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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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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_11] 의과대학 소식지_OK(P)

Transcription:

三韓時代의 성격과 成立時期에 대하여서는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 상황이나 모 두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문헌자료의 기록과 고고자료상에서 서 로 공통적으로 관련지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戰國時代의 鐵器文化를 근간으로 하고 있 다는 점이며, 燕의 鐵器文化를 갖춘 衛滿朝鮮의 성립은 근본적으로 한반도 북부지역 뿐 만 아니라 중 남부지역에 이르기까지 큰 파장을 미쳤던 것으로 볼 수 있다. 鐵器文化의 도입단계에는 鐵器의 실용적이고 희소적인 가치에 의해서 埋葬遺構에는 쉽게 부장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기원전 2세기 전반경부터는 일부 한정된 鐵器만이 埋葬遺構에 부 장되는 경향이다. 따라서 三韓時代의 성립시기는 철기의 도입과 보편적인 활용으로 보 아야하며 木棺을 사용한 西北韓地方의 土壙墓文化를 포함하여 中南部地域에 있어서 木 棺의 흔적이 확인되고 있는 積石木棺墓 단계, 즉 기원전 3세기전반대의 어느 시점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한편 咸安 道項里古墳群에서 확인된 木棺墓는 木棺의 형태에 있어서 板材組立式木棺 과 통나무木棺의 2종류가 확인되며, 板材木棺의 사용 비율이 3배 이상 높은 편이다. 出土遺物은 비교적 단순한 組合相을 보이고 있는데, 이는 嶺南地域을 중심으로 한 木棺 墓遺蹟에서도 모두 확인되고 있는 특징이므로 전반적으로 弁ㆍ辰韓社會의 매장문화는 동일한 흐름 속에서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통나무로 제작한 木棺은 積石木棺 墓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므로 韓國式銅劍文化와 함께 木棺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 으로 생각되며, 茶戶里遺蹟과 道項里木棺墓에서만 이러한 木棺의 존재가 확인되고 있는 것은 弁韓社會內에서 兩地域間의 유기적인 관계를 살피는데 있어서 주목되어야 한다. 道項里木棺墓에서 출토되고 있는 鐵器類도 거의 茶戶里遺蹟의 그것들과 유사한 경향 을 보이고 있다. 道項里 67號墓 출토 鑄造鐵斧는 다호리 1호분에서 출토된 鑄造鐵斧와 같은 地金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이며, 小形鐵斧의 구성비율이 다른 철기류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것과 起耕具로 이용되는 철제따비의 출토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道項里 木棺墓단계에는 木製農器具의 제작과 사용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茶戶里 遺蹟에 비해 절대적으로 빈약한 철기유물은 安邪國의 內的인 限界를 보여주는 것이며 小國 首長의 身分的인 象徵으로서 사용하였던 銅鏡과 儀器類의 출토가 전혀 확인되지 6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道項里木棺墓를 조영한 集團은 당시 對外文化交流의 중심적인 先進地域에 비해서 社會文化的인 變動이 덜한 주변 지역적인 성향이 강한 集團일 것으 로 생각된다. 기원후 2세기 후반경 영남지역의 木棺墓는 木槨墓段階로 변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데, 道項里와 茶戶里遺蹟에서도 木棺墓는 2세기대를 終點으로 사라진다. 고고자료상으로 도 3세기에서 4세기대에 해당되는 적극적인 유구가 확인되지 않고 있으므로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석이 요구된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을 3세기 전반 이후 한반도 남부지역에 서 일어났던 浦上八國의 전쟁과 관련지어 합리적으로 추론하고자 한다. 즉 弁韓社會內에 서 道項里와 茶戶里遺蹟의 兩集團은 洛東江과 南江水系를 장악한 交易의 中心地로서 서 로 經濟的ㆍ政治的인 共助體制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기록에 보이는 浦上八國의 대상국은 加羅와 阿羅國이며, 加羅는 茶戶里集團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그리고 浦上八國의 전쟁시기도 기원 3세기 전반대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 는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이 전쟁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3세기 전반대 이 후의 사건으로 파악될 수 있으며, 4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兩地域에서 뚜렷한 木槨墓 의 축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도 두 集團이 戰爭의 피해를 직접 받은 당사자였음 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주제어 : 삼한시대, 목관묘, 안야국, 포상팔국의 전쟁, 경제적ㆍ정치적 공조체제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7

Ⅰ. 한국고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三韓은 우리나라 중부와 남부지역에 실재하 였던 政治體로서 일찍이 중국의 正史인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그 사회와 문화내용이 비 교적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다시 축약된 내용이 後漢書 東夷傳에 그대로 전재되어 있 다. 대체로 三韓의 문제는 고대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三國時代 연구의 선행작업 으로서 한국고대사회자체의 성격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기본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대상일 뿐만 아니라 古代以前의 先史文化로부터 보다 합리적이고 繼起的인 발전관계로 이해 할 수 있는 연결고리로서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 될 수 있다. 본고는 三韓社會의 政治體 가운데 弁辰地域의 주요 小國 중 하나이지만 기록에 단지 國 名만이 전하고 있는 安邪國의 사회와 문화성격에 대한 고고학적인 접근을 목적으로 최근에 咸安地域에서 다수 발견된 木棺墓를 분석대상으로 하여 安邪國의 실질적인 문화양상과 政 治體에 대한 실마리를 풀고자 한다. 安邪國은 고대 한반도의 남부에 위치한 一小國으로 三 國의 정립시기에는 安羅國 또는 阿羅伽倻라는 政治體로서 급성장 하였고 지금의 咸安地域 을 근거지로 南部海岸地域의 군소세력을 모아 新羅 또는 百濟와 대등한 위치에서 당시의 정치와 사회문화의 판도를 이끌었으며, 멀리 日本의 大和政權과도 밀접한 외교관계를 가졌 던 국제적인 존재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그 동안 咸安地域의 古代政治體에 대한 연구의 흐름은 주로 阿羅伽倻 또는 安羅 國으로 불리우는 地域小國에 대한 문헌적, 고고학적인 검토가 주를 이루었으며, 阿羅伽倻의 전신인 安邪國에 대한 분석적인 연구성과는 그다지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상태로 파악된다. 三韓時代 安邪國에 대한 연구는 문헌사분야에서 뿐만 아니라 고고학적인 입장에 서도 古代 三韓社會의 전체적인 연구 맥락 속에서 간단하게 처리되어 버리거나 자료의 빈 곤함을 이유로 거의 무시되는 경향이어서 보다 분석적인 연구의 진행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한편, 安邪國에 대한 부족한 문헌사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고고학적 인 발굴조사 노력은 90년대부터 계속되어 왔으며 다행히 1998년 咸安의 道項里古墳群 북 쪽 능선에서 다수의 새로운 木棺墓자료들이 조사됨으로서 安邪國에 대한 새로운 연구의 장 을 열게 되었고, 그 동안 파악하고 있던 弁ㆍ辰韓의 문화내용도 더욱 자세하게 보완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하게 되었다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木棺墓의 분석에 앞서 우선 한국고대사에서 사용하고 있는 三韓時代의 槪念 8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과 이를 대표하는 弁ㆍ辰韓地域 木棺墓文化의 전반에 대하여 살펴보고 지금까지의 연구경 향과 문제점을 정리한다. 또, 咸安 道項里古墳群에서 발견된 木棺墓에 초점을 맞추어 고고 학적인 형식분류와 단계설정을 통하여 편년적인 위치를 살펴보고, 弁ㆍ辰韓의 木棺墓文化를 대표하는 昌原 茶戶里木棺墓와의 比較를 통해서 道項里木棺墓의 문화적인 성격을 설정한다. 그리고 시간적인 추이와 주변 정세변화에 따른 고고자료의 점진적인 변화양상을 추적하 여 문헌사료에 보이는 安邪國의 成長과 限界를 분석해내고자 한다. 이로써 3세기대 우리나 라 남부지역의 일대사건으로 전하는 浦上八國의 戰爭에 대한 보다 합리적이고 계기적인 이 해를 돕고자 하며 이를 통해 三韓時代 安邪國에 대한 고고학적인 접근뿐 만 아니라 前期伽 倻社會의 세력형성과정을 파악하는데 一助 할 수 있는 작업으로 생각된다. Ⅰ. 1. 三韓時代의 槪念 韓半島의 鐵器文化에 대한 고고학적 이해와 폭은 최근 들어 급증하는 유적의 발굴조사로 인해서 추가되는 새로운 정보량의 증가와 더불어 상당한 변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는 종래 의 주된 연구경향이 한반도 鐵器文化의 起源에 관한 年代의 上限이라는 문제에 집착하는 태도에서 鐵器의 일반적인 보급과 사용에 따른 한국고대사회의 여러 모습을 복원하여 당시 대의 사회상을 보다 심도 있게 이해하여 보고자하는 연구가 문헌사료나 기타 고고학, 인류 학적 지식 등을 활용하여, 그 연구의 폭을 점차 확대하여 나가고 있는 경향으로 바뀌고 있 음을 느낄 수 있다. 한국의 고고학 편년상 鐵器時代는 기원전 300년부터 기원후 300년까지 로 初期鐵器時代와 原三國時代로 구분하고 있는데1), 初期鐵器時代는 기원전 300년에서 기 원전후의 시기로 기존의 靑銅器時代後期와 겹쳐지며 靑銅器와 鐵器가 함께 공반되고 韓國式 銅劍과 鑄造鐵斧 등 工具類系의 철기유물이 확인되는 소위 韓國式銅劍文化期로 불리워지고 있다.2) 原三國時代는 기원전후시기에서 기원후 300년경까지로 原史段階의 三國時代라는 뜻 으로 熊川期 또는 金海期라고도 불리워지고 있다. 특히, 1 3세기에 해당되는 시기는 三 國志 魏書 東夷傳에 기록된 馬韓, 辰韓, 弁韓의 三韓이 대표되는 사회로 이해하여 이를 三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9

韓時代로 표현하는 연구자들도 역사학과 고고학측에서 발견되고 있다3). 三韓에 대한 문헌사 방면의 연구는 三韓을 한국고대사의 역사적 실체로서 인식하였던 조 선시대후기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많은 양의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유교사관의 정통론적 입장에서 三韓에 대한 관심을 기울이던 전근대적 역사학과는 달리 근대역사학적 입장에서 三韓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것은 신채호로 대표되는 民族主義史學과 이병도로 대표되는 文 獻考證史學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종족의 계통과 이동과정에 대한 추적과 치밀한 문헌고증을 통한 三韓에 대한 연구는 이후 이 시대 연구의 기초가 되었다.4) 이후 個別 小國의 위치문 제와 三韓과 三國의 관계설정, 三韓社會의 구조와 사회적 성격에 주목하는 연구가 추가되어 자연스럽게 三韓을 구성한 國에 대한 관심으로 연결되었다.5) 한편, 고고학계에 있어서도 발굴조사 된 자료의 증가와 더불어 三韓의 실상을 부각시키기 위한 체계적인 연구가 1970년대 후반부터 조금씩 진행되기 시작하였고, 80년대 후반에 이 르러서는 고고학계 전반의 지지를 받으면서 原三國時代를 바로 三韓時代로 同一視하는 인 식이 자리잡게 되었다.6) 한편, 경주 조양동유적의 발굴을 통해서 종전까지 金海時代, 原三 國時代의 물질문화로만 알려졌던 요소들이 사실은 4세기 이후에 해당되는 것들이며, 1 3 세기의 물질문화는 이제까지 알려져 온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싹트게 되었는데, 이후 原三國時代의 특징적인 물질문화의 상징으로서 木棺墓 및 初期木槨墓文化와 瓦質土器에 대한 연구가 줄을 이었고,7) 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논의가 지속되어 현재에 이르면서 연구의 폭도 넖고 깊어져가고 있는 경향이다8). 고고학적인 견지에서 三韓時代에 대한 用語와 槪念을 정의하려면 먼저 初期鐵器時代의 유적과 유물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요구된다. 한반도에서 鐵器가 사용되기 시작하는 시기 는 細形銅劍과 銅鉾, 銅戈 등의 武器類가 소량의 鐵器류와 함께 공반되고 있는 시기로 鐵器 3) 이현혜, 1993, 원삼국시대론 검토, 한국고대사론총 5. 이성주, 1999, 진,변한지역 분묘출토 1-4세기토기의 편년, 영남고고학 24. 4) 노태돈, 1982, 삼한에 대한 인식의 변천, 한국사연구 38. 5) 권오영, 1996, 삼한의 국에대한 연구,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6) 김원룡, 1983, 소위와질토기에 대하여, 역사학보 99, 100합집. 안덕임, 1985, 한강유역 초기철기문화, 한양대학교석사학위논문. 안춘배, 1986, 원삼국-고분, 한국고고학시대구분의 제문제. 김양옥, 1987, 철기시대-토기, 한국사론 17. 이성주, 1987, 원삼국시대의 토기,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7) 신경철, 1982, 부산,경남출토 와질계토기, 한국고고학보 12. 최종규, 1982, 도질토기 성립전야와 전개, 한국고고학보 12. 전옥련, 1988, 영남지역에 있어서 후기와질토기의 연구 경북대학교석사학위논문. 이재현, 1994, 영남지역 목곽묘의 연구, 부산대학교석사학위논문. 박순발, 1992, 백제토기의 형성과정, 백제연구 22. 김영민, 1996, 영남지역 삼한후기문화의 특징과 지역성, 부산대학교석사학위논문. 안재호, 1994, 삼한시대후기 와질토기의 편년, 영남고고학 14. 신경철, 1995, 삼한,삼국시대의 동래, 동래구지. 8) 이희준, 2000, 삼한소국형성 과정에 대한 고고학적 접근의 틀, 한국고고학보, 43. 이재현, 2003, 변진한사회의 고고학적 연구,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0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의 사용이 보편화되면서 靑銅器는 점차로 儀器로 변화하는 특징이 간취된다. 初期鐵器時代 는 기존의 靑銅器文化 위에 西北韓으로 鐵器가 유입되는 시기(初期鐵器Ⅰ期)와 鐵器文化가 전국적으로 파급되는 시기(初期鐵器Ⅱ期)로 나누어진다. 前者는 요동지역과 천청강이북에서 먼저 시작되었는데, 戰國時代 燕의 鐵器文化 파급으로 鑄造鐵斧와 철끌이 사용되는 細竹里蓮花堡類型文化의 계보를 잇는 것으로 기원전 3세기초에 시작된다. 鐵器文化가 대동강유역 으로 확산됨에 따라 銅劍, 銅鉾, 銅戈 등의 靑銅器와 戰國系鐵器들이 황해도 백천군 석산리 와 봉산군 송산리 뿐만 아니라 충남 부여 합송리, 당진 소소리, 전북 장수 남양리 등지에 까지 급속도로 전파되어 한반도 북부지방 및 남부지방의 일부 埋葬遺構에서도 鐵器의 존재 가 소수 확인되고 있다. 鐵器가 출토되고 있는 埋葬遺構의 구조는 전시기의 細形銅劍이 출 토되는 積石木棺墓가 계속되면서 西北韓地域에 새로이 土壙木棺墓가 사용되기 시작하는데, 충청도 일대의 積石木棺墓는 여전히 黑陶長頸壺가 부장되고 있어서 아직은 細形銅劍文化가 우세한 상태에서 일부 鐵器文化가 도입되고 있는 단계로 파악된다.(圖面 1) 後者는 西北韓地域에서 발달한 鐵器文化가 한반도의 남부지방 전역으로 확산되는 시기로 서 기원전 2세기말 1세기초로 생각되며, 광주 신창동유적과 사천 늑도유적, 창원 다호리유 적등에서 발견되고 있는 粘土帶土器文化와 관련되고 있다. 그런데 西北韓地域 鐵器文化의 보 급은 細形銅劍文化의 중심지였던 충청, 전라지역에서 보다 일찍 시작되었으나, 강한 靑銅器 文化의 기반 때문에 오히려 본격적인 鐵器文化의 수용은 경상도지역보다도 상대적으로 늦어 져서 鐵器文化의 발전이 상당기간 이루어지지 못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한, 경상도지역 으로 파급된 鐵器文化는 車輿具를 포함한 것으로서 충청도와 전라도지역으로 유입된 鐵器 文化의 수준보다 훨신 세련된 鐵器文化였다. 이와 같은 차이는 시간적인 격차 때문에 나타 난 것 일수도 있겠지만 鐵器文化를 담당하였던 集團의 성격차이에 기인하는 것일 가능성이 더 높은 것으로 경상도지역으로는 상당한 세력을 가진 집단이 내려간 것으로 볼 수 있다.9) 현재 한국의 고대사와 고고학에 있어서 보편적으로 인식되고 있는 三韓時代의 시간적 범 위는 原三國時代와 병행하는 시기로 파악하여 初期鐵器時代 이후, 즉 1세기에서 3세기대까 지로 鐵器文化의 일반적인 사용과 새로운 陶製術에 입각한 瓦質土器의 등장, 그리고 문헌사 료에 보이는 馬韓, 辰韓, 弁韓의 成立 등을 그 바탕에 두고 있다. 用語上에 있어서 原三國이 라는 시대구분용어는 三國史記 초기기록과 三國志 東夷傳의 상충된 기록들을 절충하는 방안의 하나로 제안된 것이고, 고고학상으로도 高句麗와 三韓地域의 다양한 문화현상까지를 포괄할 수 있는 공동의 범주를 모색하기 위한 것이었다. 原三國時代의 실질적인 연구대상 이 三韓이므로 樂浪郡과 초기 高句麗文化를 제외한 三韓중심의 내용상 불합리한 점을 피해 三韓時代라는 문헌사적인 시기구분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더욱 적절하다는 논지를 주장하는 9) 임영진, 1995, 마한의 형성과 변천에 대한 고고학적 고찰, 삼한의 사회와 문화.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11

<그림 1> 初期鐵器時代 出土 鐵器 (1 11 : 연화보유적, 12 16 : 세죽리유적, 17 18 : 장수 남양리 유적, 19 21 : 부여 합송리유적, 22 : 당진 소소리유적) 12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이현혜의 경우에도 靑銅器文化 단계에서 鐵器文化 단계로의 전환이 정치, 경제, 사회전반 에 걸친 광범위한 변화를 수반하는 것으로 鐵器의 보편화된 이후의 사회는 이전단계에 비 해 여러가지 측면에서 새로운 성격을 나타낸다고 보았으며, 중남부지역에 있어서 이시기는 初期鐵器時代와 연속선상에 있고 三韓文化의 성격이 鐵器文化 단계로 특징 지워지는 것이 라면 이를 굳이 다른 用語로 명명할 필요는 없다고 결론짓고 있다.10) 한편, 三韓時代의 성격과 시간적인 범위를 설정하는 기준자료에 대해서 고고학적으로 지 금까지 파악해왔던 瓦質土器 문제 이전에 문헌기록상에 보이는 韓이 중심이 되어야 하며, 문화의 주체를 인식할 수 있는 유물의 특성에 의해서 특정시기를 규정하는 것보다 문화의 주체에 역점을 두어 用語를 사용함이 보다 설득력 있다고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11) 이에 의하면, 三韓時代가 바로 瓦質土器時代라는 등식은 곤란하며, 사료상에서 韓이 등장하는 시 기부터 적어도 三韓時代가 開始된 것으로 보아 三國志 의 準王南走記事와 고고자료상의 細形銅劍文化의 출현을 근거로 三韓의 上限을 기원전 3세기로 파악하였고, 瓦質土器가 사라 지고 문헌상 馬韓의 존재가 확인되는 기원후 3세기말까지를 三韓時代로 보아야 한다고 주 장하였다. 따라서 三韓時代의 시기 폭은 거의 600년간에 해당되며 이 시간대 내에는 토기 문화에 있어서 無文土器에서 瓦質土器로의 전환, 묘제에서는 木棺墓에서 木槨墓로의 전환, 금속기에 있어서는 靑銅器에서 鐵器로의 전환이 이루어지며, 각 단계의 특징적인 유물상의 조합에 따라서 三韓時代를 前期와 中期, 後期로 나눌 수 있다고 보았다.12) 즉, 前期는 기원 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후반으로 細形銅劍, 黑陶長頸壺, 粘土帶土器가 조합을 이루며, 묘제는 토광내에 활석이 채워져 있고 木棺이 설치된 흔적이 있는 것으로 전단계의 支石墓 와는 입지와 구조상에 있어서 큰 차이가 있다. 中期는 기원전 1세기 후반에서 기원후 2세 기 후반까지의 前期瓦質土器 단계로 組合牛角形把手付壺와 주머니호가 주종을 이루고 묘제 는 전형적인 木棺墓로서 깊이가 있는 木棺墓를 표식으로 하며 樂浪文化와 깊은 관련이 있 을 것으로 보고 있다. 後期는 後期瓦質土器인 臺附廣口壺, 臺附直口壺, 爐形土器의 출현과 木槨墓의 등장으로 다양한 鐵器類의 부장과 부장유물의 폭발적인 증가를 보이는 것으로 권력의 집중화와 사회적으로 계층의 분화가 상당한 수준까지 진행된 것으로 파악하며, 전단 계에 비해서 한층 더 복잡하고, 다양화된 사회가 배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三韓과 辰國ㆍ衆國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료상에 辰國ㆍ衆國이란 존재가 처음 나 타나는 것이 기원전 2세기경이고 그 위치도 漢江以南地域에 해당되므로 三韓 小國들의 분 10) 이현혜, 1993, 주3)의 전게서. 11) 최종규, 1994, 삼한고고학연구. 신경철, 1995, 주7)의 전게서. 김영민, 1996, 주7)의 전게서. 12) 김영민, 1996, 주7)의 전게서.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13

포범위와 같다. 기원전 2세기경, 眞番의 주위에는 國으로 표현된 여러세력들이 존재하였음 은 분명하며, 國의 용례가 반드시 單位政治體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고 지역을 가르키는 경우도 많기 때문에 辰國은 단순히 辰의 지역을 가르키는 뜻일지도 모른다. 또 衆國으로 표 현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地域名보다는 單位政治體에 대한 지칭일 가능성이 더욱 높으며 辰國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파악하여 辰國을 포함한 여러 政治體가 衆國으로 표현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3) 따라서 당시 철기문화의 영향으로 漢江以南地域에서 성장 이 가장 뚜렷한 곳은 금강유역이며, 영남지역에서도 細形銅劍과 粘土帶土器, 黑色磨硏長頃 壺의 사용, 支石墓의 消滅이라는 공통적인 문화양상으로 보아 한반도 중부이남지역을 韓이 라는 단일한 단위로 묶을 수 있는 개연성은 높다고 생각된다. 이상에서 개략적으로 살펴본 바와 같이 三韓時代의 성격과 시기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는 상황이나 모두 나름대로의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문헌자 료의 기록과 고고자료상에서 서로 공통적으로 관련지어 볼 수 있는 것은 모두 戰國時代의 鐵器文化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간과될 수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燕의 鐵器文化를 갖춘 衛滿朝鮮의 성립은 근본적으로 한반도 북부지역 뿐만 아니라 중, 남부지역에 이르기까 지 큰 파장을 미쳤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古朝鮮 準王의 南走記事는 이러한 상황을 단편 적으로 보여주는 사실로 생각되며, 충청도와 전라도지역에서 확인되고 있는 鐵斧와 끌을 부 장한 細形銅劍文化期의 土壙墓들은 모두 鐵器文化에 익숙한 주민들의 분묘로 파악된다. 기 원전 3세기경 한반도에 있어서 靑銅器時代의 전통적인 매장문화인 支石墓가 점차 사라지고, 土壙墓가 전반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하는 시기는 묘제 문화상에 있어서 큰 변화기로 보아야 하며, 土壙墓에서 가공한 木材를 사용한 木棺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는 사실은 더욱이 주목 되어야 한다. 비록 土壙墓 내에서 철기가 출토되지는 않았을지라도 피장자의 매장주체부가 石棺에서 木棺으로 변화되었다는 것은 石棺보다는 木棺을 자유롭게 만들 수 있는 金屬製道 具의 발달이 선행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바로 이 金屬器가 鐵器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 다.14) 따라서 鐵器文化의 도입단계에는 鐵器의 실용적이고 희소적인 가치에 의해서 埋葬遺 構에 쉽게 부장되지 않았을 것으로 보이나 시간의 진행에 따라 鐵製 農工具類와 武器類가 급속도로 발달하고 널리 보급되는 기원전 2세기 전반경부터는 鐵斧와 鐵鉈 등 한정된 유물 만이 埋葬遺構에 부장되는 경향이다. 이후 매장문화의 중심체제도 鐵製道具가 중점적으로 부장되는 木棺墓에서 점차 武器類의 비중이 커지는 木槨墓로의 변화가 자연스럽게 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三韓時代의 시기 기준은 철기의 도입과 일반적인 사용으로 보아야하 13) 김정배, 1968, 진국과 한에 관한 고찰, 사총 12ㆍ13. 14) 이주헌, 1994, 삼한시대 목관묘에 대하여, 고문화 44. 14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며, 木棺을 사용한 西北韓地方의 土壙墓文化를 포함하여 중남부지역에 있어서 木棺의 흔적 이 확인되고 있는 積石木棺墓 단계, 즉 기원전 3세기 전반대의 어느 시점에서부터 三韓의 成立時期로 파악해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2. 弁ㆍ辰韓의 木棺墓文化 三韓의 埋葬文化를 대표하는 것은 木棺墓이다. 현재 三韓時代의 연구대상자료로서 가장 많이 남아있는 것은 墳墓이며, 三韓時代의 특징적 墳墓인 木棺墓는 당시의 물질자료인 遺物 과 墳墓 자체가 가지고 있는 구조적인 내용이 함축되어 있어 그 시대의 文化相에 대한 전 반적인 내용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일반적으로 埋葬遺構는 遺物과 遺構가 상호 유기 적인 관계로 맺어진 인간활동의 화석물로서 우리는 이를 통해서 한정된 시대의 지배예속관 계와 생산력의 발달, 매장관념 등 사회제분야의 의미와 변화를 추적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하고 있다. 鐵器文化의 보급과 함께 弁ㆍ辰韓地域에 점진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埋葬文化는 木棺墓 라고 분류되는 일련의 墳墓이다. 현재까지 파악되고 있는 三韓時代의 埋葬文化는 크게 積石 木棺墓단계와 木棺墓단계, 그리고 木槨墓단계로 점차 이행되는데, 기원전 3세기전반에서 기 원전 2세기 전반까지는 積石木棺墓단계로 三韓時代前期, 기원전 1세기 전반에서 2세기 후 반까지는 木棺墓단계로 三韓時代中期 그리고 2세기후반 이후부터 3세기말까지는 木槨墓단 계로 三韓時代後期로 구분하고 있다.15) 積石木棺墓는 靑銅器副葬墓로서 後期無文土器社會 의 상층부에서 이용된 묘제로서 하층신분의 성인용 묘제인 土壙墓와 유아용의 甕棺墓가 이 것과 서로 병행하여 존재한다. 積石木棺墓는 길이 180, 너비 60, 깊이 150 정도의 규모로 墓壙과 木棺의 사이 빈 공간에 積石을 돌린 형태인데, 유구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매우 깊고, 石器, 靑銅器, 鐵器, 無文土器, 琉璃製管玉 등이 출토하며 일반민의 묘와는 분리되는 墓域에 조성되는 특 징이 있다. 또한, 積石木棺墓 가운데에는 통나무를 가공한 木棺을 사용한 것이 화순대곡리 유적에서, 木板을 이용한 木棺이 대전 괴정동유적에서 발견되었으며, 繩文土器와 鐵斧, 鐵 鑿, 鐵楸, 鐵製半月刀, 明刀錢등의 유물조합상을 특징으로 하는 細竹里-蓮花堡類型의 木棺 墓가 당진 소소리, 부여 합송리, 장수 남양리 등 한반도의 중ㆍ남부지방에서 계속적으로 발 15) 신경철, 1995, 주6)의 전게서. 김영민, 1996, 주7)의 전게서. 안재호, 2000, 변ㆍ진한의 목관묘문화, 동이세계의 고고학.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15

견되고 있다.16) 특히, 鐵器文化의 開始와 관련하여 韓國式銅劍文化를 기반으로 하는 積石木 棺墓의 등장은 더욱 주목되어야한다고 생각된다.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積石木棺墓의 하나로 서 들 수 있는 부여 합송리유적에서 출토된 鑄造鐵斧 가운데 頭部에 폭이 넓은 突帶가 돌 려진 형식의 鐵斧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식의 鐵斧는 현재까지의 자료로 보는 한 中 國을 비롯한 동북아시아 일대에서는 그 유례가 없는 것으로 中國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는 2條의 폭이 좁은 突帶가 돌아가는 형식의 鑄造鐵斧와는 형식상에서 큰 차이를 보이고 있 다.17) 따라서 부여합송리출토 鑄造鐵斧는 한반도의 중부지역에서 直接製作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積石木棺墓내에서 확인되고 있는 다양한 형태로 가공된 木棺의 존재와 함께 이 지역에서 鐵器의 製作開始와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鑄造鐵斧는 精紋鏡, 細形銅劍, 銅戈와 같은 韓國式銅劍文化期의 유물과 반출되고 있고, 지역 적인 분포도 황해도 송산리, 함경도 이화동, 호곡동, 오동 등의 한반도 북부지역뿐만 아니라 충청남도 당진 소소리, 전라북도 장수 남양리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서 한반도전역에 걸 쳐서 三韓時代前期부터 鐵器의 제작이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 積石木棺墓에서 확인 되고 있는 유물중에는 길이 5 내외의 琉璃製管玉이 포함되어 있는데, 형태상 碧玉製의 길 이 3 내외의 小形管玉들이 주를 이루는 靑銅器時代의 管玉과 유사한 형태를 가지며 푸른색 을 띠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靑銅器時代에 裝身具로서 가장 많이 사용된 것은 碧玉製의 管玉이며, 중국에서는 管玉의 형태를 갖춘 것의 출토 예가 드물기 때문에 琉璃의 제작기술이 들어온 뒤 靑銅器時代의 전통적인 管玉의 형태와 색조를 그대로 따라서 材質만 琉璃로 바꾸어 琉璃製管玉을 제작한 것이 아닌가 추정되고 있다. 琉璃管玉의 成分 또한 중국 의 戰國時代 琉璃와 같은 납-바륨유리(PbO-BaO-SiO2계)임이 밝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에 중국과의 교섭에 의해서 鐵器文化의 流入과 함께 琉璃의 제작기술도 우리나라에 들 어왔을 가능성이 높으며, 합송리 출토 琉璃管玉의 成分중 불순물의 함량이 매우 적음으로 琉 璃의 原料가 고도로 정제된 것임을 알 수 있고, 琉璃의 發色과 관련이 있는 CuO성분이 포함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미 한반도 중부지역에서는 琉璃의 제작과 관련하여 상당한 기술적 인 발전이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다.18) 土器는 대부분이 無文土器로 구연부 단면이 圓形 또는 三角形의 粘土帶가 덧대어진 深鉢形土器類와 전면에 정치한 磨硏이 되어있는 黑陶長頸 壺등이 소량 부장되며 樂浪의 新製陶術에 영향받은 瓦質土器는 전혀 공반되지 않고 있다. 瓦質土器의 출현과 함께 등장하는 전형적인 三韓時代의 木棺墓는 대부분이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분포하며 창원 다호리유적을 비롯하여 경주 조양동유적, 김해 대성동 구지로 16) 이건무, 1991, 당진 소소리유적 출토 일괄유물, 고고학지 3. 17) 이건무, 1990, 부여 합송리유적 출토 일괄유물, 고고학지 2. 18) 이건무, 1990, 주16)의 전게서. 16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유적, 양동리유적, 함안 도항리유적에서 많이 발견되고 있고, 중부지방에 있어서는 충청도 진천 송두리유적에서 3기가 확인되었다. 遺構의 형태는 대체로 前段階의 積石木棺墓와 같은 長橢圓形의 형태이나 규모에 있어서는 다소 큰 규모를 보이고 있고, 木棺의 주위에 채워 넣 은 할석은 점차 사라지고 墓壙을 파내면서 나온 암반토와 점성이 강한 점질토를 서로 혼입 하여 木棺의 주위에 단단히 충진시키고 있는 점이 차이이다. 遺構의 내부에는 靑銅器, 鐵器, 無文土器, 瓦質土器, 漆器등의 다양한 부장품이 木棺의 아래와 상부 및 보강토상에 매납되 어 있는데, 遺構는 여러 기가 서로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群集을 이루고 있다. 木棺墓의 주체부는 腰坑의 존재유무와 木棺의 형태에 따라서 차이가 있으며, 이를 기준으로 크게 4개 의 類型으로 구분될 수 있다.19) 즉, 木棺 아래에 腰坑이 설치되어 있고 木棺을 통나무관으 로 사용한 것은 Ⅰa類型, 腰坑이 있고 板材木棺을 사용한 것은 Ⅰb類型으로, 木棺 아래에 腰坑시설이 설치되어 있지 않고, 통나무관으로 된 것은 Ⅱa類型, 腰坑이 없으며, 板材 棺으 로 설치된 것은Ⅱb類型으로 일반적으로 구분되고 있다. Ⅰa類型은 현재 다호리유적에서만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棺 아래에 장방형의 腰坑을 만들고 竹篋에 靑銅劍과 銅鏡등의 귀중 한 부장품을 넣은 후 통나무를 반으로 쪼개어 구유처럼 만든 木棺이 안치되었다.Ⅰb類型은 영남지역의 木棺墓유적에서 소수 발견되고 있는 형태의 木棺墓로서 腰坑의 형태는 末角長 方形 또는 圓形이며 腰坑內에 부장품이 없거나 빈약한 편이다. Ⅱa類型은 창원다호리, 김해 대성동 구지로, 함안 도항리유적에서 일부 발견되고 있는 것으로 토층상에서 만 통무관의 흔적이 확인된다. Ⅱb類型은 평면형태가 ㅍ 자상의 木棺을 안치한 것으로 영남지역 대부 분의 木棺墓유적에서 발견되며, 당시에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던 木棺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木棺墓의 各類型중에서 특히, 주목되고 있는 것은 腰坑이 설치되고 통나무관으로 埋葬主 體部가 이루어진 Ⅰa類型인데, 板材로 만든 木棺을 사용하던 樂浪地域과는 달리 戰國時代 중국의 화남지역에서는 腰坑內에 陶器와 銅器를 부장한 예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또, 통나무 목관은 주로 사천성의 巴蜀地區에서 戰國時代의 주묘제로 사용되었고 일부 운남성이나 광 서장족자치구 등지에서도 발견되고 있어서 이와 같은 類型의 木棺墓는 중국의 동북지방이 나 북한지역과는 관련이 없고 오히려 중국의 남부 혹은 서부지역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 로 추정되고 있다. 한편, 板材의 木棺을 사용한 Ⅰb類型과 Ⅱb類型의 木棺墓는 동북아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된 木棺의 형태로서 영남지방의 支石墓에서도 木棺의 흔적이 발견되고 있고 石棺墓의 石材結構形態에서도 ㅍ 자상이 많은 것으로 보아 靑銅器時代 이래의 토착적인 요소가 새로 운 형태의 墓制로 변화되었거나 한반도 북부지역에서 전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당시 19) 이재현, 1995, 변진한사회의 발전과정, 영남고고학 17.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17

辰ㆍ弁韓社會를 구성하는 種族의 다양한 出者를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되고 있다. 또한, 木棺墓의 규모가 時期 또는 身分을 반영한다는 견해가 있는데, 墓壙의 면적과 길이와 폭의 비율을 통해서 도수분포도의 群集樣相을 살펴보면 전혀 관련성이 없음을 알 수 있고 오히 려 埋納된 유물의 組合相을 통하여 階層性이 인정될 수 있을 것으로 파악된다.20) 木棺墓의 다음 시기에는 木槨墓와 木棺系木槨墓가 출현하는데, 木槨墓는 遺物의 매납이 木槨의 내부에 한정되지만 木棺系木槨墓는 木槨의 내외부에 遺物이 매납된다. 이시기 墓制 의 특징은 대ㆍ소형분이 확연히 구분되는 점이고, 대형분은 대부분이 木槨墓를 채용하고 있 는데, 이 墓制는 外來系임이 분명하며 그 起源을 樂浪木槨墓에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木 棺系木槨墓는 전단계의 木棺墓에 새로운 墓制인 木槨墓가 절충된 것으로 김해 양동리유적, 울산 하대유적, 경주 황성동유적 등에서 알 수 있듯이 부장유물과 입지상에 階層差가 보이 고 있다. 즉, 木槨墓는 다량의 鐵器와 靑銅器가 매납되고 대형의 규모를 갖고 있으며 구릉 의 능선상에 입지하지만 木棺系木槨墓는 구릉의 사면 또는 평지에 입지하고 부장품이 적은 양상으로 보아 外來系인 木槨墓가 上層身分이나 優越集團의 墓制로서 채용된 것으로 판단 된다. Ⅲ 1. 道項里木棺墓의 編年的 位置 함안지역에서 三韓時代의 墓制인 木棺墓가 발견된 것은 90년대 초반으로 道項里古墳群의 북쪽능선에 집중적으로 조영되어 있음이 몇 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밝혀지게 되었다.21) 지 금까지 알려진 木棺墓는 모두 32基로서 함안지역의 三韓時代 文化相의 계기적인 발전과정 을 살펴보는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道項里古墳群에서 확인된 木棺墓(이하 道項里 木棺墓라 칭함)를 개관하여 보면,22) 우선 구조적인 면에 있어서 墓壙은 길이 240 285, 너비 84 145 이고 깊이는 대략 50 120 정도로 깊은 편이며 墓壙의 평면형은 네모서 리가 둥근 장방형이다. 長軸은 동서방향이고 床面을 편평하게 조정한 후 바닥의 중앙부위에 20) 안재호, 2000, 주14)의 전게서. 이건무외, 1989, 의창 다호리유적 발굴진전보고(Ⅰ), 고고학지 1. 21)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 1997, 함안 도항리고분군Ⅰ. 경남고고학연구소, 2000, 도항리ㆍ말산리유적. 22) 김형곤, 1995, 아라가야의 형성과정 연구, 가라문화 12집. 18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시신을 안치한 木棺을 안장하였으며, 木棺의 형태는 板材組立式木棺과 통나무목관의 2종류 가 사용되었는데 板材木棺의 사용비율이 3배 이상 높은 편이다. 遺物은 木棺의 내부와 墓壙 과 木棺사이의 보강토내, 또는 木棺의 상부와 封土內에 주로 매납되며 부장유물은 組合牛角 形把手附壺, 주머니호, 圓底壺등의 瓦質土器類와 二段柄式의 鐵劍, 鐵鉾, 鑄造鐵斧, 無莖逆 刺式鐵鏃 등으로 비교적 단순한 遺物組合相을 보이고 있다. 木棺墓의 상부는 木蓋를 덮고 그 위에 약간의 封墳을 흙 등으로 쌓아 올려 墓域을 표시하였던 것 같은데, 이는 木棺墓들 이 서로 좁은 범위에 분포되어 있으면서도 상호 중복되는 예가 1기도 발견되지 않고 있으 며 일정한 간격을 유지한 채 조성되어 있는 점으로 보아 封土의 형태는 墓壙의 크기와 비 례한 방형일 가능성이 있다. 道項里木棺墓에서 확인되고 있는 이러한 몇 가지 구조적인 특 징들은 영남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발견된 다른 木棺墓유적에서도 모두 확인되고 있는 특징 이므로 전반적으로 弁ㆍ辰韓社會의 매장문화는 동일한 흐름 속에서 전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道項里木棺墓는 韓國式銅劍文化를 지표로 하는 積石木棺墓의 계통을 이은 것이 아니라 靑銅器時代 石棺墓에서 그 起源을 찾는 견해가 있어 주목되고 있다.23) 이는 현재까 지 함안지역에서 積石木棺墓가 발견된 바가 없으며, 오히려 이 지역의 靑銅器時代의 분묘유 적인 신촌리 석관묘, 도항리 선사유적, 오곡리 석관묘의 다양한 형태를 갖춘 支石墓의 下部 構造와 遺物의 매납 방식에서 三韓時代 木棺墓와의 구조적인 공통성을 찾을 수 있다는 지 적으로 함안일원의 지역적인 특성으로 보기보다는 弁ㆍ辰韓社會를 구성하고 있는 小國들의 다양한 존재형태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道項里木棺墓에서 출토되고 있는 각종 유물을 근거로서 木棺墓의 단계별 변화와 편 년적인 위치를 살펴보면 아래와 같이 정리될 수 있다.24) 土器類는 無文土器壺와 鉢, 小形 甕, 長頸壺, 短頸壺, 盌, 兩耳附壺 등의 유형별로 나누어지며 공반된 기종들의 평행관계를 정리하면 모두 5단계로 나누어진다.(圖面 2) Ⅰ단계는 無文土器가 중점적으로 출토되는 시 기로 전단계의 黑色磨硏長頸壺와 粘土帶甕등의 기형을 계승하면서 점차 前期瓦質土器단계 의 표식적인 기형으로 변해간다. 태토는 無文土器에 비해 정선된 점토를 사용하지만 아직은 無文土器와 같은 酸化焰燒成이다. Ⅱ단계는 정선된 점토의 태토를 사용한 還元焰燒成의 瓦質 土器가 등장하며 전단계의 平底小形甕이 末角平底化된 형태이다. 새로운 기종인 盌이 등장하 며 無文土器의 비율이 점차 낮아진다. Ⅲ단계에는 無文土器는 완전히 사라지고 본격적으로 태토가 정선된 還元焰燒成의 瓦質土器만 출토된다. 長頸壺, 小形壺, 盌 외에도 短頸壺가 나 타나며 기종의 구성이 더욱 다양해진다. 圓底의 長頸壺는 구경이 벌어지며 球形 또는 양 23) 김형곤, 2000, 함안지역 목관묘의 유형, 연보 2호, 창원대학교박물관. 24) 김현, 2000, 함안 도항리목관묘출토 와질토기에 대하여, 도항리ㆍ말산리유적.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19

파모양의 동체부형태를 띠고 小形甕은 圓底이며, 동체부 상반부가 직선적으로 변화되고 있 다. Ⅳ단계에 이르면 小形甕의 동체부상반부는 약하게 만곡하고 長頸壺는 구경부가 점점 벌 어져 외반되는 형태를 갖춘다. Ⅴ단계는 동중위에 각이지는 주판알 모양의 小形甕과 卵形의 동체부에 나팔상으로 벌어지는 구경부형태를 띠는 長頸壺 등 특징적인 형태의 瓦質土器들 이 출토되며, 매납되고 있는 토기의 량도 앞 시기에 비해 많아진다. 鐵器類는 토기에 비하 여 매우 빈약한 편으로 매납량이 적고, 그 종류도 鐵斧(10점), 鐵鎌(3점), 刀子(2점)의 鐵製 農工具類 15점과 鐵劍(5점), 鐵鉾(6점), 鐵鏃(2점), 小刀(1점)등 鐵製武器類 14점으로 매우 단순한 편이다. 그외 구체적인 형태를 알 수 없는 木器가 5점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道項 里木棺墓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鉢, 甕 등의 無文土器와 小形甕, 長ㆍ短頸壺, 盌, 兩耳附壺, 鐵鉾, 鐵斧, 刀子등 동시기 木棺墓유적에서 출토되고 있는 土器와 鐵器가 확인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주목되는 것은 遺構의 구조에 있어서 腰坑이 설치된 木棺墓의 존재가 없으며, 금속유물의 출토량이 빈약하고 종류도 단순하다는 점이다. 또, 동시기 弁ㆍ辰韓地域 에서 출토되고 있는 각종의 靑銅製 威信具와 裝身具類가 거의 없고, 鐵素材用으로 추정되는 板狀鐵斧와 따비 같은 農工具類도 거의 보이지 않는 점 등이 道項里木棺墓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으로 들 수 있다. 또한, 道項里木棺墓에서 절대연대를 비정할만한 자료는 없는 실정이나 같은 시기에 조성 된 것으로 생각되는 창원 다호리유적과 경주 조양동유적등에서 遺構가 조성된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들이 있으므로 출토된 遺物의 型式을 이들과 비교하여 간접적으로나마 道 項里木棺墓의 추정연대를 살펴볼 수가 있다. 기존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하여 볼 때 道項 里 1期는 後期無文土器단계에 해당되며, 2期부터는 瓦質土器가 등장하여 無文土器가 소멸 하는 단계에 접어들게 된다. 小形甕과 長頸壺등 한 두점에 불과하던 副葬土器의 량이 점차 많아지는 시기로 파악되며, 前漢鏡 4枚가 출토된 경주조양동 38호분이 절대연대의 기준이 되고 있다. 따라서 道項里 2期는 함께 공반된 長頸壺의 형식으로 보아 기원전후로 비정될 수 있을 것 같다. 道項里 3期는 無文土器가 완전히 사라지고 瓦質土器만이 출토되어 정착되 는 시기이며, 5期는 瓦質土器의 성행기로 토기의 형태가 급격히 변화하고 다양해지는 2세 기 전후로 파악된다. 道項里木棺墓에서 출토된 遺物의 양상은 크게 보아 三韓前期土器인 後 期無文土器에서 瓦質土器로의 점진적인 변화상을 보여주고 있고, 각 기종별 형식간의 흐름 은 연속적이라기보다는 단절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는 道項里일대에 木棺墓가 일시적 으로 중단되었다가 다시 축조되는 시간상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라기 보다는 동시기의 경 주조양동유적, 김해 양동리유적, 창원 다호리유적들에 비해서 매납된 遺物의 組合相이 단순 하고 유물의 출토량도 현저하게 적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즉, 20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道項里일대에 조성된 木棺墓文化는 동시기에 존재하였던 弁ㆍ辰韓의 동일한 文化圈域內에 서도 뚜렷한 중심세력을 형성하지 못하고, 그 세력이 미약하여 社會文化的인 발전단계가 다 소 늦은 주변지역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다호리목관묘와의 비교에서도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하에서는 이들 兩遺蹟의 遺物과 遺構를 대비 하여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2. 茶戶里木棺墓와의 比較 茶戶里遺蹟은 일제시대부터 마을 뒷편에 위치한 구릉상에서 다수의 伽倻時代 古墳이 도 굴되어 많은 량의 遺物이 국립박물관에 신고품으로 수장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 으며, 1988년초 구릉지 주변의 평지상에서 도굴에 의해 우연히 발견된 三韓時代 통나무관 을 비롯하여 내부에 副葬되었던 漆器와 細形銅劍의 발견으로 茶戶里遺蹟은 세인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1992년까지 모두 7차에 걸친 집중적인 발굴조사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의해서 진행되었다. 발굴조사결과 47기의 木棺墓와 甕棺墓가 확인되었는데, 三韓時代 낙동강하류 역을 중심으로 한 弁韓地域의 사회문화상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최고의 자료로서 평가되고 있다.25) 茶戶里遺蹟에서 확인된 내용 중 주목되는 것으로는 三韓時代前期 영남지역의 주된 묘제 는 평지상에 조영된 木棺墓이며, 三國時代가 되면 大形木槨墓와 竪穴式石槨墓가 구릉의 정 상부쪽으로 이동해가면서 순차적으로 조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분 축조상의 立地에 있어 서 低地에서 高地로 변천되는 특징적인 모습은 咸安道項里古墳群의 경우에서도 공통적으로 파악되어진다. 이는 김해 대성동유적의 木棺墓가 低地帶에만 분포하며, 이후의 木槨墓는 모 두 高地帶에 분리되어 분포하는 양상이나 경주 조양동유적과 울산 하대유적의 경우처럼 고 분의 立地가 대체로 高地帶에서 低地帶로 이루어지다 다시 高地帶의 木棺墓 주위에 조성되 고 있는 양상과는 큰 대조를 보이고 있다. 이는 洛東江 東岸地域과 西岸地域과의 埋葬文化 上에 나타난 차이로 볼 수 있으며, 문헌상에 기록된 弁ㆍ辰韓의 여러 小國들을 고고학적으 로 구분 지워볼 수 있는 단서로도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茶戶里木棺墓는 대체적으로 세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26)Ⅰ類型은 묘광의 규모가 비교적 크고 깊은 편(길이 270 25) 이건무외, 1989, 의창 다호리유적 발굴진전보고(Ⅰ), 고고학지 1. 이건무외, 1991, 의창 다호리유적 발굴진전보고(Ⅱ), 고고학지 3. 이건무외, 1993, 의창 다호리유적 발굴진전보고(Ⅲ), 고고학지 5. 이건무외, 1995, 의창 다호리유적 발굴진전보고(Ⅳ), 고고학지 7. 26) 이건무외, 1989, 주24)의 전게서.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21

내외, 너비 130 내외, 깊이 180 내외)으로 묘광 바닥면의 중앙에 장방형의 副葬坑이 있고 부장품도 많은 편이다. Ⅱ類型은 묘광의 규모가 Ⅰ류형보다는 대체로 작은 편이며,(길 이 220 내외, 너비 100 내외, 깊이 150 내외) 묘광바닥의 腰坑施設은 보이지 않는다. Ⅲ類型은 묘광의 규모가 제일 작고(길이 180 내외, 너비 60 내외, 깊이 40 내외) 副葬 坑의 시설도 보이지 않으며 부장품도 매우 빈약한 편이다. 세유형의 木棺墓는 대체로 시기 적인 차이보다는 부장유물의 과다와 상징적인 유물(붓, 저울추, 주조철부 등)들의 존재유물 로 보아 신분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木棺의 형태는 둥근 통나무관이 1호분 (Ⅰ유형)에서 출토되었고, 6호분(Ⅱ유형)과 12호분(Ⅲ유형)등에서도 내부퇴적토의 단면상에 U자상의 흔적이 보이고 있으므로 통나무관이 각 유형에 전반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에서 통나무로 제작한 木棺은 後期無文土器단계의 積石木棺墓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므로 韓國式銅劍文化와 함께 木棺의 전통이 이어져 내려온 것으로 생각되는데, 木棺 墓단계에서 통나무관의 존재가 茶戶里遺蹟과 道項里木棺墓에서만 확인되고 있다는 것은 弁 韓社會內에서 小國間의 관계를 살피는데 있어서 주목되어야 할 부분으로 생각된다. 茶戶里遺蹟에서 출토된 遺物에는 많은 양의 鐵器가 포함되어 있다.(圖面 3) 鐵劍, 鐵鉾, 鐵戈, 鐵鏃 등의 武器類는 韓國式銅劍文化期의 그것들과 형태상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으 며, 材質만 靑銅에서 鐵로 변화된 것으로 볼 수 있다. 鐵斧類가 중심을 이루는 工具類는 鑄 造鐵斧, 鍛造의 板狀鐵斧, 有肩鐵斧 등으로 다양한데, 이중 1호분의 竹篋에서 각종의 靑銅 器와 鐵製武器 그리고 五銖錢, 붓, 削刀등과 함께 출토된 단면 梯形의 鑄造鐵斧는 銎部에 鑄造時 넣은 內型을 파내지 않고, 그대로 남긴 것과 필기용의 붓과 削刀로 사용된 素環頭小 刀, 저울의 추로서 사용된 靑銅環 등의 존재로 보아 당시 鐵素材로서 交易의 대상품으로 사 용된 것으로 보인다. 弁ㆍ辰韓地域의 木棺墓와 木槨墓遺蹟에서 확인되고 있는 鑄造鐵斧중 2 점이 1조를 이루고 있는 경우는 많은데, 이들은 刃部에 날이 세워져 있지 않은 것으로 보아 實用品이라기 보다는 鐵素材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板狀鐵斧와 小形의 鍛造鐵斧는 농경지의 개간을 위한 벌목용이나 목제농기구를 제작하는데, 필요한 木工具로서 이들의 출토량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활발한 목제농기구와 농경지의 확대가 진행되었음을 암 시하고 있다.27) 또, 農器具로서는 따비와 낫, 鐵刀子가 있다. 따비는 두 종류의 것이 출토 되었는데, 하나는 날이 좁고 길며 날의 단면이 납작한 삼각형을 이룬 것으로 경주 조양동유 적, 울산 하대유적, 창원 대평리유적 등 三韓時代유적에서 발견되는 것과 같다. 다른 하나는 폭이 좁고 날이 짧으며, 끝이 뾰족한 형태로서 農耕文靑銅器에 보이는 것과 같은 형태이나 두 종류 모두 자루와 날이 약 140 의 각도를 이루고 있다. 이들 철제따비는 중국계 농기구 27) 이현혜, 1990, 삼한의 농업생산과 철제농기구, 역사학보 126. 22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그림 3> 茶戶里木棺墓(1) 및 鐵器(2 8 : 30호분, 9 11 : 40호분)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23

와는 형태를 달리하는 한반도적인 것으로 이미 三韓의 토착사회가 당시까지 보편적으로 사 용하던 목제농기구를 鐵製로 전환한 결과로 생각되며 여전히 따비류와 鑄造鐵斧가 기본 掘 地具로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鐵鎌도 중국 漢代 鐵鎌의 영향을 받아 출현하게 된 것 으로 생각되나 靑銅器時代 石鎌의 형태를 그대로 따르고 있어서 지역적인 독자성이 엿보인 다. 특히, 낫은 鐵器가 출토되는 초기단계의 유적에서는 흔하게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상당 수준의 鐵器와 靑銅器 副葬品을 갖춘 上位集團의 墳墓에서 만 주로 1점씩 출토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鐵器의 보급이 그리 일반화되지 못한 초기단계에서 낫은 農器具로서의 機能이 외에 武器, 工具 또는 특정계층의 經濟的인 富를 나타내는 상징물로서의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고, 당시의 곡물수확작업은 위천용연동유적에서 출토된 철제반달칼의 존재로 보아 아직도 이삭따기식 방법이므로 鐵刀子가 주로 사용되었고, 낫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된다. 道項里木棺墓에서 출토되고 있는 鐵器類도 거의 茶戶里遺蹟의 그것들과 유사한 경향을 보이고 있다.(圖面 4) 道項里67號墓 동단벽의 보강토내에서 출토한 2점의 鑄造鐵斧는 銎部 에서 刃部쪽으로 약하게 축약되어 내려오다 刃部에 이르러 약간 벌어지는 형태로 上面에 2 조의 突線이 刃部에서 銎部까지 연결되며, 身部의 단면은 직삼각형을 띠고 銎部의 형태는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 銎部內面에는 土製內范으로 추정되는 鑄物砂가 가득 채워져 있어서 다호리1호분에서 출토된 鑄造鐵斧와 같이 鐵器의 素材로 경제적인 의미에서 地金의 기능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 鐵製品중 48號墓, 63號墓, 72號墓등에서 출토된 길이 10 내외의 小形 鍛造鐵斧는 나무를 잘게 쪼개거나 다듬는 등의 세밀한 작업에 사용되는 것이며, 주로 소형 목제농기구의 제작에 이용되고 있는데, 小形鐵斧의 구성비율이 다른 철기류에 비해서 월등히 높은 것과 농경지의 개간을 위해 벌목용으로 사용되는 板狀鐵斧와 起耕具로 이용되 는 철제따비의 출토가 거의 없는 것으로 보아 道項里木棺墓단계에는 木製農器具의 제작과 사용이 활발하였던 것으로 생각되며, 이로써 安邪國의 農業生産力정도와 社會性格을 어느 정도 추정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茶戶里遺蹟에 비해서 절대적으로 빈약한 출토 예를 보이고 있는 鐵鎌(3점)과 刀子(2점)도 安邪國의 內的인 限界를 보여주는 것으로 여겨지며, 더욱이 小國의 首長들이 자신의 身分的인 象徵으로서 사용하였던 中國製 銅鏡의 副葬과 靑銅製 儀器類의 출토가 전혀 확인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보아 道項里木棺 墓를 조영한 集團은 당시 對外文化交流의 중심적인 先進地域에 비해서 社會文化的인 變動 이 덜한 주변 지역적인 성향이 강한 集團일 것으로 생각된다. 24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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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 道項里木棺墓 出土 鐵器 (1 4 : 67호, 5 : 48호, 6 7 : 62호, 8 : 63호, 9 : 70호, 10 : 72호, 11 : 74호, 12 13 : 49호, 14 : 58호) 26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Ⅳ 三韓時代의 後期에 해당하는 2세기 후반에 이르면 한반도 남부지역에서는 정치, 사회상 變質의 조짐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점진적인 변화가 진행된 일련의 결과로서 고고 학자료상 뚜렷하게 보이는 것은 바로 埋葬文化上의 變質, 즉 木棺墓文化의 쇠퇴와 木槨墓文 化의 出現인 것이다. 木槨墓의 발생시기에 대해서는 大形木槨墓인 김해 良東里162호분 출 토 後漢鏡을 근거로 하여 적어도 2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하고 있으며,28) 전대의 木棺墓에 비하여 일반민의 무덤과 구별되는 묘역의 입지조건, 매장주체부의 대형화, 부장유물의 양 적인 증가, 철제무기류의 폭발적인 매납 등을 주요한 특징으로 들고 있다. 洛東江下流域을 중심으로 하여 이러한 木槨墓의 등장은 2세기 후반무렵부터 古代國家體의 成立問題와 관련 하여 주목받고 있으며, 3세기 후반이후 나타나는 高塚古墳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의미에 서 전시기의 木棺墓社會와는 현격한 차이를 갖는 정치, 사회의 형성이 진행되었다고 파악되 고 있다.29) 咸安地域에 있어서도 2세기 후반경에 이르면 영남지역의 대세적인 변화에 힘입어 木棺墓 段階에서 木槨墓段階로 자연스럽게 변화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여러차례에 걸친 道項里古 墳群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道項里木棺墓는 2세기대를 終點으로 하여 서서히 사라지며 새 로운 埋葬文化가 전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분석된 자료에 의하면 4세기 전반의 Ⅰ類型 木槨墓文化와 5세기 전반대의 Ⅱ類型木槨墓文化 그리고 5세기 후반대의 竪穴式石槨墓文化, 6세기 전반대의 橫穴式石室墓文化로 시기에 따라서 다양한 埋葬文化가 수용되어 지역에 맞 는 형태로 변형된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음이 밝혀졌다.30) 여기에서 주목되는 것은 3세기대 의 埋葬文化가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4세기대의 경우에도 Ⅰ類型木槨墓의 존재가 매 우 미미하다는 것이다. 이는 道項里古墳群 일대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지 못한 현실적인 한계도 있으나, 영남지방의 初期木槨墓의 입지와 분포양상으로 볼 때 道項里古墳 群의 북쪽능선상에는 3세기대와 4세기대 木槨墓의 존재가능성이 매우 높은 지역으로 파악 되고 있다. 그러나 3차례에 걸친 북쪽능선일대에 대한 발굴조사 결과 3세기에서 4세기대의 것으로 파악되는 木槨墓는 5基이내로서 전단계인 木棺墓의 분포밀도에 비하면 매우 낮은 상태이다. 3세기대에 해당되는 유구는 <경>68호분을 들수 있는데,31) 이 고분은 구릉의 서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27

사면 단부(해발20.3m)에서 발견된 것으로 대부분이 가옥에 의해서 파괴가 심하게 된 상태 이다.(圖面 5) 遺構의 장축은 동서방향이며 잔존길이는 120 정도이고 노형토기 1점이 출 토되었다. 노형토기는 瓦質製로서 1/3기량이 파손된 상태인데, 동체부는 원저의 저부에서 약하게 내만하여 올라가다가 최대경이 위치한 동상부에서 완만하게 꺽인다. 경부는 구경부 에서 만곡하여 구연으로 이어지며 구연단은 둥글게 처리되었다. 세부적인 차이는 있으나 전 체적인 기형상에 있어서는 노포동 16호분과 유사하며, 시기는 대체로 3세기 중엽이후의 것 으로 파악된다.32) 4세기대의 것으로는 <문>35호분, 41호분, 42호분으로 遺構의 규모도 작 은 편이며, 부장유물의 매납량과 구성된 기종이 대부분 원저단경호를 중심으로 한 土器類에 국한된 상태여서 築造集團의 세력이 金海나 釜山地域의 4세기대 遺構를 축조한 集團의 세 력에 비해서 열등한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道項里古墳群내에서 2세기대까지 활발 하게 축조되고 있던 木棺墓文化가 3세기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木槨墓의 수용과 축조가 활 성화되지 못하고, 더욱이 주변세력의 통합과정에 있던 4세기대에 이르기까지 뚜렷한 遺構가 확인되지 않는 상태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데, 이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이 安邪國의 成長 와 阿羅伽倻의 실체에 대한 금후의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한편, 茶戶里遺蹟의 경우에 있어서도 咸安 道項里古墳群과 같이 2세기대까지 왕성한 木棺 墓문화가 지속되어 오다가 3세기 이후단계에 접어들면서 그 문화가 급격하게 쇠퇴하고 있 는양상을 보이고 있는 점은 주목된다. 茶戶里遺蹟에서 확인된 73기의 遺構는 대부분이 기 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대에 이르는 木棺墓와 甕棺墓이며 3세기대와 4세기대의 木槨 墓로 파악되고 있는 것은 전무한 실정이다. 그리고 주변지역에 대한 지표조사결과에서도 三 韓時代後期의 대표적 토기문화인 新式瓦質土器類, 즉 노형토기, 대부호 등의 흔적은 전혀 발견하지 못하였고, 4세기 후반대에 속하는 金海式 外切口緣高杯類와 원저단경호류 약간만 이 수습되며 5세기 이후의 중소형 고분의 흔적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33) 지금까지 학계의 일부에서는 茶戶里古墳群의 중심연대가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6세기대까지로 연속적인 고분문화가 이루어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가 제시되 지 않는 한 신뢰할 수 없는 실정이며, 茶戶里古墳群에 대한 향후 지속적인 조사가 기대되고 있다. 어쨌든 현재의 고고자료상으로 보아 道項里古墳群과 茶戶里遺蹟에서는 모두 3세기에 서 4세기대의 뚜렷한 古墳文化가 확인되지 않고 있음은 인정될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적극 적인 해석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32) 이성주, 1999, 진ㆍ변한지역 분묘출토 1 4세기 토기의 연구, 영남고고학 24. 33) 김두철 이주헌 외, 1984, 茶戶里古墳群地表調査보고, 가야통신 4집. 28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그림 5> 도항리고분군 3 4세기 유구 및 유물(1 2 : 68호, 3 13 : 35호, 14 16 : 42호)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29

三韓時代後期에 해당되는 3세기 전반대까지 비교적 사실적으로 기술된 陳壽의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의하면, 安邪國과 狗邪國은 對郡縣 交涉의 실제적인 지역대표자로서 존재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고고자료상으로 보아 安邪國의 중심세력은 咸安 道項里古墳群內의 木棺墓築造集團으로 파악되며, 狗邪國의 중심세력은 金海 良東里古墳群 築造集團과 大成洞 古墳群 築造集團으로 볼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良東里古墳群 築造集團은 2세기 전반에서 4 세기대 金海의 中心勢力이며, 大成洞古墳群 築造勢力은 3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이르기까 지 鐵을 이용한 對中國 郡縣과의 交涉뿐만 아니라 日本列島의 倭와도 빈번한 交易을 전개 하였고, 安邪國의 중심인 咸安 道項里木棺墓 築造集團은 洛東江水系와 南江水系가 만나는 交通의 結點地로서의 地理的인 利點을 이용하여 중요한 鐵資源과 對中國 交易品등을 내륙 지역으로 운송하는 交易의 據點勢力이었음을 알 수 있다.34) 또한, 茶戶里遺蹟은 地理的인 位置上으로 볼 때 바다를 향해 입지한 良東里와 大成洞遺蹟 에서 직선거리로 25 정도 내륙으로 들어와 있으며, 咸安의 道項里古墳群과는 洛東江을 따 라 동쪽으로 30 정도 떨어져 있다. 당시에 있어서 인간의 평시 활동거리가 35 내외라는 설에 따르면 茶戶里遺蹟은 金海의 對外貿易據點과 咸安의 內陸貿易據點 지역의 중간지점에 위치하는 地政學的인 곳에 해당된다. 즉, 茶戶里遺蹟의 木棺墓 築造集團은 良東里와 大成洞 集團이 수행한 鐵資源의 輸出과 對郡縣 交易品들을 洛東江과 南江水系를 통해 內陸으로 分 散시키는 道項里集團과의 仲介貿易을 담당한 세력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茶戶 里 1號 木棺墓에서 출토되고 있는 횡단면 제형의 주조철부와 붓과 削刀, 砝碼와 五銖錢의 존재는 茶戶里木棺墓集團의 社會經濟的인 性格을 충분히 나타내주고 있다. 특히, 횡단면 제 형의 주조철부는 이 遺蹟에서 발견되는 鐵器 중 유일한 鑄造品으로 그 형태가 독특하여 같 은 시기의 中國이나 日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한반도 남부지역만의 특유한 형식으로 알 려져 있다. 竹篋에서 발견된 이 鐵斧는 銎部에 흙으로 된 內型이 그대로 남아있고 2枚가 1 組로 포개져 끈으로 묶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실제로는 사용할 수 없고, 鐵素材로서 녹여 再加工할 수 있게 만든 일종의 地金 역활을 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또 붓과 削刀는 交易 時 사용되었던 文房用具로서 이용된 것이고, 砝碼와 五銖錢도 활발한 貿易中心地의 모습을 연상시키기에 충분한 자료로 볼 수 있다.35) 그런데, 道項里 67號木棺墓와 70號木棺墓에서 도 茶戶里 1號木棺墓에서 발견된 것과 同一한 형태의 鑄造鐵斧와 削刀가 출토되고 있음은 매우 주목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茶戶里木棺墓 築造集團과 道項里木棺墓 築造 集團사이에 깊은 관련성이 있음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前章에서 살펴본 바와 34) 선석열, 2000, 중국정사 동이전에 보이는 3세기대 안사국의 성장, 연보 2, 창원대학교박물관, p.59. 35) 이건무, 1992, 다호리유적출토 붓에 대하여, 고고학지 4, pp.5 29. 30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같이 이 두 集團의 木棺墓文化는 몇 가지 점에서 서로의 공통성이 확인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두 集團은 金海를 통한 對外貿易據點의 仲介地인 茶戶里集團과 洛東江水系와 南江水 系의 內陸貿易圈을 장악한 道項里集團이 서로 共同經濟體制를 형성하였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양자간에는 對象交易地域의 經濟水準 차이에 따라 社會文化的인 영향에 격차가 있었던 것 같다. 즉, 對中國 또는 對倭交涉의 창구였던 金海 良東里遺蹟과 仲介貿易據點이 었던 茶戶里遺蹟에서는 中國의 先進文化的인 영향력이 강하게 나타날 뿐만 아니라 前漢鏡 을 비롯한 각종의 威信具가 이들 유적에서 발견되고 있으며, 이와는 달리 내륙의 서쪽에 위 치한 道項里木棺墓의 경우, 前者에 비해 비교적 社會成長의 發展이 낮은 內陸地로의 物資分 配와 交涉의 結点地였으므로 對外的인 威信製는 그다지 보유하지 못한 양상으로 나타나게 된것으로 金海와 昌原地域의 동시대 유적에 비해서 주변 지역적인 성향을 가지게 된 것으 로 생각된다. 결국, 咸安 道項里木棺墓 築造集團과 昌原 茶戶里木棺墓 築造集團의 經濟的인 利害關係가 서로 일치하여 한반도 동남해안과 영남내륙지역의 交易과 經濟圈을 共同으로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데 이는 상기에서 언급한 木棺墓遺蹟의 立地上 同一性과 통 나무형목관의 共有 그리고 같은 유형의 鑄造鐵斧와 削刀의 존재등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또 5세기 전반대 咸安地域의 특징적인 토기문화인 火焰文透窓高杯가 창원 도계동유적 에서 여러점 확인되고 있는 것36)으로 보아 咸安과 昌原北部地域은 洛東江水系를 이용한 경 제권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공조체제도 이후 어느시점까지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던 것으로 짐작되어진다. 道項里集團과 茶戶里集團의 木棺墓문화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또 하나 주목되는 현상은 3 세기대이후 영남지역에 있어서 주요세력의 기반을 이루고 있는 중심지역에서 발견되고 있 는 大形木槨墓, 즉 蔚山 下代遺蹟, 釜山 老圃洞遺蹟, 東來 福泉洞遺蹟, 金海 良東里遺蹟 등 지에서 발견되는 木槨墓가 이 두 遺蹟에서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발견되더라도 3세기 말경 또는 4세기대 후반의 것이고 그 類型도 상기유적들의 것에 비해서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小形이어서 이를 有力集團의 것이라고는 파악될 수가 없다. 兩集團에서 동시에 나타나는 이러한 고고학적인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좀더 신중한 검토 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되며, 향후 道項里古墳群과 茶戶里古墳群에 대한 보다 넓은 지역에 대한 전면적인 발굴조사가 진행되어 3세기대에 해당되는 다수의 목곽묘가 확인된다면, 이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까지의 자료를 검토하여 이 문제를 합 리적으로 해석해 본다면, 필자는 이를 3세기전반이후에 남부지역에서 일어났던 浦上八國의 전쟁과 관련하여 이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으로 생각된다. 주지하다시피 三國史記 36) 창원대학교박물관, 1988, 창원도계동고분군.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31

와 三國遺事 에 모두 기록되어 있는 浦上八國의 전쟁37)은 伽倻史의 내부적인 발전과정에 대한 사실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중요한 기록으로서 일찍부터 주목을 받아 왔으며, 내용의 중요성 만큼이나 論者에 따라서 다양한 입장으로 이해되어 왔다. 대체로 三國 중심적인 시 각에서 파악하여 伽倻를 사이에 두고 대립한 新羅와 百濟의 영역확장과정으로 이해하는 관 점38)과 가야세력의 주체적 발전과정에서 사회내부의 발전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가야사의 변화적 계기로 이해하려는 입장39)으로 나누어지며, 전쟁의 시기, 전쟁대상국, 浦上八國의 위치, 전쟁의 성격 등에 대해서 다양한 견해가 제시되어 있다. 浦上八國의 전쟁이란 三國 史記 와 三國遺事 에 의하면 奈解王代에 浦上八國이 阿羅 또는 加羅를 침략하였으나 新羅 의 救援으로 이를 격퇴했다는 내용인데, 두 사료의 서술내용에 조금씩 차이가 있으며 전쟁 대상이 加羅와 阿羅로 표현되어 있고 전쟁의 시기도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연구자들에 따 라 전쟁의 시기가 3세기 초반설40), 3세기 후반 4세기 전반설41), 4세기 전반설42), 6세기 중엽설43), 7세기 초반설44)로 다양하며, 3세기 초반설을 제외하고는 기본적으로 三國史 記 의 초기기년에 대한 의문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 그 외의 견해는 근본적으로 가야발전과 정에 대한 획기설정의 차이에 기인한다. 그리고 획기의 근거 또한 樂浪을 중심으로 하는 한 반도 남부사회내 交易體系上의 변화라는 관점에 의거하여 연구자들 각자의 기준에 의해서 전쟁의 시기를 설정하고 있다. 대체로 三國史記 勿稽子傳과 三國遺事 勿稽子傳의 서술 내용이 비슷하고 전쟁 3년 뒤에 加耶가 왕자를 인질로 보냈다는 기록이 첨부되어 있는 것 으로 보아 浦上八國의 전쟁은 新羅 奈解王代에 일어났던 사실임은 분명한 것으로 볼 수 있 으며, 三國史記 초기기록에 대한 修訂論的인 시각에서 奈解王代의 紀年設定은 3세기 후반 또는 4세기 전반대로 정리될 수 있다. 전쟁의 대상국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논자들이 加羅 즉, 金海地域으로 비정하 고 있으며 樂浪을 통하여 선진적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던 金海의 狗邪國이 樂浪의 일시적 37) 三國史記 卷第2 新羅本紀 第2 奈解尼師今條. 三國史記 卷第48 列傳 第8 勿稽子傳. 三國遺事 卷第5 避隱 第8 勿稽子傳. 38) 선석열, 1996, 삼국사기 신라본기 초기기록문제와 신라국가의 성립, 부산대학교박사학위논문. 이종욱, 1982, 신라국가형성사연구. 39) 김태식, 1993, 가야연맹사, 일조각. 백승충, 1995, 가야의 지역연맹사 연구, 부산대학교박사학위논문. 남재우, 1997, 안라국의 성장과 대외관계연구, 성균관대학교박사학위논문. 40) 천관우, 1991, 가야사연구, 일조각 이현혜, 1987, 4세기 가야사회의 교역체계의 변천, 한국고대사연구 1. 백승충, 1986 1 3세기 가야세력의 성격과 추이, 부대사학 13 권주현, 1993, 아라가야의 성립과 발전, 계명사학 4. 41) 백승옥, 1997, 고성 고자국의 형성과 변천, 한국고대사회의 지방지배, 신서원. 42) 김태식, 1994, 함안 안라국의 성장과 변천, 한국사연구 86. 43) 김정학, 1977, 임나와 일본, 소학관. 선석열, 주37의 전게서. 44) 三品彰英, 1962, 日本書紀朝鮮關係記事考證 上卷. 32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쇠퇴나 樂浪의 소멸에 근거하여 交易을 통한 재분배기능을 상실함으로서 인근에 있던 浦上 八國이 海上交易圈을 둘러싸고 金海의 狗邪國을 침략하게 되었다는 것이다.45) 이와는 달리 三國史記 와 三國遺事 勿稽子傳은 奈解王 14년 이후의 17년, 20년의 사실이 年代記 的으로 구체적인 내용까지 포함하여 기록되어 있으므로 列傳에 기록된 阿羅國이 전쟁대상 이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도 있다.46) 결국, 기존의 연구동향으로 보아 浦上八國과의 전 쟁대상국을 加羅와 阿羅國 중에서 하나만을 취하려는 고정적인 시각에 의해서만 浦上八國 전쟁의 성격을 파악하려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전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三韓時代 弁 韓社會內에서 咸安 道項里集團은 安邪國의 주요한 정치세력으로 인정되어지며, 昌原 茶戶里 集團은 洛東江水系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陸路를 통해서도 근거리에 위치한 金海中心勢力, 즉 良東里古墳群과 大成洞古墳群 築造集團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加羅의 변경에 자리한 重要據點勢力으로 파악될 수 있다.47) 또한, 고고자료의 분석을 통해 서 알 수 있는 것처럼 道項里와 茶戶里遺蹟의 兩 集團은 洛東江과 南江水系를 장악한 동남 부지역 交易의 中心地로서 서로 經濟的ㆍ政治的인 共助體制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문헌상의 기록에 보이는 浦上八國의 전쟁대상국은 史料의 기록대로 加羅와 阿羅 國 二國이 될 수 있으며, 특히, 여기에서 加羅는 茶戶里集團이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기존의 연구경향대로 굳이 이를 하나의 전쟁대상국으로 축소시켜서 자의 적으로 해석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리고 浦上八國의 전쟁시기도 3세기 전반대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다루고 있는 三國志 魏書 東夷傳에 이 전쟁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적어도 3세기 전반대 이후의 사건으로 파악될 수 있고, 전쟁시 빼앗아 온 포로 가 6천인이라는 기사의 내용으로 보아서도 당시 弁辰韓의 사회발전정도와 비교해 볼 때 일 국의 규모로 보기에는 수치상 문제가 된다. 후대에 비정된 전쟁참여국들의 비정위치(圖面 6)를 고려하여 볼 때에도 포상팔국의 전쟁기록은 加羅와 阿羅의 양지역에 해당되는 기록내 용으로 볼 수 있다.48) 한편, 전쟁이후에서 4세기 후반에 이르기까지 道項里古墳群과 茶戶 45) 김태식, 주41의 전게서. 백승충, 주39의 전게서. 46) 선석열, 주37의 전게서. 남재우, 주40의 전게서. 三品彰英, 주 43의 전게서. 田中俊明, 1992, 大加耶聯盟의 興亡과 任那, 吉川弘文館. 47) 다호리유적은 행정구역상 창원시에 속해 있으나, 지리적으로 보아 창원분지를 벗어난 외곽에 위치하여 있고 낙동강을 통하여 김해지역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또 포상팔국의 하나인 골포국은 창원분지내 남천과 토월천이 만나는 가음정동 과 상남동일대에 그 중심세력이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따라서 다호리유적과 골포국의 직접적인 관련성은 없을 것으 로 생각된다. 48) 전쟁에 참여한 浦上八國의 위치에 있어서도 柒浦國은 지금의 칠원지역에 비정되고 있는데 이지역은 도항리유적과 다 호리유적의 사이에 해당되며, 사천으로 비정되는 史勿國은 사천만을 통한 해상진출 뿐만 아니라 南江水系를 이용한 서 부경남 내륙지로 진출하는 교두보이다. 따라서 지리적으로 볼 때, 史勿國(사천)-古史浦(고성)-柒浦國(칠원)을 연결하는 라인과 柒浦國(칠원)-骨浦國(마산, 창원남부)의 연결라인은 모두 함안과 창원북부지역, 그리고 김해지역을 둘러쌓고 있 는 형세이므로 이들의 공격대상국은 자연히 阿羅와 加羅로 볼 수 있다.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33

연구자 국명 三國遺事 金正浩 丁若鏞 李丙수 三品彰英 金廷鶴 白承忠 南在祐 합 포 창 원 창 원 창 원 마 산 창 원 함 안 창 원 骨 浦 漆 浦 홍해(?) 칠 원 칠 원 칠 원 칠 원 칠 원 칠 원 古史浦 경 산 고 성 고 성 고 성 고 성 진 해 고 성 古自國 고 성 고 성 고 성 고 성 고 성 고 성 고 성 史勿國 사 주 사 천 사 천 사 천 사 천 사 천 사 천 保羅國 나 주 예정지역 고성부근(?) 웅천, 함안, 진해, 사천, 곤양 <그림 6> 浦上八國 位置 比定圖 34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웅천, 거제, 삼천포, 진동만일대

里古墳群내에서 木棺墓에 이어 木槨墓의 축조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도 양 지역이 대규모 戰爭의 피해를 직접 받은 당사자였음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Ⅳ. 이상에서 三韓時代의 대표적인 埋葬遺構인 木棺墓를 중심으로 하여 三韓時代의 槪念에 대한 고고학적인 이해방법의 제시와 弁ㆍ辰韓의 木棺墓文化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또, 金海 地域의 茶戶里木棺墓와 咸安의 道項里木棺墓를 비교 분석하여 양자간의 공통성과 관련성 을 생각하여 보았다. 이로서 安邪國 세력의 成長背景을 추정할 수 있었으며 3세기 전반대 이후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되는 浦上八國의 전쟁에 대한 고고학적인 접근을 시도하여 보 았다. 부족한 고고자료와 문헌자료상의 한계로 인해서 부분적으로 논리상의 비약이 심한 것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는 입장이며, 木棺墓에서 木槨墓로의 계기적인 변화양상에 대한 검증적인 자료도 제시하지 못한 실정이어서 좀 더 분석적인 작업이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 다. 다만, 浦上八國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실마리를 풀고자 했다는 시도에 의미를 두고자 하며 3세기대이후 의 安邪國에서 安羅國으로의 變化에 대한 고고학적인 분석을 금후 기 약하고자 한다.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35

A Study of Dohang-Ri wooden coffin and Anya-Kuk Lee, Ju-Huen A wooden coffin has been given academic attention in Kaya(伽倻), due to the place the stage of Samhan society appropriately in the development of ancient korea history. Special attention must be paid on Dohang-Ri(道項里) woden coffin, since it is expected to explain the origin of Arakaya(阿羅伽倻) in the region of southen korea peninsula. Dohang-Ri wooden coffin is become generally knowen two types, and complete its unique feature in Chin-Han(辰韓) and Byun-Han(弁韓). Recently the fact that Dohang-Ri wooden coffin is discovered only in the king tombs of Chang Won Daho-Ri(昌原茶戶里) and it is remarkable of political connection between Kuya-Kuk (狗邪國) and Anya-Kuk(安邪國). Various ironware unearth of Dohang-Ri has seen similar to that from Daho-Ri, but it has not bronze mirror be maid Chines, symbol with dignity of social position in the ruling ciass. It seems that political unit of Daho-Ri is advanced sociaity and central force than Dohang-Ri in the Byun-Han. The later of two century, I have a think about wooden coffin changes the wooden chamble of Dohang-Ri and Daho-Ri that it go out of sight at AD.2 century. Becouse of possitive achaelogical sites has not confirm, it request radical interpretaion. I inference to accordingly to the it appearance connected of the wars between the eight country of southen regins in korea peninsula at the first half of AD.3 cencury. Exactly, the politial units of Dohang-Ri and Daho-Ri has concentration of trade in Racdong river(洛東江) and Nam river(南江) water system and that give form to coexistence system of economic and political mutuality. Keyword : a periods of Shamhan, wooden coffin, the wars between eight country of southen regin in korea peninsula, coexistence system of economic and political 36 道項里木棺墓와 安邪國

榮山江流域 甕棺古墳의 發生과 그 背景 김 낙 중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공예연구실) Ⅰ. 서 론 Ⅱ. 자료분석 1. 옹형토기의 특징 및 구분 2. 제1형식 옹형토기(옹관)의 지역적 분포 3. 출토유구 맥락, 용도 4. 연대검토 Ⅲ. 옹관고분 발생 배경 Ⅳ. 결 론

2세기 후반 이후 凡馬韓的으로 사용되던 대형 옹형토기는 백제가 우월적 정치체로서 성장 함에 따라 점차적으로 범위가 좁아지며 용도가 바뀌는데, 3세기 후반 이후 영산강유역에서 저분구묘의 중심 매장시설로 기능을 전용하면서 옹관고분이 등장하게 된다. 옹관의 형태와 양식이 통일되면서 백제와 구별되는 상징적 스타일로 강화,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즉 마 한을 구성한 대등한 정치체들의 공통적 상징이 백제와 구별되는 영산강유역이라는 광역적인 집단의 상징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과정은 백제와 정치적으로 구별하고 맞서야 하는 대내외적 요구를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영산강유역 집단의 결집을 위한 통합 이데올로 기의 반영이라고 판단된다. 주제어 : 영산강유역, 옹관고분, 표상적 양식, 정치체 Ⅰ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표지적 고고학 자료는 대형옹관을 매장주체로 한 고분이다. 영산강유역이 4세기 중엽 이후 백제에 복속되었을 것이라는 역사학계의 大勢論을 再 檢討하도록 한 이 지역의 독특한 묘제이다. 옹관고분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옹관 자체 의 형태적 연구뿐만 아니라 분구, 부장유물을 종합적으로 다루어 많은 진전을 보았다. 그리하여 專用化된 단계 이후의 옹관의 형태적 변천과정은 어느 정도 자세하게 다 루어졌다(成洛俊, 1983; 李正鎬, 1996). 그러나 대형옹관의 등장과 그 배경과 관련하 여서는 영암 선황리와 같은 초기 옹관은 일상용기의 형태를 계승한 대형옹관의 효시 적인 것으로 볼 수 있으며, 3세기 전반에는 발생했다고 보는 수준(서성훈 성낙준, 1986)에 머물렀다. 그런데 영암 선황리 옹관과 같은 초기의 옹관이 나주 복암리 등에 서 봉토를 갖춘 완성된 묘제로 자리 잡은 것이 확인되어 지금까지 논의된 옹관고분의 변천과정에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한 단계로 인식되었다. 또한 이러한 옹관의 등장배 경과 관련하여 유사한 속성을 가진 대옹이 마한의 영역에서 골고루 출토되는 점에 주 38 榮山江流域 甕棺古墳의 發生과 그 背景

목하여, 마한과 백제의 정치문화적 역학관계가 작용한 결과가 아닌가 추정하게 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2001a). 이 글에서는 이러한 대옹 자료를 분석하여 형태, 분포, 출토 맥락, 용도, 연대 등을 살펴보고, 백제의 성장과 압박에 대한 영산강유역 집단의 정치적 대응이라는 관점으로 논의해 보고자한다. 논의의 주요 틀은 광역적 대등 정치 체 연합(마한)이 특정 정치체(백제)의 세력강화에 대응해 일부는 자의적 또는 타의적 으로 통합되고, 정치문화적 배경이 다른 지역집단은 새로운 정치체에 대응해 응집력을 키워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치문화적 과정에 따라 지역집단내 계층성과 광역적이면 서 느슨한 종족성을 상징하던 양식(거치문 대옹)이 새로운 기능, 즉 매장시설로 전환, 상징성이 종족성과 결부되면서 집단통합에 정치적으로 이용되었을 것이라는 가정을 밑바탕에 두고 진행한다. Ⅱ 1. 옹형토기의 특징 및 구분 여기서 주목하는 甕形土器는 영산강유역 옹관고분의 성립기 옹관(제1형 옹관)1)의 속성인 회색 경질, 대형, 난형 동체, 긴 목, 외반 구연, 사면처리된 두꺼운 구순, 동부 격자문 타날, 저부 돌기, 鋸齒文 등의 속성을 일부 또는 전부 공유하는 토기이다. 영산강유역 이외 지역 주거지에서 출토된 옹형토기는 약간의 형태상 차이가 나는 것도 있고, 일부 한 두 속성이 결여되기도 하나 전체적으로 비슷한 것을 자료로 선택하였다. 가장 특징적인 속성은 크기 및 전체적인 형태이나 이외에도 장식문양으로서의 거치문을 중요하게 다뤘다. 거치문은 동체부에 격자문을 타날한 시문구의 모서리를 이용, 주로 경부와 동부의 경계에 한 바퀴 돌려 시문한 것이 일반적이다. 영산강유역의 것은 주로 한 줄만을 돌렸으나 중부지 방의 것은 두 줄을 돌린 경우도 있고, 거치문 이외에 다양한 형태를 띤다. 풍납토성 주거지 의 경우 35점의 대옹 중 문양이 있는 19점 가운데 거치문이 시문된 것은 5점이고, 무문과 능형문이 비슷하게 나타나며, 타원문도 있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01b). 능형문은 거치문과 같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나타나 거치문이 사라진 뒤에도 무문의 동체와 결합하여 이어진 1) 영산강유역에서 성행한 대형의 전용 옹관의 형식적 변천과정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옹관을 말하며 여기서는 제1형 옹관 이라고 한다(국립문화재연구소 2001a). 기존에 초기형이라고 한 구경부가 직선적으로 크게 외반하는 난형의 대옹은 제2 형 옹관, 캡슐형 대형 옹관은 제3형 옹관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39

다. 능형문이 시문된 대옹은 몽촌토성과 파주 주월리 주거지에서도 출토되었다. 현재까지 자료로 보는 한 거치문 이외의 장식문양이 시문된 대옹은 경기지역에 한정된다. 영산강유역 에서는 거치문으로 장식문양을 단일화하였다. 순천 대곡리 주거지 출토 거치문토기 분석을 통해 거치문 토기는 엘리트 주거지에서 독 점적으로 출토하고 독특한 기하학적 문양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토기와 달리 매우 크다는 점으로 볼 때 새로운 정치적 엘리트의 사회적 권위를 상징화하는 표식물, 즉 정치적 권위의 상징적 표상으로 보기도 하는데(金承玉, 1997), 마한이라는 광역적 단위 내의 지역집단 안 에서 계층화가 발생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었다는 점에는 동감하나 영 산강유역에서의 옹관고분의 발생과 관련하여서는 거치문이라는 상징적 문양이 계승된 사회 적, 정치적 맥락이 다를 수 있으며, 4세기에 옹관이 일반적인 매장주체시설로 보편화 된 이 후에도 모든 옹관에서 거치문이 나타나고, 다른 유물에 나타나지 않는 점은 지역집단 내 계 층화 표현보다는 한 단계 위의 역할, 즉 영산강유역 전체를 하나의 단위로 인식하게 하는 역할을 수행하였을 것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대옹의 주요한 형태적 특징 중의 하나로 저부 돌기가 있다. 이것을 성형과 관련된 흔적, 즉 성형시 옹 전체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지만 대옹의 성형과정에 대해 알려진 예가 없어 아직 불확실하다. 그런데 주거지 출토 대옹의 경우 주거지 바닥이나 수혈에 바로 세워놓았던 흔적이 보이므로 세우는 데는 일정한 구덩이가 필요하였을 것이며, 돌기는 이때 용기 고정이라는 부가적 용도로 쓰였을 것이다. 이러한 돌기가 전형적인 U자형 옹관에서 음각침선으로 변하는데 초기 옹관에 나타나는 돌기의 흔적기관인 것으로 판단된다. 토기질은 회색 경질2)로 모래 등 사립이 다량으로 포함되어 있으며 기벽이 두껍다. <표 1> 주요 대옹 및 옹관 주요 속성 옹(관) 유적명 출토유구 가-2호 주거지 풍납토성 나-1호 주거지 가-수혈 16호 가S5W12피트 구 높 경 이 최 문 동 구 어 저 거 부 대 체 경 깨 돌 돌 치 경 양 형 부 기 기 문 56 87 66 54.5 76 격 장 1 0 52.5 격 장 1 3 3 0 0 0 0 공 반 유 물 직구단경호, 시루, 회색무문양 광구단경호, 원저호,,타날문심발형토기 비고 부뚜막 서편바닥 중국회유도기 2) 손톱으로 긁었을 경우 긁히지 않을 정도로 단단하나 기벽의 태토가 치밀하지 못하고 속심은 손에 묻어날 정도로 약한 경우가 있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연질과 석기질의 중간 정도 굳기로 표면에 태토에 포함된 규소질이 녹아 생긴 윤이나 막, 재에서 생긴 자연유가 형성되지 않은 단계이다. 40 榮山江流域 甕棺古墳의 發生과 그 背景

옹(관) 유적명 출토유구 구 높 경 이 최 문 동 구 어 저 거 부 대 체 경 깨 돌 돌 치 경 양 형 부 기 기 문 몽촌토성 1 46 71.5 격 장 1 0 0 격 장 공 반 유 물 비고 파편 49 72.7 격 장 3 0 68.2 87.5 격 난 3 0 49.6 93.3 격 장 1 회청색경질무문직구호, 흑회색경질단경호, 8개체, 회색직구호, 회색평저직구호, 주거지 적갈색시루, 회색경질고배, 철겸 52.6 98.1 격 장 1 50.5 격 1 격 장 1 0? 난 2 0 82 60.2 격 난 2 0 0 공주 하봉리 8호주구묘 주구 66.9 86.5 60.9 격 난 2 0 0 0 서천 한성리 적석유구 파주 주월리 96-7호 주거지 53 79.7 청원 송대리 42호주구토광묘 48.6 60.6 45 서천 오석리 94-6호옹관 59 0 85 110 73 격 난 2 0 0 0 98 113 98 격 난 3 0 0 95 84 격 난 3 0 0 0? 0 원저단경호, 발, 철촉, 철모, 물미, 도자, 철부, 철착, 철겸, 구슬 원저단경호, 철겸, 철준 익산 율촌리 5호분구묘 96 81.6 85.2 73 군산 산월리 가지구 옹관 75.8 101 남원 세전리 1호 주거지 3 격 난 99 91 69 97 심발형토기, 장란형토기, 직구난형호, 원저단경호, 귀때토기, 외반구연경질무문토기 격 난 3 0 0 115 99 100 격 난 3 0 0 97 95.5 격 난 3 0 0 112 112 110 격 난 3? 0 이중구연토기, 단경호, 철겸 격 난 3 0? 0 평저광구호, 괭이 93 격 난 3 0 0 제20호옹관 68 92.8 64 격 난 3 0 0 원저직구호 제21호옹관 117 139. 103. 격 난 5 2 3 0 0 평저호 고창 송룡리 단독묘 고창 만동 단독장 2 8호주구묘 회청색도질원저단경호? 주구내 90.2 112 함평 성남리 단독묘 93 98.2 영암 선황리 단독묘 나주 복암리3호 80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41

옹(관) 유적명 출토유구 나주 복암리1,2호 주구 c무지 사이 1-2 12-2 나주 용호 함평 월야 순촌 구 높 경 이 최 문 동 구 어 저 거 부 대 체 경 깨 돌 돌 치 경 양 형 부 기 기 문 81.2 103 104 75> 파 - 편 공 반 유 물 비고 격 난 3 0 0 격 난 3? 0 주구 격 3 0 0 주체 16 소 72.6 82 68 격 난 3 0 17 대 90 80 82 격 난 3 0 0 17 소 88 76 78 격 난 3 0 0 18 대 76.4 83.6 66.8 격 난 3 0 0 18 중 83.6 64.4 74.8 격 난 3 0 0 18 소 79.6 101 75.2 격 난 3 A-24-1 85.5 100 격 난 3 A-38 82.5 96 격 난 A-39-1 대 65.4 75 평저호, 옥 주체 주구내 평저이중구연호 주체 0 0 0 0 0 - 주구내 3 - - 0 - 주구내 격 난 3 0 0 0 발형토기, 광구호, 구슬 분구隅 구슬 분구隅 A-39-3 대 88 95.2 격 난 3 0? 0 A-39-3 소 80 97.5 격 난 3 0 0 0 격 난 3? 0 구슬, 평저호, 철정 분구隅 격 난 3 0? 0 완, 원저호 분구隅 격 난 3 0? 0 심발, 원저호 주구내 격 난 3 -? 0 원저호 분구隅 격 난 3 0? 0 원저단경호, 심발형토기 주구내 격 난 3 0 0 원저외반호 2 단독장 하남 미사리 한양대A13호주 46.5 58 51.8 격 난 거지 2 중도식토기 주거지 청주 송절동 93-B-4호목곽 33.6 49 48.6 승 난 묘 1 0 원저단경호, 뚜껑, 이중구연토기, 심발형토기, 삼각만입사두형철촉 110 80 3-2 옹관 함평 만가촌 12-4 옹 12-7 옹 98 93 73.5 81 92 95 92 95 13-12 옹 90 108 7호주구묘2호옹 영암 금계리 1호옹관 승주대곡리 3호주거지 도롱 남원 두락리 단독묘 42 92 95 76 95 26.8 34.7 33 격 난 1 0 28.6 38 35 격 난 1 0 0 심발형토기, 장란형토기, 직구난형호, 원저단경호, 귀때토기 0 50 격 난 2 0 0 46 60 榮山江流域 甕棺古墳의 發生과 그 背景 원저단경호, 발형토기

구경부 : 1(외반하는 긴 목, 수평에 가깝게 외반된 구연), 2(길게 직립하는 경부, 수평으로 꺾인 구연), 3 (외반하는 긴 목, 수평으로 외반된 구연 내면과 구순에 각이 짐. 1에 비해 두꺼움) 동 체 : 난(난형 : 동장/동최대경 < 1.1), 장(장란형 : 동장/동최대경 > 1.1) 크기는 형태가 완전한 옹관 및 옹형토기의 구경과 높이의 분포상태를 보면 구경 70cm, 높이 90 이상의 대형, 그 이하의 중형으로 구분된다. 합구식의 경우 대옹을 기준으로 하 였다. 영산강유역 제1형식 옹관의 발생배경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대형옹 및 옹관은 속성의 조 합에 의해 몇 가지로 구분된다. 주요한 분류기준은 크기, 구경부 형태, 동체부 형태, 견부문 양(거치문) 저부 돌기의 조합 상태 등이다3). 크기 구경부 동체부 1 장 문양돌기조합 속성조합 3 대표적 예 비 고 주월리 Ⅱ2 1 장 2 2 난 2 풍납동, 주월리 중 송대리42, 주월리 Ⅱ1 대 2 난 1 3 난 1 하봉리, 오석리 Ⅰ 복암리3호21호옹관 나주 용호고분군 함평 월야고분군 영산강유역 제1형식옹관 거치문과 저부돌기가 조합(1), 이 중 하나만 있는 경우(2), 모두 없는 경우(3) 대형(Ⅰ) 옹 및 옹관은 영산강유역 제1형식 옹관과 속성조합이 동일하다. 중형(Ⅱ)에는 많 은 변이가 보이는데, 크게 두 가지로 세분된다. Ⅱ1은 영산강유역 제1형식 옹관과 형태는 거의 같으나 크기가 작고 구경부가 직립하며 거치문이나 돌기가 없는 것이다. Ⅱ2는 장란형 의 동체로 기벽이 얇으며 경부와 구연부가 구분되지만 Ⅰ에 비해 구연부의 기운 정도가 약 하고 세부적인 처리에 차이가 있다. 견부 문양에는 거치문 이외에 능형문, 원문 등 다양한 문양이 시문되며, 견부 문양과 저부 돌기를 모두 갖춘 경우는 없다. 지역적으로 경기도 일 대에 주로 분포한다. 중형의 나머지는 그러한 속성조합을 이룬 예가 빈번하게 나타나지 않 기 때문에 Ⅱ의 변이로 파악한다. 풍납토성에서는 Ⅰ,Ⅱ형식이 모두 나타나는데, 경부와 동 체부 경계의 문양은 없는 것에서 거치문, 능형으로 다양화되고 저부 돌기는 있는 것에서 없 3) 견부의 돌기도 주요한 속성이나 영산강유역 제1형 옹관에 주요 속성으로 정착하지는 못한다. 견부돌기가 있는 토기는 중서부지방 및 호남동부 지역 토기에서 보인다.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43

는 것으로 변하며 토기질은 연질에서 석기질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나 연질 및 경질이 대부 분을 차지하고, 기형도 장란형에서 난형으로 변하는 경향이 층위상과 대체로 일치한다(국립 문화재연구소, 2001b). 이외에 경부와 구연부가 구분없이 그대로 외반된 형태로 크기가 작은 소형의 옹 또는 옹 형토기가 있는데, 견부 문양과 저부 돌기를 모두 갖춘 경우는 없다. 이 기형은 대형 옹관과 는 별도로 일부 옹관으로 쓰인 것으로 보이나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영산강유역에 최종적으로 정착한 기형(Ⅰ)을 기준으로 보면 소형 대형, 장란형 난형, 견 부 문양 및 저부 돌기의 통일화 및 조합화로 변화 경향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역에 따른 변이와 주월리와 같이 같은 시기 유물조합에서도 변이가 관찰되므로 변화의 큰 방향만 상정한다. 2. 제1형식 옹형토기(옹관)의 지역적 분포 제1형식 옹관은 나주 복암리고분군 1, 2호분 사이4) 3호분 용호고분군, 高敞 송룡리, 영암 선황리 금계리, 咸平 禮德里 萬家村 월야 순촌, 무안 인평 등 호남지역에서 우선 그 예를 찾을 수 있다. 호남지역도 세부적으로는 영산강유역권과 고창 성남리 주구묘 등 서 해안권인 호남서부권, 남원 細田里 1호 주거지, 순천 대곡리 등 호남 동부의 섬진 보성강 유역권으로 세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형태의 옹관 또는 옹형토기는 한반도 중서부 지역에도 분포한다. 서울 風納土城, 하남 미사리, 파주 주월리 96-7호 주거지, 화성 당하 리유적, 화성 운평리유적 등 서울 경기지방에서는 한강, 임진강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서부해안에서도 확인된다. 또 하나의 주요 분포권은 舒川 烏石里 堂丁里 주구묘, 서천 漢 城里 적석유구, 益山 永登洞 周溝墓, 公州 下鳳里遺蹟의 8호 周溝土壙墓, 청주 송대리 梧倉 42호 주구묘, 대전 오정동유적, 익산 율촌리 5호분 등이 분포하는 금강유역권이다. 이와 같이 분포범위가 한강유역, 금강유역 및 중부 서해안, 호남지방 서해안지역 등 馬韓의 전역에 미치고 있어, 이후의 대형 전용 옹관 형식보다 분포범위가 훨씬 넓음을 알 수 있다(그림 1). 또한 지역에 따라 출토유구 및 맥락이 상이한 양상을 보여준다. 이 점은 후술한다. 4) 林永珍 趙鎭先徐賢珠, 1999. 2, 6, 7호 옹관 및 주구 c무지에서 출토됨. 44 榮山江流域 甕棺古墳의 發生과 그 背景

1. 파주 주월리 2. 포천 자작리 3. 풍납토성 4. 몽촌토성 5. 하남 미사리 6. 화성 운평리 7. 화성 당하리 8. 이천 효양산 9. 홍성 신금성 10. 청원 송대리 11. 청주 송절동 12. 공주 하봉리 13. 대전 구성동 14. 대전 오정동 주거지 토광묘 부장 주구묘 주구부장 종속 매장시설 주구 매장 중심 매장 주체 기타 15. 서천 오석리 16. 서천 당정리 17. 서천 한성리 18. 익산 율촌리 19. 익산 영등동 20. 고창 송룡리 21. 고창 중월리 22. 고창 성남리 Ⅲ 23. 영광 원흥리 원당 24. 함평 예덕리 만가촌 25. 함평 월야 순촌 26. 광주 오룡동 27. 광주 쌍촌동 28. 함평 성남리 29. 나주 복암리 30. 무안 인평 31. 무안 양장리 32. 영암 선황리/금계리 33. 남원 두락리 34. 남원 세전리 35. 순천 대곡리 36. 나주 용호 <그림 1> 분석대상 대옹 및 옹관 분포 및 출토맥락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45

3. 출토유구맥락, 용도 중서부 및 서남부 지방에서 출토되는 옹(관)형토기는 출토유구와 유구내 출토위치가 몇 가지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에 따라 그 쓰임새도 달랐던 것을 알 수 있다(그림 2). ① 주거지에서 출토된 경우 주거지에서 대옹이 출토되는 것은 마한지역의 공통적 양상이지만 지역에 따라 출토 맥락 은 다양하다. 지금까지 한강하류역 중심의 경기도 일대와 영산강유역, 섬진 보성강유역에서 주로 확인되었다. 한강하류역, 임진 한탄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역의 육각형 주거지에서 대옹은 부뚜 막 주변에 몇 기가 배치되거나 한 주거지 내에 집중적으로 들여놓은 상태로 출토되기도 한 다. 이 경우 주거지는 한강유역의 특징적인 형태인, 출입구가 달린 육각형 주거지이다. 소위 풍납동식 주거지(신희권, 2001)의 발전과정상 정형화된 육각형을 보이며, 부뚜막식 노지를 설치한 주거지가 출현하는 단계와 시기적으로 겹친다. 이 시기는 백제가 국가로 성장하여 주변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시기로 경질무문토기가 사라지는 대신 타날문토기와 회흑색무문 양토기가 성행하고, 회청색경질토기가 등장하기 시작하는 시기(2세기 후엽 3세기 중엽)이 다. 한강중상류역의 초기 육각형 주거지에서 이러한 대형옹이 출토되지 않는 점은 시간상의 차이도 있지만 대형옹을 비롯한 고고학적 양상이 마한의 제집단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며, 백제는 중부 한반도의 이러한 제 집단의 문화적 바탕을 흡수하며 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풍납토성에서 대옹이 출토된 양상을 살펴보면 주거지 내부 부뚜막 주변에서 출토되고 내 부에 탄화된 곡물이 들어 있는 경우(나-1호 주거지, 팥)도 있으며, 주거지 내부는 아니지만 대옹을 세워두었던 흔적이 수혈로 남은 경우(가-1112 호 수혈)의 예로 보아 곡물의 저장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몽촌토성에서도 주거지, 저장공 등에서 파편이 일부 출토되었다(박순발 1992). 파주 주월리 96-7호 주거지(장축 17.5m, 단축 10.8m)에서는 대형옹 8개체가 주거지의 양장벽에 인접하여 약 2 3m의 등간격으로 각 4기씩 출토되었는데, 모두 주거지 바닥을 파 고서 세워 놓았다. 토기 내부에서 콩과 조가 검출되었다(李仁淑 金圭相 1999). 포천 자작리유적(송만영, 2001; 宋滿榮 외, 2004)의 경우 육각형의 대형 집자리(전장 23.78m, 최대폭 13.35m) 내부에 설치된 부뚜막 좌우에 세워져 있는 상태로 3점 출토되 었다. 옹의 형태는 구순에 요철이 있고 장란형 동체에 저부 돌기가 없으며, 문양도 정면 46 榮山江流域 甕棺古墳의 發生과 그 背景

1. 풍납토성 가-2호 주거지, 2. 청원 오창 42호 주구토광묘 3. 공주 하봉리 8호 주구묘, 4. 익산 율촌리 5호 분구묘 5. 나주 용호1718 호묘 <그림 2> 옹형토기 출토맥락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47

하여 지우거나 격자문을 교차 타날하고 경질화되어 풍납토성 출토품보다는 늦은 것으로 추 정된다. 이러한 출토 정황은 한강유역의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이런 토기의 용도를 설명하는데 시 사하는 점이 있다. 대형옹이 출토된 주거지는 대형의 육각형으로 일반 주거지와는 구별되는 특별한 위상을 지닌 최상위 계층의 것으로 추정된다(신희권, 2001; 송만영, 2001). 유적 내 의 주거지 중 한정된 주거지에서 출토되고 파주 주월리 96-7호와 같이 한꺼번에 8개체가 있는 점 등으로 보아 일반 가구에 공통된 실생활 용기로는 보기 어렵다. 저장과 관련된 것 은 확실하나 주요한 생계경제 자원인 씨앗의 공동저장, 즉 생산 및 생산물의 집단적, 공공 적 통제를 유추할 수 있다. 그만큼 이 옹형토기에는 저장용기로서의 실용성 외에 재생산과 주요 농작물에 대한 독점, 통제를 표현할 상징성이 부가되었을 것이다. 즉 집단내 정치적 엘리트에 의한 통제의 표현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영산강유역에서 대형옹이 출토된 주거지로는 광주 쌍촌동(林永珍 徐賢珠, 1999) 오룡동 (최성락 외, 1995), 무안 양장리유적(이영문 외, 1997)이 있다. 쌍촌동유적은 구릉 사면에 주거지가 군집한 취락유적으로 주거지는 방형계이다. 대옹은 대부분 화재로 폐기된 13기의 주거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완형으로 원위치에서 출토된 것은 없다. 다만 노지 주변과 42호 처럼 별도로 마련된 壁龕에서 발견되는 경우와 11호처럼 밤이 담겨 있는 경우도 있어 용도 를 저장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많은 편이 퇴적토에 섞여 있어 출토 주거지마다 대옹을 사용하였다고 단정할 수 없어 취락 내에서 어느 정도의 가구에서 점유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최대한으로 잡아도 15% 정도이다. 거치문, 저부 돌기, 동체의 격자문 타날 등의 공통점은 있으나 형태는 다양하다. 무안 양장리유적은 저습지가 확인되어 잘 알려진 유적으로 대옹은 구릉과 평지의 방형주 거지에서 출토되었는데, 출토양상은 쌍촌동과 유사하게 인접한 주거지에 파편이 흩어져 있 다. 양장리유적은 5세기까지 연속되는 양상을 보인다. 94-5, 96-11호 주거지에서 소토부와 노지에서 출토된 점도 쌍촌동과 유사하다. 섬진 보성강유역에서는 취락지인 순천 대곡리와 남원 세전리에서 확인되었다. 대곡리 도 롱유적에 거치문이 시문된 옹은 89-서울대 도롱 3호 주거지에서 2점 출토되었는데, 3호 주거지는 주거지군내에서 최대급에 속한다(최몽룡 외, 1990). 그런데 기형은 제1형 옹관과 는 차이가 있으나 크기 및 거치문 등의 문양의 의미는 다른 지역의 옹형토기와 유사한 것 으로 판단된다. 남원 세전리 1호 주거지에서 출토된 옹은 제1형 옹관과 동일하다. 공반유물은 도롱 3 호 주거와와 기종구성이 거의 같은데, 경질무문토기가 공반된 점이 다르다(全北大學校博 48 榮山江流域 甕棺古墳의 發生과 그 背景

物館, 1989). 섬진 보성강유역은 유물상으로 볼 때 여타 지역과 구별되는 동질성을 보여 주고 있다. ② 주거지는 아니지만 생활유적인 경우 풍납토성 경당지구 196호 유구는 완전히 조사되지 않아 정확한 성격을 알 수 없지만 다 량의 西晉製 施釉陶器와 바로 세운 상태의 대옹이 출토되어 격납시설일 가능성이 높다. 시 유도기 자체는 위세품을 담았던 저장용기로 판단하였다(권오영, 2001). 이외에도 화성 당하리유적(이선복 외, 2000), 홍성 신금성(이강승 외, 1994), 서천 한성리 (국립부여박물관, 2000), 이천 효양산(호암미술관, 1995)에서 확인되었다. 화성 당하리유적은 점토채취, 소성 등 일련의 토기제작과정과 관련된 유구로 추정되는 구 덩이, 집자리, 추정 저수지가 확인되었다. 회색계열의 외반구연 대옹은 51개체 확인되었다. 이 대옹과 관련된 유적의 연대는 토기의 분석을 통해 3세기 전반대로 추정하고 있다. 당 하리유적은 3세기 전반대에 대옹을 제작, 배급하던 유적으로 판단된다. 홍성 신금성에서는 5호 목곽유구에서 파편이 출토되었는데, 목곽유구는 사방 4m 정도의 나무틀 밖을 개흙으로 충전한 특이한 구조이다. 유구의 성격이 불분명하고 출토정황도 용도 를 추정하기 힘들다. 서천 한성리유적에서는 적석유구에서 대옹 1개체분이 돌틈과 퇴적토에서 흩어진 채로 발 견되었다. 조사의 한계로 적석유구의 성격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대옹의 출토맥락은 서천 당정리 주구묘와 유사하게 흩어진 채로 출토되어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추정된다. ③ 매장주체부의 부장공간에 매납된 경우 청주지역 토광묘에서 확인된다. 송대리 梧倉 유적 중 제1형 옹관과 형태적 속성이 거의 같은 것이 매장주체가 토광묘인 42호 주구묘에서 출토되었고, 이외에도 14-2, 21호 토광묘 부장공간에서 저부에 원형 돌기가 달린 대형 옹이 출토되었다(한국문화재보호재단, 1999). 인근의 청주 송절동 토광목곽묘에서도 부장공간에서 대옹이 출토되었는데 93-B-3-1, 4, 6-2호묘에서 출토된 대옹은 원저단경호 등의 부장토기와 공반되었는데, 거치문을 시문한 것 이외에는 형태와 문양 등에서 영산강유역 제1형식 옹관과는 차이가 있다(車勇杰 趙詳紀, 1995). ④ 주구묘의 주구 내 출토 토광(목관)묘를 매장주체부로 하며 주구를 돌린 묘제를 주구토광묘라고 하는데, 충청도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49

내륙과 해안 및 전라북도 등 중서부지방에서 집중적으로 조사되고 있다. 입지 및 주구의 형 태에 따라 청당동형과 관창리형으로 나누기도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계통의 묘제로 볼 수 있다(성정용 2000). 옹관은 舒川 堂丁里(國立扶餘文化財硏究所 1998), 益山 永登洞 周溝墓(崔完奎 외 2000), 公州 下鳳里遺蹟의 8호 周溝土壙墓 周溝내(서오선 1995), 高敞 城南里Ⅲ유적(崔完圭 2000) 中月里(원광대학교 마한 백제문화연구소 1984) 예지리(전주대 학교박물관 2002) 만동(金建洙 외 2004), 영광 원흥리 원당(전남대학교박물관 1999) 군동 라지구(최성락 외 2001)에서 출토되었다. 서천 당정리 주구묘의 경우 2 3 6 15 18호에서 출토되었는데, 이들 주구묘는 당정리 주구묘군 중에서 중대형에 속한다. 출토 양상은 도랑 안에 파편으로 산재되어 있거나, 1개 체가 출토된 경우도 하봉리 8호와 같이 저부와 동체 이상이 양분된 상태로 있는 등 매장시 설로 보기는 어렵다. 분구 중에서 매장시설로 매납되어 있던 것이 주구로 흘러들었을 가능 성도 출토 양상으로 볼 때 희박하다. 이 경우 의례와 관련된 葬制의 하나로 파악된다. 그런데 영광 원흥리 원당 군동과 고창 중월리 예지리 성남리 주구묘, 함평 월야 순촌고분 군에서는 토광묘 주체의 臺狀部의 가장자리에 매장시설로 옹관이 매납되는 경우와 더불어 주구에서 출토되는 경우에도 합구식이나 3옹식으로 정연하게 조합되고, 부장유물이 공반하는 것으로 보아 매장시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경우 추가장 또는 陪葬의 성격이 강하다. 주구묘의 주구에서 출토되는 경우도 위와 같이 제의와 관련된 양상을 보이는 금강유역과 매장시설로 쓰이는 호남 서부지역의 양상으로 나뉜다5). ⑤ 저분구묘의 주구 또는 臺狀部의 주변에 매장시설로 쓰인 경우 益山 栗村里(崔完圭, 2000), 고창 성남리, 영광 원흥리 원당, 함평 순촌고분군, 나주 용호 고분군, 영암 금계리고분군(최성락 외, 2004) 등에서 확인되었다. 익산 율촌리고분군은 방형의 저분구묘로 주구가 설치되어 있으며, 매장시설이 여러 종류 로 多葬, 복합묘의 특징을 보인다. 5호분의 경우 평면 방형으로 규모는 남북쪽 13m, 높이 1m이다. 매장시설은 대형옹관 1기, 소형 옹관 4기, 석관묘 3기가 조사되었다. 그 중 대옹인 1호 옹관은 분구 서측의 墳丘中에서 확인되었다. 함평 월야 순촌고분군은 사다리꼴의 고분에 옹관이 매장된 것이 확인되어 옹관고분의 발 생과 관련하여 중요한 유적으로 평가된다(박철원, 2000; 최성락 외, 2001). 46기의 주구묘 가 확인되었는데, 평면 방형계와 사다리꼴의 형태로 나뉘며 방형계는 토광을 매장주체로 하 5) 주구에 옹관이 매장시설로 안치된 예로 금강유역권의 공주 장원리 1호 주구토광묘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옹관은 여기 서 논의하는 대형옹과는 다르다(柳基正 외, 2001). 50 榮山江流域 甕棺古墳의 發生과 그 背景

고 옹관이 陪葬된다. A-39호에는 1형식 옹관이 배장되어 있다. 사다리꼴의 주구묘는 대소 형이 있는데 소형에 옹관을 매장주체로 사용한 것(A-32호)이 확인되었다. 여기에서도 위에 서 분류한 1형식 옹관이 매장주체부로 쓰인 것은 확인할 수 없으나, 옹관고분의 발생과 관 련하여 토광묘 주체의 방형주구에서 옹관묘 주체의 사다리꼴 분형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인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적으로 판단된다. 인접한 만가촌고분군에서도 긴사다리꼴고분이 14기 조사되었는데, 목관묘가 매장주체를 이루며 다장의 특징을 보이고 있다. 옹관은 1형식만 보이는데 주구(12-7 옹관), 분구내 가 장자리(3-2, 12-4, 13-2)에서 확인되었다. 토광은 이 고분군이 존속하는 4세기대까지 존속 하였다(임영진 외, 2004). 나주 공산면 용호고분군에서는 모두 사다리꼴의 저분구묘가 조사되었는데, 매장주체시설 이 토광목관묘에서 옹관묘로 변화하고 있다. 1형식 옹관은 매장주체시설이 목관묘인 분구의 주구에 안치되다가(1-1, 1-2호, 17호) 나중에는 분구의 중심에 단독 매장시설로 자리 잡는 다(김건수 외, 2003). 중심 매장시설이 토광묘이고 주구를 갖춘 저분구묘의 주구와 대상부의 가장자리에서 확 인되는 1형식 옹관은 아직 종속적인 상태를 보여준다. 분구는 율촌리와 같이 방형도 있지만 영산강유역의 고창 성남리와 함평 월야 만가촌, 나주 용호에서는 방형계통의 주구묘가 사 다리꼴로 변화, 정착하는 양상을 띠는 특징적 모습을 보인다. 종국에는 나주 용산고분군 12 호 2차분구와 같이 여러 옹관이 중심 매장시설로 쓰이게 되는 30m 이상의 사다리꼴 분구 가 나타나게 되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이 중서부 지방의 주구묘에서 발견되는 대옹은 제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나 호 남지방에 분포하는 주구묘에서는 주구에서 출토되더라도 매장시설로 쓰이면서 분구의 중심 부로 이동해 가는 양상을 보여준다. ⑥ 중심 매장주체시설로 쓰인 경우 매장주체라고 하여도 분구 없이 단독으로 조영된 것과 저분구 또는 사다리꼴 주구묘의 중심 매장시설로 사용된 경우가 있는데 후자는 영산강유역에 나타난다. 단독장과 관련하여 영산강유역과는 멀리 떨어져 있으나 동일한 서해연안에 위치한 서천 오석리(94-3 94-6 95-1호)와 공주 하봉리(3 4호)에서 매장주체로 옹관이 확인되어 주목 된다. 오석리의 경우 옹관묘는 (주구)토광묘와는 독립된 배치를 보인다. 출토 맥락이 명확하 지는 않지만 주구형 구덩이 내부의 대지에서 확인되었다. 기형이 다른 95-1호 옹관묘에서 뚜껑 1점이 출토된 것을 제외하면 부장유물이 없어 단독의 주매장시설로 사용된 것인지는 문화재 제37호(2004) http://www.nri cp.go.kr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