城址, 南 Ussuriysk 城址(Nikol sk 城址, 雙城子城), Tyetyukhe 城址, Kruglyy 城址, Koksharovka 城址, Chuguyevka 城址 Kraskino (그림 1) 발해 주요 성지 분포도 [그림제목] 이러한 성 중에는 발해 이전 즉 고구려시대부터 사용하던 것을 이어받 아 사용하였던 것이 있는가 하면, 발해시대에 건설되어 사용되다가 뒤에 요, 금 등에 의하여 다시 사용되었던 것들도 있어 발해시대의 성으로 확정 하기에 어려운 것들이 많다. 따라서 위의 목록에는 발해시대에 사용되었는 불분명하여 논란이 있는 것들도 포함되어 있다. 장차 이 성들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정식 발굴이 요망된다. 그런데 지표조사된 자료를 토대로위의 성들의 성격을 살펴보면 다양한 면 을 보여주고 있다. 성의 종류로는 평지에 세워진 평지성이 있는가 하면 산성 도 있으며 그 외에 보루, 차단성 등도 있다. 또 축조 재료상으로 보더라도 토 성, 석성, 토석혼축성이 있고, 형태상으로 장방형, 방형, 부정형 등이 있다. 이제 이렇게 많은 성 중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것들을 선택하여 도성 지 제대로 - 407 -
불리고 있으며, 중국 길림성 敦化鎭(현 돈화시)의 남쪽 교외에 위치 한다. 이곳은 老爺嶺산맥과 張廣才산맥이 갈라지는 험준한 산악지대에 있 는 돈화 분지의 가운데에 해당하며, 성의 남쪽에는 牡丹江이 흐르고 주위 에는 넓은 벌판이 펼쳐져 있다. 또 멀리에는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 져 있고, 남쪽에는 장백산맥이 지나가고 있다. 이곳에 대해서는 1938년 山本守가 답사하여 보고한 바 있고, 1958년 單慶麟이 그간의 조사 내용을 정리하여 학계에 보고한 바도 있다. 이 성 은 1961년 길림성 중점문물보호단위로 선정되었다. 이상의 조사 보고를 토대로 성의 현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로도 6) 7) 8) (그림 2) [그림제목] 오동성 齋藤甚兵衛 山本守, 앞책 p. 85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집필소조, 중국의 우리민족 한울, 1988 p.36. 및 p.277 6) 齋藤甚兵衛 山本守, 앞책 pp.85 89 7) 單慶麟, 앞논문 8) 연변조선족자치주개황집필소조, 앞책 p.273-409 -
획기적인 출발을 가져오게 하였던 六頂山 고분군도 가까이에 있다. 에 18) 2. 東京城 오랫동안 도성으로 사용하였 던 곳으로 중국 흑룡강성 寧安縣에 위치한 다. 寧安縣城에서는 서남쪽으로 약 35km, 東京城鎭에서는 서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해당한다. 동경성터 안에는 渤海鎭 과 土台子, 白廟子, 언가자, 雙廟子, 後西地, 前西地 등 6개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이곳 은 주위가 수백리나 되는 평탄한 분지의 한 가운데이며, 성의 동북 및 남벽 약 1 3km 밖으로 鏡泊湖에서 흘러내려오는 牡丹江이 휘돌아 흐르고 있다. 발해는 제3대 문왕 시기인 天寶 말년(750 년대 전반경)에 구국에서 이곳으로 도읍을 옮 겼고, 30여년 뒤 다시 동경용원부로 일시 옮 겼다가 제5대 成王 시기인 794 795년경에 이곳으로 되돌아와 멸망시까지 수도가 되었 발해가 가장 19) (그림 3) [그림제목] 오동성 주위의 발해 유적 18) 이상의 유적들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람., 책 pp. 77 91, 1953 3, 1961 6, 논문, 1979 3 19) 과거에 이라 하였다가 발해진으로 개 되었고, 동경성진이 이 에서 동 으로 3k 어진 신 을인 에 붙여 다.,, 1982 1 p.91 齋藤甚兵衛 山本守 앞 歷史系敦化文物普査隊第二小組 敦化縣二十四塊石遺址調査記 吉林大學 人文科學學報 王承禮 曹正榕 吉林敦化六頂山渤海古墓 考古 王承禮 앞 王承禮 敦化六頂山渤海草清理發掘記 社會科學戰線 東京城鎭 칭 란 이름은 곳 쪽 m떨 흥 마 世環鐵 졌 丹化沙 龍泉鏡泊訪古行 黑龍江文物叢刊 - 412 -
와 회랑들을 발굴하고 있다. 이제 위의 조사 내용을 바 탕으로 성의 구조적인 측면을 중점적으로 서술하도록 하겠다. 고공작대가 문지 24) 25) (그림 4) 동경성 [그림제목] 성은 외성, 宮城, 皇城으로 구성되어 있다(그림 4). 외성의 평면은 동서 黑龍江省文物考古工作隊, 勃海上京宮城第一宮殿東西廊廡遺址發掘清理简報 文物 1985 11(a) 黑龍江省文物考古工作隊, 渤海上京宮城第2,3,4號門址發掘簡報 윗책 (b) 黑龍江省文物考古研究所, 渤海上京宮城內房址發掘簡報 北方文物 1987 1 25) 이상의 발굴보고서 외 동경성을 소개하는 글들은 다음과 같다. 孫秀仁, 唐代渤海上京龍泉府城址 黑龍江古代文物 黑龍江人民出版社, 1979 陳顯昌, 唐代渤海上京龍泉府遺址 文物 1980 9 陳靑柏, 唐代渤海國上京龍泉府遺址 全國重點文物保護單位之一 黑龍江文 物叢刊 1981 1 陳靑柏, 鏡泊湖畔小長安 渤海國都城覽古 文物天地 1985 3 24) - 414 -
(그림 5) 동경성의 [그림제목] 궁성 및 황성 궁성의 4개 구역중 중심 구역에 주요 궁전들이 들어차 있는데, 이 중심 구역은 다시 중구, 동구, 서구로 세분된다. 그 외에 동쪽, 서쪽, 북쪽 구 역에는 부속시설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그림 5). 이 궁성지에서 1963년, 1964년 조사시에 37개의 궁전지와 기타 건축지를 발견한 바 있 다. 특히 중심 구역의 중구에는 7개의 궁전지가 있는데 이 중 5개는 궁성 - 416 -
大朱屯고분군, 洋草溝고분군, 哈達屯고분군, 大興고분군(이상 寧安縣), 沙 河子고분군, 頭道河子고분군(이상 林口縣), 北站고분군, 山咀子고분군(이 상 海林縣) 등이 있고, 성으로 大牡丹屯城址, 牛場城址, 城墻磖子城, 勝利 村堡壘(이상 寧安縣), 烏斯渾舊村城址, 五道河子城址, 細鱗河村城址, 興農 村城址(이상 林口縣) 등이 있으며, 건축지로 동경성 가까이의 平安橋, 七 孔橋, 五孔橋의 다리 유적, 渤海浦 亭子 유적, 白花건축지, 哈達渡口건축 지(寧安縣), 烟筒磖子건축지(林口縣) 등이 있다. 이 외에 벽돌과 기와를 굽던 가마터들이 영안현 杏山鄕 및 발해진 哈達屯 등지에서 발견되었는데, 특히 전자는 동경성축조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39) 3. 八連城 팔련성은 古土城, 半拉城, 八磊城, 八壘城, 半拉城子土城 40) 등으로도 呂遵祿, 黑龍江省寧安林口發現古墓葬群 考古 1962 11 조중공동고고학발굴대, 앞책 pp. 237 238 주영헌, 앞책 pp. 18 19 孫秀仁, 略論海林山咀子渤海墓葬的形制傳統和文物特徴 中國考古學會第1次 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980 丹化沙, 앞논문 1982 흑룡강성문물고고공작대, 寧安縣鏡泊湖地區文货普査 黑龍江文物叢刊 1983 2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 渤海傳瓦窯址發掘報告 北方文物 1986 2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 黑龍江海林北站渤海墓試掘 北方文物 1987 1 흑룡강성문물고고연구소, 黑龍江海林二道河子渤海墓葬 윗책 39) 丹化沙, 앞논문 p. 91 40) 八連城이란 명칭의 유래에 대해서 이 성이 북대성과 7개의 성이 연결되어 있 어 붙여졌다고 하였고, 이에 따라 주영헌은 팔련성이 8개의 내성으로 이루어 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유래 설명은 억측으로 단지 半拉城 의 발음이 변화한 데에 불과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鳥山喜一 藤田亮策, 앞책 p.46 齋藤甚兵衛, 앞책 p. 8 齋藤甚兵衛 山本守, 앞책 p. 55의 琿春縣誌 인용 부분 주영헌, 앞책 p.16 金毓黻, 東北通史 권5 洪氏出版社 1976 p. 423 또 異稱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 바람. 鳥山喜一 藤田亮策, 앞책 p.46-421 -
불린다. 이곳은 琿春河 충적평야 지대의 서쪽 끝 지점으로 중국 길림성 琿 春縣城에서 서쪽으로 약 7.5km 떨어진 三家子鄕에 소속되어 있으며, 이 성에서 서쪽으로 3.5km 지점에는 두만강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있 다. 이곳의 지세는 평탄하고 주위에는 여러 산들이 둘러싸고 있으며 동남 쪽으로 동해에 연하고 있다. 鳥山喜一이 1923년과 1924년 이 성을 방문한 바 있고, 1937년 4월 에는 궁전지와 그 동남쪽에 있는 절터를 발굴하기도 하였다. 그 뒤 齋 藤甚兵衛가 1941년 9월 이곳을 지표조사한 뒤 1942년 3월, 4월에 걸쳐 발굴하여 대체적인 규모와 구조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또 1942년 에는 駒井和愛가 이곳을 방문조사하기도 하였다. 2차대전 이후 중국에 서 이곳을 지표조사 한 듯하나 자세한 것을 알 수 없고, 북한에서도 이곳 을 답사하여 보고서를 내기도 하였다. 이제 이 기록들을 바탕으로 성의 규모와 구조를 설명하도록 하겠다. 성은 토성으로서 방형에 가까우며, 외성과 내성 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 41) 42) 43) 44) 45) 46) 47) 鳥山喜一 앞 鳥山喜一 앞 齋藤甚兵衛 앞 齋藤甚兵衛 윗 駒井和愛 渤海東京龍原府宫城址考 中國都城 渤海研究 雄山閣 답 답 률볼 없 느 답 알 없 영 외 王俠 앞 李殿福 孫玉良 海國 文物出版社 필 마 鳥山喜一 벽 외 외 쪽 앙 내 반 齋藤甚 兵衛 밖 절 타 희 외 내 내 궁 내 밖 외 존 밖 외 존 벽 외 느 내 칭할 냐 또필 마 른형 란, 책 1968 p. 217의 주51 41), 책 p. 217의 주51 42), 책 p.3 43), 책 참조 44),, 1977 45) 이 때의 사보고서가 중국동북지방의 고구려 및 발해유적 사보고 (사회 과학원출판사, 1966)인데 이 보고서 수 어서 언제, 어 유적을 사 하였는지는 수 다. 주 헌은 그의 저서 발해문화 에서 이것을 많이 참조하였던 것 같다. 46) 이 에 다음을 참조하였다., 논문,, 1987 47) 이 성의 구조를 설명하는 용어가 자 다 다르다. 즉 은 팔련성의 성 을 성, 성 북 중 에 있는 구역을 성이라 부르고 있는 면, 는 팔련성 에 터가 나 나는 사실등을 들어 조산 일의 성을 성, 성(팔련성)을 성이라 하고 성 에 다시 성이 재한다고 하였다. 현 재는 팔련성 의 성 재는 별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팔련성의 성 이 성 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팔련성 안의 어 부분을 성으로 지 것 이 는 자 다 다 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주49를 참조바 다. - 422 -
형태는 동경성이나 西古城과 유사하며 크기는 동경성보다 작고 서고성과는 비슷하다. 성의 방향은 정북에서 동쪽으로 10 정도 기울어졌다. 외성의 둘레 는 약 2,895m로서 동벽 길이 721m, 서벽 길이 741m, 남벽 길이 705m 북 벽 길이 728m 이다. 벽마다 가운데에는 門址인듯한 흔적이 있다. 의 48) (그림 6) 팔련성 [그림제목] 벽 글 따른 王俠 앞 필 마 른 큰 차이는 없어 여기서는 잠정적으로 왕협의 48) 성 의 길이는 자 다 다 데 을 다., 논문 p. 122-423 -
외성 안은 북쪽 구역, 중심 구역, 동쪽 구역, 서쪽 구역의 4개 구역으로 나뉘며, 중심 구역은 다시 3개 소구역으로, 동쪽 구역과 서쪽 구역은 각기 2개 소구역으로 나뉘어진다(그림 6). 내성 은 중심 구역에 해당하여 北 城(주영헌의 제1 소구역), 中城(제2 소구역), 南城(제3 소구역)의 3개 소 구역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중 북성 안에 궁전터가 자리잡고 있는데 북성의 둘레는 1,068m로서 동, 서 양벽의 길이 316m, 남, 북 양벽의 길이 218m 이다. 남벽 가운데에 는 너비 약 25m의 잘린 부분이 있어 이곳이 북성의 남문이 된다. 중성과 남 성의 남벽에도 남문지가 있어 3개의 문이 일직선상에 배치되어 있다. 북성 남벽은 높이가 약 1.5m로서 제일 잘 남아 있다. 북성 남문에서 북쪽으로 132m 되는 곳에 동서 45m, 남북 30m의 高臺가 있어 높이가 2m 정도가 되는데, 이곳이 북성의 가운데에 해당하여 궁전유적지로 추측된다. 북성 안에 서는 이를 포함하여 도합 8개의 건물지가 1942년 齋藤甚兵衛에 의해 발굴조 사되었다. 한편 그에 의하여 이 성 밖에서 3개의 절터가 확인된 바도 있다. 이 성에서도 발해시기의 유물들이 다량 발견되었다. 유물 중에는 역시 건축재료들인 기와, 벽돌 등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그 외에 鐵鏃, 불상 등이 발견되었다. 이상의 유물 중 주목되는 것으로 발해 전형의 연화문 와당이나 문자가 새겨진 기와편을 들 수 있으며 이들은 동경성 출토의 것 들과 거의 동일하다. 한편 불상 중에는 석가와 다보의 두 부처를 모신 二 佛並座像이 눈에 뜨이는데 이것은 고구려의 불교 전통이 발해에까지 이어 지고 있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한다. 49) 50) 51) 필자마다 내성의 개념이 다른데 주영헌은 외성 안의 각 소구역을 각각의 내성 으로 보아 내성이 8개 있다고 하면서 여기에서 팔련성이란 이름이 유래한 것 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왕협은 중심 구역의 3개 소구역만을 내성으로 보아 3 개 내성이 있다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발해시기 다른 성들의 설명 예를 참조 하여 후자를 따른다. 50) 鳥山喜一 藤田亮策, 앞책 pp.46 50 齋藤甚兵衛, 앞책 주영헌, 앞책 p.16 49) - 424 -
(그림 7) [그림제목] 훈춘현내 발해 유적 新唐書 발해전에 의하면 동경용원부는 예맥의 옛 땅에 두었으며 柵 城府라고도 하였는데, 제3대 문왕 시절에 일시적으로 도움을 정하였던 52) 앞 鳥山喜一 앞 三上次男 半拉城出土の二佛并座像とその歷史的意義 朝鮮學報 49, 1968 밖 글 駒井和愛 渤海國の二佛並座石像 中國都城 渤海研究 雄山閣, 1977 新唐書 권 豸+歲 貊故地爲東京 曰龍原府 曰柵城府 51) 왕승례 저 송기호 역, 책 p.236, 책 p. 96, 이 에도 다음의 이 있다., 52) 219 발해전 ( ) - 425 -
곳이기도 하다. 이러한 동경용원부 자리가 바로 팔련성이라고 주장한 사람 은 鳥山喜一로서 김육불, 齋藤甚兵衛 등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정설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되는 것은 遼史 지리지의 동경에 관한 기록이다. 여기에는 성을 돌로 쌓았고 주위가 20리가 된다고 하여 흙으로 쌓고 주위가 3km 정도가 되는 팔련성과는 부합이 되지 않기 때문 이다. 이 기록을 토대로 동경용원부 자리를 琿春縣 내의 城墻磖子城으로 비정하는 사람도 있으나 일반적인 견해는 아니다. 팔련성이 위치하고 있는 琿春縣 경내에서도 발해시기의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었다. 성으로서는 溫特赫部城, 永慶古城, 城墻磖子城(城墻砬子 城), 桃源洞 北山城, 桃源洞 南山城, 沙齊城, 營城子城(高麗城), 石頭河子 城 등이 있으며, 절터로는 新生廟址, 良種農場廟址, 楊木林子廟址, 馬滴達 廟址 등이 있고, 탑지로서는 馬滴達塔址가 있다. 또 春化鄕 草坪村에서 는 주거지 1기와 고분군 1곳이 발견되기도 하였다(그림 7). 이 외에 동경 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목인 소련 연해주에서는 포시예트(Pos yet)항만 유 적지를 비롯하여 코프이토(Kopyto)절터, 아브리코스(Abrikos)절터, 코 프이토 고분군, 크라스키노(Kraskino)성지 등이 발견되었다. 53) 54) 55) 56) 57) 齋藤甚兵衛, 앞책 p.2 鳥山喜一, 앞책 pp. 217 218의 주 51 54) 遼史 권 38 地理志 東京道 開州 開州 本濊貊地 高麗爲慶州 渤海爲東京龍原府 疊石爲城 周圍二十里 55) 孫進己, 渤海疆域考 北方論叢 1982 4 p. 83 丹化沙, 앞논문 1983 p. 18 56) 鳥山喜一 藤田亮策, 앞책 齋藤甚兵衛 山本守, 앞책 王俠, 앞논문 張錫瑛, 琿春馬滴達渤海塔基清理簡報 博物館研究 1984 2 李健才, 앞논문 1985 57) 이건재가 보고한 龍王廟址가 이와 동일한 것 같은데 확인할 수 없어 따로 주 에 밝혀 놓는다. 李健才, 앞논문 1985 p. 137 53) - 426 -
Ⅳ. 지방도시성 京 府 州 縣으로 편제하여 다스렸으 니, 이러한 지방의 거점 도시들에는 성을 쌓게 마련이었다. 현재 위의 행정 구역이 과연 어느 지역에 비정되느냐는 문제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 고 있는 점이 많아, 각지에서 발견되는 발해 성들이 과연 어느 행정구역에 속하였는가를 밝히는 데에도 어려움이 많은 실정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府, 州, 縣의 소재지로 거론되는 대표적인 성들을 선택하여 거론하고자 한다. 발해는 전국을 5, 15, 62, 100여개의 1. 府城 西古城 이 성은 西古城子城이라고도 불리며 1982년 길림성중점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었는데, 화룡현성에서 동북쪽으로 25km 떨어진 중국 길림성 화룡 현 西城鄕 北古城村에 자리잡고 있다. 성의 남쪽에는 海蘭江이 서북쪽에서 동남쪽으로 흐르고 있다. 이곳은 頭道(溝)평야의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치우친 곳으로, 두도평야는 두만강의 지류인 해란강유역의 평야 중에서 가 장 크다. 이 평야는 불규칙한 타원형으로 동서 길이 약 30km, 남북 너비 약 10km이고, 그 주위에는 구릉들이 둘러싸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은 토질이나 기후, 교통 및 군사적인 측면에서 볼 때 사람이 거주하기에 아주 적합한 곳으로 발해시기에도 아주 중시되던 곳이다. 이곳에 대해서는 이미 일본인들이 발행한 統監府間島臨時派出所紀要 (1909), 間島事情 (1918) 등에서 소개되기 시작하였고, 鳥山喜一은 1923년, 1924년 이곳을 방문하여 관심을 가져오다가 1937년, 1943년, 1945년 서고성을 발굴하기도 하였다. 그 외에 1935년 白鳥庫吉이 이곳 을 방문하였고, 1942년 齋藤甚兵衛가 조사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2 1) 58) 59) 60) 58) 59) 61) 鳥山喜一 藤田亮策, 앞책 p. 7 鳥山喜一, 앞책 p. 216 주38-427 -
후 연변박물관등에서 여러 차례 이곳을 지표조사하였으나 자세한 조사 경과는 알 수 없고, 북한에서도 조사를 실시한 바 있다. 차대전 이 62) 63) (그림 8) 서고성 [그림제목] 鳥山喜一 藤田亮策, 앞책 p. 8 齋藤甚兵衛(優), 앞논문 p. 10 嚴長錄 앞논문 참조 영 앞책 pp. 17 18 60) 61) 62), 63) 주 헌, - 428 -
외성, 내성으로 이루어졌다(그림 8). 성의 방향은 정북에서 서쪽으로 10 치우쳐 있다. 외성은 장방형이고 둘레가 약 2,713m로서 서벽 728m, 동벽 729m, 남벽 626m, 북벽 630m 이다. 성 벽은 흙을 판축하여 쌓았는데 판축 두께는 10cm 정도이다. 성벽의 바닥 너비는 13 17m, 위의 너비는 1.5 4m 이고 잔존높이는 1.8 2.5m이 며 4.5m 높이에 달하는 곳도 있다. 성벽은 파괴가 심하여 동, 서 양벽과 남벽 서단의 정상부는 차도가 되어버렸고 나머지 성벽의 정상부도 길이 되어 있다. 성벽 밖에는 해자를 돌렸던 흔적이 보인다. 또 남, 북벽의 가 운데에는 잘린 부분이 성의 남북 중심선상에 있는데 이곳이 남, 북문지에 해당한다. 너비는 15m 이다. 내성은 외성 가운데에서 북쪽으로 다소 치우친 지점에 위치한다. 장방 형으로 남북 길이 310m, 동서 너비 190m 이다. 내성 북벽은 외성 북벽 으로부터 70m 떨어져 있다. 내성 성벽도 파괴가 심하다. 내성 중, 북부에 서 모두 5개의 건축지가 확인되었다. 한편 내성과 외성 사이 특히 내성의 북벽과 외성의 북벽 사이에서 또 하나의 벽이 발견되었는데 주영헌은 이 것을 중성의 벽이라고 칭하고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또 齋藤甚兵衛는 팔 련성의 경우에서처럼 서고성 밖에 또 하나의 성벽이 둘러쳐져 있어 이것 이 외성이고 서고성의 성벽은 내성에 불과하다는 주장을 하였으나 일반적 성은 토성으로서 64) 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고 있다.65) 축 자재인 기와 河南屯고성, 팔련성의 경 이 성을 조사하면서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역시 건 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여기에서도 동경성, 우와 같이 文字瓦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발해의 중경현덕부 소재지에 대해서도 학설이 분분하여 구국과 중경이 래 盧州인지 顯州 동일한 지역인지 여부, 중경의 소재지가 중경현덕부 아 의 인지 여부 등이 엇갈려왔 다.66) 영 외 내 외 내 齋藤甚兵衛 앞 서고성이 발해 중경현덕부의 소재지라는 64) 주 헌은 성과 성 사이에 중성을 설정하여 서고성을 3중성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성, 성의 구별 방 을 르 다. 65), 논문 pp. 14 15 식 따 겠 - 429 -
鳥山喜一등에 의해 구체적으로 제기되기 시작하여 현재에 이르러 서는 이곳에 대한 고고학적 조사를 통하여 거의 정설화되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신당서 에 인용된 賈耽의 道里記를 바탕으로 이곳에 일시적으 로 도읍을 정하였었다는 견해가 일부 피력되고 있고, 또 중경의 소재지 로는 인정하지만 이곳이 과연 중경 아래 어느 州의 소재지인지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의 평면 구조가 도성이었던 동경 성이나 팔련성과 거의 동일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고 있다. 주장은 67) 란 (그림 9) 해 강 유역 발해 유적 분포도 [그림제목] 李健才 陳相偉, 앞논문 孫進己, 앞논문 pp. 82 83 丹化沙, 앞논문 1983 pp. 16 17 67) 그러한 예로서 왕승례를 들 수 있다. 왕승례 저 송기호 역, 앞체 p.80 66) - 430 -
잡 룡 우선 성으로서는 河南屯古城, 海蘭古城, 紅星古城, 龍泉古城, 獐項 古城, 長仁遺址, 龍海古城, 八家子南山山城 등이 있다. 고분으로는 정효공 주묘가 소재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한 龍頭山고분군, 순금제 장식들이 발견 된 河南屯고분을 비롯하여 北大고분군, 龍海고분군이 있고, 紅星, 西古城 北, 南溝, 長仁, 靑龍, 明岩, 興城, 獐項 등지에서도 고분이 발견되었다. 또 절터로는 河南屯寺址, 軍民橋사지, 河南屯 南山사지, 高產사지 등이 있 다. 그 외에 용해고성 부근과 정효공주묘 부근에서 건축지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아뭏든 이러한 발해시기의 유적들은 서고성이 발해시기에 중요한 성의 하나였음을 반영하는 것으로 특히 정효공주묘, 하남둔고분의 발견은 그러한 추측을 더욱 뒷받침해 준다. 2) 北靑土城 토성리토성, 청해토성으로도 불리는 이 성은 함경남도 북청읍에서 동남 쪽으로 18km 떨어진 북청 남대천 좌안의 넓은 벌 가운데에 있다. 토 성의 북쪽에는 야산들과 대덕산 줄기가 보이고 남쪽과 서쪽에는 동해가 펼쳐져 있다. 옛날에는 남대천의 한 줄기가 토성의 북쪽과 동쪽을 감돌아 서고성이 자리 고 있는 화 현 지역에도 발해시기 유적들이 많다(그림 9).68) 69) 鳥山喜一 藤田亮策, 앞책 齋藤甚兵衛, 앞논문 郭文魁, 和龍渤海古墓出土的幾件金飾 文物 1973 8 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 渤海貞孝公主墓發掘清理簡報 社會科學戰線 1982 1 延邊朝鮮族自治州博物館 延邊文化館, 和龍北大渤海墓葬清理簡報 東北考古 與歴史 1, 1982 李健才 陳相偉, 앞논문 鄭永振, 앞논문 延邊博物館, 和龍縣龍海渤海墓葬 博物館研究 1983-3 嚴長錄, 앞논문 何明, 吉林和龍高產渤海寺廟址 北方文物 1985 4 69) 이하 다음 글을 인용하였다. 리준걸, 앞논문 발굴 및 답사 소식 (1) 조선고고연구 1986 1, p.46과 p.48 발굴 및 답사 소식 (2) 조선고고연구 1986 2, p.47 68) - 431 -
쪽 흘러감으로써 성을 보호하고 있었으나 지금은 물줄기가 바뀌어 버렸다. 또한 토성의 주위는 비옥한 땅으로 농사짓기가 좋고 수륙교통이 편리한 곳이다. 이 토성은 1966년에 조사되고 1972년과 1985년에 발굴되었다. 장방형 의 토성으로서 현존하는 성벽의 윗너비가 1 2m 이고, 아랫부분 너비는 약 10m 이다. 성의 네 벽 중심 가까이에는 성문 자리가 서로 대칭을 이 루고, 문들을 연결하는 +자 모양의 큰 길이 있다. 성벽의 네 모서리에는 角樓 자리 같은 것이 있다. 남문터에는 甕城이 있고, 북문 곁에는 망루 자리같이 높은 곳이 있다. 그 리고 성문들과 각루 사이에는 1 2개의 雉가 설치되어 있다. 성 안은 성문 들을 연결하는 큰 길에 의해 田자 모양의 구획을 이루고 있다. 그 구획들은 다시 4개의 작은 田자 모양의 구획으로 되었다. 즉 성 안에는 田자 모양의 坊을 설치하고 각각의 장방형 구획 안에 건축물 또는 시설물을 두었다. 이 성의 坊 안에서는 2 3개 고래의 온돌을 놓은 집자리들과 거기에서 나온 장식물, 무기류, 수레 부속, 그릇류, 농공구류, 건재류 등 많은 유물 남 으로 이 발견되었다. 찌 德源說, 鏡城說, 咸興說, 北靑說 등으로 갈려 왔다. 이 중 鳥山喜一은 1925년 북 청 일대를 조사하면서 城串山山城과 북청토성(당시의 肅愼고성)을 확인하 였으나 후자는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채 池內宏의 견해와 같이 전자를 남 경의 소재지로 파악하였었다. 따라서 북청토성에 대해서 제대로 조사되 기 시작한 것은 북한에 의해서인데, 토성의 규모, 형태, 지형구조 등에서 중국 동북지방의 오동성, 팔련성, 서고성과 비슷하고, 그 안에서 발견된 일 기 발해 남경남해부의 소재지에 대해서도 학설이 분분하여 70) 집자리의 구들시설이 동경성에서 발견된 것과 동일하고, 집자리에서 출토 께 토성 안의 한 유물이 중국 동북지방 출토의 것과 동일하다는 점과 함 북문 가까이에서 고려시기의 70) 무덤이 발견되어 이 성이 고려시기에는 이미 鳥山喜一, 앞책 pp. 163 164 및 p. 221 주82-432 -
폐기되어 있었다는 점을 들어 발해시기의 토성으로 단정할 수 있다는 것 이다. 그러나 이 성에 대해서 조선고고학개요 (1977)에는 전혀 언 급이 없다가 박시형의 발 해사 (1979)에서 남경남해부 자리로 추정한 바 있으나, 같은 해에 간행된 조선전사 에는 남경남해부의 위치를 단지 신창 부근으로 짐작된다고 하였고 유적 설명에서도 발해 도시성의 하나로 취급하지 않고 단순히 발해 변방의 소형의 성터로 취급하고 있어, 아직은 이 성의 성격에 대해서 단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듯하다. 북청토성에서 가까운 북청군 중리와 신포시 중흥리에서 발해 고분군이 71) 72) 발견되기도 하였다.73) 압 란 한편 서경 록부의 소재지도 논 이 많지만 최근 길림성 渾江市 臨江鎭 에서 발견된 성터로 비정되고 있다.74) 3) 蘇密城 중국 길림성 樺甸縣 縣城에서 동쪽으로 3km 떨어진 輝發河 南岸에 위 치한다. 북벽은 강가에 연해 있어 반 이상이 물에 씻겨 내려가버렸다.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그림 10), 외성은 둘레가 2,600m, 내성은 1,400m 이다. 의성은 동, 서, 남벽에 3개의 문이 있지만 북문은 이미 물 에 씻겨 내려가버려 남, 서문만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甕城이 시설되어 있 다. 내성은 가운데에 있고, 동, 서 두 개의 문이 있다. 또 이 성에는 角樓가 있지만 馬面(雉)은 없고, 해자는 외성 밖에 두 겹 75) 앞 박 형 김 종합 앞 張殿甲 앞 밀 李健才 앞 밀 글 밖 鳥山喜一 蘇密城に就いて 池內博士還曆記念東洋史論叢 座右寶刊行會, 東京 71) 리준걸, 논문 p.36 72) 시, 발해사 일성 대학출판사, 1979 p. 162 73) 리준걸, 논문 p.34 74), 논문 pp. 64 66 75) 이하 소 성의 구조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조하였다., 논문 1983 소 성에 관한 은 이 에 다음이 있으나 아직 보지 못하였다.,, 1940-433 -
돌렸다. 내성 서문 남쪽에서 돌로 쌓은 성벽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성 안에서는 붉은색과 회색의 布目무늬가 있는 암키와 조각들과 회색의 점토제 도기 조각들이 지표에 많이 널려 있다. 그리고 내성 북벽의 단면과 외성 서쪽 끝 단면에도 붉은색과 회색의 점토제 도기 조각들이 박혀 있었 다. 이 외에 외성 동벽 안쪽의 내성 동벽 가까이에서 木人 이라는 글자가 양각된 흑회색 점토제 陶豆柱 1개가 발견되었다. 으로 밀 (그림 10) 소 성 [그림제목] - 434 -
밀 찍 왔는데, 초창기에는 발해 中京의 소재지를 찾기 위 그러나 중경의 소재지가 대체로 화 룡현에 있는 서고성으로 비정됨에 따라 이제는 長嶺府의 소재지로서 주목 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장령부의 소재에 대해서는 英額城說, 北山城子說, 英額門 이북설, 海龍 부근설 등도 있어 아직 고정되지는 않은 상태이 다. 이 성 부근에는 많은 성들이 포진하고 있는데 이 중 北山城子와 北 土城子가 발해시기의 것으로 추정된다. 4) 大城子古城 이 성은 중국 흑룡강성 東寧縣 북쪽으로 흐르는 綏芬河 南岸 2km 떨어 진 곳에 위치한다. 수분하는 대성자 동쪽으로 흘러 중소 국경을 이루고 있 는 湖布圖河(大烏蛇溝河)와 만난 뒤 소련 연해주의 雙城子(우수리스크)를 지나 블라디보스톡 근처의 아무르(Amur)만으로 들어간다. 대성자로부터 동남쪽 약 65km 거리에 雙城子(우수리스크)가 있는데 이곳에도 발해시기 소 성은 발해사 연구에서 일 부터 주목되어 해서였다.76) 77) 의 성이 있다. 대성자고성에 대해서는 1972년 여 알려지게 張太(泰)湘등이 두 차례에 걸쳐 조사하 되었다.78) 절 벽 높이가 2 5m가 된 형 쭉 벽 중간이 밖으로 튀어나 와 있다(그림 11). 둘레는 3,750m 이고 장축의 방향은 동쪽에서 남쪽으 로 30 기울어져 있다. 성벽에는 몇 개의 절단된 부분이 있지만 성문지인 성지는 과거 만주국 시 에 보수되어 현재는 성 다. 성의 평면은 장방 으로 동서로 길 하고, 북 鳥山喜一, 앞책 pp. 132 136 駒井和愛, 渤海の舊國 顯州 中京顯德府について 中國都城 渤海研究 雄山 閣, 1977 77) 장령부의 소재지로 소밀성을 꼽고 있는 대표적인 인물이 이건재이다. 李健才 陳相偉, 앞논문 pp. 75 76 李健才, 앞논문 1983 丹化沙, 앞논문 1983 p. 19 78) 張太湘, 앞논문 張泰湘, 東寧考古拾零 黑龍江文物叢刊 1983 1 76) - 435 -
벽 북쪽 부분에서 甕城 하나가 발견되었고, 성벽 모서리에서는 角樓 흔적이 보였다. 성벽 밖에는 해자(護城河)를 돌렸 는데 깊이는 2 3m가 된다. 지 확인하지 못하였다. 다만 서 (그림 11) 대성자고성 [그림제목] 식 발굴되지는 않았다. 다만 지표조사시 채집하거나 현지인 들이 소장하고 있던 것을 수습한 것으로는 동제품으로 문고리(銅鋪首), 허 리띠(帶銙), 경첩(鉸鏈), 자물쇠(鎖), 그릇뚜껑, 거울, 盒, 사리함, 불상 등이 있는데 이 중 상당수는 도금을 한 것이다. 그 외에 철제 門樞, 암키 와, 와당 등도 발견되었다. 성의 평면이 장방형으로 북벽 가운데가 돌출한 것은 당의 장안성이나 발해의 동경성과 비슷한 것이고, 고성 안에서 출토한 유물들의 다수가 동 경성에서 발견된 것들과 같은 유형의 것인 점으로 보아, 이 성이 발해의 성임이 분명하며, 綏芬河 연안에서 최대의 고성지로서 팔련성이나 서고 성보다도 더 큰 점을 감안하면 이곳이 발해 率賓府 소재지로 추측할 수 이 성도 정 79) 름 率賓府는 서로 연관이 있다고 한다. 오클 드 코프 A P. Okladnikov) 저 加藤九祚, 加藤晋平 역, シベリア の古代文化 講談社, 1974 p. 196 샤프쿠노프(E. V. Shavkunov) 저 송기호 역, 연해주의 발해 문화유적 백산학보 30 31 합, 1985 p. 470 79) 이 강 이 과 발해 라 니 (. - 436 -
솔빈부의 소재지를 주로 소 련 연해주의 쌍성자(우수리스크)에 있는 니콜리스크 성지(南우수리스크 성지)로 비정하는 것이 거의 정론이었으므로 아직은 단정하기 어렵다. 대성자고성 부근에서도 발해시기의 유적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니, 대성 자고분군과 東寧 團結의 발해 평민 촌락 유적지가 있고, 대성자고성 동북쪽 의 泡子沿屯 부근과 서쪽의 東寧鎭에서 발해시기 積石墓群이 발견되었다.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성이 보고되기 전에는 80) 2. 州城 溫特赫部城 溫特赫城, 高麗城, 高力城, 高力城子土城으로도 불리는데, 중국 길림성 훈춘현 三家子鄕 古城村 안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훈춘하 하류의 충 적 평야 끝에 해당하며, 성의 서북쪽 1km 떨어진 곳에는 두만강이 동쪽 에서 서쪽으로 흘러간다. 또 성의 북쪽 7.5km 떨어진 곳에는 팔련성이 있다. 이 성의 동쪽에는 요, 금 시대의 고성인 裴優城과 인접해 있어, 배 우성의 서벽이 바로 온특혁부성의 동벽에 해당한다. 성은 사다리꼴을 하고 있다(그림 12). 흙으로 쌓은 성벽은 전체 길이가 2,269m로서 남, 북벽이 710m, 동벽이 468m, 서벽이 381m 이다. 성벽 이 거의 인멸되어 있는데, 甕城이나 雉의 흔적은 없고 해자의 흔적만 보인 다. 또 琿春縣誌 에 의하면 4벽에 각기 1개씩의 문이 있다고 한다. 1) 81) 82) 黑龍江省博物館 黑龍江省文物考古工作隊, 黑龍江文物考古三十年主要收穫 文物考古工作三十年(1949 1979) 文物出版社, 1979 p. 117 張太湘, 앞논문 1981 p. 223 黑龍江省文物考古工作隊 吉林大學歷史系考古専業, 黑龍江東寧縣大城子渤海 墓發掘簡報 考古 1982 3 81) 이 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들을 참조하였다. 鳥山喜一 藤田亮策, 앞책 pp.54 55 王俠, 앞논문 p. 122 李健才, 앞논문 1985 pp. 138 139 嚴長錄 楊再林, 앞논문 pp.58 59 82) 齋藤甚兵衛 山本守, 앞책 pp. 55 56 80) - 437 -
곳 (그림 12) [그림제목] 온특혁부성과 배우성 종류의 기와 조각들이 다수 발견되었으며, 이 중에는 고 구려시기의 연화문 와당, 발해시기의 연화문 와당, 요, 금 시기의 獸面 이 에는 여러 83) 83) 온특혁부성이란 명칭은 금시기에 女鎭 温迪痕部가 살았던 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李健才, 앞논문 1985 p. 138-438 -
紋 와당이 포함되어 있어, 이 성이 고구려 시대에 축조되어 후대에까지 계 속 사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이 성의 동남쪽 밖에서도 기와 조각 들이 발견되고 있어 고구려시기에는 성의 범위가 무척 넓었다가 뒤에 폐 기되었고, 발해시기에 들어 성을 수리하여 재사용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데 李健才는 동경용원부의 首州, 首縣인 慶州와 龍原縣은 고구려시 기에 두어졌던 것을 발해가 이어받은 것으로 이 성에 두어졌다고 하고, 팔 련성은 경주 용원현 부근에 신축한 京城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서 팔련성 안에서 고구려 유물들이 발견되지 않는 점을 들고 있다.84) 薩其城 沙齊城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은 중국 길림성 훈춘현 楊泡鄕 楊木林子村 동남쪽 1.5km 떨어진 산 위에 위치한다. 이곳은 훈춘하 하류의 삼각형 충적평야의 동북쪽 지점에 해당한다. 성벽은 산세를 따라 돌로 쌓았으며 전체 둘레는 약 5,000m이고 성벽의 현존 높이는 1 2m 이다. 서북향을 하고 있는 북문이 있고, 성의 동쪽에는 멀리 哈達門 東荒溝로부터 흘러와 서 이곳을 지나 소련 경내로 들어가는 古代 長壕와 접하고 있다. 성 안에서는 건축지 두 곳이 발견되었으며, 다량의 기와 조각들이 흩어져 있다. 기와의 형태와 무늬는 揚木林子 발해 절터의 것과 동일하다고 한다. 李健才는 이 성을 고구려 柵城府 소재지로 보고 있고, 발해에 이르러서 는 동경 아래의 穆州 또는 賀州의 소재지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 85) 86) 그러나 이 견해가 전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지는 않다.87) 위와 王俠 앞 李健才 앞 嚴長錄 楊再林 앞 李健才 윗 嚴長錄 楊再林 앞 84) 같음 85) 이 성에 대해서는 다음 을 참조하였다., 논문 p. 123, 논문 1985 pp. 139 140, 논문 p.58 86), 논문 그에 의하면 이 성의 명 도 책성부에서 87), 논문 p. 58 글 칭 - 439 - 音轉한 것이라 한다.
3) 南城子古城 쪽 교외의 江南鄕 永安村에 있는 東團山 에 위치하고 있다. 동단산은 해발 252m로 부근 지표에서는 50m 정도 높 이로 솟아 있는 자그마한 산이다. 서쪽으로는 남쪽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松花江에 임해 있고, 북쪽으로는 2.5km 지점에 고구려 龍潭山城이 있다. 해방전에 일본학자들이 동단산 유적을 조사한 바 있고, 해방후에도 여 이 성은 중국 길림성 길림시 동 러 차례 조사되었다.88) 여기에는 원시시대 및 고구려 시대 유물들이 발견 되는 동단산산성과 그 밑의 평지에 축조되어 원시시대 및 漢, 고구려, 발 해, 요, 금시대 유물이 발견되는 남성자고성이 있다. (그림 13) 남성자고성 [그림제목] 글을 참조하였다. 董學增 앞 武國勛 夫餘王城新考 前期夫餘王城的發現 黑龍江文物叢刊 1983 4 88) 이 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 - 440 -
쪽 기슭의 대지 위에 황토로 쌓았다. 성벽은 원형에 가까운데 동남쪽 부분이 현존 높이 5 6m, 윗부분 너비 1m 정도 로 비교적 잘 남아 있다. 그러나 서쪽은 성벽이 없이 동단산이 성벽을 대 신하고 있다(그림 13). 성 밖에는 해자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남, 북 문이 있는데 남문은 너비 16m 이고 북문은 44m 이다. 성벽 둘레는 서쪽 을 제외하고 1,050m 이다. 성 안의 남문 가까이에는 남북 길이 150m, 동서 너비 73m이고 지표보다 1 1.5m 높은 방형 대지가 있다. 董學增에 의하면 이 성은 3獨奏州의 하나인 涑州의 소재지로 여겨지며, 武國 勛에 의하면 그 이전에는 前期 부여 왕성이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속주의 위치를 길림시 서북쪽에 있는 永吉縣 烏拉街鄕 안에서 찾는 견해도 있다. 이 성의 부근에서 동쪽으로 1km 떨어진 곳에는 발해 시기의 帽兒山고 분군이 있고, 烏拉街 부근에는 발해 시기의 灰坑, 40기의 고분이 발견된 大海猛유적 외에 大常屯고성도 있다. 4) 크라스키노(Kraskino) 성지 소련 연해주의 하산(Khasan) 지방의 크라스키노 마을로부터 남동쪽으 로 2 3km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이곳은 야니치헤(Yan chikhe)강 계곡의 右岸으로서 심하게 습지화된 지역의 한가운데에 해당하며, 또한 海 灣이 육지쪽으로 깊숙히 들어온 곳에 위치하는 야니치헤강의 江口로부터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이 성의 존재에 대해서는 20세 기초에 들어 카파로프(Palladiy Kafarov) 가 처음으로 밝힌 바 있고, 1958년 안드례예프(G.I. Andryeyev)가 다시 조사하였으며, 1960년에는 샤프쿠노프등이 이곳을 방문하여 약간의 자료 남성자고성은 동단산 동남 89) 90) 吉林市博物館, 吉林永吉楊屯大海猛遺址 考古學集刊 5, 中國社會科學出 版社, 1987 p. 149 90) 이 성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였다. 샤프쿠노프, 沿海州の渤海の遺蹟(1960年度の調査より) シベリア極東の 考古學 2, 沿海州篇, 河出書房新社, 1982 pp. 318 319 샤프쿠노프 저 송기호 역, 앞논문 pp. 465 467 89) - 441 -
를 수집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1958년 조사시에는 발해 시기의 자료가 수 반면, 1960년 조사시에는 발 추장할 수 있었다. 이 성의 평면은 불규칙한 원형으로 북, 동, 남벽에 각기 1개씩의 문이 있다. 성벽은 낮고 심하게 붕괴되어 있어 현존 높이는 단지 1.5 2m 이 다. 성문마다 장방형의 옹성이 시설되어 있다. 채집된 유물 중 주목을 끄는 것은 輪製의 도기 조각으로 이와 유사한 것은 연해주의 발해 유적들인 코프이토(Kopyto) 절터와 아브리코스 (Abrikos) 절터, 톄츄혜(Tyetyukhe) 성지 등에서도 발견되었다. 또 이 곳에서는 十자 모양의 작은 銅製 垂飾, 황갈색 색조를 띤 綠釉의 자기 파 편도 발견되었는데, 후자의 경우 아브리코스 절터 출토의 자기 파편이나 동경성 출토의 것과 동일하다. 그 외에 발해 특유의 문양이 나타나는 약간 의 기와 조각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모든 자료를 감안해볼 때 이 성은 발해 성지로 여겨지며, 구체 적으로 동경 관할하의 鹽州 소재지로 판단된다. 이것은 이곳의 강 이름인 야니치헤 도 염주에서 유래한 것을 고려하여도 분명하다. 이곳으로부터 가 까운 포시예트(Pos yet)만에서는 발해 항만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이곳이 바로 발해에서 일본으로 출발하는 日本道의 바닷길 출발지이다. 집되지 않아 12 13세기의 유적으로 편년된 해 시기의 유물들을 다수 채집하여 발해 성지로 3. 縣城 縣城으로는 현재 土城子古城 하나가 거론되고 있다. 이 성은 중국 흑 룡강성 寧安縣 城東鄕 土城子村에 있으며, 동경성으로부터는 동남쪽으로 약 7km 거리에 있다. 성은 동경성 분지의 남부에 위치하며 동쪽에는 馬蓮河가 흐른다. 또 동북쪽 10km 떨어진 곳에는 유명한 平頂山(四方山)이 있다. 이 성을 경유하여 서남쪽으로는 敦化, 盤石 등지로 나아갈 수 있고, 동남쪽으 로는 汪淸, 琿春 등지로 나아갈 수 있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91) 글을 참조하였다. 朱國忱 渤海龍州三縣考 求是學刊 1986 5 p. 90 및 p. 46 91) 이 성에 대해서는 다음, - 442 -
형 약 300여 m, 동서 길이 200m에 가까우며 둘레는 약 1km 정도가 된다. 방향은 대략 정남에서 서쪽으로 45 기울어져 있다. 성벽은 흙으로 쌓았으며, 현재는 후에 증축된 상태로 남아있는데 높이가 2 4m 가 된다. 옹성이나 치(馬面)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60년대초에 조사하였을 때에는 3개의 문지가 남, 북, 서벽 중간 에서 발견되었다. 성의 규모나 형태는 대체로 돈화 오동성과 비슷하다. 이 성에 대해서 朱國忱은 발해의 성지로 파악하면서, 그 규모가 州의 소재지로 보기에는 작으면서 동경성으로부터 10 15km 범위 안에 있는 점으로 보아 上京 龍州 관할의 長平縣으로 볼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토성자고성은 장방 으로 남북 길이 4. 기 타 城山子山城 敦化鎭(현 돈화시)에서 서남쪽 12.5km 떨어진 大石河 南岸의 대지 위 에 있다. 성은 산허리를 따라 흙으로 쌓았다. 성벽은 동, 남, 서벽이 있 고, 북벽은 大什河에 면한 절벽에 의지하고 있어 반달 모양을 이루고 있 다. 전체 둘레는 1,085m로서 그 안에 3개의 산봉우리를 감싸고 있다. 성 벽은 현존 높이가 2 3m 이고, 너비는 4 5m 이다. 문은 두 개가 있어 동문은 산허리에 위치하여 산 아래와 통하고 있으며 현존 높이 2.5m, 너비 6m, 길이 4m 이다. 동문으로 들어가면 지세가 점 차 높아지며, 중간에 4개의 壁壘를 지나 마침내 남문에 이른다. 남문 방향 은 160 로 현존 높이는 2.5m, 너비는 4m 이다. 문 밖에는 타원형의 甕 城이 있는데 직경이 20m 이다. 성 안에서는 반지하식 주거지 50여기, 연병장 여러 곳, 대형 저수지 두 곳과 矛頭, 鐵刀, 鐵鏃, 鐵箭頭 등의 각종 병기가 발견되었다. 이 성의 성격에 대해서 단지 오동성의 衛城으로 보는가 하면, 대조영 1) 92) 93) 94) 92) 성의 구조에 대해서는 주로 다음, 논문 1962 참조 93), 논문 王承禮 앞 劉忠義 앞 글을 참조하였다. - 443 -
처음에는 이 성에 도읍을 정하였다가 뒤에 오동성으로 옮겼으니 대조 영이 첫 도읍지로 삼았다는 東牟山은 성산자산성이 위치하고 있는 산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고, 이곳이 대조영이 도읍한 舊國이면서 中京 관할 의 榮州 소재지에 해당한다는 설도 있다. 한편 구국을 논하면서 그 범 위를 좁게는 오동성으로, 넓게는 오동성과 성산자산성을 포함하여 보자는 이 95) 96) 견해도 제시되고 있다.97) 河南屯古城 虛萊城(虛來城), 八家子土城으로도 불린다. 이곳은 중국 길림성 和龍縣 八家子鄕 河南村에 속하며, 서북쪽으로 4km 떨어진 곳에 서고성이 있다. 이 성의 북쪽은 해란강에 접하고 남쪽은 산이다. 2) 98) 둔 (그림 14) 하남 고성 [그림제목] 王承禮, 앞논문 1962 p.577 劉忠義, 앞논문 孫進己, 앞논문 p. 83 丹化沙, 앞논문 1983 p. 17 劉曉東, 앞논문 98) 이 성에 대해서는 다음 글을 참조하였다. 齋藤甚兵衛, 앞논문 pp. 16 19 郭文魁, 앞논문 p.41 嚴長錄, 앞논문 p.84 94) 95) 96) 97) - 444 -
긴 장방형이고 외성과 내성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북벽이 강물에 씻겨내려가 ㄷ자 형태로 남아 있다(그림 14). 나머지 성벽도 대부 분이 무너져서 평지화되어 있고, 서벽 중간만이 희미하게 확인될 뿐이다. 1942년 齋藤甚兵衛가 이곳을 조사하였을 때의 기록을 보면, 북벽의 극히 일부와 서벽 전체, 남벽 일부만이 남아 있었다. 서벽은 길이가 360m 이 고 북벽은 서벽 북쪽에 약간만 남아 있었다. 남벽은 잔존 길이가 840m 이며 남벽 전체의 추정 길이는 1,200여m가 되었다. 성 안에는 도로와 坊의 흔적이 남아 있었고, 남벽에서 180m 정도 떨어 진 곳에는 石壘로 둘러싸인 내성 자리가 있다. 내성의 크기는 동서 140m, 남북 120m로 방형에 가깝다. 내성의 서벽 중간에는 문지로 보이 는 절단부가 있었다. 또 내성 가운데에는 궁전지로 보이는 土壇들이 서북 쪽 귀퉁이에 치우쳐 남아 있었다. 이 중 한 곳은 주춧돌 배치로 보아 동서 5間, 남북 3間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그 외에 내성 밖에도 토단들이 있고 이 중에는 주춧돌이 남아 있는 곳도 있었다. 이곳으로부터는 발해시기의 기와와 점토제 불상 머리 조각 등이 발견되 었다. 한편 주목할 만한 것은 1971년 성 안에서 발해시기의 고분이 발견 된 점이다. 이 고분은 성 안의 가운데에서 조금 서남쪽으로 치우친 지점에 서 발견되었는데, 장방형의 전축분으로 2기의 고분이 동서로 나란히 붙어 있었고 무덤 위에는 주춧돌이 있었다. 이미 파괴된 상태였지만 이곳으로부 터는 발해시기의 화려한 금제 장식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사실을 토대로 이곳이 발해시대에 陵園地로 사용되지 않았나 하 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곳에 발해 초기에 성으로 사용하다 가 뒤에 폐기하여 당시에 이미 무덤이 쓰여졌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 이다. 참고로 齋藤甚兵衛는 이곳이 舊國址이고 서고성은 뒤에 건설한 中京 址라고 추정한 바 있다. 성은 동서로 99) 100) 李健才 陳相偉, 앞논문 p. 74 齋藤甚兵衛, 앞논문 p.22 99) 100) - 445 -
Ⅴ. 연구 현황과 문제점 이상으로 발해의 주요 성지에 대한 조사 상황을 도성, 부성, 주성, 현성 타 았 및 기 로 분류하여 정리하여 보 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조사 성과를 바 떠 탕으로 어 한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지를 간단히 검토하여 보고 그러한 연구에는 문제점이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1. 성지 편년의 문제 영역이었던 만주 동부 지역에서 발견되는 성지들을 모두 발해의 것으로만 단정할 수 없음은 자명하다. 이미 부여 시기부터 성이 축조되기 시작하여 고구려, 발해를 거쳐 명, 청시대에까지 계속 성이 축조되어 왔 고, 일부는 여러 시대에 걸쳐 계속 물려받아 사용되어 왔던 것이다. 따라 서 발해의 성으로 결론짓기 위해서는 일정한 판단 기준이 필요하다. 그러 나 아직까지 명확한 기준 제시없이 막연히 발해의 성으로 규정된 것도 적 지 않다고 생각된다. 더구나 대다수의 성들이 발굴되지 않고 단지 지표 채 발해의 집된 유물들을 바탕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재고의 여지가 있는 것도 있 존 무엇인지를 정리하여 보고 거기 에는 문제점이 없는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현재 편년 기준이 되는 것은 성의 구조와 출토된 유물 양식이다. 성의 구조적인 면에서는 雉 甕城 등의 유무가 주로 고려되고 있고, 유물 면에서 는 기와, 도기 양식이 주로 고려되고 있다. 이 중에서 전자의 문제를 중점 적으로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성벽과 관련된 시설물에는 성문, 옹성, 치, 각루, 암문, 수구문 등이 있 는데, 이 지역에서 성의 연대를 고려할 때에는 치와 옹성이 주로 거론되고 있다. 일찌기 鳥山喜一, 藤田亮策은 간도의 유적을 조사하면서 만주의 토 성에서 옹성과 치(雉堞)가 발견되는 것은 대체로 요, 금 시대 이후의 것이 라고 하여 시대 추정의 기준을 제시한 바 있고, 齋藤甚兵衛는 훈춘 지 다. 이제 여기에서는 기 의 편년 기준이 101) - 446 -
裴優城과 溫特赫部城, 高麗城(營城子城) 등을 조사하면서 각각의 시 기 추정에 옹성과치의 존재를 고려하였고, 오동성의 연대에 대해서도 이 성이 극히 소형이고 雉가 있으며 발해 기와가 전혀 없다는 점에서 발 역의 102) 해성이 아니라고 하였다.103) 후 單慶麟이 오동성을 조사 보고하면서 옹성은 唐시대에 비로 소 생긴 것으로 당으로부터 배운 것이라고 설명하였으나 치의 존재에 대해 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한편 연변박물관이 汪淸縣의 성을 조사하면서 半城 古城이 馬面(치)과 각루 시설이 없고, 문의 구조도 요, 금 시기의 옹성과 같지 않다고 하면서 이 성을 발해의 성으로 규정하고 있다. 또 朱國忱 도 土城子土城을 거론하면서 옹성과 마면이 없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상 몇 가지 예를 들었지만 아직 성 벽의 구조면에서는 편년 기준이 명확히 정리되지 않은 듯하다. 또 만주 지역에서 성벽에 치, 옹성이 발생 하는 시기가 대체로 요, 금 시대 이후로 보는 견해에는 중국 문화의 변방 지역으로의 전파라는 관점에서만 보려는 편견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나 여 겨진다. 원래 옹성, 치(마면)는 唐대 이전에는 변경지역에서 적을 방어하 는 城障으로 출현하였다가 뒤에 중원지방에 이들이 설치되면서 기능이 더 욱 강화되어 도성 방어상 중요 시설로 된 것이며 五代 이후에 이러한 시 해방 이 에 104) 105) 설들이 보편화되었다고 한다.106) 그런데 고구려의 도성과 산성에서는 초 옹성, 치가 나타나는 점을 고려해볼 때 발해의 성지에서 도 옹성, 치가 발견될 수 있으며 그것은 고구려의 영향으로 보아야 할 것 기부터 이미 107) 鳥山喜一 藤田亮策 앞 齋藤甚兵衛 山本守 앞 齋藤甚兵衛 앞 변 치 박 앞 朱國忱 앞 黄寛重 中國 古代城郭 와 변 唐宋城郭 防禦 능 百濟研究 陳大爲 大寧高句麗山城初探 中國考古學會第 次年會論文集 文物出版社 101), 책 p.33 102), 책 pp. 19 30 103), 논문 1954 p. 21 104) 연 조선족자 주 물관, 논문 1985 pp.6 7 105), 논문 p. 90 106), 의 구조 재료의 천 의 기 을 중 심으로 19, 1988 p. 126 107), 5 (1985), 1988 pp. 116 117 사회과학출판사 편, 고구려 문화사 논장신서9, 논장, 1988 pp.53 54, p. 70-447 -
이다. 현재 발해의 성지로 분류된 것들 중에는 오동성, 흑석고성이나 북청 우와 같이 옹성, 치 등이 설치된 것들이 있으며, 이러한 성 들이 발해 이후에 연용되면서 추가로 시설된 것이 아니라면 바로 위와 같 이 설명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옹성, 치의 존재가 발해 성지와 요, 금 시대 성지 구분의 절대적 기준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한편 유물 중에서 기준이 되는 것은 돈화 육정산고분군에서 출토된 도 기들과 동경성에서 출도된 기와, 도기들이다. 육정산고분군 출토 유물은 발해 전기의 것을 대표하는 것들이고, 동경성 출토 유물은 상경 천도 이후 의 것을 대표하는 것이다. 더우기 육정산 고분군이나 동경성은 다른 시기 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곳에서 출토되는 것들을 발해 유물 로 보아도 무리가 없다. 이러한 유물 중의 하나로서 기와를 예로 들면 연화문 와당과 암키와 무 늬 등을 지적할 수 있다. 고구려의 것을 계승 발전시킨 蓮花紋 瓦當(숫막 새)은 6枚의 複瓣이 기본형이라 한다. 이러한 와당이 고구려 성지의 분포 범위 밖인 동경성이나 오동성 지역등에서 발견된다면 발해의 시대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또 암키와 둘레에 나타나는 連圏櫛齒 紋 은 발해 고유의 것으로 이것도 편년의 중요기준이 되고 있고, 文 字瓦도 발해 유적에서 발견되는 특징적 유물로 꼽히고 있다. 이상의 편년 기준도 단순히 편의적인 것이지 아직은 절대적 기준으로 제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더구나 위의 어느 한 요소만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발해시기의 것으로 단정하는 데에는 무리가 따를 수 있다. 이에 대 해 鳥山喜一, 藤田亮策은 미구에 잘록한 부분(くびれ)이 있는 수키와, 연 토성의 경 108) 109) 110) 111) 齋藤甚兵衛 山本守, 앞책 pp. 78 80, pp. 87 88 리준걸, 앞논문 p. 33 109) 齋藤甚兵衛, 앞책 p.30 110) 圈線紋, 筆管紋, 孔雀紋 등으로도 불리는데 암키와 하단 측면을 두 개의 흠 으로 삼등분하여 아래, 윗부분에는 평행 빗금 무늬를 만들고, 가운데 부분에 는 連圈무늬를 만든 것이다. 연권무늬 안에는 또 여러 무늬가 들어가 있다. 111) 嚴長錄 楊再林, 앞논문 p. 57 108) - 448 -
화문 와당, 文字瓦가 동시에 반출한다면 발해의 성으로 확정지을 수 있다 고 한 바 있다.112) 추정되는 성지들을 대상으로 전기와 후 기로 시기 구분하여 보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魏存成은 발해 시기의 성을 두 시기로 나누어 상경 천도 이전의 전기에는 평면이 장방형, 정방형, 반월형 등으로 일정하지 않다가 천도 이후인 후기에 들어가면 규 모가 커지면서 장방형의 일정한 형태로 통일된다고 하였다. 또 嚴長錄, 楊再林은 연변지구에서 발견되는 암키와(板瓦)들을 바탕으로 발해 초기에 는 고구려 영향을 받아 紋飾이 있는 것들을 사용하였으나 나중에는 문양이 없는 것(素面瓦)을 사용하여 전형적인 발해 고성들에서는 후자만이 나타나 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어 발해 성지의 편년에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이렇게 해서 발해 시기의 것으로 113) 114) 2. 고구려 성지와의 관련 와 고구려의 문화적 연관성을 규명한 대표적인 연구로서는 박시형, 주영헌, 박영해, 三上次男 등을 들 수 있다. 이 중 박시형은 문헌적인 정리를 하고 있고, 주영헌은 유물, 유적 검토를 위주로 하고 있고, 박영해 는 기왕의 논의를 정리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으며, 三上次男도 유적, 유물을 검토하였다. 이제 여기에서는 발해의 城과 관련된 부분만을 정리하 도록 하겠다. 제일 먼저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평지성과 산성이 한 조를 이루어 상호 결합되어 있는 점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사람이 지적하였다. 발해 115) 112) 113) 114) 115) 鳥山喜一 藤田亮策, 앞책 p.40 魏存成, 渤海城址的發現與分期 東北考古與歷史 1, 1982 嚴長錄 楊再林, 앞논문 p. 57 박시형, 발해사연구를 위하여 력사과학 1962 1 주영헌, 발해는 고구려의 계승자 고고민속 1967 2 주영헌, 앞책 pp. 147 171 박영해, 발해는 고구려를 계승한 국가 력사과학 1986 3 三上次男, 渤海國에 對하여 特히 高句麗와의 文化關係에 대하여 종 합학술회의 논문집 광복 30주년 기념 학술원, 1975-449 -
찌 齋藤甚兵衛는 훈춘 지역의 성을 조사하면서 평지성인 高麗城(營城 子城)과 산성인 城墻磖子城의 관계를 고구려 通溝城과 山城子산성의 관계 와 동일한 것이 아닌가 추측한 바 있다. 그 뒤 돈화 지방의 오동성과 그 주위의 산성을 비롯한 방어시설물들이 발해시기의 것으로 밝혀지고 난 뒤 평지성인 오동성과 주변의 산성의 결합이 고구려의 경우와 동일한 것이 라는 사실을 많이 지적하게 되었다. 주영헌은 발해 중경현덕부를 논하면서 오동성과 주변의 군사시설의 배치가 집안이나 평양 대성산 일대의 고구려 유적과 동일하며 이것은 발해가 고구려의 풍습과 전통을 이어받은 계승자 임을 증명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魏存成은 평지성과 산성의 결합 현상이 발해 초기에 나타난다고 하면서 이것은 고구려의 영향을 받은 것이 라고 인정하지만 발해의 주체민족인 粟末靺鞨이 고구려와 인접하였고, 또 고구려에 복속되었었기 때문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설명 방식은 중국과 한국 사학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것으로 중국측에서는 고구려의 영향이란 측면을 애써 축소하려 하고 있으며, 반면에 북한측에서는 의부로부터의 영향은 거의 고려하지 않고 오로지 고 구려 문화와의 계승 관계만을 규명하려 함으로써 양자 모두 객관성을 잃 고 있는 셈이다. 원래 평지성과 산성의 동반관계를 보여주는 방어체계는 고구려의 독창 적 산물로서 현재 桓因縣의 下古城子城과 五女山城, 集安縣城(국내성)과 山城子山城, 撫順城과 高爾山城, 安鶴宮址와 大城山城에서 그 면모를 찾아 볼 수 있으며, 이러한 체제는 주변국에도 영향을 주어 백제의 夢村土城과 南漢山城, 익산의 王宮里토성과 彌勒산성 등을 열거할 수 있고, 일본의 大 일 기 116) 117) 118) 齋藤甚兵衛 山本守 앞 영 앞 글 예 王承禮 앞 劉振華 渤海大氏王室族属新證 從考古材料出發的考察 社會科學戰 線 116), 책 p. 32 117) 주 헌, 논문 1966 p.3 118) 다음 을 로 들 수 있다., 논문 1979 p. 209, 1981 3-450 -
宰府와 大野城도 이와 동일하다고 한다. 그리고 가야에서도 그러한 결 합 형태가 보인다고 한다. 그런데 발해가 營州로부터 만주 동부지역으로 도피하여 불과 몇년 사이 에 오동성과 그 주변의 산성을 이와 같이 고구려식으로 축조하였다면 그 것은 건국 집단이 고구려계일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 때는 고구려가 망한지 30여년이 지난 시기이고, 그동안 영주에서 중국 문 화에 접하였을 터인데도 이렇게 고구려식을 따랐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시기 고분인 정혜공주 무덤 양식과 葬法이 완전히 고구려 식임을 보여주고 있어 이 추측은 더욱 확실해진다. 다음으로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성벽에 雉 甕城 등을 설치하였 던 것도 고구려 영향임을 알 수 있고, 성 안의 많은 건축물에 사용된 기와 가 거의 고구려 양식을 띠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 건축 구조나 양식 도 고구려식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러나 초기에 고구려 문화 요소를 농후하게 반영하던 발해 문화는 상 경으로 천도하면서 자신의 문화 기틀을 다져나가기 시작하자 당의 문화를 상당히 흡수하게 되었고, 성의 체제도 중국식을 따르기 시작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119) 120) 121) 3. 동아시아 도성 체제와의 관련 발해의 도성인 동경성이 당의 장안성을 모방하여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대체로 제3대 문왕대에 상경으로 천도하면서 만 들어지기 시작한 이 성은 중국식 도성 체제를 따랐던 당시 정황을 잘 보 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 발해만이 당의 도성 체제를 따른 것이 아니고, 일본도 동일한 상황이었으며,122) 신라도 일부 장안성 제도 全榮來, 古代山城の發生と變遷 東アジアと日本 고고 미술편, 田村圓 澄先生古稀記念會, 吉川弘文館, 1987, pp. 503 504 120) 井上秀雄, 東アジアの中の古代朝鮮の城郭 윗책 p.530 121) 魏存成, 앞논문 참조 119) - 451 -
완 를 도입하여 왕경을 보 한 것으로 보인다.123) 따라서 이 시기 동아시아 각 국이 도성 체제에서 공통성을 보여주고 있어 주목이 되고 있다. 당의 도성은 왕성이 전체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와 북변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형태가 있는데, 당 장안성은 후자에 속한다. 후자와 같 은 도시계획은 이미 北魏의 洛陽, 東魏의 鄴都, 隋의 大興城 등에서 비롯 되어 당의 장안성에 이르러 완성되기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발해, 요, 금 및 원나라 뿐만 아니라 일본의 藤原京, 平城京 등에까지도 영향을 주었던 124) 것이다.125) 발해의 동경성은 당의 장안성 다음으로 큰 규모로서 8,9세기 아시아에 째 커다란 도시였던 점을 고려한다면 당시 동아시아에서의 발해의 위치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상경 성지 외에 동경용원부 소재지인 팔련성, 중경현덕부의 소재지인 서고성도 이러한 체제를 따랐고, 심지어 솔빈부의 소재지로 여겨지는 대성자고성의 평면도 이들과 유사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해 볼 때 발해 후기에 이르러 지방 제도의 확충과 함께 도성이나 지방 주요 거점 도시의 성들을 중국식으로 건설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서 두번 로 126) 127) 이상 발해의 성지 조사 및 발굴과 관련하여 연구되고 있는 몇 가지 문 살펴보았다. 이 외에도 최근의 성지 조사와 더불어 발해의 주요 대외 교통로인 龍原 日本道, 鴨淥 朝貢道, 長嶺 營州道 등의 구체적 경로를 밝 히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생략하고자 한다. 제를 128) 佐藤武敏, 長安 近藤出版社, 1971 pp.250 260 關野雄, 周邊池域との關係 中國 日本の考古學 Ⅶ. 歷史時代(下), 河出書房新社, 1978 123) 閔德植, 新羅王京과 韓 中 日 古代都城과의 比較考察 崔永禧先生華甲紀 念韓國史學論叢 탐구당, 1987 124) 駒井和愛, 中國の都城 中國都城 渤海研究 雄山閣, 1977 p.3 125) 駒井和愛, 윗논문 참조 126) 왕승례 저 송기호 역, 앞책 p.84 127) 魏存成, 윗논문 pp. 93 94 128) 李健才 陳相偉, 앞논문 pp. 76 78 122) - 452 -
Ⅵ. 맺 음 말 내용과 이를 바탕으로 한 연구 현황을 살펴 보고 약간의 문제점을 제기하여 보았다. 이제 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함으 로써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이상으로 발해 성지의 조사 발해의 성지로 조사된 것은 현재 90개 가까이 되는데 이 중에는 발해 져 발해 시기에 다시 사용된 것도 있고, 나중에 요, 금 등에 의해 계속 사용된 것도 있다. 또 시기에만 사용된 것이 있는가 하면 그 이전에 만들어 여기에는 평지성, 산성 뿐만 아니라 보루, 차단성 등도 포함되어 있고, 재 료상으로 토성, 석성, 토석 혼축성 등으로 다양하며, 형태상으로도 장방 형, 방형, 부정형 등 여러가지가 있다. 이렇게 성들이 다양하지만 아직은 정식 발굴된 것이 극소수에 불과하여 발해 시기의 성들로 확정하기에는 미흡한 것들도 포함되어 있는 실정이다. 장차 이 성들의 성격을 제대로 파 악하기 위해서는 단지 지표조사 차원에서 벗어나 정식 발굴이 요망된다. 이상의 많은 성 가운데 중요한 것들을 도성과 지방성으로 나누고 지방 성은 다시 府城, 州城, 縣城으로 나누어 각 성마다 위치 및 주변 환경, 발 굴 조사 경위, 구조 및 출토 유물, 성의 성격에 대한 논의의 경과, 주변의 유적 순으로 정리하여 보았다. 우선 도성으로서는 첫 도읍지였던 敖東城을 비롯하여 가장 오랫동안 수도로 사용되었던 東京城, 일시 도읍을 정하였고 東京龍原府의 소재지였던 八連城을 살펴보았다. 또 일시적으로 도읍지로 사용되었는지 논란이 있는 西古城은 뒤의 부성에서 정리하였다. 한편 발해는 지방을 5京, 15府, 62州, 100여개의 縣으로 편제하여 통 치하였으므로 지방 도시의 성으로서 언급되고 있는 것들을 선택하여 정리 하였다. 먼저 府城으로는 中京顯德府의 소재지로 여겨지는 西古坡, 南京南 王俠, 앞논문 pp. 124 126 연변조선족자치주박물관, 앞논문 1985 pp. 10 11 張殿甲, 앞논문 p. 73-453 -
海府의 소재지로 여겨지는 北靑토성, 長嶺府의 소재지로 여겨지는 蘇密城, 率賓府의 소재지로 여겨지는 大城子고성을 살펴보고, 그 다음 州城으로 温 特赫部城, 薩其城, 南城子고성, 크라스키노(Kraskino)성지를 살펴보았으 며, 上京 龍州 관할의 長平縣 소재지로 언급되고 있는 土城子고성도 살펴 보았다. 기타 東牟山에 해당하는 곳으로 설명되기도 하는 城山子산성, 내 부에서 발해 고분이 발견되었던 河南屯고성도 추가로 정리하였다. 최근에 이르면 이상과 같은 발해 성지 조사 내용이 축적됨에 따라 이를 토대로 보다 구체적인 연구들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러한 연구로서 편년 기준의 문제, 고구려 성지와의 관련, 동아시아 도성 체제와의 관련 문제를 정리하고 거기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을 간단히 지적하여 보았다. 우선 성지 편년 기준으로 제시되고 있는 것에는 성의 구조와 출토 유물 양식이라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전자는 성벽에 나타나는 雉, 甕城 등 의 유무가 주로 고려되고 있고, 후자는 기와와 陶器 양식이 주로 고려되고 있다. 특히 전자의 경우 만주 지역에서 치, 옹성이 나타나는 것은 요, 금 이후로서 발해에서는 이러한 시설들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을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증국적인 관점에서만 고찰하려는 편견에서 비롯된 것 으로 고구려에서는 초기부터 이미 이러한 시설들이 나타나고 있고 이 영 향으로 발해에서도 이러한 시설들이 나타날 수 있음을 지적하여 보았다. 그렇게 보아야만 발해 유적으로 지적되고 있는 敖東城, 黑石고성, 북청토 성 등에서 치, 옹성 등이 나타나는 문제점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고구려 성지와의 관련인데, 여기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치, 옹 성 시설의 영향 외에 평지성과 산성이 결합된 방어체제를 고찰하였다. 이 러한 방어체계는 고구려에서 발생하여 주변국으로 확산되어 갔으며, 발해 도 그러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러한 영향이 단지 발해주체민족인 말갈족이 고구려에 이웃하였었고, 일시 고구려에 복 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이고 고구려 인이 발해 건국의 주축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여 보았다. - 45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