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 평화 미래를생각하는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역사학교 친일인명사전 발간 5 주년특별강좌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014. 11. 18~12. 18 화 목늦은 7 시 다래헌
인권 평화 미래를생각하는역사행동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역사학교 친일인명사전 발간 5 주년특별강좌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강 11. 18( 화 ) 한국근현대사와 친일 이만열 ( 초대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전국사편찬위원장 ) 2강 11. 20( 목 ) 민족의죄인 -모럴부재의친일문학 임헌영 ( 민족문제연구소소장 / 문학평론가 ) 3강 11. 25( 화 ) 화필보국 - 화폭에담은멸사봉공 최열 ( 미술평론가 ) 4강 11. 27( 목 ) 매국배족으로얻은부귀영화 - 조선귀족열전 이용창 ( 민족문제연구소편찬실장 ) 5강 12. 2( 화 ) 황국신민화의첨병 - 지식인층의친일행태 박수현 ( 민족문제연구소연구실장 ) 6강 12. 4( 목 ) 선율에날려버린예술혼 - 황도음악 노동은 ( 중앙대명예교수 ) 7강 12. 9( 화 ) 천황 의충견 - 제국군인과경찰 박한용 ( 민족문제연구소교육홍보실장 ) 8강 12. 11( 목 ) 총동원체제의나팔수 - 친일영화 이준식 ( 민족문제연구소연구위원 ) 9강 12. 16( 화 ) 강요된선택인가내면화한신념인가 - 친일 옹호의논리와구조 김민철 ( 민족문제연구소책임연구원 ) 10강 12. 18( 목 ) 반민족범죄고발서 친일인명사전 을말한다 윤경로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 전한성대총장 ) 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민족의죄인 - 모랄부재의친일문학 임헌영민족문제연구소소장 / 문학평론가 1. 역사의마중물로서의문학 1945 년 12월 30일전후봉황각 ( 천도교연수관 ) 에서개최되었던문학인좌담회에는김남천, 이태준, 한설야, 이기영, 김사량, 이원조, 한효, 임화가발언을했는데, 임화는 이번태평양전쟁에서일본이지지않고승리를한다, 이렇게생각해볼순간에우리는무엇을생각했고어떻게살아갈랴고했느냐 는게자기비판의근원이되어야한다면서, 일개초부로평생을두메에묻혀끝막자는것이, 한줄기양심 이라면, 마음속어느한귀퉁이에강인히숨어있는생명욕이승리한일본과타협하고싶지않았던가? 고되물으며문학자의삶과진실의문제를제기한다 ( 김윤식 << 한국문학사논고 >> 법문사 3부 1장, << 한일문학의관련양상 >> 일지사 46~49 쪽, << 김윤식전집1>> 솔 524~530 쪽참고 ). 친일파청산의호기였던광복직후좌우익문학예술단체가다 민족문화예술 을거론하면서도정작청산문제를교묘하게비켜갔다. 좌우익이그치욕의정도차이는있으나상대를돌로치기에는스스로도죄없는몸이아니어서단체의슬로건이나명분에서는친일예술청산을내세우면서도이론논쟁에서는아슬아슬하게초점을비켜간흔적이있다.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이합친조선문학가동맹의강령 1항은 일본제국주의잔재의소탕 인데, 이것은문학건설본부의강령 1항이었던 일본제국주의에의한일체의야만적이고기만적인문화정책의잔재를소탕하고이에침윤된문화반동에대한가차없는투쟁을전개한다 는데서한발물러서있다. 좌익의형해화해버린친일파청산의지는이후이광수. 최남선. 박영희등몇몇속죄양으로서의우파문단주류세력에대한제동장치정도로제한적인전략개념에가까운것이었다. 이광수의 << 꿈 >> 과박영희의 << 문학의이론과실제 >> 를판금조처하라고미군정당국에다요구한것은좌익문학단체로서친일문학인에대한최소의희생자줄이기와당면한문학단체의헤게모니쟁탈을겨냥한것으로볼수있다. 다른분야와는달리명백한증거가가장많이남아있는것이문학인의친일이건만가장논란이많은것은강제성에의한것으로자발성이없었다는점과, 대가성이없었다는점을들고있다. 과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
연그럴까. 여기서는이광수의행적을통해서친일문학인의전반적인문제의전형성을추구해보 려고한다. 2. 이광수의친일등단작 (1916 년 ) 민족해방투쟁이든반민족친일행위이든대중적인확대와심화를위해서는지도급인물이절실한데, 앞의경우는투쟁을통해서자연발생적으로형성되는데비하여, 뒤의인물들은일제의침략정책이빚은고도의정략적인차원에서조작해내기일쑤였다. 그가장좋은예가이광수일것이다. 그가일본제국의식민통치관료와어떤공생관계를이뤄왔는가를살펴보는일은친일파연구에많은시사를줄것이다. 이광수가인촌김성수의후원으로두번째일본유학길에오른건 24세때인 1915 년 9월이었다. 이듬해 7월와세다 ( 早田 ) 대학예과를 2등졸업 (7월 5일 ) 한그는와세다대학철학과에무시험장학생으로결정되었기때문에일시귀국, 총독부기관지로당시유일한한글일간지인 << 매일신보 >> 에 < 대구에서 >(1916.9.20.-23) 라는서간체기행문을연재했다. 어떤경로를통했는지는알수없으나, 이때 << 매일신보 >> 에는작가선우일 (1906 년부터친일지 << 국민신보 >> 기자 ) 이발행인겸편집인이고그아래에작가이상협 ( 당시사회문화부장, 나중발행인겸편집인 ), 그리고갓입사한역시작가인심우섭 ( 심훈의맏형. << 무정 >> 의신우선기자의모델 ) 이있었다. 셋다언론인으로 << 친일인명사전 >> 에들어있는데, 이중춘원이누구와선이닿았는지는명확히밝혀지지않았으나나중여러행적을보면심우섭이연을이어주었을가능성이높다. 어쨌든 < 대구에서 > 는춘원이명백히친일의수렁에발길을담군첫작품이다. 임종국선생은이광수의일문소설 < 사랑인가 >(1906, 18세 ) 를첫친일작품으로평가하지만, 정치사회적인관점으로보자면아무래도이기행문을들어야할것같다. 비를맞으며대구에도착한춘원은대구의몇몇친구를방문하고는가는곳마다화제로떠오른 강도사건 을거론한다. 중류이상출신자들에다상당한교육도받은자들이 대구친목회 ( 사실은달성친목회 ) 를조직, 대규모의 대죄 를범하였다고썼다. 사건의진상은이미일제에의하여강제해체당한전 달성친목회 회원중일부 ( 김진우, 김진만, 정운일, 최병규등 ) 가대구지역의이름난세부호 ( 정재학, 이장우, 서우순 3인. 앞의둘은 << 인명사전 >> 게재 ) 에게독립자금을내라고요구, 불응하자권총테러를시도한사건으로일명통감단 ( 統監團 ), 애국단, 광복단, 세칭 대구권총사건 이라부른다 ( 김일수, <1910 년대달성친목회의민족운동 > 참고 ). 독립투쟁을 강도 사건으로조작한춘원은그들을한낱파렴치한범법자로보면서이들을다스리는방법을총독부에건의하는내용이이기행문이다. 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만일저 20여명으로하여금서양사 1권이나국가학 1권은말고, 1,2년동안신문잡지만읽게하였더라도자기네농력과그만한수단이족하고그목적을달 ( 達 ) 치못할줄을깨달을것이니, 일찍해외에있어격렬한사상을고취하던자가동경에와서 2,3년간교육을받노라면번연히인구몽 ( 引舊夢 ) 을버려이전동지에게부패하였다는조소까지듣게되는것을보아도알지라. 이광수, < 대구에서 > 그목적을달치못한다는건한국의독립이불가능함이며, 해외의격렬사상고취란독립투사들의투지를뜻한다. 터놓고말하면국내외의독립운동가들을부랑불순범죄세력으로보면서일제는산업을진흥시켜이들에게일자리를제공하여식민지의안정을취하라는요지다. 이글은약발좋게식민지조선언론의사령탑인아베미츠이에 ( 阿部充家 ) 를감동시켰다. 일제는강제병탄직전한국의많은언론을통폐합시켜일어신문 << 경성일보 >> 산하에다한글신문 << 매일신보 >> 를두었는데, 아베는바로 << 경성일보 >> 의사장이었다. 심우섭의안내로춘원은욱정 ( 旭町, 현회현동 ) 의아베집을찾아가아침식사를함께했는데, 그덕분인지 < 대구에서 > 연재가끝난나흘뒤부터 < 동경잡신 ( 東京雜信 )> 을연재 (1916.9.27.-11.9) 하게되었다. 3. 일본의괴벨스도쿠토미소호 < 동경잡신 > 은제목이시사하듯이춘원이동경유학에서듣고보고느낀교육, 사회, 풍속, 문명등을쓴잡문인데, 요지는못난우리민족은일본과도쿄의우수한문명을수용해야된다는민족개량주의의엉성한입문격이다. 그런데이글에서반드시짚고넘어가야할대목이있다. 일반인들이꼭읽어야할책 7권을소개했는데마지막에도쿠토미이이치로 ( 德富猪一郞 ) 저, 나미키센타로 ( 木仙太 ) 와쿠사노시게마츠 ( 草野茂松 ) 편 << 소호문선 ( 蘇峰文選 )>>( 民友社, 1915) 이란책을거론했다. 저자도쿠토미이이치로는필명이도쿠토미소호 ( 富蘇峰, 1863-1957) 로이광수에게자기아들이되어달라고했던조선침략원흉의하나다. 이해를돕기위해간략히소개하면아래와같다. 도쿠토미소호 (1863.1.25.-1957.11.2.). 熊本縣 ( 쿠마모토겐 ) 출생, 본명도쿠토미이이치로 ( 德富猪一郞 ). 도쿄영어학교, 도시샤영어학교 ( 同志社英語學校 ), 여기서설립자니지마조 ( 新島襄 ) 에게세례받음. 중퇴, 교회에서제명됨. 1887, 출판사민유샤 ( 民友社 ), 일본첫종합지 << 고쿠민노토모 ( 國民之友 )>>, 1890 년 << 고쿠민신문 ( 國民新聞 ), 1891 년 << 고쿠민총서 ( 國民叢書 )>>, 1892 년 << 가정잡지 ( 家庭雜誌 )>> 등발행. 1910 년데라우치마사타케 ( 寺內正毅 ) 조선총독주도의 << 경성일보 ( 京城日報 )>> 감독. 이광수에게막대한도움과영향줌. 제2차대전후 A급전범용의자. << 근세일본국민사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5
( 近世日本國民史 )>>, 100 권, << 승리자의비애 ( 勝利者の悲哀 )>> 등저술. 도쿠토미에대하여길게설명할시간이없는게안타까운데, 요약하자면일본의조선지배당위성을일찍부터강조해오던그는데라우치마사타케 ( 寺內正毅, 이토히로부미피살후 2대한국통감, 병탄실현후초대조선총독 ) 와막역한관계로조선의언론통폐합시나리오의작성자이자식민지조선언론계의총독격 ( 공식직책은 << 경성일보 >> 감독 ) 이었다. 운영, 인사, 검열, 감독등일체의권한이그의손아귀에있었는데, 일본의 << 고쿠민신문 ( 國民新聞 )>> 사장을겸임했기에연간 2회정도조선에들렸다. 그는일본의군부, 정계, 재계와밀착한언론인으로파시즘체제이데올로기의창출자이자수호자로 조선인에게언론자유를주는것은 혁명사상의온상 을제공하는꼴 이라고공공연히경고하면서모든신문을통폐합하여한글, 일어, 영어일간지를각각하나씩만남겨이를총독부기관지로만들었을뿐만아니라아예한사장밑에한글과일어신문을두도록만든인물이다. 위에서이광수가만났던 << 경성일보 >> 사장아베는바로 << 고쿠민신문 >> 의부사장출신이었다. 조선병탄후도쿠토미는 << 경성일보 >> 에 < 조선통치의요의 ( 朝鮮統治の要義 )>(1910.10) 라는글을썼다. 10개항목으로구성된이글의요지는식민지의불가피성, 언론통제의당위성, 조선인의약점등등을열거하면서무단 ( 武斷 ) 통치만이해결책이라는것이었다. 소호 ( 蘇峰 ) 씨는일본최대한신문기자니씨의 20년간웅혼경건 ( 雄渾勁健 ) 한문장도일본의금일의문화에다대한공헌을하였나니차 ( 此 ) 를독 ( 讀 ) 함은일본문명사를독함과여 ( 如 ) 하여갱 ( 更 ) 히기 ( 其 ) 문장이학 ( 學 ) 할만만하니라 고이광수는이책을추천했다. 나도아직못본이책목차는아래와같다. 第一編明治十九年より明治二十六年 ( 二十七年上半を含む ) の期間第二編日役の期間第三編明治二十九年 ( 二十八年下半を含む ) より明治三十六年の期間第四編日露役の期間第五編明治三十九年より明治四十五年の期間第六編家大故の時第七編大正時代追加 도쿠토미는식민조선에대하여 < 조선통치의성적 >, << 주변의파동 >, < 평화와질서 >, < 동화의실 > 등에서식민지발전론 ( 현재의식민지근대화론 ) 과조선인의일본동화성공이유, 일선동조론 ( 日鮮同祖論 ) 등나중친일문학인들이써야할내용을모범답안으로미리제시해주고있다.( 더자세한것은정일성, << 일본군국주의의괴벨스도쿠토미소호 >>, 지식산업사, 2005, 참조할것 ). 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이책을추천한이광수의속내는무엇일까? 공교롭게도자신이하고싶은말을대신해주었을뿐만아니라이론적인배경까지제시해준사상의은인이란판단이었을까. 나는몇년전쿠마모토에있는도쿠토미의기념관을찾은적이있다. 정확히는그와다섯살아래의동생인유명한작가도쿠토미로카 ( 蘆花 ) 를함께기념하는시설이었다. 정식명칭은도쿠토미기념원 ( 富記念館 富居 ) 으로소재지는웅본현웅본시 ( 熊本熊本市大江 4-10-33.) 富蘇峰 ( 도쿠토미소호 ) 와蘆花 ( 로카 ) 형제가유소년시절을보낸집이었다. 동생로카 ( 蘆花, 1868.12.8.- 1927.9.18) 는작가, 수필가. 도시샤대 ( 同志社大 ) 영문과, 기독교신앙, 톨스토이즘믿음으로나중에직접그를방문했으며형의국가주의사상에반대하여절연의뜻으로 1903 년 < 告別の > 썼다. 소설 << 호토토기스 ( 不如歸 )>> 등. 여기서같은성도쿠토미인데도한자가다른걸주시하시라. 토미 ( ) 의위에점이없다. 형과의단절의표시로반드시그렇게썼다고기념관안내문은밝혀주었다. 이광수가일본의괴벨스에게아예터놓고공개적으로이만큼충의를보였으니화답이있어야할것아닌가. 아베미츠이에 << 경성일보 >> 사장이자기상관도쿠토미에게조선의유망한청년이광수를만나게해준것은 1917 년 8월 5일경관부연락선이도착하는부산부두였다. 기행문 < 대구에서 > 와 < 동경잡신 > 을쓴뒤이광수는 << 매일신보 >> 에엄청나게많은글을발표하여가히그신문이총독부기관지가아니라이광수의기관지라할만하다. 더구나아베의입장에서는이런충직한청년을믿고문학에서는아직풋내기지만장편 << 무정 >> 연재소설을맡길만하지않았겠는가! 1917 년 1.1-6.14 일까지 << 무정 >> 연재를끝낸이광수에게여름방학을이용하여총독부시정 5년기념민정시찰을제의, < 오도답파여행 ( 五道踏破旅行 )>(<< 매일신보 >>, 1917.6-8.) 을연재했다. 조선인기자로는처음이라하여회사나총독부로부터도각지관헌에통첩을보내, 가는곳마다실로면목이없을정도의성대한환영을받았다 는이여행기는 우리를빈궁하게만들고우약 ( 愚弱 ) 하게만든옛날은영원히장사 ( 葬死 ) 하고, 우리는우리의새세대를최선을다하여곱고아름답고부 ( 富 ) 하고강하게만들어야한다. 반도의싹트는삼림이날로성하듯이신시대의새생명은시시 ( 時時 ) 로성장한다. 는취지로, 마치박정희독재때의영화 << 팔도강산 >>(1967) 의전범을보여주는듯하다. 칙사대접을받으며충남과전남북을돌던이광수는시간에맞춰아베와함께도쿠토미를영접하러부산부두로나갔다. 이첫만남이후둘은일생동안연을이어갔다. 4. 민족개량주의의대가 도쿄유학중이광수가폐결핵에걸려 (1917 가을 ) 허영숙의간호를받다가열애에빠졌다는사연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7
은너무나잘알고들있을터다. 우시고메여의전 ( 牛女醫專, 정식명칭은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 ( 東京女子門校, 소재지명칭으로우시고메로도부름 ) 학생허영숙은이미일본에서이광수와몇번요양여행을다녀뗄수없는관계가되었고, 이광수는첫아내 ( 백혜순 ) 와신변정리를해나갔다. 그녀는졸업후귀국 (1918.7), 부모의반대를무릅쓰고 10월이광수와함께북경으로사랑의망명을떠났다. 아베 ( 阿部充家 ) 는춘원에게여비와봉천총영사등에게소개장까지써주었다. 그러나춘원의사랑의망명은단재신채호를우연히책방에서만나면서산산조각이났다. 그는춘원에게젊은여자와함께와서숨어지낸다, 일본공사관에드나든다, << 매일신보 >> 에글을쓴다는세가지소문이떠돈다며조심하라고경고했다. 도쿄에서는상상도할수없는이충격! 그게춘원으로하여금 <2.8 독립선언 >(1919) 을쓰게했고, 그때문에상하이로진짜망명을가게되었다. 그러니까엄격하게말하면독립선언서는춘원이쓴게아니라단재의투혼에혼비백산해서본의아니게썼다는뜻이다. 상하이에서춘원의애국활동은뜨거웠는데, 이것역시신규식이나도산안창호의얼이빚어낸보너스가아닐까. 춘원은서울의허영숙에게상하이로와달라는등서신을자주보냈는데, 1920 년봄부터그녀는슬그머니서울에터전을잡는낌새였다. 그러다가허영숙이홀연히상하이에나타나 (1921.2.16.) 이광수와함께귀국하겠다고하다가이내돌아갔다. 그러나이광수는함께살던사람에게조차귀띔도없이 3월슬그머니상하이에서사라져버렸다. 만류를뿌리치고이광수는귀국했는데, 이전후의정황은강동진의 << 일제의한국침략정책사 >>( 한길사, 1985) 가정확하고소상하게밝혀주고있다. 3.1운동후일제는조선인에의한동화정책을추진하고자민족개량주의를주창하게되었는데, 거기에적합한인물이화급했다. 1921 년이광수를귀국시킨총독부는 6월에는복역중인최남선, 최린을가출옥시켰다. 그배후에는필시도쿠토미가있겠지만그의충실한하수인아베가총독에게건의한문서가이렇게전한다. 앞서이광수라는자의안 ( 案 ) 을보여드렸던조선인개조문제는문화운동화로그방향을전환토 록암시를주셨는데피차서로의이득이라고생각됩니다. < 齊藤實에게보낸阿部充家書翰 >, 齊藤實文書, 강동진, 위의책, 394 쪽, 재인용. 이광수는 1921 년귀국, 즉시허영숙과정식결혼 (5월), 1922 년총독부의주선으로수당만도한달에 300엔의엄청난돈을받고동아일보논설위원으로들어갔다 ( 강동진, 위와같은책, 394쪽 ). 강동진은그액수의효과를알리고자당시보통기자봉급이 30엔, 부장급이 100엔이라고밝혀준다. < 민족개조론 > 발표 (<< 개벽 >> 1922.5) 에이어예상대로사이토 ( 齊藤實 ) 총독과도만난다 ( 첫만남은 1922.9.30. 밤 ). 최남선도당국의원조로월간잡지 << 동명 ( 東明 )>> 을발간 (1922), 1924 년 3월일간지 << 시대일보 >> 로고치고 6월창간호를냈다. 최린은천도교의분열에간여하고나중에는 자치론 을앞세워... 같은책 395쪽 ). 참고로사이토의일기에의하면 1919 년 9월부터 1926 년말까지총독을 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만난인사들과회수는김성수 14 회, 송진우 15 회, 장덕수 12 회, 이상협 8 회에이른다.( 같은책 397 쪽 ). 5. 춘원과동아, 조선일보의관계 - 이광수와동아일보의관계 1922. 5. 기자촉탁, 기자로논설과소설. < 민족의경륜 >(1924.1.2.-6) 으로퇴사. 1926. 11 편집국장. 이듬해 9월건강문제로편집고문. 1929. 12~1933. 8 편집국장. - 이광수와조선일보의관계 1933. 8~1934. 5 부사장 ( 방응모와주요한의권유 ). 이사이에 1933. 9-1934.1, 에는편집국장겸임. 1935. 4~1937. 8 편집고문. 수양동우회사건으로피체되면서언론계떠남. 방응모 ( 方應謨, 1890-?), 호는계초 ( 啓礎 ). 정주생. 1923 년 << 동아일보 >> 정주지국 (1923), 평북삭주군외남면교동광업소 ( 橋洞鑛業所 ) 시작 (1925). 1932 년광산을일본중외광업주식회사에 35만원에매각, 같은해 6월부터조선일보영업국장. 1933 년 3월조선일보의 8대사주조만식에게서경영권을인수, 부사장. 7월자본금 30만원의주식회사로등기. 인수후초대부사장은이광수, 주필은서춘. 1935 년 7월태평로새사옥준공. 1937.7.11., 간부회의. 주필 ( 서춘 ) 은 ' 일본군, 중국군, 장개석씨 ' 등을 ' 아군, 황군, 지나, 장개석 ' 수정주장. 편집국장 ( 김형원 ) 등은반대. 방응모는 3.1 운동때처럼신문이민중을지도할수없다면서서춘지지. 1950.7.7, 북한군에피랍, 연행중송각산부근에서폭격으로사망설. 1979 년까지조선일보는방응모의명의로발간. 6. 정보국 5 부 3 과 이렇게세월은흐르는데이광수와아베, 도쿠토미의정은날로깊어만갔다. 그중중요한사항만메모하면 1936 년아베가죽은뒤이광수가도쿠토미를찾아갔을때, 자네도내아들이되어주게. 내조선의아들이되어주게. 일본과조선은하나가되지않으면안되네. 크게되어주게. 알겠나. 라면서, 자네는일생을문장으로나아가게. 문장보국 ( 文章報國 ) 말일세. 라고당부했다. 이후이광수가곤경에처할때마다도쿠토미는위로만이아니라실질적인힘이되어주었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9
춘원역시이에감읍하는심경이었음을밝혀주는자료가있다. 1940 년 2월 12일, 가야마미츠로 ( 香山光郞 ) 라는창씨개명을경성부호적계에신고한뒤자신의심경을도쿠토미에게보낸편지가있다.( 이항목은전적으로정일성의저서참고, 인용. 이편지는단국대김원모교수가고서점에서입수했다고함 ). 내자식이되어다오 라는선생의말씀을들은지 5년의세월이지난오늘에야비로소선생의간곡한부탁을따르게되었습니다. ( 중략 ) 이제부터조선의올바른민족운동은황민화의한길만이있을뿐입니다. 다행히옛역사와문화, 그리고혈액의교류는인식상이든정치상이든두민족의동일국민화를자연복귀로생각케하여실로홀가분한느낌마저듭니다. ( 중략 ) 부디건강하게지내시고, 조선청년들이읽을만한독본 ( 讀本 ) 을가르쳐주시기바랍니다. 정일성, 위의책, 81-82 쪽. 도쿠토미는이후승승장구, 군부에게독이일삼국동맹을권유했으며, 1941 년 12월 8일의 < 선전조서 ( 宣戰詔書 )> 도 도조히데키 ( 東條英機 ) 수상을도와기초했다는것이일본학계의정설이다. ( 정일성, 같은책, 270쪽 ). 침략이데올로기에전력투구한그는군부를설득하여일본문학보국회 ( 日本文學報國會, 1942. 5.26) 와대일본언론보국회를만들어두단체의회장을맡았다. 파시스트답게그는이모든통제지도권을정보국에집중시켰다. 정보국제5부제3과의지도아래서일본을비롯한식민지와준식민지의모든문학단체가기획, 활동을지원하도록만들었다.( 이항목은사쿠라모토토미오, 櫻本富雄, << 日本文學報國會 - 大東亞戰爭下の文學者들 >>, 靑木書店, 1995, 참고 ). 1940 년 12.6. 발족한정보국은오로지전쟁동원을위한각종선전과이념, 사상검열과국민독려등을위한조직으로, 내각정보부 ( 閣情報部 ), 외무성정보부 ( 外務省情報部 ) 육군성정보부 ( 陸軍省情報部 ) 해군성군사보급부 ( 海軍省軍事普及部 ) 내무성경보국도서과 ( 務省警保局書課 ) 체신성전무국전무과 ( 信省電務局電務課 ) 등각관련부서에부 ( 部 ) 나과 ( 課 ) 가있었는데이를통괄하기위해내각직속 ( 閣直 ) 기구로재조정한기관이다. 통폐합의달인인도쿠도미로서야일본이든조선이든문학단체를주무르는건문제도안되었을터. 조선문인보국회도그지침대로설립 (1943.4.17.), 회장에는당연히가야마미츠로가맡았다. 대동아문학자대회 ( 大東亞文學者大會 ) 도여기서추진, 집행한행사였다. 그 1회대회 (1942.11. 3-10. 8일간도쿄와오사카에서개최 ) 에참석한가야마미츠로는여러참가자들과함께니주바시 ( 二重橋, 천황궁앞두다리 ) 앞에서궁성을관람할때유독돋보였다. 소인가야마미츠오, 삼가성수 ( 聖壽 ) 의만세 ( 萬歲 ) 를축복드려올리옵니다 고최대의경의를표한것이다. 이열성에일본인대표들조차감복했다는이야기도전한다. 1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일행중중국작가장워쥔 ( 張我軍, 타이완출신이나일본점령하북경대일문과교수였기에중국대표로참석. 나중한간 ( 奸 ) 으로몰렸으나타이완으로피신 ) 은딴청을피우며허리도굽히지않았다. 제2회대회 (1943. 8. 25-27) 에참석했던중국의타오캉더 ( 陶亢德, 절강소흥 ( 浙江 ) 출신으로출판인 ) 는귀국후참가기 (< 동행일기 >) 에서한마디도시국이나천황을찬양하지않고일본의풍물과정원, 동물원, 어느찻집의차맛, 좌담에참석했더니내용과기사가틀렸다는등등완전히엉뚱한사변들이다. 메이지신궁 ( 明治神宮 ) 이나야스쿠니신사 ( 靖國神社 ) 에갔을때를이렇게썼다. 주차장에서배전 ( 拜殿 ) 까지그렇게멀지않음에도불구하고깔려있는자갈과찌는듯한여름날씨때문에꽤지쳤다. 동행한일본인들을보면당당히걸아가고있어조금도피곤한기색이없다. 오오무라마스오 ( 大村益夫 ), << 윤동주와한국문학 >>, 소명출판, 2001, 231쪽, 재인용. 이책 < 대동아문학자대회와조선 > 은좋은참고가된다. 중국대표들은이런능청을부렸는데도전후민족반역자 ( 奸 )d 로몰려호된심판을받았다. 가야 마는어땠을까. 1 회대회에서가야마는이렇게발언했다. 자신의전부를천황에게바쳐올리는것이일본정신이라고하는것입니다. 또천황님께서자비를베푸는것을황도 ( 皇道 ) 라고말씀드리는것입니다. 천황님에게있어서이것이황도, 우리군신 ( 君臣 ) 에게있어서는이것이신도 ( 臣道 ) 입니다. 위와같은책 219-220 쪽, 재인용. 이제몇가지를생각해보자. 친일파가일제의위협을받아서했는가? 그들의행위는우리민족 과역사에아무런영향을끼치지않았는가? 오늘의친일파는어떤모습일까? 이런인간상을어떻 게평가할것인가?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1
친일미술집단과활동 최열미술평론가 1. 성격구분 친일미술행위를판단하는주요한증거라할집단및개인활동의내용과그형식은 1차시기와 2 차시기에서로다르게나타나고있다. 단체, 기관및개인의친일행위를판단함에있어일제강점기전반기인 1차시기에는일률적으로규정하기어려운복합성을특징으로삼고있으며 2차시기인말기에는일사불란한단순성을특징으로삼고있으므로상이한관점이필요하다는것이다. 따라서 1 차시기의경우해당개인의처지와상황그리고개인이선택한행동의이면에감춰진내면의의도, 그적극성또는소극성사이에숨어있는은밀성을해명하는방식을취해나가야할것이고 2차시기의경우엔사안의성격이매우명료하다는점에서참가행위의과감성과명쾌성을기준으로삼는방식을취해야할것이다. 이러한다름은해당시기의단체가내거는목적이나행위내용에서도매우뚜렷하게나타난다. 총독, 정무총감따위와밀월을누리는행위를자행한서화협회조차도목적이나활동내용은심미의세계를꿈꾸고있거니와 2차시기의조선미술가협회는목적부터비상시국아래신체제직역봉공을다하겠다고다짐하고있으며반도총후미술전따위를개최하는활동을전개하였던것이다. 그리고조선미술전람회의경우 1차시기에출발하여 2차시기까지이어졌다는점에서관심의표적이다. 그일관된성격은심미주의미학장려라는 1차시기의틀을끝까지유지했다는점에서미학적독자성을지니는것이다. 그런가운데대동아공영권미학정책이라할지역향토색관철을꾀하고있으므로제국주의정책을구현하는터전의한분야임은의심의여지가없다. 그럼에도불구하고조선미술전람회에참가여부만으로부역행위의강도를측정할수없는복잡성을지닌다는점을이해해야할것이다. 따라서기관전체의성격과참가자개인의부역정도를세분해보는방식을취할일이다. 이러한방법은 2차시기안에연이어열린반도총후미술전과결전미술전을비교, 적용해보면그유용성이보다뚜렷하게드러난다. 직역봉공 ( 職役奉公 ) 과결사항전 ( 決死抗戰 ) 의 같음과다름 이숨쉬고있는것이다. 1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2. 제 1 차시기의활동 친일매국노이완용이회장인조선서화미술회는 1911 년에당대를휩쓸던서울의서화가를모두포괄하여결성한조직으로총독부후원아래운영하고있었다. 1915 년에결성한서화연구회또한회장으로친일매국노김윤식이가담하고있었다. 이들이주최한전람회에는언제나총독부정무총감이출품하였거니와친일미술의초창기라할 1910 년대단체활동은이처럼친일매국노와총독부의품안에서자라났다. 총독부가 1922 년에설치한조선미술전람회는초창기의친일미술을종합하는결정판이었다. 민중사상의순화와사회교화 를목적으로내건전람회위원장은총독부정무총감이었고첫심사위원단에일본인과조선인을섞어놓았다. 창립과정에도서화협회간부들이대거참석하였고첫공모때도서화협회는회원들로하여금출품을대거독려하여총독부와협회의협력을폭넓게과시하였다. 하지만총독부는심사과정에서서예분야를제외하고는조선인심사위원을참관만시킨채입상작선정권을박탈하였다. 이후조선인심사위원은점차줄어들어갔는데더이상협력이란매개가없어도지배가가능하다고여겼던것이다. 명맥만유지해오던조선인심사원제도를 1935 년에완전폐지하고추천작가제를도입하는한편 1938 년에는심사권한을주지않고그저참관만할수있는심사참여제도를도입하였다. 1938 년제17회때참여작가는김은호, 이상범, 추천작가는김기창, 김인승, 심형구, 이인성이었다. 이들가운데유독이인성만을제외하고는모두전시체제아래부역미술행위를거듭하였는데우연이아니었을터이다. 조선미술전람회는일제식민통치기구의하나로써제국주의미술정책의실현이자그산물이다. 그런데일제는제국을찬양, 고무하는창작의요람이아니라그정책의방향을심미주의미학과지역향토색을장려하는쪽으로잡았다. 정치성을배제하면서대동아공영문화권을겨냥하는문화제국주의의관철을위한장으로설정하였던것이다. 그러므로여기참가하는식민지미술인의선택과의도및미적지향따위에따라개개인나름의보다복잡한층위가형성될여지가클수밖에없었다. 따라서조선미전을무대로하는활동을일괄하여친일미술행위로해석하는태도는그성격을단순재단하는것이다. 그러므로조선미전에응모하였다거나, 입상을했다는사실만으로또는무감사나추천, 참여작가로선정되었다는사실만으로일제부역행위자라고규정하는것은바르지않다. 그런태도는근본주의관점으로다층화된세계를부정하는극단의태도라할것이다. 다만개인의활동을판단, 평가함에있어방증자료라는점그리고제국의통치지배기구라는본질을지닌기구라는점은두말할나위가없을것이다. 이러한기준은 1927 년에일본인과조선인이함께조직한조선동양화가협회따위에도마찬가지로적용할수있을것이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3
3. 제 2 차시기의활동 일제말기인 1941 년 1월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위원으로참가한이상범, 심형구는김인승과함께경성미술가협회발기인으로가담하였다. 이들은협회결성식에서 국가의비상시국에직면하여신체제아래서일억일심으로직역봉공 ( 職役奉公 ) 을하여야할이때, 미술가일동도궐기하여서로단결을굳게하고또한조선총력연맹에협력하여직역봉공을다하자는목적 을천명하였다. 곧조선미술가협회로이름을바꾼협회는일본인을회장으로선출하고각분야별로조선인, 일본인을섞어역원을여럿뽑았다. 협회가수행한사업으로는성지순례, 황군위문, 반도총후미술전람회개최따위가있는데이가운데총후전은 1942 년과 1943 년모두두차례열었다. 제1회전의경우김기창, 김인승, 심형구가초대작가, 김은호, 이상범이위원작가로참가했고제2 회전의경우엔징병제실시를기념하는전람회였다. 공모요강에징병제실시에관한것을명시함으로써이와관련된소재및주제를다룬작품들을다수포함시켰을듯하다. 당시보도에따르면제2회전은징병실시의광영을총후생활의구석구석마다발휘시키고있는씩씩한자태를화폭에여실히나타냄으로써총후생활을더욱꿋꿋하게하고문화계발에이바지하였다고한다. 하지만아쉽게도제2회전출품작목록을발견치못함으로써세부내역을알길이없는게오늘의사정이다. 흥미로운일은 1941 년 2월협회결성과비슷한시기에김기창, 심형구, 김인승, 김경승이일본인화가들과함께조직한구신회 ( 九晨會 ) 다. 채화 ( 彩畵 ) 보국의열의로총후의대작을망라 한다는목적을지니고참가한회원아홉명모두앞서의조선미술가협회주요역원들이라는점에서 1차시기단체와는그성격을달리한다고하겠다. 이보다한걸음더나간단체는 1942 년에결성한조선남화연맹이다. 연맹은목적에 채관보국 ( 彩菅報國 ) 의결의 를밝히고전람회수익금을일제군대에헌납했던것이다. 그러나전시체제를상징하는이시대최고의친일부역미술단체는단광회 ( 丹光會 ) 였다. 1943 년 2월에결성하고 4 월에제1회회원전을열었다. 이자리에회원합작 < 조선징병제시행기념 > 을출품하였고 6월에는이작품을군사령부조선애국부에기증하였다. 회원은일본인 12명을포함해임응구, 김인승, 김만형, 손응성, 심형구, 박영선, 이봉상이었다. 그작품은친일파윤치호를포함하여징병제실시 단광회, 조선징병제실시기념합작헌납화 1943 의핵심인물들이징병소집자를둘러싼채격려하는장면 1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을포착한대작이었다. 조선인을전선으로내몰아가는징병을찬미하는주제는물론이고그도부족하여일본군에게작품을기증하는가하면이작품을위해모두모여합작을했다는사실을종합해보면일제부역행위의정도가극에달한느낌이다. 이따위행위는 1937 년김은호가애국금채회여성들이금비녀를조선총독에게헌납하는장면을그리고또이작품 < 금채봉납도 > 를총독에게기증한행위의확대복사판인데부역의정도는훨씬드센것이라하겠다. 개인보다는집단행위가훨씬더무거운행위이기때문이다. 하지만개인의일제부역미술행위가결코가벼운일은아니다. 구본웅은 1939 년 내선일체의현하 로시국을인식한다음 1940 년에는 동아신질서건설의사역 ( 使役 ) 을부여받은화가로써보국을꾀할것 과또다른글에서 사변승리를위하여미술의무기화에힘쓸것 을주장하는가운데다음과같이선언했다. 미술인이여! 우리는황국신민이다. 가진바기능을다하여군국 ( 君國 ) 에보 ( 報 ) 할것이다. 이러한신념에찬선언을되풀이하였던구본웅의행위와김은호의 < 금채봉납도 > 창작행위는그러나여명에지나지않았다. 김경승은 1942 년조선미전추천작가로뽑혔을때그소감을 일본인의의기와신념을표현하는데, 새생명을개척하는대동아전쟁하에조각계의새길을개척 하겠다고다짐했으며, 1943 년조선미전창덕궁상수상소감에서장우성은 총후국민예술건설에심혼을경주하여매진할것을굳게맹세 하였다. 또김인승은 1943 년 3월일본동경에서열리는육군미술협회전에 < 유기헌납 ( 鍮器獻納 )> 을출품했다. 김인승은당시 황군의필승을기원하여마지않는반도내신민 ( 臣民 ) 이가보와도같이중요한유기를기쁜낯으로헌납 하는장면을 열의를부어 그렸다고한다. 화가송정훈은 1943 년 황군의용전분투와대륙의전야를열심히그린 작품을모아종군유화개인전을열었다. 가장극적인것은 1945 년윤효중이대화숙 ( 大和塾 ) 미술부화실에서일본공군가미가제흉상연작인데윤효중은총독의아들로써전사한 < 아베 ( 阿部 ) 소위상 > 을첫작품으로제작했고이것을총독에게바쳤다. 어디그뿐인가. 황군위문용부채그림헌납이나 1943 년 8월조선에서의 징병제실시를기념하는시화 < 님의부르심을받고서 > 에가담하는일, 직 역봉공이나결전의의지를선동하는숱한삽화를그리는일들이꽃을피 워나갔다. 윤효중, 아버지의영령에 맹서하다 - 결전미술전경 성일보사장상수상 1944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5
4. 결전과왜곡의시대 김기창, 조선징병제실시기념합작헌납화 1943 총후미술전람회 2회전을마친한달뒤인 1943 년 12 월국민총력조선연맹은 황국신민필승의신념, 전쟁생활성전 ( 聖戰 ) 의목적달성 을서약하는선언을채택하였다. 이에따라조선미술가협회가주최해오던총후미술전은더이상열리지않았다. 대신 1944년 3월경성일보사가주최사로나선결전미술전람회가열렸다. 후원단체로는총력연맹, 조선미술가협회는물론조선군, 총독부가모두나섰던것인데이렇게미술행사에군관민이대거나선일은유례없는일이었다. 결전미술전은총후미술전과는그질을달리하는것이었다. 낱말그대로총후란각자직업에충실한후방을뜻하는것이라면, 결전은사생결단의전장 ( 戰場 ) 을뜻하는것으 로, 총후의경우화가본연의심미추구를직역봉공으로해석할수있고, 결전의경우엔작품소재와주제를전투의세계로다룬다는결사항전의태도를취해야한다는뜻으로헤아려야할것이다. 총독부미술관에서열린결전미술전은양화지부, 일본화지부, 조소지부로나뉘었고모두 216점이입상하여그가운데조선군사령관상을비롯 6개의특별상과특선을시상함으로써조선미전에버금가는규모를자랑했다. 심사원으로는심형구, 김인승, 김경승, 이상범이참가하였는데심형구는 < 전야 ( 戰野 )>, 김인승은 < 식힐순간 ( 息詰瞬間 )>, <00 돌진 > 을, 김경승은 < 대동아건설의소리 >, 이상범은 < 효 ( 曉 )> 를출품했다. 그밖에모든출품작제목도전투분위기가물씬풍기는것들이었다. 결전미술전은일제부역미술행위의절정이었다. 앞선시기에친일미술행위에가까이다가섰던미술인이이결전미술전에불참한경우는드물었다. 따라서결전미술전은친일미술인선정에도하나의이정표구실을하고있다고할것이다. 결전미술전은단체가아닌관료기구지만조선미전과달리그목적과형식, 내용이지극히명쾌하거니와실로단광회에버금가는무게를지니고있다할것이다. 그런데이같은기구참가자를밝혀줄자료가최근까지은폐되어있었다. 아무도몰랐던김기창의 < 적진육박 ( 敵陣肉薄 )> 과장우성의 < 항마 ( 降魔 )> 가발견됨으로써친일미술행적을부정했던지난날의판단이뒤집혀버린것은역사에서은폐란없다는평범한진리를되새기게해준다. 끝으로해방뒤친일미술행위를은폐하거나옹호하는행위를 3차시기로규정해야할당위성이여기에있다. 그은폐행위로말미암아결전미술전의전모를확인할수있는자료가 1970 년대이후사라져버렸다. 이경성이 1970 년에조소지부출품자, 1974 년에심사원및수상자명단일부를발표했을때까지자료가엄존하였지만그뒤 30여년이지나서야 < 결전미술전람회목록 > 이발굴된이 1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유가딴데있는게아니다. 은폐는부끄러움을깨우친행위이므로차라리안쓰럽지만친일미술을옹호하는행위는절망스럽다. 1983년 << 계간미술 >> 의식민잔재청산특집이나가자언론사와집필자를향해광고, 집회따위공세를취했다. 이들은 사과, 사퇴 를요구했는데당시필자의한사람이었던국립현대미술관이경성관장의사퇴를문화관광부장관에게청하였고장관은관장에게사퇴를요구하였다고한다. 그때관장은예술원회원자격이넉넉함에도불구하고바로그때사퇴를요구한이로부터회원진입을배제당해야했다. 해방뒤미술계곳곳을짙게물들여온부역미술가들의자취가여전하고더욱이저들이만든애국선열, 민족지사동상과초상은물론그들이양성한후예가즐비한상황이다. 극히일부를제외 식민잔재청산의길계간미술 1983 봄호 하고반성은커녕언급조차꺼려하는상황이다. 지난날천안독립기념관에친일관을만들어야한다는목소리가높았던때가있었다. 친일미술가가제작한동상, 초상을수거하여바로그친일관이나또는서대문형무소터에역사관을만들어진열하고 왜곡당한선열 이란이름을붙여교훈으로삼을것을제안했던것이다. 하지만그건꿈일뿐, 아직도친일화가가그린애국선열의동상, 초상이엄존하고심지어표준영정으로지정되어있는실정이다. 그러므로 2014 년현재, 친일미술세력의지배력은아직도끝나지않았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7
매국과배족으로얻은부귀영화 - 신 ( 新 ) 조선귀족열전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편찬실장 1. 조선귀족 과 왕공족 1910 년 8월의강제병합으로 조선 ( 인 ) 은내지일본의연장된영토로전락해일왕의충량한신민 ( 臣民 ) 이자대일본제국의 국민 으로편입. 그러나 조선인 의법적지위는 내지신민 과구별되는 타이완인 사할린토인 과함께최하층인 외지신민 에속함. 이에반해조선귀족은동일한일왕의신민의범주에포함되지만 일반신민 과구별되는 귀족 으로서일본의화족과동급의예우 신민 ( 臣民 ) 귀족 ( 貴族 ) 일반신민 ( 一般臣民 ) 천황 ( 天皇 ) 황족 ( 皇族 ) 조선왕공족 ( 朝鮮王公族 ) 화족 ( 華族 ) 조선귀족 ( 朝鮮貴族 ) 내지신민 ( 內地臣民 ) 외지신민 ( 外地臣民 ) 대만인, 조선인, 사할린토인 [ 樺太土人 ] 조선귀족 과 조선왕공족 ( 王公族 ) : 엄격하게구분 ( 화면참조 : 1~5 의내용 ) 1 1909년 7월 6일자각의결정, 한국병합에관한건 중 한국황실처분의건 2 1910 년 7월 8일자각의결정, 병합실행방법세목 의전체 22개항목중제16은 한국의황실및공신 ( 功臣 ) 의처분 3 한국병합에관한조약 (1910.8.22 조인, 1910.8.29 공포 ) 4 일왕의조서 : 일한병합조서, 전한국황제 태황제및황태자의예우에관한조서, 전황국황족의예우에관한조서 5 데라우치의유고 : 순종의칙유 1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1-1 황제를완전히폐위해현황제 ( 순종 ) 를대공전하 ( 大公殿下 ) 로칭하고, 고종 황태자 ( 이은 ) 와의친왕 ( 이강 ) 은공전하 ( 公殿下 ) 로칭하며, 이들에대해서는일본황족과화족의예를참작해특별한예우와특전및일정한연액 ( 年額 ) 을지급할것등 2-1 대한제국의 황실전체 를왕족이아닌 공족 으로일괄처리의도 3-1 데라우치, 통감부임 (7.23) 후 병합실행방법세목 관철에주력. 황실처우에대한방침은총리대신이완용등의강력한반대에직면 황실존속과호칭, 예우등일부의견을받아들이도록본국과협의. 일본에도없는모호한개념의 왕족 과 공족, 이른바 왕공족 이라는특수계급창출 ( 創出 ) 고종 순종 황태자 ( 이은 ) 등황실직계는 왕족, 의친 ( 懿親 ) 중이강과이재면은 공족 4-1 5-1 왕족과공족에대한호칭은별도로반포된 왕족및공족의칭호 (8.29) 에따라 왕전하 와 공전하 의호칭결정 일제는일본의황족과구분하기위해 왕공족의국법상 ( 國法上 ) 의지위는황족이아니고또일반신민 ( 臣民 ) 도아닌황족에준 ( 準 ) 하는특수의지위에있는것은조금도의심할여지가없다. 고규정 ( 일본의 ) 황족에준하는특수의지위와예우를받는 왕공족의지위는특수한신분이자계급이었기때문에일왕의두번째조서에서 마땅히별도로그궤의 ( 軌儀 ) 를영정 ( 定 ) 한다는방침에따라일본황족을규율하는 황실전범 ( 皇室典範 ) 과는별도로 왕공가궤범 ( 王公家軌範 ) ( 황실령제17호, 1926.12) 공포 시행 일본내의궁중석차는순종 고종 황태자는친왕 ( 親王 ) 이하왕 ( 王 ) 이상 ( 친왕과왕의중간 ), 공족 인이강과이재면은왕의하위로설정 메이지이후일본천황가의왕은일왕의친족에게부여하는작위명으로일왕의현손 ( 玄孫. 4세까지 ) 이내는친왕, 5세이후는왕으로책봉. 결국대한제국황실은일왕의책봉을받는 이왕가 로격하되었을뿐만아니라특수한신분 ( 계급 ) 으로서의실질적인차별 왕공족은조선귀족보다상위의신분이었으므로, 민중 [ 신민 ] 의범주에포함된조선귀족과는엄격하게구별. 법령적용에서도확인. 즉왕공족은 왕공가궤범 과 왕공족보규정 ( 王公族譜規程 ) (1927) 이적용되어창씨개명의대상이아니었지만, 조선귀족은 조선민사령 과 조선호적령 의적용을받아창씨개명의대상 ( 화면참조 : 조선귀족과공족의구분 ) 2. 조선귀족의선정과정과문제점 1) 수작자선정과정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9
조선귀족령 (8.29) 통감부 1차전고 ( 詮考 ) 일본정부, 각의논의 궁내성종질료 ( 宗秩寮 ) 1 회송, 최종심의 종질료총재, 궁내대신에상주 (9.28) 일왕의재가 (9.30) 종질료주사남작오하라센기치 ( 小原吉 ) 와궁내성식부관 ( 式部官 ) 하치스카마사아키 ( 蜂須賀正韶 ), 조선귀족 76명의작기 ( 爵記 ) 와일왕의칙서를휴대하고 10월 6일경서울도착 총독데라우치, 수작대상자인원로 대관 공훈자들에게수작식참석통보 수작식 (10.7) 조선귀족령 이발표된후 40여일의준비를마치고수작식거행 일본정부 : 1910 년 9월초부터자격이될만한자의이력서를받아심의착수. 내각의대신을지낸자이외의수작표준을관직이력 ( 履歷 ) 으로정할지, 문지 ( 門地 ) 로정할지, 또는단지훈공 ( 勳功 ) 에만의할것인지매우고심 일본언론 : 8월 22일강제병합조약이체결되기전부터한국황실문제, 그리고조선의귀족제도발포 ( 發布 ) 언급, 현재대신, 중추원고문, 원로등 50여명에게수작의은전이있을것 이이며이를기대하는자도적지않다고보도. 또종질료에서 9월말까지결정한후일왕의재가를거쳐발표할것이라고예고되었지만발표일자나몇명이어떤등급의작위를받을지등에대해서는추측성기사에그침 귀족록 2 : 명확한선정기준은확인되지않지만일제가조선귀족을선정할때염두에둔가장큰기준은강제병합과정에서판단한 공로 였고, 여기에대한제국황실을 배려 해 이왕의혈족및준 ( 準 ) 왕족 을포함시킨것으로추정할수있음 ( 화면참조 : 귀족록 ) (1) 종질료총재 궁내대신상주문건 (9.28) 1 이왕의혈족및이에준 ( 準 ) 하는자 (13명) : 후작 6인, 백작 2인, 자작 2인, 남작 3인 2 공로있는자 (63명) : 백작 1인 ( 현임총리대신 ), 자작 20인 ( 현임대신, 친임관, 정1품 ), 남작 42인 ( 현임칙임 1등관, 대신경력자, 종1품 ) (2) 통감데라우치 궁내대신자작와타나베 ( 渡邊千秋 ) 에게보낸 조선인수작자연령취조서를통감으 로부터송부의건 (9.30) 1 종질료는황실령인 궁내성관제 의일부를개정하면서爵位寮대신신설. 1 황족에관한사항, 2 왕족및공족에관한사항, 3 작위에관한사항, 4 화족에관한사항, 5 조선귀족에관한사항, 6 有位者에관한사항등담당 2 宗秩寮, 貴族錄 (1910 1913 年, 永久保存登錄第 2210). 일본宮內廳 ( 宮內省이 1945년종전후명칭변경 ) 에보관중인조선관계자료의일부. 여기에수록된문건들은 1924년 9월圖書寮編纂으로묶여있다. 2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1 이왕족및이에준 ( 準 ) 할만한자수작 ( 授爵 ) : 10 명 ( 후작 6 명, 백작 2 명, 자작 2 명 ) 2 준이왕족 ( 準李王族 ) 말예 ( 末裔 ) 수작 : 남작 3 명 3 공로자수작 ( 前대신, 칙임 1 등, 종 1 품 ) : 63 명 ( 백작 1 명, 자작 20 명, 남작 42 명 ) (3) 이재완외 75 명수작의건 (9 월 ) 의 선지안 ( 宣旨案 ) 재가 (9.30) 후작 (6 인 ), 백작 (3 인 ), 자작 (22 인 ), 남작 (45 인 ) 의구분과명단이확인 최종선정된 76명은크게 이왕의혈족및이에준하는준 ( 準 ) 이왕족말예자 와 공로자 의두가지로만구분이되고, 각각의작위는혼재. 때문에 조선귀족령 제2조에서작위수여를위한세가지구분이, 각귀족의어느등급에해당하는지파악불가. 특히작위및등급선정에어떤식으로든지 나이 고려, 기준의공정성을의심하게하는것 수작자선정이발표후우려했던논란이현실화 : 국내외언론에서작자 1순위로자작이거론되던일진회회장이용구가최종제외되자추가수작의은명 ( 恩命 ) 을받을수있도록알선중이라고보도, 수작과은전에서빠진양반중에는불평당의암류가있어위기의조짐을드러내경계중, 일부원로중에는수작되지못한아쉬움을달래면서이후추가수작의기회를기대하는자들도존재. 이에따라누락되거나앞으로추가수작되는경우도있을것이라는기사도계속보도 2) 선정기준의단서와문제점 일본화족 : 공작 후작 백작 자작 남작, 5개등급의작위에대한서작내규 ( 敍爵內規 ) 에따라 1885 년 7월 화족령 이공포되면서최종 503가 ( 家 ) 의화족결정 조선귀족에대해서는일정한서작기준이확인되지않아자세한내용은확인불가 일본국립국회도서관에소장된사이토문서 ( 齋藤實文書 ) 중 1925 년현재까지의습작자를포함해조선귀족 77명의행적을세밀하게기록한 조선귀족열전 ( 조선귀족약력 100-6-843) 의 서문 에도 이조말조선귀족의경력은일한 ( 日韓 ), 청로 ( 淸露 ) 간외교관계당사자이외외부에서는이를알수없고착종 ( 錯綜 ) 되어있다. 비밀사항이많아그런것으로, 그진상을설명하는것이매우곤란한상황에있다. 고밝히고있듯이조선귀족으로선정된이유나경력등은철저하게비밀에부쳐짐. 몇가지단서. ( 화면참조 : 1~3의내용 ) 1 조선귀족열전 의 정한조 항목 : 수작식 (10.7) 이전에일본정부가수작자를선정하기위해마 련한대강의표준확인, 후작 백작해당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1
2 조선총독부통역관후지나미요시츠라 ( 藤波義貫 ) 의언급 3 : 자작 남작해당 3 최초수작자박제순 ( 자작 ) 의작위를습작한박부양 (1905~1974) 이 1926 년 10월경조선총독부촉탁자격으로조선총독부에제출한보고서에서 1910 년 8월강제병합의공로를인정해일왕이작위와은사금을내려준것이라고밝힘 4 4 자작김윤식의 1910 년 10월 7일자일기, 황족 의친은모두후작, 전총리이완용및척리 ( 戚里. 임금의내척과외척 ) 몇사람은백작, 각대신은자작, 그나머지로서일찍이대신을지낸자는모두남작을받았다. 5 대체로조선귀족을선정할때품계 위계, 공로, 문지, 관직이력등과대한제국황실과의관계등이종합적으로고려되어반영되었을것으로추정 실제로는이러한수작표준이균등하게적용되지않은것이사실 정치적편향성. 즉소론 북인 남인, 약간의중인계급출신을제외하면노론이압도적대다수. 노론에의해장악되고있는현실을우선고려 후작 (6) 박영효, 윤택영, 이재각, 이재완, 이해승, 이해창 백작 (3) 민영린, 李完用, 이지용 자작권중현, 김성근, 김윤식, 민병석,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박제순, 송병준, 윤덕영, 이근명, 이근택, 노론 (19) 이기용, 이병무, 李完鎔, 이용직, 이재곤, 임선준, 조민희 (64) 김가진, 김병익, 김사준, 김사철, 김석진, 김영철, 김종한, 김학진, 남정철, 민상호, 민영기, 민영달, 남작민형식, 박제빈, 성기운, 유길준, 윤용구, 윤웅렬, 이건하, 이근상, 이근호, 이용원, 이용태, 이윤용, (36) 이재극, 이정로, 이종건, 정낙용, 조경호, 조동윤, 조동희, 조정구, 조희연, 한규설, 한창수, 홍순형 소론 자작 (2) 이하영 ( 중인 ), 조중응 (7) 남작 (5) 김춘희, 박기양, 이봉의, 이주영, 정한조 북인 (2) 남작 (2) 민종묵, 박용대 남인 (1) 남작 장석주 ( 평민 ) 중인 (2) 자작고영희남작최석민 76명 수작자 :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2명, 남작 45명 자료 : 朝鮮人ニ對スル授爵ニ關スル意見 (1926.11.22) ( 齋藤實文書 100-6-843) 비고 : 송병준은평민이면서, 자칭노론. 3 通譯官藤波義貫, 朝鮮人ニ對スル授爵ニ關スル意見 (1926.11.22) ( 齋藤實文書 100-6-843). 4 朝鮮總督府囑託朴富陽, 朝鮮貴族に就て (1926.10.15.), 朝鮮貴族 ( 齋藤實文書 100-5-849). 5 金允植, 續陰晴史 下 ( 卷十四, 庚戌 10 月 7 日 ), 337 쪽 (1960, 국사편찬위원회 ). 2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선정과정의정치적불공정성의사례 : 인선 ( 人選 ) 과정에참여한조중응병합당시이완용후작은병상에서치료중이었기때문에조중응자작이절충임무를맡았다. 조씨와정씨는같은소론파로서붕당관계상불공평함을알면서도그관직및위계를거짓으로작성하여과분한영작 ( 榮爵 ) 을받게된것이라고하여유식자 ( 有識者 ) 들사이에논쟁을일으켰다. 남작에대한은사공채를조중응씨와반씩나눈다는소문까지돌았는데사실여부는아직확인되지않았다. 원래조선측의교섭대표는총리대신을지낸이완용이었으나이재명의공격으로입은상처의후유증으로치료중이었기때문에조중응이이완용대신인선과정에참여. 일본어에능통해이완용의수족으로널리알려진조중응이수작자선정의조정임무를맡으면서수작자격이없는정한조의서류를조작해남작을받도록농간 언론의선정과정의불공정함및편파성 독단성등에대한우려 : 1 동경일일신문 은이완용과조중응의실명을거론하면서이들의농간에세간의의혹이있다는것과이에대한박제순의지적은매우타당하다고평가. 2 경성신보 에실린某大官의이야기, 조선귀족의수작은과거의한일관계도모두참작해서공정하게선정되어야함. 이를위해서는논공행상이우선되어야하며, 직접적이든간접적이든또과거와현재를막론하고 공로가있는자 에게 은전 이주어져야한다는것이중론이라고지적 조선귀족은 조선귀족령 에서명시하고있는 대로 ( 大勞 ) 가있고, 구덕 ( 舊德 ) 이있고, 전공 ( 前功 ) 이있는자들이고, 또 1910 년 8월강제병합의공로및이전부터일제의대한정책에순응한전반적인행위에대한 은전 ( 恩典 ) 의결과라는것은부인할수없는사실 ( 史實 ) 3. 조선귀족의탄생 1910 년 8월 22일강제체결된 한국병합에관한조약 제5조는 일본국황제폐하는훈공 ( 勳功 ) 있는한국인으로서특히표창에적당하다고인정된자에게영작 ( 榮爵 ) 을수여하고또은급을부여한다. 고명시 조선귀족령 ( 황실령제14호, 8.29, 총 22조 ) 전문 : 이가 ( 李家 ) 의의친 ( 懿親 ) 및그방가 ( 邦家 ) 에큰공이있는자는마땅히이를우열 ( 優列 ) 에승서 ( 陞敍 ) 하여조선귀족으로삼는다. 제2조 : 그대상을 1 이왕가의혈족으로황족의예우를누리지않는자, 2 문벌있는자, 3 공로가있는자로규정 1910 년이전각종매국조약에동조한이른바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구적등은모두 조선귀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3
족령 이규정한제2조의 3개조항에따라작위수여. 즉 조선귀족령 으로작위를받은최초수작자 76명은 2로서 3에해당하는자가대부분으로, 1은 2와 3의조건을충족시키기위한형식적인조항 ( 화면참조 : 국권침탈조약동조자와수여된작위 ) 대한제국황실과종친및인척으로작위를받은인물 6 1 황실과종친관계 - 고종과직계자손 : 고종 순종 영친왕 ( 이은 )[ 왕전하 ], 의친왕 ( 이강 )[ 공족 ] - 흥선대원군 4형제의직계후손 : 은신군-남연군 -흥녕군( 이창응 ) 흥완군 ( 이정응 ) 흥인군 ( 이최응 ) 흥선군 ( 이하응 ) 의직계후손. 이들중공족은흥선군의장남이재면, 조선귀족은흥선군의사위조경호 ( 남작거부 ) 조정구 ( 남작거부 ) 이윤용 ( 남작 ) 등 3명, 완림군의손자이기용 ( 자작 ), 흥완군아들이재완 ( 후작 ), 흥인군의손자이지용 ( 백작 ) - 사도세자 ( 장조 ) 의아들이자정조의이복동생들인은언군 ( 이인 ) 은신군 ( 이진 ) 은전군 ( 이찬 ) 3형제직계후손 : 은언군의후손은이완용 ( 李完鎔 자작 ) 과이해승 ( 후작 ), 은전군의후손으로이재각 ( 후작 ). 은신군은남연군-흥선군형제로위의두번째에해당 - 기타왕족후예 : 이해창 ( 후작 ), 이재곤 ( 자작 ), 이재극 ( 남작 ), 이근호 ( 남작 ) 이근택 ( 자작 ) 이근상 ( 남작 ) 3형제, 이용태 ( 남작 ), 이용원 ( 남작 ), 이종건 ( 남작 ), 이병무 ( 자작 ), 이건하 ( 남작 ) 2 황실종친및인척관계성씨 ( 본관 ) 별구분 - 전주이씨 (18명 ) : 이재완, 이재각, 이해창, 이해승, 이지용, 이완용 ( 李完鎔 ), 이기용, 이근택, 이재곤, 이병무, 이근상, 이건하, 이용태, 이종건, 이봉의, 이근호, 이재극, 이용원 - 여흥민씨 (9명) : 민영린, 민병석, 민영규, 민영소, 민영휘, 민상호, 민영기, 민종묵, 민형식 - 해평윤씨 (3명) : 윤택영, 윤덕영, 윤웅렬 - 안동김씨 (5명) : 김성근, 김가진, 김종한, 김학진, 김병익 - 풍양조씨 (1명) : 조동윤 - 반남박씨 (4명) : 박영효, 박제순, 박제빈, 박기양 - 연안김씨 (2명) : 김사준, 김사철 - 우봉이씨 (1명) : 이윤용 6 최재성, 2007 일제강점이후한국황실친인척의행적과일제의우대 한국민족운동사연구 52 참조. 2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공족 조선귀족, 은사공채 작위은사공채이름 공족 (2) 83 만원이강, 이희 ( 이재면 이준 [ 용 ]: 16 만 8000 원 ) 50 만 4000 원윤택영 2( 순종의장인, 윤덕영의동생 ) 후작 (6) 백작 (3) 자작 (22) 남작 (45) 33만 6000원 이재완2 28만원 박영효2 16만 8000원 이재각2, 이해승1, 이해창1+1 15만원 李完用 2( 후작 : 이항구2) 12만원 민영린1 10만원 이지용2 10만원 고영희4( 고희경 백작 ), 민병석2, 박제순2, 송병준2( 백작 ), 이용직 *, 조중응3 5만원 권중현2, 김성근2, 김윤식 *, 민영규2, 민영소2, 민영휘2, 윤덕영2, 이근명3, 이근택 2, 이병무2, 이재곤2, 이하영2, 임선준3, 조민희3 3만원 이기용1, 李完鎔 2 5만원 유길준, 조희연1 김가진 *, 김병익1, 김사준 *, 김사철2, 김석진, 김영철2+1, 김종한2, 김춘희3, 김학 진2, 남정철2, 민상호2, 민영기2+1, 민영달, 민종묵3+2, 민형식1, 박기양3, 박 2만 5000원 용대2, 박제빈2, 성기운3, 윤용구, 윤웅렬2, 이건하3, 이근상2, 이근호2, 이봉의4, 이용원3, 이용태2, 이윤용2, 이재극2, 이정로1, 이종건2, 이주영3, ( 장석주 )2, 정 낙용3, 정한조2, 조경호, 조동윤2, 조동희2+1, 조정구, 최석민2, 한규설, 한창수 3, 홍순형 비고 : 1 중간줄 8 명은거부 거절및반납자, 밑줄 * 4 명은 독립운동관련 실작자및습작불이행자, 2 이항구는父이완용의 공로로유일하게추가수작 ( 남작 ), 3 이준용이 1911 년받은은사공채는습공과는별개로받은것으로추정됨, 4 각이 름의번호는본인을포함한습작횟수임. + 표시는습작일자및습작여부미확인등의사유로 사전 에보류된경우임. 은사금은현금일시불이아닌공채증서 : 원금은 5년거치 50년이내상환, 연 5푼 [ 分 ] 이자는매년 3월과 6월에일본은행이나대리점또는총독이특별히지정한우편국에서지급 은사공채는총독부의허가없이양도하거나저당금지 할인및담보융자 1922 년김윤식의제자중 1명이은사공채권을담보로융자, 김윤식사후발각 ( 화면참조 : 수작자의은사공채 이자규모 ) 작위거부및반납자 8명과이종건 이름 작위 당파 은사공채 비고 김석진 남작 노론 25,000 거절 음독자결후상속신고불이행 특권상실 (1912.12.6. 조선귀족령제20조 ) 1910.10.10. 사망 조정구 남작 노론 25,000 거절 자결시도 반납 (1913.5.3. 제17조 ) 민영달 남작 노론 25,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유길준 남작 노론 50,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윤용구 남작 노론 25,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5
조경호 남작 노론 25,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한규설 남작 노론 25,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홍순형 남작 노론 25,000 거부 반납 (1912.12.6. 제20조 ) 비고 : 이종건 ( 남작. 은사공채 2만 5000원 ) 은 1919년 3 1운동전후총독부에작위와은사금반납의사를밝혔으나총독부가불 허하자공채증권을은행에예치한상태에서사망. 작위는이풍한이습작 일제와조선총독부의작위수여자체를인정하지않음. 일왕이주는작위사령서거절, 강제로발부된사령서및은사공채반납, 한국병합기념장 등훈장거절 강제병합에동의하지않는다는분명한태도를밝힘 ( 화면참조 : 1 조선귀족령제20조, 제17조, 제4조, 2 거부 거절 7명의반납이유 ) 독립운동 관련실작자및습작불이행자 이름 작위 당파 은사공채 내 용 김사준 남작 노론 25,000 조선보안법위반사건 으로징역 1년 실작 (1915.11.9, 제16조 [ 박탈, 1915.12.14]) 김윤식 자작 노론 50,000 이용직과함께 독립청원서 제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실작 (1919.7.17. 제16조 [ 박탈, 1919.7.31]) 이용직 자작 노론 100,000 김윤식과함께 독립청원서 제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실작 (1919.7.17. 제16조 [ 박탈, 1919.7.31]) 김가진 남작 노론 25,000 상속신고불이행에따른습작불능 ( 제13조제1호 [ 사망후습작신고불이행 ]) 거부 반납자와달리작위와은사공채를받고, 1910 년대일제의시정 ( 施政 ) 정책에나름대로동 조했지만이후 독립운동 과관련해작위상실 제16조유작자가국적을상실한때나혹금고 ( 禁錮 ) 나또는금옥 ( 禁獄 ) 이상의형의선고를받고그재판이확정되었을때는그작위을잃음제6조나혹제7조의예우를누리는자가전항의경우에해당하는때는귀족의족칭을제하거나혹예우를금지함 1 김사준 : 의친왕이강의장인. 남작, 은사공채, 한국병합기념장 (1912.8), 종5위서위등조선귀족으로모든혜택과권리누림. 1915 년 7월 1차세계대전을이용해독립운동을전개하던성낙형 ( 成樂馨 ) 을만나, 성낙형이 19개조항으로작성한 중한의방조약안 ( 中韓誼邦條約案 ) 을받아의친왕이강을거쳐고종에게전달하도록부탁을받고, 의친왕에게조약안을전달하려다가발각 체포, 10월 30일징역 1년선고 2 3 김윤식 이용직 : 자작, 은사공채, 한국병합기념장, 정4위서위. 1919 년 3 1운동때 독립청원 2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서 를제출한일로징역 1년 6월에집행유예 3년선고 - 김윤식은중추원의장 ( 대한제국기 ) 으로어전회의에참석해조약체결에동조, 자작작위와함께조선총독부중추원부의장 경학원대제학등에임명 - 이용직은합병조약체결에반대하는인물로지목되어어전회의에서배제되었으나, 자작작위와함께조선총독부중추원고문에임명 4 김가진 : 남작, 은사공채, 한국병합기념장, 정5위. 1919 년 3 1운동후상해로망명하고, 이후임시정부에서활동하면서조선민족대동단 ( 朝鮮民族大同團 ) 총재. 작위를박탈할마땅한조항이없어, 제13조에서적용한제11조의 6개월이내상속신고 를적용해 습작신고불이행에따른습작불능 으로처리 친일인명사전 수록수작 습작자는 138명 ( 수작 : 64명, 습작 : 74명 ) 4. 조선귀족의행태 1) 작위수여식 10월 7일오전 11시~오후 1시조선총독관저에서총독데라우치주재로수작식거행 일본에서작기 ( 爵記 ) 와칙서를전하러온오하라와하치스카가참석해이를가선시 ( 假宣示 ) 고쿠부 ( 國分 ) 인사국장이작위수여자호명 데라우치가작위등급확인및명부또는가증서 ( 假證書 ) 수여 ( 화면참조 : 한국병합기념장과증서 ) 10월 6일직접통보를받은 76명중 50여명참석. 일부는친척이나대리인이참여. 기타 20여명중작위를거부한 8명과병으로불참한자작김윤식, 남작남정철 이용원등 3명확인. 나머지 9 명은지방에거주하거나병을이유로불참했을것으로추정 매일신보 등언론이전하는 일장가관 이었던수작자들의행태 오전 10시 30분전친위부장관이병무씨는구한국육군부장의정장을입고총독부에먼저오르니찬란한금광 ( 金光 ) 은사방에떨쳐의기가양양하게제1등으로현관에마차를길게댐정1품보국민영소와전탁지부대신고영희와이재완 윤택영, 전내부대신박제순과이재극과전법부대신이하영등이요란한마차소리를내며앞뒤로서로총독관저에들어옴이에앞서총독관저에서는아침일찍부터관저내외를청소하고현관에등파 ( 藤波 ) 국분 ( 國分 ) 양통역관이맞이하여각각응접실로안내하는상황은매우다망 ( 多忙 ) 전총리대신이완용과전농상공부대신조중응과전내각서기관장한창수등제씨가마차를함께타고오전 10시 50분에도착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7
전탁지부대신임선준과전학부대신이재곤과전시종원경윤덕영과전궁내부대신민병석등이연이어수십개의마차를앞서거니뒤서거니하면서위세를떨치는가운데조선전래의보교 ( 步轎 ) 를급급히몰아오는자도있어복장의금색은황황한모양이들중에는대례복을착용한자가그대부분이고견모 ( 絹帽 ) 와후록고투 ( 厚祿古套 ) 로쇄락 ( 灑落 ) 하게장식한자도있고혹은의관속대 ( 衣冠束帶 ) 로꾸며각종다양한모습을이루었으나각자날리는희열은일장가관이었다더라. 수원집에서통보를받은박기양은수작식에참석하기위해상경했다가 10월 17일귀향 작위의영전 ( 榮典 ) 을입은사람의희열은실로상상키어렵도다. 그예를말하자면김성근 7 씨는 80 고령에이르러신선과같이은퇴했기때문에전날의수작식에도참석하지못하고대리로받았는데출두자로부터이일을듣고충심으로기쁨을참기어려워 8일에는총독부에늙은몸을일으켜방문하여어례 ( 御禮 ) 를말하였고, 또이기용씨는완림군이재원의사자 ( 嗣子 ) 인데지금나이 20 의청년인고로나라 [ 邦家 ] 를위하여아무런공로는없으나그문지 ( 門地 ) 로인하여자작의영전을얻어그기쁨은비할데가없으며또이기용씨의모친은여러날의병기 ( 病氣 ) 가점차쾌유하여어제저녁부터평화로운기운이집안에충만하여춘풍이한꺼번에도달함과같고, 기타이용태 김사철 정낙용 3씨는세상사람들이모두말하기를영전을접하기어려울것이라고했지만의외에수작되어이씨는기쁨에겨워집에돌아가서도신발을벗지도않고자리에올라환소 ( 歡笑 ) 하는상태는실로손과발이춤을추며어쩔줄을몰라했으며, 그나머지어느집이나모두이에비할바없이같아서대주연 ( 大酒宴 ) 을벌리고밤을세워축의 ( 祝意 ) 를표한다더라. 이완용 조중응 한창수 : 10월 7일수작식이끝난직후창덕궁을방문해순종에게 수작은구신 ( 舊臣 ) 에대한우대 라며자랑스럽게보고한후덕수궁의고종도알현민병석 윤덕영 : 10월 7일귀족을대표해덕수궁의고종을알현하고작위수여내용보고이기용 : 10월 8일덕수궁과창덕궁을방문해고종 순종에게작위수여보고김사준 : 축하하기위해큰잔치이해승 : 10월 11일경기도양주의선조 ( 先祖 ) 의묘소에가서작위를받았음을조상에게알리는 서작봉고식 거행 7 김성근 ( 자작 ) 은 80 세의고령으로수작식에불참했다가다음날직접총독부를방문해감사의뜻을전했다. 한편김성근 이용 원외 70 세이상되는 10 여명의원로들은수작식전인 9 월 14 일에통감데라우치에게耆老所를존치해달라는취지로청원 한일도있었다. 2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유길준 : 이해승 서작봉고제 를올린당일 (10월 11일 ) 에총독데라우치에게작위반납뜻전달이용직 : 중부수진동에봉안한선조인목은이색의묘소참배 (1919 년 7월실작 ) 박영효 : 10월 24일선원전에서수작사실을알리는봉심 ( 奉審 ) 을마치고고종방문. 일제는의빈 ( 儀賓 ) 이자고종의측근인박영효를회유하기위해 이왕가족으로특별대우 로후작 2) 은사공채권 ( 恩賜公債券 ) 교부식 1911 년 1월 13일조선총독부정무총감실에서총독데라우치를대신해정무총감야마카타이사부로 ( 山縣伊三郞 ) 가주재하고고쿠부인사국장과후지나미통역관이참석한가운데 은사공채권교부식 거행 오전 오후로나눠정무총감이직접공채권교부. 오전 10시 30분부터조선귀족 45명, 오후 1시부터 30분간공족 2명, 이어서 1시 30분부터 2시까지나머지조선귀족과기타공로자등 42명에대한공채권교부식이이어짐 공족 2명, 조선귀족 66명 ( 후작 5, 백작 3, 자작 21, 남작 37), 기타공로자 21명등총 89명참석 작위거부 거절자 8명중조경호가참석한것으로기록되어있어의문 조선귀족불참자 10명 : 거부 거절자 7명, 이해창 ( 후작 ) 이하영 ( 자작 ) 조희연 ( 남작 ) 3명, 총 9명불참으로추정 3) 작기본서봉수식 ( 爵記本書奉授式 ) 1911 년 2월 22일오전 11시부터 12시까지총독관저에서정무총감야마카타주재로총독부인사국장고쿠부, 비서관구와바라 ( 桑原 ), 통역관후지나미와스야마 ( 陶山 ) 가참여해정식증서를주는 작기본서봉수식 거행 총 63명참석 : 후작 6명, 백작 3명, 자작 21명, 남작 33명. 2/3는모두새로지은대례복을입었고, 나머지는연미복착용 조선귀족불참자 13명 : 거부 거절 8명, 도쿄에서수령한송병준 ( 자작 ) 과조동윤 ( 남작 ) 2명, 그리고두신문의명단에없는남작김병익 정한조 한창수 3명으로추정 4) 조선귀족일본관광단 조선귀족들이일왕을 알현 해감사의뜻을전할목적으로방문신청서총독부에제출 조선귀족의부인등을포함해 74 명으로구성, 1910 년 10 월 23 일 ~11 월중순까지 20 여일의일정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29
으로일본주요도시와명승지를돌아보며 문명국 일본의발전상시찰 11월 3일의천장절행사인풍명전어연 ( 御宴 ) 에특별초대받아일왕주는주병 ( 酒餠 ) 하사및 11 월 4일에는일행중 22명이직접일왕을배알하고 수작의가사 ( 賀辭 ) 를주상 ( 奏上 ) ( 화면참조 : 金榮漢, 朝鮮貴族觀光團記行, 1910) 5) 서위 ( 敍位 ) 황실령제16호 (1910.8.29) 서위조례는조선귀족의서위에관하여준용 ( 準用 ) 함 일왕의특지로후작은종2위이상, 백작 자작 남작은종5위이상 이기준이엄격하게적용되지는않았지만, 1912 년 12월 7일자로조선귀족에대한최초의서위가이루어짐 조선귀족의궁중석차는논란끝에일왕의 일시동인 ( 一視同仁 ) 하라는성지 ( 聖旨 ) 에따라일본화족과동일한서열로석차 ( 席次 ) 가정해짐 5. 조선귀족관련단체 1) 사단법인조선귀족회 ( 朝鮮貴族會 ) 1911 년 4월작위를받은귀족들이천황의 성은에감읍 하고 사회의모범 이되기위한활동을전개할목적으로조직 조선에서귀족의상호친선을도모하고품성의도야, 학식기타의향상발전에노력하며단지사교적단체일뿐만아니라일면정치적사회적매우중요한단체로서조선통치상에도공헌하는바많아실제적효적 ( 效積 ) 을일으키고있음 2) 조선임업조합보식원 ( 朝鮮林業組合普殖園 普植園 ) 1913 년 7 월귀족들의식림사업 농장경영등을위해조직 3) 재단법인창복회 ( 昌福會 ) 1929 년 9 월 28 일국채 250 만엔의기금과그이자및기타수입으로, 도박 아편등경제적으로 3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몰락해가는 조선귀족가정의안고 ( 安固 ) 도모 를목적으로, 그가계궁박 ( 家計窮迫 ) 한자 에게매달교부금지급 기금 : 1 우편저축, 조선총독이지정한은행, 신탁회사에예치, 2 공채모집에응모하거나매입, 3 조선총독이인가한유가증권모집에응모하거나매입등으로운영 지원방식 : (1) 자금대부 : 무담보로하며적당한연대보증인 2인이상, 1 자제의교육자금 : 무이자. 학생 1인당 1개월 50엔이내 2 부채정리 ( 가산정리 ): 5,000 엔이하, 연 5% 이내이자 1935 년까지학자보조 1건, 부채정리대부 14건에총 4만 3000여원 (2) 매달생활보조비지급 : 재산상태조사후결정. 규정상후작 300엔, 백작 250엔, 자작 200엔, 남작 150엔이내, 단 60세이상은지급액의 3할증액. 실지급액은이보다조금적었으며, 재난 질병 사망등에는특별교부금지급 4) 시국단체동요회 ( 同耀會 ) 1937 년 8 월귀족들이중일전쟁직후시국에대한내선 ( 內鮮 ) 의총후 ( 銃後 ) 를결속하기위해 1 시국에대한정확한인식의파악, 2 총후의후원운동등을통한내선일체의실현, 3 동양평화의 실현에기여, 4 황운부익 ( 皇運扶翼 ) 에적성 ( 赤誠 ) 등을목적으로조직 6. 조선귀족의몰락 8 1) 1920 년대중후반조선귀족의재산 1911 년 50 만원이상의자산가중조선인 32 명 : 공족 2 명 ( 이희 이강 ), 조선귀족 6 명 ( 박영효 이완 용 이재완 송병준 민영휘 민영달 ), 기타각지역 1925 년 11 월현재조선귀족및가족보유재산현황 8 金烏山人, 朝鮮貴族の沒落- 時代の推移に伴ふ一現象 朝鮮公論 제11권제9호 (1923.9) ; 전봉관, 2006 경성기담 : 근대조선을뒤흔든살인사건과스캔들, 살림출판사 ; 이기훈, 2009 1920 1930년대 조선귀족 의경제상황과조선총독부의귀족정책 역사문제연구 제21호, 역사비평사 ; 이용창, 2012 일제강점기 조선귀족 수작경위와수작자행태- 對韓政策의순응과代價 - 한국민족운동사연구 제43집,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등참조.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1
이름 작위 당파 은사공채 내용 김사준 남작 노론 25,000 조선보안법위반사건 으로징역 1년 실작 (1915.11.9, 제16조 [ 박탈, 1915.12.14]) 김윤식 자작 노론 50,000 이용직과함께 독립청원서 제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실작 (1919.7.17. 제16조 [ 박탈, 1919.7.31]) 이용직 자작 노론 100,000 김윤식과함께 독립청원서 제출. 징역 1년 6월, 집행유예 3년 실작 (1919.7.17. 제16조 [ 박탈, 1919.7.31]) 김가진 남작 노론 25,000 상속신고불이행에따른습작불능 ( 제13조제1호 [ 사망후습작신고불이행 ]) 자료 : 朝鮮貴族世襲財産令制令案 公文類聚 第 51 編, 1927년, 제31권 ( 國立公文書館 ). 조선귀족세습재산령 개정 (1927.2.10) 후조사한조선귀족들의재산상황 - 조사대상자총 61 명 ( 후작 7, 백작 3, 자작 18, 남작 33) 중다소라도재산가는 35 명 재산정도 ( 부동사 + 동산 ) 조선귀족 명수 (43) 1000만이상 민영휘 1 100만이상 이병길, 이종건 2 20만이상 이동훈, 이달용, 민병석, 민상호 4 10만이상 박영효, 이해승, 이병무, 이재곤, 민충식 *, 김호규, 한창수, 이항구, 최정원, 이장훈 10 35 5만이상 이재각, 이해창, 민충식 *, 이창훈, 박부양, 박기양, 김교신 7 5만 ( 이하 ) 조민희, 임선재, 김종한, 민형식, 박기양, 조동희, 남장희, 이완종, 장인원, 김영수, 성주경 11 재산 = 부채 송종헌 (70만), 이하영 (25만) 2 다액부채 고희경, 윤택영 (100만이상 ), 윤덕영, 이지용, 李完鎔, 이기용 6 자료 : 每日申報 1927.2.11.2면, 貧窮에陷한朝鮮貴族의慘狀, 천만장자로부터걸인까지있는조선귀족들의참상!, 時已 晩矣, 財産世襲令. 민충식 (*) 은 10만이상과 5만이상에중복됨. 1930 년 1 월분창복회교부금지급현황 - 총 33 명 : 후작 2 명, 백작 1 명, 자작 10 명, 남작 20 명 - 총 5,500 원 : 후작 500 원, 백작 200 원, 자작 1,700 원, 남작 3,100 원 번호 작위 이름 금액 번호 작위 이름 금액 번호 작위 이름 금액 1 후작 이재각 250 9 자작 민병삼 170 10 남작 김완종 150 2 후작 이해창 250 10 자작 박부양 170 11 남작 장인원 150 1 백작 이영주 200 1 남작 김종한 150+50 12 남작 이능세 150 1 자작 이규원 170 2 남작 민형식 150+50 13 남작 김영수 150 2 자작 조민희 170 3 남작 박기양 150 14 남작 이중환 150 3 자작 李完鎔 170 4 남작 이원호 150 15 남작 성주경 150 3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4 자작 이기용 170 5 남작 조동희 150 16 남작 민건식 150 5 자작 민충식 170 6 남작 이규환 150 17 남작 박경원 150 6 자작 조대호 170 7 남작 남장희 150 18 남작 민규현 150 7 자작 이충세 170 8 남작 정천모 150 19 남작 최정원 150 8 자작 임선재 170 9 남작 김덕한 150 20 남작 조중구 150 자료 : 昌福會關係書類 齋藤實文書 (100-7-853). 비고 : 1930년보통학교훈도평균월급 53원 ( 연 636원 ), 1941년 55원 ( 연 660원 ). 2) 몰락의행태 : 투기 사치 축첩 도박 이준용 ( 공족 ) : 운현궁과대증개축, 사치, 별도로은사공채수령, 부채를둘러싼소송 윤택영 ( 후작 ) : 부채왕 채무왕 대채왕 ( 大債王 ) 차금 ( 借金 ) 대왕. 해풍부원군. 순정효황후의父, 순종의장인, 대갈대감 윤덕영 ( 자작 ) 의동생. 장남윤홍섭은남작한창수의사위. 350만원내외 ( 채권자 120여명 ) 의빚더미에몰려베이징도주 사망. 분참봉첩지위조사건. 윤치호, 빚쟁이들이라면몰라도, 그의죽음은어느누구에게도손해날일은아니다. 이인용 ( 후작 ) : 이재극사망 (1927) 후유산 100만원중수십만원낭비및부인조중인의낭비 마작 불륜, 조선귀족회 ( 이재극가 ) 재정정리위원회 ( 위원장박영효 ), 이인용이조중인의간통을이유로이혼협박 구타 공갈했다고이를고소 (1932.5.9) 및 동거청구소송 (5.19, 승소 ), 이인용의 이혼청구소송 (6.2, 기각 이인용측의항소및 1934.1 승소 ), 이인용에대한준금치산자선고신청제기 (1933.7.10) 이해창 ( 후작 ) : 장남이덕주가사기꾼들의꼬임으로일본인고리대금업자에게 1만 5000여원의돈을빌렸으나, 정작본인은 4,000 여원을받아주색등으로탕진하고나머지는사기꾼들이수수료로가져감. 창복회교부금생활. 1934 년차남이흥주가충남의토지를판돈 3,000 원사기를당하고음독자살 민영린 ( 백작 ) : 아편흡입죄로징역 3월집행유예 3년선고, 1919 년 7월실작 ( 제16조 ) 이지용 ( 백작 ) : 도박에빠져예우정지와회복을몇차례반복하면서근근이작위를유지하다가손자이해충 ( 李海忠 ) 이습작 민병삼 ( 민영규의양손, 자작 ): 화류계출입으로순식간에 3만여원낭비, 본처가법원에준금치산선고를받아내기위해일족들에게서명을받으러다님. 고모에게상속될 7,000 원상당의토지를몰래팔아치웠다가횡령죄로고발당함 조중응 ( 자작 ) : 아들조대호는 장안부랑자로둘째가면서러울 정도였고, 左夫人右夫人을두고東西로無事奔走 하며주색에재산을탕진. 결국집안은 1924 년부터궁내성의자금 1만 5000원을지원받아토지를구입하고이를신탁해생활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3
민영기 ( 남작 ) : 1922 년 5월농림주식회사설립후토지사업투자, 1923 년부채 20만여원, 5월파산신청, 12월고소등으로몰락 민형식 ( 남작 ) : 파산한아들 6형제모두강도 절도를저질러 1929 년말 4명이복역, 6남은민형식이신세를지고있던친척민병석 ( 자작 ) 의집에들어가강도짓 이근호 ( 남작 ) 이근택 ( 자작 ) 이근상 ( 남작 ): 이근홍 (4남) 이근목 (5남) 등총 30여명의애첩 조동윤 ( 남작 ) : 사치와낭비로인한과도한지출로경제적파산지경에이른대표적인경우. 조선군사령관과총독 ( 사이토 ) 등이부채정리후원으로조선식산은행의저리자금불법융자계획 ( 연리 11%), 1923 년 5월조동윤 ( 본처김숙제 ) 사망후아들조중구 ( 친모김동숙 ) 가미성년으로상속하면서복잡. 당시총부채약 30만원, 이중친모김동숙의부채가원리합계금 1만 7000 원이상. 김동숙이부양비청구소송을거쳐대금등을받고分家. 파산으로부채정리기간중이던 1926 년옷값 1,300 원, 소고기값 1,600 원, 약값 1,100 원등생활비로인한부채 1만 4000여원. 1928~1929 년조중구의모친 부인 딸내외등생활비가매년 9,000 여원. 귀족구제자금 1,800 원을받았지만부채가다시늘어나 1930 년 3월 3만 8000원등으로매년지출원리금이 5,000 원이넘으면서재산정리위원들도좌절할정도 조민희 ( 남작, 이완용의처남 ) : 1923 년일본인고리대금업자들로부터파산신청당함, 1925 년도박자금을마련하기위해이완용소유토지의마름을미끼로수백엔을받는등사기행각을벌이다가고소를당함. 1928 년파산선고가내려져일시적으로귀족의예우중지 조희연 ( 남작 ) : 중추원고문. 재산을모두탕진해빚으로쪼들리다가, 1915 년 5월사망직전에작위를반납해제20조적용. 중추원고문직은사망직후반납. 작위반납은겉으로는 원 ( 願 ) 에의한반납 이었지만, 모범을보여야할조선귀족이 품위를잃고 작위를박탈당하는것을무마하기위한조선총독부의종용에따른것 실형등선고를받은윤택영 ( 후작 ) 조동희 ( 남작 ) 등도실작했다는기록이있지만, 작위가습작된것으로보아예우가정지된상태에서작위를유지한것으로추정 3) 친일재산의국가귀속 9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조사대상자총 507 명 - 친일재산이발견되어국가에귀속시킨친일반민족행위자 168 명 9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편, 2010 친일재산에서역사를배우다, 리북참조. 3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339명도친일재산이없었던것이아니라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 (2005.12.29) 시행전에이미처분되거나자료의부족으로재산조사를추진하지못함 총규모 : 2,359 필지, 1113만 9645 m2, 시가 : 2106 억원, 공시지가 : 959억상당 - 여의도면적의 1.3배, 시가로 42만명의초중고학생들에대해 1년동안무상급식가능 - 친일반민족행위자 168명중조선귀족 60명의재산현황 920필지, 607만 4438m2, 시가 : 1231 억원, 공시지가 : 556억상당 ( 화면참조 ) 법무부 (2010.7~2013.8), 친일재산환수소송 ( 보도자료, 2013.8.14) - 재산조사위원회 (2006.7~2010.7) 법무부승계이후 부당이득의반환을청구하는국가소송, 친일재산의국가귀속에불복하는행정소송, 근거법률에대한헌법소송 등총 95건의소송수행 : 종결된 87건중 84건에대하여국가승소판결, 승소율 97%( 일부승소포함 ) - 소송종료등으로매각에제한이없는재산을매각 ( 한국자산관리공사에위탁매각 ) 하는등으로 2013년 8월현재 322억 1000 만원의기금조성 반민규명위원회 진실화해위, 친일파후손등이제기한소송은총 40건 : 반민규명위와진실화해위를상대로한결정취소소송은 23건 6건, 명예훼손에해당한다며국가를상대로낸손해배상소송및헌법소원 11건. 40건중 33건이마무리, 국가를상대로한손해배상소송 2건을제외한모든사건에서친일파후손등이의를제기한이들이패소 10 - 미결 7건 3건이방응모 (2010.10 1심, 2012.1 항소심, 3년째상고심계류중 ), 김성수 (2011.10 1심, 4년째항소심계류중 ) 결정취소소송, 이해승친일행위결정취소소송 7. 마무리 일제가작위를받아들인자나거부 거절한자에게적용한기준은 충순 과 공로. 즉작위수여를 받아들인자는충순한자또는공로자, 거부 거절한자는충순이결여되어있거나스스로공로자이 기를거부한자로판단했다는해석이가능 10 한겨레 2014.11.3.1 4 5 면, 월요리포트 : 친일언론사주 재판.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5
일제가 조선귀족령 을제정하고귀족집단을만들어낸것은개항이래한국침략과정에서얻은경험을토대로한것. 일제가조선귀족에게서얻고자했던것은식민통치를앞장서선전하고정당화할전위대이자일왕의충량한신민의역할. 때문에조선귀족이식민통치에모범적이지않거나충순을결여하는등의경우에는 조선귀족령 의몇개조항을포괄적으로적용해작위삭탈. 그렇지만명백한위반자라고하더라도식민통치의이용가치가있으면작위의유지와정지를반복하면서귀족신분을누릴수있도록배려했으며, 한편으로는조선귀족의명예나일본정부및총독부의권위 체면등을위해사퇴를권유하는경우도다수작위를거부하거나거절하는행위에대해 조선귀족령 을비롯한어디에도법적 강제적조항없음. 또이로인해신체적으로고통을받거나물리적 경제적으로직접피해를입었다는사례도찾을수없음. 오히려조선귀족들은도박 축첩 아편흡입 사치등방탕한생활로가산을탕진해경제적으로몰락했을뿐만아니라재산문제를둘러싼소송등이빈번해이들에대한민중들의인식도매우부정적이어서조선총독부가이들을구제하기위해금전적 정신적지원을모색할정도였음작위를받은일이일제의일방적인강요때문이었다고주장하기도하지만최초수작자중 8명이즉시작위를거부 거절했고, 처음에작위를수용했던 4명은 독립운동 과관련해 실작. 이것은조선귀족들도 3 1운동과같은대일 ( 對日 ) 저항운동등에능동적으로참여할수있었음을보여주는것조선귀족에선정된대한제국의일부황족과국정을책임졌던관료들의반민족 매국행위는 수작행위자체 만으로도판단가능. 11 국망 ( 國亡 ) 과함께식민지배국이제공한작위를아무런저항없이받아들인행위는, 강제병합과정에순응하고협력한대가로당연하게여겼다는반증 11 해방직후제기된각단체의규정 강령 성명서및제헌국회의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에는작위수여자와습작자는모두행위와 상관없이 당연범 으로처벌하도록하였다. 3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황국신민화의첨병 - 지식인층의친일행태 - 교육계지도층을중심으로 박수현민족문제연구소연구실장 1. 지식인과친일지식인 진정한지식인은본질적으로 자유인 인까닭에자기의삶을스스로선택하고, 그결정에대해책임이있을뿐아니라자신이존재하는사회에대해서책임이있다고믿는다. 이이념에따라, 나는언제나내앞에던져진현실상황을묵인하거나회피하거나또는상황과의관계설정을기권으로얼버무리는태도를 지식인 의배신으로경멸하고경계했다. 사회에대한배신일뿐아니라그에앞서자신에대한배신이라고여겨왔다. ( 리영희 ) 지식인의가장직접적인적은사이비지식인이라고부를수있는자들이다. 집지키는개 라고 불리던 이들은지배계급의사주를받아자칭과학적인논리를통해특수주의적이데올로기를 옹호하려든다 ( 사르트르 ) 지식인의사회적역할과책임에대해서는다양한담론속에서끊임없는논쟁이오갔고, 지금도계속되고있다. 근래들어서는 지식인의종말, 지식인의종언 등타락한지식인을비판하는담론까지폭넓게확산되고있다. 지식인은어느사회나필요하고중요하지만그런만큼문제도많다. 지식인은본래진실을찾는데힘쓰고그것을알리는자로서현실에대해끊임없이고민하며, 비판적시각으로은폐된사회문제를폭로하고대중들에게새로운변화의가능성을제시하는존재들이다. 또한자신의영역에서이루어낸지적활동과성과를통해, 정치 사회등의공적인문제에대해자신의견해를표명하는오피니언리더로서역할을수행하기도한다. 어느시대건지식인들은 지적능력 과 예리한통찰력 의소유자로인정받고있고, 많은사람들의묵시적지지를받는존재들이다. 때문에지식인은큰사건이있을때마다진실규명과대중들의올바른선택을위해발벗고나서야하고, 시대역시그들을끊임없이호출하며해답을찾는다. 그래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7
서때로는신변의위험을감수하는용기를발휘해야하기도한다. 이때위험에굴하지않는지조와기개야말로지식인삶의표상이자상징이다. 억압된사회일수록민도 ( 民度 ) 가낮은사회일수록이러한지식인의사회적역할과책임은더욱막중하다. 대중의교육수준과소수엘리트의교육수준사이에큰차이가있거나지식과정보가차단된사회로서지식인의계몽적역할이중요하기때문이다. 일제강점기나해방후독재정권시기가여기에해당된다. 특히일제강점기는지식인의글, 말, 행동하나하나가대중들에게미치는파급력이큰사회로서대중들을깨우치고진실을알리는자로서의지식인의사명이절실히요청되는시기였다. 친일인명사전 에상당수의지식인이수록된것은이러한이유였다. 일제강점기의지식인들은교육, 학술, 언론, 문학, 예술, 종교등각분야에서지적활동과성과를통해대중들을깨우치고시대의요구에답할수있는능력이있고그러한위치에있는자들이었다. 그럼에도이들은자신들의역할과책임을방기한채불의한식민지권력의협력자차원을넘어앞잡이노릇을자행했다. 사르트르는행동하지않는지식인을사이비지식인으로규정하고 집지키는개 로불렀다. 친일지식인은행동하지않은지식인정도가아니었다. 사르트르의관점에서보면친일지식인은 집지키는개 가아니라식민지권력의 충견 이었다. 일제의지배정책과침략전쟁의논리를옹호하고, 이를대중들에게확산시키는역할을한친일지식인의행위가우리민족에게끼친해악은어떤분야보다도컸다. 그래서 1948 년 9월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 에서도친일지식인들을 종교, 사회, 문화, 경제기타각부문에있어서민족적인정신과신념을배반하고일본침략주의와그시책을수행하는데협력하기위하여악질적인반민족언론, 저작과기타방법으로써지도한자 ( 제4조 11항 ) 로규정하고이들에대해 10년이상의징역에처하거나 15년이하의공민권을정지하고그재산의전부혹은일부를몰수할수있다 ( 제4조 ) 고처벌조항까지명시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에서는이를더세분화하고구체화했다. 언론, 교육 학술, 개신교, 천주교, 불교, 천도교, 유림, 문학, 음악, 미술, 연극 영화등지식인들이활동하는분야를세분화하고각분야마다선정기준을마련했다. 그리고각분야마다 일제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한자 라는조항을두어강연, 좌담, 저술, 기고, 작품, 공연등지식인들이자신들의분야에서행한지적활동을통해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한자들을선정했다. 친일지식인을선정하는작업은쉬운일이아니었다. 지식인의특성상겉으로드러난행위는물론논리구조와그들의속성까지파헤쳐야했다. 경우에따라서는그들의내면세계까지들어다봐야했다. 이를위해각분야별로방대한자료조사와분석, 철저한검증작업을거쳤다. 이렇게친일지식인의실체를밝혀내는데많은노력을기울인이유는지식인의사회적 도덕적 역사적책임의 3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엄중함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친일지식인들은전시기에걸쳐광범하게포진되어있었고활동양상도분야에따라다양했다. 이강좌에서는 친일인명사전 에수록된각분야의친일지식인중교육분야의지도층인사들을중심으로살펴보고자한다. 특히이들의친일활동이가장극렬했던전시체제기에초점을맞추었다. 친일인명사전 에수록된교육계지도층은일제말전시체제기에가장영향력있는대표적인지식인그룹이었다. 이들은자신들의지위와영향력을활용해일제식민지배의정당성과천황제이데올로기를강화하는데선도적인역할을했을뿐아니라강력한파시즘체제를옹호하며조선인들은침략전쟁으로내모는데 1등공신 역할을했다. 더구나이들은학교를운영하거나직접학생들을가르치는교육자들로서학생 청년층에미치는영향력은어느누구보다도컸다. 그래서이들의친일행각이더욱문제였고지탄받아마땅했다. 설혹이들의변명대로친일행위가강요에의한어쩔수없는선택이었다하더라도그조차도지도자적위치에있는교육자, 지식인이라고한다면용납될수없는일이었다. 그런데도이들은해방이후승승장구하며교육계뿐아니라한국사회를대표하는지도자급으로거듭났다. 해방직후친일청산좌절되면서사회정의가실종된결과다. 통렬한반성과참회없이해방이후에도일제말기의추악한친일행각을벌였던그지위와명성을그대로, 그이상으로누렸다는것도문제지만더큰문제는 민족지도자, 선각자, 교육계의참스승 등으로둔갑했다는점이다. 이때문에이들의친일행위를밝히는작업은더욱철저했고세심했다. 편찬과정에서가장힘들었던분야가이들지식인층들이었다. 편찬작업이진행될수록이들의친일행각은속속들어났고, 그럼에도어떤인물보다도더주의를기울이고더철저한검증을해야만하는한국사회의현실이서글프기까지했다. 더구나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은해방된지반세기가훨씬지난시기에추진된, 그것도 역사적청산 을목적으로한사업이었다. 아래표의명단은 친일인명사전 에수록된교육분야주요인물들이다. 전시체제기각급학교에서황민화교육의첨병역할을하며학생들을천황의신민으로, 침략전쟁의예비전사로키운교육자들은많았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에서는사회적논란을최소화하기위해확실한근거가있고또친일행위의영향력과파급력이큰인물들을수록대상으로했다. 즉친일행위가명백한지도층인사를그대상으로했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39
전시체제기 (1937~45) 교육계의주요친일인사 이름 생몰년 1937~45 교육계경력 해방후주요경력 갈홍기 ( 葛弘基 ) 1904~1989 연희전문교수 숙명여대교수, 초대공보실장 고광만 ( 高光萬 ) 1904~? 시학관, 충주중교장 문교부장관, 부산대총장 고황경 ( 高凰京 ) 1909~2000 이화전문교수 서울여대학장, 국민교육헌장제정위원 김두헌 ( 金斗憲 ) 1903~1981 혜화전문교수 전북대 숙명여대총장 김상용 ( 金尙鎔 ) 1902~1951 이화전문교수 이화여대교수 김성수 ( 金性洙 ) 1891~1955 보성전문교수 부통령, 동아일보사장, 보성전교장 김활란 ( 金活蘭 ) 1899~1970 이화전문교장 이화여대총장, 유네스코한국대표 박관수 ( 朴寬洙 ) 1897~1980 시학과, 경기여고교장 경북대 한양대교수, 대전고교장, 아세아반공연맹이사장 박마리아 ( 朴瑪利亞 ) 1906~1960 이화전문강사 이화여대부총장 박인덕 ( 朴仁德 ) 1897~1980 덕화여숙교장 인덕학원이사장 배상명 ( 裵祥明 ) 1906 1986 상명여학교교장 상명여자사범대이사장 백낙준 ( 白樂濬 ) 1896~1985 연희전문교수 문교부장관, 연세대총장 서은숙 ( 徐恩淑 ) 1902 1977 이화전문교수 이화학당이사장 손정규 ( 孫貞圭 ) 1896? 경기여고교장 서울대교수, 조선교육심의회위원 송금선 ( 宋今璇 ) 1905~1987 덕성여실교장 덕성학원이사장, 통일주체대의원 신봉조 ( 辛鳳祚 ) 1900 1992 이화여고교장 이화 상명학원이사장 신흥우 ( 申興雨 ) 1883 1959 배재중교장 대한체육회회장 양주삼 ( 梁柱三 ) 1879~? 세브란스전문이사 대한적십자사초대총재 여운홍 ( 呂運弘 ) 1891 1973 보성전문교수 자유당선전부장 오긍선 ( 吳兢善 ) 1878~1963 세브란스전문교장 한국사회사업연합회회장 유진오 ( 兪鎭午 ) 1906~1987 보성전문교수 헌법기초위원, 고려대총장 유억겸 ( 兪億兼 ) 1896~1947 연희전문부교장 미군정학무부장, 조선체육회부회장 이묘묵 ( 李卯黙 ) 1902~1957 연희전문교장 주영공사 이숙종 ( 李淑鍾 ) 1904~1985 성신여학교교장 성신 숙명학원이사장, 유정회의원 이헌구 ( 李軒求 ) 1896~? 보성중교장 경기중교장 임숙재 ( 任淑宰 ) 1891~1961 숙명전문교수 숙명여대총장 장덕수 ( 張德秀 ) 1894~1947 보성전문교수 미군정조선교육심사위원 장응진 ( 張膺震 ) 1880~1950 광주욱여고교장 정구충 ( 鄭求忠 ) 1895~1986 경성여자의학전문교수 대한의학협회장 조기홍 ( 趙圻烘 ) 1908? 진명여학교교유 경기여중교장, 성신여대학장 조동식 ( 趙東植 ) 1887~1969 동덕여학교교장 상명학원이사장, 동덕여대학장 조재호 ( 曺在浩 ) 1902~? 시학관, 경복중교장 경기 서울고교장, 서울교대학장 차사백 ( 車士伯 ) 1897~1990 이화전문교수 무학여고교장 최동 ( 崔棟 ) 1896~19 73 세브란스전문교수 세브란스의학전문학장 현상윤 ( 玄相允 ) 1893~? 중앙중교장 고려대총장 황신덕 ( 黃信德 ) 1898~1983 경성가정여숙교장 중앙여중고교장, 추계학원이사장 4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2. 전시체제기교육계지도층의친일행태 일제의식민지교육은시기에따라변화가있었지만궁극적인목표는천황제이데올로기강화를통해체제에순응하는충량한황국신민을육성하는것이었다. 천황제이데올로기교육은 1911 년 조선교육령 이제정된이후줄곧식민지교육정책의핵심이었고, 그근본으로삼은것이천황의 교육칙어 였다. 1890 년에반포된 교육칙어 가 조선교육령 에도그대로반영되면서이후식민지교육이념의뿌리가된것이다. 짐 ( 朕 ) 이생각컨대우리황조 ( 皇祖 ) 황종 ( 皇宗 ) 께서나라를세우실제, 굉원 ( 宏遠 ) 한덕을세우심이심후 ( 深厚 ) 하도다. 우리신민들이충과효로써억조창생 ( 億兆蒼生 ) 의마음을하나로하여대대손손그아름다움을전하게하는것이국체 ( 國體 ) 의정화 ( 精華 ) 로서, 교육의연원 ( 淵源 ) 이실로여기에있도다. 무릇신민은부모에게효도하고형제가우애하며부부가화목하고붕우가신뢰하며, 국헌 ( 國憲 ) 을중히여기고국법을준수하며, 일단유사시에는의용 ( 義勇 ) 으로나라에봉사함으로써, 무궁 ( 無窮 ) 한황운 ( 皇運 ) 을부익 ( 扶翼 ) 할지니라. 이는짐의충량 ( 忠良 ) 한신민이될뿐아니라, 조상의유풍 ( 遺風 ) 을현창 ( 顯彰 ) 하는일이니라. 이를항상잊지않고지켜한결같이덕을닦기를바라는바이다 천황제이데올로기교육은전시체제기에극에달했다. 일제는중일전쟁이후병력을비롯한조선인들의전쟁협력이절실해지자, 내선일체 ( 內鮮一體 ) 를통치의전면에내세워황민화정책을적극적으로추진하는한편교육도정책적으로침략전쟁을위한철저한황민화교육에초점을맞추었다. 이를위해 1938 년 3월조선교육령을개정 ( 제3차조선교육령 ) 해 내선일체를통한황국신민의육성 을최우선적인목표로설정했다. 이를위해 국어 ( 일본어 ) 를상용화하고 조선어 를임의과목으로했으며, 역사 ( 일본사 ) 수신( 修身, 도덕 ) 과목을강화했다. 이후공립학교에서는대부분 조선어 과목이폐지되었다. 또한민족차별을없앤다는명분으로보통학교명칭을소학교, 고등보통학교명칭을중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를고등여학교로통일했다. 이어 1943 년 3월일제는다시조선교육령을개정 ( 제4차조선교육령 ) 해황국신민화교육을더욱강화했다. 조선어 과목은완전폐지되었으며중학교, 고등여학교의수업연한은 4년으로단축되었다. 그리고체력향상과군사훈련을강화해학교교육을근로동원및병력동원을위한전시형 군대형인간의양성수단으로활용했다. 이렇게전시체제기교육은내선일체를명분으로학생들을황국신민으로육성하고침략전쟁에적합한예비전사를양성하는데있었다. 침략전쟁에필요한인간으로교화, 육성하는것이전시체제기일제의교육목표였다. 따라서이시기교육정책과조선인병역제도는서로맞물리면서추진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41
되었다. 육군지원병제공포시기에맞추어제3차조선교육령이개정되었고, 징병제공포에맞추어제4차조선교육령이개정되었다. 병역제도가확대될수록파시즘교육도강화된것이다. 일제가내세운내선일체도실제로조선인과일본인의차별을없애기위한것이아니라, 조선인들을침략전쟁에끌어드리고반발을최소화하기위한명분이자민족말살을위한구실일뿐이었다. 내선일체를내건황민화정책과파시즘교육의의도와목적이무엇인지는일반인들도쉽게알수있었다. 이는전시체제기에크게확산된 유언비어, 그리고수많은생존자들의증언을통해서확인되는바다. 당시일반대중과는비교할수없을정도로높은수준의교양과지식을지닌지식인층, 특히학교현장의지도층인사들이이를모를리없었다. 그런데도이들은광란의선전 선동에나서며적극적인친일행위를벌였다. 교육계를비롯한각분야의친일지식인들은주로관변 민간의친일단체에참여해활동했다.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임전대책협력회, 조선임전보국단, 조선부인문제연구회, 애국금차회, 채권가두유격대, 임시지원병제익찬회, 조선교화단체연합회, 국민동원총진회,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등이다. 이단체들은조선인들의전쟁협력을조직적으로독려 강요하기위해급조된단체들로서조선총독부와긴밀한협조하에선전 선동활동을담당했다. 친일지식인의주된임무는친일단체가주관하는각종행사에참여해강연, 연설등을통해대중들을선동하는일이었다. 친일단체활동과함께교육계친일인사들의가장중요한역할은신문 잡지 방송등언론매체의기고글, 발언, 좌담회를통한선전 선동이었다. 당시매일신보 경성일보 조광 삼천리 신시대등대중매체나각단체의기관지에서가장흔하게발견되는것이이들의글이었다. 대부분일제의식민지지배를미화하고, 침략전쟁을정당화하면서전쟁협력을독려하는내용이었다. 주요사건이일어날때마다일제가선전 선동이필요로할때마다이들은어김없이등장했다. 중일전쟁, 육군특별지원병제도, 태평양전쟁, 해군특별지원병제도, 학도병제도, 징병제도등조선사회를뒤흔들고민심이요동치는큰사건이일어날때마다이들은일제의편에서파시즘체제와침략전쟁을옹호하는논리와주장으로조선인들의동요, 반발을막고전쟁협력을독려하는데힘썼다. 중일전쟁직후 유언비어 가확산되고민심이크게동요하자이들은중일전쟁의정당성과비상시국에대한철저한인식을강조했다. 북지사변과비상시국의철저한각오를환기하여민심의동요를각각자제하며각각그업에안정하여총후봉공에노력하는것이이시국에대처하는유일한방도이다. 1 라는김성수의주장은중일전쟁직후친일지식인들이대중들에게전하고자했던공 1 第二日金性洙씨, 조선일보, 1937 년 8 월 3 일 4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통된메시지였다. 전쟁이장기전으로흐르며조선인병역제도가점차확대되자, 교육계친일인사들의선전 선동도점점노골화되었다. 등장횟수도크게늘어났다. 내선일체를내건일제의총력전이큰효과를거두지못하고있다는반증이기도했다. 당시조선인들사이에서는전쟁에대한공포와병력동원에대한두려움이날로커지는상황이었다. 특히징병제도는조선사회에엄청난충격을던졌다. 교육계친일인사들은강연, 연설, 기고등을통해적극적으로전쟁협력을독려했다. 그내용은대부분징병제도는조선인에게황국신민의자격을준것이라며천황에게감사하고큰영광으로생각해야한다는것이었다. [ 박관수 ] 2천4백만의반도중서 ( 衆庶 ) 는 신민된충성을다하여본제도의실시를원활히진행하게하여황은의만분지일을보답하지아니하면안된다. 징병은일본신민으로서가장숭고한도의다. 일본신민에게만한하여부여하는최고의은총이다. 폐하의고굉 ( 股肱, 팔다리 ) 이되어서일신을군국 ( 君國 ) 에바치는것이황국신민된최대의영예요, 세계에대하여일본인이된무상 ( 無上 ) 의영광이다. 2 [ 박마리아 ] 징병령이라는것은천황폐하께옵서내리신여간한큰은사가아닙니다. 아직까지는어린애였지만인제는그성장한사람이라고인정하시고총과칼을메고전지에나가라고하시는것이니까전지에나가는이상황은에어그러짐없이충용하고훌륭한황국신민이되도록노력하는것이이혜택에보은하는최선의길입니다. 3 [ 김성수 ] 조선에징병령실시의쾌보는실로반도 2천 5백만동포의일대감격이며일대광영이라. 이징병제실시로인하여우리가이제야명실상부한황국신민의자격을얻게된것은일방 ( 一方 ) 으로전반도청년의영예인동시에반천년문약 ( 文弱 ) 의분위기중에서신음하던 모든병근 ( 病根 ) 을일거에쾌치하고거일 ( 去日 ) 생산할제2의양질 ( 良質 ) 을얻은것이다. 4 [ 고황경 ] 소화 18 년 [1943 년 ] 8 월 1 일은조선에징병제가시행되는날로써우리나라병제사 ( 兵制 2 박관수, 皇民된최고의영예, 半島の光 제 56 호, 1942 년 7 월 3 좌담회 - 징병령과반도어머니의결의, 조광 제 8 권 6 호, 1942 년 6 월 4 김성수, 文弱의痼疾을버리고尙武氣風助長하라, 매일신보, 1943 년 8 월 5 일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43
史 ) 위에영구히기록할만한일인것은물론이거니와 반도동포로하여금명실이상부하는황국신민을만들려고심혈을기울여분투한결정이아닐수없다. 이에대한무한한감사를드릴사이고, 광대무변하옵신성은에오로지공황 ( 恐惶 ) 감격할뿐이다. 성은을무엇으로보답하올까. 나라를위하여한마음이되어서힘다하여라. 임금님의군사로나서는젊은이들 젊은이들아그집안사람들아임금위하여참마음하나로일어서라하노라. 5 이들은또한일제의침략전쟁이태평양전쟁까지확대되자, 태평양전쟁을아시아민족의해방을 위한정의로운전쟁이며도의에입각한세계신질서를구축하기위한전쟁이라고역설했다. 그러 면서미국 영국에대한적개심을불러일으키는데역점을두었다. [ 백낙준 ] 오늘우리에게맡겨있는한가지임무는과연무엇인가. 나는조금도서슴지않고원수미영을때려없애고대동아전쟁을마감하는것이라하겠습니다. 명일의도의의신질서를세우려면미영의침략착취의구질서를완전히부셔버려야하고명일의협동안정, 공존공영의새질서를세우려면미영의이기주의와약육강식의경쟁질서를부셔버리지아니하여서는아니될것입니다. 그럼으로미영격멸은오늘우리의큰임무인동시에내일의채비차림이되는것이외다. 6 [ 장덕수 ] 과거수백년간동양을침략하여갖은착취와압제로서배를부릴뿐아니라아제국 ( 我帝國 ) 의동아공영권건설을방해하던동양전민족의공동의적미국과영국두나라에대하여지난 12월 8일제국은드디어정의의간과 ( 干戈 ) 를잡게되었으며 ( 두나라에서는 ) 강한자는살고약한자는죽는것뿐입니다. 약육강식하는동물사회에무슨자유주의 개인주의가있을리가있습니까. 나는영국의과거산업사를읽고그소위산업주의의문명이핵심으로부터썩어진것을통절히느끼었습니다. 동아의열민족 ( 列民族 ) 은그착하 ( 搾下 ) 에피가마르고그폭학 ( 暴虐 ) 하에뼈가굽었습니다. 선한나무는선한열매를맺고악한나무는악한열매를맺습니다. 황도일본제국의적성국가 ( 敵性國家 ) 인영미의정체는이에있습니다. 7 일제가필요로하는병력동원의대상은청년층이었지만이들의자발적참여를이끌어내기위해 5 고황경, 徵兵感謝와우리의각오 - 建軍정신에透徹, 매일신보, 1943 년 8 월 5 일 6 백낙준, 明日의勝利는今日의實踐에서, 放送之友, 1944 년 4 월 7 장덕수, 적성국가의정체, 삼천리 제 14 권 1 호, 1942 년 1 월 4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서는어머니이자남편인여성들의도움이필요했다. 이에따라여성들을대상으로한선전 선동 이이른바 총후봉공 의기치아래노골적으로전개되었다. 그역할을담당한것은주로교육계여 성지도자들이었다. [ 고황경 ] 금번조선에도징병제도가실시되게되어소화 19년 [1944 년 ] 부터는황송하옵게도우리가정에서황군을내일 ( 국가에바칠 : 작성자 ) 영광을가지게되었다. 황군을양육하는가정과그가정을맡은주부는참으로엄숙한자각을가지고국가의큰임무를맡지않으면안될것이다. 8 [ 배상명 ] 당장급한일은적령 ( 適齡 ) 된자식을가진어머니에게확고한인식을주입시켜주어야겠습니다. 떠날때, 보내는사람들이힘있게보내준다면전지에가서오래오래두고잊잖을것입니다. 떠날때에 목숨달아날때까지나라를위하여일하라 고격려해준다면얼마나좋은일이겠습니까. 독자라도서양자 ( 養子 ) 드릴셈잡고허심 ( 虛心 ) 으로나라에바치는각오가서야하겠습니다. 스물한살까지만이내아들이란 경지에도달할날이머지않아올줄압니다. 9 [ 김활란 ] 이제는반도여성자신들이그어머니그아내가된것이다. 우리는아름다운웃음으로내아들이나남편을전장으로보낼각오를가져야한다. 따라서만일의경우에는남편이나아들의유골을조용히눈물안내고맞아들일마음의준비를가져야한다. 과연우리에게그런각오가있을까? 이점에서우리는내지여성에게배울점이많다. 우리일본이세계어느나라보다도강한원인의하나가일본여성의숨은힘이라한다. 말없이참고나가는그들의힘은강한사람의몇배의힘을가진것이다. 그들을그렇게까지만드는그근본정신을지니도록해야한다. 즉국가를위해서는즐겁게생명을바친다는정신이다. 모든것이내것이아니다. 내남편도내아들도물론국가에속한것이다. 국가에속한내남편이나아들또내생명이국가에서요구될때쓰인다는것은너무나당연한일이다. 못쓰인다면오히려그얼마나부끄러운일인가. 10 8 고황경, 전시와가정 - 가정은국가의뿌리, 半島の光 57 호, 1942 년 8 월 9 배상명, 징병령과반도어머니의결의, 조광 제 8 권 6 호, 1942 년 6 월 10 김활란, 징병제와반도여성의각오, 신시대 제 2 권 12 호, 1942 년 12 월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45
[ 황신덕 ] 우리반도여성들은이번대동아전쟁을통하여느끼고배울점이많았지만그중에도충용한무훈을세우고종용히호국의뜻으로산화한육군의장병이다. 그과감위대한행동의배후에는반드시 훌륭한어머니 가있음을알수있다. 죽음 을생각지않는그러한위인들을길러내는어머니가되기에노력하여야할것이다. 11 [ 송금선 ] 군국의어머니는전날가졌던자녀에대한묵은관념을타파하여야될것입니다. 흔히자기가낳은자녀라 내것 이라는애착심이생기기쉬우나징병제도실시를앞두고 이러한자녀관은일절말소시켜야될것입니다. 삼가생각하옵건대황공하옵게도위로천황폐하의고굉 ( 股肱 : 팔다리 ) 이되고국가의간성이되며 요직에설자녀이므로촌호 ( 寸毫 ) 도 내것 이라는관념을개신 ( 改新 ) 하여어디까지든지폐하의적자, 국가의큰보물임을깊이느끼고우리는맡아서양육해드리는데불과하다는신념을굳게가져야될것입니다. 12 이들은또한가정에서의황민화실천과물자절약, 여성근로동원등을촉구하는일제의시책에 적극호응하며여성들도총력전체제에적극나설것을강조했다. [ 황신덕 ] 우리집에서는국어 ( 일본어 - 작성자 ) 를할줄아는하녀를둠으로서가족전부가물론나도함께말할때는국어를사용합니다. 무엇이든습관화로서해나가야신분에맞는말을할수있지않습니까? 곤란한일은하녀도말할때국어를사용하는데, 손님을맞이하는데조선어를사용하는것이니국어상용의철저화를영구히하는그날을원하는바입니다. 13 [ 고황경 ] 대동아전쟁이시작된지 1년이되는이때에 얼마나감사한일입니까. 배급을정부에서하는것이아무리어려운때라도한사람도억울하게굶는일이없고똑같은국민으로서의보호를주려고하는어머니와같은사랑의심정이라는것을배찰할때에감격밖에는없습니다. 14 [ 배상명 ] 여성들도간접직접으로있는힘을다해서근로전사가되어묵묵히생산전에매진하 11 황신덕, 어머니의책임더한층중대, 매일신보 1943년 5월 13일 12 춘추 제5권제1호, 1944년 1월 13 신시대 제2권 6호, 1942년 6월 14 고황경, 大戰一年間에배운것, 半島の光 鮮文版 62호, 1943년 1월 4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지않으면안될줄압니다. 당국의지도에다라군수품공장에서나논밭에서나근로함으로 써대동아전쟁의승리를바랄수있으리라생각합니다. 15 [ 이숙종 ] 지금은나라가망하느냐흥하느냐의결전단계에있어서쉬는것을생각하는일요일이있을수없는것이다. 관청이나회사에서일요일을전부바쳐일을한다해도총후의노무력은부족한이때에일요일까지일하게된것은한편힘있는일이고우리가바라마지않는일이다. 가정에있어서의주부도이러한시국의긴박한상태를깊이깊이인식하고 생각부터고쳐가져야할줄안다. 당장필요한생활필수품만을가지고이이상더주릴수있는데까지줄여서살고남은비용과힘을동원시켜서생산증강에공헌하지않으면안될줄안다. 16 무엇보다교육계친일이사들의가장두드러진친일행위는학생들의전쟁참여를적극적으로독려한일이다. 특히 1943 년 10월 학도지원병제 가공포되자, 교육자로서스승으로서학생들에게적극적으로지원을독려하는한편학부모들에게도설득작업을펼쳤다. 선동내용은거의비슷했다. 조선이진정한 황국 의자격을얻기위해, 천황과일본제국을위해, 아시아민족의해방을위해, 나가서용감히싸우다죽으라는것이다. [ 박관수 ] 신성한황국에태어나서 만세일계 ( 萬世一系 ) 의황운 ( 皇運 ) 을돕자와 신도 ( 臣道 ) 를다하여공명을죽백 ( 竹帛 ) 에드리우고혈식 ( 血食 ) 을천추에받들때를당하였다. 가진힘, 가진재주를한없이뽐내어보아라. 이번전쟁에수많은우리군신 ( 軍神 ) 들도모두이런분들이다. 우리일본에는세계에자랑할만한대화혼 ( 大和魂 ), 일본정신, 무사도라는것이있으니, 이것을가장쉽게한마디말로말한다면이것은 죽음 이라하겠다. 나의목숨은털끝같이가볍게하고군주에대한충의는해산 ( 海山 ) 과같이중히하여목숨을바쳐서충의를다하는것이다. 신민의도리로폐하의고굉 ( 股肱 ) 이되어영광스러운나랏일을하다가나라의제사를받을귀신될길이열렸다. 17 [ 김성수 ] 평소부터자주제군에게말하여온나의생각을제군의출진 ( 出陣 ) 을앞둔오늘날다시말 하고자한다. 이를한마디로말하면 의무를다하라 는데그칠것이다. 의무를위하여는목숨도아 깝지않다고늘말하였거니와, 지금이야말로제군은이말을현실에서몸으로써실행할때가온것 15 배상명, 오직승리하나뿐, 우리는총칼대신 근로, 매일신보 1944 년 8 월 27 일 16 매일신보 1944 년 3 월 8 일 17 박관수, 師父의부탁, 반도의젊은이들에게, 半島の光 제 70 호, 1943 년 10 월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47
이다. ( 중략 ) 제군의희생은결코가치없는희생이아닐것을나는제군에게언명한다. 제군이생 을받은이반도를위하여희생됨으로써이반도는황국으로서의자격을완수하게되는것이니반 도의미래는오직제군의거취에달렸다고할수있다. 18 [ 김활란 ] 앞날의대동아를생각해보길바란다. 아세아 10억민족의해방과그들의지도자가될것을생각하기바란다. 남아면피끓는청년이면이번기회를놓치지말고싸움터로나올것이다. 한번나서서싸울사명을느끼지않은가? 마음이당길때까지주저하는이유는무엇인가. 죽음이무서워서출정하지못하는가? 죽음이무서워서못나가겠다는청년이있다면참으로슬픈일이다. 딱할일이다. 그러한비겁한사람은없을줄안다. 없어야할것이다. 마감이되기전에용맹하게나서기를맹서하기바란다. 19 [ 박마리아 ] 학도들은지원한다는말의깊은뜻을먼저깨달아야할것이다. 즉지원은부르심이다. 공부를하고있는학도들을왜부르시었나? 이전쟁은동아의 10억민중의해방을위한전쟁이다. 반도의청년학도는동아의 10억이나되는사람들을해방시키는입장에서있는것이다. 학도들이잘하고못하는것은반도의장래를좌우한다. 이번기회에반도의청년들이전장에나가서힘껏싸운다면나라를위해서가정을위해서학도들자신을위해서이에더좋은일은없을줄안다. 20 [ 현상윤 ] 내가현재교편을잡고있는중앙학교는아직직접군인으로서적령자가없고, 이기회에우리중앙중학졸업자이외의각대학, 전문학교청년학도에게도몇마디나의소신을피력하고자한다. 만일아직가정사정과기타로지원의장지 ( 壯志 ) 를결 ( 決 ) 치못하고숙려 ( 熟廬 ) 중인자가있다면, 나는교육자적입장에서제군에게청년다운대용단을촉하지않을수없다. 옛날에도사 ( 士 ) 는국지원기 ( 國之元氣 ) 라는명언이있다. 국난을당하여솔선정신 ( 挺身 ) 하는것이사 ( 士된 ) 자의일대의무이며또한청년다운기개일것이다. 21 [ 장덕수 ] 지금제군은부르심을받들어출진하게된것이다. 폐하의고굉 ( 股肱 ) 으로써황국의운명 18 김성수, 大義에죽을때皇民됨의責務는크다, 매일신보 1943년 11월 7일 19 김활란, 열혈남아이거던이때를놓치지말라, 매일신보, 1943년 11월 18일 20 박마리아, 칼잡고일어서자, 매일신보 1943년 11월 19일 21 현상윤, 士는國之元氣 滅私, 久遠의生을찾자, 매일신보 1943년 11월 11일 4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을쌍견에걸머지게된것이다. 국사에대한종래의방관자적지위로부터일약 ( 一躍 ) 하여황국의초석이되고간성이된것이다. 일본제국은폐하를원수로받드는제군의제국이다. 이제야말로 우리나라 라는말은명실히상합 ( 相合 ) 하게된것이다. 제군은폐하의신민인동시에제국을구성하는요원이라는의미에서제국의국민이다. 대동아전은성전이다. 동양인의동양의건설전 ( 建設戰 ) 이다. 제군이의를위하여피를흘릴진대그사 ( 死 ) 는한갓청사에빛날뿐아니라의로더불어사는신의전 ( 殿 ) 에영원한생명의불이될것이다. 22 3. 강요된친일인가, 내재된친일인가? 위의교육계친일인사들의친일행태는전쟁협력에초점을맞춘것이고, 그것도지면관계상극히일부만을제시한것이다. 이들에대한친일행위자료는확인된것만도수없이많다. 글쓰기를업으로하는지식인의특성과이들의사회적지위를고려하면확인되지않은친일의근거도상당수에달할것이다. 위의내용만보더라도이들의선전 선동내용은너무노골적이다. 최고수준의교육을받고심지어외국유학을통해선진문물을체득한지식인들의공개적인글과말이라고하기에는믿기지않을정도다. 내선일체와황민화정책의본질이무엇인지, 침략전쟁이왜일어났고그전쟁이어떤의미가있는지충분히알만한능력과위치에있는인물들이었다. 더구나이들상당수는민족운동경력이있는인물들이었다. 이때문에이들의변명에대해여전히많은사람들이공감을하고있다. 일제의강요와협박때문이었다. 그시대상황에서는그럴수밖에없었다. 학교를지키기위한불가피한선택이었다. 나약한지식인의변명이라고하기에도너무무책임하고비겁한말이다. 이러한변명이궁색해지자최근에는일제의 조작설 까지등장하고있다. 사회적지위와영향력을고려하면이들의친일은 강요된친일 이라해도용납할수없는행위였다. 당대최고의지식인 교육자로인정받는이들이내선일체 황민화를외치며청년층, 심지어자신이가르치는학생까지침략전쟁으로내몬것은어떤이유든책임을면하기어렵다. 더구나이들의선전 선동에현혹되어사지로끌려간청년학생들이어느정도였는지는예측할수는없지만이들의영향력과파급력은결코적지않았다. 다음은해방직후학도병출신이신문에기고한글이다. 22 장덕수, 출진하는반도인학도에게, 半島の光 제 72 호, 1944 년 1 월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49
내가아니우리학병이면누구나가불같이김성수를미워하는연유를조선인민은다잘알고있을것이다. 저이놈일가의번영을위해서우리를필사 ( 必死 ) 의땅으로내몰아보내고왜제 ( 倭帝 ) 에게 기름진고깃덩어리를얻어먹다가 8 15가닥쳐와일본놈들이망하니까다시털끝만한반성도자기가책도없이 이친일파민족반역자, 학병의원수, 영원한인민의적인김성수를내가끝까지타도하고야말고싶어하는것이오로지 바른정열 ( 情熱 ) 에서나온것이요, 털끝만한 불순 ( 不純 ) 이없다는것을명확히공언할수있다. 23 그러나강요에따른마지못한행위라고하기에는이들이남긴친일의근거가너무많았고, 구체적이고노골적이었다. 그리고패망직전까지도이들의친일행위는계속되었다. 전시체제기가아무리정보가통제된사회라고하더라도시시각각으로조여오는패전의조짐과분위기를이들이감지하지못했을리가없다. 일제의마지막발악을통해서도충분히짐작할수있는일이었다. 더구나철저한단속에도불구하고민간에서는일제패망에대한유언비어가나돌았고, 일부지식인층에서는미국의단파방송을통해전황소식을접하고있었다. 특히단파방송소식은지식인층사이에서빠르게전파되어송진우 여운형 허헌등이해방정국을구상하는한계기가되기도했으며, 최남선같은친일지식인까지도그소식을접했다. 그럼에도이들이마지막까지적극적인친일에나선것은외부의강요보다는내재된현실인식때문이었다. 이미많은연구를통해서도드러났듯이친일지식인대부분은만주사변과중일전쟁을겪으면서점차일본의힘에압도되었고, 24 점차일본을상대로독립을쟁취하는것은불가능하고차라리일본제국의일원이되는것이조선을위한길이라는인식을갖게되었다. 여기에전시체제기일제가내건내선일체는친일지식인들이적극적인친일의길로나가는계기로작용했다. 일본인과조선인이라는민족차별의벽을넘을수없었던이들에게내선일체는그동안극복하기힘들었던민족차별에서벗어나진정한제국의신민이될수도수있다는 차별로부터의탈출논리 였다. 25 설혹내선일체의허구와그의도를간파했다해도현실에압도당해독립의희망을잃은지식인들에게는최선의길이자친일행위를정당화하는논리이기도했다. 독립이불가능하다는현실인식이친일의출발점이었고내선일체론을쉽게받아들이고일부는신념으로까지발전한요인이었다. 이들이지식인 지도층으로서장차큰오점이될수있는수많은근거를남기면서까지적극적으로일제에협력한것은, 해방과독립에대한희망보다는일본을 23 金尙勳, 김성수여伏罪하라! ( 上 ) 生還學兵의手記, 문화일보 1947 년 7 월 5 일 24 이준식, 파시즘기국제정세의변화와전쟁인식, 일제하지식인의파시즘체제인식과대응 ( 혜안, 2005), 110~112 쪽. 25 宮田節子, 朝鮮民衆と皇民化政策 ( 未來社, 1985), 156 쪽. 5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자신들의국가로인정하는것이조선의살길이라고믿었기에가능한일이었다. 그러기에이들대부분은내선일체의실현여부를떠나서일본과공동운명체라는인식을갖고있었다. 윤치호가 일본제국이란거선 ( 巨船 ) 이내선인을한데태우고바야흐로항구에서대해를향하여출범하려하고있다. 만약에거선이불행히도풍파를만나서난파한다든지할것같으면그속에탔던조선인은모두한꺼번에운명을같이하고말것이다. 26 라고한것은친일지식인의속내를드러낸표현이다. 일제의패망조짐을알았다해도친일행위를멈출수없는이유였다. 이들의친일은스스로가선택한길이었다. 그리고이들의전시체제기의노골적인선전 선동은마땅히지탄받아야할명백한범죄행위였다. 그럼에도이들은해방직후변신을꾀해그토록저주하고비난했던미국에빌붙어미군정의요직을차지했고, 반민특위가좌절된이후에는독재정권의하수인이되어과거의지위와명성을되찾기시작했다. 그리고친일의기억대신 민족교육의선구자, 일제의압제하에서도학교를지켜낸민족주의자, 대학설립과발전에기여한공로자 등으로기억되기시작했다. 그명성은지금까지도이어지고있다. 지난 2009년 12월 28일고려대 상명대 서울여대 성신여대 연세대 이화여대등 6개대학총장들은연명으로교육과학기술부장관에게청원서를냈다. 국가기구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가국내주요사립대학설립과발전에지대한기여를한주요인사대부분을친일반민족행위자로규정한데따른것으로, 강력한이의를제기하며조사결과에대한조속한시정을청원 한다는내용이다. 위원회가 일괄적잣대로무리하게재단하고폄하하여, 한국사회발전에미친공헌마저부정 하고있으며, 일제하의혼란속에서학교를지켜온이들의역할을폄하함으로써해당대학의앞날에매우부정적영향을미치게될것 이라는이유였다. 설립자 총장이친일을한것이지해당대학이친일을한것이아니다. 그럼에도 6개대학총장들은대학을볼모로이들을옹호하는부끄러운작태를보였다. 친일세력, 그후손과추종자들이여전히힘을과시하고있는한국사회의현실이다. 이들의범죄행위는친일에그친것이아니다. 이들대부분은일제말기파시즘체제에순응하거나이를적극받아들여수많은사람들은침략전쟁 강제동원의현장으로내몰았다. 그리고그경험을바탕삼아해방이후권력과결탁해장기간에걸친독재와폭압적인유신체제를유지케했다. 이들의행위는반인륜 반인권 반민주범죄에해당되기도했다. 26 윤치호, 내선인은동일운명 - 巨船의항해에임하여, 매일신보 1937 년 8 월 15 일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51
우리안의일본노래 노동은중앙대명예교수 1. 무엇 이 왜 일본노래인가? 필자는홍난파의친일활동을밝힌바있다. 독립기념관에서홍난파관련전시물이철시되었다. 또, 정부가공식적으로이달의문화인물 (1992.8) 지정에서도홍난파를철회 (1996) 한바있다. 앞으로후속적인작업으로초 중 고등학교음악교과서에민족음악가로평가하는내용이나난파음악제등기념행사는물론한국근대음악사에서홍난파재평가작업이이루어질것이다. 이들평가에의해서나는비로소홍난파의 사공의노래 를제대로부를수있었고, 그리고그의바이올린독주곡 애수의조선 도제대로감상할수있었다. 초등학교저학년교과서 즐거운생활 에나오는 똑똑똑누구십니까? 가교과서에적혀진대로한국의 전래동요 가아니고, 일본의 톤톤톤도나타? 일뿐아니라일본의전통동요라는와라베우타 ( わらべうた ) 이고보면, 무엇이문제인가? 지금까지우리가즐겨불러본동요가사실은우리옛동요가아니라일본동요라는혼란과갈등을겪게될것이다. 더나아가지금까지믿어온한국사회의역사와문화의정체성이문제일것이고, 한국전통과새로운전통과관계, 한국과국제문화교류간의관계등이모두부각될수있다. 이글은 즐거운생활 과 음악 등교과서와그밖의동요집에나오는노래를비롯하여소위 뽕짝 으로부르는대중가요중에어떤것들이일본식음악이고, 어떤것들이우리나라식인지작품의음계와박자그리고운율들을분석하여한국문화에대한정체성을확립하려는길잡이글이다. 2. 일본동요의양식과요소 일본의 니혼노쇼오카 ( 日本の唱歌 ) 라는창가집과 와라베우타 ( わらべうた ) 라는동요집에는 메이지시대부터일본인들이불러온노래들이있다. 이노래들을통해지금도우리가어린시절을 5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추억으로잠기게하는 쎄쎄쎄 나 여우야여우야 등이일본노래임을밝혀준다. 이처럼우리가부르는노래들이사실은일본노래가원류이고, 또일본노래곡짓기방식에따라작곡된작품들이너무많다는점에서우리들은곡이밝혀질때마다감정적대응을할것이아니라, 음악분석능력을키워일본동요들을가려내야할것이다. 우리노래가어떻게만들어졌는지를알기위해서도말이다. 작품마다따른내용성이나그역사성을접근하여밝히는것도중요하지만, 먼저음향적재료들을분석할수있어야할것이다. 모든음악들의음조직은음향적재료들을선택하고정리하여체계화한것이다. 이러한음조직은문화권마다다르다. 또, 시대에따라서도다르다. 일본음악의음조직은일본의음향적재료들을알아보아야한다. 일반적으로음향적재료는음계 음높이 음길이 음세기 음빛깔 빠르기 ( 템포 ) 아티큘레이션등에따라선택하고정리하며음조직을한다. 문화권과시대에따라음조직이달랐다면음계도음길이도음세기도음빛깔도템포도또아티큘레이션도문화권과시대에따라각각다르다. 하나의음조직만있지않다. 이러한재료들을하나씩선택하고질서를부여하며조직한 ' 음조직 ' 이곧음악이다. 당연히, 조직하는작곡가개인이나, 시대나, 민족의문화권마다 ' 음조직의조건 ' 이다르다. 곧, 각각의음향적재료의조직법이나조직해낸아이디어가있다. 우리는흔히이노래가한국음악이냐일본음악이냐를분석하기위해먼저음계분석을한다. 물론, 분석단계가더해지면음계재료로만분석하지않는다. 음높이에대한이론이나음길이에대한이론과그것의시간체험등수많은재료요소와그것들에파생된요소들을단계적으로분석하여최종적으로종합평가를한다. 곧, 음향적재료를이루는음계 음높이 음길이 음세기 음빛깔 빠르기 ( 템포 ) 아티큘레이션은물론음악의형식의구성원칙, 구성법등이모두음향적재료의표현요소 ( 퍼래미터,parameter) 이어서, 이모두가 ' 음악양식 '(musical style) 을결정하므로이모두를분석해야할것이다. 이분석방식은종족음악학 (Ethnomusicology) 방법의 ' 기술적 분석적방법 ' 으로서양식적 특성분해적방법이기도하다. 이글은주로음계와음높이와음길이, 그리고운율등을중심으로분석의길라잡이역할을하려고한다. 이같은분석은분석하는그자체에있지않다. 모두가일본작품들을평가하여우리음악의정체성을확립하려는데있다. 3. 일본의음향적재료의특징 일본의음향적재료를구성하는요소들, 곧음계 음높이 음길이 음세기 음빛깔 템포 아티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53
큘레이션중에서특히음계와박자중심으로그특징을알아보자. 1. 일본음계 (1) 일본의기본인테트라코드와음계일본민족은지금까지중국과한국그리고동남아시아와서양과문화교류를통하여독자적인음향적재료들과그작품들을만들어냈다. 일본음계론은학자마다다르지만대체적으로전통음계네 (4) 가지와근대음계두 (2) 가지등모두여섯가지로분류한다. 네가지전통음계는민요 ( 民謠 ) 음계, 율 ( 律 ) 음계, 미야코부시 ( 都節 ) 음계, 오키나와 ( 沖繩또는琉球 ) 음계등이그음계이다. 근대에일본전통음계와서양음악과관계속에서발전시킨두음계는요나누키 ( ヨナ拔き ) 장음계와요나누키단음계이다. 일본음계론을대표적으로발전시켜그이름을떨친음악가는종족음악학자코이즈미후미오 ( 小泉文夫, 1927~1983) 이다. 그는일본전통음계를네가지기본적테트라코드에서체계화시켰다. 원래테트라코드 (Tetrachord) 란고대그리스의음조직에서가장중요한요소, 곧하행 4음렬을가리키며 ( 이 4음렬은포르밍크스의 4현과일치 ), 2개의 4음렬을쌓아옥타브종류나선법 (mode) 이발생하고, 여기에서발전하여 17세기에평균율의음계 (scale) 가확립된다. 곧, 일본음계의테트라코드가서양의 4음렬에서하나의음이생략된 3음렬로되어있다. 서양의테트라코드의가장자리음들이고정되어있는것처럼일본의테트라코드로 3음렬이라할지라도가장자리음들이고정되어완전 4도로되어있다는점에서테트라코드라는용어를사용한다. 3음렬인일본의테트라코드는두개의핵음과사이음으로구성되었다. 다음 < 악보 1> 에서가장자리음들을 로표시한완전 4도의두음, 곧선율의중심을이루면서다른음들을지배하는두음을아래핵음 ( 核音 ) 과윗핵음, 그리고가운데음으로서현재까맣게칠한중간음이그위치에따라테트라코드의성격이구분되는 사이음 ( 間音 ) 이다. 아래 핵음 사이음 핵음 < 악보 1> 일본음악의기본적테트라코드 민요테트라코드 율테트라코드미야코부시테트라코드오키나와테트라코드 < 악보 1 > 에서사이음의위치에따라일본음악의기본적인테트라코드 4 가지가성립된다. 민요 5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테트라코드는아래두핵음 4도사이에아래핵음과사이음이단3도로이루어진테트라코드 3음렬이다. 율테트라코드는아래핵음과사이음이장2도로이루어졌으며, 미야코부시테트라코드는아래핵음과사이음이단2도, 끝으로오키나와테트라코드는아래핵음과사이음이장3도로이루어진테트라코드 3음렬이다. 이와같은 4가지테트라코드를두번쌓아올리면일본전통음계가성립된다. 성립된 4가지일본전통음계역시그명칭은민요음계, 율음계, 미야코부시음계, 오키나와음계이다. 다만, 두번쌓아올린음계를연결시킬때, 곧두개의테트라코드인아래테트라코드와윗테트라코드를연결시킬때그연결시키는방식이두가지가있으며, 하나가 연결 (conjunct) 이고또하나가 분리 (disjunct) 이다. 곧, 두개의테트라코드에서아래테트라코드의윗핵음과윗테트라코드의아래핵음사이의연결음이같을때는 연결, 장2도로분리하여연결시킬때가 분리 방식이다. 이처럼, 테트라코드를두번쌓아서연결시키는것은모든음계론이옥타브를어떻게나누느냐에조직되므로, 두개의테트라코드를결합시켜야만옥타브로음조직할수있다. 다음 < 악보 2> 는민요테트라코드를두번쌓아연결시키는연결과분리방식을보여주는악보이다. < 악보 2> 민요테트라코드의두가지연결방식 연결방식 분리방식 < 악보 2> 에서왼쪽의 연결방식 은아래민요테트라코드 3음렬의윗핵음과쌓아올린윗테트라코드의아래핵음을동일음으로삼고연결시키는방식이다. < 악보 2> 의오른쪽 분리방식 은아래민요테트라코드 3음렬의윗핵음과쌓아올린윗테트라코드의아래핵음사이를장2도분리시켜결합한방식이다. 이처럼, 두테트라코드를 연결 이거나 분리 방식으로결합하면 4가지기본테트라코드가 < 악보 3> 처럼일본의기본적인 4가지음계가나온다. 편의상분리방식에의한 4가지음계이다. 한옥타브내의다섯음으로이루어진 5음음계이다. < 악보 3> 일본의 4 가지음계 민요음계 율음계 미야코부시음계 오키나와음계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55
위악보중첫번째의민요음계는일본인들이가장자연스럽게녹아있는음계로서, 전래동요인 와라베우타 ( わらべうた ) 의음계이다. 두번째음계인율 ( 律, 리츠 ) 음계는일본전통음악중아악 ( 雅樂, 가가쿠 ) 과성명 ( 聲明, 쇼오묘오 ) 등에, 그리고세번째의미야코부시음계는근세에발달한방악 ( 邦樂, 호오가쿠 ) 에, 끝으로오키나와음계는오키나와 ( 沖繩 ) 와아마니 ( 唵美 ) 여러섬에나타나는남부음악음계이다. (2) 민요음계민요음계는민요테트라코드의아래핵음과중간음사이가단3도로이루어지고, 이테트라코드를두번쌓아올려서만든음계이다. 이음계는일본민요나와라베우타 ( 童謠 ) 에가장많이사용되는음계이다. 그만큼이나일본인음계감각으로는이민요음계가가장자연스러운음계이다. < 악보 2> 에서민요테트라코드 2개를 ' 연결 ' 이나 ' 분리 ' 방식으로결합하여만들어지는민요음계를다음 < 악보 4> 와같이소개하였다. < 악보 4> 민요테트라코드의연결과분리방식으로결합한민요음계 연결 분리 연결 방식으로결합한민요음계는아래민요테트라코드의아래핵음이다 (c') 음이었다. 이번에 는여러음으로시작하는 ' 연결 ' 방식의민요테트라코드의아래핵음을라 (d') 음과마 (e') 으로시작하 면다음 < 악보 5> 의형태로나타난다. < 악보 5> 민요음계의여러형태 ( 민요테트라코드의아래핵음을다 (c'), 라 (d'), 마 (e') 음으로시작한형태 ) 다 (c') 라 (d') 마 (e') 위 < 악보 5> 아래핵음이첫번째의악보처럼다 (c') 음으로시작하는경우와두번째악보의라 (d') 음으로시작하는경우들은모두음정관계로임시표가붙어있다. 그러나세번째에악보처럼아래핵음마 (e') 음으로시작하는경우는다장조 (C Major) 와같이임시표가없다. 세번째악보와같이음이름이 ' 마 (e') 사 (g') 가 (a') 다 (c'') 라 (d'')' 와같지만, 마 (e') 음이아래핵음으로중심음과같은역 5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할을한다. ( 계명으로보면 미 솔 라 도 레 로나타나지만, 미 음계라고부르지않는다. 우리나라음이름마, 곧서양의 e' 음이아래핵음으로민요음계에서중심음으로역할을하지만, 미 (Mi) 음계라고부를경우는계명의 미 는언제나으뜸음인 도 (Do) 를전제로한 미 음밖에되지않기때문에 미 음계라부르지않는다. 그것은음조직한 7음음계의각각의음들에명칭을붙힌 음이름 ( 음명 ) 을우리나라는 다 라 마 바 사 가 나 로, 영어음이름은 C D E F G A B 로채용하고있고, 이음이름에서조성에따라 도 레 미 파 솔 라 시 라는계이름 ( 계명 ) 으로노래하는음악용어사용법을채용하고있기때문이다. 곧, 이태리나프랑스의음이름인 Do(Ut) Re(Ré) Mi Fa Sol La Si 를대신채용하여사용할수있지만, 음악용어사용하기에혼란을가져온다. 우리나라 내림가 의음이름은영어로 A ' 또는 A Flat 이지만, 이태리는 La bemolle, La bémol 로읽는다. 이태리나프랑스의음이름을경우에따라 La 단조 나 라단조 라고부를경우우리나라 다라마바사가나 의 라 와혼동되고, 또 La 와같이음명과계명을구분하여사용하는우리나라에서 가단조, A minor 라는용어사용법이혼란을가져오는등의여러가지이유에서 미음계 라고부르지않는다. ) 이역할은아래테트라코드의윗핵음이자윗테트라코드의아래핵음으로 연결 시키는가 (a') 음이부차핵음으로역할을하면서사 (g') 로흘러내려가거나, 위의다 (c'') 음으로올라가는형태로많이나타난다. 곧, 다음 < 악보 6> 과같은형태로민요음계의선율들이진행한다. < 악보 6> 민요음계로만들어진선율진행들 악보를계명으로따라불러보면 미라라라솔, 미라라라라솔, 라도라솔, 라솔미미라미미. 이정도까지만불러보아도언제가어디에선가많이불러본노래가락같지아니한가? 어떤노래가떠오르는가? 우리들이어렸을때불렀던그동요가락이아닌가. 쎄쎄쎄, 여우야여우야, 두껍아두껍아 등의노래가락이쉽게나오며 아침바람찬바람이 ~ 랄지 여우야여우야뭐하니 ~ 랄지 두껍아두껍아헌집줄게새집다오 ~ 등의노래가사가떠올려지는그노래들이다. 실제로 여우야여우야 동요는 한고개넘어가두고개넘어가 / 여우야여우야뭐하니 / 잠잔다 / 잠꾸러기 / 세수한다 / 멋쟁이 / 밥먹는다 / 무슨반찬 ~ 이라는식의가사로서문답형식의부르는이동요는바로일본동요이다. 일본의에도 ( 江戶, 1603~1867) 시대부터불려진일본의놀이노래 여우야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57
여우야 의원제목은 여우의창 ( きつねの窓 ) 이었음은음악학자홍양자가 민족음악의이해 제5 권 ( 민족음악연구회, 1996, 75-156 쪽 ) 에서밝힌바있다. 이밖에도 묵찌빠 라는 가위바위보 가일본의 쟌켄폰 ( 가위바위보 ( 쟌켄 ) 할때구령 ( 쟌케폰じゃんけん ぽん ) 과같다든지, 숨박꼭질할사람 아침바람 ( 쎄쎄쎄 ) 꼬마야꼬마야 ( 꼬마야꼬마야 / 뒤로돌아라 ) 꼭꼭숨어라 ( 꼭꼭숨어라 / 머리카락보인다 ) 동아따기노래 ( 동아사러왔다 / 씨사러왔다 ) 우리집에왜왔니 ( 우리집에왜왔니 / 왜왔니왜왔니 ) 등도마찬가지로일본동요이다. 이놀이노래들은모두일제강점하에한국에서유행하기훨씬이전부터일본현지에서불려진일본동요이다. 1910 년부터한국인들이학교를통하여학습된 기러기 라는 안 ( 雁, 카리, 伊澤修二작곡 ) 이일본민요음계의작품이었다 ( 악보 7참고 ). < 악보 7> 雁伊澤修二작곡 (3) 율음계일본의율 ( 律, 리츠 ) 음계는 < 악보 1> 의일본음악의기본적테트라코드에서율테트라코드인 도레파 가두번쌓아올린음계로, 계명으로읽으면 도레파솔라도 이다. 아래핵음 도 와윗핵음 파 사이가완전4도이고가운데성격음 ( ) 이아래핵음과장2도이고, 윗핵음과는단3도로된율테트라코드가두번쌓아올려만들어진음계이다. 이음계로일본인들은아악 ( 가가쿠 ) 과성명 ( 쇼오묘오, 聲明 ) 등의작품음계로사용하였다. 다음 < 악보 8> 은너무나일본적인정서가물씬풍겨나우리에게전율을느끼게하는그유명한일본국가 ( 國歌 ) 키미가요 ( 君が代 ) 이다. 그 키미가요 ( 君が代 ) 가이율음계로만들어졌다. 천황의대 ( 代 ) 는천대만대로 / 작은돌이큰바위가되어서 / 이끼가낄때까지 ( 君が代はちよにやちよにさざい 5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しのいはほとなりてこけのむすまで ) 가그가사가율음계로선율화되어노래한다. < 악보 8> 일본국가 키미가요 ( 君が代 ) 첫네마디 레도레미 / 솔미레 / 미솔라솔라 / 레시라솔 ~ 앞서 율테트라코드 는 도레파 이었지만, 이율테트라코드를장2도높이면 레미솔 이된다. 이 레미솔 3음렬을두번쌓아올리면 레미솔라시레 라는율음계가이루어지고이음계로된작품이일본국가 키미가요 ( 君が代 ) 이다. 즉, 일본국가는율음계에다 4분의 4박자로이루어진 2박자 (duple) 형태의가락이선율화되었다. 일제강점기모든학교의조회시간마다 국가봉창 이란이름으로, 모든음악회와행사장마다맨처음순서로불렀던 국가봉창 또는 국가제창 등으로이땅에물결치던노래가바로 키미가요 ( 君が代 ) 라는일본국가이다. 이일본국가는 1910 년부터비공식적으로그리고 1914 년조선총독부가발행한 신편창가집 에의식창가의첫번째곡으로불리지면서부터해방이될때까지전한국인들이강제적으로부른일본국가이다. 일제시기학교교육을받은세대들이지금이라도어쩌다이노래를듣기라도하면부동자세를취하려는모습에서일제의식민지역사가얼마나무서운지실감케한다. 율음계로된또다른작품이 착한벗 을뜻하는 선우 ( 善友 ) 이다 ( 악보 9 참고 ). 이노래는 1910 년 5월일본인들이대한제국학부를동원하여펴낸 보통교육창가집 에 선우 ( 善友 ) 로편성시켜한국인들을교육시킨작품이다. 보통교육창가집 을교육받은세대, 그리고일제시기를경험한세대들이교육받은작품이 선우 이다. 원곡이바로일본아악곡 에텐라쿠 ( 越天樂 ) 이다 ( 악보 10). < 악보 9> 보통교육창가집 의 선우 (1910)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59
< 악보 10> 에텐라쿠 ( 越天樂 ) 이아악작품은일본국왕이즉위식을거행할때축하작품으로지금까지연주하고있으며, 1878 년이후부터근대 일본창가 로서 남조오충신 ( 南朝五忠臣 ; 악보 11) 이나 충효 ( 忠と孝 ) 등일본천황에대한충성을교재화시킨작품일정도로일본정신이배인작품이다. 그리고, 애국가 의작곡가안익태가일본식발음인 안에키타이 ( あんえきたい ) 를영어식이름부르기로바꾼 에키타이안 (Ekitai AHN) 이 33살이되던 1938 년에발표한관현악곡 에텐라쿠 (Etenlaku, 越天樂 ) 도그주제가바로이작품이다 ( 악보 12). < 악보 11> 남조 5 충신 6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 악보 12> 에키타이안의 에텐라쿠 (Etenlaku, 越天樂 ) 주제부 (1938) 안익태의공식작품명은 관현악을위한환상곡 에텐라쿠 (Etnelaku, Phantasie für Orchester) 이다. 그러나, 안익태는 1959 년 강천성악 ( 降天聲樂 ) 이란이름으로개작하였어도, 그주제선율은그대로 에텐라쿠 이다. 일본에서는이작품을 1931 년코노에히데마로 ( 近衛秀 ) 가관현악작품으로작곡하여국제적으로알려진 에텐라쿠 ( 越天樂 :Etenraku) 가있고, 또미야기미찌오 ( 宮城道雄 ) 의 에텐라쿠변주곡 ( 越天樂變奏曲 ;1928) 도있는데, 안익태는이들작품에대비되는작품을창작하여스스로역작으로자부하면서유럽전역에서지휘할때마다자주연주된작품이다. 안익태, 그에키타이안은그자신도일본천황국가의본령이자일본인들의혼의음악으로창작하여일본정신을세계화로표상시키려작품활동을전개한작품이바로 에텐라쿠 이다. (4) 미야코부시음계 < 악보 3> 의세번째음계인 미야코부시음계 는한국인들이가장많이영향을받은음계로한국화가되어버린 뽕짝 의음계이다. 원래, 미야코부시 는 도절음계都節音階 의일본식발음으로서그뜻이도회지가락의음계이다. 이용어는시골의가락인이나카부시 ( 田舍節 ) 라는일본식발음의상대적인용어이다. 이용어들은메이지 ( 明治 )-타이쇼오 ( 大正 ) 기간에일본음악사상최초의일본음계론을과학적이론으로확립시킨우에하라로쿠시로오 ( 上原六四郞, 1848~1913) 의음계론에서나온용어이다. 곧, 도시의음악인미야코부시음계 ( 都節音階 ) 와시골의음악인이나카부시 ( 田舍節 ) 음계론이그것이다. 그뒤로일본음계론은여러가지형태로발전하였지만, 미야코부시음계 라는용어는현재에도쓰인다. < 악보 3> 의미야코부시음계가아래핵음 (c') 과성격음 (d ') 사이가반음으로되어있어읽기가불편하므로계명으로옮겨읽으면 미파라시도미 이다. 미파 와 시도 사이가반음인이음계로일본인들은근세에호오가쿠 ( 邦樂 ) 에쓰였다. 호오가쿠는넓은의미로일본음악을총칭하여일본의양악 ( 洋樂 ) 과대칭되는용어를가리키기도하고, 또일본인이작곡한양악을 일본음악 이라고부를때에일본의민족적인음악을 호오가쿠 라고도한다. 때로는일본의전통적인고전음악을 순호오가쿠 ( 純邦樂 ; 일반화된용어가아니다 ), 그리고근대의 호오가쿠 로서특히미야기미찌오 ( 宮城道雄 ) 이일본전통음악에바탕을두고양악기법으로창작활동한 신일본음악 운동의음악을 신호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61
가쿠 ( 新邦樂 ) 라고말하여같은 호오가쿠 에서도구분하기도한다. 대부분 호오가쿠 라는용어는근세의호오가쿠를가리킬때가많은데, 최근엔일본의 양악 에대비하여일본음악전체를 호오가쿠 ( 邦樂 ) 이라는용어로통일되어가고있다. 한편, 1603 년부터 1867 년까지에도 ( 江戶 ) 시대이래발달한소오쿄쿠 ( 箏曲 ) 샤미센 ( 三味線 ) 음악등이 근세호오가쿠 ( 近世邦樂 ) 음악이다. 이때의소오쿄쿠의대표적인작품 로쿠단 ( 六段 ) 이있으며, 18세기에활동한야쯔하시켄교오 ( 八橋校 ) 의이작품이바로 미야코부시음계 와 2박자로되어있다. 또, 같은음계와 2박자로이루어진소오쿄쿠의작품으로야마다켄교오 ( 山田檢校 ) 의 호토토기스 ( 時鳥 ), 미쯔자키켄교오 ( 光崎檢校 ) 의 고단친 ( 五段砧 ) 등이있다. 이밖에 < 악보 3> 의네번째음계인 오키나와음계 가있지만, 주로이음계는일본의오키나와 ( 沖繩 ) 와이마미 ( 唵美 ) 등의여러섬지방에쓰이는음악이므로여기에서는생략한다. (5) 창가와엔카의음계-요나누키음계지금까지우리안에있는작품들이일본의음계인민요음계 율음계 미야코부시음계 오키나와음계로이루어진작품중심으로알아보았다. 일본이근대로나아가면서일본문부성은일본전통음악과서양음악의장점을살린새로운 일본국민음악 으로서 코쿠가쿠 곧 국악 ( 國樂 ) 을일으킬목적으로확립한대표적근대음계가 요나누키장음계 와 요나누키단음계 이다. 일본은근대에서양음계의음계명 c d e f g a b c 를 히 후 미 요 이 무 나 히 ( ヒフ ミ ヨ イ ム ナ ヒ ) 라고불렀다. 이이름에서네번째음 요 ( ヨ ) 와일곱번째음 나 ( ナ ) 를뺀 ( 拔ぎ ; 누키 ) 5음음계를일본전통음계와연결시키며동요와창가작품들을만들었다. 계명으로 Fa' 와 Sol' 을뺀 5음음계는 도레미솔라 가남게되었으니곧 요나누키장음계 ( ヨナ拔ぎ長音階 ) 가되었다. 한편, 요나누키단음계는양악의단음계 a b c d e f g a' 또는계명으로 라시도레미솔라 에서역시네번째와일곱번째음을뺀 ( 拔ぎ ) 단음계라가되었다. 다음 < 악보 13> 은요나누키장음계 (a) 와요나누키단음계 (b) 이다. < 악보 13-a> 요나누키장음계 < 악보 13-b> 요나누키단음계 음명 ヒ フ ミ ヨ イ ム ナ ヒ 히 라 미 요 이 무 나 히 숫자보 1 2 3 4 5 6 7 8 계명 do re mi fa sol la si do 6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요나누키음계 를또다른용어로 네번째와일곱번째음을뺀음계 이기에 시시찌누키음계 ( 四七き音階 ) 라고도한다. 그리고, 요나누키단음계또한 니로누키음계 나 니로누키단음계 라고도한다. 이것은단음계 라시도레미파솔라 에서네번째음요 ( ヨ ) 와일곱번째음 나 ( ナ ) 를뺀 ( き ) 음계이지만, 동시에요나누키음계의중심음인첫번째음 도 에서보면두번째 니 ( ニ ) 와여섯번째 로 ( ロ ) 를뺀 ( き ) 음계이므로 니로누키음계 라하였다 ( 이들요나누키장음계는일본아악의 료선법呂旋法 에, 요나누키단음계는전통속악의 요오선법陽旋法 에해당되는음계이다. 한편일본전통속악의 인선법陰旋法 은계명으로 미파라시레미 미도시라파미 로구성되어미야코부시음계풍의되었다 ). 주목할점은일본이근대화하면서요나누키장음계는주로일본쇼오카, 곧창가 ( 唱歌 ) 와군가 ( 軍歌 ) 로, 그리고요나누키단음계는주로일본대중음악인엔카 ( 演歌 ) 로, 19세기말에정착시켜이음악들을 1910 년한국을강점하면서학교교육과사회교육으로일반화시킨점이다. 1) 요나누키장음계서양음악의계명 도레미파솔라시도 중네번째 파 ( 요 ; ヨ ; 4) 와 시 ( 나 ; ナ ;7) 를뺀 ( 拔ぎ ) 요나누키장음계 ( ヨナ拔ぎ長音階 ) 는청일전쟁직후일본군인들중심으로영향을미치더니, 통감부시기인 1907 년에대한제국학부 ( 교육부 ) 가한성사범학교교수로초청한일본음악인고이데라이키치 ( 小出雷吉 ) 가이음계에의한일본창가로교원양성을하였다. 그리고, 일본창가집으로학부가 1910 년에개발한 보통교육창가집 에서영향을미친고이데와이후의조선총독부의음악교육을통해서한국에서가장심대한영향을미친음계가바로요나누키음계이다. 학교창가, ( 일본 ) 애국가요, 시국가요, 군가등을비롯하여일본인과한국인들이창작한창가와동요대부분이요나누키장음계로이루어진음계이었으며, 한국인들이이후자연스럽게음계감각으로자리잡은음계이기도하다. 보통교육창가집 은외국곡다섯곡을제외한 22곡전부가일본노래들을번역한작품들이다. 열여덟번째곡으로그유명한노래 학도가 가이를대변한다. 청산속에묻힌옥도 / 강아야만광채나네 ~ 은물론계명으로불러도 도도레미미레도도라솔 ~/ 라솔라도미미레도레미 ~ 로불리워지는 학도가. 흘러간노래지만심장을벅차게뛰게하는애국계몽학도들의우렁찬기상이떠오르는이 학도가 야말로국권을회복하려는애국학도들의상징적인노래이다. 그러나이노래야말로일본요나누키장음계와 2박자인 4분의 2박자로이루어진전형적인일본노래이다. 우리가우리노래로속은이유는가사가우리말인데다애국계몽기와일제강점기를지내며구국의학도를표상했기때문에속은것이다. 이노래는일본궁정음악가오오노우메와카 ( 多梅稚 ) 가 1900년에작곡한 철도창가 이다. 그 철도창가 를 1910 년학부가 보통교육창가집 으로번역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63
하여 학도가 로게재되면서부터이노래는광범위하게번져나가국내외로온갖학도가의원형이 되어변형의학도가를양산해냈다. 다음 < 악보 14> 가일본의철도창가의번악곡인 학도가 이다. < 악보 14> 학도가 요나누키장음계에 2박자형태인 4분의 2박자인 학도가 는 16째마디가끝날때까지계명으로네번째음인 Fa와일곱번째음인 Si가결코한번도나오지않는말그대로 도레미솔라 로된음계이다. 이노래 학도가 가상징하듯한국인에게 1910 년부터어떻게일본식음계감과박자감이 45년동안강제화되고이후자리잡게되었는지를반증하는대표적인노래이다. 일제강점기학교교육으로배운일본인들의작품 기원절 ( 紀元節 ) 사쿠라이의결별 ( 櫻井の訣別 ) 산보창가 ( 散步唱歌 ) 니노미야킨지로오 ( 二宮金次郞 ) 아침이다힘있게 ( 朝だ元氣で ) 적은수만 ( 敵は幾萬 ) 부인종군가 ( 婦人從軍歌 ) 용감한수병 ( 勇敢なる水兵 ) 군함행진곡 ( 軍艦行進曲 ) 내가해군 ( 我が海軍 ) 일본해군 ( 日本海軍 ) 일본육군 ( 日本陸軍 ) 진군의노래 ( 進軍の歌 ) 히노마루행진곡 ( 日の丸行進曲 ) 애마진군가 ( 愛馬進軍歌 ) 태평양행진곡 ( 太平洋行進曲 ) 하늘의용사 ( 空の勇士 ) 대동아결전의노래 ( 大東亞決戰の歌 ) 기원2600 년 ( 紀元二千六百年 ) 등모두가요나누키장음계에대부분 2박자풍의노래들이다. 날저무는하늘에별이삼형제 라는방정환작사로부르던 형제별 도일본인이창작한요나누키작품이다. 그뿐만이아니다. 홍난파의 가을 고향하늘 고향의봄 나뭇잎 노래 달맞이 병정나팔 삼월삼질 싸리비 시내물 엄마도아빠도 엄마잠 짚신짝 초생달 퐁당퐁당 햇볕은쨍쨍 허수아비 등을비롯한상당수의동요작품도요나누키장음계에 2박자풍의동요들이다. 또, 윤극영작곡의 고드름 꼬부랑할머니 옥토끼노래 기찻길옆 길조심 동대문놀이 바위와샘물 설날 외나무다리 잠바람꿈바람 등도마찬가지이다. 이밖에권태호의 눈꽃새 엄마야누나야 한개두개세개, 김성태의 강아지래요 봄꽃 엄마아빠, 박태준의 귀머거리할아버지 누가누가이기나 기차 가을밤 당나귀 맴맴 밤한톨이떽떼굴 별별무슨별 빨간열매 뻐꾸기와밤벌레 어린이노래 오뚝이 저녁종, 박태현의 달따러가자, 유경손의 웃는얼굴, 임동혁의 눈굴리기 샘, 현제명의 저녁놀 등을비롯한작품들이모두이음계와 2박자풍의동요들이다. 자연히, 해방후에부르기시작한 학교종이땡땡땡어서모이자 라는 학교종 도마찬가지이다. 그리고, 1943 년부터국민총력조선연맹이주최하고조선음악협회가후원한 국민가창운동 의 국 6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민개창가곡 74곡대부분이일본작곡가들이요나누키장음계에 2박자형태로작곡한작품들이었다. 이작품들은일본의대정익찬회 ( 大政翼贊會 ) 가선정한일본 국민개창가곡 들이기도했다. 또, 조선총독부와그기관들이선정한작품들, 김정의 ( 金正義 ) 작사와김용환 ( 金龍煥 ) 작곡으로반도개병의노래로선정한 우리는제국군인, 타나카 ( 田中初夫 ) 가작사하고오오바 ( 大場勇之助 ) 가작곡한미영격멸의노래로선정한 승리한일본 ( 勝つたぞ日本 ), 또조선문예회를통하여발표한애국가요로서발표한홍난파 ( 洪蘭坡 ) 의 공군의노래 ( 衫本長夫작사 ) 정의의개가 ( 최남선작사 ), 현제명 ( 玄濟明 ) 의 장성의파수 ( 최남선작사 ) 와 전송 ( お見送り, 土生よねさく작사 ), 이면상 ( 李冕相 ) 의 전장의가을 ( 上田忠男작사 ) 총후의남 ( 최남선작사 ) 정의의사여 ( 김억작사 ) 종군간호부의노래 ( 김억작사 ), 이종태 ( 李鍾泰 ) 의 총후 ( 德田三十四작사 ) 김소좌를생각함 ( 최남선작사 ) 방호단가 ( 최남선작사 ) 등대부분도요나누키장음계에다 2박자풍으로창작한작품들이다. 또, 요나누키장음계에 2박자형태로창작한김성태의 군국의모 ( 모윤숙작사 ), 박태준작곡의 지원병장행가 ( 이광수작사 ), 윤두선의 일본정신, 이면상작곡의 정의의사여 ( 김억작사, 임동호노래 ) 와 총후의남 ( 최남선작사, 임동호노래 ), 임동혁의 미국은적국되고 와 애국일의노래 ( 춘원작사 ), 현제명의 후지산을바라보며, 홍난파의 희망의아츰 ( 이광수작사 ) 등이창작되어보급되었다. 또, 일제가전시체제를강화하고대동아공영권을건설하려고조선을대륙의병참기지로구축하여생산확충과자원개발그리고근로동원책을강구하는한편, 일본천황의신민화로서황민화정책을획책하며만들어진시국가요또는애국가요, 또는군가들의작품들이바로일본의요나누키음계와 2박자풍의리듬으로이루어졌었다. 신극으로작곡된김해송의 僕等のうた ( 우리들의노래, 전14경, 小林五郞연출, 김해송작 ) 등수많은작품들이이시간공연되었다. 이처럼, 요나누키장음계와 2박자 (4분의 2박자, 또는 4분의 4박자, 또는 4분의 3박자등 ) 로창작한작품들은유치원과학교그리고조선총독부와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을통한사회일반에이르기까지동요에서창가는물론국민개창곡으로때로는애국가요로서시국가요로서군가로서일본의대동아공영권건설의중심적인노래로불렀다. 2) 요나누키단음계-뽕짝과 독도는우리땅 요나누키단음계 ( ヨナ拔き短音階 ; 四七拔き短音階 ) 는서양의단음계에서계명으로네번째 ( 四 ) 음인 레 와일곱번째 ( 七 ) 음인 솔 을뺀 ( 拔き ) 단음계라하여붙혀진용어이다. 한옥타브 라 시 도 레 미 파 솔 라 에서 레 ' 와 솔 을빼고남는음이모두다섯음인 라 시 도 미 파 이다. 이음계는일본의전통음계인 미 파 라 시 도 미 의미야코부시 ( 都節 ) 음계와그시작하는중심음이다를뿐모두같은공통음을가지고있기때문에때로는미야코부시음계로창작하기도한다. 이 라시도미파라 내에서어떻게진행하더라도, 곧 라시도미파라, 라시도미파미, 라도시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65
도미도시라시, 라라 ( ) 파미도시라 등으로가락이흐르면벌써구성진가락이넘쳐난다. 일본의엔카 ( 演歌 ) 이다. 일본은 1860 년대자유민권사상이전개될때신문을읽고그내용들을소리로서읽어전달하면서기능적으로 부시 ( 節 ) 가되었다. 이부시가엔카 ( 演歌 ) 를발전시켰다. 1880 년대후반이되어거리에서정치를비판하고열광적인민중의환영을받았던엔카의전달자들은민권론자들이었다. 대중들은이들의노래를 소오시부시 ( 壯士節 ) 이라불렀다 ( 사진 1 참고 ). 이시기에나온주요엔카중하나가 카이료오부시 ( 改良節 ) 이다 ( 악보 15 참고 ). 야만의꿈에서깨어나자유의나팔로일어나개화의아침해가빛날수있도록개량하세라는내용을가진 카이료오부 < 사진 1> 1891년동경 ( 東京 ) 의청년실업사가발행한소오시부시의엔카인 유쾌무지 ( 愉快武志 ) 표지이다. 시 ( 악보 15 참고 ) 는 1889 년에소오시 ( 壯士 ) 의단체인청년구락부의 창립자久田鬼石작으로알려졌다 ( 添田啞蟬坊, 流行歌明治大正史, 東京 : 刀水書房, 1982, 70 쪽참고 ). 이노래는요나누키장음계에 2 박자 (duple time) 형태의 4 분의 4 박 자로서엔카의전형적인한박자 ( 또는반박자 ) 쉬었다노래가들어가는리듬처리로되어있다는점 에서오늘날의뽕짝인엔카와다르지않다. < 악보 15> 1889 년작 카이료오부시 ( 改良節 ) 6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이후, 이들풍속적인소오시 ( 壯士 ) 시대가지나엔카 ( 演歌 ) 에종사하는쇼세이 ( 書生 ) 시대가되면서이시기의엔카를 쇼세이부시 ( 書生節 ) 이라고도불렀다. 자연히대중들의주목을받은이분야에엔카 ( 演歌 ) 를전문으로하는공간과그직업인이사회적으로요청되었다. 엔카오쿠 ( 演歌屋 ) 라는공간이생기고직업인으로서엔카시 ( 演歌師 ) 가생겼다. 그리고러일전쟁이후부터는그가사도자유민권사상에서남녀사랑가가주제가되는엔카 ( 艶歌 ) 가노래중심이되었으며, 1910 년직전부터는엔카시가연주하는악기가전통적인악기에서점차바이올린등양악기가바뀌어갔다. 1910 년대이후특히 1918 년에일본농촌이황폐해져쌀공급이수요를따르지못하고상인들이매점매석으로쌀값이폭등하는 쌀소동 이일어나자시정 ( 市井 ) 밑바닥은그애환을담은엔카가유행하였으니, 바로요나누키단음계에의한 2박자, 그리고반박자쉬었다가노래하는전형적인노래들이나왔다. 다음 < 악보 16> 이그노래이다. < 악보 16> 아아건널목지기 ( あゝ踏切番 ) 말하자면, 요나누키단음계와미야코부시음계, 또는요나누키장음계나이나카부시음계에다 2박자풍의엔카가 1910 년이전에는없었다. 한국이이해부터일제강점하가되면서학교와사회를통하여보급된이들엔카를경험하고, 그세대들이 30년이지난 1930 년대말부터한국인들은또하나의엔카인 뽕짝 에그음계감이나장단감에젖어유행시키기에이르렀다. 뽕짝 이 1910 년대에유행할수없었던것은아직뽕짝의사회적기반이갖추어지지않았기때문일것이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67
1910 년대에윤백남 ( 尹白南 ) 과이기세 ( 李基世 ) 가주도한극단이 1916 년의신극 ( 부활 ) 을공연하면서주제가로부르던 카츄샤의노래 ( 요나누키장음계와 4분의 2박자 ) 도나카야마신페이 ( 中山晉平 ) 가작곡한일본엔카로서, 이노래가한때유행하기도하였지만, 일반적이지못했다. 일본에서엔카는 1910 년대가절정기이었지만, 한국은식민지교육과사회적기반을형성한 1930 년대가되어서야엔카류뽕짝이유행한다. 이시기는식민지강점하에서도넌세스시대로센티멘털리즘의전성기인데다일본엔카의대부인코가마사오 ( 古賀政男 ) 의시대이자, 또한최초의직업가수인채규엽시대이기도했다. 일본풍을 10년간도아니고 30년간경험한세대들은그뽕짝이식민지시대의청춘의노래이었고, 또삶의노래가되었다. 그래서, 요나누키단음계에 2박자풍의대표적인뽕짝은 1927 년의 목포의눈물 ( 손목인작곡, 이난영노래 ) 1927 년의 타향살이 ( 손목인작곡, 고복수노래 ) 1936 년의 짝사랑 ( 손목인작곡, 고복수노래 ) 1936 년의 알뜰한당신 ( 전수린작곡, 황금심노래 ) 1936 년의 눈물젖은두만강 ( 이시우작곡, 김정구노래 ) 1937 년의 대지의항구 ( 이재호작곡, 백년설노래 ) 1940 년의 불효자는웁니다 ( 이재호작곡, 진방남노래 ) 등이그노래들이다. { 또, 요나누키장음계에 2박자풍의대표적뽕짝은 1932 년 낙화유수 ( 김서정작곡, 김연실노래 ) 1934 년의 감격시대 ( 박시춘작곡, 남인수노래 ) 1939 년의 홍도야울지마라 ( 김준영작곡, 김영춘노래 ) 1938 년의 나그네설음 ( 이재호작곡, 백년설노래 ) 1942 년의 꿈꾸는백마강 ( 임근식작곡, 이인권노래 ) 등이있으며, 이노래들또한한시대의대중들을휘어잡은노래들이다.} 요나누키단음계에 2박자풍의노래들은뽕짝뿐만이아니다. 일제의대동아공영권을건설하기위한전시체제와조선의병참기지화, 내선일체를확립하려고일본천황의신민화정책을획책하며만들어진시국가요또는애국가요, 또는군가들의작품들이앞서요나누키장음계와함께요나누키단음계와 2박자풍의리듬으로창작보급되었다. 대표적인노래로김해송작곡의 2천5백만감격 ( 조명암작시, 남인수 이난영노래 ), 박시춘작곡의 혈서지원 ( 조명암작시, 백년설 박향림 남인수노래 ) 과 아들의혈서 ( 조명암작사, 백년설노래 ) 그리고 결사대의안해 ( 조명암작사, 이화자노래 ), 이면상작곡 종군간호부의노래 ( 김억작사, 김안라노래 ), 전기현작곡의 마지막혈시 ( 박영호작사, 남일연노래 ) 와 어머니의기원 ( 新木景祚작사, 차홍련노래 ), 손목인작곡의 총후의기원 ( 이하윤작사, 박세환 정찬주노래 ) 과 보내는위문대 ( 함경진작사, 이해연노래 ), 이재호작곡의 결전태평양 ( 반야월작사, 태성호노래 ) 등이있다. 또, 일본엔카 ( 演歌 ) 의대표적인음악가코가마사오 ( 古賀政男 ) 가작곡하고장세정이부른 지원병의어머니 ( 조명암작시 ) 와또같은작곡자의작품으로이규남이부른 열사의맹서 등도모두요나누키단음계에 2박자로이루어진전형적인엔카의노래들이다. 한편, 위의이노래들에이어해방이되어 일제잔재를청산 하자는운동이있었음에도불구하 6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고, 요나누키단음계에 4분의 2박자등전형적인일본엔카풍의뽕짝작품이미청산된채대중들에게인기를모아갔다. 박시춘이작곡한 신라의달밤 ( 현인노래 ) 과 비내리는고무령 ( 박시춘작곡, 현인노래 ) 에이어져나왔다. 그리고, 1950년대에박시춘의대표적인작품이 굳세여라금순아 ( 현인노래 ) 와 이별의부산정거장 ( 남인수노래 ) 이었다. 그리고이재호작곡의 단장의미아리고개 ( 이해연노래 ) 도 1950년대를장식한노래이다. 1960 년대에비록요나누키장음계의엔카풍뽕짝으로 울고넘는박달재 ( 김교성작곡, 박재홍노래 ) 가있었지만, 이시기대표적인요나누키단음계에 2박자풍의뽕짝은 동백아가씨 이었다. 처음부터이노래는 왜색가요 로지적되어금지곡이되었지만, 정치 1번지의주류들이이노래를불러 금지곡 의평가를무색케했다. 1970 년대의대표적인뽕짝은황선우가작사작곡한 돌아와요부산항에 ( 조용필노래 ) 이었다. 그리고, 1980 년대에 비내리는영동교, 그리고최근장윤정이부른 어머나 나, 박현빈이부른 오빠만믿어 등에이르기까지우리들을휘어잡고있는노래가미야코부시음계로된뽕짝이다. 이름하여 뽕짝 이라기도, 트롯트 (Trot) 라고도, 엔카 ( 演歌 ) 라고도, 가라오케 ( 空オケ ) 라고도부르는이 뽕짝 은일제시대를휘어잡았고, 지금도우리들의가슴을사로잡는노래가되었다. 그노래들이때로는민족의애환을담은가사로, 때로는애틋한사랑가로, 때로는서러운추억의노래로서오늘도노래방에서불리운다. 모두그음악적재료가일본것이라는것을알지라도이미한국화가되었다며마침내부르고마는통한의노래가되었다. 그래서우리가이중적인모습일까? 가사는애국적이지만재료는일본적인, 그래서겉으로는민족을노래하면서속으로는일본풍노래를하고야하는것이아닐까? 바로대표적인노래가 독도는우리땅 ( 악보 17 참고 ) 이다. 가사와달리가락과박자는전형적인일본풍이다. 가사와같이독도는위치 역사 생활등우리들의자랑스러운땅이고역사를가진땅이다. 그런데, 왜하필이면일본풍에곡을지었을까. 계명으로불러보자. 미미미미미미 / 미미미도시라 / 라라라라라라 / 라라솔파미 미미미미미미 / 미미미도시라 / 시시도미도시 / 라 - - - 위계명처럼앞의네마디가뒤에서도비슷하게반복하는 (a+a') 노래인데다길이도여덟 (8) 마디로 한도막형식, 그리고 4 분의 4 박자이어서가사를가사대로담아낼수있어서누구나쉽게부를수있 는노래임에틀림없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69
< 악보 17> 그러나중심음구조가 미 라 이고, 또 시 미 인일본의미야코부시테트라코드의아래핵음과위핵음이두번쌓아반복되고있다. 또, 미 라 구조에서거꾸로 솔 을스쳐내려가는음을제외하고는 라파미 와일곱째마디의 미도시 로앞서의미야코부시 3음렬의아래핵음과위핵음사이의성격음이정확하게들어있는미야코부시테트라코드 3음렬이두번반복된미야코부시음계이다. 다만, 처음두마디와끝나는두마디가가단조 (a minor) 의음계인 라시도미파라 속에서진행하고있으므로비록 미야코부시음계 의공통음을가졌을지라도전체적으로요나누키단음계이다. 더욱이, 박자는일본의박자형태 2박자 (duple time) 인 4분의 4박자이다. 곧, 이노래는음계감이나박자감이전형적인일본노래이다. 2. 일본박자와운율 한국과다른형태를가진일본박자분석하기에앞서먼저 박자 와관련된용어들을정리하려고한다. 한국과극동아시아, 한국과서양의박자를비교하여한국음악의정체성을확립하기위해서도풀어가야할내용이다. 박자 ( 拍子, metre, meter, time, measure, Takt) 란 박 ( 拍 ) 이연속적으로움직이면서일정한주기가생길때, 그주기를말한다. 예컨대, 4분음표한박씩걸어가는사람이계속걸으면서왼발과오른발과같은주기가생기면그 왼발 (1박) 오른발 (1박), 왼발오른발 과같이 2박씩하나의주기가생기면 2박자가된다. 또, 그걷는사람이이번에는 1박씩 왼발오른발뛰고, 왼발오른발뛰고 와 7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같이 3박이하나의주기를만들어가면 3박자이다. 알고보면, 박자는일정한수의박이모여서음악의시간단위를형성하고, 강박과약박이규칙적으로반복되며, 악센트가주기적으로진행되어마디를구분시킨다. 곧, 한주기를악보에표시할때는세로줄을긋고, 그어진한주기를한마디로부른다. 또, 악보처음에분자와분모형태로 박자기호 를적는다. 악보에서비록가로줄을표시하지는않지만, 가로줄위에있는분자는한주기 ( 한마디 ) 박의수를가리키는데비하여, 가로줄아래에있는분모는 1박에셈하는음표의종류를말한다. 4분의 2박자에서분자의 2박자는한마디에 1박이둘이고, 4분의 에해당하는분모는그 1박씩셈하는음표의종류가바로 4분음표를가리킨다. 곧, 4분음표 ( 분모 ) 가한주기 ( 한마디 ) 에 2개가있다는박자기호가 4분의 2박자이다. 박자의종류 (time-species, Taktart) 는한마디안에포함된단위음표 (1박으로셈하는음표 ) 의수에의하여정해진다. 박자종류의구별은보통분자의수자 ( 數字 ) 로한다. 곧, 박자분류는짝수박자 (gerader Takt, 우수박자偶數拍子 ) 와홀수박자 (ungerader Takt, 기수박자奇數拍子 ), 그렇지않으면단순박자 (simple time) 와복합박자 (compound time) 와혼합박자 (added time) 등으로구분한다. 영미 ( 英美 ) 분류방식은단순박자 ( 소수素數의박자인 2 3 5 7 박자등모두 ) 와복합박자 (3의배수로서 6 9 12 박자 ), 그리고보통박자로분류한다. 보통박자는 2의배수나 3의배수가아닌박자중실제상사용이드문박자를제외한 4박자로서, 특히 4분의 4박자를가리킨다. 독일방식은영미의분류방식과달리짝수박자와홀수박자로구분한다. 짝수박자는 2박자계로단위박이 2개씩나눌수있는박자이고, 홀수박자는 3박자계로서단위박이 3 개씩나눌수있는박자이다. 일본은독일의박자분류는물론영미식을혼합한형태로분류한다. 곧단순박자와복합박자그리고혼합박자와같이세종류로구분한다. 단순박자는모든박자의기초로서 2박자와 3박자그리고 4박자를포함한다. 복합박자는박자의각한박이세개로나뉘는형태로서 6박자, 9박자, 12박자등을포함한다. 혼합박자는 2박자와 3박자의단순박자가혼합된박자로서 5박자와 7박자등이비교적으로많이쓰이고있다. 5박자인경우 2+3 또는 3+2로, 7박자는 3+4 또는 3+2+2 또는이것의앞뒤를바꾸는형을모두포함되어있다. 단순박자는 1박으로셈하는음표의종류에관계없이모든 2박자와 3박자그리고 4박자를단순박자라한다. 2박자에서 2분의 2박자는 2분음표 1박이두개로서하나둘로한마디안에주기를이루고있고, 4분의 2박자는 4분음표 1박이한마디안에두개로서역시하나둘로한주기를, 8분의 2 박자는 8분음표 1박이한마디안에서 2개로역시하나둘이라는주기를이루고있다. 3박자중 4분의 3박자는 4분음표 1박이한마디안에서세개로하나 둘 셋이라는주기를이루고있다. 4박자중 4분의 4박자는 4분음표 1박이한마디안에서 4개가있고, 하나 둘 셋 넷이라는주기를이루고있다. 이단순박자들은종족음악학또는독일식에분류하는 2박자 (duple) 이다. 그것은모든종류의단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71
순박자가 하나 둘 로 (2박자), 하나 둘 셋 으로 (3박자), 그리고 하나 둘 셋 넷 (4박자 ) 으로각각한마디안에서주기를이루고있을뿐하나의단위박들이 2개씩각각나뉘어지으므로 2박자이다. 또일본에서분류하는복합박자는같은종류의단순박자가몇개씩조합된박자로서, 6박자와 9 박자그리고 12박자로그종류를나눈다. 6박자는같은종류의 3박자를 2개씩조합한형태로, 4분의 6박자는 4분음표세개인 3박자를두개씩조합하였기때문에한마디안에서 하나 둘 셋넷 다섯 여섯 을이룬박자이다. 또, 8분의 6박자도마찬가지이다 ( 다만, 8분의 6박자는한마디안에포함된음표의길이가 4분의 4박자와같지만, 악센트를다루는방식이다르다 ). 9박자는 8분의 9박자로서같은종류의 3박자가 3개조합된형태 (3+3+3) 의박자이다 ( 경우에따라셋잇단음표세개를조합한 4분의 3박자와같은꼴로나타난다 ). 12박자는같은종류의 3박자가네개를조합한박자 (3+3+3+3) 이다 (4분의 4박자에서셋잇단음표를네개조합한꼴로나타낼수있다 ). 이들복합박자는종족음악학또는독일에서분류하는방식으로보면 3박자 (triple) 이다. 그것은모든종류의복합박자들이 3박자가두개씩조합 (6박자) 하느냐, 세개씩조합하느냐 (9박자), 또는네개씩 (12박자 ) 에따라구분될뿐, 3박자가기본이기때문이다. 한국국악계에선 3분박으로부른다. 다만 12박자인 8분의 12박자는서양이한마디안에서 3박자네개가 강 약 중강 약 으로악센트주기가주어지는데비하여한국은다르게나타난다. 한국은 1 2 3+4 5 6+7 8 9+10 11 12 의 8분의 12박자중 1 이강, 4가중강, 7이중강, 그리고 9가강, 10이중강 으로나타나결국 강 약 약 + 중강 약 약 + 중강 약 강 + 중강 약 약 으로움직인다. 혼합박자는다른종류의단순박자가몇개씩조합된박자를혼합박자라한다. 8분의 5박자는 8분음표세개와두개와결합한 1 2 3+4 5 이거나두개와세개가결합한 1 2+3 4 5 의박자이다. 4분의 5박자도마찬가지이다. 이처럼 3박자와 2박자또는 2박자와 3박자가조합하여 5박을단위로삼은박자가 5박자이다. 8분의 7박자는 1 2+3 4+5 6 7 이거나 1 2 3+4 5+6 7 의형태로결합한박자로서 4분의 7박자도마찬가지로결합하여단위를이룬다. 곧 4박자와 3박자또는 3박자와 4박자가결합한박자이다. 5박자는러시아나헝가리의민악에서많이나타나지만, 한국전통음악의엇모리장단으로나타나는박자형태이다. 이처럼, 일본박자분류는단순박자와복합박자그리고혼합박자와구분하지만, 이구분법에따르면일본음악들은대부분단순박자 ( 종족음악학의 2박자 ) 로나타나고, 한국은복합박자 ( 종족음악학의 3박자 ) 가중심적이다. 일본음악중카부키 ( 歌舞伎 ) 무용을비롯하여노래와샤미센 ( 三味線 ) 등과결합하여발달한나가우타 ( 長唄 ) 중 무스메도조죠오지 ( 娘道成寺 ) 와 에치고지시 ( 越後獅子 ) 등을비롯하여소오쿄쿠 ( 箏曲 ) 중에서기악곡의단모노 ( 段物 ) 작품인 로쿠단 ( 六段 ) 가 미다레 ( みだれ ) 등이모두단순박자의 2박자로이루어진작품들이다. 특히, 일본이근대일본국민음악을일으키려발전시킨쇼오카 ( 唱歌 ) 와온가쿠 ( 音樂 ) 의대부분이단순박자 2박자와 4박자가압도적으로이루어졌다. 이것은종족 7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음악학의박자분류인 2박자 (duple) 에해당되는박자들이다. 주목할점은이들의단순박자 ( 또는 duple 로서 2박자 ) 들에서일본인들의전형적인박자감은물론시 ( 詩 ) 의리듬을총징하는운율감이형성되었다는점이다. 일본인들의단순박자형태의 2박자 ( 강 약 ) 나 4박자 ( 강 약 중강 ) 감 ( 感 ), 곧종족음악학의분류방식인 2박자 (duple; 한마디한에단위박을이루는한박이두개씩나누어지는 4분의 2박자, 4분의 3박자, 4분의 4박자, 또는 8분의 2박자 8분의 3박자 8분의 4박자, 또는 2분의 2박자 2분의 3박자 2분의 4박자등 ) 형태에서가사가붙여지는시의리듬이생겨났기때문에그운율감또한같은형태로발전해왔다. 통상, 운율의갈래는외형률과내재율로한다. 외형율은시어 ( 詩語 ) 의겉모습에서일정한규칙에따라생기는운율로대개정형시에서찾아볼수있는갈래이다. 내재율은겉모습으로드러나지않는시의내면에흐르며일정한규칙이없이자유롭게생기는운율로서한외형률이나내재율은음수율 음위율 음성율 음보등으로각각나뉘어진다. 일본의외형율로서음수율 ( 音數律 ) 은가사 ( 詩 ) 의글자수나가사행의수가일정한규칙을가진운율이다. 또, 내재율로서음수율은음절의수가규칙적으로반복하여이루어진운율이다. 일본음수율의대표적인예가 759년에편찬한 만요슈 ( 萬葉集 ) 의와카 ( 和歌 ) 이다. 현존하는일본가집 ( 歌集 ) 으로는가장오래된이 만요슈 는조카 ( 長歌 ) 와단카 ( 短歌 ) 등약 4,500 여수의와카가실려있다. 일본고유의정형시가된이와카는현재까지그특징이면면히계승되어오고있다. 만요슈 의와카는음수율 5.7 이기본단위이다. 이기본단위를두원칙에의하여시형 ( 詩型 ) 이성립된다. 곧, 기본단위를여러번되풀이하거나또는마지막에 7음구 ( 音句 ) 을첨가하는두원칙이그것이다. 일본어는항상 2음 ( 音 ) 을단위로성립되고, 이기준으로발음되어, 이 2음이발화 ( 發話 ) 의최소단위가된다. 이 2음이반복되어문 ( 文 ) 이전개되어, 또다시 4음이되어 2 2 의내부구조를갖는것이일본어의리듬기초이다. 다음그림과같은형태와용어가주어진다. < 표 1> 와카의句 ( 박절 ) 의구조 1 音 1 音 1 音 1 音 1 音 1 音 1 音 1 音 구 ( 句 ) 반구 ( 半句 ) 율박 ( 律拍 ) 음 ( 音 ) 음수형태 5( 初句 ) 7( 제 2 구 ) 5( 제 3 구 ) 가미노쿠 ( 上の句 )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73
와카한수의구조 7( 제 4 구 ) 7( 結句 ) 시모노쿠 ( 下の句 ) 위표에서일본어는 1음씩 2개모인 2음, 그 2음이하나의율박 ( 律拍 ) 이기준이다. 그리고이 2음이반복되어 4음이만들어지고, 또 4음이반복되어 8음이만들어지면서정형적인리듬이생겨난다. 곧, 8음은네개의율박으로, 네개의율박은 2개의반구 ( 전반구와후반구 ) 로, 2개의반구는하나의구 ( 句 ) 가되면서일본어율문 ( 律文 ) 의율격이성립된다. 와카의형식은하나의율박네개가다섯번반복되는 4 4 4 4 4 를기본으로삼고, 각각의율박에음수 ( 音數 ) 가 5 7 5 7 7 로나타나는기본적인시형 ( 詩形 ) 을가진형식이다. 각각의구는모두 8음을가졌지만, 그 8음을다채우지못하고쉬게된다. 초구 ( 初句 ) 는 5음과 3음의쉼이, 제2구는 7음과하나의쉼, 제3구는 5음과 3음의쉼, 제4구는 7음과하나의쉼, 결구는제4 구와같은구조를갖는것이와카한수의형식이다. 자연히, 초구는 5음, 제2구와제3구는 7 5, 그리고제4 5구는 7 7이되었다. 와카한수는 5음으로시작하여 7 5조 ( 七五調 ) 가되고, 이어서 7 7조 ( 七七調 ) 가되어끝나는구조를가졌다. 이러한 7 5조와 7 7조가주축이어서와카의장단감이형성되었다. 일본인들은와카조에서 7 5조탄력감이 7 7조조에서안정적인결말을맺는운율감이생겼으며, 이러한운율감이일본인들의미의식이생겼다. 일본인들의운율감이 만요슈 ( 萬葉集 ) 의와카 ( 和歌 ) 와같은 8음기준에서 7 5조와 7 7조라는음수율의운율감이중심이었다면, 이번에는실제로음악과결합된노래에서나타나는리듬감도알아보아야할것이다. 일본음악중중세후기에나타난노오가쿠 ( 能樂 ) 는성악의우타이 ( 謠 ) 와기악의하야시 ( 子 ) 로구성되었다. 그노오가쿠의사장 ( 詞章 ) 에가락을붙혀서부르는악곡이바로요오쿄쿠 ( 謠曲 ) 이다. 이노오가쿠의성악곡인요오쿄쿠는대사 ( 臺詞 ) 와선율로구성되었다. 요오쿄쿠는그리듬이일자일음을원칙으로하는 카타리모노 ( 語り物 ) 이다. 곧, 요오쿄쿠는박자있는곳과없는곳이있다. 그중에서박자가있는효오시아이 ( 拍子合 ) 는 8박을하나의단위로하는 8박자를기본으로삼고 4 4조의노오가쿠 ( 能樂 ) 사장 ( 詞章 ) 을기준으로한자에한박을맞추는 오오노리 ( 大ノリ ), 8 8조의사장 ( 詞章 ) 을기준으로두자에한박을맞추는 쮸우노리 ( 中ノリ ), 그리고 7 5조의사장 ( 詞章 ) 을기본으로세자리에두박을원칙으로하는 히라노리 ( 平ノリ ) 등세종류가있다. 모두일본전통음계인민요음계에다박자가있는곳은대부분 4분의 4박자가중심이어서그 4 4조나 8 8조그리고 7 5조등은모두 4박자의주기에서나타나고있다. 한국인들이일본운율감에영향을받은것은먼저일본신체시로, 그리고뒤이어일본창가 ( 唱歌 ) 이었다. 신체시 ( 新體詩 ) 란일본신체시와서유럽의근대시에서영향을받은한국근대시의초기형 7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태이다. 이용어는 신시 ( 新詩 ) 신시가 ( 新詩歌 ) 신체시가 ( 新體詩歌 ) 등의용어와함께통용되었다. 이용어들은 구시 ( 舊詩 ) 구시가 ( 舊詩歌 ) 고시가 ( 古詩歌 ) 등의용어와함께애국가나개화가사그리고창가에대한근대시의상징으로또는상대적으로또는새로움의의미로나타내며쓰였다. 흔히한국에서신체시의기점은 1908 년 11월최남선 ( 崔南善 ) 이 소년 ( 少年 ) 잡지에소년에대한기대와희망을표현한 6연의시로발표한 해( 海 ) 에게서소년 ( 少年 ) 에게 를든다. 이신체시를기점으로한국시단은 2008 년에 한국시사 100년 을기념하기도했다. 제1연중에 태산같은높은뫼, 집채같은바위돌이나 / ( 중략 ) 나의큰힘아느냐, 모르느냐호통까지하면서 에서그음수율이 7 5 조의준정형시로나타나고있다. 그리고, 이신체시를발표하기에앞서최남선은같은해 3월에 경부철도가 ( 京釜鐵道歌 ) 를발표하였다. 각절 4행으로총 67절의신체시에다스코틀랜드민요 밀밭사이로 (Comin' Thro' the Rye) 에얹혀부르는이노래는전형적인 7 5조의운율감을가진다. 우렁탸게토하난, 긔뎍소리에 / 남대문을등디고, 나나가서 / 리부는바람의, 형세갓흐니 / 날개가딘새라도, 못르겟네 처럼전체가대부분 7 5조이다. < 표 2> 경부텰도노래 철도로문명개화를동경하고민중들을계몽한이노래가바로일본의영향을받으며신체시풍초기의우리창가모습이다. 실제로, 밀밭사이로 노래는 4분의 2박자이어서 1자1음으로진행하다가네마디째에긴음표로노래하며쉼표를나타나면대부분의가사음수율은 8 5조나 7 5조로나올수밖에없다. 이신체시 ( 新體詩 ) 들은 1880 년대전반기의일본명치시대의야타베료오키찌 ( 矢田部良吉 ), 토야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75
마마사카즈 ( 外山正一 ), 이노우에데쯔지로오 ( 井上哲次郞 ) 등동경대학교수들이중심이되어편찬한 신체시초 ( 新體詩抄 ) 에의해서구체화되었다. 이저서는서양시영향으로일본전통시가와구별되는일본의신체시는일본인들의창작시와테니슨등영미시의번역중심이었지만, 그운율은 7 5조중심으로새로운율격을시험하고있었다. 신체시는이후 신체시가, 명치신체시선 ( 明治新體詩選 ), 신체시학필휴 ( 新體詩學必 ), 신체시선 ( 新體詩選 ) 등과같은명칭으로시가혁신운동이전개되고, 동경유학생중심으로새로운시가운동을모색하고있었다. 더욱이, 1910 년 5월대한제국학부에서일본인관계자들이관공립최초의창가집으로발행한 보통교육창가집 은모두가단순박자로서 2박자 (duple) 노래뿐이었다. 한국인작품은단한작품도없는이창가집은보통학교, 사범학교, 고등학교, 고등여학교, 기타일반제학교용으로편찬한창가집으로 1914 년조선총독부발행의 신편창가집 이나올때까지는물론그이후에도같은성격으로게재되고학습했던, 한국인들에게가장영향력을미친일본창가집의번안창가집이다. 이창가집이비록외국곡이전체 27곡중 6곡이지만, 모두가일본기준으로편집된창가집이다. 스페인민요 접 ( 蝶 ; 나비야 ), 프랑스-미국동요 나아가 ;pchildren go to and fro, 로웰메이슨 (Lowell Mason) 작곡의 갈지라도 ( 찬송가 190장, 샘물과같은보혈은 ), 장자끄루소 (J.J.Rouseau) 작곡의 식송 ( 植松, 주여복을비옵나니 ), 웹스터 (J.P.Webster) 작곡 춘조 ( 春朝, Sweet by and by; 날빛보다더밝은천국 ), 스코틀랜드민요 졸업식 (Auld Lang Syne) 등 6곡이모두 4분의 4박자이지만, 나머지일본인작품 21곡모두는 4분의 2박자이거나 4분의 4박자로서단순박자들이다. 보통교육창가집 이 4분의 2박자나 4분의 4박자라고한다면, 그음수율은 7 5조가중심일수밖에없다. 제6곡 토와구 ( 兎와龜 ; 토끼와거북 ) 는라장조 (D Major) 4분의 2박자요나누키장음계작품으로그음수율은 여보여보거북님말드러보 / 천지간동물중에네발가지고 / 뎌갓치느린거름처음보와라 / 이상타그거름엇지그린가 와같이완벽한 7 5조운율로노래하는것이그것이다. 7 5조에서 7은 4분의 2박자두마디로서음수가 4+4, 3+4, 4+3으로나타나고, 5는역시 4분의 2박자두마디로서음수가 4+1로나타나고있다. 7 5조음수율로된노래가비단 토와구 뿐만이아니다. 1910 년학부의 보통교육창가집 에서제7곡 접 ( 蝶 ), 제8곡 이앙 ( 移秧 ), 제9곡 공부 ( 工夫 ), 제12곡 사절가 ( 四節歌 ), 제13곡 표의 ( 漂衣 ), 제15곡 친의은 ( 親의恩 ), 제22곡 권학가 ( 勸學歌 ), 제23곡 농부가 ( 農夫歌 ), 제24곡 수학여행 ( 修學旅行 ), 제25곡 공덕가 ( 公德歌 ), 제27곡으로서끝곡인 졸업식 도모두그음수율이전형적인 7 5조이다. 이처럼, 일본의요나누키장음계와요나누키단음계를비롯하여일본민요음계등일본음계와단순박자로서 4분의 2박자나 4분의 4박자등 2박자 (duple) 로작곡하면그가사의음수율은 7 5조가중심으로나타나는현상은신체시나 보통교육창가집 뿐만이아니라 1910~1945 년간의동요 교가 창가 군가 애국가요 국민가요 뽕짝등광범위하게나타나며, 홍난파와윤극영을비롯하여일제강점 7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기에활동한대부분의작곡작사가들의작품에서나타난다. < 악보 18> 토와구 1926 년에홍난파가작곡한 고향의봄 ( 이원수작사 ) 은누구나즐겨부르는동요이다. 이노래는다장조, 4분의 4박자로부르지만요나누키장음계로창작한동요이다. 이노래가 4분의 4박자이기도하지만이원수가작사한그음수율은일본의 7 5조와완벽하게같은운율이다. 1절에서 나의살던고향은꽃피는산골 / 복숭아꽃살구꽃아기진달래 / 울긋불긋꽃대궐차리인동네 / 그속에서놀던때가그립습니다 가그가사이다. 울긋불긋꽃대궐차리인동네 에서 7 5조와맞추기위해서도 차린동네 를 차리인동네 로처리한것으로보인다. 윤극영이작사작곡하고 1930 년이정숙이노래한 설날 은 4분의 4박자, 다장조로 보통빠르게 속도로부르는동요이다. 1절에서 까치까치설날은어저께고요 / 우리우리설날은오늘이래요 / 곱고고운댕기도내가들이고 / 새로사온신발도내가신어요 와같이그음수율로만분석하면일본의전통적인 7 5조운율로서완벽하다. 1936 년손목인이작곡 ( 김능인작사 ) 하고 O K레코오드로발매한고복수의황금시대노래인 짝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77
사랑 도그음수율은전형적인일본의 7 5조이다. 이노래가요나누키단음계에 4분의 2박자로된작품이기때문이어서 6음으로나오기도하지만, 전체적으로 7 5조이다. 아 / 으악새슬피우니가을인가요 / 지나친그세월이나를울립니다 / 여울에아롱젖은이즈러진조각달 / 강물도출렁출렁목이멤니다 가그것이다. 그렇다면일본박자와일본운율과다른한국의박자와운율은무엇이일본과다른가? 먼저한국은일본의박자분류방식인영미식과달리독일식박자분류방식으로접근하고있다. 이분류방식은모든민족의분류방식으로서접근하는종족음악학 ( 種族音樂學, Ethnomusicology) 의방식이기도하다. 다음 < 표 3> 이그것이다. < 표 3> 독일식박자분류 7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 표 3> 에서 2박자 (duple, duple time) 는하나의단위박이 2개의박으로나누어지는박자이다. 4 분의 2박자는 4분음표하나가 8분음표 2개로나누어지고그 4분음표가한마디안에두개의 4분음표로서악센트가강약의주기를가지고있다. 8분의 2박자도 8분음표 1박이 16분음표두개로나누어지고그 8분음표가한마디안에서강약의주기로구분되기때문에 2박자이다. 다만그박자들은 2분의 2박자도있고, 4분의 2박자, 8분의 2박자, 16분의 2박자등여러박자가있으나공통적으로모두같은성격으로구분되기때문에 2박자계 로묶여진다. 묶여지는것은 2박자의 3박자계도마찬가지이다. 3박자계의 4분의 3박자도 4분음표 1박이 8분음표 2개로나누어지므로 2박자 (duple) 에해당하지만, 3박자 (triple) 에속하지않는다. 8분의 3박자도 8분음표 1박이 16분음표가 2개로나누어지므로 2 박자 (duple) 이지결코 3박자 (triple) 가아니다. 4분의 3박자이든, 2분의 3박자이든, 8분의 3박자이든, 16분의 3박자이든모두가 2박자 (duple) 에속하는 3박자계 의박자들이다. 2분의 3박자나 4분의 3박자, 또는 8분의 3박자등 3박자계가 2박자 (duple) 이지 3박자 (triple) 가아니므로, 일본이 단순박자 중 강 약 약 이라는 3박자로분류하는것으로이해한다면혼란을가져온다. 이부분이한국에서박자분류정보가혼합되어있어서가장혼동될수있는부분이다. 더욱이한국국악계가위표의 2박자와 3박자의대분류를 2분박과 3분박으로용어를바꾸어사용하기때문에양악계와도그혼동을피할수없게되었다. 곧 4분의 3박자가 2박자 (duple) 인데도, 3박자 ( 일본식으로말하든, 영미식으로말하든 ), 또는 2분박인데도 3박자로말하기때문에그 3박자가 3의배수로구분되는 3박자 (triple) 를가리키는결과가되므로그용어혼란을피할수없게되었다. 대분류 2박자와 3박자를 2분박과 3분박으로바꾸었다면, 그이하의중분류와소분류역시적절한용어화가이루어져야하는데이부분을생략한채용어를사용하기때문에용어혼란이부추겨졌다. 위의 < 표 3> 에의하면한국전통음악이 3박자 (triple) 로서특히 4박자계 (12/4, 12/8, 12/16 등 ) 의 8분의 12박자가가장중심적이다. 점4분음표 가네개로강 약 중강 약 ; 한국은악센트가다르지만 ) 이라는한마디안에서한주기를이루면서그점 4분음표한박이세개로나누어지는박자이어서, 국악계에선 3분박이라했다. 또, 3박자 4박자계로서 8분의 12박자는일본에서복합박자중 12박자에해당한다. 즉, 단순박자중 1박이세개로분할하는형으로서그 3의배수가 2개로결합한 6박자, 3의배수가 3개로결합한 9박자, 그리고 3의배수가 4개로결합한 12박자등을복합박자로분류한다. 다음표들이 3박자로서 8분의 12박자의리듬분할이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79
장고리듬 구음 < 표 4> 한국의 8 분의 12 박자의리듬구조 1 2 3 4 5 6 7 8 9 10 11 12........ 덩덩덩덩 덩덩덩더쿵 불불불어라 차차차조심 경기도충청거리콩나물에술한잔 새나라우리나라금수강산내나라 눈을들어세계를바라보는우리들 선생님우리모두이과수로떠나요 선생님선생님우리들의선생님 한글은우리글이요한국어는우리모국어 악센트 > < 표3> 의일반적인 8분의 12박자, 곧점4분음표네개인.... 가악센트구조로보면 > 로나타나는데비하여, 같은 8분의 12박자인한국의 3박자 (triple) 악센트는 > 로나타나는점에서그특징이있다. 이것은 8분의 12박자에서 12박중아홉번째박이악센트가대부분들어있기때문이다. < 표 4> 에서 12박중첫번째박이분명한굵은색으로세번째와여섯번째그리고열번째박이약간연한굵은색으로표시한데비하여아홉번째박에서첫번째분명한굵은색으로표시한색과다름없는색으로표시한것도이러한장단의특징때문이다. < 표4> 에서또하나는한국의 8분의 12박자중심으로숨을분명하게쉰다. 숨을쉬는것은한국인들이한호흡에따라운동하는단위를장단의기준으로삼았기때문이다. 나와사물간에호흡에따라기 ( 氣 ) 로써운동함으로서사물의움직임을기본으로보았기때문이다. 이러한호흡에따라 3박자의 8분의 12박자, 곧 12박을하나의호흡구간으로삼고이호흡을느리게하면굿거리로, 그리고중중모리, 중모리, 자진모리등으로점점빠르기를조정하는한국의역사적인음악을창출하였다. 이호흡과박자에따라한국인들은일찍부터 구음 ( 口吟, 口音, speech rhythm, mouth sound) 을익혀왔다. 아기들의양손바닥을마주치게하여눈과손을협응케하고발달을촉진시킨 짝짝짝짜꿍 인경우에서모든장단의기초로삼았었다. 따라서이호흡과박자에따라말을모방케하거나즉흥적으로만들어내는언어능력이일찍부터발달하였으므로한국인들의운율은음보율 ( 音步律 ) 이었다. 일본의음수율과달랐다. 또, 흔히들평시조가 4음보격으로민요시가 3음보격으로평가하고있지만, 8분의 12박자의발달 (.... ) 로 4음보격이압도적이다. 8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 표 4> 의구음을보면 경기도충청거리콩나물에술한잔, 또는 새나라우리나라금수강산내나라, 눈을들어세계를바라보는우리들, 선생님선생님우리들의선생님 처럼 3+4 4+3, 3+4 4+3, 4+3 4+3, 3+3 4+3 등으로나타나기때문에굳이음수율로 3.4조, 4.3조, 3.3조등으로말할수도있겠지만, 이것은 12박의호흡에따라노래가사가나타날수있는여러변수의음수율이가능하므로 3.4조, 4.3조, 3.3조등과같이음수율로말하기가어려워진다. 예컨대, 경상도민요인 밀양아리랑 을국문학계일부학자들이 3음보로설명하고있다. 한구절씩 3번에나누어읽을수있기때문이다. 날좀보소 / 날좀보소 / 날좀보소 // 동지섣달 / 꽃본듯이 / 날좀보소 // 가그것이다. 분명 밀양아리랑 을외형율로접근한음보로접근하면 3음보일것이다. 그러나내재율로접근하면한국인들은세마치장단인 밀양아리랑 을 4음보로읽는다. < 표 5> 밀양아리랑 가사붙이기 (8분의 9박자, 세마치 )............ 1 2 3 4 5 6 7 8 9 1 2 3 4 5 6 7 8 9 1 2 3 4 5 6 7 8 9 1 2 3 4 5 6 7 8 9 날 좀 - 보 - - 소 - - 날 좀 - 보 - - 소 - - 날 - - 좀 - - 보 - - 소 - - - - - - - - 동 지 - 섣 - - 달 - - 꽃 본 - 듯 - - - - 이 날 - - 좀 - - 보 - - 소 - - - - - - - - 아 - 리 아 - 리 랑 - - 쓰 - 리 쓰 - 리 랑 - - 아 라 - 리 - 가 났 - - 네 - - - - - - - - 아 - - 리 - - 랑 - - 고 - - 개 - - 로 - - 날 - - 넘 - 겨 주 - - 소 - - - - - - - - < 표5> 는 8분의 9박자를한단위마다굵은선으로표시하고네단위를하나의단락으로삼거나, 한마디안에다시 8분음표세개를묶은점4분음표 (.) 길이마다세로줄을그린것은모두가실제적인가사배치형태를보여주기위해서표시한표이다. 즉, 운율의외형률에서 날좀보소 / 날좀보소 / 날좀보소 // 동지섣달 / 꽃본듯이 / 날좀보소 // 가 3음보이지만, < 표5> 처럼세마치의빠르기로읽는내재율로접근하면 4음보이다. 외형률 3음보로본것은제3음보째 날좀보소 의 소 를앞의제1음보와제2음보와같이셈하였기때문일것이다. 그러나노래에선분명 소 가제4음보째에길게나타나면서숨을쉬며그다음가사로옮겨노래한다. 앞의제1음보와제2음보에서 날좀 을점4분음표안에처리하였지만, 제3음보째에는 날 도 좀 도그리고 보 도각각점4분음표에맞게각각처리함으로서 소 가제4음보째에길게시작하는결과가되었다. 마찬가지로두번째연인제4음보의 소 나, 세번째연인제4음보째에 네, 네번째연인제4음보째의 소 도마찬가지로제4음보째맞추어읽어간다. 물론노래할경우는당연한것이지만. 또, 음수율에서도외형으로보면첫연에서 4+4+4 로보이지만, 장단의흐름인내재율로보면 4+4+3+1 로된셈이다. 곧, 호흡에따라음수율의움직임이조정되기때문에 3음도 4음과같은박의길이를, 또 1도 4음처럼박의길이를가지고움직이기때문에 4음보의음수율이되었다. 결국다음과같이구분하여읽는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81
< 표 6> 밀양아리랑 의 4음보운율 제1음보 제2음보 제3음보 제4음보 제1연 날좀보소 날좀보소 날좀보 소 - - 제2연 동지섣달 꽃본듯이 날좀보 소 - - ( 후렴 ) 제3연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라리가났 네 - - 제4연 아리랑 고개로 날넘겨주 소 - - 한국의민요권이나무가권이나판소리권또는산조나시나위권에서대부분의 3박자 (triple) 이다. 이 3박자는 3의배수가둘 (2) 일때의 8분의 6박자중두번째의점4분음표 (.), 3의배수가셋 (3) 일때의세번째의점4분음표 (.), 3의배수가넷 (4) 일때의네번째점4분음표 (.) 는한호흡구간을매듭짓고다음구간의노래를위하여숨을쉬려는장단의흐름때문에 밀양아리랑 처럼제4음보째에나타나는가사 소 소 네 소 처럼한음으로놓고길게내면서호흡조절을하는것이한국인들의운율특징이다. 4. 일본노래, 그회한과전망 이글은한국문화에대한정체성을확립하기위해서도 즐거운생활 과 음악 등교과서와동요집, 그밖의가요집이나창가집에나오는일본의전래동요 ( 와라베우타わらべうた ) 와쇼오카 ( 唱歌 ) 는물론소위 뽕짝 과군가 ( 軍歌 ) 와엔카 ( 演歌 ) 를망라한모든일본노래들의음계와음길이그리고일본운율의특징을우리나라그것들과비교하려는의도에서살핀글이다. 해방이된지반만년이지난현재에도일본노래들은청산되지않은채우리안에여러형태로남은그영향권에서한국인들의삶의노래들을휘어잡고있다. 결코일본가사그대로부르지않는다. 그러나일본노래들을가사바꾸어부르거나변형시켜우리노래처럼부르는것이그역사적사실이요, 우리의현실이다. 학도가 처럼그가사가바뀐채음악은똑같은형태, 내용이나음악적특징은같으면서변형된노래곧 여우야여우야뭐하니, 음계와박자등음악적요소와운율이같은엔카류의뽕짝들과동요들이바로그노래들이다. 일본인들이일본사회에서창조되고공유한문화적도구이자정신적도구인그음악이나운율들을, 더욱이일제강점기에우리가 2류의일본인이기를바라며강제화시킨폭행도구들이지금까지우리안의노래로영향을주고있는현실앞에우리가서있다. 어떤영향인가? 동요 여우야여우야뭐하니 를노래하면바로알수있다. 이노래는술래에게잡히지않으려고어린이들이매순간마다긴장과재미로노는놀이노래이다. 이노래는이미알려 8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악보 19> 한국에서 부르는 A형과 B형의 여우야 동요 지다시피 일본의 전래놀이에서 부르는 노래이다. 똑같은 선율이나 똑같은 가사가 아니면서 일본의 민요음계와 2박자, 그리고 같은 가사의 내용으로 부르는 전형적인 일본노래이다. 한국에서 다음 노 래 A형과 B형으로 노래한다(악보 19 참고). A형과 B형이 다른 점은 처음 네 마디를 반복하는 선율흐름과 매 작은 악절에 나오는 세수한다, 옷입는다, 밥먹는다, 무슨반찬, 개구리반찬 등의 리듬처리이다. 그러나 A와 B형은 같은 일본 의 민요음계이고, 같은 일본박자인 2박자(duple)로서 4분의 4박자이다. 또, 같은 놀이형태로 노래 부르는 같은 형태의 노래이다. 앞의 반복되는 네 마디가 때로는 생략될 수도 있지만, 변함없이 같 은 방식으로 노래한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83
< 악보 20> 가사에서 A형과달리 B형이고개를넘어갈때마다 아이고다리야 로희화시키고있지만, 여우가한고개두고개를넘어오거나, 또는여우를만나러수많은고개를넘어간끝에놀이하며부르는노래이다. 가사처럼이놀이는 개구리반찬을먹는여우 가등장할때까지어린이들이놀이반전의긴장속에서여우놀이에더빠져드는놀이이다. 그러나이동요가 잠자거나세수하거나옷입는 변신끝에개구리운명을좌우하는 살았다 와 죽었다 와같이여우의말한마디로생존여부가결정되는반전이긴장을더하는동요일까? 먼저밝히는사실은이노래는일본동요이다. 실제로일본에서부르는이노래 여우야여우야뭐하니 는에도 ( 江戶 ) 시대부터어린이술래놀이로발전한 여우놀이 ( きつね遊び ; 키쯔네아소비 ) 이다. 동시에이놀이는 여우의창 ( きつねの窓 ; 키쯔네노마도 ) 이란제목으로, 또는 여우씨 ( きつねさん ; 키쯔네산 ) 란제목으로지금까지부르는일본전래동요 ( わらべうた ) 이다 ( 악보 20 참고 ). 8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일본동요 여우씨 ( きつねさん ; 키쯔네산 ) 나 여우의창 ( きつねの窓 ; 키쯔네노마도 ) 은한국의 여우야여우야뭐하니 와같은놀이이다. 일본에서산 ( 山 ) 의여우를술래로만들어노는 여우놀이 가한국에들어와 여우야여우야뭐하니 가되었다. < 악보 19> 와같이한국의 여우야여우야뭐하니 나 < 악보 20> 의 きつねさん ( 키쯔네산 ; 여우씨 ) 이비단일본의전래동요이자여우놀이라는사실말고도일본종교를전도하는대표적인노래라는점에서우리들을긴장시킨다. 일본고유의종교는신도 ( 神道, 신토오 ) 가대표하며, 이신도의신이나신령을모시는곳인신사 ( 神社 ) 는일본전역에 13여만개소가있다. 일본신도는전세계종교분포로보면 1위기독교와 2위이슬람순으로보면 15번째로많은분포를차지한다. 또, 일본문화청의 2003 년 12월일본의종교분포통계에의하면그신도수가 1억7백만명으로 50% 정도에이르고있다. 불교가 44% 로서 9천4백만명, 기독교가 2천1백50 만명으로 1%, 그밖의기타가 5% 로 1천만명정도의분포이어서일본의종교분포는 94% 정도를신도와불교가차지할정도로압도적이다. 이러한분포는일본인구수가 1억2천만명이넘는수를감안하면국민대부분이신도와불교신자들이며, 특히이두종교는출생 성년식 결혼 장례등을비롯하여일상적인생활화가되었있다. 일본내신도 ( 神道 ) 의신사 ( 神社 ) 수는 13여만개소에이른다. 그중에 31% 인약 4만개소가이나리 ( 稻荷 ) 신 ( 神 ) 을모시고있는신사들이다. 경우에따라선이노우 ( 稻生 ) 이나이나키 ( 稻成 ) 라고도표기한다. 또, 이나리신 ( 이나리노카미 : 稻荷神 ) 은이나리다이묘오진 ( 稻荷大明神 ) 이라고도하고, 또는오이나리산 ( お稻荷さん ) 이나오이나리사마 ( お稻荷樣 ) 라는친근한이름으로대신부르는신이다. 4만개소의이나리신사 ( 稻荷神社 ) 총본사는쿄오토 ( 京都 ) 시의후시미쿠 ( 伏見 ) 에있는후시미이나리타이샤 ( 伏見稻荷大社 ) 이다. 곡물 ( 穀物 ) 과농업신의총칭인이나리신은이나리신사뿐아니라일반가정과상가의터를비롯하여 ' 산업전반의신 으로까지여기고기업의빌딩옥상이나공장부지내에모셔지고있으니그수까지합치면일본신사의중심이아닐수없다. 그런데, 일본의이나리신사는여우 ( 弧 ; 키쯔네 ) 동상이지키고있는데, 이것은야요이 ( 生 ) 시대부터여우 ( 弧가 ; 키쯔네 ) 가이나리신으로받아들여졌기때문이다. 그리고그여우형상은대부분백여우이다. 일본에서이나리 ( 稻荷 ) 신이나이나리신사 ( 稻荷神社 ) 가이처럼많은것은그자체가일본의역사이자문화이고종교에서비롯한다. 일본은기원전 4세기경에서기원후 3세기경까지지속된농경시대인야요이 ( 生 ) 시대에벼농사가중심일때쥐가번식하여그전염병이사람들을해롭게하자쥐를포식하는여우야말로이로운동물 [ 益獸 ] 로여기지면서토착의신으로그신수 ( 神獸 ) 가되었다. 여우는분류상개과의여우속에속하는야행성포유류로서쥐 토끼를비롯하여개구리등의곤충이나새를잡아먹는잡식성동물이다. 벼농사가일반화된야요이시대이후인 4~6세기경의야마토 ( 大和 ) 시대후반에백여우가일본조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85
정을이끌었다고믿어 이나리신 으로믿게되었다. 그리고백제불교와문화를수용하는 6세기후반 ~7세기경아스카 ( 飛鳥 ) 시대에풍양의신인다키니텐 ( ダキニ天 ) 과여우를한친족으로서동일시하면서불교와도습합의문화를가지게되었다. 에도 ( 江戶 ) 막부가정권을잡은 1603~1867 년의에도시대에일본의상업발달과함께이나리신은풍작과장사번성의신으로받들어지고, 더욱이민간신앙으로서 흙으로만든여우인형 [ 伏見のキツネの土偶 ] 을집안의선반에모신카미다나 ( 神棚 ) 에두고제사지내는풍습이유행하였다. 권력이천황으로이관된 1867 년메이지시기부터여우토우제조를금지하자대신 고양이토우 [ 마네키네코 ] 가대유행하였지만, 회사의뒤쪽에여우서식지로서소혈 ( 巢穴 ) 을두고음식을올리며공양하는풍습이쇼와 ( 昭和 ) 시기를거쳐현재에도시행되고있다. 한국인들은여우를인간을괴롭히는요괴나요물로, 특히백여우는사람을홀리거나무덤을파먹는죽음의상징적동물로여긴다. 그러나일본인들은여우가친밀한동물일뿐아니라신의사자로서믿거나이나미신으로모시는전세계의독자적인문화권의민족이다. 특히, 여우가튀김을좋아한다고전해져지금도식품이름으로 여우우동 ( 키쯔네우돈 ) 이나 여우옆 ( 키쯔네소바 ) 으로까지그용어들이일반화되었다. 그리고일본의아동문학이나그림책, 또는애니메이션은파트너인물로서여우를신뢰의이미지로표현하거나그린다. 물론일본에서도여우가교활한이미지를가진민담이나전설이있지만, 대부분은이로운동물에서신의사자이거나신으로믿는다. 한편, < 악보 20> 의 きつねさん ( 키쯔네산 ; 여우씨 ) 동요는한국의울산쪽에서동해를가로지른일본의츄우고쿠 ( 中國 ) 지방의산음지방서부를이루는야마네현 ( 島根縣 ) 의동요이다. 이야마네현에일본의 5대이나리신사의하나인타이코다니이나리신사 ( 太鼓谷稻成神社 ) 가이나리신사의총본산인쿄오토의후시미이나리타이샤 ( 伏見稻荷大社 ) 의신사로 1773 년에설립된이래역시 여우 ( 키쯔네 ) 를신으로모시고있으며, 그조각상을보물로여기고있다. 다음사진이이신사의신으로서여우 [ 神狐 ] 가족조각상이다. < 사진 2> 여우가족조각상 8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이신사는쿄오토오 ( 京都 ) 시의후시미구 ( 伏見 ) 에있는신사로신사본청에속하지않은독자적인신사로전국에약 3만여개가있으며, 참배자는일본국내제4위 (2010 년기준 ) 일정도로많은참배자가이신사를찾는다. 후시미이나리대사의루문앞에는코마이네 ( 犬 ) 대신에대부분여우상을세우고숭배한다. 원래코마이네는사자나개를닮은일본에서상상의동물로여기고있다. 다음 < 사진 3> 과 < 사진 4> 가그모습들이다. < 사진 3> 후시미이나리대사의여러여우상들 < 사진 4> 이나리신사 ( 稲荷 ) 에여우를닮은코마이네 ( 狛犬 )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87
이처럼한국의 여우야여우야뭐하니 나일본전래동요 きつねさん ( 키쯔네산 ; 여우씨 ) 는같은노래로서일본이나미신 ( 稻荷神 ) 과그사자 ( 使者 ) 를상징하는노래이다. 여우야여우야뭐 ~ 하니, 밥먹는다 ~, 무슨반찬, 개구리반찬, 살았니? 죽었니? 라는노래는 개구리운명을좌우하는생존게임의노래 라기보다는여우가수많은고개를넘고변신하여일본인의오랜역사와함께 살아있는신 이된여우찬양의노래이다. 결코동요 여우야여우야뭐하니 는 아직도버젓이살아있는여우와개구리의공포 노래가아니다. 이노래는한국에진출한일본의이나미신사 ( 稻荷神社 ) 와그문화계가한국인들을전도한종교동요이자유치원의학교교육용동요가되었다. 그러기에일본국가와동반하던일본신도 ( 神道 ) 의조선화를획책한신도정책속에보급된노래가 여우야여우야뭐하니 인셈이다. 한국인들은여우와즐겁게논적도없다. 과거에백여우에게홀린사람이있을지모르지만결코놀아본적이없다. 그러나그여우가친밀한이미지로바뀐계기가이일본의여우놀이동요에서비롯하였다. 누구든지어린시절을떠올리면친구들과함께놀았던그노래가락과놀이에서우리들은여우가어느사이에요괴와요물이미지를떨쳐버리고일본인들이신의사자로친밀하게생각한이미지로받아들인계기가바로 여우야여우야뭐하니 이다. 이처럼 여우야여우야뭐하니 는동요의노래가락으로끝나지않고일본인정서와같은일본민요음계와박자감은물론그동안의 해로운요괴 에서 친한이미지 로바꾸어한국인들에게같은류의문화전파가용이하게된노래가되었다. 일본식동요나그노래들은문화교류차원의다문화를가져다주는노래가아니다. 그노래들은일본인들이일본사회에서창조되고공유한문화적도구이자정신적도구이다. 그러나이노래들을일제강점기에강제화하고조건화한결과는일본식음계와박자감의이식으로만끝나지않고가사의운율감, 그리고일본인의종교와문화와역사를심게하는대신, 한국의민족문화와그역사를약화시키는노래들이다. 우리가미래로나아가기위해서도한국문화의정체성의기반위에서있어야할것이다. 그정체성을확립시키려면, 먼저 문화폭행 으로자리잡은 우리안의일본노래 를바로보아야할것이다. 그분석과치유가우리의미래인이유도여기에있다. 8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천황 의충견제국군인과경찰 - 친일인명사전수록기준을중심으로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교육홍보실장 제국주의일본의한반도식민지강점의목적은두말할것도없이안정적이고지속적이며효율적인수탈에있다. 이러한수탈에대해식민지조선인은적극적또는소극적으로저항을했고이에일제는억압적인행정조치를넘어직접적무력행사를불사하면서조선인의저항을잠재우고자했다. 일제강점기조선총독을비롯한제국의침략자들이늘상뇌까린통치의효율화와안정화라는허울좋은표현은수탈과억압의또다른표현이며, 경찰과군대는제국의폭력성을가장잘보여주는조직이라고할수있다. 1. 황군 장교 - 군국주의파시즘의선봉 일본제국주의의군사조직은식민지강점과대외침략정책의최일선무력조직이었을뿐만아니라군부가직접권력을잡고만주침략 (1931 년 ), 중국침략 (1937 년 ) 태평양전쟁 (1942 년 ) 등을입안 실행한대외침략의중추부였다. 나아가 천황 을앞세운파시즘정권을세우고스스로권력기관이되어내정은물론식민통치와대외침략전쟁의최고정점에서군림하였다. 따라서식민지조선인이일본제국주의의장교로재직하였다는사실은군과경찰이라는무장한권력에기초한식민지체제를지탱하는중추적인기능을수행했으며, 침략전쟁에복무함으로써일본제국주의의전범들이동아시아민중에게가해를입히는데직간접으로관여했음을의미한다. 또한 15년간이라는긴전시체제기간동안군위주의사회체제하에서직급상같은고등관이긴했으나문관보다는더많은권력과사회적지위를누릴수있었다. 사전은먼저조선총독부의고등관과마찬가지로위관급이상의장교를수록대상으로삼았다. 위관급이상의장교라함은일본군, 만주군등에서보병 포병 항공 군수 ( 軍需 ) 군의 ( 軍醫 ) 특임 ( 特任 ) 등각종병과를막론하고지금의준위 ( 准尉 ) 또는소위이상의장교를말한다. 사전에수록된위관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89
급이상의조선인장교는크게세가지로나눌수있다. < 참고1> 군편제비교표 부대편제 만주국군 일본군 軍 軍 師 師長 師團 師團長 旅 旅長 旅團 旅團長 團 團長 ( 퇀장 ) 連隊 連隊長 營 營長 大隊 大隊長 連 連長 中隊 中隊長 排 ( 패 ) 排長 ( 패장 ) 小隊 小隊長 班 班長 班 班長 * 만주국각兵科장교는軍官으로, 特科의장교는軍佐로칭함 ( 출전 : 만주국군, 17쪽 만주국군 일본군 군인계급 만주국군 일본군 대한제국군 * 大帥府 : 군통수권자이자원수부의우두머리 ( 광무고종태황제 ). * 帥府 : 서열 2위. 황태자 ( 융희순종효황제 ) * 上將 * 大將 * 大將 : 1품시종무관부무관장 ( 지금의대장 ) * 簡任官 * 勅任官 * 中將 * 中將 * 副將 : 정2품동궁배종무관부무관장 ( 지금의중장 ) * 少將 * 少將 * 參將 : 종2품원수부총장 ( 지금의준, 소장 ) * 上校 * 大佐 * 正領 : 3품. 시위대 ( 황제직속친위대 ) 연대장직책 ( 지금의대령 ) * 中校 * 中佐 * 副領 : 3품. 진위대 ( 지방군인 ) 연대장직책 ( 지금의중령 ) * 遷任官 * 奏任官 * 委任官 * 判任官 * 少校 * 少佐 * 參領 : 3품. 시위대 진위대의대대장직책 ( 지금의소령 ) * 上尉 * 大尉 * 正尉 : 3품. 시위대 진위대의중대장직책 ( 지금의대위 ) * 中尉 * 中尉 * 副尉 : 6품. 시위대 진위대의소대장 ( 지금의중위 ) * 少尉 * 少尉 * 參尉 : 6품. 부위와같은직책 ( 지금의소위 ) *** 准尉 * 准尉 * 特務正校 : 무품. 사병이최대한진급할수있는계급 ( 지금원사 ) * - 上士 * 曹長 * 正校 : 무품. 부사관직 ( 지금의상사 ) * 中士 * 軍曹 * 副校 : 무품. 정교와같은직 ( 지금의중사 ) * 少士 * 伍長 * 參校 : 무품 ( 지금의하사 ) * 上兵 * 上等兵 * 上等卒 : 지금의상등병, 병장 * 中兵 * 一等兵 * 一等卒 : 지금의일등병 * 少兵 * 二等兵 * 二等卒 : 지금의이등병 첫째, 일본육군사관학교등일본군장교양성학교를거쳐위관으로임관해일본군에복무한인 물이다. 1945 년 8 월 15 일이전소위로임관한일본육군사관학교출신조선인장교는일본육사 11 기 생해당자부터 58 기생졸업자들에해당한다. 일본육사 59~61 기생은재학중에일본패전을맞이 9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했으므로수록대상에서제외하였다. 이밖에단기장교양성기관이나일본육군경리학교를거쳐장 교로임관한인물도수록하였다. < 참고 > 조선인출신일본군장교개요 1 거의다육군소속. 극소수의항공병과장교들도육군항공대소속. 2 해군장교는지금까지파악이안됨. 일본해군병학교 ( 해군사관학교에해당 ) 에입학한조선인은없는것으로추정. 제2차세계대전말기에학도병대상자중일부가해군에입대했으나해군경리담당견습사관정도에그침. 3 입교와임관유형 1876년조일수호조규 ~ 1910년한국병합 : 초기일본유학생중일본육사에입교한경우 ( 일본육사 25기 ) 병합을전후하여한국무관학교에서일본육군유년학교, 일본육사를졸업한후일본군장교로임관 ( 일본육사 26 기, 일본육사 27기 ) 조선의왕족, 공족으로일본황실의관례에의해일본의무관이되었던경우 1930년대자원입교 ( 계림회그룹 ) 1940년일본학도병동원으로견습사관을거쳐소위로임관한학도병사관 만주군관학교출신으로일본육사본과를졸업하고일본군예비역소위와만군장교로임관 둘째, 1932 년 3월만주국에서위관급이상의군관 ( 軍官 ) 으로복무한조선인장교들이다. 먼저만주국이성립되기이전의중국동북군 ( 中國東北軍 ) 시절부터장교나하사관등으로재직하던사람들로서중국동북군이만주국군으로재편되면서만주국의군관으로근무한인물들이다. 다음으로 1932 년펑톈 ( 奉天 : 지금의심양 ) 에설립되어 1942 년까지존속하였던만주국중앙육군훈련처 ( 일명봉천군관학교 ) 출신자로서만주국소위에임관된인물들이다. 봉천군관학교 1기생부터 9기생졸업생으로임관한자들이여기에해당한다. 또 1940 년만주국수도신징 ( 新京 : 지금의장춘 ) 에세워져일제와만주국이패망할때까지존립한만주국의정규사관학교인만주국육군군관학교 ( 일명신경군관학교 ) 출신으로서장교로복무한자들이다. 신경군관학교 1기졸업생부터 3기졸업생이여기에해당한다. 신경 4기생부터 7기생은재학중에일본패전을맞이하였으므로수록대상에서일단제외하였다. 기타각종병과의장교양성학교 ( 육군군수학교, 육군군의학교등 ) 출신조선인장교들과중앙육군훈련처가개편되어주로하사관들이단기교육을받고초급장교로임관하는과정이었던만주국육군훈련학교출신위관급이상의조선인들도포함하였다. 육군훈련학교출신으로서수록대상자는 1기에서 7기까지졸업한인물들이다. 셋째, 대한제국시기장교로서대한제국이몰락한이후인 1912년이후에도참위 ( 參尉 : 1920 년 4 월이후일본식계급으로바뀜 ) 이상의장교로재직한자들이다. 1909년일제에의해대한제국군부 ( 軍部 ) 와장교양성기관인대한제국무관학교가폐지된후새로편성한친위부 ( 親衛府 ) 소속의조선보병대 (1931 년폐지 ) 와조선기병대 (1913 년폐지 ) 장교로서또는조선군사령부예하이왕부 ( 李王附 ) 무관등으로복무한장교들이여기에해당한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91
< 참고 > 대한제국군대의재편과폐지과정 * 병합후한국군인은조선군인으로호칭. 당시재적인수는장교 55명, 준사관 5명, 하사관 53명, 병졸약 700명 (1919년 8월 29일관보 ) * 조선보병대 (4개중대 ), 조선기병대 1 隊 - 이왕직戍衛와儀仗이주임무. * 1920년 4월일본군육군장교계급으로임용. 준사관이하의용어도일본식으로고침. * 이후기병대폐지, 1931년 4월보병대폐지. 권승록이외장교는전부예비역으로편입. 넷째, 장교교육과정을거치지않고이른바특임 ( 特任 ) 으로일본군또는만주군장교로복무한 자 ( 예 : 원용덕 ) 들도포함하였다. 대표적으로군의 ( 軍醫 ) 등을들수있다. 다섯째, 정규장교양성기관출신은아니나사병또는하사관에서진급해위관급에준하는대우 를받은준위도수록대상에포함하였다. 한편, 헌병은헌병오장 ( 伍長 : 분대장급으로지금의하사또는분대장을맡은병장 ) 이상을수록대상으로삼았다. 앞서도언급했듯이일본의식민통치가갖는특징은관료보다는군대가우위에있는체제였다. 더구나헌병은군대에서도더욱특수하고우월한지위를갖고있었다. 이들은대민통제와항일운동에대한탐문 검거 취조, 그리고밀정 헌병보조원활용, 특무기관을통한각종공작활동을하였다. 이른바 헌병의꽃 이라불린헌병오장은일선실무책임자로서그권한도막강하였다 ( 예 : 김창룡-관동군헌병오장 ) 이밖에위관급이상의장교나오장급이상의헌병이아니더라도항일운동을탄압하거나민간인체포 학살또는각종특무활동에종사한자들도수록대상으로삼았다. 중일전쟁이후만주에서활동한최대친일무장조직으로는만주국군내간도특설대 ( 間島特設隊 ) 를들수있다. 간도특설대는 1938 년 9월젠다오성 ( 間島省 ) 성장이범익 ( 李範益 ) 의건의와옌지현 ( 延吉縣 ) 특무기관장겸젠다오지구고문오고에 ( 小越信雄 ) 중좌의공작으로만주의항일무장역량을소멸시킬것을목적으로명월구 ( 明月溝 ) 에서설립되었다. 간도특설대는안투현치안대, 훈춘현국경감시대, 옌지청년훈련소, 봉천군관학교와기타만군부대중에서일본인군관 7명, 조선인위관 9명과조선인사관 9명을선발하여창설한조선인특수부대였다. 1938 년 12월제1기지원병입대를시작으로총 7기까지대원을모집한간도특설대는하사관과사병전원, 그리고군관절반이상이조선인으로구성되었으며, 총인원은 740여명이었다. 간도특설대는 1939 년 12월부터 1943 년말까지는젠다오성내에서토벌활동을진행하였다. 1943 년이후만주의항일투쟁세력이약해지자일제는 치안숙정 의중점을만주에서중국관내로전환하였다. 이에따라간도특설대도 1944년 1월 15일일부사무원과부상자를명월구에남겨두고주력부대를러허성 ( 熱河省 ) 으로옮겼다. 9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간도특설대는일제의패망으로해산될때까지동북항일연군과팔로군을모두 108차례나공격했다. 그들에게살해된항일운동가와민간인은모두 172명에달했으며, 그외체포된자와강간 약탈 고문당한자는이루다헤아릴수없을정도였다. 따라서간도특설대소속장교는물론일선책임자인하사관 ( 반장 ) 도모두사전에수록했으며, 일반사병도친일행위가현저하거나지속적인경우에는수록하였다. 1 다만수록대상자중다음에해당하는자는보류하였다. 일본군또는만주군의각종장교임관과정을수료하지못했거나수료 ( 졸업 ) 했더라도장교로서복무하지않은경우, 일본군또는만주군의장교출신으로서항일운동을한경우, 대한제국장교출신으로 1912년이후군을떠났거나재직여부가불확실한경우, 대한제국기에입대해일제강점기준위로승진한경우가보류대상에속한다. 1944년학병으로동원되었다가장교가된경우도학병제도의강제성에비추어보류하였다. 그리고전사한뒤소위이상으로추서되었거나, 일제말기의소년항공병출신과특별공격대처럼장교임관이목적이었다기보다는자살공격대로보내기위해졸속으로소위로임관시킨경우에는대부분보류하였다. 그러나일제말기이른바 특공사 ( 特攻士 ) 나 가미카제 ( 神風 ) 특공대 로죽은장교중사망이전계급이위관이었던자는수록대상에포함하였다. < 참고 > 일본육군사관학교 / 만주육군군관학교조선인명단 육사 입교자 11 기 * 1886년박유굉최초입학 ( 자살 ) * 1896.1.11 8명 (11명?) 입학 (8기해당) 92.12-94.7.24 / 96.2.29-97.12.13 ( 김규복노백린김교선김성은어담조택현김형섭김홍남임재덕김희선방영주윤치성장호익권선호장인근강용구 ( 강용희 ) 김봉석 ( 김상설 ) 김홍진김관현권승록이기옥 : 1898년 21명유학생으로입교 ) 계 21 15 기 98.12.17-01.11.28 ( 김응선김기원남창기유동열박영철박두영이갑김영헌 : 1902 년 5 월유학생으로서입교 ) 8 23 기 08.12.11-11.11.29 ( 김광서 = 김현충 : 1909 년유학생으로입교 ) 1 26 기 27 기 11.12.12-14.11.27 ( 이응준이대영 = 이호영안종인 = 안병범김준원홍사익권영한신태영박승훈유승렬염창섭조철호이청천 = 지청천 = 지석규민덕호 : 1909.9 예과 ( 중앙유년학교 ) 3학년 15명편입 1912. 육사입교 ) 12.01.12-15.12.11 ( 김석원김인욱김종식서정필백홍석장성환장유근정훈남태현 ( 남우현?) 유관희장기형김중규이종혁 = 마덕창이동훈이희겸윤상필원용국박창하장석윤이강우 : 1909.9 예과 ( 중앙유년학교 2년편입 1913년육사입교 ) 13 20 29기 14.12.12-17.11.27 ( 이은조대호 ) 2 30기 15.11.29-18.11.29 ( 엄주명 ) 1 42기 27.12.26-30.11.27 ( 이건 ) 1 45기 30.12.12-33.11.29 ( 이형석이우 ) 2 1 시대의자랑, 만주의번영위한 / 징병제의선구자조선의건아들아 / 선구자의사명을안고 / 우리는나섰다나도나섰다 / 건 군은짧아도 / 전투에서용맹떨쳐 / 大和魂은우리를고무한다 / 천황의뜻을받든특설부대 / 천황은특설부대를사랑한다 ( 간도특설부대가 )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93
49기 34.12.13-37.10.28 ( 이종찬채병덕 ) 2 50기 35.12.13-38.05.28 ( 지인태이용문 ) 2 52기 37.11.01-39.11.27 ( 최명하박범집 ) 2 53기 38.06.11-40.06.17 ( 신응균박재흥 ) 2 54기 38.12.27-41.07.31 ( 김정렬강석우 = 강석호노태순 :40.9 졸업 ) 3 55기 39.12.13-41.12.05 ( 유재흥김창규전원상 :41.9졸업 ) 3 56기 40.12.26-42.11.30 ( 이형근최창식김종석최정근 :42년졸업 ) 4 57기 41.12.24-43.11.30 ( 김호량정상수김영수 :44년졸업 ) 3 58기 42.12.13-44.07.31/44.05,22( 항공사 ) ( 정래혁박원석신상철한용현최복래안광수 :45.6졸업 ) 6 59기 43.12.01-44.12.20 ( 장창국홍승화금강수웅 = 김수순 = 김수웅 만주국군지 52) 3 60기 45.02.11-45.08.06 ( 장지량이연수조병건이성구이태성 = 김태성 : 만주국군지53쪽이재일 ) 6 61기 ( 정만영조병하김차경최용기오일균김중환조철형김은수 ) 9 * 육사입학 졸업연도는 일본육해군총합사전 에의거 114 ( 주의 ) 만주국군지 의졸업연도 ( 괄호안 ) 와맞지않다. * 통계는 동창생명부 에나온인물만집계 ( 전체수자틀림 ) 만주군교입교자 봉천 1 기 계 * 일본인軍官候補者는 1933 년 2 월 23 일일본군예비역少尉부터上等兵출신의 107 명이제 1 기日軍軍官候補者로입교 * 만주인軍官候補生은 1933 년 3 월 20 일만주국군에서복무하는 253 명이제 1 기滿系. 軍官候補生으로입교 봉천 2 기 (1 명金周贊 ( 군수장교 )= 조선인맞음, 간도특설대, 봉천 1 또는 2 기 ( 滿洲國政府公報 756 號 (1936.9.28) 중위진급기사 ) 봉천 3 기 (1 명 ) 김정호 ( 경리양성부 ) 봉천 4 기 (7-8 명 ) 봉천 5 기 (16 명 ) 1936. 3 또는 4. 입교 -37.9. 졸업, 37.12 임관 ( 만선일보 40.1.19 조선인 7 명졸업기사 ) 봉천 6 기 (7 명 ) 봉천 7 기 (1 명 ) 봉천 8 기 (3 명 ) 봉천 9 기 * 1935. 3 입교 -1936. 임관 : 강재호 ( 간특 ) 박봉조 ( 간특 ) 이원형 ( 간특 )( 만주국군지 36 쪽 ) 김응조계인수 ( 계인주 ) 양대진 ( 경리양성부 ) 김 **( 경리양성부 ) - 경리양성부 2 명제외하면 5 명 + 최세창 ( 김 **( 경리양성부 ) 는김주찬군수장교겸간토특설대장교일가능성있음. 김주찬이몇기인지확인요망 ) a) 김석범 ( 간특, 일육사 54 기해당 ), 석희봉 ( 간특, 일육사 54 기해당 ), 정일권 ( 일육사 55 기해당 )<- 일본군예비역소위아닌만주군소위 * 강기태김신도김찬규 ( 김백일 / 간특 ) 김홍준 ( 간특 ) 문용채문이정 ( 간특 ) 송석하 ( 수석 ) 신현준 ( 신봉균 / 간특 ) 윤춘근 ( 간특 ) 이두만탁명환 ( 차명환이맞음 ) 최경만 ( 간특 ) 최구룡등 16 인 ( 동아일보 37.9.29 ; 간특은 만주국군지 36 쪽 에의거 )- 만주국군지 43-44 쪽에는 18 명이나중퇴 ( 전해창 ) 군수후보생 ( 김일환 : 군수학교 1 회졸업, 해방직전제 7 군관구사령부소속 ) 등을제외하면 16 명맞음 ( 장수암은조선인아닌듯 ) 박승환이상렬조용성 ( 豊田 : 간특 ) 최남근 ( 간특 ) 최재환 ( 간특 : 최재항은최재환이맞음 ) 김용기 ( 간특, 군수학교 2 회졸업 ) 양국진 ( 양대진과다른인물, 군수학교 2 회졸업 ), ( 만주국군지 44 쪽, 이상렬이 7 기로나오기도 만주국군지 50 쪽, 신주백은김용기양국진을제외하고 7 기로파악, 공보 에의거하면 7 기입학생임 ) 최철근 ( 군수학교 3 회졸업 ) 이상렬 ( 만주국군지 43-44 쪽 6 기로나오기도 ) a) 김석범 ( 봉천 5 기, 간특, 일육사 54 기해당, 해방직전제 6 군관군 7 단연장 ), 석희봉 ( 봉천 5 기, 간특, 일육사 54 기해당 ) * 석주암김용국태용범 ( 만주국군지 44 쪽 )-b) 에해당 * 42.12.17 졸업 ( 신경 1 기와졸업 )a) 정일권 ( 봉천 5 기, 일육사 55 기해당 ) * 백선엽 ( 간특 ), 윤수현 ( 군수학교 5 회졸업 )-b) 에해당 a 2 b 계 2 다음기수로파악하는것이논리적으로맞음 6 기 - 김용기, 양국진은만주국군지에봉천 6 기입학에군수학교 2 회졸업으로나옴 7 기 - 박승환이상렬조용성최남근최재환최철근 ( 군수학교 3 회 ) a 1 b 계 1 9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신경 1 기 (13 명 ) 신경 2 * 3 9.4 입교 -42.12.17 졸업 ( 일육사본과졸업생 ) a) 이주일최창언박임항김민규조영원최창륜 ( 일본예비역소위임관과동시만주국군소위로임명, 이하 a) 동일 ) b) 김동하방원철윤태일이기건강재순이순 ( 일본경리학교 ) 김영택 ( 군수학교 5 회졸업일본경리학교 ) 44.4.20 졸업 ( 일육사본과졸업생경우 ) a) 박정희 ( 수석 ) 이한림이섭준 (= 이준섭이맞는듯 ) 김재풍 b) 김묵 ( 공보 : 金明哲간특 ) 이재기 ( 공보 : 李麟 ) 강창선김원기안영길이병주이상진 * 황세림회고에는김광식이란동기생도있다함. 공보에는안나옴 ) a 6 b 7 계 13 a 3 1 4 b 2 5 7 계 5 6 11 신경 3 45.6.17 졸업 ( 일육사본과졸업생 ) a) 최주진강태민 신경 4 b) 예관수장은산 ( 수석 ) 신경 5 신경 6 a) 강문봉 ( 수석 ) 황택림이용술김태종이 ** * 이때부터滿系에서日系로동등대우 a) 김윤근김세현김기준김석권이우춘정정순김학림 b) 김동훈육굉수新原 **( 수의 ) 安藤猛 ( 군의 ) 신경 7 b) 김광식 ( 김노식 ) 전상혁김윤선한진일 ( 전원예과재학중종전 ) 합계 a: 일본육사편입자, b: 순수만주군교출신자 (< 출전 > 韓國出身日本陸士 滿洲軍校同窓生名簿 1975 年 8 月現在, 28 쪽 ) a 1 1 2 b 계 1 1 2 a b 1 1 2 계 1 1 2 a 1 4 5 b 계 1 4 5 a 2 5 7 b 2 3 5 계 4 8 12 a b 2 2 4 계 2 2 4 a 13 14 27 b 12 13 25 계 25 27 52 < 일본육사 / 만주군관학교각기수별조선인소위임관숫자 > 일제시기 (1910-1945 년 ) 일본육사입학자 87 명연평균 2.4 명임관자 63 명연평균 1.75 명 만주국시기 (1932-1945 년 ) 만주국장교 ( 봉천군군교, 신경군교, 군수학교 ) 임관자 67 명연평균 4.8 명 일본육군사관학교 만주 ( 중앙육군훈련처, 만주육군군관학교 ) 봉천1기-2기 1명 23기 (1911) 1명 ( 항일운동 ) 봉천3기 1명 26기 (1914) 13명 (2명: 항일운동 ) 봉천4기 (1936) 8명 27기 (1915) 22명 (2명: 항일운동 ) 봉천5기 (1937) 17명 (3명: 일본육사편입 ) 29기 (1917) 2명 30기 (1918) 1명 42기 (1930) 1명 봉천6기 (1939) 2명 45기 (1933) 2명 49기 (1937) 2명 50기 (1937) 2명 봉천7기 (1940) 6명 52기 (1939) 2명 53기 (1940) 2명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95
54기 (1940) 3명 봉천8기 (1941) 3명 55기 (1941) 3명 봉천9기 (1943) 3명 56기 (1942) 4명 신경1기 (1943) 13명 (6명: 일본육사편입 ) 57기 (1944) 3명 신경2기 (1944) 11명 (4명: 일본육사편입 ) 신경3기 (1945) 2명 ( 모두일본육사편입 ) 58기 (1945) 6명 신경4기 ( 미임관 ) 2명 59기 ( 미임관 ) 3명 신경5기 ( 미임관 ) 5명 ( 모두일본육사편입 ) 60기 ( 미임관 ) 6명 신경6기 ( 미임관 ) 11명 61기 ( 미임관 ) 8명 신경7기 ( 미임관 ) 4명 소계 87명 ( 임관 63명 ) 89명 ( 임관 67명 ) 평가 1 자발적적극적친일의대명사 : 친일군인이라기보다적국장교 * 만주국에서조선인장교가되면항일세력, 독립운동세력과전투를하게되어있는것은자명한사실 ( 확신범적성격의친일행위 ) * 대한민국임시정부는물론만주와화북지역의조선인항일세력에게이들은적국장교 * 이들은해방을맞이한것이아니라끝까지일본군의하위행동대로서항일세력을탄압하다가패전을맞음 2 친일한것을독립정신함양으로미화 * 우리들만주군인출신은일제압제하에서조국땅을떠나유서깊은만주에서독립정신과민족의식을함양하며무예를연마한혈맹의동지들이다우리는타향인만주에서철석같은정신과신념밑에서철석같은훈련을거듭하여 8 15 해방을맞이하였다. 건국 40유여년 ( 有餘年 ) 이된오늘날 50여명의장성급과다수의영관급고급장교가배출되어조국의독립과자유수호에공헌하였다. ( 김석범`정일권 만주국군지 )_ * 우리들이추격했던게릴라중에는많은조선인이섞여있었다. 주의주장이다르다고해도한국인이, 독립을위해싸우고있었던한국인을토벌한것이기때문에이이제이 ( 以夷制夷 ) 를내세운일본의책략에완전히빠져든형국이었다. ( 중략 ) 그렇다하더라도동포에게총을겨눈것은사실이었고비판을받더라도어쩔수없다. ( 白善燁, ゲリラ -アメリカはなぜ負けたか!, 原書房, 1993 년 ) 3 해방후한국군의중추세력이되고나아가정치군인으로서역사의반동으로 1 정일권 육참총장 (50.6~51.6, 54.2~56.6) 1공 만주군헌병대위 1 이종찬 육참총장 (51.6~52.7) 1공 일본군공병소좌 (1943) 1 백선엽 육참총장 (52.7~54.2, 57.5~59,2) 1공 간도특설대중위 (1942) 9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1 이형근 육참총장 (56.6~57.5) 1공 일본군대위 1 송요찬 육참총장 (60.8~61.2) 1공 지원병입대, 종전시일본군준위 1 최경록 육참총장 (60.8~61.2) 2공 일본군소위 1 백선엽 합참의장 (59.2~60.5)) 1공 간도특설대중위 1 유재홍 합참의장 (57.5~59.2) 1공 일본군대위 유승렬 ( 劉升烈, 일본육사 26 기, 종전때일본군육군대령 ) 의차남 1 장창국 합참의장 (65.4~67.4) 3공 일본육사재학 1 이형근 합참의장 (54.2~56.6) 1공 일본군대위 이응준 ( 李應俊 ) 의사위 1 정일권 합참의장 (56.6~57.5) 1공 만주국헌병대위 1 임충식 합참의장 (67.4~68.8) 3공 만주군간도특설대준위 4 박정희, 백선엽우상화와반공논리로친일을합리화 * 선진통일연합의백선엽모시기 : 반공영웅만들기 - 보수세력이반공등을내세워다시한번권력을창출하려는데그상징으로백선엽을부각 - 백선엽의맞장구 이승만전대통령이라는위대한지도자가있어서적화통일을막았다 북한은핵무기를개발하고 20만특공대가우리를넘보고있는데남남갈등이있어서는안된다 * 공영방송의장악 : - KBS의백선엽 ( 반공영웅의창출 ) 이승만다큐 ( 광복절아닌건국절, 이승만-박정희부활의대중적선전활동 2. 경찰 < 참고 > 일제의식민통치기구에참여한자수록기준 1) 조선총독부중추원의부의장, 고문, 참의 ( 찬의 부찬의 ) 로활동한자 2) 일본제국의회의귀족원의원또는중의원의원으로활동한자 3) 고등관이상관리로재직한자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공리 4) 경부이상경찰로재직한자와고등경찰로활동한자,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1. 경부이상의경찰간부로재직한자 2. 고등경찰및검열업무담당자 3.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5) 위관급이상장교로재직한자와오장급이상헌병으로활동한자,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군인 6) 판사 검사로재직한자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사법관리 7) 국책경제기관 단체의간부로서경제침탈에적극협력한자 8) 도 부의원등관선 민선의공직자로서친일행위가뚜렷한자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97
조선인고등관료의경우반민족행위자가아니라부일협력자의범주에속한다하더라도식민국가를유지하고통치하는데핵심적인역할과기능을수행하였다는점에서역사적책임을묻고자했다. 식민지조선의경찰은군과더불어식민지를물리력으로지탱하기위한대표적인억압기구이자식민권력이마을까지침투할수있게하는하나의행정수단이었다. 권력구조면에서볼때식민권력은조선총독을정점으로조선주둔군총사령관 정무총감 법원장등이핵을이루고있으며, 총독부의과장급이상고위관직자및각도의도지사 참여관 과장 부윤 군수 경찰서장 경시 세무서장 판검사등이권력장치로작동하고있었다. 검사는형사소송법에서규정한경우외에사건이금고이상의형에해당하며빠른처분을요한다고생각할때는공소제기전에압수, 수색, 검증 ( 檢 ), 피검자의구인, 피의자또는증인심문, 감정, 통역또는번역표를처분할수있었다. 사법경찰관도대개같은권한을갖고있었다. 전쟁이장기화함에따라물자가부족해지자일제는통제경제를강화하면서공출등의방법으로물자수탈을강행했다. 이에조선인들도도피, 암거래, 은닉등을통해소극적인형태지만전쟁수행을방해하는일이많아졌고, 이러한상황을타개하기위해일제는경제경찰제를신설하고통제를강화하여그결과전시경제사범이비약적으로늘어났다. 전시경제사범은 1939 년에는위반건수가 2 만 1033 건, 위반자수가 2만 1191 명이던것이 1940 년에는각각 7만 927 건, 8만 1754 명으로 1941 년에는 7 만 9331 건, 9만 2099명으로늘어났는데, 이는위반건수와위반자수가갑자기늘어났다기보다는조선민중의생존을위한저항에비례하여그만큼통제가강화되었음을뜻한다. 즉식민통치의불법적지배를폭력을통해유지한다는점에서경찰은식민지배의본질을상징하는기구이며, 식민행정을지원하는주요수단이었다는점에서행정의식민성을대표하는기구였다. 다만경찰의경우고등관에해당하는경시뿐만아니라그아래직급인경부도포함하였다. 경부가고등관료가아님에도수록대상으로삼은것은식민지사회가물리적폭력에기초한경찰국가라는점, 그리고경찰의방대한권한에대한일종의견제장치로서직급이한단계낮게책정되어있는식민지경찰행정의특성을고려했기때문이다. 이것은식민지사회에대해한국역사학계가도달한연구수준과역사인식을반영한것이라고도할수있다. 또한식민지경찰의핵심기능인항일세력을탄압하는임무를수행하는고등경찰관과사상검열에관여했던검열관리는그기능과역할때문에모두수록범주에들게되었다. 경부이하의경찰관중친일행위가현저하게드러난사람도포함하였다. 경찰제도사라는관점에서보면식민지시기는 1 조선에대한군사침략과경찰권침탈기 (1910 년까지 ), 2 1910 년대의헌병경찰체제기, 3 1920 30 년대의보통경찰체제기, 4 전시체제하의경찰체제기로구분할수있다. 각시기의특징은 1 군 ( 헌병 ) 을중심으로한조선경찰권의침탈, 9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2 식민지지배체제를구축하기위해헌병경찰을통한지방단위까지의행정지배장악, 3 문관경찰을통한지배체제의안정화, 4 총동원체제아래전시수탈의강화로규정할수있다. 헌병경찰제도하에서의경찰기구는조선총독부행정기구에서독립한총독직속기관으로서중앙에경무총감부, 지방에경무부를두고있었다. 경무총감부의경무총장은조선주차헌병대사령관이겸임했다. 경찰관출신의경시와헌병위관겸경시를주요직원으로하는경무총감부가경찰의중추기관으로서전국의경찰사무를총괄하고있어군이치안유지의중심을이루고있었다. 헌병경찰체제는군인인헌병주도하에문관인경찰이보조적인역할을수행하는체제로서양자간의직급체계를비교하면 < 표-8> 과같다. 헌병좌관이도경무부장, 위관이경시로이른바주임관의지위에있었고, 보통문관인판임관의경우는하사관이경부, 상등병이경부보의지위에있었다. < 표 > 헌병경찰제하의직급체계 고등문관 보통문관 칙임관주임관판임관 1 등 2 등 3 등 4 등 5 등 6 등 7 등 8 등 1 등 ~4 등 경찰도경무부장경시경부경부보순사 군중장소장대좌중좌소좌대위중위소위하사관병졸 헌병 헌병 헌병 사령관헌병좌관헌병위관 하사관 상등병 자료 : 朝鮮史料硏究會, 朝鮮の官制行政問題を萩原氏にきく 朝鮮總督府官制とその行政機構 ( 友邦시리즈제 15 호 ), 友邦協會, 1939, 24~25 쪽에서정리 3 1운동으로일제는치안을군중심에서문관경찰중심으로전환하는이른바보통경찰제를수립하였다. 군이치안의전면에서물러나는대신문관경찰을증원하여치안을맡게한것이다. 경찰관서는 1919 년에 736개소이던것이 1920 년에 6,387 개소로 3.6배증가했다. 헌병과경찰을합쳐 1만 4501명이던것이 1919 년 8월제도개정이후에는 1만 6897 명으로약 2400 명이늘었으며, 1920 년 1월이후제2차경무기관확장으로약 4250명이추가증원되었다. 약간의변동은있으나중일전쟁전까지 2만여명을전후하여경찰력을유지하다가 1939 년부터 2만 3000명으로확대되었다. 보통경찰제하의 2만명에이르는경찰관은전체식민지관리 10만명 ( 면리원포함 ) 중약 20% 이상을차지하고있다. 이는일본제국주의가식민지조선을통치하기위한물리적수단으로서의역할을경찰이식민지배기간내내중심적으로수행했음을말해주고있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99
< 표 > 경무국의조직체계와직급별 민족별경찰관구성 (1920 년 ) 시기별제도개정전제도개정후 종류별민족별경찰헌병 (1919 년후 ) 행정정리전 (1923 년전 ) 1940 년 경무총장 1 ( 경무국장 ) 1 1 헌병사령관 1 경무관 일인 2 헌병좌관 조선인 1 경무부장 13 ( 경찰부장 ) 13 13 헌병대장 13 경시 일인 26 96 34 40 62 헌병위관 조선인 9 12 14 14 9 경부 일인 187 780 308 369 394 헌병하사 조선인 144-132 105 89 경부보 일인조선인 596 266 718 200 752 156 순사 헌병상등병 보조원 일인조선인 2617 3339 2525 4749 7445 8088 2028 8160 12980 8572 합계 6322 8179 16897 20648 23028 < 표 > 경무국의조직체계와직급별 민족별경찰관구성 (1920 년 ) 부서직급일본인조선인 경무국 국장 1 사무관 2 1 사무관 2 경무과 통역관 1 속 11 사무관 3 3 고등경찰과 통역관 4 속 9 4 사무관 1 1 보안과 기사 1 속 8 3 사무관 1 촉탁 6 2 위생과 속 6 2 기수 2 기사 6 10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1924 년중추원참의가된사무관구연수 ( 具然壽 ) 를제외하면조선인가운데서경무국의사무관으로재직한사람은없다. 이성근 ( 李聖根 ) 처럼경륜이있는경찰이주임관의지위에해당하는경시로승진하더라도도에서활동하는것이일반적이었다. 과별특징을보면우선경무과에는조선인이사실상배제되어있었다. 1930 년부터는경무과소속조선인은 1명도없으며, 보안과와도서과를중심으로하위직에배속되는경향을보이고있다. 직급은물론업무에서도민족차별의고용구조를띤이러한현상은식민지전기간에걸쳐서일관되었다. 1926 년고등경찰과를폐지하는대신도서과를신설하여경무과, 보안과, 도서과, 위생과체제로재편한경무국은중일전쟁이후방호과와경제경찰과를차례로신설하고정원을확대하였다. 조선의사상검열을총괄하던검열기구로는경무총감부고등경찰과도서계 (1910~19) 를들수있고, 이후경무국고등경찰과도서계 (1920~25), 경무국도서과 (1926~43) 로발전하였다. 경무국도서과는조선내에서의모든출판물과영화, 음반및도화의출판과발행, 그리고발매와반포를총괄관장하였다. 일본인검열관은고등경찰출신의정보전문가와통역관으로구성되었으며, 일본어출판물과조선어신문을담당했다. 검열기구내의하위에있던조선인검열관들은한국어단행본들을담당했으며, 1930 년을전후로최고고등교육기관출신의인물들로충원되었다. 1910 년대에는검열에종사한조선인은없었으나 3 1운동이후경무국고등경찰과에서조선인검열자가충원되었다. 1926 년부터도서과의조선인직원은 4명으로출발하여 1928 년에 6명, 1930 년에는 7명이되었지만이후대체로 5~6명이근무하였다. 도서과에근무한조선인직원의경력을두부류로나누면하나는경찰관료이고, 다른하나는지식인전문가였다. 식민지조선의경찰은경찰본래의사무이외에비상히많은특종근무를하고있어, 행정 사법양부에걸쳐그권력을가질뿐아니라학자의영역에속해야할언론의지도, 교육가의영역에속해야할사회풍속의개선, 흥신소의영역에속해야할신용조사, 실업가의영역에속해야할경제계의연구등사실상모든분야에권한을지니고있었다. 즉경찰본래의임무인치안유지이외에검사권, 민사조정권, 행정사무에대한원조, 즉결처분권, 제한된입법권등을가지고있었다. 게다가권한의자의적행사가제도적으로보장됨으로써경찰권력을남용할여지가충분했다. 식민권력의행정체계와행정력이비교적안정적인모습을띠면서지역말단까지관철되는 1920 년대중반부터는경찰의행정원조사무중일부가일반행정으로이전되긴하지만, 행정경찰의비중은여전히큰편이었다. 전시체제기로들어오면서경찰이주민의일상생활에개입하는범위는더욱커졌다. 노동력과군사력동원, 물자동원과시국동원, 단체가입종용, 물자와생활통제, 창씨개명강제등전분야에걸쳐경찰이간섭하였다. 이는식민지의행정체계가경찰이라는물리력에상당히의존하는체계임을말해주고있다. 식민지하의조선인경찰관중중간간부에해당하는경부이상을보면, 시기별로크게세유형으로나눌수있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01
첫번째유형은 1910 년대를전후하여순사보나헌병보조원으로활동한뒤 1920 년대에는경부보 경부 경시로승진하고이후행정관료로전직하여군수, 도이사관을거쳐참여관 ( 도지사차석 ) 으로올라간전형적인충복형집단이다. 일제하조선인경찰관 1세대라고말할수있는이들은경찰업무의전문성보다는일제에대한충성도가인정되어관료로진출한경우이다. 두번째유형은경찰 2세대라고부를수있는집단으로 1930 년대를전후하여고등계형사를시작으로후반에순사부장 경부보 경부로승진한경우이다. 이들은경찰일선에서잔뼈가굵은사람들로미군정하에서그대로등용된뒤한국현대경찰의원형을형성했으며, 분단과권위주의정권하에서사상탄압과정치경찰의중심이되었다고할수있다. 세번째유형은일제하에서대학을나온엘리트로서고등문관시험에합격하고난후경찰에몸을담았거나고등문관시험을거치지않고바로경찰에몸을담았던집단이다. 김우영 윤종화 이창근등을제외한이들대부분은다른고등문관시험합격자들처럼해방이후행정관료나정계, 사법계등으로진출하여지배집단의중추를형성하였다. 이들이일제하에서고등문관시험합격을통해고급관료로진출하던시기가대체로 1930 년대초반인데, 이때는일제가대륙침략을도발함으로써총력전체제를구축하려던시기다. 따라서통제강화와전시체제의수행에적합한새로운관료들이필요하였고, 그역할을바로이들이담당했던것이다. 앞의두유형과는달리이들은일제하에서대학을나올정도로자산계층의출신이었으며, 생존을위해일제의관리가된것만은아니었다. 이들역시스스로선택하여식민통치의지배구조상층에편입하려던부류로친일행위에대한역사적책임은클수밖에없다. 한편, 만주국소속조선인경찰은국내에준하여수록하였다. 즉조선총독부경부급에해당하는 경좌급이상의지위에복무한자들과, 고등경찰 ( 특무 ) 또는기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들 이여기에해당한다. 1. 만주국의천임관이상관리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리 2. 재만일본기관의고등관이상관리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리 3. 만주국의경좌이상경찰, 고등경찰,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4. 재만일본기관의경부이상경찰, 고등경찰,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5. 밀정등첩보활동을통해일제에적극협력한자 6. 군경특무조직 ( 간도협조회ㆍ간도특설대ㆍ훈춘정의단ㆍ신선대등 ) 의하사관급이상간부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대원 7. 만주국의고급관리양성기관인건국대학ㆍ대동학원등의천임관이상교원 8. 주요친일단체 ( 협화회ㆍ민회ㆍ흥아협회등 ) 의핵심인물 9. 기타국내기준에의거친일행위가뚜렷한자 10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만주국 ( 만주제국또는대만주국 : 1932.3~1945.8) 은 1931 년 9월일본관동군이만주를침략해 1932 년 3월에청 ( 淸 ) 의마지막황제푸이 ( 溥儀 ) 를집정 (1933 년만주제국황제가됨 ) 으로내세워만든일제의괴뢰국가이다. 만주국은일본인, 조선인, 만주인, 몽고인, 중국인등의협력이른바오족협화 ( 五族協和 ) 를통한왕도낙토 ( 王道樂土 ) 건설을내걸었지만사실상일본제국의식민지였다. 일제는현지의관동군과협의아래일본이나조선등지에서활동한일본인관료, 경찰들을행정, 사법, 군, 경찰기타각종외곽조직의핵심부에대거파견하였다. 또한부족한인력을충원하기위해일본인과만주인은물론조선인에게도문호를개방하였다. 이과정에서조선총독부소속조선인관료와경찰상당수가만주국으로옮겨가근무하였다. 이들은대체로조선인이밀집해서사는동만 ( 東滿 ) 지구를중심으로배치되었다. 재만또는조선내의일부조선인들도만주국이성립하자절호의기회로여기고출세의방편으로신흥만주국의각종국가기구에관료, 경찰, 군인등으로진입하였다. 일제는만주국관료 경찰등에포진한조선인들을다양한목적아래활용하였다. 이른바오족협화의기치아래조선인에게도기회가공평하게주어졌다는인식을심어주는한편, 재만조선인사회를통제하기위한중간관리인역할을부여했다. 나아가만주지역에서조선인과중국인의대립분열을조장해이이제이 ( 以夷制夷 ) 의방식으로조중연대에기초한항일운동을말살하고자하였다. 또일부극렬한조선인친일파들은일제또는만주국의군경 ( 軍警 ) 특무조직에서통역이나밀정, 그리고토벌대로활동해수많은항일투사들을체포 투옥하거나살상하는데참여하였다. 사전은먼저만주지역의친일파로서만주국조선인관료들가운데천임관 ( 薦任官 ) 이상을수록대상으로하였다. 만주국의고급관리양성기관인건국대학 ( 建國大學 ) 과대동학원 ( 大同學院 ) 등주요국공립대학교 대학원에서천임관급으로복무하는교원도수록하였다. 만주국관료는크게문관과무관으로구분된다. 문관은행정관, 사법관, 기술관, 교관으로구성된다. 문관의계급은고급관료인고등관 ( 천임관이상 ) 과일반관료인위임관 ( 委任官 ) 으로나누어진다. 행정관료로서는참사관 ( 參事官 ) 이사관 ( 理事官 ) 사무관 ( 事務官 ) 이, 사법관료로서는심판관 ( 판사 ) 검찰관 ( 검사 ), 기술관료로서는기정 ( 技正 ) 기좌 ( 技佐 ) 등이천임관에해당한다. 일본과만주국의관직을비교하면 < 표-15> 와같다. < 표 > 일본, 식민지조선, 만주국의관직비교 만주국 일본 조선 총무처총무장관등 특임관 ( 特任官 ) 친임관 ( 親任官 ) 각부대신 성장 ( 省長 ) 간임관 ( 簡任官 : 1-2등 ) 칙임관 ( 勅任官 ) 참사관이사관사무관사무관좌 천임관 ( 薦任官 : 1-6 등 ) 주임관 ( 奏任官 )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03
技正 技佐속관 ( 屬官 ) 기사 ( 技士 ) 위임관 ( 委任官 : 1-6등 ) 판임관 ( 判任官 ) 고원 ( 雇員 ) 고원 ( 雇員 ) * 기정 기좌 기사는기술직관료 / 속관 ( 屬官 ) 이란성 현 ( 省 縣 ) 의일반사무원 만주국에근무한조선인관료총수는대략 3000여명이며, 그가운데조선인으로서고등관수는 200명내외로추산된다. 조선인이만주국고등관으로진출한경로는크게다섯가지이다. 첫째, 일본의고등문관시험에합격했으나일본이나조선에부임하지않고만주국에서근무한경우이다. 둘째, 조선총독부관료와경찰등으로근무하다만주국으로 인사이동 ( 형식적으로는조선총독부관리직을사임 ) 형태로발령받은경우이다. 셋째, 만주국위임관으로시작해내부승진한경우이다. 넷째, 만주국관리등용시험인고등고시나일반관리등용시험인위임고시등을합격한경우이다. 다섯째, 만주국의고급관리진출문이라할수있는대동학원을졸업하고관직에들어선경우이다. 만주국경찰은직제가몇번바뀌었다. 초창기에는경사 ( 警士 )-경장( 警長 )-순관( 巡官 )-경좌( 警佐 )-경정( 警正 : 경시에해당 ), 1937 년부터는경사-경장 -경위보( 警尉補 )-경위( 警尉 )-경좌- 경정, 1940 년부터는경사-경장 -감독경위 ( 監督警尉 )-경좌- 경정으로직급이개편되었다. 철도경호대의경우순경 ( 巡警 )-순장( 巡長 )-순감보 ( 巡鑑補 )-순감( 巡鑑 )-호감( 護監 )-경호관 ( 警護官 ) 또는대장 ( 隊長 ) 으로편제되어있었다 (< 표-16> 참조 ). 이가운데경좌급이상의경찰직위에있었던자들을수록하였다. 그리고일제가랴오둥 ( 遼東 ) 반도일대의조차지를관할하기위해세운통치기구인관동국소속의조선인경찰, 일본외무성 일본영사관과산하분관에소속되어만주일대에서활동한조선인경찰과조선총독부에서만주로파견한경찰중경부이상으로근무한자도수록하였다. 이들중상당수는 1937 년 12월치외법권철폐로만주국경찰로편입되었다. < 표 > 만주국의경찰직제 분류 천임관 위임관 건국초 경정 경좌 순관 경장 경사 만주국 1937.12 경정경좌경위경위보경장경사철도경호대대장, 경호관호감순감순감보순장순경 중앙경찰학교 교장, 주사, 교관, 사무관 조교 일본 조선 ( 외무성경찰 / 영사관경찰 / 관동국경찰 ) 경시 경부 경부보 순사부장 순사 순사보 고원 만주지역은항일무장투쟁이활발하게일어난곳이기때문에이지역의일본또는만주국경찰은 10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일반치안만이아니라항일세력에대한조사, 밀정투입, 특무기관활용, 무장토벌대 의운용, 선만 국경 소만국경경비, 군경합동군사작전등을담당하였다. 즉군사와특무의기능을담당했기때문 에다양한경찰조직이운용되었다. 만주국보안국과특무처소속의비밀경찰조직 ( 이른바고등특무 ), 항일세력을무력진압하는임무를맡은경찰토벌대 (1939.6~1940.6) 와특무경찰토벌대 (1936.7~1945.8), 그리고해상경찰대 (1932.5), 삼림경찰대 (1939. 삼림경호대 ), 국경경찰대 (1938.4.1 국경감시대의후신 ), 경찰경비대 (1941.6), 노무경찰, 철로경찰 ( 철로보안경찰 철로특무경찰 ), 밀정경찰등이그것이다. 이러한조직의경우경좌급이아니더라도그친일행위가뚜렷한경우수록하였다. 2 2 이상의내용들은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편, 친일인명사전 1, 수록기준과해설 그리고민족문제연구소편, 일제식민통치 기구사전 의군, 경찰관련내용을전재한것이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05
총동원체제의나팔수 - 친일영화 이준식민족문제연구소연구위원 1. 왜영화인가? 일제는영화의대중적영향력을중시했다. 보기를들어 1940 년부터 1941 년까지 2차고노에 ( 近衛文 ) 내각에서외상을지냈으며대동아공영권론을제창한마츠오카 ( 松岡洋右 ) 는 백만언의말과글보다영화가제일이다. 어떠한고아한문장이라든가또는귀로듣는것보다도영화가제일빠르게인간의머리에들어간다. 그러므로영화는국운을좌우한다 라고보았다. 이러한주장은당시일제지배권력에서보편적으로나타나고있었다. 일제는영화를사상전의가장중요한 무기 로간주했다. 특히조선의경우오락기관이적기때문에 영화가지닌영향력, 지도력은다른무엇보다도뛰어나다. 영화의중요성은내지 ( 內地 : 일본 ) 에서갖는그것보다도실질적으로는몇배 라고보았다. 따라서일제는전시총동원체제에들어서면서 영화신체제 또는 영화임전체제 로불리던영화통제체제아래영화를철저하게통제하려고했다. 2. 일제는어떻게영화 ( 인 ) 를통제하려고했는가? 총동원체제이전만하더라도일제가영화정책에서중점을두고있던것은검열이었다. 검열의핵심은 나쁜 사상이조선민중에게파고드는것을방지하는데있었다. 검열을중심으로한소극적인영화정책은 1930 년대중반까지지속되었다. 일제는중일전쟁을일으키고국가총동원법 (1938) 을실시한것을계기로영화통제의질적전환을모색하기시작했다. 국민을국가가원하는방향으로동원하는장치로서의영화를통제하기위해독일과이탈리아의경우에따라영화법을제정한것이그출발점이되었다. 그리고조선에서도조선영화령 ( 이하영화령 ) 이 1940 년 1월에공포된데이어같은해 8월부터시행되었다. 영화령제정을전후해조선총독부는조선에서는영화가끌어들일수있는관객의수가많고따라서일본보다영화 10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통제의중요성이더크다는담론을집중적으로내놓기시작했다. 영화는 전시하국민생활에빠뜨릴수없는오락인동시에국책수행상의유력한무기 ( 池田國雄 ) 로간주되었다. 그리고식민지조선의특수성을반영해국책의핵심은 내선일체 와 황민화 로규정되었다. 곧조선의국민영화는 내선일체, 황국신민으로서의생활의기쁨을느낄수있는분위기를양성하는영화 라는것이었다. 영화령은영화정책에일대전환점이되었다. 전환의핵심은보아서는안되는영화가상영되는것을규제하는정책에서반드시보여주어야할영화를보도록하기위해제작, 배급, 흥행에이르는영화의모든과정을체계적으로통제하는것이었다. 그것은완성된영화에대한통제만이아니라앞으로만들어질영화에대한통제, 더근본적으로는영화를만드는데참여하는영화인과영화제작 배급기구까지일제의의도에맞게정비하는통제까지포함하는것이었다. 영화령의주요내용은영화사업과종업자 ( 從業者 ) 의등록제, 외국영화의수입제한, 우수영화장려, 문화영화강제상영, 대본사전검열, 국가가인정한영화를제외하고는연소자 (6세~14 세 ) 의영화관입장금지등이었다. 예를들어이전의검열이완성된영화를갖고하는것이었던데비해극본의사전검열제도가병행되었다. 이는한마디로극본을쓸때부터국책에어긋나는내용을포함시키는것은생각도하지말라는뜻이었다. 조선통치에지장을초래할염려가있는것, 국체관념에오해를낳을것같은사항, 국사 ( 일본사 ) 의사실을왜곡하는것같은사항, 내선일체를저해하는사항, 기타현재의시국인식에오해를낳을만한사항 이라는추상적인문구가검열의기준으로제시되었다. 특히중요한것은검열에식민지적특수성이반영되어있었다는사실이다. 이를테면조선에서는정오의사이렌에맞추어 전몰용사의영령에감사하고황군 ( 皇軍 ) 의무운을비는 묵도를하는것이관례적으로의무화되어있었다. 그런데일본에는정오의묵도라는제도자체가존재하지않았고따라서일본에서제작된영화에는정오에국민들이묵도하는장면도나오지않았다. 이경우비록선전영화일지라도정오의장면만은조선통치의방침에어긋난다는이유로모두삭제의대상이되었다. 영화령가운데가장중요한것은영화사업의등록제였다. 영화령의핵심은이제도를통해영화의제작및배급을통제하는데있었다. 그리하여 1942 년 2월먼저사단법인조선영화배급사 ( 이하영배 ) 가창립되었고 9월에는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 이하조영 ) 가창립되었다. 사단법인의형태를취한영배는처음부터조선총독부의직접통제아래놓여있었다. 창립위원장이경무국도서과장이었다든지실제로창립된이후사장에는민간인이취임했지만실무를맡는상무에는경무국영화검열실검열주임출신으로전라북도경찰부경제경찰과장이던오카다 ( 岡田順一 ) 가취임했다는사실은영배의성격을잘보여준다. 한편조영의경우형식적으로는주식회사의형태 1 를띠고있었다. 1 주요주주는가운데는친일파인하준석, 박흥식, 방태영, 이근택, 정운갑, 삼양사 ( 김연수 ) 등이포함되어있었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07
그러나정관상주주총회에서선임한취체역에대해서도총독의승인을받도록되어있었다는사실에서알수있듯이조영도사실상조선총독부의통제아래있었다. 여기에일제는조영의영화제작을 고도국방국가의요구에따르는것 으로통제하기위해상위기구로영화기획심의회를설치했다. 심의회는규정상조선총독부산하의황도문화협회안에설치한다고명문화되어있었다. 따라서황도주의를선전하는영화를만들도록조영에압박을가하겠다는것이일제의의도였던것이다. 조영이설립된후기존의영화사는자동적으로등록이취소되었다. 영화인들은대부분조영에입사함으로써일제의영화통제를따르는모습을보였다. 그러나조영도그리오래가지는못했다. 전황이극도로불리하게전개되고있던 1944년 7월일제는조영과영배를합병했다. 제작을담당하던조영을해산한뒤일체를영배에인계하는형식의합병이었다. 그리고영배는제작과배급을병행하는사단법인조선영화사로바뀌었다. 당연히조영의사원대부분이다시조선영화사사원이되었다. 3. 영화인들은영화통제를어떻게받아들였나? 현재남아있는기록으로는영화통제에대한반대의사를표명한영화인은한명도없다. 영화령제정의소식은조선의영화인들을 유사전야의흥분 상태에빠뜨렸다. 영화인들은영화통제체제에대한기대를숨기지않았다. 이러한분위기에앞장을선것은제작자인이창용, 이재명, 최승일, 감독인이규환, 안종화, 안석영, 서광제, 박기채, 최인규, 김정혁, 이병일, 방한준, 배우인이금룡, 김한, 평론가인주영섭, 임화, 이헌구, 오영진, 작가인유치진, 이광수, 김기진, 그리고언론인인유광렬, 백철등이었다. 이들은언론매체의좌담회나기고문을통해영화통제에대한지지를표명했다. 그가운데일부만뽑아도아래와같다. 좌담회李載明 安夕影 安鍾和 金正革 林和 柳致鎭 柳光烈 白鐵, 映畵文化人懇談會, 每日新報 1940 년 2월 10일李創用 李載明 安鍾和 朴基采 崔承一 崔寅奎 李圭煥 安夕影, 事變三週年과半島文化의黎明 ( 座談會 ), 每日新報 1940 년 7월 8일廣川創用외, 朝鮮映畵新體制樹立のために ( 座談會 ), 映畵旬報 30, 1941 白鐵 日夏英太郞 ( 許泳 ) 廣川創用 崔寅奎 李載明, 座談會朝鮮映畵の全貌を語る, 映畵評論 1941 년 7월安夕影 朴基采 方漢駿 林和 李創用 徐光霽 李炳逸 李錦龍외, 朝鮮映畵의新出發 ( 座談會 ), 朝 10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光 8 권 1 호, 1942 기고문李創用, 高麗映畵의今後, 朝光 5권 11호, 1939 李創用, 企業化의確立, 每日新報 1940 년 1월 1일李創用, 映畵界와新體制, 每日新報 1941 년 1월 3일李載明, 實際製作의第一步, 每日新報 1940 년 1월 3일李載明, 國家와映畵, 每日新報 1940 년 8월 8일李圭煥, 映畵界展望 - 映畵人들의心身安定이必要, 朝光 6권 1호, 1940 李圭煥, 우리銀幕打開策 - 才德兼備의企業家를待望, 朝光 4권 6호 1940 安鍾和, 映畵의文化的意義, 每日新報 1939 년 3월 24일安鍾和, 우리銀幕打開策 - 大資本의企業體를要望, 朝光 4권 6호, 1940 安鍾和, 新體制에順應하는朝鮮映畵의將來, 每日新報 1940 년 9월 13일~18 일安鍾和, 新體制와映畵人協會의任務, 三千里 13권 6호, 1941 安鍾和, 映畵刷新의時映畵의國家使命, 每日新報 1941 년 10월 27일~29 일安夕影, 米國映畵와朝鮮, 朝光 5권 7호, 1939 安田榮, 大東亞戰과映畵人의任務, 每日新報 1941 년 12월 18일, 20일徐光霽, 朝鮮映畵界의新秩序 - 映畵令 과 映畵人協會 組織에對하여, 朝光 5권 10호, 1939 徐光霽, 新體制와映畵, 人文評論 1940 년 11월호徐光霽, 最近의朝鮮映畵界, 每日新報 1941 년 10월 7일~9일徐光霽, 映畵界의總決算映畵人의國家理念把握, 每日新報 1941 년 12월 16일~17 일朴基采, 實施되는映畵令, 每日新報 1940 년 2월 5일方漢駿, 우리銀幕打開策 - 豊富한財團과機械條件, 朝光 4권 6호, 1940 金正革, 映畵의精神, 文章 2권 1호, 1940 金正革, 朝鮮映畵의現狀과展望, 朝光 6권 4호, 1940 金正革, 企業의合理化를樹立하라- 映畵界上半期總決算, 朝光 6권 8호, 1940 金正革, 映畵令의實施와朝鮮映畵界의將來, 朝光 6권 9호, 1940 金正革, 朝鮮映畵振興策의目標, 三千里 13권 1호, 1941 金漢, 銀幕遺憾, 朝光 6권 12호, 1940 朱永涉, 朝鮮映畵界展望, 春秋 1권신춘호, 1941 林和, 朝鮮映畵論, 春秋 1권 10호, 1941 李軒求, 萎縮의一年 - 映畵, 文章 2권 10호, 1940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09
吳泳鎭, 映畵と朝鮮大衆, 映畵評論 1943 년 1 월호 八峯生, 朝鮮映畵の新出發, 春秋 2 권 8 호 1942 李光洙, 新體制下의藝術의方向 - 文學과映畵의新出發, 三千里 13 권 1 호, 1941 그렇다면영화인들은왜일제의영화통제를지지했을까? 첫째, 최초의문화입법 이라고불리던영화법과영화령에의해영화가국민문화로인정을받고영화 ( 인 ) 의사회적지위가향상되었다고생각했다. 지금까지의붓자식취급을받고멸시속에소외당하던조선영화 의 지위를결정적으로확립 시킨것은 정책 이었으며따라서 조선영화도시대에어울리는강도높은정치성 을요구받을수밖에없다는것이었다 ( 오영진 ). 영화령에따른등록제가영화인의 사회적지위를향상 시키고 직업인으로서의자각과의무를촉진 하는한편 최저의생활과최대의명예 를약속 할것이라는기대도있었다 ( 주영섭 ). 심지어 새로운시대의권력자 라는자부심을토로하는영화인도있었다 ( 김정혁 ). 둘째, 영화령의주요내용가운데하나인제작및배급의일원화를통해조선영화계의최대약점으로꼽혀오던자본부족의문제를해결할수있을것으로기대했다. 분산적인자유방임의영화기업기구 를타파하고 대자본의강력한기업체의생산기관 이출현하면조선영화계가더발전할것이라는환상을갖고있었던것이다 ( 김정혁, 서광제 ). 또한자본문제와도밀접하게관련된기술문제의해결에대한기대를품고있던영화인도적지않았다. 제작자와자본가의입장에서는자유경쟁의제한이란매우매력적인것이었다. 일단일제의의도에따라독점적사업자로지정이되기만하면엄청난이윤을안정적으로획득하는것이가능했기때문이다. 셋째, 해외영화의규제와해외시장개척에대한기대가컸다. 영화인들은미국영화의규제가조선영화의새로운활로가될수있을것으로생각했다. 아울러조선의관객만으로는충분한이윤을획득하기어렵기때문에일본과만주를포함한 대동아공영권 에시장을개척할필요가있다고보았다 ( 주영섭, 김정혁, 윤봉춘 ). 해외진출에대한기대는일제가내세운대동아공영권의논리에의포섭으로이어질가능성을갖고있었다. 조선영화가살아나갈길은내지에시장을얻는것이다. 제국의북지 ( 北支 : 화북 ) 대륙진출과아울러그지방에안정의뒤를따라조선영화도내지영화와함께북지에서외국영화의등을밀고진출하지않으면벌써금일조선영화의생명은없어질것이다 라는주장이이를잘보여준다 ( 서광제 ). 넷째, 영화통제가당시영화계에서문제가되고있던, 상업주의영화특히미국영화로인한도덕의타락을배격하는기회가될것이라고기대했다. 안석영은 1930 년대말에이미미국의상업주의영화가대중을타락시키는것을 코카인 으로비유하면서 나는이런미국영화를즐겨하지않는다. 라고주장한바있었다. ( 영리를목적으로 ) 저열한작품을제작하여대중에게악영향을준다. 고본이광수도마찬가지였다. 이러한생각은구미로부터이입된 자본주의, 자유주의, 상업주의 를 11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배격하고 전체주의사상밑에서국가를위하고다시한걸음더나아가서대아세아주의사상밑에서동아신질서건설과동아공영권의수립을근저로한문화활동 ( 이광수 ) 으로서의영화제작을적극지지하는것으로이어졌다. 한편영화기획심의회위원이던유치진의경우도 나는대중의영혼을좀먹는퇴폐적인저질상업극보다는국민극이낫다는생각을했었다. 내가국민극운동에동참한가장큰이유도바로영리만능의경제구조에서괴뢰화되어가는우리연극을영리의구속에서해방시켜서연극본연의자태로되돌아가게하자는데있었던것 이라고술회한바있다. 여기서연극을영화로바꾼다면유치진이일제의영화통제체제에적극참여한이유를충분히짐작할수있다. 그렇다면이무렵조선의영화인들이생각하던건전한영화의구체적인내용은무엇이었을까? 그것은 국어 ( 일본어 ) 의보급, 내선일체의철저, 일본정신의파악, 필승체제에의적극적협력, 직업봉공, 증산, 저축, 개로 ( 皆勞 ) 의실천, 방공 ( 防空 ) 방첩정신의앙양, 동양윤리사상의함양, 시사인식의강화 곧 황민화, 총력전의고조, 건전오락 을주요내용으로하는것이었다 ( 김기진 ). 영화통제체제를지지한영화인들은 당국의알선 에의해 1940년 2월조선영화인협회를결성했다. 창립당시간부는회장안종화, 상무이사안석영, 이사이규환, 이명우, 서월영, 상무평의원김택윤, 평의원서광제, 최인규, 양세웅, 김한, 이필우, 서기김정혁등이었다. 조선영화인협회는 일본영화의일익으로서 내선일체의실을거두기를기한다 라는목적에서알수있듯이영화령의실시를앞두고영화인들에대한정지작업을벌이려고한조선총독부의 외곽단체 였다. 조선영화인협회는영화령에따라실시된영화인등록제의영화계측파트너역할을담당했다. 기능심사위원회의안종화, 안석영, 이규환, 김한, 서월영, 양세웅, 이명우, 김정혁은모두조선영화인협회의간부였다. 영화인들은극소수를제외하고는등록제에응했다. 등록이되지않는다는것은사상이나능력에문제가있다는것을의미했다. 기능심사는단순했다. 문제는경찰의신원조사였다. 일제에따르면등록제는 국민 이라는자각이결여된영화인은등록시키지않는다는방침을세웠다. 미등록자에대해서는영화령에의해단역으로출연하는것외에는일체의영화활동이금지되었다. 당시 100여명을조금넘던영화인가운데최종적으로기능등록에서빠진사람은윤봉춘을비롯해극소수였다. 나머지영화인은대부분기능등록에참여했다. 심지어나중에일제의선전영화를만들수없어영화계에서발을뺐다고하는윤봉춘, 이규환, 전창근도처음에는등록에응했다. 영화인들은등록을통해일제의영화통제를수용한셈이었다. 이와관련해 삼천리 에서 1941 년초에실시한흥미로운설문조사결과가있다. 설문의내용은 신체제의영화로써당장제1착으로어떤것을만들고싶습니까 ( 감독제씨 ) 또어떤영화의어떤역을맡고싶습니까 ( 배우제씨 ) 라는것이었다. 그런데이설문에대한영화인특히연기자의응답에는몇가지유형이나타나고있었다. 먼저연기자가운데몇명은적극적으로통제체제에부응하는배역을맡고싶다는뜻을피력했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11
다. 이를테면한은진은 내가남자라면 히틀러일대기 에히틀러역을해보았으면합니다 라고했고, 이금룡은 새동아를건설하는조선청년의씩씩한행동을주제로한작품의주인공역 을맡고싶다고했다. 그리고전택이, 한일송, 장진은각각 전운속에활약하는반도인장교, 시국색을가미하고예술적 인영화의 지원병, 국가이념을고취 하는영화의 돌격대 역을희망했다. 응답의내용을보면한은진등의경우에는상당한정도로내선일체의이데올로기를내면화했거나적어도영화통제체제에적극부응함으로써자신의입지를강화하려는의도를가졌을가능성이있다. 한편김한과독은기는각각 연기자로서어느역이든지소화, 신체제의영화로나어떤영화에서든지연기자로서그저성의와마음준비는꼭같을줄압니다 라는답을했다. 곧영화계에몸을담고있는이상내용과는상관없이 좋은 영화를만들수있으면된다는생각을드러낸것이다. 이들은전자에비해내선일체의내면화정도는약하지만영화인들에게서잘나타나는기술주의때문에영화통제체제에쉽게동화될수있었을것이다. 영화통제체제로편입된영화인들이벌인활동은크게두가지로분류된다. 그하나는영화를만드는것이었고다른하나는영화이외의분야에서활동하는것이었다. 이가운데기본이된것은당연히전자였다. 그런데영화통제체제아래만들어질수있는영화는일제가원하는영화곧조선민중을전쟁에동원하기위한선전영화였다. 이시기에만들어진영화의핵심은지원병제도나징병제와관련해내선일체를대중에게선전하는데있었다. 선전영화를만드는데중심역할을한친일영화인 2 은김정혁, 이창용, 최승일, 홍찬 ( 이상제작 ), 김영화, 이익, 박기채, 방한준, 서광제, 신경균, 안석영, 이병일, 최인규, 허영 ( 이상연출 ), 김학성, 양세웅, 이명우, 최순흥 ( 이상촬영 ), 김소영, 김신재, 김일해, 김한, 남승민, 독은기, 문예봉, 복혜숙, 서월영, 심영, 이금룡, 최운봉, 황철 ( 이상연기 ), 안종화, 이재명, 유치진, 주영섭 ( 기타 ) 3 등이었다 (< 표 1> 참조 ). < 표 1> 친일영화인의영화활동 이름 분야 창씨개명 조영 주요활동 金正革 제작 선전과장 국토방위를위해 李創用 제작 廣川創用 집없는천사, 승리의뜰, 복지만리, 망루의결사대 崔承一 제작 지원병 洪燦 제작 군용열차 方漢駿 연출 연출 승리의뜰, 거경전, 병정님 2 친일인명사전 에수록된것을기준으로한명단이다. 3 이가운데심영, 황철, 유치진, 주영섭은 친일인명사전 에연극분야로분류되어있다. 11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崔寅奎연출星寅奎연출 망루의결사대 ( 기획 ), 태양의아이들, 사랑과맹세, 신풍의아 이들 朴基采 연출 연출 우리는이제간다, 조선해협 徐光霽 연출 達成光霽 연출 군용열차 李翼 연출 국기아래나는죽으리 許泳 연출 日夏英太郞 그대와나 安夕影 연출 安田榮 연출주임 지원병, 흙의결실 申敬均 연출 大空敬均 연출 감격의일기, 우리들의전쟁, 혈과한 金永華 연출 우러르라대공 李炳逸 연출 연출 반도의봄, 반도의소녀들 金學成 촬영 金井成一 촬영과기사 집없는천사, 거경전, 조선에온포로, 반도의소녀들 梁世雄촬영三原世雄촬영과주임 李明雨촬영瀨戶明촬영과기사 반도의봄, 군용열차, 우러르라대공, 감격의일기, 우리들의전쟁, 반도의소녀들 우리는이제간다, 지원병, 복지만리, 조선해협, 소화19년, 병정님 崔順興촬영 승리의뜰, 최후의승리, 조선에온포로 獨銀麒연기光成建연기자 군용열차, 조선해협, 젊은자태, 거경전, 신풍의아이들, 우 리들의전쟁, 혈과한, 사랑과맹서 徐月影연기연기자 반도의봄, 우러르라대공, 조선해협, 젊은자태, 거경전 金漢연기星村洋연기자 군용열차, 집없는천사, 조선해협, 젊은자태, 병정님 李錦龍연기香山長春연기자 지원병, 조선해협, 젊은자태, 거경전, 병정님 崔雲峰연기高峰昇연기자 국기아래나는죽으리, 지원병, 그대와나, 조선해협, 젊은자 태, 태양의아이들, 감격의일기, 우리들의전쟁 沈影연기靑木沈影 복지만리, 그대와나, 망루의결사대 金一海연기金山正錫연기자 南承民연기연기자 국기아래나는죽으리, 지원병, 집없는천사, 우러르라창공, 반도의봄, 조선해협, 거경전, 병정님, 우리들의전쟁 우리는이제간다, 조선해협, 병정님, 태양의아이들, 우리들의전장 金素英연기연기자 반도의봄, 그대와나, 거경전, 감격의일기 金信哉연기星信哉 卜惠淑연기富川馬利연기자 文藝峰연기연기자 집없는천사, 그대와나, 조선해협, 망루의결사대, 태양의아이들, 거경전, 신풍의아이들, 혈과한 반도의봄, 조선해협, 젊은자태, 거경전, 병정님, 감격의일기, 사랑과맹서 군용열차, 지원병, 집없는천사, 그대와나, 조선해협, 젊은자태, 태양의아이들, 사랑과맹서 黃澈 연기 平野一馬 젊은자태 安鍾和 기타 安田辰雄 조선영화인협회회장, 황도학회발기인, 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위원 李載明 기타 기술과장 황도학회발기인, 조선영화사기술과장 柳致眞 기타 영화기획심의회위원 朱永涉 기타 松村永涉 다수의친일평론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13
한편영화통제체제에포섭된영화인들은영화를만드는것이외에도다양한방법으로일제의파시즘체제에동원되었다. 더많은조선인을전쟁에동원하려는일제의입장에서대중에게인기가있는영화인 ( 특히연기자 ) 들은매우유용한존재였다. 따라서일제는영화인을전쟁선전에적극활용했다. 몇가지보기를들면다음과같다. 1941 년 9월문예봉, 심영등은경성에서전쟁채권가두판매활동을벌였으며, 조선영화인협회의안종화, 안석영, 서광제등은부여신궁 4 에서근로봉사활동을벌였다. 그리고일부영화인들은조선영화인협회외에일제가만든각종친일단체에가입하기도했다. 5 그러나그보다더일반적이고도효과적인것은신문과잡지의좌담회에참여하거나글을기고함으로써일제의선전정책을지지하고선전영화를홍보하는것이었다. 6 4. 친일영화인들은어떤영화를만들었나? 영화통제체제로의전환을통해일제는조선인의전쟁동원을선전하는영화를제작하고배급하는틀을갖추게되었다. 실제로영화통제체에서제작된영화는대부분전쟁동원과직결된친일영화였다 (< 표 2> 참조 ). 그런데일제의지배정책이변함에따라선전의주안점도바뀔수밖에없었다. 그분기점은조선인을전쟁의일선에동원하는제도가지원병제도에서징병제로바뀐것이었다. < 표2> 영화통제체제아래제작된주요친일영화 제목 연도 제작 연출 내용 종류 비고 국기아래나는죽으리 ( 國旗の下に我死なん ) 1939 홍찬 이익 내선일체 문화영화 지원병 1940 최승일 안석영 지원병 문화영화 朴英熙원작, 安夕影각색 4 일제는역사의측면에서내선일체를선전하기위해고대일본과밀접한관계를맺고있던백제의수도부여에신도 ( 神都 ) 를건설한다는계획을세웠다. 이계획의핵심이바로부여신궁이었다. 부여신궁은경성의조선신궁과함께조선의대표적인신사가되었다. 일제는부여신궁을성역화하기위해 1940년부터봉사대라는이름아래조선인들을대거동원했다. 5 보기를들어현재로서는황도학회에는안종화, 안석영, 이재명, 조선임전보국단에는안종화등이가입한것이확인된다. 6 이미언급된것외에沈影, 志願兵映畵 君と僕 에出演한나의感想, 三千里 13권 11호, 1941; 金素英 金素英, 그대와나 의內地撮影日記, 三千里 13권 12호, 1941; 安田榮, 大東亞戰과映畵人의任務, 每日新報 1941년 12 월 18일~20일 ; 白鐵 沈影외, 그대와나 를中心한內鮮映畵人座談會, 每日新報 1941년 9월 14일~23일 ; 黃澈 卜惠淑 金玲 金正革외, 徵兵映畵 젊은자태 座談會, 每日新報 1943년 7월 1일~6일, 8일 ; 丸山定夫외, 映畵 若き姿 を語る ( 座談會 ), 國民文學 1943년 7월호 ; 三千里社編輯局, 李香蘭金信哉會見記, 三千里, 13권 4 호, 1941 등이있다. 11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승리의뜰 ( 勝利の庭 ) 1940 이창용 방한준 지원병 문화영화 복지만리 1940 이창용 전창근 조선인의만주이민및민족협화 극영화 반도의봄 1941 이병일 이병일 영화통제지지 극영화 그대와나 1941 조선군육군성보도부및허영내선일체, 지원병극영화보도부조선총독부후원 우러러대공조선군보도부및 1942 김영화항공선전문화영화 ( 仰げ大空 ) 체신국후원 우리는이제간다총력연맹 1942 ( 我等今ぞ征く ) 조영 박기채 징병제 문화영화 조선해협 1943 조영 박기채 내선일체, 지원병 극영화 조선에온포로 ( 朝鮮に來た俘虜 ) 1943 조영 안석영 영국군포로 문화영화 조선군사령부후원 소화 19년 1943 조영 징병제 문화영화 조선어시나리오 반도의소녀들 ( 半島の乙女たち ) 1943 조영 이병일 총후여성 문화영화 군함기와함께 1943 조영 영광의날 ( 榮光の日 ) 1943 조영 해군특별지원병 문화영화 망루의결사대 1943 東寶 고려내선일체, 조선총독부후원, 今井正극영화영화협회국경수비경찰경무국지도 젊은자태 1943 조영 징병제 극영화 거경전 1944 조영 방한준 어업보국 극영화 해군특별지원병제도기념 병정님 1944 조선군보도부 방한준 징병제 극영화 조선어판 태양의아이들 1944 조선영화사 최인규 징병제 극영화 국토방위를위해 ( 國土防衛の爲に ) 1944 조선영화사 박기채 공출독려 문화영화 승리 1944 조선영화사 박기채 반미 문화영화 영광 1945 조선영화사 문화영화 사랑과맹서 1945 東寶 최인규조선영화사今井正 해군특별지원병 극영화 1945년 5월개봉 감격의일기 1945 조선영화사 신경균 극영화 1945년 7월개봉 우리들의전장 1945 조선영화사 신경균 극영화 1945년 8월개봉예정 신풍의아들들 1945 조선영화사 최인규 극영화 1945년 7월개봉 血과汗 1945 조선영화사 신경균 극영화 1945년 8월개봉 1) 내선일체와지원병제도를선전하는영화 1940 년대초반에만들어진영화의핵심은 1938 년 2 월조선에서실시된지원병제도를대중에게선 전하는데있었다. 그것이가장두드러지게나타나기시작한것은 그대와나 부터였다. 애초에지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15
원병이모두일제가요구하던, 애국심에불타고자질이뛰어난존재는아니었다. 따라서우수한자원을지원병으로모집하기위한선전이필요하게되었다. 여기에일본영화계에서활동하던허영 ( 일본명日夏英太郞 ) 이등장해최초의지원병전사자인이인석을모델로하는선전영화의제작을제안했다. 일제는 그대와나 의제작에지원을아끼지않았다. 미나미 ( 南次郞 ) 총독과조선군사령관이지원병훈련소수료식장면에직접출연하는가하면인원과물자도최대한지원했다. 영화촬영을위해철도를증편또는임시로배차하고전등도새로가설했다. 결정적으로는육군성이나서일본, 만주의영화인까지동원했다. 이영화의주제는제목 7 이상징하듯이일본인과조선인사이의내선일체이다. 8 따라서영화에는조선인의지원병응모 훈련 출정을중심으로주인공인조선인지원병과일본인여성사이의 내선결혼, 9 정오의묵도, 10 조선인의일본어상용, 11 부여신궁참배, 12 백제를매개로한역사상의내선일체에대한설명, 13 조선인여성과일본인여성이한복과기모노를서로바꾸어입는장면등이다양하게그려지고있다. 그러나무엇보다도이영화에서군과허영이조선인관객에게전하려고한메시지는조선인지원병이 이중대한시국의모든책임을내지의청년에게만지워서는안된다. 우리반도인이총을갖고황국을위해일어나야한다. 고이야기하는장면에잘압축되어있다. 한편 망루의결사대 는조선과만주의국경을지키는경찰의활약을그린영화이다. 이영화는직접지원병제도를다루고있지는않지만그전제가되는내선일체의문제를주제로삼고있다. 감독인이마이는나중에전쟁협력영화인 망루의결사대 를만든것이자기일생에서가장부끄러운 7 허영에따르면 きみ즉그대라는것은일반내지인의총칭이요ぼく즉나는일반조선인의총칭으로서그대와나는굳게손을잡고대동아공영권의초석이되자는것을의미 한다는것이었다. 8 이하 그대와나 에관한서술은시나리오에따른것이다. 9 한일본인은자신의의매 ( 義妹 ) 에게조선인지원병과의결혼을권유하면서그이유로 내선결혼은우생학적으로매우좋은것이어서후생성에서도총력연맹에서도특히내선결혼을장려한다 는점을내세우고있다. 10 지원병을비롯해조선인들이정오에묵도하는장면에서한어린이가그냥가는노인을붙잡고 매일한번영령의명복과전지의군인들의무운장구를기도 하기위해묵도를하는것이라고설명한다. 그러자노인도어린이의말을알아듣고묵도한다. 여기서내선일체를이미내면화한어린이와그렇지못한노인세대의대비가흥미롭다. 11 이영화에서는주인공의부모를제외하고는모든조선인이일본어를사용하고있다. 곧 국어 상용의실천을영화를통해보여주고있는것이다. 12 부여출신의지원병인주인공이훈련을마치고전선으로출동하기전에부여신궁을참배하면서 부여신궁이완성되면우리고향은조선의우지야마다 ( 宇治山田 ) 시가될것 이라고이야기하는장면이나온다. 우지야마다는일본의대표적신사인이세신궁 ( 伊勢神宮 ) 이있는곳이다. 따라서이장면은조선인에게신사참배를독려하는의미와아울러부여신궁과이세신궁을등치시킴으로써조선과일본의일체화곧내선일체를보여주는의미를갖는것이었다. 13 한일본인에따르면 우리선조는이미 1,300년전에부여를중심으로내선일체를거두고있었다 는것이다. 따라서이제조선인은일본인의 반도의형제 로그려진다. 11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일이었다고회고했다. 이영화에는일제의내선일체정책이충실하게반영되어있다. 먼저내선일체는경찰의민족별구성에서부터잘나타난다. 국경을지키는 7명의경찰가운데지휘관인다카즈 ( 高津 ) 경부보를포함한 4명이일본인이고 3명이조선인이다. 이들의임무수행에민족적차별성은나타나지않는다. 그리고두명의경찰이죽는데그가운데한명은조선인이다. 이조선인경찰은임무를수행하다가목숨을잃는다. 그리고 순국 을통해일본인과같은반열에올라선다 (< 사진 1>, < 사진 2> 참조 ). 14 한편죽은조선인경찰의여동생은기모노를입고일본인과더불어궁성요배를하는데그배경에는조선인어린이들이부르는기미가요가깔린다. 마을의조선인노인들은모두일본어를익숙하게사용하고있다. 이는모두조선인사이에서이미내선일체가체현되고있음을보여주려는의도에서나온장면이다. < 사진 1> 망루의결사대 의한장면 일본인과조선인사이에내선일체가이루어진국 경의마을은사람이살기좋은곳으로그려진다. 15 다카즈의부인이마을사람들의병을치료해주고임산부가애를낳을때는조산원의역할을한다든지자위단의조선인청년이서당에서마을의아이들을가르치는데서도알수있듯이일본인또는일본에협력하는일부조선인에의해마을의모든생활문제가해결되기때문이다. 나아가궁극적으로경찰이 비적 < 사진 2> 망루의결사대 의한장면 으로부터생명과재산의안전을지켜주기때문이다. 그리하여영화에등장하는조선인과중국인은 이렇게편안하게지내는것은주재소덕분 이라는생각을갖고있는것으로그려진다. 이러한의미에서다카즈부부의역할에주목할필요가있다. 먼저다카즈경부보에게주어진가장큰임무는국경을지키는것이다. 이러한공적임무앞에서사적관계는모두거부된다. 어머니가위독하다는소식도애써외면한다. 국가라는대의를위해작은것을희생하는모습이야말로전 14 이영화의마지막장면은죽은뒤에순사부장으로승진한조선인경찰이일본인에의해 받들어총 의대상이되는것이다. 결국이조선인은죽음으로써일본인과의완전한평등을이루게된셈이다. 15 실제로비적에쫓겨국경으로까지흘러들어온한중국인은 비적 의일당이된아들에게 이렇게좋은부락을짓밟으려고하다니? 네이도둑놈들아 라고외친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17
시동원체제에서일제가국민에게요구하는바의핵심을표현하는것이었다. 나아가다카즈는일본인경찰과조선인경찰을차별하지않으며조선인마을사람들과중국인도차별하지않는다. 한편다카즈의부인은마을에서의사이자조산원이다. 그러나그보다중요한것은남편의말에절대복종하는아내의역할을보여준다는사실이다. 이는장기간의전쟁에서국가정책을믿고따르는국민의이미지를대표한다. 다카즈의부인이시종일관남편의의사를따르는것처럼총후국민은일본인이건조선인이건전쟁의승리를위해충실하게국가의정책에따라야한다는의미를내포하고있는것이다. 2) 내선일체와징병제를선전하는영화 1942 년 5월 8일, 1944년부터조선에서도징병제를실시한다는것이발표되면서부터징병제 ( 해군특별지원병제도포함 ) 에초점을맞추어조선민중에게내선일체와전쟁동원을선전하는영화가집중적으로제작되었다. 이를테면 소화 19년 (1943) 은후지 ( 富士 ) 산과금강산이오버랩되는장면에서시작된다. 16 이는후지산과금강산의일체화곧내선일체를상징하는것이었다. 이영화의하이라이트는전사한조선인이야스쿠니신사 ( 靖國神社 ) 에모셔져배례 ( 拜禮 ) 의대상이되고거기에 삶도죽음도영광이고이영광이부모와자자손손에까지이를것 이라는내레이션이깔리는장면이다. 곧이영화는조선인군인도죽으면일본인과마찬가지로호국의영령대접을받고군인으로서의영광은영원히빛날것이라는메시지를전하고있는것이다. 그러나역시징병제를선전하는데일제가중점을둔것은극영화의제작이었다. 그첫작품은일본영화인들이대거참가한가운데만들어진 젊은자태 였다. 이영화를만드는데는일본의도호 ( 東寶 ), 쇼치쿠 ( 松竹 ), 다이에이 ( 大映 ) 의스태프와배우가참여했다. 세회사가경쟁관계에있었다는점을감안할때이례적인일이었다. 그대와나 에이어군의힘이발휘된것이다. 징병제선전을효과적으로할수있는선전극영화를만들기위해군과조영은당시일본의일급감독이던도요타를선정했다. 일제가 젊은자태 를만들면서초점을맞춘것은 다음세대를담당할젊은반도의청년 특히학교를졸업하자마자징병의대상이될중학교 5학년학생이었다. 일제의이러한의도는실제영화가중학교 5학년학생들이학교안에서군사훈련을받는장면으로시작하는데서부터드러난다. 16 이하 소화 19 년 에관한서술은시나리오에입각한것이다. 11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이영화에는조선인학생들에게내선일체를가르치는모범적인인간상으로조선인교사와일본인교관이배치되어있다. 이들은누구보다일본정신을철저하게내면화하고있으며또내선일체를실천하고있다는점에서모범적이다. 조선인교사로일찍이창씨개명을한마쓰다 ( 松田 ) 는제자들에게일본정신에따라살것을가르친다. 그는학교의소사가일을하면서조선어노래를부른벌로 1전의국방헌금을걷으면서노래가부르고싶으면일본노래를부르라고가르칠정도로일상생활속에서도내선일체를철저하게구현하는인물이다. 이러한마쓰다의가르침에따라조선인학생들은발이못에찔려피투성이가되었는데도 어떤곤경에부딪혀도쓰러질때까지해내는 일본정신으로끝까지참고행진을하는존재로그려진다. 이들이영화속에서보여주는젊음은 멋있는군인이되고싶다는정열 에국한된다. 그리하여부모의반대또는건강상의이유때문에군인이되는것이좌절될위기에놓인학생들은눈물을흘리며안타까워한다. 이영화에서내선일체를실천하는것은조선인만이아니다. 교관인기타무라 ( 北村 ) 소좌의경우자신의명령을충실하게따르는조선인학생에대해칭찬을아끼지않는다. 나아가전선에나가싸우고있는조선인지원병에대해서도 훌륭한일본군인 이라고칭찬한다. 명령을잘따르고의무를충실하게수행하는한조선인도일본인과같은대우를받을수있다는것이다. 지원병의가족으로부터는과자대신에매워서눈물이날정도의김치를대접받고맛있게먹는다. 그리고지원병으로전쟁에나가전사한조선인의묘를다른사람이모르게정기적으로참배한다. 당시조선의민중에게허리에칼을찬존재가갖고있던의미를생각한다면일본인장교가조선인의묘를참배하는장면이관객에게어떤메시지를전하려고했는지이해할수있을것이다. 이영화의하이라이트는산악스키훈련을하던중에조난을당한조선인학생들을구하기위해군대가동원되고구출이성공한뒤에부대장이조선인학생도 모두가폐하의赤子 이며 훌륭한병사로입영하기를기다리겠다. 라고말하는장면이다. 사실이한장면에이영화가조선민중에게보여주려는것이함축되어있는셈이다. 내선일체이데올로기가처음등장할무렵만하더라도내선일체는목표였다. 따라서영화통제체제아래의국책영화가운데서도초기의작품들은주로내선일체를이루어야한다는내용을담고있었다. 그런데징병제실시가발표된 1942 년 5월을전후한시기부터는내선일체가이미이루어졌으며그것이조선에서의징병제실시로귀결되었다는쪽으로선전의논리가바뀌었다. 따라서영화도이미내선일체가이루어졌으며조선인과일본인사이에는아무런차별이있을수없음을보여주는쪽으로방향을선회했다. 젊은자태 는이러한메시지를전하는대표적인영화였다. 실제로징병제가실시된 1944년에개봉된 병정님 에서도 적자 론은되풀이되었다. 이영화의주인공은군인이되기를간절하게원하는조선인이아니라입영과동시에 오늘부터황군의병사 라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19
고규정된조선인이다. 최초의조선인입영자들에게부대장은 너희들의뒤에서입대하는수십만의장정은대부분농촌의청년이다. 군은이제부터너희들도농촌의장정도모두한결같이오로지폐하의적자로맞이할것이며그간에하등의차별은절대없다 고훈시한다. 일단군인이된조선인은모두천황의적자이며따라서조선인이고일본인이고간에아무런차이도차별도없다는논리가개진되고있는것이다. 한편 사랑과맹서 는일본인양부모밑에서자라면서방탕한생활을하던영규라는조선인젊은이에관한이야기이다. 그런데영규가유일하게흠모하는인물이있다. 그는조선인여성과결혼함으로써내선일체를실현하고스스로는미국항공모함에비행기와함께몸을던져전사한무라이 ( 村井 ) 라는일본해군장교이다. 영규는무라이의죽음을계기로그동안의삶을반성한끝에무라이의뒤를따르기위해해군특별지원병으로입대한다. 이영화의특징은두가지로요약된다. 그하나는내선결혼에서한걸음아예주요배역의출신민족을애매하게처리하는기법까지도사용하고있다는것이다. 실제로마지막출격을앞두고일부러찾아가작별인사를할만큼무라이와가까운것으로그려진영규의양아버지는일본인인지아니면조선인인지가분명하지않다. 의도적이라고할만큼 < 사진 3> 사랑과맹서 의한장면 < 사진 4> 사랑과맹서 의한장면 기모노를입은여성 ( 영규의양어머니 ) 과한복을입은여성 ( 무라이의처 ) 의다정한모습이자주등장하는것도결국내선일체가이미완성되었음을선전하겠다는제작의도와관련이있을것이다 (< 사진 3>, < 사진 4> 참조 ). 이처럼민족사이의경계가사실상흐트러진것처럼그려내야할만큼전쟁상황은급박하게돌아가고있었고또그만큼전쟁동원선전도절박해지고있었던것이다. 이는전사한무라이의아버지 인시골국민학교교장이학생들에게어서커서무라이의뒤를따르라고가르치는한편전쟁이란이기기도하고지기도하는것이므로결론이날때까지버티는자가진정한승자가된다고역설하는데서단적으로드러난다. 다른하나는이전의징병제영화와는달리해군특별지원병문제를다루고있다는것이다. 일제는 1943 년 8월부터조선에서해군특별지원병제도를시행했다. 이무렵일제는미국해군과의전투에서계속밀리고있었고태평양일대의섬에서는일본군의 옥쇄 가빈발하고있었다. 따라서일제로서는특공대의성격을띤해군병력을보충하는일이시급할수밖에없었다. 당시일본영화계에서이영화에대해 특공대를지원하는조선인의결의, 조선인대상의해군징모용영화 라고평가 12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 사진 5> 사랑과맹서 의한장면 < 사진 6> 사랑과맹서 의한장면 한데서도알수있듯이해군특별지원병이란사실한번떠나면돌아올수없는특공대의성격을띠고있었다. 이영화에는주인공인영규를비롯해여러조선의젊은이들이지원병으로떠나는모습이등장한다. 그럴때마다어른도아이도목이터지도록군가를부른다. 지원병을보내는마을은축제분위기이다 (< 사진 5>, < 사진 6> 참조 ). 이상에서살펴본몇편의선전영화는이상적이고모범적인인간으로가득차있다는특징을공유한다. 영화에등장하는인물들 ( 특히주인공 ) 은일본인은물론이고조선인도모두멸사봉공, 책임감, 충군애국등으로특징지어지는일본정신을철저하게내면화하고행동으로그것을실천해나가는존재이다. 조선인도일본국민이라는자각을갖고있으며 국어 < 사진 7> 사랑과맹서 의마지막장면 < 사진 8> 사랑과맹서 의마지막장면 < 사진 9> 사랑과맹서 의마지막장면 < 사진 10> 사랑과맹서 의마지막장면 에능통하고국가의정책을충실하게따른다. 일제가 1930 년대까지조선에대해언급할때면상투적으로사용하던민도가낮다는이야기는더이상 1940 년대의조선에는적용되지않는다. 내선일체가실현된조선은더이상야만의땅이아니라이상향으로그려진다. 아울러모든영화에서어떤형태로든나라를위한죽음의문제가다루어지고있다는점에도주목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21
할필요가있다. 그대와나 의경우조선인지원병의죽음자체가영화의모티브가되었고실제로훈련소의지원병들이이인석의전사소식을듣고감격하는것으로그려진다. 이후제작된지원병 징병선전영화는모두이미전사한또는기꺼이전사하려고하는조선인을그리고있다. 조선인은죽음을각오하고전선에나감으로써그리고궁극적으로는전사함으로써완전한일본인이되고나아가서는군국주의의상징인야스쿠니신사에까지모셔지게된다. 물론이들조선인이아주특별한존재는아니다. 평범한조선인도국가에대한의무를충실하게수행하기만하면영웅또는신이될수있다는사실을보여줌으로써현실속에서는아무런출세의수단도갖고있지않던조선의젊은이들을기꺼이전쟁터로몰아넣으려고했던것이다 (< 사진 7>, < 사진 8>, < 사진 9>, < 사진 10> 참조 ). 5. 친일영화 ( 인 ) 를어떻게볼것인가? 친일영화란단순히일제의지배정책을선전하는영화가아니다. 그것은일제가 대동아공영권건설 이라는미명아래벌인일련의침략전쟁에조선민중을동원하기위해만든영화, 전쟁동원의전제로내선일체의황국신민화를직접주장한영화를가리킨다. 해방된지 70여년이되어가는오늘에도우리가친일영화를문제시하는이유도바로여기에있다. 친일영화인들은아시아여러나라에지울수없는큰상처를남긴일제침략전쟁을찬양하고전쟁수행을위해조선민중이일본민족과하나가되어야하고그러기위해서는일본제국과천황을위해목숨을포함한모든것을내놓아야한다고선동했다. 차별과억압의논리를바탕으로한파시즘에의맹종은우리민족의독립과해방이세계평등, 인류평등을이루는하나의발판이될것이라고본독립운동가들의생각과극명하게대비된다. 친일영화는단순히민족을배반했기때문에문제가되는것이아니라인류를전멸로몰고갈수도있는파시즘과침략전쟁에의길을따랐기때문에문제가되는것이다. 지나간일이라고해서친일영화에면죄부를주는것은현재는물론이고미래에도영화인더나아가서는전체문화 예술인이그길로갈수있는가능성을열어놓는것과마찬가지이다. 그렇기때문에우리는반인륜범죄, 전쟁범죄로서의친일영화를지금도제대로기억해야한다. 12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강요된선택과합리화사이에서 - 친일의논리구조와변호론비판 김민철민족문제연구소책임연구원 1. 친일청산운동의성격 : 정치투쟁 / 문화투쟁 / 기억투쟁 한국현대사와관련해서친일문제는크게세가지차원에서문제가제기되거나인식되어왔다고할수있다. 첫번째는역사적또는구조적 차원에서제기되는친일파문제다. 친일파들은해방이후국가건설과정에서미국의지원아래분단 단정세력으로등장했고, 친미반공독재체제의중심세력으로성장하면서남한내에서권력을독점하는지배계급으로자리잡았다. 따라서식민지지배와파시즘적전쟁동원 ( 전시동원 ) 체제를유지하는데기능했던통치기구와제도가해방이후에도연속되었을뿐만아니라거기에복무했던친일파들이이전에는갖지못했던국가권력까지장악한지배층으로까지발전함으로써남한사회가안고있는각종모순들의발원지로서기능했다. 즉지배계급또는지배층으로서의친일파에대한문제제기라할수있다. 서중석은친일파를분단체제와반공이데올로기에뿌리를박은세력으로규정하고, 그역사적성격을다음과같이규정한바있다. 구조적차원에서분석한대표적인견해라하겠다. 첫째, 친일파는자신들의반민족적행위를반공이데올로기의작동으로희석시키고은폐하였던바, 그것은또한극우반공독재의영속을추구하는것이었다. 그런데친일파는그본성상어떤독재권력에도봉사할수있게되어있어, 이승만독재, 박정희독재에충실히복무하였다. 둘째, 친일하의득세는민족기강을무너뜨리고, 사회정의등가치관, 윤리관을극도로혼란에빠뜨렸고, 이기주의와부정 부패를사회를움직이는원동력이자기본으로삼게했다. 셋째, 친일파의위와같은성격은인간은어떻게살아야하는가등에대한이념이없고민족문제가배제된근대화지상주의적경제발전모델을만들어내는데이바지했다. 해외종속형발전모델, 재벌경제, 투기경제, 지하경제는이러한경제발전모델에서더욱심각한양상으로산출되었다. 넷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으로주체성이없고외세의존성이강한, 특히친일친미일변도의외세의존적인틀을형성하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23
였다. 문화적으로도해방이후제국주의침략논리나매판문화를무비판적으로수용하고그것이범람한것도문화계의상층또는주도층이친일파라는것에조응하는현상이었다. ( 서중석, 친일파의존재양태와구조적성격, 한국근현대사와친일파문제, 아세아문화사, 2000) 두번째는정치윤리 사회윤리차원에서의접근이다. 친일파를단죄하는일이실패로돌아가고, 이들이한국사회의지배층으로서성장함에따라죄에대한사회적인식이혼란을겪게되었다. 독립운동을하면 3대가망하고, 친일을하면 3대가흥한다 는자조적인인식이사람들속으로내면화되어감에따라오랫동안죄에대한책임추궁을어렵게만들어버렸다. 그러나브루스커밍스가 해방된한국에서도정치적정통성의주된시험기준이일본치하의경력에달려있었다 ( 브루스커밍스, 한국전쟁의기원, 일월서각, 1986) 고말한것처럼, 친일문제는한국지배층의정통성과윤리적결함을비판하는핵심적인요소였기때문에언제든다시불거져나올해묵은과제였다. 민주화이후친일문제가다시본격적으로제기된것은해결하지못한숙제에대한반성과함께새로운정치윤리, 사회윤리를만드는과정의일환이기도했다. 세번째는기억투쟁, 또는역사해석을둘러싼싸움과정에서의문제제기다. 분단과독재체제를거치면서국가권력을독점한친일세력은과거에대한기억마저독점하고있었다. 따라서자신들에게불리한기억을역사에서제거하고유리한기억만집단의기억으로만들고있었다. 1980 년대민주화과정을통해공식적기억에서제거된좌파의역사가되살아나고우파의친일문제가제기된것은바로이러한강요된기억에대한저항이자해체의한과정이었다. 특히이기억투쟁은각종기념사업을놓고첨예하게벌어졌다. 20세기를전후해서사회문제로까지발전한친일전력자의기념사업시비는친일문제가단순한역사해석, 역사인식의문제가아니라현실의문화투쟁이자공동체의사회규범과관련한문제임을보여준다.( 김민철, 기억을둘러싼투쟁, 아세아문화사, 2006) 이처럼친일문제는정치투쟁, 문화투쟁, 기억투쟁의내용을담고있으며, 서로긴밀하게연결되어있다. 그러나시기나상황의변화에따라특정내용이문제해결의중심과제로제기되었기때문에친일파청산운동의과제와양상도다르게전개되었다. 시기별로보아친일파청산운동은크게세시기로구분할수있다. 첫째는 1945~1948 년까지해방이후국가건설nation-building 시기로친일세력이미군정의후원아래한반도의남쪽에서국가권력의중심 ( 행정, 군, 경찰등 ) 을장악해가는과정이었다. 이시기친일파청산운동은국가권력형성에친일세력의배제 ( 공민권제한과공직배제등 ) 와인신구속과재산몰수등의법적 정치적책임추궁을통한직접적인인적청산이주목표였다. 해방공간의권력투쟁에서민족민주세력과좌파의패배는곧친일파청산운동의좌절또는지연을뜻했다. 둘째, 1948~1980 년대중반까지대한민국정부수립과반공독재체제기로친일세력이정치, 경제, 사회, 문화전반에걸쳐지배계급화됨에따라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 이하반민특위 ) 의와해이후친일파청산요구는현실적으로불가능하게되었다. 이시기는반민특위가과제로삼았던 12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친일파에대한물리적청산이진행되던시기와지배세력의방해로좌절된이후의시기로다시구분할수있다. 셋째, 1980 년대후반부터현재까지반공독재세력이쇠퇴하고민주주의가확장되어가는시기로친일파청산요구가사회적으로다시제기되고확대되는시기이기도했다. 그러나이시기의친일파청산요구는청산의대상자체가이미존재하지않아물리적청산이아닌역사적청산의형태로전개되었다. 즉친일문제가역사화의단계에들어섬으로써진실투쟁또는기억투쟁과문화투쟁 ( 가치투쟁 ) 의양상을띠고전개되었다. 진실투쟁 기억투쟁의양상은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보고서와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 친일인명사전 편찬으로일단락되었으나, 문화투쟁또는가치투쟁의양상은여전히진행중이라할수있다. 2000년대중반부터본격적으로제기된뉴라이트세력을중심으로한친일파변호론은가치와윤리를두고전개된새로운형태의청산논쟁이라할수있다. 현대사의전개와청산운동, 그리고억압 년도 추동하는힘 요인 억제하는힘 요인 1945 해방 분단과냉전 1948 제헌헌법, 반민법 ( 반민특위 ) 이승만과경찰 1949 6.6 반민특위습격, 와해 1960 4월혁명, 한국전쟁유족회출범, 부정선거와축재자처벌,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1961 5.16군사쿠데타 1965 한일협정 1966 친일문학론 1972 10월유신 1980 해방전후사의인식 1991 반민족문제연구소설립 ( 민족문제연구소) 2005 노무현대통령의포괄적과거청산정책 뉴라이트출범, 역사공격 해방전후사의재인식 2009 반민규명위보고서, 친일인명사전 발간 이명박정권 ( 반민규명위해소 ), 교과서공격과재편 2. 친일의논리 1. 친일논리에대한내재적접근 1) 근대국민국가수립의좌절과친일논리들 (1) 왜이용구는자신이속았을지도모른다는말을하고눈을감았을까?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25
- 봉건체제를개혁하려던이용구가전봉준과다른길을선택하게된이유는무엇일까? - 동학교도에대한봉건정부의학정과탄압이일본이라는보호막을선택할수밖에없었을까? 외세 ( 일본 ) 를이용한봉건정부의개혁이라는잘못된정치적선택이결국외세를집안으로끌어들이는치명적인잘못을범하였다. (2) 자주적인근대국가를꿈꾸던수많은개화파 문명개화론자들의대일협력을합리화시켜준논리는무엇이었나? 사회진화론 ( 실력양성론 ) 수용과논리적파탄 - 사회진화론수용 : 1900년대의양계초의 음빙실문집 (1903 년상해발행 ) 의전래와그에소개된사회진화론을수용하여민족의실력양성과그를통한국권회복운동전개 - 계몽운동의기본구조 : 弱肉强食, 適者生存즉競爭의論理에따라세계는進步하며, 이는자연의법칙이다. 따라서 살아남기위해서힘을기르자. 힘을기르기위해선우매한민중을계몽해야한다. 교육과산업이필요하다. - 그러나수용과정에서제국주의의논리에그대로노출되어오히려제국주의의침략을합리화시켜주는논리적파탄을맞는다. 1 근대지향성중시 : 文明開化를최우선, 영국의인도지배를긍정 ( 윤치호 ) 한국의식민화인정, 제국주의의시장침탈을독립침해가아니라근대화와독립보장의길로인식 ( 독립협회논설 ) 2 식민지위기를제국주의침략에돌리는것이아니라자신의무능력한문제로돌림으로써결국식민지배를인정하고마는논리적파국초래 ( 내가못났기때문이다!) 3 제국주의침략에대한이중적인식. 일제의침략성을인식하지못함 ( 러일전쟁당시의동양평화론 인종전쟁론 아시아연대론등 ) 일제의보호정치비판 (1907 년경전후 ) - 윤치호와유길준은어디에서갈라지나? 유길준의유교적소양이마지막버팀목이었나? 유길준의삼치론 ( 三恥論 ) 지금조선의개혁은행하지않을수가없지만조선인된자에게는三恥가있습니다. 제가말하는삼치란스스로개혁을행하지못해귀국의勸迫을받았으므로본국인민에대하여부끄러운그하나요, 세계만국에대하여부끄러운것이그둘이요, 천하후세에대하여부끄러운것이그셋입니다. 지금이삼치를무릅쓰고세상에나설면목이없으나오직개혁을잘이룸으로써자기의독립을보존하고남에게굴욕을당하지않으면서開進의실효를거두어保國安民하게되면오히려허물을벗어날수있을겁니다. 만일다시舊弊를그대로행한다면장차또한번의勸迫을초래해국가가앞으로어떤지경에이를지알수없습니다. 吾輩가장치이점에힘써國人의마음이따르면개혁의일을행할수있고, 만일이에통하지못해다만勸勉을행할뿐이라면아마도성공할날이없어亂이먼저일어날듯합니다. ({ 유길준전서 }4, 1894 년 10월일본외상무쓰무네미쓰와의 問答 ) 12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3) 동요하는실력양성론자들 (= 문화주의자들 ) - 1920 년대의독립불능론 : 3 1운동의열망좌절, 국제사회의냉대, 독립은먼미래의일이다. 그렇다면체제속에서근대를성취해야하지않을까?( 종속적발전론, 자치론, 2등국민론 ) - 이광수의 民族改造論 과개량주의이광수의가장중요한논문이면서민족개량주의사상의진수를담고있는 민족개조론 ( 이하 개조론 이라함 ) 은 1921 년 11월에집필되었으나발표를미루어오다가 1922 년 개벽 5월호에발표되었다. 그는먼저현시기를개조의시대라설명하고 오늘날조선사람으로서시급히하여야할개조는실로조선민족의개조 라고단정하면서출발한다. 그런데그때개조의기준이되는것은 야만 과 문명 의구별이다. 즉야만인의행동특징은본능과충동에따른자연적이며우연적인행위인데반해문명인의특징은계획과노력에있다. 따라서개조의방향은야만에서문명으로나가는길밖에없는데, 왜냐하면 현대의문화는국부적이아니라보편적이며, 지방적이아니라세계적이다. 그문화를입은자는살고그렇지못한자는망하기 때문이라는것이다. 그런데조선의현실은어떠한가? 조선민족은시국사정에어두워시세를따르지못하고정신적, 물질적으로피폐해져민족의장래는오직쇠퇴또쇠퇴로점점떨어져가다가마침내는멸망에빠질지경에이르렀으니그원인을진단하고해결책을찾는것이자신의임무라고설명한다. 그는조선민족이미개하고쇠퇴한근본원인을 타락된민족성 즉 허위, 비사회적이기심, 나태, 無信, 怯懶, 사회성의결핍 등에서구하고있다. 이것은곧일본이나서구제국주의가식민지배를합리화하기위해내세운인종주의의재판에지나지않는다. 왜냐하면그의주장대로 英米族의興旺도그민족성이원인이오, 吾族의쇠퇴도그민족성의원인 이라면조선민족이일제의식민지로된것도결국조선민족성이타락했기에일어난어쩔수없는결과이기때문이다. 이렇게해서모든문제는 내탓이오 로귀결되어식민지조선의민족 계급모순은은폐되고나아가자기역사에대한전면적인부정이일어난다. 즉, 그는조선 5백년사를空想과空論의기록, 허위와懶楕의기록이라고강조하면서벌거벗은산, 마른하천, 무너진제방과도로, 쓰러져가는城壘와都會, 게딱지같고도야지우리같은가옥, 이것이 5백년나태한생활의산증거가아니고무엇이냐고강변하였다. 그렇다면타락하고쇠퇴해진민족성을어떤민족성으로개조해야할것이며, 그주체는누가되어야할까. 그는 德體知의三育 (= 務實力行 ) 과富의蓄積, 社會奉仕心 을가진민족으로개조해야한다고설명한뒤, 식민지조선에서정치가, 관리, 상공업자. 교사, 목사, 학자, 문사, 예술가, 신문기자, 지방유지등을여기에적합한인물로보고, 이들을중심으로조선사회를개조해야한다고주장하였다. 이렇게볼때민족개조운동이란부르주아계급이주도하는문명개화운동 = 자본주의근대화운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27
동이라할수있으며, 그가지향하고자했던것도여기에있었다고할수있다. 다음으로조선민족을개조하기위해서는개조동맹단체가필요한데, 이조직은정치적색채를가져서는안된다고몇번이고강조한다. 왜냐하면 어떠한당파의정부, 어떠한주의 정견을가진정부라도容喙할이유가없는단체 라야민족개조사업을해나갈수있기때문이라는것이다. 獨立協會뿐만아니라西北學會를비롯한구한말의각종학회가실패한것도정치적색채를띠었기때문이라단정하고비정치적인靑年學友會를바로그 非政治的 성격때문에이상적모델로제시하였다. 그렇다면이광수가주장한민족개조의내용과방법이조선민족의독립과어떤관련성을갖고있을까? 앞서도언급했듯이현실에대한그의인식은야만과문명의구별에서출발하고있었다. 이러한인식은 3 1운동과이후활화산처럼터져나온민족운동과사회운동에대한평가에서극명하게드러난다. 이것은자연의변화외다. 또는우연의변화외다 또는무지몽매한야만인종이자각없이추이하는변화와같은변화외다 원시시대의민족, 또는아직분명한자각을가지지못한민족의역사는자연현상의기록 이라하여 3.1운동과이후고양된민족해방운동, 사회운동을모두자연의변화, 우연의변화, 야만적인행동으로몰아부침으로써사실상부정하고있다. 이러한인식은민족해방운동에투신한사람들에대한매도로연결된다. 근년의다수의자칭애국지사, 망명객배가중국의고관과부호에게애걸하야사기적으로금품을얻는자가점점증가 한다든가, 우리는수십인의명망높은애국자들을가졌거니와 그네의명망의유일한기초는떠드는것과감옥에들어갔다가나오는것과해외에표박하는것 이라하여비난하는한편, 뜻만좋고아무일도하지않는자 즉, 독립운동가나독립운동지향자를 국가나사회의죄인 으로까지매도하였다. 이렇게까지민족해방운동을부정하는이유는무엇인가? 그에게있어최고의가치는민족의독립이아니라문명화된민족에있었다. 따라서그는조선민족이근본적으로해야할일은 政經大道를취한민족개조요실력양성 이므로 조선인의命運改善에는결코민족개조를除한외에아무지름길도없는것 이라고주장하였다. 이것은그의논리전개상필연적으로도출될수밖에없는것이다. 왜냐하면조선이식민지화된원인이조선민족성의타락에있다고할때, 조선민족이실력을양성하여문명화되면즉민족성개조가이루어져독립할실력이갖추어지면 독립이라는것 도자연히주어지게마련이기때문이다. - 프란츠파농는식민국가의 문화주의자 를다음과같이비판하였다. 식민국가의문화주의자는 3단계의과정을거쳐간다. 서구의신문물을받아들여신사회운동을펴야한다는근대화론자로출발하는것이제1단계이며, 민중의항쟁으로식민현실이동요하기시작하면서보수적민족주의자로변신하는것이제2단계이다. 그리고이들이도달하게되는세번째단계는민족허무주의와민중에대한혐오감을노골적으로드러내는반민중주의로서의식민예찬론자로파국을맞이하게된다고하였다. 12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2) 식민지유산의연속과단절 (1) 친일문학의외적논리와내적논리친일문학에대한그간의성과중하나는친일문학의논리를내재적으로접근하는연구가심화되었다는점을들수있다. 이런성과를토대로채만식의 아름다운새벽 을비평하면어떻게될까. 채만식은 1942 년 2월 10일부터 7월 10일까지 < 매일신보 > 에연재한장편소설 << 아름다운새벽 >> 에서일본인들의神道풍습을조선인도따라할것을청하면서 지금은조선사람스스로가 하루바삐名實을다같이추호도다름이없는 닛본징 이되어야한다. 그리하여야만조선사람으로서의 닛본징 인도리를다함이려니와동시에 닛본징 으로서의조선사람인진정한행복도누리게되게될것이다. 고열변을토했다. 그런데 이부분은해방후판본에서삭제되었다. 이때의 삭제 가갖는의미는무엇일까. 이 삭제 된부분이 아름다운새벽 에서갖고있는의미가무엇일까에따라채만식의친일논리를내재적으로비판할수있지않을까. 특정부분을 삭제 하고서도전체소설의구성이나내용에서변함이없다면, 이 삭제 된부분의내용은무슨의미를갖는가. 우선, 빼도상관없을정도라면그만큼친일논리도형식적이라는설명이가능하다. 이른바생계형친일논리나마지못해주장한것인만큼윤리적비난은가능하나그다지심각한해악을끼치는논리가아니라고할수있겠다. 그러나좀더들어가서, 삭제된부분을제외하고서도글의형식과내용에서식민지기나독립한후에도통용될수있는내용이라면논의는복잡해진다. 충성을할공동체의대상이달라졌음에도통용되는글이라면두가지해석이가능하다. 하나는친일주장과관계없이글이자기완결성을가지고있거나아니면보편적인이야기를할경우이다. 다른하나는충성대상이바뀌더라도 ( 물론이건질적으로중요한이야기이다 ) 충성의형식과내용은그대로통용될수있는경우이다. 후자의경우탈식민주의자들이나 문학속의파시즘 필자들에게국가주의문학또는파시즘으로비판받는대표적인표적이되었다. 이것을과연어떻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29
게해석해야할까. - 혈서지원 (1943 년조명암작사, 박시춘작곡 ) 무명지깨물어서붉은피를흘려서 / 일장기그려놓고성수만세부르고한글자쓰는사연두글자쓰는사연 / 나라님에병정되기소원입니다. - 혈청지원가 (1953 년 ) 무명지깨물어서붉은피를흘려서 / 태극기그려놓고천세만세부르자한글자쓰는사연두글자쓰는사연 / 대한민국국군되기소원합니다. (2) 대한민국제헌헌법부칙 100조의의미 삭제 가갖는상징적의미를토론자는식민지유산의연속과단절이라는형태로문제를바꿔제기하고싶다. 형식논리상으로보면 삭제 된것은단절이요, 살아남은것 은연속이라할수있다. 그렇다면무엇이살아남고무엇이단절되었을까. 또그형식은어떤방식이었을까. 이질문에가장적합한사례가대한민국제헌헌법부칙 100조가말하고있지않을까. 제헌헌법은기존의외국 ( 일본국, 미군정 ) 의규범적질서에관하여헌법의부칙에서이를정하고있다. 즉헌법부칙제100 조에서 현행법령은이헌법에저촉되지아니하는한효력을가진다 고하고있다. 이규정에서말하는 현행법령 은미군정기동안효력을가지고있었던법령을의미한다. 이법령중에는일제강점기에시행된것도있고, 미군정기에성립된법령도있다. 제헌헌법은미군정기를포함한과거의법령들을대한민국의법질서로편입하기위한규정으로부칙규정을두었던것이며, 이는미군정기와이전의법질서를하나의사실상의지배관계로인식하고있음을보여준다.( 이헌환, 2004 : 김창록, 1998) 즉현행법령중헌법정신을기준으로연속과단절을나눈것이다. 그리고단절의최초의상징으로부칙제101 조에따라반민족행위처벌특별법을제정하였다. 나머지의숱한법령들은제정헌법의정신에비추어폐기되거나계승되거나한것이다. (3) 현시점에서친일문제를제대로다루기위해서는당시의친일행위를합리화시켰던논리그자체까지비판적으로검토하는방향으로나아가야할것이다. 왜냐하면당대의지식인들이주장했던친일의논리가해방이후의국가건설에도형식만바뀐채그대로적용되었기때문이다. 이른바친일의 내적논리 라고도부를수있는이주제는친일문제를사상사적으로접근할수있게한다. 천황제나내선일체, 동조동근론따위야해방이되고나면자연히사라질허상에지나지않겠으나침략전쟁과동원에대응했던친일의논리는해방공간과현대사를관통하면서식민지배가남긴근대의유산 ( 식민지배기에형성된근대성이라는말로도가능하다 ) 으로저변에자리잡고있다. 그논 13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리들은대개다음과같은모습을띠고있을것이다. 첫째, 사회진화론 ( 강자의찬미또는힘의숭배 ), 둘째, 전체주의적감각 ( 개체에대한전체의우월성 ), 셋째, 계획주의 ( 자유주의와지주계급에대한공격, 총동원체제의일상화 ), 넷째, 동양의발견과근대의초극 ( 서구문명에대한질시, 그리고쇠락에따른자기위안또는극복으로서의동양주의?), 다섯째, 반공주의등. 2. 해방이후엘리트 ( 식산은행원 ) 의식민지기억 1 1) 역사 : 조선식산은행 (1918) 한국식산은행 (1950) 한국산업은행 (1954) - 맨파워성장론 의사례 (Karl Moskowitz, 조선인개발한국경제성장토대 ) 2) 인식의변화 1 8 15와자기반성의대두 ; 최영철의 식산은행의장래 (1946.1.) 과거의식산은행은일본제국주의의식민지정책을담당하던금융기관이었다. 이제우리의입장에서이렇게설명하는것은용이한일이고의심할여지가없다. 그러나한편에일본제국주의의대변자들이잘말하였듯이일본은조선에철도를부설하고항만을축조하고공장을세우고광산을개발하고학교와병원을세우는등많은시설을남겨주었다고말한다. 따라서식은도많은사업을조성하고다대한공적을남기었다고찬양한다. 이렇게보는것은옳은가. 이것은그러한시설의혜택을입은사람만이하는말이다. 조선민중의다수는다만그러한시설로해서착취와기만을받았을뿐이다. 식은이어떠한기구로그러한착취와기만정책에가담하여왔는가 2 정부수립과부일협력변호의등장 ; 왕창업, 春風秋雨二十年 (3) (1950.4.) 悲憤慷慨之士는아주세상을버리고산간에운둔하거나해외로망명하는길을취하였고좀더타협하여일인에의협조자일인의수족됨에만족하였던 혹은官界로 혹은일이의주재하는경제기관에들어가보조자가되면이들과손을잡어일인의먹고남은餘瀝을감수한이도많았다. 이들은해방후욕도많이먹고소위反民法으로고생도많이하였지만은필자로보면이것은誰知鳥之雌雄格으로어느놈이옳은지속단키어렵다고생각된다 伯夷叔齊의뒤를따르거나감연히해 1 정병욱, 해방이후식산은행원의식민지기억과선택적인식 - 행우회잡지 無窮 (1946~1953) 을중심으로 역사와현실 제 48 호 (2003.6) 참조.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31
외로나아가민족국가의광복에挺身함이당연할것이나현실의不適천하의대세로써는정복자의수족이되고寇讐의앞에무릎을굽히어일시의부끄러움을참고현실의생을유지하면서정복자의優點長點을부지런히배우며자신의결점단점을개선하며힘을길러후일시기의도래에대비한越王句踐의고사를본받음도결코그리부당한것으로생각되지는아니하며一步더나아가먹고입는것으로하늘을삼는凡人匹夫의衆庶가세력과권위앞에一時의타협자一時의수족이되었다한들그리깊이책할바는없지아니한가한다 3 한국전쟁과전통의강조 ; 강대웅, 부흥자금과설치의의의와과업 (1953.10.) 당행은장기산업금융취급의특수은행으로서과거 35년간한국의산업발전과국토개발에진력하여왔으며如斯한전통과여기에적합한기구및역량을보유함으로써금후의戰災재건과경제부흥에관하여는이에적극적으로참여하고정부시책에협조하여야만할중요사명을지니고있다할것이다 3. 친일청산반대론비판 1. 해방공간 해방당시친일파청산이라는민족적요구는하나의상식처럼받아들여졌다. 그러나남한에미군이진주하고분단과냉전체제가수립되어가자이상식은위협을받게되었다. 즉친일파와이들을비호하는세력들이각종의논리를만들어친일파청산을부정하고나선것이다. 해방공간에서나온반대론은크게공범론, 생존론, 인재론, 순교론등으로정리할수있다. 1) 친일파아닌사람누가있느냐, 전민족이친일파이다. 친일파들이대표적으로내세우는주장으로이른바공범론이다. 식민지배하에서세금안낸사람없고, 일제의법률을존중하지않은사람없고, 일본말을썼고교육을받았고, 황국신민의서사를외웠고, 신사참배를했고, 일제의관제행사에동원되었고, 심지어는성과이름을갈았다. 그렇기때문에앞선자와뒤에선자의차이는단순히능력의차이이고우연의문제이고결국 50보 100보의문제이다하는주장이다. 즉국내에살면서일제와싸운사람이아니면모두가일본에협력한친일파라는것이다. 개화의선구자 였다가대표적인친일파로변절한윤치호역시같은변명을하였다.([ 한노인의명상록 : 1945.10.20.] 김상태편역 { 윤치호일기 }) 이것은식민지배가장기에걸쳐진행된데다국내의상황이엄혹했다는것과도관련이있지만여기에는중요한함정이담겨있다. 이주장은결국전민족을죄인으로만들겠다는것이다. 그래서 13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모두가죄인이되면누가누구를심판할수도없고또전원을심판할수는없는것이니결국친일파청산문제는없어지게되는것이다. 물론친일파도엄밀한의미에서는일본인에게민족적차별을받은피해자였다. 하다못해강우규의사를체포하는데큰공을세워일제로부터두터운신임을받았던김태석이라는형사조차자신보다아래인일본인형사보다차별대우를받았다고투덜거렸다. 그러나위의논리대로라면고등계형사나일반농부나다피해자이기때문에고등계형사가청산의대상이될수없는것이다. 가해자와피해자를같은범주속에섞어버림으로써살기위해세금을낸사람과능동적으로국방헌금을한사람을의도적으로구분하지않은것이다. 경북영덕지방에 문명기 라는유명한친일파가있었다. 일제가중국을한창침략하고있을때그는자신이경영하던광산을팔아조선군사령부에비행기한대를헌납하였다. 그러자일제는이것을대대적으로선전하면서군 ( 郡 ) 단위별로비행기 1대헌납운동을벌였다. 문명기는그댓가로일본신을상징하는가미다나 ( 神棚 ) 를집집마다공급하는독점권을따내떼돈을벌었다. 가미다나란신궁모양으로된나무상자를집안정면높은곳에설치한후, 그안에 천조황대신궁 ( 天照皇大神宮 ) 이라쓴일종의부적같은것을넣어둔것으로아침저녁으로드나들면서절을하게함으로써황민의식과충성심을주입하려는것이었다. 이것을어찌사할린으로징용당한노동자가일본인의절반밖에안되는임금에서강제로수탈당한국방헌금과같다고할수있는가. 또한학도병으로나가천황을위해싸우다죽으라고독려하는지식인과학도병으로끌려가개죽음을당한사람을똑같은피해자라고과연주장할수있는가. 이것은마치 죄없는자저여인에돌을던져라 는논리를이용하여조선인모두를공범으로몰아세움으로써진정참회하고죄값을치러야할친일파까지면죄부를부여하려는불손한의도가담겨있는것이다. 뒤에서살펴볼복거일의주장역시같은의미이다. 2) 일제의강요에못이겨서협력했고, 생활때문에살기위해서협력했다. 이것은많은사람의동정도사고동조도얻고있다. 실제로많은사람들이생존을위해일본에협력했다. 바보화 로유명한김기창화백이생존을위해침략전쟁을미화하는그림몇점을그렸으며, 국화옆에서 의서정주또한밥을위해서출전하는병사를찬양하는시를썼다. 그뿐인가. 말단면서기도어렵게구한직장을잃지않으려고열심히나서서공출을독려하고, 징용자를선발하였다. 그러나여기에도문제는있다. 살기위해협력하는것과출세를위해협력하는것은근본적인차이가있다. 이차이를무시하고모든친일협력행위를생존을위해했다고주장하는것은문제의본질에서비켜가기위한주장이다. 쓰기싫은시가정말상당한수준으로나오고, 하기싫은데남보다앞장서서공출을독려하고, 하기싫은데죽음을무릅쓰고독립군의행동을정탐할수는없다. 하기싫은데억지로하는수준이라면그당시친일의경쟁구조에서자연도태될수밖에없었다. 논리적이고비판적인사고에서툴고또동정심많은사람들의약점을이용하여문제를비켜가려는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33
것이다. 1946 년 10월대구에서일어난민중항쟁을무력으로진압한미군정은민중봉기의원인규명과사태수습을위해김규식 여운형을대표로하는좌우합작위원회와조 미공동회담을개최하였다. 회담에서주요관심사는당시민중들에게가장큰원성을샀던원인가운데하나인친일경찰, 특히일제고등계출신의경찰을미군정내에서청산하는문제였다. 이자리에과거일제에협력했던경찰들을대거대한민국의경찰로충원하는데결정적인역할을한조병옥과장택상도참석하였다. 경찰토벌대를직접이끌고출동했다가개선장군처럼당당하게돌아온조병옥은 경찰관의고귀한희생 을주장하면서다음과같이친일파출신의경찰을비호하였다. 당신들은대구폭동원인으로경무부장인내가친일경찰관들을많이등용했기때문이라고주장하지만, 일제통치하의친일은두가지종류로구별해야한다고생각한다. 하나는직업적인친일파였고, 또하나는자기가족과생명을보호하기위한연맹책으로택한부류다. 많은사람들이 pro-jap 이아니라 pro-job 이라고할수있다. 진짜친일파인 pro-jap 은극소수에불과하다.( 조병옥, { 나의회고록 }, 민교사, 1959) 따라서그는고의로자기의영달을위해민족운동을방해했거나민족운동가를살해한자이외에는일반경찰에전직경험이있는경찰관출신자를 pro-job 으로인정하면서 경찰현진용쇄신에대해여론이적지않은모양이고소위민족반역자친일파라운운하나과거 36년동안우리들의눈물겨운팔자를생각하건데거의오십보로소백의격이라고본다 는논리를폈다. 이런주장을펼치면서그는일제고등계형사로악명을떨쳤던최연 노덕술 이익흥 최운하등을기용하여경찰수뇌부를친일파들로충원하였다. 백번양보해서조병옥의말을수용한다해도고등계출신의경찰들에겐민족반역자란죄명을떼어낼수없을것이다. 기술전문가 (pro-job) 이기이전에친일파 (pro-jap) 였던것이다. 그들은식민지배를위한무력기구인경찰직을스스로선택해서들어간뒤일제에게충성심을보이고, 그것을발판으로출세하기위해독립운동가와조선민중을탄압했던가해자들이었다. 이런그들을생존을위해세금을내야만했던민중들과마찬가지로피해자인양취급하려는논리는결국반민족범죄자들에게면죄부를부여하려는것이며, 역사에대한무지가아니면왜곡하려는것에지나지않는다. 더구나이들은다음에서언급하듯이일제때배운기술로분단과독재체제를유지하는데결정적인역할을수행한또한번의가해자들이었다. 3) 능력있는인재를처벌하면당시의난국을누가수습하느냐. 1947 년초남조선과도입법의원은친일파를청산하기위해 부일협력자 민족반역자 전범 간상배 13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에대한특별법률 을제정하려하였다. 그러자이승만을비롯하여한민당과친일파들이격렬하게 저항하였다. 이가운데만주에서밀정노릇을한이종형 ( 李鍾滎 ) 은 망민법 ( 網民法 ) 을철폐하라 고 주장하면서과도입법의원의 부일협력법안 에다음과같이반론을폈다. 이것은網民法입니다 그냥두었다가는 2 백만내지 3 백만명의많은사람들이이망민법에걸 려 가장능률적인, 가장명석한인재들을제외하고누가미증유의건국대업을성취할것입니 까. (1947 년 5 월 5 일부일협력법안검토대회시강연 ) 이광수의말처럼친일파, 즉 반민법의대상이되는자는대체로有識有産階級이요, 各方에기능과경험을가진자 ([ 나의고백 ]) 들이었다. 결국식민지구조에서친일파로행세할수있었던것은능력을가졌기때문이다. 그리고그능력은일제에협력한대가로주어진것이다. 능력은두가지차원으로나뉜다. 첫째는구조적인것으로집안이부유하여대학을나올수있었던탓에주어진집안의능력이다. 둘째는개인적인것으로오직개인의노력과총명함등으로이른바출세의대열에올라간능력이다. 둘다일제에대한협력-소극적이든, 적극적이든간에-을전제로하진않고선생겨날수없는능력이다. 이것자체를민족에대한범죄행위라고말할수는없다. 그러나이러한주장은친일파가되지못한사람은능력이없어서라는말과같은것으로출세한친일파다수가가지고있던우월감과또민족성원다수에대한멸시로이어졌다. 또한식민체제에서출세한친일파들이가지고있던능력이나기술이란반민특위조사부장이병홍의지적처럼 같은민족을협박과폭력으로짓누르는능력이유능한행정가의능력이었고기술 이었다. 인간의존엄성을파괴하는이러한발상과기능이오늘날까지어떻게전수되어오고있는지는 사회안전법 을보아도잘알수있다. 단지자신과사상이다르다는이유하나만으로개인을수십년간격리시키는반인도적인법이실은식민지시기의 사상범보호관찰령 에뿌리를두고있다. 국가보안법역시그틀은치안유지법을모태로하고있다. 일제가조선을식민지배하기위해만든각종제도와기술이그이름만달리한채우리사회를지배해왔다. 제도와기술을부리는친일파들과함께. 4) 민족을보존하기위해스스로십자가를짊어졌다. 다음으로이광수자신의친일행위에대한직접적인변호를들어보자. 전쟁막바지에일제가조선의지식계급을말살하기위해 삼만명 이나되는명부를작성하였다. 그래서자신은 내몸이죽어서정말저들의머리위에달린당장의고난을면할수만있다면 이라는각오를가지고최린 최남선 윤치호처럼일제에협력한것이라하였다. 참으로흥미로운주장이다. 그러나이주장은우선인과관계부터가틀렸다. 이광수가친일을시작한시점은늦게잡아도 1937 년이다. 일제가살인명부를만들었다고하는시점은아무리빨라도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35
1944년경이다. 그렇다면행위가먼저있고, 그행위를유발시킨동기는뒤에나온셈이다. 논리의모순이다. 차라리마지못해했다거나, 아니면자신의또다른주장처럼좀더고상하게일제에협력함으로써조선인의차별대우를없애려고친일을했다고하면말이야된다. 살인명부라는것 보호관찰 의대상이었던사상범명단을말하는것인데, 누구나다알수있는내용이다. 그렇다면다른친일파들도그런주장을하면서친일을했다고변명을할법도한데, 이상하게도그런사례가없다. 왜인가. 현실과너무동떨어져설득력이없었기때문이다. 대신유사한논법을사용한경우는많다. 일제에협력한사립대학설립자들이 < 회고록 > 이나 < 자서전 > 에서한결같이 학교를살리기위해친일을했다 고변명하고있다. 모두가예수의길을걸은것이다. 이얼마나뒤집혀진의식인가. 역사의사실을은폐하는것도모자라스스로를순교자로만들어가고있는것이다. 이상에서친일파가자신을변호하는대표적인논리인공범론, 생존론, 인재론, 순교론등의내용과그문제점을살펴보았다. 그러나이러한변호론에서가장큰문제는내면의반성, 즉양심의가책이라는좀더근본적인것에대한인식이완전히빠져있다는점이다. 우리가앞선세대의잘못을비판할때 나중에태어난자의특권 을가지고비판해서는안된다는하버마스의충고에귀기울일필요가있다. 이말은 내가만일그러한처지에있었다면어떻게했을까 하는엄정한가능성에서출발하자는것이다. 이것은무엇을뜻하는가. 첫째, 과거의당사자들에대한전면적인도덕적규탄은별로큰의미를갖지않는다. 흔히있는일이지만당시의상황으로부터자유롭다는그이유때문에자기자신을절대적정의와동일시해서앞선세대의잘못을비판하는오류를범하지말자는것이다. 둘째, 집단적죄 ( 우리모두의책임 ) 라든가시대적상황으로책임을돌리는주장도잘못된것이다. 죄는역시한사람한사람당사자의문제이고, 분명히드러난부분에대해서는역사적인책임을추궁해야한다. 셋째, 과거의정치적판단상범한오류나과거의기회주의보다도현재의반성을더중시해야한다. 이충고를친일파비판에적용한다면, 우리역시그시대에살았다면친일파일수도있었다는가능성에서출발하자는것이다. 그렇다면문제는친일행위- 어떤이유에서했든-를잘못으로인정하느냐안하느냐는 양심의가책 문제로귀결된다. 해방직후자신의친일행위를 양심의가책 문제로까지고민한대표적인문인은임화였다. 1945 년 12월 30일전후김남천, 이태준, 한설야, 이기영, 김사량, 이원조, 한효, 임화가봉황각 ( 천도교연수관 ) 에서좌담회를열었다. 이자리에서임화는 이번태평양전쟁에서일본이지지않고승리를한다, 이렇게생각해볼순간에우리는무엇을생각했고어떻게살아갈랴고했느냐 는것이 자기비판의근원 이되어야한다면서, 일개초부로평생을두메에묻혀끝막자는것이한줄기양심 이라면, 마음속어느한귀퉁이에강인하게숨어있는생명욕이승리한일본과타협하고싶지않았 13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던가 라고되물었다. 2 잘못에대해책임을묻거나지는방식에는두가지가있다. 우선그잘못이범죄행위에해당할경우, 예를들어독립운동가를체포 고문하고심지어사망케한민족반역자이거나침략전쟁을적극적으로옹호하고선전한자일경우는당연히법적인책임을물어야한다. 두번째로잘못이주로강요나구조적인조건에의해일어났을경우, 예를들어천황제라는거대한폭력앞에무릎꿇고침략전쟁에동원된지식인이나공출을독려한면서기, 또는식민지배의이데올로기를가르친교육자의경우는대개법적인책임보다는도덕적인책임이강하게제기된다. 전자가타율적이고외면적이라면, 후자는자율적이고내면적인성격을띤다. 독일전범에대한뉘른베르크의재판과나치점령하의친독협력자에대한프랑스의대숙청이전자의성격을띠었다면, 1985 년독일인의책임을스스로에게물은바이츠체커대통령의유명한참회는후자에해당한다. 그러나우리의경우도덕적책임은커녕법적인책임조차실현하지못했다. 1947 년 7월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는친일파를심판하기위한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간상배에대한특별법률조례 (1947.7.2) 를준비하면서민족반역자를 1,000명, 부일협력자를 20만명, 전범을 200~300 명, 간상배를 1만~3만명으로추산한적이있다. 이가운데서훗날대한민국정부가들어선뒤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 (1948.9.22) 에의해기소되어유죄판결을받은자는사형 1명, 무기징역 1명, 유기징역 10명이었다. 그마저도이들은 1950년봄까지감형등으로풀려났다. 대신제1공화국의각료중 34% 가부일협력의경력이있으며, 경찰은총경의 70%, 경감의 40%, 경위의 15% 가일제경찰출신으로채워졌다. 이런상황아래서자신의친일행위를내적으로반성하려는임화의목소리는자리잡을곳이없었다. 오히려친일파의변호론만한국사회에뿌리내리게되었다. 그리고이것이남긴정신적폐해는생각이상으로크다. 해방후친일파는죄에대해책임을지기는커녕오히려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모든분야에서식민지시기보다더굳건한지배층으로자리잡았으며, 분단과독재체제를심화시켰다. 이로인해식민지에서독립한신생국으로하여금그존립기반이될최소한의가치관과역사의식을무너지게만들었고, 잘못을했으면그에따른책임을져야한다는상식조차부정하게만들었다. 이것이 50여년넘게지나면서일반대중에게까지일상화됨에따라정의는칼을쥔자의것이며역사는언제나 2 임화외, 문학자의자기비판, 우리문학 창간호 (1946.2). 이좌담회에는김남천, 이태준, 이기영, 김사량, 이원조, 한효, 임화등이참석하고있다. 이좌담회에서한효또한 이번전쟁을통하여조선사람치고어느누구를막론하고협력적인태도를취하지않은사람은없다고말해무방할것입니다. 그러므로이러한과거에대하여조금도감춤이없이준열한자기비판을한다는것은결코불명예스러운일이라고할수도없습니다. 라고말했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37
권력자의편이라는자조섞인역사인식을갖게하였다. 그결과한국사회는마침내잘못을잘못으 로서인정할능력조차상실한사회가되어버린것이다. 3. 현재 1) 자유주의자와탈민족주의자의비판론먼저복거일의주장부터보자.( 복거일, 2003, 죽을자들을위한변호-21 세기의친일문제, 들린아침 ) 그는친일행위를규정하는작업에서핵심적인논점은 조선총독으로부터식민통치정책에협조해달라는요청을받은사람들에게선택의여지가있었는가 라는것이다. 그런데 어떤사람이자유롭게선택할수있었을때에만그는자신의행위에대해서도덕적으로나법적으로책임이있다. 그러나친일행위는강요된것이었기에, 반인륜적범죄행위가아닌한비판할수없다는것이다. 십수년전부터 일제하에서세금을낸사람들은모두친일파다. 따라서모두가무죄다 는주장을펴면서친일파를변호하던그가좀더세련된어법으로 공범론 을펼치고있다. 그가의식했는지는모르겠지만그의주장에는중요한문제제기가담겨있다. 즉자유롭게선택할수있을때에만행위에대해책임을물을수있다고한다면, 인간이사회 ( 시대적제약 ) 로부터완전히자유로울수있다는전제가성립되어야한다. 그러나이전제는부당하다. 구조주의자들의지적처럼시대상황으로부터자유로울수있는인간은없다. 인간은제약된구조속에서선택을하게되고, 그선택의결과에따르는책임은동기와관계없이묻게된다. 만일복거일식의주장대로라면독립운동을한조선인들에대한고문과여자들을속이거나납치해서 종군위안부 로만든행위만을친일행위로규정할수도없게된다. 그러한행위역시자발적인것이아니라권력의명령에따라집행한것이기에책임을묻지못하게된다. 따라서자유로운선택일때에만책임을물을수있다는그의주장은사실상모든행위에대해책임을물을수없는논리적결과를낳고만다. 행위에대한책임을묻는문제에서복거일은개인의자율성을최대한존중하는견해 ( 강요로의한행위에는책임이없다 ) 를가지고있는것처럼보이지만, 그렇다고개인의자율성을억압하는제도에대한비판도하지않는다면도대체무엇을말하고자함인가. 다음으로독일의일상사를친일문제에적용한안병직 ( 안병직, 2002, 과거청산과역사서술- 독일과한국의비교 역사학보 제177 집 ) 의주장을보자. 일상사연구는기존의나치즘연구가나치즘의억압성과대다수국민들의체제순응에초점을맞춘것이었다고비판하고나치체제가유지될수있었던것은나치정권의강압적통치가아니라오히려대다수국민들의일상적삶의방식에있다고하였다. 즉대중들의정치에대한무관심과사생활에몰입한것이나치의집권을허용했다는것이다. 13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이러한연구성과를식민지에도입한안병직은 어떻게 35년간일제식민체제가유지될수있었는가 를물으면서한국인들이그런대로일상의삶을정상적으로영위할수있었고, 때에따라서는일상의삶에나름대로만족했기때문이라고말한다. 따라서일제시대한국인의일상적삶의긍정적인면모에주목하는역사서술은일제시대를가장비판적으로규명하는작업이될것이다. 이러한역사인식은친일청산문제와직결된다. 즉친일행적의규명과심판을통해식민지시대과거를청산하겠다는것은부당하다. 30여년이넘게지속된일제식민통치의역사적책임을소수친일세력에게만한정함으로써오히려성찰과반성의기회를막는결과를초래할수있다는것이다. 우선독일의일상사연구에대한그의이해에문제가있다. 그의지적처럼나치즘에대한일상사연구는나치즘체제를가장근본적으로비판하기위해출발한것이다. 이것은곧자신들에대한비판의칼날을들이대는것으로 일상사연구가지엽적인문제와미시적인그림속에서방황하지않기위해서는 현재의자신의일상을도덕적으로해결하려는문제의식과가치지평을확보해야한다 ( 데틀레프포이케르트지음 / 김학이옮김, 2003, 나치시대의일상사, 개마고원 ) 는포이케르트의지적은일상사연구의철학을웅변하고있다. 이것은나치즘에대해스스로책임을묻기위한작업의하나로서현재를비판적으로바라보기위한시각이기도하다. 그런데안병직의일상사는성찰과반성의이름아래식민지배하의친일문제를대중의책임으로부당하게전가시키고있다. 식민지배권력에편입된한국인관료와일상을살아가는대중의책임을동일시함으로써사실상정치적으로책임을물어야할집단에게면죄부를부여하는결과를낳게된다. 성찰과반성은모두의몫이므로특정개인이나집단을탄핵해서는안된다는것이다. 그렇기에그는조선일보의친일문제에대해굳이입을다물고있는가. 독일의일상사가책임문제를확장하고, 사회화함으로써궁극에는현실의부조리한일상까지비판의대상으로삼는방식이었다는것을수용한다면, 우리의경우지식집단의친일행위에대해적극비판한위에서일상사의전망이수립되어야비로소그논의의진정성과엄격함이인정될수있지않겠는가. 그래야만 부끄러움 이부재한일상이너무도자연스럽게받아들여지는현실의문제를개선할수있을것이다. 그리고식민지배체제가장기간지속된이유를한국인들의일상적인삶이그런대로정상적으로운영되었다는데서찾고있다. 이것은매우그럴듯해보이지만사실은아무것도설명하지못하고있다. 삶이정상적이라는것이무엇을뜻하는지도분명치않을뿐더러, 체제유지와일상이라는다른차원의개념을연결시켜논리의비약을범하고있다. 삶이정상적이기때문에체제가유지된다는주장이성립가능한가. 설령그논리가맞다하더라도굳이식민지배체제에만적용될사안도아니다. 체제가유지되는것은그나름의시스템이작동하기때문이다. 체제와일상을연결시키려면, 체제나권력이어떤방식으로일상에개입하고간섭하고통제하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39
는가를밝히는과제가요구될것이다. 두번째그가강조한 일상 이라는개념도분명하지않다. 독일일상사연구의개척자인포이케르트는일상에대해다음과같이정의하고있어, 시사하는바가매우크다. 나치시대를살았던사람들의개인사에서는 1933 년이나 1945 년이아닌다른일과사건들이결정적인의미를가질수있다. 그러나우리가문제삼으려는일상은가능한최대의미의일상이아니라제3제국에서의일상이다. 따라서우리가제기해야하는질문은, 나치즘의일상에서무엇이정치적이었는가, 혹은비정치적인일상에끈질기게매달리던당대인들의태도는그들의나치즘경험과어떤관련이있는가하는것이다. 이러한문제제기는체제와사람들이조우하는場, 사람들의기존의삶의방식이체제의요구에의해영향받는혹은정반대로나치운동이사람들의기대와태도에의해채색되는장, 그리고국가, 조직, 지역적 종파적 사회적하위문화들, 가족, 개인의영역을서로구분시켜주는그러한장의테두리를정해준다. 일상사의전망은그러한관계들의미로에서길을잃으면안된다. 그러나안병직이제안한일상속에는이런고민들이들어있지않은채그저 일상만 을주장하고있어공허하다. 한국민족주의와식민지인식에대해날카로운비판을가하고있는윤해동의주장을보자. 3 다소거칠게친일문제에대한그의논리를정리하면이렇다. 1 식민지주민의일상삶은저항과협력이혼재하는회색지대이다. 그리고회색지대는식민지하에서확대되고있는공공영역이위치하는지대이기도하다. 2 이러한회색지대에서일어나는친일문제는민족주의에입각하여도덕적단죄라는형태로접근해서는안되며, 협력행위에대한정치적책임을추궁하는형태로진행되어야한다. 3 따라서식민지배하의모든협력행위는적든크든정치적책임을물을수밖에없다. 4 나는친일문제를정치적협력행위에대한책임을추궁하는문제로제기해야한다는윤해동의문제제기에기본적으로동의한다. 그러나협력개념을통해서친일행위에대해정치적책임을온전히물을수있을까. 친일이라는단어가갖고있는윤리적비판에대한대안으로서제시된협력개념이제국주의의지배구조와식민지주민의대응구조를분석하는데는유효하나이또한어디까지를협력이라할것이며, 자발성과강제성을어떻게구분할것인가라는문제는여전히남는다. 이는결 3 윤해동, 1998, 식민지인식의회색지대-일제하공공성과규율권력 식민지의회색지대, 역사비평사 : 2004, 친일과반일의폐쇄회로에서벗어나기 우리안의이분법, 생각의나무. 4 식민지인식의회색지대 와식민지에회색지대가존재한다는것은다른차원의문제이다. 하나는인식의문제이고, 다른하나는실재의문제이다. 그런데윤해동은이두가지를혼재해서사용하고있다. 만일후자의의미라면굳이식민지에서만회색지대가성립하는것이아니고인간이사는모든공간이회색지대일수있다. 적절한개념이라할수없다. 차라리근대과정에서확대되고있는공공영역의헤게모니를둘러싸고식민권력과식민주민간의끊임없는긴장관계가성립되는지대라고말하는것이더실체에가깝지않을까. 다만식민지의경우식민권력의주도성이압도적이긴하지만. 14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국친일문제가개인의윤리적결단을동반한문제에서완전히벗어날수없다는것을의미한다. 그리고협력개념이식민지의정치구조를분석함으로써 친일행위 의원인을밝혀내는것이라고한다면, 친일은행위에대한책임을묻는일이라는점에서차이가있다. 그리고협력이라하더라도그유형은행위의주체가놓여있는위치에따라다르며, 책임또한다를것이다. 모든구조는권력의연쇄체계에의해구성되어있다. 따라서주체는권력의연쇄체계어딘가에위치하고있다. 그위치에따라권력의크기가다르고, 책임또한다를것이다. 공출을독려하고지휘한군수와말단에서집행한면서기가져야할책임의몫과내용은다를수밖에없다. 권력의구조를밝히지않을경우친일문제는직접동원된사람들만책임을지게되는불합리한사태가벌어지게된다. 따라서친일문제는친일의구조-식민지배체제하에서의협력구조- 를밝히는일과개개인에게책임을묻는일, 두가지가함께다루어져야온전할수있다. 그래야만 책임의동일시 가빚는오류에빠지지않을것이다. 다음으로친일파청산문제를비판적으로다룬조관자의다음글로도대체할수있는 민족주의에입각한도덕적단죄 론에대해보자. 친일 에대한규탄이민족주체성의상실을비판하는대중의도덕감정에서발로한다면, 그태도는역시민족주권의논리에기초하여형성된다. 그러나민족의의지를대표하는 단일한민족주권 의존재자체가상상의산물이지않는가. 해방후에도실재한적이없는단일한민족주권의논리로식민지에서갈라지고얽혀있던권력운동의중층적관계들은 저항민족주의 중심으로재단하는것, 친일 을민족의이름으로배제하는 민족사 만들기는자민족의긍지를살리기위하여침략의역사를왜곡하는일본의 새역사교과서만들기모임 의 민족정서 와마찬가지가아닌가?( 조관자, 민족의힘 을욕망한 친일내셔널리스트 이광수, 기억과역사의투쟁, 2002 년당대비평특별호, 삼인, 323쪽 ) 이글은우선심판할기준인 민족 이상상의공동체라는입론에근거하고있다. 민족이상상된것이라면, 그것을기준으로심판하는것을옳지않다는논리로도성립한다. 그러나민족이 상상 되었다하더라도현실에서그것이실체를가지고힘을발휘한다면그것은허구가아니라 실재 하고있는것이라는비판은매우정당하다. 문제는 상상 과 실재 가아니라, 한국사에서친일문제를왜반국가범죄행위가아닌반민족범죄행위로다루었고인식하는것이자연스러운가하는것이다. 이것은역사적조건에서비롯되었다. 프랑스의경우심판의근거가되는것은독일에점령당하기전의프랑스국가형법이었다. 그러나근대국민국가를건설하지못하고식민지로전락한한국의경우심판의근거가되어야할이전의국가가없는상태에서출발, 따라서국가를대체할민족이라는추상의단위가근거가될수밖에없는것이다. 굳이법적으로따진다면대한민국임시정부의형법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41
규정을들이대는방식이있을수도있겠지만. 5 이어친일문제를비롯하여과거청산에대한 도덕적단죄 즉 과거청산문제의도덕화 논쟁문제로넘어가자. 정치행위를도덕적단죄의차원으로접근할경우사태를선과악으로만단순화시킬위험이있다는지적은매우정당하다. 그러나나는이문제를다른각도에서, 즉니버가말한 정치적도덕성 이라는차원에서접근하는것이옳다고본다. 올바른정치적도덕성이라면도덕가들과정치적현실주의자들의통찰들을모두정당하게다루어야한다. 이렇게되면인간사회가사회적협력의범위를아무리확대하더라도, 사회적분쟁은불가피하다는너무나도엄연한사실을정확히인식할수있게될것이다. 올바른정치적도덕성은인간사회에서강제력을완전히없애기보다는최소화함으로써, 인간사회에있는합리적 도덕적요소들에가장잘부합될수있는유형의강제력을사용하도록권고함으로써, 그리고강제력이사용되는목적과목표의차이를밝혀줌으로써쓸데없는갈등의악순환에빠져있는사회를구원하고자할것이다. 즉, 정치문제를도덕화하려는것이문제가아니라갈등을해결하기위해올바른 정치적도덕성 을담보하느냐는것으로받아들일필요가있다. 정치적도덕성은분쟁이불가피하다는것을인정하는데서출발하며, 분쟁을해결하는강제력 ( 규율, 규칙 ) 을어떻게사용하느냐는문제로이해할수있을것이다. 과거청산의도덕화경향을비판하는논리는 과거청산 에대한인식과태도와도연결되어있다. 이에대해임지현은다음과같이말한다. 원칙적으로과거는심판의대상이아니라드러냄의대상이다. 사법적심판을통해과거를단죄하고청산한다는방식을넘어과거를드러내서살아있는사회적기억으로만들때, 과거는극복될수있다. 하버마스의지적처럼 오로지진실로충실한기억의작업을통해서만과거는현재에대한강압적지배력을상실할것이다. 동의한다. 그러나사법적심판이과거를극복하는최선의길은아니지만, 그길로나아가기위해 한번은거쳐야만하는과정이자하나의방편이라할수있다. 앞서도언급했듯이다양한책임을밝 5 헌법차원에서친일파처벌의근거를해명한글로는이헌환, 친일재산국고귀속의헌법학적의미 가대표적이다. 14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혀내는일은곧과거청산또한다양한차원에서진행될수있다는것을말한다. 이글에서주장하듯이 넘어 야할사법심판조차우리는제대로수행하지못했음을쉽게인정할수있을것이다. 따라서우리에겐이중의과제가부과되어있다. 마치한국사회가 압축 근대로상징되듯이과거청산역시동시적과제를부여하고있는것이다. 이것을분명히해야만 과거청산 을반대하는보수세력의논리와구분될것이다. 물론드러내는일또한그냥주어지는것이아니라격렬한기억투쟁의산물임은새삼강조할필요가없겠지만. 2) 뉴라이트의친일청산반대론 : 이영훈, 박지향, 박효종등이영훈은 대한민국이야기 ( 기파랑, 2007) 에서세가지점에서친일청산문제에대해반대하는입장을보였다. 첫째는자본주의문명론에기초한친일파청산부정론이다. 대한민국은결국어떻게세워진나라입니까. 저는그에대해개항기이래외래문명을이해하고실천해온문명개화파의후예들이주도해서세운근대국민국가라는역사상을제시했습니다. 라는말에서알수있듯이, 그는한국의자본주의발전을문명사의전환이라규정하면서높이평가하고있다. 따라서 건국에참여한사람들의친일이라해봐야테크노크라트형에불과한차원이었습니다. 그들은개항기이래문명개화파의후예들로서외래의근대문명을학습하고실천해온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의해대한민국이세워진것은문명사의대전환이란관점에서정당하였고또필연이었습니다. 그가친일파를변호하는핵심은바로여기에있다. 한국자본주의성장의담당자인문명개화파의후예, 즉부르주아계급을옹호하고정당화하는데친일청산론은걸림돌이될뿐이다. 여기에사실왜곡까지동원하여주장을강화한다. 그는해방후대한민국정부에악질적인친일파가중용된적이없다고한다. 과연그런가. 정치적반대파를폭력적으로탄압한군과경찰의주요간부들을친일파가장악하고있었음은주지하는사실이다. 이것을모를리없을것인데, 그들또한악질적인친일파가아니라단순히테크노크라트였다고만주장하는것일까. 이들은해방후좌파세력은물론이고반이승만세력과무고한민간인까지탄압하고심지어학살하는데중심세력이었다. 대한민국정부는그러한피의토대위에서만들어졌다. 부르주아세력들은직접손에피를묻히지는않았다하더라도그러한폭력을배경으로권력을잡았다. 그러한정치적과정은전혀시야에들어있지않고, 오직지배계급의시선으로만역사상을재구축하려한다. 그러한역사상은반쪽짜리역사밖에구성할수없고, 지배계급의이익에만복무하는역사관은결국타락할수밖에없다. 현실의자본주의를긍정하기위해과거의잘못마저정당화하는오류를범하고있는것이다. 둘째, 한국자본주의의긍정은곧식민지의상황마저긍정하는방향으로전개되고있다. 식민지근대화론자인그는수탈의개념을 정당한대가를치르지않고남의재산을빼앗는행위 로규정하면서박흥식이반민특위에서자기변호한 당시동척은민족의수탈과무관한금융기관 이었다는주장에동조하고있다. 수탈의개념을매우협소하게사용하고있어, 마치일본의극우세력들이조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43
선인강제연행을부정하면서주장하던논리를연상케한다. 즉길가던사람을강제로끌고가는것이강제연행인데, 일본은법을통해조선인을노동자로데려갔기때문에전시체제기에강제연행은없었다는주장과유사하다. 동척이소유한금싸라기땅이조선총독부가토지조사사업을통해국유화한것을싼값에불하받은땅이며, 동양척식주식회사의농장경영이소작농의경영자율성을완전히부정하고고율의소작료를수취하는방식이었다는것은주지의상식이다. 그런데남의재산을빼앗는데대가는왜치르지. 그냥빼앗으면되지. 여기에이영훈이주장하는식민지근대화론의열쇠가있다. 일제는자본주의문명을식민지조선에정착시켰기때문에그냥빼앗은게아니고적지만대가를지불했다는것이다. 따라서경제학적용어로말하면 수탈 은없고 불공정거래 또는 부등가교환 만있었다는것이다. 마치대기업이중소기업에불공정계약을강요하여부당한이익을취했지만대가는지불했으니까수탈은아니라는주장이다. 이런주장은수탈을약탈과같은뜻으로스스로제한해놓고, 식민지수탈을주장하는역사학자들을향해비난의목소리를높이는것과같다. 논리가이지점에오면, 식민지 는아예시야에서사라져버리고, 오직자본주의경제제도와운영만남고, 나아가거기에충실했던자본가만평가의대상이될뿐이다. 조선총독부는수탈의최고기구가아니라단지자본주의문명을전파하는통치기구일뿐이며, 경제기구의하나였던동척또한금융기구의하나에지나지않게된다. 그렇다면 1926 년 12월 28일조선식산은행과동양척식주식회사에폭탄을투척하고일본경찰과대치하던중자결한나석주의사의투쟁은어리석은행위가아닌가. 박흥식의자본가활동을옹호하기위해동원한이영훈의금융기구주장에서는항일운동의가치나의미따위가설자리는없게된다. 또한그는국가폭력에의한인권침해를다루는과거사특별법은찬성하지만, 입장에따라해석이달라질수있는과거사에관한특별법 은역사가가할일이지국가가할일이아니라고주장한다. 국가의진상규명활동이역사해석에국가가개입할위험을내포하고있다는의미에서나온주장이라면그건매우의미있다. 역사해석이권력투쟁의도구로서활용되는것에는필자역시동의하지않는다. 그러나권력의진공상태속에서이루어지는무색투명한역사인식과해석따위가성립할수있는가는의문이다. 특히현재의이해관계가첨예하게얽혀있는문제의경우더욱그러하다. 이영훈자신이대한민국건국사를정당화하기위해새롭게쓰고국가를통해확장하려는일또한역사해석에만머물러있지않다. 자신의행위는역사해석이고, 과거청산론자의주장은기억의과잉인가. 자못그경계가어렵다. 아무튼그의주장을좀더세련되게제기하면이렇다. 친일문제가 이데올로기로서의기억투쟁문제인가아니면학문으로서의역사해석문제인가 이다. 친일문제가그의주장처럼단지학문으로서의역사해석에지나지않는다면, 분명특별법은기억의과잉이다. 그러나한국사회에서친일문제는역사해석과기억이혼재된사안이며, 현재로서는기억투쟁쪽이더큰비중을차지하고있다. 이 14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것을이해하기위해서는우선특별법이제정된사회적, 시대적배경을볼필요가있다. 첫째, 20세기말부터한국사회에는각종인물의기념사업이국가차원에서, 지자체차원에서추진되었다. 그런데이들인물가운데상당수가과거친일행적이나반민주행적을갖고있었다. 이것은두가지중요한문제를갖고있다. 하나는국민의예산이특정인물을기억하고기념하기위해투입되는과정과내용이민주적이지못하고사회적합의를끌어내지않았다는점이다. 더중요한것은기념을추진하는쪽이과거의기억마저왜곡하고특권화하려한것이다. 과거의잘못은모두덮어놓고경제공적이나문화공적만내세움으로써왜곡된기억을강요하려한것이다. 죄없는자저여인에게돌을던져라 가아니라이제는 저들은죄가없으며역사에서최선을다했으니, 저들을기념하라 고강요한것이다. 지난십수년간한국사회의여론을둘로분열시켰던기념사업논쟁의핵심은이것이다. 한국의지배계급이역사마저특권화하려는것에대한싸움이바로기념사업논쟁이자, 친일논쟁이다. 둘째, 한국의기득권세력에대한환멸이특별법제정의배경에있었다. 앞서도지적했듯이사전편찬지원비의국회삭감, 차떼기당 논란으로상징되는기득권세력의무책임과특권의일상화로인한도덕적불감증, 그리고친일후손의조상땅찾기소송등이누적되어지배계급에대한국민적분노가한꺼번에터져나왔다. 결국이러한분노는정치윤리의차원에서공동체의가치를묻는일로연결되어특별법이만들어진것이다. 따라서친일문제는역사해석이전에기억투쟁의영역이자정치윤리의영역이다. 더구나대한민국국가는 민족국가 의이름으로독립유공자에게포상하고, 그들을기억하고기념하기위한공적인행위를하고있지않는가. 여기서좀더본질적인문제로들어갈필요가있다. 친일문제에국가가개입하지말라고주장할때, 그국가는도대체무엇이며, 무엇이어야하는가이다. 국가개입을비판하는논리에는한국사회에서차지하는국가권력의절대적권위에서비롯된측면도있을것이다. 그러나역으로이러한국가권력을끊임없이소수자의관점에서해체하고민주화하는측면에서바라볼필요가있다. 고정되고불변한권위가아니라유동하는권위로서국가를다시세우는작업이필요하다. 즉 개선가능한정치공동체 로서의국가라는관점에서서자. 강력한국가권위에의탁해서자기집단의역사적정통성을지키려는방식에서이제벗어나자. 사실친일문제에관한한, 그권위는국가보다는시민사회에더있지않을까. 여러해동안정부는독립유공서훈자나문화인물에대한검증을민족문제연구소에의뢰해왔다. 국가가특정사회집단의권위를인정하고활용한사례이다. 지자체역시마찬가지이다. 기억의주체는다양하지만반드시국가만이권위를갖는것은아니다. 과거권위주의정권시기국가가교과서를독점했다. 즉역사해석과기억을독점한것이다. 그러나사회의민주화로이것은해체되었으며, 많은부분은시민사회의영역으로넘어왔다. 국가가독점적역사해석과기억을강요하더라도사회가그권위를인정하지않고받아들이지않는다면, 그권위는오래가지않는다는것을우리의현대사는보여주고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45
있다. 따라서국가또한기억의한주체임을인정한다면, 오히려그것을좀더적극적으로소수자의관점에서제기하고민주화시킬필요가있는것이다. 박지향의친일청산비판은좀더학술적이며이론적인성격을띠고있다. 윤치호일기 를통해윤치호의내면을추적한박지향은 윤치호의협력일기 ( 이숲, 2010) 에서윤치호의사상이갖는내적모순과갈등, 고민들을비교적잘드러냈다. 이책에서박지향은서양의협력론을소개하면서친일론을비판한다. 이제서양에서저항과협력을윤리적으로판단하는일은중심과제가되지못한다. 강제력에대한협조는본질적으로잘못된것이아니라는사실이인정받게된것이다. 협력은복잡한이슈이며다양한형태를취했다는사실도당연시된다. 우리사회에서발견되는 저항하지않으면다협력자 라는식의이분법적판단은서양학계에서이미설득력을잃은지오래다. 그녀의협력론을핵심적으로보여주는이문장은다음과같은내용을갖고있다. 첫째, 저항과협력을윤리적으로판단하는일은보류하자. 둘째, 강제에의한협력은잘못이아니다. 셋째, 협력의양상은다양하며복잡한형태를띠고있다. 여기서우리는친일 ( 협력 ) 문제에대한근본적인차이를확인할수있다. 한국사회가 저항하지않으면다협력자 라고이분법적으로인식했다는식의규정은매우폭력적인설명이라는혐의를지울수없다. 자신의논리를강조하기위해친일청산론을단순대립구도로몰고가는것은현실을왜곡해서보거나아니면부당한전제를깔고있기때문이다. 문제는이러한왜곡과부당전제가친일행위에대한윤리적판단을보류하기위해배치되었다는점이다. 일본의식민지배체제에참여하고협력한행위를 친일 로규정하든, 협력 으로규정하든인간의정치적행위를판단하면서윤리적판단을배제하거나보류할수있는가. 친일과반일, 저항과협력사이에다양한스펙트럼이형성되어있음을부정하는학자는없다. 우리사회에서친일파를단순히비겁한사람이나기회주의자로치부하는인식도이미넘어선지오래이다. 협력이식민지하의정치구조를밝히는데유효한개념임에는틀림없다. 그러나결국에는한인간이선택한정치적행위가옳은가그런가하는실천적 윤리적판단을내릴수밖에없다. 역사해석에서조차역사가의세계관, 윤리관이투영되어있다. 그런데도굳이친일행위에대해서만판단을유보하자는주장은역사가의직무유기이도하고, 실천적으로도무력하기짝이없다. 차라리친일행위를규탄하지말자고선언하는편이더솔직하지않을까. 박지향은결국협력론의함정에빠져헤어나지못하고있다. 행위의궁극적인책임은개인에게있다. 행위의원인을구조의문제로돌릴경우, 우리는사회와역사에대해아무런책임을질필요가없다. 식민지구조가그러하기때문에어쩔수없었다는상투적인논법의전개가아니라면, 개인의행위에책임을묻는방식이무엇이어야하는가에대해답해야할것이다. 또한강요에의한행위였다해서모두면책받는것은아니다. 강요된그행위가윤리적으로잘못되었고, 타인에게나쁜영향을주었으며, 계속해서반복해나타났다면, 동기는이해될수있겠으나그에대한평가와책임은피할수없다. 윤치호를친일파라비난한다해서그를기회주의자나개인의이익을추구한인물로 14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평가하는것이아니다. 당대최고의지식인가운데하나였던그가친일을하게된배경, 친일의논리와사상적한계를규명하는일은필요하다. 친일문제에서 성찰 이란친일의주장이단지일시적이고강요된주장이아니라내면화된논리로서주장된것이있다면, 그러한것을밝히는일이되어야한다. 그논리는대개국가주의, 반공주의, 힘의숭배라는형태로전개되었다. 국가주의가개인의권리를국가의이익속으로복속시키고, 반공주의가타자를배제하거나심지어말살하는것을정당화시키는이데올로기로발전했으며, 힘의숭배는그러한배제와말살의논리를확대시키는기능을했다. 이러한이념들이결국그대상만바뀌었을뿐이지한국사회를지배하는동력으로작동했음은새삼스런이야기가아니다. 그렇다면친일문제를성찰의차원으로까지성숙시키는것은바로이러한이념과주장의연속성을분석하고, 그것을어떻게극복할것인가로문제를제기하는일이다. 더나아간다면인간이구조속에서얼마만큼자유로울수있느냐, 그리고그자유에따른책임또한얼마나큰가하는사회적존재로서의인간행위에대한본질적인해명등이되어야할것이다. 그리고박지향은서유럽의과거청산사례를소개하면서 지난 60여년간유럽에서는협력과협력자를바라보는시각이관용적으로변화해온반면, 일제치하협력자에대한우리사회의시각은더욱경직되었 다고평가한다. 왜그런경향이있을까. 이유는간단하다. 너무늦게이야기된탓이다. 친일행위의사실조차부정해오던세력들이한국사회를지배하고있었기때문에, 그것에대항하기위한사상적 실천적고투의한부산물이기도하다. 한국의지배계급이망각의저편으로지워버리려했던친일의기억을현실에되살리는일은바로지배계급만의역사와기억에대한투쟁이었다. 이제비로소역사의공과를공정하게평가하기위한약간의토대를만든것이다. 이조차기득권세력에게는참을수없는도전으로받아들여졌지만. 역사는이런과정을통해서발전하는것아닌가. 그저주어진것은단하나도없다. 반민규명위보고서와 친일인명사전 은바로그런노력의결과이다. 박효종은 시대정신 에 친일 문제를어떻게볼것인가 ( 시대정신 46호 2010 년봄호 ) 라는시론을밝힌바있다. 이글은사실오류와논리비약, 그리고전제의부당함을곳곳에서드러내어친일논쟁의수준을현저하게후퇴시키고있다. 그는 친일청산의문제는우리민족의정체성을수호함으로써 부국강병 ( 富國强兵 ) 의반듯한국가를가꾸어나가겠다는결의를다지는차원에서분명중차대한아젠다 6 라고강조한다. 그런데이건무슨의미일까. 부국강병 을위한논의와친일청산문제가어떤상관성이있는가. 해답은다음에있다. 제대로된친일청산을위해서는무엇보다도청 6 http://www.sdjs.co.kr/read.php?quarterid=sd201001&num=370.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47
산의목적을바로세워야한다. 단도직업적으로말해나라를빼앗기지않도록부강하고반듯한국가를만들겠다는것이교훈이되어야지그렇지않고빼앗긴나라에서왜비겁하게살았는가하는점이초점이되어서는안된다. 만일후자를겨냥한다면과녁을잘못정한것이다. 그런데정작과녁을잘못정한것은박효종자신이다. 만일그의논법대로라면친일청산을할이유가없다. 아니논리자체가성립이안된다. 왜냐하면부국강병을위해서는망국이왜되었으며, 당시의지도층은무엇을했는가, 또는국제정세는어떠했는가를규명하는일이필요하기때문이다. 굳이친일문제를제기할이유가없다. 주제와목적이다르면논점이다를수밖에없음은논리의 ABC 아닌가. 그냥친일청산하지말자고하면될것을엉뚱한이유를대면서 제대로된친일청산 을외치니과녁자체가잘못되어도한참잘못되었다. 박효종은사실에대해서도심한무지를드러내고있다. 그는반민특위의대상자와광복회의친일명단수, 그리고반민규명위보고서와친일인명사전의수록자를비교하면서보고서와사전이 1949 년반민특위가친일혐의조사대상자로가려낸 638명이나 2002 년광복회가발표한 692명보다많게는 6배나많은숫자라고한다. 그런데그이유가 친일인사와친일행위의범위를자의적기준에의하여대폭확대했기때문 이라고단정한다. 친일인명사전 이나반민규명위보고서에수록된대상자가차이나는것을해석하는방식의유치함이나역사적사실에대한무지에그저어처구니가없을따름이다. 이런정도의인식수준으로논쟁을전개하는그용기에박수를보내야할지모르겠다. 최소한논쟁을벌이기위해서라면기본적인사실은알고서주장을펼쳐야하지않을까. 대상자의수가확대된것은특정집단을친일파로몰기위한것이아님은조금만신경써서역사를들여다보면알수있다. 반민특위의조사대상자는처벌을목적으로살아있는사람만을대상으로했다. 예컨대수작자중생존자는이해승정도였고, 나머지는모두죽고 2대, 3대에걸쳐습작이진행되었다. 또한중국이나일본에거주하는사람들도대상에서빠졌다. 그러니반민특위에조사대상이된사람들이적은것은당연한현상이다. 더구나당시의권력구조상군은대상에서아예제외되었고, 악명높은고등계형사도일부만조사할수있었다. 그것도매우제한된시간과조건속에서했기때문에대상자가적을수밖에없다. 광복회의명단발표는그내용이나질적수준을떠나광복회가친일파명단을발표했다는그자체가상징적인의미가있을뿐사실상논의의대상이되지못한다. 조금심하게말하면, 광복회의명단은기준도원칙도없이당시시중에나온몇가지친일파관련서적에서모은것에지나지않는다. 그것도오류가많다. 문제의핵심은기준이지, 대상자의많고적음이아니다. 박효종이대상자수에시비를거는진짜이유는다음에있다. 친일인명사전 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보고서 에서많은지도자급인사들을 친일 로낙인찍는 일은 그책임을사악한가해자인일제에묻지않고억울한피해자인우리민족의지도자급인사에게묻고있으니, 친일인사명단을 14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확정한사람들이과연올바른정의관과건강한민족의식및건실한역사의식을가진사람들인가하는의구심을갖지않을수없다 는것이다. 이것이그가친일파를변호하려는본심이다. 우리민족전체가피해자이기때문에지도자급인사에게돌을던지지말라는것이다. 또한박효종은민족지도자를비판하는배경에는좌파적역사인식이반영되었기때문이라고비난한다. 그래서특히 친일인명사전 은사회주의자에게매우관대하다고주장하면서예의색깔론으로몰고간다. 여운형의친일행적을사전에서다루지않은것이그증거란다. 정진석역시여운형의친일행적을말하면서똑같은주장을하고있다.( 정진석, 2010, 좌우가리지말고똑같은잣대들이대야 신동아 2010 년 1월호 ) 그러나사전을자세히보라. 거기에수많은전향한사회주의들의행적이들어있다. 오히려더엄하게다루었다. 그렇다면왜여운형은혐의가있는데사전에서제외되었을까. 그것은기준에맞지않았기때문이다. 친일을했더라도항일을한것이증명되면사전에서제외했다. 여운형이일제말기에건국동맹이라는비밀조직을만든것은주지하는사실이고, 친일행위또한미약한수준이었다. 따라서문제의핵심은누가들어가느냐가아니라그기준에해당하느냐해당하지않느냐이다. 역사적과업을어느한개인의선호나이데올로기의치우침으로왜소화시키는그런어리석은판단을했으리라생각하는것이오히려애처로울따름이다. 박효종의억측은이의신청에서도잘드러난다. 반민규명위가유족과기념사업회의반론을거의수용하지않은것은 다른편의말을들어라 는철칙을철저하게무시했기때문이며, 이는명단을확정한위원들이편향된역사의식과특정이념에사로잡혔기때문이라고그는추단한다. 그러나이의신청을보기라도했는지묻고싶다. 대개의이의신청이아무런증거없이 독립운동을했다 거나 인생전체를판단해달라 당시의시대상을고려해달라 는식의주장이었다. 그안타까움은충분히공감하고도남으나받아들이기에는설득력이너무없었다. 증거가있는경우는당연히받아들이는게상식일진데, 반민규명위의조사관이나위원들에게그런상식이없으리라고판단하는건일종의모욕이다. 반민규명위는조사대상자선정에대해총 124건의이의신청을접수하여심의한결과 114건을기각하고, 9건을인용했으며, 1건을각하했다. 사전편찬위의경우총 74건의이의신청을접수하여 73 건을기각하고, 1건을인용했다. 반민규명위나사전편찬위에접수된이의신청의주된내용은구체적내용이나증거를제시하지않은채재검토를요구하는것이전부여서조사대상자의선정및결정에크게영향을미치지못했다. 박효종은반민규명위가 다른편의말을듣지않는 증거로노기남대주교의이의신청을인용했다. 이의신청의요지는노기남대주교의친일행위는 천주교회수장으로서교회와교인을지키기위한자기희생 이기때문에 사적이익과영달을추구한친일과는분명히구분돼야한다 는것이다. 반민규명위의판단역시이와다르지않다. 그럼에도반민규명위가노기남대주교를친일반민족행위를한것으로결정한것은천주교가일제말기침략전쟁에협력한행위에대해최고지도자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49
로서의책임을묻기위한것이었다. 이는마치김성수의친일행위가독립운동가를고문한노덕술의친일행위와다를뿐만아니라그책임또한같지않다는것과마찬가지다. 일제의식민지배하에서일어난친일행위에는여러유형이있다. 개인의이익을위해일제의침략과정이나식민지배하에서친일한행위, 항일운동가나무고한민중을고문하거나학살하는데가담한행위로반민족적 반인도적범죄행위, 식민지배체제를일상적으로유지하는데협력한행위로이른바테크노크라트의친일행위, 지식인이나사회지도인사로서일제의침략전쟁에협력한행위등이있다. 죄의내용과정도에따라책임의크기나내용도다르다. 다만반민규명위보고서나사전은그러한차이를현재로선구분하기어렵기때문에포괄적으로함께다룬것뿐이다. 이책임의차이를구분하는것이과거청산문제를다룰때간과해서는안될중요한요소이다. 과거청산을비판하면서성찰의문제로다루어야한다고주장하는사람들이흔히범하는오류는바로이책임을동일시하기때문이다. 나는친일문제를비롯한과거청산논쟁에서야스퍼스의책임론이매우소중하며의미있다고강조해왔다. 홀로코스트를단죄하면서연합군이 이것이당신들의죄다 라고말하며독일국민모두를죄인으로취급하려했을때, 죄는결국개개인이짊어져야하는것이라고주장하면서독일인은각자의위치와태도에따라형사적, 정치적, 도의적, 형이상학적죄를범했다고말했다. 이처럼죄와그에따른책임을구분하면, 우리모두가죄인이다. 따라서우리모두가무죄다 는주장은설자리가없어진다. 책임의동일시 를통해결국에는죄의책임을물어야할사람에게면죄부를주는따위의논리는성립되지않는다. 이영훈의일본군 위안부 논쟁에서범한잘못도미숙한대중적언술로인한오해가아니라, 성노예를강요한천황제파시즘의책임과딸을유곽에판아버지와조선인 위안부 를찾은조선인병사의책임을같은선상에서다룬데서비롯된것이다. 친일문제에서도마찬가지이다. 젊은이를전장터로내모는선동을한사람과침략전쟁에동원된조선인학병의책임이같을수가있는가. 일본제국주의에세금을낸사람은모두친일파라는식의복거일주장에서한걸음도벗어나지못한이잘못을지금도비판론자들은되풀이하고있다. 기득권세력에대한면책의유혹이너무도크기때문인가보다. < 강의내용은다음글에서발췌하거나전재하였음 > 김민철, 기억을둘러싼투쟁 : 친일문제와과거청산운동, 아세아문화사, 2006 김민철, 지연된정의-두개의보고서, 황해문화, 2010 김민철 장완익, 친일반민족행위의진상규명과재산환수, 역사와책임 창간호 (2011) 김민철, 탈식민의과제와친일파청산운동, 정근식 이병천엮음, 식민지유산, 국가형성, 한국민주주의 Ⅰ, 책세상, 2012 정병욱, 해방이후식산은행원의식민지기억과선택적인식, 역사와현실 제48호 (2003.6) 15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반민족범죄고발서 - 친일인명사전 을말한다 윤경로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장 머리말 - 발간 5 주년을맞는소회 지난 11월 8일로 친일인명사전 이세상에나온지만 5년이되었다. 5년전그날정권의방해로예정된행사장에서기념식을진행하지못하고인근효창원백범묘소에서헌정식을겸해 친일인명사전 발간대국민보고대회를가졌던기억이새삼생생하게떠오른다. 친일문학론 의저자임종국선생의유지를계승한민족문제연구소가출범한지 18년,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 가꾸려진이후 8년간의대장정끝에나라도못한일을 우리가드디어해냈다 는그날의감격과자부를어찌잊을수있을까. 친일인명사전 은무엇인가. 왜우리는지난한과정을견뎌가며이힘든작업에온몸을던져야했던것일까. 그열정과동력은무엇에서기인했던것일까. 한마디로 진실한역사 에대한공동체성원대다수의갈증이아니었던가한다. 국민들의거짓역사에대한분노와 역사정의실현 에대한염원이불가능하게만보였던대과업을달성하게하였다. 거기에개인적으로는오욕의역사에대한 고백과성찰 이대장정을가능하게한이정표가되었다고생각한다. 많은사실들을알고있으면서도이런저런이유로친일문제에소극적이었던당대의지식인들은좋게보아도방관자였으며직설적으로말하자면역사왜곡의방조자이자공범이었다. 특히필자를포함한역사학계는항상임무를다하지못하고있다는부채의식에서자유로울수없었다. 이런측면에서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은우리에게단죄가아니라성찰을목표로겸허하게역사를응시할자성의계기를제공해주었다. 결과적으로 친일인명사전 은오욕의역사조차도우리모두의역사로포용하며극복할수있는토대를마련했다고본다. 돌이켜보면독립한나라가어찌제국주의지배하의반민족적범죄행위를묵과할수있었는가, 이러한과정없이올곧고건강한새나라를건설할수있다고보았는가, 설령청산의기회를놓쳤더라도이를기록하고 역사화 하려는노력조차하지못했던가하는의문이들지않을수없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51
그런데이토록너무도상식적이고당연히했어야할이일을방기한채반세기가지나도록외면해왔을뿐만아니라오히려이를왜곡미화한또다른부끄러운역사를우리는알고있다. 지난독재정권시기친일비호세력이득세한가운데전도된가치와강요된침묵이이사회를지배했던것이다. 그러나침묵이곧굴종을의미하는것은아니었다. 오랜시간이흘렀음에도대다수국민들은역사의진실을알고싶어하였으며, 매국배족의역사를청산하지못한과오앞에분노하며민족적자괴감을느끼고있었다. 반역의역사도치욕이지만반민족범죄자들이해방된조국의주류로자리잡고행세하는참담한현실이우리를더욱부끄럽게만들었던것이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사는이렇게기록하고있다. ( 전략 ) 일제의가혹한식민통치에따른인적 물적피해가가늠하기힘들정도였지만, 오랜역사와고유한문화전통에대한자부심도씻기힘든손상을입게되었습니다. 따라서당연하게도민족사의굴절과왜곡의원인을외세에서찾는피해자관점의역사인식이지배적으로자리잡게되었습니다. 그러나이같은시각에는안타깝게도민족내부의자성이라는성숙한모습이결여되었다는문제점을지적하지않을수없습니다. 외적원인해명에만치중한나머지 역사윤리와정의실현 의측면에서고백적자기성찰에는소홀하였다는비판에도귀기울여야할것입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문제의식은바로여기서출발하고있습니다, 그동안수많은종류의인물사전이간행되었지만이처럼부끄러운자화상을가감없이담은사전은유례가없으며앞으로도나오기쉽지않을것입니다. 자랑스러운항일투쟁의역사이면에부일협력이라는치욕스러운과거도엄연히존재하고있음은누구도부인할수없는사실이라하겠습니다. 이러한오욕의역사도우리의역사일진대정확하게기록하고용기있게대면하는것이야말로과거를극복하고미래로나아가는지름길이되리라믿습니다.( 후략 ) 그러나 5년이지난오늘, 우리사회우리나라의현실은위에서언급한기대와믿음이산산조각이나고말았음을여실하게보여주고있다. 역사시계는다시반세기를거슬러이승만독재정권과박정희유신정권시대로급속히퇴행하고있다. 친일비호세력이발호하고서북청년단이횡행한다. 뉴라이트한국사교과서보급이좌절되자박물관에서나볼수있는국정교과서까지부활시키려한다. 상식을벗어난무지막지한역사변란에많은이들이당혹해하고있다. 그러나오늘의대한민국국민들은과거독재정권하에기죽여살던그때그사람들이아니다. 민주화를경험했고인권과평화를소중히생각하는깨어있는시민들이다. 필자는하나님도믿지만 역사정의 도신봉한다. 역사는우여곡절을겪지만길게보면반드시진전하는것이불변의법칙이다. 15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정의는반드시따르는자가있고진리는반드시승리하는날이온다 는선인의말을되새기며, 진리를향한정의로운길이설사외롭고힘들다해도그길이옳다면그길을걷겠다고스스로다짐해본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5주년에부치는각오를밝히면서, 발간전후의과정과현황을정리하고향후의과제를점검해보고자한다. 1. 사전편찬을가능하게한요인과배경 2009년 11월 8일, 숱한난관을뚫고우여곡절끝에 친일인명사전 이세상에모습을보였다. 반민특위가친일경찰의습격으로와해된지 60년만에비로소친일인물들의행적과경력을전면적이고체계적으로집대성한첫성과가출간된것이다. 일제의식민지배로부터해방되고도오랜기간유보되어왔던친일파숙정을, 강제병합 100주년을눈앞에둔시점에역사적청산과학문적정리라는최소한의절차를거쳐일단락지었다는사실은그나마다행이아닐수없었다. 불가능할것만같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달성할수있었던배경에는여러요인이있다. 먼저냉전구조의해체와사회의민주화라는시대적상황이 40여년간지속된독재정권하에서금기의영역으로만여겨졌던친일문제를객관화 공론화 역사화하는성과를거두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을성취하기까지는민족문제연구소의역할과헌신이절대적이었지만, 이밖에도다음과같은여건이조성되지못했다면불가능했을것이다. 그요인과배경을추려보자면 1 인터넷의보급으로인한정보화사회의대두와 전자민주주의 의인식확대, 누리꾼들의자발적이고적극적인 친일인명사전 편찬국민모금캠페인 참여, 2 1966 년임종국의 친일문학론 이충격을던진뒤 1980 년대부터일제강점기친일문제에대한연구가조금씩확산되어 1990년대들어서조사 연구작업이집단화 조직화되기에이르렀던점, 그성과로 3 친일파 99인 ( 돌베개 ), 청산하지못한역사 ( 청년사 ) 와같은대중서의출간과언론의기획보도가이어지면서시민들이친일문제에관심을보이며대중적인실천운동에동참, 친일인명사전 편찬의확고한지지기반으로자리잡았다는점을들수있다. 그리고 4 정치권의변화또한주요요인으로작용했다할것이다. 김대중, 노무현민주정부의출현이없었다면과연가능했을까하는생각이오늘의정치현실을보면서더욱강하게다가온다. 그러나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에결정적이었던힘의원천은편찬사업이위기에처할때마다이를일으켜세운국민적지지와동참이었다. 연구소회원들을비롯한시민들의변함없는성원은일차적결실을거두게한최대동력이었다. 이렇게단일주제의학술사업으로서는유례없는국민적관심과지원을받으면서, 미답의분야나다름없었던일제강점기 40년간친일인사들의행적을분류 정리하는작업의일단계가마무리되었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53
2. 편찬과정과주요쟁점 1) 편찬과정 1999년 8월 11일, 대학교수 1만여명이 친일인명사전 을편찬하여제2의반민특위를만들자는 친일인명사전편찬지지전국교수일만인선언 을했다. 법적인심판과단죄는이미불가능하지만, 20세기가다가기전에역사적청산만은반드시이루어내야한다는의지를밝힌것이다. 단일한사안에대해대학교수 1만여명이서명을한것은유례가없는일이었다. 멀리연변에있는 700여명의조선족대학교수들부터인터넷을통해의사를밝힌하버드대와옥스퍼드대에재직중인교수까지, 소장학자에서부터원로교수에이르기까지, 과거올림픽금메달리스트출신의체육학과교수부터역사학자에이르기까지실로다양한분야의교수들이서명에동참했다. 2개월정도의짧은기간에전임교수들만 1만명이상이서명을했다는사실은그자체로서하나의역사적인사건이자 새로운문화운동 을알리는신호였다고할수있다. 교수사회의전폭적인지지를바탕으로본격적으로편찬위원회구성이추진되었으며, 2001 년 12 월관련학계를망라한조직으로발족하여편찬사업에가속도가붙기시작했다. 이후역사학계를중심으로각분야의교수 학자등전문연구자 150여명이편찬위원을맡았으며, 이들을포함하여 180여명의한국근대사전공자들이집필위원으로참여하여사전의전문성을높이는한편집필원칙을정해나갔다. 한편주관연구소인민족문제연구소는 조선총독부관보 직원록 등관찬사료 23종 200여권, 매일신보 경성일보 만선일보 등신문자료 40여종, 삼천리 조광 등친일잡지와기관지 80여종, 조선신사록 조선인사록 등명감류 ( 名鑑類 ) 140여종, 각도 시 군지등지지류 ( 志誌類 ) 160여종, 각종연감 사전류 60여종, 공훈록 40여종, 일기 회고록 평전류 1,500 여종등총 3,000 여종의일제강점기원사료와데이터베이스 450여종등방대한기초자료를축적해놓고있었다. 여기에연구소가소장하고있는희귀고문서와사진자료도추가되었다. 연구소는이를분석 재정리하여 300만여건에달하는인물정보를구축했으며, 이를토대로 2만 5,000 건에이르는친일혐의자를모집단으로추출했다. 편찬위원회는민족문제연구소가축적한자료와인물정보데이터베이스를토대로관련논문과저술을참고하면서수록대상자를선정했는데, 신중을기하기위해 20여개분야전문분과위원회의검토와상임위원회의심의를거친후지도위원회의자문과조언을청취하고, 최종적으로편찬위원회의전체회의에서결정을내리는여러단계의검증절차를밟았다. 이렇게하여최종적으로 4,389 명의수록대상자가확정되고, 2009 년말발간에이르게된것이다. 이에앞서편찬위원회는 2008 년 4월에발표한수록예정자 4,799 명에대한이의신청을같은해 5 15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월부터받았는데이의신청은무려 97건 127명에달했다. 이의신청처리는상임위원회가담당했으며, 이들에대한심의결과압도적다수인 112명이기각되고, 13명이보류되었으며, 단 2명만이인용결정이내려졌다. 이의신청이인용되어수록대상에서완전히제외된사례는신현확전국무총리와최근우전사회당창당준비위원장 2명에그쳤다. 연구소와편찬위원회는이의신청사유가다소라도개연성이있어보이면최선을다해확인하고자했다. 설령이의신청이없더라도단한명의부당한오명을쓴사람이발생하지않도록검증을거듭하는노력을기울였다. 2) 사전의명칭 구체적인편찬작업에들어가면서편찬위원회는예상을넘어서는여러문제에부딪쳤다. 우선사전의명칭문제였다. 친일인명사전 명칭이외에 부일협력자사전, 친일반민족행위자사전, 친일행적사전 등이제시되었다. 얼핏보면유사하지만수록대상자의개념과범주를어떻게설정할것인가에따라사전명칭을달리해야할만큼매우예민한문제였다. 예컨대 부일협력자사전 은말단생계형부역자나소극적친일행위자가과도하게포함될수있다는측면이, 친일반민족행위자사전 은거꾸로매국노나민족반역자로제한될수밖에없다는점이지적되었다. 한편 친일행적사전 은최소한의가치판단이배제되어규정성이희석되는치명적인결함을안고있었다. 토론에토론을거듭한결과편찬위원회는해방공간은물론최근에이르기까지널리사용되어온 친일파 란용어의역사성을고려하여그대로수용하여사전명칭을 친일인명사전 으로최종결정하였다. 3) 친일파의정의 편찬위원회가최종적으로결정한친일파에대한정의는 1905 년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 년 8월 15일해방에이르기까지일본제국주의의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적극협력함으로써, 우리민족또는타민족에게신체적 물리적 정신적으로직간접적피해를끼친자 이다. 우선친일행위의기간에대해서는별다른논란없이 을사조약 전후부터 1945 년해방때까지로정리되었다. 대체로일본군이대규모로진주하고한국정부의통치에노골적으로간섭하기시작한러일전쟁개전때를한국의주권이심대하게침탈당한시점으로보고, 이를친일행위의상한으로정했다. 또사회통념상일제식민지배가종결되었다고보는 1945 년 8월 15일을친일행위의하한으로정했는데, 이는해방이후를대상으로할때제기될수있는이념공방을차단하고친일및친일파의범주를명확히하려는결정이었다. 다음으로친일행위의해석에대해편찬위원회는 적극적인협력의범주 를크게두가지로분류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55
했다. 조약체결등매국행위에가담한자나독립운동을직접탄압한자와같은민족반역자 ( 반민족행위자 ) 가한부류이며, 식민통치기구의일원으로서식민지배의하수인이된자나식민통치와침략전쟁을미화선전한지식인 문화예술인과같은부일협력자가다른한부류이다. 이중민족반역자전부와부일협력자가운데일정한직위이상인자, 그외정치적 사회적 도의적측면에서책임을물어야할친일행위가뚜렷한자를사전에수록할대상자로선정했다. 일반적인인식으로친일파란위로는매국행위의대가로귀족이나중추원참의의지위를차지한자로부터아래로는공출 징용 징병등의말단집행자로서직접민중과적대하면서일제의수탈과전쟁동원에앞장선면서기 순사등에이르기까지그폭이매우넓었다. 학술적개념으로서친일파를반민족행위자와부일협력자로대별할수있으나이또한경계가분명하지않다. 반민족행위자와부일협력자의범주에모두포함되는사례가있는가하면경계선상에위치한인물도존재하기때문이다. 중요한사실은반민족행위자와부일협력자의구분이반드시죄상의경중에따른것은아니며, 행위의성격을분간하기위한유형별분류일뿐이라는점이다. 친일인명사전 에서는부일협력자상층부인지식인 문화예술인 언론인등의책임을무겁게따지었다. 이중에서도지식인과문화예술인들의직역봉공 ( 職役奉公 ) 에대해서는그사회적파급력이크다는측면에서강도높은책임을물었다. 이민족지배에가장중요한요소는이데올로기통제로, 부일협력한지식인들이내선일체 ( 內鮮一體 ) 와황민화정책 ( 皇民化政策 ), 그리고전쟁동원에필요한군국주의이념을선전 보급하는데핵심적인역할을한집단이었다고보았기때문이다. 4) 선정기준 편찬위원회는수록대상자를선정하는데몇가지기본적인원칙을가지고임했다. 먼저협력행위의자발성과적극성을신중하게평가했다. 주체적신념의실천이거나출세를위한방도로친일의길을선택한것과강박에의한동원또는생계를위한불가피한선택은전혀다른차원의문제이기때문이다. 따라서생계 ( 생존 ) 형부일협력자는뚜렷한친일행적이없으면제외한반면, 권력과부그리고명예를좇는기회주의자는엄중하게취급했다. 예컨대일부지원병이나소년특공대등은일제의선전도구로악용되고부정적영향을미쳤지만, 전쟁의막바지에서총알받이로동원될수밖에없었던역사적상황을고려해특별한사유가없는한선정대상에서제외했다. 반복성과중복성 지속성여부도주된참고사항이었다. 여러친일단체에가입하여활동했거나단일단체일지라도되풀이하여직책을맡거나장기간참여했다면당사자의의지가분명히있었던것으로판단했다. 앞에서거론했듯, 지식인과문화예술인은가혹한식민통치와광기어린침략전쟁에대한비판의식과분별력을지니고있었음에도일제의선전선동에앞장섰다는점에서그사회적 도덕적책무와 156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영향력을감안하여맹목적인협력자보다더엄중하게책임을물었다. 또, 군 경찰 헌병 밀정등폭압기구의복무자들은물리력으로식민지배를뒷받침했을뿐아니라항일세력을직접적으로탄압함으로써독립을지연시켰다는점에서좀더가혹한기준을적용했다. 왕 ( 王 ) 공족 ( 公族 ) 을포함시킬것인가의여부에대해서는상당한논란이있었다. 논의끝에왕 공족의책임이결코가볍지않지만친일보다는망국에대한정치적 도의적책임을묻는것이타당하다는결론에도달했다. 다만기준에부합하는구체적인친일행위가있는경우에는수록대상자로선정하기로정리되었다. 항일에서친일로변절한자나전향자는예외없이수록하기로했다. 그렇지만일제에협력한사실이있었더라도뒤에반일운동에가담한경우, 즉선친일 후항일은제외하기로결정했다. 독립유공자로서훈된친일혐의자는대부분선항일 후친일에해당하는데, 사안의중대성을고려하여수차례에걸쳐심도있는심의절차를밟았다. 그리하여편찬위원회가수록대상자명단을발표하기전에숨겨진친일행적이노출되어 1996 년서훈이취소된김희선 박연서 서춘 장응진 정광조등과함께새로이 20명의수훈자가수록대상자로선정되어 친일인명사전 에이름을올리게되었다. 선정기준의또다른관심은지위에따른책임을어떻게물을것인가라는문제였다. 구체적행위로만협력여부를판별하게된다면말단집행자는행적이뚜렷하게남아친일파로분류되겠지만정작이를지시하거나지휘감독한상층부의책임은실종될개연성이크기때문이었다. 따라서 친일인명사전 에서는특정지위, 즉고등관이상에재직한자를일괄적으로수록대상자로규정했다. 고등관이상은식민통치와침략전쟁의유지수행이가능하도록지휘관리하는간부층에해당하기때문에더욱엄중한책임을묻기로한것이다. 국내외에서전개된지속적항일운동과압도적다수대중의반일정서등당시의현실은이들의선택을관용하기는어려운상태였다고판단된다. 즉, 대한민국이헌법전문에명시한법통인임시정부를비롯한해외항일단체와항일운동가의존재와활동, 국내의각종반일운동, 연합군의반격등일제침략에대한저항이공공연한사실로인지되고있던시기에, 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기일제의고등관료로활동한자들특히임시정부가일제에선전포고한 1941 년 12월 9일이후일제의통치기구에간부로재직한자는반국가범죄자로간주하는것이옳다고판단했다. 요컨대, 통치기구내에서말단하수인들을지휘하고통제하는역할에따른고위간부로서의책임이클뿐아니라, 이들이식민통치나침략전쟁수행에서상부구조를형성하고직책상더영향력이큰행위를할수밖에없었다는당위에서지위에따른책임을규정한것이다. 그렇다고해서편찬위원회가, 말단의집행자들모두가이같은책임에서전적으로자유롭다고판단한것은아니었다. 고등관이아니지만고등경찰 헌병오장 밀정 검열관등은직무상당연범으로수록되었으며, 촉탁이나고등관아래의하급관리 면장 서기 순사 헌병 ( 보조원 ) 등최말단의협력자라할지라도뚜렷한친일행적이있으면수록함을원칙으로삼았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57
3. 수구세력의반응과소송전 1) 수구세력의반응 2004년초단 11일만에소액모금으로목표액 5억원을돌파한국민모금운동에서도나타나듯 친일인명사전 발간에대한국민적지지는확고했다. 다수가찬성입장을밝힌여론조사도이를반증한다. 그러나이사회의일부기득권세력과무지로인해부화뇌동하는극우세력은혈연 학연 이해관계 정치적신념등다양한이유에얽혀역사적진실을애써외면하고있다. 2005년 8월의 1차명단발표에이어 2008 년 4월 2차명단발표를거쳐 친일인명사전 출판이가시화되자친일비호세력은조직적으로대응하면서민족문제연구소와편찬위원회에대한비난과압박의강도를높여나갔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를비롯한수구언론과이른바뉴라이트계열의학자들이어설픈논리를제공하고, 박정희주의자들과극우단체들이노골적인공격을맡는식이었다. 이들이최소한의학문적정리에그렇게까지히스테리적반응을보이는까닭은자신들의사주 ( 社主 ) 와정치적우상의치부가적나라하게드러난사태와무관하지않다. 그런데이들이 친일인명사전 을폄훼하는근거는차마소개하기가민망할정도로하나같이비논리적이다. 게다가해방직후친일파들의변명을그대로재연하고있어 60년세월을무색하게만들고있다. 해방공간과반민특위정국에서친일파들이즐겨내세웠던용공색깔론 전민족공범론 공과론 인재론 희생론 생계론에더하여편찬주체를겨냥한자격론 정치적음모론에심지어불가지론까지등장하는희화적상황이벌어졌다. 무엇보다난감했던일은이들의주장이사전의실체와는전혀별개의차원에서제기되어상식적인소통은물론토론자체를불가능하게했다는점이다. 수구언론을비롯한비판자들은단한번의취재나내용확인도없이억지주장만을일방적으로쏟아냈다. 이들의편향보도와사실왜곡이어제오늘의일은아니지만, 사전의선정기준이나내용전거에대한최소한의분석도없이지엽적인트집잡기와본질비켜가기로일관한것은스스로합리적인반박을할자신이없음을고백하는것과다를바없었다. 해묵은색깔론과급기야는 친일인명사전 을패러디한 친북인명사전 발간소동을일으키다세간의조롱거리가되기도했으며편찬주체의 대표성, 전문성 등을문제삼기도했다. 일제시기를전공한교수와학자들이 180여명이나망라된편찬위원회를정체불명의집단으로매도하는가하면 18년간에걸쳐친일문제를탐구한, 정부부처나지방자치단체사법부까지도인물정보를조회하고있는, 권위를인정받고있는민족문제연구소의전문성을인정하려하지않았다. 이밖에도친일문제가나오면늘거론되는 공과론 과 음모론 등이재등장하기도했다. 158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2) 소송경과 친일인명사전 과관련된소송은사전발간이가시화하면서본격화되었다. 발간에앞서민족문제연구소와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는두차례에걸쳐수록예정자명단을발표하고이의신청을접수하였다. 이어수록대상자가확정되고출판이임박하자관련자들은이를저지하기위해긴급한구제수단으로서가처분신청을법원에제기하기에이른것이다. 2008 년 7월장우성, 8월엄상섭, 2009 년 6월신현확, 10월장지연과박정희, 1010 년 11월홍순일의후손이친일인명사전게재가처분, 발행금지가처분, 서적복제 배포금지등을제기했다. 친일인명사전과관련된소송은예외없이큰파장을불러일으켰다. 하나같이면면이화려한거물급인사들이었기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에수록된인물의후손또는연고자들은 1명예등인격권침해, 2과잉금지의원칙위배등법리를다투는한편으로, 3사실관계에대한부정, 4선정기준의자의성강조, 5발간주체의자격과편향성시비, 6형평성비판, 7공과론희생론상황론정치적음모론주장등다양한문제제기로재판부에압박을가하였다. 그러나이들의지엽적이고비합리적인접근방식은전혀재판부를설득하지못하였다. 대표적쟁점에대한사법부의판단을정리해보면다음과같다. 첫째, 쟁송과정에서가장첨예한논점으로대도된것은선정기준이었다.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에관한특별법에서는조선귀족과중추원의부의장고문참의 ( 찬의부찬의 ), 일본귀족원중의원의의원만을지위에따른당연반민자로간주하였으나, 친일인명사전에서는이를대폭강화하여부일협력자상층부까지수록대상자로삼았기때문이었다. 고등관이상문관, 경부이상경찰, 위관급이상장교와오장급이상헌병, 판사검사등에게도그직위에복무한것만으로도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한것으로간주하고지위에따른책임을물은것이다. 친일인명사전관련소송사례중일제시기검사를지낸엄상섭과만주군중위출신박정희, 만주국사무관이었던홍순일이여기에해당한다. 소송을제기한후손들은선정기준이포괄적이고자의적이며합리적근거도없다고강변하였으나이에대해재판부는일제하에서고등관이상의관리나판사검사, 일정한직위이상의경찰이나군인, 헌병을부일협력자의범위에포함시키는견해가학문적의견의표명으로서의한계를넘어허용될수없는것이라고보기는어렵다고판시하고, 예외사유를인정하여상당수를수록대상에서제외한것도특정인사를제외하기위해서나다른목적을위해인위적, 자의적으로설정한것으로보기는어렵다고연구소의주장을전폭수용했다. 둘째, 절차적정당성에대해서는수록대상및분야별세부기준등과관련하여다방면전문가들의참여를통한논의를거친후발행에앞서이의제기와학계의여론수렴을위해명단을미리발표하는등그수록대상자선정에있어비교적신중하고합리적인절차를거친것으로인정했다.( 장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59
지연, 홍순일 ) 셋째, 후손들은법리적접근외에친일인명사전의신뢰도를떨어뜨리기위해다양한방식을동원하였다. 먼저편찬위원회의전문성과대표성을문제삼았다. 법에의해국가가수행해야할일을일개민간단체가수행하는것은위험하다는논리였다. 또사회주의자에게는관대하여형평성을잃고있어이념에따른자의적선정이라든지, 부정적인면만강조하는자학사관이라는등의주장을개진하고예의공과론상황론희생론등을설파했으나재판부는이를받아들이지않았다. 편찬위원회의구성이나편찬위원의경향성등자격시비에대해서는아예언급을회피함으로써사실상색깔론을일축하고있다고분석된다. 사전서술의객관성에대해서는전거가제시된사실관계를모두인정하여객관적으로확인된사실만을포함하고있고, 진실에반하지않는다고판단했다. 결과적으로사법부는친일인명사전의편찬취지와목적, 수록대상자선정기준, 수록내용등에비추어목적의공공성, 나아가사실관계의객관성과진실성, 명예훼손이나손해의최소화등이인정되므로표현행위의사전금지가허용되어야할실체적요건을갖추고있는경우에해당한다고보기에부족하다고결론을내렸다. 2008 년 7월장우성후손의게재금지가처분신청으로시작된친일인명사전관련소송은 2012 년 4 월대법원이홍순일의후손이제기한서적복제배포금지소송상고를 이유없다 고기각함으로써 3 년 8개월에걸친기나긴쟁송에마침표를찍었다. 최근에는강용석정미홍등극우인물들의 박정희혈서 조작설유포나연구소에대한종북좌경음해와관련하여연구소가제기한민형사소송이진행되고있다. 일각의인터넷상표현의자유를광범위하게보장하자는주장이설득력을가지긴하지만악화가양화를구축하는현실을볼때악의적인왜곡을무제한적으로용인할때발생하는부작용이너무도크기때문에법의판단을구해보는길외에달리방도가없는상황인것이다. 4. 사전편찬의의의 1) 역사적의미 시대정신과많은사람들의헌신적노력이결합하여어렵사리이루어낸성과인만큼 친일인명사전 발간이갖는의미와이에거는기대또한적지않다. 이를요약하자면첫째 친일인명사전 은민주주의를향한소망을담고있다. 일제식민통치에복무한친일파들대부분은해방이후에는역대독재정권에인적 물적토대를제공하면서한국사회의민주주의정착을지연시키는데일익을담당했다. 그렇기에이들에대한역사적정리는민주주의의확대심화를위한전제이다. 160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둘째 친일인명사전 은인권 평화 인종 종교에서인류사회의보편적가치를지향한다. 현존하는징병 징용 위안부문제는전쟁동원에협력한자들을반인도적전범으로취급해야함을증거하고있다. 친일인명사전 은이들과함께인종간대결을조장하거나신사참배를선동한이데올로그들의죄적도낱낱이기록하고있다. 한일과거사청산의관점에서는일제의침략전쟁을미화하고천황제파시즘을공고히하는데복무했다는측면에서일본의군국주의세력과한국의친일세력은표리관계로이해할수있다. 그런의미에서 친일인명사전 을비롯하여한국내에서전면적으로진행되고있는근 현대사에대한민족내부의자성은일본의자기반성을촉구하는계기로작용할것으로본다. 셋째 친일인명사전 과같은지난한과거사청산작업을시민들의지원만으로이뤄낸사례는세계어느나라에서도찾아볼수없다는점을주목하게된다. 국가가 60여년간이나외면해온미결과제를시민들이직접나서서해결했다는사실은역사를바꿔나가는주역이결국시민임을입증해주었다. 그것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추진과시민들의친일청산실천운동이국가차원의과거사청산을앞당기는계기가되었다는점에서도확인된다.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나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의 발족은물론이고, 다른과거사관련위원회의출범에직간접적인영향을미친점도간과할수없는성과라하겠다. 넷째학술적인측면에서는우선 친일인명사전 이단순한친일행위에대한기록이아니라한국근 현대사를아우르는최대의역사 인물정보의집적이라는사실을강조하고싶다. 그간일제침략사나독립운동사연구는질과양, 두측면에서모두깊이있게진행되어왔지만, 정작식민지배의메커니즘과근 현대사회계층의계기적연관성에대한구조적해명에는소홀한점이적지않았다. 친일인명사전 이인물사의공백을메우는동시에미답의연구분야에디딤돌이되기를기대해본다. 친일인명사전 은다양한인물군상의다기한인생행로가담겨있는대서사로서도가치가크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등모든분야가망라되어있는생활사 (Life History) 의보고 ( 寶庫 ) 라는점에서각부문의창작과연구에활용할수있는학술 문화콘텐츠로손색이없을것이다. 이밖에도지성사의측면에서간과할수없는중요한의미가있다. 주지하듯이압축근대로상징되는 20세기한국사회는사상적으로나문화적으로나그축적의폭과깊이에서볼때충실하다고보기는어렵다. 사회의변화를따라잡기에도역부족인현실에서고집스럽게한시대를정리한것은이념이나가치를떠나서그자체만으로도커다란문화적자산이될것이다. 과거를지혜롭게극복하고새로운시대로나아가기위해서는그만큼 지 ( 知 ) 의축적 이필요하다. 그 내공 만큼우리사회는더성숙해질수있는토대를갖게되리라믿는다. 2) 사전에대한평가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61
친일인명사전 발간에대한세간의평가는악의적인일부를제외한다면매우긍정적이며높은 점수 를받고있다. 즉지금까지출간된인명사전중근현대최대최고의인명사전이라는데에대체로동의하고있는것이다. 그러나이같이상당한학술적성과임을인정받았으면서도정작학문적활용과평가는기대에미치지못하고있는것이사실이다. 아직까지도여전히 시민단체의역사실천운동 정도로보는시각이남아있기때문이다. 보훈처, 법원등국가기관에서서훈심사나역사적사실확인의기초자료및판단기준으로사용하는등객관적실증성을두루인정받고있어사전의공신력은이미공인되었다고볼수있다. 심지어뉴라이트계열학자들조차선정기준과정치적배경등을문제삼긴하지만내용의정치함에는동의하고있을정도이다. 이에비해역사학계등연구자들이 친일인명사전 을분석의대상으로삼거나연구논문에직접인용하는사례는지극히희소한실정이다. 점차확대될것으로기대하고있다. 친일인명사전 발간 5주년을맞아사전발간이후확인되는사회적영향을몇가지정리해보면다음과같다. 첫째, 친일문제가사회적가치기준의하나로정립되었다는점이다. 예를들면고위공직자임명에있어본인의역사인식또는선대의친일행위에대한인식이하나의검증잣대가되고있다. 사전이나오기전까지는선대가일제강점기고위공직에있었던것을자랑스럽게여기던풍조가있었다. 그러나사전편찬이후이같은인식에큰변화가일어났다. 문창극씨의총리지명철회, 이인호씨의 KBS 이사장임명에대한사회적논란등이그보기이다. 둘째,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와민족문제연구소의역사연구, 서술에대한검증의정확성이공인되었다는점이다. 국가보훈처, 문화관광부, 행정안전부등정부부처와사법부, 지자체등에서도인물정보를조회할때기준자료로사전이넓게활용되고있다. 뿐만아니라 친일인명사전 수록자중국가서훈을받았던인물 19인의서훈이취소되었다는점역시주목해야할결과로본다. 한편 친일인명사전 발간을사실상주도한민족문제연구소는이사업성취를통해대내외적으로위상이크게신장되었다. 다시말해편찬사업을완수함으로써기왕의시민운동단체이미지일변도에서학술단체로서정체성을확고히하는상징적변화를이룩해냈다고할수있다. 동시에 친일인명사전 발간을계기로연구소의 진성회원 이배가되는성과를이룬점또한큰결실이라하겠다. 이밖에도 친일인명사전 발간이가져온반향의하나로근현대관련사전발간 붐 을들수있다. 민청학련중심의반민주인명사전, 흥사단이추진한부패인사인명사전, 4.9재단의민족운동인명사전등이그주요사례이며앞서언급한극우단체의 종북인명사전 도 친일인명사전 에대한그들나름의대응이었다. 친일인명사전 은진보보수를물론하고한국사회전체에다양한영향을끼쳤으며지금도그파장은계속되고있다고할수있다. 162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5. 현황과향후계획 1) 보급현황 친일인명사전 은 2009 년 11월초판인쇄이후 5년간 4쇄 7000 질을제작했다. 특수분야를다루는사전이라는성격과고가라는제약이있음에도 2014 년 10월말현재누적통계 6855질이판매되었다는놀라운실적을보이고있다. 출판계에서는사전으로서는보기드문베스트셀러로받아들이고있으며, 지금도월평균 35질 (2014 년기준 ) 이판매되는스테디셀러로자리잡았다. 사실이같은폭발적인호응은발간당시에는전혀예측할수없었다. 2009 년출간을앞두고출판전문가들의자문을받았는데 500질정도만제작하라는것이일반적인의견이었다. 나름결단을내려 2000질을인쇄했는데이분량은불과세달여만에소진되었다. 예상외의초반판매량은언론보도가집중된데원인이있었다. 엄상섭, 장우성, 박정희, 장지연, 홍순일의후손들이게재출판배포금지가처분을신청하고소송을이어간것이언론의주목을받았다. 특히박정희의후손이친일인명사전발간국민보고회직전기습적으로법원에배포금지가처분을신청하고이에대응해연구소가박정희의만주군관학교지원혈서를공개함으로써역설적으로사전발간사실이널리알려지게된것도세간의관심을끈요인이되었다. 이후에도사전판매가꾸준히이루어진데는회원과시민들의자발적인보급운동이결정적으로작용했다. 이들은각커뮤니티별모금과보급, 공공도서관신청, 각급학교기증운동등다양한형태로보급운동을전개했다. 친일인명사전의구매현황을분석해보면몇가지특징을찾아낼수있다. 첫째, 의외로개인구매가많다는점이다. 개인이구매하기에부담스런가격임에도이런결과가나타나는것은민족문제연구소회원들이개별적으로구매하는데서나아가주변에권유하고있기때문으로해석된다. [ 표1] 에서나타나듯이회원구매가전체판매량의 34% 를차지한다는사실은회원들이그만큼주인의식을가지고그성과를간직하고싶어한다는반증이다. 둘째, 공공도서관등기관보급이저조하다는점이다. 새정치민주연합조정식의원실이지난 8월 29일배포한보도자료에의하면공공도서관의친일인명사전비치율은불과 15% 에머무르고있다고한다. 의원실이채택한조사표본은 778개관으로의미있는지표로평가할수있다. 비단공공도서관만이아니라중고등학교도서관도상황은마찬가지일것이라짐작된다. 이같은낮은보급률은보수정권이들어선이후가해지고있는유무형의외압과무관하지않다. 실제보수계교육위원이교육청에친일인명사전을구입한학교현황을요구한다든지, 교육일선의교사들의구매요청을교장이나교감이거부한다든지하는이례적인현상들이일어나고있는것이증좌이다. 셋째, 보급이수도권에편중되고있다는점이두드러진다. [ 표2] 를보면인구편차에따른지역적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63
차이를감안하더라도서울경기의구매율이 60% 가넘어수도권이각종현안에민감하게반응하고있는보편적경향과궤를같이한다. 특기할만한사실은흔히보수의아성이라믿고있는대구지역에서의외로구매가많았다는사실이다. 이는친일문제를이념대결구도로호도하려는극우세력의시도가효과적이지않다는반증의하나로볼수있겠다. 민족문제연구소는자발적구매자들을대상으로한판매는대체로일단락되었다고파악하고있으며, 2단계보급전략은기관이나일반시민을대상으로보다조직적이고공격적인방향으로수립해야한다고진단하고있다. 66% 34% [ 표 1] 전체판매량중회원구입 34%, 비회원 ( 개인, 단체, 서점등 ) 구입 66% 회원 비회원 [ 표 2] 지역별구매현황 (2009.11~2014.10) 강원 경기 경남 경북 광주 대구 대전 부산 서울 121 1,624 217 126 367 295 165 211 2,606 1.80% 23.70% 3.20% 1.80% 5.40% 4.30% 2.40% 3.10% 38% 울산 인천 전남 전북 제주 충남 충북 해외 합계 40 166 274 269 53 145 158 18 6,855 0.60% 2.40% 4.00% 3.90% 0.80% 2.10% 2.30% 0.30% 100% 2) 향후계획 친일문제연구에선구적업적을세운임종국선생은 친일파총서 를발간하고자했지만지병으로타계했다. 편찬위원회와민족문제연구소는임종국선생의유업을계승하는한편, 해방이후 80 년간의친일청산의역사를정리하고연구성과를집대성하는취지에서 친일문제연구총서 를발간하려한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사업또한구상단계에서부터 친일문제연구총서 의일부로기획된것이다. 인명편, 단체 기구편, 연구편, 인물열전, 사진도록 참고편, 백서등크게 6종으로구성되는데, 세부내용은아래표와같다. 164 민족문제연구소 2014 시민학교
Ⅰ. 인명편 친일인명사전증보판 : 지역 해외 경제분야협력자등대폭보완 인명록시리즈 : 창씨명일람, 조선인공직자명부, 훈포상자명부등 Ⅱ. 단체 기구편 조선총독부기구사전 / 일제협력단체사전 국내편 / 해외편 / 재일조선인단체사전 Ⅲ. 연구편 친일파 의개념과범주 / 친일의논리구조 / 분야별심층연구 / 친일청산운동의역사 Ⅳ. 열전친일파 매국형친일파등 5개분야인물열전 (20권) / 직업형친일파등 7개분야인물열전 (40권) 전쟁협력형친일파등 8개분야인물열전 (40권) Ⅴ. 사진도록 자료편 Ⅵ. 백서 친일인명사전 증보판간행을비롯한인명편에서는창씨명일람, 조선인공직자명부, 일제강점기훈포상자명부등의인명록시리즈발간을계획하고있다. 단체 기구편에서는일제강점기식민통치기구로서조선총독부및각종협력단체등을사전으로펴내려한다. 연구편에는그동안축적된친일파연구및친일청산운동의역사를종합하려한다. 다음으로대표적친일파들을분야별로정리한대중서로서친일파인물열전을구상하고있다. 마지막으로각종사진과자료들을정리한자료편, 민족문제연구소와편찬위원회의역사를정리할예정이다. 이렇게탄생할 친일문제연구총서 는친일파의형성과논리구조, 활동과영향을종합적으로평가하고, 이를일반대중들에게널리알려바른역사인식을확산시켜나갈교두보가될것이다. 이를통해일제식민지배의구조와특성에대한이해가심화되고, 친일문제연구가활성화되기를기대한다. 다시보는 친일인명사전 165
민연이만든책 입금계좌 우리은행 1005201-271908 민연주식회사 누리집에서 카드결제가능 허씨일문을따라서간도로망명한독립투사이상룡선생의손부인허은여사 회고록. 시할아버지, 시아버지, 남편을뒷바라지하면서온갖고난을함께한여 사는 1920 년대만주독립운동의역사와한인여성들의애환을진솔하게들려준 다. 아직도내귀엔서간도바람소리가 독립투사이상룡선생손부허은여사회고록 구술허은 기록변창애 280 쪽 12,000 원 ( 회원가 10,200 원 ) 60~70 년대한국지식인사회에충격을던졌던친일파연구의고전 친일문학론 이정밀한고증과주해를거쳐거듭났습니다. 370 여개의각주와 1,100 여명의인명 색인에서반세기의세월을뛰어넘은원저자와후학들의치열한교감이느껴집니 다. 교주본친일문학론 임종국저 이건제교주 648 쪽 35,000 원 ( 회원가 29,750 원 ) 일제에의해징병 1기로끌려갔다가히로시마에서원폭피해를입은곽귀훈선생의회고록. 선생은 1998년일본정부에 피폭자지위확인소송 을제기하여 2001년과 2002년판결에서모두승소, 일본원폭지원법의대상자자격을쟁취한최초의한국인원폭피해자다. 나는한국인피폭자다 원폭피해자곽귀훈의삶과투쟁 곽귀훈저 285 쪽 15,000 원 ( 회원가 12,750 원 ) 민족문제연구소와포럼진실과정의가함께펴낸는과거사청산운동전문학술지. 6호에서는 해방되지못한 사할린한인의역사적현실과실천과제를특집으로다루었다. 역사와책임 연 2 회발행 13,000 원 ( 회원가 11,050 원 ) 1910 년부터현재에이르기까지일제식민지배의실상과과거사청산운동을유물 사진과도표, 상세한해설을붙여개괄적으로조명한도록집. 일제, 조선을삼키 다 등 4 부로구성되었으며연구소소장자료를포함한 800 여개의도판을실었다. 거대한감옥, 식민지에살다 강제병합 100 년특별전도록 285 쪽 25,000 원 ( 회원가 21,250 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