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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 강. 머리말 석 화 ) 전선 확보와 병력 충원. 황해도 海防 여건의 변화 4. 조선후기 황해도 해방의 한계 3. 연안 방어체계의 정비 5. 맺음말 ) 연안 진보의 승격 및 증설. 머리말 조선후기 국가방위체계상 황해도는 서울 경기 지역의 북방 외곽방어 거점 이었다. 외적의 침공을 평안도나 함경도에서 저지하지 못할 경우 황해도에서 막아야 했으나 적당한 산악지대나 협곡이 거의 없어 방어선 구축이 용이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선후기에 황해도의 군병은 평시에는 평안, 함경 강변지역 방어를 지원하기 위해 赴防하였고 유사시에는 경기지역 방비에 동원되었다. 서북지역의 직로방어체계상 황해도는 부차적인 지역이었으나 해안 방어에 있어서는 사정이 달랐다. 황해도는 경기도에서 평안도를 거쳐 중국 遼東지역 으로 이어지는 연안항로의 중심이었다.))또 중국 산동성의 登州, 萊州와는 직 선거리가 가까워 쉽게 오갈 수 있었다. 남쪽 해안을 따라 항해하면 교동도와 강화도를 거쳐 곧바로 한강에 진입할 수 있었으므로 황해도는 해안 방어의 제일선이었다. * 이 논문은 003년 한국학술진흥재단 지원에 의하여 연구되었음(KRF-003-07AS00)." ) 大東地志 권8, 程里考 海路條

368 韓 國 文 化 38 황해도 연안에는 6세기까지 서남해안을 따라 북상한 왜구가 출몰하기도 하였고 조선후기에는 명청 교체기의 혼란을 틈탄 해적이 나타나 문제가 되 었다. 또 국제정세가 안정된 8세기 이후에는 청의 어선들과 밀무역선이 수시 로 와서 불법어로작업을 하고 해안에 상륙하여 주민들과 충돌하거나 밀교역 을 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황해도는 지형상 해안선이 길고 저습지대가 발달하여 외적의 상륙이 용이 하며 저지선으로 삼을 수 있는 적당한 산맥이나 요새지가 없었다. 그러므로 조선 조정은 연안의 주요 포구나 도서에 진을 설치하고 전선과 병력을 증강 배치하여 바다에서 외적이나 이국선박을 구축하고 뭍에 내릴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막으려 하였다. 또 외적이 상륙할 경우에 대비하여 기동이 용이한 기 병부대를 편성하였다. 조선시대에 황해도는 경제적으로 발전된 곳이 아니었고 정치군사적으로 크게 중시된 곳이 아니었으며 사회변혁의 중심지도 아니었다. 이 때문에 지금 까지 황해도 지역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진 바가 없으며 군사적 관점에 서 접근한 논저 역시 전무한 형편이다.)) 3) 본 연구는 조선후기 황해도 해안방어체계의 기본적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먼저3)조선전기에 왜구 대비를 중시하던 황해 海防의 주안점이 임진병자란 후 황해를 둘러싼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해적, 황당선, 불법교역선 방지로 바뀌었음을 간략히 살펴 보았다. 이어서 연안방어를 위한 조치인 해안과 도서 鎭堡의 증설 및 이동, 戰船 건조와 병력 확보 내용을 구체적으로 정리하였다. 마지막 장에서는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방비 조치가 유명무실해지고 바다를 통한 교역이 확대된 상황에 대해 중점적으로 검토하였다. 특정 시기, 특정 지역의 군사문제에 대한 연구는 지역 사정을 충분히 이해 한 바탕 위에 이루어져야 한다. 본고는 조선후기 황해도의 사회 경제적 상황 에 대한 기본 지식을 거의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준비되었으므로 입체적인 서술이라 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선후기 황해도의 군사문제 뿐 아니라 지역사 ) 조선후기 황해도에 대한 연구는 민속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성과가 대부분이며 海 防策에 대한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있다. 3) 본고는 조선후기 광해군대에서 철종대까지의 자료를 집중적으로 정리하여 작성된 것이며, 이 시기 전후의 자료는 논지 전개상 필요한 것을 위주로 검토하였다.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369 연구의 단초로서 의미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황해도 海防 여건의 변화 조선 전기 황해도 해방의 주안점은 왜구의 침공에 대비하는 것이었다. 왜구 는 삼남지방과 강원, 함경도 지역에 주로 출몰하였으나 황해도 연해지역도 안 전지대는 아니었다. 세종 년(49) 5월에는 중국 해안을 약탈하기 위해 조선 서해안을 따라 이동하던 대규모 왜구 선단을 황해도 해역에서 포착하여 교전 이 벌어지기도 했다.4)4)이 사건은 대마도 정벌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황해도 연안에는 왜구 침공에 대비하여 翁津縣 館梁에 첨사진이 있었고 海 州 龍媒梁, 康翎 巡威梁, 長淵 大串梁과 阿郞浦, 豊川 豊川梁, 殷栗 廣巖梁 등 6개 만호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각 진에는 4 9척의 병선과 400 500명의 선 군이 배치되어 왜선 구축과 추격을 담당하였다. <표 > 세종대 황해도 연안 邑鎭의 병선 및 선군5) 읍명 진명 직급 병선(척) 선군(명) 옹진 관량 수군첨절제사 9 56 해주 용매량 6 4 순위량 7 500 대곶량 4 50 6 400 강령 장연 아랑포 수군만호 풍천 풍천량 4 400 은률 광암량 5 50 4 3,39 계 4) 세종 년(49)의 충돌사건때 왜구들은 서남해안을 거슬러 중국으로 향하던 중에 충청도 비인현을 노략질하였으며( 세종실록 권4, 세종 년 5월 7일 신해), 연평 도 부근에서는 식량 공급을 요구하면서 황해도 수군과 대치하였다( 세종실록 권 4, 세종 년 5월 3일 정사). 조선군은 귀순한 왜인을 앞세워 이들 가운데 일부를 백령도 부근에서 공격하였으며 수십 명을 사로잡아 모두 처형하였다( 세종실록 권4, 세종 년 5월 3일 정묘). 5) 세종실록 권5, 지리지 황해도조

370 韓 國 文 化 38 황해도 전역을 합하면 4척의 병선과 3천여 명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왜구의 침공은 개별 포구에 집중되는 경향이 있었던 것을 고려할 때 각 진별 전력은 충분하지 못하였다. 이에 세종 년(440)에 지중추원사 成達 生의 상소에 따라 유사시에 협동작전을 전개하도록 방침을 정하였다. 즉, 0척 미만의 왜선이 나타나면 포구에서 서로 알려 함께 공격하며, 5척에서 5척까 지의 왜구가 출몰할 경우 장산곶 이남에서는 옹진의 관량첨사와 용매량, 가을 포(순위량), 오차포 만호 등이 함께 추격하고 장산곶 이북에 있으면 관량첨사 와 아랑포, 허사포(풍천량), 광암량 만호가 협동작전을 펴며, 대규모로 침공할 경우에는 황해도 전역의 수군 병력을 모두 출동시키도록 하였다.6)6)유사시에는 협동작전을 전개하도록 방침이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또 대마도 정벌에도 불 구하고 왜구의 침입이 완전히 종식되지는 않아 병선을 계속 제작하여 배치하 는 등 황해도 수군전력을 보강하였다.7)7) 8) 서남해안의 방비가 강화되면서 왜구의 직접 침구 가능성은 낮아졌다. 8)그 러나 중종 8년(53) 5월에 풍천부 椒島 부근에 나타난 왜선을 요격하지 못 한 사건이 일어나 황해도 海防 문제가 정식으로 논의되었다.9)9)관찰사가 겸하 는 수군절도사 외에 별도의 수군절도사를 두고 맹선을 병선으로 개조하여 배 치하는 방안을 검토한 것이다.0) 그러나 황해도는 왜구들이 주로 출몰하는 곳 0) 이 아니었으므로 논의는 곧 중지되었다. 6세기 중엽에는 왜구들의 활동이 상대적으로 줄어든 반면 중국인 해적의 활동이 늘어나 새로운 문제로 대두되었다. 명종 년(547)에 풍천부 초도에서 체포된 중국인들은 집을 짓고 站을 만들기까지 하였다. 백령도와 대청도에도 )) 이와 같이 적발 체포된 중국인이 많았다. 세종실록 권44, 세종 년 6월 6일 신사 성종실록 권 49, 성종 5년 월 일 임자 성종실록 권 89, 성종 9년 월 0일 계묘 중종 8년(53) 5월에 덕적도를 거쳐 북상한 왜선이 황해도 풍천부 초도 부근 에 나타나 교전하였으나 도주하였고( 중종실록 권 48, 중종 8년 5월 8일 정 유) 전라도 수군이 이 왜선을 격침시켰다( 중종실록 권 48, 중종 8년 6월 일 경자 0) 중종실록 권 48, 중종 8년 6월 6일 을축 ) 명종실록 권 5, 명종 년 월 3일 을미 6) 7) 8) 9)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37 임란 이후 조선은 전후 복구 사업에 힘을 기울여야 했으며 왜군의 재침에 대비하여 삼남지역의 방비체계 정비에 주력해야 했다. 또 後金의 흥기로 요동 정세가 불안해짐에 따라 평안도와 함경도 북부 접경지역의 군사력 확보에도 유의해야만 했다. 이에 더하여 평안도 椵島에 진을 설치한 明 遼東遊擊 毛文 龍의 군사도 지원해야 했으므로 황해도 해역의 방비는 우선 순위가 될 수 없 었다. 그러나, 명청 교체기의 혼란으로 중국 동북 해안지역 통제가 어려워지면 서 해적이나 불법 어로선의 침입은 늘어났다. 이 시기 해적은 조선 전기의 왜 구처럼 규모가 큰 것은 아니었으나 해안 지역 치안을 어지럽혀 민생에 피해 를 입힐 우려가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한 대책이 절실히 요구되었다. 선 조 40년(607)에 평안도 철산에 침입한 해적과 교전하여 3명을 죽였으나 조 선군도 0여 명이 전사하고 군수와 첨사까지 부상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 광해군 년(609)에 평안도 용강에서 나포된 해적들은 황해도 풍천부 초도에 3)3) 서 주민들을 납치해 가던 중이었다. 인조반정 이후 7세기 초에 국가적으로 유의해야 할 대상은 황해도 해안에 출몰하는 해적 보다 함경도와 평안도 방어체계, 특히 평안도 직로의 방어대책 이었다. 국가적으로 친명배금정책을 공식화하여 후금과 충돌 가능성이 높아짐 에 따라 서북 방어체계가 더 중시된 것이다. 후금군 침공시 황해도의 육군과 수군은 모두 경기지역, 특히 왕이 피난하도록 예정된 강화도 방위에 동원하도 록 계획되어 있었다. 延安과 白川의 육군은 강화 북부해안지역 방비를 위해 바다를 건너 이동하고 황해도 6개 鎭浦와 연변 각 읍의 舟師는 바다에서 임 진강 하구를 방어하도록 한 것이다.4) 4) 정묘호란을 겪은 후 강화도 방비가 특히 강조되자 연안과 배천에도 주사를 배치하여 적의 진로를 막도록 하였다.5) 그러나 병자란이 일어났을 때에는 청 5) 군의 이동 속도가 빨라 인조는 강화도로 대피하지 못했으며 강화도 공방전도 강화도 동편 갑곶과 염하 일대에서 전개되어 황해도 병력은 거의 쓸모가 없 었다. ) 3) 4) 5) 선조실록 권 3, 선조 40년 윤6월 9일 경진 광해군일기 권 0, 광해 년 9월 8일 병오 인조실록 권6, 인조 년 8월 4일 병신 인조실록 권7, 인조 5년 0월 9일 임자

37 韓 國 文 化 38 병자란 후 황해도의 舟師는 청군지원에 이용되었다. 청군은 인조 5년 (637)에 조선이 항복한 직후 椵島의 명군을 공격하는데 황해도 수군을 동원 하였다.6) 가도가 평정된 후에는 瀋陽으로 군량을 운송하도록 요구하였는데 6) 7)7) 군량 수송선단이 패선하여 황해도 수군이 다수 익사하거나, 8)8) 는 사고를 겪기도 하였다. 미곡을 상실하 이러한 상황에서 황해도 연안 방위책을 논하기란 불가능하였다. 청이 중국 전역을 장악한 후에 내부의 혼란과 鄭錦의 난으로 동요하고 있 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황해도 해방의 문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특히 대만에 근거를 둔 정금의 군사력이 해로를 통해 침공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황해 9)9) 도 뿐 아니라 전국적인 군사력 재정비와 보강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해상세력의 침구를 경계하면서 특히 강조된 것은 荒唐船 단속과 구축이었 다. 황당선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중국이나 왜구의 배를 가리킨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중국에서 오는 어선이나 밀교역선을 모두 황당선이라 지칭하였다. 이들은 대부분 청 산동성의 등주와 내주에서 오는 어채선이었으나0) 조선 해 0) 역의 사정을 잘 아는 선인들이 황해를 무시로 통행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침공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철저하게 단속하려 한 것이다. 당 시 정금의 세력은 조선까지 공격할 능력이 없었고 조선 조정에서도 이를 알 고 있었다. 그러므로 황당선의 출몰을 대규모 침공의 전조로 인식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나 대청 위기의식이 아직 강하게 남아있던 시기였으므로 황당 선 출현 자체가 민감한 문제로 인식되었다. 숙종 8년(68)에 황당선이 나타 인조실록 권34, 인조 5년 월 일 임신 인조실록 권4, 인조 8년 8월 3일 임자 인조실록 권46, 인조 3년 7월 6일 을묘 7세기 후반 청의 내부적 동요와 정금의 난에 대한 소식은 조선에서 북벌론이 다시 거론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 성과 참조. 홍종필, 977 삼번란을 전후한 현종 숙종연간의 북벌론 사학연구 7 김양수, 979 조선숙종시대의 국방문제 백산학보 5 오종록, 988 조선후기 수도방위체제에 대한 일고찰 사총 33 배우성, 995 고지도를 통해 본 8세기 북방정책 규장각 8 강석화, 000 조선후기 함경도와 북방영토의식 경세원, 34 35면 0) 숙종실록 권38, 숙종 9년 6월 7일 신축 6) 7) 8) 9)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373 났던 사실을 보고하지 않고 은폐하였다는 이유로 許沙첨사를 사형에 처한 것 은 이러한 위기감 때문이었다.) ) 국제정세가 안정되어 대규모 침공이나 충돌 가능성이 줄어든 8세기 초에 는 중국 해안에서 출몰하는 해적의 침입이 새로운 근심거리로 떠올랐다. 청은 산동이나 발해만 해역의 해적활동을 확인하면 그 사실을 조선에 통지하였다. 해적은 정금의 세력 보다도 미약하였으므로 큰 근심거리는 아니었으나 전국 )) 에 어사를 파견하여 해방조건을 점검하는 등 기본적인 대비책은 강구하였다. 8세기에는 대규모 해상세력이나 해적의 침공가능성이 거의 없어진 반면 불법어로선의 출현이 더욱 증가하였다. 이들에 의한 피해는 고려시대나 조선 전기 왜구의 약탈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것이었다. 그러나 남획으로 인한 수 산자원의 고갈이 우려되고3) 시탄이나 음용수를 구하기 위해 상륙한 중국 어 3) 민들이 도적으로 돌변하여 주민과 충돌하거나 부녀자를 납치, 폭행하였으며4) 4) 5)5) 심지어는 관원을 구타하고 진졸을 살해하는 일도 있었다. 이에 조선은 황해 도 연안 및 주요 도서의 각지에 요망처를 두어 연해에 출몰하는 선박의 동태 를 관측하고 포구마다 전선을 배치하여 원양에서 막으려 하였고 별도의 군사 조직을 편성하여 불법어선을 문정하고 구축하려 기하였다. 군사적 조치와 함께 불법어로 및 교역선의 출몰을 근절하기 위한 외교적인 노력도 기울였다. 불법행위를 저지른 자라도 중국인이었으므로 독자적으로 처 단하거나 징벌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조선은 청에 정식으로 자문을 보내 불법어채선과 교역선의 왕래가 빈발함을 통지하고 직접 단속해줄 것을 요구 하기로 하였다. 숙종 6년(700)에는 증거확보를 위해 황당선, 척을 나포하 6)6) 여 승선자들의 신원을 파악하도록 방침을 정하고 7)7) 청에 자문을 보냈다. 명백한 물증을 준비한 후 청은 연안지역을 철저히 단속할 것을 약속하고 어로 및 교역선박을 적발할 경우 船標에 기재된 선원의 성명과 승선 인원, 주소지 ) ) 3) 4) 5) 6) 7) 비변사등록 36책, 숙종 8년 6월 일 비변사등록 57책, 숙종 3년 월 9일 영조실록 권38, 영조 0년 5월 6일 신사 비변사등록 0책, 영조 3년 9월 4일 비변사등록 04책, 영조 4년 7월 일 비변사등록 5책, 숙종 6년 7월 7일 동문휘고 범월, 上國人 金州李桂越境魚採禁斷咨(신사; 숙종 7, 70)

374 韓 國 文 化 38 를 직접 조사하여 어긋남이 있으면 불법월경죄로 처리하라는 회신을 보냈 8) 다.8) 청 선박에 대한 단속권을 확보한 것이다. 이후 조선은 황해도 연안의 진 보 위치를 조정하고 추격 선박을 배치하며 병력을 증강시키는 등 불법선박 금단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중국 배의 불법 침입은 끊임없이 이어졌 고 오히려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어업과 밀교역을 통한 이익이 컸기 때문 이다. 3. 연안 방어체계의 정비 ) 연안 진보의 승격 및 증설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및 도서의 진보 가운데 가장 중시되었던 곳은 백령 진이었다. 백령도는 중국 산동성 등주나 내주에서 오는 불법 어선이나 상선이 가장 먼저 도착하는 곳으로 이곳에서 장산곶에 이르면 수로가 나뉘어 북쪽으 로는 초도를 거쳐 풍천, 은률에 닿고 남쪽으로 장연, 옹진, 강령, 연안 등지로 향할 수 있는 길목이다. 이 항로를 통해 침입하는 해적을 막기 위해 광해군 년(609)에 첨사진을 세우고 주민 이주와 개간, 염분 설치를 권장하였다.9) 9) 백령진 창설 초기에는 병력과 장비가 부족하여 해적에게 군선을 탈취당하 30)30) 는 일도 있었다. 이에 옹진반도 안쪽 가을포에 있던 만호진을 해상 관측과 선박 출동에 유리한 등산곶으로 옮겨 登山鎭이라 개명하였다. 백령도와 서로 상응하면서 해적을 단속하고 침투한 해적들이 정박할 수 없게 한 것이다.3) 3) 이 조치로 조선 전기부터 수군첨사진이 설치되어 있던 所江鎭을 중심으로 서 쪽 해양의 백령진과 동쪽 등산진이 협동하여 황해도 남부해역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 광해군 6년(64)에 왕은 해적에 대비하기 위하여 첨사진인 백령진을 수군 절도사로 승격시킬 수 있는지 비변사에서 논의하도록 지시하였다.3) 그러나 3) 8) 9) 30) 3) 숙종실록 권35, 숙종 7년 3월 9일 병진 광해군일기 권, 광해 년 월 4일 정미 광해군일기 권46, 광해 3년 0월 8일 갑술 광해군일기 권46, 광해 3년 0월 0일 병술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375 수사를 두게 되면 주민들의 부담이 너무 크다는 반론이 있어 백령첨사와 소 강첨사를 左右舟師大將으로 삼아 협동 단속하도록 정리하였다.33) 33) 황해도 수군이 대대적으로 정비된 시기는 숙종대였다. 정금을 비롯한 해상 세력이나 해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소강진을 격상시켜 방어사를 겸하게 하고 그 아래에 龍媒, 登山, 許沙, 白翎, 吾叉 등 5진을 소속시켰다. 각 진에는 사복 시의 목장이나 전답으로 사용되던 도서나 토지를 지급하고 주민들을 모아 경 34)34) 작하게 하여 재정 기반을 보장하였다. 소강진에는 昌獜島를 주었고 용매도 에 있는 용매진을 위해 사복시 소속 말을 연평도로 옮기고 그 터를 모두 경 작할 수 있도록 허용하였으며, 등산진에는 사복시 소속 논 40斗落과 밭 30日 耕을 지급하였다. 사복시 소속 토지가 없는 허사진에는 管餉屯田 0日耕을 따 로 주었으며, 백령진에는 별도의 지원이 없었다. 오차진은 서쪽으로 5리 옮겨 군선의 정박과 주민들의 경작에 유리한 곳에 설치하였다. 이 조치로 소강첨사 는 황해 해역을 묶어서 통어할 수 있게 되었으며 직급은 첨사지만 실제로는 수군절도사와 같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평가되었다.35) 35) 숙종 0년(684)에는 등산곶에 있던 등산진을 장산곶 이남 해로의 요충인 巡威島로 이설하였다. 황당선 단속을 위해 등산곶으로 이동시킨 수군진을 더 진출시켜 아예 섬으로 옮긴 것이다.36) 아울러 유사시 강화도 방비에 동원되는 36) 연안과 배천 등지의 진보 증설도 시도되었다.37) 황당선은 그 자체가 위협이 37) 되지는 않았으나 이를 계기로 청과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에 대비해야 했으므 로 황해도 연안방위와 수도권에 해당하는 강화도와 교동 방위를 함께 강구했 던 것이다. 소강방어사의 관할 범위는 장산곶 북쪽의 허사진까지였으나 방어사로 격상 시킨 것은 장산곶 남쪽 해역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즉, 황해도 연 안에 접근하는 초입의 백령진 및 장산곶 남쪽의 오차진, 소강진, 등산진, 용매 3) 33) 34) 35) 36) 37) 광해군일기 권78, 광해 6년 5월 일 계유 광해군일기 권78, 광해 6년 5월 30일 신사 비변사등록 3책, 숙종 년 9월 6일 所江防禦使事目 비변사등록 3책, 숙종 년 4월 5일 숙종실록 권5, 숙종 0년 월 일 무술 비변사등록 38책, 숙종 0년 8월 6일

376 韓 國 文 化 38 진으로 이어지는 황해도 남부해역의 방위에 주력하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장 산곶 북쪽의 풍천, 은률 해역은 상대적으로 경계가 소홀할 수 밖에 없었으며 이를 보완하기 위해 풍천 앞바다의 椒島에 진을 두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 되었다. 숙종 6년(699) 9월에 황해감사 李寅炳은 황당선 출몰이 갈수록 빈번해지 므로 초도에 鎭을 신설하고 別將을 두자고 건의하였다. 그는 초도에 있는 사 복시의 목장을 옮겨도 무방하다는 사복시 제조의 의견을 미리 확인한 후 이 같이 제안하였다. 당시 좌의정 李世白은 초도가 비록 북쪽의 허사진과 가까운 곳에 있으나 황당선의 왕래가 잦고 이 섬에 배를 대는 일도 많으므로 감시하 고 구축하기 위해서는 별장을 두어야 한다고 적극 지원하였다. 국왕도 이에 동의하여 초도 설진 문제는 곧바로 결정되었다.38) 사복시에서는 초도 목장의 38) 말을 북쪽에 있는 席島로 옮기기로 하였다.39) 그러나 초도진 설치는 쉽게 이 39) 루어지지 못하였다. 일단 별장을 설치하였으나 황당선 출몰이 뜸해지자 사복 시에서 목장을 폐지하고 말을 옮길 수 없다고 거부한 것이다. 좌의정 이세백 은 황당선 단속을 위해서는 초도진이 꼭 필요하므로 초도에 허사첨사를 옮기 고 감목관의 직임을 겸하게 하면 해방과 목마 두 가지를 동시에 이룰 수 있 다면서 허사진을 초도로 옮기는 방안을 제시하였다.40) 그러나 초도는 황당선 40) 이 왕래하는 요로이므로 이를 단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도에 진이 있어야 하고, 허사진도 육상의 요해처에 해당하므로 어렵더라도 진을 계속 두어야 한 다는 의견에 따라 두 진을 모두 유지하기로 최종 결정하였다.4) 4) 이어 숙종 30년(704)에는 오차진과 용매진을 만호진에서 첨사진으로 승격 시켰으며 숙종 36년(70)에 장연의 金沙寺에 병선을 배치하고 僧將 직함을 주어 승려들이 瞭望 및 追捕 임무를 담당하도록 하였다.4) 아울러 해양에서 4) 막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여 상륙 즉시 격멸한다는 계획 아래 신속히 이동할 43)43) 수 있는 기병대를 창설하였다. 38) 39) 40) 4) 4) 승정원일기 승정원일기 비변사등록 비변사등록 비변사등록 평안도와 황해도의 별무사는 이때 조직되기 393책, 숙종 6년 9월 0일 기유 393책, 숙종 6년 9월 9일 무오 5책, 숙종 8년 윤 6월 일 5책, 숙종 8년 7월 6일 54책, 숙종 30년 월 3일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377 44)44) 시작한 것이다. 조선 후기에 이설되거나 신설된 황해도 연안 진보의 위치를 조선 전기와 비교해 보면 內海나 강 어귀 혹은 灣 안쪽의 풍랑을 피하기 쉬운 곳에 있던 진들이 섬이나 곶의 끝부분으로 진출하였음을 알 수 있다(<표 > 조선시대 황 해도 연안진보의 변화 및 <그림 > 조선시대 황해도 연안진보의 위치 변동 참 조). <표 > 조선시대 황해도 연안진보의 변화 조선후기 조선전기 비고 世宗實錄地理志 經國大典 輿地圖書 은률 (가)광암량 광암량 폐지 (나)풍천량 풍천량 허사포진 이설 풍천 장산곶 이북 초도진 신설 금사사진 신설 (다)아랑포 아랑포 조니진 이설 장연 백령진 신설 (라)대곶량 오차포진 오차진 이설 장산곶 이남 옹진 (마)관량진 소강진 소강진 이설 강령 (바)순위량 가을포진 등산진 이설 해주 (사)용매량 용매량 용매진 유지 계 7 7 9 구분 (가)광암량은 폐지되었고 (나)풍천량은 풍천읍 부근 업청강 어귀에 있다가 比巴串으로 이설되어 허사진이 되었고, 남대천 어귀에 있던 (다)아랑포진은 장산곶 쪽으로 진출하여 조니진이 되었다. 장산곶은 암석지대이므로 진을 세 울 곳이 없어 몽금포 부근에 세워진 것이다. 아랑포 부근에는 금사사진을 두 43) 남구만은 숙종 36년(70)에 청의 해적활동 경고에 대한 대비책으로 기병대의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그는 수도권에 있는 산성을 보강하는 안에 반대하고 상륙 한 적을 해안에서 즉시 격파하려면 기동성이 있는 기병대가 필요하며, 함경도에 있는 친기위를 모방하여 평안도와 황해도에도 비슷한 성격의 부대를 창설하자고 하였다( 숙종실록 권49, 숙종 36년 월 0일 경자). 숙종은 남구만의 건의를 그대로 수용하여 각도에 정예공격기병대를 조직하도록 지시하였다( 비변사등록 60책, 숙종 36년 월 4일). 44) 비변사등록 6책, 숙종 37년 월 9일

378 韓 國 文 化 38 었다. (라)대곶량은 옹진반도 북쪽 別西江 건너 苔灘에서 撫睡龍浦로 옮겼다 가 다시 장산곶 남쪽의 오차포로 이설되어 오차진이 되었다. 진보를 옮겼으나 무수룡표는 여전히 해방의 거점으로 중시되었으므로 무사를 상시 배치하여 45)45) 황당선의 침입을 막도록 조치하였다. (마)관량진은 일찍부터 소강으로 옮겨 져 황해 연안방어의 거점이 되었고, 순위량에 있던 (바)가을포진은 등산곶으 로 이설되었다가 섬으로 진출하여 등산진이 되었다. 조선초기에 정해진 위치 를 그대로 유지한 진은 처음부터 섬에 설치된 (사)용매진 밖에 없다. 황해도 연안진보의 설치 목적이 외적 상륙이 용이한 곳의 수비강화에서 광범위한 관 측과 추포선의 신속한 출동으로 바뀐 것이다. <그림 > 조선시대 황해도 연안진보의 위치 변동 45) 輿地圖書 黃海道 長淵 鎭堡條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379 황해도 수역을 담당하는 진보가 증설되고 첨사진으로 승격된 곳이 늘어나 자 숙종 44년(78)에 소강첨사를 수군절도사로 승격시키고 옹진부사를 겸하 게 하였다. 이 해 6월에 옹진 주민 尹鍇가 상서하여 옹진현의 요역이 지나치 게 무겁고 황당선 방비 역시 허술하므로 喬桐府의 예에 따라 소강방어영을 황해수사로 올리고 옹진현을 혁파하여 수영에 합치자고 제안한 바 있었다.46) 46) 또 지속적인 단속에도 불구하고 중국 불법 어채선의 수가 줄지 않아 단속을 강화해야 했으나 소강첨사는 방어사를 겸하고 있다 하더라도 같은 직급이므 로 나머지 진의 병력을 효율적으로 지휘하기 어렵다는 문제가 제기되어 같은 해 월에 황해수사 설치가 결정되었다.47) 47) 이는 황해도 해안 방어를 위한 기본 체계가 정비되었음을 의미한다. 최전선 의 백령진, 장산곶 북쪽의 조니진, 금사사진, 초도진, 허사진과 남쪽에 배치된 오차진, 소강진, 등산진, 용매진이 하나의 지휘체계 아래 통합된 것이다. 황해 수사는 매년 3월에서 8월까지 바람이 잦은 6개월간은 소강의 행영에 머물며 해양을 감시하였고, 9월에서 이듬해 월까지 옹진 본영에서 군무를 주재하였다.48) 48) ) 전선 확보와 병력 충원 외적이 해안에 상륙할 경우 출동하여 교전하거나 내륙 침입을 저지하는 것 에 주안점을 두었던 조선 전기와 달리 후기에는 異國 선박의 연안 접근을 원 양에서 미리 차단하고 연근해에서 불법 조업하는 이국선을 구축하려 하였다. 7세기 후반에 정금 등 해상세력이나 해적의 침공을 예상하면서 대응책을 논 할 때에나, 8세기 이후 소규모 불법 어선 단속이 주목적일 때에도 이러한 적 극적인 방침은 변하지 않았다. 이를 위해서는 해상에서 초계하거나 필요시 즉 시 출동하여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는 戰船이 필요하였다. 조선 초부터 황해도 각 포구에는 왜구의 연안 접근을 막기 위해 전선을 배 치하고 유사시에는 합동 작전을 펼치도록 계획하였으나 실제 교전이 벌어졌 을 때에 전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임진란 때에 선조가 개성을 포기하고 평양 46) 숙종실록 권6, 숙종 44년 6월 3일 경진 47) 비변사등록 7책, 숙종 44년 월 일 48) 여지도서 黃海道 水營 官職條

380 韓 國 文 化 38 으로 피난하면서 황해도 수군을 북상시켜 대동강 하구 방어에 동원하려 하였 으나 일본군을 저지하지 못하였던 것이다.49) 7세기 초에 황해도 전선은 모문 49) 룡군이나 청군 지원에 이용되는 등 수송선으로 주로 사용되었다. 7세기 후반 해적이나 해상 세력의 침공이 우려되는 반면 청의 간섭은 상 대적으로 줄어들어 적극적으로 戰船을 확보하고 각 포구에 재배치하는 등 제 도 정비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숙종 년(675)에 소강첨사진을 방어영으로 승격시키면서 전선을 건조하여 각 포구에 배치하는 방안을 본격적으로 논의 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는 전라도에서 전선을 건조하여 이송시켰다.50) 전 50) 선을 오랜 기간 동안 활용하지 않은 결과 전선 건조 경험자가 부족하여 황해 도에서 직접 제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전선에 탑재하기 위한 화기도 제조 하였다. 숙종 년(676) 7월에 병조판서 金錫冑의 제안으로 佛狼機 母砲와 子 砲 주조가 시작되었으며5) 이듬해 월에 모포 5문과 자포 60문이 만들어져 5) 5)5) 각 전선에 장착되었다. 전선 건조와 배치가 순조롭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7세기 후반에 황해 도의 전선은 삼남지역, 주로 전라도와 충청 수영에서 퇴역한 전선을 이속시켜 53)53) 사용하였는데 불량품이 많아 실제 활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숙종 4 년(688)에는 각 읍진에서 벌채 허가를 받아 직접 건조하는 방안을 강구하였 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54) 전선의 규격 역시 문제가 되었다. 삼남에서 사용 54) 하던 전선은 규모가 크고 너무 높아 해안 습지가 발달한 황해도 연안의 포구 에 정박시키거나 운용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지역 사정에 맞도록 전선을 작 게 개조하여 사용하였다.55) 숙종 36년(70) 월에 청에서 통지한 해적 경보 55) 에 대한 대책으로 연변지역에 순무사를 보내어 수군의 방비태세를 점검할 때 지역 사정에 맞는 전선 건조 및 운영 대책을 강구하였다.56) 숙종 4년(76) 56) 49) 50) 5) 5) 53) 54) 55) 56) 선조실록 권7, 선조 5년 6월 7일 을미, 6월 5일 계묘 비변사등록 3책, 숙종 년 월 6일 비변사등록 3책, 숙종 년 7월 일 승정원일기 58책, 숙종 3년 월 일 비변사등록 4책, 숙종 3년 월 4일 비변사등록 4책, 숙종 4년 월 5일 비변사등록 60책, 숙종 36년 6월 7일 비변사등록 60책, 숙종 36년 월 3일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38 에는 백령진과 소강진에만 전선을 그대로 비치하고 오차포와 허사진의 전선 과 등산진의 맹선을 방패선으로 개조하는 등 전선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 다.57) 이어 숙종 46년(70)에는 소강진에 전선을 증강배치하고 거북선도 제 57) 58)58) 작하려 했으나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8세기 중엽 영조대 이후로는 전면전이나 대규모의 침공 가능성이 줄어들 어 황해도 수군의 역할이 해상 교전보다는 어채선 단속에 중점을 두게 되자 전선 운용방식을 바꾸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영조 0년(744)에 주 문도 첨사 尹弼恩이 상소하여 불법어선은 기민하게 움직이는데 비해 전선은 너무 크고 높아 운신이 곤란하고 속도가 느려 추격에 실패하는 일이 많으므 로 전선 대신 飛船을 제작하여 비치하자고 하였다. 비선은 규모가 작고 선체 가 유선형으로 날렵하며 속도가 빠른 신형 선박이다.59) 영조 0년(754)에는 59) 황해 수사 박문수가 비선 0척을 해상에 대기시켜 초계하다가 중국 선박이 나 60)60) 타나면 즉시 추격하여 어로작업 자체를 저지하자고 건의하였다. 이 방안은 비용조달 문제로 인해 곧바로 실현되지는 못하였으나 어선을 전용하거나 새 로 건조하는 조치가 이어졌고 연안의 각 진에 추포선이 배치되었다. <표 3> 조선시대 황해도 각 읍진의 전병선 배치표는 세종실록지리지, 경 국대전 및 속대전 에 수록된 황해도 연안 각 읍진 소속 전선과 병선의 수를 정리한 것이다. 조선 전기의 병선 및 맹선의 수와 조선 후기에 이에 해 당하는 전선, 방선, 병선의 수를 합하여 비교해 보면 각각 4척, 39척, 37척으 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유사시에 대비하여 각 포구에 정박시켜 둔 기본 병선의 수는 크게 변하지 않았던 것이다. 가장 새로운 변화를 보이는 부분은 추포선의 배치라 할 수 있다. 추포선은 승선 인원은 많지 않았으나 기동이 용 이한 선박으로 황당선의 추격과 구축에 활용되었다. 이는 백령진과 초도진, 등 산진 등 도서에는 두지 않았고 소강진과 금사사진, 허사진 등 연안 포구에 집 중 배치되어 있었다. 해상을 통한 침공에 대비하는 동시에 이국 선박의 연안 접근 자체를 봉쇄하려 하였던 것이다. 57) 58) 59) 60) 비변사등록 69책, 숙종 4년 8월 4일 비변사등록 73책, 숙종 46년 3월 5일 영조실록 권38, 영조 0년 5월 6일 신축 영조실록 권59, 영조 0년 월 7일 을해

38 韓 國 文 化 38 <표 3> 조선시대 황해도 각 읍진의 전병선배치표 구분 세종실 록지리 지 병선 은률 풍천 장연 옹진 강령 해주 안악 배천 연안 장련 계 광암량 읍속 허사진 초도 읍속 조니포 금사사 오차진 읍속 백령 소강 읍속 등산진 읍속 용매 읍속 5 4 4 6 9 7 6 4 경국대전 대 맹 선 속대전 중 소 무군 사 소 거 급 별 전 방 병 협 맹 맹 소맹 계 후 맹 도 수 소 선 선 선 선 선 선 선 선 선 선 선 선 4 5 3 4 6 6 3 4 7 3 5 6 3 5 7 0 0 39 6 9 5 6 7 추 포 계 선 5 0 3 8 8 6 4 6 6 5 8 3 6 7 7 5 9 합 9 9 9 9 지명은 여지도서 와 증보문헌비고 를 기준으로 함. 海防을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은 전선과 병기가 아니라 이를 운영할 인력이 었다. 황당선 출현을 관측하여 보고하는 瞭望軍과 황당선과 교전하거나 구축 하는 추격선에 탑승해야 하는 병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8세기초까지 이는 모 두 연해지역 주민들의 몫이었으며 일정한 체계나 규정이 없이 유사시 동원되 는 방식이었다. 주민들은 생업에 종사하면서도 황당선이 나타나면 즉시 보고 하고 추격에 나서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아주 컸다. 황해도는 서울과 가까워 중앙 군영 및 各司에서 각종 인적물적 부담을 지우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추가되는 해방의 역은 주민들에게 큰 고통이었다. 민폐를 줄이기 위해 먼 바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383 다를 지나가는 어선은 추격하지 말고 그냥 두라는 지시가 내려지기도 하였으 나6) 근본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었다. 6) 이러한 폐단을 없애고 황당선을 실효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영조 년 6)6) (736)에는 황당선 추격을 전담하는 追捕武士를 별도로 설치하였다. 영조 년 5월에 초도에 침입한 중국 선인들이 철수할 것을 종용하는 첨사를 구타 한 사건은 추포무사 설치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63) 처음 편제된 추포무사는 63) 모두 690명이었으며 백령도와 초도를 포함한 도서와 연해지역의 요해처 3곳 에서 해양 감시와 추격을 전담하였다. 숙종대에 설치된 別武士의 예에 따라 閑散人들을 모아 편제하였고 별무사 군안에 수록하여 都試때 함께 試取하는 64)64) 등 특혜를 주어 인원을 확보하였다. 추포무사를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주민들의 부담은 크게 줄어들지 않 았고 단속 실적 역시 미미하였다. 추포무사는 각 요해처마다 5명에서 5명씩 번갈아 근무하였는데 황당선 척에는 적어도 5, 60명씩 승선하고 있었기 때문 에 추포무사만으로는 대적하기 곤란하여 지역 주민들을 여전히 조발할 수밖 에 없었던 것이다.65) 65) 요망처 운영 역시 큰 부담이었다. 현재 확인된 요망처 위치를 보면 초도진 에는 勝戰峰과 羅里峰에 요망처가 있었고,66) 허사진에는 비파곶 부근에 요망 66) 대가 있었다.67) 옹진부는 萬頃浦 부근 龍威島와 諸作浦(氐作浦)에 追捕廳이 67) 68)68) 있었고 69)69) 강령은 등산곶 등산포와 순위도 沙津浦에 瞭望幕이 있었다. 이 곳 6) 비변사등록 53책, 숙종 9년 6월 9일 6) 비변사등록 98책, 영조 년 월 4일 63) 비변사등록 97책, 영조 년 5월 6일; 초도첨사가 중국 선인들에게 구타당할 때 감영이나 초도진 소속 장교들이 이를 구원하지 않고 먼저 도주해버려 큰 문 제가 되었다. 이들을 효수하자는 의견도 제기되었으나 평소에 군률을 엄히 적용 하지 않다가 갑자기 처형할 수는 없다는 영조의 견해대로 엄형후정배로 결정되 었다( 비변사등록 97책, 영조 년 5월 9일, 6월 일). 64) 비변사등록 99책, 영조 년 월 3일 65) 비변사등록 9책, 영조 5년 3월 일 66)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소장 椒島鎭地圖 (奎 057) 참조. 이하 규장 각 소장 지도의 경우 지도명과 자료번호만 기재하고 소장처 생략. 67) 許沙鎭地圖 (奎 058) 68) 翁津府地圖 (奎 056) 69) 登山鎭地圖 (奎 0535)

384 韓 國 文 化 38 에 번갈아 상주하면서 해양을 감시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인력도 부족하였다. 영조 36년(760)에는 백령진 소속 수군 35명과 장연부 소속 군 사 46명을 추포군으로 전환하는 조치가 있었다.70) 황당선의 내침이 가장 잦 70) 은 곳이었으므로 수군이나 육군을 유지하는 것보다는 추포군의 숫자를 늘려 단속의 효과를 높이고 주민들의 부담을 감하려 한 것이다. 4. 조선후기 황해도 해방의 한계 8세기 이후 황해도 해역에 출몰하였던 황당선은 더 이상 국방이나 치안상 큰 문제가 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황해도 연변 각지에 요 망처와 추포청을 설치하고 병력을 배치하여 관측과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았 고 유사시 즉시 병선을 출동시켜 불법 어채선과 교역선을 단속하고 구축하였 다. 이들이 직접적인 위협 요인은 아니었다 해도 공식적으로 인정할 수는 없 었던 것이다. 단속과 병행하여 청에 여러차례 자문을 보내어 어채선의 불법항 해 자체를 막아줄 것을 요구하였고 청도 이에 협력하였다. 그러나 조선 해역 에 출몰하는 淸船의 수는 꾸준히 늘었고 추포나 금단이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황해도 연안에 출입하였던 청선들은 어채보다 상행위가 주 목적이었다. 양 국 주민들간의 사적인 교역은 그 자체가 금지된 행위였으므로 청인이나 조선 인 어느 쪽도 국가의 위세나 다수의 폭력에 근거하여 불공정한 상거래를 요 구할 수 없었다. 또한 교역 행위는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어업과는 달 리 상호 이익이 되었으므로 지역 주민들은 물로 타지의 상인들도 적극 참여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연안의 주민들과 청 어부들의 상호 교역은 청 어선에게 땔감과 음용수를 공급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점차 상거래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추포 선과 추포무사를 증치하면서 황해도 연안의 단속을 더욱 강화하였던 영조대 에도 청 어채선(황당선)의 왕래는 교역의 일환이었음을 알고 있었다. 이러한 행위는 법적으로는 단속 대상이지만 일상화되어 있었으므로 강력한 해금이나 단속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청선과 연근해 주민들의 교역은 공공연히 이루 70) 비변사등록 38책, 영조 36년 월 7일 黃海道長淵白翎兩邑鎭追捕軍新設節目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7)7) 어지고 있었으며 385 연안의 鎭將들은 황당선이 연해에 접근하였을 때에는 검 속하지 않다가 외양으로 떠나면 전선을 출동시켜 추격하는 척만 하고 쫓아내 었다고 거짓 보고하는 경우도 많았다.7) 주민 뿐 아니라 추포에 나선 관원과 7) 군병들이 정황을 힐문한다는 핑계를 대고 먼바다나 무인도에서 금물을 교역 하기도 하였다.73) 73) 영조 47년(77)의 황해도 水軍 分操 규정은 해양으로부터의 위협이 줄어 들고 중국 배에 대한 단속이 유명무실해진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황해 도 연안의 0읍(해주, 연안, 배천, 강령, 옹진, 장연, 풍천, 은율, 장련, 안악)과 8진(소강, 백령, 오차포, 용매, 등산, 조니포, 초도, 허사)의 주사는 매년 두 차 례씩 용위도 부근에 모여 합동조련을 시행해야 했다. 기근과 풍수해와 같은 자연재해나 淸使 왕래 등 사정이 있을 경우 연기되는 경우가 많았으나 춘추 합동조련은 가장 중요한 정규훈련이었다. 그러나 장산곶 부근은 암초가 많고 파도가 높아 선박 침몰 사고가 잦은 곳이었고 이 해 3월에 합조를 위해 장산 곶 이북에서 황해수영으로 가던 선박이 침몰하여 인명 피해가 발생하자 국왕 이 직접 주재하여 대책을 숙의하였다.74) 같은 해 5월에는 새 규정이 정해져 74) 장산곶을 기준으로 이남의 해주, 연안, 배천, 강령, 옹진 등 5읍과 백령, 오차 포, 용매, 등산 등 4진은 소강에 주재하는 황해수사가 조련을 시행하고, 장산 곶 이북의 장연, 풍천, 은율, 장련, 안악 등 5읍과 조니포, 초도, 허사 등 3진은 이와 별도로 집결하여 장연부사가 수군겸영장이 되어 지휘하다가 수사가 장 연에 도달하면 중군이 되어 거행하게 하였다.75) 75) 장산곶 수로는 위험한 곳이었으나 7세기 초에 이미 장산곶을 통과하는 항 로가 이용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남북 분조가 이루어진 것은 해로 문제보다는 합조의 필요성이 감소되었기 때문이었다. 해상 세력의 침공 가능성이 줄고 소 규모 불법 어선이나 교역선 단속이 황해도 수군의 주요 활동이 된 형편에서 비용이 많이 들고 위험성도 아직 남아있는 합조 방식을 굳이 고집할 이유가 7) 7) 73) 74) 75) 비변사등록 비변사등록 비변사등록 비변사등록 비변사등록 04책, 05책, 5책, 55책, 55책, 영조 4년 7월 0일 영조 5년 3월 0일 영조 9년 7월 6일 영조47년 3월 0일 영조 44년 5월 5일 海西長山南北分操節目

386 韓 國 文 化 38 없었던 것이다. 8세기 중반 이후 청선의 출몰은 훨씬 늘었으나 단속이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었고 상륙해도 방관하는 경우가 많았다.76) 이같이 상호 왕래와 접촉이 76) 빈번해지고 일상화되면서 황해도 해안은 청 금수물자의 수입과 천주교 전래 의 길로도 이용되었다. 순조 3년(83)에 장연 조니진에 정박한 이양선과 지 역 주민들이 어물과 서책을 교환하고 진의 吏校들도 필담을 나눈 일이 있었 77)77) 다. 이 배는 영국 선박이었다. 조선인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은 조선의 사정 을 청에 있는 주교에게 알리기 위해 황해도에 갔다가 헌종 년(846) 5월에 체포되었다.78) 그는 연평도 부근에서 고기잡이하는 중국선박을 만나 서한을 78) 79)79) 전달하려다 적발된 것이다. 철종 년(850)에 암행어사 申錫禧가 별단을 올려 황해도 해역의 전선, 방 선, 추포선 제작 및 개삭을 절목대로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80) 국왕도 연안에 80) 8)8) 출몰하는 당선 방지책을 강구하도록 지시하였으며, 8)8) 선박 단속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청에 자문을 보내 불법 그러나 이미 일상화된 상호 교역행위를 막 을 수 없었다. 9세기 후반에 황해도 해상은 조청 밀무역의 중심무대였으며, 주 교역품 목은 홍삼이었다.83) 철종 년(86) 월에 개성에 거주하는 金正連은 장산곶 83) 부근에서 청상인들에게 홍삼을 팔고 西洋木을 사들였다.84) 철종 3년(86)에 84) 는 소청도에 정박한 청인들이 장연주민 金應西를 납치하려다가 백령도의 首 校에게 적발되어 모두 체포된 일이 있었다. 이들은 서울에 거주하는 物主 安 在心에게 천여 금이 넘는 물품을 지급하고 홍삼을 밀매하려 하였으나 사기 비변사등록 책, 순조 34년 월 일 순조실록 권3, 순조 3년 8월 일 을유 헌종실록 권3, 헌종 년 5월 0일 갑술 헌종실록 권3, 헌종 년 7월 5일 무신 비변사등록 37책, 철종 년 4월 6일 비변사등록 39책, 철종 3년 7월 3일 비변사등록 39책, 철종 3년 7월 4일, 同文彙考 犯越 上國人 黃海道沿海各 處犯越魚採船禁斷咨文 83) 이철성, 005 대원군집권기 包蔘 무역정책과 해상 밀무역 조선시대사학보 35, 9면 84) 위의 논문, 6면. 76) 77) 78) 79) 80) 8) 8)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85)85) 당하자 거간인 김응서를 끌어가려 했던 것이다. 387 상호 교류가 이미 일상화되 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황해도 앞바다는 朝淸 민간교역의 장이었던 것이 다. 5. 맺음말 병자란 후 조선은 청과의 재충돌에 대비한 국방체제 정비에 힘을 기울였다. 청이 수군을 이용하여 침공할 우려는 적었으므로 서해안 연안 방비는 부차적 인 문제였다. 그러나 대만에 근거를 둔 정금의 세력이 침입하거나 해적이 출 몰하여 소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에 해양방위를 게을리 할 수도 없었다. 특히 중국과 거리가 가까운 황해도 해안 방위가 중시되었다. 숙종 36 년(70)에 황해도 소강첨사를 수군절도사로 승격시키고 전선을 개조하여 증 강 배치하였으며 상륙에 대비한 기병대를 창설하기도 하였다. 국제정세가 안정된 8세기 중엽 이후로는 해상을 통한 대규모 외침 가능성 이 줄어들었고 대신 황당선이라 불리는 불법 어로선 및 밀교역 상선의 왕래 가 잦아 경제 및 치안이 문제가 되었다. 이에 조선 조정은 각지에 요망군을 두고 주요 포구마다 추포선과 추포무사를 배치하여 해상을 관측하고 황당선 출현시 즉시 구축할 수 있도록 하였다. 아울러 청과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불 법 어로선 출입을 금해줄 것을 요구하여 직접 단속하고 조사할 수 있는 권한 을 확보하였다. 조선후기 내내 황당선 단속과 구축은 끊임없이 이루어졌으나 실제 이들은 국방이나 치안을 크게 위협하는 존재는 아니었다. 이 때문에 불법 어로나 밀 교역 행위를 발견하면 구축하거나 체포하여 신문하는 등 대응조치는 취하였 으나 해상에 병선을 항시 대기시켜 초계하면서 감시하거나 주요 포구 및 상 륙 예상 지점에 대규모 상비 병력을 배치하였던 것은 아니었다. 기본 방비체 계는 갖추었으나 현상 유지에 더 치중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 불법 어로 및 밀교역 행위는 더욱 성행하였고 9세기에는 거의 묵인되는 실정이었다. 9세 기 중엽에 황해도 수군의 정비가 강조되고 황당선 단속을 위한 외교적 방안 85) 비변사등록 49책, 철종 3년 9월 3일

388 韓 國 文 化 38 이 다시 강구되기도 하였으나 이미 일상화된 교역행위를 막을 수는 없었다.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변화는 海防과 海禁의 차원에 서 본다면 기준과 원칙이 와해되고 해이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역 주민들의 입장에서 접근할 경우 이는 교역 기회의 확대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조선후기 황해도 서해안 지역 방위의 여건 및 체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는 해방과 해금이라는 정치, 군사적 관점에서의 정리 뿐 아니라 이를 통해 연 안 주민의 생활이 어떻게 변하였고 조선 해역에 출몰하였던 중국 연해민들은 어로와 밀교역을 통해 어떤 이익을 취하였는지 구체적으로 규명하는 연구가 필요하다. (필자 : 경인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부교수) 주제어 : 황해해방, 연안방위, 밀교역, 전선, 요망처, 추포무사 투고일(006..3), 심사시작일(006..7), 심사종료일(006..)

조선후기 황해도 연안 방위체계 389 <Abstract> The Coast Defense System of Hwanghae Province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Kang, Seok-hwa* 86) This paper investigate the coast defense system of Hwanghae Province during the late Joseon Period. To prevent the invasion from Yellow Sea, new coast bases and guard posts had been established, and battle ships and patrol men, cavalry had been arranged. But, in late 8th century, the possibility of war had decreased, on the other hand, smuggling between Korean and Chinese were increased. In 9th century, the Yellow Sea had become the place of private foreign trade. Key Words : coast defense, smuggling, battle ship, guard post * Professor, Department of Social Education, Gyeongin National University of Education