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평화 미래를생각하는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역사학교 친일인명사전 발간 5 주년특별강좌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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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학석사학위논문 공공기관기관장의전문성이 조직의성과에미치는영향 년 월 서울대학교행정대학원 행정학과행정학전공 유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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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평화 미래를생각하는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역사학교 친일인명사전 발간 5 주년특별강좌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014. 11. 18~12. 18 화 목늦은 7 시 다래헌

인권 평화 미래를생각하는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역사학교 친일인명사전 발간 5 주년특별강좌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강 11. 18( 화 ) 한국근현대사와 친일 이만열 ( 초대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전국사편찬위원장 ) 2강 11. 20( 목 ) 민족의죄인 -모럴부재의친일문학 임헌영 ( 민족문제연구소소장 / 문학평론가 ) 3강 11. 25( 화 ) 화필보국 - 화폭에담은멸사봉공 최열 ( 미술평론가 ) 4강 11. 27( 목 ) 매국배족으로얻은부귀영화 - 조선귀족열전 이용창 ( 민족문제연구소편찬실장 ) 5강 12. 2( 화 ) 황국신민화의첨병 - 지식인층의친일행태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연구실장 ) 6강 12. 4( 목 ) 선율에날려버린예술혼 - 황도음악 노동은 ( 중앙대명예교수 ) 7강 12. 9( 화 ) 천황 의충견 - 제국군인과경찰 박한용 ( 민족문제연구소교육홍보실장 ) 8강 12. 11( 목 ) 총동원체제의나팔수 - 친일영화 이준식 ( 민족문제연구소연구위원 ) 9강 12. 16( 화 ) 강요된선택인가내면화한신념인가 - 친일 옹호의논리와구조 김민철 ( 민족문제연구소책임연구원 ) 10강 12. 18( 목 ) 반민족범죄고발서 친일인명사전 을말한다 윤경로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 전한성대총장 ) 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민족의죄인 - 모랄부재의친일문학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소장 / 문학평론가 1. 역사의마중물로서의문학 1945 년 12월 30일전후봉황각 ( 천도교연수관 ) 에서개최되었던문학인좌담회에는김남천, 이태준, 한설야, 이기영, 김사량, 이원조, 한효, 임화가발언을했는데, 임화는 이번태평양전쟁에서일본이지지않고승리를한다, 이렇게생각해볼순간에우리는무엇을생각했고어떻게살아갈랴고했느냐 는게자기비판의근원이되어야한다면서, 일개초부로평생을두메에묻혀끝막자는것이, 한줄기양심 이라면, 마음속어느한귀퉁이에강인히숨어있는생명욕이승리한일본과타협하고싶지않았던가? 고되물으며문학자의삶과진실의문제를제기한다 ( 김윤식 << 한국문학사논고 >> 법문사 3부 1장, << 한일문학의관련양상 >> 일지사 46~49 쪽, << 김윤식전집1>> 솔 524~530 쪽참고 ). 친일파청산의호기였던광복직후좌우익문학예술단체가다 민족문화예술 을거론하면서도정작청산문제를교묘하게비켜갔다. 좌우익이그치욕의정도차이는있으나상대를돌로치기에는스스로도죄없는몸이아니어서단체의슬로건이나명분에서는친일예술청산을내세우면서도이론논쟁에서는아슬아슬하게초점을비켜간흔적이있다.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합친조선문학가동맹의강령 1항은 일본제국주의잔재의소탕 인데, 이것은문학건설본부의강령 1항이었던 일본제국주의에의한일체의야만적이고기만적인문화정책의잔재를소탕하고이에침윤된문화반동에대한가차없는투쟁을전개한다 는데서한발물러서있다. 좌익의형해화해버린친일파청산의지는이후이광수. 최남선. 박영희등몇몇속죄양으로서의우파문단주류세력에대한제동장치정도로제한적인전략개념에가까운것이었다. 이광수의 << 꿈 >> 과박영희의 << 문학의이론과실제 >> 를판금조처하라고미군정당국에다요구한것은좌익문학단체로서친일문학인에대한최소의희생자줄이기와당면한문학단체의헤게모니쟁탈을겨냥한것으로볼수있다. 다른분야와는달리명백한증거가가장많이남아있는것이문학인의친일이건만가장논란이많은것은강제성에의한것으로자발성이없었다는점과, 대가성이없었다는점을들고있다. 과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

연그럴까. 여기서는이광수의행적을통해서친일문학인의전반적인문제의전형성을추구해보 려고한다. 2. 이광수의친일등단작 (1916 년 ) 민족해방투쟁이든반민족친일행위이든대중적인확대와심화를위해서는지도급인물이절실한데, 앞의경우는투쟁을통해서자연발생적으로형성되는데비하여, 뒤의인물들은일제의침략정책이빚은고도의정략적인차원에서조작해내기일쑤였다. 그가장좋은예가이광수일것이다. 그가일본제국의식민통치관료와어떤공생관계를이뤄왔는가를살펴보는일은친일파연구에많은시사를줄것이다. 이광수가인촌김성수의후원으로두번째일본유학길에오른건 24세때인 1915 년 9월이었다. 이듬해 7월와세다 ( 早田 ) 대학예과를 2등졸업 (7월 5일 ) 한그는와세다대학철학과에무시험장학생으로결정되었기때문에일시귀국, 총독부기관지로당시유일한한글일간지인 << 매일신보 >> 에 < 대구에서 >(1916.9.20.-23) 라는서간체기행문을연재했다. 어떤경로를통했는지는알수없으나, 이때 << 매일신보 >> 에는작가선우일 (1906 년부터친일지 << 국민신보 >> 기자 ) 이발행인겸편집인이고그아래에작가이상협 ( 당시사회문화부장, 나중발행인겸편집인 ), 그리고갓입사한역시작가인심우섭 ( 심훈의맏형. << 무정 >> 의신우선기자의모델 ) 이있었다. 셋다언론인으로 << 친일인명사전 >> 에들어있는데, 이중춘원이누구와선이닿았는지는명확히밝혀지지않았으나나중여러행적을보면심우섭이연을이어주었을가능성이높다. 어쨌든 < 대구에서 > 는춘원이명백히친일의수렁에발길을담군첫작품이다. 임종국선생은이광수의일문소설 < 사랑인가 >(1906, 18세 ) 를첫친일작품으로평가하지만, 정치사회적인관점으로보자면아무래도이기행문을들어야할것같다. 비를맞으며대구에도착한춘원은대구의몇몇친구를방문하고는가는곳마다화제로떠오른 강도사건 을거론한다. 중류이상출신자들에다상당한교육도받은자들이 대구친목회 ( 사실은달성친목회 ) 를조직, 대규모의 대죄 를범하였다고썼다. 사건의진상은이미일제에의하여강제해체당한전 달성친목회 회원중일부 ( 김진우, 김진만, 정운일, 최병규등 ) 가대구지역의이름난세부호 ( 정재학, 이장우, 서우순 3인. 앞의둘은 << 인명사전 >> 게재 ) 에게독립자금을내라고요구, 불응하자권총테러를시도한사건으로일명통감단 ( 統監團 ), 애국단, 광복단, 세칭 대구권총사건 이라부른다 ( 김일수, <1910 년대달성친목회의민족운동 > 참고 ). 독립투쟁을 강도 사건으로조작한춘원은그들을한낱파렴치한범법자로보면서이들을다스리는방법을총독부에건의하는내용이이기행문이다. 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만일저 20여명으로하여금서양사 1권이나국가학 1권은말고, 1,2년동안신문잡지만읽게하였더라도자기네농력과그만한수단이족하고그목적을달 ( 達 ) 치못할줄을깨달을것이니, 일찍해외에있어격렬한사상을고취하던자가동경에와서 2,3년간교육을받노라면번연히인구몽 ( 引舊夢 ) 을버려이전동지에게부패하였다는조소까지듣게되는것을보아도알지라. 이광수, < 대구에서 > 그목적을달치못한다는건한국의독립이불가능함이며, 해외의격렬사상고취란독립투사들의투지를뜻한다. 터놓고말하면국내외의독립운동가들을부랑불순범죄세력으로보면서일제는산업을진흥시켜이들에게일자리를제공하여식민지의안정을취하라는요지다. 이글은약발좋게식민지조선언론의사령탑인아베미츠이에 ( 阿部充家 ) 를감동시켰다. 일제는강제병탄직전한국의많은언론을통폐합시켜일어신문 << 경성일보 >> 산하에다한글신문 << 매일신보 >> 를두었는데, 아베는바로 << 경성일보 >> 의사장이었다. 심우섭의안내로춘원은욱정 ( 旭町, 현회현동 ) 의아베집을찾아가아침식사를함께했는데, 그덕분인지 < 대구에서 > 연재가끝난나흘뒤부터 < 동경잡신 ( 東京雜信 )> 을연재 (1916.9.27.-11.9) 하게되었다. 3. 일본의괴벨스도쿠토미소호 < 동경잡신 > 은제목이시사하듯이춘원이동경유학에서듣고보고느낀교육, 사회, 풍속, 문명등을쓴잡문인데, 요지는못난우리민족은일본과도쿄의우수한문명을수용해야된다는민족개량주의의엉성한입문격이다. 그런데이글에서반드시짚고넘어가야할대목이있다. 일반인들이꼭읽어야할책 7권을소개했는데마지막에도쿠토미이이치로 ( 德富猪一郞 ) 저, 나미키센타로 ( 木仙太 ) 와쿠사노시게마츠 ( 草野茂松 ) 편 << 소호문선 ( 蘇峰文選 )>>( 民友社, 1915) 이란책을거론했다. 저자도쿠토미이이치로는필명이도쿠토미소호 ( 富蘇峰, 1863-1957) 로이광수에게자기아들이되어달라고했던조선침략원흉의하나다. 이해를돕기위해간략히소개하면아래와같다. 도쿠토미소호 (1863.1.25.-1957.11.2.). 熊本縣 ( 쿠마모토겐 ) 출생, 본명도쿠토미이이치로 ( 德富猪一郞 ). 도쿄영어학교, 도시샤영어학교 ( 同志社英語學校 ), 여기서설립자니지마조 ( 新島襄 ) 에게세례받음. 중퇴, 교회에서제명됨. 1887, 출판사민유샤 ( 民友社 ), 일본첫종합지 << 고쿠민노토모 ( 國民之友 )>>, 1890 년 << 고쿠민신문 ( 國民新聞 ), 1891 년 << 고쿠민총서 ( 國民叢書 )>>, 1892 년 << 가정잡지 ( 家庭雜誌 )>> 등발행. 1910 년데라우치마사타케 ( 寺內正毅 ) 조선총독주도의 << 경성일보 ( 京城日報 )>> 감독. 이광수에게막대한도움과영향줌. 제2차대전후 A급전범용의자. << 근세일본국민사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5

( 近世日本國民史 )>>, 100 권, << 승리자의비애 ( 勝利者の悲哀 )>> 등저술. 도쿠토미에대하여길게설명할시간이없는게안타까운데, 요약하자면일본의조선지배당위성을일찍부터강조해오던그는데라우치마사타케 ( 寺內正毅, 이토히로부미피살후 2대한국통감, 병탄실현후초대조선총독 ) 와막역한관계로조선의언론통폐합시나리오의작성자이자식민지조선언론계의총독격 ( 공식직책은 << 경성일보 >> 감독 ) 이었다. 운영, 인사, 검열, 감독등일체의권한이그의손아귀에있었는데, 일본의 << 고쿠민신문 ( 國民新聞 )>> 사장을겸임했기에연간 2회정도조선에들렸다. 그는일본의군부, 정계, 재계와밀착한언론인으로파시즘체제이데올로기의창출자이자수호자로 조선인에게언론자유를주는것은 혁명사상의온상 을제공하는꼴 이라고공공연히경고하면서모든신문을통폐합하여한글, 일어, 영어일간지를각각하나씩만남겨이를총독부기관지로만들었을뿐만아니라아예한사장밑에한글과일어신문을두도록만든인물이다. 위에서이광수가만났던 << 경성일보 >> 사장아베는바로 << 고쿠민신문 >> 의부사장출신이었다. 조선병탄후도쿠토미는 << 경성일보 >> 에 < 조선통치의요의 ( 朝鮮統治の要義 )>(1910.10) 라는글을썼다. 10개항목으로구성된이글의요지는식민지의불가피성, 언론통제의당위성, 조선인의약점등등을열거하면서무단 ( 武斷 ) 통치만이해결책이라는것이었다. 소호 ( 蘇峰 ) 씨는일본최대한신문기자니씨의 20년간웅혼경건 ( 雄渾勁健 ) 한문장도일본의금일의문화에다대한공헌을하였나니차 ( 此 ) 를독 ( 讀 ) 함은일본문명사를독함과여 ( 如 ) 하여갱 ( 更 ) 히기 ( 其 ) 문장이학 ( 學 ) 할만만하니라 고이광수는이책을추천했다. 나도아직못본이책목차는아래와같다. 第一編明治十九年より明治二十六年 ( 二十七年上半を含む ) の期間第二編日役の期間第三編明治二十九年 ( 二十八年下半を含む ) より明治三十六年の期間第四編日露役の期間第五編明治三十九年より明治四十五年の期間第六編家大故の時第七編大正時代追加 도쿠토미는식민조선에대하여 < 조선통치의성적 >, << 주변의파동 >, < 평화와질서 >, < 동화의실 > 등에서식민지발전론 ( 현재의식민지근대화론 ) 과조선인의일본동화성공이유, 일선동조론 ( 日鮮同祖論 ) 등나중친일문학인들이써야할내용을모범답안으로미리제시해주고있다.( 더자세한것은정일성, << 일본군국주의의괴벨스도쿠토미소호 >>, 지식산업사, 2005, 참조할것 ). 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이책을추천한이광수의속내는무엇일까? 공교롭게도자신이하고싶은말을대신해주었을뿐만아니라이론적인배경까지제시해준사상의은인이란판단이었을까. 나는몇년전쿠마모토에있는도쿠토미의기념관을찾은적이있다. 정확히는그와다섯살아래의동생인유명한작가도쿠토미로카 ( 蘆花 ) 를함께기념하는시설이었다. 정식명칭은도쿠토미기념원 ( 富記念館 富居 ) 으로소재지는웅본현웅본시 ( 熊本熊本市大江 4-10-33.) 富蘇峰 ( 도쿠토미소호 ) 와蘆花 ( 로카 ) 형제가유소년시절을보낸집이었다. 동생로카 ( 蘆花, 1868.12.8.- 1927.9.18) 는작가, 수필가. 도시샤대 ( 同志社大 ) 영문과, 기독교신앙, 톨스토이즘믿음으로나중에직접그를방문했으며형의국가주의사상에반대하여절연의뜻으로 1903 년 < 告別の > 썼다. 소설 << 호토토기스 ( 不如歸 )>> 등. 여기서같은성도쿠토미인데도한자가다른걸주시하시라. 토미 ( ) 의위에점이없다. 형과의단절의표시로반드시그렇게썼다고기념관안내문은밝혀주었다. 이광수가일본의괴벨스에게아예터놓고공개적으로이만큼충의를보였으니화답이있어야할것아닌가. 아베미츠이에 << 경성일보 >> 사장이자기상관도쿠토미에게조선의유망한청년이광수를만나게해준것은 1917 년 8월 5일경관부연락선이도착하는부산부두였다. 기행문 < 대구에서 > 와 < 동경잡신 > 을쓴뒤이광수는 << 매일신보 >> 에엄청나게많은글을발표하여가히그신문이총독부기관지가아니라이광수의기관지라할만하다. 더구나아베의입장에서는이런충직한청년을믿고문학에서는아직풋내기지만장편 << 무정 >> 연재소설을맡길만하지않았겠는가! 1917 년 1.1-6.14 일까지 << 무정 >> 연재를끝낸이광수에게여름방학을이용하여총독부시정 5년기념민정시찰을제의, < 오도답파여행 ( 五道踏破旅行 )>(<< 매일신보 >>, 1917.6-8.) 을연재했다. 조선인기자로는처음이라하여회사나총독부로부터도각지관헌에통첩을보내, 가는곳마다실로면목이없을정도의성대한환영을받았다 는이여행기는 우리를빈궁하게만들고우약 ( 愚弱 ) 하게만든옛날은영원히장사 ( 葬死 ) 하고, 우리는우리의새세대를최선을다하여곱고아름답고부 ( 富 ) 하고강하게만들어야한다. 반도의싹트는삼림이날로성하듯이신시대의새생명은시시 ( 時時 ) 로성장한다. 는취지로, 마치박정희독재때의영화 << 팔도강산 >>(1967) 의전범을보여주는듯하다. 칙사대접을받으며충남과전남북을돌던이광수는시간에맞춰아베와함께도쿠토미를영접하러부산부두로나갔다. 이첫만남이후둘은일생동안연을이어갔다. 4. 민족개량주의의대가 도쿄유학중이광수가폐결핵에걸려 (1917 가을 ) 허영숙의간호를받다가열애에빠졌다는사연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7

은너무나잘알고들있을터다. 우시고메여의전 ( 牛女醫專, 정식명칭은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 東京女子門校, 소재지명칭으로우시고메로도부름 ) 학생허영숙은이미일본에서이광수와몇번요양여행을다녀뗄수없는관계가되었고, 이광수는첫아내 ( 백혜순 ) 와신변정리를해나갔다. 그녀는졸업후귀국 (1918.7), 부모의반대를무릅쓰고 10월이광수와함께북경으로사랑의망명을떠났다. 아베 ( 阿部充家 ) 는춘원에게여비와봉천총영사등에게소개장까지써주었다. 그러나춘원의사랑의망명은단재신채호를우연히책방에서만나면서산산조각이났다. 그는춘원에게젊은여자와함께와서숨어지낸다, 일본공사관에드나든다, << 매일신보 >> 에글을쓴다는세가지소문이떠돈다며조심하라고경고했다. 도쿄에서는상상도할수없는이충격! 그게춘원으로하여금 <2.8 독립선언 >(1919) 을쓰게했고, 그때문에상하이로진짜망명을가게되었다. 그러니까엄격하게말하면독립선언서는춘원이쓴게아니라단재의투혼에혼비백산해서본의아니게썼다는뜻이다. 상하이에서춘원의애국활동은뜨거웠는데, 이것역시신규식이나도산안창호의얼이빚어낸보너스가아닐까. 춘원은서울의허영숙에게상하이로와달라는등서신을자주보냈는데, 1920 년봄부터그녀는슬그머니서울에터전을잡는낌새였다. 그러다가허영숙이홀연히상하이에나타나 (1921.2.16.) 이광수와함께귀국하겠다고하다가이내돌아갔다. 그러나이광수는함께살던사람에게조차귀띔도없이 3월슬그머니상하이에서사라져버렸다. 만류를뿌리치고이광수는귀국했는데, 이전후의정황은강동진의 << 일제의한국침략정책사 >>( 한길사, 1985) 가정확하고소상하게밝혀주고있다. 3.1운동후일제는조선인에의한동화정책을추진하고자민족개량주의를주창하게되었는데, 거기에적합한인물이화급했다. 1921 년이광수를귀국시킨총독부는 6월에는복역중인최남선, 최린을가출옥시켰다. 그배후에는필시도쿠토미가있겠지만그의충실한하수인아베가총독에게건의한문서가이렇게전한다. 앞서이광수라는자의안 ( 案 ) 을보여드렸던조선인개조문제는문화운동화로그방향을전환토 록암시를주셨는데피차서로의이득이라고생각됩니다. < 齊藤實에게보낸阿部充家書翰 >, 齊藤實文書, 강동진, 위의책, 394 쪽, 재인용. 이광수는 1921 년귀국, 즉시허영숙과정식결혼 (5월), 1922 년총독부의주선으로수당만도한달에 300엔의엄청난돈을받고동아일보논설위원으로들어갔다 ( 강동진, 위와같은책, 394쪽 ). 강동진은그액수의효과를알리고자당시보통기자봉급이 30엔, 부장급이 100엔이라고밝혀준다. < 민족개조론 > 발표 (<< 개벽 >> 1922.5) 에이어예상대로사이토 ( 齊藤實 ) 총독과도만난다 ( 첫만남은 1922.9.30. 밤 ). 최남선도당국의원조로월간잡지 << 동명 ( 東明 )>> 을발간 (1922), 1924 년 3월일간지 << 시대일보 >> 로고치고 6월창간호를냈다. 최린은천도교의분열에간여하고나중에는 자치론 을앞세워... 같은책 395쪽 ). 참고로사이토의일기에의하면 1919 년 9월부터 1926 년말까지총독을 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만난인사들과회수는김성수 14 회, 송진우 15 회, 장덕수 12 회, 이상협 8 회에이른다.( 같은책 397 쪽 ). 5. 춘원과동아, 조선일보의관계 - 이광수와동아일보의관계 1922. 5. 기자촉탁, 기자로논설과소설. < 민족의경륜 >(1924.1.2.-6) 으로퇴사. 1926. 11 편집국장. 이듬해 9월건강문제로편집고문. 1929. 12~1933. 8 편집국장. - 이광수와조선일보의관계 1933. 8~1934. 5 부사장 ( 방응모와주요한의권유 ). 이사이에 1933. 9-1934.1, 에는편집국장겸임. 1935. 4~1937. 8 편집고문. 수양동우회사건으로피체되면서언론계떠남. 방응모 ( 方應謨, 1890-?), 호는계초 ( 啓礎 ). 정주생. 1923 년 << 동아일보 >> 정주지국 (1923), 평북삭주군외남면교동광업소 ( 橋洞鑛業所 ) 시작 (1925). 1932 년광산을일본중외광업주식회사에 35만원에매각, 같은해 6월부터조선일보영업국장. 1933 년 3월조선일보의 8대사주조만식에게서경영권을인수, 부사장. 7월자본금 30만원의주식회사로등기. 인수후초대부사장은이광수, 주필은서춘. 1935 년 7월태평로새사옥준공. 1937.7.11., 간부회의. 주필 ( 서춘 ) 은 '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 ' 등을 '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 ' 수정주장. 편집국장 ( 김형원 ) 등은반대. 방응모는 3.1 운동때처럼신문이민중을지도할수없다면서서춘지지. 1950.7.7, 북한군에피랍, 연행중송각산부근에서폭격으로사망설. 1979 년까지조선일보는방응모의명의로발간. 6. 정보국 5 부 3 과 이렇게세월은흐르는데이광수와아베, 도쿠토미의정은날로깊어만갔다. 그중중요한사항만메모하면 1936 년아베가죽은뒤이광수가도쿠토미를찾아갔을때, 자네도내아들이되어주게. 내조선의아들이되어주게. 일본과조선은하나가되지않으면안되네. 크게되어주게. 알겠나. 라면서, 자네는일생을문장으로나아가게. 문장보국 ( 文章報國 ) 말일세. 라고당부했다. 이후이광수가곤경에처할때마다도쿠토미는위로만이아니라실질적인힘이되어주었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9

춘원역시이에감읍하는심경이었음을밝혀주는자료가있다. 1940 년 2월 12일, 가야마미츠로 ( 香山光郞 ) 라는창씨개명을경성부호적계에신고한뒤자신의심경을도쿠토미에게보낸편지가있다.( 이항목은전적으로정일성의저서참고, 인용. 이편지는단국대김원모교수가고서점에서입수했다고함 ). 내자식이되어다오 라는선생의말씀을들은지 5년의세월이지난오늘에야비로소선생의간곡한부탁을따르게되었습니다. ( 중략 ) 이제부터조선의올바른민족운동은황민화의한길만이있을뿐입니다. 다행히옛역사와문화, 그리고혈액의교류는인식상이든정치상이든두민족의동일국민화를자연복귀로생각케하여실로홀가분한느낌마저듭니다. ( 중략 ) 부디건강하게지내시고, 조선청년들이읽을만한독본 ( 讀本 ) 을가르쳐주시기바랍니다. 정일성, 위의책, 81-82 쪽. 도쿠토미는이후승승장구, 군부에게독이일삼국동맹을권유했으며, 1941 년 12월 8일의 < 선전조서 ( 宣戰詔書 )> 도 도조히데키 ( 東條英機 ) 수상을도와기초했다는것이일본학계의정설이다. ( 정일성, 같은책, 270쪽 ). 침략이데올로기에전력투구한그는군부를설득하여일본문학보국회 ( 日本文學報國會, 1942. 5.26) 와대일본언론보국회를만들어두단체의회장을맡았다. 파시스트답게그는이모든통제지도권을정보국에집중시켰다. 정보국제5부제3과의지도아래서일본을비롯한식민지와준식민지의모든문학단체가기획, 활동을지원하도록만들었다.( 이항목은사쿠라모토토미오, 櫻本富雄, << 日本文學報國會 - 大東亞戰爭下の文學者들 >>, 靑木書店, 1995, 참고 ). 1940 년 12.6. 발족한정보국은오로지전쟁동원을위한각종선전과이념, 사상검열과국민독려등을위한조직으로, 내각정보부 ( 閣情報部 ), 외무성정보부 ( 外務省情報部 ) 육군성정보부 ( 陸軍省情報部 ) 해군성군사보급부 ( 海軍省軍事普及部 ) 내무성경보국도서과 ( 務省警保局書課 ) 체신성전무국전무과 ( 信省電務局電務課 ) 등각관련부서에부 ( 部 ) 나과 ( 課 ) 가있었는데이를통괄하기위해내각직속 ( 閣直 ) 기구로재조정한기관이다. 통폐합의달인인도쿠도미로서야일본이든조선이든문학단체를주무르는건문제도안되었을터. 조선문인보국회도그지침대로설립 (1943.4.17.), 회장에는당연히가야마미츠로가맡았다. 대동아문학자대회 ( 大東亞文學者大會 ) 도여기서추진, 집행한행사였다. 그 1회대회 (1942.11. 3-10. 8일간도쿄와오사카에서개최 ) 에참석한가야마미츠로는여러참가자들과함께니주바시 ( 二重橋, 천황궁앞두다리 ) 앞에서궁성을관람할때유독돋보였다. 소인가야마미츠오, 삼가성수 ( 聖壽 ) 의만세 ( 萬歲 ) 를축복드려올리옵니다 고최대의경의를표한것이다. 이열성에일본인대표들조차감복했다는이야기도전한다. 1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일행중중국작가장워쥔 ( 張我軍, 타이완출신이나일본점령하북경대일문과교수였기에중국대표로참석. 나중한간 ( 奸 ) 으로몰렸으나타이완으로피신 ) 은딴청을피우며허리도굽히지않았다. 제2회대회 (1943. 8. 25-27) 에참석했던중국의타오캉더 ( 陶亢德, 절강소흥 ( 浙江 ) 출신으로출판인 ) 는귀국후참가기 (< 동행일기 >) 에서한마디도시국이나천황을찬양하지않고일본의풍물과정원, 동물원, 어느찻집의차맛, 좌담에참석했더니내용과기사가틀렸다는등등완전히엉뚱한사변들이다. 메이지신궁 ( 明治神宮 ) 이나야스쿠니신사 ( 靖國神社 ) 에갔을때를이렇게썼다. 주차장에서배전 ( 拜殿 ) 까지그렇게멀지않음에도불구하고깔려있는자갈과찌는듯한여름날씨때문에꽤지쳤다. 동행한일본인들을보면당당히걸아가고있어조금도피곤한기색이없다. 오오무라마스오 ( 大村益夫 ), << 윤동주와한국문학 >>, 소명출판, 2001, 231쪽, 재인용. 이책 < 대동아문학자대회와조선 > 은좋은참고가된다. 중국대표들은이런능청을부렸는데도전후민족반역자 ( 奸 )d 로몰려호된심판을받았다. 가야 마는어땠을까. 1 회대회에서가야마는이렇게발언했다. 자신의전부를천황에게바쳐올리는것이일본정신이라고하는것입니다. 또천황님께서자비를베푸는것을황도 ( 皇道 ) 라고말씀드리는것입니다. 천황님에게있어서이것이황도, 우리군신 ( 君臣 ) 에게있어서는이것이신도 ( 臣道 ) 입니다. 위와같은책 219-220 쪽, 재인용. 이제몇가지를생각해보자. 친일파가일제의위협을받아서했는가? 그들의행위는우리민족 과역사에아무런영향을끼치지않았는가? 오늘의친일파는어떤모습일까? 이런인간상을어떻 게평가할것인가?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1

친일미술집단과활동 최열미술평론가 1. 성격구분 친일미술행위를판단하는주요한증거라할집단및개인활동의내용과그형식은 1차시기와 2 차시기에서로다르게나타나고있다. 단체, 기관및개인의친일행위를판단함에있어일제강점기전반기인 1차시기에는일률적으로규정하기어려운복합성을특징으로삼고있으며 2차시기인말기에는일사불란한단순성을특징으로삼고있으므로상이한관점이필요하다는것이다. 따라서 1 차시기의경우해당개인의처지와상황그리고개인이선택한행동의이면에감춰진내면의의도, 그적극성또는소극성사이에숨어있는은밀성을해명하는방식을취해나가야할것이고 2차시기의경우엔사안의성격이매우명료하다는점에서참가행위의과감성과명쾌성을기준으로삼는방식을취해야할것이다. 이러한다름은해당시기의단체가내거는목적이나행위내용에서도매우뚜렷하게나타난다. 총독, 정무총감따위와밀월을누리는행위를자행한서화협회조차도목적이나활동내용은심미의세계를꿈꾸고있거니와 2차시기의조선미술가협회는목적부터비상시국아래신체제직역봉공을다하겠다고다짐하고있으며반도총후미술전따위를개최하는활동을전개하였던것이다. 그리고조선미술전람회의경우 1차시기에출발하여 2차시기까지이어졌다는점에서관심의표적이다. 그일관된성격은심미주의미학장려라는 1차시기의틀을끝까지유지했다는점에서미학적독자성을지니는것이다. 그런가운데대동아공영권미학정책이라할지역향토색관철을꾀하고있으므로제국주의정책을구현하는터전의한분야임은의심의여지가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조선미술전람회에참가여부만으로부역행위의강도를측정할수없는복잡성을지닌다는점을이해해야할것이다. 따라서기관전체의성격과참가자개인의부역정도를세분해보는방식을취할일이다. 이러한방법은 2차시기안에연이어열린반도총후미술전과결전미술전을비교, 적용해보면그유용성이보다뚜렷하게드러난다. 직역봉공 ( 職役奉公 ) 과결사항전 ( 決死抗戰 ) 의 같음과다름 이숨쉬고있는것이다. 1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2. 제 1 차시기의활동 친일매국노이완용이회장인조선서화미술회는 1911 년에당대를휩쓸던서울의서화가를모두포괄하여결성한조직으로총독부후원아래운영하고있었다. 1915 년에결성한서화연구회또한회장으로친일매국노김윤식이가담하고있었다. 이들이주최한전람회에는언제나총독부정무총감이출품하였거니와친일미술의초창기라할 1910 년대단체활동은이처럼친일매국노와총독부의품안에서자라났다. 총독부가 1922 년에설치한조선미술전람회는초창기의친일미술을종합하는결정판이었다. 민중사상의순화와사회교화 를목적으로내건전람회위원장은총독부정무총감이었고첫심사위원단에일본인과조선인을섞어놓았다. 창립과정에도서화협회간부들이대거참석하였고첫공모때도서화협회는회원들로하여금출품을대거독려하여총독부와협회의협력을폭넓게과시하였다. 하지만총독부는심사과정에서서예분야를제외하고는조선인심사위원을참관만시킨채입상작선정권을박탈하였다. 이후조선인심사위원은점차줄어들어갔는데더이상협력이란매개가없어도지배가가능하다고여겼던것이다. 명맥만유지해오던조선인심사원제도를 1935 년에완전폐지하고추천작가제를도입하는한편 1938 년에는심사권한을주지않고그저참관만할수있는심사참여제도를도입하였다. 1938 년제17회때참여작가는김은호, 이상범, 추천작가는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이인성이었다. 이들가운데유독이인성만을제외하고는모두전시체제아래부역미술행위를거듭하였는데우연이아니었을터이다. 조선미술전람회는일제식민통치기구의하나로써제국주의미술정책의실현이자그산물이다. 그런데일제는제국을찬양, 고무하는창작의요람이아니라그정책의방향을심미주의미학과지역향토색을장려하는쪽으로잡았다. 정치성을배제하면서대동아공영문화권을겨냥하는문화제국주의의관철을위한장으로설정하였던것이다. 그러므로여기참가하는식민지미술인의선택과의도및미적지향따위에따라개개인나름의보다복잡한층위가형성될여지가클수밖에없었다. 따라서조선미전을무대로하는활동을일괄하여친일미술행위로해석하는태도는그성격을단순재단하는것이다. 그러므로조선미전에응모하였다거나, 입상을했다는사실만으로또는무감사나추천, 참여작가로선정되었다는사실만으로일제부역행위자라고규정하는것은바르지않다. 그런태도는근본주의관점으로다층화된세계를부정하는극단의태도라할것이다. 다만개인의활동을판단, 평가함에있어방증자료라는점그리고제국의통치지배기구라는본질을지닌기구라는점은두말할나위가없을것이다. 이러한기준은 1927 년에일본인과조선인이함께조직한조선동양화가협회따위에도마찬가지로적용할수있을것이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3

3. 제 2 차시기의활동 일제말기인 1941 년 1월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위원으로참가한이상범, 심형구는김인승과함께경성미술가협회발기인으로가담하였다. 이들은협회결성식에서 국가의비상시국에직면하여신체제아래서일억일심으로직역봉공 ( 職役奉公 ) 을하여야할이때, 미술가일동도궐기하여서로단결을굳게하고또한조선총력연맹에협력하여직역봉공을다하자는목적 을천명하였다. 곧조선미술가협회로이름을바꾼협회는일본인을회장으로선출하고각분야별로조선인, 일본인을섞어역원을여럿뽑았다. 협회가수행한사업으로는성지순례, 황군위문, 반도총후미술전람회개최따위가있는데이가운데총후전은 1942 년과 1943 년모두두차례열었다. 제1회전의경우김기창, 김인승, 심형구가초대작가, 김은호, 이상범이위원작가로참가했고제2 회전의경우엔징병제실시를기념하는전람회였다. 공모요강에징병제실시에관한것을명시함으로써이와관련된소재및주제를다룬작품들을다수포함시켰을듯하다. 당시보도에따르면제2회전은징병실시의광영을총후생활의구석구석마다발휘시키고있는씩씩한자태를화폭에여실히나타냄으로써총후생활을더욱꿋꿋하게하고문화계발에이바지하였다고한다. 하지만아쉽게도제2회전출품작목록을발견치못함으로써세부내역을알길이없는게오늘의사정이다. 흥미로운일은 1941 년 2월협회결성과비슷한시기에김기창,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이일본인화가들과함께조직한구신회 ( 九晨會 ) 다. 채화 ( 彩畵 ) 보국의열의로총후의대작을망라 한다는목적을지니고참가한회원아홉명모두앞서의조선미술가협회주요역원들이라는점에서 1차시기단체와는그성격을달리한다고하겠다. 이보다한걸음더나간단체는 1942 년에결성한조선남화연맹이다. 연맹은목적에 채관보국 ( 彩菅報國 ) 의결의 를밝히고전람회수익금을일제군대에헌납했던것이다. 그러나전시체제를상징하는이시대최고의친일부역미술단체는단광회 ( 丹光會 ) 였다. 1943 년 2월에결성하고 4 월에제1회회원전을열었다. 이자리에회원합작 < 조선징병제시행기념 > 을출품하였고 6월에는이작품을군사령부조선애국부에기증하였다. 회원은일본인 12명을포함해임응구, 김인승, 김만형, 손응성, 심형구, 박영선, 이봉상이었다. 그작품은친일파윤치호를포함하여징병제실시 단광회, 조선징병제실시기념합작헌납화 1943 의핵심인물들이징병소집자를둘러싼채격려하는장면 1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을포착한대작이었다. 조선인을전선으로내몰아가는징병을찬미하는주제는물론이고그도부족하여일본군에게작품을기증하는가하면이작품을위해모두모여합작을했다는사실을종합해보면일제부역행위의정도가극에달한느낌이다. 이따위행위는 1937 년김은호가애국금채회여성들이금비녀를조선총독에게헌납하는장면을그리고또이작품 < 금채봉납도 > 를총독에게기증한행위의확대복사판인데부역의정도는훨씬드센것이라하겠다. 개인보다는집단행위가훨씬더무거운행위이기때문이다. 하지만개인의일제부역미술행위가결코가벼운일은아니다. 구본웅은 1939 년 내선일체의현하 로시국을인식한다음 1940 년에는 동아신질서건설의사역 ( 使役 ) 을부여받은화가로써보국을꾀할것 과또다른글에서 사변승리를위하여미술의무기화에힘쓸것 을주장하는가운데다음과같이선언했다. 미술인이여! 우리는황국신민이다. 가진바기능을다하여군국 ( 君國 ) 에보 ( 報 ) 할것이다. 이러한신념에찬선언을되풀이하였던구본웅의행위와김은호의 < 금채봉납도 > 창작행위는그러나여명에지나지않았다. 김경승은 1942 년조선미전추천작가로뽑혔을때그소감을 일본인의의기와신념을표현하는데, 새생명을개척하는대동아전쟁하에조각계의새길을개척 하겠다고다짐했으며, 1943 년조선미전창덕궁상수상소감에서장우성은 총후국민예술건설에심혼을경주하여매진할것을굳게맹세 하였다. 또김인승은 1943 년 3월일본동경에서열리는육군미술협회전에 < 유기헌납 ( 鍮器獻納 )> 을출품했다. 김인승은당시 황군의필승을기원하여마지않는반도내신민 ( 臣民 ) 이가보와도같이중요한유기를기쁜낯으로헌납 하는장면을 열의를부어 그렸다고한다. 화가송정훈은 1943 년 황군의용전분투와대륙의전야를열심히그린 작품을모아종군유화개인전을열었다. 가장극적인것은 1945 년윤효중이대화숙 ( 大和塾 ) 미술부화실에서일본공군가미가제흉상연작인데윤효중은총독의아들로써전사한 < 아베 ( 阿部 ) 소위상 > 을첫작품으로제작했고이것을총독에게바쳤다. 어디그뿐인가. 황군위문용부채그림헌납이나 1943 년 8월조선에서의 징병제실시를기념하는시화 < 님의부르심을받고서 > 에가담하는일, 직 역봉공이나결전의의지를선동하는숱한삽화를그리는일들이꽃을피 워나갔다. 윤효중, 아버지의영령에 맹서하다 - 결전미술전경 성일보사장상수상 1944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5

4. 결전과왜곡의시대 김기창, 조선징병제실시기념합작헌납화 1943 총후미술전람회 2회전을마친한달뒤인 1943 년 12 월국민총력조선연맹은 황국신민필승의신념, 전쟁생활성전 ( 聖戰 ) 의목적달성 을서약하는선언을채택하였다. 이에따라조선미술가협회가주최해오던총후미술전은더이상열리지않았다. 대신 1944년 3월경성일보사가주최사로나선결전미술전람회가열렸다. 후원단체로는총력연맹, 조선미술가협회는물론조선군, 총독부가모두나섰던것인데이렇게미술행사에군관민이대거나선일은유례없는일이었다. 결전미술전은총후미술전과는그질을달리하는것이었다. 낱말그대로총후란각자직업에충실한후방을뜻하는것이라면, 결전은사생결단의전장 ( 戰場 ) 을뜻하는것으 로, 총후의경우화가본연의심미추구를직역봉공으로해석할수있고, 결전의경우엔작품소재와주제를전투의세계로다룬다는결사항전의태도를취해야한다는뜻으로헤아려야할것이다. 총독부미술관에서열린결전미술전은양화지부, 일본화지부, 조소지부로나뉘었고모두 216점이입상하여그가운데조선군사령관상을비롯 6개의특별상과특선을시상함으로써조선미전에버금가는규모를자랑했다. 심사원으로는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이상범이참가하였는데심형구는 < 전야 ( 戰野 )>, 김인승은 < 식힐순간 ( 息詰瞬間 )>, <00 돌진 > 을, 김경승은 < 대동아건설의소리 >, 이상범은 < 효 ( 曉 )> 를출품했다. 그밖에모든출품작제목도전투분위기가물씬풍기는것들이었다. 결전미술전은일제부역미술행위의절정이었다. 앞선시기에친일미술행위에가까이다가섰던미술인이이결전미술전에불참한경우는드물었다. 따라서결전미술전은친일미술인선정에도하나의이정표구실을하고있다고할것이다. 결전미술전은단체가아닌관료기구지만조선미전과달리그목적과형식, 내용이지극히명쾌하거니와실로단광회에버금가는무게를지니고있다할것이다. 그런데이같은기구참가자를밝혀줄자료가최근까지은폐되어있었다. 아무도몰랐던김기창의 < 적진육박 ( 敵陣肉薄 )> 과장우성의 < 항마 ( 降魔 )> 가발견됨으로써친일미술행적을부정했던지난날의판단이뒤집혀버린것은역사에서은폐란없다는평범한진리를되새기게해준다. 끝으로해방뒤친일미술행위를은폐하거나옹호하는행위를 3차시기로규정해야할당위성이여기에있다. 그은폐행위로말미암아결전미술전의전모를확인할수있는자료가 1970 년대이후사라져버렸다. 이경성이 1970 년에조소지부출품자, 1974 년에심사원및수상자명단일부를발표했을때까지자료가엄존하였지만그뒤 30여년이지나서야 < 결전미술전람회목록 > 이발굴된이 1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유가딴데있는게아니다. 은폐는부끄러움을깨우친행위이므로차라리안쓰럽지만친일미술을옹호하는행위는절망스럽다. 1983년 << 계간미술 >> 의식민잔재청산특집이나가자언론사와집필자를향해광고, 집회따위공세를취했다. 이들은 사과, 사퇴 를요구했는데당시필자의한사람이었던국립현대미술관이경성관장의사퇴를문화관광부장관에게청하였고장관은관장에게사퇴를요구하였다고한다. 그때관장은예술원회원자격이넉넉함에도불구하고바로그때사퇴를요구한이로부터회원진입을배제당해야했다. 해방뒤미술계곳곳을짙게물들여온부역미술가들의자취가여전하고더욱이저들이만든애국선열, 민족지사동상과초상은물론그들이양성한후예가즐비한상황이다. 극히일부를제외 식민잔재청산의길계간미술 1983 봄호 하고반성은커녕언급조차꺼려하는상황이다. 지난날천안독립기념관에친일관을만들어야한다는목소리가높았던때가있었다. 친일미술가가제작한동상, 초상을수거하여바로그친일관이나또는서대문형무소터에역사관을만들어진열하고 왜곡당한선열 이란이름을붙여교훈으로삼을것을제안했던것이다. 하지만그건꿈일뿐, 아직도친일화가가그린애국선열의동상, 초상이엄존하고심지어표준영정으로지정되어있는실정이다. 그러므로 2014 년현재, 친일미술세력의지배력은아직도끝나지않았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7

매국과배족으로얻은부귀영화 - 신 ( 新 ) 조선귀족열전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편찬실장 1. 조선귀족 과 왕공족 1910 년 8월의강제병합으로 조선 ( 인 ) 은내지일본의연장된영토로전락해일왕의충량한신민 ( 臣民 ) 이자대일본제국의 국민 으로편입. 그러나 조선인 의법적지위는 내지신민 과구별되는 타이완인 사할린토인 과함께최하층인 외지신민 에속함. 이에반해조선귀족은동일한일왕의신민의범주에포함되지만 일반신민 과구별되는 귀족 으로서일본의화족과동급의예우 신민 ( 臣民 ) 귀족 ( 貴族 ) 일반신민 ( 一般臣民 ) 천황 ( 天皇 ) 황족 ( 皇族 ) 조선왕공족 ( 朝鮮王公族 ) 화족 ( 華族 ) 조선귀족 ( 朝鮮貴族 ) 내지신민 ( 內地臣民 ) 외지신민 ( 外地臣民 ) 대만인, 조선인, 사할린토인 [ 樺太土人 ] 조선귀족 과 조선왕공족 ( 王公族 ) : 엄격하게구분 ( 화면참조 : 1~5 의내용 ) 1 1909년 7월 6일자각의결정, 한국병합에관한건 중 한국황실처분의건 2 1910 년 7월 8일자각의결정, 병합실행방법세목 의전체 22개항목중제16은 한국의황실및공신 ( 功臣 ) 의처분 3 한국병합에관한조약 (1910.8.22 조인, 1910.8.29 공포 ) 4 일왕의조서 : 일한병합조서, 전한국황제 태황제및황태자의예우에관한조서, 전황국황족의예우에관한조서 5 데라우치의유고 : 순종의칙유 1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1-1 황제를완전히폐위해현황제 ( 순종 ) 를대공전하 ( 大公殿下 ) 로칭하고, 고종 황태자 ( 이은 ) 와의친왕 ( 이강 ) 은공전하 ( 公殿下 ) 로칭하며, 이들에대해서는일본황족과화족의예를참작해특별한예우와특전및일정한연액 ( 年額 ) 을지급할것등 2-1 대한제국의 황실전체 를왕족이아닌 공족 으로일괄처리의도 3-1 데라우치, 통감부임 (7.23) 후 병합실행방법세목 관철에주력. 황실처우에대한방침은총리대신이완용등의강력한반대에직면 황실존속과호칭, 예우등일부의견을받아들이도록본국과협의. 일본에도없는모호한개념의 왕족 과 공족, 이른바 왕공족 이라는특수계급창출 ( 創出 ) 고종 순종 황태자 ( 이은 ) 등황실직계는 왕족, 의친 ( 懿親 ) 중이강과이재면은 공족 4-1 5-1 왕족과공족에대한호칭은별도로반포된 왕족및공족의칭호 (8.29) 에따라 왕전하 와 공전하 의호칭결정 일제는일본의황족과구분하기위해 왕공족의국법상 ( 國法上 ) 의지위는황족이아니고또일반신민 ( 臣民 ) 도아닌황족에준 ( 準 ) 하는특수의지위에있는것은조금도의심할여지가없다. 고규정 ( 일본의 ) 황족에준하는특수의지위와예우를받는 왕공족의지위는특수한신분이자계급이었기때문에일왕의두번째조서에서 마땅히별도로그궤의 ( 軌儀 ) 를영정 ( 定 ) 한다는방침에따라일본황족을규율하는 황실전범 ( 皇室典範 ) 과는별도로 왕공가궤범 ( 王公家軌範 ) ( 황실령제17호, 1926.12) 공포 시행 일본내의궁중석차는순종 고종 황태자는친왕 ( 親王 ) 이하왕 ( 王 ) 이상 ( 친왕과왕의중간 ), 공족 인이강과이재면은왕의하위로설정 메이지이후일본천황가의왕은일왕의친족에게부여하는작위명으로일왕의현손 ( 玄孫. 4세까지 ) 이내는친왕, 5세이후는왕으로책봉. 결국대한제국황실은일왕의책봉을받는 이왕가 로격하되었을뿐만아니라특수한신분 ( 계급 ) 으로서의실질적인차별 왕공족은조선귀족보다상위의신분이었으므로, 민중 [ 신민 ] 의범주에포함된조선귀족과는엄격하게구별. 법령적용에서도확인. 즉왕공족은 왕공가궤범 과 왕공족보규정 ( 王公族譜規程 ) (1927) 이적용되어창씨개명의대상이아니었지만, 조선귀족은 조선민사령 과 조선호적령 의적용을받아창씨개명의대상 ( 화면참조 : 조선귀족과공족의구분 ) 2. 조선귀족의선정과정과문제점 1) 수작자선정과정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9

조선귀족령 (8.29) 통감부 1차전고 ( 詮考 ) 일본정부, 각의논의 궁내성종질료 ( 宗秩寮 ) 1 회송, 최종심의 종질료총재, 궁내대신에상주 (9.28) 일왕의재가 (9.30) 종질료주사남작오하라센기치 ( 小原吉 ) 와궁내성식부관 ( 式部官 ) 하치스카마사아키 ( 蜂須賀正韶 ), 조선귀족 76명의작기 ( 爵記 ) 와일왕의칙서를휴대하고 10월 6일경서울도착 총독데라우치, 수작대상자인원로 대관 공훈자들에게수작식참석통보 수작식 (10.7) 조선귀족령 이발표된후 40여일의준비를마치고수작식거행 일본정부 : 1910 년 9월초부터자격이될만한자의이력서를받아심의착수. 내각의대신을지낸자이외의수작표준을관직이력 ( 履歷 ) 으로정할지, 문지 ( 門地 ) 로정할지, 또는단지훈공 ( 勳功 ) 에만의할것인지매우고심 일본언론 : 8월 22일강제병합조약이체결되기전부터한국황실문제, 그리고조선의귀족제도발포 ( 發布 ) 언급, 현재대신, 중추원고문, 원로등 50여명에게수작의은전이있을것 이이며이를기대하는자도적지않다고보도. 또종질료에서 9월말까지결정한후일왕의재가를거쳐발표할것이라고예고되었지만발표일자나몇명이어떤등급의작위를받을지등에대해서는추측성기사에그침 귀족록 2 : 명확한선정기준은확인되지않지만일제가조선귀족을선정할때염두에둔가장큰기준은강제병합과정에서판단한 공로 였고, 여기에대한제국황실을 배려 해 이왕의혈족및준 ( 準 ) 왕족 을포함시킨것으로추정할수있음 ( 화면참조 : 귀족록 ) (1) 종질료총재 궁내대신상주문건 (9.28) 1 이왕의혈족및이에준 ( 準 ) 하는자 (13명) : 후작 6인, 백작 2인, 자작 2인, 남작 3인 2 공로있는자 (63명) : 백작 1인 ( 현임총리대신 ), 자작 20인 ( 현임대신, 친임관, 정1품 ), 남작 42인 ( 현임칙임 1등관, 대신경력자, 종1품 ) (2) 통감데라우치 궁내대신자작와타나베 ( 渡邊千秋 ) 에게보낸 조선인수작자연령취조서를통감으 로부터송부의건 (9.30) 1 종질료는황실령인 궁내성관제 의일부를개정하면서爵位寮대신신설. 1 황족에관한사항, 2 왕족및공족에관한사항, 3 작위에관한사항, 4 화족에관한사항, 5 조선귀족에관한사항, 6 有位者에관한사항등담당 2 宗秩寮, 貴族錄 (1910 1913 年, 永久保存登錄第 2210). 일본宮內廳 ( 宮內省이 1945년종전후명칭변경 ) 에보관중인조선관계자료의일부. 여기에수록된문건들은 1924년 9월圖書寮編纂으로묶여있다. 2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1 이왕족및이에준 ( 準 ) 할만한자수작 ( 授爵 ) : 10 명 ( 후작 6 명, 백작 2 명, 자작 2 명 ) 2 준이왕족 ( 準李王族 ) 말예 ( 末裔 ) 수작 : 남작 3 명 3 공로자수작 ( 前대신, 칙임 1 등, 종 1 품 ) : 63 명 ( 백작 1 명, 자작 20 명, 남작 42 명 ) (3) 이재완외 75 명수작의건 (9 월 ) 의 선지안 ( 宣旨案 ) 재가 (9.30) 후작 (6 인 ), 백작 (3 인 ), 자작 (22 인 ), 남작 (45 인 ) 의구분과명단이확인 최종선정된 76명은크게 이왕의혈족및이에준하는준 ( 準 ) 이왕족말예자 와 공로자 의두가지로만구분이되고, 각각의작위는혼재. 때문에 조선귀족령 제2조에서작위수여를위한세가지구분이, 각귀족의어느등급에해당하는지파악불가. 특히작위및등급선정에어떤식으로든지 나이 고려, 기준의공정성을의심하게하는것 수작자선정이발표후우려했던논란이현실화 : 국내외언론에서작자 1순위로자작이거론되던일진회회장이용구가최종제외되자추가수작의은명 ( 恩命 ) 을받을수있도록알선중이라고보도, 수작과은전에서빠진양반중에는불평당의암류가있어위기의조짐을드러내경계중, 일부원로중에는수작되지못한아쉬움을달래면서이후추가수작의기회를기대하는자들도존재. 이에따라누락되거나앞으로추가수작되는경우도있을것이라는기사도계속보도 2) 선정기준의단서와문제점 일본화족 :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5개등급의작위에대한서작내규 ( 敍爵內規 ) 에따라 1885 년 7월 화족령 이공포되면서최종 503가 ( 家 ) 의화족결정 조선귀족에대해서는일정한서작기준이확인되지않아자세한내용은확인불가 일본국립국회도서관에소장된사이토문서 ( 齋藤實文書 ) 중 1925 년현재까지의습작자를포함해조선귀족 77명의행적을세밀하게기록한 조선귀족열전 ( 조선귀족약력 100-6-843) 의 서문 에도 이조말조선귀족의경력은일한 ( 日韓 ), 청로 ( 淸露 ) 간외교관계당사자이외외부에서는이를알수없고착종 ( 錯綜 ) 되어있다. 비밀사항이많아그런것으로, 그진상을설명하는것이매우곤란한상황에있다. 고밝히고있듯이조선귀족으로선정된이유나경력등은철저하게비밀에부쳐짐. 몇가지단서. ( 화면참조 : 1~3의내용 ) 1 조선귀족열전 의 정한조 항목 : 수작식 (10.7) 이전에일본정부가수작자를선정하기위해마 련한대강의표준확인, 후작 백작해당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1

2 조선총독부통역관후지나미요시츠라 ( 藤波義貫 ) 의언급 3 : 자작 남작해당 3 최초수작자박제순 ( 자작 ) 의작위를습작한박부양 (1905~1974) 이 1926 년 10월경조선총독부촉탁자격으로조선총독부에제출한보고서에서 1910 년 8월강제병합의공로를인정해일왕이작위와은사금을내려준것이라고밝힘 4 4 자작김윤식의 1910 년 10월 7일자일기, 황족 의친은모두후작, 전총리이완용및척리 ( 戚里. 임금의내척과외척 ) 몇사람은백작, 각대신은자작, 그나머지로서일찍이대신을지낸자는모두남작을받았다. 5 대체로조선귀족을선정할때품계 위계, 공로, 문지, 관직이력등과대한제국황실과의관계등이종합적으로고려되어반영되었을것으로추정 실제로는이러한수작표준이균등하게적용되지않은것이사실 정치적편향성. 즉소론 북인 남인, 약간의중인계급출신을제외하면노론이압도적대다수. 노론에의해장악되고있는현실을우선고려 후작 (6) 박영효, 윤택영, 이재각, 이재완, 이해승, 이해창 백작 (3) 민영린, 李完用, 이지용 자작권중현, 김성근, 김윤식, 민병석,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박제순, 송병준, 윤덕영, 이근명, 이근택, 노론 (19) 이기용, 이병무, 李完鎔, 이용직, 이재곤, 임선준, 조민희 (64) 김가진, 김병익, 김사준, 김사철, 김석진, 김영철, 김종한, 김학진, 남정철, 민상호, 민영기, 민영달, 남작민형식, 박제빈, 성기운, 유길준, 윤용구, 윤웅렬, 이건하, 이근상, 이근호, 이용원, 이용태, 이윤용, (36) 이재극, 이정로, 이종건, 정낙용, 조경호, 조동윤, 조동희, 조정구, 조희연, 한규설, 한창수, 홍순형 소론 자작 (2) 이하영 ( 중인 ), 조중응 (7) 남작 (5) 김춘희, 박기양, 이봉의, 이주영, 정한조 북인 (2) 남작 (2) 민종묵, 박용대 남인 (1) 남작 장석주 ( 평민 ) 중인 (2) 자작고영희남작최석민 76명 수작자 :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자료 : 朝鮮人ニ對スル授爵ニ關スル意見 (1926.11.22) ( 齋藤實文書 100-6-843) 비고 : 송병준은평민이면서, 자칭노론. 3 通譯官藤波義貫, 朝鮮人ニ對スル授爵ニ關スル意見 (1926.11.22) ( 齋藤實文書 100-6-843). 4 朝鮮總督府囑託朴富陽, 朝鮮貴族に就て (1926.10.15.), 朝鮮貴族 ( 齋藤實文書 100-5-849). 5 金允植, 續陰晴史 下 ( 卷十四, 庚戌 10 月 7 日 ), 337 쪽 (1960, 국사편찬위원회 ). 2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선정과정의정치적불공정성의사례 : 인선 ( 人選 ) 과정에참여한조중응병합당시이완용후작은병상에서치료중이었기때문에조중응자작이절충임무를맡았다. 조씨와정씨는같은소론파로서붕당관계상불공평함을알면서도그관직및위계를거짓으로작성하여과분한영작 ( 榮爵 ) 을받게된것이라고하여유식자 ( 有識者 ) 들사이에논쟁을일으켰다. 남작에대한은사공채를조중응씨와반씩나눈다는소문까지돌았는데사실여부는아직확인되지않았다. 원래조선측의교섭대표는총리대신을지낸이완용이었으나이재명의공격으로입은상처의후유증으로치료중이었기때문에조중응이이완용대신인선과정에참여. 일본어에능통해이완용의수족으로널리알려진조중응이수작자선정의조정임무를맡으면서수작자격이없는정한조의서류를조작해남작을받도록농간 언론의선정과정의불공정함및편파성 독단성등에대한우려 : 1 동경일일신문 은이완용과조중응의실명을거론하면서이들의농간에세간의의혹이있다는것과이에대한박제순의지적은매우타당하다고평가. 2 경성신보 에실린某大官의이야기, 조선귀족의수작은과거의한일관계도모두참작해서공정하게선정되어야함. 이를위해서는논공행상이우선되어야하며, 직접적이든간접적이든또과거와현재를막론하고 공로가있는자 에게 은전 이주어져야한다는것이중론이라고지적 조선귀족은 조선귀족령 에서명시하고있는 대로 ( 大勞 ) 가있고, 구덕 ( 舊德 ) 이있고, 전공 ( 前功 ) 이있는자들이고, 또 1910 년 8월강제병합의공로및이전부터일제의대한정책에순응한전반적인행위에대한 은전 ( 恩典 ) 의결과라는것은부인할수없는사실 ( 史實 ) 3. 조선귀족의탄생 1910 년 8월 22일강제체결된 한국병합에관한조약 제5조는 일본국황제폐하는훈공 ( 勳功 ) 있는한국인으로서특히표창에적당하다고인정된자에게영작 ( 榮爵 ) 을수여하고또은급을부여한다. 고명시 조선귀족령 ( 황실령제14호, 8.29, 총 22조 ) 전문 : 이가 ( 李家 ) 의의친 ( 懿親 ) 및그방가 ( 邦家 ) 에큰공이있는자는마땅히이를우열 ( 優列 ) 에승서 ( 陞敍 ) 하여조선귀족으로삼는다. 제2조 : 그대상을 1 이왕가의혈족으로황족의예우를누리지않는자, 2 문벌있는자, 3 공로가있는자로규정 1910 년이전각종매국조약에동조한이른바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구적등은모두 조선귀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3

족령 이규정한제2조의 3개조항에따라작위수여. 즉 조선귀족령 으로작위를받은최초수작자 76명은 2로서 3에해당하는자가대부분으로, 1은 2와 3의조건을충족시키기위한형식적인조항 ( 화면참조 : 국권침탈조약동조자와수여된작위 ) 대한제국황실과종친및인척으로작위를받은인물 6 1 황실과종친관계 - 고종과직계자손 : 고종 순종 영친왕 ( 이은 )[ 왕전하 ], 의친왕 ( 이강 )[ 공족 ] - 흥선대원군 4형제의직계후손 : 은신군-남연군 -흥녕군( 이창응 ) 흥완군 ( 이정응 ) 흥인군 ( 이최응 ) 흥선군 ( 이하응 ) 의직계후손. 이들중공족은흥선군의장남이재면, 조선귀족은흥선군의사위조경호 ( 남작거부 ) 조정구 ( 남작거부 ) 이윤용 ( 남작 ) 등 3명, 완림군의손자이기용 ( 자작 ), 흥완군아들이재완 ( 후작 ), 흥인군의손자이지용 ( 백작 ) - 사도세자 ( 장조 ) 의아들이자정조의이복동생들인은언군 ( 이인 ) 은신군 ( 이진 ) 은전군 ( 이찬 ) 3형제직계후손 : 은언군의후손은이완용 ( 李完鎔 자작 ) 과이해승 ( 후작 ), 은전군의후손으로이재각 ( 후작 ). 은신군은남연군-흥선군형제로위의두번째에해당 - 기타왕족후예 : 이해창 ( 후작 ), 이재곤 ( 자작 ), 이재극 ( 남작 ), 이근호 ( 남작 ) 이근택 ( 자작 ) 이근상 ( 남작 ) 3형제, 이용태 ( 남작 ), 이용원 ( 남작 ), 이종건 ( 남작 ), 이병무 ( 자작 ), 이건하 ( 남작 ) 2 황실종친및인척관계성씨 ( 본관 ) 별구분 - 전주이씨 (18명 ) :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이지용, 이완용 ( 李完鎔 ), 이기용, 이근택, 이재곤, 이병무, 이근상, 이건하, 이용태, 이종건, 이봉의, 이근호, 이재극, 이용원 - 여흥민씨 (9명) : 민영린, 민병석,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민상호, 민영기, 민종묵, 민형식 - 해평윤씨 (3명) : 윤택영, 윤덕영, 윤웅렬 - 안동김씨 (5명) : 김성근, 김가진, 김종한, 김학진, 김병익 - 풍양조씨 (1명) : 조동윤 - 반남박씨 (4명) : 박영효, 박제순, 박제빈, 박기양 - 연안김씨 (2명) : 김사준, 김사철 - 우봉이씨 (1명) : 이윤용 6 최재성, 2007 일제강점이후한국황실친인척의행적과일제의우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2 참조. 2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공족 조선귀족, 은사공채 작위은사공채이름 공족 (2) 83 만원이강, 이희 ( 이재면 이준 [ 용 ]: 16 만 8000 원 ) 50 만 4000 원윤택영 2( 순종의장인, 윤덕영의동생 ) 후작 (6) 백작 (3) 자작 (22) 남작 (45) 33만 6000원 이재완2 28만원 박영효2 16만 8000원 이재각2, 이해승1, 이해창1+1 15만원 李完用 2( 후작 : 이항구2) 12만원 민영린1 10만원 이지용2 10만원 고영희4( 고희경 백작 ), 민병석2, 박제순2, 송병준2( 백작 ), 이용직 *, 조중응3 5만원 권중현2, 김성근2, 김윤식 *, 민영규2, 민영소2, 민영휘2, 윤덕영2, 이근명3, 이근택 2, 이병무2, 이재곤2, 이하영2, 임선준3, 조민희3 3만원 이기용1, 李完鎔 2 5만원 유길준, 조희연1 김가진 *, 김병익1, 김사준 *, 김사철2, 김석진, 김영철2+1, 김종한2, 김춘희3, 김학 진2, 남정철2, 민상호2, 민영기2+1, 민영달, 민종묵3+2, 민형식1, 박기양3, 박 2만 5000원 용대2, 박제빈2, 성기운3, 윤용구, 윤웅렬2, 이건하3, 이근상2, 이근호2, 이봉의4, 이용원3, 이용태2, 이윤용2, 이재극2, 이정로1, 이종건2, 이주영3, ( 장석주 )2, 정 낙용3, 정한조2, 조경호, 조동윤2, 조동희2+1, 조정구, 최석민2, 한규설, 한창수 3, 홍순형 비고 : 1 중간줄 8 명은거부 거절및반납자, 밑줄 * 4 명은 독립운동관련 실작자및습작불이행자, 2 이항구는父이완용의 공로로유일하게추가수작 ( 남작 ), 3 이준용이 1911 년받은은사공채는습공과는별개로받은것으로추정됨, 4 각이 름의번호는본인을포함한습작횟수임. + 표시는습작일자및습작여부미확인등의사유로 사전 에보류된경우임. 은사금은현금일시불이아닌공채증서 : 원금은 5년거치 50년이내상환, 연 5푼 [ 分 ] 이자는매년 3월과 6월에일본은행이나대리점또는총독이특별히지정한우편국에서지급 은사공채는총독부의허가없이양도하거나저당금지 할인및담보융자 1922 년김윤식의제자중 1명이은사공채권을담보로융자, 김윤식사후발각 ( 화면참조 : 수작자의은사공채 이자규모 ) 작위거부및반납자 8명과이종건 이름 작위 당파 은사공채 비고 김석진 남작 노론 25,000 거절 음독자결후상속신고불이행 특권상실 (1912.12.6. 조선귀족령제20조 ) 1910.10.10. 사망 조정구 남작 노론 25,000 거절 자결시도 반납 (1913.5.3. 제17조 ) 민영달 남작 노론 25,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유길준 남작 노론 50,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윤용구 남작 노론 25,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5

조경호 남작 노론 25,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한규설 남작 노론 25,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홍순형 남작 노론 25,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비고 : 이종건 ( 남작. 은사공채 2만 5000원 ) 은 1919년 3 1운동전후총독부에작위와은사금반납의사를밝혔으나총독부가불 허하자공채증권을은행에예치한상태에서사망. 작위는이풍한이습작 일제와조선총독부의작위수여자체를인정하지않음. 일왕이주는작위사령서거절, 강제로발부된사령서및은사공채반납, 한국병합기념장 등훈장거절 강제병합에동의하지않는다는분명한태도를밝힘 ( 화면참조 : 1 조선귀족령제20조, 제17조, 제4조, 2 거부 거절 7명의반납이유 ) 독립운동 관련실작자및습작불이행자 이름 작위 당파 은사공채 내 용 김사준 남작 노론 25,000 조선보안법위반사건 으로징역 1년 실작 (1915.11.9, 제16조 [ 박탈, 1915.12.14]) 김윤식 자작 노론 50,000 이용직과함께 독립청원서 제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실작 (1919.7.17. 제16조 [ 박탈, 1919.7.31]) 이용직 자작 노론 100,000 김윤식과함께 독립청원서 제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실작 (1919.7.17. 제16조 [ 박탈, 1919.7.31]) 김가진 남작 노론 25,000 상속신고불이행에따른습작불능 ( 제13조제1호 [ 사망후습작신고불이행 ]) 거부 반납자와달리작위와은사공채를받고, 1910 년대일제의시정 ( 施政 ) 정책에나름대로동 조했지만이후 독립운동 과관련해작위상실 제16조유작자가국적을상실한때나혹금고 ( 禁錮 ) 나또는금옥 ( 禁獄 ) 이상의형의선고를받고그재판이확정되었을때는그작위을잃음제6조나혹제7조의예우를누리는자가전항의경우에해당하는때는귀족의족칭을제하거나혹예우를금지함 1 김사준 : 의친왕이강의장인. 남작, 은사공채, 한국병합기념장 (1912.8), 종5위서위등조선귀족으로모든혜택과권리누림. 1915 년 7월 1차세계대전을이용해독립운동을전개하던성낙형 ( 成樂馨 ) 을만나, 성낙형이 19개조항으로작성한 중한의방조약안 ( 中韓誼邦條約案 ) 을받아의친왕이강을거쳐고종에게전달하도록부탁을받고, 의친왕에게조약안을전달하려다가발각 체포, 10월 30일징역 1년선고 2 3 김윤식 이용직 : 자작, 은사공채, 한국병합기념장, 정4위서위. 1919 년 3 1운동때 독립청원 2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서 를제출한일로징역 1년 6월에집행유예 3년선고 - 김윤식은중추원의장 ( 대한제국기 ) 으로어전회의에참석해조약체결에동조, 자작작위와함께조선총독부중추원부의장 경학원대제학등에임명 - 이용직은합병조약체결에반대하는인물로지목되어어전회의에서배제되었으나, 자작작위와함께조선총독부중추원고문에임명 4 김가진 : 남작, 은사공채, 한국병합기념장, 정5위. 1919 년 3 1운동후상해로망명하고, 이후임시정부에서활동하면서조선민족대동단 ( 朝鮮民族大同團 ) 총재. 작위를박탈할마땅한조항이없어, 제13조에서적용한제11조의 6개월이내상속신고 를적용해 습작신고불이행에따른습작불능 으로처리 친일인명사전 수록수작 습작자는 138명 ( 수작 : 64명, 습작 : 74명 ) 4. 조선귀족의행태 1) 작위수여식 10월 7일오전 11시~오후 1시조선총독관저에서총독데라우치주재로수작식거행 일본에서작기 ( 爵記 ) 와칙서를전하러온오하라와하치스카가참석해이를가선시 ( 假宣示 ) 고쿠부 ( 國分 ) 인사국장이작위수여자호명 데라우치가작위등급확인및명부또는가증서 ( 假證書 ) 수여 ( 화면참조 : 한국병합기념장과증서 ) 10월 6일직접통보를받은 76명중 50여명참석. 일부는친척이나대리인이참여. 기타 20여명중작위를거부한 8명과병으로불참한자작김윤식, 남작남정철 이용원등 3명확인. 나머지 9 명은지방에거주하거나병을이유로불참했을것으로추정 매일신보 등언론이전하는 일장가관 이었던수작자들의행태 오전 10시 30분전친위부장관이병무씨는구한국육군부장의정장을입고총독부에먼저오르니찬란한금광 ( 金光 ) 은사방에떨쳐의기가양양하게제1등으로현관에마차를길게댐정1품보국민영소와전탁지부대신고영희와이재완 윤택영, 전내부대신박제순과이재극과전법부대신이하영등이요란한마차소리를내며앞뒤로서로총독관저에들어옴이에앞서총독관저에서는아침일찍부터관저내외를청소하고현관에등파 ( 藤波 ) 국분 ( 國分 ) 양통역관이맞이하여각각응접실로안내하는상황은매우다망 ( 多忙 ) 전총리대신이완용과전농상공부대신조중응과전내각서기관장한창수등제씨가마차를함께타고오전 10시 50분에도착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7

전탁지부대신임선준과전학부대신이재곤과전시종원경윤덕영과전궁내부대신민병석등이연이어수십개의마차를앞서거니뒤서거니하면서위세를떨치는가운데조선전래의보교 ( 步轎 ) 를급급히몰아오는자도있어복장의금색은황황한모양이들중에는대례복을착용한자가그대부분이고견모 ( 絹帽 ) 와후록고투 ( 厚祿古套 ) 로쇄락 ( 灑落 ) 하게장식한자도있고혹은의관속대 ( 衣冠束帶 ) 로꾸며각종다양한모습을이루었으나각자날리는희열은일장가관이었다더라. 수원집에서통보를받은박기양은수작식에참석하기위해상경했다가 10월 17일귀향 작위의영전 ( 榮典 ) 을입은사람의희열은실로상상키어렵도다. 그예를말하자면김성근 7 씨는 80 고령에이르러신선과같이은퇴했기때문에전날의수작식에도참석하지못하고대리로받았는데출두자로부터이일을듣고충심으로기쁨을참기어려워 8일에는총독부에늙은몸을일으켜방문하여어례 ( 御禮 ) 를말하였고, 또이기용씨는완림군이재원의사자 ( 嗣子 ) 인데지금나이 20 의청년인고로나라 [ 邦家 ] 를위하여아무런공로는없으나그문지 ( 門地 ) 로인하여자작의영전을얻어그기쁨은비할데가없으며또이기용씨의모친은여러날의병기 ( 病氣 ) 가점차쾌유하여어제저녁부터평화로운기운이집안에충만하여춘풍이한꺼번에도달함과같고, 기타이용태 김사철 정낙용 3씨는세상사람들이모두말하기를영전을접하기어려울것이라고했지만의외에수작되어이씨는기쁨에겨워집에돌아가서도신발을벗지도않고자리에올라환소 ( 歡笑 ) 하는상태는실로손과발이춤을추며어쩔줄을몰라했으며, 그나머지어느집이나모두이에비할바없이같아서대주연 ( 大酒宴 ) 을벌리고밤을세워축의 ( 祝意 ) 를표한다더라. 이완용 조중응 한창수 : 10월 7일수작식이끝난직후창덕궁을방문해순종에게 수작은구신 ( 舊臣 ) 에대한우대 라며자랑스럽게보고한후덕수궁의고종도알현민병석 윤덕영 : 10월 7일귀족을대표해덕수궁의고종을알현하고작위수여내용보고이기용 : 10월 8일덕수궁과창덕궁을방문해고종 순종에게작위수여보고김사준 : 축하하기위해큰잔치이해승 : 10월 11일경기도양주의선조 ( 先祖 ) 의묘소에가서작위를받았음을조상에게알리는 서작봉고식 거행 7 김성근 ( 자작 ) 은 80 세의고령으로수작식에불참했다가다음날직접총독부를방문해감사의뜻을전했다. 한편김성근 이용 원외 70 세이상되는 10 여명의원로들은수작식전인 9 월 14 일에통감데라우치에게耆老所를존치해달라는취지로청원 한일도있었다. 2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유길준 : 이해승 서작봉고제 를올린당일 (10월 11일 ) 에총독데라우치에게작위반납뜻전달이용직 : 중부수진동에봉안한선조인목은이색의묘소참배 (1919 년 7월실작 ) 박영효 : 10월 24일선원전에서수작사실을알리는봉심 ( 奉審 ) 을마치고고종방문. 일제는의빈 ( 儀賓 ) 이자고종의측근인박영효를회유하기위해 이왕가족으로특별대우 로후작 2) 은사공채권 ( 恩賜公債券 ) 교부식 1911 년 1월 13일조선총독부정무총감실에서총독데라우치를대신해정무총감야마카타이사부로 ( 山縣伊三郞 ) 가주재하고고쿠부인사국장과후지나미통역관이참석한가운데 은사공채권교부식 거행 오전 오후로나눠정무총감이직접공채권교부. 오전 10시 30분부터조선귀족 45명, 오후 1시부터 30분간공족 2명, 이어서 1시 30분부터 2시까지나머지조선귀족과기타공로자등 42명에대한공채권교부식이이어짐 공족 2명, 조선귀족 66명 ( 후작 5, 백작 3, 자작 21, 남작 37), 기타공로자 21명등총 89명참석 작위거부 거절자 8명중조경호가참석한것으로기록되어있어의문 조선귀족불참자 10명 : 거부 거절자 7명, 이해창 ( 후작 ) 이하영 ( 자작 ) 조희연 ( 남작 ) 3명, 총 9명불참으로추정 3) 작기본서봉수식 ( 爵記本書奉授式 ) 1911 년 2월 22일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총독관저에서정무총감야마카타주재로총독부인사국장고쿠부, 비서관구와바라 ( 桑原 ), 통역관후지나미와스야마 ( 陶山 ) 가참여해정식증서를주는 작기본서봉수식 거행 총 63명참석 :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1명, 남작 33명. 2/3는모두새로지은대례복을입었고, 나머지는연미복착용 조선귀족불참자 13명 : 거부 거절 8명, 도쿄에서수령한송병준 ( 자작 ) 과조동윤 ( 남작 ) 2명, 그리고두신문의명단에없는남작김병익 정한조 한창수 3명으로추정 4) 조선귀족일본관광단 조선귀족들이일왕을 알현 해감사의뜻을전할목적으로방문신청서총독부에제출 조선귀족의부인등을포함해 74 명으로구성, 1910 년 10 월 23 일 ~11 월중순까지 20 여일의일정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9

으로일본주요도시와명승지를돌아보며 문명국 일본의발전상시찰 11월 3일의천장절행사인풍명전어연 ( 御宴 ) 에특별초대받아일왕주는주병 ( 酒餠 ) 하사및 11 월 4일에는일행중 22명이직접일왕을배알하고 수작의가사 ( 賀辭 ) 를주상 ( 奏上 ) ( 화면참조 : 金榮漢, 朝鮮貴族觀光團記行, 1910) 5) 서위 ( 敍位 ) 황실령제16호 (1910.8.29) 서위조례는조선귀족의서위에관하여준용 ( 準用 ) 함 일왕의특지로후작은종2위이상, 백작 자작 남작은종5위이상 이기준이엄격하게적용되지는않았지만, 1912 년 12월 7일자로조선귀족에대한최초의서위가이루어짐 조선귀족의궁중석차는논란끝에일왕의 일시동인 ( 一視同仁 ) 하라는성지 ( 聖旨 ) 에따라일본화족과동일한서열로석차 ( 席次 ) 가정해짐 5. 조선귀족관련단체 1) 사단법인조선귀족회 ( 朝鮮貴族會 ) 1911 년 4월작위를받은귀족들이천황의 성은에감읍 하고 사회의모범 이되기위한활동을전개할목적으로조직 조선에서귀족의상호친선을도모하고품성의도야, 학식기타의향상발전에노력하며단지사교적단체일뿐만아니라일면정치적사회적매우중요한단체로서조선통치상에도공헌하는바많아실제적효적 ( 效積 ) 을일으키고있음 2) 조선임업조합보식원 ( 朝鮮林業組合普殖園 普植園 ) 1913 년 7 월귀족들의식림사업 농장경영등을위해조직 3) 재단법인창복회 ( 昌福會 ) 1929 년 9 월 28 일국채 250 만엔의기금과그이자및기타수입으로, 도박 아편등경제적으로 3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몰락해가는 조선귀족가정의안고 ( 安固 ) 도모 를목적으로, 그가계궁박 ( 家計窮迫 ) 한자 에게매달교부금지급 기금 : 1 우편저축, 조선총독이지정한은행, 신탁회사에예치, 2 공채모집에응모하거나매입, 3 조선총독이인가한유가증권모집에응모하거나매입등으로운영 지원방식 : (1) 자금대부 : 무담보로하며적당한연대보증인 2인이상, 1 자제의교육자금 : 무이자. 학생 1인당 1개월 50엔이내 2 부채정리 ( 가산정리 ): 5,000 엔이하, 연 5% 이내이자 1935 년까지학자보조 1건, 부채정리대부 14건에총 4만 3000여원 (2) 매달생활보조비지급 : 재산상태조사후결정. 규정상후작 300엔, 백작 250엔, 자작 200엔, 남작 150엔이내, 단 60세이상은지급액의 3할증액. 실지급액은이보다조금적었으며, 재난 질병 사망등에는특별교부금지급 4) 시국단체동요회 ( 同耀會 ) 1937 년 8 월귀족들이중일전쟁직후시국에대한내선 ( 內鮮 ) 의총후 ( 銃後 ) 를결속하기위해 1 시국에대한정확한인식의파악, 2 총후의후원운동등을통한내선일체의실현, 3 동양평화의 실현에기여, 4 황운부익 ( 皇運扶翼 ) 에적성 ( 赤誠 ) 등을목적으로조직 6. 조선귀족의몰락 8 1) 1920 년대중후반조선귀족의재산 1911 년 50 만원이상의자산가중조선인 32 명 : 공족 2 명 ( 이희 이강 ), 조선귀족 6 명 ( 박영효 이완 용 이재완 송병준 민영휘 민영달 ), 기타각지역 1925 년 11 월현재조선귀족및가족보유재산현황 8 金烏山人, 朝鮮貴族の沒落- 時代の推移に伴ふ一現象 朝鮮公論 제11권제9호 (1923.9) ; 전봉관, 2006 경성기담 : 근대조선을뒤흔든살인사건과스캔들, 살림출판사 ; 이기훈, 2009 1920 1930년대 조선귀족 의경제상황과조선총독부의귀족정책 역사문제연구 제21호, 역사비평사 ; 이용창, 2012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수작경위와수작자행태- 對韓政策의순응과代價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43집,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등참조.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1

이름 작위 당파 은사공채 내용 김사준 남작 노론 25,000 조선보안법위반사건 으로징역 1년 실작 (1915.11.9, 제16조 [ 박탈, 1915.12.14]) 김윤식 자작 노론 50,000 이용직과함께 독립청원서 제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실작 (1919.7.17. 제16조 [ 박탈, 1919.7.31]) 이용직 자작 노론 100,000 김윤식과함께 독립청원서 제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실작 (1919.7.17. 제16조 [ 박탈, 1919.7.31]) 김가진 남작 노론 25,000 상속신고불이행에따른습작불능 ( 제13조제1호 [ 사망후습작신고불이행 ]) 자료 : 朝鮮貴族世襲財産令制令案 公文類聚 第 51 編, 1927년, 제31권 ( 國立公文書館 ). 조선귀족세습재산령 개정 (1927.2.10) 후조사한조선귀족들의재산상황 - 조사대상자총 61 명 ( 후작 7, 백작 3, 자작 18, 남작 33) 중다소라도재산가는 35 명 재산정도 ( 부동사 + 동산 ) 조선귀족 명수 (43) 1000만이상 민영휘 1 100만이상 이병길, 이종건 2 20만이상 이동훈, 이달용, 민병석, 민상호 4 10만이상 박영효, 이해승, 이병무, 이재곤, 민충식 *, 김호규, 한창수, 이항구, 최정원, 이장훈 10 35 5만이상 이재각, 이해창, 민충식 *, 이창훈, 박부양, 박기양, 김교신 7 5만 ( 이하 ) 조민희, 임선재, 김종한, 민형식, 박기양, 조동희, 남장희, 이완종, 장인원, 김영수, 성주경 11 재산 = 부채 송종헌 (70만), 이하영 (25만) 2 다액부채 고희경, 윤택영 (100만이상 ), 윤덕영, 이지용, 李完鎔, 이기용 6 자료 : 每日申報 1927.2.11.2면, 貧窮에陷한朝鮮貴族의慘狀, 천만장자로부터걸인까지있는조선귀족들의참상!, 時已 晩矣, 財産世襲令. 민충식 (*) 은 10만이상과 5만이상에중복됨. 1930 년 1 월분창복회교부금지급현황 - 총 33 명 : 후작 2 명, 백작 1 명, 자작 10 명, 남작 20 명 - 총 5,500 원 : 후작 500 원, 백작 200 원, 자작 1,700 원, 남작 3,100 원 번호 작위 이름 금액 번호 작위 이름 금액 번호 작위 이름 금액 1 후작 이재각 250 9 자작 민병삼 170 10 남작 김완종 150 2 후작 이해창 250 10 자작 박부양 170 11 남작 장인원 150 1 백작 이영주 200 1 남작 김종한 150+50 12 남작 이능세 150 1 자작 이규원 170 2 남작 민형식 150+50 13 남작 김영수 150 2 자작 조민희 170 3 남작 박기양 150 14 남작 이중환 150 3 자작 李完鎔 170 4 남작 이원호 150 15 남작 성주경 150 3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4 자작 이기용 170 5 남작 조동희 150 16 남작 민건식 150 5 자작 민충식 170 6 남작 이규환 150 17 남작 박경원 150 6 자작 조대호 170 7 남작 남장희 150 18 남작 민규현 150 7 자작 이충세 170 8 남작 정천모 150 19 남작 최정원 150 8 자작 임선재 170 9 남작 김덕한 150 20 남작 조중구 150 자료 : 昌福會關係書類 齋藤實文書 (100-7-853). 비고 : 1930년보통학교훈도평균월급 53원 ( 연 636원 ), 1941년 55원 ( 연 660원 ). 2) 몰락의행태 : 투기 사치 축첩 도박 이준용 ( 공족 ) : 운현궁과대증개축, 사치, 별도로은사공채수령, 부채를둘러싼소송 윤택영 ( 후작 ) : 부채왕 채무왕 대채왕 ( 大債王 ) 차금 ( 借金 ) 대왕. 해풍부원군. 순정효황후의父, 순종의장인, 대갈대감 윤덕영 ( 자작 ) 의동생. 장남윤홍섭은남작한창수의사위. 350만원내외 ( 채권자 120여명 ) 의빚더미에몰려베이징도주 사망. 분참봉첩지위조사건. 윤치호, 빚쟁이들이라면몰라도, 그의죽음은어느누구에게도손해날일은아니다. 이인용 ( 후작 ) : 이재극사망 (1927) 후유산 100만원중수십만원낭비및부인조중인의낭비 마작 불륜, 조선귀족회 ( 이재극가 ) 재정정리위원회 ( 위원장박영효 ), 이인용이조중인의간통을이유로이혼협박 구타 공갈했다고이를고소 (1932.5.9) 및 동거청구소송 (5.19, 승소 ), 이인용의 이혼청구소송 (6.2, 기각 이인용측의항소및 1934.1 승소 ), 이인용에대한준금치산자선고신청제기 (1933.7.10) 이해창 ( 후작 ) : 장남이덕주가사기꾼들의꼬임으로일본인고리대금업자에게 1만 5000여원의돈을빌렸으나, 정작본인은 4,000 여원을받아주색등으로탕진하고나머지는사기꾼들이수수료로가져감. 창복회교부금생활. 1934 년차남이흥주가충남의토지를판돈 3,000 원사기를당하고음독자살 민영린 ( 백작 ) : 아편흡입죄로징역 3월집행유예 3년선고, 1919 년 7월실작 ( 제16조 ) 이지용 ( 백작 ) : 도박에빠져예우정지와회복을몇차례반복하면서근근이작위를유지하다가손자이해충 ( 李海忠 ) 이습작 민병삼 ( 민영규의양손, 자작 ): 화류계출입으로순식간에 3만여원낭비, 본처가법원에준금치산선고를받아내기위해일족들에게서명을받으러다님. 고모에게상속될 7,000 원상당의토지를몰래팔아치웠다가횡령죄로고발당함 조중응 ( 자작 ) : 아들조대호는 장안부랑자로둘째가면서러울 정도였고, 左夫人右夫人을두고東西로無事奔走 하며주색에재산을탕진. 결국집안은 1924 년부터궁내성의자금 1만 5000원을지원받아토지를구입하고이를신탁해생활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3

민영기 ( 남작 ) : 1922 년 5월농림주식회사설립후토지사업투자, 1923 년부채 20만여원, 5월파산신청, 12월고소등으로몰락 민형식 ( 남작 ) : 파산한아들 6형제모두강도 절도를저질러 1929 년말 4명이복역, 6남은민형식이신세를지고있던친척민병석 ( 자작 ) 의집에들어가강도짓 이근호 ( 남작 ) 이근택 ( 자작 ) 이근상 ( 남작 ): 이근홍 (4남) 이근목 (5남) 등총 30여명의애첩 조동윤 ( 남작 ) : 사치와낭비로인한과도한지출로경제적파산지경에이른대표적인경우. 조선군사령관과총독 ( 사이토 ) 등이부채정리후원으로조선식산은행의저리자금불법융자계획 ( 연리 11%), 1923 년 5월조동윤 ( 본처김숙제 ) 사망후아들조중구 ( 친모김동숙 ) 가미성년으로상속하면서복잡. 당시총부채약 30만원, 이중친모김동숙의부채가원리합계금 1만 7000 원이상. 김동숙이부양비청구소송을거쳐대금등을받고分家. 파산으로부채정리기간중이던 1926 년옷값 1,300 원, 소고기값 1,600 원, 약값 1,100 원등생활비로인한부채 1만 4000여원. 1928~1929 년조중구의모친 부인 딸내외등생활비가매년 9,000 여원. 귀족구제자금 1,800 원을받았지만부채가다시늘어나 1930 년 3월 3만 8000원등으로매년지출원리금이 5,000 원이넘으면서재산정리위원들도좌절할정도 조민희 ( 남작, 이완용의처남 ) : 1923 년일본인고리대금업자들로부터파산신청당함, 1925 년도박자금을마련하기위해이완용소유토지의마름을미끼로수백엔을받는등사기행각을벌이다가고소를당함. 1928 년파산선고가내려져일시적으로귀족의예우중지 조희연 ( 남작 ) : 중추원고문. 재산을모두탕진해빚으로쪼들리다가, 1915 년 5월사망직전에작위를반납해제20조적용. 중추원고문직은사망직후반납. 작위반납은겉으로는 원 ( 願 ) 에의한반납 이었지만, 모범을보여야할조선귀족이 품위를잃고 작위를박탈당하는것을무마하기위한조선총독부의종용에따른것 실형등선고를받은윤택영 ( 후작 ) 조동희 ( 남작 ) 등도실작했다는기록이있지만, 작위가습작된것으로보아예우가정지된상태에서작위를유지한것으로추정 3) 친일재산의국가귀속 9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조사대상자총 507 명 - 친일재산이발견되어국가에귀속시킨친일반민족행위자 168 명 9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편, 2010 친일재산에서역사를배우다, 리북참조. 3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339명도친일재산이없었던것이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 (2005.12.29) 시행전에이미처분되거나자료의부족으로재산조사를추진하지못함 총규모 : 2,359 필지, 1113만 9645 m2, 시가 : 2106 억원, 공시지가 : 959억상당 - 여의도면적의 1.3배, 시가로 42만명의초중고학생들에대해 1년동안무상급식가능 - 친일반민족행위자 168명중조선귀족 60명의재산현황 920필지, 607만 4438m2, 시가 : 1231 억원, 공시지가 : 556억상당 ( 화면참조 ) 법무부 (2010.7~2013.8), 친일재산환수소송 ( 보도자료, 2013.8.14) - 재산조사위원회 (2006.7~2010.7) 법무부승계이후 부당이득의반환을청구하는국가소송, 친일재산의국가귀속에불복하는행정소송, 근거법률에대한헌법소송 등총 95건의소송수행 : 종결된 87건중 84건에대하여국가승소판결, 승소율 97%( 일부승소포함 ) - 소송종료등으로매각에제한이없는재산을매각 ( 한국자산관리공사에위탁매각 ) 하는등으로 2013년 8월현재 322억 1000 만원의기금조성 반민규명위원회 진실화해위, 친일파후손등이제기한소송은총 40건 : 반민규명위와진실화해위를상대로한결정취소소송은 23건 6건, 명예훼손에해당한다며국가를상대로낸손해배상소송및헌법소원 11건. 40건중 33건이마무리, 국가를상대로한손해배상소송 2건을제외한모든사건에서친일파후손등이의를제기한이들이패소 10 - 미결 7건 3건이방응모 (2010.10 1심, 2012.1 항소심, 3년째상고심계류중 ), 김성수 (2011.10 1심, 4년째항소심계류중 ) 결정취소소송, 이해승친일행위결정취소소송 7. 마무리 일제가작위를받아들인자나거부 거절한자에게적용한기준은 충순 과 공로. 즉작위수여를 받아들인자는충순한자또는공로자, 거부 거절한자는충순이결여되어있거나스스로공로자이 기를거부한자로판단했다는해석이가능 10 한겨레 2014.11.3.1 4 5 면, 월요리포트 : 친일언론사주 재판.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5

일제가 조선귀족령 을제정하고귀족집단을만들어낸것은개항이래한국침략과정에서얻은경험을토대로한것. 일제가조선귀족에게서얻고자했던것은식민통치를앞장서선전하고정당화할전위대이자일왕의충량한신민의역할. 때문에조선귀족이식민통치에모범적이지않거나충순을결여하는등의경우에는 조선귀족령 의몇개조항을포괄적으로적용해작위삭탈. 그렇지만명백한위반자라고하더라도식민통치의이용가치가있으면작위의유지와정지를반복하면서귀족신분을누릴수있도록배려했으며, 한편으로는조선귀족의명예나일본정부및총독부의권위 체면등을위해사퇴를권유하는경우도다수작위를거부하거나거절하는행위에대해 조선귀족령 을비롯한어디에도법적 강제적조항없음. 또이로인해신체적으로고통을받거나물리적 경제적으로직접피해를입었다는사례도찾을수없음. 오히려조선귀족들은도박 축첩 아편흡입 사치등방탕한생활로가산을탕진해경제적으로몰락했을뿐만아니라재산문제를둘러싼소송등이빈번해이들에대한민중들의인식도매우부정적이어서조선총독부가이들을구제하기위해금전적 정신적지원을모색할정도였음작위를받은일이일제의일방적인강요때문이었다고주장하기도하지만최초수작자중 8명이즉시작위를거부 거절했고, 처음에작위를수용했던 4명은 독립운동 과관련해 실작. 이것은조선귀족들도 3 1운동과같은대일 ( 對日 ) 저항운동등에능동적으로참여할수있었음을보여주는것조선귀족에선정된대한제국의일부황족과국정을책임졌던관료들의반민족 매국행위는 수작행위자체 만으로도판단가능. 11 국망 ( 國亡 ) 과함께식민지배국이제공한작위를아무런저항없이받아들인행위는, 강제병합과정에순응하고협력한대가로당연하게여겼다는반증 11 해방직후제기된각단체의규정 강령 성명서및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에는작위수여자와습작자는모두행위와 상관없이 당연범 으로처벌하도록하였다. 3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황국신민화의첨병 - 지식인층의친일행태 - 교육계지도층을중심으로 박수현민족문제연구소연구실장 1. 지식인과친일지식인 진정한지식인은본질적으로 자유인 인까닭에자기의삶을스스로선택하고, 그결정에대해책임이있을뿐아니라자신이존재하는사회에대해서책임이있다고믿는다. 이이념에따라, 나는언제나내앞에던져진현실상황을묵인하거나회피하거나또는상황과의관계설정을기권으로얼버무리는태도를 지식인 의배신으로경멸하고경계했다. 사회에대한배신일뿐아니라그에앞서자신에대한배신이라고여겨왔다. ( 리영희 ) 지식인의가장직접적인적은사이비지식인이라고부를수있는자들이다. 집지키는개 라고 불리던 이들은지배계급의사주를받아자칭과학적인논리를통해특수주의적이데올로기를 옹호하려든다 ( 사르트르 ) 지식인의사회적역할과책임에대해서는다양한담론속에서끊임없는논쟁이오갔고, 지금도계속되고있다. 근래들어서는 지식인의종말, 지식인의종언 등타락한지식인을비판하는담론까지폭넓게확산되고있다. 지식인은어느사회나필요하고중요하지만그런만큼문제도많다. 지식인은본래진실을찾는데힘쓰고그것을알리는자로서현실에대해끊임없이고민하며, 비판적시각으로은폐된사회문제를폭로하고대중들에게새로운변화의가능성을제시하는존재들이다. 또한자신의영역에서이루어낸지적활동과성과를통해, 정치 사회등의공적인문제에대해자신의견해를표명하는오피니언리더로서역할을수행하기도한다. 어느시대건지식인들은 지적능력 과 예리한통찰력 의소유자로인정받고있고, 많은사람들의묵시적지지를받는존재들이다. 때문에지식인은큰사건이있을때마다진실규명과대중들의올바른선택을위해발벗고나서야하고, 시대역시그들을끊임없이호출하며해답을찾는다. 그래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7

서때로는신변의위험을감수하는용기를발휘해야하기도한다. 이때위험에굴하지않는지조와기개야말로지식인삶의표상이자상징이다. 억압된사회일수록민도 ( 民度 ) 가낮은사회일수록이러한지식인의사회적역할과책임은더욱막중하다. 대중의교육수준과소수엘리트의교육수준사이에큰차이가있거나지식과정보가차단된사회로서지식인의계몽적역할이중요하기때문이다. 일제강점기나해방후독재정권시기가여기에해당된다. 특히일제강점기는지식인의글, 말, 행동하나하나가대중들에게미치는파급력이큰사회로서대중들을깨우치고진실을알리는자로서의지식인의사명이절실히요청되는시기였다. 친일인명사전 에상당수의지식인이수록된것은이러한이유였다. 일제강점기의지식인들은교육, 학술, 언론, 문학, 예술, 종교등각분야에서지적활동과성과를통해대중들을깨우치고시대의요구에답할수있는능력이있고그러한위치에있는자들이었다. 그럼에도이들은자신들의역할과책임을방기한채불의한식민지권력의협력자차원을넘어앞잡이노릇을자행했다. 사르트르는행동하지않는지식인을사이비지식인으로규정하고 집지키는개 로불렀다. 친일지식인은행동하지않은지식인정도가아니었다. 사르트르의관점에서보면친일지식인은 집지키는개 가아니라식민지권력의 충견 이었다. 일제의지배정책과침략전쟁의논리를옹호하고, 이를대중들에게확산시키는역할을한친일지식인의행위가우리민족에게끼친해악은어떤분야보다도컸다. 그래서 1948 년 9월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 에서도친일지식인들을 종교, 사회, 문화, 경제기타각부문에있어서민족적인정신과신념을배반하고일본침략주의와그시책을수행하는데협력하기위하여악질적인반민족언론, 저작과기타방법으로써지도한자 ( 제4조 11항 ) 로규정하고이들에대해 10년이상의징역에처하거나 15년이하의공민권을정지하고그재산의전부혹은일부를몰수할수있다 ( 제4조 ) 고처벌조항까지명시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는이를더세분화하고구체화했다. 언론, 교육 학술, 개신교, 천주교, 불교, 천도교, 유림,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영화등지식인들이활동하는분야를세분화하고각분야마다선정기준을마련했다. 그리고각분야마다 일제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한자 라는조항을두어강연, 좌담, 저술, 기고, 작품, 공연등지식인들이자신들의분야에서행한지적활동을통해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한자들을선정했다. 친일지식인을선정하는작업은쉬운일이아니었다. 지식인의특성상겉으로드러난행위는물론논리구조와그들의속성까지파헤쳐야했다. 경우에따라서는그들의내면세계까지들어다봐야했다. 이를위해각분야별로방대한자료조사와분석, 철저한검증작업을거쳤다. 이렇게친일지식인의실체를밝혀내는데많은노력을기울인이유는지식인의사회적 도덕적 역사적책임의 3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엄중함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친일지식인들은전시기에걸쳐광범하게포진되어있었고활동양상도분야에따라다양했다. 이강좌에서는 친일인명사전 에수록된각분야의친일지식인중교육분야의지도층인사들을중심으로살펴보고자한다. 특히이들의친일활동이가장극렬했던전시체제기에초점을맞추었다. 친일인명사전 에수록된교육계지도층은일제말전시체제기에가장영향력있는대표적인지식인그룹이었다. 이들은자신들의지위와영향력을활용해일제식민지배의정당성과천황제이데올로기를강화하는데선도적인역할을했을뿐아니라강력한파시즘체제를옹호하며조선인들은침략전쟁으로내모는데 1등공신 역할을했다. 더구나이들은학교를운영하거나직접학생들을가르치는교육자들로서학생 청년층에미치는영향력은어느누구보다도컸다. 그래서이들의친일행각이더욱문제였고지탄받아마땅했다. 설혹이들의변명대로친일행위가강요에의한어쩔수없는선택이었다하더라도그조차도지도자적위치에있는교육자, 지식인이라고한다면용납될수없는일이었다. 그런데도이들은해방이후승승장구하며교육계뿐아니라한국사회를대표하는지도자급으로거듭났다. 해방직후친일청산좌절되면서사회정의가실종된결과다. 통렬한반성과참회없이해방이후에도일제말기의추악한친일행각을벌였던그지위와명성을그대로, 그이상으로누렸다는것도문제지만더큰문제는 민족지도자, 선각자, 교육계의참스승 등으로둔갑했다는점이다. 이때문에이들의친일행위를밝히는작업은더욱철저했고세심했다. 편찬과정에서가장힘들었던분야가이들지식인층들이었다. 편찬작업이진행될수록이들의친일행각은속속들어났고, 그럼에도어떤인물보다도더주의를기울이고더철저한검증을해야만하는한국사회의현실이서글프기까지했다. 더구나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은해방된지반세기가훨씬지난시기에추진된, 그것도 역사적청산 을목적으로한사업이었다. 아래표의명단은 친일인명사전 에수록된교육분야주요인물들이다. 전시체제기각급학교에서황민화교육의첨병역할을하며학생들을천황의신민으로, 침략전쟁의예비전사로키운교육자들은많았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에서는사회적논란을최소화하기위해확실한근거가있고또친일행위의영향력과파급력이큰인물들을수록대상으로했다. 즉친일행위가명백한지도층인사를그대상으로했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9

전시체제기 (1937~45) 교육계의주요친일인사 이름 생몰년 1937~45 교육계경력 해방후주요경력 갈홍기 ( 葛弘基 ) 1904~1989 연희전문교수 숙명여대교수, 초대공보실장 고광만 ( 高光萬 ) 1904~? 시학관, 충주중교장 문교부장관, 부산대총장 고황경 ( 高凰京 ) 1909~2000 이화전문교수 서울여대학장, 국민교육헌장제정위원 김두헌 ( 金斗憲 ) 1903~1981 혜화전문교수 전북대 숙명여대총장 김상용 ( 金尙鎔 ) 1902~1951 이화전문교수 이화여대교수 김성수 ( 金性洙 ) 1891~1955 보성전문교수 부통령, 동아일보사장, 보성전교장 김활란 ( 金活蘭 ) 1899~1970 이화전문교장 이화여대총장, 유네스코한국대표 박관수 ( 朴寬洙 ) 1897~1980 시학과, 경기여고교장 경북대 한양대교수, 대전고교장, 아세아반공연맹이사장 박마리아 ( 朴瑪利亞 ) 1906~1960 이화전문강사 이화여대부총장 박인덕 ( 朴仁德 ) 1897~1980 덕화여숙교장 인덕학원이사장 배상명 ( 裵祥明 ) 1906 1986 상명여학교교장 상명여자사범대이사장 백낙준 ( 白樂濬 ) 1896~1985 연희전문교수 문교부장관, 연세대총장 서은숙 ( 徐恩淑 ) 1902 1977 이화전문교수 이화학당이사장 손정규 ( 孫貞圭 ) 1896? 경기여고교장 서울대교수, 조선교육심의회위원 송금선 ( 宋今璇 ) 1905~1987 덕성여실교장 덕성학원이사장, 통일주체대의원 신봉조 ( 辛鳳祚 ) 1900 1992 이화여고교장 이화 상명학원이사장 신흥우 ( 申興雨 ) 1883 1959 배재중교장 대한체육회회장 양주삼 ( 梁柱三 ) 1879~? 세브란스전문이사 대한적십자사초대총재 여운홍 ( 呂運弘 ) 1891 1973 보성전문교수 자유당선전부장 오긍선 ( 吳兢善 ) 1878~1963 세브란스전문교장 한국사회사업연합회회장 유진오 ( 兪鎭午 ) 1906~1987 보성전문교수 헌법기초위원, 고려대총장 유억겸 ( 兪億兼 ) 1896~1947 연희전문부교장 미군정학무부장, 조선체육회부회장 이묘묵 ( 李卯黙 ) 1902~1957 연희전문교장 주영공사 이숙종 ( 李淑鍾 ) 1904~1985 성신여학교교장 성신 숙명학원이사장, 유정회의원 이헌구 ( 李軒求 ) 1896~? 보성중교장 경기중교장 임숙재 ( 任淑宰 ) 1891~1961 숙명전문교수 숙명여대총장 장덕수 ( 張德秀 ) 1894~1947 보성전문교수 미군정조선교육심사위원 장응진 ( 張膺震 ) 1880~1950 광주욱여고교장 정구충 ( 鄭求忠 ) 1895~1986 경성여자의학전문교수 대한의학협회장 조기홍 ( 趙圻烘 ) 1908? 진명여학교교유 경기여중교장, 성신여대학장 조동식 ( 趙東植 ) 1887~1969 동덕여학교교장 상명학원이사장, 동덕여대학장 조재호 ( 曺在浩 ) 1902~? 시학관, 경복중교장 경기 서울고교장, 서울교대학장 차사백 ( 車士伯 ) 1897~1990 이화전문교수 무학여고교장 최동 ( 崔棟 ) 1896~19 73 세브란스전문교수 세브란스의학전문학장 현상윤 ( 玄相允 ) 1893~? 중앙중교장 고려대총장 황신덕 ( 黃信德 ) 1898~1983 경성가정여숙교장 중앙여중고교장, 추계학원이사장 4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2. 전시체제기교육계지도층의친일행태 일제의식민지교육은시기에따라변화가있었지만궁극적인목표는천황제이데올로기강화를통해체제에순응하는충량한황국신민을육성하는것이었다. 천황제이데올로기교육은 1911 년 조선교육령 이제정된이후줄곧식민지교육정책의핵심이었고, 그근본으로삼은것이천황의 교육칙어 였다. 1890 년에반포된 교육칙어 가 조선교육령 에도그대로반영되면서이후식민지교육이념의뿌리가된것이다. 짐 ( 朕 ) 이생각컨대우리황조 ( 皇祖 ) 황종 ( 皇宗 ) 께서나라를세우실제, 굉원 ( 宏遠 ) 한덕을세우심이심후 ( 深厚 ) 하도다. 우리신민들이충과효로써억조창생 ( 億兆蒼生 ) 의마음을하나로하여대대손손그아름다움을전하게하는것이국체 ( 國體 ) 의정화 ( 精華 ) 로서, 교육의연원 ( 淵源 ) 이실로여기에있도다. 무릇신민은부모에게효도하고형제가우애하며부부가화목하고붕우가신뢰하며, 국헌 ( 國憲 ) 을중히여기고국법을준수하며, 일단유사시에는의용 ( 義勇 ) 으로나라에봉사함으로써, 무궁 ( 無窮 ) 한황운 ( 皇運 ) 을부익 ( 扶翼 ) 할지니라. 이는짐의충량 ( 忠良 ) 한신민이될뿐아니라, 조상의유풍 ( 遺風 ) 을현창 ( 顯彰 ) 하는일이니라. 이를항상잊지않고지켜한결같이덕을닦기를바라는바이다 천황제이데올로기교육은전시체제기에극에달했다. 일제는중일전쟁이후병력을비롯한조선인들의전쟁협력이절실해지자, 내선일체 ( 內鮮一體 ) 를통치의전면에내세워황민화정책을적극적으로추진하는한편교육도정책적으로침략전쟁을위한철저한황민화교육에초점을맞추었다. 이를위해 1938 년 3월조선교육령을개정 ( 제3차조선교육령 ) 해 내선일체를통한황국신민의육성 을최우선적인목표로설정했다. 이를위해 국어 ( 일본어 ) 를상용화하고 조선어 를임의과목으로했으며, 역사 ( 일본사 ) 수신( 修身, 도덕 ) 과목을강화했다. 이후공립학교에서는대부분 조선어 과목이폐지되었다. 또한민족차별을없앤다는명분으로보통학교명칭을소학교, 고등보통학교명칭을중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를고등여학교로통일했다. 이어 1943 년 3월일제는다시조선교육령을개정 ( 제4차조선교육령 ) 해황국신민화교육을더욱강화했다. 조선어 과목은완전폐지되었으며중학교, 고등여학교의수업연한은 4년으로단축되었다. 그리고체력향상과군사훈련을강화해학교교육을근로동원및병력동원을위한전시형 군대형인간의양성수단으로활용했다. 이렇게전시체제기교육은내선일체를명분으로학생들을황국신민으로육성하고침략전쟁에적합한예비전사를양성하는데있었다. 침략전쟁에필요한인간으로교화, 육성하는것이전시체제기일제의교육목표였다. 따라서이시기교육정책과조선인병역제도는서로맞물리면서추진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41

되었다. 육군지원병제공포시기에맞추어제3차조선교육령이개정되었고, 징병제공포에맞추어제4차조선교육령이개정되었다. 병역제도가확대될수록파시즘교육도강화된것이다. 일제가내세운내선일체도실제로조선인과일본인의차별을없애기위한것이아니라, 조선인들을침략전쟁에끌어드리고반발을최소화하기위한명분이자민족말살을위한구실일뿐이었다. 내선일체를내건황민화정책과파시즘교육의의도와목적이무엇인지는일반인들도쉽게알수있었다. 이는전시체제기에크게확산된 유언비어, 그리고수많은생존자들의증언을통해서확인되는바다. 당시일반대중과는비교할수없을정도로높은수준의교양과지식을지닌지식인층, 특히학교현장의지도층인사들이이를모를리없었다. 그런데도이들은광란의선전 선동에나서며적극적인친일행위를벌였다. 교육계를비롯한각분야의친일지식인들은주로관변 민간의친일단체에참여해활동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력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애국금차회, 채권가두유격대, 임시지원병제익찬회, 조선교화단체연합회, 국민동원총진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등이다. 이단체들은조선인들의전쟁협력을조직적으로독려 강요하기위해급조된단체들로서조선총독부와긴밀한협조하에선전 선동활동을담당했다. 친일지식인의주된임무는친일단체가주관하는각종행사에참여해강연, 연설등을통해대중들을선동하는일이었다. 친일단체활동과함께교육계친일인사들의가장중요한역할은신문 잡지 방송등언론매체의기고글, 발언, 좌담회를통한선전 선동이었다. 당시매일신보 경성일보 조광 삼천리 신시대등대중매체나각단체의기관지에서가장흔하게발견되는것이이들의글이었다. 대부분일제의식민지지배를미화하고, 침략전쟁을정당화하면서전쟁협력을독려하는내용이었다. 주요사건이일어날때마다일제가선전 선동이필요로할때마다이들은어김없이등장했다. 중일전쟁, 육군특별지원병제도, 태평양전쟁, 해군특별지원병제도, 학도병제도, 징병제도등조선사회를뒤흔들고민심이요동치는큰사건이일어날때마다이들은일제의편에서파시즘체제와침략전쟁을옹호하는논리와주장으로조선인들의동요, 반발을막고전쟁협력을독려하는데힘썼다. 중일전쟁직후 유언비어 가확산되고민심이크게동요하자이들은중일전쟁의정당성과비상시국에대한철저한인식을강조했다. 북지사변과비상시국의철저한각오를환기하여민심의동요를각각자제하며각각그업에안정하여총후봉공에노력하는것이이시국에대처하는유일한방도이다. 1 라는김성수의주장은중일전쟁직후친일지식인들이대중들에게전하고자했던공 1 第二日金性洙씨, 조선일보, 1937 년 8 월 3 일 4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통된메시지였다. 전쟁이장기전으로흐르며조선인병역제도가점차확대되자, 교육계친일인사들의선전 선동도점점노골화되었다. 등장횟수도크게늘어났다. 내선일체를내건일제의총력전이큰효과를거두지못하고있다는반증이기도했다. 당시조선인들사이에서는전쟁에대한공포와병력동원에대한두려움이날로커지는상황이었다. 특히징병제도는조선사회에엄청난충격을던졌다. 교육계친일인사들은강연, 연설, 기고등을통해적극적으로전쟁협력을독려했다. 그내용은대부분징병제도는조선인에게황국신민의자격을준것이라며천황에게감사하고큰영광으로생각해야한다는것이었다. [ 박관수 ] 2천4백만의반도중서 ( 衆庶 ) 는 신민된충성을다하여본제도의실시를원활히진행하게하여황은의만분지일을보답하지아니하면안된다. 징병은일본신민으로서가장숭고한도의다. 일본신민에게만한하여부여하는최고의은총이다. 폐하의고굉 ( 股肱, 팔다리 ) 이되어서일신을군국 ( 君國 ) 에바치는것이황국신민된최대의영예요, 세계에대하여일본인이된무상 ( 無上 ) 의영광이다. 2 [ 박마리아 ] 징병령이라는것은천황폐하께옵서내리신여간한큰은사가아닙니다. 아직까지는어린애였지만인제는그성장한사람이라고인정하시고총과칼을메고전지에나가라고하시는것이니까전지에나가는이상황은에어그러짐없이충용하고훌륭한황국신민이되도록노력하는것이이혜택에보은하는최선의길입니다. 3 [ 김성수 ] 조선에징병령실시의쾌보는실로반도 2천 5백만동포의일대감격이며일대광영이라. 이징병제실시로인하여우리가이제야명실상부한황국신민의자격을얻게된것은일방 ( 一方 ) 으로전반도청년의영예인동시에반천년문약 ( 文弱 ) 의분위기중에서신음하던 모든병근 ( 病根 ) 을일거에쾌치하고거일 ( 去日 ) 생산할제2의양질 ( 良質 ) 을얻은것이다. 4 [ 고황경 ] 소화 18 년 [1943 년 ] 8 월 1 일은조선에징병제가시행되는날로써우리나라병제사 ( 兵制 2 박관수, 皇民된최고의영예, 半島の光 제 56 호, 1942 년 7 월 3 좌담회 - 징병령과반도어머니의결의, 조광 제 8 권 6 호, 1942 년 6 월 4 김성수, 文弱의痼疾을버리고尙武氣風助長하라, 매일신보, 1943 년 8 월 5 일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43

史 ) 위에영구히기록할만한일인것은물론이거니와 반도동포로하여금명실이상부하는황국신민을만들려고심혈을기울여분투한결정이아닐수없다. 이에대한무한한감사를드릴사이고, 광대무변하옵신성은에오로지공황 ( 恐惶 ) 감격할뿐이다. 성은을무엇으로보답하올까. 나라를위하여한마음이되어서힘다하여라. 임금님의군사로나서는젊은이들 젊은이들아그집안사람들아임금위하여참마음하나로일어서라하노라. 5 이들은또한일제의침략전쟁이태평양전쟁까지확대되자, 태평양전쟁을아시아민족의해방을 위한정의로운전쟁이며도의에입각한세계신질서를구축하기위한전쟁이라고역설했다. 그러 면서미국 영국에대한적개심을불러일으키는데역점을두었다. [ 백낙준 ] 오늘우리에게맡겨있는한가지임무는과연무엇인가. 나는조금도서슴지않고원수미영을때려없애고대동아전쟁을마감하는것이라하겠습니다. 명일의도의의신질서를세우려면미영의침략착취의구질서를완전히부셔버려야하고명일의협동안정, 공존공영의새질서를세우려면미영의이기주의와약육강식의경쟁질서를부셔버리지아니하여서는아니될것입니다. 그럼으로미영격멸은오늘우리의큰임무인동시에내일의채비차림이되는것이외다. 6 [ 장덕수 ] 과거수백년간동양을침략하여갖은착취와압제로서배를부릴뿐아니라아제국 ( 我帝國 ) 의동아공영권건설을방해하던동양전민족의공동의적미국과영국두나라에대하여지난 12월 8일제국은드디어정의의간과 ( 干戈 ) 를잡게되었으며 ( 두나라에서는 ) 강한자는살고약한자는죽는것뿐입니다. 약육강식하는동물사회에무슨자유주의 개인주의가있을리가있습니까. 나는영국의과거산업사를읽고그소위산업주의의문명이핵심으로부터썩어진것을통절히느끼었습니다. 동아의열민족 ( 列民族 ) 은그착하 ( 搾下 ) 에피가마르고그폭학 ( 暴虐 ) 하에뼈가굽었습니다. 선한나무는선한열매를맺고악한나무는악한열매를맺습니다. 황도일본제국의적성국가 ( 敵性國家 ) 인영미의정체는이에있습니다. 7 일제가필요로하는병력동원의대상은청년층이었지만이들의자발적참여를이끌어내기위해 5 고황경, 徵兵感謝와우리의각오 - 建軍정신에透徹, 매일신보, 1943 년 8 월 5 일 6 백낙준, 明日의勝利는今日의實踐에서, 放送之友, 1944 년 4 월 7 장덕수, 적성국가의정체, 삼천리 제 14 권 1 호, 1942 년 1 월 4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서는어머니이자남편인여성들의도움이필요했다. 이에따라여성들을대상으로한선전 선동 이이른바 총후봉공 의기치아래노골적으로전개되었다. 그역할을담당한것은주로교육계여 성지도자들이었다. [ 고황경 ] 금번조선에도징병제도가실시되게되어소화 19년 [1944 년 ] 부터는황송하옵게도우리가정에서황군을내일 ( 국가에바칠 : 작성자 ) 영광을가지게되었다. 황군을양육하는가정과그가정을맡은주부는참으로엄숙한자각을가지고국가의큰임무를맡지않으면안될것이다. 8 [ 배상명 ] 당장급한일은적령 ( 適齡 ) 된자식을가진어머니에게확고한인식을주입시켜주어야겠습니다. 떠날때, 보내는사람들이힘있게보내준다면전지에가서오래오래두고잊잖을것입니다. 떠날때에 목숨달아날때까지나라를위하여일하라 고격려해준다면얼마나좋은일이겠습니까. 독자라도서양자 ( 養子 ) 드릴셈잡고허심 ( 虛心 ) 으로나라에바치는각오가서야하겠습니다. 스물한살까지만이내아들이란 경지에도달할날이머지않아올줄압니다. 9 [ 김활란 ] 이제는반도여성자신들이그어머니그아내가된것이다. 우리는아름다운웃음으로내아들이나남편을전장으로보낼각오를가져야한다. 따라서만일의경우에는남편이나아들의유골을조용히눈물안내고맞아들일마음의준비를가져야한다. 과연우리에게그런각오가있을까? 이점에서우리는내지여성에게배울점이많다. 우리일본이세계어느나라보다도강한원인의하나가일본여성의숨은힘이라한다. 말없이참고나가는그들의힘은강한사람의몇배의힘을가진것이다. 그들을그렇게까지만드는그근본정신을지니도록해야한다. 즉국가를위해서는즐겁게생명을바친다는정신이다. 모든것이내것이아니다. 내남편도내아들도물론국가에속한것이다. 국가에속한내남편이나아들또내생명이국가에서요구될때쓰인다는것은너무나당연한일이다. 못쓰인다면오히려그얼마나부끄러운일인가. 10 8 고황경, 전시와가정 - 가정은국가의뿌리, 半島の光 57 호, 1942 년 8 월 9 배상명, 징병령과반도어머니의결의, 조광 제 8 권 6 호, 1942 년 6 월 10 김활란, 징병제와반도여성의각오, 신시대 제 2 권 12 호, 1942 년 12 월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45

[ 황신덕 ] 우리반도여성들은이번대동아전쟁을통하여느끼고배울점이많았지만그중에도충용한무훈을세우고종용히호국의뜻으로산화한육군의장병이다. 그과감위대한행동의배후에는반드시 훌륭한어머니 가있음을알수있다. 죽음 을생각지않는그러한위인들을길러내는어머니가되기에노력하여야할것이다. 11 [ 송금선 ] 군국의어머니는전날가졌던자녀에대한묵은관념을타파하여야될것입니다. 흔히자기가낳은자녀라 내것 이라는애착심이생기기쉬우나징병제도실시를앞두고 이러한자녀관은일절말소시켜야될것입니다. 삼가생각하옵건대황공하옵게도위로천황폐하의고굉 ( 股肱 : 팔다리 ) 이되고국가의간성이되며 요직에설자녀이므로촌호 ( 寸毫 ) 도 내것 이라는관념을개신 ( 改新 ) 하여어디까지든지폐하의적자, 국가의큰보물임을깊이느끼고우리는맡아서양육해드리는데불과하다는신념을굳게가져야될것입니다. 12 이들은또한가정에서의황민화실천과물자절약, 여성근로동원등을촉구하는일제의시책에 적극호응하며여성들도총력전체제에적극나설것을강조했다. [ 황신덕 ] 우리집에서는국어 ( 일본어 - 작성자 ) 를할줄아는하녀를둠으로서가족전부가물론나도함께말할때는국어를사용합니다. 무엇이든습관화로서해나가야신분에맞는말을할수있지않습니까? 곤란한일은하녀도말할때국어를사용하는데, 손님을맞이하는데조선어를사용하는것이니국어상용의철저화를영구히하는그날을원하는바입니다. 13 [ 고황경 ] 대동아전쟁이시작된지 1년이되는이때에 얼마나감사한일입니까. 배급을정부에서하는것이아무리어려운때라도한사람도억울하게굶는일이없고똑같은국민으로서의보호를주려고하는어머니와같은사랑의심정이라는것을배찰할때에감격밖에는없습니다. 14 [ 배상명 ] 여성들도간접직접으로있는힘을다해서근로전사가되어묵묵히생산전에매진하 11 황신덕, 어머니의책임더한층중대, 매일신보 1943년 5월 13일 12 춘추 제5권제1호, 1944년 1월 13 신시대 제2권 6호, 1942년 6월 14 고황경, 大戰一年間에배운것, 半島の光 鮮文版 62호, 1943년 1월 4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지않으면안될줄압니다. 당국의지도에다라군수품공장에서나논밭에서나근로함으로 써대동아전쟁의승리를바랄수있으리라생각합니다. 15 [ 이숙종 ] 지금은나라가망하느냐흥하느냐의결전단계에있어서쉬는것을생각하는일요일이있을수없는것이다. 관청이나회사에서일요일을전부바쳐일을한다해도총후의노무력은부족한이때에일요일까지일하게된것은한편힘있는일이고우리가바라마지않는일이다. 가정에있어서의주부도이러한시국의긴박한상태를깊이깊이인식하고 생각부터고쳐가져야할줄안다. 당장필요한생활필수품만을가지고이이상더주릴수있는데까지줄여서살고남은비용과힘을동원시켜서생산증강에공헌하지않으면안될줄안다. 16 무엇보다교육계친일이사들의가장두드러진친일행위는학생들의전쟁참여를적극적으로독려한일이다. 특히 1943 년 10월 학도지원병제 가공포되자, 교육자로서스승으로서학생들에게적극적으로지원을독려하는한편학부모들에게도설득작업을펼쳤다. 선동내용은거의비슷했다. 조선이진정한 황국 의자격을얻기위해, 천황과일본제국을위해, 아시아민족의해방을위해, 나가서용감히싸우다죽으라는것이다. [ 박관수 ] 신성한황국에태어나서 만세일계 ( 萬世一系 ) 의황운 ( 皇運 ) 을돕자와 신도 ( 臣道 ) 를다하여공명을죽백 ( 竹帛 ) 에드리우고혈식 ( 血食 ) 을천추에받들때를당하였다. 가진힘, 가진재주를한없이뽐내어보아라. 이번전쟁에수많은우리군신 ( 軍神 ) 들도모두이런분들이다. 우리일본에는세계에자랑할만한대화혼 ( 大和魂 ), 일본정신, 무사도라는것이있으니, 이것을가장쉽게한마디말로말한다면이것은 죽음 이라하겠다. 나의목숨은털끝같이가볍게하고군주에대한충의는해산 ( 海山 ) 과같이중히하여목숨을바쳐서충의를다하는것이다. 신민의도리로폐하의고굉 ( 股肱 ) 이되어영광스러운나랏일을하다가나라의제사를받을귀신될길이열렸다. 17 [ 김성수 ] 평소부터자주제군에게말하여온나의생각을제군의출진 ( 出陣 ) 을앞둔오늘날다시말 하고자한다. 이를한마디로말하면 의무를다하라 는데그칠것이다. 의무를위하여는목숨도아 깝지않다고늘말하였거니와, 지금이야말로제군은이말을현실에서몸으로써실행할때가온것 15 배상명, 오직승리하나뿐, 우리는총칼대신 근로, 매일신보 1944 년 8 월 27 일 16 매일신보 1944 년 3 월 8 일 17 박관수, 師父의부탁, 반도의젊은이들에게, 半島の光 제 70 호, 1943 년 10 월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47

이다. ( 중략 ) 제군의희생은결코가치없는희생이아닐것을나는제군에게언명한다. 제군이생 을받은이반도를위하여희생됨으로써이반도는황국으로서의자격을완수하게되는것이니반 도의미래는오직제군의거취에달렸다고할수있다. 18 [ 김활란 ] 앞날의대동아를생각해보길바란다. 아세아 10억민족의해방과그들의지도자가될것을생각하기바란다. 남아면피끓는청년이면이번기회를놓치지말고싸움터로나올것이다. 한번나서서싸울사명을느끼지않은가? 마음이당길때까지주저하는이유는무엇인가. 죽음이무서워서출정하지못하는가? 죽음이무서워서못나가겠다는청년이있다면참으로슬픈일이다. 딱할일이다. 그러한비겁한사람은없을줄안다. 없어야할것이다. 마감이되기전에용맹하게나서기를맹서하기바란다. 19 [ 박마리아 ] 학도들은지원한다는말의깊은뜻을먼저깨달아야할것이다. 즉지원은부르심이다. 공부를하고있는학도들을왜부르시었나? 이전쟁은동아의 10억민중의해방을위한전쟁이다. 반도의청년학도는동아의 10억이나되는사람들을해방시키는입장에서있는것이다. 학도들이잘하고못하는것은반도의장래를좌우한다. 이번기회에반도의청년들이전장에나가서힘껏싸운다면나라를위해서가정을위해서학도들자신을위해서이에더좋은일은없을줄안다. 20 [ 현상윤 ] 내가현재교편을잡고있는중앙학교는아직직접군인으로서적령자가없고, 이기회에우리중앙중학졸업자이외의각대학, 전문학교청년학도에게도몇마디나의소신을피력하고자한다. 만일아직가정사정과기타로지원의장지 ( 壯志 ) 를결 ( 決 ) 치못하고숙려 ( 熟廬 ) 중인자가있다면, 나는교육자적입장에서제군에게청년다운대용단을촉하지않을수없다. 옛날에도사 ( 士 ) 는국지원기 ( 國之元氣 ) 라는명언이있다. 국난을당하여솔선정신 ( 挺身 ) 하는것이사 ( 士된 ) 자의일대의무이며또한청년다운기개일것이다. 21 [ 장덕수 ] 지금제군은부르심을받들어출진하게된것이다. 폐하의고굉 ( 股肱 ) 으로써황국의운명 18 김성수, 大義에죽을때皇民됨의責務는크다, 매일신보 1943년 11월 7일 19 김활란, 열혈남아이거던이때를놓치지말라, 매일신보, 1943년 11월 18일 20 박마리아, 칼잡고일어서자, 매일신보 1943년 11월 19일 21 현상윤, 士는國之元氣 滅私, 久遠의生을찾자, 매일신보 1943년 11월 11일 4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