼 게 됐다. 그는 자신과 여자친구를 안내해 줄 브로커 비용 을 마련하기 위해 몇 년에 걸쳐 수백 달러에 상당하는 돈 을 모으며 탈출을 계획했다. 그러나 떠날 때가 되자 블랙 DURIHANA 2009/ 3 4 13
조용히 있을 것, 공안이 신분증 검사를 하러 오면 자는 척하거나 화장실에 숨을 것, 하나님께 기도할 것 등 탈북자에게 간단한 주의사항들이 전달됐다. 중국 공안이 대대적인 단속에 벌일 경우, 수백 명까지 체포될 수 있다. 신 분증이 없는 블랙은 40시간의 힘겨운 기차 여정 동안 자거나 취한 척하면 서 경찰 심문을 피했다. 중국 안내인이 라오스 국경 근처의 경찰 검문소들을 피해 뒷길로 운전하 는 동안 탈북자들은 차멀미를 참느라 애쓰고 있다. 현재 중국에서 탈출하 는 북한인의 80퍼센트가 여성이다. 은 차로 가면 눈에 띌 것을 우려해 도강 지점까지 걸어서 산을 넘겠다고 주장했다. 결국 7시간 동안 걷는 고행을 감수한 결과 발가락 신경이 영구적으로 손상됐다. 두만강 건너는 건 그 후에 일어난 일에 비하면 쉬웠 어요. 라고 블랙은 말했다. 그는 브로커에게 속아 조선 족 갱단에 팔렸고, 그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만강을 오가 며 마약과 돈을 운반하는 것이었다. 나는그일을거절 했어요. 라고 블랙은 말했지만, 그가 초기에 중국에서 어떻게 생존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한편, 여 자친구는 늙은 마약중독자에게 팔렸고, 그때부터 그녀 와 소식이 끊어지면서 그는 가장 힘든 시간을 견뎌야 했 다. 결국 블랙은 탈북자들 가운데 나도는 충고를 듣기로 14 DURIHANA 2009/ 3 4
했다. 십자가가 보이는 곳으로 찾아가라. 옌지 부근에는 30 여 개 교회들이 탈북자들에게 음식과 옷, 그리고 임시 거처를 마련해준다. 교회들은 목사가 공개적으로 기독교를 전파하지 않고, 탈북자 지원 사실을 드러 내지만 않으면 위험을 피할 수 있다. 교회 은신처를 찾자마자 블 랙은 성경 공부를 시작했고 신 실한 기독교인으로 거듭나며 천 목사의 주목을 받게 됐다. 천 목 사는 자신이 돕는 탈북자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기 원하지만 탈북자의 신앙은 일종의 생존수 단이기 때문에 피상적일 수 있 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다수 가 진짜 기독교인은 아니에요. 라고 그는 내게 말했다. 탈북 자들에게는 김일성을 믿는 거 나, 하나님을 믿는 거나 별반 다 르지 않습니다. 머리로만 바꿨 지, 가슴이 바뀐 건 아니지요. 블랙은 신앙심이 독실해 보 였다. 그가 얘기하는 동안 선교 사는 아주 흡족해 했다. 블랙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게 된 전환점은 함께 PC방에 갔을 때 였다고 선교사는 말했다. 블랙에게 김정일 사생활 을 쳐보라고 했죠. 컴퓨터 화면에 김정일의 여자관계와 혼외 자녀들을 다룬 기사들이 뜨자 평생 동안 기만당했 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표정을 짓더군요. 식사 중에 블랙은 작은 나무 십자가 목걸이를 셔츠 밑 에서 꺼내더니 마치 온기 있는 생명체인 양 손에 쥐었다. 제 꿈은 남한에 가서 신학교에 다니고, 고향으로 돌아 가 복음을 전하는 거예요. 내가 북한에서 성경을 소지 하고 있다가 잡히면 총살형을 당할지 모른다고 했더니, 블랙은 하나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마침내 그 순간이 왔다. 행동대원으로 활약하는 선 교사들이 천 목사에게 탈출 준비가 됐다고 알렸다. 먼저 베이징에서 윈난성까지 기차를 타고 3220km를간후, 정글 속을 힘겹게 걸어 산을 넘어야 한다. 라오스 쪽 메 콩 강까지 가기 위해서다. 일단 메콩 강을 건너면 태국 에 이르는데, 탈북자들은 여기서 난민 신청을 할 수 있 다. 먼저 레드와 화이트가 출발하고, 블랙은 며칠 후 다 른 그룹과 출발할 예정이다. 중국인 안내인은 레드와 화이트를 데리고 차로 베이 징까지 가서 기차역 근처에 있는 켄터키 프라이치킨 (KFC) 앞에 내려줬다. 이제 계획에 따라 다른 탈북자 3 DURIHANA 2009/ 3 4 15
라오스 탈북자들은 중국을 무사히 빠져나왔음에도 너무 지쳐서 기뻐할 기운조차 없다. 이들은 산과 정글 속을 16시간 동안 걸은 후에 잠시 휴식 을 취했다. 아직도 라오스에서 체포될 수 있기 때문에 관광객으로 가장하 기 위해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고 있다. 메콩강 강에 어둠이 깔렸다. 탈북자들은 어둠을 이용해 라오스에서 태국까지 데려다줄 배에 탄다. 명과 합류하기 위해 윈난성 수도, 쿤밍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한다. 나도 같은 기차에 타기로 했다. 천 목사가 탈 북자들에게 전달한 주의사항은 간단했다. 조용히 있을 것, 공안이 신분증 검사를 하러 오면 자는 척 하거나 화 장실에 가서 숨을 것, 하나님께 기도할 것, 그리고 만약 체포되면 도와준 사람들의 이름을 밝히지 말 것 등이다. 레드와 화이트는 기차에 오르자마자 침대칸의 맨 위 침대로 올라가 담요 밑으로 몸을 숨겼다. 가끔 머리를 내밀고 창밖을 내다보면, 석탄 매연이 자욱한 꽁꽁 언 밭과 도시의 겨울 풍경이 점차 사라지면서 초록색 밭과 울창한 과수원 풍경이 나타났다. 한 역에 잠시 정차했을 때 화이트는 얼른 뛰어나가 귤 한 봉지를 사오기도 했 다. 40시간의 여정 동안 경찰과 역원들이 몇 차례 기차 표와 신분증을 조사하러 올 때마다 레드와 화이트는 침 대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랬더니 그냥 지나갔다. 쿤밍에 도착하자, 이들은 거대한 역 대기실을 드나드 는 사람들 무리 속에 합류했고, 곧 다른 탈북자 그룹을 찾았다. 그룹 인솔자는 택시기사 출신인 30세 남자였 다. 그는 휴대폰과 위조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고 소통 가능한 중국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 귀여운 베레모를 쓴 18세 소녀는 레드와 화이트처럼 성 매매 업종에 종사했 었고, 또 다른 탈북자는 이미 한국에 정착한 딸에게 가 기로 결심한 57세의 중년여성이었다. 사람들로 혼잡한 보도에서 탈북자들은 천 목사가 고 용한 안내인을 기다렸다. 이들을 태국으로 안내해 줄 사 람이다. 확성기에서는 행진곡이 울려 퍼졌고, 계속해서 군인들이 행진하며 지나갔다. 시간은 아주 더디게 갔다. 지친 이들은 복잡한 거리에 눈이 동그래진 채 기둥 옆에 모여 있었다. 탈북자 5명이 밖에서 더 이상 오래 기다리 고 있으면, 공안이 와서 조사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 는 내가 묵을 호텔 방에 가서 기다리자고 제안했다. 그 후 몇 시간 동안, 탈북자들은 긴 소파에 앉아 TV를 재미있게 시청했다. 저 남자 너무 잘 생겼다. 한명이 생전 처음 본 톰 크루즈의 외모에 감탄하며 말했다. 이 들은 미니바에서 코카콜라를 꺼내 마시고 과일도 나눠 먹었다. 다음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조차 안 가 요. 채널을 바꾸며 화이트가 말했다. 그저 빨리 남한 에 갔으면 좋겠어요. 남한은 발전했고 부유한 것 같아 요. 검은 색 롱 부츠에 딱 달라붙는 청바지(북한에서는 불법)와 레이스 블라우스를 입고 하트 모양의 목걸이를 16 DURIHANA 2009/ 3 4
하고 있는 그녀의 외모만 보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레드도 더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마치 두려운 생각을 밖으로 짜내려는 듯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습이 불안해 보였다. 그녀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물었 더니 깜짝 놀라며 영어도 배우고 컴퓨터도 배울까 해 요. 라고 황급히 대답했다. 그렇게 먼 앞날까지 생각하 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마침내 안내인의 전화가 왔다. 다섯 명은 짐을 들고 서둘러 나갔다. 그런데 몇 초 후,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 다. 화이트였다. 그녀는 멋쩍게 웃으며 TV 리모트 컨트 롤을 돌려줬다. 헐렁한 체크무늬 셔츠에 캐주얼 바지를 입은 천 목사의 모습은 마치 아침햇살에 반짝이는 메콩 강의 누 런 물결을 바라보고 있는 여느 관광객과 다르지 않다. 그의 뒤편으로는 오토바이 소리, 코코넛이나 생선 사라 고 외치는 노점상 소리에 깨어난 태국의 소도시가 있었 다. 강 건너편 라오스의 울창한 숲에 점점이 서 있는 스 틸트(말뚝 기둥) 가옥 부근에서는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 의 움직임이 보였다. 전날 밤 서울에서 방콕으로 날아온 천 목사는 화이트와 레드를 포함한 탈북자들을 만나기 위해 이곳 메콩 강변까지 왔다. 그러나 이들이 중국에서 발이묶이게된탓에지금천목사가할수있는일은넓 은 강 건너편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천 목사가 고용한 안내인은 쿤밍 호텔에서 이들을 차 에 태워 산길로 라오스 국경 근처 은신처까지 데려갔다. 이들은 그곳에서 며칠 동안 발이 묶인 채 초조하게 떠날 날을 기다려야 했다. 라오스 국경일을 앞두고 국경 수비 가 삼엄해졌다는 소식을 들은 안내인이 여정을 계속하기 에는 위험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안처럼 라 오스 군 경찰도 탈북자를 체포하면 북송시키게 돼 있다. 이들이 여기서 기다리는 동안, 몰래 기차를 타고 중국 횡 단에 성공한 블랙이 도착했다. 잡힐 뻔했어요. 그가 탈 북자들에게 말했다. 경찰이 신분증을 조사하러 왔을 때 의식을 잃을 만큼 취한 척했더니 그냥 지나갔어요. 태국 초조해 하며 강을 건넌 후, 기사에서 화이트(왼쪽 여성)와 레드(오른쪽 여성)로 명명된 탈북자들이 태국 쪽 강변에서 이들 을 기다리고 있던 차량에 탄 후 뒷자석에서 몸을 움츠리고 있 다. 그날 두 여성은 방콕에 도착해 망명을 요청했다. DURIHANA 2009/ 3 4 17
방콕 미국 이민서류를 기다리고 있는 탈북자들이 두리하나선교회에서 운영하 는 은신처에서 성탄절 식사 전에 감사 기도를 드리고 있다. 서울에 본부를 둔 기독교 단체인 두리하나는 본 기사에서 다룬 탈북자들을 포함해 지난 10년간 700여 명의 탈북자들을 안전하게 탈출 시켰다. 천 목사는 여정이 지연됐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현재 탈출 여정에서 가장 위험한 구 간에 와 있습니다. 앞으로 걸어서 중국 국경을 넘은 후, 라오스를 통과해야 하거든요. 함께 메콩 강변에 서 있 을 때 그가 말했다. 여기에 안전히 도착할 확률은 50퍼 센트쯤 됩니다. 천 목사는 40세에 선한 사마리아 인의 소명을 발견했 다. 호텔 지배인이었던 그가 그 나이에 신학교에 가겠다 고 했을 때 친구와 가족들은 깜짝 놀랐다. 탈북자를 돕 고 싶은 마음은 1995년에 연변 지역 선교사로 갔을 때 숨어 지내는 탈북자들을 처음 만나면서 불붙었다. 이 들은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어요. 라고 그가 말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이들의 인권을 회복 시켜주는 겁니다. 천 목사의 활동이 동반하는 위험도 를 감안할 때 그의 기록은 괄목할 만하다. 지금까지 탈 북자 700여 명의 탈출을 진두지휘했으며, 실패한 경우 는얼마안된다. 북한정부는 내가 죽기를 원하죠. 라 고 그가 말했다. 그렇다고 이제 머리가 희끗희끗 해진 50대의 천 목사 가 교과서에 나오는 성자는 아니다. 중국에서 연락책으 로 활동하는 선교사들은 가끔 그의 단독적이고 무모한 결정에 불만을 토로하며, 그가 가장 신뢰하고 자주 이용 하는 안내인은 마약 밀매업자 출신이다. 그는 탈북자들 이 감사할 줄 모른다고 불평하기도 한다. 내가 탈출하 도록 도와준 사람들 중에서 고맙다고 전화한 사람은 30 여 명밖에 안 됩니다. 라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그들 이 나쁜 사람은 아니에요. 보상을 바라지 않고 남을 돕 는다는 걸 이해하지 못할 뿐이죠. 라고 덧붙였다. 거의 3주 가까이 은신처에 머물던 탈북자들에게 드 디어 이동하라는 지시가 내렸다. 이들은 어깨에 짐을 짊 어지고 마약 운반책 출신 안내인을 쫓아 벽지로 이동한 후, 밤새 산을 올라 황금 삼각지대(골든 트라이앵글)에 이르렀다. 중국, 미얀마, 라오스, 태국이 만나는 국경지 대이자 무법의 아편생산지이다. 이들은 어둠 속에서 초 목이 어지럽게 얽혀 있는 정글을 통과하고 거머리가 득 실대는 시내를 건너며 16시간을 힘겹게 걸었다. 안내인 18 DURIHANA 2009/ 3 4
이 환히 아는 루트다. 거의 1200m까지 올라가서야 라 오스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우리는 몸이 온통 젖고 더러웠어요. 라고 레드가 말했다. 길이 가팔라 자꾸 넘어졌죠. 나는 내내 울었어요. 다음날 오후, 이들은 안내인 친구 집에 도착했다. 그 리고 그 다음날 밤 늦게 차로 메콩강 근처까지 이동한 후 거기부터 감시 탑들이 늘어서 있는 강까지 걸어갔다. 레드에게는 어둠과 세찬 물살, 그리고 부근에 있을 라오 스 군인들의 존재 등이 뒤섞이며 기차로 중국을 횡단할 때보다 5분 동안 작은 모터 쪽배를 타고 태국 쪽으로 강 을 건널 때가 더 떨렸다. 혹시 잡힐까봐 더럭 겁이 났어 요. 여태까지 겪은 걸 생각할 때 무사히 탈출한다는 보 장은 없었으니까요. 태국 쪽에서 기다리던 두리하나 픽업 트럭은 이들을 버스 역까지 데려다 줬고, 이들은 10시간 후에 방콕에 있는 두리하나 은신처에 도착했다. 거기서 몇 주만에 맛 있는 식사를 하고 휴대폰으로 중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무사히 도착했다고 알렸다. 블랙은 기도가 응답 받았 다 고 외쳤다. 다음날 아침, 선교사는 이들을 한국 대사 관으로 데려갔고, 이들은 거기서 망명 신청을 했다. 이 제 탈북자들은 또다시 불확실한 상태에 돌입하게 됐다. 이들은 긴 대기명단에 이름을 올린 후, 버스를 타고 이 민국 구치소로 이동했다. 여기서 한국 관리들이 서류 절 차를 마칠 때까지 몇 달 동안 지내야 한다. 탈북자들로 만원인 구치소에 들어가 있다가 한국행이 확정되는 대로 풀려나는데, 세 사람이 있을 당시에는 한 주에 30~40명씩 풀려났다. 그때 구치소 여성 칸에는 450명이 수용돼 있었으나, 원래는 그 절반만 수용하도 록 지은 시설이었다. 앉거나 잘 공간도 없었어요. 온전 한 화장실은 2개밖에 없었고 공기는 끔찍했죠. 라고 화 이트가 말했다. 나갈 때가 된 사람은 차지하고 있던 2평 방피트쯤 되는 자리를 400달러에 판다. 돈이 없는 사람 은 낮에는 벽에 기대 서 있다가 밤에는 화장실에 들어가 잔다. 두리하나의 도움으로 레드와 화이트는 각각 3평 방피트의 자리를 샀다. 남성칸 역시 더럽지만 여성 칸처 럼 혼잡하진 않다. (그 이후에 한국정부가 입국 수속을 신속히 처리하면서 상황이 호전돼 지금은 그때처럼 혼 잡하지 않다.) 태국에서 80일 가까이 갇혀 있던 레드, 화 이트, 블랙에게 소지품을 챙기라는 지시가 전달됐다. 이 제 긴 여정의 마지막 구간을 마칠 때가 왔다. 비행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방콕 캄보디아와 미얀마 출신 불법 노동자들이 탄 버스가 이민국 구치 소로 들어오고 있다. 탈북자들도 한 국 입국을 기다리는 동안 수백 명씩 구치소 안에 수용돼 있을 때가 다반 사다. 한국정부는 일주일에 40여 명 씩 입국시키고 있다. DURIHANA 2009/ 3 4 19
도착한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얼굴을 계속 더듬으며 이게 꿈인가 생신가 생각했죠. 남한 사회복지가와 친지들이 교육을 마친 탈북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하나원 밖에서 기 다리고 있다. 서울 남한의 자유시민이 된 첫날, 블랙은 텅 빈 이 아파트가 마치 궁전처럼 여겨진다. 하 나원 탈북자 정착시설에서 교육을 마치고 나 온 블랙은 기독교인으로서, 사회복지시설에 서 준 쌀 한 자루와 중국에 숨어 살 때 몸에 지니고 다니던 나무 십자가만 갖고 아파트에 입주했다. 그는 북한의 종교 탄압 정책이 바 뀔 것으로 생각하진 않지만 언젠가 성경책을 갖고 북한으로 돌아갈 것을 다짐한다. 고향 에 가서 하나님 말씀을 전할 겁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가족에게 신앙을 전할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아요. 북한 사람들에겐 서울에 대한 첫 인상이 가히 충 격적일 수 있다. 레드도 이곳에 처음 도착한 순간 가슴 이벅차올랐다. 얼굴을 계속 더듬으며 이게 꿈인가 생 신가 생각했죠.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착륙할 당시 아 래로 펼쳐지는 건물들과 도로를 내려다보면서 느꼈던 흥분을 떠올리며 그녀가 말했다. 이들은 버스를 타고 한 강 변을 따라 서울 시내를 가로질렀다. 서울의 모습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사람들이 바쁘게 살아가는 풍요로 운 한국 사회의 전형을 보여준다. 탈북자들이 여태껏 접 해본 어떤 세계보다 더 복잡하고 낯설다. 한국에 대해 들은 정보라고는 한국은 적국이며 무자비한 자본주의 자들의 땅 이라는 북한의 선전이나, 북한으로 밀반입된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이미지들, 남쪽 낙원에 가면 손 쉽게 성공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환상이 전부였다. 2 년 동안 서울에서 산 한 탈북자는 자신이 겪은 문화충격 에 대해 간단히 북한과 한국의 차이는 100년을 뛰어넘 는것같다 고 말했다. 간첩 진위여부를 가리는 조사를 거친 후, 탈북자들은 경비가 철저한 경기도 안성시 소재 하나원이라는 시설 20 DURIHANA 2009/ 3 4
로 이동하는데, 거기서 2개월 간 남한 문화와 지하철 타 는 법, 은행 구좌 여는 법 등과 같은 실용 지식을 익힌 다. 교육이 끝나면 한국 시민권을 취득하고, 약 5000달 러의 정착 지원금을 비롯한 월 보조금과 주택임대 비용, 취업장려금 등을 지급받는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매년 월남하는 북한인 수 가 몇 십 명에 불과해 열렬한 환영과 파격적인 보상금을 받았고, 탈북자 대부분이 군부나 평양 출신 공산당 고위 층으로 중요한 정보자료를 갖고 왔었다. 그러나 2006년 부터 매년 평균 2000여 명씩 오고 있는 탈북자들은 몇 사람을 제외하면, 빈곤지역 출신의 농장 노동자, 공장 노동자, 하위층 군인과 사무원들이 주류를 이룬다. 평균 한국인과 비교했을 때 이들의 교육 수준과 기술은 현저 히 떨어진다. 몇 년에 걸친 영양실조와 굶어 죽는 가족 을 지켜봤던 고통으로 다수가 심한 육체적, 정식적 질환 에 시달리고 있다. 이런 불이익 때문에 탈북자들은 영 구적인 최하층 시민으로 전락할 위험에 처해 있다고 국 서울 블랙은 현재 공사장에서 일하며, 북한에 있는 가족을 데려오 기 위해 돈을 모으고 있다. 밤에 외출한 블랙이 서울의 현란한 조 명과 흥겨운 분위기를 즐기고 있다. 민대학교의 북한 전문가 안드레이 란코프는 말한다. 이 들의 남한 생활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부유하고 자 유롭지만 이들은 소속감을 갈망한다. 대부분의 남한 사 람들은 탈북자들이 겪는 어려움에 대해 무관심합니다. 라고 란코프는 말했다. 자신의 고통이 무시당한다는 건 거의 참기 힘든 폭력의 한 형태죠. 레드는 노크 소리를 듣자마자 공항 근처에 있는 12 층 아파트의 문을 열었다. 중국 호텔 방에서 황급히 나 가던 겁에 질린 짙은 눈동자의 십대 소녀였던 그녀를 본 지 8개월이 지났다. 정기적인 식사 덕분에 그녀 얼굴은 더 동그래졌고 팔도 더 통통해졌다. 머리는 붉은 색으로 부분 염색을 했고 검은색 진 바지와 티셔츠를 입고 있었 DURIHANA 2009/ 3 4 21
남한 남한에 도착한 지 며칠 만에 화이트(중앙)는 갑상선암 수술 을 받았다. 병실 밖에서 감사함에 압도된 화이트가 다른 탈북자 김 하나, 화이트의 탈출을 도와준 천기원 목사(오른쪽)와 함께 기 도를 드리고 있다. 다. 그녀는 입주한 지 7주 된 자기 집을 자랑스럽게 보 여줬다. 방 2개짜리 아파트는 먼지 하나 없을 정도로 깔 끔했고 침실에 놓인 매트리스 하나와 컴퓨터를 자랑스 레 올려놓은 책상말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벽에는 행복 행( 幸 ) 자가 적힌 핑크색 종이가 붙어 있었다. 김치-! 라고 그녀가 외쳤다. 치-즈 에 대한한국 버전을 사용하며 그녀가 새 카메라로 사진과 비디오를 찍었다. 그리곤 여느 남한 젊은이처럼 능숙하게 사진을 다운로드한 후 미국에 있는 내 아내에게 바로 전송했다. 레드는 내 무릎에 초콜릿바를 쏟아부으며 먹으라고 강력히 권했다. 내가 드물게 방문한 손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가 많아요? 라고 내가 묻자 그녀는 머리 를 세게 저으며 외부 사회에 대해 이해가 안 되는데 어 떻게 친구를 사귈 수 있겠어요? 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북한 말투에 대해 신경이 쓰이고 영어를 많이 섞 어 쓰는 남한사람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거의 외출하 지 않는다고 했다. 레드는 앞으로의 취업 가능성에 대해 서도 자신이 없었다. 언어 코스와 미용 강좌 등록비는 정부에서 매달 지급하는 400달러로는 감당이 안 되고, 고졸 학력으로는 저임금 일자리밖에 얻지 못할 전망이 다. 그녀는 벌써 주유소 일자리를 그만뒀고 지금은 카페 테리아 일자리를 찾을까 생각 중이다. 취업 면접 때 북 한사람이라고 말하는 게 겁나요. 온갖 불이익을 가져올 수 있으니까요.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생선 요리를 먹었다. 레드는 깔 깔대며 사진을 더 찍고 휴대폰으로 동료 탈북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며 컴퓨터 의 영어 발음을 연습했다. 이곳 생활은 힘들어요. 하지만 남한에 온 건 기뻐요. 자신의 보금자리로 돌아가기 전에 그녀가 말했다. 저 는 지금도 성공을 꿈꾸고 있어요. 북한에 계신 부모님이 저를 자랑스럽게 여기실 수 있게요. 화이트는 탈북자 정착 지원시설인 하나원에서 멀지 않은 지방도시인 천안의 한 병원 6인실에 입원해 있었 다. 하나원 의사들은 그녀에게서 갑상선 암을 발견하자 22 DURIHANA 2009/ 3 4
서울 지금까지도 자신의 이름이나 얼굴을 알리기 두려워하는 한 탈북자가 그의 미래만큼이나 정리 되지 않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의사시험고시를 준 비하다가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다. 북한에서 의사 였다가 지금은 한국 시민이 된 그는 과거 경력이 별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나 매일 자신이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를 되새긴다. 여기 서는 자유롭게 얘기하고 볼 수 있고, 음식 걱정을 안 해도 되잖아요. 마자 암 제거수술을 집도했다. 북한이나 중국에 남아 있 었더라면 사망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치유의 희망이 있다. 그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내게 인사를 하려고 힘 겹게 일어섰다. 수술 자국이 목 밑까지 나 있었다. 잘 웃 고 야한 옷을 입었던 감정이 풍부한 여성으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쉰소리로 속삭이듯 말하며 헐렁헐렁한 병원복 차림으로 불안정하게 움직인다. 천 목사님께 전화해 고맙다는 인사를 드렸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 다. 두리하나에서 진료비를 도와주고 있고, 가끔 천 목 사님이 오시면 함께 기도해요. 천 목사는 화이트가 이 제 독실한 기독교인이 됐다고 내게 말했다. 착하고 순 수한 영혼을 가진 진실한 여성입니다. 화이트는 벌써 자기 아파트에 가봤다. 먼저 컴퓨터 와 냉장고를 사고 싶어요. 라고 그녀가 말했다. 그리 고 북한 음식을 요리할 거예요. 그녀는 내가 쳐다보는 것을 알아챘다. 나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중국에서 방에 갇혀 1년을 보냈고, 태국에서 3개월 간 혼잡한 감 옥에 갇혀 있었으며, 지금은 병원에서 3개월째 지내고 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엄마의 사망과 남동생의 체포 소식도 들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저렇게 행복해 보일 까? 그녀는 택시 타는 곳까지 걸어 나와 내게 작별인사 를 고했다. 택시 안에서 뒤로 쳐다봤더니, 그녀는 넓은 하늘을 향해 미소 지으며 아직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블랙은 한강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서울 시내에 있는 아파트에 입주했다. 차 소리와 매미소리가 아파트 창문 을 통해 들렸다. 벽에는 중국에서 그가 꼭 부여잡고 있 던 나무 십자가 목걸이가 걸려 있고, 바닥에는 다른 책 들과 함께 성경책이 열린 채 놓여 있었다. 그는 아직 가 구를 장만하지 않았다. 모든 게 내가 기대했던 것보다 어렵고 복잡해요. 40세의 블랙이 말했다. 신학교 진학 에 대한 꿈은 대학 장학금이 35세 미만에 한해 지급된 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산산이 부서졌다. 그는 지금 현 재 공사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하고 있다. 북한에 있는 남동생과 여동생을 데려 오려면 돈을 빨리 벌어야 돼요. 라고 그가 말했다. 블랙은 자신이 불평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자 내게 사 과했다. 여기 온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서울에 서 벌어지는 시위 소식을 읽을 때면 기분이 좋아요. 내 가 북한에서 그랬다면 감옥에 갔을 겁니다. 우리는 저렴하고 시끌벅적한 식당들이 즐비한 대학가 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불러 탔다. 경적 소리가 요란하고, 표지판과 보행자들이 빠르게 지나갔다. 8개월 전, 중국 에서 선교사의 밴에 타고 있던 블랙은 어깨를 움추리고, 초조하고 불안한 눈초리로 십자가 목걸이를 꼭 쥐고 있 었다. 그런데 지금은 새 고국의 즐거운 소란함 속에서 눈을 감은 채 졸기 시작했다. 이제 그는 안전하고 자유 롭다. (번역 : 이소영) DURIHANA 2009/ 3 4 23
힘겨운 남한 적응기 고향생각, 좌절 그리고 새로운 다짐 : 갓 한국에 온 탈북자들은 오래전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의 경험을 통해 생소한 남한 생활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쉬운 게 하나도 없다. 이는 남한에 정착해 몇 년쯤 산 탈북자 대부분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터득한 교훈 이며 새로 온 탈북자들에게 줄 수 있는 충고다. 경기도 일산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윤성철(48)씨의 예를보자. 윤씨가 남한에 온건1996년이었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북한을 창살 없는 감옥 에 비유했다가 이 말을 엿 들은 누군가가 밀고를 하는 바람에 쇠사슬을 찬 채 끌려 가게 됐다. 그는 그 사실 외에 북한 생활에 대해 거의 얘 기하지 않았다. 윤 씨의 식당에 가면 직접 구워 먹는 차 돌박이와 느릅냉면을 맛볼 수 있다. 여기서 파는 음식 을 북한에서는 고위층 간부들밖에 못 먹습니다. 윤씨 가 말했다. 식당이 아주 좋다고 했더니 윤 씨는 웃으면서 자본 주의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터득하는 데 10년이 걸렸 다. 고 말했다. 식품 유통업을 할 때 고용한 경리 사원 에게 사기를 당했다며 그는 자신의 최대 약점으로 순진 함을 꼽았다. 자신감도 과했던 것 같다. 남한 여성을 따 라다니며 구애해 결혼에 성공했지만 지금까지도 부인이 윤 씨가 북한 출신이라는 사실을 친구들에게 숨긴다며 마음 아파했다. 윤 씨는 소떼가 찍힌 대형 사진이 걸려 있는 자신의 음식점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하지만 남한에서 10년을 넘게 살았는데도 여전히 불안하고 우울할 때가 많다. 북 한에 두고 온 부모형제도 그립다. 북한, 러시아, 남한 에서 다 살아봤어요. 그런데 가족과 헤어져 있으면 어디 에 있어도 행복해질 수가 없더군요. 그가 말했다. 탈북자들과 같이 일해 본 남한 사람들은 탈북자 중에 서도 10~20대가 적응할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생각한 다. 기근과 세뇌교육에 시달린 노년층에 비해 정신적 충 격이 덜하고 교육비 지원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김 윤희(30) 씨는 성공하겠다는 의지가 강한 탈북 여성의 전형이다. 밤늦게 서울 방화역 근처 임대아파트를 찾아 가 만난 김 씨는 이틀 동안 한숨도 못 잤다고 말했다. 하루 종일 영어공부와 안내데스크 아르바이트 일을 하 고 조금 전에야 집에 왔다. 전날 밤에는 친구들과 노래 방에 시설을 갖춘 술집에서 늦게까지 춤을 췄다고 한 다. 친구들은 대부분 같은 처지의 탈북자들이다. 반짝 이는 금실 장식의 검정 블라우스 차림에 윗 단추 몇 개 를 풀어놓은 김 씨의 겉모습만 봐서는 퇴근해 집에 온 여느 서울 사람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외 모만 같을 뿐이다. 김 씨는 매일 남한 생활에 적응하느 라고 고생하고 있다. 김씨는2002년 서울에 왔다. 자신을 중국에서 탈출 시킨 브로커에게 5,000달러 이상의 빚을 졌다. 남한에 와서는 직장을 두 군데 다니며 빚을 갚아야 했다. 지금 은 대학교에 다닌다. 그녀는 첫 학기가 최악이었다. 고 말했다. 교수님이 하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자 퇴하고 결혼이나 할까 고민도 많이 했어요. 그러나 힘들 지만 고생하면서 더 열심히 노력해야겠다는 결심을 하 게 됐죠. 사람 사귀는 일도 어렵다. 모임에 가면 사람 들이 영화배우, 음악, 정치 이야기를 하는데 아는 게 있 어야죠. 김 씨는 말했다. 집에 오자마자 인터넷 검색 을 했어요. 다음 번엔 대화에 어떡하든 끼어보려고요. 모를 땐 웃으면서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해요. 김 씨를 비롯해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왜 남한에 왔 죠? 라는 질문에 확실한 대답을 가지고 있다. 인간답 게 살려고 왔지요 한 탈북자의 간단명료한 대답이 이 들의 심정을 잘 대변해준다. 24 DURIHANA 2009/ 3 4
서울 남한에온지5년된탈북여성 김윤희(27세)가 중국어를 전공하고 있는 한양대학교 캠퍼스에서 강의를 들으러 가고 있다. 겉만 보면 여느 대학생이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건 외모뿐이다. 2001년에 북한을 탈출할 때까지 그녀가 외부세계에 대해 아는 것은 거 의 전무했다. 지금도 새 세상에 살면서 적응이 안 되고 정보가 부족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고 말한다. 사랑의 천사를 찾습니다 중국 땅에서 유리방황하며 인신매매나 어쩔 수 없는 상황 속에서 탈북 여성들의 원치 않는 결혼으로 태어나 버려지고 방치되어 있는 무국적 탈북고아들을 기도와 물질로 후원하는 사랑의 천사를 기다립니다. 중국의 마을 곳곳에 국적 없는 아이들이 약 1만~2만 명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호구에 오르지 못한 탈북자이기 때문에 아이들 역시 호적이 없습니다. 이들은 학교진학을 못 하는 것은 물론 병원치료도 받을 수 없습니다. 실제 로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유령 같은 존재로 살아가야 하는 불쌍한 어린 영혼들이 하나님 사랑 안에서 건 강하게 양육되고 꿈과 희망을 잃지 않도록 탈북어린이 고아원인 천사의 집에 많은 사랑과 관심과 기도를 부탁드 립니다. 일반후원 - 아동의 양육비, 교육비, 생활지도비 및 천사의 집 운영비 물품후원 - 아동생활용품(의류, 신발류, 문구류 등), 교육자료, 성경 등 DURIHANA 2009/ 3 4 25
新 이학준 기자 arisu01@chosun.com 중국과 북한의 국경은 요지경 세상이다. 국경이 무너진 탓이다. 몰래 국경을 넘어오는 것은 북한산 마약에 그치지 않았다. 밤이 되면 북한의 젊은 여자들도 강을 넘어왔다. 이들은 중국 농촌으로, 유흥업소로 팔려갔다. 20대 중반의 여자는 5000위안에 흥정됐다. 그것이 정해진 가격이다. 국경 에서 여자의 가격을 깎으려다 칼에 찔리는 일도 있었다. 젊은 여자가 씨받이와 품앗이로 평생을 보내야 할 대가는 한국 돈으로 68만원에 불과했다. 물론 국경을 건넌 모든 여자가 팔려가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한국의 친척을 만나기 위해 강을 넘는 행운 아도 있다. 취재팀이 만난 금숙과 은숙 자매도 그랬다. 그러나 10년 만에 만난 자매는 한국과 북한의 차이를 확인하고 등을 돌렸다. 다시 만난 지 일주일 만이었다. 박금숙(가명 29)씨는 남한에서 대학을 다니고 박은 숙(가명 26)씨는 북한에서 공장을 다닌다. 금숙씨가 1998년 1월 북한을 탈출했다. 그리고 중국에서 숨어 지내다가 2004년 10월 공안에 붙잡혀 북송됐다. 보위부에서 풀려난 금숙씨는 다시 국경을 넘었다. 한 번 자유를 맛보니 도저히 못살겠더라 고했다. 2004년 12월 말이다. 그리고 두리하나선교회의 도움으로 태국 을 거쳐 한국으로 왔다. 금숙씨는 대학생이다. 중어중문학과 2학년. 도망치던 시절에 배운 중국어가 도움이 된다. 두리하나선교 회에 나가 봉사활동도 한다. 가끔 스스로 신기하다. 내가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다른 이를 돕고 있다니. 금숙씨는 남한에서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피붙이, 동생을 북한에서 빼낼 작정이 었다. 부모는 일찍 사망했다. 하루 5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고 정부지원금도 아껴 모았다. 하지만 동생은 영영 연락이 닿지 않았다. 2007년 3월, 언니는 모아둔 100만원을 꺼내 중국에 있는 동생 또래 탈북자에게 26 DURIHANA 2009/ 3 4
보냈다. 그래, 일단 사람 살리고 보자. 도움을 받은 탈북자가 말했다. 언니, 고마워요, 죽어도 잊지 않을게 요. 2007년 10월, 마침내 동생에게서 소식이 왔다. 금숙씨는 모아둔 돈을 전부 꺼냈다. 두리하나선교회도 이들을 도왔다. 중국 옌지( 延 吉 ), 2007년 11월 25일. 자매가 재회했다. 헤어지고 만나는 데 꼬박 10년이 걸렸다. 언니와 동생은 껴안고 한참을 울었다. 눈물은 아무리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첫날은 그렇게 지나갔다. 언니는 동생 을 데리고 남한으로 갈 생각이다. 대학도 보내고 시집도 보내야지. 다음날 동생이 말했다. 나는 돌아가 갔다. 사회주의를 지켜야지. 억장이 무너졌다. 금숙씨가 동생을 설득했다. 그 잘난 장군님이 다 굶겨 죽였다. 북한에서 몇 명이 배고파 죽었는지 아니? 300만명이 넘게 죽었다. 인구 너무 많으니까 죽었겠지. 죽은 사람이 있어야 살아나는 사람도 있지. (남한 은) 배급도 안주잖아. 내 굶어 죽을 거다, 자본주의에 살면. 그래, 지켜라, 지켜. 어서 가서. 언니는 포기하고 싶다. 언젠가 남한하고 우리 북조선이 통일되면 수령이 하나 되갔지? 통일이라는 게 하나가 된다는 건데. 같은 하늘에 태양이 두 개 있을 수 있는가. 그럼 우리 장군님이 하게 생겼지. 그러면서 동생이 노래를 한다. 아~ 조국~ 사회주의 만만세~. 언니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결국 나를 버리고 그렇게 못사는 데를 가겠니? 동생은 고개를 떨군다. 같 이 있으면 좋겠는데. 조국을 버리고 어떻게 가나. 일주일째 똑같은 언쟁. 자매를 숨겨 준 인권운동가의 집에는 늘 냉랭한 공기가 흘렀다. 새 옷을 사주고, 시내 구경을 나가며 머리를 매만져 주는 언니의 손길은 떨렸다. 이렇게 떠나가면 마지막이 아니겠습니까. 한국 돌아가면 나 미칠 것 같아요. 금숙씨가 취재팀에게 고함을 질렀다. 동생은 그런 언니가 싫지는 않다. 언니가 어디에 있든지 난 내가 끝까지 가서 같이 살라고 했지. 그래도 (조국을) 배신할 수는 없지 않아? 12월 2일. 은숙씨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나 돌아가갔다. 동생 손을 꼭 쥐고 있던 금숙씨는 결국 통곡한 다. 안 보내고 싶어, 안 보내고. 북한에서 똑같이 교육을 받고 사상무장을 했던 언니는 안다. 동생은 언니 의말을듣지않을것이다. 북한으로 은숙씨를 데려갈 브로커가 기다리는 곳으로 자매가 떠났다. 차에서 내린 자매는 꼭 끌어안고서 떨어질 줄 몰랐다. 브로커가 자매를 떼어냈다. 해가 저물면 동생은 강을 건너 북한으로 가야 한다. 마침내 동생을 태운 차량이 떠나갔다. 언니는 차가 보이지 않는데도 자리를 뜨지 못했다. 차량 속에 대기 중인 취재팀에게까지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10년 만에 만나 일주일 동안 함께 보낸 짧은 재회. 그 리고 영원한 이별이었다. [이학준기자는 조선일보 특별취재팀의 일원으로 2007년 5월부터 10개월간 중국, 러시아, 라오스, 태국, 일본, 영국, 미국 등 전 세계 9개국 2만km를 누비며 온갖 어려움과 위험을 무릅쓰고 흩어져 있는 탈북자들을 밀착 취재해 다큐방송 천국의 국경을 넘다 - 탈북 10 년보고서 를 통해 처참한 이들의 인권유린실태를 국제사회에 알려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DURIHANA 2009/ 3 4 27
글 / 박금숙 (가명 29) 그냥 기억 속에 서서히 사라져가는 아픔들, 데려오고 싶어도, 그냥 포기했어 야만 했던 그 장면들이 오늘 이 글을 통해서 다시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동생을 떠나보내고 일 년 넘게 소식이 없던 동생이 며칠 전 전화가 왔다. 다른 사람을 통해서 전화가 왔을 때 그동안 그렇게 기다렸던 전화였기에 바로 전화를 했는데 기쁨 대신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소식에 눈물이 소리 없이 흘러내렸다. 이제 연락이 오면 언니 나 여기서 더는 못살겠어, 날 데려가줘 라고 졸라대 는 동생의 목소리를 기대했었는데, 나에게 들려오는 소리는 나 결혼해 하는 소리뿐이었다. 동생의 결혼은 내가 꼭 챙겨 주고 싶었고, 그동안 못했던 모든 것을 다해 축복해 주고, 또 이곳에서 좋은 사람 만나서 그동안 고생했던 것 모두를 잊고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싶었는데, 이젠 결혼식장에도, 결혼하는 모습도, 살아가는 모습도 볼 수 없음에 서운하고, 마음이 아파서 그냥 수업시간 내 내 눈물만 흘러내렸다. 보고 싶어도, 가고 싶어도 못가는 고향이기에 더 아팠는지도 모른다. 그런 동생이 미 련해 보이고 또 그런 동생이기에 더 안타까운 내 마음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28 DURIHANA 2009/ 3 4
그래 네가 선택한 길이니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살아야 돼 라고 말해주며, 쿨하게 축하해 주고 도와주고 싶 었는데, 그냥 눈물이 나와서 별말을 못하고 그냥 냉랭하게 내일 전화를 하겠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한 참을 울고 나서 사모님에게 전화를 했다. 그래도 옆에 나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어서, 또 위로해 줄 사람들이 있어서 난 얼마나 행복한가? 그런 후에 감사하기로 했다. 그냥 아프면서도 내색을 할 수가 없었다. 다른 분들이 걱정하는 거, 바라지도 않았고, 또 그런다고 해결되는 일도 아니고 그냥 나 모르게 눈물이 흐를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 눈물을 닦 으면서 나는 나 스스로 외치고 있다. 하나님이 지켜 주실꺼라고, 내가 하나님 앞에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응 답하심을 믿기에 매일매일 기도한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해서, 나 한 사람의 헌신으로, 나 한 사람의 믿음으로 우리 가족이 다 안전하고, 또 사람 을 통해 역사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동생 가족을 지켜 주심을 믿기에 지금은 이렇게 글로써 나의 심정을 전 하고 있는 것이다. 글로 쓰면서 위로를 받고, 글로 쓰면서 또 내 마음을 다잡으면서 그렇게 살아가노라면 언젠가는 만날 수 있다는 꿈도 꾸면서 동생 결혼식 3월 15일, 주일날 결혼식을 드리는 동생을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날 기도로 축복해 주는 일 밖에 없어서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파온다. 비록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동생이지만 그날만큼은 하나님의 축복을 듬뿍 받으면서 결혼식장에 들어가는 동생 모습을 그려보고 싶다. 나는 볼 수 없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동생과 함께 하시고, 또 동생의 앞날을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간절히~기도드 리면서 빨리 통일이 되었으면, 빨리 저 북한에도 전화통화가 가능했으면, 빨리 영상 폰이 되어서 전화로 얼굴을 보 면서 이야기를 할 수 있었으면 DURIHANA 2009/ 3 4 29
두리하나 이모저모 탈북자 한인사회 관심 절실 본보 방문 탈북자 김주성씨 탈북자 인권에 대한 한인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길 기대 합니다. 3일 본보를 방문한 탈북자 김주성(31)씨는 중국정부가 탈북자 강제 북송을 중단하고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해야 만 탈북자 인권이 개선될 수 있다 며 중국정부는 최소한 동남아시아 제3국으로 향하는 중국 내 탈북자들의 탈출로만 은열어줘야한다 고 강조했다. 지난 2000년 북한을 탈출해 2003년 한국에 도착했다는 김씨는 탈북 이후 절대절명의 순간마다 길을 열어 주신 하 나님의 은혜를 증거하기 위해 뉴욕까지 오게 됐다 며 본인 의 탈북 이후 폐병을 앓던 부친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족들 과 함께 탈북,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하나님께서 보여 주셨 던 놀라운 섭리를 간증할 예정 이라고 밝혔다. 현재 한양대학교에서 경영학을 전공 중인 김씨는 지난 9년간 730여명의 탈북자를 구해낸 두리하나선교회의 도움으로 한국에 입국할 수 있었다 며 아직도 중국에는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인 탈북자들이 수도 없이 많아 한인 사회의 따뜻한 관심과 도움이 절실하다 고 덧붙였다. 김씨와 함께 뉴욕을 방문한 김주(80) 권사도 중국에서 돌보 던 탈북 청소년 10명이 한국 입국을 위해 현재 제3국에 체류 중 이라며 이번 간증집회를 통해 탈북자들의 실상이 뉴욕한인사회에 알려져 탈북자 인권에 대한 한인사회의 관심이 높아지길 기대한다 고 밝혔다. 탈북자 김주성씨 초청 간증집회는 6일오후8시 뉴욕성서교회, 8일오전11시 코맥감리교회, 13일 8시30분뉴 욕교회에서 각각 열린다. 미주한국일보 이진수 기자 2009-03-04 뉴욕 간증집회에 나선 탈북자 김주성(오른쪽부터)씨와 김 주 권사, 두리하나 USA 김영란 상임이사가 본보를 방문, 한 인들의 많은 관심과 참여를 당부하고 있다. 졸업과 입학을 축하합니다 이병희 전도사(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졸업) 최상준 전도사(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과 입학) 최유진 전도사(백석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과 입학) 이원규 형제(안양대학교 신학대학원 목회학과 입학) 김은경 자매(총신대학교 신학과 입학) 김영순 자매(총신대학교 유아교육과 입학) 김진아 자매(그리스도대학교 유아교육과 입학) 박은선 자매(감신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입학) 2009년도 두리하나 문화센터 봄맞이신학기 원어민영어 특별강좌 개설 루 던 시(Lucy)선생님 : 매주 목요일 오후 6시 (Dunn)선생님 : 매주 토요일 오전 11시 제임스(James)선생님 :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30 DURIHANA 2009/ 3 4
두리하나 독자마당 추운 날씨에 잘 계신지요? 두리하나 선교회에서 보내 주신 소중한 자료 잘 받았습니다. 특히 보내 주신 영상물 천국의 국경을 넘다 를 통해서 최소한의 인권조차 보장 받지 못하는 북한주민의 처참한 삶을 볼 수 있었고, 우리 부대 장병들이 가져야 할 마음자세와 건전한 복무의식을 높이는 교육 자료가 될 것임을 기대하고 확신합니다. 또한, 두리하나 선교회에서 하시는 모든 일이 숭고한 일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군도 맡은 바 임무에 최선을 다해서 수행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아무쪼록, 하시는 일 모 두 잘되시길 빌며 두리하나 선교회에 계시는 모든 분들의 건강을 기원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유익하고 귀중한 자료를 보내 주신 점 정말 감사드립니다. - 이규섭님 2009. 01. 23 조선일보에 게재된 탈북자 이야기를 읽고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저의 형제들인데 너무 오랫동 안 모르고 지냈으니 미안한 마음만 드네요. 작은 도움이나마 기도하고 휴대폰으로 후원결재를 했습니다!! 자주 방문해서 기도로 물질로 협력하겠습니다!! - 김관동님 2009. 01. 16 우연히 서울트레인(Seoul Train) 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고 정말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 다. 저는 지금 19살이고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어쩌다가 언론에서 탈북자란 말을 듣고 그냥 지나쳤는데 영상물을 접한 뒤에는 그 심각성을 더욱 깨달았습니다. 하루빨리 북한의 죄 없는 시민들과 탈북자들의 인권이 보장되는 날이 오길 또 중국은 국제 법규를 지키고 북한시민들의 인권을 보장해 주 는 날이 오길 간절히 바라고 기도드리겠습니다. - 이만수님 2009. 01. 14 두리하나 독자마당 은 두리하나선교회의 홈페이지(http://www.durihana.com)에 남겨 주신 동역자분들의 사연 으로 만들어집니다. 홈페이지를 방문해 주신 동역자분들의 기도와 격려에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앞으로도 관심 어린 참여와 변치 않는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 편집부 DURIHANA 2009/ 3 4 31
두리하나 수기 천사의 집을 다녀와서 김영순 (2008년 입국) 여러분들의 기도 덕분에 천사의 집에 건강히 잘 다녀왔습니다. 제가 중국 천사의 집에 가게 된 것 은 하나님의 뜻과 저의 꿈이 있었습니다. 중국에서 갈 곳이 없어 방황할 때 저 또한 천사의 집 에서 아이들과 함께 6개월을 살았었습니다. 천 목사님을 만나기 전까지는 꿈도 목표도 없이 그냥 하 루하루 노예처럼 살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님과 연결이 되어 두리하나 쉘터로 갈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저와 같은 처 지의 탈북자와 고아들이 있었습니다. 처음 사흘이면 갈 줄 알았던 한국행이 뜻하지 않게 석 달이 지 나도 넉 달이 지나도 출발 소식이 없어 그냥 그렇게 아이들과 함께 살게 되었었습니다. 처음에는 화도 나고 하루하루 짜증만 더해 갔습니다. 매일 성경공부와 기도만 시키고 선교사님의 말씀이 제 귀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형식적으로 기도하며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그렇게 형식 적으로 기도하면서도 북한에 있는 저의 가족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그때만큼은 진 심으로 가족과 만나게 해달라고 애절하게 빌었습니다. 그런 저의 모습을 보신 하나님은 저의 애절한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사랑하는 언니와 형부 조카까지 만나게 되었고, 자유의 땅 한국까지 무사히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하나님께 회개했습니다. 하나님은 없다고 믿었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한 후 마음이 변하고 얼굴이 변하고 생활과 삶이 변하면서 누군가에게서 제 마음을 녹이듯이 뭉클하게 만들어 주는 느낌을 받았고 성경을 열심히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보 면서 하루하루 저에게도 꿈이 생기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 마음 에 새겨졌습니다. 저의 꿈은 중국에 있는 우리 탈북 고아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 입니다. 드디어 저의 꿈의 첫 발자국을 내딛게 된 것입니다. 비행장에 내리는 순간 그곳은 영하 20도가 넘는 매서운 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었습니다. 제가 있던 곳은 천 사의 집 3호 알로하였고 아이들은 국이, 장강이, 민이, 남천이, 남지, 선화 모두 6명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이 다 아시겠지만 그 아이들은 탈북자의 자녀들로 하나같이 엄마가 없는 무국적 고아들입 니다. 아빠가 계시지만 무능력한 탓으로 아이들을 돌볼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애들 나이는 5살에 32 DURIHANA 2009/ 3 4
저의 꿈은 중국에 있는 우리 탈북 고아들과 함께 마음을 나누며 예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 입니다. 서 11살 가까이 되고요.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2명, 나머지는 집에서 조선족 선생님과 함께 공부를 합니다. 처음에는 제가 애들한테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가르쳐야 할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저에게 아이들은 먼저 다가와 손을 잡으며 눈을 맞추어주면서 말을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그 아이의 모습을 보며 저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 다. 엄마 없이 새어머니 손에서 눈치 보며 살던 어린 시절 생 각에 살짝 눈이 젖었습니다.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이 아이들한테 친구가 되어주면 되 겠구나 나도 같이 아이가 되어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공부를 하고 같은 게임을 하면 아이들과 마 음이 잘 통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역시 맑고 순수한 아이들이었습니다. 다음날부터 아이들의 시간표 에 맞추어 오전에는 수학과 우리말 공부를 하고 오후에는 중국어를 가르치고 운동도 하며 하루가 순 간에 흘렀습니다. 올해로 다섯 살인 선화는 우리말과 글을 다 읽고 쓰고 암산도 잘하는 아이입니다. 낮잠 시간에 같이 아이들 옆에 누웠습니다. 옆에 누운 선화가 울고 있었습니다. 왜 우냐고 물어보니 아빠가 보고 싶어서라고 말하는 선화는 소리도 못 내고 울고 있었습니다. 보고 있는 저도 눈시울이 젖어들고 있었지만 차마 애 앞에서 같이 울 수 없어 눈물을 애써 감추며 달랬습니다. 아이들이 잠들 고 난 후 혼자서 기도했습니다. 마지막 날 아이들과 헤어지며 이모 갔다가 학교 졸업하면 또 올께, 잘 있어 했더니 모두들 아무런 반응이 없었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어 보니 다들 또 온다고 하고서 오는 사람이 없다며, 거짓말쟁이라며 울 음을 터트립니다. 순간 멍해지며 이 아이들에게 어떻게 말을 해줘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눈물 흘리는 아이들을 뒤로한 채 저미는 가슴을 안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저는 금년 3월에 대학교에 진학하였습니다. 많이 부족하고 어설프지만 여러분들의 기도와 관심 속 에서 꿈이 아닌 것 같은 저의 꿈이 실현되어 하루빨리 천사들과 같이 생활하며 사랑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간절히 소망해봅니다. DURIHANA 2009/ 3 4 33
탈북자 연재수기 감옥 체험기(3) 凍 土 (동토 :얼어붙은 땅) 천상 (여, 29세) 나하고 한 감방에 있던 언니가 식구들하고 같이 몽 골에서 붙잡혀 왔는데 이제 취급이 다 끝나면 정치범 교화소에 가야 한단 다. 애들은 청진에 있는 고아원에 버려지고 남동생하고 남편이 같이 있었 다. 그 언니는 교화소에 갈 생각을 하니 너무 무서워 하루에 서너 번은 까무 러쳤다. 내가 죽으면 우리 집 식구들 은 또 어떻게 하나. 그런 저 런 생각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며칠이 지나서 모든 감방 죄수들을 불러 내오더니 남자 손과 여자 손을 한 쌍씩 수갑을 채우고 어디론가 데리고 간다. 우리가 머리를 숙이고 걸어 가자 선생이 하는 말이 야 다들 머리 높이 쳐들라우. 동북 여행을 다 하고 왔는데 뭐가 무서워? 머리 다 들라우 그런다. 흥! 동북이란 말은 어찌 알 가? 나는 걸어가면서 속으로 그렇게 생각을 했다. 선생이 하는 말이 영화관에서 군중 심판을 한단다. 우리가 들어서자 사람 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중에는 나를 알아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보안 서장이 나와서 누구는 언제 중국에 갔으며 어디에 있었고 누구와 살았고 어 찌 어찌 하여 붙잡혀 나오게 됐다고 자세히 보고를 한다. 남조선 괴뢰도당 들은 이틈을 타서 우리 같은 탈북자들을 이용하여 안으로부터 와해를 시키 려 든다고 말도 안 되는 엉터리를 불어친다. 나는 연변에 있을 때 전 북한 로동당 비서 황장엽 선생님이 쓰신 회고록 을 비롯해 일찍 탈북해 한국에 간 탈북자들이 쓴 글이나 그 내용을 주제로 한 영화도 여러 번 봤었다. 나는 그걸 보고서 비로소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사실이 거짓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지금 북한 사람들이 김일성이나 김정일이 꼭두각시가 되어 아무것도 모 르고 배가 고파 나무껍질을 벗겨먹으면서도 풀뿌리를 캐어 먹으면서도 김 정일 장군 만세를 외치고, 한목숨 바칠 각오를 하고 있다. 어처구니가 없어 서 쓴웃음이 나왔다. 그 자리에서 그런 게 아니라고 막 소리를 치고 싶었다. 34 DURIHANA 2009/ 3 4
하지만 불쌍한 북한 사람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받아야 한다. 세 번이나 당해야 한다. 미치겠네. 그렇게 못사는 게 다 철천지 미국 놈들과 남조선 괴뢰 도당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 아버지도 함흥 에서 군사 복무를 22년을 하셨는데 지금도 그렇게 알고 계신다. 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 미국 놈이고 철천지 원 쑤이다. 나는 집에서 아버지와 몇 마디 대화도 제대로 나누지를 못했다. 내가 슬그머니 아버지와 단둘이 있는 기회에 아버 지 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지 아세요? 그러자 아버 지가 험한 얼굴을 하시고 몰라서 묻냐고 나를 노려보시 는 것이다. 그 후로 나는 아버지와 한마디도 하지를 않 았다. 군중심판이 끝나고 나가는데 앉아 있던 사람들이 마구 일어나서 우리 머리를 끄당기고 가래침이 날아오 고 잣 껍데기가 날아오고 우리는 넘어져서 발길에 채우 고 짓밟히고 그렇게 한 삼십 분을 당하고야 나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나는 창피하지가 않았다. 나는 이 우물 안에 개구리들아 정신 좀 차려라 하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 었다. 삼 일이 지났는데 청년 동맹원들만 또 불러내어 영화관에서 사상 투쟁회를 한단다. 감방 안에 청년 동맹 원이 모두 여자 둘 남자 둘이였다. 보안서장이 보고를 하고나서 다음은 비판이 있겠습니다 하자 사람이 저 저마다 일어나 책상을 탕탕 두드리며 어찌 키워주고 먹 여주고 무료로 공부도 시켜준 장군님 은혜를 잊고 조국 을 배반하고 중국에 갈수가 있냐고 집중 공격을 한다. 이런 배반자들과는 한 하늘을 이고 살 수가 없다며 엄중 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울분에 차서 토론을 한다. 아 니 우리가 뭐 조국을 배반하고 싶어서 중국에 갔어요? 배가 고파서 먹을 걸 찾아갔지. 사상 투쟁회는 세 시간 이나 걸렸다. 끝이 나고 감방에 돌아가는데 선생이 니들 속으로 욕하려면 해라. 나는 그래도 또 간다. 지금 그렇게 생각 을 하구 있지 그런다. 잘 알고 있으면서 말은 왜 해 요? 그렇게 두 번이나 군중심판을 받고 이제 재판도 내 재판은 12월에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그날이 바로 내 생일이었다. 나를 불러내더니 재판 받으러 가잔다. 재판을 받으러 가니 내가 다니던 공장 사람들이 다 모이 고 집식구들도 다 모였다. 재판장이 내가 한국에 가려다 가 붙잡힌 게 아니고 중국에 있다가 왔기에 관대하게 봐 준다며 1년 판결을 내렸다. 나는 흥 1년이면 금방인데 감옥에서 나오는 날로 다시 간다. 그렇게 속으로 생각 을 했는데 나에게 그 1년이 그렇게 비참한 1년이 되고 10년만큼 길게 느껴질 줄을 나는 몰랐다. 예전에 감옥에 갔다가 온 사람이라고 하면 모두가 업 신여기고 따돌림을 당하고 그랬는데 내가 죄수가 되여 감옥에 다 가다니 하는 생각을 하니 기가 막혔다. 그것 도 배가 고파 먹을 걸 찾아 갔다는 게 죄가 되어 재판이 끝이 나고 집식구들과 마지막으로 만나게 해 준다고 취급실로 다 불렀다. 생일이라고 집에서 없는 살 림에 하얀 밥을 해오고 계란을 삶아왔다. 나만 혼자 먹 었다. 아버지와 엄마는 내가 아무리 권해도 드시지를 않 았다. 목이 메여 밥이 넘어가지를 않았다. 12월 22일 제일 추운 동짓날에 우리는 감옥에 가는 길에 나섰다. 가게 된 곳은 평안남도 증산군에 있는 11 호 단련대란다. 엄마는 집에 있는 돈이 될 만한 물건은 다팔아콩을사그걸볶아갈아서10킬로가 되게 나에 게 감옥에서 먹을 식량을 만들어 주었다. 처음에는 그걸 몰랐는데 그 콩가루가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거기에 가 서야 알게 되었다. 가는 길에 나는 너무도 무거워 그걸 다 두고 갈려고 했는데 선생이 하는 말이 그게 없어서 죽은 애들이 많으 니 무거워도 다 가지고 가라고 했다. 나는 무서웠다. 나 도 갔다가 죽으면 어찌하나! 죽으면 중국에 다시 못 가 면 어떻게 하지, 내가 죽으면 우리 집 식구들은 또 어떻 게 하나. 그런 저런 생각에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DURIHANA 2009/ 3 4 35
차가 없어서 우리는 삼십 리를 걸어서 연수라는 곳까 지 갔다가 겨우 청진까지 가는 차를 잡아 탈 수가 있었 다. 청진 역에 도착을 하니 대합실에는 거지들이 욱실거 리고 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꽉 차 있었다. 비닐박막 을 펴고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워 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 사이로 거지들이 먹다 남은 찌꺼기라도 주워 먹으려고 사이사이를 누비고 다니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꽃 사세요. 꽃 사세요 하면서 다니는 여자들도 있었다. 그러면 그 여자를 둘러싸고 남자들이 흥정을 한다. 나는 처음에 무슨 꽃을 팔러 다니는지 궁 금해서 우리를 호송하는 선생에게 물어보았는데 몸 파 는 여자들이란다. 나는 깜짝 놀랐다. 어머, 어떻게 북한에도 몸 파는 여 자들이 다 있는가. 말로만 사회주의요, 뭐요, 하지만 이 미 북한은 내부로부터 이미 썩을 대로 썩고 부패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그렇게 쓰레기를 주어먹고 몸을 팔면서 살아야 하면서도 김정일 장군님이 없으면 조국도 없다 는 노래를 하면서 살아야 한다. 기가 막혔다. 청진 역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20명가량 되는 사람 들이 손에 손을 밧줄로 이어 묶고 갑자기 들이 닥치는 것이다. 모두가 월경자들이란다. 지금 호송이 되여 가는 중이란다. 그중에는 할머니도 있었다. 청진 역에서 하 루를 기다렸는데 기차가 왔다.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우 리는 오를 수도 없었다. 그러자 선생이 우리 손에 수갑 을 채우고 소리를 지르란다. 같이 가던 애들이 수갑 찬 손을 마구 흔들면서 길 내라 길 내라 하니까 사람들이 나이도 많지 않은 여자들이 손에 수갑을 차고 마구 소 리를 지르자 옆에 있던 사람들이 이상한 눈길로 보면서 슬슬 피한다. 덕분에 우리는 기차에 오를 수가 있었다. 기차 안에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콩나물시루 같았다. 그 많은 사람들 위로 어떤 사람들은 벌벌 기여 다니기도 했다. 사람이 너무 많아 숨쉬기도 힘들었다. 범죄 후송이기에 우리는 단속 칸에 겨우 들어갈 수 있었다. 자리는 없어 그냥 서 서 가지 않으면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가야 했다. 손에는 그냥 수갑을 차고 있었다. 정전이 되면 기차는 가다가도 멈춰 서곤 했는데 어떤 때는 다리를 건너다가도 멈춰 서서 반나절이 걸려서야 다시 움직일 때도 있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만한 거리 인데 한국은 두 시간이면 간다고 하는데 그만한 거리를 우리는 일주일을 갔다. (계속) 2008년 11월 21일 중국에서 탈북녀 천상 사랑의 전화 제3국에 숨어 지내는 탈북자는 국제 미아입니다. 해당 국가의 경찰에 잡히기라도 하면 강제로 북한으로 끌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루하루를 불안에 떠는 사람들 이들에게는 잠을 청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식량과 옷과 자유를 향한 탈출경비가 필요합니다. 전화 한 통화(5,000원)로 탈북자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습니다. ARS 060-700-1021 36 DURIHANA 2009/ 3 4
모든 차종 고가매입, 저가판매 자동차 매매알선, 위탁관리, 등록대행 무보증할부 36개월 가능 위탁판매 전문 신용카드 할부 가능 방문출장 환영 소비자 직거래 판매 전화상담 환영 Car Manager/부장 김 광 호 (2002년 입국) 서울특별시 강서구 등촌동 14-7 (한성단지 203호)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TEL : (02) 3663-8686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H P : 016-766-2155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FAX : (02) 3663-6004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입금계좌 : 국민은행 459601-01-246655 웰빙시대의 건강식품 웰빙시대의 북한 건강식품 주문상담 : 016-452-8348 느릅냉면 느릅찐빵 예로부터 북한에서는 귀한 손님이 오거나 명절이 되면 느릅나무를 재료로 한 느릅국수를 만들어 먹습니다. 백두식품에서 개발된 느릅냉면과 느릅찐빵은 탈북자들의 자활공동체 기술로 제조되었습니다. 택배비(3,000원) 본인 부담. 50BOX 이상 무료배송 느릅냉면 1BOX (10인분, 육수 포함) 10,000원 느릅찐빵 1BOX (25개 入 ) 10,000원 교회나 단체 간식용으로 좋습니다. www.hoduhodu.com 매장에서 직접 구운 최고급 호두과자로 선물하세요. 선물용: 부모님, 명절선물, 답례품, 병문안 선물 간식용: 손님접대, 학교간식, 유치원, 회의용 단체주문 : 행사용(단체주문은 미리 전화주세요.) 호두호두 의왕본점 : 031-421-0035 (주일휴무) DURIHANA 2009/ 3 4 37 사단법인 두리하나에서는 탈북자분들의 자립과 취업을 돕기 위해 탈북자 사업장 무료광고를 지원하고 있습니다. 독자여러분들의 많은 기도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후원자분들의 사랑의 손길에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들의 귀한 사랑과 희망을 정성스럽게 전달하겠습니다. 12월 후원자 (주)가한, (주)건축사사무, (주)미래의보물섬, (주)오르비스인터내셔날패션, (주)인프로스, 가산교회예수인청년회, 강기정, 강승민, 강승호, 강용곤, 강준모, 강지연, 강 태주, 강학만, 강한주, 거여중앙교회, 경산교회, 경화교회, 고경철, 고종중, 고형식, 구영선, 구창회, 권명혜, 그린항공, 김경온, 김광석, 김광해, 김근호, 김기화, 김덕 환, 김동진, 김동희, 김련기, 김만나, 김명설, 김명철, 김명학, 김미자, 김민경, 김병기, 김상곤, 김상문, 김상일, 김석모, 김성곤, 김성우, 김세정, 김세한, 김수민, 김수 지, 김순남, 김승진, 김신화, 김영호, 김영희, 김옥선, 김옥인, 김용, 김용숙, 김윤옥, 김윤화, 김은규, 김은정, 김재성, 김정권, 김정규, 김정란, 김정아, 김정일, 김정희, 김종섭, 김종한, 김종희, 김주, 김중희, 김지민, 김지현, 김진달래, 김진식, 김찬현, 김창희, 김철봉, 김철수, 김춘심, 김태희, 김해정, 김현선, 김현숙, 김현우, 김현진, 김환호, 김훈섭, 나눔있는교회, 남궁견, 남능희, 남서울교회538목장, 남양주광염교회, 노광금, 느티나무어린이집, 대구열린교회, 대림평화교회, 대전늘푸른교회, 두 레27-2, 등대교회윤영숙, 디지틀조선일보, 문지숙, 민경환, 박갑성, 박공주, 박국인, 박기철, 박대용(송림교회), 박덕일, 박석봉, 박석호, 박순용, 김창열, 박승용, 박영 구, 박영근, 박영란, 박영선, 박운규, 박은경, 박정옥, 박종찬, 박지영, 박지은, 박춘식, 박현숙, 박현주, 박화순, 박희봉, 반월중앙교회, 방재목, 방정오, 방정오외16인, 배점숙, 배진호, 백봉현, 백성칠, 백창욱, 복음사랑교회3여전도회, 사랑에메세지, 상동21C교회, 새빛교회, 새희망교회, 생명샘전원교회, 서미옥, 서승우, 서용수, 서 원탄, 서유진, 서자영, 서장혁, 설재희, 성종원, 손민호, 손용찬, 손윤미, 송기쁨, 송내중앙감리교회, 송명순, 송명희, 송미원, 송승엽, 송영선, 송재환, 송학승, 순복음 제일교회, 신광화학공업(주), 신민철, 신상철, 신원철, 신정원, 신준식, 신치호, 신호명, 심순복, 심태영, 써드베이스, 안덕숙, 안병균, 안숙현, 안승희, 안옥화, 안용민, 안재찬, 양명희, 양성욱, 양윤식, 양은주, 양철호, 양현자, 어원경, 엄점희, 에이레네치유선교센터, 연미(전주비빔밥명가), 예원교회, 오가영, 오미경, 오수현, 오영숙, 오편렬, 온세계교회청년부, 온천교회, 유정순, 유종근, 유혜숙, 윤백영, 윤성대, 윤소영, 윤영기, 윤정자, 윤정혜, 윤주형, 윤지혜, 이강임, 이건휘, 이계선, 이광삼, 이 기문, 이대우, 이동교, 이미숙, 이미정, 이민희, 이병인, 이상미, 이석교, 이석기, 이성조, 이성칠, 이숙, 이연숙, 이연희, 이영란, 이영숙, 이영호, 이예진, 이완형(성암 교회), 이용택, 이운학, 이윤옥, 이은경, 이인환, 이재춘, 이정미, 이정숙, 이정아, 이정훈, 이주영, 이주형, 이찬원, 이찬형, 이창직, 이천주, 이하림, 이학준, 이헌종, 이 혜경, 이화숙, 이희정, 임금모, 임요한, 임유진, 임진희, 임창윤(오주치과), 임채홍, 임한섭, 장경우, 장석규, 장이찬, 저도밀알교회, 전광식, 전나라, 전복림, 전세기, 전 영애, 전영종, 전용범, 전진용, 전호열, 정경영, 정명철, 정상광, 정선양, 정수진, 정숙희, 정영섭, 정영택, 정인화, 정재영, 정태후, 정혁진, 정현수, 정혜선, 정희화, 조 덕기, 조말선, 조수미치과의원, 조윤자, 조창연, 조희진, 좌봉림, 주는교회(대전), 진미정, 진인수, 창원임마누엘교회, 창원한빛교회, 채임순, 천기원, 천안장경, 천안장 로교회, 천화숙, 철원감리교회, 청원유치원, 최남선, 최범귀, 최성일, 최용진, 최인숙, 최재수, 최정규, 최정아, 최향열, 최향자, 최형인, 최혜숙(소연), 최혜숙(은수), 큰 사랑교회, 하영숙, 하태옥, 하현미, 한경자, 한국기독교장로회한라, 한국철도공단(신우회), 한긍수, 한동호, 한상현, 한승분, 한현구, 허성천, 허원, 현병제, 홍경원, 홍 기철, 홍숙자, 홍혜영, 황경하, 황적홍, 황혜성, 황희숙, 무명(15명), 월요모임헌금, 핸드폰후원(7명), ARS후원(15명), 캐나다코너스톤교회, 호주루터교회이종수목사 1월 후원자 (주)가한, (주)미래의보물섬, (주)백두식품, (주)오르비스인터내셔날패션, 가산교회예수인청년회, 강기정, 강승호, 강용곤, 강준모, 강지연, 강학만, 거여중앙교회, 경산 교회, 경화교회, 고경철, 고형식, 구영선, 구장회, 권명혜, 권혁제, 기쁨의교회, 김광석, 김광해, 김기화, 김덕환, 김동미, 김동희, 김련기, 김명설, 김명철, 김명학, 김 미자, 김민경, 김병기, 김봉녀, 김상문, 김석모, 김선정, 김성곤, 김성우, 김세정, 김세한, 김수민, 김수지, 김순남, 김승진, 김신화, 김영천, 김영호, 김영희, 김옥선, 김 용, 김용태약국, 김윤숙, 김윤옥, 김은규, 김은정, 김자원, 김재성, 김정권, 김정란, 김정아, 김정희, 김종섭, 김종한, 김종희, 김주, 김주성, 김중희, 김지민, 김지현, 김 진달래, 김진식, 김진영, 김창희, 김철수, 김해정, 김현선, 김현숙, 김현진, 김훈섭, 나눔있는교회, 남광우, 남능희, 노광금, 노숙향, 느티나무어린이집, 대구열린교회, 대구태현교회, 대림평화교회, 대전주는교회, 등대교회윤영숙, 문지숙, 민경환, 박공주, 박석봉, 박석호, 박승용, 박영구, 박영란, 박영선, 박종찬, 박주연, 박지은, 박춘 식, 박한숙, 박헌, 박현숙, 박화순, 박희봉, 반월중앙교회, 배진호, 백봉현, 백창욱, 빛과소금교회, 사랑의메세지, 상동21C교회, 새빛교회, 새희망교회, 생명샘전원교 회, 서미옥, 서승우, 서용수, 서원탄, 서유진, 서자영, 설재희, 성종원, 손민호, 손용찬, 손윤미, 송림교회, 송명순, 송명희, 송미원, 송승엽, 송영선, 송학승, 순광교회, 순복음제일교회, 숭인교회, 신미정, 신민철, 신준식, 신진영, 신치호, 심명식, 심순복, 심태영, 안병균, 안숙현, 안옥화, 안용민, 양명희, 양성욱, 양윤식, 양은주, 양철 호, 양현자, 어원경, 엄점희, 엄태복, 에이레네치유선교센터, 예원교회, 오가영, 오미경, 오영숙, 원명옥, 유애영, 유종근, 유혜숙, 윤백영, 윤성대, 윤영기, 윤정혜, 윤 지혜, 이강임, 이건휘, 이광삼, 이기문, 이대우, 이동숙, 이미숙, 이미정, 이민희, 이병인, 이상미, 이상언, 이석교, 이석기, 이성조, 이성칠, 이성화, 이재덕, 이숙, 이영 숙, 이예진, 이용택, 이운학, 이유근, 이윤정, 이은효, 이인환, 이정미, 이정숙, 이정아, 이정훈, 이주형, 이지형, 이찬원, 이찬형, 이하림, 이헌종, 이혜경, 이화숙, 이희 정, 임요한, 임유진, 임진희, 임창윤(오주치과), 장경우, 장석규, 장현길, 저도밀알교회, 전나라, 전복림, 전세기, 전영종, 전용범, 전진용, 정석희, 정선양, 정수진, 정숙 희, 정영섭, 정월숙, 정재영, 정정임, 정진희, 정태후, 정혁진, 정현수, 정희화, 조경애, 조덕기, 조수미치과의원, 조우철, 조윤자, 조창연, 조희진, 좌봉림, 진미정, 진 인수, 창원임마누엘교회, 창원한빛교회, 채임순, 천기원, 천안장경, 천안장로교회, 천화숙, 철원감리교회, 최남선, 최미경, 최성규, 최용진, 최인숙, 최정규, 최정아, 최 향열, 최향자, 최형인, 최혜숙(은수), 케이아이꼬, 하경희, 하영숙, 한경자, 한국기독교장로회한라, 한국철도공단(신우회), 한긍수, 한동호, 한상현, 한승분, 한현구, 함 순옥, 허성천, 허원, 현병제, 홍경원, 홍기철, 홍베르타, 홍혜영, 황재동, 황적홍, 황혜성, 무명(10명), 월요모임헌금, 핸드폰후원(8명), ARS후원(41명) 두리하나 문화센터 두리하나문화센터에서는 2009년도 신학기를 맞이하여 봄맞이 원어민 영어 특별강좌를 개설하였습니다. 수강을 원하시는 분은 사무실로 신청 바랍니다. 1577-9121 교육과목 교육시간 교육장소 원어민 영어회화 교실 검정고시 교실 예능 교실 루시(Lucy) 던(Dunn) 제임스(James) 김재형 박해인 홍현희 피아노교실 기타교실 드럼교실 미술교실 매주목오후6시 매주토오전11시 매주토오후1시 매주 토 매주 토 매주 토 매주 월~토 오후 1시 매주토오후3시 매주수오후5시 매주토오전10시 믿음방(2층) 믿음방(2층) 믿음방(2층) 믿음방(2층) 믿음방(2층) 믿음방(2층) 두리하나교회(3층) 두리하나교회(3층) 두리하나교회(3층) 두리하나교회(3층) 38 DURIHANA 2009/ 3 4
후원자분들의 사랑의 손길을 정성스럽게 전달하겠습니다. 북한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방법 물품후원으로 동참 기도로 동참 - 개인의 기도시간에 탈북자들과 북한을 위하여 기도 - 새것은 물론이고 사용하지 않는 작은 물품이라도 귀하게 사용됩니다. (헌 옷, 폐지, 폐컴퓨터 등) - 각 교회에서 탈북동포주일 지키기 운동에 참여 - 두리하나 월요모임에 참석하여 함께 기도 선교헌금으로 동참 계좌이체 자동이체 신청하시면 매월 자동으로 결제가 됩니다. 자동이체 (CMS) 신청서를 작성하셔서 보내 주시거나 전화 예금주 : (사) 두리하나 로 신청하시면 편리합니다. 아래 계좌로 후원금을 입금해 주시거나 계좌 이체를 은행에 가시는 것이 번거로우신 분은 전화신청 1577-9121 농협은행 : 088-17-007375 외환은행 : 335-22-03034-7 지 신한은행 : 100-023-334747 로 지로를 이용하실 경우 (사)두리하나 지로번호는 국민은행 : 342301-04-012737 우리은행 : 122-387319-13-001 7661361번입니다. 지로용지가 필요하신 분께는 우 체 국 : 012872-01-002780 발송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Bank of America bofaus3n(swift code) 사랑의 전화 004129740302(account number) 수표는 Payable to : Durihana, Inc.로 기록해 전화 한 통화로 탈북자들에게 희망을 전할 수 있습니다. 주시기 바랍니다. ARS 060-700-1021 한통화 5,000원 이 밖에 두리하나 홈페이지 www.durihana.com 을 방문하시면 핸드폰 결제, 신용카드 결제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후원 회원이 되시면 후원금은 연말정산 시 소득공제 혜택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북한선교 소식지 두리하나 를 발송해 드립니다. 북한선교를 위한 탈북 영상물을 신청하신 분들께 보내드립니다. 대한예수교 장 로 회 두리하나교회 담임목사 천 기 원 Rev. Ki Won Chun 서울 동작구 사당동 39-18 건화빌딩 3층 교회 T.02)3477-2191 F.02)532-2517 예배시간안내 주일 낮 예배 주일찬양예배 수요저녁예배 새벽기도회 오전 11시 오후 2시 저녁 7시 오전 5시 금요철야기도회 청년부(토요일) 유 초등부 주일예배 저녁 9시 오후 4시 오전 10시
두리하나 Vision 사단법인 한국 홈페이지: www.durihana.com E-mail: durihana@korea.com 주소:156-090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39-18 건화빌딩 2층 TEL:1577-9121 FAX:02-532-2517 북한에도 복음의 빛이 그 막대기들을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 하라 네 손에서 둘이 하나가 되리라 (겔 37:17) 두리하나는 북한동포들에게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남과 북 이 하나가 되게 하며 평화통일에 헌신할 일꾼들을 양성하여 남북이 하나님의 공동체로서 하나가 되게 하는 평화운동을 수행하고자 합니다. 두리하나의 받은 바 소명은 탈북자들을 통하여 닫혔던 북한의 복음의 문이 열리게 하고 이 사역을 진행함에 있어 중국교회와 연합하여 다가올 21세기 통일한국 시대가 이루어 질 때에 예루살렘과 땅 끝까지 주님의 명령에 동참하는 Back to Jerusalem 사역을 완성시키는 것입니다. 21세기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에게 가장 큰 선물로 통일한국 을 주실 것입니다. 통일한국을 위하여 북한에도 복음이 전해지는 그날까지 우리의 무릎과 두 발로 헌신하고자 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가고 계시는 북한선교사역에 성도님들의 많은 기도와 관심 부탁드립니다. USA 홈페이지: www.durihana.net E-mail: durihana@gmail.com 주소:Durihana, Inc P.O.Box 3451 Mclean, Va 22103 TEL:703-347-4428 Board of chairman in Durihana, Inc. USA Rev. Cho Young Jin TEL:301-646-0644 Coordinator in Durihana, Inc. USA Kate Lee 日 本 홈페이지: www.durihana.com/japan/ E-mail :durihana_jp@yahoo.co.jp 주소: 132-0015 東 京 都 江 戶 川 區 一 之 江 6-13-3-202 TEL:03-3655-7866 秋 元 直 美 발행인 사)두리하나 KOR이사장 김진홍 목사 USA이사장 조영진 목사 대표 천기원 목사 주소 서울시 동작구 사당동 39-18 건화빌딩 2층 TEL 1577-9121 FAX 02-532-2517 E-MAIL durihana@kor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