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재특회 활동과 시민 양심, 재일동포 민족교육과 과제 이수경( 李 修 京 ) / 도쿄가쿠게이( 東 京 学 芸 )대학교 교수 Key words;경제 불황, 인터넷, 재특회, 헤이트 스피치, 특수공간 일본, 동포 민족교육 들어가며 일본의 장기적 디플레이션으로 인한 경제 불황 및 3.11도호쿠 간토 대지진의 여파와 후쿠시마 원전 사건 후의 수습 등으로 인한 사회적 침체는 일본 국내의 경기 회복과 사회 활성화를 위한 긍정적인 대안보다, 배타적인 내셔널리즘으로 결속을 도모하며 과거 일본의 침략전쟁에서 파생된 주변국과의 역사를 왜곡하며 과거의 국가 이미지 불식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고 있다. 정부의 우경화 흐름에 편승하여 사회적 영향력이 없었던 소위 [히키코모리] 성향의 생활 불만자들은 자신들의 [떼쓰기] 행위가 [애국]이란 미명으로 합리화 혹은 정당화된다는 어긋난 집단행동으로 사회진출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특히 13,000명 이상의 회원을 가진 재특회에 의한 재일동포 공격이나 한국 역사 왜곡은 위험 수위를 넘고 있다. 세계적인 인권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일본의 수도 도쿄의 중심에서 잔인한 표현을 여과 없이 뱉어내는 그들의 행위에 정치적 규제조차 제대로 가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1995년에 유엔 인종차별주의철폐조례를 체결하였다는 일본의 사회병리(social pathology)현상의 하나로 생겨난 재특회의 존재와, 그들의 무분별한 헤이트 스피치 (hate speech, 증오/혐오 발언)행위로 차별적 고통과 위협을 받는 재일동포들에 대해 자발적 움직임을 보여 준 일본의 양심 있는 시민들의 차별 반대 운동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한편, 남북이 분단된 상태로 60년 세월을 보내고 있는 한반도보다 더 복잡하게 얽혀져 있는 재일동포의 삶터인 [일본]이란 특수 공간 속의 민족교육과 역사, 재일동포들의 우선 과제에 대해 고찰해 보는 것도 본 연구목적의 하나이다. 1. 일본의 우경화 정책이 날개를 달아 준 일본의 수치( 羞 恥 ) 2011년에 발생한 3.11 도호쿠 간토 대지진은 90년대 거품 경제 붕괴 이후 침체되어 가던 일본 사회를 예측 불허의 자연재해와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유출이란 극도의 불안 속으로 몰아넣었고, 사회 파멸만은 막아야 한다는 강한 조바심이 정치 경제계를 비롯해 각처에 파급되면서 강력한 일본 민족의 결속 기즈나. きずな 을 민심 수습의 슬로건으로 외치게 된다. 오랜 자민당 정권 기간을 통해 발전을 거듭해 온 원자력 발전소의 문제가 지진이란 대재난 속에서 분출되자 당시 집권 여당이 된 민주당에 의해 비난 책임이 쏟아질 것을 두려워 한 도쿄전력 및 관계기관의 비협조적 태도가 노골적으로 표출되었고, 상상을
초월한 수습 대책이 한계에 부딪치면서 민주당 내부 분열 및 갈등이 불거지자 일본을 변혁시키려했던 민주당은 사회적 소수세력의 무력함을 토로하고 말았다. 한편, 국가 존망이 걸린 대재난의 혼란 속에서 국민과 사회의 안정에 전력을 다해야 한다는 초당적 협력 자세보다 개개인의 당파적 입장과 권력의 잣대에 연연하는 초라한 정치가들의 이기성도 여실히 보여 준 사례였다고 지적할 수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자민당 정권이 집권하고, 아베 신죠 수상은 재임과 더불어 대중영합주의를 의식한 강한 일본으로 되돌리자 는 슬로건을 걸고 경기회복과 경제부국을 지향한 아베노믹스를 정책안으로 내 세우게 된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 등의 급격한 경제적 성장과 사회적 발전에 비해 전반적으로 만연된 일본 사회의 고령화와 저출산 및 고령화 사회 속의 노동시장 및 국가 성장 동력 확보가 쉽지 않은 사회 불안과 침체된 경제적 불황을 불식하기란 쉽지는 않다. 일본 총무성이 10월1일에 발표한 8월의 완전실업률은 4.1%이며, 남성의 완전 실업률이 0.3포인트 상승한 4.5%, 여성 완전실업률도 0.4% 상승한 3.7%였고, 남성의 완전 실업자수가 170만 명으로 지난 달 보다 11만 명이 증가. 여성은 102만 명으로 10만명이 늘어났다. 1) 한편, 지난 7월의 참의원 선거 압승으로 네지레( 捻 じれ) 2) 를 해소 3) 하며 자신감을 얻은 아베정부는 본격적인 자위대의 군대화 준비 작업에 착수하며 재무장을 위한 군사력증강 및 헌법개정안에의 움직임을 원활히 하기 위한 사회분위기조성에 역사왜곡, 특히 일본군 위안부의 군관계 부정/은폐설 주장 및 영토 문제 등을 구실로 삼다가 각국의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한국과 중국의 비판에 대해 [아시아에는 중국, 한국만 있는게 아니다] 4) 는 반발로 강경책을 주장하는 아베 수상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와 일본 자위대의 분쟁지역 파견 등을 명분화 할 자위대의 군대화를 서두르고 있다. 그 배경으로는 국내의 軍 産 복합체 및 군수산업체 활성화, 첨단 무기개발 5) 및 군비 증강 확대를 통한 산업 성장을 꾀하려는 의도도 무시할 수 없다. 또, 대외적으로는 자위군 파 병 및 그들의 무기 사용을 통한 일본의 위력 홍보 등의 부국강병책으로 세계적인 위상을 되찾겠다는 시대 착오(anachronism)적 군국주의 발상이 내재된 [적극적 평화주의를 위한 행동]의 강국 노선책 6) 이 저변에 깔려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도쿄 올림픽 유치로 특수 경제 및 경기 회복을 염두에 두고 IOC총회에서 [도쿄 안전]선언을 내세우긴 했으나 한국에서 일본 수산품 전면 수입 금지를 하는 등, 1) 니혼게이자이신문( 日 本 経 済 新 聞 ) 2013년10월10일자 인터넷판 참조. http://www.nikkei.com/article/dgxnasfl010ld_r01c13a0000000/ 2) 내각제도의 일본 국회에서 하원인 중의원이 다수를 차지하는 여당이지만 상원인 참의원에서는 의원이 소수인 현상에서 생겨난 정치적 뒤틀림을 이르는 말. 3) 동아일보 2013년10월16일자,18면 참조. 4) 위와 같음. 5) 일본은 패전이 가까워지는 1944년 6월부터 강력한 위력을 가진 원자폭탄 제조를 위해 육군항 공본부는 조선총독부하의 황해도 연백군에 있던 菊 銀 광산에서 우라늄 광석을 채굴하는 등, 한 반도에서 흑사1200톤을 포함한 약 300kg의 산화 우라늄을 확보하여 원자폭탄제조를 시험한다. 山 崎 政 丞 日 本 の 核 開 発 :1939-1955 原 爆 から 原 子 力 へ 東 京 績 文 堂 2012 56-57쪽 참 조. 6) 2013년10월15일의 임시국회에서의 연설내용으로, 다음날인 16일, 아베 및 이시하라 신타로의 연설은 NHK라디오를 통해 재방송되었다. 필자는 재방송을 확인.
현실적으로는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 오염수 유출 문제로 [일본]이란 국가 신뢰도는 하향선을 향하고 있다. 참고로 2013년6월5일, 후쿠시마현민 건강관리조사 검토위원회는 후쿠시마의 17만4천명의 검진 결과, 갑상선 암 [확정]이 12명, [암 가능성 의심]이 15명이라고 발표했으나 후쿠시마현의 견해에 불신을 가진 시민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7) 이런 심각한 사례의 증가 및 원전 재가동 반대에 대한 시민의식의 고양을 저지하려는 의도인지 아베 수상은 러시아 및 중동 국가와의 관계 개척을 전개하며, 상기의 현실 감안과 향후의 원전 사고로 인한 폐해 증가에 따르는 국내 여론을 통제 8) 하기위하여, 주변국 9) 으로부터의 테러방지 및 영토보호란 미명아래 일본판 NSC(국가안전보장회의) 시스템을 국회에서 통과시켜서 여론 조절을 하려는 난폭한 우민정책조차 시도 중에 있다. 정부의 이러한 우경화 정책이 미디어를 통해 확산되고 있을 때, 날개를 얻은 듯이 자 신들의 존재를 내세우며 활발히 헤이트 스피치 행위를 한 것이 재특회 조직이었다. 개인적인 주장이나 개인 활동의 존중보다 조직적 화합 및 단체를 위한 소수 희생을 미덕 으로 세뇌시키며 보국 국민을 양산하여 근대 전쟁에 자국민 300만 명(당시의 식민지 등 타민족 2000만 명 이상)을 희생시킨 일본의 역사적, 사회적 특성을 감안할 때, 인터넷의 보급은 적극적인 외부 활동이나 노출을 꺼리던 사람들에게 만남의 공간을 제공하는 계기 가 되었고, 아베 정부의 우경화 정책에서 힘을 얻게 된 그들은 [공동의 표적] 을 [약자, 소수자]이자 일본에서 태어나 오갈 데 없이 일본에서 생활해야만 하는 동포들의 약점을 빌미로, 비열하게 재일동포를 공격 타깃으로 삼고 있다. 그들은 동포는 물론, 한류 문화 불식 운동과 한반도(남북한) 비난 매도를 아베 정권의 우경화와 맥락을 같이 하는 애국 행위라고 합리화하며, 집단적 행동을 하거나 한국까지 와서 말뚝을 박는 빗나간 [만용]조차 보이고 있다. 재특회는 도쿄 올림픽이 유치된 당일 오후, 기존의 데모 코스였던 도쿄의 한인타운 신오오쿠보( 新 大 久 保 )를 벗어난 유명 전자상가 아키하바라( 秋 葉 原 ) 10) 에서 한국학교 무상화 반대를 외치며 올림픽 유치 성공과 더불어 무절제한 쾌감 행위를 즐겼다. 그것은 몇 시간 전에 세계무대에서 [도쿄 안전]을 외쳤던 아베 수상의 대외 정책 선언을 도쿄 중심에서 뒤집어 엎어놓는 행위가 되었고, 재특회가 올림픽 유치 도시 도쿄의 수치로 전락한 순간이기도 했다. 2.사쿠라이 마코토와 재특회의 활동 거품경제 붕괴 이후, 불경기와 사회 불안정 속에서 생활 불만을 인터넷 공간에서 사회 7) Days Japan Vol.10,No.7,2013 Jul, 東 京 12-13쪽 참조. 8) Civilian control에 입각한 민주국가를 표방하는 일본이지만 여론 통제의 단계적 제도화 설치 의 의도 배경에는 자위대의 군대화 및 군국주의적 통제 정책을 행하려 하고 있고, 그런 의도를 간파한 언론 및 시민단체의 항의가 계속되고 있다. 9) 특히 2030년에 미국 추월 정책을 내세운 중국 및 핵미사일 보유의 북한을 공공연한 위협도구 로 선전하고 있다. 반면, 일제강점기 청산이 되지 않은 북한과의 정상화 추진을 위해 아베 수 상은 한국 및 중국과의 냉각 관계 속에 이이지마 ( 飯 島 勲 内 閣 官 房 参 与 )특사 파견 등의 전략술 을 펴기도 했다. 毎 日 新 聞 2013년 5월28~29일 인터넷판 참조. http://mainichi.jp/feature/news/20130529dde012010002000c.html 10) 도쿄역 근처에 자리한 세계적인 전자상가로, 현대 일본의 대중 문화 발신지로 널리 알려져 있 다.
적 약자, 소수자 를 표적으로 삼고 공격하던 개개인들이 공감대를 형성하는 움직임을 보이자 정부의 우경화 정책을 이용하며 자신들의 사회적 입지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그들 의 전국적 조직화에 앞장서고 있는 것이 재특회(재일 외국인의 특권을 용서하지 않는 시민의 모임) 이다. 2007년 11) 부터 활동개시를 사이트에 공개하고 있는 재특회 회장 사 쿠라이 마코토( 桜 井 誠 ) 12) 는 어릴 때 가정폭력의 아버지와 이혼하고, 작은 코너 술집(스 넥 바)을 경영하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나 고교 때부터 당뇨병을 앓는 등, 학교에서의 교류 관계는 거의 없는 어두운 삶이었고, 고교 졸업 후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하다 1997 년에 도쿄로 와서는 경비원 일을 하는 등 사회적으로 내세울 것이 없는 일을 하다가 인 터넷을 통해서 표면적 활동을 하기 시작한다. 13) 그의 출생 및 가정적 배경은 이미 그의 어머니가 14년 전에 사망하였고, 학창시절 부근의 조선학교 학생들과 싸움을 했다는 증 언이 없으므로 그의 재일동포 관련 혐오 발언에 이른 내력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가 [조선인]이란 재일동포를 철저한 공격 기호로 내세운 배경에는 그의 성장과 깊은 관계가 있음은 추측할 수 있다. 한편, 일본이 재일동포에게 특별영주권과 생활보호 등을 부여하는데 대한 불만을 노골 적으로 비난하며 [애국]이란 측면에서 합리화 이론을 만들어가자 사회적 영향력이 없었 던 비슷한 유형의 각지의 불평 불만자들이 지지를 하기 시작했고, 그 조직 규모 14) 가 확 대되어가자 전국규모의 헤이트 스피치 활동을 전개하게 되고, 언론 보도로 인해 선전이 되자 자신들의 존재가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이다. 즉, 인터넷을 통하여 누구라도 그들과 취지만 함께 하면 간단히 사회적인 활동, 나아가서는 자신들의 활동을 [애국적 움직임] 으로 미화시키며 사회와 관련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15) 우익단체 잇스이카이( 一 水 会 )고문인 스즈키 구니오( 鈴 木 邦 男 )가 말하듯이 우익단체 사람들은 모두 인터넷을 하고 있습니다. 재특회는 인터넷 사용 방법이 능숙해서 감탄을 합니다. 자민당이 왜 인터넷에 주목을 했는가 하면 나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젊은이들이 보수화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터넷의 해금은 안 할 것이 고, 뿐만 아니라 18세 이상에게 선거권을 부여하는 것도 안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젊 11) 재특회 공식 웹사이트에는 2007년6월9일자로 사쿠라이 마코토가 재특회의 설립취지 및 재일 동포에 대한 비방의 설명문 등을 게재하고 있는데, 嫌 韓 流 로 한류 및 한반도 역사/문화 관 련을 부정적인 시점에서 출판하여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던 야마노 샤린( 山 野 車 輪 )이 그들 사이 트의 재일동포 관련 설명의 삽화를 담당하고 있다. http://www.zaitokukai.info/ http://www.zaitokukai.info/modules/zaiko/01.html 12) 본명은 다카다 마코토. 1972년 후쿠오카현 기타큐슈 나카마쵸에 있는 현립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아르바이트 등을 전전하다 도쿄로 옮김. 그가 컸던 곳은 총련계 조선학교 및 코리안이 모 여사는 마을과 가까웠다. 그의 어머니는 조선학교 근처의 역 부근의 빌딩에서 [황혼(たそが れ)]이라는 작은 코너 술집을 경영하며 두 아들을 키웠는데, 1년 반을 사쿠라이 및 재특회를 취재한 야스다 고이치 기자에 의하면 다카다의 고교 때 이미지는 동기들에게 거의 기억이 없을 정도로 말이 없고 인상이 없었다고 한다. 安 田 浩 一 ネットと 愛 国 在 特 会 の 闇 を 追 いかけ て 東 京 講 談 社 2012년 16-25쪽 참조. 13) 상게서, 安 田 浩 一 ネットと 愛 国 在 特 会 の 闇 を 追 いかけて 24-30쪽 참조. 14) 2013년10월21일 현재 13,903명이 회원이라고 공식 사이트에 게재되어 있다. http://www.zaitokukai.info/ 참고로 연간1만엔의 회비 회원 뿐 아니라 취지 동의의 인터넷 회원도 포함하고 있다. 15) 재특회와 우익 네트 및 현재의 아베정권의 네트 전략 관계에 대해서는 다음 책에 상세히 게 재되어 있다. 安 田 浩 一 山 本 一 郎 中 川 淳 一 郎 ネット 右 翼 の 矛 盾 憂 国 が 招 く 亡 国 東 京 宝 島 社 2013년 상게서, 安 田 浩 一 ネットと 愛 国 東 京 講 談 社 2012년. 津 田 大 介 香 山 リカ 安 田 浩 一 외 安 倍 政 権 のネット 戦 略 東 京 創 出 版 2013년.
은이들에게 선거권을 주면 모두 사회당, 공산당으로 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부터 는 자민당이나 유신의 모임으로 갈 테니까요 16) 라는 말에서 인터넷이 얼마나 우익적 성 향을 촉발시키는 매개체가 되고 있는지를 알 수가 있다. (사진. 왼쪽은 재특회 공식사이트, 오른쪽은 일본 외무성 인종차별철폐조약 공식 사이트) 한편, 인터넷 온라인 게임 등에 익숙하기도 한 그들은 호전주의적 전쟁게임을 즐기는 성향이 있다. 그렇기에 과거 일본의 군국주의 침략전쟁에서 러시아의 발틱함대에 승리했고, 아시아 최고의 열강으로 중국과 한반도 등을 지배 통치했던 암흑의 시대를 일본의 화려했던 시대로서 동경을 하며 호전주의 전쟁놀이처럼 재일동포들을 짓밟는 언어 폭력을 쾌감으로 즐긴다. 동포들의 차별 받았던 과거는 당연시 생각하며, 인권과 복지 선진국을 표방하며 과거 침략전쟁의 희생자들과의 공존 상생을 위해 점진적 개선을 해 온 사회적 제도 평등에 대해서 가차 없는 불만을 표출하는 것이다. 사회적인 인정을 받기 위한 인간적 노력이나 [우익]이라 불릴 국가를 위한 헌신적 희생보다 단지 [일본인]으로 태어난 것만을 주장하며 [떼쓰기]를 합리화하는 이기성이 여실히 드러나는 행위를 하고 있다. 게다가 2002년 한일 월드컵 공동개최 이후, 급증하는 한류 문화 도입과 한국 소개 등으로 일본 대중문화의 존재가 흐려지자 강한 위기의식과 조바심을 느끼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과거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약소국 한국의 경제적 문화적 17) 성장 속에서 16) 전게서, 安 田 浩 一 외 安 倍 政 権 のネット 戦 略,7쪽. 17) 한류 문화의 인기 및 매력적인 문화컨텐츠 개발, 지리적 근접성, 여성 타깃의 에스테 및 다양 한 저가 화장품 개발, 각종 의료서비스 등을 통해 많은 일본 여성들의 마음을 앗아간 [한국]에 대한 질투, 시기와 같은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볼 수 있다.
수많은 일본 여성들이 매력적인 한류 컨텐츠를 즐기게 되자 마치 어머니나 누이를 빼앗긴 듯한 질시적 감정을 공유하며 배타적 행동에 나서게 된다. (사진. 2012년 8월, 이명박 대통령의 독도 방문 후 냉각상태 속에서도 한류 스타 특집을 발간한 일본의 주간지 여성 세븐( 女 性 セブン) ) 문화 컨텐츠 개발로 다양한 한류 문화가 제공되자 단조로운 삶에서 이에 매료되는 여성들이 늘어나고, 한류문화로 즐거워하는 자국 여성들에 대한 분노와 일종의 버림받은 듯한 초라한 감정의 교차를 공유하면서 혐한류 의 공격적인 표현으로 위로를 받던 그들은 아예 재일동포는 물론 한류 매도, 근대사 왜곡 등 한반도 관련을 일체 부정하려는 집단적 행동에 나서게 된다. 특히 일본의 약자, 소수자 로 차별받고 살아 온 재일동포 18) 에 대한 집중적 공격이 곧 애국이란 망상으로 과격한 행동을 서스럼 없이 행한다.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대의명분을 얻기 위해 일본인으로 애국자임을 주장하며 천황폐하 만세 나 고유의 영토 수호 를 외치기도 하고, 때로는 일본의 침략전쟁을 성전이라 미화하며 위대한 애국 영웅 적 활동이라는 자아도취에 취하기도 한다. 국경일 등의 휴무일에는 도쿄, 오사카 등의 거리를 활보하며 [한국인 조선인 여자들은 창녀들이니 강간하거나 죽여라] 19) 는 등의 광기어린 표현조차 내뱉고 있다. 특히 아베정권 집권 이후 우경화에 활력을 얻은 듯 그들의 움직임은 거침이 없다. 예를 들면 지난 2013년 구정 명절이었던 2월 9일부터 10일에 도쿄의 한류문화 거리로 알려진 신오오쿠보( 新 大 久 保 )에서의 재특회 데모에서는 해충 구제 를 해야 하기에 좋은 한국인도 나쁜 한국인도 어느 쪽도 죽여라 는 무차별 살인을 조장하는 듯한 푯말을 들고 외쳤고, 조선인 목 매달고 독 마시고 (높은 곳 등에서) 떨어져라 는 등의 섬뜩한 표현은 물론, 한반도와 관련된 모든 한국/북한/조선 관련자는 다 죽여라, 다 쫓아내라 고 외쳤고, 2월 9일(토)의 재특회 데모 타이틀이 불령선인( 不 逞 鮮 人 ) 추방! 한류 박멸! in 新 大 久 保 였다. 20) 18) 여기서는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와서 살게 된 동포 및 그 자손들을 말하며, 1965년 한일정 상화 이후에 온 [뉴 카머]가 아닌 [특별 영주자]를 이른다. 19) 특히 2013년3월31일, 도쿄, 오사카 등 주요도시에서 재일동포 매도 퍼레이드를 축제처럼 부 추키며 즐기자는 재특회의 움직임으로 큰 규모의 헤이트 스피치 행위가 각지에서 일어났다. 20) 이수경 한반도 정전 60주년, 또 다른 민족분단으로 복잡하게 얽힌 재일동포사회 세계한인 신문(OK TIMES) 2013년2월19일 인터넷판 참조. http://www.ok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9
(사진은 필자가 대표를 맡고 있는 한국학연구소 연구원 T씨 촬영) 불령선인은 주지하듯이 일제 강점기 때 한국인을 비하 차별한 용어이다. 혐오스런 표현이 극에 달하건만 소위 시민경찰은 보호라는 미명하에 수수방관하며 재특회 데모를 되레 안전하게 호위하는 형태만 유지하니 인권대국을 표방하는 일본의 시민 경찰의 한계라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2월 17일(일)에는 2월22일 시마네현의 다케시마의 날 행사를 의식해서 한국 다케시마로부터 두들겨 패서 내쫓아라! in신오오쿠보 라는 타이틀로 가두 시위를 벌렸다. 이번엔 경찰들이 그들의 폭동행위나 국제 언론을 의식해서인지 경찰기동대 차량이 대기하였고, 헤이트 스피치를 반대하는 일본 시민들도 그들과 같은 시간 같은 곳에서 한일교류 및 상생과 우정을 호소하는 가두행진을 했다. 다케시마에 있는 불법 한국인들을 사살해라. 한국이 불법점거를 계속 한다면 서울거리를 불태워 없애자. 불바다로 만들자. 한국 같은 작은 나라에 다케시마를 주는 것은 절대로 있어선 안 된다. 패 쫓아내자!! 한국인들/조선인들/그들 편을 드는 이들은 다 죽여라. 한국인은 적이므로 죽여라. 21) 라는 무차별 살인을 조장하는 위협적 발언은 총련계 민족학교에도 어린 아이들이 교육을 받는 와중에 전개되었다. 이 부분은 뒤에 상세히 논하도록 한다. 한편, 재특회 및 근대사 왜곡을 의도하는 일부 우익들이 가장 은폐, 소멸시키고 싶어 하는 것이 일본군 위안부 문제이다. 1932년에 상하이파견군 참모부장 오카무라 야스지( 岡 村 寧 次 )가 일본군의 현지 강간사건을 막기 위한 대안으로 위안소를 설치하자 장기전에 염세적이던 군인들에게 처음엔 취직 알선 형태에서 전쟁말기가 되면 납치형태로 식민지 여성들을 전쟁터로 끌고 가게 된다. 1944년8월의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자 14-40세의 조선 및 타이완 여성들이 동원되고, 군/관/관련업자에 의해서 8만-20만 명의 여성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전쟁터에 끌려가서 참혹한 생활을 강요당하였고, 심신은 물론 인생 자체를 파괴당하며 고통스런 삶을 살아왔던 그녀들이었기에, 오늘날 인권 의식을 표방하는 국제적인 시대감각에서 보면 수치스런 자국의 역사일 수밖에 없기에 눈앞의 국가 이미지만 불식하려는 정치가나 일부 양심 21) 위와 같음.
없는 우익들이 필사적인 은폐 혹은 왜곡 작업을 하고 있는 이유가 그곳에 있는 것이다. 22) 광기 서렸던 전쟁터에서 심신은 물론 인생조차 파멸당한 일본군 위안부 여성들을 몰지각한 정치가들이 조선의 위안부들은 창녀들이었다 고 매도하며 역사적 은폐를 시도하자 재특회 등도 사회 영향력에 기회를 얻으려고 [발악]을 서슴지 않는다. 23) 지난 2013년 3월 31일의 오사카의 한인타운 츠루하시의 헤이트 스피치 데모를 특집한 朝 日 新 聞 에서 역설하듯이 독일에서는 형법으로 나치정권하의 홀로코스트를 부정하는 언동을 [민중선동죄]로 처벌하며, 영국이나 캐나다에서도 이러한 인종 차별적 행위에 대해서는 헤이트 스피치 규제법이 존재한다. 일본도 인종차별철폐조약에 가맹하고 있는데 24), 조약 4조에서는 인종차별의 선동을 법률로 금하도록 되어 있으나 일본 및 미국 정부는 이 조문을 유보 중이다. 25) 그런 면에서 일본은 아직도 인권실천에 있어서는 소극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혐오스런 표현으로 극도의 잔인한 언어폭력을 행사하며 즐기고 있는 그들의 행위가 곧 일본의 국제적 망신임을 방관하고 있는 일본 정부 측 입장이 일관성 없이 보인다는 빈축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3.헤이트 스피치 데모 속에 보여 준 일본 시민 양심의 결속 2009년 12월 4일, 일본의 귀족문화가 발달한 헤이안( 平 安 )시대의 수도이자 백제 무녕왕의 딸 다카노 니이가사의 아들인 간무( 桓 武 )천황 26) 이도읍한이래 1000년의 고도( 古 都 )로 유명한 교토의 조선제1초급학교(초등학교)에 들이닥친 재특회의 헤이트 스피치 행위로 학교 앞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어린 아이들은 공포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그동안 경제적 곤란 때문에 충분한 학교 부지 확보가 불가능하여, 건물 주변의 공원 일각을 지방자치체에 등록을 하고선 학교 운동장 대신으로 장기간 사용해 왔던 것인데, 그것을 돌려주고 조선인들은 자국으로 돌아가라고 소동을 벌렸던 것이다. 27) 다음 해인 2010년 3월까지 총 3회에 걸쳐서 초등학교 주변은 물론, 교문을 두드리며 확성기로 위협행위를 하였고, 원고 측인 학교법인 교토 조선학원은 마이너리티가 속하는 민족의 22) 李 修 京 書 評 : 重 重 中 国 に 残 された 朝 鮮 人 日 本 軍 慰 安 婦 の 物 語 季 論 21 2013년 가을 호, 東 京,203쪽 참조. 23) 嫌 韓 流 와 맥락을 함께하는 사쿠라이 마코토도 다음 책에서 종군위안부는 창녀설로 호도 하고 있다. 桜 井 誠 実 践 ハンドブック 嫌 韓 流 反 日 妄 言 撃 退 マニュアル 東 京, 晉 遊 舎,2006년, 70-75쪽 참조. 24) 1965년 제20회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인종차별철폐조약은 1969년에 발효되었고, 일본은 1995 년에 가맹하였는데, 일본 외무부는 아래와 같이 그 전문을 공개하고 있다. [인종차별철폐조약 은 인권 및 기본적 자유의 평등을 확보하기 위해 모든 형태의 인종차별을 철폐하는 정책 등을 전부 적당한 방법에 의해 지체없이 대응할 것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http://www.mofa.go.jp/mofaj/gaiko/jinshu/ 25) 朝 日 新 聞 2013년4월6일자 참조. 26) 2001년11월에 현재의 헤이세이( 平 成 )일왕(일본에서는 천황으로 칭함)이 한일 월드컵 공동 개 최에 임하여 간무천황을 논하며 한반도에 친근감을 가진다며 한일 양국간의 교류 도모를 발언 했으나 Newsweek 등의 몇 개 언론 외에는 일본 국내 언론에는 보도가 되지 않았다. 27) 이수경 일본 우익단체의 행동은 국수주의 발로( 發 露 ) 세계한인신문(OK TIMES) 2009년12 월27일자 인터넷판 참조. http://www.ok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1188
언어로 교육을 받는 [민족교육권] 침해를 주장. 재특회는 [표현의 자유]를 주장했다. 그 결과, 2013년10월7일에 교토지방재판소는 재특회의 [표현의 자유]라 칭하는 그들의 과격행동을 동영상 촬영후 인터넷 공개를 한 행위 등에 대해 [(일본도 비준하는)인종차별철폐조약에서 금지된 인종차별에 해당하므로, 위법이다]고 지적한 뒤, [시위활동에 의하여 아동들을 위협하고 일반 수업을 곤란하게 하여 평온한 교육사업을 해야 할 환경을 저해하여 명예를 훼손시켰다]는 이유로 불법 행위를 지적하고, 향후 학교 반경200미터내의 가두행위 금지 및 약 1200만 엔의 배상을 명하였다. 28) 또한, 가두시위를 한 재특회 전 멤버8명 중 4명은 위력업무방해죄로 유죄가 확정되었다. 29) 어린 초등학생들이 교육을 받는 환경에 대한 과격 시위행위였던 만큼, 일본 시민들의 보편적인 지지가 전국 규모로 확대된 것도 간과할 수 없다. 참고로 니혼게이자이신분( 日 本 経 済 新 聞 ) 의 10월7일자 기사 내용을 보면 재특회 홈페이지에 회원수가 약 13,800명으로 보도되어 있으나 필자가 확인한 10월21일 현재는 13,903명으로 증가되어 있었다. 한편, 헤이트 스피치의 도를 지나친 과격한 행위는 법적으로 저지해야 한다고 일본 법조계에서도 양심적 성명을 하고 나선다. 2013년3월29일자로 공안 및 경시총감, 도쿄변호사회 회장에게 외국인의 안전을 호소하고 인권구제신청서를 청원한 것은 사회 인권활동가로도 알려진 우츠노미야 겐지 변호사를 비롯한 12명의 변호사들이었다. 그들의 인권구제신청서 내용에 적힌 재특회 측의 무차별 살인을 종용하는 듯한 발언을 보면 아래와 같다(번역 필자). [(전략) 재특회를 비롯하여 본건단체는 모두 재일코리안에 대한 공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본건단체의 데모 참가자는 재일코리안을 공격하기 위해 모두 아래와 같은 언동으로 큰 목소리로 외쳐대며 데모를 행하고 있다(3월16일자 아사히 신문 갑5). 조선인을 죽여라! 조선인을 패서 내쫓아라! 조선인을 사살하라! 조선인은 바퀴벌레다! 조선인은 범죄자다! 28) ヘイトスピーチに 賠 償 命 令 京 都 地 裁 初 の 判 決 日 本 経 済 新 聞 2013년10월7일. http://www.nikkei.com/article/dgxnasdg0701d_x01c13a0cc0000/ 29) 表 現 の 自 由 ではなく 国 際 条 約 に 反 する 行 為 産 経 新 聞 2013년10월7일. http://sankei.jp.msn.com/west/west_affairs/news/131007/waf13100712000014-n1.htm
동시에 본건단체의 데모 참가자는 다음과 같은 푯말을 들고 데모 행진에 참가하고 있다. 좋은 조선인도 나쁜 조선인도 모두 죽여라 (갑6) 한국 악, 한국=적 그러므로 죽여라 (갑7) 조선인 목 졸라라, 독 마셔라, 뛰어 내려라 (갑8) 이상과 같은 발언 및 푯말은 분명히 상식을 벗어나고 있으며, 우선, 대량살인의 선동은 형법의 소란죄(형법106조), 영업방해는 위력업무방해죄(234조), 보행자나 점원에 대해서 뱉은 발언은 협박죄(형법 222조), 모욕죄(231조)를 구성한다. 또한 형법의 문제를 떠나서도 주위의 환경에 미치는 영향은 막대하다. ] 30) 이들 12명의 변호사들의 재특회 및 유사 단체의 헤이트 스피치에 대한 법조계의 양심적 행동은 일본의 인권을 지키려는 자존심 있는 수많은 시민들에게도 영향력을 미쳤고, 급기야는 좌우파를 초월한 시민 문화단체가 행동 선언을 하게 된다. 한편, 일본의 오피니언 리더로 알려진 민주당의 아리타 요시후( 有 田 芳 生 )의원은 본인이 직접 재특회와 함께 데모에 참가하는 등 그들의 분위기 파악을 위하여 발로 뛴 의원이기도 하다. 그는 그런 재특회의 심각성을 염두에 두면서, '헤이트 스피치 초당파 연구회'를 결성하여 17일 국회에서 '표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헤이트 스피치를 처벌해야 한다'는 주제로 세미나를 갖는 등 규제법 마련을 위해 민주당 사민당 등의 의원 14명과 함께 세미나를 개최하기도 했고, "증오 발언은 언어폭력을 뛰어넘는 '나이프(칼)'"이고 "증오 발언을 방치할 경우 일본이 전전( 戰 前 1941~45년 태평양전쟁 이전)으로 회귀할 수 있다" 31) 라고 우려하며 정치적 대응을 궁리하는 중이다. 한편, 지난 2013년 9월 25일에는 재일동포에 대한 차별 반대 단체인 '노리코에(극복) 네트워크 We Shall Overcome! (hate speech와 racism을 극복하는 국제 네트워크)' 32) 가 출범하였다. 일본의 보수/진보/소수인 아이누/재일동포/부락동맹 등을 초월한 지식인들이 재특회 반대의 취지로 모인 이 단체엔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나 와다 하루키, 우에노 치즈코 도쿄대 명예교수들, 재일동포 평론가 신숙옥, 진보성향의 평론가 사타케 신, 우익정치단체 '잇스이카이'의 스즈키 구니오 고문 등 총21명의 공동 대표로 30) 이수경 외국인 배척행동 반대에 나선 日 양심변호사들 세계한인신문(OK TIMES) 2013년4 월1일. http://www.ok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245 31) 조선일보 2013년10월18일 인터넷 판 참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3/10/18/2013101800261.html?ns 32) 다음의 공식사이트에서 설립 취지를 상세히 볼 수가 있다. http://norikoenet.org/index.html
발족한 이 단체는 인종 차별주의가 없는 일본 사회 바로잡기에 나선 연합네트워크인 셈이다. [양심을 가진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헤이트 스피치]의 본질을 추구하는 선언문에는 보편적인 인간으로서의 가치를 논하는 인권 의식이 강렬한 인상을 준다. 앞에서 적었듯이 일본이 1995년에 인종 차별철폐조약을 체결은 했으나 아직 국가 차원에서의 인권옹호기관이 없는 이상, 이들의 최종 목표는 차별금지법 제정과 인권위원회 설정에 있다. 33) 이 단체엔 협력 변호사가 약 100명이 있고, 무엇보다도 국제적으로 시민 연대 네트를 만든다는 것은 국경이 낮아진 이 시대의 보편적 인권 의식 및 차별 문제에 대한 공감대 형성과 문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할 수 있는 기반이 될 것이다. 그 외, 각종 차별과 싸우는 다양한 시민 단체들의 활동도 간과할 수 없다. 그들의 역사를 왜곡하며 소수 약자 층을 모욕하고 증오하는 차별적 폭력행위를 일본 사회에서 없애야 한다는 책임감이 이런 때 일수록 강하게 표출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지켜 온 문화 시민으로서의 인도주의적 의식은 물론, 인적/지적 재산 및 사회적 영향력은 결코 만만치 않기에 차별과 싸우는 모든 시민들과 연대하며 결속하려는 양심 세력들이 무책임과 무관심이 만연하는 일본 사회에 새로운 시민 문화 인권운동의 태동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닐까? 4. 재일동포의 갈등과 민족교육 고찰 주지하듯이 남북한은 일제 강점기가 끝난 1945년 이후 혼란스런 시기를 거치며 한반도 대립갈등이 격화되었고, 미소 양국 간의 냉전에 휘말리며 1948년에 남북 정부가 각각 수립되었고, 1950년엔 한국전쟁 발발로 인해 3년간의 동족 간 전쟁으로 100만 명의 희생과 파괴된 한반도 땅을 치유할 여유조차 없이 반으로 긋고 휴전선 설치로 분단국가가 되었다. 그것은 수많은 동포들이 생활하던 일본 땅의 동족간의 분단을 알림이었고, 식민지 지배통치 가해국 땅이라는 특수 공간에서 살아가는 남북한 동족이 또 다른 분열과 갈등으로 얽히며 대립하는 계기가 되었다. 해방직후인 1945년10월15일에 조련계 중심의 재일본 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을 설립하고, 민전 해산 다음 날인 1955년5월25일에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이 설립되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재외공민 이라는 입장과 일본에의 내정불간섭이라는 방침을 내세웠다. 한편, 조련의 좌경화에 이념적 갈등과 분열이 생기고, 이에 반발한 사람들이 조선건국촉진청년동맹 (건청)을 결성한다. 건청은 1946년1월에 결성된 신조선건설동맹 (건동)과 합동으로 1946년 10월에 재일본조선거류민단 (민단)을 발족시키고, 귀국사업후원, 민생문제 지원 등을 위해 GHQ 및 일본정부와 협상한다. 34) 1948년9월8일에 정부로부터 유일한 공인단체로 인정받은 민단은 같은 해 9월28일에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 으로 개칭한 뒤, 1994년4월20일에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35) 33) 서울신문 2013년9월26일자 인터넷판 참조.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30926033238133 34) 재일본대한민국민단 공식 웹사이트 (2013년10월23일 현재) 참조. http://www.mindan.org/kr/shokai03.php 35) 위와 같음.
한편, 1945년8월15일, 일본 패전 당시 재일 동포들은 약 240만이었는데, 많은 사람들이 전시노동력으로 각지의 탄광이나 토건관계, 군수공장, 항만사역 등의 일을 하였고, 강제연행 된 탄광노동자들은 [생지옥]같은 환경 속에서 특고 등의 감시를 받았기에 해방이 되자 하루라도 속히 귀국을 하려했다. 36) 1946년3월에 일본 정부가 실시한 [귀환희망자 등록]을 보면 등록에 응한 재일 조선인 64만7006명 중 귀국 희망자는 51만4035명으로 약 80%였으나 당시 생활기반이 없던 고향에 귀국하건만 재일 조선인 95-6%가 남부지방출신인데 이미 미군정하에 있었고, 1인당 1000엔의 재산밖에 갖고 갈 수 없다는 제한에 처했기에 현실적으로 귀국자수가 점차 감소한다. 37) 귀국희망자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계획적 수송이 시작되자 38) 해방부터 1946년 말까지 약 150만 명 전후가 귀국을 했고, 귀국 준비의 일환으로 각지에서 모국어의 [국어 강습회]가 열리면서 민족교육에 주력하게 된다. 1946년경에는 조국의 불안정한 정치 정세에 귀국을 주저하게 되면서 재일 동포들을 위한 국어 강습회 를 보다 체계적인 민족교육으로 전환시키는 게 학교 교육이었다. 그러나 GHQ는 조선학교 교육내용에 대해서 일본정부의 지시에 따르도록 지령을 했고, 1948년1월, 문부과학성의 학교교육장은 조선인 설립 학교의 취급에 대해서 라는 통달과 함께 재일 조선인의 자주적 교육을 부정하며, 조선인 아동들의 일본학교 통학을 지시하게 된다. 39) 그러자 각지에서 재일동포와 일본정부 사이에서 충돌이 일어나고, 각 지방 당국에서는 조선인학교에 폐쇄를 명했다. 그런 일방적 명령에 저항하는 사람들과 충돌이 격화되자 사망자도 나오게 된다. 40) 대립이 정점에 달한 것이 동년 4월의 한신( 阪 神 ) 교육 투쟁 41) 이었다. 1949년에는 결국 조선인 학교 폐쇄령에 의해 대부분의 학교가 폐쇄되었지만 민족학교를 완전히 폐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단체등 규제령 에 의해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1945-1949)은 해산당하고, 조련계의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서 만든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총련,1955년 발족]이 재일동포들이 만들었던 민족학교의 대부분을 규합한 것이 현재의 조선학교의 모체가 되었다. 42) 1) 한국 학교의 상황 현재 대한민국 정부의 공인단체로 정부의 재정 지원금과 동포들의 회비로 운영되는 재일민단 산하의 민족 학교, 즉 한국 정부 측과 관련된 학교는 도쿄한국학교와 36) 尹 健 次 もっと 知 ろう 朝 鮮 東 京 岩 波 書 店,2003년,176쪽 참조. 37) 상게서, 尹 健 次 もっと 知 ろう 朝 鮮 176-177쪽 참조. 38) 1959년에 북한 귀국 사업을 일본이 지원.니이가타에서 배를 타고 귀국을 했는데, 1984년 의 제186차 귀국자는 총 9만3000명을 넘는다. 남한에서는 이를 [북송사업], 북한측은 [귀환운 동]이라 칭하는데 일본의 자국내 체류 부담을 덜기위한 귀국정책이란 의도가 배경에 있었다. 39) 李 修 京 井 竿 富 雄 呉 永 鎬 日 本 における 外 国 人 学 校 政 策 と 在 日 朝 鮮 人 の 教 育 事 情 東 京 学 芸 大 学 人 文 社 会 学 系 紀 要 I, 第 61 集 2010 年 145 頁 参 照 40) 재일조선인 학교에 관해서는 다음 문헌에서 상세히 볼 수 있다. 金 徳 龍 朝 鮮 学 校 の 社 会 史 ( 社 会 評 論 社,2004), 呉 圭 祥 ドキュメント 在 日 朝 鮮 人 連 盟 ( 岩 波 書 店,2009). 41) 1948년4월 당시 문부성 통달에 의해 일본의 지방행정인 도도부현이 조선인 학교 폐쇄에 임하 여 재일조선인과 대립하였다. 효고켄에서는 4월24일에 지사가 폐쇄방침을 철회했지만 연합군사 령부 (GHQ)가 비상사태선언을 선언하여 많은 재일 조선인들이 체포당했다. 오사카에서는 항의 집회에 참가했던 16세 소년이 총을 맞고 사망했다. 朝 日 新 聞 2007년4월29일 조간. 42) 전게, 石 田 眞 子 在 日 コリアン 研 究 東 京 学 芸 大 学 多 言 語 多 文 化 教 室 2013년 참조.
교토국제학교, 오사카의 금강학원 및 건국학교 등 4개 학교가 있다. 그 중에서도 한국식 독립 교육프로그램으로 운영할 수 있는 곳은 도쿄한국학교(일본의 각종학교 에 해당)이고, 교토국제학교와 오사카의 두 학교는 일본정부의 학교교육법 1조 에 해당하는 1조 학교 로 지정되었기에 일본의 교과과목을 가르쳐야 한다는 표면상의 형식을 받아들이게 된다. 컬리큘럼은 일본의 초등학교 및 중고등학교와 기본적으로는 같다. 43) 교토( 京 都 )한국학교도 1조 학교 로서의 인가 획득을 향해서 준비 중이다. 44) 교육기본법에 의거한 학교 제도의 기본을 정하는 일본 학교 교육법 제1조에 정해진 초등학교, 중, 고교, 대학, 고등전문학교, 맹학교, 농학교, 양호학교 및 유치원을 1조 학교 라고 부른다. 민족학교는 1조에서 정하는 학교 외의 것으로 각종학교 취급을 받는다. 즉, 학원이나 자동차 교습소 등과 같이 취급받기에 일본 정부로부터의 교육지원금 및 공공단체의 학교 조성금 등을 받을 수 없게 되고, 경영이 곤란한 학교는 계속 운영이 어렵게 될 경우가 많고, 결과적으로 수업료 등이 비싸지게 된다. 게다가 각종학교이기 때문에 대학입학시험 수험 자격이 되지 않으므로 대학검정 혹은 통신제 고등학교 등의 졸업장이 필요하다. 게다가 1조 학교 가 되면 일본의 검정을 통과한 교과서를 사용해야 하는 형식을 거쳐야 한다. 예를 들면 한일 관계에 첨예한 대립 문제가 되고 있는 역사/ 외교문제에 대한 근접 방식이 반대적 입장이 되어도 그것을 받아들여서 교육을 시켜야 하는 것이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나, 일본의 대륙 침략전쟁을 [대륙 진출]이라는 식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인식 차이는 결코 일치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일본 고유의 영토인 다케시마를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 는 일본 측 주장이 게재된 일본정부의 검정 교과서를 사용하는 대신, 일본 정부로부터 일정한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는 것이다. 속칭 1조 학교 는 교내에서 한국어 사용은 가능하지만 일본의 교과 과목외의 부수적인 과목으로 한국어나 한국문화를 배우기에 주된 과목보다는 학습 능률이 떨어지고, 어학습득이나 민족 교육에 있어서는 효율적이라고 볼 수 없기에 1조 학교 에 해당되는 한국학교는 그런 재정적 모순 속에서 갈등을 안고 있는 상황이다. 45) 게다가 한국학교는 대도시 4곳에 위치하기에 주변 지역에 살지 않으면 통학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참고로 일본은 전체 면적이 22만 0847km²(북한이 약 12만km², 남한이 약10만km²)인 한반도에 비해 총 37만 7835km2이니 물가가 비싼 일본 지방에서 한국학교에 보낸다는 것은 수업료 외의 교통비, 자취 기숙사비 등 경제적 부담이 클 수밖에 없고, 한국국적의 동포들은 일본 역사나 일본어를 [국어]로 부르는 교과과목에 거부감을 느끼기에, 자국의 문화나 역사, 모국어를 가르치려는 의도에서 총련계 조선학교나 국제학교에 아이들을 보내는 경우도 있다. 46) 43) 재정난을 이유로 1946년에 창립된 건국학교(유 초 중 고)는 1951에, 금강학원(유 초 중 고)는 1950년에 각각 일조교의 인가를 받았다. 전게, 石 田 眞 子 在 日 コリアン 研 究 東 京 学 芸 大 学 多 言 語 多 文 化 教 室 2013년 참조. 44) 石 田 眞 子 在 日 コリアン 研 究 東 京 学 芸 大 学 多 言 語 多 文 化 教 室 2013년 참조.다음 문헌에서 상 세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福 岡 康 典 在 日 韓 国 朝 鮮 人 56-57쪽 참조. 仲 尾 宏 Q&A 在 日 韓 国 朝 鮮 人 問 題 の 基 礎 知 識 80쪽 참조. 45) 전게, 이수경 한반도 정전 60주년, 또 다른 민족분단으로 복잡하게 얽힌 재일동포사회 세계한인신문(OK TIMES) 2013년2월19일 인터넷판 참조. http://www.ok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9
60만 재일동포를 생각하면 한국어 교육이나 한국사 및 자신들의 조국에 대한 의식을 가르칠 민족학교는 턱없이 부족하지만 그렇다고 체제나 이념이 전혀 다른 총련계 조선학교에 애들을 보내는 것과 그 차이를 넘어서 어우러지기도 결코 쉽지 않은 것이 일본 동포사회의 현실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총련계 민족학교는 북한 지도자의 우상이 걸려있고, 정신주의 사상을 중시여기는 절대적 사상 교육을 우선하기에 남한 측 학생들에게는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총련계 동포들이 점점 감소하는 현실을 감안하여 민족학교에서도 최근엔 일본 사회에서 어우러지며 살아가기 위한 문호 개방의 차원 혹은 학교유지 측면에서 한국국적을 지닌 재일동포나 일본국적의 학생 등 다양한 국적의 학생들을 받아들이려고 노력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한국학교에서는 학교 교육이 아닌 쟘보리 아동 단기 고국방문 및 문화체험 기획 등을 다양한 형태로 대체교육안을 전개하고 있지만 전일제 학교 교육이 아닌 만큼 민족교육이란 개념에서는 정부 측 혹은 성공한 재일동포들의 교육적 지원으로 보다 많은 안정된 학교 교육기관 설치가 필요하다. 2) 조총련계 민족학교 조총련계는 일찍부터 민족교육의 강화 발전과 재일 동포자녀의 애국의식 함양, 모국의 언어와 문자를 지켜 민족 문화를 발전시킨다는 슬로건을 걸고 강한 민족의식 교육에 힘을 쏟아 왔다. 그렇기에 총련계 민족학교 출신 학생들의 조선어 구사는 능숙하고, 자신들의 민족적 아이덴티티에 대한 자부심과 태어난 일본에서의 삶터를 구분하며 살고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은 국제사회에 복귀를 하면서 주권을 회복한 일본 정부는 1953년에 기존의 일본 국적에서 재일조선인을 배제한다. 식민지의 일본 국적으로 살아 온 사람들은 일본에서 국적을 상실하게 되면서 모든 제도적 변화를 겪게 된다. 일본 국민이 아닌 사람들에게 국가가 취학의무를 부여할 수 없고, 재일 조선인은 국민이 아니므로 의무교육이 아니기에 본인이 신청을 할 경우만 일반 학교에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그렇기에 일본에서 살아가야 할 동포들은 학교교육법 1조 학교 의 졸업자가 아닌 경우가 많다. 국교 정상화체결이 맺어지지 않은 북한을 지지하는 조총련에 결집한 사람들이 만든 학교는 모두 일본 교육법의 1조 학교 가 아니므로 졸업증서도 일본의 정식 학교 졸업 증서가 아니고, 국가 교육 조성금을 받을 수 없기에 수업료도 고액으로 알려져 있다. 47) 그런 현실 속에서 전국에 각급 조선학교가 급속히 만들어지고, 최고학부인 조선대학교가 1956년에는 [조선중앙사범학교]로 일시적으로 개설되었다가 1959년 북한의 귀국사업이 시작된 해에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물심양면의 협력으로 도쿄 고다이라시에 캠퍼스를 정비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적 재정난과 저출산, 일본 국적취득의 귀화자 증가 혹은 한국 국적 변경 증가 등으로 현실적으로는 민족 학교는 계속 감소 중이다. 46) 위와 같음. 47) 전게, 李 修 京 井 竿 富 雄 呉 永 鎬 日 本 における 外 国 人 学 校 政 策 と 在 日 朝 鮮 人 の 教 育 事 情 東 京 学 芸 大 学 人 文 社 会 学 系 紀 要 I, 第 61 集 2010 年 145 頁 参 照 나고야 조선초급학교(초등학교) 수업료, 통학비, 보험 포함에 매달 13300엔을 지불해야 하고, 그 외 교과서도 자비이므로 학년 초에는 상당한 금액을 부담해야 한다. 나고야 조선초급학교 공식 사이트 참조.http : //www.ncc.ed.jp/bosyuu/syohiyou. pdf화일 참조.
조선학교는 현재 일본 내에 대학교 1개, 고급(고등)학교 10개, 중급(중)학교 32개, 초급(초등)학교 53개가 있다. 1993년의 고급학교 12개, 중급학교 57개, 초급학교 81개였지만 한국이나 일본 국적으로 귀화하거나 저출산화 경향으로 재학생수가 줄어들면서 적지 않은 학교가 문을 닫았다. 48) 2010년에 고교 무상화 제도가 시작되었으나 조선학교는 이러한 민족적 교육의 강화 문제와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 등의 외교문제가 얽혀서 고교 무상화 대상에서 제외되었는데, 2012년10월에 한국의 474개 시민단체가 조선학교 고교무상화제도 적용을 촉구하는 연대성명서 를 일본 정부에 제출하였고, 2013년 3월31일에는 도쿄 히비야 야외음악당에서 학생, 학부모 및 시민단체 4000여명이 조선학교 무상화 배제 반대 집회를 개최하여 "유엔헌장 제55조 3항은 인종, 성별, 언어, 종교에 따른 차별 없이 모든 사람의 인권과 기본적인 자유를 존중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며 "일본에서 배우는 모든 고교생에게 무상교육 제도를 적용하는 것은 국제사회에 대한 일본 정부의 책임"이라고 주장했다. 49) 같은 해 5월21일에는 유엔 사회규약위원회가 일본 정부가 고교무상화 제도에 조선학교를 배제하는 것은 차별로서 우려하는 바이다 는 최종견해를 발표했고, 50) 현재도 많은 시민단체들이 일본 정부 측에 교육적 차별에 대한 항의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3) 남북을 초월한 민족 교육에의 또 다른 대안 51) 2008년 4월, 재일동포들이 남북한의 정치적 대립을 넘어서서 시대를 여는 글로벌 인재 육성이란 슬로건아래 세계에 통용되는 인재 양성을 표방하며 민족사관학교를 모델로 해서 설립한 것이 오사카부 이바라키시 소재 코리아 국제학원 (Korea International School; KIS) 의 코리아국제중고등학교이다. 다문화 공생 - 민족적 아이덴티티와 자존 감정을 키우는 것과 함께 다문화 공생 사회 실현을 향한 지식, 기능, 태도를 습득하는 인간을 육성, 인권과 평화 -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세계 평화를 희구하는 보편적 가치를 창조함과 함께 지구적 시야를 가지고 지속가능한 사회 구축에 공헌하는 인간을 육성, 자유와 창조 - 참된 자유를 이해하고 풍부한 개성과 다양성을 기초로 한 창조력이 넘치는 인간을 육성(주-코리아 국제학원 홍보지 越 境 人 에서 필자가 발췌 번역) 48) 전게, 이수경 한반도 정전 60주년 또 다른 민족분단으로 복잡하게 얽힌 재일동포사회 세 계한인신문(OK TIMES) 2013년2월19일 인터넷판 참조. http://www.ok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9 49) 연합뉴스 2013년3월31일자 인터넷 판 참조.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03/31/0200000000akr20130331051700073.html?inpu t=1179m 50) 월드 코리안(World Korean) 2013년5월23일 인터넷판 참조. http://www.worldkorean.net/news/articleview.html?idxno=10533 51) 이 내용의 대부분은 다음 졸고를 일부 수정 가필하여 게재한 것임을 밝혀둔다. 전게, 이수경 한반도 정전 60주년 또 다른 민족분단으로 복잡하게 얽힌 재일동포사회 세계한인신문(OK TIMES) 2013년2월19일 인터넷판 참조. http://www.ok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69
한다는 목표로 21세기 국제 사회에 필요한 글로벌 인재 육성을 위해 설립된 코리아 국제학원 (KIS)은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코리아(한반도)와 이어지며, 세계에 열린 국제학교로서 국경을 넘나드는 [ 越 境 人 ], 즉 민족과 국가, 이념을 초월한 경쟁력 있는 국제학교를 만들자는 이념으로 세워진 학교이다. 이 학교의 설립 자본은 일본 여자축구팀 INAC 고베 (사와 호마레 澤 穗 希 선수 소속) 구단주이자 음식산업/레저/스포츠 문화/정보통신서비스 등의 사업체를 거느린 (주)아스코홀딩스의 문홍선 대표가 사재를 털어 마련했다. 그런 취지를 이해하는 한국 및 재일동포 출신자, 일본인, 미국인 등의 다국적 출신 교사들은 물론 각계각층의 문화 지식인들이 협력하여 강의를 맡는 등, 중고교생의 수업치고는 다채롭고 수준 높은 강의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어 왔다. 게다가 2011년 4월에는 학교법인을 취득했고, 같은 해 12월에는 일본 문부과학성으로부터 취학 지원금 적용을 받게 되는 등, 순조롭게 운영되는 것처럼 보였으나 결국 재정적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52) 또 조선학교의 대안학교 혹은 국제학교라는 측면에서 그동안 국기게양을 하지 않았으나, 일본에 몇 개 밖에 없는 한국학교로의 방향 전환을 추진하며 한국정부에 승인 신청을 하였고, 지난 1월 29일에는 오사카 총영사 등의 공관장과 관계자들이 모인 가운데 태극기를 게양하며 한국학교로 방향 전환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남북한을 초월한 국제학교로서 글로벌 인재를 육성한다는 취지와 재학생 전원 기숙사 생활이라는 이 학교의 방침에 공감하며 동참한 많은 지식인들과 남북한 측 교육을 받은 재일동포 교사나 학생들은 물론 일본인 학생까지도 포함되어 있는 이 학교의 특성 및 설립 취지가 바뀌면 학교 이념도 바뀌게 되므로 현재는 그런 혼란스런 상황을 정관하는 듯하다. 2013년10월7일에 한국학교 교장을 역임했던 김용만 씨가 신임 교장(이사장은 송재성 씨)으로 취임하면서 건학이념과 교육목표에 맞는 전인적 글로벌 인재 육성과 학교 인프라 정비에 전력을 다할 것이라는 소신 등을 밝히고 있으나 [한국 민족 교육]을 역설하는 부분이 보이지 않는 면에서 현재의 이념대로 운영하는 듯 하다. 이 학교는 남북한 고집보다 더 큰 글로벌 인재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고, 학교 수업도 매력적인 내용으로 전개되지만 경영적 문제에서 오는 재정난에는 동포들의 교육적 후원이 필요하다. 지금은 일본 현지 학생뿐만 아니라 한국 주재원의 아이들도 입학을 하는 다문화적 상생 실천 학교가 되고 있지만 후원금 없이 자율적 운영이 불가피해지면 결국 남북한을 초월하고, 나아가서는 통일 후를 준비하는 한반도 아이덴티티도 가르칠 수 있는 선진적 글로벌 학교로서의 지속적 경영은 어렵게 된다. 글로벌 엘리트 양성을 목표로 하지만 한반도의 역사 및 문화, 언어, 그리고 영어와 일본어가 필수인 국제학교가 제대로 없는 일본의 현실을 감안한다면, 한민족 역사나 한국문화 커리큘럼이 갖춰진 이 학교의 [월경인]의 이념은 이상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미 2010년 졸업생들이 서울대나 런던의 대학 등은 물론 일본의 다양한 대학에 입학한 실적으로 증명되듯이 이 학교의 학습 효과는 높은 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교육운영비가 부담이 되는 현실 상, 후원금이 없으면 1조 학교 의 가능성을 배제한 국제학교로서의 운영 가능성은 낮아진다. 사회적 성공을 한 재일동포는 많아도 교육사업에 의식을 갖고 재정지원을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아쉽다. 52) 2013년9월28일에는 코리아국제학원 후원회 설립총회에 약 100명의 후원관계자들이 재정적 기 반을 강화하는 목적으로 모였다고 한다. 학교 공식사이트 참조. http://www.kis-korea.org/kccbbs/kannews_viewbody.php?number=408
파친코라는 성인게임 등의 오락사업이나 불고기 음식점, 부동산 사업, 통신사업 등으로 축적한 재산을 금의환향에 사용하는 재일동포들은 필자도 간혹 본다. 하지만, 일본 내에서 한반도 역사나 문화를 가르칠 국제학교에 사재를 털어 놓는 인물은 많지 않다. 필자가 인식하기에는 부동산 사업으로 모은 재산을 두산그룹에 넘기기까지 한국의 중앙대학교를 운영하며 학교 사업에 사재를 털었던 고 김희수 전 이사장의 사례가 드문 경우인지 모르겠다.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이런 교육사업에 사재를 쾌척할 수 있고 내일을 짊어질 아이들 교육에 투자하는 인물이야 말로 사회의 귀감으로 평가받는 행적이 되지 않을까? 맺으며 - 남북 갈등 완화로 한민족의 일본 내 상생을 함께 지향하는 동포사회 형성을! - 대한제국을 식민지화 시키고 지배 통치했던 가해 측 일본 속에서 피지배국 출신자들이 본국의 이념대립으로 한반도 내부보다 더 복잡하게 얽히고 갈등하는 특수한 공간 일본에서 재일동포 죽여라 는 헤이트 스피치 행위가 격화되고 있다. 강한 결속으로 과거의 역사를 청산하고 한일 관계를 돈독히 다지며 삶터를 지켜나가야 하건만 되레 남북 분산으로 약화된 현실을 얕보는 재특회 등의 절제 없는 공격은 날로 심해지고 있다. 게다가 2013년10월20일 관서지방의 요미우리 방송프로그램에서 메이지왕의 고손자로 보수파 논객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다케다 츠네야스( 竹 田 恒 泰 )가 자이니치(일본에 사는 외국인, 특히 재일 동포들을 주로 칭함)의 특권을 밝혔다 자이니치가 일상 사용 이름(통명)을 일본명으로 바꾸고 경력을 지우면 범죄가 가능하다는 것을 표현했다( 在 日 が 通 名 を 日 本 名 に 変 えて 経 歴 を 消 し 犯 罪 ができるという ことを 表 現 した) 53) 고 발언하는 등, 왕족 가문 출신자조차 언론플레이에 자중 없는 발설을 보이고 있다. 과연 이러한 현실은 남북한 재일동포들이 서로 강 건너 불 보듯이 방관하는 걸로 자신들과 무관하게 넘어가는 걸까? 일본을 특수공간이라고 앞에서 논했다. 한반도를 제외한 미국에도, 그 어느 나라에서도 이토록 남북한 대립구조 속에서 과거 침략 측으로부터 차별과 모멸적 언사를 받으며 갈등의 등을 돌리고 있는 서글픈 상황은 없다. 남북한 동포들은 이미 조국에서 태어난 1세가 거의 없다. 2,3,4세와 뉴커머가 살고 있는 일본 속에서 수많은 동포들이 약화된 아이덴티티가 버거워 국적을 바꾼다. 2013년9월30일에 한국 외교부가 발표한 재일동포 현황을 보면 2012년 말 현재, 892,704명인데 이 중에서 일본 국적으로 귀화한 사람이 345,774명으로 전체의 약39%에 달한다. 즉, 귀화를 하지 않은 재일동포들은 546,930에 해당되는 것이다. 54) 그리고 이들 53) 産 経 新 聞 2013년10월22일 인터넷판 참조. http://sankei.jp.msn.com/west/west_affairs/news/131022/waf13102220210038-n1.htm KYODO NEWS 2013년10월22일 인터넷판 참조. http://www.47news.jp/korean/politics_national/2013/10/076783.html?utm_medium=twitter&utm_s ource=dlvr.it 연합뉴스 2013년10월22일 인터넷판 참조.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3/10/22/0200000000akr20131022216000073.html?in put=1179m
중에는 귀화 혹은 국적 변경을 생각중인 사람도 적지 않다는 점이다. 재일 동포의 [국적] 현황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1947년 5월5일에 외국인등록령 (등록당시 재일조선인은 59만8507명) 55) 이 공포되자 재일동포들의 외국인등록 국적란에는 모두 조선 으로 표기되었다. 그러나 다음해인 1948년8월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 일본이 승인한 한국 국적 선택자는 한국 으로 기입, 북한 선택은 지금까지 국가간 정상화 체결이 되지 않았기에 특정한 소속 국가의 국적이 아닌 지역을 가리키는 호칭, 기호 만으로 기입되어지고 있다. 그러한 유야무야한 상황 속에서 버티지 못하는 동포들은 일본 국적으로 귀화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일부는 [한국]을 취득하기도 한다. 한편, 1952년에 외국인등록법이 설치되자 재일동포들은 외국인등록증명서의 상시 휴대와 3년마다 변경의 의무가 있었다. 56) 그러나 60년 만에 일본 정부의 보다 단순한 제도 창설이란 취지하에 2012년7월9일자로 외국인 등록증명서 가 폐지되었고, 기존의 시청 등에서 등록하는 불편함이 없이 입관법상 법무국이 일괄적으로 관리하는 재류카드 제도로 변경이 되었다. 하지만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영주자들이 일본을 출입할 경우, [ 미나시재입국 은 본인이 출국할 때 재입국 의사를 표명한 경우에 적용되는데, 그 의사표명의 방법으로서 재류카드 또는 특별영주자증명서 제시와 함께 재입국용 ED카드(출입국카드)에 미나시재입국을 희망한다. 고 하는 란에 체크를 해야만 한다. 그런데 기존의 재입국허가(상한 5년/특별영주자는 6년)를 받은 사람이 이곳에 표시를 해버리면, 미나시재입국 으로 취급되어 재입국 기한은 전술한 미나시 에 적용되는 기간으로 돼 버린다. 그 설명은 사전 홍보에서도 현재 공항 출국 카운터에서도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정해진 재입국기한까지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했을 경우에는 일본 출국 전의 재류자격을 상실하고, 신규입국자로 취급된다. 특별영주자도 예외가 아니다. 이번 미나시재입국 은 편리해진 반면, 제도를 숙지하지 못하면 재류자격을 상실할 정도의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이와 같은 미나시재입국 때문에 재류자격을 상실하게 된 중대한 사태가 이미 여러 건 보고되고 있다] 57) 말을 바꾸자면, 새로이 바뀐 제도는 자칫하면 근대 이후로 생활기반을 다져온 기존의 특별영주자(해방전에 일본에 온 사람 및 그 자손들)조차도 재류 자격을 박탈당할 수 있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제도이고, 재일동포들의 감소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이다. [재일 동포]라는 동체에 금이 간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것은 일본 현지에서 살고 있는 동포들 스스로이다. [일본]이란 특수공간에 사는 재일 동포가 재특회 등의 차별적 공격을 받을 때 일본 정부 측 대응과 일본 시민 양심은 물론, 남북한 상생 협력의 다가서기가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까지는 양측이 다 본국 산하의 작은 기관으로 존재해 54) 김도균 재일교포 귀화자 약35만 명, 전체 40%에 육박 세계한인신문(OK TIMES) 2013년10 월7일 인터넷판 참조. http://www.ok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594 55) 在 日 本 大 韓 民 国 民 団 中 央 民 族 教 育 委 員 会 歴 史 教 科 書 在 日 コリアンの 歴 史 作 成 委 員 会 編 歴 史 教 科 書 在 日 コリアンの 歴 史 東 京, 明 石 書 店,2006년,64-66쪽 참조. 56) 1999년까지 지문날인이 강요되었으나 강한 반발로 인해 지문날인제도는 폐지되었다. Expats Say Goodbye to Gaijin Card.,The Wall Street Journal,May7,2012. http://blogs.wsj.com/japanrealtime/2012/05/07/expats-say-goodbye-to-gaijin-card/ 57) 김붕앙 미나시(みなし)재입국허가 에 숨겨진 함정 세계한인신문(OK TIMES) 2013년2 월28일 인터넷판. http://www.oktime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182
왔었다면 이젠 모국에 대한 보은으로 양측이 일본이란 공간 속에서 결속을 다지는 모습으로 남북한 한반도의 평화 프로세스를 구축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잇도록 가교 역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진정 남북한 동포들의 다가서기란 결코 불가능한 환상에 불과한 것일까? 근대사 왜곡이니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은폐 등의 망언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역사수정주의자들의 양심 없는 행동을 우리는 보고 있다. 그들에겐 100년 뒤의 한일 관계보다 오늘의 일본 체면 밖에 생각하지 않는다. 큰 상처를 내고도 가벼운 소독으로 붕대를 덮고서는 역사 청산 문제는 다 아물었으니 책임이 없다는 식이다. 그토록 수많은 희생자들의 아픔을 편리하게 정당화하거나 가볍게 치부하건만 그에 대한 분노조차 일지 않고, 나와 무관한 과거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역사 인식 이전의 문제가 된다. 피해자의 아픔은 가해자의 얌심으로 치유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한 보편적 인권 의식을 공유할 때 평화 사회가 존속할 수 있는 것이고, 나의 자존이 가능한 것이다. 가해자의 양심적인 태도가 보이지 않는다면 피해를 인식할 때 까지 감정을 전하고 깨닫게 해야 한다. 그것이 향후의 피해 반복을 방지하는 현안이고 글로벌 사회를 살아가는 상생 구조의 기본적 자세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라야마 및 고우노 담화 를 보충 개선하기는커녕, 되레 잘 못 된 것이었다고 과거 희생자들을 매도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는 두 번 다시 그런 우행을 반복하지 않도록 일본 시민과 더불어 남북한 동포들의 결속 항의가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분열된 55만의 약체는 민족교육도 제대로 받지 않은 상황 속에서 더더욱 약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55만 동포 중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뉴커머임을 잊어선 안 된다. 즉, 기존의 고통 받았던 인고의 동포 역사를 공유하고 이해할 최고의 파트너는 그 시대를 함께 보내 온 남북한 올드커머들이다. 동포들의 갈등 대립이 뉴커머의 무관심으로 전락하는 현실을 생각한다면 지혜로이 상생을 위한 상승효과법을 강구해야 하지 않을까? 과연 재일 동포사회가 당면하고 넘어서야 할 우선 과제는 무엇일까? 필자가 퇴근길에 들르는 몇 군데의 편의점 입구에는 각 언론지 판매대가 놓여있다. 최근엔 노골적인 반한/혐한 기사들이 1면을 크게 장식하는 보수 언론지가 필자를 맞는다. [장기 불황으로 자신감을 상실한 사람들이 과격한 한국 비판을 해야만 신문을 산다] 58) 고 다퉈서 혐한 보도로 언론 비즈니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토록 잔인하게 재일 동포들을 정계나 언론, 재특회까지 공격의 소재로 일삼는다는 것은 그만큼 전후 양심이 형성이 되지 않았거나 양심 결여 현상이 일고 있다는 것이 된다. 여담이지만 필자의 제자로 독일의 소수인 연구를 위해 일본에서 재일 동포 연구를 한 M에 따르면, 독일에서는 두 번 다시 홀로코스트를 파생한 전쟁 구조를 자아내서는 안된다는 교육을 초등학교 때부터 철저히 실시하고 있는데, 초등학생들이 유태인의 시각에서 쓰인 책들을 읽고 전쟁 구조나 나치당에 대해서 토론을 한다고 한다. 59) 58) 필자의 퇴근길의 경험 다수 및 경향신문 2013년10월6일 인터넷판 참조. http://media.daum.net/foreign/newsview?newsid=20131006223510936 59) 국민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히틀러를 당수로 한 독일의 정당. 제1차 대전 후에 대두,
(사진; 좌로부터 1-3면까지 음해기사로 찬 [후지신문], 한국은 전쟁상태라며 한국 수학여행을 반대하는 학교 뉴스, 필자 집 우편함에 투함된 재특회 전단지) 또한 중고등학교 역사 수업에서는 제2차 대전 당시에 일어난 상황을 보다 상세히 가르치며 전쟁의 참혹함과 반복이 없도록 철저한 평화교육을 실시한다고 한다. 60) 지금의 일본은 자국의 과거를 다시는 있어서는 안 될 역사적 과오로, 미래의 거울로 자성하는 것 보다는 과거를 미화하고 현재를 포장하는데 급급한 움직임이 집권하면서 인터넷 방랑자들에게 그릇된 사회 행위를 보여주는 격이 되어있다. 그들이 자신들의 정책을 망신적으로 만들고 있음에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듯하다. 또한, 세습 정치가들이 다수를 차지하는 일본 정계 특성상, 선조들이 잘 못 판단했던 역사를 반성하고 그들을 넘어서는 올바른 미래지향의 틀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용기어린 정치가들의 움직임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재특회와 유사 단체들은 남북한 관계없이 모든 재일 동포 및 한반도 전체를 부정하고 있고, 평화헌법 개헌과 자위군 설치를 의도하는 아베 정권의 [주변국의 위협]론을 보다 노골적이고 자극적인 언사로 표출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차별 행위로 인한 소수 약자 층의 결속, 특히 재일 동포간의 대립 완화를 위한 지혜의 필요성을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이제는 서로 다가가야 하지 않을까? 한국전쟁으로 인해 분단된 하나의 민족이 총구를 마주하는 한반도의 접경 비무장지대에서도 지금은 평화공원 조성과 남북한 신뢰 구축을 위한 적극적인 움직임이 1933년 정권을 장악, 독재 정치를 단행, 반개인주의 반공산주의 반유태주의를 표방하여 국내 를 재편성. 대외적으로는 베르사이유 체제의 파기를 목표로 하여 재군비를 강행, 오스트리아를 병합해서 제3 제국을 실현했지만 39년 폴란드를 침략, 제2차 세계대전을 유발. 유대인 대학살 을 하지만 45년 독일 패전와 동시에 붕괴 ( 広 辞 苑 ). 필자 및 재일 동포 연구 파트너인 이시다 마코( 石 田 眞 子 )의 인터뷰 내용 참조. 전게, 石 田 眞 子 在 日 コリアン 研 究 東 京 学 芸 大 学 多 言 語 多 文 化 教 室 2013년 참조. 60) 위와 같음.
일고 있다. 재일 동포들도 한반도 내부만큼 격렬한 대립으로 충돌한 역사도 있었지만, 1991년의 치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을 만들어서 출장하는 등, 민단과 총련의 협력적 교류도 있었다. 어렵게 다가섰던 만큼 감동도 컸었다. 결코 남북한 다가서기가 불가능한 관계가 아님을 보여 준 사례이기도 하다. 4반세기를 재일 동포와 일본이란 공간 속에서 어우러져 살아왔고, 일본서 태어난 동포들의 고착된 대립 구조가 뉴커머이기에 잘 보이는 입장에서 동포 사회에 애착을 가지고 제안을 한다면, 동포들이 [상생]하는 지름길은 만나서 민족 문화를 공유하며 같은 땅 같은 시대를 살아가야 한다는 공감대를 진취적으로 받아들이고, 후손들의 미래를 함께 모색하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본국의 정책 계승만이 민단과 총련의 사명이 아니라, 자주적으로 살아가야 할 일본 땅에서 본국의 보다 나은 미래 만들기에 공헌하기 위해 과감한 [가교 역할]도 동포들이 해야 할 중요한 역할임을 상기하고, 그런 역사적 시대적 사명으로 동포들이 일본에서 살고 있다는 [존재의 이유]를 조금이라도 깨닫는다면 보다 나은 재일동포 사회와 일본, 나아가서는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잇는 미래지향적인 용단으로 이어지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