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공공 아카데미 2기 :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인문학 4강 <가족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2013년 4월 10일 저녁 6시~9시 하자센터 신관 하하허허홀 강의 : 맹정현 (정신분석클리닉 혜윰 원장) 담임 : 조한혜정 (하자센터 센터장,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교수) 엄기호 (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기록 : 박준서, 이은정 (이상 연세대 문화인류학과), 권기찬(연세대 경제학과) 문의 : 하자허브팀 문보미 (eeseo@haja.or.kr) 1. 강의 맹정현 안녕하세요? 오늘 이야기하게 될 주제는 아주 평범한 이야기에요. 다만 저는 이 평범한 이야 기를 조금 색다르게 풀어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이야기가 평범하다고 말씀드리는 것은 이 주제 가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고, 색다르다고 하는 것은 제가 오늘 이 주제의 언 급되지 않거나 금기시되는 측면에 대해 얘기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이야기는 바로 가족 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누구나 가족은 가지고 있잖아요? 우리는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많게 는 형제들 등으로 구성된 가족을 가지고 있죠. 바로 그 가족에 대해 저는 한계로서의 가족, 그리고 문제로서의 가족 의 관점에서 접근해 보겠습니다. 저는 오늘 오신 여러분은 이 자리에 계신 것으로 보아 가족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 이 아 닐까 생각합니다. 가족이 여러분에게 문제를 제기한다면, 여러분은 그 문제로부터 살아남은 사 람들이라는 것이죠. 좀 이상한 관점이죠? 보통 사회로부터 살아남는다는 얘기는 많이 하지만, 가족으로부터 살아남는다는 말은 잘 못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은 우리가 사는 경쟁 사회에서는 가족이야말로 우리가 쉴 수 있는 안식처가 아니겠느냐고 생각하죠. 하지 만 실제로는 가족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문제들이 존재하고, 우리는 그 문제들로 부터 살아남기 가 쉽지 않습니다. 가족이 문제를 제기한다면 과연 무엇이 안식처가 되어줄 수 있을까요? 사회 로부터 만들어진 문제에 대해서는 가족이 안식처가 되어주지만, 가족 때문에 생긴 문제에는 어 떤 것이 치유책이 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보면 사회로부터 살아남는 것보다 가족으로부터 살 아남는 것이 더 시급한 일일 수도 있습니다. 가족 때문에 발생한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는다고 할 수 있죠. 가족 안에서는 아무리 행복해 도 그저 본전일 뿐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기도 합니다. 우리가 행복하면 가족이 주는 안락 함을 잊기 쉽고, 반면에 가족으로부터 조그만 상처를 받아도 그 상처는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 되기 쉽죠. 그만큼 가족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특별한, 어떻게 본다면 아킬레스건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이라고 하는 것에는 혈연관계 이상의 무엇인가가 존재합니다. 정신 분석학적으로 가족은 서로 리비도가 투자된 대상, 즉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로 정의됩니다. 그
런데 사랑이라는 것은 어떠한가요?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는 대상이 자신을 더 사랑해주기 를 늘 기대해요. 그 대상이 우리 자신을 더 사랑해 주기를 기대하는 만큼, 당연히 우리는 그 사람이 주는 것보다 주지 않는 것에 더 주목하게 됩니다. 받았던 기억이 아무리 많아도, 받지 못한 기억 하나 만으로 그 기억들이 의미를 잃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족은 취약한 집단입니 다.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 문제가 될 때, 그것은 그 어떤 문제보다도 골치 아픈 문제가 될 수 있죠. 바로 이것이 오늘 제 강의의 출발점 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가족이 어떤 문제이길래 가족으로부터 살아남는다 는 표현까지 할 수 있을 까요? 미리 말씀드리자면, 제가 가족으로부터 살아남는다 는 표현을 쓸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가족 속에서 개인이 어떻게 하나의 주체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의 문제입니다. 가족 속 에서 주체로 살아남는 것은 다시 말해 가족 속에서 나 자신이 스스로 원하는 것을 원하고, 자 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가족 속에서 주체로 거듭난다는 것이 실제로 이토록 어려운 문제인 것인지, 가족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을 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것인지 의문을 갖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더군다나 가족은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일을 오히 려 지원해 주는 것으로 기억되는데 말이죠.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우리의 부모님은 우리가 하고 싶어하는 것을 경제적으로, 또 정신적으로 지원해주는 분들인 것 은 맞죠. 하지만 그들이 원하는 것과 내가 원하는 것이 과연 무관한 것인가? 라는 질문에 대 답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얘기해도 문제고, 반대로 얘기하지 않아도 문제가 될 수 있어요. 부모가 아이에게 원하는 것을 말하는 경우, 부모의 바람이 곧 아이가 스스로 원하는 것이 되는 경우가 있고, 오히려 정반대로 부모가 원하는 것과는 반대의 것을 아이가 원하게 되 는 이상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죠. 또 반면에 부모가 아이에게 원하는 것을 아무것도 얘기해주 지 않는 경우, 아이는 부모가 자신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기 때문에 초조해하거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 하기도 합니다. 이 외에도 경우의 수는 다양합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 이건, 부모의 바람, 요구, 혹은 욕망 등과 관련하여 해결할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 니다. 사실 결코 쉽지 않은 문제에요. 이와 같은 문제는 우리의 내적인 한계를 구성하는 문제 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즉, 부모의 바람과 욕망은 내가 무엇을 욕망하는데 있어서의 한계, 나 의 능력을 실현하는데 있어서의 한계와 같은 것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것이 내가 욕망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에 결국에는 그것이 문제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경우가 많 습니다. 즉, 내가 내 속에 있는 한, 내 안에 무엇이 들어있는지를 잘 모르는 것이죠. 내 속에 있는 욕망이 나의 것인지, 부모의 것인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의 것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반면에 사회 속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이와 비교하면 명료한 문제들이죠. 사회적인 문제들은 무엇이 문제이고 무엇이 원인인지 비교적 명확한 경우가 많아요. 하지만 그것은 제도적인 문제 이기 때문에 해결되기는 쉽지 않죠. 반면에 가족 속에서 발생한 문제는 그것이 나의 심리적인 현실 그 자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파악하기가 어렵습니다. 아주 사소한 문제이더라도 그것이 어 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기 때문에 해결되기 힘들다는 것이에요. 문제의 증상이 있지만, 그 증상은 이미 나 자신의 일부여서, 그 증상을 인정하지 않으면 스스로가 무너지기 때문에 그것 을 안고 사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자면, 외교관 아버지를 둔 한 친구가 있었어요. 나름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친 구였는데, 이 친구는 부모님, 특히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굉장히 많이 노력하는 아이였어
요. 스스로 어머니가 자랑스러워하는 딸이 되고 싶어했던 것이겠죠. 그런데 어머니는 본인보다 남동생을 더 좋아했어요. 자신이 공부를 더 열심히 하고 잘해도 어머니는 결국엔 동생을 더 예 뻐했던 것이죠. 그래도 이 친구는 그럴수록 어머니 마음에 들기 위해서 더 열심히 노력했어요. 이 친구는 어머니 생각만 하면 자동으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에요.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외교관 남편과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 사람이라고 여기고 있었어요. 그래서 같은 여자로서 어머니를 안쓰럽게 여겼던 것이죠. 그래서 이 친구는 어머니의 요구라면 무엇이든 따 르려고 노력했어요. 어머니를 위해 모든 사람이 아는 명문대에 진학하고, 착실하게 대학교 생 활을 하고, 남자친구가 있고 혼자 살아도 귀가 시간을 일정하게 지켰죠. 결국 이 친구에게는 어머니라는 존재가 하나의 초자아 와 같은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고 얘기할 수 있겠네요. 이 친구의 경우 대학생활 자체가 어머니의 요구로 점철된 것이었습니다. 나중에는 취업 동아 리에 들어가 취업 공부를 열심히 하게 되고, 그 당시만 해도 이 친구는 인생의 목표가 분명했 어요. 그리하여 탁월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남들이 원하는 직장에 들어가게 됩니다. 나 름 어머니의 요구를 충분히 충족시켜 드린 것이죠. 그런데 나름 성공을 이룬 바로 그 시점에 갑자기 모든 것이 허망해지는 거예요.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왜 이 회사에 있어야 하는 지, 왜 이 일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느끼게 된 것이었습니다. 소위 우울증이라고 부르는 상태에 빠진 것이죠. 그동안은 어머니의 요구를 충실히 따르는 삶 을 살다가, 어머니가 요구했던 모든 것을 이루는 바로 그 시점에 갑자기 하고 싶은 것이 전부 사라지더라고 얘기하더군요. 즉, 이 친구의 욕망은 그동안 어머니의 요구 안에 갇혀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동안에는 어머니의 요구가 겨냥하는 것이 분명했어요. 가령 학교 성적 등은 단기적으로 결 과를 보여줄 수 있는 것인데, 성인이 되어 직장에 들어가니 어머니에게 즉각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게 없는 거예요. 이제 아이가 성인이 되었으니 어머니는 더 이상 뭔가를 요구하지 않았 고, 아이가 스스로 할 수 있기를 원했겠죠. 그렇기 때문에 이 친구는 더 이상 삶에서 할 게 없 어진 거예요. 뭘 원해야 하는지, 뭘 해야 하는지를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죠. 결국 이 친구에게 어머니의 요구라는 것은 이 친구의 욕망을 추동하는 힘인 동시에 이 친구의 욕망 을 제한하는 한계이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이 친구는 막상 본인이 성공을 하고 나니까 이상하게도 어머니가 더 불쌍해 보였다고 합니다. 어머니는 자식과 남편을 위해 자신의 꿈을 포기한 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동안 이 친구 는 어머니의 꿈을 대신 이뤄주기 위해 열심히 살았던 것입니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친구는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했다는 것이죠. 그런데 더 이상 어머니가 자신에게 뭔가를 요구 하지 않자, 어느 순간 방향을 틀어 다른 측면에서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게 되었어요. 바로 스스 로 꿈을 포기한 어머니와 자신을 동일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이 친구는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유지했던 것이죠. 이 이야기는 하나의 예일 뿐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것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는 예죠. 그렇다면 가족 속에서 주체로 살아남는 것이 왜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요? 주체로서 살아남는 다 는 말이 전제하는 것은 지금의 우리는 가족 속에서 별로 주체적이지 않다는 것이겠죠. 실제 로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이 되었는지를 살펴보면, 우리는 별로 주체적이지 않은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정체성이 형성되는 과정을 보면, 우리는 그렇게 주체적이지 않다 는 것이죠. 우리는 오히려 주체가 아니라 하나의 대상이 됨으로서 우리 자신이 되는 것이 아닌
지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여러분이 되었을까요? 철수는 어떻게 철수가 되 었을까요? 여러분이 태어났을 때, 여러분은 여러분이 누군인지도 몰랐어요. 여러분이 누구인지 를 여러분보다 더 먼저 알던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죠. 여러분의 얼굴을 보고 여러분을 알아보 는 사람이 있었을 테고, 여러분이 남자가 여자인지를 여러분 보다 먼저 알아보던 사람이 있었 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처음으로 여러분에게 말을 건 사람도 있었겠죠. 여러분은 그 사람의 말을 따라하면서 그 말을 다른 사람에게 사용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심지어 부모가 불 러주는 이름을 우리 자신이라고 믿었었죠. 우리가 나 라는 말을 사용하기 전에, 우리는 사람들 이 우리를 지칭하는 이름으로 우리 자신을 지칭합니다. 가령 어머니가 철수 밥먹을까? 라고 하면 아이는 철수 배고파요 라고 하죠. 즉, 한동안 우리는 어머니의 관점에서, 어머니의 언어 로 우리 스스로를 불러왔던 것이죠. 그런데 어느 순간 나 라는 말을 하게 되면서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양 자신이 철수 인 척 행동하고 철수 흉내를 냈던 것이죠. 어쨌거나 우리는 이렇게 타자가 지정해준 어떤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던 것입니 다. 어찌 보면 우리는 속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렇게 거의 20년을 속고 살 아온 것입니다. 여러분이 만약 다른 집단에 속해있었으면 철수가 아니라 영철이였을 수도 있어 요. 어찌되었건 이것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거치는 과정이죠. 누구에게나 자신이 철저하게 타자 에게 종속된 시기, 달리 말해 기생적인 시기 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삶의 첫 단 추는 그렇게 대상으로서의 삶, 대상으로서의 가치, 대상으로서의 기능 을 충실하게 이행하 며 꿰어졌던 것이에요. 사실 자신이 대상이었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지 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철하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늘 누군가의 대상이었어요. 우리는 늘 어머니의 대상, 아버지의 대상, 남자친구의 대상이었고, 심지어는 그렇게 대상으로 사는 게 기분이 나쁘지도 않아요. 이것이 무슨 뜻이냐면, 우리는 늘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싶 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고,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은 다시 말해 누군가의 대상이 되고 싶다는 것 이죠. 그렇게 우리는 누군가의 전폭적인 사랑,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시기, 즉 누군가의 신체 에 빌붙어 살았던 그 기생적인 시기를 은연중에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그것을 그리워하는 만큼, 한편으로는 그 시기에 충족되지 못한 것을 그리워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 신이 받은 것보다 받지 못한 것이 더 눈에 들어오는 것이구요. 제가 이렇게 여러분에게 대상으로서의 삶을 강조하는 이유는, 인간이 인간으로 되는 과정이라 는 것이 결국 그 대상으로서의 삶에서 벗어나 주체가 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원하 는 것을 원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사람이 되는 과정이 바로 인간이 되는 과정입니 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가 않아요.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사 랑하지 않아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사랑해서 문제가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흔히 서로가 사랑하지 않아서 문제가 생긴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왜 사랑이 문제일까요?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죠. 그런데 그렇게 사랑하 는 과정에는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이 개입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즉 늘 사랑받 는 것을 원하는 것이라는 얘기입니다. 가령 타인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들 하는데, 바로 그런 사랑이 가장 잘 구현된 형태가 바로 부모들의 자식에 대한 사랑입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아이는 자신이 보살펴야 하는 존재이자 사랑해야 하는 존재에요. 그런데 단 순히 그 정도로 그치는 것이 아니죠. 아이는 부모에게 부모가 하지 못한 것을 할 수 있는 가능 성이자 부모가 갖지 못한 것을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이고,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대신 성취
할 수 있는 가능성입니다. 즉, 아이는 부모의 잠재적인 자기 자신입니다. 그래서 부모는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가지지 못한 것을 주려고 하고, 해보지 못한 것을 시키려고 하죠. 아이는 부 모 자신의 신체의 연장, 꿈의 연장, 그리고 나르시시즘의 연장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는 아 이에게 많은 것을 주려고 하고, 그만큼 더 많은 것을 아이에게 요구합니다. 물론 거꾸로 아이가 부모에게 요구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것은 부모 입장에서는 그렇게 들어 주기 어려운 게 아니에요. 부모는 아이의 요구를 쉽게 물질적인 욕구로 바꿔줄 수 있기 때문이 죠. 아이가 부모에게 사랑을 요구하면, 부모는 그것을 먹을 것이나 현금 같은 것으로 대신 충 족시켜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에게 무언가 주지 않는 것이 주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요구는 그런 식으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란 것이죠. 굉장 히 추상적이고 막연하죠. 아니면 먼 이야기인 경우가 많아요. 착한 아이가 되거라 혹은 공부 잘하는 아이가 되거라. 얼마나 착해야 될까요? 얼마나 공부를 잘 하면 공부를 잘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는 걸까요? 다른 사람보다는 잘 해야 되겠죠. 그런데 그 다른 사람들이 과연 누굴까 요? 다른 사람들은 굉장히 많아요. 좋은 대학에 가야 된다. 초등학생한테 좋은 대학에 가야 된다는 것이 얼마나 현실성 있는 이야기인가요? 이것은 굉장히 먼 이야기에요. 곧바로 부모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이나 현금으로 바꿔줄 수 있는 것처럼, 물질적인 대상으로 바꿔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아이가 배고프면 부 모는 먹을 것을 주면 되지만 착한 아이가 돼야 된다고 한다면 이것을 어떻게 충족시킬 수 있 을까요? 아이와 부모 사이에는 절대적인, 기대치적인 관계가 있다는 거죠. 쉽게 말하면 너무나 불리한 싸움이라는 거예요. 아이의 요구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으로 쉽게 봉합할 수 있 지만, 부모의 요구는 그들의 욕망에 대한 문제를 남겨놓기 때문이죠.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가, 그들이 무엇을 바라는가 가 의문문으로 남아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겁니다. 요구와 욕망, 욕구와 욕망은 다른 것이죠. 욕구는 물질에 의해 충족될 수 있지만 욕망은 그렇 지 않아요. 충족되기가 쉽지가 않은 것이죠. 부모의 욕구는 물질적인 것으로 충족되지 않기 때 문에 그만큼 어렵고 까다로워요.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는 것이 어려운 요구에요. 아이 입장에 서 부모의 요구에 따라야 한다고 하면서 힘들어하는 친구가 있고요. 게다가 그것이 너무 과도 한 것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낙오자가 되는 경우도 있어요. 게다가 부모가 요구하는 것이 많으 면 그것이 전혀 사랑의 기호처럼, 사랑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거죠. 그럴 수 있 겠죠. 그러면 부모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것일까 라는 의문이 생길 수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일부러라도 부모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어요. 결국 어느 쪽이건 출구가 없는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 만큼 가족으로부터 주체로서 살아남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문제로서 다뤄야 하는 거예요. 더군다나 이 문제는 우 리가 살고 있는 이 시기, 이 사회 속에서 현재 분명하게 인식되어야 해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사회 구조의 변화로 인해서 가족구조의 변화가 발생하고 있는데 그 결과 로 인해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문제에요. 전통적인 가족구조, 가족구조가 아동중심이 아니었 던 사회, 그러니까 가족이 핵가족화 되기 이전에는 부모와 아이 사이에 이타성이 개입될 만한 여지가 있었어요. 부모와 아이 사이에 이타성이 개입된다는 것은 가족구도 속에 부모의 나르시 시즘을 방지하거나 제어하는 제동장치가 있었다는 얘기에요. 가령 사회적 가치라던가 윤리, 아 버지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 있었죠. 그런 기능들이 부모와 아이 사이에 필요한 최소한의 거리
를 만들어냈다는 겁니다. 부모의 욕망이나 요구가 우회적인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전달이 됐다 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이게도 아이들에게는 그런 요구로부터 선택을 하고 주체성 을 가질 만한 자신만의 공간이 있었다는 거예요. 가령 아버지가 갖는 권위를 부정적으로만 생 각을 하는데, 아이들이 어머니의 대상으로만 남아있지 않도록 하기 때문에 아이들이 숨 쉴 수 있는 여지를 만들 수 있다는 거예요. 아버지의 자리는 아이에게 어머니와 지나치게 근접하는 것을 금할 수 있고요, 어머니도 아이에게 지나치게 근접하는 것을 막아주는 제동장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죠. 어머니가 아이들을 마음대로 휘두르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제동장치. 권위가 지나치면 문제겠지만, 여태까지는 아이나 어머니에게 스스로 주체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 내는 기능을 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더군다나 이전의 가족구조에서는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이 있었어요. 한 아이가 아니라 다수의 아이들이 있었죠. 한 가족 내에서 아이들아 많았어요. 그만큼 부모의 사랑을 나눠야 했던 것이 죠. 부모의 사랑을 나눠야 하는 만큼 부모의 요구가 주는 무게를 줄일 수 있었던 거예요. 부모 로부터 덜 받았지만 아이들은 그게 얼마나 귀한지를 알 수 있었던 거예요. 아주 적은 것만으로 도 부모의 사랑을 느끼기에 충분한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현재 가족은 그렇지가 않다, 라는 겁니다. 사회구조가 변하면서 한국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련의 특수한 가정들이 있죠. 그러면서 가족구 조가 아동 중심의 사회로 바뀌고 있어요. 한국은 실제로 아동 중심의 사회에요. 역사적으로 아 이의 액면가가 이 정도까지 상승한 적이 있었을까요? 아이의 가치의 인플레이션. 아이가 비싸 졌어요. 아이에게 투자하는 리비도의 양이 커졌고, 아이들에 들어가는 비용도 만만치 않아요. 아동 중심의 사회로 바뀌면서 아버지의 자리가 예전 같지 않거든요. 아버지의 역할이 결재통장 으로 축소돼 있는 경우가 많아요. 소위 돈 버는 기계 정도의 아버지가 탄생한 것이죠. 그게 아 니면 아버지의 권위를 스스로 내려놓고 아이들의 친구가 되려고 하는 경우가 있고요. 친구가 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지만 그 가정 속에 이타성을 들여놓는 지점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거예요. 경제적 위기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아버지의 몰락을 경험하기도 한 경우들도 있 었죠. 다양한 이유들이 있지만 만들어내는 상황은 비슷해요. 무엇이냐 하면 아이들이 부모의 나르시 시즘적인 연장이 되는 것을 저지해 줄만한 제동장치가 사라졌다는 것이지요. 부모, 특히 어머 니와 아이 사이의 거리가 사라지기 시작했어요. 어머니의 요구가 아이에게 매개되지 않는 방식 으로 직접적으로 부과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대상의 위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예전에 비 해 더 어려워졌어요. 집집마다 아이들이 많지 많기 때문에 그 요구들이 한 아이에게 집중되는 것도 문제겠죠. 사랑이 집중되기 때문에 더 많은 사랑을 받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요 구들이 한 아이에게 집중되는 거예요. 더군다나 젊은 부모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나르시시즘적 인 경쟁이 있고, 그 경쟁이 아이들을 경쟁시키고 있어요. 아이들이 부모의 경쟁 대상이 되어 버렸어요. 누가 얼마나 잘 키우는가, 누가 얼마나 좋은 대학을 보내는가, 누가 얼마나 열심히 아이들을 보살피는가. 그 경쟁이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이어지게 되었다는 겁니다. 부모들은 투 견장 밖에서 응원을 하지만 그 안에서 경쟁을 하면서 상처를 받는 것은 아이들이죠. 그렇게 경 쟁을 하면서 상처를 받거나 스스로 낙오자가 되어 버림으로써 경쟁하는 장소인 투견장 속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아이들도 있어요. 그것이 현재의 아이들이 처해 있는 상황이에요.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현재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을 느끼기가 쉽지가 않은 조건이죠. 쉬운 환
경이 아니라는 이야기에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데 오히려 그것 때문에 사랑을 느끼기가 더 어려워졌어요. 부모는 아이를 사랑하고 그러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더 많은 것을 주려고 해요. 물질이 점점 더 풍요로워지는 것이에요. 그러면 더 많은 것을 줄 수 있을 텐데, 그러면 그럴수 록 오히려 사랑을 증명하는 것이 더 어려워졌어요. 왜냐하면 남들도 다 누리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요. 아무리 많이 줘도 남들도 다 누리기 때문에 여전히 부족한 것이 돼 버렸어요. 남들 보다 절대적으로 더 많은 것을 주는 경우도 있을 수 있죠. 큰 마음 먹고 줄 수도 있어요. 그러 면 어떻게 될까요? 가령 너무나 사랑해서 어린 아이에게 자동차를 사줬어요. 무슨 뜻이 될 수 있을까요? 돈이면 다 되는 줄 알아 라는 의문이 생길 수도 있죠. 많은 것들을 주지만 정작 사 랑은 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가능하다는 얘기인 것이죠. 요구는 많은데 사랑을 증명할 만한 수 단을 점점 줄어들고 있어요. 가족구조, 그러니까 현재 우리가 처해있는 조건들이 이 아이들을 부모와 더 가깝게 만들면서 결국에는 그 누구도 주체로 살아남기가 쉽지 않는 상황을 만들고 있다는 것이죠. 아이들은 점 점 더 대상이 되면서, 자기가 원하는 것을 원하고,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것이 더 어려워지고 있어요. 그러니까 욕망과 능력에 있어서 제약이 발생하고 있다는 거죠. 제약이 발 생한다는 것은 제대로 원하지 않는다거나 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의 욕망을 자기 것으로 느끼면서 그 자신으로부터 소외를 당하는 현상이 제약인 것이죠. 한참 뛰 다 보니까 누군가를 대신해서 뛰고 있던 것, 한참 뛰다 보니까 모든 사람이 뛰어가고 있는 것 을 같이 뛰어가고 있는 것이죠. 제가 처음에 가족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이 하나의 문제라고 했는데요. 현재의 조건에서는 어 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나만 살아남는 것이 문제가 아니에요. 가족이란 것이 어떻게 지속 되는가 혹은 가족이란 것이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와 직결되는 문제인 것이죠. 가족 속 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문제들은 실제로 사회적으로 많은 문제를 만들어내고 있어요. 일부 아 이들이 가혹한 조건 속에서 경쟁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편에는 낙오된 아이들이 있죠. 가족이 아닌 다른 곳을 전전하는 아이들이 생기면서 가족이 붕괴되고 있어요. 가족으로 살아남는다고 하는 것은 가족 그 자체가 살아남는 조건이 될 수 있다는 얘기에요. 그런 맥락에서 저는 제목 을 가족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라고 붙인 것이죠. 가족이라는 평범한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색다르게 이야기가 되었는지 모르겠어요. 여러분이 자신이 처한 조건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오늘 이야기는 여기까지 할게요. 2. 팀별토론 3. 전체토론 엄기호 : 날씨도 춥고 해서인지 사람들이 좀 적게 오신 것 같네요. 학교에서도 수업을 하면 ' 가족'을 가지고 수업을 할 때가 가장 많은 이야기가 나오기도 하고 심각한 이야기가 나오기도 해요. 저도 사실 어떻게 이야기해야 할 지 난감해지는 이야기가 나오는 그런 주제인 것 같아 요. 지난번 자공공 1기때 맹정현 선생님께서 오셔서 강의하셨을 때도 토론이 여느 때보다 더욱 뜨겁고 길기도 했다고 하죠. 오늘은 또 어떤 이야기들이 나오는지 우리가 관찰을 해 가면서 어 떤 수준의 논의까지 할 수 있는지를 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야기 풀고 싶으신
분들께서 자유롭게 나오셔서 토론 조에서 나온 내용에 기반을 두면서 질문 해주시기를 바랍니 다. 박준서 : 우선 나르시시즘은 결국 자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데 어떻게 그것이, 자식이지만 결 국 타자인 대상에게 반영되는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연결고리가 궁금합니다. 또한, 강의 중에 아버지의 기능에 대해 설명하실 때 부모와 자식의 거리를 유지하는 기능의 일환으로 설명을 하셨는데, 잘 와 닿지 않아서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가 있을 수 있을지 궁금합 니다. 마지막으로 강사님의 가족은 어떻게 지속되고 있는지가 궁금합니다. (웃음) 맹정현 : 일단 나르시시즘이라는 개념은 흔히들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 리비도를 투자하는 것 이라고 이야기를 하죠.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이 아닌데, 분명 다른 이를 사랑하는 것인데, 왜 그 것을 나르시시즘이라고 이야기하냐는 질문이었던 것 같아요. 일단 그 대상이 자신이건 다른 사 람이건, 현실적으로 어떤 대상이건 간에 대상이 무엇으로 귀착하느냐가 제가 말씀 드리는 나르 시시즘의 핵심인 것 같아요. 물론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은 나르시시즘이라고 하죠. 그런데 어떤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왜 사랑하는지, 어떻게 사랑하는지를 물어볼 수가 있겠죠. 내가 저 사람의 과연 어떤 부분이 마음 에 들어서 사랑하게 되었느냐의 문제를 제기해볼 수 있어요. 그 친구의 성격이라든가, 나와는 다른 무언가가 마음에 들어 특별히 선택하게 된 것일 수도 있겠죠. 그런데 그 과정을 잘 들여 다보면, 사랑이라고 하는 과정이 어찌되었든 대상은 자기 자신의 연장선에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건 간에 결국 자기 자신의 등가물로 생각하게 될 수가 있어요. 만약 그 친구가 나 와 다른 사람이라면, 나의 나르시시즘을 저해하는 대상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타인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라'는 명령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그 명령이 전제로 하는 것이란 결국 그 대상이 내 몸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것이죠. 다른 대상을 선택한다 하더라도, 늘 사랑의 어떤 지점에서 는 동화되는 시점이 있어요. 더 비슷해지고, 하나의 필요 속에 들어있는 것 같은,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하나가 될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을 나르시시즘적 사랑이라고 하죠. 부모들의 사랑 역시 마찬가지인 거죠. 제 대답이 잘 이해되셨는지 모르겠네요. 그 다음 질문이 아버지의 기능에 대한 것이었죠. 일단 제가 말씀 드린 아버지의 기능은 전통 적인 가족 구조 속에서의 아버지의 기능이죠. 가족의 내부 구성 인원이면서 동시에 가족 속에 이타성이라고 해야 하나요? 사회와 맞물려있는 지점, 내부와 외부가 만나는 지점으로서의 아버 지의 기능이 있다는 것이죠. 권위적이라는 것은 무엇이냐 하면, 내가 그 사람과 동등한 관계 속에 놓일 수 없다는 것이 전제가 되겠죠. 그는 나와 나르시시즘적인 관계 속에 놓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죠. 가족이라고 하는 것을 엄마, 아이, 아버지로 이루어진다고 보면 어떤 방식으 로든 어머니가 아이를 사랑하고 아이가 어머니에 대해 갖는 애착은 거울과 같은 관계로 귀착 하게 됩니다. 아버지의 위치는 어머니와 달리 늘 현존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족 속에서 있는 경우도 있지만 없는 경우도 있어요. 나와 어머니의 관계 속에서 제 삼자의 역할을 해줄 수 있 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내가 어머니에게 다가가는 것에 대해서, 금지하는 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동시에 거기에 대해 허락을 얻어야 하는 사람일 수 있어요. 내부와 외부의 문제 에 대해 설명을 드리면요. 아버지는 현존하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부재할 수 있는 사람이죠. 가
족 내에서 누군가가 이 곳에 있으면서 동시에 바깥에 있을 수 있는 사람. 그런 기능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전통적인 가족 구조 내에서 아버지가 가질 수 있는 역할이라는 거 죠. 아까 이타성이라는 말씀을 드렸는데요. 가족이라고 하는 작은 울타리 속에서 개체만 놓고 보 면 서로 다른 사람들이죠. 생물학적으로 연결되었다고 해서 굳이 일생을 같이 살아야 할 이유 가 꼭 있는 것은 아니에요. 그러나 가족이라는 인연에 의해서 한 공간 속에서 적어도 세 명 이 상이 살아 왔고, 그러한 과정 속에서 외부는 없고 완벽하게 닫혀진 하나의 단위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거예요. 가령, 나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어머니일 수도 있고, 어머니이면서 동시에 나일 수 도 있는 그런 거울적인 관계가 만들어져요. 닫혀진 구조에서 외부와의 통로를 만들어주는 역할 이 아버지가 아니냐는 거죠. 전통사회 속에서 아버지가 차지하고 있는 그런 기능들이 있었는 데, 아까 말씀드린 몇 가지 조건들의 변화, 사회구조의 변화로 인해서 아버지가 가지고 있던 기능들이 사라졌어요. 그런 가운데 가족이라는 것 자체가 외부를 상실한, 밀폐된 자폐증적 구 조를 점점 더 형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런 측면에서의 나르시시즘을 사용한 것이기도 하 구요. 세 번째 질문은 저도 가족이 있는데요,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그렇게 나쁘지 않아요. (웃음) 조한혜정 : 좀 보완을 하면 실제로 여기 모인 사람은 가족으로부터 살아 남은 사람들이다 라 는 말씀이 무척 좋은 말인 것 같은데, 가족사회학적으로 핵가족에서 성장해서 우리는 다 개개 인이고, 지난 주에도 이야기한 것처럼, 전부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이잖아요. 이제 핵가족 다음 에는 가족이 사라져야 되는 거예요. 도메스틱 파트너십이란 단어를 이야기하죠. 이렇게 가족으 로부터 살아남기가 힘들다면, 그냥 부모와 가족같은 그런 닫혀진 구조가 아니고, 가족끼리 할 수 없이 산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다 이렇게 연극을 하면서 살면 훨씬 행 복하게 살 수도 있는 거죠. 이런 식의 상상을 해 보면 논의가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엄기호 : 제 경험 보태면서 다음 질문 넘어가면요. 저는 부재와 현존을 가지고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 저희 집은 아버지께서 전형적으로 부재하셨던 경우거든요. 사우디아라비아로 노동하러 가셨고, 돌아오셔도 계속 건설 노동자셨기 때문에 한 달이나 두 달에 한번 정도 집에 오셨어 요. 그렇다고 없었던 것이 아니라 늘 엄마에 의해 떠올려지는 존재였었죠. 가족끼리 사이가 좋 았던 것도 있지만요, 자리에 없었지만 늘 엄마에 의해 있었던 분이죠. 그래서 아버지가 오셨을 때도 당연히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이 지금 있는 것 같았어요. 그렇다고 아버지와 제가 엄청 친 했다거나 그런 건 아니예요. 굉장히 좋은데, 좀 다른 느낌을 가지고 있었어요. 수업을 하다가 학생한테 이야기 들은 두 사례가 있어요. 있는데 정말 있는 분들 : 그 아버지 는 자식이 후배랑 놀고 있어도 왜 집에 안 오냐, 오늘 같이 게임방 가기로 하지 않았냐 고 연 락하는 (웃음) 정말로 친구 같은 관계인 거죠. 또 하나의 경우는 아버지가 부재했던 집이에요. 그동안 현존하지만 부재하는 집이었던 거죠. IMF 이후 회사에서 잘리고 나서 집에 돌아오신 경우에 문제가 많았던 거죠. 부재하는 동안에 아버지가 없는 걸로 치고 모든 관계가 돌아가고 가족이 유지되었는데, 갑자기 돌아오시니까 이 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가 문제가 되는 거 죠. 그러니까 아버지만 거실에 있고 나머지는 다 도망가는 거죠. 한국에서는 여전히 어머니도 문제지만 아버지의 부재, 어머니와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인 거 같아요.
너무 어머니 위주로 얘기가 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조한혜정 : 그 때 엄기호 아버지의 경우는 경제적인 걸 하셨던 분이잖아요. 그게 굉장히 막강 한 존재인 거죠. 어머님이 아버지를 통해서 사회라는 것을 계속 알려주는 역할을 했던 것 같거 든요. 그런데 지금은 아버지가 경제력을 갖지 못한 경우가 굉장히 많고, 사회라는 것 자체가 소멸한 상태죠. 굉장히 근본적인 차이가 있고, 거기에 대해서 얘기해 보아야 합니다. 문현정 : 연세대학교 학생들과 자전거공방의 아버님들이 같이 팀을 만들어 조별토론을 했어요. 주로 나왔던 이야기는 어떻게 가족에서 주체로서 살아남느냐 하는 방법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는 피를 보더라도 서로 부딪혀 가다가 나중에는 지쳐서 알아서 가게끔 하는 것이고요, 다 른 하나는 틈을 보는 것이죠. 졸업을 하고 나름 안정된 직장에서 내가 독립했다는 것에 확신을 갖기 시작하면 그런 시기의 틈을 봐서 그 때 확 주체로 살아남도록 해버리거나, 아니면 엄마가 조금씩 취미를 찾아가실 때 저도 자전거라는 취미를 찾아갈 수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방 법은 주체가 되는 것이 계속 유예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취직한 다음에는 배우자를 찾아 야 하고, 배우자를 찾은 다음 엄마가 되고 할 때까지 계속 유예가 될 수 있는 위험도 있지요. 선생님이 생각하시는 좋은 방법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방금 말씀하시면서 생각난 것인데요, 엄마하고 아빠가 서로 브레이크를 걸면 좋은 것 같습니 다. 서로 제동을 거시는 가운데 저는 숨이 트이는 경우가 있어서요. 엄마에 대해 펼 수 있는 전략과 아빠에 대해 펼 수 있는 전략을 잘 고민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면 가족 외에 믿을 만한 사람을 두거나요. 어쨌든 자식들이 가정에서 주체가 될 수 있는 좋은 전략은 어떤 게 있 는 지 궁금합니다. 맹정현 : 보편적인 방법은 사실 없죠. 제가 말씀드리려는 것은 각각의 인간들이 자신만의 방법 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의 방법을 발견해 내야 한다는 것이죠. 어떤 역설이 있냐하면요, 어떻게 주체로서 살아남는가는 결국 부모와의 분리의 문제입니다. 이 분리라는 것 이 도대체 어떤 수준에 위치하느냐,라고 질문을 던져볼 수 있겠죠. 경제적, 현실적 수준에서의 분리인가? 같이 이 좁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데,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리라 라는 결심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는 분리인가? 아니면 어떻게든 어머니, 아버지의 돈은 받지 않겠다는 경제적 분리 인가? 사실, 글쎄요. 가령 내가 이 집을 떠나겠다고 하는 생각을 가졌을 때, 그렇게 해서 떠나 는 것이 진짜 분리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장소는 이동을 했지만 정신은 그 집 안에 있는 것 아 닌가요? 경제 역시 마찬가지 아닌가요? 내가 왜 죽어도 받지 않겠다는 건지, 왜 꼭 죽어도 가 되어야 되나요? 그냥 떳떳하게 받으면, 손을 내밀면 왜 안될까요? 한 곳 안에서 같이 살면서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으면서 떳떳하게 받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 있는 것이죠. 어떤 학생들의 경우에 굉장히 착하고 공부도 잘 하는데, 부모님께 받는 것을 굉장히 부담스러 워해요. 나름대로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살고 있는 친구처럼 보이는데, 자식이 뭔가 해야되겠다 는 부담감을 가지고 있다는 거죠. 그런데 벌써 이 생각 자체가 이 친구가 처해 있는 하나의 상 황인거죠. 긍정적으로건 부정적으로건, 부모에게 연결되어 있다고 하는 사실을 잘 보여주는 상황인거예요. 결국 분리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 경제적인 분리, 나아가서 감정적인 분리까지 다 분리일 수 있죠. 무엇보다 잘 이루어져야 하는 것은, 제 발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욕
망의 분리 를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이 선행되어야 해요. 만약에 그런 것을 쟁취할 수 있다면, 그 좁은 공간에서 사는 것이 뭐 그리 문제가 될까요? 방금 토론 시작하기 전에 조한께서도 말 씀하셨는데, 빌붙어서 주체답게 사는 것 역시 굉장히 멋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분리를 대표 적인 예로 들고 싶네요. 윤강재 : 아까 얘기의 연장선상에서, 부모의 희생이 어떻게 작용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 눴어요. 개인적인 생각으로 가족 간에 트러블이 일어나는 것은, 결국에는 우리가 모두 다 사람 인데, 가족끼리는 사람임을 넘어서 가족임을 너무나 요구하기 때문에 가족 간에 트러블이 생기 지 않나 생각을 했어요. 개인적 가족사를 얘기할 텐데 이점 양해드립니다. 제가 어릴 때 아버 지께서는 학벌에 대한 콤플렉스가 심했어요. 안 잊혀지는 일화가 있어요. 술을 마시고 돌아오 셔서, 자고 있는 저의 이불 곁에 와서 귓가에 대고 꼭 특정 대학 특정 과를 가야 한다고 이야 기 하시는 거죠. 한 달에도 대 여섯 번이니까 거의 세뇌입니다. 그때는 그러려니 하고 그 목표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어요. 부모님께서 어떻게 자식한테 해줘야 되느냐에 대해 절대적인 기준 은 없지만, 주변과 비교를 해보면, 솔직히 많이는 못 받았던 것 같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 간으로서 해줄 수 있는 가능한 선에서 최대한 해주셨어요. 저는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결 과적으로는 아버지나 부모님께서 원하시던 목표를 이루진 못했어요. 그랬더니 한숨을 쉬며 내 가 널 위해서 어떻게 희생을 했는데! 레퍼토리가 나왔어요. 그런데 저는 바라지도 않았는데 왜 해준 거냐 그런 생각이 든 거예요. 그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모님께 울분을 토했어요. 나는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걸 다 했으니 부모님도 내게 좀 인간적인 걸 요구해라 했지요. 이 야기가 좀 통했어요. 서로 미안하다고 하고, 서로 가족이기를 좀 포기했어요. 가족이기 전에 서 로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는 거죠. 그 이후로 트러블이 좀 적었습니다. 다른 분들 이야기 들어보면, 가족이기 전에 인간인데, 인간을 넘어 가족으로서 요구하기 때문에 트러블이 생기는 것 같아요. 이런 개인적인 생각에 대해서 선생님들의 의견을 듣고 싶습니다. 이보람 : 질문이 두 개인데요. 하나는 애를 왜 낳아야 되는지에 대한 생각입니다. 우리가 어쨌 든 무척 의존적이기도 하고, 아이가 나의 연장도 아니고 등가물도 아닌데 왜 낳아야 되는지, 엄청난 시간과 노력과 비용이 드는데 이타성이라는 하나만의 이유로 애를 낳아야 하는지 말이 예요. 직접 낳아서 실험을 해 봐야 할까요. 다른 하나는, 그 동안 제가 주체로서 살기 위해, 분리하기 위해, 독립하기 위해 엄청 애를 썼 는데, 사실 저는 처음 태어날 때부터 대상이었는데, 어디까지가 부모님의 욕망이고 어디서부터 내 욕망인지, 그 걸 분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걸 알았어요. 부모님과 조부모님 '나' 라는 게 독립된 주체로서 있는 건가요? 분리 작업이 뭐하는 짓인지 의문이 들고 제가 지금 하 는 질문이 사실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웃음) 도대체 뭘 요구하는 건지 궁금했습니다 임광모 : 직장을 다니다 그만 두고 심리학 대학원 진학 준비를 하고 있는 임광모라고 합니다. 좀 전 질문한 남학생의 아버지와 저의 아버지가 성향적으로 비슷한 것 같습니다. 저한테 바라 는 게 있으셨지요. 주로 아버지께서 제게 요구하셨고 어머니께서는 허용적이셨어요. 맹정현 선 생님이 강의 중에 설명하신 것이랑 좀 반대되는 관계구도인 것 같은데, 그런 케이스도 있을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다음으로 저희 조에서 나왔던 이야기 중에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조원 중 미국에 서 생활해온 친구가 가족 에 대해서 말을 해 주었어요. 미국에 있으면서 '하고싶은 걸 해라' 하 라는 식으로 살아왔고 거기에 불만은 없지만 무언가 한국의 정 같은 것이 그립다고 했습니다. 어떤 것이 더 가치가 있는지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또 전체적으로 나왔던 의견은, 가족이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한 명 한 명의 개개인이 스트레스 받고 희생된다면 그게 진정한 화목이 될 수 있고 평화가 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설명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가족은 어떻게 지속되는가에 있어서 부모에겐 부모의 역할, 자식에겐 자식의 역할이 있다면, 그것을 지키면서 오는 스트레스와 혼란이 있을 텐데요. 가족이지만 서로 맞지 않는 입장이라면 분리되어 살아도 좋다는 얘기도 나왔거든요. 맹정현 : 일단, 첫 번째 질문에 답해보면 가족으로서의 의무, 즉 가족됨 이라고 하는 관념과 인간 이라고 하는 관념을 대비시킨 것 같습니다. 가족 내 구성원으로서 부모님들이 가족으로서 의 역할이라든가 '가족임'이라는 관계를 지나치게 강요한다는 이야기지요. 그 과정 속에서 나를 가족이기보다는 인간으로 대해 달라는 울부짖음, 호소를 말씀하셨는데요. 글쎄요, 가족 과 인 간 이라고 하는 개념을 대상 과 주체 라고 하는 개념으로 대입시키면 비슷해 보이입니다. 가족 이기 전에 한 사람의 인간이 아니냐,라고 생각해볼 수 있어요. 만약 자신이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은 드네요. 그런데 제가 볼 때는, 그렇게 이야기하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가족에 대한 믿음이나 신뢰가 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가 가능 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가족이기 전에 먼저 인간으로서 서로 대해가면서 주체로서의 자신을 찾아갈 수도 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라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네요. 어떻게 보면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는 과정 속에서 가족에 대해서 그 만큼 부담 감이라든가 죄의식으로부터 어느 정도 자유로워야 된다는 거에요. 정말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 이 정신적으로 가능하다면 말 그대로 자유로운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족으로부터 벗어나 서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건 쉽지는 않은 문제라는 생각이 드네요. 어떻게 보면, 문제는 오히려 처음으로 돌아가서 다시 가족으로부터 출발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가족 안에 있으면서 분열되지 않고, 가족의 한 구성원이면서 동시에 어떻게 나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이런 문제 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떤 방법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각자의 몫이고요. 가족은 다 다르거든요. 엄마와 아빠의 관계가 다르고 살아온 역사도 다르고 내가 위치하는 곳 도 다를 것이고요. 가족사적인 맥락도 다르고 엄마와 아빠, 그 위에 할아버지 할머니.. 그 긴 역사 속에 내가 위치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인데, 자유라고 하는 것은, 혹은 주체라고 하는 것 은 그냥 우리가 목욕탕에 가서 벌거벗고 있는 상태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기분이 아닌 것이 죠. 내가 뭔가를 짊어지면서 동시에 자유로울 수 있다면, 내가 짊어지고 있는 것들을 좀 더 가 볍게 짊어질 수 있다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가 아닐까 싶습니다.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아이를 자신으로 대하지 않을 것 같으면, 왜 낳았느냐는 거지요? 일단 아이가 태어나는 순간은, 아이를 내 자신처럼 사랑하고, 보호를 해야겠죠. 그런데 과연 언제까 지 그래야 될까요? 내 아이를 내 아이로서 키워야 될까요, 아니면 내 아이를 나 자신으로서 키 워야 될까요? 아이가 탄생하는 과정 속에서 이타성이라고 하는 문제는 어떻게 보면 아이 자신 을 나와는 다른 사람, 나와는 다른 개체, 언젠가는 나로부터 분리되어서 그 스스로 한 명의 인 간, 한 명의 주체로서 살 수 있는 기회를 아이에게 줄 때에 비로소 엄마 아빠가 될 수 있는 그
런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나의 아이이기 때문에 혹은 나 자신의 일부이기 때문에 아이를 사랑한다면, 과연 어디까지 아이를 아이로서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와는 닮은 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나의 아이이기 때문에, 내 얼굴과 똑같은 얼 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이에게 얼마나 좋은 사랑이 될 수 있을 까요? 물론 아이가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기분 나쁘기 때문에 낳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것도 하나의 선택이죠. 세 번째 질문은 아주 복잡한 질문이었는데요. 우리들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부모님의 욕망, 누군가의 욕망과 분리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들여다보면 볼수록 자신 안에는 자신의 것 같지 않은 욕망들이 있는 것이죠. 그것은 욕망의 구조 자체에 내재한 속성입니다.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원래 그런 것이 아닌가요? 누군가가 루이비통을 욕망하면 나도 사고 싶은 것이 욕망 아닌가요? 처음부터 누군가의 욕망을 빌리면서 만들어진 것이겠죠. 나는 처음 부터 나 자신의 욕망을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고요. 다른 사람이 욕망하는 것을 쳐다보면서 욕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사실 내 욕망의 기원을 추적하는 문제는 끝이 없는 문 제입니다. 결국 그 속에서 부모님의 욕망 뿐만 아니라 어렸을 적의 에피소드도 있을 것이고, 친구들과의 관계도 있을 것이고, 끊임없이 가다보면 답은 하나에요.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 망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나의 욕망을 찾는다는 것은 뭘까요? 내가 누군가의 욕망을 빌 렸음에도 불구하고, 내 자신의 것처럼 능동적으로 욕망한다면 그게 주체적인 욕망이겠죠. 어디 서부터 기원했든 말이죠. 계속해서 이것이 나의 욕망이 아닌 것 같다, 어쩌면 다른 사람의 욕 망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주체적인 욕망이 아닌 거예요. 그런 생각들로부터 갈등이 있는 것이고요. 경쟁, 더 잘해야 될 것 같은 생각들, 혹은 다른 사람들의 욕망과의 관계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갈등의 양상들이 있겠지요. 죄의식이나 부끄러움도 있을 것이고요. 어떻게 보면 내 욕망이 타자의 욕망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내 욕망이 타자의 욕망임에도 불구하고 갈등을 느낀다면 그때부터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내 욕망 안에서 타자의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주체가 되는 하나의 출발점이 될 수 있습니다. 가족 속에서 부모님이 욕망했던 것들, 그들이 나에게 요구했던 것들로부터 거기서부터 나 자신의 욕망을 찾아가는 하 나의 과정이 시작될 수 있지요. 네 번째 질문도 복잡했는데, 제가 말씀 드린 가족구조와는 반대되는 가족구조에 대해서 말씀 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어머니 같은 역할을 하셨다고 했죠. 아버지가 더 많이 요구를 하 셨고 어머니는 좀 더 허용하는 분이셨다고 말씀하셨죠. 그런 구조 속에서 발생 할 수 있는 어 떤 문제가 있을까요? 그건 어떻게 보면 제가 질문을 드려야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만약에 정 말 그런 구조 속에서 살아오셨는데, 어떤 문제를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이 되면 문제가 있는 것 이고, 만약 없다고 생각되면 문제가 없는 거예요. 핵심은 뭐냐면, 가족 속에서 있어야 되는 기능들이 필요한 것이고, 사실 엄마가 그 기능을 맡 는지 아빠가 그 기능을 맡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아요. 저는 어쨌든 그 기능들이 수행되지 않 을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해서 설명했던 것이지요. 다만 한 가지 제기할 수 있는 문제는 있어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아버지의 기능이 아니라, 아버지가 굉장히 요구가 많은 경우이지요. 그 아버지의 요구라고 하는 것이 아버지를 아버지 답지 않은 아버지로 만드는 지점일 수도 있고요. 모성적인 측면과 연관이 된 부분일 수 있어
요. 가족이란 변형태 속에서 발생할 수 있는 상황들은 많아요. 그 문제도 다양한 방식으로 전 개가 될 수 있지요. 요구가 많은 아버지라고 했을 때, 그 요구가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가 중요할 것 같습니다. 그 요구가 가령, 일관되어 있느냐, 일관되지 않느냐도 중요한 문제이지요. 단순히 요구를 한다는 것이 문제가 되지는 않습니다. 아버지도 당연히 우리에게 요구를 하는 부분이 있어요. 아버지의 요구와 어머니의 요구는 다른 요구일 수 있어요. 보통 전통적인 사회 속에서의 요구는 일관된 형태를 띠고 있어요. 그때그때의 관계 속에서 변형될 수 있는 요구가 아니고, 감정에 치우칠 수 있는 요구가 아니고, 사회적 혹은 가족 내에서 가족이 지향하는 가 치에 따라서 선택될 수 있는, 그런 가치가 일관되게 구현될 수 있는 요구. 그런 요구라면 아까 제가 아버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을 때도 아버지는 요구하는 존재다 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것 이지요. 어찌 보면 사례마다 풀어야 할 문제이지 보편적으로 정해진 룰은 없어요. 그리고 마지막 질문에 대해서는 가족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라는 제목으로 제가 발표를 하긴 했는데, 사실 그 방법에 대해선 하나도 이야기 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게 문제이기는 한데요, 저는 거기에 대해서 얘기할 마음이 애초에 없었어요. 가족은 어떻게 지속되는가, 무엇이 좋은 가족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어요. 어떤 가족이 과연 건강한 가족인가, 어떤 가족 이 지속될 수 있는 가족인가의 맥락에서 접근을 하지는 않았어요. 왜냐하면, 아까 말씀 드렸듯 이, 어떤 정해진 관계를 그대로 구현하는 방식으로 가족의 보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없다는 거죠. 물론 어떤 경우에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그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각각의 가족들과 그 가족들 내에서의 삶은 다른 삶들이기 때문에 결국 그 가족 내에서 그리고 스스로 혼자 만들어야 되는 방법인 것이지, 어떤 보편적인 해결책을 그대로 가족에 적용한다든가 그런 방법으로는 해결할 수 없지요. 그렇기 때문에 애초 에 초점을 맞췄던 것은, 지금 현재 일어나고 있는 병리적인 상황에 대한 진단과 그런 진단 속 에서 가령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최소한의 원칙이라고 해야 할까요, 윤리라고 해야 할까요, 그 런 부분에 대해서 말씀드린 것이죠. 조한혜정 : 인류학적으로 이야기를 다시 풀어볼게요. 한 40살 된 친구인데, 번역을 굉장히 잘 해서 내가 좋아했어요. 미국에 이민을 간다고 그래서 왜 가냐고 했더니, 형제가 다섯 명 중에 막내인데, 항상 부모님이 약간 자기를 문제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 집안이 유지가 된다고 하더군요. 자기가 집에 있으면 항상 문제가 되기 때문에 자기는 떠날 수밖에 없다고 이민을 간 친구가 있거든요. 오늘의 얘기는 아동중심의 사회에 초점이 많이 맞춰진 것 같아요. 즉, 조상도 없고 그냥 핵가 족만 있는 구조에서는 - 원래 핵가족이 프로테스탄티즘, 영국에서 시작됐다고 얘기하지요 - 부부가 연애를 해서 그로서 온전한 세상인 거예요. 사실 여러분들 상당 부분 20대들은 온전한 우주의 소유물로서 여러분이 나온 거예요. 한 질문자가 왜 애를 낳아야 하냐고 재미있는 표현 을 썼는데, 그때 부부의 아이는 미성년인 한에서는 완전히 부모 하에 있는 거지요. 아버지가 엄마와 역할이 다르다는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거든요. 언제나 한 사람이 어떤 역할을 안하면 다른 사람이 그 역할을 하지요. 그렇게 두 명이 우주를 만들고 있기 때문에. 애도 낳았을 때는 정말 모든 투자를 애한테 하잖아요. 그야말로 애를 왜 낳는지 모르는 거죠. 애는 하느님이 잠시 너한테 맡긴 거다. 넌 최선을 다해서 아이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데까 지 길러라 이런 개념은 핵가족에선 있을 수 없는 거예요. 이런 개념은 제사를 지낸다거나 어
떤 우주적인 질서를 가질 때 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걸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사실 왜 애 를 낳아야 하는지 모르고 안 낳는 거예요. 나도 왜 태어났는지 모르지만 온전히 살다 죽고 싶 을 때, 내가 일정하게 같이 살 사람을 만나고 했을 때, 우주의 일원으로서 생각을 할 때, 아이 도 집착하지 않고 키울 수 있지요. 세속화 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게 다 사라졌습니다. 사 회가 소멸되고 실종된 병리적 상황에 우리는 살고 있고, 그래서 가족이 지속가능하냐 라는 질 문을 우리가 하고 있어요. 애를 낳아야 하냐는 질문도 그 맥락에서 나온 거지요. 가족과 분리하는 작업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서 빌붙어서 살겠다고 했는데, 사실 그건 굉장히 주체적인 거에요. 얼마든지 빌붙어서 살 친구들인 거죠. 그래서 지금 잔머리를 굴리는 거잖아 요. 어떻게 보면 지금 핵가족에서 큰 사람들은 그냥 잔머리 굴리는 주체인 거죠. 그런데 그게 주체인가? 라는 깊이 있는 질문을 맹 선생님이 해 주신 거죠. 그 핵가족이 키운, 잔머리 굴리 는 주체. 결국에는 남은 게 가족밖에 없고, 사회도 없어져버렸어요. 노동이 삶의 일부일 때 우 리는 자유로운 노동자일 수 있는데, 노동이 전부일 때 나는 더 이상 노동자가 아니고 내 자신 이 휴먼 캐피탈인 거잖아요. 그런 맥락에서, 가족이 전부일 때 가족이 뭐냐 라는 질문을 던져 야 해요. 며칠 전에 신문에 난 것인데 일본에서 미혼의 80프로가 부모 집에 빌붙어있다고 합니다. 점점 더 동거를 안 하고요. 일단은 동거할 공간도 없지요. 한국도 비슷할 거예요. 연애도 안 하고, 빨리 결혼하려고 하고, 그냥 부모들이 결혼시켜줄 수 있는 사람들끼리만 결혼을 하고, 자기가 신데렐라가 되기를 원하고요. 한쪽에서는 감정적 분리의 이야기가 있고, 한쪽에서는 경제적인 분리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야기가 있지요. 더 이상 간섭이 싫다는 것은 윗 세대의 사치인거 죠. 그런 딜레마들을 가족 이야기할 때 해야 되는 부분인 것 같습니다. 엄기호 : 맹정현 선생님은 정신분석학적인 관점에서 주체라든가 가족에 대해 말씀하셨고요. 조 한혜정 선생님은 인류학적 맥락에서, 가족이란 것이 사회 안에서의 한 단위였을 때와 달리 지 금은 가족 밖의 것들이 다 허물어져버렸는데 이 안에서 뭔가를 얻고 챙기는 능력만 가지고 게 임 할 수 있는 상황에서 그게 주체라고 말할 수 있느냐,하는 말씀을 해주셨죠. 다른 질문들 있 으신가요? 질문자 1 : 토론하면서 나왔던 두 가지 질문들입니다. 먼저 정신분석학적 논의를 들을 때마다 불편해지는 지점들이 있는데, 젠더화된 역할들, 구체화된 가족 모델들을 상정하고 있기 때문에 불편해진다고 보는데요. 저희 조 토론했던 친구 중에 미혼모네트워크에서 일한 친구도 있는데 요, 가족 문제를 설정하고 정상적인 가족 구조를 배경으로 가져오는 상황이 굉장히 이중의 부 담을 만들거든요. 아이는 뭔가 결핍된 아이가 되는 거고, 그에 따르면 엄마는 두 가지의 분리 된 역할을 부여 받게 되는 것이죠. 실제로 정신분석학적 내용이 심리학으로 넘어가서 이럴땐 이러해야 한다 는 담론을 만들고 있는데, 그런 부분에서 선생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 요. 두 번째 질문은, 방금 조한이 말씀하신 것처럼, 가족 문제라는 것이 가족으로만 풀 수 없는 지점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권위가 가장 추락했을 때가 IMF때였지요. 예전에는 아 이 교육에 엄마가 개입하면 치맛바람으로 폄하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공교육도 없 고 사회의 다른 돌봄도 없는 상황에서 엄마의 역할이 오히려 장려되는 측면이 있잖아요. 이런
상황에서 가족 문제를 가족 안에서 논하는 효용이 무엇일까요? 이것이 두번째 질문입니다. 맹정현 : 좋은 얘기를 해주셨는데요. 현재의 가족은, 시대의 발전에 따라 19세기의 가족과는 다른 방식의 가족으로 변해온 것이지요. 한부모 가정이라든가 예전과는 다른 여러 가지 유형의 가족들을 가지고 있어요.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이 오로지 전통적인 방식의 가족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 을 하신 것 같아요. 실제로 그렇지는 않아요. 정신분석학의 출발은 어떤 개념이 아니에요. 어떤 형태의 가족 구조가 전제된 상태에서 가족에 대한 논의가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 반 대에요. 즉 가족이 직면한 문제로부터 출발해서 구조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조를 전제로 했을 때 어떤 병리적 현상이 있을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게 되죠. 지금 한부모 가족이나 아버지나 어머니가 여러 명인 가족 유형이 많거든요. 이런 가정에서 자 란 아이의 심리상태는 어떠한 것일까, 라는 것이 중심이지요. 실제로 이런 가족 속에서 자란 아이의 심리상태에 문제가 없다면, 그 가족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이죠. 가족의 가치관 측면에서 접근하는 게 아니에요. 아이가 가정 안에서 성장하면서, 실제로 어머니가 없다거나 아버지가 없다거나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기능 을 실현해야 하는 인물의 부재 속에서 심리적인 문 제가 발생되는 거거든요. 애초에 이러이러한 가족이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보편적인 가족의 형태를 전제하 고 도의적인 가족과 도의적이지 않은 가족으로 분류하지 않아요. 그런 분류를 상정하지 않아 요. 그러니까,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들이 이루어지는 지점과 달리, 오히려 훨씬 더 구체적인 부분들이에요. 한부모 가족에서 자란 아이들이 문제가 없는지 보고, 만약 있다면 그 문제들의 유형은 무엇이고, 어디로부터 발생된 것인지 알아갈 필요가 있겠죠. 이것은 어떤 가족이 좋은 가족이인가, 어떤 가족이 지속가능한 가족인가 하는 가치관적인 문 제가 아닙니다. 정신분석학에서 얘기하는 가족 개념은 결국 병리적인 조건에 대한 성찰 속에서 재구성된, 혹은 구성된 개념입니다. 먼저 상정되어있는 개념이 아니죠. 만약 한부모가정의 아이 가 다른 가정에서 자란 아이만큼 똑같이 성장할 수 있다면, 가정에 부모가 하나건 둘이건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그러나 아직까지 현실적으로 문제가 없지는 않거든요. 그렇다면 그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결국 그 아이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이고, 결핍된 기능이 무엇인지 를 물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에요. 정치적인 관점, 가치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정신분석학적 논의가 굉장히 보수적인 것으로 보 여질 수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습니다. 그 누구도 가족의 가치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아 요. 가령,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경우 자신과 다른 성의 부모를 사랑하고 같은 성의 부모를 증오하는 것으로 알려졌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어머니와 잠자리를 같이 한 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현실이 아니지요. 어떻게 가족들에게 성적인 감정을 가 질 수 있나? 그것은 혐오스러운 일이죠. 왜 혐오스러운 일일까요? 이것이 문제입니다. 왜 그것 을 감당할 수 없을까요? 왜 아버지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게 될까요? 이런 병리적인 현상들은, 그 문제의 핵심은 우리에게 보여진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안에 있는 감정에 있습니다. 그 래서 그 감정을 연구하는 것이죠. 그것이 왜 혐오스럽다고 느껴지는지 그런 질문을 나름대로 설명을 하기 위해서 탄생한 것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인 것이죠. 내게 금지된 것이 있으면 그 것에 대해 설명을 해야 되는 것이죠.
다음으로 주셨던 질문은, 가족을 가족으로서 접근하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 효용이 있는가라 는 것이었어요. 어떤 효용이 있냐하면, 가족을 사회라는 관점에서 접근했을 때,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도까지 효용이 있겠지요. 가족 문제라는 것이 꼭 가족 내에서만 해결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에요. 가족이라는 것도 사회에서 구성된 하나의 집단이죠. 사회와 제도 에 맞물려있는 지점이 있죠. 그런 부분은 당연히 제도적으로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제도만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있죠. 일차적으로는 자식과 어머니의 관계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죠. 가령 어머니 때문에 살고 싶지 않다 고 말하는 친구에게 제도와 가족구조를 변화시키 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물론 거시적인 측면에서는 아주 효과가 없지는 않겠지만, 굉장 히 오랜 시간이 걸리겠죠. 가족에 접근하는 방법은 많은 것 같아요. 각각의 방법에 따른 효과를 가지고 있겠죠. 제가 말 씀 드린 가족으로부터 살아남는 것 의 관점에서 말하자면, 즉, 욕망의 문제라고 한다면, 우리는 가족 내에서, 각자의 위치에서 나름대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을 찾는 것이 맞다고 생각해요. 그 것은 누군가 대신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죠. 가족을 가족으로서 접근하는 것 외의 방법 들이 모두 무효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적어도 심리적인 문제, 관계에서 발생한 문 제에 있어서는 관계 내적인 접근법이 필요하지 않을까라는 것이에요. 엄기호 : 아까 조한혜정 선생님이 핵 가족 이후에는 가족이 없다고 말씀하셨는지요. 제가 아는 페미니스트 중에는 '가족 이후에는 가족이 있지 뭐'라고 말하는 친구가 있어요. 그 때의 가족이 라고 하는 것은, 아마 우리가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다른 형태의 가족이 될 거라고 이야 기하거든요. 지금까지 내가 현존하고 있는 가족이라는 제도 안에서 나에게 배분되어있는 권리를 얼마나 잘 사용하면서 버틸것인지를 논의 했는데요, 지금의 이야기를 인권의 측면에서 이야기해보자면, 인권 차원에서 훨씬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은 연대 에 대한 권리에요. 어떻게 새로운 관계 를 지금의 관계 바깥에서 창출해 낼 것이냐, 하는 것이 중요한 이야기로 나오고 있어요. 지금까지는 권리 중심으로 풀어왔지요. 모두가 자기 권리를 주장하는데, 그 권리는 사회에서 고정된 할당량이기에, 새로운 시도와 관계를 만들지 않고 굉장히 이기적인 주체가 되어왔던 것 이죠. 그래서 저는 가족 이후엔 가족이 있다 는 말은, 이전의 가족관계로 돌아가자는 의미가 아니라, 내가 지금 속해 있는 가족 바깥에서 어떤 새로운 관계와 가족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혹은 얼마나 상상할 수 있는지, 그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질문하실 분 더 계신가요? 그럼 지금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이만하고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