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0 호 (2017.4) 부경역사연구소
지역과역사제 40 호 차 례 연구논문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 배현성 5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 오기승 45 ꡔ울산부호적대장 ꡕ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 이정수 95 18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 김미성 131 19세기언양의가옥과거주실태 / 장경준 163 -언양현상남면호적사례분석 - 독립운동가백민황상규의생애와초상 / 김영범 197 일기연구방법론으로서의로컬리티 / 차윤정 257 부산의임진왜란기념물조성과도시경관화 / 양흥숙 289 연구동향 지방사연구와시간연구 / 차철욱 325 서평 조선후기노동양식과성격, 그리고그특성변화를추적하다 / 장경준 337 -이정수ㆍ김희호지음, ꡔ조선후기노동양식연구 - 奴婢, 雇工과挾戶의비교ꡕ, 민속원, 2016- 휘보
밀양 금곡유적을 본 낙동강 동안지역의 고대 철생산 5 ꡔ지역과 역사ꡕ 40, 2017.4, 5~43쪽 중심으로http://dx.doi.org/10.19120/cy.2017.04.40.5 연구논문 밀양 금곡유적을 중심으로 본 낙동강 동안지역의 고대 철생산 1)배 현 성* 머리말 Ⅰ. 낙동강 동안지역 제철유적의 입지와 특징 1. 입지 2. 낙동강 동안지역 제철유적의 특징 Ⅱ. 종합 제철유적으로서의 금곡 제철유적과 생산집단 1. 금곡 제철유적의 생산체계 2. 생산집단 맺음말 국문초록 한반도 동남부 지역의 고대 철생산은 경주와 김해를 비롯한 동남해안지역과 낙동강 동안을 이용한 양산~밀양 지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중 낙동강 동안의 철 생산유적은 밀양 사촌유적, 밀양 금곡유적, 밀양 큰검세유적, 양산 외화유적, 양산 물 금유적 등이다. 낙동강 동안지역은 원료인 철광석과 연료인 목재의 수급이 용이하고, 하천을 이용한 운반이 편리한 지리적 이점을 지닌 고대 철생산의 중심지였다. 또한 밀양 금곡유적의 경우, 제철조업의 전체 공정인 採鑛, 焙燒, 製鍊, 精鍊, 鍛冶, 鎔解, 製鋼 등에 해당하는 모든 종류의 제철로가 확인되었으며, 밀양 사촌유적은 제련 로 7기가 동시에 조업된 생산시설이라는 점이 밝혀졌다. 양산 물금유적 역시 제련로를 비롯한 다수의 제철로가 확인되어 낙동강 동안의 철생산유적들이 모두 대량 생산체계 를 갖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재)두류문화연구원 선임연구원(babainthelamp@hanmail.net).
6 지역과역사 40 호 이러한철생산체계및유통의관리주체는, 각철생산유적에인접한고분군 ( 임천고분군 ) 의편년과출토유물, 문헌기록을통해유추해볼때신라계의세력인것으로판단된다. 밀양금곡유적의조업시기는 6세기 ~7세기중엽정도로파악되며, 밀양사촌유적과양산물금유적도비슷한시기의것으로보고있다. 이시기는생산과유통체계가정비되고중앙에의한수공업의통제가시작되는시기이다. 이는왕도인경주에서제철에대해기술을쌓아놓았던것을신라의영토확장과더불어각지방의거점에기술을전파한것으로파악할수있다. 즉, 경주황성동에서습득된제철기술이낙동강동안지역으로전파되었으며, 이러한제철기술을바탕으로신라가강력한국가로발돋움할수있었을것이다. 6~7세기, 정복전쟁이한창이던시기에신라는양산 ~ 밀양으로이어지는철생산을장악함으로써삼국통일에한걸음더나아갈수있었던것으로사료된다. 주제어 : 낙동강동안, 밀양금곡유적, 생산체계, 임천고분군, 생산집단 머리말 제철업은이시대국가의중요한기간산업이며, 고대사회에서도철생산과그에따른철기의보급은사회구성체를변화하고발전시키는중요한역할을하였다. 그러나철에대한연구는대부분매장유적에서출토된철제품을대상으로그기원과더불어철제품의형태와기능등에대한다양한의견들이개진되었으나아직체계적인수준에는이르지못하고있다. 제철은원료의획득기술, 爐의축조기술, 송풍기술, 그리고조업기술등제반요소가갖추어져야가능한종합기술이지만, 1) 이와관련된일련의철생 1) 李南珪, 古代製鐵및鐵器製作技術의發展 ꡔ 鐵銅文明發達史硏究報告書 ꡕ, 浦項綜合製鐵株式會社, 1989, 20 쪽.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7 산공정과爐의형태와구조등에대한연구가거의이루어지지않고있어고대철생산의실체에대해서는구체적인이해가어려웠다. 1970~80년대의철생산유적에대한조사는분묘유적이나주거유적혹은패총유적을조사하는과정에서부수적으로鐵滓나송풍관등에대해간략하게언급하는수준이었다. 2) 1990년대들어제철유적에대한조사가이루어지기시작하면서, 3) 철생산과철기제작방식에대한관심이높아졌으며, 이외의분묘유적에서발굴된조사성과에의해철기문화의발전과정에관한연구가진행되어철기문화의단계구분이이루어지기도하였다. 4) 또한철제품에대한연구도이루 2) 金元龍, 加平馬場里冶鐵住居址 ꡔ 歷史學報 ꡕ 50 ㆍ 51 合輯, 1971. 金元龍ㆍ鄭永和ㆍ崔夢龍, 陽平郡大心里遺蹟發掘調査報告 ꡔ 八堂ㆍ昭陽댐水沒地區遺蹟發掘綜合報告書 ꡕ, 文化財管理局, 1974. 崔茂藏, 梨谷里鐵器時代住居址發掘調査報告書 ꡔ 建大人文科學論叢 ꡕ 12, 1979. 韓永熙, 馬場里住居址出土遺物 ꡔ 中島進展報告 ꡕ Ⅲ, 국립중앙박물관, 1982. 3) 경주황성동, 진천석장리, 밀양사촌, 양산물금, 울산방리, 광주금곡동유적등이다. 皇城洞遺蹟發掘調査團, ꡔ 慶州皇城洞遺蹟第一次發掘調査槪報 ꡕ, 國立慶州博物館, 1990. 金世基, 皇城洞原三國聚落址의性格 ꡔ 마을의고고학 ꡕ, 제 18 회한국고고학전국대회발표요지, 1994. 손명조ㆍ박문수, 慶州市皇城洞 524-9 番地住宅新築敷地內遺蹟發掘調査 ꡔ 국립경주박물관연보 ꡕ, 국립경주박물관, 1997. 國立慶州博物館, ꡔ 慶州皇城洞 524-9 番地溶解爐跡 ꡕ, 1999 ; ꡔ 慶州皇城洞遺蹟 Ⅰ ㆍ Ⅱꡕ, 2000. 慶北大學校博物館, ꡔ 慶州皇城洞遺蹟 Ⅲ ㆍ Ⅳꡕ, 2000. 啓明大學校博物館, ꡔ 慶州皇城洞遺蹟 Ⅴꡕ, 2000. 신종환, 鎭川石帳里鐵生産遺蹟의調査成果 ꡔ 新羅考古學의諸問題 ꡕ, 제 20 회한국고고학전국대회발표요지, 1996. 國立淸州博物館ㆍ浦項産業科學硏究所, ꡔ 鎭川石帳里鐵生産遺蹟 ꡕ, 學術調査報告書第 9 冊, 2004. 國立金海博物館, ꡔ 密陽沙村製鐵遺蹟 ꡕ, 國立金海博物館學術調査報告第一冊, 2001. 東亞大學校博物館, ꡔ 梁山勿禁遺蹟 ꡕ, 古蹟調査報告書第三十一編, 2000. 韓國文化財保護財團, ꡔ 蔚山圈廣域上水道 ( 대곡댐 ) 事業編入敷地內 1 次發掘調査報告書 ꡕ, 學術調査報告書第 126 冊, 2002. 국립광주박물관ㆍ한신대학교박물관, ꡔ 무등산금곡동 - 조선시대철및철기생산유적 -ꡕ, 국립광주박물관학술총서제 25 책, 1993. 4) 李南珪, 三韓鐵器文化의形成過程 - 樂浪地域과의比較的時角에서 - ꡔ 三韓社會와考古學 ꡕ, 제 17 회한국고고학전국대회발표요지, 1993, 46~53 쪽. 李盛周, 新羅ㆍ伽倻社會의政治ㆍ經濟的起源과成長,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8, 31~42 쪽. 宋桂鉉, 三韓鐵器變化의段階 ꡔ 嶺南考古學會ㆍ九州考古學會第 1 回
8 지역과역사 40 호 어졌다. 5) 다만이러한연구는해당철기의형태분석을통해이루어지고있으며, 그대다수가부장품인관계로부장양상및그조합을해석하는방향으로진행되었다. 한편제철기술에대한연구가미흡한상황에서, 철소재 6) 와鐵滓 7) 에대한연구와문헌기록의고찰을통한鐵産地에대한연구 8) 가있었으며, 고대철생산공정과이에따른고고자료에대한연구 9) 및철기제작기법에대한연구 10) 가진행되고있다. 合同考古學硏究會資料輯 ꡕ, 1994, 64~66 쪽. 5) 김광언, 신라시대의農器具 ꡔ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ꡕ 8, 書景文化社, 1987. 서영남, 鐵鎌에대하여 ꡔ 東萊福泉洞古墳群 ꡕ Ⅱ, 釜山大學校博物館, 1990. 이상률, 農ㆍ工具 ꡔ 古文化 ꡕ 37, 1990. 李賢惠, 三韓社會의농업생산과철제농기구 ꡔ 歷史學報 ꡕ 126, 1990 ; 李賢惠, 三國時代의농업기술과사회발전 -4~5 세기新羅社會를중심으로 - ꡔ 韓國上古史學報 ꡕ 8, 1991. 김재홍, 살포와鐵鋤를통해서본 4~6 세기농업기술의변화 ꡔ 科技考古硏究 ꡕ 2, 1997. 안재호, 鐵鎌의變化와劃期 ꡔ 伽倻考古學論叢 ꡕ 2, 1997. 박진욱, 신라의가시돋친무기에대한약간의고찰 ꡔ 고고민속 ꡕ 1963-4, 1963. 이재영, 有刺利器에對한一硏究 ꡔ 考古硏究 ꡕ 1, 1989. 이현주, 有刺利器에대하여 ꡔ 東萊福泉洞古墳群 ꡕ Ⅱ, 釜山大學校博物館, 1990. 천말선, 鐵製農具에대한考察 - 原三國ㆍ三國時代古墳出土品을中心으로 - ꡔ 嶺南考古學 ꡕ 15, 1994. 안순천, 小形鐵製模型農工具副葬의意義 - 大伽倻古墳郡의埋葬儀禮와관련하여 - ꡔ 嶺南考古學 ꡕ 18, 1996. 金榮珉, 蔚山下垈수습철기의검토 ꡔ 伽倻考古學論叢 ꡕ 2, 1997. 서영남ㆍ이현주, 三韓ㆍ三國時代鐵器의儀器的性格에대한一考察 ꡔ 伽倻考古學論叢 ꡕ 2, 1997. 6) 임효택, 副葬鐵鋌考 ꡔ 東義史學 ꡕ 2, 1985. 안재호, 鐵鋌에대하여 ꡔ 東萊福泉洞古墳群 ꡕ Ⅱ, 1990. 東潮, 弁韓과伽倻의鐵 ꡔ 伽倻諸國의鐵 ꡕ, 신서원, 1995. 7) 윤동석, 韓國의古代鐵滓에대하여 ꡔ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記念論叢 ꡕ Ⅰ, 一志社, 1987. 8) 文暻鉉, 新羅의鐵産 ꡔ 新羅生産經濟의新硏究 ꡕ,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13, 書景文化社, 1992. 柳承宙, ꡔ 朝鮮時代鑛業史硏究 ꡕ, 고려대학교출판부, 1993. 안춘배, 韓國古代의鐵生産과流通 ꡔ 釜山女大史學 ꡕ 10 ㆍ 11 合輯, 1995. 9) 손명조, 韓半島古代의中南部地方鐵器生産遺蹟의現狀 ꡔ 嶺南考古學 ꡕ 22, 1998. 윤종균, 古代鐵生産에대한一考察, 전남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8. 노태천, ꡔ 韓國古代冶金技術史硏究 ꡕ, 學硏文化社, 2000. 10) 張恩晶, 5~6 世紀高句麗鐵器製作技法에대한一考察, 서울대학교석사학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9 2000년대에들어서는기원전 ~ 조선시대에걸친거의전시기의제철유적에대한조사가활발히이루어져서제철에대한관심이높아지며기존의유물이나철기문화가아닌제철자체에대한연구를전공하는연구자들이나타났으며, 11) 제철과관련된논의도활발히진행되고있다. 12) 이러한상황속에서현재알려져있는조선시대의제철로를토대로고대제철을복원하려는노력 13) 과더불어진천석장리를모델로한고대제철로복원실험 14) 이실시되었으나, 제반기초자료가부족하여제철공정과관련된고대철생산에대한연구는아직도기초적인수준에머물고있다. 이러한기존의연구성과들은기본적으로발굴조사의보고서를토대로, 유적에서확인된유물을중심으로이루어진것이대부분이며, 유적자체에대한종합적인검토나철생산에대한체계적인연구는미흡한실정이다. 이는제철유적이지니는당대의중요성에대해서는연구자들이인식하면서도제철유적이물리적으로어떻게가동되고, 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어떠한기능을하였는지에대해서는심도있는연구가이루어지지않는결과로나타나고있다. 앞으로의제철과관련한연구는제철기술과과정자체에대한 위논문, 2002. 11) 윤종균, 앞의석사학위논문, 1998. 金權一, 南韓地域古代製鐵爐에對한一硏究, 한신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3. 李東完, 韓國古代製鐵에대한硏究 - 古代製鐵復元實驗을中心으로, 한신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3. 12) 특히 2011 년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에서 ꡔ 신라형성기의유적 ꡕ 을주제로진행한 고고학으로보는신라의형성기 라는학술심포지움에서는제철유적을취락에서분리된, 제철관련작업만을위한공간으로보아야한다는견해가제시되었고, 이는큰규모의제철유적들에서주거공간이나타나지않는다는점에서타당한것으로판단된다. 13) 權丙卓, 전통용광로복원과제련술연구 - 쇠부리터시설장비를되살려보존하기위하여 - ꡔ 민족문화논총 ꡕ 12, 1991 ; 古代鐵生産의硏究 - 慶州皇城洞遺蹟을중심으로 - ꡔ 國史館論叢 ꡕ 42, 1993. 14) 2011 년 10 월, 2014 년 10 월, 2015 년 9 월의 3 차례에걸친고대제철로복원실험이국립중원문화재연구소에서행해졌으며, 이러한실험을바탕으로 2015 년 9 월에 고대제철기술! 실험고고학으로말하다 라는주제로학술세미나가개최된바있다.
10 지역과역사 40 호 연구와함께정치ㆍ경제ㆍ사회적으로도어떠한기능을하였는지에대해종합적으로다루어져야할것으로사료된다. 한편밀양금곡유적의조사성과를정리하던중, 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들을국가차원에서관리하며, 발달된제철기술로대량생산체계를갖추어다량의철제품을생산하여, 낙동강수계를이용해운송하였다는철생산네트워크에 15) 주목하였다. 그간의발굴조사성과만으로는그실체가밝혀지지않아가설로만여겨지고있었다. 하지만금번밀양금곡유적의발굴조사결과를가지고밀양사촌유적과양산물금유적의기존성과를더해철생산네트워크의실체를검토해보고자한다. 이글에서는이러한고대제철과관련하여, 먼저첫째장에서낙동강동안지역의제철유적 16) 의특징과입지에대해살핀후, 그중에서도양산 ~ 밀양에이르는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에대해금곡제철유적을중심으로살펴보고, 두번째장에서는낙동강동안지역의제철유적들중에서도가장최근에발굴조사된바있는밀양금곡제철유적의철생산프로세스및생산집단에대해파악해보기로하겠다. 이러한것을통해고대낙동강동안지역철생산의성격에대해검토해본후, 낙동강동안지역의제철유적들이어떠한의미를지니는지밝히고자한다. Ⅰ. 낙동강동안 17) 지역의제철유적의입지와특징 1. 입지 제철유적의입지는주거유적과분묘유적과도밀접한상관관계가17) 있으 15) 손명조, 낙동강하류지역의고대철생산 ꡔ 동원학술논문집 ꡕ 4, 2001. 16) 제철유적을언급함에있어제련유적과제철유적을따로분리하기어렵다는점에서, 본고에서언급하는제철유적은 1 차공정인철생산과 2 차공정인철기생산을포괄하는개념이다. 17) 낙동강수계를따라확인된제철유적들은특이하게도낙동강동안지역에만형성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11 며, 18) 제철유적, 그중에서도제련로를갖춘대규모제철유적의경우에는일반적인생산유적과는달리인근에는주거의흔적이확인되지않는다. 19) 제철유적의경우에는산림과하천이모두갖추어진곳에주로입지하며, 다른생산유적과는달리, 제련로를갖춘대규모제철생산유적의경우에는특히주거의흔적이인근에서확인되지않는다. 철생산시설은어떠한집단이독점하는, 보안을요하는시설이었기때문으로사료된다. 제철유적의입지는원료와연료의확보에크게좌우되며, 그중에서도연료의확보에더중점을둔다. 20) 되어있다. 본고에서다루는낙동강동안지역의제철유적은밀양의사촌ㆍ금곡ㆍ큰검세유적, 양산의외화ㆍ물금유적등이다. 낙동강수계의범위가매우넓으나, 여기서는밀양 ~ 김해까지의범위만다루도록하겠다. 이러한낙동강동안지역제철유적의편중은원료인철광석을생산하는광산이낙동강동안에집중되어있는것이가장큰이유인것으로사료된다. 본고에서다루는밀양과양산지역의경우에도밀양동진광산, 양산의물금광산등이모두낙동강동안지역이며, 낙동강서안지역에는광산의분포가거의확인되지않는다. 김해의경우낙동강서안에위치하고있으나, 현재확인되는광산들은조선후기이후의광산으로파악된다. 물론고대의채광은노천광산에서이루어진경우가대부분이다. 이러한점에있어서광산의개념을고대에그대로적용하기는어렵다고할수도있으나, 광맥의경우고대의것이현재까지그대로이어지는경우가대부분이므로현대의광산의분포로고대의철광석의분포를살피는것또한큰무리는없다고사료된다. 18) 배현성, 고대낙동강동안지역의철생산과특징 - 밀양ㆍ양산지역을중심으로 -, 부산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4, 12 쪽. 주거유적의경우, 동굴이나임시야영지의형태를주거로활용한구석기시대에서신석기시대에는마을이등장하며강변충적지에서구릉지로그입지가변화하였다. 청동기이후에는농경에유리한곳으로마을이입지하는양상을보인다. 분묘유적의경우, 생활유적의인근에자리하므로, 주거유적과그입지의양상이같다고할수있다. 19) 이는철생산시설이보안이필요한, 생산집단이독점하는중요시설이었기때문으로보인다. 20) 이남규, 철기생산프로세스의이해 ꡔ 한국매장문화재조사연구방법론 -4ꡕ, 국립문화재연구소, 2008. 원료보다연료를운반하는비용이보다많이들기때문이다.
12 지역과역사 40 호 < 표 1> 제련유적의원료산지추정 유적명 분석대상 특징 추정철산지 1 진천석장리 철광석, 철광분 곡나철산 의충주비정설, 고려시대충주-괴산-보은다인철소에해당등지 2 밀양사촌 배후광산 자철광석편과분말, 배소흔적 밀양동진광산 3 밀양금곡 철광석 자철광석, 배소흔적 밀양지역별도의광산 4 양산물금 배후광산, 문헌 원동면화제리일원, 자철광석, 배소흔적 물금광산 밀양은 ꡔ 世宗實錄地理志 ꡕ에松谷山에서石鐵이난다는기록이있으며, 21) 양산의경우, ꡔ 慶尙道續撰地理誌 ꡕ에는臨景山에사철이생산된다는기록 22) 이있으며, ꡔ 新增東國輿地勝覽 ꡕ에火者浦에서철이생산된다하였다. 23) 이러한기록은이지역이예로부터철산지였다는사실을나타내는것이며, 실제로도근ㆍ현대밀양에는동진광산, 양산에는물금광산과경남철산이자철광과적철광의주요산지였다. 24) 연료의경우, 고대중국에서는석탄이나목재도제철의연료로사용되었다고하나, 일반적으로목탄이가장널리이용된것으로알려져있다. 목탄은일상생활에서부터제철과관련된원료로서매우중요한재료였다. 25) 이러한원료와연료의원활한수급을위해제철유적은다음과같은조건을갖춘곳에주로입지하고있다. 먼저원료수급을위해광산이가까워야하며, 연료의수급을위해山林에접해있어야한다. 다만원료와연료중연료의공급이좀더원활해야 21) ꡔ 世宗實錄 ꡕ 地理志, 慶尙道慶州府密陽都護府. 土産磬石 ( 産府東萬魚寺洞 ), 石鐵 ( 産府東松谷山 ) 22) ꡔ 慶尙道續撰地理誌 ꡕ 梁山郡 郡西臨景山産砂鐵品中歲貢正鐵四百九斤 23) ꡔ 新增東國輿地勝覽 ꡕ 卷 22 慶尙道梁山郡. 24) 자원개발연구소, ꡔ 한국의광물 ꡕ, 1977. 다만, 밀양금곡유적의원료는자연과학분석결과, 유적주변의알려지지않은광산일가능성이높은것으로추정된다 ( 두류문화연구원ㆍ삼강문화재연구원ㆍ지질유산환경연구소, ꡔ 밀양임천리금곡제철유적 - 자연과학분석 -ꡕ, 2014, 98~99 쪽 ). 25) 金鎬詳, 古代木炭窯考察 - 白炭窯를中心으로 - ꡔ 慶州史學 ꡕ 19, 2000, 18 쪽.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13 한다. 제철유적의입지를분석해보면, 위에언급한목탄과관련하여, 탄요의입지는제철로입지의중요요소중하나이다. 원료 ( 철광석 ) 를운반하는것이연료 ( 숯, 즉나무 ) 를운반하는것보다효율적인것이중요한이유이며, 목탄요의입지는깊은산중이거나도심의외곽에위치하고있다. 이는원료인목재를쉽게구할수있다는것과더불어조업과정에서많은매연과재를발생시키기때문이다. 26) 낙동강동안에위치한양산 ~ 밀양지역의제철유적들은이러한조건을충족시키며, 광석및소재의선별, 제철로의축조, 소재의냉각, 제품의열처리등제철과정및원료와연료및완성된철제품의수송을위해하천인근에입지하고있으며, 이는전국적인제철유적의입지양상이기도하다. 27) 이러한입지적특징을정리해보면, 제철유적은대부분원료와연료의원활한수급을위하여산지와하천이인접하고있는특징을보이며, 원료와연료중에서도연료의수급이더중요하므로, 하천보다는산지와조금더가까이입지하게된다. 대표적인예가광주무등산금곡동유적 28) 으로, 산에위치하고있으며, 주변에는하천이없고, 인접한저수지나계곡물을이용해조업을한것으로파악된다. 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들은전형적인입지적특징을나타내고있으며, 낙동강수계를따라생산물의운송과유통까지고려한위치에자리한것으로보인다. 26) 東國大學校慶州캠퍼스博物館, ꡔ 慶州蓀谷洞ㆍ勿川里 (Ⅰ)- 木炭窯遺蹟 ꡕ, 2002. 27) 배현성, 앞의석사학위논문, 2014, 14~19 쪽. 28) 무등산에서서북쪽으로뻗은능선의북사면에위치하며계천이발달해있다. 일대에는참나무와소나무의수종이풍부하다. 무등산금곡유적의경우, 조선시대의제철유적으로본고에서다루는제철유적들과는시기가맞지않아직접적인비교대상은아니나, 입지적특징중연료의수급이더중요하게작용하는대표적인사례이기에언급하였다.
14 지역과역사 40 호 < 도면 1> 양산물금유적위치도 < 사진 1> 밀양사촌유적원경 < 사진 2> 밀양금곡제철유적원경 2. 낙동강동안지역제철유적의특징낙동강동안지역제철유적을살피기에앞서, 경상지역전체제철유적의특징을먼저살펴보도록하겠다. 경상지역제철유적의특징은크게 4가지로나타난다. 29) 경상지역 46개 ( 동일지역을하나의단위유적으로할경우 28개소 )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15 < 표 2> 경상지역고대제철유적발굴조사현황 연번유적명유구성격출토유물조업성격시기특징 1 사천늑도유적수혈, 건물지 노벽체, 송풍관, 철재, 숫돌 단야 BC2~0 2 3 4 울산달천유적 -3 개소 창원성산패총 -2 개소 경주황성동유적 -12 개소 채광수혈, 채광갱 철광석, 무문토기, 와질토기 채광 BC1~AD3 대규모채광 야철지송풍관, 철재단야 BC1~AD1 제철로각종, 주거지 송풍관, 철괴, 정련 ~ 단야용범, 단조박편ㆍ용해 1~4 세기대규모공방 5 고성동외동패총 야철지 송풍토관 단야 2세기 야철지 6 부산낙민동패총 철생산유구 철괴, 목탄 단야 3세기 7 경주용강동유적폐기장 8 울산중산동이화유적 철기제작관련유구, 수혈 송풍관, 용범, 철재 철재, 철분, 철편 용해 제련, 용해 3~4 세기 3~4 세기 9 울산중산동 798-2 수혈 용범, 송풍관, 철괴형철재, 동물뼈 용해 3~4 세기 10 대구봉무동유적 Ⅳ 제철유구, 폐기장 11 12 부산고촌생산유적 경주월성해자계림남편 공방지, 소성유구, 수혈 수혈, 집석유구 용범, 송풍관, 철재, 노벽체 녹각도자병, 철기 도가니, 철재, 철괴, 방형석재 용해, 단야 3~4 세기대규모공방 단야 3~4 세기 단야 3~4 세기왕경유적 13 울진덕천리유적배소로배소광석배소 4 세기 14 김해하계리제철유적 제련로, 배소시설 유출재, 철괴, 송풍관 제련, 배소 4 세기 15 부산지사동유적제련로, 용해로철재제련, 용해 4 세기 16 17 울산천상리평천유적 창원봉림동유적 -2 개소 단야공방지 제련로, 단야로, 소성유구 단조박편, 철재단야 4~5 세기 철광석, 유출재, 단조박편 제련, 단야 4~5 세기 29) 김권일, 한반도고대제철문화의검토 ꡔ 한반도의제철유적 ꡕ, ( 사 ) 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2012, 541~542 쪽.
16 지역과역사 40 호 18 경주덕천리유적 Ⅴ 19 대구시지유적 -3 개소 20 양산물금유적 제철로지, 수혈, 습지, 구 수혈, 노지 제철로각종, 선광구 21 김해여래리유적수혈유구, 구 22 밀양사촌제철유적제련로각종 23 밀양금곡유적 24 김해우계리유적 제철로각종, 점토채취장, 탄요, 폐기장등 건물지, 수혈, 소성유구 용범, 송풍관, 철괴, 철광석 노벽체, 송풍관, 철괴, 철재 자철광석, 송풍관, 노벽, 철괴 송풍관, 추정정련재, 철재 철광석, 송풍관, 용범, 철괴 철광석, 송풍관, 용범, 철괴, 각종철재등 철광석, 철재, 추정도가니 제련, 용해 5~6 세기대규모공방 단야, 용해 5~6 세기취락내 배소, 제련 5~8 세기대규모공방 제련, 정련 6 세기전후 대규모공방 제련 6~7 세기대규모공방 제련 ~ 단야ㆍ용해 제련 6~7 세기대규모공방 6~7 세기 25 울산입암리유적수혈단조박편, 철재단야 7~10 세기 26 거창정장리유적 용해로, 작업장, 폐기장 노벽체, 송풍관, 용범, 철재 용해 8~9 세기대규모공방 27 경주성동동 386-5 단야로 용범, 도가니 단야 8~10세기 28 구미인덕리유적 단야공방지 단야재 단야 10~11세기 * 김권일, 한반도고대제철문화의검토 ꡔ한반도의제철유적ꡕ, ( 사 ) 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 회, 2012, 537쪽에서인용. 제철유적을검토한결과, 첫째로남한지역에서가장이른시기인기원전 2~1 세기시기의제철유적이확인되었다는점으로, 사천늑도, 창원성산패총, 울산달천유적등이이에해당한다. 이는기존의철기유입이북에서남으로이루어졌다는통설과는다른것으로, 기원전 2세기경부터경상지역의해안을중심으로가장이른시기의유적이확인되고있으며, 이러한철기의생산은통일신라시대까지단절되지않고계속이어지는양상을보인다. 둘째로는 3세기말 ~4세기초를중심으로주조괭이 ( 주조철부라칭하기도함 ) 를대규모로생산한제철유적이다수확인된다는점이다. 경주황성동이나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17 울산중산동, 대구봉무동유적은모두대규모용해유적으로, 이를통해농업생산력이증가하고, 나아가국가형성까지이르게된것으로볼수있다. 셋째로여타지역에비해대규모의체계적인생산시스템이보인다는점 30) 으로이는경주황성동과후에언급할낙동강동안지역제철유적등이대표적이다. 마지막으로는신라왕경내에서철기를생산했다는점으로철기제작이왕궁과관련된집단에의해이루어졌다는것을보여준다. 경상지역의주요제철유적을자세히살펴보면, 경주황성동유적을필두로한경주지역과양산물금유적, 고성소을비포성지, 늑도패총, 김해하계리유적등동남해안지역과낙동강수계를따라서주요제철유적이확인되고있다. 밀양사촌유적에서는규격화된제련로 7기가확인되었으며, 31) 밀양금곡유적에서는제련로 21기와함께대형폐기장, 추정용해로, 추정초강로, 정련ㆍ단야로, 다수의송풍관편, 다량의철재등이조사되었다. 32) 한편, 동남부지역은일반적으로철자원이풍부한곳으로인식되어왔으나, 품위나매장량에있어이용가치가높은광산지는대부분동남해안지역에밀집되어있다. 부산의동래철광ㆍ성지철광ㆍ괴정동철광ㆍ김해 52호광산ㆍ매리철산, 양산의경남철광ㆍ물금광산, 울산의출산철광, 거제의장승포 8호광산등근대의자철광산역시모두이지역에국지적으로있으며, 이중울 30) 김권일, 앞의논문, 2012, 542 쪽. 경주황성동을비롯하여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등은 1 차공정인제련과후속공정들이일찍부터분화되고전문화되어있었음을보여주며, 원료와연료, 생산품의유통, 인력의수급등이확립되어있어제품의생산에서유통의마지막단계까지체계적인대규모생산시스템으로판단하고있다. 31) 國立金海博物館, 앞의책, 2001, 152~153 쪽. 32) 두류문화연구원, ꡔ 밀양임천ㆍ금곡유적 - 밀양역 ~ 삼랑국도건설공사구간내문화유적 A ㆍ B 지구 [ 금곡제철유적 ]ꡕ, 2016. 밀양과양산의유적들은낙동강동안을중심으로형성되어있어낙동강수계를중심으로 철생산네트워크 를형성했다는견해도있다 ( 손명조, 앞의논문, 2001). 본고에서도언급하겠지만, 이러한철생산네트워크는낙동강동안제철유적의특징을잘나타내는것이라하겠다.
18 지역과 역사 40호 산 농소, 김해 상동, 양산 물금 일대에는 오래 전부터 노천 채굴된 흔적이 남아 있다.33) <도면 2> 경상지역 주요 제철유적(낙동강 동안 유적을 중심으로) 또한 사천 늑도ㆍ창원 다호리ㆍ김해 양동리ㆍ울산 하대ㆍ경주 조양동ㆍ 구정동 유적 등에서는 철소재인 판상철부가 이른 시기부터 나타나며, 의령 예둔리ㆍ합천 저포리ㆍ합천 옥전ㆍ양산 북정리ㆍ부산 복천동 등의 분묘유 적에서도 단야구가 확인되며, 의기성 철기가 주로 이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확인된다. 그리고 김해 구지로 유적에서는 鐵冠을 쓴 인골이 확인된 바 있 다.34) 33) 李盛周, 1~3세기 가야 정치체의 성장 ꡔ韓國古代史論叢ꡕ 5, 1993, 100쪽. 34) 宋桂鉉, 洛東江下流域의 鐵生産 ꡔ伽倻諸國의 鐵ꡕ, 신서원, 1995, 146쪽.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19 따라서동남부지역의고대철생산은경주와김해를비롯한동남해안지역과낙동강동안을이용한양산 ~ 밀양지역을중심으로이루어지고있음을알수있다. 35) 그중낙동강동안을이용한고대철생산에대해살펴보기로하겠다. < 표 3> 낙동강동안지역의제철유적현황 유적명조사내용출토유물편년 密陽沙村遺蹟발굴 ( 제련로 7 기, 폐기장 ) 密陽金谷遺蹟 발굴 ( 제련로 21 기포함 66 기의제철로및대형폐기장등 ) 철광석, 철재, 송풍관, 토기등 철광석, 송풍관, 용범, 철괴, 토기등 6~7 세기 6~7 세기 密陽큰儉世遺蹟지표조사철재, 송풍관ㆍ 梁山外花遺蹟지표조사노벽, 철재, 송풍관ㆍ 梁山勿禁遺蹟발굴 ( 제련로및광석선별유구등 ) 자철광석, 송풍관, 노벽, 철괴등 5~8 세기 조업성격 대규모공방 대규모공방 대규모공방 * 배현성, ꡔ 고대낙동강동안지역의철생산과특징 - 밀양ㆍ양산지역을중심으로 -ꡕ, 부산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4, 11 쪽에서인용 양산 ~ 밀양에이르는지역의낙동강수계를따라알려진제철유적은밀양사촌유적, 밀양금곡유적, 밀양큰검세유적, 양산외화유적, 양산물금유적등이다. 이러한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들은앞서살핀경상지역제철유적의특징중대규모의체계적인생산시스템이보인다는점에서큰비중을차지한다. 그에대한근거들을다음장부터살펴보도록하겠다. 35) 동남부와동남해안은한반도전역을기준으로하여구분한것이다. 동남부는영남권역, 동남해안은경남정도를말함이다.
20 지역과 역사 40호 Ⅱ. 종합 제철유적으로서의 금곡 제철유적과 생산집단 밀양 금곡 제철유적에서는 확인되는 제철로의 유형과 기능을 통해 생산 체계를 살핀 후, 생산체계를 담당하는 생산집단에 대해 파악해 보겠다. 1. 금곡 제철유적의 생산체계 <그림 1> 철생산기술체계 모식도 (신경환ㆍ이남규ㆍ최영민, ꡔ한국고대 製鍊기술Ⅰꡕ, 금속기술연구소, 2013, 22쪽에서 인용) 제철조업의 공정은 採鑛, 焙燒, 製鍊, 精鍊, 鍛冶, 鎔解, 製鋼 등으로 분 류된다. 제철공정의 프로세스는 <그림 1>과 같으며, 이러한 프로세스를 바 탕으로 금곡 제철유적의 생산체계를 간략히 살펴보겠다.36) 36) 본 장에서 금곡 제철유적과 관련한 조사내용은 다음의 보고서를 참고하였다. 두 류문화연구원, ꡔ밀양 임천ㆍ금곡 유적-밀양역~삼랑 국도건설공사 구간 내 문 화유적 AㆍB지구 [금곡 제철유적]ꡕ, 2016.
밀양 금곡유적을 중심으로 본 낙동강 동안지역의 고대 철생산 21 1) 1차 공정 금곡 제철유적에서 위 프로세스 에 따른 1차 공정과 관련된 것으로 는 배소로와 제련로가 있으며, 철 광석(배소철광석 포함)과 조재제 의 사용37)도 확인되었다. 밀양 금 곡유적 내 타원형의 배소시설이 확인되었으며, 철광석 파쇄의 기 능을 가진 모루돌로 추정되는 석 <사진 3> 금곡유적 배소철광석 재와 철광석이 수습되었는데, 현미경 미세조직 관찰 결과 배소흔으로 확인 되었다. 밀양 금곡유적의 21기의 제련 로의 경우, 밀양 사촌유적과 같 은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금곡유적의 경우 노와 排滓部 施設이 붙어서 확인되고 있는데 배재부가 비스듬하게 트여 있는 형태이다. 밀양 사촌유적의 경우 <사진 4> 금곡유적 61호 제련로 는 슬래그를 위에서 아래로 떨어 뜨려 움푹한 곳에 모아서 들어내 고 있고, 진천 석장리의 배재부는 계속 앞을 터서 계속해서 아래로 흘러내 리는 방식을 택하고 있다.38) 37) 두류문화연구원ㆍ삼강문화재연구원ㆍ지질유산환경연구소, ꡔ밀양 임천리 금곡 제철유적-자연과학분석-ꡕ, 2014, 46~47쪽. 38) 이는 노의 하부에 할석을 사용하고, 노바닥이 상부에 위치하는 이유도 있지만 여러 개의 노를 동시에 조업하기 때문에 좁은 지역 안에서 공간활용성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파악되는데 역시 생산량의 증가와 관련된다(國立金海博物館, 앞의 책, 2001, 153쪽).
22 지역과역사 40 호 또한원료인목탄과관련해서는측구식백탄요가 1 기가조사된바있다. < 도면 3> 진천석장리유적 B-23 호제철로 < 도면 4> 밀양사촌유적제련로 2) 2차공정 2차공정과는정련, 초강, 용해와관련된제철로들이금곡제철유적에서확인되었다. 정련은 1차공정인제련에서생산된철괴를재가열하여소재내의불순물은제거하는공정이다. 고대의제련로에서생산된철괴는불순물의함량이높으며, 그상태로는철기를만들기어렵기때문에정련을하게된다. 밀양금곡유적에서는노 2호, 노 11호, 노 12호가정련내지는정련단야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23 로로추정하고있다. 밀양금곡유적의정련로는송풍과관련된시설이갖추어진특징을보이며주변에서단조박편, 입상재, 단야재, 철편등이확인되었다. < 사진 5> 금곡유적노 2 호 < 사진 6> 금곡유적노 11, 12 호 < 도면 5> 경주황성동유적Ⅲ, Ⅳ-나ㆍ라지구 15, 16호단야공방지 < 도면 6> 황성동 537-2번지유적정련단야로
24 지역과 역사 40호 초강로는 선철을 가열용융하고 공기 중에 교반탈탄하여 강을 제조하는 爐이며, 제철조업의 2차 공정에 해당한다. 진천 석장리 유적의 노 중에서 초강로가 존재한다고 추정한 연구가 있으나,39) 정식보고서에서는 초강로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단야로에 대해서는 현재 알려진 바가 없으므로 비교의 대상이 없고, 그 구조나 송풍과 관련한 실체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 이다.40) 밀양 금곡유적의 노 55호가 구조와 형태로 보아 초강로로 추정되는데,41) 일반적인 점토 벽체가 없는 특이한 구조로 북 쪽 단벽은 판석을 이용하였으 며 나머지 세 벽면은 슬래그로 만 잔존하는 형태이다. 송풍구 나 송풍시설이 벽면이 막혀 있 는 형태로 인해 존재하지 않는 <사진 7> 금곡유적 노 55호 것이 특징이고, 노벽이 없으므로 노의 위쪽이 다 열려 있는 형태를 보이며, 열려 있는 공간에서 조업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42) 밀양 금곡유적의 경우, 노 21호와 23호를 용해로로 추정하고 있다.43) 39) 노태천, 4世紀代 百濟의 製鐵技術, 百濟硏究所公開講座 발표자료, 1997, 10 쪽. 윤종균, 앞의 석사학위논문, 1998. 40) 이러한 것과 관련하여 중국의 공현 철생구와 남양 와방장의 한대 초강로는 지하 에 작게 구덩이를 판 후 점토를 발라 노벽을 만들로 위에서 송풍을 한다고 하며 노의 규모는 폭 30 정도로 아주 작다. 41) 실제 금속학적 분석을 통해서도 초강정련의 가능성이 높다는 결과가 확인되었 다. 신경환ㆍ이남규ㆍ최영민, 밀양 임천ㆍ금곡제철유적 출토 제철관련 자료의 금속학적 분석 및 고찰, ꡔ밀양 임천ㆍ금곡 유적-밀양역~삼랑 국도건설공사 구간 내 문화유적 AㆍB지구 [금곡 제철유적]ꡕ <부록1>, 2016, 17~19쪽. 42) 초강로는 선철을 외부 공기에 노출시켜서 탈탄하는 구조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 할 때, 노의 윗부분이 노출되어 있어, 원료를 공기 중에 노출시켜 작업할 수밖에 없는 구조인 노 55호가 초강로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43) 노벽체 내부의 슬래그와 철괴, 석재를 사용해서 벽체를 구축한 점, 용범의 존재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25 < 사진 8> 금곡유적노 21 호 < 사진 9> 금곡유적노 23 호 먼저노 23호는북쪽으로인접한노 24호의일부를훼손하고축조하였으며남쪽으로 1매의석재를이용해점토를구축하여노벽체로사용하였다. 벽체의동서쪽으로직경 4cm가량의원형으로벽체를관통하는송풍구가 2 군데에서확인되었으며, 이송풍구로송풍관이노하부쪽에외부에서내부로경사지게장입된것으로판단된다. 벽체내부에는슬래그가전면적으로고르게달라붙어있으나, 송풍구주변에는요철형태로불규칙하게붙어있으며, 바닥에는별다른흔적이없어조업이후바닥을뜯어낸것으로보인다. 노 21호역시석재를중심으로내외벽에점토를덧발라노벽체를구축하였고, 노내면에는 2차례가량보수한흔적이확인된다. 노벽체내부에는 3 곳에서노벽의무너짐을방지하기위한목재지지흔이확인되었는데, 폭 2cm가량의세로홈이며, 이들지지흔은 25cm내외의일정간격을보인다. 노의내외벽을관통하여 2곳에서송풍구가확인되었는데송풍구의직경은 13cm내외의원형으로송풍관이노외부에서노내로경사지게장입된것으로보이며, 송풍구는노하부에위치하고있다. 벽체내부에는두께 2~3cm가량의슬래그가요철형태로불규칙하게달라붙어있으며, 바닥에는산화된철괴가확인되었다. 등으로용해로로추정한다.
26 지역과역사 40 호 3) 3차공정금곡제철유적내 3차공정에해당하는것은 ( 단련 ) 단야와주조이다. 밀양금곡유적의경우, 많은수의노가조사되었으나, 단야로라고단정지을수있는노는없는상황이다. 단야로의구조와형태가알려진것이없고, 잔존하고있는노중에서상태가양호한것들이그리많지않기때문이다. 다만노주변의토양을채취하여물채질한결과, 20여기이상의노주변에서단조박편이다량으로검출되어단야로의존재를입증하고있다. < 도면 7> 경주황성동 537-2 번지유적용해로
밀양 금곡유적을 중심으로 본 낙동강 동안지역의 고대 철생산 27 또한 주조와 관계된 중요한 요소가 바로 거푸집이다.44) 거푸집은 금속을 용해하여 그 주물을 흘려 넣어 정해진 형태로 주조철기를 만드는 틀로, 우 리나라에서는 주로 흙으로 만든 거푸집을 이용하였다. 경주 황성동 유적에 서는 다량의 주조괭이 거푸집이, 진천 석장리 유적에서는 소량의 范芯이 출 토되었다. 금곡유적에서는 鐵鐸 제작용으 로 보이는 용범이 출토되었는데, 용범의 너비는 14.6, 길이는 19.4 두께는 4.3 이며, 내부 의 철탁은 너비 9, 길이 12 이다. 이외에도 용범편들이 소량 출토되었는데, 복원이 불가능하 <사진 10> 밀양 금곡유적 출토 철탁용범 여 용도는 알 수 없다. 제철조업의 공정에 따른 제철로들은 앞서 살핀 바와 같으며, 이러한 제철 로들이 얼마나 많은 수가 다양하게 존재하느냐에 따라 제철유적이 지닌 조 업의 성격과 생산체계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낙동강 동안지역 제철유적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대규모의 생산시스템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45) 밀양 사촌유적의 경우, 일부 구역에서만 발굴조 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제련로 7기가 조사되었으며, 제련로의 철재 퇴적층의 최대두께가 245 일 정도인 점에서 대규모 제철조업이 행해졌음 을 알 수 있다. 또한 양산 물금유적의 경우 제련로, 배소유구 등으로 보고된 유구들의 잔존상태가 매우 불량하여 개별유구의 성격을 명확히 하기에는 무 리가 있으나, 유출재, 대구경송풍관, 철광석, 패각 등 제철조업에 사용되는 44) 앞선 2차 공정의 용해로와도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실제로 한 공정으로 행해지 지만 용해 후 초강의 과정을 거칠 수 있기에 3차 공정으로 분류한다. 45) 이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유적들이 그 대상이며, 다음부터는 발굴조사가 이루 어진 3개의 유적(밀양 사촌ㆍ금곡유적, 양산 물금유적)만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28 지역과역사 40 호 유물들이확인된점에서대규모제련공정이있었음이확인되며, 제련공정에필수적인選鑛, 배소, 패각의저장과소성등의관련유구가보인다는점에서대규모공방이었음을유추할수있다. 특히밀양금곡유적에서는제련로를비롯한다수의제철로뿐만아니라, 대규모의폐기장과제철로의축조및보수와관련된점토채취장, 배소시설, 탄요등제철의전과정과관련된유구가확인되어종합제철유적임을보여주고있다. 46) 이는앞서언급한경상지역제철유적의특징중하나이며, 이러한대규모의생산시스템은전문적인공인집단에의해제철공정의모든과정이이루어지는것으로보인다. 제련을통한 1차철소재와정련및제강을통한 2차철소재를제작하며, 단야및용해를통해완성된철기제품을생산하는시스템이다. 실제로공간배치에서도, 구릉의상부에는제련로들이다수입지하고있으며, 아래쪽으로제련의결과물을가지고와서 2~3 차공정을하는양상이나타난다. 2. 생산집단 앞의내용을살펴본바와같이, 밀양금곡제철유적을중심으로한낙동강동안지역의제철유적에서는제철공정의프로세스전과정이이루어졌으며, 이러한전과정이일정공간에서동시에행해지기위해서는철생산을위한전문집단이존재하였다고사료된다. 47) 이러한집단은중앙정부또는중요 46) 이와관련하여, 유적에서확인된제철로들이동시기에모두기능하였느냐에대한부분도검토해보았다. 제철이라는기간산업은주거지나일반생산유적과는달리, 일정기간조업후생산시설을모두폐기하고생산시설을다시구축하거나이동해간다는점에있어, 일정수이상의제철로들이동시조업을했다고볼수있다. 금곡유적의토층에서도일정구역에대해여러번에걸쳐대지를조성한것이확인되나, 이는그구역에서만 2~3 차공정에해당하는소규모의제철로들을폐기하고재구축한것일뿐, 제련로와같은대형로들은그러한것이확인되지않았다. 47) 이는앞서입지요건에서언급한것처럼고대제철유적중대규모인유적인근에서는동시기의주거유적이확인되지않아보안을요하는전문적인기술을보유한집단이있었던것으로볼수있다.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29 지역의거점에서관리하는것으로파악할수있다. 이는밀양금곡유적에인접한임천고분군의발굴조사를통해서도유추할수있다. 밀양임천고분군의조사결과, 상당한양의토기류를비롯한금동관모편, 48) 금동과대, 49) 태환이식등의위세품과각종마구류, 단야구등많은금속유물이출토되었다. 과대는삼국시대신분의등급에따라銙의재료및색, 수등을달리하여신분을나타내는것이었으므로, 임천고분군과연관된세력은일정이상의세력을지닌권력집단으로파악할수있다. 50) < 사진 11> 2지점 18호수혈식석곽묘단야구출토전경 < 사진 12> 2지점 18호수혈식석곽묘단야구 ( 집게및망치 ) 한편밀양지역의경우, 청동기시대이후삼한시대에이르기까지구체적인문헌기록은극히희소하여밀양지역을장악한세력을상정하기는쉽지않다. 다만 3세기중반경한반도남부지방의여러소국들에관하여기록하 48) 지방에서는금동관보다관모나관식을착장한채매장된예가많으며, 임천고분군내에서출토된관편또한관모의관테일부분일가능성이높다. 49) 시상중앙에서매우불량한상태로확인되었다 ( 두류문화연구원, ꡔ 밀양임천ㆍ금곡유적 - 밀양역 ~ 삼랑국도건설공사구간내문화유적 A ㆍ B 지구 [ 임천분묘유적 ]ꡕ, 2016, 358 쪽 ). 금동관과금동과대는고대사회에서관인의심볼로기능하였으며, 5~6 세기무렵삼국시대고분출토품은관복의구성품이었을가능성이있다. 50) 임천고분군에대한발굴조사보고서는추후수정및보완작업을하여배포할계획이며, 고분군내위계에대한내용은보고서의고찰에수록할수있도록하겠다.
30 지역과역사 40 호 고있는 ꡔ 三國志 ꡕ < 魏書 > 東夷傳의弁辰條와 ꡔ 三國史記 ꡕ에서단편적이나마기록이나타난다. 먼저弁辰條의기록에나타나는밀양은변진한 24국중하나인 彌離彌凍國 으로추정되고있으며, 이시기에는가라연맹체의권역에편입되었던것으로짐작된다. 이러한추정은당시밀양의옛이름이 미리벌 또는 밀벌 로써, 변진의 彌離彌凍國 이나이후신라때의명칭인 推火 나 密城 이모두이를음차ㆍ훈차한데근거하고있다. 그런데 ꡔ 三國史記 ꡕ < 新羅本紀 > 의기록에주목되는사실이있다. 그것은바로 3세기무렵에, 밀양인근지역에몇개의소국들이존재하였으며이들소국들은인접한신라를위협할정도의강력한군사력을보유하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는점이다. 그대표적인경우가경상북도청도지역에있었던 伊西國 이다. 지리적으로볼때, 청도와밀양은인접하고있어많은연관성을가졌을것으로보이며, 이는그러한사실을더욱더잘뒷받침하고있다. 그리고그세력이신라儒理尼師今 14년 (297) 에이르러, 당시신라의왕성이었던서라벌까지공격할정도였으며, 신라는이를막아낼수없어 陰兵 의도움으로막아냈다고기록되어있다. 51) 이사실로본다면, 첫째, 시기상신라가아직까지중앙집권을강화하지못하여고대국가로성장, 발전하기이전이라는점과둘째, 상대적으로 伊西國 의정치적ㆍ군사적세력이그만큼강했음을의미하는것이다. 그런데강성했던청도지역의 伊西國 을포함한인근지역의소국들은얼마지나지않은 4세기무렵에이르러신라의권역으로편입되는데, 이러한변화는직ㆍ간접으로밀양지역에상당한영향을주었을것이며, 당시존재하였다는 彌離彌凍國 이나여타邑落國家도심각한타격을받았던것으로여겨진다. 그러므로伊西國이신라에멸망하여편입된비슷한시기이거나다소늦은시기에이지역도신라의권역으로편입되었을것으로추정할수있다. 52) 51) ꡔ 三國史記 ꡕ 卷 2, 新羅本紀第 2, 儒理尼師今 14 年春五月條. 52) 삼국사기이외에도 ꡔ 광개토왕비문 ꡕ 의庚子年기사에나타난고구려의남정에서도신라의낙동강유역으로의진출이이루어진것으로파악되고있으며, ꡔ 日本書紀 ꡕ( 卷 17, 繼體紀 21 년 6 월조 ) 의기록에나타난탁기탄국의기사를통해서밀양지역이 6 세기이전부터신라의권역이었다고보는견해도있다 ( 백승충,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31 이와관련해서李炯佑는사로국이이서국을이미 2세기초엽부터간접지배하기시작하였으며, 이서국이신라가가야지역으로진출하는교두보가되었다고보고있다. 53) 그리고이를통해청도에서밀양지역으로진출하였으며, 서서히간접지배에서직접지배방식으로지배의정도를강화해나간것으로파악한다. 54) 이런가설들은그시기의차이는있으나, 일정시점에이서국이신라에복속되었다는사실에있어서는변함이없으며, 이서국의복속이후빠른시간안에밀양지역이신라에편입되었던것을알수있다. 신라의청도, 밀양지역장악은곧낙동강유역확보와동시에다른가야지역으로진출하는중요한교두보로써발전의발판을굳혔다는측면에서매우큰의미를지니고있다. 이때밀양지역은신라에편입된이후 推火郡 으로개명되었는데, 당시推火의중요성은전략적가치에있었던것으로여겨진다. 왜냐하면그입지적인위치가당시신라와경쟁중이던여러가야지역을견제할수있는교통의요지로서방어와공격에있어최일선의교두보를확보했다는점과함께낙동강유역의비옥한농업생산지대를차지함으로써국력강화에매우중요한곳을확보했다는점이다. 55) 그런데신라때이미이지역을병합하여, 推火郡으로개명했다고하였으나, 정확한편입시기에관해서알수있는사실은사료에나타나있지않다. 다만위에서말했듯이 4세기청도지역伊西國의멸망이후, 그리고智證王 6년 (505) 에국내의州ㆍ郡을정하기이전에이미밀양이신라의영토에편입된것으로보인다. 56) 加羅ㆍ新羅 결혼동맹 의결렬과그추이 ꡔ 부대사학 ꡕ 20, 1996). 이러한점을통해볼때, 낙동강동안제철유적들의가동시기에는이지역이신라의권역임을유추할수있다. 53) 李炯佑, 新羅初期國家成長史硏究 - 주변辰韓諸 國 의統合課程을中心으로 -, 건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2, 28~51 쪽. 54) 李炯佑, 위의논문, 129~137 쪽. 55) 密陽大學校博物館, ꡔ 密陽邑城 ꡕ, 2002. 56) ꡔ 三國史記 ꡕ 卷 4, 新羅本紀第 4, 智證麻立干 6 年春二月條.
32 지역과역사 40 호 이러한문헌기록이외에도생산집단과밀접한관련이있다고보여지는것이고분군의존재이다. < 표 4> 낙동강동안지역의제철유적과고분군과의관계 고분군 유적명 고분군명 이격거리 밀양사촌유적 사촌고분군 400m 밀양금곡유적 임천고분군 인접 양산물금유적 ㆍ ㆍ < 표 4> 는낙동강동안지역의제철유적과고분군과의관계를정리한것으로, 밀양지역의제철유적은인접한고분군이존재하는반면, 양산물금유적의경우는인접한고분군이확인되지않았다. 57) 고분군의경우, 제철유적과시기가비슷한것으로확인되었으며, 이는각고분군들이철생산집단과연관이있을가능성이높다는점을보여준다고하겠다. 고분군의고분축조수법및출토유물을살펴보면, 철생산집단의성격을규명할수있을것이므로, 밀양임천고분군을중심으로낙동강동안지역의제철유적의제철집단에대해살펴보도록하겠다. 58) 임천고분군의조사 59) 를통해확인된유구는청동기시대석곽묘 1기, 초기철기시대석관묘 1기, 삼국시대석곽묘 85기, 석실묘 20기, 토광묘 2기, 옹관묘 2기등이다. 출토된유물은청동기시대석곽묘에서마제석검과석 57) 인접한지역에고분군이존재하나확인되지않았을가능성과제철유적조성이후, 후대의개발행위로인해고분군이파괴되었을가능성이있다. 58) 밀양사촌제철유적과양산물금유적의경우, 인근고분군에대한조사가이루어지지않았으나, 사촌유적의인근의고분군에서는, 고배, 대부장경호등 6~7 세기경의유물들이채집되었으며, 물금유적역시동일한양상이확인되었다. 따라서본고에서는밀양금곡유적의임천고분군을통해인근의제철유적의제철집단이지닌성격을유추해보고자한다. 59) 두류문화연구원, ꡔ 밀양임천ㆍ금곡유적 - 밀양역 ~ 삼랑국도건설공사구간내문화유적 A ㆍ B 지구 [ 금곡제철유적 ]ꡕ, 2016.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33 촉, 초기철기시대석관묘에서점토대토기등이출토되었고, 삼국시대석곽묘와석실묘에서는적갈색연질토기와회청색경질토기인단경호, 대부장경호, 고배등의토기류와등자, 재갈, 행엽, 마탁등의마구류, 대도, 철촉, 철부, 철모등의무기류, 이식, 경식등의장신구류등 5세기중반 ~6세기후반에해당되는다양한유물이다량출토되었다. 유구는석곽묘 -석곽묘와석실묘의공존 -석실묘로이행하는단계가확인되며, 삼국시대수혈식석곽의경우, 대부분세장방형의형태를지니고있다. 임천고분군에서출토된유물은인근에위치하는밀양대촌유적 60) 과밀양사포일반산업단지조성부지내유적 61) 과비슷한양상으로판단되며고배, 개, 대부장경호의유형변화로보아 3단계로구분된다. < 사진 13> 임천고분군출토유물 ( 호류 ) < 사진 14> 임천고분군출토유물 ( 고배류 ) 따라서 Ⅰ기는석곽묘단계로구릉상부에주로분포되며, 고배의대각이비교적길고장방형투창이뚫려있으며, 개의손잡이가단추형으로되어있는유물이부장되는단계로 5세기중후반에해당하며, Ⅱ기는석곽과석실묘가공존하는단계로고배의대각이비교적짧아지거나, 개의손잡기가환상형으로변화되는유형으로 6세기초중반에해당한다. 마지막 Ⅲ기는석곽묘보다는석실묘가주로사용되는시기로구릉의하단부에주로분포하며, 단각고배, 삼각집선문 + 반원점문이시문된개, 부가구연장경호, 병형 60) 경남문화재연구원, ꡔ 밀양대촌유적 ꡕ, 2003. 61) 경남발전연구원역사문화센터, ꡔ 밀양사포일반산업단지내유적 ꡕ, 2010.
34 지역과역사 40 호 토기등이부장되는석곽묘와석실묘가공존하는시기로 6세기후반으로편년된다. 62) 이러한유형의변화에도임천고분군의유물, 그중에서도토기의경우, 모두신라계토기가출토되고있다. 그러나수혈식석곽이세장방형의형태라는점은신라계고분양식의전형이라고보기는어렵다. 낙동강동안지역에서신라의영역권내에있는곳의고분축조는중ㆍ소형적석목곽묘의영향으로석곽내에격벽을설치하여주곽과부곽을구분하며, 매장주체시설이장방형의형태를보이는경우가대부분이며, 석곽임에도벽체내면과바닥시설사이에목곽을설치한이중곽의구조를갖춘특징을보인다. 63) 임천고분군의수혈식석곽은이러한특징들을보이지않다가 6세기에접어들면서이중곽의구조를갖춘수혈식석곽이확인된다. 앞서살핀내용을다시정리해보면, 청도지역의이서국을신라가 2세기초엽에는자신들의영향아래둔것으로파악할수있으며, 재지세력에게지배를맡기는간접지배의방식으로통치했던것으로볼수있다. 이러한간접지배는 6세기경에이르면직접지배로서서히바뀌어가는양상이다. 64) 신라는청도지역을확보한이후, 청도에서밀양지역으로세력을확장하였으며, 이과정에서금곡제철유적을관장하는세력을포섭한것으로볼수있다. 임천고분군의출토유물은신라계이지만고분의축조방식은 6 세기에이르러서야낙동강동안지역에서신라에직접지배를받는지역에서나타나는고분축조양식이확인되는것은앞서살핀내용과일치하는것이라할수있다. 따라서밀양금곡제철유적의생산집단은간접지배에서직접 62) 이러한임천고분군의편년및신라와의관계에대한부분은앞서언급한것처럼, 추후수정및보완을거친보고서를배포될때재정리하도록하겠다. 63) 주곽과부곽의구분은 5 세기후반낙동강동안지역에서유행한것이며, 이러한낙동강동안의고분양상은창녕과관련하여신라와가야의관계를파악하기위해낙동강동안과서안의고분들을비교하며나온결과이다. 밀양지역의경우, 고분의양상들을비교ㆍ검토한사례가없어기존의낙동강동안고분의양상을대입해보았다 ( 홍보식, 고분을통해본고대창녕지역정치체의성격 ꡔ 고대창녕지역사의재조명 ꡕ, 창녕군ㆍ부산대학교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1). 64) 李炯佑, 앞의박사학위논문, 1992, 129~137 쪽.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35 지배로넘어가며완전히신라화되어간세력으로볼수있으며, 밀양지역뿐아니라양산, 김해지역까지신라가진출하였으므로양산 ~ 밀양지역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들이모두신라세력이관할하는제철유적임을유추할수있다. 이러한점은제철조업과관련된수공업의국가관리를보면더명백해진다. 수공업과관련하여신라는초기부터장인들이존재하였으며, 국가적차원에서이들을관리하였다. 이러한현상은철과같이중요한품목의경우좀더집중적으로관리하였음을상정할수있으며, 국가체제가정비되어갈수록정치체에의한관리도강화되었다가어느정도국가체제가정비된이후에는지방의거점에서관리하는시스템으로넘어간다. 65) 이러한양상은다음과같이파악할수있다. 다음의 < 표 5> 는주요대규모제철유적을비교한것이다. 그중경주황성동유적은조업시기가 1~4 세기이며, 밀양금곡유적은조업시기가 6~7 세기이다. 이는밀양금곡유적의철생산집단이 6세기경부터본격적으로대규모생산시스템을가동할수있었다는것으로볼수있으며, 이는왕도인경주에서제철에대해기술을쌓아놓았던것을신라의영토확장과더불어각지방의거점에기술을전파한것이아닐까조심스럽게추측한다. 66) < 표 5> 주요대규모제철유적비교 유적명유구성격출토유물조업성격시기특징 진천석장리유적경주황성동유적 -12개소 밀양금곡유적 제철로각종 제철로각종, 주거지 제철로각종, 점토채취장, 탄요, 폐기장등 철광석, 송풍관, 용범, 단조박편 송풍관, 철괴, 용범, 단조박편 철광석, 송풍관, 용범, 철괴, 각종철재등 제련 ~ 단야ㆍ용해 정련 ~ 단야ㆍ용해 제련 ~ 단야ㆍ용해 4 세기 대규모공방 1~4 세기대규모공방 6~7 세기대규모공방 65) 朴南守, 新羅手工業史硏究, 동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3, 187~205 쪽. 66) 물론이는수공업사적인관점에서의일반적인흐름에의한추측이며, 문헌및고고학적자료로는확인된바없다. 앞서언급한것처럼제철유적의가동시기에
36 지역과역사 40 호 맺음말 제철업은고대에서현재에이르기까지국가의중요한기간산업으로, 고대사회에서는철생산과그에따른철기의보급은사회구성체를변화시키고발전시키는중요한역할을하였다. 철에대한연구는초기에는매장유적의출토품을중심으로이루어졌으며, 1970~80년대에들어서鐵滓나송풍관등에대해간략히언급하기시작하였고, 1990년대들어점차제철유적의발굴성과가누적되면서철생산과철기제작방식에대한관심이고조되었다. 2000년대들어서는제철유적에대한활발한조사와함께제철에관련된논의도활발해지면서최근에는고대제철로를복원하려는시도까지이어지고있다. 경상지역의제철유적은크게 4가지특징을지닌다. 첫째로남한에서가장이른시기인기원전 2~1 세기시기의유적이기존의철기보급경로와는달리동남해안일대에서확인되며, 둘째로 3세기말 ~4세기초를중심으로주조괭이를대규모로생산하여사회변화를일으켰을것으로보이는제철유적이다수확인된다는점이다. 셋째로여타지역에비해대규모의체계적인생산시스템을갖추었으며, 마지막으로신라왕경내에서철기를생산하였다는점등이다. 이러한한반도동남부지역의고대철생산은경주와김해를비롯한동남해안지역과낙동강동안을이용한양산 ~ 밀양지역을중심으로이루어지고있으며, 그중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은밀양사촌유적, 밀양금곡유적, 밀양큰검세유적, 양산외화유적, 양산물금유적등이다. 앞서서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의특징을입지, 생산체계, 시기와생산집단으로나누어살펴보았다. 밀양이신라의영역이며, 금곡유적과관계된임천고분군에서도신라와관련된유물이확인되고있어하나의가능성을언급한것이다. 물론낙동강동안지역의제철유적이자체생산시스템으로가동되었을가능성도있다.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37 먼저입지적특징으로는, 전국의제철유적이공통적으로원료와연료의수급이용이한산지와하천이인접한지역에위치하고있으며, 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들은그입지적특징을그대로따라서원료인철광석과연료인목재의수급이용이하고, 하천을이용한운반이편리한지리적이점을지닌지역에입지하고있다. 더나아가낙동강동안은생산품의운반까지고려한고대철생산의중심지였음을알수있다. 생산체계의경우, 밀양금곡유적은전국의제철유적중유일하게제철조업의전체공정인採鑛, 焙燒, 製鍊, 精鍊, 鍛冶, 鎔解, 製鋼등에해당하는모든종류의제철로가존재하며, 밀양사촌유적은제련로 7기가동시에조업된생산시설이라는점이확인되었다. 양산물금유적역시제련로, 배소시설을비롯한다수의제철로가확인되어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들이모두대량생산체계를갖추었다는것을살펴보았다. 이러한철생산체계및유통의관리주체는문헌과각제철유적에인접한고분군을통해파악할수있을것으로판단된다. 먼저청도지역의이서국을신라가 2세기초엽에는자신들의영향아래둔것을시작으로, 신라는밀양지역으로세력을확장하였으며, 이과정에서금곡제철유적을관장하는세력을포섭한것으로볼수있다. 임천고분군의출토유물은신라계이지만고분의축조방식은 6세기에이르러서야낙동강동안지역에서신라에직접지배를받는지역에서나타나는고분축조양식이확인된다. 따라서밀양금곡제철유적의생산집단은간접지배에서직접지배로넘어가며완전히신라화되어간세력으로볼수있으며, 밀양지역뿐아니라양산, 김해지역까지신라가진출하였으므로양산 ~ 밀양지역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들이모두신라세력이관할하는제철유적임을유추할수있다. 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은공통적으로인근에대규모고분군들이입지하고있으며, 고분군들은그편년에있어서제철유적의조업시기와거의일치하고있다. 낙동강동안의제철유적의생산집단은각고분군의출토유물에따른편년과특징, 문헌기록을통해유추해볼때신라계의세력인것으로판단된
38 지역과역사 40 호 다. 고분군중밀양금곡유적에인접한임천고분군만이발굴조사되었으나, 나머지유적에인접한고분군들도수습된유물을통해볼때신라의세력인것으로볼수있다. 그중에서도밀양금곡유적의제철집단은신라의왕경내에서의철기제작기술 ( 황성동 ) 을지방거점에서전수받아운영하는전문철기제작집단으로파악할수있으며, 이들은국가체제가어느정도정비된이후에국가의수공업통제에서지방거점에서관리하는체제로넘어가는단계에있는것으로판단된다. 밀양금곡유적의조업시기는 6세기 ~7세기중엽정도로파악되며, 밀양사촌유적도동일시기로파악된다. 양산물금유적의경우는앞뒤로 1세기정도의차이가있으나비슷한시기의것으로파악된다. 이러한낙동강동안의고대철생산은삼국시대말기의혼란한시대상황에서상당히중요한의미를지닌다하겠다. 6~7 세기, 정복전쟁이한창이던시기에신라는양산 ~ 밀양으로이어지는철생산을장악함으로써삼국통일에한걸음더나아갈수있었던것으로사료된다. 참고문헌 ꡔ 慶尙道續撰地理誌 ꡕ, ꡔ 三國史記 ꡕ, ꡔ 三國志 ꡕ, ꡔ 世宗實錄 ꡕ, ꡔ 新增東國輿地勝覽 ꡕ 국립문화재연구소, ꡔ한국매장문화재조사연구방법론-4ꡕ, 2008. 權丙卓, 전통용광로복원과제련술연구- 쇠부리터시설장비를되살려보존하기위하여- ꡔ민족문화논총ꡕ 12, 1991. 權丙卓, 古代鐵生産의硏究 - 慶州皇城洞遺蹟을중심으로- ꡔ 國史館論叢 ꡕ 42, 1993. 김광언, 신라시대의農器具 ꡔ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ꡕ 8, 書景文化社, 1987. 金權一, 南韓地域古代製鐵爐에對한一硏究, 한신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3. 김권일, 한반도고대제철문화의검토 ꡔ한반도의제철유적 ꡕ, ( 사 ) 한국문화재조사연구기관협회, 2012.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39 金世基, 皇城洞原三國聚落址의性格 ꡔ마을의고고학ꡕ, 제18회한국고고학전국대회발표요지, 1994. 金榮珉, 蔚山下垈수습철기의검토 ꡔ 伽倻考古學論叢 ꡕ 2,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1997. 金元龍, 加平馬場里冶鐵住居址 ꡔ 歷史學報 ꡕ 50ㆍ51 合輯, 1971. 김재홍, 살포와鐵鋤를통해서본 4~6 세기농업기술의변화 ꡔ 科技考古硏究 ꡕ 2, 1997. 金鎬詳, 古代木炭窯考察 - 白炭窯를中心으로- ꡔ 慶州史學 ꡕ 19, 2000. 노태천, 4 世紀代百濟의製鐵技術, 百濟硏究所公開講座발표자료, 1997. 노태천, ꡔ 韓國古代冶金技術史硏究 ꡕ, 學硏文化社, 2000. 東潮, 弁韓과伽倻의鐵 ꡔ 伽倻諸國의鐵 ꡕ, 신서원, 1995. 文暻鉉, 新羅의鐵産 ꡔ 新羅生産經濟의新硏究 ꡕ, 新羅文化祭學術發表會論文集 13, 書景文化社, 1992. 朴南守, 新羅手工業史硏究, 동국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3. 박진욱, 신라의가시돋친무기에대한약간의고찰 ꡔ고고민속ꡕ 1963-4, 1963. 배현성, 고대낙동강동안지역의철생산과특징-밀양ㆍ양산지역을중심으로-, 부산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4. 백승충, 加羅ㆍ新羅 결혼동맹 의결렬과그추이 ꡔ부대사학ꡕ 20, 1996. 서영남, 鐵鎌에대하여 ꡔ 東萊福泉洞古墳群 ꡕ Ⅱ, 釜山大學校博物館, 1990. 서영남ㆍ이현주, 三韓ㆍ三國時代鐵器의儀器的性格에대한一考察 ꡔ 伽倻考古學論叢 ꡕ 2, 1997. 손명조, 韓半島古代의中南部地方鐵器生産遺蹟의現狀 ꡔ 嶺南考古學 ꡕ 22, 1998. 손명조ㆍ박문수, 慶州市皇城洞 524-9 番地住宅新築敷地內遺蹟發掘調査 ꡔ국립경주박물관연보 ꡕ, 국립경주박물관, 1997. 宋桂鉉, 三韓鐵器變化의段階 ꡔ 嶺南考古學會ㆍ九州考古學會第 1 回合同考古學硏究會資料輯 ꡕ, 1994. 宋桂鉉, 洛東江下流域의鐵生産 ꡔ 伽倻諸國의鐵 ꡕ, 신서원, 1995. 신종환, 鎭川石帳里鐵生産遺蹟의調査成果 ꡔ 新羅考古學의諸問題 ꡕ, 제20회한국고고학전국대회발표요지, 1996. 안순천, 小形鐵製模型農工具副葬의意義 - 大伽倻古墳郡의埋葬儀禮와관련하여 - ꡔ 嶺南考古學 ꡕ 18, 1996. 안재호, 鐵鋌에대하여 ꡔ 東萊福泉洞古墳群 ꡕ Ⅱ, 釜山大學校博物館, 1990. 안재호, 鐵鎌의變化와劃期 ꡔ 伽倻考古學論叢 ꡕ 2, 1997. 안춘배, 韓國古代의鐵生産과流通 ꡔ 釜山女大史學 ꡕ 10ㆍ11 合輯, 1995.
40 지역과역사 40 호 柳承宙, ꡔ 朝鮮時代鑛業史硏究 ꡕ, 고려대학교출판부, 1993. 윤동석, 韓國의古代鐵滓에대하여 ꡔ 三佛金元龍敎授停年退任記念論叢 ꡕ Ⅰ, 一志社, 1987. 윤종균, 古代鐵生産에대한一考察, 전남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8. 이건무외, 義昌茶戶里遺蹟發掘進展報告 ꡔ 考古學誌 ꡕ Ⅲ, 1993. 李南珪, 古代製鐵및鐵器製作技術의發展 ꡔ 鐵銅文明發達史硏究報告書 ꡕ, 浦項綜合製鐵株式會社, 1989. 李南珪, 三韓鐵器文化의形成過程 - 樂浪地域과의比較的時角에서- ꡔ 三韓社會와考古學 ꡕ, 제17회한국고고학전국대회발표요지, 1993. 李東完, 韓國古代製鐵에대한硏究 - 古代製鐵復元實驗을中心으로, 한신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3. 이상률, 農ㆍ工具 ꡔ 古文化 ꡕ 37, 1990. 李盛周, 1~3 세기가야정치체의성장 ꡔ 韓國古代史論叢 ꡕ 5, 1993. 李盛周, 新羅ㆍ伽倻社會의政治ㆍ經濟的起源과成長, 서울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8. 이재영, 有刺利器에對한一硏究 ꡔ 考古硏究 ꡕ 1, 1989. 이현주, 有刺利器에대하여 ꡔ 東萊福泉洞古墳群 ꡕⅡ, 釜山大學校博物館, 1990. 李賢惠, 三韓社會의농업생산과철제농기구 ꡔ 歷史學報 ꡕ 126, 1990. 李賢惠, 三國時代의농업기술과사회발전-4~5 세기新羅社會를중심으로- ꡔ 韓國上古史學報 ꡕ 8, 1991. 임효택, 副葬鐵鋌考 ꡔ 東義史學 ꡕ 2, 1985. 자원개발연구소, ꡔ한국의광물ꡕ, 1977. 張恩晶, 5~6 世紀高句麗鐵器製作技法에대한一考察,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2. 천말선, 鐵製農具에대한考察 - 原三國ㆍ三國時代古墳出土品을中心으로- ꡔ 嶺南考古學 ꡕ 15, 1994. 崔茂藏, ꡔ 梨谷里鐵器時代住居址發掘調査報告書 ꡕ ꡔ 建大人文科學論叢 ꡕ 12, 1979. 경남고고학연구소, ꡔ 勒島貝塚 Ⅴꡕ, 2006. 慶北大學校博物館, ꡔ 慶州皇城洞遺蹟 ⅢㆍⅣꡕ, 2000. 啓明大學校博物館, ꡔ 慶州皇城洞遺蹟 Ⅴꡕ, 2000. 國立慶州博物館, ꡔ 慶州皇城洞 524-9 番地溶解爐跡 ꡕ, 1999. 國立慶州博物館, ꡔ 慶州皇城洞遺蹟 ⅠㆍⅡꡕ, 2000.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41 국립광주박물관ㆍ한신대학교박물관, ꡔ무등산금곡동- 조선시대철및철기생산유적-ꡕ, 국립광주박물관학술총서제25책, 1993. 國立金海博物館, ꡔ 密陽沙村製鐵遺蹟 ꡕ, 國立金海博物館學術調査報告第一冊, 2001. 國立淸州博物館ㆍ浦項産業科學硏究所, ꡔ 鎭川石帳里鐵生産遺蹟 ꡕ, 學術調査報告書第 9 冊, 2004. 金元龍ㆍ鄭永和ㆍ崔夢龍, 陽平郡大心里遺蹟發掘調査報告 ꡔ 八堂ㆍ昭陽댐水沒地區遺蹟發掘綜合報告書 ꡕ, 文化財管理局, 1974. 김제시ㆍ대한문화유산연구원, ꡔ 金堤長興里隱谷製鐵遺蹟 ꡕ, 2011. 東國大學校慶州캠퍼스博物館, ꡔ 慶州蓀谷洞ㆍ勿川里 (Ⅰ)- 木炭窯遺蹟 ꡕ, 2002. 東亞大學校博物館, ꡔ 梁山勿禁遺蹟 ꡕ, 古蹟調査報告書第三十一編, 2000. 東亞細亞文化財硏究院, ꡔ 固城所乙非浦城址文化遺蹟發掘調査報告書 ꡕ, 2007. 두류문화연구원, ꡔ밀양임천ㆍ금곡유적 -밀양역 ~ 삼랑국도건설공사구간내문화유적 AㆍB지구 [ 금곡제철유적 ]ꡕ, 2016. 韓國文化財保護財團, ꡔ 蔚山圈廣域上水道 ( 대곡댐 ) 事業編入敷地內 1 次發掘調査報告書 ꡕ, 學術調査報告書第 126 冊, 2002. 韓永熙, 馬場里住居址出土遺物 ꡔ 中島進展報告 ꡕ Ⅲ, 국립중앙박물관, 1982. 皇城洞遺蹟發掘調査團, ꡔ 慶州皇城洞遺蹟第一次發掘調査槪報 ꡕ, 國立慶州博物館, 1990.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2017.03.12 2017.04.14 2017.04.27
42 지역과역사 40 호 Abstract The Ancient Iron Production in the East Side of the Nakdong River - Focused on Miryang Geumgok Historic Remains - Bae, Hyun-Seong The ancient iron production in southeastern Korea was by and large made in two areas: one was around the south-east coastal area including Gyeongju and Gimhae, the other was the east area of the Nakdong river, from Yangsan to Miryang. Among the latter area of production many historic remains in Sachon and Keungeomse, Miryang, and in Oehwa and Mulgeum, Yangsan have been remarkable. The geographical advantage of eastern side of the river made it easy to support and transport iron ores and timbers, and hence the areas along the river was at the center of iron production in the ancient times. In the first case of remains in Geumgok, Miryang, what have been discovered was that all kinds of furnaces necessary to the whole process of iron making, such as mining ores, calcination, refinement, tempering, forging, melting, and steelmaking, were found out. And, secondly, in Sachon, Miryang, the production facility in which seven smelting furnaces were able to be in operation at once was excavated. Finally, in ruins in Mulgeum, Yangsan, it has been also assured that many furnaces including those for smelting. These features in remains reveal the building and management of mass production system at that time. Considering the chronology and excavated relics of Imchon ancient tombs of
밀양금곡유적을중심으로본낙동강동안지역의고대철생산 43 iron production and the records, it is presumed that the management of this system with distribution had been in the power of those who were of the lineage of Silla. Chronologically, in the sixth and mid seventh centuries, the production facilities were presumed to be in operation, like those in Sachon and Mulgeum. That period marks the beginning of centralized control over handicraft manufacturing with the established production and distribution system. Considering the chronological situation, capital of Silla, Gyeongju, was the key place for spreading technology of iron making to strategic strongholds with territorial expansion. Based on the dissemination of iron manufacturing technology from Hwangseon-dong in Gyeongju to east side of the Nakdong River, Silla could make a giant leap to powerful nation. It can be concluded, therefore, that Silla, during the sixth and seventh centuries, in the midst of conquest war, successfully got hold of the regions of iron production like Yangsan and Miryang, and that helped Silla to take a step forward to the unification of three kingdoms. Keywords : East Side of the Nakdong River, Geumgok Historic Remains in Miryang, Production System, Imchon Ancient Tombs, Production Group.
요동 고려인 洪氏 세력의http://dx.doi.org/10.19120/cy.2017.04.40.45 형성과 洪君祥의 행적에 대한 고찰 45 ꡔ지역과 역사ꡕ 40, 2017.4, 45~94쪽 요동 고려인 洪氏 세력의 형성과 洪君祥의 행적에 대한 고찰 67)오 기 승* 머리말 Ⅰ. 여몽전쟁 시기 요동 홍씨 세력의 형성 과정 Ⅱ. 홍군상의 행보와 그 특성 1. 원 제국 신하로서의 입지와 활동상 2. 가문 내에서의 특징적 행보와 그 배경 맺음말 국문초록 몽골제국은 내투한 고려인 중 유력한 인물을 중심으로 요동 지역 고려인들을 세력화 시켜 제국 동방 경영에 활용하였다. 이러한 요동 고려인 세력들 중 가장 먼저 형성된 것은 홍씨 가문 세력이었다. 그 수장 洪福源은 침입해온 몽골군에 기대어 고려의 묵인 하에 고려 북계 내에서 세력을 얻었다가 고려 본국의 공격을 받아 요동으로 이전하였 다. 洪君祥은 홍복원의 5男으로, ꡔ元史ꡕ에 열전을 가진 요동 홍씨 세력의 주요인물 홍복 원, 홍차구, 홍군상, 홍중희 4인 중 가장 이채를 띠는 인물이다. 다른 3인이 지역 세력 가로서의 성격이 강한 반면 홍군상은 侍衛親軍을 거쳐 樞密院과 中書省의 고위직을 역 임하는 등 제국 중앙 인사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고려 본국과의 관계에서도 그는 일족의 다른 인물들과 대비된다. 상기 4인 중 다른 3인은 고려 본국과 적대했던 반면, 홍군상은 우호나 선의로 비칠 수 있는 행적을 보이 며 양호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다만 이는 고려에 대한 忠의 발로가 아니라, 제국의 고려 계 관료로서 本鄕 지역에 보인 선의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또한 본래 유화책 담당에 적합한 인사였기에 고려에 대한 우호역을 맡았을 가능성도 있다. 무엇보다 다른 3인은 * 중앙대학교 사학과 강사(oksblau@naver.com).
46 지역과역사 40 호 세습지역세력가로서고려본국과세력권이인접했으며똑같이고려인이그세력기반이었기에자연히고려본국과경쟁하며알력을빚게되었던반면, 중앙에서의경력이길었던홍군상은특정연고지역만이아니라제국전체를조망하는입장에서고려본국을바라볼수있었다. 이는그가고려본국에대해유연한태도를유지할수있었던주요요인이라할수있다. 주제어 : 요동, 요동고려인, 홍군상, 홍복원, 여원관계 머리말 13세기중후반에걸쳐길게진행되었던여몽전쟁은전쟁기간을전후하여많은고려인들이고려본국에서이탈하게되는현상을가져왔다. 1) 그리고이러한이탈자들중적지않은수가몽골의정책에의해고려 -몽골간의접경지대인요동에서산거하게되었다. 이들이탈고려인들은침입해온몽골군에의해강제적으로옮겨오게된경우가다수였으나, 자발적으로고려본국을등지고새로이충성할대상으로서몽골측을선택한경우도있었다. 몽골정부는이렇게몽골에내투한고려인중유력한인물을중심으로요동지역의고려인들을세력화시켰고, 이들을 13~14세기에걸쳐몽골제국의동방경영에활용하기도하였다. 이러한요동고려인세력들중가장먼저형성된세력인동시에가장대표적인세력중하나로거론될수있는것은바로洪福源을시작으로하는홍씨가문세력이라할수있을것이다. 1) ꡔ 高麗史 ꡕ 卷 24, 世家 24, 高宗 41 年 12 月甲午條기록에따르면車羅大가지휘했던고려高宗 41 년 (1254) 의침입때에만도남녀합쳐 20 만이넘는포로가발생하였다. 몽골침략이래이때의피해가가장격심했다고기록하고있으므로모든침입에서이정도포로가발생하지는않았겠지만, 이외에도여러차례침입이있었던것을감안하면전체전쟁기간동안누계로는 20 만을훨씬넘어서는숫자의포로가발생했음을짐작할수있다.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47 이들홍씨가문세력에대한해방이후의연구로는, 시기적으로주채혁의글 2) 을필두로하여여몽전쟁을전후한시기고려인의요동이주및세력화를다루면서이들에대하여논한연구가몇존재하고있다. 3) 홍씨가문자체를주제로삼은것으로는장동익의글 4) 이있으며, 여몽전쟁이후여원관계의흐름과관련하여홍복원의아들洪茶丘 5) 를중심으로한세력의활동을조명한연구도존재하고있다. 6) 이러한선행연구들중에서는세력성립과관련하여몽골침입을전후한홍복원의행적에관해논한것이가장많은분량을차지하고있다. 또한이들세력과고려본국또는고려왕족 7) 사이에서일어났던대립과갈등에주목한경우가다수였기에홍씨일족중에서도대립시작의주체였던홍복원이나고려에강하게적대했던홍차구등이좀더부각되고있는양상을보인다. 반면홍차구의동생洪君祥에대해서는상세한조명이이루어지지않았다. 그가아버지나형과는달리고려에 2) 주채혁, 洪福源一家와麗ㆍ元關係 ( 一 ) ꡔ 사학연구 ꡕ 24, 1974. 또한본논문의개고판이동일저자의 ꡔ 몽ㆍ려전쟁기의살리타이와홍복원 ꡕ( 혜안, 2009) 에수록된바있다. 3) 여몽전쟁전후고려인의요동이주및세력화를다루면서洪福源혹은그가문에대하여짚고넘어갔던연구들로는이하의것들을주로들수있다. 金九鎭, 元代遼東地方의高麗軍民 ꡔ 李元淳敎授華甲記念史學論叢 ꡕ, 敎學社, 1986. 장동익, 元에진출한高麗人 ꡔ 민족문화논총 ꡕ 11, 1990. 梁義淑, 元간섭기遼瀋地域高麗人의동향 ꡔ 역사와교육 ꡕ 4, 1996. 金惠苑, 高麗後期瀋王硏究, 이화여자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9. 이형우, 고려후기이주에대한일고찰 ꡔ 한국사연구 ꡕ 158, 2012. 오기승, 몽골제국의동방경영과요동고려인세력 ꡔ 중앙사론 ꡕ 43, 2016. 4) 장동익, 몽고에투항한홍복원ㆍ다구부자 ꡔ 역사비평 ꡕ 48, 1999. 5) 洪茶丘의독음으로는홍다구 / 홍차구가사용되고있다. 이전까지는대다수의용례를다라 다구 를택하였으나, 본고로부터는 ꡔ 元史 ꡕ 에기록된 洪察忽 이 洪茶丘 와동일인물이며 察忽 의음가가 [tʃaku] 라는근거를준용하여 차구 로표기하기로한다.( 여원관계사연구팀編, 譯註 ꡔ 元高麗紀事 ꡕ, 선인, 2008, 111~112 쪽 ). 6) 이강한, 고려후기元屯田의운영과변화 ꡔ 역사학보 ꡕ 196, 2007. 崔允精, 13 세기麗元관계와洪茶丘 ꡔ 中國史硏究 ꡕ 105, 2016. 7) 홍복원과대립하였으며홍차구의적대대상이었던王綧이나瀋陽王으로임명되어홍차구의아들洪重喜의세력권을위협했던忠宣王을이들과대립ㆍ갈등했던고려왕족의예로들수있다.
48 지역과역사 40 호 우호적인입장이었고이로인해고려에서도공신칭호를받았던사실은잘알려져있으나, 홍군상이가문내의여타인물과달리그러한입장을취하게되었던배경이나그전체적인활동상에대해서는아직까지분석이부족한상황이라할수있다. 8) 그러나홍군상은당시원제국내에서상당한비중을가진인사로서, 분석과조명을위한충분한여지와가치를가지고있는인물이다. 일례로 ꡔ 元史 ꡕ 列傳에따르면홍복원의아들 7명중홍차구와홍군상이가장알려져있다고언급하여홍군상이당시형에뒤지지않는명성을누리고있었음을알수있다. 9) 실상을논한다면오히려홍군상이야말로제국내에서복무한홍씨일족중가장무게있는위치를가진인사였다고도할수있다. 奇皇后라는根脚을배경으로고위직에올랐던奇氏일족과같은인사들을제외하고자신의실적으로입신한인물들만을살핀다면, 실제로요동고려인중가장고위직에이르렀던인물은바로홍군상이기때문이다. 또한요동지역홍씨세력가의일원으로서 ꡔ 元史 ꡕ 列傳에그행적이기록된이는홍복원, 홍차구, 홍군상및홍차구의아들洪重喜까지총 4명인데그중군상의비중이가장높게기록되어있는점또한이를방증한다. 10) 한편사료내에기록된활동상을살피면다른 3인은요동을기반으로한지역세력가로서그활동영역이주로요동과한반도주변에집중되며, 행적은대부분군사적인면에집중되어있다. 반면홍군상의경우對南宋전선, 원제국수뇌부, 요동및한반도로그활동이훨씬넓은영역에미쳤으며, 제국의중앙인사로서군사적인면뿐아니라그이외의방면에서도다수의활동이나타 8) 고려에우호적이었다는점외의측면을짚어본연구로는이형우가앞의논문에서홍군상의경력을일별한바있으나상세한고찰에는이르지못했다. 또한장동익이앞의논문들에서요동에서의文風증진및교류활동을, 오기승이앞의논문에서요동에서의군사적활동및행성관료로서의경력을짚은바가있으나둘모두요동에서의행적만을주로다루고있다는점에서일정한한계가있다. 9)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傳. 子七人俊奇 (= 茶丘 ) 君祥最知名 10) ꡔ 元史 ꡕ 列傳에는洪福源傳에附하여洪茶丘, 洪君祥, 洪重喜의열전까지기재하고있는데, 군상 - 차구 - 복원 - 중희순서로분량이많다. 홍군상열전에는넷중유일하게 1,000 자를넘는분량이할애되어있다.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49 나기에전체적으로다른 3인과는상당히이질적인모습을보이고있다. 이러한제반사항을감안한다면, 아직까지상세히다루어지지않았던요동고려인홍군상의행적및그배경과의미를분석하는것은 13~14세기원제국체제내요동고려인의활동상을전체적으로조망함에있어나름의의미를가진다할수있을것이다. 본고에서는이를진행하기위하여먼저그선행사항으로서요동고려인홍씨세력의형성과정을서술하되, 이과정에서 1230년대초홍복원이고려- 몽골양측에서부여받았던지위에대한고찰을포함하여다소모호한면이있었던당시홍복원세력의실상및고려북계지역의상황을새로이추적하여정리해보려한다. 그리고이어서홍군상의활동상을시계열에따라추적하는한편으로거기서나타나는홍군상개인의특성과그배경및역사적의미에대하여논해보려한다. 아울러 ꡔ 元史 ꡕ 홍군상列傳내에는편년구분의불비한점과오류로인해무비판적으로독해할경우혼동의여지를주는부분이있기에, 시계열적추적과정에서이를함께짚어보도록하겠다. 그리고최종적으로는이를통해여몽간의경계지대를출신기반으로하여활동하였던요동고려인세력의실상에대한이해의폭과깊이를더하는데기여하고자한다. Ⅰ. 여몽전쟁시기요동홍씨세력의형성과정 요동고려인홍씨세력형성의직접적계기가된것은몽골의침입과洪福源의항복이라할수있다. 高麗高宗 18년 (1231) 몽골이본격적으로고려에침공해오자홍복원은곧바로몽골에항복하였다. 11) ꡔ 元史 ꡕ기록에따 11) 이와관련하여 ꡔ 高麗史 ꡕ 와 ꡔ 元史 ꡕ 모두홍복원열전의항복기사앞에그아버지인洪大純 (ꡔ 元史 ꡕ 에서는洪大宣 ) 이高麗高宗 5 년 (1218) 겨울몽골군이거란잔당토벌을명목으로江東城공격에나섰을당시몽골군에투항하여협조했던일을기록하고있다. 그러나이후여몽전쟁이본격적으로전개될때까지북계지역은계속고려가관할하고있었으므로당시홍대순의항복은단발적인사건이었을뿐이며, 후술하겠지만몽골침입초기까지도홍씨가문은고려정부와
50 지역과역사 40 호 르면우구데이칸이살리타이 ( 撒里答 / 撒禮塔 ) 에게명하여고려를치자홍복원이솔선하여주현의백성들을거느리고귀부하였으며 12) 당시휘하에編民 1,500호를거느리고있었다. 13) 당시홍복원의고려내지위는麟州神騎都領으로추측되는데, 14) 홍복원의선조가인주로옮겨와대대로거주하였고그아버지인洪大純또한麟州都領이었던것을감안하면 15) 이주이후차차지역토호로성장하여인주에서도령직을세습하는위치에이르렀던것으로보인다. 홍복원이고려고종 45년 (1258) 사망당시 53세였다는기록을바탕으로역산하면 16) 그는 1206년생으로몽골에항복할당시 26세였으므로, 상당히젊은나이에도령직을세습했다고할수있다. 17) 그런데홍복원이있던고려北界의州鎭軍편제를살펴보면, 安北府와龜州등에서中郎將 2인위에都領中郎將을두고肅州에서는郎將 4인위에都領郎將을두며西京에서는別將 2인위에都領別將을두는등, 都領은다수의中郎將, 郎將, 別將을지휘하는위치에있었다. 18) 즉홍씨가문이세 연결을유지하고있었다. 그러므로홍씨가문이실제로몽골에완전히복속하는것은홍복원대의일로보아야할것이다. 다만홍대순항복건은몽골과고려모두자신들의입장에서귀부, 혹은반역이라는홍복원의행적에대한개연성을강화하는소재로서기록된한편으로, 강화이후의원과고려사이에서그랬듯이제국편입이후몽골에대한귀부시기를실제보다소급하여인식하는단서로도작용하였을것이다. 12)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傳. 辛卯秋九月太宗命將撒里答討之福源率先附州縣之民 13) ꡔ 元史 ꡕ 卷 208, 列傳 95, 外夷 1, 高麗傳. 得福源所率編民千五百戸 14) ꡔ 元史 ꡕ 卷 59, 志 11, 地理 2 瀋陽路條. 元初平遼東高麗國麟州神騎都領洪福源率西京都護龜州四十餘城來降 15) ꡔ 高麗史 ꡕ 卷 130, 列傳 43, 洪福源傳. 洪福源初名福良本唐城人其先徙居麟州父大純爲麟州都領 16)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傳. ( 戊午 ) 會高麗族子王綧入質 ( 中略 ) 譖福源于帝遂見殺年五十三 17) 홍복원이몽골에항복한이후로도 ꡔ 高麗史 ꡕ 및 ꡔ 元史 ꡕ 에홍대순에대한기록이나오는것을감안하면, 홍대순이생존한상태에서은퇴하면서그에게습직케한것으로보인다. 18) ꡔ 高麗史 ꡕ 卷 83, 志 37, 兵 3 州縣軍條.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51 습하던都領직은각주진에서선임지휘관을담당하는역할이었다. 양계지역의도령은고려관제내에서확실한품계가정해진관직이아니라그지역의군대를통솔하는정도의지위였기때문에해당지역의휘하병력규모나지휘관의지위에따라도령의지위에도차이가있었을것으로보이지만, 양계중북계에는그중에서도비교적위상이강한도령이적지않았던것으로추측된다. 19) 또한이지역에서는국경지라는특성을바탕으로무공을세워주진군에서입신하고도령을배출하면서주진군지휘권을장악하고강력한지방세력으로성장한가문이등장하기도하였다. 20) 이렇게성장한북계도령들은지역내에서주진군최고지휘관이상의위상을가지고지방관에버금가는영향력을보유하는경우도있었다. 21) 북계지역에서도령직을세습했던홍복원의가문역시이렇게성장한지방세력들중하나였을것이다. 그런데이들이주재하던麟州에는편제상郎將 9명과中郎將 2명이존재하므로, 22) 선대로부터麟州都領을맡고있었다면몽골과의충돌이전에홍대순과홍복원은적어도中郎將급의위상을가지고있었다는이야기가된다. 또한고려의주진군편제에중랑장보다높은직위는임명되지않았으므로, 23) 이들가문은당시북계의도령들중에 19) 김갑동, 고려시대의都領 ꡔ 한국중세사연구 ꡕ 3, 1996, 81~82 쪽. 해당논문에서는경우에따라郎將없이別將이나校尉만있는지역의도령도있어이런지역의도령은中郎將, 郎將이배치된지역의도령보다지위가낮았을것으로추측하고있으며, 휘하병력수로미루어보면북계지역도령이동계지역도령보다강한세력을가졌을것으로보고있다. 한편도령은관직이아니라특정집단이나지역의우두머리이므로국가의정식편제와반드시일치할필요없이시기나상황에따라변동가능했던일종의호칭으로보는시각도있다 ( 박옥걸, 고려도령에관한재검토 ꡔ 사학연구 ꡕ 58 ㆍ 59, 1999). 도령의지위가가변적이라는점에는필자역시동의하나, 일단양계지역에한정할경우도령칭호를가진인물이해당주진의선임지휘관을맡게되는것만은사실로보인다. 20) 김유나, 고려전기북계민 ( 北界民 ) 의형성과그집단의식 ꡔ 역사와현실 ꡕ 96, 2015, 212~213 쪽. 21) 김유나, 위의논문, 206~207 쪽. 22) ꡔ 高麗史 ꡕ 卷 83, 志 37, 兵 3 州縣軍條. 麟州中郞將二郞將九別將十八 23) 李基白, ꡔ 高麗兵制史硏究 ꡕ, 一潮閣, 1968, 254 쪽.
52 지역과역사 40 호 서도상당히강력한세력과높은위상을가진부류였다고할수있다. 24) 이러한재지세력으로서의입지와아울러홍씨가문이관할하던麟州또한몽골군입장에서는압록강도하점대안의거점으로서중요교두보가될수있는지역이었다. 이를무혈로점령하고강력한재지세력의적극적협력을얻게된것은침입해온입장인몽골측에매우큰도움으로작용하였을것이다. 이후홍복원은몽골군의嚮導역을맡아살리타이와함께항복하지않은고려의州郡을공격하는한편으로, 고려의王京까지몽골군과함께진군해오게된다. 25) 이와관련하여 ꡔ 元史 ꡕ 地理志瀋陽路條에는홍복원이투항할당시西京, 都護, 龜州 40여성을이끌고항복했다고서술하고있다. 그러나비록홍복원의세력이지방세력중강력한편이었고그가항복할때인근의州郡들중따라항복한이들이있었다고는하나 26), 압록강대안麟州의都領이西京을포함한북계 40여성전체에영향력을미쳤을것이라고는보기어렵다. 또한瀋陽路條의서술에서홍복원이이끌고항복했다는龜州는 1231년의몽골군침략당시朴犀의지휘하에끝까지항전하여버텨낸지역이기도하다. 27) 이로미루어보면瀋陽路條에서말하는 西京, 都護, 龜州 40여성 은홍복원항복당시에같이항복한것이아니라 1231년살리타이의침공당시홍복원이살리타이와함께공격했던지역으로서, 이때공략된북계지역의여러성에대한통칭으로보는것이적절할것이다. 28) 24) 麟州는고려북계최전방거점으로서그규모역시주진중에서도큰편에속했다. 전술한대로중랑장 2 명에낭장 9 명이라는편제에준하여병력수도많았을것으로보이는데, 주채혁은李基白과末松保和의연구를근거로인주도령아래 3,000 명가량의병력이있었을것으로추측하고있다 ( 주채혁, ꡔ 몽ㆍ려전쟁기의살리타이와홍복원 ꡕ, 혜안, 2009, 218 쪽 ). 25) ꡔ 元史 ꡕ 卷 208, 列傳 95, 外夷 1, 高麗傳. 撒禮塔即與福源攻未附州郡又使阿兒禿與福源抵王京 26) ꡔ 元高麗紀事 ꡕ 太宗 3 年 9 月條. 國人洪福源迎軍投降附近州郡亦有來歸者 27) ꡔ 高麗史 ꡕ 卷 103, 列傳 16, 朴犀傳. 28) 주채혁, 앞의책, 2009, 231~232 쪽. 강재구, 몽골의高麗北界분리시도와東寧府의편제 ꡔ 지역과역사 ꡕ 39, 2016, 25 쪽. 이렇게본다면몽골의 1 차침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53 그런데이이후일어난사건의흐름에대해서는고려와몽골양측이다소어긋나는시각의기록을남기고있다. 일단양자의기록에서확실하게일치하는부분은고려고종 19년 (1232) 재차고려로침입해온살리타이가處仁城에서전사하자몽골군이퇴각하였고, 그다음해인 1233년고려정부에서서경에주둔하고있던홍복원등을공격하였으며, 이에홍복원이요동으로건너가게되었다는일련의사건이다. 사건의결말에대한서술은동일하다. 그런데여기까지이르는과정과관련된고려, 몽골양자의서술은특히홍복원의당시입장에대한시각에서다소간의차이를보이고있다. 일단 ꡔ 元史 ꡕ의기록을먼저살피면, 몽골과강화한바로다음해인 1232 년에고려가몽골이배치한다루가치들을살해하고江華島로들어가몽골에적대의사를보이자홍복원이북계 40여성의유민을불러모으고 ( 몽골의원병을 ) 기다렸다는내용이홍복원列傳에기록되어있다. 29) 같은사건을서술한 ꡔ 元史 ꡕ 高麗傳기록에서는남은백성 ( 餘民 ) 을모아지키며大兵, 즉몽골의원군을기다렸다고표현하고있다. 30) 한편 ꡔ 元高麗紀事 ꡕ에서는 ( 고려와몽골간의 ) 경계지대 ( 地界 ) 에있는 40여주현의흩어진 ( 失散 ) 인민을모아지키며天兵 ( 몽골군 ) 이와서돕기를기다렸다고기록되어있다. 31) 이당시홍복원이고려북계 40여성의백성을모으는일을수행했던것은전년의몽골침입에서향도역을맡아활약한공로로몽골에의해이지역의통제권을인정받아장악하게된결과일것이다. 32) 그런데상기사료에서홍복원이모았다는이북계 40여성의백성들에대해 남은백성 ( 餘民 ), 흩 입당시홍복원이이지역을 率 하여 來降 하였다는瀋陽路條기록의실상은홍복원이살리타이와동행하여이지역을공략해 결과적으로 몽골군에항복하게만든상황을의미하는것이라고도볼수있을것이다. 29)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傳. 壬辰夏六月高麗復叛殺所置達魯花赤悉驅國人入據江華島福源招集北界四十餘城遺民以待 30) ꡔ 元史 ꡕ 卷 208, 列傳 95, 外夷 1, 高麗傳. 㬚盡殺朝廷所置達魯花赤七十二人以叛遂率王京及諸州縣民竄海島洪福源集餘民保聚以俟大兵 31) ꡔ 元高麗紀事 ꡕ 太宗 4 年 6 月條. 率王京及諸州郡人民竄於海島拒守洪福源集地界四十餘州縣失散人民保聚俟天兵來援 32) 주채혁, 앞의책, 2009, 236 쪽.
54 지역과역사 40 호 어진인민 ( 失散人民 ) 등의표현이등장하는것은주목할만한지점이다. 기존의연구에따르면고려북계지역에서海島立保는고종 18년 (1231) 몽골의본격적침입직후부터광범위하게진행되었던바있다. 33) 이로미루어보면살리타이의 2차침입을전후하여고려정부가강화로천도하면서북계를포함한여타지역에서도해도입보가적극적으로시행되었을가능성이높다. 34) 그리고그결과, 홍복원은해도입보를통해현지에서이탈한백성들을제외한인원만을모을수있었기때문에이에대하여 餘民 이나 失散人民 등의표현이사용된것이아닌가한다. 이는살리타이의 1차침입이후로도여전히북계에고려정부의행정력이미치는구역이존재했으며, 몽골이나홍복원세력이실질적으로고려북계전체를완전히장악하지는못했음을나타낸다할수있다. 이후살리타이의 2차고려침입당시홍복원은다시그와합세하여싸웠으나살리타이가처인성에서전사하자그부장帖哥는병사를이끌고돌아갔으며, 오직홍복원만이남아서 ( 고려북계에 ) 주둔하였다고 ꡔ 元史 ꡕ에는기록되어있다. 35) 그리고그다음해인고종 20년 (1233) 고려정부는홍복원이주둔하고있던서경을공격하였다. 이와관련하여몽골측의기록에서는이미 ( 몽골에 ) 귀부한서경등지의투항민을고려가공격하였다고기록하고있다. 36) 이러한일련의기록을살피면몽골측에서는 1231년의투항이후홍복원을완전한몽골측인사로간주하고있다는인상을받게된다. 33) 尹龍爀, 고려의海島入保策과몽고의戰略變化 : 麗蒙戰爭전개의一樣相 ꡔ 역사교육 ꡕ 32, 1982, 57~58 쪽. 34) 앞서인용한주 30), 31) 의 ꡔ 元史 ꡕ 高麗傳및 ꡔ 元高麗紀事 ꡕ 기사에도공통적으로 왕경및여러주현의백성을이끌고해도로숨었다 ( 率王京及諸州縣民竄海島 ) 라는표현이나와왕경이강화로이전하는것과더불어여러주현에서각각해도입보가이루어졌다고해석할여지가있다. 35)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傳. 太宗復遣撒禮塔將兵來討福源盡率所部合攻之至王京處仁城撒禮塔中流矢卒其副帖哥引兵還唯福源留屯 36) ꡔ 元史 ꡕ 卷 208, 列傳 95, 外夷 1, 高麗傳. ( 太宗五年 ) 十月㬚復遣兵攻陷已附西京等處降民劫洪福源家. ꡔ 元高麗紀事 ꡕ 太宗 5 年 10 月條. 十月㬚復遣兵攻陷已附西京等處降民亦劫洪福源家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55 그런데 1233 년의서경공격과관련된 ꡔ 高麗史 ꡕ 기록에서는홍복원이 1231 년이후로도西京郞將명목으로고려측에있다가 1233 년에새삼畢賢甫 등과함께宣諭使鄭毅와朴祿全을죽이고고려정부에 반란 을일으킨것으로간주하고있어이와는다른시각을보여주고있다. 37) 이렇게양세력에서동시에홍복원을자기측인사로간주하는기록을남긴것은오히려 1231-1233 연간서경을중심으로한홍복원의세력이양국사이에서일종의회색지대로있었을가능성을엿보게한다. 일단 1231년살리타이의침공으로고려북계지역의세력질서에큰변동이있었던것은부정할수없다. 대대로麟州에世居하며지역의유력자가되어都領을세습하던홍씨일문이이를두고서경으로근거지를옮긴 38) 것은고려북계지역에기존의토착질서를재편할만한강력한외부적압력이가해졌다는것을나타내며, 그압력의주체로지목될만한것으로는결국살리타이의몽골군을들수밖에없다. 즉홍복원이몽골에대한협력의대가로서서경을중심으로소위 북계 40여성 으로지칭되는영역에서의권한을인정받은것이홍씨가문서경이주의배경인것이다. 홍복원이고려조정으로부터西京郞將직위에임명된것또한이와관련이있다. 尹龍爀은홍복원의서경낭장임명을가리켜고려가몽골과의관계를고려하여그의활동을합법화시켜준것으로논하고있다. 39) 즉고려는몽골군에의해만들어진북계지역의새로운세력질서를追認하여, 홍복원이서경에서웅거하는상황을고려정부도일단묵인한다는의미에서그에게서경낭장지위를부여했던것이라할수있다. 40) 이는홍복원이몽골군을통해새로 37) ꡔ 高麗史 ꡕ 卷 130, 列傳 43, 洪福源傳. ( 高宗 ) 二十年福源爲西京郞將與畢賢甫殺宣諭使大將軍鄭毅朴祿全據城反 38) 앞의주 36) 에서인용한기록에는고려정부가 劫洪福源家 하였다고되어있다. 이는홍복원본인만이아니라집안전체, 혹은주요구성원다수가인주에서서경으로옮겨가있었음을의미한다. 39) 尹龍爀, ꡔ 高麗對蒙抗爭史硏究 ꡕ, 一志社, 1999, 61 쪽. 40) 이와관련하여홍복원이麟州神騎都領에서西京郎將으로직위가변동된것을일종의승진이나지위상승으로해석하는시각이있는데 ( 주채혁, 앞의책, 2009, 248 쪽. 강재구, 앞의논문, 2016, 25 쪽 ), 여기에는다소이론의여지가
56 지역과역사 40 호 얻은권력을인정해주되, 그반대급부로서홍복원이자신을 고려의서경낭장 으로임명한고려정부의우위혹은북계지역에대한고려정부의통제권역시어느정도암묵적으로인정해주기를요구하는이중적인회유의의미를담고있는것이다. 물론이렇게현상을수동적으로추인할수밖에없었던고려정부의상황과당시홍복원이몽골측에훨씬경도된행적을보이고있었던것을감안하면, 1231년살리타이의침입이후한동안은몽골측이이지역에서일종의이니셔티브를가지고있는상황이었다할수있다. 또한북계지역중홍복원이장악한것으로추측되는영역에서는몽골이鎭守司및官을설치하였기에해당지역에몽골측의점령지행정을위한체계가일정부분형성되어있었을가능성도높다. 41) 그러나앞에서살핀해도입보실시정황등을감안하면, 북계지역에는 1232년살리타이의 2차침입당시까지도고려의행정력이미치고있는범위가온존하고있었을개연성또한존재하고있다. 아울러같은해에閔曦가西京巡撫使의직책을띠고司祿崔滋溫과공모하여다루가치살해를모의하였던사건과더불어, 42) 모의당시서경에고려조정이임명한留守, 判官, 分臺御史가주재하고있다가모의실패여파로피신하였음을나타내는 ꡔ 高麗史 ꡕ 기록도존재한다. 43) 이로미루어보면당시서경을비롯한고려북계지역에는몽골의후원에힘입어홍복원의 있다. 서경이비록요지이기는하나, 전술한대로麟州의都領은정 5 품中郎將에해당하는위치로볼수있기에그아래정 6 품인郎將으로보임된것을영전이나승진이라고보기에는다소무리가있다. 홍복원의西京郎將임명은승진이나강등의의미가아니라, 본문에적시한대로그가실제로서경에서권력을행사하고있다는엄연한 현상 을고려정부도묵인한다는의미에서고려의서경관련직위를부여한것으로해석하는편이좀더타당할것이다. 41) 강재구, 앞의논문, 2016, 26~27 쪽. 다만이시점에서몽골이이지역에행정체계를완비했다고는보기어렵다. 42) ꡔ 高麗史 ꡕ 卷 23, 世家 23, 高宗 19 年 8 月己酉條. 西京巡撫使大將軍閔曦與司錄崔滋溫密使將校等謀殺達魯花赤 43) ꡔ 高麗史 ꡕ 卷 23, 世家 23, 高宗 19 年 8 月壬戌條. 執崔滋溫囚之留守崔林壽及判官分臺御史六曹員等皆逃竄于楮島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57 권력이인정되고있으면서, 동시에고려정부또한관원을파견하여어느정도관할권을행사하는일종의권력혼재상태가존재하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 실제로몽골측기록인 ꡔ 元高麗紀事 ꡕ에는고려고종 20년 (1233) 4월고려를질책하기위해보낸글에서 너희 ( 고려 ) 경내서경의金信孝등이관할하는 10여개의성 이라는문구가보이고있다. 44) 이는몽골역시이당시서경을비롯한고려북계지역을완전히흡수했다고인식하지는못했던정황을나타낸다할수있다. 결국이시기의홍복원은몽골을위해복무하고그후원으로지역에서의통할권을유지하되, 고려본국의관직또한받고그관원의출입을인정하여고려정부와도관계를완전히끊지는않는유보적태도를보이면서이를통해자신의이익을극대화하려했던것으로보인다. 이러한상황이일변한것은 1232년고려로침입해왔던살리타이가처인성에서전사한이후의일이다. 살리타이전사이후몽골군은대거퇴각하여고려북계지역에서친몽골계세력으로는오직홍복원만이남아주둔한 ( 唯福源留屯 ) 상황이되었다. 당시몽골은고려공략을일단유보하고金과東眞에대한최종공세에집중하였는데, 고려정부는이를틈타북계지역에대한지배권회복을목표로강력한조치를취했다. 몽골의후원이사라진홍복원세력또한이러한고려정부의압박으로약화위기에직면하게되었다. 45) 전술한대로고려는일단서경에주재중인홍복원에게선유사를파견하였다. 이는홍복원이몽골측에경도되기는했지만다소나마유보적입장도유지하였음을감안하여고려측으로돌아설의사가있는가를타진해보려던의도로짐작된다. 지금까지의처신에서벗어나입장을확실히할것을요구받은홍복원은선유사를살해함으로써몽골측을택하겠다는의사를나타냈다. 이에고려정부는홍복원의행위를 반란 으로규정하고서경을쳐서함락시켰다. 홍복원본인은도주할수있었으나동조자였던필현보는처형당했으며, 아버지홍대순과동생洪白壽및그자녀들은고려에사로잡 44) ꡔ 元高麗紀事 ꡕ 太宗 5 年 4 月條. 爾之境內西京金信孝等所管十數城 45) 尹龍爀, 앞의책, 1999, 62~63 쪽.
58 지역과역사 40 호 히게되었다. 46) 요동으로도주한홍복원은몽골에받아들여져遼陽과瀋陽사이에자리하며몽골로부터高麗軍民萬戶 - 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 47) 으로임명받아몽골로귀부한고려인에대한통할권을인정받고이후요동고려인세력으로서성장해나가게되었다. 몽골이이러한고려인세력을요동에육성한목적으로는고려본국에대한제어역할과아울러, 몽골제국의동방경영과관련하여동방 3왕가로대표되는제국동쪽의諸王세력을직간접적으로견제하는역할수행도제기되고있다. 48) 그런데당시홍복원이몽골로건너왔던사건에대하여 ꡔ 元史 ꡕ의기록은홍복원이 來歸 하였다는표현을사용하였다. 49) 이로미루어보면홍복원이고려를완전히버리고몽골측에최종적으로안착한것은바로압록강을넘어요동으로건너가직위를받았던이시기의일이며, 당시몽골측에서 46) ꡔ 高麗史 ꡕ 卷 23, 世家 23, 高宗 19 年 12 月條. 崔瑀遣家兵三千與北界兵馬使閔曦討之獲賢甫送京腰斬于市福源逃入蒙古擒其父大純弟百壽及其女子 47)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傳. 福源遂盡以所招集北界之衆來歸處於遼陽瀋陽之間帝嘉其忠甲午夏五月特賜金符爲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仍令招討本國未附人民 ( 中略 ) 其降民令福源統之 ; 卷 59, 志 11, 地理 2 瀋陽路條. 後高麗復叛洪福源引衆來歸授高麗軍民萬戶徙降民散居遼陽瀋州. 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임명은홍복원열전에, 高麗軍民萬戶제수는地理志瀋陽路條에기록되어있다. 문맥상임명및제수시점은둘다홍복원이몽골로도주해온후이다. 주채혁은이와관련하여두직책을겸직할수없는것으로보고, 몽골로가기전고려에서高麗軍民萬戶로있다가몽골로건너간뒤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이된것으로판단하여심양로조기록의萬戶제수시점은오류로간주하였다 ( 주채혁, 앞의책, 2009, 242~249 쪽 ). 그러나이후기록에 總管高麗女直漢軍萬戸兼安撫使高麗軍民總管 (ꡔ 元史 ꡕ 洪福源附洪重喜傳 ) 과같이萬戶와軍民總管을겸직하는사례가다수나타나며高麗軍民總管이곧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을재편하여나타난조직임을감안하면, 홍복원전과심양로조의기록모두를그대로받아들여홍복원이몽골로건너온뒤萬戶와軍民長官을겸직했다고보아도무리는없다. 혹은軍民長官임명이 1234 년 5 월임을들어요동이주이후당해 5 월이전까지高麗軍民萬戶로있다가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이된것으로추측할수도있는데, 이경우에도심양로조의기록을굳이오류로보고부정할필요는없다. 48) 오기승, 앞의논문, 2016, 44~45 쪽. 49) 주 47) 洪福源傳및瀋陽路條참조.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59 도그렇게인식했다는것으로해석할수있다. 따라서요동도주이전인 1231~1233 연간의홍복원은전술한대로권력혼재상태인북계의지역세력가로서몽골에매우협조적이었지만고려와도완전히단절하지는않은상태였다고할수있다. 그리고이렇게어느쪽에도완전히여지를없애지는않았던상황이었기때문에이시기홍복원의입장에대한양국기록간의시각차가발생할소지를남겼다고할수있을것이다. 50) 홍복원은몽골의본격적고려침공당시가장먼저자발적으로몽골에항복한세력가로서이후여몽전쟁진행과정에서도몽골군과동행하며적극적으로전쟁에협조하였다. 몽골인들은대외전쟁에서 자발적으로 또 먼저 귀부한이들에대한대우가특별했으며, 그두가지면에서홍씨일가는고려에서으뜸가는위치에있었다. 51) ꡔ 元史 ꡕ 홍복원열전의 솔선하여귀부하였다 ( 率先附 ) 라는서술 52) 에서도확인되는그의이러한위치는결국홍복원이고려영역내의세력을잃은뒤로도그來歸가받아들여지고요동고려인을통할하는위치에자리잡을수있는기반이되었다. 이후로도홍복원은여몽전쟁과정에서누차고려로종군하며세력을확대해나갔다. 요동에자리잡은홍씨가문은그세력이커져견제를받는과정에서한때永寧公王綧과의충돌로홍복원이죽음을당하는위기를겪기도하였다. 53) 50) 고려측에서는서경에어느정도통치권을행사할수있었던상태에서고려의서경낭장직위를가지고있던홍복원이선유사를살해하였으므로이를반란으로인식하고규정할당위성이있었다. 반면몽골측에서는홍복원이결국몽골을택한것에서도출된결과론적입장에서그이전의모든행위를이미몽골측에완전히경도된결과로해석할여지가있다. 이시각차가일련의사건에대한기술입장차이로나타났을것이다. 51) 崔允精, 앞의논문, 2016, 100 쪽. 52) 주 12) 참조. 이러한실질적 솔선귀부 는여몽전쟁이본격적으로전개된홍복원대에서야이루어졌으나주 11) 에서언급한대로특정시점이후에는실질적귀부시행과별개로귀부시기에대한인식만은홍대순시기까지소급되었을가능성도있다. 53) 양자의충돌에대해서는오기승, 앞의논문, 2016, 18~23 쪽과이정신, 永寧公王綧연구 : 몽고침략기왕족의모습 ꡔ 민족문화연구 ꡕ 35, 2001, 374~379 쪽참조.
60 지역과 역사 40호 그러나 그 아들인 홍차구와 홍군상이 현달하면서 세력은 다시 상승세에 들 어섰으며, 이들을 비롯한 요동 고려인 세력은 13세기 말에서 14세기 초에 걸쳐 성세를 누리게 된다. Ⅱ. 홍군상의 행보와 그 특성 1. 원 제국 신하로서의 입지와 활동상 1) 제국 중앙에서의 立身 과정 洪君祥은 아명이 雙叔으로, 홍복원의 다섯째 아들이다.54) 전술한 대로 홍복원에게는 총 7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인 홍차구55)가 홍복원 의 지위를 襲職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맏아들은 일찍 사망했던 것으로 보 인다. 또한 ꡔ高麗史ꡕ에 군상의 형 熊三의 아들 波豆兒 라는 문구가 있어56) 홍차구와 홍군상 사이에 洪熊三이 있었다는 사실은 알 수 있으나, 이외의 형제에 대해서는 기록이 부족하여 고찰하기 어렵다. 홍군상에 관련된 기록으로 시기상 첫머리인 것은 ꡔ元史ꡕ 홍군상 列傳의 기록으로, 14세 때 형 홍차구를 따라 上京에서 元 世祖 쿠빌라이를 알현한 것이다.57) 홍군상은 그 生年이 아직 미상이나, 이 기록을 바탕으로 어느 정 도 그 범위를 좁혀볼 수는 있다. 그가 아버지 홍복원이 아니라 형 홍차구를 따라가 알현했다는 점, 그리고 潛邸 등의 표현이 없으므로 실제 쿠빌라이 재위기에 만남이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홍복원이 사망한 뒤58) 어느 시점에 사실상의 가장이었던 홍차구가 알현을 주선했던 것으로 54) 55) 56) 57) 58) ꡔ元史ꡕ 卷154, 列傳41, 洪福源 附 洪君祥傳. 君祥小字雙叔 福源第五子也 ꡔ元史ꡕ 卷154, 列傳41, 洪福源 附 洪俊奇傳. 俊奇小字茶丘 福源第二子也 ꡔ高麗史ꡕ 卷130, 列傳43, 洪福源傳. 元遣君祥兄熊三子波豆兒 ꡔ元史ꡕ 卷154, 列傳41, 洪福源 附 洪君祥傳. 年十四 随兄茶丘見世祖于上京 홍복원의 사망년도인 1258년은 쿠빌라이의 전임자인 몽케 칸의 재위기간이다.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61 보인다. 그런데 ꡔ 元史 ꡕ에따르면홍차구가홍복원의죽음에억울한점이있다는것을쿠빌라이에게호소하여 ( 홍복원의사망과관련된 ) 刑章이잘못적용되었다는점을인정받고홍복원의지위를물려받은것은원中統 2년 (1261) 가을의일이다. 59) 즉홍복원의혐의가공식적으로완전히소멸된것은이시점이므로, 그가동생홍군상을데려와알현을주선한것도이때혹은그이후로보아야할것이다. 한편홍군상이처음쿠빌라이를알현한기사에는연호가기재되어있지않은반면, 그뒤로부터는곧바로至元연호를앞세운기사들이이어지고있다. 이로미루어보면알현시점은쿠빌라이재위기이면서至元연간이전인中統연간이아닌가한다. 또한중통연호는 4년까지존재하므로, 이를종합하면홍군상이쿠빌라이를처음알현한시기는中統 2년에서 4년사이, 1261~1263년중어느한해가된다. 알현당시홍군상은 14세였으므로이를바탕으로역산하면그의생년은 1248~1250년사이일것으로보인다. 列傳의사망기사를바탕으로역산하면형인홍차구는至元 28년 (1291) 병사할당시 48세였으므로 60) 그생년은 1244년이된다. 그렇다면둘의나이차이는 4-6년인셈인데, 홍차구와홍군상사이에 2명의형제가더있음을감안하면자연스러운수준의차이일것이다. 至元 3년 (1266), 고려인 3백을병사로삼아홍군상에게이를통솔하게하였다. 61) 이는그가요동고려인집단내에서처음으로자신의수하세력을가지게된시점이라할수있다. 이후萬壽山건축및通州의운하개통현장에따라가경험을쌓았으며, 62) 至元 6년 (1269) 에는林衍의元宗폐위 59)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俊奇傳. 中統二年秋茶丘雪父冤世祖憫之詔諭之曰汝父方加寵用誤絓刑章故於已廢之中庸沛維新之澤可就帯元降虎符襲父職管領歸附高麗軍民總管 60)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俊奇傳. ( 至元 ) 二十八年以疾卒年四十八子四人長曰萬 61)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至元三年籍高麗民三百人爲兵令君祥統之 62)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從禿花禿烈伯顔等軍築萬壽山復從開通州運河. 이어지는기사에는홍군상이쿠빌라이의질문에잘답하였기
62 지역과역사 40 호 사건으로인해頭輦哥를따라고려로종군해왔다. 63) 당시그의형홍차구도 3,000명의병사를인솔해왔었으므로, 그휘하에서종군했을가능성도있다. 64) 1270년원종폐위건이해결된이후, 형인홍차구는고려경내에둔전을운용하고三別抄를진압하며일본원정을준비하는등주로한반도및그주변에서활동하였다. 반면홍군상은이시기부터형홍차구와멀리떨어져對南宋전선에서활동하게된다. 자세한것은후술하겠지만, 홍군상이처음으로將軍의반열에오르게되는것은南宋수도臨安이몽골군에항복한至元 13년 (1276) 의일이다. 그러므로처음으로대남송전선에서활동하는至元 8년 (1271) 부터임안이항복하는至元 13년초엽까지는대략校尉정도의품계를가지고활동하였을것으로보인다. 이시기의활동을시계열에따라살펴보면, 먼저至元 8 년에는河南을지켰다. 65) 至元 9년 (1272) 에는淮西를공략하여大凹城을깨트렸고, 그다음해에는元帥孛魯罕을따라淮東의射陽湖를습격하여남녀와우마를노획해왔다. 66) 한편다른전선에서는 1267년부터길게끌 에술을내려치하하고동석해있던伯顔에게홍군상의장래성을높게보는발언을한일이기록되어있는데, 이때홍군상을가리켜 是兒 라는호칭을사용하고있다. 이는당시홍군상이아직성년이되지못했거나혹은갓성년이된시점이라는것을나타낸다. 본문의출생년도추측에따라계산하면至元 3 년 (1266) 홍군상은 17 세내지 19 세였을것이므로이에부합한다할수있을것이다. 63)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 至元 ) 六年林衍叛從頭輦哥征之. 다만실제로원의군대가고려경내에도착한것은그다음해인至元 7 년의일이었다. 64)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俊奇傳. 至元六年高麗權臣林衍叛冬十一月詔以其軍三千從國王頭輦哥討平之遷江華島所有臣民復歸王京. 실제로군이고려로진입했던至元 7 년에는요동의다른고려인세력가인王綧또한부민 1,300 호를뽑아거느리고두련가와함께들어갔다 (ꡔ 元史 ꡕ 卷 166, 列傳 53, 王綧傳 ). 65)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 至元 ) 八年戍河南. 금나라때부터존재하던南京路 ( 至元 25 년汴梁路로개칭 ) 의河南府 ( 현재의河南省洛陽市 ) 를가리키는것으로보인다. 66)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 至元 ) 九年掠淮西破其大凹城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63 어오던襄陽 - 樊城포위전이 1273년 2월남송측수비책임자呂文煥이항복하면서몽골군의승리로끝났다. 이지역은남송방어선최대의요충지였기때문에상황은급격히기울었다. 결국쿠빌라이는숙고끝에남송으로의대진공을결의하고 1년여간의준비끝에회동에서사천에이르는국경전역을전선으로삼아至元 11년 (1274) 일제히공세에나섰다. 67) 홍군상역시여기종군하여다수의공적을세우게된다. 다만이공세는몽골이전면공세를개시한 1274년부터남송의수도임안이항복하는至元 13년 (1276) 초까지지속된戰役인데, ꡔ 元史 ꡕ 홍군상열전에는이기간동안홍군상의모든행적이至元 11년기사로통합되어있기때문에액면그대로읽으면사실과어긋나게된다. 따라서여타기록들과대조하여해당기사각각의정확한시기를구분할필요가있다. 至元 11년 (1274) 홍군상은수도로돌아와입조하였다. 그리고이해正月쿠빌라이는바얀 ( 伯顔 ) 을남송공격총지휘자로내정하고 68) 준비에박차를가한끝에당해 9월전면공세를시작하였다. 69) 이에도강에앞서兩淮에주둔한남송의대군을견제하기위해右衛指揮使禿滿歹에게경무장 十年從元帥孛魯罕襲淮東之射陽湖俘其男女牛馬. 통칭兩淮라불리던淮西 - 淮東지역은당시몽골과남송의접경지로남송수도臨安의북쪽방어벽이었다. 얼핏淮河를기준으로동서로나뉜것이라오인하기쉬우나, 실은두지역다회하의남쪽으로, 각각淮南東路및淮南西路의준말이다. 대략현재의江蘇省중부지역및安徽省중부및동부일대이다. 67) 杉山正明저, 임대희, 김장구, 양영우역, ꡔ 몽골세계제국 ꡕ, 신서원, 1999, 257~ 258 쪽. 68) ꡔ 元史 ꡕ 卷 8, 本紀 8, 世祖至元 11 年春正月條. 帝趣召史天澤同議天澤對曰此國大事可命重臣一人如安童伯顏都督諸軍則四海混同可計日而待矣 ( 中略 ) 帝曰伯顏可以任吾此事矣 69) ꡔ 元史 ꡕ 卷 8, 本紀 8, 世祖至元 11 年 9 月條. 九月丙戌行中書省以大軍發襄陽 ; 卷 127, 列傳 14, 伯顔傳. 九月甲戌朔會師於襄陽分軍爲三道並進丙戌伯顏與平章阿術由中道循漢江趨郢州 ( 中略 ) 乃召一壯士負甲仗騎而前導麾諸軍畢濟. 本紀에서는 9 월丙戌일에군대가양양을출발하였다고하는데, 伯顔傳에서는 9 월초하루에양양에군이집결한뒤셋으로나뉘어병진하였으며, 병술일에는渡江을행한것으로되어차이를보이나일단 9 월에전면공세가시작되었다는서술에는차이가없다.
64 지역과역사 40 호 정예병 2만으로淮東의요지인淮安을공격하게하였는데, 이때홍군상도蒙古漢軍都鎭撫직위를가지고여기에종군하였다. 바얀이도강을마친후쿠빌라이의명령으로禿滿歹의부대는蕭縣으로귀환하였다. 70) 여기까지를至元 11년의행적으로볼수있다. 이뒤로이어지는열전의기사는至元 12년 (1275) 의사건이기때문이다. 이어지는기사에따르면, 홍군상이바얀의군중에있을때남송의黄州制置使陳奕이항복하였는데, 그아들이漣水軍의책임자였기에바얀이기병 30기를파견해초유하고홍군상에게이를상주케하였다. 이에쿠빌라이가홍군상에게급히돌아가서陳知府 71) 가항복하면곧바로함께오도록명하였기에돌아가그를데리고입조하였다. 72) 한편같은사건을서술한 ꡔ 元史 ꡕ 本紀의기록에서는陳奕의아들이름을陳巖으로밝히고있으며진혁이글을보내회유하자진암이항복한것으로되어있는데, 그시기를至元 12년정월의일로기록하고있다. 73) 이를종합하면 ꡔ 元史 ꡕ 홍군상열전에서도진혁부자의항복기사부터는至元 12년및그이후의행적을기록한것으로보아야함을알수있다. 진암을데리고입조한뒤로는至元 10년당시상관이었던孛魯罕의휘하에서清河를공격해함락시켰으며, 海州安撫丁順約이항복하자孛魯罕이홍군상에게보고하게했는데이때마침上京에 70)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 至元 ) 十一年入朝帝命伯顔伐宋朝議以宋之兵力多聚兩淮聞我欲渡江彼必移師拒守遂命右衛指揮使禿滿歹率輕銳二萬攻淮安以牽制之君祥以蒙古漢軍都鎭撫從行後伯顔既渡江帝命禿滿歹還軍蕭縣 71) 知漣水軍직위에있던陳奕의아들을가리킨다. 72)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時君祥奉使伯顔軍中宋黄州制置使陳奕降其子知漣水軍伯顔遣三十騎往招之因令君祥入奏帝曰卿可急還陳知府降即偕來也及與倶入朝宴勞甚厚 73) ꡔ 元史 ꡕ 卷 8, 本紀 8, 世祖至元 12 年春正月條. 甲戌大軍次黃州宋沿江制置副使知黃州陳奕以城降伯顏承制授奕沿江大都督其子巖知漣州 (= 漣水軍 ) 奕遣人以書諭之書至巖即出降. 한편 ꡔ 蒙兀兒史記 ꡕ 陳奕傳에서는바얀이보낸기병이진혁의편지를가지고가서진암을설득한것으로되어있다. 이는바얀이사람을보내초유했다는洪君祥傳기록과진혁의편지로항복했다는本紀기록을모두만족시키는서술로, 이해석이실상에가깝다고보인다.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65 와있던바얀을만나다시남벌에종군하게되었다. 74) 이후바얀이淮安을함락시키고병사를나누어淮西를공격하자南宋淮西制置使夏貴가牛都統을보내공격하지말것을설득하였고, 바얀은홍군상에게우도통을데려가쿠빌라이를알현케하였다. 그리고홍군상은돌아오면서쿠빌라이에게서바얀을효유하는旨를받아이를전달하였다. 75) 이후서술된기사의전후를살피면여기까지가至元 12년홍군상의행적인것으로보인다. 열전의이어지는기사에서는바얀이홍군상에게송의洪都統을招致하게하자이를성공시켰으며, 홍군상이홍도통을후하게대우했다고기록되어있다. 76) 한편 ꡔ 元史 ꡕ 내의다른기사에서는같은시기남송의都統洪模에대한기록이나타난다. 그는임안이항복하던해인至元 13년정월까지남송의사신으로서신을전달하거나 ( 丁丑日 ) 남송에서파견되어진군해오는몽골군을맞아들이는역할을수행 ( 辛巳日 ) 하고있었다. 77) 그런데같은달의어느시점부터洪模는몽골측으로돌아선듯한행보를보이고있다. A. 군사가나아가臨平山에도달하여臨安과의거리가 50리였는데, 洪都統이와서보고하여이르기를 송의丞相陳宜中, 殿帥張世傑이모두이미도망가고오로지三宮만이아직가지않았으니마땅히계책을속히정하여백성을살려야합니다. 하였다. 바얀이마침내홍도통에게명령하여송의三宮을보호 74)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從元帥孛魯罕攻清河抜之海州安撫丁順約降孛魯罕令君祥以聞, 時伯顔方朝上京見君祥, 甚喜遂從南伐 75)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伯顔克淮安至揚州分兵攻淮西宋制置夏貴遣牛都統以書抵伯顔曰諺云, 殺人一萬自損三千願勿廢國力攻奪邊城若行在歸附邊城焉往伯顔遣君祥以牛都統入見留三日還軍中仍傳旨諭伯顔曰事難遙度宜臨機審圖之 76)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伯顔師次鎭江諜報有宋洪都統者爲都督府將伯顔謂君祥曰汝同姓可往招致也洪都統即欣然來見君祥因厚遇之 77) ꡔ 元史 ꡕ 卷 9, 本紀 9, 世祖至元 13 年春正月條. 丁丑宋遣都統洪模齎陳宜中吳堅等書請俟宗長福王至同詣軍前 ( 中略 ) 辛巳命雲南行省給建都屯軍弓矢軍次崇德縣宋遣侍郎劉庭瑞都統洪模來迓 ; 卷 127, 列傳 14, 伯顔傳. ( 至元十二年 ) 宋人遣都統洪模移書徐王榮等 ( 中略 ) ( 至元十三年正月 ) 辛巳眾軍至崇德宜中又令都統洪模持書同囊加歹來見
66 지역과역사 40 호 하게하고홍군상에게이들을隨行하도록하였다. 78) B. 을유일, 군사가임안북쪽 15리에이르니囊加帶, 洪模가총관殷俊을통해와서보고하기를, 송의陳宜中, 張世傑, 蘇劉義, 劉師勇등이益王, 廣王두왕을끼고嘉會門을빠져나가浙江으로건너가도주하였고, 오로지태황태후와嗣君 ( 宋恭帝 ) 만이궁에있습니다. 하였다. 79) C. 을유일, 진군하여임안북쪽 15리에이르러董文炳, 呂文煥, 範文虎를나누어파견해城堡를순시하고군민을안심토록위로하였다. 囊加帶, 洪模가와서보고하기를 ( 陳 ) 宜中과張世傑, 蘇劉義, 劉師勇등이益王, 廣王두왕을끼고浙江으로내려가배를타고바다로나아가남쪽으로향했으며, 오로지謝太后와幼主 ( 宋恭帝 ) 만이궁중에있습니다. 하였다. 80) 모두 ꡔ 元史 ꡕ 내의기록으로, 각각사료 A는홍군상열전, B는세조본기至元 13년정월, C는바얀열전至元 13년정월의기록이다. 보고주체가사료 A에서는洪都統, 사료 B와 C에서는洪模인데, 세부는다르지만보고내용의요지는결국 남송의항전파인사들은 ( 益王, 廣王을데리고 ) 전부탈출하였고, 臨安의궁중에는현재태황태후謝氏와어린宋恭帝만이남아있다 라는내용으로, 셋은사실상같은보고이다. 또한사료 B, C에서는바로얼마전까지송의사신역을하던洪模가乙酉日에는몽골측인사인囊加帶와함께바얀에게임안의상황을보고하고있다. 이해정월초하루는丁卯日이었으므로앞에서洪模가서신을전달하러왔던丁丑日은이달 11일, 78)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師進次臨平山距臨安五十里洪都統來報曰宋丞相陳宜中殿帥張世傑皆已逃去惟三宮未行宜早定計以活生民伯顔遂令洪都統護宋三宮令君祥随之 79) ꡔ 元史 ꡕ 卷 9, 本紀 9, 世祖至元 13 年春正月條. 乙酉師次臨安北十五里囊加帶洪模以總管殷俊來報宋陳宜中張世傑蘇劉義劉師勇等挾益廣二王出嘉會門渡浙江遁去惟太皇太後嗣君在宮 80) ꡔ 元史 ꡕ 卷 127, 列傳 14, 伯顔傳. ( 至元 ) 十三年正月 ( 中略 ) 乙酉進軍至臨安北十五里分遣董文炳呂文煥範文虎巡視城堡安諭軍民囊加歹洪模來報宜中與張世傑蘇劉義劉師勇等挾益王廣王下浙江航海而南惟謝太后及幼主在宮中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67 몽골군을맞아들이는역할을했던辛巳日은 15일이며, 囊加帶와함께바얀에게보고했던乙酉日은 19일이다. 즉나흘사이에그가어떤이유에선가몽골측으로입장을바꾸었다는이야기가된다. 이를종합해보면洪都統은곧洪模이며이달辛巳日이후어느시점에선가홍군상의설득을통해몽골측으로돌아섰고, 그결과乙酉日에는囊加帶와함께바얀에게임안의상황을보고한것으로추론할수있을것이다. 81) 즉, 사료 A의기사역시홍군상열전에서는至元 11년기사로묶여있지만실제로는至元 13년의일을기록한것으로보아야한다. 열전에는해당보고이후홍군상이남송의三宮을수행했다고기록되어있으며, 임안항복이전의다른행적은 ꡔ 元史 ꡕ 本紀에좀더기록되어있다. 이에따르면乙酉日에洪模의보고를들은바얀은바로다음날인丙戌日 (20일 ) 에곧바로 ( 몽골 ) 군사들의임안성입성을금하고임안안팎의군민을안정시키는한편, 홍군상을포함한인사들을임안궁정에입궁시켜태황태후사씨를위로하여안심시키도록했다. 82) 또그이틀뒤항복교섭이진행되는와중에는降表에서稱臣하지않고宋의국호를썼다는이유로고쳐쓰게하는일에파견되기도했다. 83) 이해 2월남송수도임안은항복하였고恭帝를위시한황족들은쿠빌라이에게로불려갔다. 일련의원정이종료된뒤, 홍군상은종5품武略將軍中衛親軍千戶로승진하여장군의반열에오르면서황제를가까이서숙위하는부대인侍衛親軍에속하게되었다. 84) 이상의내용을바탕으로 ꡔ 元史 ꡕ 홍군상열전至元 11년조에일괄적으로기록된사건들을실제발생시기에따라연도를나누어배열하면다음과같다. 81) ꡔ 新元史 ꡕ 의홍군상열전에서는 ꡔ 元史 ꡕ 에서洪都統이있을자리에洪模를쓰고있으나, 관련된고찰이없다. 82) ꡔ 元史 ꡕ 卷 9, 本紀 9, 世祖至元 13 年春正月條. 丙戌伯顔下令禁軍士入城違者以軍法從事遣呂文煥齎黃榜安諭臨安中外軍民俾按堵如故 ( 中略 ) 伯顔又遣宣撫程鵬飛計議孫鼎亨囊加帶洪君祥入宮安諭太皇謝氏 83) ꡔ 元史 ꡕ 卷 9, 本紀 9, 世祖至元 13 年春正月條. ( 戊子 ) 且以其降表不稱臣仍書宋號遣程鵬飛洪君祥偕來使賈餘慶複往易之 84)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宋降陞武略將軍中衛親軍千戶
68 지역과역사 40 호 < 표 1> ꡔ 元史 ꡕ 洪君祥列傳至元 11 年條記事재분류 연도至元 11 (1274) 至元 12 (1275) 至元 13 (1276) 사건蒙古漢軍都鎭撫로淮安을공격하는禿滿歹휘하에서종군남송黄州制置使陳奕의아들陳巖이항복하자데리고입조孛魯罕휘하에서清河를공격해함락시킴海州安撫丁順約이항복하자보고하기위해상경伯顔을만나남송정벌에다시종군남송淮西制置使夏貴의부하牛都統이서한을가져오자데리고입조쿠빌라이의旨를바얀에게전달남송洪都統 ( 洪模 ) 을招致임안궁성으로들어가태황태후등을수행남송항복후武略將軍中衛親軍千戶로임명 至元 15년 (1278) 에는강남지방에서민병을뽑았는데, 시기로보아원의 2차일본원정을위한준비작업중하나가아니었나한다. 이를완수하고돌아온뒤에는정4품明威將軍이되고시위친군내에서도中衛親軍副都指揮使로승진하였다. 85) 이후로도그는순조롭게승진을계속하여至元 17년 (1280) 에는정3품昭勇大將軍이되고다시 2년뒤인至元 19년 (1282) 에는樞密院判官을제수받았으며, 4년뒤至元 23년 (1286) 에는정3품최고위昭武大將軍으로옮기고추밀원내에서도同僉樞密院事로승진하였다. 86) 다음해인至元 24년 (1287) 에는홍군상을포함한요동고려인세력전체가비약하는기회가된사건이발생하였다. 이해 4월동방 3왕가의지도자격이었던나얀 ( 乃顔 ) 이반란을일으켜제국이내전상태에빠지게된것이다. 쿠빌라이는사태의심각성을절감하고친정에나섰으며, 속전속결을노린전략적기습을통해사르투르에서결정적승리를거두어비교적빨 85)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 至元 ) 十五年命簽江南民兵還陞明威將軍中衛親軍副都指揮使 86)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 至元 ) 十七年進昭勇大將軍十九年授樞密院判官二十三年轉昭武大將軍同僉樞密院事. 열전의기록만으로는至元 19 년부터추밀원소속이된것으로보이나후일元成宗대의기사를보면그이전부터이미추밀원에소속되어있던것으로보인다.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69 리난을잠재우는데성공한다. 87) 한편내란진압및카단세력등의잔당소탕과정에서홍씨와왕씨로대표되는요동고려인세력은적지않은군공을세웠으며, 이를통하여세력을크게떨치게되었다. 홍군상역시황제의측근에서활약한공로로나얀본군궤멸뒤종2품輔國上將軍이더해졌으며, 이후 ꡔ 東征錄 ꡕ을저술하기도했다. 88) 그리고제국동방의반란진압에참가했던이시기를기점으로하여이후한동안제국의동방영역인요동및한반도지역에서그의활동이나타난다. 2) 遼陽行省설치시기이후의행적. 요동지역에서힘을떨치며중앙집권화에반발하던동방 3왕가의세력이나얀반란의실패로크게꺾이자쿠빌라이는그해곧바로요동지역에遼陽等處行中書省 ( 遼陽行省 ) 을설치하였다. 89) 그리고내전당시쿠빌라이에게협조했던요동고려인세력의요인들은이행성체계의재상급고위직을역임하게된다. 90) 요양행성이설치된바로그해에당시요동내홍씨가문에서는최선임자라할수있는홍차구가먼저遼陽等處行尚書省右丞을제수받게되었는데, 3년뒤홍차구가병으로이를사임하고이듬해인至元 28 년 (1291) 병사하자 91) 그右丞직은홍군상에게제수되었다. 그러나당시홍군상은요동에서활동하기보다는추밀원에더남고자했던것으로보인다. 그는얼마안가이전자리인同僉樞密院事로복귀했는데, 이과정에서 87) 오기승, 앞의논문, 2016, 26 쪽. 88)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 至元 ) 二十四年乃顔叛從世祖親征毎駐蹕君祥輒以兵車外環爲營衛布置嚴密帝嘉之凱還加輔國上將軍類次車駕起居爲東征錄. 나얀반란당시요동고려인세력의상세한군사적활약상및그로인한세력확장에대해서는오기승, 위의논문, 27~35 쪽참조. 89) ꡔ 元史 ꡕ 卷 91, 志 41 上, 百官 7 行中書省. 遼陽等處行中書省至元二十四年置治遼陽路統有七路一府. 단, 이시점에서는조직의이름을行尙書省으로하고있었다. 90) 오기승, 앞의논문, 2016, 32 쪽. 91)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俊奇傳. ( 至元二十四年 ) 凱還授遼陽等處行尚書省右丞二十七年以疾辭 ( 中略 ) 二十八年以疾卒
70 지역과역사 40 호 文翰職계통인集賢大學士가더해진점이특기할만하다. 92) 이후요양행성의右丞자리에는같은해 10월홍차구의맏아들이자홍군상의조카인洪重喜가임명되어재임하게되었다. 93) 한편 ꡔ 元史 ꡕ 홍군상열전에는이해 (1291) 에고려에사신으로다녀왔고그이후직책이僉書樞密院事로바뀐것으로되어있다. 94) 그러나 ꡔ 高麗史 ꡕ 기록에서는그가사신으로온시점이忠烈王 18년 (1292) 으로, 열전의기록과는달리元至元 29년에있었던일로기록되어있다. 앞서홍군상의남송원정종군기사에서있었던문제점을생각해보면, 이기사역시至元 28년과 29년의사건을전부 28년기사에합쳐둔것이아닌가한다. 따라서홍군상이고려에사신으로온해는 ꡔ 高麗史 ꡕ 기록에따라 1292년이며, 僉書樞密院事로의승진역시이때로판단하는것이타당할것으로보인다. 이해에홍군상이고려에온이유는쿠빌라이의 3차일본원정계획과관련된것이었다. 두차례에걸친원정이실패한이후로도쿠빌라이는다시원정을시행하고자하였고, 이를위해재삼고려의물력을동원하려했던것으로보인다. ꡔ 高麗史 ꡕ 기록에따르면마침원에가있던고려세자 ( 후일의忠宣王 ) 가쿠빌라이를알현했을당시丁右丞이라는인물이중국江南지방전선의결함을 2차일본원정의패인으로거론하고, 다음원정을위해서고려에배를만들게할것을건의한바있다. 95) 이에쿠빌라이가 3차일본원정시행과관련하여조언을구하자홍군상은먼저고려에의견을물어본뒤에행하여야한다고건의하였고, 쿠빌라이도이를받아들여다음달홍군상을직접고려에파견해일본정벌에대한의견을묻도록하였다. 96) 충렬 92)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 至元 ) 二十八年授遼陽行省右丞用樞密院留復居舊職俄加集賢大學士依舊同僉樞密院事 93)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重喜傳. ( 至元二十八年十月 ) 授龍虎衛上將軍遼陽等處行中書省右丞 94)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復奉使高麗還改僉書樞密院事 95) ꡔ 高麗史 ꡕ 卷 30, 世家 30, 忠烈王 18 年 8 月丁未條. 有丁右丞者奏江南戰船大則大矣遇觸則毁此前所以失利也如使高麗造船而再征之日本可取 96) ꡔ 高麗史 ꡕ 卷 30, 世家 30, 忠烈王 18 年 8 月丁未條. 帝問征日本事洪君祥進言曰軍事至大宜先遣使問諸高麗然後行之帝然之 ; 卷 30, 世家 30, 忠烈王 18 年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71 왕이몸소적극적으로참가하겠다는의사를밝히자 97) 원은다음해 (1293) 홍군상의형洪熊三의아들인홍바투르 ( 洪波豆兒 ) 를파견하여전함건조를주관케하는한편으로瞻思丁에게는군량조달을담당케하여 3차일본원정을준비하였다. 98) 그리고다른한편으로는같은해 2월에조서를내려耽羅에서鴨綠江口에이르는지역의연해 11개소에水驛을설치토록하고, 이를감독하는역할을홍군상에게맡도록하였다. 99) 이수참의주요설치목적은중국강남지역의미곡을고려를거쳐요동으로수송하는것인한편으로, 일본원정진행을위해강남의미곡을고려로수송하여비축해두려는목적또한있었던것으로여겨진다. 100) 즉쿠빌라이는 3차일본원정의준비와관련된교섭및실무에서홍군상을활용했던것이다. 그러나이듬해 (1294) 정월쿠빌라이가사망한직후원정계획은중지되었으며, 고려에부담된전함건조또한중단되었다. ꡔ 高麗史 ꡕ에는이를홍군상이원의승상울제이 ( 完澤 ) 에게건의한결과로기록하고있다. 101) 그리고다음해 (1294) 충렬왕은홍군상에게 5월, 8월두차례에걸쳐고려본국의공신호와작위및다수의고위직을수여하였다. 102) ꡔ 高麗史 ꡕ 홍군상열전에서그가일본 9 月壬午條. 元遣洪君祥來命我護送日本人還其國君祥以帝旨問征日本事 97) ꡔ 高麗史 ꡕ 卷 30, 世家 30, 忠烈王 18 年 9 月壬午條. 王對曰臣旣隣不庭之俗庶當躬自致討以効微勞. 그러나이후충렬왕이원에입조했을때일본원정의어려움을설명하려했다거나 1,2 차원정으로해안의재목이고갈되어전함건조가어려운것을이유로기한을늦추려했다는기록 (ꡔ 高麗史 ꡕ 卷 31, 世家 31, 忠烈王 20 年春正月癸酉條 ) 을감안하면실제로본인이적극적으로참여할의사가있었는가는다소의문이다. 98) ꡔ 高麗史 ꡕ 卷 30, 世家 30, 忠烈王 19 年 8 月條. 元遣萬戶洪波豆兒來管造船寶錢庫副使瞻思丁管軍粮將復征日本也 99) ꡔ 元史 ꡕ 卷 17, 本紀 17, 世祖至元 30 年 2 月辛亥條. 詔沿海置水驛自耽羅至鴨淥江口凡十一所令洪君祥董之 100) 정요근, 고려역로망운영에대한원 ( 元 ) 의개입과그의미 ꡔ 역사와현실 ꡕ 64, 2007, 186~190 쪽. 이강한, ꡔ 고려와원제국의교역의역사 ꡕ, 창비, 2013, 99~ 107 쪽. 101) ꡔ 高麗史 ꡕ 卷 31, 世家 31, 忠烈王 20 年春正月癸酉條. 世祖皇帝崩 ( 中略 ) 洪君祥白丞相完澤遂寢東征 102) ꡔ 高麗史 ꡕ 卷 31, 世家 31, 忠烈王 21 年 5 月己丑條. 以洪君祥爲三韓壁上功臣
72 지역과역사 40 호 원정중지를건의하였고이것이수용되었다는기사바로뒤에 왕이홍군상의공적을가상히여겨서 ( 王嘉君祥功 ) 103) 공신호등을수여했다는기록이이어지는것을보면, 바로이건의가고려본국에서공신호등을수여받은가장직접적인원인일것이다. 이후홍군상은원成宗테무르 ( 鐵穆耳 ) 재위기인大德 2년 (1298) 에趙妃誣告事件과관련하여고려에다시사신으로왔던바있다. 104) 그런데이렇게홍군상이고려방면에서활동하기시작하는시기와맞물려서그가중앙에서가지고있던위치는흔들리기시작하는조짐을보인다. 이는주로御史臺의공격이라는형태로나타났는데, 그를총애하던쿠빌라이가사망한것과도연관이있는것으로보인다. 至元 31년 (1294) 정월쿠빌라이가사망하자그해 4월즉위한성종테무르는즉위후조서를내려임관한지오래된이들을삭직하려했는데, 당시홍군상의상사였던知樞密院事暗伯등은홍군상이추밀원에있은지 16년으로가장오래재직한인물이라고상주하였다. 이에성종은홍군상이시종한마음이니옮기지않아도좋다고하였으므로, 105) 일단이당시에는충성심을인정받아면직위기를넘겼던것으로보인다. 그러나 4년뒤大德 2년 (1298) 에는고려에사신으로간사이 다른일 ( 他事 ) 로어사대의탄핵을받아중도에돌아오는사건이발생하였다. 다만탄핵사안자체는얼마후파하여졌고 106) 당해 ꡔ 高麗史 ꡕ 世家에는홍군상이고려에사신으로다녀간기록이있으므로, 107) 사신 三重大匡益城侯 ; 卷 31, 世家 31, 忠烈王 21 年 8 月庚申條. 洪君祥爲都僉議中贊脩文殿大學士監修國史世子師臨安公 103)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二十年帝崩君祥白丞相完澤寢東征二十一年王嘉君祥功 104) ꡔ 高麗史 ꡕ 卷 33, 世家 33, 忠宣王卽位年 6 月戊辰條. 太后遣僉樞密院事洪君祥及帖木兒不花來 105)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成宗即位詔裁減久任官知樞密院暗伯等奏君祥在樞密十六年最爲久者帝曰君祥始終一心可勿遷也 106)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大徳二年詔使高麗臺臣劾君祥以他事中道追回已而事罷 107) 주 104) 참조.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73 임명자체가취소되지는않고사안이파하면서고려행을재개했던것으로보인다. 이렇게어사대의탄핵이곧바로실질적결과를내지는못했지만, 이탄핵자체가홍군상에게는정치적으로상당한부담이되었던것으로보인다. 바로다음해인大德 3년 (1299) 홍군상은江浙에파견되어민간의어려움을묻는일을수행한뒤, 대략 20년간을재직했던樞密院에서나와昌平皇華山으로물러나 5년동안입을닫고時事를논하지않는칩거상태에들어갔기때문이다. 108) 다른동기가기록되어있지않은이상, 이는전년어사대의탄핵을받은일과관련이있다고밖에볼수없을것이다. 이후홍군상이중앙정계로복귀하는것은大德 7년 (1303) 3월원성종에의해中書右丞으로임명되면서의일이다. 109) 그런데어사대는성종의이인사에반발하여다시금홍군상을공격하는모습을보이고있다. 홍군상을중서우승으로삼으니감찰어사가말하기를 ( 홍군상은 ) 이전에宥密한자리에있으면서 ( 樞密院에재직했던것을가리킴 ) 재물을탐내어罷黜되었으니바라옵건대달리어질고능력있는사람을골라그를대신하게하소 108)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 大徳 ) 三年奉使江浙問民間疾苦使還退居昌平之皇華山絶口不論時事者五年. 昌平은大都인근서북쪽의昌平縣을가리킨다. 이지역은 京師之枕 이라는별칭이있을정도로수도와밀접한관계에있는인접지역이으므로, 당시홍군상이물러나시사를논하지않았다고는하지만실상완전한은거는아니었던것으로보인다. 109) 이와관련하여 ꡔ 元史 ꡕ 홍군상열전에서는大德 9 년 (1305) 에大司農으로발탁되었다가中書右丞직에임명된것으로되어있다 ( 大徳九年擢司農俄拝中書右丞 ). 그러나大德 7 년 3 월에임명되었다는本紀기사와더불어, ꡔ 元史 ꡕ 宰相表에서는大德 7 년 4 월부터다음해 1 월까지중서우승직에있었던인물로洪雙淑을거명하고있는데雙淑은홍군상의小字이다. 이로미루어보면홍군상의중서우승임명은大德 7 년이며本紀와宰相表사이의시차 (3~4 월 ) 는임명에서실제착임까지의시간으로보는것이옳을것이다. ꡔ 元書 ꡕ 에서도大德 7 년 3 월대사농홍군상을우승으로삼은것으로되어있는데 (ꡔ 元書 ꡕ 卷 6, ( 大德七年三月乙未 ) 大司農卿洪君祥爲右丞 ) 이렇게볼경우홍군상은大德 3 년江浙파견에서돌아온후칩거하여중서우승으로임명되는大德 7 년 3 월이전에대사농이된것이므로, 칩거기간을햇수로만따지면大德 3~7 년이되어열전의기록대로 5 년이되지만, 실제기간은만으로채 4 년도채우지않았을가능성이높다.
74 지역과역사 40 호 서 하였으나 ( 成宗이 ) 회답하지아니하였다. 110) 이를앞서살펴본 ꡔ 元史 ꡕ 홍군상열전의기사와종합해보면좀더구체적인사건해석이가능해진다. 열전에서는그가어사대의탄핵대상이되었던사유를단순히 他事 라고만기록하여정확히어떤이유로탄핵이진행되었던것인지분명치않으나, 本紀의기사를참조하면당시어사대가재물관련문제를지적했던것임을알수있다. 또한가지주목할부분은監察御使가홍군상이추밀원에서罷黜되었다고언급한점이다. 이는스스로물러났던것처럼서술된열전의설명과는차이가있다. 추측컨대大德 2년의탄핵당시에는홍군상이趙妃誣告事件에서파생되었던민감한정치적문제와관련하여고려와의외교라는중요사안을담당하고있었기에더추궁하지않았지만, 이후어사대측에서지속적으로문제제기혹은추가탄핵가능성을비쳤기에소위 용퇴 형식으로물러났던것이아닌가한다. 그리고이러한일련의사건에대하여어사대에서는홍군상이결과적으로는탄핵이원인이되어사퇴하게된것으로인식하였기에파출이라표현하였고, ꡔ 元史 ꡕ 홍군상열전에서는형식상그가스스로물러났던것을강조하여기록했던것으로보인다. 어사대의문제제기에도불구하고원성종이회답하지않고임명을강행하였기에결국홍군상은제국중심부중서성의재상급직위인中書右丞자리에오르게되었다. 그러나그는다음해정월이자리에서면직당하게되는데, 이면직건에도어사대가개입되어있었다. ꡔ 續資治通鑑 ꡕ에따르면大德 8년 (1304) 정월기사에이러한내용이있다. 이달, 平陽에지진이그치지않아이미복구했던백성들의집이다시무너졌다. ( 중략 ) 御使中丞何瑋가상소하여이르기를지진 ( 의재난 ) 은재상들에게허물이있는것이라하니이에右丞홍군상등을아울러파직하였다. 111) 110) ꡔ 元史 ꡕ 卷 21, 本紀 21, 成宗大德 7 年 3 月乙未條. 以洪君祥爲中書右丞監察御史言其曩居宥密以貪賄罷黜乞別選賢能代之不報 111) ꡔ 續資治通鑑 ꡕ 卷 195, 元紀 13. ( 大德八年春正月 ) 是月平陽地震不止已修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75 여러재상들중굳이中書右丞홍군상이상소로인해파직된이들의대표격으로거론된것은결국이당시에도어사대측에서가장우선으로설정한목표는홍군상이었기때문인것으로추측된다. 이후홍군상은중앙에서떠나大德 10년 (1306) 봄江浙行省右丞이되었다가그해가을遼陽右丞 ( 遼陽行省右丞 ) 으로옮겼다. 이는至元 29년 (1292) 여름부터 15년이라는장기간동안요양우승으로재임하고있던조카홍중희를대신한것이었다. 112) 기록에따르면홍군상은이직책에상당히적극적으로임하려했던것으로보인다. ( 홍군상은 ) 마땅히행성의다스림을새롭게하여순찰하는병사를늘리고, 儒學提擧官과都鎭撫등의인원을갖추어이로써문화를흥하게하고武備를손질해야할것이라고조정에청하였다. 113) 다만우승으로서는그결실을제대로맺지못했는데, ꡔ 元史 ꡕ 홍군상열전에따르면아직일을다이루지못한상태에서 ( 事未成 ) 武宗카이산이즉위하게되면서인사이동이있었기때문이다. 카이산은홍군상을우대하여정2품同知枢密院事로임명했다가곧승진시켜종1품榮祿大夫平章政事 民屋復壤 ( 中略 ) 御史中丞何瑋疏言地震咎在大臣於是右丞洪君祥等俱罷 112)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 大徳 ) 十年春改江浙行省右丞秋改遼陽右丞 ;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重喜傳, ( 至元二十九年 ) 六月改資徳大夫遼陽等處行中書省右丞大徳十年以其叔父君祥代之. 한편 ꡔ 新元史 ꡕ 홍군상열전에서는중서우승임명은大德 7 년 (1303) 으로올바로명기하고있지만, 이어지는기술에서다른설명없이어사대의탄핵으로강절행성우승이되었다가요양우승으로옮겼다고만하여요양우승임명을중서우승임명과같은해인대덕 7 년으로오인할여지가있는기술이있다 ( 七年擢司农卿拜中书右丞又为御史所劾改浙江行省右丞迁辽阳右丞 ). 그러나홍군상의요양우승임명은홍중희를교체하면서이루어진것이었고문제의 ꡔ 新元史 ꡕ 홍중희열전에서도홍중희가교체된것은大德 10 년 (1306) 으로기록되어있으므로, 홍군상의요양우승임명은 ꡔ 元史 ꡕ 기록대로대덕 10 년으로보는것이옳을것이다. 113)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請於朝宜新省治增巡兵設儒學提擧官都鎭撫等員以興文化修武備
76 지역과역사 40 호 商議遼陽等處行中書省事을부여한뒤고쳐서遼陽行省平章政事로임명하였다. 114) 이인사의정확한시기는기재되어있지않으나 ꡔ 元史 ꡕ의다른부분을참고하면대략의시기를추측할수있다. 大德 11년 (1307) 5월에즉위한무종은즉위한그달바로中書平章合散을遼陽行省平章政事로임명하였다. 115) 한편홍군상의조카홍중희는같은해 7월요양우승으로복귀하였다. 116) 홍군상이일단동지추밀원사에먼저임명되었다가그뒤에요양행성평장정사에임명되어어느정도시차가있었을것임을감안하면, 당해 5월에合散이먼저요양행성평장정사로임명되고, 홍군상은무종즉위당시일단추밀원에복귀했다가홍중희가 7월에요양우승으로임명될당시함께평장정사에임명된것으로보인다. 다만먼저임명된合散이홍군상의사망이후시점인至大 3년 (1310) 2 월까지해당직책에있었다는기록과 117) 행성의평장정사는정원이 2명이라는점을고려하면, 홍군상과合散은서로를교대한것이아니라 1307년 7월이후일정기간동안동시에평장정사로있었다고보아야할것이다. 그렇다면결국홍군상이행성우승으로있던요동을떠나추밀원에적을둔기간은길어야 2개월정도가되므로사실상거의공백없이평장정사로서요동에복귀하였다고할수있다. 그러므로평장정사재임시의그는기존의자기정책을단절없이그대로계승할수있었을것으로보이며, 우승보다강력한평장정사의권한으로우승재임당시다마치지못했던문무양면의요양행성통치개선을마저수행하려했을것으로추측된다. 원대行中書省의제도에서편제상의최상급자는일단丞相이지만, 이행 114)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事未成會武宗卽位徴爲同知樞密院事進榮祿大平章政事商議遼陽等處行中書省事改遼陽行省平章政事 115) ꡔ 元史 ꡕ 卷 22, 本紀 22, 武宗大德 11 年 5 月條. 甲申皇帝即位於上都 ( 中略 ) ( 是月 ) 以中書平章政事合散爲遼陽行省平章政事 116)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重喜傳. ( 大德 ) 十一年武宗卽位重喜朝于上都七月復授遼陽行省右丞 117) ꡔ 元史 ꡕ 卷 23, 本紀 23, 武宗至大 3 年 2 月癸酉條. 以左丞相行中書省平章政事合散商議遼陽行省事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77 성승상은늘두는것이아니어서결원인경우가다수였다. 118) 이경우편제상승상바로다음서열인두平章政事가행성의장관이되고, 그중한명이首席平章을맡게된다. 119) 그리고이당시요양행성에도행성승상이없었던것으로보이므로평장정사시기의홍군상은사실상요양행성의최고위직에자리했었다고할수있다. 행성의평장정사는그바로아래직급인右丞과비교하면兵馬지휘권이있다는점에서근본적인차이가있다. 그리고이때문에인구의다수를점하는피지배민에게는軍政을맡기지않는다는규정에따라漢人은원칙상평장정사이상의관직에오를수없었다. 120) 원제국내에서고려인또한기본적으로한인으로분류된다는점을감안하면, 소위大根脚과의혼인관계같은것도없이평장정사에까지올랐던홍군상은상당히특이한사례라할수있을것이다. 121) 그가획득했던지위는역대요동고려인유력자중에서도최상위에위치하는것으로, 다수의군공등을통해한창상승해있던당시요동고려인의성세를나타내는지표중하나라고도볼수있다. 122) 홍군상은얼마뒤商議行省事로옮겼는데, 일반적인경우商議직책이해당관서의실제서무를담당하지는않고그녹만을받으며의논에응하는정도의역할 123) 이었던것을감안하면, 晩年의홍군상은요양행성에서자문정도의역할로지내면서행성통치에조력했던것같다. 그는忠宣王이고려왕위에복위했던至大 2년 (1309) 에사망하였으며, 아들洪邁는奉訓大 118) ꡔ 元史 ꡕ 卷 91, 志 41 上百官 7 行中書省. 丞相或置或不置尤愼於擇人故往往缺焉 119) 李治安, ꡔ 元代行省制度 ꡕ, 中华书局, 2011, 28 쪽. 120) 崔允精, 원대요양행성宰相考 ꡔ 대구사학 ꡕ 116, 2014, 5 쪽. 121) 오기승, 앞의논문, 2016, 34 쪽. 122) 고려말에이르면奇轍등기씨일족이平章政事에오르는예가나오기는하나, 이는당시원제국전체에서최고위직에속하는奇皇后라는존재와의혈연관계가있기때문에가능했던것이므로, 주로스스로쌓아올린실적을통해지위를상승시켰던이시기의요동고려인들과는차이가있다고보아야할것이다. 123) 李治安, 앞의책, 2011, 30 쪽.
78 지역과역사 40 호 夫同知開元總管府事에올랐다. 124) 앞에서추정한대로 1248~1250년생이라하면홍군상은대략 60~62세정도에사망했던것으로추측된다. 그아버지홍복원이 53세, 형홍차구가 48세에사망하였고, 한참연하였을조카홍중희가바로다음해인至大 3년 (1310) 에사망하였던것 125) 을감안해보면, 일족의주요인물들중에서는가장장수했던셈이다. 2. 가문내에서의특징적행보와그배경 전술한대로, ꡔ 高麗史 ꡕ 기록등을통해이전부터일반적으로알려진바와같이홍군상의행적이나입장은가문의여타주요인물들과비교하면상당한이채를띠고있다. 그중가장대표적으로언급되는것은고려본국과의관계이다. ꡔ 元史 ꡕ 列傳에그행적이수록된요동고려인홍씨가문세력의주요인물은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중희 4인이다. 이들을주축으로한홍씨가문은기본적으로고려본국과적대적인관계에있었다. 먼저처음으로요동에서세력을구축했던홍복원은 ꡔ 高麗史 ꡕ에서逆臣列傳에그행적이수록되어逆臣으로취급되고있다. 그가완전히요동으로건너간뒤고려를모함하고몽골군에종군하여왕래하자집권자崔怡가회유를위해당시고려에있던홍복원의아버지홍대순과동생洪百壽에게벼슬을내리고홍복원의딸을張暐와결혼시켰으며, 그에게뇌물을계속보낸결과홍복원도점차고려에대한모함을덜하게되었다는기록 126) 이 ꡔ 高麗史 ꡕ에있는것으로보아다소관계개선이있었을정황은있다. 그러나홍복원은이후로도몽골군의향도가되어지속적으로고려침입에협조하였기에결국고려본국과는끝까지적대관계였다고볼수밖에없다. 127) 그의지위를襲 124)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至大二年卒子邁奉訓大夫同知開元總管府事 125)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重喜傳. 至大二年謫漳州行至杭遇赦而明年卒 126) ꡔ 高麗史 ꡕ 卷 130, 列傳 43, 洪福源傳. 讒構本國隨兵往來怡患之欲悅其心官大純爲大將軍百壽時爲僧髮之爲郞將以張暐爲福源女壻賄賂不絶福源感之讒構稍弛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79 爵한둘째아들홍차구는고려본국에훨씬적대적이었으며, 128) 손자인홍중희역시立省策動을획책하는등고려본국과알력을겪었기에역시우호적인관계라고는할수없었다. 그러나유독홍군상만은 ꡔ 高麗史 ꡕ에서도고려본국에매우우호적인인물로인식하여기록하고있다. 실제로그는 3차일본원정계획과관련하여쿠빌라이가조언을구하자고려에먼저의사를물어보고계획을진행해야한다고주장하거나, 쿠빌라이사후일본원정계획중지를건의하는등고려에우호적으로해석될수있는행적을보인바가있다. 또한忠烈王이나세자시절의忠宣王이大都에방문했을때홍군상의저택을숙소로삼았던것으로보아 129) 상호간의개인적관계역시상당히양호했던것으로보인다. 즉위후홍군상을요양행성의평장정사로중용했던원武宗이본래충선왕과매우친밀한관계의인물이었다는점또한충선왕과홍군상사이에일정이상의우호적인관계가있었음을방증한다할수있다. 이러한차이의원인은단순한요인만으로는설명하기어렵다. 이와관련하여일단 ꡔ 高麗史 ꡕ의기록에서보이는인식은대략다음과같다. 홍차구는늘本國 ( 고려 ) 에원망을품었지만, 홍군상은이르기를 차라리영녕공을원망할지언정감히나라를등질수는없다 라고하면서본국 ( 고려 ) 을위해이로운일은일으키고해로운일은없애는데힘쓰지않음이없었다. 130) 127) ꡔ 高麗史 ꡕ 卷 130, 列傳 43, 洪福源傳. 然自是元兵歲至攻陷州郡皆福源導之也 128) 홍차구외의다른아들들또한홍복원의죽음에원한을품고고려를모함했다는기록이있어이들도대개고려본국과는적대했던것으로보인다 (ꡔ 高麗史 ꡕ 卷 130, 列傳 43, 洪福源傳. 福源諸子憾父之死謀陷本國無所不至 ). 129) ꡔ 高麗史 ꡕ 卷 30, 世家 30, 忠烈王 16 年 11 月丁卯條. 遣世子如元 ( 中略 ) 至京館于同僉樞密院事洪君祥第 ; 卷 30, 世家 30, 忠烈王 19 年 12 月辛丑條. 王至燕京舍於簽書中樞院事洪君祥第 ; 卷 31, 世家 31, 忠烈王 22 年 11 月壬午條. 王至燕京館于洪君祥第 130) ꡔ 高麗史 ꡕ 卷 130, 列傳 43, 洪福源傳. 茶丘常怨本國君祥以爲寧怨永寧公不敢負國爲本國興利除害無不力焉. 여기서永寧公王綧이언급되는것은홍복원이영녕공과분쟁을빚다가형벌을받아사망하게되었기때문이다.
80 지역과역사 40 호 이기록에서홍군상의발언으로되어있는 나라 ( 國 ) 를등질수는없다 만을떼어놓고보면고려본국을위해 힘쓰지않음이없었던 그행동의근저에얼핏고려본국에대한일종의忠개념이존재했던것처럼오인될여지도있다. 그러나앞서살핀바와같이홍복원이완전히한반도를떠나요동에정착한것은 1234년이었으며, 홍차구는 1244년, 홍군상은 1248~ 1250년사이에각각출생하였다. 즉홍차구나홍군상은비유하자면일종의이민 2세대로서, 고려계이긴하나태어난시점부터온전히몽골에소속되었던인물들인셈이다. 그러므로홍군상이실제로고려본국을忠의대상이되는본인의나라 ( 國 ) 로인식했을가능성은낮다. 당시그가고려본국에대하여실제로가졌을것으로추측되는인식에관해서는그조카홍바투르 ( 洪波豆兒 ) 의발언에서그실마리를찾아볼수있다. 충렬왕 19년 (1293) 함선건조감독을위해고려로파견되었던홍바투르의발언은아래와같다. 비록금의환향이라고하나직분이백성을고달프게하는것이니참으로부끄럽구나. 131) 여기서홍바투르는자신이고려로파견된것을 錦衣還鄕 이라고표현하여이를本鄕으로돌아온것으로인식하고있음을알수있다. ꡔ 元史 ꡕ 내에서등장하는여러기록들을살펴보면, 이당시몽골제국은자신들의판도내에존재하는여러갈래의족속들중高麗人또한분명히따로분류하여기록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그러므로당시요동고려인을포함한제국영역내의고려인들은고려본국에속한이들이아니라여러족속으로구성된국가인몽골제국에속한고려계구성원들이며, 고려본국은이들의本鄕인것으로제국내에서규정되고제국의고려인들스스로도그렇게인식하였을것으로보인다. 즉, 당시요동고려인 2세대및그아래세대의인물들은처음부터몽골에서나고자랐기에그들에게있어忠의대상은어디까지나몽골제국이었지만, 넓게보았을때그제국의판도에소속되어있는고 131) ꡔ 高麗史 ꡕ 卷 130, 列傳 43, 洪福源傳. 雖云衣錦還鄕職是勞民可愧也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81 려본국을자신들의本鄕으로인식하고는있었던상태라할수있을것이다. 홍군상역시이러한인식을공유하고있었다고한다면, 그가고위직에오른뒤고려본국에우호적인행동을취했던것은고려라는나라에대한忠의발로라기보다는제국의고려계관료로서本鄕지역에가진친근감이선의나배려라는형태로나타난것이었을가능성을짐작해볼수있다. 그러나똑같이고려본국을本鄕으로두고홍군상과도거의같은시기에활동하던 2, 3세대在元고려인세력가들이고려본국과적대하는경우도있었으므로, 이것만을그가취했던입장의단일한요인이라고보기에는다소무리가있다. 이와병기할만한다른요인으로짚어볼만한것으로는제국내에서그가맡아왔던역할의특성, 그리고좀더근본적인것으로그의경력을통해정립된입장의특성이라는두가지를들어볼수있다. 먼저홍군상의행적에서일족의여타중요인물들과는달리교섭이나중재의역할을맡는모습이종종나타난다는점을주목할필요가있다. 요동고려인홍씨가문은기본적으로군사적역할이강조되는세력이다. 홍복원은본래고려에서변경방위를맡던세력가였고, 몽골측으로건너간뒤에도고려본국침입이라는군사작전에종종동원되었다. 그의지위를차례로세습했던홍차구와홍중희역시기본적으로武散階를따라승진하고있으며, 132) 공로로기록된행적의대부분은전투나그준비와같은직접적군사행위로점철되어있다. 그런데홍군상의경우는이들과다소차이가있다. 물론그역시최종적으로종1품榮祿大夫의품계를부여받기전까지는무산계만을수여받았고侍衛親軍이나樞密院에서군직에오래있었기에기본적으로는무신에가까운인물이었다. 또한앞장에서살핀것처럼하남방어나兩淮공략, 남송원정과정및후일나얀반란에서의활약등나름의군사적공로도가지고있다. 그러나군사적공로만이활약상의대다수를차지 132) 단, 홍중희는至元 29 년 (1292) 遼陽等處行中書省右丞으로임명될당시정 2 품상위인資徳大夫의품계를받았으므로최종적으로는文散階로편입되었다. 다만그이전까지는전부武散階를수여받고있었다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重喜傳 ).
82 지역과역사 40 호 하고있지않았다는점에서홍군상은여타 3인과구별되고있다. 그는남송원정과정에서항복한陳巖을데리고함께입조하거나, 남송都統洪模를招致했던바가있다. 또한남송臨安궁성과의항복교섭와중에서는사절로오가거나남송의태황태후謝氏등의요인을수행하고안심시키는역할을맡기도하였다. 즉그는적성국인사를회유하거나항복한인사들을유화적으로대하여안정시키는사후조치를담당했던셈이다. 천성적인친화력이있었던것인지, 소년시절쿠빌라이의명으로儒者의교육을받아 133) 후일集賢大學士에임명될만큼축적된유교적교양이교섭력의바탕이되었던것인지, 혹은그둘다인지는확언할수없다. 어쨌거나그가압박이나강경책보다는이렇게회유나위무와같은온건책수행에좀더적합한능력과적성을가지고있었기에해당역할을담당했던것이아닐까한다. 그리고홍군상은고려와의외교에동원되었을때도유화적접근의역할을맡았던것으로보인다. 일단至元 29년 (1292) 처음고려에사신으로왔을때는쿠빌라이의 3차일본원정계획과관련하여일본에대한유화책으로고려가호송했던일본인들의송환을지시하는한편, 고려가원정에서담당해야할역할에대해서는일방적인준비를명령하기이전에고려의의견을먼저묻는역할을수행하였다. 134) 이후大德 2년 (1298) 고려에사절로파견되었을당시의행적에서는유화적측면을담당하던그의역할이더명백히나타나고있다. 이해忠宣王妃薊國大長公主의주도로진행되었던趙妃誣告事件의여파는결국元측에서그해갓즉위했던忠宣王을퇴위시키고忠烈王을복위시키게되는데까지이르렀다. 135) 이와관련된 ꡔ 元史 ꡕ 本 133) ꡔ 元史 ꡕ 卷 154, 列傳 41, 洪福源附洪君祥傳. 年十四隨兄茶丘見世祖于上京帝 ( 中略 ) 令選師儒誨之 134) ꡔ 高麗史 ꡕ 卷 30, 世家 30, 忠烈王 18 年忠 9 月壬午條. 元遣洪君祥來命我護送日本人還其國君祥以帝旨問征日本事 135) 다만이사건을주도했던계국대장공주의의도는충선왕의세력을약화시키고혼인동맹에서본인의위상을제고하고자했던것에그쳤기때문에사건이충선왕퇴위로까지확대된것은의도치않은사태였다. 김현라, 원간섭기忠宣王妃薊國大長公主의위상정립과의미 ꡔ 지역과역사 ꡕ 39, 2016, 258 쪽.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83 紀의기록은다음과같다. 고려왕王謜 ( 忠宣王 ) 이명령을제멋대로하고함부로사람을죽이니 136), 조서를내려중서우승楊炎竜과첨추밀원사洪君祥을파견하여그를불러입시케하고, 그아버지昛 ( 忠烈王 ) 로국정을통괄하게하였다. 137) 상기한대로충선왕을퇴위시키는사절단일행의주담당자로지목된인물은楊炎竜과홍군상이다. 그런데사절단의대표격인이두인물은각각고려도착이후사뭇다른행보를보이고있다. 충선왕즉위년 (1298) 6월 2일양염룡은右丞阿里灰및洪重喜와함께백명이넘는수행원을데리고먼저들어와조비의아버지趙仁規를국문하고충선왕이고쳤던官制를되돌렸으며, 그 1주일뒤에는왕궁창고인生成庫를봉인하였다. 138) 반면양염룡도착 10여일뒤인동월 13일원태후의파견을받아도착한홍군상은 139) 그달하순양염룡이돌아간뒤 140) 7월초순두차례에걸쳐충선왕을위해잔치를열어주었다. 141) 이와관련하여 ꡔ 高麗史 ꡕ 및 ꡔ 高麗史節要 ꡕ 에서는홍군상이충선왕과그왕비薊國大長公主를화해시키기위해온것이라기록하고있다. 142) 조비무고사건에서시작된일련의사태가발생한 1 136) 정황상충선왕이고려본국의제도를개혁했던일과千戶金呂를죽이고그의金符를宦者朮合兒에게준사건등을가리키는것으로보인다 (ꡔ 元史 ꡕ 卷 208, 列傳 95, 外夷 1 高麗傳大徳 3 年 1 月條 ). 137) ꡔ 元史 ꡕ 卷 19, 本紀 19, 成宗大德 2 年 7 月壬寅條. 高麗王王謜擅命妄殺詔遣中書右丞楊炎竜僉枢密院事洪君祥召其入侍以其父昛仍統國政. ꡔ 高麗史 ꡕ 에서양염룡과홍군상이모두 6 월에고려에도착했다고기록된것으로미루어보아본기사는귀환한후의시점에서기록한것으로보인다. 138) ꡔ 高麗史 ꡕ 卷 33, 世家 33, 忠宣王卽位年 6 月條. 丁巳元遣右丞阿里灰洪重喜中書左丞楊炎龍來凡乘傳者百餘鞫趙仁規遂與元卿往監察司收新定官制 ( 中略 ) 甲子楊炎龍封生成庫乃王府珍寶所臧也 139) 주 104) 참조. 140) ꡔ 高麗史 ꡕ 卷 33, 世家 33, 忠宣王卽位年 6 月丁丑條. 楊炎龍還王餞于宣義門外 141) ꡔ 高麗史 ꡕ 卷 33, 世家 33, 忠宣王卽位年 7 月條. 辛卯洪君祥享王于內壬辰王朝德慈宮翌日偕公主又朝洪君祥設宴
84 지역과역사 40 호 차적원인은충선왕과계국대장공주의불화에있었으므로이를중재하면봉합할수있다는발상이었던것으로보인다. 즉같은사건에대응하는방법으로서양염룡일행이대상자국문, 제도변경, 창고봉인등강권적으로압박하는방식을담당했다면, 홍군상은잔치를열어위로하고중재와화해를도모하는유화적방식을담당하였던것이다. 이와같이원의정책을강온양면으로나눈다면홍군상은후자의입장을주로맡아수행했으며, 같은맥락에서고려와의접촉에서도홍군상이상대적으로온건한입장과태도를시종견지했기때문에고려측에서도그를자국에비교적우호적인인물로인식할수있었을것이라본다. 또한가지짚어볼것은홍군상이지내온경력과여기서비롯되는입장의특성이다. 일족의주요인물들중그를제외한홍복원, 홍차구, 홍중희 3인은모두요동을근거로하는지방세력가로서의성격이강하다. 이들은遼 - 瀋주변지역을중심지로하며高麗軍民總管 ( 長官 ) 직을대대로세습하였고, 이와겸하여高麗軍民萬戶府및이를재편한高麗女直漢軍萬戶府에서수장격위치를유지하며요동고려인들을주축으로한세력을규합하였다. 143) 또한그활동의범위역시근거지중심으로전개되어요동 -한반도와그인접지역을거의벗어나지않는다. 이들은그세력의특성상고려본국과서로견제하고갈등할소지가높았다. 양세력모두권력기반이되는세력의중추를동일하게고려인이라는집단에두고있었으며, 지역적으로는서로인접한권역에병립하고있었기때문이다. 이러한구도에서는한쪽의입지강화및세력확대가자연스럽게다른한쪽의약화와축소로이어지기쉬운만큼, 상호간에영역다툼이나인호에대한쟁탈이일어나기쉽게되는것은당연한흐름이라하겠다. 실제로여몽전쟁기간동안홍복원의 142) ꡔ 高麗史 ꡕ 卷 89, 列傳 2 后妃 2 薊國大長公主. 又遣洪君祥享王欲使王與公主合懽. ꡔ 高麗史節要 ꡕ 卷 22, 忠烈王 24 年 7 月條, 洪君祥享王君祥之來欲使王與公主好合也 143) 이지역에서는왕준의후손들또한유사한지위를세습하며세력을가지고있었는데, 대략 13 세기말이되면홍씨세력이요양을, 왕씨세력이심양을중심으로분립했던것으로보인다 ( 오기승, 앞의논문, 2016, 23 쪽 ).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85 節制하에많은고려인들이본국에서유출되어요동에정착했고, 고려본국은후일忠烈王초년에이렇게이지역으로도주한자, 유인되어간자, 포로로잡혀간자들을돌려보내달라고언급하며쇄환을시도했던바있다. 144) 당시요동으로유입되었던고려인들의관할권을두고양자가대립했던것이다. 또한고려와가장격심하게대립했던홍차구는한반도내부에원의둔전을설치하는과정에서둔전을거점으로구축하고인력을확보하여북으로보내는등, 고려본국의영역인서해도나한반도남부에까지자기세력의영향력확대를도모했던것으로추측되기도한다. 145) 당시충렬왕이쿠빌라이를만나요청했던내용에따르면홍차구로인해나라를다스리는일이어렵다고호소하면서그가군사에관한일만관리하면될것을모든나랏일에간섭하여멋대로하려한다고지적하고, 정고려본국에군대를주둔시키려면차라리몽골군이나한족군대를파견하고홍차구의군대는고려에서내보내달라고요청하고있는상황이었다. 146) 이는그만큼이시기에요동 -한반도지역에서세력권을둘러싼고려본국과요동고려인홍씨가문사이의알력이강했음을나타내는방증이라할수있다. 홍차구의후계자인홍중희역시복위한忠宣王이瀋陽王으로임명되어요동에세력을가지게되자이를자기세력에대한위협으로느끼고, 그를견제하기위해立省策動을일으키며충선왕을공격했던바있다. 서로가동일하게고려인을주기반으로하는인접세력이었던만큼, 요동고려인홍씨세력은자신들의영역확보와보존을위해서라도고려본국과우호적이기어려운관계였으며, 그수장이었던홍복원, 홍차구, 홍중희도기본적으로이에근거한입장을견지했던것이다. 그런데홍군상은이점에서도앞의 3명과는차이가있었다. 일단그는홍복원의아들이며앞에서살핀바와같이至元 3년 (1266) 고려인 300명을 144) 이강한, 앞의논문, 2007, 17 쪽. 145) 이강한, 위의논문, 18 쪽. 146) ꡔ 高麗史 ꡕ 卷 28, 世家 28, 忠烈王 4 年 7 月甲申條. 然茶丘在焉臣之爲國不亦難哉如茶丘者如茶丘者只宜理會軍事至於國家之事皆欲擅斷 ( 中略 ) 上國必欲置軍於小邦寧以韃靼漢兒軍無論多小而遣之如茶丘之軍惟望召還
86 지역과역사 40 호 병사로편성해자기휘하에둔것이그지휘경력의시작이므로, 홍군상역시기본적으로요동고려인세력에지분을가지고그일각을담당했던것은부정할수없다. 그러나계속요동지방을중심으로활동했던앞의 3명과달리, 홍군상은對남송전선참여를기점으로제국의중앙에서장기간경력을이어나가게된다. 앞에서살핀바와같이홍군상은至元 13년 (1276) 남송항복이후장군의반열에들면서황제직속인侍衛親軍에속하여千戶와副都指揮使를지냈으며, 그이후로는원제국의 3대중앙관부라할수있는中書省, 樞密院, 御史臺중군사중추를담당하는추밀원에서 20년내외의장기간동안재직하며고위직을역임하였다. 또한추밀원을떠나한동안칩거한이후大德 7년 (1303) 에는大司農을거쳐최고행정기관인중서성으로옮겨재상의반열에속하는中書右丞에임명되기도하였다. 즉그는경력상지방세력가로서보다는중앙인사로서의정체성이훨씬강한인물이었다. 이후大德 10년 (1306) 그가요양행성에右丞으로부임했을때의행적에서도이러한면을짐작해볼수있다. 같은직책에 15년이라는장기간을재임했던홍중희와달리홍군상의재임기간은만 1년을채우지못했을것으로보이지만, 전술한대로그가매우적극적으로직책을수행했을것으로보이는기록이남아있다. 당시그는조정에청하여儒學提擧官과都鎭撫를충원할것과마땅히행성의다스림을새롭게할것 ( 宜新省治 ) 을주장하였다. 이는장기간재임하면서도현상만유지했던것으로보이는홍중희와달리, 행성의 다스림 을새롭게하여서중앙의통제력을지방에더강하게부식시킨다는行中書省설치본연의목적에한층더충실해야할것을주장한것이라볼수있다. 행성내의學政과祭祀등을담당하는유학제거관과행성내만호부에속한진무등을관장하는도진무를확충하자는주장역시행성기구를통해元제국내의각지방을어느정도표준화하고통제하려던중앙의의도와맥락을같이한다고볼수있다. 직책은동일하게지방통치기구의右丞이었지만기본적으로지방세력가의입장에서이를담당했던홍차구, 홍중희와달리홍군상은중앙인사가지방을바라보는시각으로본직책을수행했던것이다. 이후大德 11년 (1307) 원무종즉위이후그가요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87 양행성에서군권을겸해가지는사실상의최고직위인平章政事까지승진할수있었던것역시, 충선왕과의우호관계외에도요동고려인세력가의일족이면서중앙인사로서의정체성또한함께보유했다는점또한어느정도메리트로작용하였을가능성을추측해볼수있을것이다. 그리고앞에서제기한대로, 홍군상이가지고있던이런중앙인사로서의시각과입장은또한고려본국에대한그의인식과입장이홍씨가문의여타주요인물들과는사뭇다르게나타나도록하는중요한배경으로작용하였다. 그의위치는제국중앙인사에가까웠기에요동을근거지로삼고있던일족의다른 3인과달리고려본국과세력권의중첩이나충돌을겪을일이거의없었다. 때문에홍군상은고려본국을당장눈앞에있는이익권의경쟁자로서바라보기보다는, 元제국전체라는좀더넓은시야에서조망하면서제국세력권내에있는친족관계의우호국으로서동행하고공생해야할대상으로서인식할수있었을것이다. 그가고려에보였던비교적유연한대응은여기에서도비롯된다할수있다. ꡔ 高麗史 ꡕ 기록에서홍군상이고려본국에세운가장큰공로로평가받았다고여겨지는것은至元 31년 (1294) 쿠빌라이사후에있었던 3차일본원정계획중지건의였다. 고려정부는다음해그에게공신호와고위직등을대량수여하여이에보답하였다. 그러나이전부터제국내에서도 3차일본원정실시에대하여회의적견해를표명하는대신들이있었던것을감안해보면, 이건의가전적으로그의本鄕인고려본국에대한개인적선의만으로이루어진것이었다고보기는어렵다. 그보다는원정을강행하는것, 그리고그준비를위해명목상우호국으로공생해야할고려를피폐화시키는것이제국전체의이익에부합하지않을것이라는제국중앙인사로서의판단또한상당부분작용하였던것으로해석하는것이더자연스러울것이다. 그리고그형인홍차구가일본원정계획을기화로둔전설치나내정간섭시도등을행하여고려정부를크게압박하였던전례와이를비교해보면, 고려본국과인접한지역세력가와제국전체의판도를보는중앙인사라는입장의차이가고려본국에대한실제대응에있어어떠한형태로대비되는
88 지역과역사 40 호 지비교해볼수있을것이다. 홍군상이기본적으로원제국중앙에서오래재직한고급관인이었던이상, 그가보인고려에대한배려는이러한역할과입장을바탕에두고해석하는것이좀더타당할것이다. 맺음말 살리타이가지휘하던몽골군의초기침입은고려북계지역에새로운질서를부식시켰으며, 이후요동고려인세력이형성되는계기로작용하게되었다. 살리타이의첫침입당시고려북계에서麟州의都領을세습하던지방세력가홍복원은몽골군에협조한대가로그후원을얻어西京을중심으로고려북계지역에서세력을넓히게되었다. 한때는고려정부또한그에게西京郎將이라는회유성지위를부여하여암묵적으로그위치를인정했던바있다. 몽골측에경도되기는하였으나어느정도회색지대성향을유지하던홍복원세력은살리타이전사로몽골군이철수한이후고려정부와충돌하여서경을잃고요동지역으로옮겨가완전히몽골에정착하게되었다. 그리고홍복원이몽골로부터高麗軍民萬戶 - 管領歸附高麗軍民長官을부여받고요동의遼 - 瀋지역을근거지로하여고려에서몽골측으로건너오는유이민들에대한통할권을인정받게되면서요동고려인세력이성립하기시작하였다. 홍군상은이홍복원의다섯째아들로, 요동홍씨가문의주요인물로서 ꡔ 元史 ꡕ 열전에그행적이구체적으로기록된홍복원, 홍차구, 홍군상, 홍중희 4인중경력과행적면에서가장이채를띠고있는인물이다. 홍복원, 홍차구, 홍중희가요동에근거지를두고지위를세습하며요동- 한반도및그인접지역을위주로활동하던지역세력가로서의성격이강하다면, 홍군상은요동지역에근본을두고있으며요동에서고위직을지내기도하였지만전체적인경력에서는중앙인사로서의성격이강하게나타난다. 對남송전선에서의활동을시작으로대칸측근의侍衛親軍을거쳐제국군사조직의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89 중추라할수있는樞密院에서 20년가량을재직하였으며제국행정의중추인中書省의右丞을지내기도한데서이를알수있다. 그를총애하던世祖쿠빌라이사후누차어사대의공격을받아후일결국중앙직에서는물러나게되었으나, 遼陽行省으로옮긴뒤右丞을거쳐사실상의行省내최고위직인平章政事에올라당시요동고려인중가장높은위치에까지이르게되었다. 그리고마지막에는商議行省事로서자문역을하며요동에서晩年을보냈던것으로보인다. 또한비슷한시기에활동했던홍차구나홍중희와마찬가지로주로武散階를통해승진한무인이면서도전투에서의행적만이주로강조된다른둘과달리安諭나招致와같은설득과중재에도능력을보인바있으며, 集賢大學士직을받았던만큼문인적교양또한겸비했던것으로보인다. 이러한경력상의특색과아울러일족의다른이들과구별되는특색은바로홍군상과고려본국과의관계이다. 이는오래전부터주목받아단편적으로나마언급되어오던그의특색이기도하다. 상기 4인중홍복원, 홍차구, 홍중희가고려본국과는적대관계로알력을빚었던반면, 홍군상은관계가양호하여고려본국에서공신호와작위등을수여받기도하였다. 忠烈王이나세자시절의忠宣王이연경에갔을때그의저택에숙소를정하고장기간머물렀던것이나충선왕과친밀했던원武宗카이산이홍군상을중용했던것등에서도양자간관계가비교적양호했음을알수있다. 고려측기록에도 3차일본원정중지를건의하여고려의원정준비부담을없앤일이나趙妃誣告事件으로고려에파견되었을때忠宣王에게향응을베풀고충선왕과薊國大長公主의화해를주선하는등고려본국에유화적으로대한모습이기록되어있다. 그리고그결과 ꡔ 高麗史 ꡕ에서는홍군상에대하여 본국 ( 고려 ) 을위하여이로운일은일으키고해로운일은없애는데힘쓰지않음이없었다 ( 爲本國興利除害無不力焉 ) 라는극히우호적인평가를내리고있다. 물론그가고려본국에우호적으로비칠수있는행적을보였던것은사실이다. 그러나이것이오로지개인적선의에서만비롯되었다거나고려본
90 지역과역사 40 호 국에충성심을가진결과라고해석하는것은맥락을무시한단견이라할수있다. 그가고려본국에선의를가졌을개연성은있다. 그러나몽골에서태어나몽골관료로입신한그에게있어고려본국에대한선의는고려에속한國人으로서품는忠의발로가아니라, 고려계제국관료로서품는本鄕지역에대한배려로간주하여야할것이다. 또한그가남송원정시기부터교섭이나회유및위무의역할을맡았던기록으로미루어보면, 본래부터이러한유화책을담당시키기에적합한인물로평가받았던것으로보인다. 이점역시그가고려에대해서도유화와관련된역할을수행하게하는데어느정도영향을미쳤을것으로추측된다. 그리고무엇보다도홍군상이그本鄕에대한선의가유지될수있는위치에있었다는것역시매우주목해야할지점이다. 일족의다른 3인은요동의지역세력가로서고려본국과세력권이인접하였고똑같이고려인을세력기반으로하고있었기에상호경쟁의대상으로서알력을빚을수밖에없었다. 그러나제국중앙에서의긴경력으로인하여중앙관료로서의정체성이강했던홍군상은자신의연고지역만이아니라제국전체를조망하는입장에서고려본국을배척해야할경쟁상대가아니라제국과공생해야할한구성요소로볼수있었던것이다. 그리고이것이바로그가고려본국에대한선의를유지하고유연한태도를유지할수있었던가장주요한지점이라할수있을것이다. 홍군상과고려본국과의관계및행적과그배경을해석하기위해서는, 개인적선의라는단선적해석이아니라이렇게그의출신과경력을비롯하여그경력에서파생되는역할과입장까지를복합적으로고려하여판단하는것이좀더타당한자세일것이다. 홍군상만이아니라이시기의여타고려인세력가들에대해서도마찬가지로고려본국과의관계를분석하고그행적을종합적으로해석하기위해서는이러한복합적고려가필요할것이다. 본고에서는홍군상에대하여만천착한바이므로, 여타인물들에대한천착이나이들요동고려인세력에대한전체적조망의강화에대해서는후고를기약하기로한다.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91 참고문헌 ꡔ 高麗史 ꡕ, ꡔ 高麗史節要 ꡕ, ꡔ 蒙兀兒史記 ꡕ, ꡔ 續資治通鑑 ꡕ, ꡔ 新元史 ꡕ, ꡔ 元高麗紀事 ꡕ, ꡔ 元史 ꡕ, ꡔ 元書 ꡕ 강재구, 몽골의高麗北界분리시도와東寧府의편제 ꡔ지역과역사ꡕ 39, 2016. 김갑동, 고려시대의都領 ꡔ한국중세사연구ꡕ 3, 1996. 金九鎭, 元代遼東地方의高麗軍民 ꡔ 李元淳敎授華甲記念史學論叢 ꡕ, 敎學社, 1986. 김유나, 고려전기북계민 ( 北界民 ) 의형성과그집단의식 ꡔ역사와현실 ꡕ 96, 2015. 김현라, 원간섭기忠宣王妃薊國大長公主의위상정립과의미 ꡔ지역과역사ꡕ 39, 2016. 金惠苑, 高麗後期瀋王硏究, 이화여자대학교박사학위논문, 1999. 박옥걸, 고려도령에관한재검토 ꡔ사학연구ꡕ 58ㆍ59, 1999. 梁義淑, 元간섭기遼瀋地域高麗人의동향 ꡔ역사와교육ꡕ 4, 1996. 오기승, 몽골제국의동방경영과요동고려인세력 ꡔ중앙사론 ꡕ 43, 2016. 尹龍爀, 고려의海島入保策과몽고의戰略變化 : 麗蒙戰爭전개의一樣相 ꡔ역사교육ꡕ 32, 1982. 尹龍爀, ꡔ 高麗對蒙抗爭史硏究 ꡕ, 一志社, 1999. 이강한, 고려후기元屯田의운영과변화 ꡔ역사학보 ꡕ 196, 2007. 이강한, ꡔ고려와원제국의교역의역사ꡕ, 창비, 2013. 李基白, ꡔ 高麗兵制史硏究 ꡕ, 一潮閣, 1968. 이정신, 永寧公王綧연구 : 몽고침략기왕족의모습 ꡔ민족문화연구ꡕ 35, 2001. 이형우, 고려후기이주에대한일고찰 ꡔ한국사연구ꡕ 158, 2012. 장동익, 元에진출한高麗人 ꡔ민족문화논총ꡕ 11, 1990. 장동익, 몽고에투항한홍복원ㆍ다구부자 ꡔ역사비평ꡕ 48, 1999. 정요근, 고려역로망운영에대한원 ( 元 ) 의개입과그의미 ꡔ역사와현실 ꡕ 64, 2007, 주채혁, 洪福源一家와麗ㆍ元關係 ( 一 ) ꡔ사학연구 ꡕ 24, 1974. 주채혁, ꡔ몽ㆍ려전쟁기의살리타이와홍복원ꡕ, 혜안, 2009. 崔允精, 원대요양행성宰相考 ꡔ대구사학ꡕ 116, 2014. 崔允精, 13세기麗元관계와洪茶丘 ꡔ 中國史硏究 ꡕ 105, 2016. 杉山正明저, 임대희, 김장구, 양영우역, ꡔ몽골세계제국ꡕ, 신서원, 1999. 李治安, ꡔ 元代行省制度 ꡕ, 中华书局, 2011.
92 지역과역사 40 호 논문투고일논문심사일게재확정일 2017.02.24 2017.04.03 2017.04.27
요동고려인洪氏세력의형성과洪君祥의행적에대한고찰 93 Abstract A Study on Formation of Liaodong Goryeo People Group Hong Clan and Achievements of Hong Gun-Sang Oh, Ki-Seung The Mongol empire united Liaodong Goryeo People, focused on who is an influential figure in surrendered utilized Goryeo People. And utilized them in ruling tactics of their eastern territory. In such Liaodong Goryeo People group, first united group was the Hong clan. Their leader Hong Bok-Won got power in north border area of Goryeo by support of invaded Mongol force and Goryeo s connivance. But Goryeo attacked him, and he moved to Liaodong. Hong Gun-Sang is fifth son of Hong Bok-Won. He was the most unusual man in four key figures of Liaodong Hong clan(hong Bok-Won, Hong Cha-Gu, Hong Gun-Sang, Hong Zung-Hee). Other three are concentrated upon as a regional power. On the other hand, Gun-Sang concentrated upon serve as a high-ranking officer of central of The Mongol empire. He served as Siwichingun(royal guard) officer, and high-ranking officer of Chumilwon(headquarter of imperial military force) and Chungseosung(headquarter of imperial administration) He was in contrast with other three of Liaodong Hong clan in relationship with Goryeo Dynasty. Other three was hostile to the Goryeo Dynasty. On the other hand, Gun-Sang maintained a good relationship with the Goryeo Dynasty in showing goodwill. But it was not expression of loyalty to Goryeo. Just goodwill to his home area as imperial officer who has ancestor in Goryeo Dynasty. It is also possible that he was in charge of friendly action to Goryeo Dynasty because
94 지역과역사 40 호 he was originally a suitable person in charge of friendly action. Above all, other three key figures of Liaodong Hong clan were hereditary rulers of regional power. And they were forced to compete with Goryeo Dynasty because their territory was abuted with Goryeo and base of ruling were Goryeo people. On the other hand, Gun-Sang was not entangled with benefit of specific area. And he can cognize Goryeo Dynasty as position that seeing entire empire because he served long time as a high-ranking officer of central of The Mongol empire. It was a main factor of that he can keep tolerant stance to the Goryeo Dynasty. Keywords : Liaodong, Liaodong Goryeo People, Hong Gun-Sang, Hong Bok-Won, Goryeo-Yuan Relationship
ꡔ울산부호적대장ꡕ에 보이는 협호의 노동성격 검토 95 ꡔ지역과 역사ꡕ 40, 2017.4, 95~130쪽 http://dx.doi.org/10.19120/cy.2017.04.40.95 ꡔ울산부호적대장ꡕ에 보이는 협호의 노동성격 검토* 147)이 정 수** 머리말 Ⅰ. 1609년 ꡔ울산부호적대장ꡕ의 降倭 현황 1. 항왜의 지역별 분포 2. 항왜의 구성과 점유율 Ⅱ. 1609년 ꡔ울산부호적대장ꡕ의 협인의 성격 1. 협인ㆍ솔인의 보유 실태 2. 협인ㆍ솔인의 노동성격 맺음말 국문초록 임진왜란 기간에 조선 정부는 왜병들의 투항을 적극 유도한 결과 상당수의 항왜들이 발생하였다. 왜란 이후 각 지역에 분치된 항왜의 구체적인 존재 형태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 주목되는 것은 1609년 ꡔ울산부호적대장ꡕ이다. 여기에는 항왜뿐 아니라 귀화 야 인의 기재 사례도 확인되기 때문에 이들의 존재 형태를 상호 비교해 볼 수 있다. 1609 년 울산호적은 모두 6개 面과 7개 里가 남아 있는데, 이 가운데 3개 面 4개 里에서 주 호를 이룬 11명의 항왜와 항왜 협인 1명하여 총 12명의 항왜의 기록을 찾아 볼 수 있 다. 특히 1609년의 ꡔ울산부호적대장ꡕ에는 다른 호와 달리 降倭戶에만 다수의 협인이 등재되었는데, 그 이유와 협인의 성격이 무엇인지가 궁금하다. 이들 11개의 항왜호는 혈연 관계 24명과 비혈연 관계 21명하여 총 45명의 구성원으로 이루어졌다. 항왜호에 기재된 22명의 비혈연 관계인은 12명의 협인과 협인처 6명, 그리고 솔인 4명이었다. 이들 협인과 솔인은 가족 구성이나 직역 등을 볼 때 사회경제적 처지가 열악하여 자립 적 소경영의 주체가 되기에는 부족하였다. 하지만, 이들의 연령대는 10대 중반~50대 * 이 논문은 2016년 동서대학교 학술연구조성비 지원에 의하여 수행되었음. ** 동서대학교 외국어계열 교수(jsl1598@dongseo.ac.kr).
96 지역과역사 40 호 중반으로구성되어있어서농업노동을수행하기에는적당한나이였다. 하지만, 항왜주호 11명의가족구성은협인과솔인을제외할경우부부 2인가족으로만주로구성되어농업노동력이부족하고조선의농업사정에도익숙하지않기때문에조선정부의희망과달리항왜들이조속히거주지에쉽게안착하기가쉽지않았을것이다. 여러요인으로인해이들항왜들이조선사회에안착하지못할경우여러가지사회적문제를일으킬여지가많았다. 따라서조선정부에서는이들항왜들의조속한안착을위해농지나종자, 농구등의물질적지원이외에도농업노동력이나기술의지원이필요했을것으로생각된다. 이러한여러가지상황을고려해볼때조선정부에서다른호에는없는협인을항왜호에만올린정책적의도를읽을수있겠다. 결국이들협인과솔인들은항왜호의농지를경작하는농업노동력으로서의역할, 즉항왜호의作人역할을했을것으로추정된다. 주제어 : 울산호적대장, 항왜, 협호, 솔인, 노동성격 머리말 조선후기사회변동속에서주목되는노동계층으로노비, 고공과협인을들수있다. 이들은조선후기의주요노동력으로노동성격의특성상서로대체적이거나보완적관계에있었다. 1) 특히고공과협인은조선후기상품화폐경제의발전과함께농민층이분해되면서본격적으로나타난경제적으로하층계층이었다. 다만, 노비와고공은정부에의해상민아래의신분으로법제화된반면협인은신분제의범주에속하지는않았다. 협인은양반층에서노비층까지모든신분계층을포괄하고있었다. 지금까지노비와고공의사회경제적성격에대해서는많은연구성과가 1) 이정수ㆍ김희호, ꡔ 조선후기노동양식연구 奴婢, 雇工과挾戶의비교 ꡕ, 민속원, 2016 ; 조선후기주호와협호의관계 : 신분과노동특성을중심으로 ꡔ 경제사학 ꡕ 55, 2013 ; 조선후기협호와고공의비교 ꡔ 경제사학 ꡕ 57, 2014.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97 축적됨에따라어느정도밝혀지고있지만협인에대해서는연구가상대적으로부족하여여전히논란의여지가많은편이다. 협인의경우는실록, 비변사등록, 승정원일기, 문집등각종문헌을통해서그성격을파악하기쉽지않을뿐아니라협인과관련된자료가특정지역의호적대장과양안에서만나타나기때문이다. 협호를본격분석한이영훈은국가적토지소유에대응하는농민경영의단위인 주호- 협호 관계속에서그성격을규정하였다. 조선국가의호구정책이호총제라고하는운영방식을취하고있음에따라농촌사회의친족ㆍ신분ㆍ계급의다양한관계가그것에규정되어상하관계로편제된것이주호-협호라는구조였다고 2) 설명했다. 이에대해이세영과정진영등은主戶의개념이나성격, 협호의발생과종류, 그범주나경제적성격, 호적의戶의성격등에전면적문제를제기함으로써 3) 주호ㆍ협호의성격이나戶의문제에대해좀더의미있는논쟁을일으켰다. 그리고한영국과임학성등은 주호- 협호 관계가국가의인신지배체제를나타내기보다는단순히친인척등연고가있는자의가옥일부 ( 별채ㆍ협가 ) 를빌려거주하는 4) 세입자의의미로해석하였다. 5) 2) 李榮薰, 朝鮮後期農民經營에서主戶 - 挾戶關係 ꡔ 朝鮮後期社會經濟史 ꡕ, 한길사, 1988. 3) 李世永, 18 ㆍ 19 세기兩班土豪의地主經營 ꡔ 韓國文化 ꡕ 6,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85 ; 대한제국기의호구변동과계급구조 ꡔ 역사와현실 ꡕ 7, 1992. 정진영, 18 세기호적대장 호 ( 戶 ) 와그경제적기반 1714 년대구조암방 ( 租岩坊 ) 호적을중심으로 - ꡔ 역사와현실 ꡕ 39, 2001 ; 조선후기호적 호 의編制와성격 ꡔ 대동문화연구 ꡕ 40, 2002 ; 조선후기 호 의새로운이해와전망 ꡔ 대동문화연구 ꡕ 42, 2003. 4) 한영국, 朝鮮後期의挾人ㆍ挾戶 彦陽戶籍大帳의挾人口를中心으로 - ꡔ 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ꡕ, 正音文化社, 1985. 林學成, 조선후기漢城府民의戶口文書에보이는 挾戶 의성격 ꡔ 朝鮮史硏究 ꡕ 7, 1998 ; 조선후기경상도彦陽지역 主 - 挾 型家戶의族的결합양태 1861 년도彦陽戶籍의사례분석 - ꡔ 국사관논총 ꡕ 100, 2002. 장경준, 언양호적대장의挾戶와호당구수 ꡔ 역사와세계 ꡕ 44, 2013. 5) 협호와관련된자세한연구사정리와개념등의자세한사항은이정수ㆍ김희호의글참조 ( 이정수ㆍ김희호, 조선후기협호의존재형태와노동특성 ꡔ 역사와경
98 지역과역사 40 호 특히협인과관련된기존연구가주로활용한자료는협인기사가가장풍부하게실려있는 ꡔ 彦陽縣戶籍大帳 ꡕ이었다. 언양호적대장은현재까지알려진조선후기호적대장가운데유일하게협호를다수기재하고있다. 6) 본래협인으로구성되는가족은호적에등재하지않고호적과는별도로 ꡔ 挾戶成冊 ꡕ에기재하게되어있다. 7) 하지만언양에서협인을호적에등재한것은언양의호역과군역의부담에서오는상대적인차이, 즉戶摠과口摠의괴리에기인한다고보았다. 그결과호총을구성하는主戶이외에그예하의협호들에게도군역의부담이불가피했던것이다. 그리고그근거로협호에게부과한군역직역을들었다. 8) 이러한설명에도불구하고협호가왜호적대장에기재되었으며, 그성격이나역할은무엇인지등에대해여전히의문이남는다. 이처럼호적에기재된협인의성격을보다좀더구체적으로이해하기위해서본고에서는현재까지확인된협인이기재된가장이른호적가운데하나인 1609년 ( 광해군원년 ) 의 ꡔ 蔚山府戶籍大帳 ꡕ에기재된협인을분석해보고자한다. 특히 1609년의 ꡔ울산부호적대장ꡕ 에는다른호에는없는협인이오직降倭戶에게만등재되었다는점은주목된다. 여기서협인이항왜에게만등재되었다는점은협인의성격이나역할을이해하는데시사하는바가크다고생각된다. 본고에서는항왜인에게협인이배정된구체적양상과 계 ꡕ 83, 2012). 6) ꡔ 彦陽縣戶籍大帳 ꡕ 은 18 세기초반 ~19 세기후반 (1711~1861 년, 8 개식년 ) 약 150 년간의시계열과郡縣의全邑을분석할수있는 4 개의식년도포함하고있기때문에조선후기사회의전반적변화를추적할수있는양질의자료이다. 7) ꡔ 甲午式戶口事目 ꡕ(1714 년 ), 규장각도서 No.12318. 아직까지는 挾戶成冊 이발견된바는없지만언양현호적대장등에등재된협인은호적에등재되지않는가족들이실재하였다는사실을확인시켜준다. 8) 李榮薰, ꡔ 朝鮮後期社會經濟史 ꡕ, 한길사, 1988, 386~387 쪽. 이러한추정이어느정도설득력이있다고여겨지는것은국방상의요충지에위치하여다수의군액을유지해야했던동래부의경우에도 19 세초반과중반에협인이기재되고있는몇개의준호구를확인할수있다. 동래의준호구에서협인이확인된다는것은호적에도협인이등재되었음을의미한다. 주지하듯이준호구는호적의내용을그대로발급한것이기때문이다 ( 장경준, 앞의논문, 2013, 344~345 쪽 ).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99 이들협인의성격이나역할이무엇인지검토해보고자한다. Ⅰ. 1609 년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의降倭현황 조선시대에귀화나투화한이방인은주로왜인과야인이었다. 외국인의귀화나투화는오래전부터있어왔지만정책적으로귀화인을수용하기시작한것은고려때부터로이해된다. 하지만왜인과야인에대한귀화정책이적극적으로추진되기시작한것은조선건국이후였다. 국경을안정화하여국가를평안케할목적으로북방을혼란케하는야인과남방을유린하는왜구에대해征伐과交隣이라는강온양면정책을함께추진하였다. 특히조선정부가왜인과야인의귀화정책을적극추진한명분은중화질서에입각한 화이론 을적극수용하여주변의夷狄 ( 야인, 왜, 유구등 ) 을귀화시키는것은바로向化 ( 야만을문명되게교화시키는과정 ) 로인식했던것이다. 9) 하지만왜인이나야인에게취한귀화정책의본질은실리를얻고자하는데에있었다. 조선건국초의대내, 대외적인혼란한정치상황에서남방과북방국경의안정은조선정부의당면과제였기때문에왜인과야인에대해가능한교린정책을취했던것이다. 조선정부의귀화정책은왜인이나야인의입장에서는아주좋은조건이었다. 귀화하면토지, 가옥, 식량등의무상지급은물론공로에따라관직을제수하기도하였기때문이다. 본고에서주로다루는降倭는투화, 향화, 귀화한일본인을의미하는것으로여말선초에도존재하였지만, 짧은시기에많은인원의항왜가발생된것은임진왜란때였다. 특히임진란중에조선에항왜의수는최대 1만명에이르렀다고한다. 임진란시기에왜병이조선에투항하게된직접적인원인은몇가지를들수있다. 왜병은장기간에걸친전쟁과군량미의부족, 과 9) 하우봉, 조선전기대외관계에나타난自我認識과他者認識 ꡔ 한국사연구 ꡕ 123, 2003.
100 지역과역사 40 호 중한노역, 혹독한추위와고통, 출정한하급무사들의불만, 왜병의전쟁기피등이조선의향화인초유책ㆍ우대책과결부되면서다수가조선에투항하였다. 10) 특히항왜가많이발생한시기는 1597년 ~1598년인데, 이는일본군이다시출병하여전쟁이시작되자그동안강화교섭으로전쟁이끝나서고향에돌아가기를기대하였던왜병들이실망하여투항하였던것으로여겨진다. 왜병이투항해온지역은전라도의남원과경상도의의성, 의령, 경주, 거창, 동래임랑포등지였다. 특히경상도지역에서항왜가많이나타난이유는정유재란기에일본군이주로경상도지역에주둔하여활동하였기때문이다. 11) 조선정부는항왜들의처리문제에대해서도각별한신경을기울였다. 1593년경까지명나라와의관계로인해명의항왜처리방침에따라주로요동으로압송하였다. 그러나명의주력부대가철수하고명과일본간의강화교섭이진행되면서부터는항왜를요동으로보내지않고풍기, 영천, 안동, 의성등경상도의내륙지방에 7~8 명에서 15~16명씩나누어서분치하였다. 그런데각지방의식량부족문제와예기치못한변란이발생할우려가있었기때문에항왜를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등지의해안이인접한군현이나섬으로이송하였다. 그리고그들에게농지와식량을주어안정시키는한편그들의출입을제한하여변란에대비하였다. 12) 1. 항왜의지역별분포이처럼각지역에분치된항왜의구체적인존재형태를살필수있는자료로주목되는것은 ꡔ울산부호적대장ꡕ 이다. 울산은단성과언양, 대구등과함께조선시대호적대장이많이남아있는지역중의하나로현재 1609~ 1891년까지총 54책이전하고있다. 1606~1672년이 2책, 1678~1810년 10) 한문종, 임진란시기항왜의투항배경과역할 ꡔ 인문과학연구 ꡕ 36, 2013, 321~323 쪽. 11) 한문종, 위의논문, 332 쪽. 12) 한문종, 위의논문, 334~335 쪽.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01 33책, 1813~1894년 19책이남아있다. 특히본고에서주로활용한 1609 년울산호적대장은 1606년 ( 선조 39) 산음현호적대장다음으로현존하는가장오래된호적대장이다. ꡔ울산부호적대장ꡕ 가운데서도 1609년과 1672년의식년호적에서항왜의기재를확인할수있다. 13) 현재까지확인된항왜가기록된가장이른시기의호적이바로 1609년 ꡔ울산부호적대장ꡕ 이다. 특히 1609년 ꡔ울산부호적대장 ꡕ에는항왜의기재뿐아니라귀화야인의기재사례 21건도확인되기때문에 14) 이들의존재형태를상호비교해볼수있다는측면에서주목된다. 이들귀화왜인과야인의두사례를함께기재한호적은유일한것으로보인다. 한편, 울산부에항왜가정착한경위는구체적으로잘알수없지만앞에서언급한것처럼정부에의한항왜분치정책에따른결과라고여겨진다. 울산은고려때에는蔚州라불렸고조선의태종 13년 (1413) 에와서蔚山郡으로개칭되었다. 이곳에경상좌도병마절도영이설치되어군사상의요지였다. 임진왜란때는왜군이울산군내에 2개의왜성 ( 서생포왜성, 울산왜성 ) 을축성하기도하여, 울산은임진왜란과정유재란의전체과정을고스란히겪어피해가막심하였다. 울산은 1592년 ( 선조 25) 4월병영성실함부터 1598년 ( 선조 31) 11월정유재란종결까지약 6년 7개월간사실상왜군의점령하에있었다. 특히, 울산은 2차에걸친島山城공방전에서쌍방 10만넘는병력이전투를치룬큰전장이었다. 울산은왜군의피해가막심하여인구가격감하고대부분의농경지가진황하였다. 그래서정부는왜란종결후피해가컸던동래ㆍ창원과함께울산에召募軍을설치하여유민을안집하고진황지를복구하려시도하였던것이다. 15) 13) 양흥숙,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을통해본조선후기降倭의존재와정착 ꡔ 한일관계사연구 ꡕ 34, 2016. 14) 임학성, 17 세기전반戶籍자료를통해본귀화野人의조선에서의생활양상 蔚山戶籍 (1609) 과海南戶籍 (1639) 의사례분석 - ꡔ 고문서연구 ꡕ 33, 2008. 15) 송수환, 왜란직후의울산소모군 1609 년울산부호적대장을중심으로 - ꡔ 역사와경계 ꡕ 96, 2015.
102 지역과역사 40 호 1609년울산호적은부내면과내상면일부, 동면의農所里ㆍ柳等浦里, 북면의凡西里, 남면의大代如里ㆍ靑良里ㆍ溫陽里, 서면의熊村里, 그리고임내彦陽縣川南里등모두 6개면과 7개리가기재되어남아있다. 이가운데북면의범서리, 남면의청량리ㆍ온양리, 서면의웅촌리의 3개面 4 개里에서항왜가호의기록을찾아볼수있다. < 표 1> 1609 년호적대장의항왜현황 16) 번호 거주지 주호명 직역 나이 출생연도 비고 1 信時老 主簿 53 丁巳 (1557) 2 古叱非僉知 50 庚申 (1560) 北面凡西里 3 右時老己 - 48 壬戌 (1562) 3-1 ( 也其之 ) - 33 丁丑 (1577) 挾人 4 高叱己 僉知 40 庚午 (1570) 5 金茂伊 - 50 庚申 (1560) 南面靑良里 6 禮時乃司正 38 壬申 (1572) 7 馬汝武 司正 45 乙丑 (1565) 8 南面溫陽里 高小乃 僉知 37 癸酉 (1573) 新戶 9 世和致 僉知 40 庚午 (1570) 10 西面熊村里 老己汝茂 訓鍊判事 46 甲子 (1564) 11 世叱己 判事 39 辛未 (1571) * 비고 : 3-1 의항왜也其之는右時老己의협인이나항왜현황을위해별도표기함 위의 < 표 1> 과같이 1609 년호적대장에는 3 개면 4 개리에주호를이룬 11명의항왜와항왜협인 1명하여총 12명의항왜가기재되어있다. 그런데각마을호적기록의마지막에기록된마을전체호구의총괄표 ( 이상 조 : 里總 ) 를보면북면범서리에는항왜 3구, 남면의청량리에는항왜 5구, 온양리에는항왜壯男 1구, 서면웅촌리에는항왜壯男 4구라고기록되어있다. 이에의하면 1609년울산에항왜는 4개의里에 13명이거주하고있음을볼수있다. 하지만호적본문의기록과총괄표의기록간에는항왜의수에서총괄표가본문보다 1명많은것으로표시되고, 또한마을내의항왜수에서도차이를보이고있다. 그차이를보이는이유가무엇인지에대해 16) 양흥숙, 앞의논문, 2016, 234 쪽의 < 표 1> 참조. 울산호적대장항왜의존재와정착과정에대한자세한내용은양흥숙의글을참조바람.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03 간략히검토해보자. 마을호적의본문과총괄표간의차이를보이는경우는범서리, 청량리, 웅촌리의 3개마을이다. 우선호적의본문과총괄표간의차이를보이는범서리의경우를살펴보자. 범서리의경우호적본문에는항왜주호 3호와협인 1호가기록되어있는데비해총괄표에는항왜 3구라고되어있다. 범서리호적본문의항왜관련기록은다음과같다. 戶降倭主簿信時老年伍拾參丁巳甲午肆月分出來左防禦使陣從軍妻良女召史年肆拾庚午本全羅道兒時父母俱沒肆祖不知 戶降倭僉知古叱非年伍拾庚申去甲午肆月分出來左防禦使陣從軍妻良女甘未年肆拾參丁卯本忠淸道肆祖不知 戶降倭右時老己年肆拾捌壬戌妻私婢春代年貳拾捌壬午戊申年梁山移居俠降倭也其之年參拾參丁丑戊申年梁山移居 호적본문에는항왜주호信時老, 古叱非, 右時老己 3명과항왜협인也其之 1명하여총 4명의항왜가기록되어있다. 그런데 의기사를보면右時老己의처인사비춘대가무신년 (1608) 에양산으로이거하였고, 협인항왜也其之도동년에양산으로이거하였다. 이를통해볼때右時老己는 1608년에처와협인이함께양산으로이거함에따라혼자울산에거주하였을것으로생각된다. 따라서호적총괄표에는항왜也其之를제외하고항왜의수를 3명으로기록한것으로여겨진다. 다음으로, 호적의본문과총괄표간의차이를보이는청량리의경우를간략히살펴보자. 청량리호적본문의항왜관련기록은다음과같다. 戶降倭僉知高叱己年肆拾庚午甲午年出來今年正月密陽移去率妻全羅道枎安人年肆拾參丁卯壹男子上年玖辛丑率居楊古老年伍拾參甲寅率男趙介年貳拾參丁亥 戶降倭金茂伊年伍拾庚申甲午年出來率妻良女梁山人年參拾柒癸酉率男金俊金年貳拾捌壬午 戶降倭司正禮時乃年參拾捌壬申率妻私婢石乙進年參拾玖辛未父私奴莫母良女萬里女子婢件里年拾伍乙未節現上典蔚山居柳百春
104 지역과역사 40 호 戶降倭司正馬汝武年肆拾伍乙丑甲午年出來率妻晉州良女召史年肆拾三丁卯 위의청량리호적본문에기록된항왜는高叱己, 金茂伊, 禮時乃, 馬汝武의 4명인데비해호적총괄표에는항왜의수를 5명으로기록하고있다. 이처럼항왜수 1명의차이는아마도 의高叱己호에아들로생각되는 9세의남자가기재되고있음을통해볼때그를항왜의수에넣었을가능성도있다. 세종대의사례에의하면향화인의범주를그親子까지로하고있음을볼수있다. 17) 그렇지않으면 의高叱己호에솔거했던楊古老라는인물이있는데, 그의이름표기를볼때일본명으로여겨지기때문에 18) 그역시항왜였을가능성이있다. 다음으로, 웅촌리의경우도호적의본문에는항왜가 3명인데비해총괄표는 4명으로기재되어있어 1명의차이를보이고있다. 그차이나는이유에대해서는알수없지만웅촌리의대장본문의호수는 99호인데비해이총의호수는 97호이며, 구수의경우도대장본문과이총간에는 30구정도의차이가있다. 이를통해대장본문과이총간에는약간의호구수의차이가있음을볼수있다. 한편, 항왜가호적대장에등재되었다는것은조선정부가이들에대해각별히관리와감독에관심을기울이고있다는것을의미한다. 호적대장에서이들항왜는같은統으로작통되고있었다. 1609 년의호적은 10호가 1개의통을형성하고있었는데, 19) 항왜호는해당마을의호가운데말미에등재되었다. 이것은向化野人이마을호구의말미에등재되는것과같다. 이러한사실은항왜호가마을의특정지역에모여거주하였음을의미한다. 20) 17) ꡔ 世宗實錄 ꡕ 세종 21 년 5 월 29 일. 양흥숙, 앞의논문, 2016, 236 쪽. 18) 山內民博, 十七世紀初慶尙道蔚山府戶籍大帳と降倭 ꡔ 日韓相互認識 ꡕ 2009-2, 일한상호인식연구회, 2009, 10 쪽. 19) 1609 년의울산호적은 10 호를 1 개의統으로묶고있는데이후 1675 년 ( 숙종 1) 에와서다섯호를하나의통으로묶는 五家作統法 이본격시행됨으로써이후의호적대장의작성원칙이된다. 20) 양흥숙, 앞의논문, 2016, 237~238 쪽. 1601 년 ( 선조 34) 에경상도암행어사로
ꡔ울산부호적대장ꡕ에 보이는 협호의 노동성격 검토 105 <그림 1> 18세기 중엽 蔚山府地圖(ꡔ海東地圖ꡕ 수록) 그리고 1609년의 울산호적에는 항왜인뿐 아니라 향화야인도 등재되어 파견되었던 조수익의 書啓에 의하면, 密陽에는 降倭가 저희끼리 한 마을을 이 루고 살면서 村民들을 불러 모아 저희의 울타리로 삼고 서로 비호하면서 살고 있다. (ꡔ宣祖實錄ꡕ 권136, 선조 34년 4월 1일(무진))고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볼 때 울산에서도 밀양과 마찬가지로 항왜호는 마을의 특정 지역에 집주하였음 을 추정할 수 있다.
106 지역과역사 40 호 있다. 호적대장에서기록이확인되는향화야인호는총 20호이고 21) 직역으로서향화를기재한향화야인수는 33인이다. 울산호적의훼손된부분의도이상조에기록된 11명을더하면당시울산거주향화야인의총수는 44명이다. 22) 향화야인이거주했던지역은읍내리, 동면농소리와유등포리, 그리고남면온양리의 4개리에나누어거주하고있다. 읍내리에 11명, 동면농소리에는 12호 23명, 유등포리에는 3호 3명, 남면온양리에는 5호 7명이거주하였다. 23) 그런데앞에서언급했듯이 1609년울산에는항왜인이 4개의里에 13명이거주하고있다. 북면범서리에는항왜 3명, 남면의청량리에는항왜 5명, 온양리에는항왜 1명, 서면웅촌리에항왜 4명이있었다. < 표 2> 1609 년울산호적의귀화왜인과야인거주지비교 면리부내면동면북면남면서면구분읍내리농소리유등포리범서리온양리청량리웅촌리 계 왜인 - - - 3명 1명 5명 4명 13명 야인 11명 23명 3명 - 7명 - - 44명 항왜인과향화야인의거주지에서주목되는점은남면온양리를제외하고는두집단의거주面里가겹치지않다는것이다. 온양리에거주했던항왜高小乃의경우는호적대장에의하면新戶로명기되어있어서타지에서이곳으로이주하였음을알수있다. 따라서항왜高小乃의경우도처음부터온양리에거주했던것은아님을알수있다. 하지만 1609년에와서는왜란이끝난후 10여년이지나면서점차이들에대한관리와감독이조금느슨 21) 주호의직역이향화로표기된경우를 향화호 로표기함. 22) 1609 년울산호적본문에서확인되는 33 인외에도훼손으로이름을알수없는지역의도이상조에는 11 명의향화인이더기록되어있다. 임학성은울산호적본문에기재된향화야인의수를남자가 30 여명, 여자가 20 여명으로총 50 여명으로추정했다.( 임학성, 앞의논문, 2008, 104 쪽 ) 이는향화라는표기되지않은향화야인자녀를포함시켰기때문인것으로보인다. 23) 임학성, 위의논문, 107~108 쪽. 이옥빈, 조선시기북방계향화인의원거주지와이주시기 1609 년울산호적을중심으로 - ꡔ 역사와경계 ꡕ 96, 2015, 127~ 128 쪽.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07 해진것이아닌가여겨진다. 결국조선정부는애초에는항왜인과향화야인의관리와감독을수월하게하기위해이들을격리분산배치시켰다고생각된다. 조선정부는귀화왜인과야인들에대한관리와감독에상당한심혈을기울였음을볼수있다. 이를통해조선정부의귀화왜인과야인에대한정책과인식의일면을읽을수있겠다. 2. 항왜의구성과점유율여기서는 1609년울산호적에기재된항왜호의내역과구성, 그리고항왜호구가지역에서차지하는비중등에대해살펴보겠다. 우선, 항왜호구의전반적인내역을보면아래와 < 표 3> 과같다. < 표 3> 항왜관련호구의구성내역 내용구성원 항왜호 항왜협호 계 주호 11 (11) 혈연 처 12-24 자녀 1 비혈연 협인솔인노비 11 (1) 3 1 3 3 0 21 계 39 (12) 6 45 * 비고 : ( ) 내의수치는항왜인의수를표기한것임 협인의숫자에서도망한협인金介는제외함 위의 < 표 3> 에서보는바와같이항왜를주호로하는항왜호는 11호이다. 그구성원은 11명주호의처 12명, 자녀 1명, 그외비혈연관계의협인 11 명, 24) 솔거인 3명, 노비 1명이었다. 그런데항왜의다른협인이나솔거인과달리독립의호를구성하고있는 3개의협호가있다. 이경우는 降倭某 24) 항왜호의협인가운데특이하게도항왜 1 명이있다. 그는범서리의항왜右時老己의협인으로등재된항왜也其之이다. 항왜世和致의협인중 1 명인金介 (35 세 ) 가 1609 년 1 월에도망하였다.
108 지역과역사 40 호 俠 의형식을띠고있는데, 북면범서리에거주하는항왜古叱非의협호였다. 이들 3개의협호는호적에주호인古叱非의호다음에각각연속적으로등재되어있고, 이들호의가족구성은부부로만이루어져있었다. 따라서항왜호는전체적으로항왜 12명 ( 주호 11명과협인 1명 ) 과솔거인 33명으로구성되어있었다. 다음으로, 이들항왜호의가족구성에대해좀더구체적으로살펴보자. 1609년울산에거주한항왜인의평균가족원수는아래 < 표 4> 와같이약 4.1명 (45/11) 으로나타나서항왜호는평균 4명정도의구성원수로이루어지고있었다. 항왜호의경우주호부부와자녀 1명을둔 1호를제외하고는대체로부부에비혈연솔거인으로구성되고있음을볼수있다. 주호부부외에협인, 솔인등비혈연솔거인들이다수보인다. < 표 4> 1609 년울산호적의降倭戶의가족구성양상 구성가족원수가족원수별가족분포주호내용혈연비혈연 2인 3인 5인 8인호구수 11 24 21 2호 5호 2호 2호 내역 혈연가족 혈연 + 비혈연가족 主戶 + 妻 : 2 호 主戶 + 妻 + 挾人 : 3 호主戶 + 妻 + 率人 : 1 호主戶 + 妻 + 婢 : 1 호 主戶 + 妻 + 子 + 率人 2: 1 호主戶 + 妻 2+ 挾人 2: 1 호 主戶 + 妻 + 挾人 3+ 挾人妻 3: 2 호 위의표에서보는바와같이호적대장상의항왜는 11호에혈연관계 24 명과비혈연관계 21명하여총 45명이다. 비혈연솔거인의수가가족구성의 47%(21/45) 정도를차지할정도로적지않은비중이다. 특히 1609년울산호적에등재된향화야인호의평균가족원수가약 2.4명으로서거의부부로만구성되고있었다는것과비교해볼때 25) 항왜호의경우는비혈연솔거인이많았음을알수있다. 이것은어떠한특별한이유가있었을것으 25) 임학성, 앞의논문, 2008, 33 쪽.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09 로여겨진다. 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자세히살펴보겠다. 한편, 항왜호의가족구성에있어 3인가족이 5호 (45%) 로다수를차지하고있음을볼수있다. 이경우는부부가족에비혈연솔거인 1인으로구성되어있다. 실제로비혈연솔거인을제외하면항왜호의구성은부부로만가족을이루고있는경우가대다수이다. 과연항왜호의경우자녀가실제없었기때문에호적에등재하지않았는지, 아니면영유아및미성년자녀들의경우는누락하였는지의문이다. 다만, 南面靑良里의高叱己호에아들로생각되는 9세의남아가기재되고있음을통해볼때미성년의자녀는누락했을것이라는원칙과위배된다. 하지만 1609년울산호적의향화야인호의경우에도영유아를비롯한미성년자녀가호적에등재되지않고있었기때문에 26) 항왜호의경우도미성년자녀의일부누락이있었을것으로생각된다. 이외에항왜부부의자녀를등재한것으로추정할수도있는 2개의호가있는데, 南面靑良里의金茂伊戶와禮時乃戶의경우이다. 우선, 金茂伊戶에는주호부부와함께 28세의率男金俊金이등재되어있다. 이름을볼때부부의자녀로추정할수도있지만金茂伊 (50세 ) 의처의나이가 37세인관계로부부사이에 28세의자녀를두었다고보기에는무리가있다. 그리고호적에의하면金茂伊가 1609년보다 15년전인갑오년 (1594년 ) 에향화한것으로기록되어있기때문에 28세의率男金俊金의경우이들부부의자녀가아님이확실하다. 다음으로, 禮時乃戶에는주호부부와함께 15세인婢件里가등재되어있다. 38세인禮時乃와그처인私婢石乙進 (39세 ) 의나이를감안할때 15세의비가이들부부의자녀라고보기에는무리가있다. 부연하면, 禮時乃의경우언제향화했는지기록에나타나지않아알수없지만다른항왜와같이 1609년보다 15년전인갑오년 (1594) 이라고보면향화후바로결혼하고자녀를출산했다고가정해도婢件里의나이가 15세이기때문에좀무리가있다고생각된다. 그리고件里의신분이노비인데 26) 임학성, 위의논문, 114~115 쪽.
110 지역과역사 40 호 이는종모법에의해어머니인私婢石乙進의신분을따랐다고가정할수도있지만항왜의경우도즉시종모법의규정을받았는지도의문이다. 아마도조선정부의항왜에대한여러우대정책을볼때항왜당대에바로노비종모법을적용했다고보기에는무리가있다. 27) 따라서이들은항왜의率人으로서협인과비슷한성격을가진자들로여겨진다. 이에대해서는다음장에서자세히살펴보도록하겠다. 다음으로 1609년울산지역에서차지하는항왜호구의점유율을살펴보자. < 표 5> 1609 년울산거주항왜관련호의戶口점유율 戶口數 면리전체 항왜관련호 面里 인구수 호수 인구수 점유율 (%) 호수 점유율 (%) 東面農所里 767 237 0 0 0 0 東面柳等浦里 556 169 0 0 0 0 北面凡西里 144 53 14 9.7 6 11.3 南面大代如里 324 114 0 0 0 0 南面靑良里 241 79 13 5.4 4 5.1 南面溫陽里 950 379 2 0.2 1 0.3 西面熊村里 267 99 16 6.0 3 3.0 계 3,249 1,130 45 1.4 14 1.2 * 비고 : 1 각면리의전체인구수는 이상 조에기재된실제인구수임 2 실제인구수를파악할수없는읍내리는제외함 3 북면범서리의항왜古叱非의협호 3호는독립호로계산하였음 위의 < 표 5> 와같이 1609년울산지역에서항왜관련호는전체주민 (3,249 명 ) 의 1.4% 정도이며, 호수규모로는전체호수 (1,130 호 ) 의 1.2% 정도를차지하고있음을볼수있다. 특히, 북면범서리와남면청량리의경우는항왜관련호가전체호구에서차지하는비중이제법높았다. 범서리는지역전체인구의 9.7%, 호수의 11.3%, 남면청량리는지역전체인구의 5.4%, 호수의 5.1% 를항왜관련호가차지하고있었다. 이상 조의훼손이 27) 山內民博의경우는金茂伊戶의率男金俊金과禮時乃戶의婢件里를그들주호부부의자녀로보고있다 ( 山內民博, 앞의논문, 2009, 6~9 쪽참조 ).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11 심하여호구수를파악하기어려운邑內里의경우를포함한다면항왜관련호가차지하는인구와호수의비중은이보다는낮아질것이다. Ⅱ. 1609 년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의협인의성격 1. 협인ㆍ솔인의보유실태 1609년울산호적에보이는항왜주호 11명의협인과솔인의보유실태를구체적으로살펴보자. < 표 6> 1609 년울산항왜의협인등비혈연솔인보유현황 주호협인협인처비혈연솔인번호이름직역이름직역나이신분나이이름직역나이 1 信時老主簿白於屯 - 38 - - - - - 2 古叱非僉知 萬乞石乙孫徐允鶴 寺奴私奴正兵 56 45 37 良人良人私婢 57 47 50 - - - 3 右時老己 - 也其之 ( 降倭 ) 33 - - - - - 4 高叱己 僉知 - - - - - 楊古老 - 53 趙介 - 23 5 金茂伊 - - - - - - 金俊金 - 28 6 禮時乃 司正 - - - - - 件里 私婢 15 7 馬汝武 司正 - - - - - - - - 8 高小乃 僉知 - - - - - - - - 9 世和致 僉知 崔文崔目隱同 正兵 - 46 15 - - - - - 金介 ( 도망 ) 35 10 老己汝茂 訓鍊判事 鄭介 - 38 - - - - - 11 世叱己判事 命生金山李福男 奴 - - 37 53 44 寺婢良人良人 - 38 35 - - - 위의표를통해볼때항왜주호 11명의협인등비혈연솔거인의보유실태는일률적이지않고다양한실태를보이고있다. 우선, 항왜호는크게
112 지역과역사 40 호 협인을보유한경우 ( 번호 : 1, 2, 3, 9, 10, 11) 와그렇지못한경우 ( 번호 : 4, 5, 6, 7, 8) 로나누어볼수있다. 그리고협인을보유한경우에도주호의가내에솔거인으로보유한경우 ( 번호 : 1, 9, 10, 11) 와별도의독립호로보유한경우 ( 번호 : 3) 의두가지형태를보이고있다. 또한항왜주호가협인을비록보유하지못했지만비혈연솔거인을보유한경우 ( 번호 : 4, 5, 6) 와비혈연솔거인조차보유하지못한경우 ( 번호 : 7, 8) 의두가지형태를보이고있다. 그럼, 항왜주호 11명의협인등비혈연솔거인의보유실태를좀더구체적으로확인해보기위해 1609년울산호적의기재내용을번거롭지만확인해보고자한다. 울산호적에서는 俠 내지 俠人 으로기재되어있는데, 언양호적대장등다른자료에는 挾人 내지 挾戶 로주로표기된것과는약간의차이를보이고있지만기본적으로 俠 과 挾 은같은의미로사용되고있다. 우선, 항왜주호가협인을보유하면서협인이별도의호로파악된경우의호적기록은다음과같다. 49 戶降倭僉知古叱非年伍拾庚申去甲午肆月分出來左防禦使陣從軍妻良女甘未年肆拾參丁卯本忠淸道肆祖不知 [ 북면범서리 ] 50 新戶降倭僉知古叱非俠晋州案付寺奴萬乞年伍拾陸甲寅父寺奴萬同兒時父母俱沒四祖不知妻良女召史年伍拾柒癸丑本晋州兒時父母俱沒肆祖不知 [ 북면범서리 ] 51 新戶同俠私奴石乙孫年肆拾俉乙丑兒時父母俱沒肆祖不知上典全羅道南原居楊千生妻良女召史年肆拾柒癸亥本晋州父正兵朴守山兒時俱沒參祖不知 [ 북면범서리 ] 52 新戶降倭古叱非俠全羅道淳昌府正兵徐允鶴年參拾柒癸酉父正兵豆應乞兒時俱沒參祖不知妻私婢億代年伍拾庚戌父私奴芿叱孫母良女今伊上典報恩居安唜守 [ 북면범서리 ] 위에서인용한호적대장의기재내용가운데戶앞의숫자 (49~52) 는里內의호적기재순위를나타낸것이다. 아래의인용문에서도동일하다. 북면범서리의호적에는항왜古叱非의戶뒤를이어서 降倭古叱非俠 의형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13 식으로寺奴萬乞, 私奴石乙孫, 正兵徐允鶴의戶가古叱非의협호로별도로기재되고있다. 28) 이를제외한다른협인의경우는호적대장상별도의호를이루지않고항왜호내의솔거인으로등재된것과는차이가있다. 그런데이들 3호의경우는별도자기소유의가옥에거주한경우인지아니면古叱非소유의가옥중별채일부를빌려서거주하였는지가의문이다. 이들협호 3호는부부가족으로구성되어 6명만호적에기재되고있지만자녀가존재했을가능성이높기때문에가족구성원의수가늘어날가능성이크다. 따라서이들 3호의협호가족모두가古叱非의별채에거주했다고보기에는좀무리가있기때문에별도의호를구성하고있었다고여겨진다. 특히이들협호 3호는모두 新戶 로서공통적인특징을보이는데, 이는 3년전의식년에는호적에등재되지않았다가새로이호적에올라온것을의미한다. 이처럼 3개의협호를다른협호와달리별개의호로호적에등재한이유에대해서는잘알수없지만조금의추측은가능하다. 위의 < 표 5> 1609년울산거주항왜관련호의戶口점유율에서보듯이당시울산지역내에서북면범서리가다른면리에비해호구수가월등히적다. 이때문에 3개의협호를별도의호로분리한것은아닌가여겨진다. 이어서, 항왜의戶內에솔거인으로등재된협인에대한호적의기록을보자. 48 戶降倭主簿信時老年伍拾參丁巳甲午肆月分出來左防禦使陣從軍妻良女召史年肆拾庚午本全羅道兒時父母俱沒肆祖不知俠白於屯年參拾捌壬申本全羅道兒時父母俱沒肆祖不知 [ 북면범서리 ] 53 戶降倭右時老己年肆拾捌壬戌妻私婢春代年貳拾捌壬午戊申年梁山移居俠降倭也其之年參拾參丁丑戊申年梁山移居 [ 북면범서리 ] 60 戶降倭僉知世和致年肆拾庚午妻召史年肆拾伍乙丑本蔚山又妻良女召史年參拾庚辰本京中父金希福二祖不知外祖金福本果川俠人正兵崔文年肆拾陸甲子本長興父白三祖不知俠人金介年參拾伍乙亥本全州父生 28) 이처럼협호가주호내의솔거인의형식을취하지않고별도의호로기재된경우는 1630 년의 ꡔ 慶尙道山陰縣戶籍大帳 ꡕ 과 1663 년의 ꡔ 漢城府北部帳戶籍大帳 ꡕ 에서도동일하게나타난다.
114 지역과역사 40 호 三祖不知今年正月分逃亡俠人崔目隱同年拾伍乙未節現 [ 남면웅촌리 ] 61 戶降倭訓鍊判事老己汝茂年肆拾陸甲子妻召史年伍拾陸甲寅本長城父李千三祖不知俠人良鄭介年參拾捌壬申本羅州父山三祖不知 [ 남면웅촌리 ] 62 戶降倭判事世叱己年參拾玖辛未妻私婢夢化年參拾庚辰上典黃山驛吏崔芳草俠人奴命生年參拾柒癸酉本慶州父命春母私婢小今妻寺婢億每上典慶州居黃生俠人金山年伍拾參丁巳本興陽父正兵許夫祖石乞曾祖不知外祖金公希本密陽妻良女召史年參拾捌壬申本開寧父正兵成德三祖不知俠人李福男年肆拾肆丙寅本興陽父水軍仁之祖水軍日生曾祖不知外祖正兵金守本興陽妻良女召史年參拾伍乙亥本南平父正兵崔永守二祖不知外祖水軍金山福本南平 [ 남면웅촌리 ] 위의호적에등재된항왜信時老의협인白於屯, 世和致의협인崔文, 崔目隱同등은모두주호의협실에기거했을것으로생각된다. 기록의항왜右時老己의협인也其之의경우는특이하게도항왜로서항왜의협인이된인물이다. 也其之는右時老己의처와함께무신년 (1608) 에양산으로이거한것으로되어있다. 어떤연유에서주호인右時老己는울산에있고처와협인만전해 (1608) 에양산으로이거하였는지에대해서는알수없지만추측컨대右時老己의경우도양산으로이어서이거했을것으로추측된다. 후대의기록을통해볼때당시양산에도항왜들이다수거주했던것으로보인다. 29) 기록을보면, 항왜世和致의협인가운데한명이었던金介는호적작성식년이었던 1609년 1월에도망한것으로되어있다. 이를보면해당호적의경우는당해년 1월의사정까지도반영된것을볼때 2월이후에완료한것으로여겨진다. 다음으로, 항왜주호가협인을비록보유하지못했지만비혈연솔거인을보유한경우에대해살펴보자. 69 戶降倭僉知高叱己年肆拾庚午甲午年出來今年正月密陽移去率妻全羅 29) ꡔ 燃藜室記述 ꡕ 권 26, 仁祖朝古事本末李适之變. 時大駕南巡中外洶洶多欲內應而權縉配在梁山結武士及降倭有叵測之形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15 道枎安人年肆拾參丁卯壹男子上年玖辛丑率居楊古老年伍拾參甲寅率男趙介年貳拾參丁亥 [ 남면청량리 ] 70 戶降倭金茂伊年伍拾庚申甲午年出來率妻良女梁山人年參拾柒癸酉率男金俊金年貳拾捌壬午 [ 남면청량리 ] 71 戶降倭司正禮時乃年參拾捌壬申率妻私婢石乙進年參拾玖辛未父私奴莫母良女萬里女子婢件里年拾伍乙未節現上典蔚山居柳百春 [ 남면청량리 ] 위의기록과같이남면청량리의항왜高叱己와金茂伊의경우비록협인은보유하지않았지만비혈연솔거인을 1~2 명씩거느리고있다. 항왜高叱己는率男楊古老와趙介를, 항왜金茂伊는金俊金을, 항왜禮時乃는비件里를보유하고있다. 특히, 항왜高叱己의경우는 1609년당해식년당시 1월에밀양으로이거한것으로되어있다. 이는위에서언급한항왜世和致의협인이었던金介가호적작성식년이었던 1609년 1월에도망한것으로기재된것과동일한경우로해당호적의경우는당해년 1월의사정까지도반영하였음을다시확인할수있다. 당시밀양에도항왜들이조선정부의정책에의해分置되어 30) 다수거주하고있었던것으로알려지고있다. 그리고항왜高叱己와金茂伊의기록에보면 甲午年出來 했다고되어있는데, 이와같은내용이항왜馬汝武와信時老, 古叱非에도 31) 동일하게보인다. 이들은왜란중조선정부의적극적인항왜유치책에의해갑오년 (1594) 에조선에투항하였으며, 주로이들은 1594년당시경상도방어사였던金應瑞의휘하에서종군하였을것으로생각된다. 32) 30) ꡔ 宣祖實錄 ꡕ 권 140, 선조 34 년 8 월 18 일 ( 계미 ). 강첨이아뢰기를, 신이일찍이이원익을따라영남에갔을때降倭 60 여명이密陽에모여한부락을이루고살면서양민을침학하는것을보았습니다. 이제속히처리해야하니, 만약갑자기위급한일이있어다시일본에투항하면어찌걱정거리가안되겠습니까. 신의생각으로는북쪽열읍에나누어두면일본과서로떨어지게되고오랑캐를막는데도도움이될것으로여겨집니다. 하였다. 31) 항왜信時老와古叱非의경우는그들의出來에대해 甲午肆月分出來左防禦使陣從軍 으로좀더구체적으로기록되어있다. 32) 山內民博, 앞의논문, 2009, 11~13 쪽.
116 지역과역사 40 호 마지막으로, 항왜주호가협인뿐아니라솔거인도보유하지못한경우에대해살펴보자. 72 戶降倭司正馬汝武年肆拾伍乙丑甲午年出來率妻晉州良女召史年肆拾三丁卯 [ 남면청량리 ] 142 新戶降倭僉知高小乃年參拾柒癸酉妻良女召史年貳拾陸甲申本金海父正兵夢石三祖不知 [ 남면온양리 ] 위에서본바와같이항왜주호 11명가운데 6명은협인을보유하고있었으며 3명의경우는협인대신비혈연솔인을거느리고있었다. 하지만항왜馬汝武와高小乃 2명의경우는협인이나비혈연솔인어느것도보유하지못하였다. 이들은왜협인이나솔인을보유하지못했는지에대해서는알수가없다. 다만추측컨대이들도애초에는조선정부의향화인우대책에의해식량, 토지, 가옥등의지급과함께협인이나솔인을보유하였을것으로생각된다. 하지만이후협인의도망이나 33) 항왜호의다른지역으로의이사등특별한사유로인해해당식년당시에는보유하지못한것은아닌지생각된다. 위의 항왜高小乃의경우는 新戶 로기재되어있음을통해볼때타지에서이주해왔기때문에협인을보유하지못한것은아닐까여겨진다. 2. 협인ㆍ솔인의노동성격조선은건국초부터국내와국외정치의조속한안정을추구하기위해왜인과야인에대해가능한교린정책을취했다. 특히왜인의경우는고려후기이래가장큰사회ㆍ외교적문제였다. 따라서왜인들이귀화할경우파격적인우대를하여토지, 가옥, 식량, 의복등의무상지급은물론공로에따라관직을제수하였다. 33) 앞에서본것처럼항왜世和致의협인중한명이었던金介가도망하였음을볼수있다.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17 宣旨하기를, 平道全과그처자들 14명을평양에두고, 따라온자들은함길도각관가에나누어두게하라. 고하였다. 임금이명하여평도전의처자들에게생업을갖추어살게하고, 간혹쌀과소금을주고또한비어있는집을주었다. 34) 항왜羅可溫은宣略將軍을주고, 그부하都時羅등 8인은각각領司正ㆍ副司正의직을주었다. 35) 이러한왜인에대한귀화정책은상당한정도의성과를거두어많은수의왜인들이조선에정착하게되었다. 이와같은국초이래정책의연장선속에서왜란이발생하자왜병들에대한귀화정책이적극논의되고실행되었다. 36) 이때도조선건국초와마찬가지로왜인들이귀화할경우토지, 가옥, 식량등의무상지급과혼인을주선하기도하여빠른시일내에국내에정착할수있도록적극적인정책을취하였다. 물론공로에따라관직도제수하고그에따른대우도하였다. 그러한사정은아래의인용문을통해서도어느정도짐작할수있다. 비변사가아뢰기를, 金應瑞가거느린降倭를평안ㆍ황해도의궁벽한곳에分送하여살게하자고本司에서入啓하여윤허를받았습니다. 그런데서울에온항왜들이날마다본사에와서호소하기를, 저들무리들이나온지가오래되어각각妻子와田土가있으므로편안하게살면서농사에힘쓰고있다. 지금만약갑자기移徙시키면다른지방으로멀리옮겨가게되어생활근거가없어질뿐만아니라이런엄동설한에길에서얼어죽을까염려된다. 따라서年限을두어그대로머무르게함으로써생명을보전할수있도록해달라. 고하였습니다. 37) 비변사가아뢰기를, 降倭也汝文은취초할때보니꽤計慮가있었습니다. 이와같은사람은후하게대우하여그의마음을붙잡아두어야할것같습니다. 해사로하여금급히의복과갓등의물건을조치해주게하고, 또司正의告身을주며, 형조賊人의처로짝을지어주어위안시켜힘을다하게하 34) ꡔ 世宗實錄 ꡕ 권 4, 세종 1 년 6 월 3 일 ( 병자 ). 35) ꡔ 太祖實錄 ꡕ 권 11, 태조 6 년 4 월 27 일 ( 기유 ). 36) 한문종, 앞의논문, 2013 참조. 37) ꡔ 宣祖實錄 ꡕ 권 119, 선조 32 년 11 월 5 일 ( 경술 ).
118 지역과역사 40 호 는것이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대로하라고답하였다. 38) 尹安性이비변사의말로아뢰기를, 降倭同知金向義ㆍ金歸順ㆍ李歸命등이本司에와호소하기를 우리들은이미조정의관작을받았으니당연히본국의臣民과같은대우를받아야할것이다. 지금듣기에다른관원들은모두녹봉을받는다는데우리들만料를받고있어부당한듯하다. 바라건대다른예대로우리에게도녹을받게해달라. 하였습니다. 병조로하여금春等부터시작하여軍職에붙여녹봉을주게하는것이어떻겠습니까? 하니, 알았다고전교하였다. 39) 위의 에서보면서울에거주하는항왜들은이미처자식과토지를갖고농사에종사하고있음을볼수있고, 을보면항왜也汝文에게司正 ( 정7 품직 ) 의직책과배필을짝지어주고있다. 그리고 에서보면항왜同知金向義등의요청에의해이들에게도조선관원과같이계절별로녹봉을지급하도록허가하였다. 이뿐만아니라조선정부는항왜들에게부역감면과관련된시혜도주었던것으로여겨진다. 실제 ꡔ경국대전ꡕ 에는귀화한왜인ㆍ야인은 10년간의요역을면제 ( 復戶 ) 하거나, 40) 3년간田稅를면제하는등의시혜내용을규정하고있다. 41) 副察使의포고문이다. 또너희들降倭등은본래다른나라사람으로서죽음을피하여우리나라로왔는데, 국가에서구휼함이특별하여復戶하고, 朔料를지급하니恩德이지극한것이다. 무슨까닭으로어찌하여역적이괄에게이용당하여나라의두터운은혜를저버리는가? 42) 위와같이 1624 년 ( 인조 2) 정월에발생한이괄의난에다수의항왜들이 38) ꡔ 宣祖實錄 ꡕ 권 55, 선조 27 년 9 월 18 일 ( 계사 ). 39) ꡔ 宣祖實錄 ꡕ 권 133, 선조 34 년 1 월 13 일 ( 임자 ). 40) 復戶는조선시대국가가戶에부과하는요역부담을감면하거나면제해주던제도였다. 수혜기간에따라영년복호와한년복호로구분할수있다. 41) ꡔ 經國大典 ꡕ 권 4, 兵典復戶條. 向化新來人限十年復戶 ; 권 2, 戶典收稅條. 向化人三年免稅 42) ꡔ 備邊司謄錄 ꡕ 3 책, 인조 2 년 2 월 5 일.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19 참여한것에대해효유하는정부의포고문내용을보면, 정부에서는항왜호에대해복호를하고있었음을확인할수있다. 이처럼조선정부는항왜들의조속한국내안착을돕기위해가옥, 농토, 식량등의물자와부역감면의시혜, 그리고공로에따라관직도수여하고있었다. 그런데 1609년의울산호적을보면항왜호에비혈연관계의협인과솔인등이다수존재하고있다. 이처럼다른호에는보이지않는협인이항왜호에만존재한다는것은어떤특별한이유가있었을것이다. 왜조선정부는다른호에는등재하지않았던협인을항왜호에만등재했을까. 이들협인의역할은무엇인가등여러의문이든다. 물론협인이등재된호적대장으로는울산호적외에도 1630년 ( 인조 8) 경상도 ꡔ산음현호적대장ꡕ 과 1663년 ( 현종 4) ꡔ한성부북부장호적대장ꡕ 그리고 ꡔ언양현호적대장 ꡕ 등이있다. 43) 울산호적대장에서는다른호적대장과달리이상조 ( 里總 ) 에협인의수를구체적으로명기하고있다는점이 44) 특이하다. 그럼울산호적의항왜호와함께등재된비혈연협인과솔인의성격에대해구체적으로살펴보자. 조선후기에협인으로구성되는가족은원칙적으로호적에등재하지않고호적과는별도로 ꡔ 挾戶成冊 ꡕ에 45) 기재하게되어있었던것으로생각된다. 그런데현재까지알려진호적대장가운데협인이가장많이기재된 ꡔ 彦陽縣戶籍大帳 ꡕ의검토결과에의하면, 언양에서협인을호적에등재한것은이지역국역체제의지역적인특수성에기인하는것으로보았다. 46) 즉, 호역에비해군역의부담이너무과중했기때문에호총을 43) ꡔ 산음현호적대장 ꡕ 과 ꡔ 한성부북부장호적대장 ꡕ 에등재된협호는모두주호와친인척관계에있으며, ꡔ 언양현호적대장 ꡕ 의협호는주호와친인척관계에있는경우도있지만대부분은비혈연관계였다. 44) 1609 년의울산호적에협인이등재된지역은북면범서리와서면웅촌리의두곳인데서면웅촌리의이상조에만협인壯男 6 명, 壯女 2 명으로구분하여기재하고있다. 북면범서리에도협인 5 명과협인처 3 명이있었는데, 범서리의이상조에는협인을별도로구분하여표기하지않았다. 두곳의차이가왜발생했는지에대해서는알수없지만조사원의기재방식차이에서그런것이아닌가추측된다. 45) 앞의주 7) 참조.
120 지역과역사 40 호 구성하는主戶이외에그예하의협호들에게도군역부담이불가피했던것이다. 그런데조선정부가울산호적의항왜호에협인을등재시킨것은주호의군역부담이나호역등을경감시키기위한차원은아닌것으로생각된다. 왜냐하면항왜호의경우는위에서도언급했듯이호역과전세등을면제받고있었다. 그리고울산호적의항왜들다수는조선정부로부터관직을수여받았기때문에조선의관료와마찬가지로군역의부담이없었다. 울산호적의항왜 12명가운데조선의관직을수여받은자는 9명이며, 2명은주호로서직역이기재되어있지않고 1명은항왜의협인으로되어있다.( 위의 < 표 1> 참조 ) 관직이기재되어있는항왜의현황을보면, 信時老는主簿 ( 정6품내지종7품 ), 古叱非, 高叱己, 高小乃, 世和致의 4명은僉知 ( 정3품당상관 ), 그리고禮時乃, 馬汝武의 2명은司正 ( 정7품 ), 老己汝茂는訓鍊判事, 47) 世叱己는判事 48) 였다. 그리고右時老己와金茂伊의 2명은주호로서직역이없고也其之는右時老己의협인으로기재되어있는데, 이들 3명의경우도군역의부담을가졌다고보기는어렵다. 이처럼울산호적의항왜들은조선정부의귀화왜인우대책에의해조선의일반민중들과달리전세나호역, 군역등각종국역의부담에서벗어나있었다고여겨진다. 따라서울산호적의협인은항왜호의각종국역부담을경감시키기위한목적으로둔것은아님이명확하다. 그렇다면조선정부는다른호에는두지않았던협인을항왜호에만둔이유가무엇일까. 그이유를구체적으로논하기전에항왜호에기재된 22명의비혈연의협인과솔인들의직역과나이에대해간략히살펴보자. 우선협인의경우를 46) 앞의주 8) 참조. 47) 訓練判事라는직책은사료나법전류에도보이지않는데, 훈련원내지는훈련도감의직책으로생각된다. 훈련판사가訓練院正이라면정 3 품당하관이고, 訓鍊院判官이라면종 5 품이다. 48) 여기서世叱己가받은判事라는직책이명확하지않다. 조선시대의判事는돈녕부, 의금부, 중추부등관아의으뜸벼슬을지칭하는데, 이들의품계는 1 품에서 3 품까지였다.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21 보면, 白於屯 ( 무직역, 38세 ), 萬乞 ( 寺奴, 56세 ) 과처 ( 良人, 57세 ), 石乙孫 ( 私奴, 45세 ) 과처 ( 양인, 47세 ), 徐允鶴 ( 正兵, 37세 ) 과처 ( 私婢, 50세 ), 也其之 ( 항왜, 37세 ), 崔文 ( 正兵, 46세 ), 崔目隱同 ( 무직역, 15세 ), 金介 ( 도망, 35세 ), 鄭介 ( 무직역, 38세 ), 命生 ( 奴, 37세 ) 과처 ( 寺婢,?), 金山 ( 무직역, 53세 ) 과처 ( 良人, 38세 ), 李福男 ( 무직역, 44세 ) 과처 ( 양인, 35세 ) 등이다.( 위의 < 표 6> 참조 ) 협인 12명의경우부부 2인가족 (6명) 이나자신만의 1인가족 (6명) 을형성하고있음을통해볼때그들의경제적처지는열악한상태였을것임을짐작할수있다. 이는항왜世和致의협인이었던金介가도망한것을통해서도짐작할수있다. 그리고협인 12명중에직역이표시된경우가 5명 ( 正兵 2명, 공사노 3명 ) 이고 7명은직역의표기가없다. 협인가족의연령구성은 10대가 1명, 30대가 8명, 49) 40대가 4명, 50대가 4명으로구성되어있다. 다음으로비혈연의솔인의경우를보면, 楊古老 ( 무직역, 53세 ), 趙介 ( 무직역, 23세 ), 金俊金 ( 무직역, 28세 ), 件里 ( 私婢, 15 세 ) 등 4명이다.( 위의 < 표 6> 참조 ) 이들솔인들은모두 1인가족을형성하고있음을통해볼때이들의경제적처지도열악한상태였을것으로여겨진다. 이들은사비件里를제외하고는모두직역의기재가없다. 이들솔인의연령대를보면 10대중반 ~50대초반으로구성되어있다. 그렇다면이들협인과솔인들의성격과역할은무엇이었을까. 이들의가족구성이나직역등을통해볼때사회경제적처지가열악하여자립적소경영의주체가될수없을것으로판단된다. 하지만, 이들의연령대는 10대중반 ~50대중반으로농업노동을수행하기에는적당한나이였다. 50) 49) 협인命生 ( 奴, 37 세 ) 의처나이에대해서는알수없지만남편의나이와비슷하다고추정하여 30 대로보았다. 도망한협인金介 (35 세 ) 는숫자에서제외하였다. 50) 久間健一, ꡔ 朝鮮農業の近代的樣相 ꡕ, 目黑書店, 1935, 162~163 쪽에의하면, 우리나라농촌에서남자가한사람몫의노동능률을발휘할수있는연령을보통 19~50 세전후로보고있다.
122 지역과역사 40 호 < 표 7> 1609 년울산항왜호의비혈연협인ㆍ솔인의연령분포 연령대 10~19세 20~29 세 30~39세 40~49세 50~59 세 계 협인 1명 - 8명 4명 4명 17명 솔인 1명 2명 - - 1명 4명 한편, 항왜주호 11명의가족구성을간략히살펴보자. 호적대장상의항왜호는 11호에혈연관계 24명과비혈연관계 21명하여총 45명으로구성되었다. 비혈연솔거인의수가가족구성의 47%(21/45) 정도를차지할정도로적지않은비중이다. 결국항왜호에서비혈연가족을제외할경우혈연가족구성은 2.2명에불과하여대체로부부 2인가족으로만구성되었다고볼수있다. 그런데조선정부의입장에서는이들항왜에게가옥, 농지, 식량과종자, 농구등의지급과부역의감면등을통해이들이조선사회에조속히정착할수있도록적극적인지원정책을취하였다. 하지만이들항왜들은귀화전일본에서농사에종사하지않았을경우도있겠고혹농사일에종사했다고할지라도우리의농업사정을모르기때문에조선정부의희망과같이쉽게안착하기에는어려움이많았을것으로여겨진다. 그리고항왜들의가족구성에서보듯이부부 2인가족이대부분으로서농지를경작할가족노동력이절대부족했다. 이들이낯선조선땅에서주변농민들의농업노동력지원을받기는쉽지않았을것이다. 또한이들항왜들다수가조선정부로부터낮지않은관직을받은현실에서농업경영에직접나서기도어려웠을것이다. 여러요인으로인해이들항왜들이조선사회에안착하지못할경우여러가지사회적문제를일으킬여지가많았다. 51) 따라서조선정부에서는이들항왜들의조속한안착을위해농지나종자, 농구등의물질적지원이외에도농업노동력이나기술의지원이필요했을것으로생각된다. 이러한여러가지상황을고려해볼때조선정부에서다른호에는없는 51) 실제실록등당시기록에의하면, 항왜들이여러지역에서난동을일으키기도했으며 1624 년 ( 인조 2) 에발생한이괄의난에이들이다수참여하여큰사회적문제가되었다.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23 협인을항왜호에만오직올린정책적의도를읽을수있겠다. 이들협인들은항왜호의농지를경작하는농업노동력으로서의역할을하였을것으로생각된다. 물론솔인들의경우도사회경제적처지나나이등을고려해볼때협인과노동성격이비슷하기때문에협인과마찬가지로항왜호의농업노동력의역할을했을것으로여겨진다. 실제이들협인과솔인들은연령상으로도농업노동력에적합한 10대중반 ~50대중반으로구성되어있다. 결국, 이들협인과솔인들은항왜호의作人역할을했을것으로추정된다. 맺음말 현재까지확인된협인이기재된가장이른호적가운데하나인 1609년 ( 광해군원년 ) 의 ꡔ 蔚山府戶籍大帳 ꡕ에기재된협인의성격이나역할이무엇인지검토해보았다. 특히 1609년의 ꡔ울산부호적대장ꡕ 에는다른호와달리오직降倭戶에게만협인을등재하고있다는점은주목된다. 조선은건국초부터국내와국외정치의조속한안정을추구하기위해왜인과야인에대해가능한교린정책을취했다. 특히왜인의경우는고려후기이래가장큰사회ㆍ외교적문제였다. 따라서왜인들이귀화할경우파격적인우대를하여토지, 가옥, 식량, 의복등의무상지급은물론공로에따라관직을제수하였다. 이와같은국초이래정책의연장선속에서왜란이발생하자왜병들에대한귀화정책이적극논의되고실행되었다. 이때도조선건국초와마찬가지로왜병들이귀화할경우토지, 가옥, 식량등의무상지급과공로에따라관직도제수하는등각종우대정책으로인해많은왜병들이투항하였다. 조선정부는항왜들을경상도, 함경도, 황해도, 강원도, 충청도등여러지역에나누어거주하게하고이들의조속한조선정착을위해다양한정책을시행하였다. 이처럼왜란이후각지역에분치된항왜의구체적인존재형태를살필수가장이른시기의자료로주목되는것이바로 1609년 ꡔ울산부호적대장ꡕ
124 지역과역사 40 호 이다. 특히여기에는항왜의기재뿐아니라귀화야인의기재사례 21건도확인되기때문에이들의존재형태를상호비교해볼수있다는측면에서주목된다. 1609년울산호적은부내면과내상면일부, 동면의農所里ㆍ柳等浦里, 북면의凡西里, 남면의大代如里ㆍ靑良里ㆍ溫陽里, 서면의熊村里, 그리고임내彦陽縣川南里등모두 6개面과 7개里가기재되어남아있다. 이가운데북면의범서리, 남면의청량리ㆍ온양리, 서면의웅촌리의 3 개면 4개리에서주호를이룬 11명의항왜와항왜협인 1명하여총 12명의항왜가호의기록을찾아볼수있다. 이들항왜는같은統으로작통되고해당마을의호가운데말미에등재되었다. 이러한사실은항왜호가마을의특정지역에모여거주하였음을의미한다. 그리고 1609년의울산호적에는항왜인뿐아니라向化野人도등재되어있다. 호적대장에서기록이확인되는향화야인은총 20호이고직역으로서향화를기재한향화야인수는 33인이다. 향화야인이거주했던지역은읍내리, 동면농소리와유등포리, 그리고남면온양리의 4개리에나누어거주하고있다. 항왜인과향화야인의거주지에서주목되는점은두집단의거주面里가거의겹치지않다는것이다. 조선정부는항왜인과향화야인의관리와감독의편의를위해이들을격리분산배치시켰다고생각된다. 조선정부는귀화왜인과야인들에대한관리와감독에상당한심혈을기울였음을볼수있다. 항왜호의가족구성과지역내의점유율을검토한결과다음과같은특징을보였다. 항왜를주호로하는항왜호는 11호였는데, 이들항왜호는주호부부외에협인, 솔인등비혈연솔거인으로구성되어있었다. 그구성원은 11명주호의처 12명, 자녀 1명, 그외비혈연관계의협인 11명, 솔거인 3명, 노비 1명으로, 결국항왜 11호는혈연관계 24명과비혈연관계 21명하여총 45명의구성원으로이루어졌다. 따라서항왜호의평균가족원수는 4.1명 (45명 /11호 ) 정도이며, 그가운데비혈연솔거인의수가가족구성의 47%(21명 /45명 ) 정도를차지할정도로적지않은비중이었다. 항왜호는주호부부와자녀 1명을둔 1호를제외하고는대체로부부에비혈연솔거인으로구성되고있다. 향화야인호의평균가족원수가약 2.4명으로서거의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25 부부로만구성되고있었다는것과비교해볼때항왜호의경우는비혈연솔거인이많았음을알수있다. 그리고 1609년울산지역에서항왜관련호는전체주민 (3,249 명 ) 의 1.4% 정도이며, 호수규모로는전체호수 (1,130 호 ) 의 1.2% 정도를차지하였다. 특히, 북면범서리와남면청량리의경우는항왜관련호가전체호구에서차지하는비중이제법높았다. 범서리는지역전체인구의 9.7%, 호수의 11.3%, 남면청량리는지역전체인구의 5.4%, 호수의 5.1% 를항왜관련호가차지하고있었다. 다음으로, 1609년울산호적에보이는항왜주호 11명의협인등솔거인의보유실태를검토한결과몇가지양상을보였다. 우선, 항왜호는크게협인을보유한경우와그렇지못한경우로나누어볼수있었다. 그리고협인을보유한경우에도주호의가내에솔거인으로보유한경우와별도의독립호로보유한경우의두가지형태를보였다. 또한항왜주호가협인을비록보유하지못했지만비혈연솔거인을보유한경우와비혈연솔거인조차보유하지못한경우의두가지형태를보였다. 결국, 항왜주호 11명가운데 6명은협인을보유하고있었으며 3명의경우는협인대신비혈연솔인을거느리고있었다. 하지만항왜馬汝武와高小乃 2명의경우는협인이나비혈연솔인어느것도보유하지못하였다. 이들은왜협인이나솔인을보유하지못했는지에대해서는알수가없다. 다만추측컨대이들도애초에는조선정부의향화인우대책에의해식량, 토지, 가옥등의지급과함께협인이나솔인을보유하였을것으로생각된다. 하지만이후협인의도망이나항왜호의다른지역으로의이사등특별한사유로인해해당식년당시에는보유하지못한것은아닌지생각된다. 울산호적의항왜호와함께등재된비혈연협인과솔인의성격에대해구체적으로검토하였다. 조선후기에협인으로구성되는가족은원칙적으로호적에등재하지않고호적과는별도로 ꡔ 挾戶成冊 ꡕ에기재하게되어있었던것으로생각된다. 그런데현재까지알려진호적대장가운데협인이가장많이기재된 ꡔ 彦陽縣戶籍大帳 ꡕ의검토결과에의하면, 언양에서협인을호적에등재한것은이지역국역체제의특수성으로인해호역에비해군역의
126 지역과역사 40 호 부담이너무과중했기때문으로보았다. 그런데조선정부가울산호적의항왜호에협인을등재시킨것은주호의군역부담이나호역등을경감시키기위한차원은아닌것으로생각된다. 왜냐하면항왜호의경우는조선의민들과달리우대책에의해호역과전세등을면제받고있었을뿐아니라울산호적의항왜들다수는조선정부로부터관직을수여받았기때문에조선의관료와마찬가지로군역의부담이없었다. 그렇다면조선정부가다른호에는두지않았던협인을항왜호에만둔이유가별도로있었을것이다. 그이유를확인하기위해항왜호에기재된 22명의비혈연협인과솔인들의직역과나이, 가족구성등을살펴보았다. 협인 12명의경우를보면, 부부 2인가족 (6명) 과자신만의 1인가족 (6명) 이며, 직역은 5명 ( 正兵 2명, 公私奴 3 명 ) 만있고 7명은없다. 그리고연령대의구성은 10대가 1명, 30대가 8명, 40대가 4명, 50대가 4명이었다. 다음으로솔인 4명의경우를보면, 모두자신만의 1인가족을형성하고있으며私婢 1명을제외하고는 3명은직역이없다. 그리고연령대구성은 10대 1명, 20대 2명, 50대 1명으로구성되었다. 이들협인과솔인은가족구성이나직역등을볼때사회경제적처지가열악하여자립적소경영의주체가될수없었을것이다. 하지만, 이들의연령대는 10대중반 ~50대중반으로구성되어있어서농업노동을수행하기에는적당한나이였다. 한편, 항왜주호 11명의가족구성은협인과솔인을제외할경우부부 2 인가족으로만주로구성되어농업노동력이부족하고조선의농업사정에도익숙하지않기때문에조선정부의희망과달리항왜들이조속히거주지에쉽게안착하기가쉽지않았을것이다. 여러요인으로인해이들항왜들이조선사회에안착하지못할경우여러가지사회적문제를일으킬여지가많았다. 따라서조선정부에서는이들항왜들의조속한안착을위해농지나종자, 농구등의물질적지원이외에도농업노동력이나기술의지원이필요했을것으로생각된다. 이러한여러가지상황을고려해볼때조선정부에서다른호에는올리지않았던협인을항왜호에만등재한정책적의도를읽을수있겠다. 이들협인과솔인들은항왜호의농지를경작하는농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27 업노동력으로서의역할, 즉항왜호의作人역할을했을것으로추정된다. 이처럼 1609년의울산호적대장에보이는협인의주요노동성격이나역할을항왜주호의작인으로규정할때조선후기의사회변화속에다수발생하고있던협인의유래나노동성격등을이해하는데많은시사점을얻을수있다고생각된다. 참고문헌 김희호ㆍ이정수, 조선후기주호와협호의관계 : 신분과노동특성을중심으로 ꡔ경제사학 ꡕ 55, 2013. 김희호ㆍ이정수, 조선후기협호와고공의비교 ꡔ경제사학 ꡕ 57, 2014. 박용숙, ꡔ조선후기향촌사회사연구ꡕ, 혜안, 2007. 손병규, ꡔ호적, 1606-1923ꡕ, 휴머니스트, 2007. 송수환, 왜란직후의울산소모군 1609년울산부호적대장을중심으로 - ꡔ역사와경계ꡕ 96, 2015. 양흥숙, ꡔ울산부호적대장ꡕ 을통해본조선후기降倭의존재와정착 ꡔ한일관계사연구ꡕ 34, 2016. 李世永, 18ㆍ19세기兩班土豪의地主經營 ꡔ 韓國文化 ꡕ 6, 서울대학교규장각한국학연구원, 1985. 李世永, 대한제국기의호구변동과계급구조 ꡔ역사와현실ꡕ 7, 1992. 李榮薰, ꡔ 朝鮮後期社會經濟史 ꡕ, 한길사, 1988. 李榮薰, 朝鮮後期農民經營에서主戶 - 挾戶關係 ꡔ 朝鮮後期社會經濟史 ꡕ, 한길사, 1988. 이옥빈, 조선시기북방계향화인의원거주지와이주시기 1609년울산호적을중심으로- ꡔ역사와경계 ꡕ 96, 2015. 이정수ㆍ김희호, 조선후기협호의존재형태와노동특성 ꡔ역사와경계ꡕ 83, 2012. 이정수ㆍ김희호, 언양호적대장협호의존재형태와노동특성 ꡔ지역과역사 ꡕ 32, 2013. 이정수ㆍ김희호, ꡔ조선후기노동양식연구 奴婢, 雇工과挾戶의비교 ꡕ, 민속원, 2016.
128 지역과역사 40 호 林學成, 조선후기漢城府民의戶口文書에보이는 挾戶 의성격 ꡔ 朝鮮史硏究 ꡕ 7, 1998. 林學成, 조선후기경상도彦陽지역 主 - 挾 型家戶의族的결합양태 1861 년도彦陽戶籍의사례분석 - ꡔ국사관논총ꡕ 100, 2002. 임학성, 17세기전반戶籍자료를통해본귀화野人의조선에서의생활양상 蔚山戶籍 (1609) 과海南戶籍 (1639) 의사례분석- ꡔ고문서연구 ꡕ 33, 2008. 장경준, 언양호적대장의挾戶와호당구수 ꡔ역사와세계 ꡕ 44, 2013. 정진영, 18세기호적대장 호 ( 戶 ) 와그경제적기반 1714년대구조암방 ( 租岩坊 ) 호적을중심으로- ꡔ역사와현실ꡕ 39, 2001. 정진영, 조선후기호적 호 의編制와성격 ꡔ대동문화연구ꡕ 40, 2002. 정진영, 조선후기 호 의새로운이해와전망 ꡔ대동문화연구ꡕ 42, 2003. 하우봉, 조선전기대외관계에나타난自我認識과他者認識 ꡔ한국사연구ꡕ 123, 2003. 한문종, 임진란시기항왜의투항배경과역할 ꡔ인문과학연구 ꡕ 36, 2013. 한영국, 朝鮮後期의挾人ㆍ挾戶 彦陽戶籍大帳의挾人口를中心으로- ꡔ 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ꡕ, 正音文化社, 1985. 久間健一, ꡔ 朝鮮農業の近代的樣相 ꡕ, 目黑書店, 1935. 山內民博, 十七世紀初慶尙道蔚山府戶籍大帳と降倭 ꡔ 日韓相互認識 ꡕ 2009-2, 일한상호인식연구회, 2009.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2017.02.28 2017.04.09 2017.04.27
ꡔ 울산부호적대장 ꡕ 에보이는협호의노동성격검토 129 Abstract Review of the Labor Charicteristics of Hyupho in the Register Records of Ulsan Lee, Jung-Soo During the Japanese invasion of Chosun, the Chosun government induced a large number of anti - It is worth noting that in 1609, it was the Register Records of Ulsan, In this case, not only the anti-warfare but also the examples of naturalization artists can be identified, so that their existence can be compared with each other. In 1609, the Ulsan family had 6 planes and 7 villages. Among them, there are 11 anti-war and anti-war communicators in the 4 villages on 3 sides, and 12 anti-aids records are found. In particular, in 1609, Register Records of Ulsan unlike the other one, a large number of people were registered only in the Lower House, and I wonder why and why. These 11 anti-numbers were composed of 45 members including 24 blood relatives and 21 non-blood relatives. The twenty -two non- blood - related persons listed in the Anti - Cancellation Law were twelve associates, six associates and four soles. These societies and the Solein were poor in socioeconomic status and lack of self - management as a subject of small - scale management. However, their ages ranged from mid-teens to mid-50s, so they were at a suitable age for agricultural labor. However, the family structure of the 11 anti-aggression families, excluding the association and the Solin, is composed mainly of only two family members and lacks the agricultural labor force and is not familiar with the agricultural situation of the Chosun Dynasty. It would not have been easy to settle easily. If
130 지역과역사 40 호 these anti - deniers were not able to settle in Chosun society due to various factors, there were many opportunities to cause various social problems. Therefore, it seems that the Chosun government needed the support of agricultural labor force or technology in addition to material support such as farmland, seed, and agriculture s tool for the prompt settlement of these anti - Considering these various circumstances, we can read the policy intention that the Choson government raised only the Hangul in the No. In the end, it is presumed that these negotiations and the Solin played a role as an agricultural labor force cultivating farmland of Hanghui household, that is, an anti. Keywords : Register Records of Ulsan, Hanghui, Hyupho, Solin, Labor Characteristics
18세기 관청 하급실무직의 貢人權 운영 사례 연구 131 ꡔ지역과 역사ꡕ 40, 2017.4, 131~162쪽 http://dx.doi.org/10.19120/cy.2017.04.40.131 18세기 관청 하급실무직의 貢人權 운영 사례 연구 52)김 미 성* 머리말 Ⅰ. 관청 하급실무직의 雇立과 상업활동 Ⅱ. 직임자의 貢人權 창설 사례 Ⅲ. 貢人의 직임자 責立 사례 맺음말 국문초록 이 논문은 관청 하급실무직 중 貢人化한 사례들을 확인하고 이를 유형별로 정리하였 다. 身役으로 운영되던 관청 하급실무직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고립제로 운영되기 시작 하였다. 또 조선후기에는 재정문제의 해결을 위해 각 관청이 상업활동에 참여하였고 하 급실무직들은 그 실무를 담당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급실무직에는 상업세력이 유입 하였고, 특히 물자 출납을 관리하던 직임은 이권화하였다. 일부 하급실무직은 관수물자 의 조달과정에서 貢人과 업무적으로 유사성을 지녔기 때문에 해당 직임이 貢人化하는 사례도 나타났다. 하급실무직이 貢人化한 첫 번째 경로는, 본래의 직임자가 공인권을 창설하여 운영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처음부터 官衿貢物이 부여된 직임자 유형, 官衿 貢物이 없는 직임자가 作貢을 통해서 貢人化한 유형, 貢人의 해산으로 인하여 해당 직 임자에게 貢人의 업무가 이속된 유형이 포함된다. 하급실무직이 貢人化한 두 번째 경로 는, 貢人이 해당 직임자를 책립하며 하급실무직 자리에 공인세력이 유입한 것이다. 貢 人의 奴子로서 濟用監庫直 8명을 차정한 사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와 같이 물자출 납과 관련된 하급실무직이 貢人의 일원으로서 활동하였던 사례는, 貢人의 범주 속에 포 괄된 다양한 상인계층의 한 단면을 보여주며 동시에 관수물자의 조달과정이 전국적 상 * 연세대학교 사학과 박사과정(bellevoix@yonsei.ac.kr).
132 지역과역사 40 호 품유통구조와밀접하게연동되었음을보여준다. 주제어 : 하급실무직, 貢人, 官衿貢物, 庫直, 員役 머리말 조선후기貢人은관수물자조달의의무를근거로그권한을보장받은상인들이었다. 貢人에게주어진공식적인역할은명확한것이었지만, 상인으로서貢人개개인의성격은복합적으로해석될수있다. 貢人은대동법이전까지공물대납을주도하였던防納私主人을제도적으로추인한것이었다. 1) 다시말해, 貢人은처음부터정부의편제로인해생성된상인형태가아니었고, 사적인영역에서활동하던상인세력이제도권내로유입한것이었다. 한편, 17세기이후난전활동을본격화하던상인들은 17세기말과 18 세기초정부의市案ㆍ貢案확대조치속에서공인권또는시전을창설하였다. 2) 즉조선후기貢人은官商으로서그성격이고정된다고할수없으며, 그내부에다양한상인계층이포괄되었다고할수있다. 貢人은공물진배의의무를그기본존립기반으로하였으나, 민간의상품유통구조에근거하고있었다. 공물을조달하는과정에서도지방생산지또는전국적인상품유통구조와의관계는불가피한것이었다. 또한난전세력으로서공인권을창설한경우, 단순히관수물자의조달체계에만편입되고자한것이아니라, 공인권을배경으로민간의상품유통구조에서유리한입지를얻기위한것이었다고볼수있다. 3) 공인권이하나의이권으로서매매의 1) 이지원, 16 ㆍ 17 세기전반貢物防納의構造와流通經濟的性格 ꡔ 李在龒博士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ꡕ, 한울, 1990. 2) 吳美一, 18 ㆍ 19 세기새로운貢人權ㆍ廛契창설운동과亂廛活動 ꡔ 奎章閣 ꡕ 10, 1987.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33 대상이되었던사실 4) 과한사람이여러개의공인권을경영한사례 5) 등은공인권이상업이윤을추구하는하나의수단으로인식되었음을보여준다. 공인권의창설주체가다양화하고공인권의매매가성행하였던가운데, 각관청의상업참여도주목된다. 조선후기에는 務本補末論 적정책아래각관청들이재정부족문제의타개책으로상업활동에참여하고있었다. 6) 관청은직접상품을매매하거나상인에게자금을공급해주고상행위를대행시키기도하였다. 이러한가운데조선후기관청은상인들과더욱더밀접한관계에놓이게되었다. 관청과상인의접점에는각관청의하급실무직들이존재하였다. 이서층이나경아전등으로지칭되는하급실무직에대해서는그운영방식과성격변화가기존연구성과들에서밝혀졌다. 하급실무직이급료가없는職役으로서운영되다가 17세기이후고립제로전환되었고 7) 각직임이이권화하며吏額이증가했던것이드러났다. 8) 이와더불어각직임이세습화하였으 3) 공인권소유자의계층을중인으로분석한연구에서는이들이공인권을소유한목적이경제적이유보다는직무상의이유에있었다고해석하기도하였다. 이때공인은상인으로서의자각이없었던것으로해석되었다 ( 德成外志子, 朝鮮後期貢納請負制와中人層貢人, 高麗大學校博士學位論文, 2001). 그러나 貢物之役 의담당자로서의貢人의역할을인정한다고하더라도, 貢物의조달과정에서민간상품유통경제와전혀무관했다고는보기어려울것이다. 또한상업이윤을추구하던상인들이공인체제속에유입했던사정을감안해볼때, 공인의역할이직무내에만국한되며민간대상의거래가전무했다고는보기힘들다고생각한다. 4) 이정수ㆍ김희호, 18 19 세기流通資産의매매를통해본商業構造변화 ꡔ 朝鮮時代史學報 ꡕ 43, 2007. 조영준, 조선후기여객주인및여객주인권재론 : 경기ㆍ충청장토문적의재구성을통하여 ꡔ 잡담과빙고 ꡕ, 소명출판, 2013. 5) 吳美一, 18 ㆍ 19 세기貢物政策의변화와貢人層의변동 ꡔ 韓國史論 ꡕ 14, 1986. 6) 白承哲, 朝鮮後期官廳의商業活動과그構造 ꡔ 韓國史硏究 ꡕ 106, 1999 ; ꡔ 朝鮮後期商業史硏究 - 商業論ㆍ商業政策 -ꡕ, 혜안, 2000. 7) 姜萬吉, 朝鮮後期雇立制發達 - 差備軍과造墓軍等의雇立化를中心으로 ꡔ 韓國史硏究 ꡕ 13, 1976 ; 官業에서의賃金勞動制發達 (2) - 皀隷ㆍ羅將을中心으로 ꡔ 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ꡕ, 한길사, 1984. 신해순, 17 세기전후동반소속하급京衙前制度의변화 - 書吏를중심으로 - ꡔ 韓國史學報 ꡕ 40, 2010. 8) 張東杓, 18 ㆍ 19 세기吏額增加의현상에관한硏究 ꡔ 釜大史學 ꡕ 9, 1985.
134 지역과역사 40 호 며, 9) 하나의신분층을형성하여중인층의주요구성원이되었던것으로파악되고있다. 10) 한편, 하급실무직아래대규모의役軍들도모립제또는고립제로운영되기시작하였으며, 11) 요역분야의공물화와관련貢契의성립사례도다수나타난다. 12) 조선후기상업사연구에서관청하급실무직은, 상인과관권의관계를설명하는가운데언급되었다. 시전의대표적인특권이었던금난전권은삼법사의禁吏나평시서관원의규찰을근거로행사되었던것으로나타났다. 13) 또하급실무직으로특정하지는않았지만, 시전의국가의존성을부각한연구를통해시전이관리들에게人情을비중있게지출하고있었던관행이드러났다. 14) 한편, 훈련도감의군병은市牌를발급받아상업활동을하며난전을일으켰던주범으로주목되기도하였다. 15) 이러한가운데조선후기상업사연구에서관청하급실무직의성격은명확히정리되지는않았으나, 대체로중간수탈자나봉건특권의구체적인사례로서파악되는경향이있었다. 그러나조선후기관청하급실무직과상인의관계는고립제아래하급실무직에유입된사람들의성격, 하급실무직의경제적이권, 관청의상업참여도, 9) 원재영, 朝鮮後期京衙前書吏硏究 -19 世紀호조서리의사례를중심으로 - ꡔ 朝鮮時代史學報 ꡕ 32, 2005. 10) 姜明官, 朝鮮後期京衙前社會의變化와閭巷文學 ꡔ 大東文化硏究 ꡕ 25, 1990. 조성윤, 조선후기사회변동과행정직중인 ꡔ 韓國近代移行期中人硏究 ꡕ, 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 1999. 11) 윤용출, ꡔ 조선후기의요역제와고용노동 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12) 김동철, 18 세기坊役制의변동과馬契의성립및都賈化양상 ꡔ 한국문화연구 ꡕ 1, 1988 ; 18 세기氷契의창설과도고활동 ꡔ 釜大史學 ꡕ 19, 1995. 고동환, ꡔ 朝鮮後期서울商業發達史硏究 ꡕ, 지식산업사, 1998. 13) 고동환, ꡔ 조선시대시전상업연구 ꡕ, 지식산업사, 2013. 14) 須川英德, 시전상인과국가재정 : 가와이문고소장의綿紬廛문서를중심으로 ꡔ 조선후기재정과시장 - 경제체제론의접근 -ꡕ,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Owen Miller, 시전 - 국가간거래와 19 세기후반조선의경제위기 : 綿紬廛문서를중심으로 ꡔ 조선후기재정과시장 - 경제체제론의접근 -ꡕ,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15) 卞光錫, ꡔ 朝鮮後期市廛商人硏究 ꡕ, 혜안, 2001.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35 공인권창설주체의확장등의사정을종합적으로검토한가운데재분석될필요가있다. 17세기이후관청하급실무직의고립제화와공인권창설의증가는서로별개의변화과정으로진행되었다. 그러나관수물자의조달구조라는측면에서하급실무직과공인은밀접한관계에놓여있었으므로, 각각의성격변화는그상호관계의성격변화도야기하였다. 이논문에서는관청하급실무직과공인의접점에서발생한변화의한단면으로서특정하급실무직이貢人化한사례를확인하고자한다. 이는조선후기貢人계층의복합적인성격을이해하고, 貢市人들이진배과정에서관청하급실무직들과맺었던관계의성격을이해하는데하나의근거가될수있을것이다. 나아가이는조선후기상품유통구조속에서貢人과관청하급실무직이차지했던입지와성격을재인식하는토대가될수있을것이라생각된다. 이논문에서는특히 ꡔ 貢弊 ꡕ에공인의일원으로등장하는하급실무직들을중심으로, 공인적성격을지녔던하급실무직의사례와유형을살펴보고자한다. ꡔ 貢弊 ꡕ는 1753년공시인순막때貢人의호소내용과그에대한비변사의처결내용을기록한자료이다. 다른시기의공시인순막내용도 ꡔ 備邊司謄錄 ꡕ이나 ꡔ 承政院日記 ꡕ 등에기록되어있지만, ꡔ 貢弊 ꡕ는유독공인과시전상인을구분한가운데공인으로분류되는이들의기록만을묶어정리하고있다. 이에 ꡔ 貢弊 ꡕ에등장하는이들은당시조선정부가貢人의일원으로서파악했던대상이라전제할수있다. 또한 ꡔ 貢弊 ꡕ에는다른공시인순막자료에나타나지않는공인들도포함하고있다. 물론 ꡔ 貢弊 ꡕ는 1753년에한정된일회성자료라는점에서한계가있지만, 당시존재했던다양한貢人의유형을확인할수있는근거자료가된다는점에서사료적가치가있다. 이에 ꡔ 貢弊 ꡕ를주자료로삼아공인의일원으로서활동하였던하급실무직사례의단서를얻되, 해당직임자나貢人, 그리고양자의상호관계를엿볼수있는관련자료들을함께참고하고자한다.
136 지역과역사 40 호 Ⅰ. 관청하급실무직의雇立과상업활동 서리ㆍ아전등의말단직책들은조선전기까지身役으로운영되었다. 이들의職役은役의하나로여겨졌으므로급료가지급되지않았고, 이에이들은부수적인이익을얻기위해각종폐단을일으켰다. 조선후기에이르면이들서리ㆍ아전직의부역제가무너지고고립제화가진행되었다. 16) 두차례의전란으로서리ㆍ아전층의수가급감하고그인원을모집하는데어려움을겪었던조선정부가종전의부역제방식을포기하고일정한요포를지급하여고립하는방식으로전환하였던것이다. 여기에는 17세기대동법의실시로요역제가고립제화하던추세도반영되었다. 17) 임진왜란중이었던 1593년 ( 선조 26) 에는서리에게요포를지급하는규정이마련되었고, 18) 병자호란의영향아래 1623년 ( 인조즉위년 ) 에는조예역에도요포를지급하는고립제가도입되었다. 19) 조예뿐아니라나장도고립화되었으며, 궐내외의차비군과조묘군등도고립화되었던것으로나타난다. 20) 18세기에이르면고립제가궐내외각관청에서일반화되었다. 1781년 ( 정조 5) 에는병조참의尹冕東이상소문에서 궐내각처고립군은모두동서곳곳에서온오합지졸 이라고하였는데, 이때궐내에서고립되고있었던대상은中官 ( 내시부소속 ) 과掖隸 ( 액정서소속 ), 諸色雇軍등이라고하였다. 21) 이를통해왕명의출납과관계되었던내시부나액정서등의부서에서도직역의고립화가일반적으로이루어지고있었음을확인할수있다. 18 세기후반에는고립군에게지급하는雇價도정액화되어있었던것으로나타난다. 1778년 ( 정조 2) 경궐내고립군에게는매달 4냥씩지급하는것이기 16) 신해순, 앞의논문, 2010. 17) 강만길, 앞의논문, 1984. 18) 신해순, 앞의논문, 2010. 19) ꡔ 承政院日記 ꡕ 효종 3 년 1 월 15 일 ( 姜萬吉, 앞의논문, 1984 에서재인용 ). 20) 강만길, 앞의논문, 1976. 21) ꡔ 正祖實錄 ꡕ 권 12, 정조 5 년 10 월 28 일.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37 본예가되었던것으로나타나며, 22) 1788 년 ꡔ 度支志 ꡕ에서는각아문의吏隷별로지급되는급료를명시하고있었다. 23) 각관청하급실무직에서의고용관행은법제화하였다. ꡔ속대전 ꡕ에서는경아전중皂隷에대해서는기존에지방에서뽑아올리던것을혁파하고서울에서급료를주고고용 [ 給價雇立 ] 하게하였고, 이를使令이라고통칭한다고하였다. 24) 또한선혜청과호조에서급료를주는경우와해당관청에서급료를주는경우를나누어규정하였다. 25) ꡔ대전통편ꡕ 에서는병조내에기보병의保布를관리함과동시에궐내외각관청의雇立을관장하는전담부서로서二軍色을지정하기도하였다. 26) 각관청의하급실무직이부역제가아닌고립제로운영되었다는것은, 채용의개방성이확대되었음을뜻하는것이었다. 조선전기까지경아전서리의채용은이조에서일괄적으로관할하며 3년에한번씩取才를통해선발하여빈자리를충원하는방식으로진행되었다. 그러나 17세기이후에는各司의官長이선발권을가지고수시로빈자리를채워나가는방식으로변화하였다. 27) 이때선발대상은서울거주민이었다. 28) 즉, 원칙상으로는해당직임에누구나원한다면임용될수있었던것이다. 그과정에서양반관료의수하에있던傔人의부류가청탁과주선을통해서리로진출하는사례가두드러졌다. 29) 한편, 조선후기농민층분화로인해발생된농촌유리민들중일부는생계수단을찾아중앙및지방각아문으로유입또는투탁하였기도하였다. 30) 이는하급실무직이부역제로운영되던이전의사정과차별되는부분이다. 1781년에궐내고립군의문제에대해상소하였던윤면동은예전 22) ꡔ 正祖實錄 ꡕ 권 6, 정조 2 년 9 월 10 일. 23) 원재영, 앞의논문, 2005, 254~257 쪽. 24) ꡔ 續大典 ꡕ 권 4, 병전京衙前. 25) ꡔ 續大典 ꡕ 권 4, 병전京衙前. 26) ꡔ 大典通編 ꡕ 권 1, 이전京官職正二品衙門. 27) 원재영, 앞의논문, 2005. 28) ꡔ 續大典 ꡕ 권 1, 吏典京衙前錄事. 29) 원재영, 앞의논문, 2005. 신해순, 앞의논문, 2010. 30) 장동표, 앞의논문, 1985.
138 지역과역사 40 호 의각색직역자들은출신이명확하였던데반해, 당시의고립군들은출신이불명확한점에서근본적인문제가있다고하였다. 31) 이와같이채용의개방성이확대됨에따라각관청의하급실무직에는상업이윤을추구하는사람들의유입이확대되었다. 재상가의傔人이청탁을통해서리가되는경우나庫直, 軍校, 吏胥의자리가빌때마다청탁이성행하였던양상 32) 등은모두해당직임을통해경제적이권을얻으려는의도에서비롯된것이었다. 이에재물만을탐하는이들이관직에진출한다고도하였다. 33) 특히조선후기정부가재정부족으로인하여관청의貿販활동을허용ㆍ권장함에따라, 관청은직접상품을매매하거나상인에게자금을공급하며殖利하기도하였다. 34) 이때관청의무판활동은別將, 監官, 軍官, 差人등으로지칭되는하급관리가담당하였다. 35) 이와같이관청의하급실무직들이합법적으로상업에직접참여하게되었던사정과하급실무직이고립제로운영되기시작한사정이서로맞물렸다면, 하급실무직에상업세력이유입하는것은자연스러운결과였을것이다. 이러한가운데특정하급실무직은이권화하며매매의대상이되기도하였다. 균역청庫直의자리가수공업자들사이에서매매의대상으로거론된사례가발견되며, 36) 19세기전반武庫仕, 戶吏, 典設司書員등의직임이매매되었던사례도확인할수있다. 37) 하급실무직의자리는세습화하기도하였다. 고립제아래급료가지급되면서해당업무와고립조건이고정화되자각직임은하나의전문적직업으로서인식되기에이르렀다. 38) 이에한가문이같은직임을세습적으로맡는경우도나타났던것이다. 39) 이처럼 31) ꡔ 正祖實錄 ꡕ 권 12, 정조 5 년 10 월 28 일. 32) ꡔ 肅宗實錄 ꡕ 권 38, 숙종 29 년 10 월 21 일 ; 권 50, 숙종 37 년 10 월 15 일. 33) ꡔ 肅宗實錄 ꡕ 권 38, 숙종 29 년 10 월 21 일. 34) 백승철, 앞의책, 2000. 35) 백승철, 위의책, 254 쪽. 36) ꡔ 左捕廳謄錄 ꡕ 6 책, 同日 ( 을사 4 월 27 일 ) 金串致年四十一. 37) 원재영, 앞의논문, 2005, 247 쪽. 38) 강만길, 앞의논문, 1984. 신해순, 앞의논문, 2010. 39) 강만길, 위의논문. 원재영, 앞의논문, 2005. 신해순, 위의논문.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39 하급실무직의자리가매매와세습의대상이되었던것은, 하급실무직이경제적이권을보장하는자리였기때문이었을것이다. 각관청의하급실무직은실무의처리과정에서행사할수있는권한과편법적으로이익을얻을수있는기회가많았으므로이권화할수있었다. 조선후기에는상품화폐경제의발전을배경으로防納이나고리대행위를통한이서층의이권이확대되고있었다. 40) 특히관수물자의출납과관련된실무직은이익을창출할여지가많았을것이다. 정약용은호조가재정아문으로서갖는성격상경제적이권이풍부하여그吏額이증가되는문제를지적하기도하였다. 41) 앞서살펴본사례에서매매의대상이되었던균역청庫直도균역청의대규모재정수입과관련한물자의출납과직결되는직임에해당된다. 1753년貢人들이호소한폐단의내용과그에대한정부의조치를기록한 ꡔ 貢弊 ꡕ에는工曹소속의甕器色, 營造司, 攻冶司등의각所掌, 선공감의員役, 제용감의員役, 혜민서의庫直, 典設司의員役등이貢人의일원으로포함되어있다. 42) 이들所掌, 員役, 庫直등은각해당관청에서물자의출납업무를담당하는실무직이었다. 특히庫直은물자출납과관련하여그권한이상당하였던것으로나타난다. 이는다음의사례를통해서확인할수있다. 1647년 ( 인조 25) 에사행단이가져가는세폐와관련된관리의죄를처벌하는문제가불거졌는데, 이때그폐단의주범으로庫直이지목되었다. 그내용은다음과같다. 정사가말하기를 밤마다세밀히생각하니모든세폐물을받아들임에있어서는庫直이점검하여물품을살피고큰소리로무슨물건은가장좋으니받아들이고무슨물건은좋지못하니받아들일수없다고하여그간받아들이고거절하는것을모두그의사에맡겼습니다. 郎廳은堂에앉아가부만을결정하며色 40) 장동표, 앞의논문, 1985, 13~16 쪽. 41) ꡔ 經世遺表 ꡕ 권 1, 地官戶曹第 2 敎官之屬 ( 장동표, 위의논문, 18 쪽각주 51 번에서재인용 ). 42) ꡔ 貢弊 ꡕ(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40 지역과역사 40 호 吏는붓을들고장부에기록만할뿐이었으니물품의좋고나쁨을어찌다알수있겠습니까? 낭청과색리는모두중죄에처하고, 물건을받아들일지여부를마음대로한고직은홀로죄를면해주니어찌이럴수가있겠습니까? ( 중략 ) 제의견을말한다면고직의죄가첫째이고, 낭청이다음이오, 색리는별로죄를범한것이없습니다 라고하였습니다. 43) 위의내용을통해, 고직이세폐물의가부를결정하는권한을행사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이에고직, 낭청, 색리중에서고직의죄가제일큰것으로평가되었고, 실제로도가장강한처벌인장 100에변방유배에처해졌다. 44) 사행단이매년가지고가는세폐는대청관계에서중요한역할을하는것이었으므로, 그필요한수량과품질에맞게해당물자를마련하는임무도중요한것이었다. 이에호조에서는그산하에歲幣色을따로두어관련업무를담당하게하였다. 위의자료에서문제가되었던庫直등도호조내에서세폐를관리하였던자들이었으므로, 45) 歲幣色에소속된실무직이었으리라추정된다. 위의자료에서나타나듯이고직은물자의출납과관리를맡은자리로서그권한이가장실질적이었다. 당시의고직은이미고립의대상이었던것으로확인된다. 1648년 ( 인조 26) 의 상평청사목 에서이미庫直의급료를상평청에서지급하여使喚한다고하고있는것이다. 46) 이렇듯고직의자리에외부인이고립될수있는조건이형성되어있었고, 그자리는물자출납과관련한권한을가진것이었으므로, 庫直의자리가이권화되는것은자연스러운일이었다. 중국으로보내는직물류와인삼과기타布貨, 염색, 직조등의일을관장하던제용감의庫直도대규모의관수물자가출납되는자리였다. 이에조선전기에도제용감고직의奴가창고속의布貨와의복등을훔쳐내어사리를 43) ꡔ 備邊司謄錄 ꡕ 11 책, 인조 25 년 3 월 10 일. 44) ꡔ 備邊司謄錄 ꡕ 11 책, 인조 25 년 3 월 10 일. 45) ꡔ 備邊司謄錄 ꡕ 11 책, 인조 25 년 3 월 11 일. 46) ꡔ 備邊司謄錄 ꡕ 12 책, 인조 26 년 6 월 13 일.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41 도모한사건이발생하기도하였다. 47) 이처럼물자출납과직결된제용감고직은 III장에서살펴보듯이 18세기貢人化되었다. 이외에도 ꡔ공폐ꡕ 에서공인의일원으로기록된하급실무직들은그업무적특성상관수물자의출납에깊이관여하고있었다는공통점을지닌다. 工曹의營造司所掌은 17세기초에도儀仗軍이착용하는각종가죽의복류의진배를담당하고있었던것으로나타나며, 48) 攻冶司所掌역시鍮器의진배를담당하면서그중일부를사대부가에사적으로빌려주는등의폐단을일으키기도하였다. 49) 이들은물자출납을관리하는직임자들로서경우에따라서는특정貢物의진배를직접담당하기도하였다. 업무적특성상이들하급실무직들은貢人과밀접한관계에놓여있었거나貢人과유사한역할을직접담당하기도하였으므로, 貢人化하는사례도발생하였던것으로보인다. 하급실무직이貢人化하는과정은두가지의경로로나누어볼수있다. 첫째, 원래해당직책을맡고있었던사람이貢人으로서얻을수있는이권을획득하고자貢人化한방향이다. 둘째, 원래상인또는貢人이었던사람이좀더안정적인이권을획득하고자해당직책에진출한것이다. 전자의경우라하더라도, 이미하급실무직이고립화한가운데애초부터이윤추구를목적으로해당직책을맡은경우도포함하리라생각된다. 다음의두장에서는하급실무직이공인화한사례를두경로로나누어살펴보고자한다. Ⅱ. 직임자의貢人權창설사례 재무관련관청에서물자의출납을담당하던하급실무직은관수물자를조달하던貢市人과업무절차상밀접한관계를맺을수밖에없었다. 특히직접물자의조달의무까지이행해야했던하급실무직의경우에는공시인과 47) ꡔ 世宗實錄 ꡕ 권 22, 세종 5 년 11 월 8 일. 48) ꡔ 承政院日記 ꡕ 2 책, 인조 10 년 4 월 8 일. 49) ꡔ 承政院日記 ꡕ 18 책, 숙종 20 년 3 월 8 일.
142 지역과역사 40 호 업무적으로유사성을지녔다. 이러한경우해당물자를조달하는역할을공인권으로전환하여그스스로공인이되는경우도발생했다. 물자출납관리직의공인화양상은다음과같은유형들로나타난다. 첫째, 하급실무직의경제적기반으로서처음부터공물권을획급한경우이다. 이는혜민서庫直의사례에서먼저확인할수있다. 1753년 ꡔ공폐ꡕ 에는혜민서공인과함께혜민서고직이공인의일원으로포함되어있다. 50) 혜민서에소속된員役은서원 1명과고직 1명이었던것으로나타난다. 51) 즉혜민서고직은혜민서창고의물자관리를도맡아하던직임이었다고할수있다. 혜민서고직이호소한내용에따르면, 그는 본래料布가없고단지官衿貢物이있다 고하였다. 52) 그가몫을가지고있는貢物이란혜민서제조가쓰는약료를책응하는것이었다. 이는元貢에해당된다고하였다. 그러나이元貢이외에도혜민서고직은五上司에 70종의약료를진배한다고하였다. 53) 이때官衿貢物 [ 官貢 ] 이란각사의員役들에게획급된공물로서, 54) 料布가따로지급되지않는員役들의밑천으로제공되었던것이었다. 55) 官衿貢物을획급받은원역들은貢物의진배를담당하였다는점에서貢人과유사한입장이었다. 그러나양자의성격은다소차이가있었던것으로나타난다. 1753년에는 원역배가공인을조종하는권한을쥐고있기때문에 응판등공인들의공통된국역에는공인만책응하고원역이빠진다는문제가지적되었다. 56) 이렇듯官衿貢物을담당하는원역들은공인과유사한역할을하였으나, 관청소속의직임을지니며공인으로부터공물을상납받는역할도여전히담당하였으므로공인과는위상의차이가있었다. 50) ꡔ 貢弊 ꡕ 권 3, 惠民署庫直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256 쪽 ). 51) ꡔ 備邊司謄錄 ꡕ 131 책, 영조 32 년 7 월 19 일. 52) ꡔ 貢弊 ꡕ 권 3, 惠民署庫直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256 쪽 ). 53) ꡔ 貢弊 ꡕ 권 3, 惠民署庫直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256 쪽 ). 54) ꡔ 備邊司謄錄 ꡕ 125 책, 영조 29 년 2 월 4 일. 55) ꡔ 備邊司謄錄 ꡕ 100 책, 영조 12 년 12 월 8 일. 56) ꡔ 備邊司謄錄 ꡕ 125 책, 영조 29 년 2 월 4 일.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43 그러나그위상의차이가반드시원역에게유리하게만작용한것은아니었다. 공인은貢物을진배하는대가로貢價를받도록되어있었다. 貢價는원칙적으로는시가에비해높게책정되는경향이있었다. 57) 반면, 官衿貢物을진배하는원역에게는별도의貢價가책정되어있지않은경우도있었던것으로나타난다. 혜민서고직의경우, 진배하는약료의값은별도로지불되지않고, 藥田에서거두는 17냥의稅錢을근거로각종약료를貿納한다고하였다. 58) 藥田은혜화문밖에있었는데, 모래와돌이많은척박한땅이었으며 10 斗落에불과하다고하였다. 혜민서고직은이약전에서겨우 17 냥의세를거두어 200냥어치의약재를貿納해야했으므로그부담이심하다고호소하였고, 비변사도이에대한변통책을마련하였다. 59) 이는혜민서고직이별도의貢價지급없이관청이나해당직임에배당된기본재원으로서해당貢物을진배하도록되어있었던사정을보여준다. 工曹攻冶司所掌의 ꡔ공폐ꡕ 호소내용에서도유사한사례가나타난다. 왕의거동때각부서의임시거처 [ 依幕 ] 에서소용되는요강, 대야, 沙用, 주전자등의유기는필요할때마다待令하는것이었는데, 이는 원래호조가 ( 값을 ) 지불 [ 上下 ] 하는물건이아니었고, 鍮色書吏가직접마련하여진배한다 [ 自備進排 ] 라고하였다. 60) 이경우는 官衿貢物 로명시되어있지는않지만, 그貢物진배형태를볼때官衿貢物의경우와유사하다. 공야사소장은호조로부터별도로받은貢價없이자체적으로공물을진배해야했고이는 白地進排 로표현되었다. 공야사소장은그진배과정에서情債가추가로들고해당물품의운송을위해負持軍雇價까지부담해야한다고하였다. 이에대한해결책으로공야사소장은해당공물을호조에서物力을받아各司에서마련하게하고그운송도각사에소속된水工軍士들에게맡겨달라고요청하였고, 비변사도이러한요청을받아들여이를定例에수록하도록하 57) 백승철, 앞의책, 2000, 278 쪽각주 212 213 번. 58) ꡔ 貢弊 ꡕ 권 3, 惠民署庫直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256~258 쪽 ). 59) ꡔ 貢弊 ꡕ 권 3, 惠民署庫直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258~259 쪽 ). 60) ꡔ 貢弊 ꡕ 권 1, 攻冶司所掌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59 쪽 ).
144 지역과역사 40 호 였다. 선공감원역의경우에도舍人司의諭書筒과이조의謚號筒, 紅牌등의물품을수시로새로만들어진배 [ 新造進排 ] 해야한다고하였다. 61) 이때에는호조에서지급하는값이있었던것으로파악되지만, 문제는새로만들어진배한물품을사용한후돌려주지않고누차거두어쓰기만하는것이었다. 재사용가능한물품을돌려주지 [ 還下 ] 않고계속새로진배하게하여貢人의부담이가중되는문제는옹기색소장의사례에서도확인된다. 옹기색소장이제향때장이나김치를담는용도의瓮子를진배하면사용후에還下받도록되어있었는데, 봉상시서원들이각색젓갈을담아야한다는핑계로돌려주지않는다고하였다. 62) 이경우들은모두해당하급실무직이직접匠人을관리하며수시의필요에따라생산물을마련하여진배하는경우에해당되었다. 1년동안진배해야하는수량이고정되어있지않았으며, 63) 그재원도별도로책정되어있지않은경우가많았다. 이는元貢과別貢의액수와貢價의규모가연단위로규정되어있었던일반적貢人의경우와는구별된다. 즉官衿貢物의진배를담당하였던하급실무직은그업무의특성상특정貢物의진배를맡아貢人의일원으로파악되기도하였지만, 일반적貢人만큼명확한공인권을보장받지는못했던것으로보인다. 둘째, 따로官衿貢物이없었던하급실무직으로서作貢을통해공인화한유형이다. 제용감원역이그한예이다. 다음은 1753년 ꡔ공폐ꡕ 에서제용감원역이공인의일원으로서호소한내용의일부이다. 一, 우리들은무릇국가의길흉대례에서담당하여거행하지않는것이없는데, 원래官衿貢物이없어서부모를봉양하고자생하는것은오로지호조別貿물종에의지합니다. 1년별무受價하는수는거의 3만냥에가까운데, 각양의물종을조비하여진배하는데浮費가허다하고, 또한責應을위해그외나머지 61) ꡔ 貢弊 ꡕ 권 2, 繕工監員役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62 쪽 ). 62) ꡔ 貢弊 ꡕ 권 1, 甕器色所掌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53~54 쪽 ). 63) ꡔ 貢弊 ꡕ 권 1, 甕器色所掌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52 쪽 ~55 쪽 ).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45 를나누어먹으며資生하고있습니다. 一, 定例한후에 1년별무受價하는수는불과만냥인데, 물종을措辦하고내외여러곳에진배하는가운데浮費가허다하니장차어찌辦得하여責應하겠습니까? 이러한까닭으로원역배가서로연계하여도피한자가 5 6인에이릅니다. ( 중략 ) 時任판서에이르러우리들의지탱하기어려운폐단을깊이이해하시어비로소이내별무례로作貢하여호조로부터上下하니이는실로우리들이結草할망극한은혜이오나모든 ( 선 ) 혜청대동례作貢에비하면오히려向隅之歎이없지않아감히이렇게仰籲하옵니다. ( 중략 ) 엎드려빌건대, 잘筵稟하여특별히대동례로作貢하게해주십시오. 64) 위와같이제용감원역들은본래국가의길흉대례에서실무전반을담당하였다. 그러나이들은원래부터官衿貢物을가지고있지는않았다고한다. 이는혜민서고직이官衿貢物을가지고있었다고말한것과차이가있다. 다만이들은호조의別貿물종을진배하는일을맡아하며이를그들의생계수단으로삼고있었다. 이에대한 1년치의受價는본래 3만냥가까이되었는데, 1749년의度支定例이후에는 1만냥으로줄어들었다. 그결과책응하기어려워져원역들중에서도망하는이들도생겼다고한다. 이러한피해를호소하며제용감원역은처음에호조別貿로作貢하게해준것도큰은혜라고하였다. 그러면서도선혜청의대동례로作貢한예에비해서는자신들이부당한대우를받고있다고하며, 자신들도선혜청대동례에따른作貢으로전환시켜달라고요청하였다. 이러한호소내용을통해, 제용감원역은作貢을통해해당물종의공인권을획득하였음을알수있다. 즉이들은본래별도의官衿貢物없이담당업무를수행하던중에관련된물종들을취급하다가그에대한공인권을차후에획득했던것이라할수있다. 作貢을통해공인화했던제용감원역은진배에대한受價의방식에서도앞서살펴본혜민서고직의官衿貢物사례와구별된다. 혜민서고직은藥田에서수세한것을밑천으로貢物을진배해야했던반면, 제용감원역은다른貢人들과마찬가지로진배의대가로써 1년 64) ꡔ 貢弊 ꡕ 권 2, 濟用監員役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90~193 쪽 ).
146 지역과역사 40 호 단위의貢價가책정되어있었다. 이를통해볼때, 官衿貢物만을운영하였던원역에비해별도의作貢을거쳐공인화한원역의경우가일반적인공인의성격에더가까웠다고할수있다. 셋째, 별도의貢人이맡고있었던공물권이해당관청으로移屬되어해당실무직이공물권을운영하게된경우이다. 工曹甕器色所掌의사례가이에해당된다. ꡔ공폐ꡕ 에서옹기색소장은 각항제향때祭酒를담는陶長盆은봉상시공인으로하여금예로부터담당하게하였는데, 정묘년쯤에貢人輩가비변사에아뢰어본조 ( 공조 ) 에移定하여 어려움을겪고있다고호소하였다. 65) 이를해결하기위해옹기색소장은해당陶長盆을예전처럼봉상시공인이진배하도록하게하거나, 만약그럴수없다면매년필요한長盆의총량을정해달라고요청하였다. 이에대해비변사는봉상시공인에게다시공물을넘기는대신, 제향때마다진배하지않고 1년치의수량을정해서진배하도록하는차선책을취했다. 옹기색소장의진배부담은陶匠의처지와도관련이있었던것으로나타난다. 66) 이를통해옹기색소장이陶匠의생산을관리하며필요한수량을충당하고있었음을짐작할수있다. 옹기색소장은위에서언급된陶長盆외에도봉상시제향때장류ㆍ김치류를담는甕子, 거동할때각관서依幕의茶母가쓰는陶器皿등의진배에도관여하였다. 67) 즉옹기색소장은각종의례에서필요한부서별옹기류의조달업무전반을실질적으로총괄하던직임이었다고할수있다. 이에일부물종은직접진배를담당하기도하였고, 별도의貢人이담당하던것까지이관받아진배하게되었던것이다. 별도의貢人이각종폐단으로인하여공인권을반납하고해산하여해당貢物이그소속관청으로이속되는경우는다른사례에서도발견된다. 진사계공인은본래호조의원역이진배를거행하던眞絲물종을 1778년에作貢하여공인이되었다가, 그운영난을이유로納券하며예전처럼다시호조에 65) ꡔ 貢弊 ꡕ 권 1, 甕器色所掌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52 쪽 ). 66) ꡔ 貢弊 ꡕ 권 1, 甕器色所掌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53 쪽 ). 67) ꡔ 貢弊 ꡕ 권 1, 甕器色所掌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53~55 쪽 ).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47 서거행해달라고호소하기도하였다. 68) 선공감의관할하에관가의보수공사를담당하였던軍契貢人도 1820년경파산할지경이되자공인을혁파하고선공감원역과雇軍으로서이를해결하자는의견도제기되었다. 69) 선공감원역은 1773년구영선군계의罷貢이논의될때에도대안으로여겨진바있으며, 70) 영선군계공인에게추가지급되는貢價를빼앗은사례도있었다. 71) 즉각관청의원역은貢物의마련과정에서담당貢人들과업무적으로접점을지니고있었으며, 따라서貢人이그해당역할을못하게될경우이를대신맡게되는직임이었다고할수있다. 이상의세가지유형을통해살펴보았듯이, 각관청庫直또는員役등의하급실무직은, 관수물자를제때마련하고그출납을관리하던직책이었다는점에서貢人과밀접한관계에위치하고있었다. 별도의貢人이지정되어있지않은貢物의경우에는官衿貢物로지정되어담당하급실무직이직접그진배업무를맡아하기도하였다. 官衿貢物이없었던하급실무직의경우에도직접作貢하여스스로공인권을창설하기도하였다. 또별도의지정된貢人이담당하던물종도해당貢人이해산되고나면담당하급실무직이이를대행하기도하였다. 이상의모든유형은본래의직임자가업무의운영과정에서효율과이익을추구하며공인권을운영한경우에해당된다. 공인권을운영했던하급실무직들은경우에따라일반공인과성격차가있기도했지만, ꡔ공폐ꡕ 에서이들은모두공인의일원으로파악되고있으며, 비변사의입장에서도이들해당員役들을 貢人 으로지칭하고있었다. 즉일부관청의하급실무직은공인과의업무적밀접성을배경으로, 그스스로공인권을운영하며貢人化하기에이르렀다. 이렇듯재무관청에서물자출납을관리하던하급실무직이단순한말단관리로서의성격에만머물지않고직접貢人의일원으로서물자조달에관여 68) ꡔ 備邊司謄錄 ꡕ 182 책, 정조 18 년 11 월 29 일. 69) ꡔ 備邊司謄錄 ꡕ 222 책, 순조 34 년 1 월 11 일. 70) ꡔ 承政院日記 ꡕ 영조 49 년윤 3 월 29 일. 71) ꡔ 承政院日記 ꡕ 정조 9 년 9 월 24 일.
148 지역과역사 40 호 하게된것은, 관수물자의조달과정이민간의상품유통경제와좀더밀접히연동되었음을의미한다. Ⅲ. 貢人의직임자責立사례 II장에서살펴본사례들은특정하급실무직이직접공인화한경우라면, 본 III장에서살펴볼사례들은공인이하급실무직자리에유입하거나영향력을미친경우에해당된다. I장에서살펴보았듯이하급실무직의고립제화로인한채용의개방성은상업이윤을추구하는이들의하급실무직진출을추동하였을것이다. 제용감고직의사례를통해이를엿볼수있다. 다음은 1753년제용감공인이제용감고직과관련한문제로호소한내용이다. 본감 ( 제용감 ) 庫直은예전에는공인의노자 [ 貢人奴子 ] 로써책립하였으므로별다른폐단이없었습니다. 정묘년 (1747) 이후提調의行下로써차정하였으므로전례에없던債錢을 1년에 60냥備給하니역시소소한폐단이많습니다. 특별히금단해주십시오. 당초본감 ( 제용감 ) 의庫直은貢人소속의 8명으로써定額하였다. 대개본감 ( 제용감 ) 에서捧하는바는대개곧공인이납부한것이므로, 공인으로庫直을책립한것은物種을깊이생각 [ 深慮 ] 한것이었다. 捧上하는가운데혹情債를捧하니그러하였다. 중간에공인이세운庫直 8명을낭청에분급하여그들로하여금使喚하게하고行下庫直을별도로세웠다 [ 別立 ]. 그러므로徵債하는폐단이날마다더해지고월마다증가하여바야흐로貢이지탱하기어려운폐단이되었으니별도로세운 [ 別立 ] 공인은하나같이모두혁파한후전 ( 례 ) 에따라공인이세운자로써庫直을삼은후에備局에보고하라는일로該監 ( 제용감 ) 에분부하라. 72) 위와같이제용감고직은 貢人의奴子 로서 8 명을차정한다고하였다. 앞 72) ꡔ 貢弊 ꡕ 권 2, 濟用監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79~180 쪽 ).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49 서살펴본혜민서의경우고직한명이그스스로공물권을운영하였던것에반해, 제용감의경우는여러명의庫直을별도의貢人조직이그일원으로차정하였다는점에서주목된다. 이러한내용은 1756년 各司員役存減別單 에서도재확인된다. 73) 이별단에서는각관청원역의구성과인원수등을기록하고있는데, 제용감고직은 8명으로규정되어있으며 貢人으로役을세운다 고하였다. 다른관청의고직이대부분 1~3 명정도이고호조나광흥창처럼물자의출납이집중되는관서인경우에만 9명의고직을두었던사정을감안해볼때, 제용감고직이 8명인것은그인원수가많은편에속한다고할수있다. 특히貢人에게맡긴다고한직임대상은제용감고직이유일하여주목된다. 이렇듯제용감고직자리를貢人에게맡기게된것은제용감과제용감고직이지녔던업무적성격을배경으로한것이다. 제용감은중국으로보내는직물류와인삼, 사여되는의복과비단을관장하며布貨, 물감, 염색, 직조등의일도관장하는관서였다. 74) 즉제용감에는대규모의물자출납이빈번하였다. 따라서제용감고직도貢物의진배과정과밀접한자리였을것으로보인다. 위의자료에서도庫直의자리에貢人소속인을책립한이유는, 제용감에서거두어들이는물품이貢人이바치는것과일치하기때문이라고하였다. 즉제용감고직은제용감공인이제용감에납품하는물품들을받아관리하던역할을하였으므로, 庫直과貢人을일체화하여일의효율성을기한것이다. 제용감공인이그奴子로책립한고직은 8명으로정액되어있었는데, 정묘년 (1747) 부터는제용감제조의行下로별도의庫直을차정하여폐단이발생하였다. 제용감제조는공인들이차정한 8명의庫直에대해 긴하지않은고직이너무많다 고하여이들을色丘로환작한후낭청에분급하여사환하도록하였다. 75) 그리고는별도의庫直을 2명세웠던것이다. 이때貢 73) ꡔ 備邊司謄錄 ꡕ 131 책, 영조 32 년 7 월 19 일. 74) ꡔ 大典會通 ꡕ 권 1, 吏典京官職從五品衙門. 75) ꡔ 貢弊 ꡕ 권 2, 濟用監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79 쪽 ).
150 지역과역사 40 호 人이차정한 8명의庫直과제용감제조가별도로세운庫直 2명은서로성격이달랐다. 특히제용감공인의입장에서는제조가별도로세운고직을 方外人 이라고표현하였다. 76) 공인은그들의奴子가고직에배정되어있었을때는그업무분담이잘되었으나, 方外人이고직에차정된이후에는부담이가중되었다고하였다. 제용감의당상관과낭관이먼곳에다녀올때양식을준비하는역할을제용감공인이과외로맡아하였는데, 이때공인은 1석의쌀을비납하고고직은그것을熟設하여역할이나누어져있었다고하였다. 이러한역할분담은공인의노자가고직에차정되어있었던경우에는자연스럽게이루어졌다. 그런데, 공인이차정한고직이폐지되고이자리를제용감제조가別立한고직이대신하게되자, 쌀 1석과熟設하는役의부담이모두제용감공인에게전가되었을뿐만아니라낭청이隨駕하는사이朝飯과茶啖까지제용감공인에게徵責하여제용감공인이그부당함을호소하였다. 77) 제용감공인이차정한고직이별도의行下庫直으로대체되어일어난폐단에는徵債의문제도있었다. 위의자료에서공인은고직에게 전례에없던債錢을 1년에 60냥備給 해야한다고하였다. 78) 일반적으로시전과공인은정부관청에대한진배의과정에서해당관청의담당관리에게일정한人情또는情債라는것을지급하는관례를행하고있었다. 이때庫直도情債지급의주대상이었다. 시기의차이가있는자료이지만 19세기후반의면주전자료에서이를확인할수있다. < 표 1> 은면주전내방물차지소에서관련관청이나관직에지급된例給또는人情등을추출하여정리한것이다. 79) 이는대체로면주전이方物명주를해당관청에진배하는과정에서看品, 坐起등의절차마다관련실무직임자들에게선물조로지급한것이었다. 人情의例給대상에 76) ꡔ 貢弊 ꡕ 권 2, 濟用監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81 쪽 ). 77) ꡔ 貢弊 ꡕ 권 2, 濟用監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82 쪽 ). 78) ꡔ 貢弊 ꡕ 권 2, 濟用監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79~180 쪽 ). 79) ꡔ 方物次知會計冊 ꡕ( 河合弘民文庫소장자료, 국립중앙도서관해외유출자료영인본古 9796-3).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51 < 표 1> 1865 년전후면주전 ꡔ 방물차지회계책 ꡕ 에서의人情지출명목 ( 제 ) 용감 ( 호조 ) 전례방 ( 호조 ) 三堂上 의정부 지불대상 명목 금액 ( 단위 : 냥 ) 長房민어가 252.00 執吏 ( 제 ) 용감좌기시우둔1 2.50 紬庫 ( 제 ) 용감좌기시예급 0.20 郎廳廳直 ( 제 ) 용감간품시예급 0.20 執吏 황입염시우둔 1 2.50 染庫황입염시예급 0.20 郎廳廳直 ( 제 ) 용감간품시예급 0.20 방물좌기시예급 24.00 庫直 ( 房 ) 濯足單 1.00 ( 池仁得 ) 母喪齋單 2.00 使喚房 濯足單 1.00 役人房 濯足單 1.00 修補單 1.00 長房 전례방간품시 7.00 執吏 전례방간품시 6.00 庫直 전례방간품시 10.00 都使令 전례방간품시 1.00 使令都中 전례방간품시 1.00 色驅 전례방간품시 1.00 使喚 전례방간품시 1.00 廳直 전례방간품시 1.00 色驅삼당상간품시 0.20 隨廳使令 삼당상간품시 0.20 濬井軍 0.30 運令軍 0.20 비고 使喚 : 2.00 負持 : 0.25 2명이므로총 5.00냥 3 명이므로총 0.60 냥 는장방, 사환방, 역인방등여러하급실무직들이포함되어있지만, 특히고직의비중이크게나타난다. 면주전이방물용명주를진배할때제용감은직접적인관할부서였던만큼, 80) 제용감의고직또는고직방, 그리고제용감紬庫와染庫의집리와낭청청직과의관계가두드러진다. 호조전례방의경우에도고직에게지급하는돈이여타장방, 집리, 사령, 색구, 사환, 청직 80) ꡔ 萬機要覽 ꡕ 재용편 5, 方物方物各種措備.
152 지역과역사 40 호 등에게지급하는돈보다그액수가훨씬컸다. 특히제용감고직방에대해서는그일원인池仁得의母喪齋에도 2냥의금액을보내고있다. 81) 이렇듯면주전에서제용감고직개개인의상례까지챙겨서부의금을지출했던사실은, 그상호관계가친밀하였음을반증하는것이다. 이와같은면주전과제용감고직의밀접한관계와人情을例給하던관행은, 당시貢物의진배를담당했던貢市人과해당관청庫直의관계가어떻게유지되었는지를보여주는사례이다. 원역배가공인을조종하는권한을쥐고 있다고한표현도 82) 이러한관행에기인한다고할수있다. 이러한관행은하급실무직의급료를보충해주는수단으로서정부에서도관행으로인정하며부정행위로문제삼지는않았다. 83) 다만그정도가지나칠때는폐단으로인식되었다. 봉상시공인도祭物를진배할때봉상시의庫子輩가본래정해진수량보다많이거두어들이는횡포에피해를호소하였다. 84) 또한봉상시공인과봉상시원역은모두情債를각사관원에냄으로써제향때의의무를면제받기도하였다. 85) 이러한情債의폐단은貢市人의진배업무를관장하던하급실무직의지위가貢市人에비해한단계위에위치했을때발생하는것이었다. 그러나위의사례에서처럼제용감庫直이貢人의奴子로책립되었을때에는, 庫直이곧貢人의소속원이었으므로, 貢人은庫直에대해서따로情債를지급할필요가없었을것이다. 그러다가貢人이아닌별도의庫直이다시존재하게되자貢人은또그들에게情債를지급하게되면서그부담을호소하였다. 즉제용감공인의입장에서는그들보다우위에있는별도의庫直과관계를유지하는것보다그들의奴子 8명으로차정한庫直을상대하는것이유리할수밖에없었다. 이는공인과고직의위상이역전되는상황이었 81) ꡔ 方物次知會計冊 ꡕ( 河合弘民文庫소장자료, 국립중앙도서관해외유출자료영인본古 9796-3). 82) ꡔ 備邊司謄錄 ꡕ 100 책, 영조 12 년 12 월 8 일. 83) 원재영, 앞의논문, 2005, 260 쪽. 84) ꡔ 貢弊 ꡕ 권 1, 奉常寺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70 쪽 ). 85) ꡔ 貢弊 ꡕ 권 1, 奉常寺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70~71 쪽 ).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53 던것이다. 1753년 ꡔ공폐ꡕ 가작성되던당시, 정부도제용감공인이책립한 8명이외에별도로세운庫直을혁파하도록조치를취하였다. 정부의입장에서도庫直의직임을貢人에게맡기는것이더효율적이라고여겼던것이다. 각관청의庫直자리는특히貢人들의공물조달업무와도밀접하였으므로이를貢人에게맡겨일원화하고자했던것으로보인다. 하급실무직에貢人이진출하게한데에는정부측의요구도작용하였다. 1793년 ( 정조 17) 각관청소속의여러貢人들은各司의下屬들이담당하던일을공인들에게책립하게하는폐단을공통적으로호소하였다. 풍저창공인은각릉제사차출시雨裝直 1 2명을, 상의원공인은각릉제사차출시負持軍 1명과供饋等第軍을, 제용감공인은입직낭청의食牀軍 1명을, 내섬시공인은각릉제사차출시卜直을, 선공감공인은선공감관원의使喚軍 1 명씩을책립하는부담을지고있다고하였다. 86) 이때責立이란責出하여雇立하는것으로이는해당인력의제공과그에대한雇價의납부까지의미하는것이었다. 貢人들이각관청의각종雇軍을책립하게된시기는, 제용감공인의경우경자년 (1780) 부터, 내섬시공인의경우신축년 (1781) 부터, 선공감공인의경우갑진년 (1784) 부터였다고하여대체로 18세기후반에시작된것으로보인다. 그러나이는각관청의최말단雇軍의경우에해당되는시기였고, 그이전부터도貢人이각관청의말단丘從이나役人을책립하던사례가발견된다. 다음은봉상시공인이 ꡔ공폐ꡕ 에서호소한내용의일부이다. 本寺 ( 봉상시 ) 제조및正은일찍이丘從이있어전례에따라立役하였는데, 郎廳에는원래丘從의명색이없었습니다. 근래에는借用한다고말하며이내잘못된규례 [ 謬規 ] 를만들었으니그어찌능히지탱하여담당하겠습니까? 각별히변통해주십시오. 本寺 ( 봉상시 ) 의사례를상세히들어보니郎廳은매員마다庫直 1명을수행하였고일찍이役人으로써丘從을定給하는일은없었다. 수년이래여러낭청 86) ꡔ 備邊司謄錄 ꡕ 181 책, 정조 17 년 4 월 12 일.
154 지역과역사 40 호 이잘못된규례 [ 謬規 ] 를만들어내었으니 [ 創開 ] 이는즉시혁파하도록한다. 거동할때및제향에차정할때雨裝直 1명은待令軍으로서定給하도록該寺에분부하여定式으로시행한다. 87) 위의내용은봉상시관원의丘從을貢人에게책립하게한경우를보여준다. 제조나정의丘從은본래부터있었던것이지만, 郎廳은규정에도없는丘從을만들어내어공인에게부담지웠던것이었다. 이외에도입직낭관의밥상을옮기는일은奉常寺軍士가거행하는일이었는데, 이를봉상시공인에게대신행하게하는문제도지적되었다. 88) 제용감공인의경우도제용감의진배역에필요한役人을책립하는의무를지고있었던것으로나타난다. 제용감공인책립하는役人은매일고정적으로立役하는長立役人 40명과수시로고용하는日日雇人으로구성되었다. 89) 이들은 < 표 1> 에서보듯이별도의役人房으로집단화되어있었으며, 진배역과관련하여면주전으로부터정례적인선물을받는입장이었던것으로나타난다. 90) 이들役人의역할은진배역에만국한되는것이었는데제용감의낭관들이이들을마치소속員役이나軍士처럼여기고과외로부리는일이많아졌다고한다. 91) 이렇듯공인이役人을책립하게된것은, 각관청이말단의노동력을고립하고雇價를지급하는책임을공인에게전가한것이었다. 공조공야사소장의경우, 각종유기를진배하는과정에서情債와負持軍雇價가추가로들어가는문제를호소한바있었다. 92) 이는공물의진배과정에는순수한공물의비용이외에도관련役人의품삯이나각처에지출되는情債등의부대비용이소용됨을보여준다. 따라서정부는재정이부족하던상황에서관 87) ꡔ 貢弊 ꡕ 권 1, 奉常寺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64 쪽 ). 88) ꡔ 貢弊 ꡕ 권 1, 奉常寺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69 쪽 ). 89) ꡔ 貢弊 ꡕ 권 2, 濟用監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82~183 쪽 ). 90) ꡔ 方物次知會計冊 ꡕ( 河合弘民文庫소장자료, 국립중앙도서관해외유출자료영인본古 9796-3). 91) ꡔ 貢弊 ꡕ 권 2, 濟用監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83 쪽 ). 92) ꡔ 貢弊 ꡕ 권 1, 攻冶司所掌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59 쪽 ).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55 청말단의세세한부대비용까지책임지기보다는이를모두貢人에게위탁하는것이효율적이었을것이다. 이는役人의고립을전담하는공인계들이형성되어있었던사정과도맥락이닿아있다. 종래까지요역제로운영되었던서울거주민의坊役이고립제로운영되기시작하면서, 각분야별坊役을貢物化하였던馬契, 氷契, 運負契, 車契, 軍契등의공인계는해당役에雇軍을책립하는역할을담당하였다. 93) 공인의입장에서는해당役을전담하는대가로貢價의수입을보장받을수있었고, 燻造契나折草廛의경우에는각각治道役과負持軍役을전담하는대가로메주 [ 燻造 ] 와담배 [ 折草 ] 에대한취급권한을얻기도하였다. 94) 한편, 정부의입장에서는해당공인에게貢價를일괄지급하고해당役을위탁함으로써雇軍개개인을상대하지않고서도해당役을운영할수있었으므로효율적이었다. 수공업자의고용에서도유사한상황이발견된다. 선공감원역은 본감 ( 선공감 ) 의工匠은액수가매우적고빈잔하며각색邊首외에는이미料布도없으므로, 閭里의私匠輩는모두본감 ( 선공감 ) 을피하여내수사및각군문에투속 한다고하였다. 95) 이를통해선공감원역이소수의官匠으로는응역하기어려워민간의私匠까지사역하고자하였으나급료가지급될수없었던상황에서는이마저도여의치않았던사정을확인할수있다. 공야사소장도역시공조의匠手가너무적어公私工匠을모집하여겨우국역에응하는데호조에서그功料마저감삭한문제를호소하였다. 96) 이는모두관영수공업의쇠퇴와민영수공업의발달을배경으로공적경로로수공업자를확보하기어려워진사정을보여준다. 이러한상황에서정부는官匠의생산력에의존하던데에서벗어나별도의貢人을지정하여수공업생산물을조달하게하였다. 97) 수공업자들에게직접공인권을부여한경우도다수발견된다. 98) 93) 각주 12 번참고. 94) ꡔ 備邊司謄錄 ꡕ 85 책, 영조 5 년 6 월 18 일. ꡔ 承政院日記 ꡕ 727 책, 영조 7 년 7 월 22 일. 95) ꡔ 貢弊 ꡕ 권 2, 繕工監員役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59 쪽 ). 96) ꡔ 貢弊 ꡕ 권 1, 攻冶司所掌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60~61 쪽 ).
156 지역과역사 40 호 이상과같이이권확대를꾀했던공인의입장과재정운영의효율의꾀했던정부의입장이맞물려, 공인이직접관청의하급실무직이나역인을책립하는사례가발생하였다. 이를통해각관청말단직에는공인세력이유입할수있었다. 이러한사례는관청하급실무직과공인의위상차이에도변화를초래했다. 종전에는貢人이관련하급실무직에게情債를지불해야했고, 하급실무직은貢人을조종할수있던위치에있었던반면, 공인이직접책립한하급실무직이나역인들은오히려공인의하위에존재하게되었던것이다. 제용감공인의奴子로책립된제용감고직은정부관청의하급직책으로서의성격보다는제용감공인에소속감을지닌채제용감공인의이권에따라제용감창고를운영하였으리라추정된다. 제용감공인은제용감원역에대해서도자신들의소관대상으로파악하고있었다. 99) 즉 18세기중반당시제용감공인은제용감고직과제용감원역의업무를모두포괄하는위치에있었던것으로보인다. 이처럼공인세력이재무관청의하급실무직에직접진출하여공인권을운영한사례는하급실무직의공인화양상중에서도좀더본격적인변화를보여준다. 정부가재무관청의물자출납관리직책까지공인의소관으로위탁하여운영하게한것은, 곧관수물자의조달업무를민간의상품유통구조속에서해결하고자한것이다. 이는상품유통구조의발달상과防納의관행을인정한가운데공납제를변용하였던대동법의취지가연속되는것이며, 공납제의운영에서유통경제의활용도를확대해나간것이었다. 97) 송찬식, 手工業構造의性格 ꡔ 한국사시민강좌 ꡕ 9, 1991. 98) ꡔ 貢弊 ꡕ 권 4, 毛衣匠 ; 권 4, 紙匠 ; 권 6, 工曹斜笠凉冠匠 ; 권 6, 花匠 ; 권 6, 破桶匠. 99) ꡔ 貢弊 ꡕ 권 2, 濟用監貢人 (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185~186 쪽 ).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57 맺음말 정부관청특히재무나물자출납과관련된관청의하급실무직들은조선후기에이르러고립화하고이권화하였으며, 나아가貢人化하는사례도있었다. 庫直이나員役등은관수물자의출납등과관련하여이권화할수있었을것으로추정되며, 각관청들이재정보충을위해진행하던상업활동에서도실질적업무를맡아하였을것으로생각된다. 또고립제는채용의개방성을확대하였고그결과하급실무직에의상업세력유입도확대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이러한가운데주요재정아문의庫直, 員役등하급실무직은공인의공물진배과정에서업무적접점이있었으므로, 하급실무직의공인화계기도마련될수있었다. 하급실무직이공인화한첫번째경로는, 해당직임자가스스로공인권을창설하여운영한경우이다. 하급실무직이공물의진배를맡았던유형은다시세가지로분류된다. 첫째, 하급실무직의경제적기반으로서처음부터官衿貢物이부여된유형이다. 이유형은 自備進排 또는 新造進排 를통해해당貢物을조달하며공물의수량과그에대한貢價가고정적으로책정되어있지않은경우가많았다. 둘째, 별도의官衿貢物이없었던하급실무직이作貢을통해공인화한유형이다. 이는업무의특성상貢物의출납을관리하며貢人과유사한역할을담당하고있었던하급실무직이해당업무를공인권으로전환하여운영한경우라할수있다. 作貢을통해공인화한하급실무직의경우다른일반적貢人과같이貢價의액수가고정적으로규정되어있었던것으로나타난다. 셋째, 별도의貢人이맡고있었던공물권이해당관청으로移屬되어해당실무직이공물권을운영하게된유형이다. 이는貢人이운영상의폐단으로해산하거나罷貢되어해당공물의진배업무에공백이생긴경우, 관련하급실무직이이를대신맡아진배하는경우이다. 이러한사례는관청하급실무직과공인이관수물자의조달이라는역할에서업무적유사성을지니고있었음을재확인시켜준다.
158 지역과역사 40 호 하급실무직이공인화한두번째경로는, 공인이해당하급실무직의직임자를책립한경우이다. 공인은순수한공물의진배의무뿐만아니라그진배과정에서情債, 役人의雇價, 관원이나사대부가가요구하는과외의업무등까지부담하는것이일반적이었다. 이는공인이호소하는폐단의주요내용이되기도하였으나, 공인은현실적으로그부담을감수하면서도공인권을유지하고자하기도하였다. 특정役人의책립을전담함으로써공인권을획득한공인계들도있었다. 한편, 정부의입장에서는재정의부족, 하급실무직의고립화, 요역제의고립제화, 관영수공업의쇠퇴등을배경으로, 貢物과國役의안정적인운영을위해관련업무를貢人에게대행시키는것이효율적이었다. 공인에게정해진貢價를일괄지급하고진배절차에소용되는세세한부대비용이나役人의고립과수공업자의확보책임까지공인에게일임한것이다. 이와같은맥락속에서특정하급실무직이나소소한雇軍을공인이직접책립하도록하는경우도발생하였다. 제용감고직 8명을공인의奴子로서차정하도록한사례는그대표적인예이다. 이는공인세력이관청의하급실무직에직접진출하여해당직임을공인화한사례를보여준다. 사례들을통해일부물자출납과관련되었던하급실무직이貢人化하여貢人權을운영하였음을확인할수있었다. 이처럼貢人化한특정하급실무직들은단순한공무집행자로서의성격에국한되지않고貢人으로서실제의물자출납과상거래에깊이관여하였던것으로파악된다. 이는관수물자의조달과정이전국적상품유통구조와좀더밀접하게연동되었음을의미한다. 이를전제한다면, 시전상인과공인이각각貢物을진배하는과정에서관청하급실무직과맺었던관계도단순히상인대관권의관계로만한정하기어려운부분이있을것이다. 물론이논문에서제시한하급실무직의공인권운영사례가모든하급실무직의성격으로일반화될수는없다. 다만, 이러한사례제시가貢市人에대한연구성과들과결합되어조선후기貢市人범주에포괄된다양한상인계층의성격을파악하고, 상인들의관계망을재검토하는데부분적으로나마참고자료가되길기대한다.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59 참고문헌 ꡔ대전통편 ꡕ, ꡔ대전회통ꡕ, ꡔ만기요람ꡕ, ꡔ비변사등록ꡕ, ꡔ속대전ꡕ, ꡔ승정원일기ꡕ, ꡔ조선왕조실록ꡕ, ꡔ좌포청등록ꡕ ꡔ 貢弊 ꡕ( 여강출판사영인본, 1985). ꡔ 方物次知會計冊 ꡕ( 河合弘民文庫소장자료, 국립중앙도서관해외유출자료영인본古 9796-3) 姜萬吉, 朝鮮後期雇立制發達 - 差備軍과造墓軍等의雇立化를中心으로 ꡔ 韓國史硏究 ꡕ 13, 1976. 姜萬吉, 官業에서의賃金勞動制發達 (2) - 皀隷ㆍ羅將을中心으로 ꡔ 朝鮮時代商工業史硏究 ꡕ, 한길사, 1984. 姜明官, 朝鮮後期京衙前社會의變化와閭巷文學 ꡔ 大東文化硏究 ꡕ 25, 1990. 김동철, 18세기坊役制의변동과馬契의성립및都賈化양상 ꡔ한국문화연구ꡕ 1, 1988. 김동철, 18세기氷契의창설과도고활동 ꡔ 釜大史學 ꡕ 19, 1995. 고동환, ꡔ 朝鮮後期서울商業發達史硏究 ꡕ, 지식산업사, 1998. 고동환, ꡔ조선시대시전상업연구ꡕ, 지식산업사, 2013. 德成外志子, 朝鮮後期貢納請負制와中人層貢人, 高麗大學校博士學位論文, 2001. 白承哲, 朝鮮後期官廳의商業活動과그構造 ꡔ 韓國史硏究 ꡕ 106, 1999. 白承哲, ꡔ 朝鮮後期商業史硏究 - 商業論ㆍ商業政策 -ꡕ, 혜안, 2000. 卞光錫, ꡔ 朝鮮後期市廛商人硏究 ꡕ, 혜안, 2001. 송찬식, 手工業構造의性格 ꡔ한국사시민강좌 ꡕ 9, 1991. 須川英德, 시전상인과국가재정 : 가와이문고소장의綿紬廛문서를중심으로 ꡔ조선후기재정과시장- 경제체제론의접근-ꡕ,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신해순, 17세기전후동반소속하급京衙前制度의변화 - 書吏를중심으로- ꡔ 韓國史學報 ꡕ 40, 2010. 吳美一, 18ㆍ19세기貢物政策의변화와貢人層의변동 ꡔ 韓國史論 ꡕ 14, 1986. 吳美一, 18ㆍ19세기새로운貢人權ㆍ廛契창설운동과亂廛活動 ꡔ 奎章閣 ꡕ 10, 1987. 원재영, 朝鮮後期京衙前書吏硏究 -19 世紀호조서리의사례를중심으로- ꡔ 朝鮮時代史學報 ꡕ 32, 2005. 윤용출, ꡔ조선후기의요역제와고용노동ꡕ, 서울대학교출판부, 1998. 이정수ㆍ김희호, 18 19세기流通資産의매매를통해본商業構造변화 ꡔ 朝鮮時
160 지역과역사 40 호 代史學報 ꡕ 43, 2007. 이지원, 16ㆍ17세기전반貢物防納의構造와流通經濟的性格 ꡔ 李在龒博士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ꡕ, 한울, 1990. 張東杓, 18ㆍ19세기吏額增加의현상에관한硏究 ꡔ 釜大史學 ꡕ 9, 1985. 조성윤, 조선후기사회변동과행정직중인 ꡔ 韓國近代移行期中人硏究 ꡕ, 연세대학교국학연구원, 1999. 조영준, 조선후기여객주인및여객주인권재론 : 경기ㆍ충청장토문적의재구성을통하여 ꡔ잡담과빙고ꡕ, 소명출판, 2013. Owen Miller, 시전- 국가간거래와 19세기후반조선의경제위기 : 綿紬廛문서를중심으로 ꡔ조선후기재정과시장- 경제체제론의접근-ꡕ,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0. 논문투고일 논문심사일 게재확정일 2017.03.12 2017.04.16 2017.04.27
18 세기관청하급실무직의貢人權운영사례연구 161 Abstract A Case Study on the Conversion of the Low-ranking Officials into Gongin( 貢人 ) in the 18th Century Kim, Mi-Sung This article presents some case studies of the low-ranking officials who became Gongin( 貢人 ). Although the low-ranking officials had worked as non-payment duties during the early Joseon period, Joseon government started to employ salaried employees at the low-ranking officials and started to pay wages to them after the two big war. In addition, the government also permitted or encouraged the government officials to participate in commercial activities to overcome the financial problem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As a result, some merchants who pursued commercial profits could take the low-raking official s seats. Especially, the positions which were related to material accounting duties became transaction objects with economic rights. Some low-ranking officials, especially the officials who were involved in the supply system of government goods, became Gongin( 貢人 ) due to the business similarity. The officials first route to become Gongin was that the low-raking officials acquired the rights to supply the particular Gongmul( 貢物 ) by themselves. It includes three following cases: the officials who was given Gwangit-gongmul( 官衿貢物 ), the officials who established the Gongin s rights afterwards without given Gwangit-gongmul( 官衿貢物 ), and the officials who got the Gongin s tasks because of the Gongin s break up. The officials second route to become Gongin was led by Gongin. In some cases, the government demanded Gongin to install their
162 지역과역사 40 호 workers in the low-ranking official s position, the eight Jeyonggam( 濟用監 ) warehouse keepers( 庫直 ), for example. This case study on the conversion of the low-ranking officials into Gongin( 貢人 ) could show an example of diverse merchants who were called as Gongin( 貢人 ). Also it means that the supply system of government goods were deeply connected with nationwide commercial structure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Keywords : Low-ranking Official, Gongin( 貢人 ), Gwangit-gongmul( 官衿貢物 ), Warehouse Keepers( 庫直 ), Wonyeok( 員役 )
ꡔ 지역과역사 ꡕ 40, 2017.4, 163~196 쪽 http://dx.doi.org/10.19120/cy.2017.04.40.163 19세기언양의가옥과거주실태 163 19 세기언양의가옥과거주실태 - 언양현상남면호적사례분석 - 100) 장경준 * 머리말 Ⅰ. 지역과분석기준 1. 지역 2. 분석기준 Ⅱ. 가옥현황 Ⅲ. 상남면의거주실태맺음말 국문초록 1906 년이후작성된신호적연구결과를토대로 19세기언양현상남면호적을분석해가옥현황과거주실태를대략살펴보았다. 19세기상남면에는많게는 395 채, 적게는 260 채의가옥이있었을것으로추정된다. 이것은호적의원호수보다 51.2~ 107.9% 가더많은수치로, 대구동상면과동하면 1.0~13.8%, 단성신등면과법물야면 0.2~5.4% 와크게대비된다. 대구호적과단성호적의원호가가옥과거의일치하는데비해언양호적의원호는상당수가그렇지않았음을보여준다. 상남면거주자들중에는가옥을소유하지못한무주택자가많았다. 이들은원호의호수와방계친족이거나협인관계를이루고있었던자들로 1813 년 203 명, 1858 년 88 명, 1861 년 168 명이있었을것으로추정된다. 이수치는전체의 33.8~51.7% 에이르는것인데, 대구동상면과동하면 1.0~12.1%, 단성신등면과법물야면 0.2~5.1% 와비교해볼때월등히높다. 상남면에무주택자가많은것은이지역이산간지대에위치한후진농업지역이어서 19세기경제위기를견딜만큼경제사정이건실하지못한, 다시말해소농경영의불안 * 부산박물관학예연구사 (kjang21@hanmail.net).
164 지역과역사 40 호 정에서말미암은것이었다. 그결과이지역의가옥소유구조는심각한양극화의모습을보이고있었다. 그리고 19세기중반이후부터는천주교박해를피해타지에서유입된인구도생겨나면서무주택자가양산될환경이더욱조성되고있었다. 주제어 : 가옥, 거주실태, 무주택자, 언양호적대장, 가옥소유구조 머리말 조선의호적제도는 1896년 < 戶口調査規則 > 과 < 戶口調査細則 > 의제정으로여러모로변화하였다. 이중주목되는변화는이전까지호구조사에서는행하지않았던가옥조사가이루어졌다는것이다. 이에따라 1896년이후작성된이른바 신호적 은가옥을己有와借有로구분해가옥형태 ( 초가또는와가 ) 별로그규모 ( 칸수 ) 를기재하고있다. 1) 이러한호구조사방식의변화로인해신호적을사례로 20세기초반거주실태를규명한연구들이다수제출되고있다. 2) 그리고그결과로당시여러 1) 1896 년 < 호구조사규칙 > 과 < 호구조사세칙 > 이후변화한호적은 광무호적, 근대호적, 신호적 등으로불리고있다. 이중광무호적은융희연간에작성된호적을포함하지못하는용어이고, 근대호적은근대의시기설정에논란의소지가있다. 따라서이글에서는이호적이구래호적과형식상ㆍ내용상변화의모습을보인다는의미에서 신호적 이라는용어를사용하기로한다. 2) 吳星, 19 세기말仁川港의戶와戶主 - 光武戶籍의檢討 - ꡔ 역사학보 ꡕ 131, 1991 ; 戶籍으로본韓末농촌지역의戶의구성 - 京畿道廣州府北方面을중심으로 - ꡔ 한국근현대사연구 ꡕ 18, 2001. 禹熙貞, 19 세기말황해도谷山郡住民의사회적실태, 인하대학교석사학위논문, 1994. 조은, 한말의가족과신분 - 한성부호적분석 ꡔ 사회와역사 ꡕ 50, 1996. 조은ㆍ조성윤, 한말의가족과신분 - 한성부호적분석 ꡔ 사회와역사 ꡕ 50, 1996 ; 조선말기서울지역첩의존재양식 - 한성부호적을중심으로 ꡔ 사회와역사 ꡕ 65, 2004. 임학성, 19 세기말호적자료를통해본安東주민의諸모습 ꡔ 震壇學報 ꡕ 98, 2004 ; 20 세기초西間島거주
19 세기언양의가옥과거주실태 165 지역의거주실태들이하나둘씩그모습을드러내고있다. 하지만신호적이작성되기이전, 즉 18~19세기거주실태는아직제대로밝혀지지않고있다. 이것은이미언급했듯이신호적이전에행한호구조사에서는가옥조사가이루어지지않았기때문이다. 그렇다면 18~19세기호적으로는당시거주실태를규명하기가불가능한것일까? 언양호적이나한성부호구문서의挾人을분석해거주실태의일단을규명한연구들에서볼수있듯이그렇지만은않아보인다. 3) 18~19세 조선인의거주양태 ꡔ 한국학연구 ꡕ 21, 2009. 손병규, 대한제국기의호구정책 - 단성배양리와제주덕수리의사례 ꡔ 대동문화연구 ꡕ 49, 2005. 장경준, 한말동래의지역민과이들의거주모습 -1908 년 ( 융희 2) 동하면호적의사례를중심으로 - ꡔ 博物館硏究論集 ꡕ 15, 2009. 유창호, 20 세기초경기도통진군 보구곶 마을사람들의생활양태 -1901 년 ( 광무 5) 통진군보구곶면호적의사례 ꡔ 역사민속학 ꡕ 40, 2012. 김현진, 1906 년漢城府北署의居住民樣相과都市性格 : 光武 10 년漢城府北署城內 8 坊戶籍을중심으로 ꡔ 인천학연구 ꡕ 20, 2014 ; 1903 년漢城府民의거주지이동에나타나는근대공간의집중과분화 - 光武 7 년漢城府戶籍을중심으로 - ꡔ 한국학연구 ꡕ 37, 2015 ; 근대초기도시가족과兒童인식의패러다임 光武 7 년漢城府戶籍을중심으로 ꡔ 서울과역사 ꡕ 91, 2015. 이정주, 19 세기말평안북도구성군家戶의구성과거주양태 ꡔ 역사민속학 ꡕ 43, 2013 ; 1905 년작성平安北道慈城郡호적검토 ꡔ 역사민속학 ꡕ 49, 2015 ; 광무연간북한지역여성의호적기재양상 ꡔ 역사민속학 ꡕ 51, 2016. 임학성, 20 세기초 간도 지역에거주한조선인에대한호구조사와그의미 ꡔ 한국학연구 ꡕ 30, 2013 ; 1901 년작성北靑戶籍과北靑郡民소요사건 ꡔ 한국사학보 ꡕ 53, 2013 ; 20 세기초서간도거주이주한인들의생활양태 - 초산강북호적 (1902) 자료의분석사례 ꡔ 동북아역사논총 ꡕ 46, 2014. 權眞珠, 戶籍자료를통해본대한제국기충청도지역의주민실태, 인하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4. 차인배, 광무년간한성부호적을통해본근대경찰간부의실태 - 경무청의칙임및주임관을중심으로 - ꡔ 서울과역사 ꡕ 91, 2015 ; 광무년간한성부호적을통해본순검의거주와생활양상 ꡔ 역사민속학 ꡕ 51, 2016. 吉田光男, ꡔ 近世ソウル都市社會硏究 - 漢城の街と住民 ꡕ, 草風館, 2009. 계봉오ㆍ박희진, Age patterns of migration among Korean adults in early 20th-century Seoul, The History of the Family, London Routledge, 2013. 3) 韓榮國, 朝鮮後期의挾人ㆍ挾戶 彦陽戶籍大帳의挾人口를中心으로 - ꡔ 千寬宇先生還曆紀念韓國史學論叢 ꡕ, 正音文化社, 1985. 朴容淑, 18 ㆍ 19 세기의雇工 ; 慶尙道彦陽縣戶籍의分析 ꡔ 釜大史學 ꡕ 7, 1983. 林學成, 조선후기漢城府民의戶口文書에보이는 挾戶 의성격 ꡔ 朝鮮史硏究 ꡕ 7, 1998 ; 조선후기한
166 지역과역사 40 호 기호적은어떠한가옥정보도제공하지않는다. 하지만 20세기초반거주실태를해명한연구성과가축적되고있는상황이므로이를활용해역으로추적해본다면 18~19세기거주실태도대략윤곽을파악할수는있을것으로보인다. 이에, 이글에서는 19세기언양현상남면호적을통해당시이지역의가옥 4) 현황과거주실태를규명해보고자한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호적으로는가옥형태를파악하기곤란하다. 그러므로이글에서는가옥형태가아니라어느정도가옥이분포하고있었는지, 그리고가옥에거주하는사람들이그가옥에대해어떠한권리를가지는지를대략살펴보는데에집중한다. 다시말해 19세기상남면에는어느정도의가옥이분포하고있었고그가옥에거주하는사람들중가옥소유자, 임차인, 차입자는얼마만큼존재하였는지를대략파악해보고자하는것이다. 이러한점에서볼때이글은시작부터일정한한계를가진채출발한다고할수있다. 하지만이글결론에도달하는과정은 18~19세기호적의성격과신호적이만들어진배경을보다선명하게이해하고호적연구의새로운방법론을제시하는데에일조할수도있을것이다. 이하, 이글은다음순으로전개된다. 먼저, 언양현상남면이라는지역과분석기준을설명함으로써호적분석전이해를돕는다. 다음으로 19세기상남면에분포하였던家屋數를추정해본다. 호적상호, 즉元戶는가옥과대체로일치하는경향을띠지만그렇지않은경우도적지않다. 대표적인경우가바로이글에서분석하고자하는언양호적의호들인데, 이러한호들을찾아내분리해보면가옥수를추정해볼수있다. 그다음으로상남면거주민들의거주실태를그들이가옥에대해갖는권리를중심으로살펴본다. 가옥에거주하는자는그가옥을소유한자일수도있고, 임차한자일수도있으며, 소유나임차도아닌단순히빌려살고있는자일수도있다. 여기에 성부민의호적자료에보이는 時入 의성격 - 한성부주민의주거양상을구명하기위한一試論 - ꡔ 古文書硏究 ꡕ 24, 2004. 4) 이글에서파악하고자하는가옥은烟戶, 즉자연가를말한다.
19세기 언양의 가옥과 거주 실태 167 서는 이러한 자들이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었는지 대략 추정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상의 내용들을 요약 정리하면서 이 글을 맺고자 한 다. Ⅰ. 지역과 분석 기준 1. 지역 조선시대 彦陽은 국초 彦陽縣으로 승격되고 1599년(선조 32)에 蔚山都 護府에 속하였다가 1612년(광해군 4)에 다시 언양현으로 복구되어 조선후 기까지 이어갔다.5) 언양현 面은 上北面ㆍ中北面ㆍ下北面ㆍ上南面ㆍ中南 面ㆍ下南面으로 편제되어 있었다.6) 邑治는 상북면이었으며 하남면이 8개 里, 상북면ㆍ중북면ㆍ상남면이 7개 里, 하북면ㆍ중남면이 5개 里를 각각 두고 있었다.7) 이 중 이 글에서 분석하고자 하는 면은 상남면이다. 상남면 을 택한 데에 별다른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며 호적이 비교적 충실히 남아 있다는 점만을 고려하였다. 상남면은 현재 행정구역상 상북면이 자리한 지 역으로서 언양 南川을 기준으로 남쪽으로 가지산, 간월산, 신불산이 이어지 고 있는 산간지대이다.8) 현전 언양호적을 기준으로 소속된 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5) ꡔ彦陽縣邑誌ꡕ. 6) ꡔ彦陽縣邑誌ꡕ. 현재는 상북면과 중북면이 언양면, 하북면과 상남면이 상북면, 중 남면이 상남면, 하남면이 삼동면으로 각각 개칭되었다. 7) ꡔ彦陽縣邑誌ꡕ. 8) 상남면과 하북면은 1928년 4월 1일 지방행정구역이 정리되면서 합쳐져 지금의 상북면이 되었다(상북면지편찬위원회, ꡔ상북면지ꡕ, 2002 참조).
168 지역과역사 40 호 < 표 1> 언양현상남면소속리현황 식년 1711년 1798년 1813년 1858년 1861년 양등리 양등리 양등리 양등리 양등리 거리동리 거리동리 임계리 거리동리 거리동 길천리 길천리 길천리 오산리 길천리 명촌리 명촌리 명촌리 길천리 명촌리 리명 천전리 천전리 지화리 천전리 이천리 등억리 명촌리 이천리 이천리 천전리 등억리 이천리 < 표 1> 에서보듯이현전언양호적에서확인되는상남면소속리는시기에따라 4개에서 9개까지있었다. 9) 楊等里ㆍ巨里洞里ㆍ吉川里ㆍ鳴村里등 4 개리가 18세기에이미존재하고있었고이후川前里ㆍ利川里ㆍ登億里ㆍ吾山里ㆍ知火里등의리들이생겨났다. 상남면의호규모를살펴보기위해언양현소속면들의戶數를살펴보면다음과같다. < 표 2> 언양현소속면의호수 ( 단위 : 호 ) 구분 상북면 중북면 하북면 상남면 중남면 하남면 ( 삼동면 ) 1798년 322 93 206+α 187 176+α 238 1813년 190 184 240 1858년 222 197 209 1861년 273 133 183 222+α 201+α 211 < 표 2> 에서보듯이언양현소속 6개면의호수를모두비교해볼수있는식년은 1798년과 1861년이다. 10) 1798 년의경우상북면의호수가가장많 9) ꡔ 호구총수 ꡕ 에는양등리, 거리동, 길천리, 명촌리, 천전리, 등억리, 이천리등 7 개동리가있었던것으로기재되어있다. 10) ꡔ 世宗實錄地理志 ꡕ 에따르면언양은 28 개府ㆍ郡ㆍ縣중호구수규모가 18 위에해당하는자그마한고을이었고, 동부경남에서는기장다음으로작은고을이었다. 조선후기에편찬된邑誌를보더라도호수의경우조선초기에비해울산이 7.5 배, 양산이 4.8 배, 기장이 12.5 배증가한데비해언양은 2.9 배증가하는데그쳤고, 구수의경우도울산이 8 배, 양산이 9.5 배, 기장이 27 배증가한데비해
19 세기언양의가옥과거주실태 169 았고이어하남면> 하북면 >상남면 >중남면> 중북면순이었다. 1861년의경우상북면이가장많았고이어상남면> 하남면> 중남면> 하북면> 중북면순을보였다. 호수변화추세를보면상북면ㆍ하북면ㆍ하남면이감소추세인데반해상남면ㆍ중남면ㆍ중북면은증가추세를보였다. 이처럼상남면은 1798년에는 6개면중하위 3개면에속하는호규모를가지고있었으나시간이흐름에따라호수가증가해 63년뒤인 1861년에는상위 2개면에속할만큼커졌다. < 표 3> 언양현소속면의인구수 ( 단위 : 명 ) 구분 상북면 중북면 하북면 상남면 중남면 하남면 ( 삼동면 ) 1798년 2,429 702 1,811 1,454 1,454 2,042 1813년 1,635 1858년 1,402 967 1,181 1861년 1,607 680 1,053 1,048 918 1,239 상남면의인구규모를살펴보기위해언양현소속 6개면의인구수를정리한것이 < 표 3> 이다. 여기에서보듯이언양현소속 6개면의인구수는 1798년에는상북면 >하남면 >상남면ㆍ중남면 >하북면 >중북면순이었으나 1861년에는상북면 >하남면 >하북면> 상남면 >중남면 >중북면순을보인다. 자료의결락으로상남면의인구수에는천전리인구가포함되지않았다. 1858년천전리인구 118명을 1861년인구수에산입시켜보면상남면의인구수는적어도하북면보다는많았을것으로보인다. 이처럼상남면은 19세기언양현 6개면가운데상위 3개면에포함되는인구규모를가지고있었다. 이글에서는상남면호적가운데 19세기에작성된호적만을대상으로한다. 이것은 19세기호적이시기상신호적연구결과를적용하기에적합하기때문이다. 따라서이글의분석대상이되는호적은 1813ㆍ1858ㆍ1861년 언양은 7.5 배증가하는데머물렀다 ( 김석희, ꡔ 조선후기지방사회사연구 ꡕ, 혜안, 2004, 192 쪽 ).
170 지역과역사 40 호 3 개식년분이다. 2. 분석기준신호적연구결과를토대로분석기준을설정하기에앞서신호적에대한이해가선행되어야할것같다. 신호적이란 1896년에제정된 < 호구조사규칙 >, < 호구조사세칙 > 이후작성되어 1909년民籍法이제정되기까지이어진호적을말한다. 구래호적과차별화된형식ㆍ내용때문에현재 신호적, 신식호적, 근대호적, 광무호적 등으로불리고있다. < 호구조사규칙 >, < 호구조사세칙 > 으로신호적이도입되었지만호적작성방식이그즉시구래와단절되지는않았다. < 호구조사규칙 >, < 호구조사세칙 > 이후에도당분간은구래호적작성방식이이어지고있었던것이다. 11) 따라서 < 호구조사규칙 >, < 호구조사세칙 > 이후작성된신호적도일정기간구래호적과연속된모습을보인다. 그리고이러한양상은 1905년統監府가설치되고 1906년管稅官官制가시행되기까지지속되었다. 12) 하지만이후신호적작성방식은변화하였다. 1906년이전작성된신호적에는구래호적처럼가옥단위호구조사결과가수록되지않았으나이후작성된신호적부터는가옥단위호구조사결과가수록되기시작하였던것이다 13). < 호구조사규칙 >, < 호구조사세칙 > 시행이후에도한동안크게늘어나지않던전국호수가 1906년이후크게증가하는모습으로나타나는까닭도바로이러한변화때문이다. 14) 11) < 호구조사규칙 >, < 호구조사세칙 > 으로신호적이작성되었지만이호적에서도일정기간구래호적의호기준과구성원리가계승되고있었다 ( 장경준, 광무연간의호구조사, 그연속과변화 ꡔ 역사와경계 ꡕ 92, 2014 참조 ). 12) 장경준, 위의논문참조. 13) 장경준, 위의논문참조. 14) 1897 년전국호수는 1,332,501 호로 1891 년 1,576,672 호보다감소하였으며, 1904 년까지도큰증가세를보이지않았다. 하지만 1897~1904 년사이 130~ 140 만대수준을보이던전국의호수는 1906 년管稅官官制가시행되면서 230 만대이상까지급증하였다 ( 손병규, 앞의논문, 2005, 222 쪽 < 표 4> 참조 ).
19세기 언양의 가옥과 거주 실태 171 이처럼 신호적이라도 1906년 관세관관제 시행 이전과 이후에 작성된 것 은 차이가 있는데,15) 이를 잘 보여주는 자료들이 <도 1 4>이다. <도 1> 김삼준 호구단자(1904년)16) <도 2> 김삼준 호적표(1904년)17) <도 1>과 <도 2>는 1904년 기장군 상서면 웅천리 서동 金三俊의 호구단 15) 1899년과 1900년 평안북도 정주군 해산면 호적을 분석한 이유진에 따르면 이 호적에서 구래의 호적 작성 방식과 유사한 면이 상당수 발견된다고 한다(이유 진, 광무호적의 호구변동 사례 ꡔ역사민속학ꡕ 51, 2016 참조). 그는 그 이유 를 중앙 정부의 영향력이 덜 미치는 외곽 지역에서 구래의 호적 작성 방식을 고 수하고 있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비단 그러한 이유 때문으로만 이 같은 모습이 나타났다고 보기는 어렵다. 실제로 <호구조사규칙> 시행 이후에도 한동안 전국의 호수는 크게 늘어나지 않았는데, 이는 외곽 지역의 신호적만 구 래의 호적 작성 방식을 고수한 결과가 아니라 전국에서 그러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16) 金三俊 戶口單子 (박지현ㆍ손숙경, ꡔ조선후기 기장 백길의 우봉 김씨 鄕班 가 문과 고문서ꡕ,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한국학연구소, 2013, 84쪽). 17) 金三俊 戶籍表 (박지현ㆍ손숙경, 위의 책, 85쪽).
172 지역과 역사 40호 자와 호적표이다. 여기에서 호구단자는 호구신고서로서 구래 호적작성 시에 사용되었던 그 호구단자와 같은 성격이다. 호적표 작성이 1904년 1월에 이 루어졌으므로 호구단자나 호적표에 기재된 사항들은 실제로는 전 해인 1903년에 조사된 것이다. <도 1>과 <도 2>를 살펴보면 이 호에는 호주 김삼 준 솔하에 처, 종숙, 종형, 아들이 동일하게 기재되어 있다. <도 3> 김삼준 호구단자(1907년)18) <도 4> 김삼준 호적표(1907년)19) <도 3>과 <도 4>는 1907년 호주 김삼만의 호구단자와 호적표이다. 마찬 가지로 호구단자와 호적표에 기재된 사항들은 실제로는 전 해인 1906년에 조사된 것이다. <도 3>의 기재 내용을 살펴보면 호주 김삼만 솔하에 시모, 처, 종숙, 종형, 아들이 기재되었다. 하지만 <도 1>과 <도 2>의 기재내용이 일치한 것과 달리 <도 4>는 <도 3>과 기재내용이 다르다. <도 4>를 살펴보 18) 金三俊 戶口單子 (박지현ㆍ손숙경, 위의 책, 87쪽). 19) 金三俊 戶籍表 (박지현ㆍ손숙경, 위의 책, 88쪽).
19 세기언양의가옥과거주실태 173 면호주김삼만솔하에모, 처, 아들 3명과딸 1명이기재되었다. < 도 3> 에기재되어있는종숙과종형이빠지고아들 2명과딸 1명이기재된것이다. 이러한기재상의차이는호주김삼만이 1906년이전과같은방식으로호구를신고하였음에도불구하고이것이이전처럼호적에반영되지않았다는것을보여준다. 그렇다면왜이런일이일어났을까? 이것은 1906년이후호적작성방식이변하였기때문이라는것외에는적절한이유를찾기어렵다. 즉, 호주김삼만은 1906년에실시된호구조사에서도이전방식대로호구신고서를작성하여제출하였지만그해부터신호적작성방식이변하였기때문에호적표에반영되지않았다는것외에는달리설명하기가어려운것이다. 이처럼 1906년이전과이후에작성된신호적은비록외형은같다고할지라도기재내용상큰차이가있다. 1906 년이전과달리이후작성된신호적은동일가옥내에거주하는자들을묶어하나의호를만들었다. 따라서이시기신호적의호는가옥과일치한다. 이에, 이글에서는 1906년이후작성된신호적연구결과에서분석기준을도출하고자한다. 그것이이글에서목적한 19세기언양현상남면의가옥현황을파악해내는데유효하기때문이다. 이미언급했듯이신호적을활용한연구는여러편이제출되어있다. 20) 하지만 1906년이후시행된호구조사결과를수록한신호적 (1907년ㆍ1908년ㆍ 1909년 ) 을분석한연구는단 1편에불과하다. 21) 그결과이글에서는부득이이연구결과에크게의존할수밖에없다. 이연구는 1908 년동래군동하면호적을분석한것이다. 동래는이글에서대상으로한언양과같은경상남도내에위치한지역이다. 뿐만아니라언양호적에서만나타나고있는것으로보고되어있는협인도호적자료에서발견된다. 22) 이러한점들을두고볼때동하면호적의결과를언양지역에적용하더라도무리는없어보인다. 20) 주 2) 참조. 21) 장경준, 앞의논문, 2009 참조. 22) 張慶俊, 18 ㆍ 19 세기동래지역武任家의신분변동양상 - 부산박물관소장경주최씨ㆍ창원구씨가호구단자ㆍ준호구의분석 - ꡔ 博物館硏究論集 ꡕ 10, 2003, 부표 <2-1> 참조.
174 지역과역사 40 호 1908년동래동하면호적을분석한연구에서이글의목적과관련해특히눈여겨보아야할것은가족형태이다. 그것은하나의호, 즉한가옥내에거주하는사람들의지배적인가족형태를파악하고이를기준으로구래호적을분석하면가옥수를파악해낼수있기때문이다. < 표 4> 동하면호적가족구성원의결합유형 23) ( 단위 : 호 ) 구분 재송동 우동 좌동 중동 전체 부부가족 42 68 54 72 236(60.2%) 직계결합가족 26 38 25 57 146(37.2%) 방계결합가족 1 4 1 4 10(2.6%) 계 69 110 80 133 392(100%) 비고 : 여성호주및배우자가없는호주 ( 재송동 8, 우동 16, 자동 3, 중동 19), 연령을미기재 한경우 ( 우동 1, 좌동 1) 를제외한수치임. < 표 4> 는동하면호적에나타나는가족구성원의결합유형을정리한것이다. 가장많이나타나는유형은부부가족이다. 부부가족은 부부 나 부부 + 미혼의자녀 로구성된경우로전체의 60.2% 에달한다. 그다음으로많이나타나는유형은직계결합가족이다. 부부 + 자녀부부 나 부부 + 자녀부부 + 손자녀 로구성된경우로전체의 37.2% 를차지한다. 이에비해방계혈족의결합유형인방계결합가족은전체의 2.6% 로가장적다. 부부가족과직계결합가족이 97.4% 에달하는것이다. 이처럼동하면호적에나타나는지배적인가족형태는부부가족또는직계결합가족이었다. 이러한사정은당시가옥규모를살펴보아도대략이해된다. 당시동하면의가옥규모로보더라도한가옥내에거주할수있는지배적인가족형태는부부가족또는직계결합가족이었을것임을어렵지않게짐작할수있는것이다. 23) 장경준, 앞의논문, 2009, 108 쪽 < 표 11> 재인용.
19 세기언양의가옥과거주실태 175 < 표 5> 동하면가옥의규모 24) ( 단위 : 호 ) 구분 재송동 우동 좌동 중동 전체 1칸 - - 1(1.2) - 1(0.3) 2칸 20(29.9) 24(22.1) 28(35.0) 31(23.5) 103(26.6) 3칸 20(29.9) 39(35.8) 23(28.8) 50(37.9) 132(34.0) 4칸 3(4.5) 13(11.9) 11(13.8) 13(9.8) 40(10.3) 5칸 10(14.9) 19(17.4) 11(13.8) 14(10.6) 54(13.9) 6칸 7(10.4) 8(7.3) 5(6.2) 15(11.4) 35(9.0) 7칸 6(8.9) 6(5.5) 1(1.2) 9(6.8) 22(5.6) 8칸 1(1.5) - - - 1(0.3) 계 67(100) 109(100) 80(100) 132(100) 388(100) 비고 : ( ) 의수치는백분율임. 가택사항이기재되지않은 4호 ( 재송동 2, 우동 1, 중동 1) 를제외한수치임. < 표 5> 는동하면가옥칸수별호수를정리한것이다. 여기에서보듯이동하면가옥은최소 1칸에서 8칸까지다양하게분포하지만전체가옥중 85.1% 가 5칸이하의가옥이다. 25) < 표 6> 동하면가옥의호및인구당칸수 26) ( 단위 : 호 / 명 / 칸 ) 구분 호수 인구수 가옥총칸수 1호당칸수 1인당칸수 재송동 67 341 254 3.79 0.74 우동 109 505 402 3.68 0.79 좌동 80 314 262 3.28 0.83 중동 132 579 487 3.68 0.84 계 388 1,739 1,405 3.62 0.80 24) 장경준, 앞의논문, 2009, 111 쪽 < 표 13> 재인용. 25) 1904 년 ꡔ 家戶案 ꡕ 과신호적등을분석해경상남도지역의가옥규모를밝힌연구에따르면전체가옥의 36% 가 1~2 칸, 58% 는 3~4 칸에불과하며 5~6 칸은약 5%, 7 칸이상은 1% 를약간상회하는것으로나타난다 ( 최영준, ꡔ 개화기의주거생활사 ꡕ, 한길사, 2013, 150 쪽 ). 이연구에서분석한지역은진주, 함양, 함안, 동래, 창원, 기장, 삼가, 단성, 진해, 진남, 김해, 밀양, 초계, 거창, 거제, 의령등 16 개군이며, 언양과지리적으로인접한밀양의경우 3.46 칸이었던것으로나타난다 ( 최영준, 같은책, 133 쪽 < 표 2-13> 참조 ). 비록이연구에서언양의사례는빠져있지만당시언양의사정도이와별반다르지는않았을것이다. 26) 장경준, 앞의논문, 2009, 112 쪽 < 표 14> 재인용.
176 지역과역사 40 호 < 표 6> 은동하면가옥의 1호당칸수와 1인당칸수를나타낸다. 여기에서보듯이동하면가옥의 1호당평균칸수는 3.62칸이었으며, 1인당평균칸수는 0.80칸이었다. 27) 이처럼 1908년동하면호적을분석한연구결과는당시동하면의지배적인가족형태가부부가족또는직계결합가족이었음을전한다. 이에, 이글에서는부부가족또는직계결합가족은하나의가옥에거주한다는분석기준을세운다. 즉, 부부가족또는직계결합가족 = 가옥 이라는기준을세우고자하는것이다. 이에따라방계가족이나협인가족등은가옥을달리하는것으로간주한다. 예를들어직계가족 + 방계가족 + 협인가족으로구성된호가있다면이들은 3채의가옥에거주하는것이되는것이다. 28) 직계결합가족중에는 부부 + 다수의기혼자녀 나 조부모 + 다수의기혼부모 + 다수의기혼손자녀 의경우가있을수있다. 이경우혼인한 ( 손 ) 자녀들중에는실제로는부모ㆍ조부모와가옥을달리해거주하는경우가적지않았을것으로보인다. 하지만여기에서는일단이들도모두가옥 1채에동거하는것으로본다. 또노비가족의경우도별도의가옥으로분리하지않는다. 조선시대노비의경우상전가와분리된가옥에서거주하는것이일반적이었다. 29) 하지만여기에서는상전가와분리하지않고같이거주하는것으로본다. 따라서이글에서추정하는가옥수는실제보다는적은수치일것이다. 27) 1904 년 ꡔ 家戶案 ꡕ 을분석한연구결과에의하면당시경상남도가옥의 1 호당평균칸수는 2.75 칸에불과하였던것으로나타난다 ( 최영준, ꡔ 家戶案 ꡕ 분석을통해본개화기경상남도의가옥형태와구조 ꡔ 대한지리학회지 ꡕ 38-3, 2004 참조 ). 28) 3 채의가옥에서거주한다는것은 3 개의자연가에거주한다는의미이다. 29) 전형택, 조선후기한양반가의호적자료를통해본사노비의존재형태 - 광주전의이씨문의공파종가소장고문서의사례분석 - ꡔ 朝鮮時代史學報 ꡕ 15, 2000, 130~137 쪽. 김건태, 조선후기호의구조와호정운영 ꡔ 단성호적대장연구 ꡕ,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3, 154 쪽.
19세기 언양의 가옥과 거주 실태 177 Ⅱ. 가옥 현황 이미 언급한 분석 기준으로 19세기 언양 상남면의 가옥 현황을 추정해 보 기에 앞서 상남면 호적에 등재된 元戶數부터 각 리별로 정리해 보기로 한 다. <표 7> 상남면 호적의 원호수 및 인구수 (단위: 호/명) 식년 1813년 리 양등리 임계리 길천리 명촌리 천전리 등억리 이천리 통수 6 7 7 7 5 2 3 7 11 3 원호수 31 38 37 37 24 10 13 190 37 54 13 인구수 240 329 255 395 212 124 80 1,635 208 341 106 호당 인구수 7 8 6 10 8 12 6 8 5 6 8 3 3 15 17 75 164 5 9 4 3 21 15 172 37 54 58 19 109 80 1,083 226 348 280 194 5 5 6 6 6 4 10 168 1,048 6 계 1858년 양등리 거리동리 오산리 길천리 지화리 명촌리 천전리 등억리 이천리 계 1861년 양등리 거리동리 길천리 명촌리 천전리 7 11 12 4 계 비고: 1858년 길천리, 천전리, 1861년 천전리 자료 결락으로 원호수 확인 불가 <표 7>에서 보듯이 상남면호적에 등재된 원호는 1813년 190호, 1858년 172호. 1861년 168호이며, 평균 호당 인구수는 1813년 8명, 1858년과
178 지역과역사 40 호 1861년각각 6명이었다. 19세기중후반에접어들어 2명이줄었는데, 이는협인수가줄었기때문이다. 1813년 290명이었던협인은 1858년에는 23명으로급감하였다. 30) 18세기당시전국의평균호당인구수는 4.3명이었으므로상남면이보인호당인구수는이례적으로많은것이다. 상남면의높은호당인구수는언양인근지역과비교해보아도쉽게확인된다. 1786년 ꡔ호구총수ꡕ 에따르면울산 3.8명, 동래 4.1명, 밀양 5.0명, 양산 3.2명, 경주 4.0명, 대구 4.6명이었으며, 경상도소속 71개읍의평균호당인구수도 4.4명수준을보인다. 다만, 영천만이 6.3명인것으로나타나언양과비슷할뿐이다. 이처럼언양은이례적으로많은호당인구수를보이는데, 1908년동하면호적의분석결과에서나타난가족형태로미루어보더라도호내인구가실제로동일가옥 ( 가옥 1채 ) 에서거주했으리라고보기는어렵다. 이는여러채의가옥이한호로묶여있는결과인것이다. 따라서동일호로묶인가옥을분리해보면상남면에실재하였던가옥수를대략추정할수있다. 이에, 부부가족또는직계결합가족 = 가옥 이라는분석기준으로상남면호적의호를분석해본결과가아래 < 표 8> 이다. < 표 8> 에서보듯이 1813년원호에서호수와방계친족이나협인으로연결된가족수는 205가족이다. 그리고 1858년과 1861년은각각 88가족, 108 가족이다. 즉, 상남면에는원호戶首의가옥외에방계친족ㆍ협인의가옥이이만큼더있었던것이다. 하지만이가옥들은원호에포함되어겉으로드러나지않는다. 따라서 1813년상남면에실재한가옥수는원호호수의가옥수인 190채에방계친족가족ㆍ협인가족의가옥수 205채를더해 395채였을것으로추정된다. 그리고 1858년과 1861년도마찬가지방식으로계산해보면각각 260채와 276채였을것으로추정된다. 앞서밝혔듯이이수치는노비가족, 혼인을하여가족을구성한직계가족을제외한것이다. 따라서이들의숫자까지모두포함한다면실제로상남면에분포한가옥수는이 30) 이정수ㆍ김희호, 언양호적대장협호의존재형태와노동특성 ꡔ 지역과역사 ꡕ 32, 2013, 326 327 쪽 < 표 4> 참조.
19 세기언양의가옥과거주실태 179 < 표 8> 상남면호적에등재된방계및협인가족수 ( 단위 : 호 / 명 ) 식년 리 통수 원호수 방계가족수 협인가족수 인구수 가옥의평균인구수 양등리 6 31 9 17 240 4 임계리 7 38 28 24 329 3 길천리 7 37 27 8 255 3 1813년 명촌리 7 37 29 14 395 4 천전리 5 24 9 17 212 4 등억리 2 10 0 22 124 3 이천리 3 13 0 1 80 5 계 190 102 103 1,635 4 양등리 7 37 19 1 208 3 거리동리 11 54 25 4 341 4 오산리 3 13 9 4 106 4 길천리 1858년 지화리 3 15 2 1 75 4 명촌리 3 17 7 9 164 4 천전리등억리 4 21 1 0 109 4 이천리 3 15 6 0 80 3 계 172 69 19 1,083 4 양등리 7 37 12 4 226 4 거리동리 11 54 30 3 348 4 1861년 길천리 12 58 35 7 280 2 명촌리 4 19 6 11 194 5 천전리계 168 83 25 1,048 3 추정치보다많았을것으로짐작된다. 그렇다면이러한추정은얼마나타당한것일까? < 표 8> 에제시된가옥의평균인구수에주목할필요가있다. 인구수를추정가옥수로나누어산출한이수치는이무렵경상도는물론이거니와전국의호당평균인구수와비교해볼때차이가없다. 이점에서볼때이추정치는큰무리가없어보인다. 단, 한가지의문을제기할수는있다. 즉, 언양은가옥의호당평균인구수인데비해다른지역은가옥이아닌호의평균인구수이므로서로비교하기가어려울수있다는의문이그것이다. 이에, 대구호적과단성호적은과연원호와가옥이얼마나일치하고있는지확인해보았다. < 표 9> 는대구부동상면ㆍ동하면호적에등재된원호수와원호에포함된
180 지역과역사 40 호 방계가족수를정리해본것이다. 여기에서보듯이동상면의경우원호에포함된방계가족은 1813년 56가족, 1858년 18가족, 1861년 13가족이다. 그리고동하면의경우는 1813년 29가족, 1858년 40가족, 1861년 46가족이다. 동상면에는 1813년 56채, 1858년 18채, 1861년 13채의가옥이원호에포함되어있는것이되며, 이는각각전체원호수대비 3.9%, 1.4%, 1.0% 에해당한다. 그리고동하면에는 1813년 29채, 1858년 40채, 1861 년 46채의가옥이각각원호에포함되어있는것이되며, 이는각각전체원호수대비 9.9%, 11.9%, 13.8% 에해당한다. < 표 9> 대구부동상면ㆍ동하면호적에등재된방계가족수 ( 단위 : 호 / 명 ) 군현 식년 리 원호수 방계가족수 인구수 호당평균가옥의평균인구수인구수 1813년 동상면 1,439 56 6,680 4 4 동하면 293 29 1,501 5 4 대구부 1858년 동상면 1,274 18 5,179 4 4 동하면 335 40 2,483 7 6 1861년 동상면 1,273 13 5,427 4 4 동하면 333 46 2,558 7 6 < 표 10> 단성현신등면ㆍ법물야면호적에등재된방계가족수 ( 단위 : 호 / 명 ) 군현 식년 리 원호수 방계가족수 인구수 호당평균가옥의평균인구수인구수 1825년 신등면 345 4 1,321 3 3 법물야면 567 1 1,968 3 3 단성현 1846년 신등면 314 7 1,294 4 4 법물야면 494 2 1,718 3 3 1861년 신등면 278 15 1,240 4 4 법물야면 493 6 1,717 3 3 < 표 10> 은단성현신등면ㆍ법물야면호적에등재된원호수와원호에포함된방계가족수를정리해본것이다. 여기에서보듯이신등면의경우원호에포함된방계가족은 1825년 4가족, 1846년 7가족, 1861년 15가족이다. 그리고법물야면의경우원호에포함된방계가족은 1825년 1가족, 1846년
19 세기언양의가옥과거주실태 181 2가족, 1861년 6가족이다. 신등면에는 1825년 4채, 1846년 7채, 1861년 15채의가옥이원호에포함되어있으며, 이는각각전체원호수대비 1.2%, 2.2%, 5.4% 에해당한다. 그리고법물야면에는 1825년 1채, 1846년 2채, 1861년 6채의가옥이원호에포함되어있으며, 이는각각전체원호수대비 0.2%, 0.4%, 1.2% 에해당한다. 이러한결과에서볼수있듯이대구부동상면ㆍ동하면, 단성현신등면ㆍ법물야면의원호에포함된방계가족수는 1858년과 1861년대구동하면의경우만제외하면모두 5% 미만에불과하다. 대구동하면도 9.9~13.8% 를보이지만언양현상남면이 1813ㆍ 1858ㆍ1861년에보인 107.9%, 51.2%, 64.3% 와는비교가되지않는다. 이것은대구부동상면, 단성현신등면ㆍ법물야면호적의원호들이상당수가옥과일치하고있다는것을, 그리고대구부동하면의경우도이지역들만큼은아니더라도언양보다는훨씬많은원호들이가옥과일치하고있다는것을이야기하는것이다. < 표 9> 와 < 표 10> 에서보듯이이지역들의호당평균인구수와가옥의평균인구수가일치하거나근소한차이만을보이고있다는것이이를잘뒷받침해준다. 이것은매우중요한사실을전해준다. 즉, 언양이매우이례적으로높은호당구수를유지하고있는것이다른지역과차별화된가족형태를띠고있었기때문이라든지, 가옥규모가컸기때문이라고보아서는안된다는것이다. 호적과다르게 19세기언양도다른지역들과마찬가지규모의가옥과가족형태를보이고있었다. 그리고이것은다른지역들과다르게언양호적호들의상당수가두채이상의가옥으로묶인결과였다. 이처럼언양은다른지역과다르게두채이상의가옥이하나로묶여원호를구성하는경우가많았다. 즉, 언양호적은다른호적과달리원호가운데상당수가가옥과일치하지않았던것이다. 그렇다면언양에만이러한현상이나타난까닭은무엇일까? 이를두고일각에서는과대하게부과된호총을맞추기위해인위적으로호를편제한결과라고보기도한다. 31) 과연그 31) 성군관대학교대동문화연구원호적대장연구팀편, ꡔ 단성호적대장연구 ꡕ,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03 참조.
182 지역과역사 40 호 러할까? 당시첩역문제가가장심각했던지역은동래였다. 32) 하지만동래의호당구수는다른지역들과특별하게차별되는모습을보이지않는다. 33) 부세문제로이러한현상을설명하기어렵다는것을보여준다. 호적상의호는호적작성원리에따라가옥과일치할수도있고, 그렇지않을수도있다. 그런데언양에가옥과일치하지않는호가많다는것은가옥과호를일치시킬수없는이지역나름의특별한거주환경이있다는것을말해주는것이다. 따라서언양이이례적으로높은호당구수를보이는이유는여기에서찾아야만한다. 이에대해서는다음장을서술해가면서다시논해보기로한다. Ⅲ. 상남면의거주실태 앞장에서살펴보았듯이 19세기언양현상남면에는가옥이 260~395채이상분포하고있었다. 하지만이가옥들은때로는원호의두배이상, 그리고어떤때는절반이상호적에숨어드러나지않았다. 무슨이유였을까? 이장에서는이물음에대한답을찾아가본다. 그과정에서상남면의거주실태가드러날수있을것이다. 구래호적의작성원리는가옥에대한재산권을가진자를호의대표자로세운뒤그와혈연관계나지배예속관계에있는자들을한데묶는것이었다. 34) 즉, 가옥을소유하거나임차한자는호의대표자, 즉戶首가될수있었던것이다. 따라서상남면호적에호수로오른 190명 (1813년 ), 172명 (1858 년 ), 168 명 (1861 년 ) 은가옥소유자이거나임차인들이다. 이들중가 32) 張慶俊, 18 ㆍ 19 세기동래지역의군역운영과폐단, 그리고이를둘러싼水使 - 府使의대립 ꡔ 釜大史學 ꡕ 30, 2006. 33) 尹用出, 18 세기초東萊府의築城役과賦役勞動 ꡔ 韓國文化硏究 ꡕ 2, 1989. 34) 장경준, 조선후기호적대장과 호 의성격, 부산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15 참조.
19 세기언양의가옥과거주실태 183 옥소유자와임차인이각각어느정도였는지확인하기는어렵다. 다만, 상남면이산간지대에위치한곳이라는점을생각해볼때유상으로가옥을빌려사는임차인은거의없었을것으로짐작된다. 따라서이들은모두가옥소유자였다고보아도무방할것같다. 가옥소유자는자기소유가좌에선가옥을소유한자와임차가좌위에선가옥을소유한자로구별되는데상남면의가옥소유자들중에는후자가적지않았다. 1907년에작성된 ꡔ 慶尙南道彦陽縣籌板 ꡕ을분석한결과에따르면언양의가좌중 70.8% 는자기소유가좌, 29.2% 는임차가좌였다. 35) 진주 (18.1%) ㆍ함양 (16.8%) ㆍ함안 (48.2) ㆍ동래 (21.2%) ㆍ창원 (17.3%) ㆍ기장 (8.5%) ㆍ삼가 (2.3%) ㆍ단성 (2.7%) ㆍ진해 (29.2%) ㆍ진남 (22.7%) ㆍ김해 (41.4%) ㆍ합천 (13.1%) ㆍ산청 (12.0%) 의임차가좌비율과비교해함안ㆍ김해에이어세번째로높다. 36) 이처럼언양은경상남도여러군들중에서도임차가좌의비율이높은곳이었는데, 이러한사정은 19세기에도별반다르지않았을것으로보인다. 따라서상남면의가옥소유자들중대략 25% 가량은자기소유가좌가아닌타인소유가좌를빌려가옥을지은뒤일정액의지대를지불하는자들이었을것으로여겨진다. 37) 상남면호적에호수로오른자들과달리 205명 (1813 년 ) ㆍ88명 (1858 년 ) ㆍ108명 (1861년) 의방계가족ㆍ협인가족대표자들은호수의솔하에존재하므로자신이거주하는가옥의소유자이거나임차인이아니다. 그렇다면이들은어떤자들이었을까? 이들은동래군동상면천만순호적표에기재된奇口와같은자들이었을것이다. 35) 최영준, 앞의책, 2013, 106 쪽 < 표 2-2> 참조. 36) 최영준, 위의책, 106 쪽 < 표 2-2> 참조. 37) 임차가좌에집을지은자들은소작료에준하여지대를지불하는것이일반적이었다 ( 최원규, 대한제국양전과관계발급사업 ꡔ 대한제국의토지조사사업 ꡕ, 민음사, 1995, 238 쪽 ).
184 지역과 역사 40호 <도 5> 천만순 호적표(1901년)38) <도 5>는 동래부 동상면 석대리 거주 千睌順의 1901년도 호적표이다. 가 택란에서 보듯이 천만순의 가옥은 기유 초가 3칸과 차유 초가 2칸, 도합 5 칸으로 기재되어 있다. 그리고 기구란에는 남자 2명이 기재되어 있다. 기유 초가 3칸에는 천만순과 그의 친속들이 동거하고, 차유 2칸에는 기구 2명이 동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도 6>과 <도 7>이다. 38) 千晩順 戶籍表 (慶星大學校 鄕土文化硏究所 編, ꡔ石臺千氏五代六孝古文書ꡕ, 民族文化, 1995, 257쪽).
19세기 언양의 가옥과 거주 실태 185 <도 6> 천만순 가계(1901년)39) <도 7> 천만순 대지계(1901년)40) <도 6>과 <도 7>은 호적표와 같은 해인 1901년에 작성된 家契와 垈地契 이다. <도 6>은 가옥의 소유권을 증빙하는 문서인데, 이에 의하면 당시 천 39) 千晩順 家契 (부산박물관 編, ꡔ五代六孝古文書ꡕ, 부산박물관, 2006, 68쪽). 40) 千晩順 地契 (부산박물관 編, 위의 책, 6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