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정은광(은광. 교무. 원광대학교 미술관) 목 차 Ⅰ. 서 론 Ⅱ. 茶 의 정신 1. 신라의 茶 정신 2. 고려의 茶 정신 Ⅲ. 茶 의 기원과 禪 의 배경 1. 茶 의 기원 2. 茶 와 禪 의 배경 Ⅳ. 결 론 Ⅰ. 서 론 현대인들에게 있어서 선( 禪 )은 그 자체만으로 기쁨을 창출할 수 있는 마음의 샘터다. 이런 가운데 일상화된 차( 茶 )의 정신( 精
264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神 )도 그와 결합하여 높은 정신적 감흥을 발취해 낼 수 있는 현묘 ( 玄 妙 )함을 가지고 있다. 학문은 매우 난해하다고 해도 학문이 가 지는 힘은 인류에게 현묘한 이치를 설명하고, 그 설명이 합리적 이고 조화로움으로 진행됨을 알 수 있다. 이 시대에 화두는 어떤 정신으로 맑고 밝음을 유지하는가, 그것이 정신세계에 있어서 어 떠한 역할을 배분하고 있는가에 대한 깊은 자성( 自 性 )과 통찰( 洞 察 )이다. 진리성은 자연과학 앞에 또는 실증과 고증학 앞에 맥없이 무너 지고, 참 진리를 외치는 것은 철학과 종교에서 각자의 위치로 돌 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삶은 그 밖에 마음의 신선함과 자성 의 기쁨을 찾아서 한순간 한순간이 자신의 행복과 연결되는 지극 히 편안하고 온유한 마음자리의 시간적 병행을 만들어 가고 있 다. 이러할 때 차도( 茶 道 )의 정신은 바로 맑고 청정한 선( 禪 )정신으 로 이어짐을 알 수 있는 것이고 불교의 수행승이나 또는 깨끗한 인간의 근본정신성에 기대하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메시 지를 전달하는 것은 학문에 있어 커다란 긍지요 기쁨이다. 이에 다정신( 茶 精 神 ) 이라는 차원에서 그 정신성을 담론하고 학문적 으로 그 의미를 되찾게 하여 배움 이전에 그 정신의 오롯함을 알 아야 함을 이론적으로 밝혀두고자 한다. 역사적으로나 실제 음다( 飮 茶 )의 형태상에서 인간심성의 기본 적인 마음이 다도라는 의식 속에 뿌리 깊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 을 인지하게 하고, 나아가 그 시대에 중심이었던 사람들의 수행 적 삶을 통해서 엿볼 수 있었던 기록들을 되찾아 다선일여와 다 선일미의 정신성이 어떻게 보여주고 있는가에 대한 의미의 상체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65 기를 학문적으로 열거하는 작업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차의 정신성, 차의 시대적 문화, 불가( 佛 家 )의 선사( 禪 師 )들의 의미표현, 그리고 현대에 있어서 그러한 선( 禪 )정신과 다 도( 茶 道 )의 정신성이 어떻게 연결되고 조화롭게 정신성을 창출해 내고 있는가에 대한 학문적 추구는 학문의 본질성에서 더욱더 의 미 있는 분석과 심층적 고찰을 체계화 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 각한다. 茶 人 들의 의미 깊은 정신성을 깊이 심어 고찰하려는 것 이 본 연구의 목적이다. 차( 茶 ) 정신이 선( 禪 ) 정신과의 어떠한 연결고리가 형성되는가 에 대한 가능성과 아울러 그 기록과 논문들을 통해서 그에 대한 형성과정과 학문적인 보편적 제시를 연결하고자 한다. 특히 차의 역사성에서 인간이 차를 먹고 제를 올리고 또한 다도라는 형식의 틀을 만들어 낸 문화의 차원에서 그 정신성은 자연히 불교선( 佛 敎 禪 )으로 귀결하게 된다는 것을 점차 알게 될 것이다. 차 정신이 야 말로 초의선사가 동다송 을 통해서 새롭게 해석하고 의미전달 을 한 것처럼 이러한 순숙된 분위기의 맥을 더듬지 않을 수 없었 다. 원효대사, 고운 최치원, 초의선사, 다산 정약용 등의 차( 茶 )와 선( 禪 )의 범위를 넘나들며 차 정신의 경지를 새기며, 다도( 茶 道 ) 가 일상에서 어떻게 정신성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살피고자 한다. 또한 불가( 佛 家 )의 선( 禪 ) 정신성과는 어떠한 의미로 공존해 왔는 가를 점검하는 것으로 차 문화의 흐름을 밝히고자 한다.
266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Ⅱ. 茶 의 정신 차( 茶 tea, Camellia sinensis), 곧 작설차( 雀 舌 茶 )는 먹고 마 시는 것으로 음용물의 한 종류이다. 음식, 찬선( 饌 膳 ), 식선( 食 膳 ) 이라고 할 수 있다. 먹는 음식과 마시는 음식은 보통 주된 재료에 양념을 하여 만든다. 주 재료는 한 가지이지만 양념은 한 가지 이 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들어 쓴다. 한국인이 먹는 음식은 밥과 반찬으로 이루어져 있다. 쌀, 보리, 콩, 팥, 조, 수수 등으로 밥을 짓고, 푸성귀나 부성귀의 뿌리, 나 무열매 등으로 반찬을 만든다. 쌀밥은 겨울철에 맛이 더 있고, 여 름철에 보리밥을 먹으면 절기에도 맞고 사람 몸에도 좋다. 마시 는 음식 가운데 한국인에게 가장 친숙한 식혜, 수정과 등은 적어 도 두 가지 이상의 재료를 사용하여 만든다. 그 밖에 한 가지 푸 성귀나 열매로 만드는 즙( 汁 )도 있다. 그런데 차의 경우는 시간과 장소, 환경 조건의 영향을 크게 받기 때문에 다른 음식과 동등하 게 다루기는 어려울 듯하다. 차( 茶 )는 사시사철 늘 푸른 차나무를 말한다. 늦가을에 피는 흰 꽃은 짙은 향내를 내뿜고 꽃이 진 자리에 맺히는 열매는 이듬해 꽃이 필 무렵에 익는다. 또 차는 흔히 작설차( 雀 舌 茶 )라 부르는, 차나무의 어린잎을 따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만든 찻잎을 말하기 도 하고 그 잎을 우려내어 마시는 물을 말하기도 한다. 공자는 사 람치고 먹고 마시지 않는 사람은 없건만 음식의 참다운 맛을 아 는 이는 드물구나( 子 曰 人 莫 不 欲 飮 食 也 鮮 能 知 味 也, 中 庸, 제4장) 여기서 참다운 맛 과 이를 아는 것이 왜 어려운 일인지를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67 참다운 맛이란 달고 쏘고 맵고 시고 짠 맛을 가리키기보다 생 명체들의 상생과 공존의 참뜻을 깨닫고 이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따라서 차도 그 참뜻을 알고, 의미를 되 세기며 그 정 신성과 아울러 우리들의 마음자세를 가다듬는데 인류역사상 가장 의미 있는 삶의 한 가지일 뿐 아니라 차를 마시는 본질성에 대한 인간의 이해와 마음작용과 그 공존의 삶을 깨닫게 되는 것이 바 로 다도( 茶 道 )이고 이 다도의 사상의 근본에는 선( 禪 ) 사상적 정 신성이 자리하게 된다. 거기에는 맛과 향과 색깔과 기운이 서려있으며 그러함이 품격 과 역사성과 정신성이 녹아 있는 것이 이른바 미학적인 접근이 다. 불교는 이러한 사상이 연기사상과 더불어 불교문화의 큰 미 덕으로 자리 잡게 되었고 이로써 승려와 세상 사람들에게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것은 신라 의상의 법성게( 法 性 偈 ) 와 유사하게 느껴진다. 하나에 모두 있고 많은 데 하나있어 하나가 곧 모두이고 모두가 곧 하나이니 한 티끌 작은 속에 세계를 머금었고 낱낱의 티끌마다 세계가 다 들었네 一 中 一 切 多 中 一 一 卽 一 切 多 卽 一 一 味 塵 中 含 十 方 一 切 塵 中 亦 如 是 위의 법성게 게송은 화엄경( 華 嚴 經 ) 의 핵심으로 이것이 곧 연 기( 緣 起 )를 말하는 것으로 다도에 있어서 맛과 형식과 정신성이 모두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에서 그 의미를 알게 된다. 1) 이러한 차 는 인간에게 겸손함, 경이로움, 공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며 차의 정신성은 하나이면서 모든 것이 되는 상생과 공존의 미학을 가르 1) 정동주, 한국인과 차, 다른세상, 2004, 19쪽.
268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치고 있다. 풍우란( 馮 友 欄,1894~1990)은 중국의 철학과 종교의 정신이 가장 완벽하게 드러나는 존재를 聖 人 이라고 하였다. 2) 그가 생각 하기에 성인이란 출세간만을 지향하는 살아도 아니고 입세간만을 지향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에 의하면 성인은 출세간과 입세간을 동시에 성취하는 즉 초세간( 超 世 間 ) 을 지향하는 사람이다. 초세 간이란 출세간을 지향하면서도 세간에 살고, 입세간을 지향하면 서도 세간을 초월하는, 즉 초월과 일상을 하나의 차원에서 성취 하는 사람이다. 풍우란이 말하는 초세간 을 살아가는 성인( 聖 人 )의 성취는 과 연 가능한가? 어떠한 종교도 초월과 현실 중의 어느 하나만을 지 향한다고 선언한 예는 없다. 어떠한 종교든 자신들의 초월적이면 서 현실적이고 현실적이면서 초월적이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현 실적 삶의 포기가 반드시 현실적 삶을 떠나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이처럼 풍류를 즐기고 차를 마시는 일도 세속에서의 정당한 위 치 속에서 자리 잡고 그것이 도( 道 ) 라는 차원에서 한 차원 삶의 모습을 승화시키면서 자신들의 위치를 확고하게 점유했던 정신적 인 행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데 세속을 초월한 수행승 들의 다도 즉 선( 禪 )정신에 입각한 다도는 과연 우리에게 무슨 의 미를 남기는가 하는 문제를 다시금 생각하게 가는 것이 이 논문 을 풀어가는 새로운 논제인 것이다. 다도( 茶 道 )의 정신성에는 그 근저에 중국사상과 아울러 불교사 상이 그림자처럼 지워져 있는 것을 알게 한다. 다시 말해서 히말 2) 윤영해, 주자의 선불교 비판, 민족사, 2000, 17쪽.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69 라야 산맥으로 불리 된 인도와 중국은 수 천 년. 동안 각자 너무 나 대조적인 문화와 역사를 발전 시켜왔다. 그러한 것의 특징은 인도사람들은 초월적이고 비인격적이며 창조적인 우주적 실체와 본성에 많은 관심을 가겼으며, 그 창조적 실체와 인간이 합일하 는 지혜라든가. 선과 악. 삶과 죽음 등의 온갖 이원성을 극복하는 초월적 지혜에 관한 물음이라든가 인간 심성이 섬세한 구조와 기 능 등 주로 인간 내면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또한 인도인 들은 신비한 내적 통찰을 통해 천당과 지옥 등, 현실을 넘어서는 세계들을 발견했고, 연속되는 환생이 관념을 통하여 개인이 삶을 무한한 시공 속으로 확장시켰다. 인도인들은 이 세상의 삶을 불 행과 고통으로 느꼈으며, 이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여겼다. 그들은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금욕적 고행주의와 떠돌아다니는 탁발 생활을 했다. 3) 반면에 중국 사람들은 어떻게 인간관계를 개선시키며, 어떻게 사회제도를 안정시키며, 어떻게 정당하고 영원한 정치 체제를 창 출할 것인가 하는 등. 이 세상의 구체적인 현실 문제에 가장 큰 관심을 가졌다. 그들의 세계는 현재의 삶에서 경험하는 것이 전 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중국 사회의 또 하나의 특징은 카 스트에 얽매인 인도인들에게는 도저히 불가능한 놀랄만한 사회적 신분상승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서 산적이 되었다가 도 정복을 통해 새로운 왕조의 황제가 될 수 있었으며 농부의 아 들이 교육에 의해서 재상이 될 수도 있었다. 인도사람들의 생각과는 정반대로 중국인들에게 있어서 이 세상 의 삶은 선하고 좋은 것으로써 끝까지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3) 앞의 책, 35쪽.
270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었다. 4) 이처럼 가족주의적인 윤리는 중국인들의 영원한 가치였으 나 인도인들은 한편으로 가족의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궁극적으 로는 가족을 벗어난 보편적 윤리와 해탈을 목적으로 삼았던 것이 다. 인도사람들이 다분히 추상적인 이상주의자들이었다면 중국 사 람들은 극단적으로 구체적인 현실주의자들이었다. 이러한 과정의 두 문명의 문화가 함께했던 불교의 문화가 중국인들의 삶에서 서 서히 자리 잡은 것은 그 문화 속에 서로가 원하는 문화적 편안함 과 사색이 필요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이 차를 마시기 시작한 때는 여러 가지 기원과 說 이 있지 만, 지배적인 주장은 기원전 2,700년 전인 염제( 炎 帝 ) 신농( 神 農 ) 때 부터라고 한다. 중국의 삼황( 三 皇 ) 가운데 두 번째 황제인 그 는 상고시대 동이( 東 夷 )에서 갈라져 나간 소전씨( 小 典 氏 )의 후예 이며 수많은 약초들을 혀로 맛보고 약을 만들었다고 삼한관경( 三 韓 管 境 ) 본기 제 4편에는 자세히 전하고 있다. 한국의 다성( 茶 聖 )이라 불리는 초의선사( 草 衣 禪 師,1786-1866) 는 동다송( 東 茶 頌 ) 에서 중국의 차는 맛과 약효로 분리되지만, 우리나라의 차는 그 두 가지 모두 겸비하고 있다고 했다. 근래에 는 차 생활의 풍속이 중국과 일본에 비해 우리가 뒤지고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우리나라에도 고려시대 때에는 차의 대 중화가 이루어져 차 문화의 르네상스라고 할 정도로 그 절정을 이룬 적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물을 이용하여 음차( 飮 茶 )와 음료( 飮 料 )를 즐겨한 때를 찾아 거슬러 올라간다면 언제부터인지 그 연대는 확실히 알 4) 길희성 윤해영 역, 불교의 이해, 분도출판사, 161~162쪽, 1994.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71 수는 없으나 이에 대한 공식적 문헌의 기록은 삼국유사 나 삼국 사기 에서 찾을 수 있다. 삼국사기 에 전하는 기록에는 김유신 장군이 출정 길에 자신의 집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집에는 들어가 지 않고 병사를 시켜 장수를 떠오게 하였다고 한다. 얼마 후 병사 가 떠온 漿 水 의 맛을 본 김유신은 우리집 물맛이 전과 같은 것을 보면 집안이 평안한 게로구나 하였다. 여기서 장수는 갈증을 없애 기에 좋은 시원하고 찬 물을 의미하지만 그냥 물은 아니고 곡물 을 발효시킨 음료라고 해야 될 것이다. 삼국유사 의 가락국기 에는 수로왕이 인도에서 온 허황후( 許 皇 后 )를 맞이하면서 사신 일행에게 난초로 만든 사실 것과 혜초 ( 蕙 草 )로 만든 술을 주었다 는 기록이 있다 여시에서 난액( 蘭 液 ) 이란 난의 향을 이용한 독특한 음료였으며 혜초는 난초에 속하는 식물로 좋은 향내를 가지고 있다. 5) 또한 중국의 본초학( 本 草 學 ) 에는 신라에서는 박하 잎을 말려 차로 달여 마신다. 고구려에서 나오는 오미자는 살이 많고 시고 달아 매우 질이 높다 라고 하였 다 이러한 사실들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그들의 기록으로 망아 있 는 것을 보면 우리의 음식문화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을 알 수 있다. 이렇듯 차 문화는 위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임에 틀림없으며 전 통문화의 측면에서 바라본 문화의 특성상 조상의 유산임에 틀림 없다. 따라서 차 문화의 우월성과 문화의 특색을 발견하여 본래 의 모습으로 보존하는 일이 차의 정신성에서 매우 의미 있는 일 이며 그러한 전통문화가 사회적 환경과 변용과 계승의 발전을 해 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5) 김의정, 한국차의 문화와 궁중다례, 솔바람, 2001, 27쪽.
272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1. 신라의 차( 茶 ) 정신 신라의 차 정신은 첫째 경( 敬 )의 정신이다. 불교에서는 헌다하 는 기본 정신은 공경하는 마음이다. 이것은 양식 차나 생활차를 불문하고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정신이며 태도이다. 둘째 예( 禮 ) 를 중히 여기는 정신이다. 일반적인 경우 예를 경 의 정신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으나 관습적으로 행하거나 극단적으로 경 의 정신이 부족한 경우에도 타의에 의해서 예 를 행하기도 한다. 셋째 화( 和 ) 의 정신이다. 다회에서 친화의 정신은 필수적정신 이며 태도다. 공식적인 회합이나 야외에 자연스럽게 모여 마시는 들차회에서도 차는 화 의 정신을 깃들이게 해준다. 넷째 정( 靜 ) 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동( 動 ) 과 대비되는 정신 으로 적멸과 통하는 정신이다. 다섯째 묘( 妙 ) 의 정신이다 이 정신은 사색. 禪 ( 禪 ) 다선일체 즉 깨달음과 통하는 정신이며 시가( 詩 歌 )나 풍류의 방법으로 그 현묘함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다. 끝으로 청( 淸 ) 의 정신이다 차의 정신을 맑게 한다. 는 화왕계 ( 花 王 戒 ) 6) 의 경우나 같이 정신적인 면과 물질적이나 외적인 청결 정신이 깃들어 있다. 7) 2. 고려의 차 정신 고려시대는 도자기 문화와 함께 우리 차 문화의 전성기였다. 계층별로는 최고 통치자인 왕을 비롯하여 승려, 백성 궁중에 궁 6) 통일신라시대의 학자 설총( 薛 聰 )이 지은 설화( 說 話 ). 7) 박권흠, 한국의 차문화, 삶과 꿈, 2006, 27쪽.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73 료에 이르기 까지 일반화되었으며 다방( 茶 房 ) 8), 다점( 茶 店 ) 9), 다 시( 茶 時 ), 다원( 茶 院 ), 다군사( 茶 軍 士 ), 다소( 茶 所 ), 세다( 稅 嗲 ), 다례에 이르기 까지 차에 관한 제도가 확립되었다. 차 정신에 관련된 역사의 기록을 보면 왕과 조정의 차 문화가 형성되었고 따라서 조정의 여러 행사 때 차를 올리거나 왕이 차 를 하사하여 마시는 의례를 행하였다. 따라서 고려의 2대 명일인 연등회와 팔관회에 다례를 행하였고 부처님을 섬기는 연등회는 봄철 음력 2월15일에 행하였고, 천령( 天 靈 ), 오악( 五 嶽 ) 명산대천 ( 名 山 大 川 ) 용신( 龍 神 )을 섬기는 팔관회는 가을 음력11월15일에 행하였으며, 왕이 신불게( 神 佛 ) 제를 올릴 때도 차를 올렸다. 이 처럼 왕자나 왕비의 책봉, 왕태자 생일 축하 공주의 하가시( 下 嫁 時 ) 등에도 다례를 행하였으며 군신의 연회 중형자( 重 刑 者 ) 주대 ( 奏 對 )를 위한 다례도 행하였다. 또한 불가의 차는 신불을 위한 헌다례와 고승의 제사 때 차를 올렸으며 일상생활에서도 차를 마셨다. 선수행( 禪 修 行 )에도 차를 마셨는데 진각국사( 眞 覺 國 師.1178~1234)는 차를 마시며 조주선 사( 趙 州 禪 師 )의 경지를 터득하고자 했다. 10) 고려말 함허( 涵 虛 )(1376~1433) 스님이 지은 제문( 祭 文 )에 한 8) 다방은 고려와 조선시대에는 다사와 술, 소채, 과일, 약 등의 일을 주관하는 관사로 고려 초기부터 있어 왔고, 국가적인 행사에는 거의 예외 없이 거행되던 진다의식을 주관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대종5년(1405) 다방도목(다방도목)이 제정되었고, 1411 년에는 새로 부임한 관리는 모두 다방에 소속되게 하였다. 세종 29년(1447)에는 사 준원( 司 罇 院 )으로 승격되었다(김건우, 석사논문, 30쪽). 9) 고려시대 일반인들을 위한 차가계인 다점과 여행자 휴게소인 다원이 설치되었다. 다 점은 일반 백성들이 돈이나 물건으로 값을 치르고 차를 사거나 차를 미사는 집으로 고려 성종( 成 宗,987~997) 때의 기록에는 일반 백성들이 처음에는 돈 대신 베를 주 고 다점에서 차를 사서마셨고 그 이후에는 돈을 주고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김건우, 석사논문, 29쪽). 10) 박권흠, 위의 책, 29쪽.
274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잔의 차는 한 조각 마음에서 나왔고 한 조각 마음은 한 잔의 차 속에 있도다. 한 잔의 차를 맛보고 나면 무량한 즐거움이 일어나 리. 하고 차를 바쳤다고 한다. 또 승려들 간에 차의 맛을 비교하 여 평하고 겨루는 명전( 茗 戰 )과 투차( 鬪 茶 )의 행사를 벌이기도 했 다. 뿐만 아니라 고려 말 조준과 정몽주 등의 노력으로 주문공가 례 와 대명률 이 시용되어 관례 혼례 상례 제례에서도 차가 행하여졌으며 도가에서도 다례가 행해졌다. 그 예로 고려 말 충 신인 정몽주는 석정전다 라는 시에서 나라에 이바지할 힘이 없 는 늙은 서행이 차 마시는 버릇 덕택에 세상일 잊고 사는구나, 눈 보라 휘날리는 밤에 깊은 재실에 홀로 누워 돌솥에 찻물 끊는 소 리 즐겨 듣도다. 하고 나라를 생각하며 차를 노래하기도 했 다. 11) 특히 고려시대의 차 정신에서 특이할 사항은 신라시대의 경( 敬 ) 예( 禮 ) 화( 和 ) 묘( 妙 ) 청( 淸 )의 정신의 바탕위에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정신을 추가할 수 있다. 첫째 다선일미( 茶 禪 一 味 ) 의 정신이다. 고려중기 문인 이규보 는(1168~1241)는 그의 茶 詩 방장원연보견화차운답지( 房 壯 元 衍 寶 見 和 次 韻 答 之 ) 에서 한 사발은 곧 이것이 참선의 시 작이어라네( 一 甌 是 參 禪 始 卽 )라고 차를 노래했으며 그 후 조선 후기의 김정희(1768~1856)도 명선( 茗 禪 ) 이란 휘호를 초의 스 님에게 보내기도 했다. 둘째 검소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고려 제 6대 성종(981~997) 은 왕의 신분으로 공덕제를 올리기 위해 손수 차를 갈거나 보리 를 빻는 검소한 행동을 보였다 이는 다성 육우의 정행검덕( 精 行 11) 박권흠, 위의 책, 32쪽.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75 儉 德 ) 정신과 통한다고 하겠다. 셋째 애국[ 忠 ]정신을 들 수 있다. 이는 정몽주의 다시( 茶 詩 )에 서 엿볼 수 있으며, 신라 화랑의 차 ( 茶 )수련활동과도 일맥상통한 다고 볼 수 있다. 조선( 朝 鮮 )의 차( 茶 ) 문화와 정신에서 볼 때 고려의 의례시나 음다( 飮 茶 ) 풍속( 風 俗 )을 잇고자 노력하였고, 관료 문인 승려 등 많은 차인( 茶 人 )들이 있었으나 병자호란(1636~1637) 이후 차 ( 茶 ) 문화가 급격하게 쇠퇴하게 되어 차의 품격도 떨어지고 다시 ( 茶 時 ) 다식( 茶 食 ) 다모( 茶 母 ) 등도 본래의 뜻이 없어지고 그 언어만 남게 되었다. 조선말 다산 정약용과 추사 김정희, 초의 장 의순을 중심으로 한때 차 문화가 중흥되기도 하였으나 일제 강점 기를 맞이하여 거의 단절될 위기를 맛이 했다. 특히 다산 정약용은 다신계( 茶 信 契 )를 만들어 강진의 유배생활 18년을 끝내고 제자들과의 두터운 정의를 끊지 않고자 함으로 제 자들이 스승 다산을 모시고자 발기한 것으로 1818년 8월에 발기 한 것으로 차를 음미하면서 모임을 구성하는 모습은 그 의미가 크다고 할 수 있는 족적이다. 12) 그러나 동양의 전반적인 차 정신의 근본은 일본의 차인 센리큐 ( 千 利 休, 1522~1591)가 말했듯이 화경청적( 和 敬 淸 寂 ) 이다. 이 말은 차를 마시는 이유는 바로 서로 화목하고 존경하며 깨끗하 고 고요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는 것이다. 또한 초의선사는 동다 송 에서 中 正 의 정신을 말하는데, 체신수전유공과중정 중정불 과건령병( 體 神 雖 全 猶 恐 過 中 正 中 正 不 過 健 靈 倂 ) 이라고 했다. 이 뜻은 차의 근본인 몸[ 體 ]과 차의 싱그러운 기운이 비록 온전하다 12) 박권흠, 위의 책, 60쪽.
276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할지라도 오히려 중정을 지나치면 못쓰게 된다. 중정이란 우려낸 차의 빛깔이 좋아야 하고[ 健 ]차의 간이 함께 잘 맞아야 한다[ 靈 ] 는 것이다. 이처럼 차의 정신은 그 맛과 함께 정신성이 중요하게 지배되어온 것이 사실이다. Ⅲ. 차( 茶 )의 기원과 선( 禪 )의 배경 1. 차의 기원 차( 茶 )의 기원은 두 가지로 하나는 전래설이요 또 하나는 자생 설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차들은 전래 되였다기 보다, 우리 조상이 한반도에 정착하기 전 민족의 이동 경로를 통해 생활 습 관과 풍습을 민족이 가지고 다닌 것처럼 차 또한 가지고 다녔다 고 본다. 전래설에 입각한 내용을 볼 때 중국에서 전래되었다는 것이 있으나 그것은 육우( 陸 羽 )의 다경( 茶 經 ) 에서 나오는 정도 로 식경( 食 經 ) 에서 차를 오래 마시면 힘이 솟고 마음이 즐거워 진다. 는 내용에서 찾고 있을 뿐이다. 13) 우리조상들이 차를 어떻게 보았는가는 바로 차를 영물로 보았 으며 의식과 최상의 자리에 올려놓았던 것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삼성기전 상편( 三 聖 記 全 上 篇 ) 에는 택삼칠일제천신( 擇 三 七 日 祭 天 神 ) 이란 글이 나온다. 이것은 한웅천왕이 신시( 神 市 )에 도읍을 세우고 삼칠일을 택하여 천신께 제사를 지냈다는 내용이 다. 그 내용에 있어서 신( 神 )에게 일곱 번의 제를 지냈는데 첫째 13) 김의정, 앞의 책, 35쪽.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77 날에는 하늘의 신( 神 )께, 둘째 날에는 달의 신( 神 )께, 셋째 날에는 물의 신( 神 )께, 넷째 날에는 불의 신( 神 )께, 다섯째 날에는 나무의 신( 神 )께, 여섯째 날에는 금( 金 )의 신( 神 )께, 일곱째 날에는 당( 堂 ) 의 신( 神 )께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2. 차와 선( 禪 )의 배경 1) 불교와 차 불교가 탄생하기 이전 제의에 사용된 식물의 즙인 조로아스터 교의 하오마나 힌두교의 소마는 이를 매개로 신( 神 )과 인간이 교 감할 수 있다고 믿었던 신비스런 음료였다. 그러나 이두 음료는 모두 환각( 幻 覺 ) 성분을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냉철한 이성을 바 탕으로 우주와 인간의 본질적 관계를 명징하게 깨달으려는 불교 에서는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불교는 오랜 전통과 역사 속에서 유지되어 온 이 두 음료 대신 알가 즉 깨끗한 물을 의식에 사용 하는 새로운 역사를 시작하였다. 승가(samgaha, 僧 伽 )와 교단이 확립되어 의식의 내용과 형식 및 절차가 정해졌다. 부처를 모시는 대웅전 혹은 큰방에서 정해 진 시간에 드리는 예불의식 때 승려는 맨 먼전 등불을 밝히고 향 과 물을 올려놓은 뒤 암송을 한다. 이 암송하는 글귀가 다게( 茶 偈 )다. 게( 偈 )는 산스크리트 gatha 의 음역인데 부처의 공덕이나 교리를 찬미하는 노래 글귀이다. 예불문을 암송하기에 앞서 다계 ( 茶 偈 ) 를 외우는 것은 차의 기원에서 살펴보았듯이 일체의 신( 神 ), 혹은 우주 만물과 인간의 연기( 緣 起 )를 찬미하기 위해서 다. 14) 14) 정동주, 한국인과 차 다른세상, 2004, 55쪽.
278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차( 茶 )가 불교의 수행 승려들에게 차지하는 비중이 언제부터 차츰 커지기 시작했는지는 문헌으로는 없다. 하지만 차의 약리적 성분과 효험이 수행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으리라 여겨지기 에 중국불교가 가장 큰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불교문화 의 특성을 지닌 차는 승려들의 수행생활 전반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예전부터 중국차는 광동( 廣 東 )과 복건( 福 建 ) 지방에서 많이 생 산되었다. 이유는 연중 강수량과 따뜻한 기후이며 차가 자라기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이 지역에서 자생하는 식물이기 때 문에 아주 오래전부터 찻잎을 이용해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먹었다. 차(cha) 라는 어휘가 중국문화를 상징하는 말로 자리 잡게 된 것도 차나무가 주로 자라는 광동성, 복건성의 토착 언어 로 그대로 중국의 표준어로 삼았기 때문이고 cha 는 광동성 아오 문( 澳 門, Macau)의 사투리이고 te(테 또는 데) 는 복건성 하문 ( 厦 門 )지방의 사투리다. 15) 중국의 차( 茶 ) 문화는 당나라와 송나라 를 거치면서 이른바 번영기를 누렸으며 정관( 貞 觀 )의 치( 治 ),62 7~756) 에 육우( 陸 羽,733~804)는 청년기를 보냈다. 육우는 75 8년 무렵 중국 차문화의 긍지이자 중국의 차 역사에서 가장 탁월 한 저서로 평가받는 다경( 茶 經 ) 을 집필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당나라가 존속했던 약 3백년 간 중국의 차 문화 는 중국 禪 불교와 조화를 이루면서 톡특한 발전을 이룩했던 것이 다. 이시기에 차는 매우 엄격한 제도의 틀 안에서 만들어지고 유 통되는 등 국가 재정의 주요한 수입원이 되었다. 그래서 차는 세 속의 차 문화와 선불교 중심의 사찰 차 문화로 양분되어 발전하 15) 정동주, 위의 책, 57쪽.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79 였는데 세속의 차는 다예( 茶 禮 )의 근간을 이루는 다양한 행다법 ( 行 茶 法 )과 다구들의 발달을 가져왔고 선종( 禪 宗 )의 차 문화는 수 행과 명상 그리고 깨달음과 진리를 논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중 요한 문화를 형성하게 된 것으로 당시 도교의 도사들이 지향하는 목표와 닮았던 방법으로 은은한 향기와 부드러운 맛, 고요가 녹 아서 완성된 숲의 깊은 속살 같은 차 문화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앞에서 인용 했듯이 다도의 근본정신은 화경청적( 和 敬 淸 寂 ) 16) 이라고 해야 할 것임에 틀림없다. 다시 말해서 다인들이 행하는 의식의 모든 근본이 서로 기쁨을 논하고 또한 공경하는 마음이며 그것은 마음이 깨끗하게 정리된 공변됨을 일컫게 되는 것을 말한 다. 그리고 여기에 고요함을 함께함으로써 다도의 절대 경지를 16) 화경청적 이란 일반적으로 일본 다도의 근본철학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중국 송나라 때부터 있었던 차에 대한 기본철학이라고 한다. 일본다도에서의 화경청적의 의미 화 란 찻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과 주인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경은 주인과 손님 모두가 각기 불성을 지닌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청 은 물질적 정신적인 욕심 을 떨쳐낸 맑은 마음을 통해 자유롭게 되는 것이며, 적 은 공간적 고요함과 그 어 느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열반의 세계로 진입하는 것을 뜻한다. 불교에서의 화경청 적의 의미 和 는 일체 형상과 마음이 화합하는 것 화는 화합 혹은 조화로 이때의 화 합은 일체 형상과 마음의 모든 법이 모여 화합하여 서로 여의치 않는 것을 의미한 다. 또는 어떠한 것이 서로 간에 어긋나서 맞지 않는 것을 조절하여 일치점을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는 단지 외부적으로만 적당한 섞임이 아니라 물과 젖이 섞이듯 안과 밖이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 敬 은 일체의 존재를 공경하는 것 경은 생명 있는 것부터 무정물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존재에 대하여 공경하는 것으로 앞의 和 와 유 기적 관계이며 이 둘을 합하여 화경이라고 부른다. 경을 나타내는 대표적 인물이 모든 중생을 부처의 대상으로 보아 존경한다는 상불경보살이며, 이러한 대승의 보 살이 중생과 같이 하는 데 있어 6종의 방법을 쓰는데 이것을 일러 육화경 이라고 한다. 淸 은 자신의 내면과 외부의 더러움을 깨끗이 하는 것. 청은 깨끗함, 즉 청정 함을 의미하는 말인데 자신의 내면세계를 깨끗이 하는 자성청정 과 외부의 모든 더 러움을 깨끗이 한다는 뜻의 離 垢 淸 淨 두 가지가 있다. 寂 은 마음에 번뇌가 없고 몸에 괴로움이 없는 해탈, 선정의 상태 적의 문자적 의미로는 고요하다는 것이지만 불교적 해석은 生 死 하는 인과를 없애 다시는 어두운( 迷 ) 일을 반복하지 않는 적정 한 경계를 말한다. 다시 말해 마음에 번뇌가 없고 몸에 괴로움이 없는 상태를 적 이 라고 하며 해탈, 禪 定 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280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깨달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불교에서 말하는 존재론적 인식론적으로 말해보면, 일체개공( 一 切 皆 空 ) 이라 말하고 있듯이 일체의 사상( 事 象 )은 실 체가 없는 것 이며, 실천적으로 말하면 어떠한 것에도 집착되지 않고 걸림이 없게 하는 것 편견과 집착을 버리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한 곳에 집착되고 편견을 갖게 되면 그 사물의 참된 실상을 바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국 공( 空 ) 그 차제도 공으로 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다도의 깊은 맛 도 맑고 깨끗하며, 고요함을 유지하는 정신적인 것과 공간적인 것에 의지함을 표현하며 이러함은 실상으로 불교 선( 禪 )에서 표현 한 즉비( 卽 非 )의 논리( 論 理 ) 에서 볼 수 있는 것을 말하게 한다. 다도는 그러한 형식미에서 다시 그 형식미의 표현을 사유적 공 간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선사상에서 말 하는 모든 형식의 내용은 선( 禪 )사상에서 볼 때 하나의 담담한 사 유의 공간에 비춰지는 그림자에 불과함을 알게 한다. 다시 말해 서 다도에 있어서의 청적( 淸 寂 )의 사상이 그 형식미를 갖추고 있 지만 사실은 선( 禪 )사상의 배경이 되고 있음을 말하게 하는 것이 다. 선( 禪 )에서도 일찍이 이러한 선적( 禪 的 ) 형식이 있어왔다. 말하 자면 고요히 참선을 하는 것과 그 과정에서 차를 음미하는 것은 둘이 아님을 일찍이 일깨우는 작업으로 다선일미를 주장한 것은 비록 초의선사의 모습뿐만 아니라 그것은 선다( 禪 茶 )의 품격 있는 행위의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금강경 에서 응무소주 이생기심 ( 應 無 所 住 而 生 其 心 ), 마땅히 머무르는 곳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 야 한다 라는 사상은 불교 선( 禪 )에 있어서 공사상의 대표적인 화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81 두인 것을 알게 한다. 이러한 공관사상( 空 觀 思 想 )은 반야( 般 若 )의 空 사상으로, 끊임없이 부정으로 전개되는 즉비사상( 卽 非 思 想 )의 논리인 것이다. 17) 다도에서 말하는 청적( 淸 寂 )의 경지( 境 地 ) 는 달마의 벽관에서 말하는 청정하고 깨끗한 그리고 고요함을 유지시키는 선( 禪 )정신 에서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게 한다. 이러한 것은 송대( 宋 代 )의 종감( 宗 鑑 )은 석문정통( 釋 門 正 統 ) 달마장( 達 摩 章 ) 에서 여시 안심( 如 是 安 心 )이란 벽관( 壁 觀 )을 말한다. 라고 글을 인용한 뒤, 객진위망( 客 塵 僞 妄 )이란 들어가지 못하는 것을 벽이라 한다. 고 주석하고 있다. 이 일절은 아마도 벽관에 대한 적절한 의미를 부 여한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18) 이처럼 선( 禪 )의 근본 시조인 달마가 행한 벽관( 壁 觀 )의 모습도 마음의 평안함을 표현하는 하나의 행위이며 다도에서 청적( 淸 寂 ) 한 의식의 행위도 다선일치의 하나의 모양에서 볼 때는 선( 禪 )의 경지를 나타내는 절묘한 모습으로 표현한 것을 알 수 있다. 따라 서 선( 禪 )의 행위에서 다도는 객진( 客 塵 )이 들어올 수 없는 맑은 향기를 지닌 고요함을 표현한 것으로 다선일치의 곧은 선( 禪 )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은 내면적인 마음의 긴장과 통일이라 할 수 있 으며 모든 번뇌와 거짓된 망상이 들어갈 수 없는 마음이 장벽과 같이 스스로를 관찰하는 청정성의 진( 眞 )과 성속( 聖 俗 )등의 일체 의 차별과 분별의 경지를 뛰어넘는 순일무잡의 경지를 나타내는 행위의 모습이 바로 다도에서 바라본 선 정신의 응주( 凝 住 )이다. 초의선사가 도달한 승속불이( 僧 俗 不 二 )의 차별상이 존재하지 않는 선( 禪 )의 깊은 경지를 청우( 聽 雨 ) 에서 살펴본다. 17) 정성본, 禪 의 歷 史 와 禪 思 想, 三 圓 社, 1994, 94쪽. 18) 정성본, 禪 의 歷 史 와 禪 思 想, 三 圓 社, 1994, 161쪽.
282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江 上 晩 來 雨 강마을 비 내리는 저녁 舟 遊 滯 石 湖 뱃놀이 하다가 석호에 머물렀네. 淹 因 物 外 靜 모처럼 자연의 고요함으로 인해 聽 與 人 間 殊 들려오는 것이 속세와 다르네. 冷 入 羈 愁 緬 냉기는 나그네의 수심 어린 생각에 스미는데 滴 殘 歸 夢 孤 빗방울 소리가 돌아갈 꿈을 외롭게 하네. 靑 山 燈 影 夕 청산에 등불 밝힌 밤에 誰 復 憶 今 吾 누가 다시 지금의 나를 생각하리오. 一 枝 庵 詩 藁 二 배를 타고 행선( 行 禪 )하다 저녁 비 내리자 석호( 石 湖 )에 머무니 자연의 세계는 고요로 한낮과 대조를 이루었다. 그 가운데 초의 는 자신이 속( 俗 ) 아닌 승( 僧 )의 모습으로 청산( 靑 山 )에 등불을 밝 혀 선정( 禪 定 )에 잠기니, 속세( 俗 世 )의 뱃놀이와는 다른 선미( 禪 味 )를 느끼지만 속인( 俗 人 )은 그것까지는 알 수 없는 경지이다. 만상( 萬 象 )은 오도( 悟 道 )한 선승 초의의 시각에서 보면 산( 山 )과 수( 水 )가 둘이 아닌 무차별( 無 差 別 )의 세계로 보이게 된다. 산시 수 수시산( 山 是 水 水 是 山 ) 이다. 그러기에 산시산 수시수( 山 是 山 水 是 水 ) 라 하더라도 세간( 世 間 )에서 보는 이치나 수준과는 판이 하게 다르다. 또한 초의선사( 草 衣 禪 師 )의 선시( 禪 詩 ) 그 달을 떠서 찻잔에 담고 를 음미해 본다. 어제 밤에 뜬 보름달은 참으로 빛났다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83 그 달을 떠서 찻잔에 담고 은하수 국자로 찻물을 떠 차 한 잔에 명상한다. 뉘라서 참다운 다( 茶 ) 맛을 알리요 달콤한 잎 우박과 싸우고 삼동( 三 冬 )에도 청정( 淸 淨 )한 흰 꽃은 서리를 맞아도 늦가을 경치를 빛나게 하나니. 선경( 仙 境 )에 사는 신선( 神 仙 )의 살빛같이도 깨끗하고 염부단금( 閻 浮 檀 金 )같이 향기롭고도 아름다워라. 이처럼 초의 선사의 시에서 청정( 淸 淨 )한 맛과 청적( 淸 寂 )한 맛 이 살아 있는 경지를 다도의 찻잔에서 찾아내고 있음을 알게 한 다. 2) 조주선사( 趙 州 禪 師 )의 끽다거( 喫 茶 去 ) 조주종심( 趙 州 從 諶, 778 897) 의 속성은 학( 郝 )이며, 산동성 ( 山 東 省 ) 임치현( 臨 淄 縣 )출신이다. 스님은 어려서 고향의 용흥사 에서 출가하였으며, 숭산 소림사 유리계단( 琉 璃 戒 壇 )에서 구족계 ( 具 足 戒 )를 받았으나, 경전과 계율의 탐구에 뜻을 두지 않고 여러 총림을 행각하며 선사의 길을 걷다가 안휘성 귀지현 남전산의 남 전스님 문하에 입문하여 법을 이었다. 80세 때부터 조주성( 趙 州 城 ) 동쪽 관음원에 머물러 호를 조주
284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라 하였으며, 평생 검소한 생활을 하고 시주를 권하는 일이 없어 고불( 古 佛 )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897년 120세로 입적하였으며, 제자들에게 사리를 줍지 말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스님은 특히 화두를 많이 남겨 후대 선승들의 수행 과제가 되었는데, 벽암록 ( 碧 巖 錄 ) 에 전하는 100개의 화두( 話 頭 ) 중 12개가 스님의 것으 로, 특히 무자화두( 無 字 話 頭 )와 정전백수자( 庭 前 栢 樹 子 )가 유명하 다. 학인이 스님에게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없다. 학인이 다시 물었다 위로는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래로는 개미에 이르기까지 모두 불성이 있는데 개에게는 어찌 하여 없습니까? 스님이 말하였다 그것은 업식성( 業 識 性 )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 또 한 학인이 물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스님이 말했다 집집마다 그 문전에는 장안으로 통하 는 길이 있다. 질문한 스님에 의하면 개는 인간이 아니다. 그렇지만 대승불교 의 전통에서는 '일체중생실유불성'이라고 한다. 그것은 개도 불성 을 가질 수 있다는 말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학인의 질문은 교학 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스님의 대답이 범상하지 않다. 스님은 한 번은 개에게는 불성이 없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다른 한 번은 집집마다 그 문전에는 장안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 는 긍정 형식의 표현을 사용하여서 개에게도 불성이 있다고 대답 한다. 여기서 스님이 있다 와 없다 라는 상호 모순되어 보이는 대 답에서 노리는 것은 언어 외적인 것이다. 질문한 학인은 전해 듣 거나 스스로 습득한 관념을 의식의 배경에 두고 질문한다. 그는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85 진리에 대한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고 그것에 닫혀 있다. 그렇기 때문에 스님은 질문한 승려를 뒤흔들고자 한다. 즉 스님이 없다 라는 언명을 통해 노리는 것은 불성이 있는가, 없는가의 양단에 대한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으로서의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질문 하는 학인의 문자에 대한 집착을 파괴하는 기능을 가진 없다 인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있다 라는 표현도 불성이 있다 라는 식으 로 해석한다면 역시 죽은 말이 된다. 질문하는 승려는 유 무와 중생 부처 등의 관념에 얽매여 있 고, 스님은 이것을 깨기 위하여 질문자의 고집스러운 일변을 전 제한 질문에 대하여, 답변 하나가 모두 화두의 기능을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교묘하게 답변하고 있는 것이 된다. 즉 스님의 답변은 학인의 의문에 대하여 예상했던 해결의 방향을 제시하기보다는 막연히 가지고 있었던 해답의 실마리마저 끊어버 림으로써, 질문자에게 명백한 해답을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 로 의심의 상태를 만들어 주는 것이다. 언어를 본분의 작용을 어떤 상황에서나 열어 보이는 목적에 응 용되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불교는 조사선( 祖 師 禪 )의 특징이다. 즉 언어문자에 대한 조사선의 입장은 언어문자를 한편으로는 긍정적 으로 평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속박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 에 항상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조사선의 입장 에서 본다면 스님의 유( 有 ) 무( 無 )는 답이 하나의 정해진 해답으 로 굳어지는 것을 방비한 장치가 된다. 즉 의심의 뭉치를 고의로 만들어서 공부의 틀을 만들어 주고자 하는 것이다. 즉 스님이 있 다 와 없다 라는 상호 모순 되어 보이는 대답에서 노리는 것은 언 어 외적인 것으로서, 질문한 학인에게 의단( 疑 團 )을 만들어 주기
286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위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무자화두( 無 字 話 頭 )나 정전백수자( 庭 前 栢 樹 子 )로 표방되는 스님의 선법은, 이후 당대선( 唐 代 禪 )의 활발 한 창조적 정신의 쇠퇴를 극복하면서 새롭게 등장하는, 송대( 宋 代 )이후 선종의 주류 선법인 간화선( 看 話 禪 ) 운동의 촉매제가 된 다. 795년 17세에 깨달아 40년간 스승( 南 泉,748~834) 곁에 머물 면서 자신의 불투명성과 성격적 결함을 해소해 나갔다. 스승이 죽자 절에 머물면서 3년 상을 치른 뒤 당대의 선사들을 만나 스 스로 연마하기 위하여 20년 순례 길에 올랐다. 내가 100살 노인 을 만나서도 가르쳐줄 게 있으면 가르칠 것이요, 여덟 살 소년을 만나서 그가 내게 가르쳐줄 것이 있으면 배울 것이다. 그런 그가 여든 살이 되어서야 비로써 가르쳐도 될 만큼 성숙 했다고 여기고 선방( 禪 房 )을 열었다. 그 후 40년을 가르쳤는데 그 때의 가르침은 명징( 明 澄 )과 자비( 慈 悲 )와 해학의 경이 그 자체였 다. 동 시대 위산선사( 僞 山 禪 師 )는 조주선사를 일러 본 마음이 깨어나 그 자리에 있어서 돈오( 頓 悟 )하였다하더라도 그에게는 무 시( 無 始 )로 이해로 빚어진 습기가 아직 남아있어 단번에 제거할 수 없었다. 그는 여전히 작용하고 있는 業 (karma)에 그 원인이 있는 유식( 有 識 )을 완전히 끊어버리는 것을 배워야만 했다. 이것 이 수도이다. 그러면서 그럼 차 한 잔 마시게 선사는 늘 이렇게 웃 으시며 답했다. 그 마음이 평상심으로 높이 있었음이여 그 겸허 함이 경이로웠다. 조주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불교 선( 禪 )에서 가장 중심적인 인물이고, 마음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차나 한잔 먹고 가라는 뜻을 만들어낸 가장 핵심적인 인물이다.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87 3) 조주선사의 차 한 잔 왜 조주선사는 차 한 잔 먹고 가게나 하고 끽다거( 喫 茶 去 ) 화 두를 남기었는가. 조주선사가 말한 차나 한잔 먹고 가게 즉 끽 다거( 喫 茶 去 ) 는 당( 唐 )나라 이래에 불교의 화두이다. 이 화두 끽 다거 에 관하여 그 발생 배경이 자못 의미심장하다. 조주가 당( 唐 )나라 후기의 스님으로 천하조주( 天 下 趙 州 ) 라는 명성을 드날린 동아시아 선불교의 거장이었다. 그의 행장 을 살 펴보면 관음원( 觀 音 院 )이라는 빈약한 가난한 절에서 궁핍한 생활 을 이어가고 있었으며 그의 나이는 80세였다. 당시 명성에 걸맞 게 수많은 선승들이 깨달음을 구하고저 조주선사를 찾아오곤 했 는데 하루는 수행승이 찾아왔다. 이때 수행승을 보고 조주선사가 물었다. 그대는 이곳에 전에도 와본 적이 있는가? 처음 왔습니다. 차 한 잔 드시게나[ 喫 茶 去 ]. 선사는 또 다른 스님을 보고 물었다. 그대는 이곳에 왔었는가? 왔었습니다. 차 한 잔 드시게나 이때 절의 원주가 조주선사에게 의아한 듯 물었다. 스님은 어째서 이곳에 왔던 사람이나 안 왔던 사람이나 다 차를 마시라고 하십니까? 선사( 禪 師 )가 나즈막이 원주( 院 主 )를 불렀다. 원주 예 원주가 대답하자 선사는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288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자네도 차 한 잔 드시게나. 19) 여기서 조주선사 사상의 참뜻의 하나인 끽다거 는 차나 마시 고 가라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고 차를 마시면서 정신을 깨우치며 깨달음으로 가라 는 의미심장한 화두( 話 頭 )이다. 그래서 조주선사 의 끽다거 화두는 그 핵심 사상인 일상생활이 곧 도( 道 )라는 평상 심시도( 平 常 心 是 道 ) 와 만물일체사상( 萬 物 一 體 思 想 ) 을 대표하는 화두의 하나이다. 조주선사가 세 승려 모두에게 여기에서 보았느 냐 묻은 다음 차나 마시고 가라 하였음은, 차를 마시고 가라는 것 이 단순히 공간적 지리적 방향이나 여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고 하는 깊 은 의미가 내재되어 있는 것이니,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 가 성찰하라는 의미이다. 중국 송나라 때 송원숭악( 松 源 崇 岳 )선사는 이렇게 말했다. 조주의 끽다거는 독사가 옛 길에 가로누워 있어 밟으면 이내 잘못인줄 아는 것이니, 부처님이라도 그렇게 하기는 힘들다. 또 송나라 고승 황룡( 黃 龍 )은 이렇게 말했다. 조주의 끽다거는 우리 선종의 기특한 공안이니, (그 경지에) 이르든 이르지 못하든 바로 대낮의 도적들이다. 이처럼 선다일미( 禪 茶 一 味 )적인 차원의 모습은 내면자증( 內 面 自 證 :내면적인 마음)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19) 白 蓮 禪 書 刊 行, 趙 州 錄 下, 藏 經 閣, 1991, 11 章.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89 4) 조주선사의 선차일미( 禪 茶 一 味 ) 오래 전부터 중국은 차( 茶 )와 선( 禪 )을 하나로 묶으려는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차원의 흐름은 당대의 선사들이 이어왔고 당연이 조주선사는 차를 일상에서 선( 禪 )과 둘이 아닌 경지로 수행의 위치에서 바라본 것이다. 천 년 전, 조주선사가 다 선일미의 경지를 느끼었기 때문에 차나 한 잔 먹고 가게나 가 선 ( 禪 )의 화두로 되고 그것을 2001년 10월 중국의 백림사에서 선다 일미( 禪 茶 一 味 )의 학술연토회( 學 術 連 討 會 ) 에서 다시금 2004년 영명연수( 永 明 延 壽 ) 학술연토회 에서 북경대 누우열( 樓 宇 烈 )(193 4~) 20) 교수에 의해서 다시금 그 의미를 살펴보게 한다. 21) 누우열은 다선일미와 평상심 이란 내용을 발표하면서 조주선 ( 趙 州 禪 )과 조주차( 趙 州 茶 ) 모두 본분사로 봐야 한다는 내용으로 다선일미는 바로 평상심의 구체적인 회화적 표현이라는 것을 나 타낸다고 표현하였다. 다시 말해서 조주 차의 특징은 차가 당나 라 시기에는 보편적인 행위였습니다. 당( 唐 ) 이후에도 다선일미가 널리 유포되면서 식후에 차 세잔[ 飯 後 三 碗 茶 ]은 선사들의 가풍으 로 여겼습니다. 조주선사는 구법하러온 선승들에게 차를 마시라 고 강조했습니다. 돌이켜 볼 때 조주 선사는 차( 茶 )와 선( 禪 )을 한 경계로 놓고 보았습니다. 차를 마시는 일은 조주 시대에는 극히 보편적, 평상적인 일이었습니다. 조주선사는 학인들을 제접 할 때 차 마시는 일을 방편 법문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차를 통해 선종에서 화두로 외치었던 평상심이 묘미를 발견하게 되고 또한 선종( 禪 宗 )의 고승들이 흔히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잔다 20) 절강성 출신으로 현대중국사상을 철학적으로 조명시켰으며 禪 茶 一 味 에 대한 해박 한 지식과 견해를 가졌다. 21) 茶 의 世 界, 2005.8월호.
290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는 말로 평상심을 비유하여 선수행자들을 이끌고 수행밥법으로 삼았던 그 시대에의 차 마시는 그 자체를 차미( 茶 味 )라고 말했으 며 그것은 선도( 禪 道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요약해서 말하 자면 그 세계가 바로 선오( 禪 悟 )의 경지를 증득할 수 있는 경지라 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선다일미의 가장 특징적인 사상의 결미는 차로 인해 선을 깨닫고[(유다오선) 由 茶 悟 禪 ] 선으로 인하여 차의 품격이 높 아진다[이선품다( 以 禪 品 茶 )]라는 말로 표현해야 한다고 논거를 열 고 있다. 5) 조주의 끽다문화( 喫 茶 文 化 )의 일본전래 일본후기( 日 本 後 記 ) 홍인6년(815) 4월12일조 에는 일본의 제 52대 천황인 사가 천황( 嵯 峨 天 皇, 768~842)에게 승려인 에이쓰 ( 永 忠, 遣 唐 留 學 僧 )이 차를 달여 올렸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은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가장 오래된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고고학적으로 당시 차 도구를 실체를 조사해 보면 일본에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은 나라시대( 奈 良 時 代, 710~789) 후반의 제 5 0대 천황인 감무천황( 恒 武 天 皇,781~806)시대로 거슬러 올라간 다. 당시 열렬한 당풍문화의 애호자였던 사가천황이 죽은 뒤 차 마 시는 일과 그 일을 기록하는 일이 흐지부지 되면서 일본에서 차 의 전통이 끊어지게 된 것으로 보이나 밀교수행과 불교문화를 중 심으로 한 사찰의 차 문화는 계속되었다고 본다. 22) 당시에 영충 의 제자인 최증( 最 撜, 767~822), 공해( 空 海, 774~835)가 당나 22) 정동주, 한국인과 차 다른세상, 2004, 180쪽.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91 라에서 차를 경험한 일본인 유학파 승려였다. 사가천황 때 사절 을 수행하며 당나라에 간 승려들이 당나라 풍물과 문화를 도입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게 보면 일본인들이 차를 마시기 시작한 것 은 1,200년 전이라고 볼 수 있다. 송나라 때에 더욱 활발하게 중 국 차 문화를 배우고 훌륭한 찻그릇들을 많이 수입하면서 일본에 서는 독자적인 차 미학체계를 갖추기 위한 여러 가지 실험적 차 회( 茶 會 )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당( 唐 )과 송( 宋 )나라의 차 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은 한동안 철저 하게 중국에서 만든 차를 들여왔다. 찻그릇도 모두 중국에서 만 들어진 것이었다. 가장 대표적인 찻사발( 茶 碗 )은 천목( 天 目 ) 이라 불리는 것이었다. 차는 단차법( 團 茶 法 )으로 만든 것인데, 단차를 불에다 쬐어 가루를 만들어서 더운 물에 넣어 끓인 것이다. 또 차 한 찻잎을 가루로 만든 말차를 대나무로 만든 차선( 茶 筅 )으로 저 어 거품을 일으켜 마시는 법도 있었다. 헤이안( 平 安 時 代, 9~12)는 당나라 차법인 단차식 끽다법이 유 행했고, 가마쿠라( 鎌 倉 時 代, 13~14세기)와 무로마치( 室 町 時 代, 15~16세기)에는 주로 송나라 차법인 말차식( 抹 茶 式 ) 점다법( 点 茶 法 )이 유행하였다. 1191년에 중국의 차 종자가 일본에 들어가 여러 지역에 재배되기 시작하였다. 6) 선종의 말차법( 末 茶 法 ) 찻잎을 가루로 만들어 찻 사발에 넣고 다선( 茶 筅 )으로 차를 섞 어 거품을 일으키는 매우 이채로운 분위기를 만드는 말차식 점다 법을 최초로 일본에 도입하여 퍼뜨린 것은 가마쿠라시대의 선승 에이사이( 榮 西,1141~1215)라고 알려져 있다. 송나라 차 문화의
292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상징인 말차식 점다법을 일본화 시킨 에이사이는 일본 차문화 역 사에서 거대한 위업을 남긴 인물이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일본 인이 쓴 최초의 차문화 관련 전문서적 끽다양생기( 喫 茶 養 生 記 ) 를 저술한 것이다. 에이사이 이후로 수많은 일본 승려들이 송나라에 유학하여 이 른바 송풍문화를 배워서 돌아왔고, 일본 승려들을 따라서 송나라 승려들도 일본으로 왔다. 일본에서 송나라로 유학한 일본 승려들 이나 송나라에서 일본으로 온 중국 승려 대부분은 선종 승려들이 었다. 선종( 禪 宗 )과 차 문화가 긴밀한 관계를 맺게 된 것은 중국의 선 원( 禪 院 )에서 엄격하게 지켜온 생활규범인 선원청규( 禪 院 淸 規 ) 때문이다. 동복사( 東 福 寺 )를 창건한 원미( 圓 彌, 1202~1280)가 1 241년에 중국에서 돌아오면서 선원청규 를 가지고 왔다. 조동종 ( 曹 洞 宗 )을 일으킨 도원( 道 元, 1200~1253)이 영평청규( 永 平 淸 規 ) 를 지을 때 원미가 가져온 선원청규 를 인용함으로써 선원청 규 가 일본의 선종에 커다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선원청규 에 쓰여진 다탕( 茶 湯 ), 끽다( 喫 茶 ) 같은 말을 일본에 서도 사용하게 되었고, 당시 선원에서 매우 성대하게 차를 마시 게 되었다. 또한 차를 마시는 과정에서 다례( 茶 禮 )라는 것이 매우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특히 가마쿠라시대를 지나면서 끽다 가 확산된 것은 당시 일본의 차 재배지가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이 다. 동시에 찻잎의 품질이 다양화된 것도 중요한 원인이다. 23) 고산사( 高 山 寺 )를 창건한 묘에이( 明 惠 上 人, 1173~1232)가 차 의 종자를 심어 시작된 도가산( 梅 尾 山 )의 차는 본차( 本 茶 ) 라 불 23) 정동주, 위의 책, 183쪽.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93 리면서 특별히 진중하게 여겨졌다. 헤이안시대 후기에서 가마쿠 라시대의 일본 차문화는 주로 사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대부 분 약용으로 마셨다. 선종 승려들을 주축으로 한 매우 귀하고 거 룩하기조차 한 이국적인 문화였다. 이처럼 선종의 차문화는 격식 과 다도라는 차원을 한 차원 승화시키는 새로운 차문화를 형성하 고 전개되었던 것이다. Ⅳ. 결 론 고려 희종 때 스님인 진정국사( 眞 靜 國 師 )의 차시( 茶 詩 )에 귀한 차는 몽정산의 차 맛을 이었고/ 샘물은 혜산천에서 길어 온 것 같 구나/ 졸음을 쓸어내고 정신을 맑게 하니/ 손님을 대하여 다시 여유가 있네/ 단이슬이 땀구멍에서 솟아나고/공산의 운제상인이/ 차 자리를 마련했다고 함에/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를 식혀주네/ 어찌 영약을 구해서 마셔야만/불그레한 얼굴로 지낼 수 있다 하 겠는가. 이 처럼 다도( 茶 道 )와 선( 禪 )의 정신성은 차( 茶 )에 대한 삶의 내 용을 여유와 아울러 미학적으로 해석하는 것과 같은 의미를 지닌 다. 그래서 그 분야에 대한 논문과 저술은 차를 애호하는 사람들 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그러나 그 세세한 차의 정신성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다. 그것 은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 그 취( 取 )하는 행위에 있어 저술에서 남 기는 표현의 깊이에서 정신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차
294 정신개벽 17집 정은광 의 정신성을 논하기 전에 차란 무엇인가?, 왜 차( 茶 )를 인류가 마 시면서 그 차 정신을 함유하고 공유하였는가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요구하게 된다. 여기에는 차에 대한 깊은 호흡을 한 사람들이 먼저 공유하는 정신성이 있게 마련이었고, 시대적으로 보면, 신라의 화랑도들의 정신성에서 출발하여 고려시대의 다도에 대한 다례가 화려하게 의식의 광장으로 유포되고 공유하였다. 이것은 왕실다례까지 함 께하는 차가 인간정신과 영혼까지 지배하는 아름다운 표현의 장 르였음을 짐작하게 된다. 불교선가에서 말차를 먹는 것도 어느날 갑자기 있어진 것이 아닌 역사와 시대 그리고 일본의 선가 풍토 를 음미하게 된다.
다( 茶 )와 선( 禪 )의 배경 295 <참고문헌> 1. 茶 의 世 界, 2005, 8월호. 2. 정동주, 한국인과 차, 다른세상, 2004. 3. 白 蓮 禪 書 刊 行, 趙 州 錄 下, 藏 經 閣, 1991. 4. 정성본, 禪 의 歷 史 와 禪 思 想, 三 圓 社, 1994. 5. 박권흠, 한국의 차문화, 삶과 꿈, 2006. 6. 윤영해, 주자의 선불교 비판, 민족사. 2000. 7. 김용정, 서양철학과 선, 황금두뇌, 1992. 8. 유송월, 선명구2백선, 홍신신서, 1978. 9. 안동림 역, 벽암록, 현암사, 1993. 10. 동아시아 차 연구소, 조주선사의 끽다거, 차의 세계,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