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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제3차 작가로서의 활동 일 시 2011년 5월 21일 오후 2시~5시 장 소 서울시 송파구 방이동 한국사진문화연구소 구술 육명심 면담 최봉림(한국사진문화연구소 소장)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15 최: 선생님의 연보를 보면 1965년에서 1971년까지 <인상> 시리즈를 작업하셨다고 되어 있는데요. 육: 예, 했지요. 최: 어떤 작업이셨고, 또 그 작업을 하게 된 계기 혹은 또 그 작업과 관련 해서 영향을 받은 사진작가, 현재는 또 어떻게 [그 작업을] 평가하시는지요? 육: 거기에 대해서 이제 말씀 드리자면 우선 그 시리즈의 제목을 인상 이라고 붙였어요. 임프레션. 그 제목을 붙인 까닭이 뭐냐 하면 누가 뭐라고 하든 간에 나는 어떤 대상에 대해서 나에게 인상지 어진 대로만 내가 사진 찍겠다. 남들이 뭐라고 하든 나에게 내 감정에 어필되는 대로 그대로 반 응하겠다. 하는 그런 의지의 표명이 바로 인상 이라고 하는 제목을 붙인 겁니다. 그러고 그 사 진을 찍게 된 계기가 66년에 제가 사진계에 저, 사단에 정식으로 등단하는데. 66년은 나한테 대 전 생활을 청산하고 서울로 올라온, 배재고등학교로 올라온 서울 생활의 시작인 동시에 내 사진 인생의 시작인데. 냉정하게 얘기하면 66년도보다도 나에게 어떤 리얼리즘의 한계, 리얼리즘의 문제점, 사단의 어떤 상황 파악이라는 것은 67년에도 가서, 거의 67년도 후반에 가서 사실은 구 체적으로, 분명하게 옵니다. 근데 67년도에 분명하게 나한테 한국 사진계의 한계와 그 다음에 내가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한 그 자각, 이것이 이루어지는 건 67년도 후반기인데, 거긴 두 가지 요 인이 작용을 합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제가 이제 사진을 어떻게 공부를 해 나갈 것인가? 또어떻 게 사진가로서의 길을 추구해 나갈 것인가 할 때, 일전에 말씀드린 대로 그때 동양텔레비의 영상 제작국장이었던 김행오 선생을 만나서 점심을 먹으면서 내 얘기를 했을 때 당신이 문학이라든가 또는 연극이나 영화나 미술에 대한 그 만한 현대 예술의 흐름에 대한 인문학적인 지식이 있으니 충분히 사진사를 연구하면 그 길은 아마 쉽게 찾아질 것이다. 이런 얘기를 그분이 했어요. 그래 서 그분이 얘기하기를 책 두 권을 나한테 소개를 했습니다. 한 권이 뭐냐 하면 버몬트 뉴홀의 사 진사 이고, 또 하나가 일본의 평론가가 쓴 사진 140년사 인가 50년사 인가 하는 책이 있어요. 최: 저자 분은? 육: 저자가~, 아이고 그 이름을, 이름을 깜빡 잊었는데. 그때 일본서 나온 건 그거 밖에 없었으니까. 그 두 권을 천거를 해서 바로 내가 다음날 사가지고. 일본 말이니까 더 읽기 쉬우니까. 일본말로 불과 며칠 만에 다 읽었어요. 이게 미술사를 알면 저 뭐냐 사진사는 그대로이더라고요. 그리고 이제 버몬트 뉴홀은 아무래도 영어로 되어 있으니까 이제. 근데 앞 부분은 뭐 그래. 그래서 버몬 트 뉴홀 꺼는 20세기 이후로 쭉 제가 읽어서 한 한 달 안에 사실은 그걸 다 읽어봤어요. 그랬더니 한국 사진계의 문제점이라는 게 단번에 보이더라고. 그건 뭐냐면요, 한국 사진계라는 게 리얼리 즘만이 사진의 전부인 양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거예요. 사진하면 리얼리즘이고, 리얼리즘 하면 사진이고. 리얼리즘이라는 거는 단순히, 그 여러 가지 많은 조류나 사조 중에 하나, 한 갈 래에 불과한 것이거늘. 그리고 보니까 살롱사진의 시대는 살롱사진이 사진의 전부이고, 또 리얼 리즘 시대에는 리얼리즘 사진이 전부고, 그냥 살롱사진에 대해서는 복날 개 두들겨 패듯이 그냥 완전히 매도해 버리고. 완전히 이분법적인 거야. 아, 사진사 읽어보니까 얼마나 많은 카드들을, 그 시대마다 그리고 나라마다. 그 시대마다 어떤 문화적인 다양한 사진의 그 가능성이라든가, 다 육: 육명심 최: 최봉림

116 73) 1952년 출간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Henri Cartier-Bresson)의 The Decisive Moment 를 말한다. 양한 표현양식들이라는 것이 전개되는데. 우리나라는 밥상이 단순해. 한 두 가지 밥, 반찬이야. 아,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할 거냐? 그래서 내가 그때 주목했던 것이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 다음에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는 그 중간 1917년 이후부터 1939년인가, 그 사이에 독일에 서 일어났던 그 모더니즘, 모더니즘 운동이라는 게 가장 내 눈에 뜨이더라고요. 그리고 그 수준 에서 그게 잘 보였고. 이제 내가 저 뭐냐 <인상> 시리즈를 시작하는, 이 말을 다른 말로 말할 것 같으면 영상사진의 시작은 곧 한국 사진계의 현재 당면한 문제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하 는 나 나름대로의 어떤 새로운 시도라고 할 수가 있는데. 두 번째는 제가 바로 67년 후반기, 가을 쯤 됩니다. 그때 제가 이제 까르띠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73) 이라는 사진집을 대하게 되는데. 그걸 제가 한 두 서 달 보고 나중에 비로소 그것을 제가 알게 되었어요. 그 사진의 맛을. 예. 아, 그러고 나니까 어떻게 갈 것인가가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그 무렵에 그 찍은 사진들이 이제 여기 서 지금 여러분들 보여드리면,(구술자가 가지고 온 사진을 꺼내서 보여주었다.) 최: 그때 <인상> 시리즈라는 이름을 먼저 작명을 하고 이 작업을 들어가셨나요? 육: 예. 그렇습니다. <인상> 시리즈라고 하는 작명을 하고 들어갔는데, 또 그렇습니다. 나는 기질 적으로요. 사진가로서 내 특징이 다른 사람하고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어떤 작업을 시작 할 마는 먼저 찍을 사진의 테마를 먼저 정합니다. 정해 놓고 거기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제가 그걸 집중 공략을 하는 건데. 처음 이것도 테마를 정해 놓고 시작을 했어요. 저 <인상> 시리즈라고. 그래서 여기에 다분히 까르띠에 브레송적인 요소, 그 다음에 독일의 모더니즘 요소들이 여기에 있는데. 그래서 이건 몇 번 말씀 드렸습니다 일체 누구한테 지도 받은 거 없이 인제 내 식으로 쭉 쭉 해나갔습니다. 근데 왜 [그렇게] 해 나갈 수밖에 없었냐 하면, 이걸 누구한테 보여 줘도 좋다 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공감해 주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근데 공감을 누가 하냐면, 오히려 화 가들이나 문인들이 공감을 해. 화가들이나 문인들이. 이게 나중에 제가.요 그 <예술가> 시리 즈로 옮아가는 계기도 그 뭡니까? 한 물꼬를 트는 계기도 됩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정리를 하자 면요. 그 <인상> 시리즈라고 하는 것은 정확하게 얘기하면 67년 후반부터 이제 제가 독일의 저 모더니즘 운동하고, 까르띠에 브레송의 결정적 순간 의 그 사진의 참 맛을 내가 안 다음부터 눈 을 뜨기 시작해서 이 작업을 시작한 겁니다. 최: 현재는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육: 에. 지금. 제 감정을 솔직하게 고백한다면 내가 그때 어떻게 이런 걸 찍었나 하는 생각을 해요. 특히 제가 초기 사진에서 제 자신이 뭔가 새롭게 발견하는 게 있습니다. 나 자신의 그 시각적인 어떤 특성, 또는 그 아이덴티디(identity)라는 게 아, 이거였구나! 하는 것을 이제 와서 발견 하는 게 있어요. 다시 말하면 우리 최 박사께서도 먼저 봤겠지만. 이 당시 보면 뭐를 의식한 것 은 아닌데 보면 전부 다 시간성보다도 공간성이 내 사진에 두드러진다는 사실이에요. 공간성이 두드러진다는 사실이에요. 대표적인 게 이런 경우 보면 말이죠. (구술자가 사진을 보여주며 설 명을 하였다.) 시간성보다. 그래서 지금 보면 4, 50년이 지난 지금 와서 어떤 반성을 하냐면 앞 으로 이제 지금 여든인데. 앞으로 내 말년에 사진의 방향을 어떻게 잡냐 할 때 원점으로 돌아가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17 야 겠다. 바로 이 어떤 공간적인 요소, 이게 내 사진의 특징이니까. 이걸 제대로 더, 확실하게 자각을 하고. (구술자가 다른 사진을 보여주며) 이런 경우도 보면 완전히 그 시간성보다는 공간 성인데. 아시다시피 이런 것이 한 두 장이 아니라, 내 사진 전부의 공통된 사실이란 걸 제가 알 게 돼요. 거의가 한 5분의 4정도가. 그 당시 사진은 이 공간성이. 가운데가 텅 비고. 이건 뭐 무 슨 시도를 한 것도 아닙니다. 전연 무의식 중에 이루어진 건데 이렇게 돼 있어요. 그래서 저는 어떤 평가를 지금 새삼스럽게 하냐면 아, 내 초심으로 돌아가서, 이게 바로 육명심의 사진가로 서의 시각적인 원점이 바로 이거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새로운 기점으로 삼으려고 합니다. 최: 제가 지금 선생님의 그 <인상>시리즈의 이미지를 보면요. 오히려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나 독 일의 모더니즘 사진의, 선생님이 말씀하신 아까 뉴 비전의 모홀리 나기를 말씀하시는 것 같은데, 그보다는 오히려 1950년대 오토 슈타이너트 74) 의 그 주관주의 사진이라고. 육: 그렇죠. 최: 오히려 그런 풍미가 더 느껴지거든요. 육: 아, 그 말씀 잘 하셨어요. 사실 내가 참 좋아하는 사진가가 오토 슈타이너트인데. 에, 그때는 오 토 슈타이너트라는 사람 이름조차 모를 때입니다. 저는. 최: 한국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육: 오토 슈타이너트라는 이름을 내가 알기 시작한 게 70년대 넘어서서 알았지. 전혀 몰랐었거든요. 최: 사진을 찍으실 때는 전혀 오토 슈타이너트라는 존재를 모르셨었나요? 육: 몰랐었습니다. 근데 그 얘기를 하니까 지금 생각나는 게. 내 경우는요, 나 자신이 찍은 사진들 을 이렇게 돌이켜보면 아, 내 사진에는 다행히도 모더니티, 모던한 요소들이 있구나 하는 사실 을 제가 자각을 해요. 지금 오토 슈타이너트 얘기를 하니까 그러는데 제가 <장승>을 찍었다든 가, 또는 <백민>을 찍었다든가, 또는 <검은 모살뜸>을 찍었는데 사실 그 소재 자체는 낡은 것 들이거든요. 근데 지금 와서 가만히 보면, 거기에는 다분히 현대적인 감각의 그런 요소들이 있 다는 사실을 내가 감지를 합니다. 최: 저속 셔터로 이렇게 흔들림 자국을 많이 보여 주신다든지. 육: 예, 그런 게 있거든요. 최: 그런 게 오토 슈타이너트적이죠. 육: 예. 그러다 보니까, 정말 초기에 오토 슈타이너트라는 그런 사람을 몰랐는데도. 이제 보면 이게 아 여기도 그런 게 있는데. (사진을 보여주며) 이거 뭐냐 하면 내가 가지고 있었던 어떤 그 현대 적인 감각이 아닌가. 그럼 이 감각은 어디서 온 거냐 하면 저 자신이 대학 동안 쭉 썼던 시작( 詩 作 ) 활동, 또는 제가 했던 그 연극 활동, 어떤 현대예술에 대한 교양이라든가 평소 그런 그 예술 적인 그 관여, 그런 것에서 온 영향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최: 선생님은 후에, 이제 중앙사우회 시절, 그러니까 <인상>시리즈 작업하실 때도 영상사진 이라 고 명칭을 부여하셨고요. 육: 예, 했지요. 74) 오토 슈타이너트(Orto Steinert, 19 15~ 1978). 독일의 사진가로 1949년 현 대사진 그룹인 포토포름 (Fotoform)을 결성하였다. 피사체에 대하여 사진만의 고유한 재현방법을 실험하며 작가의 강한 주관적 표현을 하고자 하는 주관주의 사진 (Subjektiven Fotografie)을 주창했다.

118 최: 그리고 한국현대미술사 (사진) 이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나온 책이요. 육: 네. 78년에 나왔습니다. 최: 영상사진의 새 물결 이라고 이렇게. 육: 했지요. 예. 했습니다. 최: 시대를 정리하셨는데요. 이때 영상사진 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지금 정의를 내리시는지? 육: 영상사진 은 간단합니다. 사실은 내 경우에 영상사진 이라고 할 때는 모더니즘, 모더니즘을, 아니 저 모더니즘이 아니고 저 리얼리즘 사진을 내가 한국 사단의 저 현황이라는 거 있지 않습니 까? 그걸 앞에다 놓고 한 얘기에요. 그건요. 그냥 어떤 단어 영상사진 이라는 단어를 쓴 것이 아 니고. 어떤 대상을 그냥 사실적으로 기록한다는 것을 넘어선 하나의 저 뭐냐 누구에요? 그게 저 미국의 스티글리츠가 <이퀴벌런트>라는 얘기를 했지 않습니까? 그 상징성이라고 하는 거 또 는 그 어떤 내면적인 어떤 깊이. 바로 이런 의미로 내가 영상사진 이라는 말로 대체한 겁니다. 최: 그러니까 주관성이 강한 사진을 일컬으시는 겁니까? 육: 그것을 주관성이라고 얘기해도 되는데, 조금 더 구체적으로 얘기를 하면 내면적인 것이죠. 다시 인간의 내면적인 어떤 세계를,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적인 세계를 보이는 것을, 대상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을 저는 영상사진 이라고 그렇게 알고서 전개했던 겁니다. 최: 작가의 내면성이 현실 속에 투영된 그러한 사진을 영상사진 이라고. 육: 투영됐다는 것보다도 그게 드러난, 그것이 영상사진이라고 나는 그렇게 알고 시작을 했었습니 다. 최: 선생님의 그 영상 이라는 말을 조금. 저의 사진을 보는 관점 혹은 제가. 육: 말씀하십시오. 최: 익숙한 사진 용어로서는 그렇게 쉽게 와 닿지 않는데, 그런 영상 이라는 말을 쓰시기를 굉장히 좋아하셨던 같아요. 육: 아이 근데 그걸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내 경우에는요, 뭐 엄청난 의미를 부여한 거 아닙 니다. 아까도 말씀 드렸죠. 한국 사진계의 그 실정 속에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구체적 인 방법으로서 내가 쓴 이름입니다,. 그게. 최: 선생님 그 존 사코우스키(Thaddeus John Szarkowski, 1925~2007)요? 육: 사코우스키요. 최: 뉴욕현대미술관에 사진담당의 큐레이터였던 그분의 책을 언급하시면서 로버트 프랑크, 윌리엄 클라인(William Klein, 1928~ ) 그런 사람들에게서는 영상적 다큐멘터리다 이렇게 정리하 시고 육: 했지요. 최: 해서 선생님이 굉장히 영상이라는 말, 그 말을 굉장히. 육: 제가 그걸 굉장히 강조했었습니다. 사실은 그 말을 내가 멋으로 쓴 게 아니고 나로서는요, 굉장 히 그 강조해서 썼어요. 그건 다시 말하면 50년대 이후 60년대 그 다큐멘터리에 대한 사람들의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19 맹목적인 신봉 있지요? 또는 그 한계라고 하는 거. 그것의 극복을 위한, 그것을 딛고 넘어서기 위한, 그런 의미에서 제가 그 썼던 겁니다. 최: 그러면 1970. 육: 더 쉽게 얘기할게요. 쉽게 얘기하면요. 저는 지난 번도 저하고 인터뷰할 때 말씀 드렸습니다만 저는 철두철미하게 사진의 기록성을 신봉하는 확신주의자입니다. 사진은 저는 어디까지나 기록 성을 바탕으로 해야 되는데. 그러나 그 기록성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잠재력이라는 게 있거든요. 다시 말하면 사진의 그 리얼리티라는 말, 우리나라 리얼리즘의 한계를 그 당시에 봤던 게 그건 데. 우리나라 리얼리즘이라는 것이 그 리얼리티라는 걸, 단순히 일전에도 내가 예를 들었는데. 그 눈물의 리얼리티라고 얘기 할 때, 한국의 리얼리즘이라는 게 고작 이제 염분과 수분이라고 하 는 물리적이고 화학적인. 그러한 리얼리티의 자각이에요. 사실은 그보다도 몇 십배, 몇 백배 사 실은 더 진한 리얼리티는 뭐냐면 쏘로우(sorrow), 비애입니다, 슬픔입니다. 이게 바로 한국, 내가 본 한국의 50년대, 60년대 리얼리즘에서 조금 아쉬웠던, 또는 극복해 넘어가야 할 문제라 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니까 나에게서 그 영상 이라는 말을 쓸 때는 바로 눈물의 미학, 눈물의 그 리얼리티에서 바로 수분이나 염분이 아닌 그 비애라고 하는 이것을 표현한 사진. 이러한 사진을 저는 영상사진이라고. 또 이렇게 돼야 한다는 그 주의주장으로 그것을 그렇게 강조했던 겁니다. 최: 선생님이 그 이후에 한국적인 사진전통, 한국, 우리 것에 대한 강조를 많이 하셨지요? 육: 했지요. 네. 최: 또 선생님의 작업의 소재도 다분히 한국적이고 우리 것에 대한 애착, 애정 그런 게 눈에 굉장히 두드러지는 데요. 어쨌든 <임프레션>시리즈하고 그쪽으로 넘어가는 건 갭(gap)이 있다라고 저는 보여지는데요. 육: 갭 없어요. 그것도 그럼 제가 설명을 드릴께요. 이제, 그 질문을 <임프레션>에서 한국적인 소 재로 건너 뛰었어요, 최 선생이. 중간에 <예술가>시리즈라는 10년 동안의 작업이 있어요. <예 술가>시리즈가 정확하게는 67년부터 사실 시작돼요. 다시 말하면 67년도 박두진 선생님의 시 집 하얀 날개 라는 시집이 나오는데 거기에 이제 박두진 선생님이 저한테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 어요. 67년도 하얀 날개. 거기에 유명한 화가 변종하 씨가 장정을 맡고 내가 이제 우리 선생님 사진을 제가 찍어드렸어요. 그걸 찍어드렸는데 그 문단의 반응이 의외로 괜찮았어요. 그래 다음 해에 이제 현암사에서 뭐가 나오냐 하면 청록집 그 이후 75) 라고 하는 말이지 책이, 청록파 시인 의 책이 두 권이 나와요. 두 권이. 하나는 뭐냐 하면, 최: 청록파 이후. 육: 네. 청록파 이후. 다른 한 권은 청록파, 청록파 와 청록파 이후. 최: 사진집, 아니 시집 이름이? 육: 두 권이 나와요. 최: 조지훈 선생하고. 육: 박두진, 박목월. 그러니까 그 1968년이 [ 청록집 이] 나온 지 20주년인가 되던 해입니다. 그래 75) 구술자가 언급한 책은 박목월, 박두 진, 조지훈 공저로 1968년 현암사에서 출 판된 청록집 기타, 청록집 이후 두 권 의 책을 말한다.

120 서 현암사에서 그걸 냈는데, 앞부분은 청록집 48년에 나온 거에다가 평론가들의 평이 써 있는 게 한 권이고, 그 뒤는 청록파 이후에 시인들이 쓰인 시들을 하나로 모은 거야. 아, 그랬더니 박 목월 선생님이 제의를 하셨어요. 아, 그거 육명심한테 그 사진을 부탁하자. 그래서 제가 1년 후에 다시 그걸 찍어드려요. 최: 그럼 조지훈 선생님도 찍으시고 육: 조지훈 선생님은 그때 돌아가셔서 못 찍고. 박목월 선생하고 박두진 선생님하고 찍었습니다. 그 게 여러분들 <문인들의 초상>에도 제가 소개해드린 박목월 선생님의 모습이고, 우리 박두진 선 생님의 사진입니다. 그게 굉장한 문단의 반응을 일으켜요. 그 사진이. 그 둘이요. 그래 가지고서 일본에서 수필가로 이름이 높았던 김소운( 金 素 雲, 1907~1981, 시인) 선생이라고 있습니다. 최: 예. 김소운, 구름 운( 雲 )자 쓰시는. 육: 그분한테서도 전화가 왔고. 또 그 다음에 조병화 선생. 이제는 여기저기서 저한테 사진을 찍어 달라고 그러는데 저는 그때 돈 한 푼도 안 받고, 사람 만나는 즐거움 때문에 그 68년 이후, 본격 적인 게 이제 그때고, 그저 그냥 사람 따라 찍었어요. 근데 문단만 아니고 제가 이제 그 당시에 가깝게 모셨던 분이 장욱진 선생이야. 그분은 나하고 사범학교 때 친구인 그 최종태 서울대학교 교수하던 조각가 최종태라고 있는데. 그 친구의 은사에요. 최: 최종태 선생님? 육: 응. 최종태가 서울대학교 조각 미대 조각과 교수인데 나하고 중고등학교 6년동안 붙어 다니던 단 짝이야. 심지어 대학 때도. 이 친구 선생이니까 내 선생도 돼. 그래서 그 장욱진 선생님 같은 경 우는 뭐 우리 집에 와서 술주정까지 할 정도로 그렇게 가까웠으니까. 그러고 김종영 선생 같은 경 우도 이제 내 친구의 스승이니까. 그래 가까웠어요. 그렇게 제가 발이 문단도 그렇고 화단도 그 렇고, 의외로 넓었습니다. 왜? 그 당시 해방 후에 말이죠. 서울대학이 이제 그 왜 마로니에 공원 있지요. 서울대학이 거기 있을 때에 있을 때 말입니다. 미술대학 있지요. 그땐 뭐 휴전 이후라고 해서 굉장히 무질서 하고 그랬어요. 그럼 조각 같은 거 실습하는데 안에 들어가 구경도 하고 그 랬다고. 그래 미술대학 시절부터 내가 그 화단에 오늘날에는 다 원로가 됐지만. 그 양반들, 많은 사람을 제가 알고 지냈어요.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이 하나 둘 소문 나서 우리도 찍어 주라. 그 래서 처음에는 문인들 찍다가, 화가들 찍다가 그랬는데. 제가 이제 72년도에 (제가) 서라벌예대 전임대우 교수로 가지 않습니까? 그때 그랬어요. 아하, 내가 드디어 이젠 아마추어, 취미로 사 진하는 게 아니고 나는 이제부터는 이젠 프로다. 왜? 사진으로 내가 밥 먹고. 또 다른 것도 아니 고 또 장차 이 사진계를 끌고 나갈 사진가, 젊은 세대를 기르는 최선봉에서, 마치 배로 말하면 선 장으로 내가 이제 드디어 방향타를 잡은 자리인데, 내가 정말 철저한 프로정신을 가지고, 그리 고 내가 우리 한국 사진계에 새로이 출범하는 배에 선장인데, 방향타를 제대로 잡아야 한다 말이 지. 그럴라면 나부터도 이젠 본격적인 프로로서 내 작업을 해야지. 그래서 <예술가> 시리즈 라고 해서 그때부터 시작을 한 겁니다. 72년부터 아주 본격적으로 시작을 했어요. 그래 가지고 제가 한 10년을 한 겁니다. 그러면 지금 이제, 여러분들이 보시면 내가 <영상> 시리즈에서 이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21 제 그 <백민>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보시면, 그 예술가의 초상 의 그 수법들이 거기에 그야 말로 아까는 그 저 뭡니까? 독일의 누구죠? 최: 오토 슈타이너트. 육: 오토 슈타이너트를 얘기했습니다만, 거기 보면은 하이 앵글(high angle)이니, 로우 앵글(lowangle), 클로즈업(close up)이니 다양한 그 표현방법들이 동원이 돼요. <예술가> 시리즈에는 그런 점에서, 처음 <인상> 시리즈를 시작할 때에 바로 그게 쭉 그대로 이어져 나가는 겁니다. 최: 그럼 한국적인 것, 한국 전통문화에 대한 애착, 애정으로 넘어가는 데에 있어 그 <예술가> 시리즈 중에서요 무형문화재 보유자를 찍게 되는 것이 어떻게 하면 연결고리가 됐나요? 육: 지금 말씀을 드릴게요. 제가. 다 있어요. 그러고 그 전에 말씀드릴 게 있어요. 제가 이제 <예술 가> 시리즈를 할 때에, 사진가로서의 육명심을 얘기할 때에 꼭 좀 이건 적고 넘어가야 할,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이에요. 제가 <예술가> 시리즈를 할 때는 중요한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냐 면 열등의식 입니다. 열등의식 이라는 게 그 <예술가> 시리즈를 작업을 하는 데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거예요. 두 가지 측면에서 열등의식 이에요. 하나는 제가 시를 쓰던 사람이에요. 바로 얼마 전까지도 같이 어깨를 나누고, 겨루면서 시를 쓰고 서로가 참 대등하게 서로 얘기 하던 사람인데. 제가 이제 시를 안 쓰고 사진을 했어요. 이때요. 사진이라는 거는 말이죠. 우습게 알 때입니다. 사진도 예술이냐 고? 짤가닥도 예술이냐 고? 사진이라는 건 오늘날의 사진, 사진가 의 위상과 전혀 달라요. 그러니까 자연히 나 자신이 사진을 하면서도 사실은 일종의 열등감을 불 식할 수 없었다고. 내가 같이 그 문단 활동을 하던 그 대학 문단의 같은 연배들하고 말이지. 그게 하나 있었고. 두 번째는 뭐가 있냐 하면요. 내가 이래도 이것이 사진이 예술 아니냐? 하고, 그 사람들을 제가 하나하나 찍어 나갔을 때 오히려 그 친구들이 아, 이거 정말 사진이 그 예술이구 나. 라고 했어요. 예를 들어 서정주 영감님이 임응식 선생께서 50년대에 그때 문협, 문협이라 거 있어요. 문협이라는 게. 요새로 말하면 예총이라는 거 전신이에요. 거기에 사진이 들어가려 니까 서정주 영감이 그러더래요. 짤가닥도 예술이냐? 고 그러더래. 그러고는 한 마디로 거절 당하셨대. 짤가닥도 예술이냐고 그래서. 그런데 서정주 영감 쭈그리고 앉은 거 제가 찍어서 갖다 드렸거든요. 그랬더니 야. 이거 예술이다. 라고 그러더라고. 그러고 그때까지 자기 사진을 말 이야, 몇 십 년 동안 신문기자니 뭐니 하는 사람들이 찍었는데 진짜 나를 완전히 나를 완전히 포 획해버렸다. 고 말이야. 그러면서 뭐라고 하냐면 이거 나, 하나 내 작품하고 바꾸자. 고 그러 더라고요. 어떻게 바꿀까요? 했더니 내 꺼 붓글씨로 써서 줄 테니까 당신도 이거 하나 좀 뽑아 서 나 하나 줘. 맞바꾸자. 고 그러더라고. 아, 그럽시다. 그래서 우리 집에 그거 하나 있어요. 그 양반이 저 붓글씨를 써서. 그분이 고맙게도 심지어 액자까지 해 줬어요. 그만큼 내 사진 그. 최: 표구까지 해서요. 육: 표구까지 해서, 쭈그리고 앉은 사진 있지 않습니까? 그걸 그렇게 이 양반이 참 좋아하시고 예 술이라고 했어요. 그러고 그 콤플렉스라는 게 두 가지 그 측면이 있어요. 하나는 내가 이제 사 진하다, 시를 쓰고, 내가 연극 하던 사람이 이제 사진한다니까 그 당시에 가장 인정하지 않

122 <예술가의 초상>, 서정주, 1970년대. 던, 그런 사진을 하게 된 데에서 오는 나 자신이 처음 품었던 콤플렉스. 그 다음에 내가 예술가 들을 찍어서 오히려 극복한 콤플렉스. 이것이 사실은 내 <예술가> 시리즈에서는 짚고 넘어가야 할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러고 그 다음에 제가 이 <예술가> 시리즈를 하면서요, 또 여러분 들 제가 분명하게 좀 얘기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저는 이 작업을 시작할 때 말이죠. 지금도 그렇 습니다. 예술가만큼 가장 중요한 건 자존심이에요. 한 나라가 독립하듯이 예술가는 각자가 저마 다 자존심에 독립, 자기 정신세계, 그 자존심의 주인공들입니다. 근데 내가 가만히 (요즘) 유행 가를 보면 말이죠. 나훈아를 흉내 내는 너훈아라는 사람이 하나도 아니고 두 사람이나 있어요. 최: 예? 육: 너훈아. 모르십니까? 너훈아라고. 나훈아를 말이야. 그 사람을 이미테이션(imtation) 해서 부 르는 가수가 있어. 너훈아라고. 나훈아를 흉내 내고 부르는 가수가 있어요. 최: 예전 가수입니까? 육: 아, 요새 떠요. 그 너훈아라고. 두 사람이나 있어. 사실 우리 예술가들이 거의 우리나라 사진가 들이나, 예술가들이 저거하고 뭐가 다른가 하는 생각을 해요. 예술가는 분명히 얘기하지만요. 자존심의 대결이에요. 예술의 장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 내가 니 아류는 될 수 없다. 는 거. 아 류만 되면 그건 죽는 거야. 저는 그건 하나는 알고 있었어요. 예술가를 찍을 때도 내가 그건 어 디까지나 내세웠던 것이고. 그러니까 여러분들, 내 사진에서는 예술가들을 내 손바닥에 얹어 놓 고 찍었지. 뭐 숙이고, 기어가며 찍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그 사진 전부 다. 내 손바닥에 분명 히 얹어 놨지. 그만큼 저는 작업을 할 때 예술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자존심이다 말이야. 자존 심. 그 자존심 이것이 허물어지면 이건 다 허물어지는 거다. 예술에서는. 근데 이제 제가요. 이 자존심 얘기를 왜 하냐면요. 그럼 내가 인물사진 이거 하면서 요세프 카쉬 (Yousuf Karsh, 1908~2002, 사진가) 나 할스만(Philippe Halsman, 1906~1979, 사진가) 이나. 또 누 구야? 그 저 유명한 또 저 그 인물사진가? 최: 카쉬?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23 육: 카쉬와 할스만. 또 뭐죠? 최: 예? 육: 또 있죠? 그 왜 저 미술가들 뭐 조형적으로 찍은 사람? 하여튼 그 왜 이름 있는 인물사진가들 있 지요? 나는 그거 다 보고 의식을 했어요. 나는 이렇게는 안 찍는다. 나는 카쉬 흉내 안 낸다., 나는 할스만 흉내는 안 내겠다. 그 다음에 누구야? 그 왜 몬드리안 찍고 한 사람 있잖아. 누구 지? 몬드리안을 조형적으로 딱 찍은 사람. 화가들 주로 조형적으로 찍은 사람 있잖아? 최: 아, 뒤에 가서요. 육: 어? 육: 뒤에 소품 다 놓고 이렇게 찍은 사람. 그런 사람들 사진들 꺼내놓고 보고. 나는 이렇게는 절대로 안 찍겠다. 저는 아주, 아주 단단히 각오하고 예술가를 찍은 사람이에요. 어? 그러면서 그 다 음에는 아, 이 친구들이 이렇게 찍었는데 나는 이렇게 안 찍겠다. 감히 대한민국에 말이야. 이 제 사진 하는 사람이, 프로로 이제 시작하는 사람이. 나는 그만큼 내가 아주 크게 오기를 부리 고 시작을 한 겁니다. 그러고 그 다음에 그럼 어떡할 거냐? 말이야. 그럼. 괜히 그저 자존심만 내세워 가지고서 큰 소리 쳐 봤자 그거 되는 거냐? 그럼 구체적인 방법은 어떻게 할 거냐? 아, 이 친구들 (카슈, 할스만을 지칭하여 말하면서) 여기에는 말이야. 인간이 없어. 사람 냄새가 안 나. 사진에. 최: 아놀드 뉴먼(Arnold Newman, 1918~2006, 사진가)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놀드 뉴먼 육: 아놀드 뉴만 얘기야. 아놀드 뉴만이니 뭐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 카쉬나 아놀드 뉴만이나 어? 또 할스만 보면 말이야. 사람 냄새가 안 나. 최: 할스만이요? 할스만. 육: 할스만. 있잖아. 타임 지인가 제일 많이 표지 장식한. 있지? 최: 타임 지요? 육: 타임 잡지 표지 사진. 최: 할스만이요? 육: 네. 아, 그래서 하여튼 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 사진가들 있지요. 나 그 작업하면서 항상 그거 봤어요. 그러고 어떻게 하면 이 친구들은 말이야. 닮지 않고 나 내 나름대로의 내 길을 갈 거냐? 하고 거기서 내린 답이 그거에요. 이렇게 발견한 게. 이 친구들에게는 사람 냄새가 안 나요. 사 람 냄새가. 예를 들면 할스만의 경우에는 향수 냄새가 나. 향수 냄새가. 어? 어떤 한 겹을 뒤집 어 쓴 가면이고. 어떤 치부가 안 드러나요. 다시 말하면 발가락 냄새가 안 나고. 땀 냄새가 안 나 고. 그래. 아, 그래, 난 그럼 말이지, 사람 찍자. 사람. 밥 먹고 잠 자고 똥 싸고, 오줌 누고, 기분 나쁘면 말이지 터트리고. 이런 생생한 사람으로 찍자. 그 생각을 내가 아주 작심을 하고 한 작업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저는 뭐 그 평가야 어떻게 남들이 할 망정, 나 개인이 그 작업을 할 때는 저는 아주 그냥 굉장한 자존심을 가지고 시작을 했고. 지금도 그 사진이 좋고 나쁜 건 둘 째 치고. 저는 거기에 대해서는 지금도 내 소신에 굽힘이 없는 사람이에요. 그래 여기까지가 내

124 가 <예술가> 시리즈를 한 겁니다. 이제. 그러면은 우리 거로 왜 넘어 가느냐? 여기에는요. 자 존심이 또 작용을 해요. 이제는 예술가들 말이야. 할스만이나 아놀드 뉴만이나 뭐 이 양반에 대 해, 한 사진가, 대한민국의 한 사진가로서의 자존심인데. 가만히 보니까 이거 로버트 프랑크는 말이야, 자기가 제 카드를 내놓은 거야. 또 에드 반 데르 엘스켄도 보면 말이야 지 카드 내놓고. 또 그 당시 브란트, 빌 브란트(Bill Brandt, 1904~1983, 사진가)도 그렇고. 전부다 영국은 영국 사진가가, 미국은 미국의 사진가가, 프랑스는 프랑스의 사진가들이 다 자기네 카드를 내 놨어. 카드를. 그러면 육명심. 대한민국의, 저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한국에서 육명심이란 말이 야, 이 사진가는 어떤 카드를 내 놓아야 할 거냐? 자꾸 찾다 보니까 내 꺼 내놓을 거 밖에 없더라 고. 그러니까 연결되는 게 어떻게 연결되느냐면요. <예술가> 시리즈에서 이제 그 우리 <백민 > 시리즈로 넘어가는 건 그렇게 됩니다. 그런데 먼저 말씀하실 때에 제 <인상> 시리즈 하고 < 백민>하고는 너무 다르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맞습니다. 그건 아주 달라져요. 왜냐면은 <인상 > 시리즈에서는 이미지라는 걸 굉장히 중요시 여겼어요, 표현이라는 문제를. 그런데 이 <예술 가> 시리즈로 넘어오면서 달라진 게 뭐냐 하면요. 어떤 이미지보다도 생명 이라고 하는 거를. 사실은 그 <예술가> 시리즈에서 다른 사람들하고 다른 점이 있다면요. 아까 얘기한 카쉬나 할 스만 또는 저 뭐냐 뉴만 얘기할 때 차이점을 좀 유식한 말로 정리를 하면 내 경우는 그 생명 이라 는 데로 갔어. 하나의 생명 이라는 문제로. 라이프(life). 어떤 그 생생한 생명 이라고 하는 문 제. 이것이 그 다음에 어디로 가냐 하면 우리의 땅, 땅 기운을 받고 여기서 뿌리를 내리는 우리 의 백민 이라는 데로 옮아가요. 그러고 보면 분명히 내가 처음에 시작했던 <임프레션>, 저 뭐 냐 <인상>이라고 하는 거하고 달라집니다. 이제. 처음에 어떻게 표현할 것이냐의 문제, 어떻 게 좀 깊이 있는 표현 을 할 거냐 하는 문제, 문제에서 출발했다면 여기에서는 어디로 가냐 하 면 하나의 그 생명 이라는 데로 간다고. 생명 이라는 문제로. 그러기 때문에 그 점에서는 이제 달라지는데. 어떻게 달라지냐 하면 <예술가> 시리즈에서 생명의, 인간의 발견. 인간의 발견이 곧 생명이라는 문제로 이렇게 넘어가기 때문에 고런 차이가 있는데. 이게 차이라고 하기 보다는 사실은 한 사진가로서의 어떤 자각의 어떤. 변증법적인, 사실은 그 하나의 새로운 전개가 아 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최: 아까 <예술가의 초상> 작업 하실 때에 사진의 예술적 지위, 사회적 지위가 무척 낮았다. 육: 맞아, 낮았죠. 최: 그렇지만 선생님께서는 이제 사진가로서의 자부심 뭐 그런 것을 굽히지 않고. 육: 네. 최: 사진을 찍으시면서 다른 예술에 대한 사진의 열등감을 극복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육: 네. 네. 그것도. 물어보셔. 최: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후에 김행오 선생님, 아까도 말씀하셨던 김행오 선생님이나 현일영 선생 님, 혹은 이상규( 李 商 圭 )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언급을 가끔 하셨거든요. 육: 했지요.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25 최: 왜 그때 <예술가의 초상>에서 그렇게 사진에 대한 나름의 자부심을 가졌으면서 그 <예술가의 초상>에는 어떠한 사진작가 한 명도 그 넣지 않으신 이유는 뭐였습니까? 육: 어, 그러지 않아도 그 얘기를 내 주변에서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예술가를 찍어도 사진가는 한 사람도 안 찍었냐 그러는데. 현일영 영감은 찍기 전에 돌아가셨어요. 60년 대 돌아가셨다고, 현일영 영감이. 내가 그 이 양반을 찍겠다는 생각을 하기 전에 돌아가셨고. 이 상규 선생은 일찍 사진계를 은퇴했고. 김행오 선생도 그러기에는, 그분이 60년대 말인가, 70년 대 초에 이민 가요. 그래서 못 찍었던 겁니다. 그밖에는 찍을 사람이 없어서 안 찍었고. 최: 그 외에는 이명동 선생님 같은 분에 대해서도 존경심을 지금까지도 표하고 계신데. 육: 그건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그렇죠. 그런데 이제 솔직하게 얘길 하면요. 이명동 선생 찍을라면 요, 임응식 선생부터 찍어야 돼요. 근데 임응식 선생 저는 찍기 싫었어요. 예? 아시겠습니까? 최: 예.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인제 그 <예술가의 초상> 이후로는 한국의 전통, 우리의 것 특히 무속 에 대한 탐구로 선생님의 작업 방향. 육: 거기에 대해서 하게 된 그 이야기를 할게요. 제가 우리 것으로 넘어오는 데는요. 머릿속으로 이 렇게 해야겠다 하고 넘어 온 게 아니에요. 제가 말씀 드렸듯이 제가 중 3때부터 판소리에 기울어 졌다는 말씀했죠. 사실 제가 60년대 소리를 들으러 굉장히 많이 다녔습니다. 연대 다닐 때 저는 시도 많이 썼지만 우리나라 판소리니 국악 들으러 참 많이 다녔어요. 아주 뭐 일주일이면 꼭 몇 프로씩은 봤으니까. 지금도 저는 내 방에서 그 우리 국악방송 있지요? 그거 틀어놓고 사는 사람 인데. 그렇게 저는 국악을 좋아해요, 정말. 우리나라에 그 정가( 正 歌 )도 그렇고. 서도 소리는 서 도 소리 대로. 또 그 다음에 강원도 토리 76), 토리도 그렇고. 전라도 육자배기니. 저 참 좋아합니 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예술가> 시리즈를 다 찍고 그 다음에 뭐로 넘어갈 건가? 그러다 보니 까 내가 학생들 보고 찍고 싶은 것을 사진 찍어 오라고 그러는데. 그럼 내가 찍고 싶은 게 뭔가 했 더니 우리 것이더라고. 우리 것, 근데 거기에 또 작용을 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슨 작용을 하 냐면요. 70년대 한참 우리나라에 이제 도시화가 피크(peak)를 이룰 때입니다. 그게 만 불 시대 로 이제 넘어서서 새마을운동 하면서 그냥 하루아침에 후닥닥닥 아파트 들어서고, 공장단지가 들어서고 할 때인데. 그때 제가 72년도에 서라벌로 오고 75년도에 신구로 가지 않습니까? 그때 내가 신천 살면서 여기 잠실로 해서 성남으로 가요. 그러면 이 벌판이 하루가 다르게 달라져 가. 아이고 안 되겠다. 이거 기록해야지. 이거 이대로 놔 뒀다면 말이지 눈 멀쩡하게 뜨고 이거 (채 록 불가) 노릇을 하겠구나. 이거 빨리 기록해두지 않으면 안 된다. 했어요. 더군다나 내가 그 당 시에 국악 하는 명인들 있지요. 명창들을 다 찍었습니다. 그때. 그러다 보니까 우리의 토박이들 도 찍어 놓아야 돼. 우리 토박이들. 그래 그때부터 작심하고 찍기 시작한 겁니다. 최: 그러면 <백민>은 우리의 토박이 육: 토박이들. 그때부터 이거 지금 안 찍으면 안 되겠다. 누가 찍나 보니까 찍는 사람이 없어. 그리고 그때 그 토박이들 찍어 보니까 참 좋아. 이게 어떻게 간 거냐 말이지. <예술가>에서 왜 예술가 를 사람으로 찍었다고 했지 않습니까? 결국은 예술가도 사람이더라고. 밥 먹고 잠 자고 똥 사는 76) 강원도 민요의 메나리토리를 말한다.

126 (좌) <백민>, 안동, 1983. (우) <백민>, 해인사, 1981. 사람이더라고. 아, 근데 거기다가 우리 토박이들은 더 사람 냄새가 폭삭폭삭 나. 어? 그래서도 그리 갔고. 또 내가 아침, 저녁으로 여기 잠실에서 성남까지 가면서 보면 말이야 이거 그냥 큰일 났어. 그래서 그 작업을 찍게 된 거야. 최: 백민 이라는 용어는 사회학적인 용어입니까? 아니면 그 당시에. 육: 예. 그거 질문 잘 하셨어요. 사실은요. 사회학적 용어로 하면 평민이나 저 민중이에요. 그게. 민 중. 그 당시에 우연의 일치인데 그 당시에 문학에도 그렇고 미술에도 어떤 민중미술, 민중문학이 막 태동을 할 때입니다. 70년대 중반서부터. 그런데 나는 사실 처음에는 그거를 뭐 동조하고, 의 식한 거는 아니었어요. 제일 컸던 것은 하여튼 내가 신천에서 학교 차 타고 잠실 건너서 성남을 왔다 갔다 하며 위기감을 느꼈던 거고. 그 다음에 내 안에 내가 찍고 싶은 걸 찍는다고 할 때 내 안에 있는 어떤 우리 것에 대한 그 애정 있지요? 이것으로부터 찍기 시작했는데. 지금 그 말씀을 하시니까 내가 대답을 하는데, 보통 사람 같으면 아마 그걸 민중이나, 서민이라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나는 거기에 동조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게 국악 하는 김영동(金永東, 1951~, 대금연 주가)이라고 있어요. 김영동. 그 사람을 김민기(金民基, 1951~, 대중음악가수) 씨가 말이지. 최: 김영동 씨요, 아니면. 육: 김영동. 최: 영동이죠. 김영동. 육: 김영동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을 김민기 씨가 당신 말이야. 그 국악에도 민중음악으로서 그걸 좀 하는 게 좋겠다. 라고 하는데, 김영동 씨가 그걸 합니다. 하는데 이 양반은 어떻게 하느냐면 김 민기 씨 식으로 소셜(social)한 쪽으로 안 해요. 김영동 씨는. 우리 전통적인 음악 가락에다가 서민적인 것을 그 옷 입히는 것 뿐이지. 그래 나도 어떻게 이걸 방향을 잡을 것인가? 소셜한 쪽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27 으로 갈 거냐? 아니면 어느 쪽으로 갈 거냐? 하고 보니까 내가 국악을 좋아하니까 김영동 국악 을 또 좋아해요. 아주 좋아합니다. 그래 나도 김영동과 똑같이 요 선으로 가자 해서 그 <백민> 을 그렇게 간 겁니다. 최: 한마디로 얘기해서 정치적이고 사회학적인 냄새를 빼고, 육: 빼고. 뺀 그냥 서민. 최: 백민 이라는 용어가 있었던 것입니까? 육: 백민 이라는 용어가 있어요. 사전 찾아보면요. 옛날에 해방 후에 잡지에 백민 이라는 잡지가 있었어요. 백민 이라는 잡지가. 근데 그 백민 이라는 잡지가 있는데, 그 백민 이 무슨 뜻인 지 하고 내가 알아봤더니. 고게 나는 처음 그게 백의민족 ( 白 衣 民 族 ) 인 줄 알았어요. 백민이라 는 게 흰 백( 白 )자에 백성 민( 民 )자니까. 백의민족, 요 말을 백민이라고 했는가 보다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사전을 찾아 봤더니 아무런 벼슬이 없는 일반 백성 이야. 최: 평민을 육: 평민이야. 평민이야. 그게 조금 낡은 언어야. 낡은 용어야. 최: 그래서 이제 비단옷 못 입는, 무명 옷 입는 일반 서민을 얘기하는 거군요. 육: 비단옷보다도, 거기서는 왜 백정 ( 白 丁 )이라 할 때 백정. 최: 예. 육: 백정 할 때도 그 백( 白 ) 자도 그겁니다. 백 이라는 것은 감투가 없다는 얘기야. 벼슬이 없고 또 아무것도 없는. 최: 평민, 흔한 말로 이야기하면 상놈 이렇게 되는 거네요. 육: 상놈 을 유식하게 말해서 백민 이라고, 백민 이라고 한 거예요. 그래서 아, 잘 됐다. 아 이게 말이야. 이게 아무 벼슬이 없는 일반 백성인데 어떤 흰 백( 白 )자에 백성 민( 民 )자니까 백의 민족 이라는 요런 또 의미도 주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단어를 쓴 겁니다. 그래서 <백민>이라는 이름 붙이고 나서 그것도 사진 작업을 시작했어요. 최: 어쨌든 근데 1970년대가 우리나라가 정치적인 상황은 조금 암울하지 않았습니까? 유신헌법 공 표되고 그래서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문학 쪽에서는 인제 민중문학, 민족문학. 육: 했지요. 최: 미술 쪽에서도 민중미술. 아무래도 현실참여적인, 그 한국의 모순적인 정치 상황에 대한 저항의 식 이런 게 고취되었는데 선생님은 그런 쪽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셨어요? 육: 저는 뭐 그런 데 대한 관심이야. 한 발짝 물러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 말에 조금 정답은 아니, 비 껴가는 답입니다마는 제가 이제 그 <백민>을 찍을 때, 또 그 찍는 데 어떤 또 이유가 있어요. 제 가 이제 학생들에게 유학을 보내겠다 하는, 이제부터는 더 이상 이대로 국내에서 가르치는 것으 로는 역부족이다. 아무리 해 봐도 말이야, 삼십 명 중에 말귀를 알아듣는 놈이 그렇게 강조를 해 도 열 명도 안 돼요. 그리고 이놈의 한국 사진계라고 하는 시대적 상황이 이게 보호를 안하면 완 전히 거기에 동화 되어버리는 그런 식의 상황이에요. 그래서 이거 말이야 유학 보내야지. 이대

128 로는 혼자 괜히 애만 쓰고 헛수고니까. 그래서 이제 유학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그렇게 하지 않습 니까? 그때부터 내가 또 그럼 이 아이들을 유학 보내고 할 일이 있다. 이 그루터기. 내가 이제, 왜 시골에서도 종가집이 대를 지키고 있어야 고향을 떠났다가 돌아올 그루터기가 되는데, 이 그 루터기를 내가 지키고 있어야겠다. 하는 생각도 제가 했어요. 이제. 다들 외국 가서 배워 올 거 아닙니까? 그런데 내가 우리의 그루터기. 우리의 전통적인 우리의 것을 내가 말이야. 이렇게 어 떤 뿌리를 박아 놓지 않으면 그 애들이 다시 시작을 해야 돼요. 그러니까 내가 그루터기를 마련 해 놓고 여기서부터 모두가 출발하도록 터전을 내가 마련해야겠다. 그런 작용도 했습니다. 여러 가지 그 요인들은 많이 작용을 했던 겁니다. 그러고 그때는 사실 <예술가>시리즈를 찍을 때는 그저 단 몇 가지 생각으로 했는데, <백민>을 할때는 내가 나이도 오십으로 접어들고 하니까 철 이 났는지 그런 많은 의식을 하고서 작업을 시작을 했어요. 최: 1970년대가 어쨌든 민중, 민족문학, 혹은 민족미술 또는 우리 것에 대해서 범학계적으로 한국적 인 것에 대한, 우리 과거에 대한 민족사학적 입장, 민족주의적 입장에서 탐구가 아주 굉장히 광 범위하게 이루어졌던 시기란 말이죠. 육: 그때 그러니까, 이렇게 얘기하시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요 어떤 독재에 대 한 항거가 단순히 독재에 대한 항거뿐만 아니고 그게 반미까지 되면서 어떤 민족적인 주체성이 라는 자각 있지 않습니까? 최: 네. 맞습니다. 육: 그것이 그 당시에 발동을 하게 된 거죠. 최: 그러고서 민속학에 대한 한국의 전통적인 민속학에 대한 관심도 꽤. 육: 그것도 저한테는 또 어떤 요소가 또 작용을 했겠지요. 더더구나 내가 예술가들을 찍고 찍을 때 에 뭐 조석( 朝 夕 )으로, 그때는 뭐 조석으로 만났어요. 그리고 저 아까 <예술가>시리즈 얘기할 때 빼놓고 지나간 게 있는데 이 사람들하고 내가 얼마나 친했냐 하면요. 문단에 소문이 났어. 그 지금 육명심이라는 자가 와서 문단을 그냥 저 완전히, 뭐라고 그러지, 휩쓴다는 말은 우스 운데. 왜냐 하면요. 그때에 저에 대해서 시를 쓴 사람이 세 사람이나 있어요. 정한모( 鄭 漢 模, 1923~1991, 시인, 국문학자) 선생이 저에 대해 시를 썼습니다. 정한모 선생이. <사진가 와 이엠에스(YMS)에게>라고 시를 쓴 게 있고. 천상병( 千 祥 炳, 1930~1993, 시인)이가 또 쓴 게 있어요, 저에 대해서. 천상병이는 조금 아주 조금 유머러스한 거지만. 그리고 윤석산( 尹 石 山, 1946~, 시인)이라고 저 뭡니까? 그 당시 지금 제주대학교에 교수로 있는 윤석산이. 그 친구가 저에 대한 시를 썼어요. <사진가 육명심>이라고 해서. 또 그 다음에 저 누구야 죽은 이형기( 李 炯 基, 1933~2005, 시인). 죽은 이형기가 그 에세이로 나에 대해서 쓴 것이 있고. 최: 이형기? 육: 예. 이형기. 그 다음에 박제천( 朴 堤 千, 1945~, 시인)이라는 <장자시> 쓴 친구가 또 나에 대해 서 시 쓴 게 있고. 그게 이형기 씨는 죽었고. 박제천 씨 같은 경우는 지금도 살아서 자기 잡지 내 는 거 그냥 벌써 몇 십 년 동안 부지런히 보내 와. 그러고 나하고도 친하고. 그만큼 <예술가 시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29 리즈>로 내가 문단과 깊이 교류를 해서 가까웠는데. 아, 그렇게 지내니까 문단에서 민중미술이 고, 민중문학 얘기하는데 저에게도 왜 그 영향이 안 왔겠습니까? 최: 그때 당시에 저는 그 어떻게 매칭(matching)이 되는지는 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만. 김수남 77) 선생님도 어쨌든 한국의 어쨌든 민속 작업에 대해서 이제 거의 평생을 바치다 육: 네. 그 얘기도 좀 할게요. 사실은요. 나는 김수남 씨의 작업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이에요. 그러 고 김수남 씨를 얘기 하는데 또 놓치고 지나가서는 안 될 분이 있어요. 앞으로 우리 최 박사 말이 야. 그 양반 김대벽 78) 이라고 있어요. 김대벽이라고 아시죠? 최: 예. 육: 김대벽이라는 인물이 중요한 사진가입니다. 그분이 우리의 고건축 있지 않습니까? 그 안장헌 ( 安 章 憲, 1946~, 사진가) 씨도 있는데. 그 어떤 의식이라든가 작업의 성과를 봐서는 미안한 얘기지만 안장헌 씨는 그저 기록이라는 게 주가 되고. 그 김대벽 씨의 그 고건축은 굉장히 중요 한 작업입니다. 최: 그분이 정도선 79) 선생님하고 친척관계입니까? 육: 그게 정도선 선생의 처남입니다. 최: 처남이요? 육: 예. 처남이고. 정도선 선생의 영향을 받아서 학원사에 들어가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사람입니다. 최: 어디요? 육: 학원. 최: 학원. 육: 학원 80) 이라는 잡지. 지금 우리 사진계에서는 별로 얘기가 안 되어 있어요. 그 김대벽 선생이라 는 분이. 그러니까 김수남 씨하고, 김대벽 선생 둘은 그 좀 우리가 주목하고 평가를 해야 하고. 최: 김대벽 선생님은 1970년대에도 한국의 고건축에 관심을 가지고 계속 작업을. 육: 했지요. 특히 한국의 고건축 81) 이라고 해서 임 선생님이 {최: 1960년대 후반에} 60년대에 낸 거 있지요. (채록 불가) 저것에 대해서 내가 비판했어요. 한국의 고건축 을요. 저건 건축 모르 고 찍은 사진이라고 그랬어요. 임 선생의 고건축을. 최: 임 선생님이 그거 인제 공간 에 계실 때에 찍으신 거죠? 육: 예. 저거 건축 모르고 찍은 거라고, 한국 건축의 특성을 알고 그 특성을 잡아내야지. 아, 멋있게 찍는 것이 건축 아니다 말이야. 그게 내가 한 작품에 대한 비판입니다. 근데 그런 점에서 그 김 대벽 선생은 우리나라 고건축의 특성을 제대로 알고. 고건축의 그 우수한 점. 그 맛을 제대로 살 린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두 번, 세 번 얘기합니다만, 그 김대벽이라는 인물을 꼭 기억해 두 셔야 하고. 또 작업을 말이죠. 우리들이 정리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고 김수남 씨의 경우에 는 그 분은 어떻게 평가를 해야 하냐면, 굉장한 중요한 인물이에요. 김수남도 굿을 찍었는데. 물 론 예술이라는 측면에서는 기록성이라는 데 너무 많이 치중했다는 데에서 아쉬움이 있어요. 저 양반의 경우에는 주로 신문기자를 했기 때문에 어떤 기록이라는 쪽에 치중을 했어요. 다시 말하 77) 김수남( 金 秀 男, 1949~2006). 사 진가. 연세대 지질학과를 졸업하고 동아 일보사 사진부에서 근무했다. 1970년대 중반부터 30년여년 동안 한국의 굿을 기 록해왔으며 한국의 굿을 찍으며 시선을 아시아로까지 넓혀 80년대 중반부터는 아시아의 소수민족을 찾아 그 문화 원형 을 담는 작업을 해왔다. 대표적 사진집으 로 열화당에서 출판된 한국의 굿 (1983 ~1993, 전20권)이 있다. 78) 김대벽( 金 大 璧, 1929~2006). 한국 전통 문화재 사진가이다. 1929년 함경북 도 행영에서 태어나 한신대학교 신학대학 을 졸업하였다. (주)학원의 사진부장과 삼 화인쇄 사진부장을 지냈으며 1969년부터 문화재관리국 사진담당을 했다. 1980년 대부터 한옥을 비롯한 전통 건축물에 관심 을 쏟았으며 목수 신영훈( 申 榮 勳, 1935~ )과 함께 우리 한옥 (2000), 한옥의 향 기 (2000), 한국의 고궁 (2005) 등을 펴냈다. 79) 정도선( 鄭 道 善, 1917~2002). 일제 강점기 회령사우회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후 중앙일보 사진부장, 한신사진뉴스 편집 국장 등을 역임했다. 저서로는 정도선 수 필집 (1983)이 있다. 80) 학원 ( 學 園 ). 학원사에서 발행한 학 생교양지로 1952년 11월에 창간하여 1979년 3월에 폐간되었다. 58 수미산( 須 彌 山 ). 고대 인도의 우주관에 서 세계의 중심에 있다는 상상의 산이다. 81) 임응식이 촬영한 한국의 고건축 시 리즈이다. 도서출판 광장에서 발행했으며 총 7권이 나왔다. 다섯 번째 책인 내설 악 너와집 편은 강운구가, 일곱 번째 책 수원성 편은 주명덕이 촬영했다. 가로 26cm, 세로 35cm의 판형으로 제작된 이 책에는 각 건축물의 사진 뿐 아니라 건축 물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와 건축물 내의 세밀한 구조에 대한 꼼꼼한 설명, 도 면, 건축가 김원이 기고한 건축물에 대한 해설 등이 함께 실려있다.

130 장승 촬영지에서 육명심, 1994. 면 하나의 작품성이라고 하는 점에서는 기록성에 너무 치중해서 아쉬움이 있습니다만. 사실 은 저 분이 연대 후배인데 저 분이 나에 대해서 참 묘한 반응을 했었어요. 괜히 저 양반이 날 보 면 말이야. 내 훨씬 후배거든요. 그런데도 보면 말이야. 가까운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시 비 거는 것도 아닌데 보면 더. 최: 관계가. 육: 이상하게 나와. 최: 친밀한 관계는 아니셨군요? 육: 친밀한 관계, 뭐 후배니까. 자기는 구본창 보고 후배, 후배하는 사람인데. 나보고 선배, 선배 하 면서도 왜 또 그렇게. 나는 알아요, 왜 그런가를. 나는 내 무당 사진 몇 장 가지고 나는 사람들 한테 알려진 사람이거든요. 내 대표작이라고 하면 그 저 동해 별신굿의 박용녀 할머니 고 하니 까. 자기는 많이 무당사진 찍었지 않습니까? 응? 그러니깐 내 주변에 누가 그래요. 내 주변에서 는, 사진 많이 찍었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 아니네. 그런 소리를 했어. 최: 예? 육: 사진 많이 찍는다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네. 그러더라고. 최: 김수남 선생님이요? 육: 아니, 내 후배 중에 누가. 최: 근데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육: 그거지. 최: 그러니까 김수남 선생님은 사진을 엄청나게 많이 찍었고, 육: 무당사진 전문으로 찍었고. 나는, 최: 선생님은 적게 찍으셨는데, 많이 찍는 게 중요한 게 아니군. 그런 이야기를. 육: 그런 얘기까지 했었으니까. 그 말 속에 뭔가 아마 그 답이 있을 거요. 최: <장승> 사진은 뭐 1982년에서 90년까지 거의 촬영이 7년여에 걸쳐서. 육: 7년 찍었습니다.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31 최: 장승 소재지 자료 구하는 데도 뭐 2, 3년이 걸렸다고. 육: 네. 그렇습니다. 최: 쓰신 적이 있는데요. 한 번 <장승> 작업에 관한 어떤 진행과정에. 육: <장승> 7년 걸렸는데요. 최: 애로 사항 그런 것 좀 말씀해 주십시오. 육: 아, 우선 장승 자료를. 그 민속학자들도 이상합디다. 그 장승 자료를 그렇게 안 내 놔. 줘도 말 이야 한 두 군데만 가르쳐 줘. 최: 예? 육: 장승을 말이죠. 자료를 달라고 하면 한 군데만 가르쳐 주고 잘 안 줘. 응? 그러느라고 2, 3년 걸 렸어요. 그 장승 자료 다 그 사람들한테 빼 내는데. 그러느냐고 7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런데 근 데 7년 걸렸기 때문에 나는 사진가로서 어떤 그 새로운 그 어떤 경험을 해요. 저는 참 그 작업을 하면서 내 작업을 통해서 내 인생에서 그 만큼 성장을 해. 첫째, 내가 그 <예술가> 시리즈를 내 가 작업을 하고 나서 어떤 콤플렉스를 내가 이제 극복을 했는데. 아까 그 얘기 하다 넘어가, 하다 가 그 말을 못 했는데. 제가 어려서부터 그냥 가난했고. 제일 밑바닥에서 산 사람이거든요. 그래 서 겉으로는 멀쩡해도 속으로는 굉장한 그 상류사회라든가, 왜 있는 사람들. 나는 그 상류사회 라는 건 말이죠. 까마득한 걸로 알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참 콤플렉스가 많았는데. <예술가> 시 리즈 한 10년하고 났더니 나도 모르게 없어져 버렸어. 정신과의사한테 치료 받은, 명의한테 치 료 받은 것보다 [나아요. 콤플렉스가] 없어지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건방질 만큼 이제 자신감 이 넘쳐 버렸어요. 그게 내가 <예술가> 시리즈에서 얻은. 그때가 내가 사십 대이거든요. 근데 사십 대에 그 평생에 극복하지 못했던 자신감을 말이지. 그 열등감을 극복해 버리고 자신감을 넘 쳤으니. 그러다가 이제 오십 대를 넘어가면서 내가 <장승>을 찍는데. 여기서 또 내가 엄청난 경 험을 해요. 저는 그 만큼 보상을 받아. <장승>을 이제 7년을 찍었습니다. 전 지금도 자동차가 없어요. 전부 다 대중교통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장승 찍으러 가면 그 어디 뭐 교통 닿는 데 없습니다. 대개 대중교통 타고 가서도 걸어 들어가야 돼. 버스 갈아타든지, 걸어 들어가야 돼요. 이렇게 하다 보니깐요. 그리고 제가 장승을 찍는데 한 번, 한 군데 간 거 아니에요. 한 군데를 뭐 가령 많이 간 데는 열 번 이상도 갔고. 최: 동일한 장소요? 육: 네. 동일한 장소는, 최: 그 이유는? 육: 그 이유는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서. 사진이 마음에 안 들어. 나중에 중반쯤 넘어가서부터는요. 해가 이런 날 (창문을 바라보며) 있지 않습니까? 이런 날은 아, 어디 가면 장승이 어떻겠다. 또 눈이 펑펑 오는 날에는 어디가 어떻겠다는 게 눈에 선해. 그러면 달려가게 돼 있어. 고, 나중에 는 이 놈이 정이 들어가지고, 장승이. 그게 7년을 찍었는데. 한 5년쯤 찍고 나니깐요. 아, 새로 운 경험이 왔어. 저는요, 어려서부터 우리나라가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그랬어요. 근데 내가

132 좀 성질이 못 된 게 있어. 남들이 다 좋다고 해도 내가 봐서 그렇게 안 느껴지면 난 그거 안 따라 가요. 그게 못된 성질인데. 선생님이 초등학교 때부터 뭐 삼천리 금수강산이라고 하는데. 우리 나라가 뭐 얼어 죽을 무슨 놈의 삼천리 금수강산이야? 더구나 해방 후에 그 산들 벌겋게 벗겨지 고 말이지. 무슨 놈의 삼천리 금수강산이에요? 또 중고등학교 때도 보면은 삼천리 금수강산. 대 학교 졸업 맡고 나서도 말이야. 삼천리 금수강산이야. 근데 아무리 봐도 삼천리 금수강산 아니 야. 차라리 일본이나 스위스나 이런 나라 같으면 그 아름다운 금수강산이지. 근데 제가요 장승을 7년 동안 찍었는데 5년 만에 아, 한국이 참 삼천리 금수강산이다. 라는 게 가슴으로 왔어요. 그 금수강산이 눈으로 보는 금수강산이 아니더라고. 흥부 마누라가 자식들이 많은데 그 자식 새 끼 하나 말이야. 그 입이라도 덜게, 배라도 안 곯게 말이야. 부자 집에 가라고 등 떠 밀어 보내도 싫어. 나는 엄마가 좋아. 하고서 그 때 꼬짱꼬짱한 엄마의 치마폭에 늘어지고 안 갈 때, 그 어 머니의 품 있지. 이 나라, 이 땅이 그 금수강산이야. 내가 보니깐. 그래 지금 저는요, 이제 서울 만 벗어나고 고속버스 타고, 이렇게 산만 봐도요, 가슴으로 와요. 우리나라의 그 땅이, 산이 가 슴으로 와요. 마치 고향 뒷동산 같이. 내가 엄청난 것을 얻었어요. 그 다음부터 아, 우리나라 참 좋구나. 그 땅을 밟으면서도 어, 그래 이게 어떤 땅인데. 이게 오천 년간 우리 선조들이 흘리 고 땀 흘리고 피 흘리고 지켜온 땅이고. 이게 우리 고향 땅 들어서는 그런 기분을 내가 느꼈어요. (테이프를 잠시 갈며 휴식 후 계속 진행) 최: 아까요 <장승>에 관해서 말씀하셨는데. 작업과정 그리고 장승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그 자료 구 하는 과정, 그것에 대해서 상세하게 말씀해 주시죠. 육: 처음에는 제가 이제 어떤 스님인데. 저 어디죠? 저기 저 땅끝마을 거기. 최: 해남, 육: 거기 무슨 절이죠? 그 유명한 절이. 그 무슨 절이지? 땅끝마을에 있는 거. 절. 미황사( 美 黃 寺 ) 말 고 그 밑에 큰 거 있잖아? 대흥사( 大 興 寺 )? 최: 네. 대흥사. 맞습니다. 육: 대흥사 위에 올라가면 왜 유명한 그 일지암( 一 枝 庵 )이라고 있지? 일지암, 그 왜 다의 초의선사( 草 衣 禪 師 ), 왜 암자라고 하는 거. 거기를 지키시는 스님인데. 그분이 장승에 대해서 많이 자료를 가지고 있다고 그러더라고. 그래 거까지 갔지. 갔더니 그 일지암에 혼자 계시면서, 장승에 대해 서 자료를 좀 얘기를 했더니. 아, 이분이 두 군데인가 세 군데인가를 가르쳐 줘. 안 가르쳐 줘. 그래 아이고 좀 있는 대로 다 좀 가르쳐주시오. 했더니 아, 이걸 내가 어떻게 찾아낸 건 데 당 신한테 그냥 대뜸 가르쳐 주냐? 고. 하여튼 이거부터 찍고 나서 다시 얘기하라. 고. 그러다가 내가 이제 민속박물관에 이종철( 李 鍾 哲, 전 국립민속박물관장), 그분이 장승연구를 하시는 분이 셨어요. 그래서 그분을 알게 됐어요. 그분한테. 최: 국립민속박물관에,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33 육: 네. 민속박물관에 이종철 씨라고. 나중에 민속박물관에 관장까지 하지만. 그때는 관장 아니었 을 때야. 그래 그분한테 좀 자료를 얻고. 근데 그분들도 사실은 자료가 그렇게 많지를 않았어요. 그러다가 이제 김두하 82) 라고 하시는, 김두하라고 개인인데. 장승과 벅수 83) 라는 책을 영한사 전 두께만큼 큼직하게, 최: 장승과, 육: 벅수. 벅수. 최: 벅수? 벅수가 무슨 말입니까? 육: 그것도 장승의 다른 이름이야. 최: 벅수가요? 육: 어, 장승과 벅수 라는 그 책을 이 만큼 영한사전만큼 이렇게 두께가 큰, 책이 있어요. 지금까지 장승에 관한 자료집으로는 그게 최고로, 제일 잘 된 거죠. 근데 그분이 적극적으로 저한테 자료 를 주셨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자료는 이제 구할 수 있었는데. 가서 보니까 우리나라에서 말이 죠 한 3, 4년만 열심히 하면 대가가 되겠더구만. 3, 4년만 하면 대가가 돼. 한 4년쯤 하고 났더 니 말이지. 이제 그분들한테 자료를 내가 받았는데 나중에는 제가 발굴해서 갖다 주게 돼 버려, 거꾸로. 그래서 김두하 선생님이 쓰신 그 장승과 벅수 라는 책 서문에 보면요, 내 이름이 나와 요. 아, 이 책을 내는 데는 사진가 육명심 씨의 덕을 좀 봤다. 고 거기 또 써 있는데. 한 4, 5 년, 한 4년쯤 지나니까 내가 발로 뛰면서 찾아낸 것들이 더 꽤 많습니다. 근데 이제 장승 찍어보 니깐요. 아까 얘기한 우리 땅하고 왜 일치감 있지요? 이거 그러니까 그거 그 책으로만 보면 안 돼 요. 제가 한 4, 5년을 이렇게 땀 흘리면서 다니니깐요. 찾아가는 과정 있지. 이게 참 중요한 거 더라고. 그렇게 애를 써서 찾아가면 말이지. 그게 굉장히 소중해. 그게. 만나면 참 반갑고. 어? 만나면 반갑고 말이지. 한 그렇게 한 4년 남짓 하다 보니까 그 대동여지도를 만든 고산자( 古 山 子 ) 김 누구야? 유명한 최: 김정호( 金 正 浩,?~1866, 조선 후기 지리학자). 김정호? 육: 김정호. 김정호 생각이 나더라고. 아, 내가 대동여지도를 만드는 이분이 바로 이렇게 다니셨구 나. 그러고 내가 뒤를 따라가는 말이지. 그 고산자의 생각이 나고. 그리고 나중에는 말이지. 이 렇게 땅을 찾아가는 그 자체가 즐거워. 땅을 찾아가는 그 자체가. 그러고. 최: 가장 깊은 오지는 어디까지 들어가 보셨어요? 육: 가장 깊은 오지는 여수에서 배 타고 한 몇 시간 가야 돼. 거기 배 타고 몇 시간. 거기 갔는데. 한 번 가면 다음날 배가 없어요. 그때가 12월 달인데. 그냥. 아 바닷바람이 얼마나 또 찹니까? 그 냥 그 여관이라는 데서 자는데 웃풍은 세가지고서 나중에 감기는 들리고. 그때 생각하면 참, 그 런 데 참 많았죠. 지방에. 최: 가장 인상 깊었던 장승이 있다면 어디에 위치했던 장승입니까? 육: 처음에는 뭐 가장 인상 깊은 장승 그랬는데. 이제 자꾸 다니다 보니까 요놈은 요런 대로 좋고, 저 놈은 저런 대로 좋고 다 좋아요. 그리고 나중에 어떤 거를 가려지지 않고. 근데 그게 왜 그런가 82) 민학동인지 회장을 지냈으며 주요 저 서는 벅수와 장승 (집문당, 1990), 장승 과 벅수 (대원사, 1991)이 있고 연구논문 으로는 노표장승고찰, 두창장승고찰, 장승류의 명칭 고찰 등이 있다. 83) 김두하, 벅수와 장승, 집문당, 1990. 전체 1230쪽의 분량으로 800장의 사진과 기원, 변천사, 명동에 대한 연구, 장승의 형 태, 제작에 대한 고찰을 했다.

134 하고 봤더니. 그건 그거더라고. 장승 그 자체로 보이질 않고. 그 장승을 말이죠. 세워 놓은 것도 그렇고. 왜 스카이라인(sky line) 있죠. 세워 놓은 그 마을하고 뒤 풍경 여기까지 보이면요. 장 승 보는 맛이 더 나요. 그래 여러분들 내 사진 보실 때 그 배경까지 좀 보셔야 돼요. 대개들 장승 지금 찍은 거면 장승만 그냥 이렇게 따서 찍어 놨어. 그렇게 기록했어. 근데 장승이 있는 뒤에 그 배경이 있지. 스카이라인. 그러고 풍토라는 게 있어요. 거기까지를 봐야 하는데 그걸 안 봐. 안 보는 게 아니라 못 보게 돼요. 내가 저것 한 4, 5년 다니니까 보이더라고. 그게 그 풍토감에 의해서 그게 이루어진 거지. 장승이라는 게 사람이 만든 거 아니에요. 사람만이 만드는 거 아니 에요. 자연과 공동작업이에요. 장승 깎아 가지고서 한 1년쯤 지나면 이제 그게 곰삭아요. 이제 비 맞고, 눈 맞고, 바람 맞고 하다 보면 말이야. 그게 곰삭아가지고 맛이 나기 시작해. 된장 맛 이 나듯이. 풍상을 겪어서. 그때 비로서 장승의 맛이 우러나. 그러다 보니 생각이 달라집니다. 장승 보는 눈이. 자연의 그 작용이라는 거 있지. 그래서 지금 저한테 물으신 거, 어디 것이 인상 깊으냐 하는데 사실은 처음에는 뭐 내가 무량사 있지. 부여에 있는 그 무량사라고 있습니다. 거 기에 있는 그 장승이 꼭 보살상 같이 생겨서 참 좋다고 그랬었는데. 나중에는 다 좋아. 나중에 는 여기는 이랬었고. 저건 저랬었고. 다 좋아. 그러고 어떤 거를 좋아하다 보면 딴 거한테 미안 해서도 그렇게 안 되고. 최: 장승은 문화재로 보존이 안 되고 있나요? 육: 장승은 문화재로, 아직은 모르겠어요. 문화재로 보존됐다는 말은 못 들었어요. 최: 아, 그 목재이기 때문에 보통 보존성이 그렇기 좋지 않을 텐데요? 육: 글쎄. 보존을 해야 하는데. 최: 보존을 해야 될 것 같은데. 육: 이제 보존을 하려면 내 책을 보존해야 할 거요. 김소월의 <진달래 꽃>이 보존되듯이 저 내 책을 보존해야 할 거요. 앞으로 한 100년 후에는. 최: 그럼 혹시 찍으신 그 장승이 지금도 남아 있는지 가보신 적이 있으세요? 육: 안 가요. 그거 뭐 내가 보나마나 이제 그건 다 다 나무는 없어졌고. 최: 그럼 선생님이 찍은 장승은 거의 지금 남아 있지 않다라고. 육: 나무는 하나도 없고. 돌로 된 것도 제자리에 없는 게 많습니다. 도난 당하거나 어디 누가 어디다 팔아 먹었거나 해 가지고서. 그리고 제가 찍은 장승 중에는요. 한 2주일 후에는 외국인의 손으로 넘어가는 장승도 있어요. 거기. 내가 찍은 장승 중에는 외국인의 손에. 최: 문화재 관리차원에서 그거. 육: 방치되어 있던 거죠. 최: 보존해야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육: 방치됐던 거죠. 그래서 하여튼 그 정말 참 즐겁게 작업한 거예요. 장승은. 참 즐겁게 작업을 한 겁니다. 최: 선생님 그 장승 사진집 보면은 이승과 저승에 관련된 그 속담이라든지,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35 육: 그거 많이 있지요. 최: 이승과 관련된 금기를 적었는데. 그게 이미지하고 텍스트하고의 어떤 상호관계가 있는 겁니까? 육: 아, 그 책을 내가 그전부터 가지고 있었어요. 제가. 그 책을. 최: 그 책이라뇨? 육: 책이 있어요. 어떤 민속학자가 우리나라의 그 저 뭡니까? 은어. 우리나라의 속담. 최: 속담, 금기어. 육: 금기어 같은 거 그런 거. 책이 쬐그만 해. 희귀본이야. 그것도. 그걸 내가 우연히 헌책방에서 구 했어. 옛날에. 근데 그건 장승 찍기 전에 구했던 거고. 마침 그 장승 책 낼 때 아, 고거 넣으면 좋 겠다는 생각이 나서 그거 넣은 거예요. 그게. 그거 참 책도 재밌지만 그 글도 재밌죠? 최: 그러니까 그 장승의 이미지하고 그 글이 어떻게 문맥이 서로 연관성이 있다라고 보셨나요? 육: 그럼. 그렇게 그랬었죠. 최: 선생님이 그 한국적인 거를 말씀하시면서요. 삼국유사 를 읽고 아주 깊은 감명을 받았다. 육: 받았죠. 예. 최: 그게 어떠한 영향이었나요? 삼국유사 의 어떠한 부분이 선생님의 사진작업에 깊은 영향을 주 었나요? 육: 내가 삼국유사 하고 아시다시피 삼국사기 가 있어요. 근데 저 삼국사기 는 그 굉장히 분량도 방대하고 내용도 그냥 참 어마어마하죠. 그런데 삼국유사 는 그거 불과 한 권이고 아주 간단한 팜플렛 같은 책이에요. 내가 얘기할 때는 그 삼국사기 하고 삼국유사 의 비유는 그런 바로 그 런 의미입니다. 단순하고 소박하면서도. 그러면서 삼국유사 에 없는 게 없어요. 그래 그런 점 에서 만약에 삼국유사 가 없으면 우리나라 단군신화도 없지요. 단군신화도 없고. 그래서 이젠 그런 정신적인 측면에서 삼국유사 는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저게. 다시 말하면 우리나라 설 화라든가 신화라는 게 굉장한 거거든요. 그게. 아시다시피. 그런 건데. 우리는 그 신화나 설화 의 의미를 단순히 그 환상적이고 그런 거로 보는데. 거기엔 그 시대에 어떤 그 시대 의식이라는 게 거기에 앙금이 가라앉아 있는 거거든요. 그래서 사실은 저는 그 삼국유사 를 얘기할 때 그 건 단순히 그냥 삼국사기 하고 비교를 해서 한 의미가 아니에요. 제가 그 얘기를 할 때는요. 하 나의 주체의식이라는 거 있지 않습니까? 주체의식이라는 게 더 강해요. 삼국유사 보다도 삼 국사기 가. 아니 삼국사기 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보다도요, 일연 스님의 삼국유사 가 훨 씬 더 주체성이 강합니다. 그래서 우리나라가 어떤 위기에 처해서 우리의 정체성을 이야기할 때 삼국유사 보다 삼국사기 를 더 들먹거리게 돼 있어요. 그런데 제가 이제 그 얘기를 저 그 삼 국사기 보다 삼국유사 를 내가 중요시 여기는 이유가 그 신화적인 거, 설화적인 그 중요성 얘 길 했는데 제가 사실 그 <백민>이나 <장승> 찍을 때 그냥 또 덜커덕 찍지는 않았어요. 내가 좀 그래도 이것저것 많이 주워 읽은 폭이 되는 사람이라. 가령 음악에서 서양음악에서 고전음악에 서 낭만파로 넘어오고 그 다음에 가서 19세기 말쯤 되면 그 러시아에서 국민음악파라는 게 등장 하거든요. 국민음악파라는 게. 그런가 하면 그 다음에 그 프랑스나 독일서 또 어떤 그 프랑스적

136 84) 송석하( 宋 錫 夏, 1904~1948), 민속 학자. 호는 석남( 石 南 ). 1922년 부산 제 2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상과 대학에 유학하였다. 1923년 귀국 이후 민속에 관 심을 갖고 현지조사에 나서기 시작했다. 조선산악회를 창설했고, 자신이 수집한 자료와 인류학자 크네즈(Knez, E. Z.)의 도움으로 1946년 국립민속박물관을 개관 했다. 서울대 인류학과를 설치하고 강의 했다. 유고집으로 한국민속고 가 있다. 85) 육명심, 직통사진, 사진예술, 1998. 5 참조. 이고 독일적인 그러한 로컬 칼라(local color), 어떤 민속적인 어떤 특성, 어떤 감성이나 특징. 이런 것들이 있는 음악들이 등장하거든요. 국민음악파라는 거. 특히 러시아부터 그게 시작이 됩 니다마는, 그런데 그게 음악만 아니고 심지어 문학에서도. 독일의 18세기에 그림형제들이. 그 림형제들이 그 독일의 우화니 그런 얘기들을 인제 다 모아서 하나의 책으로 내고 그런 부흥운동 을 합니다. 제가 그걸 알거든요. 그래서 우리의 한국적인 어떤 사진미학을 먼저 정립을 하려할 때에는 우선 어떤 이념적인 거 이전에. 우리의 설화, 또는 우리의 어떤 그 서민들의 어떤 생활감 정. 또 그들의 삶 속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그 설화라든가, 신화 같은 거 여기에 관심을 두어야겠 다. 그런 생각을 했죠. 그냥 뭐 하다 보니까가 아니라 이것저것 주워 읽은, 많이 아는 덕분에 그 런 식인 것도 이제 작용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말씀 드리는데. 삼국사기 보다도 삼국유사 를 제가 중요시 여기는 이유도 삼국유사 가 바로 서민이나 민중 편에서 쓴 그런 저술이기 때문 에 저는 중요시 여겼던 거죠. 최: 이제 그러면 선생님의 그 민속학적 작업하고 송석하 선생의 민속학적 작업하고는 어떤 비교를 하 실 수 있겠어요? 육: 간단해요. 그 양반은 사진을 자료로 모았고. 그분은 하나의 도판으로 모았어요. 자기가 글에 도 판. 최: 민속학자로서의 학문적인 자료로서. 육: 도판, 도판으로 모았고. 나는 사진을 통해서 그분이 감지하고 있고 느끼고 있는 그런 서민들의 감정이나 의식. 이걸 나는 표현할라고 했던 거죠. 최: 그러면 지금 송석하 선생의 사진은 지금 어떻게 평가를 하시나요? 육: 저는 지금 송석하 선생의 사진을 제가, 사실은 <백민>하기 전부터 그 양반의 그 헌책방 돌아다 니면서 있으면 사 모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가지고 있어요. 그걸 보는 것도 참 좋아했어요. 근 데 내가 이제 그 작업을 할 때는 아, 이거 자료가 아니라 정말 여기에 뭔가 사진의 혼을 집어 넣 고. 뭔가 여기 감정이입이 되야겠다. 내 작업을 그렇게 해야겠다. 그러면서 그 작업을 했지요. 최: 선생님의 어떤 글을 읽어 보면은 송석하 84) 선생의 대한 사진에 대해서 굉장히 높이 평가를. 육: 평가를 했죠. 최: 허구적으로 머릿속으로 계산된 사진이 아니다. 육: 아니지, 그렇게 썼지요. 참 지금 봐도 그 좋습니다. 송석하 선생이 그냥 그대로 이쁘게 안 찍고 있는 대로 찍었기 때문에. 지금도 사실은 제가 이렇게 꺼내서 그거 보면 말이죠. 그 아주 그냥 폭 삭폭삭 그 흙 냄새가 나고, 땀 냄새가 나는 게 있어요. 최: 그렇다고 한다면 오히려 자료로서의 사진, 민속학적 측의 학문연구의 어떤 대상으로서의 사진, 연구보존 수단으로서의 사진이 오히려 뭐라고 이렇게 얘기할 수는 없겠지만. 육: 뭐 솔직히 얘기해 보슈. 최: 예술로서의 사진보다도 더 어떻게 보면은 그 감동을 준다. 이를 테면 선생님의 직통사진 85) 이라 는 말하고 이제 연결시키셨던 것으로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37 육: 연결시킬 수 있지요. 직통사진 으로. 그 양반 그거 대로 좋은 점이 있는데. 그 대신에 여러분이 그걸 보셔야 돼요. 내 경우는 그 뒤 배경이 중요해요. 배경이. 근데 그분 사진을 보면 아까도 내 가 설명을 했습니다마는 자료로서 그거만 달랑 따다 놨어요. 제 경우는 그 뒤 배경하고 사진하고 아주 일체감을 이룬다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에서는 내가 송석하 선생님의 사진을 보완, 감히 보완했다고 내가 얘길 하죠. 최: 근데 인제 선생님이 송석하 선생님의 사진은 보는 이의 가슴에 직통 으로 와 닿는. 육: 예. 직통으로 와 닿죠. 예. 최: 그렇다면 선생님의 사진은 그 송석하 선생님의 사진하고는 어떻게 관객의 입장에서 그래 보면 어떤 차이가, 육: 예. 설명할게요. 그분이 좋은 점이 있고. 내 사진 좋은 점이 있어요. 그분의 좋은 점은 그 무기 교의 기교 있죠? 무기교의 기교의, 어떤 진솔한 그런 그 맛이 있고. 내 경우는 또 이제 그분의 진솔한 반면에 너무 소박하니까 그만큼 어떤 울림이 내 사진만도 못한. 그런 서로가 그 저 상보 관계가 있습니다. 최: 그러니까 선생님 같은 경우에는 선생님의 그 <장승>의 사진, 사진에는 어떤 미학적인 의도, 미 학적인 취향이 그런 게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있고. 송석하 선생님의 사진에는 미학적인 의도가 없고. 오히려 학문적인 관심. 학문적인 자료로서의 그 차이라고 이렇게 우리가 인정을 해야 되 나요? 육: 단순히 그 차이라고만 보시면 안 되고. 그렇게 계산을 안 한 데서 오는 소박한 그 맛이 있습니다. 소박한 맛이. 송석하 선생의 사진에. 최: 선생님의 그런 민속학적 작업에는 항상 예술로서의 사진, 사진예술이라는 거를 미리 앞에 계획 을 하셨다고. 육: 나는 예술이라는 게 나는 별거로 보지를 않아요. 예술이 뭐가 예술이냐면요, 얼만큼 내면적인 세 계를 깊이 파악했느냐가 예술이거든요. 그러니까 광고사진도 잘 찍었는데 내면적인 세계가 깊이 있게 파게 되면 그것도 예술이고. 예를 들어 리차드 아베돈(Richard Avedon, 1923~2004) 같은 경우 있지 않습니까? 어빙 펜(Irving Penn, 1977~2009)도 그렇고. 또 사실 로버트 카 파(Robert Capa, 1913~1954)나 유진 스미스도 그거 다 보도사진입니다. 근데 문제는 뭐냐 하면 그게 좋은 보도사진. 어떤 심층적인 보도사진이기 때문에 그게 작품이에요. 그 예술 별거 아닙니다. 문제는 얼마만큼 심층적으로 깊이 있게 그걸 파악했냐 하는 것뿐이에요. 제 경우는 그 런데. 그러다 보니까 그만큼 계산을 했기 때문에 계산 안 한 송석하 씨의 사진에는 오호, 내 사진 에 없는 게 있어요. 그래 저는 지금도 그거 내 머리맡에 있습니다. 그거. 가끔 봐요. 너덜너덜한 건데. 그만큼 그 매력이 있습니다. 그 사진이. 최: 1994년에요.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민중미술15년 1980-1994 86) 기획전이 열리는데요. 육: 예. 최: 선생님이 그 참여하시게 되죠. 86) 1994년 2월 5일부터 3월 16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로 김정헌, 황지우, 신학철 등의 민중미술관계자와 국 립현대미술관 실무자들이 추진위원회를 발족, 전시를 준비했다. 총 350점이 출품 됐고, 337명의 작가들이 참여했다.

138 육: 하지요. 최: 그때 <장승> 사진이 거기에, 육: 나가지요. 예. 예. 최: 그 어쨌든 그 민중미술이라는 건 용어가 말해 주듯이 다분히 현실 참여적인 작가, 작품들이 거기 에 많이 전시가 됐던 걸로 알고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그 현실참여적인 그 민중미술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견지하셨는지. 육: 예. 저는 한 마디로 얘기해서. 거기에 관여 안 했어요. 민중미술. 최: 관심도 없으셨고? 육: 관심은 뭐. 거기에 대해서 뭐 관심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저는 거기에 참여를 안 했어요. 저는 참여 안 한 이유가 있습니다. 대개 그런 사람들이 이데올로기에 빠져. 사람들이. 이데올로 기에 빠져 가지고 참 동기는 좋은데 그게 나중에 말이죠. 이데올로기화해 가지고 이거 아니면 저 것이라는 이분법에 빠지고 말아요. 저는 그 허구를 알고 있어요. 저는 너무 뭘 빤히 알아서 안 해, 요렇게 보고는. 그게 여러분들 그 동안에 우리들 엄청나게 군사 독재에서 싸웠던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한계였고. 저지른 실수들이에요. 그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 아십니까? 이분법적인 그 사고라는 게. 그래서 제 경우는 그거를 알기 때문에 저는 이만큼 거리 두고 봤는 데 저기에 참여하게 된 건 인제 그 쪽에서 저로 하여금 필요로 해서 나를 초대를 한 겁니다. 내가 무슨 그 사람들하고 동료의식 가지고 했던 건 아니고. 그걸 내 줬으면 좋겠다. 그러 걸래 아, 그러라. 그래서 제가 냈던 거고. 그때 이 양반들이 장승에 대한 관심들이 참 많았어요. 저 그 심 지어 그 누굽니까. 전주의 신부, 그 유명한 형제 신부 있지 않습니까? 걸핏하면 지금도 왜 데모 하고 나서는 분 있잖아요. 그 왜 문 신부라고. 최: 문규현. 육: 문규현하고 또 누구 형제 있지 않습니까? 그 성당 가면 장승이 있습니다. 그 민중, 그 당시에 민 중미술운동에서 장승을 굉장히 많이들 세우기도 하고. 대학에다. 근데 나는 뭐 거기 관여는 안 했는데. 그러니까 그 김영수( 金 永 守, 1946~2011)가 그때 거기 사진에 나를 추천, 천거해서 거 기다 내게 된 겁니다. 그게. 최: 그러면 그때 그 기획전의 큐레이터는 누가 했나요? 전시기획자는 누구였나요? 육: 몰라요 누군지. 내 그거 김영수가 내달라고 해서 그냥. 최: 다만 인제 민미협에 계셨던 김영수 선생께서 거기에 작품을 요청을 하셔 갖고. 육: 예. 그렇습니다. 그래서 낸 거예요. 최: 그러면 그때 그 사진계에서는요. 민중미술 계열에서 활동했던 사진가 분은 어떤 분이 있습니까? 김영수 선생님 말씀하셨고요. 또 어떠한 단체가 민중미술에. 육: 단체가 없었고. 단체는 없었고. 중앙대학 나오고 내가 가르친 놈인데. 아이고, 안성 놈인데. 이 름은 깜빡 잊었어. 최: 정동석( 鄭 東 錫, 1948~ ) 선생님은.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39 육: 정동석이는 아니고. 누군데. 그 이름 어디 보면은 있을 거예요. 그 친구 한때 굉장히 앞장서 부 르짖고 나섰었어요. 최: 성함이 전혀 기억이 안 나시나요? 육: 안성 놈인데 내가 중대에서 가르친 얘에요. 그래서 지가 또 가끔 나 한번 장승 찍고 하니까 찾아 오고 그랬었다고. 아이고 이름 보면 아는데. 아이고 이름 뭔데. 그 이외는 없었다고. 최: 민미협에서 아주 적극적인 활동을 하셨던 사진가 분이셨나요? 육: 예. 그 친구가 적극적이었죠. 하나 있어. 딱 하나 있었어. 최: 그분은 어떤 주로 어떤 사진을 찍으셨나요? 육: 뭐 그거 민중적인 거 뭐 찍는다고 좀 찍었는데. 뭐 활발하게 사진작업은 안 하고. 주로 주장을 많 이 했어. 최: 민미협에서, 육: 응? 최: 핵심멤버. 육: 핵심멤버도 아니고. 최: 그럼 김영수 선생님은 그 민미협에서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 육: 사실 뭐 내가 조심스럽게 해야 할 얘기인데. 그 우선 사진계에서 거기에 거의 많은 사람들이 관여 를 안 했어요. (채록 불가) 김영수 씨의 그 민미협, 민사협에. 그러고 거기 저 뭐야 민미협에 그 저 뭐야 김영. 누구지 그 총책임자였던 김영, 김영 뭔데. 지금 정부에서도 뭐 조금 걸려가지고 뭐 왔다갔다 하고 하는 사람 있어. 최: 공주사범대 교수, 문예진흥원 회장하신 분. 육: 아니, 그분 아니고. 아이고 뭐 있는데. 하여튼 사진에서는, 최: 김인수 선생님 말씀하시는 거. 육: 아니야 그거 아니야. 사진계에서는 별로 그 당시에 거기에 관여를 안 했어요. 최: 그래도 제가 아는 범위에서는 정동석 선생, 김영수 선생, 그리고 사회사진연구소라는 게 있었던 걸로 알고 있는데. 육: 근데 그게 누구야? 아까 얘기한 안성 그 놈. 최: 아, 그 사람이 사회사진연구소 했었던. 육: 뭐 그런 거 한다고 했는데 그거 미미했어요. 최: 그 분들이 어떤 뭐 어떤 그 민미협 계열 속에서요, 또 현실참여적인 그런 전시회라든지. 육: 별로 없었어요. 최: 작품집이라든지. 육: 왜냐하면 내가 그쪽은 그 돌아가는 거를 미술 쪽도 다 알고 그러니까 또 거기 있는 사람들도 알고 하니까 아는데 사진계에서는 미미했어요. 그때. 아주 미미했어요. 최: 김영수 선생은 어떤 역할, 어떠한 활동을 하셨나요?

140 육: 그 친구가 이제 그것도 조심스럽게 얘기해야 할 얘긴데. 그 친구가 그거 붙들고, 죽을 때까지 붙 최: 예. 들고 있었지. (연구자의 판단으로 녹취 공개가 보류된 부분입니다.) 87) 정범태( 鄭 範 泰, 1928~ ). 1950년대 신선회와 싸롱아루스에서 활동했다. 조선 일보, 한국일보, 세계일보에서 사진기자 를 역임했다. 최: 1990년도 초반 민족사진가협회. 육: 예. 그 얘기를 할게요. 최: 근데 홍순태 선생님이 1993년에서 96년까지 의장을 맡으셨는데. 육: 예. 그 처음에 몇 년 서부터 시작이죠? 최: 90년대 초반인데요. 육: 거기 90년대 초반인데. 최: 홍순태 선생님이 93년에서 96년. 그때가 아마 처음일 겁니다. 육: 처음입니다. 그게. 93년 처음입니다. 근데 거기에는 내가 뒤에 있어요. 제가요. 이건 분명히 납 니다. 내가 처음으로 이제 그 김영수가 이제 민사협이라는 걸 만들어요. 민사협을. 최: 민족사진가협회죠? 육: 예. 민사협. 민족사진. 왜냐면 인제 예총에서 갈라져 나와서 민예총이라는 게 생기면서 민사협 이라는 걸 만듭니다. 그때에 내가 앞장섰어요. 앞장섰다는 게 별거 아니에요. 세 교수 중에 제가 젤 앞에 나섰어요. 나서서 홍 선생 보고 당신 사협 탈퇴해라. 그리고 한 선생 모두 탈퇴해라. 나 도 탈퇴하고. 그라고 이제 이쪽으로 가자. 또 내 아는 내 주변사람 전부 다 이제 다 이제 탈퇴시 켜 가지고 이리로 옮겼어요. 최: 사협에서 민사협으로요. 육: 예. 그건 민사협의 이념적인 인제 새로운 걸 어떤 동조한다는 의미 이전에 사협, 사협이라고 하 는 그 낡은 집단으로부터 차별화 한다는 의미가 절대적이었던 겁니다. 그게. 사협이라고 하는 낡 은 이것으로부터 허물을 벗자. 그러고 마침 잘됐다. 그니까 뭐 분명히 얘기지만 민사협의 어떤 새로운 이념에 동조해서 이념적인 전환을 하기 이전에 어떤 새로운 물갈이라고 하는 측면에서 그 렇게 했던 거죠. 그래서 홍 선생 보고 당신도 그만두고. 한 선생도 그만두고. 홍 선생 당신 회장 하고. 그래서 홍 선생이 회장한 겁니다. 최: 그러면 그 우리가 민사협이 사협과 가장 두드러지는 차이점을 보이는, 어떤 노선의 차이라 할까 요? 육: 차이는 간단하게 얘기할게요. 차이는 기성세대하고 새로운 새대, 세대와의 분리에요. 최: 그때 민사협에 참여했던, 어떻게 얘기할까요? 중견작가라든지, 원로작가 분은 어떤 분이. 육: 그때 제일 나이 먹었던 게 정범태 87). 최; 정범태 선생님.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41 육: 그분이지. 그분은 으레 이렇게 젊은 사람들이 뭐 하면 잘 따라왔어요. 정범태 씨가. 최: 주명덕 선생님도 육: 또 오고. 주명덕, 주명덕도 오고. 그러나 이제 그 사람들은 어떤 단체가 아니라 개별적으로 움직 이는 사람들이고. 우리는 인제 사협의 이사도 오래 하고 사협에 터를 잡았던 사람들이거든요. 그 래서 그걸 이리로, 젊은 세대들 다 이리로 끌고 오지. 최: 그러면 1996년에요. 그 한국사진가연합, 한국사진가연합 이사장님을 선생님이 맡게 되시는데. 이 한국사진가연합은 민족사진가협회의 후신입니까? 육: 예. 그겁니다. 최: 또 후신이 다시 어떻게 또 한국사진가연합으로, 이 단체는 또 없어지지 않습니까? 육: 아, 그건데 이름이 달라져, 그렇게. 최: 그건 또 민사협으로 존재하게 되잖아요. 육: 근데 나중에 뭐 어떻게 된 건 모르지만 하여튼 날 보고 하라고 하더라고. 왜냐면 이제 홍순태도 이제 그만두고. 최: 선생님은 그러니까 민족사진가협회 의장 혹은 이사장을 맡으신 적은 없으시죠? 한국사진가연합 이라는 데 이사장을 맡으신 거죠? 육: 사실 나,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민사협 난 회장을 맡은 줄 알고 있었는데? 이름이 달라져요? 최: 선생님이요? 선생님은 한국사진가연합 이사장님이신데요. 육: 아, 어. 달라지는 이유가 있다. 그게 김영수가 그걸 말이죠. 그 저 무슨 법인. 최: 사단법인. 육: 사단법인으로 만들어요. 그래 가지고 이름을 그렇게 바꿨어. 최: 한국사진가연합으로요? 육: 네. 최; 사단법인 한국사진가연합이요? 육: 네. 최: 그럼 어떻게 다시 민족사진가협회로 다시 이름이 바뀌게 되나요? 육: 그건 나도 몰라. 난 그거 하다가 1년도 안 돼서 내가 그만뒀어. 최: 이사장직을 1년도 안 하셨어요? 육: 안 하고 그만뒀어요. 내가 그만둔 이유는 가만히 보니까 그게 김영수의 손끝에 노는 거더라고. 아시잖아요? 그 회는 김영수가 다 그냥 좌지우지하지. 최: 근데 1996년 그때면은 선생님보다도 연배가 연하시고. 육: 연하인데. 인제 사람들이 다 하나 둘 빠져 나갔어. 이제. 최: 선배 되시는 홍 선생님도 계시고. 주명덕 선생님도 계시고. 또 심지어 원로인 정범태 선생님도 계셨는데. 육: 그때 이제 김영수가 내세웠던 건 뭔가 새롭게 재건해 보자는 의미에서, 내가 의미도 새롭고 하니

142 <검은 모살뜸>, 제주 삼양, 1983. 까 나를 갖다가 앉힌 거예요. 근데 더 좀 더 솔직하게 얘기하면 내가 그걸 왜 받아들인 줄 아십니 까? 아, 광호라는 놈이 미국서 왔는데 어떻게 발 붙일 데가 없어. 최: 최광호 선생님이요? 육: 최광호가. 그러고 내가 이제 그 어른이 말이야. 그 갑철이도 좀 뭔가 사진계에 자리를 좀 잡아 줘 야 하는데. 그래서 광호가 언젠가 나 보고 영수 형, 김영수 형, 영수 형이 자꾸 나보고 그렇게 말씀 해 달라고 하는데. 어떡하겠느냐고?, 니 생각은 어떻게 하냐? 했더니 교수님 좀 하시 죠. 너무 그렇게 빼지 마시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광호 말 듣고 했어요. 그거. 왜냐면 광 호 미국서 돌아와서 좀 어디에 자리 좀 잡게. 사진계에. 그러고 또 갑철이도 그렇고. 근데 가만히 보니까 이게 다 싹수가 그른 거더라고. 그래서 가서 몇 달 만에 저는 안 한다고 하고 안 나갔어요. 최: 어떤 그 노선이 그 선생님하고 운영방안이나 방침이나. 육: 아, 그게 완전히 김영수의 개인. 이름만 민사협이지 김영수 개인 집단이야. 최: 저는 그게 쫌, 이 얘기는 저로서는 잘 이해가 안 가는데요. 육: 이해 안가는 게. 최: 김영수 선생님의 연배가 한 오십 대 초반 밖에는 안 됐을 때 아니에요? 육: 그때 그렇지. 최: 근데 그런 분이 선생님 되든. 홍순태 선생님이라든지, 심지어는 정범태 선생님, 주명덕 선생님 오히려 선배 분들이 계신데. 육: 근데 그때 이 친구가. 그건 질문 잘 하셨어. 그 저 민사협 있지? 민사협이라는 큰 흐름 단체 있지 요? 그 라인들. 가령 문학 쪽이니, 영화 쪽이니. 최: 민미협이나 혹은 민족문학. 육: 이쪽하고 김영수가 딱 이렇게 돼 있었다고. 최: 김인수 선생이라든지. 육: 김인수니. 딱 돼 있었어요. 그래서 아주 확고부동했다고.

143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검은 모살뜸>, 제주 삼양, 1983. 최: 오히려 민중미술계의 세력을 등에 업고 사진계에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했었다. 그래서 그걸 위 해서 단체도 조직하게 된 거고. 육: 바로 그겁니다. 최: 선생님 인제 <예술가의 초상>, 그 다음에 인제 <백민>, <장승>시리즈 이렇게 가시는데. 선 생님이 인제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 인간의 발견이었다 고. <예술가의 초상>과 <백민>은 인간의 발명, 발견이었다면 <검은 모살뜸>. 육: 그거 달라지죠. 최: 그건 생명의 발견이었다. 이렇게 말씀하셨거든요. <검은 모살뜸>은 어떠한 작업이었습니까? 육: <검은 모살뜸>도 <백민>작업하다가 발견한 거 거든요. 제주도 가서.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보 셔야 돼요. 이제. 그 인간의 발견, 생명의 발견이라고 했죠. 그거 분명히 얘기하면 <예술가의 초상>에서 제가 인간의 발견을 하거든요. 예술가가 아, 예술가도 사람이로구나. 그것이 이어 진 게 이제 <백민>이고. <백민>으로 이어지고. 심지어 저 <장승>까지도 인간의 발견으로 이 어져요. 왜냐면 결국은 <백민>을 만드는 것은, 누가 어떤 사람 욕하지 않습니까? 흉 볼 때. 예? 가만히 그 사람 흉 보는 거 보고 있으면요. 그분의 평소 모습이에요. 그게. 누가 누구를 말이야 ~, 에 누구 말이야. 이게. 그 사람 모습이야. 결국은 말이야, 우리가 뭘 그린다고 할 때는 말이 죠. 그건 제 모습 그리는 거예요. 그게 장승을 만든다고 하는 게 결국은 뭐냐하면 만들어 봤자 그 게 지 얼굴이야. 다시 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의식 그거 이상은 안 넘어 가. 그러 니까 결국은 내가 이제 왜 <백민>에서 <장승>으로 넘어 왔느냐 하면은 <백민>을 찍다 보니 까 <백민>이 이제 사람이 별로 없어. 그러다 발견한 게 장승인데. 이제 그러다가 장승을 찾으러 돌아다니며 <장승>을 찍은 거예요. 거기까지가 인간의 발견이에요. 그런데 이제 <백민>을 찍 으러 돌아다니다가 제주도에서 내가 <검은 모살뜸>을 봐요. 그걸 보는 순간 가슴으로 팍 오더 라고. 가슴으로,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거기서 내가 뭘 느꼈는지 아십니까? 그 머리를 이렇 게 담그고 있는 어머니 있지? 거기서 나는 그냥 단순히 그냥 누구를 본 게 아니라 어머니를 봤어

144 88) 하꼬방( 一 房 ). 일본어로 판자집을 말 한다. 요. 어머니를. 이 땅의 어머니를 봤어요. 이 땅의 어머니를 봤어요. 이 땅의 어머니를. 그 분들 이 다 누구에요?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말이지, 기본 밑받침하고 있는 말이지, 그 주춧돌이 어 머니들이라고 생각해요. 아버지들이 아니고. 그러고 말이야 어머니들이 뭐냔 말이지. 이게 이 나라 오천 년을 지켜온 지탱해 온 근본적인 뿌리고 힘이라고 생각해. 이게. 그러기 때문에 다 골 병 들어가지고 말이야. 풀어 앉아서 그냥 거기서. 그래 이 땅의 어머니를 내가 거기서 봤어. 그 <검은 모살뜸>에서. 딱. 어? 최: 이 땅의 어머니를 치유해 주는 어떤 대지의 힘, 그런 거. 육: 예. 대지의 힘. 그러고 땅, 땅, 땅 그 자체가 어머니고. 그런데 인제 그 땅이 나한테는 말이죠. 그냥 땅으로 온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나는 학생들한테도 강조해요. 작업을 하면서 자기가 성 장해야 한다. 적어도 시인들이 시를 쓰면서 바로 자기 세계가 열리고 자기가 성장하듯이. 사진가 도 자기 작업을 통해서 성장을 해야 한다. 정신 세계가. 그 얘기를 해요. 제가요, <백민>하고 <장승> 찍는 동안에 많이 내 성장을 해. 한번은 내가 그 장승 찍으러 어디를 갑니다. 원주 어디 를 가요. 거기가 유명한 옛날에 고려시대의 유명한 절터가 있어요. 그쪽에 찍으러 갔다가. 그 절 터가 뭐냐 하면 지금 얘기하면 우리 불국사만큼 유명했던 절터야. 그래 거기에 무슨 부도( 浮 圖 ) 가 하나 있어요. 근데 그 옆에 어떤 아주머니가 최: 부도가 뭔가요? 부도가? 육: 그 저 돌아가신 분. 그 저렇게 사리탑 모신 거 같은 거. 사리탑 모신 거 최: 사리탑 모신 거요. 큰스님 사리탑 모신 거. 육: 네. 거기에 그게 있는데. 그 옆에 오막살이, 조그맣게 무슨 하꼬방 88) 같은 걸 지었는데 거기에 아 주머니가 있다라고. 그래서 아니, 아주머니 여기가 옛날에 유명한 지금 불국사처럼 말이지. 유 명한 그런 경내라는 걸 아십니까? 했더니 그런 거 내가 뭘 알아요? 그 까짓 거 알 필요가 뭐 있 어요? 그러고 쏙 들어가 버리더라고. 야, 저 양반 봐라. 지금으로 치면 인제 불국사의 경내 안 에서 지금 이렇게 자기가 집을 짓고 앉았는데 말이야 그런 성스러운 땅인 걸 모르고 있구나. 그 게 참 그러고서 내가 이제 딱 5시 넘어 이렇게 해가 지는데 인제 원주서부터 서울 돌아오는데 말 이야. 해가 뉘엿뉘엿 져. 그래 땅이 말이야 이렇게 햇빛이 말이야. 땅거미가 지면서 아이고 이 땅이 어떤 땅인데. 이게 오천 년 우리가 단군이 이 땅을 대를 이어온 이 땅인데. 이 땅에 이거 신 령스러운 여기에 흘린 땀. 삭은 이들의 뼈와 살. 나는 안 그런가. 저 사람, 그 아줌마하고 나하고 하나 다른 점이 있나? 하는 그 반성이 오더라고요. 그러고 그 다음부터는 말이지. 찍으러 이렇게 가면은 어디 경내를 들어가는 거 같은 그런 걸 내가 느꼈다고. 작업을 하면 그렇게 오더라고. 그 게. 그래 지금 내가 이 얘기를 왜하냐면 말이지. 하여튼 <장승>작업은 그렇게 했는데. 지금 무 슨 얘기하다가 이 말이 나왔지? 최: <검은 모살뜸>. 육: 응? 최: <검은 모살뜸>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45 육: <검은 모살뜸>인데. 이제. 그게 왔었어요. 그게. 근데 한 번만 온 게 아니고. 그 다음에 내가 어디야 부석사( 浮 石 寺 ) 가서 느낀 거야. 부석사 갔는데 거기 가면 말이죠. 무슨 그 탑이 있는데. 그게 굉장히 신라 때 게 있습니다. 그때 날 데리고 갔던 놈이 홍대 대학원 학생이었는데. 교수 님 이게 뭐 천 년이 넘은 탑 이라고 [하더라고.] 내가 그걸 이렇게 보고 있으니까 천 년이 넘은 탑? 하고 하는 순간, 내가 말이야 뭘 느꼈느냐 면요. 아, 지금 내가, 이 지금 나 있지 않습니까? 내가 천 년이라는 나는 적어도 말년 끝에 내가 지금 와 있는 거 아닌가? 그 피로 이어져 내가 여 기 와 있는 거 아닌가? 그냥 내가 아니라 피로 이어져 여기까지 온 건가? 라는 쫙 그게 왜 하나 로 몇 마디, 천 년, 몇 천 년이 왜 성경 보면 낳고, 낳고, 낳고, 낳고라는 말이 나오죠. 그 저, 그 저 성경 첫 장 보면 말이죠. 그런 식인 핏줄의 쫙 이어지는 걸 내가 딱 느꼈다고. 어? 그 다음부 터 지금 얘기하는 말이죠. 제주 갔더니 이제 그 땅을 보니까 그게 확 그게 가슴으로 오더라고요. 그게 가슴으로. 그래 거기서 인제 보면은 말이야. 주검. 그 저 묻고 있는 특히 파낸, 여러분들이 보면 꼭 무덤하고 똑같아요. 그러고 흙에다 이렇게 가고 있는 걸 보면 말이지. 그 무덤에 들어가 있는 것 같고. 드러누워 있는 것도 그렇고. 거기서 내가 그래 생명, 강인한 어머님의 그 어머님 을 통한 어머니 상에서 오는 어떤 생명력 있지요. 그걸 느꼈어. 그러고서 이게 단순히 아, 내가 말이야 한국적 사진미학, 사진미학 했는데. 내가 얘기했던 게 과연 한국적 사진미학이 뭐였는 가? 다른 게 아니라 이거구나. 내가 말했던 한국적 사진작업 머리로 뭐 무슨 뭐 무슨 김아타( 金 娥 他, 1956~, 사진가)나 누가 한 뭐 이런 어떤 공간적인 거, 시간적인 걸 넘어서서 그거 말 고. 이 우리의 땅에 뿌리내린 말이지. 이 지맥( 地 脈 )에 뿌리내린 말이야. 바로. 이 혼, 혼, 정신 있지. 아이고. 내가 여태까지 너무나 관념적인, 관념적인 생각을 했었구나. 한국적인 사진미학 이라는 것을. 하고는 어, 그럼 내가 지금까지 지향해 왔던 것을 지금 발 딛고 있구나. 하는 생 각을 내가 그때 했어요. 그 작업을. 최: 그게 어느 해수욕장인가요? 육: 그게 이화해수욕장 89) 인가? 제주도에. 원래 세 군데 있었는데 그게 두 군데는 다 없어졌어요. 그 한 군데도 그게 뭐냐 반은 해수욕장이고 반은 이제 검은 모살뜸을 하는 데요. 근데 그게 없어지는 이유가 뭐냐 하면요. 경제적인 원리에요. 그 바닷가에 육지나 어디 사람들이 오면은 장사도 되고 하니깐 해수욕을 해야 되지. 거기 모래찜질하는 사람들 받으면 오는 사람부터도 구질구질하고. 어? 또 사람도 별로 안 오고. 근데 그 좋은 모래땅 말이야 다 해수욕장으로 열어 놓으면 손님들 이 많이 오니깐 장사도 잘 되고. 그게 경제원리에 의해서, 그래서 두 군데는 다 없어지고. 한 군 데도 반만 지금 남고. 반은 밀려간 상태에요. 지금 거의. 최: 그러면 그때 찍었던 해수욕장 그 지명이 어떻게 되나요? 육: 또 다 거기 있어요. 지명들이. 최: 그 선생님 첫 개인전이 인제 1994년 인데코 화랑에서. 육: 했지요. 최: 그때가 첫 작품집도 그때 나온 거죠? 육명심 작품집. 89) 이호해수욕장을 잘못 말했다. 구술자 가 <검은 모살뜸>을 촬영한 장소는 제 주 공천포 해수욕장, 이호해수욕장, 삼양 해수욕장이고, 현재는 삼양해수욕장만이 남아있다.

146 육: 예. 예. 그게 왜 나왔냐 하면은요 그게 내 환갑. 최: 아, 요 때가 환갑이셨구나. 육: 나는 그런 거 환갑이니 뭐 진갑이니 안 하고 지나갔어요. 그것도 사실은 94년에 했지요? 최: 94년입니다. 육: 94년. 내가 사실은 60세가 사실은 제가 33년 생이니까 어떻게 돼? 1년 전 그 전에 해야 돼요. 근 데 내가 안 할라고 넘어갔는데 이제 광호니 밑에 있는 놈들이 그냥 부추겨 가지고서 마련한 겁니 다. 장소니 뭐니 다. 나는 가만히 있고. 지들이 필름 갖다 다 해서. 그거 안 한다고 하는 거 이들 이 부추겨 가지고 한 거예요. 그거. 최: 왜 그렇게 개인전을 안 하시려고 하셨어요? 육: 저는 정년퇴임 할 때까지 안 하려고 했어요. 개인전을. 안 하려고 한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저 는. 에? 그 안 할라고 하는 이유는요. 첫째는 게으르기도 하고. 그런 거 하는 게 게으르기도 하 고. 근데 그건 조금 변명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이유가 있어요. 선생으로 있는 동안은 개인전을 안 하려고 그랬어요. 왜? 학생들한테 내 작업을 좀 안 보여 줄라고 했고. 난 그 선생 노릇하면서 강의 도중 내 사진 보여준 적이 없어요. 그래 우리 졸업생들이 나 정년퇴임 하고서 그래요. 어, 교수님 어떻게 그렇게 많은 작업을 하고 어떻게 그렇게 개인전도 별로 안 하시고. 특히 놀라운 건 어떻게 수업 중에 교수님 사진 얘기 별로 그렇게 안 하셨습니까? 얘들이 그래요. 그거는 우 연이 아니고 내가 의도적으로 안 했어요. 나 닮지 않게 하려고. 내 아류 안 만들려고. 그러잖아 도 내가 개성이 강한 사람인데 그거 보여 주고 내 얘기하면 애들이 내 아류가 다 되어 버려. 제가 굉장히 강한 사람이거든요. 그걸 알기 때문에 그래서 그 개인전 안 하려고 그랬죠. 그 강의 중에 내 얘기를 거의 안 했어요. 그러고 내 작품 보여 주지도 않고. 의도가 그겁니다. 그러다가 제가 또 왜 99년인가 또 한 번 하죠? 최: 99년 그 티벳전 말씀하신 거예요? 육: 예. 예. 최: 그건 정년퇴임. 육: 정년퇴임 때문에 그것도. 최: 99년 덕원갤러리. 육: 예. 덕원서. 그것도 그냥 그 광호나 이 놈들이, 황선구(1962~, 사진가)니 나서서 이제 정년퇴 임 하면서 하셔야 한다고. 그건 절대 안 하려다 한 거야. 왜냐? 티벳을 제가 두 번 밖에 안 가고 서 찍은 거예요. 그게. 근데 그 후에 세 번 더 갑니다. 최: 99년 이후 전시회 하시고 티벳을 또. 육: 예. 왜냐면 그 작업 두 번 해 가지고 그거 발표해서는 안 돼요. 그래서 제가 이제 다섯 번 갔으니 까. 다섯 번 갔으니까. 그거 인제 지금 봐도 내가 그냥 내 놓으면 내가 최선은 그래도 할대로 한 작업이 되기 때문에 이제는 앞으로 냅니다. 그러고 금년에 대전에서 이 다음 달. 그 포토클래스 라는 데서 전시를 해요. 그것도 내가 하지를 않아. 거기에 있는 우리 졸업생이 세 번에 걸쳐서 그

구술 녹취문 : 제3차 구술면담-작가로서의 활동 147 전시를 합니다. 그럼 나는 세 번 보고서 내가 골라서 이제 서울 올라와서 이 다음에 정리해서 할 겁니다. 제가 여기 초기사진이니 <백민>이니 다 그렇게 한 작업들이에요. 대전서 한 번 이렇게 해 보고 이제 점검해서 올라와서 다 한 겁니다. 최: 대전에 조인상( 趙 仁 相, 사진가) 선생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육: 예. 예. 그렇습니다. 최: 그분하고는 어떤 어떻게 만나셨나요? 육: 그 친구는 홍대에서 만났죠. 최: 홍대 대학원에서요? 육: 대학원에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이제 홍대 대학원에서 만났는데. 그 친구가 이제 그 경기도 요 가까운 데서 선생을 했어요. 그러니까 그 친구가 미술이나 예술에 대해서 많이 다방면에 걸쳐 아 는 친구야. 근데 그 친구가 이제 홍대에 들어왔는데 굉장히 리더십이 있어요. 그래서 동기생 중 에 오피니언 리더야. 오피니언 리더고, 리더십이 있어요. 그러니까 성낙인 선생님이 얘를 탐냈 어. 자기 이제 논문집도 자기가 하고, 그 다음에 자기 사람 만들려고. 그런데 아, 그렇게 리더십 도 있고 또 의리도 있는 놈입니다. 그러니까 또 밑에 있는 놈들한테 자기 것 있으면 다 주기도 하 고. 그런 놈인데. 성낙인 선생님이 자꾸 포섭을 하는데 포섭이 안 되는 거야. 육명심 한테 간다 고. 자네 말이야. 육명심 씨, 육 교수한테 가면 학점도 잘 안주고. 논문도 까다롭고 안돼., 아이 고 저는 육 교수한테 갈 겁니다., 왜 육 교수한테 갈라고 그러냐? 고 했더니 나중에 나 보고 그 래. 인사동에서 교수님의 인상적인 장면을 봤다는 거야. 어느 날 음식점에 들어가서 이렇게 식사 를 하는데 옆에 내가 문인들하고 화가하고 이렇게 섞여 가지고 대 여섯 명이 식사를 하더래. 응? 아, 나는 알고는 있는데. 아, 근데 그 장소에 앉아서 얘기를 하는데 보니까 사진쟁이 혼자 앉아 서 화가하고, 문인들하고 대화를 하는데 꿇리기는 고사하고 말이야. 그저 그 이야기를 오히려 리 드하다시피 얘길 하더라 이거야. 어, 사진계에 이런 사람이 있나? 하고 자기가 그때 새삼스럽 게 날 봤다는 거라. 그래서 대학원 들어오자 마자 나한테 지도교수가 된 거예요. 그래 가지고서 그 친구하고 나하고는 거의 한 30년 가깝습니다. 지금까지도 뭐. 최: 선생님 94년에 환갑기념전 도 그렇고, 99년 정년퇴임기념전 도 그렇고. 한 마디로 얘 기해서 제자들한테 떠밀리셔서 하셨고. 육: 예. 한 겁니다. 떠밀려서 한 거예요.. 최: 또 그때 제가 99년 전시회에는 제가 덕원 때는 제가 가봤는데. 그때도 최광호 선생을 만나니까, 당신이 작품을 다 셀렉(select)하고 또 자기가 다 프린트를 했다. 육: 그래. 지가 다 했어. 최: 그렇게 얘기하는데 그게 정말 그. 육: 맞습니다. 최: 사진가로서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거든요. 대체적으로 작품 선정, 그 부분은 사진가가 굉장히 심혈을 기울여서, 전시하는 사진가가 심혈을 기울여서.

148 제자 최광호의 결혼식 주례를 마치고 촬영한 기념사진. 90) 구술자의 책 검은 모살뜸 을 디자인 한 글씨미디어 홍동원을 말한다. 육: 하는 건데. 최: 선정을 하게 되고. 또 프린트를 아무리 믿을 만한 제자라고 하지만 맡긴다 하더라도. 프린트의 품질이라든지, 어떤 뭐 콘트라스트, 농도, 그런 분위기 때문에 그런 것도 굉장히 신경을 쓰게 되 는데. 그때 최광호 선생님한테서 얘기 들은 바로는. 육: 백 프로, 백 프로. 최: 선생님이 거의 방임에 가까운 정도로. 육: 방임했어요. 안 한다고, 안 한다고 하는 건데 떠밀려서 한 거야. 최: 아니 근데, 그게 저로서는 좀 잘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거든요. 그리고 다른 사진가분들을 경우 에 들더라도 그건 아주 예외적인 케이스인데. 어떻게 그런 거에 대한. 육: 아 또 그 얘기를 하죠. 그거는 인제 방임적인 게 한 칠, 팔십 프로 되고. 또 나머지 육명심 다운 한 삼십 프로 정도가 있어요. 저는 누구 한 번 믿죠. 한 번 믿으면 완전히 믿어요. 예를 들어서 지 금 내가 그 왜 책 백민 이나 저 뭐죠 저기 저 지금 나온 사진집들 있지 않습니까? 여태까지 나온 거. 제가 한 번도 편집에 관여한 적인 없어요. 물론 고른 건 내가 골랐는데. 책 만들어 나올 때까 지 내가 편집에 대해서 한 마디도 간섭한 적이 없어요. 한 마디도. 처음에는 광호가 만든 이가솜 씨가 했고. 책 한 두어 권 나온 거 있지요? 그거는 내가 한 번도 그거 편집한 거 나 볼 필요 없다 고 했어. 당신 맘대로 당신이 알아서 하라고. 어, 그게 바로 나에요. 지금도 요번에 나온 책 두 권. 장승, 그 다음에 뭡니까. 검은 모살뜸 있지요? 저것도요 고르는 건 내가 골랐지. 편집해 서 저 출판 될 때까지 저는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당신 맘대로, 당신 알아서 하라고 그랬어요. 그 러고 심지어 사진집에다가 이름 있지요. 사진 육명심 하고 당신 이름도 동등하게 이렇게 한 줄 로 써라. 디자인 홍동원 90) 을 한 줄로 쓰라고 했어요. 그건 왜 그러냐? 게을러서가 아니고. 일 단 책으로 만들 땐, 그 디자이너는 사진가만큼 오십 프로의 관여가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럼 그거 는 반은 내 작품이고 반은 그 사람 작품이에요. 책으로 일단 만들 때에는. 저는 그 몫을 주는 거 예요. 저는. 요번도 그래요. 요번에 나오는 것도. 근데 그 대신에 아무나 하는 건 아니에요. 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