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모델 : 손세제 집사, 조병인 집사, 손호연, 안정임 집사 촬영 : 김인수 장로 영생 미주 한인 예수교 장로회 YUONG-SANG PRESBYTERIAN CHURCH 706 Witmer Road, Horsham, PA19044 Tel.(215)542-0288 Fa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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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0 0 9 겨 울 종 교 개 혁 특 집 20권 68호/겨울호 특집 : 종교개혁 중세말기의 암흑과 개혁의 빛 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간추린 종교개혁 종교개혁가들의 삶과 의미 종교개혁의 샛별 존 위클리프

표지모델 : 손세제 집사, 조병인 집사, 손호연, 안정임 집사 촬영 : 김인수 장로 영생 미주 한인 예수교 장로회 YUONG-SANG PRESBYTERIAN CHURCH 706 Witmer Road, Horsham, PA19044 Tel.(215)542-0288 Fax.(215)542-9037 www.yspc.org 담임목사 이용걸 발행일 : 2009년 11월 25일 발행인 : 이용걸 목사 편집인 : 김인수 장로 / 지도교역자 : 김인광 목사 편집위원 : 김재술 장로(고문), 심수목 집사, 서성환 집사, 서진숙 집사, 유철호 집사, 김수미 집사, 박춘미 전도사, 정순렬 집사, 정연희 집사, 한희남, 유민숙 목차 온세상이 캄캄하여 참빛이 없었더니 그 빛나는 영광나타나 온세계 비치었네 죄가운데 사는 사람은 그눈이 어두워도 그 죄악을 씻는 날에는 그눈이 밝아지네 찬란한 주의 영광은 영원히 빛날 광채요 참빛을 비춘 예수는 생명의 빛이 되신다. 영광 영광의 주! 밝은 그빛 내게 비치었네. 영광 영광의 주! 이세상의 빛은 오직 예수라 이달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 이용걸 목사 2 교역자 컬럼 하나님 중심의 개혁신앙 박영빈 목사 5 장로 컬럼 개혁신앙 김사윤 장로 9 특집 : 종교개혁 중세말기의 암흑과 개혁의 빛 김재성 목사 14 역설의 시대 장성철 목사 22 종교개혁 편집위원회 28 종교개혁가들의 삶과 의미 김희돈 전도사 40 종교개혁의 샛별 존 위클리프 편집위원회 46 화보 희망의 예수사랑 초청잔치 49 신앙 간증 하나님 감사합니다 김선희 집사 53 반석이 되어주신 주님 김한보 집사 54 믿음이 주는 기쁨의 선물 이민수 집사 56 하나님의 사랑스러운 손길 허득순 권사 58 주님께 더 가까이 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지재원 집사 60 인생의 마지막 골목 허도의 집사 62 찬양이 나의 간증이 되기를 장기백 집사 64 환영합니다! 새로 부임하신 교역자 소개 65 훈련 간증 훈련과정을 통하여 깨달은 성령의 체험 곽일도 집사 66 하나님께 칭찬 받지 않으실래요? 한상진 집사 68 한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하소서! 홍성의 집사 70 전도지를 돌리는 사람 보면 이해가 안간다 한재천 집사 71 30인전도단 소개 김종식 장로 74 성경의 힘 75 전도폭발 훈련 간증 뜨거운 불길 심재환 집사 81 예비되어진 도구 강희정 집사 76 영생의 구원과 확신 최영미 집사 77 훈련을 통하여 구원의 확신을 가졌습니다. 홍병대 집사 78 자석처럼 이끌리었던 훈련 정미애 집사 79 영생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데 정균 집사 80 단기선교 보고 케냐에서 나를 변화시켜 주신 하나님 제니퍼 장, 이지원 82 브라질-기쁨과 웃음, 그리고 감사 배성은 집사 85 멕시코- 성도의 진정한 사명인 선교 신명식 집사 89 우루과이-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하면서 박은숙 집사 91 도미니카-너무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구자현 95 베트남/ 캄보디아- 선교비전의 첫걸음 박수지 99 알라스카-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이세학 집사 102 와싱턴 시애틀-예수 이름으로 승리했다 김진 104 샌디애고-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함을 깨달았습니다. 박정석 집사 107 놀스캐로라이나- Cherokee에서의 하나님의 사랑 리사 배 109 뉴욕- 예수님이셨습니다 뉴욕선교팀 113 성경문답 목사님 질문 있습니다 김인광 목사 116 선교컬럼 우리 세대 안에 지상명령을 성취한다고 박태수 선교사 118 복음사역 RV는 복음을 싣고 박숭목 집사 121 개혁의 도시 옛 종교개혁의 도시 스위스 제네바 이종태 집사 123 컬럼 종교개혁과 인쇄술 조종화 선교사 125 문화산책 오페라 라보엠 주염돈 장로 128 빛의 화가 렘브란트 김인수 장로 131 한국의 미와 멋 엄종렬 장로 133 영화 이야기 Bottle Shock 편집위원회 140 건강정보 암의 정복 편집위원회) 142 캠페인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꿉니다 유철호 집사 150 기관소개 영생한국학교 심수목 집사 152 뉴비전 사역 필라 생활정보 155 추천도서 156 필라교계 소식 158 교회소식 161 교회안내(예배안내 및 교역자 전화번호 164 편집후기 164 (영생지 정기 구독을 원하시면 교회로 연락 주십시오.) Printed in Korea / YEScom(02-2273-2988) 영생장로교회 1

이달의 말씀 하나님의 은혜 신 4:32-49 담임목사 이용걸 호주 해변에서 자 살한 고래 떼에 대한 기사가 신문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65마리의 고래가 다. 지금까지 수없이 경험한 하나님의 섭리를 다시 회고하라는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존재를 재 확인시켜 의심하는 자에게 신앙을 재충전하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지나간 일을 상고함으로써 하나 님께서 내게 무엇을 하셨는지 다시 생각할 수 있고 해변에 상륙하였습니다. 과학자들과 동물 애호가들 이 긴급히 출동하여 한 마리의 무게가 40톤이 되는 큰 고래들을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려고 많은 노력 을 기울였으나 결국 한 마리도 돌려보내지 못하고 다 죽었다고 보도되었습니다. 왜 고래가 자살했는 가? 우리처럼 사는 것이 힘들어서 죽은 것은 아닙 니다. 지도자를 잘못 만나서 그렇습니다. 고래는 언제나 떼를 지어 가는데 맨 앞의 지도자가 가는 대 로 따라 갑니다. 지도자인 고래가 잘못 갔기 때문에 모든 고래들이 원치 않게 자살을 하고 말았습니다. 지도자는 사람에게나 동물에게나 이렇게 중요합니 다. 왜냐하면 그에게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자신의 생을 마무리 하면서 간곡하게 부탁하는 말씀이 본문의 말씀입니 다. 이 말씀대로 살면 너희들이 복을 받고 너희 자 녀들이 복을 받을 것이라는 이 말씀은 저희들에게 도 사실이고 우리들에게도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지나간 날을 생각해 보라. 과거의 받은 은혜를 생각 해 보라고 말씀합니다. 과거를 회상해 보면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설계하는데 매우 중요한 일입니 현재의 신앙생활에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바쁘고 피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 다.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끔씩 절망과 낙심에 빠 질 때가 있습니다. 무엇인가 하려던 일이 좌절되어 가지고 이제는 끝이다 라고 스스로 포기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종이를 꺼내서 아직까지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 있는지 기록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제껏 나와 함께 한 아내가 있지 않습니까? 자식은 하나님께서 주신 기업이라고 했는데 소중한 자식이 있지 않습니까? 또한 건강과 나를 사랑하는 친구들이 있지 않습니 까?조금만 생각해 보면 잃어버린 것보다 가진 것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불행은 가지고 싶은 것을 못 가지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가지고 있는 것을 모르 는데 있습니다. 심리학에서는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방향으로 변화하는 존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생각하는 만큼의 세계를 살게 됩니다. 미국과 같이 풍족한 세 상에 살면서 부족하다 불행하다 힘들다 이렇게 생 각하면 그렇게 살아갈 수 밖 에 없습니다. 못한다고 생각하면 못한다는 방향으로 변화가 되는 것이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할 수 있는 방향으로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대로 변화하는 존재입니 다. 첫째로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국민이 불 가운데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 성을 너처럼 들은 적이 있었느냐? 어떤 신이 이적과 기사와 전쟁과 강한 손과 편 팔로 인도하여 낸 적이 있었느냐? 이것을 네게 나타내심은 여호와는 하나님 이시요 그 외에는 다른 신이 없음을 알게 하려 하심 이니라 고 모세는 백성들에게 다시금 강조하면서 말 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있게 말 지니라 고 제1계명으로 백성들에게 말씀하고 있습 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는 하나님 외에는 이 말씀을 순종하지 않은 데에 있습니다. 모세는 강조합니다. 그런즉 너는 오늘 상천하지에 오직 하나님만이 한 분이시고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서 하나님만을 섬기라 이것만이 너희가 살 길이 라 고 말씀하십니다.(39절) 세상에 살면서 세상의 재 물이나 쾌락이나 행복 등,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 고 살 때에 과거를 상고하면서 하나님 외에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 분이 없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만을 섬기 도록 하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윗의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복이며 하나님 한 분만 계시면 나 는 아무 소원이 없다 라는 이 말씀을 저는 언제나 묵상하면서 좋아합니다. 시16:2-5에 주는 나의 주시오니 주밖에는 나의 복이 없습니다. 다른 신에게 예물 드리는 자는 괴로 움이 더할 것입니다. 내 입술로는 다른 신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겠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잔의 소득이 시고 나의 분깃을 지키십니다 라는 것처럼 다윗은 모든 복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알았습니 다. 또 시37:4에는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 의 소원을 이루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잠16:1에는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 와께로서 나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 라고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기업이 있습 니다. 분깃이 있습니다. 남이 가진 것 다 가질 필요 가 없습니다. 또 가질 수도 없습니다. 각자에게 하나 님이 주신 본분이 있습니다. 너무 욕심 부릴 필요가 없고 남과 비교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나의 복이며 하나님만으로 나는 만족합니다. 하나님 외에 나의 소원이 없습니다. 이렇게 신앙 고백을 할 때 진정한 행복이 있습니다. 둘째로 애굽에서 나온 것을 상고해야 합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한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서 나 온 것을 보았느냐? 큰 권능으로 친히 인도하여 애굽 에서 나오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회고해 보라 는 말씀입니다. 모세가 말씀하고 있는 당시에 형편을 보면 결코 만 족할 환경이 아닙니다. 막바지 광야생활을 마치고 지치고 곤비하였으며 가나안 정착을 아직 하지 못하 였을 때임에도 불구하고 지난 날의 애굽에서 나오던 때를 생각하여 하나님만을 섬기라고 말씀합니다. 이 2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3

교역자 칼럼 것이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입니다. 우리의 현재 상태 가 어떠하든지 간에 죄악의 불신앙 가운데서 건져주 신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생각하고 감사해야 합니 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내 자신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할 때 밝은 내일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엡2장에는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 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며 이 세 상 풍속을 쫓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라 다녔으 자에게 하나님께서 손바닥에 그 이름을 새겼다는 그 감격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얼 마나 살 지 모르지만 답답하고 어려운 일이 생길 때 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나 같은 죄인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 것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 을 감사합니다 라고 구원받은 사실을 찬양할 때에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여러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개혁신앙 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 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육체의 욕심을 따 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 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긍휼에 풍성 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너희를 살리셨 고...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 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 도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사43:1이하에는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 서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 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 가 너를 지명하였고 내가 너를 불렀고 너는 내 것이 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가슴이 뜨거운 말씀입니다. 구원 받은 것을 진정으로 감사할 때에 진정한 하나님 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나는 부족하나 하나님의 것이 구나 라고 믿을 때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문제를 해 결하십니다. 내 존재, 내 생명, 내 삶의 길이 하나님 의 손안에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 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 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기고 항상 보고 있다 고 말씀하십니 다.(사 49:15-16) 꼭 기억할 말씀입니다. 내가 구원 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결론적으로 말씀드립니다. 마리안 앤더슨은 위대한 흑인 가수입니다. 필라델 피아가 낳은 세계적 가수입니다. 영감에 찬 그녀의 찬양은 듣는 이에게 은혜를 끼치고 상처받은 영혼들 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복음의 메시지였습 니다. 그래서 기독교계가 앤더슨의 찬양이야말로 백 명의 목사님 메시지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음악계에 서는 백년에 한 명 날 정도로 위대한 음악가라고 했 습니다. 그는 필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작은 흑인 교회에서 지원하여 드디어 꿈을 안고 세계적인 가수가 되기 위해 뉴욕에서 독창회를 가졌습니다. 그런데 독창회가 끝나고 나서 음악 평론가들이 악평 을 했습니다. 실의에 빠진 앤더슨에게 어머니가 찾 아가서 하는 말이 하나님의 은혜가 성공보다 앞서 야한다 고 했습니다. 이 말에 앤더슨은 용기를 얻고 하나님의 은혜로 한번이라도 음악가로 출발하기 위 한 자리에 서게 됨을 감사하였습니다. 마리안 앤더 슨을 위대하게 만들고 그녀의 전 생애를 변화시킨 이 야기는 은혜가 성공보다 먼저라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오늘 모세가 말씀하시는 네가 잘 되고 네 자손이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먼저 기억하 라 는 말씀을 마음에 깊이 간직하고 성공 이전에 하 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더 근 은혜를 체험하는 성도 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박영빈 목사 (ELM) 개혁신학은 종교개혁에 그 뿌리를 두고 존 캘빈의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에서 그 기반을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교리의 체계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다른 여러 교리들이 인간을 중심 으로 하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욕망, 감정, 생각, 그리고 경 험을 바탕으로 믿음의 체계를 만드는 성향은 항상 하나님과 진정으로 연결 되는데 걸림돌이 되어 왔습니다.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대 신 우매한 자신의 인도를 따를 때가 많았습니다. 종교개혁과 개혁신학은 신앙의 기준을 바로잡으려는 필요에 의해 탄생되었 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이루어져야 하지 않겠습니 까. 개혁신학은 구약과 신약을 옹호함으로써 이 과제를 성취했습니다. 기독 교 신앙은 전통이나 경험이 아닌 성서만이 기준이 되어야 하며 인간욕망에 의한 지배보다 하나님의 나라가 강조되어야 합니다. 개혁신학의 범위와 깊이는 개괄적이고 광대하지만 기본 교의 토대는 다섯 가지의 개혁 솔라 로 요약됩니다. 1. Sola Scriptura 개혁신학의 장점은 성경에 충실하다는 점입니다. 성경만이 우리가 하나님 과 그의 어떤 업적, 어떤 길을 믿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는 유일한 근원입니 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유일하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뜻입 니다. 따라서 성경은 우리 삶의 해석자가 되어야지 그 반대가 되면 안 됩니 다. 신자들은 이 중요한 진리를 터득하여야 합니다. 위에 제시하지 않은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면 궁극적으로 우상숭배가 되고 맙니다. 2. Soli Deo Gloria! 신자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 다른 창조물 또는 물건에 열광하려는 유혹을 극복해야 합니다. 개인이나 교 4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5

회조차도 종종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혜택에만 초점 을 맞춰왔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대신 자기 자신과 다른 창조물에 영광을 돌렸습니다. 진정한 초 점은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당신의 모습으로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 니다.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고 영생을 주셨습니 다. 우리에게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주셨습니다. 우리 의 정체는 하나님과 불가분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떨어져서 존재할 수도, 의미를 찾을 수도, 인생을 즐길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으십니다. 신자가 하나님께 영광을 드 리려는 신념으로 살 때 문자 그대로 진정한 겸손함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신이 가지지 않은 것에 대해서 고뇌 하지 않고 본인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발견 하고 기뻐합니다. 3. Sola Cristo 하나님께서 주신 구원의 선물에 관련된 한 가지 결 정적인 요소는 믿는 자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독 점적으로 행하신 일입니다. 하나님의 왕국에서 영생 을 하는 것은 사람이나 사람의 힘에 의해서가 아닙니 다. 어떤 신자도 새 생명에 대해 자랑할 만한 아무런 합법적인 근거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순전히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실 은 신자들의 가슴에 항상 새겨져 있어 야 합니다. 신자들은 창의력과 인적자 원을 이용하여 세상의 증인이 되여야 하지만 모든 구원역사의 궁극적 힘은 그리스도에게만 있습니다. 우리가 자 랑 할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4. Sola Gratia 구원은하나님의자비만으로이루어 집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에게 아무 조건 없이 구원을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구원을 받기 위해 어떤 일이나 대가를 치루지 않아도 되게 하여 주 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대가는 인간이 치루기에는 너무 높기 때문입니다. 어느 누구도 그 대가를 치룰 수없습니다. 하나님만이할수있는일이었고또하 나님이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독생자의 생명을 대가로 치르시고 사람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구원은 누구에게나 대가 없이 주어지는 것으로 인식이 되어 있지만 사실 그것은 무한한 값을 치룬 것입니다. 5. Sola Fide 이신득의(justification)는 오직 믿음만으로 가능합 니다. 오로지 신뢰와 믿음으로서 죄인은 하나님으로 부터 용서를 받을 수 있고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힘으 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인 간은 타락한 죄인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 에서 헤어 나오지 못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의 독 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부활로서 죄인의 사 면을 오직 믿음으로 부여하셨습니다. 개혁신앙은 모든 신자에게 항상 자신을 성경의 진실 의 잣대로 돌아 볼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고 삶에 희망을 부여합니다. 하나님이 중심에 계시면 어 떤 것도 통제불능이 되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우리 는 이로써 위안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에게만 의존하는 것은 처음에는 위안이 되지만 언제나 끝에 는 실망을 안겨줍니다. 이것이 유한하 고 타락한 자의 부작용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답을 처방하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를 믿고 따르는 것만이 삶의 유일한 방법입니다. (번역 :서민희) Reformed Theology s Distinctive Thrust : The Centrality of God Reformed theology has its root in Reformation and its foundation formulated in John Calvin s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t is a system of biblical doctrines that is based on the centrality of God. This is in contrast to the various systems of doctrines that center around man. The inclination for man to design a system of belief according to his desires, emotions, thoughts, and experiences has always been the stumbling block for man to genuinely connect to God. Instead of following God s lead for faith man has often opted to follow the lead of his own folly. Reformation and Reformed theology were born out of necessity to set the standard of faith straight. When it comes to believing God, it would have to be done according to God s way. Reformed theology has championed the Old and the New Testaments to accomplish this task. The Holy Bible, not tradition or experience, would be the sole standard for Christian faith. God s sovereignty is highlighted over man s desire to be in control. Although the scope and the depth of Reformed theology are broad and extensive, the basic tenet of its foundation can be summarized by the five solas of the Reformation: 1. Sola Scriptura The strength of Reformed theology lies in its loyalty to the Bible. It is the only source where we may find what we must believe about God, His works and His ways. It is the only revealed will of God to His people. Therefore the Bible should be the interpreter of our lives and not the other way around. It is critical for a believer to grasp this truth. Any other means of believing in God would ultimately result in idol worship. 2. Soli Deo Gloria! Rev. Thomas Park The ultimate goal of a believer is to offer glory unto God. The temptation to exalt oneself or other creatures and created things must be overcome. There are benefits to being a part of God s covenant family and often these benefits easily become the focus of individuals and even churches. Instead of honoring God, people often honor themselves and other created things. The real focus should be on God, the creator of all things. He created us in His image and gave us 6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7

장로 칼럼 life. He redeemed us from our sins and gave us it. Only God can. So He did. He paid for His eternal life. He gave us purpose and meaning for people s salvation with His only begotten son s our existence. Our identity is inextricably attached to God. There is no way we can exist, find meaning, and enjoy life apart from Him. life. Salvation is perceived as free to those who receive it. The reality is that it was infinitely costly. 개혁주의 신앙 There is only God who deserves glory. There is a beautiful display of humility in the 5. Sola Fide truest sense of the word when a believer lives out Justification is by faith alone. This teaching his life with the conviction to glorify God. He does not agonize over what he is not, but rejoices in who he is in relation to God. 3. Solo Christo! asserts that God s pardon for guilty sinners is granted to and received through faith or belief alone, to the exclusion of all human efforts or works. All humanity is fallen and sinful, under the curse of God, and incapable of saving itself 영어의 Church는 주님에게 속한다는 뜻 의 헬라어 퀴리아코스 에서 유래되었 다고 합니다. 구약에서 회중의 모임이란 카할, 이 말을 헬라어로 번역한 에클레 시아 곧 함께 불러내서 만남 이란 말과 같습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가운데서 불러 냄으로써 구별되는 하나님의 백성, 그리스도인으로 규정짓는 특징적 개념의 말이 교회란 말입니다. 두로, 시돈으로부터 갈릴리 빌립보의 가이샤라로 돌아오신 예수 One critical element involved in God s gift of salvation is the exclusive work done by Jesus Christ to save His people. It is not up to men or their efforts to merit birthing into eternal life in the Kingdom of God. No believer has any legitimate grounds to boast about his new life. It is purely the sacrifice of Christ that satisfies the sins of His people. This truth should always be at the heart of all believers. They should employ creativity and personal resources to witness to the world, but the ultimate power behind all conversions is Christ and His work alone. No one can boast. 4. Sola Gratia Salvation is through the gracious act of God from God s wrath and curse. But God, on the basis of the life, death, and resurrection of his Son, Jesus Christ, grants sinners judicial pardon that is received solely through faith. Reformed theology calls for all believers to constantly examine themselves with the measuring stick of truth of the Bible. It keeps them in healthy relationship with God and gives them a hopeful outlook on life. When God is in control, nothing can be out of control. We ought to find our ultimate comfort and confidence in this. Self-dependence may be soothing initially, but it always ends up disappointing. This is the side effect of being finite and fallen. God has prescribed Himself in Jesus Christ as the solution 김사윤 장로 께서 제자들에게 자기의 identity에 관해 물으셨을 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라는 대답(신앙고백)으로, 예수께서 이 반석위 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라 말씀하셨습니다.(마태 16:17) 예수님의 부활 후, 사도들 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믿는 자로 구성된 유대인 공동체가 최초의 신약교회의 창 립입니다.(이후의 지역교회가 생길 때는 설립) 오순절 이후 야고보가 순교하고, 예루 살렘에 핍박이 일어나자 신약교회는(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예루살렘 다락방모체 로 부터 유대와 사마리아와 안디옥, 가이샤라,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와 로마 제국 의 다른 도시로 확산되어 갔습니다. 주로 바울의 전도여행의 결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교회에 가입되고 다양한 교회의 모습을 보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교회의 통일성은 잃지 않았습니다. 바울서 신에서 교회의 다양한 임무, 여러 직분을 거론하면서 교회는 하나다 교회는 그리 스도의 몸이다. 이스라엘나라, 하나님의 집, 하나님의 성전, 그리스도의 신부 등으 로 표현합니다. 가정에서 모여 예배드리면서 그 공동체를 교회라 하였습니다.(롬 16:5,고전16:19,골4:15 몬2) 그들은 회당에서 유대인들의 예배형식대로 예배를 드 렸는데, 성경을 읽고 (처음은 구약을, 차츰 사도들의 글을 읽음) 공중기도, 설교, 성 찬, 찬송, 가난한 자들을 위한 연보 등이 그들의 예배형식이 되었습니다. 초대교회 에는 사도들의 구전, 성경해설이 전부였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록된 성경이 정 alone. He offers it to His people freely. There is no of that problem. Trusting and following Him is 립되고 이 성경이 교회의 예배와 신앙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work or price that is required of His people to receive it. This is because the price of salvation is too steep for any human being. No one can afford the only way to life as was meant for all of us. 교회가 주후3 ~4백년간 지중해를 중심으로 로마에서 성장하고 신앙을 체계화하였 으며 3위1체 교리도 고백하였습니다. 7세기에 이슬람이 소아시아, 시리아, 북아프리카를 점령함으로 교회역사는 유럽을 8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9

중심하여 전개됩니다. 13세기까지 진행하다가 중세 시대에 교회가 게르만들의 국가 종교가 되면서 교황 과 왕들과의 교회관장의 갈등, 충돌, 야합, 굴종을 거 듭하면서 교회는 세속화하고 부패합니다. 11~13세기 십자군 운동은 봉건사회의 붕괴, 상업, 교역의 진보, 중산층의 부상, 왕권의 강화와 교황권의 약화를 초래하고 이스람권과의 문물 교류로 유럽 지 성인들의 시야 확대, 대학의 생성이 도처에서 일어나 고, 문예부흥과 인문주의 발달로 교황주의 교회에 대 한 비평이 높아져 드디어 종교개혁이 일어납니다. 초기의 교회에서도 이단과 분파 운동은 있었습니다. 11세기까지 하나였던 교회가 성경교리와 언어와 문화 의 큰 견해차이로 동방교회(희랍정교회)와 서방교회 (카톨릭)로 분열하였고, 16세기에, 신학적인 차이로 일어 난 종교개혁을 계기로 서방의 캐톨릭교회는 로 마카톨릭교회, 루터교회, 개혁교회, 앵글리칸교회, 여러 급진적인 소그룹의 교회들로 분열되었습니다. 17세기 중엽에 대두된 계몽사조로 교회와 세속은 이 분화되고 교회 내에서도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회의 사상이 점차 고조되어 갔습니다. 합리주의 사상은 인 간중심사상과 맞물려 18,19세기 자유주의 신학으로 발전합니다. 20세기에는 현대신학으로 발전하고 위기신학을 거 쳐 기독교 신앙을 이데올로기화하는 세속신학, 정치 신학, 상황신학 등으로 발전하여, WCC의 에큐메니 칼운동의 산물인 탈 기독교적인 종교다원주의를 낳게 됩니다. 이러한 신학사상, 운동은 기독교신앙을 회의하게 하 고 교회의 세속화, 영적쇠퇴, 무기력화하고, 유럽의 국민교회화 미국의 주류교회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습 니다. 인간의 상황을 중시하고 성경이나 정통신학은 해답을 얻기 위한 보조수단으로 밀려납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객관적 진리가 현실의 상황에 답하지 못하 면 그 진리도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교회세 속화는 점점 중증을 앓게 됩니다. 인간중심의 신학이 자유를 구가하며 교회가 세상의 상황에 나서서 관계하고 억압당하는 자들 편에 서야 한다고 말합니다. 흑인신학은 하나님이 검다는 신론 에서 출발하여 내가 하나님 안에서 기원했다면 내가 검은 것은 하나님이 검기 때문이다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유, 해방, 평등을 외치며 설교하 면서 우리는 언젠가 승리하리라 라는 희망의 노래 를 부릅니다. 여권신장운동은 20세기에 들어 정치, 경제계, 교회 안까지 밀고 들어와 1970년대에 여자는 교회 안에서 잠잠하라 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여성목사안수에 대 거 가세합니다. 1986년 미국의 221개 교파 중 84개 교파가 여성목사를 안수했는데 하나님의 성회가 3,700명, 구세군이 3,200명 흑인감리교회가 19,000 명을 안수했습니다. 여성들은 하나님을 아버지 라고 말씀하는 성경은 남성위주의 유추에서 나온 것이므로 수정을 해야 한 다 고 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어머니 하나님 을 주 장하며 또한 복음은 교회와 가정을 사역하는데 남녀 구별이 없다 고까지 합니다. 상황신학은 현실의 상황과 문제점들에 관심을 기울 이고 모든 억압, 질병, 정치, 가난에서 해방하기 위해 선 성경의 텍스트도 일부는 인용하고, 무시하거나 접 어두거나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생태신학은 동양의 도사상을 끌여 들여 무위적 행동 을 추구하는 신학입니다. 사상의 극대화를 거부하며 가진 자, 억눌린 자 남자, 여자, 보수, 자유신학, 종 교, 인종을 막론하고 인류와 피조물의 생존과 보존 을 위하여 라는 주제를 다룹니다. 한국의 60~70년대 의 신신학, 자유주의자들이 토착신학, 성신학, 해방신 학 등을 주장하자 신자들이 교회를 떠나고, 쇠약해짐 으로 목회자는 성경의 기적을 믿지 않았지만 설교는 정통보수주의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인간복제기술이 인간을 질병에서, 죽음에서, 고통에 서 구원할 수 있다는 구원론이 나타날 것 같지 않습니 까?(김영재교수의 기독교교회사 P726~728 참고) 서기 1050년, 11세기의 교회 문제는 거의 정치적인 문제였습니다. 로마 카톨릭교회의 주교들(교황)이 기 독교의 세계에서 수위권을 독점하는 주장을 동방교회 (콘스탄틴노플)는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교 회가 분열되고 말았습니다. 1517년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는 기독교의 개혁의 이유를(개신교)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믿음을 지나치게 강 조하여 행함과 윤리가 약화된다고 개혁을 비판, 공격 했습니다. 교황절대주의에 항거하여 교회개혁주의자들이 분열 하고 나왔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은 교황무오설, 마리 아의 무죄설, 교회권위와 성경권위의 동등, 신부의 중 보자직을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믿음과 행함이란 주제는 행 6장 초대 예루살렘 교회 에서 다루어졌습니다. 이것은 <말씀의 봉사>와 <식탁 의봉사>, 곧<복음전도>와<사회봉사>를뜻합니다. 복음전도는 믿음이 중심이고, 사회봉사는 행함과 섬 김이 중심 과제입니다. 이 둘은 교회에 맡겨진 원초적 과제이며, 초대교회가 고심했던 문제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그의 로마서주해 서문에서 믿음은 선행을 해 야 하느냐고 묻지 않는다 고 말했습니다. 진정한 믿음이 없다면 진정한 행함도 없다 고칼빈 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선행이 없는 믿음, 선행이 없 는 칭의를 꿈꾸지 않는다 고도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소유하면서 그의 거룩함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 다. 참된믿음안에윤리적행동을포함하고있다는 것이 17~18세기 경건주의 운동의 주된 사상이었습니 다. 1635~1705 필립스페너는 당시 교회의 타락 이유가 <참되고 살아있는 믿음>이 없기 때문으로 보고 <믿음 과 행함, 칭의와 성화>의 문제에 아주 명확하게 루터, 칼빈의 종교개혁 정신을 계승하려 했습니다. 교회의 침체는 <사회 봉사>의 약함의 문제에 있다기 보다 < 참된 믿음>의 약함과 부재에 있다고 말해야 하는 것 입니다. 경건주의는 성경의 <참된 믿음>이라는 주제를 끌어 안고 씨름함으로 시대적 삶의 자리와 교회에 많은 영 향을 끼친 기독교의 커다란 흐름운동 이었습니다. <경건주의>와 <복음주의>라는 명칭에 포함되는 공 통요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인정하고) 선교의 강조, 소그룹 사역 중시, 믿음이 삶으로 이어 지는 사회의 구체적인 변혁운동에 역점을 두는 것이 라할수있습니다. 이것은종교개혁의바른신학과 교리를 계승, 삶의 현장과 사회 영역에서 실천해야 하 는 자의식의 시각에서 출발한 제2의 종교개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경건주의 운동은 거룩한 교회집단에 보 다, 개인의 인격적 개체성을 중요시 합니다. 구원이 거룩한기관, 교회에소속된문제라기보다개인의인 격적 신앙고백, 나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 며, 나의 주님으로 영접했습니다 라고 대답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로 여긴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의 중심은 교회이며, 교회의 흐름에서 가장 중요한 명제는<항상 개혁되는 교회(Reformed Church)>입니다. <개신교의 각성운동>에 가장 광범 위하게, 길게 영향을 끼친 것이 경건주의입니다. 교회 의 갱신은 사회 갱신과 맞물려 실천 지향적으로 사회 10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11

전체를 포괄해야 합니다. 이들은 오히려 교리에 치우 친 정통주의를 반대하며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사변 적 신비주의도 아니요, 가장 혁명적인 내면의 변화(곧 속 사람의 변화)를 통해 외면적 삶과 세계 전체의 변 화를 추구하는 근대 복음주의 운동의 핵심과제이기도 합니다. 루터는 신학적 확신 때문에 사제주의와 맞서 독신주 의를 버리고 개신교회의 가정생활의 입장을 제시하였 고 평신도의 손에 성경을 돌려 주었습니다 칼빈의 중심사상을 예정론이다, 하나님 영광이 다, 하나님의 주권, 그리스도의 신성, 교회 당회 제 도의 복원과 성만찬의 중요성, 성경해석의 금자탑 등 이라고 각각 주장되어 왔습니다. 루터의 말대로 우 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다. 그러 나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렇습니다. 칼빈은 인간 삶의 전 분야에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 하는 정리되고 조직된 성경의 본 모습을 유럽 세계에 알린 것이었습니다. 쯔빙글리는 언약신학의 확신으로 유아세례 시행을 하게 했습니다 종교개혁의 신학은 법치주의의 근대국가를 세웠고 모든 삶의 영역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습니다. 종교의 무지에서 벗어나, 인간의 존엄을 세워주고, 건전한 윤 리의 열매를 맺도록 하였으며, 성경의 해박한 지식으 로 성경의 진리를 조직적으로 요약해 놓은 조직신학 의 정립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의 다양한 교파, 문화, 교육 기관들은 개혁신 학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구별하려는 사람들은 오히려 종교평화주의 자의 적, 분파주의자로 낙인 찍힙니다. 성경에 입각한 가장 순수한 기독교를 칼빈주의라 정의하고, 제한된 의미에서 칼빈주의는 개혁신학을 일컫습니다. 칼빈 주의의 본질과 핵심은 신앙고백서와 교리서에 요약되 어 있고, 칼빈의 신학과 주석은 유럽의 여러나라와 청 교도에게 헤아릴 수 없는 영향력을 발휘하였습니다. 칼빈의 설교와 교육과 저술들은 개혁신학의 기초를 놓게 하였으며 전 세계로 퍼져나가 신학과 교회와 정 치, 과학, 문화, 개인의 삶, 전 영역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했습니다. 미국의 자유 독립사상의 원천에 도 칼빈주의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혁신학은 성경을 문화와 이성과 학문을 판단하고 또 진리로 복종 하는 데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앙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만이 신 학의 내용이 되고, 의존하는 신앙 체계가 됩니다. 오 직 성경만이 싱앙의 절대법칙이며 신앙의 내용입니 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란 글에서 기록된 말 씀에 담긴 하나님의 약속들에 의해서 우리는 축복을 받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신약성경이 거룩한 미사 라고 하였습니다. 칼빈은 성경은 신적인 완전한 영감으로 정확 무오하 며 모든 성도가 복종해야 할 절대 권위로 받아 들였습 니다. 20세기의 개혁주의는 전체 성경(total Scriptura) 을 기본교리에 추가 하였습니다. 현대 계몽주의와 유 행하는 신학은 성경은 참고 사항일 뿐 인간의 이해, 역사적 정황, 사회적 필요성에서부터 신학의 근거를 찾고 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계시를 선포하기 보 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온 인본주의 교훈을 가르치는 것에 우리는 경계해야 합니다.마 15:7-9, 막 7;5-7, 사39:13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10:4 하나님께서 인간에 눈으로 확인하고 목격할 수 있었던 부활 체험의 신앙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무릎 꿇고 예배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게자연만물을통해자신을알려주시지만인간본성 으로는 하님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고 그리스도안 에서 계시를 통해서만이 참 신지식이 우리에게 옵니 다. 그리스도 중심의 신앙이 극단에 빠져 나의 하나 님, 나의 주님식으로 종교적 주관주의(religious subjectivity), 내부주의(inwardness)를 우리는 경계 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특수성, 유일성을 혼탁 하게 만드는 혼합주의, 그리스도의 유일 속죄주, 유일 중보자를 떠난 보편 구원론(만인구원)도 거부해야 합 니다. (중보기도는 구약의 모세나 예수님이 드리는 기도 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면 됩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구원의 기초가 되 며 복음의 중심 메시지입니다. 눈으로 확인하고 목격 할 수 있었던 부활 체험의 신앙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 해 무릎을 꿇고 예배하는 모습으로 바뀌었습니다.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 우리 속에서 마음 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눅 24:3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성령 안에서 새로운 능력 과 사명을 주시며 그의 삶과 인격과 사역이 말씀으로 생생하게 다가 옵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신학의 중 심에 놓고 새롭게 신학을구성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롬1:17) 하박국 2:4의 인용입니다. 루터가 이 말씀에서 강한 확신을 얻고 개혁의 횃불을 들었습니다. 인간의 노력 과 공로를 통해 내적 확신을 얻으려는 시도는 헛된 일 임을 알게 된 것입니다. 성령께선 믿음의 방법으로 구원 얻게 하십니다. 구원의 마지막 근거는 하나님의 영광에 있고, 믿음 의 최종목표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구약의 모든 예 표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왕국에 있습니다. 신약의 마지막은 예수그리스도와 하나님 나라의 영광입니다. 하나님은 세세 영원무궁토록 마땅히 영광 받으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경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나 타나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들어오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신 부가될수있어영적인축복뿐만아니라주님과함께 왕국 에서 통치할 권세까지 얻습니다. 주님의 재림 으로 교회시대는 종결되고 하나님의 왕국시대가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개인적 구원을 얻지만 믿음의 최종목표는 교회적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빛과 소금의 선한 행실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므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가고, 우리 몸 을의의도구로, 산제물로, 우리가받은은사로세계 복음화(하나님 나라)가 우리의 최종목표이자 하나님 의 목표일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더욱 잘 상고 하며 주님께서 이루실 그 영원한 왕국의 소망을 가져 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 더 확실한 예언의 말씀이 있어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 예 언의 말씀을 주의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니라 (벧후 1:19). 12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13

종 교 개 혁 종교개혁은 16세기에 로마 카톨릭교회가 타락과 세속화의 극치를 이루자 카톨릭으로부터 이탈하여 세운 그리스도 개혁운동입니다. 독일의 마틴 루터가 로마 교황청의 면죄부 매출 에 반대하여 95개조 항의 의견서를 제출한것이 계기가 되어 즈빙글리, 칼뱅등에 의해 유럽 전역에 퍼져서 교회의 사상과 제도의 개혁을 일으켜 결국에는 신교가 탄생되었습니다. 개신교는 지금까지 10월 마지막 주일을 종교개혁 주일로 지키며 기념하고 있습니다. 수백년이 지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세속주의. 즉 성장지상주의 물질위주의 이기주의, 목 회세습등 부패한 모습들이 교회의 신뢰도를 떨어뜨리는 현실에서 성경중심의 신앙을 강조 하여 금욕과 자선을 실천하였던 칼빈의 개혁신앙으로 돌아가자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습 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이 그옛날 개혁신앙 정신을 다시한번 되새기며 깨닫고 이웃의 고난과 아픔에 같이 동참하여 희생과 섬김의 정신을 되살려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끊임없이 반성하고 타락한 이시대를 밝게 개혁해 나가야하는 진정 한 개혁정신을 일깨우는 의미에서 종교개혁 특집을 꾸며 보았습니다. 중세 말기의 암흑과 개혁의 빛 김재성 목사 (필라델피아 한인연합교회 담임목사, 전 합동신학대학원 교수) 종교개혁자들이 가장 좋아했던 구절 중에 어두움 후에 빛이 온다 (Post tenebras lux)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제네바에서 가장 먼저 구호로 정한 문장이다. 16세기라는 시대가 얼마나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그들이 빛 에 대한 바램을 가지게 되었는가를 오늘의 우리 시대가 과연 짐작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우리가 칼빈의 생애를 이해하기 위해서 스위스제네바와 그 당시 시민들이 처해있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칼빈이 제네 바에 도착할 무렵, 제네바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던 도시가 아니었다. 자유로운 독립과 함께, 제네바 시민들은 거룩한 도시를 기대하였다. 스위스 제네바의 개혁운동 1490년에는 유대인들의 거주지역을 폐쇄시켰고, 1495년에는 무당을 화형에 처했을 정도 로 철저한 기독교 신앙을 유지하고자 했다. 1531년에는 열 두명의 무당 혹은 점쟁이를 공개 처형했다. 1530년에 이미 스위스에서 큰 도시로 손 꼽히는 베른, 쮜리히, 바젤이 쯔빙글리의 지도하에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세 도시에는 시정부 가 교회를 장악하는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도시 정 부체제로 접어들면서 종교개혁은 더욱 가속화 되었 고, 목사들은 시정부의 일에 간섭하지 못하고 설교 하는 권한만을 부여받았다. 그 이전까지는 중세 로 마 교황의 휘하에 있는 주교가 시정부의 일을 간섭하 고 조종하였었다. 1532년에는 베른 시당국은 교회의 업무를 완전히 지배하는 데까지 발전하였다. 그리고 영향력 확보를 위해서 기롬 파렐을 제네바에 선교적 인 임무를 부과하여 파송하였다. 1533년 신앙적인 행동이 아니라 혁명에 가까운 시 민들의 동조가 있자 로마 가톨릭 주교가 떠나고, 제 네바는 파렐의 열정적인 지도를 따른 사람들이 늘어 났다. 그 후로 한 두해 사이에 획기적으로 변혁이 일 어났으니, 종교개혁에 대한 지지가 전시민들 사이에 확산되어서 미사를 폐지하자는 결정이 시의회에서 내려졌고, 모든 형상들을 제거하였으며, 이런 일련 의 진전이 불과 일 이년 사이에 견고해지면서 동전에 다가 어두움 후에 빛이 온다 는 구절을 새겨넣게 되 었다. 그리고 시민들은 로마 주교의 통치하에서 보 았던 어두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성경의 빛을 희망하였다. 나는 어두움 후에 빛을 보기를 원한다. Post tenebras spero lucem: I hope for light after the darkness. 이 새로운 표어는 이런 바램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제 어두움은 사라졌다. 1536년 5월 21일, 시민들은 새로운 빛을 받아들이는 투표에 임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살며, 하 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갈 것을 다짐하였다. 제네바 시민들 사이에는 아직도 많은 의견차이가 있고, 명 쾌하지 않은 부분들도 있었으나 하나님의 법에 따라 서 살아가고자 하는 기본다짐은 새롭게 받아들여졌 다. 이에 따라, 약 1만 여명에 달하는 시민들 사이에 무 려 400 명에 달하던 로마 가톨릭 신부들도 사라졌 다. 단지 열 명의 설교자들만 채용하였다. 반성직주 의가 증대하여서 칼빈이 맨처음 이 도시에 왔을 때에 이러한 강한 반발을 당해내야만 했었다. 시의 모든 공식 문서도 라틴어에서 프랑스어로 바뀌었다. 중세의 어두움, 왜 종교개혁을 열망했는가? 여기서 잠시 중세 시대의 어두움이 무엇이었던가를 들여다 보자. 세계 역사에서 로마 교회가 가장 큰 세 력을 행사했던 중세시대를 암흑기 라고 부른다. 그 러나 모든 면에서 완전한 암흑은 아니었다. 다만 중 세 로마 교회의 신학이 모든 것을 좌우하므로 인간의 존엄성과 다양한 학문의 발전이 더디었다는 의미이 다. 문예부흥을 가져온 르네상스 시대와 종교개혁의 시대로 이어지면서 너무나 비교되기 때문에 그 이전 시대를 암흑기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성경적인 신 앙이 없어졌다는 면에서는 어두움 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왕이나 로마 교회 고위 성직자들을 제외하고 는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훨씬 더 압도적으 로 많았다. 어찌하여 이렇게 되고 말았던가? 그들의 종교였던 로마 가톨릭을 버리고, 새로운 신앙을 받아 서 개종하게 되었던 이유는 그 어두움 이너무나깊 었기 때문이다. 왜 수없이 많은 박해와 피를 흘리면서 까지 종교개혁을 지지하게 되었는가를 생각해 보자. 좀 더 구체적으로, 나라 전체가 개신교로 돌아선 스위 스를 들여다 보자. 그리고 제네바에 살던 시민들은 어 찌해서 로마 가톨릭의 주교를 추방하고 종교개혁을 받아들였으며, 더구나 많은 논쟁 속에서도 칼빈의 설 교와 가르침을 따르게 되었는지 살펴보자. 그러기 위 해서 먼저 우리는 역사적으로 중세 말기의 현장으로 돌아가보아야하겠다. 그러면왜그시대를살던사 람들이 절망하였던가 쉽게 공감할 수 있다. 그 숱한 박해 속에서 개신교 신앙을 포기하지 않고 지키고자 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14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15

칼빈이 태어날 무렵, 지금부터 약 오백년 전의 유럽 은 오늘과는 너무나 다른 신분구조와 계급으로 이루 어진 사회적 연결망을 가지고 있었다. 유럽을 통털 어서 가장 강력한 집권세력은 로마 가톨릭이었다. 로마 교회 조직은 교황, 추기경, 대주교, 주교로 이 어져 내려오는 상층부 성직자들을 중심으로 철저한 상하관계로 중앙권력에 묶여 있었다. 귀족 집안들끼 리 혈연적으로 연결된 상류층이 권력을 세습하고 독 어오면서 수도원 밖에 살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악 과 타락을 겁내고 두려워하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영주들, 귀족들, 부자들이 앞을 다투어서 황금과 돈 을 수도원으로 가져다가 바치면서, 구원의 확신을 얻고자 했다. 수도원에는 이른 새벽부터 예배, 노동, 금식, 침묵, 고행, 금욕 등 많은 수행규칙이 정해져 있었다. 그러 나롤라를 죽였다. 그 이유는 1494년 프랑스가 이탈 리아 북부를 침략해 들어오자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 이라고 교황의 타락을 질타하였기 때문이다. 그의 억울한 죽음 이후에 로마 교회에 대해서 더 이상 아 무런 희망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졌다. 돈으로 산 삼층관 알렉산더 6세는 성직조직에 깊은 암운을 드리운 친 추기경들을 그의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막대한 뇌 물을 뿌렸다. 밀라노 공작의 지지를 등에 업은 아스 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도 유력한 후보였다. 이탈리 아 태생의 이 두 사람은 외국인을 교황으로 삼지 않 으려는 많은 이탈리아인 추기경들의 결의 때문에 초 반에는 가장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였다. 로드리고 보르자는 엄청난 부자였던 데다가, 이제 까지 쌓아온 숱한 정치 경험을 십분 활용하였다. 그 점하고 있어서 평민들의 반감과 탄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서양역사에서 중세라고 분류되는 시대의 말기에 가 장 큰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 가톨릭 교회간 타 락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 누구도 타락의 치부 를 공개적으로 말하면 단죄를 당할 뿐 전혀 개선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타락한 로마 교회의 정상에 있 던 인물들은 교황과 추기경들이었다. 로마 가톨릭은 오랫동안 물질적 세계를 악으로 간 주하였다. 그래서 개인적인 성공의 욕망을 억압하 고, 왕과 귀족들만의 향락이 은폐되고 유지될 수 있 었다. 일반인들이 소유할 수 있는 땅이나 사업이란 거의 없었으며, 물질적인 세계에서 성공하기 위한 모든 노력과 자기 개발을 악한 일로 생각하였다. 로마 가 톨릭에서 장려하던 성공적인 삶 은 물질적인 세계 나 더 이상 새벽부터 기도에만 전념하거나 노동에 나 가야 할 필요가 사라져 버렸다. 이미 수도원의 금고 에 많은 재물이 쌓여있으니, 이제 수도원 내부의 관 심은 누가 차기 수도원 원장이 되느냐에 매달리기 시 작했다. 세상에서 물질을 가장 나쁜 것으로 부인하 던 수도원이 결국 물질로 인해서 타락하였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물질로 타락하게 되었다. 사제직을 팔고, 면죄부를 팔고, 세상의 물질에 한눈을 팔게 되 었다. 성도들은 이런 로마 교회에 대해서 절망하였다. 영 국이나 스코틀랜드 땅의 절반이 교황의 것이었다. 로마는 거의 천년 가까이 교황의 절대 권력체제하에 움직이고 있었다. 교황 권력의 정점을 과시한 사람 이 알렉산더 6세였다. 이탈리아 이름으로 로드리고 보르쟈로 불리는 그는 1431년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태어나서 1503년 72세로 죽기까지 가장 타락한 세 속적인 교황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바로 이 사람 때 문에 종교개혁의 빌미를 제공했다는 비판을 로마 가 족편중, 혈연주의 정치, 즉 네포티즘 (Nepotism) 의 화신이었다. 그의 외삼촌 알론소 드 보르쟈가 1455년에 교황에 즉위하여 칼릭스투스 3세 라는 이름으로 통치할 때에, 젊은 로드리고는 교황정의 핵심 행정직에 임명된다. 일단 종교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하게 되어 그곳에서 자리를 잡은 후, 모두 다섯 명의 교황 (Calixtus III, Pius II, Paul II, Sixtus IV and Innocent VIII) 아래서 탄탄한 자신의 입지 를 구축하여 나갔다. 정치적인 수완이 뛰어나 교황 갈리스토 3세, 교황 비오 2세, 교황 바오로 2세, 교 황 식스토 4세, 교황 인노첸시오 8세 치하에서 교황 청 상서국 차장을 역임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 있으 면서 여러 주교 관구들과 다른 성직록을 차지함으로 써 엄청난 부를 축적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때 당시 는 물론이고 장차 그의 야심을 이루는 데 매우 유용 한 로마의 유력자들과 골고루 인맥을 쌓을 수가 있었 다. 1492년 교황 인노센트 8세가 사망하자, 추기경들 는 추기경들에게 샤를 8세보다 더 많은 뇌물을 주었 고, 그 덕분에 선거 네 번째 날에는 단 한 표만 더 있 으면 교황직을 차지할 상황을 만들어 내는데 성공했 다. 그래서 그는 96살의 베네치아의 추기경에게 접 근하였다. 결국 노인의 흐릿한 판단력을 적시에 공 략하여 그의 표를 얻어내는 데 성공하였다. 교황직 을 돈으로 매수한 셈이다. 이 콘클라베에서의 뇌물 증여는 곧 세상에 널리 알려져 그가 삼층관을 돈으 로샀다 고 하는 세간의 비난이 따라다니게 된 것이 다. 교황으로 선출된 사람이라면 인격과 성품, 신학과 식견이 탁월하여 기독계를 이끌어갈만한 존경의 대 상이라야 할 것이다. 추기경들에게 얼마나 많은 뇌 물을 주고 자신을 지지하도록 만들었는지에 대해 확 실한 증거가 남아있지는 않지만, 소문으로 나온 이 야기들이 영국 브리태니커 대백과 사전에 실려있다. 여러 교황들 밑에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엄청난 돈을 모으는데 성공한 로드리고는 이미 오래 전부터 를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서 세상과 담을 쌓고 수도사 톨릭 내부에서도 받고 있을 정도이다. 중에서 세 명의 교황 후보가 떠올랐다. 로드리고 보 가 되는 것이었다. 이탈리아 출신 알렉산더 6세 (본명은 로드리고)가 르자 추기경, 아스카니오 스포르차 추기경, 그리고 수도원 운동은 교회를 바르게 인도하는 신학사상의 교황으로 있던 1492년부터 1503년까지 로마 교회는 줄리아노 델라 로베레 추기경 등 세 명이 유력 후보 산실이 되지 못했고, 교인들을 건전하게 교육시키는 도저히 거룩한 것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세속 가 되었다. 초반에는 이탈리아인의 지지를 얻은 델 전당이 되지도 못한채, 완전히 소비기관이 되어서 적인 사람보다 더 훨씬 더 타락하여 여러 아들과 딸 라 로베레가 유리하다고 보여졌지만, 로드리고는 아 실패하고 말았다. 예루살렘 주변을 비롯해서 기독교 을 낳았고, 둘째 아들을 유럽의 최고 군주로 만들고 스카니오를 포함한 많은 추기경들을 돈으로 매수하 가 공인되기 이전부터 곳곳에 널리 유지되어오던 수 이름도 씨저 보르자 라고 지었다. 아들에게 걸림돌 는 것에 성공했다. 도원들은 소박한 삶을 제공하는 건전한 공동체였다. 이 되는 자들과는 전쟁 벌이기를 주저하지 않았으 그가 교황에 당선된 콘클라베 전날 밤의 상황은 대 시내산 수도원처럼, 시내산 주변, 시험산 주변, 베들 며, 온갖 추잡한 죄를 감행하다 못해서 수단과 방법 략 이러하였다. 교황 식스토 4세의 조카 델라 로베레 레헴과, 이집트, 소아시아 여러 곳에 훌륭하고 열심 을 가리지 않고 대적자들을 처형하였다. 교황과 귀 추기경도 차기 교황 유력 후보중한명이었는데, 델 히 살아가던 수도원들이 있었다. 그러나 중세로 넘 족들의 부패와 사치를 꾸짖는 플로렌스의 성자 사보 라 로베레의 지지자였던 프랑스의 샤를 8세는 많은 16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17

은밀하게 돈으로 해결하려는 치밀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로드리고는 강력한 경쟁자 중에 한사람인 스포르차를 엄청난 양의 은전을 주고 매수했다는데, 그렇게까지 돈을 사용하지 않아도 당선될 수 있었 다. 당장 한번에 많은 돈을 주는 것보다 나중에 더 큰 혜택을 제공하기로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당선 될 수도 있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1) 콘클라 베 즉, 추기경들이 모여서 은밀하게 진행한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돈으로 매수하는 일이 자주 있었 는데, 그 역사에 정통한 죤 부쳐드의 일기에 보면, 로드리고 보르자는 가장 많은 선거자금을 치루고 교 황에 당선된 사람이라고 적어놓았다.2) 그러면 그 많 은 자금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교황과의 우호적 인 거래를 필요로 하던 프랑스 국왕에 의해서 20만 냥의 금을 제공되었고, 제노아공국에서는 십만 냥의 금을 공급했다고 한다. 중세 교황청의 부패 중에서도 가장 타락했던 로드 리고의 교황선출은 심지어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마 저도 거부반응이 심했다. 훗날 레오 10세 라는 이 름을 사용하는 교황이 되어서 종교개혁의 거부대상 으로 유명해진 죠반니 로렌조 메디치 (Giovanni di Lorenzo de Medici)라는 신부가 있었다. 그는 특 히 베드로 대성당 공사비용 조달을 위해서 면죄부를 판매하던 중에 마틴 루터와 맞서게 된 사람이다. 그 도 역시 돈을 모으기 위해서 면죄부 를 팔아먹는 타 락한 교황이 되었는데, 그러한 신부의 눈에서 볼 때 에도 당시 로드리고의 교황피선은 충격이었고, 당연 히 비난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이제 우리는 늑대의 손아귀에 놓이게 되었다. 그는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전혀 보지 못했던 가장 탐욕스러운 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도망을 1) Peter de Rossa, Vicars of Christ: The Dark Side of the Papacy (Corgi, 1989), 144. 2) John Burchard, Diaries 1483?1492 (translation: A.H. Matthew, London, 1910) 3) James Reston, Dogs of God (New York, Anchor Books, 2005), 287. 가지 않는다면, 필경은 그가 우리 모두를 잡아먹고 야 말 것이다.3) 호색과 탐욕의 사생활 교황 알렉산데르 6세는 제214대 로마 교황(재위: 1492년 8월 11일 - 1503년 8월 18일)에 올랐다. 그 후로, 르네상스 시대의 타락한 교황의 대표적인 인 물이요, 호색과 탐욕으로 많은 비난을 샀다. 또, 사 생아인 체사레 보르자 를 오른팔로 삼아 일족의 번 영과 교황청의 군사적 자립에 정력을 기울여, 이탈 리아 반도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일반적으 로는 사상 최악의 교황 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차라리 교황이 되지 않고 세상 군주가 되었더라면 가 장 뛰어난 수단가로서 이름을 남길 수 있었을지도 모 른다. 로드리고는 젊은 날 쾌락의 맛에 심취하여 여러 명 의 여인들과의 사이에서 아들 여섯 명과 딸 두 명을 두었다. 그의 자녀들 중 페드로 루이스와 이사벨라, 지롤라마, 조반니 그리고 로드리고의 어머니는 누구 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그들 모두는 지상 최고의 권력을 가진 아버지의 후원 덕분에 높은 직택 에 앉거나 유력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알렉산더 6세의 가장 유명한 자녀는 체사레, 후안, 루크레치아, 호프레 등 4남매로 모두 다 반노차 카타 네이의 소생이었다. 1458년에는 이처럼 단정치 못한 품행 문제로 교황 비오 2세로부터 질책을 받았었다. 하지만, 아무런 문제없이 1492년 8월 26일, 이례 적으로 장대하게 대관 미사가 거행되었다. 지금까지 의 교황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족벌주의에서 한치 도 벗어나지 못했다. 애인 반노차가 낳은 아들 체사 레 보르자를 불과 16살, 피사 대학교의 학생이였음 에도 불구하고 발렌시아의 대주교로 임명하였다. 큰 아들 죠반니에게는 간디아의 공작이라는 지위를 주 었는데, 자신의 조상들이 살고 있던 스페인 보르기 아 지방이었다. 셋째 고트레도에게는 나폴리 왕국과 교황의 지배 영토들을 나누어서 다스리도록 했다. 이런 과정에서 나폴리 공국의 왕 페르디난드 1세와 그의 지지를 받았던 추기경 델라 로베레와의 사이에 충돌을 빚었다. 그리하여 1493년 4월 25일 나폴리 공국과의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자신이 교황에 오른 뒤에, 딸 루크레지아의 원래 약 혼자와는 파혼을 하고 페사로의 영주, 죠반니 스포 르자에게 1493년 결혼하도록 조치했다. 이 결혼은 거대하고 화려하였다. 그 이상 호화판 결혼식은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성대하게 바 티칸 궁정에서 거행되었다. 사촌 조반니에게는 추기 경직을 주었다. 외국에서 태어난 까닭에 이탈리아 내부에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정을 감안하더 라도, 보르자 가문 사람만 다섯 명이나 추기경에 임 명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자신의 지 인들과 친구들만을 등용하였다는 말이다. 세상을 손에 넣는다? 황금의 관을 쓴 알렉산더 6세는 자신의 야심을 펼 치기 시작했다. 돈으로 왕관을 사는 것은 차라리 가 벼운 죄악에 불과하였다. 아들을 최고의 군주로 만 드는데 방해되는 자들을 제거하기 위해서 전쟁도 일 으키고, 죽이고 하면서 모든 정치를 요리해나갔다. 당대 천재 학자로 손꼽히는 마키아벨리마저도 그의 아들을 군주의 이상형으로 삼고 하늘이 내린 최고의 지도자는 체사레 보르자 (혹은 영어식을 발음하면 씨저 보르기오 라고 함)라고 생각하여 군주론 의 모델로 삼았다. 알렉산더 6세가 즉위한 후 처음 두 해 동안에는 외 교적 난제가 속출했다. 밀라노와 베네치아를 비롯해 이탈리아 곳곳이 소요로 들끓었고, 나폴리 왕국의 스페인계 페르디난도 1세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나폴리 왕위 계승권을 줄기차게 주장하는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알렉산더 6세가 접근한 일이 페르디난 도 1세의 기분을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 만 제국의 팽창 속도가 해를 거듭할수록 더 빨라졌 다. 국내 정국도 만만치 않았다. 교황 선거에서 패한 두 추기경, 델레로베레와 스포르차가 알렉산더 6세 의 퇴위를 주장하는 등 그의 자리를 위협했기 때문이 다. 이처럼 산적한 문제를 하나씩 해결하기 위해 알 렉산더 6세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그는 성 마르코 동맹을 결성하여 밀라노와 베 네치아에서 교황 통제권을 강화하였다. 또 나폴리 왕을 달래기 위해 자신의 두 아들 중 한 명은 아라곤 왕가의 딸과, 또 한 명은 나폴리 왕가의 딸과 혼인시 켰다. 오스만 제국 문제에 관해서는, 오스만 대사를 극진히 대우하고 술탄과 일종의 암묵적인 동맹을 맺 음으로써 긴장을 완화시켰다. 또 뇌물을 써서 델라 로베레와 화해했다. 이렇게 해서 비로소 교황의 임 무를 정상적으로 수행할 만한 여건을 마련했다. 그 는 신대륙 발견에도 개입했다.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자 스페인 왕국과 포르투갈 왕국은 그 땅에 대 한 소유권을 서로 주장하다가 교황에게 중재를 청했 다. 그러자 알렉산더 6세는 지도 위에 세로로 선을 그어 신대륙을 양분했고, 얼마 후에는 그 선을 서쪽 으로 더 옮겨 스페인에게 더 많은 땅이 돌아가게 했 다. 이렇게 두 나라를 중재한 일을 계기로 교황은 아 메리카 대륙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많은 선교사 들을 그곳에 파견해 활발한 선교 활동을 펼치게 했 다. 1494년 1월, 나폴리의 페르디난도 1세가 죽자 잠잠 하던 국제 정세가 다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나 폴리 왕위 계승권을 두고 또다시 치열한 경쟁이 벌어 지기 시작한 것이다. 알렉산더 6세는 페르디난도 1 세의 아들 알폰소를 왕위 계승자로 인정하고 그를 왕 위에 옹립하였다. 그러자 델라 로베레를 비롯하여 친프랑스파가 샤를 8세야말로 정당한 왕위계승자라 고 주장하며 알렉산더 6세에게 맞섰다. 이러한 지지 에 고무된 샤를 8세는 교황이 자신을 지지하지 않는 다면 당장 이탈리아 반도로 쳐들어가, 공의회를 소 집하여 교황직에서 퇴위시키겠다고 협박했다. 정치 적으로 고립된 알렉산더 6세는 1494년, 샤를 8세가 실제로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스페인 및 신성 로 마 제국 등과 동맹을 체결함으로써 프랑스를 압박하 였다. 샤를 8세는 그 의도를 알아채고는 결국 이탈리 아에서 퇴각했다. 18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19

사보나롤라의 처형 도미니크 수도회 소속 탁발 수도사이자 열정적인 교회 개혁가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피렌체에서 개 혁을 외쳤다. 당대 타락한 성직자들을 향해 열렬한 비난을 퍼붓기 시작한 것이다. 사보나롤라는 연단에 서서 교회가 타락했다고 비난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했다. 또 피렌체의 통치자인 메디치 가문의 몰 는 말인가? 사보나롤라는 두 명의 제자와 함께 곧바로 체포당 하여, 잔인하게 고문받았다.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법정에서 죄목을 변명할 여지도 없었다. 곧바로 교 수형에 처해졌다. 그 시신마저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불태워졌다. 교활한 로마 교황에게 참담하게 패배하 고 말았다. 이 아들도 훌륭한 군주가 될 수 없었다. 아버지 교황 이 죽자, 그는 시민들의 증오 속에 체포, 투옥, 도망 자의 삶을 살다가 아버지가 죽은 후, 불과 나흘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칼빈과 종교개혁자들의 공헌 16세기가 열리면서, 유럽은 지성적인 안목을 갖추 고 성경의 권위를 가지고 당대의 모순을 파헤치는 루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칼빈의 영향력을 거의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우리가 무한하게 즐기고 있는 각 분야의 자유 민주주의를 정착하는데 지대한 공헌 을 한 사람들은 다 잊혀지고, 그저 지금 누리는 것만 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버드 대학교 교수 죠지 반크로프트는 유럽과 미국의 민주 주의가 정착하게 된 그 근저에 칼빈의 영향이 자리하 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지 락도 예언하며, 시민들의 복지는 뒷전이고 자신들의 금고만 채우기에 혈안이 되었다고 질타했다. 그의 저주받은 죽음 알렉산더 6세는 1500년을 성년 이라고 선포하였 터, 쯔빙글리, 칼빈, 지도자들이 등장하면서 확실하 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가운데 칼빈은 스위스 제 적한 바 있다. 칼빈은 민주공화국 체제의 선구자이 자 초기 사상가였다는 사실 수많은 역사학자들이 증 설교는 빠른 속도로 사람들 사이에서 호응을 얻어 곧 피렌체 전역에 영향력을 큰 미쳤다. 또 1494년 프랑 스군이 이탈리아를 침공했을 때, 사보나롤라는 프랑 스군을 부패한 로마를 정결하게 하고 자신의 예언을 이루기 위해 온 하나님의 칼 이라 부르며 환영했다. 얼마 후 샤를 8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 알렉산더 6 세가 반( 反 )프랑스 동맹 결성에 피렌체의 참여를 촉 구했을 때 사보나롤라가 이를 반대했으며, 이후 교 황과의 다툼이 시작되는 계기가 된다. 그러나 힘과 권세를 가진 교황권에 대한 이러한 도 전은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다. 결국 1497년 6월 18일 사보나롤라를 파문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더 구나 사보나롤라는 당시 피렌체를 덮친 전염병의 확 산을 막느라, 여름 내내 교구 사역에 몰두하고 있어 서 멀리 로마의 교황이 펼쳐놓은 교활한 압박에 저항 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또 교황의 분노로 불안해진 피렌체 정부도 그에게 자제를 부탁하여 그 해가 끝날 때까지 그는 수양에만 몰두하며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이듬해인 1498년 2월, 사보나롤라는 다시 연단에 서서 선지자적인 설교를 하였다. 피렌체 탄 압을 우려한 시민들은 그에게 설교를 중단해줄 것을 요청했고, 그는 여기에 순순히 응하였다. 그럼에도 그는 유럽의 왕들에게 서한을 보내어 공의회를 소집 해 교황을 폐위시키라고 촉구했다. 속으로는 생각했 지만 그 누구도 입밖에 내지 않았던 교황폐위론을 들 고 나오자 사람들은 교황을 두려워했다. 교황은 살 아있는 절대권력인데, 감히 어떻게 폐위를 주장한다 다. 거룩한 축복을 받으러 유럽 전지역의 수많은 순 례자들이 로마로 몰려들었다. 이들로부터 막대한 헌 금을 챙겨 교황청의 금고를 넘치도록 채웠다. 또 성 년 기념을 위해 성 베드로 대성전에 성문( 聖 門, Porta Santa)을 설치하게 하였다. 이 문은 희년 첫 날에 열고 마지막 날에 닫도록 했는데, 이 관습은 오 늘날까지도 지켜지고 있다. 1503년 8월 11일 알렉산더 6세는 자신의 죄값을 치루고야 말았다. 아들 체사레와 함께 열병으로 앓 아누워 자신의 후계자 교황 당선 기념 미사에 불참했 다. 주치의들의 처방에도 불구하고 일주일도 채 되 지 않아 그의 배는 물로 가득차고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채 사망하였다. 그 날은 날씨가 매우 후텁지근 해 시신이 금방 부패했다. 시신을 시스티나 성당에 안치해둔 동안 얼굴이 진한 자줏빛으로 변하고 군데 군데 검푸른 점이 나타났으며, 벌려진 입술은 부풀 어 올라 흉하게 일그러졌다. 심하게 부풀어 오른 시 신은 미처 관에 다 들어가지도 못했다고 한다. 그래 서 결국 관리들이 시신을 낡은 카펫으로 둘둘 말아 관 위에 걸친 다음, 쑤셔 넣어야만 했다. 후임 교황 피우스 3세는 저주받은 자의 시체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신성모독행위와 같다 고 하면서 전임자의 장례 를 거부하였다. 알렉산더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의 운명도 다를 바 었었다. 한때는 정치적, 군사적 능력이 대단했던 것 으로 보였지만, 사실은 아버지의 눈치만 보던 자들 이 뒤에서 거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기대처럼 네바에서 확고히 개신교 교회의 모델을 정착시켜 나 갔다. 그의 예리한 분석은 성경의 사상을 명쾌하게 밝혀주므로써 많은 사람들이 따르게 되었다. 하버드 대학교의 반트로프트 교수는 칼빈에 대해서 민주주의 씨앗을 뿌린 사람이라고 했다. 영국 청교 도들을 양육한 사람이므로 그 후예들이 신대륙에 건 너와서 미국을 건설하게 되어졌기에 결국 칼빈은 아메리카 라는 새로운 자유국가를 가능하게 만든 사상적인 뿌리라고 평가하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그 를 따르는 위그노 수 십만명이 목숨을 바치면서도 그 열기가 식지를 않았다. 그들의 후예들이 건너와 서 싸우쓰 캐롤라이나에 자리를 잡았다. 지금도 그 지역에는 칼빈의 영향이 더욱 생생하게 살아있다. 네델란드 사람들이 이민자들로 살고 있는 지역들, 뉴욕 맨하탄과 미시간, 인디아나, 일리노이, 아이오 와 곳곳에도 칼빈의 영향이 스며들어 있다. 칼빈의 이름으로 세워진 대학교, 신학대학원, 교회, 건물들 이 하나 둘이 아니며, 한결같이 그의 정신을 추앙하 는 기관들마다 걸출한 영향력을 보여주고 있다. 칼빈의 사상과 행동은 유럽의 근대화에 분기점이 되어갔다. 절대 군주들이 수호신처럼 여기던 왕권신 수설, 그리고 로마를 중심에 두고 단일체제를 유지 하게 하는 교황무오설 등으로 철저하게 굳어진 봉건 체제를 거부하고, 자유와 민주제도가 뿌리를 내렸 다. 칼빈에 의해서 다수의 지도자들이 함께 협의하 고 치리해 나가는 당회제도와 민주주의로 가는 첫 길 목이 열리게 된 것이다. 언하고 있고, 유럽 종교개혁 역사와 프랑스 개신교 회의 수난사에 정통하여 많은 저술을 발표한 위스콘 신 대학교 킹던 교수가 일생동안 연구를 통해서 입증 하였다. 킹던 교수의 외할아버지는 일제하 평양 숭 실학교에 헌신했던 윤산온 (George S. McCune) 선 교사였다. 칼빈주의를 그렇게 열렬하게 지지했던 것은 자유를 향한 열망 때문이다. 자유를 향한 도덕적인 싸움에 서, 칼빈의 신조야말로 흔들리지 않는 신실한 응원 자요, 결코 패하지 않는 지지자 역할을 했다. 청교도 들이 민주주의적인 자유의 원리들을 심었다.4) 칼빈과 오늘날의 성도 한사람이, 혹은 목회자가 개 인적인 관계를 맺기에는 너무나 격차가 크다. 시대 적으로, 지리적으로, 인종적으로, 너무나 우리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가장 경건한 기독교인의 모 범이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 을 수 없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소명에 충실하기 위해서 촌음을 아껴서 노력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 하여 열심히 살아가는 신앙인의 표상이기도 하다. 4) Robert M. Kingdon, Calvin and Calvinism: Sources of Democrcy (Lexington: D.C. Heath and Company, 1970), xiii. 20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21

역설의 시대 (The Age of Paradox) - 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16세기의 삶과 정신 은 무엇이었을까? 잔인하게 계속되었던 종교전쟁과 농민 반란의 시대가 세인들에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르네상스의 시대로 기억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1572년의 프랑스 성 바돌로뮤 대학살 사건과 이탈리 아의 숭고한 미켈란젤로의 작품이 함께 피어났던 이 시대의 본질은 무엇인가? 코넬대학교의 역사가 스미스(Preserved Smith)는 16세기를 그것이 이루었던 바가 아니라 그것이 꿈 꾸었던 바에 위대성이 있다 고 평가하였다. 종교개 혁 이후 16세기의 특징은 자신이 체험했던 바와 꿈 꾸었던 바의 괴리 속에서 끝없이 절망하고 또한 갈망 하는 역설 속에 있는 듯합니다. 이것은 직접적으로 는 16세기 역사에서 시대적 현실과 이념(특히 종교 적 이념)간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해야 하는지의 문제 를 제기합니다. 또한 그것은 구체적으로 16세기 역 사에서 종교개혁과 르네상스간의 관계를 어떻게 전 체적으로 해석할 것인가의 문제를 의미합니다. 스미스는 근대적인 관용과 양심의 자유의 대중적 확산을 르네상스에 의한 합리주의와 종교개혁의 결 과로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교리적인 면 에서 분명히 비관용적이었지만, 종교개혁이 가져온 전쟁의 경험은 사람들을 소진시켜 결과적으로 관용 을 받아들이게 하는 토양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한 르네상스의 합리주의는 종교적 문제에 있어 이성 장성철 목사 적이고 관용적인 토양이 되기는 하였지만, 일반인들의 미신과 주술적인 삶의 요소로 인하여 협소하고 학문적이고 이론에만 국한된 영향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종교개혁은 종교의 비관용 에 가장 크게 항의한 것이었지만, 그 개혁의 내용은 또한 가 장 비관용적인 탄압과 전쟁을 통해 달성된 것이었다 는 점에서 역설적 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르네상스는 인간 스스로의 정신과 이성에 대한 자각 과 탐미적 추구를 그 내용으로 전개한 것이었지만, 그것은 가장 비이성적인 미신과 주술, 마법과 악마 에 의존하는 사고방식으로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역 설적 인 것입니다. 이 글은 바로 역설의 시대였던 16세기의 종교개혁 을 둘러 싼 유럽의 지역적 정치, 사회와 경제적인 면 에서 미시적(microscopic)관점에서 시작하여 거시 적(macroscopic)관점으로 종교개혁사를 해석하면 서 근대적인 관용과 양심의 자유로 이어지는 역사속 의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해 보고자 합니다. 종교개혁 운동 - 교회, 국가, 농민의 관계 모든 인간 삶을 주재하는 권위의 원천으로서 절대 적이고 보편적인 하나님의 질서는 15세기 이후 새롭 게 지리적으로 구분된 민족 으로 이루어진 국가 형 태의 발전과 새로운 삶의 양식, 경제적 활동의 성장 에 따라 점차 붕괴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16세기 에 이르러 직접적으로는 기존의 보편적 교회를 대표 했던 교황 과 신성로마제국 에 대항하는 종교개혁 운동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보편적이고 정당한 권위 의 원천이 과연 어디에 근거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16세기의 역사적 현실에서 교회권력과 국가, 및 사 회의 제 세력들 간의 다양한 관계와 조건에 따라 매 우 상이한 개혁이념과 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습니 다. 루터가 시작한 종교개혁의 가장 커다란 영향은 각 국가의 독립과 군주권의 확립으로 나타났습니다. 고 위 성직자와 군주는 연합을 통해 교회재산을 몰수함 으로써 국가의 영역을 강화시켰습니다. 덴마크, 노 르웨이, 스웨덴, 핀란드는 프로테스탄트를 국교로 정하고, 군주는 종교개혁을 통해 귀족세력을 통합하 는 세속적 정치권력과 절대권을 행사하였습니다. 이러한 북유럽의 상황과 달리 폴란드와 헝가리 등 동부유럽국가들은 지방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귀족 과 젠트리 계층이 교역을 통해 부르조아지로 변모하 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권은 미약했고 프로테스탄 티즘의 영향보다는 하층민에게 보다 급진적인 칼빈 주의가 전파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들 농민들은 종교 적 관용이 허용되자 다시 카톨릭으로 복귀하였습니 다. 그런 만큼 당시 각 지역의 종교가 카톨릭이냐 칼 빈주의냐, 아니면 루터런인가 하는 문제는 어떤 특정 한 교리적인 동의로 결정되었다기보다는, 각 지역의 교회와 왕권, 귀족이 어떠한 입장을 취하는가라는 관 계 속에서 결정되었다는 역사적 해석도 있습니다. 종교개혁의 두 번째의 영향은 농민반란 등을 통한 사회 전반에 걸친 급진적 사회개혁 운동으로 나타났 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직접적으로 교회재산을 위 한 징발이나 십일조의 폐지 등과 같은 교회의 부패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그것은 중세사회의 경제적 기반 인 농노제 자체에 대한 비판을 내포한 것이었습니 다. 이러한 경제적 변화에 대한 요구가 가능했던 것 은 당시의 사회경제적인 발전과 변화에 힘입은 것입 니다. 16세기에 와서 농업혁명과 상업의 발전을 통 해 인구는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농업과 제조업이 상업적 교역을 위한 자본주의적인 것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종교개혁 운동은 교황을 중심으 로 하는 교회권력이 가지고 있었던 조세권에 대한 각 지역의 반발이었으며, 그러한 반발은 각 지역의 귀 족들과 농민의 관계와 영향력 정도에 의해 상이한 양 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각 지역에서 전개된 종교개혁 운동의 특 성은 해당 지역에서의 교회세력과 귀족, 신흥세력, 농민들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음과 같은 양상으로 나 타났습니다.먼저 프랑스에서 전개된 위그노 (Huguenot) 전쟁(1562-1593)은 종교적으로는 구 교도와 칼빈주의 신교도인 위그노 간의 싸움이었지 만, 그 양상은 국내 귀족 세력 간의 정치권력 투쟁이 었습니다. 선진 지대인 북프랑스의 귀족은 로마 교 황과 스페인의 원조를 받고 있었으며, 후진 지대인 남프랑스 귀족은 영국의 지지와 더불어 독일과 스위 스 및 네덜란드 신교도의 원조 하에 용병의 비용을 충당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1572년 8월 24일 성 바돌로뮤 축제날의 학살사건은 카트린느 드 메디치가 위그노 제일의 대변인인 콜로뉘를 제거하 고자 한 것이었다. 내전의 초기국면에서는 종교적 타협정책을 폈던 카트린느가 자신의 딸인 마가리트 발로아와 결혼한 나바르의 앙리에 대해 전면적인 탄 압을 강행했던 이유는 1572년 여름 스페인 지배에 대항한 네덜란드의 저항을 원조하기 위해 출정해야 한다는 콜로뉘의 요구 때문이었습니다. 즉 위그노의 정치적 힘뿐만 아니라 점점 커지는 군사적 힘을 두려 워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1572년 발로아 왕가가 위 그노에 대한 관용정책을 포기하고 전면적인 탄압으 로 나서게 된 이유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 운동은 정치권력의 획득과 장악을 둘러싸고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 22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23

다. 또한 위그노 전쟁은 남부 제 귀족이 무엇보다도 왕권과 국가권력과의 결합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가 앞으로 다가올 부르봉 절대왕정을 예고하고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에서 종교 개혁의 결과는 발로아 왕가에서 부르봉 왕가로의 정 치권력의 변화로 귀결되었으며, 절대주의의 성립을 낳았습니다. 이러한 내전의 과정에서 종교적 관용이 란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었던 것입니다. 인문주의적 영향을 크게 받았던 스위스에서의 종교 개혁이나 군주권의 확립과 연관되어 있었던 북구와 동유럽에서의 종교개혁, 정치권력의 장악을 둘러싸 고 진행된 프랑스에서의 종교개혁과 달리 네덜란드 의 종교개혁 운동은 공화국(Dutch Republic)의 수 립으로 나타났습니다. 네덜란드는 로마 교회의 권력 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스페인의 전제정권으로부터의 자유와 독립이라는 관점에서 귀족들과 신흥 세력들 이 연합하여 공화정을 수립하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스페인 군대와의 전쟁을 가능하게 했던 재정력, 즉 전쟁을 뒷받침할 수 있는 신흥 상업세력의 성장이 전 제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배경만으로는 왜 네덜란드에서는 귀족들이 농민들의 봉기에 반대 하는 세력이 아니라 지지자가 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완전히 설명할 수 없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스미스 는 네덜란드 지역에 왕이 존재하지 않았던 내부적 조 건과, 당시 신성로마 제국이 프랑스의 위그노 진압 에 몰두하고 계속 실패하였던 외부적 상황을 지적하 고 있습니다. 나아가 가장 중요한 점은 네덜란드 귀 족들이 조세 감면과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계층과 협상하고 타협하였기에 농민 및 제 계층과 협약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덜란드에서의 종교개혁 운동, 즉 개혁-박해-봉 기-폭동-내전-내전진압-공포시대-혁명-공화국의 수립에 이르는 일련의 과정에서 루터교와 칼빈주의 의 관계는 교리상의 투쟁이거나 두 정치 세력 간의 투쟁이라기보다는 로마 제국과 스페인의 지배와 박 해에 대항하는 점에서 동질적 연합을 형성할 수 있었 습니다. 영국의 경우 종교개혁은 헨리 8세의 이혼이라는 사 적인 사건으로 촉발되어 군주에 의한 국교회로의 전 환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앤 볼린과의 결혼문제 라는 사건이 표면화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이미 영국 에서 왕권이 어느 정도 강화해 있었다는 것을 반증하 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지리적 특성상 유럽 의 로마 교회세력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 습니다. 그러므로 영국에서의 종교개혁은 국가에 의 한 개혁으로, 의회가 그 혁명적 입법의 중심이 되었 습니다. 의회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재산을 환수하 고, 교황청에 대한 납세와 기부 헌납 금지, 왕의 허 가에 의한 주교 및 대주교 선출과 왕에 대한 복종서 약 등을 입법함으로써, 교회와 관련된 제반 특권을 폐지하고 주교회를 왕권에 귀속시켜갔습니다. 또한 개혁을 통해 몰수된 교회재산이 재분배되는 과정에 서 신흥 토지귀족이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영국과 달리,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장 로교가 우세하였는데, 그 원인은 민족적 특성의 차 이가 아니라 국가의 정치적 환경과 역사적 환경의 영 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영국은 루터의 보수적 영향이 우세했을 시기에 로마 교회의 속박으로부터 해방되었고, 스코틀랜드는 칼빈의 영향으로 혁명적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습니다. 또한 영국의 개혁은 왕에게서 시작되어 신흥 상업적 귀족에 의해 지지되 었던 반면, 스코틀랜드는 뚜렷하게 귀족적인 경향을 보여줍니다. 영국과 달리 스코틀랜드에서 왕은 허수 아비였으며 귀족들의 권력이 우세하였는데, 이는 스 코틀랜드의 환경이 농경지가 아닌 산악지대였으므로 중앙집권적 권력이 형성되기 힘들었던 전통적인 역 사적 배경에도 기인합니다. 아일랜드가 종교개혁의 과정에서 카톨릭으로 남았 던 까닭 또한 교리상의 문제라기보다는 정치적인 문 제였습니다. 영국은 아일랜드와 오랜 민족적 적대관 계에다가 신앙적 증오와 경제적 이유가 더해져 그 갈 등과 탄압이 가혹했습니다. 즉 영국이 아일랜드에게 프로테스탄티즘을 강요한 탓에 오히려 아일랜드는 이에 대한 저항의 과정에서 카톨릭으로 남았던 것입 니다. 이탈리아 또한 유럽의 전반적인 종교개혁 운동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티즘에 동화되지 않고 카톨릭으 로 남았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정치적 분열로 인 해 자치권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팽창정책이라는 외세의 강한 영향에서 벗 어날 수 없었다. 더욱이 이탈리아에서 종교개혁이 성공하지 못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유는 그곳에서 만 개한 르네상스의 영향을 들 수 있습니다. 즉 이탈리 아의 정치적 분열상 못지않게 르네상스의 시인과 예 술가 등 그 곳의 정신적 문화의 경향은 신교에 매력 을 느끼지 못했으며 그러한 환경에서 종교개혁은 일 반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물론 16세기에 제기된 종교와 국가 간의 관계 에 대한 문제가 당시의 종교적 교리 및 이념과 어떠한 측면에서 연속되며 어떤 측면에서 구분되는지는 보 다 면밀한 검토와 해명을 필요로 하는 작업입니다. 16세기 전개된 종교개혁 운동에 대한 해석 은시대 의 변화에 따라 그 평가가 달라져왔습니다. 다만 이 상의 검토를 통해서 볼 때,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은 종교적인 교리의 문제를 넘어 보편적 교회공동체가 아닌 새로운 권력과 질서를 각 지역의 환경에 따라 형성해 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전쟁과 종교적 관용 이념의 형성 16세기에 발생한 종교전쟁의 과정에서 당시의 모든 종교적 지도자들은 명백히 비관용적이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모 든 사람이 양심의 자유를 가져야만 한다 는 견해를 사악시하였습니다. 아우구스 티누스는 교회가 사람들을 강제로라도 신앙을 갖게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아퀴나스는 신앙은 미덕이며 진실을 말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 것은 죄악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러한 자들은 교회에 서 추방하고 죽여야한다고 했다. 교황 교서 (Exsurge Domine)가 비난한 루터의 신조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이교도들을 죽여야 한다는 성령의 뜻 을 거슬렀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교도 왕을 폐하고 벌하는 교황의 권력은 1559년 2월 15일 교서에 나타 나있습니다. 카톨릭 교회의 교리는 실행에 옮겨졌으 며, 박해의 의무가 성청(the Holy Office)에 의해 실 행되었습니다. 개신교(Protestants)도 마찬가지였다. 초기 개신 교도들이 보다 자유주의적이었으리라는 관념은 선입 관에 불과한 잘못된 것입니다. 루터는 초기에 관용 의 이론을 표현했다. 그는 교황은 신앙이나 신의 말 씀에 속한 문제를 판단하는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 인들은 스스로 그러한 문제를 판단해야 한다. 이단 은 힘으로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단은 영적인 것이다 또한 신앙은 자유다, 사상은 세금으로부터 자유롭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루터교가 세력 을 가지게 되자, 루터는 종교적 관용에 대하여 다르 게 보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충격은 문관(civil magistrate)으로부터 야기되었습니다. 선제후( 選 帝 侯 :Elector)인 섹소니의 존(John of Saxony)은 재 세례교(Anabaptist)를 겨냥하여 평신도들의 설교를 금지시켰습니다. 같은 해 이러한 법률 아래에서 12 명의 남성과 여성이 사형에 처해졌다. 1529년 카톨 릭과 루터교는 공동으로 제국법(The Imperial Law)을 제정하여 재세례교도들을 사형시키도록 했 24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25

습니다. 이 법 아래에서 많은 사람들이 처벌되었고 사형되었으며 종신형에 처해졌고 유배되었다. 루터 는 이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그 리고 유배가 가장 적절한 처벌이라고 견해를 밝히기 는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단이 아니라 불경죄로 탄 압한다는 명목 하에 루터는 이러한 박해를 정당한 것 으로 간주하였습니다. 루터교와 쯔빙글리교 사이를 중재하는 입장이었던 스트라스부르거(Strassburgers)도 마찬가지로 비관 용적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가 사람에 불과하 며 가짜 예언자라고 말한 자들을 사형에 처했습니 다. 스위스에서도 또한 이단을 처벌했습니다. 성인 들의 침례를 주장한 그의 교리를 비웃는 의미에서 펠 릭스 만쯔(Felix Manz)는 익사형에 처해졌습니다. 조지 블라록은 태형을 당했습니다. 취리히, 베른, 세 인트 갈에서도 재세례교도(침례교도)에 대한 사형이 수차례 거행되었습니다. 사법적인 처형에 있어서, 칼빈주의자인 서버투스(Servetus)는 칼빈의 교리를 따랐습니다. 칼빈은 정부가 이교도들을 사형에 처할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칼빈은 구약에서 이교도들에 대해 하나님이 내린 죽음의 벌이 기독교의 보편적인 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적들은 증오해야 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카스테요(Castellio)가 이 교도들을 사형하는 것은 타당치 못하다고 했을 때, 칼빈은 이교도를 옹호하는 자들은 이교도들과 동일 한 과오를 저지른 것이며 따라서 동일하게 처벌되어 야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비관용적이었던 종교전쟁에서 관 용정책을 가능하게 했던 하나의 이유는 종교적 강요 에 대한 인문주의자들의 반대와 저항의 사상에서 찾 을 수 있습니다. 즉 많은 학식있 는 프랑스인들이 힘으로 종교적 통일 정책을 강 요하는 시도가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도 잘못이라고 여기기 시작했다는데 있습니다. 이 기간동안 종교적 자유를 지지하는 동정적인 선전이 주장되었으며, 유럽 전체와 특히 프랑스에서 점차 많은 수의 인문주의자들이 종교적 통일이 강제되어 서는 안된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양심의 권리를 주 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인문주의적 입장을 설명한 프랑스 인문주의 자는 뽀스텔(Guilaume Postel:1510-81)입니다. 세계의 화합 The Concord of the World 이라는 책을 통하여 첫 번째는 기독교가 진정한 종교임 을 증명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모하메드의 믿음들을 설명하고 논박하는 부분이며, 마지막으로 모하메드 와 유대인의 개종에 대해 실질적인 충고하고 있습니 다. 그는 기독교의 진리는 본질적으로 독단적인 신 학적 주장이 아니라 증명할 수 있는 도덕적 진리들로 믿었습니다. 또한 이단을 개종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한 그의 확신은 이러한 진리들이 모든 이성적 인간 이 그것을 배움으로써 얻게될 것이라는 가정에 근거 한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개인적 양심을 강제 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사실을 다시금 풍부하게 언급한 책은 카스텔리오 (Sebastian Castellio: 1515-63)에 의해 1554년에 출판된 이단에 대하여 Concerning Heretics: whether they are to be Presecuted 였다. 그는 뽀스텔과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본질이란 주님이 오 신다는 기대 속에서 덕 있고 정당하고 종교적인 태도 로 이 세상을 살고자 노력하는데 있다는 인문주의적 주장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모든 교의상의 논쟁은 실제로 진정한 그리스도적 삶의 행위와 무관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동일한 논쟁이 보댕 (Jean Bodin: 1530-96)의 마지막 저작인 7인의 대화 Colloquium of the Seven 에서 다시 나타났 는데, 이 책은 종교전쟁의 과정에서 프랑스에서 산 출된 종교적 자유에 대한 가장 진보적인 논의였습니 다. 그 책은 자유주의적인 카톨릭 베네치안이 주인 공으로서 6개의 대화에서 나오는 다른 참여자들ㅡ 루터교도, 회의론자, 자연종교를 대표하는 자, 칼빈 주의자, 유대인과 이슬람으로 개종한자들-이 등장 하여 종교적 견해에 대한 전체적 스펙트럼을 보여주 고자 한 것이었습니다. 그 책은 모든 사람의 진정한 종교적 믿음은 그들 신앙의 근본적 원리에 대해 의견 이 일치하게 될 것이라는 이념을 다루고 있습니다. 보댕은 다른 참여자들이 가장 중요한 사실, 즉 신 (God)은 모든 신들(all gods)의 근원 이라는 바를 깨닫기를 요구하고 있습니다.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사상과 종교개혁의 비관용적 교리들이 결국 종교적 다원화의 싹이 트도록 하게 된 것입니다. 역설의 시대 16세기와 하나님의 섭리 16세기는 꿈꾸는 시대였으며, 체험하는 시대였습 니다. 그 시대는 라블레의 거인과 함께, 페루의 황금 과 동양의 의복과 향료에 흥분하여 취해 있었습니 다. 그 시대는 모험의 시대였습니다. 사람들은 루터 와 함께 종교의 자유를 위해 용기있게 나섰으며, 어 떤 이들은 그들의 삶을 지구를 건넌 마젤란이나 하늘 을 잰 부르노와 함께 했습니다. 또한 그 시대는 열망 의 시대였다. 에라스무스와 함께 그리스도와 같이 살고자 꿈꾸었으며, 혹은 모어와 함께 정의로운 장 소를 꿈꾸었고, 미켈란제로와 같이 슬픔의 의미를 숙고했으며, 몽테뉴와 함께 일상의 지혜를 쌓고자 하였다. 더욱이 16세기는 역설의 시대였습니다. 그 시대의 종교개혁은 비록 비관용적으로 진행되었지 만, 르네상스의 인문주의 정신과 종교전쟁의 소진된 경험은 이를 관용적으로 바꾸어갔습니다. 관용의 현 실적 단계는 점진적이었다. 먼저 루터교와 가톨릭간 의 오랜 막다른 대립 이후에, 아우그스부르그의 평 화조약에 의해 두 교회의 관용의 원칙이 작동하기 시 작했습니다. 바르샤바 조약은 절대적인 종교적 자유 를 귀족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네델란드는 관용 의 방향으로 오랫동안 움직여갔다. 엘리자베스 정부 는 가톨릭에 대한 초법적인 관용을 만들어냈으며, 또한 유지시켰다. 베이컨이 외국의 적들과 싸우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을 제외한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관용할 것을 제안했을 때, 교황주의자들은 자신들이 법적 승인을 얻을 수 있기를 희망했습니다. 프랑스 는 유사하게 낭트 칙령을 통해 두 종교가 이웃해서 살 수있도록 허용했습니다. 30년 전쟁은 기독교인들 의 격렬한 분노를 불사르게 했지만, 이후 대규모의 박해는 종식되었던 것입니다. 관용 라는 관념이 제기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비관용 의 역사 속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마치 신 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 관용 )가 구약의 악을 미워하고 엄하게 벌하시는 하나님의 공 의( 비관용 )를 통하여 우리들에게 분명해 진것과 같 습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있었습니다. 종교 전쟁의 와중에서 형성된 양심과 도덕의 자율성과 이 에 대한 권리의 의식을 통해 그 시대 사람들의 마음 은 보다 자유롭고 이성적으로 바뀌어 갔습니다. 결 국 신본주의 사상에서 인본주의 사상으로 옮겨가는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 또한 양심의 자유를 강조 한 나머지 절대적 진리에 대한 회의와 종교의 다원화 에 기초를 놓게 된 것입니다. 종교개혁 이후의 시대가 미시적(microscopic)으로 나타내 주는 것은 역사적 과정에서 종교적 이념과 실 제적 삶의 역설, 그리고 철학과 역사, 시대와 사상간 의 아이러니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는 거시적인 (macroscopic) 관점에서는 인간의 삶과 역사를 주 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게 해 줍니다. 26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27

종교 개혁은 1517년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교 회를 비판하는 내용의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하여 시작된 사건으로 현재의 개신교와 성공회가 로마 가톨릭에서 분리된 사건이다. 간추린 종교개혁 중세 말기에 인문학자들은 교회의 부정과 부패를 풍자하여 도덕적인 개혁을 부르짖었지만 그것으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런 가운데 마르틴 루터가 비텐베르 크 대학교의 교회당 정문에 95개조에 달하는 반박문 을 못 박은 사건은 로마 가톨릭의 유럽 지배 종식의 기점이 되었다. 중세 종교인들은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신의 목소리 듣기를 원했고, 인위적인 평안이 아닌 신이 직접 내리는 평안을 절실하게 요구하였 다. 루터는 바로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켰다. 루터는 중세의 신비 주위적 경건과 예리한 지성으로 중세 교 회의 부정과 인위적인 가면을 벗기고 복음의 실체를 값없이 모든 사람에게 선물했다. 독일에서 루터를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남과 더 불어 스위스에서는 칼뱅의 개혁운동이 꽃을 피우게 되었다. 개혁파의 신학은 점점 칼뱅의 신학으로 수 렴되면서 칼뱅주의는 대륙 쪽 개혁파 신학의 주류가 되었다. 칼뱅의 제자였던 녹스는 영국으로 건너가서 신학을 전하였다. 16세기 유럽은 대변혁을 맞았다. 이렇게 유럽이 점차적으로 교황청의 억압으로부터 종 교 개 혁 서서히 벗어나자 인문주의도 더 활발해 지면서 훗날 문예부흥을 불러왔다. 신학의 시녀로서 빛을 보지 못했던 철학이 과학적인 방법의 도입과 더불어서 독 자적인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고 자연과학의 발달과 더불어서 무조건적인 신앙의 강요가 호소력을 잃어 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억압받던 노동자와 농민들 이 제 몫을 찾기 위해서 조용한 시위를 일으키는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양상의 변화가 일어났고 신 대륙의 발견과 더불어서 박해받던 유럽의 개신교 신 자들에게 탈출의 기회가 마련되었다. 공격을 받은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는 조용하게 자 신들에 대한 반성과 더불어서 개신교를 반격할 수 있 는 철갑을 더욱 단단히 하면서 내부 개혁으로 쇄신하 였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해외 선교에 힘을 쏟는 예 수회가 시대적 필요에 부응해서 창설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이후로 기독교는 수 백 개의 여러 종파로 분열되었고, 그로인해 기독교 종파 간 갈등을 가중 시켜 신앙 상 혼란을 일으켰다는 비판을 종교개혁파 에게 내리는 사람들도 있다. 개혁자들의 신학적 사상 개혁자들의 신학적 사상은 소위 다섯 Solas(Five Solas)로 요약된다. Sola Scriptura(오직 성서) : 진리냐 아니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서에 있다는 뜻으로 진리의 판단 기준은 성서이지 교회가 아니라고 해석한 것이다. 이는 로마 가톨릭의 교권주의에 저항하는 의미를 갖 고 있다. Solus Christus(오직 그리스도) : 구원은 인간 스스로이룰수없고오직십자가에서모든사람의 죄 값을 대신 갚고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완전 히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는 길뿐이라는 뜻이다. Sola Gratia(오직 은혜) : 구원에 필요한 예수그 리스도의 공적인 효과를 덧입는 길은 전적인 하나님 의 선물로써 하나님이 인간 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 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믿음역시 하나님의 선물이 며, 믿음은 구원을 받는 통로 일 뿐이지, 믿음이 구 원의 대가 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Sola Fide(오직 믿음) :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 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교리는 인간의 종교적 행위를 강조하는 업적의 의를 비판하는 데 목적이 있다. Soli Deo Gloria(오직 주님께만 영광을) : 구원 은 하나님이 시작하시고 완성하시는 일이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만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종교개혁이 확대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요인들 종교개혁은 기독교 내부의 부정과 부패를 개혁하 여 초대교회의 원형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이었다. 16 세기 종교개혁의 모습을 보면 루터만이 아니라 그 이 전에도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영국의 존 위클리프 나 보헤미야의 얀 후스는 사상적인 개혁자들이었고 사보나롤라 같은 이는 도덕적인 개혁자였고 버나드, 타울러, 엑카르트는 신비적인 개혁자들이었다. 이들 에 의하여 준비된 종교개혁은 로마 가톨릭에 반대하 기 위하여 유일한 성서의 권위, 오직 믿음을 통한 구원의 교리, 모든 신자의 제사장직을 기본 원리로 하여 기독교의 변화를 추구하였다. 루터나 칼뱅은 이러한 운동을 보다 더 효과 있고 광범위하게 전개하 였다.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은 3가지 요인을 들 수 있다. 도덕적인 요인 교회가 신령한 축복을 돈 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 도 그것을 합리화 시키려 할 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그 외에도 성직 매매가 성행했고 신부는 문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다. 이 러한 도덕적 타락은 일부 주교들이 교회 개혁을 교황 바오로 3세에게 정식으로 건의하기에 이르기까지 했 다. 지적인 요인 르네상스는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고대 문학으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 문화의 교류, 봉건 제도의 붕괴에 따른 상업인구의 격증 등 이 모든 것 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북 유럽에서 는 인문주의가 대학가를 휩쓸었고 르네상스에 뒤따 른 새로운 학문 열은 교부신학과 성서 원어인 히브리 어와 헬라어 연구를 장려했으며 종교개혁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하여 주었다. 사회적 요인 십자군 이후 봉건사회가 점차 무너지면서 상업의 발달로 농업 경제가 상업 경제로 옮겨지는 과정에서 사회의 구조에 변화가 생겨졌다. 국가주의의 등장 28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29

으로 스페인과 스위스에서는 교회가 국가의 지배 아 래 들어오게 되고 교황청의 아비뇽 유수 로인한교 황권의 몰락은 교회 개혁을 가속화 했다. 교황청이 부과하는 조공의 상승과 지나친 사치는 백성들의 원 망을 사게 했고 루터가 개혁의 봉화를 들자 독일의 농민들은 일제히 호응하였다. 천이었다. 당시 독일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통치 아래 대 봉건 영주들의 총회의를 두고서 제국을 통치 하였다. 화폐와 관세법을 통일시킴으로써 하나의 의 회 아래에서 통일국가의 형태를 가지고 운영되었다.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들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가 보름스에서 소집되 는 제국 회의에 루터를 소환하여 추방령이 내려지자 루터는 작센의 제후 프리드리히의 보호로 바르트부 르크 성에 숨어 살면서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 였는데 그의 신약성서 번역은 독일 문학사와 특히 현 대 독일어 발전에 주춧돌이 된다. 스위스의 종교개혁 스위스는 역사적으로 유럽의 오지에 속하는 척박한 땅으로써 산업이 발달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렇지 만 자유를 원하는 농민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자 유정신을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다 각종 박해 받던 신앙인들이 모여들게 되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간섭 독일의 종교 개혁 독일의 종교개혁은 먼저 정치적 상황과 교회의 각 종 모습들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루터의 외 침이 독일 국민들 그 중에서도 특히 세속 제후들에게 호소력이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교황청으로부터의 경제적 정치적 자유를 얻는 데에 있었기 때문이다. 종교개혁 이전의 독일의 정치적 상황 종교개혁 이전 독일의 상황은 다른 나라들과 큰 차 이가 있었다.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위치한 나라로 십자군 전쟁이후 도시가 발달되면서 봉건제도에 도 전하는 단계에 있었고 프랑스는 십자군 파견으로 전 쟁 이후의 세력권에서 크게 부상하였다. 스페인은 통일왕국 시대를 맞아 해상무역권을 독차지하고 있 었고 잉글랜드는 스페인의 위성국가로, 스코틀랜드 는 프랑스의 위성국가로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였으 나 지리적인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황청의 힘이 가장 강력히 미칠 수 있었던 곳은 독일뿐이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의 보수적인 기질마저 겹쳐져서 교황청의 시녀노릇을 자처하였 다. 각종 세금성격 을띠운헌 금을 바치 는등독일 은 교황청 의 재정적 95개조 명제 발표 종교 개혁의 기폭제는 대사부(면제 부)였다. 대사란 사도시대 이래로 인간 구원의 과정에서 보조 수단으 로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피 공로와 성인들 의 보속 공로를 갖고서 신자가 현세나 혹은 죽은 다 음 연옥에서 받아야하는 죄의 남은 벌을 없애준다는 가톨릭교회의 교리이다. 1513년 교황 레오 10세는 대사를 반포하고 대사 부 판매 촉진을 목적으로 대사 설교들을 하게 하였는데 문제가 된 것은 대사 부를 산 동전이 통에 떨어지는 순간 연옥에 있던 영이 천국으로 올리어 진다 는 내 용의 신부의 설교였다. 이에 루터는 신자들이 대사의 참다운 의미와 가치를 망각하고 대사를 면죄부로 착 각하여 남용하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하여 1517년 10 월 31일 자신의 비판적인 견해를 95개조로 낱낱이 써 서 발표하였다. 교황청이 보낸 특사 요한 에크와 논쟁 하면서 교황 권과 공의회가 한 점의 잘못이 없다는 종 전의 교황무오설을 거부하였다. 라이프치히 신학논쟁과 죽음을 각오한 보름스 회의 2년 뒤 에크와 루터 사이에 라이프치히 신학 논쟁 이 개최되어 엘리트 신학 코스를 받은 에크가 이기게 되고 루터는 우울하게 비텐베르크로 되돌아간다. 마침내 루터가 교황과 로마 가톨릭교회로부터 독립 을 선언하자 교황에게 반감을 가진 독일의 기사 및 시민들이 그를 열렬히 지지하였다. 그 이후로 루터 는 확고한 신념으로 개혁을 추진하면서 교황을 적그 리스도의 상징이며 가장 악마적인 존재로 묘사하였 다. 당시 독일의 정세는 루터의 개혁을 단순히 영적 농민들의 봉기와 루터의 좌절 루터 자신은 보름스 회의에 소환될 때만 하여도 죽 음을 각오하고 뒷일을 멜란히톤에게 위임하였으나 은신해 있는 사이에 비텐베르크의 분위기는 칼 슈타 트가 주도하면서 예상 밖에 시위적인 양상이 곁들어 들자 지금까지의 불만 세력들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신분상 농노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던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전역의 농민들이 지배층의 착취를 언급하면서 자신들의 권리 회복을 부르짖기 시작한 것이다. 농 민들의 소요는 루터의 힘을 업고 더욱 거세게 몰아치 면서 도시의 빈민층까지 가세하게 되었다. 개혁운동에 농민들이 가담하게 되자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은 바로 루터였다. 왜냐 하면 지금까지 루 터가 교회 개혁을 주도하는 데에는 프리드리히 제후 의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러나 농민 편에서 볼 때 프리드리히는 착취자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루터는 힘없는 농민들 보다는 힘 있는 제후 들을 지지해야했다. 자기 지지자인 농민들을 잃게 되자 결국 로마 가톨릭 측과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 으며 여러 동조자들과 함께 자신의 주장이 수정되어 서 제출되는 등 혼자의 힘으로 반가톨릭 운동을 이끌 어갈수없게되었다. 소요한 농민들도 짧은 시일 내에 결성된 집단이었 고 내부적인 결속력이 없었기 때문에 운동 자체나 외 부의 대항세력을 지속적으로 이끌어 갈 수가 없어 2 년 후에 소요는 진압되었으나 그 과정에서 소요군의 사망자 수는 십만 명이 넘었다. 아무튼 농민의 소요 가 루터에게 치명타를 가한것은 사실이다. 을 받지 않고 1291년 연방체계로 발전하였다. 스위스는 남쪽으로는 이탈리아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쪽의 프랑스어 사용권 지역과 북쪽의 독일어 사용 권 지역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종교개혁 즈음에 이 르러서는 프랑스의 프란시스 1세의 박해를 피해서 많은 개신교도들이 피난 와서 슈트라스부르크를 중 심으로 이민사회를 형성하기도 하였으며, 제네바도 이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산업의 발달이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었으 나, 지리적인 조건 아래에서 단련된 신체적 강인함으로 인해서 스위스 인들은 오래 전부터 교 황청의 용병으로 일해서 재정적 수입을 충당하였다. 이러한 전통적인 용병제도는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 청 시절에 양쪽으로 용병이 팔려가는 바람에 민족 간 에 편이 갈려 전투를 했던 고난을 겪었으며, 신성로 마제국의 황제 카롤 5세와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전 투에서는 다시 한 번 용병으로 팔려가서 동족끼리 살 상하는 모순을 겪었다. 그래서 스위스의 종교개혁은 용병제도의 근절이라는 재정적 수입원의 차단으로부 터 시작된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마르틴 루터 동상 수입의 원 차원에만 국한시키지 않았다. 상황은 더욱 확대되어 30 영생장로교회 영생장로교회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