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위안부 기술은 아예 사라지고! 일본군 위안부 는 만주사변 이후부터 아시아태평양전쟁 시기까지 일본 군인들의 성적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강제로 연행되어 성노예 생활을 한 여성들을 말한다. 이미 유엔인권위원회 등 국제 사회가 반인륜적인 범죄로 인정하였으나 오히려 일본은 우익의 교과서 공격 등 우경화 현상이 심해 지면서 90년대 교과서 대부분에 수록되었던 것이 우익교과서 등장 이후 관련 내용의 기술이 삭제 되었다. 대동아전쟁(태평양전쟁)으로 전국이 악화되자 국내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다수의 학생 들이 근로동원되고 미혼여성은 여자정신대로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조선반도와 대만에 서는 전쟁말기에는 징병과 징용도 적용되어, 현지 사람들에게 여러모로 희생을 강요했다. (2011년 지유샤 역사 시판본 234쪽) 전쟁 말기에는 조선이나 타이완에서도 징병이나 징용이 적용되어 사람들에게 고통을 강요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광산 등에 끌려와 혹독한 노동을 강요당한 조선인이나 중국인도 있었습니다. (2011년 이쿠호샤 역사 시판본 218~219쪽) 위안부 가 된 것은 주로 조선인 여성이나 중국인 여성이었습니다. 일본의 식민지였던 조선 여성의 경우는 조선 국내에서 일거리가 있다는 말에 속아 먼 전쟁터로 끌려간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일본군은 위안소의 설치, 관리, 통제, 위안부 의 모집, 수송에 관여하였고 위안부 제도는 일본의 군대와 국가가 모두 관련된 여성에 대한 전쟁 범죄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래를 여는 역사 156~157쪽)
오키나와 집단자결은 미군 때문에?! 오키나와 전투는 일본 남단인 오키나와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의 막바지에 최대 규모로 일본군과 미군이 싸운 전투로 이 전투를 통해 약 20만명이 희생되었으며, 조선인도 1만여명이나 이 지역으로 강제동원되었다. 1945년 3월 일본군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주는 등 집단자살을 강요해 800여 명의 주민들이 집단으로 서로를 죽이고 자살하게 하였다. 일본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일본군의 강요에 의한 오키나와 집단자결이 있었다고 기술했으나, 2007년 3월 문부과학성은 이 부분을 삭제하도록 지시하였다. 더욱이 2011년 검정통과한 중학교 교과서에는 오키나와 집단자결을 미군의 책임으로 전가하는 기술을 하는 등 전쟁책임을 회피하고, 진실을 왜곡 하고 있다. 미군이 상륙하는 가운데, (막다른 골목에) 몰린 주민이 가족단위로 집단자결하는 비극이 일어 났습니다. (2011년 지유샤 역사 시판본 238쪽, 칼럼) 미군의 맹공으로 도망갈 곳을 잃어 집단자결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2011년 이쿠호샤 역사 시판본 219쪽) 민간 사망자들 중에는 전투에 휘말려 사망한 사람뿐 아니라 군대의 군민공사( 軍 民 共 死 ) 사상에 따라 집단자결 로 내몰려진 결과 초래된 사망자나, 스파이 의혹을 받고 살해된 경우, 또한 피난해 있던 참호에서 일본 군대에게 내쫓겨 나온 사망자가 수없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래를 여는 역사 178~179쪽)
아시아침략전쟁 이 해방전쟁 이라니! 일본에 의한 침략전쟁은 일본인 3백만명, 아시아인 2,000여만명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이들은 이러한 전쟁에 대한 책임을 지기는커녕, 아시아해방전쟁 으로 사실을 왜곡하거나, 대동아전쟁 등으로 미화하였다. 일본은 패전이 짙은 1944년 이후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 특공대와 인간어뢰 가이텐을 통해 3,500여명 이상의 무고한 젊은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이러한 전쟁 범죄 사실을 아시아 국가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주었다고 사실을 왜곡 미화하고 있다. 첫 전투에서의 일본의 승리는 동남아시아와 인도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꿈과 희망을 주었다. 일본군의 파죽지세의 진격은 현지 사람들의 협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위_ 박스글> 백인에게는 이길 수 없다고 포기했던 아시아 민족에게 경의로운 감동과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아래_ 박스글>일본을 해방군으로 환영한 인도네시아의 사람들 (2011년 지유샤 역사 시판본 232~233쪽) 전쟁 초기의 우리나라(일본)의 승리는 동남아시 아나 인도 사람들에게 독립에 대한 희망을 주었 습니다. 오랫동안 동남아시아를 식민지로서 지배 하던 구미제국의 군대는 개전한 지 반년 만에 대부분이 일본군에 의해 격파되었습니다. (2011년 이쿠호샤 역사 시판본 216쪽) 미래를 여는 역사 에서는 침략 전쟁과 민중의 피해 라는 별도의 장을 두어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와 침략 전쟁, 아시아 민중들의 저항, 전쟁으로 인한 피해 등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또한 일본이 대동아 공영권, 대동아 전쟁 등으로 전쟁을 미화하고 있는 사실에 대한 본질을 기술하였다. (미래를 여는 역사 128~194쪽)
한국이 독도를 불법점거?! 교과서 집필의 기준이 되는 학습지도요령해설서 에 독도(일본명 : 다케시마) 영유권을 기술하게 하여 역사, 지리, 공민 사회과 전반에 확대 서술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는 명백히 사실 왜곡에 일본 정부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주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일본정부는 영유권 문제에 대해 자신들이 점령하지 못한 곳은 영토분쟁이며 자신들이 점령한 곳은 다른 나라의 부당한 영유권 주장이라고 비판하는 이중적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일본정부는 작년에 이어 올해 중학교 교과서에도 영토문제를 교과서에 기술하여 노골적으로 갈등을 부추키고 있다. 학계에서도 정리되지 못한 문제를 교과서에 끌어들이고 교과서문제를 정치도구화 하는 일은 결코 한일 양국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1954년부터 한국에 의한 다케시마 점거는 국제 법상 어떤 근거도 없이 이루어진 불법점거 이며, 우리나라는 엄중히 계속해서 항의 하고 있습 니다.<외무성 웹사이트에서 인용> (2011년 이쿠호샤 공민 시판본 157쪽, 지도) 우리나라에는 북방영토문제, 다케시마문제 두 개의 중대한 영토문제가 있고, 모두 역사적으로도 국제법적으로도 우리나라 고유의 영토이지만, 러시아와 한국이 불법으로 각각 점거하고 있습 니다. (2011년 지유샤 공민 시판본 145쪽) 다케시마 한국이 점령중 전후에 일본영토를 확정한 국제법인 샌프란시스 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영토라고 확인되었다. (한국정부는) 1954년에는 연안경비대를 파견하고, 다케시마를 실력으로 점거했다. 현재도 경비대원을 상주시켜, 실력지배를 강화하고 있다.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1954년 이래 국제사법 재판소에 위탁할 것을 제안하고 있지만, 한국 정부는 응하지 않고 있다. (2011년 지유샤 공민 시판본 149쪽, 칼럼) 일본해상의 다케시마는 한국이 그 영유를 주장하고 지배하고 있습 니다. 그러나 이들 영토는 역사 적으로도 국제법상으로도 일본의 고유 영토입니다. (2011년 이쿠호샤 공민 시판본 157쪽)
난징대학살은 허구?! 난징대학살은 1937년 12월 일본군이 중국의 수도 난징을 점령한 후 죄 없는 군민에게 학살, 방화, 강간, 약탈 등을 자행한 사건을 말한다. 1946년 중국 난징에서 열린 일본 전범 군사 재판 판결문 에 따르면 일본군이 점령한 6주 동안 살해한 주민과 포로가 20만명이 넘었으며, 전체 희생자는 30만명에 이른다고 한다. 일본군은 2만여명의 여성들을 강간하였으며 부녀자 폭행, 약탈, 방화를 일삼았으며, 난징의 곳곳을 다니면서 살인을 게임하듯이 함부로 저질렀다. 하지만 일본의 교과서들은 이와 관련한 내용을 의도적으로 은폐 또는 축소하고 있다. 난징 점령 때에 일본군에 의해 중국 군민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난징사건). (2011년 지유샤 역사 시판본 225쪽) 이 때 일본군에 의해 중국 군민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난징사건). 이 사건의 희생자 수 등의 실태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가 있고,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2011년 이쿠호샤 역사 시판본 209쪽) 일본군은 체포한 중국 군민을 양자강 강변과 난징 교외로 내몰아 집단 학살하였습니다. 이와 함께 난징의 거리와 골목 주택 사원 촌락 등지에서 함부로 살인을 저질렀습니다. (미래를 여는 역사 151쪽) 미래를 여는 역사 에서는 난징대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일본군이 난징에서 저지른 사건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면서, 일본군이 남긴 일기와 당시 사진 등을 실었다.
임나일본부설을 아직도 쓰다니! 임나( 任 那 )는 낙동강 서쪽의 가야의 땅을 이르는 말로 임나일본부설은 야마토정권이 임나일본부 를 설치하여 4세기 중엽부터 가야가 신라에 의해 멸망하기까지 200년간을 지배했다는 것을 말한다. 일본의 역사왜곡 교과서들은 일본서기 에 신공왕후가 보낸 왜군이 369년 한반도로 건너와 가야 7국을 점령했다는 기록을 근거로 교과서에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한일역사공동연구위원회가 공동 연구한 결과, 역사적 실체가 부정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논리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야마토 조정은 반도 남부의 임나(가야)라는 지역에 영향력을 가졌다고 생각된다. 마침내 임나는 신라에 멸망당하여 야마토 조정은 조선에서 영향 력을 잃었다. (2011년 지유샤 역사 시판본 46~47쪽) 우리나라는 임나에 대해 영향력을 갖게 되었습니다. 신라는 임나에도 진출하여, 6세기 중반에는 그 지역을 지배했기 때문에, 조선반도에서 우리 나라의 영향력은 후퇴했습니다. (2011년 이쿠호샤 역사 시판본 30~31쪽) * 관련된 서술이나 그림, 도판만 문제가 아니라 [4세기 말의 조선반도]라는 지도에 임나의 영역을 낙동강 서쪽 지역부터, 전라남북도는 물론, 충청북도 일부까지 포함 시키며 사실을 왜곡하고 있다. 한일 공동 부교재 마주보는 한일사 에는 마주보는 한일사Ⅰ 에서는 전혀 그 내용을 서술하지 않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마주보는 한국사Ⅰ 에서는 송서 왜국 전에서 武 왕에게 내린 칭호가 그렇게 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우회적으로 신라나 가야가 왜국의 지배하에 있지 않았다고 명시하고 있다.
임진왜란, 침략이 아닌 출병?! 임진왜란은 조선팔도가 황폐화 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고, 포로로 끌려가 노역에 시달리며 모진 고초를 당했던 전쟁이다. 7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국가 재정은 파탄지경에 이르렀으며, 당시 수만명의 조선인들의 코를 베어 소금에 절여 전리품으로 가져가 무덤을 만들었다는 코무덤 ( 耳 塚 : 후에 코무덤이 너무 잔혹하다고 하여 귀무덤으로 바꾸었다고 함) 은 당시의 전쟁이 참혹 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일본의 우익교과서는 임진왜란의 배경을 왜곡함은 물론, 침략 아닌 출병 이라고 기술해 문제가 되고 있다. 출병 의 사전적 의미는 군사를 싸움터에 내 보낸다. 라는 뜻이지만, 이는 잘못된 상대를 응징하기 위해 군대를 출동시켰다는 의미가 강해 이에 대해 반성할 것이 없는 정당한 행위로 인식하게 한다. 1592년 히데요시는 15만의 대군을 조선에 보냈다. 그러나 명과의 교섭은 성립되지 않았고, 1597년 히데요시는 다시 약 14만의 대군을 파견했다. 2차례에 걸친 출병에 의해, 조선의 국토와 사람 들의 생활은 황폐해졌다. 또한 이 출병에 막대한 비용과 병력을 소모했던 도요토미 가의 지배는 동요했다. (2011년 지유샤 역사 시판본 115쪽) 또한 히데요시는 해외진출의 뜻을 품고 1592년 명으로의 출병 안내를 거절한 조선에 15만명 남짓한 대군을 보냈습니다. 조선출병으로 조선의 국토와 사람들의 생활은 현저히 황폐해졌습니다. 또한 이 실패는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는 원인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2011년 이쿠호샤 역사 시판본 97쪽) 한일 공동 부교재 마주보는 한일사 에는 일본, 조선을 침략하다. - 1592년 음력 4월 14일 부산 앞바다에 일본군이 나타났다. 수 백 척이 넘는 배에서 내린 일본군은 순식간에 부산진성을 함락시켰다. 곧 전쟁터에서는 무차별 코베기가 실시됐다. 도요토미는 죽기 1년 전인 1597년 한반도에서 보내온 조선인 약 5만여명의 코를 묻고 코무덤이라 불렀다. (마주 보는 한일사 89~96쪽)
재일코리안 차별은 정당한가? 일본의 식민지배와 전쟁으로 강제연행 또는 자발적 이주로 패전 당시 일본에는 약 200만명 이상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한다. 한국 해방 이후 이들 중 3/4은 자력으로 귀국했으나 65만명 정도는 일본에 남게 되었다. 해방 이후 미군 점령하에 있으면서 이들은 일본국적을 가지고 있어도 외국인으로 취급받았으며, 1952년 일본이 주권을 회복하자마자 일본국적을 빼앗고 일반 외국인으로 취급하면서 사회보장, 취직, 주거 등에서 차별을 받게 된다. 특히 일본정부는 일본인에 대한 개인 배상을 실시하면서 한국인과 대만인은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보상하지 않았다. 일본의 패전이후 일본에 남겨진 재일코리안의 경우 과거 식민지와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것이며 이들에 대한 보상 이나 배려는 일본정부가 책임이 있는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차별하고 있다. 일본에 영주 또는 주재하는 외국인에 대해서는 선거권과 공무원이 되는 권리는 기본적으로 보장 되지 않는다. (1995년 최고재판소의 판결은) 일본의 선거권은 일본국민에게 부여하고 외국인 에게 부여하지 않는 것은 합헌이며, 권리의 평등 불평등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2011년 지유샤 공민 시판본 68쪽, 칼럼) 일본국민에게만 주어지는 권리는 외국인에게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외국인이어도 일본국적을 취득하면, 일본국민으로서 선거권을 비롯한 모든 권리가 보장됩니다. <각주> 외국인 에게도 지방선거권을 인정해야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하지만 헌법위반이므로 반대하는 유력한 의견이 있어 지금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2011년 이쿠호샤 공민 시판본 56~57쪽) 미래를 여는 역사 에서는 식민지 지배와 전쟁이 남긴 사회 문제 라는 제목으로 일본의 패전 당시에 일본국적을 가진 한국인과 대만인이 다수 살고 있으며, 이들은 일본 국적을 빼앗기고 외국인을 분류되면서 그들이 사회적으로 차별 받고 있으며, 전쟁에 대한 정당한 보상조차 받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기술하고 있다. (미래를 여는 역사 210~211쪽)
전쟁범죄자 숭배도 국가 관례? 야스쿠니신사는 1945년 이전에는 육해군성 소관의 특수신사로서 천황숭배와 군국주의 보급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으며, 종전 후 국가 관리에서 벗어나 오늘날에는 단독 종교법인이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국가적 보호를 둘러싸고 논의가 분분하다. 집권여당은 야스쿠니신사를 정부의 감독 하에 국비를 지출하여 보호하자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하였지만, 정교분리를 규정하고 있는 헌법(제20 89조)에 위배되므로 법안은 폐기되었다. 야스쿠니신사는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침략전쟁의 희생자 들과 당시 식민지였던 한국과 대만의 희생자, 심지어 생존자와 침략전쟁의 A급전범을 합사하였으며, 1975년에서 시작된 일본 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의 공식 참배는 한국, 대만 등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한국과 대만 등에서는 자국 희생자의 합사 반대는 물론 총리 및 각료들의 참배를 반대하고 있다. <사진> 수상과 각료의 야스쿠니신사 참배와 헌법이 정한 정교분리와의 관계성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2011년 이쿠호샤 공민 시판본 59쪽) 야크쿠니 신사는 1978년에 새로이 도조 히데키 등 14명의 A급 전범을 합동으로 제사했습니다. 침략 전쟁을 계획 하고 수행한 최고 책임자들을 신 으로 모신다는 것은 침략전쟁 자체를 긍정하는 입장임을 재확인한 것입니다. (미래를 여는 역사 234~235쪽) 미래를 여는 역사 에서는 야스쿠니 신사란 무엇인가? 라는 소단원으로 야스쿠니신사의 본질과 야스쿠니 신사 공식참배 등 관련 문제에 대한 주변국의 반대와 이것이 갖는 의미 등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천황이 평화주의자?! 일본은 전쟁에 패하면서 대일본제국시대를 마감하고 천황주권 에서 국민주권 으로 전환되었다. 제국주의 시대의 천황 중심의 나라와 침략 전쟁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들은 교육칙어를 통해 국가의 위급한 일이 생길 경우에는 의용을 다하며, 공공을 위해 봉사함으로써 무궁할 천황을 도와야 한다. 라는 충군애국사상을 강조하고, 어린이들을 천황을 위해 기꺼이 죽을 수 있는 군국 소년, 군국 소녀 로 만드는 이데올로기를 완성했다. 천황은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에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징 천황제 로 전환하는 대신 면죄부를 받았으며 지금까지 존재하고 있다. 실제로 일본 우익의 천황 숭배는 천황에 대한 존경이나 숭배가 아니라, 천황 뒤에 숨어서 전쟁을 조종했던 과거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군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는 정치적 목적을 담고 있는 것이다. 1945년 8월의 종전도 쇼와천황의 결단이었습니다. 포츠담선언 을 수락하여 전쟁을 멈출지, 본토에서 결전( 決 戰 )을 해야할지, 정부 내 의견이 두 개로 나뉘어, 쇼와천황은 나는 국민을 지키고 싶다 며 종전의 성단( 聖 斷 )을 내렸습니다. (2011년 지유샤 역사 시판본 258~259쪽) 전쟁 고뇌, 개전 결단 일미관계가 긴박해진 1941년 9월 어전회의에서는 전쟁보다도 일미교섭의 계속을 중신들에게 시사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개전을 회피하지 못하고, 고뇌의 끝에 12월 정말어쩔수없는것이있다 등을 기록한 선전( 宣 戰 ) 조서를 발표했습니다. (2011년 이쿠호샤 역사 시판본 233쪽) (미국은) 천황을 이용하여 무리 없이 통치하려던 방침에 따라 천황 측근 및 정치가와 손을 잡고 전쟁 책임은 도조 히데기 등 육군에 있다 고 판결해서 히로히토 천황에게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미래를 여는 역사 207쪽) 미래를 여는 역사 에서는 역사 들여다보기 코너를 통해 근대 일본의 천황제에 대해 소개하고, 일본의 과거 청산이 남긴 문제 에서 천황의 전쟁책임을 지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