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milar documents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내지-교회에관한교리

할렐루야10월호.ps, page Normalize ( 할 437호 )

152*220


회원번호 대표자 공동자 KR000****1 권 * 영 KR000****1 박 * 순 KR000****1 박 * 애 이 * 홍 KR000****2 김 * 근 하 * 희 KR000****2 박 * 순 KR000****3 최 * 정 KR000****4 박 * 희 조 * 제

銀 行 勞 動 硏 究 會 新 人 事 制 度 全 部

....pdf..

<3032BFF9C8A35FBABBB9AE5FC7A5C1F6C7D5C4A32E696E6464>

(중등용1)1~27


178È£pdf

5 291

나하나로 5호

* pb61۲õðÀÚÀ̳ʸ

ITFGc03ÖÁ¾š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병원이왜내지최종본1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 C8A3C3D6C1BE2E687770>


단양군지

<C3CAC1A DC1DFB1B92E687770>

2ÀåÀÛ¾÷

- 4 -

- 2 -

³»Áö_10-6

Çѹ̿ìÈ£-197È£

¹é¹üȸº¸ 24È£ Ãâ·Â

ÃѼŁ1-ÃÖÁ¾Ãâ·Â¿ë2


º´¹«Ã»Ã¥-»ç³ªÀÌ·Î

È޴ϵåA4±â¼Û

CR hwp

<BFA9BCBAC0C720C1F7BEF7B4C9B7C220B0B3B9DFB0FA20C3EBBEF7C1F6BFF820C1A4C3A5B0FAC1A62E687770>

2002report hwp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ÁÖº¸

해피메이커 표지.indd

º»ÀÛ¾÷-1

ÁÖº¸

복지백서내지001~016화보L265턁

Slide 1

141018_m

¾Æµ¿ÇÐ´ë º»¹®.hwp

소식지수정본-1

쌍백합23호3

전도정책자료집-1

08학술프로그램

82-대한신경학0201

10월추천dvd


Jkafm093.hwp

With_1.pdf

1111

토픽 31호( ).hwp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34BFF9C8A320B4DCB8E9B0EDC7D8BBF32E706466>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Y Z X Y Z X () () 1. 3

<B1DDC0B6B1E2B0FCB0FAC0CEC5CDB3DDB0B3C0CEC1A4BAB82E687770>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USC HIPAA AUTHORIZATION FOR

연구노트

2저널(11월호).ok :36 PM 페이지25 DK 이 높을 뿐 아니라, 아이들이 학업을 포기하고 물을 구하러 가를 획기적으로 절감할 수 있다. 본 사업은 한국남동발전 다닐 정도로 식수난이 심각한 만큼 이를 돕기 위해 나선 것 이 타당성 검토(Fea

통계내지-수정.indd

(연합뉴스) 마이더스

120~151역사지도서3

03 ¸ñÂ÷

(012~031)223교과(교)2-1

¾ç¼ºÄÀ-2

* 이논문은제 1 저자의진주교육대학교교육대학원초등특수교육전공석사학위논문임. ** 주저자 : 진주장재초등학교교사 *** 교신저자 : 진주교육대학교교수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11+12¿ùÈ£-ÃÖÁ¾


p529~802 Á¦5Àå-¼º¸í,Ç×ÀÇ



2저널(2월호)0327.ok :40 PM 페이지23 서 품질에 혼을 담아 최고의 명품발전소 건설에 최선을 다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또한 질의응답 시간에 여수화력 직 DK 한국동서발전 대한민국 동반성장의 새 길을 열다 원들이 효율개선, 정비편의성 향상,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CC hwp



#7단원 1(252~269)교

<5BB0EDB3ADB5B55D B3E2B4EBBAF12DB0ED312D312DC1DFB0A32DC0B6C7D5B0FAC7D02D28312E BAF2B9F0B0FA20BFF8C0DAC0C720C7FCBCBA2D D3135B9AEC7D72E687770>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1220½É¹Ì¾Èâ27È£º»¹®

학점배분구조표(표 1-20)

hwp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C3E6B3B2B1B3C0B C8A32DC5BEC0E7BFEB28C0DBB0D4292D332E706466>

0.筌≪럩??袁ⓓ?紐껋젾 筌

한류 목차2_수정 1211

CONTENTS CSCaritas Seoul Mission. Vision Caritas,,. 28 Yes, I Do 32 DO CAT 2017 SPRING <+>

2016남서울_수시모집요강_단면.pdf

¼øâÁö¿ª°úÇÐÀÚ¿ø

1

wtu05_ÃÖÁ¾

Transcription: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주제: 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양화진 선교사들의 삶과 사상 일시: 2015년 3월 28일 토요일 오전 9시-오후 1시 장소: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대강당 주최: 한국교회사학회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후원: 마포교회협의회, 양화진문제대책위원회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일정표> 주제: 내게 천개의 목숨이 있다면: 양화진 선교사들의 삶과 사상 일시: 2015년 3월 28일 토요일 오전 9시-오후 1시 장소: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대강당 시간 일정 비고 8:30-9:00 접수 및 친교 9:00-9:20 개회예배 설교: 정영택 목사(예장 통합 총회장) 9:20-9:30 기념촬영 9:30-10:20 주제발표 발표1: 15분/ 발표2: 15분/ 총평:10분/ 토론: 10분 좌장: 김용국/ 발표자: 임희국, 이상규 / 총평자: 박명수 10:20-10:30 휴식 10:30-11:40 논문발표 I 발표1:15분/ 발표2:15분/ 발표3:15분/ 총평:10분/ 토론:15분 좌장: 김문기/ 발표자: 이은선, 오지원, 이영식 / 총평자: 소요한 11:40-11:50 휴식 11:50-13:00 논문발표 II 발표1:15분 / 발표2:15분/ 발표3:15분/ 총평:10분/ 토론:15분 좌장: 강경림/ 발표자: 양현혜, 김준철, 이정구/ 총평자: 박용규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3

개회예배 (9:00-9:20) 사회: 김용국 박사(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회장, 침신대) 예배의 부름 사회자 찬송 208장 (내주의 나라와) 다같이 기도 김문기 박사(한국교회사학회 회장, 평택대) 성경봉독 사회자 설교 정영택 목사(예장 통합 총회장) 신진학자소개 사회자 찬송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다같이 축도 설교자 광고 배덕만(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총무, 건신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4

< 광 고 > 1. 이번 한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를 개최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니다. 또 이번 학회의 좌장, 발표자, 총평자 순서를 맡아주신 교수님들께 깊이 감사드리고, 또 이번 학회를 준비하 기 위해 뒤에서 여러 모로 도와주신 분들에게 깊이 감사드립니다. 특히, 행사를 위해 재정과 인원 면에서 큰 도움을 주신 마포교회협의회, 양화진문제대책위원회에 진심으 로 감사드립니다. 2. 대강당 입구에 다과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으니, 휴식시간을 이용해서 자유롭게 이 용해주시길 바랍니다. 또 모든 행사가 끝난 후에는 구내식당에 점심식사가 예약되어 있으니, 함께 식사하며 교제할 수 있길 바랍니다. 3. 학회일정은 정해진 일정표에 따라 진행됩니다. 논문 발표와 총평을 맡으신 분들은 오늘 행사가 일정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시간을 잘 엄수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은 짧 은 시간에 여러 논문들이 발표되어야 하는 관계로, 논문발표는 15분으로 제한했고, 각 섹션에서 발표된 논문들 전체에 대해 10분의 총평시간을 배당했습니다. 그리고 첫 섹 션은 10분, 나머지 2섹션은 각각 15분의 토론시간을 갖겠습니다. 4. 양학회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서 회원들께서 학회비를 납부해주시길 바랍니다. 회비납부에 대해선 각 학회 재무이사들께 확인해주시길 바랍니다. - 교회사학회: 박경수(010-4222-1955, parkg@pcts.ac.kr/ - 역사신학회: 조현진(010-6306-9362, 69john@hanmail.net)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5

< 주제발표 > 9:30-10:30 좌장: 김용국 박사 (침신대) 발표1: 임희국 박사(장신대): 양화진의 역사와 외국인 묘지 발표2: 이상규 박사(고신대): 근대선교운동과 내한선교사들 총평: 박명수(서울신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7

양화진( 楊 花 津 )의 역사와 외국인 묘지 1) 임희국 박사(장신대) 1. 조선시대의 양화진 2) 조선왕조의 초창기부터 구한말에 이르기까지 양화진 ( 楊 花 津 )은 외교, 국방, 무역, 종교 등 여러 방면으로 대외적 요충지였다. 양화진이란 명칭은 버드나무 꽃 을 뜻하는 양화( 楊 花 )에다 가 나루터 ( 渡 船 場 )를 뜻하는 진( 津 )을 합친 것으로서, 버드나무 꽃이 핀 나루터 란 뜻이다. 3) 서울을 가로지르는 한강변에 위치한 양화진 일대는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접대장소로서 15세 기 태종 때부터 17세기 인조 때까지 주로 명( 明 )나라 사신들을 대접하던 곳이었다. 이를 통하 여 조선은 대외(중국)관계를 안정적으로 발전시켰고 또 무역의 실리를 도모하였다. 또한, 일본 에서 온 사신들에게는 수전( 水 戰 )연습을 참관시켜서 조선의 국방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이것은 일본의 군사도발을 사전에 억제시키면서 교린우호( 交 隣 友 好 )관계를 적절히 유지시키려는 전략 이었다. 양화진은 본래 경치가 빼어난 곳으로, 외국의 사신들을 접대했을 뿐만이 아니라, 국내 의 고관 사대부들도 별장을 지어놓고 풍류를 즐기며 창화를 주고받던 명소( 名 所 )였다. 양화진은 교통과 상업 및 무역의 요충지였다. 이곳은 수도 서울에서 양천, 김포를 거쳐 강 화에 이르는 중요한 물길( 水 路 )이었고 또 거꾸로 서해안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관문이었다. 양 화진은, 인접한 서강( 西 江 ) 마포( 麻 浦 )와 함께, 각 지방(충청, 전라, 황해도)에서 서해안을 따라 올라오다가 계속해서 한강 하류를 거슬러서 수도 서울로 운반되는 세곡선( 稅 穀 船 )이 도착하는 조운( 漕 運 )의 종점이었다. 또 한강 유역의 각종 고깃배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관문 역할을 하는 양화진은 한강을 가로질러서 서울로 들어가는 나루터였다. 그래서 이 일대엔 항 상 교통, 상업과 무역이 번창하였고 이에 따라 여행하는 나그네와 장사치들이 모였다가 흩어 지곤 하던 번화한 포구( 浦 口 )였다. 이와 관련하여, 서울 도성을 드나드는 여행자들을 조사하고 도적을 단속하던 검문소( 檢 問 所 )가 이곳에 있었다. 양화진은 국방상 매우 중요한 전략 요충지였다.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침략하는 외세를 대비하여 방어진지가 구축되어 있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수군( 水 軍 )을 훈련시키던 군사훈련 장도 이곳에 있었다. 18-19세기 양화진 일대는 평상시에는 어영청 소속의 100여명의 양화진 아병( 牙 兵 ) 4) 들이 주둔해 있었고, 전시( 戰 時 )에는 이 외에도 다른 군문 소속의 군대가 함께 주 1) 이 글은 다음의 책에 실려 있습니다. 한국교회사학회/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편집, 내게 천 개의 목숨이 있다면. 양화진의 유산과 그 진실, (한국장로교출판사, 2014), 89-104. 2) 양화진 역사에 대하여는 역사학자 원재연 박사가 체계적으로 연구했기에, 그의 연구에 전적 으로 의존하고자 한다. 원재연, 서세동점과 조선왕조의 대응. 동서양의 상호이해와 문호개방 (서울: 한 들출판사, 2002), 70-167쪽. 3) 고려사 에는 양진 ( 楊 津 )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를 순 우리말로 풀이하면 버들나루 가 된다. 고려사 권 56, 志, 권 10, 地 理 1; 재인용, 원재연, 위의 책, 100-140쪽. 4) 아병은 주선후기에 설치된 군병의 하나로서 아는 본래 大 將 旗 를 뜻하는 것으로 그 직책은 대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9

둔했다. 1866년(고종 3년)에 병인양요( 丙 寅 洋 擾 )가 발발하자 이곳 양화진에는 -요즘의 수도권 방어사령부에 해당되는- 총융진( 摠 戎 陣 )이 설치되어, 한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와 서울로 쳐들 어 올 것으로 예상된 프랑스 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약 1,100명 정도의 군사들이 주둔해 있었 다. 이때 양화진의 잠두봉 일대에서 천주교 신자들에게 행해진 처형은 대부분 총융진 군사들 에 의해 집행되었다. 이 당시의 양화진은 순교 현장이었다.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 일대를 침입해 온 것을 빌미 로 정치실권자 대원군은 천주교 신자들에게 엄청난 보복을 자행했다. 통외분자( 通 外 分 子 )로 지 목된 천주교 신자들을 공개적으로 처형하였다. 병인년(1866) 음력 9월 중순부터 잠두봉(일명 절두산) 아래의 양화진에서 대대적인 천주교도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박해는 프랑스 함대의 내침에 대한 대원군의 응징양식이었고, 외세의 침략에 대한 일종의 국민적 경각심을 일깨워 주려한 책략이었다. 동시에 이 박해는 그의 집권을 불안하게 하는 여태까지의 요인들을 한꺼 번에 불식시키려는 정치적 술수였다. 역사적으로,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장소가 일순간 살육 과 순교의 현장으로 바뀌었다. 2. 조선의 개항(1876년)과 첫 선교사들의 조선 입국 천주교도 박해에서 신자들 약 8,000명이 처형당했다(병인사옥( 丙 寅 邪 獄 )). 그런데, 이 무렵 에 중국의 수도 북경이 영국과 프랑스연합군의 공격으로 함락되었고 황제가 열하( 熱 河 )로 피 난했다는 소식이 날아왔다. 이 소식에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은 심각한 충격을 받았다. 이들은 정부의 쇄국정책이 이제 한계점에 이르렀다고 확신했다. 지식인들 가운데서 박규수( 朴 珪 壽 ) 오 경석( 吳 慶 錫 ) 유홍기( 劉 鴻 基 ) 등 개화사상가들이 문호개방을 주장하였다. 5) 1876년에 조선정부는 쇄국정책을 풀고 문호를 개방하기로 결정지었다. 그러고 나서 일본 과 수호조약을 맺었다. 박규수를 비롯한 개화사상가들의 역할이 컸었다. 그러나 위정척사론자 들은( 崔 益 鉉 등) 개항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들은 왜양일체론( 倭 洋 一 體 論 )의 논리로 정 부가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는데 반대하였다. 그러나, 이미 대세는 문호개방 쪽으로 기울어지 고 있었으므로 이제는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는 방법론만을 얘기해야 했다. 6) 이와 관련해서 중 국은 당시에 양무운동( 洋 務 運 動 )의 과정에 있었고 일본 또한 변혁운동( 明 治 維 新 )의 열기로 가 득하였다. 조선은 -한 걸음 앞서 근대화로 나아간 중국처럼- 서양문물을 총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유교국가의 약점을 보완하고자 했다. 이것은 서양의 동 점( 東 漸 )이래 실용주의적 관점에서 서양의 자연과학 군사 기술의 우수성과 유용성을 인정하고 장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중앙의 오영( 五 營 )과 각도의 감영( 監 營 ), 병영( 兵 營 ) 등에도 아병이 있었으며, 이들을 유지하기 위하여 아보( 牙 保 ) 또는 아병보( 牙 兵 保 )라는 군보( 軍 保 )를 포미( 布 米 )로 거두어 들였다. 김진태, 아병 ( 牙 兵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14권 (1991); 재인용, 원재연, 위의 책 116쪽에서 각 주 117번 5) 박규수는 북학파 박지원의 손자로서 중국을 두 차례 방문하는 동안에 서양문물의 우수성을 파악하였다. 오경석은 실학파 김정희( 金 正 喜 )의 제자로서 여러 차례 중국을 다녀온 역관이었다. 유홍기는 의업에 종사하였다. 6) 16세기에 서양문물이 한국에 소개되었다. 1631년에 정두원이 중국에서 천리경, 서포, 자명종 등 을 가져와 세상의 이목을 끌었다. 1645년에는 소현세자가 중국에서 지구의와 함께 서양서적(천주교서적, 천문학, 산 학 등)을 가지고 들어왔다. 이렇게 들어온 천주교는 서학( 西 學 ) 으로 소개되면서 17-18세기에 순조롭게 확산되었다. 18세기 후반에는 천주교에 대한 관심이 지적인 호기심을 넘어 신앙의 차원으로 심화되었다. 1784년에 유력한 양반 출신 이승훈이 중국 연경의 남천주당에서 그라몽 신부에게 영세를 받았다. 그런데,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정부 는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서양문물의 수용도 일단 정지되었다. 그러다가 19세기 후반 1876년에 에 개항과 함께 서양문물이 다시 도입되면서 소위 근대화가 시작되었다.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10

이를 수용하는 방법으로서 동도서기론( 東 道 西 器 論 )이라 불렀다. 이는 중국의 중체서용론( 中 體 西 用 論 이)나 일본의 화혼양재론( 和 魂 洋 才 論 )과 같은 맥락이었다. 조선정부의 개방정책은 서양문물을 받아들이되 서양종교(기독교)는 수용하지 않기로 했다. 이 상황에서 급진개화파는 서양선교사들을 통해 서양문물을 받아들이자는 구상을 하게 되었 다. 그 구상은 일본에서 일하는 중국(청)공사 황준헌( 黃 遵 憲 )이 지은 조선책략( 朝 鮮 策 略 ) 을 통해 착안되었다고 본다. 이 책을 1880년에 일본으로 수신사의 임무를 띠고 나갔던 김홍집( 金 弘 集 )이 가져와서 소개했는데, 그 책에는 서양의 제도와 기술을 받아들여서 부국강병을 이루 고 친중국 결일본 연미국( 親 中 國 結 日 本 聯 米 國 )하여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 담 겨 있었다. 그러면서 개신교(야소교 耶 蘇 敎 )와 천주교를 분리하여 개신교의 신앙은 무해유익( 無 害 有 益 )하다고 덧붙였다. 7) 사실상, 오랜 세월 조선의 지배층은 천주교와 개신교를 동일시 해 왔는데, 이 책은 그러한 관점을 바꾸도록 유도했다. 게다가 중국의 이홍장( 李 鴻 章 )이 조선정부 에게 미국과 통상관계를 맺도록 권유했다. 그의 권면에 따라 조선정부는 종전의 입장을 바꾸 어서 1882년에 개신교의 나라인 미국과 통상조약(조미조약( 朝 美 條 約 ))을 맺었다. 이 무렵에 급진개화파에 속한 김옥균이 일본에 있었다. 그가 미국 개신교 선교사들과 접촉 하면서 이들에게 조선 선교를 요청했다. 이것은 조선의 개화를 보다 더 효과적으로 추진하려 는 발상에서 비롯되었다. 이에 응하여, 1883년에 재일( 在 日 ) 미국 선교사 녹스(G.W. Knox)가 본국의 선교본부에다 조선 선교의 중요성을 알렸다. 8) 그러나 긍정적인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 다. 그런데, 이즈음에 미국에서 조선 선교의 중요성을 일깨운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정부가 미 국에 파송한 방문사절단을 통해서였다. 방문단 일행이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워싱턴으로 가는 도중에 대학총장이자 감리교회 목사 가우처(John F. Goucher)를 만났다. 이 우연한 만남이 가우처로 하여금 조선 선교의 중요성과 시급함을 일깨웠다. 그는 일본에서 일하고 있는 선교 사 맥클레이(Robert S. Maclay)가 김옥균과 가깝게 지낸다는 점을 파악하고 그를 통해 한국 의 왕실과 접촉하도록 하였다. 맥클레이는 1884년 6월에 한국을 방문했고, 고종으로부터 학교 사업과 병원사업의 윤허를 얻었다. 이를 바탕으로, 1885년에 미국의 개신교가 첫 선교사 6명을 조선에 파송했다. 아펜젤러 (Henry G. Appenzeller)부부, 스크랜튼(William Bention Scranton)부부 및 스크랜튼 모부인 (M.S. Scranton), 그리고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였다. 이들은 1885년 4월 5일(부 활절)에 조선의 제물포(인천)에 도착했다. 조선정부가 허락한 선교활동의 범위는 교육과 의료 부문으로 한정되었고, 공개적인 포교는 금지되었다. 9) 3. 양화진이 외국인묘지 로 선정된 과정 10) 1882년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조선은 서양 여러 나라들과(독일(1883), 영국(1884), 이탈 7) 박효생, 한국의 개화와 기독교, 이만열 외 7인,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서울: 종로서적, 1986), 78쪽. 8)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서울: 연세대 출판부, 1973), 75쪽. 9) 한국 근현대사 연구회 엮음, 한국 근대사강의 (서울: 한울, 1997), 86쪽. 10) 양화진외국인묘지의 호칭이 세월 속에서 다양하게 변경되었다. 1883년 통상조약을 맺을 당 시엔 외국영장지구( 外 國 營 葬 之 區 ) 라 했고, 1890년 7월 정부가 매입할 때엔 헤론매장처소( 惠 論 埋 葬 處 所 ) 라고 했다. 1900년을 전후한 정부 문서에는 외국인총지( 外 國 人 塚 地 ) 라 했고, 1913년 일제는 구미 인묘지( 歐 米 人 墓 地 ) 라 표기했고, 1930년을 전후하여 외국인묘지(Foreigners Cemetry) 라 표기했다. 1965년 서울시와 건설부는 외국인묘지공원 으로 지정고시하였다. 그 후, 양화진은 외국인묘지(공원)로 건설부 고시 제 173호와 서울시 고시 제 725호로 고시하여 외국인묘지 로 공식 호칭되었다.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11

리아(1884), 러시아(1885), 프랑스(1887)) 잇따라 통상조약을 맺었다. 통상조약 가운데는 외국 인이 조선에서 사망할 경우를 대비하여 협약을 맺은 항목이 있었다. 즉, 외교협정을 맺은 서 양 국가의 외국인이 조선에서 사망할 경우 조선 정부는 묘지용 땅을 무료 임대하기로 약정한 조약이었다. 11) 이 조약에 따라, 1890년 4월 22일 프랑스 공사(Plancy, 葛 林 德 )가 새남터(용산구 한강변 沙 南 垈 )를 외국인 묘지로 지정해 주도록 요청했다. 12) 석 달 뒤, 7월 24일에 미국 공사(A. Heard, 何 德 )가 서울 남대문 밖 남산 기슭(지금의 힐턴 호텔 근처로 추정)에 외국인 묘지를 설정해 주도록 요청했다. 13) 아마도 이때는 무거운 질병에 걸린 선교사 헤론(Heron, 惠 論 )이 곧 사망할 것으로 예견하면서 요청한 것으로 본다. 사흘 뒤, 7월 26일 헤론이 별세했다. 미국 공사가 또 다시 외교 경로를 통해 정식 공문으로 묘지를 지정해 주도록 조선 정부에다 요청했 다. 이에, 정부( 外 衙 門, 현재의 외교통상부)는 사유지( 私 有 地 )인 양화진 땅을 매입하였는데, 7 월 29일 정부는 그 땅을 양은( 洋 銀 ) 40원에 매입하였다. 14) 그리고 정부는 외교협정을 맺은 각 각의 나라에게 무료 임대하여 외국인묘지로 사용하게 했다. 15) 선교사 언더우드의 편지글(미국 해외선교부에 보낸 선교보고서)에 따르면, 16) 선교사역에 몰 입하여 헌신하던 의료선교사 헤론은 오뉴월의 뜨거운 날씨 속에서 너무 지나치게 과로한 나머 지, 1890년 7월 초순 장마철에 이질로 쓰러졌다. 약 3주간 정도 병상에 누워 있었는데, 끝내 간염과 다른 종기들이 열병을 일으키면서 7월 26일 마치 잠자는 듯 조용히 사망했다. 마지막 까지 병상을 지키며 간호한 자는 선교사 언더우드와 게일이었다. 헤론이 사망했을 때 그의 시 신을 묻을 장지( 葬 地 )를 얻는 일이 결코 수월하게 진행되지 못했다. 동료 선교사들은 조미조약 에 명시된 조약상의 권리 에 따라 서울 근교에 묘지를 달라고 요청했는데, 몇 번 연기되었 고 또 여러 가지 난처한 일이 있은 다음, 여기(서울 중심부)에서 약 4마일 정도 떨어져 있 는 한강 기슭 언덕 양화진으로 지정되었고, 헤론을 거기에다 장사지냈다. 17) 선교부의 입장으 로서는 장지( 葬 地 ) 선정이 통상조약에 따른 조선 정부의 의무이행이었고, 조선 정부로서는 그 11) 좀 더 자세하게 예를 들면, 조선이 영국과 맺은 통상조약(1884.3.8) 제 4조 5항이 다음과 같다. The Corean Authorities will set apart, free of cost, at each of places open to trade, a suitable piece of ground as a foreign cemetery, upon which no rent, land tax, or other charges shall be payable, and the management of which shall be left to the Municipal Council above mentioned."(조선 당국은 통상을 맺은 각 지역에서, 무상으로, 적당한 크기의 땅을 외 국인 묘지로 설정하되 그 묘지에는 임대료, 토지세, 기타수수료를 지불하지 않는다. 묘지의 관리는 신동 공사에 위임한다.) 신호철 편저, 양화진외국인묘지. 토지소유권의 역사적 진실 (양화진선교회, 2008), 30-31쪽. 신호철이 당시 통상조약의 여러 원문들을 이 책에다 수록했다. 당시의 조선은 외교협정을 맺 는 서양 여러 나라들과 같은 내용의 통상조약으로 조인했다. 12) 위의 책, 41쪽. 13) 위의 책, 42쪽. 14) 그 당시 정부의 외교문서인 < 統 椽 日 記 (통연일기)>(1890.7.29)에 그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 록되었다. 傳 令 北 部 蛤 井 里 契 洞 所 任 金 性 玉 處, 美 人 惠 論 埋 葬 處 所 塋 地, 春 0 田 二 日, 耕 本 衙 門 買 得, 發 給 洞 民 等 - 中 略 - 會 算 發 給, 租 價 0 項 中, 將 洋 銀 四 十 圓 立 卽 회 撥, 上 送 本 衙 門 以 便 變 價 淸 算, 該 地 岌 嶪 主 宜 當 者 이 < 統 椽 日 記 >를 서울대학교 규장각이 소장하고 있으며, 글쓴이는 이 기록을 신호철의 책(47-50쪽) 에서 발췌했다. 15) 위의 책, 47쪽. 16) 이만열 옥성득 편역, 언더우드 자료집 I, 연세국학총서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221쪽. 17) 언더우드가 쓴 편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 We forces the Koreans to give us what ist in our treaty rights, a cemetery near Seoul, and after delay, and annoyance in various ways, they set apart a pretty hill, overlooking the river, about 4 miles from here, and there Dr. Heron war buried. (위의 책, 599쪽.)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12

장소를 쉽게 물색해 내지 못했다. 훗날 이 과정을 회고한 언더우드의 부인 릴리아스(Lillias H. Underwood)에 따르면, 18) 장지를 제공해야만 하는 조선 정부가 적절한 장소를 물색하느라 애를 쓰는 가운데서 시간이 자꾸 흘러갔고 그러자 헤론의 시신을 선교회 구내에다 매장하자는 제의가 들어 왔다. 그러나 사대문( 四 大 門 ) 안에다 시신을 매장하는 일은 도무지 있을 수 없다 는 강한 미신에 사로잡힌 한국인 조사들이 이 제안을 완강하게 반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론의 시신을 이곳에다 매장할 경우, 성이 난 동네 사람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으로 예견 되었다. 때문에 헤론의 장지를 어디로 정할 수 있겠는지 선교부의 근심이 깊어갔다. 이러한 근심을 파악한 조선 정부가 미국 공사 및 선교사 알렌(Allen)과 2-3일 심사숙고한 끝에 양화 진으로 정해 주었다. 이리하여, 조선시대 초창기 이래로 구한말까지 외교, 국방, 무역, 종교 등 여러 방면에 걸친 대외적 요충지였던 양화진이 외국인묘지가 되었다. 그 이후에, 많은 외국인들이 외국인묘지에 묻히면서 묘지의 장소가 협소하게 되었다. 더욱 이, 주한 외국인의 수가 증가하면서 외국인 묘지를 확장할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19) 1904년 11월 9일 미국 공사(Horace N. Allen)가 묘지위원회의 위원장 자격으로 서양 각국을 대표하 여 기존 외국인 묘지의 서남쪽 국유지 땅을 확장하여 부지로 사용하게 해 달라고 한국 정부에 다 요청하였다. 정부가 이 요청을 승인하는 내용의 답신을 1905년 1월 18일에 보냈고, 미국 공사는 며칠 뒤(24일)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20) 지금까지 양화진에 묻힌 외국인은 선교사 이외에 외교관, 사업가, 정치가, 군인, 언론인, 교사, 음악가, 기술자 등 다양하다. 신호철의 조사에 따르면, 2005년 현재 555기의 외국인 묘 가 있으며 이들의 국적별로는 미국(279), 영국(31), 캐나다(19), 러시아(18), 프랑스(7), 필리핀 (5), 독일(4), 스웨덴(4), 이탈리아(2), 덴마크(2), 일본(2), 남아공화국(1), 호주(1), 폴란드(1), 뉴 질랜드(1) 등이다. 이 가운데서 선교사와 그 가족의 묘는 167기이다. 21) 4.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는 선교사들 이제,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는 선교사들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여기에 관하여, 지난날 세브란스병원 의료선교사였던 에비슨(Oliver R. Avison)이 이들을 기념하는 추모사 ("Memorial Day Address", 1929년 6월)를 발표하였기에 이것을 살펴보는 것으로 회고에 대 신하고자 한다. 22) 캐나다 출신인 그는 1893년 7월 한국에 도착한 다음 제중원( 濟 衆 院 ) 의사로 사역을 시작했고 그로부터 약 42년 동안 1935년까지 의료봉사로 복음을 전하다가 귀국하였 다. 23) 그는 1860년 영국 요크셔 지방 방직공장 노동자의 자녀로 태어났고 6살이 되던 1866년 18) Lillias H. Underwood, Underwood of Korea, (New York etc.: Fleming H. Revell Company, 1918), 101쪽. 19) 주한 미국인은 1907년 297명에서 1909년에 464명으로 증가했고, 주한 영국인은 같은 시기 에 87명에서 153명으로 증가했으며, 프랑스 인은 52명에서 87명으로 증가했다. 20) 여기에 관하여 1931년에 홉스(Thomas Hobbs)가 보고서로 작성했다. Thomas Hobbs, "The Seoul Foreign Cemetery," Korea Mission Field, November 1931, 237쪽. 21) 신호철 편저, 양화진외국인묘지. 토지소유권의 역사적 진실 (양화진선교회, 2008), 5쪽. 22) 이 추모사를 신호철이 펴낸 위의 책 217-219쪽에서 가져왔다. 그런데, 이 추모사의 날짜를 다른 역사자료를 통해 확인하고자 했으나 밝혀내지 못했다. 미처 밝히지 못한 점은 연구과제로 남겨두고 자 한다. 23) 에비슨의 생애와 사역에 관한 참고의 글. Young Sik Yoo, Earlier Canadian Missionaries in Korea. A Study in History 1888-1895, (Westward Graphics, 1987), 63-74쪽.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13

부모 따라 캐나다 온타리오(Ontario)로 왔다. 1884년 토론토에 있는 온타리오 약학대학을 졸 업했고, 1887년에 토론토대학 의과대학을 졸업했다. 그 당시 토론토대학은 해외선교의 열정이 대단했다고 한다. 에비슨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환자를 지극한 정성으로 돌보는 의사로서 복음을 전파했다. 그는 또한 세브란스병원의 발전과 한국의 의학교육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했 다. 추모사에서, 에비슨은 맨 먼저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는 인물들의 다양성 을 언급했다. 다양한 국적, 다양한 직업과 다양한 신분, 그리고 다양한 교파를 언급했다. 여기에 묻혀 있는 인물들의 출신국가는 유럽과 북미,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전 세계 여러 대륙을 망라하고 있다 는 것이다. 직업별로 살펴보면 선교사를 비롯하여서 외교관, 사업가, 군인, 정치가, 언론인, 교 사, 기술자 등 다양하다. 또한 출신 교파와 교회를 살펴보아도 장로교와 감리교를 비롯하여서 희랍 정교회, 성공회, 침례교, 구세군, 성결교, 로마 가톨릭 등 다양하다. 그래서 에비슨은 양 화진외국인묘지에 cosmopolitan(범세계적) 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각 각 다양한 출신에다가 다양한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 여기에 모두가 평화롭게 한 사람 한 사 람 나란히 누워 있다. (Here all lie side by side in peace)는 점에 주목했다. 다양성 때문에 발생하는 서로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것으로 말미암아 차별대우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 로의 다양한 모습을 받아들이며 조화를 이루는 평화를 강조했다. 다양성 속에서의 평화야말로 양화진묘지에서 잠들어 있는 자들이 후대( 後 代 )에게 던져주는 교훈일 것이다. 다양성 안에서 조화와 평화를 찾는 에비슨의 언급은 자신의 의료선교사역을 되돌아본 것이 라 볼 수 있다. 그는 세브란스 병원의 운영과 의학교육을 내한( 來 韓 ) 선교부들이 함께 연대해 서 연합체제로 이끌어가고자 노력하고 애썼다. 24) 이것은 그의 초창기 사역을 통해 얻은 경험 의 산물이었다. 예를 들어 1895년 조선에 콜레라가 창궐했을 때, 그는 정부가 조직한 방역국 의 위원장으로서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과 함께 협력하여서 7주간 동안 전국을 돌며 방역활동 을 하였다. 이를 통하여 콜레라의 확산을 막았고 또 감염 환자의 65%가 완쾌되는 쾌거를 이 루어 냈다. 이러한 협력과 연합의 결실이 계속해서 그의 의료선교사역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 다. 연합과 협력의 정신, 곧 다양한 교회와 교파들이 연대하고 연합하는 의료봉사를 통하여 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만을 증언하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그가 계속 추진해 왔다. 그 다음, 에비슨은 다양성 속에 있는 일치점을 발견했다. 오대양 육대주출신의 다양한 사 람들이 이 땅에 와서 각기 다양한 활동을 하였으되 모두가 오직 한 가지 목적아래 일했다는 것이다. 에비슨의 표현으로는, 모든 사람이 이곳(조선)에 와서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 기 자신을 내어 주었습니다. (They came here to give themselves for the welfare of others). 더욱이, 행함과 실천으로 그것을 증언 (testimony)했다고 강조했다. 그러한 증언의 실례를 들고자 에비슨은 양화진에 묻혀 있는 인물들을 언급했다. 가장 먼저, 앞에서 살펴본, 의료선교사 헤론(James W. Heron)을 거론했다. 고종의 시의로도 일한 그는 34세의 젊은 나 이에 과로에 시달리다가 질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별세했다. 계속해서, 평양에 들어오는 중국 (청) 군인들이 옮겨온 발진티푸스 전염병 환자들을 치료하는 동안에 불행하게도 그 병에 걸려 서 세상을 떠난 의료선교사 제임스 홀(James Hall), 그의 사역을 계승한 부인 로제타 홀 (Rosetta Hall)과 아들 셔우드 홀을 거론했다. 이화학당의 창립자이자 한국 여성을 위해 헌신 한 스크랜톤의 모친(M.F. Scranton)을 언급했고, 우편과 전신 제도를 조선에 개설하고자 온 뮤랜스뎃(H. H. Muhlensteth), 조선 정부의 법률고문으로서 복잡한 국제관계에 관하여 자문 한 그렛하우스(Clarence R. Greathouse) 장군, 성경번역을 위해 목포로 가던 중 배가 난파되 24) 참고. 양현혜, 세브란스 의료선교의 역사, 韓 國 敎 會 史 學 會 誌 제24집 (2009), 49-89쪽.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14

어 사망한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25) 서울근처 남부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 하다가 이질에 걸려 세상을 떠난 기포드(D.L. Gifford) 목사, 선교사역을 시작하던 중 발진티 푸스에 결려 사망한 맥켄지(Annie McKenzie)양, 육영공원에서 오랜 세월 영어를 가르친 할리 팩스(T. E. Halifax), 조선 정부에서 고종의 고문관으로 일한 레겐데(LeGendre), 일제의 야만 성과 조선침략을 맹렬히 비난하고 한국인의 의기를 돋우는데 모든 힘을 다 기울인 언론인 베 델(Ernest T. Bethel), 세브란스 병원의 사감으로 사역했던 캠벨(J.E. Campbell) 등을 거론했 다. 이런 식으로, 다양한 사역자들이 오직 한 가지 목적 아래 이 땅에서 다양하게 일하다가 양화진에 묻힌 허다한 증인들을 에비슨이 설명했다. 이와 더불어서 이들의 묘비에 새겨진 비문을 살펴보면, 그들의 생애와 사역이 어떠했는지 짐작하며 감동을 느낄 수 있다. 자주, 교인들과 함께 이곳을 순례하는 박귀용 목사(안양교회) 는 여기를 외국인묘지라고 부르기 보다는 사랑의 동산 이라 부르자고 제안했다. 26) 이제 몇몇 비문을 소개하고자 한다.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 (헐버트) (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 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 If I had a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 (루비 레이첼 켄드릭) (만일 나에게 (다른 이를 위해) 내어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그것 모두를 한국에 주 리라) The son of God loved me and gave himself for me. (헤론)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나를 위해 주셨다) My fight for Korea is heaven ordained. (베델) (한국을 위한 나의 투쟁은 하늘이 명하신 것이다) 5. 나오면서 이 글에서, 맨 먼저 우리는 우리나라의 역사 속에서 일어난 양화진의 변천내력을 살펴보았 다.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있는 양화진은, 한강처럼 흘러가는 역사 속에서 그 역사의 풍상을 함께 겪어 왔고, 오늘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런데, 양화진의 형태는 옛날의 그 모습이 아니다. 세월 따라 많이 달라지고 바뀌었다. 지금 우리의 시각은 그곳의 외국인묘지에 관심이 맞추어져 있는데, 그것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해준 선교사와 그 가족들이 그곳에 잠 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양화진에 잠들어 있는 선교사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려 는 사명을 안고 우리나라에 왔고 복음의 열정으로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물론 그들은 하늘에 서 온 천사가 아니었기에 인간적인 약점과 허점을 드러낼 때가 종종 있었다. 그렇지만 그들의 25) 그의 무덤은 사실 빈 무덤이다. 그가 군사 앞바다에서 익사했기에 시신을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26) 박귀용, 믿음으로 떠나는 여행 (안양: 도서출판 누가의 길, 2004), 20쪽; 참고: 신호철, (이땅에 떨어진 밀알들) 양화진 선교사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서노회, 2003)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15

약점과 허점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고, 때때로 이를 통하여 오히려 예수 그리스 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강하게 드러났다. 이제 그들은 떠나갔으며 그들이 남긴 자취가 하나님의 사랑을 증언해 주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복 음의 빚을 남겨 주었고, 우리 또한 그 복음의 빚을 안고 있다. 우리는 그 빚을 갚고자 온 세 상에 복음 전하러 나가야 할 것이다, 세계 선교를 위하여.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롬 1: 14)......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롬 13:8) *참고문헌 박귀용. 믿음으로 떠나는 여행. 안양: 도서출판 누가의 길, 2004. 백낙준. 한국개신교사. 서울: 연세대 출판부, 1973. 신호철. (이땅에 떨어진 밀알들) 양화진 선교사. 서울: 대한예수교장로회 서울서노회, 2003. 신호철 편저. 양화진외국인묘지. 토지소유권의 역사적 진실. 양화진선교회, 2008. 원재연. 서세동점과 조선왕조의 대응. 동서양의 상호이해와 문호개방. 서울: 한들출판사, 2002. 이만열 옥성득 편역. 언더우드 자료집 I 연세국학총서.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2005. 한국 근현대사 연구회 엮음. 한국 근대사강의. 서울: 한울, 1997. Yoo, Young Sik. Earlier Canadian Missionaries in Korea. A Study in History 1888-1895. Westward Graphics, 1987. Underwood, Lillias H. Underwood of Korea. New York etc.: Fleming H. Revell Company, 1918. 박효생. 한국의 개화와 기독교. 이만열 외 7인, 한국 기독교와 민족운동. 서울: 종로서적, 1986: 75-105. 양현혜. 세브란스 의료선교의 역사. 韓 國 敎 會 史 學 會 誌 제24집 (2009): 49-89. Hobbs, Thomas. "The Seoul Foreign Cemetery," Korea Mission Field, (November 1931)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16

근대선교운동과 내한 선교사들 이상규 박사(고신대) 시작하면서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연원이나 선교사들의 내한은 근대선교운동 열매라고 할 수 있다. 한 국에서의 기독교의 탄생(advent of Christianity)은 자생적 창립이나 서구교회와의 절연에서 이루어진 비상( 飛 翔 )이 아니라 접경과 연경을 넘는 선교운동의 연속에서 이루어진 결실이다. 말하자면 한국에서의 기독교의 기원은 근대선교 운동의 결실인 샘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에서 의 기독교, 선교, 혹은 선교사의 내한은 선교운동의 국제사적 1) 연쇄, 곧 각종 선교운동을 종 횡으로 연결하는 상호관련 및 선교사상의 연쇄(idea-chains)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선교사의 내한을 근대선교운동의 전개라는 국제사적 시각에서 연원적으로 추 적하되 선교단체들 간의 상호연쇄에 주목하여 한국선교의 시원에 대해 논구하고자 한다. 먼저 윌리엄 케리(William Carey, 1761-1834)로 시작되는 근대선교운동의 전개과정, 특히 라토렛 (K. S. Latourette)이 선교의 위대한 세기 (The great century of missions)라고 불렀던 2) 19세기 이후 전개된 선교운동 과정에서 이루어진 한국선교를 언급한 후 내한 선교사들의 성 격 혹은 특징에 대해 논구함으로써 한국에서의 선교사들에 함의된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프랑스혁명(1789 이후를 현대 라고 할 수 있고, 이 글의 주의는 1790년대 이 후이므로 'modern'을 근대 혹은 현대 로 번역할 수 있으나, 선교사의 경우 그 이전시기와 의 이념 연쇄에 유의하여 이 글에서는 근대와 현대를 상호교차적으로 혼용하였다. 1. 근대선교운동의 전개 1) 윌리엄 케리의 선교활동 윌리엄 케리 이전에도 선교운동이 전개된 바 있으나 3) 일반적으로 윌리엄 케리 이후 전개 1) 교통, 정보와 통신이 원활해진 근대사회에서 특정 지역이나 국가에서의 이념이나 사상, 종교운동은 독 립적 변인에 의해 형성되기보다는 국제사회의 변화에 상당한 영향을 받게 됨으로 국제사적 접근을 시 도해야한다는 점은 Patrick Finney (International History, 2005), James Mahoney, Dietrich Rueschemeyer (Comparative Historical Analysis in the Social Sciences, 2003) 등에 이해 주 창되어 왔다. 국제적인 영향력에 의해 일국사가 크게 요동쳤던 한반도에서의 경우 국제사적 접근은 더욱 타당성을 지닌다. 2) 19세기 선교운동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했던 라토렛은 7권으로 구성된 History of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Zondervan, 1970) 중 특히 제4-7권은 19세기 위대한 선교의 세기를 다루는데 활애했 다. 선교의 위대한 세기 라고 말할 때 일반적으로 1792년부터 1914년 제1차 대전이 발발하기 이전 가지를 칭한다. 3) 예컨대, 오스트리아의 남작 폰 벨츠(Baron von Welz, 1621-1668)는 예수사랑회 (Society of the Love of Jesus)를 제안하면서 이교도들에게 전도자 파송을 요구한 바 있고, 자신이 수리남에서 선교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17

된 선교운동을 현대선교운동이라고 부르고, 케리를 현대선교의 아버지 로 칭하고 있다. 그 이 전에도 영국에서 선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킨 인물이 없지 않았다. 대표적인 인물이 유명한 찬송가 작가인 아이작 왓츠(Isaac Watts, 1674-1748)였다. 1719년 햇빛을 받는 곳마다 주 예수 왕이 되시고 (Jesus shall reign where'er the Sun)라는 선교 찬송을 썼던 그는 평생 동안 약 600여편의 찬송가를 작시하여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라 고 불렸는데, 그는 케리 보다 앞서 교회의 선교적 사명을 주창한 바 있다. 그의 선교 찬송은 세계 각국으로 전파되어 하나 님의 주권과 왕권을 선포하는 찬송으로 애창되었고, 1949년부터 한국 찬송가에도 소개되었 다. 4) 또 한 사람의 선구적 인물이 로버트 밀러(Robert Millar of Paisley)였는데, 그는 1723 년 기독교의 복음전파와 이교도 정복사 (A History of the Propagation of Christianity and the Overthrow of Paganism)를 출판하여 이교도를 회심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방법은 중보기도라고 주장하고 중보기도를 호소한 바 있다. 이처럼 윌리엄 케리 이전에도 선교를 강 조한 이들이 없지 않았으나, 케리 이후 선교사업이 본격화되었는데, 이 선교운동을 주도한 나 라가 영국이었다. 5) 영국의회(장기국회)에 의해 1649년 조직된, 뉴잉글랜드복음전파협 회 (Corporation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New England)는 최초의 개신교 선교단체였다. 이 조직을 통해 북미대륙 원주민들을 위해 파송된 존 엘리어트(John Eliot, 1604-1690)의 활동, 영국 쉘돈(Sheldon)의 교구목사인 토마스 브레이(Thomas Bray) 중심 으로 시작된 기독교지식 증진협회 (The Society for the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 1698), 1701년에 창립된 외지복음전도회 (SPG,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for the Gospel in Foreign Parts), 그리고 영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운동도 영국에서의 선교운동 확 산에 영향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윌리엄 케리의 이방인의 개종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방법에 대한 그리 스도인의 책임에 관한 연구 (An Enquiry into the Obligation of Christians to Use Means for the Conversion of the Heathens, 1792. 이하 이방인의 개종 ) 6) 의 발간과 그 의 주도로 1792년 10월 케터링(Kettering)에서 창립된 침례교선교회(BMS)는 영국과 그 이후 기독교 역사에 선교적 각성을 준 신기원 으로 중시되어 왔다. 7) 1761년 영국 노스햄톤 (Northampton)에서 출생한 케리는 구두수선공(1777-1789)으로 일했으나 18세 때 회심의 경 하다가 사망했고, 1698년에는 SPCK(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 Knowledge)가, 1701년에는 SPG(Society for the Propagation for the Gospel in Foreign Part)가 조직된 바 있다. 4) 이 찬송은 1949년 이후 한국에 소개되어 합동찬송가(1949, 553장), 청년찬송가(생명의말씀사, 1959, 41장, 새찬송가(1962, 199장, 통일찬송가(1983, 52장)에 수록되었고, 현재 찬송가에는 52장에 편집되 어 있다. 5) 영국이 적어도 1850년대까지 세계 선교를 주도하게 된 배경은 1588년에 있었던 아르마다(Armada) 사건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당시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스페인은 1588년 7월말 영국을 침공했을 때 예상을 뒤엎고 영국이 승리함으로써 영국은 해상권을 장악하기 시작했고, 그 후 해외 식 민지 개척을 통해 소위 대영제국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환경에서 영국은 해외의 자국민과 이국인의 영적 개화라는 이름으로 해외선교를 시작하여 선교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대영제국이란 유럽인 들이 해양을 통해 유럽 밖으로 진출한 대항해 시대 이후 1931년 영국 연방이 성립할 때까지 영국에 복속되거나 영국이 건설한 해외 식민지와 통치 지역 제국을 통칭하는 것이었다. 1921년 당시 대영제 국은 전 세계 인구의 약 4분의 1에 해당하는 4억 5천8백만 명, 지구 육지 면적 3,670만 제곱 킬로미 터의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결과 영국은 거대한 식민지, 세계 역사상 가장 큰 영토를 가진 나 라로 부상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영국령 식민지의 규모에 빗대어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선교운동은 식민주의의 첨병으로 계속적인 비난을 받아왔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많은 영국 식민지가 독립했고, 일부는 영연방으로 남 아있다. 6) 이 책의 영문 및 한역본은 조동진, 세계선교트랜드, 1900-2000 (아시아선교연구소, 2007), 79-119 에 수록되어 있다. 7) Brian Stanley, The Bible and the Flag (Leicester: Apollos, 1990), 56.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18

험 이후 비국교도 침례교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학문의 길에 정진하여 독학으로 헬 라어, 라틴어, 히브리어 등 고전어와 이태리어, 프랑스어, 화란어 등 현대 유럽언어를 습득했 다. 또 데이비드 쿡(David Cook, 1728-1779) 선장의 쿡선장의 마지막 항해 (Captain Cook's Last Voyages), 가스리(Guthrie)의 지리학 입문 (Georgraphical Grammer), 요나 단 에드워드가 편집한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 (Life and Diary of David Brainerd) 등 을 읽고 세계선교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다. 1785년에는 침례교에서 목사안수를 받았고 1789 년 이래로 레이세스터(Leicester)교회에서 활동했다. 복음 선교에 대한 열망으로 불타던 그가 1792년에 발표한 이방인의 개종 은 87쪽에 불과 한 소책자였으나 선교각성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당시 교회는 3가지 이유, 곧 선교 명령은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명령이라는 점, 칼빈주의 예정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 그리고 로 마가톨릭 국가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있다는 현실적 이유에서 선교에 대해 무관심했다. 그러나 케리는 선교는 우리 개인과 교회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지적하고 선교의 도 구, 곧 선교단체의 조직을 강조했다. 8) 이 책이 선교에 끼친 영향은 흔히 루터의 95개조가 교 회개혁에 끼친 영향과 비교되곤 한다. 윌리엄 케리는 1792년 5월 30일 노팅햄(Nottingham)에서 모인 침례교 교역자대회에서 이 사야 54장 2-3절을 본문으로 당신의 장막터를 넓히소서 라는 제목으로 설교하면서 하나님 께로부터 위대한 결과를 기대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위대한 일을 시도하라 (Expect great things from God, attempt great things for God)고 강조하였으나 교회 지도자들의 반응은 냉담하였다. 결국 케리는 4개월 후 13명의 동료들과 함께 침례교선교회(BMS, Baptist Missionary Society, 처음에는 Baptist Society for Propagating the Gospel among the Heathens로 불렸다.)를 창립했다. 케리의 후원자이자 이 선교회 설립 회원이었던 앤드류 풀 러(Andrew Fuller)가 선교회의 초대 총무로 선임되었다. 심한 반대에 직면했으나 케리는 1793년 6월 13일 아내와 4 자녀 그리고 두 사람의 동료와 함께 인도를 출발하였는데, 이것이 현대선교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1793년 11월 11일, 인도 후글리(Hooghly)에 도착한 케리는 이때부터 약 40년간 봉사했다. 아내의 질병과 선교반대, 아들의 죽음 등 가정적인 어려움이 적지 않았으나, 이곳에서 케리는 말다(Malda), 벵갈 등지를 거쳐 칼컷타에서 16마일 떨어진 포루투갈령(식민지) 세람포 (Serampore)에 정착하여 34년간 일했다. 따라서 이곳이 인도에서 영국침례교 선교의 중심지 가 되었다. 케리와 일했던 동료가 조슈아 마쉬맨(Joshua Marshman, 1768-1837)과 윌리암 워드(William Ward, 1764-1823)였다. 인도 방언을 익힌 케리는 성경번역 사업을 중요한 과 제로 여겨 벵갈어, 산스크리트어, 마라디어 등 6개 언어로 성경을 완역하였고, 동역자들의 도 움을 입어 24개 국어로 신약을 완역하였고, 10개 국어로 성경 일부를 번역하였다. 9) 이런 전 례에 따라 선교지에서의 성경번역은 그 후 선교사들의 일차적 과제로 인식되었다. 케리는 1819년 인도학생 37명으로 세람포대학을 개교했는데, 1827년 이 대학은 덴마크 왕에 의해 문 학사와 신학사 학위를 줄 수 있는 대학으로 인정을 받았다. 학교의 설립 또한 그 후 아시아 아프리카 제국에서 선교의 중요한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그 외에도 그는 사회개혁, 곧 과부의 화형, 유아살해 등과 같은 구습 타파를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8) 해외선교에의 호소는 윌리엄 케리가 유일한 인물이었던 것은 아니다. 요한 웨슬레의 동료였던 토마스 코크(Dr Thomas Coke)는 윌리엄 케리보다 9년 앞선 1783년 이방인을 위한 선교단체조직 계획 (Plan for the Society for the Establishment of Missions Among the Heathens)이라는 문서를 발표한 일이 있고, 이로부터 3년 후인 1786년에는 메도디스트 선교기구 조직을 호소한바 있다. 그리 고 1786년 성탄절과 1787년 2월 사이에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들을 서부인도에 파송한 바 있다(B. Stanley, 56). 그러나 이들의 노력은 윌리엄 케리의 겨우 만큼 광범위한 영향을 주지 못했다. 9) 폴 피어슨, 기독교선교운동사 (서울: CLC, 2009), 432.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19

해외선교에 대한 케리의 호소와 40년간의 선교활동, 그의 편지와 보고서 등은 선교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고, 그 결과 여러 선교단체들이 조직된다. 이런 점에서 케리는 선교 열정과 함 께 선교단체조직에 대한 새로운 모델을 제시하게 되었고, 선교의 위대한 세기 를 열어가게 된 것이다. 윌리엄 케리가 제시했던 선교정책, 곧 1)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복음을 전파하되, 2) 자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보급하고, 3) 신속한 장래에 교회를 세우며, 4) 비기독교인들의 역 사와 문화를 연구하며, 5) 가능한 빠른 기간에 토착교회 지도자를 양성하는 것 또한 그 이후 모든 선교사들의 동일한 관심사가 되었다. 2) 새로운 선교단체의 조직 윌리엄 케리의 영향은 영속적인 것이었다. 교회에 선교 각성을 가져왔고, 유럽과 미국에서 의 새로운 선교단체의 조직에 영향을 주었다. 또 케리 자신의 희생적인 봉사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선교의 진정한 동기여야 한다는 점을 주지시켜 주었다. 이 시기 선교는 다양한 형태로 수행되었다. 유형별로 볼 때 초기의 선교는 초교파적인 운 동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교회는 선교 사명을 인식하지 못했고, 선교 사업을 감당할 힘도 없었다. 따라서 선교 사명을 인식한 개인이나 단체의 자발적인 노력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것 이 교회 밖의 초교파적 단체였다. 1792년에 조직된 침례교선교회 는 그 첫 경우였다. 비록 침례교 라는 이름은 있으나 초교파적인 선교단체로 출발하였다. 둘째, 선교가 강조되면서 점 차 교회 중심의 교파적 선교단체도 출현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교회가 중심이 된 선교단체가 창립되었다는 점은 교회가 선교사명을 인식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셋째, 특정한 교파나 선 교기구의 지원 없이 시작된 믿음선교 (Faith Mission) 단체도 출현했고, 넷째, 특정한 인종(예 컨대 유대인, 인디안, 에스키모 등)이나, 특수한 계층(예컨대, 나환자, 부녀자나 아동, 군인 등), 특수한 사업(곧 성경번역, 문맹퇴치, 봉사와 구호 등)을 주로 하는 선교기구나 단체도 조 직되었다. 그래서 19세기는 스테판 닐의 말처럼 위대한 선교단체의 시기 (the great age of societies)가 도래하게 된 것이다. 10) 이시기 설립된 중요한 선교단체는 다음과 같다. 런던선교회(LMS) 침례교선교회에 이어 1795년에는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가 창립되었 다. 11) 창립을 주도한 이들은 브리스톨의 존 리란드(John Ryland) 박사, 가스포트(Gosport)의 회중교회 목사 데이비드 보그(David Bogue, 1750-1825), 알드윙클의 교구목사 토마스 하웨 이스(Thomas Haweis, 1734-1820),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알렉산더 웨이그(Alexander Waugh, 1754-1827) 등이었다. 리랜드 박사는 윌리암 케리가 보낸 편지를 읽고 그 편지를 다 시 보그에게 보냈는데, 이 편지에는 선교 단체의 조직을 부탁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은 하웨이스와 함께 브리스톨에 있는 교회당 응접실에 함께 모여 기도하고 해외선교를 위해 의논했는데 이 인적 연쇄가 런던선교회 창립을 가져왔다. 이 모임 이후 보그 는 The Evangelical Magazine을 창간했는데, 이 잡지 또한 런던선교회 창립에 기여하였다. 1794년 11월 데이비드 보그를 비롯하여 런던의 독립교회 목사 조셉 부룩스뱅크(Joseph Brooksbank), 런던의 스캇치(Scotch)교회 목사 존 러브(John Love) 등 다양한 교회, 신학배 10) Stephen Neill, A History of Christian Missions (NY: Penguin Books, 1977), 252. 11) 윌리엄 케리와 그의 선교활동은 런던선교회 창립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Stock, 57, 59-60. 런 던선교회 의 역사에 대한 문헌으로는 R. Lovett, The History of the 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1895, 2 vols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899); S. Piggin, Making Evangelical Missionaries (Applrford, 1984); N Gunson, Messengers of Grace (Melbourne, 1978) 등이 있 다.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20

경의 사람이 모여 선교회 조직을 협의하고 창립선언서에 서명함으로써 1795년 2월 17일 공식 출범하였다. 12) 런던선교회(이하 LMS)는 이방 땅에 영원한 복음을 전한다는 고매한 목적을 가지고 시작되 었는데, 설립자들은 처음부터 알렉산더 웨이그 목사가 주장했던 비교파적 복음선포 를 기본 원칙으로 정했다. 즉 우리는 장로교나 독립교회나 감독교회 정치제도를 전파하지 않고... 도 리어 축복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한다. 이처럼 런던선교회는 초교파 적인 단체로 출발했으나 회중교회적 성격이 강했고, 13) 곧 영국 회중교회의 공식선교단체로 변 모되었다. 14) LMS의 첫 30명의 선교사는 1796년 남태평양의 타히티(Tahiti)로 파송되었다. 30명의 선교 사중 안수 받은 선교사는 오직 4명뿐이었고 나머지는 각종 기술자였다. 남태평양 지역은 영국 의 식민지이자(1842년에는 이곳이 프랑스식민지가 된다) 런던선교회의 첫 사역지였다. 이어서 인도(1798), 아프리카(1799)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15) 네 번째 선교지는 중국이었다. 로버트 모 리슨(Robert Morrison, 1782-1843)은 중국에 파송된 첫 선교사였다. 1807년 광동(Canton) 에 파송된 모리슨은 1813년에는 중국어로 신약을, 1818년에는 밀른(William Milne, 1785-1822)과 함께 구약성경을 번역하였고 중국어 문법책을 비롯하여 약 20여권의 중국선교 관련서적을 저술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귀츨라프와 교류하였고,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 16) 모 리슨은 자신이 번역한 신약과 밀른과 같이 번역한 구약을 합본하여 神 天 聖 書 (Morrison and Milne's Version of the Holy Scripture)라고 명명하고 21책의 선장본( 線 裝 本 )으로 마 카오에서 1823년 출간했는데, 17) 1832년 귀츨라프가 내한할 당시 가져온 성경이 바로 이 神 天 聖 書 였다. 귀츨라프는 바로 이 성경을 순조대왕께 진상했다. 18) 神 天 聖 書 는 흠정역성경 (AV)의 축어역 성격이 강했다. 또 마테오 리치는 하나님(God) 칭호를 天 主 上 帝 로 번역했 으나 모리슨은 神 으로, Holy Spirit를 聖 風 후에는 聖 靈 으로 번역하였다. 19) 이런 번역어 가 후일 한국어성경에도 영향을 준다. 신천성서는 만주에서의 로스역본의 준대본이었다. 런던선교회는 한국에도 선교사를 파송하게 되는데, 그가 로버트 제매인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였다. 1863년 12월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하이에 파송된 그는 아 내와의 사별, 상해 선교부 책임자인 윌리엄 무어헤드(William Muirhead)와의 불화 등으로 1864년 12월 선교사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1865년 9월 스코틀랜드성성공회(NBSS)의 윌리 12) 런던선교회 창립 성명서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이름을 여기에 서명하고,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위 대한 사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우리의 뜨거운 열망을 선언한다. 그리고 이 의식은 이방 세계로, 빛이 비취지 않는 나라로 전하여져서 그들과 함께하며 우리의 최선의 노력을 경주하여 복음주의 목사들과 모든 종파로 이루어진 평신도 형제들로 구성된 선교회가 정식으로 조직되고 확장되도록 하며 선교회 의 목적은 이러한 중요하고도 영광스러운 계획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추구할 것 이다. Richard Lovett, The History of London Missionary Society, 1795-1895, (London: Oxford University, 1899), 15. 이때 이 문서에 서명한 사람은 Alexander Easton, John Towers 등 34명이었다. 13) J. A. Houlder, A Short History of the Free Churches, 130. 14) S. Neill, 252. 15) 아프리카의 경우, 1799년 시에라리온(Sierra Leone)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남아프리카에 파송된 개척 선교사는 T. Vanderkemp였고, 그 외에도 John Pillip(1775-1851), Robert Moffat, (1795-1883), David Livingston(1813-1873) 등이 이 지역 선교사들이었다. 인도 선교는 1798년부터 시작되었고, 1805년부터는 남부 인도까지 선교지를 확장했다. 16) 조훈, 로버트 모리슨 (서울: 신망애, 2003), 214. 17) 조훈, 225. 18) K. Gutzlaff, "An Appeal in behalf of China," ABCFM Missionary Herald Vol.XXX (Boston: Crocker and Brewster, 1834), 423. 오현기, 굿모닝, 귀츨라프 (서울: 북코리아, 2014), 88에서 중인. 19) 조훈, 227-228.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21

암슨(Aalexander Williamson, 1829-1890)의 격려와 후원을 얻고 스코틀랜드성서공회 대리인 으로 비밀히 조선을 방문하였다. 이듬해인 1866년 8월에는 런던선교회 소속 선교사이자 스코 틀랜드성서공회 대리인 자격으로 재차 입국하여 9월 5일 경 조선에서 순교하였다. 조선측 기록, 곧 조선왕조실록 에서는 27세의 토마스를 최난헌( 崔 蘭 軒 )으로, 나이는 36세로, 키는 227cm로 잘못 기록하고 있다. 20) 토마스의 한국행에 영향을 주었던 윌리암슨은 1863년 스코틀랜드성성공 회 파송으로 중국에 왔으나 그 이전에는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일한바 있다. 이렇게 볼 때 런던 선교회는 한국에서의 개신교 연원에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다. 런던선교회는 1796년부터 1896년까지 948명의 선교사를 파송했는데, 21) 가장 많은 236명이 인도에 파송되었고, 중국에는 1816년 이래 1896년까지 109명이 파송되었다. 이들은 직간접적으로 조선 선교에 영향을 끼쳤 다. 런던선교회는 1977년 The Council for World Mission으로 개편되었다. 22) 영국교회선교회(CMS) 23) 선교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자 영국교회 복음주의자들은 1799년 새로운 선교단체를 조직했는데 이것이 영국교회선교회(Church Missionary Society, 이하 CMS)였다. 이 선교회는 찰스 시므온 의 주도로 창립되는데, 국교회의 저교회 인물들인 헨리 벤(Henry Venn, 1725-1797)과 클레펌 교구 목사인 그의 아들 존 벤(Jonh Venn, 1759-1813), 노예무역 폐지론자였던 윌리엄 윌버포스 (William Wilberforce, 1759-1833), 24) 그리고 가정성경(Family Bible)의 편집자 토마스 스코트 (Thomas Scott)가 중심 인물이었다. 이들은 선행의 실천, 사회개량운동, 노예제도 폐지운동, 그 리고 선교운동을 주도하였던 클레펌파 (the Clapham Sect)의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웨슬레 운동 에 찬동하면서도 영국교회로부터의 분리를 거부했던 인물로써 후일 국교회 내의 부흥운동을 주도 하였다. 이들은 불신자 사이에 복음에 관한 지식을 보다 효과적으로 증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방법을 사용할 수 있는가 를 진지하게 논의하기 시작하였고, 교회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 고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를 협의하는 가운데 선교단체를 창립하게 되었다. 대영성서공회 (BFBS: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도 이들의 기부금으로 1804년 설립되었다. 영국교회선교회(CMS)는 영국교회 고고회파의 SPG(The Society for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 1701)와 선의의 경쟁을 벌이면서 선교사역을 감당했는데, 한국 선 교, 특히 한국 성공회 형성에 기여하였다. SPG의 한국 개척선교에 대해서는 단행본으로 출판 된바 있다. 25) CMS는 연령 학력 등 선교사의 자격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그래서 1815년부터 1891년까지 CMS가 파송한 650명의 선교사 중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이들은 240명에 불과했 20) 고무송, 토마스와 함께 떠나는 순례여행 (서울: 쿰란출판사, 2004), 184. 21) 고무송, 70에는 각 국가별 통계가 제시되어 있다. 22) 1945년부터 LMS 가 The Council for World Mission 로 개편되는 1977년까지의 역사는 Bernard Thorogood, ed., Gales of Change (London: The Council for World Mission, 1994)로 출판되 었다. 이 책은 LMS 역사 제3권으로 출판되었다. 23) CMS의 역사는 E. Stock에 의해 방대한 책으로 엮어졌다. E. Stock, History of the Church Mission Society Vol. 1-4 (London: CMS, 1916). 또 첫 100년 동안의 역사는 One Hundred Years Being the Short History of 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London: CMS, 1899)롤 출판되었다. 또 최근 출판된 CMS의 역사서는, Kevin Ward and Brian Stanley ed., The Church Mission Society and World Christianity (Grand Rapids: Eerdmans, 2000)가 있다. 24) 윌리엄 윌버포스는 John Newton(1725-1807), Thomas Clarkson 등과 함께 노예무역 폐지를 위해 연 대했다. 윌버포스는 한때 노예선 선장이었던 John Newton의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는데, 뉴톤은 1748년 선상에서 심한 풍랑 중 회심하고 1764년 목사가 되어 1780년부터는 런던의 성 메리(St. Mary)교회의 목 사로 일하고 있었다. 윌버포스는 사회개혁 만이 아니라 복음주의 선교운동에도 관심을 가지고 존 벤과 함 께 Church Missionary Society의 창립에 기여하였다. 25) Doris Bateman, We Went to Korea (London: SPG, 1956).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22

다. CMS의 가장 중요한 선교지역은 인도, 아프리카, 중국이었다. CMS의 창립회원이자 초대총무였던 헨리 벤(Henry Venn)은 선교정책가로써 소위 네비우 스정책의 입안자였다. 그는 1854년 선교의 목표는 자치적이고(self-governing), 자립적이며 (self-supporting), 자전하는(self-propagating) 토착교회 설립을 목표로 하는 3-S 원리를 제 창했는데, 당시의 서구인들에게 편만했던 우월의식을 고려해 볼 때 받아드리기 어려운 주장이 었다. 당시 서구인들은 아아( 亞 兒 )제국에 대한 식민 의식(colonial complex) 때문에 선교지에 서 가능한 장기간 주도권을 행사하려고 하였다. 26) 특히 아아제국민들은 개화되지 못했고, 자 치 자립 능력이나 여건이 되지 못한다고 보았다. 이 점은 1910년 에딘버러에서 열렸던 세계 선교협의회(IMC)에서 이교국 선교 (Heathen mission)라는 용어 대신 해외선교 (Foreign mission)라는 용어를 권장한 사실에서 드러난다. 이런 상황에서 헨리 벤이 토착교회 건설을 선교의 우선과제로 인식한 것은 대단한 통찰이었다. 그는 자치( 自 治 ), 자급( 自 給 ), 자전( 自 傳 ) 만이 아니라, 외국 선교부는 피선교지에서 토착교회를 세우고 일정 기간 후 조용히 물러가야 한다는 소위 선교부의 안락사 (the euthanasia of a mission)를 주장했다. 27) 헨리 벤의 선 교정책은 네비우스(John Nevius)를 통해 한국에 소개되었고, 이 정책의 실행의 충실성과 상관 없이 한국교회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CMS는 이런 선교정책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한국에서의 기독교 전파에도 연쇄적 영향을 주었다. 그 중요한 사례가 부산지방에서의 선교시도, 첫 성공회 선교사 콜페(C. J. Corfe, 高 堯 翰 )의 내한, 그리고 첫 호주장로교 선교사의 내한이었다. 28) 중국에서 일하고 있던 CMS의 존 월푸(Archdeacon John R. Wolfe, 1832-1915)는 일정 기간 휴양을 권고 받고 일본 나가사끼( 長 埼 )를 방문한 후, 1884년 10월 24일경 부산을 방문 했다. 29) CMS 선교사의 첫 한국 방문이었다. 그는 부산에는 약 2천명의 일본인이 거주하고 있 고, 일본인 거주지 내에 은행과 병원, 그리고 학교가 있었다고 보고했다. 30) 조선방문 후 임지 인 푸초로 돌아간 그는 남지나 선교회 (The South China Mission) 연례 지방대회에서 조선 방문 결과와 함께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그 결과 한 사람의 중국인 목사와 세 사 람의 평신도가 조선선교를 자원하였다. 월푸는 이들의 사역을 위해 재정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실패하고, 호주 CMS로부터 부분적인 지원을 받아 1885년 11월 말경 두 사람의 중국인 전도 자와 함께 다시 부산을 방문했다. 31) 1886년에는 마틴목사(Rev. J. Martin)가 부산을 방문했 26) S. Neill, 259. 27) Klaus Fiedler, The Story of Faith Missions From Hudson Taylor to Present Day Africa (Oxford: Regnum Books International, 1994), 364; S. Neill, 260. 스테펀 닐은 헨리 벤의 주장을 수용하면서, 선교부가 일단 교회를 세우면 그 선교부는 그 지역에서 없어져도 좋다. 선교사들은 복 음이 들어가지 않는 곳으로 가고, 그들이 세운 교회는 성령의 지도아래 교회의 모든 기능을 발휘하도 록 내버려두는 것이 좋다. 라고 부기한다. 28) 이상규, 부산지방기독교전래사 (부산: 글마당, 2001), 30ff. 참고. 29) 그의 부산 도착일은 10월 24일로 추정된다. 이 때 월푸는 (그해 9월 내한했다가 가족을 데리려 중국 에 가서 다시 귀임하는) 알렌과 나가사끼에서 동행하게 되는데, 알렌이 부산을 거쳐 제물포에 도착한 날은 10월 26일이었다[김원모역, 알렌의 일기 (단국대학교 출판부, 1991), 27]. 당시 항로 상 부산 에서 제물포까지는 2, 3일이 소요되었으므로 월푸의 부산방문은 10월 24일로 추정된다. 30) 월푸는 부산을 거쳐 제물포로 갔고, 서울을 둘러보고 임지로 돌아갔는데, 그의 조선기행문, A Visit to Korea, The Church Missionary Intelligencer and Record, Vol. 10.(N.S., June, 1885), 418-430은 당시 한국의 자연환경, 촌락구조, 사회상, 일본인의 상황 등을 헤아리는데 중요한 사료가 되고 있다. 31) C. F. Pascoe, Two Hundred Years of the S.P.G.; An Historical Account of the Society for the Propagation of the Gospel in Foreign Parts, 1701-1900 (London, 1901), 713. 그러나 E. Stock는 그의 History of 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III, 565쪽에서 중국인 두 사람을 한국 에 보냈다고 말하고 있을 뿐 월푸의 내한 여부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23

고, 이때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50여명의 무리들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32) 1887년 가을에는 일본주재 비첼스테드(Bickersteth) 주교와 북( 北 )중국주재 스코트(Scott) 주교가 다시 부산을 방문하는 등 이런 인적 연쇄는 영국교회의 한국에 대한 관심을 고양시켜 주었다. 스코트는 버돈(Burdon), 모울(Moule) 주교와 함께 켄터버리 대주교에게 한국선교의 긴박 성을 말하고 선교사 파송을 호소하는 공동 서신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것은 영국교회의 한국 선교의 동기가 된다. 33) 즉 영국교회는 1890년 외지 복음선교회 (SPG)를 통해 콜페 감독을 첫 조선 선교사로 파송하였다. 34) 그는 영국을 떠나기에 앞서 웨스트민스터에서 선교사 주교 (Missionary Bishop)로 임명받고 다른 여섯 성직자와 두 사람의 의사와 함께 입국하였는데, 이것이 한국에서의 성공회 선교의 시작이었다. 뿐만 아니라 월푸는 조선을 일시 방문한 후 호 주 성공회에 한국선교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선교사 파송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냈는데, 이 편 지는 멜버른 교외 코필드에 위치한 성 메리교회(St. Mary Church)의 메칼트니(H. B. Macartney) 목사에게 전달되었다. 곧 이 편지는 그가 발행하는 The Missionary at Home and Abroad에 발표되었고, 이 호소는 호주의 첫 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의 내한의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어떤 기록에는 월푸 주교가 직접 멜버른을 방문하고 한국선교를 호소했다고 기록했으나, 35) 이를 확인할 복수 자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한국에서의 선교운동은 국제적인 선교운동의 발전, 그리고 선교조직 및 인적 연쇄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임 을 알 수 있다. 화란선교회와 바젤선교회 이상의 BMS LMS CMS 외에도 여러 선교단체가 조직되는데, 앞서 조직된 선교단체의 활 동이 가져온 결실이었다. 그래서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비롯하여 독일, 스위스, 네델란드, 미국 등에 여러 선교단체가 조직된다. 36) 본 항에서는 한국 선교와 유관된 화란선교회(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와 바젤선 교회(Basel Mission), 그리고 베르린선교회(Berlin Missionary Society)에 대해서만 간단하게 언급하고자 한다. 화란선교회는 당시 저명한 석학이었던 펀 켐프(van der Kemp)에 의해 1797년 창립되었 고, 로테르담에 본부를 두고 있었다. 비록 초교파적 선교단체였으나 칼빈주의 영향을 받은 복 음주의 단체였다. 이 단체 소속으로 활동했던 이가 내한한 첫 개신교 선교사인 귀츨라프(Karl Friedrick Gutzlaff, 1803-1851)였다. 1803년 7월 8일, 독일 프로이젠의 포메라니아에서 출 생한 그는 베르린선교학교(Missionsschule in Berlin)에서 수학하던 중 화란선교회가 선교사 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1823년 선교회에 가입하였다. 당시 독일에는 변변한 선교단체가 없었으므로 선교지망생들은 화란선교회나 런던선교회로 가서 선교훈련을 받아야 했다. 귀츨라 프는 화란 로테르담에서 3년간(1823-1826) 선교훈련을 받았다. 이 기간 동안(1825) 런던에서 32) E. Stock, The History of the Church Missionary Society, vol. 5 (London: CMS, 1899), 565; Edith A. Kerr and George Anderson, The Australian Presbyterian Mission in Korea, 1889-1941 (Australian Presbyterian Board of Missions, 1970), 6 참고. 33) C. F. Pascoe, 713; E. Stock, III, 565. 34) E. Stock, 565. 35) Horace Webber, "Joshep Henry Davies, MA, 1881-1888," Years May Pass By (Melbourne: Caulfield Grammar School, 1981), 29. 36) 대표적인 조직은 다음과 같다. Scottish and Glasgow Missionary Society(1796), Netherlands Missionary Society(1797), Interdenominational Religious Tract Society(1799),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1804), The 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1810), American Baptist Missionary Union(Board, 1814), Basel Mission (Switzerland, 1815), American Bible Society(1816), The Wesleyan Methodist Missionary Society(1817), Berlin Missionary Society (Germany, 1824) 등이다.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24

LMS의 첫 중국선교사인 모리슨을 통해 중국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계기가 되어 1826년 최초의 저술인 지상에서 그리스도 나라 확장의 역사 (Geschiedenis der Uitbreiding van Christus Koningrijk op Aarde)를 저술하게 된다. 37) 귀츨라프는 1826년 7 월 20일 로테르담에서 화란선교회 소속 선교사가 되었다. 그가 독일 루터파 교회에서 성장했 지만 루터교목사로 안수받은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바타비아(현재의 자카르타)에 파송되었 고, 1828년부터 1831년까지는 시암의 방콕에서 LMS 소속 선교사 야콥 톰린(Jacob Tomlin) 과 동사했다. 이때는 화란 선교회를 떠난 이후였다. 베르린선교학교에서 시작된 베르린선교회 는 귀츨라프를 후원했다. 귀츨라프는 그후 중국에서 모리슨 선교사와 활동하던 중 1832년 동 인도회사 소속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가 대만과 조선 서해안 일대에 통상기지를 개척하기 위한 항해를 계획하자 통역관 겸 의사로 동행하게 된다. 1832년 2월 26일 마카오를 출발한 귀츨라 프는 타이완(4.11) 닝보( 寧 波, 5.26)를 거쳐 상하이에 도착하였고(6.19), 7월 8일 상하이를 출 발하여 산둥을 거쳐 7월 17일 조선 연안에 도착했다. 38) 이때 그가 소지했던, 그리고 배포했던 한문 성경이 모리슨이 번역한 神 天 聖 書 였을 것이다. 이처럼 첫 개신교 선교사의 내한은 근대선교운동의 결실이자 여러 선교부와 선교사들의 종 횡 연쇄의 열매였다. 특히 그가 남긴 두 편의 항해기(1833, 1834)가 저마인 토마스의 내한 동 기를 제공하고, 서방세계에 조선, 및 조선선교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켰다 39) 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더욱 그러하다. 스위스의 바젤선교회(Basel Mission)는 뷔르템베르크의 개신교 목사이자 독일 기독교공동 체(Deutsche Christentumsgesellschaft)의 신학부 총무(1803-1807)을 역임했던 불룸하르트 (Christian Gottlieb Blumhardt, 1779-1838)에 의해 1815년 창립되었다. 뷔르템베르크는 경 건주의의 중심도시였고, 이곳에서 창립된 바젤선교회 또한 경건주의적 경향을 띄고 있었다. 이 선교회도 한국 선교와 무관하지 않다. 첫 개신교 선교사 귀출라프가 선교적 이상을 갖게 된 것은 15세 때였던 1818년 출생지에서 멀지 않는 슈테틴에서 바젤선교회가 발간하던 바 젤선교지 (Basler Missionsmagazin)를 접한 이후였다. 40) 1900년 내한했던 유력한 호주선교사 엥겔(Gelson Engel, 1868-1939)은 본래 바젤선교회 소속 선교사였다. 1868년 10월 10일, 남부 독일 경건주의 도시 워템베르그(Wurtemberg)에서 출생한 엥겔은 에빙겐(Ebingen)에서 열렸던 선교 모임에 참석한 후 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하 고, 1889년 8월 29일 바젤에 위치한 바젤선교교육원 (Basel Mission House)에서 3년간 신학 및 선교교육을 받았다. 일시 스코틀랜드의 에딘버러에서 특별교사훈련을 받은 일이 있으나, 1892년 6월 6일 워템베르그의 발링겐(Balingen)에서 바젤선교회 소속 선교사로 인도의 푸나 (Poona) 지방에 파송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봉사하던 중 1894년 12월 19일 호주 여성 클라 라 바스(Clara Bath)와 결혼했다. 인도에 장기 체류를 희망하였으나 건강 때문에 인도를 떠난 그는 호주로 이민하였고, 곧 빅토리아 주 장로교단(The Presbyterian Church of Victoria) 에 가입하였다. 당시 빅토리아주 여전도회연합회(PWMU)는 한국에 파송할 목사 선교사를 찾 고 있었는데, 이미 인도에서 6년간 사역한 바 있는 엥겔은 적절한 인물로 선정되어 한국선교 사로 영입되었고, 1900년 9월 19일 아내와 세 아이(Gelson, Herbert, Dora)를 데리고 멜버 른을 떠나 1900년 10월 29일 부산항에 입항하였다. 이때부터 엥겔은 1938년 한국에서 은퇴 하기까지 38년간 부산과 평양에서 교회개척, 학교교육, 성경번역과 찬송가 편찬 등 여러 분야 에서 활동했다. 특히 그는 호주장로교 선교부를 대표하여 1902년부터 평양을 왕래하며 교회사 를 교수하였고, 1906년부터는 연 3개월간 정기적으로, 1919년 이후에는 전임 교수로 봉사했 37) 독일어판은 1828년 출판되었다. 오현기, 88. 38) 오현기, 134. 39) 오현기, 352,369. 40) 오현기, 22.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25

다. 따지고 보면 그도 근대선교운동의 열매였다. 그는, The Reformation을 일본학자들이 宗 敎 改 革 으로 번역하기에 앞서 敎 會 更 正 으로 불렀고, 종교개혁사 를 교회갱정사 로 번역했 다. 루터가 작시,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Ein feste Burg)를 번역하여 신편찬송가(1935) 에 수록되게 한 것도 바로 그였다. 중국내지선교회(CIM) 1865년 6월 25일 영국에서 허드슨 테일러(James Hudson Tayler, 1832-1905)에 의해 창 립된 중국내지선교회(CIM, China Inland Mission) 또한 이 시기 선교의 중요한 발전이었다. 이 선교회는 복음주의적인 초교파 단체로서 믿음선교 (Faith Mission)을 지향했다. 41) 당시 영국 에서는 조지 뮐러(George Muller)를 중심으로 신앙운동 (faith movement)이 일어났는데, 영국국 교회의 고교회적 전통에 대한 반발이었다.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의 선교사였던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이 1807년 중국선교를 시 작한 이래 중국은 가장 많은 수의 선교기관, 선교사가 사역했던 선교의 무대였지만 해안을 비롯한 비교적 살기 좋은 곳에 집중되어 있었고 중국 내지( 內 地 )는 버려져 있었다. 1865년 당시 중국의 18개성 가운데, 11개 성에는 개신교 선교사가 전혀 없었고, 선교사가 활동하고 있는 7개성에서도 양쯔강 연안의 일부지역 외에는 선교사의 발길이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 內 地 ) 선교를 목적으로 선교회를 창립하고, 중국 내륙의 전인미답( 全 人 未 踏 )의 지역으로 들어가 중국인의 복장을 하며 중국인과 함께 살면서 복음을 증거하고 교회를 개척하는 선교회를 창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시도는 21세의 나이로 중국전도협회(Chines Evangelization Society) 소속으로 중국에서 7년간 선교했던 자신이 사역에 대한 반성이었다. CIM은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에 대한 신뢰를 바탕으로 안수 받은 목사만이 아니라 평신도들도 선교사로 받아드렸다. 또 선교정책에 찬동하는 기존의 선교사들도 영입하였다. 테일러는 1866년 5월 26일, 아내 마리아(Maria)와 4자녀를 포함한 16명(남6명, 여 10명)이 중국으로 향해 4개월 후 1866년 9월 30일 상해에 도착하였다. 이들은 이미 중국에 와 있던 8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중 국내지선교회를 구성하게 되었다. 창립당시의 CIM은, 복음주의적 초교파 신앙선교를 지향하되 선 교사들의 공식적인 학교교육을 중시하지 않았고, 선교본부를 영국이 아닌 중국에 두며, 선교사의 중국인과의 동화(의복, 음식 등)를 추구하고, 선교부의 일차적인 과제는 직접적으로 복음전파에 있 다고 보았다. 교육이나 의료 활동, 자선사업 등을 경시하지는 않았으나 이것이 복음 전도 활동에 저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이런 선교회의 창립과정에서 허드슨 테일러는 귀츨라프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귀츨라프의 용기 독창성 모험심 중국문화에 대한 적응력 선교소신과 방식은 그대로 테일러에게 전수되었다. 42) 테일러는 귀츨라프를 CIM의 선조 (forefather)로 여겼을 정도 였다고 브룸홀은 평가하고 있다. 43) CIM은 창립된 지 20년이 안된 1882년까지 중국 모든 성에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 때 151명 의 여성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중 56명이 기혼자였고, 95명이 미혼자였다. 44) 또 설립 30년 후 CIM에 속한 선교사는 640명에 이르렀고, 188개의 학교(이중 야간이 66개교)를 중국전역 에 설립하였다. 당시 중국에는 63개 기관에서 파송된 3,445명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41) 믿음선교 단체는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선교단체인데, 당시 영국에만 10여개의 단체가 있 었다. 이중 대표적인 조직이 CIM이었다. 당시 영국은 중국과 체결한 조약에 의해 중국의 내지( 內 地 ) 로 들어가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테일러는 내지의 중국인도 복음을 들어야 한다는 확신에서 중 국 내지 입경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영국교회는 조약 위반이라는 이유로 지원을 거부했다. 이 무렵 테일러는 조지 뮬러(George Muller)와의 교제를 통해 믿음선교를 지향하게 되었다. Roger Steer, George Muller: Delighted in God (Hodder and Stoughton, 1975), 192. 42) A. J. 브룸홀, 근대중국의 형성 (부산: 로뎀, 2009), 227. 43) 브룸홀, 10. 44) Ruth A. Tucker, "Unbecoming Ladies," Christian History, Vol. 15. 52(4): 28.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26

CIM 소속 선교사가 절대다수를 차지했다. 1905년 허드슨 테일러가 사망할 당시 중국전역에 205 개의 선교지부(Mission Stations), 805명의 선교사, 467명의 중국 현지인 선교협력자, 7개 병원, 37개 진료소, 101개의 아편중독자 보호소, 300여개의 학교, 약 12만 5천명의 중국인 신자들이 활 동하고 있는 중국 최대의 선교단체였다. 45) 1900년 의화단사건(Boxer Rebellion) 46) 때 개신교 선교사 135명이 살해되었는데, 중국내지선 교회 소속 선교사 58명과 28명의 선교사 자녀가 죽임을 당하므로 다른 선교기관보다 피해가 컸 다. 사건이 해결된 후 피해 보상금을 받도록 권유받았으나 그리스도의 용서하심을 보여주기 위해 이를 거절한 일은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의화단 사건 당시 원산으로 피난해 온 이들이 남감리회 여선교사 화이트(Miss Mary Cutler White)와 캐나다장로교 파송 매컬리(Louise H. McCully)였다. 이들의 발의에 의해 원산 기도회가 1903년 8월 24일부터 1주일간 개최되었고, 이 기도회가 원산부흥, 그리고 1907년 대부흥으로 발전했다는 점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CIM 소속 선교사들은 허드슨 테일러 자신같이 비교적 비천한 신분 출신이 다수였으나 영국의 상류층의 비범한 7명의 켐브릿지대학 출신들이 CIM에 가담한 일은 세인의 관심을 끌었고, 이들이 후일 켐브릿지 세븐(Cambridge Seven)으로 불리게 된다. 이 중 호스트(D. E. Hoste)는 허드슨 테일러에 이어 CIM의 제2대 책임자가 된다. 이후 CIM은 중국은 물론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 선교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된다. 테일러 자신은 중국의 18개의 모든 성에서 사역하였고, 2천 5백 명에게 세례를 베풀며 40년간 사역한 후 1905년 중국 호남성( 湖 南 省 ) 장사( 長 沙 )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CIM을 비롯한 여러 선교단체의 활동으로 1949년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았을 때, 중국 에는 300만에 달하는 로마가톨릭교도와 100만의 개신교 신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 다. 당시 중국 인구를 5억5천만명으로 계상할 때 1% 미만이었다. 47) 중국이 공산화되자 상하 이에 있던 CIM국제 본부는 1951년 공산당이 접수하였고, CIM은 중국에서 철수했다. 48) 1964 년 CIM은 OMF(Overseas Missionary Fellowship)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OMF는 Dr Petterson, Miss S. Moar 등 여러 선교사들을 한국에 파송하였다. 2. 미국에서의 선교운동 적어도 1830년대까지는 영국이 세계선교를 주도했다. 특히 LMS, CMS, WMMS(Wesleyan Methodists Missionary Society) 등 영국의 선교단체가 세계선교를 주도했다. 49) 이점은 국제 사회에서의 영국의 영향력을 암시한다. 그러나 미국에서 1810년 첫 해외선교단체가 조직되고, 1812년 첫 해외선교를 파송한 이래 미국이 선교사역에 동참하게 된다. 1830년대 이후 미국 파송 선교사가 급증하면서 미국이 선교중심국으로 부상하기 시작한다. 스테펀 닐의 언명처럼, 이재 유럽의 시대 는 지나갔다. 50) 미국에서의 선교운동은 1800년대를 이후 젊은 학생들에 의 해 추진되었지만 넓게 말해서 미국에서의 선교운동은 영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부흥운동, 45) 브룸홀, 11. 46) 의화단(( 義 和 團 )사건이란 1900년 중국 농민들에 의해 일어난 반제애국( 反 帝 愛 國 ) 운동으로써 산동( 山 東 )에서 시작하여 하북( 河 北 ) 북경( 北 京 ) 천진( 天 津 ) 산서( 山 西 ) 하남( 河 南 ) 내몽고( 內 蒙 古 ) 동북( 東 北 ) 등지로 확산되었다. 이들은 부청멸양 ( 扶 淸 滅 洋, 청나라를 도와 서양세력을 물리친다) 구호 아래 반외 세를 주창하며 교회와 선교사를 물리적으로 파괴하고 살상했다. 영국, 미국, 일본, 러시아, 독일, 프랑 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8개국은 연합군을 구성하여 중국에 대해 무력으로 대응하였다. 연합군은 북경과 천진을 함락시키고 의화단은 진압되었다. 자희태후는 광서황제와 소수의 측근들을 데리고 북 경에서 서안( 西 安 )으로 탈출하였다. 1901년 9월 청 정부는 연합군에 투항하고, 신축조약 ( 辛 丑 條 約 ) 을 체결함으로 사건은 종료되었다. 47) 허버트 케인, 세계선교의 오늘과 내일. 27. 48) 브룸홀, 26. 49) S. Neill, 276. 50) S. Neill, 243.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27

1800년대의 제2차 각성운동, 무엇보다도 영국을 중심으로 전개된 국제적인 선교운동과 선교 단체들의 활동이 가져온 인적 연쇄가 미국교회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그 일예가 데이비드 리 빙스턴(David Livingston)의 사역보고였다. 그가 1857년 출판한 남아프리카에서의 선교여행 과 탐험 (Missionary Travels and Researches in South Africa)은 아아제국에서의 선교활 동에 대한 커다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또 1870년대 영국과 미국에서의 각성운동, 1880년 대 무디(Dwight L. Moody)의 부흥운동과 헬몬산집회(1886) 등은 미국교회에 선교에 대한 신 선한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51) 이상과 같은 내외적인 요인 때문에 미국교회도 해외선교에 참여하게 되었고, 1810년 최초 의 선교단체, 곧 미국해외선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 ABCFM)가 조직되었고, 1812년에는 5명의 선교사가 인도로 파송되었다. 얼마동안 은 장로교회와 화란개혁파교회도 이 선교단체를 통해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그러다가 남북전 쟁(1861-1865) 당시 장로교회와 화란개혁파교회, 그리고 다른 교파들은 해 교회의 선교단체를 조직하고 선교운동을 시작하였다. 전쟁으로 잠시 선교운동이 중단된 일도 있으나 곧 재개되었 다. 특히 1880년 이후 40년간 미국교회의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해외선교였다. 그 결과 1900 년 뉴욕에서 개최된 에큐메니칼선교대회(Ecumenical Missionary Conference)에는 170,000 명이 참가하는 대성황을 이루었고, 그 대회에는 대통령이었던 윌리엄 멕킨리(William McKinley, 재임기간 1897.3-1901.9)도 참가했을 정도였다. 미국에서의 해외선교운동의 연원 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1) 사무엘 밀즈와 해외선교단체의 조직 윌리엄 케리가 영국에서 선교운동을 고취했듯이, 사무엘 밀즈(Samuel J. Mills, 1783-1818)는 미국교회 선교운동의 시원이 된다. 1798년에 시작된 제2차 각성운동 기간 중 에 회심한 그는 세계선교를 위해 헌신하기로 결심했고, 1806년 메서추세츠주 윌리암스타운에 있는 윌리암스대학(Williams College)에 입학하였다. 그는 이 대학에서 영적 갈망을 가진 동 료들과 기도회를 갖기 시작하였는데, 이 기도회가 후일 헤이스택운동 (The Haystack Movement)이라고 불리는 기도운동과 형제단 (The Society of Brethren)이라고 하는 선교운 동 조직의 시작이 되었다. 그래서 쉐드(P. Shedd)는 이 기도회에서 미국 최초의 선교단체가 탄생했다고 평가했고, 52) 라토렛은 이 헤이스택 기도회가 미국교회의 세계선교에 자극을 주었 다고 평가했다. 53) 세계선교를 위한 기도모임은 계속되었고, 1810년까지 527명의 학생이 형제 단에 가입했는데 그중 50%의 학생이 후일 선교사의 길을 갔다. 54) 대학을 졸업한 밀즈는 1809년 안도버신학교(Andover Seminary)에 입학하였고, 자신과 동일한 선교의 비젼을 가진 브라운대학 출신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하바드대 학교 출신 사무엘 뉴웰, 유니온 대학출신 사무엘 노트 등을 만나게 된다. 1810년 6월 메사추 세츠주 브라드포드에서 회중교회 연래총회가 열렸을 때 이들은 해외선교부 조직을 청원했고, 그 결과 미국에서의 최초의 선교단체인 미국해외선교회 (ABCFM)가 조직된다. 이년 후인 1812년 2월에는 져드슨(1788-1850), 사무엘 뉴웰(Samuel Newwell), 사무엘 노트(Samuel Nott), 골든 홀(Gorden Hall), 그리고 루터 라이스(Luther Rice, 1783-1836) 등 5명이 인도 선교사로 미국을 떠났다. 이들 최초의 미국선교사들은 윌리엄 케리와 함께 동역했다. 이렇게 시작된 미국교회의 해외 선교는 인도에 이어 실론(1816), 근동(1820), 중국(1830), 51) Ruth C. Brouwer, New Women for God, (Toronto: University of Toronto Press, 1990), 12. 52) Clarence P. Shedd, Two Centuries of Student Christian Movements (NY: Association Press, 1934), 52. 53) These Sought a Country, 46. 54) C. P. Shedd, 62.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28

마두라(Madura, 1834) 등지로 확대되었다. 인도로 갔던 저드슨은 침례에 의한 신자의 세례 가 성경적이라고는 확신에서 인도에서 윌리엄 워드(William Ward)에게 침례를 받은 후 루터 라이스와 함께 1813년 ABCFM을 탈퇴하였다. 그리고는 미국 침례교회에 선교회 조직을 호소 하여 1814년 미국침례교 해외선교회 (The American Baptist Foreign Mission Society)가 설립되었다. 55) 저드슨과 부인(Ann Hasseltine Judson)은 공동 설립자였다. 이것이 미국에서 의 두 번째로 선교 단체였다. 그 후 장로교회(1816, 1831), 감리교감독교회(1819), 복음주의 루터교회(1837) 등에 의해 선교단체가 조직되었다. 2) 학생자원운동 미국교회의 선교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것은 학생자원운동(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이하 SVM)이었다. 헤이스택기도회(1806)에서 헬몬산집회(1886)에 이르기까지 젊 은 학생들이 해외선교운동을 주도하였는데, 이 운동이 학생자원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영국 캠 브리지 대학생들의 선교헌신 소식이 미국에 영적 자극을 준 점 외에도, 이 운동의 전개에는 프린스톤대학 출신 로버트 월더(Robert P. Wilder)의 선교비젼, 위대한 설교자 무디(D. L. Moody, 1837-1899)의 영적 감화력, 그리고 코넬대학생이었던 존 모트(John R. Mott)의 탁월 한 조직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이 운동은 1886년 여름 매사추세츠주 노스필드에 있는 헬몬산의 무디수양관에 모인 수련 회에서 100여명의 학생들이 본인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다면 해외선교사가 되기로 작정합니 다. (I purpose, God willing, to become a foreign missionary)라는 프린스톤서약 (Princeton pledge)에 서명한데서 발단이 되었다. 이 때 집회는 4주간 계속되었는데, 무디 외 에도 아더 피어슨(Arthur T. Pierson), 윌리엄 아쉬모(William Ashmore) 등이 영향을 끼첬 다.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의 편집자였던 피어슨은 모든 사람이 가야하며 모든 사람에게로 가야한다. (All should go and go to all)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는데, 이 설교와 더불어 등장한 슬로건이 우리 세대에 세계 복음화를(The evangelization of the World in this generation) 이었다. 미국 침례교선교회(BMS) 소속 선교사로서 36년 동안 중국에서 사 역한 윌리엄 아쉬모는 중국 선교 지원자 동원을 위해 집회에 참석했는데, 가서 모든 족속에 게 복음을 전하라 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환기시키면서, 청년들에게 도전을 주었다. 헬몬산 집회가 시작될 때는 251명의 학생 대표 중 선교 헌신자는 6명에 불과했으나, 마지 막 날 집회까지 100명이 선교사로 헌신했다. 존 모트는 집회가 끝난 후 이 집회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유능한 복음주의적 지도자들이 있었고, 참석자들에게 해외선교에 대한 확신이 있 었다는 점 등 5가지 요인을 제시한 바 있다. 56) 존 모트를 회장으로, 윌더를 해외순방 총무(Travelling secretary)하여 학생자원운동이 공 식 발족되면서 이 운동은 미국 전역과 캐나다 호주, 그리고 세계 각국의 선교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헬몬산집회 5년 후인 1891년에는 북미지역의 350개 교육기관에 선교단체가 조직되었고, 선교 자원자는 6,200명, 해외에 선교사로 파송된 인원은 320명에 달했다. 1898년 55) 저드슨과 부인 앤 저드슨(Ann Hasseltine Judson, 1789-1826) 부부는 그 후 동인도 회사에 의해 인도에서 출국하라는 명령을 받고 1813년 7월 13일 지금의 미얀마 랑군에 도착했다. 부인은 이곳에 서 13년 간 일하고 38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저드슨은 이곳에서 37년간 일하면서 미얀마어로 성경을 번역하였고, 미얀마어-영어사전 (Burmes-English Dictionary)을 완성하였다. 그가 세상을 떠날 당 시 미얀마에는 7천명의 교인이 있었고, 저드슨은 163명의 선교사를 감독하고 있었다. 56) John Mott, "Condition at the Mount Hermon Conference Which Made Possible the Generation of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The Twenty-fifth Anniversary of the Student Volunteer Movement (New York: Student Volunteer Movement, 1911), 55-69.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29

까지 학생자원운동은 839개의 고등교육 기관으로 확산되어 선교사 1,173명이 53개 나라로 파 송되었다. 헬몬산 집회 20주년이 되는 1906년까지 2,953명의 자원자들이 약 100개의 선교 단 체를 통해 해외 선교지로 파송되었다. 학생자원운동이 시작된 지 50년이 되었을 때 약 십만여 명의 선교 헌신자를 배출했고, 이중 2만5백여 명의 학생들이 해외선교지로 파송되었다. 57) 내 한한 선교사들도 이런 북미대륙의 선교운동의 결실이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런 점을 고려해 볼 때 학생자원운동(SVM)은 선교역사의 신기원을 열었다고 할 수 있다. SVM에는 실행위원회 이사회 자문위원회와 같은 기구가 있었지만 선교사를 직접 파송하지 않 았고, 지역교회와 유대관계를 유지하되 선교 동원기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래서 초기 10년 동안 400개 대학과 100개 신학대학, 200개 의과대학, 300개 정규 선교연구기관에 학생 선교운동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후일 SVM은 YMCA 대학부, YWCA 대학부, 범신학대선교연맹(ISMA), 캐나다범대학선교연맹(ICMA) 등과 함께 세계 선교의 지경을 넓혀 나갔다. 학생자원운동이 주관하는 선교대회가 매 4년마다 개최되었는데, 제1회 대회는 1891년 오 하이오주 클리브랜드에서 열렸다. 이 때 151개 학교에서 558명의 학생들이 참석하였고, 또 31명의 해외 선교사와 32명의 선교단체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선교자원자가 매년 증가하였고, 1920년에 모였던 데스 모이네스(Des Moines) 대회는 절정에 달했다. 이 대회에는 949개 학 교에서 6,890명의 젊은이들이 참석했고, 새로 등록한 복음전도자가 2,783명이나 되어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그 후 점차 위력을 상실하였고, 1936년의 인디아나폴리스 대회는 마지막대 회가 되었다. 세계복음화 를 우선과제로 삼았을 때는 대단한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인종차별 철폐, 경제적 정의 추구, 제국주의 비판 등 사회-정치적인 문제에 우선순위를 두게 될 때 곧 힘을 상실하고 결국 와해되고 말았다. 58) 결정적인 때는 1938년이었다. 이 때 존 모트는 확대 전도 (Larger Evangelism)를 주장했다. 선교개념을 광의로 해석하여 정치와 경제 그리고 문 화 현실에 대한 총체적인 복음 증거여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말하자면 사회참여를 복음 선교 속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미시오 데이(missio dei) 개념이었다. 영혼 구원을 부정하는 것이 아 니라, 그것을 포함하면서도 동시에 더 확장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모트의 확대 전도 주장은 전통적 선교개념으로부터의 이탈이었다. 윌리엄 호킹(William E. Hoking)의 주장은 보다 과격했다. 1931-2년 중국 일본 인도 등을 방문한 그는, 힌두교 신자는 더 좋은 힌두교 신자로, 불교 신자는 더 좋은 불교 신자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른 선교라고 주장하면 서 선교관의 재고를 요구한 것이다. 이런 변화는 SVM 대회에서의 해외선교 지망자의 감소에 도 반영되었다. 즉 1920년에는 선교지망자가 2,783명에 달했으나, 1921년 637명, 1934년 38 명, 1938명 25명으로 현저히 축소되었다. 4년마다 모이는 SVM 대회 참석자 수도 1920년대 이후 격감했다. 1920년 데스 모이네스 대회에는 6,890명이 참가했으나 1940년 토론토대회에는 465명이 참석했고, 거의 그 생명력을 상실했음을 알 수 있다. 비효율적인 조직, 재정적인 어려움 등이 이유로 제시되지만 가장 중 요한 이유는 복음전도에 대한 관심보다는 사회 개혁에 대한 관심의 심화였다. 즉 전도와 선교 와 같은 본래적인 활동이 약화되고 인종문제, 경제적 불평등과 같은 사회적인 이슈를 강조하 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40년 이후에는 SVM의 활동이 사실상 중단되고 만다. SVM 57) Herbert Kane(박광철역), 기독교 세계선교사 (서울: 생명의 말씀사, 1981), 148; Herbert Kane, 세계선교의 어제와 오늘, 104. 58) 폴 피어슨, 기독교선교운동사 522; C. Peter Wagner, Church Growth and the Whole Gospel, (NY: Harper, 1981), 제6장 참고. 한국복음주의역사신학회 제32차 및 한국교회사학회 제125차 공동학술대회 -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