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전략 37호(1p-4p) 최종



Similar documents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¹é¹üȸº¸ 24È£ Ãâ·Â

ITFGc03ÖÁ¾š

ROK-WhitePaper(2000).hwp

공동성명 포함내용 비교

....pdf..

152*220

È޴ϵåA4±â¼Û

- 2 -

5 291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중등용1)1~27

(012~031)223교과(교)2-1

º´¹«Ã»Ã¥-»ç³ªÀÌ·Î

10월추천dvd

141018_m


2 Journal of Disaster Prevention

6) 송승종길병옥, ' 군용무인기개발의역사와그전략적함의에대한연구,' 군사 제 97 호, ) 최근공개된자료에따르면주한미군은기간중 268 회의무인기비행을수행한것으로알려졌다.

나하나로 5호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³»Áö_10-6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CR hwp

단양군지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01¸é¼öÁ¤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178È£pdf

ÃѼŁ1-ÃÖÁ¾Ãâ·Â¿ë2

¾ç¼ºÄÀ-2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03-교통이야기

0.筌≪럩??袁ⓓ?紐껋젾 筌

춤추는시민을기록하다_최종본 웹용

Çѹ̿ìÈ£-197È£

소식지수정본-1

2015년9월도서관웹용

#Çѹ̿ìÈ£-172È£

041~084 ¹®È�Çö»óÀбâ


#7단원 1(252~269)교

에너지절약_수정

문화재이야기part2

현장에서 만난 문화재 이야기 2

<C1DF29BCF6C7D02031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ad hwp

Jkafm093.hwp

60

**09콘텐츠산업백서_1 2

DocHdl2OnPREPRESStmpTarget

ÆòÈ�´©¸® 90È£ ³»Áö_ÃÖÁ¾

2저널(11월호).ok :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bm hwp

( 단위 : 가수, %) 응답수,,-,,-,,-,,-,, 만원이상 무응답 평균 ( 만원 ) 자녀상태 < 유 자 녀 > 미 취 학 초 등 학 생 중 학 생 고 등 학 생 대 학 생 대 학 원 생 군 복 무 직 장 인 무 직 < 무 자 녀 >,,.,.,.,.,.,.,.,.

2ÀåÀÛ¾÷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CC hwp

82-대한신경학0201

현안과과제_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_ hwp

11+12¿ùÈ£-ÃÖÁ¾

CC hwp

<BFA9BCBABFACB1B8BAB8B0EDBCAD28C6EDC1FD292E687770>

4-Ç×°ø¿ìÁÖÀ̾߱â¨è(51-74)

개회사 축 사

* pb61۲õðÀÚÀ̳ʸ

한국방위산업학회제 17 권제 2 호 2010 년 12 월 한국군워게임체계의발전방안에관한연구 김시정 1 최봉완 2 내용목차 1. 서론 2. 국방과워게임체계 3. 한국군의워게임체계 4. 결론 1 해군제7기동전단소령 2 한남대학교국방전략대학원교수 논문접수일 : 2010 년

hwp

연구노트

»êÇÐ-150È£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 89 -

ÀÚ¿øºÀ»ç-2010°¡À»°Ü¿ï-3


2013_1_14_GM작물실용화사업단_소식지_내지_인쇄_앙코르130.indd


<3034BFEDC0CFBDC2C3B5C7CFB4C2C1DFB1B9BFECB8AEC0C7BCF6C3E2BDC3C0E52E687770>

2저널(2월호)0327.ok :40 PM 페이지23 서 품질에 혼을 담아 최고의 명품발전소 건설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질의응답 시간에 여수화력 직 DK 한국동서발전 대한민국 동반성장의 새 길을 열다 원들이 효율개선, 정비편의성 향상,

!¾Ú³×¼öÁ¤26ÀÏ

[NO_11] 의과대학 소식지_OK(P)

<342EB5BFBACFBEC6B0E6C1A6C0CCBDB42838BFF9292E706466>

歯이

레이아웃 1

2009_KEEI_연차보고서

피해자식별PDF용 0502

할렐루야10월호.ps, page Normalize ( 할 437호 )

<B3B2C0E7C7F62E687770>

allinpdf.com

2015현엘 내지.indd

KFF56È£¼öÁ¤

¿©¼ºÀαÇ24È£

¾Æµ¿ÇÐ´ë º»¹®.hwp

년 2 월 1 1일에 모 스 크 바 에 서 서명된 북 태 평양 소하 성어족자 원보존협약 (이하 협약 이라 한다) 제8조 1항에는 북태평양소하성어류위원회 (이하 위원회 라 한다)를 설립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제8조 16항에는 위원회가 을 채택해야 한다고 규정

03 ¸ñÂ÷

1

Transcription:

STRATEGY 21

STRATEGY 21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5 STRATEGY 21 통권37 호 Vol.18, No.2, Autumn 2015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함 명 수 * 1) Ⅰ. 시작하는 글 Ⅱ. 창군 과제와 성과 1. 무( 無 ) 에서 유( 有 ) 를 창조 2. 숙군( 肅 軍 ) 3. 몽금포작전 4. 대한해협해전 승전보 Ⅲ. 6ㆍ25전쟁과 대한민국 해군작전 성과 1. 육군 제17연대 구출작전 2. 한국은행 지금 방출 3. 해군작전통제권 예하부대 이양 4. UN 해군작전과 한국 해군 5. 해상수송작전 Ⅳ. 베트남전 파병과 한미동맹 공고화 Ⅴ. 대한민국 해군의 원자력잠수함 필요성 Ⅵ. 맺는 글 * 제7대 해군참모총장

6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Ⅰ. 시작하는 글 대한민국 해군창설은 어느 국가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힘찬 출발이자, 모 든 역경을 극복한 성공사례이며, 전례에 드문 발전모델이다. 해방 이후 창군과 정에서 접한 이념대립, 재정적 어려움, 열세한 전력구조, 준비되지 않았던 상 황 하에 맞이한 6ㆍ25 전쟁 그리고 휴전에 이은 북한의 군사적 위협상존 등으 로 대한민국 해군은 그야말로 험난한 과정을 거쳤으며, 이를 극복하여 오늘에 이르러 세계 속의 위대한 해군 위상에 이르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 해군은 창군기 이후 접한 북한의 위협에 대응하던 연안해군 또는 열세한 해군력에서 북한의 위협을 적극적으로 억제시키고 역내 안보 안 정과 평화에 기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중견국 해군의 발전모델로 성 장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은 대한민국 정부와 국민 모두가 해군을 믿고 지원해 준 결과이자, 해군 구성원인 해군 전 장병이 노력한 성과물이다. 우리는 이후 에도 이러한 모멘템을 적극적으로 지속시키고, 발전시켜 대한민국 해군이 한 반도를 뛰어 넘어 위대한 미래 국가발전을 수호하는 국가 전략군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지원해주고 믿어야 한다. Ⅱ. 창군 과제와 성과 1. 무( 無 ) 에서 유( ) 를 창조 有 1) 8ㆍ15 해방이 곧 자주독립으로 착각한 우리는 사상과 이념의 대립으로 정 국( 政 局 ) 이 혼미( 昏 迷 ) 한 상태에 빠져 있던 해방공간 ( 解 放 空 間 ) 에서 출발한 우 리 국군을 배 없는 해군, 장비 없는 육군, 비행기 없는 공군 이라고 말한 사가 ( 史 家 ) 들의 논평은 결코 허구( 虛 構 ) 가 아니었다. 특히 패전( 敗 戰 ) 을 맞은 조선 총독부는 일본인들의 안전 귀국을 보장받고, 후일 조선인민공화국 부주석을 지낸 건국준비위원회 여운형 ( 呂 運 亨 ) 위원장에게 치안을 넘겨주고 한반도에서 1) 함명수, 바다로 세계로 ( 서울: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7.) 참조.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7 빠져나갔다. 그 공백을 채운 것은 혼돈 그 자체였지만,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은 조국과 민족을 위하여 이 몸을 삼가 바치나이다. 라는 기치( 旗 幟 ) 를 높이 들고 1945 년 11월 11 일 서울 관훈동 옛 표훈전에서 해군의 전신인 해방병단 ( 海 防 兵 團 ) 을 창단했다. 그리고 바로 간부( 장교) 양성을 위하여 해군사관학교의 전신 인 해군병학교에서 생도를 서울, 부산, 진해 등 전국 각지에서 모집하였는데 필자는 서울에서 응시하여 합격자 명단의 말석을 차지했다. 해군은 3군 중 가 장 먼저 출발하였으나 인적ㆍ 물적 자원은 전무했다. 육군과 공군의 경우, 일본 육군사관학교와 만주 또는 중국 군관학교 출신의 장교들이 있었지만, 우리 해 군은 외국 사관학교 출신이 한 명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해군의 기본 자산인 군함 역시 단 한 척도 없었다. 해군사관학교 1기생들은 함상실습 차 미 7 함대 구축함에 파견되었을 때, 처 음으로 5 인치 포가 달린 구축함을 타 보았다. 필자와 동기생 김기룡 사관생도 는 CIC 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는데 많은 고생을 했다. 당시에는 헌병( 憲 兵 ) 이 MP (military police), 방첩대 ( 防 諜 隊 ) 가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 라 는 단어에는 익숙해 있었지만, 미 해군 구축함에서 처음 접한 CIC가 Combat Information Center 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구축함 함장 이하 전 승조 장병들은 한국해군 생도들에게 친절하였고, 오늘날 필자가 인터넷 도메인 ID 로 사용하고 있는 spike 도 당시 미 구축함 함장이 내게 붙여 준 별명이다. 이처럼 무( 無 ) 에서 출발한 우리 해군이 지난 2011 년 1월 아덴만 해상에서 소말리아 해적에게 피랍된 우리의 1 만 톤 급 상선 삼호 주얼리호 을 구출한 아 덴만여명작전을 성공적으로 완수하여 대양( 大 洋 ) 해군으로서의 면모( 面 貌 ) 를 세계에 과시했다. 오늘날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민족은 역사적 과오 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을 반복한다. 는 미국의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 (Geore Santayana) 의 격언( 格 言 ) 을 상기하면서, 해군창설 70주년을 맞이하여 오늘의 도전을 극복하고 위대한 미래를 위하여 망각( 忘 却 ) 의 늪 속에서 이삭줍기를 하 는 심정으로 파란만장 ( 波 瀾 萬 丈 ) 했던 지나온 뱃길을 고찰하고자 한다. 2. 숙군( 肅 軍 ) 창군 당시 남로당 ( 공산당 ) 은 일반 사회는 물론 그 조직을 군 내부까지 깊이

8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침투시켜 군의 반란과 함정 납북( 拉 北 ) 등 만행( 蠻 行 ) 을 서슴지 않고 있었다. 미 군정은 1948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하여 독립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헌법 제정, 제헌국회 ( 制 憲 國 會 ) 의원들을 뽑는 총선( 總 選 ) 을 5월 10일에 단행한다는 것을 공포했다. 그러자 총선을 방해하기 위한 공산당의 격렬한 시위가 4월 3일 제주도에서 시작되었다. 소위 4ㆍ3 사건이다. 총선을 3일 앞둔 5월 7 일, 우리 해군( 당시는 조선해안경비대 ) 의 JMS( 일본제 소해정 ) 통천정이 동해경비 중 내부에 잠복하 고 있던 공산분자들이 정장과 부장을 살해하고 38 선 이북으로 납북했다. 3개 선거구 중 남제주군 1 개 선거구만이 간신히 마친 총선( 북제주군의 2개 선거구 는 무효) 직후인 5월 15일에는 YMS( 미국제 소해정 ) 고원정이 내부의 공산분자 들에 의해 납북되었다. 이러한 사건은 당시 조선경비대인 육군에서도 일어났 다. 1948 년 6월 18일 제주도에 주둔하고 있던 제11연대장 박진경 대령이 부하 문상길 중위 일당에 암살된 사건이 발생했다. 광복절인 8월 15일 대한민국 정 부가 수립되고 국군은 해군과 육군으로 정식 출발하였으나, 내부 공산분자들 의 분열 공작은 계속되었다.( 공군은 1949 년 독립). 정부는 내홍( 內 訌 ) 이 계속 되고 있던 제주도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여수의 육군 제14연대에 출동명령을 하달하였으나 내부에 잠복하고 있던 공산분자들의 방해공작으로 출동이 좌절 되고 이 사건은 여수ㆍ 순천 반란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정부와 군 수뇌부 에 숙군( 肅 軍 ) 문제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초미( 焦 眉 ) 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지금까지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우리 해군의 몽금포작전도 바로 이러한 숙군작 업의 일환이었다. 군 수뇌부가 숙군문제를 적극적으로 검토하던 1948 년 김태선 치안국장 ( 서 울시장 역임) 은 군 내부 좌익분자들의 활동에 대한 극비 정보자료를 이승만 대 통령에게 보고했다. 이 보고에 경악( 驚 愕 ) 한 대통령은 바로 미 군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을 경무대로 불러 당신네가 국군을 만들면서 좌우익을 가리지 않 고 아무나 받아들이는 바람에 군 내부가 이지경이 되고 말았소. 전적으로 당신 네들이 책임을 지고 이 사태를 수습하시오. 라고 강력히 항의했다. 이에 로보 츠 준장은 이 문서를 이응준 육군참모총장에게 넘겨주며 그 대책을 상의했다. 육군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 헌병사령관 신상철 대령이 오전 1시경 이응준 육군참모총장의 안암동 관사로 불려갔다. 이 총장은 문서의 출처와 경위를 설 명해주며 극비리에 숙군작업을 진행시키시오. 라고 지시했다. 우리가 건네 받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9 은 문서는 이불 보따리만큼이나 많은 방대한 분량이었다. 2) 이응준 육군참모총장도 그의 자서전 회고 90 년 (1982) 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국회의원 십 수 명과 함께 개성, 백천, 연안 등지의 38선 경비현황을 시찰하 고 일몰 후 돌아왔다. 귀가 직후 집안사람들이 귀가가 늦더라도 곧 고문관 로버 츠 장군이 와 달라고 하는 군요. 나는 바로 로버츠 장군에게 갔다. 그는 상당히 큰 부피의 서류를 내어 놓았다. 이것은 이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서류인데 군내 불순분자들의 명부라고 합니다. 당신이 참모총장이니 이것을 직접 조치 하시요. 그리고 조치 도중이나 조치 후의 보고는 다른 사람을 경유하지 말고 직접 대통령 에게 해 달라고 하니 그리 아시오. 라고 말했다. 역사에 가정이 있을 수 없다지만, 건국 초창기 사상적으로 혼미( 昏 迷 ) 한 상 태에 빠졌던 우리 군의 숙군작업이 없었더라면 6ㆍ25 전쟁에서 우리 군이 내부 의 혼란, 반란, 명령불복종 등으로 인하여 전쟁을 치르는 데 매우 어려웠을 것 이다. 3. 몽금포작전 3) 1945 년 해방병단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우리 해군은 지난 70년 동안 격랑 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랑스러운 충무공의 후예( 後 裔 ) 로서 조국의 바다를 지켜 왔다. 필자는 해군사관학교 졸업과 더불어 충무공정 (PG-313) 부장으로해군생 활을 시작했다. 그 후 중위 진급과 동시 충무공 3 대 정장 ( 초대 박홍철 중위, 2 대 이희정 대위) 으로 임명되어 남해 경비출동 시 제주도에서 일어난 4ㆍ3 사건 을 직접 목격할 수가 있었다. 특히 인민해방군 이라고 칭하며 도내 15개 경찰지소 중 14개 지소를 동시 에 급습한 그들의 무기의 출처가 궁금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제주도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미군과 최후의 결전을 할 장소로 5만여 명의 병력과 이에 필요한 수많은 무기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러나 제주도에서 미군과 결전 2) 백선엽, 군과 나 ( 서울: 시대정신, 2009.), 413 쪽. 3) 임성채 외 3 명 공저, 6ㆍ 25 전쟁과 한국해군작전 ( 계룡: 해군본부, 2012) 참조.

10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전에 항복한 일본군은 그 막대한 무기들을 그대로 놓아두고 귀국하였으니 그 무기들이 바로 인민해방군 의 전유물이 되었던 것이다. 소령 시절 해군의 숙군책임자로 지명된 필자는 깊은 번민과 고뇌( 苦 惱 ) 속 에서 보낸 세월을 잊을 수가 없다. 조사 대상자 대부분이 필자의 후배들인 소 해정 (JMS, YMS) 의 해사 2기생 부장들이었고 정장들도 해사 1기생인 동기생 들이었기 때문이다. 5ㆍ 11사건 으로 불리는 YMS-508 정의 납북사건은 1949 년 5월 11일 508정 부장인 해사 2기생 이송학 소위가 1기생 정장 이기종 소령과 전대사령 황운서 중령을 사살하고 원산으로 월북한 사건이다. 필자는 즉시 동 해첩보대장에게 보복을 지시하였지만 실패했다. 다행히도 납북을 미연에 방지한 사건도 있었다. 바로 JMS-302 정의 경우이 다. 당시 302 정의 정장은 필자의 해사 동기인 공정식 소령( 제6대 해병대 사령 관 역임) 으로 부장은 2 기생 김점복 소위였다. 5ㆍ11 사건 얼마 후인 5월 15일 남로당으로부터 부산에 정박 중인 302정의 납북지령을 받은 부장 김점복 소위 는 정내 동조 세력과 5월 20 일 공정식 정장이 퇴근한 후 야간에 납북을 결행하 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기관사 황명호 병조장 등 일부 승조원들 이 일부러 기관을 고장내어 김점복 소위 일당의 만행을 저지했다. 해군은 즉시 이들에게 특진과 표창을 수여했다. 정장 공정식 소령은 몽금포작전에서 부상 으로 위기에 처한 필자를 구조하여 준 해사 동기이자 전우이다. 1949 년 5월 5일, 강원도 인재군 현리에서 38선을 경비 중이던 육군 2개 대 대가 대대장 인솔 하에 월북한 사건이 발생하자 내외적으로 긴장과 불안 상태 가 고조되었다. 대대장 강태무와 표무원의 성을 딴 소위 강ㆍ 표 사건 이다. 이 사건으로 육군참모총장 이응준 장군은 바로 인책 해임되었다. 강ㆍ 표 사건의 여운( 餘 韻 ) 이 남아있던 1949 년 8월 10일, 해군 인천경비부가 관리하고 있던 군 사고문단장 로버츠 장군의 전용보트가 행방불명되었다. 필자는 즉시 서해첩보 대장 이태영 소령에게 보트의 행방수색을 지시했다. 인천경비부사령관 민영구 중령도 제1 정대 함정을 동원하여 조사에 나섰다. 당시 해군은 정부수립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8월 16일 인천에서 거행할 관 함식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나 손원일 참모총장은 사건보고 차 경무대 ( 지 금의 청와대 ) 를 찾았다. 당시 주무참모로서 참모총장을 수행한 필자는 사건의 사전보고를 이미 받았던 이승만 대통령의 노기( 怒 氣 ) 를 눈으로 직접 접할 수 있 었다. 이 때 필자는 마음 속 깊이 보복작전을 결심했다. 사무실로 돌아오니 서 해첩보대장 이태영 소령이 심각한 표정으로 필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황해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11 도 해주 서남방에 위치한 몽금포항에 계류되어 있는 로버츠 장군의 전용보트를 촬영한 두 장의 사진을 내밀면서 동해에서 508정 보복은 비록 실패했지만 이번 만은 반드시 성공해야 한다면서 보복작전을 강력히 제안했다. 이에 필자는 이 소령과 함께 참모총장실로 달려갔다. 몽금포항에 계류 중인 로버츠 장군의 보트 를 탈환하거나 불가시에는 이를 폭파하기 위해 이 소령이 지휘하는 첩보부대는 육상으로 그리고 필자는 샛별호 ( 정보 공작선 ) 를 이용하여 해상으로 침투한다는 보복작전의 개요를 보고하고 구두 승인을 받았다. 해사 동기생인 이 소령과 필 자는 머리를 맞대가며 세부 작전계획을 세웠다. 저녁에는 본부 옆 명동거리의 천막 포장마차에서 소주 잔을 기울이며 우리의 성공을 기원했다. 당시 천막 주 점을 밝히던 희미한 가스 등불이 지금도 눈에 아른거린다. 이 보복작전은 비밀유지를 위한 첩보부대 단독작전을 개진한 필자의 의견 보다 작전의 성공률이 높다는 일부의 건의에 따라 참모총장은 함정들의 엄호 하에 추진하는 것으로 변경했다. 8월 16일 인천에서의 관함식을 마친 주요 지 휘관들은 시내 용궁각 ( 龍 宮 閣 ) 에서 저녁 만찬이 있었다. 이 자리에서 손원일 제독은 몽금포보복작전을 이용운 중령(4 대 해군참모총장 역임) 지휘 하에 실시 한다고 발표했다. 일순( 一 瞬 ) 술자리는 숙연해졌다. 이제 몇 시간만 지나면 적 지로 출동해야 할 필자에게는 성공적인 자전구상만이 전신의 신경을 점령하고 있었다. 제1 정대사령 이용운 중령 지휘 하에 기함 충무공정 ( 정장 : 이종철 소령) 을 위 시하여 JMS-301, 302, 307, 309 와 YMS-503 정이 인천항을 출항한 시간은 8월 16일 새벽 2 시였다. 4) 적의 감시를 피하기 위하여 장산곶 서방을 우회하여 몽금포 앞바다에 도착한 시간은 8월 17일 오전 6 시경으로 기억하고 있다. 항구에 접근하 는 우리 함정을 발견한 인민군의 해안 포대가 포문을 열자 우리 함정과의 치열한 교전이 시작되었다. 빗발치는 탄막( 彈 幕 ) 속에서 민첩하게 침투보트에 몸을 실은 우리 특공대는 항내로 돌진했다. 그러나 문제의 로버츠 장군의 보트가 보이지 않 았다. 후에 알게 된 일이지만 보트는 이미 진남포로 옮겨져 있었다. 특공대를 지휘하던 필자는 양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바다로 떨어졌다. 외 항에서 필자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것을 확인한 302 정장 공정식 소령은 적의 총탄이 빗발치는 항내로 302정을 몰고 들어와 필자를 구조하고 군의관이 있는 충무공정으로 이송했다. 다행히 충무공정 군의관은 충무공정 3대 정장을 4) YMS-503 정장 남철 소령과 JMS-309 정장 김남교 소령은 군사영어학교 출신이고, 나머지 정장 들은 필자의 동기생인 해사 1 기생 소령들이었다.

12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역임한 필자의 혈액형을 알고 있어 출혈이 심한 필자에 대한 수혈작업을 신속 히 할 수 있었다. 공정식 소령은 적 함정 4 척을 격파하고, 북한군 군관을 포함 한 인민군 5 명을 생포하고, 경비정 18 호를 나포하는 데 성공했다. 이 보복작전 이후 북한은 더 이상 우리 함정의 납북을 시도하지 못했다. 훗 날 몽금포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평양사범 동기생인 이근삼( 李 根 三 ) 서강대 교수는 몽금포에 핀 아름다운 한 송이 꽃, 이름하여 전우애 ( 戰 友 愛 ) 라 는 제목의 글을 써 주기도 했다. 우리 해군은 6ㆍ25 전쟁 발발 이전 38도선 이북으로 침투하여 수행한 작전이 란 이유로 오랜 기간 동안 몽금포 보복작전을 역사의 전면에 들어내지 않았다. 당시 작전상항에 대한 일부 기록을 보면 모선을 출발한 보트 4척이 기관 고장으 로 보복작전에 참가할 수가 없었다고 하지만 사선( 死 線 ) 을 넘나들어야 하는 특 공대가 장비 정비를 적당히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그리 고 38선을 넘어 작전을 지휘한 이용운 중령이 미국의 항의로 여수기지사령관으 로 좌천되었다고도 하지만 이용운 중령은 숙군 당시 여수정대사령 재직 중에 방 첩대의 조사를 받은 경력이 있었다는 것도 간과할 수 없는 의문점이다. 북한이 6ㆍ25 전쟁에 대한 북침설의 근거로 몽금포 보복작전을 내세우는 이 유는 이렇다. 5) 이용운 중령이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전역 후 일본을 방문 하였을 때 기자회견을 통하여 몽금포작전을 자기가 직접 지휘했다고 자랑했지 만, 일본 언론들은 그가 몽금포 작전은 6ㆍ25 전쟁의 한 원인이 되었다고 말했 다. 고 보도했다. 8월 16 일 용궁각 ( 龍 宮 閣 ) 만찬에 참석했던 해군 5대 참모총 장을 역임한 이성호 중령도 몽금포보복작전은 실행과정에 대하여 많은 아쉬움 이 남는다고 회고했다. 4. 대한해협해전 승전보6) 6ㆍ25전쟁 발발 다음날 우리 해군의 백두산함이 부산 앞바다의 대한해협 해전에서 최초의 승전보가 없었더라면 꺼져 가던 대한민국의 등불을 다시 일 5) 1977 년 불가리아(Bulgaria) 의 수도 소피아(Sofia) 에서 개최된 국제의원연맹 (IPU : Inter- Parliamentary Union) 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한 필자는 신경질적인 북한 대표들 (LI Chang Sun, KIM Jae Bong, KIM Chang Hoon) 과 6ㆍ25 전쟁과 몽금포 보복작전에 대하여 설전을 벌인 적이 있다. 6) 오진근 ㆍ 임성채 공저, 손원일 제독 ( 서울: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6) 참조.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13 으켜 세운 UN 군이 신속히 참전하는 데 많은 어려움에 직면했을 것이다. 우리 현대사의 분기점이라고 사가들이 말하는 6ㆍ25 전쟁은 민족의 생존이 걸린 전고미증유 ( 前 古 未 曾 有 ) 의 전쟁이었다. 1950년 6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7일까지 1,129 일 중 어느 한 순간도 나라의 안위( 安 危 ) 와 직결되지 않은 시간 은 없으나 특히 불과 3 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적의 손에 넘어간 초전( 初 戰 ) 3일 동안은 필자의 생애( 生 涯 ) 에서 영원히 잊지 못할 가장 긴박한 순간들의 집적 ( 集 積 ) 이었다. 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이 박옥규 작전국장을 대동하고 함정구매 차 도미 중 에 일어난 실전( 實 戰 ) 상황에서 당시 정보감인 필자는 전시상황실 (war room) 실장을 맡아 참모총장 직무대행 김영철 대령을 보좌했다. 시시각각 발생하 는 전황 대처에 먹고 자고 화장실에 가고픈 생리적 욕구조차 느낄 새가 없었 다. 전시상황에 모인 해군 수뇌부들은 육군이 과연 언제까지 서울을 지킬 수 있을 것인가가 초미( 焦 眉 ) 의 관심사였다. T34 탱크 200대를 앞세운 인민군 10개 사단병력이 물밀듯 쏟아져 내려오는데 탱크를 막을 무기가 우리에게는 없었다. 육군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자체가 T34 탱크 앞에서 어찌할 바를 몰 랐다. 놀라움과 답답함이 교차되는 침통( 沈 痛 ) 한 분위기 속에서도 동시 다발적으 로 발생하는 전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여만 했다. 대한해협해전, 옹진반도에 고 립되어 전멸 위기에 처한 육군 제17 연대 구출작전, 한국은행이 보관하고 있는 자금( 금괴 1.5 톤, 은괴 2.5 톤) 지출 문제, 동서해 경비부 철수문제 그리고 해군 본부 작전통제권을 예하부대 이양시기 결정 등 해군 작전본부로서 어느 것 하나 피할 수 없는 중대한 결정 상황들이 시시각각 다가왔다. 특히 해군의 수뇌부를 최고조로 긴장시켰던 대한해협해전은 1950년 6월 25 일 주문진과 삼척 부근에 상륙하는 인민군을 저지하기 위해 진해통제부로부터 동해로 긴급출동하던 백두산함이 부산 동북방 공해상을 남하하던 수상한 괴선 박( 怪 船 舶 ) 을 발견한 것은 우연이었다. 백두산함은 전쟁발발 약 8개월전 1949 년 10월 17일 미국으로부터 구매ㆍ도입하여 3 인치(76 미리) 주포를 장착한 것 으로 우리 해군 최초의 전투함이다. 7) 6월 25일 오후 8시 12 분, 백두산함이 동 해로 항진 중 정체불명의 선박을 발견하고 해군본부에 보고했다. 7) 백두산함은 1949 년 10월 17일 미국에서 구매ㆍ 도입되어 1950 년 4월 10 일 진해에 도착했다. 함정은 해군이 조선사 또는 구매처로부터 인수 또는 구매한 일자를 기준하여 해군의 자산으로 산정한다.

14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부산 동북방 약 50km 공해상에서 정체불명의 괴선박 발견 크기는 1,000 톤급, 형태는 수송선, 정남향으로 시속 12 노트로 항진 중. 계속 되는 검문에 일절 응답 없음. 이 전보는 즉시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보고되었고 국방부로부터 정체를 확 인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해군본부 작전회의는 공해상이라도 검문에 불응 하는 선박이라면 나포하거나 강제 정선시킬 수 있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으나 만약 제3 국의 선박일 경우를 고려하여 선박의 정체, 특히 국적을 확인하라는 명령만을 하달할 수밖에 없었다. 시시각각 들어오는 백두산함의 보고를 분석하던 중 결정적인 정보가 입수 되었다. 백두산함이 괴선박에 접근해 탐조등으로 확인해 보니 선명도 국기도 없이 선수 쪽에 대포로 보이는 커다란 물체가 포장으로 가려져 있고 중갑판 양 쪽에는 중기관총이 장착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더 놀라운 것은 갑판 위에 많은 병력이 실려 있다고 보고해 온 것이다. 순간 필자는 맥아더라인 경비시절 야간 검문ㆍ 검색하던 때가 생각이 났다. 무장선박에 접근해 탐조등을 비추는 것은 아군의 위치를 확연히 노출시키고 아군을 향해 쏘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자살 행위였다. 이제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다. 적도 자신의 정체가 노출되었으 니 선제공격만이 유일한 생존수단일 것이기 때문이다. 해도를 응시하고 있던 참모총장 직무대리 김영철 대령의 굳게 다물었던 입에서 마침내 비장한 명령 이 떨어졌다. 괴선박을 격침하라. 성공을 빈다. 즉시 해도 상에서 백두산함의 현 위치에 격침 이라는 붉은 표식을 하였고 당직사관은 시간과 경ㆍ위도를 기록했다. 이 명령은 국방부에 바로 보고되었 다. 6월 26일 0시 10 분, 괴선박 발견에서부터 꼭 4 시간이 지나서였다. 격침 명령을 내렸다고 괴선박이 침몰된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 반대의 경 우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작전회의 멤버 가운데 최 연장자인 김일병 대령( 인사국장 ) 의 이 말 한마디 는 상황실 분위기를 더욱 긴장시켰다. 배의 크기로 보나 확인된 화력으로 보나 낙관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모두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살은 이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15 미 시위를 떠났다. 함 소령, 백두산함 부장이 송석호 소령이지요? 김일병 대령의 질문은 송석호 소령이 필자와 해군사관학교 동기생이 아니냐 는 뜻이었다. 기관장 신만균 소령도 동기생이라고 대답하자 김 대령은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졸업 당시 해사교장이었던 그는 늘 우리 1기생들에게 각 별한 애정을 갖고 있었다. 새삼 스승의 따듯한 정이 느껴졌다. 쉴 새 없이 들어 오는 전황을 분석ㆍ 처리하면서 필자는 전쟁이 정말 일어났다는 것을 실감했다. 격침명령이 하달된 지 얼마 안 있어 적선 좌현 3마일 거리에서 3인치포 10발을 발사했음. 그 중 5 발 명중. 이라는 보고가 들어왔다. 뒤이어 적선도 57 미리, 37 미리 포와 중기관총으로 응사함. 피아 치열하게 교전 중. 이라는 보고가 들어왔 다. 적의 포탄이 백두산함 조타실을 관통하며 나침반을 부수고 3명의 승조원들 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종식 소위는 왼쪽 발꿈치가 날아갔고 이등병조 전병익, 삼등병조 김창학은 복부와 다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군의관 김인현 중위의 응급 치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다시 눈을 뜨지 못했다. 두 사병의 전사 소식을 접한 상황실은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잠시 후 우리는 바람에 지는 꽃잎처럼 거친 남 해 바다에 새파란 젊은 목숨을 바친 두 영웅들을 위하여 머리 숙여 명복을 빌었 다. 한 시간쯤 지나 백두산함은 적선 기관실에 3인치 포탄 5 발을 명중시켰다. 적 선 마스트가 파괴되어 좌현쪽으로 20도 정도 기울어 침몰 중이라는 보고가 잇따 라 들어왔다. 상황실 시계는 6월 26일 오전 1시 38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우리 해군이 전쟁 초기 독자적으로 수행하여 거둔 이 전과는 단순히 부산을 지킨 것만이 아니다. 38선이 일시에 무너지고 불과 3일 만에 수도 서울이 적에 넘어간 당시 전황에서 600 여 명으로 추정( 推 定 ) 된 북한 특수부대가 6ㆍ25 전쟁 시 최후의 보류였던 최대의 항구 부산까지 유린했다면 6ㆍ25 전쟁의 양상이 어 떻게 되었을 지는 상상하기 그리 어렵지 않다. 6ㆍ25 전쟁 중 미 제8군사령관으 로 전선에서 싸웠고 사랑하는 외아들 지미 를 바로 6ㆍ25 전쟁 전선에서 잃은 6ㆍ 25전쟁의 영웅 밴플리트 장군은 만약 해군이 없었다면 우리는 한국에 갈 수도,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도 없었다. 고 한 말은 결코 과장( 誇 張 ) 이 아니다. 백두산함의 승전보는 철저한 충무공 정신의 결실이었다. 동해로 침투하는 적을 저지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고 출동하던 백두산함이 공해상을 지나가는 함정을 검문하지 않아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들의 전공은

16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더 빛난다. 공해상을 지나가는 배라고 무심히 지나쳤더라면 6ㆍ25 전쟁의 양상 이 사뭇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많은 전사 연구가들의 견해이다. 전쟁을 도발한 북한은 육상의 38선 돌파 작전과 함께 동해안과 부산 지역에 특공대를 상륙시 키는 협공작전을 꾀했는데 부산으로 가던 특공대가 괴멸된 것이다. 당시 맥아더사령부 정보부에 근무했던 노만 존스는 자신의 저서 한국작전 에 서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대한해협해전의 승리는 한국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다. 고 평가했다. 미국 정부가 백두산 함장 최용남 중령에게 은성무공훈장 (Silver Star) 을, 기관장 신만균 소령에게 동성무공훈장 (Bronze Star) 을 수여한 사실은 이 해전이 얼마나 중요하였는 지를 잘 보여주는 무언의 평가라 할 것이다. 특히 은성무공훈장은 미국정부가 외국군에 수여하는 최고의 무공훈장이다. 우리 정부 도 최용남 함장에게 우리나라 최고의 무공훈장인 태극훈장을, 나머지 장병들에 게도 훈기장 ( 勳 紀 章 ) 을 수여하여 그들의 전공( 戰 功 ) 을 높이 평가했다. Ⅲ. 6ㆍ25전쟁과 대한민국 해군작전 성과8) 북한은 1950 년 6월 25일에 소련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을 무력으로 적화 통일을 위해 남침을 자행했다. 전혀 준비하지 않은 상황 하에 대한민국 해군은 북한군 남침을 격퇴시키는 데 다대한 전과를 올렸다. 특히 참가한 유엔군 해군 과 함께 수송작전과 북한군을 측면 공격하는 등의 연합작전을 실시하여 서해 와 동해를 활용하여 북한군을 괴멸시키는 데 큰 성과를 내었다. 이는 대한민국 해군이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역할이자, 전쟁을 종식시키는 데 있어 결정적 역 할이었다. 1. 육군 제17연대 구출작전 6월 25일 새벽 4 시, 인민군 8 개 보병대대, 1개 포병대대 그리고 1개 싸마호 트대대 ( 자주포 ) 의 기습공격을 받은 백인엽 대령이 지휘하는 17연대는 필사적으 8) 임성채 외 3 명 공저, 6ㆍ 25 전쟁과 한국해군작전 ( 계룡: 해군본부, 2012) 참조.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17 로 대항하였으나 인민군의 막강한 화력과 3배에 달하는 병력에는 이를 격퇴할 방도가 없었다. 개성 쪽 퇴로가 막힌 연대 병력은 해안으로 밀려나 독 안에 든 쥐 꼴이 되었다. 옹진 강령 지역에서 이틀 동안 벌어진 전투에서 제17연대는 수백 명의 사상자를 냈고,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던 절체절명의 순간 해군의 구출작전이 시작되었다. 해군의 유일한 수송선 LST-801 함( 함장 : 김옥경 대위) 이 당시 서해에서 임 무를 수행 중이어서 바로 제17 연대 철수작전에 투입할 수 있었다. LST 801함 은 제17 연대 주력을 인천으로 후송했다. 연대장 백 대령은 주력부대 철수를 지 원하는 정규한 대위 부대( 제12 중대) 를 최후까지 지휘하여 801함의 출항을 확인 한 후 어선으로 연평도로 탈출하여 해군 JMS-307 정( 정장 : 소령 백운기 ) 에 의 해 육지로 철수했다. 2. 한국은행의 지금( 地 金 ) 방출 한국은행 소장 귀중품인 지금( 금괴, 은괴) 을 운반하는데 국방부 제3 국장( 군 수ㆍ경리담당 ) 이던 김일환 대령의 공로가 컸다. 당초 이 임무를 해군에 요청하 였지만 필자는 서울 남쪽 안전지대까지는 육군이 이송해 줄 것을 요구했다. 육 군은 한국은행 대전지점까지 운반하고 해군이 대전 지점에서 금은괴가 든 분량의 4톤 89 개 상자를 인수하여 진해 보급창으로 이송하여 보관했다. 그러나 낙 동강 전선이 위험해지자 해군의 건의를 받은 정부의 지시로 금은괴는 다시 충 무공정 ( 정장 : 이종철 소령) 편에 부산으로 이송되었다. 뒷날 알게 된 일이지만, 이 금은괴는 미국의 권고로 1950년 8월 1일 샌프 란시스코 행 선박에 실렸다. 부산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를 만일의 상황에 대비한 조치였다. 그러나 이렇게 한국을 떠난 금은괴는 다시는 한국 땅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1955 년 국제통화기금 (IMF) 이 창설될 때 한국은 이 금은괴 를 처분해 기금 출자금으로 전용한 것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나 우리나 라가 IMF 구제 금융을 받게 됐을 때 필자는 그때의 금은괴가 떠올라 착잡한 마음을 가누기 어려웠다.

18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3. 해군본부 작전통제권 예하부대 이양 정부의 서울 철수계획에 따라 1950 년 6월 27일 오전 7시를 기하여 해군본 부 작전지휘권을 진해통제부사령장관 ( 후에 사령관으로 개칭) 김성삼 ( 金 省 三 ) 대령에게 이양했다. 그리고 작전과 정보부서는 참모총장 직무대리 김영철 대 령과 함께 정부를 따라 대전으로 이동하고 이외 부서는 진해로 내려갔다. 대전 의 해군본부는 7월 8일 오후 2시를 기하여 진해통제부로부터 작전지휘권을 환 수했다. 미 대사관 무관실을 통해 미 극동해군사령관 조이(Joy) 제독이 한국 해군 지 원을 위해 마이클 루시(Michael J. Luosey) 중령을 부산에 파견하겠다. 는 연락 을 받은 필자는 6월 30일 참모총장 대행 김영철 대령을 수행하여 부산으로 내려 갔다. 부산 제1부두 미 해군 함상에서 열린 한미해군회담에서 김영철 대령은 대 형 함정과 군수물자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미국측은 1950 년 10월에 우선 2,000 톤 급 PF( 호위함 ) 두 척을 양도해 주었다. 61함과 62함으로 명명된 이 함정들이 취항한 뒤에 63함과 65 함이 도입되었다. 62함은 뒤에 원산만에서 작전 중 충돌 사고로 퇴함되고, 충원전력으로 66 함이 도입됐지만, PC 4척과 소해정 밖에 보 유하지 못했던 우리 해군은 일거에 호위함 급 함정을 4 척이나 갖게 되었다. 이토록 부산에서의 업무가 많아지자 해군본부는 대전 국방부에 연락관실만 남기고 7월 10 일 부산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진해로 분산되어 있던 해군본부 국감실들도 부산 해군본부로 들어왔다. 미 해군고문관 루시 중령은 유엔해군 편성 상 1950년 7월 10 일부터 한국해군 (CTG 96.7) 을 지휘하게 되었다. 그러니 까 그는 한국해군사령관 겸 한국 해군참모총장 고문관 역할을 병행한 셈이다. 그런데 한국해군에 대한 실질적인 작전지휘는 한국의 해군참모총장(CTE 96.70) 명령에 의해 이루어졌다. 6ㆍ25 전쟁 초기 타군의 상황은 동해의 괴선박 대처( 대한해협해전 ) 에 긴장 상태가 최고도로 고조되고 있던 상황실에 수도를 방어하던 육군 제1사단이 인 민군에게 완전 포위되었다. 공군은 해산했다. 그야말로 진위( 眞 僞 ) 를 가리기 어려운 첩보들이 날아들었다. 작전상황실에는 이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후 일 확인된 사실은 이렇다. 그동안 잘 싸워줘서 고맙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헤어져야 한다. 각자 살길을 찾아서 후퇴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끝까지 싸우자. 병력을 잘 챙겨서 한강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19 남쪽으로 가자. 1 차 목표는 시흥이다. 그곳에서 다시 만나자. 시흥이 불가능하다 면, 마지막으로 지리산에서 만나 게릴라가 되어 적과 싸우자. 6월 28 일 오후로 접어들던 무렵, T34 인민군 전차가 서울 시내를 질주( 疾 走 ) 하고 있는 시간이었다. 이때 파주 봉일천국민학교 제1 사단 전방지휘소 (CP) 에서 인민군에게 퇴로가 완전 차단된 수도를 방어하던 제1 사단장 백선엽 장군 의 비통( 悲 痛 ) 한 철수명령이다. 나는 한국은행에서 예금 잔금을 모두 찾아와 국장 30 만원, 과장 20 만원, 계 장 10 만원씩 직원들에게 송별금을 지급했다. 그런데 30만원 짜리 봉투 하나가 부족했다. 누군가 한 사람이 봉투 두 개를 가져간 것이다. 장지량 공군작전국장 ( 당시 공군소령 ) 이 공군참모총장을 역임하고 전역 후 인 2005 년 5월 3일 국방일보에 6ㆍ 25전쟁 발발과 공군 해산 이라는 제목으로 기고한 글이다. 4. UN 해군작전과 한국 해군 6ㆍ25전쟁 당시 유엔해군에서 한국해군의 역할을 크게 내세울 가시적인 전 과가 없다는 것이 아쉬웠지만, 필자는 전쟁을 하나의 거대한 기계에 비유할 때 한국해군은 하나의 부속품이다. 아무리 좋은 차라도 몇 만 원짜리 타이어가 없으면 굴러가지 못한다. 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한국해군은 무기와 장 비, 어느 것 하나 우리 것이 없는 가난한 군대였다. 그러나 좋은 타이어로서의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했다고 생각한다. This is not your war but ours 6월 27 일 대전에서 미 대사관의 드럼라이트 (E. F. Drumright) 참사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북한의 남침에 대한 유엔안보리의 결의내용과 미국의 공식 적인 입장을 설명하면서 이제는 각하의 전쟁이 아니라 우리들의 전쟁 이라고 한 말이다. 이날은 정부가 수도를 대전으로 이동한 날이기도 하다.

20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우리들의 전쟁? 바로 UN 군의 참전을 말한 것이다. UN군의 해군작전은 6ㆍ25 전쟁의 흐름 을 주도했다. 전쟁 초기 6 개월 동안에 감행된 인천, 원산, 흥남 등지에서의 상 륙작전, 철수작전 그리고 소해작전, 해상수송작전 등이 해군의 주요 작전이라 할 수 있다. 이 작전들은 지정학적으로 한국이 해양국가라는 전략적 가치가 높 이 평가된 작전들이다. 6ㆍ25 전쟁은 육지에서 붙은 불을 바다에서 끈 전쟁이 라고 한다. 국토의 대부분이 전쟁발발 초기 적진에 떨어지면서 만회할 수 있는 모든 전략은 해양세력 (Sea Power) 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낙동강 방어전의 전황을 극적으로 전환시킨 인천상륙작전 역시 해양세력에 의해 이루어졌다. 맥아더 장군 스스로도 5000 대 1의 도박 이라고 말한 인천상륙작전에서 우리 해군은 주로 연안봉쇄작전과 첩보작전을 수행했다. 해본작명갑 제93 호에 따라 이희정 중령(PC-702 함장) 은 서해에서 작전 중 인 함정들의 승조원으로 임시 상륙부대를 편성하여 덕적도, 영흥도, 대이작도, 팔미도 등 인천 근해 도서들을 점령했다. 이 성공적인 작전을 미 해군은 이희 정 중령의 성을 따서 이 작전(Lee Operation) 이라고 명명했다. 팔미도에는 적이 없다는 보고를 받은 서해봉쇄작전사령관 영국의 앤드루스(William G. Andrews) 제독은 휘하의 캐나다 구축함 아다바스칸 (Athabaskan) 함장에게 팔미도 등대 내 통신시설을 조사하고 그 시설을 파괴하라고 명령하였고, 이에 8월 20일 구축함 아다바스칸 상륙팀이 팔미도에 상륙하여 등대 내 통신시설을 파괴했다. 9) 한편 해군참모총장 손원일 제독으로부터 극비 첩보작전 임무를 받은 필자는 정보국 소속 김순기 중위, 임병래 소위, 장정택 소위를 팀장으로 하는 3개팀 17 명으로 첩보부대를 편성하고 8월 중순 이희정 중령이 점령한 영흥도에 부대 본 부를 설치했다. 그리고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정보수집을 위하여 적 치하의 인천 과 경인지구에서 바로 작전을 개시했다. 당시 우리에게 맡겨진 임무는 항공사 진 촬영이나 통신장비를 이용한 감청 같은 과학적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분 야, 즉 사람이 직접 가서 보고 듣고 확인해야 하는 인간정보 (HUMINT : human intelligence) 수집이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월미도와 인천 해안 방어 9) On the 20th a landing Party from Athabaskan destroyed the raidio gear in the lighthouse on Palmido. James A. Field Jr.,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Korea, (Washington D.C. : Department of the Navy, Naval Historical Center, 1962), p.185.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21 시설에 대한 정보였다. 다행이 시민들의 애국적인 협조와 포대 공사장의 인부 로, 때로는 인민군 군관 복장으로 위장하여 적진에 뛰어든 대원들의 생사를 초 월한 필사적인 노력으로 첩보수집 활동은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었다. 수집 한 정보는 해군본부를 경유하여 동경의 맥아더사령부로 전달되었다. 9월 1일 미 해군 클라크 대위 일행이 영흥도에 도착하자 모든 정보는 그 팀을 통해 맥 아더사령부로 보고되었다. 클라크 대위 팀은 한국인 통역관 2 명, 미 육군소령 1 명, 그리고 통신하사관 1 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클라크 대위 일행에 대한 미 해전사 기록의 일부이다. 1950 년 8월 31 일, 클 라크 대위는 두 명의 통역관과 영국 구축함 채러티함으로 일본 사세보항에서 출항하여, 다음 날 아침 한국 해군 PC-703 함( 함장 : 이성호 중령) 으로 옮겨 타고 그날 해질 무릎 인천에서 약 13.8 마일 떨어져 있는 영흥도에 잠입했다. 10) 두 명의 한국인 통역관은 연정 해군 소령과 계인주 육군 대령을 지칭하고 있 다. 미 육군 소령은 며칠 후 영흥도를 떠났으며, 통신하사관은 임시 장교계급 으로 근무했다. 9월 1 일 클라크 대위가 영흥도에 도착했을 때, 함명수 소령이 지휘하는 첩보부대는 적의 인천 방어태세에 관한 중요 정보를 수집해 놓고 있 었다. 11) 인천상륙작전 D-Day 를 하루 앞둔 8월 14일 적에게 허를 찔리는 사건이 발 생했다. 우리 첩보부대가 인민군의 공격을 받은 것이다. 정규군에 대항할만한 무장을 갖추지 못한 첩보대원들은 인민군의 대적이 되지 못했다. 쫓기고 쫓겨 다다른 곳이 십리포 해변, 더 이상의 퇴로는 없었다. 이 전투에서 임병래 소위 와 홍시욱 이등병조가 전사하고 많은 도민이 죽거나 다쳤다. 당시 의용군으로 참전한 대학 1 학년생 임승령 ( 林 承 烈 ) 은 1983년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처음 진두리에서 인민군과 싸우다 10 여 리를 후퇴하여 십리포 쪽으로 갔는데, 적은 개미 떼처럼 쫓아옵디다. 민간인인 나와 몇 사람은 숲 속에 숨었는데,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병조는 이제 마지막이라고 판단했던가 봐요. 홍 병조는 소총으 10) On 31 August Clark and his two interpreters sailed from Sasebo aboard HMS Charity, and transferred next morning to the ROK PC-703, By nightfall that evening, Clark s party was ensconced on Yonghung Do island, a scant 13.8 mile from Inchon itself. Malcolm W. Cagle and Frank A. Manson, The Sea War in Korea, (Annapolis : Naval Institute, 1957), p. 88. 11) By 1 September, when Lieutenant Clark arrived at Yonghung Do, Considerable information concerning the defense of Inchon had been collected by intelligence team under Lieutenant Commander Hahm Myoung Soo, ROKN, James A. Field Jr.,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Korea, p.185.

22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로 추격해오는 적을 사살하다 총구를 가슴에 대고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겨 자결합디다. 임 소위도 45구경 권총으로 적 3명을 거꾸러뜨리고 권총을 이마 에 대고 자결하고요. 이렇게 두 분이 용감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자결하는 것 을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 속에서 똑바로 보았지만, 어떨 도리가 없었어요. 두 분은 자결 직전에 모두 대한민국 만세를 외칩디다. 12) 정부는 그들에게 각각 1 계급 특진과 을지무공훈장을 추서했고, 미국 정부 도 은성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고인들의 유해는 국립묘지에 이장되어 임병래 중위는 19묘역 5판 063 호에, 홍시욱 하사는 21묘역 1448 호에 잠들어 있다. 그 리고 임병래 중위는 1999 년 8 월, 홍시욱 하사는 2005 년 9 월 호국 인물 로 선 정되었다. 우리 해군은 1992년 첩보부대 본부가 있었던 영흥도에 전적비를 세워 호국 영령들의 높은 뜻을 기렸다. 또한 2009 년에는 첩보부대 (UDU) 출신들이 월미 도에 첩보부대충혼탑을 건립하여 산화한 전우들의 애국충정의 뜻을 기리고 있 다. 이 첩보작전은 문화방송을 통해 1980년 10월 1일부터 45일간 방송되었는 데, 임병래 소위와 홍시욱 하사가 장렬히 산화하는 장면도 소개되어 있다. 13) 어서 가십시오. 어서요. 적입니다. 어서요! 임 소위님. 가시라니까 제발! 순 간 홍시욱은 총을 자기 갈비에 겨냥했다. 자, 이제 이제는 가실 수 있죠? 가세 요. 홍시욱 이등병조. 그는 숨을 거두었다.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다는 말인 가? 임병래 소위가 아직도 뜨거운 홍 병조의 시신에서 몸을 일으켰을 때 다가오 는 적의 무리는 사방에서 그를 향해 쏟아져 오고 있었다. 홍시욱은 왼쪽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추격하는 적을 피해 도주한 지 거의 두 시간. 두 사람은 기진해 있었고 몇 차례의 교전으로 실탄마저 떨어진 모양이었다. 그래서 절망한 것일까. 그래서 해군 이등병조 홍시욱은 그래서 삶을 포기한 것일까. 임 소위는 다시 홍 시욱 이등병조의 시신에 무릎을 꿇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임병래 소위는 죽음의 그림자가 한발 한발 자기에게 다가오고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임 소위는 모래밭 을 잽싸게 뒹굴며 다가오는 인민군을 향해 한발 한발 방아쇠를 당겼다. 그의 얼 굴은 땀으로 범벅 돼 있었고, 적개심에 불타는 눈동자에서는 금방이라도 불꽃이 12) 중앙일보사, 민족의 증언 3 편, 영흥도첩보전, 1983년 11 월. 13) 이 방송테이프는 현재 해군본부에도 보관 중에 있으며 문화방송 라디오에서 1980 년 10월 1일부터 11월 16일까지 방송된 비화 한국전쟁 제1 화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인천상륙작 전 17 인의 결사대 테이프입니다. 문화방송 제작진은 당시 결사대를 만드신 함명수 제독님께 이 테이프를 드리게 됨을 영광으로 생각하면서 장군께서 보여 주신 용기와 애국심이 이 땅에 사는 젊은이들에게 큰 귀감( 龜 鑑 ) 이 되었음을 확신합니다.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23 튕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권총을 들고 있던 임병래 소위의 두 팔 이 모래 위에 떨어졌다. 끈적거리는 피를 손바닥에 느끼며 임병래 소위는 권총의 총구를 자신의 관자놀이에 천천히 겨누었다. 대한민국 만세! 조국을 위해 싸우다 전사한 젊은 병사들의 사연을 파도여. 너는 아는가? 5. 해상수송작전 UN 해군작전과 관련하여 뉴스의 사각지대 ( 死 角 地 帶 ) 인 해상수송작전을 빼 놓을 수가 없다. 소총 한 정 만들지 못하고,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우리나라에 서 전쟁 중 유엔군 병사 1명의 초도 장비는 5톤이고 병사 1명에게 지급되는 하 루 보급품도 64 파운드나 된다. 이를 위해 유엔군 연병력 590 만명, 5,500 만 톤 의 화물(Dry Cargo), 2,200 만 톤의 유류가 해상으로 수송되었다. 이 7,700 만 톤의 물자 중에는 민수용 원조물자가 포함되어 있었다. 국민을 아사 위기에서 구한 미국의 원조 양곡을 적시적소에 수송, 공급한 것은 우리 해군의 역할이 컸다. 물론 긴급을 요하는 물자나 병력은 공중으로 이송되었지만 극히 제한되 었다. 이는 1톤의 물자를 공수하는데 소요되는 4톤의 항공유는 해상교통로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대형 수송선이 물자를 하역할 항구가 절대 부족하였는데 이 문제 해결 또한 한국 해군의 몫이었다. 1950 년 10 월 하순경, 해군본부 작전회의에서 미 제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조이 제독에게 보낸 메시지가 공개되었다. 워커 장군은 미 제8군은 연료가 없 어 일부 자동차가 멈춰 섰고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레이션 ( 식량) 을 하루 두 끼 로 줄였다. 고 보급품 부족을 전하면서 하루 빨리 진남포 소해작전을 끝내 해 상수송작전을 전개해달라고 요청한 것이다. 아군이 평양을 함락해 축제 분위 기로 들떠있던 때였다. 6ㆍ25 전쟁에서 항공세력 (air power) 도 소중한 자산이 었지만, 해양세력 (sea power) 은 한반도 작전에서 근본적으로 필수불가결한 요 소였다. 만약 해군이 없었다면 우리는 한국에 갈 수도, 한국에서 살아남을 수 도 없었다. 고 한 밴플리트 장군의 말이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충남도지사 관 저에 있던 이승만 대통령도 전세가 악화되자 지상교통의 혼잡으로 한국해군의 JMS-514 정으로 부산으로 이동했다. 14) 14) 1950 년 7월 1일 JMS-514 정( 정장 : 주철규 소령) 은 이승만 대통령 일행( 영부인 프란체스카 여사, 김장흥 경무대 경찰서장, 황규면 비서) 을 태우고 오후 2 시경 목포항을 출항, JMS-309 정( 정장 : 김남교 소령) 호위 하에, 7월 2일 오전 11 시 부산에 도착했다.

24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Ⅳ. 베트남전 파병과 한미동맹 공고화15) 베트남전 파병 당시 해군참모총장이었던 필자는 베트남 전선은 우리 휴전 선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필자는 주월한국군사령관 채 명신 육군 소장의 통제 하에 있는 백구부대에 LST 3척과 LSM 2척을 배속시키 고, 우리 구축함 충무함 (DD-91) 편으로 베트남을 방문하여 1966년 5월 31일 사이공에서 백구부대사령관 이응기 대령에게 백구기를 수여했다. 이 역사적인 행사에 해군사관학교 생도들을 기수단으로 대동했다. 이 행사에 필자를 수행 한 정보참모 김규섭 대령, 충무함 함장 김종곤 대령, 생도기수단의 장정길 사 관생도는 훗날 해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백구부대의 임무는 긴 해안선을 따라 요소마다 산재한 남베트남군과 미군 부대에 물자를 수송하는 일이었다. 사이공에서 북쪽으로 붕타우 ㆍ판티엣 ㆍ나 트랑ㆍ 퀴논ㆍ 추라이 ㆍ다낭 같은 곳에 탄약과 보급품을 수송하는 것은 극히 위 험한 일이었다. 남베트남 해군에는 그런 수송능력이 없기도 했지만 있다고 해 도 맡길 수 없는 실정이었다. 왜냐하면 남베트남군은 베트민 ( 월맹) 과 베트공과 보이지 않게 연결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 보급품이 제대로 부대까지 전해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 해군이 베트남에서 수행한 많은 작전 중에서 판티엣트 작전은 너무나 도 유명하다. 판티엣의 미군 제트기대대가 연료 고갈로 위기에 처했을 때 백구 부대의 LSM-611 함( 함장 : 오경환 ) 은 해도에도 없는 해안에 1,500 드럼의 연료 를 성공적으로 수송해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지 등에 널리 소개되었다. 당시 이 지역은 베트공 조직이 활성화되어 있어 그 위험이 매우 높은 지역이었다. 우리 해군의 판티엣 수송실적은 월미함 (LSM-609), 능라함 (LSM-611) 등 LSM 10 척에 의해 모두 48 차례나 있었다. 베트남에 머무른 일주일 동안 필자는 맹호부대, 청룡부대 등 부대방문에 이어 티우 남베트남 대통령을 만났다. 베트남전쟁 전망에 대한 필자의 질문에 그는 매우 낙관적인 태도를 표명했다. 전쟁 당사국 지도자로서 그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였으나 귀국 길에 대만에서 만난 장개석 총통의 생각은 티우 대 통령과 크게 달랐다. 15) 임성채 외 2 명, 베트남전쟁과 한국해군작전 ( 계룡: 해군본부, 2014.) 참조.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25 미국이 그렇게 많은 전비( 戰 費 ) 를 쓴다는 것은 초현대적인 첨단장비를 동원 한다는 뜻일 것이오. 그런데 월맹은 맨발로 뛰는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비 대칭적인 전쟁의 결말은 결국 국민이 결정하게 될 것이오. 티우 대통령이 매우 낙관적인 전망을 갖고 있으며 미국이 베트남전쟁에 하 루 1 억 달러 이상을 쓰고 있다는 필자의 말에 장개석 총통은 국민의 사기가 전 쟁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라고 예견했다. 그의 혜안( 慧 眼 ) 이 적중했다. 베트남전쟁에서 우리 해군 예비역들의 활약도 컸다. 해군 전역 장병들이 미국 의 군수물자 수송서비스 기관인 MSTS(Military Sea Transportation Service) 선박에 선장, 기관장. 선원으로 대거 승선하게 되었다. 주월미군에 대한 해상 수송은 미국의 MSTS 선박들이 전담했는데, 우리 해군에서 전역한 장병들이 미군들의 해상수송 업무를 수행했다. 6ㆍ25전쟁에서는 일본인들이 미군들의 해상수송 업무를 맡았던 것처럼 베트남전쟁에서는 한국인들이 이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1966년 당시 MSTS 선장의 월급은 680 달러였다. 우리나라 국민소 득이 100 달러가 채 못 되던 시절이다. MSTS 는 미 해군장관 소관이다. 필자는 1966년 1월 13 일, 미 국방부로 닛 체(Nitse) 해군장관을 방문했다. 필자에게 미 공로훈장을 수여하는 자리에서 필자는 한국해군의 예비역 장병들이 MSTS 소속 선박에 승선할 수 있도록 요 청하였는데, 그의 긍정적인 답변을 받았다. 닛체 해군장관의 결심에는 주한미 해군사령관, 미태평양군사령관 그리고 미해군참모총장의 도움이 컸다. 1975 년 4월 30 일, 남베트남이 공산화되자 미국은 종이호랑이 라고 세상의 조소( 嘲 笑 ) 를 받았고 우리는 남베트남 공산화에 고무( 鼓 舞 ) 된 북한의 제2남침 을 우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에 국회는 6ㆍ25 전쟁 참전국에 감사사절단 을 파견했다. 필자는 국회의원의 한 일원으로서 미국반에 속했는데 전 국방장 관 최영희 장군을 단장으로 정래혁 장군( 국방부장관 역임), 김창규 장군( 공군 참모총장 역임), 강기천 장군( 해병대사령관 역임) 과 함께였다. 자유 베트남 공 산화 직후 1975년 6월 25일 포드 미국 대통령은 백악관을 방문한 우리 일행을 맞아 로즈 가든 행사(Rose Garden Ceremony) 에서 내외신 기자들에게 한미 방위공약은 확고부동하다. 는 것을 천명( 闡 明 ) 했다. 이어서 대통령 직무실 (Oval Office) 에서 6ㆍ25 전쟁 참전 미 상하의원들과의 환담은 매우 유익했다. 그들은 미군이 베트남 정글에서 고전하고 있을 때 한국군의 도움을 미국 국민 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며 한미 양국의 젊은이들이 피로 맺은 전우애( 戰 友 愛 )

26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는 우리들의 소중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Ⅴ. 대한민국 해군의 원자력잠수함 필요성 6ㆍ25전쟁과 베트남 정글에서 전우애로 다져진 한미연합전력이 오늘날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있다. 그러나 6ㆍ25전쟁 중 UN해군에 기뢰전으로 도전한 북한이 핵무기체계를 완성하는 날 그 위협은 차원이 다르다. 핵보유 국이라고 계속 과시( 誇 示 ) 하고 있는 북한은 미사일로 운반할 수 있는 소형 경 량화 된 핵탄두 개발에 광분( 狂 奔 ) 하고 있다. 많은 군사전문가들은 북한의 핵무기체계의 완성은 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있 다. 이 엄중한 안보현실 앞에서 우리의 생존을 위한 대응전략은 과연 무엇인지 고민할 때라 본다. 필자는 비대칭무기체계의 꽃인 원자력잠수함이라고 생각한 다. 원자력잠수함의 가장 큰 매력은 우수한 기동력과 은밀성에 있다. 16) 적의 영해 깊은 곳에 오래 숨어 있어도 정찰위성으로도 탐지하기 어렵고 잠대지( 潛 對 地 ) 미사일로 공격하기 때문에 적이 대처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는다. 미 해군의 원자력잠수함이 국내에 입항하면 북한이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포클랜드해전에서 영국의 원자력잠수함 컨쿼러함은 종횡무진 활약 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북한이 탄도미사일을 발사할 수 있는 잠수함 을 건조하는 정황이 미 정보기관에 포착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핵무기를 보 유한 북한의 잠재적 위협을 크게 향상시키는 것이다. 우리나라도 과거 362이라는 한국형 원자력잠수함 3척을 건조할 계획이 있 었으나 착수하기도 전에 좌절되었다. 17) 이 사업이 예정대로 추진되었다면 2015 년 현재 두 번째 원자력잠수함이 전력화되었을 것이다. 그로부터 10여 년 이 지난 오늘날 한미 원자력협정이 개정됨에 따라 우라늄을 20% 미만으로 농 16) 디젤잠수함과 원자력잠수함의 가장 큰 차이는 이동속도와 장기간의 잠수능력이다. 원자력잠수함 은 지구 한 바퀴를 40 여 일 만에 돌 수 있다. 물론 40여 일 동안 물속에서 식품이나 연료보급을 받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디젤잠수함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데 140 여 일이 걸린다. 중간에 연료 와 식품을 몇 차례 공급도 받아야 한다. 17) 2004 년에는 해군본부 내부에 원자력잠수함사업단이 만들어졌고 획득방안에 대한 연구도 진행되 었다. 하지만 한국 원자력연구소의 우라늄 농축시험 등 문제가 불거지면서 원자력잠수함사업은 보류되었다.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27 축할 수 있게 되었다. 20% 농축우라늄은 원자력잠수함의 동력으로 사용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는 원자력발전소를 수출하는 세계 5위 원전 강국이 다. 비록 잠수함 건조와 잠수함 함대의 역사는 일천( 日 淺 ) 하지만 괄목할 만한 발전을 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원자력잠수함을 보유한다는 것은 경제적 ㆍ기 술적인 문제보다도 우리의 의지에 달려 있다. 정치지도자들의 강력한 리더십 이 기대되는 대목이다. Ⅵ. 맺는 글 대한민국 해군은 세계 해군에서 모범사례로 삼는 성공적 모델로 지목되고 있으며, 이는 동맹국 미국 해군만이 아닌, 주변국 해군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대한민국 해군의 위상은 창군과정, 6ㆍ25 전쟁 그리고 북한의 해양 군 사도발이 지속적으로 자행되는 과정 속에서 스스로 노력한 결과이다. 실제 대 한민국 해군은 빠른 발전 속도와 함께 전력 수준도 크게 올랐다. 이를 위해 이 제 인생 마감을 앞두고 있는 필자가 한국 원자력잠수함 필요성을 마지막 과제 로 대한민국 해군과 정부 지도자에게 제안한다. 잠수함을 확보하려는 국가의 해군 및 정부 지도자들이 미국 해군에게 잠수 함운용에 대한 자문을 구하면 미국 해군 지휘관들은 이구동성으로 대한민국 해군 잠수함 부대를 보고 와서 다시 이야기합시다. 하고 말한다고 한다. 어찌 잠수함만이겠는가. 이지스구축함, 프리킷함, 유도탄고속함 등이 모두 우리의 기술로 건조되어 성공적으로 운용되고 있다. 잠수함뿐만이 아닌, 수상함 그리 고 항공기 모두가 세계 해군이 배워야 할 성공사례이다. 대한민국 해군 장병 들은 충무공 이순신 제독의 죽기를 각오하면 반드시 승리한다. 는 호국정신 을 이어 받은 역사적 전통 을 이어 받았다. 아울러 국가와 민족을 위하야 이 몸을 삼가 받치나이다. 라는 대한민국 해군의 아버지 손원일 제독의 보국위민 ( 保 國 爲 民 ) 정신을 이어받고 있다. 이제 창군기와 6ㆍ25 전쟁 그리고 수많은 과정과 어려움을 겪은 필자는 창군 주역이자 대한민국 해군의 원로로서 지금 이 시간에도 육상에서 그리고 해상, 수중, 공중에서 국가방위를 위해 희생하 고 있는 대한민국 해군 후배들을 격려하고 심지어 존경까지 한다. 이제 문제는 북한 이다. 북한이 핵무기도 모자라 핵무기를 해양에서 발사

28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하는 SLBM 까지 개발하고 있다. 북한 인민들은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 는데, 3대에 걸친 정권을 계승하고 있는 북한정권은 아직도 이러한 대한민국 해군의 발전을 모르고 무모한 해양도발을 자행하는 것 같아 많은 아쉬움이 있 다. 이제 대한민국 해군은 원자력잠수함을 확보하여 수중으로 날뛰는 북한을 수중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잡아 두어야 한다. 이 길만이 대한민국이 북한의 무 모한 해양도발을 억제시키고 역내 주도국가로 발전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제 필자는 회한의 뒷길로 가고 있다. 바라고 싶은 것은 향후에도 해군 후배들 중 에서 충무공 이순신 제독과 같은 위대한 위인들이 다시 나타나서 대한민국을 더욱 빛내 주길 기대한다.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29 참고문헌 오진근 ㆍ 임성채 공저, 손원일 제독 ( 서울: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6). 함명수, 바다로 세계로 ( 서울: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07). 임성채 외 2 명 공저, 베트남전쟁과 한국해군작전 ( 계룡: 해군본부, 2014). 임성채 외 3명 공저 6ㆍ 25 전쟁과 한국해군작전 ( 계룡: 해군본부, 2012). 백선엽, 군과 나 ( 서울: 시대정신, 2009.). Cagle, Malcolm W. and Manson, Frank A., The sea war in Korea, Annapolis : Naval Institute, 1957. Field Jr., James A., History of United States Naval Operations, Korea, Washington D.C. : Department of Navy, naval Historical Center, 1962.

30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A bstract Reflecting on the History and Future of Republic of Korea Navy Hahm Myung - Soo* 18) The Republic of Korean Navy (ROKN) started from scratch. However, ROKN demonstrated its Blue Navy capabilities successfully to the entire world by conducting Operation Early Dawn at the Aden Bay, Yemen in Jan 2011. On the event of the 70th anniversary of the ROKN, I would like to retrospect past gleaning from voyages and challenges we had in the past. At the very inception of the ROKN, Korean government as well as senior military leaders recognized that it had no time to spare to clean up military those were insinuated deeply by communist agents. It was the top priority of the government. The Mongumpo Operation which was not well known, conducted by ROKN was one of the clean-up drive. The Korean War sometimes called as a fire from land put-off at the sea. The world famous Incheon Landing which reversed war situation from the Nakdong Perimeter also done by Sea Power. ROKN conducted various maritime operations including not only Incheon Landing, but amphibious operation at Hungnam, mine sweeping, sea convoy, Wonsan Withdrawal. On the same day of the Korean War started, 25th June 1950, unless the victory of the ROKNS Baekdusan (PC 701) at the Korean Strait, the waning lamp light of Korea could not be rekindled by the participation of the U.N. The ROKN rescued the 17th regiment of Korean Army from the isolation at the Ongjin Peninsular and transported gold and silver bars stored at the Bank of Korea to the Navy supply deposit in Jinhae safely. ROKN special intelligence unit conducted critical HUMINT which led * Former ROKN Chief of Naval Operations

특별기고 / 대한민국 해군창설 : 회고와 당부 / 함명수 31 Incheon Landing success. One of important mission ROKN conducted successfully was not only transporting war fighting materials but also U.S. provided grains to starving Koreans. ROKN participated Vietnam campaign from 1960s and conducted numerous maritime transportation operations supplying materials to Vietnam military forces along the long coastal lines. Experienced Naval Officers and enlisted men who discharged and acquired as merchant marine certificate supported most of the U.S. sea lift operations throughout the Vietnam campaign. ROK-US Combined Forces which had been honed and improved its war fighting capabilities through the Korean War and out of Vietnam jungle playing key deterrent against threat from north Korea. However, those threat level will be completely different when north Korea finish its nuclear weapon ambition. In order to stand firm against north Korean nuclear threat, I would like to expect strong political leadership supporting nuclear submarine for ROKN. Key Words: Republic of Korea Navy, Korea War, Vietnam War, North Korean Maritime Provocations, North Korean military threats. 논문접수 : 2015년 7월 24일ㅣ논문심사 : 2015년 7월 31일ㅣ게재확정 : 2015년 8월 4일

32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STRATEGY 21 통권37호 Vol.18, No.2, Autumn 2015 북한 및 지역 해양안보 위협 극복과 대한민국 해군발전 배 형 수 * 19) Ⅰ. 문제 제기 1. 전략적 안보 상황인식 2. 한국 해군의 과제와 전망 Ⅱ. 한반도 및 역내 안보상황과 한국해군의 대응전략 1. 한반도 정전체제 현황 2. 서북 5개 도서와 북방한계선 3. 지역 해양안보 현황과 대응전략 Ⅲ. 이중적 안보위협 극복을 위한 해군력 발전 1. 북한해군을 압도하는 전력(Hard Power) 구축 2. 북한해군을 압도하는 리더십과 조직문화 (Soft Power) 3. 국가 총력전 태세와 해군 예비전력 혁신 4. 지역 해양안보 전략 수행을 위한 해군력 발전 Ⅳ. 결론: 다시 혁신을 이야기하자 * 해군준장 ( 예), 한국해양전략연구소 선임연구위원

북한 및 지역 해양안보 위협 극복과 대한민국 해군발전 / 배형수 33 Ⅰ. 문제 제기 올해는 해군 창설 70 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이다. 1945 년 몇 명의 선각자들 과 국민의 성금으로 출발했던 한국해군은 지난 69년 동안 북한의 도발을 억제 하고, 국가 정책 지원을 위한 현대적 해군력을 구축하는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 행해 왔다. 한국해군은 한국전쟁 동안 대한해협 해전으로 반격의 실마리를 제 공하였고, 인천상륙작전과 흥남철수작전 등 핵심적인 전투에서 활약했다. 한 국해군은 휴전 후 서북도서를 방어하고 북방한계선과 한반도 해양에서 정전체 제 유지를 위해 북한의 계속되는 도발과 싸워왔다. 서해 북방한계선과 남한의 주변해양은 북한의 집중적인 도발 대상이었다. 육지에서는 총성이 멎고 경제 발전과 평화를 향유하고 있는 동안, 바다에서는 전쟁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오 늘날 한국해군은 그동안의 실전 경험을 바탕으로 현존하는 북한의 도발을 억 제할 뿐만 아니라 지역 및 세계 평화를 위해 우방국과 실질적인 협력을 강화해 나갈 수 있는 현대적 해군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북한의 위험한 도발은 강도를 더해 더욱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으며 지역적으로는 해양의 관할권 경쟁이 심화되는 등 주변 각국 간 의 갈등이 고조되고 있어 그 어느 때 보다도 완벽한 해군의 대비태세가 요구되 고 있다. 본 논문은 북한의 위협과 급변하고 있는 지역 해양안보환경과 더불어 지속적인 국가발전을 위해 증가되고 있는 한국해군의 역할과 국민의 요구를 깊이 인식하고 앞으로 국민으로부터 더욱 신뢰를 받는 튼튼한 국가 전력으로 발전하기 위한 한국 해군력 발전 방향을 살펴본다. 1. 한반도 안보 상황인식 1) 한반도 안보상황은 60 여 년 전의 그때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세계적인 냉 전은 종식되었지만 한반도는 여전히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써 전쟁이 끝 나지 않은 정전상태로 남아있고, 북한의 태도는 변하기는커녕 대남 적화통일 야욕을 견지하면서 핵과 미사일, 그리고 더 강력해진 비대칭 전력으로 한국을 1) 국가안보실, 국가안보전략 ( 서울: 청와대 국가안보실, 2014) 참조.

34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위협하고 있다. 북한의 도발은 해군이 책임지고 있는 취약한 서북도서와 북방 한계선 및 한반도 전 해역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자행되고 있으며, 급기야는 두 번의 해전과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등과 같이 전쟁이 재발될 수 있는 위험 한 수위를 넘어서고 있다. 과연, 한반도에서 반세기 이상 평화를 유지하는데 견인차 역할을 해온 정전협정과 유엔사 체제가 유효한 것인가를 의심케 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분단된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안보상황은 해양영토에 관한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새로운 안보위협으로 대두되고 있 다. 중국은 1985 년 군현대화를 추진한지 30년째를 맞아 공세적인 해양 확대정 책을 펼쳐나가고 있고, 일본은 신안보법안으로 집단자위권 합법화를 추진하면 서 미ㆍ일 동맹관계를 강화하는 등, 군사대국화를 위한 체제를 정립해 나가고 있다. 한국은 주변 해역에서 중국, 일본과 배타적경제수역 (EEZ) 에 합의하지 못 하고 있는 상태에서 독도를 국제 분쟁지역화하려는 일본의 공세에 당면하고 있 으며, 중국은 한국 해역에서 대규모 어선단의 불법조업을 방조함으로써 한국의 주변해역을 실질적인 해양활동으로 내수화하려는 의도를 의심케 하고 있다. 2. 한국 해군의 과제와 전망2) 본 논문에서는 북한의 당면 위협에 대비하면서 역동적인 동아시아 해양 안 보환경 변화에 대비해야 하는 한국의 이중적인 안보상황 속에서 한국해군은 무엇을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식별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특히, 현재의 분단 된 한반도 안보상황에서 한국해군은 북한의 재침략에 대비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는 문제인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논문 작성의 배경이 되는 안보환경 분 석에서는 현재 한반도 평화의 중심이 되고 있는 정전협정과 이의 서명 당사자 이며 관리에 책임이 있는 유엔사의 역할과 기능을 점검하는데 중점을 두었고, 정전협정의 실질적인 이행 당사자이며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억제 실패 시 에는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하는 한국해군의 대북한 전쟁 준비태세에 주목한다. 따라서 한국해군이 주적인 북한해군에 비해 전력의 규모 면에서 상대적으 로 열세에 있으며 전쟁계획의 핵심적인 작전( 예, 상륙작전 능력 등) 을 수행할 2) 대한민국 국방부, 국방개혁 기본계획 : 2014~2030 ( 서울: 대한민국 국방부, 2014).

북한 및 지역 해양안보 위협 극복과 대한민국 해군발전 / 배형수 35 능력도 제한되는 상태에서 한국해군이 희망하는 북한 위협과 미래위협 동시 대비 를 위한 해군력 방향이 타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근거으로 분석하였 다. 즉, 한국해군은 북한의 전면전 도발은 불가 할 것이라든가, 시간이 갈수 록 북한의 위협은 감소되고 불특정 미래위협은 증가 될 것이라는 위험한 가정 을 지양하고 실존하고 있는 북한의 당면 위협에 확실하게 대비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미래 위협에 어떻게 대비할 것인가를 살펴 보았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비하여 준비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자칫 당면하고 있는 전쟁 준비에 차질이 있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한편, 이제까지 해군력에 관한 연구는 일반적으로 플랫폼의 양적, 질적인 능력과 고차원적인 해양전략 등과 같은 Hard Power 의 소요 판단을 위한 연 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해군력은 무기체계와 플랫폼 등과 같은 Hard Power 에 추가하여 우수한 작전적 수준의 전략과 교리, 인력과 조직, 교육ㆍ 훈련 그리고 조직을 움직이는 리더십과 조직문화 등 다양한 Soft Power 가 더해진 총합이다. 오히려 Soft Power는 동아시아에서 상대적으로 작지만 강 한 해군을 추구해야 하는 한국해군에게 Hard Power 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 는 중요한 해군력 요소라 할 것이다. 특히, 훌륭한 리더십과 건강한 조직문화 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애써 구축한 현대적 Hard Power 들의 기능 발휘가 제 한되는 위험에 처하게 될 뿐만 아니라 국가안보를 책임지는 공익조직으로써 가장 중요한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될 것이다. 해군력 발전은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이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작전활동이 국민의 일상에서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어 잘 인지되지 않기 때문에 평시 국민적 관심과 지원이 없으면 불 가능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국가의 명운을 좌우하는 전쟁은 국가의 모든 역량을 투입하여 총력 전으로 수행된다. 강력한 해군력 또한 정규 해군만으로는 구축되지 않는다. 해 군 예비전력은 평시에는 일반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국가 해양력과 국민의 해 양의식의 기반이 되고 해군에 우호적인 여론을 구축해 나갈 뿐만 아니라 국민 속에서 해군과 소통해 나갈 수 있는 교량적 역할을 할 수 있으며, 유사시에는 우수한 해상 전투력을 지속시켜 나갈 수 있는 제2의 해군력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해군력의 방향을 크게 Hard Power 와 Soft Power 그리고 예비전력의 세 분야로 인식하고 각각의 중요한 해군력 요 소들의 발전방향을 제시한다.

36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Ⅱ. 한반도 및 역내 안보상황과 한국해군의 대응전략 한반도 안보상황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남ㆍ북한 간의 전쟁이 완전히 종 료되지 않은 정전상태인 준전시 상황 이라고 할 것이다. 3) 60여 년 전 동족상 잔의 전쟁을 일으켜 수백만 명의 무고한 인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그 정권은 패전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고 대남 도발과 전쟁준비에 광분하면서 3대째 를 내려오고 있다. 불안정한 정전상태에서 남ㆍ북한 간의 적대와 대결, 화해와 협력이 공존하고 있는 한반도의 안보상황은 북한의 화전양면 전술의 유리한 전장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지금의 한국 안보상황은 16세기 임진왜란의 전황 이 잠시 주춤하고 있었던 정유재란 직전과 유사하다. 6ㆍ25 전쟁과 임진왜란은 국가 지도자가 각기 서울과 한양을 포기하고 남과 북으로 피난을 갔었고, 무고 한 한국 국민들의 피해가 참담하고 극심했다. 그리고 당사자가 제외된 상태에 서 제3 국간의 협상이 진행되었고 정전상태가 이어졌던 점도 같다. 전쟁을 일으 킨 측이 어떠한 사과도 배상도 없이 곧바로 전쟁준비와 도발을 계속했던 점도 유사하다. 그리고 500 여 년 전 그때에는 전쟁이 재발되었다. 오늘날 일본의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반성이 없기에 한ㆍ일간의 갈등이 계 속되고 있다. 남북관계는 어떠한가? 전쟁을 일으킨 그 정권은 건재하고 도발을 계속하고 있으며, 과거사에 대한 사과는커녕 인정조차하지 않으면서 또다시 전쟁을 호언하고 있다. 과거사에 대한 진정한 사과와 반성이 없는 한, 국가 간 의 화해와 협력은 허구에 불과하다. 남ㆍ북 관계와 한ㆍ일 관계를 동일한 시각 으로 볼 수는 없겠지만, 이러한 관점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할 것이다. 1. 한반도 정전체제 현황과 유엔사 1953 년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과 함께 체결된 정전협정은 협정 조항에 명 시된바, 고위급 정치회담에서 좀 더 구체적이고 발전된 협정으로 발전되지 못 하고 지난 62 년 동안 그 자체로써 불안정한 한반도 평화의 주축이 되어왔다. 4) 3) 대한민국 국방부, 2014 년 국방백서 ( 서울: 대한민국 국방부, 2014). 4) 앤드류 퍼보스 ㆍ 윤석준, 새로운 북한 위협과 한국의 대응, 제프리 틸ㆍ 윤석준 공동편저 한국 해

북한 및 지역 해양안보 위협 극복과 대한민국 해군발전 / 배형수 37 그러나 정전협정은 제2조에 따라 협정 유지를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군사정전 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회가 협정 발효 초기부터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가운데 북한의 무차별적인 협정위반과 도발이 계속되었고, 최근에는 도발 수 위 또한 위험한 수준에 이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지속적인 무효화 책동 으로 그 위상과 기능이 위험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더욱이 한국 내 일부 지식 인들 사이에는 군사정전위원회와 중립국감시위원회의의 운영 중단 5) 과 유엔사 지휘 하에 전투 부대가 없다는 이유 등을 들어 유엔사 자체를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라거나 유명무실화되었다는 인식이 있어 그 위험성을 가중시키고 있다. 특히,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후 한국 측은 앞으로 북한의 도발에 한ㆍ 미가 공동 대응할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한ㆍ미 상호방위조약에 더 비중을 두 었던 반면, 미국 측은 이에 추가하여 유엔사가 한반도 평화의 핵심임을 강조하 고 있어 양측의 미묘한 인식차이가 표출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안함 폭침 후 한국정부는 한ㆍ미동맹을 주축으로 한 직접적인 군사적 대응을 자제 하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에 사건의 전모를 상정하여 국제사회가 규탄하는 노 력을 함으로써 유엔사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1950 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직후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다국적군과 유엔군사령부를 창설한 유엔 안보리 결의는 전쟁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은 정 전상태로 인해 아직도 유효하다. 유엔은 1950년 6월 27일 유엔안보리 결의 1511호에 따라 대북한 군사제재를 결의하고 미국 등 21 개국의 다국적군 ( 유엔 군) 을 구성하였으며, 이어서 7월 7일에는 안보리 결의 1588호를 통해 미국 정 부에 다국적군의 지휘를 의뢰하였다. 그리고 유엔사가 창설되기 열흘 전 이승 만 대통령은 국군에 대한 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했다. 한국군은 유 엔군사령관의 지휘( 후에 작전통제로 정의됨 ) 하에 6ㆍ25 전쟁을 수행하였으며 정전협정 당시 한국 측의 대표는 유엔군사령부였다. 현재의 상황은 전쟁이 종료 되지 않은 정전상태이므로 유엔사는 1950 년에 선포된 일련의 유엔안보리 결의 에 따라 명확한 임무를 가지고 한반도 평화의 핵심적인 존재로 기여하고 있다. 유엔사는 1950 년 7월 24일 유엔 사무총장으로부터 유엔기를 이양 받아 일 양전략 현안과 발전 ( 서울: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11). 5) 군사정전위원회 (MAC: Military Armistice Commission) 는 유엔사측 대표로 한국군 장성을 임명 한데 반발해 1994 년 4월 북한측이 대표단을 철수 하였고 1994 년 12월 15일에는 중국도 철수함으 로써 기능을 상실하였다. 중립국감시위원회 (NNSC: Neutral Nations Supervisory Commission) 는 북한측이 1991년 5월 22일 공식적인 활동 중단을 통보한 이후 체코와 폴란드가 각기 1993 년 4 월 3일과 1995년 2월 25일 철수하였고 1995년 5월 3 일 판문점 사무소를 폐쇄하였다.

38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본 동경에 사령부가 창설되었다. 이때의 유엔기는 1957년 서울로 이전되어 유 엔사/ 한미연합사 사령부에 게양되어 지금도 유엔안보리 결의가 유효함을 과시 하고 있다. 1978 년에는 한ㆍ미 양국의 국가통수 및 군사지휘기구 (NCMA) 와 군 사위원회 (MCM) 의 전략지시 1호에 따라 한ㆍ미연합사령부를 창설하고 주한미 군과 지정된 한국군 전투부대를 통합하여 작전통제를 하도록 하였다. 한국 국 방부에서는 이 조치로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이 유엔군사령관으로부터 한 ㆍ미연합사령관에게 전환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어서 1994년에는 전략지 시 2호에 따라 평시작전통제권이 한국 합참으로 전환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 다. 그러나 정전협정 관리는 여전히 유엔군사령관의 책임이므로 정전시 작전 과 평시 작전의 개념이 명확한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유엔군사령관의 권한과 책임이 상황에 대한 해석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문제점이 잠재되어 있 다고 할 것이다. 유엔사 지휘하의 실재 전투부대가 없기 때문에 유엔사가 우명무실하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없다. 우선 한국군은 정전협정 이행 당사자로서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임무에 관한 한 정전협정을 관리하는 유엔 사의 통제 하에 있다. 또한, 1978 년 창설된 한ㆍ미연합사령부는 궁극적으로 유 엔군사령관의 정전시 및 전시 임무를 실질적이고 효율적으로 지원하기 위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한ㆍ미연합사령부는 정전협정을 위반하는 북한 의 도발을 억제하고 도발 시 전쟁을 수행하는 임무에 관한 한 유엔사의 통제 하에 있다 할 것이다. 더욱이 < 표 1> 과 같이 주일미군은 1957년 7월 1일 일본 동경에 있던 유엔군사령부가 서울로 이동한 후에는 유엔사의 후방지휘소와 후 방기지를 유지하고 있다. 주일미군은 평시에는 한ㆍ미 연합훈련 등의 전력과 시를 통하여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고 유사시에는 서울에 있는 유엔군사령관을 직접 지원하는 막강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다. 미군의 일본 주둔 또한 유엔사를 근거로 하고 있으므로 주일미군은 평시 태평양사령관 지휘 하에 있지만 유엔 군사령관을 직접 지원하는 전력인 것이다. 유엔사 후방기지는 1951 년 9월 일본 요시다 시게루 ( 吉 田 茂 ) 총리와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 사이에 체결된 유 엔군 지원에 관한 교환 공문, 일명 요시다 -애치슨 교환 공문에 의해 유엔군사 령관이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즉, 유엔사 체계는 일본 내 미군전 력의 주둔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북한 및 지역 해양안보 위협 극복과 대한민국 해군발전 / 배형수 39 < 표 1> 주일미군 ( 유엔사 후방기지 ) 현황6) 구 분 위 치 전 력 일본 본토 오키나와 자마 육군기지 육군 군수전력 요코다 공군기지 제 5 공군 요코스카 해군기지 제 7 함대 사세보 해군기지 가데나 공군기지 미공군 18 비행단소속 F-15 후텐마 해병항공기지 회이트비치 해군기지 미해병 항공부대 제 7 함대 미 제3 해병원정군 (MEF) 31 해병원정대 (MEU) * 평균 주둔 병력 3만 5천명 이뿐만 아니라 6ㆍ25 전쟁 당시 유엔의 요청에 응하여 전투부대를 파병한 16개국 한국주재 대사들은 아직도 유엔군 사령관을 겸하고 있는 주한미군 사 령관으로부터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으며, 여전히 유엔사의 존속을 적극 지지하고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할 경우 파병할 의지를 굳히고 있다. 한국은 주권국가로서 한국군이 한국방위의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안보전략은 분단된 한반도 문제와 더불어 국제적인 문제를 고려하여야 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된 국가로 냉전체 제가 엄연히 존재하고 있고, 언제라도 전쟁이 재발될 수 있는 정전상태에 있으 며, 한반도에서 전쟁이 재발한다면 그 여파는 동북아 지역뿐만 아니라 국제질 서를 크게 혼란에 빠뜨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날과 같이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서 자국의 안보를 오직 자국의 능력만으로 달성하려는 시도는 결코 가능하지도 않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안보전략은 한ㆍ미간의 양 자동맹에 추가하여 오늘날 세계적 안보전략의 핵심이 되고 있는 다자간 안보 협력이 유리한 대안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60여 년 전 북한의 침략에 대 응하여 유엔안보리 결의에 따라 창설된 유엔사 체제는 한반도 평화를 위해 국 제사회가 공인해준 강력한 다자협력체제로서 이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해 나가 야 할 것이다. 6) 2001 년 이후 매년 2 년 주기로 발간된 국방백서 참조.

40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북한의 무모한 주장에 대한 대응 논리의 중심에도 유엔사 체제가 있다. 북한 은 정전협정 무효화와 유엔사 해체를 주장하고 있으며, 남측에는 우리 민족끼 리 를 내세워 함께 외세( 미국) 에 대적하자고 하면서도 미국과는 양자 간의 평화 협정 체결을 주장하고 있다. 북한의 노림수는 미국( 유엔사 ) 과 평화협정을 체결 하여 일거에 정전협정 파기와 유엔사 해체를 정당화하여 주한미군과 주일미군 의 주둔 근거를 취약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7) 궁극적으로 한ㆍ미, 미ㆍ일 동맹 을 위험하게 만들어 전쟁 도발의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려는데 있다. 따라서 북 한의 위협이 존재하는 한, 한국의 대응전략은 한반도에서 전쟁을 억제하는 정전 협정과 유엔사의 위상과 역량을 강화하는 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2. 서북 5개 도서와 북방한계선 서북 5개 도서와 북방한계선은 남ㆍ북한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국가안보전략과 정책을 지원하는 한국해군의 전략에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중요한 지역이다. 정전협정은 제2조에서 서북 5개 도서는 국 제연합군사령관의 군사통제하에 남겨둔다. 고 합의 명시하였으며 이를 바탕 으로 국제연합군사령관 ( 유엔군 사령관) 은 이의 실효적인 통제를 위해 북방한 계선(NLL) 을 설정하였고 한국해군에 관련 교전규칙을 시달하였다. 따라서 한국해군은 정전협정의 실질적인 이행 당사자로서 이 해역에서 북방한계선을 중심으로 유엔군사령관이 공표한 교전규칙에 따라 유엔군사령관의 임무( 정정 협정 관리) 지원을 위한 해상작전을 실시해 왔다. 그러나 정전협정을 위반하 는 북한의 도발은 계속되었고 유엔사는 이 해역에서 유엔군사령관의 임무 수 행을 방해하는 북한의 도발에 대해 실효성있는 대응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 만 아니라 1994년 평시작전통제권이 한국군으로 전환되면서 관련 교전규칙 마저도 폐기하여 이 해역의 정전협정에 관한 유엔군사령관의 권한과 책임을 스스로 약화시키는 조치를 취하였다. 한국정부 또한 이 지역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을 간과한 나머지 당시의 남북관계와 대북 정책에 따라 이 지역에서의 북한의 도발에 대한 지침( 교전규칙 ) 이 흔들리면서 많은 해군장병들이 희생되 7) 유엔사가 해체되면 UNC와 일본이 1954 년 맺은 'UNC 주둔군지위협정 ' 의 변화와 함께 한반도 유사 시 신속한 전력증강과 후방 병참지원 역할을 하는 주일 유엔군 7 개 기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북한 및 지역 해양안보 위협 극복과 대한민국 해군발전 / 배형수 41 었다. 한국정부는 북방한계선 (NLL) 은 남북한의 실질적인 해상경계선이며 이를 무시하는 북한의 도발에는 강력하게 대응하여 이를 고수 방어하고, 도발 시 에는 도발원점을 타격하는 등 강력한 대응 방침을 설정하였다. 8) 이에 추가하 여 한국과 미국은 앞으로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한ㆍ미가 공동대응 하겠다 는 의지를 천명하였고 이에 따라 한ㆍ 미 공동 국지도발 대비계획 을 수립하 였으며, 한국 국방부 ( 합참) 는 이 지역에 대한 효과적인 군사지휘를 위해 해병 대사령관을 한국군 최초로 합동군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지휘체계를 일원화 하 였다. 한국과 미국 정부가 서북도서와 북방한계선 (NLL) 인근 해역에서 북한 의 도발에 대한 다양한 대응조치 방안을 수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도 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은 여전히 이곳이 될 것이다. 이곳의 정치적, 지 리적 환경이 이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북한은 이 해역에서 유 엔사 체제와 정전협정을 무력화하기 위한 도발을 계속할 것이다. 이 지역에 서 북한의 도발은 천안함 폭침 및 연평도 포격 도발 후에 강화된 한국과 미국 정부의 단호한 공동대응 입장을 고려할 때, 즉각적인 판단이 어려운 방안으 로 자행될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지만 정치적 효과를 고려하여 공개적인 도 발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한편, 한국군에 대한 평시 작전통제권이 한국합참으로 전환된 현재의 상황 에서도 정전협정을 준수하고 관리하는 책임은 유엔군사령관에게 있으며, 한ㆍ 미연합사령관은 유엔군사령관의 정전협정에 관한 지시에 응하여 필요시에는 전투부대를 운영하여 유엔군사령관을 지원할 책임이 있다. 따라서 이 지역에 서 정전협정의 이행 주체이며 평시작전 수행의 주체인 한국해군의 대응전략은 유엔군사령관의 정전협정 이행을 지원하고 합참의 평시작전을 동시에 지원하 는 것이므로 유엔사 체제와 합참의 합동전장운영 개념에 따라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한국해군의 전략은 한ㆍ미 양개 지휘체계의 적극적인 지원을 유도하여 이 지역에서 압도적 우위의 상재전력을 구축하여 불리한 지리적 환경을 극복할 수 있는 태세를 갖추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작 전적으로는 북한의 기만작전에 대응하여 기동과 역기만 작전으로 대응하고 전 술적으로는 북한의 유인전술에 대한 무리한 근접작전으로 장병들의 희생이 반 복되지 않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8) 해군본부, NLL, 우리가 피로써 지켜낸 해상경계선 ( 계룡: 해군본부, 2011).

42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3. 동아시아 해양안보 상황과 대응전략 한반도 주변해역을 중심으로 한 동아시아 해양안보는 육지 국경과는 달리 국가 간의 해양영토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 갈등이 지속되고 있다. 9) 한국을 포 함한 각국 간의 배타적 경제수역 획정 문제가 공전하고 있는 가운데, 그 안의 도서와 암초에 대한 관할권으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해당 도서 와 암초들의 관할권이 자국의 배타적 경제수역 획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기 때문이다. 국제사회와 이 지역에서 균형자적 역할을 하고 있는 미국은 각국이 평화적 인 대화와 협력으로 해결해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영토문제에 관한한 각국이 일보의 양보도 없이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10) 특히 중국은 미국의 견제와 주변 국들과의 갈등을 무시하고 자국의 이익을 위한 거침없는 해양확장 행보를 계 속하고 있다. 일본과는 센카쿠 열도와 동지나해 배타적 경제수역 문제로 갈등 이 심화되고 있고 11), 한국의 서해와 이어도에 대해서도 공세적인 입장을 견지 하고 있다. 일본 역시 한국의 독도를 분쟁지역화 하려는 기도를 굽히지 않고 있어 한국정부에 실질적인 안보 부담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지역 국가들 간에는 불법 조업과 남획으로 인한 환경파괴, 마약밀매와 인신 매매, 해적행위 및 해상재난 등의 다양한 비전통적 해양안보 분야에서 협력을 강화해 나가고 있다. 결론적으로 동아시아 해양안보 상황은 영토문제에 관한 치열한 경쟁이 지속되는 한편, 비전통적 안보문제 분야에서는 협력이 강화되 고 있어 경쟁과 협력이 혼재하는 이중적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할 것이다. 동아시아 지역 해양안보 문제에 관한 한국해군의 대응전략은 정부의 대주 변국 정책과 해양정책을 지원해야 하는 만큼, 영토문제에 관한 군사전략 차원 의 해군전략과 비전통적 해양안보 분야의 해군전략으로 구분하여 논의해 볼 수 있다. 우선 평시 영토 문제에 관해서는 적극적인 해군력 현시 전략으로 정 부의 대외정책을 뒷받침해야 할 것이다 12). 그러나 해군력 현시는 그 목적이 국 9) 윌리암 설리반, 한국 해양안보와 새로운 위협 출현, 제프리 틸ㆍ 윤석준 공동편저 한국 해양전 략 현안과 발전 ( 서울: 한국해양전략연구소, 2011). 10) 국가안보실, 국가안보전략 ( 서울: 청와대 국가안보실, 2014). 11) 최근 동지나해의 주요 석유매장지대의 양국 공동개발을 합의한 구역에 중국 측에서 일본과 협의 없이 여러 개의 해상 플랫폼을 설치하여 긴장이 고조된바 있다. 중앙일보 7월 14일자 16 면. 12) Geoffrey Till, 21 세기 해양력 ( 서울: 한국해양전략연구소,2011). p.499. 책자에 의하면, 해군 현시는 해양전력이 대외 정책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사용될 수 있는 여러 방안 중에 첫 번째 방안 이라고 할 수 있다. 고 정의하고 있다.

북한 및 지역 해양안보 위협 극복과 대한민국 해군발전 / 배형수 43 가정책 차원의 의사결정이 이루어져야 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특정구역에서 중요한 국가 이익과 이를 위험하게 만들 수 있는 요인이 무엇인가를 식별해야 하며, 다음 단계로는 적합한 해군전력을 선정하는 정부 차원의 의사결정이 선 행되어야 한다. 따라서 해군력 현시 를 해군의 상시 전략으로 설정하기 위해 서는 관련 부처들과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고 해군력 운용에 관한 정부 차원의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하는 해군의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13) 다양한 비전통적 해양안보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추세는 유형별로 대응체 제를 달리하기 보다는 포괄적 안보개념에 따라 국내적으로 권한과 책임을 일 원화하고 대외적으로는 다국적 협력을 강화해 나가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국 내적으로는 최근에 발생한 세월호와 메르스 사건에서 보듯이 군이 포괄적 안 보개념에 따라 안보 전반에 대한 권한과 책임을 가지고 주도적으로 임무를 수 행하기에는 법적, 정치적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대외적으로 한국해군은 국제 사회의 요청에 따라 해적퇴치와 탐색 및 구조 등의 다국적 해군작전에 참여하 고 있으며 이러한 요구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한편, 한국은 대외적으로 동아시아의 중심국가로서 역내 균형자적 역할을 수행 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다. 한국해군은 정부의 이러한 희망에 따라 필요시에는 의사결정권자가 유 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전략과 전력을 준비해야 할 책임이 있다. 이러한 국내 ㆍ외의 이중적인 상황을 고려할 때 비전통적 안보 영역에서 한국해군의 해양 전략은 국내ㆍ 외적으로 적극적 협력전략 이 타당할 것이다. Ⅲ. 이중적 안보위협 극복을 위한 해군력 발전 1. 북한 해군을 압도하는 전력(Hard Power) 구축 국내의 많은 전문가들은 평화를 원하거든 전쟁을 준비하라. 고 조언하고 있는 반면, 일부에서는 북한은 전면전을 도발하지는 못할 것 이라고 하는 위 험한 예측을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양측 당사자의 합의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이성적인 판단으로 발생되는 것 또한 결코 아 13)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해군의 걸어온 길, 함께 갈 길 ( 계룡: 대한민국 해군, 2014) 참조.

44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니라는 점은 역사가 입증하고 있는 사실이다. 1차 세계대전은 한발의 비이성적 인 총탄으로부터 시작되었고, 일본은 미국을 이길 수 있다는 오판으로 진주만 을 기습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 북한의 김일성은 단시간 내에 한반도를 공산화 할 수 있다고 오판하여 민족상잔의 전쟁을 일으켰다. 앞으로 한반도에 서의 전쟁 재발은 어떠한 동기에서든지 북한의 비이성적인 판단으로부터 우발 적으로 발생될 수 있다. 더욱이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전쟁을 도발할 수 있는 수많은 비이성적인 이유들이 실재하고 있다. 북한의 전쟁 도발 위험이 상존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군의 당면 임무는 북한 의 도발을 억제하고, 억제 실패 시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한국해군은 역 동적인 동아시아 해양안보 환경의 영향으로 북한의 위협과 미래 안보위협에 동시대비 하는 해군력 발전 개념을 견지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북한의 위협과 미래 안보위협에 대비한 해군력을 구분하여 보유할 수 없을 뿐만 아니 라 전력을 양개의 유형으로 구분하는 것 또한 가능하지 않다. 북한 대비 양적 으로 현저하게 열세한 현재의 상황에서 해군력 발전은 당면하고 있는 북한의 군사적 위협에 대한 대비태세를 기준으로 계획되고 재원이 투입되어야 할 것 이다. < 표 2> 는 국방백서에서 밝히고 있는 남ㆍ북한 해군력 비교표이다. < 표 2> 남ㆍ북한 해군력 비교14) 구 분 한 국 북 한 병 력 7만여 명 ( 해병대 2.9 만여 명 포함) 6만여 명 전 투 함 상륙함정 기뢰전 함정 지원함정 잠수함정 110여 척 430여 척 10여 척 260여 척 10여 척 20여 척 20여 척 40여 척 10여 척 70여 척 ( 출처: 대한민국 국방부, 2014 년 국방백서 ( 서울: 대한민국 국방부, 2014년 12 월) 을 근간으로 저자가 작성) 군사적 억제는 상대가 아측의 무력에 대하여 심리적으로 공포를 실감할 때 14) 대한민국 국방부, 2014 년 국방백서 참조.

북한 및 지역 해양안보 위협 극복과 대한민국 해군발전 / 배형수 45 달성된다. 현재의 정전상태에서 북한의 도발을 군사적으로 억제하기 위한 실 효적이고 유일한 방안은 압도적인 전력 우위를 유지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도 발 시 아측의 예상되는 대응에 공포심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한국군은 한ㆍ미 상호방위조약을 바탕으로 미군과의 연합전력을 통하여 이러한 억제력이 유지 되기를 기대하고 있으며 북한 역시 중국과 유사한 혈맹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남북한 간의 힘의 균형은 역내 힘의 균형과 정치적인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라도 흔들릴 수 있는 불안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패가 반드시 전력의 규모로 결정되는 것은 아니지만 전력규 모의 상대적 우위는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기본적인 필요조건 중의 하나이 다. 특히, 함정은 노후되어도 적정 수준의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무 기체계의 위력이 다양하고 강력해진 현대전에서도 함정의 척수는 해상작전의 신축성과 지속성을 좌우하게 되는 등 전쟁수행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해군력 평가를 위한 중요한 요소이다. 한국은 북한에 비해 경제규모에서 10배 이상 우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해군은 양적인 면에서 북한해군에 비해 현저한 열세에 있다. 한국해군이 말하고 있는 현재의 질적인 우위가 수적인 격차를 압 도하여 적에게 공포심을 유발할 수 있는 수준인가? 북한은 과연 한국해군의 전 력규모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인식을 바탕으로 한국해군이 압도적인 대북우위를 확보해야 하는 Hard Power 분야는 다음과 같다. 15) 가. 압도적 정보우위 : 해군 작전정보 및 정보작전 능력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 이라 하였듯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첫 번 째 과제는 적을 알기 위한 노력이다. 평시, 적의 동향을 잘 알 수 없다면 이미 적에게 지고 있다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작전정보 (Operational Intelligence) 는 잠재적인 적의 의도, 그들의 위치와 행동에 대한 실시간의 정보를 제공하 는 술(art) 16) 이다. 이와 달리 정보작전 (Intelligence Operations) 은 수집된 정보를 분석한 결과물을 능동적으로 작전적 수준에서 운영하는 술(art) 이다. 전자에 따라서는 즉각적인 대응 작전이 뒤따르지만, 후자의 경우는 역정보 유 15) 대한민국 국방부, 국방개혁 기본계획 : 2014-2030 ( 서울: 대한민국 국방부, 2014년 5 월), 국가 안보실, 국가안보전략 ( 서울: 청와대 국가안보실, 2014 년 7 월) 및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해 군의 걸어온 길, 함께 갈 길 ( 계룡: 대한민국 해군, 2014) 참조. 16) Christopher Ford. The Admirals Advantage (Annapolis, Maryland: U.S. Naval Institute, 2006). p.11.

46 STRATEGY 21, 통권 37호 (Autumn 2015년 Vol. 18, No. 2) 포, 추가정보 확보 또는 적의 판단을 어렵게 하기 위한 기만작전, 심리전작전 등 고차원적인 작전조치가 실시된다. 최근 2002 년 6월 29일에 북한해군 함정의 기습적인 공격으로 발생된 제2연평 해전을 다룬 영화가 개봉되면서 상황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당시 대북감청 부 대장이었던 한 인사는 북한 함정이 한국해군 357호정에 대해 기습적으로 공격하 기 이틀 전, 북한의 도발징후를 예측할 수 있는 감청첩보가 있었음을 밝힌바 있 다. 당시 이러한 첩보가 작전부대 ( 정장과 편대장 등) 에 실시간 전파가 되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어떤 경우도 작전정보의 실패였음이 분명하다. 심지어 당 시 국방정보의 수장과 해군작전 최고 지휘관간에 정보제공과 관련한 다툼은 한국 군 작전정보의 실태를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정보를 고위제대에서 독점하게 되 면 자칫 정치적인 영향을 받게 되고 실시간 전파가 제한되는 등 실기할 위험이 있 다. 전략정보와 전투정보와 같이 정보 수준별 분류를 하고 있지만, 이를 명확하게 구분하여 신속하게 필요한 조치를 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한국해군은 해상과 해저 등 해양 영역에 다양한 정ㆍ첩보 노드를 발전시켜 실시간 작전을 리 드할 수 있는 독자적인 해양 작전정보 능력을 구축해야 할 것이다. 한국해군은 이러한 정보노드를 통하여 수집된 정보를 실시간 작전에 활용 하고 이와 함께 신중한 정보작전을 구사해야 한다. 전쟁은 서로 속고 속이는 게임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작전은 수집된 정보를 이러한 관점에서 작전적으 로 활용하는 능력이다. 고차원적인 정보작전 능력은 적이 목표하는 소모전을 회피하고 역으로 적에게 소모전을 강요하는 전략적인 효과를 가져 올 수 있다. 한국해군의 평시작전은 우세한 해양 기동력을 바탕으로 적을 기만하고 소모전 을 강요할 수 있는 정보작전의 이점에 중점을 두어야 할 것이다. 특히, 한국해 군이 상대적으로 열세에 있는 북한 해군의 잠수함 ( 정) 은 해양에서는 접촉 자체 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해저 고정식, 반고정식 음향감시 체계와 다양한 정보 플랫폼 노드를 개발하고 합동 정보노드의 정보를 통합하여 기만적이고 기습적 인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 압도적 해양 복합전 수행 능력: 네트워크 중심 전투의 구현17) 적의 위협은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각각의 위협 유형별로 구분하여 대응전 17) 대한민국 해군, 대한민국 해군이 걸어온 길, 함께 갈 길 참조.

북한 및 지역 해양안보 위협 극복과 대한민국 해군발전 / 배형수 47 력을 나누어 구비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해군의 수상전투함은 최대한 다목 적 전투함으로 설계되어 합동/ 협동 및 연합 전장에서 다양한 전투력을 발휘하 기 위한 복합전 수행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이 능력은 작전적으로는 다양한 우군전력을 활용할 수 있는 합동/ 협동 및 연합 네트워크를 통하여 가능하며 기 술적으로는 전투분야별 모듈화를 통하여 가능할 것이다. 특히 역점을 두어야 할 전투능력 분야는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네트워크 중심 대잠전 : 북한의 보이지 않는 대규모 잠수함 ( 정) 전력 은 전ㆍ평시를 막론하고 가장 위협적인 전력이다. 평시, 북한은 천안함 폭침 사건에서 확보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한국의 전 해역에서 잠수함 ( 정) 활동을 확 대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더욱이 북한의 핵무장 기도와 최근 시도한 SLBM 시험발사는 과거 냉전 시 반세기 동안 계속되었던 수중에서 보이지 않는 전쟁 의 재현을 예고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전쟁계획은 지난 양차 세계대전 시 유 럽 전장에서 진행된 초반기 전쟁 양상과 유사하게 무제한 잠수함작전으로 전 개될 것이다. 한국해군의 대잠전 능력은 전ㆍ평시 북한해군의 잠수함 ( 정) 활동 을 압도할 수 있도록 작전정보, 해상항공초계 및 수중작전 능력 등을 네트워크 한 공세적이고 입체적인 체계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둘째, 대유도탄 방어: 북한은 방어적인 지상 유도탄 체계에 추가하여, 최근 에는 공세적인 함대함 유도탄과 탄도유도탄을 집중적으로 증강하고 있다. 북 한은 순항유도탄과 탄도유도탄, 재래식 탄두에서 조만간 핵탄두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형의 유도탄으로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한국해군은 합동전장에서 이 러한 북한의 유도탄 전력의 위협에 대해 핵심적인 대유도탄 방어능력을 제공 해야 한다. 다양한 정치적 이유를 들어 북한의 특정 유도탄에 대한 방어 능력 확보를 기피하려는 것은 적의 침략에 무방비로 전선을 비워 주거나 이를 두려 워한 나머지 도주하자는 주장과 같다. 무기체계는 창과 방패의 논리에 따라 발 전되어 나가는 것이다. 적이 가지고 있는 위협에 대해서는 최대한 효율적인 방 어 대책을 강구하는 것은 당연한 군의 책무라 할 것이다. 대유도탄 방어는 징 후에 대한 감시 및 정찰, 발사된 유도탄에 대한 추적 및 요격, 발원지에 대한 정밀한 타격 등 세 가지의 합동 및 연합 작전 능력으로 구성된다. 북한의 유도 탄 위협에 대한 한국해군의 대응은 적의 탄도유도탄 공격에 대해 한국의 주요 시설과 영토를 방어하는 합동전략 지원이 가능하고, 적의 순항유도탄 공격을 무력화하여 우군 전력을 보호하며, 모든 유형의 발원지를 정밀타격 할 수 있는 능력이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