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이진서 / 일러스트레이션: 정영 Copyright: 2015 by Radio Free Asia.
목차 들어가는 글... 2 제 1장 지옥의 수용소... 3 1) 정치범 수용소 정의... 3 2) 체험자의 증언... 3 3) 집단수용소 굴락과 정치범 수용소의 차이... 4 4) 북한에서 사용하는 또 다른 명칭... 4 5) 노동강도와 연좌제... 5 제 2장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7 1)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 7 2) 1호 범죄자로 9년 수감... 7 3) 기독교인은 정치범 수용소 간다... 9 4) 황당한 간첩죄와 대물림 수용소 생활... 9 5) 국제사회가 정치범 수용소를 비판하는 이유... 10 제 3장 북한의 인신 구금시설... 11 1) 북한은 구금시설 공화국... 11 2) 구금시설 종류... 11 3) 구금시설 내 인권침해... 11 4) 도 보위부... 12 5) 감춰진 수용소 저자가 말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13 6) 북한당국의 묵인 하에 벌어지는 인권침해... 14 제 4장 정치범 수용소의 관리와 운영실태... 15 1) 파리 목숨보다 못한 사람값... 15 2) 수감자는 권리를 박탈당한 인민의 적... 15 3) 수용소 내의 일상적 구타... 16 4) 청소년 교육과 노동... 16 5) 수감자에 대한 모멸감... 16 6) 식량 배급과 굶주림... 17 7) 탈주자는 사살하라... 18 제 5장 정치범 수용소의 비밀... 19 1) 가족 3대가 끌려가 죽도록 노동... 19 2) 하루 16시간 강제노동... 19 3) 물자공급원이 되는 수용소... 19 4) 노동과 배급... 19 5)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노동의 양과 생산품... 20 6) 비밀을 제일 우선으로 하는 조사와 생존... 21 7) 북한당국이 정치범 수용소를 유지하는 이유... 21 제 6장 는 해체되어야 한다... 23 1) 국제사회의 정당한 요구... 23 2)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남한시민 반응... 23
3)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정치범 수용소 인지도 설문조사... 23 4) 정치범 수용소 경험자가 말하는 후유증... 24 5) 북한당국의 공식반응... 25 6) 유엔의 에 대한 요구... 26 7) 남한 인권운동가가 전하는 일반적 감옥과 북한의 구금시설... 26 8) 정치범 수용소 현황... 26 9) 정치범 수용소 경험자의 소망... 26 맺는 말...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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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북한 소식을 13년 동안 매일 다루면서 기자는 북한의 참혹한 실상에 대해 너무나 많이 들었기에 이제 웬만해서는 놀 라는 일도 별로 없다. 적어도 북한주민이 굶어 죽거나 맞아 죽었다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북 한의 정치범 수용소란 주제를 놓고선 상당히 당황했음을 솔직히 고백한다.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 었으며 그 잔상들이 막연했던 탓이다. 아마도 법을 준수하며 열심히 사는 사람이 감옥이란 단어에 대해 갖는 나와는 상관이 없는 또는 생각할 필요 없는 곳이란 무의식의 거부감을 나 또한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역시 알게 모르 게 외면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변명해 본다. 그렇다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과연 어떤 곳인가? 무슨 이유로 사람들은 재판도 없이 끌려가 죽을 때까지 노동을 해야 하는 것일까? 도대체 그 안에선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기자는 서울에서 일주일 동안 머물며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짧게는 몇 년 길게는 20년 이상 갇혀 살아야 했던 탈 북자들과 정치범 수용소 경비병 출신의 탈북자 그리고 이 분야의 북한 전문가들을 만나 북한 당국이 극도로 비밀리에 운영하는 정치범 수용소의 실체에 대해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감히 말하건대 우리의 상상 그 이상으로 현재 존재하는 그 어느 형태의 구금시설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참한 곳이다. 지금도 적게 잡아 10만 명 이상의 북한주민이 정치범 수용소에서 무자비한 노동과 거친 환경 탓에 꺼져가는 불씨처럼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정치가 아니다. 이념이 아니다. 그리고 내정간섭이 아니다. 인권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태어나면서 기본적으로 누려 야 할 권리 를 말한다. 그런데 지구 한쪽에서 사람이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으며 존재감 없이 죽어가고 있기에 그냥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지금껏 여러분이 알았던 지식과 상식 그리고 편견을 모두 내려놓고 기자와 함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시길 부탁드 린다. 2
제 1장 지옥의 수용소 방송듣기 1) 정치범 수용소 정의 북한당국은 지도자의 위상을 훼손하거나 반대하는 자, 기독교를 믿는 자 등 체제에 위협이 되는 사람을 포함 그 가족 3대를 사회와 완전격리해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이곳을 외부세계는 라고 부릅니다. 2) 체험자의 증언 김영순: 그 가마니 거적 데기에 널도 차려지지 않는 운명, 연좌제로 끌려가서 무슨 뽕나무에서 떨어져서 팔도 못 쓰 는데 강냉이 밟으러 나오래 밤에 그러면 한손으로 그게 굴욕이라 그거야. (김영순, 15호 관리소 구읍리, 용평리(완 전통제구역), 1970-1979년 수감) 강철환: 어릴 때는 할아버지가 죄를 지었다고 하니까 할아버지가 그때는 굉장히 미웠죠. 그런데 제가 철이 들면서 할 아버지는 죄가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됐어요. (강철환, 15호 관리소 구읍리, 1977~1987년 수감) 김혜숙: 아직 우리 동생은 올해까지 44년째인데 죄목이 뭔지 몰라요. 거기 들어가면 첫째 조항이 너희는 죄를 묻지 말 라 하니까요.(김혜숙, 18호 관리소 봉창지구 1975-2001 수감) 첫 번째 여성은 올해 78살의 김영순 씨입니다. 김 씨가 정치범 수용소에 간 이유는 김정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성혜 림과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북한당국은 김정일의 사생활에 대한 비밀을 유지한다는 이유로 김영순 씨를 포함한 일가 족 8명을 요덕에 보내 9년 동안 감금했습니다. 두 번째 증언자는 강철환 씨입니다. 강 씨는 북송된 재일교포 3세로 평양에서 태어나 9살 때 할아버지가 숙청당하면 서 연좌제에 걸려 10년간 가족과 함께 요덕에서 수감생활을 했습니다. 세 번째 증언자는 평양에서 살다가 13살 때 아무런 영문도 모른 채 북창 18호 관리소에 끌려가 28년 동안 수감생활을 한 김혜숙 씨입니다. 이들 세 명이 말하는 공통점은 억울하게 긴 세월을 강제노동을 하며 죄인으로 살았다는 겁니다. 재판도 없이 끌려갔 고 언제 석방이 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고통과 공포심은 더 컸습니다. 고인이 된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에 따르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1956년 발생한 이른바 8월 종파사건에서 시작 됩니다. 북한정권은 북한 전역에 관리소 를 갖추고 혹독한 노동을 통해 자신의 주민들이 체제에 순응하도록 하기 위 해 평안남도 북창군 소재 득장광산에 사람들을 수용하면서 공포의 정치범 수용소는 탄생합니다. 1970년부터 79년까지 요덕 수용소를 체험한 김영순 씨입니다. 김영순: 말할 새도 없고 다른 사람 볼 새도 없고 그것이 지옥이야. 노동 강도가 세고 밤에까지 일하고, 밤에 서리가 내 리면 경비대가 종을 쳐요. 그러면 전체가 이불을 들고 나가서 영양단지에 덮어야 해요. 벤츠 타고 다니면서 당에 배려 속에 멋지게 살던 사람들이 다 거기 왔거든 그러니까 그야말로 생지옥이란 말이지. 기약할 수 없는 날 그리고 아침 3 시 반에 일어나 나가야 하고 벌목공은 나무 자르다가 잘못 넘어지면 사지가 꺾어지고 치어서 죽고. 독풀, 독미나리, 독 버섯을 배가 고파서 먹고는 죽고 펠라그라 걸려 죽고요. 펠라그라 걸리면 통옥수수 먹었던 것이 항문이 열려 그냥 싸 3
요. 그래서 죽었던 시체로 길을 메워도 과언이 아닌 것이 요덕 수용소의 참상이에요. 3) 집단수용소 굴락과 정치범 수용소의 차이 북한의 관리소 즉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들어보면 얼핏 연상 되는 것이 나치의 유대인 수용소 그리고 구소련의 집단 수용소인 굴락(Gulag)입니다. 하지만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이들 수용소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세종연구소 오경섭 연구위원입니다. 오경섭: 는 정치범과 그 가족에게까지 연좌제를 적용해서 가족 3대를 일정한 산간지역에 격리 시 키는 겁니다. 이곳에는 정치범들이 주거하는 주택이 있고 개인은 공동으로 생활하는 주택에 수용하며 규칙에 따라 집 단적 생활을 합니다. 예를 들어 아침에 노동하러 가는 출근 시간이 있고 퇴근 시간이 있습니다. 이런 일정한 규칙과 규 율에 의해서 수용소 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곳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는 대부분 산간지역에 있지만 청진의 수성 수용소처럼 도시에 건물을 지어 운영하는 경우도 있습 니다. 하지만 구금시설이 있는 위치가 어디가 됐건 외부인의 접근을 철저히 통제되고 있기 때문에 그 안에서 벌어지 는 일은 알기 어렵습니다. 오경섭: 왜냐하면 북한이 정치범 수용소 관련 정보는 한 번도 공개한 적이 없고 철저히 비밀리에 정치범 수용소를 운 영하고 있습니다. 외부적으로도 정치범 수용소의 명칭을 군부대로 위장해서 운영하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알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동안 정치범 수용소 출신들의 증언을 통해 알려지고 확인이 됐는데 대부분 정치범 출신은 요덕 수용소입니다. 그래서 다른 수용소의 출신의 증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정 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증언했던 것이 안명철 씨입니다. 안명철 씨가 북한에 이런 수용소가 몇 개 정도 있다는 증언을 했습니다. 4
4) 북한에서 사용하는 또 다른 명칭 북한 당국이 주로 정치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 사람을 보내는 곳이기 때문에 한국에서는 편의상 정치범 수용소 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은 이곳의 명칭을 내부의 논리에 따라 표기하며 실체를 감추고 있습니다. 관리소 경비병 출신 안명철 씨입니다. 안명철: 정확한 명칭은 조선인민 경비대 00군부대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경비대 지시를 안 받고 국가보 위부 직속이에요. 특수부대라고 보면 돼요. 인민군 전체 병력에도 우리가 포함이 안 돼요. 밖에선 인민경비대라고 하 는데 안에서는 그냥 경비대라고 해요. 북한 국가안전보위부 7국에서 운영하는 시설인 정치범 수용소 즉 관리소는 북한 주민들은 특별독재대상구역 또는 이주구역 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울타리로 둘려 쌓인 수용소의 경비는 상상 그 이상입니다. 안명철: 한 개 수용소를 지키는 무력이 한 2천 명 가까이 됩니다. 보위부 경비대를 다 포함해서요. 22호 관리소는 5만 명을 수용했는데 본부에 두 개 중대가 항상 예비대로 폭동이나 진압용으로 있고 외곽에는 각 중대별로 초소가 있는데 6개 중대가 있습니다. 그리고 대공중대가 또 따로 있고요. 중대 인원은 140-150명되죠. 그래서 경비대 무력만 1천 200 명 가까이 있었습니다. 5) 노동강도와 연좌제 1995년부터 4년 6개월을 요덕에서 생활한 이영국 씨는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수감자는 매일 정해진 작업량을 채우기 위해 보위원들이 강하게 요구하지 않아도 스스로 높은 강도의 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구조로 돼 있다고 말합니다. (이 영국, 15호 관리소 대숙리. 1995-1999년 수감) 이영국: 먹는 것은 옥수수를 아주 조금 줘요. 그리고 못 먹는 배추 떡잎을 주워서 소금에 절인 것을 끓여 국으로 만들 어 주고 그것을 먹고 살아야 해요. 먹는 것을 그렇게 주니까 먹고 한 시간 지나면 배가 고파요. 영양이 부족하니까 배 는 나오고 살은 빠지고 한 시간 지나면 더 배고프고 그러면서 도급을 주는 거예요. 김을 매라고 하면 풀 하나 없이 다 하고 그것을 못하면 저녁에 들어와서 밥을 절반으로 자르는 거예요. 또 다른 정치범 수용소 체험자 강철환 씨는 1977년부터 10년간 할아버지가 요덕 수용소에 수감되면서 가족 3대가 모 두 사회와 완전 격리된 혁명화 구역에서 생활을 했던 경우입니다. 강 씨는 수용소 내에서 벌어지는 반인륜적 범죄행 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강철환, 15호 관리소 구읍리, 1977-1987년 수감) 5
이영국 씨가 북한 정치범수용소에서 고문을 받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다리를 보여주고 있다. RFA PHOTO 강철환: 많은 어린 아이들이 그렇게 오해를 합니다. 누군가 큰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우리가 고생한다. 이렇게 선전을 하 고 얘기를 하니까 그것을 믿지만 아이들이 커서 자기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나이가 되면 알게 되거든요. 많은 집안 에서 가장들이 그런 식으로 몰려 죽은 경우가 많아요. 그러니까 아이들이 어른들의 밥을 빼앗아 굶어 죽기도 하고요. 가족 폐륜행위가 일어나는 거죠. 어떤 경우는 죄를 지은 당사자가 가족과 수용소에 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런 집안은 아이들이 아버지를 몰아붙여서 아버지가 거의 죽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아이들이 커서 보니까 그게 아닌 거죠. 수용 소란 것이 그런 죄를 지은 당사자뿐만 아니라 아이들도 수용소에 수감해서 아이들이 죄를 지은 사람을 증오하게 만드 는 것이 북한만 가진 굉장한 반인륜적 범죄 중 하나라고 봐요. 연좌제로 수용소에 수감된 아이들은 평생 그곳에서 살아야 하며 만약 수용소에서 태어난 생명이 있다면 그 역시 죄인 일 수밖에 없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정말 기적적으로 정치범 수용소를 나왔다고 해도 다시 예전의 평범한 삶을 살 기는 힘들어 보입니다. 요덕 수용소 체험자 이영국 씨입니다. 이영국: 나왔을 때는 세상이 허무하죠. 옆에 사람이 다 싫어지고 사람 만나기도 싫어지고 잠이 들면 자꾸 악몽을 꾸면 서 사람이 과격해 지고. 그걸 고치자고 약을 먹는데 약을 먹으면 늦잠을 자서 일을 못 해요. 내가 나온 지 17년 정도 됐 는데 완치가 안 돼요. 나는 이성을 잃지 말자 해도 잠을 못 자니까 약을 먹게 되고 약을 먹으면 힘이 없어 생활에 지장 이 있으니 술을 먹고 자는 일이 많아요. 악몽을 안 꾸려고요. 사람은 싫은데 강아지는 좋아요. 그런데 자꾸 눈물이 나 요. 조금만 있으면 불안하고 그러면 화장실 가서 울고요. 그런 악몽이 영원히 지워질 것 같지는 않아요. 6
제 2장 내가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방송 듣기 1)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 는 한번 들어가는 죽을 때까지 나올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과 일정 기간이 지난 후 사회로 복귀하 는 혁명화구역으로 나뉩니다. 2) 1호 범죄자로 9년 수감 김영순: 나는 1호 범죄자야 말하자면 312호 예심과 거친 사람 없어요. 한국에 저 하나입니다. 15호 요덕 수용소에서 1970년부터 9년 동안 생활한 김영순 씨가 수용소 생활에 대해 증언하 고 있다. RFA PHOTO 15호 요덕 수용소에서 1970년부터 9년 동안 생활한 김영순 씨입니다. 북한에서 1호 범죄는 북한 체제를 비난하거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등 지도자의 명예를 훼손시킨 사람을 뜻합니다. 김 씨는 1호 범죄 즉 북한 지도자의 비밀을 본 의 아니게 알게 됐기 때문에 수용소에 보내집니다. 7
김영순: 보위부 조사 때 다 썼어요. 다 알고 왔는데 안 쓰면 어쩌겠어요. 성혜림이 우리 집에 와서 5호댁에 간다고 해서 내가 깜짝 놀랐어요. 그럼 리평(본남편)이는 어떻게 하냐고 하니까 답을 안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성혜림이 나한테 내 가 관저에 들어가면 오늘로 너하고 나하고 보는 것은 마지막이네 그러는 거예요. 그때부터 못 봤다가 중국에 탈출해 서 2002년 방송을 들어보니까 성혜림이 심장마비로 러시아에서 죽었다고 그러더라고요. 배경 설명을 하면 김영순 씨는 1970년 평양의 여행자 상점 상업부 지도원이었습니다. 김일성 가문에 가는 물건을 취 급하며 고위급 인사들과 폭넓은 인맥을 쌓았던 김영순 씨. 그는 김정일 위원장의 동거녀였던 성혜림의 친구였습니다. 성혜림은 김정일 위원장의 두 번째 부인으로 성 씨는 김 위원장을 만나기 전까지 영화배우로 활동했습니다. 성혜림은 리평과 결혼해 딸을 낳은 유부녀였지만 5살 연하인 김정일 위원장의 눈에 들면서 리평과 이혼하고 김 위원장과 동거 에 들어갑니다. 하지만 시아버지인 김일성의 인정을 받지 못했고 김정일은 아버지가 정해준 김영숙과 결혼합니다. 그 일로 해서 성혜림은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1974년 소련으로 요양을 떠납니다. 이렇게 해서 김정일의 첫째 아들 김정 남은 성혜림이 5호댁으로 간 다음 해인 1971년 태어납니다. 김정일 위원장의 경호원으로 10년간 복무했지만 제대 후 자신도 요덕 수용소 생활을 했던 이영국 씨입니다. 이영국: 제가 있을 때 김정일이 유부녀를 데려가 딸도 낳고 했는데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아버지에게 들킬까 봐 경 호원들로 다 막았어요. 관저는 따로 있고 첩들의 집도 2관저라고 해서 따로 있었어요. 평양시 평천구역 능라도 쪽이죠. 대동강 바닥인데 담장을 11m 해놓고 동거녀의 집을 5개를 만들어 놨어요. 지하로 들어가서 전부 따로 들어가게 진입 로를 달리 해놓고 있었어요. 옆에 누가 있는지 모르게 경호를 했어요. 8
무엇보다 자신의 사생활이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렸던 김정일 위원장은 자신의 동거녀에 대해 알고 있는 인물을 사 회와 완전 격리된 구금시설인 정치범 수용소에 보낸 겁니다. 김영순: 보위지도원들이 또 나왔어요. 고이 자란 영순 동무가 고생을 좀 해봐야지 하면서 내가 어디로 갑니까? 하니까 일 잘하면 나오고, 일 못 하면 못 나오지 뭐 이러더라고요. 그리고 금야 가는 열차를 탔어요. 서평양역을 출발해 6시간 가서 함경남도 금야군에 도착했어요. 아이 4명, 칠순이 넘은 엄마, 아빠와 함께요. 우리를 데려간 보위원과 여인숙에 갔는데 1970년대 금야군은 평양에 비해 너무 초라하니 기가 막히더라고요. 밤에 트럭이 오더라고요. 낮에는 안가고 밤에 실어 나르는 거예요. 아무도 모르게 하기 위해 밤에 이동하는 거죠. 밤 9시 경에 왔는데 타라고 하더라고요. 그때 그 감정을 표현을 못 하겠어 김영순 씨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나오고 10년이 지난 후에도 여전히 자신을 당국이 감시하고 있는 것을 알고 충격을 받습니다. 김영순: 정말 반탐국장이 벤츠를 타고 왔을 때 내가 얼굴이 백지장이 됐어요. 놀라지 마십시오 하면서 신분증을 보여 주면서 잠깐 요해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라며 하는 말이 간단했어요. 1989년인데 성혜림은 김정일 의 처도 아니고 아들도 낳지 않았다 이것은 새빨간 유언비어다. 다시는 어디서든 유발할 때는 용서하지 않는다. 이렇 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나보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일주일 동안 심장이 떨렸어요. 또 보위부에서 데리러 올까 봐. 잠을 잘 수가 없더라고 그때 한국에 올 것을 결심했어요. 1989년 반탐국장이 오고 간 다음 저를 인민반장을 시켰어요. 함흥 시 도 보위부가요. 왜냐하면 나를 감시망에 넣기 위해서죠. 그래서 탈북 전까지 내가 인민반장을 하다가 왔어요. 3) 기독교인은 정치범 수용소 간다 기독교인을 만난 사실도 북한에서는 정치범 수용소에 가는 죄가 됩니다. 아들이 잡혀가고 곧이어 자신과 가족 모두가 끌려갈 것을 감지한 김동남 씨는 탈북해 현재 남한에서 의 실상을 폭로하는 인권운동가가 됐습니 다. 김동남: 우리 아들 이름은 김경재이고요. 아들이 체포된 날은 2009년 9월 23일 새벽 6시에 체포돼서 1년 동안 구류소 에 있다가 관리소에 간 것으로 알고 있어요. 왜 어떻게 관리소에 갔는가 하면 북한 보위부 직원들 입에서 나온 소리고 북한에서 정치범 수용소 가는 것은 도 부위부 안에서만 재판을 해요 예를 들어 김경재 조선인민주의공화국 형법 몇 조, 몇 항에 의해 너는 징역 몇 년이다 이런 것 없어요. 본인만 알고 형기를 안고 가죠. 이런 상황에서 경재가 관리소에 들어가 있는 곳은 어딘지 알 수도 없고 보위부 직원들에 의하면 아들과 그 조직이 경재 한 명만 잡혀간 것이 아니라 열 댓 명이 넘어 가는데 그 사람들이 지금 똑같은 처지에 있거든요. 그래서 관리소 들어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자: 그 사람들이 왜 다 관리소에 갔습니까? 김동남: 전부 임명철 목사를 통해서 복음을 전달 받고 미국의 목사를 (중국에서)만났다는 죄로 그것밖에 없죠. 나라의 법을 위반한 일은 없고요. 기자: 중국에 나왔다가 기독교를 알고 북한으로 다시 건너갔다가 발각돼서 잡힌 거군요 김동남: 그렇죠. 4) 황당한 간첩죄와 대물림 수용소 생활 에 가는 또 다른 경우는 남한 사람을 만났다 즉 간첩행위를 적용 시키는 겁니다. 2000년부터 2003 년까지 요덕 수용소 서림천 지구에서 생활한 정광일 씨입니다. 정광일: 제가 1990년 중반부터 무역화사에서 무역을 했는데 그 과정에 중국을 다니면서 한국 사람을 만나게 됐어요. 다른 목적이 아니고 순수 장사로 만나는 거죠. 왜냐하면 중국 사람들과 장사를 하다 보니 너무 손실을 보게 됐어요. 그 래서 한국 사람과 직접 거래를 하게 됐는데 그러는 과정에 내가 다른 사람보다 돈을 많이 번다는 것을 알고 저에게 감 시를 붙였고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가 국가보위안전부에 제가 간첩이라고 신고를 했어요. 그래서 체포가 돼서 10개 월간 취조를 받다가 너무 힘들어서 제가 간첩이 맞다고 인정을 해버렸어요. 9
기자: 그것이 언제였나요? 정광일: 그것이 1999년 7월 29일 체포가 돼서 간첩이라고 정식 인정한 것이 2000년 4월이었습니다. 북한에선 연좌제에 의해 미성년자가 할아버지의 죄를 대물림하는 죄인이 되기도 합니다. 강철환 씨입니다. 강철환: 제가 수용소 갈 때인 1977년도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권력 이양이 될 때이기 때문에 북한의 후계구도에 반 대했던 많은 간부가 숙청될 때이거든요. 저희 할아버지도 그런 이유로 끌려간 것 같은데 제가 평양에 있을 때 많은 친 구가 갑자기 사라지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끌려가기도 했는데 수용소에 가보니까 평양에 있던 친구가 많이 와 있 는 것을 보면서 5) 국제사회가 정치범 수용소를 비판하는 이유 북한 법률에는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어떤 죄목으로 어떤 경우에 몇 년 형을 받게 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외부 세계는 이런 점을 우려합니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윤여상 소장입니다. 윤여상: 일차적으로 사람의 인신을 구속하는 것은 법률에 의한 것이어야 하고 공정한 사법적 절차와 판결에 의한 것 이야 합니다. 북한에서 물론 재판으로 형을 선고하는 것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법률에 의하지 않고 재판절차 없이 구금이 이뤄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국제사회의 당연한 비판 대상이 되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북한 내에서 북 한 법률의 근거를 갖지 않고 처벌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것 자체에 대해 북한 당국이나 주민들이 이것이 불법이라든지 부당하다든지 그런 인식을 못 한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북한 사회나 교육과정 자체가 법치주의 인권이라 하는 것 법 에 의한 지배가 이뤄져야 한다는 자체 인식이 없기 때문이거든요. 우리 일반사회에서 보면 당연하게 큰 문제이고 인 권의 문제고 불법적인 사항이지만 북한 주민들은 그것이 불법인지 아닌지 이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고 법률에 규정이 없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됐다고 하는 생각 자체도 할 수 없다는 거죠. 왜냐하면 그런 교육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입니 다. 10
제 3장 북한의 인신 구금시설 방송 듣기 1) 북한은 구금시설 공화국 북한은 다른 나라와 다르게 구금시설의 공화국이라고 할 만큼 다양하고 체계적인 운영체계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중 에서 정치범 수용소 즉 관리소는 한 번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그 안에서 강제노동을 하며 생을 마감하기에 인권침해 수준이 최악으로 알려졌습니다. 2) 구금시설 종류 윤여상: 지금 북한의 상황은 스스로 자신들이 지키겠다고 약속한 사항까지도 그것을 법률의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것 까지도 지키고 있지 않고 있기 때문에 최소한 자신들이 지키겠다는 법률이라도 지키라는 것입니다. 북한인권기록보존소 윤여상 소장의 말처럼 북한당국이 자행하는 인권탄압에 대해 국제사회는 우려하고 있습니다. 보통 어느 나라든 형사 피해자나 피고인을 조사하고 수용하는 구금시설이 있습니다. 경찰서에서와같이 조사를 하는 과정에 잠시 머무는 곳이 있고 형을 선고 받기 전 생활하는 구류장 그리고 재판을 통해 형량을 선고 받은 뒤에 가는 감 옥 이렇게 세 가지 정도입니다. 그런데 북한은 그 외에 네 곳이 더 있습니다. 윤여상: 일반 사회에는 없는 교양소, 노동단련대, 집결소란 곳이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범수용소가 있으니까 7가지 종류가 있는 겁니다. 그 수를 모두 합치면 확인은 어렵지만 약 700개에 가까운 구금시설이 북한 곳곳에 있는 겁니다. 다른 어떤 나라에서도 살펴보기 어려운 가장 많은 종류의 구금시설을 갖추고 있고 또 그것들이 북한 법률에 나와 있 지 않은 것이 대부분입니다. 정치범 수용소, 집결소, 교양소는 북한 법률에도 나오지 않는 구금시설입니다. 3) 구금시설 내 인권침해 한때 마르크스 레닌주의 사상에 빠졌었고 북한의 주체사상을 남한에 전파하면서 몰래 북한에 가서 김일성 주석을 두 번이나 만났던 김영환 씨는 북한에서 운영하고 있는 구금시설 내부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 정도는 과히 비교 대상을 찾기 어렵다고 말합니다. 김영환: 단련대란 곳은 노동을 통해 그 사람의 정신을 교화한다는 취지에서 일정한 장소에서 합숙을 시키면서 강제노 동을 시키는 것인데 보통 6개월 정도로 길게 하지는 않죠. 관리소는 맨 처음 만들어질 때는 특별독재대상구역으로 설 정이 됐는데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사실 감옥하고는 상당히 달라요. 일반적 거주 구역도 있고 각 개인의 집도 있고 학교도 있고 공장도 있고 하기 때문에 일반 감옥과 상당히 차이가 있죠. 유대인 수용소는 감옥처럼 건물이 있고 같이 자고 먹고 같이 일하러 나가고 하는데 북한에선 각자 집이 있어서 생계문제도 각자 알아서 하는 차이가 있죠. 다만 그 것만 놓고 보면 유대인 수용소나 소련의 굴락에 비해 상당히 좋은 곳이 아닌가? 이렇게 착각할 수도 있는데 실제 수용 자에 대한 처우를 보면 유대인 수용소나 소련의 굴락에 비해 훨씬 더 열악한 그런 요소들도 많이 발견할 수 있거든요. 기자: 그런 요소는 뭘 말하는 겁니까? 김영환: 굉장히 인격적인 비하라든지 무차별적인 구타라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착취를 비롯해서 성 착 취 등 착취가 매일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거죠. 북한의 일반적인 구금시설은 인민보안부에서 관리하고 정치범 수용소 즉 관리소는 국가안전보위부에서 합니다. 그 차이는 보위부는 정치범을 관리하고 반국가 또는 반민족범죄사건의 관할권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인민보안부는 일반 범죄 사건을 조사하고 관리한다는 겁니다. 11
4) 도 보위부 범죄 용의자를 잠시 수감 시키는 구류장에서도 여느 다른 구금시설 못지않게 인권침해 사례가 확인됩니다. 탈북자 이 은실(가명) 씨는 불법도강과 간첩혐의로 양강도 혜산시 성후동에 있는 도 보위부 청사 구류장에 1년 동안 수감됐습니 다. 이은실: 6개월 정도면 사람이 죽어 나가더라고요. 그 원인이 고문이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는데요. 위생상태가 너무 안 좋았어요. 내가 똥, 오줌을 눈 것을 물이 없으니까 자기 오줌을 모아서 그것으로 물을 만들어서 똥이 굳으니까 손으로 주물러서 부드럽게 해서 자기 옷을 둥그렇게 말아 망치처럼 만들어서 하수구 구멍에 압력을 주는 거죠. 물이 없으니 까 오줌에 게워서 누르는 거예요. 똥을 씻을 물도 없으니까 오줌으로 대충 또 씻는 거예요. 그러면 똥독이 올라서 거기 벌레가 생기고 그러죠. 이 씨가 있던 곳은 도 보위부 청사 별채 건물로 지하에 있어 일명 지하감옥 으로 불립니다. 구조를 보면 방 하나에 5-6 명 정도가 수용되는데 이런 작은 방이 7~8개 정도 있고 화장실이 각방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독방은 2평 남짓에 거기 에도 안에 변기가 있습니다. 한 끼 식사량은 통강냉이 150알 정도로 하도 양이 적어 옥수수 알이 몇 개나 되는지 세어 봤다고 합니다. 기자: 그 안에서 고문이나 구타는 어떻습니까? 이은실: 그런 것은 올방자(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으니까 좀이 쑤시니까 누군가 조금 움직였다 하면 관리하는 선생들 이 와서 때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는 거기 안에 같은 방 사람들에게 집단구타를 시키는 거예요. 몸을 움직일 수 있는 기 12
회니까 팔을 펴고 다리를 펴야 하니까 모두 죽어라고 한 사람을 패는 거죠. 인정사정없어요. 북한의 구금시설에 대한 책이나 결과물은 많지 않습니다. 북한의 구금시설에 대해 정확한 실태를 알려면 현장 조사가 이뤄져야 하지만 북한당국은 외부인의 접근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한된 북한의 공식 문건이나 구금시 설 체험자 또는 근무 경험이 있는 탈북자의 증언을 중심으로 추론해볼 수밖에 없습니다. 5) 감춰진 수용소 저자가 말하는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 미국인 데이빗 호크 씨는 2003년 감춰진 수용소 란 제목의 책에서 위성사진을 활용해 북한의 대표적인 구금시설의 소재를 확인해 줬습니다. 기자가 북한 정치범수용소 특집의 제작을 위해 체험자들을 만나려고 서울을 방문했을 때 우 연히 수용소 체험자 강철환 씨의 사무실에서 호크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가져간 최신 위성사진을 놓고 요덕 수용소 체험자들을 만나 최근 변화된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습니다. 호크 씨는 10년이 넘게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관심을 가지게 된 이유를 이렇게 말합니다. 데이빗 호크씨와 강철환, 정광일(왼쪽) 씨가 정치범 수용소 위성사진을 확인 하고 있다. RFA PHOTO 데이빗 호크: 이러한 인권탄압은 오늘날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겁니다. 오직 북한에만 이러한 구금시설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주민을 재판 없이 추방해서 산에 있는 구금시설에 보내 사회와 격리 시키는 데 보통 몇 년에서 대 부분 평생을 그곳에서 강제노역을 하도록 하는 거죠. 추정하건대 사상이 잘못 됐다고, 또는 반체제 단체와 연관이 있 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보내지는 겁니다. 우리는 1990년 15만에서 20만 명이 수용됐다고 봤습니다. 그땐 수용소의 수도 많았기 때문이죠. 지금은 8만에서 12만 명 정도가 아직까지 수감됐다고 보고 있습니다. 국제사회도 이제 관리소란 단어를 쓰고 그곳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북한에는 교화소, 집결소, 노동단련대 등도 있는데 이런 곳은 일반 사회에서처럼 정말 죄를 지어 가는 것이 곳이라기 보다는 국제 사회의 기준으로 볼 때 정치적 이유로 가는 곳입니다. 예를 들어 탈북 했다는 이유로 강제북송을 당하면 북한 당국에 의해 수용소로 보내지는 거죠. 13
호크 씨에 따르면 노동단련대나 교화소 등 북한의 구금시설 중 가장 비인간적이고 비인도적으로 운영되는 곳이 정치 범 수용소인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수가 과거에 비해 줄었다고 말합니다. 데이빗 호크: 15년 그 이전에는 12개의 정치범 수용소가 있었고 후에 6개로 합쳐졌으며 이제 무엇을 기준으로 보는 가 에 따라서 4개 또는 4.5개의 정치범 수용소가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가 국제사회 압력에 때문이라고 딱 잘라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북한 내부의 사정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6) 북한당국의 묵인 하에 벌어지는 인권침해 북한 전문가들은 구금자의 구금 사유와 절차, 구금 기간 등을 종합적으로 놓고 살펴 볼 때 수감자가 받는 고통과 탄압 의 정도가 낮은 것부터 노동단련대, 집결소, 교양소, 교화소, 정치범 수용소 즉 관리소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 한 구금시설들에서는 당국이 허가 하지 않은 인권유린도 벌어지고 있다고 세종연구소 오경섭 연구위원은 지적합니 다. 오경섭: 정치범 수용소에 있는 정치범들에게는 보위원들이 관리하는 과정에서 아주 무차별한 구타나 폭력, 폭행 이런 것이 보위원에 의해서 제도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자의적인 판단에 의해서도 그런 폭행이 일어납니다. 일반사회에서는 정당한 법절차를 따르지 않는 자의적 구금과 자백을 받아내기 위한 고문 등의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정당화되거나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외부 세계는 북한의 구금시설 특히 정치범 수용소 내의 인권상황을 우려하 는 것입니다.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입니다. 스칼라튜: 문제가 되는 이유는 일단 북한에도 헌법이 있는데 일단 북한 헌법을 위반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북한 은 1991년 유엔에 가입했습니다. 북한은 유엔 가입국으로서 국제인권 기준을 지켜야 합니다. 북한은 유엔 가입국으로 서 국제 인권법을 준수해야 합니다. 북한의 인권상황을 보면 그런 국제규약을 계속 위반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4
제 4장 정치범 수용소의 관리와 운영실태 방송 듣기 1) 파리 목숨보다 못한 사람값 에서 관리자는 하나님이요 수감자는 파리보다 못한 존재라고 수용소 체험자는 말합니다. 북한 법 률에도 나와 있지 않은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그 안에서만 통하는 그들만의 논리에 의해 인간의 존엄성이 파괴되고 있 습니다. 2) 수감자는 권리를 박탈당한 인민의 적 안명철: 정치범 수감자로 하는 것이 맞고 경비대가 정치범을 부를 때는 이주자 종파 종파새끼로 불렀어요. (안명철 11호 (경성).13호(온성).22호(회령)관리소, 1987-1994년 경비대 근무 경험) 안명철(전 북한 22호 회령수용소 경비대원) 북한민주화운동본부 사무총장이 구글어스를 통해 25호 청진 수용소가 증축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RFA PHOTO 현재는 해체됐지만 1994년 탈북 당시 22호 회령 관리소에서 경비병으로 근무한 안명철 씨입니다. 안 씨에 따르면 정 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은 주민의 권리를 박탈당한 죄수일 뿐 같은 사람으로 봐서는 안 되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안명철: 보위부나 경비대는 지키는 사람이니까 수감자가 누군지는 관심이 없어요. 죄를 씻고 사회 나가서 살면 다행 인 거고 죽으면 죽고. 그러니까 인간에 대해서는 신경을 안 쓴 거죠. 정치범이 지나가거나 아니면 일을 시키려고 불렀 다면 뛰어와야 하는데 보니까 건성으로 오거나 내 마음에 안 들었을 때는 구타의 대상이 됩니다. 또 얘기할 때 선생 눈 15
과 마주치면 안 되는데 올려 쳐다 본다거나 하면 또 구타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다 그런 것은 아니고 그날 기분에 따라 더 심하게 꼬투리 잡아서 할 때도 있어요. 기자: 규정에 있는 것은 아니군요. 안명철: 정치범은 부르면 무조건 뛰어와야 하고 와서는 남자는 모자를 쓰고 여자는 두건을 쓰고 있는데 그것을 벗고 공손히 손을 모으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구타 대상이 되는 거죠. 3) 수용소 내의 일상적 구타 15호 요덕 수용소 체험자 이영국 씨는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상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영국: 일을 못한다고 때린다는 것이 참나무, 물푸레나무를 20대 정도 준비했다가 다리 등을 때리는 데 맞다가 죽는 경우도 있고 또 선생님이 기분 좋은 날은 웃지만 나쁜 날은 때리니까 언젠가는 내가 죽겠구나 하고 불안해하고 선생 은 우리를 짐승으로 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예요. 그런 식으로 야수가 돼서 자기 성격표현을 다 하고 자기 쾌락을 느끼는 인간이 된 거죠. 4) 청소년 교육과 노동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미성년자라도 보호 대상이 아닌 죄인일 뿐입니다. 세종연구소 오경섭 연구원입니다. 오경섭: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정치범의 자식들이기 때문에 교육적으로 학생을 관리하는 것이 아 니고 학교에 총을 차고 보위원들이 들어온다든가 학생을 무차별 구타하고 그 과정에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든가 이런 경우가 발생하고요. 여성은 절대적인 약자이기 때문에 보위원들이 성폭행하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발생하고 그런 증 언은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13살에 요덕 수용소에 들어가 청소년기를 보내야 했던 강철환 씨는 수용소에도 학교는 있지만 그 기능을 하지 못한다 고 증언합니다. 강철환: 혁명화구역과 완전통제구역은 교육이 달라요. 완전통제구역은 김일성, 김정일 교육을 안 시킵니다. 그런데 혁명화구역은 김일성, 김정일 교육을 시켜요. 일반사회와 비슷하게 교육을 시키는데 그것은 혁명화구역은 다시 살려 내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육도 사회수준하고 똑같이 하는데 공부의 질 자체가 거의 없다고 봐야죠. 말이 혁명화구역이지 관리 자체가 완전통제구역과 똑같아요. 학업은 거의 포기한 상태고 강제노역으로 살게 되고 사실 수 용소의 아이들은 혁명화구역이던 완전통제구역이던 공부 자체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봐야죠. 기자: 노동은 몇 살부터 시작되나요? 강철환: 노동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는 거죠. 5) 수감자에 대한 모멸감 정치범 수용소는 마을 형태로 운영이 되며 수감자를 관리하는 경비대도 수용소에서 그들만 사는 지역에 집단 거주합 니다. 그런데 이들 관리자의 가족이 수감자를 대할 때 역시 인권침해는 벌어집니다. 18호 관리소 체험자 김혜숙 씨입 니다. (김혜숙, 18호 관리소 봉창지구 1975-2001 수감) 김혜숙: 안전원, 보위부 가족, 관리소 기사장, 갱장 아들들이 깡패가 많아요. 탄광이니까 먼지가 굉장한데 오라고 해서 가면 앉으라고 하고 아가리 벌리라고 하고는 가래를 뱉어요. 그걸 꿀떡 생키면 안 맞는데 그 뜨끈뜨끈한 것이 들어오 는 순간 구역질을 하면 막 때리고 한단 말이에요. 그제 자기 죄가 있어서 매 맞는 것은 아니잖아요. 16
관리자들은 수감자를 반민족 범죄자 즉 적 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비인간적 모멸감을 주게 되며 수감자는 굴욕을 느 낄 수밖에 없습니다. 요덕 수용소 체험자 정광일 씨입니다. (정광일, 15호 관리소 서림천, 2000-2003년 수감) 정광일: 정말 인간 이하의 취급을 받는 것이 제일 힘들었습니다. 예를 들면 저도 담당 보위원에게 엄청나게 맞아서 일 어나지 못할 정도로 맞은 적도 있고요. 우리가 인간이 아니고 동물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던 것이 여름에 옥수수 농사 를 하면서 인분 물을 풀어서 옥수수 포기에 주는데 그것을 우리 밥그릇으로 하라고 해서 아침에는 밥을 받아먹고 그 그릇을 들고 나가서 인분 물을 퍼서 옥수수 포기에다 주고 점심에는 도랑물에 씻어 다시 밥을 받아먹어야 해요. 짐승 도 자기 변을 봤던 그릇에 밥을 담아 안 먹는데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죠. 정치범 수용소에서의 비인간적인 수감자 관리 중 하나는 연대적 책임 입니다. 같은 조로 묶인 수감자들은 조원 중 한 사람만 잘못이 있어도 연대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관리자인 보위원이 아닌 같은 수감자가 다른 수감자를 구타하게 조장하고 있습니다. 정광일: 구타는 어떤 경우 많이 일어나는가 하면 수용소에서 제일 무서운 것이 집단체벌입니다. 전체 처벌을 주는 겁 니다. 밥을 안줍니다. 한 개 분조에 밥을 안 줍니다. 그러면 잘 못한 사람은 한 개 분조가 달려들어서 때리거든요. 그럼 그 사람은 살 수가 없죠. 제일 무서운 것이 집단체벌이었습니다. 가령 예를 들면 겨울에는 밥을 안 주는 것이 아니고 침실에 불을 못 피우게 합니다. 너무 추워서 밤새 떨면서 잠을 못 자죠. 그럼 너무 격분에 못 이겨서 모여 한 사람을 구 타를 하는 거죠. 그럼 맞아 죽죠. 6) 식량 배급과 굶주림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개인생활이 허용되지 않기 때문에 전적으로 배급되는 식량과 부식만으로 살아야 합니다. 강철 환 씨입니다. (강철환, 15호 관리소 구읍리, 1977~1987년 수감) 강철환: 수용소는 기본적으로 옥수수를 주식으로 하는데 소금과 옥수수 이 두 가지가 기본 식량이고 나머지는 알아서 17
자급자족해야 하는데 보통 500~600g 주게 돼 있죠. 그런데 이것저것 떼고 나면 300~400g이 됩니다. 보통 정량 배급을 받는다고 해도 옥수수만 먹는다면 영양실조가 올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가혹한 강제노역이 결합하기 때문에 노동대 비 먹는 것이 부실해서 영양실조가 오게 돼 있죠. 식량조절을 못하는 사람들은 한 달 중 절반은 굶게 되는 거예요. 그 래서 굶어 죽는 거예요. 기자: 300g이란 것이 일일 기준입니까? 강철환: 네. 강 씨가 말하는 알아서 자급자족 한다 는 말은 이 뜻입니다. 김영순 씨입니다. (김영순, 15호 관리소 구읍리, 용평 리(완전통제구역), 1970-1979년 수감) 김영순: 요덕 수용소에서 쥐새끼, 날아다니는 것은 다 잡아먹었어. 까마귀도 고무총으로 쏴서 잡아먹고 나비, 잠자리, 다 잡아먹고 돋아나는 풀은 다 뜯어 먹고 기어 다니는 것 다 잡아 먹는 곳이 수용소라고 평가하고 말아. 쥐새끼도 젊은 아이들이 변소깐이고 어디고 다 잡아먹어서 없어. 어른들, 아이들 영양실조 걸리면 엄지 쥐 배 안에 있는 새끼가 3마 리씩 있는데 그것을 구워서 갈아 먹이면 식독, 배가 뽈록한 것이 가라앉는다고 해서 잡으려고 그것도 없는 곳이 요덕 이야. 엄마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가자마자 그 이듬해 먹을 것 못 먹어서 돌아가신 거 가마니에 두루마리 해서 묻고 식량부족과 열악한 환경으로 환자가 속출하지만 정치범 수용소의 의료시설은 유명무실한 것으로 조사됐습니다. 수 감자들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을 수 없으며 민간요법을 통해 병세가 호전되지 않으면 사망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오경섭 세종연구소 연구위원은 정치범 수용소 내 수감자들은 의료인권 사각에 있다고 말합니다. 오겹섭: 의료혜택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정치범 수용소 내에서는 간염, 결핵 등 치명적 질병에 걸린 경우도 정상적 으로 의약품을 공급받지 못하고 생활합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은 일반인들과 생활할 수 없기 때문에 격리 시킵니다. 그리고 거기서 또 노동을 시킵니다. 기본적 의료혜택도 받지 못한 절대적인 무관리 상태에 많은 사람이 노출돼 있고 거기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가장 큰 정치범 수용소의 문제점이고요. 7) 탈주자는 사살하라 정치범 수용소에서 주는 배급은 늘 생명을 위협할 만큼 적은 양이기 때문에 수감자들은 만성적인 영향결핍 상태에 있 습니다. 그리고 만약 북한에 격변 상황이 발생하면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은 모두 사살하도록 교육받았다고 22 호 관리소 경비병 출신 안명철 씨는 증언합니다. 안명철: 우리는 항상 정치범을 적으로 봤고 폭동이 일어나면 제압을 해야 하고 유사시 전쟁이 나면 이들을 증거인멸 을 위해 전부 사살해야 하는 것이 경비대의 역할이거든요. 14.5밀리 고사기관총이 원래 헬기를 잡는 건데 유사시는 정 치범을 한곳에 몰아놓고 사람에게 쏘는 용도입니다. 기자: 탈주자는 발견 즉시 사살입니까? 안명철: 못 잡으면 사살인데 무조건 잡아야 해요. 왜냐하면 비밀이 나가기 때문에. 18
제 5장 정치범 수용소의 비밀 방송 듣기 1) 가족 3대가 끌려가 죽도록 노동 아무런 재판도 없이 당사자와 그의 부모 그리고 자녀까지 3대가 끌려가는 정치범 수용소에서는 죽을 때까지 강제노 동을 해야 합니다. 죽어서도 나올 수 없는 곳이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입니다. 2) 하루 16시간 강제노동 김혜숙: 노동 과제가 있어요. 작업반이 18명 정도 되는데 오늘 정해진 석탄을 몇 톤 해야 한다는 그 양이 있어요 (김 혜숙, 18호 관리소 봉창지구 1975-2001 수감) 18호 관리소 체험자 김혜숙 씨는 16살 때부터 채탄공으로 탄광에서 하루 16시간 이상 강제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그 리고 15호 요덕 수용소 체험자 강철환 씨는 정치범 수용소에서의 강제노동은 초등학교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된다며 수용소에서의 인간은 생산도구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강철환, 15호 관리소 구읍리, 1977~1987년 수감) 강철환: 죄를 진 장본인을 포함해 그 가족까지 연좌제로 처벌하기 때문에 많은 인원을 수용하는 구역을 필요로 했고 그것이 거대한 수용소가 된 것인데 그 많은 인력을 동원해서 북한 체제를 위해 돈을 벌게 하거나 석탄이나 나무를 만 들게 해서 북한 경제에 도움이 되는 즉 싼 인력을 강제노역을 통해서 얻는 거죠. 개천에는 탄광이 있고 요덕에는 광산 과 목재가 있고 일해서 돈을 벌 수 있는 것이 풍부해요. 회령에도 석탄이 풍부하고요. 정치범을 이용해 북한 정권이 돈 벌이를 하는 그런 지역에 수용소를 만들어 놨다고 봐야죠.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다 국가를 위 해 받치고 죽어라! 3) 물자공급원이 되는 수용소 북한당국은 정치범을 사회와 완전 격리된 시설에 보내 북한 주민들에게 공포감을 주려는 목적 외에 강제노동을 통해 수용소 내 자체 수요는 물론 국내 수요물자에도 대응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요덕 수용소 체험자 김영순 씨입니다. (김 영순, 15호 관리소 구읍리, 용평리(완전통제구역), 1970-1979년 수감) 김영순: 거기 농사지은 것은 평양이나 안전부로 가요. 인민보안부로 가고요. 수용소 안에 피나무, 옻나무 그런 좋은 나 무는 생필직장에서 자재를 만들어서 고급가구를 생산해요. 그곳에서 생산된 모든 좋은 알곡과 생산품은 인민보안부 평양으로 올라갑니다. 그리고 산삼이라도 발견이 되면 선생들(경비대)에게 받쳐야 해요. 또 산돼지, 멧돼지가 내려오 면 잡아서 선생들에게 받쳐요. 4) 노동과 배급 정치범 수용소에서 가족세대는 식량과 부식을 배급받고 독신자가 있는 합숙소에서는 규정된 식량을 배식합니다. 식 량은 모두 옥수수나 옥수수를 빻은 강냉이쌀로 정해진 배급량을 받기 위해 수감자들은 주어진 노동량을 완수해야 합 니다. 정광일 씨입니다. (정광일, 15호 관리소 서림천, 2000~2003년 수감) 정광일: 식량은 하루 과제를 줘서 과제를 수행하지 못하면 배급을 안 줍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영양실조로 죽 었어요. 약육강식의 법칙이 가장 심한 곳이 북한에선 정치범 수용소라고 봐야겠죠. 내가 일을 조금이라도 더 많이 하 면 일을 못 한 사람의 밥을 빼앗아 먹거든요. 그러면 빼앗기는 심정을 말할 수 없죠. 19
5)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노동의 양과 생산품 에서는 다양한 물품이 생산됩니다. 농작물은 대표적인 것이 옥수수, 쌀, 채소 등이고 석탄과 철광 등의 광산물 그리고 의류나 자전거, 농기구 등 열거하기 힘들 정도로 많습니다. 특히 이러한 생산품은 엄격한 관리 하 에 오랫동안 숙련된 노동자들에 의해 만들어지기 때문에 당연히 그 질이 좋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생산품은 평 양에 있는 고위 간부들에게 공급되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런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외부에서 볼 때 일반 마을 과 식별이 어렵다고 정치범 수용소 경비병 출신 안명철 씨는 말합니다. (안명철 11호(경성).13호(온성).22호(회령)관 리소, 1987-1994년 경비대 근무 경험) 안명철: 이제 관리소라고 했을 때는 항공 위성사진으로 내리찍으면 일반 마을처럼 생겼어요. 그런데 주변을 쭉 보면 철책으로 둘러 막혀 있거든요. 면적이 굉장히 넓어요. 22호 수용소 같은 경우는 서울시 3분의 1 크기예요. 그리고 13 호는 계곡을 따라 만들어서 22호 보다는 좀 작았어요. 크기에 따라 수용 인원도 틀린대 미국의 북한인권위원회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구금시설에서 수감자들을 강제노동에 동원하는 일은 그 예는 있지만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처럼 혹독한 곳은 없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스칼라튜: 루마니아도 그런 형태가 있었습니다. 다뉴브 강과 흑해 바닷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그런 마을을 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뉴브 강과 흑해를 연결하는 운하를 만들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소련의 지도자이던 스탈린 의 아이디어였습니다. 거기서 일하던 사람들은 주로 정치범들이었습니다. 그 프로젝트의 목적은 완전히 루마니아의 엘리트들을 전멸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북한 정치범 관리소에는 12만 명 이상이 수용돼 있고 연좌제에 의해 한 가족 20
의 3대가 수감됩니다. 이러한 일은 지구촌 21세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6) 비밀을 제일 우선으로 하는 조사와 생존 재판 없이 보내지는 정치범 수용소지만 수감 대상자에 대한 조사는 철저하게 이뤄집니다. 그리고 수감자의 신상 정보 에 대해서는 담당 조사관끼리도 그 내용을 공유하지 못하도록 비밀스럽게 진행됩니다. 10년간 김정일 위원장의 경호 원으로 복무하고 제대 후 요덕 수용소에 수감됐던 이영국 씨입니다. 이영국: 내 경력을 보면 경호원 10년 했고 제대해서 무산군당 지도원을 하고, 시가 되면서 대학을 졸업하고 시부부장 을 하고 김일성 고급당 학교에서 3년 공부한 걸 알았죠. 나는 중국이 텔레비전에 자꾸 나오고 하니까 호기심에 중국에 갔다가 정치범이 된 거고. 처벌이 무서워서 못 나오고 있으니까 북한이 중국에서 날 체포를 해서 비행기로 실어와 평 양에 있는 국가보위부 예심국에 보낸 거예요. 조사 문건을 보면 김정일 별장에 대한 말 그리고 김일성, 김정일 독재자라고 한 말, 남한에 간다고 한 것이 다 나오는 거죠. 그래서 심문을 할 때는 그것을 다룬 사람이 다 알지 못하게 남한에 온다고 한 것은 국가보위부에서 조사하고 경 호에 대한 것은 당중앙위원회 호위부 6처 보위부에서 나와서 조사하고 김정일 나쁘다고 한 것은 당 중앙위원회 10호에서 나와서 세 분야로 조사했어요. 왜 그렇게 하냐하면 조사하는 사람이 전체를 알면 신격화가 무너지니까 부류별로 나눠서 조사를 하는 겁니다. 안에서 인간의 존엄성을 운운한다면 아마도 외계인 취급을 받을지 모릅니다. 그저 수감자는 짐승 처럼 생존본능에 따라 움직여야 살 수 있는 힘없는 존재일 뿐입니다. 이영국: 내가 대승리에 있는데 용평, 입석은 완전통제 구역이에요. 거기는 옛날 본인들이 잘못해서 자식까지 전부 들 어온 거예요. 당사자는 죽었어도 후대가 거기서 살아요. 3대가 연좌제를 받아와서 그냥 사는데 노동 강도도 심하고 먹 는 것도 적게 주고요. 인성을 잃어서 사람 죽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게 된 거죠. 나도 한 300구 묻었어요. 달구 지에 싣고 꽃동산에 가는 거예요. 종과 횡을 맞춰서 묻는 거예요. 메고 올라갈 때는 시체에서 물이 줄줄 흘러서 등골에 서 꼬리뼈까지 흐르는데 한 열 구만 메면 아무 생각이 없어요. 우리도 악마가 되는 거예요. 살아 나가야겠다는 생각밖 에는 없고 그러니까 모든 행동이 사람의 행동을 못 하는 거죠. 정치범 수용소 관리는 국가안전보위부 제 7국이 전담하지만 법에 기반을 둔 구금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그 존재에 대 해서는 북한주민들에게 조차 비밀입니다. 대상자를 잡아갈 때도 모두가 잠든 이른 새벽 집을 방문해 잠시 동행 합시 다 이런 식이고 호송할 때도 해가 떨어진 밤에 이뤄졌다고 정치범 수용소 체험자들은 말합니다. 현실이 이러하기에 같은 탈북자 조차 정치범 수용소의 실태를 알았을 때 받는 충격은 큽니다. 자유북한방송 김성민 대표입니다. 김성민: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사실 북한에서 장교로 또 작가로 있었던 저도 실체를 몰랐을 정도로 북한 주민에게 도 철저히 베일에 쌓여있는 곳이었죠. 처음에 사실 저들의 이야기가 사실일까 할 만큼 믿기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강 철환 대표나 김영순 여사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북한 사람들끼리 통하는 마음속의 선 이 있거든요. 금선이 있거 든요. 이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구나 분명 그곳에서 북한 당국이 이들의 자식과 부모와 형제를 죽였구나 하는 것을 믿게 됐어요. 그러면서 저렇게 험한 곳이 내가 살던 북한에 있었구나 하는 것을 확인하게 됐습니다. 7) 북한당국이 정치범 수용소를 유지하는 이유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체제를 위협하는 사람과 정치적 반대세력을 축출해 사회로부터 격리함으로써 체제안정을 유지하는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치범 수용소는 경제적 생산시설로 수용소 내의 생산물이 북한경제 에서 차지하는 비율도 높아져 다방면에서 북한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큰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화여자대학교 김석 향 교수입니다. 21
이화여자대학교 김석향 교수. RFA PHOTO 김석향: 대개 슬픈 예측이긴 한데 북한 정권이 무너지기 전에 정치범 수용소가 없어질 가능성이 굉장히 희박하다고 저는 봅니다. 이유는 북한 내부에서 지금처럼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가게를 최고 존엄으로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은 이 사람들의 영광을 위해 복무해야 하는 사람으로 존재해야 하는 한, 사람이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누군가 항상 거기에 반발하는 사람은 있을 것이고 그 사람들을 어딘가 처리를 해야 하거든요. 아예 죽여 버리든지 아니면 어딘가 가둬놔서 일반 사회하고 격리를 해야 하는데 북한에서 말하는 교화소 정도로는 안 되고 완벽하게 격리된 곳이 있어야 하는데 정치범 수용소가 없어질 때 쯤 되면 북한 정권이 무너지거나 근본적인 변화가 와서 개방이 이뤄지거나 그렇게 될 것 같은데 이 얘기를 뒤집으면 북한정권이 존재하는 한 정치범 수용소가 없어질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22
제 6장 는 해체되어야 한다 방송 듣기 1) 국제사회의 정당한 요구 어느 나라든 국내법은 국제법보다 우선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법이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할 때 국제사회는 움직 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그 무엇보다 최상위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2) 정치범 수용소에 대한 남한시민 반응 기자: 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시민1: 네, 방송을 통해 들었습니다. 북한은 1인 독재체제로 약간의 반대되는 사람도 정치범으로 수용하는 것으로 알 고 있습니다. 기자: 감옥에서 죄수이기 때문에 막 때린다면? 시민1: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아마 북한에서는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시민2: 공개처형은 있을 수 없는 일이죠. 인권을 생각한다면 그렇지 않아요? 기자: 북한 하면 제일 떠오르는 것? 시민3: 김일성이죠, 김일성 기자: 북한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인가요? 시민4: 북한 하면 꽃제비가 생각나네요. 기자가 무작위로 남한시민을 상대로 서울에서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또 반세기가 넘도록 휴전 상태로 있는 분단국가 반대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질문을 던져 봤습니다. 공통적인 답변은 북한에서 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인간다운 생활을 영유하기 어려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3) 탈북자를 대상으로 한 정치범 수용소 인지도 설문조사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은 누구보다 북한의 실상을 잘 알고 있는 탈북자들은 자신이 살았던 곳의 정치범 수용소에 대해 어느 정도나 알고 있는지 알아봤습니다. 이번 설문조사는 한국에서 탈북자의 남한정착을 돕는 민간단체 새조위(새롭 고하나된조국을 위한 모임)와 함께 진행했습니다. 이 단체 신미녀 대표입니다. 신미녀: 이 조사는 3월 15일부터 4월 15일까지 한 달간 했습니다. 탈북자들은 가 있다는 것을 대부 분 알고 있었고요. 죄가 없는 사람이 억울하게 잡혀가는 곳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치범 수용소에서 무슨 일 이 벌어지고 또 그 수용소가 전국에 몇 개나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는 대부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응답자 10명 중 8명 이상인 83%가 정치범 수용소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고 답했습니다. 이들은 공개총살이 무섭다고 답했고 젊은 층으로 갈수록 무기징역이 두려운 처벌이라고 말했습니다. 23
4) 정치범 수용소 경험자가 말하는 후유증 고향을 떠나 2014년 말 현재 남한에는 2만 8천여 명의 탈북자가 살고 있습니다. 탈북하다 잡히면 정치범 수용소에 가 게 됨에도 불구하고 사선을 넘었습니다. 18호 관리소에서 채탄공으로 오래 일해 진폐증을 앓고 있는 김혜숙 씨입니다. 김혜숙: 의술이 좋아서 입원해서 몇 시간씩 탄가루를 긁어내고 치료를 받았어요. 병원에서 퇴원해 나왔을 때는 몸이 거뜬하고 어쨌든 한국정부가 집도 주고 정착금도 주고 하는 것은 좋지만 그래도 맘이 완전히 좋지는 못해요. 왜냐하 면 아직 동생들 거기 있지 또 딸 하나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북한에서 죽었는지 알았는데 살아 있는데 만나질 못하니 까요? 아직도 꿈을 꾸면 한국에 온 지 5년이 지났는데 18호 꿈을 꾸지 한국 꿈을 꾼 적이 없어요. 13살 때부터 15호 요덕 수용소에서 10년 수감생활을 한 강철환 씨입니다. 24
북한전략센터의 강철환 대표 RFA PHOTO 강철환: 여기 와서 살아보니까 또 저희 아이들 학교 다니는 것을 보니까 청소년 시절이 참 좋을 때인데 그런 곳에서 청 소년 시절을 보냈다는 것이 좀 억울하기도 하고 저뿐만이 아니라 수천 명의 아이들이 똑같은 운명에 처해있었으니까 요. 그런데 저는 한국에 와서 보상도 받았기 때문에 덜 억울한데 북한에서 태어나 수용소에서는 나왔지만 북한에 있 는 저의 친구들, 이런 친구들은 정말 인생이란 것이 허무하고 가치 없는 인생을 살고 있구나. 요덕 수용소의 또 다른 체험자 이영국 씨입니다. 이영국: 이북이 말하면 다 거짓말이라 화가 납니다. 사람이 태어나면 다 똑같은데 어찌 그런 사회가 아직도 유지 되고 그런 신적 우상화를 내세우는 독재국가가 유지 되는가? 저건 무조건 허물어져야 된다. 그런데 그 밑에 일하는 사람이 위에 있는 사람이 무서우니까 그것을 두둔하고 부스러기를 주워 먹으면서 옹호를 하고 이게 이해가 안 되는 거죠. 국립중앙의료원 정신과 이소희 과장은 겉으로 보기에 비정상적인 상황이 아무렇지 않게 유지되며 운영이 되는 것은 한쪽이 절대적 권력이나 힘을 행사할 때 다른 쪽은 순응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소희: 우선 그 소수가 다수를 제압할 때는 그 소수에게 어떤 큰 권한이 부여됨으로써 힘이 편중될 경우 다수라 할지 라도 그것을 일종의 혁명이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것에 반항하고 나갔을 때 결과적으로 책임질 수 없다면 결국 생존 본능에 의해서 그곳에서 살아남기 위해 적응하면서 살아갈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오랫동안 있다 보면 나중 에는 그 판단 자체가 무력화된 상태에서 혹은 어릴 때부터 거기서 살았던 경우는 더욱 더 그냥 계속 그래 왔기 때문에 그 안에서 살아가 하는 방법을 배워가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5) 북한당국의 공식반응 국제사회는 에 대해 우려하면서 현지조사를 하겠다고 요구하지만 북한당국은 이에 무응답입니다. 오히려 국제사회가 북한을 고립시키려고 여론몰이를 한다며 비난하고 있습니다. 북한당국이 중국에 서버를 두고 운 영하는 우리민족끼리 인터넷 방송입니다. 25
(우리민족끼리 방송 녹취): 지금 미국을 비롯한 반공화국 적대세력들은 유엔무대에서 우리공화국에 있지도 않은 인 권침해 문제를 여론화하기 위하여 별의별 유치한 노름을 다 벌이고 있다. 특히 그들은 우리공화국에서 죄를 짓고 도 망간 악질 탈북자들을 내세워 터무니없는 허위 자료로 우리의 인권실상을 날조하고 있으니.. 6) 유엔의 에 대한 요구 국제사회에서는 2003년 유엔인권이사회 그리고 2005년 유엔인권 총회에서 매년 북한 인권개선을 요구하는 결의안 을 채택하고 있습니다. 10년 넘게 유엔에서 매우 적극적으로 하고 있고 지난해에는 북한인권을 조사할 수 있는 위원 회가 만들어져서 보고서까지 나왔습니다. 북한인권실태조사보고서 펴낸 마이클 커비 전 유엔북한인권조사위원회 위원장입니다. 마이클 커비: 유엔에는 여러 가지 원칙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인권우선 원칙이란 것이 있습니다. 유엔이 채택한 이 원 칙에 따르면 저희 보고서에 지적한 것과 같은 인권유린이 존재하면 유엔 기구 전체는 인권을 우선순위에 놓아야 한다 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유엔의 보호책임 이란 원칙입니다. 유엔 회원국 정부가 자국의 국민을 보호하지 않으면 그 보호책임은 유엔 기구 전체가 져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2005년 유엔총회 때 회원국 모든 나라 수반이 합의한 원칙 입니다. 7) 남한 인권운동가가 전하는 일반적 감옥과 북한의 구금시설 북한의 주체사상 권위자로 알려진 북한인권운동가 김영환 씨는 1980년대 한국 정부로부터 북한의 사상을 추종한다 는 이유로 정치범이 돼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김 씨는 감옥에서조차 인권침해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김영환: 당연히 우리가 얘기할 때는 보편적으로 누구에게나 인권이 있고 감옥에 있는 사람이든 관리소에 있는 사람이 든 어느 누구라도 인권의 본질적 핵심 부분을 침해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도 감옥을 여러 군데 경험했습니 다. 한국에서는 7곳의 감옥, 중국에서는 짧은 기간이지만 2곳에 있었습니다. 감옥이라는 굉장히 특수한 환경에서는 관리하는 사람이 가하는 인권침해가 훨씬 더 큰 고통이고 어려움이 될 수 있거든요. 김영환 씨가 한국에서 정치범으로 경험한 감옥 생활입니다. 김영환: 한국은 감옥에 있어도 정해진 시간 일을 해야 하고 한정된 공간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부 분은 비교적 자유롭고 보통 평균 6시간을 일하는데 나머지 시간은 책을 보던 바둑을 두던 자유고 일하는 것도 외부 세 계 공장과는 달리 편하게 일해요. 기자: 먹는 것은 어떻습니까? 김영환: 적게 주는 것은 절대 없습니다. 양은 항상 풍부하게 줍니다. 다만 제한돼 있죠. 반찬은 한 끼에 3개가 나오고요. 자기가 원하는 양만큼 밥을 많이 먹을 수 있고 반찬도 풍부하게 주기 때문에 8) 정치범 수용소 현황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현재 함경남도 요덕 15호, 평안남도 개천 14호, 함경북도 화성 16호, 함경북도 청진 25호 관 리소가 각각 운영 중인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이곳에는 적어도 8만 명에서 12만 명 정도가 수감생활을 하고 있다고 추 정됩니다. 세종연구소 오경섭 연구위원입니다. 오경섭: 정치범 수용소에 수감된 사람의 70% 정도는 정치범이 아니고 정치범의 가족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 람들은 정치범수용소에서 태어나도 정치범입니다. 왜 자기가 정치범 수용소에 와 있는지도 모르고 정치범 수용소에 갇혀 있는 사람들이 한 60%에서 70%가 됩니다. 내의 모든 생활은 인권유린으로 점철돼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장 심각한 인권유린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이기 때문에 그런 점 에서도 수용소 해체의 노력을 국제사회에서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26
9) 정치범 수용소 경험자의 소망 의 실상을 담은 수기 수용소의 노래 저자인 탈북자 강철환 씨는 현재 북한전략센터 대표로 있습 니다. 강 대표는 정치범 수용소가 사라지는 그날까지 활동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강철환: 예전에 황장엽 선생님에게 왜 싸우느냐했더니 그분 말씀이 수백만이 아사한 그런 참혹한 나라에 대항해서 북 한의 지식인이 한 명도 대항하지 않았다 그런 부끄러운 오점을 남기지 않기 위해 자기가 싸운다는 말을 했거든요. 저 도 정치범 수용소 체험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 수십만이 수용소에 끌려가서 처참하게 죽는데 국제사회가 그것에 반발 해 북한을 압박하고 있지만 수용소 체험자들이 나와서 증언하지 않았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겠죠. 그러니까 아 직도 수용소가 있고 과거에 수용소에서 죽어간 많은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는 처지이기 때문에 끝까지 해봐야 할 문 제인 것 같고요. 만일 북한에 정치범 수용소 즉 관리소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증명하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북한 당국은 유엔 조사관들이 수용소 체험자들이 증언한 현장을 방문해 조사하도록 하면 될 것입니다. 이제 북한의 인권문제는 우려의 수준을 넘어 책임자를 국제형사재판소에 재소를 권고하는 단계까지 왔습니다. 27
맺는 말 현재 는 운영되고 있다. 아무리 북한 당국이 그 존재에 대해 부인하려 해도 그곳을 체험한 탈북자 들과 제한적이긴 하지만 문헌자료들 그리고 위성사진을 통해 그 실체가 확인됐다. 기자는 취재 내내 한 가지가 맘에 걸렸다. 정치범 수용소 체험자들을 만나 이들이 잊고 싶어하는 기억을 다시 생생하 게 살려 놓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내게 주어진 역할이 너무나 잔인하게 느껴졌기에 부담이 컸다. 그런 이유로 이번 취재를 통해 만난 체험자들에게 진심으로 다시 한 번 감사하고 죄송하다는 마 음을 전하고 싶다. 왜냐하면 아무런 대가 없이 이들이 들려준 사연은 당사자에겐 너무 큰 고통의 순간들이었기 때문 이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부모를 잃고 자식을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김영순 여사의 증언에선 기자도 터져 나온 눈 물을 막지 못했다. 또 담담하게 천국에서 지옥까지를 경험했다는 이영국 씨의 증언에선 마치 전쟁터에서 전우를 모두 잃고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깨어난 생존자를 마주하는 듯한 으스스함 마저 감돌았다. 정치범 수용소 체험자들은 꿈에서조차 악몽이 되어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는 기억을 아프게 꺼내놓은 이유가 세상 사 람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에서라고 했다. 기자 역시 이들의 아픔을 많은 사람이 기억해 주길 소망해 본다.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