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I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 1876~194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 2015-10-28 오후 5:50:02
1. 근대 서양치의학과 제중원 1) 우리나라에 서양의료가 처음 들어온 시기는 조선말 개항기였다. 1876년 부산에 이어 원산(1879), 인천(1883)이 개방되면서 차차 일본인거류지에 의원들이 생겨났 다. 고종은 교서(1882. 8)를 통해 조선 봉건왕조의 도를 따르되, 농 공 상, 특히 의료 분야에서는 서구의 근대문물을 적극 수용하겠다는 동도서기론( 東 道 西 器 論 )을 천명 하였다. 하지만 조선 정부는 서양의료가 과연 어떠한 것인지, 어떻게 수용해야 할지 구체적인 방도를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갑신정변 때 알렌을 통해 서양의술 의 놀라운 효능 을 목격하게 되면서, 제중원을 열어 서양의학을 본격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1) 갑신정변의 발발과 알렌의 등장 조선에 최초로 상주하게 된 미국선교사는 북장로교회의 선교의사 알렌(Horace N. Allen)이었다(1884. 9). 당시 조선은 외국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법으로 금지하 고 있었다. 알렌이 선교사 신분을 감추고 미국공사관의 무급의사로 근무한 지 3달이 될 무렵이었다. 1884년 12월 4일 오후 7시, 우정국 청사에서 우정국개국 축하연회가 끝나갈 무렵 불이야! 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민영익을 비롯한 온건개화파 인사 들은 화재를 피해 뒷마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급진개화파 서재필의 신호에 맞추어 자객들이 나와 칼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그 중 민비의 조카 민영익은 자객들 의 표적이 되어 무려 열세 번이나 칼에 찔려 쓰러졌다. 자객 중 한 명이 마지막으로 민 영익의 목을 내리치려는 순간, 우정국 총판 홍영식이 그 칼날을 막았다. 죽기 일보 직 전의 민영익은 귀에서 볼까지 베여 얼굴 뼈가 드러나고 살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그 1) 이주연, 한국 근현대 치과의료체계의 형성과 발전 도서출판 혜안, 2006. 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 2015-10-28 오후 5:50:02
런 그를 알아본 것은 미국공사 푸트(L.H.Foote)와 외교고문 뭴렌도르프였다. 뭴렌도 르프는 민영익을 독일 공관으로 옮기고, 미국인 의사 알렌에게 왕진을 요청했다. 알 렌이 도착하기 전 열네 명의 한의사들이 민영익을 둘러싸고 앉아 침과 뜸을 뜨며 치 료했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자상을 입은 상처엔 시꺼먼 송진꿀 고약을 집어넣으려 했다. 알렌이 치료를 시작하려 하자 한의사들은 반발했다. 하지만 알렌은 먼저 자상 을 소독했다. 그리고 해부학적 지식에 따라 모두 스물 일곱 군데를 꿰맨 후 붕대로 감 았다. 동맥 한 군데는 혈관을 잡아매고 심을 넣어 반창고를 붙였다. 머리의 출혈 부위 는 스펀지로 감싼 후 붕대를 감아 출혈을 막았다. 화농된 것은 배출시켰다. 그 후로 열 이 다시 오르기도 했다. 하지만, 생명의 위험을 넘겨 3개월 만에 건강을 회복하게 되 었다. 고종과 민비는 서양식 수술의 기적과 같은 효험을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되었고, 알렌과 서양의학의 효용성을 신뢰하게 되었다. 이어 알렌은 청군과 일군의 충돌로 인 한 부상병들도 성공적으로 치료하여, 민간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알렌(Horace N. Allen, 1858 1932)은 미국 오하이오 주 델라웨어시에서 태어났다. 1881년 오하이오 웨슬리안 대학을 졸업해 이학사 학위를 받은 후 의료선 교사가 되기 위해 1883년 같은 주 옥스퍼드에 있는 마이애미 의과대학을 마쳤다. 그 는 곧 결혼을 한 후 같은 해 9월에 미 북장로교 선교의사로 임명받아 청나라로 선교를 떠났다. 상하이를 거쳐 난징에 도착한 알렌은 청나라에서의 의료선교의 장래성이 탐 탁치 않음을 발견했다. 마침 상해에 있는 동료의사들이 문호를 연지 얼마 안 되는 서 울에 의사가 필요하니 그 곳에서 그 나라와 함께 성장하는 게 좋겠다 고 조언했다. 알 렌은 1884년 7월 선교부에서 한국으로 부임하라는 승인전보를 받았고, 9월에 제물포 를 통해 조선으로 들어온 것이다. 갑신정변 때 죽어가는 민영익을 살려낸 알렌의 나 이는 스물 여섯이었다. 알렌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이 롤모델로 삼았던 피터 파커 (Peter Parker, 1804~1888)와 비슷한 길을 걸을 수 있게 되었다. 피터 파커는 1834년 에 중국 광저우에 파견된 미국 선교의사였다. 안과병원을 하면서 중국의 서양의학 및 의학교육 도입에 선구자적 역할을 하였다. 그 후 미국의 외교업무에도 관여하면서 외 교관의 길을 걸었다. 2) 알렌도 한국에 서양의술을 펼치며 의학교육을 할 수 있는 병원 을 설립해 한국선교 활동을 가능케 하고자 했다. 알렌은 제중원 근무 중 미국공사관 2) 신규환, 박윤제 지음, 제중원 세브란스 이야기 역사공간, 2015, 13~60.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 2015-10-28 오후 5:50:02
의 서기관(1887. 8)으로 임명되면서 외교관의 길을 걸었다. 주한 미국공사 겸 총영사 (1897. 7), 주한 미국특명전권공사(1901. 6)로 임명되어 활동하다가 미국의 친일정책 에 반대하다 파직(1905. 3)되어 한국을 떠났다. 고종 민영익 알렌 구리개 제중원 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 2015-10-28 오후 5:50:02
2) 제중원 설립과 서양 선교의사들이 한 치과치료 1885년 1월 22일 알렌은 미국공사관을 통해 조선정부에 서양의학을 시술하는 병 원 설립을 제안하였다. 알렌의 제중원 설립 제안은 근대 의료의 자주적 수용을 원했 던 조선정부의 적극적인 호응을 얻었다. 조선 왕실의 대표적인 의료기구인 삼의사 (내의원, 전의감, 혜민서)가 해체되는 시점이었다. 그래서 새 병원이 생기면 혜민서 와 같은 근대적 대민의료기구 역할을 해줄 거라 기대했다. 알렌은 병원설립안에서 설립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귀 정부에서 본인에게 시설만 제공하여 준다면 환자와 부상병들은 서양 의술로 치료를 받을 수 있을 것입니 다. 뿐만 아니라 한국 젊은이들에게 서양의학과 위생학을 교육할 수 있는 방도도 될 것입니다. 병원 인력과 재원운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본인은 무보수로 귀 정 부 경영 하에 한 병원을 운영할 뜻이 있습니다. 필요한 것이라면 단지 깨끗한 곳에 큼 직한 한옥 1동과 신탄, 조명, 용역, 시료환자비용, 그리고 연간 약값 3천 달러 정도입 니다. 고종과 한국정부는 병원 설립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알렌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받 아들여(1. 27) 광혜원을 설립(1885. 4. 10)하였다. 고종은 처음에는 널리 은혜를 베푸 는 집 이라는 뜻의 광혜원( 廣 惠 院, 1885. 4. 12) 이라는 명칭을 하사했다. 하지만 2주 만에 사람들을 구하는 집 이라는 제중원( 濟 衆 院, 1885. 4. 27) 으로 개칭하여 하사하 였다. 조선정부는 광혜원을 병원 운영비 및 약대를 책정하여 대민의료와 함께 극빈자 에게는 무료시술을 제공하였다. 이와 같이 제중원은 조선 정부가 지원하는 의료기관이면서 동시에 미국 선교부와 미국 정부의 제안과 의료인력으로 활동하는 기관이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었다. 즉 조 선정부에는 재정과 행정에 관한 운영권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에는 의료에 관한 권 한이 주어진 이중적인 기관이었다. 이것은 초기에는 상호협력의 효과가 배가 되지 만, 시간이 흐르면서 갈등과 해체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제중원은 개원 1년 만에 1만여 명의 환자를 치료하는 성과를 올렸다. 제중원은 양 반에서부터 평민, 빈민과 나환자들까지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진료를 해주었다. 초기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 2015-10-28 오후 5:50:02
의 유료진료는 비록 실비도 안 되는 적은 금액이었지만, 이조차 지불할 수 없는 가난 한 계층에게는 무료진료를 해주었다. 한국인들에게 서양식 치과진료에 대한 최초의 기록을 남긴 사람은 알렌이었고, 의 료기관은 바로 제중원이었다. 일본인이 세운 부산의 제생의원이나 인천의 일본의원 에도 단지 구강병명만 기록되어 있을 뿐이었다. 제생의원의 고니케 가사나오( 小 池 正 直 )는 2년간 1,665명의 환자 중 충치환자가 2명 정도로 조선사람들은 충치가 없 다 고 기록(1883)하였다. 일본의원 다나카( 田 中 親 之 )도 하악복골소라는 병명만 기 록하였을 뿐 치료기록은 없다. 알렌의 조선체류기 에는 서양식 틀니에 대한 한국인들의 반응과 발치에 대해 소 상히 적혀있다. 알렌과 제물포로 같이 온 미국인 선원이 한 주막에서 점심을 먹었다. 선원이 식사를 마친 뒤 의치를 빼내어 닦았다. 이를 본 한국인들은 두려움에 떨며 도 망갔다. 알렌은 조선인의 치아를 뽑게 된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 3) 했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치아가 몹시 아프다고 불평을 하면서 찾아왔다. 그 사람을 빨 리 돌려보내기 위해 아픈 치아를 뽑아버리자고 권하였다. 그렇게 권하면 환자들은 곧 가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놀랍게도 당장에 동의 하는 것이었다. 나의 처방을 수행하기 위해 나는 능력을 다해 한 번에 치아 2개를 뽑아 버렸다. 그날 늦게 내가 병원 문을 닫기 전에 그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나는 기가 꺾이고 말았다. 내가 아무렇지도 않은 치아 1개를 썩은 치아와 같이 뽑아 버렸기 때문에 호된 욕을 먹을 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었다. 그는 그의 처의 치아 몇 개를 뽑아 달라고 처를 데려온 것 이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그때까지 한국 사람으로 그 렇게 아프지 않게 한꺼번에 치아를 2개씩이나 뽑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로 나는 많은 이를 뽑게 되어 오히려 이 뽑는 일이 점점 좋아지게 되었다. 제중원 1차년도 보고서에는(1885. 4 1886. 4) 구강질환 처치에 관한 질병별 통계 가 기록되어 있다. 충치 60례, 구내염(Stomatitis) 55례, 치통(Odontalgin) 15례, 구 개종양(Palatal tumor) 1례, 하마종(Ranula) 1례, 하악골괴사치료(Inf. Maxillary ne- 3) 호레이스 알렌, 윤후남 옮김, 이순자 감수, 알렌의 조선체류기, 예영커뮤니케이션, 1996, 26~27, 216~217. 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 2015-10-28 오후 5:50:02
crosis treatment) 6례, 구개열 (Cleft Palate) 1례, 순열 (Hare-lip) 30례, 구강저부로 부터 분리된 혀(Separation tongue from floor of mouth) 1례, 구강폐색(Occlusion Mouth) 3례, 볼농양(Cheek Abcess) 3례, 치아농양(Dental Abcess) 5례, 입술궤양 (Lips Ulcers) 2례, 치아발치 15례이다. 시술자는 알렌과 헤론이다. 4) 스크랜톤(Willian Benton Scranton)의 시병원 치료기록(1885 1889)에도 발치 와 아구창(구강괴저병)에 관한 예가 있다. 헤론( John W. Heron)의 편지(1888)에도 어긋난 턱뼈를 바로잡고 발치를 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캐나다 여의사 로제타 홀 (Rosetta Hall)은 언청이(Cleft lip &Palate)수술(1887 1890)을 했다. 이와 같이 개 항 후 최초의 서양식 구강진료는 제중원을 기반으로 한 서양인 선교의사들에 의해 이 루어졌다. 제중원의 치료활동이 성공을 거두기 시작하자 알렌은 서양식 의학교육을 실시할 의학교 설립을 제안했다(1885. 12. 1). 조선정부도 필요성을 인정하여 재정적인 지 원과 학생 모집, 졸업생들의 주사임명의 보장 등을 해주었다. 이에 조선 최초의 서양 식 의료교육기관인 제중원 의학당이 개교(1886. 3. 29)하였다. 그러나 제중원 의학당 의 의료교육은 제중원에 대한 시각을 달리하는 선교의사들의 잦은 교체와 조선정부 의 지속적인 지원의 부족, 서양식 의사면허제도의 부재 등으로 1893년 에비슨이 제 중원에 부임할 때까지 정규적이고 지속적인 과정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제중원도 병원의 관리행정을 담당한 관리들의 부패로 운영이 어렵게 되었다. 결국 고종황제는 에비슨의 건의를 받아들여 제중원 설립 9년 만에 선교부의 독자적인 사업으로 이관 (1893. 11)하였다. 에비슨은 의학교육을 체계화하고 종합병원형식으로 새 병원을 건립하고자 하였 다. 먼저 의학생들의 관리를 철저히 하고, 한글로 된 의학교과서를 편찬하였다. 다음 의료위원회를 구성(1893)하여 의학교육 및 의사자격증 수여, 학칙과 교과과정의 작 성, 졸업시험 등을 관장할 것을 건의하고, 교과과정을 결정하였다(1895). 이러한 제중원 의학당에서 최초의 치과의술 교육이 이루어졌다. 4) H. N. Allen & J. W. Heron, First Annual Report of the Korean Goverment Hospital, Seoul, For the year Ending April 10th, 1886, Printed by R.MEIKLEJOHN & Co., No.26 Water Street, Yokohama, Japan, 1886.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 2015-10-28 오후 5:50:02
제중원의 의료활동보고서 (1901)에는 치과환자 중에 274개의 치아를 조수일을 보는 학생들이 직접 발치하였고, 어려운 경우에만 에비슨에게 자문을 구한 사실이 기 록되어 있다. 5) 이것은 발치기술이 선교의사에 의해 의학생들에게 교육된 최초의 기 록이다. 따라서 제중원을 근대치의학의 효시라 보는 경우도 있다 6). 하지만 선교의사 들은 외과적인 술식의 일부로서 치과치료를 병행하였고, 제중원 의학생들에게도 같 은 방식으로 교육하여 발치를 허용하였다. 따라서 이들이 한 치과치료의 내역은 발치 를 비롯한 구강외과 영역의 치료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치아우식증이나 치주 질환의 심도에 따른 세분화된 치과진료에는 소홀했다. 외과학의 일부로서가 아닌 치 의학 고유 영역에 대한 전문적인 진료와 교육이 이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1915년 쉐 플리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치과학 교실을 개설하면서 부터이다. 그렇다면 제중 원과 제중원 의학당이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연합의학교가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 해 살펴보도록 하자. 제중원 의학생들의 발치교육 1901년 5) Records of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S.A. Korea, Letters and Reports No.80. Report of Seoul Station 1900~1901. 6) 신재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 참윤퍼블리싱, 2005, 10. 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 2015-10-28 오후 5:50:03
3) 세브란스병원과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에비슨은 제중원을 단순히 환자의 병을 고치는 기관이 아니라 교파를 초월해 기 독교적 사랑을 실천하는 장소로 생각하였다. 이러한 연합정신은 1895년 7월 콜레 라 방역국장 에비슨과 지방 여러 교파의 선교사들이 서로 협동하여 방역활동을 전개 한 데서 유래했다. 한편 구리개에 있던 제중원은 한옥건물이어서 현대식 난방이나 상 하수도 시설이 되어있지 않았다. 1899년 3월 안식년으로 캐나다로 돌아간 에비슨 은 현대식 병원의 건립을 추진했다. 우선 토론토에 사는 건축가 고든(H.B. Gorden) 에게 40명의 환자를 수용할 수 있는 병원 설계도를 기증받았다. 1900년 에비슨은 뉴 욕에서 열리는 만국 선교 대회 에 참가해 의료 선교에서의 우의(Comity in Medical Mission) 라는 주제로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에서 에비슨은 만약 서울에 시설을 잘 갖춘 병원에서 여러 교파의 선교의사들이 협동해서 일한다면, 보잘 것 없는 작은 병 원을 7개 운영하는 것보다 좋을 것 이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세브란스는 여러 교파가 연합하는 의료선교활동에 공감하여 1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했다. 1838년 8월 1일 오 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난 세브란스는 외할아버지를 비롯해 의사 친척이 많 았다. 하지만 본인은 클리블랜드 공립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은행에 취직한 후 남북전 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당시 고등학교 1년 후배였던 록펠러가 석유사업에 뛰어들자, 세브란스도 원유 채취사업을 시작했다. 1876년에서 1895년까지 스탠다드 석유회사 의 회계담당자로 근무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7) 에비슨이 세브란스에게 감사의 뜻 을 전하자, 세브란스는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주는 내 기쁨이 더 큽니다(You are no happier to receive it than I am to give it) 라고 답하였다. 세브란스가 1913년에 타 계한 이후에도 그의 부인과 가족들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의 초대과장 쉐플리의 월급은 전액 지불하고, 그 후손들 역시 1939년까지 지속적으로 기부를 했 다. 한편 에비슨이 기쁜 소식을 갖고 1900년 10월 서울로 돌아왔을 때 제중원 의학당 에는 학생들이 모두 떠나고 없었다. 1899년 3월, 대한제국 정부가 설립한 의학교의 학제는 3년제였다. 에비슨은 캐나다의 의과대학이 5년제이고, 의대교수가 자신밖에 7) 신규환, 박윤제 지음, 제중원 세브란스 이야기 역사공간, 2015, 89~111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 2015-10-28 오후 5:50:03
없는 열악한 환경을 고려해 8년간 공부할 학생들을 모집했다. 병원건물은 완공되기 까지 세브란스에게 5천달러, 뉴욕의 북장로회에서 1만 달러를 더 기부 받아야 했다. 그 결과 한국 최초의 현대식 종합병원으로 문을 열었다. 1905년 5월 한국에 하나의 토착교회를 세우기 위해 4개의 장로교회와 2개의 감리 교회가 연합하여 개신교복음주의선교협의회(The General Council of All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 를 구성했다. 이들은 연합잡지 Korea Mission Field 를 발간하고, 각 기독교학교들을 통합하려 하였다. 에비슨도 의료위원회를 열 어 의학교육의 기초를 닦고 선교연합에도 노력했다. 1907년 9월 창립된 조선의료선 교사협회(Korean Medical Missionary Association)는 이듬 해 각 교파의 선교의사 들이 매년 일정 기간 동안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서 강의를 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연합의학교를 세울 것을 결의하였다. 당시 제중원의학교 교장과 한국선교의사협회 (1907 ) 회장을 맡고 있던 에비슨(O. R. Avison)은 제중원의학 교육의 확산을 모색 하고 있었다. 한국의 의학교육은 의사뿐 아니라 간호원, 약제사, 치과의사, 그리고 안 경전문의의 양성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1908년 에비슨은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통감을 찾아가 제중원 학생들이 8년 간 성심껏 학업에 종사했으니, 의술개업인허장 을 수여해 달라고 설득했다. 그 결과 1908년 6월 3일 제중원 의학부 1회 졸업생 7명이 한국 최초의 의술개업 인허장을 부 여받았다. 같은 해인 1908년 8월 26일 통감부는 사 립학교령을 반포하여 모든 사립학교는 학부 의 인가를 얻어야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에 따라 제중원 의학교는 1909년 7월 세브란 스병원의학교(Severance Hospital Medical School)로 학부에 정식으로 등록하였다. 같은 해 세브란스병원과 의학교가 조선연합선교회 (Korean Union Missionary Society)로부터 의료선교사들의 급여를 포함한 재정적 원조 를 받게 되어 그 업무를 확장하고 정비할 수 있 세브란스 1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 2015-10-28 오후 5:50:03
게 되었다. 이러한 때에 한 대위라는 치과의사가 한국인을 의한 치의학교를 설립할 계획을 발 표한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었다. 4) 한대위(David Edward Hahn, 1874 1923)의 치의학교 설립안 한대위( 韓 大 衛, David Edward Hahn, 1874~1923)는 필라델피아대학교 치과대 학을 졸업한 독일계 미국인으로 중국에서 선교사업(1904)을 하였다. 미국의 해외선 교본부는 중국의 북경, 천진, 상해, 광동 및 다른 도시에 있는 병원과 의사들을 지원 하고 있었다. 한 대위 역시 한국에 선교치과의사가 필요하다는 소식을 듣고 내한하였 다. 미국 북감리교에서 소속으로 한국에는 최초로 들어 온 선교치과의사로 자신이 내 한한 경위를 한국선교잡지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나는 한국에 거주하는 첫 번째 유럽의 치과외과의(dental surgeon)면서 선교치과 의사이다. 내가 1904년 중국에서 일하는 동안 한국에 선교치과외과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중국에서는 여러 선교지부를 기꺼이 방문하면서, 선교치과의사가 상당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치과진료에 대한 정례적인 치료비조차 선교 본부가 감당하고 지불할 수 있는 범위보다 훨씬 많았다. 그 결과 상당수가 저작기관인 구강이 안 좋아 건강상태가 나빠지는 결과가 생겼다. 나는 선교부에서 나의 직업에 요 구하는 상당한 양의 일을 완전히 수행했고, 하느님께서 이끄시는 대로 한국에 오게 되 었다. 한대위가 감리교 선교치과의사로 활동한 것은 약 1년간(1906. 1 1907. 1)이다. 초기 5개월 동안 그는 세브란스병원과 이화학당, 영국교회의 고아원과 연계하여 치과진료를 하였다. 주말에는 무료진료소를 열었다. 또 평양에 출장 진료를 떠난 웰 즈(Dr. J. Hunter Wells)와 폴웰(Dr. E. Douglas Follwell)의 의료사업을 돕기도 했 다. 8) 웰즈는 1895년 북장로회선교의사로 한국에 와서 방역사업을 하고, 1898년부 8) D.E. Hanhn, Dentistry in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1906;2(9):165.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1 2015-10-28 오후 5:50:03
터 평양에서 의학교육을 시작했었다. 1899년 에비슨과 의학생을 가르칠 교과서를 편 찬했다. 웰즈의 교육을 받은 10명이 의술 개업인허장을 받았다. 폴웰(Dr. E. Douglas Follwell)은 감독 이외에 1905년부터 1916년까지 보구여관 간호원양성소에서 수업 을 맡았었다. 위 사항을 고려해볼 때 한 대위도 치과의료선교활동을 할 때 진료 뿐 아 니라 교육, 특히 의료교육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것 같다. 이와 함께 한 대위는 교회청년회나 YMCA 등의 단체를 통한 복음전도와 애국계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9) 이러한 활동은 통감 시기(1905~1910)의 한국의 종교계와 신지식층들 의 애국계몽운동과 관련이 있다. 교육운동도 활발해져 3,000여 개의 사립학교와 여 러 개의 전문학교가 설립(1907 1910)되었다. 신문을 통한 계몽사업 역시 한국민들 의 자주적이고도 근대적인 의식을 일깨우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그 중 기독교 단 체들은 서양 근대 기술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조선의 교육 및 산업, 의료부문을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한 대위는 YMCA와 같은 기독교 청년회와도 가깝게 지냈던 것이다. 한 대위는 당시(1907) 1200만 명의 인구가 있는 한국에 한국인 치과의사가 없으 며, 한국인들은 구강병에 중세의 비과학적인 처방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했다. 나는 한국에 한국인 치과의사가 한 명도 없는 것이 이상해서 혼자 여러 번 묻고 또 생각해보았다. 한국인들이 모두 구강상태가 좋아서 그런 것인가, 전혀 그렇지 않다. 한국인들은 구강상태가 좋은 편이기는 하지만 모두가 박테리아의 파괴적인 질환에서 면제받은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이가 아프면 그의 아내나 아이들이 가스 플라이어를 가지고 이를 뽑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어떤 한국인은 치통을 특별한 방법으로 치료한 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한국인들은 소금을 치약분말 대신에 사용한다. 하지만 어떤 이 론에 따르면 죽은 쥐에 소름을 뿌려 놓았다가 그 소금을 아픈 부위에 비벼주면 낳는다 는 것이다. 그리하여 한 대위는 한국인 치과의사 양성에 뜻을 두고, 자신의 진료소에서 한국 인 학생에게 개인지도를 시작하였다. 9) 美 師 講 導, 대한매일신보 (제4권 제329호) 光 武 10년 9월 23일자. 1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2 2015-10-28 오후 5:50:03
조선말 민간인의 발치 사진 한 대위의 의교창립 소식란: 대한매일신보 나는 좋은 치과의사가 될 수 있을 거라 믿어지는 교회의 청년들을 데리고 있다. 나 는 이 젊은이가 전문적인 치과의사가 될 수 있도록 돕겠다. 치과의사가 된다면 한국에 도움이 많이 될 것 같다. 우리의 교육사업과 치과과정을 연결해 개설하려고 심사숙고 중이다. 10) 한대위는 치의학교 설립계획안을 마련하기에 앞서 교과과정에 대해 고민하였다. 한대위가 도입하고자 했던 당시 미국식 치의학 교육모델은 다음과 같다. 19세기 초 반 미국의 치의학 교육이 보철을 위한 기공학 위주로 진행되자 이에 대한 반성으로 구강외과학과 임상교육이 포함된 3년간의 교과과정이 확립(1899)되었다. 11) 한대위 가 졸업한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은 미국 치과대학 중 가장 먼저 구강외과와 마취학을 교과과정에 포함시킨 학교였다. 구강외과 강의는 치과의사가 아닌 외과의사와 마취 과 의사에 의해 교습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구강외과는 의학과 치의학과의 경계선상 에 있는 과였다. 한대위는 자신을 치과구강외과의 로 규정하고 있었다. 한대위의 졸 업연도는 1890 1903년 사이였으리라 추정된다. 따라서 한대위가 언급한 치과교과 과정은 3년제 구강외과학과 보철기공을 포함하는 이론과 실습교육이었으리라 생각된다. 10) D. Edward. Hahn, Dentistry in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 July, 1906; 2(9): 165. 11) William F. Vann, Jr., D.M.D.,M.S., Evoution of the Dental School Curriculum-Influences and Determinants, Journal of Dental Education, 42(2):66.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3 2015-10-28 오후 5:50:03
한대위는 한국에 온지 1년째 되던 해 선교사직을 사퇴하고 스크랜톤 병원 옆에 치 과진료소를 개설하였다. 한대위의 개인진료소에는 남대문내 전달성위궁후에 거하 미국 치과의사 한대위씨 치과업에 고명 소치로 치통자가 매일 기십명식 대 기한다더라 할 정도로 환자가 많았다. 진료내용은 치통치료( 齒 痛 治 療 ), 무통발치 ( 無 痛 拔 齒 ), 충치급치근치료( 蟲 齒 及 齒 根 治 療 ), 금치호모치( 金 齒 護 謨 齒 ), 세마치 ( 細 磁 齒 ), 金 브래잇, 호모( 護 謨 )브래잇, 조작 등 과 구강위생에 대한 무료상담이었 다(황성신문 1907년 9월 7일자). 즉 한대위의 치과치료는 국소마취를 통한 무통발치 와 치주 및 보철치료, 치수치료 등 현대적 치과 영역 전반을 포괄한 것이었다. 그것은 당시 일본인 치과의사들보다 고급진료에 속했다. 치료비가 비싸다는 평을 듣기도 했 다. 이에, 헐버트(H.B. Hullert)는 이것은 진실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사실과는 다 른 개인적인 견해일 뿐인 것으로 알고 있다. 그는 상주하는 치과의사로서 출장 온 치 과의사보다 더 싼 진료비를 책정했으며, 그의 행동은 정당하다. 며 한 대위의 진료비 가 과도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밝혔다(The Korean Review, vol.6. 1906, p. 315). 한 대위는 개원 후에도 한국인 청년들에게 자신의 치과치료기구를 치료에 응용할 수 있도록 개인 지도하였다. 외과학의 일부로서가 아닌 치의학 고유 영역에 대한 전 문적인 교육의 도입이 시도된 것이다. 이렇게 한 대위가 치과의사양성을 목적으로 치 과의술을 지도한 것은 한국에서 최초로 치의학교육을 한 효시라 할 수 있겠다. 1909년 한 대위는 자기의 치과진료실에 치의학교를 병설하여 한국학생을 교육 하고 장차 제중원과 연합하여 운영할 계획을 발표하였다. 대한매일신보 학계란 (1909년 10월 30일자)에는 의교창립 이라 하고 미국 치의사 한대위 씨가 경성 남 대문 내 자기 사저( 私 邸 )의 치의학교를 창설 데 차( 此 ) 학교의셔 장차 남문 외 제 중원과 연합 주업 터이오 ( 該 ) 원의 신 건축이 충비( 充 備 )되면 차 학교 해 원 이부( 移 付 ) 고 우 원의 치과부를 증설 다더라 고 되어 있다. 이와 함께 대한매일신보 논설에서는 한대위씨의 학교 창립을 축하 노라 고 하고 서양인 이 만리 해외에서 건너와 한국의 문명을 북돋우려 한국 사람의 지식을 자라게 하여 한국형제의 진로를 장려하거든 실로 환영하며, 한 대위가 학교를 창립하면 그 효과가 제중원과 맹아학교만큼 커질 것 이라고 평하고 있다. 당시 대한매일신보 는 황성 신문 과 함께 항일언론의 선봉이었다. 이러한 대한매일신보 는 한국인들의 이해를 1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4 2015-10-28 오후 5:50:03
대변하며 한대위의 치의학교의 설립을 적극 지지하였다. 한 대위의 치의학교는 한국 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고 한국인의 구강건강을 향상시킬 것이다. 이것은 제중원이나 맹아학교처럼 한국인이 건강하게 살아가고, 한국의 국력을 향상하는데 필요한 일이었다. 한 대위가 치의학교를 설립한 후 제중원 의학교와 연합하려는 계획은 그 당시로서 는 매우 발전된 계획이었다. 19세기말까지 단과 사립대학이었던 치의학교들이 20세 기에 이르러 차차 종합대학 및 의과대학과 연합하게 되는 미국 치과대학사의 맥락과 도 어느 정도 일치했다. 12) 에비슨의 세브란스 의학교 안에 치과학교실과 약학과를 두 고, 점차 치의학교와 약학교로 발전시킬 구상과도 비슷하다. 그러나 한대위의 치과 의학교 설립안은 일본통감부에 의해 무산되고 말았다. 일본은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 성할 계획이 전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제중원의 의학교육에 이어 치의학 교육에 있 어서까지 미국에게 기선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 결과 한대위의 치의학교 설립안은 좌절되어 한국인 치과의사들에 의해 근대 치과의료체계가 형성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이후 한 대위는 조선총독부 치과의사면허 제3호를 받았으며, 1919년 정도까지 한 국에서 치과진료를 하였다. 쉐플리와도 어느 정도 협조관계를 유지하다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후 소식이 끊기고 1923년 사망한 기록만 전해진다. 한 대위의 치의학교 개설안이 무산된 이후 세브란스병원 의학교장 에비슨은 꾸준 히 선교본부에 치과학 교실을 개설할 치과의사를 요청했다. 1913년 5개 교파에서 전 임교수를 파견해 여러 전문 과목에 대한 교육이 가능해졌다. 이때부터 세브란스연합 의학교(Severance Union Medical College)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1914년 11월 4 일 각 부서 사이의 협동적인 연구활동을 위해 연구부가 설립되었다. 같은 해 12월 안 식년을 맞은 에비슨은 미국 해리스버그에 찾아가 치과의사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 리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치과교수로 임명하기에 적합한지 만나보았다. 1915년 3월 5일 언더우드(H.G.Underwood)목사는 전문학교과정을 수행할 수 있는 허가를 얻었다. 4월초 경신학교 대학부에서 60명의 학생을 모집하여 연희전문학교로 개교 하였다. 1915년 6월 7일 에비슨이 안식년을 마치고 귀국했다. 12) FRANK M. CASTO,Ph G.M.D.D.D.S. Dental School, Western Reserve University, Cleveland, Ohio, Dental Education, JDRes, 1931: 369~375.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5 2015-10-28 오후 5:50:03
2.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의 탄생과 쉐플리 1) 쉐플리의 가계와 선교치과의사로 부임하기 까지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William Jeremiah Scheifley)는 1915년 11월 세브란 스연합의학교에 한국 최초로 치과학 교실을 설립하고, 초대 과장을 지낸 인물이다.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근대치의학 100주년 기념 사업위원회는 쉐플리로부터 시작된 근대서양치의학의 성격과 내용들을 재조명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2010년부터 쉐플 리를 우리나라에 치과의교선교사로 오게 될 때까지의 성장과정과 우리나라에의 활 동, 그리고 미국에 돌아가서의 삶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료들들 집중적으로 조사했 다. 선교치과의사로 내한하기까지의 쉐플리의 이력과 삶은 미국연방인구주택총조 사서, 인명부, 필라델피아치과대학 학적부, 치과의료선교사지원서, 추천서, 각종 편 지, 여권신청서, 승객명단 등을 통해 세밀하게 조사하여 재구성하였다. 세브란스연 합의학교 치과학교실의 활동은 북장로교선교보고서, 각종 편지와 선교본부결정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학적부, 가이스보고서(Gies Report)등을 통해 실증적인 세밀함과 객관성을 확보하였다. 이 글은 미국선교치과의사 쉐플리와 세브란스연합 의학교 치과학교실 개설의 역사적 의의 논문과 자료집 13) 을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이 다. (1)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한 증조할아버지 제이콥 쉐플리와 할아버지 존 쉐플리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William Jeremiah Scheifley)는 독일에서 미국으 로 이주해 정착한 독일계 미국인의 후손이다. 증조 할아버지 제이콥 쉐플리( Jacob 13) 이주연, 권호근, 박형우, 미국선교치과의사 쉐플리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 개설 의 역사적 의의, 대한치과의사협회지, 2015; 53(11): 732-747: 권호근, 이주연, 박형우, 한 국 서양 치의학 도입과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의 쉐플리 관련 자료집, 2011~2014. 1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6 2015-10-28 오후 5:50:03
Schaufele 1819~1864)는 독일의 바덴 뷔르템베르크 주 (Baden-Wuerttemberg) 에서 태어났다. 제이콥은 공장 직공으로 일하며 같은 지역에서 태어난 마리아 시 겔 (Maria Siegel)과 결혼했다. 1848년 제이콥 부부는 존과 메리라는 두 자녀와 함 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존 쉐플리(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의 할아버지, 1836~1909)가 열두 살 때였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처음으로 이주민들을 많이 받아 들이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주로 아일랜드와 독일인들이 대거 미국으로 이주했다. 1848년에 증기선을 타고 뉴욕항에 도착한 아일랜드와 독일인들의 80%는 주로 북동 부의 공업도시나 농업지대로 이주했다. 캘리포니아 골드 러쉬가 본격적으로 일어나 기 전이라, 북동부에서 가장 많이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콥 쉐플리 일가는 북동부 펜실베니아 주 애덤스(Adams)의 레딩(Reading)에 정착했다. 펜실베니아 레딩 지역은 일찍부터 필라델피아와 운하를 통해 증기선이 왕 래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륙횡단 철도가 피츠버그까지 연결되면서 레딩은 펜실베이 니아의 주요 산업도시에 물류를 조달하고 생산하는 지역이 되었다. 당시 필라델피 아와 피츠버그는 섬유, 가죽, 철강, 유리, 식품가공업 등의 산업이 발전하였다. 그리 고 1780년 노예해방법을 통과시켰을 만큼 정치적으로도 앞선 도시였다. 제이콥 쉐 플리 가족들은 레딩 지역의 회사와 공장에서 저마다 일자리를 구했다. 제이콥 쉐플 리는 1861년까지 레딩의 철강회사에서 근무했다. 존 쉐플리는 레딩의 학교에서 교 육을 받았으며, 21세가 되던 해 동갑의 레딩 아가씨 캐서린 봅스트(Catharine Bobst, 1836~1886)와 결혼했다. 존의 장인인 찰스 봅스트(Charles Bobst)는 일용직 노동자 였다. 그의 아이들도 공장을 다니면서 학교공부를 하였다. 존은 26세까지 브럼바크 모직공장 (Brumbach s woolen mill)에서 모자를 만드는 직공으로, 캐서린 봅스트는 경리로 일했다. 그러던 중 미국에 남북전쟁(1861~1865)이 일어났다. 제이콥 쉐플리와 존 쉐플리 모두 남북전쟁에 참전하게 되면서, 쉐플리 가족의 삶에 극적인 변화가 생겼다. 14) 링 컨 대통령(임기 1861~1865)은 북부주 승리의 거점이 될 텍사스를 점령하고 남부 항 14) 몽고메리가 쓴 펜실베니아 벡스지역의 역사적 전기 연대기Montgomery, M. L, Historical and biographical annals of Berks County, Pennsylvania: embracing a concise history of the county and a genealogical and biographical record of representative families. Chicago: J. H. Beers, 1909, 1427.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7 2015-10-28 오후 5:50:04
구를 봉쇄하기 위해 3년의 전쟁기간 동안 30만 명을 징집했다. 제이콥 쉐플리는 43세 인 1862년에 입대하였다. 제이콥은 버지니아 주 피터스버그 근처의 전투에서 왼쪽 다리를 잃었다. 그는 뉴욕 주로 후송되었으나 1864 년 웨스트체스터 (Westcester) 에 있는 데이비드 아일랜드 (Davids Island) 의 군대병원에서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부인 마리아 시겔은 남편이 생전에 출석했던 루터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서 73세 의 나이로 사망(1890)할 때까지 믿음을 지켰다. 존 쉐플리(26세)도 아내와 두 아이를 남겨두고 펜실베니아 예비대 제 3연대에 입 대했다. 존 쉐플리가 필라델피아의 한 목사의 요청으로 쓴 전쟁경험담은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 나는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리치먼몬드의 7일 전투, 제2차 불런 전투, 드레인스빌 안티에탐 전투, 그리고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등이다. 존 쉐플리가 참전했던 버지니아주 리치먼몬드의 7일 전투, 제2차 불런 전투에서 북부 연합 포토맥군 조지 매클렐란(McClellan)장교는 유능하기는 하지만 너무 신중 해서 로버트 리(Lee)가 이끄는 남부군에게 잇따라 패배했다. 자신감을 얻은 리 장군 은 자신의 북버지니아 군 45,000명을 이끌고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 주로 이동했 다. 링컨은 포프의 병력을 맥클렐런에게 돌려주었고 리와 맥클렐런은 1862년 9월 17 일 샾스버그 근처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하루 사상자를 낸 안티에탐 전투를 치 른다. 포탄과 총격이 집중되었던 백병전인 안티에탐 전투에서 맥클렐란은 후퇴하는 남군까지 무찌르지는 못했지만 북군이 승리하기는 하였다. 리의 침입을 저지했으며 링컨이 노예해방을 선언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링컨은 암브로스 번사이드 소장으로 지휘관을 교체한다. 번사이드는 1862년 12월 13일 프레더릭스버그 전투 에서 패배한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마리의 고지 (Marye s Heights)에 비효율적인 정면 반복 공격을 감행하여 12,000명이 넘는 사상 자를 기록했다. 이 전투에서 존 쉐플리도 부상을 입는다. 1862년 12월 13일 벌어진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나는 오른쪽 다리를 잃게 되 었다. 나과 함께 했던 중대원 중 용감한 네 사람이 한 손으로는 소총을, 다른 손으로는 나를 부축한 채 전쟁터를 벗어나려고 했다. 남군 병사들이 총을 겨누며 우리에게 항복 1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8 2015-10-28 오후 5:50:04
하라고 요구했지만, 그들은 나를 계속 사수했다. 결국 그들 중 한명은 포로가 되었고, 다른 사람들은 부상을 당했다. 나는 부상을 입은 중대원들에게 제발 나를 버리고 떠나 라, 그리고 집에 내가 어떻게 되었는지 전해 달라 고 했다. 그때부터 나의 고생이 시작 되었다. 나는 그 전쟁터에서 5일 동안 밤낮으로 누워 있었다. 누워있는 중에 필라델피 아에서 온 사람이 내 오른쪽에서 죽었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다고 했지만, 전쟁터에 누워있는 첫 밤에 아무런 희망이 없음을 알게 되자 그가 죽어 혀가 뻣뻣해질 때까지 기 도를 시작했다. 내 지난 인생을 되돌아보니 다음과 같은 시 구절을 외쳐야겠다. 오, 주 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불가사의여!. 나는 국가의 제단에서 희생되는 사람들을 보았 다. 하지만, 이것들을 통해 내 마음에는 모든 이해를 가져다주는 평화가 있었다. 눈이 내리면서 나는 생포되었다. 남부병사 한 명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스톤월 잭슨 장군에 게 나에 대해 좋게 말해주었다. 그의 도움으로 총알이 날아오지 않는 후방으로 후송되 었고, 곧 리비 교도소 (Libby Prison)로 이송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5주 동안 억류되 었다가 가석방되었으며, 피골이 상접한 상태로 메릴랜드 주의 아나폴리스로 이송되었 다. 나를 진찰한 의사는 3일 밖에 살지 못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총 으로 나는 살아남아 내가 겪었던 고통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셔먼 장군이 전쟁은 지옥이다 라고 정확하게 표현한 것이 놀랍지 않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에서 레딩의 세 중대 중 42명이 사살되었고 단지 2명만이 살았다. 나와 다른 레딩 출신자였다. 전쟁이 끝난 후 존 쉐플리는 레딩으로 돌아왔다. 한 동안 여러 직종에서 일을 하다 가 1863년 화이트너(C. K. Whitner)의 형제인 우체국장 조지에 의해 우체국 직원으 로 임명되어 4년간 일했다. 이즈음 민주당 행정부는 그를 사임시켰지만, 후에 우체국 장 스테트슨 (Casper Stetson)에 의해 다시 임명되었으며, 이후 21년 6개월 동안 그 직책을 성실하게 수행했다. 친절하고 자상하며, 명랑하고 상냥한 쉐플리는 우체국 직원 중 가장 평판이 좋은 사람으로 소인( 消 印 )과를 맡았다. 존 쉐플리는 복음주의 교회의 교인으로, 시종일관되게 출석했다. 정치적으로 그는 공화주의자였다. 남북전 쟁의 퇴역 군인으로서 북군의 남북전쟁 참전용사회 맥린 제 16대의 가장 인기 있는 회원의 한 사람이었다 존 쉐플리는 부인 캐서린 봅스트 사이에서 2명의 아이를 잃었고, 2남 5녀의 자녀 를 두었다. 그 중 첫째 아들 윌리엄 제이콥(William Jacob Scheifley, 1860~1947)이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9 2015-10-28 오후 5:50:04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 제 1대 과장을 역임한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 (William Jeremiah Scheifley)의 아버지이다. 제러마이어의 큰 고모 루시 애니(Lucy Annie)는 윌(Fred Will)과 결혼해 필라델피아 앤드 레딩 철도의 직원으로 근무했다. 작은 고모 캐서린(Catherine)은 처브(Charles Chubb)와 결혼한 뒤 모자공장 노동자 로 일하며 레딩에 살고 있다. 너(George Knerr) 목사와 결혼한 캐리(Carrie)가 사망 했다. 작은 아버지 존( John.S.)은 식품 종업원으로 일했다. 나오미(Naomi)고모는 점 원이나 경리로 일했다. 이어 노머(Noma)와 케이트(Kate)고모가 태어났다. 이들의 어머니인 캐서린은 50세인 1886년에 사망했다. 존 쉐플리는 레딩에서 잘 알려진 화 가인 제이콥 터더로( Jacob Thuderoh)의 미망인 헬레나 케이(Helena K Thuderoh) 부인과 1889년 3월 7일에 재혼했다. 둘 사이에는 아이가 없다. (2) 쉐플리의 부모와 형제들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의 아버지인 윌리엄 제이콥 쉐플리(1860~1947)는 20 세에 우체국에서 소인을 찍던 17세의 메리 제인 디펜더퍼(Mary Jane Diefenderfer, 1862~1943)와 결혼했다. 메리 제인은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일용노동 자를 해서 키웠다. 메리의 형제들은 벽돌공이나 마차 장식공이었다. 윌리엄 제이콥 은 모자를 만드는 일과 담배상을 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꾸려나갔다. 그러면서 신학을 공부해 35세가 되던 해(1895)에 필라델피아에 있는 연합복음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윌리엄 제이콥은 독실하고 희생적인 목사였다. 메리도 교회에서 활동적으로 일을 했 다. 15) 이 부부는 1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는 이들 중 막내 로 1892년 11월 30일에 태어났다. 첫째 누나 제니 메이 ( Jenny May Scheifley, 1880 년생)는 열 살 때 찰스 헤펠핑거 (Charles Heffelfinger)와 결혼해 출가했다. 이들은 일리노어(Elanor)와 루스(Ruth)라는 두 딸을 낳았다. 둘째 누나 스텔라 메이 (Stella May Scheifley, 1882년생)역시 열 한 살 때 동갑 나이의 샴 (George F. Schaum)과 결 혼해 펜실베니아로 떠났다. 둘 사이에는 아사 루스 (Martha Ruth Schaum) 가 있다. 15) 남성 지원자 양식, 윌리엄 제이 쉐플리 치과의사와 관련된 공개 제한 편지 (베이트먼 박사, 1914 년 12월 9일) 2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0 2015-10-28 오후 5:50:04
그 중 한 매형도 목사가 되었다. 쉐플리 가계는 종교적으로 활동적이며, 근면한 생활 을 하면서 화목한 가족관계를 유지하며 살았다. (3)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의 성장과정과 선교사 지원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는 펜실베니아 주 레딩에서 189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제이콥 쉐플리가 연합복음교회 목사가 되자 필라델피아에서 학교를 다녔다. 쉐플리 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로 보낸 편지와 의료선교사 지원서, 추천서에는 쉐플 리가 우리나라에 선교치과의사로 오기 전까지의 성장과정이 잘 나타나있다. 1 기독교 신앙 제러마이어 쉐플리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기독교 신앙을 갖고, 교회의 일에 적극 적으로 참여한 것은 목사인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고 고백하고 있다. 아버지 제이콥 은 약간 내성적인 제러마이어 쉐플리에게 다정다감하면서도 신중하게 대했다. 부모 님의 자상한 배려 속에서 제러마이어는 평화롭고도 충실한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 다. 어릴 적부터 성경을 규칙적으로 읽었다. 그리고 기도를 통해 감화받기를 원했다. 성인이 되어서도 성경 공부를 하고 기도하는 복음주의적 삶을 지속했다. 개인적으로 어떠한 부분에서 영적인 교감을 얻었는지 또박또박 이유를 이야기하곤 했다. 쉐플리 가 미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로 보낸 1914년 9월 16일자 편지에서 이러한 부분을 찾 아볼 수 있다. 10살 때 나는 그 어린 내 생명이 주님 때문에 존재한다는 아주 강한 신념을 느끼면 서 주님께 저의 온 마음을 드렸습니다. 비록 타락한 죄악으로부터 오는 확신에 찬 비 난을 느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아직 나의 예수님과 보다 가까운 관계가 필요하다 고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내 죄를 사함 받고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인하기 위해 며칠 동안 기도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찬송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 을 불렀을 때 내 게 내렸던 하나님의 은총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나는 진정으로 주님을 찬양했으 며 내 일생에서 그런 행복을 다시 갖지 못했습니다. 나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최상의 가능한 기독교적인 감화만 알아왔기에 많은 죄스러운 경험들을 깨닫지 못했습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2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1 2015-10-28 오후 5:50:04
니다. 나는 자라면서 당연히 넓은 세상과 접촉하게 되었고, 내가 결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던 여러 상황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형성기(formative days) 중에 나의 헌신 이 그리 강렬하지 않았던 때가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하지만 사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런 시기를 갖습니다. 나는 그 첫 경험에서 진정한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그것의 대 부분은 내가 교회의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했던 부친의 영향 때문입니다. 특별히 흥미롭지 않겠지만 짧은 인생 중 나는 많은 매우 즐거운 경험과 약간의 놀라운 경험을 했습니다.(중략) 쉐플리는 13살 때(1905~)부터 교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사역자로 일하였다. 성 가대에서는 다른 대원들과 친밀하게 협동관계를 유지했다. 성가를 부를 때 쉐플리는 낙천적이고 활기차 보였다. 그러면서 상당히 매력적이고 훌륭한 테너 가수로서 자리 를 잡았다. 지적인 활력도 풍부해 점차 타인에게 의존하지 않는 지도자로 성장해나갔 다. 성가대에서는 세련되고 매너 있는 지휘자가 되었다. 여러 해에 걸쳐 주일학교 교 사로서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강의를 준비했다. 학생들은 점차 쉐플리를 좋아하 고 존경했다. 그러한 성과에 힘입어 교사를 훈련시키는 교사가 되었다. 필라델피아 중앙고등학교(1906~1910) 시절부터 면려청년회(Christian Endeavor Society) 에 참석했다. 면려청년회(Christian Endeavour)는 미국 포트랜 드 시 회중교회의 클라크(Francis Edward Clark)목사가 1881년에 기독청년면려회 (Young People s Society or Christian Endeavor )를 조직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 운 동이 처음 시작할 때에는 초교파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1881년에는 감리교가 엡윗청년회를 따로 조직하였다. 다른 교파들도 각기 청년회를 조직하여 장로교만이 이 모임을 유지하다가 결국 장로교 청년회가 되었다. 면려청년회에서는 성경 말씀에 따라 개인의 생활을 절제하는 금주, 금연, 도덕주의 등의 절제운동을 벌렸다. 미국 감 리교의 경우는 1912년 사회개량위원회 라는 명칭으로 절제운동을 했다. 이러한 운 동은 이후 금주위원회, 절제회, 사회사업위원회, 풍속개량회 등으로 이어졌다. 쉐플리의 의료선교사 지원서에는 금주위원회 의장, 면려청년회의 회장, 면려청년회 연합회의 자문위원 을 맡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쉐플리가 다닌 교회는 펜실베니아 주 쉐난도(shenandoah)이고, 교파는 연합복음 교회였다. 복음주의교회는 1803년 펜실베이니아주( 州 )에서 야콥 올브라이트가 창 2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2 2015-10-28 오후 5:50:04
시한 프로테스탄트 교파 가운데 하나였다. 인간이 하나님과 직접적으로 소통하는 것 을 중요시하는 복음교회는 감리교 신자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하지만 언 어장벽 때문에 따로 만들어졌다가, 1894년 연합복음주의 교회가 발족되었다. 따라 서 쉐플리가 참석한 면려청년회는 연합복음교회 신자들도 참여했던 감리교와 가까 운 초교파적 모임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와 같이 쉐플리는 아버지(펜실베니아주 이스 턴)와 매형이 목사인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복음을 이웃들과 나누는 생활을 했고, 1900년대 초반 기독교 절제운동에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 쉐플리의 교회 사역 경 험들은 그의 기독교적 신념과, 선교 사역에 대한 소망을 강화시키는데 도움을 주었 다. 2 해외선교사 지원 쉐플리가 해외선교를 결심한 직접적인 동기와 의료선교사로 오기까지의 과정은 다음과 같다. 쉐플리는 의료선교사 지원서에 해외 선교사가 되기를 희망해온 기간은 약 7년, 그러니까 15살 때부터로 적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07년 해외선교 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학생자원활동 신청서를 낸 것이다. 미국에서 일어난 학생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 )은 1888년부터 반세기만에 4,500명의 선교사 를 배출한 선교운동이 되었다. 이 운동은 약 50년간은 매일 한 명꼴로 해외선교사를 보냈고 1888년에서 1945년까지 무려 20,500명의 선교사를 해외에 파송하였다. 쉐플 리가 학생자원활동에서 받은 영향은 쉐플리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로 보낸 1914년 9월 16일자 편지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선교 사역에 대한 나의 소망, 그리고 이를 이루려는 소망의 실제 예는 학생자원운 동 사무실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그때 이후 해외에서 선교사로 활동했던 혹은 파송되는 남녀들과 접촉해 왔기 때문에 해외 선교에 대한 소망이 더욱 커졌습니다. 나 는 소명을 거부할 온당한 명분이 없음을 알고 있으며, 따라서 절박하게 내가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즉 쉐플리는 고등학생 때부터 학생자원활동을 통해 해외선교활동을 하는 사람 들과 꾸준히 만나면서, 해외선교에 대한 열망을 키워 온 것이다. 이러한 열망은 필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2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3 2015-10-28 오후 5:50:04
라델피아 치과대학(Philadelphia Dental School, 현재 템플치과대학)에 재학 중 (1910~1913.6.5)일 때에도 지속되었다. 쉐플리는 몇 년 간의 숙고와 기도 끝에 치 과대학 3학년 졸업반 때 연합복음교회 총무에게 편지를 보내 해외선교사로 가는 것 을 자원하였다. 이 때 쉐플리는 치과의사라는 직업을 통해 선교활동을 할 수 있기를 원하였다. 연합복음교회 교단에서 은퇴한 선교사에게 중국사람들이 치과의사를 필 요로 한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합복음교회 총무는 아직 재원이 적 고 선교사의 수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직 전문직인 치과의사를 선교사로 임 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총무는 쉐플리의 편지를 덥스(Dubbs)박사에게 넘기겠다고 말했지만, 실제로 넘기진 않았다. 연합복음교회의 사업을 준비하기 위해 쉐플리를 남겨 놓으려 한 것이다. 그리고는 쉐플리에게 중국 후난지역에 그냥 선교사 로 가기를 권했다. 쉐플리는 치과대학을 졸업하기 전이었고, 향후 진로로 치과에 더 해 의학 교육을 받을까 고민하고 있었다. 쉐플리는 해외치과의료선교사로 지원해놓은 상태에서 필라델치아 치과대학을 1913년 6월에 최우수학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가장 훌륭한 학생 중의 한 명이었고, 치과에서 그의 미래도 가장 유망했다. 16) 졸업 전후 선교치과의사를 필요로 하는 해외 선교지부가 없는 상태에서 쉐플리는 장래 진로에 대한 고심하다가 해리스버그에 개 원(1913.12~1915)을 했다. 쉐플리는 개원한지 2주 만에 학생자원운동에 관여하는 스미스 씨(W.B. Smith)로 부터 장로회 선교본부가 중국에 파송할 치과의사를 요청했다 는 말을 듣게 되었다. 쉐플리가 카터(Russll Carter)에게 보낸 1913년 12월 23일자 접수 편지에는 이러한 상황이 상세히 적혀있다. 현재 나는 해리스버그에서 개업한지 2주 반 정도 되었습니다. (중략)나는 이곳에 약 1,200 달러 상당의 가치가 있는 치과 장비를 보유하고 있으며, 교육과 장비 구입으 로 약 1,200 달러의 부채가 있습니다. 이곳에 온 짧은 기간 동안 나는 일을 잘 해왔고 모든 면에서 개업이 성공적이지만, 만일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면 기꺼이 헌신하 16) 남성 지원자 양식,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 치과의사와 관련된 공개 제한 편지 (베이트먼 박사, 1914 년 12월 8일) 2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4 2015-10-28 오후 5:50:04
겠습니다. 나는 졸업 당시 보다 지금, 훨씬 더 선교에 나서고 싶습니다. 그리스도를 위 한 것보다 더 선한 희생은 없으며, 미국에서의 활동에 만족하지 않고 치과의사가 거의 없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활동하고 싶습니다. 이 편지에 쉐플리의 치과의원 주소는 1624, North 3rd street, 헤리스버그, 펜실베 니아 주 이고, 진료시간은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12시 30분까지, 오후 1시 30분부 터 5시 30분까지, 주말 오전 8시부터 10시 이외에는 예약을 받음 이라고 적혀있다. 카터가 바로 다음 날 쉐플리에게 보낸 1913년 12월 24일자 편지는 다음과 같다. 친애하는 쉐플리 박사님: 혹시 중국에서 필요로 할지도 모를 치과의사로 자원한 귀하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우리는 3주 전에 중국 선교와 관련된 최고의 관리조직인 중국위원회(China Council) 가 새로 제출한 92명의 선교사 요청 명단에 치과의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음을 알게 되 었습니다. 이러한 요청은 샴과 라오스선교회에서 있었습니다. 하지만, 선교본부의 총 무는 현재 목회자 및 교사에 대한 요청이 더 절실한 이런 선교회에 미국에서 치과의사 를 파송할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국선교회의 요청 명단도 갖고 있는데,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병원에서 치과의사를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목회자와 전도 사업을 위한 여성을 요청하고 있기에 이 요청 역시 차후에 해결할 명단으로 돌려 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치과의사의 파송이라는 특수 사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어떤 독지가가 기금을 제공하지 않는다면 한국선교회에 치과의사를 파송할 수 없을 것입니 다. 지금 1,200 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다는 귀하의 언급에 근거해 보면 귀하는 선교지 에서 아마 치과의사로 활동하기 어려울 것 같으며, 우리 선교본부가 치과 사업을 위해 사람을 임명하는데 그를 후원할 독지가가 있는 가의 여부가 크게 작용할 것임이 분명 합니다. 이런 답장을 보내게 된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귀하를 공정하게 평가 해 볼 때 제반 사정을 솔직하게 알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당 신의 이름을 우리 파송 선교사 명단에 계속 올려놓기를 원하며, 만일 치과의사의 파송 이 가능해지면 다시 귀하와 상의할 것입니다. 러쎌 카터 드림 위와 같이 쉐플리는 고등학교 2학년, 치과대학 3학년 때에는 연합복음교회 해외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2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5 2015-10-28 오후 5:50:04
선교본부 담당자에게 선교사로 나갈 것을 지원했다. 그리고 해리스버그에 개원했을 초기에는 장로교 선교본부의 카터에게 치과의료선교 지원 편지를 보냈다가 파송이 어려워 유감이라는 답변을 받았다. 하지만 쉐플리는 치과의료선교의 꿈을 멈추지 않 았다. 다음 해인 1914년 9월 16일자로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본부로 정식 지원서를 보 낸 것이다. 지원서. 공개 제한. 지원자가 답할 개인적인 질문.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 1914년 9월 16일) 지원서 공개 제한 ------------ 미국 장로회 해외선교본부 156 5번가, 뉴욕 ------------ 지원자가 답해야 할 개인적인 질문. 주의. - 이 질문들은 단순히 예비적인 것이며, 당신의 지원이 선교본부에서 결정되기 전까지는 어째든 현재의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막연한 용어는 피하고, 가능한 한 분명하게 답하시오. ------------ 1. 이름.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 부모의 성명과 주소, 부친의 직업. 부친 - 윌리엄 제이 쉐플리 목사 - 목회자 - 1039 Berwick St., Easton, Pa. 모친 - 메리 제이 쉐플리 2. 주소. 1624 N. 3rd. St., Harrisburg, Pa. 지원자의 임시 주소. - 3. 생일 및 출생지. 1892년 11월 30일. 펜실베이니아 주 레딩. 4. 교육기관 및 졸업일. 필라델피아 중앙고등학교. 1906~1910 필라델피아 치과대학. 1910~1913. 6. 5. 5. (a) 영어 이외에 배운 언어는? 라틴어 4년, 그리스어 3년 (b) 영어 이외에 말할 수 있는 언어는?없음. 2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6 2015-10-28 오후 5:50:04
6. 피아노 혹은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습니까? 아니오. 노래를 지휘할 수 있습니까? 예. 7. 회계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까? 아니오. 8. 당신의 전공 이외에 일을 했던 적이 있습니까? 예. (a) 선교부 혹은 교회 사역이라면 - 시기와 장소. 필라델피아 1905~1913 해리스버그 1913년부터 현재까지 (b) 교사라면. 학교 이름과 근무 기간, 가르친 학년 및 과목. - (c) 의사라면, 병원 경험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장소와 기간은? - 개업을 했습니까? 그렇다면 장소와 기간은? 펜실베이니아 주 해리스버그, 1913년 12월 1일부터 현재까지. (d) 사업에 종사했다면, 회사의 명칭과 주소. - 9. 당신의 부모는 교회에 출석합니까? (작고 시 생전에 출석했습니까?) 예 그렇다면 교파는? 연합복음교회. 아니라면 그 이유를 간단히 설명하시오. 10. 당신이 교회에 다니게 된 시기와 장소는? 펜실베이니아 주 쉐난도(Shenandoah) 1912년 11월. 11. 지금 다니는 교회는? 펜실베이니아 주 해리스버그의 해리스 가( 街 ) 연합복음 교회 (당신이 지금 교회를 정기적으로 잘 다니고 있다는 내용이 담긴,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회의(Session)에서 작성한 편지가 필요합니다.) 이 우편물에 동봉하였습 니다. 12. 당신이 장로교회의 선교사와 진정으로 협력하는 것을 방해할 어떤 견해를 갖고 있습니까? 없습니다. 13. 당신이 성경 공부를 하는 습관은 어떻습니까? 나는 성경 공부에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며, 주일학교에서 해주는 면려청 년회 강의와 관련된 부분을 공부했습니다. 하지만 나는 성경을 창세기 부터 요 한계시록 까지 통독한 적은 없습니다. 14. 실제 기독교적 사역에 참여했던 경험은 무엇입니까? 1 면려청년회의 회장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2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7 2015-10-28 오후 5:50:04
2 Ass t S S Supt. 3 Ass t Class leader. 4 구제 선교 사업. 5 주일학교 교사. 6 주일학교 교사양성반의 교사. 6 면려청년회 연합회의 자문 위원. 15. 얼마 동안 해외 선교사가 되기를 원했습니까? 약 7년 16. (a) 혹시 선호하는 선교지가 있습니까? 중국. (b) 그 이유는? 1 은퇴 선교사로부터 [치과의사의] 필요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2 아마도 내가 속해 있는 교단이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고 내가 더 중국에 대해 들 어 왔기 때문에. 3 그런 새로운 나라(republic)에서 [치과의사가] 즉시 필요하다고 느끼기 때문에. (c) 만일 당신이 선택한 선교지로 파송될 지 여부가 확실하지 않다고 판단이 된다 면, 선교본부가 당신에게 가장 적당하다고 여기는 선교지로 기꺼이 가겠습니 까? - 17. (a) 해외 선교사가 되려는 당신의 결심에 가족들이 찬성합니까? 예. (b) 당신은 친척들과 떨어져야 하는 것을 충분히 고려했습니까? 예. 18. 만일 하나님의 뜻이라면, 당신은 지금 일생을 해외 선교 사역에 종사하겠다고 신 청하는 것입니까? 예. 19. 당신은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종종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가족과의 이별, 아이들 의 불충분한 교육 기회를 포함하여 어떤 고난과 희생이 있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이런 가능성을 충분히 알고, 그리스도를 위해 끊임없는 용기로 이것들에 맞설 준비로 선교사로 임명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까? 예. 20. 하지만 육체적 혹은 선교본부에 의해 승인된 다른 결격 사유 이외의 이유로 5년 이내에 선교사직을 사임하게 되는 경우, 선교본부가 정당하다고 판단하면 당신 의 계정에서 그 부분만큼 환불할 것을 약속합니까? 예. 21. (a) 모든 형태의 선교 사역에서 개개 선교사들의 최상의 임무는 그리스도가 주님 (Master, Lord and Saviour)이심을 알게 하는 목적임을 믿습니까? 예. (b) 어떤 것이든 다른 어떤 임무가 당신에게 부여되더라도 당신의 선교사 사역의 주된 사업으로 그러한 노력을 다할 것을 약속합니까? 2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8 2015-10-28 오후 5:50:04
22. 당신이 임명되는 경우 언제 떠날 수 있습니까? 지금으로서는 약 1개월 후에. 23. (a) 결혼했습니까? 아니오. 했다면, 언제? (b) 애가 있습니까? - 있다면, 나이는? - (c) 결혼 후 지금 별거 혹은 이혼 중이든지, 혹은 과부 혹은 홀아비라면 사실과 상 황을 적으시오. - (d) 미혼이면 결혼을 계획하고 있나요? 아니오. 그렇다면 배우자의 이름과 주소를 적으시오. - 배우자가 선교사 결심에 찬성합니까? - 24. (a) 부채가 있습니까? 아니오. (b) 부양가족이 있습니까? 아니오. 25. 당신은 절대 금주자이며, 아편, 코케인 혹은 다른 마약을 전혀 하고 있지 않습니 까? 예. 26. 선교 사역에 있어 당신의 견해를 분명하게 밝힌 후 비록 당신의 견해에 반할지라 도 다수의 결정에 흔쾌히 따르겠습니까? 예. 27. 당신은 해외 선교지에서 새롭고 생소한 환경에 순조롭게 적응할 수 있는 기질입 니까? 스스로 판단하기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28. 사진을 동봉하시오. 29. 당신의 기독교적인 경험과 선교 사업에 나서려는 동기를 성명하는 편지를 따로 작성하시오. 이것은 중요합니다. 이 우편물에 동봉했습니다. 30. 당신은 구약과 신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사역(practice)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유일한 법칙임을 믿습니까? 예. 31. 당신은 이 교회의 신앙 고백이 성서가 가르치는 교리를 포함하는 것으로 진정으 로 받아들이고 채택하겠습니까? 예. 32. 당신은 미국에서 장로교회의 조직(government)과 계율에 찬성합니까? 예. 33. 담임 목사, 교사 등을 포함해 당신에 관해 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6명 이상의 이 름과 주소를 적으시오. Name 쿠퍼(A. W. Cooper) 목사 (사회 활동) Address 2nd & Douglas St., Reading, Pa. Name 베이트먼(S. E. Bateman) 박사 (교수 및 의사) Address 648 N. 52nd St., Phila, Pa. Name 스미스(Mr. J. A. Smith) (이전 기독교적 및 사회 활동의 동료)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2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29 2015-10-28 오후 5:50:04
Address 5317 Kershaw St., Phila., Pa. Name 덤(Miss Eliz. Dum) (주일학교 교사) Address 1935 N. 4th St., Harrisburg, Pa. Name 브리저( J. F. Briser) (이전 교수) Address Phila. Dental College, Philadelphia, Pa. Name 뇡제세르( J. J. Nungesser) (현재의 사회 및 기독교적 사업 동료) Address Publisher of United Evangelical Publishing Co, 1825 N. 2nd St. Harrisburg, Pa. t., Philadelphia, Pa. ================================================= 윌레엄 제이 쉐플리, 치과의사 지원자의 서명 현 주소 1624 N. 3rd St., Harrisburg, Pa. 날자 1914년 9월 16일 모두 답했으면, William H. Gutelius 에 게 제출하시오. 218 East 15 St., N. Y. C. 쉐플리 여권사진 3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0 2015-10-28 오후 5:50:04
필라델피아 치과대학 졸업명부 1913년 쉐플리 학급 학생의 날 실습수업장면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3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1 2015-10-28 오후 5:50:05
쉐플리는 1914년 9월 16일자로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로 위의 지원서와 함 께 아래의 편지를 동봉했다. (중략) 나는 해외선교에 대한 소명을 거부할 온당한 명분이 없으며, 절박하게 내가 선교사로 나가야 한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덧붙여 나는 매일 더욱 더 주님을 위해 우리 가 가장 크게 섬길 수 있는 곳을 찾아야 하는 큰 의무가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중국 및 그곳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치과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고, 내가 그 런 도움을 주어야 할 그런 거대한 조직의 일부이며,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다는 확신 을 느끼고 있습니다. 나는 구테리우스 박사의 계획이 최신 치과의 근본적인 원리를 포 함하고 있어 논리적이고, 어느 선교본부에서건 발생할 수 있는 상황에 대처할 수 있 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선교사들의 관심을 끌거나, 자립해서 선교본부의 부담을 없애 는 것이 치과의사를 실험적으로 채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도임이 분명합니다. 치과의 료선교를 하는데 사용되는 경비와 관계된 모든 부담을 제거함으로써 시술자가 최상의 결과를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선교사들의 효율성을 증대시킴 으로써 의심할 여지없이 치과 교육, 중국인들의 능력, 무엇보다도 그리스도 왕국의 발 전에 큰 자극을 가져다주는 것입니다. 위의 편지를 통해 쉐플리는 자신이 언제 어느 때이건 해외선교활동을 나갈 수 있 으며, 치과의료선교에 대한 관심과 기금 부족을 해결하고자 보다 자립적이고 효율적 으로 일할 수 있는 치과의사가 되고자 한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이와 동시에 쉐플리는 1914년 9월 16일자로 건강진단을 한 의사인 그로스(H.F. Gross)를 통해 건강진단서를 제출했다. 건강진단서에는 쉐플리는 키는 180cm, 몸무 게는 67kg로 갈색 눈과 갈색 머리카락에 안경을 썼다. 6개월 전 장의 식중독으로 치 료한 것 이외에는 건강이 양호한 상태이다. 성격은 약간 소심하고 조심성 있는 편이 라, 생명보험회사에 약 1000달러의 보험을 들고 있는데, 위험을 분별할 수 있는 환자 (prudent risk)로 추천한다. 열대기후나 추위가 이 지원자에게 질병을 일으킬 가능성 은 적다. 11년 전에 예방접종을 받은 것이 전부이므로, 해외선교사업에 필요한 천연 두와 장티푸스 등의 예방접종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17) 17) H. F. Gross, Report of Medical Examiner in the Case of Dr. W. J. Scheifley, 1914, Sept. 16. 3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2 2015-10-28 오후 5:50:05
하지만 쉐플리의 의료선교사 지원은 1914년 9월 28일자로 철회되었다. 그 이유로 는 총무비서 4인이 투표한 결과 3인이 쉐플리의 의료선교사 임명을 찬성을 하였다. 하지만 어리고, 부채가 있으며, 일반사역에 서툴고, 자금이 마련되어야 한다는 조건 이 붙어 있어 이 문제들을 먼저 해결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쉐플리는 7명의 추천서를 받아 뉴욕에 있는 스텐리 목사를 통 해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제출했다. 쉐플리과 관계된 공개 제한 편지에 답한 추천인 6명은 의사인 리첸마러 박사(Dr. A. B. Lichtenmahrer), 4년간 같이 일한 교회동료 스미스 씨 (Mr. J. B. Smith), 부친 친구 쿠퍼 목사(Rev. A. W. Cooper), 필라델피아 치과대학교수이며 4년간 가정주치 의였던 베이트먼 박사(Dr. S. E. Bateman), 헤리스버그 교회 주일학교 교사 엘리자베 스 덤 양((Miss Elizabeth A. Dum), 매형인 목사가 운영하는 교회의 신도인 뇡제세르 씨(Mr. J. J. Nungesser)이다. 연합복음교회 목사 조지 에프 샴(Geo. F. Schaum)은 북장로교 선교본부에 쉐플리의 기독교적 품성을 보증하는 편지를 보냈다. 추천서에 기재해야 할 항목은 지원자의 성격과 업무습관, 지도력과 성취능력, 기 독교적 품성, 해외선교사로서의 자질, 치과의사로서의 자질에 대한 평가 등이다. 쉐 플리를 추천한 6명의 답변은 성격에 관한 내용을 제외하고는 같거나 거의 비슷하다. 세부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6명의 추천인이 바라본 쉐플리의 성격은 훌륭하고(3인) 호감이 가며(2인). 다른 사람과 협력을 잘한다(5인). 항상 활력 있고(4인), 활동적이며(4인), 낙천적(5인)이 다. 신중하고 자신이 손해를 보더라도 양심적이며 견실하다(3인). 매력적(4인)이며 세련된 (4인)성품을 지녀 매우 설득력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업무습관은 짧은 시간에 집중해서 훌륭한 성과을 얻으므로 최상이라는 의견으로 요약할 수 있다. 돈에 대한 태도는 돈의 가치를 알아 검소하고 절약하며, 사용에 있어 서 신중하고 조심성 있으며 알뜰하다. 지도력은 남에게 의지하기 보다는 지도자(2인)이며, 테너가수로서 노래와 악기에 능숙하다(3인), 성취능력은 결코 포기하지 않는 강인함을 지녀 주위에 감동을 준다. 지적으로 똑똑하고 현명하며(5인), 수행능력이 뛰어나고 독창적이다(1인) 기독교적 품성은 훌륭하고(2인), 소명감이 있어 견실하며, 열정적이다. 주위사람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3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3 2015-10-28 오후 5:50:05
들에게 친화력이 있으며 헌신적이고, 관찰자적 역할도 한다. 항상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영적교감을 추구한다. 가족관계는 아버지는 독실하고 희생적인 구식의 목사이다. 어머니도 열정적이며 활동적이다. 매형도 목사이다. 가족 모두 매우 존경할 만하며 주위에 호감을 준다. 가 족관계는 화기애애해서 부모가 쉐플리와 떨어져 있는 것을 서운해 할 것이라고 적혀 있다. 치과의사로서 자질은 훌륭하다(2인). 반에서 최우수 학생이었고, 치과의사로서의 미래도 가장 유망하다. 그가 유망한 치과의사로서의 기대를 포기하고 선교사가 되겠 다고 한 것에 놀라움과 기쁨을 느낀다. 그가 사역에 나선다면 가장 유능한 일꾼이 될 것이고, 그를 확보하는 교회는 그를 임명함으로써 좋은 보답을 받을 것이다. 1년간의 치과개업을 성공적으로 해왔으며 해외선교에서도 자신의 건강과 진료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추천했다. 치과의료 장비는 최고이자 최신식이며 업무를 매우 철저 하고 신중하게 한다. 선교사로서의 자질은 육체적, 정신적, 도덕적으로 적합하다. 하지만 일반선교사 역을 즉시 감당할 정도로 훈련되어 있지는 않다. 인간의 성격에 대한 일반적인 지식 이 상당하며 항상 지역 교회 사업에서 성공적이었다. 이 추천서들을 1914년 12월 16일까지 북장로교에 접수되었다. 그 사이 1914년 11 월 20일자로 구테리우스가 화이트에게 보낸 편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구테리우스 는 연합복음교회 선교사이다. 쉐플리의 의료선교사 지원이 지속적으로 난관에 부딪 치자, 구테리우스는 자신이 쉐플리와 중국에 같이 못간 것이 아쉬우나 쉐플리는 계 속 연락을 유지할 만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쉐플리 치과의사와 관계된 지원서와 관련 서류들을 에비슨 박사에게 전달해달라(1914년 11월 20일자 편지) 고 부탁하고 있다. 화이트 목사는 즉시 에비슨이 쉐플리의 지원 서류를 받아 검토하고 있다. 서울에 있 는 세브란스병원이 북장로교 선교회에서 치과의사를 파송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에, 에비슨이 쉐플리나 다른 사람 중에서 적임자를 선택하기를 희망한다(1914 년 11월 24일자) 답했다. 즉 쉐플리의 서류가 에비슨에게 전해지면서 쉐플리의 의료 선교사 지원서는 1914년 12월에 미북장로교 해외선교본부에 의해 다시 심의되기 시 3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4 2015-10-28 오후 5:50:05
작했다. 지원자 기록.1915년 2월 15일 이름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 치과의사 주소 1624 N. 3rd St., 해리스버그, 펜실베이니아 주 공식 지원일 1914년 9월 26일 연령: 22세 공개 제한 편지 발송일 1914년 11월 30일 출발 가능: 약 1달(10월, 11월) 부인 이름: 주소: 받은 추천서 12/14/14 Dr. S. E. Bateman 12/16/14 Mr. J. J. Nungesser 12/ 8/13 Mr. J. A. Smith 12/ 5/14 Dr. A. B. Lichtenmahrer 12/16/14 Miss Eliz Dum Dr. J. F. Buser 12/ 9/14 Rev. A. W. Cooper 여성 선교본부 장로회의 추천 교회 추천서 조지 지 샴 목사, 14년 9월 26일 의료 증명서 에이치 지 그로스 박사, 14년 9월 26일 선호 선교지 중국 사역 종류 치과 총무들의 투표 및 의견 S. B. 찬성 H. 찬성하지만 (1) 어리고 (2) 부채가 있으며 (3) 성경 공부가 필요함에 유의할 것 W. 찬성(하지만 기금이 준비되면) 3 세브란스 병원장 에비슨과의 만남 1914년 12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간 세브란스의학교 교장인 에비슨은 부인과 함께 쉐플리의 치과와 약혼녀 래플리 가정을 방문했다. 약혼녀 루스 이 래플리(Ruth E. Lafley, 1894.10~)는 20세로 유치원 교사 수련생이었다. 아버지 존 래플리( John Lapley 1864~)는 독일 출신으로 신발 상인이었고 어머니 매기(Maggie)는 펜실베니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3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5 2015-10-28 오후 5:50:05
아 출신이었다. 래플리는 이 부부 사이에 3남 1녀 중 셋째로 태어난 딸이었다. 중앙고 등학교를 졸업(1913.6)하고 프뢰벨 유치원학교(1915.6)를 이수했다. 아들 존( John) 과 레이턴(Layton)은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에비슨이 화이트에게 보낸 1914 년 12월 23일자 편지에는 쉐플리와 래플리에 대한 에비슨의 소감이 상세히 적혀있다. 우리는 그의 약혼녀 집을 방문해 그녀의 부모를 만났습니다. 이 면담의 결과 우리 는 쉐플리 박사가 우리 학교의 직책에 충분히 충족하고, 선교의 측면에서 우리의 힘을 바람직하게 보강해 줄 것이며, 그리고 약혼녀인 래플리 양 역시 사역을 위해 매우 유망 하고 호감이 가는 인물이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습니다. 쉐플리 치과는 장비가 잘 갖춰 져 있고 전문적인 관점에서도 면밀하게 일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쉐플리는 치 과 교육에 관심을 갖고 있으며, 해외 선교지에 나가지 않게 되면 자신의 일생을 어떤 치과대학에서 교육에 종사하려고 계획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다니는 교회의 면 려청년회의 회장이며, 2차 년도에도 회장으로 재선되었습니다. 그는 명석해 보이며, 그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인간에 대한 봉사에 굳혀져 있는 것 같습니다. 래플리 양은 우리가 볼 때 더할 나위 없이 좋으며, 사역을 희망하는 그에게 즉시 합 류할 것이고 유치원 교사 과정을 거의 끝낸 상황이어서 한국의 어린이들을 위해 일을 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사용하고 싶어 합니다. 따라서 우리들은 그들을 이런 일에 임 명하는 것이 매우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이해하기로 쉐플리 박사는 준비 가 되면 즉시 임명을 받아 파송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당연히 개업일을 정리하고 선교사로서의 실제적인 준비를 하는데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중략) 나는 개인적으로 그들을 임명을 찬성하지만, 그들에 대한 화이트와 선교본부의 입장을 듣 고 싶습니다 이 편지를 받은 화이트는 에비슨에게 쉐플리를 적임자로 추천한다 는 답변을 보 냈다. 에비슨을 따라 세브란스 병원으로 파송되는 것에 대한 쉐플리의 입장은 다음 두 가지 편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쉐플리가 화이트에게 보낸 1914년 12월 26일자 편 지 와 쉐플리가 리드에게 보낸 1914년 12월 31일자 편지 다. 쉐플리는 내가 최상의 적임자라면 내 인생과 개업의 세세한 것까지 포함한 정당한 협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 각합니다 고 밝히고 있다. 협의의 내용은 바로 래플리와의 결혼과 자신의 개업을 정 3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6 2015-10-28 오후 5:50:05
리하는 문제, 선교치과의사로서 책임자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나이인지, 연합복음교 회에서 북장로교로 선교본부 교파를 바꾸는 것 등에 관한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에 대해 쉐플리는 다음 몇 가지로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제안한다. 첫째, 저는 결혼 이후 해리스버그를 떠나려고 합니다. 약혼녀인 래플리는 6월 4일 에 유치원 교사 과정을 끝낼 수 있습니다. 래플리의 선교활동을 반대하던 래플리의 아 버지도 하나님이 두 사람을 더 넓은 봉사지로 인도하신다면 가기를 원한다 고 입장을 바꾸셨습니다. 하지만 새 환경에 적응하는데 더운 여름은 무리라고 생각하셔서 9월이 되어야 떠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둘째, 지금 개업이 훌륭하게 발전하고 있으며, 더 많은 기재를 사서 진료실을 개선 하고 싶은 시기라서 세브란스 병원으로 파송되는 것이 수개월 내에는 결정되었으면 합니다. 셋째, 현재 미국에서의 전망이 밝아 서울로 선교를 떠나는데 고민이 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 내 임무이지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내가 희생하 도록 계속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절대적으로 분명히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서 봉사하는 이상적인 삶에 더 이끌리고 경제적인 문제는 덜 중요시 생각됩니다. 치과의 료선교가 실험적인 단계(experimental period)가 지났을 때는 너무 늦을 것 같아 기 꺼이 서울로 떠나기로 결심한 상태입이다. 나는 이제부터 선교치과의사라는 직책에 적합한 사람이 되고자 하고, 그 목표에 집중할 것입이다. 내 나이가 선교치과의사로 분 명하게 자리 잡기에 아직 어린 것 같지만, 나는 나이에 비해 진정으로 사려가 깊습니 다. 그 점을 고려해주시기 바랍니다. 넷째, 제가 속한 연합복음교회의 선교본부의 중국 책임자는 제게 서울에 가서 현장 을 확인해보도록 권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연합복음교회 선교본부 및 예일병원(Yale Hospital)과의 중국책임자의 협상에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에비슨 박사에게 말했듯 이, 어떤 직책을 필요로 하거나 원해서가 아니라 고귀한 섬김에 참여하겠다는 열망과 관계되어 있습니다. 현재 저는 교파와는 관계없이 세브란스병원과의 협의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에 에비슨은 쉐플리를 세브란스병원의 치과의사로 임명하는 것에 대해 구체적 인 방침을 밝혔다. 화이트에게 보낸 1914년 12월 26일자 편지 와 에비슨의 편지, 쉐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3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7 2015-10-28 오후 5:50:05
플리 박사에 관해, 1914년 12월 30일자 에서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쉐플리가 나이가 어려 처음에는 학생시절의 판단에 어느 정도 의존하겠지만 1~2년 정도 더 경험을 갖게 되면 능숙해질 것입니다. 그의 부채는 모두 그의 진료실 장비 구입 때문에 초래된 것인데 모두 새것이고 실제적으로 우리가 치과 설비를 위해 구입하기를 원하는 것들이기에 우리의 장비 기금으로 그것들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그의 급료는 세브란스와 선교본부 사이의 협의로 모두 해결되었습니다. 따라서 우리 는 그가 임명될 것이라는 기대로 일을 진행할 것이며, 그것이 그가 준비할 수 있는 유 일한 길입니다. 쉐플리가 새 학기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능한 8월 1일에는 출발하고, 늦어도 8 월 말 혹은 9월 1일에는 한국에 도착해야 합니다. 쉐플리 박사는 가능한 한 빨리 그의 임명에 관해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으며, 그래야 그의 개업과 관계된 일을 조정할 수 있습니다 한편 연합복음교회의 니벨은 화이트에게 보내는 1914년 12월 31일자 편지에 다 음과 같이 답했다. 우리의 선교지에는 아직 치과의사가 필요하지 않아 쉐플리에게 지원하라고 요청 하지 못했습니다. 기회가 있었다면 우리는 그를 지원자로 고려했을 것이며, 우리 교단 의 사역 대열에서 그를 잃게 되는 것이 유감스럽습니다. (중략) 나는 쉐플리 박사를 귀 하 교단의 선교 사역을 위한 지원자로 추천하는 바입니다. 이러한 경로로 쉐플리는 연합복음교회에서 장로교회 선교본부로 교적을 옮기게 되었다. 선교본부에서는 쉐플리의 사안과 래플리의 사안을 분리해서 최종 결정할 수 없기 때문에 래플리도 빠르게 서류를 작성 해 보내도록 했다. 래플리는 1915년 6월 4 일 프뢰벨 유치원학교를 무사히 졸업했다. 래플리는 곧 베서니 선교 유치원의 조수로 근무했다. 유치원 원장은 선교회를 후원하는 숙녀들이 허드슨에서 7월에 개최하는 회의 에 래플리가 참석하도록 추천했다. 래플리가 선교본부에 지원했다는 소식을 기 도모임에서 듣고 그들이 놀라워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래플리는 회의에 참여하게 되 3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8 2015-10-28 오후 5:50:05
었다. 쉐플리는 화이트에게 선교본부의 결정에 관한 정보를 달라고 부탁했다. 화이 트는 쉐플리에게 래플리 양의 서류들을 방금 받았고. 모든 것이 호의적이어서, 목요 일에 공식적으로 임명될 것으로 예상한다 이라는 답변을 보냈다. 1915년 2월 15일자로 쉐플리와 래플리는 미국 북장로교 선교본부로부터 한국 선 교회로 임명을 받게 되었다. 1915년 2월 17일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는 쉐플리에 게 한국 선교회를 위한 채비 목록과 장티푸트 예방접종 증명서, 신임 선교사에 대한 조언 소책자, 개인 기록 양식 을 보냈다. 미국 선교본부의 결정은 1915년2월 18일 자, 브라운이 한국 선교회로 보낸 선교본부 결정 제262호 로 한국으로 보내졌다. 윌리엄 제이 쉐플리 박사 및 루스 엠 래플리 양의 임명. 한국 선교회 귀중 친애하는 형제들: 우리는 쉐플리 박사와 래플리 양을 선교사로 임명해 한국 선교부로 배정한 것을 알 리게 되어 기쁩니다. 쉐플리 박사는 치과의사로서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에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는 에비슨 박사에 의해 서울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치과 교수로 선택 되었으며, 그에 대한 지원은 존 엘 세브란스와 더드리 피 알렌 부인이 떠맡을 것입니 다. 정확한 출발일을 정하지 못했지만, 여름의 어느 날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한국의 선교사에 유능한 치과의사가 합류는 것으로 확신하기에 대단히 만족스럽 습니다. 아서 제이 브라운 드림 그 후 화이트가 쉐플리에게 보낸 1915년 4월 14일자 편지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 이 담겨있다. 이제까지 장로교 선교본부는 매년 80~100명의 새로운 선교사를 전세계에 파송해 왔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1914.6~1918.11)이 발발해서 페르시아 서쪽을 비롯하 여 아프리카, 시리아, 멕시코등에는 선교사 파송도 불가능하고, 선교지들이 실질적으 로 폐쇄되었다. 그래서 1915년에 파송될 선교사들은 총 24명인데, 쉐플리는 그 부류 에 속해있다. 쉐플리는 자신과 래플리의 장티프스 예방접종증명서와 개인 기록 양식과 여권사 진을 준비해서 보냈다. 그 즈음 쉐플리는 충수돌기염이 걸려 4월에 수술을 받고 5월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3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39 2015-10-28 오후 5:50:05
13일에 퇴원했다. 쉐플리는 지금 발명한 것이 하느님의 섭리로 여겨집니다. 성공적 인 수술결과를 얻고 싶습니다 고 편지했다. 이어 래플리와 천연두, 장티푸스등의 예 방접종을 받고 여권도 발급 받았다. 이른 여름 쉐플리와 래플리는 결혼식을 마치고, 8 월 7일 증기선 톤요 마루(Tonyo Maru)를 타고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윌리엄 제이 쉐플리의 미국 여권 신청서, 1915년 6월 28일. 미국 여권 신청서, 1795~1925 (앞면) 아메리카 합중국 주 펜실베이니아 군 도핀(Dauphin) 나,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 는 미국 태생 및 충실한 국민으로서, 워싱턴의 국무부 에, 아내 루스 마가렛, 다음과 같은 미성년자들 [1 년 월 일 에서 출생한, 에서 출생한 ] 과 함께 나의 여권을 신청하는 바입니다. 나는 1892년* 11월 30월 펜실베이니아 주의 레딩에서 태어났고,* 나의부친은 미국의 본토박이 시민이며, 나는 미국에 거주하고 있고 본적지는 펜실베이니아 주의 레딩 이 고 그곳에서 치과의사의 직업을 갖고 있으며, 잠시 해외로 나가 그곳에서 미국 시민으 로서 거주하고 의무를 다 할 목적으로 8년 이내에 귀국할 예정이며 이하의 목적으로 다음과 같은 국가를 방문하는데 여권이 필요하다는 것을 엄숙하게 선서합니다. (국가명) 일본 (방문 목적) 여행 및 연구 (국가명) 한국 (방문 목적) 여행 및 교육+진료 (국가명) 중국 (방문 목적) 여행 및 연구 충성의 서약 더욱이, 나는 해외 및 국내의 모든 적에 대해 미국의 헌법을 유지하고 방어하며, 진실 된 믿음과 충성을 지니며, 어떠한 정신적 문제 혹은 회피의 목적이 없이 자유의사로 이러한 의무를 받아들인다는 것을 맹세코 엄숙하게 선서합니다. 윌리엄 제러마이너 쉐플리 (신청자 서명) 4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0 2015-10-28 오후 5:50:05
1915년 6월 28일 내 앞에서 선서함 프랭크 피 Sno------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 의 지방 법원의 부 서기 * 미국에서 출생한 사람이 출생지에 살고 있으면 신청서와 함께 출생증명서를 제출해 야 한다. (뒷면) 신청자의 인상착의 나이: 22 세 구강 신장: 6 피트, 인치, Eng. 턱: 이마: 모발: 갈색 눈: 갈색 Complexion: fair 코: 얼굴: 신원 증명 - 나, 조지 에프 샴, 은 미국의 본토박이 시민이고 펜실베이니아 주 해리스버그에 거 주하며 위의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를 년 동안 알고 지냈고 그가 본토박이 시민임을 알고 있으며 진술서에 언급된 사실들이 내가 알고 믿는 한 틀림없다고 엄 숙하게 맹세합니다. 조지 에프 샴 그린 가 1608 (증인의 주소) 1915년 6월 28일 내 앞에서 선서함 프랭크 피 Sno------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의 지방 법원의 부 서기 지원자는 여권을 다음의 주소로 우송해 주기를 원합니다: 2100 N. 5th Street 펜실베이니아 주 해리스버그 (상태가 가장 좋은 사진임)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4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1 2015-10-28 오후 5:50:05
2)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의 탄생 1915년 8월 31일 쉐플리 부부가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서울거 점 회의에 참석하여, 일 년간 할 일을 배정받았다. 9월 1일 아침 쉐플리는 대학에서 치 과로 사용할 공간으로 대강 설계한 도면을 받아 중국인 목수를 만나 설명해주었다. 세관과 여러 번의 연락을 취한 후에야 마침내 진료실을 꾸미기에 충분한 치과용 기자 재를 구할 수 있었다. 마지막 기구가 10월 말에 도착하였으므로 그 때까지 많은 일을 하기는 어려웠다. 쉐플리 부부는 한국인 선생님의 발음을 즐겁게 따라하며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선교사들의 연례회의에 참석하고, 다른 부서들과 협력하면서 치과 진료실의 기구를 정리하느라 11월에야 정식으로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 쉐플리 부부는 세브란스 연합의학교와 병원의 관계자들과 많은 한국인들이 눈을 크게 뜨고 손에 들고 흔드는 종이테이프를 끊었다. 1915년 11월 1일 세브란스연합의 학교에 치과학교실과 치과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치과 분야에서는 최초로 개 설된 치과학 교실이었고, 종합병원급에서는 최초로 독립적으로 운영된 치과진료실 이었다. 동양에서 해외선교 운동과 연결된 치과가 생긴 것도 처음이었다. 이것은 한 대위의 치의학교 개설안이 통감부에 의해 무산된(1909) 이후, 세브란스병원장 에비 슨(O. R. Avison)은 꾸준히 선교본부에 치과학 교실을 개설할 치과의사를 요청해 온 결실이었다. 에비슨의 계획은 의학교안에 내과, 외과, 안과 등의 분과와 치과학교, 약 학과를 설립하려는 것이었다. 에비슨의 요청에 따라 선교본부에서는 쉐플리(W. J. Scheifley)를 세브란스병원 치과 및 의학교 치과학 교실의 초대과장으로 파견하였 다. 쉐플리는 북장로교 소속 미국인 치과의사로 구강진료와 교육, 한국인 치과의사 를 양성 할 임무를 부여받았다. 쉐플리는 치과학 교실을 통해 미국의 치의학문과 진 료기술을 소개하고, 세브란스연합의학교 학생들에게 치과학을 강의하였다. 이러한 치과학 교실 설립은 장차 치과의사 수련 교육 및 연구를 통해, 치의학의 학문적 위상 을 높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이와 비교해 조선총독부의원의 치과는 외과 산하로 부설(1911.3)되었다. 조선총독부의원부속강습소는 1916년 4월 1일 경성의 4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2 2015-10-28 오후 5:50:05
학전문학교로 승격되었다. 이 때 나기라 다쓰미( 柳 樂 達 見 )가 조교수로 임명되면서 치과학을 강의하였음에도 치과학 교실을 개설하지는 못했다. 조선총독부의원 치과 는 1926년 경성제국대학 부속병원 치과가 된 후에도 치과학 교실 이라는 명칭을 사 용하지 못하고, 치과진료부 라는 명칭을 사용하였다. 18) 치과학 교실은 연구와 교육 의 성격이 강하나, 치과진료부는 단지 진료에 국한된 업무를 수행한다. 이러한 상황 은 당시 미국에서의 치의학의 위상이나 치과의사회의 역할이 일본보다 높았음을 의 미한다. 쉐플리는 총독부 치과의사 면허 5호로 등록(11월 15일 공고)하였다. 쉐플리 의 활동은 미국인 선교치과의사가 당시 한국의 치과의료상황에 직면하여 치과학 교 실과 진료를 체계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여기서는 쉐플리가 직면한 한국의 구 강보건 상태와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으로서 도입한 미국식 치의학 교육과 의료인 양성, 진료활동이 우리나라에 끼친 영향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1) 한국인의 구강보건 상태와 미국의 치의학 교육 도입 쉐플리는 당시 한국인들이 치과에서 진료를 받지 못하는 이유로 다음 세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째, 대다수의 한국인이 빈곤하여 간단한 치과시술에 대한 진료비조차 지불할 경제적 능력이 없다. 둘째, 치아와 인접구강 조직에 대한 교육이 부족해, 구강 건강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 셋째, 치과의사가 환자 건강의 중요한 안전 장치인 구강의 정상적인 보존을 다루는 전문직이란 점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대신 치과를 금박이나 은박을 해 넣는 상업으로 생각한다 는 것이다. 쉐플리는 이러한 지 적을 통해 가난하고 구강건강상식이 부족한 한국인에게 가해졌던 일본인 치과의사 나 입치사들의 상업적 관행을 비판하고 올바른 치의학문과 진료풍토를 정립할 필요 성을 제기하였다. 이를 위해 쉐플리는 미국의 과학적 치의학 교육을 도입하여, 한국 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고자 하였다. 그렇다면 당시 미국의 과학적 치의학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 다. 1910년대 초반 미국 내 60여 치과대학의 치의학 교육에는 전면적인 변화가 시작 18) 生 田 信 保, 京 城 帝 國 大 學 醫 學 部 齒 科 學 敎 室 沿 革, 齒 界 展 望 1940; 11(15): 45 47.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4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3 2015-10-28 오후 5:50:05
되었다. 그 동안 보철 중심의 임상적인 치과진료(Mechanical dentistry)에만 치중 하여, 의과학적인 문제를 형식적으로 다루었던 것에 대한 반성의 기운이 일기 시작 한 것이다. 1910년 미국의 의학자 플렉스너(Abrahm Flexner)는 의학교육제도를 수 립하기 위해 카네기 재단의 후원으로 당시 미국과 캐나다의 의학교육현황을 보고 하였다. 이러한 플렉스너 보고서의 영향으로 미국과 캐나다의 의학교육은 대대적 인 혁신을 하였다. 치의학계도 그 영향을 받아 1909년 미국치과교육위원회(Dental Education Council of America)가 조직되었다. 미국치과교육위원회에서는 치의학 교육여건의 개선과 과학화를 위해 일반의학교육을 강화하기로 하였다. 1914년 미국 치과학교육위원회는 4년의 정규치과교육과정을 권장하였다. 이에 최소 3 4년간의 치의학 정규 교과과정을 지정하고, 치과대학생들도 총체적인 의학교육을 받도록 하 였다. 그 결과 많은 사설 치과대학들이 종합대학에 편입해 들어갔으며 의과대학과 더 욱 긴밀한 연관을 맺기 시작했다. 이른바 치의학의 과학화 라는 명제는 치과진료의 범위와 질을 높이고 공중구강보건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다. 쉐플리는 바로 이 러한 시기에 필라델피아(현 템플대학) 치과대학을 졸업(1913)하였다. 쉐플리는 한국선교본부잡지에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교수로써, 치의학 교육 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는 졸업 후 기구를 스스로 갖추고 부당한 방법으로 시술하기 보다는 우리의 방법에 한정된 시술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 과학적으로 단순한 시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자본이 지출되어야 한다. 내가 의미하는 과학적 시술은 환자의 전신 건강과 구강 조직의 건강에 필요하다고 알려진 요구 조건에 따라 수행 하는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할 수 있는 한 보다 많고 철저한 교육을 제공 하는 것이다. 다만 잘못된 시술을 예방하기 위해 어떤 제한이 가해질 것이다. 따라서 쉐플리는 일본의 치과의사나 입치사들의 도제식 훈련과는 차별화된 미국 의 과학적 치의학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쉐플리는 이를 위해 미국에 있는 공립치과대 학 교수 수준의 안정된 교육자를 확보하고, 학교 설립과 관계된 다양한 기관의 지도 자들과 당국과 공동으로 협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쉐플리가 시도한 과학적 치과학 교육의 정립 은 식민지하 한국에서는 미국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될 수 4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4 2015-10-28 오후 5:50:05
밖에 없었다. (2) 치과의사수련 및 의대생 교육 치과학 교실 개설 당시 선교본부에서는 쉐플리에게 의대생들의 교육과 함께 장차 치과의학교나 치의학 연수기관으로 발전시킬 임무를 부여하였다. 쉐플리는 치과학 교실 초대교수와 과장으로 1915년 11월부터 1920년 10월말까지 약 5년간 근무했다. 그 시간을 둘로 나누자면, 전반부는 의대 4학년 학생들과 졸업 후 치과의사 수련교육 생들을 위한 교육체계를 세우고 충실히 시행한 시기였다. 하지만 후반부는 총독부의 식민지 법령과 교육정책, 세브란스 의학교에 대한 통제로 인해 좌절을 겪고, 업무조 정을 통해 장기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했던 시기였다. 즉 치과학교실 설립 목적에 맞 게 교육의 씨앗을 뿌리고, 정성껏 가꾸되 척박한 땅에서 열매를 거두기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면서 지혜롭게 뿌리를 내려야하는 시기였다. 1 총독부의 세브란스 의학교 통제와 의대생 강의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제 점령되자 세브란스 병원 의학교는 타격을 받았 다. 1913년부터 교육 연한이 일본식인 4년으로 바뀌었고, 졸업과 동시에 받던 의사면 허증도 시험을 치르고 합격해야만 하였다. 조선총독부의원부속강습소 졸업생 전원 에게는 시험 없이 의사면허증을 주고, 정부 관리나 군인으로 쉽게 취직시켰던 것과는 대조되는 일이었다. 세브란스 의학교를 기독교 선교사가 운영하고 있고 한국인들에 게 서양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일본 당국이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1911년 10월에 공포된 사립학교 규칙은 사립학교 설치인가, 교과과정, 교과용도 서, 교원의 자격 등도 조선총독부의 인가를 받도록 하였다. 1915년 3월에 개정 사립 학교 규칙과 더불어 전문학교 규칙은 사립학교에 대한 감독을 한층 강화하였다. 교과 서는 총독부가 편찬하거나 검정, 또는 인가한 것이어야 했다. 따라서 세브란스 의학 교에서 만든 한글교과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고, 일본어 의학교과서만 교재로 채택할 수 있었다. 또 모든 강의를 일본어로 진행해야 한다는 의무규정도 생겼다. 이것은 서 양 선교사들이 교수로 있는 세브란스에서는 지극히 지키기 곤란한 규정이었다. 다행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4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5 2015-10-28 오후 5:50:05
히 유예기간을 두었기에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상당한 제약 요임임에는 분명 했다. 게다가 총독부는 전문학교 승격 조건으로 일본인 교수의 등용을 권장했다. 세 브란스에도 몇 명의 일본인 교수들이 임명되었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교실의 의대생 강의 역시 진행에 차질이 생겼다. 치 과학 강의는 당시 세브란스 연합의학교의 최고 학년인 4학년생들에게 매주 1시간씩 진행되었다. 강의 내용은 치과병리, 치과질환의 중요성, 발치 등에 대한 개념정리와 실습이었다. 쉐플리는 그 동안 일반의사들이 한 치과진료가 주로 발치나 소독, 구강 양치 등에 한정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래서 치과치료는 치과전문의사 가 담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하지만 일반 의사들도 치과질환에 대해 올바른 인식을 가지고 대중교육과 진료에 임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을 강의 목표로 잡고 있 었다. 쉐플리는 강의를 위해 매주 개요를 만들어 나눠 주었다. 하지만 서울에 도착했 을 때부터 2년간 한국말을 배웠던 쉐플리가 한국인 학생들에게 갑자기 일본어로 강 의를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더구나 통역자는 강의 주제조차 이해하지 못해 매우 서 툴렀다. 그래서 통역 없이 한자를 칠판에 적어서 기초 개념을 천천히 번역하면서 강 의했다. 쉐플리는 가급적 앞에서 임상적 시범(demonstration)을 먼저 보이고, 학생 들에게 실습을 시켰다. 쉐플리는 의학교 4학년 학생들이 강의와 더불어 임상실습을 통해 많은 치과 수술을 배우고, 기존의 나이 든 선배의사들이 하지 못했던 많은 것들 을 환자들에게 해 줄 수 있게 하고자 하였다. 그리고는 학생들이 수업 내용을 잘 이 해하는지 알고 싶어 가끔 복습용 시험을 보았다. 참고용 교과서로는 치과진단학 (Dentistry, Dental Diagnosis, Sato)이 사용되었다. 그 과정에서 세브란스연합의학교는 1917년 3월에 재단법인을 설립하였고, 5월 14일 학교설립허가가 이루어져 교명을 사립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개칭하 였다. 서울의 쉐플리가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본부로 보낸 1917년 6월 4일자 편지 에는 일본어로 강의를 어려워하는 쉐플리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최근 교수회의에서 우리 학교를 감독하는 사람으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교수들에 게 일본어를 공부하라고 권고하면서 3년 안에 모든 수업을 일본어로 강의하라는 독촉 장이었다. 그 편지의 의도는 너무나 분명해서 현재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선교사들과 관련해 각 선교회로 요청을 할 필요가 없어 보였다. 일본어 공부를 시작하는 것 이외 4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6 2015-10-28 오후 5:50:05
에는 할 일이 없음이 분명하다. 올해 나는 통역을 구해야 하며, 미래에 일하는데 필요 한 언어를 배울 기회를 갖지 못함으로써 내 미래 전체가 망쳐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내가 요청하는 것은 일본어를 배울 기회를 갖겠다는 것이다(중략)나는 지금 일을 하고 있고 그 일은 지속되어야 하지만, 언어 공부를 시작하는 날부터 향후 3년간 매일 몇 시 간씩 공부를 지속할 수 있도록 배려가 필요하다 일본어로 강의하라는 총독부의 독촉장에 쉐플리의 부담은 커졌다. 쉐플리 과장 혼 자서 환자진료와 강의와 사택건축과 진료실 정비, 각종 회의와 선교사 진료 및 일요 성경반 학습까지 다 해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열병으로 잠시 쉬고 나면 더 많은 일이 쌓였다. 그 일 각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과 힘을 써야 했다. 하지만 업무량이 한 사람이 심적으로 뿐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할 수 없을 만큼 과중했다. 쉐플리는 1917년 가을부터 일본어 공부를 충실히 진행했다. 그리고 하느 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이 이끄신 곳에 내가 있고, 현재 상황 하에서 최선을 다하도록 도와주심을 느낍니다. 나는 어떠한 실패나 나에 대한 과대한 요구에 대해 걱정할 수 없습니다. 그 런 걱정은 나의 일이 아니며, 나의 직무는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주 그리스도의 봉 사를 함에 있어 앞으로의 세월이 더욱 유용하고 성공적이며 더 유능해지기를 희망하 며 기도합니다. (쉐플리의 1917년 6월 4일자 편지) 쉐플리는 1918년 4월 세브란스 이사회 연례회의 일본어로 능숙하게 강의를 할 수 있도록 개인 진료에서 1년 동안 제외시켜 줄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이사들의 입장은 뜻밖의 것이었다. 일본어 문제는 아직 분명하지 않으며, 외국인 공동체의 진료가 더 중요하다. 따라 서 쉐플리는 교육사업보다는 과의 전반적인 관리감독 이외의 가능한 모든 시간을 외 국인 공동체의 치료에 사용하도록 했다 (쉐플리 개인보고서, 1918년 6월) 쉐플리는 의대생 교육을 위해 일본어를 공부하지 말고 외국선교사와 가족들을 위 한 진료에 더 중점을 두라 는 이사회의 결정에 교육치과의사로서의 자신의 유용성이 끝났다 고 선고를 받은 듯한 아픔을 느낀다. 해외선교를 가지 못하면 장차 미국의 치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4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7 2015-10-28 오후 5:50:06
1917년 세브란스연합전문학교 치과학교실 강의 1904년 세브란스 병원 과대학 교수가 되려 했었고, 치의학 교실을 장차 치과대학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제1 의 소임으로 생각했던 쉐프리의 계획이 수정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쉐플리는 이사회 의 결정에 따라 일본어 공부를 그만두었다. 그리고 미리 이런 상황을 대비해 1918년 1월 26일에 치과학 교실의 조수로 부임 시킨 일본인 치과의사 미시나 게이키치( 三 品 敬 吉 )가 강의를 담당하게 하였다. 이어 1919년 3.1운동 때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 교와 병원의 교수, 학생, 교직원들이 대거 참여하게 되었다. 그러자 세브란스병원을 경찰의 통제 하에 두는 법령(1919. 6)이 발효되었다. 이와 같이 일제는 회유와 강압의 이중적인 형태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와 미국인 선교의사들을 통제하면서 미 국식 의학과 치의학이 한국에 뿌리내리는 것을 견제하였다. 2 치과조수수련 쉐플리는 치과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졸업 후 과정 으로서 치과의사 조수를 뽑는 수련제도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서는 1914년부터 인턴 수련제도를 실시하고 있었다. 1914년부터 재학기간이 4년으로 고 정되었기에 충분한 임상실습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졸업 후 1년 동안 인 턴으로서 본인이 원하는 과를 순회하면서 실습경험을 쌓았다. 쉐플리는 치과대학이 없는 상황에서 치과의사를 양성하려면 의과대학 졸업생에게 2년간의 임상과 기공에 대한 수련교육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내용은 서울의 쉐플리가 미국 북장 로회 해외선교본부로 보낸 1916년6월 6일자 편지 에서 엿볼 수 있다. 4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8 2015-10-28 오후 5:50:06
일본 제국의 관립 학교에서 운영하는 교과 과정은 선교본부의 능력을 훨씬 능가하 는 것이다. 조만간 이곳에서도 이와 동일한 과정이 요구될 것으로 결론을 낼 수 있다. 지정 받은 학교를 졸업하여 졸업장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게 부과되는 시험은 위에 언 급한 기관의 교육 과정에 따른 것이다. 지정 받은 학교의 졸업장은 관립 학교가 주는 것과 동일한 가치를 가져야 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국과 관계된 상황을 요 약해 보면 치과학 교실은 모든 의대생들이 치과의 가치에 대한 폭넓은 개념의 기초를 세우도록 해야 한다. 덧붙여 우리는 총독부의 시험을 치를 조수들을 훈련시켜, 그들 의 존재가 소중해질 어떤 병원에서 일을 하든가 지역에서 개업하여 성공하게 해야 한 다.(1916년6월 6일자 편지) 1914년 1월 조선의사시험규칙 이 제정되면서 세브란스 의학교 졸업생들은 총 독부의 지정을 받게 된 1923년까지 의사면허 시험을 치러야 했다. 한편 치과의사는 1913년 조선치과의사규칙 이 공포되어 문부성이 지정한 치과의학교 졸업자나 치과 의사시험에 합격한 자, 외국치과의학교를 졸업하거나 외국에서 치과의사면허를 얻 은 자 로 그 자격이 한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1921년까지 치과의사시험규칙 이 제정 되지 않았고, 1922년까지 조선 내 치의학교도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1910년대 조선 에서는 치의학교를 다니거나, 치과의사 자격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즉 총독부가 조 선치과의사규칙 을 공포한 이유는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 치과의사의 신분을 보장 하기 위한 것이었지,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1906 년 일본에서 제정된 치과의사법 에 의해 일본 본토에서는 불법화된 입치영업자 들 의 영업을 식민지 조선에서는 합법화하였다. 1913년 제정된 입치영업취체규칙 은 일본에서 이주해 온 입치영업자들이 일본인 치과의사들의 의권을 침범하지 않는 선 에서 입치업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 따라서 조선에서 치과업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공사립 치과의료기관의 조수나 보조원으로 취업하여 잡무를 보 면서 치과학이나 치과기공술을 배우는 일을 5년 이상 한 사람만이 입치영업면허를 딸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입치영업자들은 통감시절(1905~1910)부터 지방경찰서에 서 감찰하였다. 즉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 치과대학을 설립할 계획이나 관심이 없었 다. 단지 구한말 항일 의병을 소탕하고 러일전쟁을 치르기 위해 보냈던 군의관 중 전 쟁이 끝나고 할 일이 없어진 치과의사들을 한일합병 후 지방 관립병원인 자혜의원들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4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49 2015-10-28 오후 5:50:06
의 절반 정도에 배치했다. 자혜의원 치과들도 모두 외과에 포함되어 있었다. 치과 담 당자들 거의가 검정고시 출신이거나 입치영업을 했던 무자격자( 無 資 格 者 )였다. 대 구 자혜의원 치과부(1911)의 가네코 히데시( 金 子 英 志 )만이 동경치과대를 나온 유일 한 유자격자( 有 資 格 者 )였다. 즉 총독부는 치과의료정책은 일본인 치과의사나 입치 영업자들이 조선인들을 대상으로 돈을 벌거나 천황의 자혜를 베풀도록 하는 식민지 동화정책이었다. 한국인 치과의사들을 양성해 한국인 구강건강을 향상시키기 위한 계획은 없었다. 오히려, 기존의 의과대학이나 병원에 치과학 교실이나 치과가 확대 독립하는 것을 경계했다. 하지만 쉐플리와 세브란스 이사회는 의대졸업생에게 치과조수 수련 을 실시하려 할 때 조선치과의사규칙 등의 법과 시행령도 잘 모르고, 총독부가 세브란스의학전문 학교가 된 이후에도 견제를 강화하리라는 것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1916 년 쉐플리는 보고서에서 적은 것처럼 세브란스 의학교가 총독부의 지정을 받으면 일 본관립치과대학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치과대학이 생길 수 있으며, 세브란스에서 치과전문수련교육을 받으면 총독부가 주관하는 치과의사시험을 치를 수 있다 고 낙 관하였던 것이다. 1917년 6월에도 쉐플리는 먼저 의학 교과 과정에 치과학 강의가 늘어나고 치과에 여러 졸업 후 과정이 가능해지도록 해야 한다 고 생각했다. 1918년 6월까지도 세브란스 이사회 역시 의학과 치의학 졸업생을 위한 특별 과정과, 치과 분 야의 어떤 부분에서 특별 과정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을 현명한 것으로 여겼다 (쉐플리의 개인 보고서, 1918년 6월) 게다가 쉐플리는 총독부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처럼 경성의학전문 학교(1916)의 치의학 교육 대상을 의대생으로 국한하도록 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총독부는 치과학을 의학 교육의 한 분야로 만들 것이다 라고 오해한 것 이다. 원래 의과대학 졸업생이 2~3년간의 치과수련과정을 거쳐 치과의사 또는 구강 의사 자격을 취득하는 제도는 유럽의 구강학파에 의해 시작된 제도였다. 일본은 명 치유신 때 독일의학을 국시로 삼아 군진의학과 의료제도를 도입하였고, 치의학 분 야에 대해서는 군진치의학 분야를 제외하고는 정부차원의 도입에 소홀하였다. 따라 서 치의학이 민간 미국인 치과의사들에 의해 유입이 되었더라도 관에서는 독일의 구 강과(Stomatology)나 의치일원론( 醫 齒 一 元 論 ), 또는 일본의 전통한방에 구중의( 口 5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0 2015-10-28 오후 5:50:06
中 醫 )를 염두에 둔 관행을 지속하였다. 따라서 1913년에 의학교와 분리된 치과의학 교와 의사와 분리된 치과의사면허제도에 기반한 치과의사규칙 을 공포하였음에도, 1910년대 총독부의 공문서에서 치과는 의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체계가 아니었다. 이것은 치과의사가 총독부 치과의사면허와 의사면허, 입치영업면허 3가지를 받았던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쉐플리가 필라델피아 치과대학을 다닐 당시 미국 치의학 교육계에서는 의 학교육이 배제된 치의학기공 위주의 교육에 대한 자기반성이 많았다. 평균적인 치 과 졸업자들이 일반적인 의학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모든 환자들을 제대로 치료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는 비판이 제기 되었던 것이다. 카아네기 재단 이사장 프리쳇 (Henry S. Pritchett) 역시 가이스보고서 서문에서 치아와 구강은 의학의 중요한 한 분야를 구성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치과전문직은 의과전문직에 포함되어 있 지 않은 상황 이라고 지적하면서, 플렉스너 보고서가 나왔던 1910년 시점에서는 치 과가 의학의 한 분과가 되어야 하는지, 아니면 분리된 시술집단으로 남아야 하는지가 분명하지 않았다 고 하였다. 요컨대 쉐플리는 식민지 조선의 치과의사법이나 치과의료정책에 대해 잘 모르는 상태였다. 하지만 치과학 교실의 설립방향에 따라 치과의사조수수련을 체계화시켰 다. 치과의사를 수련하기 위해서는 치의학 이론교육과 치과기공 및 임상치료실습이 필요했다. 쉐플리는 선교본부에 교수요원 충원과, 기공과 임상실습이 가능한 특수진 료실을 설비를 해 줄 것을 요청했다. 구강분야의 수술과 이론을 강의하고, 임상 및 기 공수행을 감독할 교수가 절대적으로 보강되어야 했다 19). 쉐플리는 치과학 교실이 선 교본부의 재정지원 없이도 독립적으로 치과의사를 양성할 수 있는 방법을 다음과 같 이 생각했다. 이 계획은 일부 일본 대학의 예를 따른 것이다.(중략). 지방의 모든 작은 관립병원 에는 전문의사들 중에 치과 의사가 있다. 선교거점 병원도 만일 한국인 의사 중의 1명 이 특별히 치과 수련을 받는다면 상당히 도움이 될 것이다. 미래의 교육이 더 잘 될 수 19) Scheifley, W. J., Severance College Dental Department, The Korea Mission Field, Vol 12(2), 1916, p. 44~45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5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1 2015-10-28 오후 5:50:06
있게 할 표본, 교육을 위한 모형, 환자 기록 및 다른 것들을 수집하는 것이 우리가 규칙 적으로 해야 할 일이다 (쉐플리, 미북장로교 선교보고서, 1917.6.4) 지방 관립병원, 즉 자혜병원에 있는 일본인 치과의사처럼 조선 내 여러 선교병원 들마다 치과의사를 배치시키기 위해서 세브란스치과학 교실에서부터 치과조수 훈련 을 시켜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러한 생각으로 쉐플리는 1916년 치과수련의 지원자들 중에 의대졸업생 중 한명 을 뽑았다. 그는 직원명단(1917)에 임상교원으로 기재된 최주현(C. H. Chio, 1914년 의학교 졸업) 이라 생각된다. 쉐플리는 그에게 가능한 한 완전한 과정을 이수하게 해 주고, 점차 한국인 환자를 보는 일을 배정해주겠다 고 제안했다. 쉐플리의 수련과정 을 통해 전공 뿐 아니라, 서로 약간의 한국어와 영어를 가르쳐 줄 것으로 기대했다. 또 치과수련과정을 마치면, 총독부의 시험을 치르게 한 후 병원에서 일을 하든가 지역에 서 개업하여 성공하는 것을 도울 계획이었다. 1917년 유칠석(1916년 의학교 졸업)도 치과수련의로 합류하였다. 최주현은 1917 년에 2년차 조수로 일했다. 다른 조수 한 명이 1917년 3월에 합류했다. 그는 관립병 원에서 일본인 치과의사로부터 3년 반 동안 있었으며, 치과에 관한 상당히 배웠다. 그는 일본말을 매우 잘했다. 그래서 쉐플리에게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래서 치과 에서도 조수 일을 하게 했다. 나는 연중 내 조수들에게 주당 평균 3시간 정도의 교육 을 했다. 쉐플리는 한국인들은 기술이 좋기에 청결과 치료에 관한 과목을 배울 수 있 다면 훌륭한 치과의사가 될 것이다 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치과학 교실의 중요한 임 무는 치과조수들을 잘 가르치는 것이라고 했다. 그들에게 기술 뿐 아니라 치과에 대 한 체계적인 강의를 해 주어야 환자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쉐 플리는 치과조수들을 일반 한국인 진료실이 아닌 새로 정비된 특수진료실에서 훈련 을 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1917년 9월 이후에는 하루에 2시간 동안 조수들의 모든 일들을 감독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기 위해 쉐플리의 개인적인 진료는 오후로 바꾸려 했다. 의대생들은 문진을 통해 과거력을 기록하고, 수련의들은 배당되는 한국인 환 자들을 보았다. 이렇게 최주현은 2년간 치과수련을 마치고 졸업장을 받았다. 그러나 그 졸업장은 총독부의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자격이나 치과의사자격증을 부여 받는 데 5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2 2015-10-28 오후 5:50:06
는 하등 쓸모가 없는 것 이었다. 이러한 실패 과정은 윌리엄 제이 쉐플리의 개인 보고 서, 서울, 조선, 1918년 6월 에서 찾아볼 수 있다. 전문 학생에 대한 강의 계획도 이와 비슷하게 포기했는데, 그것은 조선에서 치과 시술과 관련된 총독부 규정 때문이었다. 이 규정은 우리의 지난 계획들을 계속하는 것 을 어리석게 만들었다. 나는 지난 2년 동안 조수 역할을 한 사람에게 개인적인 증명서 를 주었으나 그것이 그에게 어떠한 가치를 줄지는 말할 수 없다. 치과 면허를 양산하는 방법은 지방 경찰당국과 매우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이며, 개업을 하고 있는 사람의 수 등과 같은 지방 상태에 따라 어떤 사람이 허가를 받을 수도 혹은 받지 못할 수도 있다. 1920년에 일본에서 시험 제도가 변경될 예정이며, 그래서 우리가 제한된 정도로 훈련 시키고 도쿄치과대학에 의해 제시된 과정을 받은 후 시험을 치르기 위해 일본으로 가 게 하는 우리의 계획이 슬기로운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한국인이 치과를 개업할 수 있는 적당한 면허를 얻는 유일한 길은 총독부가 조선에 치과학교를 시작하기까지 일본의 지정 치과학교에서 공부하는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에 갈 여유가 없는 사람은 실습할 기구를 살 여유가 없으므로 나는 이것이 매우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럴 때까 지는 그런 졸업생들이 이 땅에 충분한 수가 배출될 때까지 평범하게 부분적으로 훈련 을 받은 사람들이 그 공백을 메울 수 있다. 양질의 훈련을 받은 충분한 수의 사람들이 시술을 하게 되면, 이 면허는 분명히 없어질 것이며, 나는 5년 마다 갱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 기관이 보통의 개업의사가 하는 것을 제외하고 치과에서 사람 들을 훈련시키는 계획을 세울 수 없음을 의미한다. 젊은이들이 약간의 기공작업을 하 도록 하지만 어떤 것을 망치지 않도록 훈련시키는 것을 제외하고 특별한 노력은 기울 이지 않으려고 한다. 일본에서 시험 제도의 개정 예고에 관한 공지가 되기 전에 나는 이곳의 치과 상황을 다룬 보고서를 작성해 에비슨 박사에게 보내, 그가 이곳을 대표하 는 이사들과 치과 상황을 논의할 수 있도록 했다. 위에서 평범하게 부분적으로 훈련받은 사람들 은 입치영업자들이다. 쉐플리가 입치영업자들은 치과의사들이 많아지면 분명히 없어질 것이므로, 그들의 면허는 5 년마다 갱신되어야 한다고 평가한 것은 맞다. 하지만 쉐플리 과장 시기에 한국에서 치과조수훈련을 아무리 오랫동안 제대로 받아도 치과의사가 될 수 없음을 실패를 통 해서야 깨닫게 된 것이다. 에비슨이 제중원의학교에서 8년간 교육받은 의학생들에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5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3 2015-10-28 오후 5:50:06
1917년 세브란스의학교 교직원 게 이또 히로부미 를 설득해 의술개업인허장을 받을 수 있도록 한 시대는 이미 지나 갔다. 총독부가 들어선 뒤 치과학 실습과정은 동경치과대학에서 시행된 것 것만이 인정되었고, 시험도 일본 본토에서만 치르도록 제한되어 있었다. 결국 총독부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의 치과의사수련과정을 치과의 사 자격을 얻을 수 있는 교육과정으로 승인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최주현은 치과의사 시험조차 치를 수 없었다. 결국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의 치과전문의 수련 과정은 총독부의 승인을 얻지 못했다. 최주현은 치과의사 자격 취득에 실패하자, 군 산에서 일반의로 개업하였다. 그리고 쉐플리 밑에 치과의사 조수들은 수련을 포기했다. 이와 같이 무단정치기 총독부는 조선에 치과의학교의 설립이나 치과의사 시험을 실시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치과수련을 마친 의사조차 치과시험자격대상으로 인 정하지 않았다. 치과의사 수련교육이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쉐플리는 치과학 교실 에 몇 명의 교수진과 치과의사가 더 보강된다면 치과의학교나 특별 연수기관으로 발 전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를 견지하고 이를 현실화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쉐플리는 선 교본부가 치의학교 설립의 가치를 다양한 기관의 지도자들에게 설명하여 호의와 지 5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4 2015-10-28 오후 5:50:06
쉐블리의 진료사진(1917) 지를 얻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쉐플리의 의지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 에비슨에게 전달되었다. (3) 진료 쉐플리 과장 시기의 치과진료실의 진료 내용과 환자수, 진료비, 진료시설 및 장비, 직원동향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다. 1 진료 실적과 장비 쉐플리 과장 시기의 세브란스병원 치과의 진료실적은 다음과 같다.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5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5 2015-10-28 오후 5:50:06
l 표. 세브란스 치과진료실의 진료실적(1915 1917) 년도 총환자수 유료환자 무료환자 비고 1915.11.1~1916.3.31 한국인 166명 101명 (발치 90명, 치료 41명) 65명 (발치 46명, 치료 29명) 진료비는 일반병원의 수가에 준 함 외국인 60명 총수입: 114, 550번 이상의 수술, 방사선 기 1916.4.1~1917.3.31 20) 쉐플리개인 131명 46명 65명 계 설치 후 진단(총독부치과는 방사선기계를 1924년 10월에 설 치) 치과 총환자 849명 819명 (수술 36명) 95명 특수진료소 완비, 하루 신환 30 명 가량,, 진료비는 발치가 10전 1918.6~1919.6 1627명 1420명 207명 1919.6~1920.3 2069명 1983명 86명 20) 총수입 3422 - 지출 2377 = 실수익 1045 총수입 5524 - 지출 4488 = 실수익 1035 쉐플리 진료실적 3690 1915년 11월 1일에서 1916년 3월 31일까지 4개월이 첫 회계분기였다. 이 시기 치 과진료는 구강위생관리와 치과질환과 관련된 통증 완화, 잇몸병 치료, 발치, 간단한 충전물을 해 넣는 정도였다. 한국인은 166명 치료했고, 무료환자는 65명으로 39%가 량 되었다. 쉐플리는 60명의 외국인 환자를 대상으로 300개의 치아를 치료했다. 장부 를 보니 1916년 3월 31일까지 114엔의 수익이 있었다. 그 밖에 모을 수 있었던 비용 은 80엔이었고, 그것들은 새 회계연도에 계상될 것이다. 아직 상당히 활발한 것은 아 니지만 모든 상태는 만족스러운 것 같다. 한국인에 대한 진료비는 병원의 일반 수입 으로 계산되었다. 1916년 4월 1일부터 1917년 3월 31일까지 일반 한국인 진찰실에서 819명의 유료 환자를 치료했다. 무료환자는 95명으로 그 비율이 상당히 감소했다. 한국인 진료실 에는 한국인 조수가 근무하고, 학생 한 명이 한 달 동안씩 임상 실습을 위해 배정되었 다. 이곳에서 모든 발치를 하고, 구강의 여러 병적 상태의 좋은 예가 되는 환자들도 다 20) 쉐플리, 미북장로교 선교보고서, 1917. 6. 4. 5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6 2015-10-28 오후 5:50:06
룰 예정이었다. 하지만 쉐플리가 너무 바빠서 1917년 3월 1일까지 한국인 진료실의 발치와 치료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불가능했다. 매우 힘든 예를 제외하고는 조수들 이 치료했다. 하지만 조수들은 일을 잘 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경험과 지식을 가지 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불만족스러웠다. 그래서 3월 이후에 쉐플리가 모든 환자의 검 진을 맡았다. 그리고 그 동안 한국인 진료실은 조수들과 4학년 학생들에게 임상을 가 르치는데 사용했다. 1916년 3월부터 11월까지 쉐플리는 미국 치과대학 부속진료소를 모델로 한 특수 진료실(The infirmary)을 정비했다. 특수진료실에서는 쉐플리가 주로 진료하면서 차 차 의료조수들에게 실제적인 훈련을 할 계획이었다. 또 쉐플리 부부가 살 집을 짓는 일과 다른 여러 회의와 일들 때문에 일정에 상당한 지장을 받았다. 11월에 진료가 재 개되었을 때 쉐플리는 몇 달 동안 밀린 개인별 치료를 해 주느라 바빴다. 그 동안 쉐플 리는 특수 치과진료실(The Infirmary)에서 상당히 많은 550예의 수술을 했다. 그리 고 완벽하지는 못하지만 상당히 많은 치과 방사선 작업을 했다. 세브란스에 X선 기계 가 들어온 것은 1913년이었는데, 쉐플리도 초기에는 이것을 사용했던 것 같다. 입원 한 많은 환자를 검진하고 치료했는데, 기록에 넣지는 못하였다. 그 외에 32명의 고용 인, 학생, 간호원들을 검진하거나, 치료 혹은 자문을 해 주었다. 그 중간 중간에 대다 수의 외국인 선교사들은 쉐플리에게 진료를 받기를 원하고 있어 마음이 늘 조급했다. 서울에 여러 일본인 치과의사들과 한 대위와 같은 개업의사들이 있어도 쉐플리를 찾 았다. 이렇게 바쁜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쉐플리에게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환 자들의 모든 종류의 진료를 다하는 것은 상당한 부담이 되고 있었다. 쉐플리는 자신 이 내한하기 전에는 미국 치과대학의 교수들처럼 연구와 교육에 집중하면서 약간의 환자를 볼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1년 반 동안 학생들에게 정규 적인 강의와 임상 실습을 해주고 조수들의 개인진료를 지도하면서, 쉐플리를 찾는 환 자들 모두를 진료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매우 고된 일이었다. 1916년 4월 세브란스 이사회에서는 세브란스 병원 치과에서 일할 두 번째 치과 의사를 선교본부의 조선교육합동위원회(The Joint Committee On Education In Chosen)에 요청했다. 하지만 1명의 치과의사가 합류한다고 해도 모든 선교사들의 치과 치료가 가능하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쉐플리는 1명의 치과의사라도 합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5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7 2015-10-28 오후 5:50:06
류하여 자신은 가능한 방사선 진단과 같은 전문분야와 치료가 완료될 때까지 동시에 1~2명의 환자를 볼 수 있는 상태가 되기를 희망했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 치료(특진) 비용은 중국에서처럼 시간 당 10엔을 받아야 한다고 제안했다. 1917년 3월부터 쉐플 리가 한국인 환자도 모두 검진했으므로, 3월 이후 기본 진료비는 10전이 되었다. 그 래야 치과의 재정에 도움을 주어서 치과를 발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행히 치과 재원을 조성하는 계획을 짜는데 있어 필요한 돈이 매년 500엔의 비율로 줄어들고 있 어 희망적이었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가 1917년 전문학교로 승격하면서 새로 교칙을 제정했다. 새 교칙에서 수업시간은 오전 8시 45분부터 오후 5시까지였다. 새 학년의 시작은 4월 1 일이었고, 세 학기로 나누었다. 제 1학기는 4월 1일부터 6월 30일까지, 제 2학기는 7 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제 3학기는 1월 1일부터 3월 31일까지이다. 따라서 1916 년에서 1918년 사이 치과진료실의 진료 실적이 학기별로 보고되기도 하였다. 1917년 4월 1일부터 1918년 3월말까지의 진료통계는 1918년 6월 쉐플리의 개인 보 고서 에는 기록되지 않았다. 다만 1917년 가을 진료 장비가 추가되었다. 철제 치과진 료의자 4대와 의자당 약간의 장비를 갖게 되었다. 2명의 한국인 치과조수와 2명의 의 대생을 매일 임상시간 동안 일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의대생 중 한 명은 환자의 과 거력을 기록하고, 다른 한 명의 배정된 일을 하였다. 1918년 4월 1일부터 1919년도 3월 31일까지는 어떤 해 보다도 개인 및 진료실 진 료가 많았다. 이것은 쉐플리가 진료에 더 전념했고 미시나도 진료를 했기 때문이다. 세부적인 진료내역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총수익 2377엔 중 외국인 210명의 진료 수 입이 2904엔으로 가장 많았다. 진료실 유료환자 1189명의 총수익은 518엔이었다. 지출내역으로 봉급이 1735엔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새로운 장비 및 가구구 입에 150엔, 교육 기재, 서적 및 잡지구매에 각각 50엔이 지출되었다. 그 결과 치과의 순수익은 1045엔이었다. 1919~20년도 예산으로는 미시나 박사 봉급이 2400엔, 조수봉급이 387엔, 소모품 및 기타 용품 1000엔, 신간 서적 50엔, 잡지 21엔, 새 기자재 700엔으로 총합 4558엔 이 책정되었다. 그 외 요청사항은 선교사들 치료를 도울 다른 외국인 치과의사와, 더 많은 장비 및 재고품이었다. 5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8 2015-10-28 오후 5:50:06
1919년 4월1일에서 1920년 3월 31일까지의 진료통계는 다음과 같다. 총 치료환 자 수는 2069명이었다. 환자 구성을 살펴보면 외국인 267명(환자수), 한국인 및 일본 인 87명 (방문한 총수), 진료소 유료환자는 1629명, 무료환자는 86명이다. 총수입은 5524.5엔으로 쉐플리가 3690.95엔, 미시나가 950엔, 진료소가 883.55 엔의 수익을 올렸다. 총지출은 4488.75엔으로 봉급 및 차(Wagon)경비로 2838엔, 소 모품 및 장비 1037.57엔, 임상수입 포함된 처방 약 172엔, 기타 440엔이 소요되었다. 따라서 실제수익은 1035.75엔이 남았다. 미시나도 개인사정으로 1920년 6월에 사직 함으로써 치과에는 이를 대신할 한국인 치과의사도 더 필요하게 되었다. 1919년 12 월 쉐플리는 미시나를 비롯해 치과조수들과 기공사 이씨 등이 주목할 만한 실력 향상 을 이루어 기뻤다. 그 중 가장 큰 진전은 치과를 개설한 이래 처음으로 모든 종류의 치 과 치료를 제공할 수 있게 된 점이라고 평가했다. 쉐플리 과장 시기의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환자수가 해마다 그 규모가 크게 증가했 다. 기자재면에서도 조선에서 가장 우수했다. 1914년 총독부 치과가 4개의 목재치과 진료의자와 족탑엔진으로 시작한 것과 비교해, 쉐플리의 미국산 최신 치과기자재가 처음부터 도입되었다. 구강병 진단과 치료에 방사선사진을 도입하였다. 환자의 대부 분은 한국인 다수와 소수의 외국인과 선교사 가족들이었다. 하지만 진료수익의 상당 부분은 외국인 개인진료에서 충당되었다. 초기에는 무료환자의 비율이 높았으나, 진 료환자수가 증가함에 따라 무료의 비율은 급격히 떨어지고 진료비는 일반 병원 수가 에 준해서 받았다. 쉐플리의 봉급은 세브란스가 처음부터 마칠 때까지 지속적으로 지 불했다. 2 직원 1917년 교직원명단에는 치과학 교수로는 쉐플리가, 수련의 겸 조수로는 최주현 (C. H. Choi.,의학사 M.B.), 유칠석(C.S. Ryu)가 기록되어 있다. 쉐플리의 선교보고 서에는 특수진료실의 2명과 일반진료실의 1명의 충분히 숙련되지 못한 조수들을 감 독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환자수가 증가하자 정규 치과의사도 조수로 고용하게 되었다. 대학에서 일본 어로 강의를 할 수 있고, 외국인 환자를 볼 만큼 영어가 능숙하며 기독교인인 이사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5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59 2015-10-28 오후 5:50:07
회가 만족할 만한 한국인 치과의사를 구하지 못했다. 그래서 쉐플리가 3년간 노 력한 끝에 일본인 치과의사 미시나 게이키치( 三 品 敬 吉 )가 조수로 고용되었다 (1918.1.26~1920.6). 미시나는 미국에서 10년 동안 살았는데, 오하이오 웨슬리 안 대학에서 3년 동안 공부한 뒤 웨스턴 리저브 대학교(Western Reserve Dental Department)에서 치의학을 전공했다. 러들로가 안식년 중이었을 때 미시나를 만났 고, 미시나의 교수들과 그가 다니던 교회로부터 추천을 받았다. 그는 한 동안 세브란 스 씨 집의 집사이기도 했다. 일본정부는 한국에 오는 일본인들에게 본국보다 높은 월급을 주었다. 비교적 낮은 액수의 봉급자에게는 월급의 50%가량을 인상하였고, 고수입자들에게는 33%가량 올려주었다. 미시나는 이 관례에 따라 월봉 200엔에 채 용되었다. 미시나는 1918년부터 의학전문학교에서 일주일에 한번 학생들에게 강의 했다. 1919년 교직원 명단과 업무는 다음과 같다. 쉐플리 과장은 주로 치과수술과 15개 국에서 온 외국인을 담당한다. 조수로 미시나는 의학전문학교 강의와 기계를 이용한 치과치료, 외국인을 대상으로 진단, 충전, 발치 등의 진료를 담당한다. 기공 학생인 이씨(Mr.Lee)는 전 경신학교 학생으로 기공작업에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차 씨(Y.Cha)도 근무했다. 기공사로는 이씨(Mr. Lee, 1919)가 있었으며, 치과의사를 도와 기공작업을 하였 다. 이러한 치과의료인력 편성은 당시 일본인 치과의사와 입치사간의 업무영역이 중 복되던 일본과 달리 미국의 치과의사와 기공사간의 분업체계에 따른 것이었다. 3 임상지부활동 세브란스의전 치과학 교실은 개설 초기부터 소래, 원산, 평양, 운산등지에 임상지 부를 설치하고 진료활동을 하여 왔다. 조선말 알렌과 에비슨 등은 소래 원산 해수욕 장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 그 지역 주민들의 진료를 해주었다. 경원선(1914)이 부설 되자 원산 해수욕장은 금강산, 삼방 스키장과 더불어 관광지가 되었다. 쉐플리도 소 래를 방문하여 성인 50명과 어린이 12명에게 치과치료를 해주었다 (1920. 8). 이와 같이 임상지부는 선교의사들의 휴양지나 미국인이 운영하는 광산지역에 설립되었 다. 미국인들의 광산 진출은 알렌이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시기인 1895년에 조선국 6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0 2015-10-28 오후 5:50:07
왕에게 평안북도 운산의 금광개발권 주선을 일임 받으면서부터 시작되었다. 1897 년 미국인 실업가 헌트와 화셋은 운산에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 지부를 설립하고 광 산개발을 시작하였다.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The Oriental Consolidated Mining Company)는 헌트와 화셋에 의해 미국 West Virginia 주에 설립되었고, 1899년에 조선국왕에게 10만 달러에 운산탄광개발권을 일임 받아 1939년 일본의 금광회사에 800만 달러에 넘기기까지 미국인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1903년에는 70명의 미국인 과 70여 명의 일본인, 700여 명의 중국인과 2000명 이상의 한국인 노동자들이 저임 금을 받고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조선 전체 금생산량의 최대량에 해당하는 큰 광산 이었다. 운산금광은 조선 굴지의 노다지굴로 유명하다. 1910년대 운산금광의 수입액 은 49,000,000원가량으로 한국정부 예산과 거의 맞먹는 수준이었다. 여기 선교의사 들의 이동진료가 시작되어, 차차 세브란스병원의 정규적인 임상지부로 자리 잡게 되 었다. (4) 연구 1 한국인 구강보건 상태에 관한 연구 쉐플리는 자신의 임무를 과학적으로 수행하기 위한 준비 작업으로 한국인의 종족 적 특성과 생활환경에 따른 구강보건 상태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가 계획한 세 가지 연구과제는 다음과 같다. 첫째, 환자의 일상적인 식생활의 정확한 특성을 파악하고, 이것이 정상 분비와 구강조직에 해를 끼치는지 알아야 한다. 즉 저 작생리에 따른 구강조직의 적합성을 연구하는 것이다. 둘째, 한국인의 유치와 영구 치 맹출시기에 대한 발육상태를 통계화하는 것이다. 정상치열에 대한 기준을 세우 고, 여러 치아의 붕출 시기에 대한 도표를 만드는 것도 포함된다. 셋째, 한국인의 생 활환경과 습관을 면밀하게 연구하여, 기형적인 치열이나 치궁의 원인이 되었는지 조 사하는 것이다. 이렇게 쉐플리의 연구계획은 한국인의 구강보건의 특성을 파악하고, 올바른 치과시술이 이루어지도록 하는데 집중되어 있다. 쉐플리는 이러한 연구를 바탕을 조만간 치과질환이나 구강건강상식을 담은 책자 를 출간할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 책에는 다양한 치과적인 질병이나 상태를 치료하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6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1 2015-10-28 오후 5:50:07
거나 교정하는 것의 중요성과 방법, 개인의 전신건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주제들 을 담고자 했다. 이러한 지식을 담은 책들이 구강질환으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랐다. 또 올바른 양치법을 알리는 것과 같은 예방교육사업도 전문화시키고자 했다. 만 일 치과의사들이 아프거나 불편한 사람들이 병원을 찾는 것에만 의존한다면, 구강분 야의 전문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통상적인 의사들도 이를 뽑거나, 소독 후 솜과 붕 대로 막아주는 것 정도는 하기 때문이었다. 쉐플리는 구강보건과 질병에 대한 연구와 교육책자 발간, 예방사업 등을 통해 치의학 분야가 사회적으로 가치를 갖게 되길 바 랐다. 2 외국인 선교사와 가족들에 관한 연구 쉐플리는 도착하면서부터 많은 외국인 선교사와 가족들, 한국인 환자의 진료를 요 청받아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환자들이 서울로 상경하여 완전한 치료를 받기 위해 충 분한 기간 동안 체류하는 것도 힘들고 쉐플리 혼자서 진료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그 래서 쉐플리는 외국인 선교사와 가족들의 구강보건 및 치과진료상태와 필요도를 연 구해 선교본부에 집단구강보건관리를 요청하고자 했다. 쉐플리는 내한 후 첫 분기인 1915년 11월에서 1916년 6월까지 60명의 선교사들 을 대상으로 300개의 치아를 치료했다. 쉐플리가 치료한 8명의 어린이 중 7명은 불 규칙한 악궁을 지니고 있어 조속한 교정 치료가 필요했다. 성인들 또한 50%가 농양 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당시 미국에서는 초등학교나 군대, 함대, 여타 기관들에서 집 단적인 치과 치료와 구강관리를 통해 효율성과 의미를 입증 받고 있었다. 여러 기관 에서 구강병이 전신질환에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는 연구결과를 보고하였다. 쉐플 리는 한국의 선교본부에서도 구강병 예방과 치과치료의 의미를 연구할 필요가 있 다고 보았다. 집단 예방 및 치료사업을 통해 구강병을 줄이는 것은, 장티푸스나 다 른 전염병에 대한 예방접종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쉐플리는 이런 문제를 밀스 (Ralph G. Mills)에게 이야기해서, 연구부를 통해 분명한 통계를 얻을 수 있도록 조치 했다.(1916년 6월 6일자) 그리고 세브란스 병원 치과의 외국인 선교사 치료업무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진 6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2 2015-10-28 오후 5:50:07
료를 어렵게 만드는 몇 가지 조건을 다음과 같이 파악했다. 첫째, 치과 진료실과 선교 거점 사이의 거리가 멀다. 둘째, 선교사가 일단 결심하면 치료에 걸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사역의 전체적인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셋째, 동쪽에 위치한 개업의사 한 대 위 와 선교부 사이의 조화가 부족하다. 이것은 선교사들에게 상당한 염려와 불편을 주 며, 최상의 시술을 막는다. 넷째, 선교사들이 받는 이런 시술에 소요되는 비용은 선교 부에서 봉급의 일정 부분을 각출해서라도 마련해야 한다. 한국에서의 비용은 극동의 어느 곳보다 적게 들지만, 아직 선교사들은 그들이 받을 권리가 있는 시술을 받지 못 하고 있다. 다섯 째, 선교사들의 치아를 돌 볼 충분한 인력이 없다는 점이다. 쉐플리 는 이런 문제들을 조사해 확정된 통계를 만드는 연구를 구상했다. 그래서 1916년부 터 선교사들의 구강 상태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사업을 시작한다는 희망으로 모든 선교사들에게 설문을 보냈다. 이 설문지는 대학의 모든 과로부터 자문을 받은 후에 인쇄되었고, 연구부의 이름으로 보냈다. 설문 결과에 대해 쉐플리는 다음과 같이 평 가했다. 지금까지 수집된 설문지로는 아직 정보가 부족하다. 어떤 점이 치과치료를 어렵게 하는지 상상해야 한다. 하지만 이 나라에 10명의 치과의사가 있더라도 사람들이 완전 한 치과 치료를 받는 데에는 시간이 걸리고 약간의 불편 혹은 원망스런 불평이 계속될 것이다. 거의 원가 혹은 이 보다 약간 높은 진료비로 불완전하고 급하게 일을 계속 해 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유일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진료비의 문제일 것이다.(미북 장로교 선교보고서, 1917. 6. 4) 1918년 4월 1일 세브란스 이사회에서 쉐플리에게 학생교육보다 외국인과 선교사 진료를 담당하라고 결정했을 때 쉐플리는 미국 선교본부에 다음 사항을 분명히 밝혀 줄 것을 요구했다. 첫째, 최소한 2명의 미국인 치과의사의 봉급을 지원해 줄 수 있어 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선교사에 대한 진료비가 너무 비싸져 진료를 못 받는 사람들 이 생겨난다. 둘째, 조선에 거주하는 선교사의 수가 다른 곳 보다 많다. 이들 집단의 치아 관리를 위한 재정보조가 최소한 의과치료에 이루어지는 만큼은 지원되어야 한 다. 셋째, 기공사와 간호원 1명이 필요하고, 치과 수술실에 독립적인 방사선 장비를 갖추길 원한다는 내용이다.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6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3 2015-10-28 오후 5:50:07
쉐플리는 선교사 진료를 더 많이 하게 됨에 따라 한국 내 선교사들이 처한 상황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다. 첫째, 많은 선교사들이 체계적이고 철저한 치과 적 관심을 받을 때보다 훨씬 덜 효율적이고 덜 건강한 상태에 처해 있다. 둘째, 선교사 들을 만나 세심하게 질문한 끝에 그들 중 누구도 방사선 촬영을 포함한 철저한 치과 적 검사를 받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치과적 검사는 반드시 필요하다. 셋째, 선교사의 자녀들은 서울에 살지 않을 경우 필요한 치료를 받을 수 없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치아 변형을 갖게 된다. 넷째, 누구도 분명하게 선교사들의 치료 임무를 부 여 받은 사람이 없고 현재의 의료진으로는 이 일을 해낼 수 없다. 다섯째, 선교사들은 가족들을 치료하는 데 필요한 시스템을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예산과 장비 를 갖추는 데 필요한 돈을 지불할 수 없다. 동양의 다른 나라와 비교해 적당한 수준인 치료비를 청구해도 그들은 이를 감당할 능력이 없다. 여섯째, 선교사들은 치과 치료 를 위해 휴가를 내 미국으로 돌아간다. 정기적이고 철저한 치료를 제공되지 못한다면 훨씬 많은 수의 선교사들이 계속 이런 이유 때문에 미국을 방문하게 될 것이다.(쉐플 리의 개인 보고서,1919년 6월) 1919년 12월 쉐플리의 개인보고서에서는 최근 몇 개월 동안 선교치과와 관련해 특별히 관심이 가는 두 가지를 소개하고 있다. 첫 번째는 선교사들이 그들의 치아 건 강에 점점 더 관심을 기울인다. 두 번째는 최근 미국에서 계속된 언론 캠페인에 의해 많은 미국인들이 육신의 병이 치아 질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믿게 한 불안감으로 인 한 소동에 보수적인 태도를 취한다는 점이다. 이 과정은 치과 치료를 일반 의료의 필 수적인 부분으로 여기며 치료하도록 만들었다. 이와 같이 쉐플리는 선교사 진료를 담당하게 되면서 조선에서 활동하는 선교사들 이 미국 본토에 있을 때와 거의 같은 치과진료를 받게 해주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 고 연구조사와 집단적 대책 마련을 촉구했다. 3 1910년대 말의 미국의 치과계 쉐플리는 당대 미국 치과계의 학술적인 변화에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 1910년대 미국의 치과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 미국의 위인 중 한 명은 고름이 든 치아 때문에 생긴 병으로 숨졌다. 그의 치 6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4 2015-10-28 오후 5:50:07
아는 치과의사의 치료를 받을 때에는 위험해 보이지 않다가,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병이 진전된 뒤에야 방사선 사진에서 문제를 드러내었다. 둘째, 치아 질환은 미국의 군대 지원자들을 떨어뜨리는 질병 목록에서 두 번째다. 셋째, 부모가 전문적인 치료를 받도록 할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는 취학 아동들을 무료로 치료해주는 치과병원을 운영하는 도시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 넷째, 미국의 큰 자선기관 중 두 개는 전적으로 아동의 치과 치료에 노력을 들이고 있다. 다섯째, 한 대규모 보험 회사는 1916년에만 2,700개가 넘는 치과 방사선 사진들에 관해 보고한 치과 진단의사를 두고 있다. 이것은 모든 사업가들이 피고용인들의 치아 건강의 가치를 깨우치도록 하고 있다. 여섯째, 어떤 전문가는 자신의 임상적 소견과 함께 6,000개 이상의 방사선 사진을 보고했는데, 구강 건강의 가치와 실활 치아의 치료의 평균 실패율을 보여주고 있다. 일곱째, 여성을 대상으로 이에 낀 찌꺼기를 제거하고 치아의 광택을 내는 일을 교 육하는 특수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졸업생들은 치위생사라고 불렸으며, 치아를 청결 히 하는 일 이외에 치아 위생 교사로서 공립학교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다. 여덟째, 미군은 군인 500명 당 1명의 구강외과 의사를 보유하고 있는데, 기지 병원 에는 몇몇이 더 있다. 이 구강외과 의사는 예하부대인 연대의 치과군의관으로서 군인 들이 가능한 한 치아 건강을 잘 유지토록 진료한다. 기지의 병원들은 완벽한 치료 시 설을 갖추고 예하부대를 순회하는 이동 장비들로는 할 수 없는 특별한 치료를 담당한 다. 치과 군의관의 군대 내 서열은 일반 군의관들과 동일한 위상을 차지한다(1919년 6월보고서). 이러한 치과계의 사회적 변화 중 쉐플리가 가장 큰 관심을 갖는 내용은 빠르게 변 하는 치의학 지식과 이론에 관한 것이었다. 미국의 많은 치과의사 모임에서 강연을 한 치과의료 교육자가 있었다. 그는 자신이 완벽하게 치료했다고 자부했던 환자의 방사선 사진을 통해 자신의 치료가 오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치과의사들은 모든 사례를 철저하고 과학적으로 공부해 표준적인 치료 과정을 확립하려고 해야 한다. (쉐플리의 보고서,1919년 12월)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6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5 2015-10-28 오후 5:50:07
(5) 쉐플리 부부의 한국 생활과 쉐플리 과장 시기 치과학 교실의 의의 1 쉐플리 부부의 한국 생활과 그 이후 1915년 쉐플리 부부가 처음 도착했을 때에는 에비슨 박사 부부와 함께 지내며 도 움을 받았다. 부임 첫 해 겨울 동안 쉐플리 부부는 한국말을 익히는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 주로 한국인과 어떻게 인사를 나누고 필요한 것을 부탁하고 지시하는지에 관 한 일상회화였다. 쉐플리가 치과진료와 교육을 계획하고 하는 동안, 루스 엘 쉐플리 부인은 유치원과 부녀자 교실에서 교육을 하거나, 외국인 학교에서 음악을 가르쳤다. 쉐플리는 12월 초부터 몸이 점점 약해졌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휴가로 3일 동안 청주를 여행했다. 그곳에서 쉐플리는 밀러, 팁톤의사와 함께 전도지를 배포하며 시 골로 산으로 수 마일을 걸었다. 이 여행은 매우 즐거워 다시 건강이 회복되는 것 같았 다. 하지만 1916년 2,3월 초에는 발열로 눕고 말았다. 쉐플리가 오랫동안 아팠기 때 문에 루스 엘 부인은 남편을 돌보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쉐플리는 아프고 일이 바빠 한국어 공부에 다소 지장을 받았다. 4월 1일 새학기부터는 모든 일을 정상 적으로 수행했다. 1916년 4월 중순 쯤 쉐플리 부부의 집이 건축되기 시작했다. 건축이 끝나 이사하 기 전까지 언더우드 씨 부부와 함께 지냈다. 건축된 집은 만족스럽고 감사했다. 쉐플리에게 여러 달 동안 교회(Duke Sam Church)에 참석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 져, 쿤스 씨가 요청할 때마다 참석했다. 1916년 6월에는 남대문 교회에 출석하면서 일요일 아침마다 영어 성경반을 이끌었다. 마가복음을 공부하고 있는데, 영어를 이 해하는 학생은 없지만 여러 단어들의 정의를 내리는 중에 분명히 많은 교육이 될 것 같다. 쉐플리는 일요일마다 한국 교회의 영어성경반에 참석하는 것을 통해 주중에 부 딪히는 어려움에 맞설 힘을 얻었다. 장래가 촉망되는 몇몇 젊은 한국인들과 가깝게 만나는 기쁨도 느꼈다. 쉐플리는 영어성경공부가 한국인들이 미래에 봉사활동을 할 때 유용한 도움이 되길 바랐다. 1917년에 쉐플리는 적당한 시간에 휴식을 취하고, 운동을 규칙적으로 하고, 걱정 을 하지 않게 되면서 건강을 되찾았다. 일본어 공부를 규칙적으로 시작했다. 1918년 1월 26일 쉐플리 부부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이름은 윌리엄 제러마이어 6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6 2015-10-28 오후 5:50:07
쉐플리 2세 였다. 아들이 태어나면서, 쉐플리 부인이 한국인을 위한 유치원을 만드는 일에 참석하는 것은 어려워졌다. 외국인 어린이들을 위한 유치원 수업에만 참가할 수 있었다. 쉐플리는 의대생 강의를 미시나에게 넘기고, 2년간 치과조수 수련을 마친 최 주현이 치과의사자격시험도 보지 못하게 되어 교육치과의사로서 자신의 유용성이 끝났다고 느꼈다. 하지만 쉐플리는 자신에게 맡겨진 외국인 선교사들의 진료업무가 체계적인 집단 구강보건사업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미국 선교본부의 지원을 요청했다. 1917년 미국이 1차 세계대전 중인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 1918년 여름 쉐플 리는 미국공안위원회와 징병위원회를 통해 시민권 및 병적등록을 재승인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쉐플리는 브라운에게 치과의료선교에 대한 지원이 안 되면, 조국을 위 한 자신의 소임을 다하기 위해 미국의 치과의사 예비 장교단으로 입대할 생각이라고 편지(1918년 7월 18일자)를 쓰기도 했다. 선교사들의 치과진료재정지원에 관해 두 개의 선교회가 호의적인 조치를 취했고, 선교본부들도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쉐 플리는 선교사들의 치과진료가 명실공히 선교본부의 사업으로 자리잡지 못하는 한, 자신이 선교회의 준회원상태로 남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1919년 2월 3일자로 쉐플리는 미국 여권 신청서를 제출했다. 1920년 11월에 시작 되는 안식년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미국의 치과의사 졸업후 교육과정과 최신 정보 와 새로운 장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의 고독감을 메꾸기 위해 많은 책을 읽고, 많은 시간을 기공실에서 보내야 했다. 그래서 미국에서 대학원 과정을 밟기로 했다. 1919년 들어 쉐플리는 소래 포구 같은 임시진료소 등에서 선교사들을 치료하면서 치 과의료선교에 대해 더 많은 보람과 가치를 느꼈다. 쉐플리는 가난한 한국인들의 진료 에도 꾸준한 관심을 가졌다. 1920년 4월 9일 쉐플리의 졸업 후 과정 수학을 위해 60달러를 지급한다는 선교본 부의 결정이 있었다. 1920년 4월 이후 쉐플리는 치과부분의 총괄 감독을 중단했다. 맥안리스가 몇 달 동안 외국인 진료를 했다. 쉐플리가 조언을 했고, 맥안리스는 잘 해 내려고 노력했다. 1920년 6월 쉐플리는 연례 선교회에서 시간을 보낸 뒤 7,8월의 대 부분을 소래 해수욕장의 공동체와 미국인 광산으로 여행했다. 소래 해변에서 50명의 성인과 12명의 어린이를 치료했다. 그 후 한국을 떠나기까지의 몇 주 동안은 다른 사 람이 대신 할 수 있도록 일을 정돈하는 데 시간을 보냈다.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6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7 2015-10-28 오후 5:50:07
1920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장인 오 알 에비슨은 2월 26일자로 서울에서 준 혹은 정 선교사로서, 혹은 3~5년의 단기간 동안 도움을 줄 기독교 신자인 치과의사 를 찾는다 는 편지를 보냈다. 적합한 사람에게는 다음과 같은 보장조건을 약속했다. 첫째, 선교사와 대등한 봉급을 준다. 둘째, 서울까지의 여행 경비를 제공한다. 셋째, 그가 3년 이상 이곳에 체류하면 미국으로 돌아갈 경비를 제공하며, 정당한 이유로 그 를 해고해야 하면 우리가 그의 귀환 경비를 지불할 결정권을 갖는다. 1920년 10월 2일 일본 요코하마를 엠프레스 오브 아시아호를 타고 출항하였다. 1920년 10월 11일 밴쿠버에 도착했다. 1920년 5월 20일 대학원에 입학해 공부하기 위해 1921년 8월까지 선교본부의 휴가를 받았다. 1920년 12월 9일 쉐플리가 사업에서 필요한 요구에 부응하는데 육체적, 정서적 으로 적당하지 않다 며 선교본부에 사직서를 보냈다. 선교본부(1920. 12)는 뉴욕에 체류하고 있는 에비슨에게 자문을 구한 뒤 쉐플리의 사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느껴 다음과 같이 결정했다. 조선 선교회의 치과의사 더블유 제이 쉐플리와 그의 부인의 사임을 받아들인다. 퇴직 수당은 4개월로, 자녀 수당은 10월 그들이 도착한 날부터로 의결되었다. 선교사 사직 후 쉐플리는 미국 펜실베니아 해리스버그에서 개업을 했다. 1921년 다시 세브란스 치과과장을 맡아달라는 에비슨의 요청에 후임자를 구하지 못하면 개업을 처분하고 돌아갈 수 있다고 답했다. W. J. Scheifley(1892 1958. 3. 17) 약력 1892년 미국 펜실베니아 레딩 출생 1913년 미국 필라델피아 치과대학 졸업 1915년 8월 30일 북장로교 선교치과의사로 내한 1915년 11월 1일 세브란스병원 내 치과학 교실 개설 1920년 12월 6일 사임하고 귀국. 미국 펜실베니아주 하리스버그에서 개업 1926년 미국치과의사회 자문위원을 맡아 부츠와 맥안리스의 치과건물신 축안을 도움 1940년 펜실베니아 주 도핀 군 치과의사회 부회장 역임 1942년 미국 제2차 세계대전 징집 (만 49세). 폐인슈메이커 빌딩, 해리스버그 1943년 템플대학원에서 치의학 박사학위 취득. 6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8 2015-10-28 오후 5:50:07
1958년 3월 9일 만 56세로 사망 부인 루스 래플리는 1983년 만 90세로 사망했다. 한국에서 1918년 1월 26일에 태어났던 아들 윌리엄 제러마이어 쉐플리 주니어는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이후 1951년 텍사스로 이주한 후 1974년에 사망했다. 현재 텍사스에는 손자 윌리엄 클레이턴 쉐플리(1944~)와 존 찰스 쉐플리(1945~), 손녀 마사 앤 쉐플리(1956~) 가 거주하고 있다. 2 쉐플리 과장 시기 치과학 교실의 의의 쉐플리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에 치과학 교실을 개설한 것은 한국인의 특성에 따 른 치의학 연구와 과학적이고 윤리적인 구강진료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한국인 치과 의사수련체계를 만들고, 의대생들에게 전신건강과 관련한 구강질환에 대해 교육하 기 시작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당대 미국의 최신식 치과 진료장비와 엔진과 진료기술을 갖추고 있었다. 의대졸업생의 치과조수수련을 통한 치과의사 양성 노력은 일본정부의 치과의사 관련규정을 변화시키지 못한 채 좌절되 었다. 하지만 이후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이 최대의 한국인 치과의사수련기관으로 성 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들었다. 쉐플리가 첫 치과수련의를 배출했던 시기는 제1차 세 계대전을 전후하여 만주를 둘러싼 미 일의 이권대립으로 양국의 관계가 급격히 냉 각된 시기였고, 3 1운동을 전후하여 총독정치에 비판적인 선교사들에게 직접적인 탄압이 가해지던 때였다. 이러한 시기에 쉐플리는 치과학 교실의 발전에 필요한 비 용을 자신의 봉급에서 일정 부분 갹출하여 대야 한다고도 주장하리 만큼 열성적이었 다. 그러나 쉐플리가 견지한 낙관주의와 개인적 헌신에도 불구하고 치과학교나 졸업 후 치과전문의 과정확립에 대한 실제적 성과를 얻지 못한 대학원 과정을 밟기 위해 사임하게 된다(1921). 하지만 중국 최초의 치과학교인 서중국연합대학(West China Union University)이 1916년에 캐나다와 미국 하버드대 출신 선교치과의사들에 의 해 치과학 교실로 세워져 1921년 의학부에서 독립되어 발전한 것이었다. 쉐플리가 우리나라에 최초로 치과학 교실을 개설해서 미국 치의학의 발달된 수준에 근거한 현 대 치의학문 교육과 연구, 진료를 독립적이고 윤리적으로 진행한 것은 동양권에서도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6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69 2015-10-28 오후 5:50:07
3. 부츠 과장과 맥안리스 교수 시기 1) 에비슨의 치과의학교 설립안이 한국에 끼친 영향 1919년 3 1운동 당시 세브란스 교직원, 간호원, 학생 등 여러 사람들이 적극적으 로 참여하였다. 3.1운동 이후 한국인들의 고등교육에 대한 열의는 더욱 높아졌다. 특 히 치과의사 등의 전문직을 포함한 종합대학 설립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다. 1916년 부터 연희전문학교 교장을 맡았던 에비슨(O. R. Avison)은 치의학교를 신설하여 세 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와 함께 종합대학으로 발전시킬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 그 래서 보다 전문적인 역량을 지닌 치과의사 몇 명을 구하려했다. 1921년 3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 교실의 후임으로 부츠( J. L.Boots)가 도착하였다. 4월 부츠는 필라델피아의 비버휠스에 있는 장로교회에서 급 여를 받으면서 학생들에게 강의를 하기 위해 일본어 공부를 하였다. 하지만 에비슨은 쉐플리에게 편지를 했다. 후임을 구하기 어렵고, 자신이 세브란스 치과 과장에 적합 한 사람이 아니라는 쉐플리의 생각에 동의하지 않으니 다시 오라 는 내용이었다. 이 에 쉐플리는 개업을 처분하고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고 답장을 했다. 5월 에비슨 은 쉐플리의 복귀를 선교본부에 요청하였다. 하지만 6월 쉐플리는 개업후임자를 구 하지 못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답했다. 1921년 7월 세브란스 치과 교수로 임 명하기로 했던 캐나다의 톰슨이 천연두에 걸려 임명이 무기한 연기되었다. 1920년에 세브란스에서 몇 개월간 외국인 진료를 담당했던 맥안리스는 한국으로 오고 있는 중 이었다. 미시나는 8월 31일 사임하기로 했다. 7월18일 쉐플리는 뉴욕선교본부에 개 업을 처분할 수 있는 방법이 생겼으니, 세브란스병원에서 급박하게 사람을 요청하면 다시 정보를 달라는 편지를 썼다. 이러한 시기에 에비슨은 총독부에 치과의학교 설립청원서를 제출(1921. 7.)하였 다. 1921년 7월 5일자 매일신보와 동아일보에서는 齒 科 醫 專 門 學 校 에비슨씨가 50 7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0 2015-10-28 오후 5:50:07
萬 圓 을 내어 설립한다고 해, 齒 科 醫 專 申 請 이라는 머리기사로 다음과 같은 내용 을 일제히 보도했다. 에비슨이 조선에 치과의학교가 없음을 유감으로 생각하여, 50 만원의 자금으로 3개년의 치과의학교를 설립하려 한다. 학생은 조선인을 본과생으 로 하고, 일본인은 청강생으로 입학시키고자 한다 는 것이다. 그러나 총독부는 에비 슨의 치과의전문학교의 설립 청원을 보류하였다. 에비슨의 교육기구 확장은 총독부 의 학사행정을 앞지르는 일이어서 허가하지 않았다. 총독부로서는 미국인이 대학의 설립에 선수를 친 것은 조선 민중에 대한 일본의 위신과 면목을 떨어뜨리는 일 이기 때문에, 에비슨과 미국 선교의사들이 정규치의학교를 설립하지 못하도록 법적인 제 재를 가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비슨은 1921년 10월 5일 신촌캠퍼스에 언더우드 목사 기념 강당과 싸인쓰 강당의 정초식을 거행함으로서 종합대학을 설립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당시 총독부는 한국인 고등교육 및 치과의사 양성에 소극적인 입장을 지니고 있 었다. 이러한 시기에 조선치과의학회(1920)와 조선치과의사회(1921)를 창립한 일본 인 치과의사들은 지속적으로 입치사제도 철폐를 주장하였다. 그러나 총독부는 기존 의 입치사제도를 유지하려 하였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총독부는 한국인들을 위 한 치과학교를 운영할 비용을 보조할 생각이 없었다. 한국인의 구강건강에 대한 관 심도 없었고, 한국인 고등교육 이수자를 증가시키기를 원치 않았다. 또 조선인들이 조선인 치과의사에게 치료를 받음으로써 일본인 개업가에 타격을 입힐 것도 우려 했 기 때문이다. 그러자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몇 가지 치과의사시험제도를 건의하였다. 치과대학의 정규교육과정을 밟지 않고 입치사들이 시험을 통해 치과의사가 될 수 있 는 제도를 제안한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치과의사시험규칙(1921)을 선포하였다. 총 독부치과의사시험위원장(1921.8)을 맡게 된 나기라( 柳 樂 達 見 )는 치과의사강습소 의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나기라가 정규 치의학교가 아닌 강습소 를 구상했던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 조선치과의사시험규칙(1921)에 따라 이를 준비하 는 수험생들을 위한 강습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서울에 개업하고 있던 일본인 치과 의사들은 나기라에게 치과의사강습소를 설립하라고 재촉하였다. 둘째, 총독부의원 부속의학강습소(1914)가 경성의학전문학교(1916)로 승격한 것을 모델로 삼아, 치과 의학교도 초기에는 강습소로 출발해서 점차 학교로 승격시키려는 의중도 있었다. 그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7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1 2015-10-28 오후 5:50:08
러나 나기라의 강습소 설립계획 은 총독부의 승인과정에서 뜻하지 않은 전기를 맡게 된다. 에비슨의 치과의학교 설립안 이 한국인들에게 알려져 치의학교 설립여론이 높 아지게 되자 총독부는 이에 따른 대안을 마련해야 했다. 나기라의 경성치과의사강습 소 설립원서가 경기도청 학무과에 계류 중(1921. 11)일 때, 학무과장 노부하라 세이 ( 信 原 聖 )는 치과의학교로 변경해서 제출할 것을 지시했다. 이에 따라 나기라는 도미 타 기사쿠( 富 田 儀 作 )와 함께 경성치과의학교 설립인가 신청서를 제출(1921. 12)해, 인가(1922.4)를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성치과의학교의 순조로운 출발은 다음 두 가 지 점에서 문화정치기 일제의 교육정책과 잘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가능했다. 첫째, 당시의 사립이 대부분 민족지도자들이나 기독교계 선교사들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경성치과의학교는 일본인에 의해 신청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경성치과의학교는 고 등교육기관이 아니라 일제가 장려하는 실업교육기관이었다는 점이다. 나기라는 경 성치과의학교가 조선인 자제에게 실업교육을 시행하여 생활의 안정과 구강위생 향 상 을 도모하기 위해 창설되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실업교육이 조선통치에 기 여함이 크다 는 가키미 요조( 垣 見 庸 三 )의 원대한 관점 은 총독부의 입장이기도 하였 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총칙의 교육목적 역시 치과의학에 관한 높은 학술과 기 예를 가르쳐 나라에서 필요로 하는 황국신민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사립 경 성치과의학교의 교육 의도는 일제의 선별적 동화정책과도 부합하는 내용이었다. 경 성치과의학교 설립으로 일제하 치과의사의 양적 증가가 시작되었다. 문화정치기 경 성치과의학교는 교과과정과 시설을 확충하는 발전을 이루지만 한국인을 차별하였 다. 모집정원에 있어서도 차등을 두었고, 학술연구와 수련을 제한하였다. 이와 같이 치과의료 교육에 있어서도 주도권을 쥐려는 일제의 식민지 의료정책에 의해 에비슨의 치과의학교 설립안은 묵살되었다. 그러나 에비슨의 치의학교 설립안 (1921)은 이후 경성치과의학교를 설립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일제의 한 국인 고등교육시행을 더 이상 늦출 수 없게 하였다. 이에 일제는 2년제 예과대학신설 계획(1922. 1)과 조선교육령(1922. 2. 6, 칙령 제 18호)을 개정해서 발표하였다. 개정 교육령은 교수 확충과 시설완비를 요구하였다. 이에 학교 측에서는 구미 의대 박사학 위자들을 교수로 영입하고, 졸업생 중 몇 명을 해외로 유학시켜 교수로 양성하였다. 또 1922년 4월 1일 조선 교육령에 의한 전문학교 인가를 받고, 교명을 사립 세브란스 7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2 2015-10-28 오후 5:50:08
연합의학전문학교에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칭하였다. 한편 한국의 민족지도자들은 6개의 단과대학을 가진 종합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민립대학설치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 민립대학설치운동(1922. 2. 3)은 조선민립 대학기성회 (1922. 11)로 전국적으로 퍼져, 거액이 적립되었다. 일제는 이를 저지하 기 위해 경성제국대학령을 공포(1923. 5)하고 법문학부 의학부등 2년제 예과를 설 치(1924)하고, 학부를 개설(1926)하였다. 이러한 경성제국대학교는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 자제들의 교육과 식민지 관리 양성을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나, 여론을 의식해 한국인도 일부 입학시키게 되었다. 이와 같이 에비슨의 치과대학 및 종합대학설립 노 력은 경성치과의학교의 개교와 더불어 한국인 고등교육기관이 설립되는데 크게 기 여하였다. 2) 부츠 과장과 맥안리스 교수 시기 쉐플리에 이어 부츠( J. L. Boots, 1921. 3 1939, 총독부 면허 제15호)와 맥안리스 ( J. A. McAnlis, 1921. 10 1941, 총독부 면허 제18호)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 학 교실 및 치과에 봉직하였다. 직제상 과장 및 교수직은 부츠가 맡았으며, 맥안리스 는 교수 및 조수장(assistant chief)을 담당했다. 부임 당시 선교부에서 이들에게 부여 한 임무는 다음과 같았다. 부츠는 의대생들에 대한 치과치료와 치과조수 훈련을 담 당하면서 점차적으로 의과대학의 한 부분으로서 치과학교를 설립하는 방향으로 일 한다. 동시에 한국인 치과임상을 감독하고 치료하는 일을 맡는다. 맥안리스는 외국 인 치료에 주로 헌신하고, 한국인에 대한 임상과 교수를 보조한다 는 것이다. 부츠 는 치과업무를 진취적으로 이끌었다. 먼저 치과진료의 가치와 효율성을 높이는 작업 에 들어갔다. 치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치과의사는 정직하고 능력이 있어야 한 다. 구강병의 예방과 조기 치료에 힘써야 하고, 의사들과 협력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부츠 자신도 세브란스 회보(Bulletin)의 발행자로서 협동적인 분위기를 이끌었다. 또 진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문화된 역할 분담과 보조인력 확보, 최신 장비를 확충해나갔다. 부츠는 구강외과 부분을, 맥안리스는 보존 및 보철치료를 담당했다. 1923년에는 필라델피아 비버휠스에 있는 장로교의 기부금으로 4대의 전기가동 치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7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3 2015-10-28 오후 5:50:08
과치료의자 압축공기시설을 들여왔다. 압축공기시설은 진료를 지속적이고도 효율 성있게 만들었다. 최신 장비를 적절하게 확충하면 진료 및 교육의 질과 수입이 높아 진다. 이러한 기자재 확충은 장차 독립된 치과건물을 짓는 방향으로 나가게 했다. 특 히 치의학교 설립계획이 좌절되자, 세브란스전문의학전문학교 치과학 교실의 발전 방향은 치과의사 수련 및 치과진료와 연구를 통해 치과의학을 발전시키는 기관으로 재정비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졸업생들에게 대학원과정과 같은 임상수련과 스스로 연구해서 발표할 수 있는 훈련을 시키면서 한국의 치의학 발 전 수준을 높여나갔다. 따라서 여기서는 1921년에서 1945년까지 세브란스의학전문 학교 치과학 교실의 운영 전반을 실증적으로 살펴 한국 치의학사의 발전에 기여한 바 를 밝히고자 한다. (1) 한국인 수련의 조직의 확대 부츠 치과과장 보직 초기의 수련의 자격조건은 치과에 대한 전문적 능력과 기독교 신앙을 지닌 한국인이 우선시되었다. 초기에는 일본에서 치의학교를 우수한 성적으 로 졸업한 기독교 신자인 임택용(1922)과 김선생(Dr. Kim, 1923)이 근무하였다. Dr. Kim은 일본최고의 치과대학을 졸업한 후, 치과의사자격증 딴 한국인이다. 부츠는 임 택용이 진실하고 능력있게 일을 잘 해서 자신이 한국어를 더 많이 배우기 위해 노력 하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세 브란스연합의학교 일람(1925 1926) 에는 3명의 치과의 사와 3명의 조수가 치과환자 를 진료하느라 항상 바쁘다 고 기록되어 있다. 3명의 치과 의사는 부츠, 맥안리스와 안 종서이다. 경성치과의학교 1 회 졸업생인 안종서는 1925년 3월 1일부터 세브란스 치과에 1921년 부츠진료장면 7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4 2015-10-28 오후 5:50:08
근무했다. 조수로는 이한식, 차석진, 문성두가 있었다. 이들은 한국인 기본 진료와 선 교부와 외국인에 대한 추가진료를 해야 했으나, 월급은 적은 편이었다. 치과 역시 수 익 목적이 아니라 지역봉사의 목적을 우선시했다. l 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 직원 명단 세브란스 치과 입국년도 성명 비고 1925 安 鍾 書 경성치과의학교 1회졸, 1931년 까지 근무 1928 李 有 慶 경성치과의학교4년 경성치과전문학교 1회 입학(1930) 1931 李 東 煥 경성치전1930년졸 1회 1932 鄭 保 羅 1932년졸 3회 1933 朴 鎔 德, 金 鍾 煥 1933년졸 4회 1934 朴 遉 信 1934년졸 5회 1935 李 良 淑, 劉 基 亨, 尹 斗 亨 李 良 淑 은 소아치과 담당, 경치전 6회졸업생 유기형은 부산대학 교수 1936 박택용 세브란스의전일람에만 기록 1937 李 鍾 九 鄭 棟 謀, 張 元 仁 1937졸 8회 1939 崔 宗 善 ( 鍾?) 1939졸 10회 1940 盧 貞 鎭, 金 萬 壽 1940졸 11회 1941 李 永 玉, 金 貞 奎 1941졸 12회 1942 鄭 南 熙 1942졸 13회 1943 李 東 燮 1943졸 14회 1944 尹 信 鉉 1944졸 15회 1945 金 貴 善, 盧 性 允, 朴 應 基, 金 喆 庸 1944졸 16회 맥안리스는 기공사와 간호사의 교육 및 업무관리를 담당했다. 기공사로는 고 실 장(Mr. Koh. 1922 )과 이씨(Mr. Lee)가 근무했다. 간호사로는 1923년 세브란스 간 호대 졸업한 김한나와 한( 韓 )양이 근무했다. 부츠가 안식년으로 2년간 (1925~27) 자 리에 없을 때 맥안리스는 영사관 통상부 선교부의 외국인들을 진료하고, 안종서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7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5 2015-10-28 오후 5:50:08
가 한국인 일본인 중국인 치료를 담당하였다. 이어 맥안리스도 안식년으로 떠나자 (1927), 안종서가 치과진료를 총책임졌다. 안종서를 잘 알지 못하는 외국인들도 기꺼 이 치료를 받았지만, 치과수입은 예산부족으로 감소되었다. 정규 강사진 보강을 위 해 미시나가 재채용(1927)되었다. 고 실장은 맥안리스가 졸업한 미국의 노스웨스턴 치과대학(Northwestern dental school)에 단기연수로 최신 의치 공학을 배워왔다 (1927). 안종서에 이어 경성치과의학교를 졸업한 이유경(1928)이 1년간 (1928. 3 1929. 3)임상수련을 받았다. 이렇게 해서 치과의사 5명에 전기엔진 치과진료대 5대(1928) 를 가지고 근무하였다. 하지만 경성치과의학교가 전문학교로 승격되자 이유경은 경 성치과의학전문학교 4학년에 편입 형식으로 재입학(1929. 4)하였다. 1년 후 경성치 과의학전문학교를 제1회로 졸업(1930)하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에 재입국하 였다. 1930년에는 새 X-ray기계도 한 대 더 들여와 치과방사선 2대로 진료하게 되었 다. 안종서는 1931년 말까지 치과조수로 있으면서 산파간호부양성소에도 강사로 활 동하였다.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는 1929년 승격된 후부터 한국인 입학률이 15~20%로 낮 아졌다. 일본인 지원자도 늘어났고, 학교측에서도 한국인 모집 정원을 제한하고 차 별했기 때문이다. 일제 식민지하에 졸업한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대다수는 계속적으 로 치의학 연구와 임상수련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한 채 개원하였다. 반면 이 시기 치과건물을 신축한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은 수련의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리고 보다 체계적인 연구와 교육을 실시하였다. 1930년대 초반 수련의로는 경의전에서 근 무하던 이동환(1931),정보라를 포함한 4인이 입국(1932)하였다. 이는 치과건물 신 축으로 진료규모가 커졌기 때문이다. 이어 박용덕, 김종환(1933), 박유신(1934), 이 양숙, 유기형, 윤두형(1935), 박택용(1936)이 입국하였다. 1935년 세브란스의학전문 학교일람 치과직원 명단에는 부츠, 맥안리스를 비롯하여 이유경, 정보라, 김철용, 김 종환만이 기록되어 있다. 1936년에는 부츠교수와 미시나, 조수로 임택용, 안종서가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세브란스의전 치과학 교실의 한국인 치과의사 수련이 어떻게 진행되었 으며, 이것이 한국 치의학계의 발전에 끼친 영향이 무엇인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7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6 2015-10-28 오후 5:50:08
첫째, 미국식 치과의술을 익히는 학습반을 편성하였다. 한국인 수련의들은 신규 채용 시부터 학습반에 편성되어, 미국식 치과의술을 익혀 통일적인 진료를 수행하도 록 교육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인 치과의사들은 5 6년 이상씩 근무하면서 최신 미국 식 치과의술을 익히고, 학술 및 연구 활동에 정진하게 되었다. 둘째, 치의학 전문분야별로 교육하였다. 세브란스 치과에서는 한국 최초로 소아 치과진료실을 독립(1931)시켰고, 이양숙이 담당(1935)하였다. 보존 보철은 맥안리스 가 지도하였다. 이유경은 교정, 정보라는 보철, 박용덕은 구강외과에 역점을 두었다. 셋째,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치과운영과 치의학교육을 담당할 수 있도록 교육시켰 다. 부츠와 맥안리스는 한국인 수련의들의 업무수행 능력이 뛰어나고, 신의가 깊다 고 평가하였다. 따라서 자신들의 부재 시 안종서,이유경, 정보라가 치과운영을 담당 하도록 하였다. 또 의대생 정규강의를 이유경, 정보라가 담당(1939)하기도 하였다. 넷째, 장차 한국 치의학계의 지도자로 양성하기 위한 교육을 하였다. 선진 치의학 의 연수를 위해 미국 및 일본 유학을 보내는 한편, 국내의 학회에도 적극적으로 참여 하도록 하였다. 1924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학생 임상치과학 강의실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7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7 2015-10-28 오후 5:50:08
부츠 진료장면 부츠의 치과수련의 교육 장면 7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8 2015-10-28 오후 5:50:08
Boots 치과과장과 전직원 (2) 진료내역과 재정 1 1920년대와 1930년대 진료실적 1920년대 세브란스병원은 전문적인 의료기술이 집중됨으로써 종합병원으로서 효과적인 진단과 치료가 가능하였다. 외래환자부에는 외과, 안과, 이비인후과, 소아 과, 신경과, 부인과, 제약과, 치과가 있었으며, 부속과로 방사선과와 임상병리실, 약 국 등이 있었다. 세브란스병원의 재정운영은 자조를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선교부 에서는 소위 네비우스(Nevius)방법 이라는 자급, 자치의 선교 방침에 따르고 있었 다. 네비우스 방법이란 선교본국의 지원보다는 피선교지의 경제와 인력이 능동적으 로 가동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의료 의 자조 정책이 강화되어야 병원 재정 자 립은 물론, 한국인 의사, 간호 원, 조수의 양성이 촉진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었다. 그래서 치료비를 지불할 수 있는 환자에게는 진료비를 받고, 그렇지 못한 환자에게 는 무료진료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무료진료와 의학생교육비로 재정상태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7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79 2015-10-28 오후 5:50:09
가 점차 취약해졌다. 그러자 세브란스병원은 예산긴축과 함께 상류층 환자들을 많이 끌기 위한 환경정비와 기부금 모금을 해야 했다. 이러한 시기에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진료인력과 장비를 체계화하여, 진료실적과 재정수익이 점차 증가하는 성공을 거두 었다. 1924년 4월 1일에서 1926년 3월 31일 당시 맥안리스가 세브란스 치과 외국인진료 소에서 한 진료기록은 다음과 같다. l 표. 맥안리스 개인 진료실적 진료내역/년도 1924.4.1~1925.3.31 1925.4.1~1926.3.31 환자수 내원수 X선 아말감수복 금수복 합성도재수복 시멘트 Teeth having R.C.Tr. 신경치료수 금관 도재관 고정계속가공의치 가철성계속가공의치 총의치 국소의치 설측 bar plates 금관재부착 금관보수 예방적 수복 발치 212 1209 60 291 102 59 19 22 49 5 6 13 13 8 29 8 4 6 150 23 402 1000 230 485 166 102 74 25 105 6 4 22 8 6 10 3 (국소의치보수) 14 266 118 위의 표에 따르면 맥안리스는 보존 보철분야에서 세분화된 진료를 하였음을 알 수 있다. 교정치료 기록도 남아있다. 외국인 진료실에서는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중국, 일본, 프랑스, 러시아, 베네주엘라 등 세계 각국에서 온 환자들을 치료했다. 8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0 2015-10-28 오후 5:50:09
세브란스병원 치과(1924 1930)는 진료사업과 재정운영에서 수입과 진료 실적이 점차 증가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l 표. 세브란스병원 치과진료실적과 재정현황(1924 1930) 회계연도 (4.1~3.31) 유료환자/무료환자 총수익 비고 1924~1925 9,000 직원임금 상승으로 적자 1925~1926 15,000 부채상환 후 일부 비축 1927~1928 (치료건수 2,827건 / 405건) 세브란스 외래환자수의 약20%차지 1929~1930 수익 증가, 보조금상환 세브란스병원은 적자 위의 표에 따르면 1924년부터 치과진료와 총수익은 점차 증가하였다. 1926 27 년 치과부 수익은 맥안리스와 부츠가 없었기 때문에 작년보다 9,483.70 떨어졌다 고만 기록되어 있다. 1927 28년의 회계연도에는 치과부는 외국인 치료를 제외하고, 2,837건에 해당하는 유료치료와, 405건의 무료치료가 기록되어 있다. 부츠는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항상 최상의 수입품 재료를 사용하고, 첨단 미국식 치료기술을 제공하며, 멸균소독을 하는 양질의 진료를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비해 세브란스병원의 진료비는 총독부 병원 수가와 별차 없었다. 다른 병원의 진료 비와 거의 비슷하거나 적정하다고 평가했다. 그래서인지 1920년대 중반의 환자수 및 치료건수는 총독부병원 치과부의 환자수(외래 1,428명, 입원 12명)를 능가하게 되었 다. 세계경제공황(1929)이 시작되자 세브란스병원은 적자를 기록(1929 1930)했다. 하지만, 치과는 수익 증가로 보조금을 상환하고 자체 적립금을 마련하였다. 이와 같 이 세브란스 치과의 재정은 초기엔 적자였으나, 점차 수입이 증가하여 병원 내 타과 보다 많은 수익을 내게 되었다. 그러나 1920년대 한국내 치과의 진료비는 당시 대다수의 한국인이 부담하기에는 너무 비쌌다. 한국에 주재하고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도 진료비는 부담스러웠다. 세브란스 안종서의 회고에 의하면 1920년대 당시 세브란스 치과의 발치료는 일본돈 50전 정도, 총의치는 80원 정도, 사랑니 발치료는 10원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그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8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1 2015-10-28 오후 5:50:09
시절의 물가는 대학출신자 월봉초금이 10원에서 15원이었고, 냉면 한 그릇이 15전, 요리집에서 3~5원이면 하루 저녁을 아주 잘 먹었으니 엄청난 치료비였다고 한다. 이 에 비해 일제 식민지하 한국인 노동자의 임금은 1910년대 낮은 수준에서 1920년을 전후하여 폭등한 뒤 1920년대 말과 193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빠른 속도로 감소하였 다. 1928년에 나온 조선공사용각족노동자실장조 에 따르면 한국인 노동자의 80%가 량을 차지하는 보통 인부는 하루 평균 81전을 벌어 71.5전을 쓰고, 미장이는 2원 21 전을 벌어 1원 38전을 썼다고 한다. 따라서 세브란스 치과치료를 받은 환자의 대부분 은 경제적 수준이 중산층 이상이 사람들이었으며, 노동자나 농민의 경우는 무료혜택 을 받지 못한다면 치과치료를 받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식민지 수탈정책 으로 한국인들의 빈곤이 극에 달했다. 1924년 전북 고창의 총인구 10만여명 중 하루 세끼를 먹는 인구는 23.6%에 불과했고, 두끼 먹는 사람이 45.2%, 한끼만 먹는 사람 은 31.1%였음을 고려할 때 당시 치과수가는 일반 한국민들이 접근하기에는 상당히 높았음이 분명하다. 시료환자수가 줄어들면서 돈이 없어 치과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1928년 부츠는 진료비가 비싸서 치과치료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치과직원 들의 봉급을 10 25%가량 줄여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그리고 한국인 치과의사들을 늘려 평균진료비를 낮추도록 조치하였다. 이 시기 당시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월급은 150원 정도로 도지사의 월급과 같았다 고 한다. 이 시기 한국에서 치과의사가 되는 것이 경제적으로는 최상층으로 편입하는 혜택을 얻을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1925년 당시 환율을 보면 1달러 당 일본돈 2엔이 었다. 당시 세브란스의학교 교수의 월급은 200엔이었다. 이러한 미국인 선교치과의 사들의 봉급수준은 미국보다 적은 것은 물론이고 중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선교의사 들의 1/2 1/3가량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에 근무하는 선교의사들이 타 지역 근무자들에 비해서 그만큼의 개인적인 희생을 담보하고 있었던 것을 의미한다. 세브란스의 치과진료비는 외국인 선교사들에게 부담이 되었다. 이와 같이 1920년대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재정자립과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무료진료의 원칙을 실천하 고자 했지만, 빈곤한 한국인들을 포괄하기에는 그 물적 기반이 취약했다. 8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2 2015-10-28 오후 5:50:09
1930년대 세브란스 치과는 치과환자가 점차 증가하여 재정자립을 이루었다. 진료 수익의 1/3은 치과발전기금으로 비축되어 치의학 연구와 교육기금으로 사용하게 되 었다. 1930년대 세브란스 치과의 진료실적과 수익 21) 은 다음과 같다. l 표. 세브란스치과 진료 실적(1930년대) 회계연도 (4.1~3.31) 유료환자/무료환자 총수익 비고 1932~1933 823명/529명 (치료건수:4,578건/912건) 34,625 치과입원환자 17명 1933~1934 41,000 환율변동으로 적자 1935~1936 수천 건 약간의 흑자 1938~1939 50,000 재정적 성공 일반진료비 2 3, 특진비 10 1930년대 초반(1932 1933) 치과 외래 유료환자(823명)는 세브란스병원 전체 유 료환자(11,846명)의 68%이다. 치과건물 신축으로 치과환자가 급격히 증가했기 때 문이다. 이 시기 치과환자 중 무료환자(529명)의 비율 역시 68%이다. 이것은 세브란 스병원 치과가 빈곤한 환자들에 대한 무료진료에 상당히 호의적인 자세를 견지했음 을 보여준다. 그러나 치료건수로 비교하면 치과부는 유료가 4,578건이고 무료가 912 건으로 무료환자의 시술은 비교적 간단한 처치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33 1934년 치과부의 수입은 36,754이다. 이러한 수익의 증가는 한국인 치 과의사의 임상적 시술의 발전에서 얻어진 것이었다. 한국인 술자에게 치료받은 환자 가 4,612명(1932 1933)에서 6,501명(1933 1934)으로 늘었던 것이다. 한국인 치과 의사의 개인진료 실적을 살펴보면 이유경은 1년 동안 매달 평균 500달러 이상을 벌 었으며, 어떤 달에는 1,000달러 이상의 수입을 올렸다. 정보라와 다른 3명은 매달 평 균 400달러 가량을 벌었다. 21) 1932 1933: 세브란스 Calendar 1932 1933, 1933 1934: 부츠, 북장로교선교개인보고 서,1934 1935: 맥안리스, 북장로교선교보고서, 1938 1939: 부츠, 북장로교선교보고서,.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8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3 2015-10-28 오후 5:50:09
1933 1934년에 이르러 치과는 최고 수익인 41,000 이상의 많은 예산을 확보 하게 된다. 그러나 장비교체에 막대한 예산이 투자되고, 금과 수입품이 환율변동으 로 2배나 올랐고 실제 생산비용을 진료비에 반영하지 못하여 실제적으로는 적자가 되었다. 이 시기 치과는 많은 환자를 보았으나 직원들의 임금은 삭감되었다. 이와 같이 1930년대 초반 세브란스 치과는 건물 신축과 함께 환자 진료가 증가했 지만, 다음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첫째는 일본화폐가치의 하락과 세계경제공황의 여파였다. 일본화폐가치가 2배 이상 하락하자, 치과기자재의 구입이 어려워졌다. 생산비용이 높아짐에 따라 진료수 가도 높아져야 하지만 오히려 한국인 환자들의 경제적 상황은 악화되어 치료비를 내 지 못했다. 세브란스 치과는 예산을 맞추기 위해 진료시간을 늘려 더 많은 환자를 보 았다. 평일 진료시간이 오후 10시까지 계속되는 적도 많았고, 휴일과 토요일 오후까 지도 진료가 계속되었다. 이러한 치과의료진들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치과는 일시적 인 적자재정을 극복할 수 있었다. 둘째는 일제의 수입품 조절법안의 잦은 변동으로, 치과치료에 필수적인 항목들도 수입이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일본의 법안에 따르면 입품할 수 있는 물량은 한 달에 100달러까지여서, 일상적인 치과용 물자도 부족해졌다. 대체 방안으로 일본산 치과 재료가 구입되었다. 이로 인해 세브란스 치과는 진료 방식을 일본식으로 바꿔야 하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상과 같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병원 치과는 재정자립의 원칙과 빈곤한 사람들에 대한 무료진료 원칙을 실천하면서 진료와 재정운영면에서 성공을 거두었 다. 하지만 일제 식민지 경제정책에 의해 재료조달과 진료수행에 어려움을 겪었으 며, 빈곤한 한국인들을 포괄하기에는 그 물적 기반이 취약했음을 알 수 있다. 2 치과판매부 운영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재정사업으로 1933년경부터 치과판매부를 운영하였다. 치 과판매부의 운영 목적은 다음 세 가지였다. 첫째, 치과재료등의 판매와 수급을 위해, 둘째, 한국 내 한국인 및 일본인 치과의사들이 사용하는 재료와 진료방식을 파악해 더 질 높은 치과재료를 권장하고 재료사용법을 훈련시키기 위해, 셋째, 치의학 연구 8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4 2015-10-28 오후 5:50:09
와 유학기금과 같은 치과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해서이다. 이 치과판매부에서는 칫 솔을 판매했는데,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193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인들의 대부분은 손가락에 소금을 묻혀 이를 닦거나, 재래식 나무를 깎은 기구로 이를 닦고 있었고, 도 시인들을 중심으로 칫솔이 전래되고 있는 상황이었다. 부츠는 칫솔에 대한 대중홍보 와 판매에 적극적이었다. 세브란스 칫솔에 대한 술자의 의견 미국제 치과의학박사의 고안인 세브란스 칫솔은 털에 강도가 제4번으로 제10번의 것으로 제작되었으며 그 형상과 대소는 표면 청소에 적당하며 그 장점은 軟, 中, 硬 3 종과 大 中 二 型 으로 그 형상을 달리하여 타종의 칫솔이 달치 못하고 부패키 용이한 심부까지 청소하게 되어 있음니다. 세브란스 칫솔은 완전히 소독하여 셀로판 에 봉하 여 모양있는 갑에 봉함하였습니다. 특히 소형은 그 형상과 채색이 미묘하므로 소아들 에게는 이상적입니다. 칫솔 선택은 구강위생과 치아 보건에 제일 필요함으로 이상적 으로 제작된 세브란스 칫솔을 주장합니다. 세브란스의전 치과과장 뿌스박사 술회, 신동아 1934년 2월호 이러한 치과판매부는 일본화폐가치 하 락에 따른 수입가 상승으로 운영상의 어려 움을 겪기도 하였다. 하지만 수익은 17,316 달러(1932)로부터 18,902달러(1933)로 증 가하여 2,725달러의 순이익을 얻었다. 치 과판매부는 자체 구매자본을 5,000달러가 량 가지고 있으며, 이것은 치과 자체의 발 전기금으로 비축되었다. 치과판매부에는 두 사람의 직원이 있었다. 그 중 안씨는 미 국에서 교육받은 기독교인으로 효율적으 로 일을 하고 낙관적인 사람이라고 평가되 어 있다. 한편 사진부도 수익은 적었으나 병원과 외국인 환자들에 대한 봉사차원에 서 운영되었다. 1933.12.20. 세브란스치과재료상회 성탄축하 선물 광고 기독신보.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8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5 2015-10-28 오후 5:50:09
3 임상지부활동 1920년대 초반에는 평양, 운산에 지부를 마련하고 진료를 하였다. 1922년 3월 부 츠는 운산광산에 2주간 머물면서 운산광산에 있는 한국인 광부들에게 치과진료를 하 였다. 한국인 광부들은 공감과 자부심과 자신감을 갖고 있었으나, 미국인 사업자 몇 몇의 태도가 좋지 않아 마음에 걸렸다. 1923년 맥안리스는 북부지회원들을 위해 평 양에서 한달 간 여행 중에 619명 환자를 평균 2회씩 치료했다. 부츠는 미국인 광산인 운산에서 3주간 머물렀다. 이어 부츠는 운산연합회 부회장직(1925 1928)을 맡았 다. 이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는 치과건물을 신축할 때 많은 물자를 지원해주었다. 1920년대 말에는 원산, 광주 등에 추가로 임상지부가 설립되었다. 이들 임상지부에 서 순회진료를 요청하면 세브란스 치과 소속 의사들이 파견 나가 순회진료를 시행하 였다. 1938년 부츠가 미국인이 운영하는 광산지역에서 치과진료를 하였다. 1939년 에는 맥안리스가 평양에 1~2개월 머물며 진료를 하였다. 이들의 진료는 미국인과 한 국인을 주 대상으로 하고 있었으며, 수익사업이 아니라 봉사활동이었다. (3) 치과건물신축 1 치과센터 건축기금 모금과정 1925년 부츠는 점차 늘어가는 치과환자 수요를 충족하고, 선교사업을 강화하기 위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부속병원과는 별도의 치과건물을 신축할 계획을 세웠 다. 부츠는 먼저 선교본부로부터 모금을 허락받고, 기금 모금을 위해 미국으로 건너 갔다. 부츠와 부인 플로렌스(Florence)는 각종 언론매체와 강연을 통해 한국과 치과 센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홍보하였다. 한국은 1800만 명 인구의 가난하고, 단순한 식생활을 지닌 나라다. 한국은 동양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진이나 혁명의 위험이 없어 동양에 대해 연구할 수 있는 좋 은 지역이다. 따라서 한국에 미국의 치과센터를 건립한다면 미국의 과학적인 치과진 료를 제공하고, 한국인 치과의사를 향성하고, 치의학 연구활동을 할 좋은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미국인들이 흔히 섭취하는 설탕, 우유, 버터 등을 거의 섭취하 8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6 2015-10-28 오후 5:50:09
지 않고, 전통적인 식생활을 하는데도 비타민 결핍 질병에 잘 걸리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의 식생활과 구강보건상태의 변화를 연구하는 것은 미국의 문명화된 식생활이 구 강건강에 끼치는 영향을 연구하는데 필요하다. 만약 한국에 치과센터가 건립된다면, 발달한 미국의 치과진료를 보급하고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하며 치의학 연구를 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부츠는 치과센터를 건립해 미국의 발전된 치과의료과 선교활동을 하는 것이 한국의 개화에 좋은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호소했다. 그 과정에서 부츠는 동창 으로부터 미국치과의사협회의 협조를 구할 것을 권유받았다. 1920년대 중반 미국치 과의사협회는 지역 치과의사들이 선출한 대표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협회는 회지를 발간하고, 치과의사 노후연금을 마련하고, 치의학 연구과 선교활동을 장려하고 있었 다. 부츠가 모금을 하던 1926년 당시 협회는 28,000달러 정도의 연구비와 선교자금 을 비축하고 있었다. 연구자금은 치과대학협회가 높은 관심을 갖는 부분에 투자되었 다. 부츠가 한국치과의료센터 건립의 명분으로 치과 선교와 연구를 언급한 것은 이러 한 협회의 연구비와 선교자금을 염두에 두었던 것 같다. 미국치과의사협회의 지도부 는 부츠에게 미국치과센터 설치의 목적을 공중보건사업과 치의학 연구 로 고쳐 올리 도록 하였다. 자문위원회에서 모금승인을 심의하였는데, 자문위원 5명에 쉐플리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브란스의전 치과학 교실은 쉐플리 시기에는 동양 유일의 선교치 과의료사업이었다. 하지만 1926년 동양에는 7 8개의 선교치과부가 있었다. 이에 부 츠는 서울이 일본과 중국을 잇는 중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아시아 선교치과의료의 중심적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치과의사협회에서는 이를 승인하고 치과 센터로 알려진 4층 벽돌건물을 신축하여 치과진료와 교육, 공중보건과 연관된 연구 를 시행하도록 지시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미국치과의사협회는 가칭 치과센터 를 현재에는 부츠와 맥안리스가 운영하고 있지만, 다른 선교사업이 그러하듯 한국인 들이 그 일을 담당할 수 있을 때가 되면 한국인들에게 신축건물의 운영을 인계하도록 지시했다는 점이다. 미국치과의사협회의 승인을 받은 부츠는 치과의사들에게 10달러짜리 벽돌 만개 팔기 라는 구호를 내걸고 모금운동을 했다. 부츠는 가족과 함께 한복을 입고 기자회 견을 하기도 했고, 여러 지역 치과의사회를 방문하기도 했다. 또 건축기금을 모금하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8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7 2015-10-28 오후 5:50:10
치과센터 개설 모금에 관한 기사 기 위한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후로렌스는 바이올린 연주를 하고, 부츠는 슬라이드 로 한국의 풍물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에 대해 소개했다. 맥안리스도 미국으로 와 치과건물신축기금 마련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들의 캠페인은 미국치과 의사협회, 미국치대연합, 한국의 신 구 교도와 선교사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 결과 미국 치과의학회 회장 프리츠셀의 도움을 받아 치과건물신축기금모금에 성공하여 1 만 달러의 기금(현금 8000달러 포함)을 약속받았다. 부츠는 기부금을 가지고 1929년 귀국하였다. 8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8 2015-10-28 오후 5:50:10
부츠 가족 부츠 가족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8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89 2015-10-28 오후 5:50:10
신축치과진료소 치과센터와 세브란스 병원 연결통로 9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0 2015-10-28 오후 5:50:10
1931.10.29 치과센터 설립에 관한 동아일보 기사 치과센터 현판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9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1 2015-10-28 오후 5:50:10
2 치과건물신축 1930년 9월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은 미국에서 모금한 10,000달러로 치과센터 건물을 착공했다. 원래 계획은 남대문로 쪽에 진료소를 신축하려는 것이었다. 기금 이 모자라 세브란스 병원 북쪽에 연장해 건립하기로 하였다. 건축장비는 운산금광의 동양광업개발주식회사에서 대주었다. 총공사비는 350,000원(1,7500달러)으로, 예 상보다 적은 액수가 사용되었다. 그 이유로는 첫째, 경기침체로 건물 자재의 값이 쌌 다. 둘째, 부츠가 전체적으로 감독하면서 경비를 절감했다. 셋째, 미국 치과공장에 서 50%의 가격으로 기자재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건평 120평의 3층짜리 미국 식 치과종합병원 건물이 완공(1931. 10. 27)되었다. 1층에는 종합접수대와 서무실, X-ray실과 현상실, 대학원생실, 무료환자 치료실, 치과의료기 매점, 특별대기실, 남 자화장실을 두고, 2층에는 일반환자 진료실과 대기실, 도서실, 수술실, 강의실, 박물 관, 여자화장실을 두었다. 3층에는 특진환자 진료실과 소아치과, 종합기공실과 포세 라인 기공실, 큰 기구, 기재창고, 응접실을 설치하였다. 치과 장비로는 최신식인 독일 릿터 회사의 치과치료대 10대가 들어 왔다, 기구는 미국 화이트(S. S. White)사의 각 종기구가 들어왔다. 드디어 1931년 10월 28일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에서는 신축건 물 낙성식을 거행하였다. 낙성식에는 오긍선 교장대리와 총독부 위생부장 니시가메 산케이( 西 龜 三 圭 ), 한국 기독교 지도자 윤치호,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장인 나기라 가 참석하였다. 이러한 세브란스 치과 건물 신축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의미를 지닌다. 첫째, 건물 신축을 계기로 세브란스 치과는 최신 설비와 27명의 직원을 갖춘 치과종합병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세브란스 치과는 과거의 재래식 기계설비와 몇 명의 직 원을 지닌 소규모 운영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그래서 세브란스 병원이라하면 그 치과 를 연상하리만큼 전 동양적으로 그 설비와 기술이 우수한 병원으로 우뚝 서는 전기를 마련하게 된 것이다. 둘째, 미국치과의사협회의 기부와 지원은 장차 미국산 치과기 자재와 치의학술을 한국에 유포시킨다는 의미로 바라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세브란 스 치과를 통해 한국인 치과의사를 양성하고, 한국인들의 구강건강을 증진시키기 위 한 미국치과의사단체의 전문가의식과 기독교적 박애정신의 발로로도 받아들일 수도 있겠다. 셋째, 치과건물 신축은 모금단계부터 세브란스병원이나 선교본부의 재정에 9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2 2015-10-28 오후 5:50:11
의존하지 않는 독자성을 띠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후 치과 수입을 독립적으로 운영 하게 된 발판이 되었다. 치과의 내규로 순수익의 1/3은 치과시설자금으로 쓰고, 1/3 은 치과준비금으로 적립하고, 1/3은 치과의사 양성에 사용하도록 이사회에서 결의 되었다. 이와 같이,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은 종합병원 규모의 치과건물 신축을 통해 재정적으로 독립하고 치의학 연구와 진료, 수련의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하게 되었 다. 한편 세브란스의 아들 존 세브란스( John Louis Severance)내외와 딸 푸렌티스 (F.F,Prentiss)여사는 그들의 선친이 이룩한 사업을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인 1939년까 지 지원하였다. 이에 대해 부츠는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세브란스씨는 세브란스 전문에 10만$ 또 기부 세브란스 전문학교 설립자로서 교명까지 세브란스라고 일컫으는 L.H.세브란스 박 사의 영식 존 앨 세브란스 박사는 작고한 선친의 유언으로 매년 세브란스 전문에 일만 오천불씩 기부하던 것을 최근 3년 동안 도우지 못하다가 지난 1월 16일에 노령으로 별 세하였는데 당시 유언에 자기의 재산을 정리하여 그 중에서 십만불을 동교에 기부금 으로 전해 달라고 하였다. 세브란스 의전 치과과장, 뿌스박사 술회(신동아 1934년 2월 호) (4) 최신 미국 치의학의 도입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은 한국인의 구강보건에 관한 연구와 함께 임상치의학 발전 을 위한 연구 활동을 균형 있게 전개하였다. 이러한 세브란스병원 치과에서 한 전반 적인 진료 내용과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부츠, 맥안리스를 통해 전래된 당시 미 국의 치과의술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미국 치과대학 교육과정과 해외연수 미국에서 치과대학을 졸업한 부츠와 맥안리스는 미국의 첨단 치의학문과 진료기 술을 세브란스병원 치과 운영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부츠와 맥안리스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9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3 2015-10-28 오후 5:50:11
는 안식년마다 미국에 돌아가 졸업 후 연수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먼저 이들 이 이수한 미국 치과대학의 교육과정과 졸업 후 연수과정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부츠는 시카고에 있는 피츠버그 치과대학(Dental School, University of Pittsburgh) 을 1918년에 졸업했다. 피츠버그 치과대학은 원래 의과대학의 한 분과되었으나, 독 립적으로 운영되었다. 또 카네기 재단의 후원 하에 큰 규모의 임상진료실을 가지고 있었다. 부츠 수학 당시 피츠버그 치과대학은 3년제였다. 학생이 1038명으로, 교수 진이 미국에서 가장 많고 치과의사자격시험 합격률도 최고여서 미국치과교육회의 에서 A급 학교로 지목된 바 있다 당시 미국의 치의학파는 치과학(odontology), 구강 학(stomatology), 임상치과학(clinical dentistry) 등으로 나뉘고 있었다. 하지만 피 츠버그 치과대학은 어느 한 치의학파에 치중되지 않았다. 치과 관련과목들을 종합적 으로 균형 있게 다루면서 어느 곳보다 치과의사 윤리교육을 강화했을 뿐이다. 부츠는 졸업 후 바로 모교에 임상강사로 취임하여 근무(1919 1921)하였다. 부츠가 강사로 근무할 당시 피츠버그 치과대학은 교정 보철 외과 예방 분야를 균형 있게 다루면 서, 대국민 구강보건교육을 강조하였다. 1922년에 치과대학은 4년제로 바뀌고, 교정 과 보철을 위한 기공실을 완비하였다. 이러한 교풍은 부츠가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 과학 과장으로 임상치과학과 구강외과 공중보건 분야를 포괄적으로 섭렵하고 한국 적 상황에 맞게 탄력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자질을 길러주었다. 이러한 연고로 부츠 는 치과진료에서 구강외과를 담당하였고, 예방치의학의 실천과 의료윤리를 강조하 였다. 차후 이유경의 미국유학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맥안리스는 노스웨스턴 치과대학(Dental School, Northwestern University)을 졸업하였다. 이 대학장을 맡았던 블랙(G. V. Black, 1836 1915)은 보존 분야의 거 두였다. 미국에서 소아치과학을 최초로 분리시켜(1914) 최초의 소아치과학의 교수 를 배출(1934)한 곳도 이 곳이었다. 이러한 연고로 맥안리스는 치과진료에서 보존 보철분야를 담당하였다. 이것은 세브란스병원 치과의료인력 양성과 진료기술 발전 에도 도움을 주었다. 기공사 고씨는 노스웨스턴 치과대학 의치제작 연수에 참가했고 (1928), 이양숙은 한국 최초로 소아치과를 담당(1936)했으며, 정보라도 보철과 대학 원에서 총의치연수과정(1938)을 밟았다. 9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4 2015-10-28 오후 5:50:11
2 이유경, 정보라, 박용덕의 유학 세브란스병원 치과와 치과판매부로부터 얻은 수익의 1/3은 연구와 한국인 치과의 사들의 유학경비로 지출되었는데, 이에 따라 이유경, 정보라, 박용덕이 유학생으로 선발되었다. 이유경은 부츠와 함께 미국에 가서 피츠버그(Pittsburgh)대학교 치과대학 3학년 에 편입하였다(1935. 9). 2년간의 수업을 마치고 New Conception of Articulator와 보철학에 대한 역사적 연구 로 한국 최초로 미국치과의사(D.D.S)학위를 받았다. 졸 업 당시 이유경은 만장일치로 치과학회에서 특별회원에 준하는 특전을 받았으며, S. S. 화이트사에서 수여한 2,000달러에 해당하는 치과 기구를 받았다. 귀국(1937. 6)후 이유경은 강사로 진급(1938. 10)하였다. 정보라의 유학은 일본외무성에 신청(1936) 후 오랫동안 보류되었다. 일본과 미국 과의 정치적 상황이 매우 팽팽한 시기여서 총독부가 한국인의 미국 유학을 원치 않 았기 때문이다. 1937년 미국 시카고의 노스웨스턴 치과대학에 입학한 정보라는 미 국 치과의사자격시험에 합격하여 미국치과의사(D.D.S)학위를 받았다. 그 후 보철과 대학원 입학하여 6개월 간 스크로서(R.O.Schlosser)선생 밑에서 총의치에 대한 졸 업 후 과정(Postgraduate)을 이수하였다. 미국유학기간 중 정보라는 시카고의 한국 인 학생회에 가입하였고 총무부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당시 미국에서는 항일운동 이 매우 활발했다. 한국인 학생회는 시카고대학 내의 인터내셔날 하우스에서 한국 의 밤 이라는 행사를 개최하고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도 제창하였다. 이러한 미국유 학생활로 인해 정보라는 요코하마 항구에서 친미파로 간주되어 종로경찰서로 이감 (1939)되어 3개월간 투옥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경과 정보라의 미국 유학은 일본인들이 주도하는 한국 치과계에서 세 브란스 치과학 교실의 위상을 높이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또 이들은 미국 유학을 계기로 해방 후 미군정시기에 보건자문위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박용덕은 일본동경고등치과(현재 동경치과대학)의 구강외과 교실로 유학 을 보내 전공하도록 하였다. 기공사 이씨도 일본에서 기공작업을 견학(1935)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하 경성치과의전을 졸업한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치의학 연구와 임 상수련에서 소외되고 있을 때, 세브란스의전 치과학 교실에서는 가장 많은 수와 양질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9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5 2015-10-28 오후 5:50:11
정보라 1934 정보라 진료장면 의 수련의 교육을 시행하였다. 일제 식민지 시기에 경성치과의학교와 경성치과의학 전문학교를 졸업한 치과의사들이 수련을 받은 것은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에 17명,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에 23명, 경성의학전문학교 치과 과장 노자와( 野 澤 鈞 ), 히로세( 廣 瀨 淸 ) 등 밑에서 14명,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병원 치과의 이쿠다 과장 밑의 10명이 전부였다. 3 의료윤리의 강조 1920년대 한국인들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치과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 고, 잘못된 보철치료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1920년대 일 본인 치과의사들은 한국이 식민지라 해서 양심이나 의료인의 도의를 망각하고 한국 사람들에게는 충치가 있으면 물론이거니와 무엇이던 간에 마구 금관을 해 씌웠 기 때문이다. 1928년 제8회 조선치과의사회에서 발표한 미국치과계의 새로운 과제 (New procedure in American Dentistry)에서는 치과의사회 차원의 공동 활동이 필 요하다고 주장했다. 부츠는 일부 치과의사들과 입치사들의 상업적 태도가 오히려 구 강건강을 해치거나 치과를 금은방과 같이 알게 한 것에 대해 치과의사가 전면에 나서 서 시정해야 한다. 신문, 잡지, 방송, 학교 교육 등을 이용해서 치과의사의 역할을 알 9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6 2015-10-28 오후 5:50:11
리고 구강위생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부츠는 치과의사들도 질병이 상당히 진행된 후의 보존이나 보철치료에 주력하기보다는 예방에 힘쓸 것을 주장했다. 1934년 부츠는 한국에서의 치과학의 발전(The Progress of Dentistry in Korea) 을 경성치과의학회 특별 강연으로 발표하였다. 그 내용은 치과치료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개선과 치과의사윤리를 강조한 것이었다. 부츠는 한국 사람들은 결혼비, 장례비 등의 연회에는 막대한 비용을 쓰고 있다. 그에 비해 자신의 소중한 치아의 치료비에 는 인색하다. 미국 사람들이 치아를 소중히 한다. 그 이유는 치과의사회에서 일반 대 중에게 치아가 건강 뿐 아니라 사회적인 성공에 중요한 요건임을 잘 인식시키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햇다. 이와 함께 부츠는 치과의사들이 영리적인 목적만으로 치과 치 료를 할 때 얻어질 결과를 다음 세 가지 이유로 경계하였다. 첫째, 치과학이 영리적인 목적만을 추구한다면 치과의 의학적 기초는 더 이상의 진보를 멈출 것이다. 둘째, 구 강질환의 진단과 치료에 있어 의사들과 협조할 능력을 잃게 될 것이다. 셋째, 속인들 의 값을 싸게 하려는 경쟁이 계속될 것이므로 치과의사의 위상을 스스로 낮추는 결과 를 낳게 되리라는 것이다. 또 국민의 신뢰를 바탕으로 해야만 한국의 치과의사들도 정부의 치과의료에 대한 감독과 지배, 치료비 관리 등의 문제에 대해 적절히 대처해 나갈 수 있으리라는 견해도 피력했다. 4 최신 근관치료법 도입 부츠는 그동안 한국에서 이루어진 근관치료의 75 95%가량이 근첨까지 밀봉되 지 않은 불완전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 대안으로 멸균과 근첨 밀봉, X-ray 촬영 을 근관치료의 원칙으로 하여 진료했다. 이러한 세브란스 치과의 근관치료방식은 한국 은 물론 미국보다도 앞선 것이었다. 미국 근관치료학회가 무수치의 보존 치료를 정설 로 인정한 것이 1930년대 초반이기 때문이다. 1920년대 후반까지 미국은 감염된 치 아의 발치를 더 선호하였다. 그 이유는 국소감염설 에 근거한 것이었다. 영국의 내과 의사 헌터(Hunter)는 잘못된 치아보철물이 전신의 감염을 지속시키는 원인이라고 주장하며 미국의 보철학을 맹렬히 비판(1910)하였다. 국소감염설은 기존의 구강질 환의 발생과 치료에 대한 전면적인 인식전환을 요구했고, 미국의 치과의학은 유럽의 학계의 가혹한 비판을 통해 발전해 나갔다. 미국에 이어 당시 한국의 학계에서도 근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9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7 2015-10-28 오후 5:50:11
관치료의 원칙이 발표되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개원가에서는 뿌리 내부가 전 혀 충전되어 있지 않았거나 부분적으로 충전되어 있는 부적절한 근관치료가 행해지 고 있었다. 근관치료의 원칙을 지키던 세브란스 치과 역시 당시 미국 치의학계를 주 도하던 국소감염설 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었다. 부츠 역시 구강 내 감염원이나 매복치 제거 시 전신질환이 회복된 몇 증례 보고에 관절염, 수면장애, 정 신질환자 도 포함(1922)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브란스 치과는 미국 치과 의학에 도입된 국소감염설 에서 무균처치 와 이차감염 예방 이라는 선진적인 개념 을 응용해 근관치료에 활용하였다. 이와 더불어 세브란스병원 치과는 종합병원체계 속에서 의학 분야와 공조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했다. 내과와는 전신질환을 지닌 환자의 치료를, 외과와는 구강외과치료 분야에서 공동 작업을 했다. 5 발전된 미국식 보존 보철치료의 도입 세브란스 치과는 일찍이 발달된 주조기술과 미국산 기공장비를 도입해 질 높은 보 존 보철치료를 하였다. 맥안리스가 기록한 도재소부금관, 포스트 크라운, 계속가공 의치, 국소의치, 총의치, 금인레이 등이 그것이다. 충치 충전재로서 사용하던 금의 경 우를 예로 들자면, 당시까지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구강 내에서 직접 압박을 가해 금 박충전하거나, 금주조술은 시험하는 단계였다. 그러나 세브란스 치과는 1920년대 초 반부터 주조된 금인레이를 실용화했다. 1928년 맥안리스는 조선치과의학회 총회에 서 반간접적인 인레이 술식(Semi-indirect inlay technic) 을 발표하였다. 이러한 주조술의 발달은 보철치료에서도 기술적 차이를 드러냈다. 당시 일본의 치의학 교육 및 기술 역시 미국 치의학의 도입으로 이루어지긴 했다. 하지만, 여러 가지 기초학문 이나 의료 기술면에서 의료선교기관이 직접 서양의술을 전달하는 것보다 뒤떨어지 는 것이었다. 당시 세브란스 치과의 도재소부금관(PFM)은 당시 일본인들에 의해 행 해지던 전치부의 금장식이나 개면금관(open-faced crown), 반주조금관(half castcrown)과는 심미적으로나 기능적으로 월등히 차이가 나는 것이었다. 계속가공의치 의 경우에 있어서도 당시 일본 치과의사들은 주조가 아닌 납착(soldering)에 의해 지 대치와 가공치를 연결시키는 정도였다. 따라서 1920년대 세브란스병원 치과의 보철 시술은 현대의 치과치료 방법과도 거의 유사한 심미적이고 기능적이며 과학적인 시 9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8 2015-10-28 오후 5:50:11
술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30년대 세브란스 치과의 보철시술은 구강조직의 기능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이 었다. 정보라는 치의학은 기초의학을 일차적으로 염두에 둔 상태에서 이공학적이고 미학적인 보철수복 분야를 이차적으로 치료하는 학문 이라고 밝혔다. 이어 치과의 사의 입치기술적 작업은 안과의사의 의안이나 외과의사의 의족을 장착하는 조작처 럼 간단하지 않고 보철물을 제작할 때 구강내 해부학, 조직학, 생리학과 병리학등의 기초학을 필요로 한다 고 주장했다. 하누교합기를 이용한 총의치 제작이 일찍부터 행하여졌고, 계속가공의치는 한꺼 번에 주조하였다. 카마이클 크라운이 정보라에 의해 강의된 바 있고, 3/4금관, cap cast crowm 등도 행해졌다. 특히 전치부 보철은 근관치료 후 포스트 크라운(postcrown)을 한 뒤에 도재소부치관으로 처리되었다. 세브란스 치과에서는 이러한 보철 치료에서의 성과를 각종 학회에서 발표하였다. 정보라는 One piece casting 국부의 치의 제작순서 및 설계기준에 대하여 를, 이유경은 선천적 법랑아부전의 일환자에 있어 18개의 Porcerain jacket crown과 8개의 cast crown을 장착한 1 病 例 를 발표 하였다. (5) 연구 및 학술활동 1 한국인 구강건강 상태에 대한 연구 부츠는 우리는 공동체 속에서 치료 치의학이 아니라 예방 치의학을 실천해야만 한다 고 강조했다. 이에 따라 치과학 교실에서는 한국인 아동 및 성인들을 대상으로 공중보건사업을 하였다. 먼저 한국인 아동들을 대상으로 매달 구강검진과 구강위생 교육, 간단한 치료를 실시(1927 )했다. 한민족의 일상생활과 구강상태에 대한 연구도 하였다. 한국인의 식이와 구강상 태 (Diet and Dental Conditions in the Korea)라는 논문은 서구화되기 시작하는 한 국인의 구강질병 발생양식의 변화를 통찰해 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 논문은 한국민의 식생활이 저작기능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가 필요하다는 쉐플리의 계 획이 부츠 시기에 이르러 학문적 성과를 보게 된 것이기도 하다. 이 논문은 미국치과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9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99 2015-10-28 오후 5:50:12
의사협회에서 발표(1927)되고 Northwestern대학 회보에 실렸으며 대일본치과의학 회지(1927,40;15~21)에 번역계제되기도 했다. 또 종단연구로 계속되어 세브란스연 합의학전문학교 연구소에 속한 각 과 연구발표회와 일본 오사카의 일본의과-치과학 회에서 발표(1930)되기도 하였다. 특히 부츠는 한국인의 식생활과 구강건강과의 관계 연구 에서 서로 다른 사회적 조건과 연령을 지닌 한국인 12개 집단을 선정해 이를 세밀하게 분석해 놓았다. l 표. 조선인의 치아우식 이환율 조사 결과 Group 개인수 우식이환율% 齲 齒 數 기타 세브란스병원 내원 환자 345 75 도시거주 86% 도시 고등학교 소녀 461 51 설탕섭취 91% 서양칫솔사용 13% 도시 고등학교 소년 173 32 서양칫솔사용 61% 서해 섬주민 (해산물 다량 섭취) 165 53 2.2 설탕섭취 40% 절 주변 불교도가 거주하는 산마을 137 42 채식, 설탕, 꿀 섭취 버드나무, 복숭아 나무로 만든 칫솔 산간벽촌 (쌀 대신 수수, 감자 먹음) 89 45 설탕 없이 충치 많음 자동차 도로 변 산촌 42 57 3.0 많은 황색 곡물을 먹는 산촌 a 82 30 2.4 많은 황색 곡물을 먹는 산촌 b 64 45 3.3 많은 황색 곡물을 먹는 산촌 c 23 50 3.0 많은 황색 곡물을 먹는 산촌 d 56 40 2.0 구세군의 걸식 소년 가정 14 32 1.6 도시의 초등학교 52 52 3.0 ( 陳 列 金 ) 박물관의 두개골 30 16 2.0 극빈자 사체 외국인 가정에 고용된 조선인 83 84 7.0 가장 높은 충치이환율 1,816 46.9 (Boots JL. 大 日 本 齒 科 醫 學 會 雜 誌. 1927. 40:19) 10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0 2015-10-28 오후 5:50:12
1920년대 중반 조선의 도시와 무역지에 사는 사람들은 설탕을 접해 보았다. 아직 은 소량이고 충치이환율이 높지 않았으나, 매복치의 비율과 치주질환 비율은 상대적 으로 높았다. 칫솔 사용에 있어서도 도시의 남자고등학생은 거리낌이 없었으나, 여 학생들은 자신의 소신껏 칫솔을 선택하지 못했다. 절 주변에는 나뭇가지를 다듬어 치 아를 닦는 풍습이 계속 남아 있었다. 부츠는 위 연구결과를 다음과 같이 총괄하였다. 첫째, 조선인 치아는 칼슘 대사가 양호하고 비타민 공급이 충분하여 강도가 높다. 둘째, 조선인의 치아우식 이환율은 40~50%, 개인당 우식치는 2개 남짓이다. 셋째, 단순한 황색 곡물을 주식으로 하는 조선인은 보통 쌀밥을 먹는 조선인에 비해 다소 면역성이 있다. 넷째, 조선 고유의 음식에 외국에서 배로 실려 온 음식이 부가되면 우식이환율이 증가한다. 다섯째, 가 장 거친 음식을 섭취하는 조선인은 면역성이 가장 큰 경향이 있다. 여섯째, 대다수 우식은 대구치의 소와 및 유구치의 인접면에서 시작되며 전치 이환은 드물다. 부츠는 쌀이나 옥수수 같은 곡식과 채식 위주의 한국인의 식생활은 20세기 초 다 량의 설탕이 첨가되고 정제된 미국의 식생활보다 구강건강에 좋다는 결론을 내렸다. 2 치과학 교실원들의 연구 부츠는 2세기의 중국인 낙랑인의 두개골(A Chinese Nak Nang Skull of the second century) 을 미국에서 발표하였다. 이 논문은 평양 근처에서 발굴한 고대 유골 의 치아에서 심한 마모, 치주질환, 인접면 치아우식증 등을 관찰하여 기록한 것으로 고대 한국인들의 구강질병 상태를 추정해 볼 수 있는 논문이다. 또 발치에 따르는 Bell s Palsy 34개 치아를 포함한 치성낭종 상악동에 들어간 견치 유전적 무치 악 경우 는 미국 치과잡지에서 출간되었다. 안종서는 1930년 교실원 최초로 치조농루 를 발표하였다. 1930년대 초반은 구강외과학 연구논문이 많이 나온 시기이다. 안종서는 치은에 발생한 혈관종 일례, 하악계대이행부급 설하부부위에 발생한 법랑상피종 을 발표 하였다. 이유경은 중병의 삼차신경통 1례, 부츠와 정보라 공통으로 치성외피부의 치험5례 를 게재하였다 정보라는 하악골에 발생한 33개의 치아를 함유한 거대한 치아종양에 대하여 격세유전으로 나타나는 인류치아결여병 3예에 대하여 (1935)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0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1 2015-10-28 오후 5:50:12
口 蓄 의 형태와 그 법의학적 가치 (1936)를 발표하였다. 이동환은 하악치은에 발 생한 섬유성혈관종의 1예 를 보고하였다. 1934년 부츠와 정보라가 공동기술한 것으로 안면부 치성 누공 과 한국인들의 치아수와 사랑니 가 있다. 제3회 경성치과의학회에서 정보라는 조선인에 있어서 과잉치아 특히 Bolk씨의 paramolar와 distomoral 5예, 조선인의 치아마모증에 관 한 연구, 하악 제3대구치의 매복상태의 분류 및 그 간이한 발치법 등을 발표하였 다. 이동환은 하악치은에 발생한 섬유성혈관종의 1례 를 보고하였다. 1935년 2월 2,3일간 세브란스치과 강당에서 열린 제27회 조선선교사의학회에서 부츠는 치아환례 를 구연하였다. 정보라는 9월 조선의사협회 제2회 학술연구소에 서 하악골에 발생한 33개의 치아를 함유한 거대한 치아종양에 대하여 를 구연하고, 제15회 조선치과의학회에서는 격세유전으로 나타나는 인류치아결여증 3례에 대하 야 와 제4회 경성치과의학회에서는 One piece casting 국부의치의 조제순서 및 설 계기준에 대하야 를 발표하였다. 다음해인 1936년 조선의사협회 제3회 학술연설회 에서도 정보라가 구개의 형태와 기 법의학적 가치 를 구연하였다. 1937년에는 김철용이 임상상 희유한 이통 2례 와 소위 치조농루병의 통계적 관 찰 을 발표하였다. 박용덕은 최근 처치하는 외과적 임상 와 의미있는 노포성, 치 아낭종의 1치험례 를 발표하였다. 1938년 제7회 경성치과의학교에서 정보라는 가 장 자연적 심미를 갖추는 전치부 bridge 조제법 과 정확한 하악 기능인상법에 대 하야 를 발표하였다. 이유경은 의학생을 위해 구강내 감염과 건강 을 게제하였다. 1939년 이유경과 이양숙은 소아치교합면 중앙이상교두결절의 임상례 을, 박용덕 은 중병인 하악골체부 골절의 1치험례 를 발표하였다. 1940년에는 박용덕, 최종선 은 소아치 교합면 이상교두결절로 인한 만성근단성 치조농류을 야기한 1례 를 발 표하였다. 이유경은 선천성 법랑질결손의 1환자에 있어 18개의 porcelain jacket crown과 cast crown을 장착한 1병례 를, 정보라는 총의치의 도치배열방법에 관하 여 를 구연하였다. 1942년에 박용덕은 치근관문의 동맥 을 해부학잡지에 원저로 발표하였다. 1941년 맥안리스는 필리핀에서 보낸 편지에 Wiring up two fractured jaw cases 라고 골절환자를 치료해 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 이러한 세브란스연합의학교 치과학 교실의 학술활동은 일제하 민족차별을 극복 10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2 2015-10-28 오후 5:50:12
하고 한국인 치과의사들이 치의학 연구의 일익을 담당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 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7) 부츠와 맥안리스의 사임 일제 식민지 시대에 서양식 치과의학이 한국에 도입되는 과정에서 부츠와 맥안리 스의 활동은 두 사람의 개인적인 삶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이유는 이들이 한국 에서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 교실과 치과를 운영하면서 당시 미국의 치 과의술을 직접 전래했고, 한국 치과의료계를 주도하던 일본의 식민지 치과의료정책 에 대해 비판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에비슨의 치과대학설립안은 경성치과의학교 의 설립을 간접적으로 촉진했고, 세브란스병원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학술 및 진료 활 동은 기독교적 봉사정신과 치과의사의 윤리에 입각하여 한국인 구강보건향상을 위 한 공중보건과 계몽사업으로 나아갔다. 부츠와 맥안리스, 두 사람의 협동 노력은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 교 실이 한국인 치과의사들에 의해 주도적으로 운영되기까지 이들의 역량을 키우는 데 큰 몫을 담당하였다. 그렇다면, 이들이 한국 치의학의 미국식 치과의술 도입과정에 서 개인적으로 미친 영향은 어떠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들이 직면했던 상황적 제 약 속에서 우선적으로 선택한 가치판단의 기준이 무엇이었으며, 그들의 한국 선교치 과의료 활동이 지녔던 의미와 한계는 무엇이었을까? 여기서는 부츠와 맥안리스 개 인들 삶의 궤적 속에서 그 가치추구의 동기가 무엇이었으며, 그것이 사회역사적 제약 속에서 어떻게 현실화되고 굴절되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1 부츠 치과과장으로서의 부츠의 업무는 치과발전을 위한 기획과 조직관리였다. 치의학 교육, 진료, 연구 등의 기본업무 이외에도 대외적인 회의에 참석하여 치과의 위상을 높이고 교직원 및 학생들과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일도 그의 공식적인 업무 중의 하나였다. 그가 재임기간 중 상당 기간 동안(1923 1935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의 기관잡지인 세브란스 교우회보 (Bulletin)의 발행자를 맡아 일한 것도 그의 적극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0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3 2015-10-28 오후 5:50:12
적이고 책임있는 조직활동의 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이다. 부츠는 가족 역시 사교능력도 뛰어나고 유쾌한 성격이었다. 부츠는 틈나는대로 여 행과 모험을 즐겼다. 동해와 백두산, 두만강등지를 여러 번 다녔다. 1922년 갓난 아들 존이 폐렴에 걸린 소식을 듣고 강원도 산을 90리를 걷고 기차를 타고 돌아오기도 했 다. 부인 후로렌스(Florence)는 음악을 잘 해서 한국에서는 남대문교회 오르간 반주 자로 성가대를 이끌었다. 플로렌스 스스로 한국전통음악 악보를 정리한 책자를 만들 어 국악과 세종대왕의 한글창제의 우수성과 같은 강좌도 많이 하였다. 이 책은 하버 드 도서관 참고 서적 중에서 한국음악에 관해서는 최고로 권위를 갖고 있다. 부츠 부 부에게는 1남 3녀의 아이들이 있었다. 첫딸 진 마틸다( Jean Mathilda), 둘째는 아들 존( John), 셋째 베티(Betty)와 넷째 필리스(Phyllis)중 세 딸은 모두 한국에서 태어났 다. 미국에서 부츠 가족 모두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과 아이들과 부부 모두 한국에서 의 삶을 매우 즐거워한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과 달리 매우 친절하고 유머감각이 있 다. 빨리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 는 기사(1927.6.25)가 실려 있다. 부츠는 창의적인 기획능력과 추진력을 지니고 있었다. 외교적 수완과 함께 한국의 독특한 문화를 이해하는 안목도 뛰어났다. 한국의 백두산 이란 기행기는 National Geograpy에 투고했다가 거절된 후 한국선교계 에 실렸다. 한국인의 갑옷과 무 기 란 원고는 4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 Royal Asiatic Society 한국지부 회보 에 1933년 1월 실리기도 했다. 雲 甫 김기창 화백은 회고록에 자신을 화가로 유명하게 되게 한 이가 둘 있는데, 그 중 1명이 닥터 부츠 라고 소개하고 있다. 김기창의 어머니 가 부츠 집에 가정부로 있었는데 부츠가 그녀에게 내가 크리스마스 때 그림을 판매 해 줄 테니까 한국의 민속도를 그리도록 하세요 해서 이를 계기로 알려지게 되었다 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나방과 나비: Caterpillars and Butterflies 는 전교를 나비에 비유하면서 선교사 의 윤리를 피력하기도 했다. 여하튼 부츠 치과과장 시기 동안 치과는 많은 환자수와 많은 수입, 한국인 임상의 꾸준한 성장, 쾌적한 생활조건, 한국인 치과의사들의 탄복할 만한 인간성과 기독교 정신과 두터운 우정 을 보고할 만큼 양적 규모나 질적 부분에서 발전을 거듭했다. 그 러나 사업의 우선순위를 선정하고 자원과 인적역량을 배분하는 가치판단의 문제에 10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4 2015-10-28 오후 5:50:12
있어서는 몇 가지 부분에서 상당한 혼란이 있었던 것 같다. 첫째, 치과운영상 환자진료와 재정확보에 우선적으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면서 학 생교육과 치의학 연구에 상대적으로 소홀할 수밖에 없었던 점이다. 개별 환자의 진료 에 충실한 것은 의료인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자세이나, 이것이 그 자체의 실 용주의적 입장에 멈춰있을 때 더 이상의 발전을 위한 창조적 열정은 퇴색하게 마련이 다. 따라서 부츠 시기의 치의학 교실은 치의학교 설립이나 학술연구기관으로서의 발 전계획이 진전되지 못한 채 진료 중심의 체계 속에서 한국인 치과의사의 수련에 만족 해야 했던 한계를 낳기도 했다. 둘째, 가난한 한국인 대중들을 대하는 자세에 관한 문제이다. 부츠 역시 빈곤한 환 자들의 치과진료비를 낮추기 위해 직원들의 봉급을 삭감하기도 하고, 한국인 치과의 사 수를 늘려 일반진료 공급을 높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부츠에 있어 한국인 환자들 은 기본적으로 인류의 치과질병에 관한 과학적 지식을 높이는 데 기여할 연구대상이 었다. 그가 주도한 한국인 구강검진이나 학교보건사업 등도 일차적인 목적은 한국인 의 독특한 치과병리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연구의 필요성과 가치가 매우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 연구의 성과를 당시 한국인들에게 환원시키는 데는 역부족 이었다. 세브란스 치과가 일제 식민지 통치하에서 구강보건정책기관으로서의 위치 를 점하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연구 성과를 자본주의적 치과진료수가체계 가 지니게 되는 가난한 사람들의 소외에 관한 문제나 일제의 식민지 치과의료정책에 대한 사회보장 차원의 대안적인 구강보건정책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채 자선적인 진 료로 만족해야 했던 것이다. 셋째, 치과운영과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한국인 승계를 둘러싸고 생긴 부츠와 오긍선을 비롯한 직원 내부의 갈등이다. 에비슨의 사임(1934. 2)과 동시에 이사회에 서는 제2대 교장으로 당시 부교장 겸 피부비뇨기과 교수였던 오긍선을 만장일치로 선임하였다. 에비슨은 서양선교사 몇 사람이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한다하더라도 한 국의 보건을 증진하고 위생을 개량하는 데 큰 공헌을 하기 어렵다는 것 을 일찍 깨달 은 선각자였다. 그래서 한국인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의료교육을 실시하기 시작했 던 것이다. 에비슨의 의료교육방안은 일제처럼 한국인 의사들의 수준을 폄하하는 것 이 아니었다. 독자적인 연구능력을 배양하고 수련시켜 한국인 교수들을 대거 양산하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05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5 2015-10-28 오후 5:50:12
는 적극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한국인 정교수의 비율은 1917년 정교수 9인 중 1인인 15.5%에서, 1932년 17인 중 9명인 52.9%로 증가하였다. 오긍선은 1920년 학감으로 임명되어 병원을 감독하면서, 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일본 문부성 지정 전문학교로 승격시키는 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오긍선이 선교사들로부터 호평을 받을 정도로 일 을 잘 처리한 것은 한국인에게 의료선교사업의 권한이 대폭 옮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오긍선의 교장 취임은 한국인이 처음으로 선교의사로부터 세브란스병원 의 운영책임을 인계받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오긍선은 세브란스병원을 한국인 이 인계받아야 하는 이유로 세브란스병원이 당면한 재정상의 어려움과 전문의에 의 한 진료와 설비확대를 위해서는 한국인이 운영을 맡아 동창회나 한국교회 등의 자금 으로 병원의 어려움을 타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긍선은 교장 취임 후 한국인 자 격교수 양성에 전력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에 각 주임교수의 한국인 취임, 기초학 교 실의 교수 이하 교직원의 보강, 연구시설의 확충, 도서실의 완비 등 세브란스연합의 학전문학교로 하여금 의학교육 및 연구라는 의학교 본래의 사명과 책임을 다할 수 있 게 한 인물이었다. 그러던 중 오긍선과 부츠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갈등은 오긍선이 학교의 재정상 어려움을 이유로 정보라를 미국으로 유학 보내는 것을 거절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하 지만 정보라의 유학은 세브란스병원 치과 내규에 의거한 치과독립예산으로 이미 내 정되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치과 과장과 정보라의 입장에서, 오긍선의 처사는 부 당한 것이었다. 이러한 갈등은 중재안도 없이 감정적인 문제로 확산되었다. 잠시 오 긍선이 사직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교수진 사이에도 오긍선파와 반( 反 )오긍선파로 나뉘어 갈등이 심화되었다. 부츠의 개인보고서에는 부츠 역시 오긍선이 교장으로 선 출되는 것에 찬성했었다. 그것이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의 참다운 발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긍선이 교장이 된 후 회계담당자, 학감, 원장 모두가 한국인인 집행부 체계로 구성되었다. 그러자, 부츠는 세브란스연합의학교의 지배 가 선교부의 손에서, 갑자기 모두 한국인 권위 아래 완전히 놓이게 되었다 는 심적 불 안감을 느끼게 되었다. 부츠는 에비슨은 지도자로서 자신에게 반대하는 상대방의 의견을 인내심 있게 포용했었다. 그래서 부츠 역시 조직원들의 표현의 자유를 보장 해주는 에비슨의 권위를 존중했었다 고 회고하면서 오긍선의 권력행사에 대해 비판 106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6 2015-10-28 오후 5:50:12
하였다. 당시 기독신보제,1128호 의 세의전 교장 사직 이라는 사설에서도 부츠의 의견과 동일한 맥락의 기사가 실려 있다. (전략) 그러나 오박사는 취임 이래 자기 지 위 옹호에 급급하야 이사도 자기의 대변자들을 구하여 자기 지위를 공고히 하랴고만 힘썼으므로 교내는 항쟁과 분규가 끊이지 않이 하였다 한다. (중략) 이번 문제도 드르 니 이사회 결의가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전문학교 부교장과 경기에 있는 ㄱ회 모중등학교장 모씨와 결탁하야 모과장인 모교수를 독재로 압박하랴다가 폭발된 것 이라 한다. 하여간 교장 취임 이후에 인심수습도 못한 독재정치를 베풀다가 실패한 듯하다 한다 는 내용이다. 이와 같이 부츠와 오긍선 간의 갈등은 치과문제에 대한 결재승인 거부에서 시작됐 다. 하지만 이것은 선교의료와 일반의료, 의과와 치과, 미국인과 한국인, 권위의 확보 와 권리의 주장 등의 복합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은 선교 본부에서도 중재하지 못했고, 결국 부츠는 치과과장직 사직서를 제출(1938)함으로 써 일단락되었다. 넷째, 부츠가 치과학 교실을 한국인 치과의사에게 인계하기 위한 실질적인 준비를 어떻게 하였는가 하는 문제이다. 에비슨을 비롯한 선교의사들이 한국인 의료진에게 세브란스병원을 인계할 때 가장 우려했던 점은 자선사업 등으로 나타나는 기독교적 봉사정신이 약화되는 것이었다. 세브란스연합의학교는 1926년부터 기독교 신자 여 부에 관계없이 입학을 허가하여, 한국인을 위한 의학교로서의 위상을 굳혀 나갔다. 그러나 한국인 인계과정에서 기독교 선교정신이 약화될 것이라는 우려는 일부 선교 사들에 의해 지속적인 갈등요소로 남아 있었다. 부츠 역시 세브란스병원의 한국인 인계과정에서 기독교 정신이 쇠퇴될 것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었다. 부츠가 치과예산으로 미국 유학을 주선한 이유경과 정보라의 경우도 독실한 기독교임이 일차적인 조건이었다. 그러나 부츠는 에비슨이나 오긍선 과 달리 한국인 치과 교수로 승진시키지는 못했다. 이것은 치과 자체의 교수수가 제 한되어 있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부츠가 치과의 한국인 인계시기를 뒤로 늦추고 있었 기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다섯째로, 부츠를 비롯한 선교의료인들이 당면했던 문제는 국내외 정세의 불안이 가중되는 속에서 앞날을 예측하기 어려웠던 점이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07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7 2015-10-28 오후 5:50:13
고 1938년 9월 이후 신사참배가 강요되자 선교사들은 자진출국하기 시작했던 것이 다. 결국 부츠는 1939년 북경연합의과대학의 치과부를 재조직하기 위해 선교 임지를 바꾸기로 결정하였다. 맥안리스에게 과 운영을 인계하고, 한국의료진들은 이유경과 정보라의 지도 하에 일하도록 준비시켰다. 부츠 부부는 1939년 4월 1일 중국의 북경 으로 떠났는데 이는 부츠 부부가 조선에 온 지 18년 만이었다. 중국은 1937년부터 일본과 전면전을 치르고 있었다. 하지만 부츠는 록펠러재단에 서 운영하는 북경연합의과대학의 치과파트에서 일하고 있었다. 전세가 악화되자 부 츠는 1941년 11월에 가족만 미국으로 돌려보냈다. 1941년 12월 8일 일본의 진주만 공격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되자 부츠는 마닐라에서 고립되었다. 그 후 2년간 마닐 라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있었다. 포로수용소에서 부츠는 상해에서 온 적국의 외국인 으로 취급 받으며 여러 위험과 어려움을 견뎌야했다. 포로수용소의 경험을 쓴 부츠의 회고담에는 수용소 안에서 응급치과치료를 했던 부츠의 순발력과 외교능력,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다. 22) 1970년 피츠버그대학교 치과대학 동창회에서는 부츠가 박애주의자이며 치과진료와 교육의 개척자이고 대학동료들에게 영감을 불어 넣어 주는 공로자, 서울의 치과동료들에게 학구적인 발전을 가져다주고 현대적인 치과의 료개념을 도입시켜 주었으며, 이유경을 유학시킨 공로자로 표창장을 주었다. 23) 부츠의 약력 1894년 11월 9일 Pennsylvania NewBrighton에서 출생 1913 1914년 Geneva College 수학 1914 1915년 Pennsylvania State College 수업 1915년 University of Pittsburgh college and Dental School 입학 1918년 피츠버그 치과대학 졸업과 동시에 B.S.D.D.S. 학위를 취득 1919 1921년 피츠버그대학 치과 임상강사로 취임 22) J.L. Boots, There was no equipment, no motor, no chair, no instrument except extraction, no supplies. Delayed Return, Dr John Leslie Boots and his life in Korea, 연세 대학교치과대학, 1996, 65~68. 23) The Distinguishes Alumnus Award for 1970, By the Univeresity of Pittsburgh, School of Dental Medicine. 108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8 2015-10-28 오후 5:50:13
1921년 1월 외국선교사( 醫 育 )로 취임 1921년 11월 세브란스전문학교 교수진 부속병원 치과장으로 취임 1925년 F.I.C.D(세계치과의사연맹연구원)자격 취득 1927년 graduate work at Northwestern University 1928년 Chicago North Western대학 의학부에서 구강외과학 과정을 이 수하고 한국인의 식생활과 구강위생에 대한 논문 으로 M.S(Master of Science)학위를 득함- post graduate work 1928년 F.A.C.D 학위를 취득 1939년 북경연합의과대학으로 선교 임지 바꿈 1941년 중국에서 축출되어 마닐라 포로수용소에 수용됨 1943년 미국으로 돌아옴. 1943~52년 Pasadena 개인치과 1952~1962년 San Dirgo 개인치과 1970~피츠버그 치과대학 1983.1.28 사망 2 맥안리스( James Albert McAnlis) 맥안리스는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 교실과 부속병원 치과에서 20년 간(1921 1941) 선교치과의사로 활동하였다. 그럼에도 그가 남긴 보고서나 개인적 기록은 몇 편되지 않는다. 맥안리스는 노스웨스턴(Northwestern) 치과대학 출신으 로 치과보철을 전공하였다. 세브란스 치과에서는 보철과 보존 부분을 맡아 진료를 해 왔다. 맥안리스는 20년간 근무하면서 안식년을 제외하고는 아파서 쉰 적도 없이 진 료활동과 치과의사와 의대생의 교육, 치과과장인 부츠 보좌역 등을 성실히 담당해왔 다. 맥안리스 역시 안식년으로 미국에 갔을 때 치과건물신축기금 마련을 위해 노력하 여, 좋은 성과를 얻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또 한국에서 얻은 휴가기간 중에도 평양 등지의 임상지부에서 9 10시간가량 진 료봉사를 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과외선교활동으로는 고아원 일요학교에서 봉사했다. 당시 고아원 일요학교의 책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09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09 2015-10-28 오후 5:50:13
임교사는 3년 동안 세브란스 치과에 있었던 한국인 치과의사가 담당하고 있었다. 세 브란스의과대학 학생 두 명도 같이 활동하였다. 1938년 맥안리스는 외국인 사회와 체육 단체의 서울연합단체의 회장직을 맡아 일하기도 했다.(맥안리스, 북장로교연 례보고서, 1938 1939) 부츠가 떠나자 1939년 4월 1일부로 치과과장을 맡아 25명의 직원들로 구성된 치 과를 운영하였다.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에서는 세브란스관리본부와 실행위원 회의 간사로서 활동하였다. 1941년 맥안리스가 떠날 때 선교보고서에는 맥안리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되 어 있다. 맥안리스는 첫째 조용하고 개인적인 성품을 지녔다. 타인과의 교류에서는 자애롭고 진실한 우정을 바탕으로 하는 성실한 기독교인이었다. 둘째, 체계적인 가 치판단과 주의 깊은 생활자세로 어떤 일이던지 강력하게 추진해 나갔다. 셋째, 전문 적인 능력과 헌신적인 노력으로 세브란스 치과가 오늘날과 같은 명성과 감화력을 지 닌 진료단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즉 맥안리스는 청교도적 직업윤리 속에서 치과의사로서의 소임을 다하며, 고아원 봉사활동 등을 통하여 한국인들이 당면한 어려움에 대해서도 종교적, 사회적 책임을 지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이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미일관계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 했다. 미국은 일본에 경제적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일본 역시 한국 내의 미국선교 사들을 탄압하였다. 1938년부터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심해졌다, 1938년 9월 평양에 서 열렸던 조선기독교장로회 총회에서는 신사참배를 할 것을 강요당했다. 교직자들 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고초를 겪었다. 이에 항거하는 선교사들은 귀국하지 않 을 수 없었다. 1941년 맥안리스도 강제소환을 당하여 필리핀으로 출국함으로써 20년에 가까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의 소임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가 선교치과의사 로서 한국인 치과의사들에게 미국의 현대식 치과임상기술을 전파하고, 부츠와 당시 치과 교실원들과 조화를 이루어 헌신적으로 진료한 것은 세브란스 치과 발전의 초석 이 되었다. 2015년 9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사는 교포 그레이스 김(Grace Kim)이 옆 집 사 는 스티브 맥안리스(Christine Steve McAnlis)의 친할아버지가 제임스 알버트 맥안 110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10 2015-10-28 오후 5:50:13
리스라는 사실을 알려왔다. 스티브에 의하면 맥안리스(.J.A. McAnlis)가족은 한국을 떠난 후 필리핀의 포로 수용소에서 무려 4년간(1941~1945)지냈다. 알버트의 아들 도널드 맥안리스(Donald McAnlis, 1920~2003) 는 한국을 떠날 때 21살이었다. 도 널드는 미국으로 돌아가 치과의사가 되었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3년 3월 28세가 된 도널드는 미국 군인을 실어 나르는 배에 승선하여 한국에 도착하였다. 도널드는 한국 에서 군인들을 치료하면서, 부모님이 일했던 세브란스병원을 방문해 치과물자들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도널드 맥안리스에게 어린시절 경험했던 한국은 늘 아름다운 추 억의 나라였다. 특히 한국의 문화와 음식을 잊지 못했다. 신김치과 마늘이 충분이 들 어간 갈비, 면발이 꼬들꼬들한 잡채에 반해 있었다. 그래서 스티브도 일본으로 유학 갔던 자신의 아들이 돌아오면, 한식 음식을 차려서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파티를 열기 도 했다. 쉐플리와 부츠, 그리고 맥안리스와 그들의 가족들이 전해준 것은 서양 근대 치의학 뿐 만이 아니었다. 그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신에 대한 믿음으로 함께 했던 한 국인과 인류에 대한 사랑이었다. 맥안리스의 경력 1921. 9. 21: 북장로교 의료선교사로 내한,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에서 진료 및 강의 1939. 4. 1: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 3대 과장으로 취임 1941. 4: 일제에 의한 강제추방으로 필리핀으로 출국 John Albert McAnlis 맥안리스 가족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11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11 2015-10-28 오후 5:50:13
맥안리스와 전직원 1940 맥안리스 손자 스티브의 가족 사진 112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12 2015-10-28 오후 5:50:14
3 한국인 치과의사에 의한 운영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미국은 일본에 대해 경제봉쇄를 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한국에 있던 미국인들도 철수하기 시작했다. 부츠와 맥안리스가 떠나자 이유경이 치 과과장에 임명(1941)되었고,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치과학 교실은 한국인 치과의사 들에 의해 운영되게 되었다. 1939년 조수는 임택용, 안종서, 김길용, 유기형이었다. 다음 해에는 이양숙이 합류하였다. 이유경은 극심한 인플레이션으로 인해 세브란스 치과 과장을 사임(1944)한 후 서울 서린동(1945)에 개업하였다. 이 기간 동안에도 치 과학 교실은 발전을 거듭했으며 점차 체계를 갖추었다. 1945년 광복 당시 세브란스 전문학교 치과학 교실에는 교수에 박용덕, 조교수 박유신, 강사 김정규, 조수 이동섭, 부수 노성윤, 박응시가 각각 활동하였다. 해방 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서울대 학교 치과대학으로 편입되었다. 그 때 세브란스의전 치과학 교실 수련의의 상당수가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의 교수요원으로 발탁되어 가게 되었다. 1945년 경성치과대학 교수진 명단 중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학교실에서 수련받은 사람들은 병 원장: 이유경, 보철부: 정보라, 김정규, 보존부: 이유경, 박유신, 김만수이다. 미군정 시기 이유경과 정보라는 보건후생국 고문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안종서(해방 후 제1대부터 6번,1945.12.9~1946, 1950~1954, 1958~1960, 1962~1963)를 비롯한 이유경 (1964~1968) 등은 대한치과의사협회 역대 협회 장으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이 일제 시기 세브란 스 치과학 교실은 한국인 치과의사들을 유능한 지도자로 양성함으로 이후 우리나라 치과계의 선구자들로 만들었다. 해방 후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은 1967년 문교부로부터 연세대학교 치과대 학 예과설립인가를 받음으로써 에비슨의 세브란 스연합의학전문학교 내의 치의학교 설립의 숙원 을 이루게 되었다. 이유경 I. 근대서양치의학 교육의 시작(1876~1945) 113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13 2015-10-28 오후 5:50:14
이유경진료장면 한국인에게 인계된 세브란스 치과학 교실 114 연세 치의학 100년사 (001~114)치의학 100년사-1부-OK.indd 114 2015-10-28 오후 5:5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