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터치 마 27:38-50 예수님의생애와사역에서성령터치가첫번째였습니다. 성령터치는보통사람을특별한사람으로만드는사건이었고, 자연적인것을초자연적인것으로만드는계기가되었습니다. 예수님의사역은성령터치로시작하는놀라운것이었습니다. 두번째는말씀터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사탄의유혹과계략을기록된하나님의말씀으로물리치셨습니다. 사탄을내쫓는방법은하나님의권능의말씀에있습니다. 예수님께서신명기에기록된말씀으로사탄의간악한유혹을물리치신것을알수있습니다. 세번째는침묵터치였습니다. 성령님께서임하시고하나님의말씀으로마귀를물리치신후, 예수님의사역에초자연적기적들이나타나기시작했습니다. 병자들을낫게하시고귀신들을물리치시며죽은자를살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많은기적을행하시자동시에사람들의환호와갈채가드높아졌습니다. 당시사람들의인기는예수님께집중돼있었습니다. 사람들의환호성과박수소리가높을때, 예수님께서선택한방법은사람들의인기에야합하시지않고조용히떠나홀로산으로가셔서밤을새워기도하신것입니다. 고독하고외롭게단독으로하나님앞에서침묵터치하셨습니다. 네번째는기도터치였습니다. 예수님께서십자가를지실때까지가시는걸음을조금도흩뜨리지않고마침내갈보리산에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생애에서마지막으로겪어야했던시험은십자가를지는일이었습니다. 사탄은예수님께십자가를질필요가없다고유혹했습니다. 사탄은너무나집요하고광폭하게예수님을회유했습니다. 여기서예수님께서자신과의싸움에서이겨야하는시간을갖게되었습니다. 사탄의강한유혹에도예수님께서승리하실수있었던비결은땀이핏방울처럼떨어지도록기도하는것이었습니다. 바로기도터치였습니다. 십자가는 고난 지금까지살펴본바와같이예수님께서성령터치, 말씀터치, 침묵터치, 기도터치를통 해십자가를지는길을흔들림없이가셨습니다. 이제드디어예수님께서십자가를지십니다. 십자가란한마디로고난을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십자가를지신다는것은소풍가는것도아니고낭만적인일은더욱아닙니다. 인간이겪을수있는정신적육체적고통들이모두집중돼있는것이십자가를지는일입니다. 예수님의생애에서정점은십자가를지시는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그토록무섭고고통 스러운저주의십자가를지실수있었던비결은무엇일까요? 여기에서예수님의 고난터
치 가시작된것입니다. 기신것입니다. 고난터치는고난에대한예수님의응답으로서고난으로고난을이 예수님께서십자가의고난을친히담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십자가를지셔야모든인류를죄에서구원하실수있는것입니다. 마귀의유혹이계속되는가운데예수님께서어떻게험한십자가를지실수있겠습니까? 사람들의환호와갈채의유혹을기도로뿌리칠수있었다면, 고난의현장은어떤방법으로 이길수있겠습니까? 해답은한가지뿐입니다. 고난받기를택하시고직접뛰어들어고난을 이기는방법밖에없습니다. 이것이다섯번째로예수님의 고난터치 입니다. 모두 38절말 씀에주목합니다. 이때에예수와함께강도둘이십자가에못박히니하나는우편에하나는좌편에있더라. 참으로묘한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홀로십자가에못박히신것이아니라, 양쪽에두강 도와함께매달리신것입니다. 사람들은예수님을모욕하기위해양쪽에있는강도들과동 질의죽음이라고단정했습니다. 예수님의죽음은특별한것이아니라십자가형을선고받는 양쪽의두강도와같은죄인의죽음이라며애써의미를축소했습니다. 근본적으로다른예수님의십자가 그러나예수님께서양쪽에두강도와함께십자가에달리신것은세가지메시지를던져줍니다. 하나, 예수님께서지신십자가와두강도가진십자가는형태가같을지몰라도본질적으로전혀다른십자가입니다. 예수님의죽음은곧하나님아들의죽음입니다. 그러나두강도의죽음은죄를지어심판을받은죄인의죽음입니다. 예수님의고난은하나님께서받으시는고난입니다. 그러나두강도의고난은자신들의범죄로인해죄인들이받는고난입니다. 예수님의죽음은모든인류의죄를씻어주십니다. 하지만두강도의죽음은사람들의죄를씻어주지못합니다. 둘, 두강도는인류의모습을상징적으로보여주는그림입니다. 두강도는자타가인정하는십자가형에해당하는범죄를저질렀습니다. 사형당해야할죄인이예수님때문에살아난흉악범바나바도있습니다. 모든인류는십자가의두강도처럼죄를범해하나님의영광에서떠나있는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 절에 모든사람이죄를범하였으매하나님의영광에이르지못하더니 라고말씀하십니다. 그런데재미있는것은예수님바로옆에있던두강도들중에한명은구원을받고, 한명은구원을받지못했던사실입니다. 이는모든인류에대한구원의모습을상징적으로보여주고있습니다. 어차피인간은허물과죄로죽었던진노의자식들이요, 공중권세잡은자를따랐던죄의 노예들입니다. 따라서인간이선택한길은죽음이고지옥이며, 이미사망선고가내려진상 태입니다.
예수님께서중앙에있고양옆에두강도가있습니다. 한강도는계속해예수님을저주합니다. 네가하나님의아들이냐, 너자신이나구원해봐라. 인류의반은예수님을저주하는왼편강도와같은분류입니다. 자신이지은죄로심판을받아죽음을맞이할뿐인데, 예수님에게조롱하며핍박을가합니다. 인류의나머지반은인간으로서죄를지어십자가에달린것을회개하고예수님께구원을요청하는오른편강도와같은분류입니다. 그는예수님을저주하는강도에게 너와나는죄값을받아마땅하지만, 예수그리스도는무슨죄가있느냐 고나무라며오히려 예수여, 당신의나라에임하실때나를기억하소서 라고부탁합니다. 셋, 사람이과거에어떤죄를지었든지숨이끊어지는순간에예수님께구원을요청하면응답을받는다는것입니다. 그런의미에서자살한사람을두고지옥으로갔다고함부로단정할수없는것입니다. 따라서우리는사람을두고그가구원을받았다, 못받았다고함부로말해선안됩니다. 구 원은전적으로하나님께속한것이기때문입니다. 저의아내가미국에있는친구에게서걸려온전화를받고나서, 혼수상태에빠진사람이세례를받지못하고죽을까봐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러면서저에게어찌하든그사람에게가서세례를주고오라고했습니다. 저는하는수없이미국에있는유진소목사님께부탁했습니다. 사람이깨어나야예수님을믿으라고전할텐데, 그사람은깨어날기미를전혀보이지않는다고했습니다. 그래도유목사님은병상으로다가가기도하고있는데, 그사람이벌떡일어나더랍니다. 너무놀란나머지당신에게세례를주러왔다고하자, 세례를받겠다고했습니다. 그래서세례를주니다시쓰러져하늘나라로갔습니다. 이와같이사람의구원문제에대해선모르는것입니다. 사탄의조종을받는인간의폭력성 최근에 그리스도의수난 (The Passion of Christ) 라는영화가상영되고있습니다. 온누리교회성도님들은모두이영화를감상하셨으면좋겠습니다. 그영화는우리에게너무나큰충격과동시에감동을안겨줍니다. 예수님께서십자가를지시기까지 12시간동안의고난을너무실감나게그려놓아벌린입을다물지못하게만듭니다. 영화에대한후감은한마디로몸서리가쳐집니다. 예수님께서사람들에게무자비하게얻어맞고많은모욕을당하며이리저리끌려다니다마침내사형선고를받으십니다. 저는영화를보는동안인간의잔인함에대해내내생각했습니다. 피에굶주린인간들은예수님을때리다가끝부분에쇠붙이가달려있는로마당시의채찍으로막무가내로후려칩니 다. 그모습을보면서저는인간의원죄적폭력성을실감했습니다. 인간에게내재된폭력성
은이성을넘어서는것입니다. 이와비슷한장면을우리는 TV 뉴스에서종종보게됩니다. 아프간과이라크의전쟁에서발견되는인간의폭력성, 세계곳곳에서발생하는자살폭탄테러, 국내는현대그룹의정몽헌회장, 부산의안상영시장, 대우건설의남상국사장등자살의영이가득한현상등입니다. 국내뿐아니라세계도처에서자살의영이유행처럼번져이땅을점령하고있습니다. 저는한국이잘사느냐못사느냐하는문제엔관심이없습니다. 한국은영적부흥의혁명이일어나야합니다. 사회적약자와어린이를착취하는사회현상에서더많은돈을벌게한다는것은인간폭력성의신장외에별다른의미가없다고봅니다. 예수님을모욕하고십자가에매달아처형하는사람들은단순히예수님을때리고사형시키는것이아니라, 내면에감춰져있는인간의잔인함과폭력성을그대로노출하는것이라고생각합니다. 분노를발하며폭력을행사하는사람들을살펴보면, 그들의배후에사탄의그림자가맴돌고있는것을알수있습니다. 화를내며발버둥치는사람을보면, 제정신이아닌경우가많이있습니다. 이는인간에게내재돼있는분노, 파괴, 폭력의본능인것입니다. 이를인간들은도덕, 교양, 이성이라는이름으로극도로자제하고있을뿐입니다. 39~42 절말씀입니다. 지나가는자들은자기머리를흔들며예수를모욕하여가로되성전을헐고사흘에짓는자여네가만일하나님의아들이어든자기를구원하고십자가에서내려오라하며그와같이대제사장들과서기관들과장로들과함께희롱하여가로되저가남은구원하였으되자기는구원할수없도다저가이스라엘의왕이로다지금십자가에서내려올지어다그러면우리가믿겠노라. 조롱뒤에폭력이따르게마련입니다. 예수님에게조롱하고폭력을휘두른사람들중에로마병정만있었던것은아닙니다. 유대지도자들과바리새인들과서기관들에게매수된하수인들도있었습니다. 그리고피에굶주린군중들이있었습니다. 군중들은분노를발하며성난파도처럼움직입니다. 이성을잃고정의라는이름으로순식간에폭도로돌변할수있습니다. 이것이폭력의본질입니다. 고난으로고난을이기시다 우리는인간의분노와폭력성을자극해자기목적을달성해선안됩니다. 요즘 TV 를보면, 자기안에있는폭력성과잔인성을발견하게됩니다. 우선우리는예수님을향한사람들이조롱하는소리를듣게됩니다. 다음으로우리는채찍을치는소리를듣게됩니다. 그리고우리는조롱과폭력에도변하지않는예수님의얼굴을발견하게됩니다. 예수님의얼굴은어떤모습이었을까요? 인류의모든죄를지신하나님의아들로서조금도흩뜨려지지않은삶의모습을통해예수님의얼굴을그릴수있습니다. 이는 고난터치 의결과로고난을피하거나거부하시지않고고난속으로들어가셔서승리하신모습입니다. 조롱, 폭력, 채찍, 가시면류관, 십자가의처형을원망하시거나거부하시지않고그대로수용
하셨습니다. 많은고난이엎치고덮쳐도그대로받아들이셨습니다. 우리는예수님의고난을통해세가지사실을발견할수있습니다. 첫째, 예수님께서스스 로죽음으로가셨다는것입니다. 둘째, 상대방이폭력으로나올때비폭력으로맞섰다는것 입니다. 셋째, 자신에게고통을주는사람을위해기도하신것입니다. 스데반은사람들이던 지는돌에맞아죽으면서도 아버지여, 저들이하는일을저들도모릅니다. 저들의죄를용 서하여주옵소서 라고기도했습니다. 고난터치는고난을겪는다는것이아니라, 고난이닥쳐와도물러서지않고이겨낸다는것입니다. 폭력에맞서비폭력으로이기고, 미움에맞서중보기도로이기는것입니다. 죽음을받아들임으로써죽음을이기고, 고난을받아들임으로써고난을이기는것입니다. 43, 44절말씀입니다. 저가하나님을신뢰하니하나님이저를기뻐하시면이제구원하실지라제말이나는하나님의아들이라하였도다하며함께십자가에못박힌강도들도이와같이욕하더라. 예수님께서사람들에게핍박을받으신근본이유는자신이하나님의아들이라고주장하신것때문입니다. 그리고예수님께서받으신고난의정점은십자가에달리신것이아니라, 하나님의외면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버림받으신예수님 우리는조롱을받고핍박을당하며손가락질받아도하나님께서함께하신다면곧위로를받을수있습니다. 그러나하나님께서외면하신다고느낀다면망연자실하고맙니다. 45, 46 절말씀을봅니다. 제육시로부터온땅에어두움이임하여제구시까지계속하더니제구시즈음에예수께서크게소리질러가라사대엘리엘리라마사박다니하시니이는곧나의하나님, 나의하나님, 어찌하여나를버리셨나이까하는뜻이라. 갈보리산의십자가처형에서절정은예수님께서 하나님, 어찌하여나를버리셨나이까 라고외치신부분입니다. 예수님께서하나님의외면을경험하신것입니다. 하나님께서외면하시고떠나신다는것은너무나힘들며고통스러운일입니다. 이를좀더자세히말하면, 하나님께서예수님에게서아주떠나신것을뜻하는게아닙니다. 예수님께서인류의모든죄를지시고십자가에못박혔기때문에죄와상관없으신하나님께서예수님께서담당하신인간의죄에대해외면하신다는뜻입니다. 다시말해하나님께서예수님을외면하신것이아니라, 예수님께서십자가에서지신인류의죄를대속하신순간만큼하나님께서죄에대해외면하셨다는뜻입니다. 하나님께서죄를외면하시고예수님마저버리셨지만결과는모든인류가구원을받을수있
게된것입니다.47절에서 50 절말씀까지읽습니다. 거기섰던자중어떤이들이듣고가로되이사람이엘리야를부른다하고그중에한사람이곧달려가서해융을가지고신포도주를머금게하여갈대에꿰어마시우거늘그남은사람들이가로되가만두어라엘리야가와서저를구원하나보자하더라예수께서다시크게소리지르시고영혼이떠나시다. 여기서우리는부활이의미를되새길수있습니다. 하나님께서십자가에매달린예수님을버리셨기때문에의미가큰것입니다. 세상죄를지고가는하나님의어린양이죽음을거부하지않고고난받기를수용하셨습니다. 만약예수님께서십자가의죽음을피하셨더라면, 인간의죄는사함받을수없는것입니다. 따라서예수님께서온인류의죄를용서하시기위해고난을피하시지않고고난받기를수용하시고승리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예수님께서지시는십자가의의미를이사야서 53장 4~6절말씀에서찾아봅니 다. 그는실로우리의질고를지고우리의슬픔을당하였거늘우리는생각하기를그는징벌을받아서하나님에게맞으며고난을당한다하였노라그가찔림은우리의허물을인함이요그가상함은우리의죄악을인함이라그가징계를받음으로우리가평화를누리고그가채찍에맞음으로우리가나음을입었도다우리는다양같아서그릇행하여각기제길로갔거늘여호와께서는우리무리의죄악을그에게담당시키셨도다. 예수님께서고난을받으셨으므로우리가평화를얻었고, 채찍에맞으셨으므로우리가나음을받았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의고난을묵상하는한주간이되어진정한고난의의미를해석할수있게되기를축원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아버지! 예수님의십자가의고난이우리의죄를씻어주시고예수님께서맞으신채찍이우리의병을낫게하시며, 우리의절망을치료해주신놀라운은혜를찬양합니다. 오늘성도님들이성만찬을나눌때이축복이넘치게하여주옵시고또영상을볼때십자가를깊이묵상하는축복을허락하여주옵소서. 예수님의이름으로기도드립니다. 아멘. 온누리신문 제공 - http://www.onnuri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