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부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1. 의병의 개념과 시기 구분 1. 의병의 개념과 시기 구분 1894년 일본군이 경복궁을 무력으로 점령한 갑오변란과 청 일 전쟁을 전후하여 일제의 군사적 위협은 더욱 노골화되었다. 조선인들은 외세 침략을 당면의 극복 과제로 인식하면서 의병을 조직하여 국가와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항쟁을 전개하였다. 따라서 의병 항쟁은 한민 족의 반침략 반개화 투쟁이며, 국권 침탈 이후 독립전쟁을 일으키게 한 정신적이며 인적인 연원이 된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의병이란 맥켄지가 자유를 위한 투쟁 (The Fight For Freedom)에서 정의군 (Righteous Army)이라고 표현하였듯이 정의를 위해 일어난 군대라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한말 의병 은 이와 같은 뜻만으로 설명하기가 부족하다. 박은식( 朴 殷 植 )은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 國 獨 立 運 動 之 血 史 ) 에서 의병( 義 兵 )이란 민군( 民 軍 )이다. 국가가 위급할 때 즉각 의( 義 )로서 분기( 奮 起 )하여 조정 ( 朝 廷 )의 징발령( 徵 發 令 )을 기다리지 않고 종군( 從 軍 )하여 적개( 敵 愾 )하는 자 1) 라고 정의를 내렸다. 여기에서 의병은 민군으로, 곧 군주의 원한을 풀고자 하는( 敵 愾 ) 충의 군임을 알 수 있다. 즉 의병이란 충의정신에 입각하여 외적의 침략에 자발적으로 무장 항쟁 하여 대항한 민군( 民 軍 ) 이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이처럼 한말 의병은 정의감과 충의정신에 기초하여 개화정권을 극복하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일본이라는 외세를 몰아내 국권을 수호 하고자 한 반침략의 구국항쟁의 민족독립운동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의병 정의를 다시 5상[ 常 ; 삼강오륜의 5륜( 倫 )을 의미함-필자] 정신에 입각하여 살펴보면 바로 군신유의( 君 臣 有 義 ) 의 의( 義 )와 연관된다고 할 수 있다. 즉 의병의 주요 이념이 성리학의 의리론에 기반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내적으로는 사육신과 같은 불사이군( 不 死 二 君 )의 절의파를 배출해 냈다면, 대외적으로 민족의 위기에는 사생취의( 捨 生 取 義 ) 와 주욕신 사( 主 辱 臣 死 ) 의 정신에 투철한 의병으로 표출된 것이다. 따라서 의병이 비록 현재 관점에서는 봉건적이라는 사상적 한계가 있다 할지라도 충군과 근왕이라는 고유의 성격을 내포한다는 점에 주목하여야 한다. 이러한 개념의 의병은 이미 임진왜란 때에 나타났다. 임진의병이 보 1) 박은식, 한국독립운동지혈사( 韓 國 獨 立 運 動 之 血 史 ), 상해, 유신사, 1920, 제11장 <각지의병지약력( 各 地 義 兵 之 略 歷 )> 11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여주었던 근왕정신이 한말 의병에서는 존화양이론( 尊 華 攘 夷 論 )이라는 민족문화의 주체적 논 리가 추가되면서 민족자존적 정치문화운동으로 발전된 것이다. 한말 의병은 비록 초기 단계에는 유학자가 중심이 되어 반침략 반개화 항쟁을 전개하였 으나, 점차 민족의 위기가 심화되면서 여기에 농민과 포수, 심지어는 동학교도까지 합세하 여 민족적 대항전을 펼쳐 갔기에 의병 항쟁은 민족주의 운동으로 발전될 수 있었다. 후기 의 병에는 척사사상보다 반개화성, 특히 반봉건성이 더 나타난다. 의병 항쟁을 민중운동사의 측면에서도 평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에서 항일운동의 성격이 보이지만, 이를 의병적 이라고 할지언정 의병이라 하지는 않는다. 비록 동학농민군들이 자신들을 충의군 이라고도 불렀을지라도, 동 학의 항일운동 이념은 동학사상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동학은 의병운동이라기보다는 반봉 건적 사회개혁 또는 혁명운동의 차원에서 의의를 평가해야 한다. 또한 1894 1895년간 동학농민전쟁이 전개될 때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일부 지역에서는 민군을 편성하였다. 갑오의려( 甲 午 義 旅 ) 또는 유회군( 儒 會 軍 )이라 불리는 민군은 자신들을 의병이라고도 불렀다. 안중근의 공초( 供 招 )를 보면 조부가 의병장이었다고 기록되었는데, 바로 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그러나 갑오의려는 관군 또는 일본군과 연합하여 동학농민군과 항쟁하였으니, 항쟁의 대상이 외세가 아닌 동학군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들 또한 의병과 구분된다. 민란에 참여한 세력도 그러하다. 이들 가운데 일부가 비록 충의군적인 성격을 띠었 다 하더라도 투쟁 대상이 관군이었으니 이들도 의병이라 부르지 않는다. 이와 같이 의병의 개념을 분명히 하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의병적 성격 또는 단순히 정 의의 군대 라는 일반적 개념으로서 의병 과 임란과 구한말 외세의 침략에 주자학 사상의 충 의정신에 기초하여 무장 투쟁한 역사적 개념으로서 의병 은 구별해야 할 것이다. 2) 한편 한말 의병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면서 의병사의 체계화를 위한 시기 구분법으로는 2 시기 구분법, 3시기 구분법, 4시기 구분법 등이 있다. 위 구분은 시간의 원근, 봉기 원인의 차이, 참여층의 변화에 따른 의병 부대의 성격 차이 등을 기준으로 시도되었다. 2시기 구분법은 을미의병을 전기 의병으로, 을사 정미의병을 후기 의병으로 구분하는 것 으로, 주로 시간의 원근과 주도 세력의 성격 차이 등으로 나뉜다. 3시기 구분법은 그간 주 로 이용되던 방법으로 의병 연구의 효시라 할 뒤바보의 의병전 에서 비롯되었다. 3) 이 구분 2) 김상기, 한말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304쪽. 3) 뒤바보, 의병전, 독립신문, 상해, 1920년 4월 27일 5월 27일자. 12
1. 의병의 개념과 시기 구분 법은 해방 이후에도 사용되었으며 을미의병, 을사의병, 정미의병 등 간지( 干 支 )를 사용한 분 류법이 일반화되었다. 4시기 구분법은 1970년 강재언의 주장에서 비롯되었는데, 1초기 단 계(1895. 10 1896. 5), 2재기 단계(1905. 4 1907. 7), 3고조 단계(1907. 8 1909. 10), 4퇴조 단계(1909. 10 1914)로 구분하였다. 이 구분법은 1909년 일본군에 의한 이른바 남 한 대토벌 작전 이후 의병의 퇴조와 독립군으로의 전환 과정을 별도의 한 단계로 파악한 것 이다. 4) 조동걸도 최근의 연구 성과까지 수용하여, 1전기 의병(1894 1896), 2중기 의병 (1904 1907. 7), 3후기 의병(1907. 8 1909. 10), 4전환기 의병(1909. 11 1915)의 4단계 로 구분하기도 하였다. 여기에서는 조선말 반일 의병의 기점을 기존의 1895년 을미의병에서 1894년의 의병으로 고쳐 잡고, 의병의 하한을 1914년 대한독립의군부의 해체가 아닌 1915년 채응언의 체포로 설정한 점이 주목된다. 5) 의병사의 시기 구분과 관련하여 북한에서 출간한 오길보의 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도 참고된다. 이에는 의병을 크게 2단계로 구분하여, 119세기 말 반일 의병 운동(1895 1896), 220세기 초 반일 의병 운동(1904 1914)으로 구분하였다. 그 중 제2단계는 다시 1반일 의 병 운동의 재개(1904 1905), 2반일 의병 운동의 앙양(1906 1907. 7), 3반일 의병 운동의 확대 발전(1907. 8 1909), 4일제의 조선 강점을 전후한 시기 반일 의병 운동(1910 1914) 의 4단계로 나뉜다. 의병의 기점을 1895년 7월 김원교가 평안도 상원에서 봉기한 상원 의병 으로, 1914년 김정환 의병의 유정리 전투를 의병의 하한으로 잡은 것이 우리와 다르다. 6) 이 글에서는 한말 의병을 전기, 중기, 후기 의병의 3시기로 구분하고자 한다. 4시기 구분 법에서는 1909년 일본군에 의한 남한 대토벌 작전 을 전후하여 후기 의병과 전환기 의병을 구분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이를 한 시기로 묶어 후기 의병이라 지칭하고자 한다. 비록 1909 년 10월 이후 의병 활동이 퇴조한 것은 사실이나, 의병 부대의 활동이 연속되었으니 의병의 이념이나 목적 등의 차이를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독립군으로의 전환을 준비하는 특성 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이는 1910년 이후에 나타나는 후기 의병의 한 특성으로 볼 수 있으며 별도의 시기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이와 같은 한말 의병의 전개 과정을 시기적으로 1전기 의병 (1894 1896), 2중기 의병(1904 1907. 7), 3후기 의병(1907. 8 1915)으로 구분할 수 있다. 4) 강재언, 반일의병운동의 역사적 전개, 조선근대사연구, 동경, 일본평론사, 1970. 5) 조동걸, 한말의병전쟁,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89. 6)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조선근대반일의병운동사, 1988. 13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1) 전기 의병 전기 의병은 1894년 6월에 일본군이 무력으로 경복궁을 침범한 갑오변란, 그리고 을미사 변, 단발령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일어났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이 발발하고 관군의 연이은 패퇴에 조선 정부는 청에 군사를 요청하 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는 일본에게 조선 침략의 기회를 제공한 결과를 초래하였다. 일본 군은 일본공사관 및 거류민 보호 라는 구실 하에 조선에 군대를 파견하였고, 출발할 때부터 청 세력을 물리치고 조선을 대륙 침략의 전진 기지로 차지하려는 정책을 수립하였다. 이들은 서울에 위협적인 군대를 주둔시켜 놓고 1894년 5월 중순 이후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제의 하였으며, 6월 1일에는 총 27개조에 달하는 내정 개혁안을 강요하였다. 조선 정부는 내정 간 섭이라 거절하고, 불법 진주한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면서 철군 후에 독자적으로 개혁할 것 임을 밝혔다. 조선 정부에서는 6월 11일에 교정청을 설치하여 동학농민군이 제시한 폐정개 혁안의 일부를 받아들여 정치개혁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이와 같은 조선의 태도에 대해 일제는 개전 결의를 분명히 하고, 6월 21일에 경복궁을 공 격 점령하는 갑오변란을 일으켰다. 이 변란은 일제가 조선 침략의 야욕을 구체적으로 드러낸 첫 단계의 사건이다. 경복궁을 무력 점거한 일제는 열강에게 자신들의 행위를 은폐하기 위 하여 대원군을 유인, 입궐시켰다. 대원군의 등장은 곧 민씨 정권의 몰락을 의미하는 것으로, 일제는 고종에게 정무와 군무를 대원군에 위임토록 조치하였다. 더욱이 조선군의 무장까지 도 강제로 해제시켰다. 이어 부일개화파들에 의한 친일 정권인 제1차 김홍집 내각을 수립하 여 갑오경장을 추진하였다. 이 사태에 격분한 동학농민군은 1894년 9월경부터 반개화 투쟁과 아울러 반침략 투쟁을 재개하였으니 이것이 제2차 봉기 이다. 그러나 갑오변란을 비롯한 일련의 사태를 위기상태 로 인식한 세력층은 이들만이 아니었다. 지방 유생들 역시 침략 행위로 간주하여 반침략 투 쟁을 개시한 것이다. 그 징후는 궁궐 침범 1개월 여 후인 7월 말에 나타났다. 청풍의 유생 서 상철( 徐 相 轍 ) 등이 안동 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격문에서 궁궐을 침입한 갑오 변란이 직접적 요인이 되어 기병하였음을 분명히 하였다. 지평의 유생 안승우( 安 承 禹 ) 역시 14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고향에서 의병 봉기를 시도하였다. 을미사변 이전인 1895년 7월 봉기한 김원교( 金 元 喬 )의 상원 의병 또한 봉기의 주요 요인이 갑오변란에 있었다. 이들이 발표한 격문 내용에 사실이 잘 나타나 있다. 한편 척사유생들은 을미사변과 단발령 이후 의병 투쟁을 더욱 전국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들 역시 갑오변란을 망국의 시작으로 인식하였다. 유인석( 柳 麟 錫 )이 대표적 인물로, 그는 봉 기하면서 발표한 격고팔도열읍( 檄 告 八 道 列 邑 ) 에서 마침내 갑오년 6월 20일 밤에 이르러 우리 조선 삼천리 강토가 없어진 셈 이라고 통분하였다. 1896년 2월 진주에서 거의한 노응 규( 盧 應 奎 ) 역시 병인소( 丙 寅 疏 ) 에서 갑오변란을 6월의 변 이라 표현하여 을미사변과 같은 변란으로 인식하였다. 한편 홍주 을미의병의 총수였던 김복한( 金 福 漢 )은 갑오변란을 전후하 여 승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자정( 自 靖 )하였다. 그의 심정은 을미의병 후 체포되어 1896년 1월 23일 고등재판소에서 가진 문초 내용에 잘 나타나 있다. 홍주 을미의병 주도자 중의 한 명인 이설 역시 갑오변란에 충격을 받고 우부승지의 직을 사직하고 고향인 홍주로 낙향하였으 니 의병 봉기를 위한 준비였던 것이다. 전기 의병이 봉기하였던 또 다른 배경으로 을미사변이 있다. 을미사변이란 1895년 8월 20 일에 명성황후가 일제에 의해 시해된 사건을 말한다. 일제는 갑오변란 이후 조선을 장악하고 개화를 구실로 한 침략 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명성황후의 반대에 직면하였다. 러시아 세력과 제휴하려는 명성황후의 시도에 결국 시해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는 국제적 범죄 행위 로 조선을 식민지화 하려는 침략 행위의 일환으로 취해진 것이다. 국모의 시해 소식을 접한 백성들은 일제와 친일 정권에 대하여 적개심이 솟구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제는 자신들의 책임을 부인했으며, 친일 내각도 오히려 폐비 조치를 내리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러한 처사에 조선인의 분노는 드디어 폭발하기에 이르렀다. 폐비 조칙이 공포되던 1895년 8 월 23일 서울에서는 창의소( 倡 義 疏 ) 고시문이 붙었으며, 9월 초에는 왕후의 폐서인에 신하 된 자로서 복수토적( 復 讐 討 賊 )의 의거가 없는가 라는 내용의 고시문이 지방에도 나돌았다. 같은 해 9월 중순에 서울 종로에는 8월 20일의 왕비 시해는 훈련대가 아닌 일본인의 소행 이라면서 적개심을 품은 내용의 방이 붙었다. 원주 지방에서는 사림들이 모여 거의( 擧 義 )의 뜻을 드높이는가 하면 구월산에서도 명성황후 시해의 죄상을 성토하는 집단적인 행동이 있 었다. 한편 안동에서는 8도의 의병을 모집하여 일본인을 격퇴해야 한다는 격문이 게시되었 15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으며 이를 안동부 관찰사가 수거하여 내부에 보고하였다. 1895년 9월 18일에는 대전의 유성 에서 문석봉에 의한 항일 의병이 일어났다. 문석봉은 국수보복( 國 讐 報 復 )을 목적으로 봉기하 여 을미의병의 효시를 이루었다. 이와 같이 서울을 비롯하여 안동, 원주, 구월산, 유성에서 의 의병 봉기는 을미사변에서 비롯되었다. 을미사변은 갑오변란과 함께 반일 의병 투쟁의 주 요한 계기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추진된 변복령과 단발령 역시 의병 봉기의 중요한 요인으로 작 용하였다. 조선말 의복 제도는 수차에 걸친 개정을 거쳐 점차 서양식 복제로 바뀌어 갔다. 이 개정은 유생들의 주체적인 문화 인식에 충격을 가져와 반일 봉기에 중요 요인으로 작용한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의 바탕에는 법복 으로 상징되는 전통 문화에 대한 독존적이며 배타 적인 가치부여의 동기가 내재해 있었다. 1894년 9월에 의복 제도의 개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군국기무처에서 의제 개정에 관한 의 안을 상정하였던 것이다. 같은 해 12월에는 칙령 제17호를 반포하여 관복을 더욱 간소화 시 키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1895년부터 조신의 대례복에는 검은 색 깃인 흑단령을 입게 하고 궁에서의 통상 예복으로 흑색의 두루마기[주의( 周 衣 )]와 조끼형의 관복인 답호를 입고 관모 인 사모( 紗 帽 )와 화자( 靴 子 ; 사모관대를 할 때 신던 신발)를 착용하게 하였다. 또한 일반 백 성에게도 흑색의 두루마기를 입도록 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을미변복령의 요체로 흑색의 두 루마기를 입도록 조처한 이유를, 첫째 의제상으로라도 관민을 구별하지 않기 위해서이고 둘 째는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서 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을미변복령 은 의병 봉기의 직접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대표적인 을미의병 장 유인석이 을미변복령 이 반포된 뒤 을미훼복시립언 ( 乙 未 毁 服 時 立 言 )을 발표하여 천지 ( 天 地 )와 성현( 聖 賢 ), 선왕( 先 王 ), 부조( 父 祖 )에 죄를 지은 것이니 살아서 장차 어찌하리요 라 고 절규하는 것으로도 입증이 되고 있다. 최익현도 청토역복의제소 ( 請 討 逆 復 衣 制 疏 )를 올 려 의제를 바꾸는 것이 불가함을 역설하였다. 전통적인 의복 제도를 조선 문화의 긍지로 인 식하던 수구적 지식인들은 변복령의 반포로 인해 심각한 위기의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그 들에게 복제의 개정은 그 자체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지선극미한 전통 문물의 단 절을 의미하는 것으로 귀착되었던 것이다. 특히 음사( 陰 邪 ) 로 상징되는 흑색의 복제를 채택 한 데 대해서는 더욱 그러한 성향이 강하게 노정되었으니, 변복령은 을미의병의 중요한 동인 16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었다. 김홍집 내각은 1895년 11월 15일에 단발령 을 선포하였다. 이때 내세운 명분은 위생에 이 롭고 작업에 편리하기 때문 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유교 윤리가 일반 백성들의 생활에 깊 이 뿌리 내리던 조선 사회에서 상투는 곧 인륜의 기본인 효의 상징으로 인식되었다. 그러므 로 단발령이 내리자 유생들은 이것을 신체적 박해로, 더 나아가 인륜의 파멸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반감은 절정에 달하였다. 단발령 공포는 백성들의 뜻과는 배치되는 일부 매판관리 집 단에 의한 자의적 조치였다. 학부대신 이도재마저도 단발령이 공포된 직후 사직 상소를 올리 고 단발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는 단발령이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방적 처사임을 비난하였다. 또한 정계에서 은퇴한 김병시도 단발령 철회를 호소하는 상소 를 올렸다. 그는 단발령이 일제의 사주를 받은 부일파들의 소행임을 지적하였다. 단발령에 대한 재야 유생들의 반향은 더욱 커 극단적인 위기의식에 사로잡혀 단호한 행동 을 보였다. 그 중에서도 단발령이 반포된 다음날로 의병 투쟁의 기치를 들고 울분을 토로한 남한산성 의병장 김하락( 金 河 洛 )은 재야 유생의 입장을 대변한다. 유인석도 이러한 단발령에 대하여 변복령과 동일한 차원에서 화이론적 가치관에 입각해 통박하였다. 그는 상투와 원몌 ( 圓 袂 ; 둥근 소매) 의 수호 여부에 따라 화이( 華 夷 )와 인수( 人 獸 )의 결판이 난다고 보았다. 즉 상투와 원몌가 화( 華 )와 인( 人 )을 상징하고 수구와 자주를 의미한 데 비해 삭발과 변복은 이 ( 夷 )와 수( 獸 )를 상징하고 개화와 예속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았다. 유교 통념의 사회에서 단발령은 한민족의 문화적 자존의 표상이던 상투를 제거함으로 전 국민의 울분을 자아냈다. 강요된 단발령은 결과적으로 정치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 걸 쳐 큰 혼란을 야기시켰다. 그리하여 단발 강요에 대한 반감은 개화 자체를 증오하는 감정으 로 발전하였고, 이것은 또 일본화로 받아들여져 반일 의식으로 연결될 수가 있었다. 즉 유생 들은 개화를 상징하는 단발령을 인륜을 파괴하여 문명인을 야만인으로 전락케 하는 처사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전통질서를 수호하려는 유생들은 반침략 반개화의 의병을 봉기하여 이를 회복하고자 한 것이다. 17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2) 중기 의병 중기 의병은 1904년 2월 개시된 러 일 전쟁과 그 직후에 체결된 한일의정서, 그리고 1905년 11월 강제 늑결된 을사5조약 등 일제의 노골적인 침략에 맞서서 민족의 독립을 지키 고자 봉기하였다. 1904년 2월에 일제는 러 일 전쟁을 도발하였다. 청 일 전쟁에서 청국을 물리친 일제는 영국과 미국이 청국과 필리핀에서 우월권을 갖도록 보장해주는 대신 한국에 대한 우월권을 보장받았다. 그리고 다시 조선에서의 경쟁자인 러시아를 물리치고자 전쟁을 도발한 것이다. 러 일 전쟁이 일어나자 조선 정부는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2월 9일 서 울에 입성하여 전쟁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면서 중립 선언을 무시하고 공수( 攻 守 )와 조일( 助 日 ) 을 앞세운 의정서의 체결을 강압하였다. 일제의 강요 아래 2월 23일에 한일의정서 가 이 지용과 하야시 곤스케( 林 權 助 ) 사이에 체결되었다. 모두 6개조로 된 의정서의 내용은, 1한 국 정부는 일본을 신임하여 시설 개선 에 관한 충고를 받아들일 것, 2일본 정부는 한국 황 실의 안전을 꾀할 것, 3일본은 한국의 독립과 영토 보전을 보장할 것, 4제3국의 침략으로 한국에 위험 사태가 발생할 경우 일본은 이에 곧 대처하며, 한국 정부는 이와 같은 일본의 행 동을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 정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전략상 필요한 지 역을 언제나 사용할 수 있도록 할 것, 5한국과 일본은 상호간의 승인을 거치지 않고서는 협 정의 취지에 위배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지 않을 것, 6조약에서 미비한 사항은 양측 대표가 협의하여 시행할 것 등이었다. 이 의정서는 러 일 전쟁을 수행하는 데 조선의 지원을 명문 화한 것이었으며, 장기적으로는 일제의 조선 침략을 위한 발판이 마련된 것이었다. 이후에 일제는 이를 근거로 대한방침( 對 韓 方 針 ), 대한시설강령( 對 韓 施 設 綱 領 ), 세목( 細 目 ) 등을 강요, 시행하였다. 대한방침에서는 한국에 대한 군사상 보호의 실권을 확립하고 경제상으로 이권의 발전을 도모할 것 이라고 하여 조선에 대한 침략 의도를 더욱 노골화하 였다. 대한시설강령에서도 외정( 外 政 ) 과 재정 을 감독하고, 교통과 통신을 장악한다고 명 시하였다. 이에 따라 조선의 토지는 일본군의 군용지로 전락하였다. 3월 말에는 한국의 통 신 기관도 군용으로 강제로 접수되었다. 5월에는 우리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맺었던 모든 조 약을 폐기시켰고, 경인선과 경의선의 철도 부설과 통신망 가설 등의 이권을 일본이 차지하였 다. 6월에는 전국토의 4분의 1이나 되는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였다. 조선인은 이러 18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한 황무지 개척권 요구로 인해 러 일 전쟁 개전 이래 쌓였던 반일 감정이 폭발하여 반대 집 회 투쟁을 전개하였다. 중기 의병은 1904년의 한 일의정서 체결을 전후하여 시작되었다. 1904년 5월에 허위( 許 蔿 )의 이름으로 작성된 격문이 13도에 발송되었으며, 김동수( 金 東 壽 )의 황성의병소와 홍천의 병소의 격문이 발견되었다. 중기 의병은 1905년 9월에 러 일 강화조약이 조인될 무렵부터 더 구체적인 전개상을 보였다. 그 가운데 원주의 원용팔, 단양의 정운경의 기의가 주목된다. 중기 의병은 1905년 11월의 을사5조약의 늑결로 격화되었다. 일본은 러 일 전쟁 중 미국 과 태프트 가츠라 밀약을, 영국과는 제2차 영 일 동맹을 체결하여 조선 침략에 대한 사전 묵인을 받았다. 이어 러 일 전쟁의 승리로 강화조약을 체결하면서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조 선 정부의 동의만 얻으면 조선의 주권을 침해할 수 있다는 보장을 받게 되었다. 일본은 1905 년 11월에 이토 히로부미를 특파대사라는 자격으로 파견하고 한일협약안을 정부에 제출하며 위협을 가하였다. 이들은 궁궐을 포위하고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고종과 내각은 조약 체결을 정식으로 거부하였으나, 이토가 조약 체결에 찬성하는 대신들과 다시 회의를 열고 자필로 약간의 수정을 한 뒤 위협적인 분위기 속에서 승인을 받아냈다. 여 기에 서명한 대신은 이완용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권중현 등으로 이들을 을사오적 이 라고 한다. 그리고 이재극을 통해 황제의 재가를 강요한 다음, 그날로 외무대신 박제순과 일 본의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 사이에 조인하게 했다. 조약은 모두 5개조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제가 행사하고, 그 일을 맡아 볼 통감부를 서 울에 두도록 하는 등의 내용이었다. 이 조약으로 조선의 외교권은 일본에 박탈당하여 외국 에 있던 조선의 외교기관은 전부 폐지되었다. 동시에 영국 미국 독일 등의 조선 주재 공사 들은 철수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이듬해 2월에는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하고 초대 통감으 로 이토가 취임하였다. 통감부는 일본이 필요로 하는 사항을 외교뿐만 아니라 내정까지도 직 접 우리 정부에 명령하고 집행하게 하는 힘을 가졌다. 이에 유생과 전직 관리들이 극렬한 상 소 투쟁을 벌였으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민영환 조병세 등 뜻있는 인사들은 죽음으로 써 조선의 주권 수호를 호소하였으며, 이근택 이완용 등을 암살하려는 개인적인 의열 투쟁 도 일어났다. 을사5조약이 늑결되자 의병은 전국적으로 발전되었다. 이 시기 일어나 대표적 인 의진( 義 陣 )으로는 홍주의진 산남의진 태인의진 등이 있다. 19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3) 후기 의병 후기 의병은 1907년 7월 고종의 강제 퇴위와 같은 해 8월 1일 구한국군의 강제 해산이 직 접적 요인이 되어 봉기하였다. 고종은 1904 1905년 러 일 전쟁 전후부터 열강에 특사를 파견하여 국권을 수호하려는 외교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열강 중에서 미국과 러시아에 대하여 측근 신하나 외국인을 파견하여 친서를 전달하며 한국의 독립 지원을 요청하였다. 고종은 1905년 6월에 러 일 강 화회담이 개최된다는 소식을 듣고 탁지부대신 이용익을 페테르스부르크에 파견하여 한국의 독립을 지원하게 하였다. 그러나 친일적인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이 중재하는 회담에서 한 국의 독립을 인정하지 못하고 만약 대한제국의 주권을 침해하는 조치는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와 합의하에 할 수 있다 는 단서조항을 넣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고종은 미국에게도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1905년 7월에는 미국에 체류 중인 이 승만을 밀사로 선정하여 미국 정부 요로에 한국 독립의 지원을 요청하는 서신을 전달하게 하 였다. 이에 따라 이승만은 루즈벨트 대통령을 만나 한국의 주권 유지와 독립 보전에 대한 청 원을 전달하였다. 고종은 전 주한 미국공사 알렌에게도 운동자금 1만 달러와 옥쇄가 찍힌 친 서 등을 전달하게 하였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러한 요구들을 모두 묵살하였다. 고종은 이와 같은 미국의 반응을 보고 세계 열강에 을사조약의 불법성을 알리는 외교 활동 을 하게 되었다. 고종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 하여 일제에 의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5조약의 불법성을 폭로하고 한국의 주권 회복을 열강 에게 호소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이상설 이준 이위종 등 3인의 특사가 1906년 6월 25 일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헤이그에 도착하였다. 고종은 또 다른 한편으로는 헐버트를 특별 위원으로 임명하여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이태리 헝가리 벨기에 중국 등 9개국 국가원수에게 친서를 전달하고,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에 조선 문제를 제소 할 뜻을 전달하도록 하였다. 이상설 등은 6월 27일에 평화회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 넬리도프 에게 일본이 국제법을 무시하고 무력으로 조선을 핍박하였으며, 황제의 동의 없이 마음대로 조선의 정사를 시행한다는 내용의 호소문을 전달하고 평화회의에 대표로 참석하게 해 줄 것 을 요청하였다. 이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자 일제의 침략상을 담은 공고사 를 각 국 대표들에게 보내고 전문을 평화회의보 에 발표하였다. 이위종은 7월 9일 신문기자단의 국제협회에서 한국의 호소 란 주제의 연설을 하여 즉석에서 각국 기자들은 한국의 처지를 이 20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해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그러나 평화회의 참석은 끝내 거부되었다. 절망과 울분 속에서 식음을 전폐하던 이준은 비분강개하다가 7월 14일에 자정순국 하였다. 헤이그 특사의 활동에 당황한 이토 히로부미는 7월 6일에 이완용을 시켜 고종의 폐위 공작 을 펴게 하였다. 그 결과 소위 비상내각회의가 열렸다. 참석자는 총리대신 이완용, 내부대신 임선준, 농공상부대신 송병준, 법부대신 조중응, 학부대신 이재곤, 탁지부대신 고영희, 군부 대신 이병무 등 7인이었다. 송병준이 이때 고종에게 친히 일본으로 건너가서 천황에게 사죄 하고 황태자의 교육을 부탁하는 일과 대한문에 나가 하세가와( 長 谷 川 ) 대장을 맞이하여 두 손을 묶고 항복하는 일 이라는 패역의 망언을 서슴치 않았다. 7) 일본 정부는 7월 12일에 한국의 내정을 직접 감독 하기로 의결하고, 15일에 외무대신 하야 시 다다스( 林 董 )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이토는 고종에게 퇴위를 강요하는 한편, 이완용 내각 에게 고종의 퇴위를 결정토록 하였다. 이에 따라 이완용은 16일에 고종에게 퇴위를 권고하기 에 이르렀다. 17일에는 각의에서 다시 고종께 퇴위를 권유하였다. 고종은 격노하여 죽더라 도 퇴위하지 아니할 것 이라고 하였지만, 8) 결국 19일에 군국 대사를 황태자로 대리하게 한 다 는 조칙을 내리고 말았다. 9) 일제는 이를 근거로 20일에 순종의 즉위식을 거행하게 하였다. 일제는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킨 며칠 후인 7월 24일에 이른바 정미7조약을 조선 정부에 강요하였다. 이완용 등 친일내각은 순종의 재가를 받아 통감부에서 이를 조인하였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한국정부는 시정개선에 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제2조 한국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통감의 승인을 받는다. 제3조 한국의 사법 사무는 일반 행정 사무와 구별한다. 제4조 한국의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한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 제6조 한국정부는 통감의 동의없이 외국인을 고용 초빙하지 않는다. 7) 박은식, 한국통사, 제47장 ; 나라자키 게이엔( 楢 崎 桂 園 ), 한국정미정변사( 韓 國 丁 未 政 變 史 ), 1907, 33쪽. 8) 皇 帝 讓 位 前 後 の 重 要 日 記, 장서각 자료, 史 部 2-312, 1907년 7월 12일 17일자. 이 자료는 아사미 린타로( 淺 見 倫 太 郞 )가 작성한 이태왕실록( 李 太 王 實 錄 ) 의 일부분으로, 1931년 2월에 기쿠치 겐조( 菊 池 謙 讓 )가 그 중에서 고종황위의 양위 전후 상황만을 정리하여 편찬한 것이다. 1904년 2월 9일부터 1907년 7월 22일까지의 일기가 포함되어 있다. 9) 고종실록, 광무 11년 7월 18일자 ; 皇 帝 讓 位 前 後 の 重 要 日 記, 1907년 7월 19일자. 21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제7조 1904년 8월 22일 조인한 일한협약 제1항을 폐지한다. 10) 이 조약으로 인하여 통감부가 친일 내각을 직접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중앙 정부와 지방 행정 기관에는 일본인 차관을 비롯하여 수 천 명의 일본인 관리가 임명되었다. 이로써 통감 은 조선의 내정을 장악하게 되었으니,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된 셈이었다. 정미7조약의 협약안보다 더욱 문제가 큰 것은 극비에 붙인 부수각서 였다. 이 각서에는 협 약을 구체적으로 실행하는 내용이 담겼다. 그 중에는 군대 해산에 관한 조항이 들어 있다. 즉 부수각서의 제3항 군비 정리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국 육군의 현상을 보건대 교육은 불완전하고 규율도 엄명( 嚴 明 )치 못하여 일조( 一 朝 ) 유사 시를 당하여 참다운 국가의 간성으로 신뢰할 수 없다. 이것은 필경 용병주의를 취하기 때문 에 의용봉공( 義 勇 奉 公 )의 신념이 풍부한 연소기예( 年 少 氣 銳 )의 장정을 모집할 수 없다는 사 실과 사관에게 군사적 소양을 가진 자가 적다는 사실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 있어서도 장 래는 징병법을 시행하여 정예한 군대를 양성키 위해 지금부터 그 준비에 착수하기 위해 좌개 방법으로 현재의 군비를 정리하고자 한다. 11) 이어서 제3항에는 군대 해산의 방법과 해산병의 처리 문제가 열거되었다. 첫째, 육군 1대대를 존치하여 황궁 수위의 임무( 任 )를 담당( 當 )하게 하고 기타는 이를 해산할 것. 둘째, 군부를 비롯한 육군에 관계하는 관아를 폐지할 것. 셋째, 교육있는 사관은 한국군대에 머물 필요가 있는 자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일본 군대로 부 속시켜 실지( 實 地 ) 연습을 시킬 것. 넷째, 해산한 하사졸( 下 士 卒 ) 중 경찰관의 자격이 있는 자는 이를 경찰관으로 채용하고 기타 는 가급적 실업( 實 業 )에 종사하도록 할 것. 그 방법은 예컨대 간도로 이주시켜 개간에 종 사시킬 것. 둔전병으로 황무지 개간에 종사시킬 것 등이다. 12) 10)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70, 230 231쪽. 11)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70, 237쪽. 12)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70, 237 238쪽. 22
2. 의병의 역사적 배경 일제는 고종을 폐위시키고 한국을 강제 병합하는데 다급한 것이 조선의 병권을 빼앗는 것 이었으니, 이에 따라 구한국군의 해산을 강행한 것이다. 일제는 군제 개혁이란 명목 하에 1894년 갑오경장 때부터 조선군의 해산을 추진해 왔다. 군사 고문으로 임명된 노즈( 野 津 )는 1905년 4월에 소위 군제개혁안을 제의하였는데, 군 기구를 확장한다면서 오히려 조선군의 원수부를 해체하였을 뿐 아니라 병력을 반감하였다. 이로서 1907년 현재 조선군은 겨우 7천 여 명에 불과하였다. 해산 당시 조선 군인은 서울에 시위대 2개 연대(1개 연대는 3개 대대)와 헌부( 憲 部 ), 연성( 硏 成 ), 무관, 유년학교 등에 약 5천여 명, 지방진위대에 약 2천여 명이 배치 되어 있었다. 조선군에 대한 해산 명령은 8월 1일에 하달되었다. 아침 7시 서울의 각 대대장급 이상자에 대한 긴급 소집령이 내렸다. 이들은 일본군사령관 하세가와의 관저에 집결하였다. 해산 조 칙은 군무대신 이병무가 낭독하였다. 이어서 하세가와가 나와서 조용히 해산을 실행하라 고 하면서 장교만은 해산 대상에서 제외하였다고 덧붙였다. 부대로 돌아 온 대대장들은 각 중대 장에게 해산 조칙을 알렸다. 중대장들은 사병들의 총기를 반납하게 하고 오전 10시까지 훈련 원에 집결할 것을 명령하였다. 훈련원에는 이미 해산식 준비를 완료해 놓았다. 그러나 훈련원에 끌려 온 병사는 불과 6백 여 명에 불과하였다. 이미 남대문 쪽에서는 제1연대 제1대대와 제2연대 제1대대 병력이 해 산에 항거하여 일본군과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훈련원은 총소리에 일시 술렁거렸으 나, 빈손으로 모인 이들은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해산식은 오후 2시가 넘어서 시작 되었다. 소낙비가 퍼붓는 가운데 해산식이 진행되었으며, 하사에게는 80원, 병졸에게는 50 원과 25원(1년 이하 복무자)의 소위 은사금이 지급되었다. 서울시위대를 무력으로 해산시킨 일제는 지방진위대의 해산에 착수하였다. 8월 3일에 개성과 청주진위대, 8월 4일에는 대구 진위대, 5일에는 안성진위대, 6일에는 공주와 해주, 평양진위대, 7일에는 안주진위대, 8일에 는 수원진위대, 9일에는 광주와 의주진위대, 10일에는 홍주와 원주진위대, 11일에는 강화와 문경진위대, 13일에는 강릉과 진남진위대, 14일에는 전주진위대, 16일에는 안동진위대, 17 일에는 울산과 동진( 東 津 )진위대, 19일에는 북한( 北 漢 )과 경주진위대, 23일에는 강계진위대, 24일에는 함흥진위대, 9월 3일에는 북청진위대 등 1개월에 걸쳐 지방진위대를 해산시켰다. 13) 13) 국사편찬위원회, 한국독립운동사 1, 1970, 246쪽. 23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일제가 구한국군을 강제 해산하자 이에 항거한 군인들과 의병이 서로 연합하여 대대적인 무장 항일전을 벌이게 되었다. 해산된 군인의 항전은 서울의 시위대로부터 시작되었다. 8월 1일 해산 조칙에 접한 시위대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朴 昇 煥 ) 참령은 비통함을 참지 못하 여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신하로서 충성을 다하지 못하니 만번 죽어도 아깝겠는 가 ( 軍 不 能 守 國 臣 不 盡 忠 萬 死 無 惜 )라는 유서를 남기고 권총으로 자결하였다. 이를 목격한 시위대 군인들은 무장하여 병영을 장악하고 일본군과 시가전을 감행하였다. 서울 시위대의 해산 거부와 항전 소식을 접한 원주 강화 홍주 진주 안동 등 지방의 진위대 병사들 역 시 대일 항전의 대열에 합세하였다. 이들은 각기 의병에 가담하여 의병 전력을 강화시켰다. 원주진위대는 특무장교 민긍호의 지휘 아래 병사층을 중심으로 거의하여 강원도와 충북 일 대에 본격적인 의병 항쟁을 전개하였다. 군대 해산 이후 후기 의병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으 니 문경의 이강년 부대, 원주의 이은찬 부대, 영천의 정환직 정용기 부자의 산남의진, 영해 의 신돌석 부대, 호남의 기삼연 심남일 이석용 전해산 안계홍 부대, 충남의 정주원 부 대, 함경도의 홍범도 최덕준 부대 등은 특히 이름난 의병 부대다. 1907년 11월경에는 전국 연합의병의 성격을 갖는 13도창의군이 결성되어 서울 탈환 작전을 추진하기도 하였다. 24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1) 전기 의병 1 유성의병 1895년 8월 20일에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친일 내각과 일제가 사건의 책임을 부인하고 명성황후에 대해 폐비 조치를 내리자 조선인의 일제와 친일정권에 대한 항쟁이 개시되었다. 8월 23일부터 9월 사이에 창의소 고시문이나 복수토적을 외치는 고시문과 각종 방들이 서울 도성 안에 나붙고, 지방 각지에서 의병의 조짐이 거세어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의병 투쟁은 그로부터 한달이 채 안된 9월 18일에 문석봉( 文 錫 鳳 )의 유성의병( 儒 城 義 兵 )에서 시작되었으 니 을미의병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14) 문석봉(1851 1896)은 1893년 5월 별시 무과에 급제한 후 그해 12월 진잠 현감에 제수되어 충청도에 내려왔다. 문석봉의 의병 투쟁은 을미사변 직후 시작되었다. 그는 명성황후의 시 해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가 민영환 등을 만나 의병의 뜻을 밝혔다. 민영환은 문석봉에게 환도를 풀어주며 격려했다. 그는 우범선을 살해한 인물로 잘 알려진 고영근과도 서울에서 만 났다. 고영근은 문석봉이 봉기하기 직전인 9월 13일에 편지를 보내어 의병을 격려하였다. 대 전 지역의 좌의정 출신인 송근수와 신응조 같은 유학자들도 문석봉의 뜻에 찬동했다. 문석봉은 9월 18일(양력, 11월 4일)에 충청도 유성에서 의기를 들었다. 문석봉은 창의한 후 대장이 되어 선봉에 김문주, 중군에 오형덕, 군향에 송도순을 임명하는 등 지휘부를 조직하 였다. 김문주는 공주 출신의 유학( 幼 學 )으로 문석봉과는 동학군 진압을 위한 소모군 때부터 참모사로 동고동락했던 동지였다. 문석봉은 지휘부를 조직한 후 통문을 각지에 발송하였다. 그는 통문에서 을미사변을 천고에 없는 대변 으로 규정하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 사직 을 건져야 할 것을 호소하였다. 문석봉은 유성장터에서 부대를 편성한 후 공격 목표를 공주부 관아로 잡고, 우선 무기를 획득하기 위하여 회덕현을 급습하였다. 10월 20일(양력, 12월 6일)에 탈취한 무기로 무장한 3백여 명의 의병이 유성 장터에 모였다. 문석봉은 이를 인솔하고 다음 날 오전에 진잠으로 들어가 군수 이세경을 만나 의병에 합세할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이세경은 오히려 의병의 14) 김상기, 조선말 문석봉의 유성의병, 역사학보 134 5합집, 1992. 25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동태를 관찰사에게 보고하는 등 협조를 거부하였다. 유성의병은 그로부터 1주일 후인 10월 28일에 공암을 거쳐 공주를 향해 진격하였다. 공주부 관찰사 이종원은 전 중군 백낙완과 이 인 찰방 구완희에게 각각 100명씩 이끌고 가 대응케 하였다. 의병부대는 이들과 공주 와야동 (지금의 공주시 소학동)에서 일전을 겨루었으나 매복했던 관군에게 패하고 말았다. 문석봉은 패산( 敗 散 ) 후 중군 오형덕 등과 함께 경상도 고령, 초계 등지에서 재봉기를 준 비하였다. 우선 고령현감에게 원조를 요청하고, 감역 윤희순으로부터 군자금 지원의 약속을 받기도 하였다. 초계군수 신태철은 관에서 상금 만금을 그대들에게 걸었으니 잠시 숨어 후 일을 도모하시오 라고 안위를 걱정해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결국 고령현감의 고변으로 순 검들에 의해 체포되어 대구부에 구금되고 말았다. 문석봉의 유성의병은 개화정권의 구조적 모순 타파와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격퇴라는 민족 적 과제를 쟁취하지 못하였으나, 을미사변의 비보에 한국인이 즉각적으로 일제와 친일 내각 에 항거하였으며 나아가 단발령 공포 후 의병을 전국적으로 확대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유성의병은 회덕의 송근수, 진잠의 신응조 등 중신들의 찬동과 협조 속에서 가능하였다. 또 한 송준길의 후손인 송도순과 김경여의 후손인 김성의 등의 참여는 유성의병이 향촌 유림 세 력의 지지기반 위에서 반침략 항일 의병을 전개하였음을 알려준다. 2 홍주 을미의병 홍주 을미의병은 청양의 안창식 등 재지 유생들과 김복한 등 홍주 지역 관료들의 연합으로 전개되었다. 안창식 등은 을미사변의 비참한 소식에 접하고 의병 모집 무기 수집 등의 구체 적인 행동 개시에 들어갔다. 이들의 의병 추진은 11월 15일에 단발령이 공포된 후 더 구체화 되어 갔다. 한편 홍주 출신의 김복한과 이설은 문과에 급제하고 승지의 직임을 띠고 고종을 보필하였 으나 청 일 전쟁 후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1894년 6월에 관직을 사퇴하고 낙향하였다. 두문불출하던 이들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공포에 의병을 일으키게 되었다. 김복한은 이설 과 홍건을 만나 협의하였으며 관찰사 이승우를 만나 거병을 권하였다. 그는 이승우의 거절을 받고 11월 27일에 홍주향교 전교 안병찬을 만나 의병을 협의하였다. 이미 부친 안창식과 함 께 의병을 준비하던 안병찬은 김복한과 의기투합되어 다음날 11월 28일에 화성의 강변에 사 26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는 이인영 집에서 향회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김복한은 별도로 이봉학 이상린과 청양군수 정인희에게도 글을 보내 의병에 참여할 것을 권하였다. 12월 1일 저녁에는 정산과 청양의 이 봉학 이세영 김정하 등 수백 명이 나그네 또는 장사꾼으로 가장하고 성안에 들어와 숨었 다. 12월 2일에 안병찬의 척숙 박창로가 수백 명을, 청양의 선비 이창서가 청양군수 정인희 의 명령을 받아 수백 명을 인솔하고 각각 홍주부에 집결하였다. 여기에 안병찬 채광묵의 민 병 180명이 대기하였으니 그 군세는 홍주부를 위압하기에 충분하였다. 김복한은 12월 2일에 수백 명의 민병이 관아에 집결하였을 때 관찰사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경무사 강호선과 참 서관 함인학의 목을 베고자 하였다. 민병들이 경무청을 부수고 이들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어 결박, 구타하기에 이르렀다. 관찰사는 이들을 살려줄 것을 호소하고 결국 거의에 참여할 것 을 승복하였다. 이어 존화복수( 尊 華 復 讐 ) 라 쓴 기를 세우고 거의 방법과 계략을 협의하였다. 다음날(12월 3일) 홍주성 내에 창의소를 설치하고 김복한이 대장에 추대되었다. 김복한은 홍주부 관할 22군과 홍주군내 27면에 통문을 띄워 각 고을 대표들은 집을 순회하며 노약자 와 독자를 빼고 매호마다 한 사람씩 응모하기를 청하였다. 집집마다 이를 피하지 않고 죽을 것을 맹세하고 자진 응모하였다. 한편 관찰사 이승우는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 이란 이름으 로 절제사에게 관내에 명령을 내려 당일로 군사를 모집하여 오게 하였으며, 이설을 불러 장 계 및 각국 공사관에 조회하는 격문을 작성토록 하였다. 창의소에는 김복한과 이설 안병찬 이상린이 잔류하였으며, 의병 초모와 산성 수리를 위 하여 송병직 채광묵 이창서 이세영 이봉학 이병승 조의현 박창로 정제기 등을 파 견하였다. 이로써 1895 1896년의 홍주의병은 비로소 진용을 갖추었으니, 기병이 성립하기 까지는 1895년 4월부터 8개월에 가까운 준비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청양군수 정인희는 창의소를 별도로 청양읍내에 설치하고 홍주부에 연락을 취하여 포군 500명과 화포 1천 자루 를 관찰사에게 요청하였다. 그러나 창의소를 설치한 후 하루만인 12월 4일에 관찰사 이승우가 배반하고 말았다. 그는 처음부터 의리에 따라 죽을 마음이 없었다. 유생들의 권유와 위협에 마지못해 의병에 참여하 기는 하였으나 실패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김복한과 이설을 비롯한 총 23명을 구금하였다. 12월 7일 서울에서 신우균이 군사 250명을 이끌고 내려와 김복한 등으로부터 진술서를 받았 다. 12월 30일에 수감자 23명은 결박당한 채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들은 1896년 1월 1일 신 례원에 도착하는데 이때 아관파천과 김홍집의 처형 소식을 듣고는 다시 홍주감옥에 구금되 27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었다. 1월 12일에 김복한 등 6명(홍주6의사)을 압송하라는 법부의 훈령에 이들은 1월 17일 한 성재판소에 이송되었다. 2월 23일에 고등재판소 재판장 이범진이 공초를 하였으며 김복한에 게 유배 10년, 홍건 이상린 송병직 안병찬은 징역 3년, 이설에게는 장60을 선고하였다. 이어서 판사 김교헌은 이들을 불러들여 임금의 특지에 따라 전원 사면 석방시켰다. 15) 3 제천의병 제천의병( 堤 川 義 兵 )은 1896년 1월에 안승우( 安 承 禹 ) 이춘영( 李 春 永 )이 거의한 지평의진 에서 비롯되었다. 안승우는 지평의 포군장 김백선( 金 伯 善 )을 비롯한 포수 400여 명을 주병 력으로 하여 원주 관아를 점령하였으며, 이어서 1월 17일 제천에 무혈 입성하였다. 이때 서 상렬 이필희 오인영 배시강 등이 참여하였다. 이필희를 대장에 추대한 지평의진은 단양 군수를 구금시키고 일본군과 관군을 장회나루 전투에서 크게 물리쳤다. 그러나 관군과 일본 군의 계속된 추격에 의병대는 영월로 퇴진하였다. 이러한 사태에 접한 유인석은 요동행을 포 기하고 제천의병을 지휘하게 되었다. 1896년 1월 28일(음력, 12월 15일)에 (총대장에 추대 된) 유인석은 의진을 제천으로 진격시켜 관아를 접수하고 관아 뒷산인 아사봉에 본영을 설 치하였다. 그리고 중군장에 이춘영, 전군장에 안승우, 후군장에 신지수, 선봉장에 김백선, 소모장에 서상렬을 임명하고 각지에 격문을 띄워 전국민의 항일전 참여를 호소하였다. 16) 그는 격문에서 소중화의 조선이 왜의 침략과 이를 방조한 개화파 관리들의 개문납적( 開 門 納 賊 ) 으로 금수의 지경에 떨어지게 되었다고 밝힌 뒤 일제 침략의 전초가 된 갑오변란으로 부터 조선은 망한 바나 다름없으나 그를 이어 국모 살해와 단발의 화가 계속됨에 각도의 충 의지사는 과감히 일어나 참여할 것을 호소하였다. 무릇 각도의 충의지사는 다 같이 성조( 聖 朝 )에서 길러낸 인물이다. 환난을 피하는 일이 죽음 보다 심함이 없으니 망하기를 기다림보다 토벌함이 나을 것이다 (중략) 여기서 감히 먼저 일어난 처지에 이렇게 포고하는 것이다. 위로 공경( 公 卿 )으로부터 아래로 신민에 이르 기까지 그 누가 절박한 마음이 없을 것이랴. 이야말로 참으로 존망의 시기이니 각자가 거적 자리에서 자고 창을 베게삼으며 또한 모두 끓는 물에라도 들어가고 불에라도 뛰어들어서 이 15) 김상기, 1895 1896년 홍주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윤병석교수화갑기념논총, 1990. 16) 김상기, 한말전기의병,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09, 28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나라의 재조( 再 造 )를 기약하고 천일( 天 日 )을 다시 밝게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글을 보내 어 효유하는 것이 이후에 혹시라도 영을 어기고 도망가거나 태만히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것 은 곧 역적의 무리와 같으므로 단연 군사를 먼저 옮겨 토벌할 것이니 각자 명심하여 후회하 는 일 없게 하고 적은 성의나마 다하여 함께 대의를 펴가야 할 것이다. 17) 의병진은 주로 동일한 지역과 학통 그리고 혈통(신분)의 배경 하에 결성되었던 것이 일반 적인 경향이었다. 따라서 의병진 간의 통합은 위의 성격을 충족하여야 가능하기 때문에 용이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인석이 위와 같은 격문을 전국에 발표하자 원근의 유생들은 각기 민 병을 거느리고 동참해 왔다. 제천의병은 1896년 2월 16일에 충주성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 시기 의병의 총수는 1만명 이상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18) 2월 17일(음력, 1월 5일)에 남한강 상류인 북창나루를 얼음 위로 건너 충주성을 공격하였다. 당시 충주성에는 경군 400여 명과 지방진위대 500여 명 그 리고 200여 명의 일본 수비대가 있었으나 큰 피해 없이 충주성을 함락하였으며 관찰사 김규 식을 체포 처단하기에 이르렀다. 19) 제천의병의 충주성 점령은 전기 의병에서 최대 전과로 평 가되며 이후 각지에서 의병 봉기를 고무시키는 데 큰 자극이 되었다. 충주성 함락 후 유인석은 소모장 이범직을 호서 지역에 파견하여 천안군수 김병숙을 처단 하고 선유사 신기선을 잡아 가두었다. 당시 단발을 혹독하게 강요한 자로 천안의 김병숙( 金 炳 肅 )이 지목되었던 것이다. 20) 유인석은 각처의 의진에 연락을 취하여 합세할 것을 청하였 다. 이에 원근 지방의 의병들이 충주성으로 모여들어 제천의병은 중부 지역의 의진을 규합한 연합 의진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제천의병은 수안보와 가흥에 주둔하던 일본군 격퇴를 주요 목표로 삼아 작전을 폈다. 그러 나 2월 26일 수안보전투에서 이춘영이 전사하고 충주성 공방전에서 주용규가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제천의병은 3월 5일에 다수의 희생자를 낸 채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후퇴하였다. 유인석은 안승우를 중군장으로 삼아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때 이강년이 의병을 이끌고 의진을 찾아와 유인석과 사제의 의를 맺었다. 이외에도 영춘에서 권호선이 포수를 이 17) 유인석, 격고팔도열읍( 檄 告 八 道 列 邑 ), 소의신편( 昭 義 新 編 ), 1 2쪽. 18) 朝 鮮 時 事. 東 京 朝 日 新 聞, 1896년 2월 26일. 19) 이정규, 종의록( 從 義 錄 ), 독립운동사자료집 1, 30쪽. 20) 이정규, 위의 책, 31쪽. 29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끌고 왔으며 이명로의 횡성의병도 합류하였다. 그러나 3월 27일 선봉장 김백선의 처형 사건 이후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졌고, 제천의병은 결국 5월 25일에 제천의 남산 전투에서 관군과 일본군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고 패하여 서행의 길을 택하게 되었다. 고종의 해산 조칙에 유인석은 구제도를 회복하지 못한 점과 침략군인 일본군을 물리치지 못한 점을 들어 해산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춘천 양구 안변 영흥 맹산 덕 천 운산을 거쳐 8월 24일 초산에서 압록강을 거쳐 중국의 회인현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제 천의병은 회인현재( 懷 仁 縣 宰 ) 서본우의 제지로 8월 29일에 무장해제 당하였으며 유인석 등 21명을 제외한 나머지 의병은 강제 귀국 당하였다. 유인석 일행은 심양으로 들어가 현재( 縣 宰 ) 가원계( 賈 元 桂 )에게 군사 지원을 요구하였으 나, 가원계는 청국과 일본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외국과의 전쟁 사단을 일으킬 수 없다는 이 유로 거절하였다. 이로써 유인석은 청국의 원병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원세 개에게 가던 길을 돌려 결국 그해 음력 9월에 통화현( 通 化 縣 ) 오도구( 五 道 溝 )로 들어갔다. 일 행은 그곳을 복고제( 復 古 制 ), 척왜독립( 斥 倭 獨 立 ) 을 위한 근거지로 정하고 망국단( 望 國 壇 ) 을 만들어 참배하며 재기를 기다렸다. 21) 2) 중 후기 의병 1 단양의병 1905년 8월 충북 단양 지방에서 정운경( 鄭 雲 慶, 1861 1939)이 의병을 일으켰다. 정운경 은 송강 정철의 후예로 충청북도 제천 출신이다. 정운경은 을미사변에 항거하여 의암 유인 석 의진에 참가하여 1896년 1월 중군장에 임명되어 충주성을 점령하고, 청풍 평창 등지에 서 전공을 세웠던 의병장 출신이다. 1905년 을사조약의 무효를 부르짖으며 거의한 원용팔 ( 元 容 八 )이 9월에 체포되고 의진이 해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단양의 장림에서 이규석( 李 圭 錫 ) 김홍경( 金 鴻 卿 ) 강수명( 姜 秀 明 ) 지원영( 池 源 永 ) 김지현( 金 知 鉉 ) 정해훈( 鄭 解 薰 ) 등과 의병을 일으켰다. 이들은 10월 6일에 단양읍으로 들어가 순교( 巡 校 )와 서기 등을 포박 하여 장림으로 데리고 와 각 면의 포수들을 규합하도록 지시하고 의병을 모았다. 의거의 깃 발을 올리니 수일간에 단양 제천 영춘 청풍의 4군 일대에서 3~4백 명의 의병이 모여들 21) 김상기, 1895 1896년 제천의병의 사상적 연원과 전개, 백산박성수교수화갑논총, 1991. 30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었다. 정운경은 10월 11일에 단양읍으로 나가 이강년에게도 연락을 취해 의병에 참여할 것을 요청하였다. 정운경은 의진의 부서를 정하고 인근 각지의 지사들과 연락을 취하며 대일 전투 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전투 태세가 정비되기도 전인 10월 13일에 원주진위대의 공격을 받고 정운경은 영춘에서, 함께 거의한 의당 박정수( 朴 貞 洙 )는 청풍에서 각각 체포되니 의진은 와 해되고 말았다. 정운경은 군부로 압송되어 엄중한 심문을 받다가 1905년 11월에 평리원의 재 판을 거쳐 유배 10년형에 처해져 1906년 11월에 황주 철도( 鐵 島 )로 유배되었다. 1907년 12월 에 고종의 특사로 풀려났다. 22) 한편 1905년 을사조약에 항거하여 유학자 박세화( 朴 世 和 )도 문인인 윤응선과 함께 제천의 남현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청풍에서 체포되었다. 박세화는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 제 나라가 망하게 되어 도( 道 )와 화( 華 )가 더불어 망하게 될 터이니 장차 어찌 할 것인가 라 며 식음을 전폐한 지 23일 만에 순국하였다. 23) 2 1906년 홍주의병 1896년에 홍주의병을 주도하였던 안병찬 채광묵 박창로 이세영 등은 을사5조약의 늑 결 소식을 듣고 1896년 의병 때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의병 투쟁을 통한 국권회복 운동을 전개할 것을 다짐하였다. 특히 안병찬은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록 천장의 상 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할진대 차 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 라고 1906년 초부터 의병 봉기 를 추진하였다. 그는 동지들과 함께 의병을 초모하는 동시에 정산에 거주하는 전 참판 민종 식을 찾아가 총수의 책임을 맡아줄 것을 청하였다. 민종식은 3월 15일(음력, 2월 21일)에 이 를 받아들여 의병장에 올랐으며 박토 10여 두락을 팔아 5만 냥을 군자금으로 내놓았다. 민종 식은 대장에 추대되어 의진의 근거지를 정산의 천장리로 삼고 항전에 돌입하였다. 의병에 참 여한 주요 인물로는 안병찬 이세영 채광묵 박창로 등과 이용규 홍순대 박윤식 정재 호 이만직 성재한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격문과 각국의 공사에게 보내는 청원문과 통문 을 작성하였다. 2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1, 575 576쪽. 23) 송상도, 기려수필, 국사편찬위원회, 182 183쪽. 31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민종식은 의진을 편성하고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로 진군하였다. 이들은 이곳에 서 편제를 정하고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고 의진을 정비하였다. 이들은 이튿날 바로 홍 주로 향하여 홍주의 동문 밖 하고개에 진을 쳤다. 다음날 의진은 광시장터로 집결하여 군제 를 바로잡고 병사들을 훈련시켜 공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의병진은 화성의 합천(지금의 청 양군 화성면 합천)에 진을 쳤다. 이 소식을 듣고 공주 주재 일본헌병대가 급파되어 홍주군 관 군과 함께 오후 6시 먹고개에 도착하여 탐문하고 10시경 합천 인근에 쳐들어와 잠복하였다. 다음날인 3월 17일(음력, 2월 23일) 오전 5시에 이들의 공격을 받아 안병찬과 박창로를 비롯 한 주요 인사들이 체포되어, 의진은 해산되고 말았다. 의병장 민종식은 합천 전투에서 간신히 탈출하여 각지를 잠행하다가 전주에 거주하는 친 척 민진석( 閔 晉 錫 ) 집에서 은신하던 중 이용규 등과 재기를 협의하였다. 곧이어 이용규가 초 모한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을 재기하였다. 이용규는 합천 싸움에서 패한 뒤 전주 진안 용 담 장수 무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지 티로 와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한 것이다. 민종식은 다시 대장에 추대되어 부대를 정비하였다. 민종식은 이때 선봉장에 박영두, 중군 장에 정재호, 후군장에 정해두를 임명하였다. 이들은 홍산 관아를 점령한 뒤 서천으로 행군 하였다. 이튿날 비를 무릅쓰고 문장동을 거쳐서 5월 13일(음력, 4월 20일)에 서천읍에 도착 하였다. 의병은 남포에서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다. 남포의 관군은 공주부의 관군과 합세하 여 요새인 남포성을 의지하여 반격하였다. 5일간이나 전투가 이어졌으며 의병부대는 남포성 의 함락에 성공하여 남포군수를 감금시키고 병사 31명을 의병진에 귀순시켰다. 유회군 33명 도 영입하였다. 홍주의병은 결성으로 진군하여 하루를 지내고 5월 19일(음력, 4월 26일)에 홍주로 들어가 5월 20일 아침에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의병진에서는 진용을 정비하고 소를 잡아 천제를 지냈다. 민종식은 홍주성을 점령하고 나서 인근의 각 군수에게 훈령을 내려 양 식과 군기의 징발과 징병의 일을 지시하였다. 일본군은 5월 20일부터 공주의 고문부 경찰과 수원의 헌병부대를 증파하여 홍주성 공격 에 나섰다. 그러나 의병은 굳건한 성벽을 이용하여 이들의 총격에 잘 대응하였다. 5월 21일 에 일본 경찰대에서 경부와 보좌원 순검 13명이 성을 향해 총을 쏘며 공격하였지만, 의병 측 에서는 대포를 쏘아 이들을 물리쳤다. 일본 경찰과 헌병대의 몇 차례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32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 세가와( 長 谷 川 好 道 )는 5월 27일 대대장의 지휘아래 보병 2개 중대를 홍주에 파견하여 경찰 과 헌병, 진위대에게 협조토록 훈령하였다. 이에 보병 제 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 田 中 ) 소 좌 지휘 하에 보병 2개 중대(약 400명)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수비대 1개 소대가 합 세하여 30일 홍주성을 포위하기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다나카 소좌의 지시에 따라 30일 밤 11시에 동문으로부터 약 500미터 지점의 숲속에 잠복하였으며, 31일 오전 2시 반에 공격을 개시하여 3시경에 기마병 폭발반이 동문을 폭파시켰다. 이를 신호로 하여 일본 보병과 헌병 대, 경찰대가 기관포를 쏘며 성 안으로 진입하였다. 또한 2중대 1소대와 4중대 1소대는 각각 갈매지 남쪽 고지와 교동 서쪽 장애물 도로 입구에서 잠복하여 의병부대의 퇴로를 차단하였 다. 이때 의병 측에서는 성루에서 대포를 쏘면서 대항하였으나 북문도 폭파되어 일본군이 밀 려들었다. 의병은 치열한 시가전을 감행하면서 방어했으나 결국 일본군의 화력에 밀려 많은 사상자를 내고 처참하게 죽어갔다. 유병장 유준근을 비롯하여 소모장 최상집, 좌익장 이상구, 참모 안항식, 돌격장 남규진, 참 모 신보균과 이식, 서기 문석환, 그리고 우익장 신현두 등 9명(홍주 9의사)은 8월 6일(음력, 6월 17일)에 대마도로 유배되어 이즈하라( 嚴 原 )에서 감금 생활을 하였다. 이들의 대마도 유 배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지시에 의해 자행되었다. 한편 홍주성 전투에서 패퇴한 민종식을 비롯한 지휘부는 성을 빠져나왔다. 이용규는 그해 7월에 청양의 추티에서 의병을 재집결하여 부여와 노성 지역을 행군하여 연산의 부흥리에서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이때 조병두는 중상을 입고 체포되어 대전역에서 사망하였으며, 채경 도와 오상준 등은 공주부에 감금되었다. 이용규는 그해 10월경에 예산 현곡(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있는 이남규의 집으로 가서 민종식 등을 만나 재기를 추진하였다. 이때의 지휘부 는 대장에 민종식, 중군장에 황영수와 정재호, 운량관에 박윤식, 참모에 곽한일 이용규 김덕진으로 편제하였다. 이들은 11월 20일에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결정 하고 민종식을 다시 대장에 추대하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포위 습격을 당하여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 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악형 을 당하였다. 이때 체포된 곽한일을 비롯하여 박윤식 김덕진 정재호 황영수 박두표 등 33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은 종신 유배형을 받고 지도(전남 신안군)로 귀향갔으며, 홍순대와 김재신은 고군산도(전북 군산시)로 귀양갔다. 한편 안병찬 박창로 최선재 윤자홍 등 수십 명은 공주감옥에 감금 되었다. 민종식은 미리 신창군 남상면의 성우영 집으로 대피하였다가 다시 공주 탑곡리 쪽으로 피 신하였다. 일본경찰대는 신창에서 김덕진과 신창규를 체포하여 고문 끝에 민종식의 은신처 를 파악하였다. 결국 민종식은 11월 20일에 체포되어 공주부를 거쳐 서울로 압송되어 1907 년 7월 3일에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으로 감형 처분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24) 3 당진의병 당진 지역의 인사들 역시 을사조약의 늑결에 항거하여 즉각적으로 의병을 봉기하였다. 이 시기 대표적인 당진 의병장으로 최구현(1866 1906)이 있다. 그는 면천의 매염리 출신으로 고종 3년(1866) 태어났다. 그는 정유재란 중인 1597년 영천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충신 공 최준립의 12대 후손으로 고종 24년(1887) 12월에 무과에 급제하고 1888년 훈련원봉사로 벼슬길에 올라 군부에서 근무하던 중인 1904년 일본에 의해 한일의정서가 체결되는 것을 보 고 군부참서관 직을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이어 1905년 11월에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1906년 4월 기지시에 병오창의도소 를 설치하고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그는 면천 당진 고덕 천의 여미 등지에 격문을 발표하고 37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다. 그는 창의영도장 에 추 대되어 의병을 지휘하고 인근 지역을 돌면서 위세를 떨치고, 5월 10일(음력, 4월 17일) 초저 녁에 면천성을 공격하였다. 다음날 새벽까지 일제의 경찰대와 치열한 공방전을 수행하였으 나 화승총으로 일본 경찰대의 신식 무기를 이길 수 없었다. 최구현은 죽음을 각오한 의병 36 명을 인솔하고 밤에만 행군하여 5월 16일(음력, 4월 23일)에 소난지도로 들어갔다. 최구현은 소난지도에서 이들을 맞이해주는 또 다른 당진의병을 만날 수 있었다. 또한 화성창의장 홍 일초 부대 40여 명도 있었다. 이어서 5월 27일(음력, 윤4월 5일)에 서산의병 참모 김태순 등 28명이, 6월 7일(음력, 윤4월 16일) 홍주성에서 패한 홍주의병 차상길 등 15명이 소난지도에 합세하였다. 24)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006. 34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이들 소난지도에 주둔하던 의병들은 1906년 6월 18일 면천군에 돌입하여 군수 이교영을 포박하고 이속들을 난타하고 결전 350냥과 양총 5정, 탄환 85발, 환도 2정을 탈취하였다. 소 난지도 의병대는 그 해 8월 중순에도 다시 면천군을 습격한 것으로 보인다. 이때는 군수가 지방에 출타 중이었는데 의병 수백 명 은 총 6정과 실탄 30여 발을 탈취해 갔다. 그러나 이 들 120여 명의 소난지도 의병은 8월 24일(음력, 7월 5일) 일본경찰대의 대대적인 기습 공격 을 받았으며, 최구현 의병장은 체포되어 면천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고 옥고의 후유증으로 그해 12월 23일(음력) 사망하고 말았다. 25) 3) 충청 지역의 의병장 1 전기 의병장 충청 지역의 의병장은 전기, 중기 의병은 반개화, 반침략의 이념에 철저한 지방 유생을 중 심으로 형성되었다. 그러나 후기 의병에 들어서는 해산 군인 등 일반 평민의병장의 활동이 더욱 치열하였다. 충청의병장들은 비록 전기 의병에서 강제로 해산되었을지라도 1905년 이 후 의병을 재기하였으며, 1910년 이후 만주 지역으로 망명하여 독립전쟁에 참여하는 등 의 병의 특성을 잘 보여주었다. 전기 의병의 대표적인 의진인 제천의병의 지휘부를 보면 다음과 같은 인물들이 있다. 26) <제천의병의 지휘부> 창의대장 : 유인석 중 군 장 : 이춘영(안승우, 이원하, 원용석) 전 군 장 : 안승우(홍대석, 이정의) 후 군 장 : 신지수(원용석, 유치경) 선 봉 장 : 김백선(김용준) 좌 군 장 : 우기정(정원모) 우 군 장 : 안성해(원규상, 이강년) 중군종사 : 오명춘 중군군사 : 조준교 중군참장 : 한동직 중군참모 : 김사두 중군아장 : 이원하 소 모 장 : 서상렬, 이범직, 정인설 유 격 장 : 이강년 유격중군 : 윤기영 분 의 장 : 이희두 25) 김상기, 1908년 당진 소난지도 의병의 항일전, 한국근현대사연구 28, 2004. 26) 김상기, 한말 전기의병, 독립기념관, 2009, 171 172쪽. 35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좌 익 장 : 우필규 별 진 장 : 원우규 진 동 장 : 이필희 운 량 감 : 이필근(최병식, 이범직) 장 의 장 : 이원하 참 모 : 이조승, 윤정섭, 주용규, 이직응, 박주순 종 사 : 조석증, 주영섭, 이세희, 홍사구 총재서무 : 유홍석, 심영섭 장 서 기 : 이병회 장 빈 객 : 장충식 *( )안은 후임자임 우 익 장 : 윤성호 좌 선 봉 : 김용준 한 어 장 : 이형구 군 기 감 : 우헌영(유해붕) 장 재 용 : 김영록 수성중군 : 홍우범 제천의병은 1896년 1월부터 전투를 개시하여 8월 압록강을 건너 중국의 회인현으로 들어 갈 때까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 전투에서 중군장 이춘영과 전군장 안승우를 비롯하 여 후군장 신지수, 선봉장 김백선, 소모장 서상렬과 이범직 등을 비롯하여 다수의 의병들이 전사하였다. 제천의병 중에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인물은 보이지 않는다. 문석봉의 유성의병 지휘부에는 의병장 문석봉 외에 선봉장에 김문주, 중군장에 오형덕, 군 향관에 송도순이 있다. 이들 중에 문석봉과 김문주가 대구부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그 러나 이들은 대구감옥에서 탈옥하여 재기를 도모하였다. 문석봉이 대구관찰사의 취조에 문 답한 문건이 문집인 의산유고 에 남아 있다. 홍주 을미의병의 지휘부는 다음과 같다. 27) <홍주 의병(초기) 지휘부> 창 의 대 장 : 김복한 참 모 : 이설, 안병찬, 이상린 북면 소모관 : 송병직 남면 소모관 : 채광묵, 이창서 공주절제사 : 이세영, 이봉학, 이병승 임존산성 수리 : 조의현, 박창로, 정제기 27) 김상기, 한말 전기의병, 독립기념관, 2009, 190쪽. 36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홍주의병은 위와 같은 지휘부를 구성하고 홍주관찰사 이승우를 홍주목사 겸 창의대장 으 로 참여시켰으나, 이승우가 하루만에 배반하고 1895년 12월 4일에 의병 지휘부를 체포하고 말았다. 이로써 김복한과 이설, 이상린, 안병찬, 송병직, 홍건 등 6명이 체포되어 옥고를 치 렀다. 1896년 2월 25일(양력, 4월 7일) 고등재판소에서 이들을 판결하였는데, 김복한은 유배 10년, 이상린 안병찬 송병직 홍건은 징역 3년, 이설은 장60대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다 행히 고종의 특지로 전원 사면되었다. 이 중에 김복한과 이설의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김복한( 金 福 漢, 1860 1924)은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출신이다. 1892년 문과에 급제하 고 사헌부 지평, 형조참의, 성균관 대사성, 우부승지 등을 지냈다. 1894년 6월 일제의 침략 이 노골화되자 관직을 내던지고 1895년 11월 단발령 공포에 항일 의병을 봉기하였다. 1895 년 12월에 홍주관아를 점령하고 창의대장에 추대되었다. 그는 홍주부 관하 22개 군에 통문 을 띄워 의병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였으며 송병직 등을 소모장으로 임명하여 의병 모집을 독 려하였다. 정인희와 이세영에게 공주부 공격의 명령을 내리고 정제기에게는 대흥의 임존산 성의 수리를 명하였다. 그러나 의병에 참여하였던 관찰사 이승우가 뜻을 번복하고 김복한을 비롯하여 주도자 23명을 체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결국 김복한은 이설, 안병찬 등과 함께 1896년 1월에 서울로 압송되어 구속되었으며, 2월 25일에 유배 1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다행 히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늑결되자 그는 이설과 함께 상경하여 을사5적의 매국 행위를 성토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경무청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다음해 홍주의병이 일어나자 옥고의 후 유증으로 걸음걸이마저 어려운 몸이 되어 의병에 참전할 수는 없었으나 주위 인사들에게 의 병에 참전할 것을 권고하였다. 의병장 민종식이 지휘하는 홍주의병은 홍주성 전투에서 큰 희 생을 치르고 패산하였다. 김복한은 이때 민종식과 더불어 의병을 계획했다는 혐의로 일본군 에 체포되어 한성경무청에 구금되었다. 그해 11월말 풀려났으나, 다음 해 10월에 민심을 선 동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보령군에 구금되었다. 일본인 순검들은 그를 공주 감옥으로 이송 하는 도중 의병의 소재지를 대라며 구타하고 끝내는 총살시키려 하였다. 다행히 한인 순검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10월 22일에 풀려난 그는 12월에 홍성군 결성면 산수동에 은거하였으며, 1910년 8월 국망의 소식에 죄인으로 자처하였다. 그러나 1919년 거족적인 3.1 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고 민족대표에 유림계가 빠진 것을 알고 호서 지역의 유림과 곽종석 37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등 영남의 유림들과 함께 일제의 침략과 조선의 애족장을 호소하는 장서( 長 書 )를 작성하여 서명한 후 이를 파리의 강화회의에 발송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이 파리장서운동이 발 각되어 그해 7월 공주 감옥에 구속되어 7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불온문서 서명배포 죄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는 제자들에게 한학을 교육하면서 유교부식회의 설 립을 지도하다가 1924년 3월 한 많은 생을 마쳤다.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8) 이설( 李 偰, 1850 1906)은 충청남도 결성군 화산면에서 태어났다. 1895년 10월 일제의 명 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김복한 등과 함께 홍주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가 1896년 1월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장60 의 판결을 받았으나 국왕의 특지로 석방되었다. 1904년에 일본이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분개하여 전국에 격문을 돌리어 이를 반대하고 민 족의식을 고취하였다. 1905년 11월 일제가 무력으로 국왕과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조약을 강제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하자 이에 항거하여 일제를 규탄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일제 경찰 에 체포되어 한 때 투옥되었으나 석방되었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식음을 전폐한지 수십일 만에 1906년 4월 29일에 서거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충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 중기 의병장 중기의 충청의병으로는 1906년의 홍주의병이 있다. 의병장은 민종식으로 지휘부의 명단 을 보면 다음과 같다. <홍주 의병(중기) 지휘부> 대 장 : 민종식 군사장 : 김상덕 참모장 : 김광우, 조희수, 채광묵 중군장 : 정재호, 황영수, 이세영 유격장 : 채경도, 김광현, 윤상배, 이만식 좌군장 : 윤필구, 윤병일, 송순묵 후군장 : 정해두 서 기 : 문석환 운량관 : 성재두, 박제순 향 관 : 박윤식 좌익장 : 이상구, 김성진 우익장 : 신현두, 이봉규 28) 김상기, 김복한의 학통과 사상, 한국사연구 88, 1995 ; 김상기, 김복한의 홍주의병과 파리장서운동, 대동문화연구 39, 2001. 38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우군장 : 이병년, 이범구, 홍순대 소모장 : 지우범, 박두표, 최상집 신석휴, 김윤식 소모관 : 이만직 수문장 : 최선재 수성장 : 조병순 참 모 : 안병찬, 박창로, 안항식 신보균, 이용규 유병장 : 유준근 유병소향관 : 민정식 참모사 : 이식 돌격장 : 남계원(남규진), 안병림, 곽한일 홍주의병은 홍주성 전투에서 채광묵 등 3백여 명이 전사하는 등 희생이 컸던 의병이다. 체 포된 포로 중에서 서울로 압송된 인물이 78명이다. 이들 중에 민종식을 비롯하여 안병찬 곽한일 이용규 등의 행적을 살펴보기로 한다. 민종식( 閔 宗 植, 1861 1917)은 경기도 여주에서 판서 민영상( 閔 泳 商 )의 장남으로 태어나 1882년(고종 1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1895년 을미사변 후 벼슬을 버리고 충청남도 청양의 정산으로 이주하였다. 그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늑결되 자 항일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다. 그는 의병장에 추대되어 1906년 3월 15일(음력, 2월 21일)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에서 의병을 봉기하였다. 대장단을 세워 천제를 올리 고 이튿날 바로 홍주성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관군의 저항에 오히려 대장소마저 위태롭게 되 어 다시 마을 밖으로 나와 진을 쳤다. 의병은 화성의 합천 전투에서도 관군과 일본군의 공격 에 패산하였다. 민종식은 각지를 잠행하다가 5월 9일(음력, 4월 16일) 충청남도 홍산군 지티 에서 의병을 재기하였다. 민종식은 의병을 이끌고 서천, 비인, 남포를 거쳐 홍주에 도착하여 홍주성을 점령하였다. 홍주성에서 패주한 일본군이 공주 병력을 지원 받아 20일부터 홍주성 을 둘러싸고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의병부대가 이를 격퇴하였다. 몇 차례의 일본 경찰과 헌병 대의 공격에도 전세가 의병 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통감 이토는 주차군 사령관에게 군대 파 견을 명령하였다. 사령관 하세가와의 명령을 받은 보병 제60연대의 대대장 다나카( 田 中 ) 소 좌는 보병 2개 중대와 기병 반개 소대 그리고 전주 수비대 1개 소대를 거느리고 30일 홍주성 을 포위하여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였다. 이 전투에서 홍주성은 일본군에 의해 완전히 장악 되었으며, 참모장 채광묵 부자와 운량관 성재평과 전태진 서기환 전경호를 비롯하여 300 여 명이 학살되었다. 민종식은 성을 빠져나와 예산 이남규의 집에서 재기를 도모하였다. 민 39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종식은 처남인 이남규의 도움을 받아 11월 20일에 예산을 공격하여 활동의 근거지로 삼기로 뜻을 모았다. 그러나 일진회원의 밀고로 11월 17일 새벽에 일본 헌병 10여 명과 지방병 40여 명, 그리고 일진회원 수십 명의 습격을 당하여 곽한일 박윤식 이석락 등이 체포되었다. 이남규 이충구 부자도 함께 체포되어 온갖 악형을 당하였다. 민종식은 다행히 미리 공주로 피신하여 체포를 면했으나 결국 11월 20일에 체포되었다. 민종식은 체포된 후 12월 7일과 25 일에 모두 4차례의 심문을 받았는데 일본 경찰은 계속하여 궁중과의 관련을 추궁하였다. 이 에 대하여 민종식은 사실무근이라고 강하게 부인하였다. 민종식은 1907년 7월 2일 내란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으나 다음날 내각회의에서 종신유배형에 처해져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2월 순종의 즉위를 맞아 특사로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1963년 그의 공을 기려 대통령장 을 추서하였다. 29) 안병찬( 安 炳 瓚, 1854 1929)은 청양군 화성에서 안창식( 安 昌 植 )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5 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 사건이 발발하자, 충청도 방면에서 제일 먼저 의거의 깃발을 올 린 것은 충남 홍성에서였다. 그는 1895년 12월 1일에 채광묵과 함께 부친의 지시를 받고 향 병 180여 명을 이끌고 다음날인 12월 2일에 홍주성 입성하여 김복한을 의병총수로 추대하고 조양문 위에 홍주의병진의 기치를 높히 게양하였다. 그러나 이틀 후 관찰사 이승우의 배반으 로 그를 비롯한 23명이 체포되고 말았다. 그는 옥중에서 자결을 시도하여 인사불성에 이르 기까지 하였다. 임승주의 극진한 간호로 이튿날 깨어나 목에서 흐르는 피로 문종이에 혈시를 써서 관찰사에게 전하게 하였다. 그는 1896년 1월 17일 한성감옥에 구금되었으며 2월 25일 에 홍건, 송병직, 이상린과 함께 징역 3년을 선고받았으나, 고종의 특지로 석방되어 향리에 돌아와 재기를 위한 준비를 하였다. 1905년 결국 일제는 을사조약을 늑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정치를 강행하였 다. 이때 그는 왜놈들에게 대권이 옮겨져 있으니 비록 천장의 상소와 백장의 공문서를 올린 들 무슨 유익한 일이 있겠는가. 한갓 소용없는 빈말만 할진대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왜놈 하 나라도 죽이고 죽는 것만 못하다 라며 결연히 일제를 물리치기 위한 의병 투쟁을 재기하기 에 이르렀다. 그는 1906년 초부터 의병 봉기를 추진하였으며 정산에 거주하던 민종식을 총 수로 추대하고 3월 14일(음력, 2월 20일)에 광수장터(지금의 예산군 광시면)에서 봉기의 깃 발을 들었다. 부대 편성을 마친 홍주의진은 광시면 하장대리에서 천제를 지내고 홍주성 밖 29) 김상기, 1906년 홍주의병의 홍주성전투, 한국근현대사연구 37, 2006. 40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하우령에 유진하여 홍주성을 공격하였으나 관군과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득이 퇴거하여 청양군 화성면 산정리 합천에서 유진 중 일본군의 야습을 받았다. 대부분의 병력이 패산하고 박창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공주감옥에 구금된 그는 서울로 압송되었으나 다행히 임금의 특 지로 석방되었다. 그는 출감하자마자 2차 홍주의병에 참모사로 다시 참여하여 수백 명의 의 병이 산화한 홍주성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한 후 청양 지역에서 부대를 수습하 여 다시 기의하려다가 친일분자들의 밀고로 체포되어 수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그는 1919년 전 민족적인 3.1운동을 일어남에 김복한과 함께 유림들의 독립청원서인 파리장서에 서명하 였다. 이 일로 그해 6월 피검되어 공주감옥을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었으나 단식투쟁을 하는 등 뜻을 굽히지 않았으며 수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다. 정부에서는 그의 독립 운동의 공을 기려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곽한일( 郭 漢 一, 1869 1936)은 1906년 5월 남규진( 南 圭 振 )과 더불어 예산에서 기병하고 민종식 의진이 홍주성을 점령한 소식을 듣고 홍주의진에 합류하였다. 곽한일은 돌격장으로 임명되어 일본군과의 홍주성 전투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 새벽에 일본군의 대공세 로 홍주성이 함락되고 의진은 궤멸하고 말았다. 곽한일은 성을 탈출하여 예산 지방을 중심으 로 재기를 계획하였다. 그는 예산의 한곡( 閑 谷, 지금의 대술면 상항리)에 사는 전 참판 이남 규( 李 南 珪 )의 집에서 민종식을 대장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참모의 직임을 맡았다. 그러나 일 진회원에 밀고로 거사 계획이 일본 헌병대에 알려졌다. 10월 2일 새벽에 적의 기습을 받은 곽한일은 이남규 부자, 박윤식, 이용규, 이석낙( 李 錫 樂 )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공주 경 무청으로 압송되었다가 경성 평리원( 平 理 院 )으로 이감되어 문초를 받았다. 곽한일은 종신유 배형을 선고받고 전남 지도( 智 島 )에 유배되었다가 1912년에 풀려났다. 1913년 2월에는 독립 의군부( 獨 立 義 軍 府 )의 총무총장에 임명되어 재정 지원을 약속하고 온양 일대에서 모금을 계 획하였다. 그러나 이 계획이 발각되면서 체포되어 1913년 8월 13일 경성지방법원에서 1년 6 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출옥 후에도 군자금 모집에 주력하다가 1914년에 체포되 어 유배 생활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 장을 추서하였다. 이용규( 李 容 珪, 1859?)는 충남의 부여 출신으로 1906년 3월 15일에 매부인 민종식이 예 산의 광시에서 홍주의병을 일으킬 때 안병찬 등과 함께 의병진 편성의 주도적 역할을 담당 하였다. 홍주의병은 다음날 청양의 합천 전투에서 관군에게 패하고 안병찬 등이 체포되기에 41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이르렀다. 이용규는 이때 체포를 피해 전주 진안 용담 장수 등 전북 지역에서 의병을 모 집하였다. 그는 여산에서 의진을 결성하고 부여의 지티에서 민종식을 대장에 재추대하였다. 그는 참모사가 되어 의병의 홍주성 점령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5월 31일에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으로 홍주성이 함락당하자 탈출하여 다시 청양의 추티에서 의병을 수습하여 400명의 병력으로 부여 노성을 지나 연산에 이르러 왜병과 교전하였다. 이용규의 활약상 에 놀란 일본군은 그의 거처를 확인하기 위해 6월 17일에 그의 아내 박씨와 어린 아들 성문 ( 星 文 )을 칼로 찌르고 고문을 자행하여 그의 아들은 끝내 사망하였다. 그는 예산의 이남규( 李 南 珪 ) 집에서 재거를 계획하였다. 거사 일을 10월 5일로 정하고, 일단 민종식을 성우영( 成 佑 永 )의 집으로 피신시키고 예산 관아를 습격할 구체적인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10월 2일 에 일진회원의 밀고로 계획이 드러나 김가진( 金 嘉 鎭 )이 이끄는 관군에게 포위되어 이남규 부 자 곽한일( 郭 漢 一 ) 등과 함께 체포되었다. 그는 1907년 2월 평리원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며, 같은 해 7월 2일에 평리원 고등재판소에서 감 1등되어 내란죄 로 종신유배형을 선 고받아 지도( 智 島 )에 유배되었다가 같은 해 11월에 특사로 풀려났다. 1911년 10월에는 옥천 에서 전 승지 노병직( 盧 秉 稷 ) 전 참의 장남기( 張 南 基 ) 송순태( 宋 舜 台 ) 등과 의병을 일으킬 논의를 하였으나 1912년 4월에 밀고에 의해 30명이 함께 잡혔다가 같은 해 8월에 풀려났다. 그 뒤에도 계속 의병운동을 전개하다가 1917년 4월에 잡혀 통영 욕지도로 유배되었다. 1918 년 12월 파리강화회담에 보낼 자료를 준비하던 중 예심원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뒤 1919년 한성임시정부 수립에 참가하여 충청남도 대의사( 大 義 士 )가 되었으며, 서울시민에게 보내는 취지문을 인쇄하여 배포하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이 일로 경성지검에서 12월 19일 징역 10월 형을 구형받았으나 1920년 3월 5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원 판결을 취소하고 무죄를 선고하여 풀려났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3 후기 의병장 1907년 군대 해산 이후 충청 지역에서의 후기 의병은 전 중기 의병에서 보여 준 관료와 지방 유생 중심의 의병이 아닌 일반 평민 중심의 성격으로 바뀌어 갔다. 이는 1906년 5월의 홍주성 전투에서 큰 희생이 있었고, 양반 유생으로 이루어졌던 지휘부 인사들이 대거 희생되 고 체포된 이유도 있었으며,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부대를 독자적으로 편성하거나 의병대에 42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참여하면서 나타난 특성이기도 하였다. 충청 지역 의병 중에 판결문이 남아 있는 이들의 인 적 사항을 보면 다음 표 1 과 같다. 표 1 충청 지역의 후기 의병장 현황 순번 이 름 출신 거주지 직업 신분 활동 부대 활동 장소 활동 내용 비고(형량) 1 강덕보 공주 농업 이관도 부대 공주 군자금 모집 징15년 2 강수원 영춘 이강년 부대 영춘 일 순사 처단 징15년 3 김경문 괴산 상업 병천 군자금 모집 징10년 4 김낙진 (김낙선) 부안 연산 유7년 5 김동운 영춘 김상태 부대 영춘 밀정 처단 징15년 6 김득수 연산 유10년 7 김말출 연산 이봉백 부대 순흥 군자금 모집 징5년 8 김명심 청주 농업 한봉수 부대 청주 보은 밀정 처단 징15년 9 김법윤 전주 상업 공주 군자금 모집 교수형 10 김보령 장석홍 부대 남포 군자금 모집 징5년 11 김상태 단양 이강년 부대 단양 일군과 교전 교수형 12 김성구 강릉 정봉준 부대 음성 보은 일군과 교전 유15년 13 김성환 청주 서당훈장 청주 항일 의식 고취 금고1월 14 김수동 영춘 농업 이강년 부대 단양 영춘 밀정 처단 교수형 15 김쌍봉 해미 해미 밀정 처단 교수형 16 김용현 이강년 부대 제천 태80대 17 김재성 보은 서당훈장 김재성 보은 일본인 살해 교수형 18 김제환 청주 서당훈장 청주 항일 의식 고취 금고1월 19 김춘삼 청풍 농업 조동규 부대 군사 충주 일군교전 군자금모집 유10년 20 김현규 대흥 농업 민창식 부대 대흥 군자금 모집 취소 21 김황간 선산 농업 황간 상주 군자금 모집 징5년 22 김흥용 홍주 설인도 부대 청양 홍주 군자금 모집 종신형 23 맹의섭 보은 농업 보은 의병 모의 징3월 24 박경삼 석성 무직 금산 군자금 모집 교수형 25 박득용 제천 농업 이강년 부대 제천 영춘 군자금 모집 유5년(사면) 26 박일복 남포 상업 신도여 부대 홍산 밀정 처단 교수형 27 박정문 남포 잡화상 박일복 부대 부여 정산 의병 참여 징10년 28 박치량 청주 보은 군자금 모집 징7년 43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29 배창근 청주 청주진위대 하사 청안 군자금 모집 징7년 30 백남충 청양 농업 신여도 부대 임천 군자금 모집 징5년 31 성정모 회덕 농업 이석재 부대 남포 공주 군자금 모집 징7년 32 손명선 대구 정봉준 부대 음성 일군과 교전 유10년 33 손응현 당진 농업 정주원 부대 당진 군자금 모집 징5년 34 송헌준 청주 이발업 김형백 부대 청주 군자금 모집 징2년6월 35 신순중 당진 농업 정주원 부대 분대장 해미 군자금 모집 징15년 36 양치선 청주 농업 오양선 부대 보령 주재소 방화 징10년 37 염만순 보은 농업 보은 군자금 모집 종신형 38 우상옥 충주 농업 정봉준 부대 충주 총포 수리 유15년 39 원화상 음성 상업 방인관 부대 진천 충주 총기 소란 징3년 40 유덕삼 영춘 농업 영춘 문경 군자금 모집, 일진회원 처단 교수형 41 윤순채 청주 한봉수 부대 청주 군자금 모집 유10년 42 이강년 문경 무관 이강년 부대 제천, 충주 일군과 교전 교수형 43 이기석 청주 청주진위대 배창근 부대 청안 일군 처단 교수형 44 이덕경 공주 상업 공주 군자금 모집 교수형 45 이만봉 청주 농업 유덕삼 부대 청주 보은 군자금 모집 징5년 46 이명선 연산 연산 군자금 모집 징10년 47 이상곤 보은 농업 보은 의병 모의 징2월 48 이상덕 태안 정주원 부대 당진 일군과 교전 징15년 49 이성택 남포 신여도 부대 남포 일군과 교전 징10년 50 이양삼 연기 김순오 부대 군자금 모집 유죄 51 이용업 영춘 농업(포군) 이강년 부대 단양 제천 충주 일군과 교전 52 이원오 공주 상업 조경환 부대 공주 귀순 기각 징5년 53 이용운 연풍 청주진위대 배창근 부대 충주 군자금 모집 징5년 54 이일봉 보령 장석홍 부대 남포 일군과 교전 징5년 55 이자성 여산 한봉수 부대 보은 유10년 56 이정구 목천 농업 한봉수 부대 청주 일군처단, 총기탈취 종신형 57 이종칠 청주 한봉수 부대 청주 일군 처단 징5년 58 이춘성 공주 부상 부여 군자금 모집, 주재소 습격 교수형 59 이필봉 홍주 오양선 부대 홍주 일진회원 처단 종신형 60 이 홍 남포 장석홍 부대 남포 일군과 교전 징5년 61 장석홍 남포 장석홍 부대 남포 일군과 교전 징7년 62 장윤삼 진천 농업 이병필 부대 진천 밀정 처단 교수형 63 장인식 단양 농업 이강년 부대 영춘 일군과 교전 유3년 64 정시항 충주 정봉준 부대 음성 일군과 교전 유15년 44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65 정용운 보령 오양선 부대 보령 일군과 교전 징3년 66 정운기 괴산 측량사 괴산 의병 모의 징5년 67 정주원 당진 양반 정주원 부대 당진, 경기 일본군 공격, 관아점령 종신형 68 정중택 제천 시위대병사 이강년 부대 영춘 단양 일군교전 군자금모집 유10년 69 정춘서 청주 청주 강도 살인교사 교수형 70 조봉선 음성 전병현 부대 십장 충주 음죽 총기 휴대 유7년 71 조성윤 이강년 부대 제천 태80대 72 조운식 상주 한봉수 부대 보은 일군과 교전 교수형 73 진근선 영동 농업 황간상주 총기 휴대 종신형 74 최대옥 청풍 농업 청풍 군자금 모집 징5년 75 최명기 충주 농업 청주 군자금 모집 징5년 76 최성천 충주 광부 김상태 부대 단양 청풍 군자금 모집 교수형 77 최성필 포군 허열 부대 연산 군수품 모집 유7년 78 최순돌 면천 어물상 오양선 부대 보령 군자금 모집 징7년 79 한봉수 청주 상등병 무직 김규환 부대 한봉수 부대 청주 진천 괴산 일군, 밀정 처단 교수형 (면소) 80 한치순 회덕 무직 김기수 부대 공주 군자금 모집 징7년 81 황경문 청풍 무직 이강년 부대 충주 일군과 교전 태100대 82 황덕화 황간 무직 신명선 부대 금산 군자금 모집 징10년 표 1 은 비록 재판 기록이라는 제한성은 있으나, 의병의 봉기 현황과 의병 주체의 직업과 신 분, 그리고 활동상의 특징 등 후기 충남 의병의 성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이다. 우선 모두 82명의 의병 중에서 이강년과 정주원, 그리고 김제환 김성환 김운로 정도가 양반으로 보 인다. 그 외의 인물의 신분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직업이 표시된 50명의 현황을 보면 주로 농업(25명), 상업(9명), 해산 군인(6명), 그리고 측량사, 이발업, 광업 등으로 보아 대 부분 평민들로 생각된다. 충청 의병의 경우에도 군대 해산 이후 의병은 전기, 중기 의병에서 김복한, 민종식, 유인석과 같이 당대 최고의 유학자 또는 당상관 이상의 고위 관직을 지낸 인물들이 거의했던 상황과 성격이 판이하게 다름을 알 수 있다. 또한 의병들이 1907년 7 8월 직후 봉기하여 1910년 초에는 대부분 소멸되는 것으로 보인다. 김운로, 이상곤, 정운기 3명이 1914년 8월에 활동한 것은 3명이 이때 의병 봉기를 공모하다 가 체포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김제환, 김성환 형제의 1913년의 활동은 서당 훈 장으로 있으면서 학생들에게 항일의식을 고취하여 체포된 것이다. 의병들의 활동 사항을 보 면 주로 군자금 모집인 것을 알 수 있다. 그 외에 밀정이나 일진회원 처단 등의 활동이 있으 45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며, 일본군과의 전투 행위는 많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후기 충청 의병은 평민 중심 으로 소규모의 항일 유격대를 편성하였으며, 일본군과의 전면전보다는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면서 동시에 일진회원이나 밀정과 같은 친일 세력을 처단하는 활동을 주로 한 것으로 보인 다. 이는 충청 의병의 투쟁 방법의 변화라기 보다는 일본군의 탄압으로 의병 활동이 위축된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1910년 이후에는 충청 지역에서 그러한 활동마저도 찾아보기가 어 렵다. 충청 지역에서의 후기 의병 중에 이강년을 비롯한 활동이 두드러진 인물들의 행적을 소개 하기로 한다. 이강년( 李 康 年, 1858 1908)은 경북 문경 출신으로, 8척 장신으로 병서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는 1880년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활동하였으나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나 정국이 혼란하자 사직하고 낙향하였다. 1895년 을미사변과 단발령이 공포되고 유인석이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듣고 1896년 1월에 문경에서 의병을 봉기하였다. 거의( 擧 義 ) 직후 안동 의병에 쫓겨 도망 중이던 안동관찰사 김석중( 金 奭 中 )과 순검 이호윤( 李 浩 允 ) 김인담 ( 金 仁 覃 )을 체포하여 문경의 농암 장터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효수하였다. 이어 제천으로 유 인석을 찾아가 문인이 되고, 제천의병의 유격장으로서 수안보의 일본군 병참부대를 공격하 는 등 충주, 문경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그 해 5월 제천의병이 장기렴( 張 基 濂 )이 거느린 관군 과의 전투에서 패해 유인석이 압록강을 건너 서간도로 가자 의병을 해산하고 단양 금채동에 서 노모를 모시고 은신하였다. 1907년 4월에 일제의 침략이 노골화하자 을미의병의 동지였던 안성해( 安 成 海 ) 등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다시 일으켰다. 그해 8월에 고종이 강제로 퇴위하고 정미7조약으로 한국군 대가 해산당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원주진위대를 이끌고 봉기한 해산군인 민긍호 부대와 연 합하여 원주의 배향산에 진을 쳤다. 고종은 이 소식을 듣고 그에게 밀조( 密 詔 )를 내려 도체찰 사의 직을 하사하였다. 그는 민긍호 부대와 함께 제천에서 일본군 소대 병력을 격파하였다. 제천 전투 후인 1907년 8월에는 김상태 등 40여 의병들에 의해 제천의 의림지에서 도창의 대장에 추대되고, 김상태를 중군장, 우군장에 이중봉, 우선봉장에 백남규, 좌군장에 이용로, 좌선봉장에 하한서, 전군장에 윤기영, 감군장에 이세영 등을 임명하여 의진을 편성하였다. 의병대는 9월 10일 문경의 갈평 전투에서 적의 시체가 산과 들에 가득 찼다 고 할 정도로 대 승을 거두었다. 9월 16일에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 10월 23일 46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에는 백자동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이 해 12월에 전국의 의병들이 서울 탈환을 위해 양주에 집결해 이인영을 대장으로 한 13도창의대진소를 편성하자, 호서창의대장( 湖 西 倡 義 大 將 )으로 참여하였다. 그는 1908년 봄부터 의병들을 독려하여 가평 용소동 전투를 비롯해 대청리 전 투, 포천의 청계 전투, 인제의 백담사 전투, 안동의 서벽 전투 등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대담 한 유격전으로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지휘를 받는 의병들은 엄격한 군율로 기강이 서 있었 고 지역 지리에 밝았으며 지방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1908년 7월 2일에 제 천 금수산의 작성( 鵲 城 )에서 일본군과의 격전 중에 발목에 총알을 맞고 붙잡혔다. 수원의 일 본수비대에 구류되었다가 같은 해 7월 8일에 서울의 일본군 헌병사령부로 압송되었다. 이곳 에서 다시 평리원으로 옮겨져 9월 22일에 내란죄 로 교수형을 선고받고 그해 10월 순국하였 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30) 김상태( 金 尙 台, 1864 1912)는 단양의 영풍 출신으로 본관이 삼척이다. 1895년 을미사변 과 단발령 공포에 항거하여 1896년 이강년이 문경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중군장( 中 軍 將 )으로 활약하였다. 이강년이 유인석의 제천의병에 가담하자 그를 따라 항일전을 수행하였다. 유인 석이 제천 전투에서 패한 뒤 서간도로 들어가자 이강년을 따라 고향에서 은거하였다. 1907 년에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자 정운경과 함께 제천에서 의병을 일으켜 이강년 의진과 합세하였다. 제천의 의림지에서 이강년을 도창의대장에 추대하고 자신은 중군장을 맡았다. 이때 이중봉이 우군장, 백남규가 우선봉장, 이용로가 좌군장, 하한서가 좌선봉장, 윤기영이 전군장이 되었다. 의병대는 9월 10일에 문경의 갈평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9월 16일에 는 싸릿재, 9월 27일에는 죽령, 10월 5일에는 고리평, 10월 23일에는 백자동 전투에서 큰 전 과를 올렸다. 그는 1908년에도 중군장으로 의병들을 독려하여 가평 용소동 전투를 비롯해 대청리 전투, 포천의 청계 전투, 인제의 백담사 전투, 안동의 서벽 전투 등에서 일본군과의 교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1908년 7월에 이강년이 체포되자 그는 대장이 되어 단양을 비롯한 소백산 일대에서 유격전을 전개하였으며 일본 헌병과 교전한 것이 10여 회에 달하였 다. 1909년 3월에는 단양군내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살하기도 하였다. 총독 부는 그에게 상금 5백금을 내걸었고, 결국 돈에 눈이 먼 종사 우중수( 禹 中 守 )의 고발로, 1911 년 5월에 순흥 남목리에서 체포되어 대구경찰서로 압송되었다. 3차에 걸친 심문 끝에 1911 30) 운강선생의일록( 雲 岡 先 生 義 日 錄 ) ; 김의환, 항일의병장열전, 정음사, 1975 ; 윤병석, 한말의병장열전, 독립기념관, 1991 ; 김상기, 보병14연대 진중일지 를 통해 본 이강년 의진의 활동, 지역문화연구 9, 세명대 지역문화연구소, 2010. 47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년 대구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의분을 참지 못한 그는 순경의 칼을 빼앗아 자 결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옥중에서 일본 놈의 욕을 보느니 차라리 자살 하겠다 고 결심하고 단식하여 1912년 7월 28일 옥중에서 순절하였다.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이강년의 무덤 곁에 반장( 返 葬 )되었다가 제천시의 의병묘역성역화계획 에 의해 제천시 고암 동 의병골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 서하였다. 최성천( 崔 聖 天, 1885 1910)은 충북 충주 신기리의 광부 출신이다. 1908년 김상태 의진에 가담하여 단양 청풍 등지에서 활동하였고, 봉화에서 체포되었다가 탈출한 후 경북 예천 봉화 등지에서 활약하였다. 최성천은 김상태 의진에 1908년 6월경부터 참여하여 활동하였 다. 그는 이듬해 3월 김상태 의병장과 더불어 단양군 순사주재소를 습격하여 순사 2명을 사 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같은 해 8월 25일에는 경북 봉화군 물야면 개단리에서 일본군 수비 대의 밀정 권흑이( 權 黑 伊 )의 밀고로 체포되었다가 탈출하여 같은 달 30일 권흑이를 처단하 기도 하였다. 이후 일제의 의병 탄압이 가열되자 최성천은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하는 소부대 유격전으로 맞서기 위해 김상태 의병장과 함께 소백산으로 들어가 활동하였다. 이 때 김상태 의병장이 소부대 유격전에 맞게 의진을 분진하였으므로 최성천은 의병장이 되어 10명~20명 정도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소백산을 근거지로 대일 항전을 지속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그 는 의병부대를 이끌고 1910년 1월 2일 경북 봉화군 물야면 서리에서, 2월 6일에는 수곡리에 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같은 해 3월 26일에는 20여 명의 의병부대를 이끌고 경북 예 천군 왕천( 汪 川 ) 시장에서 군수금품을 징발하는 한편 일본인 야마우치( 山 內 銀 三 郞 )를 처단하 였다. 그러나 1910년 4월 한명선( 韓 明 善 )과 함께 일본군에 체포되어 1910년 11월 12일 대구 지방법원에서 재물탈취강도죄 로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 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한봉수( 韓 鳳 洙, 1884 1972)는 충북 청원군 북일면 세교리 출신이다. 1907년 9월경 해산 군인 김규환( 金 奎 煥 )을 만나 감화를 받고 함께 국권을 회복하고자 의병에 가담하였다. 그는 청주 세교장( 細 橋 場 )에서 기의하여 해산 군인 100여 명을 규합하여 대장으로 추대되었다. 9 월 15일에는 미원에서 일본군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으며, 10월 28일에는 문의군을 습격하 여 군수를 처단하였다. 1908년 1월에는 청주의 교자동에서 일진회원 김홍식을 처단하였으 48
3. 충청 지역의 의병 활동 며, 이후 군자금을 모금하는 한편으로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을 계속하였다. 그해 5~6월경에 는 속리산에서 수비대와 격전을 벌였는데, 6월 29일에는 괴산군 서면에서 우편물을 호위하 던 일본군을 공격하여 그 중 일본 헌병대위 시마자키( 島 崎 善 治 )를 사살하고 수송되던 세금을 군자금으로 확보하였다. 10월 1일에는 미원 헌병분견소 대원들과 격전을 벌이고 헌병보조 원 정태헌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후 전의 목천 평택 여주 횡성 문경 등지에서 일본군 과 30여 회의 격전을 치르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한편 그는 괴산의 김규환, 보은의 노병대 ( 盧 炳 大 ), 상주의 조운식( 趙 雲 植 ) 의병 등과 연합하면서 일본군을 습격하여 전과를 올렸다. 그 뒤 상해로 건너갈 생각으로 서울 선교사 집에 숨어서 기회를 노리다가 남대문역에서 일본 경찰에게 붙잡혔다. 1910년 6월 29일 공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폭도 강탈 살인 의 죄목으 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경성공소원에 항소하였으며 1910년 8월 29일에 이른바 합방대사 령( 合 邦 大 赦 令 ) 을 받아 면소 판결되어 석방되었다. 1919년에는 고종 황제의 국장에 즈음하 여 상경하였다가 귀향하여 3월 7일에 청주의 서문장터(우시장)입구 마차 위에서 이태우( 李 太 雨 ) 임봉수( 林 鳳 洙 ) 등과 함께 선언서를 살포하고 장꾼들과 함께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다. 4월 1일에는 북일면 세교리 구시장에서 다시 만세 시위를 벌였으며, 다음날에는 내수보통학 교 학생 80여 명과 같이 만세시위운동을 벌이다가 일경에게 체포되었다. 1919년 5월 6일 공 주지방법원 청주지청에서 징역 1년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 리어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31) 정주원( 鄭 周 源, 1870 1925)은 당진의 고대면 용두리에서 양반으로 태어나 어려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그가 육군 장교였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으나, 고종 황제가 강제로 폐위되고 구한국 군인이 강제로 해산된 직후인 1907년 8월 죽산(지금의 경기 안성군 이죽면 죽산리)에 서 의병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서용범( 徐 用 凡 )의 권유를 받고 그 부대에 가입하여 부장으로 100 150명을 인솔하며 일본군 수비대를 격파하였다. 그는 용인군 굴암 등지에서 의병을 초 모하고 경기도 죽산 양지 수원 안성 지역과 충청도 당진 서산 등지를 배로 이동하면서 활동하였다. 1907년 8월 25일 안성에서의 초모 모임에 참석하고, 8월 29일에 일본군과 교 전하였다. 25일 이후는 주로 죽산과 양지 지역에서 활동을 계속하였는데, 한진에서 배를 타 고 고온포에 건너가 충청도의 당진과 서산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정주원 부대는 당진분파소 31) 독립운동사 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2 ; 독립운동사자료집 별집 1, 편찬위원회, 1974. 49
중부 지역의 의병 전쟁과 의병장 를 습격하여 물품을 탈취하였다. 일본 경찰은 이들이 배를 타고 어디론가 도주했다고 보고하 고 있다. 계속해서 정주원은 충청, 경기 지역의 의병을 불러모아 연합 의병을 조직하고 일본 경찰서를 공격했으며, 우편배달부를 공격하는 등의 활동과 함께 일진회원을 비롯한 친일 세 력과 의병 고발자들을 처단하였다. 당진군 상대면의 심사성( 沈 士 聖 ) 처단 건은 대표적인 일 이었다. 정주원은 이를 시장에 광고하여 경각심을 심어주기도 하였다. 정주원은 각 면의 면 장에게 통고하여 결전( 結 錢 )을 일본인에게 상납하지 말 것을 요구하였다. 아울러 순행하는 의병들에게 보조금을 주어 일인에게 포살되는 농민이 있는 것을 알았음도 밝혔다. 32) 1908년 음력 2월 다시 안성과 양지 죽산 등지로 옮겨 활동하였다. 정주원 부대는 일본군의 추격을 받던 중 3월 31일 오전 5시 40분경 죽산군 원삼면 능촌에서 숙영하는 일본군 이천수비대와 경찰대 연합대를 공격하였다. 정주원 부대는 6월 15일에 서산의 동음암면 송내리에서 일본 인 체신부 아라키( 荒 木 臺 藏 )를 죽이고 천의를 지나 16일에는 오후 8시경에 면천군 감천면 삼 화리 이장의 기와집과 쌀 7석을 방화하였다. 이어서 당진군 읍내에 들어가 순사 전재길 집의 가구를 파괴하고 군아의 부속 건물에 방화하는 등 17일 오전 5시경까지 당진군을 점령하였다. 그러나 정주원은 결국 7월 19일 성환수비대에 의해 체포되고 말았다. 7월 17일 오후 3시 반경 아산의 서방 약 40리에 있는 행해도(지금의 행담도) 부근에서 성환수비대 소속 미조타 ( 溝 田 ) 중위가 인솔하는 일본군과 교전하였다. 정주원은 일본군과의 해상 교전 이틀 뒤인 7 월 19일 아침 8시경 추격해 온 일본수비대에 의해 해미군 적서촌(지금의 당진군 대호지면 적 서리)에서 부하인 이상덕과 함께 체포된 것으로 보인다. 정주원은 체포 당시 당진의 대호지 면의 차숙보의 집에 기거하였다 한다. 그는 대호지의 대성인 차씨 문중의 보호를 받으며 당 진포 건너의 천연 요새지인 적서리 방구바위( 防 寇 巖 ) 산록에서 부대 훈련을 시켰는데 일본군 에게 체포된 의병의 안내를 받은 일본군에 의해 소대장 이상덕과 함께 체포되었다는 것이다. 정주원은 1908년 9월 29일 경기지방재판소에서 교수형을 선고받았으나 그해 11월 24일 경성공소원에서 종신형으로 감해졌다. 그 사유는 그를 내란죄의 수범으로 오인 했으나 내란 죄의 종범 에 해당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석방 후 당진군 하대면 용두리에서 농사를 짓다 가 1925년에 사망하였는데, 그의 묘는 당진군 송악면 가학리 당현 후록에 있다. 정부에서는 정주원에게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여 공을 기렸다. 33) 32) 홍비수제122-1호(융희 2년 3월 1일), 暴 徒 ノ 貼 紙 ニ 關 スル 件 부속 문서 < 各 面 面 長 ニ 廣 告 ス> (국가기록원 소장본), 폭도에 관한 편책 33) 김상기, 한말 정주원의병의 항일투쟁, 충청문화연구 1, 2008.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