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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이종호*118)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 염상섭의 단편소설을 중심으로 - 1. 귀환과 이동의 그 어디쯤에서 2. 1945년 만주에서, 해방의 또 하나의 버전 부재하는 세큐리티 3. 해방기, 개인의 상태와 국가 4. 영토적 분절과 이동하는 것들 피난민, 잠상군, 호열자 국문초록 이 논문은 제국 일본 붕괴 이후에 발생한 대규모의 이동, 이주에 주 목하였다. 종전과 해방, 제국의 해체와 냉전 체제의 구축 속에서 대규 모의 인구 이동이 발생하였다. 이와 같은 이동은 일반적으로 귀환 이라 고 명명되고 개념화되어 서술되었고, 귀환서사 라는 맥락에서 논의되 었다. 해방기의 다층적인 인구 이동 현상을 귀환의 문제로 개념화하고, 민족수난사나 민족적 과제로 설정하여 신생국가건설과 국민통합의 과 정으로 간주하는 시도는 일면적인 해석이다. 해방기의 광범위한 이동 *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수료, exodus18@dreamwiz.com

328 한국문학연구 36집 과 이주를 민족적 국가적 귀환으로 축소시키거나 포섭하고자하는 시 도는, 의도하지 않았다하더라고 그러한 이동성 에 내재해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봉쇄하는 효과를 창출한다. 이러한 이동성 의 복원 을 통해서 해방기의 정치적 가능성과 잠재성을 가늠해보고자 하는 것 이 이글의 의도이자 문제의식이다. 다시 말해, 이 글에서는 해방기의 이동이라는 사건을 국민국가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서술하는 것이 아 니라, 그 잉여를 중심으로 서술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지점에 주목하 여 해방기 이동을 다루는 염상섭의 소설들 혼란, 모략, 삼팔 선, 엉덩이에 남은 발자국 을 검토하였다. 이러한 염상섭의 소설에 서 이동은 국가형성 혹은 국민형성의 자연스러운 과정들로 형상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이동하는 자들은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협하고, 불안을 야기하는 골칫덩어리로 형상화되며, 형성되는 국가는 이들을 배제함으 로써 체제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었다. 주제어 이동, 귀환, 이주, 안전, 염상섭, 만주 1. 귀환과 이동의 그 어디쯤에서 해방기를 특징짓는 다층적인 장면들 가운데 하나는 많은 사람들의 이동이다. 1945년 8월 15일, 제국 일본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 고, 그리하여 日 滿 支 를 잇는 경제적 엔블록은 붕괴했으며, 그 영토적 영향권도 상실되었다. 그리고 대동아공영권과 고도국방국가 건설로 압 축되는 전시통제경제 속에서 구축되었던 장거리 유통망은 여기저기서 파열구를 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종전이었고, 다른 한편으로 해방이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29 었다. 주지하듯이 종전과 해방, 제국의 해체와 냉전체제의 구축 속에서 대규모의 인구 이동이 발생하였다. 제국의 해체에 따른 인간의 이동을 흔히 귀환 이라 부른다 1). 그런 데 이러한 명명이 해방기 당시의 가장 주도적이고 가시적인 이동을 나 타내는 것이기는 했지만, 당시 이동이나 이주 전체를 포괄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귀환 (repatriation, 歸 還 )이라는 개념은 문자 그대로 다른 곳으로 떠나 있던 사람이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오거나 돌아간다 는 의 미로, 그 최종 기착지는 (무)의식적으로 민족이나 국가로 상정된다 2). 이러한 설정에는 민족, 나아가 국민국가라는 선험적인 전제가 자리하 고 있다. 해방기의 이동을 귀환이라고 명명하는 순간, 당시 인간의 모 든 이동은 국민국가형성으로 수렴되고, 현실적으로 그러하지 못했던 未 귀환은 국민국가를 위한 미래적 과제를 부여받게 된다. 당시 인구의 이동, 즉 한반도로 이주하는 해외 조선인의 수를 잠시 살펴보자. 1945년 제국 일본 붕괴 당시 해외 조선인 의 수는 대략 500 만 명에 달했는데, 이는 당시 조선인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규모였 다고 한다. 그 가운데 한반도로 이주한 자는 300만 명 정도로, 일본에 서 대략 140만 명, 만주에서 100만 명, 중국대륙에서 10만여 명, 기타 10만여 명이 각각 한반도로 이주했다. 3) 가장 대규모의 이주가 발생한 일본과 만주의 경우만 한정해서 보면, 약 60만여 명의 조선인이 일본 에 남았고 4), 만주에서는 130만여 명이 현지에 남았다 5). 전체적으로 1) 아사노 도요미( 浅 野 豊 美 ), 이길진 옮김, 살아서 돌아오다, 솔, 2005, 해설 Ⅰ쪽. 2) 영어로는 return to one's own country, 즉 re-(back) + patria(native land) 가 된다. 3) 장석흥, 해방 후 귀환문제 연구의 성과와 과제, 한국근현대사연구, 2003년 여름호 제25집, 10~11쪽. 4) 현규환, 韓 國 流 移 民 史 下, 三 和 印 刷 出 版 部, 1976, 598쪽 <표 2> 참조. 5) 손춘일, 해방직후 재만조선인의 한반도 귀환, 解 放 直 後 人 口 移 動 과 서울의 都 市 問 題, 第 9 回 서울 鄕 土 史 學 術 大 會 자료집, 2002년 11월 15일, 1쪽 참조.

330 한국문학연구 36집 해외 거류 조선인의 약 60%가 한반도로 이주(귀환)했으며, 나머지 40%는 여전히 일본과 만주 등지에 남아 있거나 그 지역 내에서 이주 를 행하였다. 여기에서 이동의 모든 유형을 귀환 이라는 개념틀로 환원 하게 되면, 200만에 가까운 인구는 미귀환, 귀환의 미달태(여전히 귀환 해야하는 존재들)라는 위치로 규정된다. 즉 이들 200만 명의 운명은 잠정 적으로 오늘날까지 귀환 이라는 민족적 혹은 국가적 과제로부터 자유 로울 수 없으며, 현실적인 가능성의 유무를 떠나 그들은 민족과 국가로 계속해서 소환된다. 예컨대 재일조선인 문제나 재중조선족 의 문제, 혹 은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발생한 북송사업 6) 등은 민족국가의 문제로 귀 착되어 그 안에 포섭되지 않는 문제들은 폐기되어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해방기의 대규모 이동을 한국, 북한, 일본 등 각각의 민족 6) 이와 관련하여 테사 모리스-스즈키(Tessa Morris-Suzuki)의 다음과 같은 언급 은 흥미롭다. 이 책에서 사용한 용어에 대해 몇 마디 부언해야겠다. 북한행 엑서더스 를 집필하면서, 나는 귀국repatriation 이라는 어휘에 대해 심사숙고 했다. 귀국 은 조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재일조선인들에게 북한은 물 론 조국fatherland 한국의 일부분이었지만, 그들 대다수가 태어난 땅은 아니 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그들은 자신들에게 친숙한 조상의 도시와 마을로 돌아가는 것returning 이 아니라 매우 낯선 사회를 향해 떠나는 것이었다. 엄 격히 말한다면, 가장 정확한 용어는 아마도 이주 移 住 일 것이다. 그러나 이 대 규모 사업에 참여한 조선인과 일본인들은 이 사업을 거의 언제나 귀국사업 으 로 간주했고, 이 귀국 이라는 용어는 당시 국제적십자위원회와 같은 국제단체 의 문서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나는 이 용어의 번역을 복잡하 게 한 수많은 대립적인 상황들을 명확히 하려고 애쓰는 한편, 귀국 이라는 용 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테사 모리스-스즈키(Tessa Morris-Suzuki), 한철 호 옮김, 북한행 엑서더스(Exodus to North Korea), 책과함께, 2008, 7~8 쪽) 테사 모리스-스즈키는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발생한 북송사업이 엄밀한 의 미에서 귀국, 즉 귀환이 아니라 이주(migration)의 문제로 설정되어야 함을 지 적한다. 이를 귀국사업 으로 명명함으로써 발생하게 되는 효과를 고려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이주(노동)이라는 문제를 귀국, 귀환이라는 용어를 통해 국민 국가적 틀로 포섭하는 것은 (그 틀을 넘어설 수 있는) 그 잠재적 힘을 봉합하 려는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귀국사업 으로 명명된 이 사업은 실질적 으로는 북한의 부족한 노동력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귀국이나 귀환, 인도주의적 송환 보다는 이주노동에 가까운 것이었다.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31 국가로의 귀환 이라는 문제로 설정하게 되는 것은, 탈식민 이라는 과정 을 국민국가건설 과 동일시 혹은 필연시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예컨 대 귀환이란 식민지시기 이주 강제연행의 결과이자 탈식민기 민족의 재통합과 국민형성 과정의 전사로서 자리매김된다 7) 라는 서술이나 귀 환을 제국적 질서의 종언을 의미하는 탈식민화 의 일환으로 전개된 것 으로 파악하여 이것이 한국, 북한, 전후 일본이라는 전후 국민국가 형성으로 이어지는 것으로 서술 8) 하는 방식이 그러하다. 그러나 식민 국가의 붕괴가 곧바로 주권적 독립국가의 수립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 었다. 이 둘 사이에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말을 바꾸면 구체제의 해체와 새로운 체제의 구축은 동일한 것은 아니었다. 9) 해방이 되기 이전부터 미국과 소련에 의한 한반도 점령 분할의 구상이 구체화 10) 되 면서 냉전체제가 구축되어 가는 가운데, 남북 각각에서 정치엘리트 혹 은 지배집단의 국가건설 기획이 경쟁적인 형태로 진행되었지만, 해방 기 당시만 해도 제국 일본의 붕괴 이후 한반도 주변 정세는 여전히 미 결정 상태였다. 결과적으로 정치체제는 제국적 질서가 붕괴한 뒤 남한 과 북한, 일본 등의 국민국가로 구축되었고, 제국의 신민으로 규정되었 던 주체들은 각 국가의 국민으로 전환되었지만, 해방기는 한반도에 냉 전체제를 구축하려는 슈퍼파워와 남북의 정치엘리트들, 그리고 거리에 서 폭발적인 에너지를 분출하면서 체제와 법으로 기율되지 않는 존재 론적 역능을 드러내고 있었던 다양한 주체성 11) 이 다층적인 형태로 경 합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 제국 일본의 붕괴가 곧 대한 7) 이연식, 해방직후 조선인 귀환연구( 歸 還 硏 究 )에 대한 회고와 전망, 한일민족 문제연구 제6권, 2004, 134쪽. 8) 아사노 도요미, 앞의 책, 앞의 쪽. 9) 박명림,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Ⅱ, 나남출판, 1996, 39쪽. 10) 이완범, 38선 획정의 진실: 1944~1945, 지식산업사, 2001 참조. 11) 천정환, 해방기 거리의 정치와 표상 공간, 1945년 8 15 해방의 드라마, 2008년 상허학회 가을 학술대회 자료집, 2008년 11월 29일 참조.

332 한국문학연구 36집 민국 혹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설과 성립을 자명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었다.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결과물에 필연성을 부과하면, 이 시기 해방이라는 빅뱅과 더불어 터져 나온 강력한 존재론적 활력의 가 능성과 잠재성, 즉 해방이라는 말이 내재하고 있는 가능성의 포착은 불 가능해지는 것이다. 즉, 해방기 다층적인 인구 이동의 현상을 귀환의 문제로 개념화하고, 민족수난사나 민족적 과제로 설정하여 조국으로 귀환되어야 마땅한 일 12) 로 규정하면서 신생 국가건설과 국민통합의 과정으로 간주하는 것은 일면적인 해석이다. 오히려 냉전체제를 구축하려는 세력과 국가 건설의 기획을 추진하고 있었던 남북의 정치지배계급에게 이러한 이주 자들은 자신들의 기획을 방해하는 불안 요인이거나 의도하지 않았던 정치적 변동을 야기하는 존재들이기도 했다. 브루스 커밍스는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이러한 이주자들의 존재에 주 목한다. 그에 따르면 식민지 기간에 해외로 이주했다가 해방 후 다시 한반도로 이주한 이주민들의 대부분은 토지의 상실과 인구과잉으로 인 해 고향을 떠난 농민과 노동자들이었고, 이들은 해방기 동안 이주 경험 을 통해 잠재적 민중으로 성장하면서 정치적으로 급진화되어갔으며, 그리하여 해방기에 주요한 정치적 주체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13) 물론 이주자들을 단순히 농민과 노동자라는 통일적인 계급으로 범주화하기 에는 무리가 있다. 이들은 이주하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하위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외에서 귀국 한 정치엘리 트, 망명 정치인 집단을 제외하면) 14), 이들은 남북한 모든 지역에서 좌익적 정치 주체들로 성장해 갔으며, 해방기 내내 급진적 정치 참여 15) 를 보 12) 장석흥, 앞의 글, 10쪽 참조. 13)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김자동 옮김, 한국전쟁의 기원, 일월서각, 1986, 73~105쪽 참조. 14) 이 글에서는 정치엘리트들의 해외에서의 귀국 과 일반 하위 주체들의 이주를 구분하고자 하며, 이동과 이주의 문제는 후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33 여주었다. 16) 이와 같이 정치적으로 급진적 주체로 성장할 잠재성을 지니고 있었 던 해방기 이주자들에 대한 정치지배집단의 대응은 배제와 방관으로 일관되었다. 한반도 남북을 가로지르는 삼팔선이 확정적으로 구축되었 음에도 불구하고, 만주의 이주민이 육로를 통해 삼팔선을 넘어 남한으 로 이주할 수 있었던 것은 북한 정치지배집단의 묵인 때문이었다. 당시 북한의 경제 규모상 실업과 토지분배 등을 고려할 때, 북한 당국은 이 와 같은 이주민을 수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그리하여 김일성을 위시 한 북한 지배계급은 이들이 북한에 정착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상황 이었다. 17) 이러한 상황은 남한 역시 다르지 않았다. 해방 직후 증가하 는 이주민으로 인해 서울은 심각한 주택난에 봉착하게 되었고, 서울에 서 이들은 도시빈민으로 전락해 갔다. 18) 해방기 남한으로 유입되는 이 주민들에 대한 미군정의 정책은 최저생계보장조차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들로 인해 남한의 경제 상황은 악화되어 기존의 거주하고 있던 남한 의 민중들의 생계까지 위협하기에 이르게 되었다. 19) 요컨대 신국가 건 15) 대표적인 예로 경상북도의 1946년 10월 봉기, 제주도의 4 3 항쟁 등을 거 론할 수 있다.(강인철, 미군정기의 인구이동과 정치변동, 한신논문집 제 15권 제2호, 1998 참조) 16) 만주로부터 이주하는 자들은 1930년대 후기 이주자, 친일파, 만주국 관료, 전 쟁 피난민, 지주 부농층, 도시거주민 비농업인구, 중국인민해방군 소속 조 선인 장병 등 다양한 하위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일본으로부터 이주하 는 자들은 징병자, 징용자, 하층 일반 재일교포, 자산가층 일반 재일 교포 등 의 주요 하위집단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강인철, 앞의 글 참조) 17) 김일성 본인이 지금의 조선은 많은 피난민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치안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다. 탈출하는 것을 도리어 환영하고 싶은 심정이 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단속하지 않을 수 없다 고 말했다고 한다 (아사노 도 요미, 앞의 책, Ⅳ쪽) 18) 이연식, 해방직후 서울 戰 災 民 의 주택 문제, 解 放 直 後 人 口 移 動 과 서울의 都 市 問 題, 第 9 回 서울 鄕 土 史 學 術 大 會 자료집, 2002년 11월 15일 참조. 19) 박보영, 미군정 구호정책의 성격과 그 한계: 1945 1948, 사회연구 2005 제1호 참조.

334 한국문학연구 36집 설기에 놓여 있었던 남북한 모두에서 이들 이주민들은 환영받지 못하 는 골칫덩어리였으며, 정치적 급진성과 경제적 어려움을 통해 체제위 협적인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해방기의 다층적인 이동 혹은 이주 그 자체는 귀 환 이라는 개념으로 민족과 국가에 통합되거나 포섭될 수 없는 차원의 문제였다. 이주민들의 이동은 소극적으로는 일본 제국 붕괴 이후 발생 한 비참한 물질적 조건으로부터 도주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추동되었지 만, 보다 적극적인 의미에서 그들을 이끈 것은 정치적, 경제적 욕망이 었다. 그리하여 이러한 이주민의 이동성 은 항상 거부와 해방 추구를 표현하는 것으로, 광범위한 착취 상황(정치, 경제적 공포, 안전의 부재 등)에 대항하는 저항과 자유와 새로운 생활 조건의 추구를 표현 20) 하는 것이 었다. 따라서 이러한 이동성은, 그것을 일정한 공간으로 유폐시키거나 포섭하고자 하는 민족이나 국가건설의 기획과 늘 상충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해방기의 광범위한 이동과 이주를 민족적 국가적 귀환 으로 축소시키거나 포섭하고자 하는 시도는, 의도하지 않 았다 하더라도 이동성 에 내재해 있는 다양한 가능성과 잠재력을 봉쇄 하는 효과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이동성 의 복원을 통해서 해방기의 정치적 가능성과 잠재성을 가늠해보고자 하는 것이 이 글의 의도이자 문제의식이다. 해방기 이동 혹은 이주의 문제는 문학사 서술, 특히 소설사 서술에 서 언급되어 왔다. 해방기 문학을 서술하면서, 귀향형식 에 주목하여 길의 회귀적 표상과 귀환의 명암 에 주목 21) 하거나 민족이동과 귀소본 능의 형식 22) 으로 풀이한다든가, 혹은 해방의 의미를 잃어버린 조국을 20) 근대적, 탈근대적 이주(migration)에 내재하는 이동성의 저항적이고 구성적 성격에 대해서는 안토니오 네그리 마이클 하트(Antonio Negri Michael Hardt), 윤수종 옮김, 제국, 이학사, 2001, 281~287쪽 참조. 21) 이재선, 현대 한국소설사: 1945~1990, 민음사, 1991, 33~46쪽 참조. 22) 김윤식 정호웅, 한국소설사, 문학동네, 2000, 340~345쪽 참조.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35 되찾았다는 역사적 사실로 해석하여 이에 대응하는 잃어버린 고향으 로서의 귀환 과정 23)으로 의미화하는 등, 근래에 들어 이 문제는 귀환 서사 라는 개념을 통해, 일본 제국 붕괴 이후의 민족 정체성 회복과 근 대국민국가성립이라는 맥락에서 논의되어 왔다24). 이러한 논의들은 해방된 조선으로 귀환은 새롭게 건설될 국가의 국민이 되는 과정 25) 이라거나 해방기라는 새로운 시공간 속에서 개인들은 新生 조선의 건 국 주체로서 자기 정체성을 새롭게 확립해야 했다 26) 등과 같이 대체 로 귀환(이동)이라는 문제를 민족적 주체나 국민적 주체의 성립과정으 로 설정한다. 이러한 설정은 절반 정도만 옳은 듯하다. 해방기 이동과 귀환서사 는 민족적/국민적 정체성을 형성하는 과정으로 해석될 수도 있지만, 다소 불완전하게나마 그 텍스트들 속에 형상화되어 있는 다양 한 이동의 층위들 또한 간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점에 주목 하여 해방 후 이동과 관련된 염상섭의 소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2. 1945년 만주에서, 해방의 또 하나의 버전 - 부재하는 세큐리티 1945년 8월 15일 이후, 한반도에서는 전 조선 각지에 구속되어 있 는 정치범을 즉시 해방하라! 27)라는 구호로 해방기를 시작하거나 여 23) 권영민, 한국현대문학사 2 (1945~2000), 민음사, 2002, 59~65쪽 참조. 24) 정종현, 해방기 소설에 나타난 귀환 의 민족서사 - 지리적 귀환을 중심으로, 비교문학 vol.40, 2006; 신형기, 허준과 윤리의 문제 - 잔등(殘燈) 을 중 심으로, 상허학보 제17집, 2006; 정재석, 해방기 귀환 서사 연구, 연세 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오태영, 민족적 제의로서의 귀환(歸還) - 해방 기 귀환서사 연구, 한국문학연구 제32집, 2007 참조. 25) 정재석, 앞의 글, 79쪽. 26) 오태영, 앞의 글, 516쪽. 27) 김남천, 1945년 8 15, 작가들, 2007, 8쪽.

336 한국문학연구 36집 기저기에 흰 바지저고리 차림의 아저씨들이 떼 지어 좋다! 좋아! 라고 덩실덩실 춤을 추는 광경 속에서 한 덩어리가 되어 좋다! 좋아! 를 연 발하면서 춤을 추며 거리를 행진 28) 할 수 있었지만, 만주국 에 거주하 고 있었던 염상섭의 경우는 상황이 달랐다. 주지하듯이 염상섭은 중일전쟁 무렵인 1936년 혹은 1937년 무렵에 滿 鮮 日 報 편집국장으로 초빙되어 만주로 건너간다. 이 무렵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염상섭의 삶에 대한 사실적인 내용은 아직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지 않다. 다만 만선일보 편집 일을 3년 가까이 하다가 1939년 9월에 안동으로 이사하여 大 東 港 건설주식회사 홍보 담 당일을 맡아보면서, 일생 중 가장 풍요롭고 안정된 시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하여 일제 말기 일본인들과 동일한 대우를 받으면서 생활할 수 있었다고 한다. 29) 만선일보 편집국장으로 초빙되어 떠나 게 되는 조건이 가족동반과 함께 문필 생활을 그만두는 것이던 만큼, 이 시기 문학 활동은 싹트는 대지 (1941)의 서문 30) 과 안수길의 창작 집 北 原 (1944)의 서문 31), 그리고 만선일보 에 연재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開 東 의 집필 정도이다. 해방을 불과 두 해도 남겨 놓지 않았던 시점인 1943년 11월에 작성 되었다고 되어 있는 북원 의 서문 32) 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염상섭 28) 유종호, 나의 해방 전후: 1940~1949, 민음사, 2004, 112쪽. 29) 김종균, 廉 想 涉 硏 究, 高 麗 大 學 校 出 版 部, 1974, 36쪽 참고. 30) 申 瑩 澈 편, 싹트는 大 地 - 在 滿 朝 鮮 人 作 品 集, 滿 鮮 日 報 社 出 版 部, 1941, 1~3쪽. 31) 연변대학교 조선문학연구소 허경진 허위운 채미화 주편, 안수길, 보고사, 2006, 582~585쪽. 32) 진실로 협화정신을 실천하고 모든 기회에 우리도 만주국의 문화건설에 참여 하고 공헌코자 할진대, 日 滿 系 의 그것에 연계와 협조를 일층 긴밀히 하고 선 진의 계발과 편달을 힘입을 방도가 있어야 할 것이데, 만주국의 예문단체가 탄생된 지 이미 3,4 星 霜 을 閱 하였을 터이로되, 조선인 작가와 작품이 그 권외 에 유리되어 있는 현상은 그 이유와 원인이 나변에 있든지간에 기형적 사태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지방적임이 근본적으로 틀린 것은 없으나, 언제까지 그 지경에서 준수하고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라는 말이다. ( 北 原 序, 안수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37 은 만주국의 협화정신과 문화건설의 참여를 언급하며, 만주국 내에서 의 조선문학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염상섭의 발언이 얼 마나 진실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표면적으로는 만주국의 일원으로서 부족하지 않은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 고 만주국에서의 이와 같은 생활은 해방 무렵까지 지속되었다고 보아 도 무방할 것이고, 그리하여 염상섭은 만주 안동에서 1945년 8월 15일 을 경험하게 된다. 해방을 맞이한 지 17년이 지난 한 일간지 1면에는 대통령권한대행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의 빈곤으로부터의 완전한 해방, 폭정과 압제에 얽매인 북한동포의 해방 을 골자로 하는 제17회 광복절 축사 가 실리는 가운데, 4면에는 내가 맞은 8 15 라는 제목으로 회고 기사가 게재된 다. 여기에는 일본, 만주, 중국, 미국, 서울에서 맞이한 8 15를 회고 하는 문인과 교수의 글들이 실려 있다. 33) 이 기사에서 염상섭은 만주 에서 맞이한 해방에 관해 쓰고 있다. 그는 대략 1000자 정도 되는 이 짧은 기사 형식에서 만주 安 東 에서 맞이한 해방을 환희와 전율 이라는 감각으로 드라마틱하게 재구성한다. 그에게 있어서 1945년 8월 15일 은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을 일본인들과 함께 청취하는 등 극적인 구석이 있었다. 회고에 따르면 그는 항복 선언을 청취한 8월 15일 당일 조선인거류민회를 조직하기 위해, 전쟁 중에 자 치제로 실시해 오던 夜 警 을 일본인 국민학교 교사와 순번을 바꾸었는 데, 그 日 人 敎 員 이 兇 漢 의 白 刃 아래 刺 殺 되 는 일이 발생한다. 34) 말 길, 582쪽) 33) 일본에서의 경우 鄭 漢 模, 만주에서의 경우 廉 想 涉, 중국에서의 경우 金 光 洲, 미국에서의 경우 申 四 勳 (교수), 서울에서의 경우 朴 斗 鎭 의 회고가 각각 게재 되었다. ( 東 亞 日 報 1962.8.15, 4면 참조) 34) 염상섭 글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光 復 의 첫날을 맞이한 것은 鴨 綠 江 對 岸, 滿 洲 땅 安 東 에서 있었다. 이날, 日 本 東 京 으로부터 重 大 放 送 이 있다는 豫 告 에 바로 옆의 집 日 本 婦 人 과 뒷골목에 사는 老 日 人 이 방송을 들으러 내 집으로 왔 었다. 이 老 日 人 은 顔 面 은 있었으나 내 집에 발을 들여 놓기는 처음이었었다.

338 한국문학연구 36집 하자면 만주 안동에서의 해방은 환희와 죽음(전율) 이라는 극단적인 상 황을 동시에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히려 해방의 환희보다는 죽음, 전 율, 공포 라는 감각이 더 큰 낙차로 다가왔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민 족과 조국은 일본 제국주의로부터 독립되었는데, 개인이나 소집단의 차원에서는 죽음으로 몰릴 수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는 것이 만주에서의 해방이었다. 말하자면 민족의 자기보존(security)이 달 성되는 시점에 개인의 안위(security)가 불안정해지는 상황이 만주에서 염상섭이 맞이한 해방이었다. 염상섭이 17년이 지난 이후에 회고라는 형식을 통해 상기한 이 사건 은 개인적 차원을 넘어 당시 만주 안동에 거주했던 조선인, 일본인, 만 주인 집단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회고의 내용은 혼란 ( 民 聲, 1949. 1)과 모략 (단편집 三 八 線, 金 龍 圖 書 株 式 會 社, 1948)의 放 送 은 목매인 소리가 흘러나오는 日 帝 의 沈 痛 한 降 伏 宣 言 이었었다. 室 內 는 冷 水 를 끼얹은 듯이 찬바람이 돌았다. 그러나 내 가슴은 뛰었다. 내 눈에도 그 日 老 人 의 눈에도 눈물이 글썽하였건마는, 제각기 그 뜻은 달랐었다. 하나는 뼈에 맺힌 怨 恨 이 갑자기 풀리는 歡 喜 의 熱 淚 이었고, 하나는 悲 憤 에 가슴 쓰린 痛 恨 의 눈물이었다. 放 送 이 끝나자 말없이들 헤어졌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 말 하고자 하는 것은 바로 그날 저녁이 공교롭게도 내가 夜 警 을 도는 차례이었다 는 것이다. 夜 警 은 戰 時 中 洞 內 에서 自 治 制 로 시행하여 오던 터인데 나는 당일 로 밤을 도아가며 조직하여야할 우리 居 留 民 會 에 참석하기 위하여 순번을 바 꾸어 달라고 청하여 隣 近 의 국민학교의 日 本 人 선생이 代 替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會 를 마치고, 夜 半 에 집에 돌아와 앉았자니, 마침 내 집의 옆 골목에 서 딱딱이 소리가 나자마자, 뒤미처 캑하고 悲 鳴 이 희미하게 들리고는 잠잠히 밤은 깊어 갔다. 이튿날 會 에 나가서, 간밤에 내 집 옆골목에서 D보통학교 日 人 敎 員 이 兇 漢 의 白 刃 아래 刺 殺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內 心 으로 어크머 니나! 하고 몸서리가 처졌으나, 副 會 長 인 나는 會 長 L 氏 와 함께 知 面 이요 橫 死 한 그의 집에 弔 慰 를 갔었다. 해마다 光 復 節 을 맞으면서 그때 이날을 一 生 에 한번 밖에 또다시 없을 歡 喜 의 눈물로 맞이하고, 그날 밤의 戰 慄 을 되씹고 있 다. 그러나 그 歡 喜 는 비록 歡 喜 라하여도 되풀이하여서는 안되고 길이길이 後 日 을 휘하여 銘 記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나 個 人 으로서는 그날의 橫 厄 에서 벗어났음을 天 主 께 감사할 다름이다. (염상섭, 歡 喜 의 눈물 속에 滿 洲 에서, 東 亞 日 報, 1962. 8. 15, 4면)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39 주요한 뼈대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당시의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그리하여 염상섭은 만주국에서 그가 맞이하는 해 방의 풍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만주반점 앞 넓은 마당을 중심으로 벌써 사흘 낮 사흘 밤을 두고 뚱 땅거리고 삐빼거리는 <까오쟈오> ( 高 脚 踊 = 滿 洲 人 의 춤)는 오늘도 훤 하면서부터 또 질번질번히 벌어졌다. 승전 축하의 거리의 잔치다. 팔월 십오일 저녁부터 시작된 이 탈춤은 언제나 그칠 줄 모른다. 新 舊 市 街 의 교차점이 이 거리에서 남편인 신시가에 사는 異 民 族 의 불안과 공포에 싸인 눈에는 얼마나 부럽게 보이고 아직도 무더운 한 밤을 시달리고 난 고달픈 새벽 잠이 몇 번이나 그 피리 소리와 갈채 소리에 소스라쳐 깼 었던지 모른다. 35) 주거지를 분할하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해방을 둘러싼 감각 역시 분 할된다. 한쪽에서는 승전 축하의 거리의 잔치 가 쉼 없이 지속적으로 벌어지고, 그와는 상반된 이민족의 불안과 공포 는 누적되어 간다. 팔 일오를 맞는 조선 사람은 어떤 의미로는 전승 국민인 이 사람들보다 더 길길이 뛰어야 할 것 이지만 그러나 조선 사람이 이렇게 놀 수 있겠는 가? 하는 생각 36) 이 자리하는 것이다. 해방 바로 직전까지 만주국의 五 族 協 和 라는 이데올로기에 의해 봉합되어 있었던 민족적 갈등은 제국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전면적으로 현실화된다. 그렇다면 이러한 공포 와 불안은 무엇으로부터 연원하는 것이었으며, 그리고 무엇이 환희와 불안을 분할하는 기준점으로 작동한 것일까. 해방 직후 만주 지역에서는 소련군이 점령한 상태에서 치안과 지배 권력이 부재한 무정부적 상황이 연출되기 시작했고, 국민당과 공산당 35) 염상섭, 混 亂, 廉 想 涉 全 集 10-중기단편 1946~1953, 1987, 민음사, 152쪽. 36) 염상섭, 混 亂, 앞의 책, 153쪽.

340 한국문학연구 36집 의 승패를 결정할 수 있는 전략적 요충지로 만주가 부상하면서 긴장감 이 고조되고 있었다. 37) 이와 같은 상황은 혼란 과 모략 등에서 자 세한 설명이 부기되지 않은 채 여기저기에 등장하고 있다. 소설에 등장 하는 조선인회, 한교 자치회, 치안 유지회, 공안국, 식량 배급 공 사 등의 단체는 항상 죽음을 상기시킬 만큼 혼란스러웠던 만주의 상태 를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단서이다. 염상섭은 회고에서 그 자신이, 그리 고 혼란 과 모략 에서 그 자신의 분신이라고 할 법한 인물들이 해방 이 되자마자 가장 먼저 행하는/행해야만 하는 작업으로 조선인회 를 조 직하는 일을 설정하고 있다. 회고에서는 그가 조선인회에 부회장으로 참여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죽음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해방 후 만주 안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 혼란 과 모략 은 사실상 조선 인회를 둘러싼 내용이 주를 이룬다. 오족협화 라는 미명 아래 형식적으 로나마 동일한 만주국 일원이었던 사람들이 해방 후 조선인회의 회원 으로 재조직되는데, 조선인회는 자민족의 自 治 와 치안유지의 一 翼 으로 급급히 조직 한 것으로, 동족 시민이나 피난민의 보호와 식량 확보 등 38) 을 구체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말하자면 부재하는 혹은 붕 괴된 안전망의 (재)구축인 셈이었다. 39) 이와 같이 안전망과 치안의 부재는 전방위적인 것이었다. 해방 직후 만주에서는 재만 조선인의 재산을 둘러싸고 중국인과의 재산분쟁이 빈 37) 김춘선, 광복후 중국 동북지역 한인들의 정착과 국내귀환, 한국근현대사연 구 2004년 봄호 제28집, 183쪽 참조. 38) 염상섭, 混 亂, 앞의 책, 154쪽. 39) 混 亂 에서 주요한 갈등 구조를 이루는 조선인회 와 한교 자치회 와 같은 자 발적인 조선인 민간조직의 성립은, 염상섭이 거주했던 안동지방의 특수한 사 례가 아니라 해방 이후 만주 지역 곳곳에서 일어난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교 민회의 조직은 만주 지역을 접수해 들어오던 국민당 정부 측과 교섭하려 했 고, 이에 국민당 동북보안사령장관부에서는 韓 國 僑 胞 處 理 臨 時 方 法 을 제정하 여 이를 관리하였다. 당시 국민당 점령지역에는 43개의 한국교민회가 설립되 었다. 이와 관련해서는 김춘선, 앞의 글, 189~190쪽 참조.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41 번하게 발생했다. 만주국 시절 당시 조선인이 토지와 기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강제적인 부등가 교환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다시 원주인 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주 지 역을 점령하고 있었던 국민당 정부는 재만 조선인들을 韓 僑, 즉 외국 인으로 분류했기 때문에, 그들이 만주 지역에 거주하는 것은 물론 재산 을 소유하는 것조차 불법행위에 해당하는 일이었다. 40) 그리하여 실제 로 해방 직후, 조선인들은 국민당 정부로부터는 산업과 재산을 몰수 41) 당하는 한편, 지주와 土 匪 들로부터는 토지와 가옥을 약탈당하는 비참 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42) 이것이 재만 조선인들이 피난민으로 전락 하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염상섭은 해방 직후 만주에서의 상황을 혼란 과 모략 을 통해 형 상화하는데, 이 소설에서는 피난이나 이주 그 자체보다는 조선인회를 둘러싼 갈등과 대내외적인 대응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혼란 에서 피난민 차로 달려든 아내의 친구는 뇌막염으로 사망하며, 결과적으로 피난에 실패하고, 이창규의 아내는 여보, 어서 갑시다. 내일 걸어서라 도 떠납시다 43) 라고 계속해서 종용하지만 끝내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조선인회 회장을 맡고 있는 임회장 은 짐을 싸 놓고 언제든지 뜰 작정 이라 며 살인 사건이나 구타 치사 같은 돌발 사건이 생겨서 어느 때 무 슨 봉변을 당하지 않을까 하는 겁에 벌벌 떨며 앉았으면서도 44) 조선 40) 손춘일, 앞의 글, 앞의 책, 8~9쪽 참조. 41) 동북보안사령장관부 한교사무처에서 1946년 4월 3일부터 동년 9월 30일까지 요녕, 요북, 안동, 길림, 열하 등 5개 성에서 차입한 한인 재산은 가옥 1,757 채, 2,934,904,86m2, 基 地 1,406,761,67m2, 수전 17,461,063,57m2, 한전 3,623,676,38m2, 雜 地 58,648,335,42m2, 原 野 276,489,00m2, 황무지 279,952,38 m2, 광산지 12,976,300,00m2, 墓 地 5,966,00m2, 공장 59 所, 기계 1,642건, 가구 31건, 醫 器 20건, 유가증권 2,044,108,60 元 이었다 (김춘선, 앞의 글, 195쪽) 42) 김춘선, 앞의 글, 201쪽 참조. 43) 염상섭, 混 亂, 앞의 책, 165쪽. 44) 염상섭, 混 亂, 앞의 책, 159쪽.

342 한국문학연구 36집 인회 회장 자리를 끝까지 지키려고 드는 인물로 그려진다. 모략 에서 도 만주를 떠나 고향으로 돌아간 자들은 소설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동네에서 끼어 살던 단 세 가구의 조선 사람 중에 두 가구 는 벌서 고향으로 떠나 가버 45) 렸다는 식의 간접적인 서술로 처리된 다. 그리고 창규의 아내는 여보 어서 우리 풀었던 짐 다시 싸가지고 내일은 나섭시다 라고 재촉하고, 창규 역시 어느 때까지 이 땅에 머뭇 거리고 있을 것은 아니나, 이번 사건만은 아무래도 낙착을 짓고 이러서 야 하겠다고 결심을 하 46) 지만 갈등이 해소되고 난 뒤에도 이들이 만 주를 떠나는 내용이 부기되지는 않는다. 두 소설에서 만주에서 떠나는 자들은 음각화되어 처리되거나 실질적인 갈등을 야기하기 않는 수준에 서 하나의 배경으로 위치지어진다. 소설 속의 주요 인물들은 만주에서 언제든지 떠날 수는 있지만 결과적으로 떠나는 장면은 소설에서 형상 화되지 않으며, 떠나고자 하는 원심력은 조선인회를 중심으로 하는 구 심력과 팽팽한 긴장을 형성한다. 요컨대 이 두 작품은 어떻게 떠날 것 인가 하는 문제보다는 어떻게 남을 것인가 하는 문제에 보다 힘을 기울 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혼란 의 김호진은 그와 같은 긴장의 가장 부정적인 형상을 보여준다. 그는 해방 후 조선인회에서의 회장직 을 차지하기 위해 한교 자치회를 조직하여 조선인 내부에서 갈등을 조 장하는데, 그는 만주에서 하급 관리 생활을 하면서도 땅마지기나 장만 하고 집 간도 사고 한 재주군이요 그만치 근거를 잡아 놓은 이 땅을 버 리고 엉덩이가 들먹거릴리도 없고 보니 이 판에 세력을 부식해 놓으려 고 애를 쓰는 것이다. 즉 김호진은 해방 후 만주에서 소유한 재산과 토지를 지키기 위해 조선인회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의 대척점에 덕순 ( 모략 )과 같은 젊은 측 이 자리하여 조선인회를 실질적 으로 구성해 나가는 창규 를 조력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부정적 45) 염상섭, 謀 略, 三 八 線, 金 龍 圖 書 株 式 會 社, 1948, 90쪽. 46) 염상섭, 謀 略, 앞의 책, 123쪽.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43 이든 긍정적이든 간에 조선인회를 구성하는 인물들은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토지와 가옥 등과 같은 소유권을 지키며, 배급과 같은 생존권과 직결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이들이 방어하고자 하는 것은 인간으 로부터 대상화된 잉여적인 사적 재산이 아니라, 사실상 강탈당하면 생 활의 터전과 생명을 상실하게 되는, 삶을 위한 필수 요건들이다. 세큐 리티가 부재하는 해방 후 만주라는 장소에서 그들이 유일하게 자존을 지킬 수 있는 물적 토대인 셈이다. 토지나 가옥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는 더 이상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는 상황, 그것이 해방 후 만주에서의 삶 이었다. 조선인회라는 私 的 團 體 가 경찰권을 행사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것 은 문제도 아니다. 그만치 이 일주일동안은 완전히 무정부상태가 된 것 이다. 그러나 제 민족끼리는 自 治 를 하여야 하고 민족 간의 마찰을 피 하야 큰 참극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하야는 그따위 法 理 論 을 논의하 다가는 조선 사람은 하나도 목숨을 건지지 못할 것이다. 47) 해방 후 불안과 공포 로 대변되는 무정부 상태 는 기존의 공사( 公 私 ) 의 관념이나 법이론적 해석을 무화시키도록 추동한다. 이와 같은 치안 부재 상태는 역설적으로 기존의 국가 관념을 재검토하도록 이끈다. 일 본인회 회장이 라디오 로 울며 하는 소리가 우리는 국가의 보호를 받을 길이 막혔으니 압길이 캄캄하다 고 합디다마는, 우리는 지금 뉘 보호를 받겠느냐는 말요. 48) 라는 질문이 되돌려지는 순간이 바로 만주 에서의 해방이다. 이 조선인회는 만주에서는 두 권력 사이에 놓여 있는 상태였다. 만주에서는 위로는 제국 일본 및 만주국을 대신하기 시작하 는 국민당 정부의 하위 기관인 치안유지회 나 공안국 이 정립해 가는 47) 염상섭, 謀 略, 앞의 책, 94~95쪽. 48) 염상섭, 謀 略, 앞의 책, 99쪽.

344 한국문학연구 36집 새로운 국가적 질서가 구축되는 한편, 정반대 편의 다른 한 쪽에서는 아래로부터의 무정부적 힘 즉 언제 어디서 자행될지 예측할 수 없는 폭력 이 창궐하고 있었다. 이 두 흐름은 권력의 양극단을 보여주는 것이었지만, 조선인회에게 있어서는 동일하게 안위 를 위협하는 것이 었다. 국민당 정부의 하위 조직인 보안위원회 나 공안국 은 제일 먼저 일반의 무기 회수 49) 를 통해 해방 이후 편재하는 권력을 국민당 정부 로 독점시키는 작업을 진행하면서, 국가 권력의 모습을 불완전하나마 갖추어 나가기 시작하고, 이로써 조선인회를 점차로 통제해 나가기 시 작한다. 한편 아래로부터 발생하는 중국인 측의 통제 불가능한 약탈과 살해 위협은 절도와 같은 형태로 조선인들을 교란 50) 시킨다. 그리고 만 주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은, 앞서 언급했듯, 돌아갈 국가가 정해져 있다 는 점에서 조선인들과는 다른 상태에 놓여 있었다. 누가 우리를 지켜 주는가 하는 물음이 유효하지 않거나 불가능한 상태가 조선인회가 서 있 는 지점이었다. 그리하여 조선인회는 가시적이고 명확하게 등장하는 국 민당 정부로부터는 공포를, 그리고 언제 어디서 튀어나올지 알 수 없는 중국인 측의 습격에 대해서는 불안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상태였다. 염상섭의 혼란 과 모략 에서 이 조선인회는 위에서 구축되어가는 국민당 정부의 권력에 투항하거나 동의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고, 그 렇다고 해서 아래에서 무정부적으로 흐르고 있는 중국인들의 대오에 합류할 수도 없는 상황 51) 이었다. 따라서 누가 우리를 지켜주는가 하는 49) 염상섭, 謀 略, 앞의 책, 99쪽. 50) 염상섭, 混 亂, 廉 想 涉 全 集 10-중기단편 1946~1953, 1987, 민음사, 165쪽. 51) 예컨대 混 亂 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참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제 조선인 회에서 이(중국인측-인용자) 축하 행진에 조선인도 합류하여 축의를 표하고 새로운 친선을 도모하자는 의논이 있었던 터라 어떻게 하는지 구경이나 하고 싶었다. 결국 조선인은 참가하진 않게 됐으나 참가하게 된다기로 불청객이 자 태로 꽁무니나 따라 다닐 맛도 없는 일이요, 더구나 그 속에 주정뱅이나 끼었 다간 무슨 일을 일으킨다면 공연히 일만 생길 것이 무서워 그만두자는 것이었 다. (앞의 책, 154쪽)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45 물음은 우리가 우리를 어떻게 지킬 것인가 하는 자치 에 대한 물음으로 정향되어야만 했다. 그람시가 지적하고 있듯이 하위 계급들 역시, 지배 계급의 역사와 마찬가지로 국가를 향해 움직이는 것52)을 고려해야만 하겠지만53), 해방 후 만주에서 구성된 민간단체로 조직된 조선인회는 토지와 가옥을 탈취당하고 영토를 상실해가는 가운데 저항과 자치를 수 행해야 했기 때문에 국가적인 성격을 보유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3. 해방기, 개인의 상태와 국가 짐 속에는 무어 있어? (중략) 없어요. 우리 거지 한가지요. 만주서 다 뺐겼어요. 만주에서 웨 와? 52) 하위 계급(subaltern classes)은 정의상, 스스로 국가 가 될 수 있기까지 통 일되지 않으며 될 수도 없다. 따라서 그들의 역사는 시민 사회의 역사와 뒤섞 여 있으며 그것을 통하여 국가들과 국가 집단들의 역사와 연결된다. (안토니 오 그람시(Antonio Gramsci), 이상훈 옮김, 옥중수고2, 거름, 1993, 70쪽) 53) 예컨대 謀略 의 다음과 같은 대목은 조선인회의 국가 구성에 대한 욕망을 드 러내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머처럼 원래의 귀빈 을 맞이하야 한자리 환담을 하랴던 것이 조국의 보호와 권위가 없는 탓인지 뜻대로 되지 않어 넷같 놈의 술은 아니 먹어도 좋다고 거더 차는 생색없는 결 과에 빠지고 말었습니다. (생략) 이곳이 외국이니만치 외국에 있는 조 선사람으로서 조국을 위하야 국민외교의 첫걸음을 떼어 놓는 이 다당에 완전 히 실패하였다는 것은 원인이 어대 있든지 간에 이것은 우리 재외동포의 적지 않은 책임인 동시에 내지 동포에 대하야 사과치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 나 미소 양국이 남북으로 분할 진주하게 된 조국의 현상으로 보아서 이 조고 만 국외 도시에서의 우리의 국제적 처지는 곧 우리 민족과 국가의 처지를 축 소 상증한 것이라고 보입니다. (생략) 우리가 지금 손님 대신으로 마시 는 이 맥주는 국가의 주권을 가진 나라의 백성의 손으로 만든 것이요 국가의 주권을 가진 나라의 대표가 마실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술을 잿 물과 같은 뱃속이 쓰린 벌주로 아시고 마시는 동시에 국가의 주권 밑에 우리 의 손으로 만든 맥주를 마실 날을 서로 기약하고 다시 한잔 건국을 빌면서 드 십시다. (염상섭, 謀略, 앞의 책, 132~133쪽.)

346 한국문학연구 36집 가라구 내쫓아서요. 돈 얼마 있어? 많이 가지고 가면 안돼. 돈 없어서 밥도 못 먹었소. 54) 이 단발적인 질문과 대답으로 이루어진 짧은 대화는 만주에서 신의 주로 이동한 뒤, 다시 삼팔선을 넘기 직전에 조선말을 할 줄 하는 소련 병과 조선인들 사이에서 발생한 것으로, 삼팔선 의 한 대목이다. 이 짧은 대화 속에는 해방 이후 재만조선인이 이주하게 되는 원인이 담겨 있다. 즉 이주가 자발적이라기보다는 만주에서 떠날 수밖에 없는 조건 들이 창출되고 있었던 것이다. 해방 후 그 이전과 같은 수준의 생활이 보장되었더라면, 사실상 이주라는 사건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 이었다. 그들은 꼭 이주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고, 꼭 이주하고 싶어 했 던 것도 아니었다. 불가피하게 떠날 수밖에 없는 사태에 내몰리게 된 것이었다. 당시 재만조선인에게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던 정치엘리트 들은 오히려 재만조선인이 만주에 계속 머물러야만 한다고 강조 55) 하 는 입장이었다. 만주에서 삶을 영위하던 염상섭을 비롯한 재만조선인의 이주 원인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송환정책과 밀접한 관련을 지니고 있었다. 당시 만 주는 국민당 관할 하의 수복구 와 공산당 관할의 해방구 로 분할되어 갔는데, 해방구 에 거주하는 조선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였다. 앞서 언급했듯, 국민당 정부는 재만조선인들을 한교 (외국인)로 규정하여 산 54) 염상섭, 三 八 線, 앞의 책, 63쪽. 55) 한국독립당은 국민당의 송환정책에 반대하면서 다각적으로 노력을 하였다. 韓 國 駐 華 代 表 團 東 北 總 辦 事 處 이건백 대리처장은 재만조선인들에 관한 모든 문 제는 다 해결하고 잘 살게 해줄 수 있는 즉 구태여 본국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리고 한국독립당 고위 간부였던 安 在 鴻 도 재만조선인 들에게 가급적 현지에 남아 고혈로 개척한 땅을 최후까지 고수하고 생존권을 확보함이 필요하다고 피력하였다. (손춘일, 앞의 글, 12~13쪽)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47 업과 토지 등의 재산과 생활기반을 몰수하고, 중국인 측은 조선인의 생 존권을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그리하여 많은 조선인들은 한반도로 이 주하거나 아니면 이중국적과 무상토지분배를 실시하고 있는 공산당 관 할의 해방구 로 이주하였다. 56) 요컨대 이동의 방향성에 있어서도 한반 도는 절대적인 도달 지점이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로 고려되었다. 염상섭의 소설 혼란 과 모략 이, 이주와 이동의 문제가 부재하는 세큐리티 에서 연원하는 것임을 보여준다면, 해방의 아들 은 민족과 국적의 선택 문제 역시 자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염상섭 은 남충서( 南 忠 緖 ) 에서 등장시켰던, 조선인 父 와 일본인 母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의 문제를 해방의 아들 에서 다시 불러낸다. 해방의 아들 의 마쓰노/조준식 은 경상남도 동래 출신의 父 와 나가사키 출신 의 母 사이의 내선결혼을 통해서 태어난 인물로, 그 역시 일본인 아내 를 두고 있다. 이 소설은 염상섭이 1946년 7월 해방 일주년 기념작으 로 쓴 첫거름 의 제목을 변경 57) 한 것으로, 염상섭이 해방 이후 쓴 첫 작품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염상섭 개인에게 있어서는 나름 상징적인 작품인 셈이다. 마쓰노/조준식 은 일본인이기도 하고 조선인이기도 하 면서, 또한 그 어느 쪽도 온전히 될 수 없는 존재이다. 해방 이전의 경 우 그의 사회적 삶은 제국 일본 에서 일본인으로써 유효할 수 있었지 만, 해방 이후 만주에서 반( 半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은 가족과의 단절을 야기하고 생존을 위협하는 기제로 작동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적은 선택의 문제로 설정된다. 마쓰노/조준식이 국적을 선택하는 방식은 해방 전인 그 때 시절에는 그 편이 녕 해롭지 않고 더구나 이런 데 나와서는 가봉( 加 俸 )이니 배급 ( 配 給 )이니 이로운 점이 없지 않어 있었 58) 기 때문이고, 해방 후에는 국 56) 김춘선, 앞의 글, 182쪽. 57) 염상섭, 解 放 의 아들, 解 放 의 아들, 金 龍 圖 書 株 式 會 社, 1949, 58쪽 참고. 58) 염상섭, 앞의 글, 앞의 책, 12쪽.

348 한국문학연구 36집 경을 통과하기 위해 민회에서 피난민증 을 획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가 국적 혹은 민족을 선택하는 방식은 안전보장 을 위한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셈이다. 그가 장기( 長 崎 )로 갈까 동래로 갈까, 여전히 마쓰노로 행세를 할 것인가 조가의 성을 찾게 되는가 하고 혼 자 방황하며 지향을 못 59) 했던 갈등상태는 어느 깃발 밑이 제일 안온 하고 평화로울 것 인가를 인지하고 확정하는 순간 해소된다. 즉 개인의 상태(state)와 국가(state)가 불안정한 긴장관계를 유발하지 않고, 합치 되는 순간이 새로운 첫걸음 이 시작되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러한 상 태 와 국가 의 합치가 이미 주어진 자명한 것이 아니라 결정과 선택의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는 점은 주목을 요한다. 사실 옆집 일인들은 조석이야 끄려 먹겠지마는 하루 온종일 또드락 소리도 없고 드나드는 기척도 아니냈다. 앞문에 붙인 김모( 金 某 )라는 문패는 접수가옥( 接 收 家 屋 )의 선취권( 先 取 權 )을 표시하는 것일 것이요. 동시에 이 집은 이 시가( 市 街 )의 어느 집에나 써 붙인 카렌스키이 도옴 (조선인의 집)이란 확적한 표시도 되는 것이겠지 마는, 그래도 캄푸라 쥬의 효과가 적을까 보아서 문설주에는 어느 때보나 벌서 후락해진 태 극기와 소련의 붉은 기ㅅ발이 좌우로 축 느러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방위진( 防 衛 陳 )을 쳐 놓고도 그 속에 들어 엎대어 있는 야마도 다마시 이 는 다다미 바닥에 옥으라 붙어서 발발 떨다가는 신 새벽에 부엌 뒤ㅅ문으로 빠져나가서, 어대가 모여서, 숨어 있는지, 날이 점으러야 하나 둘씩 기어 들어오곤 하였다. 60) 가옥의 대문에 붙어 있는 카렌스키이 도옴 이라는 표제와 태극기와 소련의 붉은 깃발 은 붉은 군대 만세 란다든지 붉은 군대를 환영한 59) 염상섭, 앞의 글, 앞의 책, 27쪽. 60) 염상섭, 앞의 글, 앞의 책, 3~4쪽.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49 다 는 의미 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들어오지 말라 라는 수행적 발화 로 작동함으로써 안전보장 을 달성한다. 일본인들은 이와 같은 작동방 식을 알기 때문에 조선인 문패, 태극기, 소련의 붉은 기 아래에서 숨죽 이며 생활한다. 말 그대로 이는 캄푸라쥬 (위장)에 지나지 않는 행동이 긴 하지만, 불안과 공포는 야마토다마시이( 大 和 魂 )의 그들을 조선인으로 변신하게끔 이끌고, 단순히 먹고 자는 존재로 추락시킨다. 요컨대 이 지경이 되고 보니 나부터도 여기 귀화해서 안온히 살수만 있다면 이대 로 주져앉고 싶 다는 심리상태를 유발한다. 해방의 아들 에서 극명하게 대별되는 것은 조선인과 일본인의 처지 인데, 이러한 차이는 신의주라는 공간에서 발생한다. 만주 안동에서 조 선인과 일본인은 모두 국가적 보호로부터 배제된 자들임과 동시에, 또 다른 국가 권력의 통제 아래에 놓여 있는 상태였고, 그런 의미에서 조 선인과 일본인의 처지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들이 신의주라 는 다른 공간으로 옮겨옴으로써 상황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신의주에 서 조선인은 일정한 영토(국가)적 보호 아래에 놓이게 되고, 일본인은 여전히 배제의 상태로 머물게 된다. 그러한 가운데 마쓰다/조준식 과 같은 존재는 새로운 국적(혹은 민족성)의 취득을 통해 그와 같은 배제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하고, 일본인의 경우 조선인으로의 위장을 통해 위기 상황에서 벗어나고 한다. 이러한 각 개인 혹은 고립된 집단의 상 태 변화는 국가 권력과 어떻게 대면하고 있느냐에 따라 그 대응 양상이 달라진다. 해방의 아들 이 되는 것이 숙명이나 운명이 아닌 개인의 선택과 결 단의 문제로 다가올 때, 민족적 혹은 국가적 신비주의는 더 이상 작동 하지 않는다. 태극기나 일장기, 붉은 깃발 등이 개인의 극단적인 생존 의 문제가 될 때, 大 和 魂 은 현실적인 다다미 바닥에 오그라들어 벌벌 떨 수밖에 없는 것이다.

350 한국문학연구 36집 4. 영토적 분절과 이동하는 것들 피난민, 잠상군, 호열자 해방 후 염상섭의 이동 경로는 만주 안동에서 신의주를 거쳐 삼팔선 을 넘어 서울에 이른다. 그의 소설 혼란, 모략, 해방의 아들, 삼 팔선 등에는 이와 같은 이동로가 고스란히 기입되어 있다. 그리하여 해방 이후 염상섭 자신의 삶이나 그의 소설에서의 이동은 이념형의 민 족의식과 결부되어 있다기보다는 현실적인 안전보장의 문제로부터 추 동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볼 때, 자신의 삶 을 영위할 수 있는 일정한 현실적 조건만 보장되었다면, 염상섭은 만주 안동이나 신의주에 머물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신의주 학생사건이 발발하면서 위기 상황이 계속해서 연출되었기 때문에, 그와 그의 소설 은 삼팔선 을 넘기에 이른다. 삼팔선 에서는 만주 안동과 신의주, 그리고 삼팔선 이남으로 이어 지는 이동의 경로가 상세히 그려진다. 만주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의 안 전을 위협하는 것은 두 층위로 형상화된다. 하나는 대지에 새로운 공간 분할과 질서를 정초함으로써 피난민의 이동을 통제하는 국가권력의 등 장이다. 소설에서 이것은 국가에 독점된 폭력의 상징물인 총 에 의해 구체화된다. 따라서 이동의 경로마다 항상 등장하는 것이 총소리 라는 점은 단순한 우연이 아니다. 작년 해방 직후의 일이지마는, 안동에 남 겨둔 짐을 차져가지고 오려니까 시가지를 다 빠져나오기 전부터 압록 강 철교 쪽에서 총소리가 팽 팽 끊일 새 없시 나고 신의주에서는 소위 학생사건 당일에는 전날밤에 (중략) 으악 소리가 나자 탕, 탕 소리가 바로 열아문간통 앞에서 나 며, 삼팔선을 이남을 향해 가는 도 중 사리원에서도 총소리가 등장한다. 총소리가 등장할 때는 항상 총을 쏘는 자들이 직간접적으로 제시되는데, 압록강에서는 소련병(만주 세관 사람), 신의주에서는 공산당 본부, 사리원에서는 보안대 주재소가 총의 발사를 집행하는 주체로 등장한다. 그들은 항상 정치적, 지리적 경계의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51 가장자리에서 영토적 분절을 통해 흘러넘치는 모든 흐름을 통제하고자 한다. 총 은 직접 대면했을 때만 불안과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 니다. 오히려 멀리서 향방을 알 수 없는 총소리 가 땀 드릴 새도 없이 얼른 몸을 감추지 않으면 어디서 팽하고 탄환이 날아올지 모를 것만 같 61) 은 불안과 공포를 더욱 증폭시킨다. 피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또 다른 층위는 도적과 강도 와 같은 범죄자들이다. 삼팔선 에서 피난민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는 이동을 통 제하는 소련병, 보안대 등과 같이 정당화된 국가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 이기도 하고, 치안 부재 상황에서 그들을 습격해 오는 사적이고 개별적 인 폭력을 행사하는 자들이기도 하다. 서울에서 북상하는 이주자를 만 나 나누는 대화의 한 대목 치안은 어떴읍디니까요?/모르죠 요행히 도적은 안만났으니까요. 어쨌던 큰길 내놓고 숨어오랴니 더 고생이죠 은 이러한 상황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삼팔선을 가로지르려는 피 난민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안전보장을 위협하고 이동을 방해한다는 점에서, 국가 폭력과 같은 공적 폭력과 도적과 강도 와 같은 사적 폭력 은 동일한 층위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만주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은 교통로를 따라 삼팔선을 넘기 위해 이 동해 가는데, 이 이동로에는 피난민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피난 민 루 - 트인지 잠상군( 潛 商 軍 ) 루 - 트인지가 개척된 후로는 신막루-트를 이용하는 사람도 없어지고 자연히 이 길은 막히고 말았던 것 이라는 서 술에서 알 수 있듯이 피난민의 이동로는 잠상군의 이동로와 동일하며, 이 두 집단은 사실상 시각적으로 식별되지 않는다. 그리고 피난민을 따 라 이동하는 무형의 존재로 호열자 라는 전염병을 빼놓을 수 없다. 말 하자면 피난민과 잠상군, 호열자 이 세 가지는 동일한 이동로를 공유하 면서, 가시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이동로를 통제하고 분절하는 국가 61) 염상섭, 三 八 線, 三 八 線, 金 龍 圖 書 株 式 會 社, 1948, 72쪽.

352 한국문학연구 36집 권력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세 가지는 삼위일체로 함께 움직이고 있는 셈이다. 피난민과 잠상군은 피난민 증명서 와 호열자 예방주사 증명서 를 통해서 이동의 필요조건을 충족시키고 이동을 허가받는다. 요컨대 피난민은 잠재적인 잠상군, 호열자 보균자 로 취급받게 된다. 이 사람도 잠상( 潛 商 )인가 싶었다. 잠상군이 아니기로 이런 길을 나 서면 주사약 한상자라도 지녔을 것이요. 흰 것(아편가루) 아니면 일본 지폐장이라도 구두창 밑이든지 여자의 속 것 춤에 숨겨가지고 왔을지 모를거라. 운수 좋아서 녀자가 붙들려가지 않을 경우면 여자의 몸은 그 리 뒤지지 않는다기도 하거니와, 요지막까지도 三 八 이북에서는 일본 돈 시세가 좋아서 돈장사의 왕래가 상당하다. 남쪽에서 일본돈을 몸에 지닐 수 있는대로 지니고 건너서면 이북에 있는 일본사람은 조선 돈이 나 만주돈과 바꾸어 두느라고 갈급이 난 것이다. 그러나 이북에서도 일 본 은행권은 통용이 아니되고 일본으로 돌려 보낸다는 예정은 점점 밀 려가니 조선은행권이나 만주돈을 다 쓴 사람은 저의끼리 바꾸어 쓰기 도 하겠지마는 그나마 일본사람 전체에 미천이 들어나면 일본은행권을 생으로 먹는 수도 없고 팔어 먹을 것은 다 팔아먹고 나면 미구불원에 굶어 죽을지 모를 형편이다. 일본인커녕 전재민도 어름어름 하다가는 가도 오도 못하고 굶어 죽을 판이다. 62) 염상섭은 삼팔선 에서 위와 같이 잠상군의 존재와 그들의 활동을 소략하면서도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들에 대한 형상화는 모략 에서 도 살펴볼 수 있는데, 해방 후 압록강을 경계로 만주 안동과 신의주 사 이에서 대규모의 밀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 63) 한다. 염상섭은 해방 62) 염상섭, 三 八 線, 앞의 책, 10~11쪽. 63) 삿자리라는것은 해방( 解 放 )이 되어 압록강이 터지니까 전 유역( 流 域 )에 걸쳐 쭉치고 엎대있던 잠상군( 潛 商 軍 )이 경칩이나 만난듯이 활개를 치고 꾀어들었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53 기 잠상군의 존재에 대해 아주 민감하게 포착 64) 하고 있는데, 이들은 삼팔선을 중심으로 오르내리며 실질적으로 만주와 북한, 남한, 일본을 잇는 장거리의 통제 불가능한 경제적 유통 공간을 창출하고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예컨대 위의 인용에서 언급되고 있지만, 그들은 비공식적인 외환거래를 통해, 만주와 북한, 남한, 일본을 하나의 외환 거래망으로 연결하고 있는 셈이다. 대지에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고 국 경선이 확정되고 통제되어 가는 가운데, 이와 같은 비공식적인 경제적 이동로의 구축은 인플레이션에 의한 물가 폭등과 같은 경제적 혼란을 유발시키는 것이었으며, 그리하여 망국적인 밀무역 65) 으로 지탄을 받 기도 하였다 66). 삼팔선 에서는 압록강에서 벌어지는 소련병의 총격 장면을 서술하는 가운데 만주 세관을 언급하는데, 이는 잠상군과 관련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삼팔선까지 하루 정도 거리를 남겨 둔 금교에서 피난민 일행은 보안 서에서 사상문제와 짐 조사, 호열자 예방주사 증명서 검사를 받는 다. 67) 해방기 이주민의 이동 가능성 여부를 판단하는 주요한 근거로 지마는 그중에서도 눈에 띄우는것이 신의주로 쏟아져 들어가는 삿자리 밀수 의 행렬이었다. 돈시세가 급자기 떠러져간다해도 한장에 십원 이십원이 떠러 지( 利 益 )니, 날마다 철교의 이끝에서 저끝까지 해가 훤한면서부터 하얗게 늘 어선 것이 삿자리의 장사진이었다. (염상섭, 謀 略, 앞의 책, 95쪽) 64) 이는 만주에서 신의주를 거쳐 삼팔선 이남으로 이주하면서 동일한 이동로에 서 반복적으로 그들과 마주하게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65) 당시 밀무역이나 밀수는 쌀값이 폭등하는 가운데서도 일본으로 쌀을 밀매하 여 이득을 취하는 등 매우 광범위하게 대량으로 발생하였고, 이는 남한 당국 의 골칫거리이기도 했었다. 66) 당시 삼팔선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민간인 차원에서의 비공식적 거래는 통상 38 密 貿 易 으로 불리는데, 이는 은밀하게 진행되고 단속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그 추세와 동향은 대략적인 윤곽만을 잡아 볼 수 있을 뿐, 적발 건수를 제외 한 그 이상의 상세한 내역은 찾아보기 힘들다. 다만 당시 남북한의 공식적인 무역 규모를 넘어서고 있었으며, 48년도에 적발된 액수만 1억 2천 9백만원 (미화 약 53만 달러) 수준이었다고 한다.(장화수, 38 密 貿 易 시절의 남북 물 자교역, 北 韓, 1985년 8월호; 이대근, 解 放 後 -1950 年 代 의 經 濟 : 工 業 化 의 史 的 背 景 硏 究, 삼성경제연구소, 2002, 131~134쪽 참고)

354 한국문학연구 36집 호열자와 같은 전염병이 문제로 떠올랐다는 사실은 쉽게 지나칠 사건 이 아니다. 염상섭은 혼란 에서도 뇌막염에 걸린 피난민을 등장시킨 바 있듯이, 해방기 전염병의 문제는 국가의 안전보장을 위해서 묵과할 수 없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예컨대 1946년 8월 만주 도문 일대에서는 호열자(콜레라)가 발병하여, 전 연변 지역으로 확산되자 중국 공산당 정 부와 군은 연합하여 방역체제를 전시체제의 일환으로 관리하였다. 전 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중국과 조선 사이의 국경은 차단되고, 잠재적 보균자인 밀수꾼들에 통제가 가해지며 민간차원의 무역은 봉쇄된다. 그리하여 한반도로 이주하려던 많은 조선인들은 발이 묶이게 되어, 결 과적으로 중국에 정착하게 되었다. 68) 한반도에서도 역시 남북한 지역 모두에서 호열자가 유행하기 시작하면서 방역체계가 구축되기에 이른 다. 69) 해방기에 호열자 등과 같은 전염병은 이주민의 이동성을 가로막 는 매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였으며, 국가 입장에서 이는 안전보장 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다시 말해 전염병을 예방, 관리함으로써 결과 적으로 잠재적 보균자인 피난민을 관리하는 방법을 통해 나머지 국 가의 인구(주민)을 살게 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즉, 이는 푸코 식으로 말하자면, 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권력 인 생명권력의 작동으 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국가의 전체적인 인구(주민)의 건강과 안전보장 67) 만주에서 무었을 했드냐는것부터 묻기 시작을하야 사상문제를 끄내가지고 문 답이 한참 되다가 있다 다시 만나서 좀더 자세히 묻겠다하고 들어가 버린뒤 에, 그 패의 짐조사가 시작되었다. (중략) 더구나 그편사람들의 호열자 예방주사 증명서를 걷우라하야 들고 들어갔으니, 있다고 래일이고 다시 만나 묻고 나야 내줄 모양같다. 우리더러도 주사증명서를 걷우어 들이라고나 아니 할까 겁이 난다. (염상섭, 三 八 線, 앞의 책, 57~58쪽) 68) 김춘선, 중국 연변 지역 전염병 확산과 한인의 미귀환, 한국근현대사연구 2007년 겨울호 제43집 참고. 69) 개성경찰서로부터 경기도 경찰부에 들어온 보고에 의하면 三 八 이북에는 호 열자 환자가 점점 늘어가고 있어 三 八 이북경계선에 방역을 엄중이 하는 한 편, 이남으로 드러오는 자는 철저히 방역검사를 실시중이라고 한다. ( 三 八 以 北 에도 호열자 猖 獗, 東 亞 日 報, 1946. 6.19, 2면)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55 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과 죽어야 하는 것 사이의 단절 이 발생한 다. 70) 해방기의 피난민 혹은 이주민은 이와 같은 생명권력 메커니즘에 따라 관리되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피난민이 잠재적으로 잠상군이나 호열자와 같은 전염병의 보균자로 간주되어 이동과 이주가 제한되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 까.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피난민은 국가적 안전보장을 잠재적으로 위 협하는 존재라는 의미가 될 것이다. 이것은 단지 전염병의 예방과 관리 차원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다. 피난민은 노동력의 차원에서도 또한 관리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1947~48년 무렵에 중국 공산당 측에서는 귀국을 신청하는 한인들 중 호주가 조선 에서 직장을 찾았거나 혹은 노동력을 상실하여 생활 능력이 없는 한인 들에 한해서만 귀국을 허가하고, 그 외 귀국이유가 명확하기 않거나 노 동 능력을 소유한 자에 한해서는 일률로 귀국을 윤허하지 않는다는 방 침을 취 71) 한다. 말하자면, 중국 공산당 입장에서는 재만조선인의 노 동력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이들을 타국민 이 아니라 노 동하는 자 로 환원하여 포섭하고자 한 것이었다. 반면에 북한과 남한의 경우, 경제적 규모에 비추어 볼 때, 이들 피난민을 수용할 여유가 없었 다. 이들이 북한이나 남한으로 이주해 올 경우, 단지 산업예비군에 지 나지 않는 존재가 되어버리는 상황이었다. 당시 남한의 경우 살인적인 인플레이션, 식량부족 그리고 대량실업 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리하 여 민중들의 생활은 대단히 궁핍하고 불안정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72) 이와 같은 상황은 북한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앞에서 피난민 (이주민)에 대한 김일성의 태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원칙적으로는 70)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박정자 옮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동문선, 1998, 278~293쪽 참조. 71) 김춘선, 앞의 글, 132쪽. 72) 박보영, 앞의 글, 75~76쪽 참조.

356 한국문학연구 36집 三 八 선을 넘어가라는 것은 아니나, 갈 수 있어서 가는 것은 묵인한 다 73) 는 입장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들은 한반도 혹은 북한과 남한에 거주하고 있는 존재이기는 했지만 국민은 아닌 자들/배제당한 자들이 었고, 그런 의미에서 피난민과 이주민들은 잠재적으로 비국민 이었다. 너의 같은 비국민은 개 돼지 만도 못한 놈들이니까, 여기서 기어 나 가라! 유치장에 넣지 않는 것만 고마운줄 알거던 네굽을 꿇구 썩썩 기 어 나가 봐라! 하고 호통을 하는 것이었다. 74) 이 대목은 염상섭의 엉덩이에 남은 발자국 의 한 부분이다. 일제 말 기, 방공연습 때에 집에서 불빛이 새었다고 해서, 주인공 父 子 가 경찰 서로 불려가서 일본인 굴전( 堀 田 ) 순사부장으로부터 위와 같은 호통을 듣고, 실제로 기어서 경찰서를 나서게 된다. 비국민은 인간이 아닌 자 이고, 개 돼지 에 해당하는 자들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아이러니하게 도 해방 후, 이주민 혹은 피난민들에게도 정확히 오버랩된다. 제국 일 본이 비협력적 조선인에게 행하던 언설이, 한반도로 이동해 온 피난민 들에게 정확히 겹쳐지는 장면, 그것이 바로 해방기의 한 모습이기도 했 다. 해방이 되었지만, 이들은 국민이 아닌 자이고, 여전히 인간이 아닌 개, 돼지에 머무른다. 그리하여 한반도로 이주해오는 피난민의 이동이 추방당한 약소민족의 이동과는 다름 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약소민족 이기로 손바닥만한 제땅 속에서 왔다 갔다하는 이렇듯 들볶이는 것을 생각하면 절통 하고 저절로 비장한 마음이 드 75) 는 것은 그들이 여전 히 비국민이기 때문이고, 그리하여 그들은 여전히 안전 부재 상황에 놓 이게 된다. 삼팔선 이북을 감시하는 소련병을 뒤로 하고, 삼팔선을 넘 73) 염상섭, 三 八 線, 앞의 책, 58쪽. 74) 염상섭, 엉덩이에 남은 발자국, 解 放 의 아들, 金 龍 圖 書 株 式 會 社, 1949, 68쪽. 75) 염상섭, 三 八 線, 三 八 線, 金 龍 圖 書 株 式 會 社, 1948, 70쪽.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57 어서는데, 인제야 三 八 선을 건너섰다는 실감이 들면서도, 가진 곤경을 다 격고 들어서는 첫 에 딱맞우친 사람이 미병 임을 발견한 순간 그들 은 또 다른 국경과 경계 하나를 넘어선 것에 불과한 것임을 깨닫는다. 삼팔선 을 겨우 넘어 이들이 내뱉는 말은 감격의 언어가 아니다. 수 해와 인플레이션이라는 현실적 조건들에 맞닥뜨려 한탄과 함께 터져 나오는 무얼 먹구 사누! 라는 현실의 언어이다. 그들이 겨우 당도한 삼 팔선 이남의 공간은 미래지향적 공간으로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은연 중에 드러내는 남과 북의 경제력의 차등은 삼팔선 이남이 오히려 살기 힘든 상황이라는 것을 노출시킨다. 한반도 외부에 있는 300만 명의 인구가 몇 년 사이에 한꺼번에 몰려 드는 현상은 정치적 혼란과 새로운 질서 구축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국가의 정치적 권력은 폴리스, 치안 다른 말로 하자면 교통로 감시였 다 76) 는 말을 참고한다면, 해방기는 이와 같은 감시와 통제가 공공연 하면서도 비균질적이고 군소지역적으로 시행된 시기일 것이다. 염상섭 소설에서 총소리는 한반도 전체 규모의 일사분란한 통제와는 거리가 멀다. 만주 안동에서 삼팔선 이남에 이르는 시공간 내에서 통행증에는 여러 도장과 증명이 중첩되고, 소련군에서 보안대, 미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통제 주체들과 마주한다. 이 같은 과정을 국민국가의 형성을 초 점으로 하여 서술하는 것과 그 잉여를 중심으로 서술하는 것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관점의 차이가 있다. 여기에는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익 숙하고 오랜 기획도 물론 자리하고 있었지만, 이동하는 자들을 항상 그 와 같은 기획으로 포섭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동하는 자들의 교통로를 통제하는 행위는 결과적으로 보자면, 그들을 잠재적 으로 비국민화하는 것을 의미했다. 국가의 관점에서 그들은 아무도 아 니 었다. 그들을 잠재적인 비국민 으로 설정함으로써만, 체제는 새로운 76) 폴 비릴리오(Paul Virilio), 이재원 옮김, 속도와 정치, 그린비, 2004, 64쪽.

358 한국문학연구 36집 질서를 구축할 수 있었고, 그 (허구적) 영속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러 나 이동하는 자들이 항상 그와 같은 기획에 순응해 왔던 것은 아니다. 이들은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정치적, 경제적, 생존의 불안을 야기했 다. 비국민이 박탈당한 권리를 요구하는 순간, 즉 항상 안전부재에 시 달리는 이들이 안전보장을 요구하는 순간, 역으로 국가의 안전보장은 불가능해졌다. 안전보장을 둘러싼 이 두 힘이 충돌하는 매순간마다 새 로운 정치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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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 한국문학연구 36집 Abstract The Politics of Mobility in the Liberation Period - on the case of Yeom Sang-seop's short stories Yi, Jong-ho I tried to observe the large scale of people's movement, the great migration which has followed after the collapse of the Japanese Empire. This large scale of movement in population has begun with the end of the 2nd World War which meant the liberation of Korean Peninsular, the deconstruction of the Empire and the Establishment of the Cold War System. This movement has been named 'repatriation', thus any narrative related with it has been conceptualized as 'repatriate narrative'. However, it seems that the attempt to conceptualize the multiple aspects of this phenomenon as a matter of repatriation or to set it up for a subject of the history of national ordeals and disgrace is the result of the one-sided interpretation. When one reduces the wide range of the migration or the movement of the population in the Liberation Period to the national repatriation, even if he or she has not intended, it would block the multiple possibilities and potentialities of 'the mobility' itself. To take aim at the political potentiality through restoration of this 'mobility' is the very intention and the critical point of this thesis. So to speak, I tried to describe the mobility in the Liberation Period not in the context of the establishment of national state, but

해방기 이동의 정치학 이종호 363 with the remains of it. On the point of this consciousness, I have thoroughly examined Yeom Sang-seop's short stories-the Chaos, An Intrigue, The 38th Parallel, Footprint on the Bottom. The migration or the movement in the population appears not in the natural process of the formation of the state nor the nation in these stories. On the contrary, the ones who move threaten the national security and raise the public anxiety. Therefor, the state could protect the security of the system by the exclusion of this moving people. Keyword mobility, repatriation, immigrant, security, Yeom Sang-seop, Manchuria 논문투고일 : 2009. 3. 30 심사완료일 : 2009. 5. 15 게재확정일 : 2009. 6.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